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권, 영조 즉위년 1724년 9월

싸라리리 2025. 8. 1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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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신축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을 고부 정사(告訃正使)로, 이진유(李眞儒)를 부사(副使)로, 김상규(金尙奎)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구례(舊例)에 대상(大喪)을 당하면 처음에 무신(武臣) 한 사람을 먼저 보내어 의주(義州)에 달려가 부윤(府尹)으로 하여금 영의정(領議政)의 뜻으로 봉황성(鳳凰城)의 장수에게 통고(通告)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경자년025)  에는 봉황성의 장수가 이문(移文) 중에 ‘승하(昇遐)’ 두 글자는 외국(外國)에서 일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거절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부윤(府尹)과 감사(監司)가 조정에 문서(文書)를 왕복하여 그 두 자를 고친 후에야 비로소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비변사(備邊司)에서 계청(啓請)하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와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지위(知委)026)  하고, 전례(前例)를 참고하여 말을 지어서 거행(擧行)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표신(標信)에 새길 압자(押字)를 의정부(議政府)와 공경(公卿)이 모여서 의논할 일을 가지고 아뢰었는데, 임금이 원상(院相) 이광좌(李光佐)에게 말하기를,
"내가 쓰고 있는 화압(花押)은 곧 선왕(先王)께서 하사(下賜)하신 것으로서, 보묵(寶墨)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내가 어찌 다른 것을 원하겠는가?"
하므로, 이광좌가 말하기를,
"무슨 글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통(通)’자이다."
하고, 이어 회의를 정침(停寢)하라고 명하였다.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재궁(梓宮)에 옻칠을 더했다. 【무릇 33차례 칠을 하고 마쳤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진검(李眞儉)이 말하기를,
"갑인년027)   국휼(國恤) 때 재궁에 칠을 더할 적에는 백관(百官)이 모여서 곡(哭)을 하느라고 자리를 비워 놓게 되니 폐단이 되었습니다."
하니, 원상 이광좌가 말하기를,
"단지 2품(二品) 이상과 삼사(三司)의 장관(長官)과 시종신(侍從臣)만 와서 모이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가 경궐(京闕)에 분부(奔赴)028)  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머물게 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머물도록 권유하라고 답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도 용인(龍仁)에서 분부하였는데,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특별히 유시(諭示)해서 함께 오게 하였다.

 

임금이 무망각(无妄閣)에 나아가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와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을 인견(引見)하였다. 조태억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구제하고, 재물을 절용(節用)하고, 궁금(宮禁)을 엄중하게 하고, 인재(人材)를 기르고, 언로(言路)를 넓히는 등의 일을 말하였다. 이광좌가 잇따라 뜻을 세우고 사람을 선발하는 등의 일을 아뢰면서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이 참소당했을 적에 인종(仁宗)이 이를 다스려서 억울함을 풀어 준 일을 인용하여 말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이미 성의(誠意)를 가지고 아랫사람을 대하시니, 혹시라도 진실되지 못한 일을 더하지 마시고, 아랫사람들이 진실로 죄가 있으면 한 가지도 숨김없이 좋고 나쁜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그 후 며칠 있다가 오명준(吳命峻)이 입시(入侍)하여 말하기를,
"현재 한 ‘사(私)’ 자가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그 ‘사(私)’자를 과감하게 버리셔서 한마디 말과 한가지 일도 정직함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또한 가납(嘉納)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해당 승지(承旨)를 추고(推考)하라고 계청(啓請)했던 것을 중지하였다.

 

처음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이광좌(李光佐)가 지관사(知館事) 김일경(金一鏡)과 봉교(奉敎) 윤상백(尹尙白)을 강화(江華) 정족 산성(鼎足山城)에 보내어 《인종실록(仁宗實錄)》과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상고하게 할 것을 품계(稟啓)했었는데, 김일경 등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명종(明宗)이 인종(仁宗)에게 고(告)한 축문(祝文)에는, ‘황형(皇兄)’이라고 일컬었고, ‘고제(孤弟)’라고 일컬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의정(領議政) 윤인경(尹仁鏡) 등이 아뢰기를, ‘춘추(春秋)의 의리에는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계승(繼承)하거나 형이 죽어서 아우가 후계자가 되거나 그 대[世]가 되는 것이 한결같습니다. 이미 나라를 물려주었으니, 전수(傳授)한 분은 비록 아버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버지와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대군(大君)에게 아버지와 같은 성격의 도리가 있다면, 왕비(王妃)에 대해서도 역시 어머니로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임금이 왕위(王位)의 계승을 종묘(宗廟)·사직(社稷)과 영휘전(永徽殿)에 고(告)하였는데, 영휘전에는 무엇이라고 일컬어야 할지 상고할 만한 근거가 없었으므로 홍문관(弘文館)에게 널리 고찰하여 아뢰게 하였다. 홍문관에서 말하기를,
"소대(昭代)029)  의 전칙(典則)을 가져다가 참고해 보았는데, 명(明)나라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즉위(卽位)한 후에 무종 황후(武宗皇后)에게 ‘황수(皇嫂)’라고 일컬었습니다. 살았을 적에 이미 형수라고 일컬었으니, 축문(祝文)이라고 해서 다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어휘(御諱)를 높여 일컫는 것에 대해서는 마침내 근거할 만한 글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대신(大臣)과 예관(禮官)에게 널리 의논하게 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들어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빈전(殯殿)에 고하는 글의 칭호는 마땅히 《명종실록》에 의하여 ‘고제(孤弟)·황형(皇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의 왕후(端懿王后)에 이르러서는 형수라고 일컫는 것이 옳겠지만, 성상(聖上)께서 스스로 일컬음에 있어서는, ‘숙(叔)’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으며, 또한 ‘고제(孤弟)’라고 일컬을 수도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인종·명종 때에 ‘고제(孤弟)’라고 일컬은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이광좌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대답하기를,
"신(臣)이 이제서야 깨닫겠는데, 그 당시 중종(中宗)의 상제(喪制)가 끝나지 아니하고 인종이 승하하였으므로 ‘고제’라고 일컬었던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은 말하기를,
"《두씨통전(杜氏通典)》 중에 보면 진(晉)나라 때에 ‘애사(哀嗣)’라고 일컬은 것이 있으니, 다만 3년 안에는 ‘애(哀)’라고 일컫는 것이 좋겠고, 3년 후에는 ‘효(孝)’라고 일컫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혼전(魂殿)에서는 ‘제(弟)’라고 일컫고 영휘전(永徽殿)에서는 ‘사(嗣)’라고 일컫는다면 반박(斑駁)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만약 명나라 조정의 예를 따라 ‘황형(皇兄)·황수(皇嫂)’라고 일컫고 동진(東晉)의 기록에 따라 내전(內殿)이나 외전(外殿)에서 아울러 ‘애사(哀嗣)’라고 일컫는다면, 주(周)나라 예를 존중하고 조상을 본받음에 있어 두 가지가 적중(適中)함을 얻을 것이다. 나는 피발(被髮)의 한 조항(條項)도 계체(繼體)의 중요성을 수의(收議)하여 시행하였는데, 더구나 ‘애사(哀嗣)’라고 일컫는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성교(聖敎)에서 중요성을 계체(繼體)로 돌리시는 것은 진실로 지당하신 것입니다. 3년 안에는 ‘애사(哀嗣)’라고 일컫고 3년 후에는 ‘효사(孝嗣)’라고 일컬으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혹자는, ‘애사(哀嗣)’니 ‘사왕(嗣王)’이니 할 때에 두 ‘사(嗣)’자가 중첩이 되는 것을 가지고 미안하게 여기지만, ‘애사’의 ‘사’자는 사속(嗣續)의 뜻이고, ‘사왕(嗣王)’의 ‘사’자는 승사(承嗣)의 뜻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종묘(宗廟)·사직(社稷)과 영녕전(永寧殿)에 이미 시행하였는가?"
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이미 시행하였고, 오직 영휘전(永徽殿)만 아직 시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대한 일인데, 비록 늦은들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봉교(奉敎) 윤상백(尹尙白)을 보내어 찬선(贊善) 정제두(鄭齊斗)에게 문의하게 하였는데, 정제두의 의논도 이광좌의 말과 같았다. 이로부터 혼전(魂殿)과 영휘전(永徽殿)의 축문(祝文)에는 마침내 ‘애사’·‘사왕’이라고 일컫고, 3년 후에는 ‘효사’·‘사왕’이라고 일컫기로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제왕(帝王)의 승통(承統)이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천륜(天倫)의 관계를 어떻게 바꿀 수가 있겠는가? ‘사왕’의 ‘사’를 ‘승사(承嗣)’의 뜻으로 여긴다면, ‘승사’의 경우는 비록 형제간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쓰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효사’의 ‘사’에 이르러서는 ‘사속(嗣續)’의 뜻으로 여긴다면, ‘사속’은 곧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는 것을 말하는데, 어찌 형제로서 부자(父子)처럼 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뜻으로 미루어 본다면, 비록 민공(閔公)·희공(僖公)의 형(兄)이 아우를 계승한 것030)  과 간문제(簡文帝)가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계승했던 것 또한 ‘제(弟)’를 아버지라 하고 ‘손(孫)’을 아버지라고 일컫는 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것이겠는가? 당시의 논의는 비록 윤인경(尹仁鏡)이 명종(明宗)에게 고(告)한 것을 근거로 삼은 것이나, 윤인경의 말뜻을 살펴보면, 그것은 부모를 섬기는 도리로 인종(仁宗)과 대비(大妃)를 섬기자는 것이었지, 그 천륜(天倫)의 이름을 바꾸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장차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위로는 ‘황형(皇兄)’·‘황수(皇嫂)’라고 일컬으면 천륜의 이름이 올바르게 되고, 아래로 ‘사왕 신(嗣王臣) 모(某)’라고 하면 승사(承嗣)의 뜻이 드러날 것이다. 임금이 영명(英明)하여서 일찍부터 그 점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으므로 만년(晩年)에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이 일은 보류해 두었다가 후세 사람이 바로잡도록 기다려야 할 것이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03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29] 소대(昭代) : 밝게 다스려진 세상.[註 030] 민공(閔公)·희공(僖公)의 형(兄)이 아우를 계승한 것 : 민공(閔公)과 희공(僖公)은 모두 춘추 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형인 희공이 동생인 민공의 후계자가 되었음.
사신은 논한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제왕(帝王)의 승통(承統)이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천륜(天倫)의 관계를 어떻게 바꿀 수가 있겠는가? ‘사왕’의 ‘사’를 ‘승사(承嗣)’의 뜻으로 여긴다면, ‘승사’의 경우는 비록 형제간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쓰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효사’의 ‘사’에 이르러서는 ‘사속(嗣續)’의 뜻으로 여긴다면, ‘사속’은 곧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는 것을 말하는데, 어찌 형제로서 부자(父子)처럼 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뜻으로 미루어 본다면, 비록 민공(閔公)·희공(僖公)의 형(兄)이 아우를 계승한 것030)  과 간문제(簡文帝)가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계승했던 것 또한 ‘제(弟)’를 아버지라 하고 ‘손(孫)’을 아버지라고 일컫는 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것이겠는가? 당시의 논의는 비록 윤인경(尹仁鏡)이 명종(明宗)에게 고(告)한 것을 근거로 삼은 것이나, 윤인경의 말뜻을 살펴보면, 그것은 부모를 섬기는 도리로 인종(仁宗)과 대비(大妃)를 섬기자는 것이었지, 그 천륜(天倫)의 이름을 바꾸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장차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위로는 ‘황형(皇兄)’·‘황수(皇嫂)’라고 일컬으면 천륜의 이름이 올바르게 되고, 아래로 ‘사왕 신(嗣王臣) 모(某)’라고 하면 승사(承嗣)의 뜻이 드러날 것이다. 임금이 영명(英明)하여서 일찍부터 그 점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으므로 만년(晩年)에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이 일은 보류해 두었다가 후세 사람이 바로잡도록 기다려야 할 것이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하였다.

 

9월 2일 임인

송인명(宋寅明)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응교(副應敎)로, 윤용(尹容)을 부교리(副校理)로, 박문수(朴文秀)를 검열(檢閱)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해당 승지(承旨)를 파직시키라는 계청을 정지하였다.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의 품계(品階)를 정1품(正一品) 흥록 대부(興祿大夫)로 승진시켰다. 옛 관례에 고부사(告訃使)는 실제로 시호(諡號)를 청하고 사위(嗣位)를 청하는 등의 일을 겸하였으므로 반드시 대신(大臣)을 차견(差遣)하였으며, 아니면 종신(宗臣)으로서 도위(都尉) 중에서 정1품을 차견했었다. 그런데 이때에 임금이 이광좌(李光佐)가 혼자 정승의 직무를 도맡고 있는데다가 또 산릉 총호사(山陵摠護使)까지 겸하고 있었으므로, 전조(銓曹)031)  에 명하여 종신(宗臣)으로 의망(擬望)032)  하게 했는데, 직이 마침내 정사(正使)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정1품에 승진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다.

 

9월 3일 계묘

밤 1경(一更)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시호(諡號)를 ‘덕문 익무 순인 선효(德文翼武純仁宣孝)’로, 묘호(廟號)를 ‘경종(景宗)’으로, 전호(殿號)를 ‘경사(敬思)로, 【후에 사(思)는 소(昭)로 고쳤다.】  능호(陵號)를 ‘의릉(懿陵)’으로 올렸다. 【사민(士民)을 안정시킨 것을 ‘덕(德)’이라고 하고, 도덕(道德)이 널리 알려진 것을 ‘문(文)’이라 하고, 사려(思慮)가 깊고 먼 것을 익(翼)’이라 하고, 큰 기업을 보전하고 공을 정한 것을 ‘무(武)’라 하고, 덕행(德行)이 중정(中正)하고 정수(精粹)한 것을 ‘순(純)’이라 하고,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실행한 것을 ‘인(仁)’이라 하고, 성(聖)스럽고 선(善)한 점이 골고루 알려진 것을 ‘선(宣)’이라 하고, 인자하고 공경함을 ‘효(孝)’라 하고, 노숙(老熟)한 마음으로 크게 생각하는 것을 ‘경(景)’이라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03면
【분류】왕실-종사(宗社)

 

정사효(鄭思孝)는 세초(歲抄) 중에 서용(敍用)하라는 전지(傳旨)를 미처 내리지 아니하였는데도 방백(方伯) 직임(職任)에 수망(首望)033)  에 주의(注擬)하였다 하여 전조(銓曹)의 관원을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정사효(鄭思孝)·이정제(李廷濟)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9월 4일 갑진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밤에 대언(對言)을 요구하여 말하기를,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가 내일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청컨대, 머물러 있도록 권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특별히 유시(諭示)해서 편복(便服)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였다.

 

이조(吏曹)에서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행장 찬집청(行狀纂輯廳)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계하(啓下)하였다. 【당상(堂上)은 유봉휘(柳鳳輝)·조태억(趙泰億)·김일경(金一鏡)·오명준(吳命峻)·이진유(李眞儒)·이명언(李明彦)·이하원(李夏源)·이정제(李廷제)·이봉년(李鳳年)·윤혜교(尹惠敎)이고, 낭청(郞廳)은 조익명(趙翼命)·심준(沈埈)·오수원(吳遂元)·여선장(呂善長)·조지빈(趙趾彬)·이진수(李眞洙)·윤용(尹容)·신치운(申致雲)·김홍석(金弘錫)·이거원(李巨源)·성덕윤(成德潤)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03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편사(編史)

 

9월 5일 을사

이보다 앞서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의만(李宜晩)이 본도(本道)의 살옥(殺獄)에 대한 문안(文案)을 간추려 조절해서 논단(論斷)하고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장문(狀聞)하였는데, 형조(刑曹)에 내려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형조에서 복주(覆奏)하였는데, 대부분 착오가 많았으므로,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형벌이란 왕정(王政)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이르기를, ‘공경하고 신중히 하여 형벌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하였고, 고요(皐陶)가 순(舜)임금의 덕(德)을 찬양하여 말하기를, ‘죄가 의심스러우면 오로지 가볍게 처벌하고, 무고한 자를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도를 잃어 실패하려 하셨다.’ 하였으니, 삼대(三代) 때에 형벌을 신중하게 다룬 것을 통하여 백성의 목숨을 중하게 여겼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석방해서는 마땅하지 못한 자도 용서하여 석방하는 데 섞여 들어갔고, 또한 마땅히 석방해야 할 자도 명백하게 장문(狀聞)하지 않고 있으니,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 심하다. 해당 당상관(堂上官)을 추고(推考)하고, 부표(付標)034)  를 고쳐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의만이 상소(上疏)하여 스스로 인책(引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앞으로 힘쓰게 하려는 뜻이니 사직(辭職)하지는 말라."
하였다.

 

9월 6일 병오

대사헌(大司憲) 이명언(李明彦)이 말하기를,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상(喪) 때에 예조 판서(禮曹判書) 장선징(張善澂)이 호복례(呼復禮)035)  를 행하였으므로, 숙종 대왕의 상 때에도 예조 판서 이관명(李觀命)에게 호복(呼復)하게 하니, 이관명이 말하기를, ‘장선징은 외척(外戚)인 까닭에 호복한 것이다. 호복은 종백(宗伯)의 책임이 아니다.’ 하고, 고집하여 이를 기꺼이 하지 않았으나, 당시에 그르다고 한 자가 없었습니다. 예(禮)를 참고하여 법식(法式)을 만들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대답하기를,
"이번 대상(大喪)의 호복은 《오례의(五禮儀)》와 고례(古例)를 따라 내시(內侍)로 하여금 호복하게 하였습니다. 상례(喪禮)는 선조(先祖)를 따르는 법인데, 어찌 고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앞으로는 일체 《오례의》에 따르게 하였다. 이명언이 또 말하기를,
"옛날과 지금은 그 형편이 다릅니다. 《오례의》도 소략(疏略)한 것이 많으니, 청컨대, 인산(因山) 이후에 예를 아는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오례의》를 수정하여 고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7일 정미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찬선(贊善) 정제두(鄭齊斗)를 유소(諭召)하여 함께 오게 했었는데, 때마침 강화(江華)에 신임(新任)·구임(舊任)의 유수(留守)가 교체(交遞)하는 때를 당하여 주전(廚傳)036)  의 폐단이 있다 하여 사관을 소환하도록 명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이정제(李廷濟)가 청대(請對)하고 아뢰기를,
"사복(嗣服)한 초기에 어진 덕망이 있는 이를 먼저 초빙한다고 하자, 중외(中外)에서 용동(聳動)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한 번의 치계(馳啓)로 인하여 곧 명을 도로 거두셨습니다. 비록 민폐(民弊) 때문이라고 하교(下敎)하셨으나, 이미 어진이를 초빙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셨으면, 폐단을 이유로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하였다. 임금이 즉시 다른 사관으로 대신 가도록 명하였는데, 이정제가 또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재야(在野)의 신하를 만나고자 하신다면, 동강(桐江)의 일037)  을 거론해야 할 것이고, 매복(枚卜)의 일을 의논하고자 하신다면 신(莘)·위(渭)038)  를 꿈속에 생각하셔야 할 것인데, 애통(哀痛)으로 경황이 없으신 가운데 문자(文字)를 바꾸시니, 임금의 말을 출납(出納)하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혹시 위대해야 할 말씀이 보고 듣기에 방애가 있을 듯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물러간 다음에 하교(下敎)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마음 속으로 숨김이 없어야 성의(誠意)를 서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좌사(左史)의 서계(書啓)에 대한 비답은 애통한 가운데 미처 살피지 못하였었는데, 근밀(近密)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마음을 인도하여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으니, 마음으로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특별히 대호피(大虎皮) 1령(領)을 주어 내가 언로(言路)를 넓히는 뜻을 표한다. 아! 온화한 모습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임은 나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니, 스스로 경책(警責)해야 할 도리에 있어서 감히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감기를 앓은 지 오래 되어도 낫지 아니하였는데도 오히려 아침 저녁의 곡전(哭奠)을 친히 행하니, 내의원(內醫院) 도제조(都提調) 이광좌(李光佐)가 섭행(攝行)039)  하게 하기를 힘써 요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명(明)나라 인종(仁宗)이 태자(太子)로 있을 적에 제사에 임해서 병이 들었으므로 신하들이 제사를 섭행하게 하기를 힘써 청했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는데, 제사를 지낸 다음에 크게 땀을 흘리고 즉시 나은 적이 있었다. 지금 이 아침 저녁의 곡전은 더욱 중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광좌 등이 간곡하게 간쟁(諫爭)하니, 임금이 며칠만 섭행하게 하고 다시 친히 행하였다.

 

9월 11일 신해

국장 도감(國葬都監)에서 시장(諡狀)·지문(誌文)·시책문(諡冊文)·애책문(哀冊文)의 제술관(製述官)과 서사관(書寫官) 및 명정(銘旌)·보전문(寶篆文)·표석 대자 전문(表石大字篆文)·음기(陰記)의 서사관 성명(姓名)을 계문(啓聞)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총호사(摠護使)는 일찍이 문형(文衡)을 지냈는데 제술관(製述官) 가운데에 들지 않았으니, 어찌 스스로 분배(分排)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행장(行狀)과 시장(諡狀)을 한 사람이 겸하여 짓게 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총호사가 제술관에 들지 않은 것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다만 행장 중에서 꺼리는 문자(文字)만을 삭제할 뿐이고, 별도로 짓는 전례는 없습니다. 숙종(肅宗)의 시장은 청(淸)나라에 보내는데 지나치게 매몰(埋沒)한 까닭에 행장을 다시 짓자는 요청이 있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같은 글입니다."
하니, 임금이 총호사에게 시장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였다. 처음에 성복(成服)한 후 5일이 되던 날 조정에서 바야흐로 복선(復膳)의 일로써 빈청(賓廳)에 모여 진계(陳啓)했는데, 대사헌(大司憲) 이명언(李明彦), 장령(掌令) 유시모(柳時模), 지평(持平) 이현보(李玄輔)·박윤동(朴胤東), 헌납(獻納) 이정걸(李廷傑) 등이 갑자기 역비(逆婢)를 조사하기를 청하여 합계(合啓)했다. 그러나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공제(公除)040)  전에는 우선 정지하였는데, 물의(物議)가 이를 그르게 여기므로 인피(引避)하고 체직(遞職)시켜 줄 것을 계청(啓請)하니, 사임하지 말라고 비답(批答)하였으며, 옥당(玉堂)에서는 차자를 올려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 명언은 이로 인하여 여러 대관(臺官)을 이끌고 잇따라 계청하여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옥당(玉堂)에서 서로 잇따라 면대(面對)를 요구했다. 이명언(李明彦)이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처음 보위(寶位)에 오르셨으니, 그 사정이 선왕(先王)께서 임시로 용서해 주던 것과는 도리(道理)에 있어서 전연 같지가 않습니다. 이 궁비(宮婢)는 선조(先朝)에 있어서는 난역(亂逆)한 적(賊)이 되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임금의 원수가 되니, 신(臣) 등이 반드시 토죄(討罪)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殿下)께서 반드시 보복해야 할 일입니다. 청컨대, 독약을 시용(試用)한 궁비(宮婢)를 국청(鞫廳)에 회부시켜 흔쾌하게 나라의 법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윤허하지 않으신 것은 우선 임시로 용서해 준 것이 아니고, 내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대답한 것도 임금의 원수를 잊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 명언이 말하기를,
"역비(逆婢)가 선왕에게 있어서는 성궁(聖躬)에 관계된 일이었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하의 부형(父兄)의 원수로서 같은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자입니다. 대행왕(大行王) 때에 처음에는 출부(出付)하도록 허락하였다가 나중에는 ‘사실이 없다’느니 ‘마침내 없었다’느니 하는 하교(下敎)가 있었으므로, 중외(中外)에서 의혹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역비의 정절(情節)은 적(賊)의 초사(招辭)와 약원(藥院)의 일기(日記)에서 죄다 드러났으므로 조사해 낼 길이 있습니다. 성상께서 그 의심이 가는 사람을 생각하셔서 유사(有司)에 회부시켜 한 차례 엄중하게 핵실(覈實)하게 하면 다시 유감이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께서 일찍이 하교(下敎)하시기를, ‘무릇 적의 초사는 죽을 고비에서 살기를 구하는 일이 없지도 않으며, 혹은 터무니없는 말도 없지 않은 것이다. 어선(御膳)을 관장하는 궁인(宮人)이 그 얼마인지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터무니없는 말로써 조사해 낼 수 있겠는가?’ 하셨는데, 정녕하신 그 하교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임금의 원수는 비록 여대(輿儓)041)  들이라도 반드시 토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비록 현명하지 못하나 어찌 이에 생각이 미치지 않겠는가? 선조(先朝)에서 조사하지 않은 것을 비록 예사람처럼 현명한 자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실정을 알아 내겠는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다."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이거원(李巨源)이 말하기를,
"독약을 쓴 한 가지 일은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고, 사건의 맥락과 지름길이 분명합니다."
하고, 이명언이 말하기를,
"이 일은 곧 전하께서 같은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인 것인데, 연일 합계(合啓)해도 다만, ‘번거롭히지 말라[勿煩]’는 두 자의 비답만 내리시니, 외의(外議)가 모두 미안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의 비답에 혹은 ‘그런 일이 없다.’ 하고, 혹은 ‘실상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거룩하신 임금의 말씀이 어찌 있는 것을 가지고 없다고 하였겠는가? 주(周)나라 말엽에 질(質)보다 문(文)이 앞섰었는데, 우리 나라도 그렇다. 지금 선왕께서, ‘그런 일이 없다.’라고 하신 하교를 가지고 즉시 정계(停啓)한다면 어찌 질(質)이 되지 않겠는가? 이 일은 내가 차마 다시 제기할 수 없는 것이므로 지금 죄다 말하였다. 그런데 삼사(三司)에서 만약 또 다투어 고집을 한다면 중외(中外)에서 장차 나를 어떻게 여기겠는가? 경(卿) 등은 양조(兩朝)를 두루 섬겼으면서도 성의(誠意)가 서로 미덥지 않게 여기고 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자, 박윤동(朴胤東)이 말하기를,
"김씨(金氏)의 성(姓)을 가진 자를 조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지난날 어선(御膳)을 맡았던 궁인을 일제히 조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박윤동이 말하는 중에 ‘우리들[吾輩]’이라고 일컬었는데, 승지(承旨) 유수(柳綬)가 망발(妄發)했다고 배척하니, 박윤동이 마침내 인피(引避)하였으나, 사퇴(辭退)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이거원(李巨源)이 말하기를,
"옛날에 길분(吉翂)042)  은 13세의 아이로서 아비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지금 역비(逆婢)는 오히려 편안하게 있는데, 전하께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시니, 신은 매우 의혹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길분은 그 때 근거할 만한 것이 있었으므로 등문고(登聞鼓)를 쳐서 그 원수를 갚았으나, 지금은 근거가 없는데 어떻게 출부(出付)하겠는가?"
하였다. 이거원이 말하기를,
"이 일을 어떻게 ‘문구(文具)’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문구라고 하신 하교는 실언(失言)하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명언이 말하기를,
"이거원이 귀가 어두워서 잘못 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한 말은 의사가 전달되지 아니하였으니, 잘못 들은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였다. 이명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사복(嗣服)하시고 첫 정사를 중외(中外)에서 눈을 씻고 보고 있습니다. 어제 언로(言路)를 넓히시려는 뜻으로 승지(承旨)에게 상을 주셨는데, 오늘은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고서 한참 후에야 비로소 불러보셨으니, 그 일을 들은 이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침 주다례(晝茶禮)043)  가 있었고, 또 양전(兩殿)께 문안을 드린 까닭에 조금 늦었는데, 바야흐로 겸연(歉然)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진계(陳戒)한 말은 어찌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후에 임금이 유수(柳綬)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선왕조(先王朝) 때에 역비(逆婢)에 대해서는 다만 그 성(姓)만을 알고 그 이름은 없었다. 그래서 이름을 물어 보는 하교가 있었는데, 만약 과연 이름이 있었다면 선왕께서 반드시 조처하셨을 것이다. 선왕께서, ‘본래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교(下敎)하셨으니, 사생(死生)과 유무(有無)에 대해서는 애당초 거론할 것이 못된다. 이미 본래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서도 아직까지 의심을 품고 있어야 하겠는가? 선왕께서 본래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 것을 가지고 지금 만약에 의심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이는 도리상 옳지 못하다. 대신(臺臣)들도 이미 정계(停啓)하였는데, 그 사람의 사생(死生)과 유무(有無)를 지금 와서 어찌 다시 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보다 앞서 신치운(申致雲) 등이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풍지(風旨)에 생각이 미쳐 복합(伏閤)044)  하여 김씨 성(姓)을 가진 궁인(宮人)의 일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일찍이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아들 심정보(沈廷輔)의 아내인 이씨(李氏)에게 말하기를,
"궁중(宮中)에 진실로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주상(主上)이 어찌 윤허하지 아니하였겠으며, 나도 어찌 분명하게 조사해서 출부하지 아니하였겠는가? 그러나 궁중에 진실로 그런 사람이 없는데 외정(外廷)에서 고집하여 그치지 않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이씨는 곧 이진유(李眞儒)의 고모이므로, 이진유가 그 말을 듣고는 다시 그 논의를 주장하지 아니하였다. 이명언(李明彦)은 곧 이진유의 혈당(血黨)이므로 그 말을 듣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인데, 지금 거짓으로 모르는 척하며 또다시 그 일을 확대시켜 공제(公除) 전에 옛 관례를 무시하고 혹은 아뢰며, 혹은 대답하면서 혈전(血戰)의 계책을 삼고 있으니, 식자(識者)가 이를 걱정하였다.

 

9월 13일 계축

조원명(趙遠命)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9월 15일 을묘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9월 16일 병진

밤 1경(一更)에서 3경까지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엄숙한 여막(廬幕)에서 공손하게 묵묵히 있는 가운데 하늘의 경고(警告)가 정녕(丁寧)하니,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 그윽한 곳에 홀로 계시는 중에서도 항상 상제(上帝)를 대한 듯이 하셨으나, 언어(言語)와 문자(文字)를 발표하실 적에 털끝만큼이라도 성실하지 못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아! 나라의 근본은 곤궁(困窮)하여 단 하루도 보전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고, 나라의 저축은 바닥이 나서 몇달 동안 지탱할 자본이 없고, 사람의 마음은 허물어지고 조정의 의논은 어긋나고 있으며, 기강(紀綱)은 해이해져 법을 지키는 사람이 적고, 겉치레만이 앞서서 진실한 기풍이 없는데, 이를 바꿀 수 있는 계기는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재앙의 경책(警責)으로 인하여 더욱 조심하되, 오직 한 생각이라도 혹시 진실에 부족함이 있거나 한 가지 일이라도 혹시 겉치레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서로를 수성(修省)하는 뜻으로 군신(群臣)을 책려(責勵)해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습관을 없애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하늘이 인애(仁愛)하여 이와 같이 경고하셨는데, 자신에게 돌이켜 반성하지 못한다면 이는 하늘이 사람에게 경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현재 폐단을 구제하려면 겉치레를 없애고 성실함을 힘써야 하는데, 이는 동자(董子)045)                  의 이른바, ‘주(周)나라의 문(文)을 약간 줄이고 하(夏)나라의 충(忠)을 숭상해야 한다.’는 것이니, 경(卿) 등은 힘써 그 성실을 다하여 나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도 차자(箚子)를 올려 힘써야 할 것을 아뢰었는데,
‘1. 하늘을 공경하고[敬天],
2. 그 백성을 근면(勤勉)하게 하고[勤民],
3. 말을 받아들이고[納言],
4. 학문을 힘쓰고[懋學],
5.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敦孝友],
6.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고[崇節儉],
7. 궁궐을 엄격하게 단속하고[嚴宮禁],
8. 간사함과 정직함을 분변하는[卞邪正]’ 것이었다. 그 간사함과 정직함을 분변하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간사한 자를 멀리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크게 경계해야 하는 것이고, 어진이를 가까이 하는 것은 나라를 일으키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간사한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오직 뜻을 받드는 것만을 충(忠)으로 여기고 순종하는 것만을 공경으로 여기지만, 올바른 사람은 그와 반대로서, 일에 따라 바로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혹 비방에 가깝게 되고, 예(禮)로써 진퇴(進退)하므로 혹 교만하다고 의심하는데, 중주(中主) 이하는 분변하기가 어렵습니다. 구양수(歐陽修)의 《붕당론(朋黨論)》과 주자(朱子)의 《여류정서(與留正書)》에 보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정상(情狀)을 설명한 것이 더욱 자세하고 통쾌합니다. 한 통을 등사하여 좌우(座右)에 두고 보게 되면 그 간사함과 정직함을 분변하는 방법에 있어서 10의 8, 9분은 착오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체념(體念)하겠다."
라고 비답하고, 이어 차자의 원본을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어 아침 저녁으로 보고서 경성(警省)하는 명(銘)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박필몽(朴弼夢)이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이를 주관했는데, 차자 중에서 간사함과 정직함을 분변해야 한다고 한 것은 대개 뜻한 바가 있어서 한 말이었으나, 임금이 그 뜻을 말없이 살피고 일부러 경성(警省)을 핑계삼아 그 차자를 머물러 두니, 박필몽은 그로 인하여 더욱 의구심을 품었다.

 

산릉(山陵)을 중량포(中梁浦)에 정하였다. 처음에 총호사(摠護使) 이광좌(李光佐)가 도감 당상(都監堂上)과 감여사(堪輿師) 11명을 거느리고 산릉(山陵)의 길지(吉地)를 두루 구하다가 마침내 구영릉(舊寧陵)·중량포(中粱浦)·용인(龍仁)·교하(交河)·왕십리(往十里) 등 다섯 곳을 선정하였는데, 이광좌는 구영릉을 주장하고, 도감 당상 김일경(金一鏡)·이사상(李師尙) 등은 중량포를 주장하였으며, 이진검(李眞儉)은 양설(兩說)을 가지고 망설이다가 김일경의 주장에 편을 들었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구영릉은 건원릉(健元陵)의 국내(局內)에 있는데, 옛부터 감여가(堪輿家)에게 일컬어졌었습니다. 비록 《기해일기(己亥日記)》를 보더라도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이후원(李厚源)·이시백(李時白)이 모두 대단히 일컬었으며, 그후 천릉(遷陵)할 적에도 봉축(封築)에 틈이 있다고 말하였으나 풍수(風水)가 나쁘다고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구영릉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의논은 모두 우리 나라에서 천릉한 장소는 다시 쓰는 전례가 없다고 하니, 오직 성상께서 결정하실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든 신하에게 하문(下問)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이 말하기를,
"비록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이라 하더라도 천폄(遷窆)한 장소에다가 그 어버이를 장사지내려고 하지는 않는데, 더구나 국릉(國陵)이겠습니까? 모든 신하들은 중량포를 주장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묻기를,
"용인·교하·왕십리는 어떠한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용인·교하의 객사(客舍) 뒤는 지사(地師)들이 많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조(宣祖)의 산릉을 수원(水原) 읍내(邑內)에 정하려고 하였을 적에 신의 고조부(高祖父)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그것은 선왕조(先王朝)에서 백성을 애휼하는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쓰지 아니하였으니, 돌이켜 보건대, 전하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이광좌와 도감의 여러 당상에게 명하여 다시 중량포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모두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래서 대비(大妃)에게 아뢰어 마침내 중량포로 결정하고, 이광좌에게 명하여 다시 가서 재혈(裁穴)하게 하였다. 이튿날 임금이 재궁(梓宮)에 칠을 더하는 것을 보기 위하여 빈전(殯殿)에 임했는데, 도감 당상 이명언(李明彦)이 아뢰기를,
"옛날에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중 무학(無學)을 거느리고 먼저 한양(漢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다음에 오릉(五陵)을 정하고 돌아올 적에 능 뒤의 작은 고개에 이르러 ‘망우(忘憂)’라는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구영릉(舊寧陵)을 옮긴 다음에 지사(地師) 반호의(潘好義)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천릉(遷陵)하나, 다음에 반드시 다시 쓸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천릉할 때를 당하여 토색(土色)이 매우 아름다운 것을 보았고 여러 지사들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였으나, 다음날 다시 쓰게 될 것을 생각하여 모두 그 곳의 흙으로 그 구광(舊壙)을 채웠다고 합니다. 지금 외부의 의논이 구영릉을 버린 것을 가지고 대다수가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구영릉을 보았는가?"
하니, 이명언이 대답하기를,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판윤(判尹) 심단(沈壇)의 말을 들으니, 고(故) 현감(縣監) 이현치(李玄緻)가 본래 풍수(風水)를 잘 알았는데, 신릉(新陵)을 좋다고 하지 아니하였으며, 지금에 나만치(羅晩致)도 대단하게 일컫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를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산릉(山陵)은 사체(事體)가 중요하다, 총호사(摠護使)가 여러 번 보았으나 결정을 못하였고, 나도 감히 독단(獨斷)할 수가 없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는 3백 년 동안 천릉한 곳에 다시 쓴 전례가 없고, 새 능 자리를 다시 정하는 것은 국체(國體)가 중대하다. 그러므로 설령 도헌(都憲)에게 의견이 있었으면, 총호사가 떠나기 전에 도헌도 대궐 안에 있었으니 대면(對面)을 청하여 강력하게 말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미 정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이의(異議)를 제기하고 있으니, 내가 언로(言路)를 막겠다는 것이 아니라 경솔한 실수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승지(承旨)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을 산릉(山陵) 일 때문에 문비(問備)046)  하는 것은 아마도 미안한 일인 듯하니, 청컨대, 그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명언(李明彦)은 곧 김일경(金一鏡)의 우익(羽翼)으로, 산릉 일에 대하여 그만이 홀로 이론(異論)을 제기하였으니, 그의 참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고, 일이 정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빈전(殯殿)에 입시(入侍)하여 말하였는데, 어찌 김일경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했겠는가? 대저 구영릉(舊寧陵)을 여주(驪州)로 옮겼을 적에 일부 사람들은 당시에 일을 담당했던 사람에게 까닭없이 옮긴 죄를 묻고자 하였었는데, 지금은 앞에서 막고 뒤에는 의심하며 갑이 옳고 을은 그르다고 하다가, 마침내 새 능(陵)은 중량포(中粱浦)에 정하였다. 그리고 구영릉은 50여 년이나 아껴두었다가, 드디어 영조(英祖)의 원릉(元陵)이 되어 한결같이 반호의(潘好義)의 말과 같이 되니, 그것이 어찌 인력(人力)이겠는가? 하늘의 뜻이다. 그리고 붕당(朋黨)의 화는 경탈(傾奪)이 부족하여 살육(殺戮)하는 데 이르고, 살육이 부족하여 선왕(先王)의 재궁(梓宮)으로 하여금 길지(吉地)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없게 하였으니, 바로 하늘에 닿은 말세의 폐단에 대해 시대를 근심하고 세상을 구하려는 군자는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04면
【분류】왕실-경연(經筵)


[註 046] 문비(問備) : 관원에게 비위(非違)의 혐의가 있을 때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글로 묻고 힐문받은 자가 승복하거나 변명하는 사연을 갖추어 답하는 것. 사헌부에서 힐문하고 피의자가 답하는 글은 함서(緘書)로 왕래하므로, 또한 함문(緘問)·함답(緘答)이라 함.
사신은 논한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명언(李明彦)은 곧 김일경(金一鏡)의 우익(羽翼)으로, 산릉 일에 대하여 그만이 홀로 이론(異論)을 제기하였으니, 그의 참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고, 일이 정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빈전(殯殿)에 입시(入侍)하여 말하였는데, 어찌 김일경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했겠는가? 대저 구영릉(舊寧陵)을 여주(驪州)로 옮겼을 적에 일부 사람들은 당시에 일을 담당했던 사람에게 까닭없이 옮긴 죄를 묻고자 하였었는데, 지금은 앞에서 막고 뒤에는 의심하며 갑이 옳고 을은 그르다고 하다가, 마침내 새 능(陵)은 중량포(中粱浦)에 정하였다. 그리고 구영릉은 50여 년이나 아껴두었다가, 드디어 영조(英祖)의 원릉(元陵)이 되어 한결같이 반호의(潘好義)의 말과 같이 되니, 그것이 어찌 인력(人力)이겠는가? 하늘의 뜻이다. 그리고 붕당(朋黨)의 화는 경탈(傾奪)이 부족하여 살육(殺戮)하는 데 이르고, 살육이 부족하여 선왕(先王)의 재궁(梓宮)으로 하여금 길지(吉地)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없게 하였으니, 바로 하늘에 닿은 말세의 폐단에 대해 시대를 근심하고 세상을 구하려는 군자는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9월 18일 무오

밤 2경(二更)에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尺) 정도였으며, 빛깔은 흰색이었다.

 

총호사(摠護使) 이광좌(李光佐)가 산릉(山陵)에 가서 재혈(裁穴)하고 돌아와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천둥의 이변을 근심하고 또 겉치레가 앞서는 폐단을 염려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몸소 솔선수범(率先垂範)함이 전하에게 있으니, 모든 일에 진실을 힘쓰고 질(質)을 숭상하여 그 근본을 얻게 되면 자연 균형이 잡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관안(官案)을 살펴보았더니, 각사(各司)에 구임(久任)047)  하는 관직이 있는데, 현재는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세종(世宗)과 성종(成宗)의 태평스러웠던 정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는데, 그때는 재주가 형판(刑判)을 감당할 만하면 형판을 구임시키고 재주가 승지(承旨)를 감당할 만하면 승지를 구임시켰으며, 그 재주가 합당치 않으면 비록 친애(親愛)하는 신하라 하더라도 망령되게 벼슬을 제수한 적이 없었습니다. 유호인(兪好仁)이 근친(覲親)하기 위해 조령(鳥嶺)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도중에서 지은 시(詩)를 가져오게 하여 이를 읽다가, ‘북으로 바라보니 임금과 신하가 떨어졌는데,[北望君臣隔] 남으로 내려오니 어머니와 자식은 함께하게 되었네.[南來母子同]’라는 한 구(句)를 읽고서는 크게 칭찬하였으니, 그 예사롭지 않게 총애한 것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유호인의 벼슬은 옥서(玉書)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아니하여 모든 관직을 아침에 제수했다가 저녁에 천전(遷轉)시키곤 합니다. 또 승지 서거정(徐居正) 같은 경우는 6, 7년 동안이나 재임(在任)하였는데, 지금은 혹 4, 5개월만 차게 되면 반드시 체직(遞職)을 꾀하고야 마니, 오히려 어떻게 직사(職事)를 경리(經理)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미 그 요체를 터득하였으니, 질(質)을 숭상하여 구임(久任)시키면, 이는 치도(治道)에 있어서 반 이상의 성과를 올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9월 20일 경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9월 21일 신유

밤 2경(二更)에 유성(流星)이 견우성(牽牛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尺)이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진검(李眞儉)이 공제(公除) 기간이 이미 지났다 하여 사친(私親)을 존봉(尊奉)하는 예(禮)를 청하며 말하기를,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으며, 인조(仁祖) 때에는 원종 대왕(元宗大王)을 추숭(追崇)한 뒤에도 인빈(仁嬪)은 다만 평소의 작호(爵號)만 썼습니다. 그리고 대행왕(大行王) 때에 이르러서는 선왕조(先王朝)의 작호를 쓸 수가 없으므로 별도로 명호(名號)를 만들었으나, 이를 전례로 삼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선왕조의 작호에다가 ‘대(大)’자를 첨가하기를 청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어머니는 아들의 귀(貴)한 것을 따라 귀(貴)해진다고 선유(先儒)가 이를 논하였으나, 맹무백(孟武伯)이 효(孝)를 물었을 적에 공자(孔子)는, ‘부모의 뜻을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나의 사친(私親)은 평소에 소심하고 신중하였으므로 반드시 선왕(先王)이 내린 작호(爵號)를 마음으로 편하게 여길 것이니, 나도 소심하고 신중한 것으로 사친에게 보답하여 인빈의 고사(故事)에 견주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은 매양 이러한 의리(義理)에 대해서 명확하게 분변하지 않았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환하게 밝히셨으니, 그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감복(感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당을 세워 관(官)에서 제사를 지내고 묘역(墓域)을 넓히고 수호인(守護人)을 두는 것은 한결같이 인빈(仁嬪)의 전례에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사당은 내가 불초(不肖)함으로 인하여 3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한데다가 나라에 대장(大葬)이 있으니 인산(因山) 후에 백성의 힘이 조금 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또다시 상석(象石)을 증설(增設)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석은 굳이 증설할 필요가 없다. 듣건대, 선조(宣祖) 때에 인흥군(仁興君)의 어머니인 정빈(靜嬪)의 묘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고 하니, 나 또한 사친(私親)의 묘에 신도비를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돌을 채취하려면 아마도 백성을 괴롭힐 것 같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그 값을 후하게 치르고 매수(買收)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말하기를,
"내가 왕자(王子)로 있을 적에, 지금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있는 이진망(李眞望)이 사부(師傅)였었다. 《소학(小學)》을 강독(講讀)하다가, ‘친척(親戚)이 이미 죽으면 비록 효도하고자 한들 누구에게 효도를 할 것이며, 나이 늙은 다음에는 비록 공경을 하고자 한들 누구에게 공경하겠는가?’라고 한 곳에 이르러 이진망이 눈물을 흘리곤 하였는데, 지금 나의 마음도 그렇다."
하고, 마침내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왕자(王子)는 6세가 되면 봉작(封爵)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봉호는 반드시 안으로부터 정해서 내리는 것이되, 교양(敎養)을 제때에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단정한 선비를 골라서 사부(師傅)로 삼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말하기를, ‘짐(朕)의 아들이 어찌 감히 선제(先帝)의 아들과 같겠는가?’ 하였는데, 6세에 봉작(封爵)하는 것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여러 종실(宗室)은 반드시 15세가 되어야 봉작하니, 그 나이가 되기를 기다려서 사부를 두는 것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자,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지금 왕자 한 사람뿐이니, 한나라 명제의 일과는 같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어릴 때에 교양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공력(功力)이 갑절이나 들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1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다. 모든 신하들이 다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지나치게 겸손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예양(禮讓)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겸손함을 버리고 어떻게 하겠는가? 더구나 이 일은 겸손한 것이 아니다. 3년만 기다리게 되면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에 있어 두 가지가 다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또 말하기를,
"부부인(府夫人)은 본래 늠록(廩祿)이 없으므로 왕명(王命)이 있어야 주는 것입니다. 듣건대, 부부인이 시골에 있다고 하는데, 서울 집으로 모셔올 적에 연도(沿途)의 지공(支供)을 전례를 참고하여 시행하는 일을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시고, 월름(月廩) 또한 전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전례를 상고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복상(卜相)048)  을 명하여 유봉휘(柳鳳輝)를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옛 관례에 공제(公除) 이튿날에는 반드시 개정(開政)049)  하여 관직(官職)을 제수(除授)했는데, 이날이 마침 국기 재계(國忌齋戒)와 상치(相値)되므로 임금이 국기(國忌)가 지난 다음에 개정하라고 명하고, 이어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를 불러 복상(卜相)하게 하니, 이광좌가 혼자 복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두 번이나 사양했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이광좌가 마침내 청대(請對)하고 말하기를,
"숙종(肅宗)갑술년050)  에 좌의정(左議政)·우의정(右議政)이 모두 결원(缺員)이 되었을 때 수상(首相) 남구만(南九萬)이, ‘두 사람만을 새로 선발하는 것은 단부(單付)051)  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니, 마침내 세 사람을 매복(枚卜)하게 하였습니다. 선왕조(先王朝) 계묘년052)  에 신(臣)이 복상(卜相)에 참여했을 적에도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이, ‘한 사람만을 새로 뽑는 것은 단부(單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고, 청대(請對)하여 품지(稟旨)한 다음에 비로소 두 사람을 매복하게 했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한 사람을 더 추천하여 갑술년과 계묘년의 전례와 같게 하소서."
하니, 그렇게 하라고 윤허하였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왕비(王妃)의 부모를 봉작(封爵)하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비록 공제(公除) 전에 거행한다고 하더라도 불가(不可)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개정(開政)하기를 기다려서 거행하겠다는 하교(下敎)가 있었다고 하니, 그것은 너무 늦습니다. 청컨대, 복상(卜相)을 할 때에 증작(贈爵)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 역사를 두루 상고해 보건대, 누구로 사도(司徒)나 사공(司空)을 삼았다고 한다면 그 다스려짐을 볼 수 있겠지만, 국구(國舅)에게 봉작하는 것을 복상하는 일과 함께 거행한다면 이는 후세 사람에게 본보기가 될 수 없다. 약간 선후(先後)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물러나와 유봉휘(柳鳳輝)·이조(李肇)를 매복(枚卜)하였는데, 유봉휘가 우의정이 되고 이광좌는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조태억(趙泰億)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오명항(吳命恒)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9월 22일 임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나는 성효(誠孝)가 천박(淺薄)하여 5년 안에 천붕(天崩)053)                  의 애통함을 두 번이나 당했는데, 가슴을 치며 울부짖어도 미치지 못하여 마음이 찢어지는 것과 같았다. 지금 재능도 없고 덕도 없으면서 외람되게 이 자리를 이어받고 나니 밤낮없이 두려운 마음으로 마치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것 같다. 바야흐로 나라 일이 위태롭고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진 때를 당했으니, 장차 어떤 계책으로 이를 구제(救濟)해야 하겠는가? 아! 임금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다. 요즈음 전국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에게는 아침저녁의 밑천이 없는데, 의탁할 데가 없어서 떠도는 사람에게 신포(身布)를 침범해 징수하여 혹은 인족(隣族)이나 혹은 백골(白骨)에게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한 사람이 온 문중(門中)의 역사(役事)를 겸하고 있다 하니, 슬프다, 우리 백성들이 살아서는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죽은 다음에도 신역(身役)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두 왕조(王朝)에서 보살펴온 백성들이 장차 다 죽고야 말겠구나. 생각이 이에 이르니 먹을 것이 어찌 목에 넘어가겠는가? 양역청(良役廳)이라고 이름을 정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진대, 한두 달 동안에 전연 타당한 대책이 없어 백성의 목숨이 끊기게 되었으니, 후회한들 어찌 미치겠는가마는, 관장할 사람을 마땅히 곧 강구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아! 그대들 중외(中外)의 신료(臣僚)는 선조(先朝)에서 백성을 사랑하던 뜻을 본받고 나의 간곡(懇曲)한 말을 생각하여 나라의 간우(艱虞)를 폐부(肺腑)의 병으로 여기고 백성의 괴로움을 한몸의 일로 여긴다면, 사사로운 뜻은 모두 제거되고 공변된 마음이 다시 밝아질 것이니, 송(宋)나라 현인(賢人)의 서명(西銘)054)                  이 오늘의 약석(藥石)이 될 것이다.
아! 움막집에 사는 백성이 비록 애통한 마음을 구중궁궐에 한 번 진달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될 수가 있겠는가? 위로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목민관(牧民官)에 이르기까지 만약 구활(救活)할 대책이 있으면 모름지기 그 뜻을 다하도록 하라. 말은 비록 갑과 을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땅히 참작할 것이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본받아 지극히 기대하는 일을 저비리지 말도록 하라. 승지(承旨)는 이를 대신 초안(草案)하여 중외(中外)에 선포(宣布)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그것을 비망기(備忘記)에 올려 중외에 널리 알리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는데, 세 번 계청하니, 비로소 따랐다.

 

서종제(徐宗悌)를 우의정(右議政)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여 관(官)에서 제수(祭需)를 공급하고 묘(墓)를 지키는 군사를 두게 했는데, 이는 왕비(王妃)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심단(沈檀)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정제(李廷濟)를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이중술(李重述)을 승지(承旨)로, 윤회(尹會)를 집의(執義)로, 김상규(金尙奎)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에게 돈유(敦諭)하여 함께 오게 했으나, 정제두가 병이 들어서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소(上疏)하여 사관(史官)을 돌아오게 하기를 청하고, 끝에 복제(服制)에 대해 논(論)하기를,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복제에 대해서는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 진실로 옛 예경(禮經)의 최마(衰麻)의 복제를 취하여 관(冠)·상(裳)·최(衰)·질(絰)·장(杖)·구(屨)를 한결같이 옛 제도와 같이 하였으므로, 그 제작의 훌륭함은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경자년055)  의 대상(大喪) 절목(節目)에는, 최복(衰服)·상복(裳服)은 성복(成服)한 다음에 보관해 두었다가 배제(陪祭)할 때에만 사용하고, 백관의 공복(公服)은 모두 가장자리를 꿰맨 포단령(布團領)·포과 사모(布裹紗帽)·포과 각대(布裹角帶)를 착용(着用)하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를 살펴보건대, 백관은 성복한 다음에 최복(衰服)으로 그대로 종사(從事)하며, 장례전까지 한 가지도 변동하는 것이 없으나, 졸곡(卒哭)에 이르러 비로소 백포의(白布衣)·포사모(布紗帽)·포각대(布角帶)로 변개(變改)하여 시사복(視事服)을 삼았는데, 이는 고례(古禮)의 ‘공최수갈(功衰受葛)’056)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신(朝臣)들은 성복한 날부터 최질(衰絰)을 쓰지 않고 즉시 공복(公服)으로 바꾸어 입고는 포모(布帽)와 포대(布帶) 차림으로 조당(朝堂)에 나와 앉아 있으니, 《오례의》의 뜻에 견주어 경중(輕重)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선대왕(先大王)께서 옛 의의를 중하게 취한 의도와는 도리어 도치(倒置)되고 있으니, 신은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삼가 원하건대, 다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묘당(廟堂)과 상의하여 《오례의》의 구례(舊禮)와 같이 혹은 참최(斬衰)·마대(麻帶)로 공복(公服)을 만들어 입고 시사(視事)하게 하고, 삼대(三代) 때의 일과 같이 혹은 최(衰)·상(裳)·관(冠)의 복장으로 시사하게 하였다가, 대장(大葬)을 치르고 졸곡(卒哭)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포의(布衣)·포모(布帽)·포대(布帶)로 바꾸게 하소서.
《오례의》에 ‘전함(前銜) 3품(三品) 이하는 생원(生員)·진사(進士)·생도(生徒)와 같이 백의(白衣)·백립(白笠)·백대(白帶)를 착용한다.’고 했는데, 이는 옛 《예경(禮經)》의 자최(齊衰) 3월장(三月章)에서 이른바, ‘벼슬을 그만둔 자는 백성과 같다.’라는 것입니다. 경자년에 제도를 고칠 때 마침내 그러한 유(類)는 모두 참최 3년에 삽입시켜서 그 최마(衰麻)가 백관과 조금도 분별(分別)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고례(古禮)가 아니며, 또 지금 법으로서 근거삼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마땅히 《예경》의 자최 3월의 뜻을 취하여 포의(布衣)·포립(布笠)·포대(布帶)로 성복(成服)하고 졸곡에 이르러 백의(白衣)·백립(白笠)·백대(白帶)로 바꾸면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지금은 이미 성복을 한 다음이므로 변통하기 어려울 것이니, 마땅히 졸곡을 기다린 다음에 변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례의》는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한 왕조(王朝)의 예를 만든 것으로서 비록 섬세한 절차라 하더라도 적절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후세(後世)에 망령되게 의논하는 자가 때에 따라 증가하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하여 대다수가 본래의 뜻을 많이 상실하였습니다. 경자년의 대상(大喪) 때에 갑자기,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임금을 위해 3년복을 입는다.’는 말이 나와 예의(禮儀)의 본뜻을 무너뜨리고 주자(朱子)의 학설을 변환(變換)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옛 제도를 변개하여 문란하게 하였으니, 조종(祖宗)의 구례(舊禮)는 씻은 듯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성상(聖上)께서 만약 《오례의》와 옛 《예경》에서 취하여 반복해서 참고하시고 예를 아는 사람에게 널리 물어서 고증하시면, 필부(匹夫)로서 망령되게 선왕(先王)의 예를 거론하고 경상(經常)을 변개(變改)하여 어지럽히는 자는 그 죄가 용서될 바 없음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大臣)과 의논해서 폼처(稟處)하게 하였으며, 사관(史官)을 돌아오게 하여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선비가 세상에 나오거나 은퇴하거나, 말을 하거나 입을 다무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합당하게 해야 할 따름이다. 정제두(鄭齊斗)가 이미 사진(仕進)하고 싶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글을 썼는가? 진실로 글을 쓰기로 했으면 새 임금이 대를 이었으니 말할 만한 일이 매우 많은데, 그런 것은 버려 두고서 다만 전날에 헌의(獻議)하였던 나머지를 주워 모아 지리하게 설명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오례의》는 세조(世祖) 때에 시작하여 성종(成宗) 때에 완성된 것인데, 이제 세종조의 책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그 고증도 상세하지 못한 것이다. 어찌 그의 학문이 격물(格物)·치지(致知)에 힘쓰지 않은 까닭에 정치의 본체에 밝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06면
【분류】인사(人事) / 정론-정론(政論) / 왕실(王室)


[註 055] 경자년 : 1720 숙종 46년.[註 056] ‘공최수갈(功衰受葛)’ : 활동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3년상일 경우 장례를 치른 다음에 대공(大功:9월복)에 해당하는 최복(衰服) 차림을 하는데, 이를 ‘공최(功衰)’라고 하며, 거친 마포(麻布) 대신 갈포(葛布)를 사용하는데, 이를 ‘수갈(受葛)’이라 함.
사신은 논한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선비가 세상에 나오거나 은퇴하거나, 말을 하거나 입을 다무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합당하게 해야 할 따름이다. 정제두(鄭齊斗)가 이미 사진(仕進)하고 싶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글을 썼는가? 진실로 글을 쓰기로 했으면 새 임금이 대를 이었으니 말할 만한 일이 매우 많은데, 그런 것은 버려 두고서 다만 전날에 헌의(獻議)하였던 나머지를 주워 모아 지리하게 설명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오례의》는 세조(世祖) 때에 시작하여 성종(成宗) 때에 완성된 것인데, 이제 세종조의 책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그 고증도 상세하지 못한 것이다. 어찌 그의 학문이 격물(格物)·치지(致知)에 힘쓰지 않은 까닭에 정치의 본체에 밝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9월 23일 계해

밤 4경(四更)에 달이 헌원성(軒轅星) 좌각(左角)에 들어갔다.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가 치사(致仕)057)  하였다. 최규서는 숙종(肅宗)신묘년058)  에 특별히 판의금(判義禁)을 제수하여 조정에 나오라고 여러 번 신칙(申飭)하였으나 마침내 오지 아니하였고, 대행왕(大行王) 때에는 정승의 반열에 들어가 수상(首相)에까지 승진되었으나 또한 오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본래부터 그 사람을 존중해 왔었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성복(成服)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그 실상을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에 비해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이키기 더욱 어렵다. 내가 어떤 직사(職事)로 상대(相待)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얼굴이나 한번 보기를 원할 뿐이다. 옛날 엄자릉(嚴子陵)은 비록 조정에 있지 아니하였으나 능히 한(漢)나라의 운명을 붙들었으니,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비록 사진(仕進)하지 않더라도 그 공효(功效)가 큰 것이다. 영상(領相)은 일찍이 빈객(賓客)과 사부(師傅)를 지냈으니 어찌 고인(故人)과 차이가 있겠는가? 나는 포의(布衣)의 야인(野人) 복장으로 입시(入侍)케 하여 만나 보고자 한다."
하였다. 그래서 그날 밤에 성문(城門)을 열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게 했는데, 사지(辭旨)가 간절하니, 최규서가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서계(書啓)하여 정승의 직임을 해면해 줄 것을 애걸하니, 행 사직(行司直)으로 등연(登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제(公除)가 이미 지나니, 최규서가 상소하기를,
"비록 서추(西樞)를 제수하셨다 하나, 그래도 바로 원임 대신(原任大臣)입니다. 선왕조(先王朝)에서 행공(行公)하지 않다가 오늘날에 행공한다는 것은 선왕조에서 끝내 폐사(廢仕)했던 뜻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봉조하(奉朝賀)059)   삼자함(三字銜)을 하사(下賜)하시어 몸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오히려 윤허하지 않고 여러 번 빈전(殯殿)에 들어오라고 명하니, 최규서가 마침내 조정에 나와 군함(軍銜)060)  으로 숙배(肅拜)하려고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품계(稟啓)하였으나, 임금이 군함으로 숙배하도록 윤허하고, 무망각(无妄閣)에서 인견(引見)하되 곡배(曲拜)와 기복례(起伏禮)를 제거(除去)하라고 명하였다. 최규서가 입시(入侍)하자, 임금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는데, 최규서도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규면(規勉)할 말을 물었는데, 최규서가 대답하기를,
"전하(殿下)의 효제(孝悌)에 대한 덕망은 비록 깊은 산골짝의 우부(愚夫)·우부(愚婦)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전송하면서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효경(孝經)》을 살펴보면, 효도에는 천자(天子)·제후(諸侯)·경대부(卿大夫)·사서인(士庶人)의 구분이 있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제왕(帝王)의 효(孝)로써 스스로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간략하면서도 뜻은 곡진하다."
하였다. 또 학문의 공부를 물으니, 최규서가 대답하기를,
"군자(君子)는 중후(重厚)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는 것이니, 학문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고 모든 정령(政令)과 하는 일들을 모두 중후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람이 기품(氣稟)은 각각 편벽된 곳이 있으므로 영명(英明)함이 크게 지나치면 반드시 중후함이 부족합니다. 신은 중후함을 가지고 전하에게 힘쓰시라고 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절실한 말이다."
하였다. 또 용도를 조절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를 물으니, 최규서가 대답하기를,
"국초(國初)부터 지금까지 나라의 계책과 백성의 생산이 점점 전만 못한 것은 토지(土地)가 황폐한 때문이 아니며 백성의 수가 적기 때문도 아닙니다. 모든 일에 옛날에 없던 것이 요즈음 생긴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훈련 도감(訓鍊都監) 또한 국초에는 없던 것이며, 그 밖에 새로 설치한 몇 개의 군문(軍門)과 각사(各司)의 추종(騶從) 또한 옛날에 없었으나 오늘날 새로 생긴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감영(監營)과 병영(兵營) 및 군읍(郡邑)에도 새로 설치한 것이 있습니다. 무릇 농토를 합하면 부자가 되지만, 재물을 나누면[分貝]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가(私家)에서는 자손이 번성하여 재산을 갈라 나누어 사니, 어찌 가난하고 궁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듣건대,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하여 변통하기 위한 장구한 대책을 세우려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쪽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서쪽을 보완하는 것은 헤어진 옷을 꿰매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그 성효(成效)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 진실된 마음으로 진실한 정치를 실행하시되, 하루이틀 끊임없이 노력하시면 일계(日計)는 비록 부족하다 하더라도 월계(月計)에서는 반드시 남을 것이니, 그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입니다."
하였다. 당시 이광좌(李光佐)가 건의하여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제도를 만들자고 청하였으므로 최규서가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더욱 절실하고, 내용이 더욱 충실하다."
하였다. 최규서가 이어서 세자(世子)를 책봉(冊封)하고 사부(師傅)를 선발하여 가르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인산(因山)이 끝나기를 기다려 시행하겠다고 윤허하였다. 최규서가 또다시 경기(京畿) 지역에 흉년이 들었으니 급재(給災)061)  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치사(致仕)를 윤허하고 서울에 머물러 도와주기를 희망했으나, 최규서는 병을 이유로 이를 사양하고 번거로움을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있을 만한 공해(公廨)062)  를 골라 주고, 월름(月廩)과 땔감을 잇대어 주며 외부 인사의 시끄러움을 금하게 하였으나, 얼마 있지 아니하여 최규서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간(司諫) 김상규(金尙奎)가 상소하기를,
"정승의 직임(職任)을 띠고 있는 몸으로서 군함(軍銜)으로 들어가 숙배하였으니, 진실로 나라의 체통을 허물어뜨린 것입니다. 승지(承旨) 조원명(趙遠命)은 전례에 의하여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마땅히 경책(警責)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그의 평일의 고심(苦心)을 빼앗지 않으려는 뜻이었다. 어찌 승정원을 문책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24일 갑자

밤 2경(二更)에 유성(流星)이 여성(女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을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尺)쯤이었으며, 빛깔이 붉었다.

 

승지(承旨) 유수(柳綬)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에 가서 수도안(囚徒案)을 열람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 19명을 석방하고, 그 나머지 각 해사(該司)의 구류인(拘留人)은 즉일로 판결하여 석방하도록 하였다.

 

사대부(士大夫)들이 백성의 집을 함부로 점유하는 것을 거듭 금지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대부들이 혹 싼값에 백성의 집을 강제로 매입하거나 혹은 백성의 집에 임대(賃貸)하여 들였다가 오래도록 돌려주지 않았는데, 숙종(肅宗)이 그 폐단을 자세히 알고 엄중하게 금하도록 하고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때때로 백성의 집을 빼앗은 여부에 대해 아뢰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한성부에서 없다고 아뢰니, 임금이 판하(判下)하기를,
"진실로 없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깊숙한 구중궁궐 속에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경조(京兆)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적간(摘奸)하게 하라."
하고, 이어 적간하는 낭관이 여리(閭里)를 소란스럽게 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장령(掌令) 유시모(柳時模)가 계청(啓請)하기를,
"혼전(魂殿)·산릉(山陵)의 향수(享需)를 감봉(監捧)하는 액례(掖隷)의 무리 가운데 뇌물을 받고 점퇴(點退)시킨 자는 법관에 회부시켜 벌을 주거나 유배(流配)시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태억(趙泰億)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가 상소하기를,
"성상의 하유(下諭)가 정녕하여 심복(心腹)을 모두 털어놓았으므로 신하들이 환히 깨닫고 큰 의논을 즉시 중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가지 흉계(凶計)를 도모한 것중에 역비(逆婢)도 그 중에 끼었는데, 선왕(先王)의 비지(批旨) 중에, ‘진실로 없었다.’라고 한 하교(下敎)는 김씨(金氏) 성을 가진 궁인(宮人)을 가리킨 듯하며, 어선(御膳)을 관장하는 사람도 아울러 없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무릇 어선은 반드시 주장하여 감독하는 자가 있고, 주장하여 감독하는 자는 각각 직숙하는 날이 있으니, 굳이 누구누구를 막론하고 그 날짜에 누가 직숙하였다는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쟁집(爭執)하지 못하고 혼미한 상태에 두고서 좌우(左右)의 가까운 곳에 숨어 있게 하였으니, 벌이 소매 속에 있으면 반드시 사람을 쏘는 것처럼 요사스럽고 간악한 성품을 만에 하나라도 다시 부린다면 종사(宗社)의 근심이 사실상 제거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 그때에 어선을 관장했던 자들은 다소(多少)를 불구하고 한결같이 물리쳐 내쫓아 화근(禍根)을 없애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들으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굳이 그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없는데, 또 어찌 이렇게까지 지나친 염려를 하는가?"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명언(李明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개기(改紀)하셨던 초기에 권강(權綱)을 장악하여 흉역(凶逆)한 무리를 쓸어버리고 선량(善良)한 무리를 등용하였으니,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만약 좌우에서 제대로 협찬(協贊)하였더라면 약간의 치세(治世)를 이루기 어렵지 않았을 것인데, 안일하게 시간을 보냈으므로 이에 신은 더욱 한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소망은 오직 전하께서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여 선왕의 일을 이어가는 데 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근엄하게 상중(喪中)에 계시면서 정령(政令)과 언동(言動)이 순수하여 한결같이 정도(正道)에서 나와 사친(私親)을 더 높이려고 하지 않은 것과 왕자(王子)를 일찍 책봉하지 않으려고 하신 것이 모두 의(義)로써 단안을 내린 것이니, 높으신 식견(識見)은 백왕(百王)에 뛰어나십니다. 그러나 의리는 추구하기가 어렵고 학문은 중단되기가 쉬우니, 반드시 정무(政務)에 임하시는 여가에 때때로 유신(儒臣)을 접견(接見)해서 경전(經傳)의 뜻을 토론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는 요체로 삼으소서.
천지(天地)에는 진실한 덕(德)이 있으므로 만물이 스스로 이루어지고, 임금은 진실한 덕이 있으므로 만사(萬事)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진실한 덕을 잃고 문구(文具)만을 일삼거나 신하를 접대하고 정령(政令)을 베풂에 있어 성실하게 하지 않는다면, 위아래가 어울리지 아니하여 온화하고 태평한 아름다움이 없을 것이며 마음과 뜻이 미덥지 못하여 반환(泮渙)063)                  할 근심이 있게 되어 마침내 국가가 멸망하고야 말 것이니, 문구가 앞서는 폐단은 한결같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임어(臨御)하셔서 4년 동안 한 가지 일도 문구에 가까이한 것이 없었으니, 우리 전하께서는 진실에 힘쓰는 뜻을 깊이 본받으셔서 주(周)나라의 문(文)은 줄이고 하(夏)나라의 충(忠)을 숭상하는 것으로써 신하들을 책면(責勉)하소서.
진실로 전하께서 시신(侍臣)을 대하여 정령을 베푸실 적에 더욱 진실한 덕을 힘쓰시고 성의(誠意)를 쌓도록 힘쓰시되 털끝만큼이라도 거짓된 마음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게 한다면,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어찌 정지(情志)의 미덥지 못함을 근심하겠습니까? 그러나 폐단의 근원이 이미 깊어지고 세속의 풍습이 고질화되었으므로 말이나 문자(文字)로써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전하께서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된 정치를 행함으로써 본보기가 되어 믿고 감동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릇 인재는 각각 능하고 능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군(郡)을 다스리는 데는 충분하면서도 정승이 되기에는 부족한 자가 있고, 문자에는 잘하면서도 정사에는 모자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堯)·순(舜)〉은 직(稷)·설(契)·기(夔)·용(龍)의 어진이와 사악(四岳)과 여러 목민관(牧民官)의 재능이 있는 자에게 각각 직무를 분담하여 시종(始終) 위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인재 등용에 있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방백(方伯)으로 그 적임자를 구하기 어려우면 한 사람이 여러 도(道)를 고루 역임(歷任)하기도 하고, 탁지(度支)064)                  로서 그 적임자를 구하기 어려우면 한 사람이 10년 동안 천전(遷轉)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번 조적(朝籍)에 오르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오직 지망(地望)의 높고 낮음과 자격이 합당한지 여부(與否)만 보고 있으므로, 아침에 전형(銓衡)을 맡았다가 저녁에 병권을 잡고 어제 사송(詞訟)을 담당했다가 오늘은 재부(財賦)를 관장하게 되어 모든 일이 합당함을 잃으며, 밭갈고 베짜는 것이 시의에 어긋나니, 나라 일이 번거롭고 잗단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신중하게 적임자를 선발하고 정밀하게 간선(揀選)하여 구임(久任)시켜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하소서. 지금 한 나라 안에 논의가 네 가지로 나뉘어지고 사의(私意)가 횡행하여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부식(扶植)하고 장려하여 발탁하되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여 물리치므로 침체(沈滯)되어 등용(登用)되지 못하는 자가 항상 3분의 2가 넘으니, 이와 같은데도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악역(惡逆)의 당류(黨類)가 되어 붙좇아 이륜(彛倫)을 멸절(滅絶)시키는 자는 엄하게 배척해 끊어서 엄중하게 막고, 그 밖에 표방(標榜)하는 사이에 비록 다른 구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소융(消融)하고 탕척(蕩滌)하여 한계를 끊고는 그 사람이 쓸 만한 데에 따라서 쓰게 되면, 또한 족히 한 세대의 일을 마무리 지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조정 신하를 신칙하여 붕비(朋比)를 타파(打破)하소서.
아조(我朝)에서 나라를 세운 것은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여 궁금(宮禁)이 엄숙하였으니, 오히려 주(周)나라의 끼친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이래로 인심(人心)이 점점 낮아져서 간사한 문이 크게 열려 뇌물이 방자하게 행해지고 있으니, 은밀한 곳에서 교통(交通)하는 것을 상례(常例)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근원은 이사명(李師命)·민종도(閔宗道)에게서 열렸고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赫)에게서 만연되었는데, 그 여파가 기승을 부리다가 삼수(三手)의 변(變)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이른바 흐르는 물을 막지 않으면 마침내 하늘에까지 치솟게 된다는 것이니, 원컨대, 궁궐에 엄중하게 신칙하여 유경(幽徑)을 막도록 하소서.
나라에 3년 비축이 없으면 나라는 나라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지부(地部)065)                  의 세입(歲入)이 지출하는 데 부족하여 전후로 빌린 것이 쌀 4만 5천 석, 돈 7만 60냥, 무명 70동, 은 3천 냥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산(因山)의 경비와 칙사(勅使)를 접대하는 수용(需用)에 대해서 유사(有司)가 어떻게 할 바를 모른 채 오직 빌리기만을 청하고 있으니, 마치 추위에 떠는 걸인의 가계(家計)와 같습니다. 하관(夏官)066)                  의 봉부동목(封不動木)은 1천 동이 차지 아니하며, 양군색(兩軍色)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수는 무명 15동, 돈 2천 냥인데, 국휼(國恤) 후에 내수사(內需司)에서 계하(啓下)하여 이송(移送)하게 한 무명이 30동, 돈이 3천 냥이었으나 아직 준송(準送)하지 못하였습니다. 선혜청(宣惠廳)은 남아 있는 쌀이 12만 9천 5백 석이고, 전미(田米) 1천 3백 석, 무명이 1천 7백 70동, 돈이 2만 3천 3백 냥입니다. 그런데 국휼에 지출(支出)할 수효가 쌀 5, 6천 석, 은 1천여 냥, 무명 40동, 돈 2만 수천 냥입니다. 그러니 옛사람이 이른바 애통하다는 것은 바로 헐후(歇後)하다는 말입니다.
구시(救時)하는 대책은 다만 용도를 조절하는 데 있고, 용도를 조절하는 방법은 또한 검소함을 숭상하는 데에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선왕(先王)의 검소한 뜻을 본받아 산릉(山陵)의 모든 제전(祭奠)에 힘써 간략하게 하신다면, 아마도 《주례(周禮)》의 ‘간소하게 한다’는 예의 뜻에 거의 부합할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등극(登極)하신 후에 동궁(東宮)에 속한 기인 공물(其人貢物)067)                  을 특명으로 감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누군들 성덕(盛德)을 우러러 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명성 왕후(明聖王后)068)                  ·장렬 왕후(莊烈王后)069)                   양전(兩殿)의 궁인(宮人)으로 각전(各殿)에 이속(移屬)시킨 자가 합계 2백여 명인데, 음식·의복·땔감 등은 그대로 두고 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니, 원컨대, 자성(慈聖)에게 아뢰어 속히 처분을 내리도록 하소서.
백성들이 받는 고통 중에 가장 심한 것은 인족(隣族)의 침징(侵徵)입니다. 우리 숙종 대왕께서는 그러한 폐단에 깊이 진념(軫念)하셔서 반드시 개혁하려고 하시다가 미처 시행하지 못하셨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그 뜻을 계승하여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하고 이를 강구하려고 하였으나 유사(有司)의 신하들이 세월만 지체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성상께서 애통해하는 하교(下敎)를 가장 먼저 내리시면서 신하들의 도움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지금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는 방법은 신포(身布)를 감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데, 신포를 감하는 방법은 쓸데없는 병력을 줄이는 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없습니다. 대개 오위(五衞)를 혁파하고부터 처음으로 훈련 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 두 군문(軍門)을 두게 되었는데, 또다시 금위영(禁衛營)·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의 병영(兵營)을 두게 되자 군액(軍額)이 날로 증가되어서 한 집안에 병사로 있는 자가 옛날엔 하나던 것이 지금은 다섯이 되었고 옛날에 둘이던 것이 지금은 열이나 되니, 백성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위(五衛)는 갑자기 회복시킬 수가 없고, 훈국(訓局)이나 어영(御營)도 경솔하게 거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금위영(禁衛營)은 설치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고 규모 또한 다 잘된 것이 아닙니다.
번(番)을 바꾸는 군사는 5초(哨)070)                  에 지나지 않는데 별장(別將)·천총(千摠)·파총(把聰)·초관(哨官)을 두었으니, 곧 하나의 큰 군문(軍門)입니다. 서울의 표하군(標下軍)에는 많은 양민(良民)을 몰아넣고 있는데, 만약 쓸데없는 군사를 논한다면 이것이 반드시 첫번째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영문(營門)은 대사마(大司馬)에 소속된 것인데, 너무 자주 체차(遞差)하여 바꾸었으므로 기무(機務)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체(代替)시켰으니, 군영(軍營)의 모양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속히 혁파(革罷)해서 상번(上番)하는 군사는 어영(御營)이나 훈국(訓局)에 이속(移屬)시켜 남북군(南北軍)의 제도와 같게 하소서. 그리고 수어사(守禦使)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주장(主將)으로 삼고 있으므로 남한 산성의 무비(武備)는 모두 주장의 군영에서 주관하고 있으니, 광주 부윤(廣州府尹)은 실제로 빈 성(城)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군영과 부윤은 서로 상관(相關)할 수 없으므로 비록 파손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체 버려두고 있습니다. 지금 수어사에게 부윤을 겸임(兼任)시켜 남한 산성을 지키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맡게 하면 전과 같은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水原)의 7천 병마(兵馬)는 본래 날래고 사납다고 하니 급할 때에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본부(本府)의 문과(文窠)가 자주 바뀌어서 군무(軍務)에 매우 유의(留意)하지 않으므로 군사 제도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총융사(摠戎使)에게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겸임(兼任)시켜서 남한 산성의 제도와 같게 하고 무신(武臣)을 차정(差定)해서 위임하여 성효(成效)를 요구하면 융정(戎政)이 반드시 전보다 배나 잘 다스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 군문(軍門)을 만약 혁파(革罷)한다면 군액(軍額)이 점점 줄어들어서 양정(良丁)이 저절로 넉넉해질 것이니, 어찌 경비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원컨대, 널리 순문(詢問)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산릉(山陵)의 원두(園頭)071)                  의 역사(役事)는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제전(祭奠) 때에 쓰이는 것은 침채(沈菜)·생채(生菜)·진과(眞瓜)·서과(西瓜) 등 3, 4종류에 지나지 않는데, 백성의 밭 5결(結)의 땅에 분토(糞土)를 빙 돌아가며 벌여 놓은 역사가 여러 고을에 골고루 미치고 있으며, 이를 바칠 때에는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또 본읍(本邑)에 서군(鋤軍)을 정해서 보내는 것과 태복시(太僕寺)의 마필(馬匹)이 왕래(往來)하는 것은 모두 폐단이 되고 있으며. 또 고군(雇軍)에게 주는 품삯이 절제 없이 소비되고 있습니다. 사포서(司圃署)의 원래 정해진 공물 외에 적절하게 수를 늘려서 함께 바치게 한다면 민폐(民弊)를 조금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진계(陳啓)한 것이 모두 근심하고 사랑하는 데에서 나왔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세 군문(軍門)의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서 갑자기 변경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그리고 포전(圃田)에 관한 일은 상소의 말이 마땅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해서 단 1분의 민폐(民弊)라도 제거하도록 하겠다."
교리(校理) 오수원(吳遂元)이 상소하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정제(李廷濟)처럼 재주 있고 민첩한 인재는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후로 외직(外職)에 있으면서 정치의 효과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품계(品階)를 바꾸고 자급(資級)을 올려 서관(西關)의 방백(方伯)에 제수(除授)하는 것은 아마도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전후로 외직 (外職)에 있으면서 정치의 효과가 많이 나타났다.’고 말하고는, 끝에 가서 이에 말하기를, ‘아마도 지나친 듯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인가?"
하였다. 그래서 이정제가 대의를 내세워 사직(辭職)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9월 25일 을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이광좌(李光佐)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양역청(良役廳)은 신(臣)이 처음에 비국(備局)에서 여러 재신(宰臣)들과 강확(講確)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관(主管)할 당상(堂上)과 문무(文武) 낭청(郞廳) 각 한 사람씩을 차출(差出)했었는데, ‘양역청’으로 일컫게 되니 명호(名號)가 차츰 커졌습니다. 대체로 양역을 변통시키려면 신포(身布) 2필(疋)은 과중하니, 이제 만약 그 한 필을 감하면 백성에게는 크게 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용도가 해마다 많아지고 달마다 더해가고 있으므로 1년의 세금으로 1년의 용도를 지탱할 수가 없으니, 나라에 일이 생기게 되면 더욱 손을 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용도를 미리 헤아리지 않고 앞질러 한 필을 감하면 나중에 반드시 명(明)나라 말기처럼 더 거두어들이는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대저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용도를 조절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세종 대왕께서는 황희(黃喜)·허조(許稠)와 산릉(山陵)의 제사 때에 소찬(素饌)을 쓰기로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려는 뜻이 이와 같았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크게 조절하고 줄여서 백성을 구제하고 나라를 살리는 방도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재물을 착취하면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을 베풀면 백성이 모이는 것이다. 나라의 저축이 비록 바닥이 난다고 하더라도 백성이 가난한 것보다는 낫다."
하였다.

 

교리(校理) 오수원(吳遂元)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옛날 송(宋)나라 소흥(紹興)072)   초기에 수황(壽皇)이 빈전(殯殿)에 있을 적에 주자(朱子)가 강학(講學)하는 날을 더 증가시킬 것을 청했습니다.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도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전에 잇따라 강연(講筵)에 나온 사실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행 대왕(大行大王) 경자년073)   초기에도 여러 차례 소대(召對)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개 《예경(禮經)》에 말하기를, ‘장례(葬禮)를 치르기 전에는 상례(喪禮)를 읽고, 장례를 치른 다음에는 제례(祭禮)를 읽는다.’ 하였으니, 효자(孝子)는 일찍이 초상으로 인하여 학문을 폐지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예를 갖추어 개강(開講)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마땅히 제전(祭奠)을 드리고 남는 시간에 간혹 신료(臣僚)를 인접(引接)하여 치란(治亂)·안위(安危)의 기미와 현사(賢邪)·왕직(枉直)의 구분에 대해 토론하게 하소서. 위징(魏徵)의 십사소(十思疏)074)  를 문황(文皇)075)  은 궤안(几案) 위에 두고 경계를 삼았으나 말년(末年)에는 차츰 처음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현종(玄宗)은 송경(宋璟)의 무일도(無逸圖)를 전각(殿閣) 벽에 걸어 두었다가 개원(開元)076)   말기에 그림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나아가기를 서두는 자는 그 물러남이 신속한 점을 경계해야 하고, 시작이 좋은 사람은 매양 끝맺음이 적은 것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총호사(摠護使) 이광좌(李光佐)가 새 능(陵)을 논(論)하는 일로 인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돌곶이[石串]의 큰 길은 새 능의 바깥 청룡(靑龍) 능선 밖에 있는데, 큰 길을 막을 수가 없으므로 화소(火巢)077)  를 형편상 장차 큰 길로 한계를 삼는다면 다른 능에 비해서는 약간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이미 양조(兩朝)에서 백성을 애휼하는 뜻으로 거듭 하교(下敎)하셨으니, 일을 맡은 여러 신하들도 마땅히 그 뜻을 이어 반드시 방도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인데, 어찌 성곽(城郭) 주변에 사는 백성의 집을 숲과 풀이 무성한 장소가 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논 같은 경우에는 마땅히 형국(形局)을 참작하여 화소(火巢) 안으로 많이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 가까운 곳에는 또 회릉(懷陵)이 있는데, 이는 곧 성종(成宗)의 왕비(王妃)로서 연산군(燕山君)을 낳고 사사(賜死)되었으나 연산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추숭(追崇)하여 능(陵)을 봉(封)했으니, 그것도 마땅히 재량하고 선처해서 화소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능침(陵寢)을 오래도록 견고하게 하는 것은 병석(屛石)을 두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 제도는 중국에서 나왔는데, 고려와 아조(我朝)에서도 모두 사용해 왔었으나 구영릉(舊寧陵)의 병석에 물이 스며들기에 이르러 마침내 다시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물이 스며든 것은 사실 흙을 굳게 쌓지 않았기 때문이지 병석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옳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9월 26일 병인

비로소 차대(次對)를 시행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손과 팔이 마비되는 증세로 매일 의원(醫員)으로 하여금 시침(試針)하면서도 친히 제전(祭奠) 드리는 일을 폐지하지 아니하였으며, 재궁(梓宮)에 옻칠을 하는 데에도 반드시 직접 가서 살펴보고 나랏일을 근심하여 일찍이 잠시도 한가롭게 지낸 적이 없었다. 이미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와 소대(召對)의 청을 받아들이고, 또다시 차대(次對)를 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숙종 대왕(肅宗大王)이 미령(靡寧)한 이후부터 대행왕(大行王) 때까지 차대를 자주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규례(規例)를 이광좌(李光佐)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대답하기를,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이 빈청(賓廳)에 나와서 승지(承旨)에게 차대를 청한 다음에 입시(入侍)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으면 주서(注書)가 와서 전해 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침을 맞은 다음에 차대를 행할 것이니, 경(卿) 등은 합문(閤門)에 와서 모여 있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이광좌(李光佐)가 판윤(判尹) 심단(沈檀)·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병조 판서(兵曹判書) 조태억(趙泰億)·우참찬(右參贊) 김일경(金一鏡)·훈련 대장(訓鍊大將) 김중기(金重器)·어영 대장(御營大將) 이삼(李森)·행대사성(行大司成) 이진유(李眞儒) 및 집의(執義) 윤회(尹會)·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부수찬(副修撰) 성덕윤(成德潤)을 이끌고 모두 합문에 나와 차대를 청하니, 임금이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무망각(无妄閣)으로 인도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어울려서 태(泰)를 이루니, 임금과 신하가 자주 접견(接見)하면 뜻이 통할 수가 있습니다. 신은 마땅히 공제(公除)한 이튿날 여러 제신들과 입시(入侍)해서 각각 맡은 직무의 일을 아뢰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지금 하교로 인하여 비로소 행하였으니, 이는 신의 실책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말에,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할 때는 적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가까이 하는 때는 많다.’는 경계가 있지 않은가?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선왕(先王)의 부탁을 실추(失墜)할까 두렵다. 기대하는 것은 오직 보필하는 여러 신하들의 협력을 바랄 뿐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옛말에, ‘수성(守成)은 창업(創業)보다 어렵다.’ 하였는데, 그 수성하는 임금은 깊은 궁궐에서 생장(生長)하여 농사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신하를 자주 접견하지 않아서 신하들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잠저(潛邸)078)  에 계셨으므로 사정을 두루 아시니, 전대(前代)의 수성(守成)하는 임금과 아주 다릅니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의 형편이 망극(罔極)한 지경에 놓여 있으니, 이를 만회(挽回)하는 방법은 오직 전하께서 뜻을 세우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항상 생각하시기를, ‘내가 나라의 형편을 만회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선왕(先王)의 종묘(宗廟)에 들어갈 것이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다면, 여러 신하 중에 어찌 치도(治道)를 도와서 성공시킬 자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뜻을 세우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니, 혹은 뜻은 있으면서도 외부의 사물에 흔들리는 경우도 있고, 혹은 시일이 오래되면 소홀해져서 스스로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구나 임금은 지극히 부귀(富貴)하기 때문에 게을리하여 소홀히 하는 생각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순(舜)임금도 그 신하들이 경계하여 심지어 말하기를, ‘단주(丹朱)079)  처럼 오만하지 마십시오.’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자질(資質)만 믿지 마시고 더욱 면려(勉勵)하셔서 게을러지는 생각이 혹시라도 싹트지 않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실하지 못하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으니, 나는 진실로 마땅히 한 마음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겠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도 나라 일에 대해 자기 일처럼 여기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낼 수 있겠는가? 장횡거(張橫渠)가 말하기를,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요컨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동궁(東宮)에 계셨을 적에는 학문에 노력하셨는데, 지금 대위(大位)에 오르시고는 장차 마음을 기울일 수 없을 것이나, 그 힘을 얻은 것에 있어서는 지금이 더욱 클 것입니다. 비록 평범한 사람으로 말하더라도 마땅히 복습을 일삼아야 더욱 간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제왕의 학문이겠습니까? 인산(因山) 전에는 비록 전례처럼 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경연(經筵)과 옥당(玉堂)은 마땅히 자주 소대(召對)하여 의리(義理)를 강론(講論)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은 말이다.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서도 나에게 소대(召對)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격례(格例)에 구애받게 되면 통하지 않는 것이다. 현종(顯宗)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적에는 빈객(賓客) 이외에 산림(山林)의 선비들까지도 같이 서연(書筵)에 들어오게 했는데, 더구나 경연(經筵)이겠는가? 나는 낮 소대(召對) 때에 경연관(經筵官)과 특진관(特進官)으로 하여금 돌아가며 들어와서 토론하게 하려고 한다."
하였는데,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옛 관례에 조강(朝講) 때에는 삼공(三公) 가운데 한 사람이 참석하고, 주강(晝講)·석강(夕講) 때에는 지경연(知經筵)·동지경연(同知經筵)이 돌아가며 참석하고, 야대(夜對) 때에는 경연관(經筵官)은 대궐 밖에 있으므로 옥당관(玉堂官)만 들어갑니다. 대저 하루에 만기(萬機)를 다스리는 여가에 세 차례 강론(講論)이 있는 데다가, 또다시 야대까지 있으니 조종조(祖宗朝)의 아름다운 규례가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서는 큰 뜻을 품고서 무비(武備)까지 묻고자 하셨으므로 무신(武臣)의 당상(堂上) 가운데 한 사람도 같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밖에 상참(常參)과 윤대(輪對) 같은 경우에는 각사(各司)의 관리가 다 들어와서 그 맡은 직무에 관한 일을 아뢰었습니다. 상참은 곧 임금의 개아(開衙)이므로 《정원일기(政院日記)》 중에 매일 상참과 경연(經筵)을 정지한 것을 반드시 기록했는데, 이는 또한 예(禮)를 아끼고 양(羊)을 그대로 두는 뜻080)  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산림(山林)의 선비도 같이 경연에 들어오게 하였으므로, 선정신(先正臣)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은 경연관의 직무를 겸하지 않고도 강석(講席)에 참여하였으니, 비록 강관(講官)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찌 학식(學識)이 고명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마땅히 어떤 직무이든 구애하지 말고 참여하게 하소서. 그리고 총부(摠府)와 병조(兵曹)의 당상(堂上)과 이품(二品) 이상으로서 공무로 인하여 대궐에 들어온 자 중에서 1명도 마땅히 소대(召對)할 때에 참석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고, 이어 경연관(經筵官)에게 명하여 날마다 돌아가며 와서 기다리되, 소대할 때에 같이 들어올 수 있도록 대비하게 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조정에는 한 사람의 관원이라도 적임자를 얻지 못하게 되면 그 직무가 다 다스려지지 않는 것인데, 만약 백성의 일에 있어 가장 긴요한 것을 논한다면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만한 것이 없으니, 엄중하게 책려(責勵)해서 극진하게 고르도록 하소서. 무릇 묘당(廟堂)의 추천과 전조(銓曹)의 정사에 반드시 그 사람의 능부(能否)를 자세히 살펴서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에는 천거한 사람을 벌주게 하소서."
하니, 심단(沈檀)이 말하기를,
"선조 대왕(宣祖大王) 원년(元年)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는데, 그 당시 명신(名臣)이었던 이항복(李恒福)이 상소하기를, ‘성의(誠意)를 미치게 하는 것은 마땅히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고, 공도(公道)를 지키는 것은 마땅히 사람을 등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이치에 들어맞는 말입니다. 현재의 병폐는 모두 사정(私情)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만약 합당한 사람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사사로운 마음부터 없애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말이 끝나기 전에 중관(中官)이 저녁 상식(上食) 때가 되었다고 고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합문(閤門) 밖에 물러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상식을 마친 뒤에 다시 여러 신하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양전(兩銓)의 관원을 나오게 한 다음 되풀이 하여 계칙(戒飭)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정직한 사람은 등용하고 부정(不正)한 사람은 놓아두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정직하도록 할 수 있다." 하였는데, ‘놓아둔다’는 것은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처음에는 권면하는 것을 알게 해서 나중에 쓰이기를 기다리게 하는 뜻이니, 경(卿) 등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또 다시 청하기를,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거듭 신칙하여 그 수령(守令) 중에 직무를 제대로 행수하지 않는 자는 엄중하게 출척(黜陟)을 더하되, 심한 자는 전최(殿最)081)  를 기다릴 필요 없이 계문(啓聞)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윤혀(允許)하였다.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
"고부 주청사(告訃奏請使)를 보내어야 마땅한데, 승습(承襲)을 청하는 주문(奏文)은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 이름으로 써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최규서가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구례(舊例)에는 좌의정이나 우의정이 대신 행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광좌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대답하기를,
"최규서는 곧 성상(聖上)께서 즉위(卽位)하셨을 때의 수상(首相)이었으니, 최규서의 이름으로 써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신(忠信)은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치사(致仕)한 사람을 가리켜 영상(領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원로(元老)가 영상의 이름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억지로 그 이름을 쓸 수 있겠는가? 좌상(左相)의 이름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진유(李眞儒)·김일경(金一鏡) 등이 모두 말하기를,
"대신(大臣)은 가함(假銜)을 쓸 수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새로 뽑는다면 좌상이 마땅히 승진될 것이니, 이조(吏曹)에서는 먼저 좌상을 영상으로 승진시키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臣)의 선조(先祖)가 정승의 직무를 맡고자 하지 아니하여 가함(假銜)을 청하였는데, 선조가 이미 시행한 일을 신이 어찌 감히 시양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만약 그로 인하여 정승에 임명된다면, 이는 성상께서 자나깨나 훌륭한 보필을 구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그것을 혐의롭게 여기는가? 무엇이 혐의스러운가?"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최규서(崔奎瑞)는 곧 즉위(卽位)하였을 적에 영의정이었으니, 최규서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옳다. 이진유(李眞儒)의 말과 같다면, 가령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이광좌(李光佐)가 또 벼슬을 그만두었을 경우에는 또한 그 주문(奏文)을 고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인가? 임금이 처음으로 차대(次對)를 행하는데, 경재(卿宰)라는 자들은 임금에게 요구하는 술수를 가지고 당로(當路)에 아첨하니, 또한 무슨 마음인가?  이명의(李明誼)·윤회(尹會)가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정절(情節)이 국안(鞫案)에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장수를 바꾸고 병력을 진열시킨 것은 역적 김창집(金昌集)이 사실 그 모의를 주장했고, 독약(毒藥)을 사온 것은 이이명이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있었던 일입니다.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세 번이나 정형(正刑)을 명했으나, 마지막에 감단(勘斷)하며 사사(賜死)에 그쳤으니, 이보다 더 큰 실형(失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참시(斬屍)해서 전형(典刑)을 밝혀서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죽은 사람에게 추후하여 형벌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선왕(先王)의 관대하신 법을 내가 계승하려는 뜻이니, 따를 수가 없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명의가 거듭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을 말하는 신하는 왕법(王法)을 지키고자 하나, 나는 반드시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신임(申銋)이 작년에 올린 상소는 적(賊) 백망(白望)을 편든 것으로서, 오직 반역 행위가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옥관(獄官)을 몰아내고 나라 일을 그르쳤습니다. 당초에 섬에다 천극(栫棘)082)  하였을 적에는 감사(減死)한다고 말했는데, 지난날 소결(疏決)083)  에서 갑자기 육지로 나오게 하면서 울타리를 철거했습니다. 그것이 비록 선왕(先王)의 관대한 법에서 나온 것이라 하나, 형정(刑政)이 해이해지면 난신 적자(亂臣賊子)들이 경계되어 두려워할 자가 없게 될 것이니, 청컨대, 육지로 나오고 울타리를 철거하라는 명은 다시 거두어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유성추(柳星樞)는 이정식(李正植)을 신임하고 정우관(鄭宇寬)과 체결하였으며 황해 병사(黃海兵使)가 새로 들어왔다는 말과 은화(銀貨)를 교통(交通)한 흔적이 적(賊)의 공초에 밝게 드러났으니, 그 죄를 범한 것은 윤각(尹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윤각은 곤장을 맞아 죽었으나 유성추는 법망(法網)에서 빠졌으니, 청컨대, 감사하라는 명을 거두어 들이시고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밝혀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도 선왕의 관대한 법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고봉헌(高鳳獻)은 장세상(張世相)과 동시에 특명으로 유배(流配)되었고 죄명(罪名)도 같은데, 장세상은 반역으로 죽었고 고봉헌은 특별히 방면되었으니, 청컨대, 전과 같이 멀리 유배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외부의 일은 비록 알 수 없으나 내부의 일은 알 수가 있다. 그때에 마침 역환(逆宦)과 같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간신(諫臣)이 의심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리고 대행 대왕 때에 이미 석방시킨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반역의 무리들이 법망을 빠져나와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선동하면서 심지어 임금의 비답까지 위조하는 등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형(李坰)이 인증(引證)한 형조(刑曹)에서 퇴직한 아전 홍득휘(洪得輝)라는 자는 형조의 문안(文案)에는 그 이름이 없습니다.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하면서 둘러대며 승복하지 않으니, 분명히 은밀한 실정이 있습니다. 청컨대, 다시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밝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윤회(尹會)가 아뢰기를, "금천 군수(金川郡守) 한일운(韓日運)은 칙사(勅使)를 대접한다고 핑계대어 관가의 곡식을 팔아 사복(私腹)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서질(庶姪)을 백성 중에 부자인 김유형(金有亨)의 손녀(孫女)와 위협하여 혼인시켜 인족(隣族)에게 해를 끼쳐서 온 마을이 농사를 폐지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문을 다 믿을 수가 없으니, 자세히 살펴서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튿날 윤회가 또다시 잇따라 계청(啓請)하니, 마침내 그 청을 따랐다. 이진수(李眞洙)를 지평(持平)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정언(正言)으로, 심유현(沈維賢)을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삼았는데, 이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와 참판(參判) 이세최(李世最)와 참의(參議) 심공(沈珙)의 정사(政事)로 인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08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정론(政論) / 역사(歷史) / 외교(外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註 078] 잠저(潛邸) : 창업(創業)의 임금이나 종실(宗室)에서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을 일컬음.[註 079] 단주(丹朱) : 요(堯)임금의 아들.[註 080] 예(禮)를 아끼고 양(羊)을 그대로 두는 뜻 : 자공(子貢)이 고삭(告朔) 때 쓰는 양(羊)을 치우려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너는 양을 아끼지만 나는 예(禮)를 아끼고자 한다. [爾愛其羊我愛其禮]"한 데에서 인용된 말. 기본 정신을 보전하기 위해 형식이나마 그대로 둔다는 말.[註 081] 전최(殿最) : 조선조 때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상·하로 평정하던 법. 상이면 최(最), 하이면 전(殿)이라 한 데에서 나온 말로, 경관(京官)은 각 관사의 당상관(堂上官)·제조(提調)가, 외관(外官)은 관찰사(觀察使)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등제(等第)를 매겨 계문(啓聞)하였음.[註 082] 천극(栫棘) : 유배(流配)된 죄인에게 가해지는 형벌. 곧 배소(配所)의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설치하여 외부와 격리시키는 것.[註 083] 소결(疏決) : 죄수를 너그럽게 처결함.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최규서(崔奎瑞)는 곧 즉위(卽位)하였을 적에 영의정이었으니, 최규서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옳다. 이진유(李眞儒)의 말과 같다면, 가령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이광좌(李光佐)가 또 벼슬을 그만두었을 경우에는 또한 그 주문(奏文)을 고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인가? 임금이 처음으로 차대(次對)를 행하는데, 경재(卿宰)라는 자들은 임금에게 요구하는 술수를 가지고 당로(當路)에 아첨하니, 또한 무슨 마음인가?
이명의(李明誼)·윤회(尹會)가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정절(情節)이 국안(鞫案)에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장수를 바꾸고 병력을 진열시킨 것은 역적 김창집(金昌集)이 사실 그 모의를 주장했고, 독약(毒藥)을 사온 것은 이이명이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있었던 일입니다.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세 번이나 정형(正刑)을 명했으나, 마지막에 감단(勘斷)하며 사사(賜死)에 그쳤으니, 이보다 더 큰 실형(失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참시(斬屍)해서 전형(典刑)을 밝혀서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죽은 사람에게 추후하여 형벌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선왕(先王)의 관대하신 법을 내가 계승하려는 뜻이니, 따를 수가 없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명의가 거듭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을 말하는 신하는 왕법(王法)을 지키고자 하나, 나는 반드시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신임(申銋)이 작년에 올린 상소는 적(賊) 백망(白望)을 편든 것으로서, 오직 반역 행위가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옥관(獄官)을 몰아내고 나라 일을 그르쳤습니다. 당초에 섬에다 천극(栫棘)082)  하였을 적에는 감사(減死)한다고 말했는데, 지난날 소결(疏決)083)  에서 갑자기 육지로 나오게 하면서 울타리를 철거했습니다. 그것이 비록 선왕(先王)의 관대한 법에서 나온 것이라 하나, 형정(刑政)이 해이해지면 난신 적자(亂臣賊子)들이 경계되어 두려워할 자가 없게 될 것이니, 청컨대, 육지로 나오고 울타리를 철거하라는 명은 다시 거두어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유성추(柳星樞)는 이정식(李正植)을 신임하고 정우관(鄭宇寬)과 체결하였으며 황해 병사(黃海兵使)가 새로 들어왔다는 말과 은화(銀貨)를 교통(交通)한 흔적이 적(賊)의 공초에 밝게 드러났으니, 그 죄를 범한 것은 윤각(尹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윤각은 곤장을 맞아 죽었으나 유성추는 법망(法網)에서 빠졌으니, 청컨대, 감사하라는 명을 거두어 들이시고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밝혀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도 선왕의 관대한 법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고봉헌(高鳳獻)은 장세상(張世相)과 동시에 특명으로 유배(流配)되었고 죄명(罪名)도 같은데, 장세상은 반역으로 죽었고 고봉헌은 특별히 방면되었으니, 청컨대, 전과 같이 멀리 유배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외부의 일은 비록 알 수 없으나 내부의 일은 알 수가 있다. 그때에 마침 역환(逆宦)과 같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간신(諫臣)이 의심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리고 대행 대왕 때에 이미 석방시킨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반역의 무리들이 법망을 빠져나와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선동하면서 심지어 임금의 비답까지 위조하는 등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형(李坰)이 인증(引證)한 형조(刑曹)에서 퇴직한 아전 홍득휘(洪得輝)라는 자는 형조의 문안(文案)에는 그 이름이 없습니다.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하면서 둘러대며 승복하지 않으니, 분명히 은밀한 실정이 있습니다. 청컨대, 다시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밝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윤회(尹會)가 아뢰기를,
"금천 군수(金川郡守) 한일운(韓日運)은 칙사(勅使)를 대접한다고 핑계대어 관가의 곡식을 팔아 사복(私腹)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서질(庶姪)을 백성 중에 부자인 김유형(金有亨)의 손녀(孫女)와 위협하여 혼인시켜 인족(隣族)에게 해를 끼쳐서 온 마을이 농사를 폐지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문을 다 믿을 수가 없으니, 자세히 살펴서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튿날 윤회가 또다시 잇따라 계청(啓請)하니, 마침내 그 청을 따랐다. 이진수(李眞洙)를 지평(持平)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정언(正言)으로, 심유현(沈維賢)을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삼았는데, 이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와 참판(參判) 이세최(李世最)와 참의(參議) 심공(沈珙)의 정사(政事)로 인한 것이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머물러 두었던 공사(公事)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어릴 적에 본 것인데, 숙종(肅宗)께서는 비록 깊은 밤이라도 반드시 공사를 수응(酬應)하여 밤이 3경이 될 때까지 시한을 정했었는데, 병환이 있고부터 비로소 인정종(人定鍾)까지로 한정하였다. 지금 내가 어찌 감히 스스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제부터는 비록 밤이 깊더라도 공사를 들이도록 하고, 변방의 긴급한 보고는 시간에 구애받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7일 정묘

태백성(太白星)이 한낮에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9월 28일 무진

김호(金浩)를 정언(正言)으로, 조익명(趙翼命)을 부응교(副應敎)로, 이거원(李巨源)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옛날 제도에 경연에서 소대(召對)하여 강서(講書)할 적에는 반드시 유신(儒臣)을 보내어 영사(領事)에게 물어서 결정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장차 소대를 행하려고 하므로 유신 성덕윤(成德潤)이 영사 이광좌(李光佐)에게 물으니, 이광좌가 대답하기를,
"전일에 진강(進講)하던 《논어(論語)》는 인산(因山) 이후 법연(法筵)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가 강독(講讀)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마땅히 《강목(綱目)》을 계속 강독해야 할 것이나, 본래의 학문하는 법은 마땅히 본원(本源)의 공부부터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니, 《심경(心經)》과 《강목(綱目)》을 번갈아 가며 진강(進講)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명의(李明誼)가 상소하여 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이 김씨(金氏) 성(姓)을 가진 궁인(宮人)의 일을 간쟁(諫爭)하여 고집하지 못했다고 논핵하자, 청대했던 여러 신하가 각각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引責)하였는데, 김홍석(金弘錫)·윤용(尹容) 등이 또 거듭 조사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거원(李巨源)도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하며 말하기를,
"옛날 신유(辛有)는 어떤 사람이 이천(伊川)에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제사지내는 것을 보고 장차 오랑캐가 될 것을 알았습니다.084)   오늘날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는 임금의 원수도 원수로 여기지 아니하고 흉역(凶逆)도 흉역으로 여기지 않는 등 윤기(倫紀)가 멸절(滅絶)되었는데,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인심을 착하게 하는 요체는 전하께서 윤리의 덕을 다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지었을 때 난신 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 했던 것은 그 엄격한 말로 통렬하게 배척하여 사람들이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신(諫臣)들이 역비(逆婢)에 대해 상소하여 논한 것을 가지고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다시 그 문제를 제기하는가?’라고 답하신 데에 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차마 못하는 작은 인(仁)에 가까운 것으로서, 아마도 탁연(卓然)하게 한 세상의 군신(君臣)·부자(父子)의 도리를 면려(勉勵)하는 뜻이 못될 듯합니다. 지난날 비망기(備忘記)를 내렸을 적에도 다만 백성의 병폐만을 물었습니다. 옛날 위상(魏相)은 흉노(凶奴)가 침범했을 때 오로지 풍속만 근심하였는데, 신(臣) 또한 오늘날 인심이 무너진 것은 그 근심이 백성의 병폐보다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륜(彛倫)과 풍화(風化)의 근본에 대해 더육 유의(留意)하셔서 무릇 토죄(討罪)를 함에 있어 호오(好惡)의 올바름을 분명하게 보이셔서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오랑캐와 짐승의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삼사(三司)에서 만약 나의 말을 믿는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의심을 품을 수가 있겠는가?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마음을 믿지 못하는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마음속으로 매우 개연(慨然)하게 여긴다."
하였다.


 

 

 

9월 29일 기사

지평(持平) 이진수(李眞洙)가 아뢰기를,
"영덕 현령(盈德縣令) 홍정보(洪鼎輔)는 개혁에 뜻을 두고 엄중하게 단속하는 것을 숭상하여 다스리니, 간사한 서리(胥吏)와 교활한 노복이 감히 쫓아내려고 하였습니다. 호장(戶長)·이방(吏房)·사령(使令)·관노(官奴)들이 밤에 읍성(邑城) 밖 요새(要塞)의 도로를 점거한 다음 시골 백성들이 관가에 바치려고 싣고 가는 것을 쫓아 버렸고, 관아(官衙)의 종이 장계(狀啓)를 가지고 감영(監營)으로 가는 것을 가로막아 금하였고, 향소(鄕所)를 달래고 위협하여 그 당(黨)에 들어오게 하되 따르지 않으면 그의 아내를 결박하여 강제로 서표(署標)를 받았으며, 또 병기(兵器)를 가지고 관문(官門)에 돌입(突入)하여 흉언(凶言)과 위협[恐嚇]이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었습니다. 그 사잇길로 보낸 장계가 영문(營門)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두려워하여 겁을 먹고 찾아와서 근거 없는 말로 사죄(謝罪)했습니다. 홍정보가 제일 먼저 주창한 자를 조사하여 형(刑)을 시행하려고 하니, 또다시 칼을 뽑아들고 결박을 끊고서 달아났는데, 마침내 영문과 이웃 고을의 힘을 입어 6, 7명을 체포하여 모두 자백을 받았으나, 감사(監司)의 체임(遞任)으로 인하여 아직 처치를 못했습니다. 청컨대, 결안(結案)하여 효시(梟示)085)  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이 강상(綱常)에 관계된 것이니, 오히려 경차관(敬差官)을 차견(差遣)하여 추핵(推覈)하게 해야 할 것이다. 지금 본 고을에서 자백받은 것을 가지고 곧바로 효시하는 것은 형벌을 신중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하게 핵실(覈實)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밤에 소대(召對)하여 《강목(綱目)》의 양기(梁紀)를 강(講)하였다. 참찬관(參贊官)        박필몽(朴弼夢)이 아뢰기를,
"문(文)이 질(質)을 앞선 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사의(私意)가 너무 앞서서 다만 겉치레만 꾸미면서 한결같이 혐의를 멀리하는 것을 위주로 삼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인주(人主)의 좋아함과 미워함은 지극히 중대한 데 관계되니, 쓰거나 버리거나 올려줌과 벌줌에 있어 한결같이 공정(公正)하게 하지 않고 치우친 사심(私心)으로 협잡(挾雜)하면 그 해(害)는 반드시 국세(國勢)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임용(任用)하거나 죄를 줌에 있어 한 몸의 사심으로 그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박필몽이 또 말하기를,
"궁인(宮人)의 일을 한결같이 아울러 내보내자고 한 요청은 하책(下策)에서 나온 것이니, 원컨대, 속히 윤허하여 따르도록 하소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보낼 수 없는 사유를 명백하게 하교(下敎)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씨 성을 가진 자로 인하여 어선(御膳)을 담당했던 사람을 다 내쫓는다면 일이 명백하지 못하고 명분도 올바르지 못하다. 만약에 그 사람이 있었다면 선왕(先王)께서 어찌 조사하여 내쫓지 아니하였겠는가? 내쫓는 것이 비록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나 그것은 명분이 없는 데에 가까운 것이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성덕윤(成德潤)이 말하기를,
"약이 어찌 공중에서 떨어졌겠습니까? 사람이 시켜서 행하였다면 어찌 어선을 담당한 사람 외에서 나왔겠습니까? 성상(聖上)의 하교 가운데 ‘죽음 가운데에서 살기를 구하느라고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 [死中求生 胡辭亂說]’는 여덟 자에 대해서 신은 의혹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의 말씀은 한 번 퍼지게 되면 사방에서 놀라 의혹을 품을 뿐만 아니라, 적당(賊黨) 가운데 그래도 남아 있는 여얼(餘孼)이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못한 때를 당하여 어찌 구실을 붙일 길이 없겠습니까? 그 한 마디 말씀은 다시 거두어 들이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곧 선왕(先王)의 하교이니, 도로 거두어들일는지의 여부(與否)는 이제 와서 논할 만한 것이 못된다. 선왕께서 이미 ‘없다’고 하교하셨으니 그 일은 난초(亂招)에 귀착되는 것이 옳다. 선왕께서 ‘없다.’고 하신 하교를 중하게 여겨야 하겠는가, 아니면 적(賊)의 초사를 중하게 여겨야 하겠는가?"
하였다. 효고(曉鼓)를 치려고 할 무렵에 기사관(記事官)        박문수(朴文秀)가 나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명백한데도 유신(儒臣)들이 번갈아 진계(陳啓)하는 것은 성상의 하교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상의 하교 중에 ‘없다.’고 하신 것은 선왕의 하교이고, 적(賊)의 공초를 가지고 ‘터무니 없는 말이다.’라고 한 것도 선왕의 하교입니다. 이번에, ‘선왕의 하교를 중하게 여겨야 하는가, 적의 초사를 중하게 여겨야 하는가?’ 하셨는데, 이 하교는 정녕(丁寧)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유신들은 오히려 논란을 중지하지 않고 있으며, 엄려(嚴廬) 가운데 야고(夜鼓)가 여러 번 울렸으니, 신은 진실로 답답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조원명(趙遠命)이 말하기를,
"박문수의 말이 명백하나, 사관(史官)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일을 말하는 것은 전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청컨대,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의 분개한 마음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나, 앞으로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추고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臣)은 삼가 살펴보건대, 김성의 궁인(宮人) 일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이 김창집(金昌集)의 지친(至親)인 숙종(肅宗)의 후궁(後宮) 영빈(寧嬪)을 은연중에 가리킨 것이며, 이로써 모든 김씨를 일망 타진하려 하고 차자(箚子)를 연명해서 올린 여러 신하들에게 언급한 것이었다. 그래서 감히 선왕의 하교를 가리켜 사실이 없는 것이라고 일컬으면서 새 임금에게 따진 것이다. 아! 이거원(李巨源)이 말한 윤기(綸紀)가 멸절(滅絶)되었다고 한 것은 누가 그 책임을 담당해야 하겠는가? 박문수가 자신의 지위를 벗어나 강개(慷慨)한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10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사신은 논한다. 신(臣)은 삼가 살펴보건대, 김성의 궁인(宮人) 일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이 김창집(金昌集)의 지친(至親)인 숙종(肅宗)의 후궁(後宮) 영빈(寧嬪)을 은연중에 가리킨 것이며, 이로써 모든 김씨를 일망 타진하려 하고 차자(箚子)를 연명해서 올린 여러 신하들에게 언급한 것이었다. 그래서 감히 선왕의 하교를 가리켜 사실이 없는 것이라고 일컬으면서 새 임금에게 따진 것이다. 아! 이거원(李巨源)이 말한 윤기(綸紀)가 멸절(滅絶)되었다고 한 것은 누가 그 책임을 담당해야 하겠는가? 박문수가 자신의 지위를 벗어나 강개(慷慨)한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9월 30일 경오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정제(李廷濟)가 임금을 사폐(辭陛)086)  하고 부임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출척(黜陟)을 공명 정대하게 하도록 권면(勸勉)하고, 또 하교하기를,
"백성은 오늘의 백성이 아니라 곧 조종(祖宗)께서 불쌍이 여기던 백성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관서(關西)는 다른 도(道)와 달라서 비록 오로지 무예만 업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또한 반드시 문학을 숭상하는 사람도 있으니, 마땅히 문교(文敎)에 유념(留念)하도록 하라."
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봉휘(柳鳳輝)가 각질(脚疾)로 계단에 오르내리지 못하니, 임금이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유봉휘가 아뢰기를,
"요즈음 문구(文具)087)  를 버리고 언로(言路)를 열어서 성심(誠心)으로 아랫사람을 대하시는 것이 비답(批答)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모든 일은 본질과 형식이 있는 것인데, 언로(言路)로써 말한다면 마음을 비워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본질이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으로 말하면 허위를 제거하도록 힘쓰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러니 언로를 여는 것은 귀에 거슬리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하고,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당(唐)나라 태종(太宗)을 훌륭한 임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매양 전사옹(田舍翁)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장손 황후(長孫皇后)의 말에 힘입어 즉시 마음을 돌리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비석을 넘어뜨리는 일088)  이 있었습니다. 현종(玄宗)이 한휴(韓休)를 정승으로 삼았을 적에 자신의 얼굴이 수척해지니, 좌우의 사람에게 묻기를 ‘이 사실을 한휴도 알고 있느냐?’고 하며, 그의 직간(直諫)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성심으로 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침내 천보(天寶)의 난(亂)089)  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무릇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 어찌 겉치레의 말과 웃는 모양으로 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미인(美人)을 좋아하는 것처럼 해야만 좋은 말이 숨겨지지 아니하여 그 나라가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하였다. 이광좌가 대제학(大提學) 조태억(趙泰億)을 다시 신칙하여 《숙종실록(肅宗實錄)》을 부지런히 수찬하기를 청하니, 조태억이 말하기를,
"옛날에 《인조실록(仁祖實錄)》과 《효종실록(孝宗實錄)》을 찬수할 적에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가 사실상 그 일을 맡았었는데, 다른 직책은 다 체임(遞任)시키고 지중추(知中樞)로서 《실록》만을 전담하게 하여 마침내 눈병을 거듭 얻게 되었습니다. 벼슬이 높으면 일이 많으니, 마땅히 나이 젊고 벼슬이 낮은 사람을 얻어서 위임하여 성효(成效)를 요구하소서."
하였다. 이광좌가 부부인(府夫人)이 상경(上京)할 때에 말과 음식물을 제공하고 도사(都事)가 모시고 오게 하자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광좌와 조태억이 거듭 청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대사헌(大司憲) 이명언(李明彦)이 말하기를,
"전례(前例)가 없었다는 성상(聖上)의 하교가 지당하니, 억지로 청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례가 없었다 하여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삼(李森)이 아뢰기를,
"보미(保米)090)  를 바치지 아니한 수령(守令)은 마땅히 논죄(論罪)해야 합니다. 새로 부임한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전(前) 수안 군수(遂安郡守) 홍이한(洪以漢)이 전혀 바치지 않았다 하여 잡아다가 처리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이명언이 앞서 아뢴 것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어영 천총(御營千摠) 이상성(李相晟)이 한강의 배 안에서 종 태성(泰成)을 시켜 사노(私奴)인 명복(命卜)을 끌어내게 하였는데, 태성이 명복을 구타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금부(義禁府)에서 잡아갔다가 마침내 무죄 석방시켰습니다. 청컨대, 추핵(推覈)하여 그 죄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가, 곧 이어 이상성(李相晟)을 도배(徒配)091)  시키라고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가 앞서 아뢴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고봉헌(高鳳獻)의 계사(啓辭) 가운데 선왕(先王)께서 당초에 내린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있는 잠저(潛邸) 때부터 마음으로 항상 매우 미워하였으며 사람 됨됨이가 간교하여 근시(近侍)에 둘 수가 없다고 하교하신 말을 첨입(添入)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공윤(李公胤)을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신 것은 지나치게 너그러운 조처입니다. 이공윤이 그날 한 행위는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심지어 영휘전(永徽殿)에 돌아가 누워 있었다는 말은 마침내 스스로 죄를 숨길 수가 없으니, 불충(不忠)·불경(不敬)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약 쓰는 일을 논의할 적에 의관(醫官) 등이 공격하는 약제와 보하는 약제를 섞어서 시험했었는데, 기술이 막히자 외방의 의원에게 맡겨서 죄를 전가시킬 계획을 삼았습니다. 청컨대, 수의(首醫)를 먼 변방에 귀양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사년092)   국휼(國恤) 때에 선왕(先王)께서 의사를 죄주지 않는 일을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하교(下敎)가 있었고, 경자년093)  에도 이에 의거하여 다만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였었다. 공격하는 약제와 보하는 약제를 번갈아 시험해 본 것은 경자년과 같으니, 같은 죄에 벌을 다르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나도 두 선왕의 뜻을 이어받고자 한다."
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릇 죄가 당역(黨逆)에 관계되는 자는 비록 여러 번 사령(赦令)을 거쳤다 하더라도 가볍게 논의할 수 없음이 틀림없습니다. 전 평안 감사(平安監司) 오명항(吳命恒)은 방미방(放未放)094)  의 계본(啓本) 가운데 죄인으로서 사당(私黨)을 비호하여 몰래 비답을 고쳐 주기를 청한 자, 역적 괴수를 아첨하여 붙좇아 어두운 밤에 주무(綢繆)한 자, 역적 윤지술(尹志述)에게 화응(和應)하여 임금을 침욕(侵辱)한 자, 뇌물을 받고 약을 전하여 국문받는 죄수를 독살시킨 자 등이 어떠한 죄명(罪名)인데 품방(稟放)에 뒤섞어 넣는 것입니까? 청컨대, 오명항을 종중 추고(從衆推考)하고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일을 만약에 깊이 말한다면, 그 죄가 어찌 추고하는 정도에 그치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견해가 각각 다르니, 그 사람의 견해를 어떻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정석삼(鄭錫三)을 사간(司諫)으로, 윤동원(尹東源)을 지평(持平)으로, 이보욱(李普昱)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일경(金一鏡)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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