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무자
정상우(鄭尙愚)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영남 암행 어사 김희순(金羲淳)을 불러 접견하였다. 김희순이 서계를 올려,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경산 현령(慶山縣令) 김인주(金仁柱), 전 영천 군수(永川郡守) 이병순(李秉淳), 비안 현감(比安縣監) 정시양(鄭時養), 문경 현감(聞慶縣監) 송윤재(宋倫載), 전 의령 현감(宜寧縣監) 남정화(南正和) 등의 정상에 대해 차등있게 죄를 논하였다.
조상진(趙尙鎭)을 진하사 겸 사은사의 정사(正使)로, 박기정(朴基正)을 부사로, 한치응(韓致應)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6월 2일 기축
예조 판서 서용보(徐龍輔)를 불러 접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온릉(溫陵) 국내(局內)의 좌우 및 주산(主山)의 재실(齋室) 근처에 있는 신씨(愼氏)의 묘와 성씨(成氏)의 묘에 대해, 무덤으로 드나드는 길을 닦고 나무를 베어내는 일을 사릉(思陵) 국내의 정씨(鄭氏)의 산소에 시행한 전례대로 하도록 하여 능을 지키는 관리로 하여금 각별히 돌보게 하였으며, 본가(本家)의 사람들도 바라보며 제사를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였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제단(祭壇)과 사초(莎草)를 수축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혹시 능을 지키는 관리가 연전에 내린 하교를 여러 집안에 분명하게 알려주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집안이 영세하고 오래도록 침체되어 때맞춰 그 비용을 마련해 낼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예조로 하여금 신씨와 성씨 집안의 여러 후손들을 깨우쳐 타이르게 하고 재랑(齋郞)에게 단단히 신칙하게 하라.
또 신씨와 성씨의 여러 무덤들이 비석이 있는 것 외에는 뭉개져서 분별이 안 되는 곳이 많다고 한다. 그와 같은 곳들을 나무 뿌리가 엉키도록 내버려둔다면 오르내리시는 왕후의 영령이 필시 저승에서 안타깝게 여길 뿐만이 아닐 것이다. 또한 예조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하여 혹 그 뿌리의 줄기들을 잘라내기도 하고 혹 번식을 못하도록 하기도 하면서 표식을 세워 구역의 한계를 두어 서로들 준수하게 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오래될수록 왕후의 생각에 깨닫는 바가 더욱 선명해져서 기쁜 마음으로 헤아리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오늘의 이 하교를 능을 지키는 관리가 감히 유념하여 준행하지 않아서야 될 일인가. 또한 예조로 하여금 판(板)에 새겨 재소(齋所)에 게시하도록 하라.
이 일로 인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다. 사릉 국내에 있는 정씨의 무덤들에 대해 무덤을 보수하고 나무하는 것을 금하고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의 일을 한결같이 선왕조에서 정한 법식대로 거행하고 있는가? 민회(愍懷)038) 의 무덤과 여러 강씨들의 산소에 대해 연전에 풀이 무성하다는 말을 비로소 듣고 제거하도록 하고 또한 사릉과 온릉의 국내에 있는 여러 산소들의 예대로 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지금 모두 하나하나 준수하고 있는가?
또 생각하니, 장릉(長陵) 바깥 오른쪽 산줄기에 있는 이른바 정씨(鄭氏)의 산소라고 하는 곳은, 성씨나 정씨의 무덤과는 사정은 다르지만 그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거룩한 선왕이 뜻이 있어 한 일인데 과연 오늘날까지 선왕조의 하교대로 시행되고 있는가? 그리고 제릉(齊陵) 근처에 있는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의 묘도 수교대로 시행하고 있는가? 일체 상세히 물어서 적어 올리도록 하라.
또 생각하니, 정릉(貞陵) 복위(復位) 때의 사적(事蹟)이 흡사 온릉의 일과 같은데, 복위한 뒤 제사를 지내는 날에 능의 지역 안에 영험스러운 비가 많이 내렸으므로 선정(先正)과 당시의 정승과 여러 신하들 및 능의 공사일을 맡았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사적을 기록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달은 바로 우리 신덕 왕후(神德王后)께서 태어나신 달이기도 하다. 왕후의 본적은 상산(象山)이고 국구인 강윤성(康允成)도 상산 부원군이라고 칭하였는데, 상산의 또 하나의 명호는 바로 곡산(谷山)이다.
일찍이 고사를 보니, 왕후께서 시냇물을 떠서 그 위에 버들잎을 띄워 올리니 태조께서 그의 태도를 기이하게 여겨 뒤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때의 그 시내는 바로 용봉(龍峰) 앞에 있는 용연(龍淵)이고 용연 옆에는 궁실터가 있는데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왕후의 본가 집터도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읍지(邑誌)에 혹 실려 있는 곳이 있는지, 또는 나이 많은 노인들이 분명하게 전하는 곳이 있는지를 또한 예조로 하여금 해당 도에 관문을 보내 물어서 장계로 아뢰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용 대장(壯勇大將) 조심태(趙心泰)를 잉임시켰다.
민태혁(閔台爀)을 이조 참판으로, 이집두(李集斗)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 서용보가 아뢰기를,
"온릉에 대신을 보내 작헌례를 섭행하게 하는 일은 전고에도 없는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이므로 제사 음식의 그릇 숫자와 술잔을 올리는 숫자에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는 안 되겠는데,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해 보아도 달리 방증할 만한 전례가 없고, 다만 《오례의》에 ‘능(陵)과 전(殿)은 일체로 한다.’는 글이 있는데, 이것을 끌어다 원용할 수 있겠습니다.
영희전(永禧殿)에 작헌례를 올릴 때의 제사 음식의 그릇 숫자는 한결같이 명절날 지내는 제사의 그릇 숫자와 같았고 술잔은 단지 한 번만 올렸기 때문에 육상궁(毓祥宮) 및 여러 궁의 작헌례에도 모두 이 예를 준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 예에 의거하여, 제사 음식의 그릇 숫자는 능에 행행하여 구역 안의 여러 능에 대신을 보내 제사를 섭행하게 할 때에 사용하는 그릇 숫자로 마련하게 하고 술잔은 한 번만 올리도록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이 뒤로는 이러한 일이 있을 때에는 이것으로 일정한 법식을 삼아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서용보가 아뢰기를,
"이번의 이 작헌례가 비록 섭행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재계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일만이라도 재계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4일 신묘
인정전에 나아가 온릉의 작헌례에 쓸 향과 축문을 직접 전하였다.
6월 4일 신묘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해는 바로 온릉이 복위한 60돌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지난번 전교에서도 이미 말하였다마는 조금이나마 추모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오늘 향과 축문도 직접 내주었다.
신도공(信度公)의 일은 알지 못하는 자는 필시 옳으니 그르니 말이 많을 것이다마는 이 일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그가 갑자년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령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송(宋)나라의 왕륜(王倫)의 일과 같다. 왕륜이 처음에는 화의론을 주장하여 청론의 공격을 받았으나 마침내 한번 죽음으로써 군자들의 칭송을 받았다. 더구나 애당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없는 신도공의 경우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지당합니다. 대개 그의 처지로 보아 충분히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끝내 구차스럽게 모면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의 우뚝한 절개를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존창(李存昌)에 대해서 감사의 장계에서는 용서해 주자고 청하였다. 깨달았다고 하였고 보면 말라 죽게 하는 것은 또한 불순한 책을 불사르고 불순한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의리가 아니다. 심환지(沈煥之) 판부사는 의논 가운데에, 그것이 참으로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하기는 했으나 그 말은 오히려 억측에 가깝다. 성인(聖人)이 《주역(周易)》을 만들면서 혁괘(革卦)에서, 그 태도부터 고치고 마음을 고치는 데에 이르게 하였다. 어찌 먼저 마음부터 고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설령 이존창이 과연 마음을 고친 실지가 없더라도 용서하자는 감사의 장계가 올라온 이상 조정의 체면으로서야 어찌 의심을 가지고 용서에 인색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감사의 장계가 경솔함을 면치 못한 듯합니다. 그가 이미 여러 해를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 이른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형장을 이기지 못하여 그런 것이지 반드시 정말 반성하여 새롭게 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완전히 용서하는 일을 가벼이 의논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온 세상이 모두 비린내나고 더러운 와중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데도 우리 나라만은 유독 깨끗함을 보존해 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불순한 학설이 횡행하여 그 피해가 장차 오랑캐나 금수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지금 이 불순한 학설을 물리치는 방도는, 나는 바른 학문을 밝히는 길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뒤 경연의 하교에서 거듭 당부했을 뿐만이 아니다. 먼저 조정에서부터 인재를 등용하거나 버릴 때에 반드시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구하여 등용하고 육예(六藝)의 과목에 들어 있지 않은 자는 물리치고 배척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불순한 학설이 절로 사라질 것이다.
내가 한 세상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위로는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아래로는 조정에 널려 있는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태반이 경학의 뜻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바른길을 벗어나 알맹이 없는 외형만을 오로지 일삼는 사람들이다. 문체는 난잡하고 글씨는 바르지 못하며 몸은 선왕의 행실을 본받지 않고 입은 성현들의 말씀을 말하지 않는다. 위의나 용모에 이르러서도 모두가 이 모양들이다. 혹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운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 배우는 것이 이런 것들이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속된 투이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폐단을 구제할 만한 약이 없다. 바른 학문이 좋다는 것을 마치 고기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참으로 알아서 애쓸 것도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만약 후대에 이런 무리들이 선배가 되어서 후배들을 가르치게 된다면 세도에 끼칠 피해가 필시 오늘날의 불순한 학문보다 더 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자(朱子)가 《대학(大學)》의 서문에서, 시나 문장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과 허무하고 적멸한 것 이외에 따로 권모술수라고 하는 한 가지가 더 있다고 한 그것인 것이다.
어려서 공부하는 자가 가까이 부모를 섬기는 일이나 멀리 임금을 섬기는 일에 대한 진정한 도리에는 관심이 없는데다 경서는 읽지 않고 다른 책을 먼저 읽으니, 평소 마음속에 주객(主客)과 내외(內外)의 구분이 이미 분명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불순한 학설이 이와 같이 쉽게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명교(名敎)까지 내던져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문장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최항(崔恒)이나 서거정(徐居正) 등의 평이하고 질박한 글을 근래에는 글로 보지를 않는다. 그들이 일삼는 것은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경학을 벗어난 올바르지 못한 글들이다.
명나라 문장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일전에 우연히 정초(鄭樵)의 《통지(通志)》를 보았는데, 반고(班固)의 문장을 깊이 배척한 것이 바로 내 생각과 꼭 일치하였다. 반고와 사마천의 문장은 예로부터 아울러 일컬어지고 있지만, 나는 곽광(霍光)이나 조 황후(趙皇后) 등의 열전(列傳) 따위가 벌써 소품(小品)의 뿌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육예를 벗어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이노춘(李魯春)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김문순(金文淳)을 이조 판서로, 이재학(李在學)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김희순(金羲淳)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체직하였다.
김사목(金思穆)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김사목이 즉시 왕명에 응하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경기 감사의 일이 어찌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닌가. 그 직임으로 말하자면 지난번 벼슬과 다름이 없고 그 분수와 의리를 가지고 말하자면 마땅히 경직(京職)을 겸한 직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벼슬한 원로이기 때문에 특별히 명하여 의망해 들인 것인데, 밤이 절반이나 지나도록 나와서 숙배할 뜻이 없다. 그런데도 정원은 죄를 청하지도 않았다. 해당 당직 승지를 아울러 체차하라.
경기 감사 김사목은 광주 유수(廣州留守)에 제수하여 당일로 사조하게 할 것이며, 현임 광주 유수는 체직하여 경기 감사에 제수하도록 하라. 기강이 비록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외직에 보임된 자도 내려가기를 지체하고자 한단 말인가. 만약 다시 미적대거든 과오를 등록하고 처분을 기다리게 할 것이며, 또한 해방 승지로 하여금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게 하라. 경기 감사에게는 이전에 찼던 밀부를 그대로 차고 인수 인계하라고 하유하되, 하유하는 글을 즉시 만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6월 5일 임진
비가 내렸다.
판중추부사 심환지(沈煥之)가 차자를 올려, 약원 제거(藥院提擧)의 직임을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비답하기를,
"옛날 우리 정릉(貞陵)을 복위한 뒤 능에 제사를 올릴 때에 영험스런 비가 많이 내렸으므로 하늘에 계신 영령이 굽어살피신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데 지금 또 온릉을 복위한 60돌을 맞아 제사를 올리려는 저녁에 단비가 주룩주룩 내려 아침까지 많은 비가 왔다. 이 역시 성후께서 내려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8일에 온 비도 천만 다행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온 지역을 두루 적시지는 못했었는데, 오늘은 평지에도 높은 곳에도 낮은 곳에도 두루 내렸고 한강 남쪽 지역과 영남과 호남에까지 많이 내렸으니, 참으로 기쁘고 기쁜 일이다. 겸하여 맡고 있는 내국(內局)의 직임에 대해 지금 우선 체직을 허락한다."
하였다.
6월 6일 계사
홍억(洪檍)을 판의금부사로, 김달순(金達淳)을 진하 부사(進賀副使)로, 남공철(南公轍)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6월 7일 갑오
전교하였다.
"왕후의 본향(本鄕)은 으레 모두 주(州)나 부(府)로 승격시켜 왔다. 거창현(居昌縣)은 단경왕후의 본향인데 연전에 고을의 무슨 폐단으로 인하여 부를 현으로 강등시켰다. 참으로 잘 살피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 도로 부사로 승격시키더라도 비용을 절약하는 방도는 현감일 때의 예를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해당 수령 자리를 영구히 음직 벼슬자리로 삼아도 안 될 것이 없다.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해서 이치를 논하여 적어 올리게 하고, 비답이 내리거든 정관(政官)을 패초하여 개정(開政)을 하고 계하받아 일의 체모를 높이도록 하라."
6월 9일 병신
차대하였다.
서용보(徐龍輔)를 선혜청 제조로, 조종현(趙宗鉉)을 전라도 관찰사로, 김면주(金勉柱)를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6월 10일 정유
예조가 아뢰기를,
"곡산부(谷山府)에 있는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옛 집터에 대하여 관문(關文)을 보내어 해당 도에 문의하였습니다.
지금 곡산 부사 조덕윤(趙德潤)의 첩보(牒報)를 받아보니, ‘노인들과 경내에서 본래부터 살고 있는 강씨(康氏) 성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는 말에 대해서 자세히 물었더니, 부의 관아 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운중방(雲中坊) 임계리(林溪里)에 임금의 장인이 살던 옛 집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연못과 시내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사가 즉시 노인들과 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데리고 달려 가서 살펴 보았더니, 과연 작은 산이 하나 있었는데 옛날에는 신류산(神留山)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당저산(堂底山)이라고 부른답니다. 산 아래 동쪽을 향한 자리가 바로 임금 장인의 옛 집터라고 하였습니다. 산의 왼쪽 기슭 아래에는 주춧돌이 하나 있었는데 길이가 20척이고 앞뒤의 너비가 각각 3척 5촌이며 좌우의 너비가 각각 3척이었습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외문(外門)이라고 하기도 하고 표문(標門)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산의 오른쪽 기슭 밖에는 큰 연못이 하나 있는데 세속에서는 당저연(堂底淵)이라고 합니다. 근원은 고달산(高達山)에서 흘러 나와 물이 고여서 못이 되었는데 깊이는 5, 6장 쯤 되고 둘레는 2, 3백 보입니다. 동쪽으로 흘러 시내를 이루어 굽이돌아 옛 집터 앞을 감싸고 흐릅니다. 주춧돌이 있는 곳에서부터 당저연까지는 2백 84보이며 당저산 아래에서 앞 시냇가까지는 2백 33보입니다. 형국 안의 넓이는 5, 6일 갈이가 넉넉히 되며, 산을 등지고 시내를 굽어보고 있으며 평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왕후의 본가의 집터가 반드시 형국 안의 중심부일 것이라고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였습니다. 용봉(龍峰)이나 용연(龍淵)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비록 전해오는 말을 자세하게 상고할 수가 없지만 주춧돌과 연못과 시내가 뚜렷이 봉우리 아래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으니, 아마도 옛날과 지금의 이름이 달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춧돌에 대해서는, 노인들과 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옛날에는 주춧돌이 두 곳에 짝으로 서 있었는데 중간에 하나가 넘어져 부서졌고 세월이 오래되어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말한 외문이니 표문이니 하는 말들이 그럴 듯하기는 합니다만, 고을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에는 상고할 만한 사적이 없습니다. 강씨의 족보에도 참으로 증거가 될 만한 글은 없습니다. 형국 안에 현재 살고 있는 두 집은 다른 성씨의 사람들이며 강씨들은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왕후의 본가 관진(觀津)은 관향이 상산이고 상산은 바로 곡산이다. 지금 그 집터에 주춧돌이 우뚝하게 있는데 그 길이가 21척이 넘으니 분명히 대대로 살다가 드디어 본관이 된 것이다. 돌기둥도 필시 결혼을 한 뒤에 집을 지으면서 세운 것일 것이다.
대체로 고을의 보고가 매우 소루하나 옛 집터라는 것은 믿을 수가 있다. 더구나 버들잎을 띄워 올린 훌륭한 사적이 야사에 널리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달 글피는 바로 우리 왕후의 생신날이다. 이러한 때에 이러한 글이 올라온 것이 마치 서로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듯하다.
그 옛 터에다가 비석을 세우되 비석에 새길 글을 직접 써서 경건하게 옛 사적을 기록해야 하겠다. 비석의 모양은 선왕조 때의 문소전(文昭殿)의 옛 터와 추모동(追慕洞)에 있는 왕후가 탄생한 옛 터에 있는 비석의 척도대로 하여 해당 도에 내려 보내어 가을에 세우도록 하라. 비각의 규모도 옛 전례대로 짓도록 하라.
또 생각해 보니, 함흥부의 치마대(馳馬臺)에 성대한 사적을 기록해 놓았는데 일찍이 들으니 곡산부에도 치마곡(馳馬谷)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부의 북쪽 7, 8십 리쯤에 있는 가람산(岢嵐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말을 달리던 길이 몇 리나 되게 산 마루에 있는데,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이 바로 옛날에 말을 달리던 그 터라고 하였다. 곡산부에서 올린 첩보에 함께 거론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읍지에 나타나 있지 않고 관문에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또한 감사로 하여금 앞으로 있을 고을 순시 때에 직접 살펴서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1일 무술
장릉 참봉(章陵參奉) 김성태(金聖泰)가 상소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멀리 온릉의 옛일에 감흥이 일어나 작헌례를 거행하였고, 이어서 임금의 장인인 신도공 신수근(愼守勤)에 대해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 이 해가 바로 우리 왕후께서 결혼한 기미년입니다. 지위를 회복하고 능을 봉한 의식이 선왕조 때 이 해인 기미년에 있었고, 임금 장인의 충성을 표창하는 은전을 또 성상의 시대 이 기미년에 내리시니,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나 온 나라가 감동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스러운 조정에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세 훈신(勳臣)의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 그 당시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 세 명의 훈신도 명분(名分)이라는 것은 중대한 것으로서 엄격하기가 하늘과 땅을 범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습니까마는, 오직 자신을 위하는 계책을 서둘다 보니 감히 모후를 폐위하자는 의논을 꺼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윤리와 기강을 전도시키고 의리가 없어지게 만들었으니 그들은 바로 종묘 사직의 죄인입니다. 왕후를 부묘한 뒤에는 그들이 편안하게 묘정에 배향될 수 없는 것은 의리상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선조인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이 을해년에 올린 한 통의 상소는 바로 고심 끝에 피끓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큰 의리를 당세에 펴지 못하고 끝내 저승에서도 풀지 못할 한을 품고 죽고 말았습니다. 신은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을 묘정에서 내치도록 명을 속히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옛날 우리 중종 때에 김정과 박상(朴祥), 두 문간공이 함께 작은 언덕에 올라 왕후039) 를 복위시키자는 봉사(封事)를 올릴 것을 의논하였으며, 그 글이 전달되자 의로운 명성이 궐정을 진동시켰다. 그리하여 남쪽의 선비들이 그 지조를 가슴에 새기면서 그 언덕을 ‘학사(學士)의 대(臺)’라고 이름지었는데, 지금도 그 언덕을 가리키며 찬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대는 김 문간공의 손자로서 왕후를 복위시킨 60돌을 맞아 세 훈신의 일을 극력 논하였으니, 내 마음에 감동이 된다. 이전에도 이런 의논을 한 자가 많이 있었다.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정으로 따져 보거나 나라의 기강과 신하의 분수로 헤아려 볼 때에 누가 옳지 않은 주장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때를 당하여 종묘와 사직을 다시 안정시켰으니, 산이 다 닳도록 물이 다 마르도록 변치 말자고 맹세를 다진 공신들에 대해서는 10대 후손의 죄도 용서를 하는 것이다. 옛날의 어진 신하들이 곧바로 청하지 않았던 것도 대개 은미한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더구나 묘정에 배향하는 문제는 지극히 중대하고 엄격한 일이다. 2백 4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경솔하게 의논을 하는 것은 신중하고 정중하게 하는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문간공 김정과 문간공 박상에게 비록 연전에 시호를 내리고 제사를 내렸지만, 금년에 와서 신도공에게 이미 제사를 내렸으니 이 두 문간공에게도 당연히 제사를 내려야 할 것이다. 예조로 하여금 날을 잡아 제사를 내리도록 하라.
제사를 받드는 후손에 대해서도 김 문간공의 집 후손은 거두어 등용하였으나 박 문간공의 집에 대해서는 고을에서 추천한 자 이외에는 아직 등용한 자가 없다. 도정(都政)에서 초사(初仕) 한 자리를 임시로 군직(軍職)에 붙여 이번 정사에서 후보자로 선정해 들이도록 하라."
6월 14일 신축
평안도 관찰사 한용귀(韓用龜)가 장계하였다.
"자성(慈城)에 개간을 허락한 것이 병진년에 있었으니 경신년에 기한이 만기가 됩니다. 삼천(三川)은 개간을 허락한 것이 갑인년에 있었으니 무오년에 이미 기한이 만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삼천 지역은 정해진 법식대로 올 가을부터 조세를 내야 합니다.
산 중턱 이하의 개간지는 원전(元田)에다 붙여 실지대로 총계를 잡아 조세를 거두는 명목에 첨가해 넣기로 정하고, 그 나머지 산간 지역의 경작지에 대해서는 화전(火田)의 예로 조세를 받고 그 조세로 거둔 곡식은 다른 고을에서 하는 것처럼 모두 해당 고을의 민고(民庫)에 붙여 제반 비용에 쓰도록 하였습니다.
화전의 결복(結卜)을 정하는 문제는 25일 갈이를 1결로 잡는 규례에 따르되 반드시 가을걷이를 한 뒤에 상세히 살펴서 총계를 잡게 하여 소출이 있는 곳과 소출이 없는 곳이 뒤섞이는 폐단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6월 15일 임인
초계 문신(抄啓文臣)들에게 다시 실시하는 시험 및 상사(上舍)의 유생인 생원과 진사들에게 실시하는 제술 시험을 모두 3일 동안 연달아 지어 올리게 하고 상이 몸소 고과하여 점수를 주고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6월 17일 갑진
예문관 제학 정범조(丁範祖)를 체직하고 이병정(李秉鼎)을 대신 임명하였다.
6월 18일 을사
시임 대신, 원임 대신, 규장각의 신하, 의궤 도감 당상을 불러 접견하였다.
유생들의 제술 시험을 명정전에서 시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올해를 경축하는 마음으로 과거 시험을 시행하여 인재를 뽑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경사날을 보다 뜻있게 기념하기 위한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 크게 일을 벌이면, 검소하게 하시려는 자궁의 뜻을 혹시라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것이 될까 염려되어 그 동안 망설여왔던 것이다. 내일의 제술 시험은, 바로 일차 유생(日次儒生)들에게 실시하는 시험인데, 강을 하고 그 강한 것으로 제술 시험을 보이도록 하라. 그리고 단 한 명만을 뽑는다면 이것이 어찌 이날의 경사까지 겸하여 기념하는 뜻이겠는가. 마땅히 두 사람을 뽑아야 하겠다. 이러한 사실을 미리 여러 유생들에게 알리도록 하라. 날씨가 이처럼 더우니 명정전 동쪽과 서쪽의 월랑(月廊)에서 시험을 치도록 하라."
하였다. 1등을 차지한 진사 조석정(曺錫正)과 생원 이현상(李顯相)에게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6월 19일 병오
도목 정사를 시행하였다. 【 이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이조 참의 이노춘(李魯春), 병조 판서 이재학(李在學)이 정청에 나왔다.】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7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93면
【분류】인사(人事)
전교하기를,
"별겸(別兼)은 아니더라도, 옛날에는 사간원과 사헌부에 각각 겸춘추(兼春秋)가 있어서 벼루를 가지고 경연에 참여하였으니, 규례가 곧 그러하였다. 이름을 별겸이라고 한 것은 대간의 직함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인데, 집에 있는 것을 당연한 규례라고 여기니 참으로 고루한 생각이다. 신칙하지 않을 수 없으니 별겸 춘추(別兼春秋) 장령 홍낙유(洪樂游)는 고산리 첨사(高山里僉使)에 제수하고, 별겸춘추 장령 서유문(徐有聞)은 고성 첨사(古城僉使)에 제수하여 오늘 중으로 하직 인사를 마치고 떠나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뒤에 홍낙유를 결성 현감(結城縣監)에 제수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승지 후보를 적은 이전의 망단자에 대해서 사심을 부려 취하고 버리고 한 일이 근래에 없지 않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이조 판서와 이조 참의가 굳세고 과감한 지조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신칙하는 하교를 내렸는데도 오히려 이러하니 오늘날의 일을 알 만하다고 하겠다. 게다가 이 더운 때에 정사를 하자니 응대하기가 매우 괴로워서 거의 오전이면 일을 마친다. 그런데 근래 승지 후보자를 적은 이전의 망단자를 써서 들인 것을 보면, 의망을 정지시키는 법을 겨우 금지하자 의망에서 빼버리는 법이 다시 나왔다. 이른바 이름 밑에 붙이는 찌는 격려시키는 데에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고 한갓 혼잡스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다만 마음을 다해 거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써서 들인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전에 보았던 섬을 보고 싶어서 이런 무엄한 짓을 한 것인가. 우선 속히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문순과 참의 이노춘에게 물어보았더니, ‘신들이 어리석고 황망하여 금지시키는 신칙이 있었음을 전연 알지 못하였습니다. 법이 중요하다는 것만 알았지 엄한 꾸중이 있었다는 것은 유념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전의 후보자 망단자에서 찌를 제거할 때에 남겨두기도 하고 떼어버리기도 하였으니 스스로 왕명을 소홀히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엄한 전교를 받고 너무나 두려워 삼가 전하의 처벌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제는 제대로 되었으니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0일 정미
자궁(慈宮)께 음식 잔치를 올렸다. 자궁의 생신은 18일이었는데 사적인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이 날로 물려 시행한 것이다.
우의정 이시수를 정리의궤청 총리 대신으로 삼았다.
정리의궤청 총리 대신 및 여러 당상들을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정리의궤청 총리 대신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6월 21일 무신
영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지방관을 통하여 상소를 올려, 겸대하고 있는 약원(藥院)의 직임을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비답하기를,
"삼복 더위가 이토록 심하지만 근래에는 더욱 건강하다. 겸대하고 있는 직임을 사직하는 일은 조정의 체모가 달려 있는 것이므로 매양 윤허하지 않을 수만은 없다. 비록 억지로라도 올라오게 하고 싶지만 이런 무더위에 어찌 강요할 수 있겠는가. 청한 대로 허락한다."
하였다.
이서구(李書九)를 이조 참판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진향사 구민화(具敏和)가 연경(燕京)에서 치계하였다.
"5월 11일 아침에 황제가 태묘에 나가 제사를 올릴 때에,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신들이 서장관 조석중(曺錫中)과 함께 오문(午門) 밖에서 배웅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진향(進香)할 날짜는 13일로 윤허가 내렸습니다. 당일에 신들이 일행 중의 정관(正官)들을 거느리고 각자 천담복(淺淡服)을 입고서 동쪽 장안문(長安門)을 통하여 관덕전(觀德殿)의 빈소(殯所)에 들어갔습니다. 전각 앞 두 번째 문 밖에 설치해 둔 장막에서 잠시 쉬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황제의 동생 17왕 영린(永璘)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사신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는 그대로 통관을 데리고 장막 밖에 와서 만나기를 청하였습니다. 길에서의 접견이 창졸간에 생긴 일이고 예를 차리기도 어려워 국궁(鞠躬)만 하고 그쳤는데, 17왕도 손을 들어 서로 읍(揖)을 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리고 통관에게 신들의 벼슬을 물어보고는 가버렸습니다. 따르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황제의 명으로 제사를 대신 지내기 위해 왔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묘시 정각에 우리가 진향할 때가 되자 홍려시 관원이 신들을 인도하여 절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정전(正殿)의 앞문을 열고 의식대로 예를 행하였습니다.
예부가 주달하여 비준받은 의식 절차 한 통은 별단으로 베껴 적어 올립니다.
정문에서 전각까지는 대략 수십 보쯤 되었습니다. 뜰의 좌우에는 41개의 음식상이 차려져 있었으며 또 술병 21개가 작은 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누런 일산 하나를 술상 앞에 세워 놓았고 양쪽 옆에는 용무늬가 그려진 초가 타고 있었습니다. 전각 위의 정면에는 좌우로 흰 장막을 설치하였고 가운데에는 수놓은 누런 장막을 드리웠으며 누런 장막 왼쪽에 별도로 작은 의자를 놓고 누런 천을 깔았는데 금색 위패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가운데 글자가 있었으나 멀어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앞에 누런 상을 차려 놓았고 난간 밖에 향로 따위를 배치해 놓았는데 제문을 읽거나 분향을 하는 일을 모두 그 아래에서 하였습니다.
횃불 화로를 얹어두는 상은 전각의 대문 밖 10여 보쯤 떨어진 곳에 설치하였는데, 모시와 명주 및 만 권이나 되는 종이돈을 두고 누런 천으로 덮어 놓았습니다. 상의 넓이는 13, 14아름이 넘었고 쌓여 있는 것의 높이도 두 길은 넉넉하였습니다. 그 앞에 향상(香床)과 술단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의식을 마치자 제문을 읽는 관원이 제문을 받들고 전각 안에서 나오고 낭중 두 사람이 용그림 촛불을 거두어 앞에서 인도하고 갔는데 17왕 이하가 곡을 하며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신들로 하여금 그 뒤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횃불 화로가 있는 곳에 이르러 제문과 용그림 촛불을 횃불 화로 상 위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부 상서 덕명(德明)이 꿇어앉아 술잔을 올린 다음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이렇게 세 번을 하였습니다. 이어서 횃불이 있는 상에서 불을 피웠는데 연기와 불꽃이 공중으로 타올라 한참 동안이나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부 상서 기균(紀均) 및 시랑 다영무(多永武)를 보니, 서로 돌아보며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었는데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습니다.
17왕이 보고를 하기 위해 대궐에 들어가면서 신들을 향하여 용모를 가다듬고 작별을 하고는 가마를 타고 갔습니다. 신들도 관소로 돌아왔습니다.
관소에 돌아오자 광록시(光祿寺)에서 제사 음식 4상을 신들에게 보내 왔습니다. 상마다 수십 개의 음식 그릇이 놓였고 마른 떡, 여러 가지 사탕, 양의 다리 등 여러 종류와 우리 나라에서 올린 과일 등이 담겨 있었는데 4개의 상이 모두 같았습니다.
19일에는 신들이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정관을 거느리고 새벽에 동화문(東華門) 밖에서 배웅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다음날에 예부가 상을 내리는 데에 대한 주본(奏本)을 작성하여 올렸고 내각(內閣)에서 등본을 만들어 군기처(軍機處)로 보냈는데, 21일에 비로소 주달되어 23일에야 알았다는 비준이 내렸습니다.
27일에 황제가 관덕전 빈소에 나갔는데, 신들이 또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궁궐로 돌아오는 때에 맞춰 신무문(神武門) 밖에서 마중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황제는 흰옷을 입고 누런 덮개를 씌운 보연(步輦)을 타고 북상문(北上門)을 통하여 돌아왔습니다. 황제가 신들이 마중하는 곳에 이르러 몸을 돌려 내다보고 이르기를, ‘너희들이 너희 나라에 돌아가거든 안부를 묻는 뜻을 고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신무문을 거쳐 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신들도 관소로 돌아왔습니다.
태상 황제의 빈소를 옮기는 날짜를 9월 2일로 잡아 이미 아뢰어 비준을 받았고 장례 날짜는 9월 15일로 정하였다고 하였는데 문적이 없어서 정확한 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마중하는 의식을 행할 때에 압반(押班) 예부 시랑 다영무에게 물어보았더니, ‘문적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완전하게 결정된 날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28일 이른 아침에 신들이 일행 중의 정관을 거느리고 오문(午門)에 나가니, 문밖에 누런 상을 설치하고 그 위에 시호를 반포하는 조서를 올려 놓았습니다. 홍려시 관원이 ‘세 번 꿇어앉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라.’고 외치니 예부 관원이 신들을 인도하여 예를 행하였습니다. 예부 상서 기균이 꿇어앉아 조서를 전해주었고 이어 상품을 내렸습니다. 또 세 번 꿇어앉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 곧 물러나왔습니다. 상마연과 하마연은 돌아온 동지사 행차 때의 전례를 따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회답하는 자문 13통은 예부에서 작성하여 보냈고 조서(詔書)의 인본(印本)은 전에 이미 봉하여 올렸으므로 단지 이번 행차에 부쳐보내는 자문만 별단으로 적어 올립니다. 신들 일행은 당일 오후에 바로 출발하였습니다.
예부가 마련한 진향하는 의주는 이러합니다.
‘예부가 아룁니다. 조선국에서 보낸 사신 구민화 등이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 앞에 나아가 제사를 올리는 일입니다. 흠천감에서 날을 잡아 5월 13일에 예를 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날 고종 순황제의 행차에 따른 의장을 모두 설치하되, 공부(工部)가 관덕전의 두 번째 문 밖의 서쪽에 장막을 치고 궤안을 두고, 횃불을 놓을 상을 횃불 놓는 자리에 설치합니다. 제문을 올려 놓을 상은 빈궁의 서쪽 처마 밑에 설치합니다. 축문을 읽는 관원이, 청나라 문자로 번역한 조선국의 제문을 삼가 받들어 그 상 위에다 올려 놓습니다. 왕 이하에서 봉은 장군(奉恩將軍) 이상까지와 공작, 후작, 백작 이하에서 만주족과 한족 문무관 4품 이상이 모두 모여 용모를 가다듬고 차례대로 섭니다. 조선 사신들은 관모(官帽)를 쓰고 흰옷을 입고 각대(角帶)를 띠며, 홍려시 관원이 인도하여 오른쪽 끝에 세웁니다. 내무부(內務府) 관원이 제사 음식물을 진설한 다음, 조선에서 올린 향촉에 불을 붙이고 홍려시 관원이 조선 사신들을 인도하여 의장의 남쪽으로 가서 북향하여 서게 합니다. 그리고 명찬관(鳴贊官)이,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라.」고 외칩니다. 예를 마치면 본래의 반열에 물러나와 서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도하는 의식을 행합니다. 음식을 올리기를 기다렸다가 음식 올리는 예가 끝나면 축문을 읽는 관원이 누런 상 앞에 나아가 제문을 받들고 난간 밖 한 가운데에 가서 위를 향하여 섭니다. 내무부 관원이 상을 계단 아래의 가운데에 올리고 나오면 제주 대신(祭洒大臣)이 상 앞에 나아가 위를 향하여 섭니다. 홍려시 관원이 조선 사신들을 인도하여 그대로 예를 행하는 곳에서 북향하여 서게 합니다. 축문을 읽는 관원이 무릎을 꿇으면 예부의 당상관 두 명이 무릎을 꿇고 제문을 펼칩니다. 제주 대신이 모두 모이게 하고 왕공과 관원 및 조선 사신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애도를 하며 잠시 뒤에 그칩니다. 축문을 읽는 관원이 제문을 다 읽고 다시 누런 상 위에다 갖다 놓으면 처음과 같이 애도합니다. 제주 대신이 술을 세 잔 올리는데, 매번 올릴 때마다 한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합니다. 모두들 따라서 예를 행하고 조선 사신들도 또한 따라서 예를 행합니다. 예를 마치고 일어나면 홍려시 관원이 조선 사신들에게는 다시 두 번 무릎을 꿇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게 합니다. 그 예가 끝나면 물러나와 원래의 반열에 섭니다. 음식상을 거두기를 기다렸다가, 거두는 것이 끝나면 축문을 읽는 관원이 축문을 받들고 횃불이 있는 곳으로 나갑니다. 이렇게 하여 애도하는 의식이 끝나면 홍려시 관원이 조선 사신들을 인도하여 나가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갑니다.’
이런 내용을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6월 22일 기유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그저께 자궁께 음식상을 올리는 예식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마음을 봉양하는 것과 음식 잔치로 봉양하는 것이 모두 극진히 갖추어졌습니다. 자궁께서 더욱 건강하시고 전하의 효성이 더욱 빛나시니 신하와 백성들의 경사스러움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축하는 나의 마음으로서야 어찌 정성과 예법을 극진히 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자궁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잔치를 차려 올려야 한다는 마음보다 항상 앞섰기 때문에 자궁의 겸양의 덕을 본받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항상 ‘부모가 나이드신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는 말을 반드시 하는데, 나는 두려운 마음이 기쁜 마음보다 항상 많다.
을묘년에 수원에서 음식상을 올릴 때로부터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거행하였다. 그래서 을묘년 이후로는 생신날을 만날 때마다 유사에게 시키지 않고 이 정리소에서 마련해 준비하여, 자궁의 장수를 축원하는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지난해의 규례에 따라 음식상을 올린 것이다. 자궁은 변함없이 건강하시고 시력과 정신은 내가 따르지 못할 정도이다. 평소에 경서나 역사책에 나오는 구절 및 고사에 대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간혹 자궁께 물어보는 일이 많이 있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에도 한밤중까지 책을 읽으시고 또 등잔불 아래에서 1백여 장이나 되는 책자를 손수 쓰셨다. 정력이 이처럼 점점 왕성해지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로서 내가 마음속으로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는 바이다.
지금 경들을 접견하였으므로 이 기뻐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였다.
윤광안(尹光顔)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6월 24일 신해
경모궁을 참배하였다.
6월 25일 임자
직제학 이만수(李晩秀), 검교(檢校) 직각(直閣) 심상규(沈象奎)와 김근순(金近淳)을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 여름에는 삼복 더위가 혹심하지만 나는 정사를 보는 여가에 책을 보는 공부를 한 번도 그만둔 적이 없다. 초계 문신들은 요즈음 하는 일이 없는데 이런 여가에 강독을 하거나 작문을 하거나 해야 한다. 과연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거행하지 못한 친시(親試)가 아직도 여러 차례나 많이 남았는데, 과거 시험의 법식에 맞춘 틀에 박힌 형식의 글을 짓는 것은 다만 한때 재주나 겨루고 대략 책임이나 때우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착실한 공부가 아니고서는 길이 진취하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새로 자라나는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갓 실속없는 화려한 문장이나 짓는 데에 매달리게 하는 것은 인재를 기르는 방도가 전혀 아니다.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에서 고사(故事)를 써내는 규례가 있는데 이제 이 규례를 따르게 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번 4월치의 친시부터는 ‘고사에 대해 적어내라.[故寔]’는 제목으로 출제하되 그 규정을 정해 날짜를 넉넉히 주어 깊이 연구해서 자기의 생각을 진술하게 하고 각자 책자로 만들어 올리게 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조목별로 비답을 내려서 우열을 고과해서, 점수를 주거나 상벌을 내릴 바탕을 삼으려고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여러 문신들이 마땅히 쓸모있는 학문에 마음을 두게 될 것이고 나라를 운영하는 글에 힘을 쏟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 이익되는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뒷날 등용할 인재를 길러두는 효과도 응당 적지 않을 것이니, 일거 양득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런 내용을 여러 문신들에게 상세하게 알려서 모두가 알게 하라.
올해의 친시는 모두 이것으로 나누어 시행하되, 그 시험 규정과 횟수에 대해서는 경연에서 물러간 뒤에 한 통의 규례를 작성하여 들이고, 도로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여러 문신들에게 일일이 써서 주도록 하라.
대개 옥당과 춘방에서 고사를 써서 올리는 것은 그 법식이 또한 같지 않다. 옥당은 강론한 내용을 부연하고 뒤에다 ‘삼가 상고하건대[謹按]’라는 말로 임금이 근면하기를 충고하는 뜻을 덧붙이고, 춘방은 의심나는 내용이나 글뜻을 변론하고 이어서 ‘우러러 여쭙건대[仰質]’라는 말로 내용에 대해서 토론하는 뜻을 붙인다.
이번에 글을 지어 올리는 것은 ‘삼가 상고하건대’와 ‘우러러 여쭙건대’를 참작하여 섞어 사용하도록 하라.
경서로는 사서(四書), 삼경(三經), 삼례(三禮), 《춘추(春秋)》를, 역사로는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당감(唐鑑)》, 《송명신록(宋名臣錄)》을, 자(子)와 집(集)으로는 송나라의 다섯 학자들의 글과 육선공(陸宣公)의 주의(奏議)를, 우리 나라의 글로는 《보감(寶鑑)》, 《오례의(五禮儀)》, 《문헌비고(文獻備考)》 등의 책을 모두 달을 나누어 차례를 배정하되 어느 달에 어느 책을 할 것인지와 어느 차례에는 몇 조항으로 할 것인지를 또한 잘 의논해서 참작해 정해서 모두 적어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만수 등이 아뢰기를,
"지금 이 성상의 하교는 세상에 처음 있는 일로서, 여러 문신들에게는 천년에 한 번 있는 행운의 기회가 될 뿐 아니라 신들 또한 함께 누리는 이 크나큰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적어 올리는 많은 책자를 읽으시자면 수고로움과 소비되는 정력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잠시도 안일하게 지내지 않으려고 해서이다. 참으로 이른바 ‘내가 스스로 즐기는 일은 피로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니, 여러 문신들이 이 뜻을 안다면 털끝만큼이라도 태만하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각이 시험의 조목과 규례를 다음과 같이 적어서 올렸다.
"내각에 강론하고 제술하는 문신을 둔 성상의 뜻은 구두나 익히고 글재주나 겨루며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나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그들의 식견을 넓혀 일에 적용하게 해서 이로써 전하의 계책을 빛나게 하고 고문에 대비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며, 지식을 연마하고 학업을 완성하게 하여 한 시대의 쓸 만한 인재를 길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시의 각종 제술 시험으로는 오히려 그들의 재능을 다 성취시키기에는 부족합니다.
올해 4월치의 친시부터 특별히 ‘옛 고사에 대해 적어내라.[故寔]’는 제목으로 문제를 내어 지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대개 춘방과 옥당에는 모두 고사가 있는데, 송나라 때 강독관이 강독이 없는 날에는 각자 한(漢)나라의 고사 두 가지씩을 적어서 올렸는데 이 뜻을 본받은 것입니다.
옥당은 강론한 내용의 뜻을 부연하고 이어서 ‘삼가 살피건대’라는 말로 임금을 면려하는 내용을 적게 하고, 춘방은 의심나는 곳을 깊이 탐구하고 글뜻을 연구하여 쓴 다음 ‘우러러 여쭙건대’라는 말로 거듭 풀이하여 토론하는 뜻을 덧붙이게 하고 있습니다. 홍문관에서 당직을 서는 날이나 서연에서 시강을 하는 여가에 조목별로 적어 올리게 하고 특별히 비답을 내리시어, 위로는 빛나는 성상의 학문을 돕게 하고 아래로는 성상을 보좌하는 정성을 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법은 경연보다 간략하지만 분석은 더욱 상세하고 문장 형식은 차자나 상소와는 다르지만 깨달음을 주는 데에는 더욱 절실합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면 서로의 마음에 믿음이 있게 되고, 경서나 역사에서 비유를 끌어온 글은 거울삼아 본받기에 더없이 요긴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거룩한 선대 임금들의 원대한 계책이었고, 우리 성상께서 세자로 있을 때부터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대 임금들의 뜻을 우러러 이어받아 묻기를 좋아하고 중도를 택하여 억만년토록 정치를 잘해 나갈 근본으로 삼은 것입니다. 선배 명유 석학들의 찬란했던 학문과 그들에 대한 임금의 융성한 대우는 홍문관에 보관하고 있는 책들을 상고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번에 내는 시험 제목은 명망있는 인재를 길러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만약 그들이 제의한 말이 성상의 마음에 부합되면 장차 실학의 바탕을 삼을 것임은 물론 실제로 실행할 수도 있을 것이니, 한나라와 당나라의 고사를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적어 내게 하던 송나라의 제도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 문신들에게는 천년에 한 번 있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경서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주례》, 《의례》, 《예기》, 《춘추》로, 역사는 《사기》, 《전한서》, 《후한서》, 《당감》, 《송명신록》으로, 학자들의 글로는 주자(周子), 장자(張子), 두 분의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글로, 집(集)은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로, 우리 나라의 책은 《국조보감》, 《오례의》, 《문헌비고》, 《경국제전》, 《대전통편》으로 하되, 차례에 따른 조항 숫자는 편의에 따라 분배할 것입니다.
고사와 실지 사실, ‘삼가 상고하건대’와 ‘우러러 여쭙건대’로 나누는 일은 제술하는 자에게 맡겨, 글을 보고 의견을 기술하여 성상의 비답을 기다리도록 할 것입니다.
제술해 올리게 할 조건은 아래에 나열합니다.
1. 《대학》 1차, 《논어》, 《맹자》, 《중용》 1차, 《시전》, 《서전》, 《주역》 1차, 《의례》, 《주례》, 《예기》 1차, 《춘추》, 《사기》, 《전한서》, 《후한서》 1차, 《당감》, 《송명신록》, 《육선공주》의 1차, 주자(周子), 장자(張子), 두 분의 정자(程子), 주자(朱子) 1차, 우리 나라의 고사 1차로 하여 분배하되, 시행하지 못한 것은 해당 연도의 각 달별로 지어올리게 할 것입니다.
1. 경, 사, 자, 집을 막론하고 ‘삼가 상고하건대’라고 쓰는 것은 옥당에서 해오던 전례를 따라, 먼저 본문을 위에 쓰고 한 글자를 낮추어서 ‘신은 삼가 상고하건대[臣謹按]’라고 쓰고, ‘우러러 여쭙건대’라고 쓰는 것은 춘방에서 해오던 전례대로, 본문과 자기의 견해를 생각나는 대로 종합하여 정리하고 조항마다 각각 한 편의 글을 완성하되, 한결같이 강의를 할 때에 조목별로 대답을 하는 전례에 따라 책자로 만들어서 써서 올리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첫째 줄에 ‘아무 달의 친시’라고 쓰고 그 아래에 관직과 성명을 쓰게 할 것입니다.
1. 경, 사, 자, 집에는 각기 ‘삼가 상고하건대’와 ‘우러러 여쭙건대’라는 구분을 두고, 고사와 실제 사실에도 ‘삼가 상고하건대’와 ‘우러러 여쭙건대’라는 구분을 둡니다. 이는 틀에 박힌 과거 시험의 문체와는 다른 것으로서, 오로지 성현의 글의 뜻을 강론하여 밝히고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를 운영하는 실제적인 일에 힘쓰게 하고, 고식적인 문자로 부질없이 화려하게 수식이나 하는 일을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사(逸史), 야사(野史)나 명현들의 문집도 널리 상고하고 인용하여 옛일을 끌어다 오늘날의 거울로 삼게 할 것입니다.
1. 차례마다의 각 조항에 ‘삼가 상고하건대’와 ‘우러러 여쭙건대’를 고정적으로 정하지 말고 매 조항마다 분배하여 각각 다른 종이에다 적어서 비답을 내리기에 좋게 할 것입니다.
1. 해당 차례의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자는 재시험을 보이지 말고, 다른 달치로 해당 달치를 옮겨 계산하여 해당 연도 안에는 한 달에 한 차례씩에 준하는 시험을 반드시 거치도록 할 것입니다.
1. 글의 찌를 뽑고 점수를 계산하는 것은 차례마다 비답을 내린 뒤에 품의하여 결정할 것입니다. 매년 시행하지 못한 달치의 시험은 각 달마다 상응하는 시험을 치게 하고 그런 뒤에 여러 문신들이 지은 글을 분류하여 각각 책으로 엮어서 성상께서 열람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할 때에 조항에 따라 대답을 하는 규례대로, 성상의 비답하는 글 아래에다 추려넣을 것입니다."
전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에게 서용하지 않는 벌을 추가로 내렸다.
전교하기를,
"이번에 이조가 추가로 써들인 세초(歲抄)를 보니 일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일 뿐만이 아니다. 비록 낙점을 해 내리려고 해도 죄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전에 등급을 나누어 처분하였던 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전례에 견주어 써서 내릴 수 있겠는가. 어제 묘당에서 초기를 올려, 수정해야 한다고 예사롭게 청한 것은 상세히 살피지 못한 흠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례없는 문서는 낙점을 해서 내리거나 써서 내릴 수가 없다. 이 문서를 해당 도에 도로 내려보내도록 하라. 서울의 세초는 다시 첨부하여 들이도록 하라.
나라의 큰 정사가 출척(黜陟)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세초가 관계되는 바는 지극히 엄중한 것이니, 해조의 당상을 파직만 시킨 것은 매우 가벼운 처벌이다. 서용하지 않는 벌을 추가로 시행하도록 하라.
이 뒤로 한 번이라도 잘못 조치하는 일이 있으면 이조의 수석 당상에게는 법을 어긴 죄율을 적용한다는 내용을 해방(該房), 해부(該府), 해조(該曹)의 규례집에 적어넣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6일 계축
전 전라도 관찰사 이득신(李得臣)이 아뢰기를,
"호남의 습속은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그릇이나 옷을 남보다 낫게 하려고 힘쓰고 있는데, 관혼 상제인 경우에는 더욱 한도가 없습니다. 이렇게 점점 물들어가고 있으니 폐해가 갈수록 많아집니다. 신이 본도에 재임할 당시에 엄하게 금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습속이 이루어진 지가 오래되어 변화시켜 고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영읍(營邑)에 관문을 보내 신칙하여, 무릇 복식과 혼례와 상례에는 차라리 검소하게 할지언정 사치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욱 깨우쳐 주게 하고, 이러한 내용을 규정으로 만들어서 실제적인 효과가 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또 아뢰기를,
"호남의 올해의 가뭄은 지난해와 다름이 없었는데도 모내기를 갑절이나 많이 한 것은 모두가 지난번에 제방에 대하여 신칙을 한 결과입니다. 대개 지방의 토호들과 간사한 백성 가운데에는 금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제방 안에서 함부로 경작을 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 폐단을 따져보면 이익은 하나이고 폐해는 백입니다. 그 가운데에 이미 경작지를 측량하여 장부에 올려 조세를 납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거론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새로 개간한 것과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긴 것에 대해서는 즉시 도로 물려서 예전대로 복구하고 하나 하나 물길을 뚫으라는 뜻으로 묘당으로 하여금 관문을 띄워 엄하게 신칙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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