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4월 1일 계축
함흥부(咸興府)에 화재가 나 1백여 가구가 연소되었으므로 영흥 부사 이명연(李明淵)에게 명하여 그곳으로 달려가 백성들을 위문하고 안정을 찾게 하도록 하였다. 정평(定平)에 또 화재가 나 역시 이명연을 심찰사(審察使)로 삼아 함흥과 마찬가지로 위문하게 하였다.
윤4월 3일 을묘
승지 이상도(李尙度)가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첫해에 과거시험의 폐단에 관한 윤음(綸音)을 특별히 내리시고 의정부와 관각(館閣)에게 명하여 각기 폐단을 바로잡을 계책을 올리도록 하는 등 의분에 겨워 그 폐단의 시정을 꾀하셨습니다. 다만,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한 사람도 그 숭고하신 뜻과 기풍을 선양하고 보좌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럭저럭 세월만 끌다가 결국 계획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일찍이 역대의 과거 제도를 살펴보았더니 서로 장단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모두 본디의 법을 대강 선택하여 시험을 보였습니다. 우리 태조조(太祖朝)의 공거법(貢擧法)도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실려 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경우는 공거설(貢擧說)에는 미치지 못하는 편이지만 모든 과거시험에 다 사관(四館)의 관원이 모여 앉아 단자(單子)를 받아 살펴보고 응시를 허락한 다음 응시자가 비로소 과장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으니, 이 또한 공거법의 일면을 약간 지닌 것입니다. 제한이라고는 전혀 없이 일체 받아들이는 근래와 같은 규례는 실로 지난 역사에 일찍이 없는 일입니다. 이제 조금이라도 바로잡으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응시자를 대폭 줄인 다음에야 규정에 관한 일에 손을 댈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 사대부나 초야에 있는 자를 막론하고 의견이 있는 자로 하여금 각기 책자로 갖추어 의견을 올리게 한다면 채택할 만한 말이 반드시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이미 크게 진작시키는 방도를 성상에게 기대합니다만 또한 틀림없이 성과를 거둘 만한 변통 방안이 있습니다. 《대전》에 의하면 과거시험은 본디 일정한 정원이 있습니다만, 분시(分試)와 향시(鄕試)로서 이를테면 증광시, 식년의 대·소과와 별시 등 과거시험의 초시 인원수는 다 중앙과 지방 팔도의 문물의 성쇠에 따라 많고 적은 차이가 있습니다. 당초 그 법의 취지는 본디 사자(士子)로 하여금 모두 본토의 시험에 응시하고 감히 본토를 벗어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경기 고을 유생으로서 서울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라도 반드시 한성시(漢城試)는 몇 사람, 경기시는 몇 사람이라고 말하였으니, 또한 그 한계가 매우 엄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로 전부 모아 치르는 과거를 자주 실시한 뒤로는 시골 선비가 곧장 서울 시험에 응시하는 일이 관습이 되어 분시와 향시까지 그 한계가 차츰 무너져 제멋대로 넘나들고 있습니다. 이에 본디 제고향에 살던 선비가 본도의 과장으로 가지 않고 서울 시험에 끼어든 자가 매우 많습니다. 당초 정원수를 정한 것은 이미 근거가 있는 것이었는데, 이제 서울 유생의 본디 정원수 가운데 태반을 시골 유생들이 점유해 버리니, 또한 어찌 법의 취지를 크게 잃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근래에는 시골에 사는 부정한 무리들이 분시가 있는 해마다 미리 서울로 올라와 형세를 관망하다가 유리한 대로 떠나거나 머무르면서 좋은 기회를 잡으려 하니 풍습이 매우 아름답지 못합니다. 서울 선비로서 시골 선비를 불러올린 사람이나 호적을 빌려 멀리 향시에 응시하는 자들은 모두 금지시킬 일입니다만, 굳이 따로 새로운 법을 세울 것이 아니라 다만 국법을 더 엄격히 밝혀 제각기 본토의 시험에 응시하고 행여 그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확실한 법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장의 응시자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또한 민심을 안정시키는 큰 정사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과거법의 폐단과 그 폐단을 고치는 일에 대해 성상께서 그 사정을 다 아시고 또 크게 노력하셨지만 24년이 지나도록 또 크게 변통하지 못한 것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서가 아니며 또한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를 미처 찾아보지 못한 때문만도 아닙니다. 각기 의견을 책자로 바치게 하여 한갓 형식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보다는 오로지 처음에 만든 법에 의해 과장을 엄격하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향시가 있을 때는 시골 선비가 경시(京試)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자는 말에 대해서는 옳은 말인 듯하나 한편 생각하면, 서울은 사방의 모범이 되는 곳으로 거느리는 것이 크고 포용하는 것도 매우 넓습니다. 그래서 북방에 유학할 뜻으로 응시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혹은 서울에서 기예를 겨뤄보고 싶어 찾아오는 자도 있는데, 이제 만약 왕래하는 길을 끊어버리는 법을 쓴다면 발이 묶여 불만을 품는 일이 없겠습니까. 승지는, 서울과 지방의 과거 인원이 각기 정수가 있는 것으로 시골은 시골대로 따로 치러야 한다는 근거로 삼았지만, 과거법 속에 이미 시골 선비는 경시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이제 법을 새로 시행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채택하지 마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였다.
"저번에 관서(關西) 사람 김도유(金道游)를 보고 그에게 주자의 책을 주면서 나의 허여하는 뜻을 나타냈다. 또 관북(關北) 유생 이원배(李元培)의 조대 경의(條對經義)를 읽어보니 치밀하게 잘 분석하였었다. 이로 인해 알찬 식견이 있다는 것을 알겠으니 그들을 북방학자라 말하더라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故) 지평 이재형(李載亨)의 후손은 세상에 그 존재가 없지만 어찌 과연 없다고 말할 것인가. 다만 들어보지 못해서일 뿐이다. 게다가 문필에 뛰어난 선비들이 풍호(豊鎬)110) 에 많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풍호는 오직 관북일 뿐이다. 사람이 문필에 뛰어나다면 하나의 영광스런 일이 되기에 충분하다.
경성(鏡城) 유학 이원배를 일찍이 군직에 임명하고 역마를 내주어 올려보내게 하였으나 나이가 많고 길이 멀어 올라오지 못한다 하니, 원배에게 새로 찍어낸 경서 및 《어정아송(御定雅誦)》과 《주서백선(朱書百選)》을 각 한 질씩 내려주고 아울러 경성 등 북관(北關)의 겸분교관(兼分敎官)에 차임하여 그로 하여금 경전과 주자의 글을 가르치게 하라. 그리하여 장차 북쪽 지방의 선비들이 모두 경전과 주자의 글을 잘 익혀 감사의 천거 단자에 오르는 자가 지금보다 몇갑절 불어난다면 이는 원배가 성심으로 가르친 공이 될 것이다."
윤4월 4일 병진
신대겸(申大謙)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김종진(金鍾眞) 등 경외(京外) 유생들이 상소한 일에 대해 대신에게 수의하였더니, 영의정 이병모(李秉模)는 말하기를 ‘오신(五臣)의 뛰어난 충절로서 뒷제사를 의탁할 곳이 없으니 유생들이 요청한 것에 대해 어느 누가 감탄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한편 생각하면, 제사드리는 이치는 지극히 정밀하기 때문에 제사를 맡아 지내지 않을 사람이 제사를 지내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제 10여 대 방손(傍孫)에게 그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과연 그 이치에 합당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후사를 세우는 예는 신은 감히 굳이 논하지 못하겠습니다. 양신(兩臣)111) 이 단호히 떠나 은거한 경우에 대해서는 마땅히 표창하는 은전이 있어야겠으니, 다시 널리 상고하여 조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는 말하기를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뛰어난 충절은 우주 사이에 찬란히 빛나고 있으니 오늘날 지사(志士)로서 어느 누가 크게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열성조에서 표창하고 받들어 보답하는 은전으로 보더라도 이미 서원을 세워 선비들이 그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있으니, 이는 천년토록 생고기 제물을 흠향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찌 사적인 집안에서 부조(不祧)하는 것으로 견주어 논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들 오신(五臣)은 후사를 세우지 않은 지가 4백 년이 가까운데 집안에는 대를 이어갈 만한 부자간이 없고 사당에는 서열을 가릴 만한 소목(昭穆)이 없으니, 장차 어디서 데려와 그 후손을 앉히겠습니까. 요즘 특별히 내리신 분부로 인해 한두 명신(名臣)에게 부조(不祧)의 은전을 내린 일이 있긴 하나 이는 제사를 받들 후손이 있고 사판(祠版)도 집안에 있는 경우이니, 그 일을 끌어다가 예로 삼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고 제학(提學) 이종검(李宗儉)과 고 감무(監務) 이지활(李智活)이 그 당시에 세운 지절(志節)에 관해서는 이제 유소(儒疏)에 논한 것을 살펴보건대 천년이 지났더라도 충분히 세상을 깨우칠 점이 있습니다. 다만 신은 미처 조야(朝野)의 사적(史蹟)을 상고하지 못해 감히 그 지절을 표창하는 막중한 은전을 쉽게 말하지 못하겠으니, 다시 해당 부처의 신하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품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충문공 성삼문 등의 드높은 충절은 천지를 지탱하고 일월을 관통할 만한 것으로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제사를 받들어 지냈으니, 성조(聖朝)에서 그 충절을 선양하고 보답해준 정도가 또한 지극하다 할 것입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사후의 일을 의탁할 곳이 없는 사정은 충신 의사로서 누구나 슬퍼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일입니다만 끊긴 대를 잇는 의리는 실로 윤기에 관계됩니다. 이제 수백 년 세월 10여 대가 지난 뒤에 본손이 아닌 지손으로 후사를 세우려 한다면 본종(本宗)을 옮기고 대수를 맞추는 과정에 반드시 예법의 뜻에 크게 걸리는 일이 있을 것이니, 한두 가지 기왕에 있던 사례를 끌어다 근거로 삼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고 제학 이종검과 고 감무 이지활이 절의를 지켜 은거한 일이 사실 제생의 말대로라면 풍속을 바로세우고 세상을 깨우치는 정사로 볼 때 마땅히 표창하는 은전이 있어야겠으나 다시 실제 사적을 널리 상고하여 조처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수의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윤4월 5일 정사
차대(次對)하였다.
윤4월 6일 무오
김달순(金達淳)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윤4월 7일 기미
전 포도 대장 신대현(申大顯)·이득제(李得濟)·유효원(柳孝源)을 서용하였다. 아울러 대현을 장용 대장(壯勇大將) 및 좌포도 대장에 잉임하고 효원을 우포도 대장에 잉임할 것을 명하였다.
윤4월 9일 신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세자빈을 두 번째 간택하였다. 전교하기를,
"행 호군(行護軍) 김조순(金祖淳)의 딸, 유학(幼學) 박종만(朴鍾萬)의 딸, 신집(申緝)의 딸을 세 번째 간택에 넣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세자빈을 세 번째 간택할 길일(吉日)로 품지(稟旨)하니, 전교하기를,
"삼가 현묘조(顯廟朝) 가례(嘉禮)의 《신묘년등록》을 따라 거행하고 길월(吉月) 또한 성조(聖祖) 가례 때의 길삭(吉朔)과 서로 부합되게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간택은 나중에 하교하겠다. 이미 두 번째 간택을 거행하였으니 대궐에서 육인교(六人轎)를 만들어 본가로 보내주되, 내수사 등 제궁(諸宮)의 원역(員役)과 무예 별감(武藝別監)을 차출하여 곁에서 보호하게 하고 별감 두 사람이 교자 앞에서 경호하게 하라."
하였다. 또 김조순에게 친서를 내리기를,
"오늘 재차 보고 나니 매우 다행스러움을 한층 더 깨달았다. 존엄하기로는 자전(慈殿)과 같고 자애롭기는 자궁(慈宮)과 같고 장중하기로는 내전(內殿)과 같아 그 차림새며 덕스런 용모며 행동이며 언어 등은 보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국모감으로서 재주와 용모가 뛰어나니 종묘사직의 경사가 어찌 이보다 좋을 일이 있겠는가. 이제는 사체가 별궁(別宮)과 다름이 없으니 지친간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들어가 보아서는 안 되며 관직을 가진 자가 어떤 사정이 있어 집에 찾아올 때는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서 말을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튿날부터 임금은 매일 액례(掖隷)를 보내 안부를 물었고 4전궁(殿宮)에서는 5일마다 봉서(封書)를 내렸다.
윤4월 10일 임술
약원(藥院)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좋은 철 상서로운 날에 두 번째 간택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니 실로 경사롭고 다행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조상에게 고하여 독단으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 먼저 진전(眞殿) 비궁(閟宮)에 참배하고 나니 내 마음에 일어나는 감회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어제 재차 살펴보고 하늘이 만든 배필임을 더욱 느꼈으니 참으로 기쁘고 다행스럽다."
하였다.
윤4월 11일 계해
이득제(李得濟)를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윤4월 13일 을축
차대(次對)하였다.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대한 친시(親試)를 거행하였는데, 초계 문신 김기은(金箕殷)이 신병으로 응시하지 않았다. 상이, 기은이 병을 핑계댄 것은 그 뜻이 심영석(沈英錫)과 함께 응시하고 싶지 않은 데 있다고 생각하고, 엄중한 분부를 여러 번 내린 뒤에 제신(諸臣)에게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김씨들 가운데 기(箕)자 항렬에 있는 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갑절 그 행실을 가다듬고 삼가해야 할 것이다. 오늘 거행하는 친시는 곧 그가 첫걸음을 내딛는 날인데 어찌 감히 병을 핑계로 방자하게 들어오지 않는단 말인가. 이는 신축년112) 에 이 제도를 실시한 이후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그가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나도 짐작하는 바가 있다.
대체로 의리란 고금이 다르지 않은 법이다. 나는 극히 중대한 의리에 관계되는 일은 애써 정밀히 다루기 위해 반드시 확고부동한 법을 쓰고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았는데, 더구나 옛날의 의리야 더욱 중대하지 않은가. 선조(先朝)에서는 그 일이 성궁(聖躬) 자신에게 관계되므로 상께서 간혹 관대한 은전을 내리실 때도 있었으니 뭇 신하들이 서로 논란을 벌였던 것은 사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조정에 있어서는 상황이 그때와 달라서 많은 신하들이 크게 분개하고 원망하니, 내가 그 의리를 천명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들였다. 오늘날처럼 사도(師道)가 엄연히 위에 존재하는 때에는 오늘의 신자(臣子)된 자로서는 사실 그 사이에 감히 입을 놀려서는 안 된다. 한번이라도 그에 관해 말을 꺼낸다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이는 진정 높은 곳에 오를 때 반드시 낮은 곳에서부터, 먼길을 갈 때 반드시 가까운 데서 출발하는 것처럼 반드시 먼저 지금의 이 의리부터 밝히고 준수한 뒤에야 비로소 옛 의리에 밝아질 것이다.
경들은 또 들어보라. 만일 그들에게 도리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죄에 걸려든 다음에 따라서 그들을 벌주는 경우인데, 그들로 하여금 미리 알지 못하게 만든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는 다 요즘의 나쁜 풍속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기강이 엄하지 않고 탐욕을 부리는 풍습이 날로 치성하여 하위 관원으로서 상관을 능멸하고 수령으로서 도리어 감사를 비방하기도 한다. 그 시초야 별것이 아니더라도 장차 파급되는 영향은 매우 크니 이는 곧 성인이 하찮은 일을 삼가는 이유인데, 조정의 위상이 높지 않고 백성들은 직무에 태만하는 등 모두가 이 모양이니, 이 때문에 나는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
예의로써 다스리는 것은 사실 나라를 다스리는 떳떳한 법이지만 삼대(三代) 이후에는 또한 부득불 형벌로 다스렸다. 형벌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사실 말단이긴 하지만 만일 범죄자를 징계하고 두렵게 하기 위해서는 또한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을묘년113) 이후 풍속을 바로잡는 정사를 오로지 정도로써 하여 혹시 군자의 도리가 신장되어 세상의 교화와 풍속의 흐름에 일대 개혁이 일어나는 성과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도리어 그전에 비해 더 나아진 것을 볼 수 없으니, 진정 한탄스럽다. 나의 못난 덕으로 위 무공(衛武公)이 90세에 스스로를 경계한 일은 견주어 말할 수 없으나 거백옥(蘧伯玉)이 50세에 49세까지의 잘못을 깨달은 일은 한번 따라보고자 노력하고 싶은데, 어찌 그처럼 최상으로 여기는 규범을 그자 한 사람 때문에 조금이라도 변동할 수 있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병모 등이 황공하여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는 조정 안에 원기가 충만하였기 때문에 위에서 간절히 가르치지 않더라도 의리가 저절로 밝아졌으나 이제는 원기가 차츰 쇠약해지고 인물의 수준이 차츰 떨어져 의리가 날로 어두어지는 우려가 있으니, 어찌 오늘과 같은 훈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나는 사실 선조(先朝)의 성덕(聖德)에 크게 미치지 못하니 어찌 감히 건극(建極)의 통치를 바라겠는가마는 또한 어찌 쓸데없는 헛소리로 시고 짠맛이나 조절하는 하찮은 생각을 하겠는가. 대체로 건극이란 말은 제왕이 통치의 준칙을 세운다는 ‘황건기유극(皇建其有極)’을 말한다. ‘극(極)’ 자의 뜻은 옥극(屋極)이니 북극(北極)이니 하는 극 자와 같으니, 곧 최상의 선이 있는 지점이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의리 또한 나름대로 최상의 선이란 것이 있는데 밑에서 내뜻에 응해주기를 이와 같이 하고 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주자소(鑄字所)를 의장고(儀仗庫)로 옮겨 설치하였다. 검교 직제학(檢校直提學)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주자소는 곧 어정 책자(御定冊子)를 찍어내는 곳으로서 당초 설치할 때의 규모는 태종조(太宗朝)의 고사를 따랐으니, 가볍지 않은 체모와 소홀히 하기 어려운 사정은 운각(芸閣)보다 한층 더 중하다 할 수 있는데,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의 직소(直所)가 연이어 들어와 자리잡은 뒤로 본소(本所)를 옮겨 설치할 장소를 물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홍화문(弘化門) 오른쪽 익랑(翼廊)의 의장고 대청(大廳)과 동북 위장소(東北衛將所) 및 어영군 번소(御營軍番所) 등 도합 10여 칸을 차지한다면 가까스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겠습니다. 의장(儀仗)은 돈화문(敦化門) 좌우의 익랑이 본디 의장을 나누어 두었던 곳이니, 그쪽에다 합치는 것이 형편상 매우 좋겠으며, 동북 위장소는 본디 일정한 장소가 없어 일찍이 여러 번 옮겼던 일도 있으니 장서각(藏書閣) 행각(行閣)으로 또한 옮기게 하는 것이 좋겠고, 입직(入直)하는 향군(鄕軍)은 그 수효가 많지 않으니 선인문(宣仁門) 근처로 이주하든지 아니면 동룡문(銅龍門) 직소로 나누어 자리잡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와 같이 분배한다면 별로 문제될 만한 소지가 없겠습니다만, 사안이 관청의 이전과 군병(軍兵)의 거취에 관계되어 감히 독단으로 조처할 수 없습니다."
하니, 따랐다. 만수가 또 아뢰기를,
"춘방은 주자소에 들어가 자리잡았으나 계방은 고문관(考文館)의 옛 위종사(衛從司)에 임시로 자리잡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제는 주자소가 의장고로 이전하게 되었으니 계방의 직소가 춘방의 동쪽 행각(行閣)으로 들어가 자리잡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집의(執義) 조윤수(曺允遂)가 아뢰기를,
"당나라 신하 한유(韓愈)의 말114) 에 ‘간관(諫官)은 지위가 낮지만 그 역할은 재상과 비슷하다.’ 하였습니다. 재상은 지위가 높으므로 그 일을 행하고 간관은 낮으므로 그 말을 행하는데 말이 시행되면 도 또한 따라서 시행되는 법이니, 부여받은 책임이 이와 같이 막중합니다. 삼가 보건대 요즘 간관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한 것이 또한 큽니다. 지금 당연히 말해야 할 일을 금령에 저촉된다고 말하고 지난달에 이미 윤허된 문제를 처분만 기다릴 뿐이라고 말하며, 백관의 규율을 잗단 일이라 하여 말하지 않고 민사와 국정의 폐단을 진부하다 하여 논하지 않으면서 빈연(賓筵)에 참석하여 그 자리만 채울 뿐이고 대청(臺廳)에 나와 낡은 종이쪽만 전달할 뿐입니다. 이미 말을 꺼내 국사를 논하여 맡은 바 책임을 조금이라도 수행하지 못하고 보니, 또 어쩔 수 없이 우물쭈물 뒤로 물러나 혹은 병가를 신청하여 거드름을 피우는 것을 일삼고 혹은 피혐하여 체직되기만 바라는데, 제수하는 교지를 받으면 고달픈 직함에 걸려들었다 하고 체직하는 명을 받으면 꺼림칙한 옷을 비로소 벗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대각(臺閣)의 직책에 있는 자는 대부분 그 직책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니 국가가 간관을 설치한 목적이 과연 이런 것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이 대각을 대하는 점에도 미진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만일 그 관직에 앉아 그 책임을 맡을 대상을 엄격히 선발하여 하찮은 자는 감히 의망에 끼어넣지 못하게 하고 그 책임을 무겁게 부여하여 무능한 자는 그에 대한 견책을 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공론이 밑에 존재하여 위에서 나오지 않고 국론이 법대로 신장되어 사적인 세력에 굽히지 않는다면, 대각에서는 비로소 대관의 중대함을 알 것이고 그 자리에 뽑혀 그 책임을 맡은 자도 반드시 감격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허물을 바로잡고 비리를 규찰하는 기풍과 혼탁한 것을 밀어내고 맑은 것을 선양하는 논조는 사실 모든 사람에게 다 요구할 수는 없지만 의견이 있는 자는 반드시 드러낼 것이고 할말이 없는 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반드시 오늘날처럼 책임감이 없이 남의 꽁무니만 따라다녀 관직을 유기하는 죄를 범하는 상황과는 다를 것입니다. 청컨대 대간의 직책은 여느 관료와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언로는 국가의 원기에 관계가 있다는 것을 살피시어 이제부터라도 빨리 선부(選部)에 명하여 반드시 명망이 있고 말을 과감하게 하는 사람을 뽑아 직책을 맡겨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조정의 위신을 높이고 대각의 위상을 중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명문이 문란하여 구별이 없고 기강이 해이해져 활발하지 않은 것은 세상의 도의가 흐려지고 습속이 야박한 데에 그 원인이 있긴 하지만 그 근원을 깊이 따져보면 대각이 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만일 조정 안에서 시비를 가려내고 백관들 사이에 잘잘못을 논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풍속을 바로잡아 옳은 길로 인도하여 미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방해하거나 무시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로 말미암아 사유(四維)115) 가 반드시 신장되고 오품(五品)116) 이 반드시 순조로와질 것이니, 그 책임의 의미가 과연 어떻습니까.
옛날 선정신 조광조(趙光祖)가 도헌(都憲)으로 있을 때는 남녀가 길을 구분하여 다니고 항간에 범죄가 없어 태평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그것이 미담으로 전해오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책임이라고는 전계(傳啓)와 분대(分臺)를 하는 데 지나지 않아 저 상대(霜臺)가 관원없는 관청으로 변했으니, 도리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 있는 기타 각조(各曹)보다 못하여 풍문까지도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뭇백성이 무엇으로 인해 행동을 삼가겠으며 풍속이 무엇으로 인해 바로잡히겠습니까. 대로상에 변괴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항간에는 참람한 일이 풍속을 이루어 명분이 무엇이고 기강이 무엇인지를 모르니, 이 어찌 가슴이 섬뜩하여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지금부터 그 인물의 선발을 엄격히 하고 책임을 무겁게 맡겨 그들로 하여금 수시로 관청에 나와 풍속 교화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사안이 큰 것은 공문을 보내 따져물어서 조처하고 작은 것은 곧장 다스려 교정함으로써 명분을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는 계기가 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그대 말은 매우 좋으나 적임자를 얻고난 다음 관청에 좌기(坐起)하는 제도를 복구하는 문제에 관해 논의할 일이다."
하였다.
윤4월 15일 정묘
약원(藥院)의 제신(諸臣)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신년117) 이전에 종로(鍾路) 이북에 살던 한 무리가 권세가 너무 크고 지위가 너무 높았는데 그 즐거움과 지위를 오랫동안 지키기 위해 스스로 네 충신의 집안에 의탁하여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 세력을 빙자해 공갈을 자행할 계획을 꾸미면서 스스로 누가 감히 나를 깔볼 것이냐고 여겼다. 그 당시 사류의 논조를 보면 ‘의리란 고금이 다르지 않다. 신축·임인년에 의리를 세운 저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은 사실 충신이지만 충신의 후손이라 하여 행여 그 흉역의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옛날 의리가 오늘의 의리에 부합되어 길이 천추만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나도 그 논조에 크게 동의하였다. 그들의 정상은 이미 의리가 크게 밝아진 때에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고 또한 스스로 도마 위의 고기꼴이 된 것을 알고서 마침내 만고에 없던 흉역을 자행하고 말았는데, 그런 지가 지금 몇년이 지났기에 감히 이처럼 무엄한 버릇을 자행한단 말인가.
이러한 의리는 조리가 분명하다. 지난날에는 조정의 원기가 충실하여 사류들 사이에도 의리를 강명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지금은 원기가 날로 위축되고 보니 과연 어떤 꼴이 되었는가. 의리를 강명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은 자는 현재 좌상 한 사람만 남았는데 좌상도 늙었다. 후진들은 필시 저번 연석에서 한 분부에 대해 도리어 의리에 어두워서 그렇다고 여길 것이다. 이른바 병이 났다고 한 자도 그 용모를 보면 제 가슴속에 아무런 주장도 없는 것 같았고 공격한다고 하는 그것도 말이 되지 않으니, 이른바 공격을 받은 사람의 일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이 일이 선조(先朝) 때라면 혹시 충성 충(忠) 자로 인정하거나 공적 공(功) 자로 포상할지 모르지만 지금 나는 그저 그 가운데 약간 논의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무엇을 아는 것이 있기에 이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참으로 가소롭다."
하니,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자세하신 분부로 그 의리를 환하게 분석하시니 오늘 연석에 나온 제신들 또한 반드시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선 신들 자신부터 어찌 감히 밖에 나가 그 사정을 일러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은모(李殷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4월 17일 기사
팔도 구관 당상(句管堂上)의 예에 따라 이서구(李書九)를 화성 구관 당상(華城句管堂上)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화성에 소속된 다섯 고을의 곡물을 호조와 상평창(常平倉) 등 곡식으로 환작(換作)하고 《통편(通編)》의 법에 따라 모곡(耗穀)을 받아 본읍의 공적인 비용으로 보충할 것을 명하였다.
윤4월 19일 신미
봉조하(奉朝賀) 이명식(李命植)이 죽었다. 전교하기를,
"중신(重臣)은 조정에 들어온 지 50년 동안 지방에 나가서는 양계(兩界)·사도(四都)118) 에서부터 영호(嶺湖)·내만(萊灣)119) 등 각 지방의 관직을 두루 지내면서 있는 힘을 다 쏟아 그 공적을 살펴볼 때 곳곳마다 좋은 성과를 올렸으며, 조정으로 들어와 금곡(金穀)과 갑병(甲兵)을 맡았을 때 법을 지키는 일에 엄격하였다는 것도 깊이 인정했던 바인데, 중간에 변고를 만나 모든 것을 다 그 시비를 가리지 않겠다는 자세로 대하여 자신의 본심을 밝히기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이제 그러한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보니 어찌 애석한 마음을 가눌 수 있겠는가. 죽은 봉조하 이명식에 대한 조문과 제사를 관례에 따라 거행하고 제문 속에 이상과 같은 말을 만들어 넣도록 하라."
하였다.
진하 정사(進賀正使) 구민화(具敏和)와 부사 한용귀(韓用龜)가 장계로 아뢰었다.
"황제가 4월 6일 기우제를 지낸 뒤로 비가 전혀 내리지 않으므로 정전(正殿)을 피해 물러앉아 감선(減膳)하면서 13일부터 재계에 들어갔는데 16일에는 의친왕(儀親王) 영선(永璇)·정친왕(定親王) 영성(永瑆)·예친왕(睿親王) 영린(永璘)을 나누어 내보내 황제를 대신하여 천단(天壇)·지지(地祗)·태세(太歲) 등 세 제단에 기우제를 거행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또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흩어져 비내릴 기미가 더 희박하므로 19일에는 면과(綿課)를 파견하여 풍신묘(風神廟)에 기도하고 21일에는 재계궁(齋戒宮)에 행차하여 3일간 재계하였습니다. 24일에는 사직단에서 황제가 직접 기우제를 거행하였는데 예부에서 신들에게 오문(午門) 밖에서 지영(祗迎)하라고 알려왔으므로 신들은 서장관 유정(柳畊)과 오문 앞으로 나아가 한족(漢族) 시랑(侍郞) 조성만(曹城滿), 시랑 문녕(文寧)과 함께 지영소(祗迎所)에 당도해 보니, 황제는 소복차림으로 걸어다녀 스스로 폄하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조신(朝臣)의 영접과 전송을 일체 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므로 줄지어 서 있던 제신들이 각자 물러나 돌아갔고 신들도 즉시 관소로 되돌아왔습니다."
윤4월 24일 병자
민태혁(閔台爀)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차대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김달순(金達淳)을 불러 접견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가도(呵導)하는 제도는 또한 의장(儀章)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일찍이 무술년120) 에 홍문관에서 초기(草記)·비지(批旨)와 역대 당(唐)·송(宋)의 제도 및 국조의 옛법을 널리 상고한 결과, 노부(鹵簿)가 있는 자와 없는 자, 쌍인(雙引)과 일인(一引), 대궐 안과 대궐 밖, 전도(前導)와 가도(呵導) 등 구분과 1품부터 4품까지 문·무관의 봉명(奉命)과 추조(趨朝) 등의 구별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특별히 교서를 내려 일정한 법을 확실히 밝힌 일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성상께서 대궐의 위상을 높이고 제도를 엄격하게 지키자는 거룩하신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조정의 모든 신하로서는 스스로 그 뜻을 삼가 받들어 거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옥당의 관원이, 옛날에는 옥당 관리는 대궐 안에서 가도를 행하였으나 요즘은 하교로 인해 행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에 대해 규례에 어둡다고만 말하고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대궐 안에 가도하는 일은 승지와 대각(臺閣)이 아니면 행할 수 없고, 내각(內閣)의 직제학(直提學)·직각(直閣)·대교(待敎)들만 금패(金牌)로 전도를 행했던 호당(湖堂)의 고사에 비추어 그 가도를 허용했을 뿐이며, 그나마 시임(時任)이 아니면 검교 각신(檢校閣臣)이라도 행할 수 없습니다. 옥당 관원은 그 전례가 홍문관 하인으로 하여금 앞에서 인도하게 했을 뿐, 애당초 가도하는 예가 없었으며 납패(鑞牌)는 대궐 밖에서만 행하였는데, 이제 만일 옥당으로서 승지와 대각이 하는 일을 행한다면 규례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사실 다른 관리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춘방(春坊)이 전도를 행하는 것도 옥당과 같은 경우로서 저번에 하교하신 일로 인해 이미 그와 같은 사정을 알려주기는 했으나 이 일의 전례가 그렇다는 것을 삼사(三司)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자세히 모르는 자가 많이 있을 수 있으니, 한번 일정한 규정을 분명히 밝혀두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청컨대 그 내용을 써서 홍문관과 시강원에 게시하여 각자 그것을 보고 따라 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국 구관 별회곡(備局句管別會穀)을 경기·호서·관동 세 도에 비치하였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저번에 호조 판서 이재학(李在學)이 아뢴 일로 인하여 곡부(穀簿)를 가져다가 살펴보았더니, 각도에 있는 호조 원회곡(元會穀)은 도합 30만여 석이나 되는데 어느 도든간에 한번 들어온 것은 내보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양서(兩西)와 북관(北關)은 으레 군향미(軍餉米)와 전세(田稅)를 가져다 쓰고 있으니 사실 예전처럼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으나, 그 나머지 다섯 도는 원회곡의 1년 모조(耗條)가 8백여 석 정도에 지나지 않아 상진곡(常賑穀)의 이록(移錄)을 허용하지 않은 뒤로는 각종 공용(公用)을 항상 다른 아문의 곡물을 옮겨 가져다가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곡물의 주인인 아문에 회감(會減)하느라 가하(加下)하는 일이 많아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현재 경기의 가하미(加下米)는 각곡(各穀)이 5천 9백여 석이고 호서의 가하미는 각곡이 4천 6백여 석이고 호남의 가하미는 각곡이 9천 9백여 석이며, 영남은 현재 가하미가 없으나 그곳도 매우 곤궁합니다. 관동 지방은 근년에 발생한 가하미를 본도에서 이미 상진곡으로 옮겨 등록한 형편이니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 도에서 발생한 가하미 2만여 석은 담당 당상관이 아뢴 말대로 우선 상진곡으로 그에 상당하는 수량을 따져 옮겨 등록하도록 하고, 관동 지방의 이미 상진곡으로 옮겨 등록한 것에 대해서도 예전처럼 시행하게 해야겠습니다.
앞으로 지출하여 쓰는 방안에 관해 수량을 비교 절충하여 별도로 변통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양남(兩南)은 상진곡이 아직은 약간 여유가 있으므로 원회곡을 침범하여 쓸 염려가 없으니 원회곡의 부족한 수량을 예전처럼 상진곡으로 옮겨 등록하여 가져다 쓰게 해야겠으며 경기·호서·관동 지방은 원회곡이나 상진곡의 사정이 다 어려워 장차 다른 아문으로 옮겨야겠습니다.
경기는 본도에 있는 것으로는 호조가 관장하는 반분조(半分條)로서 경술 무조(庚戌貿租)가 1만 1천 5백여 석이고 비국이 관장하는 진분조(盡分條)로서 영진곡(營賑穀) 가운데 기장과 벼가 각 1만 석, 봄보리가 5천 석이며 영남에 있는 것으로는 반분조로서 우병영곡(右兵營穀) 가운데 쌀이 1만 석, 벼가 1만 7천 석입니다. 호서에 있는 것으로는 호조가 관장하는 반분조로서 기유 무미(己酉貿米)가 1만 2천 석이고 비국이 관장하는 진분조로서 북곡(北穀) 가운데 벼가 2만 5천 석, 영남곡(嶺南穀) 가운데 벼가 1만 2천 5백 석이며, 관동은 본도에 있는 반분조로서 비국의 구관곡 가운데 쌀이 2백 석, 대두(大豆)가 8백 석, 벼와 좁쌀이 각 5백 석, 메밀이 1천 석, 봄보리·가을보리·팥이 각 4백 석, 귀리가 2천 석이고, 영남에 있는 반분조로서 우병영곡 가운데 쌀이 1만 6천 석, 벼가 2만 6천 석입니다. 이것을 모두 쌀로 환산하면 9만 1백 86 석입니다.
이것을 특별히 덜어내어 세 도로 나누어 주고 그것을 비국 구관 별회곡(備局句管別會穀)이라 이름하여 비국에게 관장하되, 반분조는 예전대로 절반을 나눠주고 진분조는 역시 예전대로 전부 나눠주며 연말에 본사(本司)에서 마감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회안(會案)을 책자로 만드는 것은 원회곡의 규례에 따라 각읍에서 네 등급으로 나누어 손질하여 호조로 보내게 하며 호조는 각읍에 대해 조처할 때 그 모조(耗條)를 약간씩 떼어주어 각읍으로 하여금 지출해 쓰게 하고, 해마다 연초에 1년 동안 옮겨 떼어준 수량을 합산하여 그것을 수합해 본사로 보내게 해야겠습니다. 각종 휼전(恤典)을 실시할 때 원회곡을 쓰거나 혹은 상진곡을 쓰거나 하여 도마다 규례가 서로 다른데 앞으로는 휼전과 관계된 모든 비용은 일체 진휼청 곡물로 회감(會減)하게 하며, 관동에서 바치는 사옹원(司饔院)의 백토값은 뱃삯과 함께 영남의 규례에 따라 선혜청의 곡물로 회감하게 하는 일을 법으로 정해 시행한다면 그 면모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충분히 원회곡과 상진곡이 서로 유지되는 방안이 될 것입니다. 경기와 관동으로 갈라 떼어줄 호남과 영남에 있는 곡물은 원회곡을 다른 곡물로 바꾸거나 모조(耗條)를 가져다 쓰거나 간에 해조와 해도에서 나름대로 의견을 주고받아 잘 조처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현재 곡부(穀簿)가 번잡한 것이 실로 하나의 폐단이 되는 상황에서 다른 명색을 더 보탠다는 것은 절대로 곤란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곡물을 그와 같이 갈라주지 않는다면 각도의 형편이 차츰 지탱해나가기 어렵고 이미 곡물을 운용하면서 명색을 세우지 않으면 해조는 구별하여 회계할 수 없으며, 각읍에서도 어떤 이름으로 지적하여 보고를 올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처럼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폐단을 구제할 계책을 논한다면 무엇보다도 씀씀이를 줄여야 합니다. 요즘 지방 고을에서 공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은 잘못된 규례를 그대로 답습하여 항상 외람된 일이 많고 보고한 회안(會案)을 호조에서도 제때에 살펴보지 않으니, 서리가 법을 농락하여 간교한 짓을 자행하는 일이 반드시 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조를 엄중히 당부하여 각읍에서 올린 회안을 소급하여 철저히 조사해서 외람된 것을 낱낱이 없애고 이어 남아 있는 것과 줄인 실수(實數)를 별단(別單)으로 갖추어 아뢰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좌·우상에게 물은 결과 이의가 없었으므로 윤허하였다.
지평 신귀조(申龜朝)가 아뢰기를,
"합계(合啓)한 것 가운데 사계(四啓)는 그 관계되는 바가 과연 어떠하며 죄를 진 정도가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도 윤허를 하실듯 말듯 계속 뒤로 미루시므로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던 중 다행히 단호한 결정을 내려 그대로 따르겠다고 하셨습니다만, 한 달이 넘도록 귀를 기울이고 있어도 전지(傳旨)가 계하되지 않아 막중한 사계로 하여금 도리어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처지에 놓여 있게 하였으니, 신은 의아스럽고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청컨대 사계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는 전지를 즉시 계하하여 대간의 계사와 나라의 체모가 존중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탐욕을 징계하는 법은 국가가 중시하는 바인데 우리 전하께서는 항상 생민의 고통을 생각하고 늘 수령의 탐욕을 경계하여 여러 차례 명을 내려 엄중히 당부하셨는데도 탐관 오리는 오히려 징계되지 않고 있습니다. 숙천 부사(肅川府使) 임장원(任長源)은 임금의 은혜를 크게 입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마음과 행실을 가다듬어야 할 것인데, 아전(衙前)과 향임(鄕任)을 차출할 때 밝은 대낮에 공당(公堂)에서 뇌물을 공개적으로 받으며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기가 직접 그 값을 정했으므로 서도(西道)에서 온 사람들로서 침을 뱉고 욕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그를 귀양보내는 조처를 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읍의 저리(邸吏)들이 서로 매매하는 행위는 곧 서리나 하인들이 하는 일이므로 사대부가 거기에 간여한다는 것은 오히려 수치스럽다 할 수 있는데 더구나 재상이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한 달 전 경조저리(京兆邸吏)가 서로 송사를 벌이는 일이 발생하여 담당 당상관이 문기(文記)를 가져오라고 재촉하였더니, 판서 홍억(洪檍)의 집에 있다고 말하므로 그가 여러 차례 그 집에 재촉하였으나 끝내 들여보내지 않아 담당 당상관이 그만 송사를 퇴각시켜 아직까지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일이 해괴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청컨대 홍억은 그 죄를 물어 파직하는 조처를 내리고 송사를 퇴각한 담당 당상관도 죄를 물어 파직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담당 당상관의 일은 그 일의 사실 여부를 논하기 전에 송사를 퇴각한 이유로 남의 비난을 야기하였으니 아뢴 대로 조처하고, 중신(重臣)의 일은 연로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애매한 죄로 조처할 수 없으니 그 내막을 물어 아뢰어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공조 판서 홍억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신은 종형 참판 재(梓)의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일로 약간의 재력을 모아 그 문하생에게 넘겨줬다가 작년에 비로소 그것을 보내달라고 독촉하였더니, 저리(邸吏) 문권(文券)을 대신 바쳤으므로 처음에는 우선 가지고 있다가 결국 도로 내줬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풍문으로 전하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 중신의 위신으로서 어찌 깊이 인책할 만한 단서가 있겠는가."
하였다.
윤4월 25일 정축
홍낙유(洪樂游)를 이조 참의로, 성정진(成鼎鎭)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4월 26일 무인
차대하였다. 주청사(奏請使) 이병모(李秉模), 부사 이집두(李集斗), 서장관 박종순(朴鍾淳)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병모에게 이르기를,
"만리의 힘겨운 길을 경이 부디 잘 다녀오길 바라지마는 앞으로 날씨가 더울 것이므로 실로 염려스럽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이 사신으로 나간 일이 예전에 여러 번 있었는데 이번에는 즐거운 마음만 있을 뿐, 더운 계절에 여행하는 일이야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신은 삼가 구구한 충정이 있으므로 아뢸까 합니다. 성상께서 언제나 흐리고 개이는 날씨와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드는 농사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시는데, 백성을 위하시는 일념으로서 어찌 그처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힘쓰며 쉬지 않는 대성인의 공부로서는 간혹 그 강도를 조금 늦춘다 해도 반드시 털끝만큼이라도 그 생각을 지나쳐 넘길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고 애를 태우는 생각이 혹시 너무 지나치다면 도리어 몸을 보양하는 도리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삼가 바라건대 몸을 보양하는 일에 유의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스스로 헤아려 볼 때도 경의 말과 같으니 경의 말이 실로 옳다. 대체로 3백 60일 동안 어느 날인들 헛되이 지나쳤겠는가. 날이면 날마다 걱정하며 한 해를 보내는데 금년이 지나가면 또 내년을 걱정하곤 하였다. 이제는 정력이며 의욕 등이 차츰 떨어진 것을 느끼지만 내 마음은 항상 편히 쉬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후세의 사책에 게으를 태(怠) 자 한 자를 줄여볼까 하는 생각으로 모든 처사와 행동에 스스로 노력하려고 애쓰지만, 이 마음 자체가 인위적이고 보면 일이 어찌 이루어지겠는가. 자신을 한번 돌아볼 때마다 실로 매우 괴롭다. 연신(筵臣) 중에 나와 나이가 같은 자는 소년이나 다름없는데 나는 정력이 이러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어제는 날씨가 가문 것이 답답하여 도움말을 구할 생각으로 대신(臺臣)을 불러 접견하였는데 정언 김이도(金履度)는 나이가 50세가 지났는데도 그다지 늙지 않았다. 그 사람됨을 보니 고상(故相)의 전형을 많이 지니고 있어 실로 대견하였다. 고상은 문학에 종사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 꿋꿋한 지조는 실로 남보다 뛰어나 마땅히 영상 자리에 올라갔어야 하는데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늘날 회고해 볼 때 실로 잊을 수가 없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고상은 비록 언어 문자에는 종사하지 않았으나 그 사람됨은 관계가 가깝거나 먼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그를 믿었으니, 과연 얻기가 쉽지 않은 인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오늘날 인물은 옛날 인물에 미치지 못한다. 고상은 지난날 삼정승 자리에 올랐던 자로서 모든 것이 다 그 이후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으니, 경들이 고상에 대해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무리한 말이 아니다. 장신(將臣)으로 말하더라도 내가 등극한 이후 20여 년 사이에 오늘날 장신으로 있는 자 또한 앞사람보다 못한 자들이 많다. 나의 요즘과 같은 정력으로 밑에서 보좌해 주는 것이 혹시 예전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당장 백성들의 걱정거리와 나라의 살림을 장차 무슨 수로 해결하고 꾸려나갈 것인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들의 무능한 자질로 어찌 감히 옛사람 수준의 만분의 일이나마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먼길을 떠나는 경에게 시를 증정할 생각으로 새벽에 일어나 지어보았는데 아직 마무리가 안 되었다. 연석에서 물러난 뒤에 써서 내려주겠다. 옛사람의 이른바 새벽에 앉아 아침을 기다린다는 말은 사실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인의 공부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의지와 기개가 차츰 감소되어가는 이유로 수면도 따라서 달게 이루지 못하니, 이와 같은 정력으로 어찌 경들이 잘 보좌해 주길 깊이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년 이후로 헛이름을 구하는 일이 풍조를 이루고 기강이 올바로 잡히지 않고 있으니 이 점이 무엇보다 우선 시정해야 할 문제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힘쓰시는 우리 임금 온 사방의 기강이로세.[勉勉我王 綱紀四方]’ 하였다. 이를테면 ‘새기고 다듬은 고운 무늬 그 바탕은 금이며 옥이라네.[追琢其章 金玉其相]’라고 한 수준이야 쉽게 말하기 어렵지만 기강을 바로잡는 면에 있어서는 또한 분발하여 힘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지방의 고을로 말하면 선조(先朝) 50년 동안에 장리(贓吏)를 중률(重律)로 다스린 자로서는 안상오(安相五)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오늘날 이른바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자가 도리어 그보다 못한 경우가 있으며 감사로 있는 자도 분발하여 힘쓰는 사람이 없으니, 실로 한탄스럽다. 이러한 때에 경이 또 국경 밖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그 분발하여 힘쓸 책임은 오로지 좌·우상에게 매여 있다.
옛말에 ‘위엄있는 몸가짐은 지닌 덕이 엄정하다.[抑抑威儀 維德之隅]’ 하였다. 의장 등의 일은 겉치레이긴 하나 또한 체모에 관계가 있는 것이니 우선 오늘 거행하는 배표례(拜表禮)부터 재상 이하 모든 관원에 대해 의식을 제대로 거행하지 않는 자를 경들이 규찰하여 바로잡도록 하라. 대체로 날마다 시행하는 일상적인 일을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 말고 반드시 분발하여 헤쳐나간 뒤에야 기강에 관한 일을 바로잡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조정에 권간(權奸)이 있는 것은 어찌 좋은 일이겠는가마는 대체로 권간이 있을 때는 반드시 한시대에 분발하고 격려하는 일종의 공론이 있는 법인데, 근래에는 권간이 없기 때문에 조정이 조용하여 도리어 우유부단하고 침체된 풍조를 이루었으니, 이 또한 풍속이 진작되지 못한 일면이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듣건대 고상(故相)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나라에 권신(權臣)이 있는 뒤에 비로소 좋은 시대라 할 수 있다.’ 하였다 합니다. 권(權) 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니 만일 권 자 밑에 간사할 간(奸) 자 하나를 붙이면 사실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권력을 잡고 똑바로 일을 해나간다면 이른바 권신이란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자입니다. 예로부터 권신은 당(唐)·우(虞)·삼대(三代) 때보다 더 치성한 때가 없었는데, 신하가 권력을 쓰기를 실로 고(皋)·기(夔)·직(稷)·설(契) 등처럼 한다면 어찌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병모 등이 임금을 하직하고 연경으로 갔다. 주청(奏請) 주문(奏文)에 이르기를,
"삼가 아룁니다. 봉전(封典)을 내려 한 나라의 인심을 결속시켜 주시길 청하는 일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대대로 황제의 은혜를 입어 삼가 제후국을 지키고 있는데 나이를 많이 먹도록 종묘 사직을 의탁할 곳이 없다가 다행히 신령의 도움으로 경술년121) 6월에 신의 부실(副室)이 아들 모(某)를 출생하여 이제 11세가 되었습니다. 청수하고 아름다운 자질은 실로 나라를 책임지울 만하여 은전을 청해 국본(國本)을 세우는 것이 합당하겠기에 별도로 주본(奏本)을 갖추어 보잘것 없는 충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소국의 충정을 굽어 살피시어 특별히 해부(該部)에 명해 고지(誥旨)를 내리도록 하여 온 나라의 신민으로 하여금 총애를 받는 영광을 얻게 하신다면 다행스럽기 그지없겠습니다. 경사롭게 여겨주시길 바라며 아울러 봉전을 내려 한 나라의 인심을 결속시켜 주시길 청하는 일로 삼가 주문(奏聞)을 갖추었습니다. 위와 같이 삼가 아뢰어 성지(聖旨)를 기다립니다."
하였고, 진주(陳奏) 주문에 이르기를,
"삼가 아룁니다. 감히 소국의 충정을 토로하여 그 요청을 들어주시길 바라는 일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해변 한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황상의 은혜를 유달리 많이 입어 사정이 있을 때는 반드시 호소하여 모든 소원을 다 이룸으로써 국맥을 계속 이어가며 대대로 제후의 법도를 지키고 있으니, 그 큰 은혜에 감격하여 폐부에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신은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한 충정을 지니고 감히 그것을 인자하신 부모에 스스로 알리지 않을 수 없기에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신은 제후국의 왕위에 있는 몸으로 나이를 많이 먹었으나 국본(國本)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종묘를 의탁할 곳이 없다가 다행히 경술년에 신의 부실이 아들 모(某)를 낳아 신의 비(妃) 김씨가 데려와 아들로 삼았습니다. 나이는 지금 11세인데 타고난 자질이 청수하고 기국과 도량이 숙성하여 온 나라 신민들의 마음이 빨리 황성의 성지를 청해 미리 이름을 세울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께서 제왕의 도로 교화를 펴고 은혜를 내리는 인자하신 마음으로 항상 속국이 후사를 중하게 여기는 충정을 걱정하시어 큰 종이에 어필로 쓰신 복(福) 자를 하사하여 후사가 탄생하길 고대하는 감사한 염원을 보이셨습니다. 이는 실로 번신(藩臣)으로써 일찍이 얻지 못했던 특별한 은총이었는데 신이 아들을 얻은 때가 곧 그 해였으니, 그 은혜를 갚고자 하면 한량이 없습니다. 마땅히 즉시 봉전을 청해 복을 주신 높은 은혜에 보답했어야 할 일인데 나이를 좀 더 먹을 때까지 기다리느라 이제까지 지체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황상께서는 오로지 한 생각으로 선왕의 뜻을 계승하시어 온 누리의 나라가 우러러보며 의지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는 그 은덕을 한층 더 많이 입어 먼 지방을 안무한 교화가 이미 즉위하신 그 당시에 흡족하였고 소국을 보살피는 은혜는 내복(內服)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지난날 돌보아주신 은덕을 회상하고 오늘의 길러주시는 사랑을 생각해 볼 때, 삼가 호소하는 지금 사정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혹시 자애로우신 황상께서 역대 왕조의 전례에 비추어 해부(該部)에 칙명을 내려 하찮은 소원을 이루게 해 주신다면, 이는 황상의 선고께서 전일에 복을 내리시고 황상께서 나중에 재차 은덕을 내리신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신이 북쪽을 향해 축복을 드리며 있는 힘을 다해 다소나마 그에 보답할 각오를 다질 뿐만 아니라 온 나라의 모든 신민들도 장차 은혜의 물결이 동국에까지 미친 교화에 춤을 추며 기뻐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불구하고 우러러 은지(恩旨)를 내려 주시길 기원합니다만 원주(原奏)의 사체는 엄중한 것이라서 거기에 감히 잡다한 말을 하지 못하고 이처럼 따로 주본을 갖추어 충정을 남김없이 토로하였습니다. 지니고 있는 충정이야 전부 아뢰었으나 참람하고 경솔한 말이 더러 있으므로 신은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감히 우리 나라의 소원을 아뢰어 허락해 주시길 바라는 사안으로 삼가 주문(奏聞)을 갖추어 성지(聖旨)를 기다립니다."
하였다. 【모두 영의정 이병모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54책 54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67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외교-야(野) / 어문학(語文學) / 인물(人物) / 인사(人事) / 역사-고사(故事)
[註 121] 경술년 : 1790 정조 14년.
윤4월 26일 무인
전 지평 강성익(康聖翊)이 상소하기를,
"제주 지방이 자주 흉년을 만나고 연읍(沿邑)에서 곡식을 수송해 오는 폐단을 근심하여 비국에서 본주에 공문을 보내 창고를 설치하여 곡식을 거두어 흉년을 대비하라 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목사가 곡식 수천 석을 마련한 뒤에 별도의 창고를 세 고을에 신설하여 섬백성의 구황책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본주는 봄부터 가을까지 축축하고 후덥지근한 비바람이 없는 날이 없기 때문에 촌가의 방안에 항아리며 자루 속에 놓아둔 곡식이라도 몇년도 되지 않아 썩어 곰팡이가 생기므로 손만 대면 가루가 되어 끝내 먹지 못할 물건이 되고 마니, 옛날부터 섬안에 저축해 둔 곡식이 없는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또 더구나 흙으로 쌓은 창고에 많이 쌓아둔 곡식이 장마를 치러도 괜찮고 여러 해를 넘겨도 썩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무지한 섬백성들은 모두 생각하기를 ‘앞으로 나라에서 구제해 주는 일은 이 창고만 의지할 뿐 곡식을 옮겨오는 문제는 그 길이 영원히 막히게 되었으니, 수만 명의 백성들이 장차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고, 이구동성으로 그 제도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새로 설치한 창고에 저축해 둔 것을 적당한 수량을 헤아려 변통하되 꾸어주었다가 받아들인 다른 지방의 환자곡 가운데 잘 마르고 알찬 것을 골라 해마다 한 번씩 새 창고의 것과 바꾼다면 이쪽이나 저쪽이 다 온전하여 피해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아울러 본주의 국둔마(國屯馬)의 수효가 감축한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갑인·을묘년의 흉작은 역사상 일찍이 그 유례가 없던 일로서 소중한 인명도 미처 보전하지 못한 판국이라 미천한 마소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으니, 쓰러져 죽은 국둔마의 수효가 1천 5백 마리에 달했습니다. 그 당시에 목사가 ‘흉년을 치른 뒤라서 형편이 대징(代徵)을 하기가 어렵다.’는 사유로 장계를 올리자 비국에서 ‘5년을 기한으로 그때에 가서 전량 받아들일 것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공문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금년이 곧 받아들여야 할 해입니다. 그런데 몇해 사이에 굶어 죽은 목졸(牧卒)이 수없이 많아 죽은 사람의 몫으로 징수해 내는 일은 이미 말할 것도 없고 겨레붙이나 이웃사람에게 징수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 말 형편입니다. 이른바 개인소유로 기르는 것도 열 가구 중에 일곱 여덟 가구는 비었으니 관가의 명령이 아무리 엄중하더라도 어디서 사들여 바치겠습니까. 요즘에 와서 국가 소유로 기르는 말이 차츰 늘어나 현재의 수효를 갑인·을묘년 이전의 수효와 비교해 볼 때 조금 여유가 있는 형편입니다. 신이 육지로 나오려 할 때 뱃머리에서 호소하는 잔약한 백성과 목졸들이 며칠동안 끊이지 않고 찾아왔으니, 이는 실로 온 섬안의 민정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한번 들은 일을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는 시종신 가운데 먼 지방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 민폐를 지적하여 아뢰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곡물을 창고를 설치해 비치하자는 것은 그 당시 대신이 연석에서 아뢸 때, 섬백성을 위해 그들이 육지에서 보내오는 곡식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면하게 해 주자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의도는 사실 좋았는데,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으므로 묘당으로 하여금 초기(草記)로 품처하게 하여 양쪽이 다 편리하게 하겠다. 마정(馬政)에 관한 일은 공축(公畜)이 이미 앞서의 수효보다 늘어났다면 어찌 굳이 또 목졸에게 징수할 것이 있겠는가. 겨레붙이와 이웃사람에게 징수하면 그 폐단은 저절로 목졸 이외의 평민에게 돌아갈 것이니, 어찌 매우 불쌍한 일이 아닌가. 새로 부임한 수령이 아직까지 그에 관해 한마디 말도 없는 것은 그 직무를 유기했다 할 수 있다.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공문을 띄워 그 수효가 남은 사실을 즉시 해사에 보고하지 않은 곡절을 묻고 그로 하여금 조리있게 장계로 보고하게 할 것이며 회답이 내려가기 전에는 절대로 더 징수하지 말게 하라. 그대를 장령으로 삼겠으니 나중에 연석에 올라올 때 다시 섬안의 일을 아뢰어라."
하였다.
윤4월 27일 기묘
지평 신귀조(申龜朝)가 상소하기를,
"아, 위에는 요(堯)·순(舜)의 정치가 있으나 밑에는 받들어 협조하는 기풍이 없어 임금은 수고하고 신하는 안일한 가운데 문무 관원들이 하는 일 없이 놀고만 지냅니다. 공문서를 처결하는 하찮은 일도 책임을 지고 앞장서는 사람은 없고 재물과 금전의 면에서는 공무를 빙자하여 사욕을 챙기는 무리가 대체로 많습니다. 군문(軍門)에 전곡(錢穀)을 비축해둔 것은 군사상 필요한 물자를 지급하고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니 장신(將臣)으로 있는 자는 마땅히 창고를 정성껏 잘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리는 말에 의하면, 법을 지키는 것이 예전과 달라 재물의 씀씀이가 너무 헤프고 더러는 텅 빈 장부만 남아 있을 뿐 대부분 개인의 보따리 속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합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비국의 낭관을 차출해 보내 세 군문의 전곡과 포목(布木)을 장부를 조사, 부정을 적발하게 하고 만일 법을 범한 자가 있을 때는 그곳 군영의 대장에게 탐오율(貪汚律)을 가차없이 적용하여 징벌을 엄중히 시행하소서.
조정이 칙수고(勅需庫)를 설치한 것은 그 법을 만든 뜻이 매우 중대한데 요즘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해서(海西) 칙수고의 은전 수십만 냥이 각읍에 빚을 줬다가 받지 못하거나 이른바 개시 별장(開市別將)에게 한해 전에 미리 본전을 떼어주는 잘못된 규례로 인해 없어지고 현재 남은 것은 5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게다가 전 감사 박기정(朴基正)이 체직된 뒤 떠날 임시에 은전 2만 냥을 빚을 주고 왔다 하니, 자질구레한 행위에 대한 비난이야 신은 낱낱이 따져 말하고 싶지 않으나 창고를 잘 지켜야 하는 면으로 볼 때 진정 이처럼 내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청컨대 박기정은 그 죄를 물어 삭탈 관직할 것이며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해도에 엄중 지시하여 각읍에 여기저기 빚을 줬다가 받지 못한 것을 빠짐없이 받아들이고 개시 별장에게 본전을 미리 떼어주는 잘못된 규례를 일체 시정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세 군문의 전곡을 비국의 낭관을 차출해 보내 장부를 조사, 부정을 적발하는 사항은, 병조의 세 군문을 번고(反庫)하여 부정을 적발할 때는 으레 어사를 보냈으니, 비국의 낭관을 차출해 보낸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군영마다 각기 도제조가 있으니 우선 그들이 어떻게 거행하는가 보아가며 나중에 조처할까 한다. 전 감사 박기정을 문책하여 파직하는 사항은, 칙수고의 전곡이 빚을 줬다가 받지 못해 없어졌다고 말한 것으로 볼 때 반드시 그런 일이 있었던 각 해마다 담당 감사가 따로 있을 것이니, 우선 묘당으로 하여금 초기(草記)를 조사해 보게 하라. 그리고 임지를 떠날 때 자질구레한 행위에 대한 문제는 마땅히 전 감사를 엄중히 조사한 뒤에 법대로 처단하여 기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창고를 삼가 잘 지키지 못한 무리를 징계해야겠으니, 또한 해부(該府)로 하여금 개좌(開坐)하여 엄중히 따져물어 구초(口招)를 받아 아뢰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저번에 개성 감영의 칙전(勅錢)을 다른 곳에서 옮겨 떼어주는 일로 본사에서 해서에 공문을 띄워 물은 뒤에 담당 감사 서영보(徐榮輔)가 보고한 내용을 보았더니, 창고에 비치해 두었던 칙수전(勅需錢) 21만 5천여 냥 가운데 을미년122) 부터 경신년까지 각처에 빌려줬거나 빚을 줬다가 받지 못한 것, 다른 곳에서 옮겨 갈라준 본전의 빚을 갚은 것, 개시 별장에게 본전을 미리 내준 것 등 도합 16만 7천여 냥이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겨우 4만 8천여 냥이라 하였습니다. 칙수고 법의 근본 취지로 볼 때 너무도 한심하여 이미 기한을 정해 부족한 수효를 채우도록 하라는 뜻으로 엄중 지시하여 공문을 보냈습니다만, 대소(臺疏)에 거론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지금 조사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감사로 하여금 영읍(營邑)에 흩어져 있는 수효와 다른 곳으로 반출하거나 결손이 나게 된 내막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4월 28일 경진
이경오(李敬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4월 29일 신사
차대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전 부사(府使) 이여절(李汝節)은 연전에 창원(昌原)에서 범한 죄가 곧 인명을 함부로 죽인 일이었는데 나중에 그 죄상을 조사한 결과 사형을 면했고 큰 사면을 여러 번 거친 뒤에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을 끝내 버리는 일이 없고 인재를 반드시 등용하는 것은 곧 청명한 조정의 성대한 일인데 강계(江界)에서 병졸로 강등되었을 때 여느 신하로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하였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근래 무관들의 처사가 옛날보다 너무나 못해 마음속에 항상 개탄하고 있는데 여절 같은 자는 그 선조 가운데 충의로운 신하가 있었고 그 사람 또한 취할 만한 점이 있으니, 그 죄를 씻어주고 재주를 시험함으로써 분발하여 자기의 정성을 다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실로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죄명을 참작해 용서하고, 그에게 걸맞는 관직에 뽑아 쓰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벌은 멀리 미쳐가지 않고 상은 그 자손에까지 미치는 것이 요(堯)·순(舜)의 선정입니다. 신은 비록 하찮은 사람이지만 흰머리에 일편단심은 오직 우리 임금이 요(堯)·순(舜)같은 임금이 되시길 바라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자식이 남의 죄에 관련되었다 하여 그의 아비가 자급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으니, 신이 만일 이러한 문제를 말하지 않는다면 곧 신의 본심을 저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윤영희(尹永僖)와 윤영의(尹永儀)는 모두 시종신으로 이름이 사판에 들어 있는데 그의 아비가 자급을 받을 나이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그에 관한 비지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삼대(三代) 때 죄인을 벌줄 때는 그 벌이 자식에게까지 미치지 않았는데 하물며 자식의 죄로 인해 아비를 벌준다면 어찌 효도로 세상을 다스리는 성조(聖朝)의 정사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이제 그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다. 오늘 정사에 가자(加資)하라는 비지를 내리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지평 강성익(康聖翊)이 상소한, 제주에 곡물을 비축해두는 사안에 대해 아뢰겠습니다. 요즘 듣건대 곡물이 도글도글하게 영글고 창고도 견고하여 여러 해를 지내기에 충분하다고 하는데, 앞으로 그 성과를 거두는 문제는 오로지 그것을 법도있게 지키고 사리에 맞게 조치하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새 곡식은 들여오고 묵은 곡식은 내보내 적절히 색깔을 바꿔 항상 알찬 곡식이 비축되어 있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목장의 말에 관한 사안은, 지난해에 그곳 목사가 장계로 요청한 것으로 인해 갑인·을묘년에 감축된 수효를 이미 5년을 기한으로 하여 점차적으로 채워 넣도록 조처하였으니 그 연한이 차기 전에 새로 길러서 늘어난 것을 가지고 지난날 감축된 수효를 충당한다는 것은 결코 마정(馬政)을 중시하고 뒤폐단을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공문을 띄워 물어보라는 명을 받들었으니 그에 대한 보고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중에 품처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춘추(春秋)》 대일통(大一統)의 뜻은 주왕(周王)을 높이는 일이 크기 때문에 자양(紫陽)123) 의 《강목(綱目)》이나 《속강목(續綱目)》으로 말하더라도 한(漢)나라 후주(後主)124) 와 송(宋)나라 말제(末帝) 병(昺)125) 을 다 정통으로 삼았으니, 더구나 명나라에 대한 우리 나라의 입장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 더구나 홍광제(弘光帝) 이후 계속 정통을 계승하여 천명(天命)이 아직 떠나지 않은 때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은 지금에 와서 처음으로 고 판서 정창순(鄭昌順)이 편집한 《사략(史略)》 제8권을 보았더니, 홍광제 이하는 다 왕의 칭호를 거리낌없이 써 서울과 지방에서 간행하였으므로 책을 덮고 한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열성조의 존주 대의(尊周大義)가 일월처럼 빛나 충분히 천하 후세에 내놓을 말이 있고 우리 전하께서는 비풍(匪風) 하천(下泉)의 생각126) 에 한층 더 연연하시어 그와 같은 의리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선양하고 드러내지 않은 일이 없어 《존주록(尊周錄)》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그와 같은 책을 결코 그대로 놓아둘 수 없습니다. 빨리 홍문관으로 하여금 책판(冊板)을 보관하고 있는 경상도 감영에 공문을 띄워 그 판본을 해체하도록 하여 한 시대의 비난을 면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 봉조하(南奉朝賀)127) 가 일찍이 《명사(明史)》128) 를 저술하면서 홍광 이후 세 황제를 다 제호(帝號)를 붙여썼으나 그 사실이 청나라에 유포될 우려가 있으므로 선조(先朝)에 불태워버리라는 명이 있었으니, 고 중신(重臣)이 제호를 쓰지 않은 것은 반드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중신이 살아 있을 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간행하지 말게 하였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제는 이미 완성된 책이니 굳이 책판을 해체할 것은 없다. 홍광 이후의 판본만 해체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대체로 역사서를 쓴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중신(重臣)이 그것을 쓴 일은 실로 신중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책은 간행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하고, 예조 참판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아조가 영력(永曆)129) 정삭(正朔)을 받들지 못한 일은 실로 천고의 유감인데 이제 만약 왕(王) 자를 써 후세에 전했다가 제2의 주자가 나온다면 반드시 주왕(周王)을 높이는 《춘추》의 의리에 부끄러움이 있다고 여길 것이니, 이 어찌 천만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로서는 오직 마땅히 홍광제 이후를 높여 대통으로 삼아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영력 정삭을 받들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아조의 주왕을 높이는 의리가 장차 길이 천하 만세에 내놓을 말이 있을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책판을 해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굳이 책판을 전부 해체할 것이 있겠는가. 홍문관에서 경상도 감영에 공문을 띄워 하단의 판본만 해체하도록 지시하게 하라."
하였다.
헌납 오한원(吳翰源)이 아뢰기를,
"신은 근년에 영·호남을 왕래할 때 길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그들이 하는 말은 다 재결(災結)의 수효를 무턱대고 줄여 조세를 백징(白徵)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령으로 있는 자는 실제대로 재결수를 파악하지 못하고 감사로 있는 자는 그것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지 못한 채 무턱대고 삭감하는 것으로 미봉책을 삼습니다. 대체로 묘당에서 무턱대고 삭감하기 때문에 감영이 무턱대고 삭감하며 감영이 무턱대고 삭감하기 때문에 수령이 무턱대고 삭감하는데, 수령이 무턱대고 삭감하는 것은 아전에게 삭감하는 것이 아니라 곧 백성에게 삭감합니다. 삭감된 수효가 이미 엄청나게 많다 보니 그 많은 공세(公稅)를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백성에게 삭감하지 않고 싶더라도 되겠습니까. 이는 실로 유사로 있는 신하가 표재(俵災)130) 를 고르게 해야 한다는 성상의 뜻을 잘 받들지 못하여 곤궁한 백성들로 하여금 도리어 조정이 신의를 잃었다고 의심하게 만든 것이니, 이를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픕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각도의 감사를 엄중 지시하여 재결에 관한 일을 가지고 수령이 제대로 다스리는지의 여부를 특별히 살피게 하여, 수령들이 부정을 저지를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 실제의 재결수를 조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상벌을 엄격히 시행하여 무턱대고 삭감하는 근래의 규례를 영원히 고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금년의 연분 사목(年分事目)은 이 거조(擧條)의 내용을 일일이 들어 엄중 지시함으로써 실효를 거두게 하라."
하였다.
지평 신귀조(申龜朝)가 아뢰기를,
"살옥(殺獄)에 관한 것은 국가의 중대한 법이긴 합니다만, 이처럼 날씨가 가물어 애태우는 때에는 마땅히 잘 살펴 신중히 조처해야 할 일입니다. 녹계(錄啓) 안에 들어간 자는 이미 참작하여 처결했거나 혹은 이미 관대히 용서해 줌으로써 조금도 억울하게 되었을 소지가 없습니다만, 녹계 이외의 수많은 살옥의 경우는 혐의를 둘 소지가 없는데도 혐의를 두어 의안(疑案)을 만들고 혹은 옥안(獄案)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데도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도마다 다 그러하고 고을마다 마찬가지이므로 원통하고 분하며 시름겨운 기운이 위로 하늘의 화기를 범하니, 어찌 오늘의 가뭄을 불러오지 않았음을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해조로 하여금 각도의 감사에게 엄중 지시하여 직접 심리를 집행하게 하여 평범한 남녀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요즘 사학(邪學)이 삼남(三南)에서 기승을 부리다가 기호(畿湖) 지방으로 차츰 파급되고 있습니다. 여주(驪州)와 양근(楊根)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여주 옥안에 구금된 자가 10여 인에 이른다 하고, 양근은 거기에 현혹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것을 배우지 않은 마을이 없어 장차 온 경내가 금수의 지역으로 들어갈 판국이 되었는데도 그곳의 수령은 전혀 금하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삼남의 감사에게 엄중 지시하여 각별히 단속하게 하고 양근 군수 정동간(鄭東幹)은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죄를 물어 엄중히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영읍(營邑)의 유사가 따로 있는데 어찌 번번이 공문을 띄워 당부할 것이 있겠는가. 담당 군수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판으로, 이기양(李基讓)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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