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경오
임금이 승지(承旨) 최종주(崔宗周)에게 명하여 전옥서(典獄署)로 달려가 가벼운 죄수 19명을 소석(疏釋)하게 하였다.
옷이 엷은 군사(軍士)에게 유의(襦衣)를 제급(題給)하라고 명하였는데, 모두 3백 47명이었다.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와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광좌가 진달하기를,
"대신(大臣)을 침척(侵斥)한 상소는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하교를 비록 다행하게도 도로 거두어들이셨습니다만, 대신이 되어 남의 말을 막는다면 능히 신자(臣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박지혁(朴趾赫)의 상소에는 이미 신(臣) 등을 허구 날조하여 무함하는 말이 있었는데, 비록 이의연(李義淵)을 영호(營護)하였다 하여 투비(投畀)한다 하나, 이것은 상소를 봉입하지 말라는 하교와 동일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건극(建極)하신 뒤에야 인심(人心)을 감화(感化)시킬 수 있는 법이니, 죄(罪)로써 아랫사람을 제어한다면 아래에서는 죄를 받을 뿐이고 그 마음으로는 불복(不服)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산릉(山陵)에 따라가겠다는 명(命)을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광좌가 진달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을 나래(拿來)하는 도사(都事)가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곳은 강진(康津)의 선소(船所)와 11일 길이고, 죄인을 나래할 때는 날짜를 갑절로 쳐서 가는데, 지금 이미 12일이 되었으나 여태 오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나래하는 도사는 김일경을 나래한 뒤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 역시 늦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신의 말이 또한 이와 같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태억이 말하기를,
"신은 교문(敎文)에 대해 감히 간섭할 수 없습니다만, 상소 가운데 있는 ‘종무(鍾巫)’ 등의 문자(文字)에 대해 소비(疏批)를 아직 내리시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 사람중에는 아는 자도 있고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문 가운데도 또한 ‘종무’란 두 글자가 있는데, 처음에는 ‘거의 노휘(魯翬)297) ·종무의 놀라운 기틀을 답습한 데 가까왔고, 또한 조고(趙高)의 사구(沙丘)의 남은 술수298) 를 이루었다’고 하여 입계(入啓)해 내렸다가, 중간에는 ‘종무’를 인용했던 한 구절을 ‘거의 또 진돈(晉敦)·석두(石頭)의 놀라운 기틀’이라고 고쳐 개부표(改付標)하여 답계(踏啓)해 내렸으며, 또 전체 구절을 ‘진사(秦斯)는 조고(趙高)의 깊은 사귐에 의탁했고 진돈(晉敦)은 전봉(錢鳳)의 협조가 있었다.’로 고쳐 개부표하여 답계해 내렸습니다. ‘종무’는 이미 상소 가운데 있기 때문에 문목(問目) 가운데 넣었으나, ‘사구’는 고치기 전의 문자로서 개부표 가운데 있어 반교(頒敎)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구’라는 두 글자를 문목 가운데 넣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더욱 놀랍고 패리(悖理)하니, 문목 가운데 덧붙여 넣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홍지중(洪致中)·이진망(李眞望)을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로, 윤유(尹游)를 부제조(副提調)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본조(本朝)의 주사 제조(籌司提調)는 송(宋)나라 제도의 지추밀사(知樞密事)와 같고, 부제조는 곧 첨서 추밀(簽書樞密)의 직임이다. 부제조의 선임(選任)은 더욱 중요한데, 이광좌(李光佐)가 윤유로 차하(差下)하니, 식자(識者)들이 적이 한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34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본조(本朝)의 주사 제조(籌司提調)는 송(宋)나라 제도의 지추밀사(知樞密事)와 같고, 부제조는 곧 첨서 추밀(簽書樞密)의 직임이다. 부제조의 선임(選任)은 더욱 중요한데, 이광좌(李光佐)가 윤유로 차하(差下)하니, 식자(識者)들이 적이 한탄하였다."
12월 2일 신미
하교하기를,
"어제 교문(敎文)을 보았더니 말뜻이 흉악하고 패리(悖理)하여 끝이 없었다. 이것은 장주(章秦)에 견줄 것이 아닌데도, 패초(牌招)를 받고 예궐(詣闕)하여 입으로 그 초본(草本)을 불렀으니, 옛말에 ‘진실로 마음속에 있으면 입에 나오게 된다.’고 한 것은 바로 김일경(金一鏡)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마음이 없었겠습니까?’라고 한 것 때문에 유시모(柳時模)는 접때 이미 외직(外職)에 보임하였으니, 대신(臺臣)이 된 자가 어찌 고자(顧藉)하는 마음이 있겠는가? 그런데 며칠 전에 대계(臺啓) 가운데 마음이 있고 없음을 나누어 말한 자가 있었으니, 이미 무엄한 데 관계된다. 더욱이 정동후(鄭東後)는 복역(覆逆)한 승지와 함께 역적을 비호한 것이 동일했는데도 단지 삭직(削職)만을 청하였고, 한쪽은 문출(門黜)할 것을 더 청하였다. 이쪽을 비호하고 저쪽을 배척하였으니 어찌 공심(公心)이 있겠으며, 한 계달(啓達) 안에서 현저하게 경중(輕重)을 보이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한 세상을 복종시킬 수 있으랴? 곧은 자를 들어 굽은 자 위에 두라는 것이 곧 성인(聖人)의 말씀이었다. 그날 전계(傳啓)한 대신(臺臣)을 우선 체차(遞差)하라."
하고, 이어 김시빈(金始鑌)을 무산 부사(茂山府使)에 제수(除授)하라고 명했다가 곧 무산은 통정(通政)의 자리라 하여 명천(明川)으로 바꾸어 제수하였다.
김흥경(金興慶)을 기용하여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삼고, 김동필(金東弼)을 발탁하여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윤순(尹淳)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윤광익(尹光益)을 교리(校理)로, 신택(申)을 장령(掌令)으로, 최도장(崔道章)을 승지(承旨)로 삼았는데, 최도장은 무신(武臣)이다. 김흥경은 신축년299) 의 구신(舊臣)으로서 맨먼저 근밀(近密)의 명(命)을 받았으니, 대개 소장(消長)의 조짐이었다. 그러나 이때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웠기 때문에 임금 또한 갑자기 드러내 놓고 흉도(凶徒)를 배척해 물리친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흥경은 구신(舊臣) 가운데 흉도가 심히 꺼리지 않았기 때문에 맨먼저 폐기(廢棄)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기용한 것이다.
전(前)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지극한 어짊과 성대한 덕으로 조종(祖宗)의 아름다운 규식(規式)을 준수하시어 우리 전하께 3백 년의 큰 기업(基業)을 전수(傳授)하시었으니, 광명 정대한 거조가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났는데, 일종의 사의(邪議)가 처음부터 싹터 나오고 갖가지 변괴(變怪)가 동일한 궤도(軌度)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권익관(權益寬)·이명언(李明彦)·윤용(尹容)의 무리가 서로 잇따라 투소(投疏)하여 흉악한 말과 패리(悖理)한 설(說)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고, ‘원립(援立)’이니 ‘수립(樹立)’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이 몹시 패리(悖理)하기 짝이 없었으니, 그 협박하고 무오(誣汚)함이 어찌 이에 이르렀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대신(大臣)이 ‘정책 국로(定策國老)’니 ‘문생 천자(門生天子)’니 하는 말을 진달하였다고 하는데, ‘국로’니 ‘문생’이니 하는 것은 곧 당조(唐朝)가 혼란스럽던 날 환관의 무리들이 무능한 임금을 원립(援立)했던 일입니다. 어찌 감히 이 따위의 말을 지척의 전석(前席)에서 끌어다 비유하고 제기하여 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장차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한 데 이를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저절로 뼈가 시퍼래지고 마음이 떨립니다. 아! 역적 김일경의 일이 있었던 이래의 일을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보소서. 조정 신하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군부(君父)를 위해 토역(討逆)을 청하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근밀(近密)에 가까이 있는 자가 한 번 영호(營護)하는 논의를 꺼내자, 유시모(柳時模)가 ‘출처(出處)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로 제멋대로 미혹시키고, 김시빈(金始鑌)이 마음이 있었느니 없었느니 하면서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로 올리고 내리고 이리 번쩍 저리 번쩍 반복하여 현란(眩亂)시켰으니, 하나는 성상의 뜻을 탐시(探試)하는 계책이었고, 하나는 역적 김일경의 핑계대는 바탕이었습니다. 아아! 통탄스럽습니다. 저 김시빈이란 자는 기사년300) 의 여얼(餘孼)로서 시의(時議)에 투합(投合)하여 정승의 문하에 들락거리면서 그 턱으로 하는 지시를 받아 창귀(倀鬼)가 되었으니, 그 간악한 정상과 사특한 꼴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아첨하여 힘을 다 바친 것은 본디 족히 깊이 책망할 것도 없지만, 전하의 명철(明哲)하시고 성스러움으로도 도리어 그 정상을 간파해 내지 못하시니, 신은 적이 개탄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역적 김일경을 국문(鞫問)하라 명하셨으니, 처분(處分)이 엄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후로 신구(伸救)하는 무리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데도 능히 제어하지 못하니,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역적을 비호하는 무리가 범연히 ‘당(黨)을 비호하는 것’이라며 배척해도 박벌(薄罰)이 불과 삭직(削職)·파직(罷職)에만 그치니, 이러고도 간악한 정상을 징계하여 역당(逆黨)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국청 죄인(鞫廳罪人)을 나래(拿來)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엄중(嚴重)하니, 밤낮으로 길을 갑절로 하여 가는 것이 곧 바뀔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역적 김일경이 배소(配所)로 갈 때에는 관망(觀望)하면서 미적거리다가 느릿느릿 길을 떠났고, 나국(拿鞫)하라는 명(命)이 내려졌음에도 열흘이 넘도록 근기(近畿)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행로(行路)에서 모두 전하고 나라 사람들이 말이 떠들썩하게 끓어올라 간사한 정상이 장차 드러나게 되었는데, 연주(筵奏)가 먼저 나와 자취를 덮고 미봉하려는 계책을 꾸몄으니, 그 마음속으로 꾸민 바를 구명(究明)하건대 그 누구를 속일 수 있겠습니까? 금오(金吾)의 여러 당상(堂上)들이 과연 능히 법례(法例)에 의거하여 날짜와 기한을 단단히 정했다면 반드시 이처럼 미적미적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은 그 사이에 심한 모계(謀計)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전하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음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무릇 역적 김일경에게 관계된 일은 일마다 이렇고 말마다 이러합니다. 그 흉역(凶逆)의 불길이 기세 좋게 타오르고 당여(黨與)가 제멋대로 구는 것이 임금의 명령을 능히 저지하게 만들었으니, 비록 나래(拿來)한 뒤라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즉시 신국(訊鞫)하여 전형(典刑)을 명백하게 바룰 것을 보장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이 무리들의 역적을 비호하는 죄를 하나하나 무겁게 감률(勘律)하지 않으신다면, 비록 매일 명지(明旨)를 내리셔도 반드시 역적을 치죄(治罪)하는 날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복역(覆逆)한 승지(承旨)와 영호(營護)한 옥당(玉堂)을, 김시빈(金始鑌) 그리고 금오(金吾)의 당랑(堂郞)과 한결같이 아울러 찬축(竄逐)한 뒤에는 국적(國賊)을 토죄(討罪)할 수 있고, 임금의 무욕(誣辱)을 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박윤동(朴胤東)이 제진(製進)한 만사(輓詞)의 한 구절 명의(命意)가 음참(陰慘)하고 쓴 말이 헤아리기 어려워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마음에 싹틔우고 입에 꺼낼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빨리 구문(究問)을 더하여 그 죄를 쾌히 바로잡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정동후(鄭東後)를 삭출(削黜)하자는 계사(啓辭)에 이르러서는 놀랍고 통분한 것이 있습니다. 정동후가 대신(大臣)의 토역(討逆)하는 책임을 논한 것은 삼사(三司)보다 더욱 무거웠는데, 더러운 몸으로 삼사가 이미 견책을 받아 파면된 뒤에 행공(行公)한 것이 사리(事理)에 마땅하겠습니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 차자(箚子)의 계사(啓辭)로 보더라도 ‘죽어도 여죄(餘罪)가 있으며 드러낼 얼굴이 없다.’고 하였는데, 전하께서 국사(鞫事)를 저패(沮敗)시킨다고 하교(下敎)하셨으니, 실로 뜻밖입니다. 앞서 국옥(鞫獄)이 한창 벌어지던 날의 일을 가지고 대신(大臣)을 논박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어찌 국사(鞫事)가 장차 설행(設行)될 것이라 하여 마땅히 논해야 할 일을 논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더욱 가소로운 것은 사람들이 그 역적임을 고(告)했는데도, 도리어 스스로 그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다가 잠시 서명(胥命)하여 요군(要君)301) 하는 계책을 내니, 여대(輿儓)와 하천(下賤)도 입을 가리고 몰래 웃습니다. 염우(廉隅)란 한 절조를 어찌 이 사람에게 책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상소를 다 보고 나서 하교하기를,
"아아! 붕당(朋黨)이 자심(滋甚)하고 의리(義理)가 캄캄하게 막힘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가 장차 나라꼴이 되겠는가? 대신(大臣)의 나라를 위한 마음과 공정(公正)함을 유지하려는 뜻을 내가 이미 환하게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복(嗣服)한 초기에 특별히 정승에 제배(除拜)하고 의지했던 것이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것을 ‘공(公)’이라 하니, 그른 것을 물리친 것이 어찌 불가하랴? 요사이 장주(章奏)는 정신(廷臣)을 침척(侵斥)할 경우 먼저 대신(大臣)을 들어 조금도 고자(顧藉)하지 않는다. 대신에게 과실이 있다면 말해서 고치는 것이 바로 또한 동인(同寅)의 뜻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반드시 먼저 대신을 침척하고 무욕(誣辱)한 뒤에야 정신을 쫓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따위 올바르지 못한 태도를 나는 보고 싶지 않다."
하였다. 이광좌(李光佐)·유봉휘(柳鳳輝)·조태억(趙泰億)이 의금부(義禁府)의 문밖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 대명하지 말게 하였다. 이광좌가 덧붙여 청하기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김일경이 근기(近畿)에서 머무른 일을 엄하게 핵실(覈實)하게 하소서."
하고, 조태억은 덧붙여 말하기를,
"이의연(李義淵)의 상소는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전하께 전수(傳授)하신 성의(聖意)를 완전히 무시한 채 ‘대행 대왕의 전수’라 하지 않고, 곧 ‘고명 대신(顧命大臣)이 동조(東朝)의 전교(傳敎)를 받들어 저위(儲位)를 책명(策命)하였다.’고 하여 현저하게 공(功)을 대신에게 돌렸으니, 너무나도 불경(不敬)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토죄(討罪)를 청하는 글에다 ‘대행 대왕께서 불행하게도 후사(後嗣)가 없으셨는데, 우리 나라의 고사(故事)로 말한다면, 인종(仁宗)께서 후사가 없으셔서 명종(明宗)께서 계승하셨으니, 비록 아래서 건청(建請)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천의(天意)와 인심(人心)이 전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한(漢)나라 때 두헌(竇憲)의 무리가 정책한 것을 스스로 공(功)으로 삼았고, 당(唐)나라 때 환관(宦官)들에게 심지어 「정책 국로(定策國老)」니 「문생 천자(門生天子)」니 하는 이름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만, 인군(人君)의 자리는 천의와 인심이 귀착되는 바이니, 신자(臣子)가 어찌 감히 하늘의 공(功)을 탐하여 자기의 힘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무식한 무리들이 감히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뜻은 국가를 전수한 단정함을 밝히는 것이었지, 한나라와 당나라 때 정책을 스스로 공으로 여겨 불경(不敬)·무륜(無倫)을 저질렀던 자들처럼 이의연을 배척하며 신하에게 공을 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이 말을 혼란스러웠던 날에 끌어다 비긴 것이라 하니, 그것이 과연 말이나 되겠습니까?
하고, 또 김시빈(金始鑌)은 평소 친한 사이가 아니고 호조(戶曹)의 낭관(郞官)으로 있을 때 단지 공무(公務)로 인하여 한 번 보았었다고 변명하였다.
내의 제조(內醫提調) 이조(李肇)가 구대(求對)하여 능행(陵行)을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고, 또 소선(素膳)을 봉진(封進)하라는 명을 정침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또 ‘승선(承宣)을 통의(通擬)하지 않아 추문(推問)받은 일’로 진달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군함(軍銜)에 붙였으니, 마땅히 승선에 의망(擬望)해야 한다.’고 하교하셨으나, 승선의 지망(地望)은 다른 직임에 비해 절로 구별이 있어 가부(可否)에 본디 물의(物議)가 있으므로 자기의 견해를 자임(自任)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상(堂上)이 죄다 승선의 망(望)에 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마는, 그 가운데 이미 승선을 거친 무리를 한 사람도 의망에 넣지 아니한 것은 선조(先朝)의 정목(政目)에도 이러한 일이 없었다. 저 무리들을 시종일관 마땅히 버려야만 하겠는가? 내가 만약 위력(威力)으로 하고자 한다면 삼사(三司) 또한 어찌 통의(通擬)하지 못하게 하겠는가? 나라에서 사람을 쓰는 도리로 보아 막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이조가 말하기를,
"지적하여 의논하는 것이 무거운 자는 가볍게 의논할 수 없지만, 가벼운 자는 융통성 있게 두루 쓰고자 합니다. 다만 통의한 뒤에 조저(朝著)가 조용하지 아니하면, 한갓 시끄러움만 일으키는 데로 돌아가 조정을 괴란(壞亂)시킬까 두려우니, 한 두 사람이면 족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 투소(投疏)한 사람을 가령 언지(言地)에 둔다 해도 어찌 이보다 더함이 있겠는가? 그 말하는 것이 어찌 벼슬이 있고 없는 데 관계되겠는가?"
하였다.
12월 3일 임신
삼상(三相)에게 별유(別諭)하여 ‘이의천(李倚天)의 소어(疏語)가 놀랍고 패리(悖理)하나, 경(卿) 등의 진췌(盡瘁)302) 하는 마음과 이의천의 무함하고 헐뜯는 말을 내가 환히 알고 있다.’고 하교(下敎)하고, 이어 들어와 분부를 들으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와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명을 받들고 입시(入侍)하자, 임금이 위유(慰諭)하기를,
"내가 대신(大臣)을 의심하지 않고 있음을 경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의천이 상소하여 논한 것이 대신에게는 비록 패론(悖論)이 되겠지만, 김시빈(金始鑌)에게는 그르지 않은 것이다. 저와 같은 무리를 만약 모두 죄준다면 뒷날 일일이 죄주기 어려울 것이고, 말이 공의(公議)에서 나온 경우에는 더욱 죄주기 우려울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 등이 힘써 소선(素膳)의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갑인년303) 과 경자년304) 의 예(例)를 상고해 내어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광좌가 진달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의 일이 나온 뒤로 신 등이 기화(奇貨)가 되어 징토(懲討)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罪)가 큽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만약 고금(古今)의 보통 임금이 일을 처리한 경우를 본다면, 유봉휘(柳鳳輝)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보전(保全)할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교문(敎文) 가운데 ‘척련(戚聯)’이니 ‘내옥(內屋)’이니 하는 따위의 말은 더욱 괴이(怪異)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잡(荒雜)하다. 왕언(王言)의 대찬(代撰)은 마땅히 사실에 의거해야 하는 법인데,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집의(執義) 이정걸(李廷傑)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산릉(山陵)의 앞에 있는 안산(案山)305) 의 백성들의 무덤에 대해, ‘파가기를 원하는 자는 들어주고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는 고휼(顧恤)하며, 그 나머지 오래 된 무덤은 평토(平土)하지 말라.’는 하교(下敎)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생각하건대, 차라리 내년 봄·여름에 파서 옮기는 기간을 넉넉하게 정해 주되, 옮길 수 있는 자는 옮기고 옮기지 못하는 자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도감(都監)에서 총호사(摠護使)에게 물어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2월 4일 계유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2품(二品) 이상을 인솔하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산릉(山陵)에 친히 행행(幸行)하겠다는 명을 정침(停寢)할 것을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왕(帝王)의 효(孝)는 일반 백성들과는 달라 정(情)에 따라 곧장 행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례의(五禮儀)》에 비록 이 예(禮)가 실려 있기는 하지만 열성조(列聖朝)에서 일찍이 행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근심을 머금고 슬픔을 삼키신 지 이제 벌써 다섯 달이고, 아침저녁의 곡전(哭奠)을 몸소 행하지 아니하심이 없었으니, 들녁에서 찬 기운을 쐰다면 어찌 걱정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신(臣) 등이 감히 종사(宗社)를 위한 만전(萬全)의 계책을 하지 않아 옛사람의 견거(牽裾)306) ·단인(斷靷)307) 하던 뜻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하교하기를,
"제왕과 일반 백성은 명분(名分)이 비록 다르지만 효제(孝悌)의 도리는 본래 둘이 아니다. 옛말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가 헤아려 안다.」고 했으니, 경(卿) 등이 어찌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이튿날 세 번 아뢰었으나,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장계(狀啓)하기를,
"장연 부사(長淵府使) 김협(金浹)의 첩정(牒呈)308) 에 ‘11월 22일 밤 자시(子時)에 뇌성(雷聲)이 크게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승지(承旨) 김동필(金東弼)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산릉(山陵)의 아침저녁의 제전(祭奠)과 주다례(晝茶禮)309) 는 수릉관(守陵官)이 전작(奠酌)하고 행례(行禮)하게 하였으나, 삭망제(朔望祭)는 경헌관(京獻官)이 행례하고 수릉관은 배제(陪祭)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상(大祥)·소상(小祥)에는 변제(變除)하는 절차가 있으나 또한 배제하지 못하고, 또 대전관(代奠官)의 경우 또한 단지 전작(奠酌)만 행하고 나가 원래 배제·곡림(哭臨)하는 절차가 없습니다. 그래서 변통(變通)의 타당성 여부를 의논하는 일로 명(命)하신 것이 있었는데,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는, ‘무릇 일이 오래되면 바꾸기 어렵고 가볍게 바꾸어 뒤에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경우 혹 난처한 데 이를 것이니, 예전대로 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라고 하였고, 좌의정 유봉휘(柳鳳輝)는, ‘조가(朝家)의 일은 각기 직장(職掌)이 있습니다. 만약 하례(賀禮) 때라면 여러 집사(執事)가 비록 맡은 바의 일을 끝냈다 하더라도 원래 하례에 참여하는 일이 없습니다. 대전관(代奠官)과 수릉관(守陵官)이 제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서 말미암은 듯하나,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지 않은 바라서 신의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은 ‘승선(承宣)이 진달한 바가 진실로 옳습니다만,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은 바라 진실로 억단(臆斷)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예(禮)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은 일시에 빠뜨려진 것에 불과하다. 이미 그 불가함을 알고 있으니, 변통(變通)이 없을 수 없다. 산릉(山陵)이 삭망(朔望)과 대상(大祥)·소상(小祥) 때의 수릉관(守陵官)은 일체로 배제(陪祭)하고, 대전관(代奠官)은 전작(奠酌)한 뒤 단지 삭망의 은전(殷奠)에만 참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을 의금부(義禁府)에 내렸다. 하교(下敎)하기를,
"아아! 오늘 김일경을 국문(鞫問)하는 것이 어찌 다만 나를 무욕(誣辱)했기 때문이겠는가? 대행조(大行朝)의 성덕(盛德)을 무욕한 것이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약 엄하게 국문하지 않는다면, 윤상(倫常)이 이로부터 멸절(滅絶)될 것이니, 훗날 무슨 면목으로 선왕(先王)의 하늘에 계신 영혼을 뵙겠는가? 이것은 한때의 장주(章奏) 사이의 흉패(凶悖)한 말이 아니라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입에 드러낸 것이니, 그 뜻을 쓴 바가 불을 보듯 환하다. 이것이 내가 이른바 ‘빈전(殯殿)에 울부짖으며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한 까닭이다. 직접 그 마음을 묻고 싶지만 상복(喪服)을 입은 몸이기 때문에 뜻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엄하게 핵실(覈實)하는 것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접때 이의연(李義淵)의 일로 보건대, 공사(供辭)는 몇 구절의 말에 지나지 않았으나, 추안(推案)의 출납은 자연히 지체되었었다. 김일경의 흉패(凶悖)한 사설(辭設)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나, 형신(刑訊)을 청한 뒤는 보통 때와 다르다. 그러니 본부(本府)에서 하도록 하되 그 공초(供招)를 받는 것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국(庭鞫)으로 하라."
하였다. 김일경을 국문하였는데, 김일경은 나이 63세이었다. 묻기를,
"찬(撰)했던 교문(敎文)에, ‘어찌 금정(禁庭)의 접혈(蹀血)을 면했겠는가?’라고 했고, 소사(疏辭)에는, ‘마치 노(魯)나라의 종무(鍾巫)와 같음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또, ‘양기(梁冀)·석현(石顯)에게 종무가 범(犯)했던 것은 있지 않았다.’고 했는데, 접혈·종무는 《춘추(春秋)》 《강목(綱目)》에 쓰여진 곳이 어디인가? 그런데 이에 감히 이 따위의 지극히 흉악하고 패리(悖理)한 문자(文字)를 막중한 대찬(代撰)하는 왕언(王言)에 원용(援用)하였으니, 무욕(誣辱)이 상궁(上躬)에 미쳐 차마 듣지 못할 것이 있고, 대행조(大行朝)의 성덕(盛德)을 무욕한 것 또한 망극(罔極)하였다. 교문(敎文)의 개부표(改付標)한 곳 본문(本文)에, ‘거의 노휘(魯翬)·종무(鍾巫)의 해기(駭機)를 답습했고, 거의 또한 조고(趙高)의 사구(沙丘)의 남은 술수를 이룰 뻔하였다.’고 했고, 소(疏)에는, ‘진(秦)나라의 이사(李斯)·조고(趙高)와 같음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만약 마음속에 간직해 두고 부도(不道)한 것을 쌓아 두지 않았다면 입 밖에 낸 것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그 뜻을 쓴 바가 불을 보듯 환하다. 지극히 흉악한 정절(情節)을 사실대로 직고(直告)하라."
하니, 김일경이 납초(納招)하기를,
"천하(天下)의 일은 사리(事理)를 벗어나지 않으니,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으로 헤아려 보아 그 정실(情實)을 얻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선대왕(先大王)의 알아주심을 받아 은택(恩澤)이 높고 두터웠으므로, 끝없이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마음으로 이에 불길(不吉)한 건성(建成)을 끌어다 우리 선왕(先王)께 견주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숙묘(肅廟)의 아드님이시고 경종(景宗)의 아우님이십니다. 경종께 사속(嗣續)이 있지 아니하였으므로, 선지(先旨)를 준수하여 자성(慈聖)께 품(稟)해서 전하를 책명(策命)하였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앙대(仰戴)하였습니다. 저는 전후로 3년 동안 외람되게도 빈석(賓席)에 있었고, 형관(刑官)이 되었을 때는 인혐(引嫌)하여 체직(遞職)하는 예(例)가 없지 않았으나, 곧 경재(卿宰)들 사이에서 말하기를, ‘춘궁(春宮)은 대조(大朝)와 달라 강연(講筵) 때가 아니면 감히 뵐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예학(睿學)이 고명(高明)하시고 강론(講論)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니, 빈석(賓席)에 들어가 우러러 옥음(玉音)을 들으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그래서 감히 사피(辭避)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하였습니다. 계묘년310) 봄 처음 빈석에 입시하였을 때 성상께서 궁관(宮官)을 돌아보시며 시각(時刻)을 물리라고 명하셨는데, ‘빈객(賓客)의 집이 머니 진시(辰時) 초에 들어온다면 노인이 새벽에 일어나게 되어 반드시 몸을 해치게 될 것이다.’라고 하교하셨으므로, 감격이 골수에 사무쳤습니다. 그래서 이진유에게 말했더니, 이진유가 ‘내가 문의(文義)로 인해 숙묘의 검소한 덕을 춘궁께 우러러 아뢰었는데, 「말이 선조(先朝)에 미치니 저절로 슬픔을 느끼게 된다.」고 하교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흐느끼셨다.’라고 하므로, 제가 이진유에게 ‘우리 이극(貳極)의 인효(仁孝)는 하늘에서 낸 것인데, 밖으로 드러난 것이 이와 같으니 우리들이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눈물을 떨구고 ‘우리 임금과 우리 이극의 효우(孝友)하신 덕(德)은 생각건대 요(堯)·순(舜)·삼대(三代) 이래로 이처럼 성대(盛大)한 경우가 없었다. 두 성인(聖人)께서 계시고 사직(社稷)에 근심할 것이 없으니, 우리 늙은 신하들이 죽기 전에 감격스러움과 다행스러움이 얼마나 지극한가?’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친우(親友)들과 수작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성궁(聖躬)을 침핍(侵逼)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교문(敎文) 가운데 있는 ‘접혈(蹀血)’이라는 문자(文字)는 서한(西漢)의 반고(班固)의 사책(史冊)에 처음 보이는데, 한(漢)나라·당(唐)나라 때 흔히들 썼으며, 사마광(司馬光)은 당(唐)나라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을 논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어(古語)를 인용하여 창졸간에 엮어낼 즈음에, ‘감로(甘露)가 변했을 때 금도(禁塗)의 피를 밟았다[甘露變時禁塗涉血].’란 말을 취해다 쓰려고 《통감(通鑑)》의 이훈(李訓) 정주(鄭註)의 ‘시(時)’자 아래를 열어 보았으나, 끝내 찾을 수가 없었으니, 그 말이 소종기(昭宗記)의 총론(總論)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섭(涉)’자의 경우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단지 ‘수(水)’자 변의 ‘유(流)’·‘섭(涉)’ 두 글자만 생각이 났는데, 재삼 음미해 보고 나서 아닌 줄로 생각하고 이에 ‘섭(涉)’ 자를 본초(本草)에다 썼더니, 어떤 사람이 ‘수(水)’자 변이 아니라 ‘족(足)’자 변이라고 하므로, 마침내 ‘접(蹀)’자로 썼던 것입니다. 얽어낼 때의 일의 정황으로 보건대, 어찌 뜻을 둔 것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한 글자가 잘못된 것에 불과한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지금 만약 ‘접혈(蹀血)은 비록 한나라·당나라 때 익히 쓰던 문자라 하더라도 사마광이 이미 현무문의 변에다 썼다면, 이것은 참으로 망발이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느냐?’라고 한다면 참으로 만 번 육시(戮屍)를 당해도 달게 여기겠지만 어떤 뜻이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나도 원통하고 억울합니다.
‘종무(鍾巫)’에 대한 한 가지 조관(條款)을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또한 그것이 혐의가 될 만한지 끝내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상소문에 ‘「역(逆)」이란 천하의 극악(極惡)이며 인류(人類)의 궁흉(窮凶)입니다. 그 흉악한 짓을 행한 경우 그 계책이 한 가지만이 아니었으니, 마치 노(魯)나라의 종무(鍾巫)처럼 한밤중에 칼을 품기도 하고, 한(漢)나라의 양기(梁冀)·석현(石顯)처럼 음식 가운데 독(毒)을 넣기도 하고, 진(秦)나라의 이사(李斯)·조고(趙高)처럼 상(喪)을 틈타 거짓 제서(制書)를 만들기도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사·조고에게는 양기·석현의 악(惡)이 있지 않았고, 양기·석현에게는 또한 종무가 범했던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만고의 역적(逆賊)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살피고 합쳐 보아도 오늘날 역당들의 궁흉(窮凶)·극악(極惡)과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전대(前代)의 일을 두루 들어 삼수(三手)의 역절(逆節)을 갖추어 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지난번 이봉명(李鳳鳴)이 상소 가운데 허구 날조하여 말을 만들어 ‘칼을 품은 종무(鍾巫)가 있었고, 환공(桓公)은 시해(弑害)에 참여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아! ‘환공이 시해에 참여했다[桓公與弑]’라는 네 글자가 어찌 신자(臣子)된 자가 마음속에 싹틔우고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이겠으며, 붓에 적셔 장독(章牘)에 올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대개 김용택(金龍澤)의 칼을 백망(白望)에게 준 것과 이희지(李喜之)의 거짓 조서(詔書)는 장세상(張世相)·김창집(金昌集)과 더불어 상(喪)을 틈타 행사(行使)하려는 계책이었으니, 이 양대(兩代)의 일이 천고(千古)의 확실한 증거가 되므로 다시 많은 생각을 할 것이 없어 과연 원용(援用)해 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날 삼수(三手)의 역절(逆節)은 만고(萬古)에 없던 흉모(凶謀)로서 비밀스런 계책이 죄다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역적을 논하는 정상(情狀)이 어찌 국가의 일과 달라 숨기고 감히 말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고금(古今)의 인신(人臣)이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는 자를 논하여 배척할 때마다 곧 ‘지록 위마(指鹿謂馬)311) ’를 인용하였는데, 또한 모두 그 임금을 이세(二世)에게 비겼다고 죄를 주었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대행 대왕과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인덕(仁德)이 깊고 지극하시어 사람들이 이간질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양궁(兩宮) 사이에 화기(和氣)가 피어 올랐습니다. 이것이 동토(東土)의 신민(臣民)이 같이 손을 모아 축원(祝願)한 바였으니, 저 흉역(凶逆)의 모계(謀計)는 그냥 흉역의 모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감히 비길 수 없는 곳에다 뒤섞어 넣고자 하니, 비록 천 번 만 번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끝내 그 말이 근거가 있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교문 가운데 지워 고친 곳은, 본래부터 그것이 조금이라도 국가의 혐의(嫌疑)가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구절을 두고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은 ‘종무’란 구절을 고칠 것을 청하였고,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은 ‘사구’란 구절을 고칠 것을 청하였습니다. 무릇 국가의 문자는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지 못하는 법이니, 사람들이 혹 타당하지 않다고 하면 곧 다시 고치는 것입니다. 그때 일의 정상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합니다. 그리고 문자를 따내어 죄안(罪案)을 구성하는 것은 본래부터 성세(聖世)에 마땅히 있어야 할 바가 아니며, 오래되면 짐짓 논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진년312) 겨울 우리 경종 대왕께서 원자(元子)로 탄생하시어 명호(名號)를 정하고 교문(敎文)을 반포(頒布)하였는데, 고(故) 판서(判書) 남용익(南龍翼)이 찬진(撰進)한 글 가운데 ‘몽란(夢蘭)’이란 두 글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사년313) 의 뭇 소인들이 허구 날조해 죄안을 구성하여 마침내 귀양가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슬프고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숙종 대왕께서 뒤에 후회하시고 특별히 소설(昭雪)하셨던 것입니다. ‘몽란’이란 말이 출처한 본문(本文)에는 크게 미안(未安)한 것이 있습니다만, 고금의 문사(文士)가 글을 쓸 때 재료로 취하되 출처에 구애받지 않았으니, 만약 다시 한 두 가지를 꼬집어 내어 반드시 출처한 본문을 가지고 끌어대고 비유해 죄안을 구성한다면, 고금의 문사로서 어찌 형륙(刑戮)을 면할 자가 있겠습니까?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말로써 뜻을 해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사록(沙麓)314) 의 상서는 왕씨(王氏)가 한(漢)나라를 찬탈하는 조짐이나, 후비가(后妃家)에 으레 쓰며, ‘개풍(凱風)·한천(寒泉)315) 은 그 어머니의 실행(失行)을 그린 것이나 주자(朱子)는 단지 ‘어머니의 노고(勞苦)’라는 뜻을 취하여 ‘한천’을 그 묘려(墓廬)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증증대효(烝烝大孝)316) ’라는 구절을 주상(主上)의 위전(慰箋)으로 삼고, ‘융융기락(瀜瀜其樂)317) ’을 모후(母后)의 찬사(贊辭)로 삼았으니, 또한 마땅히 군부(君父)를 고수(瞽叟)에게 비기고 성모(聖母)를 강씨(姜氏)에게 증거댔다 하여 큰 죄로 삼겠습니까?
지난날의 역변(逆變)은 환첩(宦妾)·장상(將相)·검객(劍客)의 합친 세력이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신은 선왕(先王)의 명을 받아 이미 그 옥사(獄事)를 다스려 그 정절(情節)을 깊이 알고 있었으므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힘써 교문(敎文)을 대찬(代撰)할 것을 권하였는데, 주문(主文)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미루어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거듭 패초(牌招)를 어긴 뒤 저녁에야 패초를 받들고 한밤중에 얽어냈던 것입니다. 본래 거칠고 껄끄러운 글이라 그 점검(點檢)을 잃은 것은 괴이할 것이 없으나, 세월이 오래 흐른 뒤 추가로 따내어 이처럼 망측(罔測)한 죄과(罪科)에 빠뜨리니, 한 번 죽은 것은 본디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아마도 국가의 형정(刑政)이 마땅히 심각한 데 이르러서는 안될 듯합니다. 저는 외람되게도 삼조(三朝)의 구물(舊物)로서 나이가 70줄에 들려 하고 지위는 팔좌(八座)에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뜻밖의 죄목을 억지로 더하여 악역(惡逆)의 귀결처로 몰아넣으니, 천지와 귀신이 성대(聖代)의 어질고 밝은 정치에 도리어 혹 누를 끼치는 한탄이 있음을 환히 밝힐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과연 부도(不道)한 마음이 있었다면 몰래 은밀한 곳에 기록해 두어야 옳을 것입니다. 어찌 팔방(八方)의 많은 사람의 눈이 전해 가며 보는 교문(敎文)과 장소(章疏)에 방자하게 국가를 침핍(侵逼)하는 말을 늘어놓는단 말입니까? 풍병(風病)을 앓아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마땅히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아주 죽기로 결심한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슬프고 원통한 것이 있으니, 선왕의 지우(知遇)를 욕되게 하고 신화(新化)의 청명(淸明)함을 막아 장차 구천(九泉) 아래에서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지(傳旨) 안의 사연(辭緣)은 천만 애매합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하여 다시 추문(推問)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감히 문목(問目) 외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현혹시키려는 계책으로 삼은 것이 더욱 지극히 흉참(凶慘)하다. 각별히 엄하게 추문하라."
하였다. 국청에서 김일경을 다시 추문하자, 김일경이 공초(供招)하기를,
"종무(鍾巫)의 일은 역휘(逆翬)가 도적을 시켜 몰래 칼로 은공(隱公)을 시해(弑害)했던 것이고, 칼로 임금을 시해한 자는 종무 외에 들은 것이 없었으므로 대급수(大急手)를 논하며 종무를 인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춘추(春秋)》는 말이 간략하기 때문에 비록 ‘회인(懷刃)’이란 두 글자는 없지만, 은공(隱公)은 반드시 한밤중에 분명히 칼로 피살되었을 것이므로 글을 지을 때 ‘화인’이란 두 글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접혈(蹀血)’이란 글자는 본래 한(漢)나라·당(唐)나라 때 익히 쓰던 문자(文字)이나, 사마광(司馬光)이 이미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에 썼으니, 단지 《한서(漢書)》만 기억하여 쓴 것은 크게 살피고 신중히 하는 체모를 잃은 것이므로 망발(妄發)이라 한 것입니다. 사구(沙丘)의 일이 죄가 되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희지(李喜之)의 거짓 조서(詔書) 초본(草本)은, ‘선왕을 폐(廢)하여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되, 지열(池烈)·장세상(張世相)과 더불어 안에서 그 조서를 내리고 김창집(金昌集)이 봉행(奉行)한다.’고 한 것이 옥안(獄案)에 환히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이 따위의 역절(逆節)을 어떻게 안치(按治)하겠는가? 제기(提起)하지 말 것이다.’라고 한다면, 안옥(案獄)한 대신(大臣)인 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에게 균등한 죄가 있으니, 유독 신만 책망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 역모(逆謀)의 곡절이 환하니, 사구(沙丘)의 고사(故事)는 헐후(歇後)할 뿐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구를 인용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그 사실은 문안(文案)에 실려 있어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용한 고사의 지나가다 쓴 말을 가지고 억지로 큰 죄를 구성하니, 실로 뜻과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바입니다. 처음 교문(敎文)에 쓰고 친우(親友)가 고치기를 청하였을 때 누차 논난(論難)하니, 어떤 이가 ‘사구(沙丘)를 인용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고 사람들이 마땅히 고쳐야 한다고 하는데, 어찌 반드시 굳게 고집하는가?’ 하였으므로 과연 종무(鍾巫)로 고쳤고, 이미 대신의 보고에 나왔으므로 다시 논난하지 않고 즉시 고쳤던 것입니다. 원통하고 한스러운 것은 흉도(凶徒)와 역당(逆黨)이 반드시 성궁(聖躬)을 빙자하여 악역(惡逆)을 비호하려는 계책을 삼으려는 것으로, 그 말의 무패(誣悖)·흉참(凶慘)함은 진실로 족히 논할 것이 없습니다만, 오늘날 조정에서 또한 이것을 죄안(罪案)으로 삼으니, 실로 상정(常情)밖입니다. 성명(聖明)께서는 깊이 구중궁궐 안에 계시며 갑자기 흉소(凶疏)의 말을 들으셨으니, 경동(驚動)하는 바가 있음이 마땅합니다만, 조용히 따져 보시고 문안(文案)의 수미(首尾)를 세밀하게 살펴보신다면, 반드시 남김없이 환히 살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함없는 외로운 충성으로 반드시 성궁을 보호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여겼고, 고(故) 좌의정 최석항(崔錫恒)과 더불어 누누이 상확(商確) 하였는데, 상신(相臣)이 작고(作故)하여 지금 물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일찍이 연중(筵中)에게 진달하기를, ‘이 사람의 충절(忠節)은 전하께서 보호(保護)하는 신하로 여기시어 반 년 동안 일을 같이 하셨으니, 그 나라를 향한 정성을 깊이 아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손수 진달한 말을 쓰시어 사국(史局)에 보내셨습니다. 나라를 향한 어리석은 충성을 늙은 상신이 연석(筵席)에 들어가서 진달하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전하의 일월(日月)같은 밝으심에 이해받지 못하니, 이제는 목숨이 끝날 때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비록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할지라도 끝내 근거없는 말로 교묘하게 피하고 싶지 않으니, 이것은 우직한 평소의 성품이 그런 것입니다. 품은 생각을 전후로 대략 말씀드렸으니, 오로지 성명(聖明)의 살리고 죽이는 처분(處分)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지리하게 번복하는 것은 황공하여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형신(刑訊)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흉패(凶悖)한 말이 전보다 배나 더하며, ‘죽이고 살리는 처분’이란 말에 이르러서는 그 거칠고 포악한 성품을 알 수 있다. 각별히 엄하게 형신하여 실토 받도록 기필하라."
하였다.
특교(特敎)를 내려 문사 낭청(問事郞廳) 김유(金濰)와 홍성보(洪聖輔)가 혹은 한밤중에 비로소 들어오기도 하고 혹은 끝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들어왔다 하여 아울러 잡아다 추문(推問)하라 명하고, 또 정언(正言) 김상성(金尙星)이 소패(召牌)를 어겼다 하여 체차(遞差)하라 명하였다.
12월 5일 갑술
이의연(李義淵)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이의연은 이해로(李海老)와 사귀었는데, 이해로는 비분 강개하는 성격에 술을 잘 마셨으며, 술에 취하면 곧 당세(當世)의 일을 논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두려워하였다. 임금이 즉위하고도 이광좌(李光佐)와 유봉휘(柳鳳輝)가 여전히 집정(執政)하고 있었으므로, 이해로가 상소를 초(草)하여 올리려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그것을 알고 이에 눈물을 흘리며 몹시 힘써 그만두기를 권하니, 이해로가 이로 말미암아 감히 올리지 못하였다. 이의연이 일찍이 이해로의 집에 갔다가 그 상소를 보고 그 의(義)에 심복(心服)한 나머지 이해로에게 ‘어찌하여 올리지 않는가?’ 하니, 이해로가 ‘내 어머님께서 몹시 간절히 만류하시니, 내가 차마 어머님의 마음을 어기지 못하여 올릴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의연이 ‘이 상소는 끝내 없을 수 없으니, 자네가 올릴 수 없다면, 내가 마땅히 이 상소를 올리겠네. 자네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이해로가 ‘나는 능히 올리지 못했지만, 지금 자네가 이 초본(草本)을 올리고자 한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나?’ 하였다. 이의연이 이에 이 상소를 올렸던 것인데, 이광좌·유봉휘·조태억(趙泰億)이 번갈아가며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은 애초에 국문할 뜻이 없었으나, 이명언(李明彦)이 투소(投疏)하여 말하기를,
"지난날 이이명(李頤命) 무리의 마음은 본래 전하께 있지 않았고 실제로는 전하의 이름을 빌어 마치 한(漢)나라 헌제(獻帝)나 진(晉)나라 간제(簡帝)처럼318) 다른 날의 흉도(凶圖)를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흉도(凶徒)가 법망(法網)을 벗어난 것이 대행조(大行朝) 때는 그래도 관대한 정치를 해치지 않았지만, 전하께서는 반드시 토벌(討伐)해야 할 의리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삼수(三手)의 음모를 당(黨)이라 생각하십니까, 역(逆)이라 생각하십니까? 만약 당이고 역이 아니라 생각하신다면 당일 안국(按鞫)했던 신하들은 장차 당(黨)을 심고 남을 함해(陷害)한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고, 만약 역(逆)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의연이 어찌 역적을 비호한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흉얼(凶孼)로 하여금 끝내 상형(常刑)을 피하게 한다면 왕강(王綱)은 문란해지고 인륜(人倫)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신민(臣民)의 마음을 복종시키고 뒷사람의 의논을 두절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부득이 국청(鞫廳)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는데, 이광좌의 무리가 더욱더 급하게 협지(脅持)하였으므로, 마침내 두 차례의 형신(刑訊)에 옥중(獄中)에서 죽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사류(士類)들이 슬프게 여겼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의연이 올린 바의 상소는 곧 윤봉조(尹鳳朝)가 지은 것인데, 이의연이 죽자 그의 처(妻)가 윤봉조에게로 달려가 통곡하며 「네가 내 남편을 죽였으니, 내가 마땅히 너를 죽이겠다」고 하자, 윤봉조가 뒷문으로 달아났다.’고 하는데, 거짓말이다.
〈사신은 논한다.〉 신(臣)이 삼가 살피건대, 우서(虞書)를 보면 ‘내가 늙은 나이가 되어 부지런한 데 권태롭다.’하였고, 주서(周書)를 보면 ‘왕께 질병이 있어 불예(弗豫)하였다.’ 하였으니, 이의연의 상소에 ‘선왕께서 불행하게도 부지런한 데 권태로운 질환이 있으셨다.’고 한 것이 어찌 악역(惡逆)에 가깝겠는가? 경묘(景廟)께서 하교(下敎)하시어 충헌공(忠憲公) 김창집(金昌集)과 문충공(文忠公) 이이명(李頤命)을 감사(減死)하자,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이 전(殿)에 올라가 번갈아 청해 마침내 사사(賜死)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 한 가지 일에 의거하더라도 그것이 선왕(先王)의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광좌 등이 이의연을 국문할 것을 청했던 것은 경묘(景廟)께 질환이 있었음을 굽혀 숨긴 뒤에야 정책(定策)과 연차(聯箚)를 죄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해 무옥(誣獄)을 일으켜 사대신(四大臣)을 죽인 것을 모두 경묘의 예단(睿斷)으로 돌린 뒤에야 조태구·최석항·이광좌 등이 천총(天聰)을 가리고 충현(忠賢)을 도륙(屠戮)한 죄를 덮을 수 있었으므로, 이의연의 말을 듣기 싫어하여 죽이고자 했던 것이니, 성상께서 어찌 이의연의 억울함을 모르셨겠는가? 그러나 경묘의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있고, 이광좌 등이 걸핏하면 ‘선왕(先王)을 위해 죄를 청한다.’고 말하였으므로 이에 국청을 설치하라고 명했던 것인데, 이광좌 등이 곧 음형(淫刑)을 베풀어 마침내 죽여 버렸으니, 그 또한 참혹하였다. 그러나 천도(天道)는 굽히고 펴짐이 있어서 성상께서 30년 동안 은인자중하시다가 을해년319) 에 이르러 비로소 이광좌와 조태억의 관작(官爵)을 추탈하였으니, 이에 이의연이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36면
【분류】사법(司法) / 정론(政論)
[註 318] 한(漢)나라 헌제(獻帝)나 진(晉)나라간제(簡帝)처럼 : 조비(曹丕), 즉 위 문제(魏文帝)가 후한(後漢)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의 제위(帝位)를 빼앗은 일과,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황제 혁(奕)을 폐위(廢位)하고 간 문제(簡文帝)를 옹립한 뒤 찬탈의 음모를 꾸민 일을 말함.[註 319] 을해년 : 1755 영조 31년.
〈사신은 논한다.〉 신(臣)이 삼가 살피건대, 우서(虞書)를 보면 ‘내가 늙은 나이가 되어 부지런한 데 권태롭다.’하였고, 주서(周書)를 보면 ‘왕께 질병이 있어 불예(弗豫)하였다.’ 하였으니, 이의연의 상소에 ‘선왕께서 불행하게도 부지런한 데 권태로운 질환이 있으셨다.’고 한 것이 어찌 악역(惡逆)에 가깝겠는가? 경묘(景廟)께서 하교(下敎)하시어 충헌공(忠憲公) 김창집(金昌集)과 문충공(文忠公) 이이명(李頤命)을 감사(減死)하자,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이 전(殿)에 올라가 번갈아 청해 마침내 사사(賜死)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 한 가지 일에 의거하더라도 그것이 선왕(先王)의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광좌 등이 이의연을 국문할 것을 청했던 것은 경묘(景廟)께 질환이 있었음을 굽혀 숨긴 뒤에야 정책(定策)과 연차(聯箚)를 죄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해 무옥(誣獄)을 일으켜 사대신(四大臣)을 죽인 것을 모두 경묘의 예단(睿斷)으로 돌린 뒤에야 조태구·최석항·이광좌 등이 천총(天聰)을 가리고 충현(忠賢)을 도륙(屠戮)한 죄를 덮을 수 있었으므로, 이의연의 말을 듣기 싫어하여 죽이고자 했던 것이니, 성상께서 어찌 이의연의 억울함을 모르셨겠는가? 그러나 경묘의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있고, 이광좌 등이 걸핏하면 ‘선왕(先王)을 위해 죄를 청한다.’고 말하였으므로 이에 국청을 설치하라고 명했던 것인데, 이광좌 등이 곧 음형(淫刑)을 베풀어 마침내 죽여 버렸으니, 그 또한 참혹하였다. 그러나 천도(天道)는 굽히고 펴짐이 있어서 성상께서 30년 동안 은인자중하시다가 을해년319) 에 이르러 비로소 이광좌와 조태억의 관작(官爵)을 추탈하였으니, 이에 이의연이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김일경(金一鏡)을 한 차례 형문(刑問)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국청에서 의계(議啓)하여 더 형문(刑問)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예사롭게 하지 말고 각별히 엄하게 형문하라. 사구(沙丘)란 말을 끝내 직초(直招)하지 않으니, 만약 엄하게 조사해 알아내지 않는다면, 일후에 정신(廷臣)들을 뒤섞어 의심하는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더 엄하게 물으라."
하였다. 김일경을 두 차례 엄하게 형문(刑問)하였으나 불복하였으므로, 국청에서 더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그대로 따랐다.
전(前) 좌랑(佐郞) 이태징(李台徵)이 상소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깊고 성대한 인덕(仁德)을 가지셔서 인심(因心)320) 의 우애(友愛)가 지극히 돈독하였으므로, 양궁(兩宮) 사이에 권애(眷愛)가 높고 흡족하였으니,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비록 지극히 흉악하다 할지라도 어찌 감히 차마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말을 방자하게 양성(兩聖)에게 더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선대왕(先大王)의 하늘에 계신 영혼이 생각건대 반드시 어두운 가운데서 슬퍼하시고 마음 아파하실 것이니, 이 자는 비단 전하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실로 선왕이 죄인입니다. 며칠 전 비망기(備忘記)의 말뜻이 지극히 간절하여 심지어 ‘만약 엄하게 국문(鞫問)하지 않는다면 윤상(倫常)이 멸절(滅絶)될 것이다. 직접 물으려고 하지만 상복이 몸에 있다.’고 하교(下敎)하셨으니,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누군들 눈물을 닦으며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양성(兩聖)께서 오멸(汚衊)당하신 바는 실로 천고(千古)에 있지 않던 변(變)이니, 전례(前例)의 역적들을 다스리던 법을 따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명정(明庭)에 친림(親臨)하시어 반복해서 끝까지 캐물으신 뒤에야 역적의 정실(情實)을 완전히 알아낼 수 있고, 옥체(獄體)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의 정국(庭鞫)은 비록 본부(本府)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초사(招辭)를 받는 등의 일을 유사(攸司)에게 회부하여 소홀하게 내맡겨 두고 있으니, 신이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제 또 본부(本府)에 이송(移送)하니, 느지러짐이 더욱 심합니다. 더욱이 실정(實情)을 완전히 실토하는 것은 반드시 엄형(嚴刑)으로 구문(究問)하는 데 달려 있고, 단서(端緖)를 캐내는 것이 이 한 가지 일에 매여 있는데, 적이 보건대, 국청(鞫廳)의 여러 신하들이 좌지우지하며 영호(營護)하는 정상이 처음부터 환히 드러났으니, 지금 비록 엄명(嚴命)에 몰려 억지로 국청(鞫廳)을 설치하기는 했지만, 반드시 기꺼이 하나하나 구핵(究覈)하지 않을 것이고, 설령 증거와 원고(援告)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가리고 미봉하는 염려가 없음을 보장하겠습니까? 일찍이 신사년321) 국휼(國恤)의 인산(因山) 전에 친국(親鞫)한 일이 있었습니다. 비록 한결같이 이 예를 따를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중에서 긴요하고 중요하여 마땅히 물어야 할 일은 전(殿)에 임하시어 직접 물으심이 아마도 무방할 듯합니다. 국청에서 형(刑)을 씀에 이르러서는 전례(前例)를 살펴보건대 더욱 구애되는 단서가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명지(明旨)를 내리시고 특별히 시행하시어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
아아! ‘접혈(蹀血)’·‘종무(鍾巫)’라는 구절의 말은 비단 빈말로 양성(兩聖)을 무욕한 것일 뿐만 아니라, 헤아리고 은밀하게 모의했던 것을 먼저 문자(文字)에 드러내고 마침내 망측한 계책을 성사시키려 했던 것임이 불을 보듯 환합니다. 그리고 큰 문자(文字)를 찬술(撰述)할 즈음에는 으레 미리 엮어놓았다가 사람들과 상확(商確)하는 법이니, 이것이 어찌 역적 김일경 한 사람이 혼자서 꾸며낼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또한 반드시 정상(情狀)을 같이하여 서로 의논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니, 이 조관(條款)으로 따로 문목(問目)을 만들어 진실을 알아내도록 기필해야 할 것입니다. 또 교문(敎文) 가운데 ‘내옥(內屋)’이니 ‘척련(戚聯)’이니 하는 것이 있는데, 이른바 ‘내옥’이란 어느 곳을 가르키는지요? 그 꾸민 뜻이 또한 심히 음특(陰慝)하니, 이 구절 또한 문목에 첨가해 넣어 엄하게 핵실(覈實)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적 김일경을 나래(拿來)할 때 따로 다른 도사(都事)를 보낸 뒤에야 비로소 잡아들였으니, 지금 갇혀 있는 날을 당하여 방수(防守)하는 도리를 따로 엄하게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이간하고 의심하는 말은 내가 보고 싶지 않다."
하였다.
12월 6일 을해
약원(藥院)에서 구전(口傳)으로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아뢰어 소선(素膳)을 봉진(封進)하라는 명(命)을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구전으로 대전(大殿)에 아뢰어 진달한 것을 따라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고 또 갑인년322) 의 예(例)를 끌어대어 말했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충청도(忠淸道)의 유학(儒學) 홍득일(洪得一)·이천적(李天迪)·이덕소(李德邵)·허채(許寀)·홍계현(洪啓顯)·권성선(權聖選)·이전(李㙉)·김경신(金鏡臣)·유만지(柳萬枝)·조경(趙儆)·한태조(韓泰朝) 등이 상소하기를,
"아아! 전하께서 김일경(金一鏡)에게 무멸(誣衊)을 당하시어 몸에 무욕(誣辱)을 받은 것이 지금 몇 해입니까? 전하께서 억만(億萬)의 신민(臣民)을 가지고 계시면서 능히 한 몸을 누(累)를 씻지 못하시다가 이에 하늘이 위엄을 발동하여 죄인을 잡게 되었고, 이제 왕법(王法)을 시행하려 하니, 신인(神人)의 분이 거의 조금은 풀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애석한 것은 전하께서 단지 한 사람의 김일경이 있는 줄로만 아시고 뭇 김일경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김일경으로 김일경을 다스리시니, 어떻게 그 간악한 정상을 구명(究明)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며칠 전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의 말뜻이 애통(哀痛)한 나머지 귀신도 흐느낄 만한지라, 삼가 채 반도 읽지 아니하여 절로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흘러내렸습니다.
아아! 전하께서 이미 김일경의 지극히 흉악한 역절(逆節)을 대략 아시고 정신(廷臣)들이 비호하는 정상을 환히 간파하셨으나, 그 다스리는 바는 또한 김일경으로 김일경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으니, 그 누가 기꺼이 전하의 애통하신 하교를 받들어 김일경의 지극히 흉악한 역절을 핵실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상복을 입은 몸이라 하여 친국(親鞫)하는 것을 꺼리시나, 이것은 전하께서 혹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계지(繼志)가 중대하니, 장례를 치르지 않고 주(紂)를 정벌하였고, 복수가 시급하니 상복을 입고 전쟁에 임하였던 것입니다. 대개 예(禮)는 송종(送終)를 무겁게 여기나, 의(義)는 계지와 복수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아! 전하를 독실하게 우애(友愛)로 대하신 것은 대행(大行)의 성지(聖志)였고 대행을 추악하게 무욕한 것은 곧 김일경의 죄악입니다. 김일경은 곧 대행의 역신(逆臣)이자 전하의 원수이니, 전하의 계지하고 복수하는 의리에 있어서 반드시 그 당(黨)의 손에 맡겨 둘 수가 없습니다. 친히 지극히 흉악한 정상(情狀)을 핵실(覈實)하시고, 재궁(梓宮) 앞에 참(斬)하여 대행(大行)의 영혼에 고(告)하며, 아울러 그 정실을 같이했던 요흉(妖凶)을 캐내어 시원하게 정법(正法)한 뒤에야 바야흐로 ‘송사(送死)에 유감이 없다.’는 뜻에 맞을 것입니다. 더욱이 김일경의 교문(敎文) 가운데는 비단 ‘접혈(蹀血)’이란 한 구절의 말뿐만이 아니라, 그 이른바 ‘비어(蜚語)’·‘요악(妖惡)’·‘척련(戚聯)’·‘내옥(內屋)’ 등의 말이 있으니, 어떤 말을 ‘비(蜚)’라 하는지 어떤 곳을 ‘연(聯)’이라 하는지 어떤 곳에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쓴 말이 더욱 지극히 음흉하고 꾸민 뜻이 명백히 지척(指斥)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백망(白望)의 초사(招辭)에서 체결(締結)하여 재물을 쓰고 양전(兩殿)을 모해(謀害)한 자로 맨 먼저 김일경을 현고(現告)하였는데, 마치 알지 못하는 체하고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랑(問郞)과 도사(都事)가 쟁난(爭難)하자, 대략 그 일을 기록하고는 초초(草草)하게 서명(胥命)하고 급급하게 청대(請對)하여 죽음 속에서 살길을 찾는 어지러운 사설로 돌려버렸습니다. 이에 ‘이후로는 양전(兩殿)에 관계되는 말을 다시 거론하지 말라.’고 정탈(定奪)하였는데, 신임(申銋)이 이것을 진소(陳疏)하자 이에 도로 허구 날조하여 절해(絶海)에 안치(安置)하였습니다. 도사(都事)로서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는 그가 누설했을까 의심하여 다른 일로 공격해 제거하고, 백 망을 박살(撲殺)하여 그 자취를 없애버리니,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서 나오는 자를 끝내 잡아다 핵실할 수가 없어 인정(人情)이 지금까지 놀라고 분해하며 의혹하고 있습니다. 무릇 이 몇 가지 단서는 모두 물을 만한 것에 관계되나 전하께서 알지 못하고 계시는 바이고, 여러 신하들이 덮으려고 하는 것이니, 누가 능히 하나하나 발문(發問)하여 김일경이 죽기 전에 구핵(究覈)하겠습니까? 아마도 지난해 박상검(朴尙儉)과 필정(必貞) 무리의 옥사(獄事) 때 가리고 비호하고 미봉하여 체결(締結)한 자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았던 것과 같을 듯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경전(經傳)을 인용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반드시 친국(親鞫)을 행하시고, 문목(問目)에 첨가해 넣어 정절(情節)을 캐내도록 하소서. 아아! 김일경을 박살(撲殺)하여 그 정절을 같이했음을 덮어버리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그 술수 가운데 떨어지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의 상소를 보건대, 격절(激切)한 소치에서 나왔으나 의심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고 말을 가려 쓰지 않았으니, 내가 취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고 공거(公車)에 나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충청도(忠淸道) 옥천군(沃川郡) 이면(利面)에 사는 유학(儒學) 김덕주(金德胄)의 딸이 공산(公山) 유성면(儒城面)의 민한보(閔漢輔)의 아내가 되어 7월에 아들을 낳고 11월에 또 딸을 낳았는데, 모두 충실(充實)하다고 하였다.
사직(司直) 이명언(李明彦)이 상소하여 이의천(李倚天)의 소어(疏語)를 분변(分辨)하였는데, 이르기를,
"이의연(李義淵)의 상소는 첫머리에 ‘권질(倦疾)’이란 말로 대행(大行)을 무욕(誣辱)하였고, 이어 ‘고명(顧命)한 여러 신하들이 전하의 저위(儲位)를 책립(策立)하였다.’는 말로 감히 성총(聖聰)을 현혹시켰습니다. 그 뜻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선왕도 무욕할 수 있고, 성심(聖心)도 현혹시킬 수 있으므로, 신이 상소를 올려 그 설(說)을 벽파(劈破)했던 것인데, 그 ‘설령(設令)’이라든가 ‘어찌 일찍이[豈嘗]’라는 등의 말은 대개 가설(假設)하는 말로써 전하의 수수(授受)가 몹시 바르고 사람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며, 성심(聖心)은 치우침이 없어 반드시 용서하신다는 뜻일 뿐이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개석(開釋)한 뒤에 인혐(引嫌)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심공(沈珙)이 상소하기를,
"승선(承宣)의 망(望)에 관한 일은 오랫동안 막았던 사람을 소통(疏通)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여러 요상(僚相)들과 상의한 뒤에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료(長僚)가 들어가 품지(稟旨)하고 나서 나와 의망(擬望)했으니, 무슨 경각도 늦추기 어려운 것이 있었는지요? 그리고 답통(答通)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망통(望筒)323) 에 넣었으니, 또한 무슨 뜻인지요? 무신(武臣)의 은대(銀臺) 벼슬은 극선(極選)에 관계되는데, 최도장(崔道章)은 이미 인망(人望)에 맞지 않으며, 정사(政事)에 임하여 홀로 통의(通擬)했으니, 정사의 예(例)에 크게 어긋났습니다. 신이 못나고 나약하기 때문에 막중한 전조(銓曹)의 격례(格例)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의 승선을 오늘 의망(擬望)해 들인 것이니, 무슨 난만(爛漫)한 것이 있는가? 상의한다는 일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대교(待敎)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前) 정언(正言) 나학천(羅學天)의 상소에, ‘신축년324) 이후로 공도(公道)가 더욱 없어져 크고 작은 방안(榜眼)은 모두 형세가(形勢家)의 것이고, 조정에 가득한 청금(靑襟)으로서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신은 곧 계묘년325) 의 방(榜)입니다. 인신(人臣)은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반드시 발인(發軔)326) 하는 첫길에 광명(光明)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뒤에야 천지 사이에 스스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에 있어서 남으로부터 암담한 의심을 받는다면, 몸이 이미 더러워지고 이름이 이미 이지러져 비록 강물을 트고 끌어댄다 하더라도 돌아보건대 어떻게 씻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의혹은 밝히기 어렵고 이 누(累)는 씻기 어려워서 영원히 조단(朝端)을 하직하니, 신의 마음이 서글픕니다. 오로지 사서(賜書)를 안고 황야(荒野)에 살며 훗날의 운결(隕結)을 기약할 뿐입니다. 신은 마음이 성급하고 편벽하므로, 그 상소를 보고 크게 능히 견뎌내지를 못하여 시험삼아 벗어나 정(情)을 잊으려 하였는데, 갑자기 수화(水火)가 번갈아 공격하는 것을 깨닫고 침식(寢食)을 전폐하게 되었습니다. 원하건대, 그 과방(科榜)을 깎아버리시고 그 몸을 물리치시어 궁벽한 산야에서 바짝 마른 몰골로 분수를 지키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때 사람의 말로 이처럼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지으니, 너무 지나치지 아니한가?"
하였다.
지평(持平) 이일제(李日躋)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탁월하시고 고명(高明)하시어 사려(思慮)가 만물(萬物)에 두루 미치시나, 정신(廷臣)들은 녹록하여 족히 성심(聖心)을 감당할 자가 없습니다. 망령되게 천의(天意)를 헤아려 보건대, 어찌 ‘조신(朝臣)은 족히 공경하고 꺼릴 자가 없기 때문에 능히 소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인군(人君)이 아랫사람을 제어하는 도리는 오직 작록(爵祿)으로 하는 것이니, 그것으로 얽어맨다면 나의 천락(穿絡)327) 을 받게 할 수가 있고, 모두 편책(鞭策)으로 들어올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전약수(錢若水)328) 가 강개(慷慨)하여 뜻을 고상하게 지키고 물러났던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신린(臣隣)을 책려(責勵)하심은 일체 ‘분의(分義)’ 두 글자로 하시고, 몰아서 이끄실 때는 반드시 독출(督出)하게 하는 것을 제일의 도리(道理)로 삼으십니다. 그러나 인신(人臣)이 임금을 섬김에는 분의(分義)와 염치(廉恥)가 때에 따라 가볍고 무거움이 있습니다. 지위와 임무가 높아 국가와 휴척(休戚)을 같이 하는 사람일 경우 진퇴(進退)에 본디 혹 감히 스스로 전단(專斷)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새로 진출한 신하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모름지기 경개(耿介)로 스스로를 단속하여 모몰(冒沒)을 수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왕척직심(枉尺直尋)329) 의 경계를 굳게 지키고, 나오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는 것을 쉽게 여기는 절도에 더욱 힘쓴다면, 사유(四維)330) 를 널리 펴는 정치에 보탬이 있을 것이니, 한때 신분(伸分)하는 것보다 반드시 더 낫지 아니함이 없을 것입니다.
저 뜻을 잃어 답답해 하고 관직(官職)이 없어 근심하며 염의(廉義)를 아주 잃어버린 채 온갖 계책으로 뚫고 나오려는 자가 비루한가 비루하지 않은가는 또한 명주(明主)가 마땅히 굽어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 무릇 신린(臣隣)을 만나고 대접하실 즈음에는 오로지 작록으로 얽매지 마시고, 단지 분의로만 내몰지 마시며, 한 가닥 염치의 길을 조금 열어 방범(防範)을 지키고 염우(廉隅)를 무겁게 여기는 무리로 하여금 스스로 그 사의(私義)를 다하게 한다면, 위로는 성조(聖朝)의 신하를 예(禮)로 부리는 도리에 빛남이 있고, 아래로 인신(人臣)이 입신(立身)하여 구차하지 아니한 절조를 세울 수가 있어서 신하와 임금이 모두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12월 7일 병자
오시(午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햇무리 위에는 배(背)가 있었는데,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신택(申)이 아뢰기를,
"이의연(李義淵)이 선조(先朝)를 무욕(誣辱)한 죄는 위로 하늘에까지 통하니, 무릇 혈기(血氣)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그 살점을 씹고 가죽을 깔고 자려 하지 않겠습니까만, 일종의 불령한 무리들이 감히 역적을 비호하는 계책을 내었으니, 최보(崔輔)가 창도(倡導)하자 채응복(蔡膺福)이 이를 이어 방자하게 꺼림이 없었습니다. 채응복의 상소를 보건대, 흉역(凶逆)이 망측한 사람을 ‘유(儒)’자를 써서 추켜세웠고, 흉역의 망측한 말을 ‘광망(狂妄)’이라 칭찬하였으며, 성상께서 ‘허물하지 않겠다.’고 하신 하교를 실신(失信)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아! 통탄스럽습니다. 선왕의 선침(仙寢)이 채 차가와지지도 않았는데, 난적(亂賊)의 참혹한 무욕이 다투어 이르니,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윤상(倫常)의 역절(斁絶)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성교(聖敎) 가운데 ‘어찌 부도(不道)한 말을 구했겠느냐?[豈求不道之言]’라고 하신 여섯 글자가 참으로 마땅합니다. 천하의 악(惡)은 역(逆)보다 큰 것이 없고, 《춘추(春秋)》의 법은 당여(黨與)를 다스림이 반드시 엄하였습니다. 지금 이의연은 스스로 역(逆)이 되었지 역적을 비호한 것이 아니고, 최보와 채응복이 참으로 역적을 비호한 것인데, 애초에 이의연을 극전(極典)에 두지 않아 최보가 이의연의 발꿈치를 따라 나오게 만들었고, 국좌(鞫坐)를 지체되었기 때문에 채응복이 최보의 발꿈치를 따라 나오게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이의연이 장하(杖下)에서 죽고 최보가 섬에 유배되었다고는 하지만, 제방(隄防)의 도리를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전(前) 장령(掌令) 채응복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김일경(金一鏡)이 교문(敎文)과 상소에 인용한 문자(文字)는 모두 지극히 흉패(凶悖)하여 차마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후사(喉司)의 출납(出納)하는 곳에 있는 자는 마땅히 마음이 놀라고 뼛속까지 아프게 여겨 계품(啓稟)하여 토죄(討罪)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인데, 예사롭게 보고 두리뭉실하게 봉입(捧入)하였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를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김일경의 교문에 관한 일은 한 사람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김동필(金東弼)의 한 상소가 당초에 비록 먼저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 뒤의 연주(筵奏)는 토죄(討罪)에 크게 어긋났으니, 심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동필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황해 병사(黃海兵使) 홍시구(洪時九)는 추려(麤戾)·광패(狂悖)하고 남을 잘 섬겨 발신(發身)하였습니다.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태연스레 부임(赴任)했는데 대계(臺啓)는 비록 정지되었으나, 만약 일단의 염우(廉隅)가 있다면 어찌 감히 지금까지 웅크려 차지하고 있겠습니까?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금부 도사(禁府都事) 조상협(趙尙協)과 이명복(李明復)을 형(刑)을 쓰지 말고 다시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의연(李義淵)이 물고(物故)되었을 때 국청 대신(鞫廳大臣)이 아뢰기를,
"이의연은 어제 낮에 병이 없었는데, 밤에 병이 무겁다며 보고하였고, 새벽에 물고하였다고 보고하였으니, 일이 지극히 수상합니다. 청컨대 의금부(義禁府)의 직숙 낭청(直宿郞廳)을 나문(拿問)하게 하소서."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이명복은 김일경(金一鏡)을 나래(拿來)할 때 지체하였기 때문에 잡혀와 공초(供招)를 바쳤는데, 조상협과 더불어 모두 범연하게 ‘지만(遲晩)’이라고만 하였다. 의금부에서 형추(刑推)하여 일정을 캐낼 것을 계청(啓請)하자, 윤허했다가 곧 하교하기를,
"이의연이 경폐(徑斃)한 것과 김일경이 지체한 것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인데, 전례를 따라 납초(納招)하였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형추를 청하는 계사(啓辭)를 윤허했던 것이니, 곧 일벌 백계(一罰百戒)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 형(刑)을 신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가볍게 더할 수는 없다."
하고, 형(刑)을 쓰지 않고 다시 추문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가 홍득일(洪得一)의 상소에 대해 쟁론하였는데, 이르기를,
"자교(慈敎) 가운데 있는 어구(語句)를 변환(變幻)하고 베껴서 실어 하나의 가짜를 만들고는, 중외(中外)에 전파하여 사람을 인리(人理) 밖으로 무함(誣陷)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해괴하고 패리(悖理)한 말을 어찌 족히 입에 올릴 것이 있으랴?"
하였다.
수찬(修撰) 이광덕(李匡德)이, 나학천(羅學川)이 상소하여 신축년331) 이후의 과제(科第)가 공정하지 못하였다고 논한 것 때문에 상소하여 스스로 인구(引咎)하였는데, 이르기를,
"선비의 출신(出身)은 처녀가 남을 허락하는 것과 같아 한 번 오점(汚點)을 받으면 종신토록 씻지 못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며칠 전 성교(聖敎)에, ‘오랫동안 토론(討論)하지 못하였으니, 경악(經幄)의 신하들은 마땅히 추명(趨命)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살피지 못하였습니다만, 이것은 한때 언어의 과차(過差)인지요? 아니면 진실로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여기신 것인지요? 임금이 명(命)을 내리면 신하가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인(古人)은 ‘따른다.’고 하지 않고 반드시 ‘공경한다.’고 하였으니, ‘공경한다.’는 말의 뜻은 대개 반드시 따르는 데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명령(命令)에는 의(義)로 헤아려 보건대, 행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행할 수 없는 것을 반드시 받드는 것은 그 명을 소홀히 여김이 받들 만한데도 받들지 않는 것과 죄가 같습니다. 관작(官爵)에는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아 편안한 것이 있고 편안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편안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받는 것은 그 벼슬을 업신여김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데도 받지 않은 것과 잘못이 똑 같습니다. 만약 편안한가 편안하지 아니한가, 행할 수 있는가 행할 수 없는가를 묻지 않고 한결같이 오로지 좇기에 겨를이 없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다면, 이는 임금을 무서워하는 것이지 임금을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을 공경하는 것이란 임금은 매일 존엄으로써 하고 신하는 매일 충(忠)으로써 하는 것이며, 임금을 무서워하는 것이란 임금은 매일 교만으로써 하고 신하는 매일 아첨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감히 묻건대, 전하께서는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취하려 하시는지요? 경연(經筵)의 토론은 택의(擇義)에 근실(謹實)한 자가 아니면, 더불어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전하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는 뜻이 만약 성대(盛大)하다면, 반드시 먼저 택의에 근실한 자를 살피실 것이고, 신하가 권강(勸講)하는 충성이 진실로 독실하다면 먼저 추명(趨命)하기에 겨를이 없는 것으로 스스로 처신(處身)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삼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신하가 반드시 자기의 뜻을 고집하는 것을 어찌하여 꺼리시는지요? 신이 듣건대, 잘 다스려지는 나라의 신하는 능히 자신의 뜻을 행하고, 포악한 나라의 신하는 능히 임금의 명령을 행한다 하는데, 자기의 뜻을 행하는 것은 의(義)의 길이요, 그 뜻을 행하는 것은 아첨의 근본입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고사(古史)를 보셨을 것입니다. 옛날의 신하들 중에는 위세(威勢)를 무서워하지 않고 이(利)에 병들지 아니하여 오로지 자기의 뜻만을 행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으니, 전하께서는 어떤 신하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자기가 배운 바를 버리고 자기가 지키던 바를 무너뜨리고 오로지 인주(人主)의 뜻만을 굽혀 따른 자가 있었으니, 전하께서는 또 어떤 신하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므로 신은 전하께서 오로지 신하가 혹 능히 자기의 뜻을 고집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시고, 자기의 뜻을 고집하는 것을 신하의 병통으로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분의(分義)란 말의 ‘의(義)’자는 의리(義理)란 말의 ‘의(義)’자와 진실로 같거나 다른점이 있으니, 대저 의리를 얻으면 분의는 저절로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아! 이것은 참으로 작은 일이나, 신이 부연(敷演)한 말은 지극히 장황한 데 관계됩니다.
그러나 신이 저으기 보건대, 전하의 명단(明斷)은 하늘에서 타고나셨고 총명은 귀신과 같아 임어(臨御)하신 초기에 맨먼저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셨으되, 마치 호령(號令)을 반드시 행해지는 데 힘써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뭇 신하들이 전도(顚倒)되어 다시는 염의(廉義)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말이 지극히 심각하고 사의(私義)를 강행하기 어렵게 되자, 비록 관서백(關西伯)과 같은 자도 감히 나오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나머지 오랜 해 동안 포소(逋召)332) 한 자도 일례(一例)로 억지로 기용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근래 또 김일경(金一鏡)의 일로 인하여 비망기(備忘記)를 자주 내리셨는데, 처분(處分)이 엄명(嚴明)하여 앞에서는 당(黨)을 비호한다는 의심이 있었고 뒤에서는 토벌(討罰)을 늦추는 죄가 있었으므로, 대소 신료(臣僚)들이 놀라 넋이 달아나지 않는 이가 없으며,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비록 삼사(三事)의 대신(大臣)으로서 남에게서 참혹한 말을 들은 자라고 할지라도 진퇴(進退)와 출입(出入)을 오로지 전하의 명(命)만을 따를 뿐 다시는 감히 의리를 끌어대어 자중(自重)하는 계책을 세우지 못하니, 전하의 기강이 떨쳐지고 있고 호령이 행해지고 있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마도 전하께서 만약 이와 같은 것을 보시고 곧, ‘나의 신하들을 내가 모두 천락(穿絡)하고 몰아대어 한결같이 내 명을 따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해(害)가 장차 오만하고도 자존(自尊)하는 데 이르러 신하들을 보잘것없게 대하여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뜻한 대로 오라고 부르고 물리쳐 떠나가게 한다면, 머뭇거리며 자중(自重)하는 선비는 조정에 서기를 원하지 않고, 비위나 맞추고 이익을 노리는 무리가 날마다 앞으로 나아올 것이니, 나랏일의 그릇됨은 서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사람들이 ‘대신(大臣)은 윗사람을 무욕한 죄인과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법을 굽혀 서로 비호하고 있다.’고 하니, 이것이 어떠한 대죄(大罪)입니까? 전하께서 과연 이미 그 설(說)을 받아들이시어 진실로 이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즉시 처분(處分)을 더하시어 국법(國法)을 엄하게 보이심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비록 혹 일찍 토죄(討罪)하는 데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그 마음은 진실로 국가에 충성스럽다고 생각하신다면, 또 마땅히 참소하고 무욕한 죄를 다스려 경알(傾軋)하는 폐단을 끊으신 뒤에야, 대신(大臣)을 위유(慰諭)하여 그 자리에서 편안히 징토(懲討)하는 정성을 다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한편으로는, ‘약노약교(若怒若敎)’란 유시(諭示)로 당벌(黨伐)333) 의 길을 야기해 열고, 한편으로는 ‘면유편차(面諭便次)’ 등의 하교로 대신을 겁주어 불렀으니, 이는 반드시 전하의 마음에 참소한 자를 다스리자니 진실로 이미 7, 8분의 의심이 있고, 대신을 죄주자니 인산(因山)이 가까이 닥쳐 국사(國事)가 편하기 어려웠으므로, 우선 이처럼 속박하는 계책을 쓰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만 번 죽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때 전하의 마음은 성실하셨는지요, 성실하지 않으셨는지요? 왕도(王道)를 지키신 것이었는지요, 패도(霸道)를 지키신 것이었는지요? 왕도가 왕도 되는 것과 패도가 패도 되는 것은 오로지 성실하냐 성실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으니, 삼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때의 성학(聖學)은 과연 어떠한 곳에 있었는지요? 생각건대, 그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에 대해 일례(一例)로 모두 경멸하여 부리겠다는 뜻을 가지시고 다시는 예(例)로 서로 대우하겠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니, 이번에 ‘추명(趨命)에 겨를이 없다.’는 하교는 비록 한때 우연히 나온 것이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의사(意思)가 안에서 뒤집혀 나온 것인 듯합니다. 신이 망령되게 헤아리고 망령되게 말한 죄는 비록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해도 용서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원하건대, 전하께서 비록 신의 몸에 죄를 내리신다 해도 때때로 신의 말을 살펴보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조태억이, 홍득일(洪得一)이 ‘김일경(金一鏡)으로 김일경을 다스린다.’는 말 때문에 인혐(引嫌)하기를,
"대개 신(臣) 등이 즉시 토죄(討罪)를 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종의 경함(傾陷)하는 무리가 ‘이때 김일경을 빙자해 말한다면, 군신(君臣)을 이간질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얼굴을 바꾸어 번갈아 나오는 것이니, 잇따라 일어날 말이 어떤 지경에 이를 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김일경을 친국(親鞫)할 것을 청하기를,
"김일경의 죄상은 비단 성궁(聖躬)에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대왕(先大王)의 지극하고 성대한 인덕(仁德)을 무욕(誣辱)한 것이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으니, 전하께서는 선왕을 위해 국문(鞫問)하시고 보통 때의 절차에 구애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히 ‘건성(建成)’이란 말을 하여 선대왕을 크게 무욕하였다. 이의연 역시 친국하고자 하였으나, 상복(喪服)을 입은 몸이었기 때문에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대신(大臣)에게 의심을 두겠는가? 그리고 만약 의심한다면 어찌 대신에게 맡기겠는가?"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신(臣)을 이 사람에게 견주고 있는데, 신이 이 사람의 죄를 조사하고 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은 다시는 국옥(鞫獄)을 맡을 수 없으니, 오로지 친국하는 한 가지 일이 있을 뿐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백망(白望)을 최초로 정국(庭鞫)할 때 심단(沈檀)과 김일경을 끌어대었는데, 본부(本府)에 내린 뒤에는 여러 신하들을 뒤섞어 무고하기를, ‘이 무리들은 전하께 이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백망은 가장 흉악하고 교활하였기 때문에 옥사(獄事)를 늦추고자 하는 계책을 썼던 것입니다. 국안(鞫案)을 가져와 한 번 예람(睿覽)을 거치신다면, 신의 종형(從兄) 조태구(趙泰耉)와 여러 신하들이 나라를 향해 불충(不忠)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홍득일의 상소 가운데 체결(締結)한 자를 따로 물어야 한다는 한 가지 조관(條欵)은 더욱 지극히 통탄스럽고 놀랍습니다. 그때 자교(慈敎)는, ‘두 역비(逆婢) 중에 하나는 환시(宦寺)와 체결하였다.’고 하교하셨는데, 가짜 자교 한 본(本)이 나오자 송상기(宋相琦)가 이 때문에 진소(陳疏)했던 것입니다. 이의연은 전혀 문자(文字)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였는데, 신 등은 옥사(獄事)가 만연(蔓延)될 것이 두려워 사주한 자를 묻지 않았습니다만, 이런 부류들은 대부분 남의 꾀임과 협박을 받은 것이니, 모군(募軍)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비(疏批)에 이른바 ‘격절(激切)’이라고 한 것은 김일경의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인데, 말을 가려서 하지 못하였다. 저 또한 사람의 마음이 있으니, 어찌 영상(領相)이 악역(惡逆)이 되지 않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김일경을 기화(奇貨)로 여겨 조정의 신하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급서(急書)로 다스린다면 비단 만연(蔓延)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경폐(徑斃)한다면 오늘날의 조정 신하들이 스스로 밝힐 길이 없어질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비록 밝지 못하지만, 어찌 오늘날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나의 이 말은 위로하기 위해 꺼낸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속으로 실제로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 이조(李肇) 등에게 대명(待命)하지 말도록 하는 일을 분부(分付)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대행조(大行朝) 때 각도(各道)의 감사(監司)가 도내(道內)의 옥안(獄案)을 일을 이해하는 수령에게 나누어 준 뒤 논열(論列)해서 보고하면, 감영(監營)에서 장문(狀聞)하여 소석(疏釋)하는 일을 분부(分付)하였는데, 지금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신칙(申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은 부친(父親)의 명으로 등제(登第)한 뒤 10년 동안 벼슬하지 않고 책을 읽었으며, 황조(皇朝)의 해진(解縉) 또한 황제가 10년 동안 책을 읽게 한 뒤에 등용하였습니다. 김상성(金尙星)은 성상께서 그 소원을 따르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김상성을 허락한다면, 조정 신하들이 끌어내어 예(例)로 삼을까 두렵다. 또 군신(君臣)이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옳겠는가? 한 번 취직(就職)한 뒤에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옳다."
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김일경(金一鏡)을 다시 추문하였다. 김일경이 공초(供招)하기를,
"평생 지킨 바가 충(忠)과 직(直)이기 때문에 전후의 공사(供辭)는 사실에 의거하여 곧게 진달(陳達)하였으며, 굽히거나 피한 바가 없었습니다. ‘접혈(蹀血)’이란 두 글자는 애초에 신중히 살피지 않았습니다만, 종무(鍾巫)와 사구(沙丘)의 일을 인용한 것은 명백하고 확실하여 털끝만큼도 의심스럽거나 유사한 것이 없습니다. 사구를 인용하며 수작했던 말은 한때 붕우(朋友) 사이에 있었던 사사로운 말에 불과하였습니다. 붕우 또한 오륜(五倫)의 하나인데, 자신이 사지(死地)에 빠져 있으면서 또 붕우를 빠뜨리는 것은 심히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옛날의 군자는 혹 이런 때를 당하면 비록 군명(君命)이라 할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않았으니, 본래 그 의(義)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어(蜚語)·요악(妖惡)이란 말은 무진년334) 겨울 선대왕(先大王)께서 탄강(誕降)하신 처음에 이사명(李師命)이 지어낸 것으로 안문(按問)하여 복법(伏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옥(內屋)·척련(戚聯)의 일은, 숙종 대왕께서 일찍이 기사년335) 에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의 사사(賜死)를 윤허한 대로 하라는 비지(批旨)에, ‘대계(臺啓) 가운데 「궁액(宮掖)과 척련(戚聯)하여 성상의 동정(動靜)을 엿보았다[戚聯宮掖伺上動靜]」는 여덟 자가 가장 제목으로 둘 만하다.’고 하신 것이니, 대개 연중(筵中)에 상신(相臣) 권대운(權大運)에게 하교하신 것으로 ‘성상의 동정’을 세밀하게 엿본 일의 정상이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실려 있습니다. 그때부터 공의(公議)가 ‘김수항은 명상(名相)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고 했지만, 김창집(金昌集)의 일은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였으므로 과연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으기 ‘전하께서 스스로를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보시고 털끝만큼도 성궁(聖躬)에 더럽게 가려진 것이 없다면, 비록 흉언(凶言)이 미친다 하더라도 어찌 족히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조가(朝家)에서 법(法)을 쓰는 것은 본디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이 있으나, 전하께서 법을 벗어나 따로 시행하고자 하신다면 그것은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밤 3경에 국청 대신(鞫廳大臣) 이하와 양사(兩司)에서 유문(留門)336) 하고 구대(求對)하였다. 정원(政院)에서 계품(啓稟)하자 즉시 인견(引見)을 명하고, 임금이 상복을 입은 채 무망각(無妄閣)에 거둥하였다. 위관(委官)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죄인의 초사(招辭) 가운데 ‘스스로 여긴다[自視]’는 이하는 말이 상궁(上躬)에 관계되고 너무나도 흉패(凶悖)하므로, 놀랍고 통탄스러움을 금하지 못하여 지입(持入)합니다."
하고, 판의금(判義禁) 심수현(沈壽賢)은 말하기를,
"상교(上敎) 가운데 있는, ‘비록 승관(承款)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형(典刑)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말로 물었더니, 죄인이 ‘뜻이 시원하게 따로 베풀어라.’
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추안(推案)을 보고 나서 하교하기를,
"한(漢)나라 때는 말이 위를 범하면 대불경(大不敬)으로 요참(腰斬)하였다. 이것은 마땅히 불경(不敬)으로 논단(論斷)할 것이되, 교문(敎文) 가운데 있는 흉언(凶言)은 물어보고자 한다."
하였다. 장령(掌令) 신택(申)·정언(正言) 윤휘정(尹彙貞)이 빨리 방형(邦刑)을 바룰 것을 청하고, 심수현과 동의금(同義禁) 남취명(南就明)·황이장(黃爾章)이 일제히 대간(臺諫)의 말대로 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심사는 우규(右揆)가 마땅히 알 것이고,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수 있는데, 부득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날 역옥(逆獄)에서 나온 말은 비록 영천(潁川)337) 의 물에 씻는다 하더라도 다 씻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마땅히 진전(眞殿)에 고(告)하고 부도(不道)한 마음을 직접 물으리라. 말과 문자(文字)로 단안(斷案)하는 것을 내가 항상 그르게 여겨왔으나, 이 일에 이르러서는 그 심적(心跡)을 완전히 다 구핵(究覈)하고자 하니, 밝게 재궁(梓宮)에 고(告)하고 팔역(八域)에 널리 유시(諭示)한 뒤에야 내 마음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사람들의 위가 되기는 하지만 대행조(大行朝)에 대해서는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다. 이런 망극(罔極)한 무욕(誣辱)을 들었는데, 어찌 변백(辨白)하지 않고 지레 그 죄를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의 용의(用意)의 소재처를 마땅히 직접 묻겠다."
하고, 드디어 친국(親鞫)을 명하였다.
12월 8일 정축
임금이 최복(衰服)을 갖추고 진선문(進善門)에 거동하여 김일경(金一鏡)을 친국(親鞫)하였다. 죄인(罪人)을 잡아들일 때 나졸(羅卒)이 외치는 소리가 낮고 희미하다 하여 신칙(申飭)하고, 또 죄인은 마땅히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도 이에 감히 고개를 쳐들었다 하여 머리를 덮어 씌우라 명하였다. 임금이 친히 문목(問目)을 내어 문랑(問郞) 유엄(柳儼)으로 하여금 쓰게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교문(敎文)에다 문자(文字)를 인용한 것이 이미 지극한 흉참(凶慘)하였다. 그리고 어제의 초사(招辭) 가운데 ‘적이 생각한다[竊以爲]’는 이하의 말은 더욱 지극히 헤아리기 어려웠으니, 흉심(凶心)의 소재처(所在處)가 불을 보듯 환하였다. 너는 어떠한 심장(心膓)을 가졌길래 이런 흉패(凶悖)한 뜻을 그 가운데 감추었다가 이제 구초(口招)에다 꺼내느냐? 어의(語意)가 지난날 목호룡(睦虎龍)의 말과 은연중에 표리(表裏)를 이루었으니, 그 사이의 정상(情狀)을 하나하나 직초(直招)하라. 붕우(朋友)의 의(義)가 이미 무겁다 한다면, 군신(君臣)의 의(義)는 삼강(三綱)에 들어가 있지 않느냐?"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이 판의금(判義禁) 심수현(沈壽賢)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죄인의 머리를 자루로 뒤집어 씌우라는 명(命)이 있었는데, 하지 않았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취초(取招) 때가 가까우니 머리를 자루로 씌우지 말고, 죄인이 공초(供招)를 바칠 때 씌우라."
하고, 하교하기를,
"그 광패(狂悖)한 성질을 아직도 채 뉘우치고 고치지 않아 이에 감히 큰 소리로 초사를 바치고 있다. 나장(羅將)은 마땅히 금해야 할 것인데도 금하지 않으니, 곁에 서 있는 나장을 우선 수금(囚禁)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장전(帳殿)이 바깥과 거리가 멀지 않다 하여 작문 군사(作門軍士)338) 를 더 내어 배립(排立)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광좌가 또 각문(各門)의 파수(把守)를 병판(兵判)으로 하여금 따로 신칙(申飭)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또한 허락하였다. 김일경이 공초(供招)하기를,
"오늘 저를 역률(逆律)로 다스리는 자는 성궁(聖躬)을 기핍(譏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성궁을 기핍한 것을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저를 다스리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접혈(蹀血)·종무(鍾巫)·사구(沙丘)란 세 건을 제가 조목조목 분변(分辨)하여 조금도 성궁을 기핍하지 않았던 정상을 진달하여 드러내었으나, 천노(天怒)가 한결같이 더욱더 진첩(震疊)하여 성궁을 기핍했던 양으로 하교하셨으니, 저는 너무나도 원통합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청천 백일(靑天白日) 같으시어 천 명 만 명의 흉역배(凶逆輩)가 있다 할지라도 털끝만큼도 성궁(聖躬)을 더럽게 가릴 수 없으므로, 제가 지난밤에 공초한 바에다 이러한 사연(辭緣)을 갖추어 아뢰었던 것입니다. 대개 제가 이 교문을 지은 지 3년이 되었는데, 만약 나라에서 혹 혐의로 여기는 말이 있을 경우 저는 언제나 개연히 여겨, ‘세속(世俗)이 좁아서 우리 춘궁(春宮)을 대우하는 도리가 어찌 그리도 너무 박한가? 우리 춘궁(春宮)께서는 총명(聰明)·영투(英透)하시고 성철(聖哲)·관인(寬仁)하시다. 더욱이 예학(睿學)이 고명(高明)하시고 전사(前史)를 널리 보시어 인정(人情)과 물태(物態)에 대해 통촉하지 아니하심이 없으시니, 어찌 이런 곳에 혐의를 두시겠는가?’하며, 이런 뜻을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왔는데, 참소하고 얽어대는 말이 날마다 들어가자 성명(聖明)께서 굽어 저의 정상을 살피지 않으시고, 조목조목 갈수록 더욱 엄해지셨습니다. 저의 지난밤의 초사(招辭)는 이런 심사(心事)를 드러냈을 뿐입니다. 어찌 그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대저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 번 의심하는 마음을 더하면 닿는 곳마다 의심이 생겨나 답답하고 억울함을 드러낼 수가 없으니, 어찌하여 우리 전하(殿下)의 천지와 같은 큰 도량과 해와 달처럼 밝으심으로 통촉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교하신 말씀 가운데 저의 말이 ‘목호룡의 말과 표리를 이루고 있다.’는 분부는 제가 너무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만약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알지 못했다면, 평생의 행사(行事)와 조정(朝廷)에 서서 임금을 섬긴 일과 신축년339) 의 한 소(蘇)가 강상(綱常)의 대의(大義)를 밝힘이 어찌 능히 환히 빛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번의 이 한 가지 일은 친우(親友)를 사지(死地)에 끌어넣는 것이니, 조금도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에 보탬이 없고, 한갓 붕우(朋友)의 윤의(倫義)만 손상시키게 될 것입니다. 저의 한평생 독서(讀書)는 옛 군자(君子)를 배우려는 것이었으니, 어찌 자신이 사지에 빠졌다 하여 한평생 지키던 바를 잃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공초를 다 보고 나서 또 입으로 문목(問目)을 불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의 초사에는, ‘스스로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보았다.’ 하고, 또, ‘끌어다 기핍(譏逼)으로 돌렸다.’라고 하더니, 오늘 초사에는 곧장 ‘청천 백일과 같았다.’고 하여 변환(變幻)시키며 초사를 바쳤으니, 너무나 통악(痛惡)하다. 목호룡의 급서(急書) 가운데 있던 한 가지 조관(條款)에는 음흉하고 참혹한 뜻이 있어 너의 어젯밤 공초(供招)에서 가리킨 뜻과 은연중에 서로 부합(符合)하는데도, 이에 ‘알아듣지 못한다[知不得]’는 세 글자로 저뢰(抵賴)340) 하는 계책을 삼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사구(沙丘)란 말을 인용하는 것을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으나, 사람들이 마땅히 고쳐야 한다 하니, 어찌 반드시 굳게 고집할 것이 있겠느냐?’라고 했다는 말은 과연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냐? 네가 붕우(朋友)를 〈사경(死境)에〉 빠뜨리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고 하는데, 이처럼 세도(世道)가 정신(廷臣)을 경알(傾軋)하는 때 나만 홀로 아끼며 염려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하고, 목호룡의 국안(鞫案)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뜻이 시원하게 죽이라.’고 한 것 또한 지극히 흉패(凶悖)하다. 저를 죽인들 내 마음에 무슨 시원할 것이 있겠느냐? ‘스스로 여긴다[自視]’란 두 글자는 곧 이른바 ‘나의 마음이 결백하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것이니, 그 뜻이 심히 음흉하고 참혹하다. 저는 한 벗을 아끼나, 내가 어찌 한쪽편의 신료(臣僚)들을 아끼지 않으랴? 이미 저의 초사(招辭)에 나왔는데도, 지금 만약 그대로 둔다면 장차 온 세상 사람들을 뒤죽박죽으로 의심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끝까지 캐물어 만연(蔓延)하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나, 명백하게 변서(辨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경알(傾軋)하는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알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임인년341) 의 추안(推案)을 보고 나서 추안을 그대로 이광좌에게 내려 주며 말하기를,
"내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다. 이 일을 만약 한 번 분변하여 드러낸다면, 뒷날 죽어서 이성(二聖)을 뵈올 낯이 있을 것이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임인년의 역옥(逆獄)을 어찌 다시 말할 수 있으랴? 내가 바야흐로 김일경와 목호룡을 다스리고 있으니, 한쪽편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 반드시 ‘장차 반안(反案)할 것이라.’고 생각하리라. 하나 ‘그 마음을 들추어 본다.’고 한 것이 아무리 심상길(沈尙吉)의 말이라 하더라도, 어찌하여 차마 나의 작호(爵號)의 파자(破字)를 변서(變書)에다 쓸 수 있단 말이냐? 목호룡의 처음 초사는 지극히 음흉하고 참혹하여 그가 내 마음을 안다고 하였는데, 그가 어찌 내 마음을 알았단 말이냐?"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만약 사람이라면 어찌 전하의 심사(心事)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망극(罔極)한 말이 비록 역적(逆賊)의 입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그가 어찌 감히 쓴단 말입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일경과 표리(表裏)가 되어 서로 화응(和應)한 자취가 있다."
하므로, 이광좌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목호룡을 나래(拿來)하여 물으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래하라."
하였다. 드디어 김일경을 추문(推問)하자, 김일경이 공초하기를,
"‘스스로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여긴다[自視靑天白日]’는 말은 ‘청천 백일과 같다[如靑天白日]’는 말과 뜻에 다름이 없습니다. 각건(各件)의 일은 여러 소(疏)에서 모두 ‘성궁(聖躬)을 기핍(譏逼)했다.’고 하였기 때문에 앞서의 초사(招辭)에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밤 초사를 바칠 때 ‘스스로 여긴다[自視]’란 두 글자를 곧 지워버릴 것을 청하자 죄인의 초사는 이미 쓴 뒤에 지울 수 없다며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목호룡의 초사는 제가 오래 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아 어떤 말이었는지 알수 없으므로, 그의 초사와 서로 같은지 실로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성상께서는 매번 성궁을 기핍한 양으로 하교하시니, 저는 너무나도 원통합니다. ‘진왕(秦王)은 건성(建成)을 죽였고 환공(桓公)은 시해(弑害)에 참여했다.’는 말은 이봉명(李鳳鳴)의 상소 가운데 운운한 말입니다. 제게 만약 성궁을 기핍하려는 뜻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감히 팔방에 널리 고(告)하는 교문(敎文)에다 제멋대로 썼겠습니까? 저의 지난번 초사에다 쓴 ‘전하께서 스스로 청천 백일 처럼 여긴다[殿下自視如靑天白日]’는 말이 오늘 한 ‘전하께서 청천 백일 같다[殿下如靑天白日]’란 말과 그 사이에 무슨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문세(文勢)로 보건대, ‘스스로 여긴다[自視]’란 두 글자는 부족함이 있는 듯했기 때문에 창졸간에 입으로 부른 것이고, 즉시 지워버릴 것을 청했지만 국청(鞫廳)의 대신(大臣) 이하가 따르지 않았습니다. 항양(桁楊)342) 아래나 질곡(桎梏)343) 가운데서 신기(神氣)가 흩어져 어지러운 사람이 문자(文字) 사이에 한두 글자가 부족한 것은 본디 괴이한 일이 아니니, 어찌 그 사이에 음흉한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애초부터 만약 음흉한 뜻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돌아서서 지울 것을 청하는 말을 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명철하시어, 경알(傾軋)의 습속을 엄히 막고 계시니, 어찌 반드시 정신(廷臣)을 함해(陷害)하는 폐단이 있었겠습니까? 벗을 팔아 살기를 도모하는 것을 옛사람이 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더욱이 그 말한 바가 ‘다른 사람이 이미 그르다고 했으니, 고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한 데 불과한 것이겠습니까? 그 말은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니, 이것을 지적해 고(告)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문랑(問郞)과 금오랑(金吾郞)에게 명하여 엄형(嚴刑)하여 물을 것을 신칙(申飭)하게 하였으나, 김일경은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았다. 죄인에게 ‘부도(不道)’한 것으로 승관(承款)하라 명하니, 이에 말하기를,
"성품이 원래 충직(忠直)하여 부도한 일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군부(君父)로 하여금 스스로 여기게 하는 것이 충직(忠直)이란 말이냐?"
하니, 김일경이 공초하기를,
"신하의 우러러 바라는 바가 이와 같고 군부의 스스로 여김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흉언(凶言)이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즉시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선대왕(先大王)의 빈전(殯殿)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서 죽는다면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습니다."
하였다. 또 물으니, 곧 말하기를,
"이미 충곡(衷曲)한 말을 다했으니, 달리 진달할 바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충곡에서 나왔다는 것이 부도한 말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김일경의 공초는 모두 정성스런 충심(忠心)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는데, 한차례 형신(刑訊)했지만 불복(不服)하였다. 목호룡을 나래(拿來)한 뒤 임금이 또 친히 문목(問目)을 부르기를,
"임인년의 고변서(告變書) 안에다 감히 누명(累名)을 씻는 등의 일을 제멋대로 썼으며, 납초(納招)한 것 가운데 ‘그 마음을 들춘다.’는 말은 음흉하고 참혹하였다. 그때의 역변(逆變)이 얼마나 망측(罔測)한 것이었는데, 제멋대로 그 사이에 거론하였는가? ‘감히 춘저(春邸)에 있을 때 평생의 심사(心事)를 알고 있다.’는 등의 말과 ‘즐겨 왕(王)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고 한 것은 더욱 지극히 음흉하고 참혹하다. 그날 천일(天日)이 조림(照臨)서 아셨는데 안국(按鞫)하던 신하들이 차마 캐물을 수가 없었으므로 요행스럽게도 형장(刑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김일경의 일로 보건대, 네가 말한 바와 표리(表裏)가 되어 서로 부합(符合)된다. 이 따위의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음흉한 사람에게 말하고 교문(敎文) 가운데 드러내었으니,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라."
하였다. 목호룡은 나이 41세였는데, 공초(供招)하기를,
"전후의 사변(事變)과 역절(逆節)은 저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천일(天日)이 통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역변(逆變)의 장본(張本)에 대한 전후의 일은 모두가 비단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로 전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기괴(奇怪)하기 짝이 없는 정상을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하지를 못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 친히 천정(天庭)에서 물으시니 지금이야말로 말을 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 역변(逆變)은 모두 주액(肘腋) 사이에 있었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과 요인배(妖人輩)들에게서 일어났으니, 천하 만세(萬世)에 누가 그 정절(情節)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조(趙)나라 관고(貫高)는 조왕(趙王)을 위해 함거(檻車)를 타고 경사(京師)로 가서 조왕(趙王)의 심사(心事)를 밝힘으로써 그 충절(忠節)을 다하였습니다.344) 오늘날의 역변(逆變)은 옛날의 백인(柏人)보다 더하니, 제가 전하의 심사를 천하 후세에 만고(萬古)토록 밝힌 것은 더욱 관고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아니었던들, 천하 만고 후세에 어떻게 전하께서 청천 백일 같은 마음을 가지셨음과 주액(肘腋) 사이에서 역적(逆賊)이 일어날 줄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천하 후세에 누가 능히 저처럼 밝게 전하의 심사(心事)를 폄으로써 천지의 강상(綱常)이 밝아지고 종사(宗社)가 안정된 줄 알겠습니까? 역적 무리들이 전후로 행한 바는 모두 전하께 털끝만큼도 서로 가깝지 않은 일이었으나, 전하께서 아시지 못하는 사이에 몰래 전하께 욕(辱)을 끼치려 하였으므로 심장을 쑤시듯 뼈에 사무치듯 통탄스런 나머지 한편으로는 종사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전하를 위해 역적을 토죄(討罪)하고 억울함을 씻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급서(急書) 가운데 말을 잘 가려서 하지 못했던 것은 문사(文辭)가 거칠고 졸렬한데다 말이 급박(急迫)하여 말씨가 온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변(告變)하여 역적을 토죄하는 사람의 말이 어찌 과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찬찬히 저의 말을 따져 보신다면, 충분(忠憤)에 격동(激動)되어 나온 것이라 전하를 위한 말이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역적들이 몰래 전하를 팔아 요악(妖惡)한 말을 하려 하였으므로 역적배들에게 분을 느껴 역적을 토죄하는 말을 했던 것이니, 추호도 범상(犯上)하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고 통곡할 만하며, 까무라칠 일은, 전하께서 하늘이 낸 효제(孝悌)를 가지고서 비언(鄙言)의 전후 사실을 물으려 하지 않으시고, 저에게 물으신 것이니, 역변(逆變)의 장본(張本)이 전하께 가깝지 않은 정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저는 비단 종사(宗社)에 공(功)이 있을 뿐 아니라 전하께 공이 있으며, 비단 전하께 공이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온 나라 안의 사람들이 그 누군들 전하의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 안옥(按獄)한 대신(大臣)들 또한 역변이 그 무리들에게서 일어났고 제가 공초(供招)한 바가 모두 전하께서 태백(泰伯)·중옹(仲雍)345) 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고 있음과 청천 백일 같은 마음을 제가 능히 밝혔기 때문에 아름답게 여겼던 것입니다. 교문(敎文) 가운데 은연중에 전하를 침범한 일은 저는 능히 전하의 청천 백일 같은 마음을 알고 있었고, 김일경은 전하의 청천 백일 같은 마음을 알지 못했으니, 어찌 그 차이가 너무나도 크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김일경을 국문(鞫問)하시는 것은 천지간의 지극히 원통한 일을 은연중에 침범했기 때문이니, 구문(究問)하시는 일은 정정당당합니다. 저의 급서(急書) 안에 있는 ‘원통함을 씻는다.’는 말은 역적의 말을 외었던 것이고, 납초(納招)한 일을 문목(問目)으로 내니, 모역(謀逆)에 대한 말이라면 어떤 말인들 역적의 말이라며 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고변(告變)할 즈음에 그 말이 어찌 흉악하고 참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저를 위태롭게 여기고 저를 도마 위의 고깃덩이로 생각하며 반드시 먼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의리(義理)를 알고 있고 역적배들의 일은 곧 전하께서 통렬하게 미워하시는 바이기 때문에 흉적(凶賊)에게 고자(顧藉)하여 저에게 미움을 더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대려(帶礪)346) 의 맹세로 시종 저의 자급(資級)을 아름답게 하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김일경이 전하를 무함(誣陷)한 일에 대해 저를 부르시고 물으시는데, 저는 전하를 위했고 김일경은 전하를 무함하였으니, 어찌 서로 상반되어 모순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마음 아파하는 바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시어 공정(公正)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므로, 사해(四海)의 사람들이 눈을 닦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 옥사(獄事) 때문에 저를 잡아다 물으시니, 천하 후세에 누가 전하의 심사(心事)가 청천 백일 같고, 윤리(倫理)·강상(綱常)을 중히 여겨 심사를 펴고자 했음을 알겠습니까? 혹 알지 못하는 자가 고변(告變)한 저를 전하께 죄를 지었다고 하여 김일경과 더불어 같이 다스린다면, 저의 심사를 명백하게 알 자 그 누구이겠습니까? 제가 만약 김일경의 말이 전하를 침범했음을 알았다면, 제가 김일경을 베자고 청했을 것입니다. 제가 어찌 김일경의 심사를 알겠습니까? 여러 역적들이 복법(伏法)되던 날 음흉하고 참독(慘毒)한 말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으나, 제가 극구 서로 다투었으니, 전하께서 만약 저로 하여금 전후의 사실을 상세히 진달하게 하시고 찬찬히 살펴보신다면, 반드시 저를 가상하게 여기실지언정 통렬하게 미워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적배들의 역변(逆變)의 본말(本末)은 묻지 않으시고 너무나 뜻밖에도 김일경의 흉패(凶悖)한 말을 끌어대어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이미 마음속에 있던 일이 아니니,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능히 마음에 달갑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종사(宗社)와 신령(神靈)의 주인이 되셨으니, 천지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공에 대해서는 공으로 여기시고 죄에 대해서는 죄로 여기소서. 그리하여 저의 전후의 일을 사핵(査覈)하신 뒤 잘못이 있다면 주륙(誅戮)하시고 선행(善行)이 있다면 가장(嘉奬)하시어 천지와 같은 어진 교화(敎化)를 밝히소서." 하였다.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였는데, 묻기를, "임인년의 일은 모두 옥안(獄案)에 있으니, 어찌 네가 진달(陳達)하기를 기다리겠느냐? 그리고 관고(貫高)의 일은 뒷날 다른 사람이 너의 말처럼 진변(陳辨)한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네가 스스로 망측(罔測)한 말을 올리고 도리어 스스로 관고에 비기니 더욱 지극히 흉악하고 교활하다. 춘저(春邸)에 있을 때의 심사(心事)는 대행조(大行朝)께서 인애(仁愛)하신 성덕(盛德)으로 이미 남김없이 통촉하셨으니, 어찌 너의 말을 기다려 바야흐로 명백해진단 말이냐? 그럴 듯하게 꾸며대니 그 마음이 음비(陰祕)하다. 그런데도 감히 이것으로 오늘날 공(功)을 바라는 계책으로 삼으니, 진실로 지극히 통악(痛惡)하다. 너의 초사(招辭) 안에 이처럼 범상(犯上)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김일경이 이런 일에 대해 의심을 두어 망측(罔測)한 말을 교문(敎文)에다 집어 넣었던 것이었으니, 그 장본을 따져본다면 그 누구이겠느냐? 도마 위의 고깃덩이란 말은 청문(聽聞)을 현혹시키려는 계책으로서 지극히 흉악하다. 지난날 역변(逆變)을 말하자니, 입이 더러워질 지경이다. 무슨 물을 것이 있겠는가? 또 너는 곧 역적 무리 가운데 든 자라 범상하는 패리(悖理)한 말을 끝도 없이 하였고, 고변(告變)했을 때 방자하게 써 넣었으니, 지난날 너의 마음이 곧 뭇 역적의 마음이다. 인산(因山) 전에 음흉한 정절(情節)을 캐내어 빈전(殯殿)에 고(告)하고자 한다. 직초(直招)하라." 하니, 목호룡이 공초하기를, "관고는 조왕(趙王)의 알지 못했던 심사(心事)를 밝혔을 뿐이었고, 저는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부지(扶持)하고 전하의 심사를 만세(萬世)에 밝혔으니, 관고에 견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약 고변(告變)했다면, 제가 또한 전하를 위해 신변(申辨)했을 것이니, 말이 비록 저의 입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전하의 심사를 밝히고 충성을 다한 것이 어찌 다른 사람의 고(告)한 뒤에 신변한 것과 다르겠습니까? 전하의 청천 백일 같은 마음을 천하의 누군들 알지 못하겠습니까만, 단지 이미 역적들이 전하를 무욕(誣辱)했기 때문에 제가 역적을 토죄(討罪)했던 것이니, 감히 공(功)을 바란 계책을 꾸몄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공을 바라는 뜻이 있었다면, 어찌 능히 오늘 공을 바랄 수 있음을 미리 알아 상변(上變)한 날 전하의 심사를 포백(暴白)하는 말을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청천(靑天)에 한 점 구름이 있는 것과 같음이 있으셨다면, 제가 어찌 억울함을 씻는 일이 있겠습니까? 전하를 위해 심사(心事)를 신변(伸辨)하고자 하면서 역적들이 전하를 무함(誣陷)하는 말을 고(告)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즐겨 왕이 되고 싶지 않는 마음’은 비록 천하의 왕노릇을 한다 할지라도 또한 즐겨 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곧 백이(伯夷)·숙제(叔齊)347) 와 계찰(季札)348) 의 마음입니다. 저는 범상(犯上)한 말도 없고 김일경은 제가 아니니, 그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김일경의 죄가 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는 종사(宗社)와 전하께 공(功)이 있으니, 전하께서 저를 탁용(擢用)하시어 천하 사람들에게 보이실 것을 천만번 바랐는데, 오늘 국문(鞫問)하시니 너무나도 뜻밖입니다. 만약 김일경의 흉패(凶悖)한 말을 더할 수 없는 아픔을 느끼신다면 저의 말을 가상히 여기시고 장려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황헌(黃瀗)과 이원로(李元老)가 구인후(具仁垕)를 죽이려다가 되지 않아 그대로 고변(告變)하니, 성주(聖主)께서 가상히 여기셨습니다.349) 저는 역적 무리들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 무엇이 족히 죄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공초(供招)를 다 보고 나서 하교하기를, "단지 삼수(三手)의 역변(逆變)만 가지고 고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관계도 없는 나를 변서(變書)에 집어 넣었으니, ‘즐겨 왕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은 심상길(沈尙吉)의 말이 아니라 곧 그의 말이다." 하니, 이광조가 말하기를, "이제(夷齊)란 말이 지극히 놀랍고 패리(悖理)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은 김일경의 신축년 상소를 살펴보았는가? 그 말이 음흉하고 참혹해 목호룡과 다를 것이 없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축년의 대소(大疏)를 가리키시는 것인지요?"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상길의 결안(結案) 가운데 목호룡의 이 말이 없었느냐?" 하니, 문랑(問郞) 김계환(金啓煥)이 말하기를, "목호룡이 심상길과 면질(面質)했을 때와 초사(招辭)를 바쳤을 때 만약 그 일에 언급하는 것이 있으면, 문랑(問郞)이 비록 썼다 하더라도 대신(大臣)이 문목(問目)외의 사연(辭緣)이라 하여 번번이 지워버렸으므로 국안(鞫案)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미 정탈(定奪)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여 묻기를, "그때 죄인의 초사(招辭)와 결안(結案)에는 원래 지척(指斥)한 말이 없었으니, 네가 감히 부도(不道)한 말을 하였음을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 있다. 신축년의 김일경의 상소는 너의 임인년의 초사와 말뜻이 서로 같으니, 그 마음의 서로 관계됨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목호룡의 공초는 전과 같았다. 한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회맹단(會盟壇)의 삽혈(歃血)350) 이 채 마르기도 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흉악하고 처참하다." 하였다. 다시 김일경을 추문(推問)하였는데, 죄인이 드나들 때 나장(羅將)의 소리가 여전히 낮고 희미하다 하여 금당(禁堂)은 추고(推考)하고 해당 도사(都事)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김일경을 두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이광좌가 동당(同黨)에게 묻기를 청하자,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그의 초사(招辭)에 최석항(崔錫恒) 또한 말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최석항은 다음날 새벽 빈청(賓廳)에 도착한 뒤 비로소 교문(敎文)을 보고 정원(政院)에 말을 전해 고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혹 세 글자가 훗날 정신(廷臣)을 함해(陷害)하는 단서가 될 것이라 하기에 생각하여 상세히 묻는 것이다." 하였다. 김일경이 공칭(供稱)하기를, "비록 죽는다 해도 고(告)할 수 없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종무(鐘巫) 등 세 건의 흉악하고 참혹한 글을 어찌하여 반드시 아울러 썼느냐?" 하니, 김일경이 공칭하기를, "제 마음에는 그것이 흉악하고 참혹한 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곧장 결안(結案)하라는 일을 분부(分付)하라." 하니, 김일경이 공칭하기를, "결안 없는 죄는 오로지 아무렇게나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부도(不道)를 범한 자는 요참(腰斬)하는 법이다. 어찌하여 감히 결안하지 않느냐?" 하니, 김일경이 공칭하기를, "부도인 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혹 한 조관(條款)을 이미 발단(發端)했다가 굳게 은휘(隱諱)하니, 비록 고하더라도 반드시 일죄(一罪)로는 논단(論斷)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하겠지만,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온 조정에 가득한 여러 신하들이 장차 악역(惡逆)의 죄과(罪科)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휩쓸려 당하는 자가 어찌 원통하지 않겠느냐?" 하니, 김일경이 공칭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한 말이라 비록 희미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고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先王)의 충신(忠臣)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였다. 이광좌와 조태억이 환궁(還宮)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들은 비록 한때의 무함(誣陷)을 당해도 오히려 인혐(引嫌)한다. 하물며 한 나라의 인주(人主)가 되어 이런 씻기 어려운 무함을 당하였는데 어찌 단지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목호룡을 한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목호룡이 공초(供招)하기를, "고한 자는 죽는 법이니, 장차 고한 자로서 죽겠지만, 흉심(凶心)은 없었습니다." 하고, 또 공칭하기를, "단지 종사(宗社)를 위했던 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죄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사를 위했던 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역적을 돌보아 비호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군부(君父)를 대하여 이런 말을 하니, 지극히 흉악하고 교활하다. 이것이 족히 단안(斷案)이 될 만하다." 하였다. 이어서 대신(大臣)에게 하교하기를, "김일경과 목호룡의 집에 있는 문서(文書)를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을 보내 수탐(搜探)해 오도록 하라. 그러나 같은 조정에서 친구로서 서찰(書札)을 주고받은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니, 국청(鞫廳)에 내릴 필요가 없으며 또 유중(留中)할 수도 없다.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때의 예(例)에 의해 죄다 태워버리라."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측자(反側子)로 하여금 안심하게 한다351) 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불안한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해 전교(傳敎)를 쓰게 하며 이르기를, "오늘 김일경과 목호룡을 친국(親鞫)한 것은 저들의 부도(不道)한 말에서 말미암았으니, 만약 이 일로 인해 역옥(逆獄)을 변환(變換)시키고 정신(廷臣)을 경알(傾軋)하는 폐단이 있다면, 마땅히 역적을 비호한 율(律)로 논할 것이다. 본원(本院)에서는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0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註 338] 작문 군사(作門軍士) : 작문(作門)은 파수하는 군사를 배치하여 출입을 단속하는 군영(軍營)의 문. 작문 군사는 이에 배치된 군사.[註 33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340] 저뢰(抵賴) : 거짓말을 하여 죄를 자복(自服)하지 않음.[註 341]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342] 항양(桁楊) : 죄인의 발목에 채우는 형구(刑具). 차꼬.[註 343] 질곡(桎梏) : 수갑과 차꼬. 형구(刑具).[註 344] 조(趙)나라관고(貫高)는 조왕(趙王)을 위해 함거(檻車)를 타고 경사(京師)로 가서 조왕(趙王)의 심사(心事)를 밝힘으로써 그 충절(忠節)을 다하였습니다. : 한(漢)나라 초기에 한 고조(漢高祖)가 조(趙)나라를 지나며 사위인 조왕(趙王) 장오(張敖)를 모욕적으로 대하자, 재상(宰相) 관고(貫高)가 고조를 죽여 수치를 씻겠다고 하므로, 장오가 극력 말렸음. 그러나 관고는 백인현(柏人縣)에 자객을 숨겨 두고 고조가 지나는 길에 머무르면 죽이려 하였는데, 고조가 ‘백인(柏人)’이란 말에는 사람을 협박하는 뜻이 있다며 묵지 않았으므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음. 다음해 관고의 적이 밀고하여 장오는 죄수가 타는 수레[檻車]에 실려 장안(長安)으로 옮겨졌는데, 고조가 장오를 따라오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 하였으나, 관고만은 이에도 불구하고 장안으로 가서 모진 형벌을 견디며 장오가 무죄(無罪)임을 변명했고, 고조는 이에 감동하여 장오와 관고를 용서했다는 고사를 말함.[註 345] 태백(泰伯)·중옹(仲雍) :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아들로 태왕이 막내인 계력(季歷)에게 전위(傳位)할 의사가 있음을 알고 왕위를 양보하여 형만(荊蠻)의 땅으로 피해 떠나간 사람들임.[註 346] 대려(帶礪) : 임금이 공신(功臣)의 집안을 영구히 변치 않고 대접한다는 맹세의 말.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봉작(封爵)한 서사(誓辭)에,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평지가 되도록 나라에서 영구 보존하리라[使黃河如帶 泰山如礪 國以永存]" 한 데에서 나온 말.[註 347] 백이(伯夷)·숙제(叔齊) :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은나라가 멸망한 뒤 주(周)나라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음.[註 348] 계찰(季札) : 춘추 시대(春秋時代)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작은 아들. 어질다는 명성이 있었으므로 왕이 자기 자리를 전해 주려 하였으나 받지 않았으며, 상국(上國)을 편력해 당세의 현인(賢人)들과 사귀었음.[註 349] 황헌(黃瀗)과 이원로(李元老)가 구인후(具仁垕)를 죽이려다가 되지 않아 그대로 고변(告變)하니, 성주(聖主)께서 가상히 여기셨습니다. : 심기원(沈器遠)의 모반(謀叛) 사건 때 심기원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훈련 대장 구인후(具仁垕)였으므로, 구인후를 죽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심기원의 막하(幕下)인 황헌(黃瀗)·이원로(李元老)가 도리어 고변(告變)했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때 인조(仁祖)가 황헌·이원로가 심기원의 일당(一黨)이었음을 묻지 않고 고변한 공(功)을 칭찬했다는 것임.[註 350] 삽혈(歃血) : 맹세한 때에 희생(犧牲)을 잡아 서로 그 피를 들여마셔 입술을 벌겋게 하고, 서약(誓約)을 꼭 지킨다는 단심(丹心)을 신(神)에게 맹세하는 일. 또는 그 피.[註 351] 반측자(反側子)로 하여금 안심하게 한다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모반(謀叛)에 관계되었던 자들, 즉 반측자(反側子)에 대한 문서를 받았으나, 이를 살펴보지도 않은 채 태워버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도록 한 고사(故事).
오늘날의 역변(逆變)은 옛날의 백인(柏人)보다 더하니, 제가 전하의 심사를 천하 후세에 만고(萬古)토록 밝힌 것은 더욱 관고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아니었던들, 천하 만고 후세에 어떻게 전하께서 청천 백일 같은 마음을 가지셨음과 주액(肘腋) 사이에서 역적(逆賊)이 일어날 줄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천하 후세에 누가 능히 저처럼 밝게 전하의 심사(心事)를 폄으로써 천지의 강상(綱常)이 밝아지고 종사(宗社)가 안정된 줄 알겠습니까? 역적 무리들이 전후로 행한 바는 모두 전하께 털끝만큼도 서로 가깝지 않은 일이었으나, 전하께서 아시지 못하는 사이에 몰래 전하께 욕(辱)을 끼치려 하였으므로 심장을 쑤시듯 뼈에 사무치듯 통탄스런 나머지 한편으로는 종사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전하를 위해 역적을 토죄(討罪)하고 억울함을 씻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급서(急書) 가운데 말을 잘 가려서 하지 못했던 것은 문사(文辭)가 거칠고 졸렬한데다 말이 급박(急迫)하여 말씨가 온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변(告變)하여 역적을 토죄하는 사람의 말이 어찌 과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찬찬히 저의 말을 따져 보신다면, 충분(忠憤)에 격동(激動)되어 나온 것이라 전하를 위한 말이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역적들이 몰래 전하를 팔아 요악(妖惡)한 말을 하려 하였으므로 역적배들에게 분을 느껴 역적을 토죄하는 말을 했던 것이니, 추호도 범상(犯上)하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고 통곡할 만하며, 까무라칠 일은, 전하께서 하늘이 낸 효제(孝悌)를 가지고서 비언(鄙言)의 전후 사실을 물으려 하지 않으시고, 저에게 물으신 것이니, 역변(逆變)의 장본(張本)이 전하께 가깝지 않은 정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저는 비단 종사(宗社)에 공(功)이 있을 뿐 아니라 전하께 공이 있으며, 비단 전하께 공이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온 나라 안의 사람들이 그 누군들 전하의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 안옥(按獄)한 대신(大臣)들 또한 역변이 그 무리들에게서 일어났고 제가 공초(供招)한 바가 모두 전하께서 태백(泰伯)·중옹(仲雍)345) 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고 있음과 청천 백일 같은 마음을 제가 능히 밝혔기 때문에 아름답게 여겼던 것입니다. 교문(敎文) 가운데 은연중에 전하를 침범한 일은 저는 능히 전하의 청천 백일 같은 마음을 알고 있었고, 김일경은 전하의 청천 백일 같은 마음을 알지 못했으니, 어찌 그 차이가 너무나도 크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김일경을 국문(鞫問)하시는 것은 천지간의 지극히 원통한 일을 은연중에 침범했기 때문이니, 구문(究問)하시는 일은 정정당당합니다. 저의 급서(急書) 안에 있는 ‘원통함을 씻는다.’는 말은 역적의 말을 외었던 것이고, 납초(納招)한 일을 문목(問目)으로 내니, 모역(謀逆)에 대한 말이라면 어떤 말인들 역적의 말이라며 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고변(告變)할 즈음에 그 말이 어찌 흉악하고 참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저를 위태롭게 여기고 저를 도마 위의 고깃덩이로 생각하며 반드시 먼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의리(義理)를 알고 있고 역적배들의 일은 곧 전하께서 통렬하게 미워하시는 바이기 때문에 흉적(凶賊)에게 고자(顧藉)하여 저에게 미움을 더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대려(帶礪)346) 의 맹세로 시종 저의 자급(資級)을 아름답게 하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김일경이 전하를 무함(誣陷)한 일에 대해 저를 부르시고 물으시는데, 저는 전하를 위했고 김일경은 전하를 무함하였으니, 어찌 서로 상반되어 모순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마음 아파하는 바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시어 공정(公正)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므로, 사해(四海)의 사람들이 눈을 닦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 옥사(獄事) 때문에 저를 잡아다 물으시니, 천하 후세에 누가 전하의 심사(心事)가 청천 백일 같고, 윤리(倫理)·강상(綱常)을 중히 여겨 심사를 펴고자 했음을 알겠습니까? 혹 알지 못하는 자가 고변(告變)한 저를 전하께 죄를 지었다고 하여 김일경과 더불어 같이 다스린다면, 저의 심사를 명백하게 알 자 그 누구이겠습니까? 제가 만약 김일경의 말이 전하를 침범했음을 알았다면, 제가 김일경을 베자고 청했을 것입니다. 제가 어찌 김일경의 심사를 알겠습니까? 여러 역적들이 복법(伏法)되던 날 음흉하고 참독(慘毒)한 말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으나, 제가 극구 서로 다투었으니, 전하께서 만약 저로 하여금 전후의 사실을 상세히 진달하게 하시고 찬찬히 살펴보신다면, 반드시 저를 가상하게 여기실지언정 통렬하게 미워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적배들의 역변(逆變)의 본말(本末)은 묻지 않으시고 너무나 뜻밖에도 김일경의 흉패(凶悖)한 말을 끌어대어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이미 마음속에 있던 일이 아니니,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능히 마음에 달갑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종사(宗社)와 신령(神靈)의 주인이 되셨으니, 천지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공에 대해서는 공으로 여기시고 죄에 대해서는 죄로 여기소서. 그리하여 저의 전후의 일을 사핵(査覈)하신 뒤 잘못이 있다면 주륙(誅戮)하시고 선행(善行)이 있다면 가장(嘉奬)하시어 천지와 같은 어진 교화(敎化)를 밝히소서."
하였다.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였는데, 묻기를,
"임인년의 일은 모두 옥안(獄案)에 있으니, 어찌 네가 진달(陳達)하기를 기다리겠느냐? 그리고 관고(貫高)의 일은 뒷날 다른 사람이 너의 말처럼 진변(陳辨)한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네가 스스로 망측(罔測)한 말을 올리고 도리어 스스로 관고에 비기니 더욱 지극히 흉악하고 교활하다. 춘저(春邸)에 있을 때의 심사(心事)는 대행조(大行朝)께서 인애(仁愛)하신 성덕(盛德)으로 이미 남김없이 통촉하셨으니, 어찌 너의 말을 기다려 바야흐로 명백해진단 말이냐? 그럴 듯하게 꾸며대니 그 마음이 음비(陰祕)하다. 그런데도 감히 이것으로 오늘날 공(功)을 바라는 계책으로 삼으니, 진실로 지극히 통악(痛惡)하다. 너의 초사(招辭) 안에 이처럼 범상(犯上)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김일경이 이런 일에 대해 의심을 두어 망측(罔測)한 말을 교문(敎文)에다 집어 넣었던 것이었으니, 그 장본을 따져본다면 그 누구이겠느냐? 도마 위의 고깃덩이란 말은 청문(聽聞)을 현혹시키려는 계책으로서 지극히 흉악하다. 지난날 역변(逆變)을 말하자니, 입이 더러워질 지경이다. 무슨 물을 것이 있겠는가? 또 너는 곧 역적 무리 가운데 든 자라 범상하는 패리(悖理)한 말을 끝도 없이 하였고, 고변(告變)했을 때 방자하게 써 넣었으니, 지난날 너의 마음이 곧 뭇 역적의 마음이다. 인산(因山) 전에 음흉한 정절(情節)을 캐내어 빈전(殯殿)에 고(告)하고자 한다. 직초(直招)하라."
하니, 목호룡이 공초하기를,
"관고는 조왕(趙王)의 알지 못했던 심사(心事)를 밝혔을 뿐이었고, 저는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부지(扶持)하고 전하의 심사를 만세(萬世)에 밝혔으니, 관고에 견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약 고변(告變)했다면, 제가 또한 전하를 위해 신변(申辨)했을 것이니, 말이 비록 저의 입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전하의 심사를 밝히고 충성을 다한 것이 어찌 다른 사람의 고(告)한 뒤에 신변한 것과 다르겠습니까? 전하의 청천 백일 같은 마음을 천하의 누군들 알지 못하겠습니까만, 단지 이미 역적들이 전하를 무욕(誣辱)했기 때문에 제가 역적을 토죄(討罪)했던 것이니, 감히 공(功)을 바란 계책을 꾸몄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공을 바라는 뜻이 있었다면, 어찌 능히 오늘 공을 바랄 수 있음을 미리 알아 상변(上變)한 날 전하의 심사를 포백(暴白)하는 말을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청천(靑天)에 한 점 구름이 있는 것과 같음이 있으셨다면, 제가 어찌 억울함을 씻는 일이 있겠습니까?
전하를 위해 심사(心事)를 신변(伸辨)하고자 하면서 역적들이 전하를 무함(誣陷)하는 말을 고(告)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즐겨 왕이 되고 싶지 않는 마음’은 비록 천하의 왕노릇을 한다 할지라도 또한 즐겨 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곧 백이(伯夷)·숙제(叔齊)347) 와 계찰(季札)348) 의 마음입니다. 저는 범상(犯上)한 말도 없고 김일경은 제가 아니니, 그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김일경의 죄가 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는 종사(宗社)와 전하께 공(功)이 있으니, 전하께서 저를 탁용(擢用)하시어 천하 사람들에게 보이실 것을 천만번 바랐는데, 오늘 국문(鞫問)하시니 너무나도 뜻밖입니다. 만약 김일경의 흉패(凶悖)한 말을 더할 수 없는 아픔을 느끼신다면 저의 말을 가상히 여기시고 장려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황헌(黃瀗)과 이원로(李元老)가 구인후(具仁垕)를 죽이려다가 되지 않아 그대로 고변(告變)하니, 성주(聖主)께서 가상히 여기셨습니다.349) 저는 역적 무리들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 무엇이 족히 죄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공초(供招)를 다 보고 나서 하교하기를,
"단지 삼수(三手)의 역변(逆變)만 가지고 고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관계도 없는 나를 변서(變書)에 집어 넣었으니, ‘즐겨 왕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은 심상길(沈尙吉)의 말이 아니라 곧 그의 말이다."
하니, 이광조가 말하기를,
"이제(夷齊)란 말이 지극히 놀랍고 패리(悖理)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은 김일경의 신축년 상소를 살펴보았는가? 그 말이 음흉하고 참혹해 목호룡과 다를 것이 없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축년의 대소(大疏)를 가리키시는 것인지요?"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상길의 결안(結案) 가운데 목호룡의 이 말이 없었느냐?"
하니, 문랑(問郞) 김계환(金啓煥)이 말하기를,
"목호룡이 심상길과 면질(面質)했을 때와 초사(招辭)를 바쳤을 때 만약 그 일에 언급하는 것이 있으면, 문랑(問郞)이 비록 썼다 하더라도 대신(大臣)이 문목(問目)외의 사연(辭緣)이라 하여 번번이 지워버렸으므로 국안(鞫案)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미 정탈(定奪)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여 묻기를,
"그때 죄인의 초사(招辭)와 결안(結案)에는 원래 지척(指斥)한 말이 없었으니, 네가 감히 부도(不道)한 말을 하였음을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 있다. 신축년의 김일경의 상소는 너의 임인년의 초사와 말뜻이 서로 같으니, 그 마음의 서로 관계됨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목호룡의 공초는 전과 같았다. 한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회맹단(會盟壇)의 삽혈(歃血)350) 이 채 마르기도 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흉악하고 처참하다."
하였다. 다시 김일경을 추문(推問)하였는데, 죄인이 드나들 때 나장(羅將)의 소리가 여전히 낮고 희미하다 하여 금당(禁堂)은 추고(推考)하고 해당 도사(都事)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김일경을 두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이광좌가 동당(同黨)에게 묻기를 청하자,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그의 초사(招辭)에 최석항(崔錫恒) 또한 말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최석항은 다음날 새벽 빈청(賓廳)에 도착한 뒤 비로소 교문(敎文)을 보고 정원(政院)에 말을 전해 고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혹 세 글자가 훗날 정신(廷臣)을 함해(陷害)하는 단서가 될 것이라 하기에 생각하여 상세히 묻는 것이다."
하였다. 김일경이 공칭(供稱)하기를,
"비록 죽는다 해도 고(告)할 수 없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종무(鐘巫) 등 세 건의 흉악하고 참혹한 글을 어찌하여 반드시 아울러 썼느냐?"
하니, 김일경이 공칭하기를,
"제 마음에는 그것이 흉악하고 참혹한 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곧장 결안(結案)하라는 일을 분부(分付)하라."
하니, 김일경이 공칭하기를,
"결안 없는 죄는 오로지 아무렇게나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부도(不道)를 범한 자는 요참(腰斬)하는 법이다. 어찌하여 감히 결안하지 않느냐?"
하니, 김일경이 공칭하기를,
"부도인 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혹 한 조관(條款)을 이미 발단(發端)했다가 굳게 은휘(隱諱)하니, 비록 고하더라도 반드시 일죄(一罪)로는 논단(論斷)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하겠지만,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온 조정에 가득한 여러 신하들이 장차 악역(惡逆)의 죄과(罪科)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휩쓸려 당하는 자가 어찌 원통하지 않겠느냐?"
하니, 김일경이 공칭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한 말이라 비록 희미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고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先王)의 충신(忠臣)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였다. 이광좌와 조태억이 환궁(還宮)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들은 비록 한때의 무함(誣陷)을 당해도 오히려 인혐(引嫌)한다. 하물며 한 나라의 인주(人主)가 되어 이런 씻기 어려운 무함을 당하였는데 어찌 단지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목호룡을 한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목호룡이 공초(供招)하기를,
"고한 자는 죽는 법이니, 장차 고한 자로서 죽겠지만, 흉심(凶心)은 없었습니다."
하고, 또 공칭하기를,
"단지 종사(宗社)를 위했던 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죄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사를 위했던 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역적을 돌보아 비호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군부(君父)를 대하여 이런 말을 하니, 지극히 흉악하고 교활하다. 이것이 족히 단안(斷案)이 될 만하다."
하였다. 이어서 대신(大臣)에게 하교하기를,
"김일경과 목호룡의 집에 있는 문서(文書)를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을 보내 수탐(搜探)해 오도록 하라. 그러나 같은 조정에서 친구로서 서찰(書札)을 주고받은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니, 국청(鞫廳)에 내릴 필요가 없으며 또 유중(留中)할 수도 없다.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때의 예(例)에 의해 죄다 태워버리라."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측자(反側子)로 하여금 안심하게 한다351) 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불안한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해 전교(傳敎)를 쓰게 하며 이르기를,
"오늘 김일경과 목호룡을 친국(親鞫)한 것은 저들의 부도(不道)한 말에서 말미암았으니, 만약 이 일로 인해 역옥(逆獄)을 변환(變換)시키고 정신(廷臣)을 경알(傾軋)하는 폐단이 있다면, 마땅히 역적을 비호한 율(律)로 논할 것이다. 본원(本院)에서는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전(前) 참의(參議) 박성로(朴聖輅)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옥사(獄事)는 실로 천지의 대변(大變)으로, 그 대찬(代撰)하여 늘어놓은 바가 어떤 죄명(罪名)이었습니까? 반드시 성궁(聖躬)을 무함(誣陷)하는 말을 그 가운데 찔러넣고 팔방(八方)에 반포(頒布)해 보인 것이 대저 어찌 우연한 것이었겠습니까? 반드시 큰 기관(機關)과 큰 배치(排置)가 있어 음밀(陰密)한 가운데서 경영(經營)하고 헤아리다가 채 미치지 못하여 발각되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그 마음속으로 이미 계교(計較)하고 췌마(揣摩)하였던 것이고, 그 반드시 이룰 수 있는 세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때 성궁(聖躬)은 고립되어 위태로웠고 역적은 기세를 한창 올리고 있었으니 흉도(凶圖)와 역모(逆謀)를 조석(朝夕) 사이에 드러내려는 위험이 있었고, 앞에서 소리치면 뒤에서 사실로 만드는 것이 차례로 응당 행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를 보는 데 있어서 어찌 일찍이 일분(一分)이라도 고자(顧藉)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다행하게도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지극히 어지심과 성대한 덕(德)에 힘입어 오늘날을 보전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그 무리의 처음 뜻이 미친 바가 아닙니다.
아아! 이것이 어찌 일개 김일경이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한유(韓愈)가 말하기를, ‘장오(張敖)가 비록 음흉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믿는 바가 있어서 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천만고(千萬古)에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언(凶言)과 악명(惡名)으로 군부(君父)를 무함(誣陷)한 자가 어찌 의지하고 믿는 도당(徒黨) 없이 방자하게 홀로 만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는 문자(文字)에다 썼겠습니까? 여기에는 반드시 체결(締結)하여 정실(情實)을 같이하고 서로 통모(通謀)한 자가 있은 것이나, 단지 드러난 자는 역적 김일경뿐입니다. 그렇다면 역적 김일경은 본디 주륙(誅戮)해야 하거니와, 정실을 같이했던 자들은 유독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마땅히 먼저 물어야 할 바는 단지 이 일단(一段)에 있는데도 소홀히 여겨 거론하지 않고 있으며, 오로지 실상(實狀)이 혹시라도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반드시 박살(撲殺)할 급계(急計)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아!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옥체(獄體)가 있단 말입니까? 그 체결(締結)하여 정실을 같이한 역적을 만약 찾아내어 법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비록 김일경을 만 토막으로 참(斬)한다 할지라도 이 김일경은 여전히 그대로일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이 일단(一段)에 대해 더욱 엄하게 끝까지 캐물어 그 반거(盤據)하고 있는 도당이 혹시라도 빠져나가는 일이 없게 한 뒤에야 양성(兩聖)의 무멸(誣衊)이 아마 혹 조금이나마 씻겨질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죄가 있는 자에게 죄를 주는 것인데, 지금 김일경으로 인하여 경알(傾軋)하는 말이 어찌하여 이에까지 이르는가? 김일경이 여전히 그대로일 것이라는 등의 말은 지극히 놀랍고 패리(悖理)한 데 관계된다. 이런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조정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신하들을 악역(惡逆)의 죄과(罪科)로 곧장 몰아넣을 것이다. 나에게도 고집하는 바가 있으니, 어찌 이 따위의 말에 요탈(撓奪)되랴? 토역(討逆)하는 소(疏)로 비답(批答)을 내릴 수 없다. 원소(原疏)를 돌려주라."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인산(因山) 때 따라가겠다는 명(命)을 거둘 것을 세 번 계청(啓請)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국청 대신(鞫廳大臣)이 아뢰기를,
"목호룡(睦虎龍)이 상궐(上闕)했을 때 머리에 씌운 주머니를 열어 보았더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청컨대 해당 낭관(郞官)을 나문(拿問)하고 구료관(救療官) 이하를 엄하게 처분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인하여 국청에 하교하기를,
"김일경(金一鏡)에게 형신(刑訊)을 정지하고, 대신(大臣) 이하는 입시(入侍)하라."
하였다. 입시하였을 때 임금이 목호룡을 압래(押來)했던 군졸(軍卒)과 나장(羅將)을 형조(刑曹)로 하여금 형추(刑推)하여 구문(究問)하게 하였다. 위관(委官)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육시(戮屍)의 법은 중간에 이를 막았으나 효묘조(孝廟朝)에서 관(棺)을 쪼개고 참시(斬屍)한 일이 있었고, 대행조(大行朝) 때 백망(白望) 또한 육시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해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김일경의 죄는 더 물을 만한 단서도 없고, 비록 더 형신(刑訊)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승관(承款)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일경 또한 어찌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판의금(判義禁) 심수현(沈壽賢)은 말하기를,
"곧바로 결안(結案)을 받는 것이 마땅하고 반드시 다짐[侤音]352) 을 둘 것은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大司諫) 윤유(尹游)는 말하기를,
"그가 비록 결안에 서명(署名)하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조사기(趙嗣基)를 곧 바로 정형(正刑)한 예(例)가 있습니다."
하고, 장령(掌令) 이정필(李廷弼)은 말하기를,
"곧바로 결안을 받는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자취를 가린다 할 것이고, 결안을 받지 않고 곧 형(刑)을 집행할 경우 국가에서 형(刑)을 쓸 때는 본래 전장(典章)이 있는 법이니, 상법(常法)에 의거해 승관(承款)하기를 기다린 뒤 결안을 받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험삼아 결안을 받되 만약 끝까지 결안을 바치지 않는다면 곧장 정형(正刑)하는 것이 옳다."
하고, 목호룡을 즉시 정형하라 명했다가 곧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김일경이 만약 결안하지 않고 경폐(徑斃)한다면 큰 실형(失刑)이 될 것이니, 조사기의 예에 의해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무상 부도 죄인(誣上不道罪人) 목호룡(睦虎龍)과 김일경(金一鏡)을 당일 당고개(唐古介)에서 부대시 처참(不待時處斬)353) 하였다.
국청 대신(鞫廳大臣) 이하가 또 입시(入侍)하였다. 위관(委官) 조태억(趙泰億)이 목호룡(睦虎龍)과 김일경(金一鏡)의 죄악을 추안(推案)을 살펴 뽑아내어 조보(朝報)에 써낼 것을 청하자, 허락하였다. 연신(筵臣) 중에서 어떤 이가 ‘스스로 여긴다[自視]’이하의 말은 마땅히 다 써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 서 낸 뒤에야 교문(敎文)과 더불어 전후로 서로 화응(和應)한 정상을 사방에서 마땅히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승지 윤혜교(尹惠敎)가 말하기를,
"이의연(李義淵)이 선왕(先王)을 무함(誣陷)한 것은 곧 전하를 무함한 것이고, 김일경이 전하를 무함한 것은 곧 선왕을 무함한 것입니다. 사신(詞臣)에게 명해 이런 뜻으로 찬출(撰出)하여 널리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지의금(知義禁)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김일경의 죄상은 이미 써 내도록 하였으니, 어찌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글을 찬(撰)하여 널리 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대명률(大明律)》에 ‘범상부도정리절해(犯上不道情理切害)’의 경우는 부대시 처참(不待時處斬)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사기(趙嗣基)와 이사명(李師命)에게 이 율(律)을 썼으니, 이번에도 역시 이 율을 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이의연의 무함이 선왕께 미친 부도한 죄는 두 사람과 더불어 다름이 없습니다. 일체(一體)로 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윤혜교의 말도 또한 같았다. 조태억이 이의연의 가산 적몰(家産籍沒)과 반시(頒示)를 일체 거행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광좌가 이의연을 육시(戮屍)할 것을 청하고, 조태억의 말 또한 같았는데, 판의금(判義禁)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이의연과 동향(同鄕)인 사람의 말을 듣건대 혹 이미 묻었을 것이라고 하니, 파내어 육시하는 것은 즉시 육시하는 것과 다름이 있습니다. 대신(大臣)이 아마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고, 홍치중이 말하기를,
"심수현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판의금의 말이 좋다. 오늘 목호룡이 물고(物故)되었는데, 하루 밤을 자고 육시를 행한다면, 차마 하지 못할 것이 있다. 반드시 오늘 안에 정형(正刑)하는 것이 내가 뜻을 둔 바이다. 대신(大臣)의 말이 진실로 정론(正論)이니 목호룡·김일경과 같이 전형(典刑)을 바루는 것이 마땅하나, 이의연은 물고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판의금의 말은 깊이 생각한 데서 나온 것이다. 추륙(追戮)은 비록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 물고한 지 오래 되어 행형(行刑)하지 않는다는 뜻을 써서 내고 그 죄상을 반포(頒布)하는 것이 옳겠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흉인(凶人)의 자식들을 연곡(輦轂)에 아래 둘 수 없으니, 아울러 유배(流配)시키라."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이의연을 이미 추륙하지 않는다면, 가산을 적몰하는 것은 아마도 차이를 두어야 할 것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례(前例)를 상고해 내라고 명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전례는 있습니다만, 신(臣)이 반드시 세 죄인에게 일체로 율(律)을 베풀기를 청하는 것은 실로 국가를 위해 깊이 생각한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뜻을 내가 알고 있으니, 추형(追刑)하지 않는다는 뜻을 써내어 반포해 보이고, 나머지 다른 일들은 처음의 하교에 의해 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김일경·목호룡과 같은 역절(逆節)을 이에 범상율(犯上律)로 감죄(勘罪)하였다. 아아! 김일경의 상소는 무함(誣陷)이 동조(東朝)에까지 미쳤고, 교문(敎文)에서 또 건성(建成)을 인용하여 경묘(景廟)에 비기었다. 더욱이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및 궁인(宮人) 석열(石烈)·필정(必貞)과 은밀히 결탁하여 세제(世弟)를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謀議)했던 것이 심정옥(沈廷玉)의 국안(鞫案)에 죄다 갖추어져 있다. 또 목호룡이 무옥(誣獄)을 일으킨 것은 곧장 사대신(四大臣)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상변(上變)이 책봉(冊封)의 준청(準請)에 대한 장계(狀啓)가 있었던 그 다음날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는 근저(根柢)까지 통렬하게 핵실(覈實)해서 전형(典刑)을 바루었어야 마땅한데, 이광좌의 무리가 임금에게 혐의(嫌疑)를 굽혀 피하려는 뜻이 있음을 엿보고 드디어 협지(脅持)하는 계책을 만들어 내어 대충대충 일을 마무리짓게 하였으니, 이것이 역당(逆黨)들이 무신년354) 에 고무(鼓舞)되어 칭병(稱兵)한 까닭이었던가? 아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2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註 354]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사신은 논한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김일경·목호룡과 같은 역절(逆節)을 이에 범상율(犯上律)로 감죄(勘罪)하였다. 아아! 김일경의 상소는 무함(誣陷)이 동조(東朝)에까지 미쳤고, 교문(敎文)에서 또 건성(建成)을 인용하여 경묘(景廟)에 비기었다. 더욱이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및 궁인(宮人) 석열(石烈)·필정(必貞)과 은밀히 결탁하여 세제(世弟)를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謀議)했던 것이 심정옥(沈廷玉)의 국안(鞫案)에 죄다 갖추어져 있다. 또 목호룡이 무옥(誣獄)을 일으킨 것은 곧장 사대신(四大臣)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상변(上變)이 책봉(冊封)의 준청(準請)에 대한 장계(狀啓)가 있었던 그 다음날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는 근저(根柢)까지 통렬하게 핵실(覈實)해서 전형(典刑)을 바루었어야 마땅한데, 이광좌의 무리가 임금에게 혐의(嫌疑)를 굽혀 피하려는 뜻이 있음을 엿보고 드디어 협지(脅持)하는 계책을 만들어 내어 대충대충 일을 마무리짓게 하였으니, 이것이 역당(逆黨)들이 무신년354) 에 고무(鼓舞)되어 칭병(稱兵)한 까닭이었던가? 아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12월 10일 기묘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산릉(山陵)에 따라가겠다는 명을 정침(停寢)할 것을 네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장령(掌令) 이정필(李廷弼)과 헌납(獻納) 송택상(宋宅相) 역시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비답(批答)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의 상소와 교문(敎文)을 봉입(捧入)했던 승지(承旨)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하고, 채응복(蔡膺福)은 삭출(削黜)하라. 김일경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때 꺼리는 바는 오직 정수기(鄭壽期)와 김동필(金東弼)뿐이었으니, 한때의 말로 어찌 반드시 문비(問備)하랴?"
하였다. 【봉입(捧入)했던 승지(承旨)는 박희진(朴熙晉)과 박필몽(朴弼夢)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3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전(前) 헌납(獻納) 정택하(鄭宅河)가 상소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양성(兩聖)을 무욕(誣辱)한 죄는 비록 만 토막으로 참륙(斬戮)한다 할지라도 그 만에 하나를 징계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런데 주륙(誅戮)이 그 몸에만 그쳤으니, 어찌 족히 선왕(先王)의 영혼을 위로하고 많은 사람들의 분을 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역률(逆律)로 시행하여 목을 거리에 내걸고 육노(戮孥)355) ·저택(潴宅)356) 하소서. 그리고 위로 종묘(宗廟)와 선침(仙寢)에 고(告)하고 팔방(八方)에 교문(敎文)을 반포(頒布)한 뒤에야 아마도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될 듯합니다. 목호룡(睦虎龍)이 경폐(徑斃)한 뒤 정형(定刑)하는 것이 곧 역적을 다스리는 극전(極典)입니다. 그런데 응당 시행해야 할 곳에서 시행하지 않고 곧바로 성문 밖에서 시행한 것은 실로 육시(戮屍)의 법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역적 김일경과 더불어 같이 역률(逆律)을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네 말이 옳다. 특별히 목을 거리에 내거는 율(律)을 시행하라."
하였는데, 얼마 안있어 하교하기를,
"단지 목호룡에게만 거행하라."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목을 거리에 내거는 법은 역적을 반드시 군기시(軍器寺) 앞 길에서 능지 처참(凌遲處斬)하고 수족(首足)을 각각 따로 떼낸 뒤 그 머리를 철물교(鐵物橋) 거리에 내걸고 팔방(八方)에 수족(手足)을 돌려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 목호룡(睦虎龍)은 이미 당고개(唐古介)에서 처참(處斬)하여 몸뚱이가 교외(郊外)에 있으니, 지금 그 냄새나고 더러운 물건을 성(城) 안으로 끌고 들어와 길거리에 내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참(斬)한 시체에 또 다시 그 수족을 참하는 것은 아마도 법의(法意)가 아닐 듯합니다. 어떻게 하리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목호룡의 음흉한 정상은 팔방에 널리 알리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끌고 들어올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돌려 보이는 등의 일은 그 또한 역적 중의 사람이니,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 동문(東門)에 내거는 율(律)을 적용하여 사흘 동안 문 밖에 내걸어 경외(京外)의 사람들로 하여금 환히 다 알게 하라."
하였다. 다음날 아뢰어 목호룡의 수급(首級)을 서소문(西小門) 밖에 내걸고, 사지(四肢)를 각각 따로 떼내었으며, 사흘이 지난 뒤 머리와 수족을 팔로(八路)에 돌려 보였다.
정언(正言) 한사득(韓師得)이 상소하여 붕당(朋黨)의 폐단에 대해 말하기를,
"처음에는 둘로 나뉘었다가 끝에 가서는 너더댓이 되어 병장기를 서로 찾아 드니, 사(師)·정(正)을 분변할 수가 없습니다. 타파(打破)하는 방도는 오로지 전하께서 공정(公正)하게 황극(皇極)을 세우시는 데 있으니, 당론(黨論)에 관계된 장소(章疏)나 당습(黨習)에 자취가 물든 자는 일체 아울러 통렬하게 물리치셔서 호오(好惡)를 명백히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말이 바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때 임금이 바야흐로 탕평(蕩平)에 뜻을 두고 있었으므로, 한사득이 아첨하려는 의도에서 뜻을 이처럼 받들었던 것이었으니, 그 무식(無識)이 심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43면
【분류】정론(政論)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이때 임금이 바야흐로 탕평(蕩平)에 뜻을 두고 있었으므로, 한사득이 아첨하려는 의도에서 뜻을 이처럼 받들었던 것이었으니, 그 무식(無識)이 심하다."
12월 11일 경진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인산(因山) 때 따라가겠다는 명(命)을 정침(停寢)할 것을 세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광좌(李光佐) 등이 구전(口傳)으로 왕대비전(王大妃殿)에 아뢰어 대전(大殿)께 개유(開諭)하여 인산에 따라가겠다는 명을 정침하게 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개유하겠다."
하였다. 종신(宗臣)들 또한 정청(庭請)하고, 정언(正言) 윤휘정(尹彙貞) 또한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아울러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이광좌 등이 밤에 구대(求代)하여 입시(入侍)해서 힘써 간쟁(諫爭)하자, 임금이 부득이 눈물을 가리며 억지로 따랐다.
지의금(知義禁)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기를,
"목호룡(睦虎龍)에게 이미 역률(逆律)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일경(金一鏡)의 패역(悖逆)·부도(不道)는 목호룡보다 훨씬 더함이 있으니 형법(刑法)에 있어서 결단코 다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일체(一體)로 시행하라 명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김일경에게는 이미 조사기(趙嗣基)의 전례를 적용했고, 목호룡 또한 지난날 역적을 다스린 율(律)을 썼으니, 인용한 바가 각각 다르다. 그러나 율이 다른들 무슨 해로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大臣)과 2품(品) 이상이 청대(請對)하였을 때 임금이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이 이미 복법(伏法)되었으니, 교문(敎文)을 개찬(改撰)함이 마땅하다. 관각 당상(館閣堂上)을 내일 패초(牌招)하여 제진(製進)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바깥의 의논이 한편으로는, ‘선조(先朝)의 명령(命令)으로 개찬하되 빈전(殯殿)에 사유를 갖추어 고(告)함이 마땅하다.’하고, 한편으로는 ‘곧장 당저(當宁)357) 의 명령으로 개찬하되 사유를 갖추어 고함이 마땅하다.’ 하는데, 후자의 설(說)이 낫습니다."
하였는데, 예문 제학(藝文提學) 이조(李肇)가 말하기를,
"반교문(頒敎文)은 다른 글과 달라서 간직해 두었다가 후세에 전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한때 반포(頒布)하는 글일 뿐입니다. 그 당시 이미 반포했던 것을 지금 와서 또 어찌 반포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다시 품(稟)하여 처분을 받을 데가 없으니, 선조(先朝)의 하교로 제진(製進)하는 것은 미안합니다. 그리고 본문(本文)은 결코 그대로 둘 수 없지만 지금 비록 개찬한다 해도 소용이 있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개찬한 뒤 마땅히 팔방(八方)에 반포할 것이니, 어찌 소용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왕은 말하노라[王若日]’로 제진(製進)한 뒤에야 반포할 수 있고, 개찬한 사유 또한 마땅히 교문(敎文)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니, 이조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뒤죽박죽이 되어 문체(文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일경과 목호룡은 이미 처분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교문을 반포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의 경우 반교문이 있었고, 조사기(趙嗣基)·이사명(李師命)·민암(閔黯)의 경우는 반교문이 없었습니다. ‘왕은 말하노라[王若曰]’라는 한 조관(條款)에 대해서는 대신(大臣)에게 물으소서."
하고, 승지 정석삼(鄭錫三)이 말하기를,
"친국(親鞫) 때 부러지지 아니하는 장(杖)은 계산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왕자(王者)가 형(刑)을 쓰는 도리는 신중히 살펴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이 좋으니,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12월 12일 신사
진시(辰時)에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시책보(諡冊寶)를 받들고 종묘(宗廟)에 나아가 시호(諡號)를 청하였다. 제사를 마치자 그대로 빈전(殯殿)의 문 밖으로 가서 책보(冊寶)를 임시로 악차(幄次)에 봉안(奉安)하였다. 다음날 사시(巳時)에 빈전에 시호를 올리고 예(禮)를 의식(儀式)대로 거행하였으며, 오시(午時)에 명정(銘旌)을 고쳤다.
홍치중(洪致中)을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로, 김흥경(金興慶)을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로, 오명준(吳命峻)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유엄(柳儼)을 지평(持平)으로, 윤행교(尹行敎)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조최수(趙最壽)·이광덕(李匡德)을 교리(校理)로, 이진순(李眞淳)을 승지(承旨)로, 이광보(李匡輔)를 부교리(副校理)로, 이보욱(李普昱)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의 정사(政事)였다. 권성(權𢜫)을 지중추(知中樞)로 삼았는데, 병조 판서(兵曹判書) 심수현(沈壽賢)의 정사였다.
12월 13일 임오
채팽윤(蔡彭胤)에게 특별히 승지(承旨)를 제수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을 도승지(都承旨)로, 김유(金濰)를 사간(司諫)으로, 윤진(尹晉)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특별히 명하여 종실(宗室) 이환(李煥)의 직첩(職牒)을 돌려주게 하였다. 환은 죄인 정(楨)과 남(枏)의 종자(從子)로서 애초에 양원군(陽原君)에 봉(封)해졌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환(煥)은 대군(大君)의 손자이다. 효묘(孝廟)께서 대군께 우애(友愛)하신 덕(德)이 보통 이상으로 훨씬 뛰어나셨다. 양원(陽原) 형제가 비록 직첩을 거두는 데 들어 있기는 했지만 선조(先朝)의 은고(恩顧)가 어떠하였던가? 몇 년 사이에 형제가 모두 세상을 떠났으니, 내 마음이 슬프기 짝이 없다. 자신이 살아 있다면 나라의 법이 엄하게 적용될 것이지만 이미 세상을 떴으니,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마땅히 앞세워야 하리라."
하고, 드디어 직첩을 돌려 주라고 명하고, 상장(喪葬)에 소용되는 것을 넉넉하게 주라고 명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남부 참봉(南部參奉)이 누락된 김일경(金一鏡)의 첩(妾)의 자녀 넷을 추가로 보고하였으니, 청컨대, 일체(一體)로 유배(流配)시키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부관(部官)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교리(副校理) 이광보(李匡輔)가 상소하기를,
"신은 명(命)을 받들고 재실(災實)을 심핵(審覈)하였습니다. 대저 호남(湖南)의 좌도(左道)는 반은 산골짜기에 가깝고 반은 바닷가에 가까운데 전재(田災)의 참혹함은 산골짜기나 바닷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허다한 목화밭은 애당초 알맹이를 맺지 못하여 전혀 따낼 목화가 없었습니다. 논곡식은 바닷가의 고을이 더욱 혹심하였는데, 벌레 먹고 바람에 마른데다 겸하여 해일(海溢)까지 일어나 원래 거둘 것이 없었으며 낫을 댈 곳이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조가(朝家)에서 준 7천 결(結)이란 숫자는 본도(本道)의 실결(實結)의 10분의 1에도 차지 않았으니, 이것이 신이 제마음대로 주었다는 죄를 달게 뒤집어 쓰되 조가에서 원망을 초래하게 하지 않게 하려 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유사(有司)의 신하가 말을 늘어놓으며 방계(防啓)하고 억지로 실결로 돌리게 하였으니, 조가에서 경차관(敬差官)을 차견(差遣)한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원하건대 신의 재결(災結)을 더 준 죄를 감정(勘定)하고 특별히 환실결로 돌리게 한 명을 정지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2월 14일 계미
남일명(南一明)을 수찬(修撰)으로, 윤광익(尹光益)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대사성(大司成)으로, 황이장(黃爾章)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시구(洪時九)에 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12월 15일 갑신
훈련 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에서 아뢰기를,
"능침(陵寢)이 지극히 가까운 곳에는 절발(竊發)의 폐단을 엄하게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포청(捕廳) 및 삼군문(三軍門)의 별순(別巡)을 3년 안에 각별히 하게 하되, 만약 허술한 일이 있을 경우 수릉관(守陵官)이 장문(狀聞)하라는 일로 명을 내리셨는데, 도성(都城)을 순라(巡邏)하는 예(例)에 의해 매일 패장(牌將) 한 사람과 나졸(邏卒) 13명을 정해 보내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의 망제(望祭)를 친행(親行)하고, 또 친히 계빈전(啓殯奠)을 친행하였으며, 또 계빈 별전(啓殯別奠)을 친행하였다.
진시(辰時)에 추궁(菆宮)을 열었다. 임금이 최복(衰服)을 갖추고 지팡이를 짚고 추궁의 동쪽에 서니, 집사자(執事者) 한 사람이 함(函)을 받들어 재궁(梓宮)을 닦는 수건을 담았다.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추궁의 남쪽으로 나아가 북향(北向)하고 꿇어앉아 아뢰기를,
"우의정 신(臣) 조태억이 삼가 길일(吉日)에 추도(菆塗)를 여나이다."
하였다. 총호사(摠護使) 이광좌(李光佐)가 추도를 완전히 철거할 것인가의 여부(與否)를 품(稟)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문(門)만 열고 서쪽을 먼저 부수라."
하였다. 도감 당상(都監堂上) 심수현(沈壽賢)이 선공감(繕工監)의 관원(官員)을 시켜 추(菆)를 열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대신(大臣)에게 추를 열게 하였다. 조태억이 서쪽 문을 열고 추궁 안으로 들어가자 환시(宦時) 몇 사람이 같이 들어가 모구의(毛柩衣)를 벗겼는데, 순색(純色)의 산달피(山獺皮)로 안을 대었고, 운문 홍단(雲紋紅緞)으로 겉을 배접하였다. 겉의 배접은 위에 백분(白紛)으로 도끼 모양을 그렸고 자루는 황채(黃彩)로 그렸다. 조태억이 구의(柩衣)를 털고 수건으로 재궁을 닦았다. 그리고 홍구유(紅氍毹)로 싸고 백포(白布)로 매듭을 묶어 윤대판(輪對板) 위에 봉안(奉安)하였다. 판속(板束)은 근흑(筋黑)으로 좌우 가장자리를 칠했고, 상·중·하에 모두 둥근 고리를 두었는데, 고리 입구에는 염홍(染紅)을 물렸으며 정포(正布)의 색구(索勾)로 재궁을 묶었다. 임금이 친히 추궁 안으로 들어가 양쪽을 돌아 봉심(奉審)하고 나와 위치로 나아가니, 내시(內侍)가 모구의를 받들어 덮었다.
12월 16일 을유
경종 대왕(景宗大王)을 의릉(懿陵)에 장사지냈다. 능(陵)은 양주(楊州) 천장산(天藏山) 신좌(申坐) 인향(寅向)에 있고,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10리의 거리에 있다. 지난 9월 24일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25일 묘시(卯時)에 후토(后土)에 제사지내고 풀고 베고 흙을 파냈다. 11월 초10일 진시(辰時)에 금정(金井)을 열었는데, 혈(穴)의 깊이는 8척(尺) 4촌(寸)이었고, 【영조척(營造尺)을 썼다.】 광중(壙中)을 완전히 다 파낸 뒤 외재궁(外梓宮)을 내렸다. 15일 진시(辰時)에 추궁(菆宮)을 열었는데, 이날이 되어 축시(丑時)에 발인(發引)한 것이다. 발인하는 정확한 시각은 처음에 자시(子時)로 정했었는데, 견전(遣奠)의 행례(行禮)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여 축시(丑時)로 물려서 행한 것이다. 3경(更) 1점(點)에 임금이 견전을 친행하자 드디어 발인하였는데, 임금은 최복(衰服)을 갖추었다. 집사(執事)가 향로(香鑪)와 향합(香盒)을 받들어 향정(香亭)에 두자, 좌통례(左通禮)가 영좌(靈座)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서 여(轝)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대축(大祝)이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요여(腰轝)에 봉안하고 우주(虞主)는 그 뒤에 두었다. 내시(內侍)가 요여와 교의(交椅)를 받들고 나가니, 좌통례가 추궁 앞으로 나아가 북향(北向)하여 부복(俯伏)하고 여(轝)에 올릴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내시가 명정(銘旌)을 받들고 계단을 내려오자, 총호사(摠護使)가 재궁을 마주들 관원 두 사람과 내시를 인솔하여 재궁을 받들어 내었다. 추궁을 남쪽문으로부터 들어내어 윤여(輪轝) 위로 들어내고 소금저(素錦褚)로 덮었다. 재궁을 내리자 윤대판(輪對板)을 받들었는데, 판(板)의 좌우에는 쇠고리를 두었으며, 쇠고리의 입구는 대포삭(大布索)을 물렸다. 재궁을 마주드는 관원 두 사람이 각각 그 한쪽 끝을 잡자, 내시와 액속(掖屬)이 곁에서 밀어서 마주드는 것을 도왔다. 통례(通禮)가 앞을 인도하고 나서자, 충의위(忠義衛)가 채삽(綵翣)으로 재궁(梓宮)을 가리고 좌우에서 날개를 편 것처럼 따랐다. 명정(銘旌)이 앞서 출발하자, 임금과 여러 신하와 내외(內外)의 집사들이 곡벽(哭擗)하였다. 일덕문(一德門)과 인화문(仁和門)으로 나와 윤여(輪轝)를 거쳐 인정전(仁政殿) 안으로 돌아 들어가니, 임금이 인화문 밖에 섰다. 재궁이 장차 소여(小轝)로 들어가려 하니, 임금이 도보로 윤여 가장자리의 소판(小板) 위를 돌고 나서 인정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전(殿)으로 내려와 계단 위에 지팡이를 짚고 섰다. 임금이 곡하자, 여러 신하들도 모두 곡하였다. 재궁을 소여에 받들어 올리자, 임금이 친히 살핀 뒤 재궁을 전문(殿門) 밖으로 내어 대여(大轝)로 옮겨 받들어 올렸다. 종묘(宗廟) 앞 길에 이르러 대가(大駕)를 돌리고 향립(向立)했다가 이어 출발하였는데, 보제원(普濟院)의 설제소(設祭所)에 이르러 장전(帳殿) 한가운데다 영악(靈幄)을 설치해 재궁을 장전의 동쪽에 봉안(奉安)하고 혼백(魂帛)을 봉안하였다. 남아 있던 백관(百官)들이 진향(進香)할 때 비가 물동이를 뒤집은 것처럼 쏟아졌다. 백관들이 비를 맞으며 겨우 의식(儀式)대로 진향하였다. 소여가 전문(殿門)을 나설 때 임금이 옥교(玉轎)를 타고 안으로 들어왔다가, 협양문(協陽門)으로부터 나와 숙장문(肅章門) 밖에 이르러 여(轝)에서 내려 연(輦)을 탔다. 흥인문을 나서자 문 안의 빗물이 크게 불어났으므로, 백관들이 등에 지고 지났다. 보제원에 이르러 임금이 길에 들어서서 북원(北原)의 막차(幕次)에서 장차 대여(大轝)와 혼백(魂帛)을 봉심(奉審)하려 하니, 이광좌(李光佐)와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비가 심하니, 단지 대여만 봉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련(步輦)을 타고 봉사 판위(奉辭版位) 근처에 이르러 여(轝)에서 내렸다. 임금이 판자로 만든 사닥다리를 타고 여(轝)의 강(杠)에 올라가 오른쪽 편에 서서 봉심을 마친 뒤 판자로 만든 사닥다리로 내려와 봉사판 위에 섰다. 임금이 곡을 그치지 않자, 승지 김동필(金東弼)이 나아가 엎드려 말하기를,
"빗발이 이와 같은데, 영여(靈轝)를 오랫동안 멈추고 있으니, 감히 곡을 그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곡을 그쳤다. 사배(四拜)를 행하고 난 뒤 영여를 우러러보고 흐느끼며 말하기를,
"만약 나로 하여금 여(轝)를 따라가게 했더라면 정리(情理)가 어찌 이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매사를 오로지 경(卿) 등만 믿고 있으니 반드시 꼭 마음을 다하라.’는 뜻으로 이광좌와 조태억에게 하교하고, 보련(步輦)을 타고 환궁(還宮)하였다. 대여(大轝)가 출발하여 능소(陵所)에 도착하자, 통례(通禮)가 무릎을 꿇고 여(轝)를 내려 순(輴)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재궁을 소여(小轝)에 봉안하였다. 정자각(丁字閣)의 유문(帷門) 밖에 이르러 통례가 무릎을 꿇고 순에서 내릴 것을 청하였다. 유문에서 찬궁(欑宮)까지 연달아 윤여(輪轝)를 설치했고 재궁을 탑상(榻上)에 봉안하였다. 내시(內侍)가 영좌(靈座)를 재궁 남쪽에 설치하여 혼백함(魂帛函)을 그 위에 봉안하고, 우주궤(虞主櫃)를 그 위에 두었으며, 향안(香案)·명정(銘旌)·책보(冊寶)·의장(儀仗)을 처음과 같이 설치하였는데, 이때가 사시(巳時)였다. 오시(午時) 초에 성빈전(成殯殿)을 행하였는데, 동부승지(同副承旨) 채팽윤(蔡彭胤)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와서 빈전(殯殿)에 문안하고 찬궁(欑宮)을 열었다. 애초에는 오시(午時)로 계하(啓下)하였는데, 비가 그치지 않아 일에 미비(未備)한 것이 있었으므로 오정(午正)으로 물린 것이다. 이광좌가 이 일을 치계(馳啓)하여 알렸다. 미시(未時)에 재궁을 윤여(輪轝)에 봉안했는데, 퇴광(退壙)의 강(杠) 위에서 멈추었다. 임금이 또 승지를 보내어 문안(問安)하였다. 묶고 싼 것을 풀기를 마치자 조태억(趙泰億)이 수건에 소합향온(蘇合香醞)을 적셔 재궁을 깨끗하게 닦았다. 드디어 앞뒤 고패[轆轤]의 베로 된 줄로 재궁을 달고 고패의 줄을 풀어 내렸다. 액례(掖隷)가 ‘시위(侍衛), 시위’하는 소리를 외치자, 재궁을 퇴광 가운데 있는 윤여 위에 봉안하였다. 조태억이 또 재궁을 닦고 이광좌가 홀기(笏記)를 가지고 서자, 내시(內侍)가 홍람운문단(紅藍雲紋緞)으로 만든 삼중 구의(三重柩衣)를 올렸는데, 모두 분(粉)과 금(金)으로 불(黻)을 그린 것이었다. 조태억이 받들어 내리고 홍광(紅廣)으로 짠 명정(銘旌)을 구의(柩衣) 위데 덮었는데, 명정은 금자(金字)로 썼고 상방(尙方)에서 진사(進絲)한 것이었다. 내시가 노끈을 합하여 구의와 명정에 주름이 지지 않게 하였다. 내시(內侍)가 좌우에 서서 붉은 융(絨)으로 된 줄 한 가닥을 꼬아 재궁의 아래 모퉁이에 내렸다. 매번 ‘시위’ 소리를 한 번 지를 때마다 여축(轝軸)이 돌아갔는데, 재궁이 곧바로 현수문(玄隧門)으로 나아가 여(轝)가 완전히 다한 곳에 이르자, 줄을 당기는 자가 손이 걸려 능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태항(李泰恒)이 지기목(支機木)을 지고 돌아가며 재궁을 졌는데,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힘을 다 썼다. 장인(匠人)들이 번갈아 져서 재궁을 현궁(玄宮)의 탑상(榻上)에 봉안하였으니, 이때가 신시(申時)였다. 임금이 또 승지를 보내 문안(問安)하였고. 내시(內侍)가 유의(遺衣)를 올렸다. 【갑인년(1674)에는 새로 만들어 썼고, 경자년(1720)에는 진어(進御)하던 면복(冕服)을 썼다. 도감(都監)에서 계품(啓稟)하자, 갑인년의 전례에 의해 새로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평천관(平天冠)·옥규(玉圭)·패옥(佩玉)·시석(寺舃)은 옛 물건을 썼다.】 이광좌가 꿇어앉아 애책(哀冊)을 현문(玄門) 서쪽에 받들어 올리고, 옥백궤(玉帛櫃)는 애책 남쪽에 올려 두었다. 도감 당상(都監堂上) 홍치중(洪致中)이 삽(翣)을 올리고, 또 명기(明器)·복완(服玩)·부신(符信)을 받들어 올려 두었다. 드디어 현문을 잠그자 봉쇄관(封鎖官) 집의(執義) 서종하(徐宗廈)가 ‘신(臣)’자를 쓰고 수결을 두었으며, 조태억이 흙 아홉 삽을 덮었다. 총호사와 승지(承旨)·사관(史官)이 모두 정자각(丁字閣)으로 가서 제주례(題主禮)를 행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길복(吉服)을 갖추고 차례차례 위치로 나아가자, 대축(大祝)이 손을 씻은 뒤 우주(虞主)를 받들고 나와 탁자 위에 눕혀 봉안하였다. 이에 제주관(題主官) 이세최(李世最)가 글씨를 쓰고 사자관(寫字官)이 획을 보충하였다. 대축이 영좌(靈座) 위에 다시 봉안(奉安)하자 우주전(虞主奠)을 행하고, 초우제(初虞祭)를 의식(儀式)대로 하였다.
표석(表石)을 세우고 지석(誌石)을 묻었다. 지석함(誌石函)의 윗면에는 명릉(明陵)의 전례에 의거해서 단지 묘호(廟號)와 능호(陵號)만 썼다. 정자각(丁字閣)은 정향(正向)을 썼다.
오시(午時)에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현궁(玄宮)을 내릴 때 망곡(望哭)하였고, 초우제(初虞祭) 때 또 망곡하였다.
12월 17일 병술
신시(申時)에 해에 양이(兩珥)가 있고, 해 위에 관(冠)이 있었다.
임금이 동문(東門) 밖으로 나아가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반우(返虞)를 지영(祇迎)하여 모시고 경소전(敬昭殿)에 이르러 우주(虞主)를 전내(殿內)에 봉안(奉安)하였다. 처음에 예조(禮曹)에서 올린 의주(儀註)에는 망전례(望殿禮)가 없었으나,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행하게 한 것이다. 이어 전내로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친히 별전(別奠)을 행하였다.
정진교(鄭震僑)의 상소를 봉입(奉入)하지 않은 승지를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대가(大駕)가 동문(東門)을 나섰을 때 길 북쪽에 한 사람이 진(陣) 안에 서서 장대나무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나무 끝에 종이를 매달았는데, 종이에는 ‘궁인포원(窮人抱寃)’ 네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물어보라고 명하였더니, 곧 상소를 올리려는 사람이었다. 즉시 상소를 봉입하라 명하였는데, 곧 서얼(庶孽) 진사(進士) 정진교 등 2백 60명의 상소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정진교 등은 작문(作門) 안으로 난입하여 대가(大駕) 앞에서 호소하였습니다. 작문으로 제멋대로 들어온 것은 전고(前古)에 있지 않던 일이니, 청컨대, 파수(把守)하던 장교(將校)를 조사해 내어 다스리고 대장(大將)은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그리고 난입한 소유(疏儒)는 과죄(科罪)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이미 작문 앞으로 들어왔으니, 소유는 다스리지 말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승선(承宣)이 대신(大臣)과 더불어 일찍이 ‘말이 비록 광망(狂妄)하다 하더라도 소장(疏章)을 봉입까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고 진달(陳達)하였는데, 지금 정진교의 상소에서 말한 것으로 보건대, 와서 바친 지 오래 되었으나 후원(喉院)에서 봉입하지 않은 것이다. 해당 승지(承旨)를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정진교의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서얼(庶孽)을 고폐(錮廢)하는 법은 천하 만고에 있지 않던 바입니다. 삼대(三代)로부터 한(漢)·당(唐)·송(宋)·대명(大明)에 이르기까지 서얼이 장상(將相)의 자리를 차지하여 명적(名績)을 드러내었으며, 우리 동방(東方)의 경우 위로 삼국(三國) 때부터 고려(高麗) 5백여 년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취하는 법규(法規)가 한결같이 중화(中華)를 따라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종조(太宗朝) 때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비로소 전에 없던 의논을 주창하여 서얼의 자손을 현직(顯職)에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했고, 그 뒤 강희맹(姜希孟)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차(纂次)할 때 입사(入仕)·부거(赴擧)하는 길까지 아울러 고색(錮塞)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대전(大典)》을 반포한 해에 가뭄이 흑심해서 굶어죽는 사람이 잇따라 생기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허물을 여기에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묘(成廟)께서 측은하게 여기시고 경동(警動)하시어 장차 경장(更張)하고자 하시었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선묘(宣廟) 초에 신분(申濆) 등 1천여 명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자, 선묘께서 하교하시기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함은 겉가지를 가리지 않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충성하기를 원하는 것이 어찌 꼭 정적(正嫡)이어야만 하랴?’ 하셨으니, 이에서 대성인(大聖人)의 지공지정(至公至正)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력(萬曆)계미년358) 에 이르러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비로소 옛날대로 회복해서 통용(通用)하자는 의논을 세웠는데, 마침 변방에 경보(警報)가 있어 갑자기 변통할 겨를이 없었지만, 먼저 허통(許通)·부거(赴擧)의 길을 열었으니, 그 뜻은 대개 차례로 소통(疏通)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인묘조(仁廟朝)에 이르러 부제학(副提學) 최명길(崔鳴吉)이 동료인 심지원(沈之源)·김남중(金南重)·이성신(李省身)·이경용(李景容)과 더불어 글을 올려 힘써 통용(通用)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예제(禮制)의 제정이 삼대(三代)보다 엄함이 없으나, 적(嫡)·서(庶)의 명목은 단지 사실(私室)에서만 행해졌고 공조(公朝)에서는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문지(門地)의 분별은 육조(六朝) 때보다 상세한 것이 없으나, 사람을 쓸 때는 오로지 그 아버지의 성(姓)만 묻고 그 어머니의 성은 묻지 않았습니다. 대개 하늘이 인재를 낼 때 귀(貴)·천(賤)의 차이를 두지 않았고, 왕자(王者)가 사람을 쓸 때 문지(門地)에 구애되지 않았으니, 이것은 천리(天理)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고 백왕(百王)이 바꾸지 않았던 바입니다.
우리 나라의 서얼을 현직(顯職)에 서용하지 말자는 의논은 처음에서 서선(徐選)에게서 나왔는데, 그 뒤 가면 갈수록 한 마디 한 마디가 더욱 심각해져 마침내 자손까지 영원히 금고(禁錮)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재주와 덕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억눌리고 막혀 세상에 떨치지 못하고 배척받아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한 채 마치 큰 죄나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는 부자(父子)의 은혜도 군신(君臣)의 의리도 없으니, 윤리(倫理)를 해치고 어기는 것으로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필부(匹夫)가 원망을 품어도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족한데, 하물며 그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경우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였고, 신풍 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 또한 상소하여 계속해서 논하자, 인묘께서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상용(金尙容)이 회계(回啓)하여, ‘장유의 말에 의해 시행함이 마땅하다.’ 하고, 이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할 것을 청했는데, 그 당시 상신(相臣)이었던 이원익(李元翼)·윤방(尹昉) 등은 헌의(獻議)하기를, ‘서얼을 비천(卑賤)하게 여기고 박대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있지 않던 법으로, 왕자(王者)의 「입현무방(立賢無方)359) 」의 도리에 아주 부족함이 있습니다.’고 하였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은 헌의하기를, ‘서얼을 금고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크게 공평한 정사(政事)가 아니니, 통용(通用)하는 일이 실로 이치에 맞습니다. 세간에서 행하기를 어렵게 여기는 자는 명분(名分)이 문란해진다고 말합니다만, 적(嫡)·서(庶)의 명분은 단지 자기 집안 내부의 일이고, 조정에서는 단지 현명한 자를 쓰고 인재를 거둘 뿐입니다. 비록 귀현(貴顯)하게 된 뒤에 적서(嫡庶) 사이에 만약 명분을 범하는 일이 있다면, 나라의 법이 진실로 엄하게 적용될 것이니 문란해지리라는 것을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헌의가 모두 일체(一體)로 통용하자는 뜻에서 나오고, 2품(品) 이상 여러 신하들의 헌의도 역시 모두 하나로 귀착되었으나, 오로지 몇 사람만 이견(異見)을 세워 단지 삼조(三曹)에만 허통(許通)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 뒤 최명길(崔鳴吉)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아뢰기를, ‘일찍이 을축년360) 에 영부사(領府事) 이원익(李元翼)이 홍문관(弘文館)의 차자(箚子)로 인해 「서얼이 등과(登科)한 뒤에는 요직(要職)에 통용하는 것을 허락하고 청직(淸職)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일로 성지(聖旨)를 품재(稟裁)하자, 양사(兩司)에서 서경(署經)한 뒤 예조(禮曹)에 간직해 두어 일대(一代)의 성법(成法)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9년이 지났지만 하나도 거행하지 않아서 성조(聖朝)께서 강정(講定)한 제도를 빈말로 돌리고 말았으니, 일이 매우 미안합니다. 사목(事目) 안에 이른바 「요직에 통용한다.」는 것은 곧 호조·형조·공조의 낭청(郞廳) 및 각사(各司)의 장관(長官)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 청컨대, 이 수교(受敎)에 의해 재능에 따라 의망(擬望)하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셨으므로, 신희계(辛喜季)·심일운(沈日運)·김굉(金宏)·이경희(李慶喜) 등 약간명이 형조와 공조의 낭청에 제배(除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거의 4, 50년이 지나 숙묘조(肅廟朝)에 이현(李礥) 한 사람이 겨우 호조 낭청에 제배되었는데, 떼 지어 일어나 배척하였으므로 마침내 정체(呈遞)하였고, 아직까지도 쓸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역대(歷代)의 명신(名臣)들이 서얼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중국의 경우로 말한다면, 한(漢)나라 때는 위청(衛菁)·곽거병(郭去病)이, 진(晉)나라 때는 배위(裵頠)·주개(周顗)·도간(陶侃)·환석건(桓石虔)·배수(裵秀)·완부(阮孚)가, 당(唐)나라 때는 소정(蘇頲)·이소(李愬)·두순(杜荀)·영호창(令狐彰)이, 송(宋)나라 때는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진영중(陳瑩中)·추지완(鄒志完)·호인(胡寅)이 있었고, 우리 나라의 경우로 말한다면, 정문측(鄭文則)은 예부 상서(禮部尙書)란 벼슬을, 이세황(李世黃)은 합문지후(閤門祗候)란 벼슬을 지냈으며, 권중화(權仲和)는 벼슬이 도헌(都憲)이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묘(成廟) 이후 서얼 중에서 걸출(傑出)한 사람이 많이 나왔는데, 박지화(朴枝華)·어숙권(魚叔權)·조신(曹伸)·이달(李達)·정화(鄭和)·임기(林芑)·양대박(梁大樸)·권응인(權應仁)·김근공(金謹恭)·송익필(宋翼弼)형제·이산겸(李山謙)·홍계남(洪季男)·유극량(劉克良)·권정길(權井吉)이 바로 그들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충(宸衷)에서 결단하시어 조용(調用)하는 길을 넓혀서 여신다면, 수백 년 이래로 허다하게 원통함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던 자들의 넋 또한 감격하고 고무되어 구천지하(九泉之下)에서 성덕(聖德)에 보답하려고 할 것이며, 천심(天心)이 저절로 형통하여 화기(和氣)가 흘러 넘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중국의 이른바 서얼은 단지 그 자신에게만 해당될 뿐이고, 그 자손까지 아울러 서얼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한 번만 서파(庶派)에 묶이면 수십 세(世)에 이르도록 능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봉장(封章)하여 궐문(闕門)에 엎드린 지 장차 한 달이 되려 합니다. 상소한 것이 무릇 열세 번이엇으나, 한 사람의 승선(承宣)이 힘써 물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신(臣)을 천하게 여기고 박대하여 사람들 사이에 끼워 넣어주지 않는 데 불과하나, 이미 그 몸을 금고(禁錮)해 놓고 또 그 입에 재갈을 물린 격입니다. 곧장 궐문(闕門) 밖에서 통곡하려 했지만 황공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편소(偏小)한데다 사람을 쓰는 것도 역시 몹시 넓지 않으므로, 내가 적이 개탄스럽게 여겨 왔다.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고 해와 달의 비침은 이미 정(精)·조(粗)를 가리지 않으니, 왕자(王者)가 그 사람을 씀에 있어서 어찌 그 가운데 차이를 두랴? 그대들이 인용한 바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다만 이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변통할 수가 없으니, 신중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오로지 천천히 강구하여 처리함이 마땅하다. 삼조(三曹)의 낭청에 관한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인묘조(仁廟朝)의 수교(受敎)에 의해 가려서 의망(擬望)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유자광(柳子光) 이후로 서얼의 통청(通淸)을 허락하지 않아 왔는데, 이에 이르러 못 서얼들이 스스로 통청을 청하니,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짐을 볼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45면
【분류】정론(政論) / 가족(家族) / 역사(歷史)
[註 358] 계미년 : 1583 선조 16년.[註 359] 입현무방(立賢無方) : 《맹자(孟子)》 이루장(離婁章) 하(下)에 나오는 말로, 현명한 인물을 높은 자리에 세우는 데는 그 출처(出處)와 귀천(貴賤)·친소(親疏)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임.[註 360] 을축년 : 1625 인조 3년.
사신은 말한다. "유자광(柳子光) 이후로 서얼의 통청(通淸)을 허락하지 않아 왔는데, 이에 이르러 못 서얼들이 스스로 통청을 청하니,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짐을 볼 수 있다."
12월 18일 정해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의 재우제(再虞祭)를 친행(親行)한 뒤 내시(內侍)가 혼백(魂帛)을 받들어 내어 혼전(魂殿)의 정결한 땅에다 매안(埋安)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오명준(吳命峻)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영예(英銳)함이 너무 지나치시고 정신(精神)이 너무 드러나십니다. 지혜는 만물(萬物)에 두루 미쳐 홀로 온 세상을 휘잡으려는 기개를 가지고 계시고, 군하(群下)를 꺾고 복종시켜 맹자(孟子)의 변론(辯論)을 좋아하는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미 그에 장점이 있다면 어찌 손해나는 바가 없겠습니까? 함축(含蓄)한 것이 미진하여 사기(辭氣)가 간혹 편벽되고, 일에 따라 장소에 따라 병(病)이 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너무 가볍고 너무 날카로워 혹 신중함을 유지하는 데 부족함이 있고, 총명(聰明)이 너무 넓어 너무 미세하게 하는 데서 실수가 생깁니다. 비록 전날 산릉(山陵)의 승인(僧人)이 불에 타 죽었을 때의 휼전(恤典)을 가지고 말할지라도 해조(該曹)에 명하시면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또 액례(掖隷)를 시켜 안에서 부물(賻物)을 주게 하셨는데, 다른 물건은 지나치게 많았으나 쌀·콩 몇 승(升)은 너무 보잘것없이 작았습니다. 천승(千乘)의 임금이 사람에게 부물을 주는 것이 이와 같다면, 이것은 바지를 아끼는 데361) 견줄 것이 아닙니다.
이후로는 총찰(聰察)에 맡기지 마시고 작은 은혜에 힘쓰지 마소서. 전하의 사령(辭令)은 횡설수설하여 혹 자랑하는 데 가깝습니다. 오로지 성명(聖明)께는 다만 경계하시어 간략하고 다탕하게 하는 데 힘쓰소서. 전하께서는 매번 정성과 믿음이 서로 합치되는 것을 선무(先務)로 여기시므로, 신(臣)은 언제나 마치 사시(四時)처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전의 국옥(鞫獄) 때 적간(摘奸)하라신 하교는 근고(近古)에 있지 아니한 바였으니, 대신(大臣)이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이 지나간 뒤에 전하께서 또한 반드시 후회하셨으니, 오로지 전하께서는 반성하시어 잘못을 되풀이하는 허물을 초래하지 마소서. 이의연(李義淵)이 선왕(先王)을 무욕(誣辱)한 죄에 전하께서 내리신 처분(處分)은 후세(後世)에 할 말이 있겠습니다만, 아직도 성고(聖考)께서 조사기(趙嗣基)를 처분하신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전후로 영구(營救)했던 무리들을 하나하나 무겁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고, 김일경(金一鏡)을 문출(門黜)할 때 복역(覆逆)한 승지(承旨) 또한 문출을 더해 당습(黨習)을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옛날 자사(子思)가 위후(衛候)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말을 하며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데도 경대부(卿大夫)가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임금의 나라 일이 장차 날로 그릇되어 갈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이 혹 위(衛)나라의 군신(君臣)과 비슷하니, 삼가 원하건대, 바른말을 하는 한 선비를 뽑아 그저 예예 하고 따르는 천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게 하소서. 지난날 성대(盛大)하였을 때는 사대부(士大夫)들이 벼슬을 얻었을 때나 잃었을 때나 모두 정당함을 지키며 아부하지 않아 추합(趨合)하거나 용납되려는 관습이 있지 않았으며, 비록 한때 실패하더라도 유취(遺臭)362) 의 부끄러움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진실로 탕평(蕩平)·건극(建極)하고자 하시어 반드시 호오(好惡)로 출척(黜陟)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조정의 풍기(風氣)가 먼저 변하여 사대부들의 뜻과 취향이 점점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는 원보(元輔)의 지위에 있으며 감독하고 인솔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데도, 자기 한 몸을 부끄러움 밖으로 팽개치고 이 세상을 더럽고 낮은 곳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연주(筵奏)와 장소(章疏)를 남에게 대신 올리게 하며 말마다 아첨해 기쁘게 하고, 일마다 꺾이면서도 감사하며 오로지 한 마디 말이라도 들어맞지 않을까 한 가지 일이라도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공제(公除)하는 날 빈전(殯殿) 곁에 있으면서 전하의 슬픈 눈물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급히 아첨하는 말을 올려, 사친(私親)을 위해 사우(祠宇)를 세우는 일과 사묘(私墓)를 증봉(增封)할 것을 힘써 거듭 청하였는데, 성상께서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하다고 말씀하시고, 또 묘도(墓道)는 증봉(增封)할 것이 없다는 덕음(德音)이 명백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억지로 다투었으니, 심합니다. 그 사람의 이목(耳目)을 가리고 아첨하며 은총(恩寵)을 굳히려는 술수야말로. 또 전하의 어용(御容)이 어찌 반드시 슬퍼 당황하고 있는 가운데 급급하게 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맨먼저 말을 꺼내어 누누이 진달(陳達)했습니다.
계사년363) 에 영상(領相) 이유(李濡)가 어용(御容)으로 아첨하려 했던 일 때문에 장령(掌令) 서명우(徐命遇)에게 논핵(論劾)받자, 성고(聖考)께서 즉시 그의 상직(相職)을 갈아 버리시고 한 번 물리친 뒤로는 다시 복귀시키지 않으셨으니, 성고께서 엄하게 배척하신 데는 그럴 만한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가 연석(筵席)에서 올린 말은 단지 전하께서 즐겨 들으시는 것만을 노린 것이니, 전하께서 높은 곳에서 굽어 보시며 그 정상(情狀)을 어찌 통촉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대개 그의 병통(病痛)은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데 있습니다. 지난날 구명규(具命奎)에게 참혹한 논박(論駁)을 받았을 적에는 강(江)가를 배회하며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관반(館伴)으로 무릅쓰고 출사(出仕)하였고, 또 빈사(儐使)로 먼길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총재(冢宰)란 무거운 임무를 서너 달 동안 헛되이 띠고 있으면서 끝내 힘써 사양하지 않더니, 대배(大拜)함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끝까지 윤각(尹慤)을 보호하고자 하였습니다. 언제나 정세(情勢)로 보아 편안하기 어렵다며 날마다 계달(啓達)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격렬하게 끓어올라 합계(合啓)가 장차 발동(發動)되려 하자, 공의(公議)에 겁을 집어먹고 후사(喉司)에 청하여 박자를 맞추어 줄 것을 청하니, 승선(承宣) 전부가 청대(請對)하여 그가 지휘한 대로 별유(別諭)를 내리실 것을 청했습니다.
비로소 안국(按鞫)하게 되어서는 토역(討逆)과 복수는 가볍게 여기고 대론(臺論)은 무겁게 여겼으니, 천고(千古)의 신하로서 지켜야 할 절개가 땅을 쓴 듯 없었습니다. 오로지 벼슬을 얻거나 잃는 데 대한 생각만 뱃속에 넣어둔 채 밤낮으로 경영(經營)하는 바는 오로지 당원(黨援)을 널리 심어 근본을 굳게 다지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무릇 천거하거나 빼버리는 데 관계되는 일은 오직 사랑과 미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그의 사당(私黨)일 경우라면 반드시 탁용(擢用)하고자 하되, 사람들의 말이 있을까 염려가 되면 수망(首望)과 부망(副望) 두 망(望)은 낙점(落點)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의망(擬望)에 채워넣고, 그 좋아하는 사람을 말망(末望)에 두어 천점(天點)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만약 사람들의 말이 있을 경우, ‘성간(聖簡)이었다.’고 하며, 아무리 극선(極選)·중임(重任)이라도 제멋대로 취허(吹噓)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겨울에는 원접사(遠接使)가 채 회정(回程)하기도 전에 질병이나 긴급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곧장 아경(亞卿)을 승진시켜 반송사(伴送使)로 삼을 것을 청하고, 또 두 사람의 가선(嘉善)을 곧장 자헌(資憲)으로 승진시킬 것을 청하여, 한 정목(政目)에 두 사람을 초자(超資)하는 일을 승전(承傳)으로 써서 냈습니다. 국조(國朝) 이래로 대신(大臣)이 사람을 천거할 때 혹 어필(御筆)로 특제(特除)하기도 하고 말망(末望)으로 낙점을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승전을 받들어 초자한 경우는 3백 년 이래로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당(黨)을 부식(扶植)하는 데 급하다 하지만, 유독 국정(國政)을 천단(擅斷)하는 혐의(嫌疑)는 돌아보지 않는단 말입니까?
올해 해서(海西)에는 이미 병란(兵亂)도 없었고 또 적지(赤地)도 아닌데, 새 감사(監司)를 갈아치우고자 하여 6품계(品階)에 있는 사람을 초탁(超擢)하였습니다. 눈썹을 한 번 꿈틀하자 후사(喉司)에서는 까닭도 없이 간장(諫長)의 사단(辭單)을 봉입(捧入)했고, 전조(銓曹)에서는 새 감사를 간장으로 옮기더니, 얼마 안 있어 차자(箚子)를 올려 윤용(尹容)을 탁용(擢用)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윤용은 출륙(出六)한 지 겨우 여섯 달 만에 2품에 올랐으니, 그 권세(權勢)를 뒤흔듦을 알 만합니다. 위력으로 양전(兩銓)을 제어하되, 청한 바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그 대신한 사람을 출사(出仕)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전(前) 주부(主簿) 이세복(李世澓)이 곧 그 일례(一例)입니다. 권세가 중외(中外)를 기울이고 위세가 온 나라에 횡행하여 팔도 곤수(閫帥)의 반수가 그의 집 문(門)에서 나오고 사방의 선물 꾸러미가 그의 집으로 몰려드니, 그가 세상을 그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선조(先朝)에 허물을 진데다 장차 신화(新化)에 누를 끼치려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깊이 우려하고 몰래 한탄하고 있으나, 그 당원(黨援)의 위세가 두려워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신은 적이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원하건대, 공정하게 들으시고 아울러 살펴 보시어 총행(寵倖)에 가리워지지 마시고 그 권병(權柄)을 빼앗아 권위(權威)가 아래로 옮겨지지 않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이광좌가 금부(禁府)의 문 밖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별도로 효유(曉諭)하고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한 번 붕당(朋黨)이 생긴 이후로 공의(公議)가 막히고 호오(好惡)가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대신(大臣)은 나라의 주석(柱石)으로서 비록 과실(過失)이 있다 하더라도 양사(兩司)에서 합의(合議)하는 법이니, 사체(事體)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수규(首揆)는 명신(名臣)의 손자로 양조(兩朝)를 두루 섬겨 한 마음으로 봉공(奉公)하였으니 해를 꿰뚫는 듯한 충성을 신명(神明)에게 물어볼 수 있는데, ‘아첨하며 은총을 굳힌다.’느니, ‘위세가 온 나라에 횡행한다.’느니 하는 말을 제멋대로 더하였다. 윤각(尹慤)의 일에 이르러서는 접때 그의 지극히 공정함을 일컬었기 때문에 먼저 이 일을 들어 도리어 군부(君父)을 미혹시킨 것이니, 아아! 또한 교묘하다. 조상(朝象)이 분열되어 장차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하겠기에 내가 이 습관을 통렬하게 혁파(革罷)하려 하고 있는데, 당고(黨錮)를 내심 달갑게 여기는 무리들이 갑자기 청의(淸議)를 해치려는 뜻을 내니, 은미할 때 방지하여 악(惡)을 징계하는 일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사헌 오명준을 우선 체차(遞差)하라."
하고, 곧이어 오명준을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시키라고 명하였다. 다음날 이광좌가 도성(都城) 밖으로 나갔다.
사신은 말한다. "오명준(吳命峻)은 명상(名相)의 손자로서 참하(參下)에 있을 때부터 조경(躁競)364) 한다는 비난이 있어 사류(士類)가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이광좌(李光佐)가 그의 사람됨을 더럽게 여겨 이조·병조·호조의 천망(薦望)을 굳게 막고 의망(擬望)하지 않았으므로, 오명준이 이 때문에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었는데, 시세(時勢)가 이미 위태롭고 임금의 마음이 벌써 바뀐 것을 보자 이에 군척(捃摭)한 것이 이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명준은 푸르뎅뎅한 얼굴에다 귀신 같은 피부색을 가졌고, 생김새는 노기(盧杞)365) 와 같았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5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5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註 361] 바지를 아끼는 데 : 한(韓)나라 소후(昭侯)가 해어진 바지를 갈무리하여 두고 아무에게나 내려 주지 아니하였는데, 이것은 공(功)이 있는 사람에게 내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함.[註 362] 유취(遺臭) : 악명(惡名)을 후세에 남김.[註 363] 계사년 : 1713 숙종 39년.[註 364] 조경(躁競) : 남과 권세(權勢)를 조급히 다툼.[註 365] 노기(盧杞) : 당(唐)나라 활주(滑州)사람. 본래 음험한 성격을 가졌었는데 덕종(德宗)이 그 재능을 인정하여 발탁해 중용(重用)하였음. 그런데 권력을 잡자 정사(政事)를 어지럽혔으므로 신주 사마(新州司馬)로 좌천되었고, 풍주(灃州)로 옮기는 도중에 죽었음.
사신은 말한다. "오명준(吳命峻)은 명상(名相)의 손자로서 참하(參下)에 있을 때부터 조경(躁競)364) 한다는 비난이 있어 사류(士類)가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이광좌(李光佐)가 그의 사람됨을 더럽게 여겨 이조·병조·호조의 천망(薦望)을 굳게 막고 의망(擬望)하지 않았으므로, 오명준이 이 때문에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었는데, 시세(時勢)가 이미 위태롭고 임금의 마음이 벌써 바뀐 것을 보자 이에 군척(捃摭)한 것이 이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명준은 푸르뎅뎅한 얼굴에다 귀신 같은 피부색을 가졌고, 생김새는 노기(盧杞)365) 와 같았다고 한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권성(權𢜫)이 시골로부터 분곡(奔哭)하다가 인산(因山)이 끝나자, 상소를 남겨두고 돌아감을 고(告)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원컨대 성상께서는 다음과 같이 하소서. 성효(聖孝)에 돈독(敦篤)하여 양궁(兩宮)을 기쁘게 하시고, 성학(聖學)에 부지런하시어 광명(光明)의 영역으로 들어가소서. 하늘의 경계에 삼가시어 대월(對越)의 정성을 다하시고,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이 당한 무욕(誣辱)을 변석(辨析)하소서. 사문(斯文)을 보호하시어 성고(聖考)의 뜻을 밝게 드러내시고, 억울한 이들의 마음을 풀어주어 뇌우(雷雨)와 같은 은택(恩澤)을 쏟으소서. 백성의 궁박함을 돌보시어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한 사정을 풀어주시고, 변방의 방비를 신중히 하여 음우(陰雨)의 대책에 힘을 다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부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지위를 구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만, 전후로 무함(誣陷)을 당하신 것이 무릇 몇 차례나 되었습니다. 박상검(朴尙儉)이 창도(倡導)하자 목호룡(睦虎龍)이 그 뒤를 잇고 김일경(金一鏡)이 주관하였으니, 모의(謀議)의 치밀함은 한 꿰미에 꿰어낸 듯하였습니다. 무멸(誣衊)의 참독(慘毒)함은 천고(千古)에 없던 바인데, 인심(人心)은 함닉(陷溺)하고 의리(義理)가 캄캄하게 막혀 흉도(凶徒)의 음모(陰謀)를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체하고 성궁의 무멸을 예사로운 일로 여겼습니다. 시험삼아 환첩(宦妾)의 옥사(獄事)로 말하더라도 요비(妖婢)가 잇따라 자폐(自斃)한 것과 역환(逆宦)에게 끝까지 핵실(覈實)을 가하지 않은 데 대하여 실로 중외(中外)의 의혹이 많았으나, 급급하게 마무리 지으며 오로지 단서가 혹 드러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김일경과 목호룡 두 역적에 대해 정절(情節)을 캐지도 않고 도당(徒黨)을 묻지도 아니한 채 차율(次律)로 단정하여 성급하게 행형(行刑)하였으되, 성궁을 무욕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끝내 명백하게 핵실하지 못하였으니, 여정(輿情)이 분통스러워하고 나라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합니다. 필부(匹夫)가 억울함을 품어도 오히려 신설(伸雪)하고자 하는데, 하물며 당당한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 이런 암담한 오멸(汚衊)하는 말을 듣고서도 한결같이 덮어두고 신변(伸辨)하지 않으시니, 전하의 심사(心事)를 드러낼 수 없거니와 장차 어떻게 후세(後世)에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역환(逆宦)의 여얼(餘孼)과 김일경의 혈당(血黨)을 하나하나 안문(按問)하여 무릇 모해(謀害)의 자취와 구무(構誣)한 정상에 관계되는 것에 대해 근원을 핵실해 내고 모두에게 징토(懲討)를 더하소서. 그리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전후(前後)의 국안(鞫案)을 조사해 내어 흉역(凶逆)의 정절(情節)을 찬(撰)하게 하고, 태묘(太廟)에 경건히 고(告)한 뒤 팔방(八方)에 반포(頒布)해 보여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성궁의 무멸이 환히 씻기었음을 뚜렷이 알게 하소서. 신은 지금 한강(漢江)을 건너려고 떠나면서 봉장(封章)합니다. 우러러 바라보니, 눈물이 흘러내려 무어라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여덟 조목으로 진계(陳戒)한 것이 모두 우애(憂愛)에서 나왔으니, 내가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라에서 법(法)을 쓴 것이 당악(黨惡)에 있었으니, 어찌 몇 개의 흉악한 무리들 때문에 세상의 반이나 되는 사람을 뒤섞어 물들일 수 있겠느냐? 이런 만연(漫然)한 일은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였다.
12월 19일 무자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했을 때 부제학(副提學) 김동필(金東弼)이 진달하기를,
"영상(領相) 이광좌(李光佐)는 나라를 위한 혈성(血誠)이 있고, 순수한 충성은 청류(淸流)들 가운데서 쉽사리 얻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권익순(權益淳)·유수(柳綏)를 승지(承旨)로, 이명언(李明彦)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지빈(趙趾彬)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정제두(鄭齊斗)가 나학천(羅學天)의 소어(疏語) 때문에 상소하여 인혐(引嫌)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 사람들의 말을 족히 입에 올릴 필요가 없다."
하였다.
12월 20일 기축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의 삼우제(三虞祭)를 친행(親行)하였다.
진시(辰時)와 사시(巳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내의원(內醫院)에서 복선(復膳)을 청하여 재차 아뢰자, 억지로 따랐다.
12월 21일 경인
여러 승지(承旨)들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승지 이진순(李眞巡)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나라를 위한 충성과 자신을 단속하여 청렴 결백함은 온 조정에서 함께 알고 있는 바인데, 오명준(吳命峻)의 상소는 천고의 소인배의 탐탁(貪濁)한 죄목을 모아다 억지로 꾸며대었으니, 참으로 통분합니다."
하고, 정석삼(鄭錫三)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평소 선물이나 뇌물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은 세상이 같이 아는 바인데, 이처럼 날조하여 무함(誣陷)하였습니다. 또 그 상소에서 승탁(陞擢)한 일을 말했는데, 그의 아우 오명항(吳命恒)은 관서백(關西伯)으로서 곧바로 호판(戶判)에 올랐지만 혐의로 삼지 않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권성(權𢜫)은 상소에서 ‘전하의 심사(心事)를 스스로 드러낼 수가 없다.’고 했는데, 그가 이른바 ‘드러낼 것’이란 무엇인지요? 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지위를 구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신자(臣子)로서 차마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의연(李義淵)과 김일경(金一鏡)의 자식들을 아울러 유배(流配)시키는 일로 명(命)을 내리셨는데, 처첩(妻妾)도 또한 마땅히 유배시켜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일경과 이의연은 목호룡(睦虎龍)과는 다르니, 단지 자식만 유배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2일 신묘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의 사우제(四虞祭)를 친행(親行)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도성(都城)을 나가면서 진소(陳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권성(權𢜫)의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을 깡그리 망측(罔測)한 죄과(罪科)로 몰아 넣었습니다. 환옥(宦獄)이 처음 일어난 날 밤에 신(臣)은 이태좌(李台佐)와 함께 맨먼저 청대(請對)하여 토죄(討罪)하였습니다.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의 옥사(獄事)에 이르러서는 성상께서 친림(親臨)하시어 통찰(洞察)하셨고, 마지막의 감단(勘斷)은 모두 성상의 재결에서 나왔는데, 사람들이 뒤에서 의논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박상검(朴尙儉)은 죽일 만하였기 때문에 죽였고, 김일경·목호룡도 죽일 만했기 때문에 죽였습니다. 그 무욕(誣辱)·무상(誣上)·부도(不道)한 죄를 밝혀 정형(正刑)·적산(籍産)의 율(律)로 처리했으니, 인신(人臣)으로서 토역(討逆)하는 의리가 이것 외에 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우제(虞祭)를 섭행(攝行)하고 능행(陵行)을 물려서 정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기축(己丑)에 임금이 인산(因山) 때 따라가지 못하였다 하여 의릉(懿陵)에서 전애(展哀)하는 날짜를 오는 달 보름 전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정월(正月) 13일로 날짜를 가려 계하(啓下)하였기 때문에 조태억이 소(疏)에다 언급한 것이다. 비지(批旨)를 내려 위유(慰諭)하고 힘써 그날 즉시 들어오게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제를 친행(親行)하는 것은 예(禮)에 있어서 본디 당연한 것이고, 원릉(園陵)에 행행(幸行)하는 것은 정리(情理)로 보아 그만둘 수 없으니, 다시는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부제학(副提學) 김동필(金東弼)이 우제(虞祭)를 섭행(攝行)할 것과 능행(陵行)을 물려서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또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을 힘써 나오게 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비국(備局)에서 시급하게 복계(覆啓)해야 할 공사(公事)가 적체되어 있으니, 청컨대,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하여금 일제히 의논해 변통(變通)을 품지(稟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전례(前例)가 있느냐고 물었다. 김동필이 있다고 대답하자, 임금이 이에 허락하였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언서(諺書)로 약원(藥院)에 하교(下敎)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왕대비전(王大妃殿)의 기운이 쇠잔하여 지탱하기 어려우니 권도(權道)를 따를 것을 청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약원에서 왕대비전에 아뢰어 권도를 따를 것을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3일 임진
조지빈(趙趾彬)·여선장(呂善長)을 교리(校理)로, 강박(姜樸)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2월 24일 계사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의 오우제(五虞祭)를 친행(親行)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명준(吳命峻)은 곧 신의 30년 지구(知舊)인데 소의(疏意)는 곧바로 변서(變書)였으니, 실로 신의 집안을 멸문(滅門)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들 ‘조목조목 명백하게 변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만, 만약 신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스스로 변명해도 더욱 그 추악함만 보일 것이고, 산에게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또 무엇 때문에 변명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명준의 상소는 교묘하고 참혹하니, 세도(世道)의 함닉(陷溺)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당원(黨援)’이란 한 마디 말은 더욱 사리에 어긋난다. 시험삼아 윤각(尹慤)과 이의연(李義淵)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경(卿)의 마음이 공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경의 말을 기다려 즉시 윤허했던 것이다. 조상(朝象)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 감히 청류(淸類)를 해치려는 뜻을 내고 있으니, 지금부터 이후로 공의(公議)는 깡그리 없어지고 청류는 죄다 숨어 한(漢)나라 동경(東京)의 일이 장차 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성의가 얕기 때문에 능히 군공(群工)을 감화(感化)시키는 보람을 얻지 못하였으니, 스스로 반성하며 부끄러워하는 것외에 다시 무슨 말을 하랴? 경이 비록 나 소자(小子)를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명릉(明陵)·의릉(懿陵) 두 능을 우러러 바라본다면 경의 마음이 어떠할 것이며, 훗날 돌아가 무슨 말을 아뢸 것인가? 말이 이에 이르니, 눈물이 마구 흘러내린다."
하였다.
12월 25일 갑오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명준(吳命峻)은 젊어서부터 비방이 많았는데, 이광좌(李光佐)가 그의 사람됨을 박하게 여긴 나머지 전후의 천망(薦望)을 한결같이 모두 아끼고 막아 종백(宗伯)366) 에 수의(首擬)되는 것을 저지하기까지 하였고, 또 주사(籌司)의 옛자리를 막았으므로 오명준이 원한을 품은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공제(公除)하던 날 병조와 호조의 판서를 낼 때 또 그가 탈락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인정문(仁政門)의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는 가운데에서 여러 재신(宰臣)들더러, ‘우상(右相)은 나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것인가?’ 하고 하였습니다. 산릉(山陵)의 역사(役事)를 감동(監董)하였을 때에는 이광좌가 누차 조당(朝堂)에서 오명준의 처사(處事)에 어긋난 점이 많고 징구(徵求)가 너무 지나침을 말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명준은 심지어 ‘애증(愛憎)’이란 말로 앞자리를 차지한 여러 재신(宰臣)들을 두루 침척(侵斥)하였으되, 자기에게 절실한 혐애(嫌礙)는 또한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광좌는 집안에서는 효우(孝友)하고 조정에서는 충직(忠直)하며, 평생 자신을 단속하여 속류인(俗流人)으로 자처하고자 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일대의 위인이며 국가의 신신(藎臣)367) 입니다. 거처하는 집이 벽을 바른 것이 다 떨어졌으나 종이 한 장을 들여 다시 바르지 않으며 ‘만약 직명(職名)을 벗는다면 곧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이니, 집을 꾸며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나는 형제나 아들·조카가 없으니, 내 한 몸이 우러러 믿고 사는 것은 오로지 나라와 임금일 뿐이다.’라고 했으니, 정성은 금석(金石)을 뚫을 만하고 충성과 사랑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만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신(朝臣)이 혐의(嫌疑)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만약 엄하게 금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은 말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따로 처분(處分)을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오명준의 일은 지금 경(卿)의 상소를 보건대 더욱 지극히 놀랍다. 엄하게 악(惡)을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서 삭출(削黜)에 그칠 수 없다."
하고, 특별히 부처(付處)의 율을 베풀었다. 오명준이 드디어 서산(瑞山)에 유배되었다.
12월 26일 을미
밤 5경(五更)에 금성(金星)이 토성(土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의 육우제(六虞祭)를 친행(親行)하였다.
12월 27일 병신
심단(沈檀)·심수현(沈壽賢)에게 숭록 대부(崇祿大夫)의 자급을, 이진검(李眞儉)에게 정헌 대부(正憲大夫)의 자급을, 이사상(李師尙)에게 자헌 대부(資憲大夫)의 자급을, 남취명(南就明)·서명균(徐命均)·이진유(李眞儒)·이명언(李明彦)에게 가의 대부(嘉義大夫)의 자급을, 윤순(尹淳)에게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자급을, 박정(朴涏)·조최수(趙最壽)·이진수(李眞洙)·윤성시(尹聖時)·이정걸(李廷傑)·서종하(徐宗廈)·심준(沈埈)에게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자급을 더하였는데, 빈전 도감(殯殿都監)·국장 도감(國葬都監)·산릉 도감(山陵都監)의 상전(賞典)으로서 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요상(僚相)의 진소(陳疏)로 인해 심지어 신이 가는 것을 면류(勉留)하고 말한 자를 부처(付處)하라는 하교까지 있었다 하니, 신은 두려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에게 만약 일분(一分)이나마 나아갈 수 있는 바가 있다면, 어찌 다시 면류(勉留)하심을 기다리겠습니까? 이것으로 상청(上請)하는 것은 아마도 요우(僚友)가 서로 성심껏 대하는 의리가 아닌 듯합니다. 나라의 대체(大體)에 있어서 말한 자가 뜻에 맞지 않는다 하여 언로(言路)를 넓히는 길을 소홀히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베푼 벌도 도리어 돌이킬 것을 청하고자 하는데, 지금 어찌하여 더 보태어 견책(遣責)하십니까? 당국(當國)한 원로(元老)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을 때 마다 곧 출배(黜配)하는 죄를 베푼다면, 당하는 사람은 갑절이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진실로 족히 말할 것이 없거니와, 어찌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정침(停寢)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의 뜻이 굳게 정해졌으니, 결코 차마 경(卿)을 버릴 수 없다. 부처(付處)의 율(律)은 뒷날의 폐단을 막는 것이니, 경이 어찌 마음에 불안할 것이 있으랴?"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강현(姜鋧)이 육조(六曹)의 참의(參議) 이상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왕대비(王大妃)의 복선(復膳)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나의 성효(誠孝)가 얕고 박함으로 인하여 자전(慈殿)께서 들어주시는 길이 아득하니, 더욱 절박하고 초조하다."
하였다.
동중추(同中樞) 김중기(金重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진교(鄭震僑)의 난입(攔入)으로 인해 문비(問備)까지 받게 되었는데, 무릇 교외(郊外)에 거둥하실 때 대가(大駕)가 머무른 곳은 곧 대궐 안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위내(衛內)는 병조(兵曹)에서 주관하고 위외(衛外)는 의금부(義禁府)와 군문(軍門)에서 주관하니, 본디 계하(啓下)한 절목(節目)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유(疏儒)는 이미 작문(作門) 앞으로 들어와 위내(衛內)에 숨어 있었으니, 이 경우는 결진(結陣)한 뒤 작문으로 난입한 것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위외(衛外)의 군문으로서 신지(信地)에 있던 자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일후에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위내·위외를 논할 것 없이 한결같이 허물을 군문으로 돌리면서 ‘병조에서 아는 바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신은 아마도 위내에서 훤잡(喧雜)을 금하는 것을 달리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서 폐단이 생길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후원(喉院)에서 아뢴 것은 사체(事體)를 무겁게 여기기 때문이었으니, 한때 잘못된 것에 어찌 반드시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사간(司諫) 김유(金濰)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명준(吳命峻)이 원망을 쌓고 유감을 품어왔으나, 은인(隱忍)하며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혹시나 그 취허(吹噓)하는 날이 있을 것을 바랐기 때문인데, 지금 헐뜯는 말이 좌우에서 몰려들고 낭묘(廊廟)의 지위를 조석(朝夕)사이에 보유하기 어렵게 되자, 그 마음속으로, ‘대신(大臣)의 힘을 지금 의뢰할 수 없으니, 만약 이때를 타서 그 죄를 날조하여 구성한다면 성총(聖聰)을 현혹시킬 수도 있고 오랜 원한을 갚을 수도 있으며, 또한 대신을 헐뜯는 무리들에게 명예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반드시 충량(忠良)한 사람을 경함(傾陷)하여 국사를 망치고자 하였던 것이니, 어질지 못함이 심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처분(處分)이 이미 엄하였다 하지 마시고, 더욱 징려(懲勵)를 더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요사이의 처분은 탕평(蕩平)의 다스림을 이루고 조정(調停)에 힘쓰는 데 있으니, 성의(聖意)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나 이미 경탈(傾奪)하는 풍습을 변화시키지도 못하였는데, 한갓 좌우를 구속하는 피차(彼此)를 부지하고 억누름으로써 당폐(黨弊)를 제거하고 탕평을 이루고자 하시니, 신은 아마도 진신(搢紳)의 화(禍)가 반드시 장차 더욱 깊어질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계(陳啓)한 것에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생원(生員) 이덕보(李德普) 등이 와서 한 상소(上疏)를 올렸는데, 상소 안에다 이르기를, ‘대행(大行)께서 평일에 과연 「성고(聖考)께서 비록 이렇게 하교하셨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저버리고 어기겠다.」라고 말씀하셨는지요? 또한 과연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지요? 결코 이런 마음이 없었는 줄로 압니다.’라고 하였고, 또 ‘대행(大行)께서 마음속으로 반드시 「이것은 내가 속아 가려진 것이다. 내가 채 바로잡지 못했지만 내 아우가 있으니 반드시 능히 그 일을 바로잡아 내 마음을 밝힐 것이다.」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아! 통탄스럽습니다. 저들이 아무리 사당(私黨)을 신구(伸救)하는 데 급급하다 할지라도 또한 대행조(大行朝)의 신자(臣子)이니, 어찌 감히 이처럼 무엄하게 이 따위의 억지로 교무(矯誣)하는 말을 선왕(先王)의 하늘에 계신 영(靈)에 씌운단 말입니까? 윤리(倫理)를 패멸(悖滅)한 말을 진실로 엄려(嚴廬)에 앙철(仰徹)해서 성심(聖心)의 슬픔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은 부당합니다만, 저들이 이미 여러 선비들의 상소라고 핑계대었으므로 아래에서 물리치기 어려운지라 부득이 봉입(捧入)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이덕보의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짊어지고 주자(朱子)의 법문(法門)을 준수했는데, 불행하게도 임율(林栗)368) ·형서(刑恕)369) 처럼 간악한 자가 문장(門墻)에 다시 생겨나 놀라운 기틀로 선동하자 기사년370) 에 수명(受命)371) 하기에 이르렀고, 여파(餘波)가 넘실대자 임인년372) 에 출향(黜享)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윤선거(尹宣擧)는 강도(江都)의 부로(俘虜)이고 역적 윤휴(尹鑴)의 혈당(血黨)으로서, 겉으로는 잘못을 뉘우치는 체하였으나 실지로는 일찍이 잘못을 뉘우친 일이 없었고, 말로는 비록 윤휴와 절교했다 하였으나 실지로는 일찍이 윤휴와 절교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송시열이 처음에는 믿었다가 끝에 가서 의심하게 된 까닭이고, 윤선거의 묘문(墓文)을 찬(撰)해 주었으나 윤증(尹拯)의 바람에 차지 않았던 까닭이니, 그 뒤의 어지러운 일들은 모두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강도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역적 윤휴의 악(惡)과 절교하지 않았으니, 윤선거는 절조를 잃고 악(惡)한 자와 당(黨)이 되었던 사람이며, 스승과 제자의 윤리는 군부(軍父)와 나란한데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끊은데다 악한 소문까지 더하였으니, 윤증은 윤상(倫常)을 배반하고 어지럽힌 사람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정신 권상하(權尙夏)는 송시열의 적전(嫡傳)으로서 온 세상에서 태산 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보았는데, 적얼(賊孼)이 모욕하고 작명(爵名)을 추삭(追削)하였습니다. 고(故) 유신(儒臣) 이희조(李喜朝)는 진실로 송시열을 보존하고 힘써 윤증의 당(黨)을 물리쳤는데, 자신은 거칠고 먼 땅에서 죽고 이름은 단서(丹書)373) 에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예학(睿學)이 고명(高明)하셨습니다. 병신년374) 의 처분(處分)으로 사도(斯道)가 이에 힘입어 떨어지지 않았고 인심(人心)이 이에 힘입어 다시 밝아졌던 것입니다. 우리 선왕(先王)께서 대리(代理)하시던 처음과 전수(傳授)하시던 즈음에 정녕하게 고계(告戒)하시되 사문(斯文)의 시비(是非)에 대해 매우 정성스러우셨는데, ‘나의 뜻을 너는 따르고 혹시라도 꺾이지 말라.’고 끝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일단(一段)의 문자(文字)를 지으시어 어집(御集)의 말편(末編)에 기록해 두셨으니, 참으로 대훈(大訓)375) 이고 화균(和勻)376) 이었습니다. 저들이 비록 당(黨)을 위해 죽는 데 급하고 정인(正人)을 해치는 데 과감하다 할지라도 만약 무군(無君)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변란(變亂)시키려는 계책을 세워 제멋대로 장소(章疏)에다 ‘선왕(先王)께서 여러 해 동안 침고(沈痼)한 가운데 계셨다.’라고 쓸 수 있단 말입니까? 차츰 베어들어오는 참소가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으며, 대성인(大聖人)의 지극히 밝고 지극히 올바른 처분을 난명(亂命)으로 돌리고자 하였으니, 또한 숙묘(肅廟)의 신서(臣庶)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성스러운 자질을 가지시어 성효(誠孝)는 하늘에서 낸 듯하였습니다. 더욱이 성고(聖考)의 유계(遺戒)를 반드시었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꺾고 고치고자 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대리(代理)하는 4년 동안 한결같이 성고의 훈사(訓辭)를 준수하셨던 것입니다. 일찍이 구언(求言)의 영(令)을 내리셨으되, 그 중에 오늘날의 일과 같은 것이 있을 경우 성단(聖斷)이 혁연(赫然)하시어 시비가 크게 밝아졌고, 만약 응지(應旨)를 거짓 핑계삼아 흑백(黑白)을 변란(變亂)시키려는 자가 있으면, 결단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교하셨으니, 이것이 실로 대행 대왕의 계술(繼述)하신 본뜻이었던 것입니다. 무릇 이처럼 시비가 도로 바뀌고 처분이 다시 고쳐진 것은 모두 소인배들이 희롱하여 현혹시킨 데 말미암았으니, 대행의 본뜻에서 나오지 않았음이 참으로 이미 분명해졌습니다.
전하의 마음으로 대행의 마음을 미루어 생각해 보소서. 전하께서나 대행께서나 숙묘께 대하여 효사(孝思)는 매한가지입니다. 천지(天地)는 그래도 없어질 수 있고 금석(金石)은 그래도 닳아 없어질 수 있겠지만, 전하께서 숙묘의 유교(遺敎)를 저버리실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마음은 곧 대행의 마음이십니다. 전하께서 저버릴 수 없는데, 대행께서 저버리실 수 있겠습니까? 무릇 우리 성고(聖考)의 자손(子孫)과 신서(臣庶)들이 저버릴 수가 없는데, 하물며 전하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으며, 하물며 대행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혹자는 ‘숙묘의 유교(遺敎)가 이와 같다 하더라도 대행의 처분이 또 저와 같으니, 전하께서 처리하시기에 어려운 바가 있다.’고 합니다마는, 이것은 만약 윤증을 비호하는 그릇된 설(說)이 아니라면 이치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숙묘의 유교는 곧 끊을 수 없는 심법(心法)이고 대행의 일은 한때의 처분에 불과하였으니, 여기에 재량해서 변통(變通)하는 의리가 없지 아니합니다. 하물며 이것이 간당(奸黨)의 기무(欺誣)에서 나왔고 대행의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대행을 가까이 모셨는데, 대행께서 과연 평일에, ‘성고(聖考)께서 비록 이렇게 하교하셨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저버리고 어기겠다.’라고 말씀하셨는지요? 결코 이런 일은 없었던 줄로 압니다.
한때의 참소하는 말이 비록 혹 속이고 가렸다 할지라도 이 마음의 천리(天理)는 본디 절로 애연(藹然)한 것이니, 어찌 기꺼이 이와 같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 추정(追正)하시는 일은 비단 숙묘의 유교를 반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대행의 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아득한 저 운향(雲鄕)에 선어(仙馭)가 함께 올라갔으니, 대행의 척강(陟降)은 반드시 영고(寧考)의 좌우에 계실 것입니다. 세상의 짙은 안개는 다시 덮고 가리지 않을 것이며 하늘은 밝아 별과 해가 명랑(明朗)할 것이니, 지금 대행께서는 마음속으로, ‘이것은 내가 속고 가리운 것이다. 내가 세상에 있을 때 채 바로잡지 못했지만 내 아우가 있으니, 반드시 능히 그 일을 바로잡아 내 마음을 밝힐 것이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아! 이것이 전하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대행의 마음을 밝히시고 이어 송시열의 복향(復享)과 권상하·이희조의 복관(復官)에 대한 명을 내리소서. 그리고 빨리 저 무리들이 현인(賢人)과 정인(正人)을 해친 죄를 바루시고, 윤선거 부자(父子)를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지 마시고 성고(聖考)의 뜻과 사업을 계술(繼述)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상소를 읽고 나서 하교하기를,
"일의 옳고 그름은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을 가려서 하지 않고 두서가 없으니, 너무나도 몹시 놀랍다. 이 상소는 도로 내어 주고 소두(疏頭) 이덕보(李德普)는 3년 동안 정거(停擧)하라. 그 상소 안에, ‘「선왕께서 여러 해 동안 침고(沈痼)한 가운데 계셨다.」는 등의 말을 제멋대로 상소에 썼다.’고 하였다. 아아! 선조(先朝)께서는 3년 동안 위예(違豫)하셨으나, 정무(政務)에 부지런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마침내 붕천(崩天)의 슬픔을 당했는데, 신하된 자로서 어찌 감히 소장(疏章)에다 이런 말을 제기한단 말이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후원(喉院)에서는 조사해 아뢰라."
하였다. 다음날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소유(疏儒)를 불러다 물었더니, ‘향유(鄕儒) 최탁(崔鐸) 등의 상소에 이 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원(本院)의 일기(日記)를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계묘년377) 생원 최탁 등의 상소에 이르기를, ‘이 무리들이 선조(先朝)를 자중(藉重)하는 것은 또한 무엄하다 할 만합니다. 옛날 선대왕(先大王)께서 여러 해 동안 침고(沈痼)하신 가운데 계시자, 차츰차츰 배어드는 참소가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어 일월과 같은 명철하심에 통촉하지 못하시는 바가 있었습니다. 손수 원액(院額)을 써주신 것이 마침 그때에 있었으니, 이와 같은 한때의 은전(恩典)으로 송시열의 평생 심적(心跡)까지 아울러 용서함이 옳겠습니까? 선대왕께서 일찍이 김창집(金昌集)의 화상(畫像)에 찬(贊)을 지으신 적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송시열을 위해 자구(藉口)하는 자들은 또한 장차 김창집이 역적으로 죽은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까? 더욱이 선대왕께서 송시열에 대하여 척악(斥惡)·찬축(竄逐)·주륙(誅戮)하신 것이 하나로 충분하지 않았으니, 이 무리들이 어찌하여 이 따위의 일을 제기하며, 단지 예사의 은전(恩典)만을 끌어대어 다른 사람의 입을 겸제(箝制)하는 도구로 삼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하였다. 6일 뒤에 하교하기를,
"선왕께서 비록 위예(違豫)하신 가운데 계셨으나 정무(政務)에 부지런하셨으니, 신하된 자로서 어찌 참으로 알지 못하고 감히 ‘여러 해동안 침고(沈痼)하셨다.’는 등의 말을 제멋대로 상소에 쓴단 말인가? 무엄이 막심하다. 이미 상고하여 아뢰었으니, 지나간 일이라 하여 그냥 둘 수 없다. 최탁을 5년 동안 정거(停擧)하라."
하였다.
진사(進士) 신집(申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망사(亡師) 선정신(先正臣) 이희조(李喜朝)는 소인배들에게 참혹하게 무구(誣構)당해 장려(瘴癘)를 가득 마시고 풍상(風霜)을 맞으며 길에서 죽었습니다. 신의 스승은 곧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입니다. 윤선거(尹宣擧)는 강도(江都)의 부로(俘虜)로서 안으로 엄호(掩護)할 계책을 품었었는데, 역적 윤휴(尹鑴)가 ‘강왕(康王)이 실제로 군(軍) 앞에 있었다.’는 말로 꾀었습니다. 윤선거가 죽자 윤휴의 제문(祭文)과 윤선거의 의서(擬書)가 나왔는데, 그 아들 윤증(尹拯)이 묘문(墓文)이 뜻에 차지 않는다 하여 병장기를 잡고 도로 공격하여 기사년378) 의 화(禍)를 빚어냈던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묘년379) 나양좌(羅良佐)의 상소는 사실이 전도(顚倒)된 것입니다. 신의 스승이 장서(長書)로 왕복한 것은 신구(申救)의 상소가 나올 때까지 이르렀는데, 윤선거 부자(父子)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라는 명이 있자, 그 무리인 이세덕(李世德)이 격고(擊鼓)하여 납공(納供)하면서 선정(先正)이 찬(撰)한 쇄록(瑣錄)의 말을 절단(截斷)하여 심지어 ‘몰래 천양(泉壤)의 화(禍)를 열었다.’고 했고, 또 ‘성조(聖朝)께 불충(不忠)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의 스승이 드디어 선정의 문집(文集)을 초(抄)하고 쇄록(瑣錄)의 전편(全篇)을 갖추어 실어서 책자(冊子)로 꾸민 뒤 올렸는데, 흉당(凶黨)들이 쇄록을 베껴 올린 것을 신의 스승의 일대(一大) 죄안(罪案)으로 삼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숙묘(肅廟)께서 말년에 처분(處分)하신 것을 뭇 간흉(奸凶)들이 심지어 ‘선왕(先王)의 본뜻이 아니었다.’고 말하여, 선대왕(先大王)의 태청(太淸)380) 같이 높으심이 한 자락 안개에 가리워짐을 면하지 못하고 백일(白日) 같은 빛이 한 토막 구름에 잠깐 가리워졌으니, 전하의 잘 계술(繼述)하시는 도리로는 마땅히 즉시 더러운 기운을 말끔히 씻어내고 사문(斯文)을 크게 빛냄으로써 숙묘의 유지(遺旨)를 준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경장(更張)하지 아니하시니, 어찌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다 하여 갑자기 바꾸고자 하지 않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宋)나라 선인 황후(宣仁皇后)가 신종(神宗)이 승하(昇遐)한 초기에 장돈(章惇)·채경(蔡京)의 무리를 모두 쫓아내고 이어 조서(詔書)를 내려서 유사(有司)의 봉행(奉行)이 정당함을 잃은 죄를 밝히니, 신종에게 더욱 빛남이 있었고 선유(先儒)들이 요(堯)·순(舜)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중묘(中廟) 때에도 남곤(南袞)의 무리가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를 무함하여 죽였는데, 인묘(仁廟)께서 즉위하시자 즉시 그 원통함은 신설(伸雪)케 하셨으니, 지금까지도 성덕(聖德)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법(法) 받으실 바가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숙묘의 유교(遺敎)는 ‘백세(百世)토록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숙묘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 바로 선왕의 뜻을 계술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양조(兩朝)의 성지(聖志)를 생각하지 않고 한결같이 뭇 간흉들이 농락하는 대로 내맡겨 둘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신의 스승의 무욕(誣辱)을 씻어 주시고, 뭇 흉인(凶人)들이 정인(正人)을 해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의 시비는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윤광익(尹光益)이 상소하기를,
"군심(君心)을 정하는 것이 오늘의 제일 급무(急務)입니다. 군심(君心)이 정해지면 비록 근심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마침내 근심이 없는 데 이를 것이고, 군심이 정해지지 않는다면 비록 염려할 만한 일이 없다 하더라도 마침내 근심이 있는 데 이를 것입니다. 정한다는 것은 단단히 쥐고 굳게 지키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시비(是非)가 정해지고 권도(權度)가 밝아지면, 외물(外物)이 꺾지 못하는 법입니다."
하고, 자주 소대(召對)하실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장령(掌令) 조상경(趙尙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울울(鬱鬱)한 교릉(喬陵)에 검석(劍舃)을 이미 감추시고 적막한 심전(深殿)에 의관(衣冠)을 헛되이 진설(陳設)하였으니, 선왕(先王)의 자리에 있으면서 선왕의 덕(德)을 사모하되 효제(孝悌)의 도리를 뒤미쳐 다하려 생각하는 바에 선왕의 유열(遺烈)을 준수하고 잘 계술(繼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신축년381) 의 화란(禍亂)을 진정시켜 한 나라의 이륜(彛倫)을 부지한 것이 곧 우리 선왕의 넓고 위대한 공렬(功烈)이었으니, 전하께서 마땅히 준수하시고 고치지 않아야 하실 것이 전적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의연(李義淵)의 흉소(凶疏)가 나왔고 옥정(獄情)이 채 구명(究明)되지 않았으니, 이 음사(陰邪)한 모의를 이을 자가 몇 사람이 될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의 한 생각이 혹시라도 조금이나마 느슨해진다면, 계술하는 성덕(聖德)에 큰 누(累)가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이 뜻을 굳게 정하시고, 엄격하게 과조(科條)를 세워 이후로 만약 대행(大行) 때의 일을 뒤이어 헐뜯는 자가 있다면 중률(重律)로 다스리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보상(輔相)을 쳐서 흔드는 무리들은 더욱 엄하게 배척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이의연의 일이 터지자 원로(元老)가 돌아갈 것을 고(告)하였는데, 그 뜻은 ‘떠나는 것’을 ‘간(諫)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니, 옛사람의 시간(尸諫)382) 과 같습니다. 다시 조정(朝廷)에 부르심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행하는 것이 어려우며, 처음이 있으나 능히 끝이 있기가 드뭅니다. 그러므로 실천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자(夫子)가 부끄러워 했고, 능히 끝을 잘 맺지 못하는 것을 위징(魏徵)이 경계했던 것383) 입니다. 전하께서는 영기(英氣)가 너무 날카로운 데 가까우시어 행함이 혹 말에 어긋나기도 하고, 덕(德)을 고집하심이 굳지 않은 데 관계되어 끝이 처음보다 부족함이 있기도 하십니다. 원하건대, 행함에 민첩하여 그 말을 반드시 실천하시고, 그 끝을 삼가시어 그 처음에 부응하신다면, 꾸미기를 숭상하고 헛된 문구(文具)로 돌아감을 면하실 수 있을 것이며, 한 가지 덕으로 능히 부합되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뭇사람들의 말을 살펴 받아들이는 도리는 오로지 의리(義理)를 밝히고 사정(邪正)을 통촉하는 데 달려 있는데, 요사이 처분을 내리실 즈음에 호오(好惡)가 점점 처음과 같지 않으시니, 원하건대, 먼저 나의 주관을 확고하게 하시고 참소하는 말에 현혹되지 마소서."
하고, 또 사사로운 간청을 진달하여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게 해 줄 것을 바라니, 비답하기를,
"진언(進言)이 모두 근심하고 사랑하는 데서 나왔으니,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버이를 섬길 날이 짧다는 말은 나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하고, 본직(本職)을 갈아 곧 구호(救護)하는 데 편하게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백시광(白時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위험한 지경을 밟고 오멸(汚衊)을 받으신 것이 지금 몇 년입니까? 그런데도 환비(宦婢)를 곧장 정형(正刑)할 것을 청하여 절로 자폐(自斃)하게 만들었으니, 드러나게 자취를 가리고 입을 막아버린 계책이 있었습니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과 봉장(封章)의 말은 역적의 심장과 뱃속이 아님이 없었으니, 인신(人臣)이 된 자는 하루라도 같이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는데도, 그날 정신(廷臣) 중에는 한 사람도 그 죄를 성토(聲討)하는 자가 없이 오로지 비호(庇護)만 일삼고, 추장(推奬)하기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아아! 이 무리들은 전하께 참으로 말할 만한 허물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 말이 심히 붙일 만한 제목이 된다고 여겨 그런 것인지요? 이 무리들이 역적 김일경과 동일한 심장(心腸)을 가지고 있음은 길 가는 사람도 아는 바인데, 당류(黨類)를 비호하여 한 몸뚱이가 된 여러 흉적(凶賊)들이 태연하게 드러누워 쉬고 있으면서 마치 역적 김일경과 원래 서로 관계가 없었던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김일경만 홀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군부(君父)를 제거하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만들려고 도모한 것이 어떠한 악역(惡逆)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단지 만연(蔓延)될 것만 염려하시어 그 당여(黨與)를 묻지 않으시니, 《춘추(春秋)》의 ‘먼저 그 당을 다스린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요사이 전하께 충성하며 흉역(凶逆)을 토죄(討罪)한 자를 당을 비호한다고 물리치시고, 전하를 잊고 흉역을 비호한 자를 충신(忠藎)으로 추장(推奬)하시니, 신은 역적 김일경에게 충성한 자가 과연 능히 전하께 충성할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상소를 보고 나서 하교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지금 제기할 수 없다. 요사이의 일은 처분(處分)이 이미 정해졌는데, 투소(投疏)하여 경알(傾軋)하니 참으로 지극히 놀랍다."
하고, 이어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함경 도사(咸鏡都事) 조명신(朝命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왕(帝王)의 효(孝)는 계술(繼述)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다스림이 정해지고 공(功)이 이루어져서 후세에 드리움이 넉넉하셨으니, 그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깨끗이 하신 바는 천지(天地)에 세우고 신명(神明)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문(斯文)에 대한 처분(處分)이 해와 별처럼 밝았으니, 전하께서 마땅히 계술하셔야 할 것이 성고(聖考)의 뜻과 사업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김일경(金一鏡)에게 단지 차율(次律)을 베풀었으니, 실형(失刑)한 것으로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김일경과 목호룡(睦虎龍)은 똑같이 흉역(凶逆)인데, 하나는 당률(當律)을 베풀고 하나는 주륙(誅戮)이 그 한 몸에만 그쳤으니, 어떻게 위로 선왕을 위로하고 아래로 뭇사람들의 분을 풀 수 있겠습니까? 근밀(近密)과 대각(臺閣)에서는 김일경의 무욕(誣辱)·부도(不道)한 말을 혹은 무심(無心)한 데로 돌리고 혹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 핑계대면서 근거없는 말로 영구(營救)하며 성총(聖聰)을 속이고 가렸으니, 그날의 승선(承宣)과 대신(臺臣), 그리고 그 나머지 김일경을 영호(營護)한 자들을 한결같이 투비(投畀)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민진원(閔鎭遠)을 방송(放送)하라는 명(命)이 선후(先后)를 추모(追慕)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니, 군하(群下)들이 누군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민진원에게 아직도 삭출(削黜)의 죄명(罪名)이 있어서 도성(都城) 문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고 하니, 당초의 도하(都下)에서 한 번 곡(哭)하게 한다는 뜻이 돌아보건대 어디에 있습니까? 견서(甄敍)를 명하심이 마땅합니다. 신임(申銋)과 정호(鄭澔)의 상소는 전적으로 노신(老臣)의 근심과 정성에서 나왔는데, 3년 동안 천극(栫棘)되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소석(疏釋)하는 은전(恩典)이 없으니, 신은 적이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요사이의 처분(處分)은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가율(加律)할 필요가 없다. 민진원은 특별히 문출(門黜)을 풀어주라."
하였다.
지평(持平) 유엄(柳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명준(吳命峻)은 섬오(纖汚)·험교(險巧)하여 청현직(淸顯職)을 주제넘게 바라고 탐욕이 한정이 없었으므로, 사류(士類)에게 버림을 받고 대신(大臣)에게 깊이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원한을 쌓고 독을 품어 오다가 중상(中傷)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명준은 권문(權門)에 자신의 몸을 의탁하고 백억(百億)가지로 몸을 변화시켰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윤용(尹容)은 공평(公平)하고 명백(明白)하여 청의(淸議)에 추후(推詡)받았습니다. 오명준이 반드시 앙갚음하고자 했던 것은 윤용의 소매 속에 있던 글이 채 발표되기 전에 먼저 새나간 데에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오명준이 원한을 갚으려고 했던 정상을 내가 이미 환히 알고 있다."
하였다.
유신(儒臣)을 소대(召對)하여 강목(綱目)을 강(講)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광보(李匡輔)가 말하기를,
"하탐(賀琛)384) 이 감히 다시 말하지 않았던 것은 듣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급암(汲黯)은 직신(直臣)이었으나, 유독 무제(武帝)가 신선(神仙)을 구하는 것은 간(諫)하지 않았으니, 간언(諫言)이 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거울삼아 경계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암이 말하기를, ‘안에 많은 욕심이 있으니, 신선을 구하고 장생(長生)을 구하는 것이 바로 욕심입니다.’라고 하였으니, 비록 신선에 대해 간하지는 않았지만 간언이 바로 그 가운데 있다."
하였다. 이광보가 또 말하기를,
"호남(湖南)에 봉명(奉命)하였을 때 연해(沿海)에서 제언(堤堰)을 쌓는 것이 백성에게 큰 폐단이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여러 궁방(宮房)과 각 아문(衙門)에서 제언을 쌓는다고 정장(呈狀)하면 제언사(堤堰司)에서 감영(監營)에 도부(到付)하여 군정(軍丁)을 제급(題給)하는데, 백성들이 고전(雇錢)을 거두어 낭비한 뒤 중도에서 그만두게 됨을 면하지 못합니다. 백성들이 군정을 모집하여 스스로 제언을 쌓는 것 외에 궁방과 아문에서 제언을 쌓는 것은 마땅히 엄하게 금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언답(堰畓)은 옛날부터 있었으니, 허물어진 것을 수축(修築)하는 것은 본디 그만 둘 수 없는 일이나, 새로 쌓는 곳은 엄하게 금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광보가 또 말하기를,
"궁방과 아문의 둔전(屯田)의 차인(差人)이 폐단을 일으킴이 대단히 참혹합니다. 듣건대, 수진궁(壽進宮)과 기로소(耆老所)의 차인이 흥양(興陽)에서 수세(收稅)할 때 판옥(板獄)을 만들어 사람을 가두었는데, 판옥은 겨우 서 있는 것만 용납할 뿐 앉거나 누울 수가 없어서 선 채로 죽을 염려가 있다고 합니다. 차인을 내려보내는 법을 혁파(革罷)하고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수세(收稅)하여 올려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수령으로 하여금 거두어 바치게 한다면, 감색(監色)이 또 장차 폐단을 일으킬 것이니 차인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판옥의 일은 놀랄 만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추치(推治)하게 하라."
하였다. 이광보가 이 이후로 차인으로서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각읍(各邑)에 분부(分付)하여 감영(監營)에 보고하고 무겁게 다스리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광보가 또 말하기를,
"호남 우도(湖南右道)의 전답 문서(田畓文書) 가운데 전하께서 사저(私邸)에 계실 때의 작호(爵號)로 세금을 면제하여 상납(上納)하는 곳이 여러 곳 있으니, 사체(事體)로 보아 미안합니다. 당당한 천승(千乘)의 임금이 사저에 있을 때 절수(折受)한 것을 그대로 두어서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만약 민간(民間)에 준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본래 절수한 곳이 없으니, 선조(先朝) 때 획급(劃給)한 원결(元結)인 것 같다. 작호는 이미 쓰지 말도록 하였다."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경연관(經筵官)이 일찍이 소대(召對)에 참여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이후로는 전의 규례(規例)에 의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임금이 인산(因山) 전에는 경연(經筵)을 열 수 없다고 특별히 경연관을 소대에 입시(入侍)하지 말라고 명했는데, 이때에 와서 인산이 이미 지나가 경연을 장차 열려고 하였으므로 이광보가 말한 것이다.
12월 28일 정유
2품 이상이 왕대비전(王大妃殿)이 복선(復膳)하는 일 때문에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승지(承旨) 정석삼(鄭錫三)이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김구(金構)의 아내는 지금 나이 80세로, 병이 들어 아침저녁으로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장자(長子) 김희로(金希魯)와 차자(次子) 김재로(金在魯)가 모두 적소(謫所)에 있습니다. 재작년 대계(臺啓)에서 와언(訛言)을 선명하고 종적(蹤跡)이 음비(陰秘)하다는 것을 죄목으로 삼았는데, 그 뒤 아홉 사람 중에서 구정훈(具鼎勳)과 김영행(金令行)은 방석(方釋)되었습니다. 김재로는 승낙했다고 하여 귀양갔지만, 김희로는 방석하여 돌아가 그 어미가 죽기 전에 병을 보살피게 하는 것이 체하(體下)하는 도리에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뜻이 좋다. 김재로는 비록 죄명(罪名)이 다르다고 하지만, 대행조(大行朝) 때 만약 이런 정상을 아셨다면 특별히 방석하지 않으셨겠는가? 우러러 대행조께서 효(孝)로 다스리시던 것을 체념(體念)하여 김희로와 김재로를 특별히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정석삼이 또 말하기를,
"김취로(金取魯)에게 또한 노모(老母)가 있는데, 다른 형제는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일체(一體)로 방송하라 명하였다.
12월 29일 기해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왕대비전(王大妃殿)에 정청(庭請)하여 세 번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자, 답하기를,
"거상(居喪)의 예(禮)는 이처럼 소선(素膳)하는 것일 뿐이다. 이 망극(罔極)한 정(情)을 헤아려 차마 하지 못할 청을 정지하라.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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