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갑인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기곡 대제(祈穀大祭)에 관한 서계(誓戒)를 행하였다.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을 전알(展謁)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를 특별히 제수하여 의정부 영의정으로 삼았다.
원자(元子)를 왕세자(王世子)로 삼고, 대신(大臣)·각신(閣臣)과 이조·예조·병조·호조·한성부의 모든 당상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바로 정월 초하루이다. 그래서 새벽에 진전(眞殿)을 배알하고 이어서 종묘와 경모궁을 전알하였다. 그리고 방금 국가의 막대한 전례(典禮)를 경들에게 자문하고자 하는데, 이런 때에 삼공(三公)의 자리가 다 차지 않아서는 안 되겠으므로, 아까 궁문(宮門) 밖에서 특별히 영의정을 제수하는 명을 내리었다.
그리고 왕세자를 책봉하는 예는 곧 나라에서 당연히 행해야 할 전례이며 온 나라 사람들이 크게 축하를 올리는 일인데, 더구나 지금 원자는 나이가 이미 10세를 넘었으니 조종조에서 이미 행한 관례로 말하더라도 늦었다고 하는 것이 또한 옳을 것이다. 내가 이토록 신중하여 오늘에 이른 까닭은 대체로 오래오래 지연시켜서 원자가 많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지난 동짓날 청대(請對)했을 때에 이미 경들에게 하유한 바가 있었는데, 이 일을 오늘 새벽 이전까지만 해도 마음에 결정을 짓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종묘와 경모궁을 배알할 적에 조종의 영혼이 매우 가까이에 강림하신 듯이 느껴지더니, 빙 돌아서 문을 나올 즈음에는 내 마음이 저절로 감동되어 마치 직접 조종을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 같은 정도뿐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대궐로 돌아온 다음 비로소 자전(慈殿)과 자궁(慈宮)께 우러러 여쭈었다. 오늘이 설날이고 좋은 때이므로, 곧 이 일을 하교하려다가 경들에게 이렇게 자문을 하는 까닭은 바로 관례(冠禮)와 가례(嘉禮)를 책례(冊禮)와 일시에 병행하는 것이 매우 좋겠다는 생각에서이다.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에 이른바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좋은 선(善)을 다 얻는다.’001) 는 것은 비록 치학(齒學)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한 것이나, 지금 이 세 가지 큰 전례를 일시에 병행하는 것은 문왕세자편의 고사에 대해서 단장 취의가 되기에 충분하고, 또 그 의식 절차가 간략하고 번잡하지 않아서 건곤(乾坤)의 이간(易簡)002) 한 도리에도 부합된다. 그러니 이간하다는 《주역》의 이치를 몸받고, 세 가지 선을 얻는다는 《예기》의 교훈을 따라 관례와 가례를 금년에 병행하는 것이 실로 합당하겠다. 그리고 관례를 하고 자(字)를 부르는 것은 성인(成人)을 만들기 위함인데, 선왕들 때의 관례는 모두 책례(冊禮) 이후에 있었으므로, 관례를 거행하는 날에 으레 훈서(訓書)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왕 책례와 병행하게 되었으니, 책서(冊書)에다 훈서를 겸하는 것도 또한 예의(禮意)에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예가 지극히 중대하고도 처음으로 행하는 일이므로, 널리 자문하여 거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신·각신과 예조의 당상들은 각각 소견을 진술하라."
하니, 영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태산 같고 반석 같은 높고 견고한 형세와 억만년 국운을 누릴 경사가 지금부터 시작되는지라, 손뼉을 치며 춤이 절로 나오는 이 기쁜 마음을 어떻게 형용하여 말씀드리겠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 일로 세 가지 선을 얻는다는 가르침과 건곤이 이간하다는 의리는 천하의 법이요 만세의 준칙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인이라야 예법을 만드는 것인데, 관례·책례·가례를 차례로 병행하겠다고 하시니, 신은 실로 칭송할 겨를도 없는 터에 다시 무슨 의논을 드리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심환지(沈煥之)는 아뢰기를,
"종묘 사직의 억만년 무궁할 경사가 오늘부터 시작되었으니, 팔도의 신민들이 다같이 손뼉을 치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선을 얻는다는 하유와 천지의 도가 간이하다는 가르치심에 이르러서는 신이 이 하교를 들은 이후로 칭송하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옛 경전에서 찾아보아도 이 예에 부합되지 않은 것이 없고, 때를 가지고 말하자면 또 길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신은 한 마디 말도 거들 수가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이시수(李時秀)는 아뢰기를,
"삼원(三元)003) 의 길일을 만나서 이같은 하교를 받았으니, 종묘 사직의 억만년 무궁할 기반이 오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기뻐서 춤을 추며 축원하는 정성을 실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성대한 전례를 오늘날까지 지연시켜 온 것과 세 가지 예절을 일시에 병행하는 것은 모두가 원대한 성상의 슬기에서 나온 것이니, 신은 실로 우러러 흠모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고, 검교 제학(檢校提學) 정민시(鄭民始)는 아뢰기를,
"이 새해를 맞이하여 신민들의 소망이 더욱 간절한 터에 오늘 이런 하교를 받고 보니, 진실로 너무 기뻐서 고무되는 마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경사스러운 예식들을 일시에 병행하는 데에 대해서는, 신은 본디 예법에 어두워 경전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지금의 형편으로 보아서는 합쳐서 거행하는 것이 타당하겠고 국가의 경례(慶禮)에 있어서도 대비(大備)004) 가 될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서매수(徐邁修)는 아뢰기를,
"정월 초하룻날 종묘와 경모궁을 배알하신 끝에 이 막대한 예를 결정하시니, 신은 곧장 연전(筵前)에서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습니다. 그런데 세자 책봉의 의식이나 관례의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모두가 끝없는 경사이니, 오늘 한 가지 경례를 거행하고 내일 또 한 가지 경례를 거행하여, 차례로 좋은 날을 받아서 의식 절차를 각각 마련하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지극히 중대한 일이라 2품 이상의 관원들은 당연히 불러서 물었거니와, 또한 이 간이(簡易)하게 한다는 뜻에 대하여, 비록 오늘 이 일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아니나 여러 승지들도 각각 소견을 진술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행 도승지 이면응(李冕膺) 등이 아뢰기를,
"온 나라 신민들이 학수 고대하던 끝에 이 하교를 받았으니, 기뻐서 고무되는 마음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경례를 합쳐서 거행하는 일은 사람들의 마음에 진실로 합치될 것입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여러 의논에 다른 말이 없으니, 이것이 대동(大同)이라는 것으로, 이는 홍범(洪範)에 이른바 ‘자신은 안락해지고 자손들은 좋은 일을 만날 것이다.’는 것이다."005)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정월 초하룻날에 종묘와 진전과 경모궁을 배알하고 원자(元子)의 책례·관례와 가례에 대한 사유를 친히 고하였으니, 예조로 하여금 좋은 날을 가리고 인하여 응당 해야 할 여러 가지 절차를 품정(稟定)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27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註 001]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좋은 선(善)을 다 얻는다.’ : 한 가지 일이란 세자(世子)가 국학(國學)에서 신분의 상하를 논하지 않고 나이의 순서에 따르는 것[齒學]을 이른 말이고, 세 가지 선(善)이란 바로 세자가 국학에서 나이의 순서에 따르는 것을 본 뭇사람들이 첫째로는 부자(父子)의 도리를 알게 되고, 둘째로는 군신(君臣)의 의리를 알게 되고, 셋째로는 장유(長幼)의 예절을 알게 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註 002] 건곤(乾坤)의 이간(易簡) : 《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에 "건도는 쉬운 것으로 주관하고, 곤도는 간략한 것으로 이룬다.[乾以易知 坤以簡能]" 한 데서 온 말이다.[註 003] 삼원(三元) : 해의 처음[歲始]이고 달의 처음[月始]이며 날의 처음[日始]이라는 뜻으로, 즉 정월 초하루를 이른 말이다.[註 004] 대비(大備) : 마치 성인(聖人)의 인격처럼 완벽하게 이루어짐을 뜻한다.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예는 모범이니 그러므로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한다.[禮器 是故大備]" 한 데서 온 말이다.[註 005] 이것이 대동(大同)이라는 것으로, 이는 홍범(洪範)에 이른바 ‘자신은 안락해지고 자손들은 좋은 일을 만날 것이다.’는 것이다." : 대동은 의견이 크게 같다는 뜻인데,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네 의견을 경사가 따르고 서민이 따르면 이를 대동이라고 하니 자신은 안락해지고 자손은 좋은 일을 만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정월 초하룻날에 종묘와 진전과 경모궁을 배알하고 원자(元子)의 책례·관례와 가례에 대한 사유를 친히 고하였으니, 예조로 하여금 좋은 날을 가리고 인하여 응당 해야 할 여러 가지 절차를 품정(稟定)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책례·가례는 모두 차례대로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관례의 경우는 일찍이 도감(都監)을 설치한 예가 없었으나, 관례와 책례를 이미 동시에 거행하게 되었고 보면 도감의 칭호를 의당 품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례를 한 다음에 책례를 하는 것이 순서이니, 이번에는 칭호를 의당 관례 책저 도감(冠禮冊儲都監)으로 했다가 관례를 마친 뒤에는 가례 도감(嘉禮都監)으로 칭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문순(金文淳)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만수(李晩秀)를 발탁하여 정경(正卿)으로 삼았다.
정3품 문신 당상관을 사옹원 부제조로 차출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종신(宗臣) 가운데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겸보덕(兼輔德)을 요속(僚屬) 가운데서 정3품 당상관으로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이재학(李在學)을 호조 판서로, 홍양호(洪良浩)를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으로, 서매수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이병모를 세자사(世子師)로, 심환지를 세자부(世子傅)로 삼았다. 이병모를 관례 책저 도감 도제조로, 홍양호·홍억(洪檍)·이만수를 제조로 삼았다. 홍양호를 좌빈객으로, 정민시를 우빈객으로, 서용보(徐龍輔)를 좌부빈객으로, 이만수를 우부빈객으로, 송환기(宋煥箕)를 시강원 찬선으로, 김조순(金祖淳)을 겸 보덕으로, 신순(申絢)을 보덕으로, 박길원(朴吉源)을 필선으로, 박종순(朴鍾淳)을 겸 필선으로, 김굉(金㙆)을 문학으로, 이인채(李寅采)를 사서로, 조득영(趙得永)을 겸 문학으로, 김근순(金近淳)을 겸 사서로, 홍명주(洪命周)를 설서로, 이존수(李存秀)를 겸 설서로, 송치규(宋稚圭)를 자의로 삼았다. 이만수를 예조 판서로, 송치규를 경연관·서연관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사부를 시강원의 빈객으로 삼은 것은 예에 따라 모방한 것이다. 찬선은 비록 이미 낙점(落點)하였으나, 산림 유선(山林諭善)은 또한 실직 찬선을 단망(單望)으로 계하(啓下)하라. 회덕(懷德)의 찬선은 품계가 높으니 겸 찬선으로 하비(下批)하고, 문관이나 음관 출신의 요속들은 모두 시강원과 익위사에 옮겨 임명하되, 그중에 당상관 요속인 정일환(鄭日煥)은 내가 세자로 있을 때 시강원에서 글을 가르쳐 준 사람으로 지금 요속이 되었으니, 어찌 그 품계 그대로 시골로 돌아가게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 호조 참판을 제수하라."
이성보(李城輔)를 시강원 찬선으로, 송환기를 겸 찬선으로, 조진관(趙鎭寬)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책례를 거행한 다음날 백관(百官)이 진하(陳賀)드리는 일과 경외(京外)에서 전문(箋文) 올리는 일은 의당 관례대로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 전궁(殿宮)에 바치는 방물(方物)과 물선(物膳) 및 세자궁에 바치는 방물과 물선을 똑같이 봉진(封進)하라는 뜻으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통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모두 생략하려고 하니 감히 조금이라도 떠벌려서는 안 된다. 더구나 옛 규례를 의거할 수 있으니, 이것이 실로 선왕들의 뜻을 우러러 계승하는 단서가 된다. 대전(大殿)께 올리는 전문 이외에 각 전궁의 전문과 대전 이하에게 바치는 방물과 물선은 마련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삼원이 고루 좋고 온갖 복이 다 이르는 때를 당하여 우리 왕세자의 책례에 대한 명이 이날에 내렸으니, 이는 실로 동방에 억만년의 기반입니다. 모든 의식을 거행하는 절차는 본디 정해진 제도가 있는 것이니 진상하는 물건의 종류를 정하는 일은 더욱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모든 일을 되도록 간략하게 하려고 한다. 나에 대해서도 선조(先朝) 때에 이와 같이 간략하게 한 전례가 있으니, 오늘 진상하는 것은 책례를 거행한 뒤에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도에서 세자궁에 진상하는 새로 생산된 물선(物膳) 및 삭선(朔膳)에 대해서는 품지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것도 책례를 거행한 다음 다시 하교를 기다려 진상하도록 하라. 옛날 선조 때에도 임시로 중지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나는 의당 그대로 따를 것이다. 이렇게 알라."
하였다.
13세·12세·11세 된 처녀들은 금혼(禁婚)시키도록 명하였다.
팔도와 사도에 윤음(綸音)을 내렸다.
"이번 정월 초하룻날에 종묘를 배알하면서 선왕들의 백성을 위하신 성덕과 대업을 생각하니, 백성들의 농사를 중히 여기시어 우리에게 태평한 시대를 열어 준 훌륭한 일들이 마치 융성하였던 선왕들 시대를 눈으로 직접 보는 듯하였다. 대체로 농사를 총괄하여 일을 도와주는 것은 그 근원이 위에 달려 있는 것으로서, 농사철을 알려주는 일과 어진 지방관을 임명하는 일에서부터 ‘우리 백성들에게 명하여, 호미질 가래질을 재촉하리라.[命我衆人 庤乃錢鎛]’고 읊은 글들을 《시경》과 《서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더구나 천명을 받은 이후 억만년토록 우리 국본을 공고히 하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되고, 복을 받고 풍년을 내리어 수천 리 강토의 민생들을 편케 하는 일도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않은가. 농부의 경사는 곧 국가의 경사이거니와 농사에는 반드시 권농관이 있어 농삿일을 잘하도록 감독해야 하는데, 그 책임은 오직 감사와 유수들이 나의 뜻을 백성들에게 잘 선양하여 오늘 내린 윤음의 뜻에 부응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1월 2일 을묘
도감 도제조 이병모, 상의원 제조 정민시, 예조 판서 이만수를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 경례는 어제 이전까지만 해도 당초 예정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어제 진전(眞殿)에서 행례할 때에야 내 마음이 비로소 정해져서 그대로 말없이 속으로 고(告)하였고, 또 몸소 종묘에 고하고 나서야 비로소 경들을 불러 결정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어찌 영혼의 성음이 역력히 들리는 듯한 즈음에 우리를 보살펴 준 것이 아니겠는가. 경사를 만나면 기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똑같은 심정이거니와 나의 사정으로 오늘의 경사를 만남에 있어서는 어버이 사모하는 마음이 미칠 수 없음을 더욱 깨닫게 된다. 비록 여러 신하들과 마주앉아서 이를 말이나 표정에 나타낼 수는 없지만, 책례의 일을 추억하건대 실로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낮에는 밥을 먹을 수 없고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으며, 마음이 멍해져서 장차 어떻게 날을 보낼지 모르겠다. 전일에는 내가 매양 자전의 마음을 위로해드렸는데, 요즘은 자전께서 도리어 이와 같은 경례를 가지고 어찌하여 그와 같이 마음을 쓰느냐고 위로를 해주신다. 그러니 소자(小子)가 이런 하교를 듣고서 어찌 받들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내 마음을 내가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도감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는 시급한 것이 없지 않으나, 또한 내가 조검(照檢)할 길이 없으니, 경들이 잘 하라."
하고는, 인하여 얼굴을 가린 채로 자신도 모르게 옷깃 가득히 눈물을 흘리었다. 그러자 이병모가 아뢰기를,
"이런 경례를 신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고 성상의 건강을 보살피는 일은 모두가 감정을 억누르는 것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들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 가지 예식을 일시에 병행하는 것은 실로 삼선(三善)의 뜻에 부합되므로, 이 뜻에 대해서는 어제 연석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 그런데 가례에 규수를 간택하는 것이 본디 좋은 제도가 아님에 이르러서는 우리 나라 선정(先正) 중에서도 이에 대하여 말한 이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 만일 간택의 규정을 없애고 중매하는 예를 행하여, 이름 있는 가문을 널리 선택해서 현숙한 처녀를 구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속담에도 ‘나랏일은 전례를 따르고 집안 일은 선조를 따른다.’는 말이 있으니, 비록 내 뜻대로 결정하여 이렇게 할 수는 없으나, 사리로 보아서는 의당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합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앞으로 해야 할 많은 일 가운데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보도하는 책임은 오로지 양방(兩坊)006) 에 있으니, 양방의 관속들을 잘 가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세자로 있을 때에 궁료(宮僚)들에게서 도움을 받은 것이 매우 많았다. 남유용(南有容)·박성원(朴聖源) 같은 사람들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수공(水工)에게 기식(寄食)하면서 강론하는 일에 전념하였던 이보관(李普觀)·이휘중(李徽中)·이숭호(李崇祜) 같은 사람들을 지금은 어디서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전교하였다.
"세자에게 권강(勸講)하는 직임은 더없이 막중하며 빈객의 체모는 자별한 것인데, 궁관(宮官)은 모두 신진 당하관으로 되어 있으니, 또한 어찌 당상관 요속만 하겠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의당 전례를 초월해서 임명해야 할 것이다. 요속 김희순(金羲淳)에게는 보덕을 제수하고, 이노춘(李魯春)에게는 필선을 제수하노니, 내가 늘 그들의 인품을 좋아했었다. 전 참의 윤광보(尹光普)에게는 겸필선을 제수한다."
이재학(李在學)을 연접 도감 제조(延接都監提調)로 삼았다.
팔도와 사도(四都)의 노인직에 대해서 하비(下批)하여, 1백 세된 노인 18인에게 모두 숭정(崇政) 품계를 내리었다.
1월 3일 병진
상의원 제조 정민시, 한성부 판윤 서매수, 예조 판서 이만수를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례가 이 얼마나 막중 막대한 일인가. 바깥 사람들은 반드시 내가 사대부 집 가운데 마음을 둔 곳이 있을 것이라고 하겠지만, 실상은 어느 집에 처자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모두가 하늘이 정하는 일이지,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늘과 조종이 도와주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옛 규례에는 사조(四祖)007) 중에 현관(顯官)이 없는 집에 대해서는 한성부에서 빼버리는 대상에 두기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각각 단자(單子)를 봉하여 예조로 직접 보내서 그냥 두거나 빼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체로 처자란 심상하게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정에서 누차 칙교를 내리고 심지어는 각 집의 종들을 다그쳐 조사하는 지경에 이른 다음에야 마지 못해 단자를 작성해서 바치곤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절대로 종들을 다그치지 말고, 경들의 인척이나 혹 친지 중에서 서로 찾아보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기묘년 책례 때의 의장(儀仗)을 상의원에서 마련했었다는 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교련(轎輦)을 새로 만드는 일은 기묘년의 규례에 따라서 하는 것이 곧 선조 때에 나를 위해 절약하시던 선왕의 뜻을 준수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의장을 상의원에서 마련하도록 하는 것도 기묘년의 규례에 따라서 하라."
하였다.
1월 4일 정사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군사들에게 호궤(𩝝饋)를 행하였다.
윤광보(尹光普)를 이조 참의로, 정대용(鄭大容)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월 6일 기미
영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죽었다. 김희의 자는 선지(善之)인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다. 영종(英宗) 계사년에 급제하였다. 금상(今上)이 즉위한 뒤에 경술(經術)로 진용되었는데, 매양 물음을 받을 때마다 경전(經傳)의 장구(章句)와 제가(諸家)의 주설(註說)들을 마치 자기의 말을 외듯 하였다. 내각과 이조의 관직을 역임하고 계축년에 재상에 올랐다. 상이 이인(李䄄)008) 을 소견할 적에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쟁하였으나 듣지 않자, 김희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끝내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상(喪)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소식(疏食)을 하였다. 벼슬이 경상(卿相)에 이르러서도 담박하고 검소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나, 처세에 능하여 강직한 풍도가 적었으므로 선비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전교하기를,
"이 대신이 옥당과 내각을 거쳐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알아줌을 받아 발탁이 된 것은 그의 경학(經學) 때문이었다. 나는 그 유상(儒相)을 대신으로 대우하였으나, 그 대신이 자처하는 것은 역시 한사와 같았을 뿐이었다. 중간에 한 번 고향을 내려간 이후 오랫동안 격조했었는데, 부음이 갑자기 이를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그를 위해 마음이 아파 한참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경학을 말하기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지금의 습속으로 이러한 대신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은졸(隱卒)의 특전은 의당 해당 도에서 거행할 것이요, 대신의 녹봉은 3년 동안 실어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1월 7일 경신
사직단(社禝壇)에 나아가 희생과 제기를 점검하고 인하여 재숙(齋宿)하였다. 행차 도중 종로 거리에 이르러 연(輦)을 멈추고 공시인(貢市人)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대례(大禮)가 있으면 궁인(宮人)을 가려 뽑는 것이 또한 옛 규례이나, 이번에는 모든 일을 되도록 간략하게 할 것이기에 옛 규례와 같이 하려고 하지 않겠다. 이 사실을 너희들이 아직 모르고 있다면 미리 조혼(早婚)을 시키거나 도피를 시키는 폐단이 꼭 없으리라고 보장하기가 어려우니, 모름지기 각자 이 사실을 일러주어 혹시라도 소란을 피우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장용 대장 신대현(申大顯)과 전 승지 서영보(徐英輔)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전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신대현에게 장용 대장을 잉임시키라는 명이 있었는데, 포도 대장까지 잉임시키라는 명으로 잘못 알고 명소패(命召牌) 및 장패(將牌)·영패(令牌)를 뒤섞어 받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1월 8일 신유
사직단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냈다.
1월 9일 임술
조상진(趙尙鎭)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사신이 오갈 때에 관서와 해서 지방에 폐단을 끼치는 것은 오로지 사신 일행의 잡물(雜物)로 말미암은 것이니, 지금 사람들이 자기 몸 돌보는 것이 너무 지나치고 사치가 습속을 이룬 소치이다. 그러니 이른바 구복(口腹)을 채우는 식품 따위는 일체 삭감해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강을 건널 때에는 의당 별도로 어사를 파견해서 고찰할 것이되,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것이 있으면 그대로 어사를 법관으로 차송(差送)하여 해당 서장관을 잡아다가 법대로 처벌하라. 근래에 조정의 기강이 비록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다고는 하나, 어찌 명령이 행해지지 않는 폐단이야 있겠는가."
1월 10일 계해
전교하였다.
"세후로 벌써 여러 날이 지났는데, 밤마다 거의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고 낮에도 정무를 볼 수가 없다. 첫 신일(辛日)에 기곡제를 지내는 것은 곧 백성을 위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일이므로, 마음을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애써 왕래하였을 뿐이다. 이 밖에는 도감에서 거행하는 절차에 대해서조차 아직 한 가지도 수응을 못하는 처지이며, 심지어 회동(會同)하는 일조차 자꾸 지연되는 것은, 돌이켜 보건대 부모를 추모하는 나의 마음이 실로 경사를 만나 기쁨을 고하는 날에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겸하여 가슴을 트여주고 기를 내리게 하는 약제를 날마다 서너 종지씩 복용해 보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효과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이 마음을 조금 편 다음에야 점차로 이 마음이 풀릴 것이다. 16일 새벽에 출발하여 현륭원(顯隆園)에 가서 예를 행하고 하룻밤을 유숙한 다음 이튿날 석양에 행궁(行宮)으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그대로 환궁할 것이니, 해방(該房)은 그리 알라."
장용 대장 신대현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조원(李祖源)을 형조 판서로, 이치중(李致中)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홍억(洪檍)을 공조 판서로, 민태혁(閔台爀)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11일 갑자
전교하였다.
"해마다 현륭원(顯隆園) 행행의 명이 내리면, 정례 당상(定例堂上)은 해조에서 능행 정리사(陵幸整理使)의 직함을 빌리는 규례에 따라 바로 계하(啓下)를 받아서 공무를 수행하고, 환궁한 뒤에는 그 직함을 깎아버리도록 하라. 그리고 현륭원 행행에 관한 모든 사무는 해소(該所)에서 전적으로 검칙(檢勅)을 관장하되, 해방(該房)의 승지는 그곳에 가서 공사(公事)를 받들어 올릴 것이요, 당상 일원(一員)이 또한 윤번으로 근무를 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정례(定例) 및 정원과 비국의 등록에 기재하도록 하라."
1월 12일 을축
정민시(鄭民始)·이만수(李晩秀)·서유대(徐有大)·김조순(金祖淳)을 원행 정리사(園幸整理使)로 삼았다.
현륭원 행행 때에는 노량진에서 시흥까지 횃불을 세우던 것을 등(燈)으로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한용귀(韓用龜)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겸 찬선 송환기(宋煥箕)에게 하유하였다.
"강학을 시작하여서는 경이 사부(師傅)로 명을 받았고, 세자를 책봉하여서는 경이 빈료(賓僚)로 부름을 받아서, 경의 집 선정(先正)이 사부로 빈료가 되었던 고사와 똑같이 되었으니, 경의 집과 나라의 다행스러움이 마치 서로 부절을 맞추듯이 잘 부합되었다. 좋은 때가 가까워지고 화창한 봄 기운이 퍼지고 있으니, 이런 때에 경이 길을 떠남에 있어 어찌 수레와 신이 준비되기를 기다리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즉시 일어나 출발하여 우리 세자를 빛나게 하라."
자의 송치규(宋稚圭)에게 하유하였다.
"옛날 우리 선왕 효묘(孝廟)께서 세자 자리에 올랐을 때에 처음으로 찬선·진선·자의 등의 관직을 설치하여 산림(山林)에 은거한 선비들을 맞이하였는데, 이때에 김 문경공(金文敬公)009) 은 찬선이 되고, 너의 할아버지인 문정공(文正公)010) 은 진선이 되고, 징사(徵士) 이유태(李惟泰)는 자의가 되었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그때에 궁료(宮僚)를 훌륭히 간선한 것이 삼대(三代) 시대의 융성함에 비길 만했다고 칭송하고 있다. 생각하건대, 내가 선왕의 큰 왕업을 이어받아 세자 책봉의 대례를 거행하고 나서 너의 종숙(從叔)011) 대사헌을 찬선으로 삼고 너를 자의로 삼음으로써, 주(周)나라 선비들 대대로 빛나012) 그 광채가 오래도록 이어진 것 같이 하고자 하니, 너에게 어찌 함께 영광됨이 있지 않겠는가. 너는 너의 집안 사람들을 데리고 산림에서 도를 강론하여 집안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으니 대부의 반열로 부름을 받고 와서 학문을 가르치는 직임을 맡아준다면 내 마음의 기쁨을 어떻게 형용하겠는가. 너는 모름지기 동강(東岡)만 지키려는 뜻013) 을 속히 돌리어 우리 강론하는 자리로 나와야 한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올 경신년, 청나라와 우리 나라의 역서(曆書)를 대조해 본 결과, 큰 달과 작은 달, 24절기, 합삭(合朔)의 현상, 상현(上弦)과 하현(下弦), 보름달의 현상, 해가 뜨고 지는 시각 등이 거의 서로 맞습니다. 그런데 5월 16일 소서(小暑)의 경우 청나라는 술시(戌時) 정초각(正初刻) 7분에 들고 우리 나라는 술시 정초각 8분에 들며, 12월 21일 입춘(立春)의 경우 청나라는 미시 초 2각 10분에 들고 우리 나라는 미시 초 2각 11분에 들어 각각 1분씩 차이가 납니다. 이것은 북경(北京)의 시각보다 약간 빠르거나 늦은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실로 계산상의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9월 중기(中氣)의 상강(霜降)의 경우 청나라는 9월 초6일 밤 자시(子時) 3각 6분에 들고, 우리 나라는 초7일 자정(子正) 2각 3분에 들어 하루의 차이가 납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절기가 드는 시각에다 42분을 더하였기 때문에 만일 자시 초정이 교환하는 때를 당하면 서로 하루가 차이나는 것입니다. 이는 이전부터 전례가 있으니 《황규(皇圭)》의 각성(各省) 시각 아래에 있는 조선난(朝鮮欄)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기타 역주(曆註)의 여러 곳이 서로 틀린 경우는 거의 저들이 꺼려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형편상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니, 우리 나라 역서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월 13일 병인
왕세자가 강학을 하게 되자, 전교하기를,
"시강원과 익위사의 관원들은 아직 숙배(肅拜)하지 못하였으니, 요속으로 우선 이전처럼 강학을 하도록 하라."
하였다.
관례 책저 도감 도제조 이병모가 아뢰기를,
"왕세자 관례 책저 도감이 오늘부터 회동하여 일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현묘(顯廟) 신묘년의 책봉 의궤(冊封儀軌)를 상고해보니, 관례·책례·가례를 한 해에 함께 거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세 가지 경례를 함께 거행하는 것과 전후의 법칙이 서로 꼭 부합되니, 도감의 모든 일을 신묘년의 등록에 의거해서 거행하되, 정미년·경술년·병진년·계해년의 등록도 하교에 따라 상고해내어 적용하겠거니와, 성상 즉위 후 기묘년 경례 때의 의식 절차도 똑같이 참고하여 봉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관례 책저 도감 이병모가 아뢰기를,
"관례를 거행할 때에 의식 절차를 검칙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정미년 경례 때에는 대신의 주청에 따라 궁관(宮官) 중에서 예를 아는 자 한 사람이 의주(儀注)를 가지고 당(堂)에 올라 의식을 거행했었으니, 이번에도 이 전례에 따라 미리 사람을 가려 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번에는 각신(閣臣) 한 사람이 홀기(笏記)에 따라 의식을 진행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가 아뢰기를,
"‘삼가(三加)014) 의 예가 끝나면 빈(賓)이 자(字)를 부른다.’는 말이 예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 왕세자의 자를 정하는 데 있어서도 미리 좋은 날을 가려 의정부 이하 관원들을 명초하여 그들의 회의 결과를 입계(入啓)해서 낙점을 받은 다음에야 예문에 따라 일을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세자의 자를 정할 좋은 날을 이달 안으로 가려서 입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글을 내려보낸 다음에 좋은 날을 가려서 서면으로 입계하여 낙점을 받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왕세자 책례 때에 전하께서 정전에 나가시어 책례를 선포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그때에 가서 하교할 일로 하명하셨습니다. 의주 절목에 대해서 지금 계하를 받아야 하는데, 친히 나가시는 것으로 마련해야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나의 요즘 정력으로는 자력으로 하기 어렵겠다. 그러나 의주 절목은 서면으로 입계하라. 그러면 그때에 가서 하교할 것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례 때 삼가(三加)의 옷과 책례 때의 옷에 대해서는 삼가 예문에 따라 거행하겠거니와, 왕세자가 처음 방에서 나갈 때의 옷에 대해서는 신묘년·경술년의 전례에 따라 쌍계(雙髻)·옥잠(玉簪)·아청직령(雅靑直領)·조대(縧帶)로 마련하시기 바라오니, 상의원으로 하여금 만들어 들여오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삼가의 옷도 모두 전궁(殿宮)에서 마련하여 내리는데, 더구나 이것이겠는가. 그리고 아청직령의 경우는 《오례의》에 있는 것이 아니니, 선왕들이 입었던 옷을 상고해 보면 알 수 있겠으나, 이번에는 강학(講學) 때에 입은 옷을 그대로 입히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가 《의례(儀禮)》를 상고해보니 ‘빈(賓)이 단술을 주면 관자(冠者)가 자리의 서쪽에서 절하고 술잔을 받으며, 빈은 동쪽으로 향하여 답배(答拜)를 한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자리의 서쪽에서 절한다는 것은 남쪽을 향하여 절한다는 뜻이요, 빈이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답배를 한다는 것은 성인(成人)과 예(禮)를 함에 있어 주인(主人)에게 답배할 때와 달리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자리의 서쪽에서 절한다.’는 것이 ‘서쪽을 향하여 절한다.[西向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 유신(儒臣) 정경세(鄭經世)가 남(南) 자가 잘못된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리하여 경술년 등록에서는 대신이 정경세의 논의를 끌어다 연품(筵稟)하여 ‘남쪽을 향하여 절한다.[南向拜]’로 바로잡았으니, 이번에도 여기에 따라서 마련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례의》의 관례 의식은 《개원례(開元禮)》와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참고하였는데, 그 설위조(設位條)에 의하면 담 밖[序外]의 장막 안에는 ‘찬물(饌物)을 의치(擬置)한다.’는 글만 실려 있고, 예석(醴席)의 남쪽에는 단술병과 술잔을 두는 곳만 설치되었을 뿐, 찬품(饌品)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황조(皇朝)의 예에 의거해서 술과 찬품을 함께 서계(西階) 위에 차리는 것이 예의(禮意)에 합당할 듯합니다. 청컨대 이것으로 의주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2품 이상의 관원들이 절할 때 왕세자가 머리를 숙이는 절차에 대해서는 정미년에 번잡한 의식이라는 하교로 인하여 그만두었으니, 이번에도 이 규례에 따라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례 때의 교서(敎書)는 본디 《오례의》에 실린 글이 있기 때문에, 따로 지어서 중첩으로 쓰지 말자는 뜻으로 지난 경술년 대신의 연품을 인하여 법식을 정해서 시행했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오례의》의 본문(本文)을 베껴서 하루 전에 대내에 들여보냈다가 당일에 들이고 내기를 주청해서 쓰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책인(冊印)과 교명(敎命)을 대내에 들여오고 대내에서 내주고 하는 절차와 원본·부본을 대내에 들여오는 절차까지도 모두 잠시 보류하고자 하니, 이 또한 의당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관례 때의 예작(醴爵)은 을묘년 봉수당(奉壽堂) 진찬(進饌) 때 썼던 시굉(兕觥)을 들여다 쓰고, 술항아리는 정미년 가례 때에 썼던 자기 항아리[磁缸]를 쓰고, 삼가(三加) 때의 기명(器皿) 등속은 모두 대내에서 내려보내는 것을 쓰라고 명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가 아뢰기를,
"《오례의》의 관례 의식에 의하면 ‘익위사에서 소속된 의장과 호위를 단속하여 세운다.’는 글이 있고, 신묘년 등록에 의하면 관례와 책례의 날짜가 서로 가깝기 때문에 관례 때에도 의장을 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례가 같은 날에 있으니, 신묘년의 전례에 따라서 거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례의 의식이 끝난 다음에 빈(賓)·찬(贊)을 만나는 예와 군신(羣臣)을 만나는 예가 예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군신을 만나는 예는 신묘년·경술년·신사년의 등록에 의하면 모두 거행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그만두겠지만 빈·찬을 만나는 예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회동하는 것은 연회에 가까운 것인데, 지금 선대를 추모하고 있는 내 마음으로 어떻게 이런 의식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승지 서유문(徐有聞)이 아뢰기를,
"시직(侍直) 오희상(吳熙常)은 자신이 생원·진사 출신도 아니고 또한 초사(初仕)로 승전(承傳)을 받은 사람도 아니므로, 해조에서 자신을 천거한 것은 격례에 어긋난 것이어서 감히 현직에 있을 수 없다 하여 소장을 올려 체직하기를 청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오희상의 일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출신(出身)하는 처음부터 사양할지 받을지의 분수에 밝았으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병조 판서의 일은 살피지 못했다고 이를 만하다. 더구나 관직을 제수하라는 명이 없는 자를 천거한 것이겠는가. 대체로 더없이 엄격한 것은 관리의 법도인데, 오희상만이 유독 그 뜻을 이루었으니, 그의 후보자 명단을 그대로 두라."
하고, 인하여 초사(初仕)로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또 명하여 부수(副率) 김일주(金日柱), 세마(洗馬) 이동윤(李東允)도 익위사의 관직을 체직하고 다른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이조가 왕세자 관례 때의 주인(主人)·빈(賓)·찬(贊)을 의망하여 아뢰었다. 【주인은 안춘군(安春君) 이륭(李烿), 빈은 영의정 이병모, 찬은 예조 판서 이만수, 주인찬은 겸 보덕 김조순이었다.】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30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1월 14일 정묘
봉상시 정 남이익(南履翼)에게 명하여 현륭원을 행차할 때 도로변의 각 고을들을 염찰(廉察)하도록 하였다.
1월 15일 무진
우의정 이시수가 차자를 올려 현륭원 행차를 중지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밤에 행차를 준비하게 되니 마음은 활시위에서 벗어난 것 같고, 원릉을 바라보니 마치 아버지가 계신 뜨락에 들어선 것 같다. 그러나 원릉을 하직할 때를 미리 생각하니 도리어 가지 않은 것만 못하겠는지라 이 즈음에 내 마음은 더욱 억누르기가 어렵구나."
하였다.
겸 찬선 송환기(宋煥箕), 찬선 이성보(李城輔)에게 하유하였다.
"우리 효묘의 융성하던 시대로부터 초야에서 불러 올린 선비들에게 겸직으로 세자궁의 직함을 주어 시강원을 출입하게 하였는데, 여러 유신(儒臣)들 중에 한 사람도 사양하고 나오지 않은 자가 없었다. 문경공(文敬公)과 두 송 문정공은 찬선으로 나와서 명을 받았고, 또 박 문순공(朴文純公)015) 과 고 이조 참판 이유태(李惟泰)와 고 대사헌 이상(李翔)과 고 진선 정양(鄭瀁) 등도 자신을 퍽 애중(愛重)하는 사람들로 일컬어졌으나, 이들은 한 번 돈유(敦諭)하자 대번에 일어나 조정에 나왔었다. 초야에 은거하는 사람에게 비록 굳은 지조가 있기는 하나, 실상은 대대로 벼슬한 집안들이었으므로, 경사를 함께 하는 때에는 힘써 명을 받아서 매양 여러 번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 중춘(中春)의 좋은 시절에 세 가지 경례를 아울러 거행하는 이런 때야말로 빈료(賓僚)의 반열에 있는 경들이 어찌 지나치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의례히 주는 직함에 사양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겠지만 이 직함은 사양할 수 없는 것이고, 의례히 부르는 때에 사양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겠지만 지금 이런 때는 사양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더구나 이번 의식은 현묘 때에 세 가지 경례를 아울러 거행했던 전례를 그대로 따르고 겸하여 숙묘 경술년에 있었던 대례(大禮)의 전례까지 인용하여 거행하는 것이고 보면, 반열에 나왔던 옛 선정들의 행적이 또한 어찌 경들이 본받아 법칙으로 삼을 바가 아니겠는가. 의식을 거행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경들은 경들을 기어이 불러 올리려는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알아서 제때에 올라 오라."
각사(各司)·각영(各營)에서 기미년의 회부(會簿)를 올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호조·양향청·선혜청·병조·장용영·훈련 도감·금위영·어영청·총융청에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 황금이 2백 60 량 남짓이고, 은자(銀子)가 41만 4천 7백 량 남짓이고, 돈이 1백 67만 1천 2백 량 남짓이고, 면포가 6천 4백 98 동 남짓이고, 저포(苧布)가 58 동 남짓이고, 쌀이 26만 1천 2백 석 남짓이고, 전미(田米)가 6천 5백 석 남짓이고, 황두(黃豆)가 3만 3천 4백 석 남짓이고, 피잡곡(皮雜穀)이 1만 48 석 남짓이었다.
1월 16일 기사
현륭원에 가서 친히 제사지내고 재실에서 유숙하였다.
1월 17일 경오
현륭원에 가서 두루 돌아보고는 상이 엎드려 땅을 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목메어 울먹이므로, 대신과 각신이 번갈아 재실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흐느끼며 이르기를,
"금년의 경례가 나에게 있어 그 얼마나 큰 일인가. 경사를 당하여 선대를 추모하는 중에 크나큰 아픔이 북받쳐 올라서 그러는데, 어찌 차마 나더러 진정을 하란 말인가."
하고, 인하여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계속 내리면서 몹시 목메어 흐느꼈다. 그러자 정민시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경사를 만나 추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신들 또한 어찌 모르겠으며, 전하의 지극한 효성으로 또한 어찌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반열에 있던 여러 시위하는 신하들이 허겁지겁 원릉으로 올라왔다. 화성 유수 (華城留守)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경사를 고하는 오늘을 당하였으니, 성대히 하늘을 오르내리는 선왕의 영혼도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만일 하늘을 오르내리는 선왕의 마음을 전하의 마음으로 삼으신다면 어찌 상심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또 흐느끼며 이르기를,
"어느 해, 어느 날인들 추모하지 않았으랴마는, 금년의 경우는 나의 심정이 더욱 다른 바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스스로 억제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손으로 땅을 쳤다. 이때 대신과 각신은 좌우에서 상을 부축하였고, 약방 제조는 차를 올리며 마시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심기가 조금 가라앉은 다음에야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이러한 즈음에는 가슴속을 진정시키기 어려울 것이니, 바라건대 조금 드소서."
하였으나, 상이 또 뿌리치고 들지 않으므로, 심환지 등이 아뢰기를,
"아침 기후가 차갑고 땅 기운도 매우 냉한지라, 신들의 마음은 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신들 또한 성상의 끝없는 추모의 심정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날째 수고로이 거둥하시어 계속 잠까지 이루지 못하시는 이 즈음에 또 이렇게 하시다가는 성상의 몸에 반드시 탈이 날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속의 격한 기운이 만일 다시 더치기라도 한다면 어찌 천만번 민박(悶迫)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정민시는 아뢰기를,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는 일상적인 규례를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신들이 또 죽을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어 심환지와 이시수가 상의 좌우로 나누어 서서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일어나기를 번갈아 계속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쉬었다가 곧 내려가겠다."
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목메어 흐느끼며 이르기를,
"내가 아무리 완악하고 잔인한들 오늘조차 어찌 차마 내려가겠는가."
하니, 심환지 등이 울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하십니까. 마음 졸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신들에 대해서는 아예 말할 겨를도 없거니와, 유독 선왕의 영혼께 걱정 끼쳐드림은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상이 또 손으로 땅을 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계속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리자, 심환지 등이 또 울면서 부액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혼자 일어서겠다."
하고, 일어나 겨우 한두 발자국을 가서는 또 울며 엎드려 흐느꼈는데, 그 후로도 이러기를 또 수차 되풀이하였다. 그러자 이시수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비록 조금 쉬었다가 내려가겠다고 하교하셨지만, 이 자리에서는 추모하는 마음이 계속 일어나 더욱 마음을 억제하시기 어려우니, 삼가 바라건대 잠시 재실로 돌아가소서."
하였는데, 이렇게 하기를 또 한참 지나서야 상이 비로소 일어났다. 그러자 제신들이 또 앞으로 나아가 상을 부액하고 내려온 다음 작은 가마를 타고 재실로 돌아왔다.
1월 18일 신미
어가가 화성의 행궁(行宮)을 출발하여 시흥의 행궁에서 주정(晝停)을 한 다음 환궁하였다.
1월 19일 임신
의주 부윤 김기상(金箕象)이 칙사 행차가 봉성(鳳城)에 도착했다는 일로 치계하였다.
"상사(上使) 전국영(田國榮)은 산질 대신(散秩大臣) 세습후(世襲侯)로 나이는 올해 63세이고, 성품은 순진하고 신중하나 가끔 사리에 어두운 때가 많습니다. 부사(副使) 영화(英和)는 나이가 올해 30세인데, 고 예부 상서 덕보(德保)의 아들로서 성품이 명민하고 문필에 익숙하여 본래부터 이름이 나서 꽤나 총애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울과 외방의 연향(宴享) 및 정배 다담(庭排茶啖)·군위(軍威)·군가(軍歌)·무동(舞童)·유관우(遊觀牛)·타락우(駝駱牛)·별자우(別雌牛)·헌가(軒架)·나례(儺禮)·병화(甁花)·성문 결채(城門結綵)·성포(城砲)·상하 마포(上下馬砲) 등의 의식을 모두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병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은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고, 훈련 대장 이한풍(李漢豊)은 파직시키고, 계라 선전관(啓螺宣傳官) 심풍조(沈豊祖)는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환궁할 때에 용기(龍旗)와 내취(內吹)가 순서를 잘못 섰기 때문이었다.
1월 20일 계유
찬선 송환기에게 하유하기를,
"경이 선뜻 마음을 바꾸어 올라오기를 나는 날로 애써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관(史官)의 복명을 통하여 나를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음을 대강 들었다. 나는 경을 애써 기다리고 있는데, 경은 과연 내가 의례적으로 부르거나 하유하는 것으로 알고 그러는가? 시강원과 익위사에 새로 선발된 요속들이 아직 사은하고 취직하지 않은 것은 경이 오기를 기다려서 함께 하려는 것이다. 이제 의식 거행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경이 올라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국본이 튼튼하기를 학수 고대 기다리던 경의 성심으로 어찌 길 떠날 차비인들 기다리겠는가. 더구나 내가 부르는 예는 곧 선왕의 예이고, 경이 맡을 직책은 곧 선정의 직책인 것이다. 하늘이 우리를 정성스러운 말로 돕고 있는 것을 우리 백성들에게 살펴 알 수 있는데, 내가 만일 나라를 편히 하신 선왕들의 업적을 그대로 잇지 못하거나, 경이 만일 옛 선조가 끼친 계책을 밝게 드러내지 않는다면 조상의 훌륭한 교훈을 잘 들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여러 말을 할 것도 없이 몸소 직접 맞이해 와서 간모(干旄)의 고사016) 를 적용하고자 한다."
하고, 이르기를,
"이 뜻으로 참판을 보내 송 찬선에게 가서 내 하유를 전하고 송 찬선과 함께 오도록 하라."
하였다. 찬선 이성보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사직소가 또 올라왔으니, 진실로 나는 녹록하여 어진이를 불러들이기에 부 족한 사람이라, 내 스스로 반성해 봄에 부끄러울 뿐이다. 비록 경이 나를 돌보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서연(書筵)을 처음 열던 때에 장구(場駒)의 시를 점쳐서017) 세자의 의표를 빛내도록 했었으니, 정리나 예나 의리나 정성으로 보아서 내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나와야 할 듯하다. 산림 처사의 거취에 대해서는 본디 아무나 억측할 바가 아니나, 내가 ‘당연히 와야 한다.’고 말했고, 경대부도 ‘당연히 와야 한다.’고 말하며, 어리석은 서민들도 모두 ‘당연히 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곧 대동(大同)이라는 것이니, 나올 만하면 나와야 한다. 몸소 맞이하겠다는 것을 경에게 또한 말하노니, 경이 어떻게 처리할지는 모르겠으나, 경은 모름지기 당일로 길을 떠나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하는 소망에 부응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검교 제학 정민시 등을 소견하였다. 정민시가 관례 때에 쓸 관과 홀(笏) 등 여러 가지 도구를 바치니, 상이 보고 나서 이르기를,
"이번의 경례를 크게 떠벌리지 않으려고 한 까닭은, 한편으로는 선왕조의 간략히 하던 뜻을 받드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어버이를 추모하는 나의 생각을 부친 것이다. 남들과 다른 나의 심정으로 이때에 이 예를 거행하면서 어떻게 전례대로 정전에 나앉아 책문을 선포하고 하례를 받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옛날 세종 대왕은 실로 우리 동방에 태평 만세의 터전을 닦으신 임금이었는데도, 상고해 보건대 왕위를 주고받을 때에도 옥새를 친히 넘겨주지 않았고, 현명한 임금이 대대로 이어져 태평 성대를 가만히 앉아서 누리기로는 우리 현묘 때만한 적이 없었지만, 현묘께서 세자를 책봉할 적에는 하례하는 의식도 임시로 정지했었으니, 이것이 어찌 나 소자가 우러러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선조(先朝)께서도 나 소자를 돌보고 사랑하시는 뜻이 더없이 지극하셨으나, 모든 의식 절차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는 일체 간략한 쪽을 따라서 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왕업을 깊이 이어가고 많은 복을 누리게 되는 근본이 오로지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빈(賓)을 임명하고 책문(冊文)을 전하는 절차를 모두 내가 친히 참견하지 않을 것이고, 하례 올리는 의식 또한 임시로 정지할 것이며, 심지어 의장(儀章) 등 모든 사항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간략히 하고 또 간략히 하여, 절대로 조금이라도 떠벌리는 뜻을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니, 경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잘 알아야 한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나의 관례 때에 썼던 밀화영자(密花纓子)가 있는데, 규격은 비록 작으나 대체로 검박하게 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것을 자궁(慈宮)께서 친히 싸두시었으니, 이번에도 이것을 쓰려고 한다."
하고는,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내보였다.
상이 경모궁에 나아가 재실에서 밤을 지냈다.
각도의 춘조(春操)를 정지시켰다.
1월 21일 갑술
경모궁을 참배하였다. 이날이 상의 탄신이었기 때문에 상의 마음이 너무 슬픈 나머지 가슴에 치밀어오르는 증세가 더쳐서 탕제를 연이어 올리었다. 약방·정원·옥당의 여러 대신과 시임 각신·원임 각신 등이 문안하기 위하여 접견을 요청하였으나,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이병모, 좌의정 심환지, 우의정 이시수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으로 아뢰기를,
"오늘 성상의 추모하시는 마음에 대해서야 신들도 목석이 아닌데 어찌 감히 우러러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건강에 대하여 몹시 걱정이 되어서 계속 탕제를 올리고 있는 중인데도 아직 환궁하자는 명을 받지 못하였으니, 신들이 정청을 어떻게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환궁하겠다는 전교를 속히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이 물러가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불러들여 만날 것이다."
하였는데, 재차 아뢰어 돌아가기를 청해서야 비로소 환궁하였다.
겸 찬선 송환기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경을 돈유(敦諭)하여 부르기 이전이라면 경의 말이 혹 이럴 수도 있겠으나, 내가 이미 ‘몸소 맞이하겠다.’고 하였으니, 이제는 동강(東岡)의 뜻을 거의 돌렸으리라 생각한다. 비록 맹자(孟子) 이후를 통틀어 말하더라도 임금이 신하를 찾아가 보는 일은 나만한 임금을 보지 못했거니와, 적관(適館)의 시018) 도 내가 일찍이 외던 바이니, 경은 모름지기 나의 충정으로 내린 유시를 잘 알아서 즉시 길을 나서야 한다."
하였다.
1월 22일 을해
훈련 대장 이한풍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1월 23일 병자
자의 송치규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찬선이 조정에 나오겠다는 기약을 이제 막 듣고 만족스럽기가 마치 무엇을 얻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인하여 회덕의 찬선이 올라오는 길에 너도 함께 올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이제 너의 소장을 보니, 겸손하기 그지없어 나를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는지라, 너를 기다리고 바라던 나머지 실망감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 경례를 마치고 나서는 장차 서연(書筵)을 열 것인데, 이때에 세자를 교화시키는 보람을 너희들에게 기대하노니, 힘써 당일로 길을 떠나서 안절부절 못하고 기다리는 내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4일 정축
전교하였다.
"나의 오늘날 추모하는 마음으로 만일 예에 따라 정전에 나가서 관례 의식에 있어 빈과 찬을 직접 임명하거나 책례 의식에 있어 책문과 인장을 직접 전한다면 내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예절이란 인정을 따르는 것이니, 인정에 어긋나지 않는 곳이 곧 천리에 부합되는 것이다. 또 더구나 조정의 예는 사대부 집의 예와 다른 점이 있기는 하나, 새며느리를 맞아온 집에서 3일 동안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것은 요즘 나라에서나 사가에서나 다 통용되고 있다. 지난번 예조 판서가 연석에서 아뢴 말에 대하여, 관례와 책례 때 정전에 나가는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하교를 기다리라고 비답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책문과 인장을 먼저 가져다 본 다음 머물려 두고 기다리도록 한 것도 대체로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선왕의 성헌(成憲)을 살펴서 한 것이니, 억만의 큰 복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옛날 세종 대왕께서 왕위를 주고받을 때에는 태종 대왕이 보평전(報平殿)에서 내신(內臣)을 명하여 동궁을 모시고 나오게 한 다음 바로 보평전의 내전에서 대보(大寶)를 전수하여 마침내 세종께서 왕위에 올랐었다. 임금의 자리를 주고받는 일이 이 얼마나 막중 막대한 일인가마는, 그런데도 그 예가 이와 같이 매우 간략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나 소자가 자나깨나 오직 한 마음으로 우러러 계승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달 2일 관례에 빈을 임명할 때와 책례에 책문을 전할 때에 내가 정전에 나가는 일은 모두 보류할 것이다. 그리고 예가 끝난 다음 축하하는 의식은 의당 자전과 자궁께 아울러 거행해야 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받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정전에 나앉을 수 있겠는가. 이는 권정례로 거행하라. 동궁의 축하 의식도 또한 현묘께서 세자를 책봉할 때의 전례를 따라서 권정례로 마련하도록 하라."
좌의정 심환지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만화(萬化)의 근본을 맑게 하시고 백행(百行)의 근원을 두터이 하시면서, 선대를 추모하는 황급한 마음으로 인해 임금의 자리에도 즐거움이 없이 40년을 하루같이 지내셨습니다. 면류관과 곤복을 차리고 나면 전하께서는 시름에 싸이고 악기 소리를 들으면 따라서 곧 슬퍼지시며, 보좌(寶座)에 앉아서는 길이 한숨을 쉬시고 좋은 음식을 대해서도 맛을 전혀 모르십니다. 태평한 세월은 비록 뭇 신하들의 칭송에 담아졌지만, 금니(金泥)와 옥첩(玉牒)으로 성대한 의식 꾸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끝없는 효심은 오랠수록 더욱 그치지 않고, 효성을 미처 다하지 못한 슬픔은 세월이 오래가도 다하지 않아서 주(周) 문왕(文王)이 난수(灤水) 가에 아버지 무덤을 쓴 예019) 를 거행하고, 한 고조(漢高祖)가 신풍현(新豊縣)을 만든 방법020) 을 계승하여, 행궁(行宮)을 두어 호위하는 형세를 성대히 하고, 어진(御眞)을 모시어 우러러 의지하는 정성을 부쳤습니다. 그 지극한 정성과 예가 백대 제왕들보다 월등히 뛰어났지만, 그래도 일찍 별세한 어버이에 대한 효심에는 조금도 위로될 수가 없었고, 어버이 은혜에 대한 보답은 조금도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전(傳)에 이른바 ‘지극한 덕과 중요한 도는 신명(神明)을 통하고 천지를 감동시킨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인의 효도는 천지에 순종하고 신명에 부합하여, 교화가 널리 유통하고 국가의 운명이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명전(承明殿)의 수많은 저작(著作)들과 굉유 석사(閎儒碩士)의 문장으로도 또한 그 효성을 표현하기에 부족하거늘, 우리 동방 6천 리 강토 안에 사는 백성들로서 누군들 격앙하여 흠모하지 않겠으며, 누군들 보고 느끼어 효심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늘과 조종(祖宗)들께서 두터이 보살펴주어, 온갖 복이 찾아들고 세 가지 경례를 한꺼번에 아울러 거행하게 되었으니, 억만년토록 나라가 태산 반석처럼 편안할 기초가 지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하늘에 사무친 성효는 경사를 만나 더욱 새로워져서, 매양 연석에 참여하여 전하의 하교를 듣다 보면 구구한 걱정으로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감히 잠시도 마음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한밤중부터 어가를 준비시켜 저물녘에 현륭원을 가서 제사를 지낼 적에는, 술잔을 부어 올리는 즈음에 예절을 신중히 행하심으로써 지게문을 나올 때에 영혼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으며, 향기가 올라가 신령의 기가 사람을 엄습하여 아득히 신령과 서로 간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재실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현륭원을 하직할 적에는 전하께서 현륭원 잔디 위에 엎드려 우시니 눈물이 소매에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슬픈 감정을 전혀 억제하지 않으시고, 건강에 해롭다는 주위의 말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므로, 아침부터 한낮에 이르기까지 대소의 신료들이 몹시 당황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중도에 지나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가가 막 서울에 돌아와서는 이내 경모궁에 가시어, 하룻밤 사당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삼조(三朝)에 문안 드리던 때를 어슴푸레 떠올리셨습니다. 이때에 후원의 나무에는 서리가 내리고 시간은 점점 깊어갔는데,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이때 무슨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신은 외람되이 여러 신하들의 뒤를 따라 내전으로 환어하시기를 우러러 청하여 심지어는 누차 번거롭게 정청(庭請)까지 함으로써 겨우 성상의 마음을 돌리게 되었는지라, 몹시 애타던 나머지에 서로들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니 2일의 경례 때에는 친히 정전에 임어하지 않을 것이고 백관이 동궁에게 하례 올리는 의식도 권정례로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이 비록 매우 어리석으나 성상의 의중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나라의 중대사 중에 세자 책봉의 예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습니다. 융성하던 삼대(三代) 때의 문헌에서는 보지 못했습니다마는, 한(漢)나라 효명제(孝明帝)로부터 비로소 태자 책봉의 의식에 임금이 직접 참가하였습니다. 그리고 당(唐)나라 《개원례(開元禮)》의 오례(五禮) 가운데서는 그 두 번째가 가례(嘉禮)인데, 50 가지나 되는 의식 가운데 열여덟 번째가 임금이 대청에 나앉아 황태자를 책봉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것이 만세의 법칙이 되었습니다. 또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는 훌륭한 선왕들이 서로 뒤를 이음으로써 제도가 크게 빛나서 세자 책봉의 의식을 가장 신중히 하였습니다. 임금이 정전에 친히 임어하는 것은 체모(體貌)를 높이기 위한 것이고, 책문과 인장을 친히 내리는 것은 전례(典禮)를 중히 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례를 지극히 중히 여기기 때문에 체모도 또한 높아지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선대를 추모하시는 것은 곧 성상의 지극한 정리이고, 전례는 바로 열조(列朝)에서 남긴 제도이니, 지극한 정리야 물론 억지로 가라앉히기가 어렵겠지만, 열조의 제도 또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례대로 거행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그만둘 만하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태종조(太宗朝)의 고사는 아예 끌어댈 만한 규례가 아닙니다. 일마다 조종의 성덕(盛德)을 본받으시는 전하로서야 신의 말을 듣지 않아도 환히 아시는 바가 있을 듯합니다.
심지어 동궁의 축하 의식도 권정례로 하라고까지 하신 데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기축년에는 이것이 처음 있었던 일이니, 오늘날에는 옛 규례대로 거행할 뿐입니다. 또 더구나 경례를 거행할 날짜가 가까이 다가오고 기후도 화창해지니, 벙어리·귀머거리·절름발이·앉은뱅이들까지도 다 우리 행사장에 나와서 구중궁궐에 계시는 전하의 용안을 우러러 뵙고 모두 함께 만세 삼창의 환호를 올리도록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뭇사람의 뜻에 굽어 보답하시어 성대한 의식을 크게 이루는 일을 어찌 행여라도 더 주저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새로운 명을 내리시어 나라의 예를 중히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빈을 임명할 때 정전에 나가지 않으려는 것과 책문과 인장을 침전(寢殿)에서 전하려는 것은, 한편으로는 선대를 추모하는 마음의 만분의 일이나마 부치고자 함이요, 또 한편으로는 성조(聖朝)에서 이미 행하신 일을 따르고자 함이니, 의식 절차는 비록 너무 간략한 듯하지만 실상은 여기에 정밀한 의리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서용보(徐龍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노춘(李魯春)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월 25일 무인
관례 책저 도감 도제조 이병모, 제조 홍양호·홍억·이만수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삼가 전교를 받아보니, 책문은 침전에서 전하고 하례 의식은 권정례로 한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평소 전하의 말씀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천리와 인심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오늘의 전교는 삼가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요(堯)·순(舜)의 도를 본받고 증(曾)·민(閔)021) 의 효행을 몸소 실천하시어, 삼조(三朝)의 예는 선왕을 추모하는 마음에 부치셨고, 50세까지 어버이 사모하는 마음은 신명에 통하였습니다. 대체로 천리와 인도를 탐구하는 학문과 예악을 밝혀 행하는 정사에 있어 수많은 성인을 집대성하시고 역대 제왕들보다 우뚝 뛰어나신 것은 모두가 성상의 타고난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제사 의식만으로는 정성을 펴기에 부족하였고, 아름다운 옥벽만으로는 성대한 의식을 이루기에 부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곳을 바라보시지 않은 날이 없었고 그곳을 배알하시지 않은 달이 없었으며 그곳을 행차하시지 않은 해가 없어, 일찍 별세한 어버이에게 효성을 미처 못 다한 감회와 시절의 변천에 따라 북받쳐오르는 슬픔으로 자나깨나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임금의 자리도 좋은 줄을 모른 채 20년을 하루같이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삼원(三元)의 좋은 철에 대례(大禮)를 결정하심으로써 왕세자의 위호는 더욱 중해지고 동궁의 훌륭한 범절 또한 새로이 빛나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종묘 사직의 억만년 무궁할 터전이 태산과 같이 견고해지고 사유(四維)022) 로 잡아맨 듯이 튼튼해졌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이른바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 만 백성이 이를 힘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전하께서는 기쁜 일을 만나서는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이르는 곳마다 성상의 감회가 그지없었습니다. 3일 동안 현륭원을 배알할 때와 재실에서 추운 밤을 지낼 때에 행차를 따르면서 전하께 애원하던 모든 신하들이 전하를 차마 우러러 뵙지 못했던 것은 다만 그 겉으로 드러난 일일 뿐입니다. 정월 이래로 전하께서는 옷을 입은 채로 지새우셨는데, 정월도 이제 이미 하현(下弦)이 지났습니다. 그리하여 전하께서는 옥체가 손상되는 것도 스스로 모르고 계시는데, 신들은 연석에 참석하여 뵙고서 알지만, 온 나라 사람들이야 또한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의물(儀物)은 일체 간소한 쪽을 따르고, 공역(工役)은 힘써 생략하는 쪽을 따르고 계십니다. 천지의 영구한 의리를 몸받고, 영고(寧考)께서 끼쳐주신 모책을 따라, 전후로 간곡히 일러주신 하교에 대하여 신들은 오직 삼가 받들어 거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책례와 하례 두 가지 의식이야말로 이 얼마나 국가의 큰 행사입니까. 상고해 보건대, 삼대(三代) 시대에는 태자(太子)가 탄생하면 지위가 이미 정해지므로 책봉한다는 문헌은 볼 수가 없으나, 단면(端冕)으로 남쪽 교외에서 보았으니, 그 예는 본디 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경》의 강숙지고(康叔之誥)와 문후지명(文侯之命)에 살펴보면 공(公)이나 후(侯)를 봉할 적에도 천자가 반드시 친히 책봉하여 주었는데, 더구나 태자에게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태자를 책봉하는 전례는 한(漢)나라 때에 시작되어 당(唐)나라 때에 성행하였고, 특히 송(宋)나라 때에는 임금이 친히 책봉하는 것을 가장 중히 여기어, 천자가 대경전(大慶殿)에 임어한 가운데 좌보(左輔)는 책문을 전하고, 우필(右弼)은 문을 읽었는데, 이것을 성헌(成憲)으로 삼아서 그 의식이 질서 정연하였습니다. 그후로 황조(皇朝)에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이 있고, 우리 나라에는 《오례의》가 있는 바, 이는 모두 역대의 예문들을 빼기도 하고 보태기도 하여 일왕(一王)의 제도를 회통(會通)시킨 것인데, 그중에서 세자를 책봉하는 의식의 경우는 실로 당·송 때의 고사를 모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임금이 친히 대청에 나앉아 책봉을 한다.’ 거나 ‘관원을 명하여 책문을 발표한다.’ 거나 세자의 키를 보는 것에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왕세자는 춘추가 11세이고 슬기로운 자질은 엄연히 타고난 듯합니다. 그래서 총총 걸음을 할 때나 섬돌을 오를 때의 동작이 모두 스승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도 우(禹)임금의 걸음 걷는 법도023) 에 잘 들어맞습니다. 그러니 정전의 큰 마당에서 친히 보책(寶冊)을 선포하시되, 악기를 연주하여 세자의 절하고 꿇고 하는 것을 가락 맞추고 의장을 벌여 세워 그 위의를 빛나게 해서, 천지와 조종의 큰 은혜를 밝게 드러내고 백관과 만민이 높이 우러러 보도록 하기에 정히 알맞습니다. 그런데 이에 연침(燕寢)이나 편전(便殿)의 즉석에서 건네주어, 보좌(黼座)도 마련하지 않고 의장도 갖추지 않은 채 왕조에서 응당 행해야 할 전례를 달리하여 사가(私家)의 지극히 간략한 의식을 사용하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삼대 때에도 이런 예는 없었고, 한·당 시대에도 이런 예는 없었으며, 명나라나 우리 나라에도 이런 예는 없었습니다. 이런 예가 없는데도 이런 예를 행하는 것은 곧 성인이 예를 창제한 것이니, 백세 뒤에 오늘날의 일을 논하는 자가 성상의 뜻의 소재와 성상의 효심이 미루어진 곳에 대하여 그 누군들 깊이 감탄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신들은 끝내 지나치신 처사라고 여깁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의리로 일을 바로잡고 예로 마음을 바로잡으라.’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정전 대청에 나가시지 않는 것을 깊은 의리로 여기시지만, 신들은 대청에 나가신 다음에야 의리에 부합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또 전하께서는 인정을 따르는 것을 예의 근본으로 여기시지만, 신들은 예를 따른 다음에야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또 이르기를 ‘처음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다.’ 하고, 또 ‘어질게 되도록 명하기도 하고 길하게 되도록 명하기도 한다.’ 하였는데, 그 명이란 곧 하늘이 명하는 것이요, 선왕의 영혼이 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어떻게 그 일을 빛나고 크게 하여 거듭 명해 준 복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는 이르기를 ‘무왕이 어찌 일이 없었으랴, 후손을 위해 일하시었네.[武王豈不仕 胎厥孫謨]’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비록 이 막중한 예를 인하여 끝없는 효심을 부치려고 하시지만, 유독 천년 만년토록 크게 밝은 꾀를 크게 이어갈 것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성상의 하교 가운데 성조(聖祖)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말씀에 대하여 신들은 더욱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
영묘(英廟)께서 세자를 책봉할 때에는 의례(儀禮)가 크게 갖추어졌으므로, 사관(史官)이 ‘대대로 훌륭한 임금이 나서 태평 성대를 이룩할 큰 계책과 큰 업적의 터전을 길이 마련하였다.’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삼가 이어받아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례 의식에 대해서는 ‘자전과 혜경궁께서 의당 하례를 받으셔야 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전하께서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권정례로 한다면 이것이 받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한(漢)나라 원년에 장락궁(長樂宮)이 완성되자 뭇 신하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았는데, 성대한 예의를 차린 그 의식이 오히려 미사(美事)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세자를 책봉하는 경례야말로 경사(卿士)들은 조정에서 손뼉을 칠 것이고, 상고(商賈)들은 시장에서 노래를 할 것이며, 농부들은 들판에서 춤을 출 것이고, 부녀자며 아이들과 종들, 그리고 벙어리·귀머거리·절름발이·앉은뱅이까지도 모두가 기쁨에 넘쳐 서로 축하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축원과 만세를 전하께서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동궁이 자리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는 의식은 《개원례》로부터 이미 행했던 것이고, 우리 왕조에서 세자를 책봉할 때에도 일찍이 한번도 그만둔 적이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관례를 마치고 세자에 대한 책문과 인장이 올려진 뒤에 정전의 마당 가득히 성대한 의식을 지켜본 백관과 사대부들이 기쁨에 넘친 성심을 펴지 못한다면, 인륜으로 보나, 천리로 보나 과연 어떻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더 깊이 생각하시어 밝은 명을 속히 내리시고, 친히 책봉하고 하례받는 의식을 일체 나라의 예법대로 하셔서, 큰 경사를 중하게 하시고 뭇사람의 뜻에 보답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좌상의 차자 내용도 곧 경들의 말과 같았으므로 좌상에 대한 비답에서도 나의 뜻을 말하였다. 침전에서 책문을 전하는 일이 예절은 간략하지만 뜻은 참다운 것이다. 더구나 우리 성조께서 행하신 일을 나 소자가 이어 따르고자 함이니, 경들은 내 뜻을 알아주기 바란다."
하였다.
집복헌(集福軒)에 나가서 왕세자의 관례와 책례에 대한 습의(習儀)를 행하였다.
왕세자의 이름은 이공(李玜), 자는 공보(公寶)라 정하였다. 승지 서유문(徐有聞)이 세자의 이름을 정할 때에 육조의 참판 이상과 관각(館閣)의 여러 신하들을 패초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육조의 참판 이상들이 빈청에 모여 의정(議定)해서 들이는 것이 본래 옛 규례이지만, 나의 이름을 정할 때에는 선조(先朝)께서 대신과 문임(文任)들만 불러서 친히 스스로 명명하시었으니, 이번에도 간이(簡易)하게 하는 뜻에서 선조의 고사를 우러러 따르고자 한다."
하고는, 대신·각신·문임 등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 세자의 이름을 정하는 데 있어 옥(玉) 변의 글자를 쓰고자 하는데, 알기 쉬운 글자는 휘피(諱避)하기가 어렵고, 알기 어려운 글자는 은벽(隱僻)한 단점이 있다. 그래서 나의 뜻에는 옥(玉) 변에 공(公)이 들어가는 자가 아주 좋을 듯하다. 또 옛날 선묘(宣廟)의 휘자는 일(日) 변에 공(公)이 들어간 자였는데, 이 자는 본디 자의(字義)도 씌여 있지 않은 것이었으나, 중국 사신들이 모두 아주 좋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운보(韻譜)》와 《자서(字書)》에까지 끼어 넣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정한 이 글자는 편방(偏傍)은 이미 서로 부합되었거니와, 《자서》에 상고해 보면 그 음은 홍(洪)이고 뜻은 미옥(美玉)으로 되어 있으니, 음으로 보나 뜻으로 보나 참으로 진선 진미하다고 이를 만하다. 경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하니, 이병모 등이 말하기를,
"음과 뜻이 모두 다 좋으니 신은 매우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의논이 이미 합치되었으니, 이름은 이 글자로 결정하고, 자(字)도 오늘 의정하여야겠다. 대체로 자를 짓는 법도 의당 이름 자를 고려해야 하는데, 이름 자는 기왕 미옥의 뜻을 지녔거니와, 옥(玉) 자 편방은 또한 왕(王) 자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대체로 물건 중에는 옥이 가장 귀한 것이요, 사람 중에는 왕이 가장 높은 것이니, 옥은 물건 중의 지보(至寶)이고, 왕의 자리는 또한 성인(聖人)의 대보(大寶)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 계사(繫辭)에 ‘천지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의 큰 보배를 위(位)라 한다.’ 한 것이다. 그런데 천지의 명을 받들어 큰 보배가 되는 자리에 앉는 것은 그 도가 지극히 공정한 데에 있으니, 공(公) 자와 보(寶) 자로 자를 정하는 것이 실로 덕을 표하는 뜻에 부합되겠다. 그런데 《서경》의 ‘한 사람이 크게 훌륭하면 온 나라가 올바르게 된다.[一人之良萬邦以貞]’는 뜻과 《상서대전(尙書大傳)》의 ‘해와 달의 광채가 한 사람에 의하여 광대해진다.[日月光華弘于一人]’는 뜻을 취하여 본다면, 보(寶) 자 위에 혹 원(元) 자를 놓거나 혹은 홍(弘) 자를 놓아도 좋겠는데, 어떤 글자가 더욱 좋겠는가?"
하니, 이병모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하교하신 세 글자가 모두 좋아서 신들이 감히 어느 한 글자를 지목하여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견해로도 취사 선택을 하지 못하겠으니, 경들이 각각 소견을 진술하라."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세 글자 가운데 공(公) 자가 더욱 좋은 듯합니다."
하고, 심환지는 말하기를,
"홍(弘) 자가 역시 진선 진미합니다."
하고, 이시수는 아뢰기를,
"세 글자가 각기 모두 깊은 뜻이 있기는 하나, 그중에도 원(元) 자가 더욱 좋은 듯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문임으로 있는 제신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홍양호가 아뢰기를,
"원 자가 더욱 좋은 듯합니다."
하고, 정민시는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하니, 황승원은 아뢰기를,
"공 자와 원 자가 다 좋으나 원 자가 더욱 진선 진미합니다."
하고, 이병정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공 자가 가장 낫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뜻이 이미 이러하니 공 자로 결정하겠다."
하였다. 그리하여 예조 판서 이만수가 명을 받들어 써서 올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자를 의정한 다음에는 원단자(原單子)를 예조 정랑이 용정(龍亭)에 담고 의장과 고취악을 갖추어 싣고서 예조에 봉안하는 것이 곧 옛 규례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나의 이름을 정할 적에는 옛날 우리 영고(寧考)께서 이름을 명해주시고 자도 정하여 또한 써서 내려주시었으니, 이번에도 그대로 따라서 할 것이다. 또 나의 자를 정한 단자를 주합루(宙合樓)에 봉안하였었으니, 이번에도 이 예에 따라서 하되, 예조 판서가 이미 각신(閣臣)인 만큼 경례를 거행하는 날 모셔갈 것이며, 이것을 규식으로 삼으라."
하였다.
1월 26일 기묘
건륭 황제(乾隆皇帝)의 붕어에 관하여 조칙을 반포하는 사신이 도착하였다.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를 맞이하였다.
서매수(徐邁修)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조승(李祖承)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인정전에 나아가 칙서를 선포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의 조서에 이르기를,
"나는 생각하건대, 하늘과 땅을 밝게 살피어 큰 행운을 우러러 제사를 올리고, 사당에 나아가 어버이를 제사할 때 훌륭한 의식을 거행하여 하늘에 배향하였다. 명당(明堂)에서 큰 제사 올릴 적에는 큰 복을 아장(我將)에서 송축하였고,024) 천하에 도덕을 폄에 있어서는 두루 기르신 것을 하늘의 명으로 노래하였는지라,025) 이에 훌륭한 제사를 상고하여 힘써 융숭한 법도를 드러내었다. 우리 국가는 오랫동안 큰 모책을 작성함으로 인하여 하늘의 도타운 권우를 널리 입었다. 그리하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세조 장황제(世祖章皇帝)·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세종 헌황제(世宗憲皇帝)는 모두 이미 하늘에 배향이 되어 끝없는 복을 내리었다.
삼가 생각건대, 황고(皇考)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께서는 덕은 중화(中和)를 이루시고, 법칙은 청녕(淸寧)026) 에 부합되시어, 민정(民情)을 자세히 보고 들으시고, 만물의 변화에 유행과 생성을 순조로이 하시었다. 광명(光明)한 덕은 끊임없이 이어져 강강(康强)하고 순고(純固)한 정신이 넘치시고, 아침 태양과 초승달처럼 탄탄하게 안정되어 크고 넓고 높고 밝은 도량을 지니시었다. 정결한 제사 엄숙히 지내 하늘을 밝게 섬기니 정성은 신명이 흠향하는 데에 이르렀고, 크게 나타난 도를 드러내어 백성에게 베푸니 덕은 백성을 보우하는 데에 높았다. 그리하여 은택이 널리 펴져 백성들에게 흠뻑 입혀졌고, 문명의 다스림이 밝게 빛나서 상서로운 구름이 길게 뻗치었다. 신묘한 공적을 크게 운용하니 백성들이 서로 의지하고 떠받들어 사(私)가 없게 되었고, 마음을 텅 비우고 백성들에게 하문하심이 항상 주밀하여 엄연히 백성의 살 곳을 살피심이 빛났었다. 천자의 자리에 앉아 법제를 세워서 하늘에 칠정(七政)027) 을 바로잡으시고, 해[歲]를 살펴서 백성들을 편케 하기 위해 오신(五辰)028) 을 시절에 맞추시었다. 그래서 수토(水土)와 오행(五行)을 잘 다스려 공적을 이루시니, 그 높고 큰 도덕을 말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복희씨(伏羲氏)의 《주역》을 부연함으로써 만국(萬國)이 다 편안하게 되었고, 기자(箕子)의 홍범 구주(洪範九疇)를 추역함으로써 서징(庶徵)029) 이 다 갖추어졌다. 그러므로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사당을 세우는 일은 조종들께서 행하신 것을 따르겠거니와, 팔방의 끝까지 은덕을 사모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에는 그 은택을 하늘에 짝지워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진실로 의당 태단(泰壇)에 올려 모시어 오른쪽에 배향시켜서 열성(列聖)을 이어 때로 흠향하시도록 해야 하겠기에, 옛날의 제도를 널리 상고하여 옛 전례를 삼가 준행해서 하늘 땅과 종 묘·사직에 밝게 고하였다.
그리고 제왕(諸王)과 패륵(貝勒)과 문무 군신(文武羣臣)들을 거느리고서 가경(嘉慶) 4년 11월 26일 동지(冬至)에 삼가 환구(圜丘)에서 상제(上帝)께 제사지내고 고종 순황제를 배향하였다. 또 가경 5년 1월 18일 두 번째 신일(辛日)에 상제께 기곡제(祈穀祭)를 지낼 것이고, 5월 초하루 하지(夏至)에는 황지기(皇地祇)를 방택(方澤)에서 제사지내고 고종 순황제를 아울러 배향할 것이다. 공경하여 제물을 올림에 흠향을 편히 하시도록 한 데서 큰 복이 함께 펴지고, 하늘과 땅을 섬김에 어버이를 높이는 데서 효도로 인한 행복이 아울러 흡족하였다. 이미 높은 휘호를 올리고 이에 큰 혜택을 베풀기 위하여, 응당 베풀어야 할 일들을 아래에 열거하노라.
1. 각성(各省)에서 건륭(乾隆) 60년 이전까지에 걸쳐 누적된 조세 부족액의 징수를 늦추어온 것과 지정세(地丁稅)의 부가세 및 백성들이 미처 바치지 못한 자종(籽種)·구량(口糧)·조량(漕糧) 대신의 은냥(銀兩)을 모두 면제한다.
1. 각성에서 건륭 60년 이전까지에 걸쳐 누적된 조세 부족액의 징수를 늦추어 온 것과 백성들이 꾸어갔다가 바치지 못한 쌀과 잡곡 및 초속(草束)은 모두 면제한다.
1. 역대의 능침(陵寢)과 공자(孔子)의 궐리(闕里)에는 응당 관원을 보내서 치제해야 하니, 규례를 살펴서 거행하도록 할 것이다.
1. 오악(五嶽)과 사독(四瀆) 등에 지내는 제사는 응당 관원을 보내서 치제해야 하니, 규례를 살펴서 거행하도록 할 것이다.
1. 직례(直隷)와 각성의 아동들이 입학(入學)하는 정원수는 대학에는 7명을, 중학에는 5명을, 소학에는 3명을 각각 증가하되 조서가 도착하는 대로 거행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일차만 이렇게 하는 것으로 규례를 삼지 않는다.
1. 뛰어난 재능과 인품을 지니고도 초야에 묻혀 있는 지방 선비들에 대해서는 해당 독무(督撫)가 잘 찾아내어 자세히 보고하도록 한 다음 참작하여 등용할 것이다.
1. 각성의 백성들 가운데 부양받을 데가 없는 고아나 가난한 자나 고질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지방관이 유의하여 보살펴 주도록 할 것이다.
1. 각성의 중요한 길목에 있는 교량 및 나룻배들 가운데는 간혹 파괴된 것도 있어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지장을 주고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지방관이 잘 조사하여 제때에 수리하도록 할 것이다.
1. 각성의 군류(軍流)030) 이하 사람들이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특별히 등급을 낮추기로 결정할 것이다.
1.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해 병영에 머물러 있는 병사로서 대오에 편입될 수 없는 자에 대해서는 해당 장수가 잘 조사하여 본가(本家)에 만일 아들이나 동생 그리고 친척으로서 교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대신 교련시키고, 그에게 식량을 정해 주어 생활의 길을 잃지 않도록 할 것이다.
아, 큰 계책 끼치어 후인을 보우하는 인(仁)을 드리우시니 그 인하다는 성문이 아래에 두루 퍼지고, 덕을 보아서 하늘의 조화에 맞추시니 그 덕의 높기가 하늘에 닿았다. 우리를 끝까지 편안하게 하시니 귀신과 사람에게 화락함이 두루 퍼지고, 이 큰 복을 내려 주시니 그 은혜가 우주와 함께 널리 미치었다. 이 사실을 천하에 고하노니 모두 들어 알도록 하라. 가경 4년 11월 27일"
하였다. 그리고 칙서에는 이르기를,
"봉천 승운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유(勅諭)한다.
나는 오직 하늘의 법도에 맞추어 사방을 살펴서 백성 돌보는 마음을 높이고, 교제(郊祭)를 더욱 정성껏 지내어 상제께 흠향할 수 있도록 엄숙히 하였다. 그리고 으뜸가는 공훈을 드러내서 상제께 배향하니 그 정성이 올려 제사하는 데에 지극하고, 성대한 전례를 본받아 사당을 준공하니 그 은택이 후손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우리 황고 고종 순황제께서는 바른 부서(符瑞)와 튼튼한 국운을 타시어 훌륭한 정치를 이루시니 온 천하가 이에 화락해졌다. 백성의 뜻을 환하게 보고 듣고 하시어 하늘의 은총을 받들어서 천하를 두루 기르시었다. 그리하여 그 크고 넓고 높고 밝은 덕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버이처럼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고, 하늘을 도와 만물을 작성하신 공에 대해서는 오직 온 세상이 믿고 의지하였다. 밝은 운수가 온 누리에 넘치게 하였으니 천명을 받은 것이 타당하고, 하늘에 보답하는 제사를 융숭히 올렸으니 그 은택은 하늘과 짝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조칙을 선포하여 은혜를 널리 펴노니, 진실로 은혜가 널리 미쳐 팔방의 끝까지 다 편안해지리라.
너 조선 국왕은 대대로 충성을 다하였고 해마다 직분의 조공을 잘 수행하였다. 번방(蕃邦)에서 고명(誥命)을 받들고 진향(進香)할 적에는 일찍이 슬픈 마음이 간절했었고, 시전(諡典)을 가지고 사신을 보내 윤음(綸音)을 선포했을 적에는 다시 제사지낼 공물을 정성들여 바치었다. 그리고 표문을 올려 충성을 다 토로해서 우러러 보고 의지함을 갈음하였으므로, 예부에 유시를 내려서 이에 너의 간곡한 정성을 포양하는 바이다.
이에 승배(升配)의 예가 이루어짐에 따라 특별히 산질 대신(散秩大臣) 부도통(副都統)으로 일등 순의후(一等順義侯)인 전국영(田國榮)을 정사(正使)로, 내각 학사 겸 예부 시랑(內閣學士兼禮部侍郞) 영화(英和)를 부사(副使)로 보내어 너희 나라에 조서를 반포하고 아울러 국왕에게 비단 50필을 내리노라. 그러니 국왕은 삼가 이 큰 은총을 받고 더욱 정성을 가다듬어 먼 나라까지 보살피는 은혜를 공경히 받들어서 위로 하늘에 계시는 신명께 보답해야 할 것이다. 예의(禮儀)가 이미 갖추어져서 먼 번방까지 다 천자의 덕을 입게 되었고, 복록이 이루어져서 천자의 혜택이 신하들의 반열에 함께 펴졌으니, 공경할지어다.
특별히 조선 국왕에게 망단(蟒緞) 2필, 보단(補緞) 2필, 장단(粧緞) 2필, 편금단(片金緞) 2필, 왜단(倭緞) 2필, 섬단(閃緞) 5필, 의소단(衣素緞) 5필, 모(帽) 5필, 광소단(光素緞) 5필, 양단(洋緞) 10필, 각색단(各色緞) 10필을 상으로 내리노라."
하였다.
군위 현감(軍威縣監) 박길원(朴吉源)이 상소하여 본읍의 폐단을 진술하였는데, 그 상소에,
"본현은 아주 작은 고을로서 큰길 옆에 끼어 있는데, 땅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한데다 요역은 번다하고 부세는 과중하여 온 경내가 다 곤궁하고 온갖 폐단이 따라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 폐단의 근원을 자세히 알아보니, 오로지 군액(軍額)과 곡총(穀摠)이 너무 많은 데서 기인되었습니다.
신이 하양현(河陽縣)의 원으로 있을 적에는 그 당시 관찰사였던 고 참판 김광묵(金光默)이, 본읍의 환곡이 장부에만 올라 있을 뿐 실제로는 없는 일로 인하여 신을 조사관으로 임명해서 그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조사한 결과 그 당시 반포(反逋)된 것이 이미 1천 8백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대체로 정미년 이전부터 이미 반포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어느 해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읍의 환곡에 대한 폐단에 대해서는 신이 진실로 알고 있은 지 오래입니다.
이제 이 고을을 맡게 되어 곡식 장부를 조사해보니, 당초의 곡식 총수가 가호(家戶)의 총수보다 10배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곡식을 한 가호가 받은 것이 많게는 수십 석에 이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병든 사람이나 자식 없이 홀로 사는 늙은이까지도 4, 5석 이하로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번 흉년을 만나면 제 수량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므로, 해마다 그 받아들이지 못한 곡식을 이미 받아들인 것으로 마감한 것이 해를 따라 모조(耗條)가 더해져서 마침내 1만 1천 2백 17석이나 되는 많은 수량에 이르렀습니다. 어찌 최초의 반포된 것이야 이런 수량에 이르렀겠습니까.
전 현감 구득로(具得魯)가 상소한 이후 무오년에 받아들인 각종 곡식이 2천 4백 44석 남짓인데, 이포(吏逋)가 2천 3백 43석 남짓이고, 민반(民反)이 1백석 남짓이었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곡식 8천 7백 73석 남짓에 대해서는 3년에 걸쳐 나누어 받아들이기로 이미 규정해 놓았습니다. 금년에 받아들일 것은 2천 9백 24석 남짓인데, 이포의 경우는 재작년에 이미 받아들인 수량에 거의 절반이 넘으니 형편상 가호마다 3분의 1씩을 받아들여서 그 수량을 충당해야 할 것이고, 민반(民反)된 것 6천 7백 60여 석 중에는 이 고장을 떠난 가호와 아주 끊어진 가호의 이름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각종 곡식이 통틀어 모두 2천 7백 10석 남짓이나 되는데, 이는 다 고장을 떠났거나 대가 끊어진 지 오래된 가호로서 징수할 데가 없는 것들이니, 형편상 족징(族徵)이나 인징(隣徵)을 하여야만 수량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형편으로 보면, 흉년이 거듭되던 끝에 다행히 약간 풍년든 해를 만나서 모든 백성들의 마음에 제법 한 곳에 안주하여 삶을 즐길 생각을 갖게 되었고, 공채(公債)·사채(私債)·신포(身布)·국곡(國穀) 등을 근근이 다 바친 처지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상처가 겨우 나은 것과도 같고 또한 강한 화살이 멀리 나가서 힘이 다한 모양과도 같은 형편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때에 또 이웃이나 친척이 어느 해에 꾸어 먹었는지도 모르는 해묵은 환곡을 이들에게서 강제로 징수한다면 백성들의 힘만 지칠 뿐 아니라, 장차 풍년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이모저모로 생각해 보았으나 계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에 현재 있는 가호 아래에 수량을 나누어서 배정한 다음 이노(吏奴)들의 포곡(逋穀)으로 그 수량을 채워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일은 비록 구차하고 어렵지만 형편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금년에는 다행히 풍년이 든 덕에 임시방편으로 처리하여 해당 연도의 수량은 충당하였으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직도 5천 8백여 석이나 되는 가운데 타지로 떠났거나 아주 끊어진 가호 아래에 기록된 곡식의 수량이 거의 그 절반을 차지합니다. 그러니 금년과 명년에 기어코 제 수량대로 다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아무리 지려(智慮) 있는 사람이 이 일을 맡아서 한다 해도 이웃이나 친척에게서 징수하는 방법 외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 저 백성들은 1년 내내 고생을 하여도 가을에 수확하는 것은 그 수량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조금 풍년든 해를 만나더라도 관청의 환곡도 채 바치기 전에 이미 단지의 곡식까지 텅 비게 됩니다. 그런데 이웃이나 친척에게서 강제로 징수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편달을 가하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일 뿐만이 아니라, 끝내는 반드시 백성들이 모두 유랑하여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이는 참으로 한 고을 백성들의 고통 가운데 가장 바로잡기 어려운 일이며, 또한 아랫사람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에 감히 백성을 마치 다친 데가 있는 것처럼 불쌍히 여기시는 전하의 마음을 우러러 의지하여 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을 갖추 진술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은지(恩旨)를 내리시어, 고향을 떠났거나 없어진 가호들의 묵은 환곡을 탕감하도록 윤허하시고, 그 나머지 3천 1백 30 석 남짓 되는 곡식에 대해서는 또한 2년에 나누어 받아들여서 백성의 힘을 일분이나마 펴게 하도록 하시어, 한 고을 백성들로 하여금 곤궁의 걱정을 면하게 하소서.
아, 그리고 융정(戎政)은 국가의 큰 정사입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세초(歲抄)와 세말(歲末)이 있고 식년(式年)마다 안(案)을 고치며, 10년에 한 번씩 도안(都案)을 고치는데, 대체로 그 규정이 엄밀하여 간사한 행위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다만 마감하는 즈음에 반드시 정채(情債)가 있게 되는데, 이른바 정채라는 것은 아전 무리들의 지필(紙筆) 값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서울과 외방의 아전 무리들이 이것을 잇속으로 간주하여 교묘하게 명색을 만들어서 온갖 방법으로 토색질을 하고 제한 없이 긁어들이되, 해마다 더욱 심해져서 자못 한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영남에 처음 왔던 때부터 이번 재차 온 때까지가 10여 년에 불과한데, 그 동안에 정채의 증가된 것이 전보다 갑절이나 되었으니, 이것만도 이미 군민(軍民)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세초와 세말 그리고 안과 도안을 고치는 일이 수월 이내에 차례로 거행될 것인바, 경사(京司)와 각영(各營)에서 마감하는 것이 모두 네 차례나 됩니다. 그런데 이른바 군적(軍籍)이란 한 판(板)으로 계속 찍어내는 것과 같은 것인데도 매양 한 번 마감할 때마다 한 번씩 정채가 있게 되고, 그 징수하는 것은 모두 군민에게서 나와야 하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나 있겠습니까.
지난 신해년에 고 재상 유척기(兪拓基)와 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이 서로 이어 이 도의 감사가 되었을 때에 군정(軍政) 마감 때의 정채를 막아 금지시킬 일로 조정에 계문하여 이를 절목으로 만들었었는데, 그 법이 불행히도 중간에 폐지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포된 절목은 아직도 열읍에 남아 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그 절목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각 고을에서 군포를 바친 군사의 경우는 세초를 기다리지 않고 빈 자리가 나는 대로 채워 넣고 누런 쪽지를 붙여놓았다가 이를 책으로 묶어 즉시 관할하는 각 군영에 보고하되, 색리(色吏)는 보내지 않고 다만 지자군(持字軍)을 보내어 가서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또 각 군영에서는 거기에 준하여 쪽지를 붙인 다음 사람을 특별히 보내지 않고 다른 인편으로 경사(京司)에 올려 보냈습니다. 대체로 열읍에서 각 군영에 보고할 적에는 지자군만 보내고 각 군영에서 경사로 보낼 적에도 사람을 특별히 보내지 않는 것은 토색질하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신은 이 법이 몇 해나 행해지다가 어느 해에 폐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옛날 대신이 군민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했던 그 훌륭한 제도가 아전 따위들에게 조종되어 중간에 폐해지고 시행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이 한 가지 일은 한 고을의 폐단이 될 뿐만 아니라 곧 한 도 전체 군민의 막대한 폐단인데, 마침 금년에 신이 여러 가지 폐단이 된 것을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첨부하여 진술하는 바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너의 말대로라면 곡식 몇 천 석만 탕감해주면 해당 고을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는 일대 분수령이 될 수 있겠는데, 어찌 그것을 아끼겠는가.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너의 상소문을 가져다가 하나하나 베껴내서 초기(草記)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군정(軍政) 마감의 폐단에 대하여 고 상신 유척기·조현명이 마련하여 조정에 보고한 절목은 어찌하여 중간에 폐지되었단 말인가? 이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즉시 그곳 관찰사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절목과 함께 올려보내게 한 다음에 너의 상소문을 그 뒤에 붙여 회계(回啓)하도록 해서 네 고을과 여러 도의 폐단을 제거하는 뒷받침으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1월 27일 경진
태평관에 나아가서 칙사를 접견하고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이때 부칙사가 상에게 오언 율시(五言律詩)를 지어 올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명하고 예절 있는 나라에
사명 띠고 잠시 와 머무노니
해상의 흰 구름은 창문에 비치고
푸른 나무는 누각 가까이 서있네
전하의 빛나는 모습 가까이 뵈니
동남쪽 땅의 영험이 발휘됐어라
몇 번이나 멀리 눈길을 보내어
천리 밖 황제의 궁궐을 바라봤던고
진하 부사장 한용귀(韓用龜)에게 반송사(伴送使)를 겸하여 임명하였다.
1월 28일 신사
우의정 이시수가 차자를 올려, 상이 바야흐로 몸조리를 하는 중이니 칙사를 전송하는 자리에 직접 임어하지 말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수십 년 이래로 의거할 만한 전례가 우선 없으니, 역시 힘들더라도 해야 할 듯하다."
하였다.
1월 29일 임오
모화관에 나가서 칙사를 전송하였다. 이때 부칙사가 통역관들에게 나누어 준 물품이 적다는 내용을 종이쪽지에 써서 상의 자리에 올리고 계속 투덜거렸는데 그 행동이 몹시 해괴 망측하였다. 그러자 상이 전례에 비추어 더 주라고 명하였다.
1월 30일 계미
경모궁을 배알하였다.
조윤대(曺允大)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겸 찬선 송환기와 찬선 이성보가 오므로, 사관을 보내 위로의 말을 전하고 쌀과 고기를 공궤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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