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52권, 정조 23년 1799년 10월

싸라리리 2025. 8. 1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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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병술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에 새로 급제한 자 및 칠석제(七夕製)에 입격(入格)한 유생을 소견(召見)하였다.

 

수찬 박윤수(朴崙壽)가 상소하기를,
"시장(試場)에 친림(親臨)하셨을 경우, 그 사체야말로 얼마나 특별하다 하겠습니까. 따라서 비록 대독관(對讀官)173)  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답안지를 낭독할 때 이외에는 어떠한 말이나 문자도 감히 입 밖에 내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니, 이는 법례(法例)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 금장(禁將)이 고관(考官) 이상도(李尙度)의 우측에 자리를 잡고는 시험 점수를 매길 때 끼어들어 농지거리를 하며 웃곤 하였습니다. 지극히 엄한 시장의 사체에 비추어 볼 때 보고 들음에 놀랍기만 하니, 연로한 무장(武將)이라고 하여 그냥 놔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금위 대장(禁衛大將) 서유대(徐有大)에게 견삭(譴削)하는 처벌을 속히 시행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무소(武所)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시사(試射)가 일단 끝나고 나면 참방(參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거주지와 고강(考講)에 관련된 사항과 호적 등에 대해 자세히 물어 보아야 하니, 이는 그야말로 과장(科場)을 엄히 하고 간사한 폐단을 막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응당 행해야 할 일은 당초 거행하지 않고서 개인적으로 직접 군막(軍幕)에 불러다 물어 보았으니, 이는 시험에 관한 규정을 크게 무너뜨린 것으로서 뒤폐단과 관계가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무소의 해당 시관(試官)들에 대한 처분이 아직 내려지지 않고 있는 상황인 만큼 신이 감히 앞질러 죄를 적용하라고 청할 수는 없습니다만, 장전(帳殿)174)  에서 명단을 대조하는 격례(格例)와 어긋나게 행한 일에 대해서만은 여러 시관들 역시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모두 견책하는 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장의 사체야말로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 그렇다면 말을 주고받는 것도 감히 해서는 안 될텐데, 더구나 농지거리를 하며 웃을 수 있겠는가. 전에 듣지 못했던 일이니, 해당 장신(將臣)에게 서용하지 않는 벌을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10월 2일 정해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태묘(太廟)에서 거행하는 동향 대제(冬享大祭)의 서계(誓戒)175)  를 행하였다.

 

10월 3일 무자

《아송(雅誦)》이 완성되었다.
상이 ‘순(舜)임금의 조정에서는 뒤를 이을 아들에게 제일 먼저 음악을 가르쳤다. 오늘날 음악 교육은 마땅히 시(詩)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삼백편(三百篇)176)   이후로 사무사(思無邪)의 뜻을 얻은 것은 오직 주자(朱子)의 시밖에 없다. 따라서 문왕(文王)을 기다려야 하는 선비177)  들을 흥기(興起)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주자의 시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하고, 직접 사부(詞賦)와 금조(琴操)와 고체시(古體詩)·근체시(近體詩) 등 3백 59편(編)을 뽑는 한편, 그 끝에 명(銘)·잠(箴)·찬(贊)·제(題)·사(辭) 등의 글을 부록으로 실어 모두 4백 15편을 수록, 8권(卷)으로 정리한 뒤 책 이름을 《아송》이라 하였는데, 아송이란 말은 아언(雅言)과 같은 의미였다. 그리고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간행해서 바치도록 하고, 경연(經筵)과 주연(胄筵)에서 진강(進講)토록 하였으며, 존경각(尊經閣)에 소장해 두고, 유생들을 달마다 고강(考講)하는 책으로 삼도록 하였다.

 

10월 5일 경인

이에 앞서 전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기양(李基讓)이 아뢰기를,
"신이 만부(灣府)178)  에 거급(擧給)179)  하는 것을 고질적인 폐단으로 생각해서, 소를 올려 ‘환곡(還穀) 가운데 진분조(盡分條)180)  에 대해서는 반절의 분량을 유고(留庫)케 해 달라.’고 청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먼저 감영의 곡식부터 바로잡은 뒤에 장계로 보고하라.’는 성상의 분부를 받았기에, 신이 ‘진분조 2만 3천여 석(石) 가운데 1만 1천여 석을 유고시켜야 마땅하다.’는 뜻으로 도신(道臣)에게 논보(論報)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도신이 단지 ‘6천여 석을 먼저 다른 고을의 반분조(半分條)181)  로 옮겨 바꿔주면 실제로 3천 석이 줄어든다. 따라서 나머지 1만 8천여 석 가운데 유고시켜야 할 것이 9천여 석인데, 이것은 추수하기를 기다려 상정가(詳定價)로 돈을 받고 청남(淸南)의 곡식이 부족한 고을에 옮겨 팔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으로 장계를 올려 청했는데, 이에 비국에서 ‘한꺼번에 옮겨 부역케 하는 것은 곤란하니 형세를 보아가며 조처토록 해야 하겠다.’고 앙청(仰請)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도신이 미처 조처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난해에는 9천여 석이던 것이 지금은 또 모곡(耗穀)까지 합산하여 1만여 석이 되고 말았는데, 지금 만약 제때에 변통해 주지 않는다면 거급(擧給)하는 폐단이 다시 예전과 같아질까 두렵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본부(本府)의 진분곡(盡分穀) 전량을 다른 고을로 옮겨 다른 곡식으로 바꿔 주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무역하게 해서 거급하는 폐단이 영원히 없어지도록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남의 각 고을이 백성은 많고 곡식은 적다는 것을 조정에서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만약 만부(灣府)를 위해 한도를 벗어나서 옮겨 무역하게 할 경우, 저쪽에서 매매하고 이쪽에서 무역하노라면 거꾸로 폐단이 생길 수도 있으니, 청남에서 해마다 매매하도록 되어 있는 총액(摠額)에서 그 숫자만큼 줄이고 의주의 곡식을 더 사들이도록 하되 상정가를 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공사(公私)간에 모두 유익하게 될 것이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그렇게 거행한 뒤에 장계로 보고토록 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한용귀(韓用龜)가 장계를 올리기를,
"지금 이 의주부의 환곡을 거급(擧給)하는 폐단에 대해서, 전 부윤 이기양이 당초 소장을 올려 진달하였고 지금 또 연석(筵席)에서 아뢰었습니다마는 신의 감영 내에는 이를 상고해 볼 만한 문부(文簿)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전전(前前) 도신 박종갑(朴宗甲)이, 해(該) 부윤 이기양의 소에 내린 비답에 따라 비변사가 계하(啓下)받아 보내 온 관문(關文)을 해부(該府)에 알려 주었는데, 그 관문 가운데 ‘거급하는 폐단은 일체 혁파하고 가호(家戶)를 헤아려 총액을 파악하라. 그리고 실제로 생활이 빈한한 자들을 따로 가려낸 뒤 받기를 원하든 받기를 원하지 않든 따질 것 없이 등급을 나누어 균등하게 안배(按排)하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또 전 도신 민종현(閔鍾顯)이 재임(在任)할 때 해 부윤 이기양이 올린 첩정(牒呈)을 살펴 보건대 ‘환곡을 나누어 주는 법으로 말하면, 다른 읍의 경우는 한결같이 호수(戶數)에 따라 대(大)·중(中)·소(小)로 칭한 뒤 분배하는 법이 있지만, 본부(本府)의 경우는 단지 받기를 원하는 자들을 뽑아 식구를 계산하고 곡식을 헤아려 한 달에 3번 돌아가게 할 뿐, 당초 대·중·소로 나누어 가구별로 안배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진분곡(盡分穀)이 점점 많아지는 바람에 대·중·소로 안배하여 나누어 주는 규정이 처음으로 생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거급(擧給)의 폐단이라는 것이다. 지금 바로잡아 주기를 원하는 것은 다만 대·중·소로 나누어 강제로 안배하는 폐단에 대한 것이요, 그리하여 받기를 원하는 가호(家戶)에 한정하여 그 식구를 헤아려서 나누어 주는 법을 다시금 존속시켰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관문의 내용 가운데 「받기를 원하든 받기를 원하지 않든 따질 것 없이 일괄적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본부에서 환곡을 나누어 주는 법을 자세히 알지 못한 것인 듯하다. 만약 또 원하지 않는 가호에 분배해 준다면, 거급의 폐단이 예전 그대로 있게 될 것이니 바로잡아 개혁하는 뜻이 못될 듯하다.’ 하였습니다.
전전 도신에게 균등하게 배분하라고 신칙(申飭)한 것이야말로 폐단을 제거하는 요체(要體)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대체로 환곡을 나누어 주는 법에 있어서는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를 따질 것 없이 호수(戶數)를 계산하고 곡식을 헤아려 공평하게 나누어 준 뒤에야 어느 한쪽만 치우치게 고통을 받는 걱정을 없앨 수가 있는 것인데, 만부(灣府)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아 받기를 원하면 주고받기를 원하지 않으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미 다른 고을에는 없는 예인데도 그만 ‘본부의 예는 다른 고을과 다르다.’고 하고 있는데 그 예가 다른 고을과 다르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본부의 잘못된 예를 고수하려고 하면서 다른 고을에 적용되는 상법(常法)은 따르려 하지 않고 있는데, 지금 만약 한결같이 의주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다른 고을에 곡식을 옮겨 줄 경우, 저 환곡을 싫어하는 백성들이야 물론 소원을 성취한 즐거움을 맛보겠지만, 곡식을 바꿔 주고 환곡을 더 받는 고을의 입장에서는 백성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걱정이 오히려 있지 않겠습니까.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소민(小民)의 사정(私情)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반하여 주고 안 주는 것이야말로 관가(官家)의 공법(公法)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해부(該府)의 잘못된 예대로 행할 경우, 이는 환곡을 나누어 주는 법례(法例)를 관가에서 굽히는 것이 되고 환곡을 받는 권한이 백성에게 있게 되는 셈인데, 관가와 소민이 있게 된 이래로 어찌 이런 도리가 있었겠습니까.
지금 해부에 1년 동안 나누어 줄 곡식의 총수(摠數) 및 민호(民戶)를 조사해 보건대, 총수는 미곡으로 환산해서 4만 4천 3백 26석이고, 민호는 1만 2천 6백 40호인데, 이 곡식의 총수를 민호에 분배할 경우 1호당 받는 양은 겨우 3석(石) 7두(斗)에 지나지 않습니다. 농민이 종자(種子)로 쓰고 양식으로 삼는 것이 전적으로 환곡에 의지하고 있고 보면, 3석 7두의 환곡을 주어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인데, 어찌 분수에 넘치게 받아 폐단을 발생시킬 리가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만부(灣府)의 환곡을 나누어 주는 잘못된 예를 지금 이후로 혁파하고, 다른 고을에 적용하는 예대로 일체 등재된 민호에 따라 적당량을 균등하게 분배하는 한편, 다른 고을로 옮겨 바꿔 주고 유고(留庫)하는 곡식의 양을 늘려 주는 한 조목은 지금 우선 시행을 정지했다가 장래에 곡식이 점점 많아지는 날을 기다려 서서히 의논해서 도모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마치 물고기를 삶는 것182)  과 같으니 요동시키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이야 원래 평등하지만, 남쪽 백성들과 동쪽 백성들은 곡식과 삼[麻]과 생선과 소금을 바치게 하는 등 수고시키는 반면, 서쪽과 북쪽 백성들은 편히 지내면서 볏단 하나 옮기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러나 이렇게 법을 만들고 규정을 세운 본래의 의도를 살펴볼 때 어찌 혹시라도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정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우공(禹貢)183)  에 오복(五服)으로 구별한 것을 보건대, 전복(甸服)184)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9등급으로 분류한 공부(貢賦)의 책임을 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더구나 저 의주부의 경우는 변방의 요새지에 처해 있기 때문에 봄에도 베[布]를 바치지 않고 가을에도 국세(國稅)를 내는 일이 없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다면 도신(道臣)의 장계에 나오는 이른바 ‘다른 고을에서 공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通行] 예를 적용해야 마땅하다.’고 한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는가. 이런 말을 과연 도백(道伯)이 된 자가 입에서 꺼내고 글로 쓸 수 있단 말인가.
거급(擧給)하는 것이 잘못된 규정은 아니라 하더라도, 베를 바치는 일도 없고 국세를 내는 일도 없게 한 것 역시 바로 예에 없는 예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만약 민정(民情)을 거스르면서 그 고을의 관례를 고쳐 거급하는 규정을 먼저 만들어 낸다면, 변방 지역의 인심이 갈수록 서로들 불안해 하면서 장차 ‘변방 고을에 적용하는 법제(法制)가 고쳐졌으니 세법(稅法)도 당연히 따라서 고쳐질 것이다.’고 하리니, 이것이야말로 아무 탈이 없는데 괜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령 이와 반대로 한다면 팔뚝을 잡아 끌며 못하게 막는 일은 털끝만큼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정에는 조정 나름대로의 체면이 있게 마련이다. 수신(守臣)이 상소를 올리고 연석(筵席)에서 직접 진달하는 등 일단 아뢰고 나서 또 아뢴 데 대해 조정에서 그것을 그르다고 하지 않고 바로잡아 고치도록 허락한 이상 도신은 단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거행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더구나 동서 남북이나 내지(內地)·외지(外地) 백성들의 수고하고 편한 정도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야말로 고금(古今)에 바뀔 수 없는 철칙인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도 홀연히 ‘공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通行]’는 두 글자를 가지고 방계(防啓)하는 빌미로 삼았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생각이 부족하단 말인가.
근래에 도백이 청렴하다는 소문을 들을 수 없는 가운데 청남(淸南) 직로(直路)의 곡식 장부가 텅 비어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새로 설치된 군영(軍營)을 빙자하여 시장 가격을 올리고 내리면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변방의 정사를 고달프게 여겨 온 지가 또한 오래되었다. 이 한 조목의 일이 비록 지금 재임 중인 도백의 죄는 아니라 할지라도, 오늘날 변통해야 할 때를 당하여 부익(裒益)185)  하는 정사를 잘 행하기만 한다면, 곡식은 발이 없어도 모여들 것이고 백성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안정을 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도신이 즉시 결단을 내려주지 않은 것만도 매우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인데, 또 어떻게 감히 자기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자질구레하게 위에 보고를 올릴 수 있단 말인가.
해(該) 도신을 추고(推考)하고 이 장계는 도로 내려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여러 해로 나누어 하건 당해 연도에 하건 따질 것 없이 또 무슨 방편을 써서 옮겨 바꾸건 따질 것 없이 그저 거행하고 난 뒤에 그 형편을 장계로 보고토록 하라."
하였다.

 

10월 7일 임진

곡산부(谷山府)의 성적비(聖蹟碑)가 완성되었다. 상이 친히 인본(印本)186)                  을 받고 상전(賞典)을 시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말 달리시던 옛터와 수라천(水剌泉)과 성후(聖后)께서 거하시던 사제(私第)의 옛터에 세운 비의 인본을 직접 받을 때에 모셔 올리고 맞드는 역할을 수행한 예방 승지        윤동만(尹東晩), 검교 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 겸 차사원(兼差使員)이며 지방관인 곡산 부사        조덕윤(趙德潤)의 자급을 모두 가선(嘉善)으로 올려 주고, 어제(御製) 비명(碑銘)을 서사(書寫)한 관원인 행 대제학        홍양호(洪良浩)의 자급을 보국(輔國)으로 올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서매수(徐邁修)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10월 8일 계사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친압(親押)187)  하고, 이어 태묘(太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참배한 뒤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펴보았다.

 

10월 9일 갑오

태묘에서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친히 행하였다.

 

10월 10일 을미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요즘 들어 사치 풍조가 점점 자라나고 있다. 일전에 제향(祭享)하는 반열에서 본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통청(通淸)188)  이 안 된 사람들과 참하(參下)인 문관들까지 모두 조복(朝服)을 입고 있었다. 대체로 4품(品) 이상은 조복을 입고 5품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는 것이 원래의 규례이기 때문에 의주(儀註)도 본래 이와 같이 마련했던 것이었다.
기억하건대, 옛날 선조(先朝) 때 내가 묘정(廟庭)에서 올려 모실 당시에 보니, 시종(侍從) 가운데 조복을 착용한 자가 절반도 안 되었었다. 그런데 어느새 수십 년도 못 되어 사치 풍조가 날로 자라나 이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난모(煖帽)189)  를 말하더라도 그렇다. 초모(貂帽)190)   역시 덕이 있는 자에게 쓰게 하는 상징물로서 품계(品階)를 확연하게 구분해 놓은 것이 거의 초헌(軺軒)191)  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가령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들의 경우는 사송(賜送)된 관계로 더러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문관 가운데 좌이(佐貳)192)  를 거치지 않은 자들과 무관 가운데 순장(巡將)들까지 모두 쓰고 있고, 심지어는 수직(壽職)에 있는 자들마저 모두 잘못을 본받고 있으니, 복장을 등급별로 제정한 제도가 이보다 더 심하게 밝혀지지 않은 경우는 없다 하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예를 갖추고 군신(君臣)이 만나는 조정의 의식이야말로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 그런데도 근래에 하나의 큰 조회(朝會)를 행할 때마다 문득 잘못되는 일이 한 번씩은 생기곤 한다. 일전에 알성(謁聖)하려고 재숙(齋宿)할 때 시위(侍衛)를 난잡하게 한 것은 우선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승선(承宣)이 앉아 있는 모양을 보니 불경스럽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집안에서 자기 행동을 단속하는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에 나와서 공적인 자리에 있을 때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일이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민망한 일이 아닌가."
하였다.

 

김문순(金文淳)을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로 삼았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신은 지금 보잘것없는 몸으로 나이만 많이 들어 어느덧 죽을 시기가 가까워졌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법문과 규례 같은 사소한 것이나 부서 기회(簿書期會)193)   같은 지엽적인 것마저 대강이라도 짐작해서 그 끝에 서명하는 것조차 힘든 형편입니다. 따라서 만약 일찌감치 스스로 인퇴(引退)하지 않으면, 중한 책임을 부여한 성조(聖朝)의 융숭한 은혜를 저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고, 사방에서 사우(士友)의 여론을 야기시키게 될 것이니, 신이 죄를 피할 길이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내려 오는 중서(中書)194)  의 상규(常規)에 의하면, 초기(草記)로 품(稟)하며 복계(覆啓)하는 것은 수상(首相)이 주관하지 좌상이나 우상도 대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더구나 어떻게 감히 그 일을 대신 행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최근 주사(籌司)195)  를 신칙(申飭)하여 상규를 준수하게 한 것이다. 뒷사람들 역시 주사의 초기를 볼 경우 묻지 않고 당연히 수상의 글이라고 인정한 나머지 문고(文稿)를 추가로 엮으면서 의심하지도 않고 이를 가져다 수록할 것이다.
연전에 한두 명의 고 정승이 혹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혹은 문서 처리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담당 관원의 조력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실제로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었다. 대체로 고 정승 신 문정공(申文貞公) 당시에는 문서의 제결(題決)까지도 일체 담당 관원에게 위임했었으니 이것을 하나의 증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상규를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 그렇게 한 사례도 있으니, 고 재상 김 헌숙공(金憲肅公)196)  이나 채 문숙공(蔡文肅公)197)  의 두 사례 중에서 편할 대로 본따 쓰도록 하라."
하였다.

 

하직 인사를 올리는 곤수(閫帥)를 소견하였는데,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이응운(李膺運)이 연석(筵席)에서 아뢰면서 착오를 많이 범하자, 장령 정한(鄭澣)이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이를 따르고 김선(金璿)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민창혁(閔昌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12일 정유

진하 겸 사은 정사(進賀兼謝恩正使) 조상진(趙尙鎭)과 부사(副使) 서형수(徐瀅修)가 반사(頒赦)한 조칙(詔勅)에다 그동안의 상황을 덧붙여 기록해서 치계(馳啓)하였다. 그 내용에,
"신들이 8월 27일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예부(禮部)에 나아가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올렸더니, 우시랑(右侍郞) 추병태(鄒炳泰)가 낭관(郞官)들을 이끌고 나와 맞이하여 받았습니다. 그러고나서 주객사(主客司)의 낭관이 방물(方物)에 관한 표문과 자문을 본 다음에 역관(譯官)에게 묻기를 ‘별사(別使)가 올 때에는 방물을 보내지 말라고 전에 이미 선황상(先皇上)께서 은지(恩旨)를 내리셨는데, 지금 진하(進賀)하는 행차에 규례대로 방물을 싸 가지고 온 것은 어찌 된 일인가?’ 하였는데, 역관이 대답하기를 ‘이번에 태상황제(太上皇帝)에게 시호(諡號)를 올린 일을 축하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중대한 의미가 있는 전례(典禮)이다. 그래서 소방(小邦)이 별사를 전적으로 차견하면서 특별히 방물을 갖추고 가 반드시 산릉(山陵)을 옮기기 이전에 맞추어 바치게 한 것이니, 이는 대체로 관례에 따라 축하하는 것과는 원래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였습니다.
29일에 황제가 관덕전(觀德殿) 빈궁(殯宮)에 가서 특별히 큰 제사를 직접 행할 때에 예부에서 4인의 역관에게 통지하여 신들로 하여금 어가(御駕)를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날 5경(更)에 신들이 서장관(書狀官) 한치응(韓致應) 및 원역(員譯) 등과 함께 흑단령(黑團領) 차림에 흉배(胸褙)는 떼고서 신무문(神武門) 밖 북상문(北上門) 안의 지영(祗迎)하는 반열에 나아가 기다렸습니다. 진시(辰時)에 황제가 누런 지붕의 작은 가마를 타고 신무문에서 나왔습니다. 신들이 지영하는 곳에 이르러 황제가 몸을 기울여 내려다 보고는 웃음을 짓더니 시위(侍衛)하는 대신을 돌아보고 묻기를 ‘조선 사신인가?’ 하였는데 가마가 지나가는 사이에 멈추지 않고 주의 깊게 바라보기만 하였습니다.
9월 1일, 황제가 관덕전의 빈궁에 가서 조전례(祖奠禮)를 행할 때에 예부를 통해 알려 왔기에, 신들이 천담복(淺淡服)을 착용하고 관덕전 뜰에 나아가서 기다렸습니다. 묘시(卯時)에 전각 뜰에 노부(鹵簿)198)  가 설치되었습니다. 진시(辰時)에 황제가 누런 지붕의 작은 가마를 타고 북상문에서 나왔는데, 신들이 지영하고 있는 곳에 이르러 황제가 수레 안에서 신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어 황제가 재궁(梓宮)을 바라보고 곡(哭)을 하자 시위하는 신하들이 모두 걸어가면서 곡을 하였고 반열에 있는 백관들은 모두 서서 곡을 하였습니다. 황제가 의장대 행렬 밖으로 우회하여 관덕전 안에 들어와서 곡을 그치니 백관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객사(主客司)의 관원이 신들을 인도하여 서쪽 반열의 산관(散官) 아래의 위치에서 무릎을 꿇게 하였습니다.
전각 안에서 제문(祭文) 읽는 것이 끝나자 전각 안과 전각 뜰에서 모두들 곡을 하였습니다. 황제가 술 석 잔을 부어 올리니 동쪽과 서쪽 반열의 신하들이 뒤따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이 예를 행하고 나서 예관(禮官)이 제문을 받들고 나가자 제8왕(第八王)과 제17왕이 그 뒤를 따랐고 왕공(王公)과 백관 및 신들이 모두 뒤를 따랐습니다. 전각 뜰 동쪽 문밖에 이르니 난여(鑾輿)와 기복(器服)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제8왕이 제문을 앞의 탁자에 봉안(奉安)하고 곡을 하며 술 석 잔을 올린 다음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것들을 모조리 불질러 태워버렸습니다. 신들은 그 즉시 물러나 관소(館所)로 돌아왔습니다.
2일, 빈궁(殯宮)에서 떠나 보낼 때 또 예부를 통해 알려 왔기에 신들이 천담복을 착용하고 조양문(朝陽門) 밖 5리(里) 되는 돌다리 앞으로 나가 기다렸습니다. 사시(巳時)에 황제가 누런 지붕의 작은 가마를 타고 나왔습니다. 신들이 길 옆에서 지영(祗迎)했더니 황제가 수레 안에서 신들을 관심 있게 쳐다보고는 또 수건으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가마가 지나가고 나서 6량(輛)의 수레가 잇따라 나왔습니다. 맨 앞에는 누런 비단에 검은 뚜껑의 수레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관방(管房)이 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관방이란 비빈(妃嬪)을 일컫는 말입니다. 다음에는 꼭대기를 황금으로 장식하고 푸른 뚜껑을 한 수레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10공주(公主)가 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네 채의 수레에는 8아가(阿哥)199)  ·11아가·17아가와 복진(福晋) 및 면아 복진(綿兒福晋)이 타고 있다고 하였는데, 복진이란 낭랑(娘娘)200)  을 일컫는 말로서 모두 선황제(先皇帝)의 자부(子婦)와 손부(孫婦)라고 하였습니다.
맨 뒤에 재궁(梓宮)을 실은 큰 승여가 나왔는데, 그 승여는 누런 지붕과 누런 명주와 누런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고, 영가(靈駕)의 책보(冊寶)를 실어 나르는 용정(龍亭) 및 시위(侍衛)와 노부(鹵簿)가 앞에 늘어섰습니다. 지나가는 문과 다리 안에서 대신이 술을 붓고 종이돈과 비단을 불살랐으며 서울에 남아 있는 백관과 신들은 반열을 지어 곡하며 길가에서 전송하였습니다.
돌다리 동쪽으로 두 갈래 길이 나뉘어 닦였는데, 하나는 재궁이 가는 길이고 하나는 황제의 가마가 가는 길이었습니다. 황제가 걸어서 전송하여 문까지 이른 다음 문에서부터는 먼저 다른 길을 취하여 앞서 갔습니다. 역참(驛站)마다 재궁을 공경히 맞이하는 법은 바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전부터 관덕전 동쪽 문을 걸어서 전송하는 곳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새 능침(陵寢)의 이름은 유릉(裕陵)으로서 계주(薊州)의 속읍인 준화현(遵化縣) 창서산(昌瑞山)에 있는데 연경과의 거리는 3백 70리입니다. 재궁이 매장된 것은 바로 9월 15일 묘시였습니다.
6일, 방물(方物)을 실은 차량이 아무 폐단 없이 들어왔습니다.
7일, 예부에서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행재소(行在所)에 제본(題本)을 올렸습니다.
11일, 연례적인 공물로 처리해 주라는 황제의 칙지(勅旨)가 비로소 내려 왔습니다. 예부가 올린 제본 및 황제의 칙지는 별지(別紙)로 베껴 올리겠습니다. 그 동안 일과 관계된 각 해고(該庫)의 낭리(郞吏) 및 제독(提督)·대사(大使)·통관(通官) 등에게도 예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18일, 황제가 환궁할 때 또 예부를 통하여 알려 왔기에 신들이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흉배는 뗀 채 조양문(朝陽門) 밖 5리에 있는 돌다리로 나가 기다렸습니다. 사시(巳時)에 황제가 누런 지붕의 작은 가마를 타고 왔습니다. 신들이 예부 우시랑(禮部右侍郞) 추병태(鄒炳泰)와 주객사 원외랑(主客司員外郞) 복극정아(福克精阿)와 함께 반열을 이루고 길가에서 지영(祗迎)했더니, 황제가 신들을 바라보고는 수레 앞으로 나오게 한 뒤, 한어(漢語)로 시위하는 대신을 시켜 신들에게 ‘국왕은 평안한가?’ 하고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칠액 부마(七額駙馬)인 납방다라기(拉網多羅記)가 나와서 황제의 뜻을 전하기에 신들이 통관(通官) 태평보(太平保)를 시켜 대답하게 하기를 ‘국왕은 황상이 내려 준 복 덕택에 계속 평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가마가 지나간 뒤에 신들이 바로 따라서 관소(館所)로 돌아왔습니다.
황제가 처음 정사를 행하면서 응대하는 말을 가급적 간중(簡重)하게 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이에 앞서 누차 신들을 돌아보는 거조를 취한 것에 대해서도 통관들은 오히려 영광으로 알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서로 더불어 와서 축하하며 ‘황상께서 귀국의 왕에 대해 이토록까지 관심을 보이다니, 정말 감격스럽다.’고 하였습니다.
19일, 황제가 종묘(宗廟)에 나아가 신패(神牌)를 맞이할 때 또 예부를 통해 알려 왔기에 신들이 흑단령을 착용하고 오문(午門) 밖에 나가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다가 제독(提督)이 통관으로 하여금 신들을 이끌고 먼저 대청문(大淸門) 밖으로 나가서 신패를 지영(祗迎)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묻기를 ‘어제 예부에서 4역관(譯館)에게 통지한 문서에 의하면, 단지 황상의 출궁(出宮) 때 지영하고 환궁 때 지송(祗送)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 다시 시기에 딱 당해서 변통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였더니, 통관이 말하기를 ‘전례(前例)에 의하면, 내조(內朝)의 백관은 나가서 신패를 지영하고 뒤따라 종묘에 이르는 반면, 외국의 사신은 그저 황제의 수레를 지영하고 지송할 따름이기 때문에 예부에서 전례를 상고하여 그렇게 마련했던 것이다. 그런데 황제께서 「신패를 종묘에 들일 때에 조선 사신도 똑같이 지영하게 하라.」는 분부를 특별한 내리셨으니, 이는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조치로서 우리들까지도 영광스럽기만 하다.’ 하였는데 예부의 여러 관원들도 자못 감동되는 기색이었습니다.
신들이 마침내 즉시 나와 대청문 밖에서 대기하다가 신패를 실은 누런 수레가 도착하자 백관들과 함께 반열을 지어 지영하였습니다. 이어 황제가 탄 수레의 뒤를 따라 종묘의 문밖에 이르러 멈추었다가 길을 돌아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간 뒤 예전에 대기했던 장소에서 황제의 행차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진시(辰時)에 황제가 부(府)에서 대궐로 돌아갔는데 신들이 지영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예전처럼 관심 있게 지켜 보았습니다.
20일, 조서(詔書)를 선포할 때 또 예부를 통해 알려 왔기에 신들이 흑단령을 착용하고 천안문(天安門) 밖으로 나아가 기다렸습니다. 진시에 반사(頒赦)하는 조서를 누런 용정(龍亭)에 싣고 정문(正門)을 통해 나왔는데, 향정(香亭) 및 어장(御仗)·황개(黃蓋)가 앞장서서 인도하였고, 총독(摠督) 및 예부·홍려시(鴻臚寺) 관원들이 뒤따랐습니다. 문밖의 길 한복판에 설치한 탁자 앞에까지 와서 예부의 관원이 조서를 받들고 나와 탁자 위에 놓았습니다. 홍려시 관원이 무릎을 꿇으라고 외쳤으므로 반열에 있는 관원 및 신들 모두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조서를 선포하는 관원이 탁자 쪽으로 올라가니 두 사람이 조서를 펼쳤고 다섯 사람이 만주어(滿洲語)와 한어(漢語)로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읽기를 마치고 나서 반열에 있는 관원 및 신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이에 마침내 조서를 도로 용정에 봉안한 다음,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따르는 것을 앞에서와 같이 하면서 대청문(大淸門)으로 나와 예부로 향하였습니다.
21일, 상(賞)을 나누어 줄 때에 또 예부를 통해 알려 왔기에 신들이 오문(午門) 밖으로 나가 기다렸습니다. 오시(午時)에 예부 상서 덕명(德明)이 낭관(郞官)들을 이끌고서 오문 밖에 탁자를 설치한 다음 관례에 따라 상을 나누어 주기에 신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공경히 받고서 물러났습니다.
반사(頒赦)한 조서(詔書)를 이번 사신 행차 편에 부쳐 줄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황제의 수레가 대궐로 돌아간 다음에 처음으로 예부 상서 기균(紀均)에게 탐문해 볼 수 있었는데, 그가 대답하기를 ‘이미 아뢰었으니 이번에 온 사신 일행에게 분명히 교부해 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20일에 조서를 선포할 때에는 주객사 원외랑(主客司員外郞) 복극정아(福克精阿)가 수역(首譯)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반사한 조서는 우리들이 가지고 가는 것이 마땅하나 너희들의 대인(大人)이 갖고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21일, 상을 나누어 줄 때에 신들의 좌석이 마침 예부의 낭관들과 붙어 있기에 신들이 수역을 시켜 묻게 하기를 ‘반사한 조서를 이번에 온 사신 일행에게 부쳐 보낼 것이라고 들은 듯하다. 사신 일행이 언제 돌아갈 수 있게 될지는 조서가 언제쯤 내려오느냐에 달려 있다. 그 시기가 언제쯤이나 될지 듣고 싶다.’ 하였더니, 낭관들이 대답하기를 ‘조서를 인출(印出)하고 어보(御寶)를 찍노라면 자연 5, 6일은 소요될 것이니, 26일이나 27일 사이에 사신에게 교부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신 편에 부쳐 보내는 한 조목은 다시 의심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선래 통사(先來通事)는 오늘 당장 출발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서 1통을 먼저 베껴서 올려 보내야만 사은(謝恩)하는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지어낼 수 있을 것이고, 이번 사신 편에 조서를 부쳐 보내는 일과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을 전하는 사행(使行)의 공문 또한 이번 선래 통사 편에 올려 보냄으로써 근거할 자료로 삼게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주선한 결과 이제 와서야 장계(狀啓) 1통 및 반사(頒赦)한 글과 예부에서 아뢴 제본(題本)의 등본(謄本) 2통, 그리고 통지문들을 찾아내어 건수(件數)대로 발송합니다.
그런데 21일, 상을 나눠 준 다음에 예부 상서 덕명이 통관(通官)을 통해 신들에게 말하기를 ‘26일 황상께서 종묘에 가실 때 사신이 수레를 맞이하고 나서 이어 하직 인사를 올려야 할 것이니, 이에 관련된 문서를 역시 제때에 작성해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출발 시기는 이때쯤으로 잡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면 출발할 날짜가 27일이 될 듯한데 아직은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반사(頒赦)한 조서(詔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서를 내리노라.
짐(朕)이 생각건대 《시경(詩經)》에서는 사성(思成)201)  을 노래하며 천명(天命)을 받은 넓고 큰 경사를 기리었고, 《주역(周易)》에서는 은천(殷薦)202)  을 일컬으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점괘를 뽑게 된 뜻을 드러내었다. 조종(祖宗) 대대로 내려오는 덕을 이어받아 그렇게 되기를 구하셨음에203)   삼가 의식을 거행하여 부제(祔祭)를 올리었고, 제후들의 덕으로 많은 복을 받게 되었음에204)   큰 은택을 베풀어 윤음(綸音)을 반포하게 되었다. 이에 법전을 상고하여 아름다운 법도를 밝히는 바이다.
삼가 생각건대 황고(皇考)이신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께서는 천자로 등극하신 뒤 운세를 크게 열어 국운(國運)을 창성하게 하시었다. 백성들이 황제의 하는 일을 믿고서 높이 숭봉하였으며 하늘에서 돌보아 주시는 것 역시 돈독하였다. 선대(先代)의 뜻을 이어받아 향기로운 정사를 펼치시면서 큰 계책을 시행하셨고,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업적을 겸하신 경륜(經綸)으로 성대한 사업을 일으키셨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부지런히 힘쓰시어 태평 시대를 이룩할 정사를 강구하셨고, 마루며 발[廉] 등에도 경계하는 글을 써 붙여서 정치를 보좌하도록 관원들을 북돋았다. 대책을 의논함엔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일이 완결되도록 하셨고, 백성을 중도(中道)로 대하심에 인륜이 자연 행해졌다. 우(禹)임금이 행했던 일을 빈틈없이 살피심에 농정(農政)에 관한 제본(題本)이 차례로 대궐에 올려졌고, 빈풍(豳風) 7월장(七月章) 내용을 병풍에 붙여둠에 절기별로 행하는 백성들의 일을 멀리서도 환히 알고 계셨다.
천하를 이롭게 해 주시려는 그 마음이야말로 묻지 않아도 원길(元吉)한 것으로서205)   그 이익됨이 끝이 없었고, 철저히 사실을 조사하여 의심 없게 된 뒤에도 용모를 다시206)   좋은 쪽으로 옥사(獄事)를 처결케 하시었다. 사시(四時)에 따라 교화된 상황을 살피게 하심에 기쁜 현상이 천문(天文)에 나타나고, 도리에 의거해서 직언(直言)을 하게 하심에 임금을 깨우치는 바른말이 쏟아졌다. 원대한 계책 정립하고 3만 리 강역 넘어 영토를 확장했고, 뛰어난 인재 배치하고 결함 없는 이 비축하여 언제든 여유있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진정한 도에 합치되고 정사가 제대로 이루어져 참으로 대도(大道)의 경지에 올라서게 되었으며, 강령이 거행되고 조목별로 펼쳐져서 예전의 어떤 정사보다 안정되기에 이르렀다. 돈후한 풍속이 크게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정성은 자연의 질서에 부합되는 효과로 나타났고, 영원토록 무한한 복을 받게 되었으니 그 극진한 교화는 덕정(德政)이 펼쳐졌던 오대(五代)207)  의 때를 만났다고 할 것이다. 만방(萬方)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며 문왕(文王)의 도를 믿고 따르는 것으로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 아님이 없었으니, 구묘(九廟)에 제사를 경건히 받들면서 이에 효성을 바쳐 제향을 올리게 되었다.
황비(皇妃) 효현 순황후(孝賢純皇后)께서는 천부적인 의표(儀表)를 지니시고 황후의 자리에 오르시어 달빛처럼 은은하게 광채를 드리우셨다. 엄숙하고 단정한 자태가 동사(彤史)208)  의 기록에도 나타나듯 궁정에서 착실히 내조하였고, 단의(丹扆)209)  의 정치를 삼가 보좌하며 대궐 안에서 자비로움을 펼쳐 내셨다.
황비 효의 순황후(孝儀純皇后)께서는 대지와 부합되는 성품을 갖추셨다. 대궐 안 정사를 훌륭하게 처리하고 정성을 다 바쳐서 받들어 도왔으며, 궁중에서 황태자를 양육하면서 돌보아 주시느라 무진 애를 쓰시었다.
인(仁)과 의(義)에 입각하건대 처음 제사를 올릴 때는 똑같이 높이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겠기에 마침내 합부(合祔)하는 의식을 성대히 거행하게 되었다. 이에 삼가 여러 왕들 및 패륵(貝勒)210)  과 문무(文武)의 신하들을 거느리고서 가경(嘉慶)211) 4년212)   9월 19일에 고종 법천융운 지성선각 체원입극 부문분무 효자신성 순황제(高宗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孝慈神聖純皇帝)의 신위(神位)와 효현 성정돈목 인혜보천 창성 순황후(孝賢誠正敦穆仁惠輔天昌聖純皇后)의 신위와 효의 공순강유 자인익천 육성 순황후(孝儀恭順康裕慈仁翌天毓聖純皇后)의 신위를 공경히 받들어 태묘(太廟)에 합부하였다. 주(周)나라와 같은 복을 누려 국운이 한없이 장구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요(堯)임금 때의 법도를 본받아 희생(犧牲)을 차린 궤연(几筵)을 정성껏 올렸는데, 일단 성대한 의식을 이룬 만큼 드넓은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구체적인 사항은 다음에 열거한다."

 

예부(禮部)가 제본(題本)을 올려 아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부는 삼가 분부를 받들 일로 아룁니다.
살피건대, 조선 국왕이,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에게 시호(諡號)를 올린 일과 관련, 정사(正使) 판중추부사 조상진(趙尙鎭)과 부사(副使) 예조 판서 서형수(徐瀅修) 등을 특별히 차임, 표문(表文)과 방물(方物)을 공손히 싸가지고 연경(燕京)에 와서 축하하는 동시에 천은(天恩)에 감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조사해 보건대, 옹정(雍正)213) 2년214)  에 조선 국왕이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에게 시호를 올린 일과 관련하여 축하하는 예물을 보내 왔을 때, 신(臣)의 부(部)에서 ‘순치(順治)215) 18년216)  과 강희(康熙)217) 52년218)  에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상주(上奏)하여 윤허를 받았던 예(例)를 따르자.’고 의논드리며 사유를 갖춰 아뢴 결과, ‘이번에 바친 예물은, 예물 명목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냥 이곳에 놔두어 연공(年貢)219)  으로 쳐 주어라.’는 분부를 받들었었습니다.
또 건륭(乾隆)220) 2년221)  에 조선 국왕이 세종 헌황제(世宗憲皇帝)에게 시호를 올린 일과 관련하여 축하하는 예물로 보내 왔을 때, 신의 부에서 ‘옹정 2년의 예에 따라 예물을 받아들이지 말고 여기에 놔두었다가 연공으로 쳐 주자.’고 의논드리며 사유를 갖춰 아뢴 결과, ‘의논드린 대로 시행하라.’는 분부를 받들었었습니다. 이상이 예물의 처리에 대한 판례(判例)들입니다.
이번에 조선 국왕이 고종 순황제에게 시호를 올린 일과 관련하여 축하하는 예물을 공손하게 보내 왔습니다. 그리고 해(該) 국왕은 삼가 근실하게 표문을 짓고 사유를 갖춰 상주함은 물론, 또 다른 한편으로 신의 부에 이자(移咨)하기를 ‘사실 그대로 전주(轉奏)함으로써 상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감히 위에 보고드리지 않을 수 없기에, 삼가 국왕의 자문(咨文) 원본 및 공물의 청단(淸單)222)  을 초록(抄錄)하여 열람하시도록 올립니다. 그리고 국왕이 바친 예물을 받아들여야 할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지 처리하는 문제도 응당 상주하여 분부를 받들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명을 내리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의 부에서 그에 따라 처리해야 하겠기에 삼가 아뢰어 분부 내려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가경(嘉慶)223) 4년224)   9월 10일에 황제의 유지(有旨)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부에서 아뢰기를 ‘조선 국왕이 삼가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에게 시호를 올린 것과 관련하여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과 방물(方物) 1접(摺)을 바쳤다.’고 하였으니, 해(該) 국왕의 공순한 자세와 정성스러운 마음을 모두 알겠다. 국왕이 바친 공물은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여기에 놔두었다가 연공(年貢)으로 쳐 줌으로써 보살펴 주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주객사(主客司)에서 보내 온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객사는 알려 줄 일로 공문을 보낸다. 경축하고 사은(謝恩)하러 온 조선의 사신이 연경에 있는 동안,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와 효현 순황후(孝賢純皇后)와 효의 순황후(孝儀純皇后)를 태묘(太廟)에 올려 합부(合祔)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과 관련하여 반포하는 조서(詔書) 1통을 삼가 받게 되는 행운을 맞이하였다. 각당(各堂) 대인(大人)의 지시를 받들건대, 사신에게 교부하여 삼가 싸들고 가게 하라고 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4역관(譯館)에게 통지하는 바이니, 사신에게 이 사실을 전달해 보고하여 조서가 내려올 때 다시 통지해서 알려주면 그때 부(部)에 가서 수령(受領)하도록 하라. 이 공문을 4역관에게 보낸다. 9월 23일."

 

하교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옛날에 어떤 유신(儒臣)이 상소를 올릴 때면 번번이 절을 1백 번 하고서 ‘삼가 1백 번 절합니다.[謹百拜]’라는 머릿말을 채워 넣다가 늙어서 근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어서는 50번 절하는 것으로 줄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중신(重臣)은 변경(邊境)을 책임맡고 있을 때 장계(狀啓)에 서명을 할 적마다 번번이 손을 씻고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군직(軍職)이라고 하여 중추부(中樞府)의 직함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자기 이름을 써넣는 자들을 이에 비교해 본다면, 그 성실하고 치밀한 것과 소루하고 전도된 것이 30리 정도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중신을 위해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신칙하는 일을 이미 행했으니, 전(前) 상호군(上護軍) 김재찬(金載瓚)을 서용(敍用)토록 하라."

 

10월 13일 무술

김재찬(金載瓚)을 진하 겸 사은 정사(進賀兼謝恩正使)로 삼았다.

 

경외(京外)의 유생 김운주(金雲柱) 등이 상소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세상에 나와 고정(考亭)225)  의 학문을 으뜸으로 삼고 《춘추(春秋)》의 의리를 행하면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맑게 하는 동시에 후학(後學)에게 길을 열어 주고 사설(邪說)을 물리쳤습니다. 그리하여 우뚝 사림(士林)의 영도자가 되자 군유(群儒) 숙덕(宿德)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그림자처럼 따른 나머지 그 도를 함께 하며 서로 전하는 기풍이 성대하게 이 세상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도가 재차 전해져 고(故) 유신(儒臣) 한원진(韓元震)에 이르러서는 선정(先正)이 전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은미(隱微)한 말과 오묘한 뜻이 모두 밝혀져서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보건대 원진은 걸출하게 호걸의 자질을 타고 나 일찍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노닐었는데, 상하가 그와 며칠 동안 이야기해 보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이가 겨우 약관(弱冠)에 이르렀는데 위로는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에 대한 학문으로부터 병농(兵農)과 율력(律曆)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그 근원을 탐구하고 그 흐름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참으로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라 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시(詩)를 지어 주어 장려하기를 ‘묘령의 나이에 드높은 재주로 공자와 주자의 학문 배움이여 경서의 해설 정밀하고 해박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도다[妙歲高才學孔朱 說經精博似君無]’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원진은 이미 비밀히 전해진 비결(秘訣)을 받은 위에 스스로 터득한 것들을 참작하면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재주에 남이 백 번 하면 자기는 천 번 하는 공력을 쌓아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미세해서 안이 없는 것[無內]까지도 분석하여 정밀하게 따지고 거대해서 밖이 없는 것[無外]까지도 포괄하여 통합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가운데, 혹은 크게 분류하고 작게 분류하기도 하며 혹은 떼어내어 보기도 하고 합쳐서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기(理氣)의 원류(源流)에 대해서 논하기를 ‘일물(一物)이 아니면서 일물이고 선후(先後)가 없으면서 선후가 있다.’ 하였으며, 성리(性理) 두 글자의 명의(名義)에 대해서 논하기를 ‘하늘의 입장에서는 이(理)라고 해야지 성(性)이 라고 해서는 안 되며 사람과 다른 존재의 입장에서는 성이라고 해야지 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과 이는 본래 일물(一物)이기 때문에 서로 바꿔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하였으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해서 논하기를 ‘기(氣) 가운데 나아가 이(理)만 단독으로 가리킬 때 본연지성이 되는 것이고 기까지 아울러 지칭할 때 기질지성이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극(太極)과 오상(五常)에 대해서 논하기를 ‘태극이란 형기(形氣)를 초월해서 말하는 개념이고 오상이란 기질(氣質)에 입각하여 성립된 이름이다.’ 하였으며, 사람과 다른 존재의 성(性)에 대해서 논하기를 ‘사람이든 다른 존재이든 모두 똑같은 성을 가지고 있으니 태극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만물의 근원이 하나이기 때문이요, 사람과 사람이 같은 성을 갖고 있고 다른 존재와 존재 역시 같은 성을 갖고 있으니 오상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하나의 근원에서 다르게 갈려 나간 것이요, 사람끼리도 다른 성을 갖고 있고 다른 존재끼리도 다른 성을 갖고 있으니 기질지성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다르게 갈려 나간 것이 다시 다르게 갈려 나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心)과 기질(氣質)에 대해서 논하기를 ‘심은 기질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미발지심(未發之心)을 일컬어 본래 선(善)하다고 하는 것은 기(氣)가 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기질을 아울러서 말한다면 심에도 선악(善惡)이 있는 것인데, 담연(湛然)하며 허명(虛明)한 것은 미발의 기상이요, 청탁(淸濁)과 수박(粹駁)이 있는 것이 기품(氣稟)의 본래 속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였으며, 지각(知覺)의 설에 대해서 논하기를 ‘물[水]이 만물에 대해서 처음과 끝을 같이 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지(智)에도 사덕(四德)을 포괄하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지각이 비록 일심(一心)의 미묘한 기능을 전단(專斷)한다 할지라도 지(智)의 작용에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하였으며, 사단(四端) 칠정(七情)에 대해서 논하기를 ‘심(心)과 성(性)은 둘로 가를 수 없고 이(理)와 기(氣)가 각각 발동하는 법은 없다.’ 하였습니다.
이 모두는 그가 곧장 앞으로 용맹스럽게 매진하여 도체(道體)를 분명하게 본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주자가 이미 완성해 놓은 가르침에 입각하여 그 은미한 뜻을 더욱 드러내었고 오랜 세월에 걸친 제가(諸家)의 잘못된 점을 변별하여 모두 지극한 이치에 맞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깊이 걱정하고 멀리 내다 보는 생각에서 심득(心得)한 것을 글로 옮겨 써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이 세상에 나오자 《주역(周易)》·《중용(中庸)》·《대학(大學)》의 뜻이 단청(丹靑)처럼 분명해졌고,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라는 작품이 나오자 자양(紫陽)226)  의 초년과 만년의 견해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환해졌으며, 가령 《의례보편(儀禮補編)》 같은 책의 완성을 두고 말하더라도 한 임금의 정치 경륜과 여러 성인들이 말씀해 놓으신 것을 빠짐없이 소개하면서 그 종지(宗旨)와 귀결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백가(百家)를 포괄하고 만세토록 길잡이가 되도록 하였으니 이는 한때 저술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인사들이 그 울타리나마 엿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대체로 그의 평생에 걸친 언행을 보면 한결같이 주자를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라도 신기한 주장을 내놓으려고 힘쓰면서 주자의 학설에 배치되는 자가 나오기만 하면, 그 주장이 아무리 훈고(訓詁)와 관련된 지엽적인 것이거나 품물(品物)의 속성을 규정하는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통렬하게 분별하여 극력 배척하면서 부월(斧鉞)을 가하듯 엄하게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춘추(春秋)》의 의리에 대해서는 더욱 엄하기만 하여, 오랑캐인 원(元)나라를 섬겨 복무한 허형(許衡)을 두고 만세의 죄인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충청도를 둘러 싼 수백 리 사이에서는 비록 삼척 동자라 할지라도 모두 주자는 감히 높이지 않을 수 없고 이단은 물리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적이 정통(正統)을 같이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였으니, 이 모두가 원진의 덕택이라 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영고(寧考) 영종 대왕(英宗大王)께서 등극하신 초기에 특별한 은총을 먼저 원진에게 내리시고 도타웁게 유시하시면서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셨습니다. 이에 원진이 남다른 대우에 감격한 나머지 대궐을 멀리 하려는 마음을 억지로 되돌리고는 진수당(進修堂)에 등대(登對)하여 경사(經史)의 뜻을 토론하면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지향점과 보살필 점, 그리고 음양(陰陽)과 선악(善惡)의 소장(消長) 및 왕복(往復)에 관하여 위아래로 수천 언(言)의 말씀을 드렸으니, 이는 이천(伊川)227)  이 이영전(邇英殿)에 등대했던 것이나 주자가 연화전(延和殿)에서 아뢰었던 것과 시대는 달라도 똑같은 일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가령 그가 병자·정축년의 말할 수 없는 치욕을 개탄하고 신축·임인년의 제적(諸賊)을 성토하면서 의리를 해와 달보다도 밝게 드러내고 국가의 형세를 구정(九鼎) 대려(大呂)보다도 무겁게 안정시킨 일로 말하더라도, 국가와 백성에 끼친 그 공적이야말로 또한 초야에 묻혀 자기 몸만 온전히 하려는 자들과 똑같이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속히 유사에게 명하시어 그의 덕업(德業)을 드러내도록 하시는 동시에 추증(推贈)하는 은총과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을 베푸심으로써 사림(士林)을 빛내고 사풍(士風)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한 내용이 포증(褒贈)과 관련된 일인 만큼 상례(常例)로 비답을 내리기가 어려우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보고토록 하라."
하였다.

 

10월 15일 경자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차자를 올리기를,
"어제 이조의 낭관(郞官)이 유생 김운주(金雲柱) 등의 상소에 대해 내리신 비답을 가지고 신에게 와서 전했는데, 대신에게 의논하여 보고토록 하라는 명이었습니다. 그 상소에서 청한 내용이 바로 고(故) 집의 한원진(韓元震)의 추증(追贈)과 시호(諡號)에 관한 일인 만큼 신이 이미 외람되게 의정부에 몸담고 있는 이상 직분상으로 이에 대해 의논을 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언젠가 원진의 문집을 보건대, 신의 어미의 고조(高祖)인 문경공(文敬公) 윤선거(尹宣擧)와 증조(曾祖)인 문성공(文成公) 윤증(尹拯) 두 분에 대해서 못할 말이 없이 비난하고 모욕을 가했습니다. 지금 포증을 의논하는 마당에 신은 개인적인 의리상 논의에 참여하기가 참으로 어려워 명을 봉행할 수가 없으니, 속히 견책을 가해 체차시키라고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개인적인 의리로 보면 당연히 그렇겠다. 경은 안심하고 일을 보라."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고 집의 한원진의 추증과 시호에 대한 일을 가지고 대신에게 문의하였더니, 좌의정 심환지(沈煥之)는 의논드리기를 ‘원진은 호서(湖西)의 호걸스러운 선비로서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고 재질 또한 경륜(經綸)을 겸비했으니, 정경(正卿)을 추증하는 의전(儀典)으로 포상함으로써 그의 훌륭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많은 선비들의 여망을 충족시켜 주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호를 의논하는 한 조목만큼은 비상(非常)한 의전에 관계되는 것이라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드리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이 의논드린 대로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원진이 일찍이 ‘미발지심(未發之心)에도 기질(氣質)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과 다른 존재는 오상(五常)이 각각 다르다.’는 설을 지어 내었는데, 그 설이 김창흡(金昌翕)·이재(李縡)·이간(李柬)의 설과 같지 않았으므로 문도들끼리 서로 비난하고 헐뜯었다. 그리하여 호학(湖學)이니 낙학(洛學)이니 하는 이름이 생겨 났는데, 이는 대체로 이재가 서울에 살고 원진이 호서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의필(李義弼)을 형조 판서로, 이서구(李書九)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고 집의 한원진(韓元震)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10월 18일 계묘

차대(次對)를 행하고 아울러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전경 문무신(專經文武臣)·한학 문신(漢學文臣)·일차 유생(日次儒生)을 대상으로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양호(兩湖)에서 물을 빼내고 제언(堤堰)을 수축하는 곳에 비변사 낭관을 보내 살펴보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장철(李長喆)을 황해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0월 19일 갑진

응제(應製)에 입격(入格)한 유생을 불러 보고, 이어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강제(講製)와 비교하는 일 및 과차 유생(科次儒生)과 비교하는 일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 10월 초하루에 실시한 일차 유생의 전강(殿講)에서 순통(純通)의 점수를 얻은 자와 상재생(上齋生)의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한 자를 비교해 보았는데, 진사 김석현(金碩鉉)이 또 순통의 점수를 얻었고 진사 구강(具康)이 또 수석을 차지했다. 일차 유생의 전강의 경우에는 특별히 분부하여 등제(登第)를 내리도록 하는 일이 《통편(通編)》에 실려 있다마는, 특별히 비교해 본 자들의 경우도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토록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정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송환기(宋煥箕)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상도(李尙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3일 무신

하교하였다.
"지난번에 조사(朝士)와 유생 중에서 주자(朱子)의 글 연구에 전심하는 자에 대해서 듣고 본 대로 기록하여 보고하게 했었다. 대체로 조정에서 인재를 구할 때에도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그 방법에 달려 있는 것인데, 더구나 늘 자신의 학문에만 뜻을 두고 글을 읽는 선비의 경우에 있어서야 어찌 기꺼이 자기 발로 걸어오려 하겠는가. 비유하자면 마치 옥(玉)이 저절로 굴러오지 않고 사람이 직접 캐내야 하는 것과 같으며 거울이 스스로 비추어 주지 않고 사람이 비춰 보아야 하는 것과 같으니, 찾아 보아야 응하게 되는 그 이치야말로 틀림이 없다 할 것이다. 그런데 분부를 내린 지 한 달이 다 되는데도 아직껏 기록해서 보고하는 일을 보지 못하고 있다.
경학(經學)을 꺼려 피하는 것이 오늘날의 잘못된 풍조라고 하지만, 내가 구하는 것이 정작 그들의 좋아하는 것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고 보면, 어찌 이렇게도 답답하기만 하단 말인가. 경전과 주자의 글은 상호 필수적인 관계에 있다. 따라서 경학에 종사하려면 반드시 먼저 주자의 글을 독실하게 믿어야만 경전도 오롯하게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도 기록해서 보고하지 않고 있으니, 어쩌면 혹 세상에 글 읽는 선비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그러나 만약에 없다고 한다면 이는 한 세상을 속이는 것이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오랫동안 기다리다 보니 또 귀찮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의 이 한 마디 말을 대신과 전조(銓曹)의 신하와 방백들에게 모두 잘 알아 듣게끔 하라."

 

10월 24일 기유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장용영(壯勇營)의 대비교(大比較)를 행하였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데 따라 경전과 주자의 글 연구에 전심하는 자들을 듣고 본 대로 별단(別單)에 써서 들입니다."
하였는데, 좌의정 심환지(沈煥之)는 여주(驪州)의 유학(幼學) 김일주(金日柱)와 목사(牧使) 임육(任焴)과 서산(瑞山)의 유학 이동윤(李東允)과 성주(星州)의 진사 강시환(姜始煥)을 추천하였고, 우의정 이시수(李時秀)는 정산(定山)의 생원 윤두기(尹斗基)와 안동(安東)의 유학 강필효(姜必孝)를 추천하였다.

 

정상우(鄭尙愚)를 이조 참의로, 유한령(兪漢寧)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6일 신해

이의봉(李義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7일 임자

우의정 이시수(李時秀) 등을 파직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우의정 이시수가 시급히 품달할 일이 있어서 합문(閤門) 밖에 와 청대(請對)하고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청대하고 있는 것은 심(沁)228)  의 일 때문인 듯한데, 이것이야말로 어찌 최근 들어 망령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경들이 과연 심의 일을 안단 말인가. 모른다면 망령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나 또한 어찌 경들의 망령된 생각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청대하는 뜻을 분명히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우의정 이시수가 말하기를 ‘밤중에 강화(江華)의 중군(中軍)이 경기 감영에 보고한 바 인장(印章)까지 찍힌 공문을 얻어 보건대 「이달 26일 진시(辰時)에 내사(內司)의 관원이 빈 가마 2채를 가지고 방수(防守)하는 곳에 와서 죄인을 데리고 가려 하기에 유수(留守)와 경력(經歷)과 중군이 다방면으로 엄히 막았는데 이 상황을 우선 치보(馳報)한다.」 하였다. 그래서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기에 경재(卿宰)를 이끌고 합문 밖에 와서 청대하게 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엄하게 막았다고 한다면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또한 망령되이 생각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속히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우의정 이시수가 말하기를 ‘성상의 분부를 듣고 보니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경재들을 이끌고서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청대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모두 파직하라고 하교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에게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8일 계축

북영(北營)에 거둥하여 국출신(局出身)229)  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전 좌의정 심환지(沈煥之) 등이 또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 좌의정 심환지와 전 우의정 이시수가 경재 및 3품 이하의 신하들을 이끌고 뒤따라 작문(作門)230)  에 도착했으나 들어가지 못하자 거적을 깔고 소장을 진달하였는데, 상이 승전색(承傳色)에게 구전(口傳)으로 하교하기를,
"작금 대신의 소장에 대해 즉시 비답을 내리지 않은 것은 대체로 수응(酬應)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지 예우해야 하는 뜻에 소홀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강화에 유배되어 있던 사람은 어제 이미 올라왔으니 경들은 모두 물러들 가라. 이러한 뜻으로 양(兩) 대신에게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주서(注書) 홍석주(洪奭周)가 서계(書啓)하기를,
"신이 삼가 하교를 받들고 가서 전 좌의정 심환지와 전 우의정 이시수에게 전하였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신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어찌할 줄을 모른 채 소장을 안고 작문(作門) 밖에 와서 엎드렸는데, 방금 사관(史官)이 와서 성상의 분부를 전하였습니다. 언제 위기가 닥칠지 모를 이런 때를 당하여 신들이 비록 죄명(罪名)을 지니고 있는 몸이라 하더라도 잠깐만 인접(引接)을 허락해 주신다면 삼가 절박한 심정을 모두 털어놓겠습니다. 지난해 훈련원에서도 이미 접견을 허락해 주셨었는데, 올해 이곳이라고 해서 또 어찌 시간을 내주시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봄에도 돌림병 때문에 시달리고 여름엔 무더위로 고생하고 가을엔 백성들의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다가 요즘 와서야 조금 여유가 있게 되었다. 이런 한가한 때를 당하여 불러서 보고 싶은 것이야말로 정리(情理)상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어제 이후로 경들의 입장에서는 진정 별별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을 것인데, 지금와서 어찌 경들을 속여서야 되겠는가. 소장에 대한 비답을 하룻밤 묵혀 내린 것은 예우해야 하는 뜻에 흠이 되는 일이기에 특별히 사관을 보내면서 아울러 그렇게 된 상황을 유시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부가하여 아뢴 것을 보고서 경들이 아직도 작문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만약 물러가지 않으면 오늘 안으로는 결코 환궁하지 않겠다. 조정에서 그지없이 엄격한 것은 격례(格例)이다. 죄명(罪名)이 거두어지기도 전에 무턱대고 청하며 나아온 일이 옛날에 있었던가, 없었던가. 옛적에 송(宋)나라 충방(种放)이 짚신을 신고 어전에 올라 온 일이 있긴 하다마는 이때 충방은 은사(隱士)로서 죄명을 지닌 몸이 아니었으니 오늘날 본받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뜻을 다시 전유케 하고 물러간 것을 확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전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세 차례 소장을 진달하고, 검교 제학(檢校提學) 정민시(鄭民始) 등과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등과 전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 등과 예조 참의 이노춘(李魯春)과 전 참의 홍낙항(洪樂恒) 등과 광주 유수(廣州留守) 김사목(金思穆)과 전 예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등과 대사간 이의봉(李義鳳)과 사복시 정 홍원섭(洪元爕) 등이 소장을 진달하였으나, 모두 답하지 않았다.

 

부호군 윤장렬(尹長烈)과 전 참의 이유경(李儒慶)을 특별히 발탁하여 아경(亞卿)으로 삼았다.

 

전 좌의정 심환지(沈煥之) 등이 다시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판부사 이병모(李秉模)가 경재(卿宰)를 이끌고 또 청대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노춘(李魯春)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대신(大臣) 이하를 처분토록 한 전교를 환수하고, 이어 각신(閣臣) 서용보(徐龍輔)·정대용(鄭大容)·이만수(李晩秀)·김근순(金近淳)을 먼저 삭직(削職)한 다음 나문(拿問)하며 공초(供招)를 받고서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일단 일이 타결되었으니, 대신(大臣)·각신(閣臣)·중신(重臣)·재신(宰臣)·장신(將臣)·도신(道臣)·유신(儒臣)·대신(臺臣)을 처분하라고 근일 내린 전교를 환수하라.
그지없이 중한 것은 분부를 받는 일이요 더없이 엄한 것은 일의 체면이다. 영성군(靈城君) 사건 이후로 대신(大臣)을 제외하고 그 누가 감히 금오(金吾)231)   근처에서 처분 명령을 대기한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더구나 문안에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허둥지둥한 것도 스스로 허둥지둥한 것이요 고루한 것도 스스로 고루한 것이다. 금대(金帶)를 두르고 붉은 비단옷을 입은 신하가 이런 식으로 망신스러운 거조를 취하다니 어찌 조정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한심하다고 말하는 것도 헐한 표현이라 하겠다.
그리고 더구나 의금부에 내리는 국법이야말로 전지(傳旨)보다도 중한 것이고 보면, 서용(敍用)하지 말고 파직하라는 한 장의 전교와 비교해 볼 때, 결국에 가서는 피차간 한계가 더욱 자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조의(朝衣)를 입고 조관(朝冠)을 쓴 자로서는 마땅히 파직의 벌을 적용받은 제신(諸臣)이 평복(平服) 차림으로 집결해 있는 곳에서 함께 죄를 청했어야 할 것이요, 아니면 차라리 있던 곳에 그대로 있었어야 할 것이다.
의리란 어디고 없는 곳이 없다. 따라서 하찮은 일이니 조금이라도 다투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의리에 어긋나는 점에 있어서 연전에 탈옥한 놀라운 일과 정상은 달라도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까운 반열에 있는 신하가 그만 이처럼 범법 행위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다시 전철을 답습하며 한갓 꾀를 부리려다가 오히려 졸렬해진 결과를 빚은 것과 비슷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금부에 내리라는 전지(傳旨)를 계하(啓下)받지도 않았고 승전(承傳)도 받들지 않은 상태에서 분부를 받는 격식을 어겨 가며 금오에서 처분 명령을 기다린 당해(當該) 제신(諸臣)들을 출두시켜 진술을 받은 뒤 우선 삭직(削職)하고 즉각 나수(拿囚)하라. 그리고 바로 즉시 개좌(開坐)하여 엄히 신문을 가하고 공초(供招)를 받도록 하라. 만일 범법한 말로 공초를 받을 경우에는 금오문(金吾門)에 나아가 직접 신문해 엄히 처벌함으로써 분부 받드는 법을 중하게 하고 일의 체면을 엄하게 할 것이다. 이른바 국가의 체면이라는 것이 가는 곳마다 땅을 쓴듯 없어지고 말았으니, 아, 또한 이상한 일이다. 경재(卿宰)가 청대(請對)했었는데 육조(六曹)의 참의(參議)까지 뒤섞어 출두시켜 진술받는 대상 인원에 포함시킨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래서 거두어 서용하는 대상으로 논하지 말라고 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승지들 모두 죄가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제신을 일단 용서해 주기로 한 만큼 똑같이 용서해 주고 패초(牌招)한 뒤 임시 변통으로 입직(入直)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9일 갑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이병모(李秉模)를 특별히 임명하여 의정부 영의정으로 삼았다. 상이 병모에게 이르기를,
"어제의 일은 경 때문에 조금 모양이 이루어져서 다행히 일찍 돌아올 수 있었다. 해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면 번번이 응수하느라 허비하곤 하는데, 아직 일이 행해지지 않았을 때에는 그 시기를 맞기 전부터 신경을 쓰다가 일단 일을 치르고 나면 피곤함을 가누지 못하겠다. 그런데 요즘에는 정력이 점점 예전과 같지 않으니 더욱 안타까운 느낌만 들 뿐이다. 지금 이미 그를 돌려 보냈는데도 경들이 아직 대궐에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잠깐 이렇게 불러서 만나 보고 내 뜻을 유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대저 이번의 일에 대해서는, 당초 생각하기를 ‘유수(留守)가 너그럽게 잘 처리하고 그다지 힘들여 막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유수가 엄하게 더 막는 바람에 빼내 올 길이 없어 하루를 지체하게 되었으므로 꽤나 애를 태웠다. 해(該) 유수야말로 엄하게 막아 지키면서도 분수를 뛰어넘어 예절을 무시하는 정도에는 또한 이르지 않았으니, 옛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하게 하였다 하더라도 또 어떻게 이보다 잘할 수 있었겠는가.
경은 작년에 길을 떠났다는 확실한 보고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청대(請對)했었는데, 우상은 빈 수레가 내려 갔다는 보고를 한 번 듣고는 곧장 경재(卿宰)를 이끌고 들어왔으니, 이것이 바로 우상이 경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라 할 것이다.
임금의 행차 때에 지영(祗迎)하는 예로 말하더라도 그렇다. 가령 고 정승 김재로(金在魯)·김흥경(金興慶)·유척기(兪拓基)와 같은 경우는 현안(懸案)과 같은 일을 당했을 때에도 오히려 모두들 평복(平服) 차림으로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서 지영했었고, 파산(罷散)된 자들 역시 성 밖에서 지영하는 예가 있었다.
그런데 어제의 경우를 보면 좌상이야 일단 성 밖에 있었던 만큼 물론 들어오기 어려웠겠지만, 우상은 가까이 조방(朝房)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금문(曜金門) 밖에서 지영한 사람은 단지 몇 사람의 아장(亞將)에 불과하였다. 이런 국체(國體)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궐문 밖으로 행차할 것이라고 이미 기일에 앞서서 명령을 내렸고 또 백관을 그냥 놔두라는 분부도 한 적이 없었고 보면, 일단 3품 이하 및 파산되지 않은 여러 재신(宰臣)들이 있었던 이상 동쪽과 서쪽의 반열로 정돈시켰어야 마땅한데, 예조에서 이에 대한 절목(節目)을 애당초 마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신도 각사(各司)에 알려 주지를 않았다. 그리고는 그저 작문(作門) 밖에 서로들 이끌고 와 엎드려서는 한바탕 북새통을 이루었으니, 분의(分義)로 볼 때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닌가.
좌상이 그저께 곧바로 성 밖으로 나갔다가 어제 도로 들어온 것은 모두 처신을 잘한 것이었다. 좌상처럼 소활(疏闊)한 사람도 이렇게 할 수 있었다니, 이를 통해서 그의 장점을 알 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우상의 일은 정말 개탄스럽기만 하다."
하니,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신이 이번의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고간에 죄 아닌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전에 청대했을 때로 말한다면 실로 문장(文狀)을 얻어 보았기 때문이지 단지 빈 수레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전후에 걸쳐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은 실로 본분을 극진히 못한 점이 있으니, 몸이 떨리며 두렵기만 할 뿐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물러가서 명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나치다. 이미 일이 타결된 뒤인데 어찌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올 봄에 돌림병을 겪고 난 뒤로 일을 모두 두루 편하게 되게끔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경들에게 파삭(罷削)의 처분을 내렸던 것도 대체로는 곡진히 보살펴 주어 경들을 편히 쉬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경이 이번 일을 대처한 것은 지난해와는 크게 같지 않았다. 대저 요즘 들어서는 이와 같은 사단(事端)을 한 번 만나기만 하면 모두 북새통을 떨며 볼품없이 만들고 마는데, 만에 하나 혹시라도 뜻밖의 일이 벌어지면 임금과 신하간의 명분이 뒤죽박죽되고 말 것이다.
연전에 내사(內司)에 소속된 사람들이 심부(沁府)232)  에 내려갔을 때 연로(沿路)의 수령이 자청해서 옥에 갇히겠다고까지 했다 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제 여러 각신(閣臣)들의 이른바 명을 기다리겠다고 한 것도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각신들 가운데 다른 사람이야 깊이 죄를 물을 것이 없지만 서용보(徐龍輔)만큼은 경우가 다르다고 하겠다. 지난해 발생한 호서(湖西) 사건을 보건대, 그가 범한 것이 비단 자기를 그르치고 남을 잘못되게 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마터면 서로들 이끌고 사지(死地)로 들어갈 뻔하였다. 내가 그때 곡진히 살펴 생명을 구해 준 것은 유독 그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성후(聖后) 집안의 사람으로서 그의 생년 월일이 성후께서 승하하신 시기와 일치하였으므로 그 일이 또한 우연치 않게 여겨졌다. 그래서 성후께서 평소 지니셨던 마음을 우러러 몸받아 그를 보전해 길러 줄 목적으로 일이 생길 때마다 보호해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일을 보면 무지해서 함부로 행동했다고만 볼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
총재(冢宰)는 대신에 버금가는 자리이긴 하다마는 국가의 체통과 관련된 일인 만큼 그 관직은 또한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조엄(趙曮)·이최중(李最中)·조명정(趙明鼎) 같은 이들은 모두 직접 신문하는 일을 거쳤는데, 어제도 직접 나아가 신문하려 하였으나 이미 밤이 깊었을 뿐 아니라 노여움을 잊고 사리를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우선 꾹 참기로 하였다.
그런데 오늘이 지나고 나면 또 궁향(宮享)과 관련하여 재계(齋戒)를 해야 할 텐데, 만약 지금 제때에 바른 대로 실토하지 않을 경우에는 필경 처분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사(供辭)를 만약 잘 받지 못하면 판금오(判金吾)도 엄히 조처할 것이다. 주서(注書)는 나가서 이러한 내용으로 특별히 판당(判堂)을 신칙하도록 하라.
서용보의 지난해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렇다. 신하된 자가 한 번 그런 일을 당했으면 종신토록 징계하면서 혹시라도 잊어버릴세라 조심해야만 참으로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에 이미 그러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금년에 또 이와 같은 짓을 행하였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 보면 그 한 몸만 온전히 보전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장차 성후(聖后)의 본가(本家)에도 누(累)를 끼치게 될 것이다.
그의 잘못을 말한다면, 첫째 분부를 받은 법을 무시한 것, 둘째 연석(筵席)에서의 분부를 따르지 않은 것, 셋째 지난해의 일을 징계하지 않은 것이니, 이러한 조목으로 명백하게 공초(供招)를 받도록 하라. 그가 뭔가 믿고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마는 이는 법과 관련된 일인 만큼 수년 동안 근밀(近密) 따위는 또한 돌아볼 수 없는 점이 있으니, 다시는 그런 생각을 심중에 두지 말고 사실대로 곧장 공초하도록 하라. 그런데 만약 그의 구초(口招)가 원정(原情)과 다르게 되면 대우법(對偶法)233)  으로 볼 때 크게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 될 것이니, 이에 대해서도 금랑(禁郞)을 엄히 신칙토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서용보 역시 관직이 너무 높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 사람됨을 돌아보면 취할 점도 있긴 하나 단지 너무 일찍 등과(登科)하여 독서를 많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식견에 혹 밝지 못한 점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성의가 결여된 면을 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늘 성실하게 되도록 힘쓰는 도리를 가지고 경계시켰었다. 지난해와 같은 일만 하더라도 놋쇠 숟가락으로 식사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그렇게 했단 말인가.
그리고 두 직제학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면, 처음에는 진실한 측면에서 조금 낫다고 인정했으나, 요즘 들어 볼 때에는 너무 지나치게 두루뭉실하여 우상보다도 크게 못 미친다.
내가 최근에 기필코 사람들로 하여금 경서(經書)에 힘을 쏟게 하려고 하는 것은 대체로 의리의 궁극처를 강명(講明)하게 하기 위함이다. 마치 용마루가 높이 솟음에 동서 남북 모두가 이를 기준으로 정해지듯 대소 경중이 일정하지 않은 가운데 바로 타당한 행동 기준이 되는 것은 곧 의리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고간에 타당한 의리가 없는 곳이 없는데, 반드시 아무 일이 없을 때에 미리부터 강구해 밝혀두어야만 일을 당해 취사(取捨)할 때 미세한 부분까지도 모두 합당함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장신(將臣)과 같은 사람들이 비록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곧장 배척해 쫓아보내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무장(武將)의 무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잇따라 내리신 분부를 받들건대 훤하게 분석해 주시어 다시 미진한 점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미련하기는 하나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대소 신하들의 마음이 뒤숭숭하여 안정되지 못할 뿐만이 아니고, 성상의 몸에 수고를 끼치면서 너무도 근심 걱정을 하게 해 드리니 정말 안타깝고 절박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한 번 소장으로 진달드리는 것 또한 엄하고 두렵기만 한 심정으로 볼 때 어찌 감히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역시 분의(分義)상 그만둘 수 없기 때문에 나온 일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지난해에 조처했던 일을 보면 정말 정승답게 처리했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어제 취한 거조 또한 여유가 있으면서 다급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과연 즉시로 행차를 돌리라고 허락했던 것이다. 내가 잠시 경에게 한가로이 지내도록 허락했었다만 이제는 경을 그냥 놔둘 수 없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원보(元輔)234)  의 직책은 더욱 자별한 점이 있다. 예전부터 이 직책을 맡길 때에는 어떤 일이건 논할 것 없이 반드시 하나라도 탄복할 만한 점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위임을 했었다. 내가 아직까지 경에게 이 직책을 맡기지 않았던 것은 혹 인망(人望)으로 볼 때 이 지위에 이르기에는 그래도 부족한 점이 있지 않나 하는 염려에서였다. 그런데 근래의 사단(事端)치고 이번의 경우보다 큰 것이 없었는데 경이 이번 일을 이미 그토록 선처했고 보면, 백료로 하여금 모두 우러러 보게 하는 도리로 볼 때 어찌 심복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이런 분부를 받들고 보니 놀랍고 떨리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감히 오래도록 전석(前席)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이제 바야흐로 물러가야 하겠는데, 비록 먼 지방에 귀양보내고 부월(鈇鉞)을 가하는 주벌(誅罰)을 받는다 하더라도 감히 주제넘게 직책을 받을 수는 없기에 도성을 나가 시골로 돌아갈 계책을 세우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양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관학(館學) 유생 강필호(姜必祜) 등이 상소하여 강화(江華) 역적의 죄를 속히 바로잡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서용보(徐龍輔) 등의 공초(供招)를 가지고 아뢰니, 곧바로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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