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52권, 정조 23년 1799년 11월

싸라리리 2025. 8. 1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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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을묘

도승지 민태혁(閔台爀)을 보내 영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돈유(敦諭)하였다.
"나라에 정승을 두는 일은 어렵고도 조심스러운 일인데 원보(元輔)는 또 승필(承弼)235)  과는 차원이 크게 다르다. 내가 즉위한 지 20여 년 동안에 원보의 책임을 맡긴 자를 헤아려 보면 열 손가락에 차지 않는다. 한 장의 소를 올려 구름을 걷고 어두운 세상을 태양과 별처럼 밝힌 경우로는 서 충헌공(徐忠憲公)이 있고, 기미를 환히 알고서 나라를 위한 정성으로 혼란의 와중에서 스스로 떨쳐 일어난 경우로는 정 문안공(鄭文安公)이 비슷하다. 그리고 효제(孝悌)의 의리를 독실히 행한 이로는 김 문정공(金文貞公)을 들 수 있고, 나라와 행불행을 같이 한 이로는 홍 효안공(洪孝安公)을 들 수 있고, 평소 공명 정대한 자세를 견지한 이로는 채 문숙공(蔡文肅公)을 들 수 있고, 그 밖에 인릉군(仁陵君)의 경우는 그의 한 마디 말 속에서도 공경하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는데, 대체로 볼 때 각자 의거한 바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내가 원보를 뽑을 때 그토록 어렵게 여기고 신중하게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경들이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일찍이 애석하게 여겼던 것은 명의(名義)를 지킨 김 봉조하(金奉朝賀)와 소신이 확고했던 김 영돈녕(金領敦寧)이 미처 한 걸음 더 내딛지 못했던 점인데 이는 윤우규(尹右揆)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대저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유지시키는 책임은 대신에게 있다 할 것이다. 근래에는 한결같이 흐지부지하며 넘겨버리기가 일쑤였는데 뭔가 조치를 취하기라도 하면 작고 크고 간에 찧고 까불면서 위를 범하는 일이 잇따랐으니 국가의 체면과 조정의 기강이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때문에 두려운 생각이 들어 한밤중에 탑전을 돌아다닌 적도 여러 차례나 되었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작년에 경이 집정(執政)하면서부터는 정돈을 할 수가 있었으나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예전 그대로 말이 되지 않는 형편이다.
반나절 동안 장막 속에서 동생을 잇따라 만나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어도 잠깐이나마 시끄럽게 반대하는 걱정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경이 이런 때에 돌아와 주었기 때문이다. 경이 황급한 상황에서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서서히 일어나 붙들어 준 덕택으로 나라의 체면이 조금 세워질 수 있었고 조정의 기강도 약간 펼쳐질 수 있었다. 속된 견해로는 느슨한 행동을 보였다고 할지 모르나 참으로 그 성의에 입각한 마음은 감동적인 것이었다.
대신이 당대에 중하게 여김을 받고 후세에까지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은 정승으로서의 직무를 어떻게 수행했느냐에 달려 있다. 경이 거조를 한 번 온당하게 취해 주었던 까닭에 훈련원에서 자리를 마주하고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었으며, 또 다시 온당한 거조를 취해 준 덕분에 북영(北營)에서 말이 떨어지자마자 행차를 돌리게 되었던 것이니, 정승이 수행한 일치고 이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에 내가 신중하게 여기며 주저하고 있던 일을 복상(卜相)하라고 명할 필요도 없이 확정짓고는 다음날 아침 전각(殿閣)에 나와서 곧바로 경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렇게 한 이유로는 첫째도 경이 수행한 정승의 일을 가상하게 여겼기 때문이요 둘째도 경이 수행한 정승의 일을 가상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경은 모쪼록 오늘 즉시 조정으로 나와 나의 보살펴 주는 지극한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상소하기를,
"아, 지난번의 일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대관(大官)의 직책에 몸담고 있는 이상, 마침 동료인 정승이 밖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나라에 급한 사태가 발생했으면 모두가 신의 책임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구나 위기가 박두하기도 전에 심도(沁都)236)  에서 온 공문을 얻어 보고는 신이 그만 허둥지둥하며 청대(請對)해 놓고 앞질러서 바로 물러나 버렸으며, 그러다가 북영(北營)으로 막 행차하시던 때에는 또 옷자락을 잡아당기고237) 말의 가슴걸이 끈을 끊어 버렸던238)   옛사람의 정성도 본받지 못한 채 마침내 추운 날 아침 산야(山野)의 군영(軍營)으로 가시어 종일토록 머무르시게 하면서 혹시라도 지척에서 변이 발생했을 경우 이에 대처하여 호위할 일도 전혀 고려치 못했으니, 아무리 작문(作門) 밖에서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구른들 어찌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할 뻔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백성들의 본성이 날로 어두워지고 신하의 분의(分義)가 날로 추락되는 때에, 신처럼 망극한 은혜를 입고도 충성스럽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여 직분을 다하지 못한 부류에 대해서 먼저 법대로 벌을 가하여 온 나라에 분명히 드러내야만 그런대로 대의를 밝히고 한 세상을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니, 속히 신에게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영상이 돌아와서 만난 뒤에 점잖게 마음을 유도하여 돌리게 한 것이나 좌상이 성을 나간 뒤에 시기에 맞춰 도로 들어온 것은 모두가 온당함을 얻은 처신이었다. 그런데 경의 경우는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번거롭게 떠들면서 며칠 동안이나 귀찮게 응수하도록 만들었으니, 지난해 훈련원에서 여유 있게 마무리지었던 것과 비교해 본다면 어쩌면 그렇게도 상반되게 행동했단 말인가. 심지어는 육조(六曹)의 참판들까지 경재(卿宰)가 청대(請對)하는 자리에 마구 들어오게 하고, 을묘년의 잘못된 특례(特例)를 답습하여 백관을 임시로 제수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격례(格例)를 문란시키고 체모를 가볍게 여긴 것으로서 관계되는 바가 정말 작지 않다. 그러나 그런 국면을 당했을 경우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은 예로부터 대신들이 면하지 못했던 바인데, 어찌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해서 인혐(引嫌)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안심하고 즉시 일어나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일 병진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상소하기를,
"신의 일생을 보건대 그 어느 것인들 천지 조화의 힘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난번 해면(解免)해 주신 것 또한 부모처럼 자애롭게 보살펴 주신 사은(私恩)에서 특별히 나온 것이었는데, 이에 선조의 산소를 찾아가 제사를 드리고 이승과 저승에 대한 감회에 새삼 젖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 조정이 경황이 없는 때에 갑자기 정승에 다시 임명하는 명을 내리실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 니다.
어제 은혜롭게 타일러 주신 것이야말로 정중하고도 간절하였으니 신이 목석(木石)이 아닌 이상 어찌 감읍(感泣)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신의 경력(經歷)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털끝만큼도 하늘을 감동시킨 공은 없고 그저 답답하게 세월을 헛되이 보냈다는 자책만 들 뿐입니다. 따라서 상께서 용납해 주실수록 신의 죄는 더욱 드러나기만 하고 상께서 비호해 주실수록 신의 허물은 깊어만 갈 따름입니다.
아, 훈련원 때의 일로 말하면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따르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신의 죄이며, 북영(北營)의 일로 말하더라도 사태가 발생하고 난 뒤에 즉시 머리를 짓부수며 간하지 못하였으니 이것 역시 신의 죄입니다. 그래서 신이 해마다 통분해 하고 한밤중에도 가슴 아프게 여기면서 감히 다시는 대관(大官)으로 자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상께서 유시하시며 내려주신 크고 작은 은혜를 신이 어떻게 감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부끄럽고 송구스럽기만 할 뿐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할지 더욱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원보(元輔)의 직책이야말로 국가의 안위(安危)와 직결되는 자리이고 보면, 신이 어떻게 감히 장황하게 말씀드리며 마치 처음에는 사양했다가 뒤에 가서 받아들이는 자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속히 면직시켜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예로부터 성현께서 허다한 도리를 말씀하셨다마는 근원과 근본에 입각하게 하신 것이야말로 실다운 이치라 할 것이다. 태극(太極)의 전체(全體)로 말하면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히 있는 사이에서 어느 곳인들 중정(中正)하지 않은 곳이 없고 어느 때인들 인의(仁義) 아님이 없다. 이러한 도리를 잘 닦으면 길(吉)하게 되어 군자가 되는 반면, 이를 어기면 흉(凶)하게 되어 소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주부자(朱夫子)께서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고요함을 위주로 하여 성명(性命)을 확립토록 요구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뭇 생령들을 계도(啓導)하신 것이었다.
대저 오늘날의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글을 읽지 않은 탓으로 어떤 사태가 발생하기만 하면 솜털이나 물거품처럼 행동하면서 스스로 직분을 다했다고 여기고 있으나 이 모두는 도대체가 분수를 모르고 하는 짓들이다. 처음에는 문을 밀치고 들어오다가 급기야는 문을 부수는 짓을 하기에 분수를 모른다고 책망했더니 모두들 심드렁하게 행차를 맞이하면서 자포 자기해 버리고, 처음에는 하옥(下獄)시켜 달라는 말을 마지막 수단으로 삼다가 급기야는 옥(獄)으로 넘어 들어가기에 분수를 모른다고 책망했더니 그만 금법(禁法)을 어긴 채 관복(冠服)을 벗어버리고는 스스로 갇히려고까지 하였다. 인자(仁者)의 눈으로 보게 한다면 시정 잡배의 짓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대체로 강화(江華)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나의 정(情)에만 내맡긴 채 사람의 본성을 어길 수는 없기에 사태가 복잡하게 전개되는 가운데에서도 번번이 한 가닥 길을 뚫곤 하였다. 나는 내 방식대로 했다마는 신하된 자의 분수로서는 또 그 신하된 본분을 따라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나라를 몸받은 대신이라면 정승의 위치에서 점잖게 처리하면서 임금의 큰 계책을 협찬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경황이 없고 시끄럽게 떠드는 때를 당하더라도 조정에서 행할 예법(禮法)을 어기지 않으면서 해야 할 일은 바로 행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해야만 바로 이른바 안위(安危)가 그 몸에 매인 대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엊그제 연석(筵席)에서 황극(皇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타일렀고, 또 돈유(敦諭)할 적에 정승의 일을 부탁했었다만, 정승의 일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임금과 서로 도와 나가는 것이 으뜸이라 하겠다. 임금이 표준이 되어 그 표준을 세상에 확립하면, 정승이 된 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 법칙으로 삼아 신민(臣民)에게 널리 펼쳐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백관들끼리 화목한 기상이 넘쳐 흐르게 하고 만 백성들에게 공평한 정사가 행해지게끔 한다면 조정의 복이 됨은 물론 세도(世道)에도 다행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서로 도와 나간다는 것도 동정(動靜)에 간격이 없는 것처럼 해야만 태극의 전체를 온전히 보유하고서 황극의 공용(功用)을 협찬할 수 있을 것인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 독서하고 강구해 밝히는 길밖에는 없다고 할 것이다.
다시 바라건대 즉시 떨쳐 일어나 한결같이 경 자신이 이미 잘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직위에 있는 사람들을 거듭 권면토록 하라. 그리하여 각자 당연한 법칙을 몸에 닦고 고유한 성품을 극진히 하게 함으로써 움직일 때에도 안정이 되게 하고 가만히 있을 때에도 안정이 되게 한다면, 태평 시대의 기상이 오늘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하고, 이어 아경(亞卿)에게 명하여 이 비답을 전하게 하였다.

 

예조 참판 이조승(李祖承)이 영의정 이병모의 부주(附奏)239)  를 서계(書啓)하였는데, 그 부주에 아뢰기를,
"재신(宰臣)이 선유(宣諭)한 비답을 보건대, 태극(太極)의 전체(全體)를 가지고 비유해 주시고 자양(紫陽)240)  의 요지(要旨)를 가지고 깨우쳐 주셨는데, 마치 태양이 뜨자 낱낱이 진상이 드러나고 중문(重門)이 열리자 대궐 안 풍경이 다 보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성상의 분부 가운데 ‘표준이 되어 이를 세상의 표준으로 세우고, 백관이 화목하게 하며 만 백성에게 공평한 정사를 펼쳐야 한다.’고 하신 것도 이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조정에서 학문의 바탕이 없는 사람을 거론한다면 신이야말로 첫 손가락에 꼽힐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솜털과 같은데 어떻게 남을 탓하며 내가 물거품과 같은데 어찌 다른 이에게 자긍심을 가지겠습니까.
대저 의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분수도 바로 정해지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신이 우려하는 바가 있습니다. 성상의 경지는 깊고도 멀어 정조(精粗)를 다 포괄하고 계십니다마는, 인자(仁者)는 인(仁)이라고 생각하고 지자(智者)는 지(智)라고 생각하는 등 늘 한 쪽에 집착하는 시각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는 사이에 급속도로 점잖게 있으면서 한가로이 즐기기만 하는 것으로 하나의 교묘한 수단을 삼게 되었고 보면, 겉으로야 분수를 지키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이보다 더 크게 분수를 지키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니, 걱정해야 할 것은 거꾸로 그 점에 있지 않나 삼가 걱정됩니다.
경모궁(景慕宮)의 제향일(祭享日)이 하루 앞으로 다가 왔는데 배종(陪從)하는 의리가 중한 만큼 이 역시 신하가 행해야 할 직분의 일단이라고 하겠습니다만, 분수에도 경중(輕重)이 있는 이상 신은 정말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엄한 주벌(誅罰)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사전(祀典)이야말로 지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출궁(出宮)할 날짜가 내일로 박두했으니, 다시 정경(正卿)을 보내 함께 오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황승원(黃昇源)이 서계하기를,
"영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어떻게 꿈적거려 볼 여지가 없으니 성 밖으로 물러갈 도리밖에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상부(相府)의 고사를 보건대, 좌상에서 관례적으로 수상으로 승진한 경우 경이 하는 것처럼 극력 사양한 때는 없었다. 경이 만약 들어오지 않으면 내일 출궁할 때 대궐 문에 행차를 멈추어 두고서 경이 조정에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할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다시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또 서계하기를,
"영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성을 나간 것이야말로 작은 거조가 아닙니다. 그런데 금방 나갔다가 금방 들어오는 등 오직 어느 정도로 책망하는 분부를 내리시는지 봐 가면서 진퇴(進退)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성상의 유시(諭示) 가운데 ‘마음에 주견이 없다.’고 한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입니다. 함께 오도록 하신 명을 속히 환수하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나와 직무에 응하는 문제를 가지고 아침부터 지금 밤늦게까지 수응(酬應)을 하고 있다. 나라를 위하는 경의 마음으로 볼 때 어찌 이렇게까지 나를 피곤하게 만든단 말인가. 경이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하겠다고 이미 경에게 말을 했는데 어찌 식언(食言)할 수 있겠는가. 즉시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이상의 내용으로 다시 전유하라."
하였다.

 

11월 3일 정사

예조 판서 황승원(黃昇源)이 서계(書啓)하기를,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죽는 한이 있어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꼭 나와서는 안 되는 의리도 없고 보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인가. 나는 오직 전에 한 말을 실천할 따름이다. 한 낮이 다 되도록 아직 출궁(出宮)하지 못하고 있는데 경의 분의(分義)로 볼 때 결여된 점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승지 서유문(徐有聞)을 보내 전유토록 하였으나, 병모가 끝내 응하지 않자 다시 도승지 민태혁(閔台爀)을 보내 간곡하게 돈유(敦諭)하였다. 이에 병모가 부주(附奏)하기를,
"이번에 특별히 제수해 주신 성상의 뜻에 대해서는 연석(筵席)에서도 분부를 들었었고 돈유를 통해서도 읽어 보았습니다. 대체로 보건대 전일 신이 취한 거조가 분수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은총을 내려 발탁하고 포상해 주시려는 뜻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신이 이렇게까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사죄드리는 것은 참으로 감히 잠시라도 특별히 제수해 주신 성상의 뜻을 감당하지 못하겠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시골로 길을 떠나고 있는 중입니다."
하니, 상이 황승원에게 명하여 뒤쫓아가서 전유하게 하기를,
"경이 끝내 마음을 결단하고 멀리 떠난다 하니 허전하다 못해 계속 탄식만 나올 뿐이다. 경이 지신(知申)241)  을 통해 부주(附奏)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가장 긴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래도 분명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다. 경은 모쪼록 나의 이러한 뜻을 체득하고 즉시 돌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경모궁(景慕宮)에 가서 재계(齋戒)하며 묵었다.

 

11월 4일 무오

경모궁에서 겨울철 제사를 몸소 행하였다.

 

하교하였다.
"이번의 사신 행차에 칙서(勅書)를 부쳐서 보낸 만큼 그들을 서용(敍用)해야만 구애되는 단서가 없게 될 것이니, 귀환한 정사(正使) 조상진(趙尙鎭)과 부사(副使) 서형수(徐瀅修)와 서장관(書狀官) 한치응(韓致應)을 서용토록 하라."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치계(馳啓)하기를,
"영의정 이병모가 현재 양근(楊根) 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니, 돈유(敦諭)하기를,
"나는 나의 본분을 다해서 경을 대우하였는데 경은 본분을 다하지 않고서 스스로 인혐(引嫌)만 하고 있고, 나는 나와서 직무에 응하라고 경에게 요구하고 있는데 경은 한사코 나오지 않으려고만 하니, 경과 나는 모든 것이 서로 반대만 된다.
소완(小宛)에서 말한 정매(征邁)의 경계242)  를 보건대 형제간에도 그렇게 해야 되는 법이거늘 하물며 군신(君臣)간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주역(周易)》으로 말하면 건괘(蹇卦)의 셋째 효(爻)243)  요, 《예기(禮記)》로 말하면 조문자(趙文子)의 훌륭한 기원244)  이요, 《춘추(春秋)》로 말하면 정고보(正考父)의 구루(傴僂)245)  이니, 바로 이러한 것들이 내가 경에게 바라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경은 그만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내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말 한 마리에 종 둘을 데리고서 태연하게도 동쪽으로 떠나갔다. 경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나라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경이 만약 즉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내가 장차 직접 행차하여 맞아들이기라도 해야 할 형편인데, 그렇게 되면 경의 거취(去就)도 한 마디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결판나고 말 듯하니 경은 잘 생각해서 하라."
하였다.

 

11월 5일 기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신이 일단 약원(藥院)에 나가 있다가 빈대(賓對)하는 명이 있기에 부득불 와서 회동하긴 하였습니다만, 신이 죄를 진 몸으로서 어떻게 감히 대신의 일을 행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나치다. 좌상의 경우 그날 성을 나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들어왔는데 그런 행동 모두가 절도에 맞는 일이었다. 그리고 영상의 경우 역시 잘 주선한 결과 성의(誠意)에 입각해 감동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런데 경은 당초 청대(請對)했던 것이 끝내 너무 일찍 서두른 꼴을 면하지 못한 나머지 난처한 지경을 허다하게 만들어내는 결과에 이르게 하고 말았다.
그리고 의금부에 내렸던 것도 그렇다. 그때 제신(諸臣)에 대한 전지(傳旨)를 받들지 않았을 뿐만이 아닌 상황에서, 비록 당직(當直)을 불렀다 하더라도 애당초 내주라는 분부도 없었고 보면, 도사(都事)가 압송해 가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앞질러서 스스로 갇히겠다고 한 것이야말로 어찌 너무도 잘못된 행동이 아니었겠는가. 옛날에 정위(廷尉)를 불러 들여야 하는 것을 살피지도 않고 하옥(下獄)시켰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의금부에 내린 것이 나처(拿處)하라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살피지 못했으니, 이 또한 대칭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신이 강화(江華)의 보고를 얻어 들은 것이 26일 밤이었으니 그날 밤부터 행차하시던 아침까지는 그래도 3일 간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관(大官)의 신분으로 계속 정성을 들여 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그날의 거조가 있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밖에 잘못된 일들은 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사소한 일들에 속한다 할 것이니, 죽어도 죄가 남는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상소하니, 봉한 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비답하기를,
"백성에 관한 일 가운데 자문을 구해 결정할 사항이 있기에 빈대(賓對)를 명하여 와서 모이도록 한 것인데, 경의 소장이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소장의 내용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말한 것치고 금령(禁令)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대신이야말로 내가 공경스럽게 예우해야 하는 만큼 어찌 그 소에 비답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찍이 금령을 설치했던 것도 부득이 한 일이었으니, 아무리 대관(大官)의 소라 하더라도 금령에 저촉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결코 봉입(捧入)해서도 안 되고 비답을 내려서도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소본(疏本)을 승지로 하여금 봉한 채로 돌려주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의 경우에는 경이 아직 출사(出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분부를 어쩔 수 없이 철회하고 말았었다마는, 이번에는 경이 이미 공무를 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서(不敍)의 명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랬더니 경이 그를 쫓아내는 등 엄격히 격례(格例)를 지키다가 출궁(出宮)할 때가 되자 도로 들여 와 따로 한계를 짓도록 하였으니, 경의 이러한 거취(去就)는 모두 타당성을 얻었다고 할 것이다. 이는 영상이 지난해와 올해 중도에 맞게 거조를 취한 것과 조금도 어긋나는 점이 없으니, 내가 바야흐로 경 등을 위하여 매우 기뻐하고 있다.
경이 소 가운데에서 뭐라고 뭐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지나친 말을 한단 말인가. 즉시 일어나 조정에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고, 이어 승지 조홍진(趙弘鎭)을 보내 전유케 하니, 환지가 부주(附奏)하기를,
"이 일이 있고나서부터 매년 한 번씩 조정이 심하게 동요하고 민간에서도 놀라며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체면이 날로 낮아지고 세도(世道)가 날이 갈수록 무너지는 가운데 난적(亂賊)을 토벌할 기약이 없게 되고 의리를 드러낼 여지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신이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리저리 배회하거나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뿐 조금이라도 보답해 드릴 길은 막연하기만 하니, 차라리 시골에 물러가 본분을 지키면서 대강이나마 《춘추(春秋)》에 남겨 준 가르침을 강구해 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가 세 번째 상소를 올리면서 명을 기다리니,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11월 6일 경신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오직 나의 일념(一念)은 백성을 위하는 일에 있다. 그래서 밤이나 낮이나 감히 스스로 한가하게 있지를 못하는데, 설령 은택이 백성들의 피부에 닿게 흡족하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잘 다스려 보고자 하는 성의만큼은 절실하여 과도하게 신경을 쓰다 보니 정신이 날이 갈수록 쇠해지기만 한다. 요즘 들어 힘을 분담할 방도를 찾다가 경들에게 전담시키기로 하였는데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결과라 하겠다.
그런데 제도(諸道)에서 분기(分期)별로 아뢰는 것에 대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도착하는 즉시 결정을 내려 주어야만 한다. 언제 일찍이 시각을 지체시키며 기한을 넘긴 때가 있었던가. 그런데 느닷없이 금년에는 서로들 며칠씩이나 버티고만 있는 형편이다. 곧장 장계를 올려 청한 대로 회답하는 분부를 내려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경들에게 맡긴 마당에 마치 경들을 대신해서 급한 일을 처리해 주는 것처럼 내가 할 일도 아닌데 다시금 떠맡아 할 수가 있겠는가. 경은 마음을 편히 가지고 즉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첫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봉한 채로 돌려주었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현(縣)에서 보고를 올리는 경로를 통하여 상소하여 죄를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일찍이 부자(夫子)246)  의 가르침을 들으니, 자산(子産)을 평가하여 이르기를 ‘몸가짐이 겸손하고 윗사람을 깍듯이 섬겼다247)  .’고 하면서 그것을 군자(君子)의 도(道)라고 찬탄하셨다.
대저 근세(近世)의 인간들을 보건대, 눈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만 하면 번번이 북새통을 떠는 일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몸가짐을 겸손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겸손치 못한 결과로 귀착되고 윗사람을 깍듯이 섬기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거꾸로 불경(不敬)스러운 행동에 가깝게 되고 만다. 이는 장수라 할 뜻[志]이 기(氣)에 먼저 자리를 빼앗겨 정신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지배하면서 점점 고질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돌아보건대 내가 두려운 마음을 갖고 신실하게 호령을 내리며 조정에서 거양(擧揚)하고 있는 것248)  은 시대를 바로잡고 풍속을 고치겠다[矯時改俗]는 네 글자 외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직 경만은 신실하고 인후하여 행동 거지에 잘못됨이 없었다. 지난해 훈련원에서 청대(請對)하였을 때 삼군(三軍)과 만백성이 모두 경의 말을 들으면서 위계 질서를 분명히 지키며 문란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 나의 본의를 유시할 때에는 반열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 모두 떠드는 일이 없이 조용히 들었으며 더러는 감격하여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이번에도 옛날처럼 어떻게 수단을 부려 볼 수가 없었는데 경이 극문(戟門) 밖에 점잖게 띠를 드리우고서 법도에 맞게 행동을 하며 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였으므로 내가 그날로 행차를 돌릴 수 있었으니, 아, 이것이 누구의 힘이었던가.
지금 경이 이렇듯 교외를 빠져나가면서 ‘여론이 펼쳐지지 못한 채 근심이 여전히 남아 있다. 죄를 진 몸으로서 어찌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까지 말하고 있는데, 경은 한 번 생각해 보라. 임금과 정승은 한몸으로서 서로 도와 주는 관계에 있으니 구구한 나의 마음을 경은 필시 이해할 것이다. 내가 언제 조금이라도 정도를 벗어나 수식하는 분부를 내리면서 단지 경 자신만 영화롭게 하고 경의 직함만 사치스럽게 해 준 적이 있었던가. 하나는 시대 상황을 바로잡기 위함이요, 둘은 습속을 고치기 위함이니,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전에 유시하면서 ‘세신(世臣)을 보전시키고…….’라고 한 것과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고 하겠다.
경은 모쪼록 안심하고 조리하다가 틈을 낼 수 있거든 도성에 들어와 나의 면유(面諭)를 듣도록 하라. 사직한 것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어 종백(宗伯)249)  에게 명해 전유(傳諭)하게 하고, 어의(御醫)를 보내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간호하게 하였다.

 

11월 6일 경신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장계를 올리기를,
"이달 초하루에 내사(內司)의 노복 10여 명이 김포(金浦)의 민가에 돌입하여 문을 부수고 수색하면서 사람들을 구타한 뒤 돈과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만약 통렬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이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난동 부린 내사 소속의 노복들에 대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법 규정을 살펴 엄히 단속토록 하고, 내사의 관원에 대해서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내사에 소속된 자들이 민간에 폐를 끼치면서 허다하게 범법 행위를 저지르다니 정말 증오스럽기 그지없다. 형조에 엄히 신칙하여 형장(刑杖)을 되우쳐서 공초(供招)를 받은 뒤 보고하라고 분부하라. 그리고 만일 한 명이라도 누락될 경우에는 차지 중관(次知中官)을 또한 엄히 처치할 것이니, 이러한 뜻으로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요즘 듣건대 사복시에 소속된 자들이 지방에 내려갈 때에도 폐단을 끼치는 것이 또한 마찬가지라고 한다. 몰이꾼들을 각별히 단속하라는 뜻으로 해랑(該郞)이 패(牌)를 내줄 적에 엄히 신칙토록 하라. 그리고 이 뒤로 사(司)에 속한 자들이 폐단을 일으킬 경우에는 일일이 감영에 보고토록 하고, 만약 혹시라도 덮어둘 때에는 그 수령 역시 죄를 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뜻으로 형조에 회유(回諭)하고 공초를 받아 보고토록 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이 일이 있기 전에 얼마나 엄하게 신칙했던가. 그런데도 단속할 줄 모르다니 정말 증오스럽기 그지없다. 이른바 재복(再福)이라는 자는 경기 감영에 내려 보내도록 하라. 그리하여 즉시 해(該) 군수로 하여금 그 고을의 양반과 천민들을 그 일이 발생한 곳에 모이도록 한 뒤 그를 엄히 다스리게 하고 나서 바로 갑곶진(甲串鎭)의 사공(沙工)으로 충정(充定)토록 하라. 그리고 앞으로 사(司)에서 강화에 내려가는 자들이 폐단을 일으킬 경우, 그 당사자는 우선 놔두고라도 당해(當該) 차지 중관은 양화도(楊花渡)의 관령(管領)으로 충정하고, 두목과 이예(吏隷)들은 모두 형추(刑推)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고, 이를 관아의 벽에 써 붙여놓고 준행토록 하라."
하였다.

 

전 승지 홍의호(洪義浩)를 소견(召見)하였다. 이때 의호가 그의 형 홍인호(洪仁浩)를 이어 《심리록(審理錄)》을 편집 교정하고 있었다. 의호가 아뢰기를,
"정유년 사목(事目) 가운데 나오는 바 ‘이미 매장했을 경우에는 검시(檢屍)하지 말라.’고 한 분부는 대체로 백골(白骨)을 검시하게 되는 경우나 아주 오래된 시체를 파내는 경우를 지칭하여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합의하여 묻었건 몰래 묻었건 간에 세월이 혹 조금 흘렀다 하더라도 검시해야만 할 사정이 있을 경우, 이런 것까지 일체 파내어 검시하지 못하도록 한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또 상놈[常漢]을 거적으로 싸서 임시로 묻은 경우는 영구히 매장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모두 한편으로는 계문(啓聞)하고 한편으로는 무덤을 파서 검시해야 마땅한데, 《통편(通編)》 속에 수록된 내용은 너무 간단해 경외(京外)에서 거행할 때 의혹을 갖게 하기가 쉬우니, 역시 품지(稟旨)하여 상세히 수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판당(判堂)을 거친 사람들과 다시 상의하는 동시에 또 대신에게 의논하여 의견을 하나로 모아 규정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호가 또 아뢰기를,
"고한(辜限)250)  과 관련된 법을 보건대, 원(元)나라와 송(宋)나라 이전에는 손과 발로 사람을 상해했을 경우 10일의 기한을 두었었는데, 명(明)나라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20일로 기한을 설정하였습니다. 대체로 빨리 죽게 되는 부위의 경우 10일을 넘길 수 없고 보면 10일의 기한을 둔 것이 법의 뜻으로 볼 때는 그럴 듯합니다만, 사람마다 강하고 약한 것이 다르고 타격을 가한 것 역시 세고 헐한 차이가 있어 어떤 때는 20일을 끌다가 비로소 죽는 경우도 있고 보면 명나라에서 20일로 단안을 내린 것은 대체로 인명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한을 늘린 법을 상고해 보건대, 만력(萬曆)251) 13년252)  에 형관(刑官)인 서화(舒化)가 편찬하여 올린 조례(條例)에 ‘본 상처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을 경우, 고한을 늘려 적용한다.’는 구절이 처음 나타납니다. 그러나 본 상처로 인해 죽게 되었는지 단정한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데 하나라도 혹시 착오를 범하게 되면 사람 목숨이 관련이 되니 이를 경솔하게 끌어다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무자년에 올린 평안도의 녹계(錄啓) 가운데에 복계(覆啓)를 거치지도 않은 채 고한을 늘리는 법을 무턱대고 적용한 사례가 있게 되자 수고스럽게도 엄한 분부를 내리시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반인(泮人)253)  이었던 정한룡(鄭漢龍)이 환도(環刀)로 다른 사람의 무릎뼈를 쳤는데 그 사람이 고한을 넘겨 죽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환도로 쳤다면 의도적으로 죽이려 한 것이 분명했고, 무릎뼈가 반쯤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그 상처로 죽게 된 것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형조가 계품(啓稟)하여 고한을 늘려 적용할 것을 청하자, 대신에게 문의한 뒤 윤허하신 일까지 있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칼에 의한 상처나 입으로 물어서 생긴 상처 등 정상이 명백한 것을 제외하고는 고한을 늘려서 적용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옥사(獄事)를 신중하게 해야 하는 뜻과 합치될 듯합니다."
하니, 이에 따르고, 하교하기를,
"고한(辜限)을 늘리는 법이 쉽사리 비롯되게 해서는 안 된다. 칼로 인한 상처나 입으로 문 상처라 하더라도 별도로 품지(稟旨)한 뒤 의논을 거두어 귀일시키기 이전에는 감히 경솔하게 먼저 옥사를 성립시키지 말게 하라고 경외(京外)에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11월 8일 임술

영의정 이병모(李秉模)의 사직을 들어주었다. 병모가 함께 온 중신(重臣) 편에 부주(附奏)하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이나 몸가짐 모두가 좌우의 법도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분부를 내리실 때에 있어서도 베풀어선 안 될 일을 섣불리 베푸신 적이 있지 않았고 행해서는 안 될 일을 문득 행하신 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옥처럼 받들고 성현의 법도처럼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지 한 때의 잘못된 은혜를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총애하는 분부를 아끼지 않고 계시니 조야(朝野)에서 보고 들을 때 뭐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거취(去就)에 대해서는 단연코 드릴 말씀이 없기에 오직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앞으로 나아가면서 빨리 국법으로 처벌받게 되기만을 기대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겨우 30리쯤 왔을 때 고질병이 갑자기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내일 고향 길을 향해 돌아가는 일이 참으로 부득이 하게 되었으니 죽을 죄만 더욱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번에 돌아가서 하늘의 신령스러운 힘 덕택으로 살 길을 얻게 된다 하더라도 직명(職名)이 몸에서 풀어지기 이전에는 다시 도성 문에 들어갈 희망이 정말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지금 또 도로 고향 집으로 간다고 하는데, 어째서 경은 이토록 굳이 사양하는 것인가. 더구나 병도 아직 낫지 않은 상황에서 추위를 무릅쓰고 어려운 길을 가고 있으니 더욱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이쯤 되어서는 우선 경의 간절한 뜻에 부응해 주는 것이 실로 공경하며 예우하는 방도에 합치된다 하겠다. 이에 경의 상직(相職)에 대한 해면(解免)을 허락함으로써 성에 들어와 안온하게 조섭할 수 있도록 하는 바이다."
하였다. 병모가 이에 도성에 들어왔다.

 

이병정(李秉鼎)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와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의금부에서 처분을 기다리니, 하교하기를,
"요즘 경들 때문에 번거롭게 수응(酬應)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정상에 대해서는 경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 내 기력을 갖고 수응하노라면 번번이 버티기가 어려운데 다시 혹시라도 시끄럽게 떠든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입시한 승지로 하여금 좌상과 우상에게 가서 전유(傳諭)토록 하라."
하였다.

 

11월 9일 계해

좌의정 심환지가 상차(上箚)하니, 차본(箚本)을 승지로 하여금 돌려주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약원(藥院)의 계사(啓辭)에 대한 비답도 아직 예에 따라 써서 내려보내지 못하고 있다. 도상(都相)254)   이하가 약원에 있는데 좌상이 조정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다니 좌상이 이처럼 과격하게 어긋난 행동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내일은 자전(慈殿)의 탄신일이 맞물린데다 차대(次對)도 예정되어 있는데 좌상이 들어온 뒤에야 합문(閤門)으로 가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좌상이 들어오겠다 하면서도 문안드리러 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빈대(賓對)하겠다는 명을 이미 내린 이상 빈대하러 합문으로 간 뒤에 인견(引見)할 것이니, 이 뜻을 다시 승지로 하여금 좌상에게 가서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차대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어서 우선 그 뜻을 따라 주었다만 경들의 경우 어찌 무단히 모두 체차를 청해서야 되겠는가."
하니, 좌의정 심환지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번거롭게 진달드리겠습니까. 그러나 근래에 국가의 법이 이로 인하여 느슨하게 풀어졌고 의리가 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면서 막히고 말았습니다. 신들이 이처럼 절박하게 여기면서 애를 태우는 것이 어찌 집안을 위하고 자신의 몸을 위해서이겠습니까. 성상의 유시가 거듭 내려지고 차대하는 명이 있어 감히 다시 뒤로 빼지만은 못하겠기에 이렇게 연석(筵席)에 참여했습니다마는, 오직 이 뒤로는 다시 이런 일이 없게 되기만을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아뢴 것을 보건대 대체로 지나치다."
하였다.

 

하교하였다.
"좌상이 일단 조정에 나왔으니, 비지(批旨) 가운데 ‘나를 속이는 것과 비슷하게 되지 않겠는가.[不幾近於欺予]’라는 여섯 글자를 지워버려 대신의 마음을 편케 해 주도록 하라."

 

11월 10일 갑자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를 소견(召見)하였다.

 

11월 11일 을축

정언 심보영(沈普永)이 상소하기를,
"전라도 관찰사 이득신(李得臣)은 재해(災害)를 입은 결전(結田)에 대해 농간을 부렸으니 탐욕을 징계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낙안 군수(樂安郡守) 이겸회(李謙會)는 온 힘을 기울여 겉치레하는 작태를 보이고 수완을 부려 마구 거두어들이는 자취를 보이고 있으므로 길 가는 사람들조차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문(營門)의 압객(狎客)을 책실(冊室)에 박아두도록 하면서 은밀히 뇌물이 통하는 문을 열어두고 인사 행정에 간여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하는 등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니, 이렇듯 간사한 부류를 목민관의 반열에 놔둘 수는 없습니다. 속히 파직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득신의 일은 이른바 간사한 비장(裨將)이 재해를 입은 결전을 늘려 조세를 줄인 범법 행위라고 할 것인데 과연 그대의 말대로라면 어찌 놀랍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여 그냥 놔둘 수는 없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조사한 뒤 처리하게 하라. 이겸회의 일은 풍문만 믿을 수는 없으니 해(該) 도신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한 뒤 장계로 보고토록 하라."
하였다.

 

11월 16일 경오

김달순(金達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이재(金履載)를 의정부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시헌서(時憲書) 재자관(齎咨官)으로 중국에 갔다 온 이광직(李光稷)이 수본(手本)을 비변사에 올렸다. 그 내용에,
"저쪽의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동짓날에 황제가 천단(天壇)에 직접 제사를 지내면서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에 대해서도 동시에 제사를 올리는데, 그 예식을 마치고 나면 천하에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면서 조칙을 반포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외국에도 조칙을 반포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자세히 탐지해 보았더니, 모두들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를 드린 뒤 조칙을 반포하는 것이 원래 해마다 늘 행하는 규례이긴 하나 올해의 경우는 순황제의 제사를 그날 하늘 제사와 동시에 거행하는 만큼 다른 해와는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이는 황제의 뜻과 결부되는 것으로서 조칙을 내릴지의 여부는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런데 태묘(太廟)에 배향(配享)하고 존호(尊號)를 올렸을 때 조선에 조칙을 반포하면서 모두 그때의 사신 편에 부쳐 보냈었고 보면, 지금 조칙을 혹 반포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동지사 편에 부쳐 보내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교비(敎匪)를 토벌하는 일은 아직도 완결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위 교비란 백련교(白蓮敎)·홍련교(紅蓮敎)·청련교(靑蓮敎)의 호칭을 가진 자들로서 비(匪)라는 것은 적(賊)이라는 의미입니다. 유씨(劉氏) 성을 가진 그 괴수는 본래 사천(四川)의 사인(士人)으로서 둔갑법(遁甲法)을 배워 얻었는데 이 사술(邪術)을 가지고 인민을 현혹시키면서 건륭(乾隆)255) 60년256)  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지금은 그 도당(徒黨)이 호북(湖北)·호남(湖南)·섬서(陝西)·하남(河南) 등지에 흩어져 있는데, 수령들 모두 교주(敎主)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모두 둔갑술을 배웠기 때문에 비록 관군(官軍)에게 붙잡혀도 그 즉시 곧바로 몸을 빼어 달아나곤 하는 관계로 더욱 소란해지기만 할 뿐 끝내 붙잡아 복종시키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가경(嘉慶)257) 3년258)  에 대신(大臣) 늑보(勒保)를 사천성 총독(四川省總督)으로 삼았다가 무슨 일로 파직하여 경략(經略)으로 삼았으며, 그 대신 괴륜(魁倫)을 총독으로 삼았다가, 그 뒤에 다시 태포(台布)를 총독으로 삼고 공부 상서(工部尙書) 나언성(那彦成)을 한군 도통(漢軍都統)으로 삼아 급히 달려가 총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성은 바로 고(故) 각로(閣老) 아계(阿桂)의 손자인데 몸집이 웅장한데다 지략(智略)도 상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황제가 조칙을 내렸는데 ‘교비(敎匪)의 죄는 묘비(苗匪)보다도 더 크다. 묘비는 그래도 귀순할 줄을 알았는데 교비는 완악해서 은혜를 생각할 줄을 모르고 시종 일관 소란만 피우고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백성의 부모 된 자가 자식처럼 돌보아 주지 않은 탓으로 일어난 것이다. 위협에 못이겨 따르게 된 자가 만약 몸을 빼어 귀순해 온다면 죽이지 않음은 물론 작록(爵祿)을 내려 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통관(通官) 등처의 복물(卜物)을 전해 주는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봉황성(鳳凰城)의 서가(徐哥) 등처에 전해 두자니 끝내 허술하게 될 것 같기에 장사꾼의 물건처럼 포장하여 의주(義州)의 짐 수레 속에 섞어 실은 뒤에 연경(燕京)의 관소(館所) 안에까지 운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상품을 매매하는 것처럼 하면서 조금씩 가지고 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두 칙사(勅使)에게 찾아가 보려 하였더니, 통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만나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또 부사(副使)로 왔던 칙사는 현재 죄를 입고 있는 중이니 가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당시의 차비관(差備官)이었던 이방화(李邦華)의 명의(名義)로 자그마한 편지를 작성하여 소매 속에 넣고 상사(上使)로 왔었던 칙사에게 갔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만나주지 않고 집안 사람을 시켜 묻기를 ‘무슨 일로 와서 만나려 하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대인께서 소방의 선물용 토산품을 받지 않고 변경에 그냥 놔두셨기에 지금 차비관의 자그마한 서찰을 함께 가지고 와서 품청(稟請)하려 하는 것이다.’ 하고는 이어 편지를 건네 주었습니다. 집안 사람이 나와서 편지를 돌려주며 말을 전하기를 ‘편지를 꼭 뜯어 볼 것은 없다. 이 일은 내일 예부(禮部)의 대인과 상의해야 마땅하다. 그러고 나서 즉시 회보(回報)해 줄테니 우선 돌아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왜극정액(倭克正額)을 시켜 그의 서찰을 찾아 가지고 오게 했더니, 그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정사는 꼭 토산품을 보내 올 것은 없다는 뜻을 말로만 전했을 뿐 끝내 문자로 직접 써 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부사로 왔던 칙사의 경우는 처음부터 집에 없다고 핑계대었기 때문에 그 집안 사람을 통해 편지를 전해주게 하였는데, 그제야 청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 있는 상태로 말을 나누기를 ‘이당(李堂)259)  의 서찰을 보았다만, 이 물품에 대해서는 이미 황제의 유시가 있었던 만큼 보내 올 필요가 없다. 국왕에게 도로 주는 것 또한 황상의 은전인 것이다.’ 하고는 이어 ‘감히 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하겠다.’ 하면서 가 주었으면 하는 뜻을 비쳤습니다. 회신(回信)하는 일에 말이 미치자 그가 말하기를 ‘그대는 다시 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관소로 사람을 보내는 것도 온당치 못하니, 보덕(寶德)을 보내 찾아 가도록 하라.’ 하기에 즉시 관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에 그 집 사람이 서찰을 도로 전해주고 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통관(通官)이 예부 시랑(禮部侍郞) 문녕(文寧)의 지시를 받고 와서 서찰을 찾아가지고 갔다가 얼마 뒤에 도로 와서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보덕으로 하여금 가서 회신을 찾아 오게 하였는데, 그가 두려워하며 감히 가지 못했으므로 그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상사로 왔던 칙사는 이미 왜극정액에게 입으로 전해 준 말이 있고, 부사로 왔던 칙사의 경우는 또 직접 들은 말이 있으니, 억지로 회신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대저 그들의 기색을 살펴보건대, 조선 사람이 들어 온 것만 보면 대경 실색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두 칙사에 대한 물건을 만약 가져와 전해 준다면 그야말로 진퇴 유곡의 입장에 놓일 일이라서 어떻게 처치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11월 17일 신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진하(進賀)하고 귀환한 정사(正使) 조상진(趙尙鎭)과 부사(副使) 서형수(徐瀅修)와 서장관(書狀官) 한치응(韓致應)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형수에게 분부하기를,
"주서(朱書)를 구해 왔는데 그중에 과연 긴요한 부분이 있던가?"
하니, 형수가 아뢰기를,
"써서 내려 주신 책들에 대해 책을 많이 소장한 숙유(宿儒)에게 두루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것이 무슨 의례(義例)인지조차 분변하지를 못하였는데, 오직 예부 상서(禮部尙書) 기균(紀勻)만은 그 원류(源流)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가령 주옥(朱玉)이 편찬한 《대전운편(大全韻編)》260)  은 사실과 연대(年代)를 편년체(編年體)의 기술 방식에 따라 기술하면서 주석을 달아놓은 것인데 《대전(大全)》의 제본(諸本) 중에서는 최고의 선본(善本)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여정덕(黎靖德)이 편찬한 《어록합편(語錄合編)》261)  은 곧 지주(池州)·미주(眉州)·요주(饒州)·휘주(徽州)·건령(建寧)·회안(淮安)의 제본(諸本)을 합쳐 수록한 것이기 때문에 전본(全本)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하나는 건령에 있고 하나는 회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차례로 구해 놓았다가 이 뒤에 오는 사신 행차 편에 순차적으로 부쳐 보내겠다고 하였으니 분명히 약속대로 해 줄 것입니다.
이번에 사서 가지고 온 것은 《주자대동집(朱子大同集)》과 《주자실기(朱子實紀)》와 《후한서(後漢書)》 등 3질(帙)인데, 《대동집》 중에는 《대전(大全)》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구절들이 가끔씩 꽤나 나오고 있으니, 전집을 편집할 무렵에 이 책이 정말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리(黃李)의 진본(眞本)을 끝내 얻을 수 없었는가?"
하니, 형수가 아뢰기를,
"《황리록(黃李錄)》이 나온 이후로 누차에 걸쳐 후인(後人)이 거듭 편집했으니 진본이 현재 남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남경(南京) 등에서는 사정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연경(燕京)에서 찾아보는 것은 무익하겠기에 오로지 제록(諸錄)을 빠짐없이 수록한 것에 대해서 널리 물어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균(紀勻)은 육학(陸學)262)  에 종사한다고 들었는데 주자(朱子)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겠던가?"
하니, 형수가 아뢰기를,
"기균의 문학과 언어를 보면 주자를 높이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래에 세상에서 학문하는 자들이 주자를 등지고 변변치 않은 것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서(朱書)를 이토록 구하기 어렵게 된 것도 필시 세상에서 육학을 떠받들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형수가 아뢰기를,
"근래에 들어 중원의 학술을 보면 과연 대부분이 육학을 종주로 삼고 있습니다. 주서를 얻기 어렵게 된 것도 꼭 여기에 기인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일렀다.
"원유붕(元有朋)은 위세를 믿고 백성을 학대했으니 법으로 볼 때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 당초에 다른 사람의 분산(墳山)과 지극히 가까운 곳에다 몰래 장례를 치루어 놓고는 끝에 가서 또 유감을 품고 화풀이를 하면서 못할 짓이 없이 굴었는데, 한 동네의 백성들의 집을 허물면서 심지어는 정문(旌門)과 사판(祠版)에 손을 대기까지 하였다. 나라가 있고 법이 있는 마당에 어찌 이렇듯 패악스러운 버릇을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저 황가(黃哥)로 말하면 절효(節孝)가 뛰어난 가문으로서 효묘(孝廟)와 선조(先朝)의 조정 때에 분부를 받은 사실 역시 그지없이 중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유붕이란 자가 과연 어떠한 사람이기에 그만 감히 분부를 받았던 일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런 범죄를 저질렀단 말 인가.
동백(東伯)263)  이 조사하여 아뢰라는 명을 받은 뒤에도 곡진히 유붕을 위해 줄 목적으로 허구한 세월을 질질 끌어 온 것이야말로 지극히 형편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가 연전에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있었을 때 비변사 낭관을 비호해 주었던 일로 보더라도 은혜를 너무나도 저버렸다 할 것이다. 그리고 금부 당상 김이익(金履翼)의 일은 더더욱 놀랍기 그지없다. 차당(次堂)264)  의 신분으로서 공초(供招)를 받으라는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앞장서서 떠맡고 나서면서 애매 모호한 유붕의 공초를 받아 들여보내도록 하였으니, 이익과 같은 자가 어떻게 감히 이렇듯 무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는 필시 유붕이 좌우에서 부탁을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일 것이다. 그가 위세를 믿고 법을 무시한 것과 전후에 걸쳐 청탁을 한 정상에 대해 일일이 공초를 받도록 하라. 만약 사실대로 공초하지 않을 경우에는 위력을 행사하며 엄히 신문하여 기필코 실토하게 한 뒤 봉입(捧入)토록 하라."

 

이노춘(李魯春)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태영(李泰永)을 평안도 관찰사로, 김문순(金文淳)을 공조 판서로, 김이영(金履永)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명월 만호(明月萬戶) 정관휘(鄭觀輝)를 승진시켜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하라. 그리고 6년이 되기 이전에는 경직(京職)에 의망(擬望)하지 말게 함으로써 피폐된 지역을 소생시킬 여지가 있게 하라."

 

봉조하(奉朝賀) 조돈(趙暾)에게 숙헌(肅憲)이라는 시호(諡號)를, 이조 판서 송재경(宋載經)에게 경헌(景獻)이라는 시호를, 좌찬성으로 증직(贈職)된 조심태(趙心泰)에게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추증(追贈)하였다.

 

진하사(進賀使)로 갔다가 귀환한 정사(正使) 조상진(趙尙鎭)과 부사(副使) 서형수(徐瀅修)가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다. 그 내용에,
"첫째, 올해의 농사에 관한 일입니다. 관문(關門) 밖의 경우는 산전(山田)과 원전(原田)을 막론하고 거의 모두 곡식이 여물었습니다마는, 관문 안의 경우는 메뚜기 떼가 들판을 덮는 바람에 어느 곡식치고 재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쌀 한 말 값이 중국 돈으로 무려 9백여 문(文)이나 되고 있습니다.
황제가 비로소 메뚜기 재해에 대한 말을 듣고 근심스러운 기색을 나타내며 자주 근신(近臣)에게 물어 보았는데, 호계당(胡季堂)이란 자가 대답하기를 ‘메뚜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누런 것은 재해를 입히지만 까만 것은 재해를 입히지 않는다. 그런데 금년에 발생한 메뚜기는 누런 것이 아니라 까만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그러다가 이번의 유릉(裕陵) 행차 때에 남여(藍輿)에서 메뚜기를 잡아 직접 살펴보니 누런 것과 까만 것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아첨한 그의 죄를 드러내고 재해를 입은 고을의 대로(大路)에 게시하는 한편 재해를 입은 고을의 전조(田租)에 대해 10분의 3을 감면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둘째, 황제가 정월에 친히 정사를 맡아 본 이후로 권력을 장악하고 풍속을 쇄신하면서 호령한 것들 중에 볼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6월에 황제가 관덕전(觀德殿)에서 친히 제사를 거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견(引見)할 관리가 없느냐고 시위(侍衛)에게 물어 보니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그 당시에 날씨가 찌는 듯하였으므로 관리를 수응(酬應)케 하노라면 황상을 번거롭게 할까 걱정한 나머지 예친왕(睿親王) 순영(淳潁)이 사적(私的)으로 철수해 돌아가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그런 사실을 조사해 낸 다음에 유시하기를 ‘종전에는 화신(和珅)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면서 각성(各省)의 주보(奏報)와 각 아문(各衙門)의 주접(奏摺)을 자기 뜻대로 폐기하곤 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죄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었다. 지금 순영이 일단 발송되어 온 주접을 철회시키는 행동을 다시 저질렀는데, 이는 먼저 시험해 본 뒤에 화신이 저질렀던 술책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고는 종인부(宗人府)에 넘겨 엄히 의논해서 처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5월과 6월에 걸쳐 잇따라 구언(求言)하는 유지(有旨)를 내렸는데, 이와 함께 자질구레한 일이나 근거 없는 일을 말하여 사적인 유감을 풀거나 귀찮게 하지 말라고 경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국전(局錢)을 은(銀)으로 바꾸자는 요청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조정에서 일반 서민들과 이것을 다툰다면 조정의 체면이 다시 어떻게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 몇 가지 일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 호북(湖北) 지방의 군사 작전에 관한 일입니다. 소위 교비(敎匪)라는 것이 어떤 족속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문적(文蹟)에서 나온 것을 토대로 살펴보건대 먼저 토벌했다가 뒤에 어루만져 주고 성벽을 굳게 지키면서 들판을 깨끗이 치우는 등 어떤 계책이든 써 보지 않은 것이 없는데도 아직껏 평정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천(四川)·섬서(陝西)·호북(湖北)·하남(河南) 등 4개 성(省)에까지 파급되어 일반 백성들의 생활이 결딴난 상태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가령 수풀 속의 사당에서 여우 울음 소리를 내는 도적265)  이라 하더라도 엄청난 사태를 야기시키는 도화선(導火線) 역할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신들이 책문(柵門)에서 연경(燕京)으로 들어갈 때 관동(關東) 군사들의 가속(家屬)이 송별하고 오는 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으며, 연경에서 관문(關門)을 나왔을 때에도 길에서 또 길림(吉林) 흑룡강(黑龍江) 군대가 징집된 것을 보았는데,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행렬로 소요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랫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 보건대 ‘교비(敎匪)의 소굴은 대숲이 울창한 험준한 곳으로서 요동(獠獞) 같은 만족(蠻族)이나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군대가 이르면 달아나서 바위 골짜기에 숨었다가 군대가 떠나가면 나와 군현(郡縣)에서 노략질하는 까닭에 소탕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저번에 출동했던 관군은 한 번 끝까지 추격해 들어갔다가 하마터면 전 병력이 함몰당할 뻔했으니, 이번의 작전 역시 사생(死生)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였습니다. 총독(摠督) 원수(元帥)는 듣건대 늑보(勒保)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조신(朝臣)에 대한 평가입니다. 일치된 공론(公論)에 따르면, 강직하고 방정한 사람으로는 유용(劉鏞)이 꼽혔고, 풍류가 있고 유아(儒雅)하기로는 기균(紀勻)이 꼽혔습니다.
그런데 유용은 그 사람됨을 보건대 아래를 쳐다 보면서 천천히 걸었으며 일단 반열에 들어가 자기 자리에 서면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몇 해 전 황제의 자리를 물려 받을 때 축하를 받아야 할 시각이 다 되었는데도 고황제(高皇帝)가 대보(大寶)를 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유용이 축하하는 일을 중지시키고는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대보가 없는 천자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그 길로 마침내 들어가 고종(高宗)에게 아뢰기를 ‘폐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대한 미련이 없으실 수 없다면 물려주는 일을 그만두시면 됩니다. 그러나 일단 물려주고 나서 대보를 내주지 않는다면 천하에서 듣고서 폐하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며 반나절을 극력 간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대보를 얻어 가지고 나옴으로써 축하하는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게 되었으므로 지금 황제가 정책 원로(定冊元老)로 대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균은 이렇습니다. 요즘 들어 중원의 학술을 보면 거의 대부분 성률(聲律)이나 서화(書畵)를 가지고 장식하고 미화하는 도구로 삼고 있는데, 이보다 조금 낫다고 하는 자들을 보아도 총서(叢書)나 소품(小品)266)  에 박식한 정도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번에 가서 구매하려고 할 때 당세에 장서가로 일컬어지고 있는 명유(名儒)들과 많이 왕복하면서 질문해 보았더니, 내각(內閣)에서 써준 서목(書目)과 관련하여 그것이 무슨 의례(義例)이며 누가 편각(編刻)한 것인지도 모르는 때가 간혹 있었는데, 오직 기균 한 사람만은 그의 박학한 지식으로 연월(年月)과 경위(經緯) 그리고 그동안의 곡절에 대해 환히 꿰뚫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 《고문(古文)》을 보아도 경술(經術)에 근본하고 문장 작법에 엄격한데, 순정(純正)하고 우여(優餘)한 기균 그 사람이야말로 당세의 명가(名家)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습니다.
다섯째, 칙사(勅使)에게 선물로 준 물품에 대한 일입니다. 연경에 들어간 뒤에 듣건대, 여름철에 항걸(恒傑)이 복장을 잘못 착용하고 관원들 사이에 함부로 낀 일 때문에 파척(罷斥)을 당했는데, 그때 황제가 사명(使命)을 받들었을 때 일을 선처하지 못한 그의 죄까지 거론하여 책망하는 동시에, 예부(禮部)에 유시하기를 ‘선물용 물품이 만일 들어 올 경우 해(該) 칙사에게 주지 말고 먼저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래서 수역(首譯)으로 하여금 예부의 낭관들에게 가서 탐문해 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면서 또 말하기를 ‘황제의 뜻이 이미 이와 같은 이상 귀국의 도리로서는 들여보내선 안 될 듯하다.’고 하였다 합니다.
여섯째, 근년 이래로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잘못된 관례가 자꾸만 생겨나고 있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즉 변경이나 관소(館所) 할 것 없이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쓸데없는 비용들이 해마다 증가하는 바람에 유한한 나라의 재화가 날로 소모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바로잡는 정사를 생각해 본다고 해야 우리 경내(境內)에서 대접하는 비용을 줄이는 것과 별도로 가는 원역(員譯)의 숫자를 감하는 것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도 조그마한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꼭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저 중국에 들어가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들어가는 비용을 감안한다면, 어찌 만금(萬金)을 버리고 천금(千金)을 아끼는 것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신들이 이번의 사신 행차에서 시험삼아 물정(物情)을 탐지해 보았더니 예전부터 ‘주선해 주고 융통해 주겠다…….’ 한 것들은 모두가 통관(通官)과 서반(序班)267)  의 무리들이 안에서 농간을 부린 것으로서 생판으로 돈을 끌어내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 사신 편에 조칙을 부쳐준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신들은 예부 상서의 말을 통해서 이미 주본(奏本)을 올려 윤허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된 뒤에 수역이 와서 전하는 통관 무리들의 꼬드기는 말을 들어 보니 ‘예부에서는 사신 행차가 이렇게 올 줄을 모르고 예전에 벌써 재자관(齎咨官) 편에 부치는 것으로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따라서 지금 아래에서도 어떻게 옮겨 부칠 수가 없게 되었으니, 현재 관소에 있는 사신들로서는 빈 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 같다. 그런 뒤에 나중에 온 재자관이 거꾸로 가지고 가게 된다면 사신들의 입장에서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들이 주선해주고 싶은데 손 쓸 물건만 있다면 변통시켜 줄 방법이 없지도 않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수역에게 말하기를 ‘은(銀) 한 조각이라도 부당하게 허비하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도리로서는 그저 한결같이 상국에서 편의에 따라 타당하게 처리해 주는 대로 따라야 할 것이니 꼭 무색할 것도 없고 주선해 줄 필요도 없다.」고 하라.’ 하였습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계속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며 와서 으름장을 놓았으나 결국에는 신들이 이미 속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주선해서 변통해 주겠다느니 하는 것들치고 이들이 재주 부리는 것 아닌 것이 없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규례에 합당한 일일 경우에는 그렇게 되게끔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되게 마련이며, 규례에 없는 일이라면 또 서반이나 통관의 무리들이 주선해 준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닌 것입니다."
하였다.

 

서장관(書狀官) 한치응(韓致應)이 별단(別單)을 올렸다. 그 내용에,
"1. 재작년에 태상황(太上皇)의 칙지(勅旨)를 받들어, 효숙 황후(孝淑皇后)를 위해 27개월 동안 거상(居喪)한 다음에 황귀비(皇貴妃) 유호록씨(鈕祜祿氏)를 황후로 세우도록 명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5월로 그 기한이 찼으므로 바로 칙지대로 준행하여 황후로 책봉하고, 황후의 부친 공아랍(恭阿拉)은 규례에 따라 일등후(一等侯)로 봉하였습니다. 그러나 응당 행해야 할 황후 책봉의 의식은 다시 27개월이 지나 상복을 벗게 되는 가경(嘉慶) 6년에나 가서 상세히 전례를 상고한 뒤 길일(吉日)을 택해 거행할 예정입니다.
2. 고황제(高皇帝)의 실록(實錄)은 이미 편찬 기관을 설치하고 감수(監修)에 착수했습니다. 태학사(太學士) 경계(慶桂)가 총재관(摠裁官)을 맡았으며 편찬하는 체재는 한결같이 《강희실록(康熙實錄)》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미 즉위 초년(初年) 5개월 동안의 정치를 가지고 편집해서 9권(卷)의 책으로 만든 뒤 벌써 위에 바쳤는데, 완성될 때쯤이면 대략 1천 4백, 5백 권쯤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강희실록》은 3백 권으로 되어 있는데 작업을 착수한 지 9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실록의 경우는 권질(卷帙)이 예전의 것보다 다섯 배나 되는 만큼 편찬 기관의 인원을 만약 옛날식대로만 겨우 채워준다면 시일만 끌게 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기보다는 적당히 인원을 보충해 주어 일찌감치 완성하게 하는 것이 낫겠기에 마침내 만족(滿族)과 한족(漢族) 출신으로 찬수관(纂修官)과 수장관(收掌官)·번역관(繙繹官)·등록관(謄錄官) 등 1백 50여 인을 더 차출한 뒤 봉급으로 은(銀)을 내주면서 달마다 계획량을 설정해 편찬케 하고 있습니다.
3. 급사중(給事中) 명승(明繩)이 은광(銀礦)을 발굴해 캐내자고 청하니, 유시하기를 ‘지금 이익을 도모하는 일로 놀고 먹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될 경우 점점 흔단을 일으키게 되리라는 것은 사세상 필연적인 일이다. 그리고 국가의 경비(經費)는 본래 정상적인 공부(供賦)로 댈 수가 있는데 어찌 산택(山澤)을 끝까지 뒤져가면서 얄팍한 이익을 노려서야 되겠는가. 짐이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놓은 것은 이익을 말하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 아니다. 거두어들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신하는 결단코 쓸 수 없으니, 즉시 명하여 아뢴 원본을 되돌려 주도록 하고 이 일을 부(部)에 교부하여 의논해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살빈도(薩彬圖)가 화신(和珅)이 재산을 숨겨 둔 곳을 추적해서 찾아내게 하자고 청하니, 유시하기를 ‘짐이 이 사건을 심리하면서 이미 지나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속히 처결하고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라고 유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식한 무리들이 벌벌 떨면서 그의 재산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 이는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는 일이 될 뿐만이 아니라 짐의 본의를 체득할 줄을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짐은 천하를 내 집으로 삼고 있으니 어찌 겨우 부고(府庫)에 저장해 둔 것만을 내 소유로 간주하겠는가. 이에 대한 일을 조사해 낸 결과 가령 숨겨둔 곳이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 역시 하늘 아래 땅 위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인데, 어찌하여 돈을 긁어 모으려고 안달하면서 마을을 샅샅이 뒤져 세금을 물리는 일과 비슷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홍양길(洪亮吉)이 사서(私書)를 성친왕(成親王)에게 정체(呈遞)268)  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3, 4월 이래로 조회를 여는 일이 조금 늦어지고 있으니 아마도 배우(俳優)나 근습(近習)들이 상의 총명을 혼란시키고 있는 듯하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에 군기처(軍機處)의 대신들이 회동하여 심리한 결과 근거가 없는 일로 밝혀지자 마침내 참형(斬刑)의 율(律)을 적용하기로 결정하니, 유시하기를 ‘만약 그러한 말들을 직접 상소하여 진달했다면 그 내용보다 더 황당무계한 말을 했다 하더라도 짐은 반드시 죄를 주지 않고 스스로 반성할 자료로 삼으면서 좋은 가르침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아무 근거도 없는 말을 가지고 각처에 편지를 써 보내다니 이것이 정말 무슨 심보인가. 그러나 짐은 바야흐로 강직한 말을 듣고 싶어하는 중이다. 그러니 어찌 그에게 사죄(死罪)를 적용함으로써 곧다는 명성을 도둑질하려고 하는 자로 하여금 짐이 말한 사람을 주륙(誅戮)했다고 생각하게 하겠는가. 관대하게 처리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 주도록 특별히 명하는 바이다. 그리고 진달한 일이 조금도 훌륭한 정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이 때문에 노여워하며 화평스러운 분위기를 깨뜨리거나 감히 말할 수 있는 기풍을 막지 않을 것이며, 원서(原書)는 안에 놔두고 보면서 처음엔 부지런히 잘하다가 나중엔 게을러지는 폐단에 대한 경계로 삼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4. 중국의 습속을 보면 옛날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만인(滿人)들은 수초(水草)의 고통269)  을 잊어버린 채 점점 안일한 생활에 빠져들고 있고, 한인(漢人)들은 바뀐 의복을 태연히 입고 살아 가면서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아내는 뜻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이 또한 세상이 한 단계 변화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나라를 세운 지 이미 오래되어 점차 전성기로 접어들면서 형식적인 겉치레만 요란해지고 원기(元氣)는 감퇴되고 있으며 부박한 분위기가 압도하는 가운데 실용(實用)의 정신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치 풍조로 말하면 민간이나 저잣거리 할 것 없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들 모두가 생활에 절실한 것들이 아니라 그저 노리개에 불과한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겉치레에 몰두하고 세속의 풍조가 얼마나 부박한지를 이를 통해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홍양길(洪亮吉)을 처분하는 분부를 내리면서 ‘오늘날의 기풍을 보면 왕왕 의논하기를 좋아하고 있으며, 어쩌다 시문(詩文)들을 보기라도 할라치면 자기 작품이 최고라고 뽑내고들 있다. 이는 인심과 사습(士習)에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인데, 어찌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본조(本朝)에서 명(明)나라 말기의 분위기나 폐습을 답습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야말로 고질적인 세속의 폐단을 정확하게 본 것으로서, 이를 바로잡아 쇄신하려는 뜻을 여러 차례에 걸쳐 칙유(勅諭)하는 가운데에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학술로 말하면 풍속이 날로 달라지면서 더욱더 심하게 지리 멸렬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로는 정(程)·주(朱)도 함께 떠받들고 있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그 대체적인 내용조차 엿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조금 지식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기록이나 의례(義例)에 대해서 출처가 어디인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었으며, 심지어는 왕양명(王陽明)이나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에 있어서도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른바 서양(西洋)의 사교(邪敎)에 대한 일을 가지고 더러 조정 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에 대한 설은 당초 일반 서민들을 바보스럽게 미혹시키는 데 불과했던 것으로서 처음에는 점점 만연되어 치성해지는 결과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서는 국가에서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5. 금년 8월에 묘비(苗匪)를 초유(招諭)하는 일과 관련하여 전후 수백 자(字)에 달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백성들을 보살펴 주고 먼 지역의 나라를 포용해 주었던 선황제(先皇帝)의 덕을 빠짐없이 서술하였는데, 맨 먼저 조선이 유조(遺詔)를 받들어 이 일을 전담하는 사신을 파견해서 향을 올리고 제사를 드리면서 애도하는 뜻을 표하고 예를 극진히 했던 일을 일컫고, 이와 아울러 안남(安南)의 여러 나라도 정성을 쏟아 추모하면서 앞을 다투어 달려왔던 일을 언급하였으며, 해비(該匪) 등은 똑같이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을텐데도 조금도 감동하는 일은 없이 그저 난리만 일으키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60년 동안 중국에서 기름을 받은 데 대한 보답이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선유(宣諭)한 문자를 조서 형태로 인쇄하여 두루 효유(曉諭)토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유하기를 ‘짐이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반복해서 이유를 생각해 보니, 해마다 지방에서 백성의 고혈(膏血)을 쥐어짜낸 나머지 이런 사변을 일으키게 된 것이 분명하다. 지금 보면 탐욕만 부리는 관원들이 아직도 모조리 축출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들을 시골로 내려보내고 나면 그대로 침학하는 일이 이어질까봐 관망하고 머뭇거리면서 감히 바로 내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소속(所屬) 주현(州縣)에서 백성을 침해하는 탐관 오리들을 조사해 내어 몇 사람을 엄히 탄핵함으로써 공분(公憤)이 풀리게 하고, 평소 민심을 얻은 어진 관리들을 승진시켜 발탁하여 백성들을 어루만지게 하라고 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적중에서 잡아내는 자가 있을 때에는 모두 예전에 있었던 오롱등(吳隴登)의 예에 따라 상을 주고 5품(品)으로 대우해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다시 효유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영남에서 진전(陳田)270)  을 도로 개간하여 경작할 경우 등급을 낮추어 세금을 감해 주도록 규정을 마련하고 이어 제도(諸道)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진전(陳田)을 개간하여 경작하는 곳에 3년 동안 세금을 감해주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법전에 실려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일단 진전이라고 한다면, 오래 전부터 묵힌 토지거나 근년에 아주 못 쓰게 된 토지거나를 막론하고 도로 개간하여 경작할 경우에는 세금을 감해주는 법전을 똑같이 적용하는 것이 본래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오래 전부터 묵힌 토지의 경우에는 힘은 많이 들어가는데 반해 소득이 적기 때문에 비록 3년 동안 세금을 감해준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망설이면서 개간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전에 영남의 도신(道臣) 이태영(李泰永)이 장계를 올려 청한 기회에 특별히 등급을 내려 주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년에 못쓰게 된 토지의 경우에는 비록 하천으로 뒤바뀌고 무너져 유실되었다 하더라도 일단 재해를 입기 전까지는 경작해 왔던 토지인 이상 등급을 낮춰 주는 대상 속에 같이 포함시켜 거론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도신이 임자년271)  에 하천으로 뒤바뀐 토지[成川]와 무너져 유실된 토지[浦落]와 모래자갈로 뒤덮인 토지[覆沙]까지 모두 포함시켜 등급을 낮춰 주자고 청했으니 이는 뒤죽박죽을 만들어 놓았다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다시 수확하기 시작한 복사(覆沙) 명의의 토지까지 성천(成川)이나 포락(浦落)과 같은 범주로 논한 것은 더더욱 살피지 못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등전(降等田)과272)   역시 분명히 그 개념이 구분되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양안(量案)273)  에 등재된 6등(等) 이상의 토지에 대해 매년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되 6등으로 낮추는 것까지도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강등전이라고 하여 6등의 정전(正田)에 포함시키지 않는가 하면, 속전(續田)의 예에 따라 경작하는 대로 세금을 거두는 토지에 대해서도 강속전이라고 하는 등 법례(法例)와는 전혀 딴판인데, 어떤 때는 강등전이라 하고 어떤 때는 강속전이라고 하면서 또 일정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지도 않습니다.
영남의 도신 신기(申耆)가 본사(本司)에 보고해 온 것을 살펴보더라도, 정사년274)  에는 근년의 진전(陳田)과 오래 된 진전을 다시 개간한 경우에 대해 모두 등급을 낮추어 주는 동시에 세금을 감해 주었으며, 무오년275)  에는 오래된 진전을 다시 개간한 경우에는 예전대로 등급도 낮추어 주고 세금도 감해 준 반면 최근의 진전을 다시 개간한 경우에는 곧장 세금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가지고 말씀한다면 최근의 진전을 경작한 것에 대해 일단 세금을 감해 준 뒤에 또 등급을 낮추어 주었으니 이미 정상적인 규례(規例)에 어긋나는 일이고, 후자의 경우로 말한다면 최근의 진전을 다시 개간했을 때 오래 된 진전을 다시 개간한 것과 동일시하여 등급을 낮춰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일단 하천으로 바뀌고 무너져 유실된 영재처(永災處)라고 말한 이상에는 같이 포함시켜 3년 동안 세금을 감해 주었어야 할 텐데 감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한 쪽은 지나치게 해 주고 한 쪽은 부족하게 해 주는 등 모두 중도(中道)에 맞지 않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와서는 의당 일정한 규정을 한 번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이 뒤로는 양전(量田)을 하여 오래 묵힌 토지를 다시 경작한 것으로 밝혀진 경우에는 부과하는 등급을 6등으로 낮춰 주는 동시에 세금을 3년 동안 감해 주도록 하고, 현재 경작 중인 토지 가운데 근년에 재해를 입었다 다시 경작하게 된 경우 역시 3년 기한으로 세금을 감해주기는 하되 등급을 낮춰 주는 일은 절대로 거론치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중에 무너져 유실된 저쪽 편으로 진흙이 덮인 곳을 조사해내어 등재한 토지에 대해서는 법전에 있는 대로 그 해에 세금을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무오년에 다시 경작해서 기한 내에 세금을 낸 곳의 경우는 납부한 세곡(稅穀)을 지금 민간에 도로 내줄 수는 없으니 금년부터 3년을 기한으로 세금을 감해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근년에 재해를 입었다가 아직 개간하지 못한 곳과 그동안 오래도록 묵혀 온 곳 중에서 개간하면 좋을 땅에 대해서는 별도로 토지 대장을 작성해서 감영(監營)에 보관해 두고 매년 개간하는 대로 등급을 낮춰주는 차제(次第)와 세금을 감해 주는 연한(年限) 등을 하나하나 기록해 두도록 해야 할 것 입니다. 그리하여 2통의 문서를 작성해서 하나는 본사에 보고하고 하나는 호조에 보고토록 한 뒤, 이를 토대로 모두 별도의 장부를 만들어 상세히 주(註)를 달아놓음은 물론 연분(年分)276)  에 관한 장부와 아울러 아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묵힌 토지에 대해 등급을 낮춰주는 일은 세금을 감해주는 일에 비해서 더욱 중대합니다. 따라서 매년 봄철 초기에 ‘모모읍(某某邑)의 오래 묵히던 토지 몇 결(結) 가운데 몇 결에 대해서는 앞으로 등급을 낮춰주어 경작하도록 권하려 한다.’는 내용으로 반드시 먼저 아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근 묵히게 된 토지를 다시 경작할 경우 세금을 감해 준다는 정식(定式)을 다시 밝히기로 한다면, 작황에 따라 등급을 매길 때 재해를 입은 토지로 판정하는 일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도신이 된 자가 만약 사실대로 조사하지 않음으로써 전체 토지 면적이 점점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중한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엄히 단속시키라고 분부하소서."
하고,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새로 진전(陳田)이 된 것을 다시 경작할 경우 3년 동안 세금을 감해 주기로 한 법의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재해를 입은 토지로 판정받아 토지 대장에 오르기만 하면, 몇 년 안에 다시 개간해서 경작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듬해에는 도로 진전이 되기도 하고 그 다음해에는 또 개간되지 않은 것으로 바뀌는 등 교묘히 3년이라는 명목하에 피하면서 영구히 세금을 물지 않는 토지로 둔갑하고 맙니다. 백성은 그 토지를 경작하면서 규례대로 세금을 납부하고 있는데 아전들이 결국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토지 면적이 날로 줄어드는 결과를 빚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최근에 묵혔다가 다시 경작함으로써 3년 동안 세금이 감면된 토지에 대해서는 전부(田夫)의 성명과 토지 면적과 다시 경작한 연도 등을 따로 만든 장부에 기록해 두고 매년 토지 조사를 행할 때 동시에 이를 검열해서 엄히 징치(懲治)해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심환지가 이런 내용으로 분부하여 옛 법전을 다시 밝히도록 반포할 것을 청하고, 영남 이외의 제도(諸道)에서도 모두 이에 따라 시행케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이에 앞서 임자년277)  에 영남에서 물난리가 나 전야(田野)가 무너지고 모래에 묻혔는데 도신이 못쓰도록 재해를 입었다고 보고한 토지가 1만 결(結)을 넘었다. 그 다음해에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 정민시(鄭民始)가, 영구히 재해를 입은 곳으로 판정한 것이 1만 결이나 되는 것은 사목(事目)과 맞지 않는 점이 있다는 이유로 임자년 당시에 도신이었던 정대용(鄭大容)을 논하여 파직시키고 본도에 엄히 신칙하여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해(該) 수령들을 독촉하여 위법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당시 토지 측량을 해 본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수령들 대부분이 토지를 검열할 줄을 잘 알지 못한 나머지 영영 재해를 입게 된 곳을 다시 경작하게 된 토지 항목에 기재하곤 하였다. 그러자 영남 백성들이 떠들썩해지면서 말하기를 ‘임자년에 재해를 입었는데 계축년에 경작을 했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태영(李泰永)이 조진택의 뒤를 이어 영남을 안찰(按察)하면서 수습해 보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상이 영남 백성들의 사정을 듣고는 측은히 여기며 걱정한 나머지 여러 차례나 묘당에 신칙하여 민폐를 없애 줄 방책을 강구하게 하였던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여러 대신들이 등급을 낮춰 주고 세금을 감해 주는 법을 제안하면서 팔로(八路)에 반포하게까지 하였으나, 끝내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11월 18일 임신

원자(元子)가 《맹자(孟子)》 제1권의 강(講)을 마쳤다.

 

11월 20일 갑술

이치중(李致中)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1월 22일 병자

하교하였다.
"근래 신본(新本) 《춘추(春秋)》를 복각(覆刻)한 일과 관련하여 제사를 올린 다음에 그 일을 주관한 사람의 집에 한 벌씩 주도록 하였다. 그런데 내 생각에 고(故) 중신(重臣)이 이미 돈령부(敦寧府)의 관직을 역임했으리라 여기고서 써 넣었는데 지금 들으니 그 관직을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직함을 써 넣었으니 어떻게 뒤에 와서 고칠 수 있겠는가. 지사(知事) 조윤형(曺允亨)의 집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지돈령이라는 관직 임명장을 만들어 옥새를 찍은 뒤 보내 주도록 하라."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장계를 올리기를,
"본도(本道)에서는 공도회(公都會)를 매년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에서 각각 1개 읍(邑)씩 택해 돌아가며 시소(試所)를 정한 뒤에 도사(都事)가 시취(試取)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다른 도에서 하는 방식에 의거, 초시(初試)의 경우는 네 곳의 큰 고을 수령들이 소속된 지역의 유생들을 모아놓고 시험을 치른 뒤 그 답안지를 감영으로 올려 보내게 하고, 그 답안지를 채점한 뒤 뽑힌 유생들을 대상으로 전일 감영에서 했던 대로 복시(覆試)를 보여 시취하고 나서 장계를 올린다면, 시험을 주관하는 고을에서 대접하는 폐단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현재 난잡해지고 있는 풍조도 조금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장계의 내용대로 시행케 하라고 하교하였다.

 

 

 

11월 25일 기묘

반궁(泮宮)278)  에서 황감제(黃柑製)를 거행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생원 조민화(趙民和)는 전시(殿試)에 곧장 응시토록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조적(糶糴)하는 법은 백성을 위해 만든 것으로서 모곡(耗穀)을 취해 쓰는 것은 옛 법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비록 경비가 넉넉하지 못하고 재정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 탓으로 경외(京外)에서 필요한 비용을 여기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를 담당한 조정의 신하나 한 지방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랫사람들을 보태 주려는 위의 뜻을 우러러 체득함은 물론 여유 있게 비축해 둘 방법을 늘 생각해야 참으로 마땅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경외의 각 아문에서 모곡을 내다 파는 것을 보면, 추수가 끝나고 상환할 무렵에 높은 값으로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봄철이 끝나갈 무렵 농사가 한창일 때 억지로 배당하며 돈을 징수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전이나 군교(軍校)를 나누어 보내 경중(輕重)을 비교해 계산한 뒤, 이미 갚은 돈을 퇴짜 놓기도 하고 팔았던 곡식을 도로 취소하게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백성들만 피해를 보게 되는데 나라의 법과 기강이 훼손되고 듣기에도 수치스럽기만 한 일이니 정말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산촌(山村)의 산물과 해변의 산물을 서로 바꿔 폭리를 취하지 못하게 하라고 연전에 금령(禁令)을 내려 단속했습니다만 그 금령도 세월이 흘러가다 보면 느슨해지기가 쉬운 법입니다. 따라서 높은 값을 매기고 억지로 배당하는 등의 각종 잘못된 풍조 역시 일제히 통쾌하게 개혁할 수 있으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올해 각 지역이 다행히도 조금 풍년이 든 상황에서 백성들을 보살펴 주는 정사로는 그들을 동요시키지 않게끔 하는 것이 제일일 것이니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단속하는 일을 바로 이때에 해야만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경외의 아문을 막론하고 모곡을 내다 팔 때에 혹시라도 예전의 잘못을 답습함으로써 스스로 중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제도(諸道)에 엄히 신칙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초기(草記)가 체례(體例)상으로 매우 타당함을 얻었으니 백성에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먼저 경외에 엄히 신칙하라. 그리고 바로 조지(朝紙)에 반포함으로써 각각 이러한 법령을 잘 알고서 감히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11월 26일 경진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과 각신(閣臣)과 예당(禮堂)을 소견하였는데, 대신이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 등이 아뢰기를,
"오늘은 바로 동짓날로써 온 나라 사람들이 똑같이 축원하는 정성을 표하고 있으니, 원자궁(元子宮)을 책봉하는 예식 문제에 관해 기필코 오늘 승락을 받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이렇게 요청하는 것도 물론 당연하다만 생각건대 아조(我朝)의 열성(列聖)들께서 서로 계승하여 찬란한 업적을 쌓아 오신 지 어언 4백여 년이 되어 오니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는 오직 예전에 해오던 대로 따라야만 하리라고 여겨진다.
열조(列朝)가 책봉될 당시의 의문(儀文)을 두루 찾아 보아도 상고하여 근거로 삼을 만한 것으로는 단지 숙묘조(肅廟朝) 때에 행해졌던 예(禮)가 있을 뿐이다. 대체로 열조가 책봉된 예를 보면 대부분 어린 나이에 이루어졌었는데, 숙묘조의 경우는 나이 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책봉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래서 그때의 의문이 바야흐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 역시 8세가 되어서야 책봉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근본적으로 영구하게 되기를 기원하려면 역시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난해에도 이러한 뜻을 경들에게 이미 언급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늦으면 늦을수록 좋겠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그렇게 한 번 행하면 세 가지가 좋아질 것이라는 뜻도 일찍이 언급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가령 관례(冠禮)나 가례(嘉禮)의 경우는, 자전(慈殿)이나 자궁(慈宮)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하는 도리로 볼 때 명년을 넘기기 어려운 점이 있는 만큼 책례(冊禮) 이전에 먼저 행하는 것이 참으로 좋겠다마는, 이미 국조(國朝)에 근거할 만한 예가 없는 이상 그것도 용이하게 의논할 수가 없다.
기억하건대 옛날 선조(先朝) 때 나의 가례를 행할 적에 오직 책빈(冊嬪)하는 날만 친림(親臨)하셨을 뿐 그 외에는 모두 권정례(權停禮)279)  로 행하게 하셨으니 나도 이 고사를 우러러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같은 절목(節目) 사이의 일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렇게 따라야 마땅한데, 하물며 큰 의문(儀文)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늘 경들이 이렇게 요청한 것도 물론 당연하다 하겠다만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나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오히려 너무 빠르다는 느낌이 든다. 오늘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역시 자전과 자궁께 아직 품할 때가 못 된다고 하겠으니, 내년이나 내후년쯤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이것은 신들이 올리는 말씀일 뿐만이 아니고 온 나라 백성들이 똑같이 축원하고 있는 일입니다. 일단 내년에 생각해 보겠다는 하교를 받들었으니 우러러 기다리는 것이 물론 마땅하겠습니다만, 만약 내후년으로 미루어진다면 또 어떻게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오늘은 바로 아세(亞歲)280)  입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진심으로 손을 모으고 학수 고대하는 것은 오로지 오늘의 요청을 허락받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어찌 굽어살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예조 참판 이조승(李祖承)이 아뢰기를,
"오늘 요청드리는 것이야말로 온 나라 백성들의 똑같은 심정이라 할 것이니, 오직 원하건대 속히 유음(兪音)을 내려 주소서."
하고, 검교 제학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신들도 어찌 신중하게 처리하시려는 성상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오늘 들어서는 더욱 뭇 사람들의 축원하는 마음이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삼가 하교를 받들었으니 전혀 승락을 받지 못하는 경우와는 차이가 있으나 그래도 아랫사람의 심정은 허전하기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책례(冊禮)는 우선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혼례(婚禮)를 금지시키는 것과 관련, 삼가 열조(列朝)의 고사를 상고해 보니, 1, 2년 전부터 금지시킨 예가 있었다. 지금 가례에 있어서도 서둘러 하는 대신 늦게 하려고 하는 것은 또한 그것이 의문(儀文)과 관계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입학(入學)시키는 것은 관례(冠禮) 전후로 어느 때나 안 될 것이 없지마는 관례를 행한 뒤에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혼례를 금지시키는 일이야말로 응당 행해야 할 전례인데 아직껏 하지 않고 있다니 너무 늦었습니다. 먼저 명령을 내려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문제도 우선 기다리도록 하라. 그리고 물러가 근거할 만한 과거의 사례를 상고한 뒤 다시 품할 때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오늘의 하교야말로 이미 유음을 받든 것과 다름이 없는데, 아직도 분명한 분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신들의 심정은 실로 허전하기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얼마나 큰 전례(典禮)인가. 그런데 정승 중에 영의정의 자리가 아직 비어 있고 예당(禮堂) 역시 인원이 따로 구비되지 않은 상태인데 어떻게 허술하게 의논해서 정할 수 있겠는가. 내년도 물론 좋지만 그 다음해도 좋다. 내가 다시 생각해 볼테니 경들은 우선 물러가 기다리도록 하라."
하자, 민시가 아뢰기를,
"내년까지 미루는 것만도 이미 충분히 신중을 기한 일이라고 할 것인데 또 어떻게 다시 내후년까지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대(靈臺)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는 것은 또한 분(分)281)  ·지(至)282)  ·계(啓)283)  ·폐(閉)284)  가 되는 날에 하는데 오늘 날씨가 매우 좋다고 하겠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입시한 아당(亞堂)285)  의 일은 참으로 희귀한 경우라 하겠다. 임신년286)  에 내가 원손(元孫)으로 정해질 때 이 아당의 증조가 승지로 있으면서 전교를 썼고, 기묘년287)  에 책봉될 때에는 또 도제거(都提擧)로 있었다. 이 아당은 또 승지로 있으면서 경술년288)  에 원자(元子)의 호(號)를 정할 때 전교를 썼는데 지금 또 청대(請對)하는 일에 입시하고 있으니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를 계기로 생각해 보건대 이 아당이 고(故) 정승의 증손이고 보면 나도 벌써 4대(代)에 걸쳐 인물을 보는 셈이다.
이번에 새 달력이 나온 김에 내 나이를 계산해 보았더니 어느새 49세나 되었다. 열성조(列聖朝)께서 기사(耆社)289)  에 들어가셨던 연세를 살펴보면 국초(國初)290)  에는 70세였고 숙묘조(肅廟朝)는 59세였고 선조(先朝)의 경우는 51세였다. 이미 선조의 고사가 있고 보면 이 뒤에 제신(諸臣)이 또한 그 예를 원용(援用)하여 청할 것이 뻔하다마는, 어버이 앞에서는 노인 행세를 하지 못하는 의리로 볼 때 역시 그런 대접을 감히 앞당겨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 경사스러운 예식을 행할 해까지 조금 기다리는 것이 실로 나의 뜻에 부합되기에 경들도 미리 알아두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신들이 청대하여 들어올 때에 반열에 있던 재신(宰臣)들이 유음을 기다린 것이야 원래 말할 것도 없고 아래로 여대(輿儓)의 하천배들까지 모두들 쳐다보며 신들이 승락받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들이 어떻게 승락도 받지 못한 채 앞질러 물러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고 경들의 요구도 정당하다. 나의 의도는 오로지 신중을 기하려고 하는 것이니 경들은 우선 물러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참판 이조승(李祖承)을 특별히 발탁하여 예조 판서로 삼았다.

 

11월 28일 임오

이조가 경전(經傳)과 주서(朱書)를 전공한 송치규(宋稚圭)·조진구(趙鎭球)·오희상(吳熙常)을 아뢰어 천거하였다.

 

11월 29일 계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선혜청 제조 김문순(金文淳)과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호서(湖西)에서 두 번째 조운(漕運)한 배에 관한 일을 조사해 보건대, 공주(公州)에서 2척(隻), 이성(尼城)·은진(恩津)·덕산(德山)·서산(瑞山)에서 각각 1척씩 모두 정박한 지 3개월 뒤에야 비로소 실어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서산의 경우는 기일에 앞서 영문(營門)에 일일이 기록해서 보고했다고 들었으니 다른 읍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만, 그 밖에 잘못이 드러난 수령에 대해서는 잡아다 신문하면서 엄하게 단속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성과 홍산(鴻山) 두 고을의 경우는 실어서 보낸 뒤에도 지체시키는 결과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기강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왕도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경계를 바로잡는 정사를 펴는 것은 백성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요, 백성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는 또한 그 공물(貢物)과 부세(賦稅)를 균일하게 해 주는 길밖에 없다 할 것이다.
공(貢)과 부(賦)의 명칭은 하우(夏禹) 때의 공법(貢法)과 은(殷)·주(周) 때의 조법(助法)·철법(徹法)에서 비롯된다. 토지의 소출과 관련된 것을 부라고 하니 지금의 전세(田稅)가 이것이고, 그 땅의 특성에 맞는 산물을 바치는 것을 공이라고 하니 지금의 대동(大同)이 이것이다. 공물과 부세를 공평하게 해 준 뒤에야 백성들이 비로소 풍년엔 종신토록 배불리 먹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할 수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위로 어버이를 모시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게 하며 선한 일엔 상을 주고 악한 일엔 벌을 주는 정사를 또한 그 사이에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일단 넉넉하게 해 주어야 착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라에서 소중히 여겨야 할 바로서 이보다 더 큰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공부(貢賦)라는 명칭을 붙여놓고는 이런 식으로 범법 행위를 하면서 심지어는 민간에서 두 번씩이나 거둬들이기까지 하였다 하니, 이렇게 기강과 관련된 일을 어떻게 그대로 놔둘 수가 있겠는가. 대동미(大同米)를 추수 때까지 연기해 준 것만도 특별한 은혜라고 할 것인데 추수 때까지 연기시킨 것도 모자라서 10월 그믐까지 지체시켰는가 하면 전세(田稅)마저 9월까지 끌었으니 이것이 어떻게 말이 되겠는가.
돌아 보건대 지금 크고 작은 폐단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두가 기강이 해이해진 탓이다. 현재 날씨를 예로 들더라도 추워야 할 때 덥고 눈이 와야 할 때 비가 내리고 있는데, 꼭 무슨 일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끌어다 붙여 이야기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작은 일들이 쌓여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보면, 기강이 해이해진 그 결과가 또한 어쩌면 이러한 곳에 징험된 것은 아니겠는가.
어떤 조정이든 기강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적발해 내지 못했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적발해 낸 이상에는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가운데에서 정도가 심한 자는 유배보내는 형벌을 적용해도 좋고 금고(禁錮)시켜도 좋다. 그리고 아무리 그 정도가 가볍다고 하더라도 엄벌을 면하게 해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창고 곡식을 나이(那移)291)  하는 것에 대해서도 근본을 확립시키는 데에 저촉되는 범죄 행위라 하여 반드시 지극히 엄한 법 규정을 적용하곤 하는데, 더구나 감히 민간으로부터 재차 징수하다니 말이 되는가. 설사 아전들이 농간을 부렸다 하더라도 그 간악한 아전들의 행위를 살피지 않은 것은 또한 명리(命吏)292)  의 책임이다. 비록 뱃사람들이 지체시켰다 하더라도 명리가 이 모양이니 뱃사람들을 또 책망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근래에 이와 같이 징계시키는 법이 온통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먼저 죄상이 뚜렷이 드러난 한두 명을 단연코 용서해 주지 않아야만 비로소 일벌 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다. 경 등 유사(有司)의 신하들이 각자 더욱 두려운 생각을 갖고 혹시라도 기강을 잡는 일을 지나쳐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신하와 임금 모두 영광스럽게 되면서 그 이익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번에 사실 조사를 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분명치 못한 점이 있으니, 오늘 연석의 분부를 토대로 공적으로 관문(關文)을 뛰우거나 사적으로 글을 보내든 간에 신임 방백을 엄히 신칙해서 하나하나 다시 조사하도록 하라. 그런데 서산 고을 수령은 신임 방백을 출두시켜 조사받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일이 자기와 관련이 된다 하더라도 어찌 자수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도신(道臣)의 체모가 중한 만큼 체차시키는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나 만약 참으로 범법 행위가 있었다고 한다면 이를 돌아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리고 전임 방백의 경우도 단속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갇혀 있는 덕산 고을의 수령도 우선 방송(放送)했다가 사실 조사의 결말이 나기를 기다려 함께 율(律)을 적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북진(西北鎭)을 장군파고보(將軍坡古堡)293)  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구익(具㢞)과 북도 병마 절도사 이윤겸(李潤謙)이 장계를 올리기를,
"서북진의 기지(基地)를 보면 지세가 좁고 협소한데다 토질 역시 모래와 자갈로 되어 있어서 씨를 부려 경작해도 수확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며 우물이 없는 관계로 수백 보 밖의 냇물에서 물을 길어 와야 하기 때문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구가 겨우 3, 4호(戶)밖에 되지 않으니 지금 와서 진(鎭)을 옮기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이에 반해 장군파고보는 요새지로 보나 농경지로 보나 물을 길어 와 취사하는 면으로 보나 지금 진의 기지에 비하면 그 이로운 점이 하늘과 땅 차이일 뿐만이 아니고, 또 그 거리가 5리(里)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진을 옮기는 일에 그다지 민력(民力)을 소비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지금 진의 기지에는 고봉(高峰)·서산(西山)·동봉(東峰) 등 세 곳의 봉수대(烽燧臺)가 있는데 모두 진의 뒷산 밖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호를 받아 읍의 봉수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진을 옮긴다면 새로 남산(南山)의 봉수대 하나를 설치하여 서쪽으로는 고봉을 응하고 북쪽으로는 동봉을 응하고 동쪽으로는 최세봉(崔世峰)을 응해 신호를 받은 뒤 읍의 봉수대로 전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경우 서산의 봉수대는 겹쳐 설치한 결과가 되는 만큼 이 서산의 봉수대를 없애고 저 남산의 봉수대를 설치한다면 봉군(烽軍)의 인원을 더 늘려야 하는 폐단도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복주(覆奏)하기를,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의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요새지의 형편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옮기자고 의논하는 일은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만 사세(事勢)를 논한다면 변통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이시수(李時秀), 병조 판서 이재학(李在學), 장신(將臣) 신대겸(申大謙)·이한풍(李漢豊) 등이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겠다고 하니, 따랐다.


 

 

 

평안도 절도사 이유경(李儒敬)이 비변사에 보고하기를,
"창성(昌城)의 당아 산성(當峩山城)이야말로 요새지로는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그런데 당초 성을 쌓을 때 북쪽 방면의 7백여 보 되는 지역을 미처 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끝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탄식을 하곤 합니다. 본성(本城) 향곡(餉穀)의 모미(耗米) 6백 석(石)을 확보해서 내년 봄에 축성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주하여 허락해 주도록 청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하교하였다.
"군서(群書)의 표기(標記)가 이제 완성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어찬(御撰)을 찬술토록 명하는 것인데 책들을 분류하여 연도 별로 수록해야만 뒷날 상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교를 내각(內閣) 검교(檢校)의 두 직각(直閣)인 서영보(徐榮輔)와 심상규(沈象奎)에게 교부하여 우선 담당하도록 하라. 그리고 만약 외방에 보임되거나 나이가 많이 들어 후임자를 임명할 때에는 품지(稟旨)하여 차출하되 간행을 감독하는 각신(閣臣)의 예에 따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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