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52권, 정조 23년 1799년 9월

싸라리리 2025. 8. 1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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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병진

전교하였다.
"오늘 황해 감사가 올린 장계를 보았다. 그 내용에 의하면, 치마도(馳馬道)의 옛터를 살펴보았는데 동쪽에는 상유령(上踰嶺)이 있고 남쪽에는 성조성(聖祖城)이 있으며 그 곁에 수라천(水剌泉)이 있다고 하였다. 치마도 옛터의 지형 문제 이외에 믿을 자료로 삼을 만한 지명이 또 이와 같았다. 이런 사실을 이제와서야 자세히 들은 것은 어찌 매우 희귀하고 반가운 일이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오히려 사실을 확실히 모르다가 이번 감사의 걸음에서 그가 조목별로 진술한 것이 매우 분명하였다. 마땅히 성후(聖后)145)                  의 사제(私第) 옛터와 함께 비각을 짓고 비석을 세워야겠으나 또한 응당 깊이 헤아려서 해야 할 문제가 있다. 치마도 옛터는 곡산부에서 북쪽으로 1백 50리 지점에 있는데, 그곳은 북관(北關)의 안변(安邊) 등 고을과 서관(西關)의 성천(成川) 등 고을과 관동(關東)의 안협(安峽) 등지를 모두 빙둘러 껴안고 있으며, 천연으로 된 높은 산이 깎아지른듯 만 길이나 솟아있고 치마대(馳馬臺)가 그 위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향나무가 우거져 하나의 산등성이에 깔려있고 나머지 지역은 전부 평탄하여 사람이 일부러 다듬어놓은 땅과 흡사한데 그 길이는 두세 리이고 너비는 백여 보쯤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을 소재지에 가까운 사제의 옛터와는 상황이 약간 다르다. 옛터에 사적을 기록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근거로 삼을 만한 북관 지역에서의 사례에 따라 옛터에서 가까운 지역의 바위에 새겨 기록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한층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해좌 사향(亥坐巳向)의 위치에 ‘치마기(馳馬基)’라는 세 글자를 돌에 새겨넣는 것도 좋겠다. 다시 감사로 하여금 그곳의 지형과 북관에서 실시했던 과거의 사례 가운데 적용하기에 적합한 방안에 관해 따로 의견을 갖추어 장계로 아뢰게 하라.
그리고 이달 6일 육상궁(毓祥宮)을 참배하러 갈 때 문소전(文昭殿) 비각 앞을 지나갈 것인데, 이번에 세울 곡산부 사제(私第) 옛터의 비석 모양이 문소전의 비석을 본떠 만들었으므로 이번 기회에 살펴보고 싶다. 광화문(光化門)으로 나가 먼저 비각을 살펴보고 의식을 행한 뒤에 육상궁으로 가야겠으니, 이런 내용으로 분부하도록 하라. 이달은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에 있는 두 본궁(本宮)에 옷과 폐백, 향촉(香燭)을 내가 직접 내주는 달이다. 오는 15일에 직접 내줄 생각인데 이 전교를 내각으로 하여금 감사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9월 2일 정사

전교하였다.
"능으로 행차하여 밤을 묵는 경우에 유도 대신(留都大臣)이 3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하루 간격으로 문안을 드리는 것은 나라의 확고한 법이다. 지금 사람들은 옛날 규정에 대부분 어두워 유도 대신이 하루 간격으로 문안드리는 일을 언제나 일상적인 규례대로 행하는 조정의 문안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법전에 나와있는 3품 이상 관원을 육조 참의로 간주함으로써 이번에 대신이 연석에서 아뢰어 파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사실은 잘못된 규례를 답습해온 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직된 사람들을 모두 서용하도록 하라. 앞으로는 유도 대신이 미리 의정부의 참찬(參贊)을 엄중히 신칙하여 각기 거안(擧案)146)  을 바치게 하고 문안을 하는 것도 단자(單子)로써 하는 문제를 규정으로 정하여 시행하게 하라. 해방(該房) 승지가 공무에 관한 장계를 올리는 경우에도 유도 대신 장계의 규례에 따라 똑같은 원칙으로 말을 만들도록 하라."

 

9월 3일 무오

춘당대에 거둥하여 장용영의 무사 및 금군(禁軍)·호위 군관에 대한 시사(試射)를 실시하였다.

 

9월 4일 기미

전교하기를,
"치마도 옛터에 새길 글씨는 오늘 내가 직접 써서 6일에 직접 내주고 그 다음 문소전 비각을 살펴볼 생각이니, 이런 내용도 함께 해조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성후(聖后) 옛 집터의 비석에 쓸 글씨는 마침 감사가 내려가는 편에 가지고 가게 하였다. 북도 함흥의 비석 글씨도 재신(宰臣)이 가지고 가야 할 일이지만 이번에는 근신 한 사람이 가지고 가게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비석에 글씨를 새기는 작업은 길일을 알아본 뒤에 공문으로 기록하여 가지고 가서 승지가 지방관에게 전달하고 그와 함께 작업을 하는 장소를 살펴볼 것이며, 승지는 장계로 보고하되 우선 복명부터 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미수(徐美修)를 동지 부사로 삼았다.

 

9월 5일 경신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차대하는 목적은 인재를 천거하는 한 가지 일 때문인데 경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일전에 내린 전교에서도 이미 말을 하였지만 묘당과 전조(銓曹)의 당상, 반장(泮長)들이 성심껏 찾아본다면 좋은 재주를 품고 초야에서 서성거리는 자가 또한 어찌 없겠는가. 초선(抄選)하는 법은 조종조 때부터 이미 시행해 오던 것으로서 일단 초선을 하면 유일(儒逸)로 대우해주기 때문에 출세하는 길에 스스로 나서곤 하였다. 대체로 사람을 취하는 방도는 굳이 모든 것을 완전히 갖추기를 바랄 것은 없다. 비록 유일이란 칭호에 혹시 약간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행실를 닦으며 글을 읽은 사람도 엄연히 행동이나 태도를 삼가서 경계하고 조심하는 선비라 할 수 있으니, 그에게 내외의 벼슬을 두루 맡겨 세상의 사무를 책임지게 한다면 사람들의 표준과 모범이 되는 성과 이외에 저절로 백성을 널리 구제하는 소득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 시급한 일은 이보다 앞설 것이 없다."
하니,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는 정말 옳습니다. 만일 성심껏 구한다면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이시수는 아뢰기를,
"사람을 천거하는 방도는 항상 명칭과 실지가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므로 천거하는 자는 사실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마땅히 철저히 찾아보아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난 다음에 조정에 천거하여야만 비로소 내실을 힘쓰는 정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경》에 ‘빈틈없는 위의 지녀 모가 난듯 덕이 반듯[抑抑威儀 惟德之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대체로 그 덕이 가슴 속에 쌓이면 밖으로 드러나므로 얼굴이 맑고 등이 번듯한 아름다움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위의가 밖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미루어보면 그 사람이 덕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려내기 어렵지 않다.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서 원하는 것은 공(孔)·맹(孟)을 배우자는 것인데, 주부자는 곧 공·맹 이후 제일인자이고 한 질의 주자 저서는 곧 천지간에 손꼽히는 문자이다. 내가 그 저서를 전부 모아 하나로 묶으려는 것은 백성들의 뜻을 일깨우고 세속을 안정시켜보자는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내가 구하는 사람은 오로지 꼭 초선하기에 합당한 사람만은 아니고 곧 주자의 글을 읽은 선비이다. 그런 사람을 가지고 경전의 자문에 응하게 하고 내외의 관직으로 시험한다면 이것이 어찌 유자의 학술을 높이고 권장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경들은 각자 반드시 성심껏 찾아보고 자기가 보고 들은 대로 이름을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 말이 이미 나왔으므로 하는 말인데 집집마다 사람마다 모두 주자의 글을 외우고 익히게 하려면 강하는 제도를 만들어 사람을 취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우리 나라는 오로지 과거 시험만 숭상하기 때문에 유생이 만일 강받기 시험에 응시하고 싶으면 저절로 그 글을 외우고 익힐 것이다. 앞으로는 일차강(日次講)은 주자의 글을 가지고 하고 전시(殿試) 강경의 책들 속에도 추가해 넣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병모 등이 아뢰기를,
"주자의 글 가운데 봉사(封事)의 경우는 간혹 너무 긴 글들이 많아 잠깐동안에 외우고 읽기가 어려운 점이 있으나 《어정백선(御定百選)》의 경우는 외워 익히고 뜻을 이해하기가 매우 쉬운 편이니, 앞으로는 이것을 가지고 강받기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진 사람을 구하는 길을 어찌 주자의 글을 읽은 사람에게만 그칠 것인가. 주자의 글을 읽은 사람 하나를 찾아서 등용하고 장려한다면 그보다 훌륭한 자가 또한 흐뭇한 기분으로 모여드는 아름다운 현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약간 부족한 사람부터 우선 등용하자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예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에게 이르기를,
"옛날에는 김성응(金聖應)이나 구선행(具善行)과 같은 이름난 무관들은 모두 서북 지방의 변장(邊將)을 거쳤었다. 무관으로 출신한 뒤에 한번 변장을 거치는 것도 의의가 없지 않기 때문에 섣달에 있은 인사 행정 때 이미 분부를 내려 규정으로 정한 적이 있었으나 만일 부정(副正)을 이미 지낸 자들을 하나같이 차송하려 한다면 모순되는 문제가 없지 않다. 지금부터는 부정을 이미 지낸 사람에 대해서는 감찰(監察)로 삼고 감찰로 있으면서 6개월 동안 사고가 없이 보낸 자를 변장의 이력으로 간주한다면 문제되는 것이 없지 않겠는가."
하니, 문순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는 지당합니다만 그와 같이 한다면 이비(吏批)와 병비(兵批)를 처리하는 면에서 말거리가 될 잘잘못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9월 6일 신유

곡산부 치마도 옛터에 세울 비석의 글씨 대본을 직접 내주고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 문소전(文昭殿) 비각을 살펴보았다.

 

육상궁(毓祥宮)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봉안각(奉安閣)에 나아가 참배한 뒤에 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장보각(藏譜閣)·의소묘(懿昭廟)에 나아가 작헌례를 거행하였다.

 

9월 7일 임술

선희궁(宣禧宮)에 거둥했을 때 행차를 영접한 유생들이 지은 응제 시권(應製試券)을 품평하여 내리고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9월 8일 계해

이병정(李秉鼎)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9월 9일 갑자

춘당대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를 실시하고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신경회(申慶會)에게 전시(殿試)에 곧장 응시하게 하였다.

 

9월 10일 을축

또 춘당대에서 구일제를 실시하고 표(表)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 오연상(吳淵常)에게 전시에 곧장 응시하게 하였다.

 

9월 11일 병인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판으로, 윤광보(尹光普)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9월 12일 정묘

이문원(摛文院)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이문원에서 전경 무신(專經武臣)과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 초계 문신(秒啓文臣)의 친시, 문신의 제술(製述)을 행하였다.

 

9월 13일 무진

선원전(璿源殿)에서 작헌례를 거행하였다.

 

9월 14일 기사

이문원에 나아갔다. 종묘·경모궁(景慕宮)의 삭향(朔享)과 문묘의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과 축문을 이문원 문 밖에서 영접하고 그대로 재숙하였다.

 

9월 15일 경오

이문원에서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두 본궁에 쓸 옷·폐백·향·초를 직접 내주고 이어 경모궁에 나아가 참배하였다.

 

9월 16일 신미

유선(諭善)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기를,
"신은 이전(二典)147)  과 삼모(三謨)148)  를 읽을 때마다 완전하고 아름다운 정치의 실상을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삼가 생각하기를, 후세의 제왕이 혹시 하루아침에 상고 때의 그와 같은 정치에 뜻을 두고 여러 가지 생각이며 정치상의 명령이 오로지 올바른 자연의 이치로부터 나와 용감하게 똑바로 전진하기를 큰 강물이 터져 밀고나가듯이 한다면 곧 그날부터 다름아닌 태평 세상이 된다고 보니, 이것이 이른바 그 성과가 매우 빠르면서도 극히 크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논어》에 나온 ‘1년이면 골격을 이루고 3년이면 완성할 수다.’는 말씀의 경우는 그 기강이 깔려지고 예악이 행해지는 것을 가리킨 것이며 하늘의 방향을 바꾸고 땅의 축을 돌리는 공이야 잠깐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인데, 어찌하여 상하 수천 년간 명철하신 임금이 나오지 않고 유학의 가르침이 침체되어 태평한 날은 항상 적고 어지러운 날은 항상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문에 일찍이 의분에 겨워 한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요·순의 큰 계책을 받들어 따르고 공자와 주자의 정맥에 깊이 젖어들어 지극한 정성과 고심이 말씀 속에 넘쳐 흘러 천지를 감동시킬 만하시니, 이제(二帝)149) 삼왕(三王)150)  의 정치를 장차 오늘에 다시 한번 보고 수사(洙泗)151) 낙(洛)·민(閔)152)  의 도학이 장차 이 세상에 크게 행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거룩한 덕과 큰 업적은 이미 세자에게 모범이 되실 만하니, 세자의 예절바르고 온화한 덕이 날로 빛나는 것과 그 학문의 정도가 날로 성취되어가는 것도 전하께서 가르쳐 감화시키고 일깨워 열어주시는 과정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방의 수많은 어진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눈을 비비면서 큰 복이 강물처럼 흘러들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만 낮아지는 세속의 풍습은 물이 밑으로 내려가듯 자꾸 심해져 의리는 어두워지고 이단은 그 기세를 더하므로 오히려 한없는 걱정이 있습니다.
우리 자양 부자(紫陽夫子)153)  는 수많은 현인들의 업적을 집대성하고 천년 동안 끊긴 도통을 이어받아 내놓는 말들이 모두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성인의 도학을 여는 요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 저서들이 여러 질로 흩어져 그 전체를 볼 수가 없는데 전하께서 《춘추》 대일통(大一統)의 뜻에 깊이 느끼신 바가 있어 장차 전질을 하나로 편집하여 《중용》·《대학》·《논어》·《맹자》와 서로 내외를 이루게 하심으로써 옛 성인의 도학을 잇고 후생들의 앞길을 열어놓음과 동시에 사람의 준칙을 떨쳐 드러내는 글이 전부 갖춰져 유감이 없게 되었으니, 거룩하기 그지없습니다.
위에 완전하고 아름다운 덕을 지닌 군주가 계시면 그 밑에는 반드시 걸출한 공을 세우는 신하가 있는 법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중외에 재간이 있고 어진 사람들이 많이 깔려있지만 또 다시 산골에 숨은 자를 찾아본다면 뛰어난 인물이 시대의 요청에 응하여 나오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만일 수많은 영걸들이 조정에 포진하여 나라가 의지할 곳이 있고 선비가 모범으로 삼을 곳이 있다면 그것은 원기가 튼튼한 몸에는 탈이 생기지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으니, 어찌 세상 풍기의 다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관(史官)이 비답을 전해온 것은 곧 은거한 선비를 우대하는 성대한 조처인데 천만 걸맞지 않은 미천한 몸에 여러 번 베푸시니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빨리 특별한 예우를 거두시어 하찮은 본분을 지키게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 가을에는 꼭 불러오고 싶다는 뜻을 이미 여러 번 말했는데 보내온 소장을 보니 또 다시 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돌아보면 이번 겨울까지는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당장 억지로 일어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또 장차 내년 봄으로 기약한다면 이렇게 하고 있는 사이에 세월만 헛되이 지나갈 뿐인데, 어찌 이처럼 지난날의 약속을 실천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제 와서 경에게 대답할 말은 오직 ‘부를 소(召)’ 자 한 자만 알 뿐이니, 경은 부디 이 비답을 받은 당일로 올라오기 바란다. 사관이 명을 전달한 것에 대해 경의 말이 너무 겸손하였으므로 이번에는 감사에게 부쳐 전달하려고 한다. 나는 경에게 일일이 경의 뜻을 따라줬다고 할 수 있다. 경 또한 다소곳이 올라와 경을 못 잊어하는 내 마음을 보답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위아래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원칙이라고 보는데, 경은 나의 뜻을 따라주지 않으려는가?
요즘 내가 주부자의 저서를 천명하여 집집마다 외워 익히고 사람마다 연구하게 하려 하는 것은 그것이 천리를 밝히고 인륜을 바로잡는 일에 준칙이 되기 때문이다. 이단과 간특한 학술이 따라서 배격을 당하는 것도 반드시 이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니, 말하자면 천리와 인륜의 큰 원칙을 강론하여 밝히는 문제 정도는 오히려 소소한 절차상의 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대체로 이 책이 한 세상에 천명된 다음에야 나라가 나라다워질 수 있고 사람이 사람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우순(虞舜)이 하고 싶어 했던 것은 구장(九章)154)  으로 면복(冕服)을 짓고 팔음(八音)155)  의 변화를 듣자는 데에 있었는데 우(禹)에게 그 제도를 밝히고 소리를 들어보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그만한 적격자가 있어야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주부자의 글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선비를 두루 찾아서 구해 우선 구두와 자구의 뜻부터 자문에 응하게 하자는 것이 곧 이 때문이다. 그러니 경들부터 각기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나의 뜻에 부응해 준다면 조정에 있는 자들도 응당 추천서를 혹시 남에게 뒤질세라 앞다투어 올릴 것이니, 경들이 어찌 소홀이 할 수 있겠는가. 회덕(懷德)에 있는 유신(儒臣)에게도 이와 같은 뜻을 전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문체에 관한 문제는 경도 말을 하였지만 나 또한 주부자의 이른바 ‘국초(國初)의 문장은 그 논조가 매우 졸렬하여 아무리 교묘하게 하려고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일면이 있다.’는 말씀에 깨달은 점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항상 경영관에게 문장에 관하여 말하면서, 변계량(卞季良)과 서거정(徐居正) 등 몇몇 사람만이 비로소 사단(詞壇)의 영수로서 제왕의 계책을 도왔다고 할 수 있고 그 나머지는 다 구차스러우며, 또 이보다 한 등급이 떨어져 김석주(金錫胄) 등 몇 사람들의 체가 나옴으로써 순박하고 진실한 가락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다만 학문을 하는 선비는 그와는 달라서 세상의 등급이 비록 낮아지고 하도(河圖)·낙서(洛書)가 나온 시대가 비록 멀어졌지만 오히려 성인의 은미한 말을 가지고 궁리하고 풀이하여 이따금 옛 사람이 미처 밝히지 못했던 것을 밝혀내는 자들이 있으니, 경학과 문장이 갈라지는 것이 곧 이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풍속을 바로잡는 길은 진정 경학을 기피하지 않게 하여 중외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알도록 하는 데에 있으니, 그렇게 한다면 세상의 풍기가 올바로 잡힐 것이고 선비의 기풍도 제대로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애를 쓰는 문제이다."
하였다.

 

홍천(洪川)의 유생 조진풍(趙鎭豊)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조부 조상신(趙尙紳)은 곧 고 도정(都正) 조도보(趙道輔)의 서자인데도 불구하고 그 집안에서 족보에 붙여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바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예조로 하여금 다시 주인 집안의 문장(門長) 및 벼슬이 높은 사람과 상의할 것을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 부사(府使) 조원(趙瑗)과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 등이 말하기를 ‘90년이나 지난 일이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부친과 조부 때부터 서로 전해오는 이야기는 눈으로 본 것이나 마찬가지로 잘 압니다. 상신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조부가 생존시에 사실 한두 번 찾아와 모습을 보였으나 말한 것이라고는 자기의 어머니가 너는 이 집의 핏줄이라고 말했다고 한 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른바 상신의 손자라고 하는 자가 구절마다 사실을 날조할 뿐만 아니라 이른바 「온 집안 사람의 논의에 따라 4대의 조상을 호적에 넣어 기록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 말은 더더욱 간교하고 고약합니다. 정유년156) 홍천(洪川) 수령으로 있을 당시 마침 식년(式年)157)  을 만나 호적을 정리하다가 그 이른바 상신의 호적을 발견하고 즉시 잘라내어 빼버리고 엄중한 말로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손자의 이런 저런 말들은 순전히 거짓으로서 함부로 날조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윤리의 기강은 신분의 귀천에 따라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억울한 사정은 사안의 크고 작은 것에 따라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조상신(趙尙紳)이란 자는 고 도정(都正)의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도정이 앞서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해둔 일이 없기 때문에 윤리의 기강이 불분명하고 억울한 사정이 풀리지 않은 지가 지금 90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지난 90년 사이에 만들어진 호적에는 전부 고 도정은 부친, 고 군수(郡守)는 조부, 풍안군(豊安君)은 증조부라고 일일이 기록되어 본현과 한성부에 보관되어 있다. 고 판서 이하 한성부 윤이나 낭관을 지낸 사람이 15, 16인 정도나 되는데 그들은 다 어디로 가고 금하지 않았으며, 조원(趙瑗)이 홍천현 수령이 되었을 때 정유년 한 해의 식년에서만 허락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가 여러 부형들보다 무엇을 더 많이 아는 것이 있기에 그런 행위가 있었단 말인가. 이른바 허락을 하지 않는 이유는 관인이 찍히지 않아서였던가, 수정하는 도장이 찍히지 않아서였던가, 원래의 대장에 기록되지 않아서였던가, 통(統)과 민호(民戶)에 포함되지 않아서였던가, 이미 분명한 증거가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그렇다고 믿었단 말인가. 분명히 사실에 맞지 않는 증거가 있었다면 무슨 까닭으로 즉시 도로 노비 대장에 집어 넣지 않았단 말인가. 만일 상신이란 자가 애당초 그 집안의 서자붙이가 아니었다면 어찌하여 면천(免賤)을 허락하였겠는가.
고 도정이 살아 있을 때 찾아와 얼굴을 보이지 않은 문제는 고 도정이 세상을 떠난 시기가 갑진년이었으니 그가 찾아와 얼굴을 보이려고 했더라도 그 때의 나이는 겨우 아홉 살이었고 거리도 천리길이었다. 회음후(淮陰侯)158)  의 아들처럼 어찌 자신의 존재를 말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어찌 조씨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겠는가. 조원의 백부인 고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그를 특별히 돌보아주었고 또 그의 종형인 증 영부사(領府事) 조돈(趙暾)은 상신에게 당장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라고 권하기까지 하였는데, 저 조원은 어떤 자란 말인가. 이전에 의견을 써서 올린 것도 매우 흐리멍덩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뭐라고 한 말도 앞뒤가 어긋나 한바탕 웃음거리도 안 된다.
그리고 충정공(忠定公)159)  에게 서자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모르고 있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털벙거지를 쓴 종붙이가 나는 재상의 아들이라 하며 나타났으니, 이는 곧 충정공의 수준이 보통사람보다 한 등급 높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조원이 반드시 그 부형들의 뜻을 어기고 다른 주장을 세우는 것은 과연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자기의 주장이 옳다면 어찌 자기의 형인 충정공의 일에 대하여 예조에 문서를 올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단 말인가. 당나라 곽숭도(郭崇韜)가 분양(汾陽)160)  의 무덤을 참배할 때 분양의 자손들이 오늘날 조원의 행위처럼 숭도를 내쫓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한 집안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는데도 존장(尊長) 하나만 벌을 준다는 것은 풍속을 교화하는 것에 관계되는 문제이므로 마땅히 국법을 적용하여 처벌할 일이나 우선 너그럽게 넘어가는 것은 그가 충정공의 아우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으로 조원에게 분부하도록 하라.
운명을 만드는 것은 임금에게 있고 인륜을 정하는 것은 질종(秩宗)161)  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경의 조(曹)162)  에서 ‘조상신을 가선 대부 돈령부 도정 증 숭정 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조도보(趙道輔)의 서자로 삼는다.’는 문안을 만들어 내주어 조원과 호조 판서 등이 그것을 가지고 자기집 사당에 고하고 아울러 풍양 조씨의 족보에 그 내용을 새겨넣도록 하는 사항들을 빠짐없이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 승지        윤동만(尹東晩)이 치계하였다.
"신은 삼가 어필(御筆)을 가지고 가서 지방관에게 넘겨주고 성후(聖后) 사제(私第)의 옛터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 뒤에 해당 부사        조덕윤(趙德潤)과 함께 수라천(水剌川)을 봉심해 보니, 그 샘의 상하 좌우에 바위돌이 있긴 하였으나 재질이 견고하지 못하고 여기 저기 틈이 벌어져 정(釘)을 대어 새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3보 정도 나가서 수라천 좌향인 갑좌 경향(甲坐庚向) 자리에 비석을 세우자는 뜻으로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치마도(馳馬道) 터를 봉심해보니, 위쪽의 주변에는 땅에 박힌 돌이 한 개도 없고 그 아래 중앙 부분에 울퉁불퉁한 바위 하나가 있는데 등쪽은 튀어나오고 언저리는 얇아 가로로나 세로로나 글자를 새기는 것은 다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질이 부스러지기 쉬워 도저히 새길 수 없고 다만 비석의 받침돌로 쓰기에 적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생긴 모양에 따라 단단한 부분을 파내어 비석 받침돌로 만들고 해좌(亥坐)의 좌향으로 비석을 세우자는 뜻으로 해당 부사와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두 곳에 세울 비석은 해당 부사가 이미 다듬어 산밑에 운반해 두었는데, 치마대 비석은 15일에 글자를 새겨 16일에 세우고, 수라천 비석은 16일에 새겨 17일에 세울 예정입니다."

 

9월 17일 임신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장계하기를,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무덤을 쓴 산이 파주(坡州) 오리곶면(烏里串面)에 있는데 지금 그 후손이 매우 가난하여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 허술하고 무덤을 지키는 종 하나로는 나무를 잘라가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요즘 연석에서 중신(重臣)이 아뢴 말로 인하여 호소한 것이 매우 외람되고 일을 담당한 자가 직계손이 아닌 줄은 알았으나 묘역에서 나무를 베고 소를 방목하는 행위를 금하지 않아 소나무와 오동나무들이 다 없어짐으로써 익성공의 무덤을 쓴 산의 체모가 지금 이처럼 묵었다는 말을 듣고보니 조정에서도 오히려 괴롭고 한탄스러운데,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익성공의 모든 자손들은 자책하는 마음이 더욱 어떻겠는가. 그들로 하여금 즉시 조정에 들어와 하직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찾아가서 성묘한 뒤에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고 나무가 드문 곳은 옮겨심어 보충함으로써 봉분의 주위가 완전히 새롭게 되어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익성공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면 그 앞을 지나가는 자는 반드시 숙연해질 것이고 그 주변에 사는 자는 반드시 보호해주어 이전처럼 그대로 방치해두지는 않을 것이다. 경은 이 판부를 가지고 그 집안의 문장(門長)을 불러 일러주고 아울러 지방관을 엄중히 신칙하여 옛날의 어진이를 추모하는 생각을 잊지 말도록 하라는 뜻으로 감사에게 회답하라."
하였다.

 

9월 19일 갑술

직산(稷山) 유학 박기덕(朴基德)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6대조 박승종(朴承宗)에 대하여 전후에 걸친 조정의 논의에서 그 하자를 논박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계축년의 옥사 때 참여하여 국문했다는 것과 궁문을 막아지켰다는 것과 삼창(三昌)163)  이라고 하여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거론되었다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계축년의 옥사 때 참여하여 국문했다는 문제는, 저의 할아버지가 그 당시 의금부 판사를 지내고 위훈(僞勳)의 명단에 이름이 끼었으므로 그에 대한 시비는 반드시 응당 받아들여 잘못을 인정할 일이긴 합니다만, 그 당시 명사들 가운데 누구는 위관(委官)이었고 누구는 위훈의 명단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대강 손꼽아 셀 수가 있는데, 지금 옥사를 다스렸다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신의 할아버지에게만 죄를 돌렸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궁문을 막아지켰다고 하는 문제는, 그 당시 윤리가 장차 없어지고 서궁(西宮)이 곧 유폐될 상황으로서 흉악한 진당들이 틈을 엿보면서 무당굿을 기회로 삼아 변란을 꾀하기까지 하는 등 화가 일어날 조짐이 계속 터졌으니, 군사를 풀어 궁문을 지킨 것이 어찌 깊은 뜻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막아지킨 한 가지 일만 가지고 곧장 그 마음가짐과 행사를 판단하였으니, 어찌 극히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정사 공신(靖社功臣)164)  들은 모두 폐조(廢朝)165)   때 벼슬을 지내고 그 당시의 일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이었으나 반정을 한 뒤에는 모두 신의 할아버지가 서궁을 보호한 공을 말하였고 대궐 군사로 막아지킨 것을 죄로 삼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 행위를 용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창이라고 싸잡아 함께 거론되었다는 문제는, 저의 할아버지가 유희분(柳希奮)·이이첨(李爾瞻)과 불행하게도 모두 왕의 외척 신분으로서 다 함께 중용(重用)되었고 봉호에 창(昌)자가 들어간 것도 우연히 서로 같았으므로 당시에 사실 삼창이라고 지목을 받은 적은 있으나 그 마음가짐이나 행사를 논한다면 그들과는 너무도 달라서 향초와 악초, 얼음과 숯불덩이의 차이 정도만이 아니었습니다. 고 상신(相臣) 조익(趙翼)의 차자 내용에 언젠가 ‘이이첨은 항상 옥사를 일으켰고 박승종은 보호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삼창이란 명목으로 이첨의 무리와 똑같이 취급하고 분간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영원토록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유감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할아버지는 왕의 외척으로서 혼란한 때를 만난 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자니 종묘 사직과 흥망을 함께 하는 의리를 도외시할 수도 없었고 왕의 뜻을 거역하여 죽어버리자니 양궁(兩宮)을 보호할 책임을 부탁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0년 세월을 애쓰면서 온갖 일을 미봉해 나가다가 경신년166)  에 와서야 비로소 영의정이 되자 허균(許筠)·김개(金闓)가 모두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고 삼사(三司)가 비로소 이첨을 공격하였으니, 이는 신의 할아버지가 흉악한 무리를 배척한 성과입니다. 아버지를 보면 지돈령(知敦寧) 박안세(朴安世)가 인목 대비를 서인으로 폐하자는 정청(庭請)의 반열에 참가하지 않았고 아들을 보면 교리(校理) 박자응(朴自凝)이 위경(偉卿)의 상소문을 직접 찢어버리는 등 한 가문에 3대가 모두 충효를 가다듬었습니다.
그 고심과 피어린 정성은 언제나 윤리를 부지하고 바른 선비를 심는 데에 있었으나 다만 그 처지가 특별했던 관계로 밖으로는 권세를 탐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심적으로는 왕과 함께 죽어야겠다는 뜻을 지켜 가죽띠 주머니에 비상을 넣고 다니고 입춘날 지은 시에는 죽기를 빌었으니, 그 시를 읊는 사람은 천년 뒤에도 상심하기에 충분합니다.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아뢴 말중에는 박승종이 아니었더라면 서궁(西宮)이 보전될 수 없었고 신들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내 목숨을 내던진 것은 곧 본디부터 자처하던 것이었으나 조용히 의리를 지켰으므로 식견이 있는 자들은 칭찬하였습니다.
돌아가신 지 한 달이 지난 뒤에 비로소 소급하여 벼슬을 삭탈하는 처벌을 가하였는데 당초의 처분은 능창 대군(綾昌大君)을 용서하지 않은 것까지 소급하여 문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일이었으므로 홍호(洪鎬)가 한(漢)나라 주유(朱鮪)의 일을 인용하여 주인을 위해 죽은 절개를 덮어버리지 말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의 할아버지가 폐조(廢朝)를 위하여 죽은 것은 절의라고 말할 것이 못된다고 하지만 예로부터 순절한 신하는 모두 혼란한 때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몇해전 유몽인(柳夢寅)에 대해 관직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릴 때 임금께서 그를 길재(吉再)와 김시습(金時習)에게 견주기까지 하셨으니, 신의 할아버지의 진퇴가 몽인과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섬기는 사람을 위하여 본분을 다한 점을 가지고 논한다면 마땅히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신의 할아버지 승종의 벼슬과 그의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의금부가 복계(覆啓)하기를,
"승종이 지은 죄가 과연 어떤 것인데 세대가 이미 멀어진 지금에 와서야 기덕(基德)이 감히 함부로 논변을 한단 말입니까. 천만 놀라운 일입니다. 그의 상언을 들어주지 말고 해조로 하여금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하게 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박승종의 일은 오랜 세월 동안 공론이 결정되어 있지 않았으나 옛사람이 임금께 아뢴 말은 증거로 삼을 만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처지로서 그처럼 특별한 면이 있었으니, 이를테면 주머니에 독약을 넣어두어 자기 혼자서만 살아남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나 억울한 옥사는 반드시 구제해주려 한 일, 흉악한 주장은 한사코 배척한 일 등이다. 그러므로 승평 부원군과 연평 부원군 등 몇 명의 공신들은 승종이 아니었더라면 서궁이 보전되지 못하고 신들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을 뿐만 아니라, 홍호(洪鎬)는 한나라 주유(朱鮪)의 일을 인용하여 주인을 위해 죽은 절의를 표창하자고 청하였는데, 그의 아비 박안세(朴安世)는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자응(自凝)은 위경(偉卿)의 상소문을 손수 찢어버렸다. 이 때문에 그의 집안 사람이 몇 해전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을 때 마땅히 참작해보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판하했던 것이다.
본 사건은 여느 경우와는 약간 다르므로 기왕에 시행했던 비슷한 경우의 규례를 곧장 시행할 수는 없더라도 그 호소를 도외시해 버리는 조처를 취한다는 것은 시대 상황에 맞게 조처하는 법칙에 어긋나는 듯하다. 성조(聖祖)167)  께서 반정했던 초기에는 조정의 처분상 그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늘의 시점에서 성조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깊은 뜻을 드러내려고 한다면 또한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춘추의 대의는 풍경을 구경할 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양이 바뀌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대신과 전임 금오 당상(金吾堂上) 등 여러 사람에게 이 문제를 물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삼가 판부하신대로 대신과 전임 금오 당상 등 여러 사람에게 물었더니, 좌의정 이병모는 말하기를 ‘이전에 박기덕(朴基德)이 호소하였을 때 그는 신의 선조인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이 홍호(洪鎬)를 변호하고 구제했던 일을 근거로 삼았으나 신의 할아버지가 연석에서 극력 아뢰었던 것은 특히 홍호가 별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만 밝혔을 뿐, 박승종이 억울한가 억울하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당시 의논을 드릴 때 그와 같은 사실은 대강 진술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시 다른 의견을 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박승종에 관한 일은 그 후손이 억울함을 거론할 때는 항상 속마음과 행사는 달랐다는 것으로 말하지만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단지 지극히 엄중한 명분과 의리만 있을 뿐, 그 진실을 밝힐 만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속마음과 행사가 같았는가 달랐는가 하는 문제는 사실 가려내기 어렵습니다. 종전에 있는 조정의 논의에서 약간 유동성이 있었던 것은 특히 죽음을 바친 한 가지 일 때문이었으나 도망가서 자살한 것은 나라의 어려움을 구제하다가 죽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으니, 벼슬을 회복시켜주는 조처는 섣불리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봉조하(奉朝賀) 홍수보(洪秀輔)는 말하기를 ‘박승종에 관한 일은 언젠가 야승(野乘)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것을 상고해보았더니, 그의 속마음을 논하고 행사를 근거로 삼아 어떤 사람은 역사서에서 그 오명을 씻어줘야 한다 하였고 어떤 사람은 신원해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쓴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중에, 정인홍과 이이첨 등 여러 흉적이 찾아와 속마음을 떠볼 때 마침 당 아래에서 새와 벌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저처럼 하찮은 것들도 군신과 모자간의 윤기를 안다는 등의 말로 책망하는 뜻을 분명히 보임으로써 마침내 그 두 흉적과 맞서게 되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서궁을 보호하고 흉악한 논의를 극력 막았던 자취를 이것을 통하여 대강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몸을 빠져 도망쳐 나와 부자가 함께 한 가닥 끈으로 목매달아 죽었으니, 이로써 그 속마음과 행사는 다시 논의할 만한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명분과 의리란 극히 엄중한 것이고 관계되는 바 또한 막중하므로 한두 가지 용서할 만한 단서로써 섣불리 용서해주는 조처를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한성 판윤(漢城判尹) 이조원(李祖源)은 말하기를 ‘박승종이 서궁을 보호하고 이첨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실에 대해 비록 두 공신이 연석에서 아뢴 말이 있긴 하지만,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구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유도하였고 결국에는 형세가 불리하여 돌아갈 곳이 없게 되자 절간으로 도망가서 스스로 목을 매었으니, 그 죽음이 애매합니다. 그런데 지금 유몽인(柳夢寅)에 실시했던 전례를 인용한다는 것은 신은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지돈령 이병정(李秉鼎)은 말하기를 ‘박승종에 관한 일은 그 후손이 억울함을 거론할 때 비록 속마음과 행사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말하긴 하지만 다만 행사란 사실 환히 드러나는 것이고 속마음은 밝히기 어려운 법이므로 그 행사를 가지고서 속마음을 논한다면 과연 다르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관계되는 바가 극히 중대하고 명분과 의리란 매우 엄중한 것이니, 신원하는 조처는 섣불리 논의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은 말하기를 ‘박승종에 관한 일은 속마음과 행사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공론으로 볼 때 오히려 용서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 후손이 호소하는 사정은 혹시 인정할 수 있더라도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 죽음이 일단 애매하고 범한 죄가 명분과 의리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므로 수백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벼슬을 복구시키는 문제는 섣불리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병조 판서 이재학(李在學)은 말하기를 ‘박승종에 관한 일은 반정 초기에 내린 처분이 엄정할 뿐만 아니라 사안이 막중한 의리에 관계되고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처지이니 연대가 오래된 지금에 와서 그 후손의 호소로 인해 용서해준다는 것은 섣불리 논의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공조 판서 황승원(黃昇源)은 말하기를 ‘박기덕이 그의 할아버지 승종을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한 말은 비록 그와 같다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된 문제를 혹시 조금이라도 잘못 처리한다면 앞으로 의리가 흐려지고 국법이 엄중해지지 않을 것이니, 이점이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기덕의 이른바 세 가지 큰 죄안에 대해 변명한 것은 이미 분명히 증명할 만한 단서가 없는 이상 그가 한 말은 모두 흐리멍덩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 성조(聖朝)께서 내린 처분이 지극히 엄중하고 단호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백여 년 동안 굳게 지켜온 문제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지중추부사  서유대(徐有大)는 말하기를 ‘박승종의 범죄사실은 과거의 서책에 분명히 실려있는 이상, 비록 그 후손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관계되는 바가 극히 중대한 점으로 볼 때 용서해주는 조처는 섣불리 논의하기 어렵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행 호군(行護軍) 이한풍(李漢豊)은 말하기를 ‘신은 지식이 모자라고 본디 고사에 어두워 지금 물어보신 것에 대해 감히 억지로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조 참판  이조승(李祖承)은 말하기를 ‘박승종의 죄악은 공사간의 문헌에 모두 근거가 있습니다. 대체로 어린 종에게 압슬형(壓膝刑)을 가하여 무옥(誣獄)을 만든 것과 궁문을 굳게 닫고 조사를 배치하여 막아지킨 것은 곧 승종이 지은 죄상이며, 저 거사하던 날 밤에는 그의 아들 박자흥(朴自興)과 성을 넘어 도망가다가 체포망이 바싹 좁혀든다는 말을 듣고 송산(松山)168)  으로 뛰어가 스스로 목을 매었으니, 이것이 곧 승종이 죽은 실상입니다. 지금 승종의 후손 기덕이 올린 상언(上言)의 내용으로 살펴보면 그 말들이 외람될 뿐만 아니라 사실을 꾸며댄 정상을 마디 마디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의 선조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신 이귀(李貴)의 말을 인용한 내용은 온 세상사람이 다 모르고 있는 것을 그가 혼자 어디서 얻어들었단 말입니까. 여기서 더욱 그 심술이 교묘하고 나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밝혀낼 만한 것이 있습니다. 이첨이 형벌을 받기 직전에 소리치기를 「서궁의 변고에 대하여 나는 극력 그 논의는 중지하였는데 어찌하여 나를 죽인단 말이냐.」 하자, 신의 선조가 대답하기를 「너는 그 당시 비록 논의를 중지시켰다고 하지만 당초에 이 논의는 너에게서 처음 나왔으니 그 죄를 면할 수 있겠느냐.」 하였으니, 승종이 옥사를 조작하여 서궁의 변고를 조성한 것은 이첨과 갈라서 다르게 간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의 선조가 어찌 승종에게 대해서만 차이를 두어 말씀을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정언 홍호(洪鎬)가 상소하여 승종을 변호할 때 신의 선조가 그 말을 엄하게 물리쳐 연석에서 아뢰기까지 하였는데, 더구나 승종에 대하여 어찌 용서하였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인묘조께서 내리신 분부속에 「승종의 부자는 권력을 주물러 국사를 그르치고 무고한 사람을 모함해 죽인 죄는 희분(希奮)과 똑같다.」 하는 말씀이 있었고, 또 하교하기를 「승종은 비록 서궁을 폐서인 하자는 논의를 극력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비밀히 사주하여 옥사를 일으킨 것은 이첨과 다를 것이 없다.」 하셨으며, 삼창(三昌)의 죄악은 서로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분부를 내리기까지 하시고 특별히 처분을 가하셨습니다. 도저히 용서 될 수 없는 승종의 범죄에 대해서는 비록 연대가 멀어진 뒤라 하더라도 마땅히 국법을 굳게 지켜 변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신은 달리 드릴 만한 말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병조 참판 홍성연(洪聖淵)은 말하기를 ‘박승종에 관한 일은 그 마음과 행사를 논한다면 비록 용서할 만한 단서가 있다 하더라도 그 죄명을 돌아보면 실로 관계되는 바가 중대합니다. 신의 얕은 소견에는 달리 논의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예조 참판 정대용(鄭大容)은 말하기를 ‘박승종에 관한 일은 전후의 뛰어난 인물들이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하자는 논의가 없지 않았으나 증명문건에 죄명이 확실히 드러나 있고 역사서에 여기 저기 기록되어 있으므로 세월이 오래 지난 오늘날에 와서 감히 아래에서 뭐라고 의논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행 호군 김이익(金履翼)은 말하기를 ‘신은 일찍이 서궁(西宮)의 옛사건에 대해 생각이 미치기만 하면 쓸개가 뒤틀리는 것 같고 말이 미치기만 하면 두 눈이 금방 찢어졌었는데, 지금 뜻밖에 흉악한 역적 승종의 후손 기덕이란 자가 삼척(三尺)의 국법을 무시하고 백대의 공안을 어지럽히기 위해 함부로 상언을 올렸으니, 놀랍고 분개하여 사실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고 상신 이정귀(李廷龜)의 《문견록(聞見錄)》에 말하기를 「심우영(沈友英)의 10여 세된 어린 아들이 대군(大君)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허위로 자복한 뒤에 국구(國舊)169)  의 노복들을 고문했는데 누구 하나 승복한 자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12세된 아이종이 하나 남았는데 율관(律官)이 나이가 아직 어려 형장을 칠 수 없다고 말하자 박승종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김가의 노복으로는 이 아이 하나만 남았으니 이 아이에게 형장을 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단서를 찾아낼 길이 없다. 형장은 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압슬(壓膝)도 할 수 없단 말이냐.』 하여, 마침내 그 아이를 압슬하니 무당 고상(高祥)이 드나들었다고 거짓으로 자백하였고, 고상은 대비께서 항상 성상의 나이가 어느 때가 좋고 나쁜가에 대해 물었다고 거짓으로 자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옥사는 계축년에 그 조짐이 조성되었다가 이때에 와서 현실로 드러났는데, 사실은 승종이 어린아이에게 압슬형을 가함으로 인해 그 무함이 대비에게 미침으로써 서궁에 유폐시키는 단서를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을묘년 정월에 있었던 일로서 그 달이 넘어가기 전에 광해가 대비를 경운궁(慶運宮)으로 옮겨모시고 분사(分司)를 설치해 지켰는데, 승종이 연석에서 금병의 수효를 늘려 궁문을 막아지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계해년 3월 반정한 다음 그달 19일에 전교하시기를 「삼창(三昌)의 죄는 서로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하시고 승종의 벼슬을 소급하여 삭탈하고 적몰(籍沒)할 것을 명하셨으니, 임금께서 진실을 보신 것이 똑바르고 하신 말씀 또한 분명합니다. 이것이 어찌 승종에 대한 일대 단안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삼가 우리 나라의 역사기록을 상고해보았더니 「반정하던 날 저녁에 승종은 수상(首相)으로서 국청(鞫廳)에서 도망하여 자기집으로 돌아와서는 사돈집 행자(行者)170)  의 상복을 얻어입고 그의 아들인 경기 감사 박자흥(朴自興)과 함께 수구문(水口門)을 넘어 곧장 그의 친족인 양주 목사(楊州牧使) 박안례(朴安禮)의 임지로 달려가 안례로 하여금 군사를 출동시키게 하여 두험천(豆險川)에까지 갔다가 비로소 왕위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승종 부자는 자기집 선산으로 달려가 무덤 밑에서 마침내 약을 마셨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승종이 능히 왕사(王師)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어도 속죄를 못한 것으로서 《춘추》에서 이름을 써주지 않고 《강목(綱目)》에서 죽었다고 인정해 주지 않은 경우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승종의 벼슬을 삭탈하라는 명이 내리던 날 홍호(洪鎬)가 상소하여 그를 변호하자, 헌부가 계사를 올려 홍호의 죄를 논하고 아울러 승종의 패역한 행위를 언급하였는데, 그속에 「승종의 죄는 이첨 희분과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라고 한 말이 있고, 끝부분에 가서는 또 「몸을 빠져 도망갔다가 처지가 다급하고 힘이 모자라자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자결하였다.」라고 단정지었으니, 이는 곧 극히 엄정한 필단이며 공공연한 성토입니다.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신 이귀(李貴)는 가슴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고 무슨 일이건 말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 곧 그의 평소 집념입니다. 혹시 승종의 마음과 행사에 대하여 용서할 만한 단서가 털끝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숨김이 없는 그의 성품으로 볼 때 반드시 집안에 전하는 문자가 있을 것인데, 지금 그의 문집에 조금이라도 비슷한 말이라고는 아예 없습니다. 고 상신 조익(趙翼)의 일로 말하더라도 조익이 계해년 5월에 차자를 올려 홍호를 구제하기를 「홍호의 말이 비록 망녕된 것이긴 하지만 신하가 가슴에 품은 생각이 있을 경우 반드시 아뢰는 의리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니, 하교하시기를 「승종이 비밀히 사주하여 옥사를 일으킨 죄는 이첨 등과 다를 것이 없는데 너는 그러한 사정을 잘 몰라 이런 말을 하는가.」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실들은 이런 정도에 지나지 않은 만큼 승종이 그런 문제로 인하여 죄명을 벗을 만한 계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른바 박안세(朴安世)가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문제는, 안세가 승종을 아들로 두었는데 승종이 그 당시 임금의 악을 조장하며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지내는 상황이었으니 안세가 비록 백번을 참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벌을 받을 염려가 있겠습니까. 박자응(朴自凝)이 위경(偉卿)의 상소문을 손수 찢어버렸다는 문제는, 대체로 위경이 그 상소문을 썼던 때는 승종과 이첨이 이미 사이가 벌어져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위경의 상소문이 이첨의 지시에 의해 나온 것을 미워하여 그랬던 것이며 자응이 결국에는 또 효립(孝立)의 옥사에 끼어들어갔으니, 대대로 악행을 저질은 작태를 이로써 더욱 볼 수 있습니다. 저 박기덕(朴基德)이란 자는 감히 세대가 오래된 것을 빙자하여 그의 조상의 오명을 지워볼 심산으로 함부로 임금의 은혜를 빌어 마치 예사로운 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처럼 하였는데, 이는 비록 근래에 인심이 날이 갈수록 무엄해지는 풍조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사실은 국법이 너무 허술하고 은전이 무뢰하게 내려지는 점들이 그와 같은 행위를 유도한 것입니다. 기덕이 상언한 뒤에 담당 승지는 외람되게 생각하여 곧장 빼버리지 않고 무턱대고 임금에게 올렸으며 의금부는 특별한 내용으로 그 죄를 논박하지 않고 관례에 따라 회계하였으니, 국법을 엄하게 지키고 한 사람을 징계하여 백 사람을 격려하는 도리로 볼 때 마땅히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행 호군 이면응(李冕膺)은 말하기를 ‘지금 박승종의 후손 기덕이 사실을 호도하여 여러 번 임금께 호소한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무엄한 것이며, 비록 그가 스스로 변명한 말을 가지고 논한다 하더라도 하나도 믿을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그가 인용한 연평 부원군 이귀는 곧 신의 선조인데 문집과 상소문을 상고하고 집안에 전해내려오는 말들을 살펴보아도 본디 한 마디나 반 마디도 승종을 변호한 것은 없습니다. 홍호가 상소하여 승종을 두둔하였다는 문제도 사적인 사정으로 한쪽을 두둔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당시 대간의 논의가 크게 일어나 성토가 엄중하였으며, 신의 선조께서도 법으로 처단하고 위엄을 적용해야 한다고 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증거가 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승종은 곧 이른바 삼창(三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과 능창 대군(綾昌大君)을 모함하여 해치고 어린 종에게 압슬형을 가하여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옥사를 조성한 것과 군졸을 둘러싸서 서궁을 유폐한 조치를 취하게 한 것이 세 가지 큰 죄안인 것입니다. 연대가 오래된 지금 그 후손이 거짓으로 꾸민 말을 가지고 섣불리 달리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공조 판서 이서구(李書九)는 말하기를 ‘박승종은 한 나라의 수상으로서 윤리가 두절되는 것을 좌시하여 임금의 악을 유도하고 비위를 맞추었을 뿐, 한 마디도 그 잘못을 바로잡은 적은 없었으며, 옥사를 혹독하게 다스리고 서궁을 엄중하게 지키는 일들이 또한 다 그의 손에서 나오기까지 하였으니, 설사 순절로 목숨을 바쳐 자기가 섬기는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하더라도 기왕에 지은 죄를 한번의 죽음으로 갚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더구나 그 죽음 또한 스스로 그 죄를 알고 계책이 궁해 달리 빠져나갈 곳이 없었던 것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두 마음을 갖지 않기로 맹서하여 죽더라도 뉘우침이 없었던 유몽인과 똑같이 견줄 수 있겠습니까. 명분과 의리가 극히 중하고 국법 또한 엄중하므로 신원하고 벼슬을 회복시키는 조처는 논의하기 어렵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대사성 이만수(李晩秀)는 말하기를 ‘박승종에 관한 일은 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런 저런 논의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만, 수상으로 있으면서도 삼창의 지목속에 달갑게 끼어 들었고 흉론을 직접 보고서도 그것을 바로잡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으니, 명분과 의리가 극히 중하고 죄안이 명명 백백합니다. 이른바 읍백(挹白)171)  이란 당호(堂號)와 주머니에 약을 넣고 다녔다는 말 등 밖으로 나타난 흔적으로 속마음을 추리한다는 것도 아무래도 미심쩍습니다. 다만, 그가 최종에 한 번 죽은 것이 비록 유몽인이 뛰어나게 스스로를 깨끗하게 보전한 경우와는 크게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성조께서 반정하신 당시에 조정에 벼슬하던 사람으로서 자기 생명을 바친 자는 승종 한 사람 뿐이었으니, 자기가 섬긴 임금에게 마음을 다했다는 것을 가지고 용서해 준다면 혹시 전하의 관대한 정사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러나 신원하고 벼슬을 회복시키는 조처는 사안이 극히 엄중하므로 신의 얕은 소견으로는 감히 억측으로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도승지 민태혁(閔台爀)은 말하기를 ‘승종의 범죄사실은 나라의 역사서에 실려있을 뿐만 아니라 계해년 부제학 조익(趙翼)이 올린 차자에 대한 임금의 비답에 「비밀히 사주하여 옥사를 일으킨 죄는 이첨과 다를 것이 없다.」는 분부가 계셨고 벼슬을 삭탈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아, 서궁의 화는 모두가 삼창의 죄이지만 승종이 궁노(宮奴)에게 혹독하게 압슬형을 가한 이후에 가서는 그가 삼창의 괴수라고 말하더라도 맞습니다. 지금 만일 그의 후손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하여 죄를 벗겨주는 조처를 취한다면 앞으로 몇 개의 박기덕(朴基德)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였습니다.
호조 참판 이의필(李義弼)은 말하기를 ‘박승종이 서궁을 보호한 사실이 과연 두 공신이 임금께 아뢰었던 대로라면 그 본심을 따져볼 때 비록 이첨 등 다른 적들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그는 임금과 인척관계에 있는 신하로서 수상의 자리에 앉아 윤리의 큰 변괴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그것을 바로잡는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는 것이 곧 그를 평가하는 단안이니, 유몽인과 견주어 똑같은 경우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행 호군 윤필병(尹弼秉)은 말하기를 ‘박승종에 관한 일은 비록 용서해 줄 근거로 삼을 만한 문헌과 논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 당시 공신들이 아뢴 것과 옥당의 차자 내용이 서로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의리가 극히 엄중한데 어찌 감히 달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동지중추부사  심기태(沈基泰)와 유한모(兪漢謨)는 말하기를 ‘박승종에 관한 일은 조야의 기록에 여기 저기 나타난 것을 보면 혹자는 그 마음을 동정하는가 하면 혹자는 그 행적을 따지고 드는 등 이 사람 저 사람 하는 말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내린 처분이 일단 엄정한 것인 만큼 이제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참으로 외람됩니다.’ 하였습니다.
대사간 송전(宋銓)은 말하기를 ‘박승종이 윤리가 끊어질 당시 있는 힘을 다하여 보호하였으니 그 마음이 가상하고 반정으로 해와 달이 다시 새로워졌을 때 목숨을 끊어 스스로 속죄하였으니 그 사정이 애닳습니다만, 명분과 의리가 극히 중하고 국법 또한 엄중하기 그지 없으므로 섣불리 달리 논의하기란 어려운 듯합니다. 대체로 승종은 곧 삼창 가운데 한 사람의 적신(賊臣)입니다. 흉론을 맨 처음 제기한 이첨과는 다르지만 서궁의 문을 막아지킨 조처는 사실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설사 형편과 사정에 구애되어 그런 것일 뿐 진정으로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나라에 화를 입히고 윤리를 파괴함으로써 죄악이 극에 이른 상황으로 볼 때 그 속마음과 행사가 다르다는 것을 가지고 논할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의 아들이 군사를 동원한 문제는 오로지 폭군을 돕자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결국 천리를 범한 행위이니, 자신의 절개를 깨끗이 지킨 유몽인의 의리와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 자살한 문제는 궁지에 몰려 달리 빠져나갈 길이 없었던 결과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은 진정 《춘추》에서 이름자를 써주지 않는다든가 《강목》에서 죽음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경우에 해당 됩니다. 어찌 세월이 오래 지났다 하여 엄중하기 그지없는 의리에 대해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해주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박기덕이 인용한 여러 설들은 다 분명한 것이 아닌데 그것을 가지고 여러 차례 임금을 번거롭게 하는 작태는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상언 속에 들어있는 사연은 들어주지 마소서. 신은 마땅히 그 죄에 해당되는 벌을 적용할 것을 청할 일이지만 이미 대신과 전임 금오 당상 등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아뢰라는 명이 계셨기 때문에 우선 의견을 올려 상께서 재결하시길 청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9월 21일 병자

이한풍(李漢豊)을 장용 대장(壯勇大將)으로 신대현(申大顯)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정민시(鄭民始)를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금위 대장 정민시가 상소하기를,
"신은 장수자리에 본디 나갈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장수 후보자는 사안이 중대하므로 본디 아무런 까닭없이 명단을 그대로 두거나 빼버리거나 하는 법이 없는 것인데 신의 이름은 전후에 걸쳐 누락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묘당의 논의에서도 신이 이 자리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공적인 논의에서 이미 합당하지 않다고 한 것을 사적인 의리상 어찌 감히 함부로 맡을 수 있겠습니까. 장신(將臣)은 감히 사직을 청할 수 없다 하지만 신의 경우는 직책은 장수자리라 하더라도 신분은 문관 재상이니, 어찌 감히 영화와 총애만 탐내고 염치를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조정의 예의 염치를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새로 제수한 명을 거두어 하찮은 본분을 지키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훈신이나 척신이 아닌 사람은 장수 후보자로 추천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묘당에서 말을 꾸며 계청한 것에 따라 만들어진 규정에서 나온 것으로서 당초에는 문관 재상이 무관 재상보다 그 수효가 많았으니, 제명록(題名錄)을 한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더구나 경은 이미 장용(壯勇)과 총융(摠戎) 두 영의 장수를 역임하였으므로 굳은 살이 박힌 것이나 다름없다. 몇 차례 묘당의 추천에서 빠진 것은 옛 규정이 중간에 폐지되어 그랬던 것뿐이니, 사양하지 말고 즉시 병부(兵符)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작년 8월 19일 차대로 인하여 입시하였을 때, 문관 재상으로서 총융사(摠戎使)만 거친 자는 장용영과 3국(三局)의 대장 후보자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과 현임 장용 대장과 훈련 대장은 총융사 후보자로 추천하지 말 것에 대해 아뢰어 규정으로 정하였는데, 그것이 비록 거행조건(擧行條件)으로 발표되어 나가지는 않았으나 그 이후 계속 그에 따라 배정하고 추천하여 왔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3국의 후보자로 들어간 사람을 이유없이 3국의 장수자리에 추천하지 않는단 말인가. 앞으로는 일단 추천한 사람은 빼버리지 말라. 그리고 문관 재상으로서 총융사만 거친 자는 3국에 추천하지 않는다고 운운한 것은 아무래도 구두로 한 분부에 지나지 않으니, 이 또한 한번 문헌을 자세히 상고하여 확실하게 국정을 정해야 할 문제이다."
하였다.

 

9월 22일 정축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금년에 절사(節使)가 갈 때 가지고 갈 토산물을 세 번에 걸쳐 보내자는 것으로 연석에서 아뢰어 마련하였습니다만, 일전에 예부(禮部)에서 보내온 자문을 보았더니 세 명절을 축하하는 표문을 봉해 올리지 말라고 알려왔습니다. 이제 토산물을 보내는 문제는 자연 거론할 것이 없게 되었는데, 이미 축하하는 표문과 토산물이 없는 이상 사신의 명칭을 마땅히 세폐사(歲幣使)로 고쳐야 할 듯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이에 따라 계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24일 기묘

경모궁을 참배하였다.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전교하였다.
"당초에 치마도(馳馬道) 옛터의 위 아래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함흥(咸興)의 사례에 따라 거행할 것을 하교하였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성조성(聖祖城)은 비록 노인들의 입에 전해내려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미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는 상황이고 보면 이처럼 막중한 일을 십분 신중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처음 생각할 때는 반드시 그 주변의 바위를 다듬어 글자를 새기려고 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비각을 짓고 비석은 세운다고 하였다. 그렇게 한다면 백성에게 끼치는 폐단이 작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형도 매우 온당치 못할 것 같은데, 감사는 무슨 확실한 생각이 있어서 갑자기 적합하다고 보고하였단 말인가. 치마도 터에 이미 비석을 세운 이상 성조성에 세울 비석은 우선 그 시기를 뒤로 미루더라도 늦지 않다. 어필 비문을 가지고 가지말고 내각에 모셔둘 것이며 각신(閣臣)이 택일하는 문제도 우선 그만두도록 하라.
왕후의 사제(私第)터와 치마도 옛터, 수라천(水剌泉) 등 세 곳에 세운 비석을 탁본한 것을 즉시 차사원을 정하여 올려보낼 것을 황해 감사에게 알리도록 하라. 그리고 이번에 비석을 세우는 공사는 본도가 집행하면서 지나치게 거창하게 하여 민폐를 많이 끼쳤다고 한다. 더없이 중대한 공사를 집행하면서 능히 조정의 본의를 받들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감사를 장차 어디에다 쓰겠는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 처분을 내리지 않으나 응당 특별히 어사를 보내 만일 잘못된 일이 드러날 경우에는 분명히 중벌이 있을 것이다. 파발마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지연되는 폐단이 해서지방이 특히 심하니, 각 역참을 단속하지 않은 죄를 감사가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이상과 같은 뜻으로 말을 만들어 엄중히 문서를 뛰우도록 하라."

 

9월 25일 경진

추도기(秋到記) 유생을 대상으로 보인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차지한 민철유(閔哲儒)와 제술에서 수석을 차지한 신광식(申光軾)에게 모두 전시에 곧장 응시하도록 하였다.

 

9월 27일 임오

칠석제(七夕製)를 반궁(泮宮)에서 실시하였다. 지방의 유생들이 다 모였다고 하여 지방 팔도의 유생으로서 합격한 자들은 모두 차등있게 상을 내릴 것을 명하였다.

 

서유대(徐有大)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전 판서 조심태(趙心泰)가 죽었다. 전교하기를,
"이 장신(將臣)은 임금으로부터 인정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중요한 직무를 전적으로 맡아 관서지방의 방어사부터 시작하여 북도와 남도의 병사를 계속 역임하다가 몇 해 사이에 마침내 장수로 승진하였다. 돌이켜보면 수원성을 건설하는 공역에 처음부터 정성을 쏟아 지대한 공을 세웠고, 말을 달리며 군사를 지휘하는 수고는 역사를 놓고보더라도 그 유례를 찾기가 드물었으므로 드높은 간성처럼 크게 의지하고 믿어왔다. 삼군(三軍)의 생살권을 맡고 판서의 품계에 오른 정도로는 그 노력에 보답하고 공적을 표창하기에 충분하지 못한데 큰 나무가 그리도 빨리 시들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너무도 슬픈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죽은 판서 조심태의 집에 성복(成服)하는 날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해조로 하여금 품계를 올려주고 증직하며 맹부(盟府)172)  에서 훈신으로 올려주는 규정에 따라 시호를 내리는 조치도 즉시 거행하게 함과 동시에 부의를 통상적인 규례로 내려주는 것 이외에 갑절로 늘려 보내주고 관을 짜는 재목도 좋은 것으로 골라 지급하게 하였다. 아울러 의정부 좌찬성을 증직할 것을 명하였다.

 

9월 28일 계미

차대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발탁하여 한성부 판윤으로 삼고 윤행원(尹行元)과 이익모(李翊模)를 아경(亞卿)으로 승진시켰다.

 

좌의정 이병모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전교하기를,
"좌상은 신경통을 앓고 있으므로 지금처럼 절기가 바뀌는 때에 새벽에 일찍 나오고 저녁늦게 돌아가는 수고를 강요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지난 여름 사임을 요청했을 때 나중에 그 뜻을 들어주겠다고 말을 하였으니, 서리내리는 추운 때를 만나 우선 사임을 허락하여 건강을 더 손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실로 대신을 예우하는 의리에 부합된다. 좌상의 간청을 특별히 허락하니 오늘 인사행정에서 조치하여 비답을 내리고 즉시 숙배하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심환지(沈煥之)를 의정부 좌의정으로 다시 제수하고 조정에 나올 것을 간곡하게 하유하였다.

 

서유대(徐有大)를 금위 대장으로, 이한풍(李漢豊)을 훈련 대장으로, 신대현(申大顯)을 장용장으로, 이득제(李得濟)를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좌의정 심환지에게 거듭 하유하였다.
"경은 정승으로 제수된 것에 대하여 사임할 사정이 없다. 내일 문묘에 술잔을 올려야 하는데 동반(東班)의 앞자리는 마땅히 인원을 갖춰 참례해야 한다. 오늘 나와서 숙배를 해야만 재숙(齋宿)할 수 있다. 당직 승지는 이런 내용으로 가서 전달하고 그와 함께 오도록 하라."

 

9월 29일 갑신

춘당대(春塘臺)에서 재숙하였다.

 

좌의정 심환지가 상소하여 사임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정승자리에 재차 제수한 뜻을 돈유(敦諭)로 대강 언급하였으니, 경은 마땅히 선뜻 나와서 받아야할 일인데 어찌하여 또다시 사직소를 올렸는가. 기강이 바로서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대항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조처하기를 올바로 한다면 바로서지 않던 것이 저절로 바로서게 될 것이다. 국법이 날로 무너져 멧돼지가 무작정 날뛸 경우 그것을 쏘아잡을 천근의 쇠뇌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 너그럽게 보살피거나 엄하게 다스리는 것이 각기 중도에 맞는다면 무너질 듯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민생을 편안하게 살리고 구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청렴한 기풍을 권장하고 탐욕을 징계하는 일들이 느슨하기 때문이며, 세상의 풍교를 붙잡아 세우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올바른 학문을 밝히지 못하고 그 다음 명예와 행실을 닦지 못한 때문이다. 오늘날 여러가지 폐단을 바로잡는 길을 어찌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인가. 오직 경들이 심력을 쏟아 나를 도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다.

 

9월 30일 을유

문묘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이어 춘당대에 나아가 알성과(謁聖科)를 실시하여 문과에서는 이규진(李奎鎭) 등 6인을 뽑고 무과에서는 정경진(鄭慶鎭) 등 13인을 뽑았다.

 

전 판서 이경무(李敬懋)가 죽었다. 전교하기를,
"당당한 노장의 굳세고 날렵한 자태를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일찍이 대장을 역임한 이후 그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은 줄곧 변함이 없었다. 죽은 판서 이경무의 집에 일반적인 규례 이외에 부의를 더 많이 내려줄 것이며 그의 아들에 대해서는 상기를 마친 뒤에 등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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