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53권, 정조 24년 1800년 3월

싸라리리 2025. 8. 1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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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병진

상이 봉실(奉室)에 예를 행하려 함에 의주(儀註)를 참고하고 나서 승지 조석중(曺錫中)에게 이르기를,
"망위례(望位禮)는 신탑(神榻)을 모셔 내오기 때문에 면복(冕服)을 착용하지만 봉실 행례 때는 신탑을 모셔 내오지 않는데 어찌 망위례의 예(例)대로 할 것인가."
하니, 석중이 아뢰기를,
"《등록(謄錄)》을 상고해보았더니, 임자년 3월 7일 봉실 행례 때는 판위(版位)는 봉실 앞뜰에다 설치하고 악차(幄次)는 조종문(朝宗門) 밖의 재실에다 설치하고, 백관들의 자리는 열천문(冽泉門) 밖에다 설치했으며 출궁·환궁 때는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 차림이었고 행례 때는 복색을 면복으로 마련한 것으로 되어 있고, 기유년 3월 6일 망위례 때는 출궁·환궁 때의 복색을 예조가 잘못 강사포(絳紗袍)로 마련했다가 제교(提敎)에 이른 뒤에는 행례 때의 복색까지도 익선관에 곤룡포로 마련했었는데 그 일 때문에 그 판서에 대해 삭탈 관직의 명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기유년에 예조 판서가 삭탈 관직된 것은 그때 제사가 친제(親祭)가 아니었는데도 출궁·환궁 때의 복색을 강사포로 잘못 마련했던 일과 망위례에 면복과 조복(朝服)을 마련하지 않았던 일 때문이었다. 그리고 임자년조의 의주는 그것이 아주 틀린 것이다. 판위 자리가 틀림없이 봉실 앞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문(壝門) 안에 있었을 것이고 백관들 자리 역시 열천문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문 안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의주를 만들 때 필시 살피지 않아 그리 되었을 것이다. 망배례(望拜禮)를 행할 때는 혹 열천문 밖에서 했던 전례도 있는데 그 때는 백관들의 반열 또한 열천문 밖에 있었으니, 행례는 봉실 앞뜰에서 하면서 백관들은 바깥 처소에 나와 서 있을 리 있겠는가.
그리고 또 행례하던 그날이 삼황(三皇)의 제삿날이 아니라 바로 제향 전날이었는데, 예조에서는 제향 전날 담 안에서 거행하는 망위례 의주에 있는 복색에 관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 봉실 행례가 제향일인지의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구별을 못했던 것이다. 그때 예조 판서가 죄를 면했던 것은 요행으로 면한 것이다. 이 후로는 이 연교(筵敎)대로 준행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봉실 행례는 그것이 임시 변통으로 행하는 예인데 어찌 면복을 착용할 수 있겠는가. 모레 행례 때 여러 집사(執事)들은 들어오지 말고 술독을 둔 자리에서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맞이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5일 정사

대신과 각신 및 약원(藥院)의 신하들을 불러 접견하였다. 원릉(元陵) 제향일이라 하여 제신들이 문안을 드린 것이다. 영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일전 대사간 상소에 대한 비답 내의 몇 마디는 사실 지나친 감이 있었는데 다행히 동료 재상의 주달로 인하여 삭제할 것을 특별히 명하셨으니 신들로서도 영광으로 여기는 터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보통 문자를 쓸 때 제목을 붙여 쓰려고 하지 않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뜻인 것이다. 다만 이번 일에 있어서는 바로잡기 어려운 속습에 대해 늘 마음속으로 개탄을 해왔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용이 그렇게 쓰여졌던 것이라 급기야 우상의 말을 듣고서 삭제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성상이 무슨 뜻으로 그러시는지 신들이 왜 모르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금령이 아직까지 있다는 것은 매우 민망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모든 제도가 안정을 이룰 때까지만 잠시 기다리라고 하교하셨지만, 예로부터 말하는 것을 금한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령이 놀랄 정도로 듣기 거북한 것임을 나라고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날로 틀려만 가는 풍습에 비하면 오히려 그쪽이 더 낫다 싶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지난번 승지의 처분에 관해 내리신 전교를 보았지만 석방·미석방 문제를 승정원이 집행한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습속의 그러한 폐단이야 사실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금령까지 둔다는 것은 좋은 일이 못 됩니다. 신이 너무나 염려스러운 것은 금령이 삼엄하면 할수록 기강은 더욱 무너질 염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승지가 한 처사는 참으로 매우 놀랄 일이었다. 석방·미석방에 관해 계사를 쓸 때 무릇 이름이 죄인이면 그 죄질의 경중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기록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전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신년 이후 징토가 어떠했고 을해년 이후 제방은 또 어떠했는가. 그때 연좌돼야 할 무리들 중에 석방·미석방을 매기는 데 누락된 자라곤 일찍이 없었고 또 그때 그 문제를 들어 말한 자가 있었다고도 듣지 못했다. 그 때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일을 이희갑(李羲甲) 같은 자는 어려움없이 해냈는데, 그 또한 이희갑의 죄만은 아니고 근래 풍습이 그러한 일들을 두고 각기 직분을 다하는 도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러한 풍습이 크게 바꿔지기 전에는 앞으로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될 염려마저 있으니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금령을 둔 것은 나로서도 물론 지나친 일로 생각한다. 그런데 옛사람들이 과감하게 말하는 자라고 한 자들은 그저 보통 사람과 같은 정도에 불과했으며 저마다 과감하게 말하는 자로 자처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일단 과감하게 말을 했다 하면 반드시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했기 때문에 그 말이 한 시대를 두고 귀중한 말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징토에 관계된 일이기만 하면 옛사람들이 해냈던 일은 하지도 못할 자들이 옛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말만은 다 잘하고 있다. 그것이 참으로 과감하게 말할 수 있는 기풍이 옛사람들보다 나아서 그런 것이겠는가. 기실은 모두가 눈치놀음이나 하는 작태들인 것이다.
그러한 고질적 폐습들을 내가 하나하나 다 들추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마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징토가 어디 있을 것인가. 그것이 막을 수 없는 습속으로 굳어져 구제할 약이 없다. 지금 당장 국가의 기강이고 체통이고 모두가 말이 아닌데 이렇게 세월만 보내면서 끝까지 바꾸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내 그리하여 부득이 금령을 둔 것인데 그 금령이 엄해야지만 조정이 조금 존엄해 질 것이고 경들의 분의(分義)도 그것을 계기로 다소 신장되어 세상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다.
옛사람들은 비록 징토를 할 때라도 공평하고 진실한 논리를 폈다. 내가 우연히 홍우원(洪宇遠)의 문집을 보았더니 그 문집 속에도 보통 사람이 말하기 어려운 말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고 재상 민정중(閔鼎重)이 한 일과 사정은 달라도 행위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옛사람들은 으레 한편으로는 준엄한 징토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와 같은 이론이 조금만 있으면 그를 당장 당악(黨惡)이요 호역(護逆)으로 몰아붙인다. 그들의 이른바 징토라는 것이 으레 그런 투인 것이다.
언로(言路)만 하더라도 옛사람들이 말했던 언로 개방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 지금의 그따위 언로를 가리켜 말한 것이겠는가. 비록 한 마디를 해도 그 당시에 두려움을 느낄 만한 말을 해야지만 비로소 과감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을 돌아보면 당장의 급선무가 그러한 폐습들을 조금씩 고쳐나가는 일인데 요즘 들어서는 금령도 조금은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 폐습이 크게 바꿔질 때까지는 그대로 두었다가 크게 바뀐 후에 금령을 없애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는 풍토를 크게 조성하여 우리 다함께 억만년 두고두고 태평 성대를 누린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그렇게도 간곡하신데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그 뜻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옛날 충신과 역적, 어진 자와 사악한 자가 뒤섞였을 때는 부추기기도 하고 억누르기도 하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었겠으나 오늘의 징토야 어떻게 그와 비교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楨)·남(枏) 사건 같은 것이야 그 얼마나 위태위태했는가. 그런데도 고 재상 민정중은 가볍게 처리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었다. 왜냐하면 마음속으로는 비록 정반대일지라도 그가 한 행위가 미심쩍으면 감히 말하기 곤란한 일까지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한 시대의 존중을 받은 사람이어야지만 혐의로울 바가 없는 것이고, 혐의로울 바가 없기 때문에 남이 하기 어려운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며, 남이 하기 어려운 말을 하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이 세상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그것을 공론이라고 할 수 있고 충직한 뜻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평상시에 의리(義理)에 대해 강구한 일이 없고 공석에서건 사석에서건 그러한 문제를 놓고 논의해 본 일조차 애당초 없는 실정인데, 하루아침에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경중을 알아 취사 선택을 맞게 하겠는가. 지금 분분하게 올리는 각종 상소 및 이미 계사를 올리고 나서 또 소를 올리는 것 같은 습속들이 모두 폐단 중에서도 심한 폐단인 것이다. 경들도 그와 같은 것을 일체 금지하고 개혁할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시기는 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만약 소탕(疏蕩) 정책을 쓰시고 싶으면 그중에는 경중 천심을 논할 만한 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니 다방면으로 공론을 청취하고 나서 절충하신다면 그 얼마나 온당한 일이겠습니까. 어찌하여 꼭 뭇신하들과는 상의 한 마디 없이 성상 혼자서 단안을 내리시고 게다가 또 금령까지 내려 여러 입들을 막으려고만 하십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사면해서는 안 될 자를 사면하기 때문에 금령이 필요한 것이지 만약 사람들 모두가 사면할 만한 자라고 하여 사면을 하면 금령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한 말들도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러나 시기 적절한 조치를 취하자니 자연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사면해서는 안 될 자뿐만이 아니라 비록 죽여야 할 자라고 하더라도 사면 대상으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이미 죽여야 할 자라고 했으면 어떻게 또 사면 대상으로 논의할 수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죽여야 하고 사면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 다 공론일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좌상의 말이 옳습니다. 금령이 지엄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가 시간이 흐르고 일이 오래된 뒤에는 도리어 그것을 무방한 일이었다고 말하는 자도 혹 없지 않을 것이니 그와 같이 계속된다면 속습에 더 큰 해가 될 것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이희갑이 한 일을 보지 않았는가. 그것이 그의 죄는 아니다. 그는 틀림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어 그리했을 것이다. 속습이 그 모양인데 어떻게 금령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그러한 문제는 상께서 가르치시면 그뿐이지 꼭 금령까지 내려야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 같이 지위가 높은 자부터 앞으로는 결코 언급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금령은 철폐를 안 해도 저절로 철폐가 될 것이다."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십분 지당하신 처분이라면 신들이 어찌 감히 한 마디인들 하겠습니까마는 만약 온당치 못한 처분을 내리셨는데도 모두가 입을 다문다면 신들은 무슨 꼴이 될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그러한 문제들을 왜 백성들과 함께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금령을 내리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것이 바로 백성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조정 풍습이 이 모양이기 때문에 중간에 가득 차 있는 것들이 마치 역가(曆家)가 말하는 청몽기(淸濛氣)라는 것처럼 전부가 부잡한 기운뿐이다. 그러니 진짜 공공의 논이 어떻게 위에까지 전달이 되겠는가. 만약 진짜 공공의 논을 물어본다면 틀림없이 이 처분을 당연한 처분이라고 할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가 아뢰기를,
"금령을 어떻게 공공의 논이라고 하겠습니까. 설사 당연한 처분이라고 하는 자가 혹 있을지라도 그것이야말로 바로 상께서 하교하셨던 눈치놀음하는 짓이지 그것을 어떻게 공론이라고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눈치놀음이야 물론 안 될 일이지만 뜻을 그대로 따를 일은 따라야지 전부를 반대만 해서야 될 일인가."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옛사람은, 아름다운 정사를 받들어 따른다고 말하였습니다. 금령이야 그게 무슨 아름다운 정사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겉으로 보아서 아름다운 정사가 아닌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근본 취지만은 속습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경들의 말도 다 좋은 말들이다. 영상도 아까 기강에 대해 말했지만 《시경》에도 ‘우리 임금께서는 끊임없이 이 세상 질서를 바로잡으시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라에 기강이 있는 것은 마치 망건(網巾)에 위를 맬 끈이 있는 것과 같아 윗부분에 팽팽하게 묶을 곳이 있어야지만 아래가 좍 펴지는 것이다. 지금의 속습으로는 비록 충직하고 뜻 있는 선비가 있더라도 바른말 바른 행위를 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금령을 내린 것도 언로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습속을 확 바꿔보자는 것이다."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시속의 폐습을 말하자면 사실 성상의 하교대로 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처분이 만약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꼭맞는 처분이라면 금령이 없어도 될 것 아니겠습니까. 금령이 내려지자 공론이 돌지 않습니다. 이리되면 이후로는 조정의 모양이 날이 갈수록 더 비속해지지 않을까 신은 그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사면 특전에는 중죄자로서 탕척 대상에 들어간 자도 혹 있지마는 반대로 죄가 경한 자가 세초(歲抄) 때 누락된 경우도 있다. 의금부 문서가 난잡하기 짝이 없어 심지어 노성중(盧聖中) 같은 경우는 방면으로 기록된 지 이미 오래인데도 그대로 거행도 하지 않고 또 아뢰지도 않고 서로 핑계만 대다가 결국은 덮어둬버리고 을묘년 사면 때도 방(放) 자를 썼으나 또 덮어뒀다가 작년 겨울의 사면 문서를 뒤섞어 둔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으니 그러한 풍습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형정(刑政)이 얼마나 중대한 정책인데 임금은 이미 방면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일을 아래서는 애초부터 거행을 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존속할 것은 존속하고 발거할 것은 발거하는 것이 국가의 금석(金石) 같은 법인데 당연히 발거할 자를 발거하지 않았으니 그 폐단이 결국은 반대로 발거하지 않을 자를 제멋대로 슬그머니 발거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그런 것들을 바로잡지 않고서야 조정이 무슨 수로 존엄할 수가 있으며 기강이 어떻게 확립되겠는가."
하자, 환지가 아뢰기를,
"그것은 참으로 놀랄 일입니다."
하였다.

 

북원(北苑)에서 재계하며 밤을 보냈다.

 

3월 6일 무오

봉실을 배알하고 북원의 재계하는 처소로 돌아왔다.

 

3월 7일 기미

상이 고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를 이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교하기를,
"지금 들으니 김 봉조하의 면례(緬禮)를 열흘 후에 한다고 하는데 옛날부터 대신의 면례 사실을 대신이 아뢰오면 특별 하교로 장례 때 도와줬던 대로 도와주도록 해 온 전례가 있다. 그가 세상에 있을 때는 비록 가까운 교외만 가더라도 먹을 식량이 없으면 없었지 술과 안주는 꼭 갖추었고 게다가 시까지 곁들였었다. 그런데 지금 만약 그를 까맣게 잊어버린다면 은례(恩禮)가 끝까지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재계하고 있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숙연히 바람이 일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 대한 감회가 별안간 새로워짐을 느꼈다. 필요한 물품들을 해청과 해부로 하여금 전례대로 도와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먼저 대내에서 돈과 쌀·무명베 등을 내려 내각의 관속을 시켜 보내준 것이 있었고, 이어 친히 지은 유사(侑詞)를 가지고 가 읽으면서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김 영부사(金領府事) 장례일이 가까워오는데 이 대신이 비록 과목(科目)으로 길을 튼 사람이었지만 경전에도 많은 연구를 하여 깊이 있는 학문을 쌓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집에서는 효도했고 관직에 있으면서는 결백했다. 그러한 내용으로 시호를 내리도록 태상시(太常寺)에 물어야 할 것이나 장례 시기가 임박해서 오래 기다릴 수가 없으니, 시장(諡狀)이 홍문관(弘文館)에 도착하는 대로 즉시 시호를 마련하여 장례날까지 대도록 하라. 그리고 시호 내리는 날 뒤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 영부사는 바로 정승 김희(金憙)이다.

 

영부사 김희는 시호를 효간(孝簡)으로 내리고, 영부사 서명선(徐命善)의 시호는 충문(忠文)으로 고쳤다. 서명선의 첫 시호가 충헌(忠憲)이었는데 그의 행적에 비하여 시호가 좀 부족하다는 공론이 있어 온 지 오래였다. 이때 와서 하교하기를,
"서 영상(徐領相)의 시호에 관해 몇 해 전부터 말들이 있어 왔으나 지금까지 세월만 흘렀다. 이 대신으로 말하면 관직도 관각(館閣)을 역임했고 또 그가 쌓은 것도 바로 문자(文字) 관계의 일이었으므로 시호를 고치라고 하는 주장들이 옳다."
하고, 그의 시호를 고치도록 재가를 내리고 나서 또 하교하기를,
"시호란 행적의 표상이기 때문에 한 글자로는 그 사람의 덕을 나타내기에 부족해서 두 글자로 한 것이다. 그러나 두 글자로도 다 표현이 안 되면 세 글자까지도 쓰는 것인데 위(衛)나라 정혜 문자(貞惠文子)가 바로 그 예이다. 고 영상도 그 시호가 많은 사람들이 부르기에 맞지 않아 지금 다시 고친 시호를 사판(祠版)에다 쓰려니 슬픈 감회가 다시 이는 것이다."
하고, 이어 치제하도록 명했다.

 

3월 8일 경신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돌아온 진하 정사(進賀正使) 김재찬(金載瓚), 부사(副使) 이기양(李基讓)을 불러 접견하였다. 진하사의 수역(首譯) 김윤서(金倫瑞)가 보고 들은 것을 따로 적은 단자를 올렸다. 그 내용에,
"1. 황제가 화신(和珅)을 제거하고는 즉시 그 도당들은 불문에 부친다는 뜻으로 중외에 선포하고 모두 새 갈길을 찾도록 하였으나 그 후로 황제가 신임한 자들은 모두 종전에 화신에게 붙지 않았던 인물들이고 조건을 붙여 쫓아낸 자들은 모두가 화신의 잔당들이었습니다.
1. 황제는 상황(上皇) 말년에 권력을 아랫사람이 쥐고 있던 사실을 큰 교훈으로 삼아 큰 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직접 처리했기 때문에 언제나 때가 늦도록 끼니도 잊고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형상(刑賞) 등 법제는 옹정(雍正) 때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1. 유구(琉球)의 공사(貢使)가 마침 북경에 있어 늘 황제 행차를 맞고 전송하는 곳에서 만나보게 되었는데 얼굴 모양이 유순해 보이고 행동 거지도 조용한 것이 그 나라 풍속이 그런 모양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묻기를 ‘몇 해 전에 귀국 사람이 우리 나라로 표류해왔기에 그들을 잘 보호하고 국경을 넘어가서 상국(上國)에 넘겨 주었는데 그들이 과연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왔던가?’ 했더니, 그들 중 중국말을 잘하는 종사관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팔중산(八重山) 사람이고 나는 중산(中山)에 살고 있어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못 보았지만 남들이 전하는 말을 들었는데 귀국에서 죽어가는 목숨을 가엾게 여기고 과분한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에 고국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 모두가 매우 감사해 하고 있다.’ 하였고, 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귀국에 표류해간 자도 있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몇해 전 표류해 온 자가 있어서 그에게 물자와 식량을 넉넉히 공급하고 공선(貢船)에 태워 복건성(福建省)까지 호송하였다.’ 하였습니다.
1. 건륭(乾隆) 연간의 유명한 신하로는 아계(阿桂)가 최고였는데 황제도 평소 그를 존경하였습니다. 그의 손자 나언성(那彦成)이 일찍이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역임했는데 젊어서부터 재주와 담략이 있어 황제가 그에게 교비(敎匪)를 징벌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관군(官軍)이 크게 패하고 언성은 적에게 부상을 당했다고 하는데 민간에서는, 언성이 이미 죽었으나 아직 보고를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하는 자들도 혹 있었습니다.
1. 중국 사람들의 모자챙 모양이 그전에 비해 좀 달라졌습니다. 연전에 상황(上皇)이, 모자챙이 너무 위로 말려올라가 꼭대기에 있는 정자(頂子)가 챙에 가리워 조신들 직품(職品)을 한눈에 알아보기 어렵다 하여 모자챙을 낮추도록 명했었는데 그 후로 정자가 없는 백성들도 그를 본받아 챙을 모두 낮췄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3월 9일 신유

돌아온 서장관 구득로(具得魯)를 불러 접견하였다. 득로가 보고 들은 것을 따로 적은 단자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1. 황제가 대신들에게는, 현량한 사람을 추천하고 각 성(省)의 진상물은 엄금할 것이며, 피해 입은 백성들을 잘 돌보라고 명하고 독무(督撫)056)  들에게는 신칙하기를, ‘총독·순무들이 만약 평상시에 관심을 갖고 체찰(體察)을 하고 인재 추천 때가 되면 백성들에게 실지 혜택을 준 자들을 골라 추천자 명단에 올리면 주(州)나 현(縣)이 모두 가일층 분발하고 더할 수 없이 노력을 하겠지만, 총독·순무가 만약 용렬한 관리들 중에서 대답이나 잘하고 무엇을 시키면 그저 부지런을 떠는 무리들을 써서 올린다면 그들이 참으로 꼭 현량하고 좋은 실적이 있는 자들은 아닌 것이다. 지금 모두가 말이나 번지르르하면 능력 있는 관리로 치고 강직 과감하고 무뚝뚝하면 일 할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사실 근년의 나쁜 습속이다. 주와 현은 백성을 직접 맡아 다스리는 기관이기 때문에 백성의 괴로움을 알고 그들의 원기를 배양할 줄 알아야 비로소 제구실을 한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각 성에서는 특별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거나 또는 승직 요청을 할 때는 되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그의 심술(心術)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여론도 수집해서 지조가 있고 단정 결백하고 마음을 다해 백성을 사랑하는 자를 최상으로 칠 것이며 말이나 얼굴 만으로 사람을 고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풍기가 바뀌고 정치 풍토도 순후해져서 백성들이 자연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 것이고 사람 고르는 방법도 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조정에 있는 자들은 재리(財利)밖에 모르고 지방 관리라는 것들은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 염치가 날로 없어져 위신이 서질 않으며 날마다 왕명이 내려가도 법만 가지고는 되지 않고 있다. 그 모두가 너무 오래 태평 무사주의에 빠져 풍속이 그렇게까지 퇴폐한 것으로 만약 일대 쇄신을 가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점점 더 허물어져만 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1. 황제가 구언(求言)의 조서를 내려, 채택할 만한 말은 즉시 시행하도록 하고 비록 옳지 않은 말이라도 죄를 내리지는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1. 구언의 조서가 있은 후 한림(翰林) 홍양길(洪亮吉)이 3통의 서찰을 써서 성친왕(成親王) 및 대신들에게 올렸는데 내용이 다분히 상대를 헐뜯는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헌황제(憲皇帝)는 엄명하고 인황제(仁皇帝)는 인자하다는 등의 말로 우열을 가리려고 한 것이라든지 황제가 3, 4월 이후로 조회를 점점 늦게 보이는 것이 아마 배우나 측근들이 성상을 유혹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등의 비난의 말을 터놓고 했으며, 또 화신의 잔당들을 불문에 붙인 일을 논하고 대신은 죄가 있어도 석방한다고 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기 대신(軍機大臣)으로 하여금 형부(刑部)와 회동하여 신문하게 하였던 바 그에게 대불경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이에 유지를 내리기를 ‘홍양길이 만약 배후니 측근이니 하는 등의 말만 써서 올렸다면 비록 그보다 더 황당한 말이었을지라도 짐은 틀림없이 그를 책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하여 자신을 반성하고 이어 좋은 교훈으로 삼았을 것인데 지금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각처에다 서찰로 보냈으니 그게 진실로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홍양길은 평소 주정뱅이로서 예절과 법도라고는 모르는 사람이다. 윗사람을 비방한 그 무례함을 간쟁하는 신하에 비유할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짐이 지금 충직한 말을 듣기를 바라고 있으면서 말 때문에 사람을 죄줄 수야 있겠는가. 그리고 단연코 언관(言官)을 죽임으로써 내 스스로 귀와 눈을 가려버리는 못난 임금은 되지 않겠다. 지금은 말을 놓고 스스로 마음에 반성하면서 그러한 사실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노력할 뿐인 것이다. 그 원서(原書) 1통은 수시로 볼 수 있도록 비치해 두라. 그가 한 말이 털끝만큼도 영향이 없는 말이지만 짐이 그 때문에 노기를 품어 만물이 생동하는 봄기운을 해치거나 과감히 말하는 풍토를 저상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수시로 열람하여 시근 종태(始勤終怠)의 경계로 삼아야겠다. 홍양길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려 사형을 면제시키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1. 묘비(苗匪)의 난리로 해마다 군대가 동원되는 통에 모든 창고가 바닥이 나 매관 매작까지 하게 되었는데 안으로 낭중(郞中)·주사(主事)에서부터 밖으로 지주(知州)·지현(知縣)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정한 값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오년부터 《선후사례(善後事例)》라는 책자 하나를 인쇄 발행했다가 기미년 가을에 와서야 비로소 그를 혁파하도록 했는데 그 소식을 미처 못 듣고 각 성(省)에서 관작을 구하기 위해 온 자들에게는 또 그대로 시행하게도 하였답니다. 작년에는 사천(四川)·섬서(陝西) 두 성에 대해 군수 물자로 은 8백여 만 냥을 풀고 두 번째로 또 4백 50만 냥을 풀었는데 12월에 와서 사천·섬서 두 성이 거의 다 평정되었다는 첩서(捷書)가 올라왔다고 하였습니다.
1. 북경 앞 삼문(三門) 밖에는 각처에 도둑들이 숨어 있어 좌익·우익의 총병관(總兵官)을 차출해서 밤낮으로 순행을 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1. 처음에는 군사 기무가 많았던 관계로 성친왕(成親王) 영성(永瑆)으로 하여금 입직하면서 사무를 처리하게 했다가 곧 국가 제도와 맞지 않는 조치라 하여 면제시키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부삼(傅森)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했는데 날이 갈수록 총애가 융숭하여 한 시대를 좌우한다고 하였습니다.
1. 황제가 금년 가을에는 심양(瀋陽)에 간다고 했는데 그것은 전해들은 말이어서 확실하게 믿기가 어렵습니다.
1. 덕명(德明) 등이 아뢰기를 ‘조선국 재자관(䝴咨官)이 장승훈(張承勳) 집에다가 서신을 던져넣은 것을 사역관(四譯館) 관리인 낭중(郞中) 명안(明安)이 보고서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부(部)로 넘겨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여, 11월 21일에 황제가 유지를 내리기를 ‘이광직(李光稷)이 던져넣으려고 했던 내막을 명안이 이미 물어 알고서도 그때 즉시 못하게 못했으니 당연히 잘못이지만 한편 명안이 그래도 그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그 이튿날 즉시 장승훈에게 공문을 발송했으니 그것을 보아 죄를 면제해주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1. 그 곳 농사는 작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날씨가 불순했던 관계로 관내 관외가 겨우 큰 흉년을 면할 정도였지만 현재 시세로는 풍년과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난리가 일어난 이후로 수송에 든 비용이 수천만 금이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돈이 귀해 풍년이 들지 않아도 곡식값이 뛰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산동(山東) 지방은 곡식 한 포기 심지 못한 땅이 수백 리이고, 관내에는 또 황충이 일어 군현에서 백성들의 품을 사서 잡게 했는데 황충 한 되마다 값으로 돈 1백 전을 줬다고 했습니다.
1. 책문 안에서 요동까지는 비록 깊은 두메산골이지만 곳곳이 인가이고 군데군데 산전(山田)이어서 땅은 좁아도 인구는 많음을 볼 수 있었고, 요양(遼陽)에서 경도(京都)까지는 수천 리 넓은 들에 굴뚝연기가 서로 닿아 있고 닭 우는 소리 개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1백 보마다 마을 하나가 있고 몇 리(里)에 장(庄)이 하나 있었으며 인구는 많게는 50, 60호, 적어도 10, 20호였습니다. 그리고 큰 곳은 마을과 시가가 4, 5리씩 연달아 섞여 있었는데 지금 같이 인구가 번성한 때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1. 중국은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기구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솜을 타는 탄궁(彈弓)·면거(綿車) 그리고 외바퀴수레 같은 것들은 모두가 가장 필요한 것들로서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을 하고 있었고, 연자방아 찧는 방법도 나귀나 말로 하기 때문에 힘은 적게 들고 효과는 많았으며 그 구조도 매우 간편하고 만드는 방법 역시 어렵지 않아 그대로 하기만 하면 유리한 점이 많을 것이지만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불편하게 여겨 금방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수레 이용인데 우리 나라 영문(營門)에서 쓰고 있는 큰 수레는 애당초 중국 것을 본뜨지 않았기 때문에 소나 말의 힘은 곱 이상이 들면서도 쓰기에 아주 불편합니다. 혹자는, 우리 나라 지형이 수레를 이용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고려 현종(顯宗) 때 강조(康兆)는 검거(劒車)를 이용하여 거란을 격파했고, 선종(宣宗) 때 유홍(柳洪)은 병거(兵車)를 이용해 적과 싸워 이겼습니다. 이렇듯 정(鄭)나라에만 군대 편제가 있고 초(楚)나라에만 이광(貳廣)057)  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양(瀋陽) 동쪽은 높은 산이 겹으로 싸여 험준하기 이를 데 없지만 상인들의 수레는 평지를 밟듯이 왕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고갯길을 조금만 수리하면 수레 통과가 얼마든지 가능한데 그것을 갑자기 실행하기는 물론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볼 때 절사(節使)가 한 번 가는 데 동원되는 삯말이 2백 필이 넘는데 그것을 만약 수레로 대신하게 되면 수레마다 소나 말 5, 6필을 메워 그것으로 짐바리 무게 15, 16말 몫을 운반할 수 있을 것이니, 수레 15량(輛)에 소나 말 70여 필이면 남으면 남았지 부족하진 않을 것입니다. 또한 해서·관서 지방의 여러 고을의 그 많은 폐단도 덜거나 없앨 수가 있습니다.
1. 그 쪽에서는 모든 운반에 있어 공사간에 나귀나 노새를 많이 이용하고 기타 밭갈이·연자방아 그리고 물긷고 곡식 털고 하는 일 등에도 모두 나귀의 힘을 이용하는데, 그 나귀라는 것이 먹이기도 쉽고 번식력도 강해 암수 몇 백 마리만 사다가 서북 지방의 노는 땅에다 풀어두었다가 많이 번식한 다음에 이용하게 되면 공사간에 두고두고 유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3월 10일 임술

전 판서 정민시(鄭民始)가 죽었다. 민시는 정순붕(鄭順朋)의 후손으로 영종(英宗) 계사년에 급제하였다. 상이 동궁으로 있을 때 홍국영(洪國榮)과 함께 서연을 출입했고 등극 후에는 또 국영과 함께 총애를 받고 발탁되어 몇 해 동안에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재상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원래는 평범한 집안이었으나 지체가 갑자기 높아져 한 시대를 위압했고 국영이 쫓겨난 뒤에도 그에 대한 상의 사랑은 변하지 않아 문임(文任)과 융원(戎垣)을 여러 번 거쳤으며 늘 재정을 요리하도록 맡겼었다. 벼슬이 1품에 이르렀지만 성품이 편협하고 괴팍하여 조정 모양이 누차 바뀌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계속 총애를 받기 위해서는 왕의 주위를 외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연석에 오를 때마다 조정 신료들을 헐뜯었으므로 그의 말 앞에서는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재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가혹하게 받아들이고 사람 놀리기를 좋아하여 세상에서는 수십 년 동안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민생이 곤궁에 빠진 것이 모두 정민시와 서유린(徐有隣)의 죄라고 하였다. 그러나 국영이 이담(李湛)을 특이한 보물로 삼고 있을 때 이담과 혼인을 맺도록 민시를 권했는데 민시는 이를 한사코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왕의 사랑이 끝까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전교하기를,
"동궁 시절부터 다정했던 사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 가버리고 오직 중신(重臣)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더구나 옛날 갑오·을미년에 그는 기미를 미리 알고 그 와중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심복으로 자처하고 동궁의 촛불 아래서 눈물을 뿌리며 신하로서 앞장서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천지 일월과 같이 인자하시고 현명하신 우리 영고(寧考) 때문에 위급했던 상황이 태산 반석처럼 변하고 뭇 백성들은 즐거워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한두 신하가 있어 우리 나라에 큰 혜택을 주었으니, 맨손으로 윤강(倫綱)을 바로잡고 후세를 위해 풍교(風敎)를 수립했던 것이다. 무릇 혈기가 있고 생명이 있는 무리라면 《명의록》 그 한 책이 바로 이 나라 《춘추(春秋)》인 것을 누가 모를 것인가.
국가의 비상시기를 만나 그것을 계기로 공명을 세우고 전원에 물러앉아 풍악을 울리며 부귀 영화에 파묻히다 보면 절도 있는 생활을 하는 이가 적어 끝까지 만전을 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중신(重臣)으로서 항상 겸손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이룬 공업을 잘 마무리한다면 훌륭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정민시는 4개 영(營)을 맡았었고 6개 부(部)의 장을 역임했으며, 3개 번(藩)을 다스리고 2개 관(館)의 장도 했다. 이렇듯 인사관계·문학관계·재정·군사 등등 화려하기 짝이 없을 만큼 여러 요직을 역임했으나 그의 문정은 청탁의 발걸음이라곤 없이 쓸쓸하고 조용하기만 하여 옛날 빈한했던 시절의 규모를 20년이 넘는 오늘까지 그대로 지켜왔던 것이다. 국사에 기록으로 남기고 많은 상을 내리기도 했지만 《주역》에서는 물을 건너다 꼬리를 적신다는 경계를 하였고, 《서경》에서도, 공로가 있다 하여 사랑과 이권을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제 그는 그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질병 요양을 위해 강가 농막으로 갔던 사람이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아, 그 중신을 무슨 수로 다시 본단 말인가. 그의 발자국 소리는 완연히 들리는듯 하건만……. 그 중신은 선왕조에서도 특별한 사랑을 받아 벼슬길에 나서자마자 가까이서 모셨고, 세 번씩이나 사명(使命)을 띠기도 하였으며, 모신 자리에서는 사랑의 말이 오가는 등 곁에서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였으니 그는 중신 중의 중신이다. 참으로 애석하다. 죽은 판돈녕부사 정민시에게 우의정을 특별 추증하라."
하여, 그날로 하비(下批)하고, 이어 홍문관으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즉시 시호를 정해 출상 이전까지 대도록 했으며, 각종 부의도 이미 대내에서 내린 것 이외에 해조에서 곱으로 주도록 했다. 그리고 동원비기(東園秘器)의 남은 자재도 보내주도록 하고, 조상·제사·호상(護喪) 등등도 내각에서 조례에 비추어 거행하도록 했으며, 그의 아들도 복을 마치면 벼슬에 기용하고, 3년까지 녹봉을 보내주는 일도 대신(大臣)에게 하는 예와 똑같이 하도록 하였다.

 

홍낙유(洪樂游)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정민시에게 시호를 충헌(忠獻)으로 내렸다.

 

3월 11일 계해

민태혁(閔台爀)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13일 을축

이상도(李尙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14일 병인

장령 송문술(宋文述)이 상소하기를,
"신이 남쪽 고을을 맡고 있을 때 도신 고적(考績)에서 성적 최하위를 차지했었는데, 신은 돌봐줄 사람 없는 외로운 몸으로 남의 미움의 대상이 되어, 역적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독한 손아귀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매만지며 슬퍼할 일입니다. 작년 농삿일로 말하면 팔도가 다 풍년이었는데 유독 호남 서해 연안의 10여 읍은 흉년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묵은 땅이 모두 과세 대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조세를 특별 감면하여 그 지방 백성들의 마음에 위안이 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호남 서해 연안의 작년 형편이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로써 남쪽으로는 오로지 그곳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누차 신칙했기에 다소나마 보탬을 주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도리어 묵어 있는 땅에다 구실을 매기고 텅 빈 땅에다 조세를 책정하여 결국 다른 곳에서 곡식을 꾸고 다른 사람의 전지를 팔아가면서 떠난 사람들 대신으로 물라고 한다면 백성들이 어찌 억울하다고 울부짖지 않겠는가. 그 사실을 듣고서야 어떻게 이미 때 지난 일이라 하여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즉시 도백을 상대로 자세한 사실을 캐물어 징수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해당 수령을 지명하여 보고하게 한 후 의금부에서 잡아들여 사실을 캐물은 다음 조처를 취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5일 정묘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였다.

 

재실에서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령 송문술의 상소 아랫부분은 백성들 고통과 관련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답을 내렸으나 그 윗부분은 전최(殿最)에서 그가 하위였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것은 역적들이 복수하려는 독한 손아귀에 걸려든 것이라고 운운했는데, 탄핵을 받고 반박을 하는 것도 옳치 않은 일인 것인데 더구나 수령이 도신(道臣)의 손에 의해 하위 평가를 받고서 도리어 그렇게 상대를 욕한다는 것은 너무나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전최라면 그것이 감사가 전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정의 명령에 의해 출척(黜陟)을 결정하는 일인데 수령으로서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는가. 그리고 국가 기강에 있어서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기에 경들에게 물어 처리하려는 것이다."
하니, 영의정 이병모(李秉模) 등이 아뢰기를,
"일의 체통으로 보더라도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박기정(朴基正)을 파직시켰다. 감영의 사옥 축조를 위해 고을에 민폐를 끼쳤기 때문이었다.

 

신사운(申思運)을 판의금부사로, 김재찬(金載瓚)을 규장각 제학으로, 서영보(徐榮輔)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득제(李得濟)를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3월 16일 무진

전교하기를,
"국가가 있으면 조정이 있기 마련이고 거기에는 기강(紀綱)과 법전(法典)이 있어 견제하고 유지하는 도구로 써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내팽개쳐 버린다거나 무너뜨리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 폐단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근래에는 법에 종사하는 청렬(淸列)들까지도 어쩌면 그리 되갚는 욕설들을 많이 하는가. 또 되갚는 욕설을 하는 것도 놀랄 일인데 더구나 하관(下官)이 상관(上官)을 능멸하고 그것도 또 지엄한 고적(考績)을 두고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지난번에도 한 대간이 그런 글월을 올렸으나 그는 그 이름을 바꾸어 말했기에 그것을 꼭 억측까지 해가면서 찾아낼 것까지야 없었지만 이번에는 또 자기 자신의 고적 문제를 놓고 극도로 상대를 욕하는 소리를 상소문에다 올려놓은 것이다. 백성의 문제가 우선 중하므로 사람이 그렇다고 그가 한 말까지 다 버릴 수는 없어 우선 그에 대한 비답을 내리기는 하였지만 허물과 그릇된 풍습을 바로잡아야하는 조정의 정령상 어떻게 그것을 용인할 것인가. 그리하여 어제 빈연(賓筵)에서 무슨 죄를 내리는 것이 적당할까를 물었는데, 대신들이, 그 상소의 본문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기에 물러가서 적당한 죄안을 논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는 모든 이런 종류의 풍습은 일체 엄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병모가 차자로, 송문술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서구(李書九)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17일 기사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원침(園寢) 행차 때 친히 보통 융복(戎服)이나 혹은 군복(軍服)을 착용하시는데 그것은 경진년 온천 행차 때 착용했던 복색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서 봉안각(奉安閣)에 모셔진 어진(御眞)도 역시 그 복색을 착용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성상께서 선왕이 하시던 일을 그대로 따르시면서 추모의 정을 부치려는 효성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연전에는 고 중신 이문원(李文源)이 옛날 온천 행차 때 고 상신 이천보(李天輔)가 보고 기록해둔 것을 인용하여 원침 행차 때도 시위하는 모든 신하들이 다 군복을 착용하도록 청한 일이 있었고, 그 후로도 승지·사관 그리고 각신(閣臣)들도 모두 상의 복색대로 따라 입었으며, 재작년 경릉(敬陵) 행차 때는 고 제학(提學) 정민시가, 능 행차 때와 원침 행차 때 굳이 복색을 달리할 필요가 없다고 연주(筵奏)하여 시위 제신들이 모두 원침 행차 때의 예식대로 거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정한 격식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온천 행차 때의 복색을 원침 배알 때 그대로 착용하는 것은 실로 성상께서 별도의 뜻이 있어 하신 일이지만 행차이기는 일반이라 하여 능 행차 때 복색까지 그대로 한다는 것은 사체로 보아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행차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 왔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한번 여쭈어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후로는 능 행차 때의 시위 제신들 복색은 모두 융복(戎服) 차림으로 대가를 따르게 하고, 만약 능과 원침을 동시에 배알할 때는 복장을 계속 갈아입기 곤란한 점이 있으므로 그냥 원침 행차 때의 복색으로 마련하는 것이 사체로 보아도 적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따랐다.

 

3월 19일 신미

송전(宋銓)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21일 계유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 건원릉(健元陵)·목릉(穆陵)·휘릉(徽陵)·현릉(顯陵)·혜릉(惠陵)·숭릉(崇陵)을 두루 배알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 와서 배알을 하고 나니 유모(孺慕)의 감회가 어떻겠는가. 상설(象設)을 둘러볼 때 마치 옥음(玉音)이 들리는 듯하였다. 오늘을 기념하는 뜻에서 일을 도운 제신들에게 시상을 해야겠으니, 감회를 나타내는 한편 경사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하고, 헌관 이하 각원에게 차등을 두어서 시상했는데, 아헌관인 좌의정 심환지(沈煥之), 종헌관인 우의정 이시수(李時秀)에게는 길들인 말을 면전에서 내리고, 집례(執禮) 윤서동(尹序東), 전사관(典祀官) 한치응(韓致應), 대축(大祝) 김근순(金近淳)에게는 가자(加資)를 했는데, 근순은 아직 준직(準職)을 지내지 않았다 하여 다시 취소하였다. 그것은 근순이 젊은 나이로 승급이 너무 빠르다 하여 상이 그를 더 노숙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경사 끝에 보이는 정시(庭試) 초시(初試)를 보였다. 【문과 1소(所)는 예조(禮曹)에다 설치했는데, 중추부(中樞府)를 거쳐 북으로는 광화문(光化門) 밖까지, 남으로는 경조부(京兆府) 앞까지 닿았다. 베 포장을 쳐 성을 만들었고 참가자는 3만 2천 5백 98명이었으며, 받아들인 시권(試券)은 1만 3천 7백 37장이었다. 2소는 비천당(丕闡堂)에다 설치했는데 동으로는 대성전(大成殿) 문밖까지, 남으로는 항교(香橋)까지 닿았다. 참가자는 3만 9천 8백 70명이었고, 받아들인 시권은 1만 5백 22장이었다. 3소는 명륜당(明倫堂)에다 설치했는데 동으로는 식당교(食堂橋)까지, 북으로는 벽송정(碧松亭)까지 닿았으며, 2소와 함께 모두 베 포장을 쳤고 참가자는 3만 9천 3백 70명이었으며, 받아들인 시권은 1만 4천 3백 57장이었다. 그리하여 3개 소의 참가자가 도합 11만 1천 8백 38명이었고, 받아들인 시험지는 3만 8천 6백 14장이었다. 무과 1소는 훈련원(訓鍊院)에다 설치했는데 참가자가 1만 1천 5백 91명이었고, 2소는 모화관(慕華館)에다 설치했는데 참가자가 1만 50명이었으며 3소는 남소영(南小營)에다 설치했는데 참가자가 1만 4천 2백 50명이었다. 그리하여 3개 소 참가 인원이 도합 3만 5천 8백 91명이었다.】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53면
【분류】인사-선발(選拔)

 

3월 22일 갑술

춘당대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 시험을 보였다. 【참가자가 10만 3천 5백 79명이었고, 받아들인 시권은 3만 2천 8백 84장이었다.】  서울 거주자로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김수종(金秀鍾)과 시골 거주자로 수석을 한 호서(湖西)의 유학 이남익(李南翼)에 대해서는 둘 다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차점자 1백 명에게는 각각 2분(分)씩을 주고 등수는 매기지 않았으며, 금번 정시 초시 합격자 명단 끄트머리에다 특별히 이름을 올려주었다.

 

1백 33건의 상언(上言)에 대해 재가를 내렸다.

 

3월 25일 정축

정시 초시 합격자 명단 중에 은사(恩賜)로 점수받은 경우로서 누락된 자들을 그 명단 끄트머리에다 이름을 올려주도록 명했다.

 

성균관에서 삼일제(三日製)를 실시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장계를 올리기를,
"곽산군(郭山郡) 소재지를 정축년에 운흥(雲興)으로 옮겼는데, 정해년 화재 이후 도신(道臣)이, 그곳이 터가 너무 좁고 샘물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시 옛 자리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저쪽 나라나 우리 나라의 사성(使星)이 오갈 때면 그곳 관리(官吏)나 졸예(卒隷)들이 모두 운흥에 나와 대기해야 하기 때문에 백성들 힘도 바닥이 나고 호구도 점점 줄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의 사세로서는 다시 운흥으로 소재지를 옮겨야지만 백성도 정착하여 살 수가 있고 읍의 힘도 피겠으니 묘당에서 청하여 시행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비변사 낭청을 보내 실정을 잘 살피고 오라고 명하고 또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의 의견을 묻기도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고을 자리는 보통 눈을 가지고 논하자면 산세가 꽤나 거칠고 지형이 궁벽해도 토질은 비옥하고 샘물도 풍부한 곳인 반면, 운흥으로 말하면 터가 훤하고 마을도 즐비하지만 토질과 샘물이 먼저 소재지만 못하다. 이 때문에 그 고을 여론이 절반은 제자리가 더 낫다고 하고 또 절반은 운흥이 더 좋다고들 하는데, 그 이유가 혹은 사역(使役)이 치우치게 고통스럽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주거지가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니, 제각기 제 사욕만 챙기는 말들로써 공공한 안목으로 대체를 논한 것은 아닌 것이다. 지금 도신이 청해 온 것이 매우 상세한 내용이긴 하지만 만에 하나 이 뒤에 또 불편한 일이 있어 또다시 옛 자리로 옮기자고 한다면 하는 일도 전도 착란일 뿐만 아니라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당할 것인가.
그 고을 수령을 각별히 골라 보내 그 곳에 오래 있으면서 군적(軍籍)에 관한 폐단을 백성들이 소생할 수 있는 쪽으로 바로잡게 하면 예전부터 문제되어 왔던 출참(出站) 때문에 읍 전체가 쇠잔해지거나 융성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도신으로 하여금 반복해서 살피고 또 살펴서 운흥으로 다시 옮기는 것이 십분 의심할 여지가 없고 1백 년이 가도 폐단이 없을 계책이라고 판단된다면 그의 소견대로 별도로 치계(馳啓)한 후 분부를 받아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7일 기묘

이문원에서 재계하며 밤을 보냈다.

 

차대(次對)하고 이어 일차 유생(日次儒生)에게는 전강(殿講)을, 상재생(上齋生)에게는 제술(製述) 시험을 실시했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고 재상 홍명하(洪命夏)는 사림(士林)의 중심 인물로서 대의(大義)를 실현하는 일을 극력 도왔으며 그가 남긴 사업과 후인의 본보기가 될 만한 일들이 남달리 월등하여 선배 명인 석사들도 그의 부조(不祧)를 논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사체가 너무 중대하여 그렇게 청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여주(驪州) 땅에는 기천 서원(沂川書院)이 있는데 바로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을 제사지내는 곳으로서 홍 재상의 형인 고 감사 홍명구(洪命耉)가 배향되어 있기도 한 곳입니다. 홍 재상도 여주 사람인데 추배(追配)의 은전을 받지 못했다 하여 사림들의 공론이 그것을 답답한 일로 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홍명구를 추배한 일이 선왕조 신유년 칙금(飭禁)이 있던 이전에 했던 일인가?"
하자, 병모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추배하는 일을 엄금해야 옳겠으나 고 홍 재상만은 그의 공업이 근고에는 짝이 드물만큼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별한 데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주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을 제사지내는 곳도 있는데 그것은 기해년에 특례로 실시한 것으로서 칙금이 있은 이후 처음 있었던 일이다. 선정신 서원이라면 사체가 보통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그때 그 일을 결정하면서 십분 신중에 신중을 기했었다. 그뿐 아니라,
오랜 세월 무덤 위에 잣나무만 무성한데
어느 곳에 꿇어앉아 묵은 사연 말을 할까
한 이 시구는 바로 선정신이 고 재상 정익공(貞翼公) 이완(李浣)을 두고 감회가 일어 읊은 시구인 것이다. 정익공과 같은 처지로서도 아직까지 여주에 제사지내는 곳이 없다는 것은 흠전(欠典)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정중을 기해 쉽게 결정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고 홍 재상 추배 문제도 함부로 허락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겠다."
하니, 좌의정 심환지가 아뢰기를,
"신유년 칙금이 있은 이후로는 감히 함부로 청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고 홍 재상에 관하여는 사림들 사이에 공론이 있은 지도 오래되었고, 또 그 고을 유생들이 그 일 때문에 올라오기도 했었습니다. 신은 그때, 조정 명령이 그러하니 감히 논의할 수도 없는 일이고 오직 조정 처분을 기다릴 뿐이라고 했었습니다."
하자, 우의정 이시수도 아뢰기를,
"신도 고 홍 재상이 명재상이었다고 들은 바 있고 아까 합문 밖에서 영상이 한 말도 들었습니다마는, 역시 함부로 논의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남병사(南兵使) 최경악(崔景岳)이 삼수 부사(三水府使) 및 각처 진장(鎭將)들이 보고한 내용을 낱낱이 들어 아뢰면서, 후주진(厚州鎭)의 18개 봉수대와 기린산(麒麟山)의 두 봉수대 및 옛날 갈파지보(乫波知堡)의 서봉(西峰)과 사리봉(沙里峰) 두 봉수대를 절목(節目)에 의해 설치하면 어면(魚面)은 자동적으로 갈파지보 또는 옛날 갈파지보의 소속으로 되어 네 봉수대는 저절로 내지(內地)가 되기 때문에 그 모두는 혁파해야 옳다고 하였습니다. 민폐치고 봉수대만한 것도 없는데 지금 후주진 등지의 여러 봉수대를 설치하고 나면 어면 등 4개 봉수대는 저절로 내지가 된다니 그렇다면 그 봉수대 혁파는 당연한 것으로 다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 소청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환지가 아뢰기를,
"사액 서원(賜額書院)에 있어 후현(後賢)들을 같이 모시고 함께 제사지내는 일은 중대한 전례로써, 사림들의 청에 의해 국가에서 특별 해가한 경우가 아니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관례인데, 요즘 들으면 사체를 모르는 시골 유생들이 왕왕 저희들끼리 발론을 하여 옛날 조정에서의 현자나 혹 향당의 숙유(宿儒)들을 저희들 멋대로 추배하고 공론을 거슬러가면서까지 자기들의 욕구를 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서원 제향이 존엄성이 없고 향토 풍습도 점점 비하되고 있어 신은 저으기 이를 개탄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해조로 하여금 각도에 엄한 경계를 내려 사액 서원이 있는 고을에서 품명(稟命)을 거치지 않고 사사로이 추배를 했을 경우에는 아무리 덕망이 높은 명신(名臣)일지라도 그 모두를 바로잡아 식견 있는 선비들의 공론에 의해 처리하게 하고, 현자를 존중하는 국가 전례가 존엄성을 유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3월 28일 경진

이문원에 나아가 함흥(咸興)·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에 폐백과 향과 초를 친히 전하였다.

 

춘당대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들에게는 제강(製講)을, 초계 문신(抄啓文臣)들에게는 친시(親試)를, 내금위(內禁衛)·서북 별부료 군관(西北別付料軍官) 그리고 마령(摩嶺) 이북 및 삼수(三水)·갑산(甲山)·강계(江界)·제주(濟州)의 무사들에게는 시사(試射)를 실시하였다.

 

춘도기(春到記) 제술에서는 동등자가 3명이었는데 생원(生員) 심영석(沈英錫)·민기현(閔耆顯)과 진사(進士) 조정화(趙庭和)였고, 강경에서는 수석자가 유학(幼學) 이집운(李集運)이었는데, 그들 모두에게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관서(關西)에서 경학 전공으로 추천받은 오위 장(五衛將)        김도유(金道游)를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도유에게 이르기를,
"하늘과 사람, 성(性)과 명(命)의 심오한 이치에 대해 후학으로서 비록 성급히 말할 문제는 아니지만 지난번 조대(條對)한 것을 보고 심(心)·성(性)에 관해 참된 공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평소 연구를 하면서 과연 어느 쪽에다 주력을 했는가? 성경(聖經)이나 현전(賢傳) 그 모두가 다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것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핍진하고 절실한 것으로 진짜 두고두고 노력해야 할 것으로는 사서(四書)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는데, 사서 중에서 종전에는 어느 책에다 주력을 했는가?"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대학(大學)》은 덕(德)으로 가는 문이고, 《중용(中庸)》은 도(道)를 밝히는 책이지요. 신이야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마는 처음에는 《논어(論語)》·《맹자(孟子)》를 좋아하였으나 《중용》·《대학》을 읽고 외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서 중에서 어느 것이 좋은지 딱 지적하라고 하신다면 당연히 《중용》·《대학》을 들어 대답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보통 《중용》·《대학》을 늘 말하고는 있지만 《중용》은 《논어》·《맹자》에 비해 뜻이 더 심오하기 때문에 초학자로서는 공부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글이다. 독서(讀書)의 순서를 말하자면 《대학》을 먼저 읽는 것이 당연한데, 《대학》이라면 또 명덕(明德)이라는 것이 책을 펴자마자 첫 눈에 들어오는 총체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명제가 아니겠는가. 그대는 그 ‘명덕’ 두 글자에 대해 과연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신 같은 시골의 어리석은 자가 무슨 별다른 견해가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 물으신 것이 ‘명덕은 본심(本心)이다.’라는 해석을 가리켜 하신 하교이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명덕은 본심이라고 한 그 해석에 대해 그대는 과연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주자(朱子)는 장구(章句)에서,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虛靈)하고 어둡지 아니하여 모든 이치가 그 속에 갖추어져 있고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라고 해석하였고, 옥계 노씨(玉溪盧氏)는 ‘본심’ 두 글자로 그 뜻을 발휘했는데 다 체득하고 나서 한 말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덕을 마음으로 풀이한 자도 있고 성품으로 풀이한 자도 있는데 장구의 해석으로 본다면 ‘허령’은 마음에 속하고,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 한 것은 성품에 속하고,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 한 것은 정(情)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주자가 장자(張子)058)                  의 심통 성정(心統性情) 학설을 인용하면서, 가장 정밀한 풀이라고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대체로 명덕을 오로지 성품에다만 소속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또 ‘마음’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선과 악의 양면이 있기 때문에 마음 심(心) 자 위에다 반드시 근본 본(本) 자를 더 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며 또 그래야지만 비로소 완벽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주자 장구 내의 몇 구절도 자세히 음미해보면 ‘심(心)’·‘성(性)’ 등의 글자를 애당초 노출시키지 않았지만 심·성의 뜻을 스스로 알게 하고 있어 참으로 그대로 그려냈다고 할 만하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옥계 노씨의 학설인 ‘본심’에 관하여는 이문성(李文成)059)                  이 처음으로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분명하게 밝혀놓았지만 그 한 조항이 바로 《대학》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중용》은 그 전체의 관건이 뭐니뭐니해도 계신(戒愼)·공구(恐懼)인데 그에 대해서는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통관동정(通貫動靜)의 학설을 제창하여 문성공이 ‘본심’을 해설한 것과 함께 공로에 있어 두 분이 같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문원공이 만들어낸 학설이 아니라 바로 주자가 못다한 말을 뒤이어 불려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신독(愼獨) 공부는 어떠한 기미는 이미 발단이 되었으나 다만 그 형적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기 이전의 상태에서 하는 것으로 이발(已發)·미발(未發)로 따지면 당연히 이발 이후에 속하는 문제겠으나 보지도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언제나 계구(戒懼)한다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지경(持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자가 장구에서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마음은 언제나 경외(敬畏) 속에 있어 남이 보고 듣지 않을 때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는데 그것이 바로 본상태 그대로의 천리(天理)를 존속시키는 길이다.’ 하였다. 주부자의 그 말이야말로 전성(前聖)이 미처 하지 못한 말을 한 것으로서 ‘경외’ 그 두 글자로 계구를 풀이한 것이다.
대체로 대본(大本)의 중(中)이니 본연(本然)의 성(性)이니 하는 말은 자사(子思)가 공자(孔子)의 깊은 뜻을 천명한 말이고, ‘계구는 경외에 속한다.’거나 ‘동정(動靜)을 통관(通貫)한다.’고 한 말은 주 부자가 또 자사의 은미한 뜻을 천명한 말이다. 다시 말하면 언제나 경외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주경(主敬)인 것이고, 주경이 바로 주정(主靜)인 것이다.
‘정(靜)’ 이 글자는 원래는 악기편(樂記篇)의 인생이정(人生而靜)이라고 한 데서 발원한 글자로 주렴계(朱濂溪)060)                  도 이르기를 ‘중(中)·정(正)·인(仁)·의(義)로 방향을 정하고 정(靜)을 목표로 한다.’ 하였는데, 경(敬)을 목표로 하자면 고요함[靜]이 당연히 근본이 되어야 할 것이나 고요함 그 자체가 위아래를 통틀어서 없는 곳이 없다면 움직이고 있는 순간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외(敬畏) 두 글자를 장구에서 특별히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주자가 계신(戒愼)·공구(恐懼)에 관해서는 늘 경외 속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풀이했고, 신독(愼獨)에 관해서는 또 형적은 비록 나타나지 않았으나 기미는 이미 작동이 된 상태라고 해석하였는데 그 해석들을 반복해서 음미해보면 저절로 춤이 춰지고 발이 굴러지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대학》의 명덕에 관해서는 문성공이 확실한 설명을 했고, 《중용》의 계구에 관한 뜻은 문원공이 들추어냈으니 당연히 문성·문원의 그에 대한 탁월한 견해와 체득의 소산이겠으나 원 내용은 모두 주자가 경전의 뜻을 밝혀놓았기 때문에 그를 근간으로 한 말로서 그 두 가지가 사실 《중용》·《대학》에 있어 책을 펴면 첫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뜻을 지닌 구절인 것이다."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중용》·《대학》에 있어 그 전체의 뜻이 책을 펴면 그 첫머리에 다 나타나 있기 때문에 역시 맨 첫머리 장(章)에다가 특별히 게시한 것이지만 어쨌든 주자가 그 깊은 뜻을 천발(闡發)한 점에 있어서는 참으로 성상이 하교하신 그대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학》은 원래 공씨(孔氏)의 유서(遺書)로서 증씨(曾氏)가 독자적으로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지만 주자가 그 뜻을 들추어내고 나니까 증씨에게도 더욱 빛이 있게 되었고, 《중용》의 계구(戒懼)도 그 뜻을 주자가 처음으로 분석 해명하여 전성(前聖)이 미처 못한 말을 다 해놓았던 것이다. 그의 계왕 개래(繼往開來)의 공로야말로 참으로 공부자 이후로는 그분뿐인데 그대도 과연 그를 철저히 믿고 존상(尊尙)하는가?"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공자 이후 집대성한 분으로는 주자 한 사람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높고 높은 태산 같은 맹자(孟子)의 기상, 만물을 생성하는 천지 이치를 훤히 관조하는 듯한 주렴계(朱濂溪)의 기상, 봄바람 화창한 날씨 같은 정백자(程伯子)의 기상 그 어느 것 하나 후학들로서 존경하고 앙모할 만한 기상 아닌 것이 없지마는 그중에서도 주자는 모든 이의 장점을 다 모아 집대성을 하고 두고두고 후학들이 갈 길을 열어주었으니 그 공로가 더욱 큰 것은 당연하다. 불행히도 총령(蔥領) 일파들이 왕수인(王守仁)·육구연(陸九淵) 쪽으로 흘러 중국에서 명색이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복장을 한 자들 중에도 주자가 존경할 만한 분이라는 것을 혹 모르는 자도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아 문교(文敎)가 크게 발전하고 유현(儒賢)들이 배출되어 모두가 주자를 표준으로 삼고 있지마는 요즘 들어 주자를 존상하는 기풍이 점점 예전만 못해가고 있어 세상 장래를 생각할 때 참으로 작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머나먼 변지에 살고 있는 그대 같은 자를 그렇게 열심히 찾아 불러올린 것도 사실은 그대가 경전(經傳)에 밝고 주자를 존경하고 신봉하여 한 고을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해서이다. 그대는 그대 소회를 남김없이 다 말하라."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신이 어떻게 감히 성상의 하교대로 다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를 부른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 도내의 인사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숭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추천을 받은 그대 같은 자들이 앞장서서 권장하면 그 고을 인사들이 바람 따라 움직이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그리고 경학(經學) 중에서도 반드시 주자의 도(道)를 천명하기에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지금 풍습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는 것은 경술(經術)이 밝지 못한 소치입니다. 신이 살고 있는 곳은 패관 잡기(稗官雜記)를 전파하는 자가 아직은 없으니 잘만 가르치면 누가 주자를 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서(關西)에서는 초선(抄選)된 사람이 선우사업(鮮于司業) 단 한 명뿐인데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2백 년 전의 일이었는데 그대들이 처음으로 경학(經學) 추천에 뽑혔으니 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 그대가 내려가서 근일 천거 대상에 든 사람들과 함께 각각 경전의 뜻을 밝히고 그중에서도 주자 학설을 그대들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가르치고 깨우쳐 근일 그대를 부른 것이 실지 효과가 있는 일이 되게 만든다면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는가. 그대들은 노력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관서라고 해서 무예만 숭상하는 곳이라고 할 것이 아니다. 하(河)·삭(朔)도 제(齊)·노(魯)로 대우하면 역시 제·노가 되는 것이다. 재능과 슬기는 처지나 문벌과는 관계가 없고 인재를 쓰고 안 쓰는 것이 지역의 원근과 무슨 관계이겠는가. 패수(浿水) 밖에서는 유신(儒臣)이라고는 선우 한 사람만이 왕조(王朝)에 올라왔을 뿐 그 이전이거나 이후이거나 다시는 아무 소식이 없었던 것은 그곳을 제·노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늘이고 땅이고 만물이고 원래는 나와 일체(一體)인 것으로 하늘 땅이 자리가 잡혀야 만물이 자라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인(聖人)의 능사인 것으로 수도(修道)가 교(敎)라는 것도 역시 그 속에 있는 일인 것이다.
몇 해 전 평안도 관찰사에게 경의(經義)에 밝은 유생을 추천하도록 명하고 추천받은 자들에게 칠서(七書)·삼례(三禮)·춘추 강의(春秋講義)를 내려보내 각 조목별로 대답하게 했었는데, 그 대답한 것들을 보니 좌우에 찬 칼이 없으면서도 쪼갤 것은 쪼개고 자를 것은 잘라 금방금방 만들어놓은 말들이 다 조리에 맞아서 비록 금화(金華)에서 책을 펴들고 있는 무리들 중에서 찾아보아도 그만한 자들이 많지 않을 정도였다. 그 어찌 기특하고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 세 유생의 경우 드물게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난 것이지만 세 유생 중에서도 김도유는 그의 작문을 보았을 때 내용이 어느 정도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한 번 불러 오게 하고 싶었는데 근간에 올라와서 두 차례나 연석(筵席)에 올라 대답한 것은 또 작문보다도 더 훌륭했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나이가 너무 많아서 서울에 오래 체류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니 그가 돌아갈 때 마땅히 보고 싶어하는 서책으로 골라 주도록 하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주자서백선(朱子書百選)》 각 1질씩을 하사하고 두 유생이 대답한 강의도 본도에서 간행하여 관서 지방을 권장하게 함으로써 또 서토(西土) 사람들로 하여금 주자를 존중하는 것이 바로 왕을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하라."
하고, 드디어 본도에 명하여 김도유 등이 경의에 대해 조목별로 대답한 것들을 편찬 간행하여 《관서빈흥록(關西賓興錄)》이라 이름하도록 하였다. 또 함경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경지(經旨)를 이해하고 공령(功令)에 능한 유생들을 탐방하여 아뢰게 하였으며, 조문(條問) 및 어제(御題)를 내려 시험보인 후 우등을 한 9명에게는 급제를 내리고 경학에 조예가 있는 유생은 직을 제수했으며 관서의 예와 같이 그들 저작도 편찬 간행하게 하고 이름하여 《관북빈흥록(關北賓興錄)》이라 하였다.

 

 

 

3월 29일 신사

돈령 도정(敦寧都正) 최창적(崔昌迪)을 강원도 영동(嶺東)의 분교관(分敎官)으로 삼았다. 이어 《아송(雅誦)》·《주서백선(朱書百選)》 등의 책자를 최창적 및 전 도정 안석임(安錫任)·전 부사 박사철(朴師轍)에게 나누어주도록 명하였다.
삼척(三陟)과 간성(杆城)에 화재가 나 수백 호가 연소되었는데, 평해 군수(平海郡守) 권준(權晙)을 명하여 실정을 살펴보고 위로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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