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갑신
경모궁(景慕宮)에 친히 삭제(朔祭)를 행하고 세자 책봉의 고유제까지 겸하여 행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관례 때나 세자 책봉 때 찬선(贊善)의 위차는 당연히 춘방(春坊) 반열에 동참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나 두 유신(儒臣)은 다 자급(資級)이 높아 빈객(賓客)과 같은 반열로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유신을 예우하자면 도리상 당연히 빈례(賓禮)로 대우해야 할 것이다. 별개의 반열을 만들되 그 위치가 사부(師傅) 자리 뒤에 있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빈(賓)·찬(贊)을 명할 때나 반교(頒敎)·진하(陳賀) 때는 헌가(軒架)를 벌려놓지 말도록 하라."
병조가 아뢰기를,
"왕세자 책봉과 관례 때 책봉문을 침전에서 전수한다는 명령이 계셨지만 사체가 너무 중대하오니 시위군·금군을 전원 동원하게 하시고 의장대와 갑사(甲士)도 규례대로 다 동원하게 하소서."
하니,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2월 2일 을유
왕세자 관례와 책봉례를 집복헌(集福軒) 바깥채에서 거행하였다. 빈·찬을 명할 시간이 되자 빈 이하 종친들과 문무 백관 모두가 인정문(仁政門) 바깥 자리로 나왔다. 교명을 받드는 관원이 교서 상자를 받들어 책상 위에다 놓고 집사관(執事官)이 먼저 자리에 나오자 승지가 동서로 나뉘어 인정전 안으로 들어와 부복하였고 사관(史官)은 그 뒤에 있었다. 인의(引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들을 두 갈래로 나누어 인솔하고 들어오니 찬자가 ‘사배(四拜)’ 하고 창을 하여 종친과 문무 백관이 사배를 올렸다. 전교관(傳敎官)이 자리 앞으로 나와 꿇어앉아서 전교를 아뢰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동쪽 문으로 나가자 집사 두 사람이 교서안(敎書案)을 마주들고 그 뒤를 따랐다. 전교관이 내려와 빈의 동북쪽에 와서 서쪽을 향해 서 있고, 집사자는 교서안을 들고서 전교관 남쪽에 서 있는데 전교관보다는 조금 물러선 자리에서 역시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전교관이 전교가 있다고 말하자 빈 이하가 다 꿇어앉았다. 전교관이 교서를 선포하기를,
"지금 원자(元子)에게 관례를 올리는데 경들이 일을 도와 진행하라."
하고, 선포를 마치자 빈 이하가 사배를 올렸다. 집사자가 교서안을 들고 전교관 앞으로 나가니 전교관이 교서 상자를 들어 빈에게 주었고 빈은 앞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고 꿇어앉아 그것을 받았다. 교서안을 든 두 사람이 그것을 마주들고 빈의 왼편으로 가서 꿇어앉으니 빈이 교서함을 그 교서안 위에다 올려 놓았고 교서안을 든 자는 서로 맞들고 물러나와 빈의 뒤에 가 섰다. 전교관은 시위(侍位)로 돌아오고 빈과 찬이 부복했다가 일어나 사배를 올리고는 동쪽 문으로 나왔는데 이때 교서안을 든 자가 앞서 갔다. 빈이 교서 상자를 채여(彩輿)에다 올려 싣고 빈 이하 모두가 그 뒤를 따랐으며 종친과 문무 백관은 모두 배위(拜位)로 다시 가서 사배를 올리고 나가 집복헌 바깥채에 이르러 의식대로 예를 거행했다.
관례 시간이 되자 세자가 시복(時服)031) 차림으로 나왔다. 필선(弼善)이 세자를 인도하여 자리에 오르게 하자 궁관(宮官) 및 집사들이 들어와 재배를 올리고 각기 자기 자리로 갔으며 인의가 도감 제조(都監提調)를 비롯 시임·원임 각신(閣臣), 종친, 문무관 2품 이상을 동서로 나누어 인솔하고 들어왔다. 필선은 꿇어앉고 찬자가 일어날 것을 청하여 세자가 일어나서 자리 앞에 서 있고 도감 제조, 시임 각신, 원임 각신, 종친, 문무관 2품 이상 자들이 서계(西階)로 해서 올라와 청마루 안에 마련되어 있는 배위로 나왔다. 찬의가 재배를 제창하자 도감 제조, 시임 각신, 원임 각신, 종친, 문무관 2품 이상이 재배를 올렸고 세자도 재배로 답하였다. 그 일이 끝나자 도감 제조, 시임 각신, 원임 각신, 문무관 2품 이상들이 자리에서 나와 뜰 동서에 마련된 자리로 갔고 세자도 자리로 올랐다. 도감 낭청 3품 이하가 들어와서 배위로 가 재배를 올렸고, 사부(師傅)·빈객(賓客)·찬선(贊善)이 들어와 각기 자리를 잡았다. 세자가 자리에서 내려오자 필선이 세자를 인도하여 동계(東階)를 통해 내려와 뜰 동쪽에 마련된 배위로 가서 서쪽을 향해 서서 재배하였고 사부·빈객·찬선도 재배로 답하였다. 필선이 세자를 인도하여 뜰 동남에 마련된 자리로 나가 서쪽을 향해 서 있었는데 이 때 사부는 앞을 서고 빈객·찬선이 그 뒤를 따랐으며 익위(翊衛) 두 명이 좌우에 서 있었고 그 나머지 의장 시위들은 사부 밖에서 줄 서 있었다.
주인이 나와 문 동쪽에서 서쪽를 향해 빈을 맞았고 빈은 문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서 있었다. 빈과 주인이 서로 양보하면서 문 안에 들자 교서 상자를 받든 자가 앞에 가고 있었는데 세자는 그것을 보고 몸을 굽혔고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몸을 굽혔다. 빈이 교서를 받들어 책상 위에다 올려놓고 뜰로 나와 남쪽을 향해 서 있었고, 찬관(贊冠)은 빈의 서쪽에서 동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주인이 자리에 나와 서자 빈이 교서를 가지고 원위치로 돌아왔고 필선은 세자를 인도하여 전교를 받는 자리로 나와 북쪽을 향해 서서 사배를 올리게 하였다. 빈이, 전교가 있다고 하자 세자가 무릎을 꿇었다. 빈이 전교를 선독하기를,
"왕세자 아무에게 좋은 날을 골라 관을 씌우는 것은 다 옛 법을 따르는 것이다. 의정(議政) 아무를 명하여 궁에 나아가 예를 행하게 한다."
하였다. 선독을 마치자 세자가 부복했다가 일어나 사배를 올리고 꿇어앉았다. 사부가 빈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교서를 받아들고 물러와 세자에게 주었고 세자는 그 교서를 받아 필선에게 넘기면서 교서 상자를 가진 자에게 주도록 하고 부복했다가 일어나 동계(東階)를 통해서 올라갔으며 사부·빈객·찬선은 앞에서 인도하고 뒤따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주인측 찬관이 세자를 인도하여 동쪽 장막 안으로 들어가 북쪽 지점에서 서쪽을 향해 서 있게 하고, 사부·빈객·찬선은 각기 청마루 위의 마련된 자리로 나갔다. 그리고 빈은 서계를 통해서, 주인은 동계를 통해서 올라와 각기 자리 뒤에 가서 서 있었다. 처음에 빈이 올라왔을 때 빈측 찬관이 물항아리 앞으로 가 손을 씻고는 동계로 해서 올라와 동쪽 장막 안으로 가서 주인측 찬관의 남쪽에 자리하고 서 있었는데 다 서쪽를 향한 자세였다.
주인측 찬관이 세자를 이끌고 나와 관례를 올릴 자리의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서 있게 하였고 빈측 찬관은 머리싸개와 빗이 든 상자 둘을 가져와 꿇어앉아서 세자에게 올리는데, 관례를 행할 자리의 남쪽에서 하고 일어나 자리 북쪽으로 와 약간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서 있었다. 빈이 세자에게 읍을 하자 세자가 자리에 올라 서쪽을 향해 앉았다. 빈측 찬관이 자리 앞으로 가서 동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세자 머리에 빗질을 하고 머리싸개를 한 다음 일어나 약간 북쪽으로 가서 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빈이 내려와 손 씻을 때 주인도 따라 내려오고, 빈이 올라갈 때 주인도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첫번째 씌울 관을 든 자가 서계로 올라오자 빈이 한 계단 내려가서 그 관을 받아 세자가 있는 자리로 가 동쪽을 향해 서서 축(祝)하기를,
"좋은 달 좋은 날에 처음으로 관을 씌우노니 동심을 다 버리고 이루어진 덕을 삼가 지키면 장수의 상서가 있어 큰 복을 받으리라."
하고, 꿇어앉아 관을 씌운 다음 일어나 원위치로 돌아와서 동쪽을 향해 서 있었다. 빈측 찬관이 자리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꿇어앉아서 관을 똑바로 씌운 다음 일어나 원위치로 돌아갔고 세자는 부복했다가 일어났다. 빈이 세자에게 읍을 하니 주인측 찬관이 세자를 이끌고 동쪽 장막 속으로 가서 곤룡포를 입고 나와 자리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서 있게 하였다. 빈이 세자에게 읍을 하자 세자가 자리에 올라 서쪽을 향해 앉았다. 빈측 찬관이 자리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고 꿇어앉아서 처음에 씌웠던 관을 벗겨 상자 속에 넣고 일어나 원위치로 돌아왔다.
두 번째 씌울 관을 가진 자가 서계로 오르자 빈이 두 계단 내려가서 그것을 받아들고 세자가 있는 자리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서서 경축하기를,
"좋은 달 좋은 때에 좋은 관을 다시 씌우노니 경건한 마음으로 위의를 갖추고 그 덕을 더 밝게 하면 만년 장수를 누릴 것이며 이어 큰 복을 받으리라."
하고, 꿇어앉아 관을 씌운 다음 일어나 원위치로 돌아와서 동쪽을 향해 서 있었다. 빈측 찬관이 자리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고 꿇어앉아 동곳을 꽂고 갓끈을 매고는 일어서서 원위치로 돌아왔고 세자는 부복했다가 일어났다.
빈이 세자에게 읍을 하자 주인측 찬관이 세자를 이끌고 동쪽 장막 안으로 가 강사포(絳紗袍)를 입고 규(圭)를 들고 나와 자리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서 있었다. 빈이 세자에게 읍을 하니 세자가 자리에 올라 서쪽를 향해 앉았다. 빈측 찬관이 자리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꿇어앉아서 두 번째 씌웠던 관을 벗겨 상자 속에 넣고는 일어나 원위치로 돌아오고 세 번째로 씌울 관을 가진 자가 서계로 올라오자 빈이 세 계단 내려가서 그것을 받아가지고 세자가 있는 자리 앞으로 나와 동쪽을 향하여 서서 경축하기를,
"해로도 좋은 해 달로도 좋은 달에 마지막 관을 씌우노니 그 덕을 잘 이루면 만수 무강할 것이며 하늘로부터 경사를 받으리라."
하고, 꿇어앉아 관을 씌운 다음 일어나 원위치로 돌아와서 동쪽을 향해 서 있었다. 빈측 찬관이 자리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고 꿇어앉아서 동곳을 꽂고 갓끈을 매고는 일어나 원위치로 돌아오니 세자는 부복했다가 일어났다. 빈이 세자에게 읍을 하자 주인측 찬관이 세자를 이끌고 동쪽 장막 안으로 갔고 빈측 찬관은 머리싸개와 빗이 든 두 상자를 거두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측 찬관이 또 세자를 위한 예석(醴席)을 청마루 위에다 차렸는데 약간 서쪽으로 당겨 남을 향하게 하였다.
세자가 면복(冕服) 차림으로 규를 들고 나오자 주인측 찬관이 세자를 이끌고 자리로 나와 남쪽을 향해 서게 하고 찬관은 물러갔다. 빈이 예석으로 나오니 사옹원 부제조가 단술 동이를 얹어놓은 탁자 쪽으로 가 북쪽을 향하여 서서 단술을 술잔에 따랐다. 빈측 찬관이 그 단술을 잔에다 받아 예석 서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서 있었고 빈이 그 단술을 받아가지고 세자가 있는 자리 앞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서서 경축하기를,
"맛있게 익은 단술이며 좋은 안주가 향기로우니 절하고 받아 제를 올려 이 상서를 공고히 하면 하늘이 주는 복을 받아 장수를 누리리라."
하였다. 세자가 자리에 올라와 앉으니 빈이 꿇어앉아 단술을 올렸고 세자가 그 단술을 받자 빈은 일어나 원위치로 돌아갔다. 빈측 찬관이 차린 음식상을 들고 자리 앞으로 나가자 세자는 단술을 조금 부어 제를 올린 다음 자리 끝으로 나가 꿇어앉아서 단술잔을 비웠으며 빈측 찬관이 그 빈 잔을 받아 받침대에다 되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빈측 찬관이 음식상을 물리자 세자가 부복했다가 일어나 남을 향해 재배하였고 빈은 동쪽을 향해 재배로 답한 다음 내려와서 서계의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동쪽을 향해 서 있었다.
빈측 찬관은 빈을 따라 내려와 빈의 서남쪽에서 동쪽을 향해 서 있었고, 주인도 따라 내려와 뜰 남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서쪽을 향해 서 있었으며, 필선이 세자를 이끌고 서계를 통해서 내려와 서계 동남편에 서 있게 하였다. 빈이 조금 앞으로 나가 자(字)를 주면서 이르기를,
"갖출 예의는 이미 다 갖추었기에 이 좋은 달 좋은 날에 자를 삼가 알리는 것이니 군자(君子)에겐 당연한 일로서 큰 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 받아 길이 보존하소서. 전교를 받들어 자를 아무라고 합니다."
하니, 세자가 재배하고 이르기를,
"아무가 비록 불민하오나 감히 경건하게 받들지 않으리까."
하고는 세자가 재배하였다. 빈과 찬자와 주인은 문을 나갔고, 필선은 세자를 이끌고 조계(阼階) 아래에 마련된 자리에 와서 서쪽을 향해 서 있었으며, 사부·빈객·찬선은 다 배위(拜位)로 돌아왔다. 세자가 재배하자 사부·빈객·찬선은 재배하고 나갔으며 필선이 세자를 이끌고 조계로 해서 올라가 배위에 가 있자 도감 제조와 시임 각신, 원임 각신, 2품 이상도 나갔다. 세자가 자리에 오르니 도감 낭청, 3품 이하 모두가 배위로 돌아와 재배를 올렸다. 필선이 꿇어앉아 예가 끝났음을 아뢰니 세자가 자리에서 내려와 대내로 돌아갔다.
책봉례 거행 시간이 되었을 때는 어좌(御座)를 예대로 청마루 한복판에다 마련했는데 상은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세자가 면복 차림으로 규를 들고 나오자 필선이 뜰 위에 마련된 판위(版位)까지 인도하였다. 교명(敎命)·죽책(竹冊)·인수(印綬)를 받든 관원이 각기 교명·죽책·인수를 받들어 함께 책상 위에다 올려 놓았고, 예조 정랑은 전문함(箋文函)을, 제용감 판관은 표리함(表裡函)을 각각 받들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근시(近侍)와 집사관(執事官)이 먼저 전정에 들어와 사배를 올렸고 인의가 도감의 도제조 이하를 인솔하고 들어와 배위로 가서 사배를 올린 다음 섬돌 사이에 마련된 자리로 가 동쪽을 향해 서 있었다. 필선이 세자를 인도하고 들어와 마련된 자리에 가 있었고 사부·빈객·찬선이 차례로 들어와 각기 배위로 가 있었다. 찬의(贊儀)가 ‘사배’ 하고 창을 하니 세자가 사배를 올리고 사부·빈객·찬선도 사배를 올렸다. 필선이 세자를 인도하여 자리 앞에까지 올라와서는 필선은 기둥 밖에서 멈추고 사부·빈객·찬선이 뒤따라 올라 섬돌 사이에 마련된 자리로 가 있었다. 세자가 꿇어앉자 도감의 도제조가 서계로 해서 올라와 교명이 든 상자를 받들어 근시에게 주니 근시가 그것을 전해받아 꿇어앉아서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받아 겸 찬선(兼贊善)에게 주었다. 그 교명문에는
"주(周)의 세자는 책봉을 받고 하루 세 번씩 문안했는데 황리 원길(黃离元吉)032) 이었고, 당(唐)의 예는 중춘(仲春) 2월에 관례를 거행했는데 주불 사황(朱芾斯煌)033) 이었다. 그리하여 고유의 제도에 의해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아, 너 원자(元子)는 하늘이 점지하신 남다른 바탕으로 흐르는 무지개 같은 상서를 받았기에 자랄수록 온화하고 문아했으며 자손에게 좋은 교훈을 남길 것이다. 하늘이 도우시어 공자가 태어나던 그 해에 낳게 하였고, 조종(祖宗)이 감싸시어 후직(后稷) 어머니가 후직을 잉태하고 낳던 날과 같았다. 그리하여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고 앞으로 광명의 시대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상대를 예우하라는 교훈을 받들어 삼전(三殿)께 손자를 본 기쁨을 안겨드렸고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는 성의를 보여 팔도 백성이 원대한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주역》에서 말한 것처럼 몽양(蒙養)034) 의 공이 있어 인후하다는 소문이 자자했기에 한나라 문제의 예건(豫建)035) 정책이 나는 오히려 더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옛 전래의 의식에 따라 우선 관례를 거행하기로 하고 해로도 좋은 해요 달로도 좋은 달에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삼가(三加)의 예를 치뤘으며 사람에게 물어도 의사가 같고 거북에게 점을 쳐도 사람들 의사와 같기에 세자 위호를 정했던 것이다.
‘경신년’ 이 해는 바로 숙조(肅祖)께서 면류관을 쓰던 해요 또 영왕(寧王)이 옥책을 받던 해이기도 하다. 이에 너를 명하여 왕세자로 삼노니 너는 이 주어진 중책을 생각하고 나의 이 훈계를 체득하라. 그리하여야 너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고 천록이 만년토록 끝이 없으리라. 더욱 근면하고 경건해야만 선왕의 덕을 크게 현양하고 또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성학(聖學)을 존중하고 문교(文敎)를 진작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 가문의 법도였으며, 왕도(王道)를 따르고 기복(箕福)을 거두는 것이 역시 열성조의 위대한 교훈이었기에 이렇게 교시하는 것이니 아마 이 뜻을 충분히 알리라."
하였다.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것이다.】 도감 도제조가 죽책 상자를 받들고 꿇어앉아 근시에게 전하니 근시가 그것을 받아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찬선에게 주었다. 그 죽책문에는, "삼가례를 경건히 닦았으니 수와 녹이 끝이 없을 것이며 종묘 사직이 의탁할 곳이 있으니 만년 대계를 거듭 다진 것이다. 이에 왕실 고유의 제도를 참작하여 아름다운 전례를 선포하는 것이다. 아, 너 원자는 창성한 운세를 타고났으며 자품이 특이하였다. 태어나던 해가 공자가 탄생하던 해니 하늘·땅·사람이 다 도운 것이며, 계절은 자궁(慈宮)이 태기를 찾던 계절이어서 달도 날도 시간도 다 좋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하니 바로 제왕의 바탕이고 말에 법도가 있고 행동에 규칙이 있어 학문을 통한 공부가 이미 나타나 보였다. 상서로운 봄빛이 장락궁(長樂宮)에 계속 들어 오래 성숙되길 바랄 생각이었는데 초하루 아침의 종묘 배알 때 거기 계시는 영령이 무슨 말씀인가 하시는 듯하였다. 그 한 가지 일을 함으로써 삼선(三善)036) 이 다 성취된다는 옛 법을 취하고 하늘 땅이 제자리를 지키도록 하는 뜻을 따를 것을 생각하여 관례를 행하고 자(字)를 붙여주고 책명을 하여 위호를 정했으니, 예로 비추어 볼 때 당연한 윤리 질서이고 평이하고 번거롭지 않은 건곤(乾坤)의 도로서 일로 따져 사리를 따른 일이며 길상한 일이었다. 성조(聖祖)가 행했던 의식에 맞추어 문장은 찬란했으나 영원한 국가 운명을 빌던 영고(寧考)의 뜻에 따라 물채(物采)는 되도록 호화로움을 피했다. 계절도 경사에 걸맞게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이고 뭇백성들도 화기에 젖어 팔도가 중리(重离)의 노래 소리에 들떴다. 이에 너를 명해 왕세자로 삼노니 너는 착한 명성을 드높이기에 노력하고 큰 복을 영원히 누리도록 하라. 정일(精一)하여 중용의 도를 지키는 것이 바로 우리 가문 전래의 심법이며 함양(涵養)을 위해서는 모름지기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성문(聖門)의 관철된 공부이다. 거북점도 시초점도 경사(卿士)도 서민(庶民)도 똑같이 따라주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동(大同)이라는 것으로 나라 장래는 태산 반석일 것이며 해와 달과 남산(南山)과 송백(松栢)처럼 너에게 많은 복을 주어 그 복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철인이 되고 길상을 누리려면 다 시초부터 잘해야 하는 것이며 공순하고 검소함만이 덕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은 현자를 가까이함으로써 진보가 있는 것이니 언제나 이를 생각할 것이며 근면이 바로 수업(修業)의 요건이니 안일하지 말아야 편안해지는 것이다. 일을 당해서야 훈계하는 것은 비록 신교(身敎)에 비해 부끄러운 일이나 어버이 뜻을 따라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면명(面命)을 한 시도 잊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지었다.】 도감 도제조가 인수(印綬) 상자를 받들고 꿇어앉아서 근시에게 주니 근시가 그것을 받아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받아 빈객에게 주었다. 근시가 또 훈서(訓書)를 받들어 무릎을 꿇고 세자에게 올리자 세자는 또 그것을 받아 사부에게 주고 【 순서는 《오례의(五禮儀)》에 나와 있다.】 부복했다가 일어나 원위치로 내려와서 꿇어앉았다. 예조 정랑은 전문 상자를 받들고, 제용감 판관은 표리 상자를 받들어 차례차례 올리니 필선이 그것을 받아 꿇어앉아서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차례차례 받아 근시에게 주어 책상 위에다 놓게 하였다. 그 전문(箋文)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嘉慶) 5년 2월 2일에 관례를 행하고 저부(儲副) 자리에 올랐으니 신은 너무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사례하는 바이옵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관례를 거행하고는 특별히 단술을 내리시는 사랑을 보이셨으며 중리(重离)의 상징으로 종묘 제사를 받드는 큰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삼가 보명(寶命)을 받고 나니 더욱 비재(菲才)인 것이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의 나이 아직 관례를 치를 때가 아닌데, 일을 당했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상으로부터 받은 교훈은 비록 신교이오나 아직 정일(精一)의 전수 심법에는 어둡고 어린 탓인지 좋은 명성이 나타나지 못해 억조 창생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 것인데 면류관을 쓰게 하시는 날에 종묘 사직을 지키라는 은총이 거듭 내리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칠장(七章)으로 몸을 꾸미고 비로서 성인이 되는 전례를 거행했으며 이극(貳極)이라는 칭호로 일을 경건히 치를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특별히 부여하셨습니다. 스스로 돌아볼 때 이 어린 나이로 감히 세자라는 중한 자리를 맡게 된 것은 다 하늘과 땅처럼 변함없고 해와 달같이 밝으신 주상 전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뻐하시는 왕대비전의 만년 장수를 비옵고 하늘이 도우셔 백세 자손이 연면하도록 오직 자식을 사랑한다는 인자하신 마음으로 세자를 세우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신이 감히 그 교훈을 패복(佩服)하고 그 덕음(德音)을 되뇌이지 않겠습니까. 바다처럼 윤택하고 별같이 빛나는 것을 사중(四重)037) 으로 칭송하기는 비록 부끄러운 일이나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삼조(三朝)038) 의 정성을 다할까 합니다. 신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성상을 우러러보며 황공하고 급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이옵니다." 하였다. 【대제학 홍양호가 지었다.】 왕대비전(王大妃殿)·혜경궁(惠慶宮)·중궁전(中宮殿)의 상전(尙傳)이 자리에 나왔다. 예조 전랑이 전문 상사를 받들고 꿇어앉아 차례차례 올리니 필선은 그것을 받아 그 차서대로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차례로 받아 상전에게 주었으며 상전은 꿇어앉아 그것을 받아가지고 들어갔다. 왕대비전의 전문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거행하고 세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신으로서 너무나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이옵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어린 나이로 무릎 앞에서 재롱을 떨며 미처 성숙되지 못한 점이 부끄러웠는데 길일을 골라 관례를 행하고 세자 책봉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외람되이 동궁 자리를 더럽히게 되니 큰 짐을 진 것 같습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신은 원자(元子)라는 큰 책임을 졌으며 태어난 해는 공자가 태어난 해와 같은 해였습니다. 자손이 번창하도록 자성께서 감싸주셨기에 외람되이 기자 홍범의 오복(五福)을 받게 되었고 사랑과 존경을 힘쓰는 가법에 따라 하루 세 번 문안했던 주나라 문왕을 흉내냈을 뿐인데 동궁이라는 칭호의 은총이 삼가례를 마치는 날에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모두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 왕대비 전하(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王大妃殿下)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왕대비께서는 여자 중의 요(堯)·순(舜)이시고 이 나라의 도(塗)·신(莘)039) 이십니다. 남모르게 돕고 감싸주신 은혜는 높이서 덮어주는 하늘이시고 끝없이 길게 누리실 수한은 저 상서로운 태양입니다. 드디어 관례가 끝난 다음 종묘의 제사를 맡도록 하셨는데 신이 감히 그 아름다우신 가르침을 따라 삼가 내리신 은총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네 이루어진 덕을 따르라고 하신 칭찬은 받기가 부끄러운데 단술까지 내리신 축복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마는 이 큰 복을 받으라는 그 말씀 가슴에 새기고 손자의 재롱 보시며 노년을 즐기시는 인자하심에 더욱 송축을 드리는 바이옵니다." 하였고,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혜경궁 전문에는, "세자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거행하고 세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입니다. 이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색동옷 차림으로 장락궁에서 춤출 때 외람되게도 사랑하시는 은총을 받았고 조계(阼階)에서 현단복(玄端服)을 받고서 또 세자 책봉의 총애까지 입었습니다. 제 자신 노둔한 위인이라서 어떻게 백년대계를 위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이 아무는 온화하고 문아한 자품은 아니지만 사랑과 존경의 성의만은 간절합니다. 나이 13세가 다 되도록 명성이 드러나지 못해 부끄럽지만 자궁께 경사 있던 날과 이 날이 합치되어 큰 복이 거듭 내려진 것입니다. 종묘 사직을 맡으라는 명령이 관례의 뒤를 이어 거듭 내리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다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가 계셨기 때문으로 수가 칠순에 오르시고 천승(千乘)의 봉양을 받고 계십니다. 색동옷에 술잔을 들어 북두(北斗)와 남산(南山)같은 큰 복을 비오며 자손을 보살피시는 자애로운 손길은 기나긴 봄에 만물을 화생시키는 햇살과 같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세자를 책봉하시고 이에 빛나는 호칭을 내리시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어찌 감히 그 뜻을 받들어 언제나 기쁨에 찬 얼굴빛을 간직하지 않겠습니까. 일취 월장하여 훌륭한 세자가 되기에는 비록 부끄러운 점이 있을지라도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하게 하여 영원한 만수 무강을 빌겠습니다." 하였고, 【대제학 홍양호가 지었다.】 중궁전(中宮殿)의 전문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올리고 세자 책봉을 받았습니다. 신으로서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입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어린 시절 무릎밑을 돌며 길러주신 땅 같은 덕화 속에 자라나서 이제 관례를 올리고 외람되이 왕업을 이어갈 자리에 올랐습니다. 오직 두렵고 황공할 뿐 이 무거운 책임을 어찌 감당하오리까. 엎드려 생각건대 신의 나이 13세가 가깝도록 늘 경계의 말씀을 받들어왔습니다. 학궁에 나아가 스승에게 유의(幼儀)는 배우지 못했으나 자손을 사랑하시는 은덕으로 자애로운 가르침은 끊이지 않으셨습니다. 관례를 거행하고 자(字)를 명하시고 이어 세자 책봉의 명까지 내리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다 중궁 전하의 덕입니다. 갖추어진 부덕은 주위가 다 길상하고 그 아름다운 덕화는 기록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전궁(殿宮)을 다 기쁘게 만드신 장중한 덕을 모두 추앙하고 있으며 규달(閨闥)이 교화를 받고 있으니, 자손 만대에 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자 책봉의 영광이 어리석은 이 몸에 왔으니 신이 감히 빈축(賓祝)을 받고 모의(母儀)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일곱 가지로 장식된 몸에 어울리는 옷 비록 사중(四重)을 갖춘 한나라 태자만은 영문(令聞)이 못할지라도 하루 세 번 화기 찬 얼굴로 주나라에서 송축하던 구여(九如)040) 를 빌겠습니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도감 도제조 이하 그리고 사부·빈객·찬선 모두가 배위(拜位)로 되돌아왔다. 【자리에 있는 자들도 다 함께 하였다.】 예를 마치고 도감의 도제조 이하는 모두 나갔고 세자는 대내로 돌아왔다.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3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語文學)
[註 032] 황리 원길(黃离元吉) : 《주역(周易)》 이괘(離卦)의 효사(爻辭). 중용의 도를 지키면서 훌륭한 문명(文明)을 누리고 있는 내용이므로 하나도 나쁠 것이 없이 전례가 길하다는 뜻.[註 033] 주불 사황(朱芾斯煌) :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편(斯干篇)의 구절. 주불(朱芾)은 천자(天子) 또는 제후(諸侯)의 복색을 말하는데, 뿌리 있는 가문에 태어나서 앞으로 제후가 되고 천자가 될 기상이라는 뜻.[註 034] 몽양(蒙養) : 《주역(周易)》 몽괘(蒙卦)에 어렸을 때에 정도로 잘 기르는 것이 성인을 만드는 공효[蒙以養正聖功也]라는 말이 있다.[註 035] 예건(豫建) : 태자(太子)를 서둘러 세우는 것. 《후한서(後漢書)》 문제기(文帝紀)에 "태자를 미리 세워두는 것이 종묘 사직을 중히 여기는 뜻입니다." 하였음.[註 036] 삼선(三善) :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섬기고, 어린이로서 어른을 섬기는 세 가지 착한 일. 왕세자는 존귀한 존재이지만 학궁(學宮)에 들어가서 배우는 한 가지 일을 하므로써 무지한 백성들로 하여금 그 세 가지 도리를 다 알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임.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註 037] 사중(四重) : 말을 정중하게, 행실을 정중하게, 얼굴 모습을 정중하게, 기호를 신중하게 하는 것. 《법언(法言)》 수신(修身).[註 038] 삼조(三朝) : 하루 세 번 문안하는 일.[註 039] 도(塗)·신(莘) : 우(禹)의 비(妃)이며 계(啓)의 어머니 나라인 도산(塗山)과 문왕(文王)의 비이며 무왕(武王)의 어머니 나라인 신국(莘國).[註 040] 구여(九如) : 신하가 임금을 송축하는 말. 산 같이, 언덕 같이, 산등성이 같이, 구릉 같이, 시냇물이 막 흘러오듯이, 달이 언제나 기울면 차듯이, 태양이 떠오르듯이, 언제나 불변하는 남산(南山) 같이, 언제나 무성한 송백(松栢) 같이, 이렇게 9개의 여(如) 자가 들어 있는 축가.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
도감 도제조가 죽책 상자를 받들고 꿇어앉아 근시에게 전하니 근시가 그것을 받아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찬선에게 주었다. 그 죽책문에는,
"삼가례를 경건히 닦았으니 수와 녹이 끝이 없을 것이며 종묘 사직이 의탁할 곳이 있으니 만년 대계를 거듭 다진 것이다. 이에 왕실 고유의 제도를 참작하여 아름다운 전례를 선포하는 것이다.
아, 너 원자는 창성한 운세를 타고났으며 자품이 특이하였다. 태어나던 해가 공자가 탄생하던 해니 하늘·땅·사람이 다 도운 것이며, 계절은 자궁(慈宮)이 태기를 찾던 계절이어서 달도 날도 시간도 다 좋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하니 바로 제왕의 바탕이고 말에 법도가 있고 행동에 규칙이 있어 학문을 통한 공부가 이미 나타나 보였다. 상서로운 봄빛이 장락궁(長樂宮)에 계속 들어 오래 성숙되길 바랄 생각이었는데 초하루 아침의 종묘 배알 때 거기 계시는 영령이 무슨 말씀인가 하시는 듯하였다. 그 한 가지 일을 함으로써 삼선(三善)036) 이 다 성취된다는 옛 법을 취하고 하늘 땅이 제자리를 지키도록 하는 뜻을 따를 것을 생각하여 관례를 행하고 자(字)를 붙여주고 책명을 하여 위호를 정했으니, 예로 비추어 볼 때 당연한 윤리 질서이고 평이하고 번거롭지 않은 건곤(乾坤)의 도로서 일로 따져 사리를 따른 일이며 길상한 일이었다. 성조(聖祖)가 행했던 의식에 맞추어 문장은 찬란했으나 영원한 국가 운명을 빌던 영고(寧考)의 뜻에 따라 물채(物采)는 되도록 호화로움을 피했다. 계절도 경사에 걸맞게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이고 뭇백성들도 화기에 젖어 팔도가 중리(重离)의 노래 소리에 들떴다.
이에 너를 명해 왕세자로 삼노니 너는 착한 명성을 드높이기에 노력하고 큰 복을 영원히 누리도록 하라. 정일(精一)하여 중용의 도를 지키는 것이 바로 우리 가문 전래의 심법이며 함양(涵養)을 위해서는 모름지기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성문(聖門)의 관철된 공부이다.
거북점도 시초점도 경사(卿士)도 서민(庶民)도 똑같이 따라주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동(大同)이라는 것으로 나라 장래는 태산 반석일 것이며 해와 달과 남산(南山)과 송백(松栢)처럼 너에게 많은 복을 주어 그 복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철인이 되고 길상을 누리려면 다 시초부터 잘해야 하는 것이며 공순하고 검소함만이 덕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은 현자를 가까이함으로써 진보가 있는 것이니 언제나 이를 생각할 것이며 근면이 바로 수업(修業)의 요건이니 안일하지 말아야 편안해지는 것이다. 일을 당해서야 훈계하는 것은 비록 신교(身敎)에 비해 부끄러운 일이나 어버이 뜻을 따라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면명(面命)을 한 시도 잊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지었다.】 도감 도제조가 인수(印綬) 상자를 받들고 꿇어앉아서 근시에게 주니 근시가 그것을 받아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받아 빈객에게 주었다. 근시가 또 훈서(訓書)를 받들어 무릎을 꿇고 세자에게 올리자 세자는 또 그것을 받아 사부에게 주고 【 순서는 《오례의(五禮儀)》에 나와 있다.】 부복했다가 일어나 원위치로 내려와서 꿇어앉았다. 예조 정랑은 전문 상자를 받들고, 제용감 판관은 표리 상자를 받들어 차례차례 올리니 필선이 그것을 받아 꿇어앉아서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차례차례 받아 근시에게 주어 책상 위에다 놓게 하였다. 그 전문(箋文)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嘉慶) 5년 2월 2일에 관례를 행하고 저부(儲副) 자리에 올랐으니 신은 너무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사례하는 바이옵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관례를 거행하고는 특별히 단술을 내리시는 사랑을 보이셨으며 중리(重离)의 상징으로 종묘 제사를 받드는 큰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삼가 보명(寶命)을 받고 나니 더욱 비재(菲才)인 것이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의 나이 아직 관례를 치를 때가 아닌데, 일을 당했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상으로부터 받은 교훈은 비록 신교이오나 아직 정일(精一)의 전수 심법에는 어둡고 어린 탓인지 좋은 명성이 나타나지 못해 억조 창생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 것인데 면류관을 쓰게 하시는 날에 종묘 사직을 지키라는 은총이 거듭 내리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칠장(七章)으로 몸을 꾸미고 비로서 성인이 되는 전례를 거행했으며 이극(貳極)이라는 칭호로 일을 경건히 치를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특별히 부여하셨습니다. 스스로 돌아볼 때 이 어린 나이로 감히 세자라는 중한 자리를 맡게 된 것은 다 하늘과 땅처럼 변함없고 해와 달같이 밝으신 주상 전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뻐하시는 왕대비전의 만년 장수를 비옵고 하늘이 도우셔 백세 자손이 연면하도록 오직 자식을 사랑한다는 인자하신 마음으로 세자를 세우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신이 감히 그 교훈을 패복(佩服)하고 그 덕음(德音)을 되뇌이지 않겠습니까. 바다처럼 윤택하고 별같이 빛나는 것을 사중(四重)037) 으로 칭송하기는 비록 부끄러운 일이나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삼조(三朝)038) 의 정성을 다할까 합니다. 신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성상을 우러러보며 황공하고 급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이옵니다." 하였다. 【대제학 홍양호가 지었다.】 왕대비전(王大妃殿)·혜경궁(惠慶宮)·중궁전(中宮殿)의 상전(尙傳)이 자리에 나왔다. 예조 전랑이 전문 상사를 받들고 꿇어앉아 차례차례 올리니 필선은 그것을 받아 그 차서대로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차례로 받아 상전에게 주었으며 상전은 꿇어앉아 그것을 받아가지고 들어갔다. 왕대비전의 전문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거행하고 세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신으로서 너무나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이옵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어린 나이로 무릎 앞에서 재롱을 떨며 미처 성숙되지 못한 점이 부끄러웠는데 길일을 골라 관례를 행하고 세자 책봉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외람되이 동궁 자리를 더럽히게 되니 큰 짐을 진 것 같습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신은 원자(元子)라는 큰 책임을 졌으며 태어난 해는 공자가 태어난 해와 같은 해였습니다. 자손이 번창하도록 자성께서 감싸주셨기에 외람되이 기자 홍범의 오복(五福)을 받게 되었고 사랑과 존경을 힘쓰는 가법에 따라 하루 세 번 문안했던 주나라 문왕을 흉내냈을 뿐인데 동궁이라는 칭호의 은총이 삼가례를 마치는 날에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모두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 왕대비 전하(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王大妃殿下)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왕대비께서는 여자 중의 요(堯)·순(舜)이시고 이 나라의 도(塗)·신(莘)039) 이십니다. 남모르게 돕고 감싸주신 은혜는 높이서 덮어주는 하늘이시고 끝없이 길게 누리실 수한은 저 상서로운 태양입니다. 드디어 관례가 끝난 다음 종묘의 제사를 맡도록 하셨는데 신이 감히 그 아름다우신 가르침을 따라 삼가 내리신 은총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네 이루어진 덕을 따르라고 하신 칭찬은 받기가 부끄러운데 단술까지 내리신 축복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마는 이 큰 복을 받으라는 그 말씀 가슴에 새기고 손자의 재롱 보시며 노년을 즐기시는 인자하심에 더욱 송축을 드리는 바이옵니다." 하였고,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혜경궁 전문에는, "세자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거행하고 세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입니다. 이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색동옷 차림으로 장락궁에서 춤출 때 외람되게도 사랑하시는 은총을 받았고 조계(阼階)에서 현단복(玄端服)을 받고서 또 세자 책봉의 총애까지 입었습니다. 제 자신 노둔한 위인이라서 어떻게 백년대계를 위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이 아무는 온화하고 문아한 자품은 아니지만 사랑과 존경의 성의만은 간절합니다. 나이 13세가 다 되도록 명성이 드러나지 못해 부끄럽지만 자궁께 경사 있던 날과 이 날이 합치되어 큰 복이 거듭 내려진 것입니다. 종묘 사직을 맡으라는 명령이 관례의 뒤를 이어 거듭 내리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다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가 계셨기 때문으로 수가 칠순에 오르시고 천승(千乘)의 봉양을 받고 계십니다. 색동옷에 술잔을 들어 북두(北斗)와 남산(南山)같은 큰 복을 비오며 자손을 보살피시는 자애로운 손길은 기나긴 봄에 만물을 화생시키는 햇살과 같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세자를 책봉하시고 이에 빛나는 호칭을 내리시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어찌 감히 그 뜻을 받들어 언제나 기쁨에 찬 얼굴빛을 간직하지 않겠습니까. 일취 월장하여 훌륭한 세자가 되기에는 비록 부끄러운 점이 있을지라도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하게 하여 영원한 만수 무강을 빌겠습니다." 하였고, 【대제학 홍양호가 지었다.】 중궁전(中宮殿)의 전문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올리고 세자 책봉을 받았습니다. 신으로서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입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어린 시절 무릎밑을 돌며 길러주신 땅 같은 덕화 속에 자라나서 이제 관례를 올리고 외람되이 왕업을 이어갈 자리에 올랐습니다. 오직 두렵고 황공할 뿐 이 무거운 책임을 어찌 감당하오리까. 엎드려 생각건대 신의 나이 13세가 가깝도록 늘 경계의 말씀을 받들어왔습니다. 학궁에 나아가 스승에게 유의(幼儀)는 배우지 못했으나 자손을 사랑하시는 은덕으로 자애로운 가르침은 끊이지 않으셨습니다. 관례를 거행하고 자(字)를 명하시고 이어 세자 책봉의 명까지 내리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다 중궁 전하의 덕입니다. 갖추어진 부덕은 주위가 다 길상하고 그 아름다운 덕화는 기록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전궁(殿宮)을 다 기쁘게 만드신 장중한 덕을 모두 추앙하고 있으며 규달(閨闥)이 교화를 받고 있으니, 자손 만대에 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자 책봉의 영광이 어리석은 이 몸에 왔으니 신이 감히 빈축(賓祝)을 받고 모의(母儀)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일곱 가지로 장식된 몸에 어울리는 옷 비록 사중(四重)을 갖춘 한나라 태자만은 영문(令聞)이 못할지라도 하루 세 번 화기 찬 얼굴로 주나라에서 송축하던 구여(九如)040) 를 빌겠습니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도감 도제조 이하 그리고 사부·빈객·찬선 모두가 배위(拜位)로 되돌아왔다. 【자리에 있는 자들도 다 함께 하였다.】 예를 마치고 도감의 도제조 이하는 모두 나갔고 세자는 대내로 돌아왔다.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3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語文學)
[註 032] 황리 원길(黃离元吉) : 《주역(周易)》 이괘(離卦)의 효사(爻辭). 중용의 도를 지키면서 훌륭한 문명(文明)을 누리고 있는 내용이므로 하나도 나쁠 것이 없이 전례가 길하다는 뜻.[註 033] 주불 사황(朱芾斯煌) :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편(斯干篇)의 구절. 주불(朱芾)은 천자(天子) 또는 제후(諸侯)의 복색을 말하는데, 뿌리 있는 가문에 태어나서 앞으로 제후가 되고 천자가 될 기상이라는 뜻.[註 034] 몽양(蒙養) : 《주역(周易)》 몽괘(蒙卦)에 어렸을 때에 정도로 잘 기르는 것이 성인을 만드는 공효[蒙以養正聖功也]라는 말이 있다.[註 035] 예건(豫建) : 태자(太子)를 서둘러 세우는 것. 《후한서(後漢書)》 문제기(文帝紀)에 "태자를 미리 세워두는 것이 종묘 사직을 중히 여기는 뜻입니다." 하였음.[註 036] 삼선(三善) :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섬기고, 어린이로서 어른을 섬기는 세 가지 착한 일. 왕세자는 존귀한 존재이지만 학궁(學宮)에 들어가서 배우는 한 가지 일을 하므로써 무지한 백성들로 하여금 그 세 가지 도리를 다 알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임.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註 037] 사중(四重) : 말을 정중하게, 행실을 정중하게, 얼굴 모습을 정중하게, 기호를 신중하게 하는 것. 《법언(法言)》 수신(修身).[註 038] 삼조(三朝) : 하루 세 번 문안하는 일.[註 039] 도(塗)·신(莘) : 우(禹)의 비(妃)이며 계(啓)의 어머니 나라인 도산(塗山)과 문왕(文王)의 비이며 무왕(武王)의 어머니 나라인 신국(莘國).[註 040] 구여(九如) : 신하가 임금을 송축하는 말. 산 같이, 언덕 같이, 산등성이 같이, 구릉 같이, 시냇물이 막 흘러오듯이, 달이 언제나 기울면 차듯이, 태양이 떠오르듯이, 언제나 불변하는 남산(南山) 같이, 언제나 무성한 송백(松栢) 같이, 이렇게 9개의 여(如) 자가 들어 있는 축가.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
도감 도제조가 인수(印綬) 상자를 받들고 꿇어앉아서 근시에게 주니 근시가 그것을 받아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받아 빈객에게 주었다. 근시가 또 훈서(訓書)를 받들어 무릎을 꿇고 세자에게 올리자 세자는 또 그것을 받아 사부에게 주고 【 순서는 《오례의(五禮儀)》에 나와 있다.】 부복했다가 일어나 원위치로 내려와서 꿇어앉았다.
예조 정랑은 전문 상자를 받들고, 제용감 판관은 표리 상자를 받들어 차례차례 올리니 필선이 그것을 받아 꿇어앉아서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차례차례 받아 근시에게 주어 책상 위에다 놓게 하였다. 그 전문(箋文)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嘉慶) 5년 2월 2일에 관례를 행하고 저부(儲副) 자리에 올랐으니 신은 너무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사례하는 바이옵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관례를 거행하고는 특별히 단술을 내리시는 사랑을 보이셨으며 중리(重离)의 상징으로 종묘 제사를 받드는 큰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삼가 보명(寶命)을 받고 나니 더욱 비재(菲才)인 것이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의 나이 아직 관례를 치를 때가 아닌데, 일을 당했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상으로부터 받은 교훈은 비록 신교이오나 아직 정일(精一)의 전수 심법에는 어둡고 어린 탓인지 좋은 명성이 나타나지 못해 억조 창생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 것인데 면류관을 쓰게 하시는 날에 종묘 사직을 지키라는 은총이 거듭 내리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칠장(七章)으로 몸을 꾸미고 비로서 성인이 되는 전례를 거행했으며 이극(貳極)이라는 칭호로 일을 경건히 치를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특별히 부여하셨습니다.
스스로 돌아볼 때 이 어린 나이로 감히 세자라는 중한 자리를 맡게 된 것은 다 하늘과 땅처럼 변함없고 해와 달같이 밝으신 주상 전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뻐하시는 왕대비전의 만년 장수를 비옵고 하늘이 도우셔 백세 자손이 연면하도록 오직 자식을 사랑한다는 인자하신 마음으로 세자를 세우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신이 감히 그 교훈을 패복(佩服)하고 그 덕음(德音)을 되뇌이지 않겠습니까. 바다처럼 윤택하고 별같이 빛나는 것을 사중(四重)037) 으로 칭송하기는 비록 부끄러운 일이나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삼조(三朝)038) 의 정성을 다할까 합니다. 신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성상을 우러러보며 황공하고 급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이옵니다."
하였다. 【대제학 홍양호가 지었다.】 왕대비전(王大妃殿)·혜경궁(惠慶宮)·중궁전(中宮殿)의 상전(尙傳)이 자리에 나왔다. 예조 전랑이 전문 상사를 받들고 꿇어앉아 차례차례 올리니 필선은 그것을 받아 그 차서대로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차례로 받아 상전에게 주었으며 상전은 꿇어앉아 그것을 받아가지고 들어갔다. 왕대비전의 전문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거행하고 세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신으로서 너무나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이옵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어린 나이로 무릎 앞에서 재롱을 떨며 미처 성숙되지 못한 점이 부끄러웠는데 길일을 골라 관례를 행하고 세자 책봉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외람되이 동궁 자리를 더럽히게 되니 큰 짐을 진 것 같습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신은 원자(元子)라는 큰 책임을 졌으며 태어난 해는 공자가 태어난 해와 같은 해였습니다. 자손이 번창하도록 자성께서 감싸주셨기에 외람되이 기자 홍범의 오복(五福)을 받게 되었고 사랑과 존경을 힘쓰는 가법에 따라 하루 세 번 문안했던 주나라 문왕을 흉내냈을 뿐인데 동궁이라는 칭호의 은총이 삼가례를 마치는 날에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모두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 왕대비 전하(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王大妃殿下)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왕대비께서는 여자 중의 요(堯)·순(舜)이시고 이 나라의 도(塗)·신(莘)039) 이십니다. 남모르게 돕고 감싸주신 은혜는 높이서 덮어주는 하늘이시고 끝없이 길게 누리실 수한은 저 상서로운 태양입니다. 드디어 관례가 끝난 다음 종묘의 제사를 맡도록 하셨는데 신이 감히 그 아름다우신 가르침을 따라 삼가 내리신 은총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네 이루어진 덕을 따르라고 하신 칭찬은 받기가 부끄러운데 단술까지 내리신 축복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마는 이 큰 복을 받으라는 그 말씀 가슴에 새기고 손자의 재롱 보시며 노년을 즐기시는 인자하심에 더욱 송축을 드리는 바이옵니다." 하였고,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혜경궁 전문에는, "세자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거행하고 세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입니다. 이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색동옷 차림으로 장락궁에서 춤출 때 외람되게도 사랑하시는 은총을 받았고 조계(阼階)에서 현단복(玄端服)을 받고서 또 세자 책봉의 총애까지 입었습니다. 제 자신 노둔한 위인이라서 어떻게 백년대계를 위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이 아무는 온화하고 문아한 자품은 아니지만 사랑과 존경의 성의만은 간절합니다. 나이 13세가 다 되도록 명성이 드러나지 못해 부끄럽지만 자궁께 경사 있던 날과 이 날이 합치되어 큰 복이 거듭 내려진 것입니다. 종묘 사직을 맡으라는 명령이 관례의 뒤를 이어 거듭 내리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다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가 계셨기 때문으로 수가 칠순에 오르시고 천승(千乘)의 봉양을 받고 계십니다. 색동옷에 술잔을 들어 북두(北斗)와 남산(南山)같은 큰 복을 비오며 자손을 보살피시는 자애로운 손길은 기나긴 봄에 만물을 화생시키는 햇살과 같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세자를 책봉하시고 이에 빛나는 호칭을 내리시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어찌 감히 그 뜻을 받들어 언제나 기쁨에 찬 얼굴빛을 간직하지 않겠습니까. 일취 월장하여 훌륭한 세자가 되기에는 비록 부끄러운 점이 있을지라도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하게 하여 영원한 만수 무강을 빌겠습니다." 하였고, 【대제학 홍양호가 지었다.】 중궁전(中宮殿)의 전문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올리고 세자 책봉을 받았습니다. 신으로서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입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어린 시절 무릎밑을 돌며 길러주신 땅 같은 덕화 속에 자라나서 이제 관례를 올리고 외람되이 왕업을 이어갈 자리에 올랐습니다. 오직 두렵고 황공할 뿐 이 무거운 책임을 어찌 감당하오리까. 엎드려 생각건대 신의 나이 13세가 가깝도록 늘 경계의 말씀을 받들어왔습니다. 학궁에 나아가 스승에게 유의(幼儀)는 배우지 못했으나 자손을 사랑하시는 은덕으로 자애로운 가르침은 끊이지 않으셨습니다. 관례를 거행하고 자(字)를 명하시고 이어 세자 책봉의 명까지 내리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다 중궁 전하의 덕입니다. 갖추어진 부덕은 주위가 다 길상하고 그 아름다운 덕화는 기록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전궁(殿宮)을 다 기쁘게 만드신 장중한 덕을 모두 추앙하고 있으며 규달(閨闥)이 교화를 받고 있으니, 자손 만대에 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자 책봉의 영광이 어리석은 이 몸에 왔으니 신이 감히 빈축(賓祝)을 받고 모의(母儀)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일곱 가지로 장식된 몸에 어울리는 옷 비록 사중(四重)을 갖춘 한나라 태자만은 영문(令聞)이 못할지라도 하루 세 번 화기 찬 얼굴로 주나라에서 송축하던 구여(九如)040) 를 빌겠습니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도감 도제조 이하 그리고 사부·빈객·찬선 모두가 배위(拜位)로 되돌아왔다. 【자리에 있는 자들도 다 함께 하였다.】 예를 마치고 도감의 도제조 이하는 모두 나갔고 세자는 대내로 돌아왔다.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3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語文學)
[註 032] 황리 원길(黃离元吉) : 《주역(周易)》 이괘(離卦)의 효사(爻辭). 중용의 도를 지키면서 훌륭한 문명(文明)을 누리고 있는 내용이므로 하나도 나쁠 것이 없이 전례가 길하다는 뜻.[註 033] 주불 사황(朱芾斯煌) :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편(斯干篇)의 구절. 주불(朱芾)은 천자(天子) 또는 제후(諸侯)의 복색을 말하는데, 뿌리 있는 가문에 태어나서 앞으로 제후가 되고 천자가 될 기상이라는 뜻.[註 034] 몽양(蒙養) : 《주역(周易)》 몽괘(蒙卦)에 어렸을 때에 정도로 잘 기르는 것이 성인을 만드는 공효[蒙以養正聖功也]라는 말이 있다.[註 035] 예건(豫建) : 태자(太子)를 서둘러 세우는 것. 《후한서(後漢書)》 문제기(文帝紀)에 "태자를 미리 세워두는 것이 종묘 사직을 중히 여기는 뜻입니다." 하였음.[註 036] 삼선(三善) :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섬기고, 어린이로서 어른을 섬기는 세 가지 착한 일. 왕세자는 존귀한 존재이지만 학궁(學宮)에 들어가서 배우는 한 가지 일을 하므로써 무지한 백성들로 하여금 그 세 가지 도리를 다 알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임.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註 037] 사중(四重) : 말을 정중하게, 행실을 정중하게, 얼굴 모습을 정중하게, 기호를 신중하게 하는 것. 《법언(法言)》 수신(修身).[註 038] 삼조(三朝) : 하루 세 번 문안하는 일.[註 039] 도(塗)·신(莘) : 우(禹)의 비(妃)이며 계(啓)의 어머니 나라인 도산(塗山)과 문왕(文王)의 비이며 무왕(武王)의 어머니 나라인 신국(莘國).[註 040] 구여(九如) : 신하가 임금을 송축하는 말. 산 같이, 언덕 같이, 산등성이 같이, 구릉 같이, 시냇물이 막 흘러오듯이, 달이 언제나 기울면 차듯이, 태양이 떠오르듯이, 언제나 불변하는 남산(南山) 같이, 언제나 무성한 송백(松栢) 같이, 이렇게 9개의 여(如) 자가 들어 있는 축가.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
왕대비전(王大妃殿)·혜경궁(惠慶宮)·중궁전(中宮殿)의 상전(尙傳)이 자리에 나왔다. 예조 전랑이 전문 상사를 받들고 꿇어앉아 차례차례 올리니 필선은 그것을 받아 그 차서대로 세자에게 올렸고 세자는 그것을 차례로 받아 상전에게 주었으며 상전은 꿇어앉아 그것을 받아가지고 들어갔다. 왕대비전의 전문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거행하고 세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신으로서 너무나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이옵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어린 나이로 무릎 앞에서 재롱을 떨며 미처 성숙되지 못한 점이 부끄러웠는데 길일을 골라 관례를 행하고 세자 책봉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외람되이 동궁 자리를 더럽히게 되니 큰 짐을 진 것 같습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신은 원자(元子)라는 큰 책임을 졌으며 태어난 해는 공자가 태어난 해와 같은 해였습니다. 자손이 번창하도록 자성께서 감싸주셨기에 외람되이 기자 홍범의 오복(五福)을 받게 되었고 사랑과 존경을 힘쓰는 가법에 따라 하루 세 번 문안했던 주나라 문왕을 흉내냈을 뿐인데 동궁이라는 칭호의 은총이 삼가례를 마치는 날에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모두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 왕대비 전하(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王大妃殿下)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왕대비께서는 여자 중의 요(堯)·순(舜)이시고 이 나라의 도(塗)·신(莘)039) 이십니다. 남모르게 돕고 감싸주신 은혜는 높이서 덮어주는 하늘이시고 끝없이 길게 누리실 수한은 저 상서로운 태양입니다. 드디어 관례가 끝난 다음 종묘의 제사를 맡도록 하셨는데 신이 감히 그 아름다우신 가르침을 따라 삼가 내리신 은총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네 이루어진 덕을 따르라고 하신 칭찬은 받기가 부끄러운데 단술까지 내리신 축복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마는 이 큰 복을 받으라는 그 말씀 가슴에 새기고 손자의 재롱 보시며 노년을 즐기시는 인자하심에 더욱 송축을 드리는 바이옵니다."
하였고,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혜경궁 전문에는,
"세자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거행하고 세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입니다.
이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색동옷 차림으로 장락궁에서 춤출 때 외람되게도 사랑하시는 은총을 받았고 조계(阼階)에서 현단복(玄端服)을 받고서 또 세자 책봉의 총애까지 입었습니다. 제 자신 노둔한 위인이라서 어떻게 백년대계를 위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이 아무는 온화하고 문아한 자품은 아니지만 사랑과 존경의 성의만은 간절합니다. 나이 13세가 다 되도록 명성이 드러나지 못해 부끄럽지만 자궁께 경사 있던 날과 이 날이 합치되어 큰 복이 거듭 내려진 것입니다. 종묘 사직을 맡으라는 명령이 관례의 뒤를 이어 거듭 내리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다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가 계셨기 때문으로 수가 칠순에 오르시고 천승(千乘)의 봉양을 받고 계십니다. 색동옷에 술잔을 들어 북두(北斗)와 남산(南山)같은 큰 복을 비오며 자손을 보살피시는 자애로운 손길은 기나긴 봄에 만물을 화생시키는 햇살과 같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세자를 책봉하시고 이에 빛나는 호칭을 내리시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어찌 감히 그 뜻을 받들어 언제나 기쁨에 찬 얼굴빛을 간직하지 않겠습니까. 일취 월장하여 훌륭한 세자가 되기에는 비록 부끄러운 점이 있을지라도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하게 하여 영원한 만수 무강을 빌겠습니다."
하였고, 【대제학 홍양호가 지었다.】 중궁전(中宮殿)의 전문에는,
"세자 신 아무는 가경 5년 2월 2일 관례를 올리고 세자 책봉을 받았습니다. 신으로서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삼가 전문을 받들어 칭사하는 바입니다.
신 아무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이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어린 시절 무릎밑을 돌며 길러주신 땅 같은 덕화 속에 자라나서 이제 관례를 올리고 외람되이 왕업을 이어갈 자리에 올랐습니다. 오직 두렵고 황공할 뿐 이 무거운 책임을 어찌 감당하오리까.
엎드려 생각건대 신의 나이 13세가 가깝도록 늘 경계의 말씀을 받들어왔습니다. 학궁에 나아가 스승에게 유의(幼儀)는 배우지 못했으나 자손을 사랑하시는 은덕으로 자애로운 가르침은 끊이지 않으셨습니다. 관례를 거행하고 자(字)를 명하시고 이어 세자 책봉의 명까지 내리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다 중궁 전하의 덕입니다. 갖추어진 부덕은 주위가 다 길상하고 그 아름다운 덕화는 기록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전궁(殿宮)을 다 기쁘게 만드신 장중한 덕을 모두 추앙하고 있으며 규달(閨闥)이 교화를 받고 있으니, 자손 만대에 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자 책봉의 영광이 어리석은 이 몸에 왔으니 신이 감히 빈축(賓祝)을 받고 모의(母儀)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일곱 가지로 장식된 몸에 어울리는 옷 비록 사중(四重)을 갖춘 한나라 태자만은 영문(令聞)이 못할지라도 하루 세 번 화기 찬 얼굴로 주나라에서 송축하던 구여(九如)040) 를 빌겠습니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도감 도제조 이하 그리고 사부·빈객·찬선 모두가 배위(拜位)로 되돌아왔다. 【자리에 있는 자들도 다 함께 하였다.】 예를 마치고 도감의 도제조 이하는 모두 나갔고 세자는 대내로 돌아왔다.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3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語文學)
[註 032] 황리 원길(黃离元吉) : 《주역(周易)》 이괘(離卦)의 효사(爻辭). 중용의 도를 지키면서 훌륭한 문명(文明)을 누리고 있는 내용이므로 하나도 나쁠 것이 없이 전례가 길하다는 뜻.[註 033] 주불 사황(朱芾斯煌) :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편(斯干篇)의 구절. 주불(朱芾)은 천자(天子) 또는 제후(諸侯)의 복색을 말하는데, 뿌리 있는 가문에 태어나서 앞으로 제후가 되고 천자가 될 기상이라는 뜻.[註 034] 몽양(蒙養) : 《주역(周易)》 몽괘(蒙卦)에 어렸을 때에 정도로 잘 기르는 것이 성인을 만드는 공효[蒙以養正聖功也]라는 말이 있다.[註 035] 예건(豫建) : 태자(太子)를 서둘러 세우는 것. 《후한서(後漢書)》 문제기(文帝紀)에 "태자를 미리 세워두는 것이 종묘 사직을 중히 여기는 뜻입니다." 하였음.[註 036] 삼선(三善) :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섬기고, 어린이로서 어른을 섬기는 세 가지 착한 일. 왕세자는 존귀한 존재이지만 학궁(學宮)에 들어가서 배우는 한 가지 일을 하므로써 무지한 백성들로 하여금 그 세 가지 도리를 다 알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임.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註 037] 사중(四重) : 말을 정중하게, 행실을 정중하게, 얼굴 모습을 정중하게, 기호를 신중하게 하는 것. 《법언(法言)》 수신(修身).[註 038] 삼조(三朝) : 하루 세 번 문안하는 일.[註 039] 도(塗)·신(莘) : 우(禹)의 비(妃)이며 계(啓)의 어머니 나라인 도산(塗山)과 문왕(文王)의 비이며 무왕(武王)의 어머니 나라인 신국(莘國).[註 040] 구여(九如) : 신하가 임금을 송축하는 말. 산 같이, 언덕 같이, 산등성이 같이, 구릉 같이, 시냇물이 막 흘러오듯이, 달이 언제나 기울면 차듯이, 태양이 떠오르듯이, 언제나 불변하는 남산(南山) 같이, 언제나 무성한 송백(松栢) 같이, 이렇게 9개의 여(如) 자가 들어 있는 축가.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
도감 도제조 이하 그리고 사부·빈객·찬선 모두가 배위(拜位)로 되돌아왔다. 【자리에 있는 자들도 다 함께 하였다.】 예를 마치고 도감의 도제조 이하는 모두 나갔고 세자는 대내로 돌아왔다.
축하의 교서를 반포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왕업을 이어갈 사람으로서 세자 책봉이 주어지고 사례(四禮)의 첫머리인 관례를 성대히 거행하였기에 이에 이 교서를 반포하여 팔방(八方)에 널리 알림으로써 경사를 함께 하려는 것이다. 생각하면 저사(儲嗣)는 나라의 뿌리이며 성왕이 소중히 여겼던 것은 관례였다. 종묘의 제사를 받들라는 희경(羲經)의 교훈이 있고 불면(黻冕) 차림으로 단술을 받는 예가 대기(戴記)에 나와 있다.
돌이켜보면 과인이 위업을 물려받았는데 다행히도 남달리 특이한 원자가 태어난 것이다. 해는 대성 공자가 탄강했던 해이고 달과 날은 자궁(慈宮)의 탄신과 합치되고 있으며, 주나라에서도 맏아들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쳤듯이 신인(神人)이 일찍이 원자(元子)에게 의탁한 것이다. 의젓한 천품에 총명과 효우(孝友)는 마음에서 우러났고 날이 갈수록 온화하고 문아하여 용모와 사기(辭氣)가 법도에 맞았다. 봄에는 시(詩)를 익히고 겨울에는 예(禮)를 익히면서 보부(保傅)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고 《논어》·《맹자》를 배우면서 빈료(賓僚)가 깜짝 놀라는 질문을 했었다. 큰 책임은 맡을 사람에게 맡겨야 할 것이고 나이도 이미 관례를 치를 때가 되었다. 전궁(殿宮)에 손자를 안겨 주는 기쁨을 주었으니 내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며, 신민(臣民)들이 목을 늘이고 고대하고 있는 일을 늦잡을 것이 무언가. 처음에는 어려서 바르게 자라게 하기 위해 큰 호칭을 내리기에 정중을 기했으나 이제는 관례를 치를 날을 당했으니 동궁에 있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해는 공자 탄강의 경년(庚年)이 다시 돌아왔으니 세자도 그 빛을 받아 빛을 낼 것이며 달은 좋은 묘월(卯月)인데 사천(司天)이 시간은 정오임을 아뢰었다. 그리하여 본월 2일 관례를 거행하고 이어 왕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요(堯)가 수(收)041) 를 쓰고 순(舜)이 면(冕)을 쓴 듯이 완전한 위의가 그럴싸하고, 은(殷)의 호(瑚)와 하(夏)의 황(璜)을 지킬 자가 있어 종묘 사직이 더욱 존엄해진 것이다. 뜰에서 보책(寶冊)을 선포하자 뭇백성들은 머리를 들어 우러렀고 현단(玄端) 차림으로 조계에 오르니 일곱 가지 수놓은 옷이 눈부셨다. 쟁그랑거리는 패옥 소리는 저절로 절도에 맞고 축하의 술잔들은 일렁이는 파도가 연상되었다. 장구하기를 바라는 선왕의 가르침을 따라 성대한 의식을 하루에 다 거행하였는데 하늘의 두터운 사랑을 받아 미래는 만년을 두고 영원하리라.
이른 아침에 하례를 받고 은덕을 온 국토에 베푸는 것이다. 태양처럼 빛나는 상서로운 빛을 모두 기쁜 마음으로 눈을 닦으며 우러러보고 바람처럼 퍼져가는 화기 찬 기운에 양양한 노랫소리가 귀에 가득하다. 하(夏)의 계(啓)를 칭송하며 노래 불렀듯이 세자에 대한 찬양이 자자했고, 주(周)의 세자가 아침 저녁 문안했듯이 나라 사람들 모두가 그 효성을 본받으리라. 새벽에 서연이 열리면 많은 선비들이 선(善)을 말하고 잘못은 바른말로 도와야 할 것이며, 세자궁에 봄이 들었으니 때때로 인(仁)을 실천하고 덕을 펴야 할 것이다.
본월 2일 새벽 이전을 기하여 사형수 이하의 잡범들은 모두 죄를 면제하고 관직에 있는 자들은 각각 한 자급씩 올려주며 자궁(資窮)인 자는 그의 대신인 자를 올려주도록 하라. 아, 십육언(十六言)042) 전수된 심법(心法)은 해와 달이 계속 밝듯이 끝없이 전수될 것이며, 4백 년 역사의 나라의 기반은 태산(泰山)·화산(華山)과 함께 더더욱 공고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체는 다 함께 끝없는 수를 누릴 것이며 모든 복이 온 누리에 퍼질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 홍양호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36면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註 041] 수(收) : 고대 관의 일종.[註 042] 십육언(十六言) :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수하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순일하게 하여야 진실로 중도를 잡을 수 있다.[人心唯危道心唯微唯精唯一允執厥中]"는 16자를 말함.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영의정 이병모(李秉模), 좌의정 심환지(沈煥之), 우의정 이시수(李時秀), 선혜청 당상 김문순(金文淳)·서용보(徐龍輔), 겸 찬선 송환기(宋煥箕), 찬선 이성보(李城輔) 등을 불러 접견하였는데, 병모(秉模) 등이 아뢰기를,
"좋은 날 좋은 때에 경사스러운 예가 잘 이루어졌으니 억만 년 끝없는 기반이 지금부터 다시 시작된 것이므로 기쁘고 경사스럽게 여기는 마음은 온 누리가 다 같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경사는 사실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이 돌보시고 도우셔서 있게 된 일이지만 내 마음은 한편으로는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 계신 어버이가 그리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내 정력이 남을 대하여 응대하기에는 사실 어려운 점이 있으나 특히 두 유현(儒賢) 때문에 이렇게 접견하기로 한 것이다. 이 때 유현이 올라와서 반열에 참가한 것은 성대한 일을 더욱 빛나게 해준 정도만이 아니다. 이번에 경사스러운 예를 한꺼번에 거행한 것도 사실은 현묘조(顯廟朝)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는데, 유현으로서 관례·책봉례 등 세 차례 예에 다 참가했던 일도 오직 그때 그랬었다. 더구나 찬선(贊善)이라는 직함을 처음으로 두어 맨 먼저 그 부름를 받고 응했던 자가 바로 송선정(宋先正)043) 이었다. 지금 겸 찬선은 선정의 손자로서 그로부터 1백여 년 후에 다시 그 성대한 일에 참여하여 고인의 뒤를 밟았고, 여주(驪州)의 찬선 역시 애써 처음 먹었던 마음을 돌려 함께 이렇게 와주었으니, 나로서는 경들에 대해 참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하니, 찬선 송환기가 아뢰기를,
"사실 너무 늙고 병들어 재능을 펴보일 가망은 없으나 이 큰 경사날을 당하여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분부를 거듭 받고서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어 들것에 실려 올라와서 성대한 의식을 보고 나니 기쁨에 넘치는 정성이 조금은 풀렸습니다. 게다가 전후 성상께서 번번이 신의 선조 문정공(文正公)의 고사를 언급하시니 더욱 만만번 황공함을 느끼는 바입니다."
하고, 찬선 이성보는 아뢰기를,
"대례(大禮)가 이미 끝났으니 만만번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울 뿐 달리 아뢸 말씀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겸 찬선을 못 본 지가 벌써 여러 해 되었다. 그 동안 근력은 어떠한가?"
하니, 환기가 아뢰기를,
"지금은 날이 갈수록 점점 쇠진해가기만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묘조에서 유현을 불러올렸던 것은 사실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 있었던 훌륭한 일이었는데 지금 두 번째 또 그 일이 있는 것이다. 찬선은 이미 나와 묵은 약속이 있기에 금방 훌쩍 떠나지는 않을 것으로 내 믿고 있지만 겸 찬선도 나이로 보아서는 비록 매우 늙었어도 역시 나를 위해 조금 있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몇해 전에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물었다가 금방 고향을 찾아 가버리게 만든 일이 있었지만 지금이야 그러한 문제는 다시 꺼낼 겨를도 없을 것이다. 경들이 기왕 올라왔으니 경연(經筵)·주연(胄筵)을 드나들면서 토론도 하고 계옥(啓沃)도 하는 보탬을 준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하니, 환기가 아뢰기를,
"성대한 예를 보기 위해 들것에 실려 오기는 했으나 사실 지금 당장 병을 견디기가 어려워 성상께서 내리신 분부를 받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비록 오래 체류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어떻게 강석(講席)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그리고 찬선은 과연 묵은 약속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니, 이성보가 아뢰기를,
"신으로서 만만번 감당하지 못할 일이오나 이미 성상의 하교를 받은 이상 삼가 강석에 한 번은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상의 하교가 저리도 은근하시니 겸 찬선도 한 번쯤 참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찬선이 좋은 말을 했다. 경도 돌아가고픈 마음을 조금 늦추도록 하라."
하니, 환기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그러하시니 신도 삼가 한 번은 참석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내 정력이 무리해서 일어나기에는 비록 어려운 상태지만 경들이 지금 있기로 하였으니 며칠 안으로 경연을 열어야겠다. 경들은 먼저 물러가 휴식을 취하면서 다시 볼 때를 기다리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경례(慶禮)는 되도록 간소하게 하였고 추은(推恩)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역시 감히 큰 규모로 치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국가 운명을 영원토록 공고히 하는 기본이 사실은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는 데 있으므로 서울·지방 할 것 없이 되도록 균등하게 실질적인 혜택을 베풀고 싶은 것이다. 경술년에 했던 전례를 모방해야겠지만 그래도 균일하게 베풀 수 있는 방법을 경들이 다시 강구해 보라. 묵은 환자곡을 기유년 이전 것까지로 하면 그 수가 30, 40만 섬 가량이 되는데 그것을 몽땅 탕감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가장 오래된 환자곡은 탕감하는 것이 과연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묵은 환자곡의 탕감으로는 실질적인 혜택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 지금 나의 원래 생각은 무엇보다도 빠짐없이 고루 혜택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인(貢人)의 유재(遺在)나 시민(市民)·반인(泮人)에게 있어 부역 같은 것은 서울 백성들에게 딸린 문제이고 세전(稅錢)이나 공전(貢錢) 같은 것은 시골 백성들에게 딸린 문제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나 소자(小子)는 황천이 도와주시는 사랑을 받고 뭇 백성들이 바라는 뜻에 따라 날도 좋으며 때도 좋은 때에 삼가(三加)의 예를 거행하고 세자 책봉까지 마쳤다. 나라는 태산 반석 같이 안정되었고 전궁에는 즐거운 기쁨을 안겨드렸다. 우리 조종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터전을 닦고 자손들의 후사를 다짐했으며 화락한 가정과 번성한 자손은 우리 후대에 경록(慶祿)을 물려줄 것이다. 그리고 서로 알리고 서로 기뻐하여 우리 백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생각하면 애당초 가신 어버이가 그리워 따라가려도 따라갈 수 없는 나의 심정으로 이 유신(維新)의 시기를 당하여 비록 전례에 따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기는 해야 했으나 안정을 유지하고 천천히 함으로써 완전을 기하고 유종의 미를 기했던 것이다. 대소 신료들이야 이러한 나를 이해하겠지만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무엇인가 기념이 될만한 행사를 하는 것은 그 경사를 백성들과 함께 하기 위한 것이므로 전교를 선포하여 사면령을 내리기도 하고 과거를 보여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는 것이며 또 백성들을 화락하게 함으로써 국가 운명을 공고히 할 기반을 삼기도 하는 것이다. 열성조에서 준행하시던 법을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이니 조관(朝官)은 나이 70, 사서(士庶)는 나이 80인 자로서 당상관 품계에 이르지 못한 자는 모두 한 품계씩 올려주고, 각도의 묵은 환자곡 30만 섬과 공인들의 묵은 유재(遺在) 1만 섬 그리고 시민들은 부역 3개월, 반인들은 30일씩을 모두 탕감할 것이며 군전(軍錢)·결전(結錢)·승역(僧役)·세전(稅錢)·공전(貢錢)도 수량을 나누어 감면해 줌으로써 만민에 복을 내리는 뜻을 표하고 이어 국가에 바라고 있는 여정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전(賞典)을 실시하였다.
관례와 세자 책봉 때 빈(賓)이었던 영의정 이병모에게는 안장 갖춘 말 1필을, 찬례(贊禮)였던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는 길들여진 말 1필을, 주인(主人)이었던 안춘군(安春君) 이륭(李烿)에게는 안장 갖춘 말 1필을, 주인으로서 찬관(贊官)이었던 예조 참의 김조순(金祖淳)에게는 길들이지 않은 말 1필을, 집관자(執冠者)였던 상의원 정 박윤수(朴崙壽)와 예모관(禮貌官)이었던 필선 윤광보(尹光普)에게는 각각 길들이지 않은 말 1필을 내리고, 전교관(傳敎官)이었던 예방 승지 정상우(鄭尙愚)와 작례관(酌禮官)이었던 사옹원 부제조 이노춘(李魯春)은 품계를 올려 주었다. 진포관(進脯官)이었던 사옹원 직장 이회상(李晦祥)에게는 약간 길들여진 말 1필을, 빈객(賓客) 및 배종(陪從)하였던 춘방(春坊)·계방(桂坊)에게도 각기 길들이지 않은 말 1필씩을 내렸다.
전책관(傳冊官)이었던 예방 승지 정상우, 예모관이었던 필선 윤광보, 보덕 김조순도 모두 품계를 올려주고, 도제조 영의정 이병모에게는 안장 갖춘 말 1필을, 제조 행 판중추부사 홍양호, 행 공조 판서 홍억(洪檍), 예조 판서 이만수에게는 각기 길들여진 말 1필을 내리고, 도청 응교 김근순(金近淳), 수찬 조석중(曺錫中)은 품계를 올려주고, 교명문 제술관(敎命文製述官)이었던 행 판중추부사 홍양호, 서사관(書寫官)이었던 봉조하(奉朝賀) 이명식(李命植)과 죽책문 제술관(竹冊文製述官)이었던 영의정 이병모, 서사관이었던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에게는 각기 길들여진 말 1필씩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상전은 현묘조 신묘년의 관례와 책봉례 때 시행한 전례를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 중 반열‘에 참가했던 부(傅) 좌의정 심환지와 교명(敎命) 두 글자를 전서로 쓴 서사관 행 공조 판서 홍억과 옥인(玉印)을 전서로 쓴 서사관 행 대호군 김익휴(金翊休)에 대하여는, 기묘년의 책봉 때도 약간 길들여진 말과 완전히 길들여진 말을 상전으로 내린 일이 있었고 또 강관(講官)으로 준직(準職)을 준 일도 있었으며 계방(桂坊)의 우직(右職)을 주기도 하였으니, 지금 역시 기묘년에 시행했던 상전을 그대로 감히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친히 임하지 않더라도 친히 전하는 의식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훈서(訓書)를 받들었던 부(傅) 좌의정 심환지, 교명(敎命)을 받았던 겸 찬선 송환기, 죽책(竹冊)을 받았던 찬선 이성보, 옥인을 받았던 빈객 홍양호, 찬홀(贊笏)인 검교 직각(檢校直閣) 심상규(沈象奎)는 다 소중한 일들을 거행하였고 더구나 산림(山林)으로서 반열에 참가했던 이는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하여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부(傅)에게는 기묘년에 사부에게 내렸던 상전을 원용하고, 찬선과 빈객에게는 기묘년에 빈객에게 내렸던 상전을, 찬홀에게는 신묘년에 겸보덕(兼輔德)에게 내렸던 상전을 원용하라. 그리고 전지(傳旨)를 받들었던 윤광보(尹光普)·김조순(金祖淳)·정상우(鄭尙愚)·이노춘(李魯春)은 가선(嘉善)으로 올리고 조석중(曺錫中)은 통정(通政)으로 올릴 것이며 김근순(金近淳)은 준직(準職)을 지내지 못했으므로 준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중신 윤사국(尹師國)이 크고 작은 ‘달(達)’자와 ‘성(省)’자를 썼고 문안패(問安牌)·휘지마패(徽旨馬牌)도 썼으니 내시(內寺)로 하여금 길들여진 말 1필을 전달하게 하라."
하교하였다.
"사부와 유선(諭善)이 개강하는 자리에 함께 나와 있고 지금 이 경사스러운 때에 또 황발(黃髮)의 노인까지 나와 우리 빈료(賓僚)들의 의표가 빛나기 때문에 조정의 관원들 모두가 서로 바라보며 기쁨이 솟아오르고 있어 내 마음도 물론 만만번 행복하다. 더구나 삼보(三保) 구경(九卿)의 벼슬자리가 숲 속에 묻혀 있는 숙덕(宿德)들에게 맞는 자리이지만 아직까지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은 역시 때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겸 찬선 송환기는 종1품, 찬선 이성보는 정2품으로 각각 품계를 올리라."
이성보(李城輔)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산림 처사가 1품이 된 것은 근래에 드물게 있는 일이다. 더구나 찬성이라는 자리가 원래 선정(先正)을 위해 만들어졌던 것인데, 그 선정의 후손이 선정의 뒤를 이어 대례(大禮)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 품계에다가 어떻게 판부사(判府事)만 달랑 붙여줄 것인가. 송환기에게 찬성을 제수하도록 하라."
호조에 명하여 쌀·고기·땔감·숯 등을 겸 찬선 송환기에게 실어보내게 하였다.
검교 대교 이존수(李存秀)가 서계하였다.
"신이 삼가 성상의 유지를 받들어 좌참찬 이성보에게 전달했더니, 그의 말이, ‘신이 집에 있을 때부터 계속 품어온 뜻은 이왕 크나큰 은덕에 감격하고 있는 터이고 게다가 또 감당할 수 없는 하교까지 받아 만사 무릅쓰고 부름에 응해야 할 처지이면 어차피 나가는 것은 일반이므로 가서 대례를 참관하고 나서 주연(胄筵) 나들이나 한 번 하고 돌아오리라 했던 것인데 천만 뜻밖에도 분수에 없는 은총으로 새로운 중대한 임무를 보잘것없는 천신(賤臣)에게 맡기시니 신으로서는 깜짝 놀라고 마음이 다급해져서 몸 둘 곳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막 성 밖으로 물러나와 이 작은 충정을 문자로 아뢰고 그 길로 고향을 찾아 돌아가려고 하는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합신(閤臣)이 와서 특별 유지를 전달했는 바, 그 내용이 더더욱 융숭하고 진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 마음을 이해하리라.’는 하교까지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물론 이 세상 모든 물건에 대해 그 나름대로 최고 가치를 부여하시려는 지극한 은택으로 하신 것인 줄을 알지만 머리를 조아리며 읽어내려갈 때 너무나도 황공하여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제수된 직명(職名)이 아직 이 몸에 있기에 이렇게 부주(附奏)를 올리는 것이지만 까닭없이 도로 들어간다는 것은 명분으로 보나 의리로 보나 사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장 상소를 올려 다시 안타까운 심정을 호소하니 새로 제수하신 작질(爵秩)은 다 도로 거두어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겸 춘추 김진각(金珍恪)이 서계하기를,
"신이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들어 우찬성 송환기에게 유지를 전달했더니, 그의 말이 ‘신이 오늘의 성대한 의식을 보고는 너무나도 기뻤고 소원도 풀었는데 막상 전석(前席)에 올랐을 때 성상께서 다시 신의 선조의 옛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간곡한 언급을 하시니 구구한 이 마음은 감격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성 밖에 나와 있으면서 비록 혼미하고 피곤한 속이지만 성상에 대한 충심만은 걷잡을 수 없던 차에 다시 성상의 유지를 받았는데 성상께서 ‘선정의 뒤를 따르라.’고까지 하교하시고 이어 발탁의 명령을 내리시니 신으로서는 황홀하고 당혹하여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참으로 몸둘 곳을 몰랐습니다. 미천한 신이 이번에 온 것은 오로지 위로는 성상이 마음을 터놓고 내리신 하교를 받들고 아래로는 목을 늘이고 바라던 이 작은 정성을 표하기 위함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벼슬자리를 내리시니 만만번 근거도 없는 일이며 만만번 맞지도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체면을 무릅쓰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신의 분의로 볼 때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정신이 아찔하고 넋이 달아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서둘러 돌아갈 길을 찾았던 것인데, 그러고 보니 신의 죄만 더 깊어졌습니다. 머리를 돌려 대궐을 바라보니 그리움이 마음에 사무칠 정도뿐만이 아닙니다. 삼가 피끓는 충심을 다시 아뢰어 명령을 거역한 벌을 내리시기를 기다립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부주(附奏)를 보아도 그렇고, 또 듣건대 패초가 가고 오는 동안 경은 이미 길을 나섰다고 하는데, 경은 어찌 그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것인가. 서울에 좀 있어달라는 뜻으로 연석(筵席)에서 대놓고 말하지 않았던가. 설사 새 직명을 제수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떠나야 할 것은 뭔가. 품계를 올리면 그것이 혹 뒷걸음칠 단서가 될까봐 연석의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으나 모두가 다 체례(體例)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머뭇머뭇하다가 경의 손자를 먼저 제수하고 나서야 차근차근 질(秩)을 올렸던 것이 아닌가. 이미 나왔기 때문에 그러한 명령을 했던 것이고 또 품계가 이미 올라갔으면 거기에 맞는 직을 제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일의 계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경이 만약 그것을 생각하고 억지로라도 머물러 있으면서 그 직명을 굳이 사양했다면 그 심정을 이해하고 달리 취할 방도인들 왜 없었겠는가. 지금 비록 길을 나섰다 해도 아직 강을 건너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특별히 승지를 보내 내 뜻을 전하는 것이니 경은 즉시 길을 돌려 돌아오라."
하였다.
2월 3일 병술
옥당이 연명으로 된 차자를 올리기를,
"찬성 송환기와 참찬 이성보가 서로 이어 돌아갈 뜻을 알리고 이미 성 밖까지 나갔다고 합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그 두 유현(儒賢)이 산골에서 도를 닦는 몸으로 곤궁 그대로가 마음에 더 편하고 당세의 일에는 별 뜻이 없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지성으로 그 두 유현을 불러 올린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선왕께서 선정을 예우했던 뜻을 따라 선정과 같은 보도(輔導)가 있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유현들이 해야 할 일은 역시 선정의 뜻과 선정이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 진퇴에 있어서 선배의 뒤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지난 기유년에 선정이 왕명으로 나왔다가 차마 금방 물러가지 못했던 그 뜻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가는 말을 잡아매기 이전에 그들이 먼저 마음을 돌렸어야 했습니다.
처음으로 서연을 연 지금 많은 빈료(賓僚)들이 있기는 하지만 세자의 덕성을 함양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계도하자면 경(經)에 밝고 도(道)를 강마한 선비의 힘이 절대 필요한데 겨우 경례(慶禮)를 마치고 나서 금방 돌아가 성상이 예를 다해 맞이했던 그 융숭한 은례가 한낱 하루 구경거리가 되고 말아버린다면 그것이 어디 조정에서 애당초 그들에게 걸었던 기대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다시 정중히 부르시고 무슨 방법으로든지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가는 것을 만류하여 멀리 가버리려고만 하는 마음을 서둘러 돌려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찬성은 강을 건너갔지만 다시 재촉해보려 하며 참찬은 아직 도성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각신을 보내 서연에서 있었던 하교를 가지고 타이를 것이다. 그의 부주를 보면 현재 상소를 작성하려고 하고 있다는데 그 상소가 올라오면 그때 가서 그에게 제수했던 직임을 풀어주고 그가 나갈 길을 다시 열어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제에 그대들도 만류할 것을 청하였으니 논사(論思)의 책임을 다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대들의 소청을 즉시 윤허하는 바이다."
하였다.
사면 단자를 재가하였다. 김상복(金相福)은 죄명을 지우게 하고, 이창급(李昌伋)·노성중(盧聖中)·신광복(申光復)·주형로(朱炯魯)·변경붕(邊景鵬)은 죄를 탕척하고, 이극생(李克生)·이만식(李萬軾)·조진명(趙鎭明)·이승훈(李承薰)은 1등급을 감하고, 현기(玄杞)는 직첩(職牒)을 돌려주었다.
승지 서유문(徐有聞)·조홍진(趙弘鎭)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면 혜택이 멀리 미치는 것이므로 광범위한 사면이 베풀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김상복·이창급·이극생·노성중 같은 자들은 그 지은 죄가 어떠하며 곁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데 혹은 그의 성명을 지워버리고 혹은 탕척도 하고 감등도 하여 마치 대수롭지 않은 죄인이 사면 때를 당하여 풀려나듯이 하는 것입니까. 나라가 유지되는 힘이 전적으로 의리를 밝히고 제방을 엄히 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인데 그러한 죄인까지 사면 범주에 넣는다면 의리가 밝아질 턱이 없고 제방은 무너지고 말아 나라가 나라 꼴이 될 수 없고 사람도 사람 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징토(懲討)를 무섭게 하시고 명분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데에 마음을 다하시는 훌륭한 덕을 가지신 우리 전하께서 어찌하여 그렇게 천 번 만 번 지나친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신광복·주형로·현기·변경붕 같은 무리들도 이미 죽었거나 미미한 존재들이니 나무랄 것도 없다 하여 사면 축에 뒤섞어 넣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리신 명령을 철회하시어 큰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판의금부사 조상진(趙尙鎭)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재가하여 내리신 사면 단자를 신들이 보니 죄인 김상복·노성중·신광복·주형로 등을 모조리 석방하라는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아, 저 상복 등은 그들이 지은 죄가 어떠했으며 곁에 미친 영향이 어떠했습니까. 혹은 역옥(逆獄)에 연루된 자이고 혹은 이름이 단서(丹書)에 있는 자들인데 전에 없는 큰 은택을 베푼다고 하여 그렇게 똑같이 용서를 하신다면 역적 무리가 앞으로 무서워할 길이 없어지고 국가 법령도 시행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 얼마나 소름이 끼치고 한심한 일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 염려스러운 것은 그러한 종류의 범죄자들을 임금의 명령을 받들기에 바빠 아무 어려움 없이 풀어준다면 앞으로 제방이 점점 무너질 우려가 있고 국가의 기강도 날로 흐트러질 염려가 있으므로 결코 해묵은 지나간 일이라 하여 너그럽게 처리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내리신 명령을 철회하시어 난신 적자들을 징계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 장지면(張至冕)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내리신 전교를 보았더니 김상복·이창급·이극생·노성중·신광복·주형로·현기 등의 죄인이 모두 사면 대상 속에 들어가 있는데 신들로서는 물론 전하가 오늘 취하신 일이 경사를 당해 죄를 말끔히 씻어버리자는 뜻으로 하신 말로 알고 추앙하고는 있으나,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그들이 지은 죄가 어떠했고 정상과 행위가 어떠했습니까. 그리하여 혹은 국법이 가해지기 전에 귀신이 먼저 잡아가기도 했고 혹은 태연자약하게 숨이 붙어 있어 제방이 점점 무너져가기도 하는데, 사면의 특전 속에다가 그러한 무리들까지 싸잡아 넣어서 죄가 없던 것으로 한다면 그 형정(刑政)이 얼마나 잘못된 형정이겠습니까.
대체로 경사를 당해 사면을 하는 것은 정상도 참작할 만하고 용서도 할 만한 대수롭지 않은 죄를 두고 한 것이지 어찌 지은 죄와 주위의 연관이 저러한 무리들까지 사면의 특전을 놓고 논의할 수가 있는 일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내리신 명령을 도로 거두시어 의리가 밝아지고 난신 적자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서매수(徐邁修), 대사간 김달순(金達淳) 등이 상소하기를,
"듣기에 사면의 특전이 내려지면서 지극히 중한 죄를 범한 무리들까지 다 죄를 씻어 없애버리기로 하였다니, 아, 이게 무슨 일입니까. 김상복이 역적을 보호한 것이라든지 노성중이 주장했던 흉론(凶論) 같은 것은 그 범한 죄와 주위와의 관계가 어떠한 것들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애당초 그들에 대한 사면을 두고 무슨 논의할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극생·이창급·주형로·신광복 같은 자들은 혹은 역적 처벌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고 혹은 원악(元惡)에 붙기도 했다는 것이 추국 때 역적 공초에서도 이만저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으니, 그들이야말로 모두 국법으로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요 나라 사람 전체가 분개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목숨을 보존하고 있는 것만도 이미 큰 실형(失刑)인데 지금 와서 죄를 탕척하는 특전이 그러한 무리들에게까지 구별없이 미친다면 국가의 법령은 다 무너지고 없는 것이 되고 명의(明義) 자체는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내리신 명령을 빨리 취소하시어 의리(義理)가 영원히 민멸되고 제방이 점점 무너지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홍낙유(洪樂游)를 이조 참의로, 송환기를 세자 이사(世子貳師)로, 이성보를 시강원 겸 찬선(侍講院兼贊善)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첨지(僉知) 이극영(李克永)은 바로 내 보양관(輔養官)의 아들이고 또 일찍이 그 사람됨에 대해 들은 바 있다. 조원(趙瑗)은 충정(忠定)의 아우인데 어떻게 첨지만 주고 말 것인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자리를 더 늘리고 그들을 제수하여 숙명(肅命)하도록 하라. 그리고 첨지 나열(羅烈)·정원림(鄭元林)도 그들 선대에는 다 시강원·익위사의 관리들이었고 연석에서의 군신 사이가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상훈(常訓)을 찬집·편찬하여 올린 일에도 참여했던 자들인데 그들 역시 어떻게 으레 주는 중추부 직함만 주고 말겠는가. 똑같이 도정 자리를 더 늘려 제수하도록 하라.
첨지 조상규(趙祥逵)는 바로 기묘년 도청(都廳)의 아들이며, 정길(鄭桔)은 문청(文淸)의 6대손이고, 정겸환(鄭謙煥)·정세환(鄭世煥)은 둘 다 문경(文敬)의 종증손(從曾孫)이며, 권이성(權彛性)은 문순(文純)의 종손이고, 장윤종(張胤宗)은 문강(文康)의 7대손이며, 윤광경(尹光絅)은 충헌(忠憲)의 5대손이고, 유규(柳)는 문충(文忠)의 6대손이다. 그리고 조우진(曺羽振)도 충현(忠賢)의 후예이고 이광덕(李光德)은 또 누구의 자식인가. 그들이 만약 과거에 오른다면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될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을 오장(五將)이나 중추부 첨지로만 대우한대서야 남다른 대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역시 유일 후보로 추천하여 임명하는 도정 자리를 더 늘리도록 하라.
첨지 최창적(崔昌迪)은 관동(關東) 사람으로서 경학(經學)으로 선발되었고 그와 얘기해 보았더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특별히 백리(百里)의 책임을 맡겨 그 고을 사람들을 옳은 길로 지도하게 하라. 그러한 인물들이야 세상 부류와 똑같이 취급할 것이 없다. 그들 모두를 단일후보로 추천하여 임명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번에 수직(壽職)에 관해 이조에 내린 비답에는, 관서(關西) 사람으로서 경학으로 참봉(參奉)에 특별 제수되었던 김덕홍(金德弘)·김도유(金道游) 두 사람이 내가 알기에 나이 칠순이 찼기 때문에 함께 그 대상 속에 들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누락되고 말았다. 그는 틀림없이 서울의 참봉과는 다르다 하여 거론하지 않은 모양인데 그를 특별 제수할 때 전교가 어떠했는지를 모른단 말인가. 해조가 한 일이 소홀하기 짝이 없다. 오위 장(五衛將) 속에서 어느 자리이건 자리를 만들어 그리 추천하고 이어 해조로 하여금 도신에게 유시하여 만약 그들의 기력이 괜찮으면 역말과 식량을 대주고 올려 보내도록 하게 하라."
전교하였다.
"외신(外臣)도 나이 70이 차면 자급을 주는데 더구나 자궁(慈宮)의 가까운 친척이겠는가. 금년에 나이 70이 된 전 동돈령(同敦寧) 홍준한(洪駿漢)을 지중추부사로 특별 임명하고 만약 그의 근력이 괜찮으면 올라와서 숙명하고 이어 자궁을 배알하도록 하라."
조영순(趙榮順)·이재간(李在簡)의 죄명을 탕척하고 관작을 되돌려주었다. 전교하기를,
"옛 분들도 이르지 않았던가. 실증이 없는 말로 단정하기 어려운 죄를 단정하려 들면 그것이 바로 죄의(罪疑)라고. 죄가 미심쩍으면 끝까지 조사하여 그 진상을 밝혀내야만 국가 법령이 공평 무사하여 그 법에 승복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사건이 사람이 죽고 사는 큰 문제가 걸려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국가에서 조영순·이재간 사건에 관하여 언제나 생각하기를 ‘그들이 그랬을까? 설마 그랬을라구?’ 하면서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인지를 두고 누차에 걸쳐 이리도 생각해보고 저리도 헤아려봤던 것이다. 한쪽은 왕실과 가까운 대단한 가문이고, 한쪽은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집 후예인데 그러한 신분과 위치에서 그러한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그는 춘추 필법의 무장(無將)과 한(漢)나라 국법의 불경(不敬)을 범한 것으로서 불의로 인한 주륙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영순으로 말하면 이미 죽고 다른 증거가 없고, 재간은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지레 죽지 않았는가.
옛날 한나라 고제(高帝)가 정공(丁公)을 죽인 일을 두고 후인들이, 임금으로서 독단을 했다고 하면서 잘못이라는 평을 하고 있는 꼴이다. 이른바 그 두 죄에 대해서는 대각(臺閣)이 아뢰기도 했고 상부(相府)에서 차자를 올린 일도 있으나 혹은 그들의 행적을 들어 마음을 죄준 것이고 혹은 들은 소리만 믿고 마구 한 말이기도 하여 결국 세상의 큰 죄인을 만들고 만 것인데 세상에 만약 충직하고 뜻있는 선비가 있다면 그 누가 앞장서서 설분하려 하지 않겠는가. 다만 공경 대신의 논의가 그대로 시행되지 않고 상대를 극형으로 모는 법이 지레 시행된다면 그것은 국가로서 늘 염려하는 바인 것이다. 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그 가문은 아껴야 할 가문이며 그들 행적은 접어두고라도 정상으로 보아서는 용서할 점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두 집 다 대대로 용서받아 왔던 집안으로서 법조문에도 원정(原情)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으니 국가 은택이 널리 베풀어지는 이 시기에 만물이 새롭게 출발한다는 뜻에서 탕척의 은전을 내리는 것이 해로울 것 없는 일이다. 조영순·이재간의 죄명에 대하여 간혹 잘못 고쳐진 것들도 있지마는 어차피 다 미결상태에 있는 문제들로서 구차한 점이 너무 많으니 특별히 모두를 탕척하도록 하라. 이제 작질(爵秩)이 복구된 이상 회수했던 고신(告身)도 즉시 되돌려줄 것이며 이 문제에 관한 한 쟁집(爭執)의 소계(疏啓)도 다시 없도록 하라."
하였다.
우참찬 이성보가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신이 말직 음관인 미천한 몸으로 외람되이 남다른 예우를 받고서 병을 무릅쓰고 소명에 응하여 성대한 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으나 그것이 어디 신이 평소 꿈에나 생각했던 일이겠습니까. 다만 너무 융숭한 예우를 하시고 맡기신 일도 너무 중하여 신 같이 근사한 것이 전혀 없는 자로서는 감히 감당하지 못할 일이기에 두렵고 조심스러워 몸둘 곳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분수 이외의 발탁으로 새로운 제수의 특별 전지가 천만 뜻밖에 또 내려지고 가까운 반열에 다시 나오라는 유시까지 내리시어 신으로서는 땅에 엎드려 떨고 있을 뿐 무엇을 어떻게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집에 있을 때부터 늘 생각해오던 것이, 만약에 아무리 사양해도 허락을 받지 못해 무릅쓰고 일단 나가게 되면 서연에 나아가 한 번 뵙고 그것으로 견마(犬馬)의 정성을 표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작질(爵秩)이 이렇게 오르고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딴판이어서 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게다가 또 내 마음을 이해하리라고 하신 하교까지 받았으니 지금부터는 나올 수 있는 길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내려진 새 품계에 대해 그것을 공경히 받고 숙배할 길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버젓이 도로 들어가 청백하고 지조있는 자라면 부끄러워할 일을 다시 하겠습니까. 이 심정을 특별히 이해하시어 모두 다 전개(鐫改)하시기를 엎드려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 내용은 이러하지만 지금은 억지로라도 맡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 더구나 새로 제수한 직명(職名)이 시강원의 중대 임무에 비하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가 자명할 것이다. 경의 마음이 편하도록 하기 위하여 경의 청을 특별히 받아들이는 것이니 경은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잠시 쉬고 있다가 강연이 열리는 날 서연에 오르도록 하라."
하였다.
2월 4일 정해
선원전(璿源殿)을 배알하였다. 왕세자도 처음으로 배알하는 예를 행하였다.
하교하였다.
"지금 이 경사는 바로 선왕께서 주신 것이다. 종묘와 진전(眞殿)에 이 경사를 경건히 고해야 하는데 오늘 우선 진전 배알을 하고 보니 나의 추모하는 마음이 그지없어 이날 곧바로 월유(月遊)하시던 곳에 나아가 선왕에 대한 정성을 조금이나마 풀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능소를 바라보면 날을 꼬박 새워 생각하게 되는데 아마도 상하 좌우에 계신 듯한 영령이 위에서 기뻐하시면서 나 소자가 와서 배알하기를 기다리시는 것 같다. 금년 봄 배알 때는 맨 먼저 건원릉(健元陵)을 배알하고 다음 원릉(元陵)에 가 배알한 후 친히 제를 올릴 것이다. 그리고 이번 제의 의절은 성조(聖祖)·성후(聖后)가 행하셨던 예절을 그대로 따를 것이며 또 숭릉(崇陵)도 배알하고 그 국내(國內)에 있는 각 능소도 똑같이 배알할 것이니, 새달 안으로 날을 잡는 것으로 예조는 알고 있으라."
우찬성 송환기가 시골로 돌아가는 도중에 상소하기를,
"아, 신은 원래 대대로 녹을 먹는 집안의 후예로서 나라에 성대한 행사가 있는 이 때 우러러 보고싶은 구구한 마음이야 남에게 뒤지지 않는데 왜 꼭 거듭 내리신 소명을 받고서야 비로소 나왔겠습니까. 다만 신의 분수에는 맞지 않은 일이고 병세 또한 힘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급기야 친히 맞겠다는 하교를 받고서는 짧은 소견을 너무나 고집할 수만은 없어 이에 남이 비웃는 것도 돌보지 않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만사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대궐문을 다시 들어와서 다행히도 성대한 의식을 볼 수가 있었으나 신의 본분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 내리신 ‘선정(先正)의 뒤를 이어 대례에 참석하라.’ 하신 하교를 받고서는 신은 저도 모르게 더욱 등에 땀이 젖고 얼굴이 붉어져 곧바로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상(貳相)이라는 직임은 관계된 것이 너무 중하여 신의 선조 이후로는 그 직임을 맡았던 이가 사실 드물었는데 신 같이 지극히 어리석고 고루하여 간 데마다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는 일이 없는 자가 어떻게 감히 한 시대가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것과 백대의 공정한 여론도 무서워하지 않고 선조의 뒤를 이어 하는 일이라고 자처하면서 당돌하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명령을 어긴 신의 죄를 빨리 다스리시고 이어 신의 모든 직질(職秩)을 삭탈하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지금 신이 일단 한강을 건너고 머리를 돌려 대궐을 바라보니 견마(犬馬)의 그리움이 더욱 가슴에 맺힙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왕세자께서는 학문이 일찍 성취되었고 좋은 명성이 더욱 자자하므로 지금부터는 되도록 독실한 쪽으로 돕고 인도해야 할 것이며, 그 방법은 옛날에 좌우 보필을 선임하여 조기 교육을 실시했던 그것이면 아마 충분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을 가려 뽑을 때는 반드시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인품의 현우(賢愚)와 충간(忠奸)을 구별하고 학문의 진위(眞僞)와 사정(邪正)도 구별해야 할 것이며 취사 선택에도 공정을 기하고 규범도 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악은 아무리 작아도 가까이 하지 말고 또 소원한 사이라 하여 빠뜨리는 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인재 물색을 광범위하게 하여 조금도 구차하거나 소략하게 함이 없이 최고의 덕 최고의 학문이 되도록 보도하게 한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이를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신이 또 하나 자질구레한 일을 아뢰고 싶은 것은, 전하께서 누차 먹을 것을 하사하시어 너무나 황공하고 감사했습니다만 호조에서 수송해온 것은 신의 분의상 미안하여 감히 받지를 못하겠습니다. 도로 거두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내 일찍이 주자(朱子)의 봉사(封事)를 읽다가 그가 황태자 보익(輔翼) 문제를 두고 백 번 천 번 간곡한 말을 되풀이하고 이어 창안 백발의 감회를 말했던 것을 보니, 1천 년 뒤에도 그 당시 군신(君臣) 사이가 어떠했던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이 나라의 경사에 기하여 흔연히 나를 찾아주었을 때 선비들은 시기 적절하다고 했고 백성들은 즐거운 일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밤을 지샐 줄 알았던 마당에 매둔 말이 뜻하지 않게 시골길을 떠나 곧바로 한강을 건너고 갯구름 물가 나무 사이에서 날 바라보며 밤새워 그리다니……. 작질(爵秩)이 주어지고 포름(庖廩)이 이어진 것은 바로 선왕께서 선정을 대우하던 예이자 선정이 선왕께 받은 예였다. 그렇다면 내가 그 예를 따르지 않아서야 될 것이며 경이 그것을 받지 않아서야 될 일인가. 그리고 경의 상소 내용 중, 궁료(宮僚)를 가려 뽑고 규범을 엄히 할 것이며 악은 아무리 작아도 가까이하지 말고 소원한 사이라 하여 빠뜨리지 말라는 등등의 말은 참으로 의미있는 말이었고 그것이 바로 주자의 뜻이었던 것이다. 내 그것을 이미 좌우명으로 삼고 이어 전부(銓部)로 하여금 관잠(官箴)으로 하도록 할 것이다.
경이 나이 70에 얼굴빛이 아직은 왕성하여 여기 있으면서 훈도(薰陶)의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했었는데 어찌 그렇게 버리고 갈 수 있단 말인가. 경은 꼭 오늘로 길을 돌려 입성하여 나의 이 지극한 소망이 헛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서용보(徐龍輔)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겸 찬선 이성보가 상소문을 남기고 시골로 돌아갔다.
2월 5일 무자
승지 이정규(李鼎揆)·김이익(金履翼)·이익모(李翊模)·조석중(曺錫中)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신들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너무나 걱정되고 개탄스러워 연명으로 글월을 올려 이미 내리신 명령을 환수하실 것을 바라고 있는데, 거기에 성명을 노출시키지 않고 내용도 거의 은미하게 표현한 것은 금령을 감히 어길 수 없어 되도록 준수하기 위한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붓을 놀리는 과정에서 신들도 모르게 다소 금령에 저촉된 글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급기야 하교를 받으니, 준엄한 꾸지람을 내리셨는데 더욱 어떻게 감히 다시 소란을 피우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임금과 신하라면 바로 아비와 자식 같은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아비에게서 비록 한 때 꾸지람을 당했더라도 어찌 그것 때문에 스스로 사랑을 외면하고 또 생각하는 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숨길 것입니까.
아, 금령을 둔 것이 결국은 나라로 치면 걱정의 뿌리가 되고 있고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이성을 망치는 좀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세월을 두고 제방이 자꾸 무너져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어제 또 과중한 처분을 내리시고 게다가 하나를 더 보태어 뜰에 가득한 신료들로 하여금 감히 옴짝달싹을 못하게 만드시니 영구 불변의 국가의 약속은 오히려 세척해 버리기가 어렵지 않게 되고 충직한 논쟁으로 주의 주장을 고집할 길은 없어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도 보신 바와 같이 예로부터 잘 다스려진 세상에도 혹시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역적을 위해 금령을 설치했던 때가 있었습니까.
의리가 어두워지고 징토(懲討)가 늦춰진 것이 어찌 꼭 전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겠습니까마는, 사실은 금령이 이렇게 점점 주밀하다 보면 올바른 사람들이 해체가 되어 결국은 금령과 상관없이 서로가 서로를 꺼리고 숨기면서 점점 말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 얼마나 가슴 서늘한 일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어제 내리신 여러 죄인의 죄명을 탕척하라는 하교를 빨리 철회하시고 이어 갖가지 금령도 없애도록 명하시어 윤리가 다시 밝아지고 난역의 싹이 꺾여지도록 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영의정 이병모 등이 상차하여 여러 죄인들에 대한 탕척의 특전을 철회할 것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오늘 한 사람 놓아주고 내일 한 사람 놓아주고 하는 것은 사실 사문(赦文) 내에 첨가해 넣은 ‘사면’이라는 조항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오래 가면 유신(維新)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천지가 하는 일은 쉽고 간단한 것일 뿐이고 이 세상 모든 일은 천지와 조화를 이루는 것뿐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시기에 알맞은 조치로서, 나는 그것을 경중을 다는 저울이나 장단을 재는 자로 삼으려는 것이니 또한 경들도 그것을 알아 이로써 나를 도와주기 바라는 것이다."
하였다.
한후락(韓後樂)·이련(李瑓)·송환정(宋煥程)·이관원(李觀源)·이복해(李福海)·이유철(李有喆)·신기현(申驥顯)을 의금부 문안(文案)에서 특별히 지워버렸다.
영의정 이병모 등이 연명으로 상차하기를,
"임금이라면 구오(九五)의 높은 자리에서 태아(太阿)의 칼자루를 쥐고 있으므로 모든 형정(刑政)에 있어 놓아주고 싶으면 놓아주고 탕척하고 싶으면 탕척하는 것이지 공경 보필 또는 귀와 눈 역할을 하는 신하들과 조정에서 논의를 꼭 거친 뒤에야 결정할 까닭이 뭐 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보통 죄인을 풀어주는 일이라도 그 억울한 정상을 살펴 죄를 감면할 때 반드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다수의 의견에 의해 결정하는 것은 일개 개인의 총명으로 만세의 법정(法程)을 가볍게 보고 싶지 않아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춘추 필법에 관계된 일이고 국가 운명과 관계있는 죄명이겠습니까. 신들이 혹 의견을 간접적으로 아뢰기도 하고 혹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기도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급기야 비답을 받고 보니 거기에는 ‘오늘 한 사람 놓아주고 내일 한 사람 풀어주고 하는 것은 사문 내에 첨입되어 있는 사면이라는 조항을 실천하는 일로서 오래되면 유신의 효과가 꼭 있을 것이다.’ 했는가 하면, 또 이르시기를 ‘하늘과 땅이 하는 일은 쉽고 간단한 것일 뿐이니 지금으로서는 더욱 시기 적절한 조치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저울과 자로 삼고 싶고 또 경들도 그것을 알아 이로써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신들은 전하가 하신 일이면 모(謨) 하나나 훈(訓) 하나, 정(政) 하나, 영(令) 하나라도 모두 다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외우고 심복을 해왔지만 이번의 그 하교만은 어리석은 신들로서는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교 내용 가운데, 사면 조항을 첨입했다고 한 것은 성인(聖人)이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육성하면서 의심스러운 것이면 그를 용서하여 유신의 교화를 펴자는 뜻인 것이고, 시기 적절한 조치라는 것은 가령 제도나 문장(文章)을 그때그때 참작해서 손익하는 것 또는 가벼운 법을 적용하고 무거운 법을 적용함에 있어 시기와 상황에 따라 그에 알맞게 바꿔나간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쉽고 간단하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천지와 조화를 이루는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일이 춘추 필법에 관계되고 국가 운명과 관계있는 죄명까지도 거기에서 유신의 효과를 기대하고 시기 적절한 조치라는 뜻을 부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공경 보필이 함께 앉아 듣지도 못했고 귀와 눈 역할을 하는 신하가 알지도 못하는 일을 전하 혼자서 마음으로 생각하시고 마음으로 단안을 내려 그것을 바로 바꿀 수 없는 저울이나 자로 삼으려 한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비록 감히 보필이라고 자처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관직으로서는 보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이렇게 누차 괴롭히는 것이 죄가 되는 줄이야 알지마는 차자 한 번으로 그만둘 수가 없었고 이어 또 스스로를 해명하면서 하루 책임이나마 메꿔보자고 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어제 내리신 처분을 취소하시어 만세의 제방을 튼튼히 하소서.
그리고 신들이 어제 차자를 올렸을 때 승지가 내일 올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들로서는 그 까닭은 자세히 모르지만 크게 격례(格例)에 위배되는 일이었고 또 뒤폐단도 있을 일이기에 신들의 생각에는 그 승지를 파직시키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 사면령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혹은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 또는 제일 작은 문제를 우선적으로 취급했고 혹은 큰 문제이면서 그냥 두어졌던 것 그리고 작은 문제여서 미처 함께 들추지 못했던 문제들을 추가로 취급하기도 하였다. 이제부터는 잠영(簪纓) 집안에 어둠에 묻혀 버려진 사람도 없을 것이고, 애매하게 당한 폐족(廢族)도 없을 것이며, 말없는 속에 대의(大義)가 더욱 밝아져 어느 집 어느 사람 할 것 없이 충성심을 가지고도 발휘하지 못했던 자들이 다 즐겨 일시 동인(一視同仁)의 품안에 들게 될 것이다.
세신(世臣)들의 다행이 바로 조정의 다행이고, 조정의 다행이 또 바로 억만 년의 다행인 것이다. 내가 요즘 내린 처분이 혹 털끝만큼이라도 내 개인의 총명을 내세워 만세의 법정을 가볍게 여긴 듯한 점이 있었던가? 어제 정원(政院)의 귀뜸을 통해 차본(箚本)이 정원에 와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사향(社享) 때문에 재계에 들어가 밤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전각 배알 끝에 어떻게 그러한 공사(公事)를 접응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녹사(錄事)를 시켜가서 추후에 올리라는 뜻을 전하게 했었는데 경들이 승지에게 죄를 내리도록 청한 것을 보니 이는 틀림없이 녹사가 하교를 잘못 전달한 것일 것이다. 경들이 그 녹사에게 자세히 물어보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판의금부사 조상진(趙尙鎭)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죄인 탕척의 명령을 취소할 것을 청했으나, 그 상소를 되돌려 주었다.
대사헌 서매수(徐邁修), 대사간 김달순(金達淳)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신들이 전날 연명으로 호소의 글월을 올렸으나 끝내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으니, 신 자신들의 죄를 돌아다볼 때 다시 나타날 면목이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전하께서 대각의 말을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무시해버릴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들의 말은 비록 매우 하잘것 없을지라도 그 뜻만은 의리를 밝히고 제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전하께서는 그를 따르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이어 또 두 죄인에 대한 복관(復官) 명령까지 내리시어 일절이 일절보다 더 깊고 오늘이 어제보다 더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의리니 제방이니 하는 것은 무너지고 어두워지거나 말거나 내버려두자는 식이니 이쯤되면 신들로서는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아, 죽은 뒤의 죄명이 극형으로 확정된 30년 불변의 국가 문안이 엄연히 그대로 존재하고 있고, 심지어 병을 핑계대면서 국가를 원수 보듯 했고 사주를 받고 소를 올려 은근히 역적을 두둔하는 등 그 끔찍한 행위와 흉특한 마음씨야말로 나라 사람들이 차마 하루도 잊지 못하고 있는 일들인데 그들을 다 사면 대상 속에 집어 넣었으니, 아, 그게 무슨 일입니까. 전하가 그들을 용서하고 있는 까닭은, 달리 그들을 소세(昭洗)할 만한 자료가 있어서가 아니라 한 마디로 단 하나 의심쩍으니 당연히 놔주어야 한다는 그것 아닙니까.
그리하여 끝에 가서는 왕실과 관계있는 집안, 국가에 공로있는 무리라 하여 그들에게 세유(世宥)의 법을 적용했는데 애당초 그들에 대한 처분이 너무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전하께서 의심할 것 없는 자리에서 의심을 찾은 것으로 뭇사람을 실망시키고 국론이 뒤틀린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털끝만큼이라도 의심될 일이 뭐가 있기에 전혀 의심할 것 없는 자리에서 의심을 찾아내시고, 이렇게 또다시 전석(全釋)까지 하시며 심지어는 얼토당토 않은 ‘세유(世宥)’ 두 글자를 이용하여 마치 보통 죄수를 어느 사면 시기에 금방 풀어주는 것과 똑같은 취급을 하신단 말입니까.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신들의 의혹이 풀릴 것이며 나라 사람들도 심복을 하겠습니까. 경사가 있을 때 은택을 베푸는 것이야 물론 태평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지만 죄가 있으면 신분·지위에 관계없이 응분의 벌을 내리는 것 역시 금석(金石) 같은 법령인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도 어렵게 여긴다거나 신중을 기함이 없이 오직 탕척만을 일삼아 앞으로는 난신 적자도 두려워할 것이 없고 명분도 의리도 붙일 곳이 없이 만든다는 것은 신들로서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언제나 이러한 일에 대해 구차한 미봉책을 쓰실 생각이 있으면 곧 금령을 내려 뭇 입을 틀어막는 묘방으로 쓰고 계시니, 그러한 조문들이 전후 얼마나 많았습니까. 신들이 밤낮으로 걱정하고 한탄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또 1개 금령을 다시 강조하신 외에 또다시 1개 금령을 신설하고 그렇게 천부당 만부당한 일을 하시면서 말을 못하도록 위협하시니 고금 천하에 그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이전에는 금령도 엄했거니와 그들 죄명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신들이 억지로라도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탕척으로 이제 그들을 죄없는 평인이 되게 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신들로 하여금 전례만 그대로 지킨 채 말 한 마디 못하게 한다면 국가에서는 과연 그렇게 하기 위해 대각을 설치한 것입니까. 그리고 전하는 그러한 대각을 어디에다 쓸 것입니까. 이렇게 되면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둘째이고 성조(聖朝)의 잘못된 정책치고 이보다 더 잘못된 정책은 없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참으로 그 죄인들에게 징토할 만한 죄가 없다고 여겨 그만둬야 할 쟁집(爭執)을 그만두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만약 신들의 말이 공론에도 맞지 않는 말이고 성상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다면 물리치셔도 좋고 죄를 내려도 좋으며 귀양살이도, 준엄한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전하도 그렇게 여기지 않으시면서 이렇게 전에 없는 일을 하시며 신들만 감히 그 문제에 관해 말 한 마디 못하게 하신다면 그것이 어디 성스러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선 복관(復官) 명령부터 빨리 취소하시고 이어 신구 금령도 모두 환수하시어 성상의 덕화를 빛내시고 나라의 법을 존엄하게 만드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바른말을 하도록 관리를 두고서 그로 하여금 말을 골라서 하도록 하고 또 이어 엄격한 규정을 두고 금령을 내리고 하는 조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사실 부득이해서인 것이다. 부디 잠시만 참도록 하라. 이 고비를 넘겨 죄에 승복하고 벌을 받은 자 이외의 죄명이 차근차근 해명이 되어 폐족도 버려진 사람도 없이 정치가 틀이 잡히고 모든 제도가 정착된 뒤에는 경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원벽(院壁)에 써서 걸어둔 각종 금령을 모두 가져다 물에 던져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리고 즉시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 숨김없이 할 말을 다하게 할 것이니 경들은 그때까지만 기다리라. 경들의 오늘 상소는 금령에 저촉된다고 보아야 옳을 것인가, 저촉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성명을 드러내지 않은 점은 매우 광명 정대하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다. 이미 환급했던 소본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 이에 대해서만 관례에 따라 비답한다면 매우 성실치 못한 일로서 그 폐단이 금령을 둔 것보다 배나 더할 것이다. 경들의 상소는 안에 머물려두었다가 없애버릴 것이다."
하고, 이어 그들의 본직을 체직시키고 해방 승지도 체차하였다.
이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참판 조윤대(曺允大)가 연명으로 상소하여, 조영순·이재간에 대해 죄명을 탕척하고 고신을 되돌려주라고 한 명령을 철회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복관(復官)이 되면 뒤이어 고신도 환급하는 것이 옛 관례인데, 근래의 관례는 전지(傳旨)로 계하(啓下)하였다고 해조에 가서 승전(承傳)만 받들 뿐이다. 이른바 근래의 관례란 바로 이핑계 저핑계로 그냥 지나치려고만 하는 습속이 만들어낸 폐단이지만 기왕에 하나하나 바로잡아서 고신을 뒤이어 주지 않을 바에야 어차피 근래의 관례대로 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거기에는 아무 할 일도 없는 것이고 해조로서는 더더욱 거행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폭이니 이 상소가 필요없는 상소가 아닌가."
하고, 되돌려주었다.
2월 6일 기축
관학(館學) 유생 윤행경(尹行慶) 등이 상소하여, 유현(儒賢)을 소환하여 세자 보도에 도움을 주도록 할 것을 청했는데, 비답하기를,
"유현들이 와 있도록 또다시 간곡하게 타이르려고 한다."
하였다.
승지 이익모(李翊模)가 상소하기를,
"아, 흉한 무리들이 음모를 꾸며온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처음 무신·기유년에 생겨나기 시작하여 그 형세가 요원의 불길처럼 자랐고 급기야 을미·병신년에 와서 세력을 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화란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앞에서 선창하면 뒤에서 화답하여 모두가 획일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가령 김상복(金相福) 같은 자는 흉악한 홍인한(洪麟漢)의 세력을 믿고 음모를 주장하여 왔고, 요사스런 임치운(任致雲)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해서 백년 대계를 저지하려 했던 정상이 그에게 붙어다니던 것들에 의해 모두 탄로났습니다. 국안(鞫案)에도 죄악이 소상히 드러나 있으며, 이극생(李克生) 같은 자는 역적 임(任)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인한의 앞잡이가 되어 삼사(三司)를 드나들며 암암리에 역적을 비호했던 사실이 현저하고 한 차례 올린 상소라는 것도 괴수의 죄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통탄스러운 일은, 이른바 세유(世宥) 족속들이라는 것들은 성상의 영명(英明)하심을 속으로 꺼려하여 공식석상에서 패악한 말을 함부로 해대고 인심을 선동시킬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하여 만고를 두고 법으로 용서할 수 없고, 또 이른바 국가의 공신 자손의 집들이라는 것들은 흉악한 역적이 그 가문에 태어나 은근히 후일을 기대하고 딴 뜻을 품고 있으면서 천륜도 모르는 무리를 사주하여 음흉한 상소를 올리게 하고 쓸데없는 병을 이유로 정청(庭請)에 불참하기도 했습니다. 짧은 소를 올리면서 우위(宇偉)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고 흉물스런 속심이 복철(復喆)과 연결되고 있었는데 그에게 국법이 가해지기 전에 귀신이 먼저 그를 잡아가고 말았으니, 이것이 모두 큰 실형(失刑)이었습니다.
그밖에도 귀신같은 이상한 무리, 흉물스럽고 추악한 것들이 혹은 흉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고 혹은 역적과 연루되기도 하여 그 형적은 다 탄로가 났고 지은 죄도 가지가지였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모든 적들은 죄로 치면 사흉(四兇)보다도 더하고 정상을 따져도 구류(九流)를 면치 못할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명의록(明義錄)》에다 남김없이 소상하게 기록하여 놓았으니 그렇다면 아무리 나라에 경사가 있어 은택이 멀리 미친다 하더라도 역적 괴수까지 일률적으로 면죄시킬 수는 없는 일이요 연관된 역도들도 함부로 풀어놔 줄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쩌자고 전하께서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큰 제방을 갑자기 버리시고 그 모든 문제를 날이 새기 이전의 상태로 돌려버리고 모두 함께 유신의 대열에 끼우려고만 하십니까.
또 하나 말을 못하게 금령을 둔 그 문제는 이웃 나라가 알까 두려운 일입니다. 어제 연석에 올랐을 때 우선 금령을 철회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 약간 아뢴 바 있었으나 간략한 그 몇 마디로는 충분한 의사 전달을 바랄 수 없겠기에 아직 남아 있는 생각을 다시 상소로 올리려던 참이었는데, 계속 들리는 말이 한후락(韓後樂) 등 7명의 죄인에 대해 그 죄명을 모두 지워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제방이 한 번 무너지면 용사(龍蛇)가 모두 도망가고 우리가 열리고 나면 호시(虎兕)가 앞다투어 나오듯이 경악을 금치 못할 온갖 미물들이 날치는 꼴을 팔짱 끼고 앉아서 구경이나 할 뿐, 보이는 것이 전부 그런 것들이라도 막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신이 근밀(近密)의 직을 더럽히고 있으면서 그렇게 정도에 벗어난 처분을 눈으로 보면서도 전하를 감동시킬 말 한 마디 못하였으니 이도 물론 죄이거니와, 대신(大臣)이, 차자를 추후에 올리겠다고 한 문제로 인하여 승지에게 죄를 내리라고 청하였으니 정원의 다른 동류들과 입장이 다를 것이 없는 신으로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직책을 지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후 내리신 금령들을 모조리 철회하시고 여러 역적들의 죄명의 탕척 명령도 빨리 취소하실 것이며 이어 신의 은대(銀臺) 직명도 깎아버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서연에서 아뢰고 또 상소까지 하니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다.
전교하였다.
"요즘 피로가 쌓여 무리하기 어려운 실정임을 대신 이하 각 관원들은 물론 아랫것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다 요즈음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더욱 피곤하다. 피곤한데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사면 문제로 다시 시끄럽게 구는 상소를 만약 받아들일 경우 병조 판서와 입직한 당상·낭청 그리고 각문의 수문장에 대해 의금부 당상관이 청대했을 때 정원에 내렸던 전교 내용대로 처치할 것이니 각자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대사간 이동직(李東稷)이 피혐(避嫌)하여 아뢰기를,
"이번에 용서받은 여러 죄인들이 모두가 다 막중한 국가 운명에 영향을 준, 조금도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일전에 풀려난 두 흉인으로 말하면 다 자신이 중한 죄를 범한 자들이고 또 간밤에 풀린 일곱 역적들은 역적 괴수와 지극히 가까운 사이로 당연히 연좌되어야 할 자 아니면 바로 제발로 와서 사실을 실토한 역적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논의할 까닭이 없는 일들을 어려움없이 논의하여 오늘은 탕척을 하고 내일은 또 지워버리고 하여 국법이 제 구실을 할 날이 없고 의리가 다시 어두워질 우려가 있으니 이 어찌 명철한 성상께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말할 책임이 있는 자가 제대로 말할 수가 없으면 떠나는 법인데 신은 간관(諫官)으로서 윤리 강상이 전혀 없고 제방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일찍이 대궐 섬돌에다 머리를 짓찧지도 못하고 상소를 올려 간쟁하는 일까지도 할 수가 없었으니 이런 간관을 두어 무엇에 쓸 것입니까. 신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헌납 김근순(金近淳)이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아, 《명의록》 한 책은 사실 우리 나라의 《춘추(春秋)》입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 군강(君綱)을 존엄히 하고 인기(人紀)를 확립하는 방법에 대해 잊을 사이없이 남다른 관심을 보이시면서도 이번 처분에 있어서는 서로 반대되는 정도뿐만이 아니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명의록》을 읽을래야 읽을 곳이 없게 될 형편입니다. 저들의 죄악으로 말하면 극에 달하여 혹은 동요를 일으킨 효시가 되기도 하였고 혹은 괴수의 심복 노릇을 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국론(國論)을 들어보면 모두가 죽여야 한다고 하고 국법으로 비춰봐도 용서라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차근차근 용서해주고 풀어주고 하시면서 철안(鐵案)을 번복하기 위해서 의심쩍다는 말을 끄집어내시고, 또 뭇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별도의 금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또 억지 이름을 붙여, 이것이 시기 적절한 조치이고 이것이 저울이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감히 알 수 없지만 고금 역사에 그러한 조치가 있었다는 기록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도 이미 체직된 여러 대각과 입장이 다를 것이 없지만 마침 재일(齋日)이어서 소를 올려도 전하의 귀에 닿지 않고 또 일이 목전에 있기 때문에 패초를 어기는 것은 징토(懲討)를 청하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어 비록 부득이 사체를 무릅쓰고 나와 숙배하였으나, 말을 하자니 법이 저렇게 걸려 있고 금령이 성화 같아 전하의 대각들은 입 다물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말도 하지 않으면서 그 직에 있으면 그것은 실직(失職)인데 신이 어떻게 감히 아무렇지 않게 대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승지 성정진(成鼎鎭)이 사면령 가운데 여러 죄인들의 죄명을 탕척하라고 한 일을 들어 상소하니, 하교하기를,
"나라가 있은 다음에야 징토도 있는 것이고, 법이 있어야지만 조정이 있는 것이다. 오늘의 조정 신료들은 그들 가슴 속에 허령(虛靈)한 기운이라곤 한 점도 없이 그저 요란하기만 하고 떠들기만 하여 모양이 사대부 같지 않은 꼴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인데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극에 달하고 있다. 많고 적은 금령은 그냥 접어두고라도 명색이 국기(國忌)여서 재계 중인데 대각들의 상소를 받아들인 것으로도 부족해서 제 자신이 감히 상소를 올리고 있고, 그는 또 말할 것 없다 치더라도 정원에 있는 자들은 만약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국기로 재계 중인 것도 따지지 않는단 말인가. 이들은 책망할 가치도 없고 아까운 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직명(職名)이다. 그 상소문의 환급 여부는 논할 것도 없고 당사자와 정원에 있던 자들을 우선 자리를 만들어 내보내라. 그리고 그들 죄상은 묘당에 회부하라. 지금으로서는 대각의 논주(論奏)를 징토하는 일은 나중 문제이다. 영상 이하 누구의 상소나 차자라도 다시 번거롭게 들어오면 그에 대한 나라의 법이 있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신의 상소이건 기타 나랏일에 대해 논하는 상소이건 따질 것 없이 만약 재계하는 날을 당하면 정원에 유치해 두는 것이 관례이고 받아들이라는 명령이 있기 전에는 감히 받아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지금 전 승지 성정진은 그렇게 엄중한 관례를 어려움없이 무너뜨려버리고 처음에는 재계하는 날 대각의 상소를 받아들이더니 이어 또 자신의 상소까지 올렸습니다. 그렇게 법을 어지럽히는 풍습에 관해 지극히 엄절한 하교가 전후에 있어 왔던 터이므로, 그 문제에 생소하여 잘못 저지른 일로 논할 수는 없겠습니다. 전 승지 성정진에게는 파직하고서 서용하지 않는 법을 적용하고, 정원에 있었던 승지들은 모두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진하 정사(進賀正使) 김재찬(金載瓚), 부사(副使) 이기양(李基讓)이 연경에서 출발했음을 치계하고, 보고 들은 것을 따로 적은 단자를 올렸는데, 내용에,
"백련교(白蓮敎) 난리가 있은 지 지금 이미 5년이 되어 신들이 관내(關內)에 막 들어갔을 때는 전하는 말들이 너무 많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관(館)에 도착한 후 널리 캐물은 끝에 근일에야 적확한 소식을 얻어들을 수가 있었는데, 과연 12월에 첩보(捷報)가 이미 도착하였고 남은 잔당들도 거의 다 소탕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병진년 봄에 사천(四川)에 사는 과부 제이(齊二)라는 여인이 ‘제이 과부’라고 자칭하면서 옳지 못한 방법으로 대중을 유혹하였는데 이른바 백련교(白蓮敎)라는 이름으로 서로서로 선동하는 바람에 빈궁한 백성들이 호응하고 나서서 드디어 많은 무리가 떨쳐 일어나 널리 부근 고을들을 노략질하고 사천(四川)·섬서(陝西)·초(楚)044) ·예주(豫州) 일대를 출몰하며 관군(官軍)과 싸워 관군이 여러번 패하고 장졸들이 수도 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또 군사가 동원된 지 벌써 오래여서 모든 경비가 거의 바닥이 났기 때문에 호부(戶部)에 명하여 각로(閣老)·구경(九卿)·과도관(科道官) 등과 다방면으로 상의하게 하여 드디어 관작을 파는 제도를 두었는데 주(州) 하나 현(縣) 하나에 각기 일정한 값을 정하고 그것을 책자로 만들어 중외에 인쇄 반포하였다는 것입니다.
가경(嘉慶) 4년에 경략 장군(經略將軍) 만주 사람 늑보(勒保)가 군대 5만 명을 거느리고 제이를 무찔러 목베고 적의 우두머리 왕삼괴(王三槐)를 사로잡아 서울에다 바치자 황제가 늑보에게 유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짐이 왕삼괴의 공사(供辭)를 보니 자못 측은한 생각이 든다. 짐이 막중한 부탁을 받고 백성들을 부상자 대하듯 보살피며 한 사람이라도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야 할 처지인데 어찌 차마 몇 성(省)의 창생들로 하여금 난리에 죽어가게 할 것인가. 그것은 다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관리들이 덕의(德意)를 받들어 선양하지는 못하고 온갖 방법으로 토색질이나 하여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기 때문에 민심이 그렇게 급변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모두 화신(和珅)045) 과 결탁하여 우리 백성들만 그 고통을 당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가. 그리고 교비(敎匪)도 원래는 그리 많지 않은 수였다. 그들이 양민들을 협박했기 때문인데 죽기 무서워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들로부터 노략질을 당하는 그 어쩔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을 짐은 이미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다. 장수를 임명하고 군대를 출동시키는 것은 다만 불복자를 토벌하기 위함이지 양민들을 죽일 이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만약 적의 우두머리를 묶어 바치고 과거의 죄를 후회하고 새로운 공로를 세운 자는 그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일반 규정을 초월한 은택이 내려질 것이니 늑보를 시켜 각기 그 지방에다 이 유지를 두루 알리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이가 죽고 나자 그 일당인 냉천록(冷天祿)이 제이를 위해 복수를 한다고 하면서 무리를 모아 노략질을 일삼아 그 형세가 매우 불어났는데 늑보는 제 공로만 믿고 교만하고 나태하여 적을 보고서도 자신만 보호하고 있었으므로 사천 총독(四川總督) 괴륜(魁倫)이, 적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놔두고 군율을 해이하게 다루며 군량까지 투식하고 있는 늑보의 죄상을 논하였습니다. 이에 황제는 늑보의 직을 빼앗고 잡아들여 하옥시킨 다음 내무부(內務府)에 명하여 사실을 자세히 조사해 올리게 하고 만주 장수 액륵등보(額勒登保)를 경략 장군으로 삼아 늑보 대신 출정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액륵등보가 군문에 이르러 장수와 병졸들을 잘 돌봐주고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싸우기만 하면 공로가 있었답니다. 그리하여 냉천록이 크게 겁을 먹고 섬서와 감숙성 부근으로 도망가 거기에서 또 군대를 풀어 노략질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호부 상서(戶部尙書)인 만주 사람 나언성(那彦成)을 명하여 관동(關東) 흑룡강(黑龍江)의 군대 3천 명과 관군 수만 명을 인솔하고 섬서·감숙 지방으로 추격하여 액륵등보와 협공을 하게 하였던 바, 12월에 액륵등보가 적과 만나 대전 끝에 냉천록 이하 두령급 수십 명을 사로잡고 1천여 리나 추격해 들어가 사천은 모두 평정이 되었는데 섬서·감숙에 남아 있는 비도들이 험준한 지형을 점거하고 출몰하여 나언성은 그들과 싸우다가 패배를 당하고 부상까지 입었으며 수십 명의 장령과 1만여 명의 병정이 모두 전사했다는 것입니다. 그후 액륵등보가 군대를 그리로 옮겨 추격 끝에 많은 전과를 올리고 적도 거의 토평되어 현재는 1만여 명의 적만이 남아 있다는 것이 작년 12월 27일 현재의 첩보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황제가 유지를 내리기를 ‘액륵등보가 냉천록 이하 1개 부대의 비도들을 섬멸하고 아울러 수십 명의 두목을 사로잡고 적 수천 명도 죽였는데 그 주달한 내용을 본 짐으로서는 도와주신 황천에 깊이 감사드리며 또 이는 사실 황고(皇考)의 영령이 도와주시기도 한 것이다. 냉천록은 감숙·섬서 일대를 발판으로 화를 꾸며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그 죄 죽어 마땅하므로 그가 있던 성에 지시하여 능지 처참하도록 하고 사로잡힌 두목들은 모두 책임자를 지정하여 서울로 압송해 오도록 할 것이며 그 나머지 투항자들은 이미 과거를 뉘우치고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이상 너무 가혹하게 다루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경략 액륵등보에게는 어고(御庫)에 있는 비단·금·은을 상으로 내리도록 하라. 그 경략이 위임을 받은 이후로 여러 곳에서 적을 죽이는 등 자기 책임을 완수했는데, 머지않아 개선한 후에도 그대로 분수 이상의 힘을 발휘하여 온 세상을 깨끗이 맑힘으로써 위임했던 짐의 기대를 저버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힘을 다했던 여러 장수와 병정들에 대해서도 모두 액륵등보로 하여금 조사 보고하게 하고 관직과 돈·식량 등을 상으로 내려 고무 격려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2월 7일 경인
이성보(李城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한모(兪漢謨)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8일 신묘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고 희생과 제기를 점검하였다. 춘향(春享)이 내일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하 여러 신하들을 재실로 불러 접견하고, 상이 이르기를,
"이번 경사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일이었는가. 이때를 당하자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을 억제할 길이 없고 일전에 진전(眞殿) 배알을 마치고 나서는 더욱 이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름 전에는 연거푸 재일(齋日)이어서 접견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경들에게 분명한 유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니 경들은 잘 들으라.
근일에 소석(疏釋)이라는 한 가지 문제로 인하여 많은 수응(酬應)을 해왔는데 대체로 의리(義理) 자체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일이 의리에 꼭 해가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국가 경사를 당하여 은택을 널리 베풀 때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함부로 소석 논의를 할 것인가. 일반적인 사면 특전을 두고도 오히려 소인(小人)들에게 다행한 일이라고 하는 것인데 더구나 사면 특전을 써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소석해서는 안 될 사람을 소석할 수 있는 일인가. 다만 나는 오늘날 실제에 힘쓰는 정책으로는 소석 그 문제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죄명만 소석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응시할 자는 응시하게 하고, 관직에 임할 자는 임하게 하여 아무런 일도 없었던 옛날과 똑같은 고가(故家)가 되고 세족(世族)이 되게 하려는 것이니, 그러면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느냐의 갈림길에서 벗어난 그들인들 국가에 충성을 바칠 마음이 왜 없겠는가.
조영순(趙榮順)이 공개 석상에서 흉측한 말을 했다는 것도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이 전한 말일 뿐 영순을 면전에서 논핵하여 밝혀낸 사실이 아닌 바에야 그 역시 애매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것 말고도 그에게는 다른 죄범도 있었을 것이기에 김 봉조하(金奉朝賀) 같은 자는 그에 대해 매우 엄한 지론(持論)를 펴기도 했지만, 몇 해 전 비궁(閟宮) 친향 때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된 우상 윤시동(尹蓍東)이 헌관(獻官)이었기에 이 방으로 불러 접견했었는데 그 사실이라면 그가 그때 직접 겪은 일로써 당시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과연 밤이 새도록 실정을 다 토로하고 진지한 말을 주고받았지만 그의 말이 과연 지공 무사했었다.
그리고 이재간(李在簡) 같은 자는 그때 그 말을 직접 들은 자가 아직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른바 직접 들었다고 하는 말 역시 당시의 대신이나 금부 당상이 너무 권한을 마구 쓴 것이 죄라는 말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뒤를 재는 풍습에 젖어 있는 지금이라면 설사 그러한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빽빽이 앉아 있는 속에서 누가 그러한 말을 꺼내겠는가. 그렇게 볼 때 나는 재간이 말을 한 것이 도리어 말을 하지 않은 것보다 낫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때는 시기가 위태위태할 때여서 보통 때와는 사건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김 봉조하도 그의 죄상을 엄히 성토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나도 부득이 그러한 처분을 내렸던 것이다. 주공(周公)이 권도를 썼던 것도 시기가 위태위태한 때였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그러한 시기가 아니라면 왜 떳떳한 원칙을 두고 권도를 쓸 것인가. 신기현(申驥顯)의 상소가 올라오고 난 뒤에는 그때 만약 재간을 엄중 조치하지 않으면 그와 같은 무리들이 틀림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1만 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부득이 중전(重典)을 적용했었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사건도 이미 지나간 일이고 주위의 모든 상황이 점점 달라져가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아닌가.
김상복(金相福)이, 말 뿌리를 캐자고 청한 것도 물론 그 자체가 죄이기는 하지만, 그의 본의를 따져보면 그것은 서 판부(徐判府)가 한 말이 사건을 확대시키려는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온 것인 줄 잘못 알고 격분을 느껴 한 말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의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정한다면 당연히 참작의 여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송환정(宋煥程) 같은 자야 무슨 죄가 있는가. 오늘날의 사람들이 전고(典故)를 잘 모르는 데 대해서야 논할 것도 없지만 일전의 비근한 일만 놓고 보더라도 거의가 다 사리에 깜깜하여 환정과 같은 자까지 모두 쟁집(爭執)을 하려고 드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극생(李克生)이 신묘년 가을에 대각에 와서 했던 일은 지독하다고 할 만하다.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된 재상 이성원(李性源)이 모화관(慕華館) 시험장에서 사헌부·사간원의 대신(臺臣)들과 약속을 하고 몰려와 곧바로 청대를 하고 합동으로 아뢰었는데, 나는 언제나 그 대신(大臣)이 어려운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극생은 극관(克觀)과는 조금 먼 사이인데 그렇다면 그가 범했다는 것도 애매한 일 아니겠는가. 내가 이번에 한 처분들은 모두가 고심 끝에 내려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처분이 죄는 승복을 하고 벌은 받지 아니한 무리들에게만 적용되어 나는 오히려 그것을 마음에 흡족치 못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니,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영순이 흉측한 말을 했다는 것이 청원 부원군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청원이 어찌 들은 데 없이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또 액정서 하례들에게 형을 내리고 귀양보내고 할 때 이미 세자 자리를 동요시킬 뜻이 있었던 그의 속마음이 벌써 다 여지없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상복은 원래가 성격이 강직한 소인으로서 홍인한·정후겸의 앞잡이가 되고 심복이 되어 그날 한 말 한 마디에 대리 청정에 대한 불만의 뜻이 현저히 담겨져 있었고, 재간으로 말하면 사건은 비록 다르지만 《명의록(明義錄)》 속에 들어 있는 역적들과 한 통속인 것이 사실인데 그러한 자를 풀어준다고 논의된다면 《명의록》은 앞으로 읽을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이병모(李秉模)는 아뢰기를,
"재간 문제는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기현의 공초 내용이 나왔을 때 이미 그의 죄상이 여지없이 탄로나버린 것이고, 영순·상복도 다 《명의록》 속에 이미 죄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명의록》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리 나라의 《춘추》인 것으로 공자(孔子)가 《춘추》를 쓸 때 중죄가 한 번 가해진 이는 만세를 두고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난신 적자를 경(經)에다 써두고 금방 또 그를 사면하여 죄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이시수(李時秀)는 아뢰기를,
"천 마디 백 마디 누누한 성상의 하교에 대해 그 본의가 무엇이라는 것을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감히 끝까지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상의 하교는 어떻게 하든지 그들도 다 유신의 무리들과 함께 천치 창조의 화기 속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뜻이겠으나, 거기에 만약 불순한 찌꺼기가 섞이게 된다면 또 어찌 천지 창조의 화기에 해를 끼치는 일이 없겠습니까. 그 여러 역적들이 범한 죄가 원래 중했는데 애당초 그 진상을 분명히 밝혀내 그들로 하여금 죄를 승복하고 준엄한 벌을 받게 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잘못된 형정(刑政)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지금 와서,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고 그들도 승복하고 응분의 벌을 받은 일이 아니라 하여 그들을 곧 죄없는 사람들로 만든다면 그러한 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이 태평 성대를 이루는 방편이라고 하시지만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만약 그렇게 계속하다가는 역적들이 점점 불어나 태평 성대를 이룰 때가 더욱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처분은 한 마디로 말해, 그 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고 오늘에 와서는 또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이 뒤로 내려올수록 법의 그물은 점점 주밀해지고 세상은 까탈이 많아 죄를 범한 고가 대족(故家大族)들이 매우 많아지고 있다. 영순·재간을 두고 말하더라도 신축·임인년에 그 의리가 어떠했으며 사충(四忠)046) 이 국가 장래를 위해 한 일이 어떠했는가. 그런데 그 사충의 집 자손들이 그 지경이 되고 말면 그 어찌 측은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신년에 있었던 일도 사실 국가 안위가 판가름나는 일이었는데 그 당시 공로를 세운 집 후예들이야 다른 사람과는 틀리다는 것이 또한 사실 아니겠는가. 그 두 집안이 아무 죄없는 집안이 된다는 것이 나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 한 가지 일을 처리하고 내일 또 한 가지 일을 처리하면서 차근차근 풀어주고 차례차례 죄를 씻어주어 실정이 있는데도 폭로를 못하고 죄가 없으면서도 벗어날 수 없었던 무리들이 모두 처음과 같이 평인(平人)이 되도록 만든다면 그것이 바로 열성조가 내게 크고도 어려운 유업을 물려주신 뜻을 이어가는 길인 것이다. 내 그리하여 밤낮으로 조심조심 정력을 쏟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기 적절한 조치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의리여서 만약 그대로 쓸 경우 비록 날마다 소석을 한다 해도 제방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준엄한 징토(懲討)를 못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내 또 하나 이 기회에 오늘 관직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 모든 대소 신료를 막론하고 마음 조이며 죄를 무서워하고 나라를 위해 진력하고 법을 준수한다면 하늘은 지극히 공정하여 선한 자에겐 복을 주고 음란한 자에겐 화(禍)를 주므로 겸손한 군자는 반드시 복을 받는다. 이것은 또 오늘 세신(世臣)들로서도 서로 노력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지금 나의 처분에 대해 국가와 운명을 같이했던 옛날의 대신이 만약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내일 비록 탄핵을 당할지라도 오늘은 그 뜻을 그대로 따르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인데, 지금 나는 경들로 하여금 이 뜻을 따르게끔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경들이 옛 분들만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속이 옛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와 달을 두고 계속 노력하면 서로 미쁨을 받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언제나 신들을 보고 물의가 두려워서 감히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물론 신들이 불충하고 무상하여 미쁨을 보이지 못한 소치이기는 합니다만, 오늘 일에 대해서만은 천신(薦紳)에서 하인까지 모두가 이구 동성이니 사실 물의가 두려워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환지는 아뢰기를,
"전하가 아무리 재간의 죄를 벗겨주려고 해도 그가 원래 형편없는 소인으로서 전에 이미 익로(翼魯)와 결탁한 일이 있었고, 뒤에는 또 기현(驥顯)을 사주하기도 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재간의 죄명을 탕척한다면 그 전의 역모를 범한 자들 중에 누가 딴 생각을 품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비록 시기 적절한 조치라고 말씀하시지만 소소한 과실이라면 물론 때에 따라 경중을 저울질할 수가 있는 것이나 역안(逆案)이야 한 번 정해진 이상 비록 천만세가 가더라도 바꿔질 이치가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모라는 명칭을 너무 함부로 쓰면 도리어 무서운지를 모르는 법이다. 감해주고 또 감해주고 벗겨주고 또 벗겨주고 하여 미심쩍은 위치에 있는 것들은 모두 차근차근 죄를 씻어주고 나서 진짜 역적의 철안(鐵案)만 바꾸지 말아야 그것이 바로 역적을 엄히 다스리는 방법인 것이고 그래야만 역모라는 이름이 과연 무섭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이재학(李在學)이 아뢰기를,
"작년에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풀어주었는데 금년에 또 영순·상복을 풀어주면 《명의록》은 아무 의의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재간이 범한 죄는, 현재 조정에 가득한 제신들의 생사 여부가 바로 이 의리가 밝아지느냐 밝아지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데, 어떻게 쉽사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말 할 것 없다. 대신은 바로 나의 팔다리가 아니던가. 머리와 팔다리는 그게 바로 한 몸인데 금령(禁令)이 있다지만 그것 때문에 한 차례 면유(面諭)도 하지 않아서야 될 일인가. 지금 당장도 일들이 많지만 나는 이 일보다 더 큰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일이야말로 오늘의 세상을 대화합으로 이끄는 하나의 크나큰 관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들을 이 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타이르는 것은 나도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왕실과 가까운 사이로서 불행에 빠진 집안 사람들을 꼭 등용하려고 하시면 그 중 관련이 없는 자들을 골라 갈 길을 터주더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꼭 지울 수 없는 죄안에 묶여 있는 자들까지 싸잡아서 똑같이 죄가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겁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운이 융성했던 조종조 시절에는 법의 그물이 성글어서 비록 소인배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 역적이라는 명칭을 덮어씌우지는 않았었다. 가령 지금은 고인이 된 심수경(沈守慶) 같은 사람은 심정(沈貞)의 손자였지만 그 때문에 공경(公卿)이 못 되지는 않았었는데 세상의 수준이 점점 낮아지는데다가 자기 쪽만 아는 파당이 성하여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대뜸 역적 쪽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역적으로 몰려 이미 법에 의해 처단되고서도 금방 또 관작이 회복되고 국가에서 제물까지 내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오늘 상대를 논핵(論劾)하면서 그 사람에게 ‘적(賊)’이라는 글자를 쉽게 붙이는 일은 매우 좋지 못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비록 세유(世宥)를 말씀하시지만 충현(忠賢)의 후손으로서 그러한 죄를 범한 자가 있다는 것이 더욱 통탄할 일입니다. 그리고 또 그 후손들로서 죄없는 자도 얼마든지 많은데 어떻게 그 가문이라는 이유 때문에 중대한 국법을 굽힐 것입니까."
하고, 병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은 아뢰기를,
"신은 의금부에 있어보았기 때문에 더욱 울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하가 하신 그 일이 만약 지당하신 일이라면 의금부에 대한 전지(傳旨)를 받들지 말라는 명령이 왜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금부에 대한 전지를 받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사면 문서에는 전지를 받는 규례가 애당초 없는 것이다. 세초 단자(歲抄單子)에 첨가해 들어간 자들에 대해 이미 계(啓) 자 인을 다시 찍었는데 어찌 다시 전지를 받들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각신(閣臣) 서용보(徐龍輔)가 아뢰기를,
"한(漢)과 적(賊)이 둘 다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비록 많은 죄인을 구제하자는 뜻으로 하신 처분이겠지만 대신들이 아뢴 말들이 사실 깊은 우려를 가지고 한 말들입니다. 서둘러 윤허의 말씀을 내리시기를 엎드려 바라는 바입니다."
하고, 병모가 또 아뢰기를,
"이번 소석 대상 중에서도 상복·영순·재간·기현 이 네 사람은 더욱 거론의 대상이 못 됩니다. 그들에 대한 명령을 우선 거두시고 금령 또한 철회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령 그것도 시기 적절한 조치인 것이다. 그저께가 재계하는 날이었는데 상소를 받아들인 것이 과연 말이 되는 일인가. 가장 엄한 것이 격례(格例)인 것이다. 우리 동방이 원래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했는데 지금 와서는 예의고 명의(名義)고 거의 말할 것이 없게 되었고 그래도 믿는 것이라곤 격례가 있다는 그것뿐이다. 옛날에는 재계하는 날이면 대궐 안의 각 관아에서도 으레 모두 행소(行素)를 했었는데, 지금은 그 규례가 폐지되긴 했지만 소장을 어려움없이 받아들이니 그게 과연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규례가 그렇게 뒤죽박죽이 된 것은 물론 규례에 생소해서 그런 것이겠으나, 그 원인을 찾자면 오로지 방종만을 좋아하고 번잡한 예절을 싫어하는 소치로 그리 된 것이다.
조정의 의식 반차(班次)로만 말하더라도 난잡하고 질서가 없어 너도나도 다 그 모양이니 일개 감찰(監察)이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단속할 것인가. 우선 대관(大官)들부터 격례를 잘 지켜나가고, 이러한 문제들은 비변사가 별도로 규찰하여 일벌 백계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그러나 신들이 매우 하잘것없는 존재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관인데 전하께서 그렇게 큰 처분을 내리시면서 애당초 신들의 의사는 물으신 적도 없었고 게다가 또 일국의 공론까지도 받아들이지 않고 대뜸 명령을 반포하셨으며 뒤이어 또 금령까지 내려 입을 막고 있으니, 신으로서는 이 역시 결과적으로 파괴를 가져오지나 않을까 삼가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불가하다고 할 줄 번연히 알면서 의사를 꼭 물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일에 무슨 의사를 묻는 격례가 있었는가."
하자, 환지가 아뢰기를,
"비록 죄인이라도 대단한 관계가 없는 자야 풀어주어도 무방하겠지만 《명의록》과 기유년의 의리에 관계있는 자들을 어떻게 논의 대상에다 둘 수 있겠습니까. 병신년 역적 징토 때 이미 큰 대가리들은 누락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가. 정이환(鄭履煥)이 교문(敎文)을 대신 쓰면서 끼워넣은 구절이 있었는데 그는 꼭 그 구절을 《명의록》 속에다 실으려고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경이 또 왜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그와 같은 처지에 대해 신이 감히 처분을 어떻게 하라고 청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의리에 대해 지금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자가 많아 그것이 세상의 장래를 위해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정치달의 처는 이미 풀려나갔고 홍낙임(洪樂任)도 반열에 끼여 있는데 상복·영순까지 또 차근차근 죄가 벗겨진다면 의리도 제방도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니 신들이 앞으로 무엇을 가지고 전하를 섬길 것입니까."
하자, 병모도 아뢰기를,
"신들이 하잘것은 없지만 직책으로 치면 대관들인데 전하는 왜 다소라도 신들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분명한 유시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장악원 제조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지금 대신 이하 여러 신하들 말은 바로 일국의 공론입니다. 상복(相福) 문제는, 그가 격해서 그랬든 격하지 않고도 그랬던지 간에 대리 청정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신하로써 그 의리에 관해 의견을 달리했다면 흉역(凶逆)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면할 것입니까. 흉한 무리들이 성상을 다그쳤던 것은 오로지 터무니없는 흉언 때문이었고 그 흉언의 칼자루는 실로 영순이 쥐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그는 더욱 극악한 역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재간에게 있어서는 그 죄가 홍국영(洪國榮)·덕상(德相)과 일맥 상통한 것으로 변란의 장본인을 기화로 삼고 국가가 위태위태할 때 은근히 두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남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번의 탕척은 사실 그 두 큰 의리를 어둡게 만드는 일로써 신은 그 전교를 보고부터는 마치 미친 사람과 같이 되어 살고 싶은 마음이 참으로 없었습니다. 윤리 강상이 땅에 떨어지고 의리가 빛을 잃어가고 있는데 전하 혼자서 그 구구한 격례를 준수하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계시니 신으로는 너무나 답답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칙을 지키기는 쉽고 임시변통을 잘 해나가기는 어려운 것이다. 누구는 죄를 주고 누구는 풀어주고 하는 것도 다 추와 저울대가 있어서 한 일이니 경들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금령이 내려진 마당에 감히 문자(文字)를 올릴 수는 없고 기왕 이러한 기회를 만났는데 소청이 관철되기 전에야 어떻게 감히 물러서겠습니까."
하고, 환지는 아뢰기를,
"신축·임인년의 역적 징토를 두고 말하더라도 을사년047) 에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년048) 에 또 역모가 있었고, 무신년에 다 소탕해버리지 못했기에 을해년049) 에 역모가 또 있었듯이 충역(忠逆)과 사정(邪正)은 도저히 양자가 함께 존립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정의는 패배당하기 쉽고 불의는 승리하는 게 보통인데 전하는 왜 그 점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병모가 또 아뢰기를,
"오늘 소청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물러가면 뒤에 또 시끄럽게 굴 것이 뻔한데 상하가 서로 버티기만 한다면 어찌 민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에게 무슨 성상의 뜻을 돌릴 힘이 있겠습니까마는 불행이 길어지기 전에 발길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고, 환지는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일단 마음을 굳혔더라도 뭇 신하들의 말을 따라 서둘러 윤허를 내리신다면 성상의 덕화가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제 할 말을 다 했는데는 뒤에 어찌 다시 번거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2월 9일 임진
양사가 【대사간 유한모(兪漢謨), 집의 박서원(朴瑞源), 사간 심규로(沈奎魯), 장령 오한원(吳翰源)·남혜관(南惠寬), 지평 이동면(李東冕), 헌납 이동식(李東植), 정언 심반(沈鎜)·강준흠(姜浚欽).】 아뢰기를,
"국가를 유지하는 데는 의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고, 조정에서 가장 신중히 다루어야 할 것은 제방이 우선입니다. 병신·정유년 이래로 역적이 늘 생겨나고 윤리 강상이 점점 파괴되어 거의 나라가 나라 꼴이 아니고 사람도 사람 꼴이 아닙니다. 물론 전하가 기강을 떨치신 덕에 흉한 무리들의 소굴은 드러났지만 도깨비같은 것들이 아직도 많이 숨어 있고 고래처럼 거센 것들을 다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과 사람들의 울분이 가면 갈수록 쌓이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이나마 의지하여 믿고 있는 것은 1만 세를 두고도 고치거나 없앨 수 없는 단서 철안(丹書鐵案)뿐인데, 전하께서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그 죄명을 탕척하는 은전을 베푸시어 마치 보통 죄수들을 사면 시기를 이용하여 금방 풀어주듯이 하셨으니, 아, 그게 무슨 일입니까.
지금 풀려난 역적들이나 기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진 무리들, 또는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자들은 모두 음흉한 마음을 품고 흉도들과 서로 뭉치고 있는 정상이 낭자하고 수법들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지금 모두 탄로났습니다. 이에 나라 전체의 신민(臣民)들이 성토함은 물론 천지 귀신까지도 함께 분개해 하고 있는 판인데 쳤던 그물을 다시 걷어버리고 국가 법령도 무시해버렸으니 형정(刑政)이 잘못된 것이 이미 극에 달한 것입니다. 아무리 전에 없던 나라의 경사를 당해 은택이 멀리까지 뻗쳐가야 할 때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 문제를 두고서 저울이요 자이며 시기 적절하다고 말하면서 대뜸 사면을 결행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내일 차근차근 탕석(蕩釋)을 하여 제방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의리도 깜깜한 채 단서 철안이 모두 속 빈 껍데기가 되어버리고 말면 도깨비 고래같은 것들이 또다시 뒤따라 일어날 것이니,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 얼마나 소름이 끼치고 머리끝이 쭈뼛해질 일입니까. 《명의록》도 이제는 읽을 곳이 없어진 것입니다. 오늘의 신하들치고 그 누군들 대담하게 나서서 성토도 하고 머리를 짓찧으며 쟁집이라도 하려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백간(白簡)이 올라가기도 전에 금령이 먼저 내려져 수문장이 문을 막아 소차의 길이 끊겼으니 역적이 무엇을 보고 무서워할 것이며 국가의 헌장이 무슨 길로 펴지겠습니까. 금령이 철회되지 않으면 성토를 할 길이 없고, 내리신 명령을 취소하지 않으면 국가의 기강이 떨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후 금령을 다 철회하시고, 역적들을 풀어준다는 이번 명령도 서둘러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우선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아뢴 대로 하라고 했던 것은 공론이 일단 신장되었다가 다시 한풀 꺾이기를 바란 것이다. 또 그대로 사그라진들 어떠랴. 내가 그 변통수를 쓴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아뢴 대로 하라고 한 일은 시행하지 말고 전번에 내린 처분대로 시행하라."
2월 10일 계사
승지 이집두(李集斗)·이서구(李書九)·남이익(南履翼) 등이 아뢰기를,
"어제 양사(兩司)가 새로 아뢴 내용은 분명히 의리를 밝히고 제방을 튼튼히 하자는 내용이었는데 겨우 윤허를 내렸다가 금방 또 그대로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이랬다 저랬다 하신 일에 대하여 뭇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고 당혹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처음에 공론이라는 이유로 윤허를 하셨는데, 공론이란 온 세상이 의견을 같이한 말이며 따라서 그것은 백대를 두고도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금방 이랬다 저랬다 하고 또 하겠다 하지 않겠다 하면서 그것을 일러 공론을 따른 것이고 국시(國是)를 분명히 지킨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종전 하교대로 시행하라는 명령을 빨리 취소하시고 대각의 계청을 쾌히 따라 왕의 말에 신의를 보이시고 또 국법도 엄하게 하소서."
하니, 되돌려 주었다.
2월 13일 병신
영희전(永禧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과거 시험에 합격한 지 60돌이 된 사마시(司馬試) 합격자 홍사호(洪絲浩)와 무과 합격자 박태상(朴泰相)을 불러 접견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과거 합격 후 60돌을 맞은 노인 홍사호를 접견하니, 나이가 81세라는데도 맑은 얼굴에 흰 머리가 흡사 50, 60대 노인같고 걸음걸이도 장년 같아 오르내리고 배례하고 추창하는 것을 다 마음대로 하였으며 시력도 역서(歷書)의 소주까지 알아보고 청력 역시 작은 말도 다 알아들었다. 그렇게 기력이 강장한 사람은 사실 처음 보았는데 우리 조정의 인서(人瑞)라고 할 만하다. 더구나 그의 선인은 바로 고(故) 대사간 홍성보(洪聖輔)로서 그의 기절과 명성이 지금까지 전해올 만큼 내가 언젠가 들먹였던 사람인데, 지금 그의 아들이 큰 수를 누리고 과갑(科甲)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 얼마나 희귀한 일인가. 지중추부사 자리를 더 마련하여 제수하고 이에 총관(總管)을 겸하도록 할 것이며 해조로 하여금 연회에 필요한 것들을 여유있게 보내주게 하라."
하고, 이어 박태상에게도 연회에 필요한 물건들과 쌀·무명 등을 넉넉히 주도록 명하였다.
2월 14일 정유
각 제단의 신위 위판을 초헌관 이하 모두가 일제히 모시는 것을 규례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2월 15일 무술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판서로, 김희순(金羲淳)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17일 경자
혜경궁(惠慶宮)이 부스럼이 나 열흘이 넘도록 편찮았는데, 상이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친히 약을 바르다가 손이 붓기까지 했지만 자궁의 뜻이 떠들썩하게 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내의원 직숙(直宿)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에야 침을 맞고 모든 증세가 깨끗이 나으니, 내의원 소속 제신들 및 대신과 예조의 당상관, 시임·원임 각신(閣臣)들을 불러 접견했다. 영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자궁(慈宮)께서 몸조리하시는 동안 지금쯤은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셨는지요?"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해질 무렵 이후에는 증세가 더욱 심하여 밤을 새다시피 했는데 종기가 겉으로는 손등까지, 안으로는 장심(掌心)까지 부어올라 그때 내 심정은 초조하고 절박했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까 침을 맞으시고는 피고름이 많이 나오더니 우선 아픈 증세가 즉시 멎고 부어올랐던 것도 빠져 만만 다행이었다."
하였다. 대신과 예조 당상이 아뢰기를,
"하늘이 돕고 큰 복이 내려 자궁의 부스럼이 오늘 침을 맞으시고는 쾌히 나으셨으니 신민들의 기쁨이야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마는 그 동안 성상께서 애태우며 걱정하신 지가 며칠이십니까. 성상의 정성으로 모든 증상들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그야말로 나라 전체의 막대한 경사로서 직숙 여부에 관계없이 경사를 축복하는 의식을 거행해야 되겠습니다. 여쭈어 보고 나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렇게 경사스럽고 기쁜 지금 마음 같아서야 그대들의 청이 있기 전에 당장이라도 축하 의식을 거행하고 싶지만 조정에서 문안드리는 일을 자궁께서는 하지 말았으면 하시고 더구나 또 종묘에 아뢰고 백성들에게 반포하는 의식이라면 거창하다고 하여 더욱 마다하실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만 10일 동안을 직숙해야지만 축하하고 상을 내리는 것이 바로 선왕으로부터 받은 교훈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들은 이렇게 청하고 있지만 선왕으로부터 받은 교훈을 준수하고 자궁의 뜻도 받들어야 하는 나의 도리로서는 허락할 수가 없다."
하였다.
김문순(金文淳)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2월 19일 임인
왕세자의 종묘 배알 날짜를 처음에는 이날로 잡도록 명했었는데 이날 따라 비가 내렸다. 전교하기를,
"내가 세자 책봉을 가장 늦게 받고 책봉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종묘를 배알했었는데 처음에는 9월 12일로 날을 잡았다가 그날에 가서 스무날 전으로 물려잡았었다. 어쩌면 오늘의 일과 그리도 서로 들어맞는 것인가. 뿐만 아니라 그저께에도 내가 말했거니와 모든 일이라는 것이 기쁜 일이 너무 잦으면 도리어 두려운 것이다. 두 예(禮)를 잘 마치고 또 한 가지 예를 거행하려는 즈음에 자궁의 병환이 평복되었는데 이 시기에 종묘 배알까지 한다면 너무 잦은 게 아닌가 싶어 그때 바로 물려잡고 싶었으나 그리 못했던 것은, 자궁의 건강이 이미 회복되었는데 자궁의 건강 때문에 날짜를 물려잡는다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슬비가 내리고 있어 비록 옷이 젖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청명한 날만은 못하고, 또 어제 비록 편전(便殿)에 나와 재계는 하였지만 내 마음이 아직도 확 풀리지 않는 것은 그동안 자궁 곁에서 약물을 만지고 해서 혹 불결하지나 않을까 싶어서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을 물려서 행하는 것이 좋겠으니 종묘 배알에 관해 다시 하교가 있기를 기다려 날을 잡도록 하라. 그리고 내가 종묘 배알을 앞두고 날을 물려잡았던 그때의 전례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1일 갑진
정원이 아뢰기를,
"함경도 관찰사 구익(具㢞)이, 방면할 자와 방면하지 못할 자를 책으로 엮으면서 역적붙이 및 그 이름이 대계(臺啓)에 올라 있는 자까지 아무 차별없이 종전 품질(品秩) 밑에다 그대로 죽 기록해 놓았습니다. 도(道)의 관례가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똑같이 기록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한 일이니, 그 도신을 중한 쪽으로 추고하고 만들어진 책은 다시 내려보내 고쳐 수정하여 올려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법이란 상경(常經)인 것이다. 한 분야의 일을 맡은 신하로서는 오직 그 상경만을 지키고 준수할 뿐 조금이라도 감히 변통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함경도 도신의 장계를 보면, 당연히 연좌되어야 할 자 및 노비로 만들어야 할 자들은 정식(定式)에 의거하여 거론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만하면 맡은 바 임무를 다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아뢴 내용은 대체 어느 죄인을 지칭한 것인가? 참으로 그대들 말대로 한다면 법전(法典)은 있으나 마나인 것이다. 도신(道臣)으로서 취사(取捨)를 제멋대로 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게 하기로 들면 방면하지 못할 대상자 명단을 고쳐버려도 될 것 아닌가.
한 번 물든 습속이라고 어쩌면 그렇게도 바로잡기가 어렵단 말인가. 그대들을 오히려 엄중 조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고 대계 속에 아직 계류되어 있는 무리들은 비록 점을 찍었더라도 자동으로 문제삼지 않기로 되어 있는데 도신이 어떻게 그를 빼버릴 것인가. 그대들을 관대하게 보아주어 우선은 파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이번의 이 처분은 꼭 관대함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자는 데 뜻이 있고 또 습속을 바로잡는 데도 큰 도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나 정사를 하는 데도 뜻을 함께 해주지 않고 사람들도 교화를 따르지 않는다. 요즘 아뢴 내용들도 얼핏 보아서는 제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뜻 같지만 사실은 다 바로잡기 어려운 고질병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진짜 무슨 방법을 써야지만 자기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 자들을 구하여 6승지 자리에다 둘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하였다.
2월 22일 을사
지평 이경신(李敬臣)이 상소하기를,
"작년 전교에, 주자서(朱子書)에 대하여 지성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고 신은 그것을 두 번 세 번 되풀이해 읽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기를 마치 풍악소리 북소리를 듣고 손뼉을 치고 춤을 추듯 하였습니다. 성스러운 우리 전하께서 주자의 도(道)까지 깨치셨으니 성현(聖賢)의 학문과 제왕(帝王)의 정치가 오늘날 바다 동쪽에서 실현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도 일찍이 《주자전서》를 보았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기는 하지만 그전의 선정(先正)들이 이미 차의(箚疑) 등속을 써둔 것들이 있고 게다가 또 뒤에 유자들의 학설도 있어서 별 의심없이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류(語類)》에 있어서는 바로 그의 문인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평소 언행(言行)에 대해서는 오히려 《전서》보다 더 상세하게 되어 있어 주자의 도를 배우려면 《어류》를 읽지 않고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말투가 지금 쓰고 있는 문자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알기 어렵다 하여 그냥 묶어두고 있는 자가 많고 또 간혹 읽는 자가 있어도 역시 가당치도 않은 것을 억지로 끌어다 대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신은 우선 조정 신료 중에서 그에 통달한 자로 하여금 주해(註解)를 내게 하여 독자들의 참고에 편의를 제공한다면 주자학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기억나는 것은 지난번 향음례(鄕飮禮)·향사례(鄕射禮)에 관하여 윤음을 반포하셨을 때 아무리 심산 궁곡에 사는 백성들이라도 모두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그 윤음을 들으면서 덕치의 교화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향례합편(鄕禮合篇)》이 나왔을 때는 향음례·향사례 편의 주석들이 분명하지 못한 곳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그 일을 맡았던 신하들이 어려운 것을 쉽게 풀이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쉬운 것이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으로, 가령 당동영(當東榮)의 ‘동영(東榮)’이라든지 방호간(房戶間)의 ‘방호(房戶)’가 과연 어느 곳임을 지정하지 않았고, 사금(斯禁)에서의 ‘금(禁)’과 궁이촌(弓二寸)에서의 ‘이촌(二寸)’ 같은 것도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음을 밝혀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방에서 그 예를 행하고 싶더라도 어디에 가서 확실한 고증을 하여 절충을 취할 것입니까. 만약 그 의의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로 그 흉내나 내려고 하면 주자(朱子)가, 명주(明州)에서 행한 의식을 두고 예에 어긋나고 야비하다고 비난했던 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이 바라는 것은 다시 경의 주해를 맡았던 신하에게 좀더 상세한 고증을 하도록 명하여 분명한 전례를 중외에 반포하고 후대에 물려주어 사방의 의칙(儀則)이 되고 후왕의 법정(法程)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면 《의례(儀禮)》 속에 있는 연례(燕禮) 및 대사례(大射禮)는 그것이 바로 삼대(三代) 시절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서로 읍양(揖讓)하던 의식입니다. 주자도 이르기를 ‘임금·신하 사이가 근엄과 존경으로만 일관하다 보면 정이 혹 통하지 않아 서로 도움이 되는 충고(忠告)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차려두고 서로 모이는 기회를 갖기 위하여 잔치하고 음식을 권하는 예를 만들어 상하의 정이 통하게 하고 은근한 정이 붙도록 한 것이다.’ 하였는데 그 얼마나 의미 심장한 말입니까. 그야말로 옛 성왕(聖王)이 그 예를 만들었던 근본 취지를 십분 이해한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도 우선 그 두 가지 예를 위에서 꼭 행하시어 우리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도록 하소서.
또 삼가 생각건대 국가가 있는 한 반드시 비축이 있어야 합니다. 비축을 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이 그것을 하늘로 여기기 때문인데 전(傳)에도 이르기를, 국가에 3년 비축이 없으면 국가가 국가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로 말하면 1년 비축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것은 곡식 저장술을 몰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반드시 곡식을 움에다 저장했었는데 그 사실은 사책(史策) 군데군데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땅을 파고 움을 만들고 질흙으로 구멍을 만들어두기를 지금의 기와 굽는 가마처럼 만든 다음 그 안에다 곡식을 넣고 흙으로 그 위를 덮어 두툼하게 묻어두면 비록 몇 십년이 가도 결코 습기가 차 썩거나 뜰 염려가 없습니다. 옛날에 9년, 10년씩 비축해 둘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국의 창고에 저장해둔 것을 모두 움에다 저장하고 받아들이고 내주고 하면서 민폐를 끼칠 것없이 해의 풍흉에 따라 값만 조종하기를 경수창(耿壽昌)050) 의 상평(常平) 제도처럼 한다면, 혹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더라도 관창(官倉)을 바라보고 그것을 생명선으로 삼을 것이며 남쪽이거나 북쪽이거나 그 지역의 시운에 따라 한 쪽에서는 팔고 다른 한 쪽에서는 사들이고 하여 썩은 흙같던 것이 주옥(珠玉)처럼 변하고 값도 곱으로 오를 것이니, 그 법이 이행되고 보면 국가만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구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보물 중에서 천하가 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은(銀)뿐입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 사치 풍조가 날이 갈수록 더하여 칼 장식·안장 꾸미개에서 가락지·비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은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갖가지 장수와 행복을 비는 글자 문양이나 기타 자질구레한 반짝거리는 문양들은 결국 하나의 소모품이 되어버리고 보물로서의 가치를 되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산량은 한계가 있는데 소모는 무한정으로 하기 때문에 보물은 보물대로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값도 따라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 연경 가는 장사치들은 짐을 수량대로 채우지 못하고 가끔 그 쪽에서 나온 사행들에 대해서도 그 많은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재정은 점점 줄어들고 물가는 점점 올라가고 있는데 지금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자면 무엇보다도 나라 안에서 은으로 장식물을 만드는 일을 일체 금하고 비록 이미 만들어 장신구로 차고 다니는 것들이라도 그것을 다 저울로 중량을 달아서 그걸 팔아 돈으로 만들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국가 비축물로서는 은이 돈보다 좋고 사용하는 백성들로서는 은이 돈만 못하여 돈은 자연 백성 쪽으로 몰릴 것이고 은은 국가로 돌아오게 되어 국가도 경비에 대한 걱정이 없을 것이고 백성들도 돈 흉년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사 간에 쓰지 않으면 안 될 갖가지 중국 물건들도 값이 더는 올라가지 않을 것이 눈으로 보듯 훤합니다.
우리 나라는 귀천 상하를 막론하고 다습게 입으려면 명주가 있고 시원하게는 삼베가 있지만 그 모두가 무명베만 못합니다. 무명베는 너무 사치스럽지도 너무 검소하지도 않고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적당하여 마치 먹는 물건에 있어 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밥이나 콩처럼 친근합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나라 안에 백금(白金)이 너무 귀한 탓으로 무명베로 그 값을 쳐서 저들 나라와 교역(交易)하는 데 쓰고 있기 때문에 세무명 한 필 값이 넉 량은 되어야 백금 한 냥과 맞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백성들이 입을 베를 우리 백성들이 먹지도 못할 백금과 바꾸어 국경 밖 머나먼 나라로 보내는 격이니 나라가 무슨 수로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은 무슨 수로 춥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국가에서 해마다 비용을 많이 쓰는 일이 준설 사업인데 그 역시 도랑 속에 있는 모래를 굴착하여 겨우 도랑 밖에다 그냥 펴두기 때문에 큰 비만 한 번 왔다 하면 그 모래가 다시 도랑 안으로 흘러 들어갈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래는 도랑 안팎으로 늘 돌고 도는 격인데 그 일이 언제 끝나겠습니까. 그리고 그 비용 절감은 어느 세월에나 할 것입니까.
신의 생각에는 여름철 장마에 물이 불어 도랑들이 다 차 있을 때 소에다 쟁기를 메워 도랑 안으로 들어가서 그 모래를 갈면 그 모래는 성질상 그대로 있지 못하고 흐르는 물결 따라 저절로 떠내려갈 것이니 만약 쟁기 여남은 개만 동원하여 하루 품만 들이면 모래가 쌓여 도랑물이 흐르지 않을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 모래가 다 남쪽으로 흘러가 강을 메우면 염창(鹽倉)이 막힐 우려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또 방법이 있습니다. 두서너 개의 닻돌에다 가시가 돋게 만든 쇠붙이를 부착하고 큰 줄로 묶은 다음 그것을 강 속에다 집어넣고 위아래로 끌어 당기면 닻돌이 지나간 곳은 마치 소가 간 것처럼 되어 얕았던 곳이 깊어지고 막혔던 곳이 트일 것이니 도랑 안의 모래 처리보다 도리어 쉬울 것입니다.
예로부터 제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반드시 경계(經界)를 근본으로 삼았던 것은 맹자(孟子)가 등문공(滕文公)에게 한 말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후세에 와서는 그 경계 문제가 비록 옛날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나라 다스리는 데 근본이 되고 있는 점은 일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朱子)도 임장(臨漳)에서 경계 문제가 일개 군의 영구한 이해 관계를 좌우한다고 보고 우선 전지 측량에 능숙한 자 몇 명을 구해 지형을 보아 재고 분할하고 하여 십중팔구의 성과를 거두고는 임장 백성들을 이제 도탄 속에서 구제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결국 당시 그 일에 회의를 느끼는 자들의 방해로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호남(湖南)·광서(廣西)를 맡으라는 명령을 두 차례에 걸쳐 받았지만 두 번 다 사양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천 리 밖에서 생업을 잃고 있는 백성들에 대해 사죄하는 뜻에서였던 것입니다.
우리 조종들께서도 전지에 있어 반드시 연한을 두고 다시 측량하는 법을 만드셨는데 어찌 경계를 우선으로 여겼던 맹자·주자의 뜻을 본받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근자에는 태평 무사가 풍속이 되고 그대로 따르는 것만을 일삼아 나라 안 전지 중에 어떤 것은 1백여 년이 가도록 측량을 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능선이 계곡으로 계곡이 능선으로 변하고, 물바다가 뭍으로 뭍이 물바다로 변하여, 혹은 측량에서 제외된 것이 옥토인 것도 있고 혹은 측량을 이미 받은 것인데 전지 형태조차 없는 것도 있습니다. 혹은 놀고 있는 땅이 있는데도 백성들이 개간하지 않는 것은 실지로는 없는 전지까지도 조세가 부과될까를 염려해서이고, 혹은 비옥한 땅을 경작하고 있으면서도 돈 한 닢 바치지 않는 자도 있는데 그것은 간교한 아전들 붓끝 농간으로 그리 된 것입니다.
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만 말하더라도 읍(邑)에는 비치된 양안(量案)이 없고 결수[結]도 일정한 총수가 없이 연분에 따라 저들 멋대로 올렸다 내렸다 한 곳이 황해도 토산(兎山)이고, 사람이 대대로 살고 있다 하여 전지는 없어졌는데도 결수는 남아 있어 계속 조세를 물고 있는 곳이 전라도 전주(全州)입니다. 누락된 전결이 있으면 문서로 농간을 부리는 아전들이 다 횡령하고 호소할 곳 없는 백성들은 없는 땅의 조세를 계속 바치는 것입니다. 남이건 북이건 바닷가나 산골이나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은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못하고 원성이 위에 알려지지 않아 민생은 야윌 대로 야위고 국용은 바닥이 날 대로 났는데 그 모두가 이상과 같은 폐단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주자 저서를 가지고 주자의 도를 강론하고 계시니 주자가 당시에 행해보려고 했던 일들이 오늘에 와서야 행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라건대 일을 맡은 신하로 하여금 《대전》과 《어류》에 있는 말들 중에 경계 문제에 관해 언급한 것을 좀 더 상세히 강구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근래 올려온 소장들이 별로 시원한 내용이 없던 차에 그대 상소문을 보니 입을 열자마자 주자에 대해 말하였고 게다가 또 이용 후생(利用厚生)에 관한 문제까지 덧붙여 있었다. 모두 입다물고 있는 풍토 속에서 그대가 이 말을 한 것은 참으로 적잖이 다행스럽다. 내 그리하여 그대를 가상히 여기는 것이니, 그대는 자기 직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첫 번째 조항의 《어류》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나는 생각하기를, 《대전》은 주부자 손에서 나온 것이고 《어류》는 문인들 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대전》이 《주역》의 계사(繫辭)와 같다면 《어류》는 《논어》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기록할 때 사람 성품이 데면데면한 자도 있고 주밀한 자도 있었을 것이며 문장을 쓰는 법 역시 상세하게 쓰는 자가 있는가 하면 대략으로 쓴 자도 있었을 것이다. 또 통틀어보기를 좋아하고 하나하나 분석하기를 꺼려하며 깊이 숨어 있는 보물은 버리고 부스러기 금만 취하기도 했을 것이므로 가끔은 잘못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체로 《대전》과 《어류》를 놓고 비유해서 말한다면, 똑같은 물건인 것이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명(命)이 되고 사람이 받은 입장에서 보면 성(性)이 되는 것과 같아서 분리해서 보아도 좋고 종합해서 보아도 좋다. 아무튼 동일한 곳에서 다른 점을 발견하고 또 다른 곳에서 동일점을 찾아내야지만 비로소 주자를 잘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燕)에서는 책을 사오고 악(岳)에서는 사람을 골라 하나의 통일된 큰 문자(文字)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하늘이 만약 사문(斯文)의 길을 열어주어 내 뜻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대도 선택받은 한 사람이 되어 그 책의 편찬 사업에 함께 종사해줘야 하겠다.
두 번째 조항의 《의례》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당(堂)·영(榮)·풍(豊)·금(禁) 같은 것들이 의식을 거행하는 데 있어 그 물건이나 제도로 보아서는 비록 말단적인 것에 속하지만 이것들이 기본이기 때문에 잘 알아야지 소홀히 할 것은 아니다. 궁실(宮室)에 관한 주자 해석이 《이아(爾雅)》와는 다소 들쭉날쭉하지만, 앞은 비고 뒤는 차 있으며 각(角)이 점(坫)이고 측(側)이 염(廉)이라고 한 것은 마치 명당(明堂)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질서 정연한 것이다. 왕안석(王安石) 이후로 《의례》를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옛 법도가 어두워지고 말았는데 《향례합편(鄕禮合篇)》의 주석이 예의 본의와 틀린 것들이 있는 것은 그야말로 담당자가 잘못 알고 한 것으로 내각에서 상세히 고찰하여 바로잡도록 할 것이다.
세 번째 조항의 향음례·향사례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술을 마시는 것은 농부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고 나이 차례를 따지는 것은 연장자를 존경하기 위한 것으로, 내가 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일인데 중외에서 그 뜻을 받들어 거행하지 못하여 또 관잠(官箴)의 제정까지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묘당에 회부하여 처리하도록 해야겠다.
네 번째 조항의 움창고에 관하여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한(漢)나라의 오창(敖倉), 당(唐)나라의 낙구창(洛口倉)이 모두 움으로 된 창고들로서 유방(劉邦)·항우(項羽)의 8년 전쟁과 양(楊)051) 과 이(李)052) 의 6년 전쟁 때 누구나 마음대로 가져가고 써도 써도 동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만 움이 비록 질흙으로 다진 것일지라도 역시 습기를 싫어하고 건조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큰 강 이남이 하북(河北)만은 못했던 것이다. 우선 적합한지의 여부를 타진해 보는 뜻에서 서북 한 곳이라도 시험해보고 싶은데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묘당에서 잘 헤아려보고 그 편리 여부를 우선 서북면의 도신(道臣)에게 물어 아뢰도록 해야겠다.
다섯 번째 조항의 은화(銀貨)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각종 기물이나 복식들이 날이 갈수록 사치해지는 꼴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옛날에는 놋그릇도 금했었는데 더구나 화폐 유통을 맡고 있는 기관에서 백금(白金)이라고 부르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그것을 하루아침에 법을 만들어 금지하고 보면 도리어 개공(蓋公)이 제(齊)나라 다스리던 뜻053) 과 괴리되는 점이 있을 것이니, 우선 재집(宰執)·시종(侍從)의 집에서부터 실천하여 아래에서 본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섯 번째 조항의 무명베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한(漢)나라의 비단도 당(唐)나라의 비단도 무명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 다리 없이 이웃으로 달려가듯 해마다 끊임없이 새나가고만 있으니, 이는 우리 백성들의 옷을 벗겨다가 다른 고장에다 버려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근래에는 금과 삼으로 짐을 채우는 제도에 대해 자주 정리하고 단속하고 있어서 아마 그 전처럼 무명베를 낭자하게 써버리지는 않을 것이지만 오직 사신 일행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일곱 번째 조항의 준설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 선대왕께서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신 거룩한 덕과 큰 업적이야 역사에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준설 문제도 그중의 하나였다. 준설이 물론 공사 규모가 크고 작은 구별은 있지만 크다면 그 비용이 만(萬)에 가깝고 작아도 몇 천이 드는데 만약에 소가 갈고 인력은 쉬게 된다면 비용이 많이 절감될 것이고 이득도 상당할 것이다. 모래를 자꾸 파내면 무더기를 이룰 것이니 무더기가 되고 난 뒤에 수문(水門) 밖 공한지에다 몇 길 되게 언덕을 쌓고 거기에 나무를 심어 유사를 방지하면 될 것이다. 그밖에 조금 남아 강으로 흘러들어온 것들은 닻돌과 쇠갈고리를 이용하여 흘려보내자고 하였는데, 그대 말이 내가 두고두고 생각해 온 것과 바로 들어맞는다. 다만 닻돌과 쇠갈고리를 이용하는 것과 대나무 바자를 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손쉬울지는 묘당에서 알아 여쭙도록 해야겠다.
여덟 번째 조항의 양전(量田)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삼대(三代) 다시 만들려면 우선 정전법부터 시행해야 되지만 정전법은 이미 실시할 수 없게 되었고 균전법(均田法)‘·한전법(限田法)도 옛 제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처음으로 가구수에 따라 전지를 분배하고 대대로 이를 업으로 삼게 하는 법을 제정했었지만 금방 토지 겸병자들이 차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지 제도라는 것이 그만큼 갑자기 바꿔지지는 않는 것으로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측량을 다시 하는 것인데 그것도 고을에서 적임자를 쓰지 않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할 수가 있는 것이다. 주자도 언젠가 시도를 했었지만 한 고향 사람인 유 승상(留丞相)이 또다시 빈정대며 훼방을 놓지 않았던가. 그만큼 어렵고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기에 마음을 굳게 다지고 시행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옛날 선왕 시절에는 초목도 울창하고 뽕나무와 삼도 번성했으며 마을에는 개짖는 소리가 없고 관청에서 자손을 기를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 풍류(風流)가 독후(篤厚)하고 금망(禁罔)이 소활(疏闊)했던 것인데, 내가 밤낮없이 걱정하고 노력하고 한 것도 이상 여덟 글자에 불과한 것이다. 조정의 진신들이 화목해야지만 백성들 살기가 편안하고, 백성들 살기가 편안해야지만 풍속이 순후해지고, 풍속이 순후해야지만 향음례도 향사례도 행할 수 있고 재물도 곡식도 여유가 있는 것인데, 그 근본을 찾자면 주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대 말이야말로 시무(時務)를 아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영종(英宗) 무자년 정시(庭試) 때 급제자 명단에서 빼버렸던 신사찬(申思贊)·김처곤(金處坤)의 정상을 가려 다시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사찬의 아들 신간(申簡)이 글을 올려 자기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해왔으므로 예조에 명하여 대신들에게 문의하게 하였던 것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신들에게 문의하였더니, 영의정 이병모(李秉模), 좌의정 심환지(沈煥之), 우의정 이시수(李時秀) 등은 ‘그 당시의 사실을 들었던 것과 지금 사찬의 아들이 올린 내용과 별로 틀린 것은 없는데, 방을 부르고 불러들일 때 정신이 얼떨떨하여 즉석에서 외우지 못했던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나 그 처분이 선왕조의 처분이고 또 미처 급제자로 창방된 일도 없으니 감히 함부로 복과(復科)를 논의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조(曹)에 비치된 무자년 이후의 등록(謄錄)을 두루 고찰하여 본 바 신사찬을 급제자 명단에서 빼버리라고 한 전교는 기록되어 있으나 합격을 알린 전후의 사실에 대하여는 참고가 될 만한 기록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찬의 아들에게 다시 물었더니, 그때 사찬이 전적(典籍)의 단일 후보자로 꽃을 꽂고 입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합격한 시권(試券)을 가져다가 보았더니 갑과(甲科) 1등이라는 붉은 쪽지가 아직도 시권 겉면에 붙어있었습니다. 또 《승정원일기》에서 참고용으로 뽑은 것들을 보았더니, 무자년 9월 26일 친히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를 보였는데 그때 신사찬이 앞으로 나와 어제(御題)를 외우지 못했던 관계로 그를 원방(原榜) 속에서 빼버리도록 특별히 하교를 하고 이어 그를 군대에 충원하고 어사화와 홍패는 반납하도록 명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조(吏曹)에 물었더니, 그때 새로 급제한 자에 대한 정사(政事)에서 신사찬을 전적의 단일 후보로 붙였던 것은 과연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사찬을 급제자 명단에서 빼버린 일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급제자를 발표한 뒤에 있었던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김처곤 문제는 연교(筵敎)에 의해 《승정원일기》에서 참고용으로 발췌한 것 또는 신의 조에 비치된 무자년 이후의 등록들을 상세히 고찰해 본 바 그 당시 송작(誦作)을 못했던 관계로 역시 원방에서 빼버릴 것을 명한 기록만 있고 그후 복과가 된 사실은 없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들 수의(收議)에는 ‘미처 급제자로 발표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사실과 다른 말이고, 또 그 당시 연교에도 빼버리고 군대에 충원하고 어사화와 홍패는 반납하라는 전교만 있었지 삭과(削科)의 명령은 없었다. 빼버림을 당한 무리들은 언제나 다시 가려 처리하는 특별 은총을 입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선왕조 50년 동안에도 급제자 발표 전에 빼버린 자는 영원히 빼버렸지만 급제자 발표가 있은 후에 빼버린 자로 영원히 빼내버려진 자가 과연 있었던가. 그러한 예로 본다면 신사찬과 김처곤 두 사람이 아직까지 빼내버려진 속에 있었던 것은 미처 살펴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문제를 결정하는 데 뒷받침이 될 만한 일이 있다. 선왕조에서 언젠가 하교하기를 ‘을유년 급제자 면접 때 경회루(慶會樓)를 부제(賦題)로 냈었는데 어느 유생 하나가 전석(前席)으로 나와서는 겁에 질려, 그 앞의 것을 잊어버리고 기억을 못하겠다고 대답한 자가 있었고, 또 어느 유생 하나는 급제하고 입시하여서는 본문(本文)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한 자가 있었다.’ 하시자, 채 판부사(蔡判府事)가 그때 도승지로서 연석에 있다가 아뢰기를 ‘춘당 대시(春塘臺試)에 응시했던 자가 이를 마치고 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안 사람이 춘당대가 어디 있더냐고 묻자 모르겠다고 대답한 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도 겁에 질려 한 소리이지 어찌 참으로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했었다. 인원 왕후(仁元王后)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하교하기를 ‘승지의 그 말이 고인에 비해 손색없는 말이다. 너그럽고 여유있는 풍도가 훗날 틀림없이 크게 될 사람이다.’ 하셨고, 선왕께서는 늘 그 두 유자 얘기를 끄집어내시면서 왕위에서 물러나신 후에도 자주 말씀을 하시곤 하였다. 더 자세히는 아마 기거주(起居注) 기록에 있을 것이다.
경회루도 모르는 한 유생은 신사찬과 같고 본문도 외우지 못했던 유생은 김처곤과 같은데 만약 그 두 유생들을 놓고 진지한 말씀을 하실 때 자리에 있는 신하 누군가가 신과 김의 문제를 꺼내 슬쩍 귀뜸을 했더라면 그 즉석에서, 다시 가려 처리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겠는가? 다시 가려 처리하는 것이 아마 옳을 것이다. 그리 알아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3일 병오
영의정 이병모가 상차하기를,
"신은 어제 정목(政目)에 대해 삼가 놀랍고 의혹이 갔습니다. 종성(鍾城)이라면 육진(六鎭) 중에서도 이름있는 고을로써 부사를 뽑아 보낼 때 십분 가려서 뽑아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만, 가려 뽑는 중에서도 그 출신과 품계를 고려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할 수는 또 없습니다. 지금 새로 임명된 부사 성정진(成鼎鎭) 같은 사람은 지난 시기에 그가 해냈던 일이 어떠했습니까. 그를 일러 비록 어두운 밤거리의 별이라고 하더라도 안 될 것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명의록(明義錄)》에 관련된 대의 명분이 날로 어두워져가고 있는 이때 당연히 그와 같은 자를 추려 뽑아 권장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을 지금 도리어 그를 머나먼 국경지대로 보내다니, 내려진 그 제목(題目)을 보고 과연 의아해 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는 이력이 홍문관 출신이요 대사간입니다. 이력이 그렇고 공로가 그런 자를 특교(特敎)나 벌보(罰補)가 아니고서 변방 고을로 내보낸 일이 일찍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신은, 그 전조(銓曹)의 당상관을 중한 쪽으로 추고하고 그 부사는 다시 임명하여 조정의 체통을 높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조 당상관은 추고하고 그 부사는 다시 임명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이력이 그렇고 공로가 그런 자를 특교나 벌보가 아니고서 변방 고을로 내보낸 일이 일찍이 있었습니까?’ 한 경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과연 그렇다.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성보(李城輔)가 경계의 내용으로 상소하면서 죄명 씻어버리는 일을 철회할 것을 청했는데, 그 상소문을 봉하여 되돌려주고 이어 비답하기를,
"기나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던 차에 보내준 글월을 대하니 청수한 그대를 대한 듯하고 곁들여 한 말들이 모두 훌륭한 내용인데 천 리를 사이에 두고 면담이라도 한 듯하여 더욱 기다려진다. 대체로 이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이치는 없고 못 해낼 일 또한 없는데 맹자(孟子)는 몰라서 안 한 것과 할 수 없어 못한 것을 말하면서 태산을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 것으로까지 비유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있는 정치는 돌이켜보면 어떻다고 해야 할 것인가?
백성은 바로 임금의 마음인 것이고 조정은 백성의 마음이며 예악(禮樂)과 교화(敎化)는 조정의 마음인 동시에 임금이란 그 예악 교화의 도구를 손에 쥐고 있는 자인 것이다. 내가 옛날 나 자신을 헤아려보지도 않고 성인(聖人)의 글을 읽고 성인의 뜻을 사모하면서 원대한 포부를 이루어볼까 하고 개연한 생각을 가졌었는데 세월이 물흐르듯 하여 벌써 백발이 성성하다.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아직도 황하(黃河)에 하도(河圖)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한탄054) 만 하고 있는데 경이 마침 내 뜻을 알고 말하였으니 경이야말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내 거기에 대해 저으기 느낌이 있는 것이다.
선정(先正)이 지은 병풍서는 그 내용이 풍기(豊芑)의 훌륭한 교훈055) 과 일치하고 있다. 더구나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시기와 사실이 딱 들어맞으니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써서 올리도록 하라. 말미에 언급한 《명의록》에 관해 운운한 것은 감히 나 혼자서 차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라 안의 대소 신료들과 함께 구벽(球壁)처럼 지켜나가고 경사(經史)처럼 두고두고 전할 것이다.
그리고 경이 한 말은 뜬소문 치고 좀 지나친 것으로, 별로 지적할 만한 어구는 비록 없지만 이제 막 금령이 게시되었기에 부득이 봉하여 돌려보내는 것이니 경은 그리 이해하고 다시는 굳이 사양하지 말기를 또 한 번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자중만 하지 말고 애타게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좀 맞추어달라."
하였다.
2월 24일 정미
우찬성 송환기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자기 손자의 음보(蔭補)까지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올 때는 너무 더뎌 한이더니 떠나갈 때는 어찌 그리 서두르는가. 세 번 읍(揖)하고 나왔다가 한 번 읍으로 물러가는 것이 예가 그렇다고 이르지 말라. ‘그대 얽매임없이 놀려고만 말고 그대 떠날 생각을 굳히지 말라.’ 이 시구가 바로 《시경》 소아(小雅)의 현자를 만류한 시가 아니던가. 나는 선정(先正)과 같이 생각할 것을 경에게 바라는데 경은 선정의 출처(出處)를 그대로 본받으려고 하지 않으니, 나의 성의야 물론 선왕께서 선정을 대우하듯이 하지 못할지라도 경마저 선정이 선왕을 섬기듯이 나를 섬기지 않아서야 될 일인가.
경이 떠나면서 올린 서찰에서 보부(保傅)에 대하여 지성으로 말했는데 그 보부를 고르려면 당연히 경과 같은 숙덕(宿德)을 골라야 할 것 아닌가. 상소로 말만 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경을 직사(職事)로 부르지는 않겠다고 경에게 미리 말하고서 찬성(贊成)을 특별 제수했던 것은 오로지 이사(貳師)의 겸직으로 준 것일 뿐이다. 경을 벼슬로 묶어두려고 한 것이 아닌 내 마음을 경도 알 터인데 어쩌면 그리도 지나치게 사양하는 것인가. 그리고 경의 손자에게 관직을 제수한 것은 바로 전대부터 있어온 선음(先蔭)을 이은 자손에게 벼슬을 주는 법에 의하여 한 일인데 다시 이렇고 저렇고 할 것이 뭐겠는가. 주연(胄筵)의 스승 자리를 빛나게 하기 위하여 따로 정중한 비답이 다시 있을 것이지만 우선 이 비답에다 그 뜻을 밝히는 바이다."
하였다.
이서구(李書九)를 이조 참판으로, 홍낙유(洪樂游)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일단 법이라고 하면 어느 법인들 지엄하고 지중하지 않겠는가마는 사전(赦典)에 관한 문서야 그 관계된 바가 더욱 어떠할 것인가. 옛날에는 도류(徒流)·안치(安置)·충군(充軍) 등의 죄명이 사면 때를 당하면 방면이 되었었다. 방질(放秩)·미방질(未放秩)을 구별하는 것은 그것이 근래 규정이고 그 후로 오면서 또 품질(稟秩)과 명목(名目)이 첨가되었는데 그것은 또 근래 규정 중에서도 더 근래 규정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비록 근래 규정이라고 해도 이미 정식(定式)에 속해 있는 한 그것도 법은 법인 것이다.
각 도로부터 방면·미방면에 관한 계본(啓本)이 다 올라왔는데 호남만은 아직 올라온 것이 없다. 추후 들어보니 특별 하교도 아니요 결정된 사항도 아닌데 일개 승지가 경솔하게도 자기 소견대로 지방에서 환송한 미방질 내의 범죄에 깊이 관련된 무리들을 빼버리고 계사(啓辭)를 다시 작성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망녕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죄명이 중하기 때문에 미방질에다 둔 것인데 지금 만약 그것을 빼버리면 그 무리들은 앞으로 위에서도 모르고 중간에서도 모르는 죄명이 되고 말 것이니 그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은 비록 그 방면에 생소해서 그리 한 것이겠으나 변변찮은 일개 승지가 그 부(府), 그 조(曹), 그 도(道)가 생긴 이후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짓을 저질렀으니 그 위인이야 나무랄 것도 없다 치고 그에게 무슨 죄를 내려야 맞겠는가? 그러나 사면령 실시가 이제 막 지났으므로 그냥 관대한 법을 적용하여 전 승지 이희갑(李羲甲)에게 미방질 중의 수율(首律)을 적용하라. 그리고 해부로 하여금 오늘 중으로 공죄(公罪)에 의한 속전을 받을 것을 초기하도록 할 것이며, 전조(銓曹)에서는 그를 다시는 승정원 후보자 축에 끼우지 말도록 하여 요즘 속습에 빠져 높이도 두께도 모르면서 재주를 부리는 자들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라."
흑산도로 정배했던 죄인 도겸(度謙)의 귀양지를 금갑도(金甲島)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2월 26일 기유
종묘와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였고, 왕세자도 종묘 배알의 예를 행하였다.
세자빈(世子嬪)의 첫 번째 간택을 집복헌(集福軒)에서 행하고 하교하기를,
"행 호군(行護軍) 김조순(金祖淳)의 딸, 진사 서기수(徐淇修)의 딸, 유학(幼學) 박종만(朴鍾萬)의 딸, 유학 신집(申緝)의 딸, 통덕랑(通德郞) 윤수만(尹守晩)의 딸만 두 번째 간택에 들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허혼(許婚)하도록 하라."
하였다.
관상감 제조 이만수(李晩秀), 예조 참판 이노춘(李魯春)을 명하여 국복(國卜)인 김해담(金海淡)을 데리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4차에 걸친 배례로 각 실(室)을 봉심하려니 나도 힘이 들었는데 동궁은 나이가 어려 그런지 배례를 행하면서 별로 힘들어하는 줄 모르겠더라."
하니, 만수가 아뢰기를,
"추창하고 오르내릴 때나 절하고 무릎꿇고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서고 하는 절차가 마치 타고난 듯이 의젓하여 모두 법도에 딱딱 맞았습니다. 참으로 그런 경사요 다행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국복에게 묻기를,
"오늘 간택한 처자들의 사주(四柱)에 대해 묻는 것이니 그대들은 상세하게 아뢰라. 기유년 5월 15일 유시(酉時)면 그 사주가 어떤가?"
하니, 해담이 아뢰기를,
"그 사주는 기유·경오·신미·정유이온데 바로 대길 대귀의 격입니다. 이 사주를 가지고 이러한 지위에 있게 되면 수와 귀를 겸하고 복록도 끝이 없으며 백자천손을 둘 사주여서 다시 더 평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김조순 가문에 대해 처음에는 별 마음을 두지 않았었는데 현륭원 참배를 하던 날 밤에 꿈이 너무 좋아 마치 직접 나를 대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 같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해득을 못했다가 오래 지나서야 마음에 깨치는 바가 있었다. 오늘 간택 때도 그가 들어왔을 때 보니 얼굴에는 복이 가득하고 행동거지도 타고나 궁중 사람들 모두가 관심이 쏠렸으며 자전과 자궁도 한 번 보시고는 첫눈에 좋아하셨다. 종묘 사직의 끝없는 복이 오늘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정월 초하룻날 태묘(太廟) 배알을 앞두고 점을 쳐서 비괘[比]가 관괘[觀]로 변했는데 그를 해석하면 선왕(先王)의 관(觀)과 비(比)한다는 뜻이 된다. 내 그리하여 관례와 책봉례를 거행했던 것인데 지금 이 가례(嘉禮)는 또 현륭원 참배 때 얻은 길몽으로 정한 것이니 이 모두가 다 하늘이 주신 것이며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명하신 일이다. 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인작으로 하는 일을 하겠느냐. 더구나 그 가문이 덕문이요 명망있는 집으로 뭇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집이라서 내 마음이 기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니, 만수 등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하교를 듣고 보니 참으로 종묘 사직을 위해 끝없는 복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첫 번째 간택을 마치고는 박종보(朴宗輔)를 시켜 본집까지 호송하도록 명하고 이어 간택이 결정되었다는 뜻으로 유시하기를,
"두 번째 세 번째 간택을 한다지만, 그것은 겉으로 갖추는 형식일 뿐이다. 국가에서 하는 일은 형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두 번째 세 번째 간택도 앞으로 해야겠지만 오늘 이 첫 번째 간택이 옛날로 치면 바로 두 번째 간택인 것이다."
하고, 또 김조순에게 수서(手書)를 내리기를,
"처음 가마에서 나왔을 때 자전·자궁이 여러 처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그를 가리키면서 저게 뉘집 처자냐고 물으시고 이어 앞으로 오게 하여 한 번 보시고는 상하 모두가 진심으로 좋아하면서, 그런 처자는 처음 보았다고들 하였다. 이 모두가 하늘이 명하신 일이고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주신 일이며 청음(淸陰)·문곡(文谷)·몽와(夢窩)·죽취(竹醉)가 쌓아올린 경사인 것이다. 경은 이제 나라의 원구(元舅)로서 처지가 전과는 달라졌으니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2월 27일 경술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월 한 달 간은 나 같은 심정에 처해 있는 사람으로서 경사스러운 예를 치르게 되어 감히 보통사람 같이 자처를 못하고 어떻게 넘겼는지 모르게 넘어갔고, 2월 이후로는 또 자궁의 병환으로 초조와 절박감 속에서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모든 백성 일과 나랏일에 관하여 전혀 수응을 못했으며 차대 역시 새해 들어 아직까지 한 번도 못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즉위한 지도 벌써 20여 년이 흘렀는데 단 반푼인들 무슨 기록할 만한 선정이 있었을까마는 접견과 수응을 이렇게 오래 못하기는 또 20여 년 동안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지금은 정력이 사실 스스로 버티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오늘 이 자리는 부득이 연 것이다. 이제 근력도 날이 갈수록 더 쇠해가고 먹고 자는 것도 제대로 안 되며 시력도 자잘한 글자는 볼 수가 없고 정신 역시 왔다갔다하여 참으로 이른바 보는 것은 어둡고 생각은 막혔다고 한 말 그대로이다.
지금으로서는 대례도 잘 마쳤고 자궁의 병환도 회복되었으나 또 하나 마음에 늘 잊혀지지 않고 있는 것은 현륭원 참배는 세초에 올렸고 진전(眞殿)과 종묘와 경모궁도 이미 차례로 배알하였으나 원릉(元陵) 행차를 새달에 해야 하는데 지금의 내 근력으로는 오르내리는 일을 힘들어서 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선조와 선왕을 받드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감히 늙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게을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오직 그 일만은 밤낮으로 성의를 다하고 있으나 그 밖의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부득이 휴양(休養)을 위주로 해야 하겠다. 그 전에는 걷는 정도는 가장 무난했었는데 어제 봉심하면서 예를 행할 때는 나도 모르게 땀이 흘러내렸다."
하니, 영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도 어제 그렇게 힘들어 해 하시는 것을 보고 너무 염려가 되었습니다."
하자, 우의정 이시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몸만 그렇게 힘들도록 움직이신게 아니라 경모궁 배알 때는 추모하는 마음까지도 너무 지나치셨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종묘를 배알했을 때는 선왕께서 내 나이가 어리다 하여 종묘 안 봉심을 하시면서 따라다니지 못하게 하고 절하는 자리에 그대로 서 있게만 하셨는데 이번에는 세자로 하여금 따라다니면서 봉심하게 했어도 오르내리고 추창하는 품이 법도에 맞게 의젓하고 그렇게 오래 걸어도 땀도 흘리지 않아 매우 기특해 보였었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들도 계속 지켜보았지만 그렇게 여러 차례 예를 행하면서도 다 법도에 딱딱 맞았습니다. 문왕(文王)이 세자 시절에 했던 일도 어떻게 그보다 더했겠습니까. 참으로 너무나 경사스럽고 기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흥(興)·배(拜)를 할 때 나는 혹 크게 외치는 소리와 맞지 않을 때가 있었지만 세자는 조금도 틀림이 없이 하나하나 소리에 맞춰 행하였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과연 너무 흠탄할 정도로 절차가 엄숙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첫번째 간택이 아주 잘되었다. 하늘이 정해준 짝이 있기 마련인데 내가 어떻게 감히 털끝만큼인들 그 일을 내 뜻대로 할 것인가. 관례·책봉례도 내가 감히 내 뜻대로 못하고 정월 초하룻날 아침 배알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을 했던 것은 어리석은 나로서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하면 언제나 분명하게 지도를 하거나 경계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의 말씀에, 형체 없는 데서 보고 소리 없는 데서 듣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 위하여 재계했던 그를 틀림없이 본다고 하지 않았는가. 성인의 말은 원만하고 모가 없어 비록 명백하게 ‘이것이 그것이다.’라고는 않으셨지만 그러한 이치는 틀림없이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이번 간택에 있어 내가 그 쪽에 뜻을 둔 것도 외인들이 보기에는 마치 그 집 문벌(門閥)이나 취한 것 같고 또 어쩌면 왕실과 가까운 사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내용을 자세히 말하자고 들면 혹 허탄한 소리 같기도 하지만 임금과 재상 사이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경들에게까지 그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륭원을 배알하던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는둥 마는둥 하고 있는데 무엇인가 아주 간곡하신 말씀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더구나 그 가문으로 말하면 아주 훌륭한 덕문(德門)이요 명족(名族)으로서 청음(淸陰)·문곡(文谷)·몽와(夢窩)·죽취(竹醉)라면 그들 호(號)를 부녀자와 어린애들까지도 다 아는 처지 아닌가.
그리고 어제 간택 장소에 그 집 처자가 들어왔을 때 얼굴단장 몸단장 등 각종 범절을 수수하게 꾸몄는데도 얼굴에 복이 가득해 보이고 여러 사람 속에서 매우 뛰어나 그야말로 닭 무리 속에 서있는 한 마리의 학(鶴)이었다. 궁중 사람들도 그가 처음 왔을 때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면서도 너도나도 관심을 기울였고 자전과 자궁께서도 보시고는 첫눈에 좋아하셨다. 그리고 또 옛 예를 그냥 폐지하고 말 수가 없어서 국복(國卜)을 불러 물었더니, 모두가 대길하다고 하였다. 이는 참으로 황천과 조종이 주신 것으로 종묘 사직을 위해 막대한 경사가 아닐 수 없다."
하니, 병모 등이 일제히 아뢰기를,
"하늘이 주시고 조종이 주셨으니 그야말로 억만 년 두고두고 끝이 없을 경사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관례와 책봉례를 동시에 거행하고 또 중춘(仲春)에 책봉례를 거행한 것은 모두 현종조의 전례를 따른 것이었는데, 처자의 생일까지 또 성후(聖后) 탄신과 같은 달이어서 가례(嘉禮) 역시 신묘년에 했던 대로 거행해야겠다. 그리고 또 모든 의식 절차는 되도록 간편하게 하고, 진행은 두고두고 천천히 하고 싶다. 가례 날짜를 12월로 잡은 것 역시 천천히 하려고 하는 뜻과 합치되는 것이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들로서는 너무 늦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야 성상의 마음대로 하실 일입니다."
하였다.
이조 참판 이서구가 아뢰기를,
"유신(儒臣)을 예우하고 창언(昌言)이면 다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성조(聖朝)의 전래 가법이요 우리 전하께서 쉴새없이 관심을 두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행 대사헌 이성보(李城輔)가 올린 상소 내용 중에는 이번의 사전(赦典) 문제에 관해 그의 의견을 개진한 곳이 있었는데, 의리를 밝히고 징토(懲討)를 엄히 하자는 것은 이 나라 전체의 똑같은 심정이고 유현(儒賢)의 말 한 마디는 장차 인민과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을 만큼 중한 것이니, 이성보 상소 중의 그 한 마디는 바로 하늘을 감격시키고 세상 풍교를 진작시키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말을 올린 그의 성의를 이해하시고 군신 상하가 대의(大義)를 굳게 지켜 나가자는 성상의 뜻을 그에게 분명히 보여주셨으므로 그 점에 대해 신으로서도 사실 흠탄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가 청한 조건들이 금령에 저촉된다 하여 그 원소를 봉해서 돌려보내라고까지 하신 점에 있어서는, 누구라도 간언을 올릴 수 있도록 문호를 터놓은 전하의 성덕으로서 유독 역적 징토 그 한 문제에 대해서만 금령을 내려 받아들이지 않으심으로써 전하께서 평소 깊은 관심을 쏟아왔던 것과는 서로 큰 차이를 보이고 계시니 이것이 어찌 뭇 신하들이 평소 성상께 기대했던 바이겠습니까.
신이 그때 승지 자리를 욕되게 하고 있으면서 어리석은 소견을 아뢰고 싶었으나 미처 연석에 오르지 못하고 금방 자리를 옮기게 되었기에 그때 남아 있던 소회를 감히 이렇게 아뢰기로 한 것입니다. 원소를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빨리 거두시고 이어 그의 청을 윤허하심으로써 성덕이 더욱 빛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현의 상소가 사체로 보아 중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선정(先正)보다 더할 수야 있는 일인가. 예전에 선정 송 문정(宋文正)은 빈사(賓師) 예우를 받고 있으면서도 김홍욱(金弘郁) 건에 관해 독대(獨對) 때의 수차(袖箚) 말고는 소차를 올리거나 공식 석상에서 말한 적이 없었는데, 어찌 할 말을 감히 다하는 기개가 부족하고 하고싶은 말을 다하는 성의가 부족해서 그랬겠는가.
이번의 유현 문제로 말하면 알고는 다 말하는 그의 성의가 감동스럽고 또 그 상소 내용도 꼭 금령에 저촉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답을 내린다 해도 으레 반포하기는 역시 곤란한 일이기에 특별히 사관(史官)이 가는 편에 돌려보내게 한 것인데 그게 바로 대신에게 적용하는 규례인 것이다. 안에 머물려 두는 상소 역시 의레 비답을 내리지 않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유신(儒臣)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지금 봉하여 되돌려보낸 것이 안에 머물려 두고 비답을 내리지 않는 것과 비교할 때 상대를 존경하고 예우하는 뜻이 과연 어떠한가."
하였다.
삼사(三司)가 그 전에 아뢰었던 덕상(德相)의 일 및 상철(尙喆)의 일, 양사(兩司)가 전에 아뢰었던 홍국영(洪國榮)의 일 및 구종(九宗)의 일에 대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대사간 유한녕(兪漢寧)이 상소하기를,
"신의 생각에는 오늘의 그 많은 일들 중에서 제일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언로(言路)를 여는 일입니다. 언로는 바로 국가의 혈맥으로서 혈맥이 막히면 사람이 병이 나듯이 언로가 막혀 있으면 나라가 망하기 때문입니다. 옛 당(唐)·우(虞) 시절에는 많은 현자가 조정에 가득하고 좋은 말치고 숨어 있는 것이 없었으나 그래도 진언지정(進言之旌)과 비방지목(誹謗之木)을 두어 할 말 다하라는 문호를 활짝 열어놓았으니 언로(言路) 두 글자가 나라 다스리는 데 있어 급선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간하지 않아도 선한 일만 하시는 성인으로서 말하도록 만든 길을 넓히시어 즉위 이후로 말로 죄를 받은 사람이라곤 없었습니다. 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성의가 역대 어느 왕보다도 으뜸이셨는데, 요즘 가만히 보면 입다무는 것이 풍속이 되어버려 간혹 상대를 논하는 소장이 어쩌다가 있으면 뭇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무슨 변이라도 난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저 몇 마디로 책임이나 때우려고 할 뿐 임금의 위엄을 무릅쓰고 감히 대드는 자가 있었다고 들은 적이 없고 소장이 계속 올라온대야 거의가 아양이나 떨며 숫자를 채우는 식입니다. 그리고 글을 쓰다가도 조금만 꿋꿋한 표현인 듯하면 자꾸 갈고 다듬고 하여 아무런 모서리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말로만 횡설수설 구차하게 때워 넘기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이 죽을 죄를 무릅쓰고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간언을 받아들이는 정성이 혹 아랫사람에게 미쁨을 주지 못해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산림(山林)에서 올라온 상소만 하더라도 그 내용이 어떻게 꾸며졌는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내려진 비답의 뜻으로 보아서는 거기에 언급된 것이 의리(義理)에 관한 내용 같은데, 그 원소를 결국 봉하여 돌려보냈으니 이는 성조에서 유현을 우대하는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엊그제 당차(堂箚)만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논사(論思)의 책임을 수행한다고 한 것인데 내용에 온당치 못한 한 두 마디가 있다 하여 즉시 도로 내주었습니다. 대체로 당차를 도로 내준 예는 극히 드문 일인데 성학(聖學)이 고명하신 전하로서 왜 그리도 상도에서 벗어난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제 겨우 새로 제수를 받은 신으로서 말해야 할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금령에 저촉될까 두려워 실속없고 케케묵은 말로 짧은 소장을 엮어가지고 들어가 올리려고 하였는데 수문장이 몸 수색을 하는 바람에 소장을 가지고 간 자가 들어가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하잘 것 없는 존재이나 직책이 대사간인데 소를 올리려다가 일개 수문장에게 막혀 생각을 하고도 토로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조차 아뢸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신으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기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오늘 빈대(賓對) 자리까지도 참여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신의 직을 삭탈하시고 선부(選部)에 특별 명령을 내려 다시는 대간 후보자로 추천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입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폐단에 대해 많은 말을 했는데 그 말들은 다 분명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리도 시속에 따라 남의 흉내나 내는 습관에 젖었는가. 근일의 문제만 하더라도 거기에 슬쩍 끼어들어 결과적으로 같은 꼴이 되고서도 상대만 헐뜯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이른바 징토니 제방이니 하는 것은 충직한 자만이 그 문제를 두고 감히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지극히 연약하여 줏대가 없고 지조가 없는 자들이 추고(推考)나 체차(遞差)에만 관심을 두어 그들 부류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서슬이 시퍼래서 비할 데가 없지만, 막상 그밖의 시정(時政)이나 관사(官師)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너도나도 토란을 씹고 대추를 삼켰는지 묵묵 무언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징토래야 징토가 아니라 남 헐뜯기 좋아하는 자가 자기를 소개하는 교묘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제방도 제방이 아니라 경거 망동하는 자들이 남의 뺨이나 치는 졸렬한 방편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 따위 속습들이 확 바뀌고 말끔히 없어지기 전에는 소장 등이 날로 쌓인다 해도 개중에는 물론 자갈무더기 속의 부스러기 금 같은 것도 있겠지만 기껏해야 그것은 가라지밭의 벼싹이요 자주색 속의 진붉은색 정도여서 음양(陰陽) 흑백(黑白)이 뒤섞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그것으로는 사기를 부추겨 바른말 잘하는 풍토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며 언로 개척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2월 28일 신해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관기교(觀旂橋)에서 행차를 맞이한 유생들에게 글짓기 시험을 보여 수위를 차지한 진사 조형기(趙亨基)를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어 춘당대(春塘臺)로 나아가 행차를 뒤따르는 군교(軍校)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하교하였다.
"사옹원의 부제거(副提擧) 자리는 일정한 규정을 두어야겠다. 한 자리는 종반(宗班), 나머지 세 자리는 당분간 승지 2명과 세자 시강원의 당상관 가운데서 1명이 으레 겸임하되 도승지가 으레 겸임하던 예대로 하여 성명을 열서하고 낙점을 받도록 하라."
2월 29일 임자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우리 전하의 몸동작 하나 말씀 한 마디가 앞으로 모두 만세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금년부터는 더더욱 많은 생각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금령(禁令) 한 가지 문제에 대하여는 전하께서도 그것이 천 번 만 번 옳지 않은 조치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시면서도 뜻을 굳게 굳히시고 누가 뭐라든 완강히 거부만 하시는데 이는 지금 당장 의리와 윤리 강상에 큰 영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후세에 모범을 보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어제 대사간 유한녕의 상소에 대하여 내리신 비답만 하더라도 징토니 제방이니 하는 말들을 일체 아첨이요 경거 망동으로 몰아붙이셨는데 그야 물론 뭇신하들이 성실하지 못한 탓이겠습니다마는 넓은 도량으로 직언을 받아들여야 하는 성상의 도리로서는 당연히 그 말이 정당한지의 여부를 살피고 나서 취사를 결정했어야 했습니다.
요즘 여러 신하들의 금령 철회 요청에 관해서도 전하 역시 그것을 부당한 요청으로 여기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똑같이 아첨이요 경거 망동으로 대놓고 매도하시니 지금 그렇잖아도 습속이 시들시들 나약함이나 부리고 있는 이때 만약 전하의 그 하교로 인하여 모두가 풀이 죽고 겁에 질려 징토나 제방이라면 애당초 감히 입도 뻥긋하지 않으려 한다면 의리가 날로 빛을 잃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세상과 인심을 위해 얼마나 많은 우려가 되는 일입니까. 신에게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지경연사(知經筵事) 이병정(李秉鼎)은 아뢰기를,
"대사간의 소본은 비록 미처 보지 못했으나 성상의 비답에 혹 지나친 구절들이 있어 아까 대신과 그 문제를 놓고 말을 주고받은 바 있었는데, 지금 대신이 그 문제를 아뢰었으니 마침 경연을 더럽히고 있는 신으로서도 어떻게 감히 입다물고 말 한 마디 없을 수 있겠습니까.
비답 어구 중에 ‘대신이 아뢴 것 이외에는 추고·체차에만 관심이 있다.’ 하신 어구들은, 성인은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 입장에서 볼 때 다소 흠이 있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은 그렇잖아도 뭇신하들이 부들부들 떨며 겁에 질려있어 혹시 죄나 받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무서워하는 자들이 많은데 하교까지 그렇게 하시면 이는 결국 벼슬을 못해서는 못해서 걱정이고 하고 나서는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만 만들어내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니, 이 어찌 예로써 부리는 도리에 손상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 때문에 징토 문제에 대해 모두가 다 우물우물 해버리면 의리와 제방이 다 무너져가고 있는 이때 더욱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점에 대해 유의하시기를 엎드려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든 왕언의 대제(對題)에 있어 제목을 붙이는 구절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내가 평소 경계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이다. 지금 말했던 징토·제방의 폐습이라는 것만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아첨이나 경거 망동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고, 또 조정에는 추고·체차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의 비답 내용은 제목과는 상관없는 일장 설화에 불과하니 꼭 고치고 말 것도 없다. 그렇지만 비답 내용에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그 비슷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혼후(渾厚)한 말투가 아닌 것으로 경들이 한 말이 옳다. 비답 중에 관심(關心) 이하 7자와 어시호(於是乎) 이하 31자는 삭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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