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54권, 정조 24년 1800년 5월

싸라리리 2025. 8. 1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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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계미

이때 한 달이 넘도록 가뭄이 계속되었다. 교서를 내리기를,
"근래에 극심한 가뭄이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어 하늘을 쳐다보며 밤낮으로 애를 태우면서 이제라도 제물을 바쳐 단비를 기원할까 한다. 어제는 종백(宗伯)과 기백(畿伯)을 접견하고 상황을 물어보니 경기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기우제를 지낸 고을이 없다고 했는데 이 일은 서울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체모에 관계되기 때문이니 체모라고 하는 것은 하찮은 겉치레인 것 같으나 《서경》 홍범(洪範)의 ‘다섯 가지 일[五事]’과 ‘여러 가지 징험[庶徵]을 상고해 볼 때 겉모양과 비가 내리는 일은 그 이치가 일치하니, 이 때문에 재계를 하고 제사옷을 입는 것은 모든 사물현상을 남김없이 체현하기 위한 것이다. 빨리 기백으로 하여금 수령들에게 물어 즉시 기우제를 지내게 하라. 서울은 지방의 장계가 올라올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렸다가 또한 차례대로 나누어 거행할 생각이다. 이제 또 내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옷을 찾아 입고 아침이 되길 기다려 정사를 살피는 것은 어찌 그저 한가롭고 편안하게 지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일 뿐이겠는가. 내가 도움을 구하는 것은 바른말이다. 말과 맑은 날씨의 상호 관계는 또한 겉모양과 비가 내리는 일이 상응하는 것과 같은데 더구나 지금처럼 가뭄이 계속되는 때에 어찌 바른말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교서를 입궐을 기다리고 있는 간원과 옥당의 여러 신료들에게 보여주고 제각기 직무를 수행하는 도를 다하게 하라."
하였다.

 

상참(常參)과 아울러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말을 하지 못하게 금하는 것은 곧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을 뜻하는데 옛말에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일보다 어렵다’ 하였으니,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특별한 법을 만들어 삼사(三司)에게 어떤 일과 어떤 일은 말을 하지 말라고 금한 것은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성상께서는 학문은 천인(天人)을 통달하고 덕은 요(堯)·순(舜)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지만 이 한 가지 일만은 한(漢)·당(唐) 시대 평범한 군주보다 못하여, 아뢴 대로 하라고 윤허를 하시고서도 전지(傳旨)를 내리지 않는 일까지 있으십니다. 전하의 한 마디 말씀과 한 가지 동작은 다 동궁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니 어찌 천하 만대의 법만 되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말을 하지 못하게 한 금령을 빨리 거두어 성덕(聖德)을 빛내고 세도(世道)를 안정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령을 만든 것은 부득이한 조치이며, 전지를 내리지 않은 것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서이다."
하니, 환지가 아뢰기를,
"성인이라도 사실 부득이한 일이 있는 법이니, 이를테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이는 경우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또한 어찌 여러 해를 넘겨가면서 오랫동안 계속하겠습니까. 그리고 말을 채용하는 도리는 어떤 말이 채용할 만하면 채용하고 채용할 수 없으면 도외시해 버리며 또 혹시 죄를 줘야 한다면 주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금령을 만들어 그에 대해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명을 거두지 않으시니, 이 어찌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좋다. 대체로 금령이라는 것은 국법으로 정한 바 소 잡는 일, 술을 빚는 일, 소나무를 베는 일을 금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밖의 여러 가지 금령은 모두 백성으로 하여금 유사에게 달려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은 법으로 보아 마땅히 조사해야 할 일을, 말을 못하게 하는 금령을 만들어 이것은 말을 하고 저것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대각(臺閣)에 써놓고 승정원 벽에 붙여 두어, 간관은 어떻게 거행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승정원에 들어온 자는 대부분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니, 고금에 어찌 이와 같은 나라의 체면이 있겠으며 후세에 만일 또 이것을 인용한다면 그 폐단이 과연 어떻겠는가. 그러나 이 또한 특정한 때의 경우에 맞게 조처한 일로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 조정 안에서 조처하는 일이 법도에 들어맞아, 이러쿵저러쿵 서로 맞지 않는 말들이 있다 하더라도 임금의 명을 받들거나 거부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규모가 있었더라면 처음에 어찌 금령을 만들어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았겠는가.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금령이 생겼던 것인데, 근래에는 풍속이 예전에 비해 조금 나아졌으니 만일 나쁜 풍속이 크게 변하고 조정의 기상이 바뀐다면 금령을 거두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 교리 권경유(權景𥙿)는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무오 사화에 죽었는데 그 덕량과 문행(文行)은 한때 사류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으나 죽은 뒤에 집에 소장하고 있는 그의 글이 흐지부지 없어져 전해오는 것이 없고 게다가 후손도 없어 수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유풍과 여운은 그저 그 고을 선비들의 경모 대상으로만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몇해 전에 무오년이 다시 돌아오자 선비들이 다시 일어나 그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으니, 공론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성조(聖朝)의 과거 사적을 수습하고 숨겨진 덕행을 선양하는 날을 만났으니, 포상하고 증직하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경묘(景廟) 신축·임인년에 여러 간흉과 요망한 환관들이 비밀히 서로 결탁하고서 임금을 속여 성궁(聖躬)131)  을 해치려고 도모하였고 무옥(誣獄)을 조작해 내어 충신과 현인을 해침으로써 거의 종묘 사직을 무너뜨릴 뻔하였으니, 그 일을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하고 말을 하노라면 머리털이 솟구칩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일념으로 올곧은 도를 지키신 선조(先朝)의 심법(心法)을 계승하고 어렵고도 큰 선조의 왕위를 이어받아 의리의 근원을 천명하고 충신과 역적의 구분을 엄격히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나름대로 분명하고 확고한 기준이 있으셨습니다. 신축·임인년의 일에 있어서도 중천에 빛나는 태양처럼 그 시비를 환히 밝히셨으니, 숨겨진 인물을 선양하고 그 충절을 포상하는 면에 어찌 유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또 세상에서 말하는 오절도(五節度)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이상집(李尙)·백시구(白時耉)·김시태(金時泰)는 먼저 증직하고 그 뒤에 또 증시(贈諡)하였으나 유취장(柳就章)과 심진(沈搢)은 증직은 했지만 증시는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대체로 증직한 시기가 선후의 차이가 있어 한꺼번에 증시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 충절을 논한다면 다섯 사람이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의리를 천명하고 명예를 붙잡아 세우는 이 성스러운 시대에 증시의 은전을 어떤 자에게는 베풀고 어떤 자에게는 베풀지 않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한탄이 없지 않을 것이니, 고 병사 증 병조 판서 유취장과 심진에게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증시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금군 별장(禁軍別將) 최동악(崔東岳)은 그 직위에 앉은 이후 금군에게 피해를 끼쳐 추잡하다는 비방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를 선발하고 사랑으로 감싸는 것은 비록 옛정을 생각한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군영의 정사를 중시하는 도리로 볼 때 계속 그대로 방치할 수 없으니, 사판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요즘 기강이 날로 해이해져 곤수(閫帥)가 둔전(屯田)을 설치하면 고을 수령이 협박을 가해 괴롭히고 감사가 고을 서리를 추고하면 그 고을에서는 문서만 보내고 사람을 보내지 않습니다. 서리를 밟으면 장차 얼음이 얼고 나쁜 조짐은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말들은 대체로 이와 같은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고 장신(將臣) 김흡(金潝)이 통수(統帥)로 있을 때 해상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그때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자 호두패(虎頭牌)를 장교에게 주어 달려가서 체포하게 하였더니 그 목사는 뒷문으로 도주한 일이 있었으니, 그 이야기가 지금까지 사류들 사이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더없이 엄격한 것은 계급이며 더없이 중한 것은 체통입니다. 앞으로 만약 이와 같이 법을 어긴 자가 있을 때는 너나없이 다 유배시켜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요즘 사치 풍조가 날마다 그 도를 더해가 귀천의 복장이 구별이 없고 상하의 등급이 한계가 없어 식견 있는 자들이 한탄한 지 오래입니다. 일찍이 들은 바에 의하면 선조(先朝)에 하교하시기를 ‘나는 목침을 휴대하고 다니며 항상 그것을 베고 눕는다.’ 하고, 제신에게 명하여 휘장과 병풍을 철거하라고 하셨다 하는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와 같은 풍습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우선 신들 자신부터 그와 같이 하지 못하여 마음에 항상 송구스럽지만 어찌 내 자신이 그것을 범했다 하여 밝히고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군사를 거느리는 무신이 군중에 있을 때는 덥더라도 일산을 펴지 않고 춥더라도 갖옷을 껴입지 않은 것은 옛날부터 내려온 풍조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장신(將臣)이 대가(大駕)를 따라 밤을 지샐 때는 췌막(毳幕)을 설치하지 않고 세속에서 말하는 방군막(房軍幕)을 둘러쳐 사방을 막으니, 그 비용도 많이 들거니와 편한 방법을 고르는 풍조 또한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그와 같은 일들을 한결같이 엄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 심규로(沈奎魯)가 아뢰기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백연(李栢然)은 과거 서읍(西邑)에 있을 당시 탐욕을 부려 추잡하다는 설이 한세상에 파다하게 떠돌았는데, 지금의 병사 자리에 앉은 뒤로는 오로지 제몸을 위하는 일만 추구하여 온갖 방법으로 사욕을 채우며 뇌물을 한없이 받아들이니, 군사와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이미 뭐라고 형용할 것도 없고 승려와 장수(匠手)들도 당장 죽을 판국이라 하는 등 남쪽 지방에서 올라오는 설이 파다합니다. 이백연을 문책하여 빨리 삭탈 관직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남쪽 지방의 병사로서 지은 죄를 서읍(西邑)의 일로 확인할 수 있으니 한때의 풍문으로 전하는 말이라 할 수는 없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훈련원의 군병을 충원하는 법은 반드시 먼저 건장한 자를 뽑되 그중에서 힘이 세고 기예가 있고 풍채가 좋은 자를 골라내어 다음해의 결원을 보충하고 기타 사적인 운영을 용납하지 않으니, 이는 곧 변동할 수 없는 국법입니다. 그런데 저번에 정관채(鄭觀采)는 중군(中軍)의 직위에 앉아 죄없는 군병을 계속 도태시키고 그 결원을 보충하면서 남몰래 뇌물을 받아 1년 동안에 받아들인 돈이 1천 냥에 가까워 원성이 자자하니, 재앙을 부르기에 충분합니다. 도감의 전 중군 정관채를 유배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는 그냥 지나쳐 넘길 풍문이 아니다. 병신년132)  에 엄중히 처분한 이후 또다시 이러한 말을 들었으니 그동안 기강에 관한 온갖 일들이 해이해지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미루어 알 만하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동간(東間)에 구금하고 군정(軍丁)을 도태시키고 결원을 보충할 때 뇌물을 받아들인 죄를 엄중히 조사하여 구초(口招)를 받아 보고하게 하라. 선현(先賢)은 선현이고 공법(公法)은 공법이다. 사율(死律)에 대하여는 혹 참작하여 용서할 수 있으나 심문하는 일까지 거론하지 않는다면 잘못이다. 만일 즉시 승복하지 않는다면 을러대거나 형을 가하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 더구나 뇌물을 받은 죄를 처벌하는 본율(本律)은 군율(軍律)이 아닌가. 해부에 엄중 지시하여 관채를 불찰(不察)의 죄로 공초를 받아 호서의 변방으로 유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인수(李仁秀)를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대사간 이기양(李基讓)이 상소하기를,
"옛사람은 재변이 생기는 원인을 오로지 인사(人事)에 돌렸고 아울러 가뭄의 원인은 원통하고 억울한 기운이 사무쳐 생기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치로 보아 맞는 말입니다. 신이 직접 눈으로 본 사실을 가지고 낱낱이 말씀드릴까 합니다.
신은 일찍이 서로(西路)에 다녀왔었는데 그곳의 백성이 십중 육칠 할이 줄어들었고 남아 있는 자들도 다 짐을 꾸려 떠날 생각을 하기에 그 이유를 물어보니 모두 환곡(還穀) 때문이라 했으며, 환곡이 많은 이유를 물었더니 ‘어느 해에는 어느 아문의 별무조(別貿條)가 추가되고 어느 해에는 어느 아문의 진분조(盡分條)가 추가되었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백성이 괴로워서 도망하였는데 도망하는 자가 차츰 많아지자 남아 있는 자는 한층 더 고달퍼 마침내 한 사람이 서너 가구가 받을 몫을 껴안게 되었고, 처음에는 강변에 위치한 고을이 심하다가 지금은 내륙에까지 파고들어와 그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가 이와 같으니 삼남(三南)의 실태를 알 만합니다. 실태가 이러한데 백성이 어찌 고달프지 않겠습니까.
과거 을묘년133)  에 가뭄이 극심하다가 중복(中伏)에야 비가 내리자, 각도 순영(巡營)에서는 모두 각 고을에 지시하여 백성에게 모를 심게 하라 하였는데, 백성들은 곡식은 필시 거두지 못하고 세금은 경감되기 어려울 것이라 하여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결코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간절히 권하고 타이르자 그때서야 그 말을 믿고 모를 심었습니다. 신은 처서(處暑)가 지난 뒤에 때마침 남쪽 지방에서 올라오며 호서 지방을 경유하였는데, 잎이 누렇게 마른 모 포기가 들판에 깔려, 그것이 3, 4백 리까지 뻗은 것을 보고 결코 추수를 하지 못할 줄을 알았습니다. 가을이 지난 뒤에 들어 보니 모를 심은 자는 전부 세금을 물어 백성들이 한층 더 곤궁해졌다 하며 그후 흉년에는 항상 그 방법을 썼습니다. 이 일이 이와 같으니 다른 일은 미루어 알 만합니다. 이러고서도 백성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요즘 또 형조에 있으면서 죽산부(竹山府) 포교(捕校)의 옥안(獄案)을 볼 수 있었는데, 긴요한 말이 빠져 있어 성상께서 그 점을 지적하시게 만들었습니다. 옥안은 말 한마디에 경중이 뒤따르고 한 글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의 생사가 달라지는데, 이 옥안이 이러하니 다른 옥안은 미루어 알 만하고 한 고을이 이러하니 각도의 실태를 알 만합니다. 이러고서도 백성들이 어찌 원통해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형옥(刑獄) 중에 큰 것은 무엇보다도 살옥(殺獄)이지만 기타 모든 송사가 사실 다 민생의 고락과 관계가 있으므로 신중히 처결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인데 근래에 형조와 경조(京兆)의 장관들이 자주 바뀌어 서리배의 농간에 일임하므로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져 사리의 곡직이 밝혀지지 않으며, 밖으로는 세력이 큰 감사와 추잡한 수령들이 송사의 심리를 전혀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의 그때그때 감정에 따라 판결하므로 사리가 바른 자는 억울해도 풀지 못하고 힘이 강하고 교활한 자는 제멋대로 설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원성이 사방에서 터져나와 서울과 지방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러고서도 백성들이 어찌 원통함이 없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이러한 몇 가지 일만으로도 충분히 화기를 범하고 재앙을 부를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성상께서 날마다 위에서 갖은 애를 쓰시더라도 유사가 그 뜻의 만분지일이나마 받들지 못하여 결국 백성으로 하여금 밑에서 곤경에 허덕이고 재앙이 위에 나타나게 만든다면 이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시폐(時弊)를 논하는 자는 항상 재용(財用)과 형옥(刑獄)을 거론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자가 이미 범범하게 말하므로 조정에서 들을 때에도 범범하게 여기지만 지금 신이 거론한 것들은 다 눈으로 직접 보고 깊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즉시 유사로 하여금 근년 이후 추가로 배정하거나 새로 갈라놓은 각도의 환곡을 일체 시정하여 예전대로 나누어놓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근심하지 않고 편안히 살게 할 것이며, 아울러 서울의 담당 관청과 영읍(營邑)에 명하여 이미 완결되었거나 진행 중에 있는 옥안을 가져다가 세밀히 조사하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죄도 없이 화를 당하거나 죄가 있으면서도 요행이 빠져나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서울과 지방의 옥안은 담당 장관으로 하여금 모두 직접 심리를 맡아 감히 제마음대로 조작하거나 서리의 농간에 일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이 뒤바뀌어 원통해 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혹시 옥안이 잘못되었거나 송사가 억울하게 처결되는 일이 있을 때는 묘당·대각(臺閣) 및 경외(京外)의 수령을 규찰하여 조사하게 하소서. 진정 이 몇가지 정사를 먼저 시행한다면 충분히 밑에서는 백성의 화합을 부르고 위에서는 하늘의 재앙을 소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린다면, 홍수나 가뭄은 하늘의 재앙이고 재물이 고갈되어 백성이 곤궁에 처하고 형옥이 공평함을 잃는 것은 사람의 일인데, 인사(人事)가 제대로 될 경우 하늘의 복이 이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말을 오활하다 여기지 마시고 빨리 시행하소서.
신은 또 듣건대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더라도 땅이 윤기를 잃지 않는 것은 수목이 지면을 덮어 샘물의 근원이 바닥나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더구나 소나무의 벌채를 금하고 기르는 것은 나라의 큰 정사로서 그에 관한 국법이 매우 엄중한데도 요즘 듣건대 영남·관동·호서 등 각도의 소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한 산중 고을이 곳곳마다 벗겨져 민간인의 소유 뿐만 아니라 관가에서 금하는 곳까지 다 마찬가지라 하니, 조정의 금령이 시행되지 않고 국법이 서지 않은 상황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또 한편 이러한 형편에 어찌 지맥(地脉)이 촉촉하고 샘물의 근원이 불어나길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지방관이 맡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일은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감사나 병사로 말하더라도 서울 관청에서 공문으로 지시한 사항을 예사롭게 보아넘겨 범법 사실을 적발해 논계한 적도 없고 또 수령의 전최(殿最)를 엄격히 하지 않아 퇴폐한 기강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니, 실로 한탄스럽습니다. 지금 당장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수령의 잘잘못을 조사해 그 결과 상벌을 시행하게 함으로써 송정(松政)에 실효가 있게 하는 것이 또한 가뭄에 대비하고 농사를 윤택하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마음을 다져 먹고 아뢴 경의 의견은 뜻을 지니면 끝내 성취한다는 말처럼 될 줄로 안다. 옥안을 심리하는 방안은 경의 말이 매우 일리가 있고 송정의 일 또한 그렇다. 경의 소를 묘당에 내리게 하겠다."
하였다.

 

5월 5일 병술

상이 경모궁(景慕宮)에 배알하고 제물과 제기 등을 살펴보았는데 하향(夏享) 날짜가 내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본궁(本宮)의 제조 서용보(徐龍輔), 장악 제조(掌樂提調) 조진관(趙鎭寬)·이서구(李書九), 협률랑(協律郞) 이영유(李英裕) 등을 불러 접견하고 향악강보(享樂腔譜)에 관해 물었다. 상이 이르기를,
"예행연습에서 초헌(初獻)할 때 울린 풍악은 상당히 음절에 맞는 듯하다."
하니, 영유가 대답하기를,
"신을 맞이할 때 구성(九成)을 연주하는 것은 너무 더딘 듯합니다. 주자가 남악묘악(南嶽廟樂)에 관해 논한 것에서도 음악이 너무 더디어 사람이 오랫동안 서 있다면 도리어 예절에 흠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음악의 효용 가치는 간단하면서도 완전한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신을 맞이할 때 사성(四成)을 연주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성을 쓰는 것은 근거가 있는가?"
하니, 영유가 아뢰기를,
"당나라 때 큰 제사에는 다 사성을 연주하였으며 또 세종조 때 문헌공(文獻公) 박연(朴堧)도 일찍이 신을 맞이할 때는 사성을 연주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일(四佾)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영유가 아뢰기를,
"사일의 수효는 16인인데 인솔하여 나가고 들어갈 때는 단일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간편할 듯합니다."
하고, 서구는 아뢰기를,
"제향 때의 악률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므로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5월 6일 정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진하정사(進賀正使) 구민화(具敏和), 부사 한용귀(韓用龜), 서장관 유정(柳畊)을 불러 접견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서영보(徐榮輔)가 장계로 아뢰기를,
"절도사 이성묵(李性默)은, 본주(本州) 목사 조영경(趙榮慶)이 가마를 타고 일산을 썼다는 이유로 수향(首鄕)134)  을 몽둥이로 다스리고 교리(校吏)들에게 조리돌리며 두 귀를 화살로 뚫고 얼굴에 횟가루를 바르기를 군법대로 하였습니다. 교리들이 수색하여 잡는 과정에서는 본주의 교례(校隷)가 문을 막고 서로 대항을 하였고 목사는 세 군데의 문을 부수고 기왓장을 걷어 어지럽게 내던지게 하였으며 또 병영의 군교(軍校)를 형틀을 씌워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병사가 우후(虞候)로 하여금 병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가서 빼앗아오게 하였습니다. 병사 이성묵의 잘못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당해 목사는 애초부터 행위가 매우 어긋났는데 문을 부수고 기왓장을 내던져 서로 난투극을 벌이듯 하였고 문서에 쓴 말이 오만불손하여 극도로 깔보고 무시하였으니, 기강이 해이해진 양상이 실로 매우 한심합니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죄를 물어 그에 맞는 벌을 주게 하소서. 당해 수신(帥臣)은 본관(本官)이 체모를 손상한 것에 대해 경고하고 훈계하는 것이 옳은 일인데 함부로 곤장을 치고 조리돌리는 벌을 가했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아울러 전교하기를,
"근래에 체통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말들은 조정의 위신을 높이자는 것이었는데, 영남은 고성(固城) 수령의 사건이 있고 호남은 전 영암(靈巖) 수령의 사건이 있고 호서는 전 충주 목사(忠州牧使)의 사건이 발생하는 등 거의 매월 유사한 사건이 일어나다가 황주(黃州) 사건이 또 해서에서 발생하였으니, 행여 남이 들을까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황주 사건은 다른 도의 경우와는 판이한 점이 있으니, 만일 국법을 침범한 일이 있다면 이른바 체통은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다. 조정의 조치는 사안에 따라 각기 그 법도에만 맞게 하면 그 뿐이다.
옛날 한(漢)나라의 장탕(張湯)은 연리(掾吏)와 서로 다툰 결과 탕이 상관으로써 벌을 받았다. 당해 병사의 상도에 어긋난 수많은 행위는 우선 거론하지 않더라도 태평한 시기에 군사적인 일도 아니고 군사훈련을 하는 장소도 아닌데, 갑자기 군중의 형률을 백성 다스리는 관청 앞에서 시행하였으니, 술에 몹시 취한 상태가 아니라면 정신이 나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우후를 내보내 군교(軍校)를 빼앗아갔으니 이 얼마나 형편없는 짓인가. 더구나 절도사로서는 관청에서 형률을 사용해서는 안 될 일인데 그 고을 수향(首鄕)을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형신을 가하려 했으니, 이 또한 법을 지킨 것인가, 범한 것인가. 곤장·몽둥이·형틀은 각기 쓰이는 곳이 따로 있어 그에 관한 규정과 조항이 법전에 분명히 실려 있는데 그가 어찌 감히 모르는 체하며 스스로 국법을 범한단 말인가. 이와 같은 폐단이 일단 벌어진다면 앞으로 또 무슨 폐단이 생길지 알 수 없으며 체통과 국법 상호간의 의리와 경중은 한없이 멀어지고 말 것이다. 당해 병사 이성묵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공초를 받아 국법을 무시한 율을 적용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진하 서장관(進賀書狀官) 유정(柳畊)이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1. 관동에서 공물로 바치는 인삼은 연간 6백여 근씩인데 건륭(乾隆) 때에는 해마다 가을철에 내고(內庫)에 저장해 둔 것을 소금장사 왕십만(王十萬)에게 사적으로 판매하여 많은 값을 거둬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금년에는 군용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을까지 가지 않고 미리 꺼내 팔았는데 소금장사에게 판매하게 하지 않고 특별히 패륵(貝勒) 시위군 가운데 총애를 받는 자 1백 6인을 골라 인삼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정해 그들로 하여금 팔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삼을 사는 인삼장사들은 먼저 패륵 시위군의 표지(標紙)를 얻은 다음에 내고에 들어가 사서 가져가게 하였는데, 1등 표지의 값은 은 8백 냥이고 2등 표지는 6백 냥이고 3등 표지는 3백 냥이었으며 4월 8일부터 시작하여 나흘만에 전부 팔았습니다.
1. 유용(劉墉)은 위인이 강직하여 무슨 일이든 따지고 간섭하므로 황제가, 그가 노년에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특별히 체인각 태학사(體仁閣太學士)로 임명하여 한가로이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관직은 새로 창설한 것이고 체인각은 태화전(太和殿) 동무(東廡)에 있는데 관장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말하기를 ‘겉으로 노인을 우대하는 예를 보이면서 속으로는 그를 멀리하는 속셈을 이룬 것이다’ 하였습니다.
1. 예부 상서 덕명(德明)은, 청명절(淸明節)로 인해 황자(皇子) 면녕(綿寧)을 제관으로 차송하였는데, 황자의 경우에는 아가(阿哥)라 쓰고 이름자를 쓰지 않으며 으레 전주(轉奏)해야 하는데도 덕명은 이름자를 쓰고 또 직주(直奏)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는 덕명을 불러다가 규례를 어긴 죄를 심하게 꾸짖고 그 사안을 형부에 내려 직무를 교체할 것인가 유임시킬 것인가를 논의하여 조처하게 하였는데, 덕명은 황공하여 응당 주달해야 할 예부의 크고 작은 일들을 감히 예전처럼 조처하지 못하고 내각(內閣)으로 보내며 내각에서 다시 군기(軍機)로 보내 전주(轉奏)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방물(方物)의 공납이 지연된 것은 이와 같은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1. 아적사(阿迪斯)는 태학사 아계(阿桂)의 아들로 지난해에 성도 장군(成都將軍)에 임명되었습니다. 적사는 본디 발병[足疾]이 있었으나 사직한다는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성(省)에 부임한 뒤에 묘족(苗族)의 비적(匪賊)이 가릉강(嘉陵江)을 건너 천서(川西) 지방을 침략하자 적사는 본성의 장군으로서 수수방관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가지도 않고 사실을 들어 주문(奏聞)하지도 않고 있다가 황제의 엄중한 경고가 있은 다음에야 죄를 크게 졌다는 것을 알고 겁이 난 나머지 겨울경에 발병이 재발했다는 이유로 파직해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황제는 그가 적을 피하려는 계책인 줄 의심하고 이르기를 ‘적사는 어찌 지난 겨울에 발병이 났다 말하지 않고 오늘까지 끌어왔단 말인가. 아계가 이처럼 불초한 자식이 있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러한 자를 엄중히 다스리지 않으면 만주 출신 공신들의 후예가 어찌 서로 그를 본받으려 하지 않겠는가. 아적사를 체직하고 잡아다가 엄중 심문하라.’ 하였습니다. 적사의 장자는 경거 도위(輕車都尉) 나언첨(那彦瞻)이고 차자는 중서(中書) 나언주(那彦柱)이고 셋째 아들은 나언복(那彦福)이고 넷째 아들은 6품 음생(蔭生) 나언감(那彦堪)으로, 모두 응당 체직시켜 변방 수비군으로 내보낼 작정이었으나 아계가 여러 번 공을 세우고 정성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였으므로 차마 그의 손자들을 전부 변방으로 내보낼 수는 없었고 게다가 나언성(那彦成)이 현재 군영(軍營)에 있으면서 심력을 다해 나라에 충성하고 있는데 언첨 등은 곧 언성의 큰댁 종형제들입니다. 이로 인해 은전을 베풀어 변방으로 내보내는 벌을 면하고 체직만 시키게 했다 합니다.
1. 건륭(乾隆) 말에 화신(和珅)이 각성(各省)의 독무(督撫)들에게 황제에게 아뢸 일이 있을 경우 먼저 주본의 초고를 자신에게 보내게 하여 그것을 훑어보고 아뢸 사건을 미리 알아 행동거지와 대답하는 말을 민첩하게 함으로써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독무들이 먼저 주본의 내용을 사적인 글로 질문하는 일이 전례가 되어 버렸는데, 지난해 정월에 황제가 명을 내려 앞으로 내외의 아문에서 진주(陳奏)할 사건을 먼저 군기(軍機)로 보내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금하였습니다. 그런데 광흥(廣興)은 조운 총독(漕運摠督)으로서 관할구역을 가르는 일 때문에 주보(奏報)하는 것 이외에 따로 자문(咨文) 한 건을 복사하여 군기로 보내 그곳에서 대신 전주(轉奏)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광흥의 그 행위는 뚜렷하게 법을 어긴 것으로 사적으로 촉탁을 행한 것에 해당된다. 이는 곧 이제까지 없었던 일로 용서하기 어려우니, 사건을 형부에 넘겨 엄중히 협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1. 교비(敎匪)의 잔당이 아직도 10여 만 명이 남아 서천(西川)·감숙(甘肅) 지방으로 쳐들어가 제각기 남자(藍字)·백자(白字)·선자(線字) 등의 칭호를 내걸고 산골짜기에 모여 살면서 각 고을을 노략질하는데 그 세력이 강하여 막아내기가 어려웠다 합니다. 그리하여 경략 대신(經略大臣) 액륵등보(額勒登保)와 참찬 군무(參贊軍務) 나언성(那彦成) 등이 합심하여 계획을 짜고 성도  장군(成都將軍) 덕능태(德楞泰)를 지휘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시켜 봄부터 여름까지 계속 승전하였으나 사망한 전사 또한 몇 천 명에 이르렀고, 승전보를 계속 올리다가 마침내 그들의 괴수인 진득봉(陳得俸)·장자총(張子聰)·염첨(冉添)·원장(元掌)·교사부(敎師傅)·손노육(孫老六) 등을 죽였다 합니다. 또 조서를 내려 귀순한 무리를 석방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 식량을 지급해 농사에 힘쓰도록 하였으며, 나머지 잔당은 도망가 뿔뿔이 흩어졌으나 그들 가운데 오랫동안 극성을 부렸던 두목은 산골짝으로 도망가 그곳을 요새로 삼아 지키고 있는데, 그 세력이 보잘것 없어 머지않아 소탕될 것이라고 말하고는 있으나 이들 도적의 노략질이 고통거리로 대두된 지 오래되었고 이합집산이 일정치 않아 그 소굴을 소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합니다."

 

수역(首譯) 김재수(金在洙)가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1. 금년 봄 동서의 능에 거둥할 때 황제가 군기처(軍機處)에 하유하기를 ‘짐이 일찍이 당해 장군 임녕(琳寧)에게 큰 역사가 완공된 뒤 금년 7월 안에 성경(盛京)에 가서 여러 능을 참배하고 제사를 지낼 예정이라고 하유하고 임녕에게 미리 준비하게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금년 가을은 27개월의 상복을 벗기 이전이라서 짐이 성경에 가더라도 궁전에 올라가 연회를 벌이는 등 일체의 전례를 거행하기가 온당치 않다. 그래서 그 계획을 이제 다음과 같이 다시 결정한다. 이번 봄에 교비(敎匪)를 소탕하는 일을 마치긴 했으나 이번 가을에는 성경에 가지 않고 내년 상복을 벗은 뒤에 열하(熱河)에 머무르다가 8월 안에 출발, 구관대(九關臺) 앞을 거쳐 성경에 가서 여러 능을 참배한 뒤 예가 끝나면 관례대로 사냥을 하고, 돌아올 때는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연경으로 돌아올 생각이다. 그러니 예전에 지시하였던 미리 준비하는 문제는 잠시 중지하도록 하라. 이 하유를 임녕에게 통보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1. 십일왕(十一王) 영성(永瑆)은 가경(嘉慶) 초부터 군기(軍機)의 군무(軍務)를 총괄하고 있으면서 상당히 황제의 마음에 들게 일을 하였으나 책임을 맡은 지 오래되자 차츰 독단으로 처결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황제는 법을 어기는 일은 용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나머지 어떤 일로 인해 경고하고 그 군기의 군무를 관장하는 직책을 거두었는데, 영성은 황제의 명을 받고 무서워 크게 조심하여 모든 일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합니다.
1. 만족(滿族) 각로(閣老) 경계(慶桂), 구문 제독(九門提督) 포언달뢰(布彦達賚), 병부 상서(兵部尙書) 부삼(傅森), 천감 참찬(川甘參贊) 나언성(那彦成), 어전 시위(御前侍衛) 풍신제륜(豐伸濟倫)은 모두 훈척(勳戚)으로 재주와 슬기를 겸하여 현재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포언달뢰와 나언성은 더욱 총애를 받는다 합니다. 한족(漢族) 각로 유용(劉墉)·왕걸(王杰)·동고(董誥)와 호부 상서(戶部尙書) 주규(朱珪), 공부 상서(工部尙書) 팽원서(彭元瑞) 등은 각기 남다른 재주로 또한 총애를 받고 있는데 유용의 강직, 왕걸의 정중, 동고의 경학, 주규의 청렴, 팽원서의 문장은 모두 한 시대의 으뜸이라 합니다.
1. 산동(山東) 능현(陵縣)의 지현(知縣) 곽원조(郭元兆)가 그의 아우 원규(元揆)를 서울로 보내 밤을 틈타 해성(該省) 순무(巡撫) 전보(全保)의 아들인 병부 주사(兵部主事) 아미이달(阿彌爾達)을 찾아보고 은 3백 냥을 바쳐 자기를 이끌어 발탁해 준 은혜를 사례하게 하였는데, 아미이달은 거절하여 받지 않고 그 사실을 전보에게 알리자 전보는 즉시 황제에게 주문을 보내 원조의 관직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황제는 전보와 그의 아들 아미이달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결원이 있을 때 승진시키도록 하고 원조는 아뢴 대로 파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황제가 화신(和珅)이 권력을 혼자서 도맡아 쥐고 지나치게 탐욕을 부린 폐단을 깊이 경계로 삼아 뇌물의 수수를 일체 금하고 염찰(廉察)을 자주 실시하여 만일 비위 사실이 발각될 경우 중벌로 다스리므로 전보가 자수한 것은 청렴결백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벌을 받을까 무서워서 그런 것이다.’ 하였습니다.
1. 양회(兩淮) 상인(商人) 진잠원(陳箴遠) 등이 아뢰기를 ‘천감(川甘) 지방의 전쟁은 머지않아 반드시 마무리가 될 것입니다만 상금을 내려주고 안무시키느라 재력이 많이 소요되니, 은 2백만 냥을 희사하여 전쟁의 비용을 도울까 합니다.’ 하니, 황제가 매우 가상히 여겨 그 지역의 독무(督撫)로 하여금 그 절반을 받아 우선 창고로 운반하여 쌓아두고 지출을 대기하고 있도록 명하고 그 상인들에 대해서도 특별히 관직에 서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합니다."

 

5월 7일 무자

충청도 관찰사 김이영(金履永)이 살옥(殺獄)의 문안으로 아뢰었는데, 전교하기를,
"지척에 있는 경기 고을 사람들의 원한이 이와 같으니 경기 고을보다 멀리 떨어진 호서 고을이야 이들의 원한보다 더 심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요즘 비가 내리는 일로 말하더라도 비가 내릴듯말듯 감질만 날뿐 흡족하게 쏟아지지 않고 논바닥에 보습 한 개 들어갈 정도이거나 호미 하나 들어갈 정도에 그치고 말았는데, 경기와 호서는 또한 그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는 반드시 억울하고 원통한 사정이 풀리지 않아서 그럴 것이니, 어찌 살인사건들만 억울한 일이 있을 것인가. 크고 작은 모든 옥안이 뇌물을 받아 시비가 전도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정도가 심한 경우는 또한 화기(和氣)를 해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 장계의 내용을 보니 마음을 가다듬어 왕명을 받드는 뜻이 결여되어 있다. 이 장계에 대해 담당 승지는 엄중 훈계하는 뜻으로 답해 보내고 비가 내린 뒤라도 억울한 옥사를 성심껏 두루 살펴 발견이 되는 대로 즉시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5월 8일 기축

황해도 전 관찰사 서매수(徐邁修)는 부처(付處)하고 박기정(朴基正)은 고신(告身)을 빼앗으며 이태영(李泰永)·조윤대(曺允大)는 삭직할 것을 명하였는데, 칙사를 접대하기 위한 물자를 결손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울러 이러한 물자를 지키는 법을 철저히 밝혀 그 법을 어긴 감사는 관서 칙고례(關西勅庫例)에 따라 대동 사목 감정율(大同事目勘定律)로 논죄하는 것으로 법을 정하게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李時秀)는, 전임 황해 감사로서 그들과 같은 죄를 지고 혼자 벌을 면했다는 이유로 여러 번 상소하여 벌을 줄 것을 요청하자 상은 위로하고 타이를 뿐 윤허하지 않으니, 시수는 또 처분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서매수·조윤대 등은 죄명에 따라 파직할 것을 명하고 이태영은 현재 관서의 감사로 재직중이라 하여 잉임시켰다.

 

5월 9일 경인

광주(廣州) 유생 이의가(李義可)가 헌릉(獻陵)에 능역의 나무를 몰래 베어가는 폐단이 있다고 상소하여 금지하고 보호하는 법을 엄격히 할 것을 청하자, 예조에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능침의 수목은 사안이 막중한 것으로 우리 성상의 지극하신 효성에 의해 보호하고 심어 가꾸는 면에 각별하신 정성을 쏟아 수없이 당부하고 훈계하셨는데도 능밑에 있는 민가들이 능졸(陵卒)과 뜻이 맞아 남몰래 베어가는 폐단이 이처럼 심하여 유생이 상소하여 아뢰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능을 수호하는 관리는 태연히 단속하지 않고 본 광주부에서는 전혀 규찰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한심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대무산(大姆山)은 본릉(本陵) 안의 주봉(主峰)으로 중대하기 이를 데 없는데 한 그루도 남은 것이 없다고 하니 너무도 놀랍습니다. 각 능침에 봄가을로 나무를 심는 일은 무오년135)  부터 규정을 정해 문서를 작성하여 보고하고 있는데, 본릉이 무오년 10월에 보고한 것에 의하면 대무산 왼쪽 기슭의 나무가 드문 곳에 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 했고 기미년 3월 보고한 것에서는 주봉(主峰) 동쪽 뒷기슭에 상수리 4백 말을 뿌렸다 했으나 유생의 상소에서 말한 것과는 서로 크게 다릅니다.
대체로 본릉은 그 주변이 매우 넓으므로 만일 법을 엄중히 세워 각별히 단속하지 않는다면 명을 내리더라도 세월이 가면 갈수록 차츰 해이해져 반드시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능졸(陵卒) 가운데서 통수(統首)를 뽑아 세우고, 민가 안에 감고(監考)를 두고, 각 진장(津將)들이 조사해 살피고, 두부를 만드는 절을 중건하는 등의 조치는 분명히 실효를 거두고 뒤폐단이 없을 것입니다만 갑자기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 광주부로 하여금 그 내막을 자세히 조사하고 그렇게 조처하는 것이 좋은가를 잘 살펴 그 의견을 낱낱이 장계로 보고하게 한 뒤에 본조에서 다시 품처하여 절목을 작성, 영구히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잘 단속하지 못했던 전후 능관(陵官)은 전부 소급하여 죄를 주기는 어렵더라도 대무산에 유생의 상소 내용대로 과연 나무를 전혀 심지 않았다면 무오년 이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능관에 대해서는 엄중 문책하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본부로 하여금 그 문제도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아울러 입시한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능침의 안팎을 살펴보고 아뢰게 하였다.

 

한용귀(韓用龜)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숙천 부사(肅川府使) 임장원(任長源)을 옥에 가두고 공초를 받은 뒤에 판하(判下)하기를,
"조목조목 변명한 그의 공초를 보니 그 아문에 자기를 찾아와 묵고 있는 손님이나 하인이 없다는 것을 알 만하다. 탄핵하는 글의 핵심은 중에게 고기를 먹는다고 꾸짖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과거에 어느 대신(臺臣)이 네 글자의 나쁜 풍문을 부모를 여읜 독신에게 잘못 꺼낸 경우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예전에 이 죄수를 이미 발탁하고 또 벼슬에 보임한 것은 그 사람이 아까워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 관명(官名)이 아까워서였다. 벼슬이 일단 언관(言官)이고 보면 어떤 자가 혹시 약간의 망발이 있다손 치더라도 아무쪼록 잘 감싸주고 보호하여 한편으로는 참소를 뭉개버리고 한편으로는 여린 자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줘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가 연전에 올린 한 장의 소는 망발이 아닌 우직한 충정의 발로로서 그의 분수를 뛰어넘은 논조는 분개한 마음에서 나온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허무맹랑한 일을 깨끗이 씻어주지 않는다면 이 죄수의 몰락은 차치하고라도 사람들마다 이 죄수의 일로 인해 혀를 매어두고 입속에 아교풀을 머금어 더 심한 벙어리로 될 것이니, 그 폐단은 거만한 태도로 인해 사람을 천리 밖에서 막는 경우보다 어쩌면 더 심할 것이다.
더구나 현재 날씨가 가물어 흡족한 비를 얻지 못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건설적인 말을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이 죄수를 죄를 준다면 뒷걸음질치면서 앞으로 나가길 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이 죄수는 임지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서도의 백성들도 국사를 말한 그 보람은 능히 대간의 탄핵이라도 감히 그 명예를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즉시 석방하여 임지로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5월 10일 신묘

춘당대(春塘臺)에서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고 행사에 참석한 명나라 사람의 자손과 충신의 자손을 불러 접견하였다.

 

영화당(暎花堂)에서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전에 있었던 황해 병사의 사건은 그 체통 때문에 관대히 보아줄 수는 없다. 체통이 비록 중하지만 국법은 또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 가령 서울에 있는 장수가 군사훈련을 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함부로 자기집에서 조리돌리는 율을 시행했다면 그 죄는 무슨 벌을 받아야 합당하겠는가.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수령이라 하더라도 그 또한 임금의 명을 받은 관리인데 어찌 감히 우후(虞候)를 내보내 관청을 포위하여 마치 가도사(假都事)가 죄인을 잡듯이 한단 말인가. 도성 밖은 그대가 다스리라고 한 말은 곧 장수를 전쟁터로 내보낸 이후의 일로서 태평한 때에는 그 말이 해당되지 않으며, 관가의 병정을 독단으로 조발하는 죄도 《대명률》에 실려 있는데 하물며 우후를 독단으로 내보낸 경우이겠는가. 수령이 곤장을 쓰는 것도 기강에 관계되는데 병사가 어찌 형벌을 쓴단 말인가. 지난날 조윤정(曺允精)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렸어야 하는데도 그만두었기 때문에 이번 이성묵(李性默)의 일이 더 크게 벌어진 것이다. 이번 일을 엄중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또 어떤 괴상한 일이 벌어질 줄 어찌 알겠는가. 형벌을 쓰는 것이 부족하여 조리돌리고 조리돌리는 것도 부족하여 목칼을 씌우기까지 하였으니, 한걸음 더 나아가면 진짜로 사람의 목을 자르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일개 병사로서 독단으로 청사당(聽事堂) 앞에서 조리돌리는 벌을 시행했으니, 이런 놀라운 일이 어찌 또 있겠는가.
체통은 체통이고 기강은 기강이다. 이는 실로 이른바 의리란 경우에 따라 제각기 맞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 대장 김성응(金聖應)이 황해 병사로 있을 때 장연 부사(長淵府使)가 자기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계를 올려 파직할 것을 청했으나 고상(故相) 유척기(兪拓基)는 그 당시 감사로써 말하기를 ‘군사적인 일 이외에 수령을 파직시켜 내쫓는다는 것은 격례에 어긋난다.’ 하고, 이어 또 장계를 올려 고 대장을 파직시켰었다. 현재 모든 관리들은 오직 무사안일만 일삼아 그 풍조를 쇄신하는 보람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와 같은 문제들을 행여 그냥 지나쳐버리는 일이 없어야만 기강이 다소나마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저번 한흥유(韓興裕)의 사건은 그때 적용했던 법이 너무 가벼웠다 할 수 있다. 현재 지방 고을의 체통은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어 수령이 감영이나 병영에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마구 해댈 정도인데, 그들은 송나라 때 장영(張詠)이 촉(蜀)을 다스렸던 일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인가. 지금 시대의 상황에 맞게 조처하려 한다면 마땅히 촉을 다스리던 정사를 써야 할 정도만이 아니니, 이 어찌 형벌이 문란해져 나라가 중한 법을 써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과거에 수신(帥臣)이나 수령으로 있던 자들 또한 그 기백이 어찌 이성묵(李性默)과 조영경(趙榮慶)보다 못했겠는가. 그런데도 예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일을 이제 와서 들으니 이는 모두 조정의 책임이다."
하니,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수령이 체통을 범하면 수령을 벌주고 병사가 법을 범하면 병사를 벌주는 일은 형벌을 시행하는 정치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병사의 죄가 수령보다 심한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감히 방자하게 그 사실을 장계로 아뢰었으니, 삼가고 어려워하는 태도가 없다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는 문관이나 음관의 수령을 막론하고 한흥유와 같은 수령이 또 있거나 이성묵과 같은 병사가 또 있을 때는 반드시 중벌을 가해 절대로 용서하지 말아야만 다소나마 경계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하였다.

 

사간 심규로(沈奎魯)가 아뢰기를,
"신은 온릉(溫陵)136)  의 단오 전사관(端午典祀官)으로 능역을 둘러보고 본릉에 아직까지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각능 가운데 비석을 세우지 못한 곳은 세우도록 하라는 선조(先朝)의 수교(受敎)가 일찍이 있었고, 우리 전하께서도 선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효성으로 능침에 관계되는 모든 일에 온갖 정성을 다 들이셨습니다. 그러다가 무신년137)  에 호조와 예조의 판서에게 역사를 시작할 것을 명하셨으나 유사로 있는 신하가 제때에 그 일의 진행을 품의하지 못하고 머뭇거려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신의 마음은, 연대가 오래된 뒤에 본릉의 성스러운 덕이며 거룩한 말씀과 전후의 사적이 영원히 묻혀 전해지지 않는 한탄이 나오고 선대왕의 선조를 추모하고 능을 복구하신 큰 덕과 사업이 또한 밖으로 드러나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청컨대 빨리 유사로 하여금 무신년의 하교에 따라 온릉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거행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봉실(奉室)을 참배한 뒤에 경봉각(敬奉閣)에 봉안(奉安)한 괴원(槐院)에서 올린 사대 문서(事大文書) 및 명나라 당시의 《이문등록(吏文謄錄)》 15권을 친히 봉심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당시의 《괴원등록(槐院謄錄)》 12권          【본디 13권이었는데 1권은 없어졌다.】        을 한 궤짝에 넣어, 봉안한 책장 가운데 제1층 고칙궤(誥勅樻)의 왼쪽에 안치하였다. 대체로 봉실에 예를 행할 때는 경봉각에도 아울러 행하고 매년 봄에 승문원 제조와 호조·예조의 당상과 낭관이 봉심하고 햇볕에 말리는 것을 일정한 법으로 정했다. 경봉각 자물쇠는 괴원에 보관해 두었으며 《형지안(形止案)》 4본(本)은 단사(壇司)·내각(內閣)·괴원·예조에 나누어 보관시켰다. 전교하기를,
"봉실(奉室)을 참배하고 경봉각에 보관되어 있는 만력(萬曆)138)                   전후의 사대 문서를 두루 봉심하면서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마음에 사무치는 느낌이 한이 없었다. 아울러 생각건대, 마 제독(麻提督)139)                  은 임진 왜란을 만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나라에 나와 싸워줬는데 그 성대한 업적은 이 영원(李寧遠)140)                  과 서로 비슷하였다. 은진(恩津) 들판에서 왜적과 교전하고 있을 때 어떤 노인이 함께 도와 싸웠는데 나중에 들판에 있는 석불(石佛)이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이상하게 여겨 구리쇠로 삿갓을 주조해 씌워준 일이 있어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그 석불을 가리키며 감탄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손자 순상(舜裳)이 풍씨(馮氏)·왕씨(王氏) 등 여러 사람과 그곳의 난리로 인해 우리 나라에 들어와 또 고상(故相) 문정공(文貞公) 김육(金堉)과 남쪽 지방의 누에치는 일을 논의하였다. 그 자세한 사실은 문정공의 일기에 들어 있는데 지금 1백 5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도독의 후손이 호남으로 옮겨 내려갔다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분명히 어디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수소문하여 반드시 그 후손을 찾아 보고하게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마씨의 후손을 찾는 일로 인해 또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다. 문가상(文可尙)은 신국(信國)의 손자로 요동과 심양의 난리를 만나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돌아왔으니 그 의기가 뛰어난 것을 알 만하고, 또 ‘타향의 달구경’이란 시를 보면 연(燕)나라 저자에서 노래부르고 거문고를 타던 감상141)                  이 절로 일어나는데 화어(華語)를 책으로 엮어 나라에 바친 일로 특별히 3품의 품계를 받았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로 도망쳐나온 사람들 가운데 걸출한 인물이라 할 만한데 유독 그의 후손만 소식이 없어 망배(望拜)하는 대열과 한족(漢族)의 무리 속에 참여하지 못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자손 또한 한성부로 하여금 수소문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5월 12일 계사

중비(中批)로 이만수(李晩秀)를 이조 판서로, 서용보(徐龍輔)를 예조 판서로, 이경일(李敬一)을 공조 판서로, 이은모(李殷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조진관(趙鎭寬)을 선혜청 제조로, 이인수(李仁秀)를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민광승(閔光昇)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5월 13일 갑오

상이 재계 중이라 국사를 살피지 않았다.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에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날 다섯 치의 비가 내렸다.

 

5월 22일 계묘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조 판서는 아무쪼록 출사하도록 해야 하는데 대체로 잘못된 시속을 바로잡는 일은 현재 가장 시급한 사안이다. 병신년142)   이후 외척보다 현인을 우대하는 의리가 차츰 과거보다 못하다는 탄식이 많았는데 이제 이조 판서는 그 인품이야 전형을 맡는 지위에 약간 부족하지만 조정에 나와서 시속을 바로잡는 정사를 할 사람으로서는 바로 적격자이다. 옛날 사마공(司馬公)143)  이 추밀(樞密)을 사양한 일이 있고 과거에 김 문정(金文貞)144)  이 이조 판서가 된 뒤에 사면하기로 결심한 일이 있었으므로 사직소의 비답에서 ‘사추밀(辭樞密)’ 세 자를 언급하였다. 김 문정이 추밀을 사양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지만 요즘에는 염치의 기준이 옛날과 다르며 의리를 지킨다는 것은 더욱 지나친 일이다.
이조 판서는 그의 형이 현재 재상으로 있다 하여 반드시 의리를 지키려고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고상(故相) 이건명(李健命)과 이관명(李觀命)은 동시에 함께 행공(行公)하였고 그밖에도 그와 같은 전례가 많으니, 결코 형이 현임 재상으로 있는데 아우가 이조 판서가 되었다는 이유로 피혐할 것은 없다. 대체로 전임 이조 판서는 시속을 크게 개혁해 보려고는 했으나 조정에 피혐한 자들이 많아 공정하지 못하다는 한탄이 없지 않았고 게다가 그 재주를 더 단련시키고 사람을 아껴두는 측면으로 인해 체직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사람 가운데 어느 누가, 나는 인물을 전형하는 재주를 지녔다 말하고 나와서 명을 받을 것이며, 또 어느 누가, 나는 인물을 알아보고 구별하는 기술이 없다고 말하며 그로 인해 벼슬을 사면받을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일반적인 풍습을 보면 먼 친족 가운데 호조나 병조 판서와 같은 관직에 있는 자가 있더라도 이조 참의로 있는 자는 행공(行公)하려 하지 않으니, 의리를 지킨다는 그것이 결코 온당한 것이 아니다. 이조 판서가 만일 특별히 제수한 뜻을 이해하여 세속의 관습을 떨쳐버리고 나와서 한 시대의 폐습을 말끔히 씻어준다면 어찌 조정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경은 잘 당부하여 빨리 나와서 숙배하게 하라."
하였다.

 

주원(廚院)으로 하여금 꿩고기를 살아 있는 닭으로 대신 받아 봉진(封進)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하도록 명하고 아울러 삭선(朔膳)의 재료를 대신 받아들이는 것도 일공례(日供例)를 적용할 것을 명하였다.

 

장령 권한위(權漢緯)가 상소하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세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해야만 그 중도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16자는 곧 요(堯)·순(舜)·우(禹) 등 성군이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이자 또한 우리 열성조에 서로 주고받은 아름다운 이상이기도 하니, 전하께서는 항상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일깨우고 가르치는 방도로 삼으소서.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믿고 전하를 섬기는 것은 ‘의리를 밝힌다[明義理]’는 세 글자에 불과하고 나라의 힘이 만세를 유지하는 것도 이 세 글자에 벗어나지 않는데, 근년 이후 어떤 일이 의리에 관계되면 금령이 엄중하고 어떤 말이 충직한 뜻에서 나오면 훈계하시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으니, 아랫사람들이 평소에 전하께 기대했던 바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생각하고 또 생각하시어 전반적으로 의리에 관계되는 일은 아무쪼록 더욱 천명하소서.
현재 성명께서 나라를 다스리시면서 세속을 교화시키는 모든 방면에 있는 힘을 다 들이시지만 저들 별종의 사학(邪學) 무리는 서울에서부터 시골까지 불길이 번지듯 번져가고 있으니, 그 근원을 막고 그 사람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길은 그 책을 태워버리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신의 견해로는 방리(坊里)로 하여금 진서(眞書)나 언문으로 베껴쓴 책들을 전부 거두어 태워버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빨리 명을 내리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가 사람을 쓰는 법은 곧 문(文)·음(蔭)·무(武) 세 길인데 도포를 입은 선비가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이 되어도 승진하지 못하는 자가 있고 가죽군복을 입은 무사가 천거의 시기를 놓치고 오래도록 적체되어 한 번도 의망되지 못한 자들이 많으니, 어찌 모두 재능이 없기 때문에 그러겠습니까. 신의 견해로는 특별히 두 전조(銓曹)에 지시하여 인물이 적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각도에서 환곡(還穀)을 나누어 주거나 보관해 두는 것은 대체로 종자와 식량을 보충하고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서인데 대부분 다른 아문의 곡식을 감영의 곡식에다 옮겨 등록하여 전부 나누어 주기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환자곡식을 타먹는 집이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신의 견해로는 묘당으로 하여금 각도에 공문을 띄워 그 사례를 샅샅이 조사하여 도로 본디의 아문으로 귀속시켜 환자곡식을 타먹는 집의 폐막을 다소나마 풀어주도록 지시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군사에 복무하는 일이거나 도적을 다스리는 일 이외에는 곤장을 쓸 수 없는데 근래에 수령들이 군사나 도적도 아닌 민간인을 혹독한 곤장으로 다스리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고 무관 수령의 경우는 그 보다 더 심합니다. 이번 해서 병사(兵使)의 사건으로 보더라도 형신과 곤장을 남용하는 실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의 견해로는 묘당으로 하여금 각별히 각도에 지시하여 법을 범한 수령은 율에 따라 논죄하게 함으로써 국법을 잘 지켜 예전의 버릇을 답습하지 말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여러 조항은 다 세련되고 진실한 의견으로 마땅히 유념하여 채택하겠다. 사학(邪學)에 대해 그 책을 불태우는 일은 예전의 법령이 엄중하니, 유사가 어떻게 그 법을 잘 집행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이 되도록 벼슬하지 못한 자를 전조(銓曹)로 하여금 가려내 이름을 써 올려 차례대로 거두어 쓰도록 하고, 천거에 누락되어 오래도록 실직에 의망되지 않은 자도 병조에 물어 보고하게 하라. 각도에서 10년 이래 다른 아문의 곡식을 감영 곡식에다 옮겨 등록한 것들을 샅샅이 조사하는 문제는, 다만 그 수효만 있기 때문에 항상 그처럼 구차스러움을 면치 못하니, 이 문제를 묘당에 넘겨 잘 조처하게 하라. 수령이 곤장을 쓰는 문제는 각도에 감사와 병사가 있는데도 금하지 못하니, 앞으로 그와 같은 일이 드러날 경우 우선 잘 단속하지 못한 자부터 벌을 주겠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민영조(閔榮祖)가 상소하기를,
"사계(四啓)에 대해 그대로 하라고 윤허하신 것은 실로 거룩하신 결단에서 나온 일인데 처음에는 윤허하시고 나중에는 또다시 시행을 거부하시니, 이 어찌 성상의 밝고 환하게 형벌을 시행하시는 정치에 결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빨리 전지(傳旨)를 내리소서. 이득제(李得濟)는 병조 판서에 대해 문무의 구별이 있고 존비의 차이가 현격하며, 그는 어영 대장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장수와 막하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하찮은 일에 화를 내어 공회 석상에서 대들었으니, 교만하고 무례한 버릇이 이대로 자꾸 커간다면 기강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도 상대(霜臺)에 입직했을 때 찾아오는 손님들의 출입을 금하지 않았고 말을 탈 때에는 마침 재계를 하는 시기였는데도 감히 잡다한 무리와 어울려 새벽닭이 울 때까지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으니, 이는 모두 기강이 문란해지고 명분과 의리가 어긋난 풍조입니다. 이득제는 이름을 사판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고 그의 아들 석구(石求)는 범한 죄가 더 무거우니 잡아다가 죄를 물어 엄중 조처하소서.
그리고 삼가 듣건대 성균관 유생들이 윤광안(尹光顔)이 대사성이 된 일로 통문을 보내 그 소문이 중외에 퍼졌으니, 이는 실로 조정의 일대 수치입니다. 이 어찌 알성(謁聖)에 하자가 있는 자가 성균관의 장관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인물을 잘 알아보시는 성상의 혜안으로 그 사람을 아껴 써야겠다고 생각하셨다면 지방이나 서울 가운데 무슨 벼슬인들 안 될 것이 없을 것인데 하필 요직 중에서도 요직인 대사성을 맡기신단 말입니까. 청컨대 윤광안에게 대사성직을 제수한다는 중비(中批)의 명을 특별히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처음에 말한 일은, 모든 일에 대해 이미 아뢴 다음 또 상소하는 것이 근래의 잘못된 풍조 가운데 하나로서 매우 엄하게 금지시켰는데 네가 어찌 감히 금령을 범한단 말인가. 감히 말할 일이 아니다. 이득제와 석구의 일은, 어찌 큰 일이겠는가. 그런데 한번 써내려가는 붓으로 함께 논의하였으니 맑은 조정에서 충후함을 숭상하는 기풍이 아니며, 장수와 막하 운운한 점에 있어서도 매우 온당치 않다. 예전에 이 일로 죄를 심의하여 처분한 일이 있는데 어찌 다시 처분할 수 있겠는가. 석구에 대해서는,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상대에 끼친 수치가 막심하고, 재계하는 날의 행위도 그대로 두고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구초(口招)를 받아 보고하게 하라. 대사성에 대한 중비를 특별히 거두라고 한 일은, 내가 그의 문장과 식견을 잘 알아 현 관직에 중비한 것으로서 인물에 걸맞게 부리자는 뜻이었는데, 너의 이 소장의 말은 사적인 편견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은 행위를 어찌 감히 자행하는가."
하였다. 석구는 죄를 심의하여 호서의 변방으로 유배하였다. 전교하기를,
"중비를 상소하여 논박한 것은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법이나, 잡스러운 자까지도 모두 금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우순(虞舜)이 참소를 증오하여 간관(諫官) 용(龍)을 명한 뜻이겠는가. 어느 벼슬인들 적당한 자리가 없겠느냐고 대간의 상소에서도 말했으나 대사성에 먼저 제수한 것은 그의 문학이 정사쪽보다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여러해 동안 시종신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그와 애기를 해본 바 논리가 매우 분명하였다. 선부(選部)의 관직도 적격자가 아니라 할 수 없으니 현직을 체차하여 염치의 도리를 신장할까 한다. 전 대사성 윤광안을 이조 참의에 제수하라."
하였다.

 

5월 24일 을사

이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상소하기를,
"신은 빈연(賓筵)에서 물러나와 삼가 이조 판서를 특별히 제수한다는 명을 받고 오장이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위로 국가의 큰 체면을 생각하고 아래로 사문(私門)의 깊은 걱정을 돌아보느라 정신이 오락가락 헛소리를 하며 하룻밤 사이에 서너 번씩 자리에서 일어나곤 한 지가 열흘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신은 듣건대 신하로서 임금을 섬길 때 직분을 다하는 것이 충성이고 사양하는 미덕은 바른 의리가 아니라 하였습니다. 옛날 문물이 한창 성했던 장릉(長陵)145)   당시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어전에서 스스로 자신을 천거하여 특별히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던 일은 오늘날까지 전조(銓曹)의 미담으로 전해 오니, 대체로 그 나라를 위한 진심이 물아(物我)라는 하찮은 혐의에 구애받지 않은 것으로, 또한 시대와 자신의 역량을 헤아려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이 자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돌아보면 신은 10년 동안 측근에 모시고 있으면서 받은 은혜가 하늘같아 죽으나 사나 오직 앞으로 뻗은 한가닥 충성심은 감히 옛사람보다 못하지 않다고 자부하니, 혹시 성군의 치화를 돕고 큰 은혜를 보답할 만한 극히 작은 능력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자신을 천거한 고사라도 흠모하여 그대로 따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어찌 감히 상투적인 말로써 저버릴 수 없는 하늘의 명을 사양하여 스스로 진실을 꾸미는 세속의 풍조로 돌아가길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일에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있으니, 하찮은 정성이나마 다 바치며 살아서는 목을 내놓고 죽어서는 결초 보은으로 은혜를 갚는 일은 가능한 것이고, 난장이가 수천 근을 짊어진다거나 소경이 오색을 가려내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처럼 무능하고 용렬한 자질은 어느 것 하나 남과 같은 것이라고는 없으니 무슨 벼슬인들 걸맞겠으며 무슨 일인들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인물을 선발하는 관직에 대해서는 더욱더 무식하니 관제(官制)의 연혁과 반부(班簿)의 고하와 인물을 천거하고 삭제하며 성적을 고과하는 법이며 씨족 신분의 구별 등에 깜깜하여 하나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도 오활하여 평소에 남들과 어울리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같은 조정에서 하대부(下大夫) 이하 인물은 그 성명과 얼굴을 거의 몰라 인사 임명장을 볼 때마다 제(齊)나라 사람이 초(楚)나라 말을 듣는 것처럼 어리둥절합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천관(天官)의 으뜸자리에 앉혀 한 나라의 인사 행정권을 맡아 당대의 인물을 진퇴하여 그로 인해 청류를 밀어주고 탁류를 제거하며 당파를 잘 조절하고 융화시킴으로써 우리 성상의 공명 정대한 정치를 보좌하게 한다는 것은 또한 틀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나라의 중대한 자리는 의정부와 정조(政曹)로서 세상에서 말하는 바 인재로써 임금을 섬기는 직책인데, 형제 두 사람이 동시에 함께 차지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이름난 신하들 가운데 그 유례가 드물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엄숙하고 밝은 조정에 유능한 인재가 많이 있는데 신이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특별한 대우를 받는단 말입니까. 어떤 자를 선발해야 할지 묻고 의논하는 일을 장차 사적인 방안에서 행해야 하겠습니까, 또 인사행정의 잘잘못을 장차 공적인 조정에서 행해야 하겠습니까. 사리의 체면은 곤란하게 될 뿐이며 일정한 격식의 관례는 사사건건 장애를 받을 것인데 중비(中批)로 잘못 은혜를 내리셨으니, 성군이 다스리는 세상의 아름다운 법이 아닙니다. 제목(除目)이 일단 밖에 나가면 사방의 식견이 있는 선비들은 반드시 관청의 준칙이 해이해지고 작위가 너무 더럽혀진 것에 수근거리며 한탄해 할 것입니다. 삼가 빌건대 새로 제수하신 신의 직명을 빨리 삭제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특별히 제수한 것은 그 뜻이 풍속을 바로잡자는 데에 있으니, 경은 사양하지 말고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만수가 부르는 명을 어기자, 전교하기를,
"천관(天官)의 장관은 삼정승에 버금가는 자리로서 맡은 책임이 중하기 때문에 그 거취 또한 가볍게 할 일이 아니다. 중비를 내린 이후 열흘 이상이 지났지만 머뭇거리는 것을 그대로 허용하고 그다지 다그치지 않은 것은 너그럽게 포용하여 예의로써 부리는 도리를 다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내가 중신(重臣)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이러하면 중신이 그에 보답하는 것도 나처럼 한 뒤에야 위아래의 행위가 다 옳게 될 것이다. 대체로 마땅히 인혐하지 않을 일인데 인혐을 한다거나 마땅히 인혐할 일인데 인혐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가 다 임금의 명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명을 업신여기는 자는 그 폐단이 거짓이 되기 마련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 자질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지만 옛사람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옛사람이 행했던 일을 행하면 그가 곧 옛사람일 뿐인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 옛사람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감히 행하지 못한 것을 제 자신이 창안하고 제 자신이 그것을 지키면서 이리저리 꾸며대어 기발한 계책을 만들어내므로 기강이 따라서 해이해지고 습속이 차츰 치유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저번에 교지를 내려 타이르고 연석에서 당부하기를 두번 세번 거듭하여 그만두지 않았던 것은 중신이 여러해 동안 시종신으로 드나들어 그 인품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갑자기 현임 정승의 아우라는 이유로 정조(政曹)를 맡기 어렵다 하여 도저히 범할 수 없는 선처럼 보아 사직소를 장황하게 올리고 부를 때마다 거절한단 말인가. 혹시 이와 같은 격식이 고금에 한번도 없는 상황에서 중신이 맨 처음 시작한 것이라면 두려워하고 근심하여 나오기를 주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수백 년 전부터 정승과 전조의 판서를 형제간에 동시에 지낸 사례가 비일비재하니, 이를테면 고상(故相) 이관명(李觀命) 형제의 경우는 아우는 재상이고 형은 총재(冢宰)가 되어 대정(大政)을 두 번이나 치르도록 그대로 유지하였다. 형도 오히려 관직을 사양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아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중신은 격례에 어두워서 그렇다 하더라도 우상(右相)은 애당초 그를 일깨워주지 않아 10일 동안 재계하느라 겨우 지탱할 정도로 허약해진 나에게 이처럼 마음을 졸이며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있게 하니, 과연 마음에 유쾌한지 모르겠다. 이는 따지고 보면 군신간의 의리에 관계될 뿐이지만 다만, 기강을 세우는 일이 여기에 있고 습속을 바로잡는 일도 여기에 있다고 며칠전 빈대(賓對)할 때 누누이 말한 것을 생각해 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늘 강명하는 것은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의리이다. 그 어찌 강요할 수 없는 자를 계속 강요하여 사람의 본심과 본성을 거스릴 수 있겠는가. 이조 판서 이만수를 어찌 탓할 수야 있겠는가. 저번의 명패(命牌)로 패초하여 거취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할 것이며 이 뜻을 또한 입시한 사관에게 대신(大臣)을 찾아가 전달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6일 정미

큰비가 내렸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내시(內侍)의 송사를 내시부를 통해 전계(轉啓)하지 않고 곧바로 법사(法司)로 올릴 경우 그 송사는 청리할 수 없다는 규정이 본디 있습니다. 일전에 양주(楊州)에 사는 내관(內官) 이세엽(李世曄)이 송사할 일이 있다고 하며 동부(東部) 관아의 문으로 들어오므로 서리들이 내관의 송사는 청리할 수 없다고 말하자, 부(部)의 법관에게 무수히 욕을 퍼부었다는 말을 듣고 놀랍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경기 감영에 이문(移文)하여 그곳에서 압송하게 했더니 그가 일찍이 대령 낭청(待令郞廳)을 지냈다는 이유로 잡아오지 못했다 합니다. 그가 조관(朝官)의 신분이고 보면 신의 부(府)로서는 국법상 마음대로 그 죄를 다스릴 수 없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죄를 물어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근래에 법의 기율이 해이해져 이와 같이 기강을 범하고 법을 어지럽히는 무리가 심지어 법사의 관원을 마구 욕하기까지 하는데도 법으로 처단하지 못하고 초기(草記)를 올렸으니, 이 어찌 너무나 자질구레하지 않은가. 경들부터 우선 엄중히 추고해야겠다. 이른바 대령 낭청이란 이름은 곧 내시부에는 없는 직함이므로 사칭이라는 것을 알기가 어렵지 않은데 이제까지 경조(京兆)에 넘겨 처치하지 않았으니, 해조로 하여금 현재 드러난 두 가지 죄를 엄중히 조사하여 그 실상을 알아내 법대로 단호히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형조가 내관 이세엽은 조율하여 곤장을 쳐 유배하였다고 아뢰었다.

 

정대용(鄭大容)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5월 28일 기유

비국 유사 당상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요즘 송정(松政)이 우려되는 상황은 서울이나 지방이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배를 수선하고 바꾸는 일이 해마다 벌어지는데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니, 실로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우려가 있습니다. 우선 조선(漕船)으로 말한다면 과거 선조(先朝) 정미년146)  에 호남의 감사 이유(李瑜)가 조창(漕倉)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여론을 널리 채집하고 아울러 10년 만에 개삭(改槊)하고 20년 만에 새로 만들기를 청하여 여러 해 동안 그대로 실시하였고 그 법을 《속대전(續大典)》에 실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고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연석에서 아뢴 것으로 인해 다시 원전(原典)의, 5년 만에 개삭하고 10년 만에 새로 만들기로 한 법을 따랐는데, 그때 아뢴 말을 살펴보면, 연한을 늘려 정한 뒤로 조졸(漕卒)의 간교한 꾀가 더 생겨나 경강(京江)에 도착하면 스스로 선판을 훼손하고서는 호조에 허위로 보고하여 10년도 못 되어 기어이 바꾸고야 만다고 말했을 뿐, 배가 참으로 썩고 상하여 10년이 넘도록 사용할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선재(船材)는 백년 동안 기른 나무로 사용하는데 해마다 계속 베어내고 있으니, 이처럼 방치해 두다가 언젠가 바닥이 나는 때가 닥치면 조운(漕運)이 폐지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사용한 기간이 5년이 되지 않은 것은 절대로 쉽게 개삭을 허가하지 말게 하소서. 양호(兩湖)는 조선을 개삭하거나 새로 만들 때 으레 장계를 올리는데 영남에서만은 보고하지 않으며 선혜청에서 개삭을 허가할 때도 본사(本司)에 보고하지 않고 공문을 내보내고 있으니, 일이 매우 엉성합니다. 앞으로는 한결같이 호조와 양호의 사례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29일 경술

수찬 김이재(金履載)가 상소하기를,
"방금 이조 판서 이만수(李晩秀)의 사직소 어구를 보았더니 온당치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는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직분을 다하는 일이 충성인 것이고, 사양하는 미덕은 올바른 의리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아, 사군자가 논조를 세워 이야기를 할 때는 흠결이 없이 원만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어찌 그렇게도 경솔하고 교만하단 말입니까. 대체로 사양이란 예법의 시발점입니다. 예법이란 마음에 뿌리를 두었고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인데 사양하는 것을 올바른 의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천성을 악하다 할 수 있고 학문을 거짓이라 할 수 있으니, 이 어찌 작은 문제입니까.
옛날의 군자는 세 번을 읍한 뒤에 나아갔고 한 번 사양하고 물러났으니, 마땅히 나아갈 상황인데도 나아갈 때는 반드시 세 번을 읍함으로써 흡사 본심을 꾸미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 혐의를 피하지 않았던 것은, 그와 같이 하지 않으면 나쁜 곳으로 흘러가기 쉬운 마음을 단속하여 예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충성을 다하고 직분을 다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사양하는 것과 그 비중이 똑같다고 볼 수 있으니, 상탕(商湯)이 세 번 초빙했던 이윤(伊尹)과 소열제(昭烈帝)가 세 번 찾아갔던 제갈양(諸葛亮)을 보면 그들이 나가서 임금을 섬길 때 그 충성과 직분을 다한 정도가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오늘날을 돌아보면 세상의 등급이 차츰 낮아져 사대부들이 너나없이 모두 명리를 추구하면서도 도리어 교묘하게 본심을 꾸미고 사양함으로써 이름과 이익을 취하는 경향이 있으니, 이는 그 마음이 사실 혐오스럽습니다만 신의 우매한 소견으로는 사실 예법을 보존할 수만 있다면 사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청주와 말린 고기가 있다 합시다.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면서도 그것을 마시거나 먹지 않고 있다면, 그자가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생각을 잊지 못하는 것은 사실 그점이 있으나 왼손 오른손으로 마구 끌어당겨 오직 배를 채우는 것만 추구하는 것보다야 어찌 낫지 않겠습니까.
만일 중신(重臣)의 이 말이 지위가 낮아 말의 영향력이 작은 자에게서 나왔다면 신 또한 굳이 걱정할 것이 없겠으나 지금 임금의 측근으로 예우를 받는 중신의 입에서 나와 소장에 등재되고 그것이 사방에 퍼졌으며, 또 그가 나오기를 바라는 임금께서 그 말을 포용하는 비지를 내리셨습니다. 혹시 다행히 그것을 보는 자들이 잘못 이해하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겠으나, 만에 하나 기회를 노리며 사실을 왜곡하길 좋아하는 요즘 풍속으로서 너나없이 말을 조작하여 염치없이 명리를 탐하는 마음을 지니고서 그것이 곧 바른 의리라고 생각하며, 어쩌다가 사양하여 뒤로 물러나는 자가 있으면 진심을 꾸민다는 이름을 붙여 곤경에 빠뜨릴 경우, 그 폐단이 오늘날 걱정하는 것보다 더 심하지 않겠습니까.
신 또한 중신의 본의는, 그 사직이 허위로 꾸며 사양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일부러 그 말을 구사해 다소나마 세속의 범주에서 탈피하려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만, 이 말이 한번 더 발전하여 염치가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감히 이처럼 구구한 말로 옳고 그름을 가려 조절하는 설을 하였습니다. 삼가 성명께서 특별히 더 깊이 생각하시어 이조 판서 이만수를 훈계하고 꾸짖어 그 말을 잘 삼가지 못한 과실을 바로잡음으로써 한 시대의 올바른 사상을 부지하는 한 방안으로 삼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중신에게 특별히 총재(冢宰)를 맡긴 것은 그 의도가 오로지 세속을 바로잡자는 데서 나왔으며 그를 격려하는 교지도 세속을 바로잡는다는 뜻의 ‘교속(矯俗)’ 두 글자로 전편의 주류를 이루었으니, 사실 조정의 명분을 갈고 닦기 위해서는 마땅히 고루한 습속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요즘의 습속은 후한 녹을 받으며 청요직(淸要職)을 차지한 자들이 그 직함을 받자마자 그만두려고 하니, 이는 진정 주부자(朱夫子)의 이른바 사대부들은 거짓 핑계를 댄다는 습속이다. 조정이 이것을 반드시 바로잡아 한 시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려고 하는 이때,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그 어떤 무리가 뻔뻔스레 거역하여 중신의 상소문 구절을 흠잡아 앞장서서 상소하여 횡설수설한단 말인가. 중신이 당한 일은 이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오늘날의 습속이 어찌하여 옛날 그대로인지 모르겠다. 밖으로 드러난 자부터 먼저 중벌로 다스린 뒤에야 진정으로 습속을 바로잡는 길이 될 것이니, 수찬 김이재를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재는 언양현(彦陽縣)으로 유배되었다.

 

5월 30일 신해

약원(藥院)의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내의원 도제조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어제 삼가 전교를 보았더니 수찬 김이재를 귀양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원소(原疏)를 보지는 못했으나 이것은 한 재상을 논박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옥당이 한 재상을 논박하였다 하여 귀양을 보내기까지 한다면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신은 감히 신의 아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에 대한 처분이 중도에 지나친 것이 아닌가 염려되기 때문이니, 빨리 더 깊이 생각하시어 도로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연석에 불러 접견한 것은 이 일을 확실하게 일러주기 위해서인데, 차대(次對)하는 날짜를 앞당겨 정한 점은 조금 지나친 일이고 나의 요즘 정력으로는 여러 사람을 상대하여 대화하기도 매우 어렵기 때문에 유사 당상만 들어오게 한 것 이다. 경의 그 말은 너무나 뜻밖으로 도리어 한탄스럽다. 경의 선경(先卿)147)  이 일찍이 고 부제학 김시찬(金時粲)148)  을 구제한 일이 있는데, 경이 김이재를 구제하는 것은 경의 선경의 일과는 그 말로 보면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일은 사실 다르다. 대체로 선조(先朝) 당시에는 신축·임인년의 의리로서 성궁(聖躬) 자신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그 당시 의리를 고수하는 사람은 모두가 선조(先朝)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었는데 사대부의 기풍과 절개 또한 오늘날보다 백배나 되었으며, 게다가 공적인 분개 이외에 그들의 조부와 부친 때부터 잊지 못할 사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의리는 저절로 신장이 되었으나 그로 인해 파급된 폐단은 세신(世臣)과 세가(世家)도 보전하지 못할 염려까지 생길 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선대왕의 거룩한 덕과 큰 사랑으로 반드시 그들을 붙잡아주고 존속시키고자 번득이는 창칼 속에서 구제하여 반석처럼 안전하게 해 주셨다.
김시찬을 처분한 일은 대체로 지나친 자를 꺾고 거센 자를 억제하는 고심에서 나왔으나 당시에 의리를 고수한 선비들은 하나같이 김시찬과 같았으므로 그 처분이 비록 엄중했지만 공론은 더욱 더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천지를 떠받치고 우주를 관통하는 의리는 이로 인해 한층 더 튼튼해지고, 당쟁을 없애 서로간에 화합하게 한 성덕(聖德)은 이로 인해 한층 더 빛났다. 경의 선경의 경우는 김시찬과 본디부터 친근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있는 힘을 다해 그를 구제했는데 이는 참으로 당연한 도리인 것이다.
오늘날의 세도(世道)는 옛날과는 달라 이른바 청의(淸議)를 고수하고 준엄한 언론을 지녔다는 자들이 옛날 사람들의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니, 만일 위에서 밝히지 않는다면 한줄기 춘추(春秋)의 의리는 금방 어두워져 장차 밝힐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의 이 처분은 순전히 의리를 밝히기 위해서였는데 경은 그 일이 경의 아우와 관련되었다 하여 도리어 구제하는 말을 하였으니, 이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성인의 이른바 처지를 바꾸면 다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말은 그 처지가 서로 다르고 처리한 일도 따라서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선경이 김시찬을 구제한 일은 대체로 그가 의리를 붙잡아 세웠기 때문이지만 지금의 김이재가 한 말은 의리의 반대편인 세속의 무리 속에 속한 것이니, 경이 그를 구제하는 일을 어찌 선경의 일을 끌어다가 전례로 삼을 수 있겠는가.
만일 외면으로만 본다면 그 상소는 한 사람 이조 판서를 논박한 것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 또한 경고하고 꾸짖으라고 한 것에 불과하니, 이른바 추고하는 정도로 약간 다스리면 충분할 것이다. 지금처럼 어물어물 넘어가는 때에 이조 판서 정도는 말할 것도 없고 혹시 경을 논급하거나 더 올라가 임금을 논급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그 이유로 죄를 가해 이와 같이 처분할 수가 있겠는가. 이 어찌 의리에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대신은 자기 자신이 탄핵을 받은 것과 관계되는 일이더라도 의리에 관계된 것이라면 작은 혐의를 피하지 않고 앞장서서 벌을 줄 것을 청한 경우도 가끔 있었는데 경의 그 말은 전혀 경에게 기대했던 바가 아니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신은 그 상소의 원본을 보지 못하고 경솔하게 대답하였다가 이제 분부를 받고 보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사실이 덕이 못난 사람으로 등극한 이후 3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나 정책적인 면에서는 볼 만한 것이 없으나 한 가지 정당한 규범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꿋꿋하게 지켜 변동이 없었다. 대체로 을해년149)   이후부터는 정치가 이루어지고 제도가 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천도(天道)는 순환하는 법이라서 성쇠가 계속 반복되었다. 사실 모든 신료들이 극도로 성하면 다시 쇠퇴해진다는 경계를 잊지 말고 의리를 고수하던 자세를 잃지 않아 항상 을해년 이전이 마음을 지님으로써, 의리를 고수하는 것이 모두들 자기 조부와 부친이 선조(先朝)를 위해 충성을 바쳤던 것처럼 하였더라면, 어찌 모년(某年)150)  의 의리를 범하는 일이 벌어졌겠는가.
그 원인을 따져보면, 안일을 즐기는 고질 속에 깊이 빠져들어가 한 조각 정신이 궁리하고 경영하는 것은 오로지 명리를 얻을 것을 걱정하고 얻은 뒤에는 잃을까 걱정하는 데에만 있으므로 추고나 체차 등 가벼운 벌까지도 다 신경을 쓰면서도 의리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의리와 배치되는 쪽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한 번 발전하여 모년의 대의리에 관계되었고 두 번 발전하여 을미년151)  의 상황이, 세 번 발전하여 병신년의 상황이, 네 번 발전하여 정유년의 상황이 벌어졌으며 정유년 이후는 참으로 이른바 회국(鄶國) 이하는 자질구레하여 비평할 것도 없다는 상황이므로 나 또한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나의 모든 신자들은 어느 누가 선대왕께서 만들어 길러주신 자가 아니겠으며 또 어느 누가 선조 때 충성을 다 바친 자들의 아들 손자가 아닐 것인가. 그런데도 잘못에 잘못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이와 같은 영역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으니, 이는 인인(仁人) 군자만 차마 방관하지 못할 일이 아니라 세도(世道)와 국가를 돌아볼 때 어찌 추위가 살을 에이듯 송연하지 않겠는가.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한 부류의 청의(淸議)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두 척리(戚里)의 다툼이 춘추 시대 의리가 없는 싸움과 흡사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의리를 부식하고 있는 아무아무도 그들이 어찌 모두 척신(戚臣)과 친한 자들이겠는가.
나의 한 조각 애절한 마음은 오로지 찌들은 더러운 습속을 전부 새롭게 만들어 마침내 나쁜 무리들까지도 모두 착한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있기 때문에 처음 왕위에 오를 때부터 한 가지 정당한 규모를 분명히 내보여 의리를 천명하고 함께 대도(大道)로 가는 근본으로 삼았는데, 규모가 크게 정해진 뒤로 이 속에 들어온 자는 국가를 위하는 편으로서 충신이고 군자였으며 여기서 벗어난 자는 역적의 편으로서 충성스럽지 않은 자이고 소인이었다. 의리에 관계되는 일은 실로 못을 자르고 쇠를 끊듯 과감하게 처결해야 하며 규모가 일단 확고히 세워지면 국법보다 엄한 법이다. 오늘날의 신자로서 어느 누가 이러한 규모는 절대로 변동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나의 한 가지 정당한 규모에 관해서 방금 말을 하였는데 그것을 잘 모르는 자는 간혹 내가 사람을 취사할 때 선후와 피차가 서로 다른 경향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병신년152)   이후 등용한 자를 살펴보면 내 본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이다. 기해·경자년 당시는 바야흐로 어진 자를 대거 등용할 때였으나 불행하게도 홍국영(洪國榮)의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때의 상황으로는 우선 쉬게 했다가 다시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실 어쩔 수 없이 진출시켰다가 다시 또 내보내는 등 오락가락 하였으나 한때의 진퇴가 의리의 경중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기해년 이후 8년 사이에 비로소 조금씩 옛모습으로 돌아갔는데 고상(故相) 채 판부(蔡判府)153)  와 김 봉조하(金奉朝賀)154)   등의 경우는 액을 당한 시기가 마침 같기 때문에 신축년부터 무신년까지 8년 사이에 또 다시 등용하였으며, 그 당시에는 조정에 쓸 만한 인물이 많았으므로 윤 우상(尹右相)155)   같은 자는 때마침 사건을 만난 김에 들어가서 쉬게 하였다가 무신년부터 을묘년까지 8년 동안에 다시 등용하였다. 대체로 그 등용하고 내보내고 하는 주기를 모두 8년으로 기한을 두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월을 낭비했던 점은 있으나 반드시 쉬게 한 뒤에 쓰려고 했던 이유는 시대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고 또한 그 사람을 위해 신망을 기르는 방안이었다. 내가 그를 쉬게 한 이유도 일찍이 그 자신에게 말해준 것이 있었지만 그 자신이 잘 쉬어준 것도 그 어찌 처신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8년을 주기적으로 등용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하지만 8년을 전후하여 세 정승을 번갈아 등용하였고 그 중간에 정승으로 제수되어 책임을 맡은 자 또한 많았는데, 모두 그 마음이나 행적이 의리를 고수한 실상이 반드시 있어야만 등용하였었다. 지금 이 분부도 어느 한 부분만 들추어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깊은 뜻이 따로 있다.
과거 선조(先朝) 때에는 당쟁을 없애려는 고심 때문에 등용하고 물리치는 일이 기준이 없는 때도 있었으나 나는 이와 같이 일정한 기준을 두었는데 이는 또한 이른바 때 시(時) 자의 의미가 크다고 한 경우이다. 그 진퇴는 혹 서로 다른 때가 있었으나 지극히 엄중한 의리는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니, 비유하자면 음식을 먹을 때 여러 가지 시고 짠 반찬이야 많아도 죽·밥·콩·조 등의 본디 맛은 항상 변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현재 의리를 주장하는 한두 신하들 또한 몇명 남지 않았다는 한탄이 있으나 지위의 고하와 대소를 막론하고 참으로 선을 사모하고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곧 우리 당의 인물이니, 내가 사람을 쓰는 기준 또한 어찌 이러한 규모에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친절하신 분부로써 환하게 일러주시니 오늘 연석에 올라온 제신으로 어느 누가 삼가 성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한 가지 규모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큰 기준을 삼았다고 말했지만 다시 또 가르침을 따른다는 뜻의 ‘솔교(率敎)’ 두 자를 가지고 제신에게 자세히 말할까 한다.
《중용(中庸)》에서, 하늘이 사람에게 준 기품을 본성이라 이르고 그 본성을 따라 행하는 것을 도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하늘의 떳떳한 도를 지닌 것은 천성에 근본을 둔 것으로서 그대로 잘 따라 어긋남이 없는 것이 이른바 도(道)이고, 임금과 스승의 자리에 앉은 자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그리하여 예악과 형정(刑政)의 가르침이 있는 것이 이른바 도를 조절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자기가 한 말을 어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성인이 깊이 경계한 것이지만 하늘의 법에 부합되고 하늘의 이치에 맞는 것이라면 위에 있는 자가 어찌 감히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것인가. 《대학(大學)》에서, 요(堯)·순(舜)은 천하를 인(仁)으로써 인도하자 백성들이 그것을 따랐다고 했고 또, 명을 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과 서로 틀리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좋아하는 것이라는 글자는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긴 하나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는 뜻의 ‘호시의덕(好是懿德)’의 호(好) 자로서 또한 단장 취의(斷章取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명하는 것이 그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그 우애함을 일깨워주는 교화에 포용되고 크게 한덩어리로 뭉치는 영역으로 함께 가지 않겠는가.
대체로 의리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서 지극히 옳은 것이 곧 의리이니 옛날의 의리나 오늘날의 의리를 막론하고 지극히 옳은 점에 있어서는 다 마찬가지이다. 오직 그것이 지극히 옳은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보다 한 등급이 높은 선배의 선류들도 모두 법칙에 들어맞고 가르침을 따르는 영역으로 함께 돌아갔는데, 겉으로 치닫는 별종의 무리는 도리어 기회를 엿보고 상대편의 비위를 맞춘다는 죄목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니, 이 어찌 세도의 깊은 걱정거리가 아니겠는가. 의리가 있는 곳은 지극히 정밀하고 엄정하므로 반드시 면밀히 살펴본 뒤에야 변함없이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평소에 쌓은 학력(學力)은 이러한 부분에 똑바로 보았다고 자부하여 즉위하던 그 당시 일찍이 한두 신하와 삼대(三代) 성군의 정치를 이룩하자고 서로 기약했던 말도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사실 우스운 일이나 내가 고수했던 것은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을묘년156)   이후 나는 세도를 깊이 염려한 끝에 습속을 바로잡자는 ‘교속(矯俗)’ 두 글자를 끄집어 냈는데 대체로 화기가 있고 인정이 두터운 쪽을 애써 따라 야박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속(俗) 자 하나로 말하였으나 사실을 따지고 보면 모년(某年)의 의리에 국법을 범한 것도 곧 이 속 자이고 을미·병신년에 관계된 것 또한 이 속 자 하나였다. 지금 세상에 살면서 오늘날의 신자가 된 자라면 아무리 무지 몽매한 필부라도 누가 ‘교속’ 두 글자가 형벌보다 엄하다는 것을 모를 것인가. 이 때문에 요즘 분부를 내릴 때 속 자 하나를 가지고 언급할 경우에는 비록 변동할 수 없는 정황이 있더라도 행여 뒤처질세라 헐레벌떡 바짝 다가가 다루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어찌 속 자 하나에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엄중해서가 아니겠는가. 이번 이조 판서의 일로 말하더라도 사직소에 대한 비답이나 나오라고 권하는 분부에서 첫째도 교속을 말했고 둘째도 교속을 말했으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히 그러하였겠는가.
대체로 여러 해 전부터 일종의 풍습이 녹봉과 벼슬자리만 추구하여 사실 좋은 벼슬을 지낼 수만 있다면 염치 같은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미친듯이 허둥대므로 그 해독은 장차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에 이를 판국이다. 그러다가 일단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다시 또 그만둘 생각을 가져 상피(相避)하는데, 그 사례가 법전에 없다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군신간의 분의(分義)가 지엄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여 같은 성씨의 먼 친족 사이에서도 그 관계를 끌어대어 이유로 삼기를 《대전(大典)》 본문의 상피 조항과 다름없이 하고 있다. 이른바 시종신이란 자들도 제수된 관직을 그 즉시 행공하려 하지 않고 임금과의 관계가 소원한 자들까지도 다 그것을 아름다운 일로 간주하여 앞다투어 본받고 있으니, 이런 점들이 세도의 폐단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작은 일이 아니다. 어제 하교 가운데, 존귀한 지위로서 청환 요직을 차지한 자들이 그 직함을 받기가 무섭게 모면하려 한다고 한 것은 나 또한 십분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같이 썼을 뿐이다.
나는 이 한 가지 일만 바로잡으면 충분히 습속의 폐단을 전부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자(程子)가 한 말씀에 효제(孝悌)는 인(仁)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 했는데 나 역시 이것은 습속을 바로잡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일을 바로잡으면 한 가지 일의 성과가 있고 두 가지 일을 바로잡으면 두 가지 일의 성과가 있을 것이므로 이와 같이 계속해 나간다면 크게 모두 변화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내가 고심하고 있는 바로 그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중비(中批)로 조처하는 일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일인데 내가 어찌 현직 우상의 아우를 특별히 그 벼슬에 제수하였겠는가. 정승과 이조 판서 자리를 형제가 나누어 앉는 것은 그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백년 전에 있었던 일이고 게다가 지금 사람은 자질이 옛사람보다 못한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처럼 파격적인 일을 했으니, 이조 판서로서는 나와 달라는 분부를 받는 즉시 주저하지 말고 명을 받는 것이 또한 어찌 습속을 바로잡으려는 나의 본의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조 판서의 사직소를 처음에는 자세히 보지 않았다가 김이재(金履載)의 상소가 들어온 뒤에 다시 가져다 보았더니, 먼저 진(晉)나라 왕술(王述)의 말을 쓰고 그 다음 이귀(李貴)의 일을 인용하여 잘 들어맞지 않아 오활하다 할 수 있으므로 나 또한 어폐가 없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습속을 바로잡는 것과 관계가 있으니 비록 이보다 더 큰 망발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쥐를 때려잡고 싶어도 그릇이 깨질까 염려하는 혐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사 그 말을 논박하고 싶더라도 반드시 습속을 바로잡는다는 본의부터 먼저 천명한 다음에 그 어구가 중도에 지나쳤다는 것으로 말을 한다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지금 이 김이재의 상소는 그 명목은 이조 판서 한 사람을 논박한 것이지만 사실은 종이에 가득 떠벌린 말들이 오로지 요즘에 내가 분부하는 ‘교속(矯俗)’ 두 글자를 버젓이 배치하려고 한 것들이다. 내가 현재 그가 어구를 흠잡은 것을 나쁘다고 하였기 때문에 다시 그의 상소문 속의 어구를 가지고 지적하여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그 취지를 살펴보면 표적이 이조 판서에 있지 않고 오로지 ‘교속’ 두 글자를 파탈하자는 데에 있다. 나의 본의를 그가 반드시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니, 알면서도 이러한 행위를 한 자를 어떤 벌로 다스려야 하겠는가. 의리가 개재되어 있는 문제는 털끝만큼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의리의 반대는 곧 속습(俗習)이니, 속습을 바로잡는 데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마땅히 나막신 신고 압록강 얼음판을 건너간다는 속담처럼 정성껏 따르고 삼가 지켜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감히 이처럼 상반되는 행위를 한 것은 과연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그 상소문은 이미 ‘교속’ 두 글자에 배치되는데 이것으로 이조 판서를 공격하는 도구로 삼았으니, 이조 판서의 일은 저절로 속습과 상반되는 쪽에 속하게 되며 속습과 상반되는 자는 곧 군자쪽 사람인 것이다. 또 더구나 자신의 안전을 돌아보지 않고 임금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 일삼다가 그의 공격하는 말을 받았으니, 이조 판서 그 자신에 있어서도 어찌 아울러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그는 신진 소년에 불과하므로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여 그 상소를 도로 내려줘 버린다면 더 이상 아무런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 관직을 돌아보면 옥당의 유신(儒臣)이고 그 사람을 돌아보면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던 명문인데다 그 상소를 돌아보면 또 국사를 말한다는 것으로 이름을 내세웠으니, 그 사람을 꾸짖을 가치도 없다고 하여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일찍이 이재를 강경(講經)과 제술 시험을 보이는 자리에서 보아 그 사람을 익히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멍청한 것처럼 보이나 확신할 수가 없고 영리한 것처럼은 보이나 단정지을 수 없었으며 게다가 기백이 강하면서도 거친 점이 있기까지 하였으므로 머리 셋에다가 팔 여섯 개가 달린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그를 판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요즘 조정 안에 권간으로 지목할 만한 자가 없으므로 또한 그의 지시를 받았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외면상으로 얼른 보면 그 원인을 몰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혹시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음종(陰腫)처럼 당장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깊이 박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일은 마땅히 눈앞에 드러난 것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니 어찌 그 이외의 것을 건드릴 것까지야 있겠는가마는 그렇다고 그대로 놓아둔다는 것은 왕자의 어진 마음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대략 내보이고 경들에게 한 번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전교에서 귀양보낸다는 뜻의 ‘투비(投畀)’ 문자를 구사한 것은 《시경(詩經)》의 이른바 ‘북녘땅으로 던지련다.[投畀有北]’를 인용한 것이니, 이 또한 참소하는 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공자께서 사대(四代)의 예악을 안연(顔淵)에게 말해줄 때 그 결말을 짓는 말은 ‘정(鄭)나라의 음탕한 음악을 물리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였다.’고 한 것에 불과했으며, 우순(虞舜)이 용(龍)을 간관으로 명해 참소하는 자를 없애라고 했던 것도 참소하는 말은 현혹되기 쉬워 진실을 가려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소문은 얼른 보면 말이 되는 것도 같지만 나는 그 숨은 걱정이 천진교(天津橋)에서 울던 두견새 소리157)  보다 못하지 않다고 본다. 천진교의 두견새는 군자가 사라지고 소인이 득세할 조짐에 지나지 않지만 지금 이 상소문은 그 관계되는 바가 과연 어떤 것인가.
을묘년158)   이후 새롭게 변모할 가망이 있을 듯하면서도 한해 두해가 지나가도 그 보람이 전혀 없다. 의리를 고수하는 일만으로 말하더라도 을사·병오년 사이에 신묘·임진년과 같은 죽이고 들이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앞장서서 의리를 담당한 자도 공적인 분개에다 사적인 원수를 겸한 옛사람들보다 못하였다. 대체로 오늘날 세도의 책임을 지고 있는 자들 또한 어찌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 남이 업신여기는 한탄이야 없겠는가마는 다만 서로 부족한 점을 닦아 합심하여 함께 가면 될 것이다. 어찌 스스로 업신여기고 있다 하여 의리에 관계되는 것까지도 반드시 망가뜨리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비록 노쇠하였으나 이러한 무리를 처치하는 일에 어찌 단호하게 하지 않았던가. 병신년에 처분한 일로 보더라도 나는 결단을 내리는 면에 있어서는 또한 부족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니, 어찌 오로지 보살펴주기만 하였겠는가마는 근년에는 사실 조정에 사람이 없다는 한탄이 있고 아울러 일체 휴양을 위주로 하고 싶어 크거나 작은 일을 막론하고 오로지 침묵을 지켜 마음상으로 허다한 생각만 허비하였다. 요즘 정신과 근력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도 반드시 그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금년은 다른 해와는 달리 금오(金吾)에 까치가 집을 지어 그 뜻이 화기를 이끌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보므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모두 크게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말하고 싶다. 지금 이 하교는 참고 또 참다가 나온 것으로 매우 평범하게 하는 말이다.
교서를 내리든 어쩌든 간에 한번은 이와 같은 뜻을 내보일 생각이지만 먼저 이러한 뜻을 경 등을 위해 상세히 말하였으니, 오늘 연석에 올라온 제신들은 밖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알려 점차로 의리를 일깨워 주라. 그러면 그늘에서 학이 울 때 그 새끼가 화답하는 것처럼 똑같은 이치에 의해 서로 감응하는 묘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하교를 들어본 자 가운데는 반드시 의기가 북받쳐올라 그 의리를 천명할 길을 생각할 자도 있을 것이고 또한 반드시 걱정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히는 방안을 생각할 자도 있을 것이며,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또한 어찌 얼굴과 마음을 고쳐 위엄을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할 것을 꾀하는 자가 없을 것인가. 이제부터는 아비는 그 자식을 훈계하고 형은 그 아우를 권하여 속습의 버릇을 벗어버리지 못한 자는 참으로 그 낡은 버릇을 씻어 제거함으로써 늦게나마 옳은 길로 따라나서야 할 것이며, 혹시 본디부터 고루한 속습으로 빠지지 않은 자가 있다면 또한 마땅히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아는 자세로 더 한층 노력하여 내가 하려고 하는 정치를 도와줬으면 하는 것이 곧 나의 소망인데, 내가 이처럼 분명히 일러준 이상 앞으로는 더 이상 여러말을 하지 않겠다. 임금의 뜻에 부응하는 책임은 오로지 경들에게 있으니 우선 경들부터 사소한 혐의는 전부 쓸어버리고 각자 책임을 지고 속습을 바로잡을 방책을 생각하도록 하라."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분부하신 것을 누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우선 신들부터 밖에 나가서 한세상 사람에게 두루 알려 모두가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환히 알게 한다면 또한 어찌 알면서도 일부러 범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리를 천명하든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히든지간에 오직 자기 한 몸에 매인 일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도 또 보람이 없다면 나도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대체로 김이재(金履載)의 상소문은 그 말이 가소로우니 그 사람을 문책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일이야 극히 하찮은 것이지만 규범을 무시하고 훈계를 어기는 짓을 자신이 직접 범하였다. 머리를 숙이고 제 잘못을 승복하였으니 분명히 그가 무고하다는 것을 알지만 감히 먼저 말을 꺼내 나를 한번 시험해보려고 시도한 것은 곧 병신년 이후 25년 동안에 처음 있는 일이니, 어찌 그 사람을 문책할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그 말을 예사롭게 보며 그 일을 쉽게 간주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다스리고 속습을 제재하면서 일종의 규모가 없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어릴적부터 성인의 글을 통해 대도(大道)를 대강 들어서 알았으며 그것을 안 뒤에는 또 그대로 실천하였고 실천한 뒤에는 규모를 세워 나 자신이 먼저 행하고 그것을 미루어 남에게까지 파급시켜 반드시 따르게 함으로써 반드시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전부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무슨 이재(履載)와 같은 무리가 오늘의 조정에서 불길한 행위를 하려 한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 생각하면 또한 매우 측은하다. 그 자신이야 하찮아서 거론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대대로 요직을 지낸 집안이 아닌가. 특별히 한 사람을 귀양보내 만인을 구제하는 계책에 의해 오늘의 처분이 나온 것이니, 경들은 마땅히 이러한 본의를 알아야 한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오늘 연석에서 하교한 것은 맨 먼저 고금의 의리가 시대 상황에 따라서 다른 것을 말했고 다음은 규모, 그 다음은 인물을 등용한 문제, 그 다음은 가르침을 펴고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방안에 대해 말하면서 여러 번 되새기고 반복하였는데, 마디마다 세교(世敎)를 부식하고 구절마다 고심을 드러내었다.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한 통의 연화(筵話)로 기록하여 한 본은 묘당에게 보이고 한 본은 간원과 홍문관의 관원에게 보인 뒤에 장고(掌攷)에 자세히 등재하게 할 것이며 그 원본은 사고(史庫)에 보관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가 상차하기를,
"신이 아침 연석에서 유신(儒臣)을 용서해 달라는 뜻으로 함부로 아뢰었는데 말을 전부 끝내기 전에 책망하시는 분부가 계속되어 너무나 황공한 나머지 감히 더 이상 아뢰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보(小報)를 보았더니 유배지에 대한 초기(草記)가 이미 계하(啓下)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일은 사실 성상의 처분과 조정의 큰 체모에 관계되는데, 황공하다는 이유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의 직분을 저버리는 것이며 성상의 은혜를 등지는 것이니, 신이 어찌 차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침 연석에서는 그와 같이 처분하신 성상의 뜻이 오로지 속습을 바로잡자는 데에 있다는 것으로 분부하셨습니다만, 그 일 자체를 가지고 말한다면 옥당의 상소에 논한 것은 곧 하나의 재상을 논박한 것에 불과하며 더구나 요청한 율도 깨우치고 책망하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깨우치고 책망하는 것은 곧 더 잘하기를 요구한다는 뜻인데, 한 재상에게 더 잘하기를 요구하였다는 이유로 경연의 가까운 신하를 멀리 변방으로 귀양보내시니, 모양이 어수선하여 듣고 보는 사람들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평소에 신하들을 예우하시던 우리 성상의 크나큰 도량으로서 갑자기 이처럼 아주 중도에 지나친 일이 있으시니, 성상의 덕에 결함을 끼치는 정도가 과연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신 아우의 상소문 내용은 비록 고인의 말을 인용하여 면직을 청하는 뜻을 밝히고자 했더라도 새삼 스스로 따져볼 때 참으로 실언한 것이었으니, 유신(儒臣)의 경계하고 주의를 주자는 말을 문제삼아 크게 죄를 줄 게 뭐가 있습니까.
가슴에 품은 것을 숨기지 않는 것은 신하의 떳떳한 직분이고 멀지 않아 되돌아오는 것은 명주(明主)의 거룩한 법도입니다. 신은 감히 신의 아우에게 관계된 일이라 하여 존엄을 모독한 것은 아니니, 하찮은 충정을 굽어살펴 주시리라 믿습니다. 삼가 전 수찬 김이재를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빨리 거두어 금방 마음을 되돌리시는 덕을 빛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침 연석의 대화는 사관에게 넘겨 제신에게 널리 보이게 했으니, 누가 그 처분의 본의를 모를 것인가. 그런데도 경은 자기의 일로 간주하여 연석에서 이미 다 아뢴 뜻을 다시 되풀이하였으니, 옛날 대신들이 나랏일을 보던 뜻은 아마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은 편안한 마음으로 국사를 돌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이만수(李晩秀)를 면직시켰다. 만수가 상소하기를,
"신은 감당할 수 없는 고루한 자질로 나갈 수 없는 사적인 의리가 있는 몸이니 천관(天官)의 중책을 그 어찌 무턱대고 받을 가망이나 있겠습니까만, 정성이 한번의 호소로는 임금을 감동시켜드리지 못하고 짓는 죄는 세 번이나 명을 어김으로써 자꾸 쌓이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특별히 내리신 전교를 받들고 보니 하교하신 취지가 간곡하고 엄중하였으며 독려하시는 분부가 신의 형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너무나 송구스럽고 감격스러워 문득 자신의 사정을 잊고 허둥지둥 숙배하였고 또한 이미 정사를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당초의 마음을 돌아보면 완전히 반대가 되고 말았으니, 온 세상에 청론을 지닌 자들이 그 누가 용서하겠습니까.
어제 전 수찬 김이재의 상소문은 신의 사직소 가운데 한두 구절을 들추어 반복해서 그 시비를 밝히고 크게 비난을 가하였는데, 서로 충고하는 뜻에서 말이 나오고 뒤폐단을 끼칠까 우려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신은 그것을 절반도 읽기 전에 자신도 모르게 매우 부끄럽고 두려웠습니다. 대체로 나라에는 사유(四維)가 있고 사람에게는 사단(四端)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라도 도외시한다면 실로 기본적인 틀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아는 것이 없고 사리에 어둡지만 다소나마 천성을 갖추고 있는데 또한 어찌 과분한 벼슬에 제수되었을 때 삼가고 조심하였던 옛사람의 의리를 전혀 모르겠습니까. 다만 문장 구사에 미숙한 나머지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여, 면직을 청하는 소장이 도리어 진출을 꾀한다는 혐의를 야기하게 함으로써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염치를 무너뜨려 세교(世敎)에 누를 끼친다고 깊이 우려하게 하였으니, 무겁고도 큰 신의 죄는 어찌 다만 신 한몸의 거취가 볼성사납게 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겠습니까. 그러니 마땅히 그 걸맞지 않은 관직은 거두고 당연히 줘야 할 벌을 가하여 공론이 신장되고 관작의 위상을 중하게 하셔야 할 것인데도 유신에게는 가차없이 엄중한 문책을 가하고 신에게는 높은 벼슬을 그대로 지니고 있게 하시니, 물정은 더욱 어긋나고 신의 처지는 더욱 위축되었습니다. 비록 자리를 털고 다시 일어나고 싶더라도 열 사람의 손이 가리키고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신처럼 형편없는 사람이 한량이 없는 은혜를 받았는데 몇년 동안 측근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은혜를 하나도 보답하지 못하고, 끝내는 스스로 낭패를 불러 성상께서 알아주신 마음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정말 할 말이 없고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신이 만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려운 죄입니다. 세초(歲抄)할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아 거행하라고 명하셨고 거듭 패초하시어 교지가 앞에 있는데, 짧은 글로 충정을 토로하노라니 말이 조리가 없습니다. 삼가 신의 본직과 겸직을 모두 삭제하고 앞뒤에 걸친 신의 죄를 다스려 예를 지켜 사양하는 풍속을 권장하고 신을 살리고 길러주신 은택을 끝까지 보전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물어물 지나가는 세상에 한 토막의 짧은 말이라도 금쪽같이 귀하니, 중신(重臣) 한 사람만 논박한 것이 아니라 대신이 논박을 받았더라도 사리상 용서해 주는 것이 합당할 것이며 또 대신 한 사람만 논박한 것이 아니라 임금까지 논박했더라도 너그럽게 포용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경의 상소문 가운데 이른바 ‘능히 사양하는 아름다움[克讓之美]’이란 구절은 공자나 주자와 같은 분들의 말씀이 아니고 진(晉)나라 사람이 아무렇게나 내던진 말에 불과하므로 나 역시 그 말은 완전한 문장이 못 된다고 생각하니, 그 자가 그와 같이 논박한 것을 어찌 깊이 흠잡을 것이야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 상소문을 보고 또 본 다음에 이와 같이 처분한 것은 그 까닭이 있다. 대체로 수십 년 전부터 사정(邪正)은 구분되었으나 더러운 속습은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가(世家)와 세족(世族)과 세신(世臣)과 세도(世道)를 위해 밤낮으로 자나깨나 맺혀 있는 한 생각은 속습을 바로잡자는 ‘교속(矯俗)’ 두 글자에 있을 뿐이니 나의 모든 분부 가운데 혹시라도 속습을 따르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교활한 자는 기운에 빠지고 넋이 나갔으며 어리석은 자도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하고 속습을 피해 멀리하는 것이 살길이라는 것을 능히 알았다.
희경(羲經) 혁괘(革卦) 상육(上六)의 정전(程傳)에 이르기를 ‘소인은 마음속으로 변화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얼굴을 바꿔 윗사람의 가르침과 명을 따른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주 어리석은 자는 비록 성인이라도 변화시킬 수 없다. 이를테면 요(堯)·순(舜)이 임금으로 있을 때 묘(苗)와 상(象)이 있었던 경우와 같은 것인데 그 또한 얼굴만 바꿨을 뿐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마음은 선한 도와 끊어졌더라도 위력이 무서워 죄를 작게 짓는 것은 보통사람과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저 김이재는 깃털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아주 어린 신진이다. 사실 어찌 감히 묘(苗)·상(象)과 견주어 논할 것이 있겠는가마는 그 신분이며 재주로 볼 때 오히려 혁괘의 소인과 하우(下愚) 정도까지는 안 되니, 위력이 무서워 죄를 짓는 옛날의 소인이나 속습을 피해 멀리하는 오늘날의 어리석은 자들의 범주 속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보이나 그 상소는 전편이 곧 ‘교속’ 두 글자의 반대론이었다. 그래서 혹시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그 폐단이 크게 발전해 구제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까 염려되어 마침내 하나를 귀양보내 만인을 건져내는 조처를 취했던 것인데, 경은 이 조처가 오로지 경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참으로 그렇다면 경의 오산이다. 천관(天官)의 총재는 이 어떠한 중책인데 경의 일로 인해 언자(言者)를 귀양보내고 경에게 행공(行公)하라고 독촉할 것인가. 이는 진정 ‘교속’과는 반대로서 추잡하여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교속’을 한층 더 장려하는 면에 있어서 특별히 정신을 가다듬을 생각이지만 이 또한 경의 체직이며 잉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경이 사양하는 전조의 관직은 특별히 체직할 것을 허락 한다."
하였다.


 

 

 

홍낙유(洪樂游)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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