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권, 영조 즉위년 1724년 11월

싸라리리 2025. 8. 1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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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신축

임금이 하교하기를,
"내가 못난 재주와 박한 덕으로 선조(先朝)의 투간(投艱)한 성의(盛意)를 잇고 외람되게 이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진 듯 두려워하고 있다. 접때는 우레소리가 수장(收藏)하는 때 일어나더니, 지금 중동(仲冬)의 전후에 다시 우레와 번개의 변이 있어 우르릉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여름과 다름이 없다. 아아! 하늘이 경계를 보이심이 어찌하여 일어나는가? 그 까닭을 궁구해 보니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다. 내가 수기(修己)의 공(功)에 아직 능하지 못한 바가 있는가?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량에 미진한 바가 있는가? 자봉(自奉)하는 절도에 사치한 바가 있는가?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 성실하지 못한 바가 있는가? 어진이가 재야(在野)에 있는데 능히 수용하지 않는 바가 있는가? 궁박한 사람이 원망을 품고 있는데 구중궁궐까지 알려지지 못한 것인가? 조정의 기상이 화평하지 못하여 천기(天氣)를 감상(感傷)시킨 것인가? 공의(公議)가 가리워져 막히고 사의(私意)가 횡행하는 것인가? 이 여덟 가지 조목 외에 드러난 것들을 말한다면, 백성은 거꾸로 매달려 물과 불 속에 있는 듯하고, 당고(黨錮)는 날로 심해져서 서로 간과(干戈)179)  를 찾고 있다. 아!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아야 하는데 백성이 장차 다 죽으려 하고 있으니, 내가 누구와 함께 임금 노릇을 할 것인가? 동경 당화(東京黨禍)180)  란 전철(前轍)이 환히 보이니, 만약 이런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말과 생각이 이에 이르니 잠자리가 어찌 편안하랴? 어떻게 하면 백성이 장차 편히 살겠으며, 어떻게 하면 조정이 저절로 안정될 것인가? 그대 근밀(近密)의 신하들은 나를 대신하여 교서(敎書)를 초(草)하고 정부(政府)에서는 널리 직언(直言)을 구함이 마땅하다. 그 말이 아주 적절하면 내가 마땅히 가납(嘉納)할 것이고, 말이 비록 과중하다 하더라도 내가 허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아! 재앙이 실로 나에게 말미암았으니 지금은 마땅히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다. 어찌 남을 책망하겠는가? 그러나 또한 어찌 서로 경계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 낭묘(廊廟)에 있는 사람은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굽은 사람을 물리치며 공적인 일에 힘쓰고 사사로운 일을 버릴 것이다. 방백(方伯)의 신하는 스스로 청렴 결백을 지키고 출척(黜陟)을 오로지 밝게 하여 한결같이 공심(公心)을 따른다면, 나랏일을 해낼 수 있고 백성도 편안해지리라. 아! 그대 여러 신하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념하여 공경히 그대들의 직임을 받들라."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서종하(徐宗廈)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황해 병사(黃海兵使)        홍시구(洪時九)는 일찍이 충청 수사(忠淸水使)를 맡았는데 쟁문(爭門)한 일로 인해 도신(道臣)이 장파(狀罷)한 데 노하여 도신의 죄를 얽어 비국(備局)에서 논보(論報)하였습니다. 수신(帥臣)이 도신을 죄주기를 청한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한 해괴한 일입니다. 그때 대신(臺臣)이 논계(論啓)하여 잡아올 것을 청하였는데, 사령(赦令)으로 인하여 말감(末勘)181)                  하고 다시 본직(本職)을 제수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습니다. 삼사(三司)와 재신(宰臣)이 외람되게 부임할 수 없음을 말하였으나, 급급하게 사조(辭朝)하였습니다. 청컨대 홍시구를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수성 찰방(輸城察訪)        오태흥(吳泰興)은 보잘것 없는 천한 무부(武夫)인데 선전관(宣傳官)에 천의(薦擬)하는 한 가지 일로 인해 동류(同類)들에게 통문(通文)을 띄우고 재신(宰臣)을 모욕하며 그 성(姓)까지 빼버렸습니다. 본직(本職)에 제수되자 옥서(玉署)의 장관(長官)이 그의 하례(下隷)를 붙잡아다가 외람되게 부임할 수 없음을 말했으나 태연히 내려갔습니다. 청컨대 오태흥을 삭거 사판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좌의정 유봉휘(柳鳳輝)·우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이 번개의 이변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리고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숙묘조(肅廟朝)에도 또한 일찍이 재난을 만나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각 소견을 아뢰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때, ‘재난을 만나 일시적으로 경동(警動)하는 것은 항상 재난이 없을 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조존(操存)182)                  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정령(政令)과 시조(施措)의 사이에 저절로 위로는 천심(天心)에 합치될 것이고 아래로는 민정(民情)에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숙묘께서 가납(嘉納)하셨습니다. 지금 재난을 만난 날에 감히 선조(先朝)께 고한 것을 전하께서 거듭 경계하실 것으로 삼는 바입니다."
하니,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원로(元老)는 80노인으로 자주 연석(筵席)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재앙을 그치게 하는 도리를 더욱 상세히 찾아 물으시고 만약 그 말을 채용하신다면, 생각하건대, 그 자신을 등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최규서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말을 다하라."
하니, 최규서가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한(漢)나라의 다스림이 가장 고도(古道)에 가까운데, 순리(循吏)들을 포장(褒奬)하여 그들이 많이 들어와 재상이 되었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으로 소강(少康)의 다스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작은 일로 말한다 하더라도,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행한다면 저절로 성효(成效)가 있을 것입니다. 근자에 들으니, 산릉(山陵)의 포자(圃子)183)                  를 재신(宰臣)의 상소로 인해 혁파하고 여가(閭家)를 탈입(奪入)하는 것을 따로 엄하게 신칙(申飭)하셨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일에서 또한 백성이 실질적인 은혜를 받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이 가만히 보건대, 전하의 영명(英明)하심은 천고(千古)에 뛰어나시나 지치(至治)를 구하심이 너무 날카로우시고 일을 하심이 대단히 급하시니, 도리어 해로움이 있게 됩니다. 오직 마땅히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한가지 일을 행하시어 착실하게 해나가신다면, 저절로 성효가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전하의 성덕(聖德)은 백왕(百王)보다 훨씬 높으시니, 오늘날 신료들은 무능하여 감당해 낼 수 없을 듯합니다. 따라서 성상의 마음에는 반드시 군하(群下)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堯)·순(舜)의 신하였던 고요(皐陶)·직(稷)·설(契)은 요순에 미치지 못했지만 당우(唐虞)의 다스림을 이루었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십란(十亂)184)                  은 반드시 무왕만 못했으나 창업(創業)의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또 《서전(書傳)》에는 구덕(九德)185)                  을 말했지만 삼덕(三德)이 있는 자와 육덕(六德)이 있는 자를 또한 모두 등용했습니다. 삼덕과 육덕을 합하면 구덕이 되니, 인재를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나, 쓸 곳에 갖추어 쓴다면 저절로 성효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점에 유의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말이 유원(悠緩)하고 절실하니 마땅히 깊이 새겨두고 잊지 않겠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원로가 지치(至治)를 구함이 너무 날카로움을 염려했는데, 이는 참으로 노성(老成)한 사람의 논의입니다. 지금의 형세를 비유하자면 오랜 병을 앓은 사람이 진원(眞元)이 크게 허(虛)해지고 한 번 드러난 증상을 거쳐 기진맥진한 것과 같아 아무리 미법(美法)이 있더라도 가볍게 행하기 매우 어려운 꼴입니다. 원로는 반드시 염려하는 바가 여기에 미쳤기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 본말(本末)을 생각하고 헤아려 신중히 살펴서 처리할 뿐입니다. 결코 이 때문에 지치(至治)를 도모하려는 뜻을 물리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로는 오직 날카로운 데로 나아갈가 두려워하고 영상(領相)은 또 물러날까 염려하니, 그 뜻이 모두 좋다. 내가 비록 수성(修省)한 공(工)은 없지만, 마땅히 각별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11월 2일 임인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위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말[斗]과 같았고, 길이는 8, 9척이었다.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진수(李眞洙)와 이광덕(李匡德)을 수찬(修撰)으로, 이현보(李玄輔)를 지평(持平)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정언(正言)으로, 심단(沈檀)을 도총관(都摠管)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대교(待敎)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아아! 우레와 번개의 재이(災異)가 달마다 나타나 정성스럽게 거듭 타이르시니, 이것이 어찌 인애(仁愛)한 하늘이 우리 동방(東方)을 사랑하고 돕고자 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재앙을 만나 놀라고 근심하신 나머지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으시어 십행(十行)186)  의 사륜(絲綸)을 내리시고 여덟 조목을 환히 내거시니,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사표(辭表)에 넘쳤습니다. 신 등은 참으로 못내 감탄하고 어리석은 마음에 격동되는 바가 있어 참람됨을 헤아리지 못한 채 시험삼아 성교(聖敎)에 대하여 조목별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아! 전하께서는 2년 동안 진저(震邸)187)  에 계시며 날마다 두 번씩 서연(書筵)을 여셨고, 엄려(嚴廬)에서 슬퍼하면서도 강론(講論)을 또한 폐하지 않으시어 학문에 대한 부지런함이 거의 촌음(寸陰)까지도 아끼셨으니, 수기(修己)의 공(工)이 집희(緝熙)188)  의 영역까지 미치심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기(辭氣)에 나타난 것이 혹 능히 치우침이 없지 않았고, 시조(施措)에 나타난 것이 혹 의논할 만한 것이 없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임이 실로 인주(人主)의 성절(盛節)이며 치세(治世)의 선무(先務)인데, 지난번 헌계(憲啓)에 대해 말을 범했다 하시고 심지어 강상(綱常) 등의 말을 내리시기까지 하시며, 꺾어버리고 견벌(譴罰)하시되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전환(轉圜)189)  하시는 도량으로 즉시 반한(反汗)190)  을 허락하셨지만 다툰 바의 논계(論啓)는 여전히 윤허를 아끼고 계십니다.
양사(兩司)의 논계는 토복(討復)을 엄하게 하고 흉역(凶逆)을 징계하자는 뜻에서 나왔는데,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시고 윤종(允從)을 내리지 않으시니, 신은 아마도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리에 미진(未盡)한 바가 있는가 합니다. 자봉(自奉)의 사치와 절검(節儉)에 이르러서는 상중(喪中)에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궁위(宮闈)의 옛 공물(供物)의 명목(名目)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헌장(憲長)의 소론(疏論)에 가부(可否)를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이처럼 거듭 흉년이 들어 창고의 저축이 씻은 듯한 날에는 역시 마땅히 절약에 더욱 힘쓰시어 근검의 덕을 밝히셔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료들을 대우하심은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접(晋接)191)  이 빈번하고 수응(酬應)이 메아리 같으며 문구(文具)를 쓸어 없애고 성실로써 힘쓰시니, 상하가 서로 믿고 정과 뜻이 서로 통합니다. 그러나 칙려(勅勵)가 너무 엄하여 염우(廉隅)가 혹 폐해지고 속박하여 다그치시니, 실로 종용(從容)히 예로써 부리는 도(道)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마땅히 전하께서는 예를 숭상하고 염치를 기르시어 사대부의 대방(大防)을 허물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재야(在野)의 신하들을 곡진히 예모(禮貌)를 더한다면, 정초(旌招)192)  가 미치는 바에 마음을 바꾸지 않음이 없어 멀리 떠나 있는 원로(元老)들이 다시 문폐(文陛)193)  에 오르고 산림(山林)의 큰 덕이 있는 사람들이 경사(京師)로 나아올 것이니, 정성과 예가 서로 합치되어 그 응함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존숭(尊崇)하는 도리에 있어서 권여(權輿)194)  를 힘써 받들어 이미 온 자들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오고자 하는 자들을 막지 않게 하는 것이 전하께서는 오늘날 마땅히 힘쓰실 일입니다. 형옥(刑獄)이 중요함은 인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경외(京外)의 체수(滯囚)들의 원기(冤氣)가 재앙을 부르는데,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한 나머지 심지어 여러 해 권축(卷軸)을 이루고 서안(書案)에 쌓여 곧 휴지가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담당 관사(官司)에 신칙(申飭)하여 막힌 것을 풀어주소서. 조상(朝象)이 화평하지 못하고 공의(公議)가 막힌 데 이르러서는 비록 군하(群下)가 능히 동인협공(同人協恭)195)  하고 대양(對揚)196)  하지 못한 잘못이라고는 하나, 또한 전하께서도 조제(調剤)에 더욱 힘쓰시어 넓히고 펼치심에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아! 해마다 큰 흉년이 계속되어 백성이 거꾸로 매달린 듯하여 오늘날 망국(亡國)의 근본이 되고 있는데, 양필(兩疋)의 역(役)에 이르러서 더욱 치우치게 괴롭습니다. 백골 징포(白骨徵布)와 인족 침징(隣族侵徵)이 한정이 없어 수화지중(水火之中)에서 구해 내는 것이 하루가 급하니, 이것이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해야 할 까닭입니다. 그러나 호포(戶布)나 구전(口錢)은 의논이 정해지지 않아 허송세월만 하고 전혀 실효가 없으니, 마땅히 묘당(廟堂)에 신칙하여 나은 방도를 따라 변통하게 하되, 우선 그 신역(身役)을 고르게 하소서. 무릇 여러 가지 구활(救活)의 정사를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에게 거듭 유시(諭示)하여 뜻을 다해 무마하게 한 뒤에야 조금이나마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붕당(朋黨)의 화(禍)는 그 유래가 매우 오래 되었습니다. 송(宋)나라의 신하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붕당론(朋黨論) 한 편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을 가장 정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혹 인접(引接)하시는 겨를에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읽게 하여 그것을 들어 보신다면, 반드시 흑백과 현사(賢邪)의 구별을 환히 아실 것입니다. 무릇 쓰고 버리는 즈음에 이런 뜻에 힘쓰소서. 그리고 명분을 간범(干犯)하는 무리는 엄하게 막지 않을 수 없으나, 작은 재주나 조그만 선행이 있는 자 또한 그 능력에 따라 맡겨 부리시면 실로 건극(建極)의 도(道)에 합치될 것이니, 어찌 무기를 서로 찾는 근심이 있겠습니까? 무릇 이 팔조(八條)·삼목(三目)은 당일(當日)의 긴요한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상하가 마땅히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요체(要諦)는 전하의 ‘수기(修己)’란 두 글자로 해 나가시는 것을 벗어나지 않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대학(大學)》의 격치(格致)·성정(誠正)·수제(修齊)의 공(工)에 더욱 맹성(猛省)하시고 중간에 끊어짐이 없게 하시며 하늘에 순응하셔서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11월 3일 계묘

왕자를           【휘(諱)】         봉하여 경의군(敬義君)으로 삼고, 심육(沈錥)을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응교(副應敎) 조익명(趙翼命) 등이 우레의 이변으로 인해 차자(箚子)를 올려 수성(修省)의 도리를 진달하였다. 붕당을 없애고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진달한 것이 누누이 수백 마디의 말이었는데,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11월 4일 갑진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신설한 궁가(宮家)의 전답 이백 결(結)은 원결(元結) 가운데 본방(本房)에서 망정(望呈)197)                  한 뒤 정해 주고 은자(銀子) 4천 냥(兩)을 획급(劃給)하는데, 궁장(宮庄)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콩 1백 석(石)과 선혜청(宣惠廳)의 쌀 2백 석을 5년을 기한으로 수송하는 일을 일찍이 을해년198)                  에 대신(大臣)들이 진달(陳達)해서 정식(定式)하였습니다. 이제 경의군(敬義君)이 이미 봉작(封爵)되었으니, 청컨대, 이에 의해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설한 궁가는 비록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경비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은자는 2천 냥을 줄이고 쌀은 1백 석으로 줄여 수송하라. 결수(結數)에 대한 일은 훗날 연석(筵席)에서 하교(下敎)하겠다."
하였다.

 

사헌부 【지평(持平) 이현보(李玄輔)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5일 을사

사헌부 【지평(持平) 이현보(李玄輔)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산릉(山陵)의 선반미(宣飯米)199)  는 기내(畿內)의 각읍(各邑)에서 전세미(田稅未)를 덜어내어, 매 삭일(朔日)에 재실(齋室)로 실어다 바칩니다. 그런데 비단 서울로 운반하는 데 폐단이 있을 뿐 아니라, 언제나 봉납(捧納)할 즈음이면 곧 하배(下輩)들이 조종(操縱)하여 들어가는 정채(情債)가 응당 봉납해야 하는 수를 거의 넘게 됩니다. 따라서 각읍에서는 부득이 백성들로부터 갑절을 징수하여 목전에서 일을 일으키는 것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수릉관(守陵官) 이하 원역(員役)의 요미(料米)를 광흥창(廣興倉)에서 반록(頒祿)하는 예(例)에 의해 마련하여 진배(進排)해서 기민(畿民)의 폐단을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종부시(宗簿寺)의 계달(啓達)로 인해 홍해 도정(興海都正) 강(橿)의 자질(資秩)을 탁수(擢授)하였다. 대개 종신(宗臣)으로서 강(講)에 연달아 오등(五等)으로 수석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외재궁(外梓宮)에 칠을 더하였는데, 무릇 마흔 다섯 차례를 하고 그쳤다. 이날 정전(正殿)으로 넘겨 봉안(奉安)하였다.

 

정언(正言) 김호(金浩)가 상소하여 시폐 칠조(時弊七條)를 논하였다. 그 첫째에 이르기를,
"백성과 친한 관리로는 수령(守令)만한 것이 없으니, 수령이 적절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좋은 법이 있더라도 백성들이 그 은택을 입지 못합니다. 근래에는 분경(紛競)200)  이 풍습을 이루어 한 고을 자리가 비면 다투는 자가 구름 같아 정관(政官) 역시 자유롭지 못하고 웅주(雄州)·거읍(巨邑)으로 동천 서승(東遷西陞)하는 자는 권귀(權貴)의 족속이 아니면 반드시 남을 잘 섬기는 무리들이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천거한 사람을 죄주는 법이 있었으나 요새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세수(歲首)에 천거하는 상규(常規)를 혁파해 버리고 따로 주천(主薦)하는 사람을 뽑아 그로 하여금 세수에 각자 문음(文蔭)과 무인(武人)을 천거하게 하여 해조(該曹)에 계하(啓下)하되, 매번 고을에 빈 자리가 생기면 반드시 추천된 사람으로 자리를 메꾸게 하소서. 그리고 생재(眚災)201)  로 직임을 잃은 자를 제외하고 탐오(貪汚)·불법(不法)으로 죄를 입은 자는 본인이 관계된 바의 경중(輕重)에 따라 그 추천한 사람을 죄준다면,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추천하지 못할 것이고, 이재(吏才)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사(三司)와 시종(侍從)의 신하로 외직(外職)을 거치지 않은 자 또한 간간이 군읍(郡邑)에 차송(差送)하여 백성의 고락(苦樂)을 알게 한다면, 근심을 나누고 같이 다스리는 도리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그 둘째에 이르기를,
"지금의 사대부들이 어찌 모두 온갖 일에 능통한 재주를 가졌겠습니까만, 한 직임(職任)에 오래 있는 것을 수치로 알아 아침에 제수되면 저녁에 옮겨 관직이 병들고 허물어지니, 온갖 법도가 폐지되고 해이해지게 만들며 나라가 그 폐해를 받게 합니다. 심합니다. 사람을 위하여 관직을 택하는 폐해야말로, 그 사람됨과 역량이 어떠한지는 묻지 않고 현요직(顯要職)을 한 번 거치기만 하면, 이 자리 저 자리 거칠 것이 아주 없으니, 어디에 그 재주를 헤아리고 임무를 맡기는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사람을 쓰는 규모가 매우 좁은 나머지 순전히 문벌(門閥)만 써서 족속이 한미한 자는 화직(華職)에 들지 못하고, 오로지 과목(科目)만 숭상하며 음로(蔭路)로 벼슬한 자들은 그 기량을 펴지 못합니다. 국조(國朝) 이래의 성규(成規)를 이제 갑자기 의논하여 변통(變通)할 수는 없겠지만, 그 중에서 기이한 재주가 있어 실재로 같은 조정에서 추허(推許)받는 사람은 정관(政官)이 대신 의논하거나 혹은 탑전(榻前)에서 진달(陳達)하여 파격적으로 조용(調用)하고 재주에 따라 벼슬자리에 임용한다면, 관직을 위해 사람을 고르고 인재를 수습하는 방도에 또한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그 셋째에 이르기를,
"장률(贓律)이 엄하지 않으므로 탐욕이 풍습을 이루어, 옥사(獄事)는 뇌물로 이루어지고 관직은 돈으로 얻는지라 중외(中外)에서 서로 본받아 태연스레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치성(治聲)의 높고 낮음은 뇌물의 많고 적음에 말미암고 벼슬길에의 통하고 막힘은 혹 집안 재산의 빈부(貧富)에 관계되니, 신은 적이 통탄하는 바입니다. 또 어사(御史)의 안핵(按覈)과 대관(臺官)의 계파(啓罷)가 비록 한결같이 분명한 데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은 알지 못하겠지만, 그 사체(事體)에 있어서 진실로 쉽사리 견록(甄錄)할 수 없는데, 묘당(廟堂)과 전조(銓曹)에서는 수용(收用)하기에 급급하여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어사(御史)와 대관(臺官)에 의해 배척받은 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이는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하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지금부터 탐장(貪贓)과 불법(不法)으로 어사와 대관에게 배척당한 자들은 모두 해당되는 법을 베풀어 용서하지 말며, 청렴 결백하여 세상에서 모두 아는 자가 있으면 묘당(廟堂)과 정조(政曹)에서 기록하여 위에 알리고 관질(官秩)을 올려주어 가장(嘉奬)하는 뜻을 드러나게 보인다면, 풍성(風聲)이 이르는 곳마다 더러운 풍속이 변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그 넷째에 이르기를,
"위로는 인군(人君)으로부터 아래로는 사서(士庶)에 이르기까지 사치로써 나라를 망하게 한 자들을 옛 사첩(史牒)에서 살펴보면 이루 다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치의 해가〉 천재(天災)보다 심함이 있다는 옛사람들의 경계입니다. 접때 대신(臺臣)이 제택(第宅)이 제도를 넘고 있다는 뜻으로 금지시키고 억제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의복(衣服)에 대한 한 가지 조항은 같이 논열(論列)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고금(古今)을 참작하고 제도를 덜고 보태어 의복의 품식(品式)을 정하고, 상하의 등급을 명백하게 조열(條列)하여 제택(第宅)의 금제(禁制)와 함께 경외(京外)에서 일체(一體)로 반행(頒行)하게 하소서.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율(律)에 의해 중벌(重罰)로 다스리되, 또한 원컨대 성상께서 절검을 숭상하여 돈박(敦朴)함을 보이심으로 표솔(表率)202)  의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고, 그 다섯째에 이르기를,
"수령(守令)의 현부(賢否)를 염찰(廉察)하고 민간의 질고(疾苦)를 두루 아는 것은 어사를 자주 파견하는 것만한 것이 없으니, 사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전부터 어사를 초계(抄啓)하는 것을 묘당(廟堂)에서 주관하였으니, 대개 그 선택을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뽑힌 사람을 일시에 패초(牌招)하여 여러 도(道)에 나누어 파견하므로, 고을 수령들이 일찍 듣고 알아 조금 스스로 수그러들어 있다가, 올라간 뒤에는 전처럼 제멋대로 구니, 특별히 몰래 파견하고 잠행(潛行)하는 의의가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특별히 묘당으로 하여금 각별하게 초선(抄選)하게 하고, 성상께서도 또한 시종(侍從) 중에서 적합한 사람을 살펴 두셨다가 불시에 패초(牌招)해 추첨해 보내시되, 한 도(道) 안에서는 혹 먼저 가는 자는 좌(左)로 뒤에 가는 자는 우(右)로, 팔로(八路) 안에는 혹 뒤에 가는 자는 동으로 앞서 가는 자는 서로 보내고, 전자(前者)는 복명(復命)하고 후자(後者)는 출두(出頭)하며, 작년에 남으로 나갔으면 금년엔 북으로 가게 하는 등 돌아가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여러 도(道)의 수령들은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 감히 방자한 행동이나 법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못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그 여섯째에 이르기를,
"북평사(北評事)를 설치한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니니, 어찌 다만 장군의 막부(幕府)에 수행(隨行)하여 축대(逐隊)하게 할 뿐이었겠습니까? 조가(朝家)에서 전랑(銓郞)의 극망(極望)으로 순차로 차견(差遣)하니, 그 직책이 무겁다 할 만합니다. 다만 출입하는 전랑들이 본래 많은 인원이 아닌 까닭에 잠깐 갔다가 금방 돌아오며 일찍이 오래 머문 적이 없습니다. 지난날 대행조(大行朝) 때 대신(臺臣)이 임기가 차기 전에는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진계(陳啓)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전랑을 차제(差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삼사(三司) 중에 명망 있는 사람을 가려 파견하되 그로 하여금 1년으로 임기를 한정하여 교체하게 한다면 진실로 구임(久任)의 방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어 생각하건대, 평안 병사의 통영(統營)은 서남쪽 수륙(水陸)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유독 종사하는 임무가 없어 마치 북평사(北評事)의 경우와 같으니, 너무나 변방을 중히 여기는 뜻이 아닙니다. 하물며 양곤(兩閫)은 재곡(財穀)이 풍부하여 국가의 완급(緩急)에 소용되는데, 주수(主帥)하는 사람이 반드시 다 자신을 법도로 단속하고 봉공(奉公)하는 자는 아니니, 지난번 백시구(白時耉)·이수민(李壽民)이 은(銀)을 내놓은 일만 보더라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어찌 슬프고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조정의 명사(名士)에게 평사(評事)의 관직을 주고 부내(府內)에 처하게 하여 주수(主帥)의 일거일동을 미리 알지 못함이 없게 한다면, 비록 이수민과 백시구 같은 교활한 자들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서평사(西評事)는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합니다. 신은 그것을 설치했다가 없앤 것이 어느 때였는지 알지 못합니다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서평사와 남평사를 한결같이 북평사의 예에 의거해 파견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그 일곱째에 이르기를,
"영장(營將)의 임무는 병사를 다스리고 도적을 다스리니, 가벼운 것이 아니라 무거워 그것을 설치한 뜻이 본디 있었습니다. 그러나 벼슬의 대우가 박히기 때문에 무변(武弁) 중에서 조금이라도 이름있고 세력 있는 자들은 모두 싫어하여 피합니다. 또 삼가 들으니, 근래에 도적들이 횡행하여 크게는 인명을 살상하고 작게는 재산을 빼앗는다고 하는데, 이 또한 영장(營將)을 적절한 사람을 얻지 못한 데에 말미암아 그러한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각별히 신중하게 가려서 반드시 연소(年少)하고 이름 있는 무인(武人)을 빈 자리가 나는 대로 의차(擬差)하고, 또한 일찍이 곤임(閫任)을 거친 사람을 간혹 파견하되, 영장(營將)을 거치지 않았으면 곤수(閫帥)의 망(望)에 의망(擬望)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정례(定例)로 정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각도(各道)로 하여금 명화적(明火賊)이 있는 곳을 일일이 감사(監司)·병사(兵使)에게 치보(馳報)하게 하고, 감사와 병사는 더욱 자세히 살펴서 각진(各鎭)의 속읍(屬邑)에서 도적들이 많이 발생한 곳은 그 직임을 계파(啓罷)하거나 혹은 폄고(貶考)에 둔다면, 군무(軍務)를 다스리고 도둑을 그치게 하는 계책에 있어 두 가지를 거의 얻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품처(稟處)할 만한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거조(擧條)를 써낸 뒤에야 군상(君上)의 덕의(德意)와 조정의 득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 가끔 전혀 조지(朝紙)에 써 내지 않는 경우가 있고, 또 혹은 연설(筵說)을 죄다 베껴 내기 때문에 지나치게 장황하기도 합니다. 차후로는 연설은 일기(日記)에 상세히 기록하고 거조는 중요한 말을 요약해 써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승지(承旨)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정원(政院)의 규례로는 계하(啓下)한 거조가 만약 소소히 절목(節目) 사이의 일에 관계되면, 다만 각사(各司)에 분부하고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할 뿐입니다. 원래 조보(朝報)에다 죄다 써내는 예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김동필의 말은 옛 규범을 모르고 한 말입니다. 신의 출신(出身)이 김동필보다 앞서므로, 아직도 능히 기억해 알 수 있습니다. 탑전(榻前)에서 정탈(定奪)한 것은 반드시 죄다 조보에 내보내야 하는데, 어찌 어떤 것은 내보내고 어떤 것은 내 보내지 않는 규례가 있겠습니까?"
하자, 심단(沈檀)이 말하기를,
"신은 일찍이 당후(堂後)에 오래 있었으므로 정원의 규례를 또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경연(經筵)이 끝난 뒤에 승지와 주서(注書)가 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로 거조(擧條)를 의논하여 반드시 그날 저녁에 계하(啓下)하여 조보에 죄다 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거조를 조보에 죄다 내지 않는 것이 비록 잘못된 구례라 하나, 이는 승지가 헤아려서 그렇게 한 것이다. 중요한 말은 초출(抄出)하여 거조로 내보내고 그 나머지 이야기들은 일기에 상세히 기록하되, 3일 안으로 거조를 써내는 뜻으로 정식(定式)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1월 6일 병오

사헌부 【장령(掌令) 서종하(徐宗廈)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유사(有司)의 신하가 경비를 걱정하여 빚을 받아들이는 데 급한 나머지 날마다 매질을 일삼으므로 도하(都下)의 김씨(金氏) 성을 가진 부처(夫妻)가 서로 이어 자결(自決)했다고 합니다. 듣는 이들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고 빚의 징수는 내년 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독촉을 늦추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지극히 놀랍고 처참하다. 해사(該司)의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은 각박하게 군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특별히 그 직책을 파면시켜 백성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유학(幼學) 이의연(李義淵)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양암(諒闇)203)   중에 계시며 효(孝)는 허물이 없을 것을 생각하시고 사복(嗣服)하신 초기에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우선하시니, 하늘의 꾸짖음을 불러 일으키지 않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동(仲冬)의 달에 우르릉거리는 천둥과 번쩍이는 번개가 예사롭지 않으니, 재앙이란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대성인(大聖人)의 자질로써 불행하게도 정사(政事)를 권태롭게 여기는 병환이 있었습니다. 선조(先朝) 때 고명(顧命)한 군신(群臣)들이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깊이 생각하고 동조(東朝)204)  의 성교(聖敎)를 받들어 전하를 저위(儲位)에 책(策)함으로써 나라의 대본(大本)을 정하고 서무(庶務)를 섭찬(攝贊)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요·순(堯舜) 때의 성사(盛事)였는데, 오직 저 뭇 소인배들만이 틈을 엿보고 흉악한 뜻을 드러내어 먼저, ‘한밤중에 허둥지둥하며 몰래 천위(天位)를 옮긴다.’는 등의 말로 민심을 동요시키고, 북문(北門)으로 잠입하여 마침내 그 계획을 이루었습니다. 신총(宸聰)을 가리고 기화(奇禍)를 빚어내어 교목 세가(喬木世家)를 남김없이 주륙(誅戮)하였으며, 심지어 ’금정 접혈(禁庭蹀血)’205)  이란 말을 꺼내기까지 하였으니, 그 마음의 계책이 음흉하고 참독(慘毒)함은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전하의 책임은 뭇 소인배들이 가리고 탁란(濁亂)한 죄를 바로잡아 신축년206)   이후의 일이 모두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뜻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또 뭇소인배들의 음흉하고 참독한 죄를 바로잡아 《춘추(春秋)》의 반드시 토벌한다는 의리를 밝히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임어(臨御)하신 지 몇 달 동안 줄곧 미적미적하시며 정사를 펼치는 사이에 작은 것은 살피시되 큰 것은 버려두시니, 대월(對越)207)  의 정성은 문구만 있고 실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왕(先王)의 뜻은 이로 인해 드러나지 않고 《춘추》의 의리는 오래 되어도 밝혀지지 않으며, 신인(神人)의 분함은 이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천지(天地)의 기운은 이로 인해 조화되지 않으니, 상제(上帝)가 경고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죄인이 다스려지지 않고 원로(元老)가 무욕(誣辱)을 당하자 우레와 바람이 벼를 쓰러뜨렸고, 간신(姦臣)들이 정사를 어지럽고 군자가 용서받지 못하자 천둥 번개가 나무를 뽑았으니, 재이(災異)의 원인은 예로부터 그런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자신을 반성하시고 정사(政事)를 닦으시되 척연(惕然)히 다시 도모하시어 소인배들의 죄를 바로잡아 선왕의 뜻이 드러나게 하고, 《춘추》의 의리를 밝혀 신인(神人)의 분을 씻는다면, 인심(人心)이 바로잡혀 천지(天地)의 마음이 바로잡힐 것이고, 인심이 조화롭게 되어 천지의 마음 또한 조화롭게 될 것이니, 겨울철 우레의 재앙이 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형혹성(熒惑星)이 궤도를 옮겨가고208) 상상(祥桑)이 말라 죽은 아름다움209)  이 어찌 유독 전대(前代)에만 있겠습니까? 사문(斯文)의 시비(是非)에 이르러서는 숙묘(肅廟)의 유교(遺敎)가 밝고 밝은데, 흉악한 무리들이 거리낌없이 출향(黜享)하였고, 윤지술(尹志述)의 충직함과 억울함은 사림(士林)들이 지금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복향(復享)의 은전과 충직을 포상하는 일이 아직까지 다시 시행되지 않고 있으니, 이 역시 재앙을 불러들인 단서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일개 위포(韋布)210)  이니, 조정의 일에 진실로 월조(越俎)211)  의 혐의와 참람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흉악한 무리들이 체결(締結)하고 하늘의 재앙이 자주 나타나 국사(國事)에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염려가 있는데, 큰 화를 겪은 뒤라 선류(善類)들이 떨며 모두 말하는 것을 조심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가 3백년 동안 선비를 양성한 뜻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절로 통곡하게 됩니다."
하였다. 정원(政院) 【승지(承旨) 이중술(李重述)·김동필(金東弼)·유수(柳綬)·이명의(李明誼)이다.】 에서 아뢰기를,
"이의연이 응지(應旨)를 핑계대어 와서 하나의 소(疏)를 바쳤는데, 그 한 편(篇)의 정신(精神)은 오로지 흉역(凶逆)을 비호하고 선류(善類)를 일망타진하자는 데 있습니다. ‘북문(北門)으로 잠입하여 끝내 그 계책을 이루었고 기화(奇禍)를 빚어내어 교목 세가(喬木世家)를 주륙하였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방자하게 말을 해대었고, ‘신축년 이후의 일은 모두 선대왕(先大王)의 뜻이 아니었다.’고 말한 것은 가리킨 뜻을 더욱 지극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위로 선조(先朝)를 무욕(誣辱)하고 사사로이 흉역을 두호(杜護)한 정상이 너무나도 통탄스럽습니다. 그 나머지 여러 신하들을 얽어 모함하여 화를 전가시키려고 마음먹어 사문(斯文)의 시비를 현란시키고, 윤지술의 요악(妖惡)함을 치켜세운 것은 거론할 겨를도 없는 것들이나, 이미 응지로 이름한 것이니, 한 번 예람(睿覽)을 거쳐 처분을 분명히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봉입(捧入)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이의연의 상소를 보니 한편의 정신이 오로지 당(黨)을 비호하는 데서 나왔다. 아! 신축년의 하교를 오늘날 추념(追念)하건대, 마음의 놀라움이 너무나 아프고 절실하다. 그런데 도리어 무슨 마음으로 다시 제기해 말한다는 것이냐? 이런 상소는 응지(應旨)로 답할 수가 없는 것이니. 반드시 즉시 되돌려 주라. 아! 붕당(朋黨)이 심해져 시비가 분명하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깊이 탄식하는 바이다. 만약 이 일을 가지고 다시 서로 공격한다면 한 번 가고 한 번 옴에 어찌 화기(和氣)를 손상시킴이 없을 수 있겠는가? 아! 그대 근밀(近密)의 신하들은 먼저 관평(寬平)한 뜻에 힘쓰고 직분에 삼가 노력하여 우리 나라를 지키라."
하였다.

 

청주(淸州)의 유학(幼學) 정규상(鄭奎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자임하여 사문(斯文)의 종사(宗師)가 되었고, 요(堯)·순(舜) 시대의 군민(君民)의 뜻과 출처(出處)와 행장(行藏)의 의리가 선정신 조광조(趙光祖)의 평생(平生)과 부합되었습니다. 그래서 숙묘조(肅廟朝)에 특별히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배향할 것을 허락하여 어진이를 숭앙하는 지극한 뜻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욱(黃昱)과 김범갑(金范甲)의 무리는 지난날 남곤(南袞)·심정(沈貞)·윤휴(尹鑴)·허목(許穆)의 여얼(餘孼)로 올바른 이를 해치고 어진이를 무고하여 원향(院享)에서 내칠 것을 청하니, 백륙(百六)212)  의 화(禍)가 이에 이르러 지극하였습니다. 심지어 신치운(申致雲)이란 자가 꼬리를 이어 일어나 사악한 생각을 품고는 독기(毒氣)를 뿜어 우리의 선정신 권상하(權尙夏)를 무욕(誣辱)하여 작명(爵名)이 마침내 삭탈(削奪)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숙묘(肅廟)께서 존숭(尊崇)한 두 어진이를 이처럼 무고하고 헐뜯어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고, 심지어 선왕의 본뜻이 아니라고 하기까지 하였으니, 비단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일 뿐만 아니라, 또한 숙묘의 역신(逆臣)이 되는 것입니다. 청컨대 송시열의 사향(祀享)과 권상하의 작명을 회복시켜 주소서."
하였다. 승지 이명의(李明誼)가 아뢰기를,
"정규상이 응지(應旨)를 핑계하여 와서 하나의 소(疏)를 바쳤는데, 말뜻이 매우 패리(悖理)합니다. 그가 아무리 당(黨)을 비호하는 데에 급급하다지만 어찌 감히 허구 날조가 이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상소를 도로 돌려주라."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의연(李義淵)의 소어(疏語)는 흉악하고 교묘한 뜻이 많습니다. 신이 청컨대 조목조목 따져 진달하고자 합니다. 이른바 ‘한밤중[半夜]’ 운운한 것은 우상(右相) 유봉휘(柳鳳輝)의 소어(疏語)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른바 ‘몰래 옮긴다[陰移]’ 운운한 것은 고(故)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의 소어를 가리킵니다. 유봉휘의 상소의 뜻은 대개 ‘김창집(金昌集)의 무리가 한밤중에 한 번 청하고 두 번 청한것이 거의 협박에 가깝다. 복상(卜相)213)  도 오히려 마땅히 이와 같아서는 안될 것인데, 정책(定策)이야말로 얼마나 큰 일인가? 그런데도 이와 같이 대충대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인묘조(仁廟朝)에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 역시 이러한 상소가 있었으나 효묘(孝廟)께서 등극(登極)하신 뒤 곧 정승에 제배(除拜)하였으니, 유봉휘의 상소가 이경여의 상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즉위한 초기에 또한 정승에 임명하셨으니, 뭇 신하들이 그 누군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이의연이 이것으로 임금과 신하를 해치고 이간질하고자 하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한세량의 상소는 대개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로 인하여 나온 것인데, 그 소가 명백하고 정직하였으니, 그 뜻에 어찌 다른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북문(北門)으로 몰래 들어갔다.’고 운운한 것은 곧 고(故)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선인문(宣人門)으로 들어가 청대(請對)했던 일을 가리킵니다. 당시 정청(庭請)이 갑자기 정지되고 김창집의 무리가 갑자기 청정 절목(聽政節目)에 관한 차자(箚子)를 들였는데, 조태구가 입대(入對)하여 힘써 다투고자 하였으나, 병 때문에 걸을 수가 없어서 이에 편리함을 취해 선인문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미 들어가자 김창집의 무리가 듣고 허둥지둥 따라 들어와 번거롭게 자신들의 죄를 말했으니, 여기에서 조태구의 일이 정대(正大)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러나온 뒤에 국문(鞫問)하자는 청까지 있었으니,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접혈(蹀血)’ 운운한 데 이르러서는 곧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에 있는 말을 가리키는데, ‘접혈’이란 두 글자는 고문(古文)에 많이 나오는 것으로 ‘장안신접혈(長安新蹀血)’과 같은 부류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의연은 반드시 이것을 따내어 구함(構陷)하려 하니, 문자(文字)를 따내는 것이 어찌 소인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그 상소 가운데 혹은, ‘선왕께서는 일에 싫증을 내는 병환이 있었다.’ 하고 혹은, ‘신축년 이후의 일은 선왕의 뜻이 아니었다.’고 하였으므로, 신 등은 이를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는데, 성상의 마음이야 마땅히 어떠하셨겠습니까? 무욕이 선왕(先王)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런데 비망기(備忘記)에다 단지 한때의 당론(黨論)으로 돌리셨을 뿐입니다. 이의연의 상소를 어찌 당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당론이 아니라 역(逆)입니다. 이를 엄히 다스리지 않으면 흉당(凶黨)들이 꼬리를 물고 다투어 일어나 강상(綱常)이 끊어져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하고, 이진수(李眞洙)가 말하기를,
"일에 싫증을 내셨다[倦勤]’라는 두 글자는 비록 스스로 면목(面目)을 약간 숨긴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신축년 이후의 일은 선왕(先王)의 뜻이 아니었다.’고 한 말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에게 비록 병이 있더라도 천하(天下)에 군림(君臨)한 경우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유독 당(唐)의 순종(順宗)과 송(宋)의 광종(光宗)이 질병 때문에 석위(釋位)했는데, 순종은 중풍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고, 광종은 수황(壽皇)214)  이 병이 나도 가서 볼 수가 없었으며 붕어(崩御)하고 나서도 또한 집상(執喪)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이같은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군신(君臣)의 대방(大防)은 지극히 엄하니, 임금에게 비록 병이 있더라도 진실로 이 두 임금과 같은 경우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찌 다른 의논을 용납하겠습니까?
옛날에 송(宋)의 영종(英宗)이 질병이 있어 관(棺) 앞에다 지팡이를 던지기까지 하자, 한기(韓琦)가 주렴 안으로 안고 들어가 백관(百官)들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단속했는데, 영종은 송(宋)의 현군(賢君)이 되는 데 해롭지 않았고 한기가 명신(名臣)이 되는 데 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행조(大行朝)께 비록 질환은 있었으나 약원(藥院)에서 일찍이 한 첩의 약도 올리지 않았는데, 이에 즉위한 원년(元年)에 급급하게 대리(代理)를 청하였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습니까? 진실로 청정(聽政)을 바꿀 수 없는 의논이라고 생각했다면 정청(庭請)을 또 어찌 한단 말입니까? 처음에는 거짓으로 정청을 했고 책임을 때운 지 사흘 만에 갑자기 정침(停寢)을 의논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수상(首相)인 이광좌(李光佐)가 그때 힘써 다투며, ‘청하며 마지 않을 수 없다면 곧 내일 다시 청하기로 영(令)을 내자.’고 하였는데, 그날 밤 절목(節目)에 관한 차자(箚子)가 갑자기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미 차자를 올렸으면 임금의 비답(批答)을 기다려야 마땅한데 조태구가 청대(請對)하자 또 급급히 따라 들어가 이구동성으로 정침(停寢)할 것을 청했으니,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인심(人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의연의 상소 가운데, ‘그 계획을 이룰 수 있었다.’는 말은 정청을 도로 정침한 일을 가리킵니다. 이 일이 과연 어떤 일이길래 이에 ‘그 계획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반드시 이 상소를 응지(應旨)로 여기셔서 죄를 주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또 이 자를 죄준다면 더욱더 격렬해지는 근심이 있을 것이라고 염려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악은 윤상(倫常)에 관계되는 것으로 만약 명백하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거원이 말하기를,
"신축년의 옥사야말로 어떠한 대역(大逆)이었습니까? 그런데도 그가 이에 감히 드러내놓고 말을 하며 영구(營救)하되, 심지어 흉괴(凶魁)가 복법(伏法)된 것을 오늘날 재앙을 초래한 이유로 삼으며, 주공(周公)에 비기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천하의 악(惡)은 똑같은 법입니다. 대행(大行)께 불충(不忠)한 자가 어찌 전하께 충성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진수가 말하기를,
"이의연의 상소는 지극히 흉악하고 패리(悖理)하여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범연하게 당(黨)을 비호한 것이라고 하시니, 어찌 헐후(歇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의연의 상소와 승정원의 계사(啓辭)를 보았다. 신축년의 하교(下敎)를 이제 와서 추념(追念)하건대, 마음에 놀랍고 아픔이 절실하다. 신하된 자들이 어찌 감히 나를 향해 제기하는가? 그 상소를 돌려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아래 조항의 금등(金縢)215)  의 일은 나 역시 주공(周公)에게 비긴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광부(狂夫)의 말도 성인은 택하는 법이니, 택하지 않는다면 쓰지 않을 뿐이다. 지난번 구언(求言)한 비망기(備忘記)에다 또한 당고(黨錮)의 폐해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광망(狂妄)한 것은 광망한 것으로 돌리고 쓰지 않으면 그뿐이다. 이것이 어찌 족히 국가에 해(害)가 될 수 있겠는가? ‘선대왕(先大王)께서 정사(政事)를 권태롭게 여기는 병환이 있었다.’는 말의 뜻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 우의정이 한(漢)의 선제(宣帝)가 하후승(夏候勝)을 죄주지 않았음을 말했고, 또 위(魏)의 태무(太武)가 최호(崔浩)를 죄주지 않았으니, 하후승과 최호를 당시에 만약 죄주었다면 후세에 어찌 말이 없었겠느냐? 구언하는 비망기가 내려지자 광망한 자들이 틈을 엿보고 일어나고 있지만, 어찌 반드시 극죄(極罪)로 죄줄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싫어함이 너무 심하면 어려워진다.’고 했으니, 어찌 반드시 너무 심하게 싫어하랴?"
하였다. 이거원과 이명의 등이 다투어 나서서 힘써 간쟁하되, 수백 마디의 말을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후로 만약 이런 상소를 올리면 찬배(竄配)함이 옳겠으나 지금 이의연을 죄주는 것은 옳지 않다. 유신(儒臣)에게 비록 지키는 바가 있으나 나에게도 또한 지키는 바가 있다."
하였다. 이거원이 말하기를,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형벌로 가지런히 한다[齊之以刑]’고 했습니다. 만약 이의연의 죄를 명백하게 바룬다면 차후로는 절로 이런 흉소(凶疏)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가 말하기를, ‘덕으로 이끌고 예로 가지런하게 하며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가지런히 한다.’고 하였으니, 덕과 예가 위이고 법과 형벌은 그 다음이다. 유신(儒臣)이 이차적인 일로 임금을 보도(輔導)할 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요·순의 일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했다. 내가 비록 스스로 부끄러운 점이 있으나 유신의 보도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
하였다.

 

11월 7일 정미

헌부(憲府) 【장령(掌令) 서종하(徐宗夏)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의연(李義淵)의 상소는 지극히 흉악하고 패리(悖理)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우리 전하를 책립(策立)하시어 국본(國本)을 정하셨으니, 수수(授受)가 명백한데, 지금 이의연은 선조(先朝)의 지극한 덕을 완전히 무시하고 은연중에 정책(定策)의 대계(大計)를 전적으로 모역(謀逆)하다가 복법(伏法)된 거괴(巨魁)에게로 돌렸습니다. 또 ‘신축년216)   이후의 일은 모두 선왕의 뜻이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아! 과연 이 말과 같다면 4년 동안 크고 작은 형정(刑政)은 과연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며, 선대왕(先大王)은 마땅히 어떤 지경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그 거짓을 시원스레 바루어 사방에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의연을 잡아다 엄하게 국문(鞫問)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大司諫) 권익관(權益寬)과 정언(正言) 김호(金浩) 등이 또한 상소하고,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과 수찬(修撰) 이진수(李進洙) 등이 또한 상소하여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양정호(梁廷虎)가 상소하여, 본읍(本邑)의 호구(戶口)는 적은데 군액(軍額)이 많은 폐단을 말한 뒤 그 액수를 감해 줄 것을 청하고, 또 군포(軍布)가 적포(積逋)된 폐단을 말한 뒤 참작해 탕감해 줄 것을 청하고, 또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이 적은 폐단을 말한 뒤 남한산성(南漢山城)과 북한산성으로 이전(移轉)할 쌀을 본읍에 그대로 두어 조적(糶糴)하게 할 것을 청하고, 또 적몰(籍沒)한 노비를 본읍에 획급(劃給)할 것을 청하니,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좌의정 유봉휘(柳鳳輝)가 이의연(李義淵)의 상소로 인해 상소하여 인죄(引罪)하니, 답하기를,
"내가 비록 현명하지는 못하나 어찌 이 따위의 말을 믿고 보상(輔相)에게 의심을 두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인구(引咎)하고, 이어서 이의연(李義淵)에게 죄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경(卿)의 해를 뚫을 듯한 충성을 내가 이미 상세히 알고 있다. 경에게 조금도 편안하지 못할 단서가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8일 무신

윤용(尹容)과 이일제(李日躋)를 지평(持平)으로, 조지빈(趙趾彬)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조(李肇)가 이의연(李義淵)의 상소로 인해 상소하기를,
"‘북문(北門)으로 몰래 들어갔다.’고 한 말은 신이 그때 여러 신하를 따라 청대(請對)하여 선인문으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말하니, 진실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批答)하였다.

 

우참찬(右參贊) 김일경(金一鏡)이 상소하기를,
"신이 찬(撰)한 반교문(頒敎文) 가운데 네 글자를 이의연(李義淵)이 따내어 허구 날조한 것입니다. 대개 신이 응제(應製)할 때에 당기(唐記) 이훈(李訓) 정주(鄭注)의 ‘시섭혈금도(時涉血禁塗)’란 구절을 어렴풋이 기억해냈으나 ‘섭도(涉塗)’ 두 자를 창황(蒼黃)하여 기억해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도(塗)’는 ‘정(庭)’인 줄 알았고 ‘섭(涉)’은 ‘섭(渫)’이라 부르니, 장령(掌令) 이태원(李太元)이 마침 자리에 있다가 신을 돌아보며 ‘이것은 족(足)자 변이지 수(水)자 변이 아니다.’고 하므로, 드디어 ‘접(蹀)’자로 썼던 것입니다. 교문(敎文) 가운데 이른바, ‘만약 궁성(宮城)에 군사를 배치한 일이 이루어졌다면, 어찌 금정(禁庭)에 피가 낭자함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倘或遂宮城之陳兵抑何免禁庭之蹀血]’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니, 곧 글로 인해 일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批答)하였다.

 

청주(淸州)의 유학(幼學) 송재후(宋載厚)가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원사(院祀)를 복향(復享)할 것과,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의 직첩(職牒)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치운(申致雲)은 역얼 난가(逆孼亂家)의 아이로 감히 올바른 이를 해치고 어진이를 무함하는 수단을 썼으니, 청컨대 당률(當律)을 베푸시고, 특별히 경외(京外)의 제생(諸生)으로서 선정(先正)을 위해 유배된 자들을 방송(放送)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나라의 반이 되는 잠신(簪紳)217)  들이 모두 영해(嶺海)로 옮겨져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데, 한 사람도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양조(兩朝)에서 예(禮)로 대우한 유현(儒賢)이 길바닥에 넘어져 죽고 90살의 야위고 늙은 중신(重臣)이 나란히 해도(海島)에 갇혀 있으며, 심지어 어미를 찾아 우는 어린아이가 채 이를 갈 나이도 안되어 귀양지로 또한 보내졌습니다. 그리하여 살아서 원훈(元勳)과 국구(國舅)란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죽어서는 주인 없이 떠도는 귀신이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익릉(翼陵)의 하늘에 계신 혼령 역시 반드시 어두운 저 세상에서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상소를 도로 내주라."
하였다.

 

이의연(李義淵)을 절도(絶島)에 귀양보냈다.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의 청을 따른 것이다. 이때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와 우의정 유봉휘(柳鳳輝)가 모두 인죄(引罪)하고 사직하였는데, 조태억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불행하게 후사(後嗣)가 없으셨습니다. 전하께서는 대행(大行)의 아우이시며 숙묘(肅廟)의 아드님이십니다. 비록 우리 나라 고사(故事)로 말하더라도 인종(仁宗)께서 후사가 없으시매 명종(明宗)께서 계승하셨으니, 곧 비록 아래서 건청(建請)하지는 않았으나 천의(天意)와 인심(人心)이 전하께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한(漢)나라 때 두헌(竇憲)218)  의 무리가 정책(定策)한 것을 스스로 공(功)으로 여겼고 당(唐)나라 때 환관(宦官)은 ‘정책 국로(定策國老)’니 ‘문생 천자(門生天子)’니 하는 칭호까지 있었습니다. 인군(人君)의 자리는 천의와 인심이 돌아가는 바가 있으니, 신하가 어찌 감히 천의를 탐하여 힘쓴단 말입니까?"
그리고 신축년219)   일이 어찌 나라를 위해 정책(定策)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역적들의 초사(招辭)를 보건대, ‘탁군(涿郡)의 유비(劉備)’라느니 ‘제실(帝室)의 후예’라느니 하는 말과 이이명(李頤命)의 자(字)를 손바닥에 썼으니, 이것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왕실(王室)을 위한 마음에 가깝겠습니까? 백망(白望)이 비수를 끼고 측간에 숨은 것220)  과, 이이명이 사행(使行) 중에 독약을 산 일이 장세상(張世相)과 김성절(金盛節)의 초사에 낭자하게 드러났으며, 덕양군(德讓君)으로 봉한다고 한 의논에 이르러서는 모두 이이명을 추대하는 데 뜻이 있었습니다.
신축년의 일을 만약 역모(逆謀)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만이겠지만, 나라에서 이미 그 죄를 밝혔으니, 오늘날 신하된 자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무엄하게 비호할 수 있단 말입니까? 비록 사가(私家)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상을 당한 집에 글을 보내고 반드시 먼저 상사(喪事)를 위문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상소는 천붕(天崩)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저도 또한 신하로서 어찌 차마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북문(北門)으로 몰래 들어가 끝내 그 계책을 이루었다.’는 것은 곧 신의 종형(從兄)인 고(故) 상신 조태구(趙泰耉)가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와 청대(請對)했던 일을 가리킵니다. 그때 신의 종형은 바야흐로 논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유(庭籲)에 들어와 참여하지 못했고, 철유(撤籲)한 날이 되어서야 부득이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와 청대(請對)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병이 든 사람이라 실제 멀리 걸어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편리함을 취해 선인문으로 들어왔던 것이며, 이조(李肇)·김연(金演)·한배하(韓配夏)·최석항(崔錫恒)·이광좌(李光佐)·이태좌(李台佐) 역시 동시에 입대(入對)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이의연이 이른바, ‘끝내 그 계책을 이루었다.’고 한 것이 어떤 일인지 알 수 없고, ‘기화(奇禍)를 빚어냈다.’고 한 것 또한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어찌 질서가 심히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정책(定策)을 공으로 삼지 않으시는 것을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릇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저 흉역(凶逆)한 무리들은 망령되게 스스로 헤아려 생각하고서는 이러한 상소를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비록 말이 맞지 않아도 내가 허물하지 않겠다.’고 하교(下敎)하셨습니다만, 지금 이의연의 상소는 말이 맞지 않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곧 선왕(先王)을 무욕(誣辱)한 것입니다. 신이 외람되게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런 역적을 토죄(討罪)하지 못하니, 천경 지위(天經地緯)가 장차 멸절(滅絶)되어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우승지(右承旨)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이 자는 이희지(李喜之)의 속영정행(續永貞行)과 똑같은 역적의 뱃속을 가진 자입니다. 공의(公議)로 말한다면 천하(天下)에 만세(萬世)의 역적이고, 신하(臣下)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며, 전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부형(父兄)을 무멸(誣衊)한 흉역(凶逆)입니다. 이 자를 토죄하지 않으면 왕법(王法)이 행하여지지 않고 백성의 윤리가 멸절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매번 말하고자 했지만 지금은 상복을 입고 곡읍(哭泣)해야 하는 때라 국가의 큰일 이외의 것을 어찌 말할 수 있었겠느냐? 그러나 말의 단서가 이미 나왔으므로 이제 비로소 말한다. 저 신축년에 갑자기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던 저이(儲貳)의 명을 받들게 되었으니, 그때의 심사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대행조(大行朝)께서 자지(慈旨)를 받드시며 심지어, ‘효묘(孝廟)의 혈속(血屬)이며 선왕(先王)의 골육(骨肉)이라.’는 등의 말로 하교(下敎)하시기까지 하셨다. 효묘께서는 세 번 상소하여 면할 것을 바라셨지만, 나 같은 자가 어찌 세 번 상소하고 그칠 수 있었겠는가? 천심(天心)을 돌릴 것을 바라며 잇따라 글을 올려 면하기를 바랐지만, 그중 두가지 노목의 비지(批旨)는 비록 철석(鐵石) 같은 심장이라도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지난날 고(故) 영상(領相)이 성정각(誠正閣)에 청대한 일이 있었다. 나의 심사를 조정의 신하들이 과연 어찌 알겠느냐? 나의 마음은 곧 천지신명에게 물어볼 수 있고 하늘에 계시는 조종(祖宗)의 영혼께서 굽어살피실 것이다. 사저(私邸)에 있을 때 ‘고죽청풍(孤竹淸風)’ 네 글자를 벽에 써 놓았는데,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내 마음을 질정(質正)할 수 있다. 위로 자지(慈旨)와 대행조(大行朝)의 성의(盛意)와 종사의 부탁한 무거움을 몸받아 사양할 수가 없었기에 마침내 이에 이르렀던 것이니, 일념으로 계구(戒懼)함을 어찌 말로 다하겠느냐?"
하였다. 김동필이 말하기를,
"신은 그때에 보덕(輔德)으로 입대(入對)했는데, 갑자기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받들고 나와 달려가 외정(外庭)에서 알려 주토(誅討)의 법을 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본뜻은 비단 소신(小臣)만이 이제 와서 흠탄(欽歎)할 뿐만 아니라, 조정에 있는 신료가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하고, 조태억이 말하기를,
"벽에 써 놓은 네 글자에 대해서는 오늘에야 비로소 성상의 하교를 받듭니다. 전하의 본뜻이 이와 같으시니, 비록 하찮은 미물이라도 누가 모르겠습니까? 공제(公除)221)  한 날 특별히 유봉휘(柳鳳輝)를 정승에 제배하셨으니, 이는 실로 옛 제왕(帝王)들에게 드문 성절(盛節)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개의하지 않고 있다는 뜻을 어제 좌상(左相)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도 언급했다. 그리고 이의연이 상소 가운데 정책(定策)에 대해 말했는데, 내가 비록 현명하지는 못하나 어찌 이것 때문에 털끝만큼이라도 그 무리들을 용서할 리가 있겠는가? 이의연은 당(黨)을 위해 죽기로 달게 마음을 먹은 무리로서 원악(元惡)이 이미 죽은 뒤에도 여전히 역적을 비호하는 데로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고 이런 상소를 하였다. 내가 역적을 비호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와 같은 상소는 반드시 뒤따라서 죄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미워함이 너무 심하면 어지러워진다.’라고 하였다. 내 뜻이 이와 같은데, 이제 대간(大諫)의 상소는 나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때문에 개연(慨然)히 답했던 것이다. 옥당(玉堂)에서는 한밤중에 청대(請對)하고, 영상(領相)은 차자(箚子)를 올렸으며, 오늘은 대신들이 또 청대(請對)하였다. 이로 보건대, 온 나라의 공의(公議)를 알 수 있겠다. 대계(臺啓)는 잡아다 국문(鞫問)할 것을 청했으나, 어찌 원악과는 다름이 있지 않겠느냐? 소유(疏儒) 이의연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11월 9일 기유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상소하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마땅히 오랫동안 연하(輦下)에 머무를 수가 없어 잠시 인산(因山)의 기한을 기다리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어떤 사람이 상소하여 선조(先朝)를 무욕(誣辱)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역적들이 종사(宗社)를 위한 계책에 무슨 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장차 선대왕(先大王)을 어디에 두려는 것인지요? 이처럼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있는 날 저와 같은 상소가 있으니, 인심을 교화(敎化)시키기 어려움이 심합니다. 신이 도하(都下)에 오래 머물러서 이처럼 차마 듣지 못할 말을 차마 들었으니, 다만 귀를 가리고 달아나 그림자도 소리도 없이 세상과 서로 간섭하지 않아야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향리(鄕里)로 달려 돌아가니, 승지를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면류(勉留)하게 하였다.

 

동학 훈도(東學訓導) 이봉명(李鳳鳴)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시며 선조(先朝)의 동기(同氣)이십니다. 그런데 조태구(趙泰耉)가 먼저 ‘혐의를 무릅쓰고 나와 뵈었다.’는 등의 말을 앞에서 부르짖고, 전하께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이극(貳極)의 자리에 오르시자 유봉휘(柳鳳輝)가 이어, ‘놀랍고 당황스러우며 근심스럽고 의혹이 된다.’는 등의 말을 뒤에서 부르짖었습니다. 그 흉역(凶逆)을 논하자면, 조태구·유봉휘가 괴수가 되고, 역환(逆宦)·요비(妖婢)가 안팎으로 결탁하여 참혹한 해(害)와 큰 화(禍)가 호흡지간에 닥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성(慈聖)의 언교(諺敎)를 막아 반시(頒示)하지 못하게 하고 선조(先朝)의 특지(特旨)를 게으름을 피우며 즉시 거행하지 않았으니, 만약 그 정적(情跡)을 캐낸다면 위험한 일을 꾀하는 의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지극한 정과 곡진한 사랑에 힘입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어찌 오늘이 있으리라 어찌 보장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제 와서 생각하니 뼈가 시리고 담이 절로 떨립니다. 저 김일경(金一鏡)과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사갈(蛇蝎)과 짐승처럼 악행을 세습하였으니, 그 죄를 쓰고자 해도 죽간(竹簡)이 모자라 쓸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222)   특히 지난날의 소어(疏語)와 교문(敎文)의 일을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회인 종무(懷刃鍾巫)’223)  라 했고, 한편으로는 ‘접혈금정(蹀血禁庭)’이라고 했습니다.
아! 종무(鍾巫)라고 한 것은 곧 노(魯)나라 환공(桓公)이 은공(隱公)을 시해(弑害)한 일로 전(傳)에 이르기를, ‘우보(羽父)가 시해할 것을 청했다.’ 했으니, 환공이 실제로 그와 함께 도모한 것입니다. 접혈(蹀血)이라고 한 것은 당태종(唐太宗)이 건성(建成)을 시해했던 일이니, 온공(溫公)224)  이 말하기를, ‘동기(同氣)에게 칼날을 들이대어 진왕(秦王)이 잔인하게 서로 싸웠다.’라고 했으니, 이는 옛 사책(史冊)에 실제 써 있는 것이며 선유(先儒)가 크게 비난한 것입니다. 골육(骨肉) 간의 대변(大變)이 천년 뒤에도 환하여 가릴 수가 없으니, 저가 어찌 이 문자를 대찬(代撰)과 봉장(封章)에 인용하여 성궁(聖躬)을 몰래 배척하여 드러내 놓고 핍박하며, 참혹한 무욕이 또한 선조(先朝)에까지 미치게 한단 말입니까? 역적의 심장을 길가는 사람도 다 아는 바이니, 무릇 혈기(血氣)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 고기를 씹고 가죽을 깔고 자려 하지 않겠습니까? 조정에 가득한 신료(臣僚)들이 예사로운 말로 여기고 태연하여 놀라지 않았으나, 김동필(金東弼) 한 사람만이 조금이나마 같은 투식에서 스스로 벗어나고자 하였는데, 막 한 장의 상소를 올리자마자 곧 뭇사람의 떠들썩한 소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니 이 무리가 전하를 잊고 역적 김일경의 죄를 비호한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조정은 성상(聖上)의 조정이거늘 역적 김일경의 조정이 되었고, 삼사(三司)는 성상의 삼사이거늘 역적 김일경의 삼사가 되었으니, 다만 역적 김일경이 있음만 알고 전하가 계심은 알지 못합니다. 토죄(討罪)의 글이 지금까지도 조용하니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재이(災異)가 거듭되는 것도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됩니다.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의 죄악은 전하께서 이미 통촉하셨으나, 역적 김일경의 흉역(凶逆)은 혹 전하께서 미처 살피지 못하신 것인지요? 종무(鍾巫)·접혈(蹀血) 등의 말을 시험삼아 대신(大臣)·제재(諸宰)·후사(喉司)·삼사(三司)에 물어보소서.
과연 모두들 ‘인용한 것이 마땅함을 얻었다.’고 한다면, 신은 마땅히 임금을 속일 율(律)을 받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인용한 것이 마땅함을 잃었다.’고 한다면, 역적 김일경이 악역(惡逆)으로 주륙(誅戮)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경재(卿宰)와 삼사(三司)의 여러 사람들 역시 어찌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에서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아! 재이가 꾸짖고 경고함이 어찌 초래한 까닭이 없겠습니까? 역적 유봉휘가 대각(臺閣)을 훔쳐 차지하고 있으니 음양(陰陽)이 어긋나고 변(變)이 생김이 마땅하고, 역적 김일경이 지금까지도 왕장(王章)을 모면하고 있으니 재얼(災孼)의 경고를 보임이 당연합니다.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비록 엄려(嚴廬)에 계시나 강연(講筵)을 열어 치도(治道)를 도모하시고 성학(聖學)이 밝게 빛나니, 감히 의논할 수 없겠으나, 건강(健剛)을 몸받고 힘쓰시는 데 혹 미진함이 있는지요? ‘굳세다[剛]’는 한 글자는 실로 인주(人主)의 대범(大範)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재의 운행이 건실하니 군자는 그것으로 쉬지 않고 힘쓴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건강(健剛)을 몸받으시고 숭상하시어 군주(君主)의 세력이 아래로 옮겨져 뭇 흉악한 무리가 스스로 방자하지 않게 한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숙종 대왕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지 40년 동안 강단(剛斷)이 뭇 왕(王)보다 뛰어나시어 흉역(凶逆)들을 토죄(討罪)하시어 윤상(倫常)을 바로잡으셨고, 사악한 말을 물리치시어 사문(斯文)을 바로잡으셨으니, 대처분(大處分)이 백대(百代)에 미혹되지 않는다 할 만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흉역들이 날뛰어 윤상이 어그러지고 사악한 말들이 불같이 일어나 사문(斯文)이 위태로워졌습니다. 화양동(華陽洞)의 어묵(御墨)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도봉(道峯)의 향의(享儀)를 갑자기 철거하여 여러 조정에 걸쳐 예우했던 어진이가 이처럼 무멸(誣衊)을 당하게 하고, 흉악한 역적의 무리들이 이처럼 방자한 마음을 품게 하였습니다. 아아! 통탄스럽습니다. 만약 성고(聖考)께서 지금까지 세상을 다스리신다면 사문(斯文)에 어찌 이런 액운(厄運)이 있었겠으며, 흉역(凶逆)의 무리가 어찌 이같이 방자하겠습니까? 화기(和氣)가 어긋나게 된 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신이 명릉(明陵)을 바라보니, 절로 피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전하께서는 계술(繼述)하시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숙묘(肅廟)의 강단(剛斷)을 제일의 급선무로 삼지 않으십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이봉명의 소어(疏語)를 보건대, 응지(應旨)라 핑계대어 상신(相臣)을 구날(構捏)하여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다. 아! 두 대신(大臣)이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음을 이미 상세히 알고 있고, 이번에 구언(求言)하는 비지(批旨) 가운데 붕당의 폐해를 극언(極言)하였는데, 이 무리가 사당(死黨)하기로 작정하여 이처럼 상소하는 일이 있으니, 진실로 지극히 놀랍고 괴이하다. 원소(原疏)는 돌려주고, 지금 이후로는 일이 당론(黨論)과 관계되는 것들은 비록 응지라고 일컬은 것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봉입(捧入)하지 말라."
하였다.

 

지평(持平) 윤용(尹容)이 상소하여 이의연(李義淵)을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의연은 이미 도배(島配)의 법을 베풀었다. 어찌 반드시 죽인 뒤에야 비로소 왕법(王法)을 바루겠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접때 이미 연석(筵席)에서 나의 뜻을 유시(諭示)하였다. 신축년225)  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지금 이의연이 흉악한 상소를 올렸으니, 내가 전형(典刑)을 밝게 보일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단지 원소(原疏)를 주라고 했던 것은 이들 무륜(無倫)한 무리가 호역(護逆)이 사당(死黨)에 이름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의 마음이 차분하여 답한다면 입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신(諫臣)과 유신(儒臣)들이, ‘전날의 불충(不忠)하던 자가 어찌 오늘날 충성하겠는가?’라는 뜻으로 번갈아가며 앞에서 진달하니, 매번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차라리 죽어 알고 싶지가 않다. 아아! 통탄스럽다. 천경 지위(天經地緯)에 멸(滅)할 수 없는 것은 강상(綱常)이다. 내 비록 배우지 못했으나, 또한 이러한 이치는 알고 있으니, 어찌 그 사이에서 꺾이겠는가? 하지만 면계(勉戒)하는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아! 내가 남들이 나에게 더하고자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남에게 더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인(仁)이다. 경악(經幄)의 신하는 성현(聖賢)의 글을 읽고, 성현의 일을 행하는데 이와 같은 것을 헤아리지 못하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랴? 붕당(朋黨)을 비호하고 역적을 비호하는 말에 대해 연중(筵中)에서 명백히 유시(諭示)했으니,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김일경(金一鏡)의 일로 보건대, 직책이 경악에 있으면서도 붕당을 비호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같은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김동필(金東弻)의 상소에, ‘뭇사람의 입이 시끄러워 광괴(狂怪)하게 여긴다.’고 하였으니, 유독 유신(儒臣)만 듣고 알지 못했다는 것인가? 당고(黨錮)가 이와 같으니 공언(公言)이 어찌 들리겠는가? 마땅히 그 직책을 갈아 언로(言路)를 넓히는 뜻을 보이겠다.
교문(敎文)에 이르러서는 장주(章奏)와 다름이 있어 곧 왕언(王言)을 대찬(代撰)하는 것이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흰 구슬의 흠은 그래도 갈 수 있지만, 말의 흠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접혈 금정(蹀血禁庭)’, ‘회인 종무(懷刃鍾巫)’란 두 구절은 비록 옛사람의 말에 있다 하나, 《춘추(春秋)》·《강목(綱目)》의 어디에 적혀 있는가? 나는 비록 족히 생각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대행조의 성덕(盛德)·인애(仁愛)한 일에 대해서는 어떠하겠는가? 옛날 공자가 소정묘(少正卯)226)  를 주살(誅殺)했던 것은 제방(隄防)을 엄하게 한 것이었다. 소행(所行)이 이처럼 광패(狂悖)하고 간신(諫臣)의 말이 또 이처럼 엄절(嚴絶)한데도 조금도 기탄(忌憚)이 없으니, 그 염치(廉恥)의 도리를 닦는 데 있어서 그대로 둘 수가 없다.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아아! 오늘날의 거조(擧措)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겠는가? 이후로 당(黨)을 비호하는 무리가 망령되게 나의 뜻을 헤아려 불쑥 틈을 타고 나타나 현란시키려 한다면 마땅히 중률(重律)로 다스리겠다. 아아! 어제 이의연(李義淵)을 도배(島配)하라 명하고, 지금 또 김일경을 삭출(削黜)한 것은 호오(好惡)를 밝히고 붕당을 타파하고, 강상(綱常)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아! 그대 후설(喉舌)의 신하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모든 진신(搢紳)들로 하여금 지극히 공변된 것에 힘쓰도록 신칙하라."
하였다.

 

정원(政院) 【이중술(李重述)과 이명의(李明誼)이다.】 에서 아뢰기를,
"김일경(金一鏡)이 교문(敎文)과 소장(疏章) 가운데 사용한 문자가 비록 스스로 변명한 상소로 보더라도 옛사람 중에서 이런 문자를 사용한 경우가 또한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창졸간에 응제(應製)할 즈음에 아무런 정실이 없이 그리 된 것에 불과한데, 지금 이봉명(李鳳鳴)이 허구 날조한 것으로 인해서 이처럼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엄한 하교가 있었습니다. 유신(儒臣)이 진달한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품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한다.’는 데서 나온 것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당(黨)을 비호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체직(遞職)하라는 명이 또 뜻밖에 내려졌습니다. 무릇 문자로 사람을 죄주는 것은 실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세 번 생각을 더하시어 김일경을 삭출(削黜)하고 유신(儒臣)을 체직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나의 이 거조(擧措)가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느냐? 호오(好惡)하는 뜻을 밝히고 공변된 언로(言路)를 넓히려는 것이다. 너희들의 직책은 근밀(近密)에 있는데, 당(黨)을 구하는 습관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해괴하다."
하였다.

 

재궁(梓宮)을 결과(結裹)227)  할 때 임금이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이 이미 입시(入侍)하였다. 다시 양사(兩司)에서 서경(署經)할 일이 없는가?"
하니,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그동안 이미 사상(私喪)으로 돌아갔으니, 지금 처의(處義)가 마땅히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양사의 서경을 거쳤으니, 다시 서경하는 일이 없을 듯하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끝내 미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억지로 입시(入侍)하게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다시 인입(引入)할 것이다. 그대로 두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재궁을 닦는 것은 우상(右相)의 임무이니, 청컨대 우상으로 하여금 닦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집사자(執事者)가 하라."
하였다. 함평군(咸平君) 홍(泓)이 말하기를,
"경자년228)  의 결과(結裹) 때는 영상(領相)이 재궁을 닦았다고 합니다. 신 등은 감히 대신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그때 영상은 정세가 편안하지 못하여 추후(追後)에 입시하였으니, 이 임무를 맡지 않았을 듯합니다. 함평군의 말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궁을 닦는 것은 본래 우상의 임무이니, 우상이 하라."
하니, 조태억(趙泰億)이 명을 받들어 닦았다. 닦는 것을 마치자 유금(襦衾) 【금(衾)은 남대단(藍大緞)으로 겉을 만들고, 백방과주(白方綶紬)로 속을 만들어 솜을 두었다.】 을 싼, 다음 홍전(紅氈)으로 쌌으며, 바느질 선으로 유금과 홍전의 염단(斂端)과 맞도록 꿰매었다.

 

11월 10일 경술

권익관(權益寬)·정석삼(鄭錫三)을 승지(承旨)로, 윤광익(尹光益)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어제 비망기(備忘記)를 승정원에서 복계(覆啓)하기에 이미 비답을 내렸는데, 전지(傳旨)를 아직도 써 들이지 않으니, 매우 놀랍다. 해당 주서(注書)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날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삭출(削黜)된 수어사(守禦使) 김일경(金一鏡)을 대신할 사람을 마땅히 즉시 천망(薦望)해야 하는데도, 본사(本司)의 낭청(郞廳)이 아직도 와서 천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신은 낭청이 영의정·좌의정이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물어보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여 입직 낭청(入直郞廳)을 불러 물었더니, ‘회공 낭청(回公郞廳)이 으레 천망을 받는데, 해당 낭청은 새로 들어온 생소한 사람이라 즉시 천망을 받지 않았고, 영의정·좌의정을 찾아가 물어본 일도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해당 낭청 김윤(金潤)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다. 당시 군흉(群凶)들이 당국(當局)하고 있어서 김일경이 이미 삭출(削黜)되었는데도 정원(政院)에서 작환(繳還)하였고, 엄(嚴)한 비답(批答)이 또 내려졌지만 전지(傳旨)를 즉시 써서 들이지 않았다. 수어사(守禦使)를 대신할 사람을 비국의 낭청이 또한 즉시 천망을 받지 않았으니, 그 당(黨)의 패역(悖逆)함이 이와 같았다. 이봉명(李鳳鳴)이 상소에서 이른바, ‘한갓 역적 김일경이 있는 줄만 알고 전하가 계신 것은 모른다.’고 한 것이 역시 증험된다고 할 것이다.

 

부응교(副應敎) 조익명(趙翼命)이 상소하여 이의연(李義淵)을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이 예궐(詣闕)할 즈음에 들으니,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과 수찬(修撰) 이진수(李進洙)가 서로 잇따라 견책(譴責)받아 파직되었으므로 관직(館職)이 온통 비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두 유신(儒臣)이 깊은 밤에 구대(求對)하여 누누이 진언(進言)한 것은 오로지 우애(憂愛)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 며칠이 지난 뒤 추후에 제기하여 견책과 물리침이 서로 이어졌으니,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입니까? 원하건대 특별히 그 직책을 돌려주어 전환(轉環)의 도량을 보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부사직(副司直) 이명언(李明彦)·교리(校理) 오수원(吳遂元)·부교리(副校理) 조지빈(趙趾彬) 등이 역시 상소하여 이의연(李義淵)을 국문(鞫問)할 것을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호군(護軍) 김상옥(金相玉)·전(前) 부사(府使) 유복명(柳復明)·전 현감(縣監) 박사성(朴師聖)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김일경(金一鏡)의 차고 넘치는 죄는 낱낱이 들기 어려움이 있으나, ‘접혈 금정(蹀血禁庭)’이란 구절과 ‘회인 종무(懷刃鍾巫)’라는 말은 더욱 지극히 흉특(凶慝)합니다. 아! 집안에서 칼날을 들이대었으니, 변란(變亂)이 한정이 없었고, 참소를 꾸며 시해를 꾀하였으니 흉화(凶禍)를 헤아릴 길이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천륜(天倫)·골육(骨肉) 사이의 큰 변(變)이었으니, 그가 어찌 감히 대찬(代撰)하는데 인용하고 장주(章奏)의 사이에 제멋대로 쓸 수 있단 말입니까? 상궁(上躬)을 지척(指斥)하고 무욕(誣辱)이 선조(先朝)에까지 미쳤는데, 뜻은 음참(陰慘)하고 역심(逆心)이 환히 드러나 거의 예(羿)와 착(浞)229)  이 해를 쏜 것보다 더함이 있었으니, 어찌 천지사이에 하루라도 드러누워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다행하게도 오늘날 전하께서 비로서 그 정상(情狀)을 통촉하시고 조금이나마 삭출(削黜)의 벌을 베푸셨으니,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역적을 비호하는 마음을 싹틔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 당여(黨與)들은 근반(近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뜻을 다 기울여 영호(營護)하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아아! 통탄스럽습니다. 진실로 조금이라도 성궁(聖躬)을 돌아보고 보호하려는 뜻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까? 신 등은 빨리 역적 김일경의 무상(誣上)·부도(不道)한 죄에 대해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어 여분(輿憤)을 풀고, 당(黨)을 비호하는 여러 신하들을 한결같이 아울러 찬출(竄黜)한 뒤에야 선조(先朝)께서 받았던 무욕이 신설(伸雪)되고 성궁이 받은 무멸(誣衊) 또한 환하게 씻을 수 있으며, 흉얼(凶孼)들이 숨을 죽이고 종사(宗社)가 안정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김일경의 소행은 참으로 지극히 패리(悖理)하다. 그래서 이미 삭출(削黜)의 벌을 베풀었고, 당을 비호하는 사람 역시 파직시켰다. 어찌 반드시 죽이고 난 뒤에야 왕법(王法)을 바룰 수 있으랴?"
하였다.

 

11월 11일 신해

김일경(金一鏡)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였다. 하교하기를,
"김일경은 감히 차마 인용할 수 없는 일을 방자하게도 대찬(代撰) 가운데 썼으므로 빈전(殯殿)에서 울부짖으며 차라리 죽고싶었다. 그 엄하게 징토(懲討)하는 도리에 있어서 삭출에만 그칠 수는 없으니, 절도에 안치하되 당일로 압송(押送)하라. 지난번에 붕당(朋黨)의 일로 면유(面諭)한 것이 정녕(丁寧)하였고, 김일경이 범한 바가 지극히 중대한 데 관계되니, 신하된 자들이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영호(營護)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사당(私黨)에 급급하여 분의(分義)를 돌아보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이른바 붕당이 심하면 시비(是非)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파직(罷職)으로 그칠 수 없으니, 그날 복역(覆逆)한 승지를 삭탈 관직(削奪官職)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복역(覆逆)한 승지를 삭탈 관직(削奪官職)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공변된 일에 힘쓰고, 사사로움을 버려 탕평(蕩平)을 이루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재차 환수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두 사람이 당(黨)을 비호하기로 작정했으니, 대단히 무엄(無嚴)한 데 관계된다. 그러므로 징려(懲勵)하는 바가 있었던 것인데, 연이어 환수를 청하니,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 있다."
하고, 이어 환침(還寢)을 명하였다.

 

이진순(李眞淳)을 승지(承旨)로, 유명응(兪命凝)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윤진(尹晉)을 사간(司諫)으로, 유시모(柳時模)를 정언(正言)으로, 오명준(吳命峻)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이진검(李眞儉)을 지경연(知經筵)으로, 황이장(黃爾章)을 우윤(右尹)으로, 신치근(申致謹)을 검열(檢閱)로, 윤순(尹淳)을 실록 겸 춘추(實錄兼春秋)로, 오명항(吳命恒)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이판(吏判) 이조(李肇)와 참판(參判) 이세최(李世最)의 정사(政事)였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이번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발인(發靷) 때 인정전(仁政殿) 안팎 계단가의 윤여(輪輿)를 배설(排設)하는 곳에다 흙을 메꾸어 수리하는 역사(役事) 및 각양(各樣)의 차비군(差備軍)이 2백 45명에 이릅니다. 예전에는 경기(京畿)의 하번 기병(下番騎兵)을 조용(調用)했는데, 경자년230)  의 국휼(國恤) 때는 외읍(外邑)의 군사를 조발(調發)하는 폐단을 염려하여 여사(輿士)의 나머지 군사를 추이(推移)해 취용(取用)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이 예(例)에 의거해 거행하되, 능소(陵所)의 전루군(傳漏軍)은 청컨대, 지방관으로 하여금 전례(前例)에 의거해 배립(排立)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칙수(勅需)는 한 번에 지급하는 것이 많게는 만수(萬數)에 이릅니다. 호조 판서 오명항(吳命恒)이 도백(道伯)으로 있을 때 수역(首譯)의 무리로 하여금 통관(通官)에게 주선하여 그 수를 참작해서 정하게 하였는데, 한 칙사(勅使)에게 드는 비용이 4천 냥(兩)이 차지 않았고 지공(支供) 역시 따라서 간략하였습니다. 네 칙사를 접대하는 데 동일한 예(例)로 시행한다면 은혜가 궁한 백성에게 미침이 진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정식(定式)으로 삼아 등록(謄錄)으로 만들어 내어 각읍(各邑)에 반포하되, 이 일은 모두 수역(首譯)의 주선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으니, 네 칙사 때의 수역과 도별장(都別將)들을 그 공로에 대해 상(賞)을 주어 격려하고, 차후로 혹시 털끝만큼이라도 고친다면 수역을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그대로 정식(定式)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호조 판서 오명항이 아뢴 바로 인해 별사(別使) 때의 은자(銀子)는 1천 냥을 한정으로 하여 획급(劃給)하고 소용되는 대로 용하(用下)하되, 경외(京外)의 은화(銀貨)를 대급(貸給)하는 한 가지 조항은 일절 막을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청나라[彼中]에서 처리하는 것이 비록 지극히 중대한 일이라 할지라도 일찍이 뇌물로 힘을 얻는 규례가 없었고, 정축년231)  의 봉전(封典)이 거듭 저지되었으나, 극히 적은 비용도 들이지 않고 마침내 청한 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별사(別使)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재화(財貨)를 주어 보낼 필요는 없고, 혹 뜻밖의 염려가 있다면 이번에 진달한 것에 의거해 천 냥 혹은 6, 7백 냥을 헤아려 획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외에서 대급(貸給)을 허락하는 한 조항은 더욱 통렬하게 두절(杜絶)하고, 비록 별사가 처리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하지 않으면 획급하지 말 것을 청컨대 영원히 정식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아아! 우리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전수(傳授)한 심법(心法)은 곧 요(堯)·순(舜)의 효제(孝悌)의 도(道)이니, 김일경(金一鏡)이 감히 노(魯)나라·당(唐)나라의 일을 끌어다 성조(聖朝)를 비난함이 깊었다. 그런데도 그날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견책(譴責)을 청하는 글이 없었으니, 대단히 무엄하다. 이는 역시 당고(黨錮)의 폐단에서 연유한 것이나, 지금은 탕평(蕩平)에 먼저 힘써야 할 때이니, 이처럼 이미 지나간 일들을 어찌 마음에 품고 있을 수 있겠느냐? 이미 김일경을 찬축(竄逐)한 뒤이니, 이 교문(敎文)의 일로 영호(營護)하는 자가 있다면, 역적을 비호하는 율(律)을 베풀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승정원은 잘 알아두라."
하였다.

 

금부(禁府)에서 김일경을 진도(珍島)에 의배(擬配)하니, 하교하기를,
"특명(特命)이 내려졌는데 진도에 정배(定配)하니, 심히 놀랍다.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정의현(旌義縣)으로 개부표(改付標)232)  하여 들이라."
하였다.

 

전(前) 군수(君守) 이봉익(李鳳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삼(李森)은 본래 효경(梟獍)233)  의 바탕과 음특(陰慝)한 성품을 가진 자로, 오랫동안 장임(將任)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흉악한 생각을 방자하게 행하였습니다. 어영청(御營廳)의 저축이 조금 여유가 있었는데, 한 번 스스로 그 자리를 외람되게 차지한 뒤로 물쓰듯 재물을 써서 군수(軍需)가 텅 비어 간 곳을 모르고, 체결(締結)하여 분주하게 돌아다니므로 종적이 섬홀(閃忽)하니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간사하고 흉악하여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은 결코 일각(一刻)이라도 병사를 거느리는 임무를 맡길 수 없습니다. 마땅히 병권(兵權)을 빨리 거두어들이고 찬극(竄殛)의 법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윤취상(尹就商)에 이르러서는 성품이 본래 음흉하여 불법(不法)을 자행하였고, 또 역적 김일경과 함께 평소 서로 친압(親狎)하였음은 길 가는 사람도 다 압니다. 사구(司寇)234)  의 장관(長官)을 태연하게 모거(冒據)하고 있으니, 역시 죄주어 쫓아내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역적 김일경의 죄는 위로 하늘에 통하여 귀신과 사람이 공분(共憤)하고 있으니, 어찌 하루라도 천지간에 누워 숨쉴 수 있겠습니까? 천극(栫棘)으로 그칠 수 없으니, 또한 원하건대, 방형(邦刑)을 쾌히 바루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大司諫) 유명응(兪命凝)·수찬(修撰) 이보욱(李普昱)이 상소하여 이의연(李義淵)의 죄를 논하고 국문(鞫問)하여 정법(正法)할 것을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직(司直) 이기익(李箕翊)이 상소하여 김일경(金一鏡)의 죄를 논하고, 국법(國法)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또 후설(喉舌)과 삼사(三司)가 임금을 배신하고 역적과 무리를 지은 죄를 논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교서 박사(敎書博士) 이한동(李漢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적이 삼가 듣건대, 고(故) 상신(相臣) 김상헌(金尙憲)이 효묘(孝廟)께서 산릉(山陵)에 친히 행행(幸行)하시고자 하던 날 마침 재이(災異)를 만났으므로 봉장(封章)으로 힘써 만류했다 합니다. 아! 고 상신이 진계(陳戒)한 뜻은 바로 오늘날의 사기(事機)와 같습니다. 지금 번개와 혜성(彗星)의 변괴는 그 당시와 비교하건대, 더욱 심한데, 인산(因山) 때 친히 행행하시겠다는 명에 대해 유사(有司)의 신하는 대충대충 몇 마디 말로 방계(防啓)하고 곧 그쳤습니다. 전하께서는 조종(祖宗)의 중대한 부탁을 받으셨는데, 비록 정(情)에 끌리는 대로 스스로 가볍게 하고자 하시나, 그것이 종묘(宗廟)에는 어떠하며 군정(群情)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이처럼 재이를 당한 날 전하께서는 삼가는 마음을 지녀 여느 때와 같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어 신민(臣民)의 여망에 부응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데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산릉(山陵)에 따라가는 것이 예문(禮文)에 실려 있고, 정리(情理)가 있는 바이니,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내 마음이 결정되었으니, 고치기 어렵다."
하였다. 다음날 승지 김동필(金東弼)이 최보(崔補)의 상소를 가지고 청대(請對)하였을 때 아뢰기를,
"어제 이한동의 상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듯합니다. 그러나 그 인용한 바 고 상신 김상헌이 진계(陳戒)한 일로 말하건대 가리키는 뜻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대개 김상헌의 상소에, ‘와언(訛言)이 누차 끓어올라 만목(萬目)이 놀라 보고 있으며,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변(變)이 조석간(朝夕間)에 닥쳐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한동이 이것을 끌어대어 말을 하였으며, 최보의 상소에서 말한 바, ‘대신(大臣)은 역괴(逆魁)이며 대장(大將)은 음흉(陰凶)하다.’고 한 말과 아울러 일시(一時)에 나와 마치 변괴가 조석간에 닥친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은 곧 공동(恐動)시키고 형혹(熒惑)하려는 계책입니다."
하고, 승지 정석삼(鄭錫三)이 말하기를,
"이한동의 상소에 ‘오늘의 사기(事機)’라고 한 것은 어의(語意)를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한동의 상소는 처음에는 그것에 깊은 뜻이 있는 줄 깨닫지 못했는데 ‘사기(事機)’라는 두 글자는 진실로 그 협잡(挾雜)이 있음이 의심스럽다. 지금 승선(承宣)의 말을 듣건대, 출처가 과연 이와 같으니, 그 마음의 소재처(所在處)가 진실로 지극히 음비(陰祕)하다. 옛날 조보(趙普)235)  는 이해(利害)에 관계된 문자(文字)를 큰길에서 태웠다고 한다. 이해에 관계된 문자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참소하고 꾸며대는 말을 배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정원에서는 그 상소를 뜰에서 태워 나의 뜻을 명백히 보이라."
하였다.

 

11월 12일 임자

사직(司直) 허윤(許玧)이 상소하여 인산(因山) 때 친히 행행(幸行)하겠다는 명(命)을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고, 또 김일경(金一鏡)의 무상(誣上)한 죄를 논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난날 옥당(玉堂)의 야대(夜對) 때 궁인(宮人)의 일로 인해 심지어, ‘전하께 무슨 꺼림이 있으랴?’는 등의 말을 방자하게 진주(陳奏)하기까지 하였으니, 성궁(聖躬)을 침핍(侵逼)한 것이 이처럼 무엄한데, 다른 것이야 오히려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금일 전하의 조정은 무륜(無倫)하다고 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능행(陵行)을 정침할 것을 청한 것이 이한동의 상소와 서로 부합되나, 재신(宰臣)의 상소로 답할 수는 없으니, 이 상소를 돌려주라."
하였다.

 

경기(京畿) 유학(幼學) 최보(崔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아! 전하께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인지요, 다스리지 않으시는 것인지요? 순음(純陰)의 회일(晦日)236)                  에 천둥 번개가 예사롭지 않고, 영남(嶺南)의 고을에서는 사람이 옆구리로 태어났으니, 어찌 우리 성상(聖上)께서 사복(嗣服)한 초기에 이러한 놀랍고 충격적인 변(變)이 있는지요? 조정에 당고(黨錮)가 날로 심각해지고 오막살이의 원기(寃氣)가 하늘을 찔러 그런 것은 아닌지요? 이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어 그런 것입니다. 공자는, ‘임금은 신하의 벼리[綱]이다.’고 했으니, 천지(天地) 사이에 멸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강상(綱常)입니다. 아!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마는, 김일경(金一鏡)처럼 대역 부도(大逆不道)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성상(聖上)을 모위(謀危)하려는 계책이 천백(千百) 가지였는데, 감히 당태종(唐太宗)의 골육(骨肉)간의 변(變)을 대찬(代撰)하는 글에 인용해서 팔방(八方)에 반시(頒示)하여 인심(人心)을 의혹케 하였고, 노(魯)나라        환공(桓公)의 찬시(簒弑)한 악행을 장소(章疏)에 끼워 넣어 일필 구단(一筆句斷)으로 상궁(上躬)을 드러내놓고 핍박했으니, 이는 왕망(王莽)·동탁(董卓)·사마의(司馬懿)·조조(曹操)237)                  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으로, 고금(古今)의 천하(天下)에 어찌 이 역적처럼 흉악하고 교활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이 자는 실로 전하(殿下)의 신하된 자가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이번에 이봉명(李鳳鳴)의 한 상소는 거칠게나마 토죄(討罪)·복수의 뜻을 펴고 있는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비단 역적 김일경을 비호했을 뿐만 아니라,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춘추(春秋)》의 의리에 아주 어두워 주토(誅討)의 청이 아직도 적막합니다.
후설(喉舌)의 관리는 감히 영호(營護)하려는 계책을 내어 복역(覆逆)의 계사(啓辭)가 어지럽게 이어졌으니, 만약 조금이나마 전하께 북면(北面)238)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어찌 감히 이러하겠습니까? 위로는 대신(大臣)으로부터 아래로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역적 김일경의 역상(逆膓)과 동일하여 다만 역적 김일경에게 충성할 줄만 알고 전하께 충성할 줄은 알지 못하니, 천위(天位)는 위태롭고 역적의 세력은 기세를 올리고 있습니다. 위급한 형상은 마치 머리카락 한 올에 천균(千鈞)이 매달린 것과 같은데, 안으로는 폐부(肺腑)의 지친(至親)이 없고 밖으로는 주석(柱石)의 신하가 없으니, 금일의 국사(國事)는 실로 어느 곳에 탈가(稅鴐)239)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육가(陸賈)는 말하기를, ‘천하(天下)가 편안하면 재상에 주의(注意)하고 천하(天下)가 위태로우면 장수에 주의한다.’ 했으니, 장수와 재상이 국가에 관계됨이 이처럼 무겁습니다. 아아! 어려움과 걱정이 눈에 넘치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아 놓은 듯한 날에 재상으로 말하자면 국가에서 병용(柄用)240)                  하는 대신(大臣)이 악역(惡逆)의 헤아릴 수 없는 죄과를 맨먼저 범했고, 장수로 말하자면 조정이 의지하고 믿는 어장(御將)이 손가락질과 의혹을 받음을 면하지 못하니, 어찌 역적 김일경과 치밀하게 얽혀서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아! 군신(君臣)의 강상(綱常)이 무너져 없어지고, 천인(天人)의 경고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순음(純陰)의 철에 천둥이 치니 이는 하늘이 고(告)한 것이요, 사람이 옆구리로 태어나니 이는 사람이 고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로(公路)를 활짝 넓히시어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여 인주(人主)의 세력을 존중하게 하소서. 역적 김일경의 머리를 효수(梟首)하여 길거리에 내걸고, 김일경을 비호하는 무리 역시 당률(黨律)을 베풀어 종사(宗社)가 저절로 편안해지고, 신인(神人)이 분을 푼다면, 하늘의 경고에 답할 수 있고 재앙을 소멸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신이 또 개탄스럽게 여기는 것은 이의연(李義淵)의 상소가 말은 비록 중도(中道)를 넘었으나, 재앙을 만나 구언(求言)하는 날 감히 숨김이 없는 정성을 나타냈으니, 전하의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리에 있어서 쓸 만하면 쓰고 쓸 수 없을 것 같으면 쓰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전하께서 한 상신(相臣)에 꺾여서 ‘말이 비록 중도를 넘는다 하더라도 내가 허물하지 않겠다.’는 분부를 한갓 문구(文具)만을 숭상하는 과목(科目)으로 돌릴 줄 생각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고도 천재(天災)가 그치고 언로(言路)가 넓혀질 수 있겠습니까? 말 때문에 죄를 얻는 것은 실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신은 적이 성상(聖上)을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유생(儒生) 최보(崔補)를 흑산도(黑山島)에 찬축(竄逐)하고 동학 훈도(東學訓導) 이봉명(李鳳鳴)을 양덕(陽德)에 편배(編配)하였다. 김동필(金東弼)·정석삼(鄭錫三) 등이 청한 것이다. 이때 김동필·정석삼이 승지로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접때 당론(黨論)에 관계된 상소는 절대로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번에 최보가 올린 상소는 김일경(金一鏡)의 일로 인하여 정신(廷臣)들을 악역(惡逆)으로 곧장 내몰았고, 끝에 가서는 또 선왕(先王)을 무욕(誣辱)한 이의연(李義淵)을 신구(伸救)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 상소는 곧 하나의 급서(急書)였으니, 명백하게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 등이 청대(請對)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김동필로 하여금 그 상소를 읽게 하였다. 다 읽자,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241)  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으랴? 김일경의 상소로 빈전(殯殿)에서 울부짖으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이번에 도배(島配)한 것은 말감(末減)한 것이라 할 만한데, 또 일종의 무리가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이로 인해 계속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그 후의 비망기(備忘記)에 내 뜻을 명백히 보였던 것이다. 대개 이의연의 상소는 나의 본의(本意)를 알지 못하였으니, 그래도 용서할 만한 길이 있겠지만, 오늘 최보는 비망기를 내린 뒤에 또 다시 이와 같이 하였으니 그 죄가 이의연보다 심하다. 최보를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고 당일(當日)로 압송(押送)하라."
하니, 김동필이 말하기를,
"최보의 상소는 김일경을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논했는데, 과연 그의 말과 같다면, 신은 다만 김일경이 지은 교문(敎文)의 문자(文字)가 황잡(荒雜)한 것만을 논하고 주토(誅討)할 것을 청하지 않았으니, 신도 역시 죄가 있습니다. 김일경은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우며 문장 역시 황잡하여 교문에 인용해 비유한 것이 괴류(乖謬)하기가 막심합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화심(禍心)을 감추고 불궤(不軌)을 몰래 도모한 자는 오직 남이 알까 두려워하여 비밀로 하고 감추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어찌 문자(文字)에 올릴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은 간장(諫長)으로서 과연 논핵(論劾)하였으나, 그의 사람됨은 거칠고 조악하며 판탕(板蕩)한 사람입니다. 성상께서 문자의 망발과 잘못을 죄로 삼으신다면 비록 쫓아내고 귀양보내더라도 저는 반드시 마음에 달갑게 여길 것이나, 만약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단죄한다면 아마도 성조(聖朝)의 정실(情實)을 캐내어 정죄(正罪)하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조정에서 청토(請討)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좌상(左相)의 일은 처음에 이의연·이봉명의 상소에서 나왔는데, 전하께서 좌상이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음을 이미 살피셨으니, 남을 무고한 악역(惡逆)은 저절로 그 해당되는 율(律)이 있습니다. 어장(御將)을 아울러 거론한 데 이르러서는 공공연히 제멋대로 허구 날조하였고 이봉익은 또 두 장수를 제론(提論)하되 그 쓴말이 실로 매우 위포(危怖)하였습니다. 또 고(故) 상신 조태구(趙泰耉)의 천위(天位)를 부지(扶持)한 공로와 해를 뚫는 충성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이봉익의 상소는 그를 지목해 역괴(逆魁)라고 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혐의를 무릅쓰고 나가 뵈었다.’ 하는 것은 칙사(勅使)가 왔을 때 조태구가 차자(箚子)를 올렸던 일을 가리키는 듯한데, 이는 성상(聖上)께서 그 차자를 가져다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성(慈聖)의 언교(諺敎)를 막아 반시(頒示)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가리키는 뜻이 위포(危怖)합니다.
신축년 11월 22일 전하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 신은 사서(司書) 권익관(權益寬) 및 위사(衛司)의 여러 사람들과 입시(入侍)하였다가 갑자기 비상(非常)한 하교를 받들게 되어 외정(外廷)으로 달려가 알리고 유문(留門)하여 청대(請對)하였는데, 드디어 엄수(閹竪)를 적발(摘發)해 정법(正法)하라는 명(命)이 있었습니다. 파대(罷對)한 뒤에 영의정 조태구가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로서 후반(候班)에 나아가 비답(批答)을 가디릴 즈음에 자전(慈殿)의 승전색(承傳色)이 비답을 전한 뒤 소매에서 자성(慈聖)의 언교(諺敎)를 꺼내어 대신(大臣)들에게 전해 보였습니다. 신은 함께 앉아 비답을 기다렸던 까닭에 마침 참가해 볼 수 있었는데, 언교의 사의(辭意)는 대저 망극한 것이었고 사제(私第)로 나가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교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조태구가 급히 우의정 최석항(崔錫恒)를 청하여 내보인 뒤에 그대로 봉환(封還)했고, 또 구전 계사(口傳啓辭)로 안에서 양궁(兩宮)을 보호하시라는 뜻과 나인(內人)을 유사(有司)에게 출부(出付)하시라는 청(請)을 우러러 진달했습니다. 대개 언교에는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것이 있었고, 그 봉환한 바는 대개 승정원에서 작환(繳還)하는 뜻과 같았습니다. 만약 이봉명의 말처럼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했다면 과연 어찌되었겠습니까? 만약 또 봉환하지 않고 성죄(聲罪)했다면 그 죄는 또한 마땅히 어떠했겠습니까? 그날 자성께서 또 약원(藥院)에 언교를 내리시어 양궁을 보호하라는 뜻을 되풀이하시고, 이어 두 궁인(宮人)의 이름과 죄상(罪狀)을 써서 내리셨는데, 이는 처음의 하교와 다름이 있었기 때문에 사초(史草)에 베껴서 실은 뒤 이어 대조(大朝)께 토죄(討罪)의 청을 진달하고 유사에게 출부(出付)하였습니다. 이때의 실상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았는데, 일종(一種)의 무리들이 이에 다시 내린 자교(慈敎) 가운데서, ‘죄상은 반드시 당률(當律)이 있다."고 한 곳 아래의, ‘그 궁인(宮人) 한 사람은 환시(宦侍)와 체결(締結)한 자이다[其一宮人則乃締結宦侍者也]’라는 12글자를 지워버리고, ‘궁인(宮人)과 체결한 자 및 환시(宦侍)와 체결한 자’로 고쳐 쓴 뒤 ‘율(律)에 의해 처치(處置)하라.’는 등의 글자를 써서 변환(變幻)하여 베껴서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외간(外間)에 전파(傳播)하였으니, 마치 궁인·환시 이외에 별도로 체결(締結)한 자가 있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또 이날 내리신 언교는 단지 두 번이었으나, 망측하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세 차례 언교(諺敎)가 있었다며 소지(小紙)에 전(傳)해 올리고, 난보(爛報)242)   아래 점부(粘付)243)  하여 진신(搢紳)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이에 송상기(宋相琦)가 가짜로 전해진 등본을 잘못 듣고, ‘비밀로 하여 널리 보이지 않으며 자지(慈旨)를 변환(變幻)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조태구가 차자를 올려 대죄(待罪)하니, 선대왕(先大王)께서 비답을 내리시어 환히 밝히셨던 것입니다. 대저 이의연이 투소(投疏)한 뒤 전하께서 비록 엄히 배척하셨다 하나, 그대로 전형(典刑)을 명백히 바루시지 아니하신 까닭에 이 무리들이 이와 같이 틈을 엿보아 나오는 것입니다. 최보는 비록 이미 처분(處分)하였다고 하나, 이봉명이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을 얽어 무고한 죄를 엄하게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봉명을 죄주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비록 대신들을 면출(勉出)하려 하시더라도 대신들이 어찌 명을 받들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최보·이봉명의 일로 인해 말의 단서가 열렸으니, 내가 비로소 말을 한다. 대각(臺閣)의 논의에도 또한 혹 너무 심한 일이 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미워함이 너무 심하면 어지러워진다.’고 했으니,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봉명의 원소(原疏)는 비록 이미 돌려주었으나, 대신(大臣)을 얽어 무고했음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먼 곳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김동필·정석삼이 이세최(李世最) 등과 더불어 이의연을 국문(鞫問)하자는 청을 힘써 진달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유시모(柳時模)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유시모가 이의연을 국문하지 않을 수 없음을 힘써 진달하기를,
"이 무리들이 천위(天位)를 탐하여 자기 공으로 여기는 것이 마치 전하(殿下)께서 군흉(群凶)들에 의해 옹립(擁立)된 것인 양 함이 있습니다. 성교(聖敎) 가운데 호당(護黨)이라는 대목은 아마도 이 역적들의 죄를 논할 수 없는 것인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국장 도감 당상(國葬都監堂上) 이세최(李世最)가 아뢰기를,
"애책문(哀冊文)은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것인데, 김일경이 바야흐로 죄로 적소(謫所)에 있으니, 예차(預差)244)  로 하여금 다시 찬(撰)하게 하리까?"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어 예차가 누구냐고 묻자, 이세최가 이사상(李師尙)이라고 하였다.

 

11월 13일 계축

양사(兩司)에서 전(前)에 합계(合啓)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유언통(兪彦通)을 지평(持平)으로, 윤용(尹容)을 교리(校理), 이명언(李明彦)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삼았다.

 

도승지(都承旨) 박필몽(朴弼夢)이 상소하여 이의연(李義淵)·이봉명(李鳳鳴)·이한동(李漢東) 등 여러 사람의 죄를 논하고, 또 이르기를,
"삼가 허윤(許玧)의 상소를 보건대, 머리를 감추고 말을 하며 비록 이름을 들어 지척(指斥)하지는 않았으나, 야대(夜對) 때 궁인(宮人)의 일을 진달(陳達)했던 것은 바로 신입니다. 허윤은 다른 사람의 죄를 얽는 데 급급하여 감히 흉패(凶悖)한 말로 은연중에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에 비기었습니다. 지의(指意)를 헤아리지 못하며 신의 몸을 얽어 죽이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하니, 전례(前例)에 따라 비답(批答)하였다.

 

임금이 무망각(无妄閣)에 나아가 좌의정 유봉휘(柳鳳輝)를 불러 보았다. 유봉휘가 인죄(引罪)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기룰,
"좌규(左揆)가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음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일전(日前)의 비지(批旨) 가운데 한(漢)의 소제(昭帝) 때 곽광(霍光)의 일245)  을 인용했는데, 한의 소제가 이미 소설(昭雪)한 뒤에는 곽광이 한결같이 고사(固辭)하는 말이 없었으니, 서한(西漢)의 독후(篤厚)한 풍속을 상상할 만하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안으로 살펴 병됨이 없으니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하였다. 경(卿)은 이미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었으니,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이날 밤 임금이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삼(李森)을 불러 보고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역대(歷代)의 사기(史記)를 보니, 남을 참소하는 사람이 인주(人主)에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 장상(將相)에게서 나오지 않았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장상의 권위가 무겁기에 남의 윗자리에 있는 자가 쉽사리 의심하기 때문이다. 동한(東漢)의 광무(光武)는 마음을 미루어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정성으로도 마원(馬援)으로 하여금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없게 하였고246)  , 한(漢)의 경제(景帝)가 어찌 한(漢)나라의 중등에 가는 임금이 아니었겠는가마는, 주아부(周亞夫)에 대해 세류(細柳)에서 노군(勞軍)하였던 일을 잊어 마침내 하옥(下獄)하는 데 이르러 피를 토하고 죽게 했으니247)  , 이는 의심이 불러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매번 사기(史記)를 보다가 여기에 이르면 일찍이 세번 거듭 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이때 이봉익(李鳳翼)·최보(崔補)가 번갈아 글을 올려 이삼의 죄상을 죄다 논했기 때문에 임금의 위유(慰諭)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11월 14일 갑인

승정원 【승지(承旨) 이진순(李眞淳)·정석삼(鄭錫三)이다.】 에서 아뢰기를,
"전(前) 정랑(正郞) 임주국(林柱國)이 상소하였는데, 국기(國忌)의 재계(齋戒) 때문에 잠시 되돌려 주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어(疏語)를 써서 들이라."
하였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안치(安置)하라.’는 명(命)이 있었으니, 거의 신인(神人)의 분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겠지만, 다만 생각하건대, 처분(處分)이 그래도 그 죄를 밝게 바루지 않았습니다. 대찬(代撰)한 글은 비단 성궁(聖窮)을 무욕(誣辱)한 것뿐만이 아니라 선왕(先王)을 무욕한 것입니다. 비록 이 역적을 용서하고자 하더라도 선왕께 대해서는 어떠하겠으며 국법에 대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춘추(春秋)》·《강목(綱目)》의 어디에 쓰여 있느냐?’고 하교하시고, 지금 도배(島配)로 말감(末減)하셨으니, 신은 아마도 선왕의 영령(英靈)을 위로하고 전하의 무욕(誣辱)을 씻을 수 없을 듯합니다. 말을 하다 보니 창자가 절로 찢어지는 듯합니다. 교문(敎文)을 찬성(撰成)할 즈음에는 주문(主文)하는 사람이 서로 충분히 의논하는 법인데, 오히려 예사롭게 보았고, 김동필(金東弼)의 상소가 나오자 장헌(掌憲)의 신하가 사사로이 비호하는 데 급급하여 말을 써가며 분소(分疏)248)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특교(特敎)가 내려졌는데도 삭출(削黜)의 박벌(薄罰)을 오히려 다시 작환(繳還)하였고, 대신과 삼사(三司) 또한 모두 잠자코 있으니, 인심(人心)의 망측(罔測)함이 이처럼 지극한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상의 하늘처럼 큰 도량으로 비록 지난일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탕평(蕩平)의 덕(德)을 보이신다고 하지만, 적이 생각하건대 오황(五皇)이 강극(剛克)의 정치를 지극히 하였음은 이와 같지 않았을 듯합니다. 신은 역적 김일경을 엄하게 국문(鞫問)하여 전형(典刑)을 명백히 바로잡고, 전후(前後)에 걸쳐 역적을 비호한 무리들을 아울러 모두 논죄(論罪)할 것을 원합니다. 유봉휘(柳鳳輝)의 한 장의 상소는 마음의 소재처(所在處)가 있어 천일(天日)을 속이기 어려운데, 오늘날 천찰(天札)을 계속해서 내리시어 도리어 부도(負圖)249)  했던 한(漢)의 신하에 견주니,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이봉익(李鳳翼)의 상소는 실로 온 나라의 공론(公論)을 거두어 모은 것이니, 전하께서 따르지 않으실 수 없는데 도리어 협잡(挾雜)으로 의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삼(李森)이 김일경의 복심(腹心)이 되었음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이봉익의 말은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데서 나왔으니, 어찌 그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협잡이 있겠습니까? 이삼이 한 번 대명(待命)했다가 태연히 다시 출사(出仕)한 것은 또한 무엄한 것인데, 80세의 재신(宰臣)이 스스로 우애(憂愛)를 다하고자 한 것을 당습(黨習)으로 돌려 도리어 돌려주라는 명을 내리시니,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조정의 신료들에게 과연 당을 비호하는 습관이 없다고 생각하시고 유독 이 사람에게만 의심을 두시는지요? 말한 사람이 서로 잇따라 찬축(竄逐)되니 이미 구언(求言)하는 본래의 뜻이 아니며, 상소를 불태운 일에 이르러서는 사적(史籍)에 실려 있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번 비망기(備忘記)에 ‘말이 비록 중도를 넘는다 하더라도 내가 허물하지 않겠다.’는 하교는 어디에 두셨습니까? 큰 화(禍)가 있었던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감히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있다가, 명지(明旨)를 내리시자 한둘의 소원(疏遠)하고 천(賤)한 신하들이 근심하고 분해 하는 정성을 대략 진달했으니, 비록 중도를 넘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고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처럼 꺾어버리시니, 차후로 충언(忠言)을 듣고자 하더라도 누가 전하를 위하여 말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임주국의 소어(疏語)는 장상(將相)과 여러 신하들을 허구 날조하려는 계책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주문(主文)한 사람이란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을 가리킨 것인데, 조태억은 죄인은 조태채(趙泰采)의 지친(至親)으로서 교문(敎文)에 간섭할 수 없었고, 김일경이 홍문 제학(弘文提學)이었기 때문에 급박한 판이라 변통(變通)하여 찬진(撰進)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문(敎文)의 반포가 다음날 아침이어서 김일경이 날이 저물었는데도 패초(牌招)받고 입궐해 한밤중이 된 뒤에 비로소 지어 올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집이 성(城) 밖에 있는 사람이 비록 서로 의논하고자 했더라도 형세로 보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을 무함(誣陷)하는 데 급급하여 터무니없이 날조하고 무고하니, 신 등은 혹 그때 주문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성상께서 알지 못하실까봐 염려되어 이것을 함께 붙여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11월 15일 을묘

임금이 친히 망전(望奠)을 행하였다.

 

11월 16일 병진

달이 여귀성(輿鬼星)을 범(犯)했다.

 

전(前) 정랑(正郞) 임주국(林柱國)을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였다. 임주국의 상소가 이미 입계(入啓)되자, 하교하기를,
"임주국의 소어(疏語)는 오로지 상신(相臣)을 얽어 무고하는 데 있다. 아! 참소하는 말이 예로부터 있기는 했지만, 어찌 이와 같은 상소가 있었겠는가? 그날 주문(主文)한 신하가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혹시 의심할 수 있지만, 우상(右相)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좌상(左相)의 일은 나를 노여움을 감추는 허물로 미루었으니, 더욱 해괴하다. 삭거 사판하라."
하였다.

 

김계환(金啓煥)·윤순(尹淳)을 승지(承旨)로, 김홍석(金弘錫)·윤성시(尹聖時)를 부교리(副校理)로, 신치운(申致雲)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여선장(呂善長)을 교리(校理)로, 박필몽(朴弼夢)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이판(吏判) 이조(李肇)의 정사(政事)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현장(李顯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강가 일대에 파수(把守)를 설치하니 무더운 장마와 혹독한 눈으로 무한한 고생을 무척 당합니다. 사행(使行) 때 각참(各站)에서 지대(支待)를 진실로 이미 견디기 어려운데, 책문(冊門)에서 소곶관(所串館)까지의 무릇 일곱 개의 큰 참(站)을 본부(本府)에서 홀로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분주하여 겨를이 없습니다. 진념(軫念)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우휼(優恤)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구적(舊糴)을 탕감하고, 장교(將校)로서 구근(久勤)한 사람을 조용(調用)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철기(鐵騎)가 마구 달리면 한달음에 도달할 수 있고, 얼음이 얼어 육지와 연결되면 더욱 믿을 수가 없으니, 병자년250)  의 일을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백마 산성(白馬山城)은 요충지의 험한 곳에 거점하고 있으니, 이곳은 한 고을이 의뢰하는 곳입니다. 지금 이곳으로 고을을 옮기고자 하나, 묘당(廟堂)의 의논이 반드시 허락하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록 감히 곧바로 청(請)하지는 못하나, 읍성(邑城)은 이미 수비할 만한 땅이 아니고 융기(戎器)와 재곡(財穀)은 도적이 의지하고 가져가는 밑천이 되기에 꼭 알맞습니다. 만약 산성(山城)에 참작하여 옮겨둔다면, 거의 청야(淸野)251)  의 법에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전차(戰車)를 쓰지 않으니, 대개 지세(地勢)에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관서의 직로(直路)만 모두 평평하고 넓은 들이고, 본부(本府)의 경우 압록강 서쪽과 진강(津江) 동쪽은 평탄한 땅이 아님이 없으니, 참으로 전차를 사용해 치고 싸울 장소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거자고(車子庫)를 서로(西路)에 설치하고 칙사(勅使)의 짐바리를 실어나르게 하여 시행해 온 지 여러 해였고 혁파한 지는 오래 되지 아니합니다. 지금 만약 전례(前例)에 의거해 다시 설치한다면, 평상시에는 방물(方物)과 칙사의 짐바리를 실어 날라 각읍(各邑)의 쇄가(刷價)의 비용을 덜 수 있고 난리 때에는 전진(戰陣)의 소용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니, 이를 일러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성덕윤(成德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의 천변(天變)은 인사(人事)가 부른 것입니다. 역비(逆婢)의 토죄(討罪)를 청하는 대론(大論)을 성교(聖敎)를 받들었다가 갑자기 정계(停啓)하자, 며칠 안 있어 수장(收藏)의 절후에 뇌진(雷震)이 있었고, 당역(黨逆)한 척리(戚里)를 단지 돈친(敦親)하는 사사로운 뜻으로 무단(無端)히 방석(放釋)하시고 나서 도리어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죄목을 억지로 집법(執法)하는 헌신(憲臣)에게 더하며 꺾어버렸고, 또 벌을 이미 행했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민진원(閔鎭遠)의 부범(負犯)이 몇 년 동안 찬벌(竄罰)로 속죄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시는지요? 찬탈(簒奪)을 꾀한 역괴(逆魁)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육시(戮屍)하자는 청을 따르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억지로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하교로 듣기 싫어하는 뜻을 드러내 보이셨는데, 얼마 안가 재변(災變)이 번갈아 일어났으니, 어찌 황천(皇天)이 일부러 경계를 보인 것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이의연(李義淵)이 지금까지 천지간에 머리를 들고 살아 있으니, 이것이 무슨 국법(國法)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한유(漢儒)가 부회(傅會)한 것252)  을 후세 사람이 비웃었는데, 너의 상소에 논한 바가 또한 그와 근사(近似)하지 않은가? 나는 이런 말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다.

 

정언(正言) 유시모(柳時模)가 상소하여 이의연(李義淵)을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고, 또 이르기를,
"흉얼(凶孼)이 뉘우침 없이 중외(中外)를 선동하여 불령(不逞)한 무리들을 몰래 모집하고 경영(經營)·배치(排置)하여 날마다 몇 차례가 정장(呈章)하되, 맨먼저 잠리(簪履)한 구신(舊臣)들이 도하(都下)에서 분곡(奔哭)했다는 말을 정신(呈身)하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또 경재(卿宰)와 삼사(三司)가 동일한 심장(心腸)이라는 말로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으로 삼아 빨리 병권(兵權)을 거둘 것을 청하였으며, ‘오늘날의 사기(事機)’란 말은 마치 일이 호흡지간에 있어 급할 때 상변(上變)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는 평범하게 참소하여 얽는 상소가 아니니, 신은 이봉익(李鳳翼)·이한동(李漢東)에게 빨리 투비(投畀)의 법(法)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전(前) 첨사(僉使) 이우송(李友松)이 상소하기를,
"치도(治道)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옛것을 본받는 것’, ‘현재(賢才)를 임명하는 것’, ‘양리(良吏)를 뽑는 것’, ‘장수(將帥)를 가리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무릇 수백 마디였다. 임금이 가장(嘉奬)하였다.

 

전(前) 찰방(察訪) 신방(申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아! 김일경(金一鏡)이 양궁(兩宮)을 무욕(誣辱)하고 핍박(逼迫)한 죄는 비단 전하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선왕(先王)의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다만 도배(島配)의 법만 베푸시고 아직도 정법(正法)하라는 말씀을 아끼고 계십니다. 만약 신하의 도의(道義)를 아는 자라면 참으로 피를 뿌리며 청토(請討)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한데, 전후(前後)의 정신(廷紳)들이 끝내 한 마디 말도 없다가, 비망기가 특별히 내려진 뒤에 이르러 근렬(近列)에 반거(盤據)한 자들이 방자하게 정침(停寢)을 청하였으니, 전하께서 후사(喉司)를 박하게 책망하신 것은 지나치게 관대하게 처리한 실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들어온 자들이 다시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고야 말았으니, 생각건대 이 영호(營護)하는 무리들이 굽혀 용납한 것입니다. 그리고 청토(請討)하는 말과 같은 것은 일례(一例)로 거절하시니, 처분이 도리어 꺾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종일관 큰 차이가 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전하께서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언로(言路)를 넓히시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마음속으로 가상하게 여긴다. 김일경을 투비(投卑)한 것은 악을 징계하는 뜻이었으니, 당초 환수(還收)를 청한 것은 실로 무엄하였다. 하지만 두 차례의 계달(啓達)을 모두 당류(黨類)를 도와 신구(伸救)하는 데로 돌렸으니, 네 말도 역시 당습(黨習)에 물들어서 헤아리지 못한 것인가?"
하였다.

 

11월 17일 정사

권변(權忭)·유술(柳述)을 승지로, 유엄(柳儼)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부교리(副校理) 김홍석(金弘錫)이 상소하여 이의연(李義淵)을 토죄(討罪)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에 대해 진달하니, 무릇 수천 마디였다.
비답하기를,
"붕당(朋黨)의 폐단이 어떠한가? 지금 이 말도 또한 당(黨)에 물든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유시모(柳時模)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반교문(頒敎文)은 왕언(王言)을 대신하여 팔방(八方)에 널리 알리는 것이니, 그 사체(事體)가 지극히 무겁습니다. 김일경(金一鏡)이 찬(撰)한 반교문 가운데 쓴 문자는 출처(出處)가 어떠한지 생각하지 않아 말이 미친 헛소리 같았는데도 전혀 신중히 살피지 않았습니다. 조가(朝家)에서 이미 이 때문에 성죄(聲罪)하여 도배(島配)하였으니, 찬(撰)한 문자를 고치지 않고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빨리 예원(藝苑)에 명하여 품지(稟旨)해 개찬(改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김일경의 일은 엄지(嚴旨)를 이제 막 내렸으니, 오늘 간원(諫院)의 계사(啓辭) 가운데 개찬을 청한 것은 옳다. 그러나 ‘출처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내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계사(啓辭)가 비록 배척하는 듯하나 뜻은 실로 엄호(掩護)하는 것이니, 이런 공변되지 아니한 말은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다. 공의(公議)를 격려하는 도리에 있어 버려둘 수 없으니, 정언(正言) 유시모를 우선 체차(遞差)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유시모를 진해 현감(鎭海縣監)에 제수(除授)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금일의 대계(臺啓)는 김일경의 벌이 가벼운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니, 배소(配所)에 가극(加棘)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유시모(柳時模)는 김일경(金一鏡)의 당(黨)이 아니니, 오늘의 계사(啓辭)는 정실(情實)이 없는 데서 나온 듯합니다. 듣건대 유시모에게는 80세의 노모(老母)가 있다 하니, 청컨대 당(唐)의 유우석(劉禹錫)의 고사(故事)253)  를 따라 내지(內地)로 옮겨 제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정이 불쌍하고 딱하니, 훗날 정사(政事) 때 이배(移拜)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태억이 또 이르기를,
"민진원(閔鎭遠)을 이미 특별히 방송(放送)했는데, 대간(臺諫)이 연이어 아뢰어 상하(上下)가 서로 버티고 있으니, 사체(事體)가 미안합니다. 듣건대 부부인(府夫人)이 지금 여주(驪州)에 있다 하는데, 만약 민진원을 양이(量移)하여 충주(忠州)·제천(堤川) 등지로 중도 부처(中道付處)한다면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중도 부처하면 부부인이 반드시 따라갈 것이니, 이는 다시 중도 부처하는 것과 같다. 성덕윤(成德潤)이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모두 민진원의 방송(放送)에서 말미암았다고 하니, 가소롭다. 또 한 가지 개연한 일이 있으니, 지난날의 일이라 말을 하자면 입을 더럽힌다. 하지만 서명백(徐命伯)은 최 좌상(崔左相)이 진달(進達)로 인하여 연좌(緣坐)되지 않았고, 그 밖에 응당 행해야 할 법도 또한 집행하지 않았으니, 민진원을 특별히 방송한 것도 역시 선후(先后) 때문인 것이다. 지난번 송재후(宋載厚)의 상소에도 또 무어라고 한 것이 있어 원소(原疏)를 돌려주었는데, 광성군(光城君)의 제사를 받들 자손과 여러 자손들이 모두 다 멀리 귀양가서 국구(國舅)의 향화(香火)가 이로부터 끊어졌으니, 선후(先后)의 혼령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광성(光城)은 비단 국구일 뿐만 아니라 경신년254)  의 원훈(元勳)입니다. 그 자손 한 사람이 출계(出繼)하였다 하니, 이 사람이 바로 김연택(金延澤)의 아들이고 김진부(金鎭符)의 양손(養孫)입니다. 비록 연좌(緣坐)의 부류라 하더라도 출계한 자는 분간(分揀)하는 것이 예(例)입니다. 이 사람을 방송(放送)하여 향화(香火)를 받들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즉시 방송하라."
하였다. 조태억이 또 말하기를,
"근래 들으니 달이 여귀성(輿鬼星)을 범(犯)했다 합니다. 이 별은 일명(一名) 적시(積尸)라고 하는데, 접때 무인년255)  에 이 별의 빛깔이 붉어지자 여역(癘疫)이 크게 번져 조가(朝家)에서 여시(輿尸)256)  를 묻으라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겨울인데도 이와 같이 따뜻하니, 명년 봄에 여역(癘疫)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선묘조(宣廟朝)에 《벽온신방(辟瘟神方)》이 있었다 하고, 효묘조(孝廟朝)에도 또한 일찍이 그 책을 인쇄하여 반포했다 합니다. 대개 언문(諺文)으로 번역한 것은 쉽게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고, 대황(大黃)·송엽(松葉) 같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으로 구제하여 백성들이 은혜를 많이 입었다 합니다. 옥당(玉堂)에 이 책이 있다고 하니, 팔도(八道)에 베껴 보내어 민간에 두루 보임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18일 무오

서천군(西川君) 이황(李榥)이 졸(卒)했다. 황은 종친(宗親)이다.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하고 상장(喪葬)의 비용을 넉넉히 주라고 명하였다.

 

11월 19일 기미

하교하기를,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은 선후(先后)의 지친(至親)이요, 선조(先朝)의 원훈(元勳)인데, 내쫓고 가사(家舍)를 팔아 향화(香火)를 받들 사람이 없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한밤중에도 잠을 못이루겠다. 연좌(緣坐)에 들지 않은 자는 특별히 방환(放還)하고, 그 팔아버린 가사(家舍)도 역시 추급(推給)하라. 그러면 어찌 다만 나의 회포만 풀 수 있겠는가? 대행조(大行朝)의 척강(陟降)하시는 혼령도 역시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해조(該曹)에서 아뢰기를,
"팔아버린 가사는 지금은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을 봉사(奉祀)하는 집이 되어 추급(推給)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드디어 사당을 건립할 비용을 주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청대(請對)하여 김일경(金一鏡)과 서로 친밀하지 않았던 일을 스스로 진달하였다. 또 최보(崔補)에게 배척당한 원통함을 말하고, 이어 이의연(李義淵)에게 극전(極典)을 쓰지 않을 수 없음을 힘써 청하며 이르기를,
"신(臣)이 다 말하지 않으면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도배(島配)한 것도 역시 우규(右揆)의 말로 인해 한 것인데, 어떻게 처리하면 율(律)에 합당하겠는가? 비록 국청(鞫廳)을 설치한다 해도 또한 물을 만한 단서가 없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이의연은 신축년257)   이후의 일을 선왕(先王)의 본의(本意)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로 물을 것이 없으니, 곧장 극전(極典)을 씀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말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국청을 설치하여 엄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산(因山)이 가까이 닥쳤으니 잡아다 가둔 뒤, 인산을 넘기고 국청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김일경의 일로 빈전(殯殿)에 울부짖으며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 인용한 두 구절의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후설(喉舌)의 신하는 언어(言語)로 사람에게 죄를 주는 것이라고 말하나, 뒷사람들은 반드시 이 한 구절의 말로 사람을 죄준다 할 것이다. 이미 교문(敎文)을 찬(撰)하여 팔방(八方)에 반시(頒示)하였으니, 천극(栫棘)으로만 그칠 수 없다. 또한 이의연의 예(例)에 의거하여 일체(一體)로 엄하게 국문(鞫問)하라."
하였다. 처음에 이의연의 상소를 다만 돌려주라고 명하고 죄를 더하지 않았는데, 정원(政院)·삼사(三司)와 대소(大小)의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일어나 국문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태억(趙泰億)의 말로 인해 비로소 도배(島配)를 명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이광좌가 힘껏 청하여 반드시 극전(極典)을 쓰려 하니, 임금이 비로소 잡아와 국문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이광좌가 이의연을 성죄(聲罪)한 것은 ‘신축년 이후의 일은 선왕(先王)의 본뜻이 아니었다.’는 한 구절의 말 때문이었다. 그 뒤 유생(儒生) 박지혁(朴趾赫) 등이 상소하기를,
"이광좌의 무리가 일찍이 대행조(大行朝) 때 감히 숙묘(肅廟)의 병신년258)   처분(處分)을 ‘숙묘의 본래 뜻이 아니었다.’ 했으니, 어찌 이의연을 다스릴 율(律)로 이광좌를 먼저 다스리지 않습니까?"
하니, 이에 대해 이광좌는 변명하지 못했다.
하교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의 일을 하교한 뒤 오늘날의 조정 신하 또한 선조(先朝)의 신하들인데, 어찌 한 마디도 말이 없는가? 서울에 있는 삼사(三司)를 한결같이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이에 대사간(大司諫) 유명응(兪命凝), 정언(正言) 유엄(柳儼), 부제학(副提學) 박필몽(朴弼夢), 응교(應敎) 조최수(趙最壽), 부응교(副應敎) 조익명(趙翼命), 부수찬(副修撰) 신치운(申致雲), 교리(校理) 윤용(尹容)·김홍석(金弘錫) 등이 모두 파직되었다. 정원(政院)에서 재차 복역(覆逆)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좌의정 유봉휘(柳鳳輝)·우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정승(政丞)은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인데, 어찌 홀로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전(前) 정언(正言) 나학천(羅學川)이 상소하여 민폐(民弊)와 시사(時事)를 논하니, 무릇 수만 마디였다. 맨먼저 경자년259)   양전(量田)의 가세(苛細)260)  한 폐단을, 다음 경차관(敬差官)의 남색(濫索)이 새로 일어나 허결(虛結)이 증가한 폐단을, 다음 읍수(邑守)가 화전(火田)에 늑봉(勒捧)하는 폐단을, 다음 관가(官家)에서 승역(僧役)을 주구(誅求)하는 폐단을, 다음 융비(戎備)가 해이(解弛)해지고 군기(軍器)가 썩고 무디어진 폐단을, 다음 수령을 가리지 않는 폐단을, 다음 붕당(朋黨)의 폐단을, 다음 과장(科場)에서 사정(私情)을 따르는 폐단을 논하며 이르기를,
"매번 한 과거(科擧)를 거치고 나면 사람들의 말이 낭자합니다. 신축년261)   이후로 공도(公道)는 더욱 상실(喪失)되어 대소과(大小科)의 방안(榜眼)을 모두 형세가(形勢家)에서 차지하였으니, 조정에 가득한 청금(靑襟)들 중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하고, 또 이르기를,
"황일하(黃一夏)·정호(鄭澔)의 상소를 그 당시 여러 신하들이 경함(傾陷)하는 것이라 여겼으나, 대의(大意)를 따져보면 모두 우리 전하의 몸을 보호하고자 함이었는데, 그 말은 상(賞)을 받지 못하고 죄로 유배하는 일이 따랐습니다. 이정소(李廷熽)의 당초의 상소에 이르러서도 역시 종사(宗社)를 위하는 계책이었으니, 비록 다른 죄로써 죄주었다 할지라도 어찌 고자(顧藉)하는 뜻이 없는지요?"
하고, 또 이르기를,
"목내선(睦來善)·이현일(李玄逸)이 죄를 얻은 것은 언어 문자(言語文字)의 실수에 관련된 것에 불과하였는데, 다년간 그 죄 때문에 귀양살이를 하였습니다. 방귀 전리(放歸田里)한 것은 그 죄를 용서했기 때문이며, 관작(官爵)을 회복한 것은 선왕(先王)의 명(命)으로 따져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죄명(罪名)이 처음과 같아 그 자손(子孫)을 아울러 폐고(廢錮)하니, 아아! 또한 매우 심합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복제(服制)는 실로 국가의 막중한 전례(典禮)입니다. 지난날 이인복(李仁復)이 논한 바는 올바름을 얻었다고 할 만한데,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이 국제(國制)를 다시 고집하니, 제왕가(帝王家)의 경상(經常)의 대전(大典)에 위배됨이 있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했으니,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기며 당습(黨習)을 크게 말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 절실하였다. 하지만 나는 너 또한 붕비(朋比)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고, 위에 진달(陳達)한 항목에 대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1월 20일 경신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이의연(李義淵)·김일경(金一鏡)을 인산(因山) 뒤에 국문(鞫問)하겠다는 명이 있었으나, 죄인을 어찌 여러 달 동안 잡아 가두어 두고 국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의연은 선왕(先王)을 무욕(誣辱)했으니, 이 자는 빈전(殯殿)의 죄인입니다. 신(臣)과 영상(領相)·좌상(左相)이 서로 의논했더니, 모두 지금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규(左揆)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유봉휘(柳鳳輝)가 말하기를,
"신은 이의연에게 배척받은 몸이라 감히 말씀드릴 수 없으나, 국청을 설치하는 일은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조금도 늦출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의연·김일경은 마땅히 묻지 말고 곧바로 정법(正法)해야 할 것이나, 옛날 조착(鼂錯)이 조의(朝衣)를 입고 동시(東市)에서 참수되자262)   후세 사람들이 기롱했었다. 인주(人主)는 생살(生殺)의 권한을 쥐고 있으나 반드시 국문하는 것은 대개 훗날의 해(害)를 막고자 해서이다. 이의연은 먼저 국청을 설치하고 김일경은 잡아온 뒤에 역시 국청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에게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말이 준엄하게 나왔으나 내가 국청(鞫廳)의 설치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 사복(嗣服)한 초기에 하찮은 이의연(李義淵) 때문에 국청을 설치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였다. 처음에 우상(右相)에게 물어 보고 도배(島配)했는데, 지금 영상(領相)에게 물으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주(人主)가 가볍게 죽일 수는 없으므로 반드시 대신(大臣)에게 물어 본 뒤에 국청을 설치한 것이니, 대신에게 공심(公心)이 있음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훗날 만약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대신들은 이 뜻을 체득하였다가 나를 보도(輔導)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실록 당상(實錄堂上)은 단지 이조(李肇) 한 사람뿐인데, 늙은데다가 눈이 어두우니 번잡하게 몰려드는 공무(公務)를 어떻게 정밀(精密)하게 찬(撰)할 수 있겠습니까? 간성 군수(杆城郡守) 이덕수(李德壽)가 문학(文學)이 있어 실록(實錄)의 임무에 합당하고, 지금 조정의 신하들 중에 이덕수보다 나은 자가 없습니다. 또 윤순(尹淳)은 문식(文識)이 정아(精雅)하고 사륙문(四六文)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조정의 의논이 모두 사사(史事)를 전적으로 이 두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하는데, 실록 당상을 당하(堂下)에서 곧장 승배(陞拜)하는 것은 특별한 거조(擧措)이어서 전례(前例)가 없습니다. 윤순은 마침 승자(陞資)했기 때문에 계하(啓下)하였으나, 이덕수는 아직 당하에 있어 우상(右相)이 고(故) 상신(相臣) 이행(李荇)이 소세양(蘇世讓)을 천승(薦陞)했던 예(例)에 의거하여 바로 진달(陳達)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소세양은 홍주 목사(洪州牧使)로서 고(故) 상신(相臣)의 천거를 받아 통정(通政)이 되었다가 가선(嘉善)이 되고 대제학(大提學)이 되었습니다. 대신(大臣)은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는 법이니, 영상(領相)의 말이 좋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초탁(超擢)하면 사람들이 혹 의논하겠지만, 실록의 일은 중대한 것이니, 이덕수를 첨중추(僉中樞)로 삼으라."
하였다. 조태억이 또 양양 부사(襄陽府使) 채팽윤(蔡彭胤)의 문사(文詞)에 대해 말하기를,
"채팽윤은 위포(韋布)로 있을 때 소색(疏色)으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무욕(誣辱)하는 상소에 참여하여, 공의(公議)가 지극히 엄하기 때문에 호당(湖堂)에 있은 지 30년 동안 아직도 변쉬 당상(邊倅堂上)을 얻지 못하였으니, 대개 준직(準職)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문(斯文)의 일은 몹시 중요하니, 아장(亞長)을 청직(淸職)으로 부를 수는 없다. 전조(銓曹)에서 준직(準職)을 거치지 못한 것에 구애받는다면, 내가 마땅히 헤아려 하겠다."
하고, 이날 채팽윤을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흑산도(黑山島)에 정배(定配)했던 죄인 최보(崔補)를 진도(珍島)에 이배(移配)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장계(狀啓)를 올려 말하기를,
"이번달 8일 술시(戌時)에 북쪽에서 어떤 소리가 났는데, 서남쪽으로 흘러갔으며, 그 소리는 마치 큰 종소리와 같았습니다. 지진(地震)이라 한다면 창벽(窓壁)이 흔들리지는 않았고, 천동(天動)이라 한다면 땅과의 거리가 2, 3장(丈)에 불과했으니, 일이 변이(變異)에 관계됩니다."
하였다.
잠저(潛邸) 때의 구궁(舊宮)을 숙빈(淑嬪)의 사우(祠宇)로 삼으라고 명했다가, 대신(大臣)들의 말을 따라 드디어 따로 지으라고 명하였다. 이때 유사(有司)가 장차 숙빈의 사우를 지으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나라의 재용(財用)이 바닥이 났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였으니, 내가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은 뒤 사제(私第)를 어찌 그대로 둘 수 있겠느냐? 사친(私親)의 사우는 마땅히 여기에 세워야 하리라."
하였다. 그 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사우를 지은 뒤에도 마땅히 인빈(仁嬪)의 예(例)에 의거해 해야 하니, 주사(主祀)하는 자는 인신(人臣)이 됩니다. 전하께서 거처하시던 집을 아무리 주사(主祀)하는 사람이라 해도 어찌 감히 신하의 몸으로 들어가 기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으니, 어찌 거처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힘써 그 불가함을 진달(陳達)하자, 임금이 드디어 땅을 골라 창건(創建)하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사친(私親)께서는 평소 조심스런 마음으로 근신(謹愼)하셨으니, 나는 우러러 선왕(先王)의 검소하셨던 덕을 본받고 또 사친의 유지(遺志)를 따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에게 이르기를,
"절수(折受)에 관한 일은 네 궁(宮) 외에 또 하나의 궁(宮)이 있으니, 지부(地部)의 원결(元結)이 반드시 줄어들 것이고, 또 민폐가 될 것이다. 왕자(王者)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는 법이니, 내가 대통(大統)을 이은 뒤에 다시 어찌 구궁(舊宮)의 소유에 연연하겠는가? 모두 마땅히 신설(新設)하는 궁(宮) 【경의군(敬義君)의 궁(宮)이다.】 으로 옮기라."
하니, 이광좌가 대답하리를,
"잠저(潛邸)에서 들어와 대통을 이으면 으레 구궁을 본궁(本宮)으로 삼는데, 지금 전하께서 경비를 염려하시어 구궁의 전민(田民)·제택(第宅)을 모두 새 궁으로 옮기라 하시니, 이는 천년 동안 없었던 성덕(盛德)입니다."
하였다.


 

 

 

이봉년(李鳳年)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송택상(宋宅相)을 장령(掌令)으로, 윤휘정(尹彙貞)을 정언(正言)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박정(朴涏)을 부응교(副應敎)로, 임광(任珖)을 교리(校理)로, 조지빈(趙趾彬)을 부교리(副校理)로, 강박(姜樸)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1월 21일 신유

하교하기를,
"종신(宗臣)중 당하(堂下) 이상으로 나이 70인 사람은 세수(歲首)에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초계(抄啓)하여 이조(吏曹)에 보내 가자(加資)하게 하라."
하였는데,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당하(堂下)는 어느 품계(品階)로 한정(限定)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정(都正) 3품에서 정6품까지 가자(加資)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돈친(敦親)의 뜻에서 나왔으나, 신이 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종반(宗班)으로 종2품인 사람은 봉군(封君)하는데, 일찍이 도정을 거쳤으면 봉군하고 거치지 않았으면 봉군할 수 없으니, 억울한 마음이 없지 않다 합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봉군이 되기 전에는 2품의 녹봉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정은 종반(宗班) 중에서 화직(華職)이다. 교지(敎旨)가 있을 때에 제수(除授)한다는 것이 《대전(大典)》에 있다. 군(君)에 이르러서는 원래 가려서 봉하는 규례가 없고, 외조(外朝)에서는 도정을 외조의 준직(準職)을 대신하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매번 ‘도정을 거치지 못했으니 어찌하리까?’라고 품(稟)하면, 선조(先朝) 때 특별히 봉군하였다. 지금 관안(官案)을 보건대 가선(嘉善)이 자못 많으니, 이미 전례(前例)가 있었던 것이다."
하고, 이조(吏曹)에 분부하여 아울러 모두 봉군하니, 이날 종신(宗臣) 중에서 봉군된 자가 무릇 9명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회원군(檜原君)은 선묘(宣廟)의 왕손(王孫)으로 나이가 90에 가까우니, 실로 희귀한 일이다. 이미 자궁(資窮)하였으니, 그의 손자를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제령군(齊寧君) 달윤(達胤)은 나이가 90에 가까우니 특별히 가자하여 노인을 우대하고 친척을 친근히 하는 뜻을 표(表)하라."
하였다.


 

 

 

남평 현감(南平縣監) 임광(任珖)의 직책을 잉임(仍任)시키게 하였는데,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청한 것이다. 이때 임광이 교리(校理)에 이배(移配)되었는데, 이광좌가 아뢰기를,
"수령(守令)이 자주 바뀌면 폐단이 있으니, 청컨대 잉임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옥서(玉署)란 경악(經幄)의 신하이다. 임금에게 어긋난 일이 있으면 보필하고 정사(政事)에 빠뜨려진 일이 있으면 말해야 하니, 그 임무가 무겁지 아니한가? 이광좌가 현감을 잉임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당당(堂堂)한 옥서의 신하가 도리어 한낱 현감보다 못하단 말인가? 나라를 위해 다스림을 도모하는 체통을 잃었다고 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29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옥서(玉署)란 경악(經幄)의 신하이다. 임금에게 어긋난 일이 있으면 보필하고 정사(政事)에 빠뜨려진 일이 있으면 말해야 하니, 그 임무가 무겁지 아니한가? 이광좌가 현감을 잉임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당당(堂堂)한 옥서의 신하가 도리어 한낱 현감보다 못하단 말인가? 나라를 위해 다스림을 도모하는 체통을 잃었다고 할 만하다."
김조택(金祖澤)을 방송(放送)하였다. 김조택은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의 손자이며 김운택(金雲澤)의 아우이다. 지난날 임인년263)  에 군흉(群凶)들의 계달(啓達)로 인하여 김운택·김민택(金民澤)의 여러 아우와 자질(子姪)을 모두 절도(絶島)에 유배(流配)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이 특별히 방송한 것이다.


 

 

 

윤혜교(尹惠敎)를 승지(承旨), 박정(朴涏)을 집의(執義)로, 이보욱(李普昱)을 지평(持平)으로, 오수원(吳遂元)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부호군(副護軍) 정동후(鄭東後)가 상소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선왕(先王)을 무욕(誣辱)·핍박(逼迫)하고, 상궁(上躬)을 오멸(汚衊)한 죄에 대해 전하께서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견벌(譴罰)을 대략 베푸셨으나, 저 혈당(血黨)들이 근밀(近密)을 굳게 차지하고 있어 영호(營護)하는 말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습니다. 혹은 언어(言語)로 인한 작은 허물이라 둘러대고, 혹은 망발(妄發)이라 일컬으며 근거없는 말로 섬롱(閃弄)하니, 가리고 비호하는 정상이 환하여 가릴 수가 없습니다. 엄하게 징토(懲討)하는 도리에 있어 결코 용서할 수 없으니, 마땅히 찬출(竄黜)의 법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유시모(柳時模)의 계사(啓辭) 가운데 ‘출처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과 같은 것은 지극히 회특(回慝)하였으니, 영읍(領邑)의 외직(外職)에 보임한 것도 말감(末勘)이라고 할 만한데, 승선(承宣)이 작환(繳還)의 청(請)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신(相臣)은 바꾸어 차임(差任)하자는 말을 잇따라 꺼내어 이처럼 무엄하고 방자하게 구해(救解)하였으니, 신은 적이 통탄하는 바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삼사(三司)에서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 모두 파직하였습니다. 아! 삼사(三事)의 반열(班列)에 있는 자는 국가를 위하여 토역(討逆)하는 의리(義理)가 삼사(三司)에 비교하건대 무거울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찬(代撰)의 부도(不道)한 흉언(凶言)을 애초에 예사롭게 여겨 숭장(崇奬)하고 발탁(拔擢)해서 오직 하고 싶은 대로 하였습니다. 지금 전후(前後)로 밝은 명(命)을 내렸으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청토(請討)하자는 말은 한 마디도 없이 삭출(削黜)했다가 도배(島配)하고, 도배했다가 국문(鞫問)하는 것이 모두 특교(特敎)에서 나왔으니, 대신(大臣)들이 전하를 저버린 것이 이처럼 지극한 데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삼사(三司)가 견책(譴責)당한 뒤 조금도 인죄(引罪)하는 뜻이 없이 더러운 몸으로 앉아 있는 것이 평일(平日)과 다름이 없습니다. 진실로 방자하여 매우 거리낌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에서 침척(侵斥)하되 조금도 말을 가려 쓴 것이 없으니, 진실로 해괴하다."
하였다.


 

 

 

11월 22일 임술

부수찬(副修撰) 성덕윤(成德潤)이 허윤(許玧)의 상소로 인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박필몽(朴弼夢)의 상소와 대략 같았다. 비답하기를,
"허윤의 소어(疏語)를 지금 네가 상소하여 변정(卞正)함은 좋으나, 백수(白首)의 재신(宰臣)을 노물(老物)이라고 배척하여 ‘비패(鄙悖)한 말을 멀리한다.’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으니, 내가 실로 개연(慨然)해 하는 바이다."
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송인명(宋寅明)·좌도 재상 경차관(左道災傷敬差官) 유언통(兪彦通)·도사(都事) 윤서교(尹恕敎) 등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본도(本道)의 재결(災結)을 조가(朝家)에서 만결(萬結)로 정해 주었으나, 실로 분배(分排)하기 어려워 신(臣) 등이 회동(會同)하고 소상하게 하여 정수(定數) 외에 1천 6백여 결(結)을 더 나누어 주었는데, 세율(歲律)이 장차 궁(窮)해져 미처 계문(啓聞)하지 못하고 지레 먼저 구획(區劃)하였습니다. 제멋대로 처리한 죄를 실로 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 등의 이 일은 한(漢)나라의 급암(汲黯)과 같으니264)  , 죄주지 않겠다."
하였다. 그뒤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급암은 서울과의 거리가 매우 멀어서 부득불 교조(矯詔)265)  로 창고를 열었던 것인데, 호서(湖西)는 서울과의 거리가 불과 며칠의 길이니, 장문(狀聞)하여 품처(稟處)하는 데 무슨 불가(不可)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이에 먼저 나누어 주고 난 뒤에 장문(狀聞)하였으니, 추고(推考)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후로는 마음대로 급재(給災)하는 자는 나문(拿問)하여 죄를 주는 것을 정식(定式)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전(前) 판관(判官) 김만익(金萬翊)이 상소하기를,
"신이 적이 듣건대, 안으로 병조(兵曹)와 각 군문(軍門)으로부터 제도(諸道)의 영(營)·진(鎭)에 이르기까지 바치는 군포(軍布)가 적은 것이 아니나, 낭비가 절반을 차지한다고 하니, 마땅히 조정에서 그 들어오는 것을 헤아리고 용하(用下)266)  를 절약하되 정해진 법제(法制)를 거듭 밝혀 헛되이 낭비하는 것을 금하고 억제한다면, 국용(國用)이 풍족해질 것입니다. 무릇 그런 뒤에 군액(軍額)으로서 긴요하지 않은 것을 혁파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도고(逃故) 중에 탈(頉)이 있는 자는 모두 보충할 필요가 없으니, 신역(身役)의 필수(疋數)를 헤아려 감면해 주고, 한 집안에 신역(身役)이 셋이 있는 경우는 그 중 하나를 면제해 주며, 아약(兒弱)으로 나이가 차지 않은 자와 늙어서 나이가 다 된 자들은 일체 탈(頉)로 잡아 면제해 준다면, 잔약한 몸이 소생되어 병에서 일어날 것을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크게 변통(變通)에 관계되는 것은 신의 어리석음으로 진실로 그 사이에다 감히 입을 놀릴 수 없으나, 한 가지 방도로 공사(公私) 양쪽에 편리한 것이 있습니다. 무릇 금위(禁衛)·어영(御營) 두 영(營)의 상번군(上番軍)은 모두 쌀을 바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들에게는 각각 자장보(資裝保)가 한 명씩 있어 상번(上番) 때 길에서 쓰는 비용으로 삼고, 두 달 동안 입번(立番)하면 요름(料廩)을 후하게 지급하니, 조가(朝家)의 대우가 지극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쌀을 바치기를 원하는 것은 비록 자장포(資裝布) 여섯 필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밖에 달리 쓰이는 비용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금위영(禁衛營)의 정군(正軍)은 1만 9천 3백 45명이고 어영(御營)의 정군은 2만 2백 64명인데, 매 군사마다 각각 자장보 한사람이 있으니, 총 7만 9천 38명이고, 두 영의 납미 보인(納米保人)이 또 10여 만명입니다. 국가에서 이 두 영을 설치함은 대개 숙위(宿衛)의 계책 때문이었으나, 양군(兩軍) 중에서 일시에 상번하는 자들은 단지 각 5초(哨)뿐이고 하번군(下番軍)은 외방(外方)에 산재해 있습니다. 갑자기 위급한 일이 있어 불러 모으면 왕래하는데 곧 수십 일이 걸릴 것이니, 이것이 족히 완급(緩急) 때 믿을 만한 것이 되겠습니까? 지금 오부(五部)의 장정(壯丁)을 계산해 보면 억수(億數)를 밑돌지 않는데, 모두 유의유식(遊衣遊食)하는 자들입니다. 혹 부곡(部曲)의 사람들을 모집해 편성하고 의름(衣廩)을 후하게 주어 한결같이 훈국(訓局)의 제도와 같이 한다면, 저 기한(飢寒)에 몰린 자들이 누군들 메아리처럼 따르지 않겠습니까?
수천 명의 군사를 하루아침에 마련해 금위영·어영청 두 영(營)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한 달 간격으로 번(番)을 바꾸되, 향군(鄕軍)의 상번처럼 한다면, 1천 명의 군사가 입번(立番)하는 것 외에도 하번 2, 3천 군사가 항상 연하(輦下)에 있을 것이니, 설령 생각하지 못한 변란이 있더라도 한 번의 호령(號令)으로 대오(隊伍)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 무리들의 용감하고 정예로움이야말로 어찌 먼 지방의 두회기렴(頭會箕斂)267)  한 자들과 같은 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저 외방의 여러 군사들은 상번을 면제해 주고 해마다 쌀 12두(斗)를 내게 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봄이 되어 양영(兩營)에 조운(漕運)하여 경군(京軍)의 늠료(廩料)로 삼는다면, 1년의 봉납(捧納)으로 쌀 3만 1천 6백 87석(石)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3, 4천 군사가 1년 동안 분료(分料) 외에도 남아도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인(保人)으로서 쌀을 바치는 자가 기병(騎兵)·보병(步兵)의 보인의 예(例)처럼 포(布)를 내어 번상군(番上軍)의 의자(衣資)로 삼는다면, 10여만 명이 납포(納布)하는 것으로 수천의 군사에게 지급할 수 있고, 그 수는 반드시 반에도 미치지 않을 것이니, 그 용도(用度)의 넉넉함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무릇 이와 같이 한다면, 도민(都民) 수천 가구가 저절로 구제되어 살아나갈 수 있는 가운데 놓이게 되고, 향군(鄕軍) 가운데 번을 면제받은 자들 역시 서로 기뻐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 어찌 공사(公私)가 서로 편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장보 3만 9천 6백 9명은 진실로 마땅히 혁파하여 도고(逃故)의 궐액(闕額)을 채울 수 있을 것이고, 백골지징(白骨之徵)과 인족지침(隣族之侵)도 역시 조금은 늦추어질 것입니다. 또 무릇 훈국(訓局) 포수(砲手)의 승호(陞戶)가 더욱 주현(州縣)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 승호란 대개 비용이 수백 금(金)이 되는데, 낭비하는 것이 매우 많아 부자는 그의 농토를 다 팔아도 오히려 모자랄까 근심하고, 가난한 자는 인족(隣族)들에게 강제로 징수해도 반드시 만족스러울 것을 요구하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승호에 궐액(闕額)이 있음을 들으면, 사람마다 스스로 위험하게 여긴 나머지 아전에게 뇌물을 주며 벗어나려고 가재(家財)를 다 기울입니다. 그래서 담당 아전은 가난하여 의지할 데 없는 자를 구차하게 망정(望呈)하고 인족(隣族)으로 하여금 힘을 합쳐 마련해 보내게 하며 채찍을 마구 휘두르니 울부짖는 형상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도민(都民)으로서 포수(砲手)에 소속되기를 바라는 자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이것이 어찌 향민(鄕民)은 싫어 피하고, 도민(都民)이 스스로 원해서이겠습니까? 어찌 이곳에서 생장(生長)하여 향민(鄕民)이 어버이와 헤어지고 고향을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요포(料布) 역시 몸을 가리고 입에 풀칠하는 바탕이 되는 데 족하겠습니까? 어찌 반드시 각읍의 승호로 하여금 소요를 일으키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내 마음속으로 가상히 여긴다. 의논해 처리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11월 23일 계해

김시빈(金始鑌)을 장령(掌令)으로, 이진망(李眞望)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윤순(尹淳)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11월 24일 갑자

예문 제학(藝文提學) 이조(李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토역(討逆)하는 반교문(頒敎文)을 신(臣)이 마땅히 제진(製進)해야 할 것인데, 이 교문(敎文)은 곧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할 것이어서 ‘지금 반교(頒敎)한다.’는 뜻으로 말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앞머리의 ‘왕약왈(王若曰)’이란 말은 곧 대행조(大行朝)의 교명(敎命)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 한 구절은 품정(稟定)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거행하기에 미안(未安)한 바가 있으니, 바라건대 신(臣)의 상소를 예문관(藝文館)에 내려보내 상확(商確)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으라고 명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정운형(鄭運亨)이 상소하여 수령(守令)을 가리고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학문에 힘쓰고 명기(名器)를 신중히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진천(鎭川)의 유학(幼學) 변우익(邊遇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람의 재예(才藝)는 각각 장기가 있으니, 변려문(駢儷文)에 익숙하나 부(賦)·책(策)에 익숙하지 못한 자, 부·책에는 공교로우나 변려문에 공교롭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이래로 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절제(節製)는 오로지 표문(表文)으로 선비를 시험한 까닭에 경유(京儒) 중에서 과거 공부를 하는 자들은 갑을(甲乙)을 살피지 않고 먼저 사륙문(四六文)을 익히나, 향유(鄕儒)로서 다만 부·책을 익힌 자는 천리를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가 표제(表題)를 보고는 붓을 내던지고 백지(白紙)를 끌고 가며 눈물을 삼키고 절망합니다. 무릇 이와 같기 때문에 방목(榜目) 안에 든 사람은 모두 경유(京儒)이고 향유(鄕儒)들은 한 사람도 합격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표문(表文)이 사대 문자(事大文字)이므로 한쪽만 폐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만둘 수가 없다면 하나만 두고 지금부터 부(賦)·표(表)·논(論)·책(策)으로 혹은 명제(命題)를 번갈아 내고, 그렇지 않다면 혹은 부·표로, 혹은 논·책으로 두 제목을 나누어 표시하여 만약 10인을 등용(登用)할 경우 각기 5인씩 등용한다면, 경향(京鄕)의 선비들이 모두 그들의 장점을 쓸 수 있을 것이니, 나라는 유주(遺珠)268)  의 한탄이 없고, 선비는 읍옥(泣玉)하는 억울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사(疏辭)를 보고 너희들의 정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좌의정 유봉휘(柳鳳輝)·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정동후(鄭東後)의 상소로 인해 도성(都城)을 나가 서명(胥命)하고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11월 25일 을축

헌부(憲府) 【장령(掌令) 김시빈(金始鑌)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의연(李義淵)의 흉역(凶逆)한 죄는 천지간에서 하루라도 살아있게 할 수 없는데, 지금 정동후(鄭東後)의 상소로 인해 국사(鞫事)를 점차 지연되게 만들어 왕법(王法)을 쾌히 바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동후(東後)가 일경을 논한 것에 대하여서는 그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전날도 뒷날도 아닌 국좌(鞫坐)가 바야흐로 열리려고 하는 날에 대신(大臣)을 배척해 내쫓아 안국(按鞫)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처럼 음흉하고 교활한 습관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부호군(副護軍) 정동후를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김일경이 인용한 문자(文字)는 참으로 절패(絶悖)하였습니다. 만약에 과연 이런 마음이 있어 발(發)하였다면 만 번 베어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고, 설령 이런 마음이 없는 데서 나왔다 하더라도 이미 성죄(聲罪)한 뒤이니, 죄명(罪名)의 중대함에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당초의 처분(處分)이 삭출(削黜)에 그쳤으니, 말감(末勘) 중의 말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직책이 근밀(近密)에 있는 자가 이에 작환(繳還)하는 청(請)이 있었으니, 전례(前例)대로 파직에만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그날 복역(覆逆)했던 승지(承旨)도 아울러 삭탈 관작을 명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지부(地部)의 염분 선세(鹽盆船稅)는 원래 정액(定額)이 있어 파손되는 대로 대정(代定)하는데, 근래 경상사(京上司)·각궁(各宮)·외영문(外營門)·각군(各郡)이 대부분 다 사설(私設)하여 새로 만든 것들을 모점(冒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부(地部)의 소속은 한결같이 파손된 뒤 다시 대신 충당할 길이 없으니, 청컨대, 지부(地部)로 하여금 낭청(郞廳)을 파견해서 적간(摘奸)하게 하고, 각처(各處)의 소속도 아울러 곧장 대정(代定)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말단(末端)의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전(前) 장령(掌令)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락 이르기를,
"며칠 전 유시모(柳時模)가 교문(敎文)을 개찬(改撰)하자는 계사(啓辭)에서 쓴 뜻이 음특(陰慝)하였는데, 전하께서 다시 깊이 따지시지 않고 가볍게 윤가(允可)를 내리셨습니다. 무릇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찬(撰)한 교문은 곧 대행조(大行朝)의 윤음(綸音)을 대찬(代撰)한 것이고, 이미 팔방(八方)에 반포(頒布)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품명(稟命)한 바 없이 추가해 고친다면,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고친 글을 장차 선조(先朝)의 왕언(王言)이라 할 것인지요, 아니면 오늘날의 왕언(王言)이라 할 것인지요? 또 팔방(八方)에 마땅히 다시 반포해야 할 것인지요? 그리고 장차 궤각(几閣)269)  에 간직해 두실 것인지요? 사체(事體)로 헤아려 보건대 너무나도 불가합니다. 마땅히 먼저 역적 김일경을 토죄(討罪)하여 왕법(王法)을 쾌히 바루고, 하늘에 계신 대행(大行)의 영혼에 밝게 고(告)한 뒤 이어 다시 찬(撰)해서 반시(頒示)하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역적 김일경이 윗분을 무욕한 부도(不道)한 죄를 환히 알게 해야만 바야흐로 도리(道理)를 충분히 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유시모는 다만 역적 김일경이 있음만 알고 군부(君父)가 있음은 알지 못한 채 엄호(掩護)하는 데 급급하여 다만 구차하게 마무리를 지으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찬(改撰)하자는 청(請)에 거짓 핑계를 대어 감히, ‘출처(出處)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로 성총(聖聰)을 어지럽혔으니, 그 정태(情態)의 교밀(巧密)함이 환히 드러나 가릴 수가 없습니다. 외읍(外邑)에 출보(黜補)하는 작은 견책(譴責)으로 그칠 수만은 없으니, 마땅히 투비(投畀)의 법(法)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김동필(金東弼)은 지난해에 역적 김일경의 한 상소를 논하였으니, 평범한 무리 중에서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聖上)께서 그 상소를 가져다 보시고 처분(處分)한 바가 있어 역적 김일경의 역절(逆節)이 남김없이 환희 드러나자, 저 역적 김일경은 김동필에게 허물을 돌렸고, 김동필은 이 때문에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등연(登筵)하는 날 감히 ‘망발(妄發)’ 등의 말로 허다한 사설을 늘어놓으며 영구(營救)하여 속죄(贖罪)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하였으니, 십목(十目)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당초 얻은 것이 오히려 대역(大逆)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 것은 더욱 군색하였고, 사설을 변환(變幻)시켜 자못 가리고 비호하는 뜻이 있었으니, 이는 역적 김일경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무겁고 임금의 원수를 보는 마음은 가벼운 데 불과합니다. 인심(人心)의 함닉(陷溺)이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를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역적 김일경의 역상(逆狀)을 한 사람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봉명(李鳳鳴)의 상소로 인해 성상(聖上)께서 비로소 감촉(鑑燭)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징토(懲討)가 바야흐로 행해지려던 차에 연신(筵臣)들이 이봉명을 귀양 보내자고 청하였으니, 이른바 건덕(建德)을 위해 원수를 갚는다는 것270)  입니다. 그러나 전하의 밝고 성스러움으로도 도리어 그에 가리워져서 곧 그 청을 윤허하셨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어찌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 사람을 죄준 적이 있었겠습니까? 무릇 시비(是非)가 분명하지 못하면 인심(人心)이 복종하지 않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으면 당습(黨習)이 점점 심해져 크게 어려워진 나머지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믿음이란 인군(人君)의 큰 보배다.’라고 했고, 맹자(孟子)는, ‘어찌 어진 사람이 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속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아랫사람에게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함이 분명합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소유(疏儒)를 국문하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생각하건대 저 광망(狂妄)한 사람은 진실로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하께서 재앙을 당해 구언(求言)하시는 날 이미, ‘말이 비록 중도에 지나칠지라도 내가 허물하지 않겠다.’라고 하교하셨는데,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들이 전후(前後)로 서로 이어지고, 지금 또 소유를 엄하게 신문하시니, 구언한 뜻이 한갓 헛된 문구가 될 따름이며, 허물하지 않겠다던 하교가 도리어 실언(失言)이 되어 버렸습니다. 애석합니다. 전하께서는 이단(履端)271)  한 초기에 어찌 이런 백성을 속이는 일을 하시는지요?"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채응복의 상소는 흉적(凶賊)을 가리켜 소유(疏儒)라 하고 국문(鞫問)을 실언(失言)이라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이의연과 더불어 같은 심간(心肝)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일분(一分)이나마 엄외(嚴畏)하는 뜻이 있다면, 이 설국(設鞫)의 명이 있는 날 어찌 감히 방자하게 구해(救解)하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음이 이에 이른단 말입니까?
청컨대 명백하게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런 사람은 의리(義理)로 책망할 수 없다."
하고, 다만 원소(原疏)를 돌려주라고 하였다.

 

국장 도감(國葬都監)에서 아뢰기를,
"발인 습의(發靷習儀) 때 대여(大轝)의 높이와 너비를 흥인문(興仁門)에다 견주어 보았더니, 문의 높이가 부족한 것이 거의 2척(尺)이었습니다. 반드시 문지방의 박석(礴石)272)  을 파서 제거한 뒤에야 걸릴 우려가 없겠습니다.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또한 파낸 전례가 있었습니다. 습의하기 전에 청컨대 이 예에 의거해 수치(修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조(戶曹)에게 아뢰기를,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에게 매달 주육(酒肉)을 보내고 봄 가을의 세시(歲時)에 주급(周給)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봉조하가 지금 이미 하향(下鄕)했으니, 청컨대 본읍(本邑)에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6일 병인

헌부(憲府) 【장령(掌令) 김시빈(金始鑌)과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천하(天下)의 악(惡) 중에 역(逆)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춘추(春秋)》의 법(法)이 당여(黨與)를 다스리는 데 반드시 엄하였습니다. 지금 이의연(李義淵)은 스스로 역(逆)이 된 것이지 호역(護逆)한 것이 아니며, 최보(崔補)와 채응복(蔡膺福)이 참으로 호역한 것입니다. 애초에 이의연을 극전(極典)에 두지 않아 최보가 이의연을 뒤따르게 만들었고, 계속해서 국좌(鞫坐)가 천연(遷延)됨으로 인해 채응복이 최보를 잇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비록 이의연을 옥(獄)에서 국문하고 최보를 섬에 유배했으나, 만약 채응복의 죄(罪)를 바루지 않는다면 채응복을 뒤이어 일어날 자가 장차 셀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울 것입니다. 청컨대 장령(掌令) 채응복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청대(請對)해서 입시(入侍)하고, 스스로 김일경(金一鏡)의 죄를 논(論)하지 않은 죄를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조태억이 또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김일경을 승탁(陞擢)한 것은 그에게 물망(物望)이 있어서가 아니었으며, 다만 구차(久次)273)  에 따라 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상과 김일경은 취미(臭味)가 맞지 않았고 신(臣) 또한 김일경과 혐의(嫌疑)가 있었습니다. 영상에게 지금 비록 병(病)이 있으나, 옛사람 중에는 병을 무릅쓴 채 수레에 올라 토역(討逆)했던 자가 있었으니, 성상께서 만약 다시 돈면(敦勉)을 더하시어 국좌(鞫坐)에 나아가게 한다면, 어찌 감히 질병으로 사양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영상과 좌상을 나아가 국문에 참여하도록 권기(勸起)하고 있으니, 우의정은 먼저 가서 안국(按鞫)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윤혜교(尹惠敎)가 채응복(蔡膺福)에게 죄줄 것을 힘써 청했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이의연(李義淵)을 국문(鞫問)하였다. 이의연의 나이 33세이었다. 공초(供招)하기를,
"선대왕(先大王)께 어찌 병환(病患)이 없었다 하겠습니까? ‘권근(倦勤)’이라는 두 글자는 대개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지 않으셨음을 이릅니다. 비록 조보(朝報)에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하더라도 선대왕께서는 능히 종종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제전(祭奠)에 몸소 참여하지 않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로써 병환이 있음을 알었던 것입니다. 만약 병환이 없으셨다면 하늘처럼 큰 효(孝)로써 어찌 자주 몸소 참여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신축년274)   이후의 일은 모두 우리 선대왕의 뜻이 아니었다.’고 한 것은 신축년 이후의 일이 비록 선대왕께서 하고자 하신 바가 아니었으나, 조신(朝臣)들이 한 번 아뢰고 두 번 아뢰고 혹 청대(請對)하여 쟁집(爭執)했던 것입니다. 또 어 부원군(魚府院君)의 상소 가운데, ‘김일경이 자기가 아뢴 것을 모두 「상지(上旨)」라 칭했다.’ 하였고, 또 민진원(閔鎭遠)을 특별히 방송(放送)하라는 명을 군하(群下)가 쟁집(爭執)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선왕(先王)의 뜻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기화(奇禍)를 빚어내고 교목 세가(喬木世家)를 남김없이 주륙(誅戮)하였다.’고 한 것 역시 선대왕(先大王)의 뜻이 아니었고, 곧 여러 신하들이 가리고 막은 소치였으며,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 또한 세가(世家)라고 말할 수 없겠습니까? 초야(草野)의 한사(寒士)가 어찌 역(逆)·불역(不逆)과 시비(是非)·곡절(曲折)을 알겠습니까? 원래 위로 선대왕을 무욕(誣辱)한 일이 없으니, 애매합니다."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다시 추국(推鞫)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7일 정묘

윤유(尹遊)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중희(金重熙)를 집의(執義)로, 조최수(趙最壽)를 사간(司諫)으로, 최종주(崔宗周)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올족보(兀足堡)를 호타(豪打)로 옮기고 만호(萬戶)의 병부(兵符)를 다시 만들어 주었다.

 

하교하기를,
"만장(輓章)을 찬진(撰進)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무거운데, 지금 부사직(副司直) 박윤동(朴胤東)이 올린 만사(輓詞)를 보건대, ‘위험한 길에서 천 겹의 파도를 겪었고[危塗閱歷千層浪], 보좌(黼座)275)  는 한바탕 꿈속에 희미했네[黼座依佈一夢場]’란 한 구절은 매우 신중을 기하지 아니하였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고, 고쳐 올리라고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죄인 이의연(李義淵)에게 다시 엄문(嚴問)하였더니, 그 공초(供招)가 더욱 흉패(凶悖)하였습니다. ‘제전(祭奠) 또한 어찌 정사(政事)가 아니겠습니까?’, ‘서무(庶務)에 능히 부지런하지 않으셨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방자하게 말하여 다시 조금도 돌아보거나 두려워함이 없었으니, 단지 이 한 조목만으로도 족히 단안(斷案)이 됩니다. 그리고 그 상소 가운데 ‘신축년276)   이후의 일은 모두 선대왕(先大王)의 뜻이 아니었다.’고 한 것은 그 뜻이 오로지 임인년277)  의 옥사(獄事)는 화(禍)를 빚어내어 주륙(誅戮)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번의 초사(招辭)는 다만 두 사실을 들어 증거로 삼았는데, 이에 말하기를, ‘어찌 「개(皆)」자를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경폐(徑斃)하고 병폐(病斃)한 두 죄인을, ‘남김없이 주륙(誅戮)한 데’로 돌렸는데, 이른바 ‘그 죽음을 죄가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세가(世家)이기 때문에 범연(泛然)히 썼다.’ 하였으며, 또한 선왕(先王)의 뜻이 아니라고 감히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뜻이 애초에 상청(上聽)을 형혹(熒惑)시키고자 하였으나, 지금 와서 엄문(嚴問)하는 아래 비로소 그 말을 둘러대며 호역(護逆)의 죄과(罪科)를 모면하려 하였으나, 그 상소와 초사가 구절구절 상반됨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절(情節)은 엄하게 반문(盤問)을 더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죄인 이의연을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김시빈(金始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이제 탕평(蕩平)의 다스림을 힘쓰시니, 바로 혁연(赫然)하게 하교(下敎)하시어 정계(定界)와 한비(限丕)를 명백히 하실 때입니다. 만약 ‘지금부터 앞으로 감히 호역(護逆)하는 자들은 마땅히 역률(逆律)로써 논죄(論罪)하고, 범역(犯逆)하지 않은 자들은 마땅히 재능에 따라 조용(調用)하겠다.’ 하시면, 어진 자들은 등용되는 것을 즐겁게 여길 것이고 불초(不肖)한 자들도 또한 경계를 알 것입니다. 만약 방한(防限)을 엄히 세우지 않고 뒤섞어 포용하신다면, 비록 호역(護逆)하는 무리라 하더라도 호당(護黨)하는 죄과(罪科)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혹 말감(末減)의 율(律)을 베풀거나 정형(正刑)하지 않는다면, 윤의(倫義)를 알지 못하는 무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 탐시(探試)하는 부류가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역(護逆)의 죄를 밝게 바루는 것과 호역에 대한 방비를 엄히 세우는 것이 진실로 왕법(王法)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하물며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한 말은 최보(崔補)의 말과 하나의 원본(原本)에서 인쇄해 낸 듯하여 그 죄가 똑같은데, 누구는 죄주고 누구는 죄주지 않는다면, 더욱 뒤죽박죽으로 귀착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빨리 채응복을 절도(絶島)에 투비(投畀)하소서. 지난번에 대계(臺啓)로 인해 김일경(金一鏡)이 찬(撰)한 교문(敎文)을 개찬(改撰)하라는 명(命)이 있었습니다. 대저 김일경이 인용한 문자(文字)는 흉패(凶悖)하니, 진실로 일각이라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나, 다만 생각하건대, 김일경은 지금 잡혀오고 있는 중이어서 아직 정죄(正罪)하지 않았고, 또 교문(敎文)은 선조(先朝)의 왕언(王言)이니 지레 먼저 개찬하는 것은 사체로 헤아려 보아 끝내 걸리는 단서가 있습니다. 채응복의 상소가 이 일을 논하고 있는데, 비록 협잡(挾雜)의 태도가 드러나게 있다 하더라도 그 이른바 ‘왕법(王法)을 먼저 바룬 뒤에 개찬을 명하시라는 말’은 옳습니다. 흉얼(凶孼)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하여 채취(採取)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잠시 개찬(改撰)하라는 명을 멈추시고 김일경을 국문하는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예문관(藝文館)에서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교문(敎文)의 일은 네 말이 옳다.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교문(敎文)을 이제 와서 개찬(改撰)하는데, 대행조(大行朝)의 교명(敎命)으로 할 수는 없으니, 당저(當宁)의 교명(敎命)으로 찬(撰)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시빈(金始鑌)의 상소가 옳다. 김일경을 국문하는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영상(領相)이 진달한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28일 무진

홍문관 교리 이거원(李巨源)과 수찬 이진수(李眞洙)를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지난번 복역(覆逆)한 승지(承旨)가 이미 삭직(削職)되었으니, 애초에 영구(營救)한 사람을 체차(遞差)로만 그칠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영의정 이광자(李光佐) 등이 발인(發靷) 때 능소(陵所)에 따라가겠다는 명을 정침(停寢)할 것을 누누이 청하여 천백 마디의 말을 하며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산(因山)이 이미 가까이 닥쳤으니, 내 마음은 새로운 듯하다. 만약 가지 않으면 정리(情理)가 망극(罔極)하고, 내가 자봉(自奉)함이 매우 간략하게 된다. 비록 엄동(嚴冬)이라 할지라도 일찍이 이엄(耳俺)278)  을 쓰지 않았고, 근래 풍속(風俗)이 사치스러워 내 나이의 사람들은 털옷을 입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나는 일찍이 털옷을 입어 본 적이 없다. 평상시에 배양(培養)한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손상(損傷)될 염려가 있겠느냐?"
하였다. 이광좌 등이 힘써 청했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아뢰기를,
"산릉(山陵) 원두(園頭)279)                  의 일이 기민(畿民)의 고질적인 폐가 될까 염려하여 이미 변통(變通)이 있었기 때문에 수박 1개의 가미(價米) 3두(斗), 참외 1개의 가미 5승, 하루에 바치는 김치의 가전(價錢) 2냥(兩)을 호조(戶曹)에서 원두군(園頭軍) 등에게 갖가지 방법으로 추이(推移)해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참외·수박은 두 배의 값으로, 김치값은 전번과 비교해 더 후하게 쳐주니, 별감(別監) 등이 모두 값을 받고 진배(進拜)하기를 자원하였으므로, 일찍이 그 무리들이 담당하던 역(役)을 그대로 맡게 하는 것이 또한 불가한 것이 없겠고, 여러 사람의 의논도 모두 편하다고 하니, 이에 의거해 시행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집의(執義) 김중희(金重熙)가 이제 막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부임(赴任)하였는데, 대직(臺職)에 이배(移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직에 제배(除拜)된 자가 또한 외직(外職)에 잉임(仍任)하는 규례가 있는가?"
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아래에서 감히 청할 수 없으니, 오직 처분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대각(臺閣)은 체모(體貌)가 무거우니, 어찌 잉임할 수 있겠습니까? 집의는 인산(因山) 때의 봉폐관(封閉官)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망(前望)을 다시 들여오라 하여 이정걸(李廷傑)에 낙점(落點)하였다.

 

금부(禁府)에서 이의연(李義淵)을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조최수(趙最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 임인년280)   여름에 신이 외람되게도 대지(臺地)를 더럽히면서 김일경(金一鏡)을 논박하고자 탄핵하는 글을 소매에 넣고 대각(臺閣)으로 갔는데, 채 발계(發啓)하기도 전에 신필회(申弼誨)의 저격(沮擊)하는 글을 만나 낭패를 면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에 뭇사람들의 비난과 미움을 받았고, 탄론(彈論)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김일경의 도리어 꾸짖는 말이 재차 삼차 이르렀는데, 지금와서 김일경에게 무슨 고자(顧藉)할 것이 있다고 성죄(聖罪)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진실로 당한 바가 비상(非常)하여 감히 삼사(三司)로서 스스로 처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네가 김일경을 탄핵했던 일을 가상히 여기니, 너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에게 이르기를,
"이의연(李義淵)의 초사(招辭)를 보았는가? 이 자는 실성(失性)한 사람이다. 그 초사는 더듬어 잡을 것이 없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국청(鞫廳)의 규례는 지엄하고 또 급하기 때문에 초사를 받은 뒤 한 번 읽어 죄인으로 하여금 듣게 하고 빈 종이에 죄인의 서명을 받는 것이 3백 년 이래의 옛 규례입니다. 그러나 이의연의 경우 그가 반드시 초사(招辭)를 직접 보고자 하며 굳게 고집하고 서명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막중한 국옥(鞫獄)이라 사람들의 말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초사(招辭)를 내보였더니, 그가 ‘내 마음이 풀렸다.’고 하면서 비로소 서명하였습니다. 그 사람됨이 진실로 괴이하고 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의연의 일을 하문(下問)하시니 천의(天意)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문자(文字)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의 상소 가운데 있는 말을 능히 답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남의 사주를 받은 것입니다. 사주한 사람 역시 대행(大行)을 무욕(誣辱)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신이 어찌 적발(摘發)하여 정법(正法)하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만, 사주한 사람을 캐묻는다면 진실로 만연(蔓延)될 염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편당을 지어 배격하는 습속에 조심하여 대행(大行)을 무욕한 죄인에 대해 안치(按治)를 늦추거나 소홀히 한다면, 이는 목이 메인다고 먹는 것을 그만두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대신(大臣)의 뜻을 알고자 하여 물은 것이다. 내가 어찌 사주한 자를 국문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미 물은 뒤에는 일이 매우 난처하니, 잠자리에 들어서 어찌 일찍이 이 때문에 생각하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또 비록 정형(正刑)하지는 못했지만 죽이는 데에 이르렀으니 심히 좋아할 수 있겠는가? 어제 골똘히 생각하여 다시 묻게 하려 하였으나, 물을 만한 단서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형추(刑推)의 청을 윤허한 것이다."
하였다.

 

11월 29일 기사

유생(儒生) 박지혁(朴趾赫)을 부령(富寧)에 유배하였다. 박지혁은 경기(京畿) 사람인데, 기호(畿湖)의 유생을 이끌고 상소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실로 우리 동방의 주자(朱子)입니다. 요(堯)·순(舜) 시대의 군신(君臣)의 뜻을 품고 세도(世道)를 부식(扶植)하였고, 천지(天地)가 뒤집히는 날 대의(大義)를 드러내 밝히었으니, 우리 나라가 금수(禽獸)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빈사(賓師)의 지위에 두시었는데, 우모(訏謨)는 밀물(密勿)했고 계합(契合)은 소융(昭融)하였습니다. 현묘(顯廟)·숙묘(肅廟) 두 성세(聖世)에 이르러 더욱 존대하는 예(禮)를 더하였고,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언찰(諺札)에 이르러 극도에 도달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문도(門徒) 중에서 창을 거꾸로 쥔자가 하늘까지 넘실거리는 화(禍)를 빚어내어 기사년281)  의 변(變)이 있게 하였습니다. 갑술년282)  에 개기(改紀)한 뒤에는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합향(合享)할 것을 특별히 명(命)했으니, 대개 이 서원은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를 철식(腏食)한 곳입니다. 숙묘(肅廟)께서 사림(士林)이 청한 바를 특별히 허락한 것이 어찌 실천한 도(道)가 독실하고, 몸소 참화(慘禍)를 당한 것이 전후로 한결같았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병신년283)   즈음에는 친히 ‘화양 서원(華陽書院)’이란 네 글자를 쓰시고 특별히 근시(近侍)를 보내 송시열을 철향(腏享)하는 곳에 걸고 제사하게 하셨으며, 이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시기를, ‘인주(人主)가 어진이를 받드는 것은 지성(至誠)에서 나오는 것이니, 또한 선비의 추향(趨向)을 정(定)하고 사설(邪說)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하시고, 이 하교를 새겨서 함께 걸게 하셨습니다.
또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대리(代理)하시던 초기에 하교하시기를, ‘근래의 일은 처분이 정해졌고 시비(是非)가 분명해졌으니, 백세(百世)에 의혹되지 않으리라.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되니, 돌아보건대 중대하지 않은가? 내 뜻을 너는 따라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셨으니, 무릇 조금이라도 이륜(彛倫)을 지키는 성품이 있고 약간이나마 부자 군신(父子君臣)의 윤리를 아는 자라면, 그 누가 감히 훼척(毁斥)·배패(背悖)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직 저 황욱(黃昱)·김범갑(金范甲)의 무리가 이에 감히 선어(仙馭)가 빈천(賓天)하신 뒤 흉얼(凶孼)들에게 구사(驅使)되는 것을 달게 여긴 나머지 무리를 지어 일어나 날뛰며 말도 안되고 사리에 가깝지도 않은 말을 부회(傅會)하여 억지로 삼조(三朝)에서 존례(尊禮)하던 선정(先正)에게 더하고, 숙묘의 유훈(遺訓)을 드러내어 배척해 감히 훼손할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광좌의 무리가 입시(入侍)하여 근거없는 말로 심지어, ‘병신년284)  의 대처분(大處分)은 성고(聖考)의 본의(本意)가 아니었다.’ 하고, 졸지에 도봉 서원의 조두(俎豆)를 철거하고 말았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또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는 송시열의 적전(嫡傳)이고 울연히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는데, 매번 숙묘의 총애를 입어 심지어 온궁(溫宮)에서 사대(賜對)하시어 친히 손을 쥐며 천어(天語)가 간절하기까지 했으니, 이는 실로 천고(千古)에 듣지 못한 은례(恩禮)였습니다.
그런데 역적 신면(申冕)의 손자로 신치운(申致雲)이라 이름하는 자가 흉당(凶黨)에 빌붙어 대대로 그 악(惡)을 이루어 허구 날조하며 무욕(誣辱)하되 다시는 여지(餘地)를 남기지 않더니,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무리들이 두 선정(先正)에게 감심(甘心)하고자 한 것은 대개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숙묘에게 원독(怨毒)한 마음을 부리려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을 위해 보복하려는 것입니다. 대개 윤선거는 강도(江都)의 노란(虜亂) 때 김익겸(金益兼)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죽기를 약속하고, 심지어 ‘고인(古人)은 난(亂)에 임하여 먼저 처자(妻子)를 죽였다.’ 하고 손으로 아이 밴 아내까지 목졸라 죽였는데, 무릇 여러 사람들이 자살한 뒤에 이르러 윤선거만 유독 투생(偸生)285)  하여 선복(宣卜)이라 이름을 고치고 진원군(珍原君)의 길마잡이가 되어 달아났던 것입니다.
돌아와서는 주자(朱子)를 함께 공박하고 효묘(孝廟)를 무욕한 역적 윤휴(尹鑴)와 심복(心腹)의 관계를 맺어 몰래 서척(書尺)286)  를 통하여 효묘를 기무(譏誣)하되, 심지어 ‘강왕(康王)287)  이 실제 군전(軍前)에 있었다’, ‘구천(句踐)288)  은 속이고, 연광(延廣)289)  은 미쳤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윤증은 또 그 아비가 죽지 않은 것이 충분한 도리(道理)라고 여기고 사국(史局)에 글을 보내어 무친(誣親)하기를 꺼리지 않다가 끝내는 아비로 섬기는 곳에다 창을 거꾸로 쥐고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숙묘께서 엄한 말씀으로 준엄하게 배척하신 까닭이며, 심지어 윤선거·윤증에게 추탈(追奪)·철원(撤院)하는 법을 베푸신 까닭이었습니다. 오늘날 흉도(凶徒)가 우리 숙묘의 유훈(遺訓)을 훼기(毁棄)한 것도 역시 윤선거·윤증의 무부 무군(無父無君)의 가법(家法)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군흉(群凶)들의 부도(不道)한 죄를 바루시고 이어 유사(攸司)에 명하시어 빨리 복향(復享)하고 직첩(職牒)을 돌려주는 법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이의연(李義淵)은 참으로 시대를 근심하는 강개(慷慨)한 선비인데, 간흉(奸凶)들이 일제히 일어나 번갈아가며 죄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조태억(趙泰億)은 돌입(突入)하여 근거없는 말로 협박하였고, 권익관(權益寬)·이명언(李明彦)에 이르러서는 전하의 몸에 미루어 올려 공공연하게 무욕(誣辱)하되, 전하를 윤상(倫常)을 알지 못하는 지경으로 밀어버렸습니다. 또 감히 정책의 공(功)을 덕(德)으로 여기는 데로 돌려 용서하는 과목(科目)이 있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더욱 통탄할 만한 것은 박필몽(朴弼夢)·이거원(李巨源)·서종하(徐宗厦)·윤용(尹容) 등이 다만 당(黨)을 비호하는 마음을 품은 채 성궁(聖躬)이 무욕당하는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여 이에 이치에 가깝지 않은 말로 군부(君父)를 협지(脅持)한 것입니다. ‘종무(鍾巫)’·‘접혈(蹀血)’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실로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인데, 저 유시모(柳時模)는 자신이 대지(臺地)에 있으면서 감히 신구(伸救)할 계책을 내어 ‘출처(出處)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로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비호하며 그 죄를 가리고자 하였으니, 역적 유시모의 죄는 김일경과 그리 다름이 없습니다. 먼 외읍(外邑)으로 출보(黜補)한 것도 실로 관대한 은전(恩典)인데, 저 조태억은 ‘모자(母子)가 서로 헤어진다.’는 말로 영구(營救)해 마지않아 끝내 고을을 바꾸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통탄스럽습니다. 지난날 민진원(閔鎭遠)이 방석(放釋)될 때 ‘선후(先后)의 혼령이 반드시 측연(惻然)하게 여기실 것이다.’라고 하교하시자, 역적 윤회(尹會)는 성교(聖敎)의 말뜻과는 반대로 이에 ‘선후(先后)께서는 반드시 통렬히 미워하실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글에 썼습니다.
심적(心跡)을 따져보건대,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나, 조정에 가득한 신료(臣僚)들 중 한 마디의 공의(公議)도 없었습니다. 역적 유시모가 출보(出補)될 때에 이르러서 그 모자(母子)가 서로 이별하는 가련함을 들었으니, 저 조태억이 만약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동기간(同己間)의 정(情)을 생각해 보고 부부인(府夫人)의 정경(情景)을 추서(推恕)하였다면, 유시모의 어미에 비해 경중(輕重)이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아아! 이광좌의 무리는 숙묘의 병신년 처분을 선왕(先王)의 본뜻이 아닌 것으로 돌렸으니, 어찌하여 이광좌에게 이의연의 율(律)을 먼저 더하지 아니하시고, 단지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한 일개 이의연만 이런 음형(陰刑)과 극률(極律)에 걸려들게 하십니까? 신(臣)은 아마도 재앙을 그치게 하는 일이 도리어 재앙을 초래하는 단서가 될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건단(乾斷)을 널리 휘두르셔서 조태억·권익관·이언명 등 여러 사람의 죄를 바로잡으시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서 하늘의 견책(譴責)에 답하소서."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박지혁의 상소는 말뜻이 흉패(凶悖)하기가 채응복(蔡膺福)보다 백배나 더합니다. 청컨대, 한 번 예람(睿覽)을 거치신 뒤 명백하게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박지혁 등이 감히 이의연을 비호하고 대신(大臣)을 무욕하였으니,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이날 경기(京畿)·전라(全羅)·충청(忠淸) 등 삼도(三道)의 유생(儒生) 송상광(宋相光)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원향(院享)을 환복(還復)하기를 청하고,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의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국조(國朝)의 어첩(御牒)을 지금 바야흐로 개수(改修)하고 있는데, 경자년290)  에 개수할 때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휘호(徽號)인 ‘광렬(光烈)’의 ‘광(光)’자를 ‘원(元)’자로 썼습니다. 그때 미처 상세히 살피지 못한 소치이나, 막중한 어첩을 칼로 긁어내고 다시 쓸 수는 없습니다. 이 한 장(張)은 따로 개수하여 새 어첩과 일시(一時)에 봉안(奉安)하고 옛 장(張)은 마땅히 불살라야 하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불사른 전례가 있으면 불사르고, 그렇지 않으면 세초(洗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언(正言)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여 스스로 어린 나이로 등제(登第)한 불행을 진달하고, 영원히 사적(仕籍)에서 깎아버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이일제(李日躋)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날 장령(掌令) 윤동수(尹東洙)가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도신(道臣)이 공문(公文)을 주고받는 사이에 말이 조롱하고 모욕하는데 관계되었으므로, 신이 과연 추고(推考)를 청하는 계사(啓辭)를 내었던 것입니다. 대개 윤동수는 곧 조가(朝家)에서 예우(禮遇)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도신(道臣)이 하나의 자질구레한 일로 인해 고자(顧藉)하지 않고 마침내 유자(儒者)를 대우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게 되었으니, 유신(儒臣)이 이로 인해 신(臣)을 탄핵할 줄은 진실로 생각이 미친 바가 아니었습니다. 신이 어찌 일찍이 식려(式閭)291)  ·설례(設醴)292)  와 옹수(擁篲)293)  ·절절(折節)294)  ’의 예(禮)를 가지고 같은 조목으로 유신의 말처럼 아울러 조정(朝廷)과 궁부(宮府) 사이에 논하였단 말입니까? 신의 말이 비록 오활하지만, 그 뜻은 유자(儒者)를 예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청했던 바는 한 방백(方伯)을 문비(問備)하는 박벌(薄罰)에 불과하였고, 그 본래의 일을 따져본다면 단지 관사(官師)의 서로 경계하는 상례(常例)였을 뿐입니다. 어찌 크게 놀라고 조금 괴이하게 여기는 데 이르렀겠습니까? 그러나 옥서(玉署)의 연차(聯箚)는 사체(事體)가 본디 크고 대신(臺臣)이 논박(論駁)하여 체직(遞職)함은 거조(擧措)가 또한 무거운데도 돌보지 않았으니, 신은 진실로 돌아볼 것이 없겠습니다만, 유독 청조(淸朝)에서 대각(臺閣)을 무겁게 여기는 뜻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사직(辭職)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유생(儒生) 정세갑(鄭世甲)이 상소(上疏)하여, ‘득인무본(得人務本)’ 네 글자를 근본으로 삼아 몇 만 마디나 되는 말을 하였다. 과장(科場)에 사륙문(四六文)을 내지 말고 오로지 부(賦)와 책(策)을 위주로 할 것을 청하고, 양역(良役)은 군포(軍布)를 반으로 감하고 호전(戶錢)을 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였다.

 

좌의정 유봉휘(柳鳳輝)가 대락 스스로를 변명하는 말을 올리고, 이어 아뢰기를,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이 박지혁(朴趾赫)의 상소 때문에 서명(胥名)하고 있습니다. 옛부터 국가에서 선조(先朝)의 일을 뒤에 고친 적이 많았으니, 요(堯)임금 때 곤(鯀)을 부리다가 순(舜)임금 때 곤을 죽였으며, 송조(宋朝)에도 또한 ‘선왕(先王)의 본래 뜻이 아니다.’라는 등의 문자(文字)가 있었던 것입니다. 도봉 서원(道峯書院)에 송시열(宋時烈)을 배향(配享)할 적에 고(故) 상신(相臣) 윤지선(尹趾善)이 상소하여 그 불가함을 논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수백 년 동안 홀로 향사(享祀)하던 곳에 추향(追享)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숙종께서 특별히 환수(還收)할 것을 명하셨는데, 과적(科賊) 이성휘(李聖輝)가 원임(院任)으로서 미리 위판(位版)을 만들어 두었다가 하룻밤 사이에 급급하게 봉안(奉安)하였음을 승지에게 알려 입달(入達)하게 하였으므로, 숙종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그대로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 그대로 아울러 향사하게 되었는데, 임인년295)  에 출향(黜享)할 때 신은 영상이 진달(陳達)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하나, ‘선왕의 본래 뜻이 아니었다.’는 말은 옛날에도 또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의연(李義淵)에 이르러서는 신축년296)   이후의 일을 선왕의 본래의 뜻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윗사람을 무욕(誣辱)한 부도(不道)한 데로 귀착되는 까닭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소신(小臣)이 바야흐로 국좌(鞫坐)에 나아가고 있으니, 내일 은전(殷奠)에 진참(進參)하는 것은 미안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은전은 하룻밤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 잠시 개좌(開坐)하지 말라. 내일이 대제(大祭)의 재계일(齋戒日)인가?"
하였는데, 유봉휘가 말하기를,
"국좌는 재계(齋戒)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재계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개좌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봉휘가 말하기를,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감히 조정(朝廷)을 텅 비게 만들 계책을 내어 이의연을 사주하였는데, 이의연은 이미 무상(誣上)하는 말을 소장(疏章)에 올렸습니다. 수상(首相)이 곧바로 정형(正刑)을 청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정형(正刑)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랴? 그러나 이와 같은 무리를 어찌 죄다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진망(李眞望)·이덕수(李德壽)를 실록 당상(實錄堂上)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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