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임자
앞서 수원 유수(水原留守) 서유린(徐有隣)에게 하유하기를,
"번갈아 돌아가는 오행(五行) 가운데 토공(土功)이 크고 팔괘의 순서를 매길 때는 감궁(坎宮)이 앞자리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주(周) 문왕(文王)이 기읍(岐邑)을 다스릴 때 토지의 형편과 특성에 따라 조세를 정하는 법을 세웠고 한나라 고제(高帝)는 관중(關中)을 안정시킨 뒤에 조세에 관한 법을 만들었는데, 조정이 화성(華城)을 보는 비중도 주나라의 기읍이나 한나라의 관중과 다름없으니, 백성의 생활 터전을 중시하는 정사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일만 석의 물이 흐르는 도랑을 성 북쪽에 뚫고 아홉 길 높이의 보를 성 서쪽에 쌓음으로써 관개 용수가 서쪽에서 남쪽으로 흘러가 마침내는 온 경내에 미치고 다시 그 경내에서 멀리 팔도에까지 두루 미쳐간다면 그로 인한 이로움이 어찌 넓고 크지 않겠는가.
팔달문(八達門) 밖에서부터 유천(柳川) 이포(泥浦)까지 그 토지가 넓은데도 경작이 미치지 않는 것은 경기 백성들이 농사에 게을러 힘들게 노력하려 하지 않아서이지만 대체로 그 마음과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漢)나라 선비의 말에 ‘능히 그 마음을 다하지 못하면 그 힘을 다할 수 없고 능히 그 힘을 다하지 못하면 그 공을 이룰 수 없다.’고 한 것은 곧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다. 충분히 황무지를 개척할 만한 마음과 힘이 있더라도 재력이 없으면 해낼 수 없고 충분히 땅을 일구어낼 만한 재력이 있더라도 관력(官力)이 없으면 성사되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높고 메마른 땅은 물을 끌어가기가 어렵고 시골백성은 함께 모여 농사짓는 방법에 어두운 상황이 아닌가. 밭모양이 이미 갖추어져 씨를 부리면 당장 거두어 먹을 땅이라 해도 명을 내걸어 대중에게 고하기를 ‘백성들이 마음대로 경작하여 먹게 하고 고을 관아에서 조세를 거두지 않는다.’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인심으로는 그렇더라도 용기를 내어 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현재 모래먼지만 부옇게 날리고 있으니 비록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 주도록 허락한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부름에 응해 나와서 아침에 밭을 갈고 저녁이면 거두어 노적가리가 즐비한 아름다운 광경이 있을 것인가. 한나라 때 조과(趙過)159) 등 여러 사람이 백성을 위해 농사를 장려하면서 농기구와 소를 모두 관가에서 마련해 주었고 수령으로 있는 자가 삼태기며 삽을 들고 밭두둑을 밟고 다님으로써 묵혔던 땅이 옥토가 되고 놀던 사람이 농부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함께 더불어 성과를 거둔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옛법을 본받지 않는다면 어찌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인가.
오늘의 계책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둔전(營屯田)을 인부를 모집해 경작하는 법에 따라, 본부(本府)에서 재력을 들여 땅을 일구고 그 역사가 끝난 뒤에 일정한 면적의 밭을 나누어주어 관용(官用)에도 보태고 백성의 식량을 넉넉하게 해 주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고, 하나는 곡물을 바치면 벼슬을 주는 법에 따라, 며칠갈이의 면적을 개간했는가를 보아서 당나라 때의 공명 고신(空名告身)이나 송나라 때 적공랑(迪功郞) 이하의 품계를 줬던 사례와 같이 각자의 소원대로 향품(鄕品)은 향임(鄕任)을 시키고 교리(校吏)는 빈 벼슬자리를 주되, 한달갈이 면적을 넘어 쌀 백 석을 수확할 만한 경우에는 중추부 직함이나 변방 장수 자리에 그 공로를 따져 임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묵은 땅이 날로 개간이 되는 성과가 있을 것이다.
수구(水口)가 크고 넓으면 백성이 요족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마디로 말해서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먼저 수구에 관한 설을 볼 때 도회지나 고을과는 관계가 없으니 풍수에 관한 책에서 찾아보면 분명하다. 만일 성 밖에 산을 만든다면 그 형편이 성 안을 내려다 보기가 쉬울 것이고 물 아래쪽에 제방을 만든다면 물길을 가로막기가 편할 것인데, 앞서의 경우는 성 주변에 초루(譙樓)를 배치하는 뜻에 어긋나고 뒤의 경우는 물이 맑고 깨끗해야 한다는 명당(明堂)의 금기에도 어긋난다. 그러나 과거 명사들의 큰 계책을 참고해 보면 평양(平壤)의 성이 설치되었을 때 강 오른쪽에 길게 잇닿은 숲을 길렀고 선산(善山) 고을이 완성되었을 때도 시내 왼쪽에 역시 거대한 숲을 설치하였다. 옛말에 ‘백 가구의 마을과 열 집의 저자라도 반드시 산을 등지고 시냇물을 둘러야 한다.’는 것이 곧 그것이다. 우선 금년부터 나무를 심되 버드나무·뽕나무·개암나무·밤나무 등 아무 것이나 가리지 말고 많이 심어 숲을 만들어서 경관이 크게 달라지도록 하는 것이 또한 먼저 조처해야 할 일이다. 부읍(府邑)과 역마을에 집집마다 나무를 심으라고 예전에 여러 번 지시한 적도 있지만, 집안에 나무를 심지 않을 경우 구실을 징수한 것은 곧 주관(周官)160) 에서 정한 법이다. 경은 부디 편할 대로 잘 조처하여 조정이 화성 백성을 위해 밤낮으로 걱정하는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 것이며, 개간하는 문제를 여러 사람의 의견을 널리 채집하여 조리있게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유린(有隣)이 3백 60일 갈이의 면적을 권장해 개간하였다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농업을 중시하는 정사는 개간을 장려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어찌 있겠는가. 본부(本府)는 다른 지방의 본보기가 되는데 3백 60여 일 갈이의 면적을 특별히 유시한 뒤에 개간했다는 것은 매우 가상한 일이다. 우선 그 당사자부터 포상한다는 도리로 볼 때 장려하는 조처가 없을 수 없으니 판관(判官) 김사희(金思羲)에게 내하(內下)한 녹피(鹿皮) 1령(令)을 내려주라. 관가에서 개간한 것 이외에 또 30일 갈이를 사적으로 개간한 자가 있다 하니 더욱 가상하다. 해조로 하여금 가선(嘉善) 품계인 위장(衛將)을 임명하게 하라. 그리고 이러한 사정을 묘당으로 하여금 각도에 유시하되 이것을 본보기로 삼아 서로 힘써 공을 세우게 하고 만일 그 공이 뛰어나 장려하기에 합당한 자가 있을 때는 그 실적을 조사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일 계축
이조 참판 조윤대(曺允大)를 잉임하였다.
6월 3일 갑인
이병정(李秉鼎)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6월 5일 병진
예조 참판 이서구(李書九)가 상소하기를,
"신은 일전에 외람되이 제신의 뒤를 따라 우리 전하께서 시원하게 거룩하신 명을 꺼내 속마음을 내보이신 것을 삼가 목견하였는데, 수천 수백 마디의 말씀이 자상하고 진지하여 그 모두가 세도를 염려하고 세신(世臣)을 감싸 아끼는 지극하신 뜻이었습니다. 신은 우러러 그 말씀을 듣고 속으로 생각을 거듭하면서 신 자신의 몸이 미약하고 식견이 작아 그에 만분의 일도 부응해 드리지 못하는 것이 내심 부끄러웠으며, 나중에 내려 보여주신 연본(筵本)을 삼가 읽고 나서는 더 한층 솟구쳐 일어나는 충정을 자제할 수 없었습니다.
아, 오늘날 조정 신하들 가운데 과연 능히 의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알고 전하를 위해 한번이라도 밝혀본 자가 과연 있었습니까. 신은 듣건대 의리라는 것은 오직 하나일 뿐이라 하였습니다. 떳떳한 도를 독실히 지키고 예법을 따르는 것을 의리라 하고 선을 드러내고 악을 징계하는 것을 또한 의리라고 말하니, 이는 곧 인륜이 세워지고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는 원동력으로서 천하 만세가 다 함께 걸어가는 길인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타고나신 자질이 순수하고 성학(聖學)이 고명하신데 30년 동안 정밀히 살펴 굳게 지키신 것이 이와 같은 의리에 지나지 않았으니, 쓰라린 마음 지극한 정성도 여기에 있었고 거룩한 덕과 위대한 업적 또한 오직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가끔 그때그때의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의견이 다른 자를 적당히 무마하고 얼버무렸던 적도 있었으나, 등용하거나 벌을 주거나 할 때의 깊은 뜻은 모두가 그 마음의 발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성스런 뜻을 지닌 모든 선비들은 다 그 덕을 흠모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의리와 정도를 지켜 춘추(春秋)의 큰 법을 단단히 다지고 요(堯)·순(舜) 같으신 성군의 지극한 덕을 보좌하였으니, 이는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겠습니까. 사실 타고난 선한 천성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인데 우리 전하께서 인륜을 밝히고 정성을 다 쏟으며 중도와 법을 세우신 것이 충분히 그들의 마음을 감복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민심이 통일되지 못하고 세도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 날마다 그 정도를 더해가 처음에는 서로의 견해가 약간 어긋났다가 마침내는 행적이 완전히 달라지고 마는 일이 자꾸 만연되어 장차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그것은 저 윤기를 범하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이 드러나지 않은 뒤쪽에 숨어서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반드시 우리의 대의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선류를 원수로 몰아 은밀히 자신들이 득세할 기회를 잡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때를 당해서는 나라에 충성심을 가진 자들이 설사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함께 왕실을 떠받들더라도 여유만만한 다섯 마리의 용같은 인물이 거침없이 날뛰는 돼지같은 소인을 당해내지 못하는 법입니다. 더구나 지금 사기(士氣)는 기를 펴지 못하고 명의(名義)는 깜깜하게 꽉 막혀 조정에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한 줄기 청론은 마치 마지막 남은 큰 과일이나 깊은 땅속에 들어 있는 미약한 양기(陽氣)와도 같은데, 세속의 이런저런 말들이 그 사이에 마구 떠돌아다녀 같은 집안에서는 창칼이 번득이고 길거리에서는 다니는 길이 서로 다르며 마침내는 군신과 상하가 강명하고 고수할 의리까지도 전혀 애석해 하지 않으니, 아, 그 또한 나쁘기가 한량없다 하겠습니다.
대체로 소인들의 말장난에 말려들고 그 냄새와 맛에 차츰 물들어 자신도 그와 같은 소인이 되더라도 달갑게 여겨 거부하지 않는 자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고, 기타 도리를 보는 것이 밝지 못하고 힘들여 선을 행하지 않는 자들 또한 병 근원의 천심과 파급된 폐단의 대소는 어쩌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의리를 거스리고 해치는 점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삼아 요즘의 한두 가지 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의리란 고금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의리를 엄중히 지키는 것은 신축·임인년의 의리를 빛나게 하는 일인데, 군부(君父)를 존경하고 난적(亂賊)을 치는 것은 그 당시부터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군부를 존경해야 하며 난적을 마땅히 쳐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감히 하나의 의리를 두 쪽으로 나누어 얼떨떨 혼란에 빠지게 하는 술책을 쓰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심을 품고 이익을 독차지하며 녹과 벼슬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피폐한 국사를 먼 외국의 일처럼 보아 서글프게 여기는 정성이라고는 한푼도 없는 것이 곧 오늘의 속습인데, 의리를 어느 누구 책임지고 밝히는 사람이 없는 것도 반드시 이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반드시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시는데, 근본을 놓아두고 헛다리를 짚어 어리둥절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것들은 모두 밖으로 드러난 형체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온 세상에 거세게 흐르는 이론(異論)의 물살은 갈대잎 같은 조각배로 헤쳐나갈 수 없는 상황인데 신은 실정을 낱낱이 더듬어 통절히 분간해 볼까 합니다.
저들은 사실 말하기를 ‘의리는 우리들이 다 함께 지키는 것으로서 큰 강령이 이미 올바로 세워졌으니 더 이상 닦거나 밝힐 것이라고는 없다. 어찌 굳이 심각하게 스스로 부르짖어 자기 자신의 집안일처럼 간주할 것인가.’ 하는데, 이것은 이렇습니다. 의리의 정밀함과 미세함이란 매사가 서로 같지 않고 경우마다 각기 다르니, 깊이 따지고 살펴 반드시 그 실체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무슨 수로 심오한 이치를 알아 변화무쌍한 천하를 안정시키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요망한 설이 사라지지 않아 깊은 걱정거리가 아직 남아 있는데, 장차 입을 다물고 수수방관하여 나라의 장래를 도외시한 채 부지하고 보호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저들이 이미 의리를 마땅히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덕을 지닌 사람이 외롭지 않고 이웃이 있다는 것은 인정상 즐거워해야 할 일인데, 무슨 이유로 한두 명의 우리 당 인사를 모두 부정하게 동아리를 짓는다는 지적을 받게 하고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는 아름다움을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 가운데 첫번째입니다.
저들은 사실 말하기를 ‘의리를 밝혀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논의가 일어나는 그 원인을 따져보면 또한 제각기 공정하지 못한 사적인 면이 있다. 그러니 설사 이쪽은 옳고 저쪽은 틀리더라도 나는 구차하게 동조하지 않겠다.’ 하는데, 이것은 이렇습니다. 의리는 공물이므로 그 말이 누구에게서 나왔던지간에 진정 사적인 것을 물리치고 흉악을 없애는 의리에 도움이 된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이 하찮다는 이유로 그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더구나 절개있는 사대부나 충직한 초야의 인물로서 자신의 안전을 돌아보지 않고 남달리 강직한 풍도를 지닌 자가 있기 마련인데 이 어찌 모두 말살하고 억지로 편파적인 주장만 일삼아 공정한 시비를 혼란시키면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 가운데 두 번째입니다.
저들은 사실 말하기를 ‘오늘날 의리를 큰소리로 말하는 자는 그것을 실지로 아는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엿보고서 그 뜻에 맞출 뿐이니, 이것은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이 인의(仁義)의 가면을 쓴 것과 다름이 없다.’ 하는데, 그 말이 어긋나고 잘못된 것은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혹시 전하께서 지키시는 의리가 하나라도 공정한 천리(天理)에 부합되지 않은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한 말을 올리고 바르지 못한 마음을 막아 성덕(聖德)을 올바로 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첨하고 애교를 부려 그 은총을 받으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소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렇지 않아 위에서 교훈을 세우신 것이 우순(虞舜)과 주공(周公) 같은 성군에 부끄러움이 없는데 임금의 뜻에 영합한다는 혐의를 일부러 피해 그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반드시 본심과 천성을 무시하고 의리를 등진 뒤에야 비로소 그 비난을 모면할 것이며 인의(仁義)를 힘쓰고 지향하는 길이 이로부터 끊길 것이니,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 가운데 세 번째입니다.
저들은 사실 말하기를 ‘나는 비록 사류로 자처하지 않지만 나쁜 무리와도 서로 관계를 맺지 않으니, 저들이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느냐.’ 하는데, 대체로 이쪽저쪽 상황을 보아가며 스스로 편의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양이 있으면 음이 있고 정도가 있으면 사도가 있는 것이 떳떳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이쪽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반드시 저쪽으로 들어가게 되니,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며 사도도 아니고 정도도 아닌 영역이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엉큼하고 능청스러운 자태와 뜻을 해득하기 어려운 언론은 그 자체가 벌써 나쁜 무리가 기분좋게 받아들여 속으로 비호하는 것이 되니, 몇 사람이나 태연스럽게 함께 어울리지 않아 편당을 짓는 것에 대한 형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무서운 일인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 이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 가운데 네 번째입니다. 이상과 같은 그들의 설은 모두가 식견이 밝지 못한 것으로 인해 사리사욕이 반복해서 굳게 다져져 마침내 처음의 근소한 차이가 결국 큰 차이가 나는 상황으로 발전한 것이니, 《시경》의 이른바 ‘그 누가 착하단 말인가. 모두 물에 빠진 꼴이 되었네.[其何能淑 載胥及溺]’라고 한 것은 곧 이런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대의가 장차 어두워지고 오도(吾道)가 날로 외로워지는 것을 가슴아프게 여기시어 큰 교훈을 높이 내걸어 한세상의 준칙으로 삼으셨는데, 잘못된 시속을 괴로워하시는 뜻이 말씀 속에 넘쳐 흘렀습니다. 이 교서를 받들어 읽고 나서도 깜짝 놀라 무서워하지 않고 이제 막 꿈속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이는 진정 변화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어리석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달갑게 여긴 자입니다. 그러나 풍속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은 그 또한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함없이 밀고나가는 도를 견지한 뒤에야 비로소 차츰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전하께서 한층 더 마음을 가다듬고 먼저 스스로 노력하시어 사물을 접하고 대처하는 모든 자세가 순수하게 오로지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마음에서 나와, 군자 소인의 성쇠 조짐을 잘 살피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공정한 마음을 분명히 내보임으로써, 우주를 지탱하는 이 의리가 중천의 태양처럼 빛나게 하여 지난날 정신이 혼미하여 헤매던 자들로 하여금 모두 이렇게 하면 충신 현사가 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역적과 소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낡은 버릇을 통절하게 고쳐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가게 하신다면, 만세토록 태평할 세상이 장차 이제부터 시작이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세상을 가르치는 교훈이 그 구실을 제대로 할 일대 기회인 것입니다. 이에 감히 참람되고 버릇없음을 생각지 않고 충정을 피력하였으니,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힘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서경(書經)》 홍범(洪範)의 오황극(五皇極)에서 말하기를 ‘법칙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죄악에 빠지지 않았다면 임금은 곧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였고, 채침(蔡沈)의 집전(集傳)에서 그 말을 풀이하기를 ‘받아들이면 함께 선을 행할 수 있고 버린다면 악으로 흐르는 것이니, 임금으로서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였는데, 근일에 하유한 말과 연석에서 한 분부는 대체로 그 말을 취택한 것으로서 일찍이 형벌을 가지고 신칙한 일은 없다. 이러한 시점에 경의 소장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알겠다. 특별히 유념하고 처사에 반영하여 나의 공명정대한 길을 통해 다 함께 큰길로 나아가길 기대하고 싶다."
하였다.
이경일(李敬一)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6월 6일 정사
김희순(金羲淳)을 이조 참의로, 이만수(李晩秀)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강화부 유수 이경일이 상소하기를,
"옛날 병자년과 정축년의 병란 당시 신의 온 가족이 강도(江都)로 피난해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던 날 신의 고조모가 갑자기 적병을 만나 칼에 찔려 돌아가셨는데, 애통하고 분한 자손의 마음으로서는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쪽 나라와 서로 관계되는 일에 혐의쩍어 간섭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화도 바다의 뱃길을 차마 건너지 못하겠습니다. 왕명을 받들고 머무르는 것은 여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신의 사적인 의리로서는 실로 부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체직을 허락하였다.
6월 7일 무오
이조원(李祖源)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정범조(丁範祖)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6월 9일 경신
공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상소하기를,
"신이 범한 한 마디의 잘못은 혀가 있어도 변명할 수 없는데, 무거운 짐이 풀리니 신의 분수에 약간 편안합니다. 그러니 마땅히 임금의 큰 은혜를 기리며 전일의 잘못을 반성함으로써 훈계를 받아들여 허물을 보충할 방도를 도모할 따름인데, 또 어찌 감히 얼굴을 들고 입을 열어 뻔뻔하다는 경계를 재차 범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유신(儒臣)을 남쪽땅으로 귀양보낸 한 가지 일만은 너무나 가슴이 조인 나머지 제대로 밥을 먹고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처분하신 일은 언자(言者)에 대해 노하신 것도 아니고 신의 처지를 위해서도 아니며 그 간절하신 마음은 오로지 속습을 크게 변화시키고 세신(世臣)을 보전하자는 데에 있는데, 열 줄의 교서에서 하신 말씀이나 연석에서 하신 네 단계의 분부는 광명 정대하고 진심이 넘쳐흘러 참으로 금석을 꿰뚫고 물고기나 짐승까지도 감화시킬 정도였으니, 오늘날 전하의 조정에 서 있는 모든 자들 가운데 어느 누가 깜짝 놀라 두려워하고 감동하여 거센 바람에 잡초가 쓰러지듯 다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국가의 체면을 가지고 논하더라도 그 사람은 경연에서 국사를 말하고 궁리하는 신하이고 그 사안은 관원들끼리 서로 충고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상소문이 올라가자마자 엄중한 문책이 금방 내려 무더운 날씨에 천리길을 가느라 행색이 급박하니, 혹시라도 사방에서 말하는 자들이 말로 인해 죄를 받았다고 수군대며 한탄한다면 그 어찌 사방으로 눈을 밝히고 언로를 활짝 여시는 성조(聖朝)의 뜻에 크게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신의 죄는 만번 죽는다 해도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가령 신이 임금의 총애를 믿고 염치를 도외시한 채 조복에다 인끈을 차고 의기양양하게 큰길에 출입한다면 진정 이른바 기탄이 없는 소인일 것이니, 비록 전하께서야 지극한 사랑으로 내쫓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청명한 조정의 사대부들이 그 누가 함께 어울리려 하겠습니까. 혹시 성자(聖慈)께서 깊이 동정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한산한 자리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산란한 마음을 수습하여 시비를 궁리하고 분변하는 학문의 공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하시고 아울러 영화로운 길을 멀리하고 못난 규범을 힘써 지켜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사문(私門)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게 하신다면 가르쳐 길러주신 은택을 신은 장차 어떻게 갚아야 좋을지 모를 것입니다. 수부(水部)의 벼슬에 새로 제수되었으니 의리상 서둘러 그 명을 받드는 것이 옳고 고적(考績)을 하는 것도 그 기한이 있으므로 제때에 마감하는 것이 합당하지만 유배된 자를 풀어주기 전에는 신은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자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임금의 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고 큰 벌을 기다릴 뿐이니, 전후에 걸친 신의 죄를 다스려 구구한 충정을 보전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이재가 상소할 때 자신의 예측으로는 반드시 멀리 변방에 귀양까지 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은 대소 경중을 막론하고 매사마다 정밀한 의리가 붙여 있기 마련이니 이 때문에 신묘한 성인의 공화(功化)로서 빛나고 밝은 수십 조항 가운데 가장 먼저 혐의를 구별하고 은미한 것을 밝히는 일에 심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수찬 벼슬은 그 지위가 특별하다는 것을 모른 것도 아니고 홍문관에서 올린 글은 그 사체가 중하다는 것을 모른 것도 아니다. 명색이 논사(論思)의 직에 있다 한다면 임금에게 올리는 일체의 일에 있어서 이해 문제는 따지지 말아야 하고 굳이 말을 하고 싶으면 바르게 말하면 될 것인데도 그의 현실과 동떨어진 설은 ‘교속(矯俗)’ 두 글자에 대해 비웃고 비꼬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쪽으로 보면 칭찬하는 것 같고 저쪽으로 보면 비방하는 것 같다. 사실 강직한 성격을 가진 자가 그의 마음속을 들여야 본다면 비위가 반드시 뒤틀릴 것인데 이와 같은 어조와 이러한 행위가 고 부제학의 후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또한 족히 오늘의 속습을 엿볼 수가 있다.
나는 세도(世道)에 대해, 세신(世臣)을 위해서만 아니라 반드시 그 습속을 바로잡아야겠다고 각오하였다. 다만, 나의 지나치게 강한 자질 때문에 혹시 함축성이 부족하여 온 천하를 포용하는 도량에 해로움이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나의 자질을 바로잡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이렇기 때문에 요즘에 처분하는 일들은 구차하게 감싸고 용서해 주는 것을 꺼리지 않아 힘없는 칼처럼 휘둘러 내리치는 것을 보류해 왔다. 대체로 오늘날 조정에는 극히 미미한 것까지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속습의 폐단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유자(儒者)의 말을 하면서 묵적(墨翟)의 행동을 하는 자는 미워하는 정도에 그칠 수 있더라도 말이나 행동이 다 유자가 아닌 순전한 묵적에 속한 자가 있다면 어찌 목이 메었다 하여 먹는 것을 그만두듯 그대로 보아 넘어갈 수 있겠는가. 속습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고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임금이 있고 신하가 있는 기강을 장차 무용지물로 보아 팽개쳐버릴 것이니, 내가 진지하게 반드시 바로잡으려 하는 목적이 또한 어찌 세도와 세신의 처지를 위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이제 만일 경이 조정에 나오게 하기 위해 김이재를 용서한다면 형정(刑政)이 두서가 없다고 국사에서도 쓸 것이고 야사에서도 반드시 기록할 것이니, 차라리 경의 자취가 조정에서 멀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재를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조처는 결코 다시 논의하기 어렵다. 사직하겠다는 것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고, 아울러 하교하기를,
"공조 판서에게 내린 비답에서도 말했지만 자신의 입장과 처지만 생각하고 조정의 체면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의리를 지키는 것이 실로 지나치다. 패초(牌招)하여 행공하고 아울러 고적(考績)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1일 임술
헌납 오한원(吳翰源)이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5월 30일 연석에서 내리신 분부를 읽어보니 끝없이 이어진 수많은 말씀이 간곡하고 진지하였으니 만물을 다스리고 우주를 굴리는 거룩하신 대성인의 지극한 사랑과 덕이 충분히 금석을 꿰뚫고 우매한 짐승까지도 감화시킬 만하였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세족(世族)과 세신들 가운데 어느 누가 감동하고 칭송하며 길이 그 마음을 굳게 지켜 높은 은혜를 보답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단단히 굳어진 어두운 소견은 갑자기 열리기가 쉽지 않고 깊이 물들은 예전 버릇은 금방 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 풍속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돌려 선으로 향하게 하는 도는 일조 일석에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편 큰 교화를 밝히고 성과를 거두는 방안을 논한다면 며칠 전 재신(宰臣)의 상소문 가운데 오랫동안 단단히 결집시킨다는 ‘유구견응(悠久堅凝)’ 네 글자가 실로 확실한 주장이니, 삼가 전하께서는 완악한 자를 감화시킨 우순(虞舜)의 교화를 힘써 밝히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 주(周) 문왕(文王)의 미덕을 짝하시어 씩씩한 건원(乾元)의 공이 쉬는 일이 없고 돌아오는 태평의 운세가 길이 왕성하게 하소서.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연본(筵本) 안에 ‘극히 우매한 서민이라 해도 그 누가 교속(矯俗) 두 글자를 모를 것인가.’라고 분부하셨으나 오늘날 사류들도 오히려 어두운 구멍이 트이지 않아 마냥 모르고 있는 자들이 많으니, 어찌 부인이나 어린이들이 이러한 의리를 환히 알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교서를 내리든 어쩌든 한번 널리 반포해 보이겠다는 분부를 받기는 하였으나 세교(世敎)가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 하는 관건은 참으로 여기에 달려 있고 속습을 만회하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으니, 모르고 있는 자를 일깨워 선으로 인도하는 조처를 서둘러야 합니다. 신의 견해로는, 이 연본(筵本) 한 통을 조보(朝報)에 올려 팔방에 반포해 보여 집집마다 강명하고 외우며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감복하게 함으로써 세도를 바루고 백성의 뜻을 통일시키는 방도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재상들에게 회람시키고 삼사(三司)에 돌려 보여줬으니 마음을 새롭게 가져 개혁을 하는 일이 그 어찌 연본을 다시 조보로 반포하는 데에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2일 계해
이때 자궁(慈宮)의 탄신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와 그 일을 정리할 당상들이 명을 받고 입시하였으나 공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부르는 명을 여러 번 어기자, 전교하기를,
"폐습이 일반적인 풍속이 되어 법전에 없는 것까지도 사소한 이익이 있다면 거리낌없이 범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반드시 속습을 바로잡는 것을 우선 한집안의 형제를 정승과 정조의 장관 자리에 앉혀 감히 사적인 사정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 한 것이다. 중신(重臣)이 그 명을 받고 나온 것은 임금의 지시를 따르기 위한 것이었으나 임금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폐속에 물이 든 자의 비방을 받았으므로 그자를 엄중히 처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신은 그뒤에 이로 인해 사직을 한사코 청했는데 의리를 지키는 것이 매우 지나친 점은 있으나 또한 그럴 듯하다. 수부(水部)의 실직은 형세를 보아가며 사직하겠다는 뜻을 받아주려 했는데, 오늘 당상들이 와서 모인 것은 그 목적이 자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마다 관례로 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도 들어오지 않았으니, 이러한 자는 경고와 제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조 판서 이만수를 통어사(統禦使)에 제수하라."
하였다.
대신 이하 제신을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두 직제학(直提學)은 해마다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이번에는 들어오지 못했구나. 대체로 법전에 정한 것 이외의 상피로 관직을 그만두려 하는 것은 내가 깊이 싫어하는 속습이고 전일에 그가 나와서 제수하는 명을 받은 것도 사실 속습을 바로잡기 위한 뜻에서였으나, 예의 염치상 그냥 지나쳐버릴 문제가 아니었고 게다가 또 무턱대고 행공(行公)한다면 도리어 속습을 바로잡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김이재(金履載)의 상소는 곧 병신년161) 이후 처음 있는 버릇이다. 내가 비록 노쇠했으나 악인을 처단할 칼을 들었으며 위에서는 가르침을 내리고 밑에서는 그것을 잘 따라 위아래가 서로 뜻이 맞고 군신이 다 함께 영예를 누리는 등 이러한 오늘의 규모를 모든 사람이 다 아는데, 그가 어찌 감히 위에서 가르침을 내리고 밑에서는 그것을 따르는 관계를 갈라놓으려고 마음을 먹는단 말인가.
저번 연석에서의 이야기 속에서도 살속에 숨은 종기에 대한 비유가 있었는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숨은 종기는 명의가 아니라면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태양 밑에서는 잡귀가 그 모습을 숨기지 못하는 법이니, 때를 타고 틈을 엿보아 오늘날의 조정에서 감히 옛버릇을 자행하는 이 무리가 밝은 대낮의 잡귀와 어찌 다르겠는가. 그가 만일 한푼의 사람 마음이 있다면 절대로 감히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인데 그 또한 환관이나 척신의 위세를 끼고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신(世臣)을 위하는 생각 때문에 입을 열어 야박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나쁜 무리의 음산한 노선과 바르지 않아 가증스러운 버릇을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전일의 연본(筵本)에, 의리를 천명하던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히던지 하라고 두 가지로 나누어 말을 끝맺었던 것은 내가 아무렇게나 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천명하는 상소만 있을 뿐 잘못을 스스로 밝히는 상소가 없으니, 무슨 이유인가. 내일부터 사흘을 기한으로 주겠는데 혹시 김이재의 상소를 사주한 자가 있다면 스스로 밝혀야 할 것이다. 예조 참판의 상소에 네 가지로 그 폐단을 말한 것이 있는데 예조 참판이 본디 분수가 밝지 못한 사람이 아니고 그 상소문 또한 아무렇게나 한 말이 아니니, 그 네 가지 부류들 가운데 반드시 해당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자가 비록 스스로 밝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어찌 저절로 발각되는 때가 없을 것인가. 사흘 안에 만일 스스로 밝히는 상소문이 올라오지 않아 내가 먼저 한번 입을 열 경우 그들이 어떤 경우를 당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태산에 불이 붙으면 옥석(玉石)이 다 타버리기 마련이니 또한 많은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화가 미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병진년162) 겨울의 처분은 세도를 위한 일조가 되긴 했으나 결국 뚜렷한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일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밝히지 않는다면 어떠한 처분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경들은 각기 밖에 나가 일러주도록 하라."
하니, 시수(時秀)가 아뢰기를,
"전후에 걸친 연석에서의 분부는 그것이 다 대도(大道)로 함께 나아가 서로 어울려 살아가자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 연석에 올라온 제신들부터 서로가 일깨워준다면 어찌 크게 두려워하여 스스로 밝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이재의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은 차치해 두더라도 그가 멀리 귀양간 일은 공조 판서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혐의가 있으니, 당사자가 머뭇거리는 것은 또한 그럴듯한 일이다. 예의 염치상 사실 강요하기 어려우므로 별도로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우울하고 속이 답답한 증세로 밥을 한 숟갈도 먹지 못했으나 연석의 대담을 두루 보여준 뒤로는 먹고 마시는 것이 확실히 나아졌다. 대체로 그 연석 대담을 본 자는 어찌 얼굴과 마음을 바꿔 위엄을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할 사람이 없겠는가마는 임금을 비방하고 나라를 원망하느라 주둥이를 놀려 떠들어 대는 무리도 반드시 많이 있을 것이다. 곤하게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요즘의 풍속에 이처럼 말을 끄집어낼 자료가 생겼으니 이점을 생각하면 도리어 마음이 상쾌하다.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반드시 이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환하게 게시되고 의리가 지극히 엄중한데 누가 감히 임금을 비방하고 나라를 원망하겠습니까. 하지만 만일 이러한 무리가 있다면 또 어찌 잠깐이라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무리는 반드시 차근차근 드러날 것이다."
하고, 이어 통어사 이만수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의 염치가 무너지면 도리어 속습을 바루는 길이 되지 못하므로 내가 경에게 나오라고 애써 권하지 않았다. 경의 상소에서 왕술(王述)의 말을 인용한 것은 사실 잘 들어맞지 않았는데, 저번에 연신(筵臣)의 말을 들으니, 다른 사람과 약간 다르게 해보려다가 도리어 그와 같은 잘못이 생겼다고 하였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신 아우의 상소 용어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본심이 거짓으로 사양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려 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이재의 상소문 가운데 ‘사양이란 예법의 단서이다.[讓者 禮之端]’ 한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본디 ‘사양하는 마음은 예법의 단서이다.[辭讓之心 禮之端也]’라 했는데, 그 어찌 양(讓) 자 하나만으로 예법의 단서를 삼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학가왈위(學可曰僞)’ 4자를 ‘성가왈악(性可曰惡)’에다가 대를 맞췄는데 이는 곧 댓구를 맞추는 과문(科文)의 버릇이긴 하나 위(僞) 자와 악(惡) 자의 말뜻도 본디 다르다. 그러나 그 상소에 있어서는 하찮은 문제라 할 수 있으므로 전혀 따질 것이 못 된다."
하였다.
승지 이노춘(李魯春)이 아뢰기를,
"신은 공조 판서 이만수를 외직에 보임하신다는 명에 대해 어리석은 소견이 있으므로 감히 아뢸까 합니다. 우리 성상께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를 펴는 규모는 나름대로 1부(部)의 《명의록(明義錄)》을 따로 지니고 계시어 일을 처리하거나 분부를 내리실 때는 《명의록》의 의리에 근본을 두지 않은 것이 없어 시원스런 분부로 여러 번 그 의리를 천명하셨는데, 이번 연석에서 내리신 분부는 그 심오한 것을 전부 드러냈다는 것을 한층 더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신은 진정 《명의록》 속편이 나오자 원편(原編)의 뜻이 더욱 밝혀지고 이번 연석의 분부가 나오자 속편의 뜻이 더욱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연석의 분부 가운데 의리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신 또한 생각하기를, 의리를 강명하고 속습을 바루는 방도는 특별히 신기한 도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우리 성상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 크게 확정한 규모를 따라 드러나거나 숨어 있는 크고 작은 의리를 강명하고 깊이 잠복한 악을 깨부수는 것뿐이라고 봅니다.
신은 요즘 호오(好惡)를 분명하게 내보이신 성의(聖意)에 대해 흠앙하는 마음이 더욱 깊습니다만, 이번 중신(重臣)에 관한 처분은 중도에 지나친 듯합니다. 중신이 의리를 철저히 밝히시는 성상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한 개인의 왜곡된 혐의로 간주하였으니, 그가 의리를 지키는 것이 매우 옳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금방 물리쳐 외직에 보임하는 벌을 가하신다면 곧 도리어 마음을 현혹시키고 시험해보는 교활한 무리의 계책에 말려드는 것이니, 이 어찌 호오를 분명하게 내보이신 전하의 뜻이겠습니까. 또 의리를 등지고 임금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무리가 그 틈을 살피고 엿보아, 오늘의 처분은 한때 진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엄중한 의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예전처럼 잘못 헤아리고서 비밀히 입을 놀려 시비를 현혹시키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고서는 속습을 크게 변화시켜 함께 대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더 깊이 생각하여 도로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조 판서로 나오라고 독촉한 것도 교속(矯俗)이고 그가 의리를 지킨 것을 이해해 주는 것도 교속이다. 이것저것을 다 따져 모든 것들이 사리에 맞도록 하는 것을 교속이라 말하며 크고 작은 강줄기가 다 함께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 교속이다. 임금의 뜻에 따라 보좌하는 중신을 잡고 흔든 것은 사실 고약한 일이지만, 그가 귀양을 간 것은 중신 때문이니 중신이 가책을 받아 머뭇거린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대체로 그 상소는 외면상으로는 그 진실을 알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병술·경인년의 전례로 중신에게 요구할 수는 없으나 오늘 들어오지 않은 일만은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이처럼 외직에 보임한다는 명이 나온 것인데,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또한 반열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아뢴 것은 과연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전에 들으니, 승지의 견해에 대해서는 우상의 구제하는 차자에서도 잘못한 일이라 하였다 한다."
하니, 노춘이 아뢰기를,
"연본(筵本)이 밖에 나온 뒤에도 전 공조 판서가 자기 한 개인의 혐의로 간주하였으므로 신은 사실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속습을 바루는 방도로서 승지가 한 말을 그 어찌 가상히 여겨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마는, 피혐하는 것이 부당한데도 피혐을 할 때는 반드시 나오도록 하는 것이 사실 교속이고 마땅히 머뭇거려야 할 때 머뭇거릴 경우 한걸음을 양보하는 것 또한 교속의 하나이다. 김이재의 상소는 그 본심은 숨기지 못하지만 말로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임보(林溥)와 최익남(崔益男)의 사례에 견주어 조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벌을 받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자기는 의기양양해 한다면 어찌 도리어 염치에 손상을 끼치지 않겠는가. 또한 요즘의 오만불손하고 서로 미워하는 습속으로 볼 때 또 어찌 크게 떠벌려 말하기를 ‘벼슬자리에 관계되는 문제들은 염치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교속이다.’ 하지 않을 줄을 알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상차하기를,
"방금 내리신 전교를 보니 공조 판서 이만수를 문책하여 통어사로 보임하셨습니다. 대체로 만수를 특별히 이조 판서에 제수하신 것은 성상의 뜻이 교속에 있었고 만수가 즉시 그 명을 받은 것은 임금의 지시를 따르자는 뜻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 사직소에 한 마디 잘못한 말이 있긴 하지만 조금 넓은 눈으로 보면 세도와 의리에 전혀 상관이 없는데 어찌 굳이 자구를 흠잡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그처럼 지나치게 비방한단 말입니까. 그 단서는 하찮더라도 사실 서리가 내린 뒤에 장차 얼음이 얼까 걱정스럽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그를 멀리 귀양보내는 것으로 엄중히 조처하신 것은 성인의 원대한 걱정이라 할 수 있으니, 중신 한 개인의 사적인 의리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나 중신이 언자(言者)가 유배를 당했다는 이유로 나아가기 어려운 단서를 삼은 일 또한 선배들의 그와 같은 전례가 많으며 청명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신이 연석에 올라온 것은 장차 자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정성을 펴기 위한 중대한 목적이 있어서인데, 이조 판서의 사직 청원을 이미 이루었고 아울러 사직소의 비답을 통해 시원한 분부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무슨 범하지 못할 철칙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린 것은 사실 온당치 못하니, 신은 중신을 위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조(聖朝)의 정교(政敎)는 수시로 강약이 있는 법이니, 이제 만일 중신의 의리를 지키는 일이 지나치다는 이유로 문책하여 외직에 보임하는 조치를 가하신다면 아마도 호오를 분명히 내보이시는 의리에 의문을 야기하여 도리어 기회를 엿보며 함부로 못된 짓을 꾀하는 폐단을 열어놓을 것입니다. 승지 이노춘(李魯春)이 아뢰는 말에서, 성상의 크게 확정하신 규모와 《명의록》 1부(部)의 의리를 열거해 논한 뒤에 아울러 중신을 외직에 보임한 명을 거두실 것을 청했는데, 그말은 매우 옳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마음을 즉시 고쳐잡아 윤허하신다는 말씀을 내리지 않으십니까. 이 또한 성상의 뜻을 천명하고 속습을 타파하는 하나의 기회인 것입니다. 삼가 빌건대 이만수를 통어사에 제수한다는 명을 특별히 거두어 교속의 본의를 밝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조에 제수한 것이나 곤직(閫職)에 보임한 것이나 그 뜻은 마찬가지로서 각각 상황에 맞도록 올바르게 조처한 것이니, 이것을 교속이라 말하는 것이다. 승지가 아뢴 말을 윤허하지 않은 이유는 신하를 예로써 부리고 그 미덕을 이루어준다는 도리에 나름대로 헤아리는 바가 있어서이니, 경은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공조 판서로, 민태혁(閔台爀)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14일 을축
상이 이달 초열흘 전부터 종기가 나 붙이는 약을 계속 올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효과가 없으므로 내의원 제조 서용보(徐龍輔)를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용보가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밤이 되면 잠을 전혀 깊이 자지 못하는데 일전에 약을 붙인 자리가 지금 이미 고름이 떠졌다."
하였다. 의관 백성일(白成一)·정윤교(鄭允僑) 등을 불러들여 약을 붙였던 자리를 진찰하도록 명하고, 분부하기를,
"어제에 비해 좀 어떤가?"
하니, 윤교가 아뢰기를,
"독기는 어제보다 한층 더 줄어들었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무슨 약을 붙여야겠는가?"
하니, 윤교가 아뢰기를,
"근(根)은 없지만 고름이 아직 다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지고(荔枝膏)가 고름을 빨아내는 데는 가장 좋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터진 곳이 작으니 다시 침으로 찢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윤교가 아뢰기를,
"이미 고름이 터졌으므로 다시 침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등쪽에 또 종기 비슷한 것이 났는데 지금 거의 수십 일이 되었다. 그리고 옷이 닿는 곳이므로 삼독[麻毒]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 윤교 등에게 진찰해 보도록 명하고 분부하기를,
"무슨 약을 붙이는 것이 좋겠으며 위치는 그리 위험한 곳이 아닌가?"
하니, 윤교가 아뢰기를,
"위치는 위험한 데가 아니고 독도 없습니다만, 근이 들어 있으니 고름이 생길 것 같습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웅담고(熊膽膏)를 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웅담고도 효과가 없을 것 같다."
하니, 윤교가 아뢰기를,
"수도황(水桃黃)은 독을 녹이는 약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
하였다.
가감소요산(加減逍遙散)을 지어 올렸다.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체직하였다.
6월 15일 병인
약원(藥院)의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도제조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의관의 말을 들으니 머리와 등쪽에 또 종기 비슷한 증세가 있다 하므로 애타는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머리 부분은 대단치 않으나 등쪽은 지금 고름이 잡히려 하고 게다가 열기가 올라와 후끈후끈하다."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몸은 순전히 더위의 증세이므로 양제(凉劑)를 쓰지 않을 수 없으나 소요산(逍遙散)이나 백호탕(白虎湯)은 다 지나치게 찬 염려가 있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맞는 약이므로 어쩔 수 없이 계속 쓰고 있다. 병을 조리하는 중이라도 잠자기 전에는 망건을 벗은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도 머리를 묶어 싼 채로 접견하고 있지만 함께 상대하기가 매우 힘들다."
하였다. 의관 백성일(白成一)과 정윤교(鄭允僑)에게 진찰해 보도록 명한 뒤에 상이 이르기를,
"등쪽은 무슨 약을 붙이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성일이 아뢰기를,
"행인고(杏仁膏)에 대황(大黃)과 천화분(天花粉)을 더 넣어 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약 힘이 너무 약할 듯하다."
하니, 윤교가 아뢰기를,
"이것도 독을 녹일 수 있으며 너무 독한 약은 섣불리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근은 없는가?"
하니, 성일이 아뢰기를,
"거의 다 고름이 잡혔고 근은 없습니다. 가슴의 화기가 내려가면 이 증세도 저절로 쉽게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행인고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백호탕 두 첩을 올렸다.
내의원이 아뢰기를,
"입시한 의관이 전하는 말을 삼가 들으니 석양에 등쪽의 열기가 더 오르는 증세가 있다 하므로 참으로 애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미 날이 저물어 신들을 불러 접견하시라고 감히 청할 수 없으나 이러한 때 몸을 보호하는 조처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빨리 신들로 하여금 의관을 거느리고 본원(本院)에 입직하여 수시로 진찰하고 약을 논의할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일 불러 접견하겠다."
하였다.
6월 16일 정묘
약원의 제신과 대신(大臣) 및 각신(閣臣)을 불러 접견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 등이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맨 처음 소요산을 복용한 뒤로 매일 두 번씩 마셔 몇 첩이나 복용했는지 모를 정도인데 이와 같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어렵고 그저 속만 탈 뿐이므로 조보(朝報)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린 것은 그저께의 두 첩에 지나지 않는다. 소요산은 본디 양제(凉劑)인데 거기에다가 황금(黃芩)과 황련(黃連) 등속을 추가하였으므로 석고(石膏)의 약효보다 못하지는 않으나 어제 백호탕(白虎湯)을 쓰기로 정하여 그것을 마시면 혹시 열을 내릴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금 마시자마자 곧 열이 오르는 증세가 생겼는데 어깨와 등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온몸이 다 뜨거워 찬 음식을 먹고 나자 비로소 조금 내려간 듯하였고 오늘 아침에는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듯하다."
하였다. 의관 정윤교에게 등쪽의 종기를 진찰하도록 명한 뒤에 상이 이르기를,
"일반적인 증세로는 고름은 적고 피가 많이 나오니 피속에 열이 많아 그런 것 같다. 앞으로 무슨 약을 쓰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도제조 이시수가 아뢰기를,
"여러 의관이 모두 어제 저녁의 열증세는 약힘의 발산 때문인 것 같다고 하니, 백호탕을 다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한 첩을 더 달여 들여오도록 하라. 대체로 이 증세는 가슴의 해묵은 화병 때문에 생긴 것인데 요즘에는 더 심한데도 그것을 풀어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크거나 작은 일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것까지도 다 차츰 피곤해지는데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畏) 자 한 자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선 경들 자신부터 임금의 뜻에 부응하는 방도를 생각하도록 하라."
하니, 환지가 아뢰기를,
"일월처럼 밝디밝은 전후에 내리신 분부는 모두가 지극히 정밀한 의리였으며 이번에 연석에서 분부하신 뒤로는 털끝만큼도 미진한 점이 없게 되었으니, 비록 우매한 서민이라도 그 누가 성상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며 또 누가 감히 그 사이에 이론을 제기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 또한 늙었지만 저번 연석의 분부 속에 자기 자신을 경멸하면 남이 따라서 경멸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또한 경들이 스스로 반성할 점이다."
하니, 환지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실로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사실 매사를 다 잘할 수 없지만 신처럼 무능한 자는 열 가지 일 중에 한두 가지 일도 조정에 도움이 있기를 기대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남의 경멸을 받는 한탄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비록 덕이 모자라지만 의리에 관계되는 문제는 한번 기준을 잡은 다음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데 오늘날 신하로서 누가 감히 그에 반대하여 나를 이기려는 생각을 가질 것인가. 가령 내가 지키는 의리가 완벽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그 어찌 나를 반대하는 자로 하여금 내말을 무조건 어기지 말라고 할 수 있겠는가마는, 천지 자연과 부합되는 정밀한 의리에 대해서야 또한 어찌 그들이 어지럽게 하는 대로 방치해서야 되겠는가. 《서경(書經)》에 ‘오직 임금만이 극을 만든다.[惟皇作極]’ 하지 않았던가. 위에서는 극을 세우고 밑에서는 그 극을 돕는 것인데 극이란 옥극(屋極)·북극(北極)과 같은 말이다. 옥극이 일단 세워져야 문지도리·문기둥·문빗장·문설주 등이 각기 제자리에 들어서고 북극이 그 자리에 자리잡고 있어야 수많은 별이 에워싸고 돌아가는 것이니, 황극을 세우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어울리는 자는 저절로 큰 덩어리 속으로 함께 들어가지만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자는 새매가 참새를 몰아 쫓아가듯 밀어내기 마련이다.
또 더구나 의리란 두 개가 없으므로 옛날 의리와 오늘의 의리를 두 가지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날 이른바 신축·임인년 의리를 핑계대는 것은 과연 무슨 이유로 나온 것인가. 인정과 천리(天理)로 말하더라도 내가 신축·임인년 의리를 지키는 것이 어찌 오늘날 신하들보다 뒤떨어질 것인가. 설사 내가 의리를 강명하는 것이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 치더라도 신자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친근한 자를 위해서는 그 허물을 말하지 않는다는 뜻에 입각하여 그저 선한 도리로 임금의 마음과 유대를 맺는 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더구나 지금 중천에 태양이 뜬 것처럼 이와 같은 모든 의리가 미진한 점이 없이 완전히 밝혀졌는데 오히려 겉으로 그것을 가탁하여 간사한 짓을 꾸미려 하는 것은 과연 무슨 심사란 말인가. 나 또한 야박하게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루이틀 그대로 지나가 약한 모습을 내보이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그들이 만일 살고 싶다면 어찌 감히 그처럼 강경하게 고집을 세운단 말인가.
병진년163) 겨울의 처분은 성과가 없는 것 같지만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또한 한푼의 소득이 없지 않았으니, 그뒤부터는 그러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의 일은 병진년 당시보다 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경들 자신부터 밖에 나가 서로 고하여 이러한 사정을 제각기 이해하도록 한다면 다소나마 죄에 걸리지 않을 보람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살피고 엿보기를 잘하는 습속으로 혹시 나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안다면 또한 어찌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고치는 길이 없겠는가. 오늘의 입장으로서는 그들로 하여금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고칠 수 있게 한다면 사실 가장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 가운데 한두 사람은 그가 지은 죄에 걸맞게 벌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숨어 있는 음침한 장소와 악인들과 교제를 갖는 작태를 내가 어찌 모를 것인가. 내가 만일 입을 열기만 하면 상처를 받을 자가 몇 사람이나 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참고 있는데, 지금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어도 하나도 자수하는 자가 없으니, 그들이 무엇을 믿고 감히 이런단 말인가.
이른바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도 한 군데만 교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면 팔방으로 부정한 경로를 믿고 비밀히 서로 내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또한 사대부들이 하는 짓인가. 내가 그들을 사대부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 방치하고 있으나 지금 세상에 살면서 감히 이와 같은 버릇을 자행한단 말인가. 아무개가 어디에서 이런저런 작태를 벌인 것에 대해 나도 익히 들은 것이 있으니 분명히 조사하여 엄중히 조처하는 것은 한번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결판이 날 판인데, 그들은 오히려 무서운 줄을 모른단 말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엄중하신 것은 모두가 의리를 천명하기 위해서이지만 아랫사람들 가운데 죄가 있는 자는 사실 그가 지은 죄에 걸맞게 벌을 가하면 그뿐입니다. 병을 요양하시는 중에 어조가 과격하시니 혹시 몸조리에 해로울까 신들은 매우 애가 탑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하는 일도 한탄스럽다. 이와 같은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그 이름을 지적해 달라고 청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나를 나약하다 생각하고 감히 이렇게 하고 있으나 조만간에 결국 결말이 날 것이다. 비유하자면 종기가 고름이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나는 반드시 그것이 스스로 터지기를 기다리고 싶으나 그들이 끝내 고칠 줄 모른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하였다. 이어 예조 판서 서용보(徐龍輔)에게 하교하기를,
"진찬(進饌)은 우선 며칠 이후로 미루어야겠으니 이점을 알고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순청량음(四順淸凉飮) 두 첩과 금련차(金連茶)를 올린 뒤에 우황고(牛黃膏) 다섯 알을 만들어 올렸다.
내약원(內藥院)이 진찰을 받도록 두 번을 아뢰어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렸다.
이병정(李秉鼎)을 내의원 제조로 삼았다.
6월 17일 무진
가감소요산(加減逍遙散) 세 첩을 지어 들여오고 금련차(金連茶) 한 첩을 다려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6월 18일 기사
약원이 진찰을 받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9일 경오
약원의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약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조금 전 연석에서 성상의 병세가 더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걱정되고 초조하여 여러 번 직숙(直宿)을 청했으나 끝내 윤허를 얻지 못한 채 물러나와 서로 마주 대하고 있자니 속이 불에 타는 듯합니다. 전하께서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상의 병세가 이처럼 계속되고 심한데도 직숙을 하지 않으니 어찌 이와 같은 나라의 사체가 있단 말입니까. 성상의 마음에는 의관의 진찰로도 별다른 문제가 없으므로 직숙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시고 아울러 일을 크게 벌여 소란을 피우는 것을 염려하시지만, 국가의 중대한 일이 성상의 건강이 좋지 않는 때보다 더한 경우가 어찌 있겠습니까. 편리한 대로 간단히 진찰하는 것은 사체를 무겁게 다루는 것이 아니고, 일을 크게 벌여 소란을 피우는 것 또한 염려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들과 의관들이 본원을 떠나지 않아야만 약을 의논하고 병세를 진찰하는 일에 수시로 정성을 들일 수 있으니, 즉시 관례대로 직숙할 것을 명하여 나라의 사체를 높이실 것을 간절히 빕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직숙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0일 신미
약원의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가감소요산(加減逍遙散)은 중지하고 유분탁리산(乳粉托裏散) 1첩, 삼인전라고(三仁田螺膏) 및 메밀밥을 지어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6월 21일 임신
약원의 제신과 대신(大臣)·각신(閣臣)들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李時秀) 등이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높이 부어올라 당기고 아파 여전히 고통스럽고, 징후로 말하면 한열(寒熱)이 일정치 않은 것 말고도 정신이 흐려져 꿈을 꾸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분간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하고, 강명길(康命吉)·유광익(柳光翼)·현필채(玄必采)·박전(朴烇)에게 증세를 진찰할 것을 명하였다. 강명길이 아뢰기를,
"맥의 도수는 일정하여 기운이 부족한 징후는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빠르고 센 것 같으나 특별한 종기의 열은 없습니다."
하고, 유광익은 아뢰기를,
"좌우맥 삼부(三部)164) 는 다 고루 뛰고 있긴 합니다만, 신은 그전에 진찰한 날짜가 약간 오래되었는데 왼쪽 간맥(肝脈)은 전일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습니다."
하고, 현필채는 아뢰기를,
"맥박은 조금 큰 것 같습니다만 좌우 삼부가 다 고르게 뜁니다."
하고, 박전은 아뢰기를,
"왼쪽 맥은 고르게 뛰고 오른쪽 맥은 가라앉아 빠르게 뛰는 징후가 약간 있으나 열은 대단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열 증세는 이들의 말이 그럴 듯하다. 대체로 한열(寒熱)이 번갈아 일어날 때 가슴의 기운이 올라와 식히기 때문에 열은 조금 줄어든 것 같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한열이 일어나는 증세는 종기독이 위로 공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만 신들은 종기에 대해 전혀 모르고 맥박도 과연 자주 뛰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종의(腫醫) 김유제(金有濟)는 아뢰기를,
"다른 의원이 전하는 말을 들었더니, 종기 증세는 곧 근종(根腫)이므로 반드시 먼저 근을 녹여야만 통증이 멎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천오(川烏)·황백(黃栢)·적소두(赤小豆)를 똑같은 분량으로 가루를 내어 술에 개어 부친다면 독을 녹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봅니다."
하였다. 시수(時秀)가 아뢰기를,
"조금 전에 의관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메밀밥을 붙인 것이 오늘 여섯 차례에 지나지 않았다 했습니다. 그것은 본디 순한 약인데 이와 같이 하고서야 어찌 쉽게 효과를 거두겠습니까."
하고,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붙이는 약은 반드시 자주 갈아붙여야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렁이 고약을 붙인 뒤에 근이 들어 있는 곳이 약간 차도가 있는 것 같으나 조금 더 오래 붙여두어야 약기운이 스며들어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종기의 부위를 진찰해 본 뒤에야 이어서 붙일 처방을 의논할 수가 있는데 의관들이 다 진찰을 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들에게 자주 진찰하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녁 무렵에 진찰해 보게 하겠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병환이 이러한데도 신들은 아직까지 종기가 난 부위를 진찰해 보지 못했으니, 더욱 초조하고 답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쉰 뒤에 경들에게 진찰해 보게 하겠다."
하였다.
유분탁리산(乳粉托裏散) 3첩과 메밀밥을 조제하여 들여오고 우방자(牛蒡子)와 감초(甘草)를 달여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6월 22일 계유
약원(藥院)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잡아당기는 통증은 조금 나은 듯하다."
하고, 화성 유수 (華城留守)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수라는 이미 드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라를 어찌 챙겨먹을 수 있겠는가. 겨우 쌀미음을 조금 마셨을 뿐이다."
하고,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봉해 올린 장고(羘膏)는 드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과 같은 입맛으로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하고, 유린이 아뢰기를,
"지금은 성상의 병환이 상당히 차도가 있으니 수라와 장고 등속을 연이어 드신다면 그 효과가 더 빠를 듯합니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조용히 조리하시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오래 앉아계시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의관들에게 진찰해 보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피재길(皮載吉)에게 지방 의관 김한주(金漢柱)·백동규(白東圭)와 함께 들어와 진찰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재길 등이 진찰한 뒤에 상이 이르기를,
"찹쌀밥을 붙인 뒤에 고름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나 곪았는가?"
하니, 한주가 아뢰기를,
"지금은 푹 곪았다고 봅니다."
하고, 동규는 아뢰기를,
"고름은 많이 나왔으나 아직도 푹 곪지는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여러 의관과 마루 밖으로 나가 앉아 앞으로 쓸 처방을 자세히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죽엽차(竹葉茶)에 청심환(淸心丸) 한 알을 넣어 달여 들여오고 패모고(貝母膏)를 조제해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또 향유조중탕(香薷調中湯) 한 첩과 향귤음(香橘飮) 한 첩을 조제해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6월 23일 갑술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아뢰기를,
"밤 사이에 종기 고름은 계속 순조롭게 흘러 나왔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름이 나오는 곳 이외에 왼쪽과 오른쪽이 당기고 뻣뻣하며 등골뼈 아래쪽에서부터 목뒤 머리가 난 곳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그 크기가 어떤 것은 연적(硯滴)만큼이나 크다."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병환이 지금까지 끌어오고 있는 것은 신들의 죄입니다. 지방의 의관을 널리 구해 보았으나 진짜로 의술에 밝은 자를 얻지 못해 이러쿵저러쿵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아 한심할 뿐입니다. 다시 구해 본다 하더라도 이들보다 나을 것이라고는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탕약은 강명길(康命吉)·유광익(柳光翼)이 의논해 정하고 현필채(玄必采)·이유감(李惟鑑)·이경배(李敬培)·박전(朴烇) 등이 보좌하게 했을 뿐이며, 종기의 증세는 백성일(白成一)과 피재길(皮載吉)이 진찰하게 했는데 백성일의 아들도 상당히 조예가 깊다고 하니, 그로 하여금 곁에서 돕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대령 중인 지방의 의관이 모두 몇 사람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김한주(金漢柱)와 백동규(白東圭)는 다 대궐 밖에서 대령 중이며 정윤교(鄭允僑)도 대궐 밖에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김한주는 의술이 가장 노련하고 알차며 외모도 좋습니다. 백동규는 그말이 수시로 변하여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름이 나왔다고는 하나 통증이 현저히 줄어든 것은 느끼지 못하겠다. 병이 든 지 오래되어 원기가 차츰 약해지고 있으니 지방의 잡다한 무리는 더 이상 많이 모아 들여보내지 말라. 경들은 의술에 밝은 자를 두루 찾아 반드시 오늘 안으로 당장 차도가 있게 하라. 나의 병세가 이러하여 백성과 나라의 일을 전혀 처리하지 못하고 있으나 일마다 관심이 있는 것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아 이따금 꿈을 꾸기도 하니, 이 때문에 한 가지 병을 더 보탠 것 같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그와 같은 것들은 생각에서 배제하여 깨끗이 씻어버리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동안 제조(提調)165) 에게 해당되는 탄핵 상소가 있었는데 그 자신은 과연 모르고 있는가?"
하니, 윤대(允大)가 아뢰기를,
"그 자신도 이미 그 소식을 대강 들었지만 지금과 같은 때에 어찌 감히 물러날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하룻동안에 서너 번씩 접견하면서도 내가 그에 관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성의가 모자란다는 한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연석의 분부로 인해 물러난다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오후에는 오르내리는 열증세가 과연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도 한창 열증세가 있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조금 전에 강명길이 하는 말을 들으니 경옥고(瓊玉膏)를 드시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 약은 인삼이 들어가긴 했으나 온제(溫劑)와는 달라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 열증세가 일어난 것은 5푼의 인삼이 들어 있는 육화탕(六和湯)에 그 원인이 있는 것 같은데 이제 어찌 다시 그와 같은 약을 쓸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조금 전에 변씨(卞氏) 의원의 말에 따라 토끼가죽을 이미 대령하였고 장영 장관(壯營將官) 심인(沈鏔)의 이른바 연기를 쐬는 법도 이미 시험하여 효과를 보았다고는 하지만 이번에 종기를 치료하는 것은 전부 떳떳한 처방을 쓰고 있으며 고름이 흐르고 근이 녹아 차츰 그 효과가 있으니, 그와 같은 잡약(雜藥)은 섣불리 시험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두 가지 방법은 과연 소문대로 효과가 있다 하던가?"
하자, 윤대(允大)가 아뢰기를,
"토끼가죽은 신봉조(申鳳朝)가 효과를 보았고 연기를 쐬는 법은 서정수(徐鼎修)가 또한 효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증세를 보건대 여느 병과 다르며 게다가 한창 무더운 날씨에 약성이 더운 약을 붙이고 고름이 흘러내리니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만, 대체로 종기란 빨리 낫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봉합이 너무 빠르면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시어 한때의 괴로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와중에 국사를 처결하기가 어렵지만 호남 수령들에 대한 포폄의 장계는 당장 뜯어보지 않을 수 없으니, 당직 승지로 하여금 와서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내의원 제조 이병정(李秉鼎)을 체직하고 김재찬(金載瓚)을 그 후임으로 삼았다. 이 당시 대신(臺臣) 홍시제(洪時濟)가, 이병정이 전조(銓曹)의 요직에 부당하게 앉아 있다고 상소로 논박하였는데 그것을 안에 머물려 두고 계하하지 않던 중, 이병정이 부모의 병환으로 인해 체직되었다.
찹쌀밥과 우렁이 고약을 조제해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6월 24일 을해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밤 사이에 열증세는 조금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밤공기가 매우 더워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잠을 주무신 것은 어떠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젯밤같은 무더위 속에 어찌 잠을 붙일 수가 있었는가마는 그젯밤에 비해서는 조금 나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일어나 앉아 보고 싶어 경들을 불러 접견했지만 이 또한 힘이 든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고름이 흘러나오는 상태는 조금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정오 이후부터는 나오는 고름이 조금 적어졌다. 이제는 피재길(皮載吉) 한 사람에게 진찰하게 할 수 없는데 여러 의관들 중에 누가 조금 더 나은가?"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김한주(金漢柱)와 백동규(白東圭) 두 사람에게 함께 진찰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심인(沈鏔)이 조제한 연훈방(烟熏方)과 성전고(聖傳膏)를 들여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 처방은 경면 주사(鏡面朱砂)를 사용하였고 성전고는 파두(巴豆) 등 약을 사용하였으므로 신하들이 섣불리 시험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이때에 와서는 모든 약이 효과가 없어 상이 연훈법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하므로 마침내 가져다가 써보기에 이른 것이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 등이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곁에 있는 작은 종기가 한층 더 당기고 아프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곁에 있는 종기가 크기는 작더라도 독기는 더 많기 때문에 아픈 증세가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기 전문의원에 대해 또 소식이 들어온 것이 있는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전주(全州)에 사는 황씨(黃氏) 의원이 의술에 정통하여 신통한 효과를 본 자가 많은데 민태혁(閔台爀)이 그와 서로 친근하다 하므로 신들이 글을 보내 물어본 뒤에 그에게 올라오도록 하였으니, 며칠 사이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방금 잠깐 잠이 들었는데 열기가 또 올라온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의관의 말을 들으면 열증세가 오르내리는 것은 언제나 취침한 뒤에 그러하였다 했는데 지금도 그렇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부를 살피는 각신(閣臣)을 서로 돌아가며 연석에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성전고(聖傳膏)와 연훈방(烟熏方)을 조제해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6월 25일 병자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고, 상이 이르기를,
"심인(沈鏔)과 정윤교(鄭允僑)를 들어오게 하라.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잠을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요자리에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 종기 자리가 어떠한지 궁금하므로 경들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제신이 진찰한 뒤에 아뢰기를,
"피고름이 이처럼 많이 나왔으니 근이 이미 다 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의 반갑고 다행스러운 마음은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원기를 보충하는 면에 한층 더 유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부어고(鮒魚膏)를 본원(本院)에서 봉하여 올리겠습니다. 잠자리도 전에 비해 편안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밤에 비하면 조금 나았다."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날이 밝은 다음에 다시 자세히 진찰해 보아야겠으나 기쁘기가 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어깨죽지 위의 당기고 아픈 또 다른 종기는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잘 모르겠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상께서 잘 모르겠다고 분부하시니 통증이 가신 것을 짐작할 만합니다. 그간에 무엇을 드신 것은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 먹은 것이 없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피고름이 완전히 나은 뒤에는 구미도 반드시 크게 좋아질 것입니다. 지금은 성상의 병세가 이미 나아지고 있는 상태이니 그야 물론 머지않아 쾌차하실 것입니다만 이러한 때의 조리는 한층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날것과 찬것을 드신다거나 찬바람을 쏘이는 일을 깊이 경계하셔야 하며, 신경을 너무 지나치게 쓰는 것은 이와 같은 종기에 더욱 해로운 법이니 바라건대 더욱더 유의하시어 모든 일에 반드시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시도록 힘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바람을 쐬는 것은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 이처럼 방문을 굳게 닫고 있는 것은 도리어 너무 답답하다."
하자, 윤대(允大)가 아뢰기를,
"사실 너무 답답하실 염려가 있으니 바깥 창문만 닫고 방문은 가끔 잠시 열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신(閣臣)들 가운데 누구누구가 들어왔는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어젯밤에 들어와 숙직한 각신은 모두 들어왔습니다. 좌상은 지금 합문(閤門) 밖에 대령하고 있는데 지금 막 밖에서 왔으므로 감히 연석에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할 것이야 뭐가 있겠는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 범사를 어찌 감히 한층 더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신들 중에 오늘 새벽 연석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이쪽으로 와서 이부자리의 고름이 젖은 곳을 살펴보도록 하라."
하니, 신하들이 앞으로 나가 살펴본 뒤에 서로 돌아보고 기뻐하며 아뢰기를,
"피고름이 다 나왔으니 근이 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사스럽고 다행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몸을 움직이는 것은 조금 낫고 어깨죽지의 부은 곳도 조금 가라앉은 것 같긴 하나 주변의 작은 종기들이 한덩어리를 이루어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 같아 잡아당기는 증세가 없지 않다. 피고름이 많이 나온 뒤라서 뱃속이 필시 허약할 것인데 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 무엇을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니, 이상한 일이다."
하니, 이시수가 아뢰기를,
"열기는 아직도 있습니까?"
하고, 상이 이르기를,
"열기는 참으로 견딜 수가 없으니 이것은 특별한 증상이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비록 두 가지 증상이긴 하나 종기 증상도 열종(熱腫)으로 인해 생긴 것이니 종기가 낫는다면 열기도 차츰 내려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름이 많이 나와버렸는데 오히려 당기는 증세가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심인(沈鏔)이 아뢰기를,
"이미 흘러나온 피고름이 많아 지금 남은 것은 약간의 찌꺼기뿐인데 그것도 차츰 이어서 나올 것입니다. 종기 증상은 이미 나아가고 있으나 남은 기운이 어찌 당장 없어지겠습니까."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신들이 조금 전 연석에서 물러나와 머리를 맞대고 서로 축하하였습니다. 이번에 나온 피고름은 아무리 원기가 강장한 사람이라도 이처럼 많은 피를 흘리고 나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인데 성상의 건강을 살펴볼 때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약의 힘이 비록 독하더라도 원기가 튼튼하지 않다면 어찌 이처럼 뽑아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는 열을 다스리는 약을 크게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의관들 중에 약을 논의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유광익(柳光翼)·현필채(玄必采)·이유감(李惟鑑) 등 몇 사람뿐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탕약을 의논하여 결정하는 과정에 약리(藥理)를 잘 아는 의관이 전혀 없으니 나라의 체모로 보더라도 어찌 말이 되는가. 다급한 상황을 만나면 갑자기 구하기가 어렵고 일이 지나간 뒤에는 또 어물어물하니, 진정으로 유의하여 찾아본다면 그래도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는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잘 찾아보겠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이제는 음식으로 원기를 보충하는 것이 시급한데 체하거나 답답하지 않으면서도 먹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으니, 내 생각에는 전부 화기 때문이라고 본다. 경들은 어제도 생맥산(生脈散)을 써보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양약(凉藥) 가운데 인삼 한 돈이 들어 있으므로 인삼의 열이 한층 더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강명길(康命吉)에게 들어와 맥을 진찰할 것을 명하였는데, 명길이 아뢰기를,
"새벽에 진맥할 때는 좌우의 삼부(三部)가 높이 자주 뛰고 탄탄했습니다. 이제는 조금 내렸으나 오른쪽 맥은 아직도 내리지 않고 그대로이니, 신의 소견으로는 원기를 보충하는 것은 괜찮으나 절대로 양약을 써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새벽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정신은 말짱하고 구미는 터지지 않으니 무슨 이유인가?"
하니, 심연이 아뢰기를,
"정신이 이미 좋아지셨으니 구미도 차츰 저절로 트일 것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연훈방을 오늘도 써볼 것인가?"
하니, 심연이 아뢰기를,
"오늘은 우선 중지하고 밤이 돌아온 뒤의 상황을 다시 살펴보고 시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소요산(逍遙散)에 사물(四物)을 더 넣는다면 합당한 약이 될 것 같다. 경들은 물러가 다시 의논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조금 전에 의관이 전한 분부를 들어보니 그 말씀이 과연 지당하십니다. 피고름이 그처럼 많이 나온 것은 순전히 다 곪아서 터진 것이 아니라 더운 피가 위로 올라와 그것이 터져서 따라 나온 것 같습니다. 이로 볼 때 핏속에 열기가 많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으니, 너무 차가운 약은 감히 논의할 수 없으나 피를 식히고 맑게 하는 약으로 서서히 조절하는 것이 괜찮겠습니다. 다시 의관들과 십분 토론하고 내일 아침 진찰을 마친 뒤에 탕약을 의논해 결정할 생각입니다. 아침 이후 무엇을 드셨으며 또 몇 차례나 드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식전에는 조금 나은 것 같았으나 오후에는 구미가 완전히 변해 전혀 먹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순전히 열증세인데 요즘은 입안이 마르는 일이 없으므로 찻물도 찾아 마시지 않으니 이 또한 이상하다."
하였다.
용뇌안신환(龍腦安神丸) 한 알과 댓잎을 달인 물에 우황청심원(牛黃淸心元) 한 알을 넣어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6월 26일 정축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몸을 움직이는 것은 조금 낫지만 통증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하고, 이시수가 아뢰기를,
"잠자리는 편안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젯밤도 편히 눈을 붙이지 못했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수라도 자주 드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라는 완전하게 다 맛보지 못하고 원미(元味)166) 만 조금 먹었다."
하고, 환지가 아뢰기를,
"원미라도 자주 드시면 반드시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다. 심연·정윤교에게 약을 붙일 것을 명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신은 눈이 어두워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부어오른 곳이 어제보다 더 낮아진 것 같습니다."
하고, 심연은 아뢰기를,
"어제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낮아진 감이 있습니다. 고름도 계속 흘러나와 작은 적삼이 젖은 곳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훈방은 날이 저물 무렵에 시험해 보고 싶다."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열이 조금 식은 감이 있으니 탕약은 우선 중지하고 다시 의논하여 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좌의정 심환지가 아뢰기를,
"날이 저물었는데 그동안에 음식을 드신 일은 있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전에 흰도라지 미음을 마시긴 했으나 많이 마시지 못했다."
하고, 이시수가 아뢰기를,
"신은 아침 연석에서 말씀을 드리려 하다가 곧 연훈방을 써보아야겠다는 분부가 계셨기 때문에 즉시 물러나와 미처 아뢰지 못했습니다. 그제 이전은 종기가 부어올라 당기고 아픈 정도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진찰할 때는 종기를 다스리는 일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이제는 종기가 거의 나아가 별다른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열이 오르내리고 왔다갔다 하는 것은 한때 가슴의 화기처럼 보입니다만,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로 보더라도 침식이 편하지 않으면 번울증이 있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며칠 동안 병을 조리하시는 가운데 잠을 매일 설치고 수라도 드시는 것이 없으시니, 이러한 과정에 원기가 날로 차츰 쇠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서 열기가 더 오르는 것도 반드시 기운이 허약해진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하루를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1도의 열을 추가하고 이틀을 그렇게 하면 반드시 2도의 열을 또 추가할 것이니, 이 어찌 너무도 애가 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양제(凉劑)를 드시는 일은 이미 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반드시 먼저 원기를 보충하셔야 하니, 그런 뒤에야 허열 또한 사라지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수의(首醫)와 기타 의관들이 하는 말이 다 이와 같았기 때문에 조금 전에 그들과 의논하여 약명(藥名)을 정했는데, 사물(四物) 가운데 숙호(熟芐)는 건호(乾芐)로 대체하고 육군자(六君子) 가운데 반하(半夏)를 감하고 팔물탕(八物湯) 가운데 진피(陳皮) 한 가지를 추가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기혈을 강하게 보충하는 약이 아니라 사실 평범하고 떳떳한 왕도(王道)의 약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이라면 혹시 잘못될 수도 있겠으나 여러 의관의 말은 그다지 틀리다고 볼 수 없으니, 오늘부터 복용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과 같은 번열증으로 어찌 그와 같은 약을 복용할 수 있겠는가."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이 증세는 허번(虛煩)167) 이지 실열(實熱)168) 은 아닐 듯합니다."
하였다. 환지가 아뢰기를,
"이제는 약을 쓰는 길이 어제 이전과는 크게 다르다고 봅니다."
하고, 시수는 아뢰기를,
"신들의 뜻은 처음에 경옥고(瓊玉膏)를 복용하시라고 아뢰려 하였으나 이제는 그것도 너무 약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한번 먹어보겠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제조에게 밖에 나가 다려서 들여오게 할까요?"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복용할 수 없고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의논하도록 하자."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이제는 탕약을 하루라도 중지하시면 애가 탈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나의 본디 체질을 몰라서 그렇다. 나는 본디 온제(溫劑)를 복용하지 못하는데 음산하고 궂은 날에는 그와 같은 약들을 더욱 먹지 못하니, 그 해로움이 틀림없이 일어난다. 오늘과 같은 날씨에 어찌 이러한 약을 복용할 것인가. 궁중에 여러 해를 출입한 각신(閣臣)은 반드시 나의 체질을 알 것이다. 체질로 헤아려보고 사리로 참작할 때 오늘은 결코 복용할 수 없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신들의 마음은 하루라도 약을 중단하시면 실로 초조하기 그지없겠습니다만 그러하시다면 우선 소량의 경옥고를 향유(香薷)를 달인 물에 묽게 타서 복용하시고 만일 속이 막히는 감이 없으면 조금 더 많이 드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더 병세를 지켜보아야 할 일이나 평소에 경옥고를 한번 맛보면 5, 6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생맥산(生脈散)이 어쩌면 경옥고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그러신다면 생맥산을 조제해 들이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생맥산이나 경옥고를 막론하고 내 생각에는 복용하기가 곤란하다고 본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현재 원기를 부지할 힘은 오로지 탕약에 있으니 원기가 실하다면 객열(客熱)은 저절로 물러갈 것입니다. 이제 만일 즉시 결정하지 못하고 오늘이 또 지나가면 신들의 다급한 심정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로 대화하기도 어렵다. 경들의 뜻이 그러하니 팔물탕은 내일 진찰하는 자리에서 다시 여쭈어 결정한 뒤에 들여오도록 하고 경옥고나 생맥산 또한 다시 하교를 가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열기운이 아직도 내리지 않았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조금 전 연훈방을 시험해본 뒤에 심연과 여러 의관이 하는 말은 모두 종기 부위가 어제보다 눈에 띄게 좋아져 며칠 가지 않아 나머지 독도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신들은 그말을 듣고 너무도 경사롭고 다행스러웠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그말이 사실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의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 연석에서 진찰할 때 신들이 본 것으로도 어제보다 매우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염려할 것이 없으나 주무시는 것과 수라를 드시는 일이 아직 정상을 회복하지 못하여 가장 애가 탑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탕약의 일로 경들이 누누이 애써 간청하니 그 또한 계속 거절하기 어렵다. 생맥산을 먹어보긴 해야겠으나 우선 경옥고를 조금 시험하고 싶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신들이 처음부터 경옥고를 드실 것을 청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으므로 생맥산을 드실 것을 청했던 것인데, 이제 그것을 복용하신다는 분부가 계시니 실로 천만 다행입니다."
하고, 윤대(允大)는 아뢰기를,
"이 약은 인삼 재료가 들어가긴 했으나 지황(地黃)의 양을 배로 늘렸기 때문에 양제(凉劑)라고 말할 수 있으며 체질이 본디 차가운 자는 복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나서 경옥고를 올려드렸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들어온 자는 누구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신들은 약원의 세 제조입니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각신도 들어왔는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좌의정·화성 유수·경기 감사·예조 판서 등은 나중에 들어올 것입니다."
하였다. 시수가 또 아뢰기를,
"신들이 들어온 지는 오래되었는데 상께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시간이 상당히 오래되었는가?"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담배 한 대 피울 만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전에는 잠을 자고난 뒤에 열이 매우 많았는데 이제는 조금 나은 것 같다. 연훈방은 아직도 한 차례가 남았으나 지금 해가 이미 저물었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오늘은 두 번만 시험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기어코 정해진 수효를 다 채우고 싶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경옥고를 복용하신 뒤에 별다른 증상이 없으니 이제는 온보(溫補)할 약을 당장 의논해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일은 팔물탕(八物湯)을 올려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성전고와 연훈방을 조제해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경옥고를 들여보냈다.
6월 27일 무인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어제 저녁에 들어와 진찰할 때 상께서 마치 주무시는 듯 정신이 몽롱한 증세가 있었는데 지금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밤에 계속 그러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젯밤을 지샌 일은 누누이 다 말하기 어렵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지금은 탕약을 의논해 정하는 일이 한시가 급하니, 수의(首醫) 이하로 하여금 맥을 진찰해 보게 하소서."
하였다. 강명길(康命吉)·유광익(柳光翼)·이경배(李敬培) 등이 진맥한 뒤에 아뢰기를,
"열기는 조금 없어진 듯하나 좌우 삼부(三部)의 도수는 모두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맥박뿐만 아니라 신들의 소견으로 말하더라도 정신이 혼미하시니 매우 애타고 답답합니다. 온보(溫補)할 약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는데 이제는 팔물탕도 오히려 약한 편입니다. 신들은 여러 의관과 다시 탕약을 의논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옥고는 어제도 복용하였으나 날씨가 궂은 때는 효과를 보기가 어렵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경옥고는 본디 서서히 조리하는 약이므로 당장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으로 탕약을 드시면서 경옥고를 간간이 복용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제는 병의 증세를 직접 마주하여 응하는 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그동안 수라는 몇 번이나 드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미가 더욱 맞지 않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탕약을 즉시 의논해 정해야겠는데 잠시 물러가 의논해 들여올까요?"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바깥마루로 나가 앉아 의논하여 들여오도록 하라."
하였다. 시수가 여러 의관과 함께 탕약을 의논해 정한 뒤에 가감팔물탕(加減八物湯) 방문을 가지고 읽어드리자, 상이 명길에게 이르기를,
"이 약이 속에서 막히면 어찌 할 것인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원방(元方) 가운데서 건지황(乾地黃)을 감하였으니 반드시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두 번을 복용해야 할 것이니 인삼 두 돈을 한 돈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정향(丁香) 5푼은 너무 많으니 7매(枚)로 고쳐야겠습니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어제 심연의 말을 들으니 종기 아래쪽이 약간 단단한 것 같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것 같긴 하나 자세히 잘 모르겠다."
하고, 좌의정 심환지가 아뢰기를,
"당기고 아픈 곳은 완전히 나았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나았다. 연훈법을 다시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는가?"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탕약을 복용하신 뒤에까지 우선 기다렸다가 증세를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환지 등이 아뢰기를,
"그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신이 혼미할 따름이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잠을 너무 오랫동안 자면 도리어 정신이 혼미한 증세가 있는 법인데 이처럼 무더운 날씨에 이 또한 애가 탑니다. 수라는 얼마나 드셨으며 구미는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더욱 먹을 수가 없다."
하였다. 시수가 탕약을 받들어 올리자, 상이 복용한 뒤에 곧 잠이 들었다. 시수가 말하기를,
"성상의 증세는 억지로 일어나시기 어렵지만 탕약을 드신 뒤에는 곁에서 부축하고 수시로 방안에서 걸어다니시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이르기를,
"도목 정사를 치를 때가 되었는데 정관(政官)169) 의 사정이 딱하게 되었구나. 혹시 민사에 관한 일이 있으면 비록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도 자주 여쭈어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가미팔물탕 한 첩을 달여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탕약을 받들어 올리자, 상이 마시려 하다가 다시 분부하기를,
"탕약이 조금 식은 듯하니 다시 데워 오라."
하였다. 그것을 마신 뒤에 상이 이르기를,
"맛이 참 좋구나."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약힘이 매우 약한 편이니 오후에 다시 올릴 약은 인삼은 1돈을 넣고 건강(乾薑)을 첨가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강명길(康命吉)은 아뢰기를,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 3돈을 쓰더라도 안 될 것은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갑자기 많이 넣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좁쌀 미음을 본원에서 끊여 들여야겠는데 이따금 미음처럼 드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그만두어라."
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그동안 성상은 병환이 조금 어떻습니까?"
하니, 상은 잠이 든 것처럼 한참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시수가 또 아뢰기를,
"신들이 들어왔습니다. 날씨가 이처럼 무더운데 너무 오랫동안 주무시니 정신이 흐려지신 감이 있는 듯합니다. 조금 정신을 차리소서."
하고, 조금 뒤에 또 아뢰기를,
"탕약을 달여 들여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무 잦은 것 같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정오가 이미 지났으므로 지금 드시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더위 때문에 견디기가 매우 어렵다. 경들은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팔물탕을 올렸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탕약 두 첩을 드신 뒤에 별다른 증세는 없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특별히 다른 증세는 없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연훈방을 다시 시험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시험해 보아야겠다."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연훈방은 종기에 맞는 처방이긴 하나 정신이 혼미하신 이때 연기가 혹시 방안에 퍼지면 정신에 해로울까 걱정이 됩니다."
하고, 유광익·심연 등은 아뢰기를,
"연훈방은 우선 중지하고 천천히 상태를 보아가며 시험하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하였다.
인삼 5돈쭝과 좁쌀 미음을 끓여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주무시는 가운데 정신이 너무 혼미하십니다. 탕약을 지금 달여 들여왔으니 잠시 일어나 앉아 드십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거기에다 두어라."
하였다. 조금 뒤에 시수 등이 또 청했으나 상은 계속 잠이 든 것 같았다. 한참 뒤에 시수가 아뢰기를,
"탕약이라서 쉽게 식으니 지금 드십시오."
하니, 상이 비로소 일어나 앉아 마셨다. 시수가 아뢰기를,
"지방 의관들 가운데 홍욱호(洪旭浩)와 강최현(姜最顯)이 가장 의술에 밝다고 소문이 났으니 그들을 대령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인삼 5돈쭝과 좁쌀 미음을 올렸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인삼 1냥쭝과 좁쌀 미음을 끓여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6월 28일 기묘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좌의정 심환지 등이 아뢰기를,
"밤 사이에 성체는 조금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각(漏刻)이 멎은 뒤에 잠을 조금 잤다."
하고, 이시수가 아뢰기를,
"밤 사이에 무엇을 드신 것이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혀 먹은 것이 없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인삼차를 지금 대령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응답하지 않았다. 다시 아뢰기를,
"인삼차를 끓여 들여온 지 상당히 지났습니다."
하니, 상이 마셨다. 시수가 아뢰기를,
"일찌감치 진맥을 하는 것이 좋겠는데 지방의 의관 김기순(金𨑓淳)과 강최현(姜最顯)도 대령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세상에 병을 제대로 아는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불러들여라."
하여, 기순과 최현이 들어왔다. 강명길(康命吉) 등이 진맥한 뒤에 아뢰기를,
"원기 부족하기는 어제와 마찬가지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탕약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원기를 보할 약을 쓰면서 아울러 비장(脾臟)을 따뜻하게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최현 등이 진맥한 뒤에 아뢰기를,
"맥 도수가 부활(浮滑)하고 풍기운이 있는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체적으로 어떠한가?"
하니, 최현이 아뢰기를,
"대체적으로는 부족합니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신들은 물러가 의관들과 탕약을 의논해 정하겠습니다."
하였다.
가감내탁산(加減內托散) 한 첩을 달여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탕약을 받들어 올리자, 상이 이르기를,
"누가 지은 약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강최현이 지은 것인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대체로 서로 비슷하였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5돈쭝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인삼 3돈을 넣었습니다."
하였다.
승지 한치응(韓致應)을 체직하고 김조순(金祖淳)을 그 후임으로 삼았다.
상이 영춘헌(迎春軒)에 거둥하여 좌부승지 김조순(金祖淳), 원임 직제학(直提學) 서정수(徐鼎修), 검교 직제학(檢校直提學) 서용보(徐龍輔)·이만수(李晩秀)를 불러 접견하였다. 이때 상의 병세가 이미 위독한 상황에 이르러 만수가 홍욱호(洪旭浩)와 강최현(姜最顯)을 불러 진맥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약원을 입시할 것을 명하여 약원의 세 제조 및 각신(閣臣) 정대용(鄭大容)·김면주(金勉柱)·심상규(沈象奎)·김근순(金近淳), 의관 강명길(康命吉) 등과 지방 의관 전 현감 홍욱호(洪旭浩)·첨정(僉正) 강최현(姜最顯) 등이 앞으로 나가 엎드렸다. 상이 무슨 분부가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들어보니 ‘수정전(壽靜殿)’ 세 자였는데 수정전은 왕대비(王大妃)가 거처하는 곳이다. 마침내 더이상 말을 하지 못하므로 신하들이 큰소리로 신들이 들어왔다고 아뢰었으나 상은 대답이 없었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지방 의원 이명운(李命運)이 지금 대령하고 있으니 홍욱호 등과 들어와서 진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나, 상은 응답이 없었다. 이에 시수가 욱호 등을 불러 들여 앞에 나가 진맥하게 하였다. 진맥한 뒤에 명운이 말하기를,
"맥도(脈度)를 감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욱호와 최현은 다 아무말도 없었다. 시수의 뜻에 따라 탑교(榻敎)를 쓰기를,
"인삼 5돈쭝과 좁쌀 미음을 먹어야겠으니 계속 끓여 들여오라."
하고, 또 탑교를 쓰기를,
"청심원(淸心元) 두 알을 먹어야겠으니 들여오라."
하고, 또 탑교를 쓰기를,
"소합원(蘇合元) 다섯 알을 먹어야겠으니 생강을 끓인 물에 타서 들여오라."
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앞으로 나가 큰소리로 아뢰기를,
"성상의 병세가 이와 같으므로 의약청에 탑교를 방금 써 내보냈습니다."
하였다. 좌부승지 김조순이 탑교를 받아쓰기를,
"의약청(議藥廳)은 관례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좌의정 심환지 등이 앞으로 나가 큰소리로 신들이 대령하였다고 아뢰었으나 상이 대답이 없자, 인삼차와 청심원·소합원을 계속 올려드렸다. 왕대비전이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분부하기를,
"이번 주상의 병세는 선조(先朝) 병술년170) 의 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 드셨던 탕약을 자세히 상고하여 써야 할 일이나 그때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복용하고 효과를 보았으니 의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올려드리게 하시오."
하자, 도제조 이시수가 명길로 하여금 성향정기산을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다. 혜경궁(惠慶宮)이 승전색을 통해 분부하기를,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하므로 환지 등이 물러가 문 밖에서 기다렸다. 조금 뒤에 환지 등이 문 밖 가까이 다가가 큰소리로 신들이 이제 들어가겠다고 이뢰었다. 자궁(慈宮)이 대내로 들어가자 환지 등이 다시 들어왔다. 부제조 조윤대(曺允大)가 성향정기산을 받들고 들어오자 시수가 받들어 올리면서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두세 숟갈을 입안에 넣었는데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토해내기도 하였다. 다시 또 인삼차와 청심원을 계속 올려드렸으나 상은 마시지 못했다. 시수가 또 명길에게 진맥하게 하였는데 명길이 진맥을 한 뒤에 물러나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하자, 제신이 모두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묘사궁(廟社宮)과 산천에 기도를 거행하였다.
궁성을 호위하였다. 왕대비가 승전색을 통해 분부하기를,
"주상의 병세는 풍기운 같은데 대신이나 각신이 병세에 적절한 약을 의논하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기색만 있으니 무슨 일이오."
하니, 좌의정 심환지가 회답하기를,
"이제는 성상의 병세가 이미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천지가 망극할 뿐 더 이상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고, 왕대비가 또 분부하기를,
"선조(先朝) 병술년에 주상의 병환이 혼미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하루 밤낮을 넘기고 다시 회생하였으며 갑오년에 또 그와 같은 증세가 있었으나 결국 회복하였소. 지금은 주상의 병환이 위독한 지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 무슨 말이오."
하니, 환지가 또 회답하기를,
"지금 또 병세에 맞는 약을 계속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제조 김재찬(金載瓚)이 인삼차와 청심원을 받들고 들어왔으나 상은 역시 마시지 못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왕대비에게 들어가 여쭙기를,
"인삼차에 청심원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만무합니다.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
하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왕대비가 분부하기를,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하므로, 환지 등이 명을 받고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다. 조금 뒤에 방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리자 환지와 시수 등이 문 밖으로 바싹 다가가 큰소리로 번갈아 아뢰기를,
"신들이 이와 같은 망극한 변을 만나 지금 4백 년의 종묘 사직의 안전이 극도로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우리 왕대비전하와 자궁저하(慈宮邸下)일 뿐입니다. 동궁저하께서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우리 자전전하와 자궁저하에게 달려 있을 뿐인데 어찌 그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하였는데, 한참 뒤에 자전은 비로소 대내로 돌아갔다.
유교(遺敎)를 선포하고 대보(大寶)를 왕세자에게 넘겼다.
이날 유시(酉時)에 상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171) 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종척 집사(宗戚執事)는 어상(御床) 곁으로 나가 속광(屬纊)하고 검열 홍석주(洪奭周)가 ‘상대점(上大漸)’ 세 글자를 쓰자 가주서 여동식(呂東植)이 그것을 받들고 외정(外廷)으로 나가 내보였다. 좌의정 심환지가 말하기를,
"이번 대례(大禮)는 마땅히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준수해야 한다."
하자,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서구(李書九)가 《상례》를 가져다가 상고한 뒤에 제신과 의논하기를,
"속광(屬纊) 밑에 ‘숨이 끊어진 뒤에 내외가 다 함께 곡한다.’는 대문이 있고 그 밑에 비로소 고복(皋復)하는 절차가 있으니, 마땅히 고복을 하기 전에 먼저 거애(擧哀) 절차를 거행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왕세자 및 자전과 자궁이 거애하고 신하들도 모두 거애한 뒤에 내시가 곤룡포를 받들고 동쪽 처마 밑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북쪽을 향해 고복을 세 차례 부르고 곡하여 애도를 표하였으며, 대신과 각신들은 줄을 나누어 기둥 밖에 늘어서 있고 서구(書九)가 복의(復衣)를 받들어 어상(御床) 곁에 놓았다. 왕대비가 분부하기를,
"경비와 민폐는 성상께서 항상 아끼고 안타깝게 생각하셨던 일이다. 이번에 드는 물자는 다 대내에서 내리겠으니 대내에서 준비하기가 적당하지 않은 의대(衣襨)만 밖에서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9일 경진
신시(申時)에 목욕(沐浴)·습(襲)·소렴(小斂)을 거행하였다. 행 도승지 윤행임(尹行恁), 행 좌승지 이서구(李書九), 행 우승지 이익운(李益運), 행 좌부승지 김조순(金祖淳), 우부승지 한용탁(韓用鐸), 동부승지 김희순(金羲淳), 기사관(記事官) 김계온(金啓溫), 가주서(假注書) 여동식(呂東植)·민철유(閔哲儒), 기사관 이존수(李存秀)·홍석주(洪奭周),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우의정 서용보(徐龍輔),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 서유린(徐有隣), 규장각 제학 김재찬(金載瓚), 원임 직제학 서정수(徐鼎修), 원임 직각 김면주(金勉柱), 검교 직각(檢校直閣) 심상규(沈象奎), 직각 김근순(金近淳),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 참판 민태혁(閔台爀), 참의 홍낙유(洪樂游), 대사간 이은모(李殷模), 집의 장지면(張至冕), 교리 김이도(金履度), 보덕(輔德) 윤광안(尹光顔) 등과 종척 집사(宗戚執事)로서 창성위(昌城尉) 황이점(黃仁點),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 돈녕 주부(敦寧主簿) 김기윤(金基允), 전 주부 김재창(金在昌), 돈녕 직장(敦寧直長) 김재삼(金在三) 등이 모시고 늘어선 뒤에 내시가 휘장을 쳐 내외를 가리고 종척 집사가 문 안에 평상을 설치하였다. 내시들은 각기 목욕시킬 여러 도구를 받들고 있고 집사자가 어상(御床)을 받들어 머리를 남쪽으로 돌린 뒤에 머리를 이불로 덮고 이불 위에 복의(復衣)를 덮었다. 평상 위에는 화문석을 깔고 화문석 위에 비단요를 깔았으며 요 위에는 또 화문석을 깔았다. 원상(院相) 심환지, 총호사(摠護使) 이시수, 예조 판서 이만수 및 행임(行恁)·조순(祖淳)·상규(象奎)와 사관(史官) 2원은 어상 앞에 서고 예방 승지 이서구는 홀기를 가지고 기둥 밖에 섰으며 대신 이하 제신은 대청의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섰다.
내시가 향탕(香湯)을 올려 그것으로 얼굴을 씻기고 목욕을 마친 뒤에 명의(明衣)를 입혔으며 방건(方巾)으로 얼굴을 덮고 이불로 덮었다. 그 다음 습례(襲禮)를 거행하였는데, 집사자가 먼저 습상(襲床) 위에 베개를 올린 뒤에 용문석(龍紋席)을 깔고 그 다음 요를 깔고 그 다음 교(絞)를 깔았다. 맨 먼저 유청공단 이불[柳靑貢緞衾]을 【깃은 붉은 공단이고 안은 흰공단이다.】 편 뒤에 화옥대(畵玉帶)를 깔고 그 다음 곤룡포를 【다홍운문단(多紅雲紋緞)으로 금사견(金絲肩) 용흉배(龍胷背)인데 안감은 남운문단(藍雲紋緞)이다.】 깔고 그 다음 아청운문단 답호(鴉靑雲紋緞褡𧞤)를 깔고 그 다음 남화한단 중치마[藍禾漢緞中赤莫]를 【안감은 흰공단이다.】 깔고 그 다음 초록화한단 중치마[草綠禾漢緞中赤莫]를 【안감은 흰공단이다.】 깔고 그 다음 옥색공단 장의(玉色貢緞長衣)를 【안감은 흰공단이다.】 깔고 그 다음 보라색화한단 장의(甫羅色禾漢緞長衣)를 깔고 그 다음 보라화한단 주의(甫羅禾漢緞周衣)를 깔고 그 다음 백공단 홑적삼을 깔았다. 그 다음 백공단 바지를 올리고 그 다음 백공단 홑바지를 올리고 그 다음 백공단 버선을 올리고 그 다음 남화한단 허리띠와 남화한단 대님을 올리고 그 다음 백공단 행전을 올리고 그 다음 털비단 망건을 올리고 아울러 익선관(翼善冠)을 【털비단이다.】 씌웠으며 그 다음 신을 【초록운문단이다.】 올리고 그 다음 악수(幄手)172) 를 올리고 그 다음 잘라낸 손톱 발톱 및 빠진 이빨과 빠진 머리털을 담은 주머니를 올려 그것들을 어상 위에 가져다 놓았다. 습례가 끝난 뒤에 집사자가 멱모(幎帽)173) 를 올리고 명정(銘旌)을 【붉은 비단천으로 길이는 아홉 자이고 너비는 온 폭이었다.】 설치하였으며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이금(泥金)으로 대행왕 재궁(大行王梓宮)이란 글씨를 전자체로 써 올렸다.
환지가 어상 앞으로 나아가 집사 대신 반함례(飯含禮)를 행한 뒤에 대신과 예관(禮官)이 왕대비에게 들어가 여쭙기를,
"예법으로 말한다면 습례를 행한 뒤에 전(奠)을 드리면서 위차(位次)를 마련해 곡을 하고 비로소 소렴을 하게 되어 있으나 이번의 경우는 습례와 소렴이 같은 때에 거행되므로 소렴 시각이 차츰 늦어질 형편이니, 또한 매우 송구스럽고 민망합니다. 습전(襲奠)과 소렴전을 소렴 뒤에 함께 행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 소렴례를 거행하였는데, 집사자가 요자리와 베개를 깐 뒤에 먼저 교(絞)를 깔고 그 다음 이불을 깔고 그 다음 의대(衣襨)를 나열하였으며 영상(靈床)을 염석(斂席)에다 받들어 모시고 예법대로 소렴을 행하였다. 이불로 싸고 교(絞)를 잡아맨 뒤에 진홍 공단(眞紅貢緞)에 분가루로 보불(黼黻)을 그려 교(絞) 위에 덮고 도로 어상에다 받들어 모셨다. 염이 끝나자 제신은 문을 닫고 물러나와 문 밖에 서서 기다렸다. 자전과 자궁이 나와서 참관하고 내전으로 들어간 위에 그 자리에 있는 대신 이하가 모두 엎드려 곡하여 애도를 표하였다. 내시는 영상(靈床)을 설치한 뒤에 신백(神帛)과 명정을 영좌(靈座)의 오른쪽에 봉안하고 물러나와 섬돌 아래에 반차(班次)를 이루었으며, 대전관(代奠官) 및 종척 집사가 영좌 앞으로 올라가 예법대로 습전과 소렴전을 거행하였다.
소렴 의대(衣襨)는 강사포 상의 하상(絳紗袍上衣下裳), 원유관(遠遊冠) 【홍화한단(紅禾漢緞)이다.】 , 남주 창의(藍紬氅衣), 아청운문단 곤포(鴉靑雲紋緞袞袍) 【두 벌.】 , 보라화주갑 장의(甫羅禾紬甲長衣), 남광직 도포(藍廣織道袍) 【두 벌.】 , 아청 상직 대자답호(鴉靑常織帶子褡𧞤), 다홍운문대단 철닉[多紅雲紋大緞帖裏] 【금흉배(金胷褙)·이상은 상의.】 등이며 초록운문대단 광수(草綠雲紋大緞廣袖) 【두 벌.】 , 초록운문대단 배자(草綠雲紋大緞褙子) 【두 벌.】 , 보라화화주면 장의(甫羅禾花紬綿長衣), 초록공단 중치마[草綠貢緞中赤莫], 옥색능 중치마[玉色綾中赤莫], 유록용문단 협수(柳綠龍紋緞夾袖) 【안감은 남용문단(藍龍紋緞)이다.】 , 아청운문단 쾌자(鴉靑雲紋緞快子) 【안감은 진홍용문단(眞紅龍紋緞)이다.】 , 토색대설문통해단 협수(土色大揲紋通海緞夾袖) 【안감은 남공단(藍貢緞)이다.】 , 아청대설문통해단 쾌자 【안감은 진홍공단이다.】 , 다홍대초갑 도포(多紅大綃甲道袍) 【안감은 남주(藍紬)이다.】 , 진홍화주 도포(眞紅禾紬道袍) 【안감은 남주이다.】 , 아청운문대단 철닉 【이상은 아랫도리이다.】 등이었다.
장생전(長生殿)의 재궁(梓宮)은 수망(首望)을 택하였다. 재궁망(梓宮望)은 우(雨) 자 【겉길이는 6자 9치 8푼, 겉너비는 2자 4치 3푼, 겉높이는 2자 4치 5푼, 안길이는 6자 3치 8푼, 안너비는 1자 8치 2푼, 안높이는 1자 8치 1푼이었다.】 , 노(露) 자 【겉길이는 6자 9치 3푼, 겉너비는 2자 3치 1푼, 겉높이는 2자 3치, 안길이는 6자 3치 3푼, 안너비는 1자 6치 9푼, 안높이는 1자 6치 7푼이었다.】 , 등(騰) 자 였다. 【겉길이는 7자 2푼, 겉너비는 2자 2치 5푼, 겉높이는 2자 2치 2푼, 안길이는 6자 4치 2푼, 안길이는 1자 6치, 안높이는 1자 6치 3푼이었다.】
【태백산사고본】 54책 54권 66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8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왕대비가 빈전(殯殿)을 환경전(歡慶殿)으로 옮겨 정할 것을 명하였다. 처음에 영춘헌(迎春軒)을 빈전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가 원상(院相)이 비좁다고 여쭈었기 때문에 이 명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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