5월 1일 갑자
차대가 있었다.
전 집의 이노춘(李魯春)과 전 응교 정동관(鄭東觀)을 원자의 요속으로 삼았다.
5월 2일 을축
호조 판사 김화진이 상소하여 오수전(五銖錢)을 주조할 것을 청하였다. 그 상소에 말하기를,
"전폐(錢弊)는 《주관(周官)》의 구부환법(九府圜法)에서 비롯되었고, 후세에 이르러서는 그 제도를 누차 바꾸었는데, 만일 그 수냥(銖兩)이 꼭 알맞은 것과 고주(鼓鑄)105) 가 가장 정밀한 것으로 말하자면 오직 한(漢)나라 때의 오수전(五銖錢)과 당(唐)나라 때의 개원전(開元錢)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구전(舊錢)이 그 무게가 자못 여기에 방불합니다. 그러나 화재(貨財)가 나오는 것은 고금이 서로 다르고, 동(銅)·석(錫)·유(鍮)·납(鑞)은 거개가 귀하므로, 만일 무게를 경감시키지 않으면 조금도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신전(新錢)으로 양식을 바꾼 것인데, 지금의 신전을 구전에 비교해보면 무게가 거의 5분의 2나 감소된 것으로 이것이 곧 옛날 삼수전(三銖錢)의 유입니다. 그런데 이는 대체로 사세가 그렇게 만든 것으로서 양식을 바꾸는 것이 부득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돈을 주조할 때를 당하여 타당한 방책을 깊이 연구해 본 결과, 오로지 유·납만 사용하여 무게가 많이 나가게 하면 이익이 없고, 연(鉛)·철(鐵)을 섞어서 사용하여 얇고 작은 대로 내버려두면 오래 지탱하지 못하게 됩니다. 옛 역사를 상고해보면, 너무 무거운 것으로는 치백전(直百錢)·당천전(當千錢)이 있고, 너무 가벼운 것으로는 유협전(楡莢錢)·아안전(鵝眼錢)이 있는데, 유협전·아안전은 너무 박렬(薄劣)하고, 치백전·당천전은 영리(嬴利)가 많아서 모두 성세(聖世)에 의논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사를 상고해서 근거할 데가 있고, 한 시대에 써서 행해질 수 있는 것으로 말하지면, 오직 한 잎으로 다섯 잎을 당하고 한 잎으로 열 잎을 당하게 했던 법이 있었습니다. 비록 한(漢)·당(唐) 시대로 말하더라도, 당오전(當五錢)은 한(漢) 무제(武帝) 원정(元鼎) 연간에 있었고, 당십전(當十錢)은 당(唐) 숙종(肅宗) 건원(乾元) 연간에 있었는데, 이는 모두 그때에 재용(財用)이 부족했기 때문에 경중의 중간을 짐작하여 이런 임시적인 방법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이를 모방하여 법식으로 삼아서 크고 작은 것을 섞어서 사용하게 한다면, 비록 조금만 주조하더라도 이익이 크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일 몇 갑절의 이익이 있게 한다면 혹 도주(盜鑄)106) 의 폐단도 없지 않을 것이나, 전대(前代)로 거슬러 올라가 상고해보면 당나라의 법이 가장 엄밀하였으니, 이 법에 의거해서 법금을 설치한다면 간사한 짓을 할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이 유형원(柳馨遠)의 《수록(隨錄)》을 보았는데 ‘우리 나라에는 동산(銅山)이 없으므로 도주(盜鑄)가 없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야말로 참으로 미리 꿰뚫어 본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전폐(錢幣)를 경영하는 일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각각 소견을 진술하도록 윤허한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영부사 홍낙성, 좌의정 채제공, 영돈녕 김이소는 병 때문에 헌의(獻意)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좌참찬 정민시가 말하기를 ‘전 호조 판서의 전제(錢制) 변통에 대한 상소는 대체로 때에 따라 폐단을 구제 조치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그 요점은 이득을 갑절 늘리고 사용을 편리하게 하는 데에 있는데, 이득을 갑절 늘리는 것은 진실로 필연적인 것이거니와, 사용의 편리 여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므로, 감히 단연코 행할 수 있다고 질정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우참찬 김문순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행해지고 있는 돈은 완전히 동전(銅錢)만을 쓰는데, 이른바 전황(錢荒)107) 이 요즘같은 때가 없었으므로, 지금 이 호조 판서의 긴 상소문에서 진술한 것은 대체로 부득이한 실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변통한 뒤에 과연 샘물처럼 잘 유행해서 다시 간핍(艱乏)되는 걱정이 없게 된다면, 재물을 늘리고 용도를 유족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 참으로 다행이겠다. 다만 눈앞의 이익은 비록 알기가 쉬우나 장래의 편리 여부는 실로 미리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감히 질정하여 말하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판윤 이경무는 말하기를 ‘지금 이 전제의 변통에 대한 논의는 실로 때에 따라 편의를 조성하여 비용을 적게 들이고 이익을 넓히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무릇 이익이 있는 곳에는 병폐도 혹 심한 것이 있는 법이니, 말류의 폐단을 확실하게 알 수 없어 감히 억측으로 대답하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이조 판서 김재찬은 말하기를 ‘현재 전황의 폐단에 대해서는 의당 바로잡아 구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나, 다만 구하는 방도를 제대로 얻으면 재물을 늘려서 백성들을 유족하게 하여 이익됨이 매우 광박해질 수 있겠지만, 구하는 방도를 제대로 얻지 못하면 다만 폐단 위에 또 폐단이 생기어 폐단을 끝내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역대 이래로 누차 그 전제를 바꾸었으나 한번도 오래도록 폐단이 없었던 전제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 만일 당오전·당십전의 제도로 전황의 폐단을 구하려고 한다면, 혹 당장은 조금 유족해지는 방도가 될지라도, 십분 편의하여 오래도록 폐단이 없을 것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확실히 알 수 없어 질정하여 말하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병조 판서 이시수는 말하기를 ‘호조 판서가 돈을 개주(改鑄)하자고 한 논의는 증거를 댄 것이 이미 자상하고, 변통하는 데에도 방편이 있기는 하나, 고금의 사정이 서로 다르고 이익과 병폐를 확실히 알기 어려운 것이라, 이 폐단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혹 다시 다른 폐단을 발생시킬 우려도 있으므로, 신의 좁은 소견으로는 감히 질정하여 말하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호조 판서 조진관은 말하기를 ‘경용(經用)이 넉넉하지 못한 때문에 중전(重錢)을 주조하기를 청한 것이니, 대체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비록 그러나 신은 들으니, 나라를 유족하게 하는 방도는 용도를 절약하고 본업을 힘쓰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돈이라는 것은 본디 물화(物貨)를 유통시키는 것이지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것으로 이익을 취하자면 이익은 진실로 중전(重錢)보다 더 독점하는 것이 없으나 폐단 또한 그와 같다. 옛날 오(吳)의 당천전, 촉(蜀)의 당백전, 민(閩)의 당십전, 원(元)의 당오전 등은 비록 군사를 일으키는 즈음에 임시 방편으로 일을 성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이내 모두 철폐하고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명(明)나라 구준(丘濬)이 《대학연의보(文學衍義補)》에서 이를 자세하게 논의하였다. 우리 나라는 돈이 세상에 행해진 이후로 지난 경오·신미년간부터는 해마다 돈을 주조하여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나, 백성과 나라에서 쓰는 것이 유족해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더구나 중전을 주조해놓으면 그 폐단이 어떠하겠는가. 대저 지금 쓰고 있는 돈은 비용 10을 들여서 12를 취한 것인데, 만일 당오전·당십전의 제도를 시행한다면 이는 곧 비용 10을 들여서 60 혹은 120을 취하게 되니, 비용을 지극히 적게 들이고 취하는 것은 너무 많지 않겠는가. 더구나 돈은 위에서 만드는 것이고 물산은 민간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물산은 한량이 있는데 돈만 날로 불어난다면 온갖 용도가 다 뛰어올라서 백성들이 그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중전을 주조하는 방법은 비유하자면 위험하기가 마치 의가(醫家)의 독삼탕(獨蔘湯)이나 병가(兵家)에서 성을 등지고[背城] 결사의 투쟁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만부득이한 형편이 아니라면 어찌 경솔하게 시험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지금 인심이 점점 혼탁해져서 이끗의 구멍이 오만 가지로 뚫리는 실정인데, 또 그 사이에 하나의 기화(奇貨)를 창출하는 것은 성상께서 백성들에게 순박함을 보이시는 뜻을 몸받는 일이 아니므로, 신은 이를 편의하지 않게 생각한다.’ 하였습니다.
호군 서용보는 말하기를 ‘옛날 성인들은 전폐를 주조해 쓴 것이 한번도 이익을 얻으려는 뜻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이익의 다소는 아예 논할 것도 없거니와, 당오전·당십전 같은 경우는 비록 한·당 이래 한두 건의 증거할 만한 설이 있기는 하나, 돈이란 천하의 중한 보배인데, 천하의 중한 보배를 행용하는 데 있어 그 길을 두세 가지로 하고도 폐단이 없기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 신은 감히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호군 이서구는 말하기를 ‘옛날에도 전폐에 대해서 비록 경중을 서로 저울질하는 법이 있기는 하였으나, 반드시 물화는 중하고 전폐는 경하므로 막혀서 유통이 되지 않은 다음에야 중폐(重幣)를 만들어 이를 유통시켰으니, 대체로 이 또한 백성의 재물을 불리기 위한 것이지 나라의 용도를 유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만일 나라의 용도가 넉넉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작은 비용을 들이어 부실한 가격을 올려서 이익을 많이 취한다면 이는 자못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이익을 독점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므로 옛부터 대전(大錢)이 나온 때에는 반드시 백성들이 먼저 고통을 받았으니, 이는 곧 이미 그러했던 징험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걱정은 전폐가 가벼운 데에 있지 않고 쓰임이 막히는 데에 있는 것이니, 오직 제도로써 절약하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하면서 달마다 회계하고 해마다 결산을 해서 오래도록 쌓고 또 쌓는 공을 거두어야 하는데, 어찌 다시 중폐를 만들어서 그 근원을 흐리게 할 수 있겠는가. 가사 행해서 폐단이 없을지라도 강령은 이미 어긋난 것이니, 성인이 큰 이익을 가지고 천하를 이롭게 하는 뜻이 전혀 아니다. 더구나 백성들이 이끗을 따르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아 부호들이 병탄하여 빼앗고 교묘한 속임수가 날로 불어나서, 말류의 폐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임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신의 어리석은 천견으로는 삼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였습니다.
좌승지 이익운은 말하기를 ‘무릇 때에 따라 구제 조치하는 방도는, 이끗 한쪽에만 전심하지 말고 반드시 먼저 공사간에 행용하는 방편을 연구한 다음에야 비로소 변통을 잘했다고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이 당오전·당십전을 주조하자는 의논으로 말하자면, 우선 눈앞의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나 폐단이 이미 따르게 되어 행용하는 즈음에 아마도 막힘이 많을 듯하다. 민생들의 날로 쓰는 것은 극히 영쇄하여 장사를 하면서 값을 논할 적에는 호리를 다투게 되는데, 궁박하고 급한 경우에는 남의 교활한 억압을 받아서 반드시 당오전 1문(文)을 가지고 당삼문(當三文)·당사문(當四文)으로 쓰고 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이미 많이 누적되면 절열(折閱)108)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다만 빈민들에게는 불편함만 주고, 탐리(貪吏)들의 돈을 길러주기에 알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행해서 폐단이 없으리라는 것은 신이 감히 질정하여 말하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신 이병모는 말하기를 ‘전폐를 설치하는 것은 본디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요 나라를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옛날 전폐를 논한 이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경중이 중도를 얻어야 하고 유사(有司)가 비용을 아껴서 이익을 구해서는 안된다. 경중이 중도를 잃으면 사물이 균평을 얻지 못하고, 비용을 아껴서 이익을 구하고 보면 돈을 오래도록 전할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역대로 전폐에 대한 좋은 논의가 이 두 마디에 벗어나지 않으니, 이 밖의 다른 논의는 모두 좋은 논의가 아니다. 대저 금 은이란 땅에서 생산되어 그 권한은 조물주가 보배로 삼는 데에 있고, 전폐는 사람에게서 만들어져 그 권한은 윗사람이 보배로 삼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10만 냥을 가지고 10만 냥을 주조할 경우, 마치 남은 것이 없는 듯하지만 원전(原錢) 10만 냥은 자연히 국중(國中)에 있게 되고 또 새로 주조한 10만을 따라서 유포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나라에서는 10만 냥을 비용으로 들여서 20만 냥의 용도를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으로 장사를 하고 이것으로 세상에 통행시키면, 어디서나 이익이 백성에게 돌아가서 나라가 절로 그 이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의를 부여하고 이와 같이 규칙을 세워서 한다면 비록 억만 년 뒤에까지라도 폐단이 없이 행해질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수선스레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당오전·당십전의 제도는 모두가 한때 임시 편의에 따라서 행했던 방법인데, 그 시대를 상고해보면 결코 지금 같이 당당한 성명의 조정에서 증거댈 바가 아니다. 도주(盜鑄)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물론 슬기있는 이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거니와, 유형원(柳馨遠)이 논한 말은 대체로 그 도주에서 이익을 얻을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고, 십백(什百)의 이익이 있음을 보고도 도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끝내 그 일이 옳은 줄은 알지 못하겠으나, 변통에 관계되는 일이니, 상께서 재결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고 상신 문정공(文貞公) 김육(金堉)의 봉사손에게 아직도 녹용(錄用)의 은전이 없었다고 하니, 백성을 위해 마음을 다하여 경륜과 사업을 세상에 이와 같이 크게 펼친 문정공 같은 이의 봉사손에게 아직까지 음보(蔭補)가 지체된 것은 흠사(欠事)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나이가 차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니, 유학(幼學) 김만선(金萬善)을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할 일로 먼저 승전(承傳)을 받들라."
5월 3일 병인
원자가 《대학》의 강을 마쳤다.
전교하였다.
"성경(聖經)은 의리상 높이 받들어 소장해야 하고, 또 내가 만년에 성경을 읽기에 편리하게 하고자 하여, 이 대판(大板)으로 각자(刻字)를 하였는데, 글자 모양은 《계몽집전(啓蒙集箋)》의 것을 준용하여 이제 이미 완성을 보았다. 그러니 지금 새로 간행한 《오경백편(五經百篇)》을, 이미 태학(太學)의 존경각(尊經閣)에 봉장(奉藏)된 갑인년에 새로 간행한 삼경(三經)·사서(四書) 및 병진년에 새로 간행한 《춘추좌씨경해(春秋左氏經解)》와 함께 소장해야 할 것이다. 옛날 주 부자(朱夫子)께서는 장주 지사(漳州知事)로 있으면서 《역(易)》·《시(詩)》·《서(書)》를 간행하고, 《춘추(春秋)》는 다만 좌씨(左氏)의 경문(經文)만 취하여 별도로 일서(一書)를 만들어서 삼경의 뒤에 붙여 이를 합해 사경(四經)이라 하였다. 그리고 간행의 일이 끝나서는 종사관을 보내어 선성(先聖)의 사당에 그 사유를 지고(祗告)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갑인년의 간행본을 장봉한 뒤로 짐짓 고유(告由)의 의식을 지체하며 지금 이 책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왔으니, 내달 초하룻날 분향(焚香)할 적에 반장(泮長)109) 으로 하여금 이 사유를 성묘(聖廟)에 고하도록 하되, 그 의절은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삭망(朔望)의 제례(祭禮)대로 할 것이요, 축문(祝文)은 내가 친히 짓고 또한 친히 전할 것이니, 태학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도록 하라."
전교하기를,
"오늘 유선(諭善)을 소견하고 남 봉조하(南奉朝賀)와 박유선(朴諭善)의 전례를 취하여 품계를 올려주려고 하였으나, 너무 떠벌리는 데에 가까울 듯하여 우선 천천히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노인이 연일 강석(講席)을 출입하느라 수고로움이 더욱 많은 데에도 원자에게 성심으로 권과(勸課)를 하고 있으니, 더욱 매우 가상하다. 행 좌유선 윤득부(尹得孚)에게 해조로 하여금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라. 그리고 요속 정일환(鄭日煥)·이술원(李述源)은 모두 나의 주연(胄筵)의 옛 요속으로, 책을 끼고 서연을 출입한 지 벌써 28년이 되었고 혹은 32년의 오랜 세월을 지냈는데, 지금 또 권강(勸講)의 직임을 가지고 《대학》의 강을 시작할 때와 마칠 때에 함께 강석에 들어왔으니, 희귀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니 또한 반드시 영광스럽게 해주어야겠다. 이 두 요속은 나이가 70세 안팎으로서 자력(資歷)은 모두 준직(準職)을 지낸 터이니, 요속 정일환·이술원에게 우선 품계를 올리고 특별히 첨지중추를 제수하라."
하였다. 이윽고 정일환·이술원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5월 4일 정묘
전교하였다.
"근래에는 수령을 천거하는 법이 쓸어버린듯이 없어져버렸다. 옛날에는 비록 존례(尊禮)를 받는 대신일지라도, 다른 여러 가지 현고(現告)에 대해서는 모두 논하지 않지만, 오직 수령 천거한 일로 죄에 걸리면 일찍이 용서받은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전해오는 불변의 법칙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문관의 판교(判校)나 무직(武職)인 동지 중추를 천거한 자들도 모두 손상을 입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 뒤로는 사실을 거듭 밝혀 엄중히 신칙하여 모든 장죄(贓罪)에 관계된 유에 대해서는 일체 법전에 의거하여 바로 금부에서 죄목을 살펴 내용을 구성할 일을 해부(該府)의 수교(受敎)에 기재하고, 인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벽상(壁上)에 써붙이도록 하라. 인재를 가려 쓰는 일로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 대신 이외에는 오직 전조(銓曹)가 그러한 것인데, 설령 천거된 자가 직임을 감당하지 못했을 경우 전조가 만일 사정을 따르지 않고 관직을 위해서 사람을 가린다면 이는 ‘형을 주는 것은 형벌을 줄 것이 없는 데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니 의당 이번 정사부터는 아름다운 규정을 다시 회복시킬 것을 각별히 유념할 일로 전조에 엄중히 신칙하라. 그리고 이번 정사에서 차송한 수령이 만에 하나라도 고을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바로 체직될 경우에는, 해당 판당(判堂)에게 《대전(大典)》에 기재된 오천(誤薦)의 율을 쓰도록 하라."
5월 5일 무진
경모궁을 배알하고 하향제(夏享祭)의 생(牲)과 기(器)를 살펴보았다.
5월 6일 기사
명하여 화성부(華城府)의 무과 출신으로서 타지에 부방(赴防)하는 자에 대해서는 심도(沁都)의 예에 의거하여 본부에서 유방(留防)하도록 하였다.
5월 7일 경오
영남에서 기민을 진휼하였는데,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그 일을 마쳤다. 【공진(公賑)으로는 창원(昌原)·상주(尙州)·대구(大邱)·선산(善山)·인동(仁同)·칠곡(漆谷)·초계(草溪)·함안(咸安)·하양(河陽)·용궁(龍宮)·청하(淸河)·함창(咸昌)·현풍(玄風)·영산(靈山)·창녕(昌寧)·경산(慶山)·기장(機張)·비안(比安)·웅천(熊川)·자인(慈仁) 등의 읍(邑)과 제포(薺浦)·서평(西平)·안골(安骨)·천성(天城)·신문(新門)·남촌(南村)·청천(晴川)·금오(金烏) 등의 진(鎭)과 송라역(松蘿驛) 등을 진휼했는데, 기민(飢民)이 총 36만 4백 78명에 진곡(賑穀)은 2만 6천 1백 90석 남짓 들었다. 그리고 사진(私賑)으로는 진주(晋州)·김해(金海)·밀양(密陽)·동래(東萊)·흥해(興海)·고성(固城)·진보(眞寶)·연일(延日)·장기(長鬐)·사천(泗川)·칠원(漆原) 등의 읍과 부산(釜山)·다대포(多大浦)·적량(赤梁)·귀산(龜山)·포이(包伊)·포항(浦項) 등의 진과 자여역(自如驛) 등을 진휼했는데, 기민이 총 8만 2천 1백 53명에 진곡은 5천 3백 61석 남짓 들었다. 그리고 좌병영(左兵營)·우병영(右兵營)·좌수영(左水營)·우수영(右水營)·경주(慶州)·안동(安東)·성주(星州)·울산(蔚山)·영해(寧海)·청송(靑松)·순흥(順興)·청도(淸道)·영천(永川)·예천(醴泉)·영천(榮川)·양산(梁山)·곤양(昆陽)·합천(陜川)·금산(金山)·영덕(盈德)·의성(義城)·남해(南海)·개령(開寧)·의령(宜寧)·언양(彦陽)·진해(鎭海)·지례(知禮)·고령(高靈)·군위(軍威)·의흥(義興)·신녕(新寧)·예안(禮安)·삼가(三嘉)·영양(英陽) 등의 읍과 가덕(加德)·서생(西生)·미조항(彌助項)·두모포(豆毛浦)·개운(開雲)·지세(知世)·옥포(玉浦)·평산(平山)·당포(唐浦)·사량(蛇梁)·조라(助羅)·삼천리(三千里)·구소비(舊所非)·독용(禿用) 등의 진과 유곡(幽谷)·김천(金泉)·성현(省峴)·황산(黃山)·소촌(召村) 등의 역과 울산(蔚山)·진주(晋州) 등의 목장(牧場)을 구급(救急)하였는데, 기민이 총 12만 2천 2백 2명에 진곡은 8천 7백 60석 남짓 들었다.】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86면
【분류】구휼(救恤)
5월 8일 신미
김달순(金達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이윽고 형관(刑官)을 체직할 수 없다 하여 형조 참의에 그대로 유임시키고, 이태형(李太亨)을 그 대신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북관(北關)에서 경공생(經工生)110) 으로 초계(抄啓)된 경성(鏡城)의 유학 이원배(李元培)에게 어제(御製)의 조문(條問)을 내리노니, 내각에서 이를 북백(北伯)에게 싸보내어 북백으로 하여금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해서 해읍(該邑)에 전하여, 다시 해당 수령으로 하여금 친히 그 사람에게 직접 전해서, 기한을 넉넉히 주고 이를 연구해서 조대(條對)하게 하도록 하라."
5월 9일 임신
어제(御製)한 경의(經義)의 조문(條問)을 호남에 내리어 제생들에게 조대하도록 하였다.
5월 10일 계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황단(皇壇)에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이는 고황제(高皇帝)의 휘신(諱辰)이기 때문이었다.
차대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가뭄이 점점 치성해지는데 소나기 한줄기도 내리지 않고 있으니, 민사(民事)를 생각하면 참으로 매우 민망하다. 어젯밤 재소(齋所)에 들어가 새벽까지 잠을 못 이뤘고, 오늘 예를 행하고 나니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 재일(齋日)을 만났음에도 빈대(賓對)에 와서 모이도록 명을 내린 것은 곧 나의 걱정스러운 생각에서 재해를 지식시킬 좋은 계책이 나오기를 기대한 때문이다."
하였다.
5월 12일 을해
차대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요즘에 마음을 많이 썼는데, 눈은 곧 마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안력(眼力)이 퍽 감소되었다. 비가 와야 할 때에 오지 않는 것은 상리(常理)에 위배된 것이니, 오직 상리에 위배되기 때문에 재(災)라고 하는 것이다. 천도(天道)를 비록 현원(玄遠)하다고 하나 반드시 인사(人事)와 서로 호응하는 것이니, 아래서 잘못하면 위에서 나타나는 것은 상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리는 하늘을 순종하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로 삼는 것인데, 건곤(乾坤)의 성정(性情)으로 논하자면 지성하여 간단이 없는[至誠無息] 다음에야 바야흐로 하늘을 순종한다고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마음 사이가 조금이라도 해이해져버리면 바로 이것이 이지러짐이 되고, 이지러지면 곧 이것이 성(誠)하지 못한 것인데, 성하지 못했다 하면 이는 벌써 하늘을 순종하는 데에 위배되는 것이다.
나는 항상 간단없이 노력하면서도 오히려 혹 마음이 해이해질까 염려하건만, 재이가 이르러 왔으니, 또한 어찌 까닭이 없이 그러겠는가. 아마도 반드시 아래서 잘못한 일이 있을 듯하나, 참으로 무슨 일 때문인지를 모르겠다. 《서경》에 이르기를 ‘온 세상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나 한 사람이 책임질 일이요, 나 한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온 세상 사람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으니, 진실로 그 까닭을 추구해보면 그 허물을 누가 책임져야겠는가. 오직 마음에 반성하는 것을 수성(修省)의 방도로 삼을 뿐이다. 주공(周公)은 앉아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고, 문왕(文王)은 해가 기울도록 밥먹을 겨를도 없었으니, 옛 성인은 간단 없는 공부가 이와 같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후인들은 타고난 기(氣)가 비록 고인에게 미치지 못할지라도 진실로 스스로 그 정력이 이르는 곳까지 다하기만 한다면, 그 마음가짐은 또한 주공이 우(禹)와 탕(湯)과 문왕(文王)·무왕(武王)을 겸하려고 생각한 데에 거의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력이 미치는 곳에도 그 정력을 다 쓰지 못한다면 이는 지성하여 간단이 없는 도리가 아니다. 내가 항상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노심초사하여 감히 스스로 마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해가 기울도록 밥먹을 겨를이 없던 때나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던 때에 성인의 마음이 조금도 해이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마음의 상황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안한(安閑)한 기상만 있고 박속(迫束)된 뜻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마음 다스리고 성정 수양하시는 공부가 어찌 혹시라도 미진함이 있겠습니까마는, 삼가 그 노심초사하시는 것은 혹 과당한 곳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경의 말과 같이 주공·문왕과 같은 활발발(活潑潑)한 기상의 경우는 마치 물결이 일지 않는 고요한 물과 같고 티 없는 맑은 거울과도 같아서, 외물(外物)이 이르러와도 절로 누(累)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후인들은 하루에도 만사(萬事)를, 한 가지 일에도 만려(萬慮)를 하는 즈음에 저절로 힘쓰는 데에 지나침을 면치 못하게 된다. 또 구속(拘束)은 예(禮)에 속하고 관광(寬廣)은 악(樂)에 속하나, 예에 치우치면 화기를 잃게 되고 악에 치우치면 절제를 잃게 되는 것인데, 나의 공부를 가지고 어찌 관광의 경지를 갑자기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관광의 경지를 실천하려다가 혹 절제를 잃는 데에 이르면 옛날에 얻은 것도 오늘 다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비유하자면 마치 이러하다. 1천 칸의 창고에 칸마다 각각 지키는 자가 있으면 허술할 염려가 없겠으나, 나의 경우는 혼자서 1천 칸을 다 지키는 격이므로, 걱정하는 일념에 절로 힘을 갑절이나 쓰게 된다. 더구나 지금은 사무가 더욱 많고 응대도 더욱 번거로워서 걱정과 두려움과 삼가는 것이 나날이 더 심한지라, 무슨 일만 있다 하면 매양 노심(勞心)을 느끼게 된다."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형조와 한성부가 구륫간(拘留間)을 두고 사람을 가두는 데에 대해서, 이는 전옥(典獄) 이외에 또 전옥이 있는 것이라 하여 이를 헐어버리도록 명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지평 이동환(李東煥)이 상소하여 시사를 논술한 가운데 "근래에는 옥송(獄訟)이 허술하여, 사송(詞訟)을 맡은 제사(諸司)에는 본디 사람을 구류하는 법이 없는데도, 죄의 경중을 분간하지도 않고서 혹은 전옥으로 넘기기도 하고 혹은 여염집에 보호시키기도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죄를 타당하게 정하고 형벌을 타당하게 쓰는 것이 또한 풍속을 바로잡는 일단이라고 여깁니다."고 한 말이 있으므로, 여기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법사(法司)라는 곳에서 법에 없는 일을 하는 경우는 그 죄가 더욱 무거운 것이다. 그런데 형조와 한성부에 있다는 이른바 구륫간은 곧 법에 없는 것으로, 더욱 무상하고 불법적인 구례이다. 더구나 선조 때에 수교(受敎)한 금령이 있었는데도 그 후로 금령을 범하여 다시 설치한 것은 극히 해악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재작년에 이미 금령을 거듭 계칙하는 명이 있었고 보면, 대신(臺臣)으로서는 의당 금령을 거듭 계칙한 뒤로 다시 해이해진 폐단을 잘 살펴서 듣는 대로 논핵하여 바로잡았어야 할 것이다. 어찌 도리어 법에 없는 구륫간을 가지고 형옥이 너무 허술하다고 말하여 마치 구륫간을 다시 설치하자고 신청한 것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를 실언(失言)으로만 논할 수가 없다. 지평 이동환을 파직하라."
하였다.
특별히 총융사 김지묵(金持默)을 파직하고 신대현(申大顯)을 그 대신으로 삼았다. 이는 용암사(龍巖寺)의 창고에 불이 난 사실을 즉시 상문(上聞)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교하였다.
"지금의 가뭄은 또한 몹시 혹독한 데다 주야로 근심 걱정이 겹쳐 몸이 마치 불에 타는 듯하다. 견책이 위에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아래서 인사(人事)가 잘못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백관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곧 위에 있는 한 사람의 잘못이니, 죄가 과인의 몸에 있는지라 감히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는데, 조금이나마 속죄할 수 있는 실마리로 삼는 것은 오직 자신을 폄척하는 한 가지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내일 이후로는 열흘 동안 재계하게 되어 조정에 나가 정사를 보는 일도 장차 관례대로 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이 밖의 못을 터내리고 도랑을 치는 등의 응당 해야 할 일들은 겨우 하도록 하였으나, 신명의 응험이 막연하다. 그래서 또 온갖 방법을 다 쓰는 뜻에서 소결(疏決)을 시행하려고 하나, 이 일은 모름지기 의위(儀衛)를 갖추어야 행할 수 있으니, 이 또한 행할 때가 아니라 하겠다. 지금 형관(刑官)을 와서 기다리게 하고 빈대(賓對)까지 겸해서 하도록 한 것은 정히 녹수(錄囚)에 관한 일을 물어보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일은 진실을 힘쓰는 것이 귀중하니 어찌 상격(常格)을 논하겠는가. 소결한다는 명칭은 없이 녹수의 실상만 있으면 이 또한 진실한 정사인데, 진실이란 곧 거짓의 반대인 것이다. 천심(天心)이 즐거워지기를 우러러 기대하는 방도와 내 몸의 공구 수성을 힘쓰는 방책은 한두 가지 일이라도 먼저 실질에 가까운 일부터 잘해나가는 데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부터 형조의 당상과 낭관은 모두 본조에 숙직하면서 경외(京外)의 사수(死囚)에 대한 상복(詳覆) 및 녹계(錄啓)와 회계(回啓)·사계(査啓) 등 1백 2도(度) 중 품복(稟覆)하고 답을 내리지 않은 12도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를 하나하나 자세히 조사하여 각각 의견을 내서 사리를 연구하고 분석하고 논결하는 가운데 간혹 또 비변사의 대신에게 나아가 의논을 거친 다음 계속해서 보고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내가 재거(齋居)하는 동안에 조용히 연구하고 자세히 강구하여 재거를 마치고 나서 의당 판하(判下)할 것이니, 이 뜻을 해조의 당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라. 근래에 가뭄이 너무 심하기는 하나, 경기와 호서가 서로 천심(淺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산천의 제사를 대신해서 먼저 마음속으로 기도하여 재해를 지식시키고 비를 내리게 하되, 이때의 구조(求助)에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각각 논사(論思)와 언책(言責)의 직에 있는 관원들로 하여금 서로 강마하여 진술하게 하도록 하라."
호남에 진휼을 시행하였는데, 정월부터 진휼을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마쳤다. 【공진(公賑)으로는 김제(金堤)·고부(古阜)·임피(臨陂)·만경(萬頃)·함열(咸悅)·옥구(沃溝)·무안(務安)·흥양(興陽)·용안(龍安)·고창(高敞)·흥덕(興德) 등의 읍과 고군산(古羣山)·사도(蛇渡)·임치(臨淄)·임자도(荏子島)·위도(蝟島)·고금도(古今島)·마도(馬島)·신지도(新智島)·어란(於蘭)·금갑도(金甲島)·남도(南島)·발포(鉢浦)·여도(呂島)·녹도(鹿島)·다경포(多慶浦)·지도(智島)·목포(木浦)·격포(格浦)·고돌산(古突山)·흑산도(黑山島) 등의 진과 흥덕의 목장 등을 진휼했는데, 기민이 총 46만 9천 72명에 진곡은 2만 7천 5백 4석이 들었다. 그리고 사진으로는 좌수영(左水營)·우수영(右水營)·전주(全州)·나주(羅州)·장흥(長興)·순천(順天)·여산(礪山)·익산(益山)·영광(靈光)·영암(靈巖)·진도(珍島)·부안(扶安)·무장(茂長)·강진(康津)·함평(咸平)·해남(海南) 등의 읍과 가리포(加里浦)·방답(防畓) 등의 진과 나주·진도 등의 목장을 진휼했는데, 기민이 총 25만 3천 6백 51명에 진곡은 1만 4천 9백 67석 남짓 들었다. 또 병영(兵營)·금구(金溝)·태인(泰仁)·곡성(谷城) 등의 읍과 군산(羣山)·금모포(黔毛浦) 등의 진과 순천의 목장을 구급하였는데, 기민이 총 2만 7백 44명에 진곡은 1천 23석이 들었다.】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87면
【분류】구휼(救恤)
호서에도 진휼을 시행했는데, 정월부터 진휼하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마쳤다. 【은진(恩津)·한산(韓山)·임천(林川)·서천(舒川)·석성(石城)·노성(魯城)·부여(扶餘)·평택(平澤)·황간(黃澗) 등의 읍과 서천진인데, 기민 총 2만 8천 3백 8명에 진곡은 2천 1백 15석 남짓 들었다.】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87면
【분류】구휼(救恤)
5월 13일 병자
충청도 관찰사 한용화(韓用和)에게 하유하기를,
"지금 현재 비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곳곳마다 절실하지만, 어찌 가뭄이 제도(諸道)보다 10배나 더 심한 본도(本道)만이야 하겠는가. 일도(一道)를 통틀어 거의 모두 비를 빈 것은 근래에 없었던 일이다. 생각건대 도내에 혹 원통함을 품고도 풀지 못한 자가 어둠속에 가린 채 나라의 은택을 입지 못해서 비가 오려다가도 오지 않고 수십 일을 넘어 두 달에 걸친 것이 아닌가. 경중(京中)은 먼저 소결의 조치를 시행하였는데, 본도의 갈급함은 경중에 비할 바가 아니니, 녹계(錄啓)되지 않은 여러 죄수들에 대해 우선 그 대강을 열거하여 성화같이 한 책을 등사해서 장문하라. 그러면 직접 처결할 만한 죄수에 대해서는 바로 소방(疏放)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밖의 원통함을 풀지 못한 자나 나라의 은택을 입지 못한 자들의 우울함에 대해서는 특별히 정성을 다해 탐지해서, 화기를 해치던 일이 화기를 인도하는 일로 전환되도록 기하라. 내가 재거(齋居)하는 이때에 어찌 하유를 할 수 있으랴마는, 삼농(三農)을 위하는 일념이 마치 타는 듯, 끓는 듯이 간절하므로 이와 같이 신신당부를 하노니, 경은 유의해서 거행하라."
하였다. 상이 이날부터 재거에 들어가면서 가뭄 걱정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다.
5월 15일 무인
이미 기우(祈雨)하기를 명하고, 상이 깊이 재성(齋誠)을 다하면서 전교하기를,
"내일 쓸 축문(祝文)은 의당 친히 지을 것이나, 헌관(獻官) 등 여러 집사(執事)들은 각별히 목욕 재계하고, 향소(享所)에는 금주(禁洒)를 엄히 계칙할 것이며, 진배(進排)하는 각사의 관원들은 꼭 일일이 재숙(齋宿)할 것 없다. 그리고 밖으로부터 진배하는 물종은 대령하지 말고, 인하여 이를 관례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7일 경진
삼각산·목멱산·한강에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날 비가 조금 내렸다.
5월 22일 을유
차대가 있었다
전교하였다.
"작금의 일기가 또 다시 말끔히 개어버리니, 백성들의 황급함이 어찌 호서 지방만 그렇겠는가. 지금에 비가 오지 않으면 이 해를 장차 어찌하겠는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걱정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타는 듯하다. 재차 비를 비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 없으니, 날짜를 가릴 것도 없이 내일 바로 향(香)을 받아서, 용산(龍山)에는 중신을 보내고, 저자도(楮子島)에는 재신을 보내어 기우제를 설행하도록 하라. 이 두 곳은 으레 모두 용을 그려가지고 행사를 하거니와, 신위(神位)는 지방(紙榜)을 쓰는 것을 지금부터 법식으로 삼으라. 하루 앞서 헌관은 태상시(太常寺)에 재숙하면서 구임랑(久任郞)과 함께 용그림을 살펴서 정결하게 하도록 힘쓰고, 다음날 아침에는 향실(香室)에 가서 향을 받아가지고 다시 태상시로 가서 모시고 나갔다가 제사가 끝난 뒤에는 도로 봉안하기를 또한 그와 같이 하라. 예조와 태상시로 하여금 이 내용을 등록에 기재해두고 그대로 준행하도록 하라."
호조 판서 김화진을 파직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제도에 금은점(金銀店)을 설치할만한 곳에 대해서는 반드시 연품(筵稟)을 거친 다음에야 관문(關文)을 발송하는 것이 본디 정해진 법식입니다. 또 연전에는 북관에서 금을 캐는 일로 인하여 칙교를 엄히 내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으니, 해조에서 금 은을 캘 만한 곳에 관문을 발송했는데 그 숫자가 수십 읍에 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호조의 관리를 불러 물어보니, 연품을 거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정해진 법식을 위배한 것으로 대단히 미안한 일입니다. 호조 판서 김화진을 견파(譴罷)하여도 안될 것이 없겠으나, 중대한 직임을 가벼이 체직하기 어려우니, 우선 먼저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소서. 그리고 해조의 차인(差人)이 외방 고을에 폐단을 끼친 것이 많으니, 본사(本司)에서 제도에 행회(行會)하여 각각 자기 도내에 금은점을 설치한 곳이 몇 고을이며 각 고을 중에는 금은점을 설치한 곳이 몇 군데나 되는지를 상세히 열록(列錄)해서 장문하도록 해서 이를 품처한 뒤에야 비로소 금은점 설치를 허락한다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통지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거듭 엄히 법식을 정하여, 만일 연품을 거치지 못했으면 관문을 발송할 수 없게 해서, 경외로 하여금 조정에서 법령을 내린 본의를 환히 알도록 해야겠습니다."
하고, 장령 정최성(鄭㝡成)은 아뢰기를,
"신이 연석에 나와 삼가 들으니, 대신이 제도의 금은점에 관문을 발송한 일로 호조 판서를 추고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호조 판서의 주대(奏對)가 대단히 장황하여 마치 쟁변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저 금은점에 관한 일의 본말을 신은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마는, 연품을 거치지 않고 지레 먼저 관문을 발송하여 물은 것은 삼가는 도리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연석에서 조사 신문하자는 주청이 대신에게서 나오기까지 했는데도, 스스로 인책하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변명하는 죄과를 범하였으니, 사체가 엄중한 연석에서 대관(大官)의 도리를 손실함이 작지 않습니다. 추고만 하고 그만둘 수 없으니, 호조 판서 김화진에게 파직의 법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평 윤함(尹涵)이 아뢰기를,
"이단(異端)에 대한 폐해를 성인이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에 비유하였는데, 지금 이른바 서양학(西洋學)이라는 것이 바로 그중에서 더욱 심히 패려한 것입니다. 연전에 내린 조정의 금령이 더없이 신엄(申嚴)하였고 보면, 이제 사설(邪說)이 영원히 지식되었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듣건대, 호서 지방에는 그 무리들이 실로 번성하여, 곳곳에서 서로 무리를 불러 모으고 곳곳에서 사람을 속여 꾀면서 궁벽한 도서 지방이나 산속 토굴 사이에 자취를 숨기고 있는 자들이 도리어 지난날보다 더 치성하고, 심지어는 도성 안에도 그 무리들이 계속 늘어나서 처단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곧 다름이 아니라, 전하께서 비록 금한다고는 하시나 뿌리를 뽑지 못하여 그들의 소굴이 아직도 남아 있음으로써 이렇게 오래갈수록 더욱 치성해지는 것입니다. 아, 저 천리(天理)와 인기(人紀)를 멸절시키는 사설이 아직도 감히 이 천지 사이에 제멋대로 행해지고 있으니, 또한 어찌 하늘이 노염을 품고 음양이 화기를 잃는 일이 없겠습니까. 청컨대, 전하께서는 먼저 그들의 소굴부터 속히 깨뜨릴 방도를 진념하시어, 그들로부터 유혹당한 저 백성들로 하여금 회오(回悟)할 바를 알도록 하셔서 음양의 화기를 도양(導揚)하는 한 가지 도움으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호서 지방의 소굴에 대해서는 대신이 이미 말하였으니, 절로 의당 거조(擧條)를 낼 것이다. 그 밖의 경외 인민들의 미혹을 깨우치고 지식시키는 방도에 대해서는 각각 유사가 있으니, 유사의 직무 수행이 성실하지 못할 경우에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대신은 그들을 논박하여 감죄하고, 너희들은 그들을 규핵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반드시 먼저 이존창(李存昌)을 베어 죽인 다음에야 호서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점차로 감염되는 폐단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대저 이존창은 그들 가운데 두목으로서 전혀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소굴을 만들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비록 그런 하찮은 것들까지도 반드시 그 악을 변화시켜 삶으로 인도하려고 하니, 그렇다면 저 돼지나 물고기, 나무나 돌맹이 같은 것들도 의당 감격할 터인데, 저 이존창은 어둡고 강포하여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를 처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혹은 서로 다투어 주육(洒肉)을 준비해서 옥중(獄中)으로 찾아가 그를 위문하기까지 한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사람 살리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는 의리이겠습니까. 도신(道臣)으로 말하더라도 의당 사유를 갖추어 진문(陳聞)해서 처분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여러해가 지나도록 아직까지 가부간에 아무런 말이 없으니, 청컨대 해당 전후 도신들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고 속히 사실을 열거하여 치계하도록 해서 율에 따라 처단할 뒷받침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함이 또 아뢰기를,
"인기(人氣)가 화평해진 다음에 천기(天氣)가 순조롭고, 민심이 기뻐한 다음에 천심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민생들의 뼈에 사무친 원통함은 모두 여러 가지 부세와 요역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이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떠도는 사람이 서로 잇달고 탄식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정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끝내 이를 변통하지 못하는 것은 곧 국용(國用)이 부족하여 보충할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자가 일찍이 송(宋)나라 임금에게 말하기를 ‘안으로 경사에서부터 밖으로 군읍에 이르기까지, 위로 궁금(宮禁)에서부터 아래로 서도(胥徒)에 이르기까지를 통틀어 명목 없는 낭비를 죄다 없앤다면 반드시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도 용도가 지극히 많고 명목도 매우 많으니, 그 사이에 어찌 헤아려 감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이제 의당 조신 가운데 사무에 익숙한 자들을 가리어 과(科)를 갈라서 각각 한 가지씩 나누어 맡아 모든 불필요한 비용들을 일체 견감하게 해서 국가의 용도를 넉넉하게 한 다음에 비로소 백성들의 부세와 요역에 관해서 매우 절실하고 급하여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을 제거한다면 민심이 거의 위로될 수 있고 천심도 혹 감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비용을 견감하는 일도 만일 잘하지 못하면 한갓 아랫사람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명칭만 있게 되고 용도를 절약하는 실상은 보지 못할 것이니, 모름지기 일용(日用)의 지출과 수입 가운데서 지출이 수입을 넘는 일이 없어야만 공사(公私) 양쪽이 다 편의하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주모(籌謨)하는 자리를 하루 간격으로 설행하고 있으나, 여러 재신 가운데 들을 만한 계책을 낸 자가 어디 있던가. 오늘의 연석만 보더라도 한 가지도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하는 주모가 없으니, 계책을 묻는 것이 묻지 않는 것만 못하다. 우선 놓아 두라."
하였다.
승지 홍인호(洪仁浩)가 아뢰기를,
"병신년 이후로 내려진 심리(審理)·녹계(錄啓)에 대한 판부(判付)를 죽 초록하여 책으로 만들어서 을람(乙覽)에 대비해왔습니다. 그런데 신이 자주 해방(該房)의 승지로 있었던 때문에 명을 받들어 수정한 것이 지금까지 15년 동안에 걸쳐 18권에 1천 3백여 안(案)이 모아졌습니다. 그런데 다만 그 문안(文案)이 너무 간략하게 산삭되어 옥정(獄情)의 본말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에다 원안(原案)의 개략을 첨부하고, 모든 공초(供招)의 중요한 대목이나 주언(奏讞) 가운데 중요한 말로서 빙고(憑考)하지 않을 수 없는 데에 관계된 것들을 다 뽑아내서 대략 초하여 안(案)마다 세주(細註)를 달며, 안마다 그 밑에 삼가 판부를 힘써 정밀하고 자상하게 기록하도록 하되, 초안(抄案) 작업은 유사에게 맡기고 판부는 내각으로 하여금 다시 교정을 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을 다 마친 뒤에는 이를 호남·영남의 감영으로 내려보내서 수본(數本)을 정서(淨書)하게 했다가, 그들이 이를 올려보내기를 기다려서 그대로 활자(活字)를 사용하여 간행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차후로는 내려진 판부가 한 권(卷)이 차는 대로 즉시 이 예에 의거해서 계속 간행하여, 안으로는 형조와 한성부, 밖으로는 사도(四都)와 팔도(八道)에 각각 1건(件)씩을 반하(頒下)해서 각기 이대로 준수하여 봉행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사체가 중대하니, 묘당 및 각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경외 중수(重囚)들의 죄상을 살피어 옥안(獄案) 1백 1도(度)를 판하하여 살려준 사람이 19인이었다.
5월 23일 병술
승지를 용산강(龍山江)과 저자도(楮子島)에 보내어 재차 기우제를 지냈다.
5월 24일 정해
비가 내렸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단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아직 심지 못한 모들을 차례로 옮겨 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절서가 이미 늦었고 인력(人力)도 두루 미치기 어려워서, 비록 비가 충분히 온 뒤에도 반드시 모를 심지 못할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의 경우 이러한 때에는 오로지 다른 곡종(穀種)을 대신 파종하는 효과를 힘입었는데, 이는 종자가 넉넉한 다음에야 걱정이 없을 수 있으니, 먼저 관문으로 경기와 삼남 지방의 도신들을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도내의 곡부(穀簿)를 죄다 점검해서 그 가운데 대신 파종하기에 알맞은 곡종을 골라, 산간 지역과 연안 지방을 헤아려서 서로간에 많은 데서 취해다가 적은 데로 보태주어 제때에 다른 곡종으로 대신 파종할 수 있는 뒷받침으로 삼도록 하고, 인하여 이 일로 그 지방관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판가름하여 특별히 출척(黜陟)의 정사를 거행해야 하니, 이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오늘 비가 이렇게 넉넉히 내리니, 오직 원도(遠道)까지 두루 다 우택(雨澤)을 입기 바란다. 그러나 비록 다같이 우택을 입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때늦은 곳도 많이 있을 터이니, 이 초기(草記)가 매우 좋다. 이 초기대로 분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곡종을 대신 파종한 곳에는 세금을 견감해주되, 세금을 견감하는 것은 곧 열심히 파종하게 하기 위한 본의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한다."
하였다.
어용겸(魚用謙)을 이조 참의로, 송민재(宋民載)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조진관을 호조 판서로, 어용겸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는데 어용겸은 이내 병으로 체직되었다.
5월 25일 무자
임희존(任希存)을 이조 참의로, 박종갑(朴宗甲)을 형조 판서로, 이의강(李義綱)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5월 26일 기축
큰비가 내렸다.
관동(關東) 지방에 정월부터 진휼을 시행하여 이때에 이르러 진휼을 마쳤다. 【사진(私賑)으로 평해(平海)·울진(蔚珍) 등의 고을을 진휼했는데, 기민이 총 3백 86명에 진곡은 2백 52석 남짓 들었고, 돈은 51냥 남짓 들었다.】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88면
【분류】구휼(救恤)
5월 27일 경인
지평 윤함(尹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일전의 동래 부사(東萊府使) 천망(薦望)에서 경력과 위망이 전혀 근사하지도 않은 사람을 쉽사리 천거하여 의망하였으므로, 제목(除目)이 한번 나오자 여론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일전에 이 대신은 차자에서 지난날의 일을 가지고 퍽 깊이 스스로 인책하는 듯했는데, 분수 밖의 책임을 무릅쓰고 천망에 응하게 되자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또 어찌 그리도 갈수록 더욱 방자히 전도되게 한단 말입니까. 삼가 대신을 위해서 이번 일을 애석히 여깁니다. 그리고 신의 생각에는 동래 부사 권평(權坪)을 속히 명하여 개차(改差)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동래 부사의 일은 사람마다 진실로 감당할 수 있는데 어찌 경력을 논하겠는가. 그리고 네가 어찌 대신을 함부로 헐뜯을 수 있겠는가."
하고, 전교하기를,
"윤함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는 윤허하지 않았으나, 이러한 때에 수령을 헛되이 매두어 직임을 비우게 할 수 없으니, 동래 부사 권평을 개차하고 즉시 그 대신을 차임하라."
하였다.
권엄(權𧟓)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우의정 이병모가 동래 부사 의망의 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미 좌상에 있으니 감히 무릅쓰고 담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더없이 엄중한 것은 중서(中書)의 고사이니 어긋남 없이 일체 고사대로 준행하기를 의당 권면할 일이요 강제로 시켜서는 안된다. 연전에 있었던 한두 번의 특례는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나도 여기에 대해서 반드시 이 예를 함부로 끌어다가 써서 당당한 상부(相府)의 체모를 손상시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 동래 부사의 의망에 대해서는, 좌상은 현재 휴가 중에 있고 영읍(嶺邑)은 지금이 농사철이고 보니, 그 대신 차임하는 데에 조금도 날짜를 지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비변사의 대신으로 하여금 의망하여 들이게 한 것은 대체로 조금이나마 법도의 한계를 보존하고자 해서 그리 한 것이다. 혹 수상(首相)이 밖에 나가 있을 적에 의천(議薦)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차상(次相)이 수상 대신 일처리하는 것을 혐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도 중서의 고사이다. 지금 일들이 이와 유사하니, 경은 모름지기 거행하는 것이 도리어 근거할 곳이 있는 데에 잘 참작해서 즉시 의망하여 들이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처음 규벽(珪璧)을 바쳤을 때는 신령한 비가 바로 내렸고, 재차 경건히 기도했을 적에는 그 다음날에 또 많은 비가 내렸으니, 모두 신령이 준 것이다. 감히 넉넉한 줄을 모르겠다는 것은 아니나, 바라고 바라는 한 생각에 그윽이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지역이 모두 다 흡족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한 생각에 그윽이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지역이 모두 다 흡족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마음을 두 가지로 쓰지 않는 의의에서 응당 신령께 보사(報謝)의 예를 거행해야 하는데, 우선 지체하다가 오늘 벌써 3일이 경과되었다. 그런데 3일 동안에 얻은 측우기(測雨器)의 수심(水深)이 몇 촌(寸)을 넘었고, 지금 또 비가 많이 내릴 기미가 있다. 대체로 비를 기도해서 비를 얻으면 재관(齊官)에게 논상(論賞)하고 인하여 신령께 보사의 예를 거행하는 것은 그 기쁨을 기억하여 그 일을 중히 여기고 겸하여 신령의 도와주심에 보답하고자 해서이다. 이미 비가 왔는데 보사의 예를 지체하는 것은 또한 귀신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니, 삼각산·목멱산·한강·용산강·저자도에 지난번 향을 받아갔던 근시(近侍)·중신(重臣)·재신(宰臣) 등을 보내어 날을 가려서 보사제를 거행하고, 헌관 이하 여러 집사들에게 논상할 일에 대해서는 정원에서 전례를 상고하여 품지(稟旨)하라."
5월 29일 임진
차대가 있었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별비 명색(別備名色)이 나왔으나 균역청(均役廳)이 급대(給代)를 실시한 이후로 손쓸 곳이 없게 되었다. 무릇 민폐를 견감시키는 데에 관계된 일이라면 급대할 곳을 찾지 않을 수 없어 혹 별비조(別備條)를 사용하기도 하나 그 실상은 이른바 무명세(無名稅)에 가깝다. 이미 비치된 것이 있으면 끝내 이를 취해다 쓰게 마련이나, 심지어 이를 공가(公家)의 문자에 올리기까지 하니, 어찌 이러한 체모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또 예전에 없던 별별비 명색(別別備名色)까지 만들어낸단 말인가. 이것은 묘당에서 엄히 계칙하여 통렬히 혁파하는 것이 옳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전곶(箭串)의 목장(牧場)에 머물려두고 방목하는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본 사복시에 소속된 풀밭은 매우 협착합니다. 6궁(宮)의 풀밭이 한 곳에 같이 있는데, 소속이 각기 달라서 서로 통하여 방목할 수가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이 풀밭을 본시에 소속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6궁의 풀밭을 떼내서 사복시에 소속시키면 그 명분이 어찌 정대하지 않으랴마는, 다만 사복시에 소속시킨 뒤에는 아랫것들의 간교한 폐단을 이미 엄히 막기 어려운 실정이고 보면 끝내는 모조리 개간하는 데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 이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목장이 배봉진(拜峰鎭)과 가까워서 서로 다툴 단서도 없지 않을 것이니, 진장(鎭將)으로 감목(監牧)을 겸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좋겠고, 또 서로 방해되는 단서도 없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일을 가지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장용 제조(壯勇提調) 정민시가 말하기를,
"진토(鎭土)를 목장에 함께 소속시키기 어려운 것이고 보면 이미 서로 거리끼는 단서가 많을 것이고, 진군(鎭軍)은 또 본영(本營)의 정군(正軍)이므로 또한 목자(牧子)에 겸속시킬 수 도 없으니, 비록 명목상 감목을 겸하게 하더라도 그 실효를 보장하기를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사복 제조(司僕提調) 이시수는 말하기를,
"겸관(兼管)하는 것이 참으로 좋기는 하나, 반드시 목장의 모든 일은 진장(鎭將)에게 소속시키고, 진장에 대한 상벌은 본시가 주관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편의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목을 겸하는 데 대한 논의를 오늘 갑자기 결정하기가 여려우니, 다시 더 충분히 토의를 거친 뒤에 초기하여 품처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22일에 소결(疏決)의 문서를 반포한 이후 처음으로 경들을 만나보았다. 가뭄에 대한 걱정으로 애가 타는 이때에 어떤 수고로움인들 꺼리랴마는, 유독 소결을 하는 데 있어 전례대로 전좌(殿座)하지 않은 것은 꼭 재거(齋居)를 만나서 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속으로 몹시 애통함이 있어 차마 전례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전례대로 한다면 결안(結案)된 사수(死囚)에서부터 도(徒)·유(流)·안치(安置)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당 품결(稟決)을 했던 것이다. 천하 만사가 어디에나 혈구(絜矩)의 의리가 있는 것이라, 심도(沁島)의 죄수들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은데, 무슨 마음으로 정전에 앉아서 유방(流放)된 무리들에게 가부를 평론하겠는가. 이 때문에 다만 여러 당상들로 하여금 해조에 회직(會直)하여 사수의 안(案)만 품하게 한 것이다. 목숨을 보전시켜보려는 한 생각에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 같은 무더위에 그들을 장기(瘴氣)의 고장에 방치해두고서, 나는 비단옷 입고 쌀밥을 먹고 있으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진실로 생명을 보전시키는 데에 유익하기만 하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 있어서 무엇을 아끼겠는가. 이 마음이 참으로 이른바 ‘좋아하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심하다.’는 것이니, 경들을 대해서 어찌 한 마디도 없을 수가 있겠는가. 사수(死囚) 1백 1도(度)에 이르러서는 근근이 정신을 수습해서 판하(判下)하기는 했으나, 또한 그 허다한 사수들의 죄상을 헤아려 처단하는 데 있어 하나하나를 마치 금 저울[金秤]로 달듯이 공평하게 했다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매양 판옥(判獄)의 문서를 계하하는 날을 당해서는 마음이 매우 송구하여 그 후 여러 날을 진정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마침 다행히 그 다음날에 단비가 내려서 내 마음이 퍽 스스로 위로가 되었으나 그래도 계속 염려가 된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제도(諸道)에서 정리곡(整理穀)을 빙자하여 농간을 부린 곡절에 대하여 그 실상을 조사해서 올린 장계를 가져다 보니,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일 거행을 가장 만홀하게 하여 대충대충 미봉한 꼴이 마치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자인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암행 어사의 계본을 인하여 마침 나문(拿問)하라는 명이 내렸으므로 우선 감히 율명(律名)을 우러러 주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은 정리곡으로 명칭된 것을 모조리 화성(華城)에 붙였으니, 이는 자못 옛말의 ‘가죽이 없는데 털이 어디에 나겠는가.[皮之不存毛將安傅]’라는 것과 같은 격이다. 건더기가 없는데 무슨 비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열읍에서 죄과를 범한 것이 있고 없음은 우선 차치하고라도, 그때의 거조(擧條)에 대한 비지(批旨)가 그 얼마나 엄절했던가. 그런데 이른바 이형원이란 자는 은권(恩眷)을 후히 입어 누차 감사직을 역임했건만, 그의 일 거행하는 것을 살펴보니 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장계 내용의 무상함과 사건을 조사한 데 대한 부실함은 곧 팔도의 도신이 다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리고 감영의 막료를 놓아서 열읍을 침학함으로써 백성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면서 도리어 이 막중한 정리곡의 명칭을 골치를 썩히는 자료로 간주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죄 위에 죄를 더한 것이다. 그러나 맥추(麥秋)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그를 처분하자는 말이 이미 백성을 위하는 뜻에서 나왔으므로, 지금까지 기다려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새 도백이 이미 부임하였으니, 만일 이형원에게 혹시라도 용서를 해준다면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다. 그를 잡아오기를 기다려서 엄히 가두고 신문해야 할 것이니, 해부(該府)에 분부해서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찬 윤익렬(尹益烈)이 청하기를,
"이형원에게는 엄수(嚴囚)의 예로 체포해 와 공초를 받아 속히 해당된 형률을 시행하고, 정리곡에 죄과를 범한 수령들에 대해서는 다시 하나하나 조사해내도록 해서 잡아다 신문하여 엄히 감죄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장릉(長陵)111) 의 능관(陵官)이, 본릉(本陵) 국내의 소나무와 잡목이 해마다 저절로 말라 썩어서 꺾어진 것이 매우 많다는 것으로 예조에 보고하자, 예조가 이 사실을 상에게 계문하고 또 그 말라 썩은 것들을 베어버리고 봄에 새로 나무를 심을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의당 특별히 사람을 보내 적간하여 사실의 본말을 간심(看審)한 다음에 처분해야 한다. 본릉의 산림에 관한 정책은 더욱 자별함이 있다. 옛 장릉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대부분이 영묘(寧廟)112) 께서 손수 심으신 것이고, 신해년에 능을 옮겨 봉안한 뒤에는 선조(先祖)께서 또한 고사를 준행하시어 정자각(丁字閣) 곁에다 친히 두어 그루를 심으셨는데, 지금은 거의 아름드리가 되었다. 연전에 내가 능을 배알했을 때도 동갑(銅甲)을 만들어 그 나무를 보호하여 표지로 삼았었다. 능수(陵樹)를 잘 보호하는 일이야 어는 곳인들 중하지 않으랴마는, 본릉의 중함은 더욱 이와 같은데, 이런 것에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다면 송구스럽고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니, 어찌 재랑(齋郞)만 책망할 수 있겠는가. 또 선조의 훌륭한 뜻을 우러러 체받자면 그 처분을 엄절하게 하기를 의당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 숨겨두고 낱낱이 보고하지 않았거나 산을 단단히 금해서 나무를 잘 기르지 못한 해당 재랑 등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히 신문하여 공초를 받고, 이번에 한번 적간한 뒤로는 특별히 획일적으로 법식을 정하여 초기(草記)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명하여 제도의 영장(營將)이나 중군(中軍)으로 20 개월이 차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내직으로 전임할 수 없도록 하였는데, 이는 병조 판서 이시수의 말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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