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무오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경모궁 도제조 심환지(沈煥之), 제조 정민시(鄭民始), 장악원 제조 이서구(李書九)를 불러 접견하였다. 전교하기를,
"묘향(廟享)은 14실(室)에 제사를 올릴 때에 시각이 자못 느리기 때문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따라서 느긋하게 하는데, 궁향(宮享)은 시각이 다소 빠르므로 음악을 연주할 때에 매양 천천히 느긋하게 연주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제사 그릇을 거둘 때에 연주하는 악장(樂章)과 신령을 보낼 때에 연주하는 악장을 전에 이미 함께 연주하도록 하였고 그 얼마 뒤에 또 초헌(初獻)을 할 때의 악장과 진찬(進饌)을 할 때의 악장을 함께 연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뜻으로 물었던 것이다.
지금 초헌과 진찬의 두 악장을 보니, 글자와 구절의 많고 적음이 아주 달라서, 인도하여 들어올 때와 초헌을 할 때의 악장은 4자 8구, 5자 4구로 되어 있고 진찬을 할 때의 악장은 단지 4자 8구로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형세로 보아 한꺼번에 합하여 연주하기가 어렵겠다.
지금 만약 전폐(奠幣)와 진찬 두 악장을 합하여 연주한다면 진찬 악장은 단지 4자만 더하면 되니 함께 연주할 때에 길고 짧음이 같지 않을 염려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예식을 행하는 절차는 더 늘어나더라도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촉박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음악을 담당한 사람들로 하여금 시험적으로 연습을 하게 하여 오늘 밤에 대향(大享)을 올릴 때부터 이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으로 홍문관 제학을 삼았다.
5월 2일 기미
한성 판윤(漢城判尹) 이정운(李鼎運)을 체직하고 이응거(李膺擧)로 대신 제수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사람의 인품에 대해 전에 그 도의 감사와 수령을 지낸 적이 있는 두 대신에게 들어 보니, 학문과 행실이 모두 독실하여 그 고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하였다. 서울에 있었다면 마땅히 가까운 반열에 두어 고문(顧問)으로 삼았을 사람이다.
한번은 작은 벼슬을 제수한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고 집이 멀다는 이유로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으므로 아직 수령으로서의 역량을 시험해 보지 못하였다.
그뒤에 지중추부사에 특별히 제수하였고 이번에 또 총관(摠管)을 제수하여 역말을 타고 올라오게 하였다. 불러서 가까이에서 만나 그가 아뢰고 응대하며 주선하는 것을 보고, 전에 내가 들었던 말이 어긋남이 없는 분명한 사실임을 알았다. 거듭 바른말을 아뢰게 해보았더니 온화한 행동 거지가 더욱 감탄스러웠다.
예전에 평양에 성균관 사업(司業)을 지낸 선우협(鮮于浹)이란 사람이 있었고 정주(定州)에는 또 한성부 우윤을 지낸 조창래(趙昌來)라는 사람이 있었으나, 근래에는 이러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오래도록 듣지 못하였다. 이처럼 특별히 발탁하여 등용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나, 이 사람은 이러한 인품을 지녔는데 조정에서 등용하는 것이 위부(衛府)나 중추부의 직함을 주고 마는 것이라면 간절히 인재를 구하는 본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나이가 아흔에 가까워 내직이나 외직의 직무를 맡기기가 어려웠다.
마침 그가 서울에 올라왔으니 이 때에 시험해 보고 싶다. 대호군 이응거(李膺擧)를 경조 윤(京兆尹)에 특별히 제수하고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일전의 빈대(賓對)에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들었다. 중신(重臣)은 이미 청현직인 성균관 대사성을 거쳤고 그의 증조(曾祖)도 부학(副學)을 지냈으니, 이와 같은 지체에는 이전에도 간혹 경연에서 여쭈어 융통한 규례가 있었다. 호조의 관직을 전례대로 증직한 것이 비록 깊이 생각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기는 하더라도, 증직을 고칠 때에 여쭈지 않고 멋대로 해버린 것은 또한 법식을 어겼음을 면하기 어렵다. 그리고 증직(贈職)과 노직(老職)을 내리는 문제는 반드시 모두 대신이 경연에서 여쭌 뒤에 시행하는 것이 규례이다. 이것으로 보나 저것으로 보나, 증직을 고친 이조의 당상관은 신칙을 아니할 수 없다. 무겁게 추고하라.
대각의 논장(論章)이 나온 뒤에 아직껏 결말을 짓지 않고 있는데, 일의 면모로 보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중신 이가환(李家煥)의 집에 증직하는 문제는 그대로 이조의 관직으로 시행하도록 하라."
집의(執義) 심규로(沈奎魯)가 상소하기를,
"지난번 시호를 의논했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이전의 상소에서 모두 말씀을 드렸으므로 지금 다시 해명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고 정승 채제공(蔡濟恭)이 우뚝하게 법도를 세우고 엄하게 윤리를 잡아 지킨 것은 바로 세 가지 큰 의리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들어서 아는 일입니다. 그의 한평생에 대해서는 선왕께서도 아셨고 우리 전하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을 지녔다는 하유는 해와 별처럼 빛나고 세 가지 의리를 하나로 잡고 지켰다는 말은 부인들과 아이들까지도 모두 칭송하고 있습니다. 비록 평소에 창을 잡고 갑옷을 입고 있는 무인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머리를 숙이고 승복하여 어느 누구도 감히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자가 없습니다.
만약 시호를 내리는 법전에 애당초 충(忠)자가 없다면 모르겠으나 그 글자가 이미 있고 보면, 채제공과 같은 사람이 그 글자를 받지 못한다면 다시 어떤 사람이 그 글자를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 길원(吉源)은 신만이 충자를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의리를 유독 신 한 사람만이 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이 대신의 의리를 유독 의리로 볼 수가 없다는 말입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 가지 큰 의리 밖에 다시 어떠한 의리가 있단 말입니까.
그의 상소 안에, 시호의 의망에 대한 의논을 완전히 마치고 자리를 파하였기 때문에 논란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사실과 다른 말을 어찌 이렇게까지 한단 말입니까.
문을 닫기 전에 모임을 열어 3경에 이르도록 서로들 논쟁을 하였는데, 신은 사람이 하찮고 말이 가벼운지라 끝내 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즉시 자리를 파하고 곧바로 물러나오려고 하였는데 대궐의 문이 이미 닫혀 마음대로 나올 수가 없었으므로 할수없이 곁방에 피해 앉아 있으면서 다시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자리를 파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을 시호 의망에 대한 의논을 완료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 길원은 신을 멸시하고 억지로 아전을 시켜 시호의 의망을 입계하도록 하였는데, 담당 아전이 ‘지금 이미 자리를 파하였고 토론이 완결되지 못하였으므로 지레 먼저 입계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관(館)의 규정을 근거로 들며 거행을 하지 않으니, 길원이 아전에게 해직을 시키겠다고 큰 소리로 화를 내며 강제로 입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지금에 와서는 이에 ‘동료 관원들과 아전들이 모두 참여하여 들었다.’고 하니, 그가 비록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하다고 하더라도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어찌 이처럼 거짓으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가산 군수(嘉山郡守) 심인(沈鏔)은 본래 비천한 자로서 수령에 제수된 것부터 애당초 아주 분수에 지나친 것입니다. 그가 거제(巨濟)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탐욕스러운 짓을 마음대로 저질러 바닷가 고을 백성들을 못살게 굴다가 암행 어사의 논계로 파직되었던 일은 조정에서도 일찍이 환히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또 관서의 부유한 고을에 제수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조의 관원이 그에게서 무엇을 취한 것입니까. 정사 방목이 한번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들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탐욕스러운 자를 징계하는 조정의 법전은 결코 이와 같이 멋대로 올렸다 내렸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가산 군수 심인은 속히 개차하고, 이조의 해당 관원도 경계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견책하는 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심인의 일은 해조로 하여금 암행 어사가 아뢰었던 보고서의 내용을 상고하게 해서 과연 그대의 말과 같다면 아뢴 대로 시행하고 이조의 관원도 추고하여 문책을 하도록 하겠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5월 4일 신유
이조 판서 김재찬(金載瓚)이, 그 어미를 개장(改葬)하고 상소하여, 석달 동안 여묘살이를 하여 면복(緬服)028) 을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다. 비답하기를,
"개장을 했다고 해서 정사를 볼 수 없다는 의리는 본디 없는 것이지만, 인정에 따라 편법으로 행하는 일이, 예법에 규정이 없는데도 때로는 예법에 맞을 때가 있다. 굳이 끌어다가 법식을 삼을 것은 아니더라도, 경의 마음은 참으로 감동스럽다.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는 대신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결정하겠다."
하였다.
그뒤 빈대(賓對)에서 상이 대신들에게 물으니, 좌의정 이병모(李秉模)와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비록 이것이 편법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그의 소청을 들어 주는 것이 효성으로 다스리는 정치에 도움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김재찬을 특별히 체직하였다.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판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5월 5일 임술
차대(次對)를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이가환의 집에 증직하는 일에 대하여 속으로 염려스럽고 탄식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 불순한 학문이 날로 성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권일신(權日身)의 무리는 지금 이미 죽었으나 그 이웃 마을에 점점 물이 드는 것은 오히려 다시 이전과 같으며, 호남(湖南)까지도 선동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개 그 뿌리를 파내지 않고 그 말단만을 다스렸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일전의 하교에 대해서 신이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일찍이 사사로이 당파를 짓는 의논을 한 적이 없고 신과 가환의 사이에는 지난날에도 노여움을 품은 적이 없으며 오늘날에도 원수를 진 일이 없는데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잡된 생각을 품겠습니까만, 근래에 불순한 학설의 피해가 점차 더욱 넓어지고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면 간담이 서늘합니다.
이른바 죽은 뒤에 벼슬을 추증하는 일은 출세하여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일인데, 가환 같은 자는 곧 불순한 학문을 주장하는 세력의 괴수로서 제사를 폐지하여 윤리를 끊어지게까지 하였으니 그의 할아비와 아비에게 죄를 지은 자입니다. 그의 할아비와 아비도 어찌 추증하는 벼슬을 편안히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벼슬을 추증하는 일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는 명을 속히 내려야 한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비록 이러하나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설령 가환에게 참으로 그러한 죄를 범한 형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스스로 새 사람이 되도록 허락하였고 보면, 굳이 이것으로 죄를 삼을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외방인 호남의 고을에 수령으로 있을 때에 불순한 학문을 하는 자들을 적형(賊刑)으로 다스렸고 그전에 또 상소를 하여 스스로를 해명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단속하고 깨우치게 해서 그것으로 그 허물을 속죄하도록 한다면 불순한 학설을 물리치는 효과가 필시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지난 일을 뒤미쳐 논란하니, 새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끊어버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비록 이러하나, 신은 모든 일이 염려가 됩니다. 근래의 이른바 한 무리의 중인(中人)들이 저지른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가환에게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가 문학적 명망이 조금 있기 때문에 모두들 휩쓸려 그를 추종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 일을 지금 와서 다스린다면 도리어 효과없는 임시 방편에 가까울 것이니, 차라리 바른 학문을 크게 밝혀 불순한 학설이 절로 수그러들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재주를 안고 한을 품고서 올바른 도리를 저버리고 문득 정도를 벗어나 다른 길로 빠져 들어가는 수가 많다. 이른바 중인(中人)이라는 자들은 나아가 사대부가 될 수도 없고 물러나 상민(常民)이 될 수도 없어 스스로 불우한 처지에 절망하며 실제적인 일에는 뜻이 없다. 간혹 재능이 조금 있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기량을 펴보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문득 망녕된 생각을 하여 오로지 새로운 것만을 숭상하게 된다. 그들과 함께 배우고 익히는 자들은 경학(經學)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때문에 그 학설이 쉽게 들어오는 것이니, 형세로 보아 도도하게 흐르는 폐단이 반드시 이르게 되어 있다.
옛날에는 초학자를 가르치는 법이 먼저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으로 가르치고 그 뒤에 차차로 《사기(史記)》를 가르치고 범위를 넓혀 문장가(文章家)의 글을 가르쳤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로 하는 자들은 먼저 《좌전(左傳)》, 《국어(國語)》,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로부터 시작하고 그 뒤에 비로소 경서(經書)를 가르친다. 이래서 혈기가 정해지기 전에,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사덕(四德)이나 오상(五常) 등의 학설을 들어보지 못하니, 어떻게 바른 학문이 마음속에 쉽게 받아들여질 수가 있겠는가.
내가 고 정승 채제공을 만났을 때마다 이르기를, ‘경들의 친지들에 대해서 지금부터라도 먼저 경서를 가지고 초학을 가르친다면 무릇 의리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 그 분명히 깨우쳐 아는 바가 필시 다른 책보다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채 정승도 그렇겠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폐단은, 동이냐 서냐 남이냐 북이냐와 저쪽과 이쪽의 같고 다름을 논할 것 없이, 평소 당연히 행해야 할 일상적인 일을 버리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괴이한 문체가 있는 줄만 아는 것이다. 《패관잡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책들을 정말 열심히들 읽고 있다. 이른바 명나라와 청나라 이후의 문장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많이 읽으려고 하더라도 결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얻는 것이 어떤 모양이 되겠는가. 작게는 사람을 속이고 물건을 취하는 거간꾼의 술수가 되기 때문에 한 번 구르면 바른 학문을 할 수가 없게 되며 두번 세번 구르면 마침내 바로 불순한 학설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크게는 아비도 안중에 두지 않고 임금도 안중에 두지 않는 귀신이나 물여우 같은 자가 되어서 자신의 몸도 자신의 집안도 보전할 수가 없게 된다. 수십 년 이래로 대대로 벼슬을 한 훌륭한 집안 가운데 무사한 집안이 거의 드물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린다.
올바른 학문이 전혀 맛도 없고 뜻도 없는 듯하더라도, 오늘날의 세상에 살면서 오늘날의 폐단을 바루려면, 반드시 먼저 올바른 학문을 높이고 장려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이단을 물리칠 수가 있다.
내가 일전에 내각(內閣)에 보관되어 있는 일처리 문서[形止案]를 우연히 보았더니, 이른바 불순한 학설을 담은 책자로서 연전에 옥당과 내각에서 거두어들여 불태운 것이 도대체 몇권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전에는 그런 책자가 넓게 퍼져 있었어도 점점 물들어가는 걱정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요즈음에 이와 같이 성행하는 것은, 종합하여 말하건대, 사대부들의 지조와 취향이 높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또 종합하여 말하자면 양기(陽氣)가 쇠퇴하고 음기(陰氣)가 치성하여 바른 학문은 사라져가고 불순한 학설이 세차게 번지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대낮에 나타난 반딧불처럼 우임금의 솥에 비친 잡귀신처럼 그 빛을 드러내고 그 형체를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근래의 풍속을 보면, 경술(經術)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오로지 옆길로만 치달아, 말이 경학에 미치면 황당한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본다. 공당(公堂)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도 말하는 것이라곤 외설스럽고 비루한 이야기들이며, 조금은 체신을 지키려고 말을 가려서 하는 자들도 또한 폐단될 것도 없고 해로울 것도 없는 말을 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조정에서도 학문을 논하고 경전을 이야기하는 선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마침 우상을 새로 임명한 초기인지라 또한 말을 해두고 싶다. 사람을 뽑을 때에 반드시 명망과 실제가 모두 훌륭하고 글을 많이 읽고 몸가짐이 반듯한 사람을 찾아 조정에 본보기가 되게 하여 폐단의 습속을 한번 변환시킨다면, 가환과 같은 자를 도리어 발탁하여 등용을 하더라도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에 입신 양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견책하고 이미 증직한 것까지 빼앗는다면 지나치게 박절한 것일 뿐만 아니라 불순한 학설을 물리치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반드시 바른 학문 높이는 일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고 분부하시지만, 오늘날 불순한 학문의 폐해는, 비유하자면, 중병이 든 환자가 밖에 불순한 기운의 응어리가 맺혀 비록 인삼과 부자를 넣어서 지은 진기한 약제로 처방을 하더라도 치료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선행을 드러내고 악행을 처벌하는 일이 아울러 행해지고 형법(刑法)이 합당하게 시행된 뒤라야 비로소 성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가환 같은 자는 성스러운 시대에는 응당 귀양을 보내야 할 자이니, 증직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애당초 거론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오늘 아뢰는 바는 참으로 고심을 하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신을 견책하시더라도 신은 감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만, 신의 말을 그르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가환 한 사람을 배척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내가 이가환을 등용하고 홍낙안(洪樂安)을 몹시 배척한 것이 마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뒤집어진 듯함이 있지만 내가 어찌 따져 생각해 보지 않고서 그렇게 하였겠는가.
대개 홍낙안은 그때의 사단이 바로 죽은 채 정승을 등용하려고 하던 때에 있었는데, 내가 채제공 정승을 등용하려고 한 것은 또한 취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제문에도 세 가지 의리를 한 가지로 잡고 지켰다는 말이 들어 있다. 그 글귀가 60구나 되는 것도 대개 알아줌을 받아 권장 등용된 사유를 서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홍낙안 같은 자가 이에 감히 그 사이에서 일을 뒤흔들 계책을 부려 의도적으로 사심을 가지고 틈을 타서 농간을 부렸다. 그가 감히 몰래 판도를 뒤집을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인가. 염(濂)·락(洛)의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는 것과 같은 일에 대해서도 그가 감히 잡된 생각을 품고 그렇게 하였단 말인가.
벌을 주고 상을 주는 일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벌주고 상주는 일이 어찌 아래로 옮겨갈 수가 있겠는가. 내가 지금 경들을 믿고 등용하였는데 설혹 이와 같은 절실한 참소가 있다고 한들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동요가 되겠는가. 내가 한결같이 법을 지켜나가는 일은 오직 이런 일들을 엄하게 배척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그때에 신은 강 밖 교외에 있으면서 그 긴 글을 보게 되었는데 역시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홍낙안을 등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일은 본디 이 일과는 관계가 없으며 낙안과 가환도 굳이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밖에서 갑자기 보게 된다면, 불순한 학설을 배척하다가 도리어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필시 형정(刑政)이 뒤바뀌었다고 할 것인데, 이것 또한 경들이 마땅히 드러내 밝혀야 할 바이다.
이가환의 일은, 제사를 폐지했다는 등의 말이 비록 온 세상에 나돌더라도 사람들의 말을 또한 어찌 모두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근래에는 불순한 학문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다고들 하던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요즈음은 온 나라 구석진 곳에서까지도 서로들 모이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말로 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만, 바로잡아 구제할 방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모든 일이 합당하게 된 뒤라야 근본이 서고 원기가 채워져서 불순한 병의 빌미가 물리치지 않아도 저절로 물러갈 것이다. 경은 중병 환자에게 인삼과 부자로 지은 약제를 먹이는 일을 가지고 비유를 하였으나 온갖 병이 저절로 물러가는 것은 사실 인삼과 부자가 진원(眞元)을 증진시키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지와 몸 구석구석의 그 많은 병든 곳을 어찌 매 증상마다 그것을 치료하는 약제를 쓸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안을 닦고 밖을 물리치는 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반드시 밖을 방비하는 일에 전혀 유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근본은 반드시 안을 닦는 일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물러나 근본을 닦는 일보다 나은 것이 없다.
글은 경전을 위주로 하고 행실은 효성과 우애를 근본으로 하며 집에서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가서는 임금을 섬기되, 평소의 일상적인 언행에서부터 부지런히 힘써서, 잡되고 경박한 말을 하지 말며 괴상한 책은 읽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밥을 먹을 때에는 밥에 부끄러움이 없고 잠을 잘 때에는 이부자리에 부끄러움이 없고 평소 거처할 때에는 아무도 없는 방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세속에서 이른바 재미없는 말이라거나 웃음거리 일이라고 하는 것들을 착실히 실천해서 조금이라도 그냥 지나감이 없어야 한다. 그런 뒤라야 효과를 거두는 방도가 있게 될 것이다.
근래에 보면 조정에 참다운 기풍이 전혀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만을 거슬러 헤아려 보더라도 습속의 모양이 이미 아주 달라졌다. 더구나 천년 백년 전이야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 근래 경연의 체모가 영 말이 아니다. 조정이 이러하니 시골의 일이야 알 만하다. 가까이로는 아비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애당초 두 가지 이치가 아니라면, 집에서도 삼가 바른 몸가짐을 지니지 못하고 지낸다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 비록 겉모습을 가지고 보더라도 화려한 옷이 온통 오늘날의 유행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고 정승 김종수(金鍾秀)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이 사대부가 시정 잡배와 같은 것을 근심하였는데, 오늘날의 사대부들은 역관배와 같다.’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역관배와 같을 뿐만 아니라 기생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김 정승의 말이 분격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나 만약 그의 말이 맞는 말이라면 어찌 사대부의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경의 말을 나 역시 지나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불순한 학문은 마땅히 금해야 할 바이다. 그러나 금지하는 일을 정당한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단지 수치의 단서만 만들 뿐일 것이다. 기강이 서 있지 않고 위아래가 서로 미덥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금지한들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한 마디로 잘라 말하자면 근본을 돌이키는 방법밖에 없다. 비유하자면, 근래 농정(農政)을 강구하는 일과 같은데, 사람들이 필시 오활하다고 비웃을 터이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바로 참으로 근본을 힘쓰는 일이다. 오늘날 우선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시골에 묻혀 경전을 깊이 공부하며 행실을 닦는 선비를 찾아내어 예우하여 모셔다가 그들부터 등용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바람을 일으켜 크게 변화시키는 효과가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풍속을 바로잡는 방도는 또한 시기에 적절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선비된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만약 혹시라도 가서는 안 될 자리를 주제넘게 넘어들어가거나 말해서는 안 될 일을 외람되이 지껄인다면 이런 일도 또한 모두가 육예(六藝)의 교과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나는 본래 잡된 책을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삼국지》 등과 같은 책도 한 번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평소에 내가 읽는 책은 성인과 현인들이 남기신 경전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점점 눈이 어두워지더니 올봄 이후로는 더욱 심하여 글자의 모양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다. 정사의 의망에 대해 낙점을 하는 것도 눈을 매우 피로하게 하는 일인데, 안경을 끼고 조정에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놀랄 것이니, 6월에 있을 몸소 하는 정사도 시행하기가 어렵겠다. 그러나 경전에 대한 공부는 오히려 감히 게을리하지 않는다.
오늘날 가까운 반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과연 나의 뜻을 널리 펴고 시행하여 작으나마 모범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참으로 옳습니다. 다만 신이 아뢴 말이 충후함이 부족한 듯하나 불순한 학문을 배척하기에 급하여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고 정승 채제공이 살아 있을 때에 신이 일찍이 불순한 학문을 공격하는 주인으로 자처하기를 권한 적이 있었습니다. 채 정승으로 하여금 오늘날 신이 한 이 말을 듣게 하더라도 필시 지나치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익운(李益運)의 일도 놀라운 일이다. 벼슬을 추증하는 법은 지극히 엄하니, 이것이 어찌 이조의 관원 하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겠으며, 설령 전례를 뛰어넘어 추증을 하였다면 이것이 관직을 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살았을 때에 수직(壽職)으로 돈녕 도정이 되지 못했던 것도 반드시 경연에서 여쭌 뒤에 의망을 허락하는 것으로 새로 법식을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체모가 중대한 증직의 경우이겠는가."
하였다.
광주부(廣州府) 유수(留守) 서정수(徐鼎修)가 장계하기를,
"신의 영문(營門)이 진(鎭)을 낸 뒤에 지출하는 비용이 부족한 사유에 대해서는 전 유수 홍억(洪檍)이 이미 아뢰어, 이무곡(移貿穀)을 도로 내다 팔아서 편의에 따라 처리하라는 일로 판하하셨습니다.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며 곡식으로 만들어 놓는 일에는 양쪽을 모두 편리하게 하는 방도가 없습니다.
성기소(城機所)에서 성을 쌓는 데에 들어갈 관서(關西)의 관향(管餉) 좁쌀 2천 섬과 해서(海西)의 관향 좁쌀 1천 섬, 그리고 두 해의 모조(耗條) 6백 섬 및 관향에 덧보탤 좁쌀 1천 섬, 배삯의 축난 것을 보충할 쌀 83섬 5말, 을묘년 중순에 당시 관향전(管餉錢)을 빌려쓴 대신으로 받아들인 관서의 쌀 7백 76섬을 합하면 모두가 5천 4백 59섬 5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대로 유치해 두고 환자미로 활용하여 매년 모미(耗米)를 취한다면, 그 숫자가 지출하는 데에 모자라는 5백 20섬쯤을 충당할 수 있습니다.
성기소의 성을 쌓는 공사 몫 및 관향소의 관향에 덧보탤 몫은 경기 고을의 이무곡을 도로 판 돈을 가지고 편리에 따라 댓가를 지급하면 됩니다. 관향전을 쌀로 바꾸는 것과 경기의 곡식을 돈으로 바꾸는 것은 환산하는 값이 같지 않기 때문에 돈 쪽이 부족한데, 이것은 신의 영에서 편리에 따라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한다면 돈을 흩어서 곡식으로 바꾸는 폐단이 없어질 뿐 아니라 토지를 사서 둔전을 설치하는 데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의논대로 시행하게 하라고 복주(覆奏)하니, 따랐다.
평안도 절도사 이유경(李儒敬)이 장계하기를,
"아이진(阿耳鎭)은 변방 관문의 요충지에 처해 있으면서 소속된 데가 없고 독립된 진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진의 군사와 광평보(廣坪堡)의 군사들로 위급할 때에 독자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병권(兵權)을 삼았으니, 그것을 처음 설치한 규모는 강변의 여러 진보들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그런데 수령이나 그 부진(府鎭)에 소속된 인원을 막론하고 모두 구근(久勤) 벼슬자리를 지위가 낮고 명망이 적은 사람으로 인식하므로 군사를 쇄환할 때라든지 백성들의 소송 문건이 오가는 때에 통제하는 위엄이 결국 이력(履歷) 벼슬자리였을 때보다 못합니다. 이제 도로 이력 벼슬자리로 만든 다음에야 체제와 규례가 조금 무게 있게 될 수 있겠는데, 변통에 관계되는 일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복주(覆奏)하기를,
"재능은 지위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오직 선발하여 등용하기에 달렸습니다. 비록 이력 벼슬자리라고 하더라도 가려 뽑은 자가 합당한 재능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구근 벼슬자리로 하는 것보다 도리어 못할 수도 있으며, 구근이라도 합당한 사람을 뽑아 쓴다면 어찌 이력보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대체적으로 논한다면 이력으로 하는 것이 그래도 재능이 있는 자를 선발하는 뜻이 있으며 구근으로 하는 것은 사람을 뽑아 쓰는 방도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력이 구근보다 나은 것이 어찌 아이진에서만 그렇겠습니까만, 이미 군영(軍營)이 있고 보면 구근 제도를 쓰지 않을 수가 없고 구근 제도를 쓰기로 하고 보면 또 벼슬자리가 적어서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이 변통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렇더라도 아이진과 같은 경우에는 설치한 모든 것으로 보아 구근으로는 위엄있게 통제하기가 끝내 어려우니 종전대로 이력 벼슬자리로 만드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같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분부하소서."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가 아뢰기를,
"체모에 조금 무게가 있도록 하려 한다면 구근이 이력만 못하나, 사람을 잘 가려서 차임해 보낸다면 또한 이력이거나 구근이거나 관계가 없습니다. 비록 이것이 변경을 지키는 장수의 벼슬자리 하나에 대한 문제이기는 하나 이 역시 관직 제도에 속하는 일이니 자주 뜯어고치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매우 곤란한 일일 듯합니다."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곤란하다고 하는 의논도 또한 관직 제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전에 고군산 첨사(古群山僉使) 자리를 도로 이력 벼슬자리로 만드는 일로 점련하여 아뢰어 판부를 받았는데 하교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이 일도 그때의 판부에 의거하여 해조에 분부하소서."
하였다. 상이 그 의견을 따랐다.
전 수찬 박길원(朴吉源)과 수찬 심규로(沈奎魯)를 파직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시호를 의논하는 모임이 있은 뒤에 집의 심규로가 그 모임에 참여하고도 도리어 말썽을 일으킨 데에 대해서는 참으로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전 수찬 박길원은 만약 대응하는 글을 올리려고 하였다면 다만 일을 가지고 일을 논하여 그 모임의 자리를 파하지 않았던 실상을 밝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호의 글자를 하나하나 들며 조목조목 변론을 하였으니 체모를 손상시켰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심규로는 또한 다시 기세를 돋구어 헐뜯고 배척하여 마치 조정에 대고 질정을 하는 자와 같은 바가 있었습니다. 후세의 시호법이 비록 예전과 같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 본뜻을 따져보면, 더없이 존귀한 임금으로서도 그 사이에서 가타부타한 적이 없었고 한결같이 공론에다 맡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여 의논하는 자리에 함께 참여한 사람으로서 공공연히 비난을 하였고 조정에까지 파급되게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 수찬 박길원과 집의 심규로를 모두 파직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였는데, 그 의견을 따랐다.
대사헌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기를,
"농정(農政)에 대한 지난번의 윤음(綸音)에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먼저 해야 할 일과 백성을 보살피는 일에서의 큰 기준에 대한 큰 성인(聖人)의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팔도에 반포해 내리자 모두들 우러러 기뻐하고 있으며 신도 삼가 받아보고는 찬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과 같이 농사일도 잘 모르면서 놀고 지내며 목숨이나 이어가는 자는 스스로 부끄럽고 두려울 뿐입니다. 농서(農書)와 같은 경우는, 비록 각신(閣臣)이 편지로 알려주었으므로 경연에서 내린 하교를 받들기는 하였습니다만, 저에게 어찌 내세울 만한 문도(門徒)가 있겠으며 말할 만한 농사 지식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성상의 훌륭한 명을 받들 수가 있겠습니까. 아,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이 백성을 보살핀 정사는 실로 근본을 힘쓰고 비용을 절약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신은 참으로 전하께서 여기에 간절한 마음을 다 쏟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이 시골로 돌아간 지가 어느덧 3년이 되었다. 경을 그리워하는 내 마음에 어느날인들 잊은 적이 있겠는가. 내가 경에게 직무를 억지로 떠맡기지 않은 것이 어찌 다만 경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겠는가. 대개 이렇게 함으로써 장차 반드시 나오도록 할 방도를 삼으려는 것이다.
내가 경에게 세상의 풍도를 바로잡고 나라의 정치를 해달라고 맡기더라도 경은 마땅히 힘써 일어나 나와야 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 내가 경을 편안하게 해주고 경에게 기대하는 것이 과연 어떠한데, 경은 한결같이 시골에 묻혀서 지내려는 애초의 마음을 고집하려고 하는가.
돌아보건대 덕이 없는 내가 정성과 예우가 부족하였으므로 권면하는 하유를 거듭 내렸는데도 떠나려는 마음을 만류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사양하는 상소가 올라왔으니 두려운 마음이 배나 심하다. 요즘 날씨가 아주 무덥지는 않으니 경은 기회를 보아 올라오도록 하라.
농서(農書)에 대하여 덧붙여 진달한 일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내는 동안 필시 스스로 터득한 경륜이 있겠기에 지난번 찍어 반포하던 날에 의견을 말해 달라는 뜻을 거듭 당부했던 것인데, 경은 이에 ‘근본에 힘쓰고 용도를 절약하라’는 말을 뽑아내어 대답하였으니, 경의 정성에 대해서 내가 참으로 감탄하여 마지 않는다."
하였다.
5월 6일 계해
홍양호(洪良浩)를 이조 판서로, 정민시(鄭民始)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5월 7일 갑자
유선(諭善)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오래도록 맡아온 벼슬자리를 무엇 때문에 굳이 사직하려고 하는가. 경을 만나보고는 경의 품성을 알았다. 이전에 내린 경연에서의 하유와 상소에 대한 비답은, 한편으로는 경에게 보필을 맡기고 한편으로는 경을 위로하려는 뜻으로 신신당부를 한 것이었다. 이미 경에 대해서 알았으니 반드시 불러오고자 하는 것은 이치로 보아 당연한 일이다. 경이 비록 다시 사양을 하려고 하나 될 일이겠는가.
요즘 들으니, 28일과 3일에 내린 비가 여주(驪州) 근처는 골고루 적시지 못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한강 이북에는 한강 이남보다 조금 낫게 비가 내렸으나 그래도 비를 바라는 한결같은 마음은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날이 새도록 은하수만 바라보고 보내는 날도 있다.
설령 하루 이틀 사이에 주급(周給)하더라도, 20일 전에는 재계하는 일이 잇달아 있고 그 뒤에는 삼복 더위가 또 닥친다. 당분간은 한결같이 독촉하기가 어렵겠다. 조금 기다렸다가 서늘한 기운이 나면 이전의 약속을 지키라는 뜻으로 다시 경에게 권면할 것이다. 경은 편안한 마음으로 쉬면서 지내도록 하라. 나머지는 가을에 하유하겠다."
하였다.
전라도 암행 어사 유경(柳畊)이 복명(復命)하였다. 서계(書啓)를 올려, 격포 별장(格浦別將) 김여황(金麗晃), 임피 현령(臨陂縣令) 이종숙(李鍾淑), 함열 현감(咸悅縣監) 이인채(李寅采), 전주 영장(全州營將) 백동운(白東運), 익산 군수(益山郡守) 김기남(金箕南), 법성 첨사 (法聖僉使) 이응복(李膺福), 공주 판관 (公州判官) 김기응(金箕應) 등의 정치를 잘못한 정상에 대하여 차등있게 논죄하였다.
유경이 또 별단(別單)을 올려 아뢰기를,
"1. 닥[楮]과 대[竹]의 정사에 대한 일은 전후로 조정에서 거듭 엄하게 신칙했을 뿐만이 아닌데, 근래에 단오 선물 부채의 폐단과 종이가 귀하여 값이 뛰는 일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닥과 대가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선 신이 거쳐 지나간 고을들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더라도, 위에서 말한 길가의 고을들은 황폐된 밭이나 땅 가운데 닥과 대를 재배할 만한 곳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백성들이 재배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관아(官衙)에서 세금으로 징수하고 영문(營門)에서도 징수해 가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 차라리 버리는 땅이 되더라도 애당초 재배해 기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밭은 각각 맞는 토질이 있어서 우도(右道)가, 무성하게 뻗어 자라는 좌도(左道)만 못합니다. 그러나 닥밭은 땅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닥은 한 해에 자라는 풀이어서 한 번 베어내면 그 그루터기에서 해마다 움싹이 자라므로 이익됨이 매우 큽니다. 저 남도의 백성들이 어찌 즐겨 그 일을 하면서 서로들 권면하지 않겠습니까. 비워두고 놀리는 땅이거나 곡식 생산을 아니하는 땅이라면, 그대로 묵고 황폐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참으로 땅의 이익을 다 찾는 방도가 아닙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관문(關文)을 보내 신칙해서 곳곳마다 심어 길러 생업의 바탕을 삼게 하도록 하고, 영문에서 배정해 징수하는 일과 관아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일을 모두 금지시키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1. 옻[漆]의 용도가 매우 많고 생옻의 폐단은 더욱 심합니다. 관아의 용도에 쓸 것과 영문에서 책정하는 것을 반드시 생옻으로 백성들에게서 징수해 받아들입니다. 매번 영문에서 책정해 징수해갈 때에는 반드시 북을 치면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사방에서 찍어내는데 한번 겪고 나면 밭둑에 줄지어 섰던 나무가 하나도 남지를 않습니다. 옻을 생산하는 곳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나무가 자라는 것은 한도가 있고 옻의 용도는 끝이 없으며 옻을 생업으로 삼는 백성들도 점점 줄고 있으니 옻이 어찌 귀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응당 사용해야 할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달인 옻[火漆]으로 내도록 책정하고 값도 일정한 액수에 맞추어 주도록 할 일을 문서로 만들어 불변의 법식을 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1. 정읍(井邑) 등 일곱 고을의 전세(田稅)를 법성(法聖)으로 실어다 바치는 것은 참으로 하나의 큰 폐단입니다. 일곱 고을에서 법성까지의 거리는 길이 매우 멀어 가까운 곳은 1백여 리이고 먼 곳은 2백 리나 되므로 실어나르는 고생이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는데다, 황룡(黃龍)의 험한 시내를 지나자면 번번이 배가 침몰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두들 가까운 곳으로 갖다 바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가깝기로는 흥덕(興德)의 사포(沙浦)만한 데가 없습니다. 사포에서 일곱 고을까지의 거리는 먼 곳은 1백여 리이고 가까운 곳은 3, 4십 리인데, 또 이곳은 법성의 조운선이 지나다니는 길입니다.
법성과 사포 사이에는 험한 칠산(七山) 바다가 있으므로 전세를 실어나르는 배들이 침몰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만약 그들의 소원대로 가까운 곳으로 갖다 바치게 한다면, 전세를 납부하는 일에는 먼 곳까지 가야 하는 고생을 없앨 수가 있고 배로 실어 나르는 일에는 험한 길을 피할 수 있는 잇점이 있으니, 나라나 개인이나 양쪽이 다 편리하다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배를 통솔해오는 일은 이전과 같이 법성에서 출발하도록 하고, 다만 이 조운선들이 지나갈 때에 사포에서 동시에 출발시킨다면 법성에 있어서도 또한 위험한 칠산 바다를 지나야 하는 고생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찌 진졸(鎭卒)들의 한 때의 이익을 잃는다는 것 때문에 일곱 고을 모든 백성들의 소원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몇해 전에 고 정승 김이소(金履素)가 장성(長城)에서 돌아와 경연에서 아뢰었으므로 본도에 관문을 보내 하유하여 두 곳의 편리 여부에 대해 보고하도록 했었는데, 아직도 이 일이 중지된 채로 있습니다.
신이 길에서 이런 사실에 대해서 들었는데 가서 보니 들었던 일이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소원이 매우 절실하니 변통이 있어야 옳을 듯합니다.
1. 김제(金堤) 등 여러 고을의 세미(稅米)는 반드시 경강(京江)의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싣기 때문에 매양 세미를 받아들일 때마다 뱃사람들이 해당 고을에 와서 머무는데, 고색(庫色)들이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되어 관장(官長)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쌀을 툇자놓기를 제멋대로 하며 받아들일 때에는 말이 넘치도록 수북하게 받아들입니다. 그 간사한 짓을 하는 이유를 따져보면 쌀말을 훔쳐내어 이것으로 축난 것을 채우려는 속셈입니다. 흉년의 곤궁한 백성들에게는 쌀 한 톨도 어려운데 이 무리들의 침탈이 한이 없으니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배 한 척이 곡식을 싣고 출발을 할 때에 바다에서 먹을 양식 2백 섬을 지급해주면 그들에게는 적지 않은 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도 이처럼 규정을 벗어나는 폐단을 저지르고 있으니, 그들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해당 관사로 하여금 엄하게 금단하게 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복주(覆奏)하기를,
"닥, 대, 옻에 대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닥, 대, 옻 세 가지는 오로지 단오 부채를 만들기 위한 것인데, 단오 부채를 책정하는 일은 듣건대 해당 도에서 근래에 이미 혁파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뒤로는 도신이 감히 다시 길을 열지는 못할 듯하고, 도신이 이러하다면 여러 고을들을 단속함에 있어서 명령을 내리지 않고도 시행되게 할 방도가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영읍(營邑)의 침탈이 없어지고 나면 백성들에게 이익이 있을 것이니 이 이익이 되는 사실을 들어 백성들에게 재배하기를 권하는 일은 또한 별 수고를 하지 않고도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귀한지 천한지를 보면 영읍의 관리들이 부지런한지 나태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옻의 폐단과 같은 것도 책정을 줄인 뒤에는 또한 금지하지 않아도 저절로 금지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분부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이병모가 또 복주하기를,
"정읍 등 일곱 고을의 전세를 전체에서 분리하여 흥덕의 사포에서 싣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성(長城)과 고창(高敞)의 대동미(大同米)에 대해서 전에 변통한 적이 있었는데, 실어내리는 포구(浦口)의 폐단이 매우 많고 법성포의 조운선을 오래도록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곧바로 다시 이전대로 바꾸어 모두 법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뒤에 고 정승 김이소(金履素)가 경연에서 아뢴 일이 있었으므로 해당 도에 관문을 보내 하문하였는데 폐단이 위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례대로 시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다시 해당 도에 하문하더라도 변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이시수(李時秀),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도 모두 변통하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선혜청 제조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사포에서 나누어 싣는 것은 조창(漕倉)에 있어서는 실어내리는 데에 따르는 폐단과 기다리는 데에 따르는 폐단이 있습니다. 중간에 나누어 싣던 대동미도 지금 또한 모두 조창으로 수송하고 있으니, 지금 나누어 싣는 일을 다시 의논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리고 전세는 체모가 중대한 것이므로 깊은 산골짜기의 백성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모두 각 조창으로 실어다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곱 고을의 전세를 나누어 싣는 일은 가벼이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따랐다.
전라도 관찰사 이득신(李得臣)이 도내의 진휼하는 정사에 대한 일로 치계하기를,
"거느리고 있는 비장들을 나누어 보내 곳곳마다 살펴보게 하였더니, 읍(邑)과 진(鎭)에서 양식을 나누어 먹인 것이 모두 넉넉하여 굶주린 형색이 이미 모두 회복되었고 밀과 보리가 익어 백성들의 양식이 조금 여유가 생겨서 굶어죽어가던 백성들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진휼하는 정사가 이제 끝났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이 호남 관찰사의 장계를 보면, 양식을 넉넉하게 나누어 먹여 굶주린 백성들이 이제 모두 회복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또 암행 어사의 계문을 보면, 찌를 뽑아 시찰을 한 네 개의 고을 가운데 금구현(金溝縣)에서는 굶주려 죽은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밖의 다른 고을에도 어찌 이와 같은 곳이 없겠는가. 그렇다면 관찰사의 장계 가운데 ‘회복이 되었다.’고 한 것은 사실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불찰이 아니라면 영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니, 한 지역을 그에게 맡긴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해당 도의 관찰사 이득신에게 서용하지 않는 벌을 속히 시행하라. 해당 수령으로 말하더라도, 어사의 장계에 비록 성실하고 부지런하기는 하다고 하였으나, 굶주렸거나 병들었거나를 막론하고 그가 마음을 다해 구휼하지 못한 것은 무거운 처벌을 면하기 어렵다. 해당 수령 성정주(成鼎柱)를 즉시 해당 부서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히 심문하여 구술 공초를 받아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큰 정사에는 연분표결(年分俵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데, 후하게 하기도 하고 박하게 하기도 했다는 말이 어사의 계문에까지 들어 있다. 이러한 중요한 일에 사심을 부린다면 그 죄가 어떠한 것인가. 이 일을 가지고 유추해 보건대 이른바 읍분등(邑分等)에도 또한 후하게 하기도 하고 박하게 하기도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참으로 이러하다면, 호남의 백성들은 각기 그 수령이 도백과 얼마나 친분이 있는지에 따라서 편할 수도 있고 고생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고을을 맡긴 뜻을 너무나 저버렸다. 해당 관찰사는 임무를 교대하고 올라오거든 해당 부서로 하여금 잡아다 심문하게 하라.
해조가 회계하면서 이 조항을 무심히 보아넘기고 중요하게 거론하여 아뢰지 않은 것도 놀라운 일이다. 해당 당상을 체차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전라도 어사 유경의 별단에, 김제(金堤) 등 여러 고을의 세미(稅米)를 경강(京江)의 배에다 싣는 것이 폐단이 된다고 하면서 해당 관사로 하여금 금단하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한 뒤에 뱃사람들에 대한 단속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빙자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있으면 곧바로 해당 고을로 하여금 엄하게 다스리고 치보하게 하였으니, 그 무리들이 어찌 감히 다시 나쁜 짓을 저지르겠으며 수령도 또한 어찌 팔짱 끼고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사의 계문에서 폐단을 말한 것이 또 다시 이와 같으니, 각 고을의 일이 참으로 매우 놀랍습니다.
해당 관사로 하여금 해당 각 고을을 엄하게 신칙하여, 이 뒤로 법을 어기는 뱃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잡아가두고 즉시 보고하게 하여, 잡아다 엄하게 곤장을 치고 바로 선안(船案)에서 빼버려서 다시는 세미(稅米)를 운송하는 일에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서울의 관사에서 곡식을 받아들일 때에 정해진 액수보다 더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뱃사람들이 이것을 핑계로 백성들에게서 지나치게 징수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주교사를 설치한 뒤에, 배가 소속되어 있는 해당 관사에 모두 더 받아들이던 만큼의 경비에 대해 대용 물품을 책정하여 지급해 주고, 뱃사람들이 저지르는 폐단에 대해서는 해당 고을에 맡겨 스스로 결단하여 엄하게 다스리게 하였다. 그렇게 하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관청이나 백성들이나 양쪽이 모두 편리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의 어사의 계문에, 주교사 뱃사람들의 작폐에 대하여 논열한 것이 있었다. 이보다 놀라운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묵은 폐단을 한꺼번에 제거하고자 하면서 어찌 별도의 폐단이 다시 생기는 것을 내버려둘 수가 있겠는가. 각 고을의 수령들이 주교사라고 하는 세 글자에 겁을 먹고 즉시 스스로 결단하여 징계해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뱃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이 뒤로는 한 되나 한 홉의 쌀이나 콩이라도 만약 지나치게 징수한 일이 있어서 어사의 논계에 거론되면 뱃사람은 단단히 묶어다가 거행 조건대로 시행하고, 금지하지 못한 해당 수령도 엄하게 다스릴 것이며, 또 아전들의 농간을 살피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적용 법률을 두 배로 엄하게 하도록 하라. 이러한 거행 조건을 암행 어사가 가지고 가는 절목과 금부의 수교에 첨가해 넣도록 하라.
호서에도 곡식을 나르는 배가 두 번이나 운행을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고생을 한다고 한다. 뱃사람들이 기한을 어기거나 지나치게 징수하는 나쁜 습속을 또한 금단하되 한결같이 호남의 관례대로 하고, 사목 및 수교에 함께 첨가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
이서구(李書九)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5월 8일 을축
강학청(講學廳)이 아뢰기를,
"세자가 《논어(論語)》를 이제 모두 강론을 마쳤습니다. 이어 강론할 책자는 의논하여 정해주면 진강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독서의 차례로 보면 《맹자(孟子)》를 진강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대학》과 《논어》를 먼저 거듭 강론한 뒤에 《맹자》와 《중용》을 강론하는 것이 좋겠다. 외방에 있는 두 유신(儒臣)에게도 이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예조 참의 이정덕(李鼎德)을 체차하고 윤광보(尹光普)로 대신 제수하였다.
5월 9일 병인
차대하였다. 충청도 암행 어사 신현(申絢)이 복명하였다.
서계를 올려, 평택 현감(平澤縣監) 유상문(柳相文), 아산 현감(牙山縣監) 홍장보(洪章輔), 태안 현감(泰安縣監) 이종해(李宗海), 남포 현감(藍浦縣監) 이황(李潢), 공주 판관(公州判官) 김기응(金箕應), 중군(中軍) 유진엽(柳鎭燁) 등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정상을 논하여 차등있게 논죄하였다.
신현이 또 아뢰기를,
"충청도 수군 절도사 구명원(具明遠)은 송금(松禁)이 자못 해이하였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구명원을 무겁게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판부사(判府事) 심환지(沈煥之)의 말을 들으니, 안면도(安眠島)의 온 백성들이 수영(水營)의 침학에 고생을 하고 있으며 소속된 각 섬들까지 모두 그 피해를 입고 있는데 빙자하는 단서는 진상에 쓸 생전복[生鰒]이 가장 심하다고 하였다. 몇년 전부터 전복을 진상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면제하고 줄여주었는데 감히 이 조목에 대해 농간을 부린단 말인가. 진상용 전복을 퇴짜놓는 일로 지난해에는 섬 백성이 비속(裨屬)에게 곤장을 맞고 죽은 자까지 있다고 하였다. 그 곡절에 대해서 묘당이 해당 수사에게 엄하게 공문을 보내 추문하고 사실대로 비변사에 보고하게 한 뒤에 초기(草記)를 올렸다. 올해에는 해당 수사는 전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들은 한 개나 반 개라도 봉진하지 말라.
이러한데도 이른바 영속(營屬)이라고 하는 자들이 각 섬 근처에 출몰하면서 예전대로 토색질을 하다가 장차 내려갈 암행 어사에게 적발된다면, 단속하지 못한 해당 수사는 의금부로 잡아다가 조율하여 금고(禁錮)의 벌을 내릴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감사와 수사에게 엄하게 신칙하라.
현임 수사의 죄는 예사롭게 파직하고 잡아다가 논죄해 처리해서는 안되겠다. 그로 하여금 속죄할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현이 또 별단을 올리기를,
"1. 흉년에 환곡(還穀)을 연기해 주는 것은 참으로 조정에서 은혜를 베푸는 일이지만, 그 실상을 따져보면, 눈앞의 혜택은 매우 적고 뒷날의 폐단은 매우 큽니다.
대개 곡식이 흉년이 들면 어쩔 수 없이 우선 납부할 날짜를 연기하여 다음해에 곡식이 여물기를 기다리는데, 간사하고 교활한 서리(胥吏)들이 이것을 기회로 농간을 부립니다.
그들은 대부분 식록을 받아먹지 않는 자들로서 항상 백성들의 집에서 꾸어서 먹는데, 그 때문에 분등(分等)하고 연기할 때를 당하면 자기들이 꾸어먹은 집을 부자를 가난한 집으로 만들어서 등급을 낮추거나 올리거나 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관속들에게는 많이 돌아가고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적습니다. 다음해에 조금 풍년이 들어 옛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는 새 문서와 옛 문서를 변조하고 분수(分數)의 많고 적음을 뒤섞어서, 백성들은 모두 바치더라도 서리들은 태연히 그대로 있습니다. 해마다 명목을 바꾸어가며 계속 징수해 내는데도 관아에서는 다 살필 길이 없고 백성들은 다 알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교활하게 한없이 토색질을 하여 백성들에게 끝없는 폐단을 끼치는 것으로는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항상 말하기를, ‘차라리 1분이 탕감되는 것이 낫지 3분을 연기해 주는 것은 원치 않는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매우 억울해 하는 실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월이 오래 흐르다 보면 마침내 가장 오래된 조목은 절로 탕감되고야 마는 것이라면, 쓸모없는 빈 장부를 남겨두어 아전들의 간사함을 자라나게 하고 백성들에게 폐단이 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곧바로 탕감하여 백성들에게서 손해를 보는 것이 낫습니다. 이 뒤로는 흉년에 받아내기가 아주 어려운 자들에 대해서는 비록 대략 탕감해주기는 하더라도 다시는 연기시키지 않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묘당과 대각에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복주(覆奏)하기를,
"연기해 주는 일의 폐단은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예전에도, 차라리 탕감해주는 것이 낫지 연기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대개 연기해 주는 것의 폐단을 딱하게 여긴 것이지 탕감으로써 연기해 주는 것을 대신하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한번 법으로 정해져 버리면 나중에 곤란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두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신현이 또 화성(華城)의 여섯 조항의 타당성에 대해서 논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복주하기를,
"다섯 개의 소속 고을의 친군위(親軍衛)의 장락대(長樂隊)는 혹 즐거이 부임하면서 영광으로 여기는 자도 있고 혹 구습에 젖어 신설 부대로 가기를 꺼리는 자도 있는데, 백성들의 마음이 이러한 것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정한 제도대로 한결같이 따라서 차례대로 번을 서게 하면 결국에는 편하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굳이 다른 의논을 받아들일 것은 없습니다. 인원수를 줄이고 비용을 줄인 은혜로운 뜻을 먼저 선포하고 번거롭게 하지도 않고 변경시키지도 않는 실제적인 조치에 대해 다시 진념해야 합니다. 해당 고을의 수령 가데 과천 현감(果川縣監) 김강(金鋼)은 잡아다가 처분하고, 안산 현감(安山縣監) 김유(金鍒), 시흥 현령(始興縣令) 윤수익(尹守翼)은 무겁게 추고하소서.
환곡 받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뇌물을 바치고 면하기를 도모하니 이것은 필시 면임(面任) 무리들이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서로 바꾸어 놓고 양쪽을 다 토색질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다른 도나 다른 읍에서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이곳은 임금의 선대 묘소가 있는 고을입니다. 그 폐단 되는 바가 과연 어사의 논계와 같다면 참으로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외탕고에서 획정하여 받아들이는 대동미가 1섬이 30말이라는 설은, 어사가 아뢴 바는 곡(斛)으로 담아 받아들이는 양이 바로 30말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방아찧고 운송하는 비용까지 합쳐서 거의 이 숫자에 이른다는 것인데, 혹 가까울 듯도 합니다. 지금 변통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한결같이 다른 대동미의 예대로 대동창에서 받아올려 외탕고로 이송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아서 시행하소서.
영화동(迎華垌)에 물길을 내는 일이 고르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에 방둑을 설치한 것은 실로 백성들을 위하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공전(公田)이든 사전(私田)이든 한결같이 균등하게 물을 대라고 거듭 엄하게 신칙하였습니다. 이토록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걱정스러운 때에는 공전과 사전을 가릴 것없이 씨를 붙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우선 감사에게 엄하게 신칙해야 합니다. 서쪽 방둑의 새로 쌓는 곳에 침범해 들어온 백성들의 밭은 복결을 풀어줄[解卜] 때에 모두가 합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더욱 잘 조사하게 해서 적절히 조처해야 합니다.
가천역(加川驛)을 진위현(振威縣)에 옮겨 붙이는 일은, 참으로 걸리는 문제가 많으니 지금은 우선 그냥 두도록 하소서.
교졸(校卒)과 이민(吏民)들의 습속을 단속하는 일은, 감사와 지방관들이 검소한 기풍으로 솔선하고 소박한 풍속으로 인도하여 세입과 세출이 제대로 된 공을 이룬 뒤에야 비로소 직분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근본을 따져보자면, 이처럼 단속을 잘 하지 못하여 어사의 장계에 거론되기까지 한 경우에는 해당 감사는 우선 무겁게 추고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따랐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과천(果川)과 시흥(始興)은 혹은 정밀하고 분명하기도 하고 혹은 상세하고 신중하기도 하여, 모두 안산(安山)의 조용함과는 비록 숙달됨과 생소함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이러한 수령들도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모두 우선은 논핵하지 말아서 장래에 공효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외탕고에서 쌀을 지나치게 받아들이는 폐단은, 이와 같이 개정한 뒤에 과연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는지, 조세를 받아들일 때와 환자 곡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전에 비해서 어떠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마땅히 각각 어사를 보내야 하겠다.
서쪽 방둑을 새로 쌓는 일은, 비록 조정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하나하나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반드시 곳곳마다 아랫 백성들에게 이익이되는 쪽으로 힘쓰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화성(華城)의 여러가지 폐단에 대해서 과감히 말하여 매우 근실하니, 그는 어사로서의 체모를 깊이 터득하였다. 이 사람은 초계 문신으로 있을 때부터 나의 본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어사의 임무를 받들고 외방에 나가서 먼저 화성의 폐막부터 숨김없이 모두 논하였으니, 어찌 매우 가상히 여길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의리를 분명하게 알아서 영읍(營邑)의 폐단을 말하려는 자들이 반드시 화성을 말하게 된다면, 화성의 백성들에게 날마다 즐거움과 이로움이 있게 되어 장차 넉넉히 먹고 즐겁게 사는 풍속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어사에게 우선 상을 내려 뒷사람을 권장해야 하겠으니, 어사 신현에게 안에서 상현궁 한 장을 내려 지급하도록 하라."
상이 경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화성과 관계되는 일에는 참으로 내가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성곽과 궁실을 보기에 웅장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대개 의도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 자가 혹 지나치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절목에서 조치를 하는 여러가지도 또한 어찌 모두가 아주 잘 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참으로 소견이 있다면 본대로 다 말하는 것을 탓할 게 뭐가 있겠는가.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반드시 즐겨 듣고 빈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
임장원(任長源)과 같은 자도 모두 너그럽게 받아들여 용서한 뒤에야 내가 석년(昔年)029) 에 아름다움을 돌리는 일이나 경들이 내게 아름다움을 돌리는 일이 모두가 여기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문호를 활짝 열어 사람마다 말을 다하게 할 수 있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어사의 계문에 화성의 폐단에 대해서 하나하나 숨김없이 거론한 것은 매우 가상한 일이다.
장영(壯營)을 설치한 일은 옛 제도를 본받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한 이것이 근래에는 처음으로 보는 일이니,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였다. 상호군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이러한 일들을 만약 참으로 공평한 마음으로 이야기한다면 신들이 어찌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만, 매양 평탄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임장원의 상소는 그 속뜻이 어찌 일을 가지고 일을 논하는 것에 그치는 것일 따름이겠습니까. 어사의 논계는 들은 대로 폐단을 진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에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령 그 말이 일을 가지고 일을 논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더라도 또한 해로울게 뭐가 있겠는가. 예전에 궁방(宮房)이 폐단이 될 당시에 바른말할 책임을 맡은 신하들이 궁방에 대해 언급하기를 매양 어렵게 여겼었다. 오늘날의 장영이 바로 이 일과 같다. 고 참판 이광덕(李匡德)이 일찍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에 건지산(乾止山)을 떼어주는 문제로 계문하여 쟁집한 적이 있었는데, 건지산은 도신이 수호하는 지역과 관계가 있었다. 오늘날의 장영이야 또한 어찌 감히 이러한 곳까지 의논이 미칠 수가 있겠는가. 궁방이 지녔던 권세를 대개 상상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는데, 정민시가 아뢰기를,
"이전에 산골 고을의 폐단은 오로지 궁방이 지역을 떼어받는 일에 있었는데, 어느 곳이든 가릴 것 없이 신청을 하면 반드시 떼어받았습니다. 그런데 장영은 한번 둔전을 설치하려고 했다가는 곧바로 또 내놓아야 하니, 어찌 궁방과 견주어 논할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사가 논계한 별단 가운데의 여섯 조항에 대해서는, 유사 당상이 한 본을 해당 유수에게 베껴 보내고 그대로 속히 올라오게 한 다음, 대신들이 본사에 모여 서로 의논해서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나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오직 수령들이니, 수령이란 직분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다. 당나라 때에도 전각 기둥에 이름을 써붙이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숙묘조에는 대주첩(代柱帖)이 있었고, 선대 임금 때에는 다섯 번 고과에서 다섯 번 상등을 맞았거나 고을을 잘 진휼하여 어사의 계문에서 아주 칭찬을 받은 자에 대해서는 관안(官案)에 올리고 주를 달아 적어넣어 뒷날 참고로 삼을 수 있게 하였었다. 근래에는 이러한 전례가 오래도록 폐지된 채 시행되지 않고 있다. 이조에서 이전의 전례를 상고해서 옛 법규를 회복하도록 하라."
상이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전 이조 판서의 상소는 예법에 근거가 없는 것이므로 본래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일이 더없이 중대한 경우에는 모두 마음에 깊이 새겨 감히 조금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 것은 오직 작은 혐의라도 분명하게 분별하려는 생각에서이다.
기유년에 면복(緬服)을 입었던 한 가지 일은 내가 마땅히 별도로 이야기를 하겠다.
지극히 간절한 마음으로 권도(權道)의 예를 행한 것이었는데, 몇몇 유생들이 다른 의논을 제기하기까지 하였었다. 나는, 그 당시에 옳은 일로 생각하여 받들어 따랐던 자들도 또한 옳으며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러니저러니 말하였던 자들도 또한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지극한 마음이 이미 이러하였기 때문에, 나에게 적용한 기준을 남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의리로 미루어 볼 때, 내가 하고자 한 바를 남에게는 못하게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 비지(批旨)를 내릴 때에 굳게 거절을 하지 않았고 그날 의논을 물어본 뒤에 또 즉시 받아들였던 이유이다.
그러나 예전에 추복(追服)을 입으며 묘를 지키겠다는 사람에 대해서 조정에서 그 뜻을 막지 않았던 때도 있었으나, 또한 어찌 이것을 인하여 사람마다 추복을 입고 사람마다 묘를 지키게 할 수야 있겠는가. 만약 이뒤로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자가 모두 전 이조 판서의 일을 끌어다가 전례를 삼는다면 어찌 모두 하나하나 다 들어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중신의 부친인 고 정승도 또한 면복을 입는 기간 중에 행공을 했었으니, 중신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이른바 ‘우리 선친이 일찍이 시행했던 일’이 되는 것이다. 고 정승의 효성과 우애로도 오히려 이와 같았고 보면 중신의 이 상소가 더욱이 어떠한 혐의도 없을 수가 정말 있겠는가. 설령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자 하더라도 형편에 맞추어 시행할 만한 방도가 있기 마련일 것인데 어찌하여 글을 지어서 반드시 이와 같이 상소를 올리기까지 한단 말인가."
하였는데,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예전에 효성으로 일컬어지던 사람과 산림 처사라고 자처하던 사람도 또한 이것으로 혐의를 삼은 적이 없었고 보면, 중신이 상소를 올린 것은 지나치다고 할 만합니다. 이 뒤로 어찌 이것을 끌어다가 전례를 삼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이시수가 아뢰기를,
"신은 갑자기 그 상소를 보고 처음에는 지나치다고 여기지는 않았는데,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서야 이에 고 정승도 일찍이 행공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중신의 상소는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조 판서는 체모가 중대한데 이미 이 일로 상소를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허락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만, 결코 이 일로 전례를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경연을 마치고 물러가거든 경들은 이러한 경연의 하교를 중신에게 상세히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김이재(金履載)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조 판서 김재찬(金載瓚)이, 직무를 벗고 면복 제도를 마칠 수 있게 해 달라고 상소를 올려 청하자, 상께서 대신들에게 물어보시고 그들의 아룀을 인하여 김재찬의 요청을 윤허하셨습니다.
대개 면복을 입기 위하여 직무를 벗는 것은 예법에 그런 규정이 없습니다. 예법에 없는 일을 굳이 하는 것은 예법에 지나치는 것입니다.
삼가 《곡량전(穀梁傳)》을 살펴 보건대, ‘개장(改葬)을 했을 때의 예법은 석달 시마복을 입는다. 제일 낮은 복을 입어서 멀리 부모를 추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면복을 가벼운 쪽을 따라 입는 것은 참으로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한(漢)나라의 법에는 장리(長吏)는 상중에 있는 자가 아니면 벼슬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진(晉)나라의 유량(庾亮)과 하충(何充)이 개장을 하고 삼년 복을 입자 여러 유자들이 비난을 하였으며, 한나라의 초현(譙玄)과 위표(韋彪)가 기년복을 입는 1년 동안 벼슬을 떠나 있었는데 후세에 그것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면 면복을 입는 기간에 벼슬을 떠나는 것은 혹 예법에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례는 격식보다는 차라리 슬픔을 다하고자 해야 하고 예법은 후한 쪽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중신의 간절한 요청은 참으로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이에 전하께서 윤허하셨으니, 이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지금부터 직무를 보면서 면복을 입고 있는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중신의 전례를 빌어다가 자신들도 한번 직무를 벗고 마음 후련하게 복을 입으려고 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조정에서 한결같이 허락하여 직무를 면하게 해 주겠습니까. 이는 한 사람에 대해서 권도로 시행한 일을 인하여 모든 사람이 누구나 행할 일상적인 법식이 되는 것이니, 결국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반드시 생기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신에게 하문하시어 분명하게 그 법식을 만드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대신에게 묻는 본래의 뜻은 경연에서 말하였고, 대신들이 올린 거행 조건 가운데 직무를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하자는 뜻은 그대의 상소와 같은 취지이다. 어찌 별도로 법식을 만들자고 말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조윤대(曺允大)가 도내에 비가 내린 일을 치계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 빈대(賓對)는 바로 경기(京畿) 안 한강 남쪽의 각 고을에 특례로 기우제를 지내는 일의 타당성 여부를 묻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의논이 아직 일치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루 이틀 뒤에 다시 물어보려고 한다. 아침에 보니 비가 내릴 듯한 구름이 잔뜩 끼었기에 비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는데 저녁에는 또 서늘한 바람이 불어 구름을 흩어버렸다. 안타까움이 하루 하루 더해 간다.
한강 남쪽의 각 고을 가운데에 28일과 3일에 고루 적시지 못한 곳은 경기 고을인데, 무릇 일이란 실지를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어찌 굳이 일상적인 전례만을 고집할 수 있겠는가. 관찰사는 우선은 시행할 것까지는 없겠고 먼저 가뭄이 심해 애타는 몇몇 고을로 하여금 정성껏 기우제를 지내게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경은, 한강 남쪽의 여러 수령들에게 두루 물어 거행 조건을 장계로 아뢸 일로 경기 관찰사에게 하유하라.
지금 황해도에서 올라온 장계를 보니, 3일에 내린 비로 도내의 23개 고을 가운데에 밭갈이 정도를 할 수 있는 고을이 9개이고 김매기를 할 수 있는 고을이 12개이고 먼지나 적시고 만 고을이 2개라고 하였다. 경기의 한강 남쪽 고을들에 비교한다면 어찌 참으로 천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비가 내렸다고 해서 마음을 느슨하게 갖지 말고 각기 수령들로 하여금 환자 곡식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권장하는 일을 착실하게 하고 농사일에 힘을 다함으로써 가을에 추수를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호서(湖西)의 기민 구제는 1월부터 실시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진휼을 끝냈다.
【공적으로 진휼한 곳은 홍주(洪州), 청주(淸州), 은진(恩津), 석성(石城), 부여(扶餘), 한산(韓山), 연기(燕岐), 태안(泰安), 서천(舒川), 임천(林川), 회덕(懷德), 서산(瑞山), 정산(定山), 직산(稷山), 아산(牙山), 평택(平澤), 진잠(鎭岑), 보령(保寧), 결성(結城), 당진(唐津), 전의(全義), 천안(天安), 덕산(德山), 해미(海美) 등의 읍(邑), 수군 절도사 영(營), 성환(成歡), 율봉(栗峯) 등의 역참, 평신(平薪), 안흥(安興), 소근(所斤), 마량(馬梁), 서천포(舒川浦) 등의 진(鎭)이었고, 사적으로 진휼한 곳은 공주(公州), 이성(尼城), 옥천(沃川), 면천(沔川), 문의(文義), 연산(連山), 영동(永同), 황간(黃澗), 대흥(大興), 홍산(鴻山), 청안(淸安), 보은(報恩) 등의 읍, 병마 절도사 영, 이인(利仁) 역참이었다. 긴급 구제한 곳은 괴산(槐山), 진천(鎭川), 청양(靑陽), 남포(藍浦), 비인(庇仁), 회인(懷仁), 청산(靑山), 제천(堤川) 등의 읍과 금정(金井) 역참이었다. 총계하면, 굶주린 백성은 50만 9천 7백 22명이었고 구제하는 데에 든 곡식은 4만 5천 8백 10섬이었다.】 이조가 아뢰기를,
"1천 섬 이상을 자원하여 바친 안치택(安致宅) 등 세 사람은 실직(實職)을 제수해야 되겠고 1백 섬 이상을 바친 박성권(朴聖權) 등 세 사람은 가자첩을 만들어 지급해야 하겠습니다. 3백 섬을 바친 청주(淸州)의 김한걸(金漢杰)은 사인(士人)이니 낭관 품계의 직첩을 만들어 지급해야 되겠습니다."
하였는데, 따랐다. 전교하기를,
"실직에 제수할 세 사람은 알맞은 벼슬자리를 만들어서 등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0일 정묘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황단(皇壇)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였다. 명나라 사람들의 자손 및 충량(忠良) 자손들을 영화당(暎花堂)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이어서 차대를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들이 서둘러 들어오고 있는데, 전교하기를,
"원임 대신이 빈대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일이고 또 연전에 전교를 하기까지 한 일이다. 그렇다면 아무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이 일을 소홀히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른 아침부터 수고롭게 거둥을 하여 정전에 나와 불러 접견을 하는 것이니, 원임 대신이 이미 궐중에 들어와 있다면 경연에 나와 문안을 하는 것이 명분으로나 의리로나 마땅한 일이다. 더구나 전후로 하교를 하기까지 한 일인데, 잊은 듯이 태연하게 있으면서 준행하지를 않으니, 일의 체모가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는가. 그리고 원임 대신도 비국의 도제거(都提擧)를 겸하고 있으니, 또한 마땅히 빈대에 따라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설령 빈대에서 일을 품의하는 데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면 문안을 올린 뒤에 그대로 먼저 물러가기를 청해도 될 일이다.
함께 입시하여 문안을 올려야 하는 일을 행하지 않은 것은, 비록 사소한 일인 것같기는 하나 참으로 일의 체면에 관계되는 것이다. 어찌 일마다 타이르고 일마다 깨우쳐 줄 수가 있겠는가. 일이 매우 놀랍다.
이러한 빈대는 하고 싶지가 않다. 대신 이하는 즉시 물러 가도록 하라. 이 전교는 또한 심(沈) 판부사에게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 우의정 이시수, 판중추부사 심환지가 대죄하였다. 이병모 등에게 하유하기를,
"예양(禮讓)을 앞세우는 것은 일반 신료들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데 더구나 경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원임 대신이 비록 사양을 하더라도 경들이 전례를 근거로 들어 함께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연에서 깨우쳐 준 것이다. 더구나 이런 전례에 대해서 일찍이 전교한 적이 있었지 않은가. 대죄하지 말라."
하고, 심환지에게 하유하기를,
"원임이라는 혐의는 작은 것이고 문안을 해야 하는 의리는 중대한 것이다. 중추부의 전례가 경으로 인하여 폐지되게 된 것은 경에게 바라던 바가 전혀 아니다. 더구나 옛 전례를 회복시키라고 신칙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으니, 곧바로 다시 내던져버린 경들의 소행은 매우 옳지 못하다. 그러나 대죄하는 일은 체면이 중대하니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지난해 이후로 다시 심리해야 할 옥사의 많은 죄인들에 대해서 완결짓지 않고 있다가, 신칙을 한 뒤에 근래에야 비로소 날마다 모여 추고하고 있는데, 저와 같이 경황없이 일을 처리하다 보면 어느 겨를에 중요한 죄수들에 대해서 깊이 유념해야 하는 의리에 생각이 미칠 수가 있겠는가.
그밖에도 적어서 아뢰고 조사해 아뢴 각도의 계문에 대해 아직 회계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든지 서울의 죄수들을 한 달에 여섯 번을 추문해야 하는데 내버려 두고 하지 않고 있었던 것 등을 비록 재계를 하는 날 이전에 일제히 거행을 하고자 하더라도 한갓 일을 부실하게 처리하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다.
대개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 대해서 닷새마다 적어서 아뢰는 일은, 하루 전에 대신들이 자세히 살피고 서명을 하기까지 하는 옛 제도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어찌 한 마디도 살펴서 아뢰는 말이 없다가, 가뭄을 걱정하며 들어앉아 재계를 하는 때에 수응을 하게 한단 말인가. 이것은 일반 관원들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지난해와 올해의 하위 대신 및 독상(獨相) 대신을 위한 일인데, 어찌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노고와 안일이 뒤바뀐 것은 우선 접어두더라도, 이번에 특별히 하교하여 신칙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에 옥사가 판결날지 알 수가 없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5월 12일 기사
전교하였다.
"공신의 맏아들이 자급이 2품에 이르면 으레 대물림을 하여 봉군(封君)을 하는데, 부친이 살아 있는 경우에는 나중에 때가 되면 소급하여 봉군을 한다.
근래에 들으니, 좌승지의 집안에 연원군(延原君)을 봉군한 전례가 있고, 이것을 인하여 또 들으니, 고 판서 신방(申昉)의 집안에도 근거할 만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찾아볼 것도 없이 중신 집안의 능남(綾南)의 일이 분명한 증거가 된다. 고 판서 구상(具庠)의 집에 대물림하여 봉군하는 일을 오늘 정사에서 하비하여 제면(題面)030) 하기 전에 미치도록 하라.
이 뒤로 이러한 경우에는 모두 이 예를 사용하되, 대신이 품의한 뒤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비한 내용은 훈부(勳府)의 등록(謄錄)에 싣도록 하라."
판중추부사 심환지가 차자를 올려 견책을 청하니, 답하기를,
"원임 대신이 돌아가면서 차대에 입시하는 것은 수교(受敎)로 정해진 법식이 문헌에 분명하게 실려 있다. 만약 임금이 거둥하여 정전에 나와 앉아 있을 때를 당하여 몸이 대궐에 들어와 있다면 경연에 나와 문안을 올리는 것은 일찍이 원임이라고 해서 시임 대신들과 다르게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다시 그 법을 밝혀 시행하라는 하유를 경연에서 누차 내리지 않았던가. 경들이 준수하지 못한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여러 사형수에 대해서 검사만 하고 판결을 마무리하지 못하여 해가 넘도록 옥에 적체되도록 한 것은 근래에 처음 듣는 일이다. 닷새마다 하는 보고 때에 신칙하지 못한 것도 또한 어찌 경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일전에 경연에서 하교한 것은 책려하자는 뜻에서였지 공경하는 예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차자를 올려 견책을 청하니, 답하기를,
"판부사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대략 말하였다. 경들의 일이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이와 같다면 여러 관료들이 수교를 어길 때에 어떻게 바룰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서울과 외방의 옥안(獄案)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된 것은 경들이 무관심하게 내버려둔 탓에 그렇게 된 것이다. 7일 밤낮을 계속 수고스럽게 일을 보고있으나, 이토록 가뭄을 걱정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몸이 고생스럽고 마음이 고생스러운 것은 나는 오히려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비가 알맞게 내리고 볕이 알맞게 나는 것은, 또한 위 아래가 자기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느냐의 여부에 관계가 전혀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따져보건대, 경들의 마음을 어떻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참으로 경들을 위하여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경은 안심하고 정사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가 차자를 올려 견책을 청하니, 답하기를,
"좌상에게 내린 비답에 말하였다."
하였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이 도내의 농사 형편을 치계하였다. 전교하기를,
"백성들이 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시급한 고을 18개 가운데에, 어느 곳을 먼저 하고 어느 곳을 나중에 할 것인가를 가지고 망설이지 말고, 시급히 비가 내려야 할 곳부터 기우제를 지내게 하고 잇달아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비록 재계하는 때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의 일에 관계되는, 비를 빈다든지 비가 내렸다든지 하는 등의 농사 형편에 대한 문서는 출납할 일을 잘 알아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울과 외방의 옥안(獄案) 28통을 판결해 내렸다.
5월 13일 경오
상이 재계에 들어갔으므로 정사를 보지 않았다.
5월 16일 계유
전교하였다.
"비올 기미가 아득하니 기우제 지내는 일을 어찌 하지(夏至)까지 기다리겠는가. 삼각산(三角山), 한강(漢江), 목멱산(木覓山)에는 가까이 모시는 신하가 기우제 지낼 향을 받아가도록 하라."
5월 17일 갑술
비가 내렸다. 기우제 지내는 일을 우선 비오는 형세를 살펴보고 거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5월 20일 정축
삼각산, 목멱산, 한강에 기우제를 지냈다.
5월 22일 기묘
차대하였다. 전교하기를,
"내가 참으로 덕이 부족하여 이런 가뭄을 당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해, 달, 별이 온전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조화롭고 산은 벌거숭이가 되지 않고 못은 물이 마르지 않는 것을 가지고 만물이 제 자리를 잡고 잘 생육되는 공효를 삼았다. 만물이 자리를 잡고 생육되게 하는 일은 바로 나의 책임이다.
신해년 이후로 내린 비의 많고 적음을 반드시 기록해 두었는데 1년치를 통계해 보았더니, 신해년에는 8척 5촌 9푼이었고 임자년에는 7척 1촌 9푼이었고 계축년에는 4척 4촌 9푼이었고 갑인년에는 5척 8촌이었고 을묘년에는 4척 2촌 2푼이었고 병진년에는 6척 8촌 5푼이었고 정사년에는 4척 5촌 6푼이었고 무오년에는 5척 5촌 6푼이었다. 지난해와 올해의 이번 달을 가지고 계산해 보면, 지난해 이달에는 측우기의 물깊이가 거의 1척 남짓이나 되었는데 올해 이 달에는 내린 비가 겨우 2촌이었다. 가을 추수가 어떨지는 미리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백성들의 실정은 참으로 매우 딱하다.
오늘의 접견은 오로지 도움을 구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모르는 가운데 혹 신원되지 못한 억울한 일이 있는 것인가, 개혁되지 못한 잘못된 정사가 있는 것인가?
대체로 지난해에는 호서의 가뭄이 가장 심했는데, 올해에는 호서에는 거의 2촌이 넘게 비가 내렸으며 영남과 호남도 경기 고을보다는 낫다."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무릇 제사를 지내어 치성을 올리는 일은 시일을 끌면서 하는 것보다는 신속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조심스럽고 경건한 마음을 오래도록 해이해지지 않게 간직하기란 참으로 사람마다 그렇게 하기를 바라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번 외방 고을의 기우제는 너무 자주 지내는 것같습니다. 점점 처음만 못하게 될 염려가 있을 수도 있으니, 이 또한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의 가뭄 기운도 또한 이번의 돌림 기운과 같아서 모두가 사악한 기운이 모인 것인데, 혹심한 가뭄이 또한 서풍이 그치지 않고 불어대는 데에 기인하니, 이처럼 서쪽에서 오는 것이 더욱 이상하다.
강이천(姜彛天)과 김려(金鑢) 같은 자들은 일종의 풍습에 젖은 자들로서, 자못 아첨을 잘하는 자들은 이런 투식에서 벗어나는 자가 거의 없고 조금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도 또한 점점 물들어감을 면하지 못한다. 다시 한 층을 더 들어가면 바로 불순한 학문이다.
대개 오늘날에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자는 그 문장에서부터 글씨에서부터 모두 이러한 폐습으로 흘러들어가고, 심지어는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당장 눈앞에 별일이 없는 것만 다행으로 여기고 학문의 기초가 될 실제적인 발판을 전혀 갖추지 않고 있다. 갓을 쓰고 옥을 찬 사람들 가운데에도 더러 일종의 바르지 못한 기풍을 가진 자들이 있으니, 이와 같은데 어찌 환하고 명랑한 기상이 있겠는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한 것이 바로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센 기운인데, 오늘날은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모두가 불순한 기운이다. 이와 같은데 어찌 가뭄을 불러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말로써 깨끗이 물리치는 일은 맹자가 아니고서는 참으로 쉽게 의논하기가 어렵지만, 또한 어찌 불순한 기운을 내버려 두고서 깨끗이 쓸어낼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개 이치는 하나뿐이고 마음도 하나일 따름이다. 여기에 온 마음을 기울이면 반드시 저기에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바른 한 쪽을 중시하게 되면 사악한 한 쪽을 걱정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한 집안 사람끼리 서로 권면하고 경계해서, 올바른 학문인지 불순한 학문인지 주인이 되는 학문인지 빈객이 되는 학문인지를 엄밀하게 살피고,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는 미세한 차이를 신중하게 가려서, 독실하고 돈후한 풍속을 만회하되, 육예(六藝)의 과조에 들어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을 일체 물리쳐 버려야 한다. 그런 뒤에야 오늘날의 가뭄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에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마땅히 근래의 풍속에 이른바 긴요치도 않은 웃기는 일이라는 것들부터 먼저 힘껏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대개 근래의 풍속을 가지고 보면, 경술(經術)이라는 두 글자를 수치로 여기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드는 일도 또한 어찌 괴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수치로 여기는 바는 바로 옛 사람들이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고 오늘날 괴롭게 여기는 바는 바로 옛 사람들은 괴롭게 여기지 않았던 바이다. 만약 오늘날 좋아하는 것을 뒤집지 않고 오늘날의 풍속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해볼 만한 방도가 무엇이 있겠는가.
근래에 매양 차대를 한 번 하려고 하면, 번번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별반 큰 계책은 내지 못하더라도 간혹 한두 가지라도 마음에 맞는 것이 있으면 그래도 마음에 흡족한 생각이 들겠지만, 만약 한갓 한바탕 잡다한 분란만 있고 볼 만한 것이 전혀 없다면 도리어 차대를 행한 것이 후회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비국의 유사 당상 이서구(李書九)에게 전교하기를,
"호남의 전결(田結)에 대한 부역을 이미 개정했다고 하던가?"
하니, 이서구가 아뢰기를,
"관찰사가 몇몇 고을의 개정한 초안을 책으로 엮어 올려 보냈는데, 그 가운데 4, 5개 고을은 수입과 지출을 비교하여 보건대 끝내 서로 맞지가 않았습니다. 전결에서 거두어들인 것이 더한 것만 있고 덜어준 것은 없었습니다. 환자 곡식을 받아들일 때에는 가승(加升)이라는 명목으로 더 받아들이기까지 하여 이것으로 민고(民庫)에 보충해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폐단은 결코 답습해서는 안 되겠기에 다시 개정하라는 뜻으로 문서를 주고받았습니다.
관찰사가 지금 막 교체되었으므로 올라올 때에 각 고을의 개정한 문서 장부를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으니 그가 올라오면 각 고을마다 하나하나 상세히 따져 계산해 보려고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고 정승 조현명(趙顯命)이 전라 감사로 있다가 교체되어 올라온 뒤에 호역(戶役)에 대한 절목(節目)을 만들어 낸 적이 있었다. 선왕조 중년 이전에는 고 정승과 같은 사람이 이러한 절목을 이미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그 당시에 옛 관부(官夫)와 쇄마(刷馬)에 대한 일과 함께 민고의 호렴(戶斂)을 엄히 금지하였었다. 지금의 이른바 개정한 절목이라고 하는 것은 필시 모두가 신을 신은 채 가려운 발을 긁는 격이다. 오늘날의 기강을 가지고 어떻게 일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이번에 재계를 할 때에 선왕조의 문적 가운데 백성들의 일과 관련된 것들을 가져다 보았다. 이와 같은 절목에 해당하는 일들을 오늘날 사람들은 필시 자질구레한 일이라서 시행할 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대체로 부역이 지나치게 괴롭기가 오늘날이 옛날보다 배는 더한데 백성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잘도 바친다. 오늘날의 민심이 어찌 옛날보다 더 착하겠는가. 더구나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절목을 마련할 때에 잡역(雜役)에 대한 한 조목에 대해서는 위 아래가 더더욱 관심을 쏟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도리어 탐탁치 않게 여기면서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경들은 더욱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승지 홍의호(洪義浩)가 아뢰기를,
"무릇 심리한 옥안에 대해서 해조에 판하한 것은 해조의 심리 낭청으로 하여금 단초(單抄)를 주관하게 해서 《심리록(審理錄)》을 수정할 바탕을 삼게 하고, 또한 초본 두 건을 내각(內閣) 및 정원(政院)에 나누어 보내 《일성록(日省錄)》과 《일기(日記)》에 기재하도록 할 일을 법식으로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에 양산 군수(梁山郡守) 윤노동(尹魯東)의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와 경상 좌병사 이보한(李普漢)의 장계에 대한 판부(判付)의 내용으로 영남(嶺南)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물어보았습니다.
지금 경상도 전 감사 이의강(李義綱)의 보고를 보니, ‘생전복[生鰒]을 더 따거나 미리 따는 폐단을 일체 혁파하겠습니다. 전복을 딸 때에 데리고 가는 하인들 및 권농 수작자들의 숫자를 줄이고 포구를 떠나는 기간도 열흘이나 보름으로 정할 것이며, 일을 돕는 일꾼도 혁파하겠습니다. 동남쪽의 여덟 포구에 대해서는 연호(煙戶) 잡역을 줄이고, 물속에 들어가는 일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은 돌아가면서 그 비용을 담당하게 하여 폐단을 없애겠습니다. 돈의 이자를 불리는 조항 및 원래 진상하는 공물값으로 내는 쌀을 마련한 뒤에 해마다 멋대로 거두는 5백여 냥은 모두 영원히 감면하겠습니다. 기장(機張)에 넘어가 따는 일도 일체 금지하겠습니다. 합하여 봉진하는 것의 편리 여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생전복과 삶은 전복을 한꺼번에 봉진하는 것은 삭선(朔膳)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도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반쯤 말린 전복은 봄 가을로 각각 일곱 번을 바치는데, 봄에는 원래 일정한 날짜가 없어서 관문(關文)이 오면 봉진하며 가을에는 으레 9월에 첫번째 봉진을 하고 그 나머지 여섯 번은 달마다 봉진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폐단을 지금 이미 모두 혁파하였고 보면, 합하여 봉진을 하든 나누어 봉진을 하든 바닷가 백성들에게는 이로울 것도 해로울 것도 별로 없으니, 이전대로 봉진하는 것이 편리하고 합당합니다. 다만 봄에도 가을 9월에 봉진하는 예에 따라 3월 중 일정한 날짜에 봉진을 한다면 여러 폐단을 없앨 수가 있습니다. 좌수영에서 청어(靑魚)와 대구(大口)를 봉진하는데, 그것을 봉진하기 위하여 기장의 배를 가진 백성들에게서 3백 80여 냥을 해마다 거두어들입니다. 이것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지금부터는 청어를 진상하는 일은 동래(東萊)에 있는 면세조(免稅條), 어조(漁條), 어렴(漁簾)에 오로지 책임을 맡기고, 기장의 배 가진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일은 영영 혁파할 일로 엄하게 과조를 세워, 절목을 만들어 올려 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절목대로 과조를 엄하게 세우면 조정의 후덕한 의도가 바닷가에 사는 곤궁한 백성들에게까지 두루 미쳐서 그들이 고생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신칙하고 금지하는 것이 시일이 조금 오래 지나면 느슨해지기 쉬울 것이니, 이 절목 한통을 베껴서 감영, 병영, 수영과 고을의 곳곳에 두고 영구히 준행하도록 할 일을 내의원 및 해당 도의 감사, 병사, 수사에게 분부하소서.
좌수영에서 기장의 백성들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3백 80여 냥도 이미 영구히 혁파했으면 일체 엄하게 신칙하여 다시 범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합니다.
전 병사 이은복(李殷福)은 더 따고 미리 따는 것도 부족하여 때없이 사사로이 따게 하기까지 하면서 바닷가 백성들을 돌보지 않은 죄상이 지금 이미 보고되었으니, 징계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전교하기를,
"이와 같이 법식을 정한 뒤에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해당 수신에게는 3년 동안 금고시키는 벌을 시행할 것이다. 이것을 수교에 적어넣도록 하고, 또한 해당 수신으로 하여금 현판에 적어 게시하도록 하라.
반쯤 말린 전복은, 봉진하는 묶음의 숫자를 봄과 가을의 일정한 기한을 정하여 각각 두 차례로 나누어 합하여 봉진하도록 하되, 해당 달에 봉진하는 생전복, 삶은 전복과 함께 동시에 봉진하라는 뜻으로 해당 병사와 수사 및 통영에 분부하라."
하였다.
호조의 아전 이창린(李昌麟)과 김처신(金處信)이 대궐에 바칠 것이라고 칭탁하고 수리계(修理契)의 종이를 훔쳐내려고 거짓 보고를 하여 계단(啓單)을 받았다가 일이 들통났다. 옥에다 가두고 끝까지 심문하니, 김처신은 꾀를 내어 시킨 자이고 이창린은 직접 죄를 범하여 거짓으로 전한 자였다.
형조가 이창린을 정범(正犯)으로 삼아 옥안을 갖추어 계문하니, 판하하기를,
"법관이 법을 다룰 때에는 털끝만한 것도 다투며, 관청 문서에는 본래 격례가 있는 법이다. 사형죄에 대한 옥안은 법이 매우 중대하여, 글자 하나 낱말 하나를 놓을 때에도 반드시 더할 수도 없고 덜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변통할 수도 없게 해야 한다. 그런 뒤라야 범인을 승복시킬 수가 있고 옥사의 체모를 더욱 높일 수가 있는 것이다.
무릇 사형수에 대한 옥안(獄案)을 형조에서 뽑아 적어 아뢸 때에는 죄수의 이름 아래에다 죄목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쓰고 문서의 윗 부분에다 쪽지 글을 적은 누런 종이를 붙이는데, 그 법의 엄하기가 마치 죽은 사람에 대해서 죽은 원인을 조사하여 기록한 시체 검사 대장과 같다. 이것을 가지고 자복을 받고 이것을 가지고 법률을 상고하고 이것을 가지고 옥사를 완결짓고 이것을 가지고 재심을 하는 것이다. 한 글자 한 낱말의 경중과 출입에 따라서 법 적용이 달라지는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런데 지금 이 옥안에 붙인 황지(黃紙)를 보니, ‘죄인 이창린과 김처신이 전지(傳旨)를 거짓 칭탁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친 일’이라고 하였고, 원래의 옥안에 들어 있는, 호조에서 보내온 공문 및 본조에서 받은 각자의 공초와 완결지은 결론을 살펴보니, 혹은 ‘하교(下敎)라고 칭탁하였다.’ 하고 혹은 ‘허위로 전교(傳敎)를 전하였다.’ 하고 혹은 ‘전지(傳旨)를 거짓으로 전하였다.’ 하고 혹은 ‘전지를 속여서 전하였다.’라고 하였다. 위 아래가 서로 뒤바뀌고 앞뒤가 모순되어 황지에 적힌 죄명과 마디마디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비록 원래의 옥안에 적힌 말을 가지고 확정하여 법률을 적용하려고 하더라도 또한 어느 말을 따르고 어느 말을 버려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대개 전지라는 것과 전교라는 것과 하교라는 것은 체모가 각기 다르다. 벼슬을 내리거나 상을 주거나 형벌을 가하거나 사형을 시키는 일을 각 해당 관사에 내릴 때에 교서를 전하여 내보내면 승지가 대략 추려서 적어 내리고 당후 주서(堂后注書)가 자세히 적어서 접는 문서로 만들어 계하받아 내리는 것을 유음 전지(流音傳旨)라고 한다. 주서가 또 베껴 적어 인장을 찍고 승지가 벼슬 이름을 갖추어 적은 다음 해당 관사에 내려 보내는 것을 하음 전지(下音傳旨)라고 한다. 승지가 임금 앞에서 임금이 말로 하유하는 것을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승지가 반포하는 것이라든지 사알이 각 담당 승지에게 전하는 것을 담당 승지가 글로 써서 반포하는 것을 전교(傳敎)라고 한다. 경연에 나온 신하들이 직접 임금을 뵙고 들은 것을 물러나와 받들어 행하는 것을 하교(下敎)라고 한다. 또 혹 승전색이 말로 전하는 하교를 받아 내오면 여섯 승지들이 모여 앉아 글로 적어서 전하되 ‘승전색 구전 하교’라고 쓰고 적어서 조지(朝紙)에 반포하는데, 그 체모는 또한 전교와 같다.
왕의 말은 실과 같아서 그 실이 풀려 나오듯이 나오는데 그 말을 사관이 적어서 팔방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한 마디 분부나 한 마디 호령도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궐 안으로 들여오는 물품들을 호조 및 각 관사에서 가져다 쓰는 일은, 전에는 단지 중사(中使)가 전교를 듣고 분부하는 규례만 있었는데, 병신년 이후로는 표지(標紙)로 계하하는 법을 별도로 세웠으므로 각사가 표지가 없으면 거행할 수가 없고 거행한 뒤에는 또 들여온 물품 단자가 있어서 그것으로 빙증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표지를 계하하는 일 이외에 또 정원의 담당 승지로 하여금 출납을 감독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대개 안과 밖을 엄하게 구분하고 궁중과 부중을 하나로 보려는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 표지의 법식을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각 관사의 서리들과 각종 공물을 바치는 백성들까지도 이 제도를 모르는 자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하찮은 호조 서리 하나가 감히 표지도 없는 물품으로 궐내로 들여갈 것이라고 거짓 칭탁을 하였는데 해당 조에서 진짜 하교인 줄로 알았다는 것이 어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더구나 견양초주지(見樣草注紙)는 두꺼운 종이로서 바로 수리(修理)하는 데에 쓰는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10여 권을 가져다 쓴 적도 없고 또한 한 번도 도배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2백 권이나 되는 종이를 장차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이와 같이 알기 쉬운 일을 눈을 멀쩡히 뜨고 속임수에 넘어갔으니, 해조의 일은 참으로 너무나 한심스럽다.
그런데도 경의 조에서 올린 계첨에는 ‘전지를 가탁하였다.’는 것으로 두 죄수의 죄목을 삼고 있다. 종이를 궐내로 들여오는 일에 어찌 전지가 있겠는가. 주제를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설령 해조에서 보낸 공문이 처음부터 이와 같이 잘못되어 있었더라도 마땅히 다시 공문을 주고받으며 바로잡았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바로잡기는커녕, 이에 사형죄를 적용하는 옥안에다가 윗부분에는 ‘전지를 가탁하였다.’라고 해놓고는, 완결한 결론 부분에 가서는 문득, 보내온 공문의 공초에도 없는 ‘전교를 허위로 전하였다.’는 말로 경들이 스스로 고쳤다. 또 ‘전교를 허위로 전한 죄는 바로 사형에 해당합니다.’라고 하며 전례대로 결안 취초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다만 한 때의 불찰로만 논할 수 있겠는가.
이 길이 한번 열리면, 초록하여 아뢰는 죄명이라든지 죄수의 옥안에 붙이는 황지라든지 살인 사건에서 죽은 원인을 조사한 문서 등이 모두가 쓸모없는 빈말이 될 것이고, 한 형관(刑官)의 의견으로 멋대로 원래의 옥안을 뭉개버리고 수시로 바꿀 것이니, 이로부터 생길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짜[假]’라는 것과 ‘허위[僞]’라는 것과 ‘속임수[詐]’라는 것도 글자의 뜻이 다르다. ‘가짜’라고 하는 것은 진짜 문서가 있는데 그것을 빙자하여 거짓 칭탁을 하는 것을 말하고, ‘허위’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런 일이 없는데 헛되이 날조하는 것을 말하고, ‘속임수’라고 하는 것은 속에 간사한 마음을 감추고 사실이 아닌 일로 속이는 것을 말한다. ‘가짜’와 ‘속임수’는 조금 가볍고 ‘허위’는 아주 무거운 죄이다. 그런데도 말을 이리저리 바꾸며 뒤섞어 놓았으니 장차 무엇을 표준으로 삼겠는가.
규례라는 것은 조정이 규범을 지켜 유지해 가는 기준이다. 경들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전지와 전교도 분별하지 못하고 임금에게 글을 아뢰는 규례에 대해 어둡기가 그 모양인가. 하나의 옥안에 대한 잘잘못이야 그래도 하찮은 일인 것이다.
대개 그날의 일은 전교도 아니고 하교도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표지에 계자를 허위로 찍은 것인가? 해방의 분부를 허위로 전한 것인가? 계하한 표지가 위조한 것이 아닐 것같으면, 과연 승지가 들은 전교를 알린 것이라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해당 죄수들은 단지 정원의 분부를 허위로 전해준 죄만 있는 것인가? 해조도 또한 어찌 계하한 표지를 보지도 않고 다만 담당 아전이 입으로 전하는 말만 듣고서 갑자기 시행할 이치가 있는가?
이 한가지 조항은 처음부터 엄밀하게 조사하여 명백하게 하나로 통일시킨 뒤에야 옥안을 완성할 수가 있고 죄목을 정할 수가 있다. 갇혀 있는 죄수들을 도로 해조로 돌려 보내 다시 끝까지 조사하여 수정한 뒤에 완결짓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단지 해조에서 보낸 공문을 고쳐서 보내게 하여 그 보내온 공문을 가지고 죄수들에게 공초를 받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과연 허위로 전한 일이 단지 구전(口傳)이라고 한다면, 구전을 위조하는 것에 대한 죄목이 법률에 있는가?
두 죄수를 가지고 논하더라도, 처신은 죄가 쌓인 교활한 아전이고 창린은 새로 들어온 간사한 무리이다. 창린은 그래도 두려워할 줄을 알아서 나중에 계단(啓單)을 지웠는데, 처신은 먼저 분수 넘치는 욕심을 품었고 뇌물로 주는 돈을 혼자서 받았다. 그 정상을 따져 보자면 처신이 주모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창린은 추종자가 되어야 하는데, 경의 조에서는 한갓 말재간 있는 처신의 공초만을 인하여 창린을 정범으로 규정하는 옥안을 억지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판결하는 법률의 본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경들은 법 조문에 어두운 법관들이므로 법을 적용하면서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필시 별 어려움 없이 해낼 것이다. 그래서 경들에게 다시 넘겨서 잘 처리할 바탕을 삼도록 하는 바이다. 옥사를 결단하는 요체는, 머물려 둘 수가 없는 것이 불과 같아서 감히 지체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재계하기 전에 수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어두운 방에서 꾀를 낸 것이 비록 처신이 주장한 일이라고는 하겠으나, 공공연한 자리에서 거짓말로 보고한 것은 창린이 직접 저지른 죄입니다. 그 말이 더없이 중대하고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린은 확정하여 주모자로 삼고 처신은 참작하여 다음 법률을 적용하였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법의 뜻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판하하기를,
"영덕(盈德)의 검관(檢官)이 시체를 검사한 대장에 죽은 원인을 찔리고 맞아서 죽었다고 난잡하게 달아 적었기 때문에 엄한 처벌을 받기까지 하였다. 경들이 지금 이창린과 김처신 등의 문안(文案)에 처음에는 ‘전지를 가탁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 하였다.’고 달아 적었다가 두 번째에는 ‘하교를 허위로 전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고 하였다.’고 고쳐 적은 것이 영덕의 시체 검사 대장에 죽은 원인을 조사하여 적은 것과 어쩌면 이다지도 서로 비슷한가.
가탁하였다거나 허위로 전하였다는 것이 하나의 죄가 되고,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고 하였다는 것이 또 하나의 죄가 된다.
영덕의 사건의 죽은 원인을 조사한 대장에는 맞아죽었다라고 먼저 말해 놓고 겸하여 찔려죽었다라고 하여 참으로 종잡을 수가 없었으나 그 옥안에서는 정범(正犯)이 단지 김득손(金得孫) 한 사람 뿐이었다.
비록 하나의 옥사에 두 사람의 주범이 있더라도 안 될 것은 없겠으나, 이 옥사는 이창린과 김처신이 형과 아우처럼 짝이 되어 저지른 일이라고 할 만하고, 더구나 두 놈이 두 가지 죄에 각각 꾀를 낸 자와 일을 도와준 자라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옥사에 어찌 두 사람의 주범이 있겠는가.
설령 훔치려고 한 죄로는 사형에까지는 이르지 않고 허위로 전한 죄는 죽여도 또한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여, 훔치려고 한 한 가지 죄안은 지워버리고 단지 허위로 전한 죄안만을 가지고 정범(正犯)을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꾀를 낸 김처신을 추종자로 삼고 말을 전한 이창린을 주모자로 삼았으니, 이와 같이 법률을 적용한 전례가 과연 어떤 형법 서적에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달아 적어서 아뢴 죄명을 바꿀 수 없는 것은 시체를 검사한 대장에 죽은 원인을 조사하여 적은 것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한 번 공문을 보내자 ‘가탁하였다.’는 말이 변하여 ‘허위로 전하였다.’가 되고 ‘전교’가 변하여 ‘하교’가 되었다. 경들이 만약 법이란 털끝만큼이라도 마음대로 올리거나 내릴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면 이치로 보아 당연히 한번 보고는 깜짝 놀라서 관문(關文)을 돌려 보냈어야 하는 것이거늘, 그런데 도리어 개정한 문안으로 추문하여 공초를 받고는 이어서 조율하기를 청하였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와 같은 옥사의 체모는 보지 못하였다.
무릇 죄를 따져 법률을 적용하는 규정에 있어서는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분부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죄율을 거론하는 것이고 사형수에 대해서는 더욱 특별히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결안(結案)을 할 때에는 단지 결안만 받들어야 하고 다시 상복(詳覆)이나 계복(啓覆)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적용할 법률의 명칭을 적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들이 갑자기 《대명률(大明律)》의 사위조(詐僞條)를 끌어다가 이론을 갖춰 죄안을 만든 것은 어찌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닌가.
가령 경들의 말처럼 이 법률이 합당한 법률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적용할 법률은 곧 중대한 사형죄이다. 어두운 방에서거나 공공연한 자리에서거나를 막론하고 꾀를 낸 자는 당사자가 있으니, 거짓으로 보고한 자는 마땅히 일을 거들어준 자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다만 정리(情理)가 조금 무겁다고 하여, 일을 거들어 준 자를 꾀를 낸 주모자로 삼았으니, 또한 과연 말썽이 날 염려가 없겠는가. 경들이 법을 적용한 글에 ‘조지(詔旨)를 속임수로 전하였다 운운.’ 하는 말이 있는데, 조지라는 것은 입으로 내린 분부가 아니니, 처음 아뢸 때에 사용한 ‘전지를 가탁하였다.’고 한 죄명은 그래도 그럴 수 있겠으나, 구전 하교에다가 견주는 것은 단락이 판이할 뿐만이 아니다. 형조에 어떤 놈의 법률을 농간하는 율관이 있어서 경들을 그와 같이 잘못 가르쳤는가.
이 죄수의 죄가 사형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면 어찌 해조로 다시 보낼 수가 있겠는가. 예전 선왕조 때에 수교(受敎)를 내려, 사형수가 포도청에서 승복을 했다가 형조에서 공초를 바꾸자 다시 포도청으로 이송을 하여 공초를 일치시킨 일에 대한 전례를 게시하도록 하고,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엄히 금단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조정에서도 등골이 오싹하다. 어느 겨를에 경들이 즉시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깊이 책망하겠는가. 이 때문에 경들에 대해서는 모든 일을 조금도 거론하지 않고 불문에 부치되, 단지 법을 농락한 율관에 대해만은 반좌율을 적용하여 처리하고자 한다. 우선 엄히 가두어 두고 재계 후의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라.
시체의 죽은 원인을 검사한 기록을 바꿀 수 없다면 계첨(啓籤)도 또한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두 번째 계사의 황지는 불태우도록 하라. 첫 공초에 전지라고 한 것이 진짜 전지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다시 해조로 보내어 철저히 조사하여 돌려보내오도록 하고, 돌려보내오기를 기다렸다가, 황지 가운데의 전지라는 두 글자를 고쳐 쓴 연유를 간단히 보고하고, 그런 뒤에 문안을 수정하고 정범을 다시 결정해서 옥안을 작성하여 다듬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창린의 공초에, ‘과연 하교인 양 거짓 보고하였는데, 전지와 하교를 구분하지 못해서 이렇게 잘못 대답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김처신의 공초에, ‘비록 궐내에 들일 것인 양하여 훔쳐 내기로 함께 모의하였으나 거짓으로 보고한 사연은 모두가 창린이 한 짓이고 보면 하교와 전지에 대해서는 참으로 알 길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전지라는 두 글자가 이창린의 첫 번째 공초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이미 사알(司謁)의 구전(口傳)을 들었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전지가 아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혹 위조한 표적이 있었다면 어찌 그 자리에서 잡히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잘못 대답한 대로 따라가다가 해조와 신의 조가 구별을 못했습니다만, 창린의 공초에 이미 ‘하교인 양 거짓 보고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계첨 황지에 ‘전지를 가탁하였다[假托傳旨]’라고 한 넉 자는 실로 개정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래서 ‘하교를 허위로 전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 하였다.’라고 고쳐 썼습니다. 문안은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수정하여 입계하겠습니다."
하였다. 판하하기를,
"호조의 아전은 궐문을 밀치고 대궐로 들어 올 수 없으니, 이른바 하교라는 것은 반드시 듣고서 전한 내력이 있을 것이다. 어느 방 승지에게서 들은 것처럼 말한다고 하던가?
승지 이외에는, 병신년 이후로는 구전 하교를 승전색 등으로 하여금 전하게 한적이 없다. 이미 확고한 법이 이루어져 호조의 위아래 관원들이 모두 알고 있다. 호조의 아전이 비록 이것을 빙자하려 하더라도 해조 당상 이하가 누가 믿고 들어줄 자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교를 허위로 전한다는 것이 어찌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설령 잘못 전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니, 그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또 응당 하교했을 법한 일을 잘못 전했다거나 허위로 전했다고 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참으로 가죽 없는 털과 같이 허무맹랑한 말이다.
이 한 조항은 속히 조사하여 바로 문안을 작성하고 수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아뢰기를,
"올봄에는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매우 많은데, 안으로는 오부(五部)에서부터 밖으로는 팔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의 은혜를 받아 때를 놓치지 않고 시체를 묻었습니다.
무릇 고을 수령으로 있는 자는, 비록 일반 백성의 초상인 경우에도 마땅히 열심히 구휼하여, 성스러운 조정에서 백성들을 위하는 뜻을 우러러 깊이 유념하여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 강원 감사 심진현(沈晉賢)의 초상이 금화현(金化縣)에서 났는데 초상이 난 지 10여 일 만에야 비로소 빈소를 차리고 염을 하였으며, 고 위원 군수(渭原郡守) 심흥영(沈興永)의 초상이 초산부(楚山府)에서 났는데 1백여 리나 떨어진 곳에서 시체를 메고 군에까지 갔으므로 들은 사람들이 모두들 참담한 마음으로 놀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성스러운 조정에서 풍속을 두터이 하는 도리로 볼 때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금화 현감(金化縣監) 김재겸(金載謙)과 초산 부사(楚山府使) 송상렴(宋祥濂)을 모두 삭직시키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전교하기를,
"금화의 일이 참으로 풍문으로 전하는 말과 같다면 해당 수령의 소행은 참으로 형편없다고 할 만하다. 한편으로는 해당 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장계로 아뢰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해당 부서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여 공초를 받게 하라."
하였다.
정언 조수민(趙秀民)이 아뢰기를,
"성스러운 세상의 풍속과 교화는 마땅히 충성스럽고 돈후한 것을 숭상해야 합니다. 강원 감사 홍인호(洪仁浩)가 죽어서 빈소가 지척에 있고 미처 발인도 하기 전에 현임 감사 윤필병(尹弼秉)은 기생과 음악을 성대하게 벌려 놓았습니다. 임무를 교대하여 부임해 가는 마당에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풍속을 손상시키고 의리를 벗어나는 것이 대사간이 논한 금화(金化), 초산(楚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서 모두가 인정에 가깝지가 않습니다. 강원 감사 윤필병을 속히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풍문으로 전하는 말은 다 믿기가 어려우니 그 사실을 끝까지 조사하지 않을 수없다. 우선 헌부로 하여금 함문(緘問)을 내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의 함문에〉 윤필병이 대답하기를,
"북문 안에는 취타(吹打)를 정지시켰고 5리 정도에서는 거행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함문에 답한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잡다하게 증거를 끌어대어 난잡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풍속과 교화를 돈후하게 하고 일의 체모를 무겁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조율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대각의 논계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용산강(龍山江)에서 재차 기우제를 지냈다. 전교하기를,
"비가 올듯 올듯 하면서도 아직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 필시 묵은 원한을 마음에 담아두고 풀지 못하고 있는 자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오늘 빈대를 당겨 정하여 경들에게 물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묘당과 삼사의 신하들은 이미 경연에서 하교를 받았으니, 들은 일이 있으면 즉시 아뢰어야 한다. 그 외에 스스로 오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한성부에 엄히 신칙해서 곳곳에 모두 알리게 하여 원한을 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묘당에 보고하도록 하고, 묘당에서는 도착하는 대로 즉시 초기를 만들어 보고할 것이며, 각도는 감사가 널리 탐문하여 숨김없이 그대로 장계를 올려, 부지런히 물어보는 일에 실지 보람이 있도록 하라."
하였다.
권유(權裕)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권엄(權𧟓)을 형조 판서로, 이면응(李冕膺)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5월 23일 경진
영남의 진휼을 1월에 시작하여 이때에 마쳤다.
【공적으로 진휼한 곳은 경주(慶州), 상주(尙州), 대구(大丘), 영천(永川), 흥해(興海), 경산(慶山), 거창(居昌), 하양(河陽), 용궁(龍宮), 봉화(奉化), 청하(淸河), 현풍(玄風), 연일(延日), 자인(慈仁) 등의 읍(邑), 송라역(松羅驛), 포항진(浦項鎭)이다. 긴급히 구휼한 곳은 좌수영(左水營), 좌수 우후영(左水虞候營), 안동(安東), 성주(星州), 밀양(密陽), 선산(善山), 인동(仁同), 칠곡(漆谷), 청도(淸道), 초계(草溪), 예천(醴泉), 영천(榮川), 양산(梁山), 합천(陜川), 금산(金山), 고성(固城), 의성(義城), 함창(咸昌), 지례(知禮), 고령(高靈), 신녕(新寧), 예안(禮安), 장기(長鬐), 영산(靈山), 창녕(昌寧), 기장(機張), 삼가(三嘉), 비안(比安), 칠원(漆原) 등의 읍, 안기(安奇), 장수(長水), 김천(金泉), 성현(省峴), 황산(黃山) 등의 역(驛), 부산(釜山), 다대(多大), 포이(包伊), 두모(豆毛), 개운(開雲), 서평(西平), 구산(龜山), 당포(唐浦), 사량(蛇梁), 삼천(三千), 남촌(南村), 금오 산성(金烏山城), 독용 산성(禿用山城) 등의 진(鎭)이다. 굶주린 백성은 모두 46만 3천 9백 48명이고 구휼에 사용한 곡식은 3만 4천 3백 40섬이다.】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6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88면
【분류】구휼(救恤)
호남의 진휼을 1월부터 시작하여 이 때에 마쳤다.
【공적으로 진휼한 곳은 김제(金堤), 고부(古阜), 임피(臨陂), 만경(萬頃), 용안(龍安), 함렬(咸悅), 옥구(沃溝), 흥덕(興德), 무안(務安), 여산(礪山), 익산(益山), 운봉(雲峯), 진안(鎭安), 남원(南原), 금산(錦山), 금구(金溝), 정읍(井邑), 무장(茂長), 고창(高敞) 등의 읍, 군산(群山), 고군산(古群山), 목포(木浦) 등의 진(鎭)이다. 긴급히 구휼한 곳은 영광(靈光), 영암(靈巖), 태인(泰仁), 전주(全州), 부안(扶安) 등의 읍이다. 굶주린 백성은 모두 65만 2천 6백 93명이고 구휼에 사용한 곡식은 4만 1천 5백 63섬이다.】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6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88면
【분류】구휼(救恤)
5월 24일 신사
가뭄으로 해서 삼사의 여러 신하들에게 바른말을 올리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가뭄이 너무나 심하여 근심으로 마음이 타는 때에는 재야의 현인들을 찾아내고 억울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몸을 돌아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만 못하다. 빈대하는 날에 이미 삼사(三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있었으니 반드시 각자 알고 있는 바를 다 말하여 하루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재계하는 날도 다 지나갔으니 내일부터는 대청(臺廳)을 잠그지 말고 날마다 대청에 나오게 하라. 논사(論思)하는 반열에 있는 관원들도 어찌 강건너 불보듯 하면서 임금의 잘못이나 관원들의 잘못에 대하여 날카롭게 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삼사의 여러 신료들에게 다시 신칙하여, 자신을 반성하고 꾸짖는 나의 이러한 생각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원(李祖源)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3차 기우제를 용산강(龍山江)에서 지냈다.
5월 25일 임오
상참(常參)하였다.
장령 강세륜(姜世綸)이 아뢰기를,
"온화한 기운이 상서를 불러오고 어그러진 기운이 재변을 불러오는 것은 이치로 보아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근래에 이른바 일종의 불순한 학문이 옳지 못한 쪽으로 점점 물들어 간 지가 자못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신이 지난 가을에 전 참판 이익운(李益運)이 전 지평 정종로(鄭宗魯)에게 보낸 편지를 얻어보았더니, ‘서울에도 종자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일이 커지기 전에 조짐을 막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운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 말과 같다면 불순한 학문이 이미 잠잠해졌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불순한 기운이 아직 모두 제거되지 않은 것도 또한 재변을 불러올 단서가 되고도 남는 것입니다. 한성부에 엄하게 신칙하여 더욱 철저히 조사하게 해서 점점 더 번져갈 염려가 없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불순한 학문을 막는 방도가 법을 만드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지난번 빈대에서도 이미 언급을 했다마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올곧은 기운을 가득히 배양하고 불순하고 어두운 습속을 깊이 경계한다면 육예(六藝)의 과목에 들어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은 절로 배척되어 없어질 것이다. 먼저 조정에서부터 사람을 쓰고 버릴 때에 무릇 행실이라든지 옷입는 것이라든지 말하는 것이라든지 짓는 글이라든지 이 한 쪽으로 가까이 물들어 있는 자가 있으면 일체 배척해서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거의 크게 변화시키는 방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또한 다 그렇게 되지 못한 곳도 있다. 고 정승 판부사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곧은 사람을 등용하는 일은 있었으나 곧지 못한 사람을 버리는 일은 부족하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다.
한성부부터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한 일은, 지적할 만한 자가 누구라는 것도 없는데 장차 어떻게 철저히 조사하겠는가. 참으로 들은 바가 있다면 어찌하여 바로 말하지 않고 모호하게 논핵을 하는가. 영남 사람은 평소 진실하다고들 일컬어지는데, 이 대간의 거조는 참으로 눈에 거슬린다.
그리고 근래 불순한 학문이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고보면, 이익운의 편지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고 하는 것은 정말 너무도 성실치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바른말을 구하는 때인지라 꺾어버리고 싶지는 않다만, 이러한 습속은 내가 매우 미워한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 자는 바로 병오년에 이문원(摛文院) 관원들을 접견하던 날에 고 정승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청하던 대간이다. 그 당시 아룀에서부터 이미 두 가지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 일로 해서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그르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제 또 이렇게 아뢰니 참으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하고, 이어서 장령 강세륜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신헌조가 아뢰기를,
"불순한 학문의 해독을 이루 말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추악한 무리들과 연줄을 대어 점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군신 부자 사이의 윤리도 무시하고 남녀 부부 사이의 분별도 더럽히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여 곳곳마다 무리를 이루고 있으니, 윤리가 남김없이 모두 없어질 뿐만 아니라 황건적(黃巾賊)이나 백련적(白蓮賊)과 같은 자들의 반란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성상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여 기르려는 어진 마음으로 반드시 불순한 무리들을 교화시켜 올바른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더라도, 저 인륜을 끊어버린 무리들은 이미 군신 부자의 윤리를 모르니, 어찌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꾸어 모두 새롭게 하는 교화에 따르려고 하겠습니까.
간혹 불순한 학문을 공격하는 자라고 하는 자가 있기는 하나 겨우 이존창(李存昌) 한 사람을 대충 거론하여 책임이나 면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이 성실하지 못한데 사람들이 누가 두려워하겠습니까.
그 소굴 속에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을 말하자면, 조정의 벼슬아치로는 이가환(李家煥)이 있고 경기에는 권철신(權哲身)과 정약종(丁若鍾) 같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이존창 같은 자가 한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김려(金鑢)와 강이천(姜彛天) 같은 무리들은 취향은 다르나 길을 같이하고 얼굴은 다르나 배짱은 맞는 자들로서 빈틈없이 일을 해나가는 것이 지극히 흉악하고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들에 대한 근심 걱정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미처 다 아뢰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중신이야 본디 사람들의 지목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마는,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또 이름을 지적해 가며 논열하여 아랫 조항의 말 뜻이 점점 더 과격해지고 있으니, 장차 세상의 절반을 들어서 강이천이나 김려의 무리라고 몰아부칠 작정인가? 이와 같이 과격한 것은 한갓 조정이 안정되지 못할 단서만 열어놓을 것이니, 대사간의 일은 참으로 생각이 모자라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신헌조가 아뢰기를,
"신이 계사를 다 진달한 뒤에 다시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내가 도움을 청하였고 그의 말이 또 불순한 학문을 배척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이것은 조정의 기상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그 말을 다 마치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이어서 대사간 신헌조를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신헌조가 아뢰기를,
"신이 이미 체직을 당하였으니 어찌 감히 번거롭게 진달드리겠습니까마는, 불순한 학문이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며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니, 앞으로의 폐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몸이야 비록 무거운 견책을 받더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만, 이 계사를 다 아뢰지 못하면 신의 마음은 울분에 차서 장차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한이 맺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불순한 학문을 엄히 배척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대사간만 못하겠는가마는, 지금 이 처분에는 대개 또한 뜻이 담겨 있다. 이미 체직하였으니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가 아뢰기를,
"앞서 사헌부 대간 강세륜이 아뢴 말은 참으로 강직함이 부족하였고 대사간 신헌조가 아뢴 말은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뭄 걱정으로 인해 도움을 청하는 시기에, 경연에 나온 대간이 아뢰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잇달아 견책과 체직을 당하였는데, 그 말이 무엇인고 하면 불순한 학문을 배척하자는 것이었으니, 혹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말 때문에 견책을 당하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두 대간을 체직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이어 전교하기를,
"이번 경연에서 두 대간이 마침 모두 불순한 학문에 대한 일로써 체직을 당하였는데, 밖에서 갑자기 보면 혹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지난번에 비록 석방시키기는 하였으나 의리는 더욱 분명해졌던 정처(鄭妻)031) 의 일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불순한 학문을 배척하는 데에 도리어 도움이 되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들이야 멀리 있는 사람과는 달리 성상 가까이에 있으니 성상의 의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만, 밖의 사람들은 필시 의혹스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한 동료 정승의 말이 참 좋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신헌조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참마음으로 바른말을 청해 놓고는 또 바른말 하는 자로 하여금 그 말을 다 마치지 못하게 하시니, 어리석은 신은 죽을 죄를 진 채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아, 신이 이가환의 무리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반드시 목을 달아 죽여서 극형을 시행한 뒤에야 그만두려는 것이겠습니까. 이 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윤리가 끊어져서 마침내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되고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신은 이것이 두려워 피눈물을 흘리며 성토하는 것입니다.
신의 변함없는 한 줄기 속마음은 앞의 경연 자리에서 이미 대략 말씀드렸으나, 물러나올 때에 걱정과 울분이 가슴에 가득하여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천만 뜻밖에 체직되자마자 다시 잉임시키시니 마땅히 다하지 못했던 말씀을 다 아뢰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한번 생각해 보니, 지난번 경연에서 말씀드리고자 했던 바를 다 끝맺지 못한 것은 바로 신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실수였습니다. 옛날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난간을 부러뜨렸던 충신으로 하여금 이런 처지를 당하게 하였다면 필시 신처럼 나약하게 물러나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데도 나라에 대각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도 또한 어찌 감히 대각으로 자처하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한편으로는 바른말 하기를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처분을 하였으니 참으로 사람을 부르면서 문을 닫아건다는 탄식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의 허물에 관계되는 말이라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단지 내버려두면 되겠지만 일이 조정의 기상에 관계되는 것을 어찌 혹 저것에 구애되어 이것을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오늘 대사간이 논한바 불순한 학문과 패관 소품이나 짓는 강이천의 무리들에 대한 일은 비록 말은 다 끝맺지 못하였으나 대체는 참으로 옳은 말이다. 어찌 즐거이 듣고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계사가 격분에 차 있고 언어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으니, 복희씨(伏羲氏)의 《역경(易經)》에 나오는 마음을 고쳐먹는 의리와 정자(程子)의 가르침에 있는 선(善)으로 옮겨가는 데에 대한 말과는 아주 상반될 뿐만 아니라 또한 나의 고심을 전혀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현인과 호걸들은 대부분 법대로 처리하는 것 이외에 그들을 명교와 본분으로 되돌아오도록 하였고, 이보다 아래에 있는 부류들에 대해서는 내버려두어 스스로 벌을 두려워하고 형벌을 피하게 해서 모두 함께 새로운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치지 않는다는 유풍(遺風)인 것이다. 어찌 반드시 얼굴에 먹물을 넣거나 발꿈치를 베어버림으로써 소생할 가망마저 막고 일반 사람들과 같이 살지 못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내 마음이 후련하고 백성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극악하기 짝이 없는 자로서 교화시키기 어렵고 따르려 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전에도 극형에 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뒤에 다시 이런 자가 나오더라도 또한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의리를 제정하는 일과 형벌을 적용하는 일은 한결같이 형평에 맞고 아울러 시행되어 어그러짐이 없는 뒤에야 사람들이 모두 사람답게 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사간은 이에 잘못을 깨달은 사람에 대해서 소급하여 다스리려 하고 연루됨이 없는 사람들까지 뒤섞어 의심하였다. 그리고 그가 적용하여 죄를 청하고자 하는 것이 어떠한 법률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니 만약 벼슬이 언론을 맡은 관원이라는 이름과 바른말 하는 것을 막는다는 혐의 때문에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조정의 기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잉임시킨 것이 대신의 계청을 따른 것이기는 하나 다시 피혐하는 계사를 보니 아직도 깜깜한 밤중에 있어 꿈에서 깨어나려면 한참 멀었다. 이것은 바로 걸려 있는 것이 사사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대사간 신헌조를 체직하라.
이제부터는 모든 군자들은 각각 그 덕을 밝혀 가까이 부모를 섬기는 일에서부터 멀리 임금을 섬기는 일까지 한결같이 당연히 항상 행해야 할 법칙으로 자신의 일상 생활을 삼도록 하라. 그렇게 하여 오래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참이 쌓이게 될 것이니, 비록 상을 주더라도 결코 올바른 학문을 배반하고 성인을 능멸하는 무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책임은 조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집안의 글방에서 글을 가르치는 어른들에게도 바라는 바가 있다. 이번에 거듭 하유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민시(鄭民始)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김문순(金文淳)을 판의금부사로, 황승원(黃昇源)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5월 26일 계미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전 사헌부 대간이 외방 고을의 기우제에 대한 일을 논하였는데, ‘수령이 몸소 행하거나 향소(鄕所)를 대신 보내거나를 막론하고 운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대간이 지나가면서 한 말이기는 하나, 때로는 향소가 대신 시행한다는 사실을 미루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대개 기우제를 지내는 예절은 그 가뭄 기운의 정도에 따라, 백성과 사직을 책임진 자가 각기 그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수령의 직분이지 향소가 대신 거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수령이 만약 병고가 있어서 기우제를 거행하지 못하겠으면 뒤로 날을 물려 행해도 되고 잠시 정지해도 되는 일입니다. 향소를 대신 보내는 것은 예법에나 의리에나 무슨 근거가 있습니까. 비록 겸임하는 관원이라 하더라도 다른 임무는 모두 겸하여 살필 수가 있지만 기우제는 대신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각도에 분부하여, 만약 기우제를 지낼 시기가 닥쳤는데 해당 수령이 병고가 있으면, 차라리 정지하게 하고, 겸임이거나 향소이거나를 막론하고 대신 거행하지 못하게 하는 일로 영원히 시행할 법식을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옳다. 이대로 각도에 분부하여 일정한 법식을 삼도록 하고, 또한 예조로 하여금 상세히 기록하여 두었다가 뒷날 참고를 삼을 수 있게 하라.
이것을 인하여 또 하교할 일이 있다. 전 충청 감사가 지난해에 기우제를 지낼 때에 한 거조는 참으로 해괴한 것이다. 그 사이 또한 이 일로 처벌을 하기는 하였다. 비록 자리에 들어갔다고 하기는 하나 그가 일을 행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듯하다. 그렇다면 축문에 지방관으로 이름을 고쳐 넣었는가, 아니면 감사의 이름을 그대로 두고 일을 맡은 수령으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하였는가? 이것으로 보나 저것으로 보나 일상적인 격식을 어긴 것이다. 조정에 아뢰지 않은 것이 비록 병으로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생긴 일이기는 하나, 지난번 심문하여 아뢰게 했을 때에 조사해 처리하려고 하였는데, 미처 하지 못하였다. 마침 가뭄을 걱정하는 때를 당하여 경연에서 여기에 대해 주고받은 말이 있었으니, 제사지내는 일을 중시하고 조정의 기강을 높이는 도리에 있어서 한번 심문하지 않을 수 없겠다. 대신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는데, 이병모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추문하여 아뢰게 했을 때에는 축문에 누구의 이름을 써넣었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밝혀낸 바가 없었습니다. 만약 이미 적어 넣은 감사의 이름을 사용하여 그대로 제사를 지냈다면 예법에 있어서 옳지 못한 일이고, 만약 수령의 이름으로 고쳐 적어 넣고서도 장계 안에서 거론하지 아니하고 범범하게 몸소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였다면 임금에게 아뢰는 체모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일은 더 조사하여 다스린 뒤에야 기우제를 지내는 법을 중시하게 되고 앞으로의 폐단을 막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가지 일을 두 번 조사하여 처벌하는 것과는 다르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잡아다 심문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충청도 전 관찰사 한용화(韓用和)가 공초하기를, ‘지난해 5월 연산(連山)의 용추(龍湫)에 기우제를 지낼 때에, 평소 앓아오던 어지럼병과 허리와 다리의 병 증세가 갑자기 심해졌는데, 그날 제사지내는 자리에 나갈 때에는 여러 증세가 아주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지방관을 시켜 대신 행하게 하였는데, 애당초 자리에 나가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일이 창졸간에 있었는지라 축문에 이름을 고쳐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계문을 할 때에는 또 일에 어두워, 이 일을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은 참으로 잗단 일인 줄로만 알고 전례대로 계문하였으니, 죄를 진 것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만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판하하기를,
"귀신을 섬기는 도리는 정성과 공경을 앞세워야 하고, 기우제를 경건하고 정결하게 해야 하는 것은 더욱이 일반 제사와는 각별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임시로 대신 행하게 하였으니 정성이 매우 부족한 것이다. 축문에 이름이 적힌 자가 일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전혀 공경심도 없는 것이다. 앞서 조사한 조건에 견주어 볼 때 관계되는 바가 더욱 무겁다. 이미 보고받은 뒤에는 노쇠하였다고 해서 관대히 용서할 수는 없다. 연산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7일 갑신
진향사 정사 구민화(具敏和)와 부사 김이익(金履翼) 등이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치계하였다.
시호(諡號)를 반포하고 내린 조서(詔書)는 다음과 같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서를 내린다.
예로부터 제왕은 만물을 다스리고 만민을 통솔하여, 높은 덕은 나라를 번창시키는 데에서 성대하였고 큰 계책은 왕업을 이루어 나가는 데에서 환히 빛났다. 그래서 모두 옥책에 적어 시호를 정하고 법전을 상고하여 휘호를 올렸다. 이것은 여러 사람들의 우러러 공경하는 정성을 표시하기 위함이고 선대의 광명을 이어받아 그 아름다움을 널리 드러내기 위함이다.
삼가 생각건대, 세상을 떠난 우리 태상 황제는 총명한 자질을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몸가짐이 장엄하고 마음가짐이 경건하여 날로 수양이 성취되었다. 쉬지 않고 지극한 성실을 추구하는 근본 마음을 넉넉하게 하였고 유구하고 끝없는 도량을 넓히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의 명을 잠시도 잊지 않아 하늘을 모범삼고 하늘의 뜻에 합치되었으며, 상제를 대하여 조심스럽고 신중한 자세로 교외의 제단에서 엄숙히 제사를 올려 신령이 선택하고 하늘이 복을 내렸다. 적전에서 몸소 농사를 지어 빠뜨리지 않고 종묘에 제사를 지냈고 능을 참배하러 거둥하여 신령들께 술잔을 올렸다.
명륜당 앞의 비석에 훈계의 글을 지어 새긴 것은 선조의 제도를 삼가 따른 것이고,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를 써서 외운 것은 선대 황제의 계책을 정성껏 받든 것이다. 봉작을 하여 여러 황족들의 혈맥을 복구하였고 품질을 더하여 옥첩에 빛을 더하게 하였다.
원로 공신들을 예우하여 높였고 관리의 법도를 모범이 되어 바로잡았다. 복잡한 정사는 환히 알아서 비답을 내렸고 모든 벼슬을 함께 임명하여 대궐에서 접견하였다. 여덟 가지 방도로 나라를 다스리니 이익과 폐해를 두루 알았고 여섯 가지 청렴한 일로 관리들을 평가하니 권장되고 징계되어 서로 가다듬게 되었다.
소고(召誥)를 읽어 뜻이 무일(無逸)까지 통달되니 황제의 표제를 병풍에 게시하였고, 고요모(皋陶謨)를 연구하여 학업에 더욱 부지런하니 황제의 논지로 경전을 풀이하였다.
역참에서 올라오는 보고에 밤낮으로 관심을 기울여 멀리 저 벼곡식 논밭의 일을 진념하였고, 볕나고 비오는 날씨에 대해 농부(農部)에 자문하여 그 수확 곡식의 수량을 상세히 헤아렸다.
새로 일군 밭의 조세는 다섯 번을 면제하였고, 조운선의 축난 쌀은 세 번을 덜어주었다. 해묵은 포흠을 두 번을 탕감하여 은혜를 더하였고, 누차 재해가 심한 논밭을 걱정하여 세금을 면제시켜 주었다. 예부에서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새봄에까지 백성들을 진휼하였고, 도성에 은택이 흐르고 가까운 고을의 포흠도 용서하여 주었다.
급히 흐르는 여울을 제학(鯷壑)으로 틔우니 맑은 물이 소용돌이치고 돌아가는 썰물을 인당(鱗塘)에다 막으니 큰 물결이 잠잠하여졌다.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돌보니 자문을 구하심이 변방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고, 드넓은 도량으로 토목 공사의 어려움을 헤아리니 수리와 건축에 나라의 창고를 자주 열었다. 형법을 참작하여 죄수를 심리하고 죄가 의심스러울 때에는 오직 가벼운 쪽을 따랐으며, 군수품을 모아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군대를 출동시킬 때에는 군률로써 하였다.
도시(都市)를 건설하고 향읍(鄕邑)을 구획지었으며, 제도를 만들어 공적을 드러냈다. 헌장(憲章)은 오조(五朝)의 것을 받들었고, 법도는 삼대(三代)의 것보다 훌륭하였다. 으뜸가는 공로를 표창해서 술잔을 올리니 사직(社稷)의 제사가 경건하게 치루어졌고, 천지 신명과 산천에 차례로 제사를 올리니 제사 그릇들이 일정한 제도에 맞았다.
아름다운 옥에다 책문과 인장을 새기니 선대의 영광보다 더 빛났고, 그릇에 두루 그림을 새기니 고금을 참작하여 성대한 법도를 밝히는 것이었다.
종과 경쇠는 음률이 중화의 화평한 기상에 맞았고, 옥과 금으로 만든 수레는 황제 의장의 훌륭함을 볼 수 있었다. 삼통(三通)을 편찬해서 법칙을 삼으니 과오를 짓는 일이 없었고, 육전(六典)을 힘써 연구하여 책을 엮으니 기강이 정연하게 바로잡혔다. 천문(天文)을 관장하는 곳에서 도수(度數)를 헤아리고 때를 연구하게 하니 하늘의 운행으로 조짐을 점친 것이었고, 탁본을 하여 책을 증보하여 나라에 소속시키니 영토에 대한 지도의 기록을 넓힌 것이었다.
글을 관찰하여 교화를 이루고, 도를 실어서 말씀을 내렸다. 지은 문장은 세 권의 책에 넘쳤고, 지은 시는 5만 수나 되었다. 서적을 편찬하고 유림에 은택을 내렸다. 선비를 가르침에는 깨끗하고[雅] 바르고[正] 맑고[淸] 참됨[眞]을 가지고 하였고, 서적032) 은 문연각(文淵閣), 문원각(文源閣), 문진각(文津閣), 문소각(文溯閣)에다 보관하였다.
사시(四詩)의 악보를 정하니 풍(風), 아(雅), 송(頌)을 악장에 맞게 하였고, 세 나라 역사의 잘못을 바로잡으니 요(遼), 금(金), 원(元)의 국어(國語)를 번역하였다.
무영전(武英殿)에서 교감해서 판각을 하니 보배로운 글을 뽑아 인쇄한 것[聚珍版]은 새겨 펴내는 데에서 더욱 기술을 넓힌 것이었고, 천록각(天祿閣)에 서책을 거두어 보관하니 훌륭한 문장은 그 정미롭고 좋은 것들을 특별히 가려뽑은 것들이었다.
돌에 경(經)을 새기면서 잘못된 것을 교정하여 바로잡으니 당(唐)나라 개성(開成) 연대의 것보다 훨씬 훌륭하였고, 사냥을 나가 비석에 글을 새긴 것은 주(周)나라 태사(太史) 주(籀)의 대전(大篆)을 거듭 본뜬 것이었다.
궐리(闕里)에 몸소 가보았고 태학(太學)을 새로 세웠다. 경시(京試)의 정원은 흥환(興桓)에서 정하였고, 학교의 인원은 진적(鎭迪)에서 늘렸다. 사과(詞科)는 명경(明經) 시험을 다시 거행하여 숙유들을 더욱 특별히 권장하였고, 직접 합격자를 발표하는 소시(召試)를 일곱 번 열어서 준수한 선비들을 자주 흥기시켰다. 영명한 계책이 익숙히 정해졌고 우뚝한 공렬이 환히 펼쳐졌다.
군사에 관한 정사는 중추(中樞)에서 총괄하게 되었고 무공에 대한 성과는 큰 훈련에서 이루어졌다. 열 아홉 대의 화살을 거듭 명중시키니 성인의 무예가 널리 떨쳐졌고 삼만 리가 넘도록 강토를 넓히니 천자의 위엄이 더욱 빛났다.
염(冉)과 방(駹) 땅이 합병되니 두 금천(金川) 지역이 모두 우리의 강토에 소속되었고, 회준(回準)이 항복해 오니 네 개의 위랍(衛拉)이 모두 맹서를 하고 책봉을 받았다. 바다의 요괴스러운 기운을 적감(赤嵌)에서 쓸어내니 대원(臺員)033) 의 반란을 미리 평정한 것이었고, 표락(驃樂)을 주파(朱波)에서 공물로 바치니 참으로 면전(緬甸)034) 까지 복속시킨 것이었다.
훈공이 높아 전쟁을 하지 않아도 남교(南交)035) 가 머리를 조아리며 조회를 하였고, 공적이 뛰어나 전에 없는 것이었기에 구르카(廓嗒)036) 가 깨끗한 마음으로 와서 표문을 올렸고 토르쿠트(土爾扈特)는 귀순하였고 힌두스탄(痕都斯坦)은 공물을 가져왔고, 안디잔(安集延)은 서봉우선(書奉右旋)하였고, 카자흐(哈薩克)는 말을 가지고 서쪽 끝에서 와서 천자의 위엄을 우러러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니 일곱 가지 덕을 명심한 것이었고, 태평 시대에 풍속과 교화를 넓히니 열 가지 공적을 더욱 쌓은 것이었다. 오직 상제의 명을 따라 잊지 않아 능히 백성들에게 혜택을 보장하였고 후인을 위해 음덕을 펴서 크나큰 복록을 즐거이 누리게 하였다.
하늘의 운행은 중단이 없는 것이고 순일한 성인의 덕도 또한 중단이 없는 것이니 참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 경사에 참여하였고, 대(大)는 의식적으로 할 수가 있는 것이나 화(化)는 의식적으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니 그 위의가 무어라 이름할 수 없을 정도로 더없이 높고 더없이 넓었다.
물려주는 왕위를 받아 첫 터전을 닦을 때에는 조상의 업적을 계승하는 정성을 폈고, 옥새를 물려주고 심법을 전하여준 회갑 날에는 하늘에 고했던 뜻에 유감이 없었다. 새해 아침에 선위를 하여 3년이 지났으나 더욱 부지런히 정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고, 오래사시며 강녕하게 지내시니 90살이 넘었으나 신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짐은 교육시켜주시는 황고의 은혜에 흡족히 젖어 궁정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아들이 바야흐로 장성해지기를 기다리고 계시더니, 슬프게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짐은 누구를 의지할까. 끝없는 슬픔 속에 애모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지고, 온 백성들의 정성을 펴서 이에 휘호를 올리게 되었다.
삼가 여러 왕과 패륵과 대신과 문무 신하들에게 명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법전을 상고하여 공손히 시호를 올리게 하니, 모든 제후들과 공경 신하들이 한결같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이에 비로소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옛 전례를 삼가 준수하여 공손히 천지와 종묘 사직에 고하고, 가경(嘉慶) 4년 4월 7일에 책보(冊寶)를 받들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태상 황제께 존호(尊號)를 올렸다. 그 존호는 법천융운 지성선각 체원입극 부문분무 효자신성 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孝慈神聖純皇帝)이고, 묘호(廟號)는 고종(高宗)이다.
이미 공덕(功德)을 드러내어 환하게 밝혔으니, 효성을 다하여 그 은혜를 세상에 미루어 펴야 하리라."
자문(咨文)은 이러하다.
"가경 4년 4월 10일에 내각(內閣)에서 베껴낸, 이날 받든 황상의 유지에, ‘이해 정월에 예부시랑 항걸(恒傑)과 부도통 장승훈(張承勳)을 조선(朝鮮)에 보내어, 세상을 떠난 태상 황제께서 남기신 조서(詔書)를 공경히 반포하게 하였다. 이 두 관리가 대궐에 들어와서 떠나는 인사를 할 때에 내가 이들을 만나 하유하기를, 「이 두 사람이 이번에 사신의 임무를 받들고 조선에 가는 것은 태상 황제께서 남기신 조서를 반포하기 위한 것이니, 보통 때에 국왕이나 왕세자를 책봉하는 것에 견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 나라 국왕이 선물을 보내오더라도 사신의 예의상 그대들은 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번방(藩邦)을 잘 보살피려는 나의 의도와 관계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어제 항걸 등이 연경에 돌아와서 다녀온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 보고에 의하면, 그 나라 국왕은 태상 황제의 조서를 아주 공손하게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예물까지 잘 갖추어서 보내왔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굳이 거절하며 받지 않으니, 국왕은 두세 번 받으라고 간청하면서, 예절과 관련하여 이전에 고종 순황제로부터 비준받은 유지까지 내보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냥 받지 않아서, 사람을 시켜 예물을 가지고 압록강까지 따라오기까지 하게 되었는데, 강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전 사신은 가지고 돌아갔다는 말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일처리가 너무 융통성이 없고 사리에 어둡다. 그들을 사신으로 임명할 때에는, 고종 순황제가 이미 내린 유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몰랐다. 이 때문에 예물을 받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그 나라 국왕이 서너 번씩 간청을 하였고 보면 이 두 사람은 사리를 헤아려 참작하여 받아주어서 공경하고 순종하려는 그들의 마음을 펴게 해 주고 연경에 도착한 뒤에 사실대로 분명하게 아뢰었더라면 일이 제대로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한편으로는 받아주고 한편으로는 지난번 사신이 받든 고종 순황제의 유지를 기록하여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었더라도 안 될게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아니라서 혹 끝내 받지 않더라도 또한 일처리는 제대로 했어야 하는 것이다. 저 나라에서 사람을 시켜 예물을 싸가지고 강가에까지 왔는데 다시 물리쳐 돌려 보내었으니 저 나라 사람들에게 먼 길에 싸들고 따라오는 동안 부질없이 역참의 노고만 심하게 시킨 셈이 되었다.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여러 가지 일들을 매우 잘못 처리하였다. 그래서 지금 군기시의 왕대신(王大臣)으로 하여금 항걸과 장승훈을 불러다가 조선에서 보낸 정사와 부사가 보는 자리에서 이 두 사람에게 유지를 전해주고 신칙하게 하였다. 아울러 항걸과 장승훈을 해당 부서에 내려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융통성 없이 일을 잘못 처리한 연유를 조선 국왕에게 알리게 하였다. 예물을 가지고 따라온 조선의 모든 사람들은 이들을 대하여 합당치 않게 한 일이 없으니, 조선 국왕은 이들을 처벌하지 않아야 한다. 이 뒤로는 조선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서 저 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에는 국왕으로 하여금 그대로 고종 순황제의 유지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회유하는 뜻을 보여주고, 정성을 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부에서 황상의 유지를 받드는 일입니다. 주객사(主客司)의 안정(案呈)에 대하여 내각에서 베껴내어 받든 황상의 유지 한 통을 응당 간단한 문서로 베껴적어서 조선 국왕에게 알리는 것이 옳겠기에 이에 자문을 보냅니다."
전교하였다.
"사신 행차가 이달 보름이나 스무날 쯤에 상을 받고 즉시 출발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시호를 반포하고 내린 조서를 이번 행차에 부쳐 보내는 사유를 주달하기 위하여 별도로 보낸 군관과 역관이 지금 이미 먼저 나왔다. 사신이 이번 일을 잘 주선하여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또 승지의 말을 들으니, 사신이 의견을 승정원에 글로 적어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은혜를 사례하는 일을 마땅히 부묘하고 조서를 반포하기 전에 해야 하겠는데 어떨지 모르겠으니 즉시 상께 품의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침 을묘년의 전례를 보니, 그 때에는 병진년 3월에 가서 등극을 축하하는 사신을 먼저 보내고, 또 명절을 축하하는 사신 행차에 시호 반포를 축하하는 사신을 겸하여 보냈으며, 부묘를 축하하는 사신은 정사년 동지 사신 행차에 그 임무를 함께 부쳐 보냈다. 이번의 이 일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전례만을 고집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면 시호 반포를 축하하는 사신은 9월 부묘 이전에 들여보내고 부묘를 축하하는 사신은 명절 사행에 부쳐보내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시호 반포를 축하하는 사신을 이번 겨울 동지사 행차에 부쳐보내고 부묘를 축하하는 사신은 별도로 보내는 것이 옳겠는가? 여러 재신들과 상의하여 의견을 일치시켜 적어올리도록 하라."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시호 반포를 축하하는 사신을 별도의 행차로 먼저 보낸 뒤에 부묘를 축하하는 사신은 명절 사신 행차에 부쳐 보낸다면 두 사행이 각각 합당할 것입니다. 성상의 분부 가운데에 앞 조항의 분부가 참으로 지당합니다. 여러 재신들도 다른 의견이 없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진하사 겸 사은사를 차출하여 8월 그믐 이전에 들여보내 북경에 닿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명례궁(明禮宮), 수진궁(壽進宮), 어의궁(於義宮), 용동궁(龍洞宮)의 무역하는 종놈들이 돼지전[猪廛]에서 강제로 매매를 하며 폐단을 일으켰는데, 비변사가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니, 전교하기를,
"소고기를 강제로 사들이는 폐단을 엄금하기를 어떻게 하였으면 돼지전에서의 악행이 또 드러났단 말인가. 수량이나 횟수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명색이 궁방(宮房)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금법을 한번이라도 범한 자는 일반 백성들보다 몇배의 죄를 더 주어야 한다. 내수사의 종 및 우두머리 종놈은 형조로 하여금 위의 법률을 적용하도록 하고, 죄과를 범한 궁방의 종들도 또한 해조로 하여금 엄하게 다스리게 하라. 돼지전이 이와 같다면 전부터 엄금해 오던 현방(懸房)도 필시 예전과 같을 것이다. 즉시 조사하여 적어 아뢰도록 하라.
담당 중관(中官)이 엄하게 단속하지 못한 것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 어제 본사에서 조사하는 일을 그대로 덮어두었는데, 이 폐단이 한번 열리면 앞으로 중관들이 덮어주고 가려주면서 간사하게 속임수를 쓰는 일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는가. 해당 중관은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다만 나이가 70이 넘었으니 우선 해당 부서로 하여금 잡아다 처분하여 유 삼천리(流三千里)의 법률을 적용하여 속전(贖錢)을 받고 석방하도록 하라. 와서 보고하지 아니한 우두머리 서리는 유 일천 오백 리에 처하도록 하라.
이 뒤에 또 현방에서 토색질을 하며 폐단을 부리는 자가 있으면, 궁방의 하인들은 엄한 형벌을 가하여 귀양을 보낼 것이며 담당 중관은 내시부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8일 을유
비가 내렸다. 전교하기를,
"3차에 걸친 기우제가 그 감응이 없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에까지 많은 비가 내려 먼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모두 흠뻑 적시었다. 다시 간절하게 비는 일은, 측우기의 물 깊이가 이미 두서너 촌(寸)을 넘었으니 기우제를 지내는 일은 형세를 보아가며 취품하라고 해조에 하유하라. 우사단(雩祀壇)에 나갔던 헌관과 여러 집사들에게는 전례대로 논상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도공(信度公) 신수근(愼守勤)의 마을에 정표하였다.
전교하기를,
"이해 이달 이날은 바로 우리 공소순열 단경 성후(恭昭順烈端敬聖后)를 복위(復位)시킨 뒤에 능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던 여러 신료들이 일을 마쳤음을 보고한 때이다. 삼가 생각건대 또 이 해는 결혼 3백 주년이 되는 해이다. 능이 있는 곳을 바라보니 사모하는 감회가 더욱 새롭다.
옛날 중종조에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의 상소가 있었고, 숙종조에 이르러서 또 신규(申奎)가 글을 올렸었는데, 혹은 당시의 일이 어려웠음으로 인하여 혹은 묘당이 망설이며 적극 나서지 않았음으로 인하여, 새나 날아다니는 텅빈 산속에서 탄식스럽게도 세상에서 잊혀진 채로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선왕께서 중관에게 특별히 명하여 별묘(別廟)를 수직하게 하였고, 얼마 뒤에 김태남(金台男)이 아뢰자 성상께서 뜻을 굳게 정하시고 성대한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여, 드디어 우리 나라가 억만년토록 번창하며 뻗어나갈 복록의 기초가 되게 하였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었다.
마침 이날을 다시 맞이하니 그때의 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이때를 즈음하여 사방 천리에 좋은 비가 내렸으니 신령의 보살핌이 있는 듯하였다. 나의 정성과 감격을 어디에다 펴랴. 더구나 초봄에 참배하려고 준비하였다가 실현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마음이 편치 않은데 또 어찌 이달을 넘길 수 있겠는가.
즉시 예조 판서로 하여금 좋은 날을 잡아 대신을 보내어 온릉(溫陵)에 작헌례(酌獻禮)를 대행하게 하도록 하되, 축문은 문형(文衡)이 지어 올리도록 하라. 좌의정 증 영의정 신도공(信度公) 신수근(愼守勤)의 묘에는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라. 제사를 받드는 사람은 이름을 물어보아 오늘 정사에서 본릉의 참봉으로 의망해 들이도록 하라. 일찍이 들으니 신도공의 사당을 호조에서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호조 낭관으로 하여금 비바람을 잘 가릴 수 있는지를 살펴서 아뢰게 하라.
맡은 일에 마음을 다하여 아름다운 절개를 지킨 것으로 중국의 서휘조(徐輝祖)와 같은 자는 신도공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고 참판 유몽인(柳夢寅)에게도 시호를 추증하였는데 더구나 신도공에 있어서이겠는가.
임금의 장인을 충신이라고 하여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은 처음으로 시작하는 성대한 거조이니, 입시한 사관은 비변사 대신들에게 가서 문의하고 재신들의 의견이 같거든 분부하여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의논드리기를,
"처지로써 보면 다같은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지만 맡은 일에 마음을 다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지조를 지켰으니, 외방의 신하가 창졸간에 절조를 이룬 것과 비교해 볼 때 그의 우뚝하고 변치 않았던 지조는 더욱 분명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한갓 그가 면할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것만 알 뿐이고 그의 확고한 마음이 구차스럽게 면하지 않으려는 데에 있었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번의 이 성상의 물으심에 특별히 정문을 세우는 문제에까지 언급하셨으니, 우러러 칭송할 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이시수(李時秀)는 의논드리기를,
"맡은 일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하로서의 큰 절조이고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을 표창하는 것은 나라의 훌륭한 제도입니다. 신도공 신수근은 선대 임금의 장인으로서 그의 회갑이 다시 돌아왔는데, 성상께서 감회가 일어나 흡족히 은혜를 내려 특별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게 하셨으니, 풍속을 세우고 세상을 격려하는 교화에 참으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형조 판서 이조원(李祖源), 대호군(大護軍) 이방일(李邦一), 호군(護軍) 신대현(申大顯), 호군 이한풍(李漢豊)은 모두 대신들의 의논과 같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결혼을 한 지 60갑자의 주기가 다시 돌아온 해를 당하여 능침에 작헌례를 거듭 거행하니, 성상께서 감회가 깊어져 관진(觀津)의 옛집과 절의를 세운 지난 일에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에 여러 신료들에게 널리 물어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의논해 거행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같은 처지로서 그 같은 우뚝한 절조를 세웠으니, 끝까지 변치 않았던 그의 확고한 충성심을 더욱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의논은 이미 모두가 일치하였습니다. 속히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성스러운 조정에서 먼 선조를 추모하고 절조있는 자를 장려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익창 부원군 신수근을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즉시 거행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조상진(趙尙鎭)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5월 29일 병술
비가 왔다. 전교하기를,
"가물다가 비가 왔고 비도 흠뻑 적셨다. 타들어가던 가뭄 끝이라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다. 그런데 비가 내린 뒤에 조바심나는 마음은 오히려 비가 내리기 전보다 더하다. 천지 자연이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하고 백성들이 잘 살도록 하는 근본에 힘쓰는 길은 오직 농사일에 온 힘을 다하는 데에 있다.
생각건대 지금 모내기를 다음달 상순까지 할 수 있다면 또한 풍년든 들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은 궁핍하여 때를 놓치기가 쉬울 것이니, 그래서 때를 놓치게 되면 그 책임은 관청에 있지 백성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령으로 있는 자는 직접 들판에 나가 다니면서 모자라는 것은 보태주고 나태한 자는 경계시켜야 과연 임금을 대신하여 한 지역을 맡아 다스리는 책임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아(阿) 지역의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않자 제(齊)나라에서는 그 대부를 쫓아냈다. 이후로는 점검을 하여 일벌 백계의 법을 쓰도록 하겠다. 묘당으로 하여금 먼저 각도에 신칙하여 혹시라도 스스로 법을 범하는 자가 없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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