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52권, 정조 23년 1799년 7월

싸라리리 2025. 8. 1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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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정사

전교하였다.
"대향(大享) 때 제거(提擧)를 들어가게 한 것은 각실(各室)에서 제례를 행할 때 협률랑(協律郞)의 앞에 서서 제사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제조 김문순(金文淳)을 교체시키고 황승원(黃昇源)을 제수한 뒤에 그를 패초(牌招)하여 재숙(齋宿)하도록 하라. 춘추 대향(春秋大享)은 침전(寢殿)의 제향도 있는데, 도상(都相)040)  이 만일 헌관으로 위임되었을 경우에는 승지가 제5실의 술잔을 놓아둔 곳인 협률랑 자리 앞에 서 있기를 태실(太室)에서 지내는 대향의 규례와 같이 한다는 것으로 본서(本署)041)  에 분부하여 해방(該房)과 해조(該曹)의 장고(掌故)에 기록하도록 하라."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의 추향에 쓸 향과 축문을 직접 내주었다.

 

태묘 추향의 제관들에게 제호탕(醍醐湯)042)                  과 환약을 내려보내주고 전교하기를,
"금년의 태묘 추향은 내가 직접 지내려 했다가 그대로 못하지만 걱정 되고 그리는 마음이야 어찌 감히 조금인들 늦출 수 있겠는가. 날씨가 또 이처럼 무덥기는 근래에 드문 일이다. 여러 제관들이 나를 위해 대신 수고하는 것을 생각하여 변변치 않은 것으로나마 위로해주는 뜻으로 이 약물을 내려보내 더위를 씻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으니, 여러 집사들과 나누어 먹을 것이며 아래로 춤추는 자들과 악공들까지 빠짐없이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나의 이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향을 받기 바로 전날 밤부터 단비가 개이더니 제삿날 저녁에는 한층 더 맑았다. 운관(雲觀)의 택일관(擇日官)에게 관상감으로 하여금 높은 품계에 해당하는 급료를 주게 하도록 하라. 요즘같은 무더위에도 오늘밤은 날씨가 그다지 덥지 않아 제물이 다 정결하고 제례가 예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니, 천만다행이다. 헌관과 사헌부 감찰 등 지영(祗迎)하는 반열에서 처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용서하도록 하라."

 

7월 3일 기미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판으로, 이노춘(李魯春)을 이조 참의로, 송전(宋銓)을 사헌부 대사간으로, 이득신(李得臣)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7월 4일 경신

김한동(金翰東)을 사헌부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5일 신유

정언 임업(任㸁)의 상소로 인해 전교하기를,
"선대왕께서 수라를 물리치고 대궐문에 나오셨을 때 내리신 수교(受敎)가 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당시 관원들이 올린 상소문은 사고(史庫)에 보존되어 있고 그 내용이 《정원일기》에 그대로 적혀 있다. 그 이후 4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상소문 등의 문자에 감히 이잠(李潛) 두 글자를 들먹이지 못하게 했는데, 그것은 위로는 수교를 따르고 아래로는 관원들의 상소를 징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시골뜨기 한 대간의 상소문을 보니 그 어구를 함부로 쓰고 있다. 지방의 신진이라면 혹시 그와 같은 사정을 모를 수 있겠으나 정원에 있는 승지들이 한 마디도 그에 관해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으로 볼 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지금 승지들이 스스로 고백한 말을 들어본 결과 그 내막은 사실 지난날 수교와 관원들의 상소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동부승지의 경우는 먼 지방에서 올라왔으므로 혹시 그럴 법도 하지만 그 나머지 여러 사람들이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모르고 범한 죄이거나 알고 일부러 범한 죄이거나 간에 그 죄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으나 곧장 해당한 법조문을 적용하는 것은 모호한 처분에 가깝고 자꾸 분부를 내리는 것도 나라의 기강에 관계된다.
승지 이집두(李集斗)·정상우(鄭尙愚)·이경운(李庚運)·심상규(沈象奎)·이노춘(李魯春)·유악주(兪岳柱) 등을 우선 의금부에 넘겨 잡아가두고 즉시 엄중 문초하여 구두 공술을 받아서 그 내용을 적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임업의 상소문은 내려보내지 않았다.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과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익모(李翊模)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6일 임술

김조순(金祖淳)을 이조 참의로, 김재찬(金載瓚)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7월 7일 계해

의금부가 아뢰기를,
"전 승지 이집두(李集斗) 등의 구두 공술에 의하면, 그들은 미련하고 어두워 선대왕의 수교와 관원들의 상소문에 관한 사실을 전혀 몰라서 오늘 대간의 상소문에 금기 사항을 범한 어구가 있었는데도 잘 알아보아 물리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판부하기를,
"수교는 비길 데 없이 엄중한 것이니 어느 것은 가볍고 어느 것은 무겁다고 감히 구별할 것인가마는 그 당시의 수교로 말한다면 엄중한 것 중에서도 한층 더 엄중하여 문자속에 감히 거론할 수 없는 점이 있고, 게다가 분명히 게시한 처벌에 관한 법조문은 또한 신하로서 감히 받들어 듣지 못할 분부였다. 요즘 사람들이 아무리 전고에 어둡다고는 하나 경이나 사대부의 반열에 있는 자들이 모두 전혀 모른다 하니, 모르는 것도 죄가 되고 그로 인한 수치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연전에 중신(重臣)의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사관(史館)과 당후(堂后)043)  에 보관된 문서를 조사해내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오래된 전고는 모른다고 핑계댈 수 있겠으나 근래의 일까지도 감히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공술을 가지고 섣불리 처분을 내릴 수는 없으니 다시 구두 공술을 받도록 하라. 그들 가운데 유악주(兪岳柱)는 옛날 전고를 모를 뿐만 아니라 근래의 일도 필시 듣지 못했을 것이니, 우선 보방(保放)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다시 공초를 받은 것을 가지고 아뢰니, 판부하기를,
"재상의 반열에 올라 하대부의 지위에까지 이른 자가 처음 공술에서 모른다고 말을 하고 지금 공술에서도 못 들었다고 말을 하니, 어찌 조금도 가당치 않은 말로 공초를 바친단 말인가. 하지만 그 말대로 믿을 수 밖에 없다. 유악주 등과 함께 특별히 용서하여 풀어주되, 그 당시 찾아낸 수교와 관원들의 상소문의 대본을 내주어 우선 본부(本府)에서부터 공문에다 기록해두며 정원과 삼사(三司)에서도 삼가 기록해 두도록 분부하라. 여러 죄수 중에 이노춘(李魯春)은 공술한 말이 너무 눈에 걸린다. 중신의 문제와 관련된 갈등은 그가 용서받고 돌아간 지 몇해 뒤에 있었던 일이니, 비록 시골에 묻혀 있었다 하더라도 감히 이런 말로 핑계를 삼을 수 있겠는가. 여러해 동안 밤낮으로 함께 지냈던 관리들이 모두 듣지도 알지도 못한다고 하는 것을 어찌 꼭 이 죄수에게만 추궁할 수 있겠는가마는 공술한 말이 무엄하므로 처벌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계속 옥에 가두어두고 하교를 기다려 다시 추고하라."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김한동(金翰東)이 상소하기를,
"엊그제 정언 임업(任㸁)의 상소문을 도로 거두어들이고 상소 대개(上疏大槪)를 즉시 내주었으므로 신은 그가 말한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나 다만 전교 속의 두 글자044)  를 가지고 보건대, 그가 수교(受敎)를 어겼다는 것을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 이것이 얼마나 큰 의리와 관계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예사롭게 거론하였으니 정말 너무도 무엄합니다. 게다가 또 선대왕께서 대궐문에 나오셔서 신칙하신 분부가 애절하고 엄중하였으므로 그 이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감히 또 그에 관해 언급하는 자가 없었는데,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렇게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비록 남을 무함하는데 급급한 소치이긴 하나 결국 알고서 죄를 범한 사정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시골 사람의 무지한 짓으로 치부해버리고 그 관계가 극히 중대한 사정은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전 정언 임업의 본 상소문을 빨리 내려보내 중외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죄를 범한 사유를 환히 알게 하고 우선 그에게 사판에서 삭제하는 벌을 적용하소서.
그리고 신은 지난번의 일에 대해 안타까워 한숨을 쉬며 마음을 진정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전 교리 박길원(朴吉源)의 상소문 문제입니다. 처음 회자(會座)하였을 때 갑자기 들어가 제멋대로 독단한 자체가 이미 시호를 논의하는 체모를 잃은 것이며, 그 후 해명하는 소장은 더욱 해괴하여 ‘고 상신의 충성에 대해서는 심규로(沈奎魯) 한 사람만이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아, 고 상신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이 한평생 견지한 것은 천지를 받쳐주고 우주에까지 뻗어나가 도저히 소멸시킬 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 동방에 사는 백성으로 약간이나마 지식이 있는 자라면 어느 누가 그 충성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길원의 무리만은 몰랐습니다. 그 자가 아무리 무지할망정 그래도 타고난 본성을 지녔는데 어찌 감히 이럴 수 있겠습니까.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에 젖어들어 의리가 중한 것을 생각지 않고 남을 모해하는 작태가 버릇이 되어 충성과 역적의 구분을 돌아보지 않은 결과 아무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대로 계속 나간다면 조정이 안정될 날이 없을 것이고 세상일이 진정될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전 교리 박길원에게 빨리 귀양보내는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자리에 회자했던 여러 신하들에 관한 문제로 말하더라도 박길원의 행위를 예사로운 일로 보아넘기고 한마디도 시비를 따지는 일이 없었으므로 시호를 의논하는 막중한 일이 이처럼 나중에 말썽이 되게 만들었으니, 이 또한 방치해 두고 죄를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회자에 참가했던 신하들을 모두 문책하여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임업의 상소문은 금법을 어긴 것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속하는데 어찌 다시 가져와 내려보낼 것인가. 사정을 잘 알아보지 못한 죄는 사실 있으니 사판에서 삭제하는 문제는 아뢴 대로 시행하라. 박길원에 관한 문제는 그 상소문이 설사 말을 잘 가려서 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죄가 귀양보낼 정도까지야 되겠는가. 이것은 네가 한 말이 사적인 감정을 면치 못한 것이다. 더구나 길원의 일은 이미 처분을 거쳤는데 어찌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재차 처벌할 수 있겠는가. 회자에 참가한 신하들에 관한 문제는 심규로(沈奎魯)와 박길원 그리고 기타 사람들을 막론하고 사실 제대로 잘 조처하였더라면 그들이 관연 그러하였겠는가. 문책하여 파직시키는 문제는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수찬 조득영(趙得永)이 상소하기를,
"방금 대사간 김한동의 상소문에 대해 내리신 비답을 삼가 보았더니, 전 정언 임업을 사판에서 삭제하는 문제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신은 임업의 상소문 속에 쓴 내용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설령 금법을 범한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임금의 측근에 드나드는 승지들도 오히려 깜깜하게 모르고 있는 문제를 저 대간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 어찌 알겠습니까. 잘 살펴보지 못한 것으로 책망하는 것은 혹시 그럴 수 있으나 사판에서 삭제하는 것으로 처벌한다면 어찌 너무 심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특별히 교체시킬 것을 명하여 이미 처분을 거쳤는데 동료 대간으로 있는 자가 감히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도리어 공격하는 행위를 자행하였으니, 그 적용하려는 법조문은 너무도 들어맞지 않습니다. 신은 맑은 조정의 과감히 말을 하는 기풍이 이로 인해 한층 더 침체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삼가 빌건대 전 정언 임업을 사판에서 삭제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고 대사간 김한동에게 도리어 사판에서 삭제하는 처벌을 적용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정의 현황이 안 좋은 것이야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사시의 계절이 돌아가는 것은 아무런 말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요즘 나는 그 법을 본떠 정사를 행하고 있는데, 물거품처럼 물결을 뒤쫓다보면 나루가 있는 곳을 모르는 법이고 쇠노와 장검은 다람쥐나 파리 따위를 잡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일일이 다 수작하는 것은 번거로울 뿐이니 상소문을 되돌려주도록 하라. 오늘날은 그의 종조부와 같은 자들이 인사 행정의 권한을 잡고 정사를 행할 때의 풍습이 아니고 도를 닦는 것을 교화라고 한 것과 같은 하나의 규모가 나름대로 있다. 그런데 이것을 선양하지 못하는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7월 8일 갑자

전교하였다.
"영변 부사(寧邊府使) 서형수(徐瀅修)를 부사(副使)로 삼고 그에게 안주목(安州牧)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상사(上使)와 함께 가도록 할 것을 하유하라. 봉과(封裹)045)  를 이미 끝냈다고 하는데 조사 확인하는 일은 상사는 체모가 중하니 승문원 제조가 대신 집행하는 문제를 도당(都堂)에 말해주라."

 

7월 10일 병인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요즘 일기 등 문서를 상고해 볼 일이 있었는데 역시 마음대로 훑어보기가 어려웠다. 이는 예사로운 눈병이 아니어서 깊은 생각을 한다거나 복잡한 일이 있을 경우 어김없이 이상이 생겨 등골의 태양경(太陽經)과 좌우 옆구리에 횃불이 타는 듯한 열기가 있는데 이것이 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간혹 시험삼아 불을 때지 않은 온돌바닥에 누워 있으면 몸의 열기로 바닥까지 차츰 따뜻해지므로 처음에는 조금 시원한 것 같아도 나중에는 또 견디기가 어려우니, 이는 전부 태양경의 울화가 팽배해 있는 결과로서 나의 학문의 힘이 깊지 못해 의지의 힘이 혈기(血氣)를 제어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미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내 몸을 다스리지 못한 처지에 또 어찌 남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스물 서너 해 동안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고 그저 애만 쓴 병통이 있긴 하나 스스로 반성하여 그 원인을 찾아볼 때 그 수준이 그다지 낮은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다 하더라도 공부가 깊지 못해 혈기가 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로 말한다면 현재의 상태는 결국 크게 고쳐지기 어려운데 이것은 내가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지금의 세속이 완악한 오랑캐보다 교화시키기 어려워서인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내가 등극한 뒤로 등용한 자들이 모두 어진 사대부였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환관이나 궁첩들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일 승지를 접견하여 어떤 날은 그 횟수가 열번이나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폐단을 면치 못하므로 요즘은 이전의 규례를 약간 고쳤는데 자주 만나면 사이가 멀어진다는 경계 때문에 그런 것이긴 하나 이 또한 실효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비유하자면 나의 눈이 좌우로 눈을 떠 보고는 있으나 다 어둡고 마음만은 눈처럼 어두운 정도까지 되지 않은 것과 같다.
내 반평생에 힘을 들인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내 생각에 마음과 눈이 다 어둡지는 않다고 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의리의 측면에서 한 세상을 인도해나가 한푼이나마 나에게 지워진 책임을 저버리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병신년 이전에도 내가 지향하는 의리는 회의적인 것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갑오·을미년 이후 한두 신하가 한마음을 가져준 것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뒤로 그 규모를 지켰으며 아래에 있는 자들도 받들어나가는데,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일이 문제가 많아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관계로 을묘년 이후에는 이 규모가 또 한 차례 변경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모년(某年)의 의리와 전례(典禮)에 관한 문제에 대해 내가 고수하는 것이 극히 공명 정대하여 기타 크고 작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오직 정당한 것만 추구할 뿐 평범하게 하는 입장은 취하고 싶지 않았으나 아래에서 응하는 자들이 그것을 빙자하여 사심을 부리는 폐단이 없지 않았으므로 대강 바로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갑인년046)   이전에는 조정의 신하들이 그야말로 이른바 ‘당나라 때 권신들 왕비 왕숙문 미친듯이 부귀에 급급하였네.[王伾王叔文 汲汲如顚狂]’ 한 말과 같은 상황이었으므로 사실 거론할 가치도 없고 그 뒤에도 세상의 도리가 어떤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리에 관해 물어보면 모두들 흐지부지 도외시해 버리려 하였으므로 지난날의 이른바 임금의 덕을 높이고 임금의 무함을 분간하자는 것이 도리어 그 덕을 더럽히고 그 무함을 보태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은 과연 누가 이렇게 주장했단 말인가.
일전에 성균관 유생들을 시험보일 때 시의 제목을 ‘밤마다 돈꿰미 세느라 나 홀로 잠 못 이룬다.[夜夜算緡眠獨遲]’라고 냈는데 그것은 내 자신을 비유한 것이고, 부(賦)의 제목을 ‘소를 먹이니 소가 살졌다.[飯牛牛肥]’라고 냈는데 그것은 벼슬과 녹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백리해(百里奚)를 혹시 지금 사람들이 본받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나의 이 고심을 경들이 아니면 누가 받들어 부응해 줄 것인가. 태고 적에는 거룩한 임금이 표준을 세워 스승의 도가 위에 있었으나 후세에는 그렇지 않아 스승의 도가 아래에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스승의 도를 지녔다고 자처하겠는가. 그러나 도가 있는 곳이 곧 스승이 있는 곳이고 도는 의리보다 큰 것이 없는데, 나는 내심 인(仁)을 행할 일을 당하면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 의지를 갖고 있다. 대체로 오늘날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사람으로서 한번이라도 혹시 이것과 반대로 나간다면 역적만 되고 마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삼족을 멸하는 법은 없으나 결국은 반드시 극형을 가해 없애버려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의리에 혹시라도 흠결이 되는 점이 있다면 죽기를 다짐하고 간쟁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만일 그와 같이 하지 않고 나에게 이점에 대해 미진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과연 옳겠는가.
일전에는 뜻밖에 이잠(李潛)이란 두 글자를 거론한 한 장의 상소문을 보았는데 그 말이야 사실 조리가 없었으나 이가환(李家煥)의 간특한 학술을 배격하기 위해 그 어구까지 끌어들인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갑자기 보고 깜짝놀라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일찍이 선대왕 때의 50년 동안 올린 소장을 50여 권 분량으로 베껴놓고 그 이름을 《장차휘편(章箚彙編)》이라 하였는데, 그 속에 이잠 두 글자는 전혀 없었다. 그것은 대체로 그 관계가 극히 중하기 때문에 선대왕 당시 경연의 분부에서 한 번 언급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 뒤로는 구두로 아뢰는 것이나 반포하는 교서에서조차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선대왕조에 없던 말이 갑자기 오늘날에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연전에 이가환의 문제로 시끄러울 때 심 판부사(沈判府事)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언급하였고 이서구(李書九)도 그에 관해 말한 적이 있긴 하나 그때는 그들이 그에 관한 금법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 일이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애당초 말을 내걸어 갈등을 야기시키지 않고 그저 금법이 있다는 것만 표시했을 뿐이다. 지금 임업(任㸁)의 상소문은 비록 거론할 가치는 없으나 명색이 대간의 상소라 하면서 금법을 범한 것이 이런 정도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말이나 되는가. 승지를 잡아다가 처분한 것은 일의 체모를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저 시골뜨기와 같은 무리들이야 사실 그 잘못을 책망할 것도 없지만 선대왕조의 금령이 지극히 엄중하기 때문에 장차 경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파직시킬 근거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김한동(金翰東)이 상소하여 사판에서 삭제시킬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그의 말대로 적용할 것을 허락하였다.
오늘날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천명하였더라면 먼 지방이야 논할 것이 없더라도 약간 가까운 호서지방에 살았던 임업같은 자들이 어찌 감히 법도를 지키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겠는가. 설령 그가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더라도 약간 경고만 하고 그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의 풍습은 사실 을묘년 이전의 흐리멍덩하던 때와 다름없으니 지금의 도리로서는 다만 종을 내보내고 주인을 맞아들이는 의리에 눈을 밝혀 조금이라도 그것을 어기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못을 자르고 철판을 끊는 것처럼 단호하게 처벌해야 할 것인데, 경들이 어찌 그 책임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나의 의리가 혹시 옳지 않은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나의 가장 높은 신조가 이미 분명하고도 엄격하니 만큼 그 나머지 일들의 규모를 누가 감히 한치라도 어길 것인가.
임업이야 우선 그만두고라도 옥당 한 사람이 상소하여 임업을 구제하는 말을 했는데 비록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몇 줄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해도 그 가운데 하나는 명을 취소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리어 김한동을 문책하는 것이었으며 끝에 가서는 또 언로를 막는 처사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더욱이 천만 번 놀라운 일이다. 호판(戶判)이 지금 연석에 올라와 있는 자리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여 상대방이 친한 자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 의리에는 혹시 흠이 될 수 있으나 그 자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집안이 귀신이 변해 사람이 되고 문필에 종사하다가 변방땅에 귀양을 가고 한 것은 과연 무슨 까닭이었던가. 이른바 이조의 관리로서 인사행정을 한 문제는 을미년 이전은 내가 따지지 않았고 섣달에 인사행정을 했던 것만 가지고 그 죄안을 삼았는데, 지금 그의 종손자가 태연히 시비를 논하고 임업의 문제에 대한 처분에 대해 감히 언로를 막는 처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 집안의 잘못을 그렇게까지 씻어준 것은 그 문제가 내 자신과 관련되어 기어코 보전해주고 싶어서였다. 또한 자궁(慈宮)의 지친(至親)이 되기 때문에 을묘년에 중신(重臣)으로 뽑아쓴 것은 그만한 의도가 있었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을 가리우지 못하는 법이니 내 마음에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 요즘 서겸순(徐謙淳)이 평정에서 하등급을 맞은 뒤 기한 안에 거두어 서용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 규례인 것이다.
오늘날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 가운데 그 누가 처음 병이 들었다가 다시 나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어떤 자는 처음 병들었다가 다시 나은 것을 가지고 도리어 높은 나무에 앉아 있던 새가 도로 깊은 골짜기로 옮겨간 것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병을 치료해준 의원인데 그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의 그와 같은 말들은 초야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갑자기 꺼내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호판(戶判) 집의 선대 중신이 인사행정을 하던 때의 풍습이 아니라면 어찌 감히 이런 일이 있겠는가.
옛날의 큰 의리를 가지고 논한다면 이를테면 온릉(溫陵)047)  의 복위(復位)는 선대 왕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행되었고, 육신(六臣)의 신원은 숙묘조 때 비로소 거행되었으며 현량과(賢良科)를 복구하는 것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시행되었다. 그 당시 선정(先正) 등 제현(諸賢)의 논의가 과연 얼마나 강력하였던가. 그런데도 그처럼 정중하게 처리했던 것은 반드시 공론이 크게 보편화되고 인심이 흡족하게 여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그 일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득영(趙得永)의 상소문은 올리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리는 성과를 거두고 싶긴 하나 형정(刑政)을 가지고 논한다면 만약 그대로 둘 경우 정사의 원칙에 문제가 있을 것 같고 게다가 그 종조부의 종손자이기 때문에 지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 중이다. 대체로 집안의 허물을 덮어보려는 호판의 생각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이런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나의 깊은 고심을 드러내주는 사람이 없긴 하나 현재 나의 뜻을 받들어나가는 대책으로 말하면 지금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나는 오늘 말의 강도를 지나치게 높이고 싶지 않아 부드럽게 말을 하지만 이와 같은 무리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임금을 속인 죄목에 가깝다. 우리 임금은 그 일을 못한다고 말하는 것도 오히려 역적이라 하는데 임금을 속여 무능하다고 한다면 어떤 죄에 해당되겠는가. 비록 문헌을 상고해내어 중외에 반포하라는 분부를 내리긴 했으나 내가 눈이 어둡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없으니 지금 이 사관(史館)에서 상고해낸 구두 진술과 반포한 교서 및 《일기》 속에 있는 경연석상에서의 말들을 경들이 한번 살펴보도록 하라. 대체적으로 더없이 중하고 공경해야 할 처지에 계신 분에게 관계되고 또 신하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분부가 있는데, 이와 같은 문헌을 금오(金吾)의 《등록(謄錄)》과 정원 및 삼사(三司) 등에 베껴 반포한다는 것은 너무 무례한 일이다. 처음 분부를 내릴 때 내가 미처 두루 생각하지 못한 소치이다. 경들이 이것을 훑어보고 밖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일깨워준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자연 알게 될 것이다."
하고, 책자를 내려주며 승지에게 받들어 대신들에게 전해줄 것을 명하였다. 이병모(李秉模) 등이 엎드려 훑어보았는데 먼저 《정원일기》부터 읽어 해당된 부분까지 내려갔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적인 것이 그렇다. 경들이 읽어보고 내용을 전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글로 써서 내놓는다면 어찌 무례하지 않겠는가. 선대왕조 때부터 이미 감히 말할 수 없는 일로 되었던 것은 이 때문인데, 조득영(趙得永)의 상소가 그 당시의 문서를 베껴 반포하라는 명을 내린 뒤에 올라왔으므로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잠(李潛)의 문제가 만약 임금의 훈계에 속한 것이라면 선대왕 때에 그러한 분부가 계셨다 하더라도 신임 의리(辛壬義理)048)  를 내가 어찌 천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김용택(金龍澤) 등 다섯 사람들의 문제는 선대왕의 자손된 자로서는 사실 그 억울한 것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는 일이니, 비유컨대 주(周)나라 때 남궁괄(南宮括)과 산의생(散宜生)의 문제를 무왕(武王)의 입장으로서는 정도가 아니었다고 책망할 수 없는 경우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잠의 경우는 그와는 다르다. 그가 병술년049)  에 올린 한 장의 상소문은 고 상신 두 사람의 문제만 말한 것이 아니다. 또 경묘(景廟)가 동궁으로 계실 때 상소하여 잔치를 올려드리자고 청했으나 김진규(金鎭圭)가 막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때는 경묘의 병환이 나은 뒤였기 때문이다. 그 때의 상황을 돌아보면 신사·임오년 이후 양궁(兩宮)050)   사이에 이미 극히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으나 그 사정을 따져보면 잔치를 올려 동궁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것이었는데 김진규에게 저지를 당한 것이다. 이것이 곧 선대왕께서 지극히 가슴아픈 분부를 내리신 이유이다. 덕유당(德游堂)은 곧 우리 선의 왕후(宣懿王后)051)  가 거처하신 곳인데 선대왕께서 그분을 섬기신 것은 인원 왕후(仁元王后)052)  와 차등이 없었다. 이는 실로 그 마음이 크게 덕스럽고 선하기 때문인데 현판을 걸어놓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지켜 받들고 있으니, 그 의리는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선대왕께서 내리신 분부에 ‘남(南)·유(柳)053)  에 관한 문제는 나를 위해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실으려고 하지만 나의 일로 한푼이라도 황형(皇兄)054)  에게 유익한 것이 없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 당시의 고 상신 김재로(金在魯) 무리들도 감히 이잠을 역적이라 하지 못했으며 이잠에게 증직했던 남대(南臺)055)   벼슬이 지금까지 사실 그대로 있는데, 경들은 과연 그런 사실을 아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사실 몰랐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대왕의 마음에는 공격하는 자나 옹호하는 자들이 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처분이 나온 것이며, 몇해 전 그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내가 이 일을 고 상신 채 판부사(蔡判府事)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럴만한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를 옹호하는 자가 만약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를 주자고 청한다면 누가 감히 저지할 것인가. 대체로 이러한 큰 의리가 이처럼 분명치 않으니 임업이야 사실 거론할 것도 없고 세상의 도리를 짐작할 만하다. 김용택(金龍澤)과 같은 무리는 제몸의 안전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였으나 지금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 한쪽에서는 법도도 안 지키고 또 가르침도 안 따르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또 반드시 이가환(李家煥)을 위해 이잠의 죄를 벗겨주려 한다고 말하니, 피차간을 막론하고 선대왕께 누를 끼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감독하여 바로잡고 교화시키는 방도는 경들에게 그 책임을 맡기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의리란 두 갈래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니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을 둘로 나눈다면 안 된다. 지난날 이른바 임금의 덕을 높인다고 말하던 것이 지금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오늘의 일은 내가 혹시 말이 중도에 지나치지 않을까 염려되어 부드럽게 말했으니, 경들도 밖에 나가면 조리있는 말로써 의혹을 일깨워 모두들 스스로 알게끔 하기 바란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들은 처음에 사판에서 삭제하는 벌로 임업을 처벌할 것을 청하려 했는데 대사간의 논의는 도리어 경하게 한 것을 면치 못했습니다. 조득영(趙得永)에 대해서는 더욱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현재의 형편은 화를 주고 복을 주는 권한이 아래로 옮겨간 우려가 있다. 화를 주고 복을 주는 권한이 아래로 옮겨가고서도 나라가 과연 나라꼴이 될 수 있겠는가. 다행히 그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내가 듣건대 저자에서 전방을 세낸 자가 여러 가지 물건을 모아놓고 있는 것을 도가(都家)라 부른다고 하는데 지금 이런 짓을 하는 자가 이것과 무엇이 다른가. 성덕우(成德雨)와 정호인(鄭好仁)은 벌이 자기 한몸에만 그쳤으나 지금 이와 같은 자들은 나라의 권력을 훔쳐 나쁜 짓을 자행하려고 노릴 것인데 누가 어디에 엎드려 있는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섬멸되고야 말 것이다.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죄는 이마에 먹물을 넣는 형벌을 적용하는 법이니, 지금 내가 해당하는 법조문을 적용하겠다고 분부하는 것이 어찌 지나친 것이겠는가. 우선 하고픈 말을 다하지 않고 참고 또 참는데 내가 어찌 일개 이가환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경들은 이 책자를 보고 나가서 여러 재상에게 말해주어 서로 경계하게 한다면 어찌 이 의리를 천명하는 길이 없겠는가. 나는 권한을 잡고 있을 뿐이고 천갈래 만갈래 복잡한 문제를 하나하나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은 그 책임이 오직 경들에게 있을 뿐이다. 오늘 경연 석상의 대담을 우선 심 판부사(沈判府事)에게 보여주어 서로 힘쓰도록 하라. 조가(趙家)의 집 문제는 미결된 문건이니 앞으로 대책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이 경연 석상의 대담을 승지와 주서가 함께 기록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라."
하였다.

 

연경에서 돌아온 정사(正使) 구민화(具敏和), 부사 김이익(金履翼), 서장관 조석중(曺錫中)을 불러 만나보았다. 석중이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1. 황제의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상황(上皇)이 승하했을 때 예법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면서 3년복을 입으려 하자 종실과 대신들이 아뢰기를 ‘상황께서 황조(皇祖)가 승하하셨을 때 백일복을 입으셨으니 전례를 따라야 합니다.’ 하니, 황제께서 그 글을 읽고 애통해 하며 말하기를, ‘이미 황고(皇考)께서 행하셨던 전례를 가지고 말한 이상 또한 감히 사적인 정 때문에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다.’ 하고 결국 마지못해 그대로 따랐다고 합니다. 궁중 안에 있을 때는 27개월 동안 소복(素服)을 입어 천자가 3년 동안 거상하는 뜻을 표시하였는데 이른바 소복이란 흰옷은 아니고 화려한 장식을 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는 푸른색 도포차림을 하다가 궤연(几筵)에 몸소 나아가는 날은 또 흰 비단옷을 입었습니다. 상황이 승하하신 날이 정월 3일이었으므로 매달 3일에는 큰 제사를 지냈으며, 재궁(梓宮)을 능으로 옮겨 모시는 날을 처음에 8월 27일로 잡았다가 추모하는 정성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9월 2일로 고쳐 잡았습니다. 능호는 유릉(裕陵)인데 재궁을 옮겨모실 때 경유하였던 통주(通州)와 계주(薊州) 등 고을은 길을 닦는데 백성을 부렸다 하여 당해년도의 조세를 감면해주었다고 합니다.
1. 각부(各部)와 원(院)의 중요한 직책은 모두 만인(滿人)들이 차지하고 있고 한인(漢人)은 그저 인원수나 채우는 것이 본디 전해오는 옛법인데 새 황제가 직접 국사를 다스린 뒤로는 만인과 한인을 함께 등용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청렴하고 성실한 유용(劉墉)과 순박하고 분명한 왕걸(王杰)은 평소에 의지해오던 인물들로서 지금 대신이 되었고, 주규(朱珪)는 남방 순무(南方巡撫)로부터 들어와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었으며 팽원서(彭元瑞)는 공부 상서로서 특별히 태자소보(太子少保)를 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 한인이긴 하지만 가깝게 대하고 총애하기로는 만인만 못하다 합니다. 만인으로서 신임을 받고 있는 자는 내대신(內大臣) 경계(慶桂)와 호부 상서 풍신제륜(豊伸濟倫), 공부 상서 나언성(那彦成) 등인데 언성은 곧 아계(阿桂)의 손자이고 제륜은 부항(傅恒)의 손자이자 복륭안(福隆安)의 아들입니다. 화신(和珅)이 처분된 뒤에 즉시 11왕 영성(永瑆), 전임 태학사(太學士) 동고(董誥), 호부 시랑(戶部侍郞) 대구형(戴衢亨) 및 경계(慶桂)·나언성(那彦成) 등에게 군기처(軍機處)에 파견 근무할 것을 명하였는데, 군기처는 건청궁(乾淸宮) 동쪽 담장 밖에 있으며 기밀을 다루는 중요한 곳입니다. 11왕은 황제의 친형으로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중외를 도맡아 다스리기 때문에 크고 작은 모든 사무를 반드시 다 그에게 보고합니다. 그에 대한 황제의 대우는 온 조정에서 으뜸인데 사람됨이 상당히 총명하지만 일을 대할 때 의심이 많아 사람들이 다 무서워하고 꺼립니다. 조정 관리 가운데 3품 이상은 내외직을 막론하고 다 군기처에서 황제의 재가를 받아 차출하고 이부에서는 4품 이하만 차출한다고 합니다.
1. 전임 내각 학사(內閣學士) 윤장도(尹壯圖)는 운남(雲南) 사람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끝까지 간하는 것을 좋아하여 평소에 조정 관리들이 무서워하였으나 일찍이 각성(各省)의 창고가 결손된 것이 많으니 전부 실사해야 한다고 아뢰었다가 아뢴 말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황제가 직접 정사를 다스리면서 그를 발탁하여 급사중(給事中)으로 삼았습니다.
1. 황제께서 비밀리에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4월 7일에는 궁중 하인 두 사람을 거느리고 정양문(鄭陽門) 밖 유리창(琉璃廠)까지 걸어 나갔는데 이부 시랑 주흥대(周興岱)가 가마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가 황제라는 것을 알고 황급히 가마에서 내리자, 황제가 몸을 돌려 사잇길로 피해 갔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대소 신하들과 백성들이 모두 무서워하였으며 정문 밖의 반점(飯店)들이 거의 전부 텅 빌 정도였습니다. 처음 다스리는 정사가 엄격하고 분명하여 크고 작은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또 백성의 고통을 살펴보는 일에 뜻을 두어 어사를 각처에 나누어 보내면서 또 근신에게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두세 번을 반복하여 여러 사람의 말이 서로 일치한 다음에야 죄가 있는 자를 처벌하였고 혹시 사실과 다를 때는 고발한 자를 죄주기 때문에 억울하게 벌을 받는 사람이 없고 어사도 감히 사심을 부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1. 건륭(乾隆) 만년에 각관(各關)과 각문(各門)에서 조세를 받아내는 것이 매우 무거워 일정한 규정 이외에 또 우수리라는 명목이 있었습니다. 도성의 숭문문(崇文門)의 경우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남경(南京) 상인들의 물품이 이 문이 아니고서는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서리들이 농간을 부리는 것이 거의 한량이 없어 장사꾼이 거의 다니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4월 초에 우수리를 받는 것을 엄금하고 일정한 세액을 감히 어기지 말 것을 명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상황(上皇)께서 마음을 갖고 계시다가 미처 실시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아비가 죽은 뒤 3년 동안은 아비의 법도를 고치지 말라는 성현의 경계를 범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 천초(川楚)056)  의 교비(敎匪)057)  가 아직까지 섬멸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화신(和珅)이 군사정책을 잘못 운용하여 각 군영이 관망만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화신이 죽자 즉시 명을 내려 사천 총독(四川摠督) 늑보(勒保)를 경략 대신(經略大臣)으로 삼아 각 군영으로 하여금 그의 지휘를 받도록 한 결과 정월 이후로 적의 괴수 다섯 사람을 사로잡았습니다. 초여름에 선비들을 시험보일 때 교비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는 것으로 제목을 내었고 또 분부를 내려 귀화시킬 방도를 유시하였습니다. 사신 일행이 산해관(山海關)을 나올 때 보니 수레 16대가 각기 4, 5명씩 싣고 황성(皇城)쪽에서 왔는데 그들은 곧 흑룡강(黑龍江)의 관병(官兵)으로 천초 지방에서 전투를 치르고 돌아오는 자들이었습니다. 괴수를 이미 처단해버려 그 잔당은 불원간에 제거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황제가 특별히 돌아가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항주(杭州)의 소금장사꾼이 은 3백만 냥을 바쳐 전공을 이룬 자들에게 상금으로 주는 비용에 보태쓸 것을 자원하자 황제가 2백만 냥만 받도록 명하였습니다. 앞서 건륭(乾隆)경술년058)  에 양자강 남쪽의 돈많은 장사꾼이 황제의 나이가 팔순이라고 하여 은 40만 냥을 바쳐 경축하는 정성을 표하겠다고 자원하자 건륭 황제가 받으라고 명하였습니다. 장사꾼이 은을 바치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새 황제가 그 잘못된 규례를 답습함으로써 처음 정사를 다스리는 과정에 하나의 흠이 되었다고 합니다.
1. 정사년059)   10월에 태상황(太上皇)의 칙지에 따라 황제의 귀비(貴妃) 유호록씨(紐祜菉氏)를 황귀비로 삼고 효숙 황후(孝淑皇后)의 3년상이 끝난 뒤에 황후로 세울 것을 명한 일이 있었는데, 금년 4월에 분부를 내리기를 ‘효숙 황후가 죽은 지 27개월이 되어 이제 사당에 모실 기한이 되었다. 칙지에 따라 황귀비를 중궁(中宮)으로 봉한다. 그의 아비 공아랍착(恭阿拉着)은 규례에 따라 일등후(一等侯)로 삼는다.’ 하셨는데, 황후로 책봉하는 의식은 가경(嘉慶) 6년 3월 상복을 벗은 뒤에 길일을 받아 거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1. 화신(和珅)을 처치한 뒤에 사람들이 다 황제께서 삼달덕(三達德)060)  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즉위한 뒤로 화신이 반드시 자기를 해치려한다는 것을 알고 모든 정사를 행할 때 화신의 말을 전적으로 들어주어 그를 가깝게 여기고 신임하는 뜻을 보임으로써 의심과 두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지(智)이고, 온종일 국사를 처결하면서 말소리와 기색을 변하지 않아 조정의 면모가 일신되고 간특한 소인들이 사라지게 했으니 이것은 용(勇)이고, 당파를 다스리지 않고 연좌시켜 처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대소 신하들이 우려를 씻고 각기 스스로 안심하도록 하였으며 화신의 며느리가 된 황제의 누이동생을 특별히 돌보아주었으니 이것은 인(仁)입니다. 화신의 집에는 정주(正珠)와 조주(朝珠) 한 꿰미가 있었는데 그것은 황제가 수레를 탈 때의 복장에 걸치는 것이었습니다. 화신은 항상 등불 밑에서 사람이 없을 때 남몰래 몸에다 걸치고 거울을 보면서 가지고 놀았는데, 나중에 황제가 그 사실을 조사해 안 뒤에는 그의 죄악을 더욱 미워했다고 합니다.
1. 화신이 각부(各部)를 도맡아 다스릴 때 모든 사무를 자기가 다 황제에게 아뢰어 결정하였고 상서와 시랑들은 전부 모양새만 갖추고 있을 뿐이었는데, 화신이 죽은 뒤에 그와 같은 풍조를 과감히 혁파하고 또 각 아문과 지방 관청에서 모든 사무를 보고할 때 황제 앞으로 곧장 올리고 부봉(副封)을 별도로 갖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1월 28일에 있었던 일인데, 8왕 영선(永璇)이 이부(吏部)를 맡아 다스릴 때 이부 상서는 휴가를 가고 시랑(侍郞) 철보(鐵保)가 제반 사무를 전적으로 관리하자, 8왕은 시랑이 모든 일을 자기에게 물어서 처결하지 않는다고 낭중(郞中)을 꾸짖기를 ‘내가 분명히 어떤 일이 있으면 논박하여 아뢰겠다.’ 하였으므로 철보가 어쩔 수 없이 필첩식(筆帖式)으로 하여금 수시로 가서 사무를 물어보도록 하였습니다. 필첩식은 우리 나라의 녹사(錄事) 벼슬과 같은 것입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화신이 남긴 버릇을 가지고 있다고 미워하여 8왕을 도맡아 다스리는 직무에서 파면하고 철보를 내쫓아 심양  병부 시랑(瀋陽兵部侍郞)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1. 칙서를 반포하러 나가는 부사(副使)는 으레 내각 학사(內閣學士) 가운데 진사 출신을 파견하는데 항걸(恒傑)은 진사에 급제하지 못한 자였습니다. 호광도 감찰 어사(湖廣道監察御史) 계선(繼善)이 탄핵하기를 ‘조선은 본디 문장이 뛰어난 나라이니 조사(詔使)를 반드시 진사로 파견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항걸은 지체와 명망이 모자라고 게다가 문장에 관한 식견이 없으니 보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황제는 항걸이 일찍이 찬례(贊禮) 벼슬을 지내면서 제례(祭禮)를 보좌하였으므로 그가 능히 예법을 알 것으로 짐작하였고 또 길을 떠날 날짜가 급박했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가 그가 복명할 때 예물에 관한 문제로 자급을 강등하는 벌까지 내렸습니다. 예부 시랑이 되어 처음 아문에 들어갈 때 길가는 사람들이 그를 보고 비웃으며 모두들 어사의 말이 선견 지명이 있었다고 했다 합니다.
예부 낭중 이륵도(伊勒圖)가 항걸이 사신으로 나갔다가 응대를 잘못한 일로 사람들의 비난이 있다는 말을 했는데 항걸이 그 말을 듣고 그를 미워하여 죄에 밀어넣을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효숙 황후(孝淑皇后)의 상기를 마치는 제사를 지낼 때 반열에 참가한 신하들은 관례대로 청색 도포를 입었으나 항걸은 남색 도포로 잘못 입고 상소하여 자신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면서 아울러 말하기를 ‘해당 낭중 이륵도가 미리 알려주지 않아 이처럼 착오가 생겨 많은 신하들이 남색 도포를 입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마땅히 벌을 내려야 합니다.’ 하자, 황제는 이르기를 ‘항걸은 예부 시랑인데 어찌 낭중이 알려주길 기다린단 말인가. 아뢰는 말이 매우 모호하다. 이륵도에 대해서는 묻지 말고 항걸은 형부에 넘겨 죄를 논의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후임을 차출하라.’ 하였다고 합니다.
1. 외국이 향을 올리는 의식을 이전에는 예부에서 자체적으로 거행했을 뿐 본디 온 조정의 백관과 사신들이 일제히 참가한 적은 없던 일로서 이번에 행사를 크게 벌인 것은 외국을 예우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17왕이 찾아오고 여러 패륵(貝勒)이 함께 모인 것은 사실 황제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황제는 현재 거상 중이므로 외국 사신을 접견하려 하지 않다가 사신들이 돌아가기 하루전에 마침 빈전(殯殿)에 거둥하는 날을 만났기 때문에 특별히 지영(祗迎)하도록 하여 조정으로 돌아오신 뒤에 문안을 드렸습니다. 대체로 황제께서 3일 간격으로 빈전에 참배하느라 궁궐을 떠났다가 돌아왔으나 조정 신하들도 지영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특별한 분부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날 황제께서 벼슬이 높은 신하들에게 의류를 나누어준 것으로 인해 모두 대궐에 들어와 사은하느라 왕걸(王杰)·유용(劉墉)·나언성(那彦成)·경계(慶桂)·팽원서(彭元瑞) 등 여러 사람이 신무문(神武門) 밖의 다리가에 줄지어 서 있었는데, 외모들이 다 출중하고 행동거지도 모두 보통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한 시대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 심양(瀋陽)에 이른바 하원 행궁(夏園行宮)이란 것이 있는데 능을 참배하러 갈 때 도중에 임시로 거처하는 곳입니다. 심양의 장군이 수리할 것을 주청하자, 황제께서 분부를 내리기를 ‘이곳은 비록 태상황 때에 만들어지긴 했으나 본디 상황의 본뜻은 아니다. 만주의 옛 풍속에는 언제나 거둥할 때 털로 짠 임시막사를 휴대하여 고생을 익히고 검소함을 숭상하는 뜻으로 삼았었다. 앞으로는 행궁을 철거하여 백성을 고생시키고 재물을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고 합니다. 심양 사람들이 하는 말로는 당초에 장군이 행궁을 수리하자고 청한 것으로 보아 황제가 능을 참배하는 행차가 몇년 이내에 있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1. 농사는 산해관 안쪽은 비가 내리고 맑은 것이 적절하여 오곡이 풍년이 들었으나 산해관 동쪽지역은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작황이 산해관 안쪽보다 못했습니다. 심양에서부터 책문(柵門)까지는 한재가 혹독하긴 했으나 모두 밭이기 때문에 별로 크게 손상된 것은 없어 산해관 안쪽보다는 못해도 산해관 바깥에 비하면 오히려 더 나았습니다. 그러나 추수 시기가 아직 멀어 풍년여부를 미리 판단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수석 역관 김재화(金在和)가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1. 황제께서 즉위한 뒤로 정사를 잘해 볼 마음을 먹고 이른 아침에 조회를 열고 저녁 늦게 일을 끝내면서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명사들을 등용하였으며, 화신(和珅)에게서 경계를 얻어 권력을 아랫사람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과단성은 충분히 있으나 가끔 일을 당하면 의심을 품고 신하들이 해야 할 일을 직접 처리하여 온 조정이 벌벌 떨며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데, 11왕 영성(永瑆)이 나라의 온갖 사무를 도맡아 다스리면서 제멋대로 권력을 행사하므로 사류의 여론이 옳다고 여기지 않아 상당히 큰 걱정이 있다고 합니다.
1. 황제께서는 즉위한 이후 화신을 미워하긴 했으나 그에 관해서 한마디도 언급한 일이 없었는데, 어느 날 화신이 연석에서 태상황(太上皇)에게 태복(太僕)의 말을 줄이자고 아뢰자, 황제가 혼자말로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겠구나.’ 하니, 곁에 있다가 그 말을 들은 연신(筵臣)이 화신에게 반드시 좋은 일이 없을 것을 알았습니다. 화신이 처치된 뒤에 몰수하여 태복에 들어간 말의 수효가 수백 마리가 넘었다고 합니다.
1. 태상황 만년에 변방에서 야적들이 가끔 들고일어났는데 그것은 다 지방 장관의 침탈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으므로 함께 모여 도적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사를 징발하여 내보내 소탕하는 일이 해마다 그치지 않아 많은 비용이 들어갔으므로 창고의 물자가 점점 줄어들다가 화신의 재산을 몰수한 뒤로는 재물이며 보화가 관청 창고에 가득 찼습니다. 내국(內局)의 인삼은 너무 많이 저장되었다 하여 봄에 또 수백 근을 팔았기 때문에 민간과 저자에서는 은값이 크게 뛰어올랐다고 합니다.
1. 황제께서 4월 27일에 정안장(靜安庄)에 거둥하여 효숙 황후(孝淑皇后)의 빈소에 제사를 지내려 하였는데 그것은 황후를 아직 장사지내지 않았고 4월달에 대상(大祥)이 끝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안장에서 원명원(圓明園)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으므로 정안장에 간 김에 그곳으로 가려 하자, 제17왕 영린(永璘)이 아뢰기를 ‘정안장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정리와 예법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원명원에 행차하시는 것은 유람하고 즐기는 것에 가깝습니다. 비록 오늘날 간하는 신하는 없더라도 후세의 역사기록은 어찌 하시겠습니까.’ 하니, 황제는 그 말을 따라 중지하였다고 합니다.
1. 작년에 뭇별들이 서로 엇갈려 흐른 재변은 흠천감(欽天監)에서 숨기고 아뢰지 않았으나 금년에 해와 달이 맞붙고 다섯 별이 한줄로 늘어선 현상에 대해 길하고 상서로운 일이라고 아뢰자, 황제께서 분부를 내려 책망하기를 ‘사천(四川)과 섬서(陝西) 일대의 도적떼를 아직도 평정하지 못하고 그들이 여러 개의 성(省)에 만연하여 백성들이 그 피해를 당하고 있으므로 경계하고 조심하기에 여념이 없는데 감히 상서를 말한단 말인가. 더구나 재변은 숨기고 상서는 아뢰니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가 전혀 아니다. 앞으로는 상서 두 글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 아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고, 지방에서 진기한 새의 등속을 바치는 일을 금할 것을 명하였다고 합니다.
1. 강희(康熙) 이후부터 학문을 중시하는 정치를 전적으로 숭상하긴 했으나 종실의 친척들은 만주의 옛 풍속을 지켜 모두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도록 하였는데, 지금 황제는 그들을 전부 《시경》·《서경》을 읽고 과거 공부를 익히게 하여 생원(生員)·감생(監生)들과 함께 향시(鄕試)에 응시하도록 하는 등 상당히 문예를 일삼아 무술을 숭상하던 조상들의 뜻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7월 11일 정묘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차자를 올려 종묘에 참배하는 날짜를 다시 날씨를 살펴보고 길일을 가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가을철 참배를 한 뒤에 섬돌을 개수하는 공역을 살펴볼 생각이니 날씨가 이처럼 무덥다 하더라도 어찌 날짜를 물려 거행할 수 있겠는가. 오늘 비가 내릴 기미가 있는데 만약 한차례 쏟아진다면 농사에는 반드시 갈증을 해소하는 도움이 있을 것이니 그 다행스러움이 과연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역사를 시작하는 것도 날씨가 맑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참배를 거행하는 날짜도 그것을 보아가며 조정해야겠다."
하였다.

 

7월 12일 무진

약원(藥院)이 비가 내린다는 이유로 거둥하신다는 명을 거두고 다시 길일을 잡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참배와 개수하는 것을 위해서는 날이 맑았으면 좋겠고 농사와 민정을 위해서는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걱정으로 생각이 들떠 갈피를 못잡겠다. 아침나절에 날씨가 흐릴지 개일지 더 살펴보고 하교하겠다."
하였다.

 

종묘에 참배하였다. 전교하기를,
"예를 거행하고 공사를 시작한 다음 궁궐로 돌아올 때 동구 밖에 이르자 단비가 쏟아졌으니 천만 다행이다. 날씨가 개일 기미가 있긴 하나 공사를 벌일 섬돌 부분이 빗물에 젖었을 것이니 공사를 일단 시작한 이상 날씨가 갤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행하는 것이 매우 좋겠다. 도제조와 여러 당상들은 이 점을 알고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3일 기사

평안도 관찰사 한용귀(韓用龜)가 평양부에서 민가에 불이 나 1백 75호가 불탔다고 치계하니, 전교하기를,
"서도는 사신 행차가 끊임없이 왕래하는 곳이므로 백성들은 반드시 병이 들지 않더라도 살기가 힘들 것이다. 더구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야윈 몸으로 비틀거리는 가운데 또 다시 화재를 만나 흩어져 사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으니, 백성의 사정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 마땅히 선전관을 내려보내 집을 얽어 몸을 가리우는 상황을 살펴보고 아울러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해야 할 일이지만 혹시 도리어 폐단이 될까 걱정되어 우선 그만둔다.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도백에게 공문을 띄워 집이 불탄 백성들을 큰 길거리에 불러다 놓고 거처할 곳을 마련해 준다는 뜻을 일러줄 것이며, 그중에 극히 가난한 자는 공사간의 신역과 신구의 환자를 특별히 감면하고 그 나머지는 등급을 나누어 환자나 신역 가운데에서 적절히 헤아려 면제시켜 주도록 하고, 그들이 거처를 잡아 안정이 다 된 뒤에 그 전말을 갖추어 장계로 보고토록 신칙하게 하라. 고성진(古城鎭) 장수로 나가 있는 자는 현재 어사를 겸하고 있으니, 이달 그믐 이전에 샅샅이 둘러보고 올라와 연석에서 자세히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조윤대(曺允大)가 장계하였다.
"곡산부(谷山府)에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운중방(雲中坊) 임계리(林溪里)에 과연 작은 산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은 당저산(堂底山)이라 불렀습니다. 이 산의 북쪽에 상산(象山)·봉두산(鳳頭山)과 같은 산들이 다섯 봉우리를 이루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용이 몸을 서리고 있는 형세와 같았습니다. 그중에 세 번째 봉우리는 지형이 약간 높은데 구역 안 한복판과 등지고 있으니 마땅히 이 지역을 가장 요지로 볼 수 있으며, 좌향을 신좌 을향(辛坐乙向)으로 잡아야만 세 번째 봉우리를 정확히 등져 앞쪽과 뒤쪽의 형세가 반듯하고 원만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용봉(龍峰)의 이름에 대해서는 노인들에게 두루 물어보았으나 분명하게 무엇이라 증거를 대는 자가 없으니 아마 오랜 세월로 인해 변천된 것 같습니다. 오른쪽에는 용연(龍淵)이 있는데 산세가 꾸불꾸불 서려 있으며 왼쪽에는 기둥 바위가 있고 그 곁에는 기괴한 바위가 높이 솟아 마치 한쌍의 망주석처럼 보이고 또한 머리를 숙이고 시내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용머리의 모습과 비슷하였습니다. 용연이란 이름이 이미 분명한 것이고 보면 그것이 용봉 아래에 있는 용연이 되는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신좌(辛坐) 지점에서 왼쪽으로 50보 거리에 또 건좌(乾坐)로 자리잡기가 합당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도 매우 좋기는 하지만 등지고 있는 봉우리를 가지고 논한다면 신좌 자리가 등을 진 봉우리보다 약간 낮고 또 한 경내에서 중앙이 되는 지점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도형을 살펴보고 신의 소견으로 참작해보면 신좌 자리가 한 경내의 중요한 지점이 될 것 같고 용봉을 등지고 있는 것도 이곳보다 나은 곳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더없이 중대한 사안이므로 감히 함부로 결정하지 못하고 삼가 그림 한 장을 예조로 올려보내 상께 여쭈어 조처하기를 기다립니다.
비석은 금천(金川)의 오석(烏石)이 본디 품질이 좋다고 정평이 나 있는데 신의 감영 남문 밖에 있는 태조 대왕 승첩 고기비(太祖大王勝捷古基碑)와 남문 안에 있는 인조 대왕 탄강 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를 다 이 돌을 썼기 때문에 떠내어 정으로 다듬어서 곡산부로 운반해 두었습니다. 가람산(岢嵐山)061)  의 성조(聖祖)062)  께서 말 달리던 옛터는 가을 순시 때 살펴보고 장계로 보고하겠습니다. 용취 장가비(龍就章家碑)의 비문은 탁본하여 예조로 보냅니다만 글자획이 마모되어 거의 형태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상산 부원군(象山府院君)063)  의 봉사손(奉祀孫) 강달수(康達秀)에게 덕원부(德源府)에 그대로 머물러 묘제(墓祭)를 받들게 하였으며 비각(碑閣)을 새로 세운 곳은 그 고을에 사는 강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들어가 살도록 하였습니다."

 

7월 15일 신미

이조 참판  이조승(李祖承)을 파직하였다. 제관으로 차임되어 일을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도의 가을철 군사훈련을 중지하였다.

 

7월 16일 임신

연경에 가는 사신들에게 하유하였다.
"주부자(朱夫子)는 곧 공자 이후 일인자이다. 당요(唐堯)·우순(虞舜)·하우(夏禹)·상탕(商湯)의 도는 공부자(孔夫子)가 태어남으로써 밝혀졌고 공자·증자·자사·맹자의 학문은 주부자가 태어남으로써 전해졌으니, 주부자가 높아진 뒤에야 공부자가 비로소 높아지게 되어 있다. 천지를 위하여 중심을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천명을 세우고 자손만대를 위하여 태평을 열어놓았으며, 떳떳한 가르침을 끝없는 우주에 밝히고 올바른 법도를 당대에 베풂으로써 이단이 소멸되고 민심이 안정된 것은 오직 공맹의 도를 밝히고 올바른 학문을 옹호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근본을 찾아보면 우리 주부자를 높이는 것이 곧 그것이다. 한편 나는 지극한 정성과 애타는 마음으로 가슴속에 높이 받드는 가운데 그 분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귀로 직접 말씀을 듣는 것만 같았다.
일찍이 한가한 시간을 틈타 일상적으로 운용하고 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에 기본적인 요소가 들어있는 《대전(大全)》 한 질을 가지고서 그것을 요약하여 《회영(會英)》이라 하고, 분류하여 《선통(選統)》이라 하고, 뽑아서 《백선(百選)》이라 하고, 요지를 묶어서 《절약(節約)》이라 하고, 한쪽으로 모아서 《회선(會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춘추》의 뜻에 맞추어 대일통(大一統)의 문자를 만들 생각으로 있다. 이를테면 《대전》과 《어류》에서 빠진 글과 이경(二經)064)  ·사서(四書)의 전의(傳義)·장구(章句)·집주(集註)·혹문(或問) 및 《계몽(啓蒙)》·《가례(家禮)》·《시괘고오(蓍卦考誤)》·《한문고이(韓文考異)》를 비롯하여 위백양(魏佰陽)의 《참동계(參同契)》와 《초사(楚辭)》의 주해서(注解書), 통서(通書)·서명(西銘)·태극도(太極圖)에 대한 주해서 등 수많은 글을 전부 모아 전서(全書)로 만들되 정명도(程明道)가 소강절(邵康節)의 뜻을 계승하고 자양(紫陽)이 주렴계(朱濂溪)를 본뜬 것처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단서를 찾아 힘을 쏟는 방도와 도에 나아가고 덕을 이루는 순서 등이 환히 밝혀져 서로 뒤섞이지 않을 것이며 부자의 대문과 담장, 마루와 방안을 여기에서 고증하여 밝힐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듯 환하고 강물이 줄기를 따라 흐르듯 순탄할 것이므로 풍습을 교화하는데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있을 것이다.
그에 관련된 책을 수집한 지 여러 해가 지나 머지 않아 그 결말을 보게 되었는데 편성이 끝나면 선성(先聖)065)  의 사당에 고하고 책으로 찍어 세상에 유통시킴으로써 주부자가 장주(漳州)에서 실시하였던 고사를 계승할 생각이다. 《춘추》를 먼저 간행한 것은 대일통(大一統)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다만 《어류(語類)》는 범례가 소소한 하자가 많다. 지주(池州)와 요주(饒州)에서 찍은 두 대본은 정밀하고 잘된 것이라고는 하나황문숙(黃文肅)066)  은 오히려 만족해하지 않았다. 부문별로 갈라놓은 것으로 말하면 장경부(張敬夫)067)  가 인(仁)에 관한 말을 갈라놓은 것과 조충정(趙忠定)068)  이 주의(奏議)를 따로 갈라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일찍이 고정 선생(考亭先生)069)  의 생존시에 평정을 거친 것으로 은미한 말씀과 큰 뜻은 깊이 묻혀 드러나지 않았으니, 이는 어찌 주부자의 본의가 태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보는 자는 그 규모를 상상하고 듣는 자는 그 논리가 환해질 것이므로 부문별로 나눈 순서나 책수의 많고 적은 것들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대학(大學)》에서 전(傳) 제5장의 빠진 부분을 보충한 것으로 말하면 주부자의 큰 역량과 정밀한 공부가 드러난 곳이다. 나의 소원이라면 주자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유교가 곧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상고하여 바로잡을 때는 마땅히 자세히 살펴 반드시 미산(眉山)·휘주(徽州)·건안(建安)에서 찍은 대본과 함께 참 면모를 볼 수 있어야만 그 책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大全)》의 경우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태주(台州)에서 올린 장계가 민중(閔中) 판본에는 실려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육씨(陸氏)·왕씨(王氏)에게 보낸 글과 매화를 두고 지은 부를 빠뜨리고 집어넣지 않았다. 선유(先儒)가 ‘천지에 가득찬 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말하였다. 이번에 진하사(進賀使)를 보내면서 부사(副使)로 특별히 제수한 것은 그가 본디 책을 엮는 일에 능란하고 게다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주부자의 글을 편집하는 근본 취지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신 행차가 연경에 들어간 뒤에 특별히 《대전》의 진짜 대본과 《어류》 등 각 대본을 구입할 것이며 상사(上使)도 이미 연석에서 내린 분부를 받들었으니 부사와 함께 성의를 다해 구해오도록 내각으로 하여금 하유하게 하라.
근래에 중국을 휩쓸고 있는 학문은 왕수인(王守仁)과 육구연(陸九淵)의 여파로서 백사(白沙)070)  에게서 범람하고 서하(西河)071)  에게서 치성하여 극에 이르렀다. 혹시 양자강 이남의 건주(建州)·민중(閔中)·천주(泉州)·장주(漳州) 등지에 부자의 빛나는 광채와 유풍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 혹은 새로 편찬된 주부자의 글이 멀리 전파되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동궁에 있을 때 여성공(呂成公)072)  의 《대사기(大事記)》를 구했는데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끝에 가까스로 연경 저자에서 구입하였으니, 성심껏 구한다면 책이 어찌 입수되지 않을 것인가. 만약 이를 빙자하여 잡서가 또 책문(柵門) 밖으로 빠져나온다면 나라에 그에 따른 법이 있는 만큼 누가 감히 범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경전에 대해서는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책상 위에 받들어 모셔두는 것으로 보더라도 우리 나라의 것이 중국 책보다 나을 뿐 아니라 조금만 읽으면 금방 책장이 해어지고 게으른 자는 누워서 보기에 안성 마춤이니, 경전을 커다란 옥처럼 아끼고 신명처럼 존경하는 뜻이 어디 있겠는가. 이 금령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사도(斯道)를 옹호하고 바른 학문을 부지하는 데에 일조가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근래에 이른바 경전의 뜻은 단지 소주(小註)만을 이용하다가 마침내 이른바 몽인(蒙引)·왕정(王訂) 등 여러 주해서까지 이용하는데, 날이 갈수록 더욱더 거칠어지고 있다. 패관(稗官)·잡사(雜史) 이외에 중국 판본인 경전까지 구입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은 또한 자신을 반성하고 실천하는 주자의 뜻과 같은 것이다. 이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행대(行臺)073)  에게 엄중히 당부하도록 하라."

 

관상감(觀象監)이 취재시험과 학술을 권장할 때 쓰는 책자와 음청표(陰晴表)에 쓰는 수은(水銀)에 대해서는 연경에서 구입해 오는 것을 금지하지 말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 최경악(崔景岳)이 장계하기를,
"갑산부(甲山府)의 동인보(同仁堡)를 지금 이미 옮겨 설치하였습니다. 청컨대 백덕령(柏德嶺)에 봉수대 하나를 두고 소리덕(所里德)의 봉수대는 녹반(綠磻)으로 옮기며 파수대를 가림(嘉林)과 천수(泉水) 두 곳에 설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17일 계유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7월 20일 병자

차대가 있었다. 전교하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은 【임시철(林蓍喆)이다.】  어찌하여 지금까지 부임하지 않는단 말인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근래에 기강이 비록 해이해졌다고는 하나 마른자리 진자리를 제 마음대로 고르기를 어찌 감히 그처럼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직하는 소장을 열 번, 아니 스무 번까지도 올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원래 변방의 수령에 관해서는 부임하지 않을 경우 바로 그 지역에다 충군(充軍)시키는 법이 있다. 의주 또한 변방의 수령자리이므로 그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지금 비어있는 다른 자리로 차송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제주(濟州)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의주 부윤 자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전에 시종관으로 수령에 제수되자 【정관휘(鄭觀輝)이다.】  말에서 떨어져 체직을 요구한 자가 있었는데 그 뒤에 서울 관직에서 예전처럼 공무를 보았으니, 어찌 그와 같은 도리가 있단 말인가. 제주에다 임기가 짧은 변장자리를 하나 만들어 차송하고 분부를 내리기 이전에는 체직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사신이 국경을 나갈 때에 부사와 서장관이 반드시 대신을 찾아보는 것은 사신의 임무를 중하게 여기는 뜻이 있는 것인데, 근래에 이 규례가 없어졌으니 다시 신칙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장렬(尹長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범조(丁範祖)를 예문관 제학으로, 이치중(李致中)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이득신(李得臣)을 형조 판서로, 김재찬(金載瓚)을 한성부 판윤으로, 이현택(李顯宅)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7월 21일 정축

황단(皇壇)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였는데 이날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다. 이어 북영(北營)으로 거둥하여 망배례의 반열에 참가한 문신과 무신들에게 글짓기와 활쏘기 시험을 치를 것을 명하고 합격한 사람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삼학사(三學士)074)  와 송문정(宋文正)075)  의 직손은 이조에서 수소문하여 아뢰고 조문충(曺文忠)076)  의 제사를 받드는 집에 대해서는 예조에서 자세히 알아보아 초기(草記)로 아뢸 것을 명하였다.

 

경봉각(敬奉閣)을 봉실(奉室) 서쪽의 담장 밖에 옮겨 지으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옛날 선대 왕조 때의 누각을 괴원(槐院)077)   근처에 세워 황조(皇朝)078)  의 고칙(誥勅)을 받들어 모셨으나 괴원의 청사가 무너진 뒤에 누각 하나만 덩그렇게 길가에 놓여 있어 보는 자들의 이목에 거슬린다. 이것은 한 칸의 집에 불과하므로 이쪽에서 철거하여 저쪽으로 옮기는 정도야 그다지 큰 공사는 아니다. 그리고 황단(皇壇) 동쪽에 이미 봉실(奉室)이 있으니, 그 담장 밖의 계단에다 이전의 틀을 그대로 옮겨 세워 봉안하는 것이 사실 사리에 합당하다. 호조로 하여금 예조에 물어 길일을 잡아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2일 무인

경봉각에 고칙(誥勅)·어필(御筆)·어화(御畵)를 봉안한 뒤에 매년 초봄에 봉심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7월 23일 기묘

홍양호(洪良浩)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봉실(奉室)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봉실 앞에서 경봉각에 행하는 의식까지 아울러 거행하는 것으로 규정을 삼을 것을 명하였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황조(皇朝) 때의 표(表)·전(箋)·주(奏)·자(咨) 등 문자로서 여기저기 야사(野史)나 문집에 나온 것들을 채집하여 책으로 만들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7월 24일 경진

봉실에 나아가 의식을 거행하였다.

 

전교하였다.
"아침에 열천문(冽泉門) 밖에 나가서 의식을 거행하고 아울러 경봉각의 새 터를 살펴보았다. 비록 베껴서 찍어낸 대본이긴 하나 황단(皇壇) 곁에 황조의 고칙(誥勅)을 보관해 둔다면 구름무늬 책장이 찬란히 빛나 지난날 성대했던 명나라의 문화를 접하는 것 같을 것이니, 그 주변을 맴돌고 섬돌을 오르내릴 때의 심경이 과연 어떻겠는가. 홍무(洪武)079) 25년080)   당시부터 빛나는 고칙이 온 산하에 어리비치고 사신의 행차가 번갈아 왕래하여 우리 나라를 중국 본토와 다름없이 여겼다. 우리 역대 임금들께서는 그 뜻을 받들고 계승하여 고칙을 국보처럼 감싸고 선왕의 훈계처럼 높였다. 남한 산성으로 임금이 임시 옮겨가 계실 때는 충정공(忠貞公) 윤집(尹集)과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이 행재소에서 아뢰기를 ‘저들이 만약 황조의 고칙과 인장을 요구할 경우 의리로써 맞선다면 저들은 필시 이해할 것입니다.’ 하자, 임금께서 그 의견을 가상하게 여기셨으나 때가 위급하고 형편이 곤란하여 의리로써 맞서기는 어려웠다. 태왕(太王)도 서울을 떠날 때 주옥 등 보물을 보전하지 못했으니, 이는 곧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이 가슴을 치고 한탄하여 피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그만둘 줄 몰랐던 일이다.
때마침 이 누각을 옮겨 세우는 때를 즈음하여 나라를 위해 장래를 걱정했던 옛사람을 생각하니 더욱 감개무량하다. 이 제독(李提督)081)  과 삼학사(三學士)와 두 대신 【조한영(曺漢英)과 송시열(宋時烈).】 들의 봉사손을 의식을 행하는 반열에 참가시키라는 명을 어제 이미 내렸는데, 문간공의 후손만 빠져서야 되겠는가. 그 역시 반열에 참가시키도록 하라. 세상을 떠난 지 백년이 지났는데 관청에서 그 동안 제사를 지내주지 못했으니, 이 어찌 결함이 있는 일이 아닌가. 문간공의 봉사손인 내섬시 봉사 정식(鄭軾)을 특별히 수령으로 제수하여 충신을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나의 뜻을 보여주도록 하라."

 

승문원 제조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어제 괴원(槐院)에 있는 《등록(謄錄)》을 가져다 보니 황조 때의 표(表)·전(箋)·주(奏)·자(咨)·정(呈)·게(揭) 등 문자를 상당히 많이 수집하였으나 두세 권이 빠져있었습니다. 경봉각에 봉안할 문건은 지금 마땅히 찾아내 덧붙여서 기록하여야겠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들 문자가 야사나 문집에 여기저기 나와있다 하더라도 누락되어 실리지 않은 것도 반드시 있을 것이니, 두루 더 찾아 기록하여 한 책자로 만들고 활자로 몇 벌을 찍어 사고(史庫) 등 여러 군데에 나누어 보관해야겠습니다. 찾아내는 일과 책으로 엮는 일은 본원의 관원 및 제술관과 이문 학관(吏文學官) 가운데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나누어 맡겨 살펴보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25일 신사

경봉각을 고쳐 세우는 공사가 완공되어 상이 친히 나아가 봉심하고 고칙(誥勅)을 봉안하였다. 누각은 황단(皇壇) 서쪽에 있다. 경봉(敬奉)과 흠봉(欽奉) 두 편액을 누각 안팎의 문위에 옮겨 걸었는데, 다 영묘(英廟)의 어필이다. 작은 장롱을 북쪽 벽에 놓고 《추감황은편(追感皇恩編)》 2권, 【선대왕이 운관(芸館)에 명하여 황조의 조칙 1책을 엮어서 활자로 찍어 올리게 한 뒤에 이름을 《추감황은편》이라 붙이고 어필로 겉표지에 썼다.】  황조에서 보내준 인장을 찍은 사본 1건, 【국초의 공신들에게 내린 교서로서 연월일 위의 31년이라는 부분에 ‘홍무(洪武)’라는 인장을 찍은 것이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어필 장자(障子) 하나,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의 어제(御製) 어필 장자 하나,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의 어필과 어화(御畵) 각 하나, 어필을 새긴 현판 두 개를 봉안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정상우(鄭尙愚)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27일 계미

전교하였다.
"나는 충정공(忠貞公) 정뇌경(鄭雷卿)의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에 맺혀 풀리지 않는다. 부노(俘奴)082)  가 우리 임금에게 대들고 모욕하던 날을 당하여 그 능욕을 받은 수치는 적들이 호통치는 것보다 백배나 더하였다. 충정공은 너무나 분개한 나머지 계책을 써서 떨쳐 일어나 그들을 없애버리려고 하다가 결국 피살당하고 말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삼학사와 마찬가지로 슬퍼하고 있다. 이 어찌 죽은 일이야 같지 않더라도 죽은 그 마음은 그들이 모두 자신을 희생하여 절개를 지킨 자들이 아니겠는가.
충정공은 곧 질관(質館)083)  의 일개 시종관으로서 그의 몸은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의 직무는 조정 안에서 계책을 세우는 것과 관계가 없었다. 자기의 동료들과 어울려 금방 갔다가 돌아오기만 하면 벼슬과 부귀를 손쉽게 얻을 수도 있는 일인데, 가슴이 미어지는 분개를 견디다 못해 적에게 빌붙은 역적을 반드시 없애고자 죽고 사는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책을 써 적의 손을 빌어 죽이려 하였으니, 그 얼마나 충성스러운가. 그러다가 모사가 탄로되었을 때는 한마디만 공손히 하고 빌었더라면 자기 생명을 보전하고 그 곤란을 풀 수도 있었을 것인데, 남아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 죽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는 마음으로 전혀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고 남쪽 하늘 멀리 계신 임금과 어버이에게 절하고 하직한 다음 시퍼런 칼날을 받기를 마치 낙원으로 달려가듯 하였으니, 그 얼마나 의로운가. 강효원(姜孝元)이 그와 함께 달갑게 죽은 것도 감탄스럽다. 혹시 충정공의 계책이 그 당시에 성공했더라면 부노(俘奴)를 없애는 것은 썩은 쥐새끼를 치우듯이 쉬웠을 것이다. 부노를 제거하면 걱정거리를 십중 팔구 정도 벗어버릴 것이고 또한 우리의 힘을 기르고 적을 물리치는 계책에 안심하고 힘쓸 수 있었을 것이지만 충정공의 뜻은 성사되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었으니, 이는 운명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다.
담암(擔庵)084)  이 오랑캐와의 화의(和議)를 배척했던 글과 노중련(魯仲連)이 벼슬을 거절하고 해변에 숨어버린 지조가 비록 평소에 배양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충정공이 죽음을 앞에 두고 조용히 처신한 것은 남들이 해내기 어려운 것을 해낸 것으로서 더더욱 늠름하여 존경하고 감격할 만하다. 그러나 충신 의사의 집안에 불행히도 역적이 나와 후손이 끊겨서 제사를 받아먹지 못한 지가 지금 70여 년이 되었다. 후손이 죄를 지은 것으로 인하여 그 조상의 큰 절개를 묻어버리는 것은 충성을 높이고 선행을 포상하는 조정의 법이 아니므로 이전에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조치를 취했으니, 그 뜻이 어찌 범연한 것이겠는가. 요즈음 정 문간(鄭文簡)085)  의 봉사손에게 말단 관직을 주었다가 곧 수령 자리를 주었다. 문간공과 충정공의 높은 절개는 똑같이 빛나고 아름다운데다가 다같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후손이고 다같이 제사를 받드는 사람에 대해 음직을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는다면 그 어찌 두 집안을 똑같이 보아주는 정사이겠는가. 정사충(鄭思忠)의 직계자손으로서 충정공의 뒤를 이은 자를 전조(銓曹)로 하여금 그 이름을 물어 오늘 있을 정사에서 처음 벼슬자리에 의망하도록 하라. 신주가 있는 곳에 술잔을 올려야겠다. 정 문간공의 신주에 대해서도 똑같이 실시하되 모두 제문을 지어 내려보내면 거행하도록 하라.
선정(先正) 조문정(趙文正)086)  의 집에도 옛일을 생각하여 후손을 녹용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도리어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고 연전에 제사를 지내주라고 한 명도 흐지부지 시행하지 않고 말았다. 선정에게 생각이 미치면 서글프고 불쌍하다. 이미 죽은 자 이외에 그의 직계손 중에 벼슬살이를 할 만한 사람이 또 있는지에 대해서도 즉시 알아보아 보고하도록 하라."

 

정상우(鄭尙愚)를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삼았다.

 

7월 29일 을유

차대가 있었다. 장용영(壯勇營)과 어영청(御營廳)이 아뢰기를,
"석한영(石漢英)과 한준(漢俊) 등의 사실에 대해 하교하신대로 다시 더 조사해 보았습니다. 《황명유려조주석씨사실(皇明遺黎潮州石氏事實)》과 석거사전(石居士傳), 오정 노인(梧亭老人) 이세영(李世瑛)이 석동자(石童子) 도현(道賢)에게 써서 준 글 한 책 등은 이미 전하께서 읽어보셨습니다. 신해년 경에 신들은 명을 받고 안협(安峽) 등지에서 수소문해 보았고 강원도의 감영에서 또한 호적을 상고해 보았는데 석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을 기록하고 전기를 썼다는 이세영까지도 알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 문서의 내력을 가지고 석가에게 물었더니, 그들 형제가 열 살이 되기 전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연천(漣川)에 이르러 주막을 경영하던 중국인 석일후(石一厚)의 수양아들이 되었으며, 그 수양아버지를 따라 경기 지방으로 굴러들어가 여러 곳을 떠돌다가 마지막에는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들은 고 상신 김치인(金致仁)이 연석에서 아뢴 말을 듣지 못했는가. 이원(李源)은 춘천(春川)의 산간에서 농사지으며 나무꾼이나 소먹이꾼과 함께 살았으므로 사람들은 영원백(寧遠伯)087)  의 후손이라는 것을 모르고 떠돌아다니는 말만 믿고서 발탁하는 조치가 있었다. 그것이 어찌 족보가 있는 전씨(田氏)나 고칙(誥勅)이 있는 진씨(陳氏)의 경우처럼 그것을 증거로 삼아 그렇게 한 것과 같겠는가. 물속에 기어다니는 게나 풀잎에 붙어 사는 거미 따위도 오히려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데, 하물며 석씨(石氏) 성을 가진 자는 우리 나라의 입장으로 볼 때 그 존재가 과연 어떤 것인가. 임진 왜란 당시 임금의 행차는 의주에 머물러 있고 사신은 봉성(鳳城)으로 달려가는 등 그 상황이 급박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 때 중국 조정의 제공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태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바깥에 있는 나라가 스스로 무찌를 일이지 어찌 감히 대국을 귀찮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중에 오직 대사마(大司馬) 석공(石公)088)  만은 비분 강개하여 우리 나라의 일을 스스로 책임지고서 들끓던 옥신각신한 주장들을 물리치고 백만대군을 출동시켜 아무 보답도 할 수 없는 땅에 은덕을 베풀었으나 뜻이 이루어지자 자신은 형벌을 받아 사형을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주고 칭송한다 하더라도 구원병 백 명에 대한 보답도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세상이 수없이 변한 시점에서 자기가 분양(汾陽)089)  의 후손이라 한다든지, 또는 회음(淮陰)090)  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는 우선 그만두고라도 그 기쁨과 감격이 과연 어떻겠는가. 당 태종(唐太宗)은 왕업을 일으킨 뒤에 전조(前朝)의 충신을 위하여 어린아이들에게도 다 높은 품계를 내려줬는데, 하물며 석씨 성을 가진 자를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우선 어영청에 적을 붙여두고 요식을 주다가 분명한 문헌이 나타나면 특별히 거두어 등용해야겠으니,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경기 감사와 강원 감사에게 성심껏 탐방하여 기어코 상고할 만한 문헌을 구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할 것이며, 이번에 가는 사신이나 혹은 앞으로 사신을 보낼 때는 석 상서(石尙書)의 족보를 비용을 아끼지 말고 구입해 와서 참고하는 데에 일조가 되도록 하라는 뜻을 또한 사역원(司譯院)에 분부하게 하라. 제대로 구입해온 자는 본원에서 책을 사다가 바친 사람을 표창하는 규정을 적용하고 만약 분명한 문헌을 그 안에서 찾아낼 경우 또한 그에게 의식을 행하는 반열에 참가하게 하는 것을 예조 판서로 하여금 해조의 장고(掌攷)에 기재해 두게 하라."
하였다.

 

윤광보(尹光普)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30일 병술

상이 이문원에서 재숙(齋宿)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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