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정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남단(南壇)·사직단(社稷壇)·우사단(雩祀壇)과 산천제(山川祭)에 쓸 향축(香祝)을 내주었다. 이문원에서 재숙하였다.
별겸춘추(別兼春秋) 서유문(徐有聞)이 평양부의 화재를 당한 가구의 현황을 살펴본 것을 가지고 서계하기를,
"화재를 당한 민가수는 1백 75호인데 성상께서 분부하신 뜻으로 낱낱이 알려주었으며 구제조치로서 좁쌀을 빠짐없이 나눠주었습니다. 감사와 지방관들도 쌀과 돈으로 도왔고 부유한 백성으로서 물력을 내놓아 구제해준 자는 일곱 사람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서도 지방의 민속이 비록 순후하다고는 하지만 한 사람이 천금을 내놓아 도와줬다는 것은 그 의리가 가상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그들의 이름을 물어 해조에서 표창하여 가자(加資)하는 특전을 적용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일 무자
이문원에 나아가 차대(次對)하였다.
서매수(徐邁修)를 동지정사로, 이득제(李得濟)를 경기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3일 기축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내승(內乘)·별군직(別軍職)·선전관(宣傳官) 및 무예청(武藝廳)에 대한 추등시사(秋等試射)를 실시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충청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의 이문(移文)에 의하면, 이존창(李存昌)이 석방되어 돌아온 뒤에 특별히 살려준 조정의 고마움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설 계책을 서둘러 세우기를 ‘지금 만약 시골마을에 따로 떨어져 있다면 남에게 신임을 보이기가 쉽지 않으니 고을 밑에 살면서 일상적인 언행이 사람들의 이목에 오르내리게 함으로써 선한 길로 옮겨간 보람이 세상에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혹시 이단에 빠져들어 스스로 헤쳐나오지 못한 자가 있으면 또한 앞으로 가르치고 일깨워 기어코 성인의 교화 속으로 함께 돌아오게끔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관가의 근처에 와서 살게 했는데, 그의 집안에서의 평소 행동을 특별히 살펴보고 이따금 물어보면 완전히 마음을 바꿔 더이상 미련이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염탐하여 살펴보도록 해당 고을에 특별히 당부하고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매월 조정에 낱낱이 이문할 생각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존창이 그의 잘못을 이미 깨우쳤다는 것은 분명하여 더이상 의심할 것이 없다. 게다가 도에서 보낸 문서와 고을에서 올린 보고에 또 이처럼 증거가 있으므로 외양을 바꾼 것 이외에 마음까지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최필공(崔必恭)에 비하면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말로만 그렇게 하고 실제적인 흔적이 없는 것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아울러 남들도 깨우쳐서 다른 사람과 자신이 다 보통사람들이 하고 있는 대로 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이단에 빠진 자를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방도를 가지고 다시 본도의 감사에게 엄중히 신칙하라."
하였다.
8월 4일 경인
춘당대에 나아가 선천(宣薦)·내금위(內禁衛)와 정원 이외의 내금위 군사들에 대한 추등시사(秋等試射)를 실시하였다.
8월 5일 신묘
차대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금부 당상이 전 백령 첨사(白翎僉使) 신광로(申光輅)를 의논하여 조처하는 일로 주상께 아뢴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외딴섬에 유배되었거나 위리 안치한 무리들에 대해서는 예사로운 일에 연좌된 자라 하더라도 그 행동을 주시하고 단속하기를 정말 엄격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죄인 이윤석(李胤錫)은 역적 이탄(李坦)091) 과 역적 이훈(李壎)092) 의 조카로서 일찍이 체포되어 국문까지 받았으나 두루 포용하신 선대왕의 은혜를 특별히 입고 연좌시켜 귀양지를 옮기는 정도로만 처벌했던 자이니, 그 관계가 극히 중대합니다.
그의 아들이 고한 것에 의하면 낚시하러 나갔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었는데 시체가 떠올랐으나 날이 저물어 미처 건져내지 못했다고 하니, 그 놀라움을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밝히고 조사할 방도와 시체를 찾아 건져서 검시하는 일을 한시라도 늦잡을 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전후에 걸쳐 올린 장계의 내용은 너무도 허술하니, 해당 첨사와 해당 부사를 마땅히 법에 따라 엄중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황해도 관찰사 조윤대(曺允大)를 파직하고 금부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고 엄중히 처벌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기정(朴基正)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이 아뢰기를,
"최필공(崔必恭)은 신의 조(曹)에서 엄중히 신문하고 여러 방법으로 일깨워보았는데 이단에 빠져든 정도가 갈수록 더 심해질 뿐 조금도 깨우치는 뜻이 없었으므로 그의 부형을 불러 그들에게 일깨워 보게 하였더니, 며칠 사이에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기한이 지난 뒤에 그들이 다시 와서 일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교화시키기 어려운 백성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법조문을 적용시켜야만 다스려지는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자는 족히 책망할 것도 없는 무리이다. 이전에는 입으로만 그렇게 하겠다 하고 마음은 깨우치지 못했으나 이번에는 반드시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이 자의 행위는 매우 가소롭다. 생활이 곤궁할 때는 잘못을 깨우쳤다고 말하여 먹을 것을 얻을 길을 찾았다가 일단 먹을 것을 얻은 다음에는 금방 또 예전과 마찬가지이니, 이는 항심(恒心)이 없는 무리에 불과하다."
하였다. 이 때에 최필공이 이전의 버릇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옥에 잡아 가둔 것이다.
8월 6일 임진
이익모(李翊模)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7일 계사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한 뒤에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고 제사하는 의식을 연습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이조 참판으로, 권유(權𥙿)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집두(李集斗)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8월 8일 갑오
전교하였다.
"상산부(象山府)093) 에 있는 신덕 왕후(神德王后)094) 생가의 옛터에 세울 비석의 앞면에 새길 글은 황해 감사가 부임할 때 가지고 가게 해야겠으므로 오늘 내가 직접 써서 내일 감사에게 내려주겠다. 비석 음기(陰記)는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써서 올리고 초도서 전자(草圖書篆字)는 원임 직각 김조순(金祖淳)이 써서 올릴 것이며 가지고 가는 것은 용정(龍亭)에 넣어 교외에까지 가서 감사에게 넘겨주도록 하라. 글씨를 처음 새길 날짜는 내각으로 하여금 길일을 잡아 초기(草記)로 아뢰고 비각을 세우는 공사는 좌향을 정한 다음 나중에 길일을 잡아 착수하도록 하라."
민태혁(閔台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8월 9일 을미
화성(華城)에 딸린 고을의 부장(部將)들에 대한 취재(取才) 시험에 앞서 초시를 실시하고 임금이 직접 나가 다시 시험보이는 것에 대비할 것을 명하였다.
8월 10일 병신
편전(便殿)에 나아가 신덕 왕후 생가의 옛터에 세울 비석 앞면에 새길 글씨를 직접 내주었다.
전교하였다.
"날씨가 이미 서늘해졌으니 지방에 있는 산림(山林)095) 을 불러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강석(講席)에 출입하게 해야겠다. 서울에 있는 두 유선(諭善)은 요즘 본직과 겸직의 직무로 인해 매일 관청에 나가므로 당분간 규정대로 출근하기 어렵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유선부터 먼저 올라오게 하고 회덕(懷德)에 있는 산림도 이전에 돈유(敦諭)한 적이 있으니 그 또한 올라오게 해야겠다. 이 뜻을 두 산림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이서구(李書九)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8월 11일 정유
윤대(輪對)하였다. 하직하는 수령을 불러 만나보았다.
8월 13일 기해
전교하였다.
"종묘의 제사용으로 쓰는 각 품목은 마땅히 정성을 들여야 하므로 제사 음식까지도 오히려 제철에 나는 과일을 그때그때 바꿔서 쓰는데, 어찌 제사용으로 쓰기에 합당하지 못한 것을 봉해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제물을 보니 잘 살펴보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다. 장원서 제조(掌苑署提調) 권유(權裕)와 예조 참판 송전(宋銓)을 체차하라."
8월 14일 경자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내일 새벽에 진전(眞殿)에 술잔을 드리기 위해 일찍 재계할 곳으로 가야겠는데, 항상 천추구절(千秋舊節)096) 을 만날 때마다 선대왕의 효성을 생각하게 되고 멀리 선침(仙寢)을 바라보면 그리움이 한층 더하였다. 더구나 오늘은 곧 인현 성모(仁顯聖母)께서 돌아가신 날이다. 회상하면 지난날 선대왕이 안동(安洞)의 옛집에 거둥하셨을 때 내가 함께 모시고 성모께서 잠깐 거처하신 곳을 삼가 우러러본 적이 있는데, 임금이 쓰신 감고당(感古堂) 세 글자가 난간 위에 걸려 있어 탄생의 사적을 기록한 추모동(追慕洞)의 비석과 민간의 마을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날 이 재계를 만나 어찌 선대왕의 뜻을 계승하는 조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문정(文貞) 민유중(閔維重)의 사당에 승지를 보내 당일에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관청에서 제사를 지내주지 못한 지가 벌써 20여 년이 지났다. 요즘 또 보건대, 그는 명문가의 법도가 있으므로 한 고을을 다스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겠다. 봉사손인 도사(都事) 민기현(閔耆顯)을 오늘 인사행정에서 6품 자리의 수령으로 제수하고 곧바로 떠나보내도록 하라."
다달이 천신(薦新)할 특산물을 봉진하는 때가 혹시 날이 저물어 종묘의 문이 잠긴 뒤일 경우에는 문을 잠그는 것을 보류하고 올리게 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8월 15일 신축
이문원에 나아가 차대하였다.
이조의 세 당상관인 김문순(金文淳)·이조승(李祖承)·이익모(李翊模)를 파직하였다. 밤이 될 때까지 개정(開政)하여 의망 단자를 올리는 것을 지체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나온 것이다.
8월 16일 임인
이서구(李書九)를 이조 참판으로 삼고 윤광보(尹光普)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가 곧 체직하고 윤행원(尹行元)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8월 17일 계묘
송전(宋銓)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조원(李祖源)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재찬(金載瓚)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8월 19일 을사
헌릉(獻陵)097) 에 행차하였다. 관왕묘(關王廟)를 둘러본 뒤에 주교(舟橋)에 이르러 칠언근체시(七言近體詩) 두 수를 지었다. 영묘(英廟) 무자년 상이 동궁에 있을 때 어가를 모시고 헌릉을 참배하러 갔는데 용주(龍舟)로 광나루를 건너면서 시를 지은 적이 있었다. 이 때에 와서 옛일을 회상하여 그 당시의 운자로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과천(果川) 행궁에 당도하니 날이 아직 새지 않아 군병들에게 조금 휴식을 취하라고 명하였다. 아침해가 돋을 때 헌릉에 나아가 직접 제사를 지내고 재실로 들어가 또 칠언 율시 한 편을 지었는데, 역시 무자년 당시의 운자였다. 신하들이 또 다시 화답하여 올린 뒤에 과천 행궁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전교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헌릉 대왕께서는 거룩하고 신성하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하신 분으로 오제 삼왕(五帝三王)을 이어 표준을 세우고 이경 팔도(二京八道)를 쓰다듬어 가정으로 삼으셨다. 창제한 것은 하늘땅에 견줄 만하고 업적은 금석처럼 공고하여 산천의 신령도 기꺼이 떠받들고 동물과 식물, 곤충까지도 소생시켜 준 은덕을 길이 입음으로써 우리에게 억만년토록 끝없이 이어갈 복을 굳게 터잡아주셨으니, 생민(生民)098) 과 하무(下武)099) 같은 시라도 그 공덕을 충분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선대왕의 복록을 이어받고 역대 조상의 거룩하신 가르침을 익히 배워 그것을 잊지 않고 한층 더 빛내야겠다고 다짐하여왔다. 때마침 비석을 세워 사적을 새기는 일이 사록(沙鹿)100) 의 옛터에서 있었으니, 일이 마치 오늘날을 기다린 것만 같아 경사스럽고도 다행스럽다.
지난날 선대왕 무자년에 어가를 모시고 본 능에 제사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32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다시 선침(仙寢)을 참배하고 아울러 제사를 드린 것이다. 문무 석상(文武石像) 사이를 맴돌고 있노라니 불현듯 지난날 선대왕께서 공역을 친히 살피실 때 아침 수라를 권해 올리던 일이 떠오르는데 그때의 자세한 사실은 반드시 사관의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각 그리운 마음이 한층 더 새로워짐을 느낀다.
삼가 생각건대 국초(國初) 태종께서 즉위하기 전에 제릉(齊陵)101) 을 관진(觀津)의 명당자리에 모실 때 풍수가가 제의하기를 ‘이 자리에다 모시면 후손이 하늘의 해·달·별처럼 영원히 번창할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유태씨(有邰氏)102) 의 외손으로 태어나 풍수(豊水)103) 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아, 유신씨(有莘氏)104) 와 도산씨(塗山氏)105) 가 국가에 끼친 공은 남궁씨(南宮氏)106) 나 산의생(散宜生)107) 보다도 월등히 높다 하겠다.
오늘날 고마운 정성을 표시하는 일은 마땅히 근본을 먼저 찾아야 한다. 여흥 부원군 문도(文度) 민제(閔霽)와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송씨(宋氏)의 묘소에 정경(正卿)108) 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그 봉사손 민백전(閔百全)은 선대왕 때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가 등용하는 성대한 조치로 인해 말단의 벼슬을 지낸 일이 있으나 그 이후로는 벼슬살이를 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어제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109) 봉사손이 대답한 말을 들으니, 여흥 부원군의 집안에 백전의 손자가 있는데 나이가 20세가 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 이름은 민치검(閔致儉)이라고 하였다. 본 능의 재랑(齋郞)을 의망할 때 그의 품계를 올려 그 자리에 보임하도록 하라."
전교하기를,
"오늘은 곧 내가 옛날 어가를 모시고 온 이후 처음으로 알현한 날이다. 마땅히 경사로운 일에 상을 내리는 조치를 오늘 제사에 참가한 신하들에게 실시해야겠다."
하고, 아헌관(亞獻官) 좌의정 이병모(李秉模)와 우의정 이시수(李時秀)에게는 숙마(熟馬) 1필씩을 그들을 마주 대하여 직접 내주고, 찬례(贊禮) 예조 판서 서용보(徐龍輔)에게는 숙마 1필을 하사하고,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집두(李集斗)는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승진시키며, 대축(大祝) 부응교 이정운(李貞運), 통례(通禮) 서유문(徐有聞), 집례 홍낙유(洪樂游) 등은 모두 통정 대부로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다.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는 옛날 이 능에 행차했을 때 승지로 어가를 수행하였다 하여 자헌 대부로 승진시켰다.
전교하였다.
"오늘 새벽 주교(舟矯)를 건너올 때 송추(松楸)110) 가 눈 안에 들어왔다. 몇해 전에 묘소에 제사를 지내드린 적이 있는데 금년은 그분의 환갑이 다시 돌아온 해이므로 강타(江沱)111) 와 규목(樛木)112) 의 칭송이 생각난다. 자손에게 복록을 길이 누리게 하였고 나라에 끼치신 공이 크니, 내가 어찌 감히 목묘(穆廟)113) 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 그 공을 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지를 보내 이 제문을 가지고 가서 창빈묘에 제사를 지내드릴 것이며, 대원군(大院君)114) 의 봉사손이나 직계손 중에서 이름을 알아본 뒤에 현재의 목릉 참봉은 임시로 군직에 붙여두고 그 후임으로 오늘 인사행정에 의망하여 그로 하여금 내일 제례에 참가하고 그대로 재소(齋所)로 들어가 숙직하게 하라."
8월 20일 병오
사근평(肆覲坪) 행궁에서 잠깐 머물러 쉬면서 전교하기를,
"밥을 먹기 전에 화성(華城)에 도착할 수 있다면 참배하는 것을 어찌 내일로 미룰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장용영(壯勇營)을 내영과 외영으로 설치한 것은 그 기능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병을 뽑아 행차를 수행시키고 나머지는 다 행궁에 계속 머물러 있게 한다면 또한 매우 편리하겠다. 오늘 그냥 원소(園所)로 가서 참배하였다. 이렇게 한다면 궁궐로 돌아가는 것도 내일에 있게 될 것이니, 이런 뜻을 도성에 남아 있는 대신으로 하여금 알고 있도록 하라."
하였다.
행차가 화성 행궁에 머물렀다가 그대로 현륭원으로 가서 몸소 제례를 행한 다음 화성 행궁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수궁 대장(守宮大將) 김재찬(金載瓚)을 파직하고 홍양호(洪良浩)로 교체하였다. 재찬이 올린 장계에 종사관의 성명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8월 21일 정미
궁궐로 돌아왔다.
8월 22일 무신
좌의정 이병모와 우의정 이시수가 상차하여 말을 하사한 은전을 사양하였는데, 병모의 차자에 대해 비답하기를,
"한번 다녀간 이후 30년이 지난 뒤에 참배하여 정성을 표시하면서 그 당시 운자로 시를 지어 감회를 기록하고 떳떳한 법에 따라 상을 내려 이 행사를 중시하는 뜻을 보였다. 이 점을 나는 또한 다행한 일로 여기고 있으며 경도 반드시 함께 영광이 있어야 한다. 내려준 좋은 말은 편한 마음으로 받으라."
하고, 시수의 차자에 대해 비답하기를,
"경의 선경(先卿)115) 은 항상 왕위를 물려받고 능을 참배하는 일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으로 나에게 말했었는데, 지금 다행히 정성을 표시하고 돌아왔다. 상전(賞典)이 제례를 집행한 신하들에게 두루 미친 것은 이 또한 옛일을 기리고 선대의 뜻을 계승하는 일 가운데 한가지이니, 사양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편한 마음으로 받으라."
하였다.
상언(上言) 1백 14건을 판하하였다.
8월 23일 기유
전교하였다.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묘소와 해창위(海昌尉)116) ·명안 공주(明安公主)117) 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고 명혜(明惠)118) ·명선(明善)119) 두 공주의 묘소에는 내시를 보내 치제할 것이며, 공신의 후예로서 적장손(嫡長孫)에 대하여는 충훈부로 하여금 각 계파를 자세히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고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의 집에 사관을 보내 그의 자식들을 돌보아 주라고 명하였다.
8월 24일 경술
이득신(李得臣)을 동지정사로, 이정덕(李鼎德)을 부사로 삼았다.
중비(中批)로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좌명 공신(佐命功臣)의 적장손(嫡長孫)으로서 충의위(忠義衛)에 붙여주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즉시 붙여주되, 그중에 의안 대군(義安大君)120) 의 장손 이종회(李宗恢)는 관직을 제수하고, 진산 부원군(晋山府院君) 하륜(河崙)의 장손 하용빈(河龍彬)은 참봉으로 임용하고, 상당군(上黨君) 이연(李衍)과 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는 수소문하여 찾아보며, 한산 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의 장손인 수위관(守衛官) 조명한(趙明漢)은 그가 교체되어 돌아오는 대로 우선 유서(諭書)에 붙여 놓았다가 충의위에 자리가 나면 거두어 쓰고, 이름을 기록하지 못한 여러 집안에 대해서는 찾아내는 대로 충의위에 붙여주도록 할 것과 의안 대군의 묘소와 진산 부원군의 묘소에는 승지를 보내 치제하고, 상당군·한산군·취산군의 묘소에는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할 것을 명하였다.
8월 25일 신해
차대하였다.
8월 26일 임자
의주부(義州府)의 죄수 김중망덕(金衆望德)은 사형을 감하여 먼 섬에 보내 신역을 지우고 그의 아내에게는 쌀과 베를 후하게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본디 중망덕은 무늬있는 비단에 대한 금법을 어긴 자였는데, 그의 아내 함씨(咸氏)는 자기 남편이 옥에 갇힌 뒤로 울면서 밥을 빌어다가 남편을 먹여 살렸다. 낮에는 눈비를 무릅쓰고 돌아다니고 밤에는 옥문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거친 사내들도 감히 그에게 접근하지 못했으며 천리길을 기어 걸어와 징을 치고 자기 목숨을 남편의 목숨과 바꾸게 해달라고 비는 등 20년을 하루같이 남편을 위해 헌신하였다. 전 의주 부윤 이기양(李基讓)이 그 사실을 아뢰자 이 명이 내린 것이다.
8월 27일 계축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서총대(瑞葱臺) 시사(試射)와 화성(華城) 속읍의 무사들에 대한 시취(試取) 및 장용영(壯勇營) 추등시사(秋等試射)를 실시하였다.
유선(諭善) 이성보(李城輔)가 고을의 보고 계통을 통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요즘 겸유선(兼諭善) 두 사람이 한 사람은 병석에 누워있고 한 사람은 본직을 수행하느라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게다가 지금은 서늘한 가을이 되었으므로 기운을 내 길을 떠날 수 있으니, 이전에 승낙한 말을 더더욱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은 즉시 올라와 강석에 출입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호군(大護軍) 송환기(宋煥箕)가 고을의 보고 계통을 통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유선에게 내린 비답에서도 말했지만 요즘 날씨가 맑고 좋아서 충분히 힘을 내어 길을 떠날 만하니, 부디 밤낮으로 고대하는 내 마음을 생각하여 빨리 올라오도록 하라. 일단 세상을 이끌어가는 직무를 맡긴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인 만큼 경은 어찌 계속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십 일이 지나가면 또 겨울철에 들어설 것이니, 반드시 이 비답을 받은 뒤에 즉시 길을 출발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9일 을묘
전교하기를,
"유학으로 나라를 세운 것은 삼대(三代) 때의 아름다운 법도이다. 희공(姬公)121) 은 마땅히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고 마땅히 존경할 사람을 존경하였으며, 태공(太公)122) 은 어진이를 등용하고 공이 있는 자를 높였으므로 주나라 선비들은 귀하게 대접을 받았다. 한(漢) 고제(高帝)는 후덕한 인물이었는데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맑고 깨끗한 정치로 보좌하고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순후함이 뒤를 이었으나 오히려 황(黃)·로(老)123) 가 뒤섞였으며, 동한(東漢) 이후로는 더 이상 선왕(先王)의 기풍이 없었다.
홍범(洪範)124) 의 오복(五福)에서는 덕을 좋아하는 것이 네 번째에 들어있고, 태재(太宰)125) 의 팔통(八統)에서는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세 번째로 들어있다. 우리 나라는 이것을 크게 숭상한 결과 역복(棫樸)126) 이며 청청 자아(菁菁者莪)127) 와 같은 시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를테면 목릉(穆陵)128) 의 융성하던 때에는 기(夔)·용(龍)129) 처럼 뛰어난 신하들이 조정에 포진해 있었는데 그 당시 문순공(文純公)130) 과 문성공(文成公)131) 이 그 표준이 되었으며, 세상이 아주 잘 다스려졌던 영릉(寧陵)132) 때는 예악이 꽃을 피워 노래가락에 올려졌는데 그 때도 문경공(文敬公)133) 과 문정공(文正公)134) 이 좌우에서 보좌하여 그 빛나고 성대한 정치는 그 유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올바른 학문이 밝혀지고 사특한 설은 사라져 우리 해동이 공(孔)·맹(孟)의 나라가 되고 후세에 장횡거(張橫渠)와 주자의 지역이 되었으니, 전해오는 말에 군자의 나라라고 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옛날의 입장에서 오늘을 본다면 오늘의 현상은 과연 어떠한가. 지금 나라 안의 사람을 등용하면서 재정을 맡아볼 사람이 없다느니, 군정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느니 하는 한탄이 많으나 내 생각에는 재정과 군정 따위는 그것을 맡은 유사가 따로 있고 고민되는 것은 초선(抄選)135) 을 오랫동안 실시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나예장(羅豫章)136) 이 말하기를 ‘경술(經術)137) 은 동생(董生)138) 과 공손홍(公孫弘)이 그 길을 열어놓았으나 주공(周公)·공자의 본심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대체로 이른바 ‘경술’이란 두 글자는 도를 밝히는 자의 요체가 아니긴 하지만 근래 30, 40년 동안에는 그 경술마저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들어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은 사람에게 매인 것이지만 들으려해도 듣지 못한 것은 시대에 관한 것이다. 지금 비록 극히 공평한 마음과 참다운 정성으로 도를 밝혀보자고 발벗고 뛰어드는 공자 맹자같은 사람이 또 나온다 하더라도 도저히 손을 쓸 도리가 없게 되었는데, 그 책임은 사람에게 있는가, 시대에 있는가?
지금 특별히 초빙하는 사람으로는 두 유신(儒臣)이 있을 뿐인데 쓸쓸한 산골에 버려져 세상을 멀리하는 마음을 잡아돌리지 못하니, 내 스스로 반성해 마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아예 찾지를 않는다면 초야에서 글을 읽은 선비는 장차 등용될 날이 없을 것이다. 선비가 등용되지 않는다면 나라가 과연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 세상의 도리는 이로 인해 허물어질 것이고 조정의 기상은 이로 인해 파탄이 날 것이고 민간의 풍속은 이로 인해 혼탁해질 것이므로 항상 한밤중에는 근심이 되어 한탄하며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삼대 이후에는 오로지 과거시험으로만 사람을 뽑아왔다. 당나라 때 양관(楊綰)과 이덕유(李德裕)가 이미 제도를 고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천년 세월을 이어온 잘못을 갑자기 개혁할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음관(蔭官)도 과거를 보이자는 논의가 섣달에 있은 인사행정 석상에서 거론되었던 것이나 이 또한 근본과 시초를 바로잡는 계책은 아니다. 뛰어난 선비 한 사람을 얻으면 충분히 백관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법이니 당장 시급한 것은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덕있는 자를 우대하고 어진 사람을 믿으면 오랑캐들도 복종할 것이다.’ 하였다. 만약 조정이 유가의 학술을 높이고 장려한다면 어찌 바른 학문이 밝아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간특한 설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할 것인가. 주자의 글을 전부 모아 하나로 묶어 편집하는 것은 곧 내가 세상을 일깨우고 풍속을 안정시키자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을 엮고 손질하는 작업이며 토론하고 밝히는 일은 마땅히 몸을 닦고 실천하는 선비와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대체로 이른바 초선(抄選)이란 이름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 대상자를 엄격하게 가려 뽑는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대왕조 때에 규정을 정한 뒤에는 법의 의미가 한층 강화되어 그 선발에 일단 들어가면 유일(儒逸)로 대우하였다. 지금 내가 구하는 자는 글을 읽은 선비이다. 그에게 경전의 뜻을 물어 시험해보고 또 내외의 관직을 맡겨 시험해 본 뒤에 과연 초선을 하기에 합당한 인물이라면 묘당과 이조가 《통편(通編)》과 수교(受敎)의 규정에 따라 빈청(賓廳)에 모여놓고 그 중에서 선발하여 천거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그대들 정부의 신하들은 지금 내가 내리는 윤음(綸音)을 잘 받들어 성심껏 찾아내어 각기 차례대로 등용될 수 있게 하라.
그리고 주부자의 저서로 말한다면 곧 천지간에 손꼽히는 문자로서 《중용》·《대학》·《논어》·《맹자》와 함께 서로 안팎을 이루는데 그것을 숭상하는 풍속은 지금이 옛날보다 못하다. 이 때문에 나는 그것을 강론하여 드러내기를 옛날 정부자(程夫子)가 《예기》 속에 들어있는 중용·대학을 끄집어내어 특별히 드러냈던 것처럼 하여 집집마다 사람마다 외우고 익히게 하려 한다. 조정의 선비나 유생으로서 주자의 글을 전문으로 공부한 자에 대해 안으로는 대신 및 이조의 관리와 밖으로는 각도의 감사들에게 각기 자기가 듣고 본대로 이름을 적어 아뢰게 하라. 오늘날 해야 할 실제 정사로서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하고 또 전교하기를,
"경들은 초야에 있으므로 반드시 글을 읽은 선비를 알 것이다. 만약 사람을 천거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면 주부자의 글을 전념하여 외우고 익힌 자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자는 우선 즉시 아뢰고 나중에 알아낸 자는 나중에 아뢰어라.’라는 내용으로 내각에게 지방에 있는 유신에게 하유하도록 할 것이며, 또 반장(泮長)에게 태학과 사학(四學)의 유생 가운데 주부자의 글을 깊이 공부한 사람을 유신과 똑같이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정부와 정조(政曹)에서는 초야에서 글을 읽은 선비를 찾아내어 경전의 뜻을 고문하는 자리나 내외의 관직을 맡겨 재주를 시험해보고 만일 초선(抄選)하기에 합당한 자가 있을 경우 《통편》과 수교(受敎)의 규정에 따라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대신·전신(銓臣)·반장(泮長)과 각도의 감사들에게 주자의 글을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을 각기 아뢰게 하라."
하였다.
김문순(金文淳)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황해도 관찰사 박기정(朴基正)이 곡산부(谷山府)의 태조가 말을 달렸던 길을 살펴본 내용으로 치계하기를,
"신은 말을 달려 곡산부에서 북쪽으로 1백 50리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가람산(岢嵐山)에 이르러 치마도(馳馬道)139) 옛터를 삼가 살펴보았습니다. 대체로 장백산(長白山) 한 능선이 서남쪽으로 6, 7백 리를 뻗어내려 오다가 곡산 북쪽에 이르러 가람산을 이루었는데 혹은 하남산(河南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배후는 양덕(陽德) 땅인데 북쪽으로는 안변(安邊)·덕원(德源)·문천(文川)·고원(高原) 등 땅과 잇닿았고, 동쪽으로는 이천(伊川)·안협(安峽)을 틀어쥐고, 서쪽으로는 성천(成川)·삼등(三登)을 끼고 남쪽은 곡산 땅입니다. 조물주가 특별히 만든 높은 산이 만 길이나 깎아지른듯 솟아 있는데 그 웅건한 기세와 기묘하고 장엄하게 배치된 모습은 해서지방 여러 산들의 으뜸이 될 뿐만 아니라 바로 경기·강원과 서북 지역을 포함한 5개 도의 요충지인 것입니다.
산줄기가 좌우로 나래를 펴 주위를 껴안아 감싸고 있고 그 중앙에 한 줄기 큰 능선이 뻗어나와 그 길이는 두세 리(里) 정도에 이르고 너비는 1백 50, 60보 정도 되는데, 평탄하고 곧게 깔린 형태가 마치 숫돌과 화살 같았습니다. 그것이 비록 조물주의 조화라고는 하지만 인간이 다듬어놓은 땅과 흡사하였습니다. 그 근본 형체를 따져보면 해좌 사향(亥坐巳向)140) 으로서 세속에서 전하는 성조(聖祖)의 치마도가 곧 이곳이었습니다. 앞쪽과 뒤쪽에 다 칠성대(七星臺)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돌을 쌓아올려 대를 만들었던 터가 뚜렷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지점에 있는 능선은 곧 상유령(上踰嶺)인데 항간에 전하는 말은 성조께서 일찍이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상유령에서 남쪽으로 15리 지점에 성조성(聖祖城)이 있는데 그곳은 하남리(河南里)의 마을 입구였습니다. 평지의 중앙에 산봉우리 하나가 높이 솟아있고 그 꼭대기에 작은 성이 있는데 돌을 포개 쌓아올린 것으로서 둘레는 31보이고 높이는 18척이었습니다. 동쪽·서쪽·북쪽 3면은 높이 서 있고 남쪽은 허물어졌으며 그 중앙의 토대[土墩]는 사면에 쌓은 돌과 그 높이가 같았습니다.
그 성에서 동쪽으로 3리쯤 되는 지점의 골짜기 사이에는 샘물이 바위 밑에서 만곡원(萬斛源)141) 처럼 솟아오르는데 속칭 수라천(水剌泉)이라 하고 또 돌 틈에서 흘러나오는 샘이 있는데 속칭 성조랑(聖祖浪)이라 합니다. 옛날 전설에 의하면 이 두 줄기의 샘은 일찍이 성조의 끼니를 짓는 데에 이바지하였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동(槽洞)·안치(鞍峙)·전동(箭洞)·노동(弩洞)·창암(鎗巖)·검암(劍巖)·주암(胄巖)·종암(鍾巖)·용가봉(龍駕峰) 등의 명칭이 하나의 산속에 깔려있으며 또 시냇물이 바위 골짜기에서 흘러나와 문성강(文城江)에 이른 뒤에 당저(堂底)·용연(龍淵)의 물과 합류하여 대동강(大同江)으로 들어갑니다.
이상의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상유령은 북관(北關)142) 으로부터 송경(松京)143) 으로 통하는 곧은 길이고 치마도와 성조성·용연 등지는 다 성조께서 풍패(豊沛)144) 로부터 왕래하시던 길이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조동·안치·용가봉 등 칭호들도 모두 근거가 있는 것들입니다. 신은 또 원근에 있는 노인들에게 여러가지로 알아보았더니, 모두들 이 산은 성조께서 임하셨던 곳이라고 옛날부터 전해 내려와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자자하다고 하나같이 말하였습니다. 삼가 그림 한 벌을 그려 예조로 올려보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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