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계미
일식이 있었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4월 3일 을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문무과 전시(文武科殿試)를 실시하였는데, 무과 전시는 5소(所)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4월 6일 무자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무과 전시의 합격자 방목에 성명이 누락된 일로 차자를 올려 인혐(引嫌)하니, 비답하기를,
"아조(我朝) 사대부로서 조정에 벼슬한 자는 어느 누구나 전고를 환히 익혀 궁전이나 묘당에서 처신할 때 질서와 법도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 사람은 자기 집에서는 방종을 즐기고 조정에 나와서는 규범을 꺼려 하여 조정의 의식과 경연의 사체가 엄중하지 못하게까지 되었으니, 식견이 있는 자가 어찌 한탄하지 않겠는가.
내 일찍이 주의를 기울여 기어코 옛법을 따라 지키려 한 것은 그 뜻이 어찌 하찮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경의 해박하고 정밀한 식견은 오늘날 조정 신하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하고 더구나 시원(試院)의 의식은 법전(法殿)과 똑같은 경우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원들의 일 처리가 규범대로 되지 않은 것들이 많으니, 오늘 내일 날짜가 넘어가고 한 가지 일 두 가지 일 범위가 자꾸 넓어져 끝내 사람들의 이목에 익어져 버리지 않을까 매우 걱정된다. 경이 인혐한 바 방안(榜眼)으로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미처 살펴보지 못한 일 따위는 하찮은 문제일 뿐이다. 즉시 해조로 하여금 부표(付標)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7일 기축
강원도 삼척(三陟)·간성(杆城) 등지의 암행 어사 권준(權晙)이 장계하기를,
"신은 간성 경내로 들어가 곧장 고백진(古栢津) 화재 장소에 이르러 상황을 탐문하고 그 전말을 알아보았더니, 69가구가 한꺼번에 불탔는데 휼전(恤典)으로 나누어 지급한 쌀은 29석이었습니다. 불탄 가구가 먹은 환곡(還穀)은, 때마침 섣달을 만나 이미 봉고(封庫)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꺼내어 지급하였는데 그 수량은 각곡 도합 1백 59석이었으며 영읍(營邑)에서도 다 함께 도와서 지급하였습니다. 지금 본 바로는 마을 형태가 이미 이루어져 모두 자리잡고 살 곳을 정한 형편입니다. 그들 가운데 간혹 농사지을 동안 먹을 식량을 마련하기가 어려워 환곡을 받겠다고 자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창고에 보관해 둘 명목으로 놓아둔 부근 창고의 곡물로 나누어 지급하였습니다. 그 뒤에 고백진에서 발길을 돌려 경내의 촌마을로 찾아가 상세히 탐문해 보았더니, 계묘·갑진년 이후 조정에서 보살피고 구제해 준 혜택이 본읍에까지 두루 미쳐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공삼(貢蔘)의 일부를 면제한 일, 진결(陳結)을 감면한 일, 포보(砲保)를 다른 물건으로 대신하도록 한 일, 유랑민에 대해 10년 동안 잡역을 부과하지 말도록 한 일 등은 이 모두 고을 백성들이 다시 살아날 기회였는데, 그 이후 16년이 된 오늘날 상처가 거의 다 아물고 유랑민도 이미 안정되어 다른 고을에 견주어 볼 때 별다른 폐단은 없었습니다.
그 밖에 행적을 숨기고 다니면서 보고 들은 일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1. 본군 고백진(古栢津)의 불탄 가구 가운데 군보(軍保)를 띠고 있는 자의 신포(身布)를 이미 다 감면하였으니, 삼척의 불탄 가구 가운데 공천록(公賤錄)에 올려진 역군과 내노(內奴)·역노(驛奴) 5명도 누구나 차별없이 보아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에 비추어 다 함께 신역을 견감해 주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1. 삼척 후평(後坪) 굴촌(窟村)에 사는 유학(幼學) 김채인(金采仁)의 질녀가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스물 일곱 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천(私賤)으로 속량(贖良)을 한 이웃에 사는 정완수(鄭完守)가 그를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싶었으나 신분이 서로 맞지 않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석 가락지를 사서 같은 마을의 어린아이를 꼬여 김씨 질녀에게 주고 사람들에게 소문내기를 "아무개 질녀가 나에게 시집올 것이다. 내가 일찍이 가락지를 사서 줬다." 하였습니다. 여자는 그 말을 듣고 곧 목을 매어 죽어버렸는데 채인은 그 더러운 소문이 역겨워 끝내 덮어두고 말았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들은 뒤에 관가에 들어가 은밀히 물어보고 관련자들의 진술을 받아 감영에 보고하기까지 하였고, 감영의 판결문에서도 그 억울한 마음을 밝히긴 하였습니다만 완수는 곤장만 쳐서 석방하였습니다. 불가불 한번 다시 조사하여 그 사실을 캐낸 다음에 완수를 무고죄로 조율하여 억울하게 죽은 넋으로 하여금 참된 심정을 밝히게 해야겠습니다.
1. 간성(杆城)에서 해척(海尺) 11인과 선격군(船格軍) 77인이 지난해 정월 11일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들어갔다가 갑자기 폭풍을 만나 한꺼번에 침몰하였으나 시신을 건져내기 전에는 생사를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정에 장계를 올리지도 못하고 휼전(恤典) 또한 제급(題給)하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월달에 추위가 매섭고 거센 바람이 몰아쳤으니, 그들이 익사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신이 보고 들은 대로 말씀드리면, 아비 잃은 어린 자식과 남편을 잃은 홀어미가 소리를 삼켜가며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감사에게 분부하시어 해상에서 제사를 지내 구슬픈 넋을 위로하게 하고 특별히 선세(船稅)를 견감하여 백징(白徵)의 억울함이 없도록 하소서.
1. 양양(襄陽) 낙산진(洛山津)에 있는 동해신묘(東海神廟)는 제향을 드리는 예법이 나라의 법전에 실려 있으니 이곳을 어느 정도로 중시했던가를 알 만한데, 근년 이후 제관(祭官)이 된 자가 전혀 정성을 드리지 않아 제물이 불결하고 오가는 행상들이 걸핏하면 복을 빌어 영락없는 음사(淫祠)로 변했으며, 게다가 전 홍천 현감(洪川縣監) 최창적(崔昌迪)의 집이 신묘(神廟)에서 매우 가까운 지점에 놓여 있어 닭이며 개들의 오물이 그 주변에 널려 있고 마을의 밥짓는 연기가 바로 곁에서 피어 오릅니다. 신과 인간이 가까이 처해 있는 것은 신을 존경하되 멀리한다는 뜻에 자못 어긋납니다. 요즘 풍파가 험악해져 사람들이 간혹 많이 빠져 죽고 잡히는 고기도 매우 양이 적은데, 해변 사람들이 다 그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억지로 끌어다 붙인 말로서 족히 믿을 것이 못 되지만, 신명을 존경하고 제사 예법을 중시하는 도리로 볼 때 그대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감사에게 분부하시어 그 사당을 중수하여 정결하게 만들고 제향에 올리는 제물도 다 정성을 드리게 하며, 미신으로 믿어 기도하는 일을 일체 금지시키고 사당 앞의 인가도 빨리 철거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이 장계를 살펴보니, 간성 백성들 또한 살 곳으로 나아가 안정되게 살아갈 가망이 있어 매우 다행스럽다. 덧붙여 아뢴 여러 조항 가운데 첫 조항은 사실 옳은 말이다. 즉시 문건을 만들어 감사에게 보내거나 아니면 고을 수령에게 분부하여 간성 고백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신역을 견감해 주도록 하라. 삼척 후평 굴암촌(窟巖村)의 조사할 일 또한 감사에게 철저히 조사 처결한 뒤에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간성 해변 마을에서 1백 명에 가까운 사람이 바다에 빠져버렸는데도 아직까지 조정에 알리지 않으면서 어찌 생사를 분간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즉시 감사로 하여금 지방관을 엄중히 지시하여 제단을 설치, 위문제를 행하도록 하고, 선세(船稅)도 장청(狀請)대로 거행하라. 양양 낙산진 동해신묘에 관한 일도 장청대로 보수한 뒤에 감사가 그 결과를 장계로 보고하면 그대 권준을 헌관으로 차임하여 제물을 올려 양양 백성들이 옛날처럼 풍요를 누리도록 빌게 하겠다.
일찍이 들은 바로는 양양·간성에서 은어(銀魚)를 잡아 바치는 폐단은 백성의 큰 고통이라 했는데, 그대는 이번 걸음에서 어찌 장계에다 거론하지 않았는가. 쓸모없는 산물로서 바로잡기 어려운 폐단을 만드는 것은 이미 의미가 없는 일이며 게다가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뜻으로 말하더라도 양양은 그나마 해당되는 고을이라 할 수 있으나 간성은 참으로 부당하다. 이 문제를 항상 규정으로 정하려 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는데, 그대가 마침 영동에 어명을 받고 나간 김에 우선 두 고을 은어에 대하여 궁중에 바치는 것이거나 감영에서 사용하는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전복을 잡지 말도록 한 제주(濟州)의 규례에 의해 다시는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봉진(封進)과 복정(卜定)을 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당해 고을에서라도 만일 한 마리라도 사들여 쓰는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그 고을 수령을 균역청 사목(均役廳事目)의 은결죄(隱結罪)로 다스리겠다."
하였다.
4월 8일 경인
전교하였다.
"주(周)나라 제도에는 반드시 세록(世祿)을 귀히 여겼고 《맹자》에도 일찍이 교목 세신(喬木世臣)을 칭송하였는데, 금년 봄 경과(慶科)의 방목은 인재를 얻었다고 말할 만하다. 국가에 충성을 바친 문벌과 나라의 심장과 같은 처지로서 앞뒤에 서로 벼슬을 지내고 동시에 문과에 급제하여, 민 문정(閔文貞)061) 김 문충(金文忠)062) 의 옛일과 흡사한데 그 응시한 시권을 살펴볼 때 시종신의 반열에 둘 만하다.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곧장 등영(登瀛)하는 일은 한두 가지 들추어 말할 만한 과거의 사례도 있지 않은가. 새로 급제한 고창 현감(高敞縣監) 민기현(閔耆顯)063) 과 전 영(令) 김이도(金履度)064) 를 부수찬에 제수하고 경연청으로 하여금 납패(鑞牌)로써 그를 인도하게 하라."
전교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전 선전관(宣傳官) 이희장(李熙章)은 제독(提督) 충렬공(忠烈公)065) 의 후손이다. 제독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우리 나라 사족(士族)의 딸을 맞아들여 사내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우리 나라에 남아 희장의 선조가 되었는데, 해변땅에 떠돈 지 수백 년 만에 이제 처음 급제자가 나왔으니, 어찌 기특하지 않은가. 해조로 하여금 도총부의 경력(經歷)을 하나 더 마련하여 의망에 넣도록 하고, 내일 숙배하는 자리에 그도 함께 사은하도록 하라. 이는 종의(鍾儀)가 고국의 음악을 연주했던 경우처럼 그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다.066) 앞으로 희장 집안 사람으로서 문무과에 급제한 자가 있을 때는 방방(放榜)하는 날 화패(花牌) 차림으로 선무사(宣武祠)와 제독의 사우(祠宇)를 배알하게 하되 이를 규정으로 삼도록 하라."
4월 9일 신묘
문무과 새 급제자를 불러 접견하고, 전교하기를,
"아조(我朝)의 산서(山西) 종자067) 는 흔히 장절공(壯節公)068) 의 후예를 손꼽는데, 대대로 장수가 되어 지금까지 대수 장군(大樹將軍)069) 의 기풍이 있는 자는 오직 총수(摠帥)070) 의 집안이 으뜸이니, 고 훈련 대장 신여철(申汝哲)이 그의 고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수의 아들이 이번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니, 어찌 총수의 기쁨만 되겠는가. 무과 신급제 신굉(申紘)을 선전관으로 의망에 넣도록 하라. 동방(同榜) 급제 서춘보(徐春輔)는 문청(文淸)071) 집안 사람으로서 붓을 내던지고 무과에 응시하였는데, 과거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단 출신한 뒤에는 어찌 다른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을 또한 더 설치하여 의망에 넣도록 하라."
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김이영(金履永)이, 영춘 현감(永春縣監) 김수조(金壽祖)가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겸관(兼官)에게 곧장 보내버린 일로 치계하여 파면할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먼 지방에 특별히 임용한 사람은 곧 감사에게 수용되지 못한단 말인가. 지난해에는 호남에서, 내가 불러다가 수령에 제수한 한 사람을 쫓아내더니 이번에 호서에서 또 이와 같은 장계를 올렸으니,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들으면 어느 누가 세상에 나와서 벼슬하려 하겠는가. 이 감사는 감사가 된 이후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조정에 천거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주자(朱子)의 글에 조예가 있는 자까지도 알아보는 식견이 없었는데 홀연 임금이 애써 서용한 사람을 이와 같이 흠을 달고 나서니,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당해 감사는 5등의 녹봉을 감봉 처분하라. 남대(南臺)072) 에서 하는 일은 여느 일과 달리 특별하니 또한 어찌 억지로 다른 직무를 보게 할 수 있겠는가. 당해 현감 김수조는 도로 지평으로 제수하여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4월 10일 임진
전교하였다.
"제독(提督)의 후손 이희장(李熙章)의 홍패(紅牌)에 청나라 연호(年號)가 들어 있었다 하니, 옥새를 찍은 승지는 어찌 그렇게도 고루한가. 그 패를 안고 그의 선조 사당을 참배한 그자 또한 무식하다. 그의 이마에 과연 부끄러운 땀이 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천지 사방에 충만한 제독의 영령(英靈)이 그가 와서 참배할 때 마음이 즐거웠겠는가. 홍패 한 장을 즉시 다시 써서 옥새를 찍어 이효승(李孝承)을 불러 그에게 주고 선무사(宣武祠) 낭관으로 하여금 데리고 가서 다시 참배하게 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그의 집안 사당에도 다시 참배하게 하라. 이와 같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홍패와 교지를 이 규례대로 할 것을 이조와 병조에 분부하여 《등록(謄錄)》에 자세히 싣게 하라."
4월 11일 계사
전교하였다.
"《항의신편(抗義新編)》을 보면 그때마다 고 충렬(高忠烈)073) 부자 등의 정성을 다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가 섬나라 오랑캐무리로 하여금 어안이 벙벙하게 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고 이제까지도 호해(湖海) 사이에 씩씩한 생기가 넘쳐흐르는 것만 같아 무릎을 치며 감탄이 터져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제 그 후손 정봉(廷鳳)이 저번에 《대학유의(大學類義)》를 엮어 교정하는 작업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내가 그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공령(功令)으로 시험해 보았더니 삼장(三場)에서 다 선발되어 그가 지닌 재주를 한층 더 확인하였고, 경의(經義)를 조목별로 물어보니 구경(九經)074) 의 의심스러운 뜻에 대해 그가 대답한 말은 더욱 식견이 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의 차등 비교에서 당당하게 수석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급제시켰다. 이제 이미 방방(放榜)하였는데 이러한 가문으로 이런 사람이 나왔으니, 무슨 벼슬인들 맡기지 못하겠으며 무슨 은전인들 아끼겠는가. 우선 호남 외대(湖南外臺)075) 자리를 주고 그에게 역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
4월 12일 갑오
신하들을 불러 접견하였다.
김재찬(金載瓚)을 판의금부사로 삼고, 특지로 윤광안(尹光顔)을 제수하여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경외(京外)의 유생 김종진(金鍾眞) 등이 상소하기를,
"지난 단묘조(端廟朝) 때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등은 세상에서 말하는 육신(六臣)으로서, 이들은 곧 우리 나라의 백이(伯夷)·숙제(叔齊)이자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孺) 경청(景淸)076) 입니다. 이 때문에 세조 대왕께서 이미 만고 충신으로 인정하셨고 그후 열성조(列聖朝)에서 불쌍히 여겨 억울함을 풀어주며 그 충성을 포상하고 세상에 드러내 주신 조치가 조금도 유감이 없으며, 그 무덤과 사우를 이미 조정에서 조성해 주고 수축한 일이 있었으니, 그 자손들이 받들어 높이고 영원토록 제향을 드릴 필요는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끊긴 자손을 이어주고 없어진 집안을 보존하여 그 충혼 기백으로 하여금 각기 의지하여 붙여 있을 곳이 있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성조(聖朝)의 은전이 아직 거기까지 손을 쓰지 못해 뜻있는 선비들의 장탄식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 저 육신의 정성을 다한 충성과 큰 절의는 실로 하등의 차이가 없는데 박팽년의 한 가닥 핏줄은 다행히 끊기지 않았고 근래에 또 번창하고 있으니, 하늘이 복을 남긴 이치를 족히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저 오신(五臣) 집안의 혈통이 끊겨 후사가 없는 것은 실로 천지간에 유감이자 백대의 가슴아픈 일입니다.
과거 숙묘(肅廟)을유년077) 에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경연에서 건의하기를 ‘하위지는 체포되어 가는 날 죽은 뒤의 일을 그의 조카 원(源)에게 부탁하였으니, 을사 명신(乙巳名臣) 김저(金䃴)에 대해 양자를 들여세운 사례에 따라 원의 후손으로 하여금 그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 하니, 숙묘께서 하교하기를 ‘육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니 어찌 끊긴 후사를 이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특별히 시행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위지는 비로소 그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 생겼으나 성·유·이·유의 집들만은 그와 똑같이 끊긴 자손을 이어주는 은전을 입지 못했는데, 사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현묘조(顯廟朝)에 어떤 서리가 인왕산(仁王山) 밑에서 성삼문의 신주를 주웠는데 글자가 너무도 뚜렷하여 그 당시 선비들이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에게 달려가 의논하였더니, 선정은 말하기를 ‘지금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미 수백 년이 지났으니, 예법으로 보면 제사를 지내는 대수가 다 되어 마땅히 땅에 묻어야 할 일이나 선생의 절의는 백대를 내려가면서 제사를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또 한편, 하늘이 이미 일깨워주었는데, 사람이 또 그것을 묻는다는 것은 어찌 차마 그럴 수 있는 일인가.’ 하고, 신(神)이 집안으로 돌아오는 예법에 따라 노은동(魯恩洞) 옛집에 도로 모시게 하였다 합니다. 아, 신주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은 하늘의 뜻이 그 제사를 폐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텅 빈 집의 신주가 오늘날까지도 의지할 곳이 없으니, 하늘의 뜻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육신이 절의를 위해 몸을 바칠 당시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이란 자가 있었는데,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집현전 박사로 뽑혀 성삼문 등과 함께 《역대통감(歷代通鑑)》을 편찬하여 이미 의기가 서로 맞았고 마침내는 함께 절의를 세웠습니다. 그 절의를 위해 죽은 내용은 장릉지(莊陵誌) 안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후사가 없이 제사가 끊긴 것 또한 저 사신(四臣)과 마찬가지이니, 지금 후사를 들여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는 일에 모두 똑같은 은례(恩禮)를 베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故) 제학(提學) 이종검(李宗儉)은 보흠의 종형(從兄)이자 유성원(柳誠源)의 내종(內從)입니다. 일찍이 단묘(端廟)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 궁료(宮僚)로 있었는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다는 소문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 문종 대왕께서 당호(堂號)를 효우(孝友)라 지어 주셨고 고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시에 ‘성상께서 지은 당호 절실하고요 동궁의 깨우친 도 깊기도 하다.[聖上名堂切 儲宮造道深]’ 하였으니 이는 다 실지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보흠과 동방 급제한 처지에다 또 그와 뜻을 함께하여 광묘(光廟)께서 왕위를 물려받자 세상에서 자취를 거두어 마음내키는 대로 살며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미련없이 떠난 그 절의는 《용인읍지(龍仁邑誌)》 및 고 찬성(贊成) 유희춘(柳希春)의 글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그가 비록 보흠과는 미처 동시에 순절하지 못했지만 절의를 잡아 스스로 지켜 여느 사람과 달리 뛰어난 점에 있어서는 참으로 이른바 난형난제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림이 추앙하여 지방 고을에서 나란히 제향을 드리고 있으니, 이 또한 백대의 공론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또 감무(監務) 이지활(李智活)이란 자가 있었는데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8세에 운봉 현감(雲峰縣監)으로 나갔다가 을해년078) 에 이르러 한숨을 쉬며 한탄하기를 ‘옛날 박유(朴儒)는 나와 뜻이 같은 선비였다.’ 하고, 마침내 거창(居昌) 박유산(朴儒山)으로 들어가 제문을 지어 박유에게 제사를 드린 뒤에 누대를 지어 망월정(望月亭)이라 이름을 붙이고 매일 아침저녁 북녘을 바라보며 절을 하였습니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밤마다 그리움에 밤깊은 줄 모르는데 동녘에 떠 지새는 달 두 고을 마음 이런가 지금 이때 사무친 원한 알아주는 사람 없어 외로운 산정 속에 눈물 절로 흐른다오.[夜夜相思到夜深 東來殘月兩鄕心 此時冤恨無人解 孤寄山亭淚不禁]’ 하였는데, 그것은 영월에 계시는 임금을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입니다. 정축년 10월 이후로는 부모를 잃은 듯 안절부절 못하여 항상 술병을 들고 박유산 꼭대기에 올라가 해가 지도록 통곡하고 돌아오곤 하며 종신토록 지조를 지켰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학문이 깊고 도가 높아 오류 선생(五柳先生)079) 의 기풍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 두 신하의 절의 또한 세상을 깨우치고 풍속을 바로잡기에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다만 조정의 기휘(忌諱)로 인해 서로 맞지 않아 아직까지 이름이 묻혀 세상에 전한 것이 없으니, 어찌 사림이 한탄하고 애석해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성삼문·유응부·이개·유성원 및 이보흠 등 제사가 끊긴 오신(五臣)은 반드시 제사를 보존하여 그들의 넋으로 하여금 의지할 곳이 있게 해 주시고, 이종검·이지활 등 이름이 묻힌 자에 대해서는 그 절의를 표창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하소서."
하였는데, 그 상소의 내용을 해조에 내려 대신과 의논한 뒤에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4월 13일 을미
전교하였다.
"김회연(金會淵)은 곧 중신(重臣) 김종정(金鍾正)의 아들이다. 중신은 내가 동궁으로 책봉되어 강원(講院)을 설치했을 때 궁료(宮僚)로 있었고 뒤에 또 빈객(賓客)이 되어, 궁료에서부터 빈객의 지위까지 오직 중신이 다 지냈었다. 그의 아들은 일찍이 반제(泮製)에서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제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게 되었고 때마침 설서(說書) 자리가 비었으니, 나중 정사 때 의망에 들여넣도록 하라."
4월 15일 정유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왕세자빈을 두 번째 간택하는 길일을 돌아오는 윤4월 9일로 정해 거행할 것으로 명을 내리셨습니다. 삼가 전례를 살펴보니, 두 번째 간택이 끝난 뒤에는 가례 도감(嘉禮都監)의 당상과 낭관을 이조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는 등 모든 일에 도감을 설치하여 거행하였습니다. 품지(稟旨)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신묘년080) 의 성교(聖敎)에 ‘세 번째 간택은 날짜가 아직 멀었으니 천천히 상황을 보아가며 차출하라.’는 명이 계셨다. 이번에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간택을 가을이나 겨울쯤에 거행하려 하니, 도감을 설치하는 일도 다음 하교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재전(齋殿)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며칠 전 글을 탐독하느라 아침부터 정오까지 13권을 읽고 오고(午鼓)를 친 뒤에 비로소 수라를 들여왔는데, 갑자기 눈 부위가 부어오른 증세가 생겨 지금 며칠 지나도 낫지 않으니 괴롭다. 첫 번째 간택하는 예는 종묘에 가서 참배하는 날 이미 거행하였고 두 번째 간택할 길일을 이제 곧 가리려고 한다. 오늘 참배한 것은 어떤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한다는 의미를 구현하고 싶기 때문에 감히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한식(寒食) 이후 이달 8일에 와서야 처음으로 비가 내렸으나 충분하지 못해 한스럽다. 지금 이때 한 차례 쏟아져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하니,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요즘 농사철을 만나 한번 비가 내리고 개이는 것까지 신경을 쏟으시니, 혹시 정신을 너무 손상하시는 점이 없지 않을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눈의 증상도 글을 많이 보신 과로 때문에 생긴 것이니, 글에 흥미를 붙여 고된 줄 모르신 심정은 신이 사실 이해합니다마는 적당하게 운동해야 하는 섭생의 도에 어찌 해롭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급제한 자들 가운데 두 옥당(玉堂)081) 은 모두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새로 경연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집안 선조들도 다 경학(經學)으로 이름이 났고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082) 은 국구(國舅)로서 강연(講筵)에 들어와 참여하기까지 하였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어제 새로 들여온 주서(注書)의 연설(筵說)을 보았더니 흐리멍덩한 말들이 들어 있기에 전부 빼버렸다. 어제 승지에게 영청문(永淸門)으로 들어와 입시하게 한 뒤에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는 50년의 통치 기간 동안 근신을 접견하는 때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고 중신(重臣) 정창순(鄭昌順)은 일찍이 한림으로 있을 당시 항상 한밤중 입시할 때는 미처 망건도 쓰지 못하고 나와 건양문(建陽門) 밖에 이르러 하나를 쓰고 건양문 안을 지나가면서 또 하나를 썼으니, 여기에서 또한 그 당시 사관의 고생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공무가 없으면 하루에 한 차례 이외엔 접견하지 않고 있다. 내 본디 생각에는 현인을 우선으로 하고 친척을 멀리함으로써 어진 사대부를 친히 하는 보람을 거두려 하였으나 그 보람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수많은 폐단이 있었으니, 접견을 자주하던 것이 드물어진 이유는 사실 이 때문이었다.’ 하였다. 그런 뒤에 그 연설(筵說)을 보니, 어진 사대부에 관한 대목은 완전히 삭제하였고 나머지 이야기도 다 가려서 취해 사면팔방으로 하자가 없는 것만 비로소 뽑아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버릇은 과연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르겠다. 이번 새 급제자는 모두 41인으로, 그 신분이며 풍채며 재주들이 참으로 찬란하다 말할 만한데 혹시 이와 같은 법을 배워 차츰 시속의 양상으로 돌아가버린다면 어찌 걱정스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이르기를,
"감시(監試) 날짜가 멀지 않으니 사류의 습속을 엄하게 단속해야 할 것이다. 이번 과장(科場)에서는 사방에서 한꺼번에 모여들 때 서로 뒤섞여 번거롭고 혼란한 것만 보일 뿐 정돈되고 엄숙한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만약 특별히 엄하게 단속하는 조치가 없다면 앞으로 과장의 법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어찌 반드시 보장할 수 있겠는가. 전시(殿試) 과장 안에서 시권(試券)을 잃어버린 자가 네 사람이나 되었으니, 이 점에서도 사류의 습속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체로 요즘 사람은 전혀 글을 할 줄 모르는 자도 자리잡고 가만히 앉아 있으려 하지 않고, 조금 모양새를 이룰 수 있는 자도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자의 손을 빌리려 한다.
선조(先朝) 때 여러 차례 과거를 실시하였는데 일찍이 춘당대 과거에서는 거둔 시권이 1만여 장이나 되어 그 당시 모두 처음 있는 일이라 하였었다. 요즘에는 갑인년083) 에 거둔 시권이 2만여 장이고 이번에는 3만여 장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인재가 성하게 부쩍 일어난 소치이겠는가. 과장의 법이 유명무실해진 것이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앞으로는 법을 분명히 밝히고 단속하여 절일제(節日製)와 도기(到記)가 하자가 없다 하더라도 글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예 감히 과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전의 급선무인데, 감시의 조흘강(照訖講)084) 을 이미 감시가 있기 3개월 전에 실시하라고 하였으니, 그에 대해 특별히 단속하는 방안을 지금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이번에 서울로 올라온 과거 응시자가 그처럼 많았으니 상께서 그에 대한 조처를 그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친히 임하여 치르는 시험이 아니면 대궐 안에 과장을 설치한 예가 없는데 이판(吏判)이 본디 격식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경복궁(景福宮)에 과장을 설치하자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응시자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무사(武士)의 일로 말하더라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들어와서 쏘았다 하니 어찌 이런 모양새가 있단 말인가. 이번 감시에는 그에 대해 단속하는 명을 미리 포고하지 않을 수 없는데, 조정에서 이와 같은 일이 항상 거론되면 밑에 있는 자들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가다듬어 반드시 역참을 통해 명을 전달하는 것처럼 빠른 성과가 있을 것이다. 우선 조흘강부터 서울에서는 사학(四學)에 위임하고 지방은 각읍에 위임하여 미리 실시함으로써 여유있게 강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경 등은 더 잘 생각하여 다음 차대(次對)할 때 품처(稟處)할 수 있도록 하라. 초시에 1천 명을 뽑는 것은 선조(先朝) 계해년085) 고상(故相) 조현명(趙顯命)의 건의로 인해 시작된 것으로 세상에서 천초시(千初試)라 불리는데, 나중에는 비리가 한층 더 자행되었다 한다. 내 본심은 천초시를 하고 싶지 않으나 이번만은 부득이 한번 시행해야겠다. 시작부터 끝까지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뜻을 저번에도 이미 언급하였거니와 이번 가을부터는 크고 작은 과장을 막론하고 반드시 엄할 엄(嚴) 한 글자로 시작부터 끝까지 올바르게 하는 기준을 삼아야겠다. 오늘 하교는 시작에 불과하고 나중에 본론을 말하겠다.
과거 시험 제도를 변통하는 일은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아예 손을 대지 않았으나 관직에 이미 중비(中批)086) 제도를 사용하는데 과거만 어찌 그와 같이 못할 것이 있겠는가. 지난날 궁전 뜰에서 치르는 과거에는 호명(糊名)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나 고금은 그 상황이 다른 법이니 호명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겉모양으로 사람을 취해서도 안 된다. 예전에는 학교의 재임(齋任)을 고강(考講)하여 인재를 얻는 성과를 많이 거두었으나 그것이 오래되니 또한 폐단이 생겨 요즘 시행하지 않고 있다. 응제(應製)하는 상재생(上齋生)은 곧 유생 가운데의 초계 문신(抄啓文臣)이라 할 수 있으니 실력의 수준이 환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나는 과장을 엄숙하게 하는 문제에 내 나름대로 고심하고 있으니, 이제 어찌 한번 기강이 무너졌다 하여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는 한탄을 초래할 수 있겠는가. 경들도 나의 이 뜻을 알고 각별히 협조하는 방안을 생각하도록 하라."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저번에 분소(分所) 명관(命官)으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내려주신 분부를 잘 받들어 행하지 못하고 많은 잘못을 저질러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즘 습속은 격식 문제에는 전혀 유의하지 않는데 지금 조정의 실제적인 문제가 형편이 없으면서도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 격식 때문일 뿐이다. 만일 격식까지 벗어나 버린다면 과연 무슨 모양이 되겠는가. 격식은 작은 일이 아니다. 신하가 그 임금에게 절하고 자식이 그 아비에게 절하는 그것도 격식이다. 밖으로는 조정과 안으로는 가정에서 전부 격식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일삼는다면 금수와 거의 가깝지 않겠는가. 고 제학(提學) 정민시(鄭民始)가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승지들이 연중에서 물러간 뒤에 걸음걸이가 빠르고 느린 것을 가지고 서로 비교해 말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송나라 때 걸음걸이를 배운다는 말이 있었는데, 걸음걸이를 배우는 것도 오히려 이상스러운데 더구나 서로 비교한단 말인가. 내가 근신을 드물게 접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니, 어찌 이들을 친히 할 만한 사대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가로이 앉아 글을 보거나 혹은 하루종일 이리저리 거닐면서 신하들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속에 있다가 막상 접견했을 때 만일 조금이나마 유익한 사람을 보면 온종일 마음이 부듯하여 뭔가 소득이 있는 것 같지만, 혹시 그렇지 못하면 당장 기분이 좋지 않다.
그 언어를 가지고 보면 상스럽고 속되며 그 복장을 가지고 보면 화려하다. 서쪽 지방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동쪽 지방 사람들은 칡신발로 서리를 밟는 것은 곧 시인이 한탄한 일이지만, 오늘날 풍속으로 화려한 옷을 입는 자이거나 칡신발로 서리를 밟는 자이거나 모두 내실을 다지는 것과 상반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겉치레를 지양하고 내실을 다지는 것이 진정 눈앞의 급선무이다. 나는 몇 년 전에는 그래도 장차 희망을 가져볼 만하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온 세상에 사람이 없다는 한탄이 점점 나온다. 항상 글을 읽은 선비와 오손도손 글 얘기를 나누며 계속 즐기는 것이 곧 나의 본디 규범이었는데 요즘은 차츰 권태가 느껴진다. 조종조(祖宗朝)의 고사를 살펴보면 꽃필 무렵 봄철 모임에 궁궐 밖의 신하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내각(內閣)을 설치한 뒤로는 항상 내각 신하들과 자리를 함께하여 해마다 그만두는 일이 없었는데, 몇해 전부터 이것마저 그만두었다. 측근에 있는 신하들은 곧 아까 말한 걸음걸이를 비교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이런 사람들과 천하를 다스리는 도를 강론할 것인가, 문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습속의 폐단은 한마디로 말해서 성의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서로간의 신분 차이가 엄격하지만 성의를 가지고 서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조정 안에서 함께 경외하는 마음을 갖추는 것이 최상인데, 오늘날에는 얼굴을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면서 전혀 성실한 뜻이 없으며 또한 어느 누가 마음을 활짝 열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습속이 이와 같으니 어찌 상께서 조정에 대해 탄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실 그렇다. 세 사람이 있으면 세 사람의 마음이 각기 다르고 다섯 사람이 있으면 다섯 사람의 마음이 각기 다르고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의 마음이 각기 다르다. 설사 아랫사람들이 혹시 성실하지 못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차라리 남은 나를 저버릴지라도 나는 남을 저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져 괜한 억측으로 남의 마음을 떠보는 성실하지 못한 짓을 하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요즘의 습속은 불성실하기 이를 데 없어 혹시 남의 말을 듣더라도 반드시 먼저 그 말 이외의 딴 뜻을 찾으려 한다. 명색이 조정 사대부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버릇을 갖고 있으니 말이 여기에 미치면 저절로 한탄이 터져 나온다.
새로 나라를 세우거나 가통을 계승할 때 소인은 쓰지 말라 하였다. 옛사람은 소인을 소소(宵小)라 했는데 소(宵)라는 글자는 밝을 명(明) 자와 상반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모양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생각에는, 지금 사람이라도 전부 옛사람보다 못한 것은 아니고 습속이 그렇게 만들어 놓아 저도 모르게 차츰차츰 한통속으로 빠져든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 반드시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고 분발하여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위축되는 태도를 갖지 말고 내 자신부터 사표가 되어 후진을 교화시키되 처음 한 사람부터 시작하여 두 사람으로, 두 사람부터 시작하여 세 사람으로 늘려나가 나중에 열 사람, 백 사람까지 서로서로 본받게 한다면 앞으로 어찌 습속이 크게 변모할 효과가 없겠는가."
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4월 16일 무술
삼척(三陟)·간성(杆城) 등 고을에 암행 겸 위유 어사(暗行兼慰諭御史)로 나갔던 권준(權晙)이 복명하였다.
권준이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삼척의 봉산(封山)087) 가운데 황지(黃地)와 원덕(遠德) 두 산은 안동(安東)·봉화(奉化)·영월(寧越)·울진(蔚珍) 등 고을과 접경을 이루어 나무를 훔쳐가는 도둑이 이 네 고을에서 많이 들어와, 잘라가는 것은 그들인데 벌을 받는 것은 이쪽입니다. 이 때문에 본 경내 그 두 산 밑에 사는 백성으로서 수호군(守護軍)이 된 자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거의 다 흩어지고 없어 결국 아무도 수호하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이제 접경 지점에 각기 그 고을로 하여금 방수군(防守軍) 몇 명을 배정해 두고 힘을 합쳐 지키게 하되 혹시 몰래 베어가는 일이 있을 경우 그들과 벌을 같이 받게 한다면 흩어져 없어지는 백성이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벌목을 금하고 지키는 면에서도 더 나을 듯합니다.
봉화 고을은 강릉·삼척·울산 세 고을 봉산(封山)의 요긴한 목을 이루는 지대에 위치하여 세 고을에서 널판지를 훔쳐가려면 그 길을 통하게 되어 있으므로 봉화 고을이 널판지의 불법반출에 대한 책임을 전담하게 된 것입니다마는, 그에 파생된 폐단이 잘못된 규례를 만들어내 금판 장교(禁板將校)를 배정해 두고서 의무적으로 매달 훔친 널판지 3부(部)를 적발하여 바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둑이 없어 잡아낸 것이 없더라도 잘 지키지 못했다 하여 형을 가하고 곤장을 쳐 기어코 그 수효대로 관가에 바치게 하니, 장교가 된 자는 어쩔 수 없이 톱장이를 많이 데리고 직접 봉산으로 들어가 좋은 나무를 골라서 널판지를 켜 관가에 바칠 거리로 삼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찌 관가에만 바치겠습니까. 그러니 금하게 하려 시도했던 것이 결국 스스로 범하게 하는 꼴이 되었으며, 봉화에서 나무를 판다는 설이 그전부터 나돕니다. 당해 고을을 엄중히 단속하여 수효를 정해 받아들이는 규정을 영원히 혁파하도록 한다면 법 이외의 폐단을 없앨 수 있고 사리와 체면에도 합당하겠습니다.
1. 강릉의 영서(嶺西)는 모두 여섯 개의 창고088) 가 있고 피곡(皮穀)과 잡곡이 도합 2만 6천 40석인데 거주하는 사람이 적어 가구수가 46통(統)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나누어 줄 수량을 응당 받아갈 통에 분배한다면 가구당 받는 수량이 많게는 1백 석 안팎에 이르고 적더라도 사오십 석을 내려가지 않을 판이니, 일년 내내 애써 농사를 짓는다 해도 장차 어디에서 이 수량을 마련해 바치겠습니까. 게다가 또 관청이 멀리 떨어져 있고 고을 아전의 농간에 일임한 상황이니, 곡식은 쭉정이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도망가는 백성이 끊이지 않아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어 있으니, 분배하는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감해 주는 정사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동(嶺東) 각 창고의 경우에는 각종 공적으로 소비되는 곡물과 다른 고을로 옮겨가는 몫이 다 그곳에서 나가기 때문에 곡물 장부가 차츰 축소되고 유통이 간혹 끊깁니다. 그러니 차라리 영서의 곡물을 편리한 대로 좇아 환작(換作)하여 영동으로 옮겨둠으로써 저쪽에서 덜어내 이쪽에다 보탠다면 실로 두 쪽이 다 편리한 방도가 될 것입니다.
1. 삼척 사미창(四美倉)의 피곡과 잡곡은 모두 3천 4백 5석인데 부근에 살고 있는 백성은 40통에 지나지 않으니, 한 가구당 배정받는 것은 거의 20석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강릉의 영서처럼 큰 폐단이 되지는 않지만 모곡(耗穀)을 계속 받아내기만 하고 오랫동안 소모하지 않고 있으므로 장차 곡물은 날로 자꾸 불어나고 백성의 수효는 날로 줄어들어 어떻게 변통하여 처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판국이니, 또한 적당한 수량을 고을 창고에서 환작하여 산중 백성을 보존하는 방도로 삼게 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겠습니다. 만일 금년에 한 번만 이처럼 환작하고 그 뒤에 또다시 곡식이 쌓인다면 얼마 가지 않아 그 폐단은 도로 과거 와 마찬가지일 것이니, 삼척의 사미창이나 강릉의 여섯 창고나 다 같이 환자곡을 받아들일 때마다 그해의 모곡에 상당하는 분량을 전부 다 써버리고 법정 수량이 넘어가게 남겨두는 일이 없게 한다면 실로 영구히 폐단이 없는 방안이 될 것입니다.
1. 강릉부 동쪽 7리 지점에 두 군데의 벌렬(伐列) 제방이 있으나 본디 수원(水源)이 없어 제방 아래 민전(民田)이 혜택을 입지 못하므로 부(府) 남쪽의 큰 냇물에 보를 쌓아 곧장 제방 밑에까지 물이 지나가 천여 석을 수확하는 관개용수가 되고 있으니, 이 제방은 만 섬의 물을 담아두더라도 소용이 없는데 게다가 또 바짝 말라 있습니다. 부 남쪽 십 리 지점에 또 해남(海南) 제방이 있는데 수리(水利)가 없기는 벌렬과 마찬가지입니다. 긴 냇물이 그 주변을 안고 흘러 제방 아래 모든 들판이 다 혜택을 입어 제방이 있거나 없거나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신은 은밀히 다닐 때 그 내막을 알아보고 여론을 들어보았더니, 모두 말하기를 ‘제방은 사실 쓸모없지만 토질만은 매우 좋아 여러 차례 영부(營府)에 정소(呈訴)하여 개간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나라의 법이 엄중하여 함부로 결정하기 어렵다는 말로 지시가 내려 민심이 안타까워한 지 오래이다.’ 하였습니다. 그 길이와 너비를 헤아리고 과식(科式)으로 참작해 보았더니, 1백여 석의 씨를 부릴 수 있고 짐[負]을 매기면 10여 결(結)이 될 만하였습니다. 백성에게 개간을 권장하는 오늘과 같은 시기에 기름져서 충분히 개간할 만한 땅을 버려두고 묵혀 한탄만 하게 할 수는 없으니, 특별히 묘당으로 하여금 협의 처리하게 하여 백성에게 농사를 지어 먹게 허락하고 그 결부(結負)에 대해서는 영읍(營邑)의 의논을 들어 경계를 갈라 정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1. 평릉역(平陵驛) 복호(復戶)는 한 가구당 50부(負)이고 은계역(銀溪驛)은 한 가구당 1백 부씩이었는데, 가정(嘉靖) 22년089) 전쟁을 치른 뒤에 은계역이 피폐해졌다 하여 평릉·상운(祥雲) 두 역의 가포(價布) 총 6백 50냥을 입거전(入居錢)이란 명목으로 해마다 은계로 보냈습니다. 그 뒤에 세상이 태평해진 지 오래되어 평릉·은계·상운이 다 똑같은 형편인데 입거전을 보내는 일은 예전과 변함이 없다가 강희(康熙) 무인년090) 어사 정호(鄭澔)가 연석(筵席)에서 품의한 뒤에 2백 50냥을 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평릉·상운 두 역이 요즘 또 피폐해져 지탱하기 어려우니, 이제 그 4백 냥 가운데 그 절반을 줄인다면 그런대로 두 역이 소생할 방도가 될 듯합니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주(覆奏)하기를,
"각 조항에서 논열한 것을 모두 감사에게 엄중히 당부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어사 권준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권준에게 이르기를,
"삼척의 불탄 가구들은 관가의 문에서 가깝다 하는데 새로 집을 지어 들어가서 사는 상황이 바깥 마을보다는 좀 낫던가?"
하니, 권준이 아뢰기를,
"아전의 집이 절반이나 되기 때문에 새로 집을 짓는 것이 민가보다 훨씬 나아 이제는 전부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해(平海)는 농사 형편과 민폐가 어떻던가? 그리고 본읍의 어호(漁戶)에 30여 냥을 징수해 내는 폐단이 있었다 하는데, 어사가 내려간 뒤에 과연 이미 시정하였던가?"
하니, 권준이 아뢰기를,
"지금은 완전히 시정되었으며 지난해에 농사 형편이 조금 좋았기 때문에 거의 다 안정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 영동(嶺東) 고을 어부에 대한 폐단을 시정한 뒤로 그전에는 열 길 물속에 드나들던 어부가 지금은 두세 길 얕은 물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하니, 이는 하지를 않아서이지 못해서가 아니다. 이로써 보면 어염(魚鹽)의 선세(船稅)를 다 없애더라도 그 폐단은 분명히 예전과 같을 것이다. 요즘 들어보면 어부들 가운데 갓을 쓴 자도 있다 하는데 사실 그렇던가? 승지는 일찍이 그 지방의 어사로 나갔으므로 아마도 민속을 잘 알 것 같다."
하니, 승지 조홍진(趙弘鎭)이 아뢰기를,
"대체로 육지 백성이 어부를 보는 것은 거의 소 잡는 백정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번 해안(海案)에 이름이 기록되기만 하면 평민과 서로 겨룰 수 없으므로 그들의 자손은 모두 그들 할아버지가 어부라는 사실을 숨깁니다. 이미 조정에서 어부에 대한 폐단을 없애주었으니, 그들은 반드시 지난날의 수치를 씻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갓을 쓰고 글을 읽는 자도 없지 않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은 참으로 만족해 할 줄 모른다. 심지어 사소한 진상품까지 모조리 없앤 뒤에야 마음이 시원할 것인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폐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겸춘추(兼春秋)는 일찍이 그 고을 수령을 지냈는데, 계묘년091) 이후에는 과연 어떻던가?"
하니, 겸춘추 김계렴(金啓濂)이 아뢰기를,
"한번 어부에 대한 폐단을 시정하여 고친 뒤로는 과거에 남루한 옷을 입던 자들이 전혀 부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또한 사치 풍조의 일단이다. 송정(松政)은 요즘 어떻던가?"
하니, 권준이 아뢰기를,
"서계(書啓)에서 아뢴 것 이외에 범작(犯斫)에 관해 아뢸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서 우선적으로 규찰할 것은 곧 송정 한 가지 일이다. 그대는 임지로 돌아가는 길에 감사에게 말해 각별히 단속하도록 하고 만일 수령들을 만나거든 잘 당부하라."
하였다.
권준이 또 아뢰기를,
"통천(通川)의 어부들이 부역에 응하는 것은 다른 고을과 사례가 다릅니다. 지난 무오년092) 에 이영운(李榮運)이 군수로 있을 때 경내의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모두 1천 7백여 냥이 모여졌는데, 그것을 10대 3으로 이자를 불려 1년간의 이자돈이 도합 6백 50냥이었습니다. 이것을 첨해전(添海錢)이라 이름을 붙이고 예리(禮吏)에게 내주어 진상 물선(進上物膳)을 사서 바치는 자본으로 쓰게 하였으며, 지난해에는 새로운 규정의 정채(情債)093) 로 마련한 돈이 5백 9냥 2전 5푼이었는데, 그것은 어부에게서 받아냈습니다. 대체로 물선은 어부 자신이 잡는 것으로서 그에게 담당하게 하는 것은 사실 각 고을에서 통행하는 규례인데 유독 통천에서는 예리에게 사서 바치게 하고 있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며 또 어찌 그 사이에 폐단이 없을 줄 알겠습니까. 이미 이자로 불어나는 돈이 있으니 그것으로 그 규정의 정채를 충당하게 하고 물선은 어부에게 가미(價米)를 내주어 갖추도록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흡곡현(歙谷縣)의 곡부(穀簿) 가운데 벼 환자곡은 3백 47석이고 콩 환자곡은 9백 25석인데, 본읍은 논이 밭보다 많아 항상 대두(大豆)를 받아들일 때마다 백성들이 모두 다른 지방에서 사들이느라 소요가 일어나니, 절반 가량 명목을 바꾸어 벼로 한다면 백성의 사정으로 보아 편리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주달한 두 가지 일은 그대가 임지로 돌아가는 길에 감사를 만나 의논하여 신중히 시정한 뒤에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의봉(李義鳳)을 발탁하여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책을 옆에 끼고 주연(胄筵)에 출입한 지가 거의 30년이므로 그 나이를 물었더니 내년이면 만 70이라 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3품 반열에 있으니 너무도 침체해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강개한 담론은 시정(時政)과 세속의 폐단에 많이 미쳐 모습은 쇠했지만 마음은 쇠하지 않은 옛날 그대로의 인물인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행해야 할 책무를 억지로 요구하기는 어렵다. 좌승지 이의봉을 아경(亞卿) 자리 가운데 수부(水部)094) 의 한가한 사(司)에다 오늘 정사에 의망하여 넣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9일 신축
세자가 우빈객(右賓客) 김재찬(金載瓚)과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어영 대장 좌포도 대장 이득제(李得濟)를 잉임(仍任)하였다.
4월 20일 임인
차대(次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공(周公)은 대성(大聖)이신데 무일(無逸)095) 한 편에서 일곱 번이나 그 단서를 바꿔가며 신신 당부하였다. 나 또한 경들의 이른바 근력을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말대로 다소나마 안일하지 말자는 뜻을 붙여 전일에는 자주 신하들을 접견하였으나 입시한 자들이 반드시 다 올바른 사람이며 유익한 인물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사(公事)를 가지고 오는 승지 이외에는 요즘 차츰 드물게 접견하는데, 이 또한 부득이하여 그런 것이다. 저번 이의봉(李義鳳)을 보았을 때 그가, 경들이 어진 자를 진출시키고 무능한 자를 물리치지 못한다 하여 개탄해 하는 뜻이 많이 있었다. 요즘 사람으로서 조정에 출입하는 자 가운데 임금과 재상이 하는 일에 대해 언급한 것을 듣지 못했으니, 이의봉의 개탄한 말은 또한 조정의 좋은 이야기거리이다."
하니, 영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병모가, 형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이 사정이 있다는 구실로 오랫동안 행공(行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추고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당초의 일은 이미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고(故) 중신(重臣) 정민시(鄭民始)가 생존해 있는 때라 해도 일이 일단 지나간 뒤에는 그것을 끌어댈 필요가 없는데, 더구나 고 중신이 죽은 지금 어찌 묘당의 한 차례 초기(草記)로 인해 관직 거취의 변경할 수 없는 한도로 삼을 수 있겠는가. 설사 자기 신상에 밀접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율명(律名)은 파직 추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염치 문제로 인한 거취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사정에 맞게 참작하여 조처해야 하는 법이니, 이를테면 어제의 일이 염치가 중요하면 염치의 측면을, 오늘의 일이 사정이 중요하면 사정의 측면을 따르는 것이 도리로 보아 당연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관잠(官箴)에 대한 말을 한번이라도 들으면 곧 인입(引入)할 생각을 가지면서 말을 꺼냈다 하면 반드시 사유(四維)096) 가 중하다 하는데, 사유가 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찌 이처럼 터무니없는 일을 두고 한 말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조정의 위상이 높지 않아 체통이 점점 무너져서 그런 것이다.
과거 선조(先朝) 때 민통수(閔通洙) 형제를 처분한 일을 살펴보라. 선대왕(先大王)의 타고나신 효심과 추모하는 정성으로 통수 형제에 대해 사랑하고 아끼며 돌보시는 정도가 과연 어떠했으며 통수가 잡고 있는 세력이 과연 어떠했던가. 그런데도 한 대신의 일로 인해 평소에 그처럼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을 형틀을 채우고 머리를 덮어씌워 단호히 처분하였으니, 선조의 규모가 엄정하다는 것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너나없이 감히 간하는 선비이지만 그 행동을 살펴보면 외면으로 쉽게 알 만한 격식에 대해서도 다 모르고 있으니, 제도와 규모가 차차 쇠퇴해지는 문제는 그만두더라도 외면의 격식이 곧 팽개쳐질 형편이다. 연석에서 이와 같은 말을 여러 번 꺼냈지만 자기 집에서는 그 아비에게 절하지 않고 조정에서는 임금에게 숙배(肅拜)하지 않는 자가 몇이나 있을 줄 어찌 알겠는가. 말이나 생각이 이에 미치면 자신도 모르게 서글프고 한심스럽다.
내가 즉위한 지가 이미 30년이 되었다. 30년 동안을 보아오다 보니 자연히 낯 익은 자가 있게 되고 정 또한 두터워졌다. 그리하여 체통을 무너뜨린 자에 대해서도 법으로 처단하지 못하니 이는 대체로 마음속에 참작하고 요량하는 점이 있어서인데, 밑에 있는 자로서 한가닥 딴길만 생각하여 그 행동을 제멋대로 하고 체통을 유지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외면을 단속하여 그 내면을 안전하게 하라느니, 의관을 올바로 하고 둘러보는 시선을 의젓하게 하라느니 등의 좋은 격언 또한 외면의 공경 경(敬) 자 공부를 벗어나지 않는다. 옛모습 그대로 일을 하는 데에는 경(敬)보다 좋은 게 없다. 그렇다면 격식이며 체통 또한 벗어버리거나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경들도 정성껏 옛법을 유지하여 백관을 바로잡는다면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이러한 말을 추판(秋判)에게 일러주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공자께서 《시경》·《서경》을 간추려낼 때 《시경》은 3백 편만 남겼는데, 위(衛)나라는 작은 나라인데도 ‘빈지초연(賓之初筵)’이며 ‘억계(抑戒)’ 등 편을 아(雅)에 실어 천자의 반열에서 함께 찬미를 누리게 하였다. 그 이유는, 무공(武公)은 어진 임금이므로 그가 노래한 ‘빈틈없이 지닌 위의 곧 덕이 엄정하네.[抑抑威儀 維德之隅]’를 내심 취하여 크게 드러낸 것이니, 사람의 위의 또한 어찌 덕을 드러내는 표상이 아니겠는가. 외적인 격식이 자질구레한 것 같지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격식을 어찌 자질구레하다 하겠습니까. 옛날의 어진 사대부는 얼굴빛을 바룰 때에는 성실함에 가깝게 하고 말을 할 때에는 비루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멀리하여 단정한 조복차림으로 묘당에 앉아 백관의 풍기를 바로잡았는데, 신처럼 형편없는 사람은 조정에서 하는 일 없이 밥만 먹는다는 평만 받고 한 가지 일도 조정 신하를 단속하는 것이 없으니, 이의봉(李義鳳)이 말한, 훌륭하고 무능한 자를 진퇴시키지 못한다는 말은 도리어 너무 관대히 용서해 준 것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모양으로 본다면 훌륭한 자는 사실 얻기가 어려운 상황이나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스스로 구속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점이니, 언어는 비속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의복은 모두 화려하다. 이번에 새로 급제한 사람들의 옷을 보았더니 몇몇 신은(新恩)의 복장이 대체로 다 똑같이 화려하였다. 이 어찌 사치를 숭상하는 일면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것은 진정 취할 것이 못 되고 남루하고 더러운 것도 좋게 여길 것이 못 되니, 모든 일이란 본분에 맞춰서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렇게 하면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데 모두 이와 같은 도리를 모르고 서로 사치를 숭상하여 의복이며 음식이 남보다 못한 것을 한 가지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니, 이는 너무도 한심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겉모습을 보고 말을 들으면 그 내면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대강 알 수 있는 법인데, 요즘 사람은 한결같이 일정한 틀에만 맞추어 말 한 마디 속에 몇겹의 테두리를 설치해 놓고 있으므로 비록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니, 이와 같이 하고서 현인과 양사(良士)를 어디서 얻겠는가. 신진 소년은 장차 구만리 앞길이 창창하다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풍조를 그들이 배워 차츰 세속의 굴레 속으로 들어간다면 앞으로의 걱정이 어찌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좌의정 심환지(沈煥之)에게 이르기를,
"새로 급제한 심영석(沈英錫)을 경은 아는가?"
하니, 환지가 아뢰기를,
"그 사람은 고 판서 심단(沈檀)의 증손(曾孫)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신축년097) 에 선조(先朝)께서 동궁에서 나오실 때 고 중신 심단이 아직 숙배(肅拜)하지 않은 빈객(賓客)으로 앞장서서 청대(請對)하기를 구해 능히 태양을 옹호하는 공을 이루었으니, 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가 금부 당상으로 있을 때는 사사건건 위관(委官)과 서로 고집을 세워 구제하고 풀어준 공이 많이 있었다. 서덕수(徐德修) 사건의 경우에는 《주례(周禮)》 추관(秋官)의 팔의론(八議論)098) 을 내세워 변호하였으니, 그 집안 사람들이 끝까지 무사했던 것은 실로 이 사람의 힘이었다. 또 이희지(李喜之) 어미의 경우에는 이길(李洁) 어미의 사례에 따라 체포하여 문초하는 벌을 면하게 하였으니, 그 형벌을 관대히 하자는 주장과 사람을 살려낸 공이 과연 어떠한가. 선조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심단은 충신이며 공신이다.’ 하시고 그 집안 사람을 각별히 돌보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 판서 심각(沈瑴)은 문과에 급제한 뒤 1년 사이에 다섯 자급이 뛰어올랐고 심박(沈𡑿) 또한 실주서(實注書)가 되었으니, 이는 대체로 옛정을 생각하고 공을 보상해주려는 성의(誠意)에서 나온 것으로서, 한쪽 사람들이 그들을 공격하더라도 본심을 굽혀 그 주장을 따라주지 않으셨다. 그 내력을 따져보면 이와 같으니 경들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신진들에게 이와 같은 사정을 일러주어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현재 식년 감시(式年監試)가 곧 다가오므로 본조에서 과거에 관한 사목(事目)을 수정할 예정입니다. 지난번에 치른 정시(庭試)는 때마침 세상에 드문 큰 경사를 만나 팔방에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모여든 자가 10만 인이나 되었으므로 과장이 혼란한 것은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였으나 과장의 법규가 약간 해이해졌다고 인정하는 자도 있으니, 이는 조정이 바라던 본의가 결코 아닙니다. 저번에 과장의 법규가 해이해졌다고 하신 분부는 그에 관한 성상의 깊은 우려를 실로 이해합니다마는, 종전에 과장이 엄격하지 않았던 것은 곧 유사의 책임인데 어찌 매번 훈계를 내리시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감시 조흘강(監試照訖講)은 《대전(大典)》에 실려 있으니 그대로 따라 잘 시행한다면 실로 과장을 엄격하게 하는 요긴한 길이 될 것입니다. 다만 식년시 때마다 조흘강을 받는 것을 시험 직전에 실시하므로 강에 응하는 유생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바쁘게 종결을 짓느라 엄격하고 명백히 하는 뜻이 전혀 없기 때문에 몇해 전 강기(講期)의 기한을 정하자는 일로 대신에게 수의하였으나 미처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식년시부터 서울과 지방의 조흘강은 전부 과거가 있기 3, 4개월 전에 개강(開講)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한다면 유생들이 혹시 차일피일 관망하느라 개강 초에는 들어오는 자가 거의 없다가 과거 날짜가 바싹 다가온 뒤에야 일제히 몰려올 염려가 있을 듯합니다. 그러니 개강부터 철강(撤講)까지 미리 기한을 정하게 하되 만일 법전에 허용한 실제 연고가 있어 즉시 응시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진시(陳試) 규정에 의해 조흘소(照訖所)에 정문(呈文)하고 공문을 받아 나중에 강을 받도록 하며, 이밖에 기한을 넘긴 자에 대해서는 일체 허용하지 말도록 해야겠습니다. 시관은 굳이 사관(四館)의 관원으로만 차출할 것이 아니라 성균관의 구임 낭청(久任郞廳) 세 사람과 사학(四學)의 교수들로 하여금 짝을 갈라 날짜를 바꿔가며 반궁(泮宮)에 나아가 유생이 들어오는 대로 강을 받도록 하되 그 규정을 엄격하게 하면서 기한을 충분히 주어 허술하거나 혼란한 폐단이 없게 해야겠습니다.
각도는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막론하고 각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그 고을 유생의 강을 받아 그 명단을 책으로 만들어 서울 시험장으로 보내게 하며, 한성시(漢城試)에 응하길 원하는 자에 대해서도 그 고을로 하여금 강을 받게 하고 감사가 그 명단을 거두어 책으로 만들어서 본조로 보내면 본조에서 조흘소로 보내 원본과 자세히 대조해 본 뒤에 비로소 체문(帖文)을 주게 해야겠으며, 혹시 이전에 이미 서울로 올라와 지방에 다녀오기 어려운 유생은 조흘소에 정문하면 강에 응하는 것을 허용하게 해야겠습니다. 과장의 문에 들어올 때 금란관(禁亂官)이 체문을 살펴보는 따위의 일을 각별히 엄중하게 하되 함께 따라온 사수(寫手)로서 체문을 함부로 가진 자가 혹시 발견되면 당초에 강을 받았던 조흘 시관(照訖試官)과 당해 고을 수령을 무겁게 논죄하도록 하며, 각도에서 강을 통과한 자의 명단을 적은 책을 거두어 보낼 때 강에서 떨어진 유생의 성명도 함께 기록해 보내도록 하여 그것을 참고로 삼아 부정을 막는 자료로 쓰게 해야겠습니다.
조흘시험에서 강을 받는 것은 본디 일정한 법식이 있는데 여태까지는 시관들이 간혹 본문 밖에서 의문난 뜻을 끄집어내어 묻거나 혹은 글 제목을 내어 제술 능력을 시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시험을 보다 엄격하게 보이려고 한 것이지만 도리어 시험의 체모를 손상하니, 앞으로는 음과 구두 및 본문의 글뜻을 능통하는 것만으로 강을 통과하는 기준으로 삼을 것을 시관에게 엄중히 당부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상의 신이 아뢴 조항을 거조(擧條)에 내보내 내외에 알림으로써 강에 응하는 유생으로 하여금 모두 마음을 가다듬어 행여 규정을 범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개강과 철강의 기한에 대해 일정한 규정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신의 생각에는 서울 및 가까운 도는 윤4월 1일부터 개강하여 7월 10일에 철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만, 이 일을 대신에게 물어보소서."
하였는데, 상이 대신에게 물었더니 영의정 이병모 등이 아뢰기를,
"백성을 늦추어주기만 하고 팽팽히 당기지 않는다면 문왕 무왕도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저번에 늦추어지면 반드시 팽팽히 당겨야 한다는 교지를 읽고 우러러 칭송하길 마지않았습니다. 이번에 이 예조 당상이 아뢴 것은 실로 임금의 명을 선양하고 옛법을 닦아 거행하는 방도가 되겠으며, 무엇보다 강을 받는 기한을 정하는 것은 목전에 닥쳐 혼잡을 이루는 폐단을 막을 수 있겠습니다. 신은 달리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그렇다면 그 제도를 시험해 보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과장의 폐단은 곧 성상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 내리신 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당시 대신과 기타 신하들에게 하명하여 널리 논의하여 보고하게 하셨으나 머뭇거리다가 끝내 달리 변통하는 좋은 계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상고 때의 빈흥법(賓興法)이나 향공법(鄕貢法)099) 을 복구하지 못한다면 이른바 변통하는 것은 다 구차한 것인데 고금의 상황이 서로 다른 법이라 감히 선뜻 논의할 수 없고, 아조(我朝)의 과거 제도로 논한다면 무엇보다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일 가운데 경학(經學)이 밝지 못한 문제가 가장 걱정거리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부단히 경술(經術)을 앞세우고 문예를 뒤로 하는 것으로 인재를 길러내고 풍속을 유도하는 근본으로 삼은 지 어언 20년이 되었으나 붓대를 잡고 글을 배운 세상 사람들 중에 경전 하나를 능통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인재가 일어나지 않고 문풍(文風)이 진작되지 않으며 사류의 습속이 순박하지 못한 이유가 오로지 이 때문인 것입니다. 입과 귀로 구두만 익히는 공부가 진정한 경학에 반드시 도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룻동안에 잘 짓거나 못 짓거나 하는 사부(詞賦)나 변려문(駢儷文)에 비하면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니니, 오늘의 폐단을 바로잡는 것은 마땅히 과거 제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선조(先朝) 기묘년100) 에 대소 문과에서는 제술을 우선하고 강경을 뒤로 하며, 원점 유생(圓點儒生)에 대해서는 강경을 우선하고 제술을 뒤로하는 것으로 법식을 정하도록 특별히 분부하시어 그것을 절목으로 만들어 여러 해 동안 시행하다가 어떤 일로 인해 중단하였습니다. 그 뒤에 한 경서를 강하는 제도를 복구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으나 결국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시행하지 못했으며, 근년에 이르러 일차 전강(日次殿講) 때 원점 유생은 특별히 강경시험에 응하도록 허용하였고 전강에 합격할 때는 혹 제술로 비교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다 학문을 권장하여 인재를 육성해내자는 임금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이 대사성으로 있을 때 양재(兩齋) 유생들이 새벽 등불 아래 글을 읽은 소리를 들었으니, 풍조가 크게 변한 보람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미 그 보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제도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묘년 절목에 의해 매년 원점 유생의 일차전강을 실시할 때 각자 원하는 대로 한 경전을 강하게 하되 뜻풀이는 제외하고 암송하게 하고 조(粗) 이상의 점수를 얻은 자에 대해 다시 제술로 시험을 보이도록 하며, 시관은 전강 때의 시관의 인원수로 하고 은상(恩賞)은 성상의 하교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춘추 도기(春秋到記)의 경우는 원점(圓點)에 구속을 받지 않더라도 수백 명에 달하는 재사(齋舍)의 유생이 한 편의 공령문(功令文)으로 쉽게 과거에 급제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권장할 일이 못 될 듯합니다. 아조의 고사로 보면 정시(庭試)와 알성시(謁聖試)에서도 사제(賜第)101) 하지 않은 때가 있었으니, 고 대사헌 김계휘(金繼輝)는 장원을 하였으나 회시(會試)에 응시할 자격만 주었고 고 재신(宰臣) 성호선(成好善)은 세 번을 장원하고서야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정시와 알성시에서도 그러하였는데 더구나 도기(到記)야 말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절일제(節日製)에 사제(賜第)하는 것은 특별한 은전에서 나온 것이지만 옛날에는 그때마다 물의가 일어났으니, 성대(盛代)의 아름다운 풍속을 또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도기와 절일제 시험에서 삼하(三下) 이상으로 합격한 사람은 다시 한 경서를 강하는 것으로 시험하거나 혹은 다시 제술로 시험하는 문제를 그때그때 품지(稟旨)하여 거행한다면 경술(經術)을 높이고 과거법을 엄격히 하고 옛법을 이어받고 요행의 문을 막는 일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것이며,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도 반드시 크게 분발하여 한층 더 학문에 힘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대단한 변통은 아니라도 다소 이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사안이 과거법에 관계된 것이니, 대신에게 물어보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에게 의논을 거두어 초기(草記)로 품의 조처하라."
하였는데, 이 일은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내섬시(內贍寺)를 혁파하여 의영고(義盈庫)에 합병하였다. 내섬시 제조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본시(本寺)의 폐단을 시정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일에 대해 저번에 삼가 하교를 받았습니다. 공적으로 지출하는 돈으로 해마다 부족한 액수가 거의 5백 냥에 가까워 예전에 10년을 기한으로 선혜청에서 그 돈을 받아 이자를 불려 보충해 쓰도록 하자고 청했으나 선혜청의 사정이 차츰 옛날과 달라져서 사실 해마다 대출해 주기가 어렵습니다. 현재의 계책으로서는 공상 육사(供上六司)에 관청을 합치는 것보다 좋은 수가 없는데 그 육사 가운데 의영고가 3일마다 공상하는 것이 서로 같고 물품 종류도 서로 같은 것이 많으니, 만일 의영고에 별도로 내섬의 한 담당자를 세워 그에게 본시에서 진상할 물품을 전담하게 하며, 관원은 서로 합쳐 번갈아 입직하고 원역(員役)은 각기 본디의 녹을 받게 한다면, 피차간에 서로 도움이 되어 장애될 것이 없을 것이고 여러 가지 본시의 관용(官用) 물자도 다 소비되지 않아 충분히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건물은 팔아서 빚을 갚도록 하는 것이 가장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 사온서(司醞署)는 내자시(內資寺)에, 풍저창(豊儲倉)은 장흥고(長興庫)에 합병하는 등 과거의 사례 또한 많으니, 그 경우를 참조해 볼 만도 합니다. 본시의 제조에 대해서는 의영고에 비중을 크게 두고 그를 호조에 소속시켜 관직을 겸임하게 하는 것도 괜찮고 본시에 비중을 크게 두어 그대로 놓아두는 것도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 낭청 세 사람 문제는 관청을 합병한 뒤에는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결원이 날 경우 보충하지 말거나 혹은 날마다 공상하는 아문 가운데 인원수가 적은 곳에 나누어 소속시키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다만 이 문제들은 관제(官制)의 변통에 관계되는 일이니 대신에게 물어보소서."
하였는데, 상이 대신에게 물으니, 영의정 이병모 등이 아뢰기를,
"모든 일들이 변통하기가 어려운 것은 이쪽이 이익이 있으면 저쪽이 손해가 있기 때문인데 이번 이 합병하자는 논의는 이쪽이나 저쪽이 서로 방해될 것이 별로 없는 일로서 신은 합외(閤外)에서 그 말을 듣고 이미 옳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합병한 뒤에 제조는 호조의 장관이 으레 겸임하게 하고 낭관 두 사람은 결원이 생기면 보충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설이 그럴듯하니 그대로 시행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겠다. 그리고 관청의 준칙으로 말하더라도 사축서(司畜署)와 귀후서(歸厚署) 등 관청과는 약간 다르다."
하고, 마침내 혁파하였다.
함경도 남북 지방의 시험을 주관하는 도사(都事)와 평사(評事)는 근래의 규례에 따라 서로 바꾸지 말 것을 명하였는데, 장령 한계옥(韓啓玉)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송환기(宋煥箕)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4월 21일 계묘
지평 조항진(趙恒鎭)이 상소하기를,
"거룩하신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께서는 춘추가 이미 10세가 넘어 길일에 두 가지 예를 거행했는데, 여유롭고 평화로운 성대한 행사에 뭇사람의 경하하는 마음이 한층 더 간절하였습니다. 의젓하고 엄숙하신 의표를 예를 행할 때 모두 우러러보았고 어질고 효성이 깊다는 좋은 소문이 책봉을 받던 날 널리 퍼졌으니, 억만년 태평 세월의 터전이 이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대체로 오늘날은 한 사람이 큰 선을 지닐 때 온 나라가 바로잡히는 시초로서 《서경》의 이른바 ‘복된 명과 길한 명이 모두 처음에 달렸다’고 한 경우이니, 우선 무궁한 복을 기원하고 도와서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드리는 일이 뒤따라야 하는데 지금이 곧 그때입니다. 예로부터 도와 이끌어주는 법은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102) 과 가의(賈誼)가 인용한 보부편(保傅篇)103) 에 이미 다 나와 있으며 주부자(朱夫子)가 말씀한 태자를 보좌하는 요지도 서책에 실려 있으니, 후세 사람으로서 세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싶은 자는 그것을 놓아두고서는 다시 별다른 법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성의(誠意)·정심(正心)과 같은 낡은 말이라도 사실은 곰곰이 연구해 보면 새롭고 기특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춘궁 저하께서는 준수한 천품을 타고나 슬기가 날로 진보하시니 아주 어렸을 적에도 동궁의 요속으로 뽑힌 자들이 강석(講席)에서 물러나와서는 성인이라고 말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세자복의 정장을 하고 세자 자리에 오르시자 엄숙한 의표가 참으로 자연스러워 법도에 맞는 행동은 대우(大禹)와 같고 금옥을 조각한 듯한 기상은 문왕(文王)과 같았습니다. 이는 총명하신 자질을 타고나 애를 쓰지 않고서도 법도에 들어맞는 경지 때문이긴 하지만 우리 전하께서 몸으로 가르치신 도와 보살펴 기르신 공이 일찍이 그 근본이 되었고 여러 요속이 좌우에서 보좌한 공 또한 어쩌면 도움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 우리 전하의 한 가지 동작과 하나의 정사며 호령이 다 세자의 법이 된 것입니다. 깊은 궁전 속에서 아침저녁으로 부왕을 모실 때 성상께서 주신 훈계와 세자께서 받으신 가르침에 대해 신은 감히 알 수 없지만 세자를 책봉하던 날 베푸신 조치를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산림처사를 우대한 것은 현인에 대한 예우를 보이신 것이고 노인들에게 은혜가 미쳐간 것은 나이먹은 자를 존경하는 뜻을 보이신 것이며, 죄명을 씻어준 은전은 너그럽고 인자함을 보이신 것이고 부역을 견감해준 은전은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는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막대한 예임에도 본받으신 것은 검소함이었고 과거에 없던 경사임에도 잊지 않으신 것은 조심하고 삼가하시는 마음이었으므로 기쁨을 기념하는 이와 같은 행사에서 선대 임금들께서 정해놓은 기준에 어긋남이 없으셨으니, 우리 성상께서 몸으로 가르치신 거룩한 법과 훈계는 신은 더 이상 노력하시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도와서 이끄는 일과 성심을 다해 깨우쳐드리는 방도는 오로지 서연관(書筵官)에게 책임이 있는데 다만 춘방(春坊)에 딸린 신하들은 결국 과거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이라 경서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면에 있어서는 초야에서 글을 읽은 선비보다 못하므로 저번에 춘방을 처음 설치할 당시 전조(銓曹)에게 당부하여 우선 천거 단자에 이름이 올라 있는 자를 차례대로 주의하게 하셨으니, 매우 거룩한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산골과 들판의 한미한 준사(畯士)들이 과연 다 빠짐없이 천거되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인재를 취하는 것은 오로지 문벌만 앞세워 인재를 불러낼 때 소략함을 면치 못하니, 신은 일찍이 이 점을 문제로 여겨왔습니다. 삼가 원컨대 명을 크게 내려 널리 숨은 선비를 구하여 덕이 재주보다 낫고 본바탕이 겉보다 우세한 자를 애써 취하되 출신은 보지 말고 반드시 인물을 위주로 함으로써 우리 어린 세자로 하여금 순박하고 진실한 것이 소중하고 겉으로 꾸미는 것은 여사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이 길을 따라 앞으로 나가면 하(夏)나라와 은(殷)나라 때 숭상하던 충실하고 질박한 방향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돌아가 경망하고 으시대는 근대의 습관을 그런대로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니, 거룩하신 덕을 성취하는 방도에 어찌 도움이 작겠습니까.
그리고 서연의 강이 끝나 궁료들이 물러간 뒤에 춘궁께서 함께 어울리는 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정자(程子)가 말했던, 어진 선비를 가까이하는 때는 적고 환관을 대할 때는 많다는 것이 진정 신의 오늘의 염려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세자에 대해 아버지이자 스승이십니다. 매일 서연이 파한 뒤에 반드시 전하의 무릎 밑에 와 모시면서 국사의 처결을 함께 참관하게 하시고 조정의 공식적인 석상에서만 활동하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 어찌 하루만 햇볕을 쪼이고 열흘 동안 추위 속에 있을 걱정이 있겠습니까. 곁에서 시중드는 자들을 반드시 성실하고 후덕한 사람을 가려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주자(朱子)께서 말씀한 일도 있지만 성상께서 반드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계실 터이니, 신이 어찌 여러 말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춘궁께서는 슬기가 뛰어나고 천성적으로 학문을 좋아하여 장구(章句)를 따져묻고 심오한 뜻을 풀이하여 이미 경학의 깊은 공부에 도달하셨다 하니 신은 진정 흠앙해 마지않습니다만, 오늘날 서연의 관원으로 있는 사람은 문리(文理)의 진취나 구두를 섭렵하는 일에 애쓰지 말고 반드시 옛 성현의 마음을 바르게 갖는 근본과 잘못을 바루는 요체를 가지고 꾸준히 선한 말씀을 올려 마음을 깨우치도록 해야 합니다. 글을 암송하고 저술하는 따위는 비록 빈천한 선비라 하더라도 바른 마음을 갖고 학문하는 자라면 오히려 장난거리라는 것으로 경계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도리는 강을 모시는 여러 인사가 반드시 그 경중을 알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24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시면서 사치 풍조를 몰아내는 데 전념하셨으니, 이번 막중한 의식 때 애써 그 경비를 줄인 일로 살펴보더라도 검소한 것으로 장래에 계책을 남기고 절약하는 것으로 복을 기르신 성상의 마음을 신은 우러러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 도를 더 확충시켜 춘궁의 의복·음식이며 거처하는 집과 기물에 대해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뒤에 차츰 호사를 누리는 경계를 지켜 비단이며 주옥 등 치장을 몸에 가까이하지 말고 기묘하고 이상한 즐길거리를 눈에 접하지 말게 해야 하는데, 그 근본은 또한 우리 성상 한 몸에 달려 있습니다. 한층 더 힘쓰시기 바랍니다.
삼왕(三王)이 세자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예악(禮樂)으로 하였는데, 천리(天理)를 절제하고 수식하여 그 이치를 밝히는 것은 예이고 인심을 순화시켜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은 악입니다. 《명의록(明義錄)》 한 부(部)는 곧 우리 성조(聖朝)가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순화시키는 큰 요체로서 예악의 가르침이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요즘 《명의록》에 관계가 있는, 자신이 직접 그 율을 범했거나 혹은 그 율에 연루된 자들에 대해 예사로운 죄나 과실로 간주하여 그 죄명을 씻어주고 있으니, 신은 예악의 법이 쓰러지고 기강이 무너져서 장차 천리가 어두어지고 인심이 막히는 지경에 이르러 옛말에 이른바 예악이 밝지 못했다는 경우와 거의 비슷하게 될까 심히 걱정됩니다. 몸소 실천하고 남을 가르쳐 인도하는 방법은 요컨대 《명의록》을 천명하는 데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성상께서 마음을 가다듬어 깊이 살피시길 원합니다.
과거 시험이 폐단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옛날 현인이 말했던, 30년의 사과(詞科)를 혁파해야만 정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말씀은 곧 오늘을 예견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종조(祖宗朝) 4백 년 동안 인재를 취해 쓴 길은 과거시험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으니, 다만 그 이미 이루어진 절목을 취해 착실히 거행하면 될 것입니다. 대체로 응시자를 마주 대해 시험하는 것은 부정을 막는 참다운 정사이긴 하지만 이 법은 선조(先朝)에 잠깐 시행했다가 그만둔 법이므로 신은 감히 다시 시행하자는 주장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한 경전을 시험보이는 강경(講經) 또한 선조(先朝) 때 시행했던 법인데, 한 경서를 능히 암송한 자는 반드시 큰 선비는 아니라 하더라도 장구(章句)를 통하지 못하고 고기 어(魚) 자와 나라 노(魯) 자를 분간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요행히 급제할 생각을 갖는 자에 비해 볼 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재주는 각기 달라서 암송을 잘하는 자는 제술을 못하고 제술을 잘하는 자는 암송을 못하며 젊은 자는 잘 암송하지만 늙은 선비는 잘 암송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도 사실 옳습니다만 한 경전을 암송하는 것은 비록 노쇠하고 미련한 자라도 1년 공부만 쌓는다면 어찌 해내지 못할 염려가 있겠습니까.
문무신(文武臣)에게 강경시(講經試)를 보이는 법은 제1권부터 차례대로 강에 응하는데, 유생의 강경시 또한 그 방식을 따라 이번 과거에서 상경(上經)을 외우고 다음 과거에서 하경(下經)을 외우게 하여 단계적으로 숙독한다면 총명하거나 미련하거나 늙었거나 젊었거나 또한 어찌 통하지 못할 염려가 있겠습니까. 과거시험의 폐단을 비록 크게 개혁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경서를 시험보이는 일은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과거시험을 보일 때는 그때마다 서울과 지방의 관리로 하여금 과거에 응시할 예비시험을 먼저 보여 그 결과를 도목(都目)으로 만들어 예조에 보고하되 근래 소과(小科)의 초시에 《소학(小學)》을 강하는 것처럼 하게 한다면 대소 과장에 하인들이 함부로 들어가는 일이 없고 또한 서로 짓밟아 상처를 입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삼가 원컨대 널리 의견을 물어 빨리 시행하소서.
민생의 고락 여부는 오로지 수령에게 매였으니 적임자를 고르기가 한없이 어려운 것이 수령입니다. 하지만 문관·무관·음관으로서 오랫동안 벼슬살이를 한 자의 소망은 고을 수령이 되는 데에 있고 재주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것도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인재가 적은 시기에 3백 60여 고을마다 어찌 다 어진 사람을 얻어 백성을 보살피는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몇해 전 흉년을 만났을 때 성상께서 인물과 고을이 서로 적합하지 않은 점을 염려하여 감사에게 명해 재주를 참작하여 고을을 서로 바꾸도록 하셨는데, 신은 그 당시 호남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서로 고을을 바꾼 당해 수령이 과연 이쪽에서는 우둔하지만 저쪽에서는 슬기롭다는 것을 자세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조정이 이미 시험했던 법을 어찌 흉년을 만나 구휼을 실시하는 때에만 시행한단 말입니까. 신의 생각에는 수령을 차임하여 보낼 때 선부(選部)를 엄중히 당부하여 체면이나 개인 사정에 구애받지 말고 인물과 고을을 서로 비교 요량하되 그 인물이 그 고을의 일에 힘겨운가 수월한가 서투른가 익숙한가 하는 문제만 따져 각기 능력에 맞도록 한다면 수령을 고르는 보람이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해변의 송산(松山)이 날로 황폐해지는 일은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신은 남쪽 고을에 있었으므로 송정(松政)에 대한 폐단을 익히 압니다. 본도의 세 조창(漕倉)과 좌우 각 읍진(邑鎭)에서 사용하는 선재(船材)는 왼쪽으로 순천(順天)·흥양(興陽)과 오른쪽으로 강진(康津)·해남(海南)에서 나오는데, 근년에 봉산(封山) 소나무 가운데 선재로 쓸 만한 것은 이미 다 베어버렸고 자라나는 어린 소나무는 벌레의 침해를 많이 받아 재목으로 쓸 만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소나무를 사용하는 요소를 또한 줄여야겠습니다. 전선(戰船)은 변고를 대비하는 용도이므로 하나라도 줄일 수 없습니다만 군산(群山)·함열(咸悅) 두 조창의 경우는 그것을 하나로 합친다면 조선(漕船) 수십 척을 줄일 수 있으니, 섬 지방의 소나무를 아끼고 기르는 정사로 볼 때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두 곳에 창고를 갈라놓은 것은 해만 있을 뿐 이익은 없으니, 송재(松材)를 소비하는 한 문제뿐만은 아닙니다. 삼가 원컨대 묘당과 일찍이 감사를 지낸 자에게 하문하여 조처하소서.
품직(品職)을 추증하는 것 또한 관직 제도에 관계되는데 옛날에는 공경 대신의 자식이라도 증여하는 벼슬은 굳이 이조(吏曹)의 벼슬만 아니라 병·호·공·형조의 벼슬도 다 줬으며, 선조(先朝) 때 법을 정해 3대를 옥서(玉署)에 벼슬한 집안으로 한계를 짓고 그 나머지는 명문거족이라 해도 다 호·병조의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법이 너무 한계가 없어, 품관(品官)을 지내지 못한 먼 시골 사람들도 수직(壽職)으로 동지(同知)를 지냈을 경우 호·병조의 벼슬을 추증하면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지 않으며,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응당 증직을 받을 자는 호·병조를 수치로 생각하여 간혹 받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호·병조를 수치로 생각하여 그 증직을 받지 않는 자도 사실 잘못입니다만 당초에 관직 제도를 엄격히 하던 본의가 도리어 흐려진 경향이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명문대가는 3대가 다 옥서를 거치지 않았더라도 전조(銓曹)의 신하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하여 보다 더 후하게 해주는 방도를 생각하게 하며, 호·병조의 증직은 더 자세히 따지고 살펴 시행함으로써 요즘과 같은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처음에 거론한 조항들은 그대의 말이 다 현실적인 일로서 매우 가상하다. 그중에 몸으로 가르치라는 말은 더욱 좋으며, 덕이 재주보다 우수하고 본바탕이 겉모양보다 나은 은사를 널리 구하고 문벌이 좋은 자를 가려 양방(兩坊)에 두지 말라 한 것은 곧 내가 자나깨나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이고, 그 은사를 찾아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시 더 명심할 생각이다.
덧붙여 진달한 예악과 기강 등에 관한 설은 또한 옳은 말이긴 하나 의리는 대체로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마르거나 바닥이 나지 않는다. 그 갈라진 줄기가 억만 가락이지만 결국은 같은 곳으로 가기 마련이니, 약수(瀹水)·제수(濟水)·탑수(漯水) 등 작은 물줄기가 회수(淮水)·사수(泗水)로 모이고 마침내는 강으로 흘러들어 바다로 모이니, 어찌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의 청탁으로 인해 한눈에 그것을 보고 청탁이 섞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는 이치를 아는 자라야만 이야기가 통할 것이다.
또한 요즘 과거법이 엄격하지 못한 폐단은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어제 연석에서 예조 판서가 그 폐단을 바로잡을 계책을 누누이 말하므로 그 말에 따라 그로 하여금 의견을 널리 물어 다시 여쭙게 하였으니, 자세한 내용은 조보(朝報)를 보도록 하라. 한 경전을 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 또한 예조 판서의 거조(擧條)가 있었는데, 요즘 간혹 일차강(日次講)에 시험해 보았더니 참 쉬웠다. 다만 늙은 선비는 본디 기억력이 좋은 자라도 정력이 미치지 못하니 어찌할 것인가. 나도 젊었을 때는 차례대로 외우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나 요즘 다시 완전하게 해 보려 하였더니 십중팔구는 구두가 서로 엇바뀌었으므로 늙은이와 젊은이는 서로 구별이 없을 수 없다는 뜻으로 영상에게 말했었다. 그 이유는 영상 또한 차례대로 외우는 것을 잘했었으나 이제 그렇게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이번 과거에 상경(上經)을 외우고 다음 과거에 하경을 외우게 하는 일은 어제 내린 거조(擧條)와 함께 대신에게 묻도록 하겠다. 《소학》을 강하는 일을 빨리 시행하는 문제는 대과(大科)의 강경 문제가 결말이 난 다음에 논의할 일이다.
문관·음관·무관의 수령을 고을을 바꿔 차임하자는 요청은 곧 고상(故相)이 바꿔 차임하자고 논했던 것으로서, 나는 항상 ‘지금 세상에 공수(龔遂)와 황패(黃覇) 같은 순리(循吏)를 얻기가 쉽지 않으니 서로 자리를 바꾸어 맡기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대의 말을 전조(銓曹)의 신하에게 하명하여 다시 좋은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겠다.
송정(松政)을 철저히 하는 문제는 또한 현재의 급선무라 말할 만한 것으로 마음에 항상 잊지 못하고 있다. 전선(戰船)과 조선(漕船)을 통용하게 한 다음에 그 나머지 문제를 천천히 논의해야 할 것이다. 군산과 함열의 창고를 통합하는 일은 그대의 말에 따라 대신과 전임 감사에게 의견을 물어 그들로 하여금 초기(草記)하여 올리게 하겠다. 또 관직 제도 문제에 대해서는 해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의정부가 가려뽑아 아뢴 강제 문신(講製文臣)은 이영하(李泳夏)·여동식(呂東植)·김매순(金邁淳)·김기은(金箕殷)·신위(申緯)·윤일규(尹日逵)·심영석(沈英錫)·조정화(趙庭和)·오연상(吳淵常)·김후(金𨩿)·조종영(趙鍾永)·윤정렬(尹鼎烈)·조석정(曺錫正)이었다.
4월 22일 갑진
남공철(南公轍)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이의필(李義弼)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4월 24일 병오
병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이 어미의 병세를 상소하여 아뢰고 체직해 줄 것을 청하였다. 허락하고 김재찬(金載瓚)을 그 후임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작년에 장령 홍석(洪)의 상소로 인하여 각도 향시의 과장을 각 고을로 돌려가며 설치하는 일이 좋은가의 여부를 각도의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 물어본 뒤에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각도에서 보고한 것에 의하면 모두 ‘감영에 과장을 설치하면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으니, 시험장에 오는 유생이 길이 먼 자는 항상 멀고 가까운 자는 항상 가까우며 감영 고을의 물가가 다른 곳에 비해 크게 뛰어올라 그 폐단이 적지 않고, 시관을 미리 정함으로 인해 혹시 분쟁이 일어날 소지도 있으며 감사가 쇄원(鎖院)하는 것 또한 사무에 방해가 될 염려가 있다. 중론을 널리 알아보니 옛날처럼 각 고을에 돌려가며 정하는 것이 좋다.’ 하였습니다. 사세상 어렵고 많은 사람의 소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각도 감사의 말들이 사실 일리가 있습니다. 더구나 당초에 감사가 시험을 주관했던 것은 대체로 전정(田政)을 복심(覆審)할 때 감사와 도사(都事)가 그 일을 주관한 사례에 따른 것으로서 고금의 상황이 서로 다릅니다. 감사가 시험을 주관하는 방식은 그대로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성상의 뜻에서 특별히 나온 것으로서 불합리하다고 말한 애기는 별로 없으나, 각도의 대소과 향시의 과장을 설치하는 일은 지난날처럼 각 고을에 돌려가며 정하고 경시관(京試官)과 도사(都事)가 시험관을 나누어 맡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희순(金羲淳)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4월 25일 정미
차대(次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번에 예조 판서가 아뢴 강경(講經)과 제술에 관한 일은 경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강경과 제술을 함께 실시하자는 말은 참 좋다고 생각하며, 대관(臺官)의 상소에서 거론한 바 이번 과거에는 상경(上經)을 시험보이고 다음 과거에는 하경을 시험보이자는 말은 과연 소득이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인재를 뽑는 방안은 마땅히 고을에서 천거하고 마을에서 선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지만 오늘날 그 방법을 시행하지 못하고 보니 여러 가지 과거 시험의 폐단을 갑자기 고치기 어렵다. 현재는 또한 시관이 적격자인지 유생이 글을 잘 읽었는지의 여부에 매여 있을 뿐인데 그에 관한 제도를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문제이다."
하니,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강경과 제술에 관한 과거법은 예판이 아뢴 말이 참 좋다고 봅니다. 대관(臺官)의 상소에서 거론한 바 한 경전을 강하는 일은, 옛날 선조(先朝)에 법을 정해 시행하다가 어떤 일로 인해 중단됐는데 이제 복구하여 그대로 시행한다면 반드시 그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비지(批旨) 가운데 늙은이와 젊은이를 구별해야 한다는 분부에 관해서는 실로 깊이 살피신 생각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나이가 50이 넘은 자라도 주석이 없는 경서 한 질이야 암기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대관의 상소 가운데 이번 과거에는 상경(上經)을 외우고 다음 과거에는 하경을 시험보이자는 말은, 한 경전에만 노력을 들이는 것보다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어영 대장 이득제(李得濟)를 파직하였다. 득제가 병조 판서 조진관(趙鎭寬)과 어떤 일로 언쟁을 벌였는데, 영의정 이병모가 체통에 관계된다 하여 파직한 것이다.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南公轍)을 잉임하였다.
장령 한계옥(韓啓玉)이 아뢰기를,
"근래에 먼 시골의 민속이 노인을 존경하고 어른을 대우하는 의리를 모르므로 몇해 전에 향음주례(鄕飮洒禮) 의식과 향약(鄕約) 다섯 조목을 팔도에 내려주어 그 당시 감사와 수령들이 각면(各面)과 리(里)로 하여금 훈장(訓長)을 뽑아 정해 집집마다 그것을 가르치게 하여 대단히 고무적인 풍속이 일어났는데, 겨우 2,3개월 거행하고 그만두어 어리석고 무식한 풍습이 지난날과 도로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신이 살고 있는 고을이 이와 같으니 각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청컨대 각도의 감사와 수령을 단단히 타일러 영원히 정식 절목으로 삼아 반드시 농한기를 틈타 그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감영 고을에서 어떻게 거행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니 별도로 당부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득신(李得臣)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4월 26일 무신
승지 조홍진(趙弘鎭)이, 삼도(三道)의 유생들이 와서 소개(疏槪)를 올렸으나 감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말로 아뢰자, 상이 상소 내용을 물으니 홍진이 아뢰기를,
"소개에 ‘감히 선대 임금의 무함을 신변하고자 하는 염원을 진달하여, 사첩(史牒)의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선조(先朝)에 대해 대의를 밝히고 한편으로는 후세 사람들의 의혹을 깨뜨리소서.’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필시 신축년104) 당시 청나라에 보낸 문자에 관한 일일 것이다."
하니, 홍진이 아뢰기를,
"그런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신축·임인 연간에 저쪽으로 보낸 문자는 흉도(凶徒)의 손에서 나왔으나 무신년 혼란을 평정한 뒤에 다시 사신을 들여보내 흉도의 죄를 자세히 말하고 아울러 흉도의 설이 그들쪽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각별히 엄금해 달라는 뜻으로 당부하자, 저쪽 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설을 유포하는 자를 전국에서 수색하고 아울러 알아듣도록 타이르겠다는 뜻을 우리측에 답해 보냈으니, 어찌 다른 말을 할 것이 있겠는가. 시골 유생은 이러한 전고(典故)를 모르므로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지만 태학(太學) 장의(掌議)는 서울 유생으로서 신축·임인년 당시 의리의 전말을 몰라 그 상소에 ‘근실(謹悉)’ 두 자를 썼으니, 이러한데도 태학의 집강(執綱) 반열에 끼워 둘 수 있겠는가.
몇해 전에 대신(臺臣) 이사렴(李師濂)이 사첩(史牒)의 일로 상소하였을 때 그 당시 고(故) 중신 황경원(黃景源)이 문서의 내용을 잘 알아 이 일을 연석에서 자세히 아뢰었고 고 지신(知申) 유당(柳戇)도 그때의 일을 연석에서 아뢰었는데, 그 사실은 기주(記注)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런 일이 있는 뒤에는 위로 조정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의리를 누가 모르겠는가. 장의란 직책은 유생들을 내쫓고 받아들이는 권한을 갖고 있는데, 당연한 의리라면 사실 막으면서 ‘근실’ 두 자를 쓰지 않아서는 안 되지만 이와 같은 사안에 대해서야 어찌 철저히 살펴보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지는 장의를 불러다가 이러한 분부를 빠짐없이 일러주고 그로 하여금 상소한 유생들에게 즉시 알려주게 하라."
하였다.
채홍리(蔡弘履)를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재자관(齎咨官) 김경위(金景瑋)가 올린 수본(手本)은 다음과 같다.
"황자(皇子) 삼아가(三阿哥)가 입학하는 날 숙친왕(肅親王) 영석(永錫)이 옥그릇 등 여러 가지 물품을 진상한 뒤에 그 사실을 황제에게 아뢰지 않고 본부(本府) 태감(太監)으로 하여금 황후의 주방에 전해주게 하여 태감이 그것을 받아 대신 올렸는데, 황제가 하유하기를 ‘짐은 친히 정사를 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려 공물 바치는 일을 중지시키고 뇌물의 왕래를 금함으로써 순박한 풍속으로 돌아가 우리 만주의 돈후한 기풍을 되찾자고 엄중히 재삼 훈계하였었다. 영석이 진상한 물품에는 옥그릇까지 들어 있었으며 또 그것을 황제에게 아뢰지 않고 사적으로 태감에게 보내 황후 주방에다 대신 바치게 하였으니 실로 크게 잘못하였다. 그가 맡고 있는 기한군 도통(旗漢軍都統)과 원명원(圓明園) 사무를 관리하는 직책을 모두 거두고 아울러 이 사건을 종인부(宗人府)에 넘겨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라. 앞으로 사치품을 사적으로 선물한 자가 한번이라도 발각될 때는 그 죄를 무겁게 다스리겠다는 뜻을 삼공(三公) 및 내외의 한족(漢族)과 만족(滿族) 대신들에게 통지하여 철저히 준수하도록 할 것이며, 각 친왕(親王)과 군왕(郡王)을 소집하여 영석이 진상한 물품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퇴각시키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진하 정사(進賀正使) 구민화(具敏和)와 부사 한용귀(韓用龜)가 장계(狀啓)하였다.
"황제가 본월 8일 북경에서 출발하여 연교(燕郊)의 큰길을 거쳐 10일에 융복사(隆福寺)에 당도하였는데 11일에 각릉을 참배하고 융복사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12일에 또 유릉(裕陵)으로 가서 청명절 부토례(敷土禮)를 거행한 뒤 도로 원래의 길을 경유하여 15일에 연경 남성(南城) 밖을 지나 19일에 양격장(梁格庄)에 이르러 각 릉을 참배하고 23일 부성문(阜城門)을 통해 돌아왔습니다. 동릉(東陵)은 계주(薊州)와 준화주(遵化州) 등지에 있는데 곧 강희 황제(康熙皇帝)와 건륭 황제(乾隆皇帝)의 능이고, 서릉은 역주(易州) 지방에 있는데 곧 순치 황제(順治皇帝)와 옹정 황제(雍正皇帝)의 능입니다.
15일 황제의 행차가 남원(南苑)을 지나갈 때 신들은 남원 소홍문(小紅門) 밖 지영소(祗迎所)로 나아갔는데 황제가 말을 타고 신들이 마중나온 곳까지 이르러 자세히 살펴본 뒤에 지나갔으며, 16일에는 황제가 남원 안에 있는 옛 아문(衙門)으로부터 출발하였는데 신들은 남원 서홍문(西紅門) 밖에서 마중하였습니다. 남원은 황성(皇城) 남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곧 황제가 사냥하는 곳으로 성의 둘레는 1백 60리입니다. 23일 행차가 돌아갈 때 신들은 부성문(阜城門) 밖으로 나갔더니 황제가 말을 타고 신들이 마중나온 곳까지 이르러 둘러보며 묻기를 ‘조선 사신인가?’ 하자, 구문 제독(九門提督) 포언달뇌(布彦達賚)가 곁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황제는 직례(直隷)·산동(山東) 등 여러 성(省)이 크게 가물어 4월 5일에 천단(天壇)에 행차하여 하룻동안 재계를 올리고 이튿날 새벽에 몸소 기우제를 거행하였으며 예가 끝난 뒤에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신들은 오문(午門) 앞으로 나아갔는데 황제는 의장대를 설치하지 않고 노란 지붕의 작은 가마를 타고서 신들이 마중하는 곳까지 이르러 가마 안에서 이러저리 둘러보며 지나갔습니다."
4월 27일 기유
신대현(申大顯)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전 어영 대장 이득제(李得濟)를 잉임하였다.
4월 28일 경술
이조원(李祖源)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4월 30일 임자
차대(次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저께는 비가 내릴듯 말듯 하였고 어제도 비가 내릴 기미가 있었으나 끝내 내리지 않았으니 농사를 생각할 때 실로 걱정스럽다."
하니,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여름철이 되면 비가 한번 내리고 한번 개일 때마다 성상의 마음이 안절부절하여 어제부터 오늘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염려해 마지않아 실로 옥체를 보양하는 면에 지장이 있으므로 신들의 마음은 매우 애가 탑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계복(啓覆)은 마땅히 해마다 해야 하는데 삼공(三公)의 인원수가 오랫동안 갖추어지지 않았고 지금은 갖추어졌으나 경이 국외로 나가게 되어 올해도 거행하지 못할 것 같다. 옛날에는 계복에 대한 판부(判付)가 자주 있었다. 선조(先朝)에 승지 윤동승(尹東昇)은 글씨를 빨리 쓰기 때문에 판부를 받아썼는데 이따금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으니, 그것은 판부가 많아 받아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지못해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의리로 볼 때 계복을 해마다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처럼 삼공의 인원수가 갖추어진 때에도 규례대로 거행하지 못하니,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에게 이르기를,
"어제 판하한 반민(泮民)의 옥사(獄事)는 인심이 금수와 거의 같은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만스러운 마음이 쉽게 분노를 자아내 그런 것이다. 중관(中官) 무리도 마찬가지이다. 고 부제학 신응시(辛應時)는 중관이 어찌 감히 유각모(有角帽)를 쓸 수 있느냐고 항상 말했고, 고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는 연석에서 중관의 제복(祭服)에 찬 패옥(佩玉)을 없애자고 여쭈어 중관 무리가 깊이 분개하였다. 옛날에는 조신(朝臣) 가운데 패(牌)를 찬 자가 극히 드물었는데 이는 그와 같은 것을 가지거나 차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이며 따라서 중관들도 패를 차지 않은 때라도 감히 마음을 먹지 않았었다. 그들을 끼어주지 않는 그와 같은 일로 인해 항상 불만스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원망과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앞으로 과거시험을 마땅히 엄격하게 해야겠지만 성균관 유생에 대해 강을 받는 일은 섣불리 논의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선조(先朝)에 원점생(圓點生)의 강경(講經)과 제술 시험을 보일 때는 강경을 먼저 치르고 제술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참다운 인재를 많이 얻었는데 강을 받을 때는 언제나 지루하기 짝이 없어 아무리 빨리 마친다 해도 3일 만에 겨우 다 받았었다. 오늘의 경우를 보면 일차강(日次講)과 갱시(更試)를 날짜를 따져 분배하면 한 달 동안에 받는 강이 16번이고 갱시도 몇 번이 있다. 그러니 한 달 30일 동안 강만 받느라 날짜가 모자라는 형편이고, 또 50, 60세가 된 늙은 선비가 강을 치르는 것 또한 어찌 한 자라도 그르치는 일이 없겠는가. 일단 강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만 주저앉고 마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닌가. 이 때문에 저번에 수의(收議)한 것에 대해 당장 비답을 내리지 않았으니, 이 또한 나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리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실로 지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동(安東)의 치적(治績)은 경과 김상묵(金尙默) 이후 오랫동안 거론된 자가 없는데, 이번 안동 향교 유생의 일에 대해 경은 말을 들어보았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저번에 이귀운(李龜雲)의 소개(疏槪)를 보니 놀랍고 분하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신은 그 내막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안동 향교 유생들이 서로 다투는 일로 귀운이 한 장의 소장을 올렸는데, 그 일은 곧 시골 사람들의 싸움이므로 조정이 이러쿵저러쿵할 것이 없어 본 소장을 이미 되돌려줬으나 오재소(吳載紹)의 행동은 옳지 않은 듯하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요즘에는 영남의 풍속도 쇠퇴해졌습니다. 안동과 예안(禮安)은 한 고을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옛날에는 안동의 백성이 예안 수령의 일을 감히 말하지 못하였고 예안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선정(先正)의 유풍이 자연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귀운이 안동에 대해 토민(土民)은 아니라지만 본 고을 수령을 죄주자고 청한 것은 크게 눈에 거슬립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사실 맞다. 해주(海州)는 본디 선정 문성공(文成公)105) 이 살았던 고을이지만 그 유풍이며 끼친 교화가 안동이나 예안보다 못하니, 그것은 그 순수하고 진실한 공부가 문순(文純)106) 과는 다소 차등이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선정 문성공께서 해주에 살았던 기간이 짧았고 또 해주의 풍속이 사나워 가르침으로 교화하고 감복시키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대전(大典)》을 가져다 살펴보니 ‘과장(科場)에 들어오는 사람으로서 조흘(照訖)과 호패(號牌)가 없는 자는 응시자격을 정지시킨다.’ 하고, 또 ‘조흘강을 대신 치러준 사람은 본인에 한해 수군(水軍)으로 충정(充定)한다.’ 하였습니다. 조흘은 곧 강을 통과했다는 체문(帖文)을 말하는 것으로 대·소과(大小科)에 전부 조흘첩(照紇帖)이 있으며 감시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강책(講冊)은 생원·진사시의 초시·복시에 다 학례강(學禮講)107) 이 있고, 시관은 성균관 박사 이하 관원이 예문관·승문원·교서관의 7품 이하 관원 및 감찰(監察)과 함께 나간다 하였으며, 《속전(續典)》에는 ‘양소(兩所)의 당하관 1원(員)은 이조에서 차출하고 예조 낭관, 성균관 관원, 감찰 1원은 각각 그 해당 관청에서 차출하여 보낸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대과에서 조흘법을 쓰지 않았고 감시의 초시에 《소학》만 강하였으며 시관에 대해서도 법대로 인원수를 갖추지 않아 유생들이 법전에 본디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해년108) 가을, 선조(先朝) 정해년109) 에 수교(受敎)한 당시 규정을 따르도록 하라는 명에 의해 일찍이 한림(翰林)을 지낸 사람으로서 춘추관의 직함을 겸한 자를 시관으로 뽑아보낼 때 간혹 사관(史官)이 감찰을 대신하여 나갈 때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사학 교수(四學敎授)와 성균관 관원을 시관으로 차출한 것은 오로지 일을 거행하기가 간편한 점과 강규(講規)를 엄격히 하기 위해서인데 예문관·춘추관 및 감찰 가운데서 뽑아 내보내는 것이 어떨지 여쭙고자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학 교수와 성균관 관원 가운데 춘추관 직함을 겸한 자를 함께 내보내되 만약 구차스럽다면 그 사정을 승정원에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한풍(李漢豊)을 좌포도 대장으로, 신대겸(申大謙)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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