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신미
이때 임인년095) 과 계묘년096) 의 옥사(獄事)를 거치면서 편배(編配)가 거의 팔로(八路)에 골고루 있었다. 제도(諸道)의 감사(監司)가 사위(嗣位)의 사면(赦免)으로 인하여 모든 귀양간 죄인을 석방해 줄 것을 상소(上疏)하여 계청(啓請)하였다. 전 평안 감사(平安監司) 오명항(吳命恒)은 품방(稟放)에 둔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이명의(李明誼)에게 탄핵받았고,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시환(金始煥)은 김성절(金盛節)과 연좌된 사람 시일(時逸)·시술(時述) 등을 품방에 두었다 하여 승정원(承政院)에서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다. 전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동필(金東弼)도 민진원(閔鎭遠)을 품방에 두고, 또 귀양살이하는 여러 사람에게 식물(食物)을 공궤(供饋)하고 방문하였다 하여 두 번이나 대간(臺諫)의 논핵(論劾)을 받았다. 이때에 와서 김동필이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상소하기를,
"귀양간 모든 사람의 죄명(罪名)이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연좌된 것은 문득 지엽(枝葉)과 같고, 유배(流配)를 당한 것도 지금은 이미 세월이 오래 되었으며, 맹제(盟祭)097) 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호남(湖南)의 품계(稟啓) 중에 들었습니다. 도신(道臣)이 이미 방면(放免)을 구별하여 계품(啓稟)하는 일을 맡았으니, 우선 그런 것을 품질(稟秩)에 두어 조정의 처분을 따르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더구나 민진원(閔鎭遠)은 원구(元舅)의 친척이니, 특별히 관대하게 사유(赦宥)를 베풀어 모자(母子)가 서로 의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실상 친족을 돈독히 하는 뜻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옥서(玉署)098) 의 장관(長官)이 상소하여 경화(更化)하는 초기에 석방하기를 청하였을 적에 그것을 비난하여 배척하는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청조(淸朝)의 사직(司直)의 처지에서 아직도 강한 것은 토해 내고 부드러운 것은 삼키는 것을 면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귀양가 있는 사람에게 음식물을 제공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미 죽을 죄가 아닐 경우에는 관리들이 그를 돌보아주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 문구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지경 안에 귀양와 있는 명신(名臣)·석보(碩輔)가 진실로 옛날부터 인정과 안면이 있으면 비록 연좌된 중죄인(重罪人)이라고 하더라도 돌보아 주는 데 대하여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감사(監司)가 된 이후로 허다하게 귀양 온 사람 가운데 혹 친척이 있거나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있으면 관례에 따라 방문하였으나, 몇 포(包)의 모곡(耗穀)099) 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죄명(罪名)이 지극히 중한 자일 경우에는 비록 본래부터 알고 있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감히 물품을 보내거나 안부를 묻지 않았으니, 그 선배들의 후했던 풍속에 견주어 볼 때 너무 박하게 대한 것인데, 그 일이 신(臣)에게 중한 죄책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에 한 것이 나에게 체통(體統)을 얻은 것이니, 생각 없이 한 대간(臺諫)의 지적을 가지고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명언(李明彦) 등이 아뢰기를,
"통영(統營)의 아전 백초규(白楚圭)는 곡식 1백 60섬을 훔치고 배 만들 소나무 1천 80여 주(株)를 도벌하였으며, 백남형(白南珩)의 아들 백봉령(白鳳齡)은 곡식 1천 5백 88섬을 훔쳐서 통영의 종[婢] 반역자 전인좌(錢仁佐) 및 주수(主帥) 이수민(李壽民)의 아들과 안팎으로 서로 호응하며 혹은 변장(邊將)을 유인하기도 하고 혹은 비국(備局)에 허위 보고를 하여 금송(禁松)을 몰래 베었습니다. 수신(帥臣)이 조사하여 아뢰었으나, 본도(本道)의 처단(處斷)이 크게 실형(失刑)한 것이었으니, 청컨대, 토포사(討捕使)로 하여금 가둔 백초규는 결안(結案)하여 효시(梟示)하게 하고, 백남형과 백봉령은 속전(贖錢)을 되돌려주고 해당되는 율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역신(逆臣) 이우항(李宇恒)이 총수(銃帥)로 있을 적에 염초와 유황을 무역한다 하며 열읍(列邑)에 있는 군영(軍營)의 쌀 1천 2백 섬과 조(租) 6백 섬을 동래(東萊) 사람 김광조(金光祖)에게 주었는데, 전 통제사(統制使) 남태징(南泰徵)이 공문을 보내어 여러 번 재촉하니, 김광조는 성명을 바꾸어 종적을 감추고 온 가족은 서울에 올라와 있습니다. 지난 겨울에 수신(帥臣)이 포도청[捕廳]으로 하여금 기포(譏捕)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장청(狀請)하여 윤허(允許)받았으나 포도청에서는 아직까지 근포(跟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좌우 포장(捕將)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기한을 정하여 잡아다가 국문(鞫問)하여 중률(重律)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토포사가 결안 정법(結案定法)하는 것은 형벌을 신중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하게 신문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하원(李夏源)이 간사한 아전 이중익(李重翊)을 다스리고자 하니, 이중익이 그 집을 비워 놓고 도피하였다. 이하원이 그 집을 사사롭게 친한 사람에게 주어 들어가 살게 하였는데, 그것이 마침내 경조(京兆)의 사계(査啓)100) 에 올랐으므로 이하원이 두 번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을 하니, 비답하기를,
"사람은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집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간사한 아전을 다스리는 것은 진실로 체모를 얻은 일이라 하나, 그 집을 속공(屬公)하는 것은 어느 법전(法典)에 있는가? 법관(法官)이 되어 백성의 집을 빼앗았는데, 내가 말없이 있다면 그것이 옳은 것이겠는가?
10월 2일 임신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들어와 알현하였는데, 이는 치사(致仕)를 사례하려는 까닭이었다. 임금이 맞이하며 말하기를,
"좌상(左相)이 숙명(肅命)을 미치지 못한 까닭에 인접(引接)이 약간 늦었는데 경(卿)은 추운 곳에 앉아서 기다리느라고 병이 나지는 않았는가?"
하니, 최규서가 탈이 없다고 사례하고, 이어 주급(周急)101) 한 은전(恩典)을 사례하고, 말하기를,
"휴치(休致)102) 한 자는 옛날에 녹을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별히 4품(四品)의 녹을 주었는데, 선왕(先王) 때에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은 치사(致死)한 뒤에도 나라에서 빈사(賓師)로 대우했습니다. 그래서 늠록을 담당하는 사람이 곡식을 계속 잇대어 주는 뜻에서 매월 늠미(廩米)를 주었으며 봉조하 남구만(南九萬)에 이르러서는 늠미를 굳이 사양하므로 조정에서 그 명목(名目)을 바꾸어 봄·가을과 세시(歲時)에 특별히 주급(周急)한다는 것으로 구실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특수한 은전이므로 관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최규서가 강력히 사양하므로 연신(筵臣)들이 모두 그 양을 줄여서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최규서가 물러간 다음에 임금이 묻기를,
"나이 많은 신하에게 궤장(几杖)103) 을 내려 준 전례가 있는가?"
하니, 이광좌(李光佐)가 대답하기를,
"70세에 치사(致仕)하였는데, 치사하지 않은 자에게는 궤장을 하사하여 조정에 나오게 하였습니다. 옛날 상신(相臣)이었던 이원익(李元翼)과 이경석(李景奭)은 모두 어진 정승이었으므로 당시에 특별히 궤장을 하사(下賜)했었습니다."
하였다.
경외(京外)에 구임(久任)시키는 법(法)을 거듭 밝혔다. 좌의정(左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인재를 선택하여 구임(久任) 시키는 것보다 우선하는 일이 없습니다. 호조 판서(戶曹判書)와 같은 경우 선왕조(先王朝)에서는 일찍이 자주 옮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임인년104) 에서 지금까지 3년 사이에 호조 판서가 이미 다섯 사람이나 바뀌었습니다. 병조(兵曹)의 이군 색낭(二軍色郞)과 호조의 판적사(版籍司)·별예방(別例房)·별영랑(別營郞)은 모두 요직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풍속이 투박해져서 병조의 낭관이 된 지 반 년만에 옮겨지지 아니하면 문득 지리하고 불만으로 여겨 반드시 체임(滯賃)하고야 맙니다. 그리고 호조의 낭관도 1년만에 군읍(群邑)을 얻지 못하면 대다수가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온갖 일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각사(各司)의 쌀과 베를 담당한 사송랑(詞訟郞)은 일찍이 구임(久任)시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나아가 의논해서 다시 그 기한을 정하여 아뢰어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 판서를 구임시키는 것은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으나, 낭서(郞署)를 구임시키는 일은 묘당에서 상의하여 규정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육경(六卿) 중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공조 판서(工曹判書) 외에는 구임시키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또 승지(承旨)와 같은 경우에는 진실로 그 적임자만 얻는다면 백사(百司)를 호령하여 치도(治道)를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사(諸司)의 초기(草記)와 회계(回啓)의 옳지 못한 것은 혹은 물리치고 혹은 죄를 청하고, 임금의 명이 지나쳐서 미치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일일이 따질 수가 있으니, 그 국정(國政)의 추요(樞要)함은 묘당보다도 더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반드시 명망이 높은 이를 선발하여 임명했으므로 수십 년 동안 도승지로 있었던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혹 여러 달 동안 행공(行公)하면 남에게 지탄과 조소를 받으므로 아침 저녁으로 체개(遞改)하는 것이 마치 전사(傳舍)와 다음이 없으니, 어떻게 직무를 받들기를 바라겠습니까? 신(臣)이 지난날 원상(院相)으로서 승정원(承政院)에 머물 적에 고사(故事)가 해이해진 것을 직접 보고 약간의 절목(節目)을 초출(抄出)해서 승정원에 게시하여 준행(遵行)하도록 하였습니다. 승지도 구임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또 말하기를,
"백성의 휴척(休戚)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으므로 수령은 더욱 자주 체임(遞任)할 수가 없는 것인데, 요즈음 정목(政目)에는 수령의 의망(擬望)도 많이 청하고 있다. 나는 오래 되고 오래 되지 않은 것을 헤아려서 낙점(落點)하고자 한다. 앞으로는 그 부임한 날짜를 망통(望筒)에다 주석으로 밝히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가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은 삼사(三司)에 출입한 사람으로서 수령을 삼은 경우에는 대체로 2년으로 기한을 정했었는데, 그 후에 그 법이 해이해졌으므로 신도 답습하여 잘못 아울러 의망했습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법을 만들어 놓고 따르지 않는 것은 폐단입니다. 지난해에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가 각사(各司)의 이서(吏胥)와 노예의 액수(額數)를 늘릴 적애 대략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한가함과 분망(奔忙)함을 참작하고 헤아려서 인원을 정하고 그 밖에는 궐원(闕員)이 있어도 보충하지 아니하였는데, 그 후에는 다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품지(稟旨)하여 변통한 것은 바로 금석(金石)의 법인데, 어찌 공공연하게 폐지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는 법을 따르지 않는 자는 논책(論責)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무릇 삼사(三司)에서 외읍(外邑)에 나간 자도 그러하니, 이미 품지(稟旨)하여 기한을 정한 것은 이를 준수해야 할 뿐입니다."
하였는데, 이조가 말하기를,
"그러면 반드시 2년의 기한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급암(汲黯)을 회양 태수(淮陽太守)로 삼고 10년을 불러들이지 아니하였는데, 그것은 싫어서 내쫓은 것이다. 경악(經幄)에 출입한 사람을 어떻게 오래도록 지방에 있도록 하겠는가? 마땅히 그 기한을 가깝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한나라에서는 사람을 임용할 때 먼저 백성의 일부터 시험했는데,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전연 백성의 일을 익히지 않은 사람도 정승에 제수되기에 이르니, 정치가 어찌 옛날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황패(黃霸)105) 는 들어와 정승이 되고부터 공명(功名)이 군(郡)을 다스릴 때보다 줄어들었으니, 어찌 모두 군을 다스린 연후에야 정승이 될 수 있겠는가? 옥당(玉堂)은 걸양(乞養)106) 을 제외하고는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지방 고을에 경솔하게 제수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남구만(南九萬)이 옥당에 있었을 적에 사헌부(司憲府)에서 오래도록 개좌(開坐)107) 하지 않는다 하여 모든 대간(臺諫)을 파면시키자고 계청(啓請)하였으니, 그 엄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각사(各司)에 신칙하여 평명(平明)에 출근하고 신시(申時)에 퇴근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정언(正言) 조명교(曺命敎)가 상소하여 아홉 가지 조항을 진달했는데,
1. 성효(聖孝)를 돈독히 하고,
2. 성학(聖學)에 힘쓰고,
3. 기질(氣質)을 바로잡고,
4. 신하들을 예우하고,
5. 치체(治體)를 살피고,
6.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7. 인재(人材)를 수습하고,
8. 민심(民心)을 얻고,
9.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질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장식(張栻)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장중(莊重)하고 침착(沈着)한 기상에 부족한 바가 있으므로 드러나는 것에 과격함이 많고 함축성이 적은데 이는 본원(本源)을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해서 그러할 따름이다. 이로써 일을 생각하면, 나는 아마도 보고 듣는 것을 살피지 못하고 사려(思慮)가 자세하지 못한 듯하다. 아침저녁으로 점검해서 그러한 싹을 끊는다면 뜻이 정해지고 생각이 안정되어 위아래가 모두 신복(信服)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영기(英氣)가 너무 지나치시어 혹 그와 같이 치우친 점을 면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최규서(崔奎瑞)가 말씀드린 것 중에, ‘무게가 없으면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로 증세(症勢)에 적합한 처방이었습니다. 원컨대, 몸가짐을 침착하고 온후하게 가지셔서 사물을 대함에 있어 너그럽게 하소서."
하고, 그 신하들을 예우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르기를,
"대사헌(大司憲)의 말이 경솔함은 면할 수가 없으나, 임금에게 성실하지 않게 고하였다고 하신 하교(下敎)는 아마도 지나친 듯합니다. 금오(金吾)의 장관이 사직한 것과 관서백(關西伯)108) 이 인혐(引嫌)한 것은 부득이한 형편이었는데, 바로 ‘조금만 기강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중신(重臣)과 재상들은 서관(庶官)에 비해 더욱 다르니, 이들을 속박하며 얽어매는 것은 염치를 길러주고 체면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못됩니다."
하고 치체(治體)를 살펴야 한다는 데 대해 이르기를,
"요숭(姚崇)이 낭리(郞吏)를 제수하자고 청하자 현종(玄宗)은 전우(殿宇)를 쳐다보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는데, 의논하는 자가 체통(體統)을 얻었다고 일컬었습니다. 대개 일마다 살피려고 하면 정신이 먼저 피곤해지고, 물건마다 구하려고 하면 생각이 두루 미치기 어려운 것인데, 그로 인한 폐단은 점차로 작은 것은 살피고 큰 것은 버려두며 말단적인 것을 먼저하고 근본적인 것은 뒤로 미루는 근심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인재를 수습(收拾)해야 한다는 데 대해 이르기를,
"오늘날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사의(私意)가 횡행(橫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관직을 제수하고 한 계급의 품질을 올려 줄 때마다 외인(外人)이 미리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기를, ‘누구와 누구가 친한 사이다.’ 하고, 심할 경우에는, ‘누가 누구를 잘 섬긴다.’고 하는데, 제목(除目)109) 이 내려지면 그 말에 어긋남이 거의 없습니다. 어사(御史)가 장계하고 대간이 탄핵하는 글을 올리면, 탐장(貪贓)이 많은데도 조사하여 의언(議讞)110) 할 적에는 공공연하게 벗어나며, 한번 사령(赦令)을 거치면 거리낌없이 녹용(錄用)하고 있습니다. 탐관 오리(貪官汚吏)들은 비록 엄중한 법으로 다스려도 오히려 두려워하여 그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벼슬을 주기를 마치 포장(褒奬)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무엇을 꺼려하여 하지 않겠습니까? 권세(權勢)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는 것은 진실로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매진(媒進)할 수가 없으니, 역시 부득이한 처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후백(李後白)이 전형(銓衡)을 잡고 있을 적에 친족(親族) 가운데 벼슬을 구하는 자에게 책자(冊子)를 내보이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의 이름을 기록해 두었었다. 아깝구나! 그대가 아예 말을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상헌(金尙憲)이 정승으로 있을 적에 어떤 병사(兵使)가 부채 40 자루를 보내왔는데, 10 자루만 남겨 놓고 돌려 주었습니다. 그런 일을 후세 사람들이 미담(美談)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하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데 대해 이르기를,
"대상(大喪) 때에 궁인(宮人)에게 내린 상포(喪布)는 경자년111) 에 비해 3백 필이나 더 많았습니다. 만약 명목(名目)을 헛되게 벌여 놓은 것이 아니면 반드시 궁인의 액수(額數)를 늘린 것입니다. 무릇 궁인을 내보내는 것은 새 정치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는 곧 울적한 심기(心氣)를 배설시키는 것이고, 자급(資給)하는 비용을 줄이는 것도 됩니다. 적당하게 내보내서 첫 정치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비어 있는 궁궐의 각문을 수직하는 고군(雇軍)이 모두 1백 20명으로, 해마다 주는 베[布]가 2천 4백 40필입니다. 그리고 시어소(時御所)112) 의 각 차비인(差備人)과 전원문(殿院門)을 순직하는 고용군은 모두 2백 40명으로, 해마다 주는 베는 5천 7백 60필입니다. 후원(後苑)의 자주 열지 않는 문은 굳이 지켜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창차비(窓差備)·내차비(內差備) 따위는 이중으로 정해진 것이니 더욱 의의가 없습니다. 빈 궁궐과 시어소는 차이가 있는 것이니, 그 긴요하고 긴요하지 않은 것을 참작하여 알맞게 줄이시면, 이는 비용을 절약하는 데 진실로 합당할 뿐만 아니라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데에도 도움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한기(韓琦)가 말하기를, ‘비용을 줄이는 것은 궁궐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쓸데없는 경비에 관계되는 것을 일체 혁파(革罷)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묘당(廟堂)에 내려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밤에 소대(召對)하여 《심경(心經)》을 강(講)하였다.
10월 3일 계유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領議政)으로, 유봉휘(柳鳳輝)를 좌의정(左議政)으로, 조태억(趙泰億)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심수현(沈壽賢)을 병조 판서(兵曹判書)·판의금(判義禁)·지경연(知經筵)으로, 이삼(李森)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봉상(李鳳祥)을 한성 우윤(漢城右尹)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정언(正言) 조명교(曺命敎)이다.】 에서 앞서 아뢴 것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전(前) 길주 목사(吉州牧師) 조엄(趙儼)은 그의 할아버지가 본고을에서 죽었다 하여 부임하기를 혐의하여 사폐(辭陛)하여 하교(下敎)를 들을 즈음에 이러한 놀랍고도 이치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습니다. 원리(院吏)가 전례를 들어 말하니, 다시 일어났다가 앉으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족하다.’ 하면서 말과 행동이 그토록 교만하였으니, 특별히 파직한 것만 가지로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사과(司果) 이경열(李景說)은 해읍(海邑)의 수령으로 있었을 적에 나쁜 비방이 매우 심하였고, 돌아올 적에는 짐이 법에 벗어났으므로, 신관(新官)에게 지적당한 것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그 자식을 보내어 미봉책을 쓰기까지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시켜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사재 직장(司宰直長) 민사수(閔師洙)는 가는 곳마다 비루하고도 잣달아 아전들의 계돈을 빌려 쓰고 공인(貢人)의 마포(麻布)를 함부로 빼앗았으니, 청컨대, 파직시켜 서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장릉 참봉(長陵參奉) 윤세관(尹世觀)은 추패(麤悖)하고도 창피(猖披)하여 재리(財利)를 늘이니, 비방이 향리(鄕里)에서 비등하고 능졸(陵卒)에게 원망을 샀습니다. 청컨대, 파출(罷黜)하소서."
하였는데, 윤허(允許)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고 하교하기를,
"조엄(趙儼)은 이미 파직시켰으니, 나문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이경열(李景說)은 풍문을 꼭 다 믿을 수가 없다."
하였다.
수찬(修撰) 김홍석(金弘錫)이 상소하기를,
"양역(良役)의 폐단은 부역이 고르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장차 이를 고르게 하려면 반드시 견감해야 하고, 견감시키고자 하면 반드시 부족하게 될 것인데, 부족해도 충당시킬 대책이 없다면 그것은 일을 담당한 신하가 지혜와 생각을 다하더라도 계책을 세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무릇 임금이 만민(萬民)을 기르는 것은 부모가 여러 자식을 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두 같은 자식인데, 하나는 노고(勞苦)하여 죽고 하나는 근심없이 편하게 지낸다면, 부모로서는 고르게 편안하고 나누어 노고하게 할 생각일 뿐일 것입니다. 오늘날 사족(士族)은 진실로 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관이나 무관 두 길의 출신도 아니고 반드시 바탕삼을 만한 문음(門蔭)113) 이 있는 것도 아닌데 농토와 집을 소유하고 노비(奴婢)를 부리고 있습니다. 한 번 사족이라고 불리워지면 기꺼이 편맹(編氓)114) 으로 자처(自處)하려고 하지 않는데 관장(官長)들도 이를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한 말의 곡식과 한 자의 베도 관에 바치는 일이 없이 자식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마치 봉작(封爵)을 세습(世襲)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입니까?
한(漢)나라 때에는 세 공자(孔子)가 변방에 수자리를 살았었고, 당(唐)나라 때에는 조용(調用)할 적에 선비와 농민을 구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오위(五衛)를 혁파하기 전에는 사족들도 모두 역명(役名)이 있어서 편안하게 일 없이 앉아서 먹는 자는 본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족이란 옛날에 없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우리 나라의 전성기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듣건대, 양역(良役)을 바치는 것은 통상적으로 한 필로 정식(定式)하였다고 하는데, 장차 헤아려 줄여서 그 본래의 액수(額數)를 감축시킨다면, 신(臣)은 부족한 수가 과연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본래의 베[布]에 비교해 보아도 5, 6분의 1, 2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호적에 드러난 경외(京外)의 민호(民戶)가 여호(女戶)와 단정(單丁)을 제외해도 1백여 만 호(戶)에 밑돌지 않을 것인데, 사족(士族)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부족한 숫자를 돈으로 계산하여 사족을 가리지 말고 1백여 만 호의 백성에게 모두 징수한다면, 충당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요즈음 일을 주장하는 자가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경장(更張)을 꺼려서이고, 또 오늘날 나라 기강이 그 일을 해 낼 수 없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진실로 노성(老成)하고 충후(忠厚)한 뜻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무릇 크게 변통하기 위한 경우에는 반드시 큰 경장(更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1백 년 동안 고질화된 폐단을 바로잡아 만백성의 거의 끊어지게 된 목숨을 구하려면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문 채 인순(因循)해서야 일이 순성(順成)되기를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것은 오직 임금과 정승이 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스스로 주저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혹 자질구레한 것을 주워모아 미봉책으로 꾸려가면서 구차하게 마무리지을 계획을 한다면, 이는 명목(名目)이 이미 정당하지 못하고 사체(事體) 또한 매우 구간(苟簡)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시행한 지 1, 2년도 안 되어 온갖 병폐가 생기게 됨에 따라 마침내 도로 정지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 정지한 뒤에는 또 다시 이를 징계하고 두려워하여 폐해를 혁파하자는 말을 꺼릴 것입니다. 그러면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마저 마침내 지탱할 수가 없게 되어 나라의 근본이 쓰러질 것이니, 어찌 크게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백성들이 스스로 진달(陳達)할 수 없음을 염려하셔서 심지어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진언(進言)하게 하셨으나, 외신(外臣)의 진소(陳疏)는 체통이 중하므로 반드시 관계가 소원하고 처지가 미천한 것으로 자처하고 있으니, 또 다시 그 기대에 어긋날까 염려가 됩니다. 마땅히 각도(各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열읍(列邑)에 거듭 유시(諭示)하여 각각 민폐(民弊)를 갖추어 감영(監營)에 보고하게 하고 도신은 이를 채택하여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심이 고금(古今)에 으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세움이 흑 순일(純一)하지 못하고 뜻을 지킴이 혹 견고(堅固)하지 못하면 속히 물러서게 된다는 경계와 끝맺음이 없다는 비평 또한 마땅히 염려해야 할 것인데, 이는 오직 학문을 하여 이치를 밝히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한갓 이름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속히 해버리려는 뜻을 가지고 남의 이목(耳目)에 놀라운 일이 있기를 힘써 구하면서 실제로 몸과 마음에 체득한 것이 없으면, 비록 그 처음 부지런히 힘쓸 적에는 조그마하나마 볼 만한 선(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일시적인 지기(志氣)는 쉽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이 게을러진 다음에 막연하게 이를 이어갈 수가 없게 되면 마침내 혼란과 같은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하자는 것은 명분이 진실로 아름답다. 그러나 만약 동쪽 것을 헐어다가 서쪽을 보강하듯이 그 일에 대해 책임만 면하려 한다면, 이는 국체(國體)가 구간(苟簡)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뒷날의 폐단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반드시 크게 진작(振作)시키는 일이 있은 후에야 양역(良役)을 공평하게 하고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번에 그대의 상소를 보니 오늘날의 약처방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호포(戶布)115) 와 구전(口錢)116) 은 그 의논이 선왕(先王) 때부터 비롯되었으나, 시행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처음 실시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족(隣族)의 침징(侵徵)과 백골(白骨)의 징포(徵布) 또한 고전(古典)에 있었던가?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해서 처리하게 하겠다. 민폐에 관한 일은 도신(道臣)에게 분부해서 이에 의해 거행하게 하겠으며, 경계를 진달한 말에 대해서는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집의(執義) 윤회(尹會)가 상소하여 계청(啓請)하기를,
"군현(郡縣)의 교생(校生)·군관(軍官)과 각 병영(兵營)의 여러 소속(所屬)을 나라에서 정한 액수(額數) 외에는 모두 사태(沙汰)하소서. 그리고 이른바 유학 충의(幼學忠義)는 모두 그 부조(父祖)의 수십 년 동안의 장적(帳籍)을 소급하여 고찰해서 모칭(冒稱)하는 자를 가려내어 양정(良丁) 가운데 도망했거나 죽은 자를 대신하여 보충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각 군문(軍門)에 둔전(屯田)117) 을 설치한 곳은 양민(良民)들이 부역을 피하여 도망가는 소굴이 되고 있으며, 둔감(屯監)들은 가렴 주구(苛斂誅求)하여 모두 사복(私腹)을 채우고 있습니다. 본관(本官)에서 재실(災實)을 조사할 적에 색리(色吏)를 정하여 곧바로 군문에 바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적에 전결(田結)과 시장(柴場)을 절수(折受)118) 하셨는데, 저위(儲位)에 오름에 미쳐서도 그대로 답습하여 혁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지금은 높이 보위(寶位)에 오르셔서 온 나라를 다 소유하였으니 마땅히 한결같이 모두 혁파하여 임금은 사장(私藏)이 없다는 뜻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계청하기를,
"신구(新舊)의 조적(糶糴)은 금년의 재실(災實)을 헤아려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수 만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 밖에 햇수가 오래 되어 적체(積滯)된 포흠(逋欠)은 특별히 탕척(蕩滌)하고 그 문적(文籍)을 불태우게 하소서."
하고, 또 계청하기를,
"산중의 군(郡)에서 바치는 공부(貢賦)를 면포(綿布)로 바꿀 것은 일체 그 해의 시중 가격대로 하고, 돈으로 절반을 내도록 하게 하지 마소서."
하고, 또 계청하기를,
"호남(湖南)·영남(嶺南) 두 감영(監營)에서 별도로 모은 곡식은 절반을 돈으로 상납(上納)하게 하여 탁지(度支)의 바닥난 경비를 보충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고 비답하였다.
10월 4일 갑술
밤 1경(一更)에 달이 남두(南斗)의 네 번째 별을 침범하였다.
소대(召對)하여 《강목(綱目)》을 강(講)하였다.
교리(校理) 오수원(吳遂元)이 상소하기를,
"등극(登極)을 주청(奏請)하신 사신(使臣)은 본래 정승을 차견(差遣)하는 것인데, 지난번에 정석(鼎席)이 다 갖추어지지 아니하였다 하여 종신(宗臣)을 차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삼공(三公)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청컨대, 그 배표(拜表)119) 하는 날짜를 조금 물려서 다시 대신(大臣)으로 사신을 고쳐서 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배표할 시기가 임박하였고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은 각각 상시(上諡)와 계빈(啓殯)하는 일을 맡았으며, 좌상(左相)은 병이 들어 갈 수가 없는데, 그대가 미처 이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스스로 가기를 청하면서, 오수원의 말이 체통을 얻은 것이라고 허여하였는데, 윤허(允許)하지 않고,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그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말한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개수(改修)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와 좌의정(左議政) 유봉휘(柳鳳輝)가 임인년120) 의 《시정기》에 국안(鞫案)이 기록되지 아니하였으니 그때의 사관(史官)인 송인명(宋寅明)·신치운(申致雲)으로 하여금 함께 시강원(侍講院)에서 숙직하면서 개수하기를 청하고, 이어 임금에게 아뢰기를,
"송인명과 신치운이 말하기를, ‘죄수의 공초 외에도 대간(臺諫)의 계사(啓辭)와 연신(筵臣)의 말이 《시정기》에 실려 있는 것이 있으니, 반드시 하나로 통합해서 포폄(褒貶)을 첨가해야 바야흐로 역사의 체계를 이룰 것입니다. 지금 만약 문안(文案)만 등사(謄寫)하여 각 판각(板刻)에 붙여 넣는다면, 이는 한 원리(院吏)로서도 충분할 것인데, 어찌 사관(史官)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말이 옳습니다. 다만 사관(史館)의 옛 관례에 《시정기》는 관문(館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으니, 지금 상번(上番)하는 한림(翰林)의 방을 장지[障子]로 막아 둘을 만들어서 송인명과 신치운으로 하여금 차례로 숙직하면서 각각 그 전에 만든 《시정기》에다가 보강하여 정리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한 세대의 출척(黜陟)과 용사(用捨)는 대신(大臣)이 이를 주관하고, 천고(千古)의 포폄(褒貶)과 시비(是非)는 사신(史臣)이 이를 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신이 사관(史官)의 기록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은 사신이 묘당(廟堂)의 의논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는 고금(古今)의 공통된 뜻이다. 그런데 지금 이광좌 등은 대신으로서 사필(史筆)에 대해 소활하고 세밀함을 총찰(總察)하고 있고 송인명 등은 사신으로서 묘당에서 포폄(褒貶)하는 일을 품의(稟議)하였으니, 둘 다 잘못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13면
【분류】역사(歷史)
[註 120] 임인년 : 1722 경종 2년.
사신은 논한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한 세대의 출척(黜陟)과 용사(用捨)는 대신(大臣)이 이를 주관하고, 천고(千古)의 포폄(褒貶)과 시비(是非)는 사신(史臣)이 이를 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신이 사관(史官)의 기록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은 사신이 묘당(廟堂)의 의논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는 고금(古今)의 공통된 뜻이다. 그런데 지금 이광좌 등은 대신으로서 사필(史筆)에 대해 소활하고 세밀함을 총찰(總察)하고 있고 송인명 등은 사신으로서 묘당에서 포폄(褒貶)하는 일을 품의(稟議)하였으니, 둘 다 잘못된 것이다.
10월 5일 을해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사인(士人) 이존중(李存中)·이보원(李輔源)·조상항(趙尙恒)은 남의 집을 빼앗은 죄로 체포되어 갇혔는데, 병이 위중하니, 청컨대, 보수(保授)121)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로 특별히 풀어주되, 병이 낫기를 기다려 추문(推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6일 병자
윤행교(尹行敎)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최수(趙最壽)를 장령(掌令)으로, 박윤동(朴胤東)을 지평(持平)으로, 이철보(李喆輔)를 검열(檢閱)로 삼았다.
고부 겸 주청 정사(告訃兼奏請正使)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부사(副使) 이진유(李眞儒)·서장관(書狀官) 김상규(金尙奎)가 배표(拜表)하고 길을 떠났다. 그 주문(奏文)에 이르기를,
"조선국 권서 국사(朝鮮國權署國事) 신(臣) 이금(李昑)은 삼가 고부(告訃)의 일을 아룁니다. 신(臣)의 형인 선신(先臣) 이균(李昀)은 금년 7월 20일부터 우연히 병을 얻었는데, 증세가 악화되어 8월 23일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심해지더니, 마침내 그 달 25일 축시(丑時)122) 에 훙서(薨逝)하였으므로, 고부의 사유(事由)를 이렇게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조선국 희순 왕비 김씨(朝鮮國僖順王妃金氏)는 삼가 승습(承襲)의 일을 아룁니다. 저의 아들인 선신(先臣) 왕(王)이 금년 7월 20일에 우연히 병을 얻었는데, 8월 23일에 이르러 증세가 갑자기 심해지더니, 그 달 25일에 세제(世弟)인 이금(李昑)에게 국사(國事)를 부탁하고는 그 날 축시(丑時)에 훙서(薨逝)하였습니다. 대개 세제인 이금은 총명하고 효우(孝友)하며 너그럽고 인자하여 일찍부터 장인(長人)의 덕망이 있었으므로, 나라 사람의 희망에 의해 추대 받아 이미 천정(天庭)에 주문(奏聞)하여 강희(康熙)123) 61년124) 5월에 성조(聖祖) 인황제(仁皇帝)께서 특별히 내려 주신 은전(恩典)을 받았으니, 흠차 칙사(欽差勅使)가 고명(誥命)을 받들고 와서 세제(世弟)로 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제 이금은 일찍이 고(故)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며, 선신(先臣) 왕이 운명할 무렵에 삼가 성명(成命)을 받들어 세제에게 나랏일을 임시로 맡게 했습니다. 첩(妾)이 이때에 부인(婦人)으로써 피혐(避嫌)할 수 없으므로, 삼가 전례(典禮)를 좇아 세제인 이금을 책봉하여 국왕(國王)으로 승습(承襲)하고 그 아내 서씨(徐氏)를 왕비(王妃)로 삼을 것을 삼가 청합니다.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천지의 부모이시니, 특별히 해부(該部)로 하여금 고명(誥命)을 내리게 하여 작은 나라의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은총의 빛남을 보게 하시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크게 기대하는 경사를 제외하고 승습에 관계된 사리(事理)를 이렇게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하고,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조선국(朝鮮國)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이광좌(李光佐) 등은 삼사 승습(承襲)하는 일을, 희순 왕비(僖順王妃) 김씨(金氏)의 교령(敎令)을 공경히 받들어 알립니다. 옹정(雍正)125) 2년126) 8월 25일 축시에 국왕(國王)이 훙서(薨逝)하면서 세제(世弟)에게 나라 일을 부탁하였습니다. 대개 세제는 총명하고 효우(孝友)하며 너그럽고 인자하여 일찍부터 장인(長人)의 덕망이 있었으므로, 나라 사람의 소원에 의해 추대받아 이미 성조(聖祖) 인황제(仁皇帝)께서 내리는 은전을 받고 세제에 봉해졌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고(故)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정부(政府)에서는 옛 관례에 의거하여 위로 예부(禮部)에 보고하니, 전달하여 시행해 주소서. 이렇게 공경히 준행(遵行)합니다. 저희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나라에는 단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가 없고, 또한 하루라도 명분과 지위를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임금이 이미 성명(成命)을 받들어 세제로 봉했고, 훙서할 적에는 종묘·사직과 백성을 부탁하셨으니, 삼가 바라건대, 귀부(貴部)에서는 전항(前項)의 사유를 자세히 살펴보시고 낱낱이 천총(天聰)께 아뢰어 세제를 국왕으로 책봉하고 서씨를 왕비로 삼는 두 건의 사항에 대해 속히 밝으신 전지(傳旨)를 내려 주셔서 온 나라 신민(臣民)이 밤낮으로 크게 바라는 마음을 위로해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이렇게 주문(奏文)을 갖추어 알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이를 아뢰어 시행하게 해주소서. 삼가 보고 드립니다."
하였다. 세 사신(使臣)이 하직하니, 임금이 무망각(无妄閣)에서 인견(引見)하고 지극히 위로하였다.
당초에 총호사(摠護使) 이광좌(李光佐)가 민폐(民弊)를 염려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모집하는 역군(役軍) 수를 작정(酌定)하여 문서에 기록해서 산릉 도감(山陵都監)에게 보냈는데, 산릉 도감이 1백 80명의 백성을 더 사역하였으므로, 이광좌가 그 사실을 듣고 비국(備局)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도감의 아전을 조사하여 봉공(俸供)127) 하게 하고, 도감 당상(都監堂上)을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도감 당상 이사상(李師上)이 크게 노하여 상소해서 이광좌를 헐뜯기를, ‘이것은 당상을 봉공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체통이 이와 같아서는 마땅하지 못하다."
하였다. 이튿날 이광좌가 들어가 아뢰기를,
"신(臣)이 총령(摠領)의 책임을 맡고 있는데 어찌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마는, 대저 근일(近日)에 나라의 풍속이 어렵게 되어 칭찬하면 기뻐하고 허물을 지적하면 비록 추고(推考)를 하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니, 기강이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어제 도청(都廳)에서 품언(稟言)하기를, ‘지사(地師)인 박지만(朴支蔓)이, 「새 능(陵)의 혈(穴) 위에 흙을 보충하여 뇌두(腦頭)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뜻을 이미 총호사에게 말하였으므로 바야흐로 역사(役事)를 시작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듣건대 ‘이미 3척(尺) 남짓하게 흙을 쌓았다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가령 신이 도감(都監)에게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품계(稟啓)하기 전에는 쉽사리 역사를 시작할 수가 없는 것인데, 어찌 박지만의 말만 믿고서 경솔하게 역사를 시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일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그것은 모름지기 문적(文跡)이 있어야 가능하므로 또한 해리(該吏)를 봉공(捧供)하게 했습니다. 해당 당상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신은 다시 지사(地師) 4, 5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 편부(便否)를 살펴보고 품정(稟定)하겠습니다."
하니, 옳게 여겼다.
10월 7일 정축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즉시 나와서 일을 보도록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정언(正言) 조명교(曺命敎)이다.】 에서 전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주 목사(星州牧使) 김우집(金宇集)은 일찍이 선산 군수(善山郡守)로 있었을 때 저치미(儲置米) 2백여 섬과 환상(還上)할 미조(米租) 1천여 섬을 마음대로 꺼내다가 미리 백성에게 주고 장리(長利)를 먼저 받아 사복(私腹)을 채우는 자본으로 삼았고, 가을을 기다려 섬수에 준하여 억지로 바치게 하였습니다. 본 고을로 옮겨진 다음에는 백성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하면서 신관(新官)에게 소장(訴狀)을 올리자 신관이 받은 곡식만 바치게 했는데, 곡식 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법(不法)한 사람은 버려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0월 8일 무인
특명으로 민진원(閔鎭遠)을 석방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작년에 특명으로 석방하게 했던 것은 선왕(先王)이 의도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아! 성후(聖后)128) 의 형제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그 당시 대간(臺諫)이 논계(論啓)를 준엄하게 내었으므로, 선왕이 비록 내린 명령을 도로 거두기는 하였으나 성심(聖心)은 무척 슬퍼하여 반드시 부부인(府夫人)이 살아 계실 적에 특별히 석방해서 서로 의지하게 해야 하겠다는 뜻을 여러 번 말로 나타냈었다. 아! 인산(因山)이 이미 정해졌으니, 석방시켜 서울에 와서 한 번 곡(哭)할 수 있게 한다면 어찌 내가 선왕의 뜻을 따르는 도리일 뿐이겠는가? 아마 하늘에 계신 성후(聖后)의 영령(英靈)께서도 생각건대, 반드시 명명(冥冥)한 가운데에서 기뻐하실 것이다. 전 판서(判書) 민진원(閔鎭遠)을 특별히 방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남취명(南就明)·우승지(右承旨) 이중술(李重述)·우부승지(右副承旨) 유수(柳綬)가 민진원을 석방하게 한 명을 다시 거두어들일 것을 계청(啓請)하니, 비답하기를,
"요(堯)·순(舜)의 도는 효도와 공경뿐이다. 내가 이번에 특별히 석방하라고 명을 내린 것은 하늘에 계신 성후(聖后)의 영령(英靈)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자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석방하려고 했던 뜻을 따른 것인데, 복역(覆逆)129) 하는 논의가 근밀(近密)한 곳에서 나왔으니, 진실로 내가 생각했던 바가 아니다. 아! 오늘의 비답은 민진원(閔鎭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성후를 위한 것이며, 나의 뜻이 아니고 선왕(先王)의 뜻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목이 메어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유독 경(卿) 등은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복역하는 뜻이 있는가?"
하였다.
집의(執義) 윤회(尹會)가 아뢰기를,
"민진원(閔鎭遠)이 범한 죄가 지극히 중대한 것은 앞뒤의 대계(臺啓)에서 자세히 논하였습니다. 민진원은 폐부지친(肺腑之親)으로서 겉으로는 잠규(箴規)130) 를 칭탁하면서 속으로는 실로 알양(訐揚)131)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추후하여 후회한다는 등의 말은 위협하는 뜻이 드러나 있으니, 이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역적 김창집(金昌集)이 형벌을 받은 뒤에도 인친(姻親)의 호의를 폐지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저버리고 역모에 가담한 실상을 더욱 숨길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석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여 《심경(心經)》을 강(講)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김홍석(金弘錫)이 말하기를,
"이 편(編)에서는 계구(戒懼)와 신독(愼獨)를 분리시켰는데, 우리 나라의 유현(儒賢)인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순서를 잃었다.’ 하였고, 선정신 이황(李滉)은, ‘옛사람도 이렇게 분배한 분이 있었으니, 굳이 까다롭게 공박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신독’이란 마음이 이미 발동한 다음의 공부이고 ‘계구’는 마음이 아직 발동하기 이전의 공부이므로, 다만 그 공부의 의의만을 취하여 분리시킨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도표로써 보건대, 대립된 순서가 아마도 경중(輕重)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하니, 김홍석(金弘錫)이 말하기를,
"어찌 대립시킨 순서를 가지고 경중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계구’는 마음이 발동하기 이전의 공부이고 ‘신독’은 마음이 이미 발동한 다음의 공부입니다. 사람은 비록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마음을 잠깐 품었다면 이는 곧 발동한 것입니다."
하였다. 동지경연(同知經筵) 이진검(李眞儉)이 말하기를,
"‘위(危)’ 자(字)는 가장 주의깊게 탐구해야 할 공부입니다. 비록 간사한 마음을 잠깐 품었다 하더라도 이는 곧 위태로운 것입니다."
하고, 김홍석이 말하기를,
"인심(人心)을 인욕(人慾)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육자정(陸子靜)이 말하기를, ‘순(舜)임금이 만약 인심을 좋지 않게 여겼다면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버리게 하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다만 위태롭다고 한 것은 안일하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색(聲色)과 취미(臭味) 사이에서 끌려서 ‘인욕’이 되는 것입니다. 필부가 욕심에 끌려가면 몸을 망치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임금의 한몸은 종사(宗社)를 맡고 있는 처지이므로, 그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더욱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였다.
10월 9일 기묘
예조(禮曹)에서 발인(發靷)하고 반우(返虞)132) 할 때에 봉사(奉辭)하고, 지영(祗迎)하는 데 대해 계목(啓目)을 마련하였는데,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봉사(奉辭)와 교영(郊迎)은 곧 옛 제도인데, 지금 이 신릉(新陵)은 서울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며, 현궁(玄宮)133) 에 받들어 안치(安置)하는 것도 그 날에 있다. 지금 만약 경숙(經宿)하는 전례(前例)를 따라 문 밖에서만 곡(哭)을 하고 몇 리밖에 되지 않는 능소(陵所)에 따라가지 못한다면, 애통한 마음을 어떻게 억제할 수 있겠는가? 능소에 나아가서 현궁에 곡(哭)하여 하직하고 환궁(還宮)했다가, 이튿날 교영(郊迎) 또한 전례에 따라 하겠다. 즉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총호사(摠護使)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국조(國朝) 이래로 봉릉(封陵)할 때 원경(圓經)을 혹 35척(尺)을 쓰거나 혹은 30척을 썼는데, 장릉(長陵)134) 은 25척이었습니다. 그 후에 익릉(翼陵)135) 은 30척이었고, 명릉(明陵)136) 은 신사년137) 에 25척으로 정했고, 경자년138) 에 봉릉(封陵)하였을 때에도 그 제도를 따랐으니, 이번에도 마땅히 경자년의 제도를 따라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다만 안과 밖의 재궁(梓宮)139) 이 전에 비해 상당히 긴데, 만약 25척의 제도를 쓰게 되면 퇴광(退壙)140) 금정(金井)141) 의 아래 모퉁이의 판(板)은 반드시 원경(圓徑) 바깥에 배포해야 할 것이고 능 주위에 두르는 엄석(掩石)도 으레 먼저 깔아야 할 것인데, 돌 머리 부분도 반드시 금정 안에 가로로 들어가게 될 것이니, 그것이 가장 염려가 됩니다. 만약 30척의 제도를 쓴다면, 지금의 묘혈(墓穴)이 아무리 넓다고 하더라도 능(陵) 위에 상석을 설치할 곳은 오히려 부족하게 되어 곡장(曲墻)은 마땅히 보충한 흙 위에 있게 될 것이니, 그것도 염려가 됩니다. 지금 만약 25척에서 30척 사이의 절반인 27척 5촌을 쓰거나 27척만 쓴다면 능의 모양도 지나치게 크지 않고 퇴광·금정도 구애될 염려가 없다고 합니다. 이에 의하여 27척 5촌으로 정하여 시행해도 되겠습니까? 짝수는 쓰지 않고 반드시 홀수를 써야 하는데 5촌·7촌은 모두 홀수이고, 모든 일은 또한 모름지기 넉넉해야 하는 것이니, 27척 7촌으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홀수를 쓴다고 하지만 30척도 짝수가 된다. 총호사의 말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6과 8의 수와는 다르다. 예전부터 짝수를 쓰지 아니하였으면 총호사의 말에 따라 27척 7촌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 후에 이광좌가 또 아뢰기를,
"이번에 산릉 도감(山陵都監)의 품목(稟目)을 보건대, 산릉(山陵)의 모든 일을 한결같이 명릉(明陵)의 옛 제도를 따랐으므로, 회격(灰隔)이 3척이고, 지회(地灰)가 3촌이며, 퇴광(退壙)은 정광(正壙)에 비해 좌우가 각각 5분(分)이 감소되었고, 길이는 2척이 감소되었습니다. 다만 안팎의 재궁(梓宮)의 척수(尺數)가 상당히 길기 때문에 산릉의 원경(圓徑)은 27척 7촌의 제도를 쓰게 된 것입니다. 정광의 안쪽 길이가 11척 8촌 9분이면, 반달 모양의 능을 만들 경우 마땅히 18척 2촌 9분 5리가 되어야 하며, 나머지의 지름이 9척 4촌 5리인데, 이는 마땅히 퇴광의 터가 되어야 하며, 엄석(掩石)이 놓일 자리를 3촌쯤 제외시키면 9척 1촌쯤 됩니다. 이것을 안쪽 재궁에 비교할 때 1척 3촌 1분쯤 더 긴데, 지금 만약 정광의 길이에 비하여 2척을 감하는 제도를 쓴다면 퇴광의 안쪽 길이는 마땅히 9척 8촌 9분이 되어 엄석 밖으로 가로 나오는 것이 결국 7촌 9분이 될 것이니, 처음에 원경을 품정(稟定)한 본뜻이 아닙니다. 만약 2척을 감한 외에 또다시 7촌 9분이나 혹 8촌을 감한다면 아마도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랫사람으로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척수(尺數)를 정한 것은 혹시라도 엄석을 침범하게 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퇴광은 원경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형편에 따라 해야 할 것이다."
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그러면 8촌을 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승지(承旨)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양역을 변통해서 한다는 논의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대행 대왕(大行大王) 때에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해 놓고 강구하였으나 지금까지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더욱 낮아지는 때를 당하여, 이른바 크게 변통시키는 일은 가볍게 의논하기 곤란한 점이 있는데,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 두 영(營)의 소속이 모두 향군(鄕軍)이므로, 더할 수 없이 허술합니다. 서울에 있는 색목(色目)은 다만 늠료(廩料)만 허비할 뿐이고, 본래 숙위(宿衛)한 사실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수어청(守禦廳)을 혁파(革罷)하여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돌려서 유수(留守)로 승격시키고, 총융청(摠戎廳)을 혁파하여 수원(水原)에 소속시켜 경기 병사(京畿兵使)로 승격시키되 문관(文官)·무관(武官)을 교차(交差)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고, 그리고 그 제도를 증가하여 군병(軍兵)을 관속(管束)하게 하되 허비하는 늠료를 연출(捐出)하고 긴요하지 않은 색목(色目)을 혁파하여 필수(疋數)를 감소시킨 양역(良役)의 수용(需用)에 보충하게 한다면, 일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묘당(廟堂)에서 널리 상의하여 장점을 따라 변통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陳達)한 것은 매우 좋은 말이다. 양역청(良役廳)에 본부해서 상확하여 변통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0월 10일 경진
임금이 승지(承旨) 김동필(金東弼)에게 말하기를,
"민진원(閔鎭遠)의 일은 선후(先后)를 생각하면 말하는 즈음에 목이 메이는데, 대관(臺官)의 피혐(避嫌)하는 말 가운데 감히 선후를 거론하는 말을 하였으니, 신하의 도리로서 어찌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앞으로는 선후에 대해 말한 소장(疏章)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김동필이 말하기를,
"대관이 피혐하며 말한 것은 대개 성상(聖上)께서 하교(下敎) 가운데 제시하여 말씀하신 것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뜻을 제대로 드러내어 진달하지 못하여 준엄한 하교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최절(摧折)하시니, 이는 진실로 언자(言者)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도리에 어긋납니다. 심지어 소장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하교까지 내리셨으니, 더욱 성상의 덕에 흠이 되겠습니다. 성상의 하교가 비록 그러하더라도 신은 감히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후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 몇 년이 되었길래 오늘날 신하된 자들로서 어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승지의 말이 이와 같으니 소장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은 도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민진원(閔鎭遠)을 석방할 적에 하교하기를,
"하늘에 계신 성후(聖后)의 영령(英靈)께서, 생각해 보건대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하였는데, 대신(臺臣) 윤회(尹會)가 그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면서 피혐하여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선후(先后)의 영령께서, 생각해 보건대 반드시 매우 싫어하실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임금의 하교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포도 대장(捕盜大將) 김중기(金重器)가 말하기를,
"조녀(趙女)가 저주한 사건의 옥사는 비복(婢僕)의 무리가 저뢰(抵賴)하며 승복하지 않으므로, 대관(臺官)들이 포도청(捕盜廳)에 이송(移送)하여 추핵(推覈)하기를, 계청(啓請)해서 윤허(允許)를 받았습니다. 다만 생각해 보건대, 그 옥사는 이미 구가(舅家)에 흉물(凶物)을 묻은 것으로 일컬어진 것이니, 이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므로 아마도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로 다스리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요망스러운 비복의 무리가 경폐(徑斃)142) 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법관(法官)에게 회부시켜야지 어찌 포도청에 이송시켜야 하겠는가? 앞으로는 도둑을 다스리는 사건이 아닌데도 혹시 포도청으로 이송하는 일이 있으면 비록 대관의 계청이라고 하더라도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11일 신사
양사(兩司)에서 거듭 합계(合啓)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이집(李㙫)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조상경(趙尙慶)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총호사(摠護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지석(誌石)의 함(函) 위에 혹은 묘호(廟號)만을 기록하여 ‘모종 대왕(某宗大王)’이라고 하였고, 지문(誌文)에는 혹 시호(諡號)를 함께 기록하거나 혹은 시호만 기록하기도 합니다. 경자년143) 의 경우에는 ‘모종’·‘모능(某陵)’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지문으로서는 가장 간략하고 곡진(曲盡)합니다."
하니, 임금이 경자년의 관례를 따르게 하였다.
10월 12일 임오
하교하기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정재악(鄭載岳)은 어진 재상의 아들로서, 나이가 90세에 이르렀으니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노인을 공경하고 나이 많은 이를 존중함에 있어 특별한 은전이 없을 수 없으니, 지돈녕(知敦寧)을 제수하라."
하였다.
조최수(趙最壽)을 응교(應敎)로, 이진급(李眞伋)을 헌납(獻納)으로, 홍만조(洪萬朝)를 판돈녕(判敦寧)으로, 이정필(李廷弼)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0월 13일 계미
호조 판서(戶曹判書) 오명항(吳命恒)·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윤취상(尹就商)·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세최(李世最)·행 부제학(行副提學) 박필몽(朴弼夢)·대사헌(大司憲) 윤행교(尹行敎)를 비국 당상(備局堂上)으로 차정(差定)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심수현(沈壽賢)과 오명항을 이어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차정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진유(李眞儒)가 아뢰기를,
"계성묘(啓聖廟)144) 는 공자(孔子)의 사당과는 다른 것인데 사배례(四拜禮)를 적용하고 있으니, 마땅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바로잡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는 말하기를,
"공자는 만세(萬世)의 스승이고, 또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존(追尊)되었으므로 진실로 사배례를 행하는 것이 마땅하나, 계성묘에 이르러서는 사배례를 행하는 것이 매우 의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유신(儒臣)들과 의논하게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정제두(鄭齊斗)가 말하기를,
"신(臣)이 삼가 우리 나라 사전(祀典)을 보건대, 비록 작은 제사의 경우에 있어서도 모두 사배례를 적용하고, 본래 재배(再拜)의 예는 없습니다. 지금 이 계성묘는 이미 나라의 사전(祀典)을 삼았으므로 서원(書院)과 교사(郊社)와 개인의 제사 경우와는 같지 않으니, 마땅히 나라의 예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릇 성인(聖人)을 존중하는 것은 작위(爵位) 때문이 아니라 그 도(道)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호(王號)가 있기 전이라 하더라도 그 예수(禮數)가 어찌 여러 작은 제사의 다음에 해당되겠습니까?"
하니, 다시 대신(大臣)에게 문의하게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말하기를,
"나라에서 지금 애통하여 경황이 없는 때를 당하여 상사(喪事)와 기무(機務)에 관계되는 중요한 일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다른 일을 강론(講論)하는 것은 합당치 못할 듯합니다. 지금 이 사배례가 비록 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우선은 조용한 날을 기다리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앞서 이미 엄한 하교를 내렸다. 오늘날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인데, 감히 ‘성후(聖后)’ 두 글자를 연계(連啓)하는 글 가운데에 또 쓰고 있으니, 아! 성후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몇 해가 지났길래 무슨 마음으로 감히 다투어 논계(論啓)하는 글 속에다가 쓰고 있는가? 이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 아니라 강상(綱常)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그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서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 집의(執義) 윤회(尹會)는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도성문(都城門) 밖으로 내치도록 하라."
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유수(柳綬)와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원명(趙遠命)이 그 명을 도로 거두어들일 것을 계청(啓請)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이 비지(批旨)는 언로(言路)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윤리와 강상을 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직무상 근밀(近密)한 곳에 있으면서 이렇게 명을 거두라는 계청이 있으니, 어찌 참작하는 도리가 없겠는가? 특별히 관직을 삭탈하는 벌을 시행하라."
하였다.
권익관(權益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박필몽(朴弼夢)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10월 14일 갑신
교리(校理) 오수원(吳遂元)과 수찬(修撰) 김홍석(金弘錫) 등이 면대(面對)를 요구하여 윤회(尹會)를 삭탈 관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부부인(府夫人)의 나이가 많은데 모자 간에 멀리 떨어져 있으니, 오르내리시는 선후(先后)의 영령(英靈)께서 어찌 측은한 마음이 없겠는가? 부부인이 있지 않다면 내가 어찌 측은하다고 하교하겠는가? 윤회(尹會)는 선후의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반드시 매우 미워할 것이라고 하는가? 말이 매우 공경스럽지 못하다.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만약에 생각이 이에 미친다면 어찌 명을 거두어들이라는 계청(啓請)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홍석 등이 번갈아 나아가서 수백 마디의 말로써 강력하게 계청하기를 마지 아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민진원(閔鎭遠)을 위한 것도 아니고 윤회(尹會)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만약 잘못된 일임을 안다면 거두어들이는 것이 좋겠지만 이미 스스로 잘못된 일임을 알지 못하겠는데 군하(群下)의 말에 끌려서 거두어들인다면, 이는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니, 성실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벌이 이미 시행되었으니, 어찌 참작하는 방법이 없겠는가?"
하고 마침내 도로 거두어 들이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얼마 전에 하교(下敎)로 인하여 조사해 물어 보았더니, 근장 군사(近仗軍士)145) 가 한 여인을 잡아왔다가 중사(中使)의 말로 인하여 즉시 보냈다고 합니다. 잡아 왔다가 즉시 보냈으면 그것이 죄가 될 것이 없을 듯한데, 족장형(足杖刑)146) 을 받기까지 한 것은 반드시 그 언사(言辭)가 공손하지 못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병조(兵曹)의 초기(草記)는 명백하지 않은 듯하므로 하교하시게 된 것입니다. 다만 하교 가운데, ‘별감(別監)이 혹 하사하는 물품을 전하거나 혹 대신(大臣)에게 문안을 전하게 되면, 이는 왕인(王人)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하셨는데, 대개 별감이 특별히 하사하는 물품을 가지고 성상(聖上)의 하교를 전하게 되면 대신 이하는 마땅히 왕인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록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말하더라도 만약 왕명(王命)을 받들 때가 아니면 왕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액례(掖隷)가 항상 해리(該吏)를 불러가는 것을 어떻게 왕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별감으로 있는 몸으로서 모욕을 당했다고 하여 해리(該吏)를 죄 준다면 그 죄를 준 자 때문에 다만 그 호기만 더하게 될 것이니, 이는 반드시 뒷날의 폐단이 있게 되어 장차는 누구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왕인(王人)’이라는 두 글자는 비록 이미 고쳐 내렸으나, 성상께서 더 유념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기강이 해이해진 폐단을 승지(承旨)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다만 별감은 다스리지 않고 해리만 다스린다면, 또한 치우친 처사이다. 승지는 이를 가리켜 반드시 반드시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진실로 좋은 말이다.
앞으로는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10월 15일 을유
호조 판서(戶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옛말에 ‘사방의 국경을 잘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방어해야 할 것은 변방에 있는데, 근래에 소홀해졌습니다. 신이 관서(關西)를 순심(巡審)할 적에 압록강 주변의 7읍(邑)을 둘러보았는데, 고갯마루의 험준(險峻)한 형편과 각 고을의 지도를 모두 그려서 비국(備局)에 보냈습니다. 4군(郡)의 경계로부터 충천령(衝天嶺)·설한령(薛罕嶺)이 서북을 가로막고 있고 적유령(逖踰嶺) 한 줄기는 곧바로 운암 산성(雲暗山城)의 해변(海邊)에 이르러 멈추었는데, 이는 실로 하늘이 만들어 준 요해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진보(鎭堡)에는 파수군(把守軍)만 있으니, 만약 경급(警急)이 있어서 밤을 틈타 침입하면 장차 어떻게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 고을이 압록강가에 벌여 있는데, 창성(昌城)은 더욱 저들의 땅과 가깝습니다. 병정지란(丙丁之亂)147) 때에 그들이 강홍립(姜弘立)의 항복한 군사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였는데, 그가 마침 창성 사람이었으므로 멀리 돌아서 오는 길을 가리켜 주어 새벽 무렵에야 성(城)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혹 화를 면한 자도 있었으나, 창성 부사(昌城府使)는 체포되어 해를 당했고, 강 주변이 와해되어 마치 아무도 없는 땅처럼 들어왔습니다. 근래에 보건대, 유민(流民)들 중에 강변에 들어가는 자가 많이 있는데, 만약 이들을 잘 어루만져 편안히 모여 살 수 있게 해 주고 그들이 나누어 지켜야 할 신지(信地)를 정해 준다면,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는 것은 저들 오랑캐와 다름 없으니, 쓸만한 군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변방 백성 중에 조총을 잘 쏘는 자를 보았습니다. 호랑이가 3, 4간(間)쯤 있으면 비로소 발사하는데 명중시키지 못할 때가 없으니, 묘기(妙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으로 조총만한 것이 없으니, 현재 장려하는 방법으로 다른 묘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의주(義州) 밖 압록강 주변의 6읍(邑)은 전(前)에 권관(權管)으로 있었던 몇 사람 외에는 벼슬한 사람이 없으며, 무과(武科) 출신 또한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경성(京城)이 너무 멀어서 식량을 싸가지고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면 집안이 망하게 되며, 또한 시험 날짜가 급하면 그 시기에 달려갈 수가 없으므로 앉아서 정거(停擧)하는 수밖에 없으니, 그 때문에 무과 출신이 아주 적다.’고 하였는데, 그 말 또한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나라에서 변방의 실정을 굳게 결속시키는 방법은 인재를 수용하는 것만함이 없습니다. 무과에 오른 자는 비록 아직 입사(入仕)하지 않았어도 나라를 향한 마음은 또한 일반 백성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지금 만약 별도로 명목(名目)을 만들어 유민(流民) 등 중에 장실(壯實)한 자를 선발해서 모집하여 조총 쏘는 것을 정밀하게 익히게 하고, 감사(監司)와 병사(兵使)가 순점(巡點)할 때 세 번 발사하여 여섯 번 명중시킨 자는 특별히 직부(直赴)148) 하게 하면, 용동(聳動)하여 흥기(興起)하게 될 것이니, 진실로 변방을 위한 장구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그 문제를 가지고 대신(大臣)에게 〈서신(書信)으로〉 왕복했는데, 조총을 쏜 것은 거짓으로 명중한 것이 많고 과거 길이 너무 넓다고 생각하여 어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요즈음 보건대, 병조(兵曹)에서 호랑이를 잡은 데 대한 포상에서 허위(虛僞) 때문에 이를 변통하여 혁파(革罷)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변방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니, 변방의 백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으므로 호랑이를 잡은 자는 스스로 가자(加資)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호피(虎皮)를 사고자 원하는 사람에게 팔아서 값을 받아 연명(延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호피가 쓸 데가 없는데, 누가 기꺼이 비싼 값으로 사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앞서 호랑이 사냥을 위해 총쏘기를 익힌 자들이 모두 총을 팔아서 먹고 있으므로 총을 쏘는 기술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소홀해지고 있으며, 호환(虎患)도 이로 말미암아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한 가지 폐단을 방지하면 도리어 한 가지 폐단이 생기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들은 비록 과거 길에 요행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을까봐 지난(持難)하고 있으나, 이는 변방의 실정에 관계된 것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0월 16일 병술
여필용(呂必容)을 발탁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삼고, 이진유(李眞儒)를 겸 대사성(兼大司成)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피국(彼國)에서 세폐(歲幣)149) 16동(同)을 감해준 것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진실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市民) 중에 그것을 생업(生業)으로 삼고 있는 자는 지극히 가련하게 여길 만합니다. 대개 세폐의 규려(規例)는 값을 주면 시민이 그 남는 이익을 보게 되는데, 지금은 세폐가 감해졌으므로 시민이 의뢰할 바가 없게 되어 날마다 묘당(廟堂)에 하소연하여 받은 값을 탕감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을해년150) 에 세폐 2년 조를 감했으므로 미리 받은 값 2천 2백여 섬을 특별히 탕감했었습니다. 지금 이 16동의 값에 해당하는 쌀 1천 6백여 섬을 만약 을해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탕척(蕩滌)하면 백성이 실제로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즉위(卽位)하신 초기에 마땅히 백성의 고통을 불쌍하게 여겨 실제의 혜택을 주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판윤(判尹) 심단(沈檀)이 아뢰기를,
"사부(士夫)로서 집이 없는 자가 많으므로 세(貰)로 들어가는 것이 근래에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애당초 세를 주지도 않고, 심지어 허위로 세든 문서를 작성하여 빼앗아 들어간 죄를 면하려고 꾀하는 자도 있으니, 일체 금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부로서 상민(常民)의 집에 들어가 사는 사람은 빌려거나 세를 들었거나를 막론하고 아울러 빼앗아 들어간 것으로 죄를 정하라."
하였다.
종부 제조(宗簿提調) 이조(李肇)가 말하기를,
"당저(當宁)151) 께서 왕위(王位)를 계승하시면 어첩(御牒)152) 을 수정(修正)하는데, 왕자(王子)의 명자(名字)를 마땅히 전례에 따라 수록해야 합니다. 내전(內殿)에서 써서 내려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봉작(封爵)하기 전에도 관명(冠名)을 쓰는가?"
하자,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신(臣)이 지난 규정은 알 수 없으나, 봉작은 나이를 기다리지만 명명(命名)은 봉작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마땅히 써서 내리겠다."
하였다. 이조가 말하기를,
"《선원세계(璿源世系)》 가운데에 왕자를 낳아준 이를 소훈(昭訓)으로 주석에 기록하는데, 지금은 동궁(東宮)에 있을 때와 사정이 다르지만, 전처럼 주석에 기록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보략(譜略)》을 상고하여 마침내 소훈을 소원(昭媛)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박필몽(朴弼夢)에게 말하기를,
"소장(疏章) 가운데에 과대(過大)한 말은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박필몽이 말하기를,
"성교(聖敎)에 이른바 과대하다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성명(聖明)이라는 등의 글자와 천지(天地)라는 등의 일컬음과 일월(日月)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비록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슨 손실이 있겠는가?"
하므로,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광무(光武)가 장주(章奏)에 성실하지 못한 언사(言辭)를 금한 것은 대체로 자만심을 갖지 않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라 사기(史記)에도 기록한 것인데, 그 시종(始終)을 상고해 보면 그 말에 걸맞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언어(言語)와 문자(文字) 사이에 성(聖) 자를 쓰지 말라고 명하셨으니, 그 스스로 겸손하신 덕은 흠탄(欽歎)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성군(聖君)은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니, 사양하여 자처하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이로써 스스로 힘쓰셔서 현재의 성군(聖君)으로서 더욱 성군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이 하교(下敎)는 사책(史冊)에 빛날 것인데, 말씀으로 겸양(謙讓)하시는 것은 실덕(實德)만 못한 것이니, 신 등은 이것으로 기망(冀望)하겠습니다."
하였다.
10월 17일 정해
지평(持平) 윤동원(尹東源)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비답하기를,
"옛날 제왕(帝王)이 은둔한 선비를 반드시 불러다가 좌우에 두려고 했던 것은 대개 그 이름을 사모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대는 주연(胄筵)153) 에 출입한 것이 과연 얼마였던가? 학문의 밝음과 자질이 곧은 것을 내가 이미 자세히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초치(招致)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그대는 모름지기 나의 뜻을 체득하여 속히 올라와서 그 온오(蘊奧)한 학문을 다 펼치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총호사(摠護使) 이광좌(李光佐)가 산릉(山陵)의 안산(案山)에 있는 많은 무덤을 옮기는 것과 평토(平土)154) 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에 대해 말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화소(火巢) 안에 있는 것은 파서 옮겨야 할 것이나, 다만 서로 보인다는 이유로 파서 옮기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광좌에게 명하여 살펴보게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이광좌가 돌아와 아뢰기를,
"무덤들이 많이 있어서 천만으로 셀 정도이며, 비석을 세운 것도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왜 굳이 평토해야 한다는 것인가? 산 사람도 오히려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더구나 이미 죽은 자이겠는가? 일찍이 능행(陵行) 때 길가에 있는 많은 무덤을 보았는데 모두 봉분을 평탄하게 하였고 혹은 그 축대까지 헐어버린 것이 있었으므로 마음에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렇게 많은 무덤이겠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그러면 평토하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석물(石物)도 어찌 굳이 뽑아 버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광좌가 말하기를,
"석물에 대해서는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뽑아 버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능소(陵所)에서 보이는 곳에 것은 뽑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 심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화소(火巢) 안에 논은 마땅히 묵혀서 버려 두어야 할 것이 매우 많습니다. 호조(戶曹)에서 값을 치러 주었으나 반값도 되지 못하니, 백성은 반드시 생업(生業)을 잃게 되어 원통함을 호소하게 될 것입니다. 적몰(籍沒)한 밭이 상당히 많이 있으니 그것으로 대신 획급(劃給)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의 희망에 따라 대신 주거나 값을 치러 주되,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하라."
하였는데, 우승지(右承旨)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호조에서 으레 결복(結卜)으로 마련하여 값을 주었고 농토의 품질은 본래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반값을 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호조(戶曹)에 명하여 그 생산량의 말[斗]수를 계산하여 넉넉하게 마련하여 값을 치러 주게 하였다.
10월 18일 무자
정언(正言) 김호(金浩)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정제(李廷濟)가 명을 따르지 않음으로 인하여 여러 번 엄한 전지(傳旨)를 내렸고, 심지어,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전교(傳敎)까지 내리셔서 마침내 핍박하여 가게 하고야 말았으니, 신(臣)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지적하여 의논했다는 말은 이미 논사(論思)하는 자리에서 나온 것이니, 이정제가 사양하는 바는 곧 염치를 중하게 여기는 뜻입니다. 전하(殿下)께서 예의로 부리는 도리에 있어서도 마땅히 그의 뜻을 힘써 받아들이셔야 할 것인데, 이에 도리어 엄교(嚴敎)를 내리시며 엄위(嚴威)로 핍박하여 밤늦어 문이 닫힌 뒤에 특별히 표신(標信)을 내어 보내어 궁문(宮門)에 머물렀다가 들어와 숙배(肅拜)하라고 독촉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속박하여 몰아쳐 부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진실로 성덕(聖德)의 아름다운 일이 못되며, 이정제도 엄한 위엄에 핍박받아 억지로 명을 받드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는 위·아래가 다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니, 신은 진실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일전에 한 여자가 궁중에 들어온 일로 인하여 별감(別監)의 무리가 중사(中使)의 분부라고 일컬으며 병조(兵曹)의 결속리(結束吏)를 잡아다가 족장형(足杖刑)을 시행했다고 하는데, 이는 진실로 전에 없던 일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구중궁궐 안이 얼마나 엄숙한 곳입니까? 한부(漢符)155) 가 없는 여인이 마음대로 들어왔으면 근장 군사(近仗軍士)가 잡아가는 것은 그 직책상 당연한 것이므로 이는 중사가 참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감히 해리(該吏)를 잡아다가 임의로 곤장을 때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 풍습이 매우 놀랍습니다. 해조(該曹)의 초기(草記)에서 별감을 다스리기를 청한 것은 진실로 매우 합당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별감을 왕인(王人)이라고 하시면서 해리를 갑자기 가두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무릇 왕인이란 왕명(王命)을 받든 자를 일컫는 것입니다. 액정(掖庭)의 한낱 천례(賤隷)를 어떻게 왕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별감을 왕인이라고 한다면 궁궐 문을 지키며 금훤(禁喧)156) 하는 자만 유독 왕인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더구나 그 해조의 당상(堂上)은 곧 근밀(近密)에 출입하는 신하입니다. 반드시 하리(下吏)의 무소(誣訴)만 편벽되게 듣고 감히 별감을 가두어 다스리기를 청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그 말을 믿지 않으시고, 심지어는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물어서 아뢰게 하였으니, 전하께서 신하를 대하는 도리가 진실로 너무 박절하셨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에서 물어서 아뢴 것을 살펴보건대, 구타당한 한 조항은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전하께서는 마침내 별감이 별감의 신분으로 모욕을 당했다 하여 해리만 죄주시고 사사롭게 해리를 구타한 죄는 다스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해리는 왕인을 무시(無視)하고 감히 변명했다 하여 죄를 삼아 마침내 가두어 징치(懲治)하는 데 이르렀으니, 그 부지(扶持)하고 억제(抑制)하시는 바가 너무 치우친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무릇 액정(掖庭)의 소속은 세력을 의지하여 방자한 행위가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비록 성상께서 엄하게 금하고 억제하신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치지 않을까 걱정인데, 지금 그 죄를 다스리지 않고 도리어 모욕을 당하였다 하여 잘못이라고 여기시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준절하게 방지하여 궁중을 엄숙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이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성덕(聖德)에 허물이 되고,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되는 것이 큽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10월 19일 기축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0월 20일 경인
호속(虎贖)의 면포(綿布)를 견감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호속목(虎贖木)에 대한 법을 만든 뜻은 대개 해마다 호랑이를 사냥하여 백성의 해를 덜어 주고 그 가죽은 진상(進上)하여 방물(方物)에 쓰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도에 적합한 것을 얻기가 어려운 까닭에, 이에 쌀이나 비단으로 수량을 정하여 거두어 들여서 호랑이 가죽을 살 수 있는 자본을 삼았습니다. 무릇 호랑이란 있으면 잡고 없으면 잡을 수 없는 것인데, 잡을 수 없으면 내버려두어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지금 각 고을에 얼마 동안의 기한을 정하여 그 값을 바치게 하였으니, 넓은 들에 한치의 나무도 없는 고을에서는 어디에서 호랑이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또한 값을 바치게 하고 있습니다. 또 그 베는 지극히 고운 베이기 때문에 쓸 돈을 배나 징수해야 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무슨 호랑이가 있다고 호랑이 값을 거두어 들이는가?’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국체(國體)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견감해 주고자 한다면 호속목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비록 백성을 위해 해를 없애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나, 호랑이를 잡기가 쉽지 않고, 다만 쌀과 베만을 징수하고 있으니, 그 해가 도리어 호랑이보다 더 심하다. 이미 그 해를 알았으면 없애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또 아뢰기를,
"혜민서(惠民署)는 도성(都城) 백성의 의약(醫藥)을 위해 설치한 것이고, 전의감(典醫監)은 조정의 신하들의 의약을 위해 설치한 것이니, 설치한 뜻이 어찌 매우 융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조정의 신하가 전의감(典醫監)의 약을 한 첩도 먹을 수가 없는데, 더구나 도성의 백성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인삼(人蔘)이나 중국 당대(唐材)의 값은 선혜청(宣惠廳)에서 조정하여 오래 구임(久任)시킨 자로 하여금 관장(管掌)하게 하는데, 이른바 구임은 제조(提調)가 사사롭게 친근한 자로 이를 삼아서 혜택을 얻게 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백성들이 고생하여 모은 물건을 이와 같이 까닭 없이 낭비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만약 그 서명(署名)은 그대로 두고, 그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혜민서(惠民署)·전의감(典醫監)의 이름이 어찌 좋지 않은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너는 그 염소를 아끼는가?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 하였으니, 훗날 만약 그 이름을 보존하게 된 효과로 인하여 혹 옛것을 회복하게 된다면 좋을 것이다. 3백 년 동안 전해 온 일을 갑자기 혁파(革罷)할 수는 없다. 의약(醫藥)을 담당하는 두 부서가 소속될 곳이 없다면 이 또한 구차한 일이다. 그리고 구임에 이르러서는 하루 아침에 파직시키는 것도 매우 가련한 일이니, 할 수가 없다. 묘당(廟堂)에서 참작하여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현재 재정이 너무 고갈(枯渴)되어 실로 지탱할 방책이 없습니다. 나라에서 절약하여 줄이는 일을 크게 시행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열조(列朝)에서는 궁전(宮殿) 안에 쓰는 지의(地衣)157) 도 많이 꿰매어 썼으며, 종묘(宗廟)의 포진(鋪陳)158) 도 해어진 곳을 꿰매어 썼습니다. 유사(有司)에 거듭 신칙하여 특별히 살펴보게 하고, 일에 따라 절약하여 줄이게 하소서. 비록 교서관(校書館)에서 책을 인쇄하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경비가 매우 많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처음 《심경(心經)》을 강(講)할 적에 옥당(玉堂)에서 새로 인쇄하기를 청했으나 나는 내장(內藏)되어 있는 것으로 쓰게 하였다. 이미 옛것을 사용하였는데 어찌 고쳐 가의(加衣)할 필요가 있겠는가? 앞으로 진강(進講)할 적에 인출(印出)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만약 내장된 것이 없으면 진강할 때에 사자관(寫字官)으로 하여금 베껴서 바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경자년159) 의 대상(大喪) 때에 호조 판서 조태구(趙泰耉)가 차일장(遮日帳) 등의 물건은 꿰매어 쓰자는 뜻으로 아뢰어 윤허받았습니다. 무릇 밖의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다 계획하여 조절해야 하겠지만, 내간(內間)의 일은 전례에 의거하여 진배(進排)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막(御幕)의 차일(遮日) 하나에도 몇 동(同)의 무명이 소비되는데, 한번 쓴 다음에는 다시 내준 일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자년에 새로 마련하지 아니하였던가?"
하자,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신(臣)이 지난번 찬집청(纂輯廳)에서 《일기(日記)》를 참고해 보니,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하교(下敎)에, ‘혹은 세탁해서 쓰고 혹은 꿰매어 쓰라.’고 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크고 작은 상여(喪輿)를 멈추는 곳과 인산(因山)할 때에 쓰는 것은 새것으로 쓰고, 그 밖에는 이미 전례가 있으니, 옛것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0월 21일 신묘
사간원(司諫院)에서 앞서 아뢰었던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상식(上食)할 때가 이미 되었으니, 만약에 새로 아뢰는 것이 아니면 첫머리와 끝부분만을 거론(擧論)하라."
하였다. 그래서 대신(臺臣)이 이미 전계(傳啓)하였는데, 교리(校理) 이거원(李居源)이 아뢰기를,
"비록 전에 아뢰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다 읽는 것은 대개 다시 그 사실을 살피려는 것입니다. 이번에 첫머리와 끝 부분만을 거록하라는 하교로 인하여 대신(臺臣)이 성급하게 그 명을 받든 것은 상하(上下)가 모두 성실하지 못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상식할 때가 되었으면 조금 물리게 하거나 대청(臺廳)에 전계(傳啓)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옥당(玉堂)에서 진달한 것이 진실로 좋다. 그러나 다만 등대(登對)한 대신(臺臣)들이 물러가거나 전계한 일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옥당의 말은 진실로 식견이 있는 것입니다. 대계(臺啓)는 단지 첫머리와 끝 부분만을 거론할 수가 없는 것이며, 등연(登筵)한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밖에 나가거나 전계(傳啓)하게 하는 것도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때에는 비록 상식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다 말하고 물러가게 하는 것이 아마도 불가(不可)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10월 22일 임진
밤 4경(四更)에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경자년160) 에 춘방(春坊)161) ·계방(桂坊)162) 을 정파(停罷)하였을 적에 상관(庠官)이, 학궁(學宮)이 조잔해진다는 것으로 연명(聯名)해서 상소하여, 춘방과 계방의 노비(奴婢)를 사학(四學)에 이속(移屬)시켜 공물(貢物)을 거두어 용도에 보충하게 했다가, 다시 설치한 다음에 곧바로 환속(還屬)시켰습니다. 춘방과 계방을 지금 또 정파하자, 두 곳의 노비를 전례에 의하여 소속시키는 일을 사학에서 비국(備局)에 보고하였는데, 비국에서 허락하였습니다. 경자년의 관례에 따라 다시 설치하는 동안 우선 사학에 소속시켰으면 하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송인명(宋寅明)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송인명에게 말하기를,
"호서(湖西)는 사대부(士大夫)의 본거지이므로 그 도(道) 안에 뛰어난 인재(人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매양 문지(門地)로써 사람을 뽑으니, 그 규모가 협소함을 면치 못하였다. 비록 초야(草野)에 있는 미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찾아내어 추천할 때를 기다리지 말고 즉시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강목(綱目)》을 강(講)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김홍석(金弘錫)이 공명첩(空名帖)163) 을 발매(發賣)하는 폐단을 거론하여 말하기를,
"명(明)나라 때에 곡식을 바치는 백성을 모집하여 ‘의민(義民)’이라고 일컫고, 심지어 정려(旌閭)164) ·복호(復戶)165) 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미 매작(賣爵)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차라리 의민을 삼아 곡식을 모으는 규례가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백성이 스스로 감동하여 의리를 사모해서 곡식을 바치는 것은 좋겠지만, 관청에서 곡식을 모으기 위해 억지로 의(義) 자를 붙인다면, 이는 의리를 파는 것이다. 의리를 파는 폐단은 매작보다 더 심한 것이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하였다.
10월 23일 계사
유생(儒生) 양명화(楊命和)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 등이 살고 있는 영천(永川)은 곧 고려(高麗)의 시중(侍中)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상자지향(桑梓之鄕)166) 입니다. 가정(嘉靖)167) 을묘년168) 에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그 옛터에서 향사(享祀)를 올렸고, 명종(明宗)께서는 ‘임고 서원(臨皐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下賜)하고 하양(河陽)·금산(金山)·의흥(義興)·영천(永川)의 위전(位田)169) 10여 결(結)을 본 서원에 획급(劃給)해서 봄·가을로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임진 왜란 때에 서원이 불타고 위전(位田)을 다시 수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故)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위전을 다시 추급(推給)하여 본 서원에 소속시켰었는데, 요즈음 하양의 교생(校生)인 박서봉(朴瑞鳳) 등이 감영(監營)에 거짓 내용의 글을 올리니, 도신(道臣) 김동필(金東弼)이 갑자기 이를 빼앗아 조금도 지난(持難)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지금 만약 도신의 주고 빼앗는 것만에 일임한 채 한 번 이를 규명하여 사실을 밝혀서 다시 추급할 것을 생각지 않는다면, 임금의 하사(下賜)를 소홀히 하는 행위가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0월 24일 갑오
서종하(徐宗廈)를 장령(掌令)으로, 이진수(李眞洙)를 지평(持平)으로, 정도원(鄭道元)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삼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뢰었던 것을 거듭 아뢰고, 【지평(持平) 윤지(尹志)이다.】 또 아뢰기를,
"수찬(修撰) 김홍석(金弘錫)이 어젯밤 경연(經筵)에서 아뢴 것은 이미 일을 논하는 체통을 잃은 것인데, 간신(諫臣)이 임금에게 대간(臺諫)의 말을 믿지 말도록 인도했다고 배척하니, 허둥지둥 인혐(引嫌)하고는 그대로 공무(公務)를 수행하였습니다. 징계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청컨대, 김흥석을 체차(遞差)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순장(巡將)의 임무는 가볍지 않고 무거운 것입니다. 비록 지난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고(故) 상신(相臣) 이숙(李䎘)은 본병(本兵)에서 체임(遞任)되자마자 곧바로 순장에 차정(差定)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 임무를 맡은 자는 전연 가려서 차임한 것이 아니니,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일제히 가려내고 다시 선발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인하여 하교(下敎)하기를,
"순장이 하는 일은 먼 변방의 무관(武官)의 일로서 요직(要職)에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임무만을 맡긴 것이다. 지금 모두 가려낸다면, 이는 그 너무 융통성이 없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야대(夜對)를 행하여 《심경(心經)》을 강(講)하였다.
10월 25일 을미
승문원(承文院)에서 자문(咨文)의 초본(草本)을 올렸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3월 27일에 칙서(勅書)를 받았으니 이미 대행조(大行朝)에 있었던 일인데, 지금의 당직자(當職者)로 쓰는 것이 옳은지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대신 이광좌(李光佐) 등이 황공하여 사죄(謝罪)하였다.
도승지(都承旨) 박필몽(朴弼夢) 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기를,
"신(臣) 등은 대신이 원리(院吏)를 수금(囚禁)한 일에 대해서 의혹스러워 불안한 점이 있습니다. 육승지(六承旨)가 조정(朝廷)의 반열(班列)에 차례로 배열해 있을 때에는 비록 대신이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반열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3백년이나 된 옛 관례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정승으로 있었을 때 그의 아들인 고(故) 판서(判書) 김좌명(金佐明)이 도승지였는데, 김육이 마침 궁정의 반열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김좌명이 일어나면 승정원의 관례에 어긋나고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므로, 무릎을 모으고 고쳐 앉으면서 공경하는 뜻을 보였다고 합니다. 지난번 국휼(國恤) 초기에 영의정[領揆]이 원상(院相)이 되었는데, 이는 제거(提擧)와 같은 것이므로 그가 출입할 적에는 모든 승지가 기거(起居)하여 공경을 표시하였으나, 지금은 공제(公除)가 이미 지나서 원상(院相)에서 이미 물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대로 인순(因循)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일 전에 옛 관례를 회복시키고자 하였을 적에 좌의정과 우의정은 모두 잘못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는데, 영의정만이 크게 잘못이라고 여겨 잇따라 두 원리를 가두었습니다. 신(臣) 등은 결코 예에 맞지 않는 공손을 지나치게 행하면서 옛 풍속에 어긋날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관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그 이튿날 이광좌가 또 원리(院吏)를 가두니, 모든 승지들이 경출(徑出)170) 하였다. 이광좌가 마침내 경연(經筵)에서 아뢰어 규정을 정하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거둥이 임박했을 때의 시위(侍衛)하는 반열(班列)에서는 대신을 보더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평소 후반(候班)과 곡반(哭班)에서 마땅히 일어나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은 한 사람의 밑이자 만인(萬人)의 윗자리에 있으면서 온갖 부서를 총괄하는 자이다. 정식(定式)을 삼고자 하는 것은 그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대신이 밖에서 제도를 만들지 못하고 심지어 경연 가운데에서 말하게 되었으니, 체통을 알 만하다. 대신은 체통을 지키려고 하고 승지는 옛 풍속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다 좋은 일이나, 또한 가볍고 무거운 구분은 있는 것이다. 만약 문안(問安)하는 반열에서 일어나야 한다면, 시위하는 반열에서 일어나는 것 또한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 이조(李肇)가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개수(改修)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장(內藏)된 것 중에서 새것이 매우 많으니, 경비가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보관함에 있어서도 공경을 다하기가 어렵다. 앞으로는 고쳐야 할 판(板)만 고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사저(私邸)에 있었을 적에 당호(堂號)와 어제시(御製詩)가 있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 뜻을 알고자 하면[欲知存養意] 진심편(盡心篇)171) 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 [深玩盡心篇]’고 하였다. 이는 곧 한평생 지키며 잊지 않아야 할 것이므로 자호(自號)하는 것이니, 이는 과장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일은 옛날에도 어첩(御牒)에 오른 것이 있다."
하니, 이조가 말하기를,
"마땅히 수록하겠습니다."
하였다.
10월 27일 정유
장령(掌令) 서종하(徐宗廈)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가까운 신하를 내보내실 적에 그 정세(情勢)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전연 돌아보지 않으시고 오직 명을 받드는 것만 중요시하여 독촉하고 구박(驅迫)하여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으십니다. 신은 아마도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신하를 부리는 것이 마침내 종을 부리는 것처럼 될 것이고, 조정 신하가 명을 받드는 것은 점차 속박받는 견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은 예조 참의(禮曹參議) 이진순(李眞淳)과 전(前) 장령(掌令) 이정필(李廷弼)의 일에 대해서는 그윽이 놀랍고 한탄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습니다. 비록 그 일이 옳고 그른 것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하나의 작은 일로 인하여 서로 다투며 힐난하는 것은 지극히 아름답지 못합니다. 심지어 포목(布木)을 거두었느니 뇌물을 받았느니 하는 등의 말을 여러 장주(章奏)에 올려서 온갖 말로 헐뜯어 욕하며 서로 공경하는 뜻을 완전히 잃었으니, 신은 두 사람 모두 파직(罷職)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병조 참지(兵曹參知) 윤순(尹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외방 고을에 승진 발탁된 자가 부임하지 않아서 체임(遞任)되면, 아울러 그 품계와 직위까지 도로 거두어 들이는 것이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신(臣)이 처음에 기보(畿輔)에 발탁되었을 적에 사면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땅히 그 새로 받은 직위는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인데, 대신(大臣)이 격례(格例)를 깨뜨리고 사국(史局)으로 옮겨서 차정(差定)하였으니, 이는 구간(苟簡)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듣건대, 공론(公論)이 시끄럽자 재상(宰相)들이 불가(不可)함을 드러내어 말하였고, 대각(臺閣)에서도 논박하여 논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지난번에 치욕을 받았으니, 오직 종신(終身)토록 스스로 물러나 있어야 마땅합니다. 지석(誌石)의 글씨를 쓰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감히 명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총호사(摠護使)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능소(陵所)와 마주 대하는 곳에 산소가 있는 사람은 하교(下敎)에 의하여 분부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장할 수 있는 사람은 인산(因山) 전에 서둘러 하게 하고, 이장하고자 해도 가난하여 할 수 없는 자는 봉분을 평토(平土)하지 말고 석물(石物)만 뽑아내라는 뜻으로 도감(都監)에게 감결(甘結)172) 하였습니다. 그런데 민간에 잘못 전해져서 모두 파내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므로 상당한 소동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일일이 다 알려서 백성들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깊은 겨울철인데. 백성들의 물력(物力)으로 어떻게 인산(因山) 전에 이장할 수가 있겠는가? 내년 봄까지 기다리게 하면 차츰 폐단이 줄어드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성상(聖上)의 어지신 은혜가 썩은 뼈에까지 미치니, 감격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내년 봄을 기다리게 되면 사체(事體)에 어떠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자원하여 즉시 이장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굳이 금할 필요가 없겠지만, 다만 인산 때까지 이장할 수 없는 자는 내년 봄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인산을 마쳐서 봉분을 쌓은 다음에 마주 대하고 있는 산에서 어떻게 흙을 파고 이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그러한 사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하교했던 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두 선왕(先王)께서 백성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본받기 위한 것이다. 날짜를 정하고 독촉하지 말고 능력에 따라 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29일 기해
하교(下敎)하기를,
"추노(推奴)173) 를 엄하게 금하기를 거듭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닌데, 자신이 영장(營將)으로 있으면서 공무를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고 도둑을 잡는다는 핑계로 추노하고 있으니, 뒷날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방백(方伯)의 직무를 띠고 있으면서 파출(罷黜)만 청하는 것은 매우 소홀한 처사이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권이진(權以鎭)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진주 영장(晋州營將) 김박(金鑮)은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김호(金浩)가 전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기(京畿)는 곧 나라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토질이 메마르고 백성의 노역이 가중되는 것이 다른 도(道)에 비해 갑절이나 심합니다. 연천(漣川)·마전(麻田)·적성(積城)·삭녕(朔寧) 등의 네 고을은 그 토질이 더욱 메마른데 결역(結役)은 치우치게 많아서 열 가족(家族)의 집일 경우 1년 동안 힘들여 농사를 지어도 그 부세(賦稅)를 충당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소와 말, 재산까지 팔아서 바치고 있으니,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기가 이 곳보다 더 심한 데가 없습니다. 제도(諸道)에서 모두 기경(起耕)하는 데 따라 수세(收稅)하는 법규가 있으니, 이러한 고을에는 공평하지 못하다는 탄식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지부(地部)로 하여금 일일이 상고해 내어 아울러 기경하는 대로 수세하는 규례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라에서 한결같이 대하는 혜택을 받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0월 30일 경자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선원보략(璿源譜略)》이 지금 수록(收錄)하며 왕자(王子)의 관명(冠名)이 이미 정해졌으니, 마땅히 봉작(封爵)하고 스승을 정하여 교양(敎養)시키는 것 또한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유봉휘(柳鳳輝)·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한성 판윤(漢城判尹) 심단(沈檀)·호조 판서(戶曹判書) 오명항(吳命恒) 또한 그렇게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려서부터 교양시키는 것이 진실로 급한 일이나, 스승은 인산(因山)을 마친 후에 차출(差出)해야 할 것이고, 봉작은 아직 3년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광좌가 말하기를,
"어찌 3년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조태억은 말하기를,
"6세에 봉호(封號)를 받고 7세에 사은(謝恩)하는 것은 고사(故事)가 그러합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3년을 기다릴 필요는 없으나 봉작하게 되면 전례에 사은이 있었는데, 내가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으니, 어찌 그 사은의 예를 받을 수 있겠는가? 비록 봉호를 정한다고 하더라도 사은만은 아직 3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부(師傅)에 이르러서는 즉시 선발할 수도 있으나, 강습(講習)만은 인산 후에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유봉휘가 말하기를,
"대궐 밖에는 으레 금표(禁標)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천연두(天然痘)가 매우 치성(熾盛)하니, 청컨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찾아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병은 피한다 해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니, 금표(禁標) 안에 천연두의 유무(有無)는 사실상 상관이 없는 것이다. 환자를 적발할 적에 반드시 혼란스러운 폐단이 있을 것이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혼전(魂殿)과 능소(陵所)에 3년 동안 채소와 땔감의 공급은 으레 호조(戶曹)에서 마련하여 경기 각 고을에 나누어 정했습니다, 그런데 기해년174) 국휼(國恤) 때부터 경기 각 고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비로소 본청(本廳)으로 하여금 구관(句管)하여 값을 주게 하였습니다. 그 값은 본래 각 청(廳)과 각 군문(軍門)과 병조(兵曹)·호조(戶曹)에서 계품(啓稟)하여 취용(取用)하였습니다. 값은 쌀 3천 9백 30여 섬이니, 청컨대, 쌀과 무명·전문(錢文) 세 가지로 나누어 마련하여 참작해서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처음에 재자관(䝴咨官)175) 이 떠날 적에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여 성절(聖節) 때의 방물(方物)을 동지사(冬至使) 편에 함께 보내기를 청하였는데, 예부에서 처음에 이를 막으려 하므로, 역관(譯官)의 무리들이 이를 주선하여 청(請)을 준허(準許) 받으려고 은(銀) 2백 60냥(兩)을 소비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그 수본(手本)을 상고해서 탕감해 주기를 청했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동지사는 으레 성질과 정조(正朝)를 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강희(康熙)176) 의 생일은 3월이므로 그 편에 함께 보낼 수가 있었으나, 옹정(雍正)177) 의 생일은 10월 30일이니, 동지사를 만약에 10월 그믐 전에 들여보내려고 한다면 장차 오래 머물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일찍이 듣건대, 숭덕(崇德)178) 의 생일이 10월이었는데, 그 때에도 동지사에게 함께 보냈으므로, 그 전례를 인용하여 이자(移咨)해서 겸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자관이 말하기를, ‘예부에서 트집을 잡아 소비한 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비록 역관(譯官)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의 사실 여부는 진실로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나라의 체통에 손상이 있을 것이니 특별히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었다. 승지(承旨) 유수(柳綬)가 말하기를,
"오늘 합계에 대한 비답에,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말라.[勿復强聒]’고 하신 네 글자는, ‘번거롭게 말라.[勿煩]’라는 뜻에 비할 때 아마도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비록 들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지(批旨)에 있어서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시끄럽다[强聒]’는 비답은 지난번에도 했으니, 지금 처음이 아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유봉휘(柳鳳輝)가 계속 아뢰니, 임금이 ‘번거롭게 말라[勿煩]’고 고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지난날 대행조(大行朝) 때에 재신(宰臣)·도신(道臣)·수신(帥臣)에게 특별히 인재(人才)를 추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추천한 뒤에는 대신(大臣)과 이조(吏曹)의 당상(堂上)이 마땅히 모여 앉아서 등급을 나누어 입계(入啓)해야 하는데, 아직도 모여 앉아 등급을 나누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은 세월이 상당히 오래 되었고 추천했던 사람도 대다수가 죽었습니다. 이미 추천을 하게 했으면 마땅히 일체로 등급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마땅하지 않은 사람을 추천하였으면 그 추천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옛 법규입니다. 그러나 추천한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별천(別薦)은 매양 세수(歲首)에 계하(啓下)했었는가?"
하자, 좌의정(左議政) 유봉휘(柳鳳輝)가 말하기를,
"세수(歲首)에 추천하는 것은 연례(年例)로 수령(守令)을 추천하는 것이요, 이것이 별천(別薦)이니 학행(學行)이 풍부하고 재략(才略)이 갖추어진 것으로써 별도의 과목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별천에 오른 사람도 다 쓸 수가 없으므로, 으레 묘당(廟堂)에서 등급을 나누어 선발하여 아뢰어서 이조(吏曹)에 회부시킨 다음에 비로소 서용(敍用)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별천을 분등(分等)하는 일은 대행 대왕 때에 이미 계하(啓下)한 것이고, 추천한 사람을 문책하는 문제도 말단적인 것이다. 진실로 합당한 자가 있으면 아울러 등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찌 추천한 사람이 현재 있고 없음을 거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 같이 등급을 나누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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