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권, 영조 즉위년 1724년 8월

싸라리리 2025. 8. 1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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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경자

경종 대왕(景宗大王) 4년 【청(淸)나라 옹정(雍正) 2년이다.】  8월 을미(乙未) 【25일이다.】 에 경종 대왕이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그 후 6일째 되는 날인 경자001)   오시(午時)에 왕세제(王世弟)가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원상(院相)·승지(承旨)·사관(史官)은 조복(朝服) 차림으로 돈례문(敦禮門) 밖 서정(西庭)에 동쪽을 향하여 앉고, 홍문관(弘文館)은 승정원(承政院)의 다음에 앉고, 시강원(侍講院)은 동정(東庭)에 서쪽을 향하여 앉고, 익위사(翊衛司)는 시강원의 다음에 앉고, 병조(兵曹)·도총부(都摠府)는 융복(戎服) 차림으로 동쪽·서쪽에 앉아서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왕세제(王世弟)가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차(廬次)에서 나오니, 좌통례(左通禮)가 왕세제를 인도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서계(西階)를 거쳐 욕위(褥位)에 올라갔다. 찬의(贊儀)가 큰 소리로, ‘배(拜), 궤(跪)’ 하고 선창(先唱)하니, 좌통례(左通禮)가 낮은 소리로 ‘궤(跪)하소서.’ 하고, 고하기를,
"사왕(嗣王)은 보위(寶位)를 받으소서."
하였다. 상향례(上香禮)를 마치고 왕세제(王世弟)가 내려와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막차에서 나와 걸어서 돈례문(敦禮門)의 동쪽 협문(夾門)을 지나 동계(東階)로 내려가 연영문(延英門)을 거쳐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숙장문(肅章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꺾어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 밖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그 곳 한복판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는데, 왕세제가 어좌에 올라가니 백관(百官)이 네 번 절하고 ‘천세(千歲)!’ 하고 호창(呼唱)하였다.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와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들어가 인정전(仁政殿) 정로(正路)를 거쳐 인정전에 올라갔다. 임금이 여차(廬次)로 돌아와 면복(冕服)을 벗고 최복(衰服)을 다시 입었다. 이보다 4일 전에 예조(禮曹)에서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왕세제가 영지(令旨)를 내려 돌려주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루 세 번씩 도로 올렸으며, 승정원(承政院)·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에서도 번갈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성복(成服)하는 날에 이르러 외부 의식이 이미 마련된 다음에 원상(院相) 이광좌(李光佐)가 여차(廬次) 앞에 이르러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세제가 눈물을 흘리며 점침(苫枕)002)  에 엎드려서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광좌가 왕대비전(王大妃殿)과 왕비전(王妃殿)의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구전(口傳)으로 내전(內殿)에서 나아가도록 계청(啓請)하니, 왕대비전과 왕비전에서 언문 교지(諺文敎旨)를 내려 나아가도록 권유하였다. 그제서야 왕세제가 남여(籃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어좌(御座) 앞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울부짖으며 어좌에 오르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여기에서 영고(寧考)를 모셨었는데 지금 무슨 마음으로 어좌에 오를 수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이광좌 등이 누누이 간청하니, 한참 후에 등극(登極)하였다. 정시(正時)가 되니, 예조(禮曹)에서 비로소 사시(巳時)가 되었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오시(午時)에 이르러 마침내 즉위(卽位)하고, 혜순 자경 왕대비(惠順自敬王大妃) 김씨(金氏)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왕비(王妃) 어씨(魚氏)를 왕대비(王大妃)로,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王妃)로 삼고, 마침내 인정문(仁政門)에서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였는데,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하늘이 어찌 차마 이런 재앙을 내리는가? 거듭 큰 상(喪)을 만났는데, 나라에는 임금이 없을 수 없으므로 억지로 군하(群下)의 청을 따랐노라. 지극한 슬픔을 억제하기 어려운데 보위(寶位)가 어찌 편하겠는가?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타고난 천성이 관대하고 어질었으며 그 마음은 효우(孝友)하였다. 저위(儲位)에 있은 지 30년에 온 국민이 목숨을 바칠 정성이 간절하였고, 조정의 정사를 대리한 지 4년에 성고(聖考)께서는 수고로움을 나누는 기쁨이 있었다. 남몰래 부각된 실덕(實德)은 지극히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정고(貞固)003)  하게 대처했고, 말없이 운용한 신기(神機)는 지극히 비색함을 돌려서 태평하게 하였다. 하늘이 널리 덮어서 만물을 길러주어 모두 형통하게 하고, 태양이 높이 매달려 퍼지는 불길한 기운을 신속하게 쓸어버렸네. 놀이와 사냥과 음악과 여색은 하나도 좋아함이 없었으므로, 정령(政令)을 시행함에 있어 모두 그 적절함을 얻었다. 위대하신 선왕(先王)의 덕을 크게 이어받았으니, 거의 삼대(三代)004)  의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기거(起居)도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하다가 문득 구령(九齡)의 징조005)  를 잃었도다. 반야(半夜) 사이에 갑자기 빙궤(憑几)의 유명(遺命)006)  을 받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불행하게도 5년 안에 두번이나 승하(昇遐)의 슬픔을 품게 되었으니, 애처로운 나는 고아[嬛孤]로서 이렇게 혹독한 벌을 받게 되었다. 여차(廬次)에서 곡읍(哭泣)을 하며 명령을 내릴 경황이 없었는데, 왕위(王位)에 오를 면복(冕服) 차림으로 어찌 차마 대통(大統)을 계승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백료(百僚)들의 요청이 더욱 간절하다 하나, 다만 슬픈 감회만 더할 뿐이다. 돌이켜 보건대, 양전(兩殿)께서 특별히 간곡하게 권유(勸諭)하시니, 감히 초지(初志)를 고집할 수 있겠는가? 윤리(倫理)로는 형제이고 의리로는 부자이니, 진실로 지극히 애통함이 끝이 없다. 조종(祖宗)을 계승하여 신민(臣民)의 주인이 되었으나 보잘것없는 몸이 감당하기 어려움을 어찌하겠는가? 환규(桓圭)007)  를 잡고서 오동잎[桐葉]의 희롱008)  을 생각하였고, 법전(法殿)에 임해서 동기간(同氣間)에 쓸쓸함을 슬퍼하노라.
갱장(羹墻)의 사모함009)  이 간절하니 차례를 계승하는 생각 잊을 수가 없고, 근심이 더욱 깊었으니 임금이 되는 것이 어찌 기쁘겠는가? 높은 지위에 오르니 두려움이 마음을 놀라게 하고, 성대한 의식을 보니 끊임없이 눈물만 흐른다. 선왕(先王)의 성덕(盛德)과 선행(善行)에 뒤따라 이어가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열성(列聖)의 대업(大業)과 큰 규모(規模)를 무너뜨릴까 매우 걱정이로다. 조종(祖宗)께서 잇따라 멀리 떠남을 슬퍼했으니, 나라를 장차 어떻게 다스릴 것이며, 인종(仁宗)·명종(明宗)처럼 서로 계승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본받을 수 있겠는가? 이에 중외(中外)에 널리 알려서 사민(士民)과 기쁨을 함께하리라. 비록 옛 나라이나 새로운 명을 받았으니, 정치는 시작을 잘해야 할 기회를 당했고, 허물과 수치를 깨끗이 씻어내기 위하여, 이에 함께 살기 위한 인덕(仁德)을 베푸노라. 이달 30일 새벽 이전부터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赦免)하고, 관직(官職)이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되 자궁자(資窮者)는 대가(代加)하게 한다. 아! 편안하고 위태로움과 다스려지고 혼란스러운 계기가 처음 시작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협력하여 도와주어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여러 신하에게 기대하노라. 그래서 이렇게 교시(敎示)하니,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조태억(趙泰億)이 지어서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01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註 001] 경자 : 8월 30일.[註 002] 점침(苫枕) : 옛날에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짚을 엮어 만든 거적자리를 깔고 흙덩이를 베개로 삼는다는 뜻으로, 상중에 있는 사람의 거처를 말함.[註 003] 정고(貞固) : 굳은 의지로 흔들리지 않음.[註 004]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세 왕조(王朝)를 말함.[註 005] 구령(九齡)의 징조 : 90세를 살 수 있는 징조라는 뜻.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제(上帝)에게 구령(九齡)을 받는 꿈을 꾸었는데, 문왕(文王)이 이에 대해, "이는 너의 수명이 90임을 뜻하는 것인데, 내가 너에게 세 살을 주겠다." 하였음. 그래서 무왕이 93세에 죽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임.[註 006] 빙궤(憑几)의 유명(遺命) : 유언(遺言)을 뜻하는 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임종(臨終) 때 대신(大臣)을 불러 놓고 옥궤(玉几)에 기대어 고명(顧命)을 내린 데에서 인용된 것임.[註 007] 환규(桓圭) : 오서(五瑞)의 하나. 주대(周代)에 공작(公爵)의 작위를 가진 사람이 갖는 길이 9촌(寸)의 홀(笏).[註 008] 오동잎[桐葉]의 희롱 : 옛날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오동잎으로 규(圭)를 만들어 동생인 당숙(唐叔)에게 주고, "너를 임금으로 봉하겠다."고 한 고사에서 인용된 말임.[註 009] 갱장(羹墻)의 사모함 : 요(堯)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임금이 3년 동안 지극히 사모하니, 앉으면 요임금의 모습이 담에 나타나 보이고 음식을 대하면 국에 나타나 보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임.

 

처음 대행 대왕(大行大王)이 승하(昇遐)하였을 때 왕세제(王世弟)가 머리를 푸는 것이 마땅한지 여부를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물었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 등이 아뢰기를,
"제왕가(帝王家)에게 계체(繼體)010)                  한 뒤에는 천륜(天倫) 관계의 높낮음을 막론하고 모두 부자(父子)의 예(禮)와 같은 것이니, 마땅히 《오례의(五禮儀)》의, ‘왕세자(王世子) 이하는 머리를 풀어야 한다.’는 글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이광좌 등의 의논에 따르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머리를 푸는 것은 옛 예(禮)가 아니다. 《개원례(開元禮)》011)                          에 비로소 보이나, 예를 아는 선비들은 오히려 그르다고 하였다. 이광좌 등은 마침내 계체(繼體)한 것은 부자(父子)와 같다는 도리를 미루어 오늘날 방례(邦禮)에 옮겨 시행하였는데, 그것이 어찌 참으로 예의 본뜻을 알지 못한 데에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튿날 예조(禮曹)에서 복제(服制)의 절목(節目)을 올리고, 곧이어 저장(苴杖)012)                  ·등위(等威) 및 생원(生員)·진사(進士) 이하의 의대(衣帶)가 경자년의 옛 제도에는 소략(疏略)한 점이 많이 있다 하여 절목(節目)을 다시 수정하여 올렸는데, 이르기를, "왕세제(王世弟)는 참최(斬衰) 3년인데, 의상(衣裳)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관(冠)013)            와 갓끈[纓]을 만든다.】        ·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          【모두 생마(生麻)를 사용한다.】        ·죽장(竹杖)·간리(菅履)014)                  이다. 사위복(嗣位服)은 면복(冕服) 차림을 하고, 졸곡(卒哭) 후 시사복(視事服)은 포포(布袍)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와 베로 싼 익선관(翼善冠)          【입자(笠子)는 흰색을 쓴다.】        과 베로 싼 오서대(烏犀帶)와 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한다. 무릇 상사(喪事)에는 최복(衰服)을 입고, 13개월이 되어 연제(練祭) 때에는 연관(練冠)에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제거(除去)한다. 시사복(視事服)은 백포(白袍)를 입고, 백포(白布)로 싼 익선관, 백포로 싼 오서대, 백피화를 착용한다. 25개월이 되어 상제(祥祭) 때에는 현포(玄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한다. 27개월이 되어 담제(禫祭) 때에는 현포(玄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한다. 담제(禫祭) 후에는 곤룡포(袞龍袍)와 옥대(玉帶)를 착용한다. 왕대비전(王大妃殿)은 자최(齊衰) 기년(朞年)인데, 대수(大袖)·장군(長裙)          【차등(次等)의 거친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대수(大袖)는 본국(本國)의 장삼(長衫)이고 군(裙)은 곧 치마이다.】        ·개두(盖頭)·두수(頭𢄼)          【약간 고운 생포(生布)를 쓴다. 개두(盖頭)는 본국(本國)의 여립모(女笠帽)로 대신하고, 두수(頭𢄼)는 본국의 수파(首帊)로 대신한다.】        ·죽차(竹釵)          【전계(箭筓)이다.】        ·포대(布帶)          【차등의 거친 생포(生布)를 쓴다.】        ·포리(布履)          【흰 무명 베로 만든다.】        를 착용한다.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白布)로 만든 대수(大袖)·장군(長裙)·개두(盖頭)·두수(頭𢄼)와 띠, 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한다. 13개월이 되어 연제(練祭) 후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왕대비전(王大妃殿)의 복제(服制)는 예조(禮曹)에서 처음에는 참최(斬衰) 3년으로 계하(啓下)했다가, 이튿날 다시 자최(齊衰) 기년(朞年)으로 고쳐서 마련해 올렸다.】         왕비(王妃)는 참최(斬衰) 3년인데, 대수(大袖)·장군(長裙)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를 쓴다.】        ·개두(盖頭)·두수(頭𢄼)          【약간 고운 생포를 쓴다.】        ·죽차(竹釵)·포대(布帶)          【거친 생포를 쓴다.】        ·포리(布履)를 착용한다. 13개월이 되어 연제(練祭) 때에는 백포(白布)로 만든 대수·장군                  【연포(練布)를 쓴다.】        ·개두·두수 및 백피혜를 착용한다. 25개월이 되어 상제(祥祭) 뒤에는 짙은 옥색물을 들인 대수·장군과 흑개두·두수 및 띠, 그리고 백피혜를 착용하고, 금은(金銀)·주옥(珠玉)과 붉은 수놓은 것은 쓰지 않는다. 27개월이 되어 담제(禫祭) 뒤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왕세제빈(王世弟嬪)은 최복(衰服) 3년인데, 왕비(王妃)의 복(服)과 같으며, 내명부(內命婦) 빈(嬪) 이하의 복도 왕비의 복과 같다. 상궁(尙宮) 이하는 참최 3년인데, 배자(背子)          【본국(本國)에서는 몽두의(蒙頭衣)이니,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개두·두수          【약간 고운 생포를 쓰는데, 시비(侍婢) 이하는 개두(盖頭)가 없다.】        ·포대(布帶)·소혜(素鞋)          【흰 가죽으로 만든다.】        를 착용한다. 연제(練祭) 후에는 백포로 만든 배자·개두·두수와 띠·백피혜를 착용한다. 수규(守閨) 이하의 복(服)은 상궁의 복과 같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참최 3년인데, 의상(衣裳)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관(冠)          【양(梁)에 있어서 3품(三品) 이상은 3양(梁)이고, 5품(五品) 이상은 2양이고, 9품(九品) 이상은 1양이며, 삼끈[麻繩]으로 무(武)와 갓끈을 만든다.】        ·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          【모두 생마(生麻)를 쓴다.】        ·죽장(竹杖)          【종친(宗親) 종2품(從二品)·정3품(正三品) 도정(都正) 이상, 문관(文官) 및 음직(蔭職)·무관(武官)의 종2품으로 일찍이 동돈녕(同敦寧)·부총관(副摠管) 이상을 지낸 자, 당상(堂上)으로서 일찍이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자, 당하(堂下)·참하(參下)로서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을 지낸 자, 외관(外官)의 수사(水使)로서 일찍이 수사 이상을 지낸 자, 각품(各品)으로서 일찍이 시내직(視內職)을 지낸 자이다.】        ·관구(菅屨)          【망건(網巾)은 흰 가선을 두르고, 금관자(金貫子)·옥관자(玉貴子)를 제거한다.】        를 착용하는데, 공복(公服)으로는 베로 만든 단령의(團領衣)          【거친 생포(生布)로써 가장자리를 꿰맨다.】        에 생포(生布)로 싼 사모(紗帽), 생포로 싼 각대(角帶), 백피화를 착용한다. 무릇 상사(喪事)에는 최복(衰服)을 착용(着用)하고, 연거복(燕居服)은 생포립(生布笠)·생포의(生布衣)·생포대(生布帶)를 착용한다.          【이보다 앞서 숙종 대왕(肅宗大王) 국휼(國恤) 때에 예조(禮曹)에서 복제(服制)에 관한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유생(儒生)은 마대(麻帶)로 3년을 마치도록 마련하였고, 백관(百官)의 연거복(燕居服)은 애당초 논의되지 않았으며 포대(布帶)이건 마대(麻帶)이건 각자가 임의로 행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가 상소하여, 주자(朱子)와 여정보(余正甫)의 평상시에는 백대(白帶)를 쓴다는 말을 인용하여 참고해서 마련하도록 명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대신(大臣)들과 의논하게 했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굳이 고칠 필요가 없다고 하여 그대로 따르게 했는데, 이때에 와서 해조(該曹)에서 다만 생포대(生布帶)를 쓰기로 마련하여 계하(啓下)했다.】         13개월이 되어 연제(練祭) 때에는 연관(練冠)을 쓰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제거한다. 공복(公服)은 백포로 만든 단령의(團領衣)와 백포로 싼 사모(紗帽), 백포로 싼 각대(角帶), 백피화를 착용하고, 연거복(燕居服)은 백의(白衣)·백립(白笠)·백대(白帶)를 착용한다. 25개월이 되어 상제(祥祭) 때에는 짙은 옥색을 물들인 옷과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한다. 27개월이 되어 담제(禫祭) 때에는 흑의(黑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고, 담제 후에는 길복(吉服)을 착용한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아내는 자최복(齊衰服) 기년(朞年)인데, 대수(大袖)·장군(長裙)          【차등의 거친 생포(生布)를 쓴다.】        ·개두(盖頭)·두수(頭𢄼)          【약간 거친 생포를 쓴다.】        ·죽차(竹釵)·포대(布帶)          【차등의 거친 생포를 쓴다.】        ·포리(布履)를 착용한다.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로 만든 대수(大袖)·장군(長裙)·개두(盖頭)·두수(頭𢄼) 및 대(帶)와 백피혜를 착용한다.          【담제(禫祭) 전에는 비단으로 수놓은 것과 붉은 색과 금은(金銀)·주옥(珠玉)·비취 따위의 장식을 금한다.】         각도(各道)의 대소(大小)의 사신(使臣)과 외관(外官)·전함관(前銜官)의 복제(服制)는 백관(百官)의 복(服)과 같다. 아내들의 복제는 백관아내들의 복제와 같다. 동성(同姓)·이성(異姓)으로서 시마 이상친(緦麻以上親)015)           【시임(時任)·전임(前任) 및 관직이 없는 사람을 막론하고 다 같다.】         참최(斬衰) 3년인데, 백관(百官)의 복제(服制)와 같으며, 아내들의 복제는 백관 아내들의 복제와 같다. 동성·이성으로서 시마 이상친의 여자는 참최 3년인데, 친자(親子)의 아내의 복제와 같다.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 내시(內侍)는 참최 3년인데, 최복(衰服)의 제도와 연제(練祭)·상제(祥祭)·담제(禫祭)의 복제는 친자(親子)의 복제와 같다. 내시(內侍)·사약(司鑰)·사알(司謁)·서방색(書房色)·반감(飯監)은 참최 3년인데, 백관(百官)의 복제와 같다. 별감(別監)과 각 차비인(差備人)은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로 만든 직령의(直領衣)·두건(頭巾)과 생마(生麻)로 만든 띠와 백승혜(白繩鞋)를 착용하고, 연제(練祭) 후에는 백의(白衣)·백두건(白頭巾)·백대(白帶)로 3년을 마친다. 직사(職事)가 있는 전함(前銜)의 각품(各品)과 성중관(成衆官)          【내금위(內禁衞)·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충순위(忠順衛)·별시위(別侍衛)·족친위(族親衛)의 유(類)를 말한다.】        은 포로 만든 단령의(團領衣)          【거친 생포(生布)로써 가장자리를 꿰맨다.】        와 생포(生布)로 싼 사모(紗帽),          【갓도 같다.】         생포로 싼 각대(角帶), 백피화를 착용하고, 연제(練祭) 후에는 백포로 만든 단령의, 백포로 싼 사모, 백포로 싼 각대 차림으로 3년을 마친다. 녹사(錄事)와 서리(書吏)는 생포(生布)로 만든 옷과 생포로 싼 평정 두건(平頂頭巾),          【갓도 같다.】         생포로 만든 띠와 백피화를 착용하고, 연제 후에는 백의와 백평정 두건, 백대 차림으로 3년을 마친다. 생원(生員)·진사(進士)·유학(幼學)·생도(生徒)는 생포로 만든 갓, 생포로 만든 옷과 띠, 백피화를 착용하고, 졸곡(卒哭) 후에는 백립(白笠)·백의·백두건·백대차림으로 3년을 마친다.          【학교에 들어갈 때에는 흰 두건, 전내(殿內)에서는 검은 두건을 착용한다.】         사직서(社稷署)·종묘서(宗廟署) 및 모든 능(陵)·전(殿)의 참봉(參奉) 등의 벼슬아치는 아울러 평상시의 복장인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고 외출할 때에는 백관(百官)과 같다.          【혜릉(惠陵)과 영휘전(永徽殿)의 참봉 등은 입직(入直)할 때에는 복색(服色)이 백관의 복색과 같다.】         갑사(甲士)·정병(正兵)은 백의·백립(白笠), 생마(生麻)로 만든 띠와 백피화를 착용하고, 연제(練祭) 후에는 포대(布帶) 차림으로 3년을 마친다. 서인(庶人)과 승려(僧侶)들은 백의·백립·백대 차림으로 3년을 마치고, 서인(庶人)의 여자는 백의(白衣)를 입다가 연제(練祭) 후에 제거한다.          【담제(禫祭) 전까지는 붉은 빛깔의 장식은 금한다.】        "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참최복(斬衰服)에는 삼베[麻]로 띠를 만드는 것이 예(禮)이다. 비록 연거복(燕居服)이라 하더라도 삼베를 베로 바꾸는 것은 아마도 근거가 없는 듯하다. 경자년016)                          의 절목(節目) 중에는 조관(朝官)의 연거복에 대해서는 애당초 마련하지도 아니하였으니, 아마도 연거복(燕居服)은 조가(朝家)에서 정해진 격식이 없는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유생(儒生)들이 최복(衰服)이 없기 때문에 녹사(錄事)·서리(書吏)와 같이 마대(麻帶)를 착용하도록 마련한 것은 아마도 띠로서 최복을 대신하여 참최복을 입는 뜻을 표(表)하는 데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이희조(李喜朝)가 인용한 주자(朱子)의 학설(學說) 같은 것은 경자년의 대신(大臣)의 논의 중에서 이른바, ‘그 당시의 상제(喪制)는 미처 다 복고(復古)하지 못하였으니, 백대도 오히려 차마 습길(襲吉)을 할 수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지금은 상례(喪禮)가 크게 갖추어 정해졌으므로 주자 때와는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이 옳을 듯하다. 이희조의 말은 너무 구애받는 인상을 면할 수 없으므로 조가(朝家)에서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유생(儒生)·녹사(錄事)·서리(書吏)의 마대(麻帶)는 곧 경자년에 이미 정해진 방례(邦禮)인데, 지금 예조(禮曹)에서 마련한 조관(朝官)들의 연복(燕服) 제도는 이미 경자년 것과 같지 아니하며, 또 연복(燕服)은 포대(布帶)를 착용하는 전례를 미루어 유생·녹사·서리의 마대(麻帶)를 모두 포대(布帶)로 바꾸었으니, 이는 문득 경자년의 예안(禮案)에 반대되는 것이다. 품지(稟旨)하지도 않고 곧바로 방례(邦禮)를 바꾸었으니, 예전에도 이러한 관례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우리 나라의 상제(喪制)는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으나, 방상(方喪)에 이르러서는 미처 다 복고(復古)하지 못하였습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모두 삼대(三代)의 제도를 따르게 하여 경자년의 대상(大喪) 때에 비로소 참최(斬衰)를 시행하니, 중외(中外)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유감이 없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만든 절목(節目)에 혹시라도 경정(逕庭)017)                  이 없지는 않을까 하여, 이번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바로잡게 한 것은 대개 그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만 생각해 보건대, 상제(喪制)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비록 작은 형식과 작은 절차라 하더라도 반드시 상세하고 신중하게 검토하여 지극히 합당하게 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을 모두 대궐에 나오게 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 논의에 대하여 자세히 검토하게 해서 미진(未盡)한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마침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문의하게 했다. 찬선(贊善)        정제두(鄭齊斗)가 말하기를, "죽장(竹杖)·간구(菅屨)는 사실 고례(古禮)에 의거한 것이므로 지금은 논할 만한 것이 없으며, 생원(生員)·진사(進士)·생도(生徒)에게 백의(白衣)·백립(白笠)을 착용하도록 제정한 것은 옛 제도의 자최(齊衰) 3월의 규정에 비해 보건대, 백의·백립은 너무 가벼운 것이고, 3월의 기간으로서 3년을 마치게 한 것은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지금 만약 생포(生布)로 만든 갓과 옷과 띠의 복제를 착용하고 졸곡(卒哭) 때에 이르러 백립·백의·백대로 고쳐서 3년을 마치게 하면, 아마도 옛 고례(古禮)인 자최 3월의 뜻에도 어긋나지 않고, 우리 나라의 백의와 백립으로 3년을 마치는 제도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별감(別監)·각 차비인(差備人)·정병(正兵)·갑사(甲士) 등의 복제(服制)는 《오례의(五禮儀)》에 마대(麻帶)를 쓰게 돼 있는데 이번에는 포대(布帶)로 마련했으니, 마땅히 《오례의》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정제두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사직(司直)        이인복(李仁復)이 상서(上書)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숙종(肅宗)의 장자(長子)로서 열성(列聖)의 정통(正統)을 계승하셨으니, 자성(慈聖)께서는 마땅히 적자(嫡子)를 위하여 참최 3년의 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의논하는 자들은 국제(國制)라고 말하는데, 현종(顯宗)께서 말년(末年)에 깨달은 것과 숙종(肅宗)께서 뜻을 따라 바로잡은 것만 유독 이미 시행된 국제(國制)가 아닙니까? 더구나 단의 왕후(端懿王后)018)                  의 상(喪) 때에 양전(兩殿)의 복제(服制)를 기년(朞年)으로 고치고 대공(大功)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대개 적자에게는 3년복을 입어주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중하게 여겨야 할 처지에 도리어 줄여서 시행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에서 나온 것입니까?" 하니, 역시 〈대신에게〉 문의(問議)하라고 명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효종(孝宗)·현종(顯宗)께서 승하(昇遐)하셨을 적에 자성(慈聖)의 복제(服制)는 모두 지금의 제도를 썼었습니다. 을묘년019)                   무렵에 비록 윤휴(尹鑴)의 말로 인하여 고치기는 했으나,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상사(喪事) 때에는 성상(聖上)께서 비답(批答)에 분명히 우리 나라 제도로 단정한 것인데, 3년이란 말은 어디에 근거하여 나온 것입니까?" 하고, 정제두(鄭齊斗)는 말하기를, "역대 조정에서 모두 나라의 제도를 따랐고, 선왕조(先王朝)의 일 또한 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며, 단의 왕후의 상에 기년(朞年)의 복제(服制) 역시 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인데, 장부(長婦) 기년(朞年)을 가지고 이제 와서 3년의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였는데, 이광좌(李光佐)의 논의에 따르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인복(李仁復)이 무슨 예를 안다고 망령되게 그와 같이 대례(大禮)를 거론하는가? 신(臣)은 삼가 고찰하건대, 이인복의 상소는 대개 허목(許穆)·윤휴(尹鑴)의 논의를 답습한 것이다. 그의 마음이야 어찌 참으로 예의 뜻으로 보아 마땅히 참최(斬衰)라야 된다고 여겼겠는가? 그것을 알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0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상복(常服)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註 010]          계체(繼體) : 선대의 뒤를 이어받음.[註 011]              《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소숭(蕭嵩) 등이 칙명(勅命)을 받아 만든 책. 현종 때의 예제(禮制)를 적은 것인데, 모두 1백 58권임.[註 012]          저장(苴杖) : 상중(喪中)에 쓰는 검정 색의 대지팡이.[註 013]【약간 고운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삼끈[麻繩]으로                             무(武) :               갓 밑의 머리를 묶는 도구.[註 014]          간리(菅履) : 짚신.[註 015]          시마 이상친(緦麻以上親) : 종증조(從曾祖)·삼종형제(三從兄弟)·중증손(衆曾孫)·중현손(衆玄孫)으로, 시마(緦麻)의 복(服)을 입는 친족(親族). 시마는 십오승포(十五升布)로 만든 상복(喪服)의 일종으로, 상기(喪期)는 3개월임.[註 016]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017]          경정(逕庭) : 큰 차이.[註 018]          단의 왕후(端懿王后) : 경종비(景宗妃) 심씨(沈氏).[註 019]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사신은 논한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머리를 푸는 것은 옛 예(禮)가 아니다. 《개원례(開元禮)》011)                          에 비로소 보이나, 예를 아는 선비들은 오히려 그르다고 하였다. 이광좌 등은 마침내 계체(繼體)한 것은 부자(父子)와 같다는 도리를 미루어 오늘날 방례(邦禮)에 옮겨 시행하였는데, 그것이 어찌 참으로 예의 본뜻을 알지 못한 데에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튿날 예조(禮曹)에서 복제(服制)의 절목(節目)을 올리고, 곧이어 저장(苴杖)012)                  ·등위(等威) 및 생원(生員)·진사(進士) 이하의 의대(衣帶)가 경자년의 옛 제도에는 소략(疏略)한 점이 많이 있다 하여 절목(節目)을 다시 수정하여 올렸는데, 이르기를,
"왕세제(王世弟)는 참최(斬衰) 3년인데, 의상(衣裳)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관(冠)013)            와 갓끈[纓]을 만든다.】        ·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          【모두 생마(生麻)를 사용한다.】        ·죽장(竹杖)·간리(菅履)014)                  이다. 사위복(嗣位服)은 면복(冕服) 차림을 하고, 졸곡(卒哭) 후 시사복(視事服)은 포포(布袍)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와 베로 싼 익선관(翼善冠)          【입자(笠子)는 흰색을 쓴다.】        과 베로 싼 오서대(烏犀帶)와 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한다. 무릇 상사(喪事)에는 최복(衰服)을 입고, 13개월이 되어 연제(練祭) 때에는 연관(練冠)에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제거(除去)한다. 시사복(視事服)은 백포(白袍)를 입고, 백포(白布)로 싼 익선관, 백포로 싼 오서대, 백피화를 착용한다. 25개월이 되어 상제(祥祭) 때에는 현포(玄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한다. 27개월이 되어 담제(禫祭) 때에는 현포(玄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한다.
담제(禫祭) 후에는 곤룡포(袞龍袍)와 옥대(玉帶)를 착용한다. 왕대비전(王大妃殿)은 자최(齊衰) 기년(朞年)인데, 대수(大袖)·장군(長裙)          【차등(次等)의 거친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대수(大袖)는 본국(本國)의 장삼(長衫)이고 군(裙)은 곧 치마이다.】        ·개두(盖頭)·두수(頭𢄼)          【약간 고운 생포(生布)를 쓴다. 개두(盖頭)는 본국(本國)의 여립모(女笠帽)로 대신하고, 두수(頭𢄼)는 본국의 수파(首帊)로 대신한다.】        ·죽차(竹釵)          【전계(箭筓)이다.】        ·포대(布帶)          【차등의 거친 생포(生布)를 쓴다.】        ·포리(布履)          【흰 무명 베로 만든다.】        를 착용한다.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白布)로 만든 대수(大袖)·장군(長裙)·개두(盖頭)·두수(頭𢄼)와 띠, 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한다. 13개월이 되어 연제(練祭) 후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왕대비전(王大妃殿)의 복제(服制)는 예조(禮曹)에서 처음에는 참최(斬衰) 3년으로 계하(啓下)했다가, 이튿날 다시 자최(齊衰) 기년(朞年)으로 고쳐서 마련해 올렸다.】         왕비(王妃)는 참최(斬衰) 3년인데, 대수(大袖)·장군(長裙)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를 쓴다.】        ·개두(盖頭)·두수(頭𢄼)          【약간 고운 생포를 쓴다.】        ·죽차(竹釵)·포대(布帶)          【거친 생포를 쓴다.】        ·포리(布履)를 착용한다. 13개월이 되어 연제(練祭) 때에는 백포(白布)로 만든 대수·장군                  【연포(練布)를 쓴다.】        ·개두·두수 및 백피혜를 착용한다. 25개월이 되어 상제(祥祭) 뒤에는 짙은 옥색물을 들인 대수·장군과 흑개두·두수 및 띠, 그리고 백피혜를 착용하고, 금은(金銀)·주옥(珠玉)과 붉은 수놓은 것은 쓰지 않는다. 27개월이 되어 담제(禫祭) 뒤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왕세제빈(王世弟嬪)은 최복(衰服) 3년인데, 왕비(王妃)의 복(服)과 같으며, 내명부(內命婦) 빈(嬪) 이하의 복도 왕비의 복과 같다. 상궁(尙宮) 이하는 참최 3년인데, 배자(背子)          【본국(本國)에서는 몽두의(蒙頭衣)이니,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개두·두수          【약간 고운 생포를 쓰는데, 시비(侍婢) 이하는 개두(盖頭)가 없다.】        ·포대(布帶)·소혜(素鞋)          【흰 가죽으로 만든다.】        를 착용한다.
연제(練祭) 후에는 백포로 만든 배자·개두·두수와 띠·백피혜를 착용한다. 수규(守閨) 이하의 복(服)은 상궁의 복과 같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참최 3년인데, 의상(衣裳)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관(冠)          【양(梁)에 있어서 3품(三品) 이상은 3양(梁)이고, 5품(五品) 이상은 2양이고, 9품(九品) 이상은 1양이며, 삼끈[麻繩]으로 무(武)와 갓끈을 만든다.】        ·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          【모두 생마(生麻)를 쓴다.】        ·죽장(竹杖)          【종친(宗親) 종2품(從二品)·정3품(正三品) 도정(都正) 이상, 문관(文官) 및 음직(蔭職)·무관(武官)의 종2품으로 일찍이 동돈녕(同敦寧)·부총관(副摠管) 이상을 지낸 자, 당상(堂上)으로서 일찍이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자, 당하(堂下)·참하(參下)로서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을 지낸 자, 외관(外官)의 수사(水使)로서 일찍이 수사 이상을 지낸 자, 각품(各品)으로서 일찍이 시내직(視內職)을 지낸 자이다.】        ·관구(菅屨)          【망건(網巾)은 흰 가선을 두르고, 금관자(金貫子)·옥관자(玉貴子)를 제거한다.】        를 착용하는데, 공복(公服)으로는 베로 만든 단령의(團領衣)          【거친 생포(生布)로써 가장자리를 꿰맨다.】        에 생포(生布)로 싼 사모(紗帽), 생포로 싼 각대(角帶), 백피화를 착용한다. 무릇 상사(喪事)에는 최복(衰服)을 착용(着用)하고, 연거복(燕居服)은 생포립(生布笠)·생포의(生布衣)·생포대(生布帶)를 착용한다.          【이보다 앞서 숙종 대왕(肅宗大王) 국휼(國恤) 때에 예조(禮曹)에서 복제(服制)에 관한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유생(儒生)은 마대(麻帶)로 3년을 마치도록 마련하였고, 백관(百官)의 연거복(燕居服)은 애당초 논의되지 않았으며 포대(布帶)이건 마대(麻帶)이건 각자가 임의로 행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가 상소하여, 주자(朱子)와 여정보(余正甫)의 평상시에는 백대(白帶)를 쓴다는 말을 인용하여 참고해서 마련하도록 명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대신(大臣)들과 의논하게 했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굳이 고칠 필요가 없다고 하여 그대로 따르게 했는데, 이때에 와서 해조(該曹)에서 다만 생포대(生布帶)를 쓰기로 마련하여 계하(啓下)했다.】         13개월이 되어 연제(練祭) 때에는 연관(練冠)을 쓰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제거한다. 공복(公服)은 백포로 만든 단령의(團領衣)와 백포로 싼 사모(紗帽), 백포로 싼 각대(角帶), 백피화를 착용하고, 연거복(燕居服)은 백의(白衣)·백립(白笠)·백대(白帶)를 착용한다.
25개월이 되어 상제(祥祭) 때에는 짙은 옥색을 물들인 옷과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한다. 27개월이 되어 담제(禫祭) 때에는 흑의(黑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고, 담제 후에는 길복(吉服)을 착용한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아내는 자최복(齊衰服) 기년(朞年)인데, 대수(大袖)·장군(長裙)          【차등의 거친 생포(生布)를 쓴다.】        ·개두(盖頭)·두수(頭𢄼)          【약간 거친 생포를 쓴다.】        ·죽차(竹釵)·포대(布帶)          【차등의 거친 생포를 쓴다.】        ·포리(布履)를 착용한다.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로 만든 대수(大袖)·장군(長裙)·개두(盖頭)·두수(頭𢄼) 및 대(帶)와 백피혜를 착용한다.          【담제(禫祭) 전에는 비단으로 수놓은 것과 붉은 색과 금은(金銀)·주옥(珠玉)·비취 따위의 장식을 금한다.】         각도(各道)의 대소(大小)의 사신(使臣)과 외관(外官)·전함관(前銜官)의 복제(服制)는 백관(百官)의 복(服)과 같다. 아내들의 복제는 백관아내들의 복제와 같다.
동성(同姓)·이성(異姓)으로서 시마 이상친(緦麻以上親)015)           【시임(時任)·전임(前任) 및 관직이 없는 사람을 막론하고 다 같다.】         참최(斬衰) 3년인데, 백관(百官)의 복제(服制)와 같으며, 아내들의 복제는 백관 아내들의 복제와 같다. 동성·이성으로서 시마 이상친의 여자는 참최 3년인데, 친자(親子)의 아내의 복제와 같다.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 내시(內侍)는 참최 3년인데, 최복(衰服)의 제도와 연제(練祭)·상제(祥祭)·담제(禫祭)의 복제는 친자(親子)의 복제와 같다. 내시(內侍)·사약(司鑰)·사알(司謁)·서방색(書房色)·반감(飯監)은 참최 3년인데, 백관(百官)의 복제와 같다. 별감(別監)과 각 차비인(差備人)은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로 만든 직령의(直領衣)·두건(頭巾)과 생마(生麻)로 만든 띠와 백승혜(白繩鞋)를 착용하고, 연제(練祭) 후에는 백의(白衣)·백두건(白頭巾)·백대(白帶)로 3년을 마친다. 직사(職事)가 있는 전함(前銜)의 각품(各品)과 성중관(成衆官)          【내금위(內禁衞)·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충순위(忠順衛)·별시위(別侍衛)·족친위(族親衛)의 유(類)를 말한다.】        은 포로 만든 단령의(團領衣)          【거친 생포(生布)로써 가장자리를 꿰맨다.】        와 생포(生布)로 싼 사모(紗帽),          【갓도 같다.】         생포로 싼 각대(角帶), 백피화를 착용하고, 연제(練祭) 후에는 백포로 만든 단령의, 백포로 싼 사모, 백포로 싼 각대 차림으로 3년을 마친다. 녹사(錄事)와 서리(書吏)는 생포(生布)로 만든 옷과 생포로 싼 평정 두건(平頂頭巾),          【갓도 같다.】         생포로 만든 띠와 백피화를 착용하고, 연제 후에는 백의와 백평정 두건, 백대 차림으로 3년을 마친다. 생원(生員)·진사(進士)·유학(幼學)·생도(生徒)는 생포로 만든 갓, 생포로 만든 옷과 띠, 백피화를 착용하고, 졸곡(卒哭) 후에는 백립(白笠)·백의·백두건·백대차림으로 3년을 마친다.          【학교에 들어갈 때에는 흰 두건, 전내(殿內)에서는 검은 두건을 착용한다.】         사직서(社稷署)·종묘서(宗廟署) 및 모든 능(陵)·전(殿)의 참봉(參奉) 등의 벼슬아치는 아울러 평상시의 복장인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고 외출할 때에는 백관(百官)과 같다.          【혜릉(惠陵)과 영휘전(永徽殿)의 참봉 등은 입직(入直)할 때에는 복색(服色)이 백관의 복색과 같다.】         갑사(甲士)·정병(正兵)은 백의·백립(白笠), 생마(生麻)로 만든 띠와 백피화를 착용하고, 연제(練祭) 후에는 포대(布帶) 차림으로 3년을 마친다. 서인(庶人)과 승려(僧侶)들은 백의·백립·백대 차림으로 3년을 마치고, 서인(庶人)의 여자는 백의(白衣)를 입다가 연제(練祭) 후에 제거한다.          【담제(禫祭) 전까지는 붉은 빛깔의 장식은 금한다.】        "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참최복(斬衰服)에는 삼베[麻]로 띠를 만드는 것이 예(禮)이다. 비록 연거복(燕居服)이라 하더라도 삼베를 베로 바꾸는 것은 아마도 근거가 없는 듯하다. 경자년016)                          의 절목(節目) 중에는 조관(朝官)의 연거복에 대해서는 애당초 마련하지도 아니하였으니, 아마도 연거복(燕居服)은 조가(朝家)에서 정해진 격식이 없는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유생(儒生)들이 최복(衰服)이 없기 때문에 녹사(錄事)·서리(書吏)와 같이 마대(麻帶)를 착용하도록 마련한 것은 아마도 띠로서 최복을 대신하여 참최복을 입는 뜻을 표(表)하는 데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이희조(李喜朝)가 인용한 주자(朱子)의 학설(學說) 같은 것은 경자년의 대신(大臣)의 논의 중에서 이른바, ‘그 당시의 상제(喪制)는 미처 다 복고(復古)하지 못하였으니, 백대도 오히려 차마 습길(襲吉)을 할 수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지금은 상례(喪禮)가 크게 갖추어 정해졌으므로 주자 때와는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이 옳을 듯하다. 이희조의 말은 너무 구애받는 인상을 면할 수 없으므로 조가(朝家)에서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유생(儒生)·녹사(錄事)·서리(書吏)의 마대(麻帶)는 곧 경자년에 이미 정해진 방례(邦禮)인데, 지금 예조(禮曹)에서 마련한 조관(朝官)들의 연복(燕服) 제도는 이미 경자년 것과 같지 아니하며, 또 연복(燕服)은 포대(布帶)를 착용하는 전례를 미루어 유생·녹사·서리의 마대(麻帶)를 모두 포대(布帶)로 바꾸었으니, 이는 문득 경자년의 예안(禮案)에 반대되는 것이다. 품지(稟旨)하지도 않고 곧바로 방례(邦禮)를 바꾸었으니, 예전에도 이러한 관례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우리 나라의 상제(喪制)는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으나, 방상(方喪)에 이르러서는 미처 다 복고(復古)하지 못하였습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모두 삼대(三代)의 제도를 따르게 하여 경자년의 대상(大喪) 때에 비로소 참최(斬衰)를 시행하니, 중외(中外)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유감이 없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만든 절목(節目)에 혹시라도 경정(逕庭)017)                  이 없지는 않을까 하여, 이번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바로잡게 한 것은 대개 그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만 생각해 보건대, 상제(喪制)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비록 작은 형식과 작은 절차라 하더라도 반드시 상세하고 신중하게 검토하여 지극히 합당하게 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을 모두 대궐에 나오게 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 논의에 대하여 자세히 검토하게 해서 미진(未盡)한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마침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문의하게 했다. 찬선(贊善)        정제두(鄭齊斗)가 말하기를, "죽장(竹杖)·간구(菅屨)는 사실 고례(古禮)에 의거한 것이므로 지금은 논할 만한 것이 없으며, 생원(生員)·진사(進士)·생도(生徒)에게 백의(白衣)·백립(白笠)을 착용하도록 제정한 것은 옛 제도의 자최(齊衰) 3월의 규정에 비해 보건대, 백의·백립은 너무 가벼운 것이고, 3월의 기간으로서 3년을 마치게 한 것은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지금 만약 생포(生布)로 만든 갓과 옷과 띠의 복제를 착용하고 졸곡(卒哭) 때에 이르러 백립·백의·백대로 고쳐서 3년을 마치게 하면, 아마도 옛 고례(古禮)인 자최 3월의 뜻에도 어긋나지 않고, 우리 나라의 백의와 백립으로 3년을 마치는 제도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별감(別監)·각 차비인(差備人)·정병(正兵)·갑사(甲士) 등의 복제(服制)는 《오례의(五禮儀)》에 마대(麻帶)를 쓰게 돼 있는데 이번에는 포대(布帶)로 마련했으니, 마땅히 《오례의》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정제두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사직(司直)        이인복(李仁復)이 상서(上書)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숙종(肅宗)의 장자(長子)로서 열성(列聖)의 정통(正統)을 계승하셨으니, 자성(慈聖)께서는 마땅히 적자(嫡子)를 위하여 참최 3년의 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의논하는 자들은 국제(國制)라고 말하는데, 현종(顯宗)께서 말년(末年)에 깨달은 것과 숙종(肅宗)께서 뜻을 따라 바로잡은 것만 유독 이미 시행된 국제(國制)가 아닙니까? 더구나 단의 왕후(端懿王后)018)                  의 상(喪) 때에 양전(兩殿)의 복제(服制)를 기년(朞年)으로 고치고 대공(大功)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대개 적자에게는 3년복을 입어주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중하게 여겨야 할 처지에 도리어 줄여서 시행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에서 나온 것입니까?" 하니, 역시 〈대신에게〉 문의(問議)하라고 명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효종(孝宗)·현종(顯宗)께서 승하(昇遐)하셨을 적에 자성(慈聖)의 복제(服制)는 모두 지금의 제도를 썼었습니다. 을묘년019)                   무렵에 비록 윤휴(尹鑴)의 말로 인하여 고치기는 했으나,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상사(喪事) 때에는 성상(聖上)께서 비답(批答)에 분명히 우리 나라 제도로 단정한 것인데, 3년이란 말은 어디에 근거하여 나온 것입니까?" 하고, 정제두(鄭齊斗)는 말하기를, "역대 조정에서 모두 나라의 제도를 따랐고, 선왕조(先王朝)의 일 또한 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며, 단의 왕후의 상에 기년(朞年)의 복제(服制) 역시 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인데, 장부(長婦) 기년(朞年)을 가지고 이제 와서 3년의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였는데, 이광좌(李光佐)의 논의에 따르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인복(李仁復)이 무슨 예를 안다고 망령되게 그와 같이 대례(大禮)를 거론하는가? 신(臣)은 삼가 고찰하건대, 이인복의 상소는 대개 허목(許穆)·윤휴(尹鑴)의 논의를 답습한 것이다. 그의 마음이야 어찌 참으로 예의 뜻으로 보아 마땅히 참최(斬衰)라야 된다고 여겼겠는가? 그것을 알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0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상복(常服)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註 010]          계체(繼體) : 선대의 뒤를 이어받음.[註 011]              《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소숭(蕭嵩) 등이 칙명(勅命)을 받아 만든 책. 현종 때의 예제(禮制)를 적은 것인데, 모두 1백 58권임.[註 012]          저장(苴杖) : 상중(喪中)에 쓰는 검정 색의 대지팡이.[註 013]【약간 고운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삼끈[麻繩]으로                             무(武) :               갓 밑의 머리를 묶는 도구.[註 014]          간리(菅履) : 짚신.[註 015]          시마 이상친(緦麻以上親) : 종증조(從曾祖)·삼종형제(三從兄弟)·중증손(衆曾孫)·중현손(衆玄孫)으로, 시마(緦麻)의 복(服)을 입는 친족(親族). 시마는 십오승포(十五升布)로 만든 상복(喪服)의 일종으로, 상기(喪期)는 3개월임.[註 016]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017]          경정(逕庭) : 큰 차이.[註 018]          단의 왕후(端懿王后) : 경종비(景宗妃) 심씨(沈氏).[註 019]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사신은 논한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참최복(斬衰服)에는 삼베[麻]로 띠를 만드는 것이 예(禮)이다. 비록 연거복(燕居服)이라 하더라도 삼베를 베로 바꾸는 것은 아마도 근거가 없는 듯하다. 경자년016)                          의 절목(節目) 중에는 조관(朝官)의 연거복에 대해서는 애당초 마련하지도 아니하였으니, 아마도 연거복(燕居服)은 조가(朝家)에서 정해진 격식이 없는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유생(儒生)들이 최복(衰服)이 없기 때문에 녹사(錄事)·서리(書吏)와 같이 마대(麻帶)를 착용하도록 마련한 것은 아마도 띠로서 최복을 대신하여 참최복을 입는 뜻을 표(表)하는 데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이희조(李喜朝)가 인용한 주자(朱子)의 학설(學說) 같은 것은 경자년의 대신(大臣)의 논의 중에서 이른바, ‘그 당시의 상제(喪制)는 미처 다 복고(復古)하지 못하였으니, 백대도 오히려 차마 습길(襲吉)을 할 수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지금은 상례(喪禮)가 크게 갖추어 정해졌으므로 주자 때와는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이 옳을 듯하다. 이희조의 말은 너무 구애받는 인상을 면할 수 없으므로 조가(朝家)에서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유생(儒生)·녹사(錄事)·서리(書吏)의 마대(麻帶)는 곧 경자년에 이미 정해진 방례(邦禮)인데, 지금 예조(禮曹)에서 마련한 조관(朝官)들의 연복(燕服) 제도는 이미 경자년 것과 같지 아니하며, 또 연복(燕服)은 포대(布帶)를 착용하는 전례를 미루어 유생·녹사·서리의 마대(麻帶)를 모두 포대(布帶)로 바꾸었으니, 이는 문득 경자년의 예안(禮案)에 반대되는 것이다. 품지(稟旨)하지도 않고 곧바로 방례(邦禮)를 바꾸었으니, 예전에도 이러한 관례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우리 나라의 상제(喪制)는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으나, 방상(方喪)에 이르러서는 미처 다 복고(復古)하지 못하였습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모두 삼대(三代)의 제도를 따르게 하여 경자년의 대상(大喪) 때에 비로소 참최(斬衰)를 시행하니, 중외(中外)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유감이 없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만든 절목(節目)에 혹시라도 경정(逕庭)017)                  이 없지는 않을까 하여, 이번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바로잡게 한 것은 대개 그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만 생각해 보건대, 상제(喪制)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비록 작은 형식과 작은 절차라 하더라도 반드시 상세하고 신중하게 검토하여 지극히 합당하게 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을 모두 대궐에 나오게 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 논의에 대하여 자세히 검토하게 해서 미진(未盡)한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마침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문의하게 했다. 찬선(贊善)        정제두(鄭齊斗)가 말하기를,
"죽장(竹杖)·간구(菅屨)는 사실 고례(古禮)에 의거한 것이므로 지금은 논할 만한 것이 없으며, 생원(生員)·진사(進士)·생도(生徒)에게 백의(白衣)·백립(白笠)을 착용하도록 제정한 것은 옛 제도의 자최(齊衰) 3월의 규정에 비해 보건대, 백의·백립은 너무 가벼운 것이고, 3월의 기간으로서 3년을 마치게 한 것은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지금 만약 생포(生布)로 만든 갓과 옷과 띠의 복제를 착용하고 졸곡(卒哭) 때에 이르러 백립·백의·백대로 고쳐서 3년을 마치게 하면, 아마도 옛 고례(古禮)인 자최 3월의 뜻에도 어긋나지 않고, 우리 나라의 백의와 백립으로 3년을 마치는 제도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별감(別監)·각 차비인(差備人)·정병(正兵)·갑사(甲士) 등의 복제(服制)는 《오례의(五禮儀)》에 마대(麻帶)를 쓰게 돼 있는데 이번에는 포대(布帶)로 마련했으니, 마땅히 《오례의》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정제두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사직(司直)        이인복(李仁復)이 상서(上書)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숙종(肅宗)의 장자(長子)로서 열성(列聖)의 정통(正統)을 계승하셨으니, 자성(慈聖)께서는 마땅히 적자(嫡子)를 위하여 참최 3년의 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의논하는 자들은 국제(國制)라고 말하는데, 현종(顯宗)께서 말년(末年)에 깨달은 것과 숙종(肅宗)께서 뜻을 따라 바로잡은 것만 유독 이미 시행된 국제(國制)가 아닙니까? 더구나 단의 왕후(端懿王后)018)                  의 상(喪) 때에 양전(兩殿)의 복제(服制)를 기년(朞年)으로 고치고 대공(大功)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대개 적자에게는 3년복을 입어주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중하게 여겨야 할 처지에 도리어 줄여서 시행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에서 나온 것입니까?"
하니, 역시 〈대신에게〉 문의(問議)하라고 명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효종(孝宗)·현종(顯宗)께서 승하(昇遐)하셨을 적에 자성(慈聖)의 복제(服制)는 모두 지금의 제도를 썼었습니다. 을묘년019)                   무렵에 비록 윤휴(尹鑴)의 말로 인하여 고치기는 했으나,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상사(喪事) 때에는 성상(聖上)께서 비답(批答)에 분명히 우리 나라 제도로 단정한 것인데, 3년이란 말은 어디에 근거하여 나온 것입니까?"
하고, 정제두(鄭齊斗)는 말하기를,
"역대 조정에서 모두 나라의 제도를 따랐고, 선왕조(先王朝)의 일 또한 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며, 단의 왕후의 상에 기년(朞年)의 복제(服制) 역시 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인데, 장부(長婦) 기년(朞年)을 가지고 이제 와서 3년의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였는데, 이광좌(李光佐)의 논의에 따르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인복(李仁復)이 무슨 예를 안다고 망령되게 그와 같이 대례(大禮)를 거론하는가? 신(臣)은 삼가 고찰하건대, 이인복의 상소는 대개 허목(許穆)·윤휴(尹鑴)의 논의를 답습한 것이다. 그의 마음이야 어찌 참으로 예의 뜻으로 보아 마땅히 참최(斬衰)라야 된다고 여겼겠는가? 그것을 알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0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상복(常服)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註 010]          계체(繼體) : 선대의 뒤를 이어받음.[註 011]              《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소숭(蕭嵩) 등이 칙명(勅命)을 받아 만든 책. 현종 때의 예제(禮制)를 적은 것인데, 모두 1백 58권임.[註 012]          저장(苴杖) : 상중(喪中)에 쓰는 검정 색의 대지팡이.[註 013]【약간 고운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삼끈[麻繩]으로                             무(武) :               갓 밑의 머리를 묶는 도구.[註 014]          간리(菅履) : 짚신.[註 015]          시마 이상친(緦麻以上親) : 종증조(從曾祖)·삼종형제(三從兄弟)·중증손(衆曾孫)·중현손(衆玄孫)으로, 시마(緦麻)의 복(服)을 입는 친족(親族). 시마는 십오승포(十五升布)로 만든 상복(喪服)의 일종으로, 상기(喪期)는 3개월임.[註 016]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017]          경정(逕庭) : 큰 차이.[註 018]          단의 왕후(端懿王后) : 경종비(景宗妃) 심씨(沈氏).[註 019]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사신은 말한다. "이인복(李仁復)이 무슨 예를 안다고 망령되게 그와 같이 대례(大禮)를 거론하는가? 신(臣)은 삼가 고찰하건대, 이인복의 상소는 대개 허목(許穆)·윤휴(尹鑴)의 논의를 답습한 것이다. 그의 마음이야 어찌 참으로 예의 뜻으로 보아 마땅히 참최(斬衰)라야 된다고 여겼겠는가? 그것을 알 수 없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유수(柳綏)·헌납(獻納) 이정걸(李廷傑), 정언(正言) 조상경(趙尙慶)·한사득(韓師得)이다.】 에서 아뢰기를,
"어의(御醫) 등이 마침내 병 증세에 따라 약을 쓰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잡아다가 국문(鞫問)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유의(儒醫) 이공윤(李公胤)은 입진(入診)할 때마다 문득 오만한 태도를 취했으니 이미 지극히 공경스럽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위예(違豫)020)  했을 적에는 오로지 몹시 공격적인 약제만을 써서 병세가 도리어 악화되게 하였습니다. 위독했던 날 저녁에는 전하(殿下)께서 근심하고 두려운 나머지 초조해서 서둘러 불러다가 증세를 물어 보니,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되는 뜻이 없이 느릿느릿 아무렇게나 대답하고 서둘러 나가버렸습니다. 말씨와 행동거지가 교만스럽고 도리에 어긋났으므로 그날 입시(入侍)했던 여러 신하들 가운데 놀라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잡아다가 엄중하게 국문하여 율(律)에 의거하여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이명언(李明彦), 집의(執義) 이진순(李眞淳), 장령(掌令) 유시모(柳時模), 지평(持平) 박윤동(朴胤東)·이현보(李玄輔)이다.】 에서도 어의(御醫)의 일과 이공윤(李公胤)의 일을 아뢰었는데, 모두 사간원에서 아뢴 것과 같았다. 또 아뢰기를,
"어제 정곡(庭哭)을 파한 후에 승정원(承政院)에서 미처 변통하지 아니하여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금중(禁中)에서 밤을 새게 하였으니, 칭컨대, 해당 승지를 파직(罷職)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표신(標信)021)  의 출납(出納)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재작일(再昨日) 재궁(梓宮)022)  을 돈화문(敦化門)으로 받들고 들어올 적에 표신(標信)이 내려진 다음에 또다시 백관(百官)이 물러났고, 금호문(金虎門)에서 문에 머물게 한 일이 있었는데, 마침내 먼저 내려온 표신을 가지고 뒤에 여는 문에 그대로 사용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承旨)를 잡아다가 국문(鞫問)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기복(起復)023)  하였을 때의 관복(冠服)은 나라에서 정한 제도가 있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크게 위독했던 날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는 하교(下敎)로 인하여 입시(入侍)하면서 생포(生布)로 만든 관모(冠帽)와 띠를 착용하고 대내(大內)에 나왔습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미처 단속하지 못하였음을 간원(諫院)에서 아뢰니, 어유귀는 먼저 스스로 잘못을 말했으나, 그 후에 출입할 적에도 마침내 고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승정원에서는 마땅히 관례에 따라 금해야 할 것인데 사리에 어두워 그냥 두고 있었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어의(御醫)의 일과 이공윤(李公胤)의 일은 아뢴 대로 하고, 해당 승지를 잡아다가 국문하는 일은 파직만 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진시(辰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햇무리 위에는 등[背]이 있었고, 빛깔이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푸르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계품(啓稟)하기를,
"본원(本院)과 다른 관사의 생기(省記)024)  에 실린 입직관(入直官)과 원상(院相)은 전례에 따라 파하여 내보내게 하소서."
하였는데, 그대로 하라고 윤허(允許)하고 원상은 그대로 입직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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