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을유
전 공조 판서 이치중(李致中)을 잉임(仍任)시켰다.
12월 3일 병술
충헌공(忠憲公) 서명선(徐命善)의 아들을 이번 정사(政事)에서 고을 수령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관의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명하였다. 각신(閣臣)을 문충공(文忠公) 김종수(金鍾秀)의 집에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윤광보(尹光普)를 이조 참의로, 이조승(李祖承)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전(前) 도사(都事) 원유붕(元有朋)이 공초(供招)하기를 ‘모친상을 당하여 원주(原州)에 산소를 정했는데 황이대(黃二大)가 야음을 틈타서 제멋대로 무덤을 파내었으므로 자식된 입장에서 그 애통한 마음을 어디 가서 풀 길이 없었다. 그런데 본주(本州)의 아전과 군교(軍校)가 황가(黃哥)와 부화 뇌동하여 변을 일으켰다는 말이 들리기에, 아전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황효자(黃孝子)의 뛰어난 행실이야 그 누가 우러러 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너희들이 어떻게 이 사우(祠宇)와 정문(旌門)을 믿고서 전에 없던 괴이한 짓을 차마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더니, 아전들이 겁을 먹은 나머지 헐어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법 규정대로 엄히 처벌토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우선 당사자에 한하여 유배를 보내고 이와 함께 금고(禁錮)시킴으로써 진신(搢紳)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원유붕을 부령부(富寧府)로 유배하였다.
12월 5일 무자
이병정(李秉鼎)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8일 신묘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요즘 일과를 정해서 새로 간행된 《춘추(春秋)》를 읽어 왔는데 오늘에야 겨우 끝났다. 그런데 자궁(慈宮)께서 내가 어렸을 때 책씻이[冊施時] 【우리 나라 풍속에 아동이 독서하다가 책을 다 떼면 그 부모가 음식을 차려놓고 기쁨을 표시하는데 그것을 책씻이라고 한다.】 하던 일을 생각하시고 음식상을 마련해 주셨기에 경들과 함께 맛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니,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축하하였다. 상이 어제(御製)를 써서 내리며, 입시(入侍)한 신하들 및 《춘추》에 구두를 달거나 감독하며 간행하는 일에 참여한 신하들과 상이 동궁으로 있을 때의 춘방(春坊)294) ·계방(桂坊)295) 의 신하들 모두에게 화답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12월 11일 갑오
《제중신편(濟衆新編)》이 완성되었다.
상이 세자로 있을 때 10년 동안 약시중을 들면서 아침 저녁으로 끊임없이 연구했던 것은 진맥(診脈)에 대한 비결과 탕약(湯藥)에 대한 이론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를 계기로 널리 의술(醫術)의 이치를 탐구하여 위로는 《소문(素問)》과 《난경(難經)》으로부터 아래로 역대의 모든 처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골고루 열람하였다.
본조(本朝)의 의학 서적으로는 오직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 가장 상세하다고 일컬어져 왔으나 글이 번거롭고 내용이 중복되는가 하면 소홀히 다루거나 빠뜨린 부분이 또한 많았다. 이에 상이 여기에 교정을 가하고 범례(凡例)를 붙여 《수민묘전(壽民竗詮)》 9권(卷)을 만들어 낸 다음 다시 내의원에 명하여 여러 처방들을 채집해서 번잡스러운 것은 삭제하고 요점만 취한 뒤 경험방(經驗方)을 그 사이에 첨부해서 세상에 유행시킬 수 있는 책 1부(部)를 따로 편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에 걸쳐 원고 수정 작업을 계속해 오다가 상이 즉위한 지 24년이 되는 때에 이르러서야 책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원편(原編)이 8권이고 목록(目錄)이 1권으로서 풍(風)·한(寒)·서(暑)·습(濕)으로부터 약성가(藥性歌)에 이르기까지 모두 70목(目)으로 되어 있었는데, 1목(目)마다 먼저 진맥에 대한 비결과 증세를 서술한 다음 합당한 처방과 약제를 붙여놓음으로써 멀리 외딴 시골에 사는 백성들까지도 한 번 책을 보기만 하면 환히 알게끔 하였다. 그리고는 그 책의 이름을 《제중신편》이라 하고 주자소(鑄字所)에 넘겨 간행해서 반포토록 하는 한편 내의원 도제조인 이병모(李秉模)에게 서문(序文)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12월 12일 을미
충헌공(忠憲公) 정홍순(鄭弘淳)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는 날 제사를 지내 주도록 명하였다.
12월 13일 병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그저께 밤의 날씨는 참으로 이상한 것이었다. 내가 즉위한 지 지금 23년이 되는데 그 동안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해 놓은 것이 실제로 없기 때문에 늘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운 심정이 들 뿐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바 ‘걱정하며 애쓴다.296) [憂勤]’는 두 글자를 내가 늘 가슴속에 간직하며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응답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따를 방법을 강구해 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절기(節期)를 보면 바로 양(陽)의 기운이 회복된 뒤인데도 천둥과 번개가 치는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비록 10월에 일어난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천둥치며 번개치는 것이 무더운 여름철과 다름이 없으니 한때의 걱정거리로 그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심정은 두렵고 떨리기만 할 뿐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다.
모르겠다만 사람이 한 일 중에 무슨 잘못이 있어서 하늘이 이처럼 절급하게 경고해 주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지금 경들이 대궐로 들어와 반열에 참여하게 된 것으로 인하여 날이 밝기도 전에 옷을 갈아 입고서 해가 뜨자 바로 인견(引見)하게 된 것이다. 내가 이처럼 정신없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애쓰며 가다듬는다[勤勵]는 두 글자에 입각하여 조금이라도 스스로 면려하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하니,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연석(筵席)에서 이처럼 간절하게 하교해 주셨으니 순음 지월(純陰之月)297) 에 일어난 변고라도 필시 감응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양의 기운이 회복된 뒤이니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되돌릴 방법이 어찌 더더욱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최근 몇 년 동안을 보면 겨울철 날씨가 대체로 지나치게 따뜻하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추워야 할 때 춥지를 않아 이처럼 계절의 질서를 잃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정력을 쏟으며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부지런히 일해 나갈 수만 있다면 혹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따뜻한 날씨를 추운 날씨로 전환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정력을 돌아보건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겠는가. 나를 바로잡아 주면서 보좌할 책임은 전적으로 경들에게 있다.
옛날에는 경재(卿宰) 한 사람이 정성과 정력을 기울여서 재변을 소멸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오늘 경들과 연석에 참여한 여러 재신들 모두 옛날 경재가 기울였던 정성과 정력의 20분의 1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 이를 합쳐 한마음으로 만들기만 한다면 옛사람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재변을 해소시킬 방법이 없다고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난 무술년에도 겨울철이 무척 따뜻했었는데 그때에는 겨울철이 따뜻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조정에 침묵만을 지키는 풍조가 이루어져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그리고 재자관(齎咨官) 편에 듣건대 저쪽 청(淸)나라 땅은 눈[雪]으로 길이 막혀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 한다. 이를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겨울철이 지나치게 따뜻한 것은 우리 나라에만 있는 현상이라고 할 것이니 어찌 더욱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거백옥(蘧伯玉)은 옛날 훌륭했던 하나의 대부(大夫)에 불과했는데도 오히려 49세가 될 때까지 매년 자기의 잘못을 알았었습니다. 그러니 더구나 대 성인의 입장에서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면려하는 공부를 함에 있어 어찌 혹시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교하시는 가운데 우리 나라만 그러하다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그야말로 그지없이 흠앙하고 찬탄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재이(災異)가 나타날 때마다 문득 ‘하늘이 경고해 주시는 것이 오직 우리 나라만 그러하다.’고 하시면서 애쓰고 가다듬을 생각을 갈수록 더욱 간절하게 지니시고 정사 하나하나에 대해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행해 나가신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재이의 해소책은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20년을 하루같이 걱정하고 애쓰시면서 밤이나 낮이나 홀로 위에서 수고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신처럼 형편없는 자가 정승의 자리를 메우고 있으면서 성상의 뜻을 받들어 도와 드리는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한 채 늘 몸을 움츠리고만 있으니, 이처럼 절기에 어긋난 기후는 모두가 신들이 차지해서는 안 될 자리를 외람되게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먼저 신처럼 형편없는 자부터 배척하여 물리치도록 속히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스스로 인혐(引嫌)한 것은 필시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그러나 경들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허물이며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나 한 사람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故) 정승채 판부(蔡判府)298) 가 일찍이 ‘바른 사람을 쓰고 부정한 사람을 쫓아내야 한다.299) [擧直措枉]’는 가르침을 인용하여 나를 경계시키기를 ‘바른 사람을 쓰는 것도 물론 힘써야 하겠지만 부정한 사람을 쫓아내는 것이야말로 더욱 절실한 문제입니다.’라고 하였다. 요즘 들어 기후가 이렇듯 질서를 잃고 있는 것이 혹 거직 조왕(擧直措枉)하는 일을 잘못한 탓으로 위에서 꾸지람을 내리셨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어떤 일을 자세히 궁구하되 그렇게 된 이유를 살피지 못한다면 좋은 타개책도 터득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지금 사람들이 사무를 처리하면서 끝내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점괘를 스스로 풀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시(詩)에 ‘점장이가 점을 쳐 준다.300) ’고 하였는데, 스스로 점을 치지 못하고 꼭 점장이에게 점을 치게 하는 이유는 대개 스스로 그 점괘를 해득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사무를 처리할 때 요령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미치지 못하는 점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필수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점에 공력을 들여 장단점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요령을 파악할 수 있게 된 뒤에야 일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르겠다만 어떻게 해야 사무를 처리할 때 이와 같이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건대 거직 조왕이야말로 절실하고 긴요한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조왕(措枉)하는 정사를 행하려면 마땅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부류부터 착수해야 할 텐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부류로는 신들과 같은 자들이 없습니다."
하고, 환지가 아뢰기를,
"조왕하는 정사가 어찌 상께서 혼자 하셔야 할 일이겠습니까.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그런데도 사시(四時)가 운행된다’301) 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시가 운행되도록 보좌하는 것이야말로 신들의 책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른 자와 부정한 자가 서로 뒤섞여 있고 내쫓고 들어서 쓰는 정사가 타당함을 잃고 있으니, 이는 모두가 신들이 상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스스로 인혐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나 한 사람의 책임이다."
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제로(諸路)에서 금을 채취하지 못하도록 거듭 금지시키는 일에 대하여 후일 주사(籌司)에서 모임을 갖고 충분히 상의한 뒤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금을 채취하지 못하도록 금한 법의 뜻이 본래 엄격한데 요즘 들어 본업(本業)302) 을 버리고 말업(末業)303) 만 따르는 폐단이 생겨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판부(判付)하신 가운데의 분부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말업을 억제시키는 정사야말로 현재 당면한 급선무라고 할 것인데, 억제시켜야 할 말업 중에서도 금을 채취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더욱 급선무라 하겠습니다.
대체로 게을러서 농업에는 종사하지 않은 채 놀고 먹을 계책을 꾀하는 부류들이 떼를 지어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온갖 꾀를 내어 몰래 채취하고 있는데 크게는 기름진 전답을 못쓰게 만들어놓고 작게는 굴을 파 헤치며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리들은 동(銅)이나 은(銀)과 같은 광물을 취급하는 점포에서 광산을 채굴하여 채취하는 것과도 다른 점이 있어 아침에는 이쪽에 모이고 저녁에는 저쪽에 모이는 등 제멋대로 오고 가며 모이고 흩어지는 데에 일정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영이나 고을에서 통렬히 금할 길이 없다고 난색을 표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한 경내(境內)에서 금이 나오는 곳이라고 해야 고작해서 몇 군데밖에 되지 않을 것인데, 고을 수령들이 만약 그 경내를 각자 알아서 제대로 금지시키지 못한다고 한다면, 관의 명령을 도대체 어디에 시행한단 말입니까. 제도(諸道)에 엄히 신칙해서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채 몰래 채굴하도록 방치해 둔 수령에 대해서는 즉각 논죄토록 하고, 사실을 은폐한채 보고하지 않은 도신(道臣)에 대해서는 알려지는 대로 특별히 일벌 백계(一罰百戒)의 처벌을 내려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조가(朝家)에서 농업을 중시하고 말업을 억제시키는 정사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일전에 형조에 판부(判付)하면서 대략 말했었다만 이 일은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이 허가해 줄 것이냐 허가하지 않을 것이냐로 압축된다고 하겠다. 채취를 허가해 준다면 세금을 부과한 뒤 그 물품을 유통시키면 될 것이고 채취를 허가해 주지 않는다면 거듭 금지시키기만 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설령 채굴을 허가해 준다 하더라도 정말 요지 부동으로 깨지지 않을 훌륭한 대책을 마련해 놓아야 할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말업에만 치달리는 풍조가 형성되어 본업에 힘쓰는 것은 수치로 여기고들 있다. 그런데 본업으로 되돌리고 말업은 억제시키는 정사를 펼치려 하면서 한편으로는 농정(農政)에 대한 윤음(綸音)을 반포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대로 방치한 채 놀고 먹으면서 이익을 독점하게 해 준다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할 것이다.
경이 지금 연석(筵席)에서 내가 일단 자문을 구한 기회에 금지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역설하였는데 이는 바로 나의 뜻과 합치되는 것이다. 묘당에서 사도(四都)304) 와 팔도(八道)에 거듭 타일러 관하(管下) 수령들을 엄히 단속토록 함으로써 각각 경내에서 금단하게 하라. 그리고 설혹 감영과 고을에서 영을 내리기 전부터 점포를 차린 곳이 있다 하더라도 일체 혁파해버리고 채굴하는 일에 종사하던 무리들을 농업으로 전환시키도록 하라. 이와 함께 경들 역시 앞으로 어느 정도의 효력이 발생하는지 꼭 살펴보면서 때때로 단속을 가함으로써 거듭 금지시킨 실효가 나타나도록 하라."
하였다.
다섯 명의 아들을 과거에 급제시킨 원최진(元最鎭)에게 쌀을 내려 주고, 유배 중인 아들에게 말미를 주어 설을 쇠게 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아이진(阿耳鎭)305) 에 대해서는 수신(帥臣)이 이미 말하기를 ‘오래 근무하는 자리로 된 뒤 옛날의 폐단들이 제거되어 진(鎭)의 백성들이 안도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 다시 의논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안흥(安興)과 가덕(加德) 두 진에서 발생한 각종 폐단은 모두 고을 수령이 진의 장수를 업신여기고 고을 관속들이 진의 백성들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서 점차 피폐해져 마침내는 지탱하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특히 안흥의 경우는 성을 지키고 군량을 관리하는 일을 다른 곳보다 특히 다르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신(道臣)과 수신이 제대로 단속을 하지 못한 나머지 조정의 명령을 번거롭게 하고 누차 관원의 제도를 고치게 하는 결과를 빚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사체(事體)와 관계가 되는 일이니 먼저 엄하게 도신과 수신에게 신칙하여 체모를 유지하도록 힘쓰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수령이 오래된 명문 출신이고 변장(邊將)이 속량(贖良)된 천인(賤人) 출신이라 하더라도 조정에서는 마땅히 서열이나 작질(爵秩)만을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즘 들어 제도(諸道)에서 이와 같은 폐단이 계속해서 보고로 올라오는데 나라에 기강이 없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설사 이보다 백 배나 되는 폐단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결단코 없애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안흥과 가덕의 경우는 뒤에 자리가 빌 때에 시종(侍從) 문신이나 별군직(別軍職) 무신이나 변방의 관원 경력이 있는 사람 중에서 차출해 보내고, 절제(節制)를 받지 않는 수령이 있거든 곧바로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그 뒤에 다시 오래 근무하는 관리를 차출해 보내다가 그 뒤에 또 문벌이 있는 자를 가려 때때로 보내도록 하라고 전조(銓曹)에 분부하고, 아이진과 고군산(古群山)에도 이 예를 간간이 적용토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경외(京外)에서 올린 전최(殿最)의 계본(啓本)을 개봉하는 날에는 빈대(賓對)하는 일을 중지토록 품하는 것이 규례로 되어 있는데, 특별히 오늘로 앞당겨 정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어제는 대신이 당참(堂參)306) 과 관련된 일로 부좌(赴坐)했었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고, 오늘은 조현(朝見)하러 들어오는 날이기에 그대로 와서 모이도록 하고는 동이 트기 전부터 옷을 갈아입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인견(引見)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첫째로는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백성과 나라를 유익하게 하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즉위한 지 23년이 흐르는 동안 하늘의 마음에 응답하고 백성의 소원을 따라 준 일은 하나도 없이 재이(災異)만 거듭해서 발생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걱정스러운 일들 뿐이다. 계절이 질서를 잃고 있는 것을 보면 하늘이 얼마나 노여워하고 백성들이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지 불을 보듯 뻔하다. 봄철의 어려움은 용사(龍蛇)307) 때보다도 심하였는데, 그런 상황이 겨울철에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지기만 하여 추워야 할 때 춥지 않고 때 아닌 비가 내리면서 가을철 날씨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밤낮으로 전전 긍긍하고 두려워하여 침식(寢食)을 잊어 온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나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면 하늘의 뜻에 성실히 응하여 감동시키는 정성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저께 밤에 천둥과 번개가 치는 변고를 당했는데, 이는 음기(陰氣)가 땅속에 가만히 있어야 하는 이 계절의 현상이 아닌 것이라서 말없이 나의 허물을 헤아려 보았더니 어느 것 하나 나의 죄 아닌 것이 없었다. 그래서 옷을 입은 채 전전반측(轉轉反側)하다가 그대로 새벽을 맞게 되었는데, 바보나 지각이 없는 무지렁이가 아니라면 새벽 바람을 맞으며 전각(殿閣)에 나오게 된 그 본의를 어찌 헤아려 알지 못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색이 사간원의 책임자라고 하는 자가 조현(朝見)하는 반열에 있다가 곧장 자기 집으로 가버렸는가 하면 이를 인하여 아랫 자리의 대간들도 일제히 병을 핑계대고 들어가 버렸으니, 이런 일을 이웃 나라에서 듣게 할 수가 있겠는가 없겠는가.
이웃 나라의 경우는 절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연경(燕京)에 간 사신이나 재자관(齎咨官)으로 다녀 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모두 눈이 쌓여서 통행이 어려울 지경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저쪽에서 내리는 눈이 우리 나라에서는 비로 내리고 있으니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삼사(三司)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양복(陽復)308) 의 계절 전후에는 그런 현상이 보통 있게 된다는 입장만 고수한 채 내가 귀를 기울여 온 3일 동안 한 사람도 매일 수행해야 할 자기의 직분을 제대로 행한 자가 없었다. 그들을 유도하여 말을 하게끔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물론 반성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직분을 각자 극진히 수행해야 할 삼사의 도리로 볼 때 과연 직분을 다 행했다고 해야 하겠는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해야 하겠는가. 저 대사간이란 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빨리도 뛰어 올라 내외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더니 염라 대왕처럼 혼자 잘난 체만 하고 있다.
사람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이 물론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입시(入侍)했던 옥당마저 【옥당은 이귀운(李龜雲)을 말하는데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후손이다.】 일단 나와 지척의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에 대한 일이나 시정(時政)에 관한 일 그리고 백성의 일에 대해서 입을 꼭 다문 채 감히 한 마디 말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가 제신(諸臣)의 뒤를 따라 나가고 말았으니, 선정(先正)이 후손을 잘 두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 백성의 일과 금의 채굴을 금지시키는 일 등 몇 가지의 일을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었기 때문에 무료함을 면할 수 있게는 되었다마는, 소위 삼사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이 직무를 유기한 것은 그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그러나 추고하고 파직시키는 처벌을 내린다 하더라도 이는 그야말로 일깨워주기 위해서 짐짓 행해 보는 처분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니 그런 것은 아예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 대신 그들이 그렇게 한 곡절을 즉시 해방(該房)으로 하여금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물어 아뢰도록 함으로써 잘난 체하는 그들을 조금이나마 일깨워주도록 하라."
승정원이 아뢰기를,
"하교하신 대로 공무를 집행하는 삼사의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행 대사간 김달순(金達淳)은 대답하기를 ‘전일 천둥·번개가 한밤중에 쳤으므로 놀랍고 두려운 마음에 어쩔 줄 모르며 새벽을 맞이했다. 다만 자질이 우둔한 탓으로 자기 소견을 가지지 못한 채 두려워만 하고 마음을 다잡지 못한 가운데 지금까지 끌어오고 말았으니, 분의(分義)로 헤아려 볼 때 어떤 처벌이라도 받아야 할 몸이다. 신은 또 전일 괴원(槐院)309) 의 일과 관련하여 전후로 일을 잘못 처리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그냥 놔두고 논하지 말라는 분부가 대신에게 미치기까지 하였다. 신은 밤낮으로 처벌 받기만을 기다릴 뿐 스스로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집의 조윤수(曺允遂), 사간 박윤수(朴崙壽), 장령 민명혁(閔命爀)·김선(金銑), 헌납 남혜관(南惠寬) 등은 대답하기를 ‘그저께 천둥과 번개가 친 것이야말로 매우 놀랍고 두려운 현상이었는데, 외람되게 언책(言責)을 담당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이 당연히 더 들었다. 그런데도 벌벌 떨기만 하고 마음을 다잡지 못한 채 시일만 보내면서 바로잡을 한 마디 말씀도 드리지 못했으니 황공하여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응교 이귀운(李龜雲), 부교리 조득영(趙得永)·김이재(金履載), 수찬 남이익(南履翼)·조석중(曺錫中), 부수찬 박종순(朴鍾淳)·김희주(金熙周)는 대답하기를 ‘신들이 외람되게 경악(經幄)의 논사(論思)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마침 천둥과 번개가 한겨울에 일어나는 현상을 접하고서도 최소한의 언책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였고, 특히 신 귀운은 빈대(賓對)하는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했으면서도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성상의 분부를 삼가 받들건대 두려워하며 조력을 구하시는 덕의(德意)가 언외(言外)로 흘러 넘치면서 곡진하게 깨우쳐 주고 꾸짖어 주셨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신들의 죄를 더욱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은 말하지 말 일이다. 그런데 어느 일이건 각각 그렇게 행해야 할 격례(格例)가 있는 것이고 보면, 원래 한두 명의 대각이나 옥당의 신하가 자기 하나만의 의견을 가지고 파격적으로 할 수도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대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관원이고 논사(論思)하는 직책을 지닌 사람이라고 한다면 무슨 말인들 못할 것이 있으며 어느 때인들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번에 물어서 아뢴 것을 보건대, 감히 격식을 어길 수가 없어서 생각이 있어도 제대로 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편벽된 말을 들으면 어디에 가려져 있는지를 알고 회피하려는 말을 들으면 어디에 논리가 막힌 것인지를 안다’310) 고 한 말은 오늘날의 삼사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성인께서 어찌 우리를 속여 그렇게 말씀하셨겠는가.
합계(合啓)하는 격식을 보면 삼경(三更)이 되기 이전에는 으레 계사(啓辭)를 전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관원들이 모두 대청(臺廳)에 모였을 때에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거리낌없이 논하게 하고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와 관련하여 또 신칙할 사항이 있다. 일단 합계라는 이름을 붙인 이상 단지 대간 한 사람만 들여보내 계사를 전하게 하는 것은 고례(古例)와 완전히 어긋난다 하겠다. 심지어 장관(長官)의 경우는 차대(次對)하는 때를 제외하면 요즘 대청에 나아가지를 않고 있다. 조정의 법도가 요즘 편리할 대로 하는 대간들 때문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이 또한 너무도 한심한 일이 아닌가. 앞으로 장관은 감히 병을 핑계대지 말라고 양사에 엄히 신칙하는 동시에 해방(該房)으로 하여금 고사(故事)에 기재토록 하라."
하였다.
12월 14일 정유
좌의정 심환지(沈煥之)와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려 견책을 내려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연석(筵席)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상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뿐더러 나와 경들이 성실한 자세로 면려시켰고 보면 반드시 실효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진하게 남은 뜻이 다시 뭐가 있기에 스스로 인혐하는 차자를 또 올린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한다면 다만 전례에 없는 특별한 예를 따로 내놓아야 할 텐데 그러면 한갓 번거로운 결과만 야기시키는 데에 그치고 말 것이니 이는 참으로 경들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일단 차자를 올렸으므로 어쩔 수 없이 비답을 내리게 되었는데, 경들은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5일 무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대한 친시(親試)와 선전관의 사강(射講)311) 과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각사(各司)의 구임(久任) 낭청을 소견하였다.
신대영(申大偀)을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16일 기해
상재생(上齋生)으로 응제(應製)한 사람 중 우등(優等)한 자들의 비교(比較)를 행하였다. 진사 윤행철(尹行澈)이 수석을 차지하였는데 태학(太學)에서 천거하는 고사를 적용하여 벼슬에 임명하라고 승전(承傳)을 내렸다.
이조 참판 이서구(李書九)를 잉임(仍任)시켰다.
이조승(李祖承)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19일 임인
조상진(趙尙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20일 계묘
하교하였다.
"이 재신(宰臣)은 외방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아경(亞卿)의 등급에 머물러 있다. 도총관(都摠管)의 자리가 비었으니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경일(李敬一)을 의망(擬望)해 들이도록 하라. 결코 그냥 버려 둘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특별히 북청(北靑)에 있는 이명연(李明淵)을 그 후임자로 삼되 숙명(肅命)하고 난 뒤에 부임시키라고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에게 하유하라."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 이조 판서 서용보(徐龍輔), 참판 이서구(李書九), 참의 윤광보(尹光普), 병조 판서 이재학(李在學)이 참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24면
【분류】인사(人事)
김굉(金㙆)을 요속(僚屬)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한 번만 보고서도 그 마음가짐을 알 수가 있었는데, 그 뒤에 상소한 것을 보아도 어느 경우고 간에 주자(朱子)를 인용하곤 하였으니 실제로 공부한 것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비답을 통해 칭찬하며 장려하였고 또 연석에서도 누차 분부하면서 그를 대우해 중앙 관서로 옮겨 주려 했었다. 그런데 또 두 대신의 말을 듣고 보니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알겠다. 그를 요속에 임명하는 것을 계하(啓下)하고, 역마(驛馬)를 태워 상경시키라고 이어서 하유하라."
하였다.
이성묵(李性默)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서매수(徐邁修)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21일 갑진
규장각이 어제(御製) 선사본(繕寫本)을 올렸다. 세자로 있을 때부터 기미년312) 까지의 어제를 4집(集)으로 나누고 30목(目)으로 분류해서 정리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시(詩) 5편(編)·서(書) 1편·서인(序引) 4편·기(記) 3편·비(碑) 3편·지(誌) 1편·행록(行錄) 1편·행장(行狀) 1편·제문(祭文) 8편·윤음(綸音) 4편·교(敎) 7편·돈유(敦諭) 3편·유서(諭書) 3편·봉서(封書) 3편·비(批) 5편·판(判) 3편·책문(策問) 5편·설(說) 1편·논(論) 1편·찬(贊) 2편·잠(箴) 1편·명(銘) 4편·송(頌) 1편·잡저(雜著) 7편·강의(講義) 56편·유의 평례(類義評例) 2편·고식(故寔) 6편·심리록(審理錄) 25편·일득록(日得錄) 19편·군서 표기(群書標記) 5편 등 모두 1백 91편이었다.
규장각을 처음 설치할 때부터 각신(閣臣)이 어제(御製)를 모아서 정리하는 법을 정해 놓았는데, 서호수(徐浩修)가 이를 실제로 주관하면서 의례(義例)를 세우고 편차(編次)를 분류해 놓았었다. 무오년313) 가을에 호수에게 명하여 이만수(李晩秀)·김조순(金祖淳)·이존수(李存秀) 등과 함께 선사(繕寫)하는 작업을 감독하게 했었는데 겨우 수십 편을 끝낸 상태에서 호수가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해에 서영보(徐榮輔)에게 명하여 계속 편집하면서 베낀 것을 교정하게 하였는데 정대용(鄭大容)·심상규(沈象奎)·김근순(金近淳) 등이 교정 작업을 분담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2본(本)의 선사(繕寫) 작업이 완료되었으므로 각신이 이를 받들고 합문(閤門) 밖으로 가서 바치게 된 것이었는데, 1본을 대내(大內)에 보관하고 1본은 이문원(摛文院)에 보관하게 하였다. 각신에게 상을 주었는데, 호수에게는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고 영보에게는 말[馬]을 하사하였으며 나머지 모두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가 상차하여 《흥왕조승(興王肇乘)》 4편(編)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건너 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뉘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상으로 말하면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반반을 차지했고 그 풍속으로 말하면 중국과 오랑캐의 것이 서로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제(齊)나라와 가까웠고 성수(星宿)를 보면 기성(箕星)과 두성(斗星)의 분야에 해당되었는데, 옛적에 단군께서 나라를 일으키신 때는 도당씨(陶唐氏)314) 때와 일치하고 기자께서 봉해지신 것은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체로 그 풍토가 중국과 서로 비슷한데다 중국의 교화를 점차로 입게 된 결과 의관(衣冠)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고 문자도 오랑캐의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혹은 소중화(小中華)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왜가리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깃을 다는 저 오랑캐의 풍속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다만 왕씨(王氏)315) 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말갈(靺鞨)과 국경을 접하고 몽고족(蒙古族)인 원(元)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예교(禮敎)가 일으켜지지 않고 윤기(倫紀)가 밝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치고 찌르는 것을 능사로 삼아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단군과 기자께서 남겨주신 풍도를 까마득히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크게 열리고 운세가 밝게 트이면서 아조(我朝)가 일어났습니다. 이때는 마침 황명(皇明)이 중원의 판도를 새로 장악해 나가던 시기였는데 우리의 국호(國號)를 내려주고 면복(冕服)을 하사하는 등 내지(內地)의 나라와 동일하게 대우해 주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덕을 합쳐주고 귀신과 사람이 모두 도와주는 상황을 맞이하여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질을 갖추시고 천년에 한 번 있을 운세를 당하여 남쪽 지방과 북쪽 지방을 정벌하심으로써 삽시간에 삼한을 통일하셨습니다. 이렇게 왕업(王業)을 일으켜 후대에 물려주고 대경(大經) 대법(大法)을 확립하여 시행케 하는 한편 불교나 도교와 같은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선왕(先王)의 위대한 법도를 펴게 하자 문물 제도가 상(商)나라나 주나라 때보다도 빛나게 되면서 그 명성이 온 누리에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구(琉球)에서 조공(朝貢)을 바쳐 오고 섬라(暹羅)에서 귀순해 오는가 하면 올량합(兀良哈)과 원료준(源了浚) 같은 족속들까지도 서로 이끌로 와서 지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발해(渤澥)316) 와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를 다 차지하였으며, 귤과 유자 같은 과실이나 담비와 표범 같은 희귀한 가죽들도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잇따라 실려오곤 하였습니다. 어염(魚鹽)의 풍족함이 오(吳)나라나 초(楚)나라와 겨룰 만하였고 견사(繭絲)의 이로움도 제(齊)나라나 노(魯)나라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함께 예악(禮樂)이 행해지고 교화가 융성하게 펼쳐져서 집집마다 제사지내는 풍조가 이루어지고 어린 아이들도 시서(詩書)를 암송하는가 하면 말몰이꾼이나 양치기들까지도 삼년복(三年服)을 입을 줄 알고 부엌에서 시중드는 여종이나 밥짓는 아낙네들도 다시 시집가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우리 동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로서 기자 성인께서 펼치신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교화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행해지게 된 것이니, 아, 정말 성대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근본이 없이 된 것이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예로부터 제왕이 천명(天命)을 받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 윗대에서 덕을 쌓아 신령스러운 기운이 길러지고 선한 일을 하여 상서로움이 내려지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반드시 천명을 내려주어 후손을 창성하게 해 주는 것이니 이는 마치 높은 산과 큰 강물에 밑둥이 있고 근원이 있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가 각각 설(契)과 직(稷)에서 근본했던 것을 경서(經書)나 사서(史書)를 통해 알 수가 있는데, 우리 나라의 조상으로 말하면 멀리 신라 때의 사공(司空)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빛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계속 자손이 번창하여 목조(穆祖) 때에 이르러서는 인의(仁義)를 행하여 왕업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이는 공유(公劉)가 빈(豳) 땅에 거주했던 때의 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익왕(翼王)과 도왕(度王)께서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기면서 부지런히 왕업의 기틀을 더욱 다지셨고, 급기야 우리 환고(桓考) 때에 이르러 선대(先代)의 공적을 크게 드러내시자 민심이 귀의하여 끝내 대업(大業)의 성취를 보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태왕(太王)이 기(岐) 땅으로 옮겼을 때의 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경서에 이르기를 ‘나라가 장차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 갖가지로 뒤섞여 나타난 기이하고도 상서로운 징조들에 대해서 북쪽 지방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전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돌보고 사방의 민심을 살펴본 데에 기인한 것으로서 산천이 신령스러운 현상을 드러내고 신명(神明)이 말없이 도와 준 까닭에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히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만 이렇듯 위대한 사적(事蹟)이 혹 패관(稗官)이나 야승(野乘)에나 보일 뿐 간행된 믿을 만한 서적은 없이 그저 입으로만 서로들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은 나름대로 유감스럽게 여겨 왔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북방 변경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산천을 두루 돌아보면서 왕업을 일으킨 고적(古蹟)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답사하였는데, 마치 풍패(豊沛)317) 고을에 가서 대풍가(大風歌)318) 를 직접 듣는 듯 하염없이 감회에 젖어들었으면서도 신의 자질로는 어떻게 표현하여 드날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곧 이어 또 실록(實錄)을 찬수(纂修)하는 임무를 외람되게 맡게 된 기회에 궁중에 비장(秘藏)된 귀중한 사료(史料)들을 얻어 볼 수가 있었는데, 훌륭한 제도와 문물들은 모두 《보감(寶鑑)》에 실려 있었지만 오랑캐를 물리치고 영토를 개척한 공로 등은 모두가 고려조(高麗朝)의 역사 속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근거로 삼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한 책만은 즉위하기 이전의 사적을 자세하게 기재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책은 전적으로 공적을 노래로 찬송하는 것을 위주로 해서 대요(大要)와 세목(細目)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항목별로 비유를 들면서 멀리 고사(古史)를 인용하는 등 기사체(記事體)와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또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은 관계로 앞뒤의 순서가 어긋나고 세대를 자세히 살피기가 어려워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로서 후세에 전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나름대로 《고려사(高麗史)》 및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개인적으로 뽑아 취집한 다음 연대를 분류해서 관련 사실들을 한데 묶고, 물러가서는 또 《여지승람(輿地勝覽)》 및 《능전지(陵殿誌)》·《송경지(松京誌)》와 개국 초기의 문집들을 널리 상고한 뒤 왕업을 일으킬 때의 사실을 언급한 부분들을 주워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저것을 인용하여 이것을 증명하고 번거로운 것을 삭제하여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항목을 달리하면서도 내용을 일관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오직 책으로 완성되어 간행된 것만을 자료로 택하고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어설픈 기록들은 감히 뒤섞어 넣지 않음으로써 가능한한 근엄하면서도 정밀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사체(事體)가 중해지게 하는 동시에 크나큰 업적을 드러내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3편(編)으로 만든 다음에 분명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북쪽 지방의 고적(古蹟)을 덧붙이고 열조(列朝)의 공적을 기술하여 드날리는 말을 각각 기재하는 한편 그 아래에는 사신(詞臣)이 찬양하며 칭송한 말들을 언급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4편으로 만든 다음에 이름을 《흥왕조승》이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거칠기만 하고 보잘것없이 미천한 신이 어떻게 감히 역사를 기술하는 중대한 일을 의논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관각(館閣)의 관직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 옛날로 말하면 태사(太史)의 직책에 해당되기에 어리석고 망령된 것을 헤아리지 않고 문득 찬술하게 되었으니 참람되게 행동한 죄를 실로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손을 씻고 정성스럽게 재계한 뒤 차자를 올리며 삼가 책을 바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효성을 다해 선인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고 조상의 덕을 정성껏 추모하여 적도(赤島)에 비(碑)를 건립하고 경흥(慶興)의 저택을 기념케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독서당(讀書堂)과 치마대(馳馬臺)와 같은 고적들을 발굴하여 선조의 공적을 선양하는 등 아무리 먼 시대의 것도 모두 드러내 보여 주었으며 심지어는 상산(象山)319) 의 유지(遺址)에까지 모두 비석을 세워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수백 년 동안 미처 행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에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으니, 아,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지금 신이 올리는 책을 보시고 마음속에 느껴지시는 것이 있거든 한가하실 때에 특별히 살펴보도록 하시고 내각에 보관하여 빠진 역사를 보충하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 열조(列祖)께서 계속 쌓아 오신 덕업(德業)과 왕업을 일으킬 때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던가를 그런대로 후세에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선대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켜 후손들을 잘살게 해 줄 계책을 꾀함에 있어서도 늘 이를 생각하며 어긋나지 않게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니, 그러면 만세토록 태평 시대를 누리면서 끝없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상의 공적을 드러내고 선인의 아름다움을 드날린 것으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보다 더 자세한 것은 없는데, 《서경》의 이훈(伊訓)과 무일(無逸) 편은 경계해 주는 것을 위주로 하였고, 《시경》의 현조(玄鳥)와 생민(生民) 편은 전적으로 칭송하며 노래를 부른 것이라 하겠다.
기술(紀述)하는 체재(體裁)로 쓴 삼대(三代)320) 의 기록으로는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 이는 훌륭한 사관(史官)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고, 대체로 볼 때 그 일이 너무도 공경스럽고 그 의리가 지극히 컸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일 따름이다.
아, 우리 국가에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임금들이 계속 뒤를 이으시어 하늘과 땅처럼 빛나게 된 것은 실로 왕업을 일으킨 고장의 성스러운 사적에 기초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드날리는 책 1부(部)를 여태까지 지체시키면서 편찬하지 못한 것은 다만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였지 그럴 겨를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감》을 찬수할 때에도 삼가 열성(列聖) 19인의 큰 계책과 위대한 업적만을 기록했을 뿐 왕업을 일으키기 이전의 일들에 대해서는 기술하지를 못했던 것이었다.
나 소자(小子)는 밤이나 낮이나 선왕(先王)의 마음으로 열조(列朝)의 마음을 추급해 헤아리고 열조의 마음으로 성조(聖祖)321) 의 마음을 체득해 보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하여 옛날에 거하시던 유적지를 기념하고 왕업을 일으킬 때의 상서로움을 드러내어 영원히 자손에게 무궁한 복을 끼쳐 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한두 개의 정민(貞珉)322) 에 새겨서 조금이나마 조상의 덕을 추모하고 은혜를 갚으려는 정성을 표시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경이 《용비어천가》를 근거하고 궁중에 비장된 사료를 뽑아 낸 뒤 연대별로 분류하고 관련 사실들을 한데 묶어 하나의 종합적인 책으로 저술해냈으니, 이것이야말로 옛날 태사(太史)의 직분을 수행한 것이라 하겠다. 경이 올린 《흥왕조승》 2책(冊)을 가져다 경건한 자세로 열람하고 경의 정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내각으로 하여금 이를 간행하여 보관하게 하는 동시에 우리 나라의 보배로 삼게 할 것이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통영(統營)에서 관장하는 별향미(別餉米)를 당초에 설치해 둔 법의 뜻이 매우 중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향곡(餉穀)을 따로 비축해 둠으로써 뜻밖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원곡(元穀)의 모곡(耗穀)이거나 가분곡(加分穀)323) 의 모곡이거나를 막론하고 매년 전량을 원곡에 회록(會錄)함으로써 점차적으로 더욱 비축해가는 도리로 삼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간간이 감영(監營)의 채무를 갚는 데에 쓰도록 8, 9년 동안이나 모곡의 획급(劃給)을 허락해 주고 있으니 이것만도 당초 설치했던 본의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또 기유년324) 에는 통영이 피폐되었기 때문에, 매년 거두어들이는 가분곡의 모곡을 통영에 도로 소속시킨 뒤 10년을 기한으로 그 곡식을 돈으로 바꿔 토지를 매입함으로써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자본으로 충당하게 했었는데, 이것 역시 대체로 어찌할 수 없어 임시 방편으로 나온 정사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유년부터 무오년325) 까지 이미 10년의 기한이 만료되었는데, 그 동안 가분곡의 모곡을 가져다 쓴 것이 3만 11석(石)이고 매입한 둔전이 또한 3백 75석의 종자를 파종할 수 있는 면적입니다.
따라서 농사가 보통 수준으로만 된다고 하더라도 조세(租稅) 수입이 거의 3천 석에 이를 것인데, 이 3천 석 가까운 곡물을 가지고 일체 별향미(別餉米)의 모곡을 가져다 쓰는 예에 따라 해마다 돈으로 바꿔 토지를 매입하게 한다면, 10년을 약간 지나서 거의 1만 포(包)의 곡물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수신(帥臣)이 얼마나 성실하게 행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별향미 가분곡의 모곡을 지금 기미년326) 부터는 다시 가져다 쓰지 못하게 하고 일체 원곡(元穀)에 회록(會錄)토록 하는 한편, 이미 매입한 토지의 조세를 해마다 돈으로 만들어 더 토지를 사들여서 둔전(屯田)을 설치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풍년과 흉년에 따른 조세 실적과 돈으로 바꾼 양을 새로 매입한 토지 면적과 아울러 근래의 규례대로 매년 연말에 일일이 장부로 작성해서 본사(本司)에 보고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해당 수신을 엄히 신칙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변사가 어사(御史)에 적합한 사람으로 조석중(曺錫中)·조득영(趙得永)·김이재(金履載)를 뽑아 아뢰었다.
이한풍(李漢豊)을 다시 훈련 대장에 제수하였다.
12월 23일 병오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이어 재전(齋殿)에서 유숙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밤에 종묘와 사직과 전궁(殿宮)에 납향(臘享)을 행하려 하였다마는 선릉(宣陵)327) 의 기신(忌辰)과 맞물려 모두 직접 행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밤에 재전에서 나와 예식이 다 끝나기를 기다리려고 한다. 그리고 근일 장악원에서 개정한 곡조와 가락을 한 번 들으면서 예행 연습을 해 보려고 하였다마는 재일(齋日)이라서 음악 연주를 할 수가 없으니 제향을 올릴 때 재전의 뜰에 나와 앉아서 예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아울러 자세히 들어보려고 한다. 오늘은 참배한 뒤를 이어 재전에서 유숙하고 내일 대내(大內)로 돌아가겠다. 종묘와 사직에는 승지를 보내 제품(祭品)의 준비 상황과 예식의 의절(儀節)들을 점검하게 하고, 남전(南殿)에는 승지가 적간(摘奸)한 뒤에 와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4일 정미
경모궁(景慕宮)에 납향 대제(臘享大祭)를 행하였는데 섭행(攝行)한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제사지내는 음악을 연주할 때 내가 직접 가서 듣고 싶은데, 행각(行閣)328) 이나 재전(齋殿) 뜰이나 매한가지이니 편리할 대로 내가 행각에 가서 예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겠다. 본궁(本宮)의 제조(提調)가 먼저 가서 위판(位版)을 설치한 다음에 돌아와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시간이 되자 헌관(獻官) 이하가 차례로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서 예식을 행하였다. 신을 영접하는 음악이 연주되자 상이 이르기를,
"승가(升歌)329) 의 곡조가 전에 비해 과연 느려졌다."
하였다. 제향 의식이 끝나자 하교하기를,
"어제 참배하는 예를 행하긴 하였다마는, 지금은 또 날이 바뀌었고 게다가 오늘은 다른 날과도 다르니 예를 행하는 절차가 있어야 마땅하다."
하고, 이어 판위(版位)로 나아가 참배한 뒤 궁문(宮門) 안으로 올라가서 자세히 살피고 날이 밝자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김기상(金箕象)이 치계(馳啓)하였다.
"대국(大國) 사람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나왔기에330) 뜯어 보았더니 ‘차비 역관(差備譯官) 이방화(李邦華)와 재자관(齎咨官) 이광직(李光稷)이 부통(副統) 장승훈(張承勳)의 집안에 개인적인 서신을 보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봉성장(鳳城將)이 함께 보내 온 치통(馳通)331) 1통의 내용은 ‘예부가 패문(牌文)을 보내기를 「조선국에 나아가, 삼가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를 천단(天壇)에 올려 배향(配享)한 것과 관련하여 조칙을 반포하게 할 목적으로, 정사(正使)인 위서(委署) 산질 대신(散秩大臣) 후(侯) 전국영(田國榮)과 부사(副使)인 내각 학사(內閣學士) 겸 예부 시랑(禮部侍郞) 영화(英和)를 파견, 6품(品)의 통관(通官) 왜극경액(倭克經額)과 6품의 통관인 쌍림왜승액(雙林倭昇額)과 품급(品級)이 없는 통사 영보(寧保)를 대동하고, 금년 12월 11일 길을 떠나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삼가 가지고 가는 조서 1통과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 먼저 알려주는 바이다.」고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치통을 자문과 함께 도로 감봉(監封)하여 승정원에 올려 보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치통 1통은 자문을 건네어 보낸다는 내용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예전대로 이곳에 그냥 놔두기로 하였습니다.
이번에 봉성의 장수가 급히 통지해 온 일을 보건대, 칙사와 관련된 패문 한 통이 봉성에 도착하자 단지 이 패문의 내용을 토대로 글을 작성해서 급히 통지 한 것일 뿐, 예부에서 첨부해 보낸 원래의 패문은 처음부터 부쳐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패문의 내용이 어떠한지 그리고 언제쯤 칙사가 나오게 될 것인 지 알아보기 위하여 훈도(訓導) 방세홍(方世洪)을 급히 봉성에 들여 보냈습니다.
그런데 전후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칙사가 길을 떠나 혹 26, 27일이 지나서야 강을 건너 나왔으니, 지금 출발하는 날짜로 계산해 본다면 칙사가 강을 건너게 될 시기가 내년 정월 7, 8일 사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부(禮部)는 황제의 분부를 받든 일을 알려주기 위해 자문을 보냅니다. 주객사(主客司)의 안정(案呈)에 의하건대, 가경(嘉慶) 4년 10월 9일에 내각(內閣)에서 초출(抄出)한 바, 이달 8일에 받든 황제의 분부는 이러하였습니다.
‘금년 정월에 부도통(副都統) 장승훈을 정사로 삼고 예부 우시랑 항걸(恒傑)을 부사로 삼아 조선국에 파견해서 고종 순황제의 유고(遺誥)를 삼가 반포하게 하였었다. 그때 짐(朕)이 장승훈 등을 불러 직접 유시하기를 「이번에 조선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국왕이나 세자를 봉해 주기 위해서 가는 보통 때의 칙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가령 국왕이 선물을 보내 주더라도 사신의 예의상 받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 때문에 장승훈 등이 국왕이 예물을 보내 왔어도 물리치고 받지 않았던 것이며, 다시 국왕이 그전에 고종 순황제로부터 바른 예법에 관해 받았던 유지(諭旨)를 제시하며 보여주었어도 그들이 여전히 받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따르지 않고 사람을 차출해서 이 예물을 싸가지고 압록강 강변에 가서 그 사신들이 가지고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나라에서 예물을 싸서 보내느라 인원들을 먼 길까지 수행시키면서 역참(驛站)만 고달프게 만들었으니 일 처리가 너무도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 일로 장승훈과 항걸을 부(部)에 넘겨 처치하도록 하는 한편, 일이 구차스럽고 잘못된 연유를 국왕에게 알려 주라고 분부를 내렸다.
이와 함께 또 군기 대신(軍機大臣)으로 하여금 그 나라 사신이 잘 알아 듣도록 직접 전유(傳諭)하게 함으로써 국왕 스스로 짐의 뜻을 준수하여 예물을 회수토록 하였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 지 몇 개월이 지나서 그 나라의 차비 역관인 이방화가 사적인 서신을 건네 주며 재자관인 이광직으로 하여금 부도통 장승훈의 집에 전하게 하였다. 장승훈이 이방화의 서신 원본을 바치기에 짐이 서신에 적힌 사연을 살펴보았더니, 전에 싸서 보낸 토산물이 그대로 강변에 있어 지키고 있으니 정말 옳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이방화의 이 서신은 혹 국왕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끝내 자기 멋대로 연경에 가지고 온 것일 수도 있으나, 천조(天朝)의 법령은 삼엄하여 신하가 외교(外交)할 수가 없으니 결단코 감히 속국(屬國) 배신(陪臣)의 서신을 숨긴 채 아뢰지 않아서도 안 되고 또 이미 물리친 토산물을 다시 개인적으로 주고받는 예(禮)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나라 국왕은 이방화와 이광직에 대해 각별히 엄하게 신칙함은 물론 앞으로는 개인적인 서신을 가지고 와서 올리지 못하게 배신을 단속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냥 놔둔 토산물은 즉시 전에 유시했던 대로 준수하여 회수토록 하고 기필코 두 번 다시 귀찮게 하지 말게 해야 할 것이다. 그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겨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이 그쪽에 토착할 경우 국왕은 그냥 고종 순황제의 유지(諭旨)를 경건하게 준수하여 일을 처리함으로써 사대(事大)하는 예를 극진히 갖추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상 초출(抄出)한 황제의 분부가 본 예부에 도착하였기에 자문을 띄워 알리는 바입니다."
정민시(鄭民始)를 관반(館伴)으로, 서용보(徐龍輔)를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사신이 나라 밖에 나가 있을 때 가령 사신의 일과 관련이 있을 경우에는 혹 부득이 예부에 정문(呈文)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적인 서신을 서로 교환하는 것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지극히 엄하게 금하고 있는 것으로서, 전후에 걸쳐 거듭 밝히며 신칙하는 분부를 내렸었고 보면 또 얼마나 엄중한 일이라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자관 이광직(李光稷)은 보잘 것 없는 역관에게 수역(首譯)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는 사적으로 서찰을 작성한 결과 예부의 자문에까지 그 일이 오르게 하였으니 이보다 더 무엄한 일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나라의 금법(禁法)을 다시 밝히고 뒷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심상하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광직을 속히 유사(攸司)에게 내려 우선 사형을 면해 주는 대신 형장(刑杖)을 치고 유배보내는 율을 적용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방화(李邦華)는 비록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지만 일단 그 이름이 자문(咨文)에 오르게 되었으니 역시 혁직(革職)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중국에 가서는 개인적인 서신을 주고받는 폐단이 없게끔 신칙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이노춘(李魯春)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25일 무신
상이 연신(筵臣)에게 일렀다.
"내가 요즘 들어 정치하는 면에서는 점점 볼 만한 것이 없어지면서도 오직 문자(文字)쪽으로는 발전되는 바가 있는 것은 또한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비록 덕이 없긴 하지만 어찌 날마다 훌륭한 사대부들을 가까이 하려고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다만 오늘날의 이른바 훌륭한 사대부(士大夫)라고 하는 이들이 일단 옛날과 같지 못하기 때문에 접견하는 일이 점점 뜸해지는 결과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환첩(宦妾)의 무리에 대해서는 더욱 내가 본래부터 멀리 물리치기로 엄격하게 작정하고 있는 바로서 한가할 때에도 이미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물게 되었고 보면 아침 저녁으로 일과로 삼는 일이 오직 경전(經傳)을 탐구하는 것인데 패관(稗官)·잡기(雜記) 같은 것은 한 번도 눈길을 주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활쏘는 것 만큼은 육례(六藝)의 하나인 동시에 아조(我朝)에서 서로 전해 내려오는 가법(家法)이라 하겠다. 옛날 선조(先朝) 때에는 보령(寶齡)이 칠순이 넘은 뒤에도 친히 모화관(慕華館)에 가시어 활을 쏘아 정곡(正鵠)을 명중시키기까지 하셨다.
당시에 그 활과 화살을 훈련 대장 이장오(李章吾)에게 내려 주셨는데 아마도 그 집에서는 지금까지도 보배로 여기며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의미에서도 활쏘기 연습을 그만둘 수가 없는데 완력(腕力)이 점점 예전과 같지 않아져 뜻대로 되지가 않는다.
올해도 벌써 다 저물었다. 이럴 즈음에는 한 해의 공과(功過)를 따져 보아야 한다는 옛사람의 말이 생각나는데, 내가 지금 한 해를 통틀어 결산해 보건대, 공은 한 가지도 말할 만한 것이 없는 반면에 명령하고 조처한 일 치고 과오로 결산해야 할 일 아닌 것이 없는 형편이다.
거백옥(蘧伯玉)은 나이 50이 되어 49세 때의 잘못을 알았다고 하는데, 이는 꼭 49세를 마감하는 제석(除夕) 때에 와서야 전날의 잘못을 알았다는 말이 아니라 대체로 자기 마음속으로 점검해 볼 때에 반드시 혼자만 깨닫는 묘한 부분이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퍼뜩 깨달아지는 점이 있지를 않으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금년 봄과 여름 사이에 기후가 어긋나 문득 하나의 액운(厄運)을 당했으므로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아도 몸이 마냥 떨려 온다. 그런데 또 여름철에 모진 가뭄이 닥쳐 오는 바람에 계속 애를 태웠는데 다행히도 하늘이 보살펴 준 덕택으로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게 되었다. 그러나 겨울철에 들어와 기후가 지나치게 따뜻해지면서 너무도 비정상적으로 진행되기에 10월에도 다른 재이(災異)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감히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그런데 천둥치고 번개치는 이변이 그만 며칠 전에 일어나고 말았으니 이는 필시 이런 마음이 풀어져서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마치 이부(吏部)에서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것처럼 해마다 나 자신을 점검해 보지만 세월만 덧없이 흐르면서 실제 효과는 까마득히 거두지 못하고 있다. 설령 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 공이 과오를 덮어주지는 못할 것이니, 어찌 두렵고 떨리면서 겸연쩍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이윤겸(李潤謙)을 잉임(仍任)시켰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신구(新舊) 별군직(別軍職)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12월 27일 경술
비국의 유사 당상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칙사(勅使)의 행차 때에는 양서(兩西)의 역마(驛馬) 중에서 달단(韃靼) 계통 종자의 말은 쓰지 않았기 때문에 북관(北關)의 역마를 관서(關西)에 보충해 주고 관동(關東)의 역마를 해서(海西)에 보충해 주었었는데, 올 봄에 달단 계통 종자의 말도 통용하자는 뜻으로 연석(筵席)에서 품하여 이미 행회(行會)하였습 니다.
그런데 방금 황해 감사 박기정(朴基正)이 올린 장계를 보건대, 이번 칙사의 행차 때에 대비하여 관동의 역마를 보충해 달라고 또 청하였습니다. 이전의 칙사 행차 때에 들여보낸 마필(馬匹)의 숫자만 가지고 보더라도 달단 계통 종자의 말을 통용할 경우 각 차비(差備)에게 분배해 주는 말을 제외하고서도 본도의 역마는 아직 60여 필이나 남는데 관동의 역마를 보충해 달라고 다시 청하다니 정말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관북과 관동의 역마를 보충해 주는 규정을 영원히 폐지하는 것이 온당할 듯싶습니다."
하니, 따랐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의 당상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칙사를 맞아들이고 보내면서 다례(茶禮)를 행할 때 매번 인삼차를 쓰고 있는데, 인삼이 진귀한 식품이기는 하지만 일단 늘 마시는 차가 아니기 때문에 그 맛을 알지 못해 거꾸로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곤 합니다.
올 봄에 다례를 행할 때 직접 본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객사(客使)가 찻잔을 받아 들고 한 번 맛보더니 마시지를 않았으니, 그 뜻을 알만합니다. 만약 품질이 좋은 다른 차를 가져다 쓰면 온당하게 될 듯싶으니, 이렇게 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28일 신해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다음해인 경신년 춘등(春等)의 장용영(壯勇營)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구민화(具敏和)를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한용귀(韓用龜)를 부사(副使)로, 유경(柳耕)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사직단(社稷壇)에 기곡 대제(祈穀大祭)332) 를 올리기에 앞서 서계(誓戒)를 행할 때 그 서약하는 글을 읽는 문관으로는 이판(吏判)의 경력이 있는 자를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이조 판서 서용보(徐龍輔)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외방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한 것이었다.
《두육천선(杜陸千選)》이 완성되었다.
상이, 시도(詩道)야말로 정치 교화의 성패에 직결되는데, 근대의 시를 보면 날이 갈수록 낮고 슬픈 음조를 뛰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옛날의 순박했던 시로 되돌릴 방법을 생각한 나머지 이미 주자(朱子)의 시를 뽑아 《아송(雅誦)》을 만들었었다. 그러다가 또 주자가 당대(唐代)에서는 유독 두공부(杜工部)333) 의 시만을 취하였고, 육무관(陸務觀)334) 은 주자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는데도 주자가 그의 시를 평하여 ‘화평(和平)하고 수미(粹美)하여 중원의 태평 시대의 기상이 담겨 있다.’고 인정했다 하여, 이에 이르기를,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옛날 시대의 것을 구하여 백성을 가르치고 풍속을 변화시키려면 두(杜)·육(陸)을 놔두고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두율(杜律)로 오언(五言)과 칠언(七言) 5백 수(首)를 뽑고 육률(陸律)로 오언과 칠언 5백 수를 뽑아 모두 8편(編)으로 만든 뒤 이름을 《두육천선(杜陸千選)》이라 하고, 주자소(鑄字所)에서 간행해 올리게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내려 주었다.
12월 29일 임자
부수찬 김희주(金熙周)가 상소하기를,
"아, 법이 오래되면 폐지되는 것이야말로 이치상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아조(我朝)는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임금들이 대를 이어 나와 문물과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미래 세상을 인도해 준 것이 지극하고 극진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풍교(風敎)가 날이 갈수록 더욱더 해이해지고 기강(紀綱)이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으므로 비록 요(堯)·순(舜)이나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이 나온다 하더라도 이것을 가지고서는 정치를 펼 수 없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법도 오늘날의 문구(文具)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 천하의 일을 보건대 그것이 크든 작든 아니면 사소하든 거창하든 간에 참되지 않고서는 성취되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의 이치입니다. 이 도리에 비추어 볼 때 일단 결함이 있게 되면 만 가지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군신(君臣)간의 관계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평소에 길러 두지 않으시다가 꼭 하루아침에 요구를 해 오시는가 하면, 재이(災異)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구언(求言)을 하지 않으시다가 재이를 당하게 된 뒤에야 구언을 하곤 하시니, 이것이 바로 재이가 거듭 발생하는 원인이고 강직한 말이 들리지 않게 된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근래에 삼사(三司)의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대청(臺廳)에서 전계(傳啓)하게 하신 것에서도 그지없이 은근하게 대해 주시는 뜻을 알 수가 있었는데, 열흘을 제대로 넘기지 못한 채 대청의 자물쇠가 굳게 잠기고 말았습니다.
대신(臺臣)이 아뢰는 말에 대해서는 수용해 주시는 자세가 중요한데 체례(體例)와 혹 어긋나기만 하면 대번에 꺾어버리면서 용서해 주시지를 않는가 하면, 승선(承宣)이야말로 출납(出納)하는 직분을 수행하며 상의 재가를 받으려고 두고 있는 것인데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견책을 가하시며 밖에서부터 막아버리시곤 합니다.
그러고 보면 평소에 길러주시지 않는다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들어오게 하면서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구언(求言)한다면서 내리신 분부도 형식적으로 하신 것으로서 결국에는 불성실한 허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옛날 신의 선조(先祖)인 부제학 신 김우굉(金宇宏)이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어떤 일을 아뢰다가 상의 도량이 넓지 못하다는 말씀을 드리게 되자 상께서 힐책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하나의 증거입니다.’ 하자, 마침내 위엄을 거두시면서 화평스럽게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으니, 군신 사이에 성의(誠意)가 서로 돈독했던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과연 성조(聖祖)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고 계신다면 직언(直言)이 들리지 않을 걱정을 하실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은 또 나름대로 생각만 지닌 채 아직 진달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선정(先正)신 이황(李滉)이 평생토록 자료로 제시해 드리면서 임금을 섬긴 것은 바로 《성학십도(聖學十圖)》였습니다. 선정이 《성학십도》에 못내 정성을 쏟아 부으면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교화의 근원을 맑게 하려고 했던 것이 과연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당시에 온후하게 비답을 내리시고 성심(誠心)으로 받아들이면서 병풍에 걸어두어 스스로 경계로 삼으시는 한편 이를 찍어서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어 좌우명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성학십도》를 강(講)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어찌 너무도 개탄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성학십도》의 구판(舊板)이 이미 오래되어 희미하게 닳아 없어졌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의당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크고 작은 두 개의 판본(板本)을 다시 새기게 하여 상의 병풍을 꾸미도록 하고 작은 판본을 찍어내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성조(聖祖)께서 전해 주신 심법(心法)으로 삼는 동시에 신하들로 하여금 임금을 섬기고 임금을 면려시키는 방법이 이밖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끔 한다면 치도(治道)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목별로 진달한 말들이 좋으니 유념토록 하겠다. 덧붙여 진달한 《성학십도》의 일은 내각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南公轍)이 치계(馳啓)하기를,
"간성군(杆城郡)의 경우 다른 지방으로 떠돌다가 다시 돌아와 사는 민가가 5백 80호(戶)입니다."
하니, 유시하기를,
"역(役)을 면제해 주는 기한이 아직 여유가 있으니 백성을 불러 오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구호(舊戶)를 편안히 살도록 하는 일도 더욱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30일 계축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하교하였다.
"오늘 밤 기곡 대제(祈穀大祭)에 앞서 서계(誓戒)를 받고 서약문을 읽을 때 서약을 듣는 관원의 숫자를 채워야 하니, 전 형조 판서 조상진(趙尙鎭)을 잉임(仍任)시키도록 하라."
《묘모휘편(廟謨彙編)》이 완성되었다. 이에 앞서 상이 비국 당상 이성원(李性源)에게 명하여 영종조(英宗朝)의 하교·비답 및 묘당의 계책과 관련된 계본(啓本) 등을 정리하게 하였는데, 갑진년335) 부터 병신년336) 까지 6전(典)으로 분류하여 편집토록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서구(李書九) 등에게 명하여 일을 계속하게 해서 완성시킨 것인데 모두 75권(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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