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권, 영조 1년 1725년 1월

싸라리리 2025. 8. 1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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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경자

8도(八道)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下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농사란 천하의 근본이기 때문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백성을 때에 맞게 부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비록 농사를 권장하는 하교가 있더라도 백성을 때에 맞게 부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농사에 전념할 수 있겠는가? 비록 평년(平年)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인데, 하물며 거듭 기근(飢饉)이 든 때를 당해서이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면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을 지경이다. 아! 너희 방백(方伯)의 신하들은 나의 이런 뜻을 체념(體念)하여 농사철을 빼앗지 말고 농사에 부지런하도록 권장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을 일절 금단(禁斷)하여 편히 살면서 농사를 짓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001)  하여 왕대비전(王大妃殿)에 권도(權道)를 따를 것을 세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또 정청하자 허락하였다.

 

1월 2일 신축

권익관(權益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유(金濰)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대왕 대비전의 환후(患候)가 평복(平復)된 경사 때문에 정시(庭試) 무과(武科)를 설행하였는데, 초시(初試)를 채 출방(出榜)하기 전에 대상(大喪)을 만났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조에서 날짜를 가려 시취(試取)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헌납(獻納) 윤진(尹晉)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옥사(獄事) 이래로 불령한 무리들이 때를 틈타 글을 올렸는데, 을러대고 몰아대는 무리는 많이 따질 것이 없으나, 숭반(崇班)의 기구(耆舊) 가운데에서는 권성(權𢜫)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권성은 얼버무리는 말로 여러 신하들을 망측한 데로 마구 몰아넣어 심지어 상소(上疏) 가운데 ‘일호(一毫)’란 두 글자 이하는 스스로 그 말이 부도(不道)의 죄과를 범한 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집(申鏶)은 소에서 이희조(李喜朝)를 선정(先正)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오늘날 신하된 자로서 조금이라도 국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선조(先朝)에서 죄를 얻어 이름이 단서(丹書)002)   가운데 있는 자를 주어(奏御) 문자(文字)에다 존칭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유학(幼學) 최세웅(崔世雄) 등이 상소하여 육지(陸贄)003)  의 ‘실제 혜택을 미루어서 백성을 믿게 하고 경비와 용도를 줄여 아래에 보태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결포(結布)004)  를 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일 신축

전(前) 도사(都事) 유응환(柳應煥)이 상소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을 무상(誣上)과 부도(不道)로 결단한 것은 이미 실형(失刑)이라 할 수 있는데, 마침내 감률(勘律)005)  한 것이 도리어 목호룡(睦虎龍)보다 가벼웠으니, 이것이 무슨 법의(法意)입니까?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일경이 우두머리가 되고 목호룡은 그의 사주(使嗾)를 받은 자이다.’라고 하는데, 전하께서는 경폐(徑斃)할까 염려하시어 조사기(趙嗣基)의 예(例)를 적용하셨습니다만,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조사기의 죄는 오직 문자(文字) 사이에서 속여 핍박한 것이었지만, 김일경은 이에 숙종(肅宗)을 원망하며 속이고 선왕(先王)을 속였으며, 전하와 자성(慈聖)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한 적(賊)입니다. 어찌 조사기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숙종께서는 어진이를 부식(扶植)하고 간사한 자를 배척함이 매우 엄정하셨기 때문에, 김일경의 무리가 뜻을 잃고 불만스런 마음으로 한산한 곳에 물러나 있으면서 원한이 골수(骨隨)에 사무쳐 몰래 틈을 엿보았던 것이니, 이는 상안민(常安民)006)  이 이른바, 원망과 분함을 한 번 내면 그 해가 반드시 크다.’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왕께서는 불행히도 후사(後嗣)가 없으셔서 전하께서 저위(儲位)007)  에 오르시어 마치 하늘의 해처럼 광명(光明)이 있게 되었으니 누가 감히 의논을 용납하겠습니까만, 이 무리들의 가슴속에는 이미 장돈(章惇)008)  ·채경(蔡京)009)  이 원한과 독기를 부린 것과 같은 계책이 있어서 조태구(趙泰耉)가 앞에서 조절(操切)하고 유봉휘(柳鳳輝)가 뒤에서 지휘하고 의논하면서 전하에게 다른 마음을 품게 한 것이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니고 그 해 겨울에 이르러 선왕의 비망기(備忘記)와 비지(批旨)에 단지 ‘환후 때문에 공무(公務)에 방해됨이 있다.’고 하교하시어 전하로 하여금 대리(代理)하게 하시고자 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가부만을 평범하게 말을 해서 지당하게 하는 데 힘쓰면 되었을 것인데도 군소배(群小輩)들이 엿보고 일어나 이 기회를 틈타야 한다고 하면서 그 흉악한 꾀를 드러내어 비망기를 한쪽에 버려두고서 근거없는 흉악한 말을 지어 냈는데, 최석항(崔錫恒)이 전선(傳禪)한다는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켰고 또 한세량(韓世良)을 시켜 계속 ‘몰래 천위(天位)를 옮기고’ ‘말후(末後)의 한 가지 일’이란 말로써 모두 건저(建儲)010)  하는 일에 참여시켜 우리 전하를 속박(束縛)함이 뚜렷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대리(代理)하는 일과 관계됩니까? 다행히 선대왕(先大王)의 지극한 덕(德)을 힘입어 천륜(天倫)에 틈이 없게 되고 나라의 근본이 의뢰할 바가 있게 되었으나 흉한 무리들이 밤낮으로 경영하는 것은 단지 전하를 모해(謀害)하는 데 있습니다. 이에 김일경이 앞장서 나와 여러 적들의 꾀를 이어받아 불량한 무리들을 불러들여 스스로 와주(窩主)011)  가 되어 하나의 소를 올렸는데, 이른바 전선(傳禪)한다는 말은 또한 다시 없어지고 곧바로 ‘기(冀)·현(顯)012)  처럼 찬시(簒弑)를 하려 한다.’는 등의 말로 난만하게 늘어놓기를 조금도 주저하거나 거리낌없이 하였으니, ‘피를 밟고 칼을 품었다.’라는 무함을 어찌 교문(敎文)을 기다려 알았겠습니까? 이른바 기·현이란 바로 양기(梁冀)와 염현(閻顯)인데 태후(太后)를 믿고 임금을 폐하고 시해하는 모의를 자행한 자에게 비하였으니, 비단 전하만 모위(謀危)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성(慈聖)까지 아울러 무함한 것이 이미 분명합니다.
이 상소가 있은 후 열흘이 못되어 박상검(朴尙儉)의 일이 드러났으니, 그 체결(締結)하여 함께 꾀한 형상을 이에서 알 수가 있으며, 더구나 자성(慈聖)의 언교(諺敎)를 중간에서 막아 돌려주어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르게 하였습니다. 김일경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서로 이끌고 입대(入對)하여 박상검을 곧바로 처참(處斬)하기를 강력히 청하였고, 두 역비(逆婢)013)  를 국문(鞫問)하라는 명을 즉시 거행하지 않아 스스로 죽도록 했으니, 안팎에서 서로 응한 자취를 더욱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백망(白望)이 김일경을 고하여 잠시 명(命)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청대(請對)하여 옥수(獄囚)의 말로써 양궁(兩宮)을 범한 것과 정탈(定奪)014)  을 논하지 않고 스스로 그 옥사를 다스려 찬축(竄逐)하라 말한 것에 미쳐서는 고금(古今)에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박상검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은 흉악한 마음은 고치어지지 않고 분한(忿恨)이 마음에 가득하여 부딪치는 곳마다 탄로되어 스스로 숨길 수 없는 것이 소장(疏章)과 교문(敎文)에 나타났으니, 참으로 음흉한 계획을 세워 장차 무슨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면 감히 이렇게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늘날 보장받은 것은 하늘의 힘이지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그 소(疏)에 말하기를, ‘밤중에 칼을 품은 것이 마치 노(魯)나라의 종무(鍾巫)015)  와 같다.’고 한 것은 이는 전하를 무함함이요, ‘음식 속에다 독약(毒藥)을 넣으려 한 것이 마치 한(漢)나라의 양기(梁冀)·염현(閻顯)과 같다.’고 한 것은 자성(慈聖)을 무함한 것이요, ‘상(喪)을 틈타 전지(傳旨)를 위조하려 한 것이 마치 진(秦)나라의 이사(李斯)와 조고(趙高)016)  와 같다.’고 한 것은 이는 전하를 진나라의 호해(胡亥)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미 죄역(罪逆)을 성토(聲討)한다고 일컬으면서 도리어 ‘삼수(三手)017)  ’라는 흉악한 말로 우리 전하와 자성(慈聖)을 잡아 얽는 것이 환하여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 교문(敎文)에서 또 ‘양기·염현의 간사함’이라 일컬었고 전후 문자에서 모두 세 번이나 양기·염현이란 말을 인용한 것은 그 말이 은미하여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해서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안으로 곽현(霍顯)018)  이 행배(行盃)한 것을 도모하고 내옥(內屋)의 인척들과 결탁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행배’란 바로 곽현이 태후(太后)로 하여금 술을 장만하게 하고는 인하여 천자(天子)를 폐하려고 도모한 일입니다. 이 말과 상소의 말이 착착 들어맞아 그 가리킨 뜻의 돌아가는 바가 어찌 다만 장돈(章惇)·채확(蔡確)의 무리가 선인후(宣仁后)019)  를 무함한 것일 뿐이겠습니까? 임부(林溥)와 이잠(李潛) 두 간흉은 바로 숙종조(肅宗朝) 때 안치(按治)한 적인데도 멋대로 찬미(贊美)하였으며, 유언비어와 요악(妖惡)한 말은 신하로서 차마 꺼내 말할 일이 아닌데도 갑자기 첫머리에 썼으니, 아! 분통스럽습니다. 선왕(先王)을 위해 대신 지은 글에서 전하를 무함하고 자성(慈聖)을 무함하는 말을 드러내어 써서 숙종을 무함하는 데 이르렀으며, 선왕께서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배척하여 말하고, 천감(天鑑)을 속이고 가려 팔방에 반시(頒示)하였으니, 비록 마디마디를 베고 조각조각 살을 발라 죽이더라도 어떻게 그 죄를 만분의 일이나마 면하겠습니까?
대개 그 사나운 성품이 선왕께서 무고(無故)한 것처럼 보아 신축 여탈(伸縮與奪)을 오직 마음대로 하려고 하였고, 처분(處分)이 만약 그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문득 불경(不敬) 부도(不道)한 말을 함부로 해 협박 조절(操切)하고, 비웃고 농락하기를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시비(是非)에 대해 분명하지 않으시고 충역(忠逆)에 대해 나타내지 않으시며 노여워하면서도 어떤 일에서 마땅히 노여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죄를 주면서도 어떤 단서(端緖)에서 죄를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였고, 전하께서 스스로 뉘우쳐 한때의 화(火)로 돌리는 데 미쳐서는 ‘우리 임금에게 과연 병이 있는가? 이 병이 그치지 않으면 국사(國事)가 어찌 될 것인가?’ 하면서, 한편으로는 숙종을 원망하며 무함(誣陷)하였고 한편으로는 선왕(先王)을 속여 무함했으며, 한편으로는 자성(慈聖)을 모위(謀危)하였고 한편으로는 전하를 모위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한 죄만 있어도 극률(極律)을 면하기가 어려운데 더군다나 한 몸에 네 가지 죄를 겸하여 여러 악역(惡逆)이 모여 수악(首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러한 죄목(罪目)을 하나하나 그에게 따져 묻지 않고 단지 그 머리만 베어 그 몸뚱이를 보전하게 하여 음흉한 정절(情節)을 아직도 통렬히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신(臣)은 아마도 이와 같은 데 그친다면 비단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징계(懲戒)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고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천고(千古)의 망극한 악명(惡名)을 씻어 천하 후세에 말을 하시겠으며 또 장차 무슨 말로 자성(慈聖)께 들어가 고하며, 또 무슨 면목으로 숙종과 선왕의 영전(靈前)을 배알하시겠습니까? 적(賊) 김일경(金一鏡)의 신축년020)   겨울 소(疏)에 이미 함께 참여한 여러 사람이 있으니, 그 흉악한 말과 뜻을 구문(究問)해야 옳습니다. 박상검(朴尙儉)의 옥사(獄事)는 그때 자성의 언문 교서(諺文敎書)를 조보(朝報)에 품출(稟出)하여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해야 했는데, 함께 국문(鞫問)을 당했던 환관(宦官)이 아직도 살아 있는 자가 있으니, 이 역시 구문할 계제(階梯)가 됩니다. 두 역비(逆婢)가 스스로 죽은 정상은 그들과 함께 사는 친속(親屬)에게 끝까지 물으면 허다한 정절(情節)을 조사해 얻을 수 있고, 박상검 등 여러 사람을 곧바로 참하기를 청한 자와 역비를 국문하라는 명을 즉시 거행하지 않은 의금부 당상관 역시 잡아다가 그 까닭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일경과 함께 백망(白望)의 초사(招辭)에 같이 나온 자를 아울러 국문하라고 명하시면 김일경의 정절 역시 구핵(究覈)할 수 있으니, 마땅히 빨리 차례로 구문하여 그 실정을 알아내어 각각 마땅히 시행해야 할 율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김일경의 죄 및 교문(敎文)의 조어(措語)가 무역(誣逆)했던 정상을 찬술(撰述)해 내게 하여 위로 태묘(太廟) 및 선왕(先王)의 혼전(魂殿)에 고하고 팔방(八方)에 반시(頒示)하여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김일경이 두 성상(聖上)을 모위(謀危)하고 두 조정을 속인 죄를 환히 알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일은 비단 전하 한 몸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요 역시 세 성인(聖人)께서 무함을 입은 것에 관계되니,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효제(孝悌)의 도리로써 새로 교화(敎化)시키는 근본을 삼아야 하는데, 밝게 분변하여 통렬히 다스리기를 생각하지 않으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오직 이렇게 하시기 때문에 간흉(奸凶)한 무리들이 전하의 심천(深淺)을 엿보아 김일경과 목호룡(睦虎龍)이 잔인하고 사납게 형(刑)에 임해 불복(不服)하면서 오히려 악한 말을 함부로 한 것이며, 또 그의 혈당(血黨)들이 도리어 김일경의 도(道)로써 감히 얼굴을 붉히며 임금을 협박할 계책으로 삼고 서로 잇따라 상소하여 악을 함께 하는 데로 나아갔습니다. 그 이른바 ‘원립(援立)’이니 ‘옹립(擁立)’이니 하는 등의 말은 실로 김일경의 양기(梁冀)·염현(閻顯)의 설과 일관(一貫)된 것인데, 정책(定策)의 일을 논하려고 한다면 성궁(聖躬)에 거리끼고 핍박되기 때문에 억지로 찬미(贊美)하는 말을 하여 역적을 다스리는 일을 늦추려고 하였지만 본색(本色)이 이미 탄로났기 때문에 감히 신구(伸救)할 계책을 하지 못하고 이에 도리어 전하를 정책(定策)을 돌보아 주는 데 두어서 마치 혐의(嫌疑)스러운 처지에 있는 것처럼 하여 그 징토(懲討)하는 것에 늦추기를 바랐으니, 진실로 조금이나마 신하 된 마음이 있는 자라면 어찌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이러한 정상은 전하의 밝으심으로도 오히려 통촉하지 못하시고 조금도 놀라거나 통분하지 않으시니,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러한 말들을 그래도 용서할 만한 것이 있다고 여겨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혐의를 무릅쓰고 나와 보았다.’느니 ‘인평 대군(麟坪大君)처럼 대해야 한다.’는 말로써 먼저 화심(禍心)을 시험하여 아주 급박하게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 말을 했고, ‘뒤쫓아 호(號)를 정하고 전선(傳禪)한다.’는 말과 ‘몰래 왕위[天位]를 옮기려 한다.’는 설을 논하면서 문득 청평(淸平)한 세계에서 음침한 무지개와 어지러운 우박이 내리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한 세상을 흔들고, 대중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미혹되게 하였습니다. 오직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최석항(崔錫恒)·한세량(韓世良)을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김일경·박상검·목호룡이 있게 된 것이고, 김일경·박상검·목호룡을 다스리기를 부족하게 하였기 때문에 빌붙은 자들이 오히려 다시 머뭇거리게 된 것이니, 처음에 어찌 다스릴 자를 다스리고 용서할 자를 용서하여 강상(綱常)을 밝게 게시(揭示)하고 인심을 만족하게 복종시켜서 정대하고 쾌활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런 것에 분명하게 밝히어 통렬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피를 밟고 칼을 품었다.’는 무함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승지(承旨) 이진순(李眞淳)과 정석삼(鄭錫三)이 소(疏)를 가지고 입대(入對)를 구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정석삼에게 읽기를 명하였다. 정석삼이 말하기를,
"말한 자의 말이 옳으면 여러 신하들의 죄를 다스리고, 그르다면 말한 자의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응환(柳應煥)을 불러들이라."
하니, 정석삼이 말하기를,
"인견(引見)하시고 문초(問招)하는 것을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만약 엄히 처단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시끄럽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진순(李眞淳)은 말하기를,
"사람이 그 부모(父母)에게 추악한 욕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아들은 마땅히 분통(憤痛)하게 여겨 원수를 갚아야 하고 또한 사람들을 향하여 그런 말을 말해서도 부당한데, 이제 드러내 놓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또 따라 각주(脚註)를 부연(敷衍)하여 조지(朝紙)021)  에 실어서 원근에 전파시켰으니, 어찌 매우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유응환이 입시하니, 임금이 유응환에게 소(疏)를 읽으라고 명하고, 또 전교하기를,
"조목(條目)마다 진달하라."
하니, 유응환이 말하기를,
"김일경의 망극한 무함을 전후로 말한 자들은 단지 8자(字)만 가리켰을 뿐 자성(慈聖)을 애핍(礙逼)한 일에 대해서는 한 사람도 진달한 자가 없었으니, 어찌 분명하게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읽다가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가 두 마음을 품었다는 말에 이르러 유응환이 말하기를,
"조태구의 소 가운데 ‘혐의를 무릅쓴다.’는 혐자(嫌字)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칙사(勅使)가 왕자(王子) 보기를 청했으면 일의 가부만 가지고 논해야 마땅한데도 ‘혐의를 무릅쓴다.’는 등의 말을 했습니다. 또 전하께서 책봉된 후에는 성(城)에 들어와 하례(賀禮)하는 반열에 참여한 일이 없었으며, 유봉휘의 소가 나온 후에는 그를 영구(營救)했으니, 참으로 전하를 사랑하여 받드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그러하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자(文字) 사이의 말을 가지고 한쪽 사람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려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하니, 유응환이 말하기를,
"어찌 일망타진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단지 중한 죄만 말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정석삼이 말하기를,
"조태구가 말한 바는 단지 여러 종친을 모조리 지적한 말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꼭 지적한 것으로써 말하는 것입니까?"
하니, 유응환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왜 인평 대군(麟坪大君)를 인용했겠습니까?"
하였다. 읽다가 ‘몰래 임금의 자리를 옮기려 한다[陰移天位]’는 등의 문자에 이르러 읽기를 정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회(所懷)가 있는가?"
하니, 유응환이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공무(公務)에 방해됨이 있다.’ 하고 전교하셨으니, 여러 신하들은 마땅히 그 일의 가부(可否)만 논해야 되는데도 최석항은 이에 전선(傳禪)의 말을 꺼냈으니 신은 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한세량(韓世良)의 ‘몰래 천위(天位)를 옮기려 한다.’는 말은 천위를 어느 곳으로 옮기려고 한다는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김일경의 소에 또 양기(梁冀)·염현(閻顯)의 찬시(簒弑)한 말을 꺼냈는데, 목호룡이 상변(上變)하기 전에 어찌 능히 미리 알 수가 있어 이런 문자를 썼겠습니까? 한 번만 썼다면 혹 망발(妄發)로 미룰 수 있지만 세 차례까지 썼으니,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다. 읽다가 박상검의 일에 이르러 유응환이 말하기를,
"그때 자성(慈聖)께서 애통(哀恫)하는 교서를 내리시고 석렬(石烈)과 필정(必貞)에 대한 전지(傳旨)가 내린 후에 즉시 잡아다 가두고 군졸(軍卒)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더라면 어찌 자살할 근심이 있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안팎에서 화응(和應)한 일입니다. 비록 예사로운 도적이라도 반드시 그 동당(同黨)을 묻는 법입니다. 그런데 박상검은 어떤 중한 죄수이기에 동당을 묻지 않고 승관(承款)했다고 말하면서 곧바로 정형(正刑)했겠습니까? 이 역시 의심나는 한 단서입니다. 백망(白望)의 초사(招辭)에 김일경의 이름이 이미 나왔으니 비록 허망한 말이라 하더라도 즉시 나문(拿問)을 청해야 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신임(申銋)이 이로써 소를 진달하다 섬으로 유배(流配)되기에 이르렀는데도 그는 무슨 심장(心腸)을 가졌기에 역적의 초사에서 나왔는데도 어찌 태연하게 국문(鞫問)에 참여하는 것입니까? 자성(慈聖)의 언교(諺敎)까지도 중간에서 막아 돌려보냈으니, 이런 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에 만약 봉(封)해 돌려주지 않고 밖의 사람에게 전하여 보였으면 오늘날 무슨 말을 가지고 죄를 만들지 어찌 알겠는가?"
하니, 유응환이 말하기를,
"애통의 교서는 중외에 전파해 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어찌 반시(頒示)한 것으로 죄를 삼겠습니까? 이른바 삼수(三手)란 말을 그가 어찌 성궁(聖躬)에 애핍(礙逼)되는 줄 몰랐으며 그리고 여러 차례 써서 반드시 드러내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행배(行盃)’에 이르러서는 바로 곽현(霍顯)이 술에다 독(毒)을 넣어 천자(天子)를 폐한 일이었는데, 그런데도 반드시 이런 문자(文字)를 썼으니, 어찌 절통(切痛)하지 않겠습니까? 임부(林溥)·이잠(李潛)의 일은 숙종(肅宗)의 처분이 매우 엄하였는데도 교문(敎文) 가운데서 극구 찬미(贊美)하였으니 요악한 유언 비어(流言蜚語)를 이제 와서 또한 어찌 제기(提起)하겠습니까?"
하였다. 읽다가 ‘그 문서 등을 불태웠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 정석삼이 말하기를,
"이 한 조항에 묻기를 청합니다."
하니, 유응환이 말하기를,
"김일경이 비록 죽었다 하더라도 어찌 그 당(黨)이 없겠습니까? 그 문서 가운데 반드시 왕복한 서찰(書札)이 있어 전하께서 이미 친히 보시고 불태우셨으니, 어찌 불안해 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안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일경의 당은 누구인가?"
하니, 유응환이 말하기를,
"죄상(罪狀)이 이미 드러난 후에도 신구(伸救)한 자는 어찌 그의 당이 아니겠으며, 신축년022) 소하(疏下)023)  가 또한 당이 아니겠습니까? 전후해서 신구(伸救)한 자 및 신축년 소하에 있는 사람은 모두 김일경의 당으로 감히 양기(梁冀)·염현(閻顯)이란 문자를 쓰고도 이에 과감하게 사로(仕路)에 양양하게 있는 자가 많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후로 인용하여 증거댄 것이 비단 성궁(聖躬)에 누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3성(三聖)께서 모두 무함을 입으셨는데, 전하께서는 왜 명백히 구핵(究覈)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그의 혈당(血黨)이 이에 ‘원립(援立)’·‘옹립(擁立)’ 등의 말을 지어냈으니, 이는 김일경의 양기·염현이란 말과 일관(一串)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립·옹립이란 누구의 말인가?"
하니, 유응환이 말하기를,
"이명언(李明彦)·유시모(柳時模)의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책(定策)의 말은 누가 했는가?"
하니, 유응환이 말하기를,
"이 역시 이명언입니다. 선왕(先王)께서 불행히 후사(後嗣)가 없으셔서 전하께서 저위(儲位)에 오르셨습니다. 비록 여항(閭巷)의 서민(庶民)으로 말하더라도 후사가 없는 자는 원근(遠近)에서 족속(族屬)을 얻어 후사를 삼으면 이웃 마을에서 모두 가서 하례(賀禮)하는데, 더군다나 선대왕께서는 전하를 후사로 삼으시어 3백 년 종사(宗社)의 의탁이 모두 전하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감히 이처럼 배척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그 일의 시비(是非)를 논하더라도 마땅히 먼저 칭경(稱慶)·헌하(獻賀)하는 뜻을 우러러 계진(啓陳)해야 하는데, 일찍이 일언 반구(一言半句)도 여기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니, 그가 만약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 이에 이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左相)024)  의 일을 네가 뒤따라 제기(提起)하여 죄를 주려고 한다면, 이는 나를 노여움을 품고 있는 죄과(罪科)로 돌리는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당을 감싸고 경알(傾軋)025)  한 것을 책망하였다. 정석삼(鄭錫三)이 청하기를,
"연설(筵說)을 기록해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하여 여러 신하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길을 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정석삼이 말하기를,
"유응환의 상소의 뜻이 위파(危怕)합니다. 비록 두 재상(宰相)의 일로 말하더라도 이처럼 터무니없는 무함을 하였는데 단지 당습(黨習)이라고 전교하시니, 엄히 배척하는 도리에 아주 어긋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옥석(玉石)을 구분하지 않고 오로지 여러 신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데서 나와 당여(黨與)의 습성을 면치 못하였다. 삭직(削職)하고, 그 소는 돌려주어야 옳다."
하였다.

 

이어 김일경(金一鏡)의 노적(孥籍)026)                  을 목호룡(睦虎龍)의 예(例)에 의해 거행하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김일경의 일은 입이 더러워 차마 말로 할 수가 없으며 ‘국사(國事)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말은 더욱 흉패(凶悖)하다. 그 흉악한 마음이 이루어지면 지우(知遇)를 받는다고 말하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이와 같이 진소(陳疏)하였으니, 음흉한 정절(情節)은 이에서 바로 알 수 있다."
하고는, 인하여 양기(梁冀)·염현(閻顯) 등의 말이 음험하고 참혹하다 하여 김일경의 신축년 소하(疏下)에 있는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이명의(李明誼)·정해(鄭楷)·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를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고 명하였다.

 

1월 3일 임인

윤취리(尹就履)를 장령(掌令)으로, 윤회(尹會)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붕당(朋黨)의 폐단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문(斯文)027)  에 소란을 일으키더니, 지금에는 한편 사람을 모조리 역당(逆黨)으로 몰고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도 역시 어진 사람과 불초(不肖)한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어찌 한편 사람이라고 모두가 같은 투(套)일 이치가 있겠는가? 각박하고 또 심각하여져서 유배(流配)되었다가 다시 찬축(竄逐)되었으니, 그 가운데 어찌 억울한 사람이 없겠는가? 한 지어미가 억울함을 품어도 5월에 서리가 내리는데, 더구나 한편의 여러 신하들을 모조리 제도(諸道)에 물리치는 것이겠는가? 이러한데도 경알(傾軋)하는 말이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우리 나라는 본래 치우쳐 있고 작아서 사람을 쓰는 방법 역시 넓지 못한데,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그 사람을 임용하는 것이 모두 당목(黨目) 가운데 사람이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도 천리(天理)의 공(公)에 합하고 온 세상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지난해까지 함께 벼슬하였던 조정이 지금은 왜 전과 같지 않은가? 이렇게 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띠를 매고 조정에 있을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제하는 것은 요순(堯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는데, 더구나 한 나라의 절반이 침체(沈滯)되는 것이겠는가? 아!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가 사람을 씀이 어찌 이처럼 좁은 것인가? 피차가 서로를 공격하여 공언(公言)이 막혀지고 역당(逆黨)으로 지목하면 옥석(玉石)이 구분되지 않을 것이니, 저가 나를 공격하는 데에서 그 장차 가려서 하겠는가, 가리지 않고 하겠는가? 충직(忠直)한 사람을 뒤섞어 거론하여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로 몰아넣는 것은 그들이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는 나의 말이다. 이는 바로 속담에서 말하는 ‘입에서 나간 것이 귀로 돌아온다’라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조정이 언제나 안정되며 공의(公議)가 언제 들리겠는가? 당(唐)나라 때 유안(劉晏)028)  이 제(帝)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글자는 모두 바르지만 유독 붕(朋)자만은 바르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바로 오늘을 두고 말한 것이다.
아! 임금과 신하는 부자(父子)와 같으니, 아비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해 저쪽은 억제하고 이쪽만을 취한다면 그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불안하겠는가? 공경(公卿)과 서료(庶僚)들은 모두 대대로 녹(祿)을 먹은 신하들인데, 공효(功効)를 보답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목인(睦婣)029)  의 의리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한 조정 가운데서 공격을 일삼고 한 집안에서 싸움만을 서로 계속하고 있으니, 이러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해가 거듭 바뀌어서 새해가 다시금 돌아왔는데, 하늘과 사람은 한 가지이니, 어찌 옛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힘써 새 봄을 맞이한 뜻과 같이 하지 않겠는가? 저 귀양을 간 사람들은 금오(金吾)로 하여금 그 경중(輕重)을 참작해 대신(大臣)과 더불어 등대(登對)하여 소석(疏釋)하고, 전조(銓曹)에서는 탕평(蕩平)030)  하게 거두어 쓰라.
아! 지금 나의 이 말은 위로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기상(氣象)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이다. 만일 혹시라도 의심을 일으키거나 혹은 기회(機會)를 삼아서 상소해 경알(傾軋)하면 종신(終身)토록 금고(禁錮)031)  시켜 나라와 함께 하지 못할 뜻을 보이겠다. 너희 여러 신하들은 내가 자수(自修)함이 없다고 여겨 소홀히 하지 말고 성인(聖人)께서 잘못한 자를 바로잡는 뜻을 따라 당습(黨習)을 버리고 공평(公平)하기에 힘쓰라. 그렇게 하면 어찌 비단 나라를 위하는 것뿐이겠는가? 또한 너희들 조상의 풍도(風度)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정승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소하(蕭何)가 조참(曹參)을 천거한 뜻032)  을 본받고 전형(銓衡)하는 데에서는 이윤(伊尹)이 저자에서 매를 맞는 것처럼 여긴 뜻033)  을 배워야 한다. 내 말을 공손히 듣고 우리 방가(邦家)를 보존하라."
하였다.

 

충청도(忠淸道) 유학(幼學) 이제담(李齊耼)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의 스승 정호(鄭澔)는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손이며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인데, 충청(忠淸)은 곧 그 대대로의 아름다움이었고, 도학(道學)은 또 본래 스승에게서 이어받아,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를 쉽게 여겨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법문(法門)을 따라서 출처(出處)와 영욕(榮辱)을 항상 사도(斯道)에 따라 굴신(屈伸)하였습니다. 단지 일찍이 박세당(朴世堂)이 경서(經書)를 무너뜨리고 제사를 폐한 잘못과 윤선거(尹宣擧)가 임금을 무함하고 스승을 배반한 죄를 논하자 도당(徒黨)들이 유감을 쌓아 없는 사실을 날조해 모함하였는데, 김홍석(金弘錫)·이세덕(李世德)이 창도(倡導)하고 심준(沈埈)·신치운(申致雲)이 이어받았습니다. 차율(次律)034)  로 추형(追刑)하고, 무덤을 헐고 석물(石物)을 철거하자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신의 스승 소(疏)에는 원래 언급한 바가 없었으며, 그 소에 말하기를, ‘신이 저 무리들의 서동 부언(胥動浮言)035)  을 들으니, 윤선거는 조정의 의논이 비단 훼판(毁板)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차 추형(追刑)하는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윤선거의 죄가 비록 대불경(大不敬)의 율(律)을 피하기는 어렵지만, 추형한다는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성왕(聖王)께서 의형(義刑)하는 뜻이 아니라, 곧 이는 후세의 몹시 각박한 법인 것입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 초기에 혼조(昏朝)036)  의 폐단을 깊이 징계하여 일절 혁파하는 것을 영원한 정식(定式)으로 삼았으니, 저 무리들이 이런 것을 모르지 않는데도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내어 경동(驚動)하고 협박할 계책을 삼습니다. 이는 모두 엄경수(嚴慶遂)가 유자광(柳子光)의 설로 선동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신의 스승이 그 당시 주장한 이론이 참혹하고 각박한 데에 이르지 않았음을 추측해 알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소를 보고는 전교하기를,
"소 가운데 정호(鄭澔)의 소에는 원래 언급한 바가 없다고 한 것을 정원(政院)에서 상고해 아뢰라."
하였다. 그후 정원에서 아뢰기를,
"일기(日記) 가운데 정호의 소에는 무덤을 헐고 석물을 철거하라는 등의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유학(幼學) 권유(權瑜)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이덕보(李德普)를 정거(停擧)하라는 명을 거두고 황욱(黃昱)·김범갑(金范甲)·최탁(崔鐸)이 선왕(先王)을 무함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최탁은 장차 처분하려고 하며, 상소한 유생을 정거(停擧)한 것은 선비의 습성을 면려(勉勵)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전적(典籍) 정창선(鄭敞選)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037)  과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038)   두 집 자손은 혹 제사를 지내게 하거나 혹은 특별히 사유(赦宥)하시면 성덕(聖德)에 빛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임(申銋)·조도빈(趙道彬)·정형익(鄭亨益)은 소석(疏釋)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답만 한 여러 사람은 김재로(金在魯)와 함께 사유(赦宥)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충주(忠州)의 생원(生員) 이덕창(李德昌)이 상소하여 숙종(肅宗)의 병신년039)   처분에 따르기를 청하였는데, 말하기를,
"능히 선왕의 뜻을 따르는 것이 곧 대행왕(大行王)040)  의 마음이었으니, 대행왕께서 선왕의 뜻을 따르시던 마음을 드러내고 전하께서 뜻을 이어받드는 효(孝)를 빛나게 한 뒤에야 요순(堯舜)의 효제(孝悌)하는 도리가 이에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희로(金希魯) 등은 이미 특방(特放)하였는데, 이병상(李秉常)·신사철(申思喆)은 늙은 어미가 있으니 마땅히 같이 사유해야 하며, 신임·정호·정형익은 소석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말이 매우 개절(剴切)하니, 마땅히 조용히 생각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사직(司直) 이성조(李聖肇)가 상소하여 조정을 바로잡고 기강(紀綱)을 세우며, 사령(辭令)을 삼가고 징토(懲討)를 엄격히 하여 붕당(朋黨)을 타파하는 것으로 조목(條目)을 삼았는데, 말하기를,
"성고(聖考)께서 군주(君主)의 대권(大權)을 총람(摠攬)하신 지 40여 년에 여러 아랫사람들이 감히 거짓말을 꾸며 총명을 가리고 방자한 말로 위를 범한 자가 없었습니다. 선왕(先王) 대에 미쳐서는 연묵(淵默)041)  의 도량으로 능히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위엄을 삼았으나 조정 신하들이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없어 오직 강박(强迫)을 일삼았습니다. 적경(賊鏡)042)   같은 자는 합계(合啓)를 윤허하지 않기 전에는 팔을 자를지언정 결코 주문(奏文)을 지을 수 없다는 말을 했으니, 바로 그 중 한 가지입니다.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모두 서로 본받아서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도 고치지 않아서 윤회(尹會)는 말이 선후(先后)를 범한 것으로 엄지(嚴旨)를 받았는데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고, 이광덕(李匡德)은 대신(大臣)을 위해 분소(分疏)043)  하면서 뜻을 시험해 보는 데 두어 조금도 머뭇거리고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전하의 애사(涯涘)044)  를 엿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너무 영예(英睿)하심을 드러내고 함축(含蓄)함이 조금 부족하여 호령을 내는 즈음에 능히 정중함을 지니지 못하시어 비지(批旨)를 내리시는 사이에 혹 과중(過中)하게 하여 ‘해를 꿰뚫는 충성이다.’라는 말을 갑자기 가하셨으니, 곧 지금의 대신들이 속으로 전하를 위해 애석해 합니다."
하였고, 또 청하기를,
"김일경에게 대역률(大逆律)을 시행하고 영호(營護)한 무리들은 모두 투비(投畀)045)  하소서."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종묘(宗廟)에 고하고 반교(頒敎)하는 것을 전하께서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시고 유사(有司)는 고하지 못해 예사로운 일로 보니, 신은 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한세량(韓世良)의 상소에 ‘몰래 천위를 옮기려 한다[陰移天位]’는 네 글자는 그 마음씨를 따져보면 역적 김일경과 다를 것이 없으니,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朋黨論)은 천고(千古)에 인군(人君)의 의심을 타파시켜 주었는데,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이 시비를 논쟁하는 데에서 모두 당론(黨論)으로 의심하시는 것은 아마도 전하께서 현사(賢邪)를 구별하시는 것이 미진한 데서 그러한가 싶습니다. 만일 현사를 뒤섞어 임용하시려고 하신다면 훈유(薰蕕)046)  가 함께 냄새를 피우고 빙탄(氷炭)047)  을 한 그릇에 담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붕당이 타파되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마시고 오직 현사를 구별하는 데 밝지 못한 것을 근심하셔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수년 사이에 유배하고 찬축한 것이 손가락을 꼽아 셀 수가 없으니, 어찌 원기(寃氣)가 위로 천화(天和)에 관계됨이 없겠습니까? 즉시 신원(伸寃)시켜 석방(釋放)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다섯 조항의 진계(陳戒)가 오로지 임금을 사랑하는 데서 나왔으니, 매우 가상(嘉尙)하다. 김일경은 이미 처분하였고, 소(疏) 끝부분의 일은 내 뜻을 비망기(備忘記)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서명균(徐命均)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도내(道內)가 흉년이 든데다가 또 산릉(山陵)의 큰 역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나라의 용도가 소모되고 줄어 비록 반조(半租)를 내리지는 못하더라도 수미(收米)를 양감(量減)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경자년048)   국휼(國恤) 때에 고양(高陽)은 지방관(地方官)이 유독 봄의 수미 3두(斗)씩을 감해 주었으니, 지금은 도내(道內)를 통틀어 2두씩 감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무오일(戊午日)에 또 상소하여 신청(申請)하니, 임금이 특별히 따랐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이진망(李眞望)이 입대(入對)하기를 구하여 말하기를,
"교문(敎文)을 마땅히 찬진(撰進)해야 하는데, 죄인 조태채(趙泰采)는 노적(孥籍)한 일이 없으니, 역률(逆律)로 처단한 것이 아닌 듯하나, 전의 교문 가운데는 들어가 있습니다. 마땅히 국안(鞫案)을 상고해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고 또 전교하기를,
"임인년049)  에는 들어 있지 않은 듯한데, 막중한 교문에 노적하지 않은 것을 뒤섞어 넣는 것은 부당할 듯하다."
하였다.

 

1월 4일 계묘

전(前) 전적(典籍) 허석(許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축년050)  의 일은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비참한 칼날로 날뛰고 독(毒)하게 쏘아댄 것은 일절(一節)이 일절보다 더 심했는데, 조태구(趙泰耉)가 맨 먼저 ‘혐의를 무릅쓰고’라는 설을 창도하여 우리 대행왕(大行王)을 공동(恐動)시키고, 전하를 망측한 죄과로 몰아넣었습니다. 유봉휘(柳鳳輝)는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진 뒤에 이의(異議)를 제기했으니, 이는 전하의 죄인이 아니라, 바로 종사(宗社)의 죄인인데, 일이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으로서 용서하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유독 종사의 적과 대행왕을 무함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까? 박상검(朴尙儉)을 끝까지 핵실(覈實)하지 않고 결안(結案)한 것은 계책이 멸구(滅口)051)  하는 데 있었고, 오직 단서가 혹 탄로날까 두려워서였으며, 두 역비(逆婢)에 이르러서는 제때에 잡아가두지 않아 모두 스스로 죽게 하였으니, 박상검의 여당(餘黨)과 두 비(婢)의 지친(至親)을 마땅히 모두 구문(鉤問)해야 합니다.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는 책봉(冊封)하는 선래(先來)052)  가 온 이튿날 나왔는데, 성궁(聖躬)을 무함하고 더럽힘이 지극히 망극했습니다. 그런데도 일이 동궁(東宮)에 관계된다 하여 추안(推案)을 들이지 말게 하자는 등의 말을 우물쭈물 진달하였는데, 겉으로는 전하의 처지를 위한 체하였으나 실제로는 전하를 의심하고 흐릿하여 분명치 못한 자리에 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천위(天位)가 크게 안정되고 보명(寶命)053)  이 오직 새로워지기에 미쳐 위태롭게 움직일 계책이 시행할 만한 곳이 없자 이명언(李明彦)은 대보(大寶)054)  를 기뻐하지 않는 말을 하고, 권익관(權益寬)과 여필용(呂必容)·조익명(趙翼命)은 아주 패악하고 윤리가 없는 말을 한 것은 통분하기 그지 없습니다. 대신(大臣)이라고 이름한 자가 이에 ‘정책 국로(定策國老)055)  ’니 ‘문생 천자(門生天子)056)  ’니 하는 말을 함부로 진달하였습니다.
아! 대행왕께서 왕위를 주고받은 성덕(盛德)은 하늘과 땅에 세울 수 있고 귀신에게 질정해도 될 만한데, 유봉휘가 한번 창도(倡導)하고, 박상검·목호룡이 뒤를 잇고, 김일경이 주장하여 그 사이에 무함하고 패악한 말이 얼굴을 바꾸어 가며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이는 비단 전하를 무함한 것만 아니라 바로 대행왕을 무함한 것입니다.
이세최(李世最)의 작년 한 소(疏)는 역적 김일경을 위해 변명하고 숭장(崇奬)한 것으로, 하나는 ‘하늘을 붙들고 해를 떠받들었다[扶天擎日]’고 하고, 두 번째는 ‘가슴에 붉은 피는 법정(法正)에 비할만하다.’고까지 하여, 그가 옛것을 인용하여 지금에 증거한 것은 말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김동필(金東弼)은 김일경 일당의 공갈에 겁을 내고 김일경을 배척한 흔적을 가리려고 하여 ‘망발이지 악역(惡逆)으로 그의 죄를 삼아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하여 마음을 다해 신구(伸救)했으니, 그의 반복(反覆)하고 회호(回互)하는 형상은 마치 폐간(肺肝)을 보는 듯한데,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승진시키고 국자감(國子監)으로 옮겨 주었으니 명기(名器)가 참람하게 되었습니다.
아! 전하께서 역적의 무리에게 무함과 더럽힘을 받고도 밝게 씻지 못한 것이 지금 거의 몇 달 몇 날이 되는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그 정상을 통찰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일이 성상(聖上)의 몸에 관계되므로 깊이 다스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여러 흉적들이 성상의 마음을 엿보고는 감히 ‘정책 국로(定策國老)’ 등의 말로써 전하를 협박하며 버티기 때문에 요탈(撓奪)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 한 몸의 일이겠습니까? 실로 이는 위로 대행왕(大行王)을 무함하고 성상을 협박한 것이니, ‘혐의한다[嫌]’는 한 글자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성상께서 마음이 만일 혹시라도 공갈하는 흉설(凶說)에 현혹되고 흔들려 엄히 징토(懲討)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아마도 민이(民彛)가 영원히 무너지고 성상의 몸에 더럽힌 욕은 끝내 천하 후세에 밝게 밝히지 못할 듯싶습니다. 전후로 악역을 한 무리들은 마땅히 하나하나 엄히 국문(鞫問)하여 전형(典刑)을 밝혀 바로잡으소서. 김일경의 신축년 상소 가운데 있는, ‘기(冀)·현(顯)’ 두 글자는 자성(慈聖)을 무함하고 더럽힌 것이니, 소하(疏下)에 있는 6적(六賊)은 급히 먼저 정절(情節)을 국문하여 우리 자성(慈聖)께서 입은 망극한 무함을 씻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권성(權𢜫)의 상소는 오로지 충성해서 나온 것이니, 연주(筵奏)한 승선(承宣)057)  과 발계(發啓)한 대신(臺臣)은 엄히 찬출(竄黜)을 가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문(斯文)의 시비는 이미 성고(聖考)의 단안(斷案)이 계셨는데, 저 절개를 세운 윤선거(尹宣擧)를 선조(先朝)에서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여 경종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옛날 유감을 드러낼 만하다고 여겨 곧바로 숙종(肅宗)의 본의(本意)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근일 이의연(李義淵)은 ‘선왕의 본의가 아니다.’라는 말로써 마침내는 극형(極刑)에 이르렀으니, 아! ‘선왕의 본의가 아니다[非先王本意]’고 한 다섯 글자는 전후가 한가지인데 유생(儒生)이 하면 죄를 주고 낭묘(廊廟)가 하면 그냥 두니, 이것이 어찌된 이치입니까? 저 향유(鄕儒)의 무리들이 그 기염(氣焰)을 이어받아 문득 감히 ‘여러 해 동안 고질적으로 침윤(沈潤)058)  된 참소가 이르지 않는 바가 없다.’는 등의 말로써 멋대로 선조(先朝)를 무함하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윤선거의 사당(私黨)들은 유소(儒疏) 가운데서 말을 뽑아내어, 말을 늘어놓아 현혹시켜 소두(疏頭)를 정거(停擧)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습니다. 원하건대, 성고(聖考)의 유지(遺旨)를 따르소서. 그리고 최탁(崔鐸)이 선왕을 무함한 죄를 바로잡고 상소한 유생의 정거(停擧)의 명을 거두시며, 인하여 후원(喉院)059)  에서 고알(告訐)060)  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하나의 상소로 조정 신하를 모조리 모함하니, 이런 습성을 나는 실로 괴롭게 여긴다. 대신을 침노하여 헐뜯은 것은 참으로 놀랄 만하다."
하였다.

 

이정걸(李廷傑)을 승지(承旨)로, 유언통(兪彦通)을 정언(正言)으로, 오수원(吳遂元)을 부교리(副校理)로, 이광덕(李匡德)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김일경의 아들 김정해(金正海)와 김영해(金寧海)는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내 교형(絞刑)에 처하고 김윤흥(金允興)과 김희웅(金喜雄)은 나이가 차지 않았으니 전대로 배소(配所)에 있게 하여 연좌(連坐)시켜 노(孥)로 삼는 일’을 아뢰니, 김정해·김영해를 사형을 감하여 종[奴]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사직(司直) 유명홍(兪命弘)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덕보(李德普)가 최탁(崔鐸)을 상소하여 변명한 상소 가운데 무함이 영고(寧考)061)  의 말에 미쳤는데도 전하께서는 일의 시비를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말라고 전교하시면서 특별히 정거(停擧)를 명하셨습니다. 최탁의 상소를 조사해 아뢰자 ‘알았다.’고만 답하셨으니, 전하의 이 한 말씀은 나라를 잃게 하는 분부임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고는 인하여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후원(喉院)062)  에 답한 것은 단지 그 일을 알았다는 것이니 이로 추후에 처분할 것인데, 경의 소는 살피지 않은 것이 아닌가? ‘우선 시비를 버려두라.’는 말은 이덕보의 상소가 말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그 광솔(狂率)함을 다스리려고 그런 것이지 어찌 본래의 일을 소홀히 한 뜻이겠는가? 이덕창(李德昌)의 소비(疏批)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유학(幼學) 이진(李榗)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영고(寧考)께서 옛날의 처분하신 것은 윤선거(尹宣擧)의 죄악을 징토(懲討)하여 성조(聖祖)063)  의 오욕(汚辱)을 변석(辨釋)한 것입니다. 윤선거가 ‘구천(句踐)064)  은 속이고, 연광(延廣)065)  은 광망(狂妄)하였으며, 강왕(康王)066)  은 실제로 군전(軍前)에 있었다.’는 등의 말을 했으니, 그 심술(心術)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정강(靖康)의 변란067)   때는 강왕(康王)을 보내 군전에서 항복할 것을 구하였는데, 당시 효종께서도 역시 전에 그런 행위가 있었습니까? 자손(子孫)들은 흔들리지 말라는 성훈(聖訓)이 정녕(丁寧)한데도 괴귀(怪鬼)068)  처럼 상소한 자들이 감히 참소를 믿은 것이라 말하고 ‘여러 해 동안 침고(沈痼)되었다.’는 말까지 하여 은연중 따르기 어려운 난명(亂命)으로 돌립니다.
흉당(凶黨)들의 복주(覆奏)에는 선왕의 본의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드러내놓고 사마광(司馬光)069)  의 말을 인용하여 송 신종(宋神宗)의 암혹(闇惑)함에 비유하고, 영고께서 빼앗은 관작(官爵)을 갑자기 추복(追復)시키고 성조께서 입으신 훼욕(毁辱)을 전처럼 그대로 가하여, 영고는 참소를 믿었다는 과목(科目)으로 돌리고 경종(景宗)께서는 뜻을 어겼다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무함하고 헐뜯는 것을 단지 효종에게만 입혔는데, 이제는 더럽힘이 삼성(三聖)에까지 아울러 미쳤습니다. 명릉(明陵)070)  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흉한 무리의 방자한 횡포가 이에 이르렀으니, 천위(天威)가 이미 고요하여졌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며, 교묘하게 헐뜯고 업신여기면서 희롱하여 여러 해 동안 쌓은 유감의 뜻을 통쾌하게 하려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명명(明明)한 영혼께서 분통하고 서러워하시면서 성사(聖嗣)인 자에게 주토(誅討)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상소하고 복주(覆奏)한 것을 가지고 여러 적에게 친히 엄한 국문을 가하시어 쾌히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이미 이덕보(李德寶)의 상소에 답하였다. 소의 끝부분의 일은 너무 심하다."
하였다.

 

서울의 유생(儒生) 이도익(李道益)이 상소하여 세 가지 폐단을 진달하였는데, 전형(銓衡)이 공정하지 못한 것, 진전(陳田)의 수세(收稅), 아약(兒弱)에게 징포(徵布)하는 것이었다. 인하여 청하기를,
"영읍(營邑)의 정원 이외 군관(軍官)과 양전(量田)한 후 은결(隱結)071)  을 자수(自首)하게 하고, 승니(僧尼)를 도태시키며 만과(萬科)072)  를 설행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소의 사연에서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상소 끝부분의 일은 지금 까닭 없이 설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충주(忠州)의 유학(幼學) 강조열(姜祖烈)이 상소하여 도봉 서원(道峯書院)의 제향을 회복하고, 김범갑(金范甲)·최탁(崔鐸) 및 복주(覆奏)한 묘당(廟堂)과 소를 받아들인 승지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숙고(肅考)073)  의 일월(日月)같이 밝으신 분을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은연중 혼미하여 깨달아 살피지 못한 과목(科目)으로 돌리었으니, 명릉(明陵)074)  을 돌이켜보매 눈물을 뿌리지 않겠습니다. 이의연(李義淵)은 ‘선왕의 본의가 아니다.’라는 말 때문에 장(杖)을 맞다 죽기까지 하였는데, 김범갑·최탁의 무리는 ‘선왕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도 유독 형장(刑章)에서 벗어났는데 조정에 가득한 여러 신하들이 당연한 일처럼 보고 있으니, 그러고도 전하의 신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최탁을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은 이진(李榗)의 상소에 비답한 것과 같았다.

 

유학 김일양(金日讓)이 상소하여 민폐(民弊)를 진달하고, 수령(守令)을 선택하는 것과 민역(民役)을 고르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우통례(右通禮) 한재후(韓在垕)가 상소하여 현량(賢良)한 사람을 천거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물리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르기를,
"오늘날의 조정(朝廷)은 모두가 역적 김일경의 혈당(血黨)이니, 선조(先祖)의 구신(舊臣)인 민진원(閔鎭遠)·김재로(金在魯) 같은 사람이 하루도 조정에 없어서는 안됩니다. 원하건대, 적의 당여를 엄히 다스리고 옛날 사람을 임명할 계획을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너의 어진 사람을 칭송한 말이 진실로 좋긴 하나, 어찌 세상 사람의 절반이 모두 어질고 세상 사람의 절반이 모조리 어질지 못하겠는가? 모름지기 공정한 마음으로 생각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5일 갑진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진검(李眞儉)이 상소하여 그의 형 이진유(李眞儒)의 신축년075)   소를 변명하여 말하기를,
"기(冀)·현(顯)의 현은 바로 염현(閻顯)으로 김일경의 교문(敎文) 가운데 있는 곽현(霍顯)이 아니며, 설사 ‘현(顯)’ 자가 서로 같다 하더라도 이는 김일경의 것보다 뒤에 있었으니, 생각건대 어찌 신축년의 소에 참여한 여러 사람에게 참여시켜 아울러 참소하는 무함을 더하는 것입니까? 유응환(柳應煥)의 무리가 네 흉인(凶人)을 영호(營護)하려고 소하(疏下)에 있는 여러 신하의 죄를 얽어 네 흉인을 벗어나게 할 계제(階梯)를 삼은 것입니다. 신축년의 한 소는 바로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만고에 바꿀 수 없는 의논이긴 하나, 어찌 소두(疏頭)가 다른 일을 인해 복주(伏誅)된 까닭을 가지고 모두 이 소에 참여시켜 죄를 얽어 무함해야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소에 참여했던 사람을 견책(譴責)하는 것은 그 일을 소중히 여기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승지(承旨)        이정걸(李廷傑)이 상소하여 그 스승 윤증(尹拯)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말하기를,
"부자(父子)는 은혜가 소중하고 스승과 제자는 의리로 합한 것이므로, 윤증은 인륜(人倫)의 변고를 만나 그 본심의 바름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송시열(宋時烈)이 말하기를, ‘윤증(尹拯)의 아비 윤선거(尹宣擧)는 강도(江道)에서 실절(失節)076)                  한 잘못이 있는데도 윤휴(尹鑴)는 이것을 지지(支持)하였기 때문에 겉으로는 절교(絶交)했다고 말하면서 몰래 그와 더불어 교제했다.’고 하였으니, 허구 날조에 마음을 쓴 것이 오로지 이에 있었습니다. 송시열이 윤선거를 제사하는 글이나 《삼학사전(三學士傳)》의 끝에서 기꺼이 복종하고 칭양(稱揚)하였는데 갑자기 강도(江都)의 일로 윤선거의 누(累)를 삼은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윤선거가 윤휴에게 종말에 가서는 친우(親友)의 도리로 대하지 않았고 단지 자상(姉喪)에 윤휴의 위문(慰問)에 답하였을 뿐이고, 윤선거가 죽자 윤증은 그 아들이 와서 전(奠)드리는 것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송시열은 윤휴를 백이(伯夷)와 같다고 추장(推奬)하면서 격외(格外)로 등용하자고 논하였고, 산송(山訟)을 조사하지 말자고 청한 것이 모두 황산 문답(黃山問答)077)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단(異端)으로 논한 후에 화심(禍心)을 품었다고 배척한 것은 경자년078)                  의 예론(禮論)이 있은 후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박세채(朴世采)가 송시열의 두 편지를 베껴 윤증에게 보냈는데, 강도의 일에 대한 네 글자를 이미 썼다가 다시 지웠는데 지워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그 마음씀이 수고로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목천(木川)의 일079)                  에서 잔인한 사람이란 말과 물가에 물어보란 말이 또 송시열의 입에서 낭자하게 나왔고, 정묘년080)                  에 이르러서 손수 항장(抗章)을 지어 곧바로 윤선거를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복법(伏法)시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데도 부사(父師)를 다 온전하게 해야 한다고 하는지, 신은 감히 알 수 없습니다.
숙종께서는 ‘부사 경중(父師輕重)’이란 네 자를 굳게 지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수십 년 후에 김창집(金昌集)의 소에 말하기를, ‘윤증이 갑자년081)                  에 송시열에게 글을 보낸 묘문(墓文)을 고쳐달라고 청하기를, 「‘유명(幽明)한 가운데 내리심을 받으면 맺힌 의심이 모두 풀릴 것이니 단지 문하(門下)의 한 마디에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만약 비문(碑文)을 칭찬하는 뜻으로 써 주면 본래의 의심이 풀릴 것처럼 하였으나, 이는 곧 거짓말입니다. 무오년082)                   이후에 다시 비문 고쳐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갑자년083)                  에 고쳐 주기를 청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대개 송시열은 목천(木川)에 통문(通文)하는 일에 언근(言根)을 귀착(歸着)시킬 데가 없게 되자 이에 말하기를, ‘이를 끌어안고 지하에 들어가 백세(百世)를 기다리겠다.’라고 했기 때문에 윤증이 그 글에 답하여 곧 말하기를, ‘유명한 가운데 내리심을 받으면 맺힌 의심이 다 풀릴 것이니, 단지 문하의 한 마디 말에 달려 있는데 어찌 백세를 기다리는 일이 있어야겠습니까?’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창집이 ‘묘문 고쳐 주기를 청하였다’란 네 글자를 ‘유명한 가운데 내리심을 받으면’이란 위에다 더하고, 하단(下段)의 ‘어찌 백세 동안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는 한 구절의 말을 잘라버린 것은 숙종께서 본래의 일에 의심되고 의심되지 않는 것을 묘문을 고치라고 했는가, 고치지 않으라고 한 것에 관계시켜 보시게끔 하려고 한 것이니, 아무리 숙종의 밝으심으로도 어떻게 본문(本文)의 말뜻이 그렇지 않음을 알았겠습니까? 이미 이런 말로 숙종을 속일 수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상소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물리쳐 막았으니, 비록 숙종의 밝으심으로도 어떻게 말뜻이 그렇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숙종께서 이렇게 된 사실이 이와 같은 것을 아셨기 때문에 ‘절교해서는 안 될 것을 절교했다.’라고만 했을 뿐이고, 일찍이 ‘부사(父師) 사이에는 비록 사변(事變)을 만나더라도 경중(輕重)을 분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지금 윤선거를 무함하는 자들은 단지 ‘군신(君臣)은 환란(患亂)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을 가지고 비의(比擬)하는 뜻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들 생각으로 말하여 비의를 풀이한다면 단지 참람하다는 이름을 가할 뿐이고 그 처의(處義)한 본사(本事)를 또 실절(失節)했다는 것으로 헐뜯었으니, 참람한 것을 또 바꾸어 무욕(誣辱)하였다고 하면서 교묘하게 풀이하고 끌어다 바꾸어서 죄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상소의 사연을 죄다 보았으나, 어찌 이것으로써 단정하겠는가?"
하였다.

 

주강(晝講)에 나아가 《논어(論語)》를 강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유봉휘(柳鳳輝)가 유응환(柳應煥)의 소 때문에 현옥(縣獄)에서 명을 기다렸고, 우의정(右議政) 조태억(趙泰億)은 허석(許錫)의 소 때문에 금오문(金吾門)밖에서 기다리다 그대로 고향으로 내려가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고 함께 오도록 하였다.

 

1월 6일 을사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유응환의 소 때문에 스스로 변명하고, 인하여 오명준(吳命峻)을 방면(放免)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르기를,
"신은 비록 말하는 자를 죄주어 가면서 자신을 호위한 것은 아니나, 아직도 위권(威權)으로 배척하였다고 함이 있는데, 더구나 신의 연고로 헌장(憲長)과 중신(重臣)이 배척되어 유배되었으니, 사방에서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이미 물러나 있지만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성명(聖明)께서는 비록 후일의 폐단이 있다고 전교하셨으나, 대간(臺諫)이 감히 재상을 논하지 못하게 한다면 후일의 폐단이 도리어 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나이가 이미 일흔을 바라보고, 또 병이 있는데, 만약 길에서 갑작스런 일이 있으면 어찌 새로 교화하는 데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내가 비록 밝지 못하나, 이미 경의 마음을 알았다. 참소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경이 반드시 면직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오명준의 일은 비단 경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도(世道)를 염려해서이다."
하였다.

 

충청도 유학 한세기(韓世基)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나라에 어찌 한결같이 상도(常道)에 반대되는 의리가 많습니까? 우리 성조(聖祖)·영고(寧考)084)  를 무함하고 헐뜯는 자는 복이 되게 하고, 우리 성조나 영고를 신송(伸訟)하는 자는 재앙을 당하니, 신은 무슨 별다른 의리가 있어 그렇게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성조의 대의(大義)를 구천(句踐)과 강왕(康王)에 비유해 실제로 오랑캐 진영(陣營)에 있었다고 무함한 자는 윤선거 부자(父子)이며, 영고의 성단(聖斷)을 침고(沈痼)하고 침윤(浸潤)한 것으로 돌리어 영고의 뜻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말한 자는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입니다. 묘당(墓堂)에서 속이고 가려서 윤선거와 윤증의 관작(官爵)을 새롭게 했으나 성조께서 입은 추한 욕은 옛날 그대로였고 영고의 수훈(手訓)이 던져지자 대행왕의 효사(孝思)가 가리어 어두워졌으니, 한 번에 전하의 3세가 모두 무함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아직 전형(典刑)을 실시하지 않고 곧 도리어 총애하시는 예(禮)를 더하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더구나 심한 자는 윤선거와 윤증을 조술(祖述)085)  하다가 시비가 크게 정해진 날 죄를 얻었는데도 이에 윤선거와 윤증을 위하여 절의(節義)를 지키려고 하면서 영고에게 원망하면서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며, 감히 심사(心事)를 폭로하기 전에는 다시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고 멋대로 진소(陳疏)하면서, 병환에 문안(問安)하는 반열과 대상(大喪)의 곡림(哭臨)하는 반열에 직을 띠고 서울에 있으면서도 끝내 들어와 참여하지 않아서 대장(臺章)이 준엄하게 일어나고 죄명(罪名)이 낭자하여졌습니다.
이제 오야(梧野)086)  의 행차가 이미 멀어지고, 무릉(茂陵)087)  의 풀이 이미 묵었으니, 모르겠습니다만, 그 폭로하지 못한 심사를 어느 곳에 폭로하고 양양(揚揚)하게 부르짖으며 길을 다니겠습니까? 한때의 엄교(嚴敎)에 분을 품고 군신(君臣) 사이의 분의(分義)를 망각한 채 병환이 있어도 문병을 하지 않고, 상(喪)이 나도 곡상(哭喪)하지 않으며, 그 원망하는 감정을 시종(始終) 풀지 않으니, 어찌 차마 영고(寧考)의 사왕(嗣王)을 신하로써 섬기겠으며, 전하 역시 어떻게 신하로 삼겠습니까? 신 등은 전하께 영화로운 명예와 이로운 녹(祿)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삼성(三聖)께서 배양(培養)해 주신 두터운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이니, 차라리 전하를 등지고 오늘날 흉당(凶黨)의 죄인이 될지언정 삼성을 등지고 후세 군자(君子)의 죄인이 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바로 전하 집안의 일인데, 전하께서 만약 ‘구천(句踐)과 강왕(康王)의 비유가 반드시 성조(聖祖)께 추한 욕이 되지 않으며, 침고(沈痼)·침윤(浸潤)이란 말이 반드시 숙종을 무훼(誣毁)한 것이 아니며, 본의(本意)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과연 대행왕(大行王)의 친교(親敎)이고, 당초의 처분이 과연 숙종의 본의가 아니었다.’라고 하신다면, 신들은 오직 마땅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구원(丘園)으로 물러나 죽어서야 삼성에게 돌아가 뵙고 호소할 뿐입니다. 만일 그러하시지 않는다면 빨리 여러 신하의 죄를 징토(懲討)하여 삼성이 무함당한 것을 변명하여 전하의 효성을 빛내게 하소서. 신들이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이르기를, ‘만약 김일경을 엄히 국문(鞫問)하지 않는다면 후일 어떻게 대행왕을 뵙겠는가?’ 하시어 말뜻이 통박(痛迫)스러워 귀신도 울 정도였는데, 지금 전하께서 만약 성조와 영고를 무함한 무리를 엄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훗날 성조와 영고를 뵙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 일은 내가 일찍이 마음속으로 묵묵히 생각했는데, 이제 너희들의 소를 보니 나의 슬픈 마음을 더한다. 그러나 공격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내가 실로 병통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사직(司直) 이유민(李裕民)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권성(權𢜫)의 소에 대해 ‘만연(蔓延)시키고 싶지 않다.’고 비답하셨으니, 전하께서 실언(失言)하신 것입니다. 진실로 해야 할 일이라면 어찌 만연될 것을 염려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흉적(凶賊)의 망극한 무함을 받아 천고(千古)에 암매(暗昧)하다는 이름에 처하여 있는데도 밝게 분면하여 통렬히 씻을 것을 생각지 않으신다면, 전하께서 그 어떻게 천하 후세에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동궁(東宮)에 계시면서 사위(辭位)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국청(鞫廳)에서는 말이 동궁에 관계된 것은 기록하지 말기를 진달했으니, 성상을 무함함이 망극함을 알 수 있는데도 암매한 곳에 덮어 두었습니다. ‘몰래 천위를 옮기려 한다’느니 ’문생 천자(門生天子)이고 정책 국로(定策國老)’라느니 ‘옹립 원립(擁立援立)’ 등의 말은 김일경의 ‘자시약(自視若)088)  ’ 세 글자의 공초와 매우 다름이 없으니, 원컨대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성상을 무함한 자는 모두 엄히 조사하고 분명하게 분변하시어 광명한 지역으로 돌리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한 사람의 나쁜 일을 가지고 반세(半世)의 사람을 싸잡아 배척해서는 옳지 않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지만 지금 소급해 책벌하는 것은 어찌 심하지 않겠는가? 이런 일을 나는 할 수 없으며, 대신(大臣)을 침범하여 배척하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7일 병오

정사효(鄭思孝)를 승지(承旨)로, 홍치중(洪致中)을 판윤(判尹)으로, 한배의(韓配義)를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의 정사(政事)였다.

 

매상(昧爽)089)  에 유성(流星)이 저성(氐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릿대만 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 남짓하였으며, 색은 붉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신축년090)  ·임인년091)   이후에 찬적(竄謫)된 사람을 소석하였다. 정호(鄭澔)·신임(申銋)·황선(黃璿)·이정익(李禎翊)·윤정주(尹廷舟)·조정만(趙正萬)·조상경(趙尙絅)·이휘천(李輝千)·이의현(李宜顯)·어유룡(魚有龍)·이중협(李重協)·박치원(朴致遠)·장붕익(張鵬翼)·김고(金槹)·강욱(姜頊)·박태준(朴泰俊)·조영복(趙榮福)·이의종(李義宗)·김유경(金有慶)·신사철(申思喆)·이교악(李喬岳)·권경(權炅)·박사익(朴師益)·이명희(李命熙)·강계부(姜啓溥)·윤봉의(尹鳳儀)·윤득인(尹得仁)·이현록(李顯祿)·이징귀(李徵龜)·윤헌주(尹憲柱)·정형익(鄭亨益)과 적소(謫所)에 있다가 죽은 사람 송상기(宋相琦)·임방(任埅)·이희조(李喜朝)·신절(申晢)·오중한(吳重漢)·이정주(李挺舟)·이오(李悟)는 양이(量移)092)  하고, 김천학(金千鶴)·손일업(孫一業)·유경유(柳慶裕)·박후응(朴厚應)은 감등(減等)하고, 홍석보(洪錫輔)는 육지로 내보냈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도기(到記)093)  한 유생(儒生)을 시강(試講)하였다.

 

전(前) 사정(司正) 임술(任述)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당론(黨論)을 매우 싫어하시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고칠 계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당론은 반드시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에 문란하게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전하께서 통촉하지 못하심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래저래 하시면서 미봉(彌縫)하는 계책을 하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전하의 본원(本源)의 바탕이 반드시 편벽되게 가리운 바가 있는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옛날에 붕당(朋黨)을 미워하여 제거하려다가 이따금 나라를 망치기에 이르기도 했다.’라고 하였으니, 원하건대, 이를 경계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사문(斯文)의 일은 숙종의 성교(聖敎)가 명백하니, 원하건대, 성단(聖斷)을 쾌히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에 임금을 사랑한 것을 보겠다. 그러고 내가 어찌 조금이라도 시비를 우물쭈물해 넘길 뜻이 있겠는가? 이쪽에서 지적하여 역적이라 하고, 저쪽에서 지적하여 역적이라고 하는데, 고금 천하에 어찌 한쪽이 어질면 한쪽은 역적이 되고, 한쪽이 역적이 되면 한쪽이 어질게 되는 이치가 있겠는가? 옛사람이 ‘호인은 없다[無好人]’고 한 세 글자는 자신을 해치는 것이라 말하였는데, 더구나 세상의 반을 들어 역적이라 하겠는가? 그렇다면 한 사람을 죽여 악(惡)을 징계하고 곧은 것을 들어 굽은 것을 바로잡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욱 마음 아픈 것은 피차 공격하면서 위를 무함하였다고 말을 하는데, 이는 징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함하는 것이니, 어찌 입에 담을 수 없는 뜻을 생각하지 않는가? 사문의 일은 내가 바야흐로 마음속으로 묵묵히 생각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사가(私家)의 문자(文字)를 가지고 점차 조정으로 올라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내가 가만히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1월 8일 정미

유중무(柳重茂)를 도승지(都承旨)로, 윤유(尹游)·박정(朴涏)을 승지로, 이보욱(李寶昱)을 장령(掌令)으로, 조문명(趙文命)을 지평(持平)으로, 이현보(李玄輔)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정언 유언통(兪彦通)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탕평(蕩平)에 힘쓰라는 명지(明旨)에 치우침이 없는 성덕(聖德)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괴귀(怪鬼)처럼 경알(傾軋)하는 말로 일망타진(一網打盡)할 계책을 행하려고 하여 김일경의 옥사를 빙자해서 점차 법망(法網)에 끌어넣는 데 이르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소인(小人)의 마음으로 천지(天地) 같은 도량을 능히 헤아릴 수 없으나, 혹은 알아낸다 하더라도 ‘의(疑)’와 ‘기(機)’ 두 글자가 성교(聖敎)에서 염려하신 바와 같겠습니까? 신은 우리 전하의 심사가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전문(殿門)을 활짝 열어놓으라고 유시한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님을 알지만, 유독 괴이하게 성교(聖敎)가 더욱 부지런할수록 참소하는 말이 더욱 나오고, 전하께서 또한 그때마다 즉시 처분하시는 거조가 없었습니다. 신은 ‘의’와 ‘기’ 자의 근심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는 데 있지 않고 이에 있을까 염려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성(誠)이 귀함이 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신(信)이 없으면 존립(存立)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전하께서 붕당을 타파시키고 탕평(蕩平)의 도를 힘쓰게 하는 데 진실로 성신(誠信)으로써 근본을 삼지 않으면 언교(言敎)를 따르지 않게 되어서 그들로 하여금 다투게 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백료(百僚)들이 두려워하고 언관(言官)들이 입을 다물고서 참소하는 사람의 칼날을 피하게 되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와질 것이니, 신은 가만히 서러워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언(進言)이 마땅하니,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유학(幼學) 우덕삼(禹德三)·이최일(李最一)·유수(柳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역적 환관(宦官)과 적 김일경은 모두 유봉휘(柳鳳輝)의 음흉한 소와 조태구(趙泰耉)의 아주 패악한 말에 따라 일어났는데, 원악(元惡)이 법망(法網)에서 빠졌습니다. 또 숙종 때 여러 신하들을 거론하는 데서 이사상(李師尙)은 혼조(昏朝) 때 얼신(孽臣)들보다 더 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미 역비(逆婢)의 소행이라고 하였는데 윤서교(尹恕敎)는 감히 선왕이 총애한 사람이라고 지적했으니, 인륜의 큰 변고요 천고에 없는 부끄러운 도리인데도 이세최(李世最)는 분소(分疏)094)  하여 역적 김일경을 영구(營救)했습니다. 병신년095)   처분은 백세토록 지켜야 마땅한데도 역적 최탁(崔鐸)은 점차로 헐뜯는 참소에 빠졌다고 하였으니, 그 역시 숙종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죄가 한결같이 모두 엄하게 국문하는 데 해당되므로 빨리 일정한 형벌로 바로잡아야 할 것인데, 세 흉인은 누워서 쉬고 최탁이 가벼운 벌을 받았으니, 나라에 전장(典章)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협박하는 말에 흔들려 저 양성(兩聖)이 무함당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구구한 형적의 혐의로써 역란(逆亂)의 죄를 쾌히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진검(李眞儉)은 역당 이진유(李眞儒)의 아우로서 그 형이 내침을 당한 데 분노하여 버젓이 항소(抗疏)하였고, 후사(喉司)에서는 태연하게 받아들였으며, 전하께서는 도리어 따뜻한 비답(批答)을 내리셨으니, 신은 난적(亂賊)이 더욱 날뛸까 염려됩니다. 전하께서 사복(嗣服)하신 처음에 구언(求言)하신 아래에서 한 선비를 죽이고 세 신하를 찬축하셨는데, 구언하신다는 것이 도리어 죄를 준 것이니, 신은 지금 이후로는 설사 한탁주(韓侂胄)096)  나 노기(盧杞)097)   같은 무리가 함부로 날뛰고 교만을 부려도 위에서 얻어 들을 길이 없게 되어 나라에서 그 해를 당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난번 이의연(李義淵)의 소 첫머리에 국휼(國恤)의 일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우덕삼(禹德三)의 소에도 역시 이러한 말을 첫머리에 하지 않았는데, 매우 순서가 없다. 이 소를 되돌려 주라."
하였다.

 

조지 별제(造紙別提) 방만규(方萬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축년098)   이후에 여러 흉인들의 망극한 무함을 받고 천고(千古)에 씻기 어려운 이름을 지고 있으니, 비단 성상의 몸만 위태롭게 하고 급박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인하여 또 동조(東朝)099)  를 무함하여 더럽혔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의논은 단지 전하께서 무함받은 것만 알 뿐 동조께서 무함받은 것이 전하보다 더 심함이 있는 것을 모릅니다.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과 장소(章疏) 가운데 곽현(霍顯)·양기(梁冀)·염현(閻顯) 등의 일을 두세 번씩이나 인용하였는데,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태후(太后)와 서로 내통하여 사군(嗣君)을 독살(毒殺)한 자들입니다. 이는 대개 그 무리들이 이른바 소급수(小急手)라는 것으로 은연중 자성(慈聖)께서 그 사이에 참여하여 아시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한 것입니다. 또 ‘내옥(內屋)·척련(戚聯)’이라고 하였는데, 신은 내옥이란 어디이며, 척련이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말하기를, ‘하나의 서찰(書札)을 다시 중신(重宸)에서 얻기를 도모하여 늦추어 해야 하나 빨리 해야 하나를 장세상(張世相)에게 몰래 탐지한다.’고 했는데, 이른바 중신이란 또한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이며, 중신의 어찰(御札)을 이 어찌 구하기를 도모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몰래 기일을 탐지하고 한 서찰 얻기를 도모한 것은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한다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또 그 무리들의 이른바 평지수(平地手)라는 것으로 은연중 자성(慈聖)께서 또한 그 사이에 참여해 아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한 것입니다.
김일경이 수창(首倡)하고 여러 적들이 그림자처럼 따라서 반드시 김일경의 말을 사실처럼 하기를 생각했던 것이며, 이에서 김성(金姓)을 가진 궁인(宮人)의 계사(啓辭)가 또 나왔습니다. 대행조(大行朝)에서 하신 ‘원래 없고, 본래 없다’는 등의 전교로 본다면 그런 사람이 확실히 없었음을 단연 알 수 있는데, 그 무리들이 비록 지극히 흉악하고 사납다 하더라도 어찌 그런 사람이 실제 없음을 몰랐겠습니까? 대개 그 허다한 기관(機關)을 그 가운데 감추어두고 몰래 헤아릴 수 없는 화(禍)를 빚어내어 감히 부도(不道)한 마음을 행한 것입니다.
끝에 가서는 윤서교(尹恕敎)란 자를 꾸며내어 심지어 말하기를, ‘이 적이 선조(先朝)로부터 공봉(供奉)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전하께서 〈선조에서〉 사랑하는 바를 또한 사랑하시는 효심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 그렇습니까?’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또 숙원(淑媛) 조적(趙賊)과 같은 이는 가장 은총(恩寵)을 받았는데 선왕의 총희(寵姬)이나 오히려 드러나게 죽임을 더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아! ‘공봉(供奉)하고 또한 사랑하였다.’는 등의 말은 가리키는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고 숙원을 끌어대어 비유한 말 역시 매우 음흉하고 간사하니, 이것이 어찌 윤서교 한 사람의 말이겠습니까? 실로 그들 무리가 함께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만약 김성절(金盛節)을 시켜 과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면 그 때 왜 우선 살려두고서 하나하나 그 근각(根脚)100)  과 곡절을 캐어묻지 않고 급급하게 정법(正法)한 뒤에 이런 계사(啓辭)를 내놓는 것입니까? 이는 그 뜻에 대개 이러한 악역(惡逆)의 이름으로 터무니없는 무함을 구실로 삼아 위로는 감히 말하지 못할 곳으로부터 아래로는 온 궁궐 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심하고 암담(黯黮)한 가운데로 몰아넣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김일경의 앞뒤의 말이 바야흐로 전박 불파(顚撲不破)101)  의 의논이 되고, 이성(二聖)의 헤아릴 수 없는 무함이 끝내 밝히기 어려운 처지로 돌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김일경을 육시(戮屍)하는 전형(典刑)이 조용해졌고, 수노(收孥)하라는 명을 곧바로 거두었으며, 같은 당여 여섯 사람은 삭출(削黜)하는 데 불과하고, 김성 궁인(金姓宮人)의 일을 논계(論啓)한 자는 또 모두 평인(平人)같이 보고, 심수현(沈壽賢)의 무리는 역적 김일경을 영호(營護)했는데도 편리한 곳을 가려 정배(定配)했으니, 국문(鞫問)하는 체계가 엄중하여야 할 것인데, 처음부터 날짜를 잡아 기한을 정하지 않고 도사(都事)로 하여금 천천히 잡아오게 했으니, 그 마음을 둔 바는 헤아리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국문하던 날에 동정(同情)하던 여러 사람은 그 단서를 약간 꺼내다가 마침내 끝까지 조사하지 않았고, 오직 삼사(三司)의 신하를 곧바로 죽인 것만을 다행하게 여겨 심상한 일로 보아 끝내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오수원(吳遂元)은 김일경을 토죄한 사람을 흉소(凶疏)하였고, 윤진(尹晉)은 변무(卞誣)한 사람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며, 양기(梁冀)·염현(閻顯)을 인용하여 비유한 여섯 사람은 아직껏 국문하는 일이 없으니, 한갓 김일경의 당이 있는 줄만 알고 전하가 계심을 모르니, 그들 무리가 비록 김일경의 당과 같은 마음이라 하더라도 과연 신하로서 섬길 뜻이 있다면 임금을 업신여기고 역적을 옹호하는 것이 어찌 이러한 극도에 이르렀겠습니까? 전후에서 말하지 않은 삼사(三司)는 마땅히 모두 찬배(竄配)해야 합니다. 명릉(明陵)의 지문(誌文)은 현궁(玄宮)102)  에 영원히 묻는 것으로 얼마나 지중(至重)한 땅인데, 묻어둘 수 없다고 말하여 파낼 계책을 하고, 대신(大臣)이 된 자가 수다한 말로 미봉(彌縫)하여 다시 지어야 한다는 말을 함부로 진달했습니다. 지난번 선령(先靈)의 묵우(默佑)가 아니었더라면 능침(陵寢)의 화가 절박스럽게 다가와 있게 되었으니, 무릇 우리 명릉의 신하가 된 사람이면 누가 그 살점을 저미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앞뒤에서 다시 지어야 한다고 논한 자는 마땅히 모두 역률(逆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전후 소비(疏批)에서 문득 ‘당여를 영호(營護)한다.’라고 전교하시는데, 인주(人主)가 먼저 하나의 ‘의(疑)’ 자를 마음속에 두시면 이미 마음을 비우고 형평(衡平)하는 도에 부족하실 것이니, 더구나 징토(懲討)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소를 보고 전교하기를,
"소의 끝에 진달한 바는 대의(大義)가 비록 좋고 ‘기(冀)·현(顯)’ 두 글자가 비록 김일경의 소에서 나왔으나, 어찌 그 본래의 말을 제론(提論)하여 사방의 듣는 이를 놀라게 하는가? 이는 이른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방만규(方萬規)는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고, 원소(原疏)는 내어 주라."
하였다.

 

전주(全州) 유학(幼學) 유조(柳組)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만약 역옥(逆獄)을 변환(變幻)한 폐단이 있으면 마땅히 역적을 옹호한 형률을 시행해야 하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전교를 하셨습니까? 그 역절(逆節)이 명백하여 의심이 없으면 오직 마땅히 목욕(沐浴)하고 징토(懲討)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감히 변환할 계획을 내는 것입니까? 혹시라도 억울함이 있다면 억지로 정할 수 없는 것이 국시(國是)103)  입니다. 옥정(獄情)의 허실(虛實)은 본디 먼 곳에 있는 자가 감히 알 바가 아니나, 정책(定策)하고 봉사(奉使)하는 데 있어 주선하는 정성을 다하였고 나를 보위(保衛)하고 사직(社稷)을 붙드는 데 그 공고(鞏固)히 할 계획을 다한 자가 어찌 도리어 역신(逆臣)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역(逆)’이란 한 글자가 어떠한 죄명(罪名)인데, 일찍이 성고(聖考)께서 어린 세자를 부탁하고 소중한 직임(職任)을 맡기게 된 신하를 어찌 모조리 여기에 빠뜨리십니까? 선조(先朝)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역적이란 그물에 걸려들고 유현(儒賢)들이 모두 참혹한 무함을 입었습니다. 사람을 알아보기란 비록 쉽지 않지만 우리 성고(聖考)께서는 명철(明哲)하셨는데 어찌 통촉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부지(扶持)하고 사직(社稷)을 보위(保衛)하는 책임을 모조리 이 몇 신하에게 부탁하는 것을 허용했겠습니까? 역적질을 하지 않았는데도 역적질을 했다고 말하는 자는 역적질을 한 자보다 심한 자이며, 실제로 역적질을 했는데도 역적이 아니라고 말한 자도 또한 역적보다 더 심한 자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우유(優游)104)  하게 맡겨두고 물리쳐 제거하기를 생각하지 않으시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될 것이니, 원하건대 열조(列祖)를 본받으시어 당습(黨習)을 제거하고 옥안(獄案)을 조사하여 성상이 받은 무함을 씻으시고, 유교(遺敎)를 따르시어 사문(斯文)을 부호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상소를 보고 전교하기를,
"이는 우덕삼(禹德三)의 소와 말을 만든 것이 한 모양이니, 돌려주라."
하였다.

 

임금이 반유(泮儒)105)  를 친시(親試)하였는데, 강(講)이 끝나자 김정신(金鼎臣)·김상려(金相礪)·정집녕(鄭輯寧)에게 전시(殿試)106)  에 직부(直赴)107)  하게 하였다. 시관(試官) 이조(李肇)가 말하기를,
"세 사람에게 급제를 내리는 것은 고례(古例)에 없으니, 너무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두 사람에게 급제를 내린 예가 있었으니, 비록 세 사람인들 무엇이 방해되겠는가?"
하였다.

 

전강(殿講)에 입시(入侍)할 때 임금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가운데 있는 이사상(李師尙)의 전후 소(疏)를 가져다 보고는 전교하기를,
"김일경의 일은 마음속에 간직된 것이 입에서 나온 것이니,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니다. 내가 문자(文字)로써 남을 죄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나, 이사상의 소어(疏語)가 매우 해괴하고 패악하다. 문자를 쓰는 것이 어떠한 한계인데 반드시 왕망(王莽)108)  ·동탁(董卓)109)   등의 말을 썼으며, 또 혼조(昏朝)110)   때 흉당(凶黨)에 비하여 논하였으니, 이는 마음대로 당을 옹호하려고 그런 것이다. 그 ‘후일을 위한 계책은 얻었다.’라고 한 것은 어찌 말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사상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라."
하니, 승지(承旨) 정석삼(鄭錫三)이 말하기를,
"방만규(方萬規) 등의 소에는 김성(金姓)을 가진 궁비(宮婢)의 일과 기타 감히 말할 수 없는 말을 무수히 나열하였으니, 일로 보아 마땅히 계품(啓稟)하는 데 들여 보내야 하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소가 반드시 많이 계속하여 들어올 것인데, 만약 조어(措語)하여 계품하면 막는다고 말할 것이고 몽롱하게 받아들이면 오직 윤허하신 뜻이 아니니, 하교가 계신 연후에 봉행(奉行)해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것이 쓸 만하면 쓰고 쓰지 못하겠으면 놓아둘 뿐인데, 어찌 받아들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기(冀)·현(顯)’ 두 글자가 비록 김일경의 상소에서 나왔지만 다만 ‘출처(出處)가 《강목(綱目)》에 있다.’라고 하면 되지, 각주(脚註)를 달은 것은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뜻을 크게 그르친 것이다. 자전(慈殿)을 침범했다는 말이 지금와서 제기(提起)하여 끝내 무엄(無嚴)한 데 관계시켰으니, 이렇게 한 후에도 만약 또 이러한 소가 있으면 죄가 삭판(削版)에만 그치지 않고 마땅히 그 문자를 쓴 자와 같은 죄를 주겠다고 분부하라."
하고는, 인하여 정석삼(鄭錫三)에게 전교하기를,
"3백 년 종사(宗社)의 부탁이 나에게 있으니,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라가 망한 후에 그만두게 될 것이다. 그 전에 승지(承旨)로 의망(擬望)한 사람을 오늘 정사(政事)에서 한 사람도 의망하지 않았는데, 만약 엄외(嚴畏)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한 번도 승전(承傳)111)  을 받들지 않는가? 오늘 정사에 참여한 이조 당상(吏曹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니, 정석삼이 말하기를,
"귀양간 여러 사람을 이미 석방하라 명하였고, 또 수용(收用)하라는 전교가 계셨으니, 성상의 뜻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마치 훈유(薰蕕)를 한 그릇에 담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말은 가벼운 것이 되고 당론(黨論)의 말은 도리어 중하다는 것인가? 이와 같이 하고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는가? 승지는 공평한 마음으로 천천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종부시(宗簿寺)에 곧바로 추치(推治)하는 법을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한 시민(市民)이 연령군(延齡君)의 궁노(宮奴)와 서로 싸우면서 문 밖에서 함부로 악을 쓰므로 왕자의 부인(夫人)이 본시(本寺)에 정단(呈單)하였는데, 본시에서 형추(刑推)하다가 죽게 만들자, 대신(臺臣)이 발계하여 종신(宗臣)을 추고하고 곧바로 다스리는 법을 드디어 폐하게 되었다. 여성군(礪城君) 집(楫) 등이 임금에게 그 법을 회복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종부시의 규례(規例)는 한결같이 헌부(憲府)와 같습니다. 사부(士夫)가 욕을 당하면 헌부에서 다스리고, 종신은 종부시에 정단하는 것이 바로 3백 년 동안의 성헌(成憲)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추고하기를 청한 것은 형을 삼가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조종조의 성헌이 이로 인해 폐지되게 되었으니, 목이 메어 먹는 것을 폐하는 것과 거의 같으며, 종신을 대우하는 것 역시 매몰하게 할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사헌부에 왕헌(王憲)을 관장하여 경외(京外)에서 법대로 하지 않은 자를 다스리는 것은 비단 사부(士夫)가 능멸당하는 것만을 위해 설치한 것이 아니다. 국가에서 종신을 대우하는 것이 본디 매몰해서는 안되지만, 사형(私刑)을 설치하여 곧바로 도성(都城)의 백성을 다스리면 세 법사(法司)는 어디에 쓰겠는가? 더군다나 종신은 법을 지킴이 드문데, 어떻게 그 벌이 그 죄에 해당된다고 해서 세력의 횡포가 백성을 괴롭히는 걱정이 없기를 바라겠는가?

 

1월 9일 무신

권성(權𢜫)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았다.

 

조경명(趙景命)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오수원(吳遂元)을 헌납(獻納)으로, 조원명(趙遠命)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흥경(金興慶)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윤봉조(尹鳳朝)·박내정(朴乃貞)·김계환(金啓煥)을 승지(承旨)로 삼았는데, 이조(李肇)의 정사(政事)였다.

 

1월 10일 기유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춘향 대제(春享大祭)를 친히 행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추안(推案) 가운데서 조태채(趙泰采)의 일을 조사해 아뢰라고 명하셨습니다. 김창도(金昌道)와 양익표(梁益標) 등의 공초에는 말하기를, ‘사대신(四大臣)이 상의(相議)하여 병판(兵判) 이만성(李晩成)으로 하여금 이삼(李森)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내보낸 후 또 상의하여 훈련 대장(訓鍊大將)에게 분부하여 유취장(柳就章)을 중군(中軍)으로 삼아 궁성(宮城)을 호위할 계책을 삼았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처음에 이미 수노(收孥)하지 않았는데, 지난번 교문(敎文) 가운데 넣은 것은 잘못됨을 면치 못한 것이니, 빼어 버리라."
하였다.

 

1월 11일 경술

임금이 하직(下直)하는 수령을 인견(引見)하였다. 승지 윤봉조(尹鳳朝)가 아뢰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극기(克己)란 모름지기 성(性)이 편벽되어 극복하기 어려운 곳으로 좇아 극복해 가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극기의 공부는 스스로 깨닫는 데 가장 힘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또 영예(英銳)함이 지나치면 신중함이 부족하게 되고 근신(謹愼)함이 지나치면 용단(勇斷)이 부족하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면계(勉戒)한 것이 매우 좋으니,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윤봉조가 말하기를,
"선대왕(先大王)께서 대리 청정(代理廳政)하실 때 숙종(肅宗)의 ‘자손은 굳게 지녀 흔들리지 말라.’고 전교하신 것이 금석(金石)의 법전과 같았는데, 3, 4년을 지나지 못하여 이에 곧 ‘선왕의 본의(本意)가 아니었다.’라고 하여 용이하게 고쳐서 시비를 전도(顚倒)시켰습니다. 최탁(崔鐸)의 ‘여러 해 동안 침고(沈痼)하였다.’는 등의 말은 그 죄가 어찌 정거(停擧)에만 그치겠습니까? 김인수(金麟壽) 등의 소비(疏批)에 ‘복관(復官) 등의 일을 거행하라.’는 전교가 계셨으나, 오히려 명백하지 못하니, 반드시 별도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고 명백한 처분을 내려서 선조(先祖)의 유교(遺敎)를 영원한 정식(定式)으로 삼아야 합니다.
송시열(宋時烈)은 복향(復享)시키고, 권상하(權尙夏)는 관직을 회복시키면서, 윤선거(尹宣擧) 부자는 선조에서 이미 선정(先正)이라 칭하지 말고 유현(儒賢)이라고도 칭하지 말라고 명하셨으니, 또한 분명하게 하교를 내리셔야 하며, 이 일로 인해 좌적(坐謫)된 자들도 또한 모두 석방해야 합니다. ‘사사(私事)가 위로 온 것이다.’라고 전교하셨는데, 처음이라면 혹시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미 유교(遺敎)가 계시니, 이는 논할 것이 못됩니다. 최탁(崔鐸)과 이덕보(李德普)가 아울러 정거(停擧)를 당하였으니, 경중(輕重)이 역시 도치(倒置)되었습니다. ‘선왕의 본의가 아니었다.’라고 말한 자는 죄를 주지 않을 수 없고, 신치운(申致雲)의 ‘임금을 배반한 나라의 원수다.’라는 설은 죄가 찬배(竄配)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로 올라와서는 안된다.’라는 말은 바로 선조(先祖)의 하교이다.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을 지금 만약 추탈(追奪)한다면 어찌 피차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필경에는 일이 어떻게 될지 헤아리겠는가?"
하니, 윤봉조(尹鳳朝)가 말하기를,
"신(臣)은 추가로 죄를 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만, 최탁(崔鐸)이 선왕을 침범해 욕한 죄는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으며, 복관(復官) 및 도봉 서원(道峯書院)의 복향(復享)은 마땅히 일체로 거행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윤봉조가 말하기를,
"순제(舜帝) 때 팔원 팔개(八元八凱)112)  가 하나의 붕(朋)이 되었으니, 임금은 마땅히 먼저 시비를 분명하게 하여 그 옳은 자를 써서 그른 자로 하여금 얼굴을 바꾸고 교화되게 해야 합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원우(元祐)113)   시대의 조정에는 명도(明道)의 역량(力量)이면 가할 것이나 나 역시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알아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목호룡(睦虎龍)이 안팎에서 화응(和應)한 정상을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십니다. 김일경이 신축년114)  에 상소한 뒤에 박상검의 옥사가 나왔고, 그 후 목호룡의 변서(變書)가 올라왔고 또 그 뒤에 김일경의 교문(敎文)이 나와서 절절(節節)이 서로 부합되니, 이는 부인(婦人)들과 어린아이도 함께 아는 바인데, 의리(義理)가 어둡게 막히고 인심이 함닉(陷溺)되어 비록 반드시 모두가 김일경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들과 동류(同類)인 까닭에 삼사(三司)에 있는 자들로 그 죄를 분명하게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축년 이후로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비록 모두 중한 견책(譴責)을 가해서는 안되지만 삭출(削黜)하는 벌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정여립(鄭汝立)의 역절(逆節)이 드러나지 않아서야 그 당시 사람이 누가 알았겠습니까만, 선조(宣祖)께서는 그래도 오히려 그가 인용한 사람을 고출(考出)하여 드디어 의망(擬望)한 전관(銓官)을 죄주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악(元惡)을 이미 정법(正法)했는데 어찌 반드시 하나하나 소급해서 따지겠는가? 삼사(三司)에서 말하지 않은 것은 비록 잘못이라 하더라도 어찌 참으로 그의 마음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겠는가? 당론(黨論)에 가리운 바가 된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전일(前日)의 비망기(備忘記)에 이미 말한 바 있으니, 비록 필부(匹夫)라 하더라도 한번 말한 후에는 가볍게 고쳐서는 안되는데, 더군다나 제왕(帝王)이겠는가?"
하였다. 윤봉조(尹鳳朝)가 말하기를,
"모든 일에 나를 둔다면 문득 이는 사(私)가 되며, 남이 나를 편벽되다고 할까 의심하여 하지 않은 것도 역시 편벽한 데에 귀착됩니다. 연교(筵敎) 및 비지(批旨)에 그 일이 성상의 몸에 관계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그런 줄을 알고 계시면서 혐의를 곡피(曲避)하는 뜻이 없지 않으신 듯합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피혐(避嫌)하는 일을 현자(賢者)도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건저(建儲)한 이래 동조(東朝)115)  께서 전하에게 부탁한 것은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요, 전하에게 사사로운 뜻을 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학문의 공부는 부족하지만 모든 일에 옳으면 옳다고 하고, 그르면 그르다고 하여 내 마음의 아는 바에 따라 하였고 원래 피혐하는 뜻이 없었으니, 비록 김일경과 이사상(李師尙)의 일로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래의 상소에서 대부분 좌상(左相)의 일을 말하면서 나를 노여움을 감춘다는 과목(科目)으로 돌리니, 이는 당습(黨習)이 아니겠는가?"
하니, 윤봉조가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의 일에 대한 하교는 참으로 성덕(聖德)의 일입니다. 효종(孝宗) 때에 이경여(李敬輿)를 배상(拜相)한 것 역시 성덕의 일이었는데, 그 심적(心跡)에서 공사(公私)를 살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당론(黨論) 이후에 어찌 공의(公議)가 있겠는가?"
하니, 윤봉조가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조여우(趙汝愚)116)  에게 준 글은 하람(下覽)하셨을 줄 생각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곧은 것을 들어 그른 것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그 뜻이다."
하니, 윤봉조가 말하기를,
"옥당(玉堂)에서 바야흐로 방만규(方萬規)의 나국(拿鞫)을 청하였는데, 국문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그 역시 창출(創出)해 낸 말이 아닙니다. 윤서교(尹恕敎)의 소에 나온 ‘공봉(供奉)이니 사랑한 바를 역시 사랑한다.’는 등의 설은 아주 괴이하며, 조숙원(趙淑媛)의 비유 또한 괴이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랑한 바를 역시 사랑한다.’는 말은 참으로 수상(殊常)하며, 조숙원 운운(云云)한 것도 또한 해괴하다. 윤서교가 오랫동안 대망(臺望)이 막혀 곧 외읍(外邑)에 보임되었으니, 그들 중의 공의(公議)를 볼 수 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한 말은 김일경이 비록 썼더라도 지금에 이르러 방만규가 어찌 감히 주석(註釋)을 달아 입 밖에 낸단 말인가? 유신(儒臣)의 청이 괴이하지 않으나, 말을 한 사람을 이미 따져 묻지 않았으니, 그 말을 해석한 사람을 도리어 잡아다 국문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는, 드디어 윤서교의 삭직을 명하였다. 윤봉조가 말하기를,
"명릉(明陵)117)  의 지문(誌文)을 고치자는 청을 했는데, 그런 일을 어찌 차마 하였겠습니까? 지문(誌文)을 만약 고쳐서 지어 묻는다면, 능침(陵寢)이 그 장차 편안하겠습니까? 대신(大臣)의 회계(回啓)에 경통(驚痛)하는 뜻이 없었고, 또한 발계(發啓)118)  한 사람을 죄주기를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내가 하교하려고 하였는데, 발계한 대간의 삭출(削黜)을 명한다."
하였다. 윤봉조가 말하기를,
"숙종 때의 일이 신축년119)  ·임인년120)   이후에 변혁되지 않음이 없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이잠(李潛)이 절의를 세웠다고까지 하였으며, 임진년121)   과옥(科獄) 때 숙종께서 ‘이진급(李眞伋) 역시 복과(復科)하겠는가?’라는 전교가 계셨는데, 이 역시 복과하여 숙종의 처분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차차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옹립(擁立)’·‘원립(援立)’ 등의 문자를 이 어찌 신하로서 인용할 수 있는 것이며, ‘정책 국로(定策國老)’·‘문생 천자(門生天子)’ 등의 말에 이르러 대신의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문생’이라 한 말을 나는 그 말을 뜻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원립’ 등의 설로써 만약 문자(文字) 때문에 사람을 죄준다면 어찌 이에서 그치겠는가? 《강목(綱目)》의 위 태후(魏太后)의 일을 내가 일찍이 가탄(嘉歎)하였는데, 내가 어찌 호 태후(胡太后)만도 못하겠는가?"
하니, 윤봉조가 청하기를,
"김재로(金在魯)의 예에 의하여 늙은 어버이가 있는 사람으로 적소(謫所)에 있는 사람을 사유해 석방하소서."
하니, 명하기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별단(別單)을 써 들이게 하라."
하였다.
윤봉조가 진달하기를,
"신임(申銋)의 방송(放送)은, 정원(政院)에서 대계(臺啓)가 있다는 것으로써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윤봉조가 황재(黃梓)의 방송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으며, 이덕보(李德普)의 정거(停擧)를 풀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처분을 전도(顚倒)시켜서는 마땅치 않다고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三司) 제신(諸臣)의 직을 특파(特罷)하였다. 전교하기를,
"김일경에게 율(律)을 가하자는 말이 혹 대신(大臣)에게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중신(重臣)에게서 나오기도 했으나, 삼사(三司)는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이 위패(違牌)122)  가 서로 잇따라 관망(觀望)하는 것처럼 했었으니,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하겠는가? 전후의 삼사(三司)는 아울러 파직하라."
하고, 이어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능(陵)에 행행(幸行)할 때 위패한 것으로써 이조 참의(吏曹參議) 조원명(趙遠命)을 파직하여 윤봉조(尹鳳朝)로 대신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진검(李眞儉)을 파직하였는데, 사람을 가릴 때까지 낭관(郞官)을 시켜 번갈아 행하게 하였다. 또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세최(李世最)를 체직하라고 명하고, 또 전 참판 황일하(黃一夏)의 서용을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신임(申銋)은 대신(臺臣)이 비록 출륙(出陸)을 다시 정지하기를 청했으나, 이번 방송(放送)은 이와는 다름이 있으며 잇따라 아뢰는 것으로 미루는 것은 옳지 않으니, 특별히 방송하라."
하고, 또 김흥경(金興慶)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유명홍(兪命弘)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허윤(許玧)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김상옥(金相玉)·박성로(朴聖輅)를 승지(承旨)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용인(龍仁) 유학(幼學) 안절(安梲)이 상소하여, 요해처(要害處)에는 각기 연대(煙臺)123)  를 설치하고, 열읍(列邑)에는 각기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여 토착(土着)해 사는 거호(巨豪)로 장령(將領)을 삼고, 토착한 백성에게 군적(軍籍)을 편성하여 ‘향병(鄕兵)’이라 일컫고 신지(信地)를 나누어 주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춘천(春川)은 견고한 산성(山城)과 험준한 요새지로 되어 있는 것이 강화도와 남한 산성보다 훨씬 낫고, 양산(梁山)의 취서산(鷲棲山)은 가장 험준(險峻)하게 막혔으니, 청컨대 관방(關防)을 설치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남소문(南小門)은 무학(無學)124)  이 창건한 것을 김안로(金安老)가 폐했는데, 임진년125)  ·정유년126)  의 왜란이 있었고, 광해조(光海朝)의 요승(妖僧) 성지(性智)가 서북쪽 방위에 새 문을 창건하였는데, 갑자년127)  ·정묘년128)  ·병자년129)  의 호란이 있었으니, 청컨대 흉문(凶門)은 막고 길문(吉門)을 열게 하소서."
하였고, 또 말하기를,
"강상(江上)의 창름(倉廩)이 염려되니, 마땅히 두 부아현(負兒峴)에 성을 쌓고 창고 짓는 것을 옮겨야 합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의승(義僧)이 입번(入番)하는 규정을 파하고, 각도에 하나의 총섭(摠攝)을 설치하여 그를 통솔(統率)하게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향군(鄕軍)을 파하고 도성(都城)과 기전(畿甸)의 백성으로 대신하되, 군포(軍布)·보미(保米)를 주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군액(軍額)130)  을 줄이고 호(戶)에 따라 쌀을 거두어 군사를 양성하게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친경(親耕)131)  하여 농사를 권장하소서."
하고, 또 붕당의 폐를 말하면서 청하기를,
"피차를 막론하고 같은 배를 탔다는 생각으로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조부(祖父) 안명로(安命老)가 《연기신편(演機新編)》을 지어 이상진(李尙眞)이 영백(嶺伯)으로 있을 때 간행하여 올리어서 장병(將兵)의 아문(衙門)에 반포하였고, 아비 안정기(安鼎基)가 병거(兵車)를 만들어 올리자 숙종께서 각 아문에서 만들어 쓰기를 명하셨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이광보(李匡輔)가 상소하여 방만규(方萬規)와 유조(柳組)를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자성(慈聖)은 국모(國母)이니, 무함한 자는 본디 역적이며, 무함한 일이 없는데 무함하였다고 말하는 자도 역시 역적인 것입니다. 일전 성상의 비답에 이른바 ‘성토(聲討)한 것이 아니라 바로 무함한 것이다.’라는 전교는 참으로 이런 귀역(鬼蜮)의 정상을 간파(看破)하신 것입니다. 아! 자성을 무함함은 천하의 극심한 죄인데, 이것을 어찌 몰아넣는다 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겠으며, 분소(分疏)132)  한다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과연 털끝만큼이라도 방만규의 말과 방불한 점이 있다면 조정에 가득한 진신(搢紳)과 온나라의 장보(章甫)·종척(宗戚)·무신(武臣)으로 항소(抗疏)하는 자가 사패(司敗)133)  에게 모두 내려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잡기를 청하였을 것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방만규가 자성을 무함한 죄를 다스려 사방 팔역(八域)으로 하여금 자성께는 처음부터 변명해야 할 무함이 없었음을 환히 알게 해야 합니다. 이의연(李義淵)이 선왕(先王)을 무함하여 이미 법에 의해 복주되었고, 김일경은 성상을 무함하여 역시 법에 의해 복주되었는데, 돌아보건대, 이 자성을 무함한 방만규만이 유독 이의연·김일경의 죄로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더구나 목호룡(睦虎龍)의 음흉한 정절(情節)은 더욱 전하를 위해 변무(卞誣)하는 데 있다고 칭탁하였지만 실제는 전하를 무함한 것이었으니, 이번 이 방만규도 자성을 위해 변무하는 것이라 청탁하지만 실제는 또한 자성을 무함한 것이므로 징토하는 전형(典刑)을 다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유조(柳組)는 소에서 감히 ‘정책(定策)·봉사(奉使)하여 주선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라는 등의 말로 역괴(逆魁)를 드러내어 변호했으니, 그의 옥정(獄情)을 변환(變幻)시킨 계책이 이처럼 방자한데도, 역적을 옹호한 형률을 베풀지 않으시니, 지난날의 비망기(備忘記)는 종이 위에 적은 빈말임을 면치 못할까 염려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소를 돌려주고 그치는 데 지나지 않게 하십니까? ‘성고(聖考)께서 탁고(托孤)134)  하셨다.’는 등의 말은 더욱 무엄합니다. 오직 우리 경종 대왕(景宗大王)께서는 춘추(春秋)가 한창이시고 4년 동안의 대리(代理)를 하였으니, 나이 어린 유사(幼嗣)를 대신에게 부탁하는 데 비할 것과 같지는 않은데, 그가 비록 여러 흉적의 공을 칭송하기에 급하더라도 어찌 감히 숙종의 말명(末命)을 교무(矯誣)하기를 이처럼 방자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 죄는 비단 역적을 옹호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신은 방만규와 유조를 일체로 모두 국문한 연후에야 사람들의 기강이 힘입어 서게 되고, 난역한 자들이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직강(直講) 안세갑(安世甲)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진유(李眞儒)와 역적 김일경(金一鏡)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음흉하고 사나와 살육(殺戮)을 일삼았고, 흉한 모의와 비밀스런 계책을 모두 주장하여 기염(氣焰)이 하늘에 닿아 온세상이 바람에 쏠렸으며, 조정의 권세를 잡아 세력이 임금보다 컸습니다. 김동필(金東弼)이 교문(敎文)의 일로써 역적 김일경을 논하자 분독(憤毒)을 머금고 사사로운 원수처럼 보았고, 국조(國朝)에 없던 일을 내어 급급히 청대(請對)하여 단망(單望)으로 외읍(外邑)에 임명하였으니, 이에서 바로 역적 김일경과 같은 마음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땅히 문을 닫고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데도 그 아우 이진검(李眞儉)은 공공연히 함부로 상소하여 변명하였는데, 신축년135)  의 한 상소는 강상(綱常)이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김일경의 상소와 동일한 범위의 투입니다. 권익관(權益寬)은 김일경의 종제(從弟)로, 음모를 치밀하게 엮어 그 반은 이 사람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지난번 한 소의 흉패한 말도 또한 역적 김일경을 소술(紹述)한 것이며, 유수(柳綏)는 바로 김일경의 가까운 친척으로 역적 김일경을 위해 김동필을 논핵하여, 그가 역적 김일경을 돕는 부하가 되었다고 사람들이 모두 지목하였습니다. 이명언(李明彦) 역시 역적 김일경의 심복(心腹)으로 유봉휘(柳鳳輝)의 질서(侄壻)입니다. 신축년에 만부(灣府)136)  에 있으면서 창고의 저축을 탕갈시켰는데 사람들이 간 곳을 몰라 모두 의혹하였으며, 책봉(冊封)하는 선래(先來)가 나오게 되자 일부러 만류하여 빨리 달려오지 못하게 했으니, 그 마음은 헤아리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당의 괴수가 되어서는 마음에 내키는 대로 자행하였는데, 김동필이 김일경을 논하자 김동필을 보직에 물리친 것으로써 정석(政席)에서 시끄럽게 다투다가 인하여 일어나 나가기까지 했으며, 전소(前疏)의 내용에 핍박하고 무함하며 흉악하고 패만한 말은 역시 모두 역심(逆心)이 마음에 버티어 있고 분한 기운이 격발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구명규(具命奎)와 이보욱(李普昱)은 글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 역적 김일경·이사상(李師尙)·이명언의 사환(使喚)하는 군졸(軍卒)이 되어 그들의 보살핌을 받고 그들의 말하는 것을 추앙하여 세 흉적에게 충성이 되는 것이면 일마다 조성(助成)하고 말마다 받들어 행하여서, 전후의 흉악 패만한 계사(啓辭)에 앞장서서 스스로 담당하였습니다. 이보욱은 참람되게 영선(榮選)에 올라 명기(名器)가 외잡(猥雜)되었으며, 이광보(李匡輔)는 여기(戾氣)가 뭉쳐서 흉악하고 음특한데다가 이진유의 가까운 친척으로 역적 김일경의 조아(爪牙)가 되었습니다. 어두운 밤이면 출입하면서 그의 사령(使令)이 되어 남을 해치고 나라를 해치는 일에 팔뚝을 걷어올리고 담당하였으므로, 김일경의 무리가 이로써 끌어들여 외람되이 청요직(淸要職)에 통하게 하였으니, 원하건대, 아울러 귀양 보내어 죽게 하소서.
국옥(鞫獄)의 체모가 소중하므로 이름이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오면 잡아다 조사하는 것이 당연한 법인데, 백망(白望)의 초사를 국청(鞫廳)에서 공공연히 쓰지 않다가 금부 도사(禁府都事) 황유목(黃有牧)이 법에 의거해 입증(立證)하자 문사랑(問事郞) 윤유(尹游)가 비로소 써서 이끌어댄 여러 신하 및 역적 김일경이 부득이 서명(胥命)137)  하였는데, 승지 조경명(趙景命)이 면출(勉出)하게 하라는 뜻을 번거롭게 계품(啓稟)까지 하여 반드시 무릅쓰고 나와 옥사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황유목은 일로 인하여 공격해 제거하여 국문하는 일을 듣지 못하도록 했으니, 대개 백망을 박살하여 멸구(滅口)할 계획을 한 자는 역적 김일경이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조경명이 도와 이룬 것이므로, 마땅히 안팎에서 화응(和應)한 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조태억(趙泰億)의 ‘문생 국로(門生國老)’란 말은 끝내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잡지 않았으니, 원하건대, 빨리 그 부도(不道)한 죄를 바로잡으소서. 조태억은 그의 종형(從兄)138)  의 안법(按法)함을 당해 여러 재상과 함께 입대(入對)하였기 때문에 역적 김일경이 말하기를, ‘조태억이 함께 들어온 것만 보아도 그의 종형이 역적질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까지 하여, 준청(準請)을 핑계하는 자료로 삼아 골육(骨肉)을 해쳐 멸한 형상은 부인·어린아이·천한 사람들도 또한 모두 이를 갈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명릉(明陵)의 지문(誌文)을 고치자는 청은 아뢴 말이 망극하였고, 대신들의 수의(收議) 역시 아주 패만하였는데도 아직껏 토죄함이 없으니, 신은 혼자서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다.

 

문겸(文兼)139)  ·김국려(金國礪)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동궁(東宮)에 계시게 되면서부터 흉악한 무리들이 반드시 동요(動撓)시키려 한 것은 유봉휘가 창도(倡導)한 것으로 여러 해 동안 폐기(廢棄)된 것에 원한을 쌓은 나머지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진 뒤에 해독(害毒)을 드러내어 상소의 말이 역적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없어 글자와 구절마다 사납고 독한 뜻을 지녔으나, 김일경·박상검의 뒤를 따라 날뛰는 것이 오로지 그가 전수(傳授)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전하의 신하 된 사람이면 누군들 그 고기를 먹고 가죽을 깔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환관(宦官)과 궁비(宮婢)의 무리들은 비록 매우 요악(妖惡)하였으나, 만일 흉도의 사주(使嗾)가 없었다면 계획을 세워 흉악을 부림이 어찌 이처럼 기탄이 없었겠으며, 역적의 정상이 발각되던 날에 만약 어두운 곳에서 물든 형적이 없었다면 또한 하필 스스로 죽도록 맡겨두어 지레 옥사를 그처럼 급급하게 끝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 무리들을 다스리지 않고는 세 성인께서 무함받은 것을 씻고자 해도 되겠습니까?"
하였고, 또 말하기를,
"최탁(崔鐸)과 이덕보(李德普)를 같게 벌하는 것은 미안하니, 최탁의 죄를 분명하게 바로잡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승지(承旨)의 의망(擬望)에 무고(無故)한 자를 어떻게 한정하기에 단지 한두 사람만 초초하게 갖추어 책임을 막는 것입니까? 마음씀이 아주 교묘합니다. 이 무리들은 오직 선(善)한 사람이 나올까 염려하여 임금의 명을 거역하면서 반드시 이기기를 다툰 것은 오로지 윗사람을 무시하고 명을 거역하는 습관에 말미암아 능히 전호(傳護)하는 법을 지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소를 보고는 전교하기를,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인정(人情)이 같은 바인데, 흑백(黑白)을 구분하지 않으면 이것이 공정(公正)한 것이겠는가? 좌의정(左議政)의 일은 나에게 노여움을 품는 과(科)로 돌리는 것이다. 이러한 소는 비록 하루에 백 번 이르더라도 결코 답을 내리기가 어려우니, 이 두 소는 돌려주라."
하였다.

 

경상도 유학(幼學) 김인수(金麟壽) 등 7백 40여 명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의 무리가 단지 윤선거가 있는 줄만 알고 숙종(肅宗)과 선왕(先王)이 계신 줄은 모르고 감히 숙고(肅考)께서 처분하신 뜻을 변개(變改)하여, 성자(聖子)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날에 모독(冒瀆)하면서 감히 선왕의 본의가 아니며 침고(沈痼)되고 침윤(浸潤)되었다는 등의 말로 꾸며대고 억눌러 곧바로 시비(是非)가 분명치 못한 과(科)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이 함부로 성고(聖考)를 업신여기고 무함하여 선왕을 속이고 가리워 반드시 유훈(遺訓)을 내던지고 시비를 변란(變亂)시키려고 하는 것이 모두 윤선거와 윤증을 위해 보복(報復)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은 송시열(宋時烈)을 출향(黜享)하고 권상하(權尙夏)를 삭관(削官)한 데서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반드시 성고(聖考)께서 윤선거 부자(父子)에게 베풀었던 것을 도리어 두 현인(賢人)에게 베풀어 그 분노를 쾌히 씻으니, ‘하룻밤 사이에 몰래 향사(享祀)했다.’는 설을 거짓으로 지어내어 출향시키는 밑천을 삼았고, 없는 사실을 날조한 계사(啓辭)를 엿보아 내어서 삭관(削官)하는 죄안(罪案)을 이루었습니다.
도봉 서원(道峯書院)에 승향(升享)한 것은 병자년140)   정월 12일이었고, 윤지선(尹趾善)이 이의를 제기한 상소는 15일에 들어와, ‘우선 정지하라’는 비답이 있었기 때문에 정원에서 ‘이미 거행하였다.’는 뜻을 계품하자, 이에 ‘분부하지 말라.’고 비답했는데, 그들의 말은 마치 윤지선의 소에 대한 비답이 내린 후 급급하게 몰래 하룻밤 사이에 향사하고는 이미 거행하였다고 거짓으로 품한 것처럼 하였으며, 지난날 정원에서 유소(儒疏)를 받아들이며 아뢸 때에도 오히려 이미 탄로가 난 전의 말을 고집했으니, 가소로움이 심합니다. 신치운(申致雲)은 흉한 역적의 유얼(遺孽)로 권상하에게 독을 뿜어 벌이 지하에까지 미치게 하였고, 계사 가운데 ‘나라의 원수이고 임금에게 반역하였다.’는 등의 말은 윤리(倫理)가 전혀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다고 하여 머뭇거리고 어렵게 여기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이는 전하께서 선왕의 마음을 살피시지 못해서입니다. 우리 선왕께서는 만일 흑백(黑白)을 변란(變亂)시킨 자가 있으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전교하셨으니, 바로 숙종께서 ‘굳게 지녀 흔들리지 말라.’ 하신 뜻이었습니다. 그 후 처분이 전의 것과 어긋난 것은 실로 여러 간사한 무리들이 현란(眩亂)시키고, 옹폐(壅蔽)한 소치에 연유한 것이니, 이것이 과연 선왕의 본심이나 실정(實情)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이제 수많은 소인이 환롱(幻弄)하고 괴란(壞亂)시켜서 도리어 선왕의 처분으로 돌리니, 이는 선왕의 효사(孝思)하심이 암매함을 입어 끝내 발명할 바가 없게 될 것이니, 장차 천하 후세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윤선거의 ‘강왕(康王)’·‘두거(杜擧)141)  ’·‘구천(句踐)’·‘연광(延廣)’의 말은 대의(大義)를 흠잡아 헐뜯고, 성궁(聖躬)에 누(累)를 끼치는 것으로 이에 성고(聖考)께서 훼판(毁板)·철원(撤院)하라고 한 까닭입니다. 한 번 그 당이 폭위(暴威)를 떨침으로부터 조정에서 윤선거를 대우한 것이 선정(先正)으로 존경하고 조두(俎豆)로써 제향하게 되었으니, 저들은 윤선거가 성조(聖祖)를 무훼(誣毁)한 것을 당연한 도리로 보았습니다. 이는 비단 효종(孝宗)의 성덕(盛德)·대업(大業)이 오점(汚點)을 받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늘에 계신 현종(顯宗)·숙종(肅宗) 두 성인의 영혼을 위로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이미 출향(黜享)한 송시열을 회복시키고, 이미 삭탈한 권상하의 직첩(職牒)을 주시며, 윤선거 부자를 다시는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지 마시며, ‘선왕의 본의가 아니며, 침고·침윤되었다.’는 등의 말로 영고(寧考)를 침해해 욕한 자는 빨리 중한 법으로 처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효(孝)는 계술(繼述)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는데, 선조(先朝)의 처분이 이미 간책(刊冊)에 실려 있으며, 대행왕(大行王)이 계술한 뜻이 비지(批旨)에 넘친다. 그러니 두 조정의 성대한 뜻을 잇는 도리에 있어 그 일시 과격한 대언(臺言)을 따라서야 되겠는가? 아! 사문(斯文)의 시비는 본디 유림(儒林)에 있는 것이지 조정의 작질(爵秩)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조정에 올려서 이에 이르게 하는 것인가? 나는 못내 개탄스럽게 여긴다. 복관(復官)하는 등의 일은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경기(京畿)의 유학 한익진(韓翊震)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의 무덤이 수원(水原) 근방에 있어 장보(章甫)들이 사당을 세우고 편액(扁額)을 청하자 숙종께서 즉시 매곡 서원(梅谷書院)이란 이름을 내렸는데, 한 번 윤선거가 성조(聖祖)를 무함하여 성고(聖考)께 죄를 얻으면서부터 그 사원(祠院)을 철거하라 명하시어 그 무리가 원망을 송시열에게 돌렸고, 윤성시(尹聖時)가 몰래 향사했다는 말을 거짓으로 지어내어 갑자기 도봉(道峰)의 향사를 없앴습니다. 이진유(李眞儒)는 겹쳐 설치하는 것을 금한다고 가탁(假托)하여 여러 서원의 편액(扁額)을 모조리 철거했습니다.
당초에 이진유는 숙종의 성명(成命)에 의하여 계사년142)   이후에 겹쳐 설치한 서원은 모두 철거하기를 청해 윤허를 받았는데, 그 사목(事目)을 반포하기에 미쳐서는 송시열의 서원은 계사년 이전에 사액(賜額)한 것도 모조리 철거하는 가운데 넣었으니, 남의 신하로서 농락하고 변환(變幻)하는 것이 이와 같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때에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선조(先祖)에서 사액한 것은 환수(還收)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는데, 그 대신들도 어찌 윤선거와 윤증의 사당(私黨)이 아니었다면 그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겠습니까? 원하건대, 도봉 서원의 향사를 회복하고, 본원(本院)의 편액을 걸도록 하시며, 그 나머지 같은 때 철거한 원액(院額)도 한결같이 모두 다시 내리며, 윤선거·윤증의 선정(先正)이란 칭호를 금하여 여러 흉적들이 정인(正人)을 해친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소유(疏儒) 안윤증(安允中)·홍우저(洪禹著)·윤현(尹俔)은 이미 사유(赦宥)되었으나, 곽진위(郭鎭緯)·나정일(羅廷一)·박번(朴蕃)·정만원(鄭萬源)은 사유를 받지 못했으니, 청컨대 아울러 석방하소서."
하고, 또 최탁(崔鐸)을 투비(投畀)하기를 청하였다.
유학(幼學) 이근(李瑾)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항상 충역(忠逆)의 구분에서 적실한 지시의 하교를 내리시지 않아서 충성스러운 자로 하여금 권장이 되지 않게 하고, 반역을 한 자로 하여금 징계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사문(斯文)의 일에 이르러서도 ‘흔들리지 말라.’는 유훈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사가(私家)의 일로 돌리시니, 신은 곧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려고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진상(金鎭商)은 80세 된 노모가 있는데 처자(妻子)가 없으니, 청컨대 김재로(金在魯)의 예에 의하여 석방하고, 그 나머지 노모가 있는 자도 모두 석방하되 형조(刑曹)와 금오(金吾)에 일체로 시행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신임(申銋)을 방송하라는 명을 막아 행하지 않았으니, 미안합니다."
하였다. 또 청하기를,
"새로 즉위한 후 찬적(竄謫)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한 사람은 아울러 사유(赦宥)하소서."
하였다. 경기(京畿)의 생원(生員) 안택인(安宅仁)이 청하기를,
"송시열을 도봉 서원에 복향하고, 권상하(權尙夏)·이희조(李喜朝)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아울러 치제(致祭)를 내리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흉적 최탁(崔鐸)이 황욱(黃昱)·김범갑(金范甲)과 더불어 ‘당초에 향사(享祀)를 명한 것은 선왕의 본의가 아니었다.’라고까지 말했으니, 비단 선정(先正)만 무함한 것이 아니라, 이에 성고(聖考)를 무함한 것입니다. 이의연(李義淵)은, ‘선왕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 때문에 이미 성상을 무함한 율을 입었는데, 최탁의 무리는 성고를 ‘선왕의 본의가 아니었다.’라고 무함하였는데도 그냥두고 신문하지 않았으니, 모두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모두 이미 처분하였다고 비답을 하였다.

 

 

 

진사(進士) 유언일(兪彦鎰) 등이 이덕보(李德普)의 소하(疏下)로서 또 상소하여 변명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사문(斯文)의 시비는 사실 성고(聖考)의 유훈(遺訓)과 관계되니, 반드시 먼저 대행왕(大行王)의 마음을 미루어 밝혀서 성고(聖考)의 사실에 어긋나지 않음을 드러낸 연후에야 사리(事理)가 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두 조정에 미쳐 붓을 잡고 훌쩍이면서 먼저 ‘대행왕의 평일 마음으로 미루어 보아도 결코 그럴 이치가 없다.’고 합니다. 또 대행왕의 하늘에 있는 마음으로 책임이 전하에게 있다는 것을 힘쓰게 하였으니, 아! 마음이 아픈 자는 소리를 늦출 수가 없습니다. ‘문왕이 오르내리느니’, ‘문왕이 말하기를 아!’라고 하였다 함은 이는 후세 사람이 상상(想像)한 뜻인데 전성(前聖)들이 경(經)143)  에 실었으니, 하늘에 계신 영혼이 상상컨대 반드시 회오(悔悟)하였을 것이라는 것으로, 곧 선현(先賢)이 임금께 고한 말이며 후세에 좋은 비유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무리들이 그 말을 꼬집어 무함해 날조하여 윤리를 능멸하였다는 과목(科目)으로 돌리는 것은 무슨 마음입니까? 만약 그들의 말과 같다면 반드시 대행왕의 마음이 성고(聖考)에 어긋난 바가 있다고 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도리에 합당하겠습니까? 성고(聖考)의 유훈(遺訓)을 드날리고 대행왕의 본심을 드러낸 것은 신들인데 벌이 정거(停擧)에 이르렀고, 영고(寧考)를 침범하여 욕한 것은 최탁(崔鐸)의 무리인데 또 벌이 정거에 그쳤으니, 전하께서는 양쪽을 들어 양쪽 모두를 그르다고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자신이 성고를 섬겨 지위가 묘당(廟堂)에 있는 자인데, 이에 ‘선왕의 본의가 아니었다.’라는 말을 하였으니, 이런 의논을 한 자가 과연 성고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성고의 무함을 신설(伸雪)하고 대행왕의 마음을 밝히는 이것은 바로 신들이 마땅히 급히 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전하께서 마땅히 급히 할 바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매양 붕당(朋黨)을 염려하시는데 또한 성상의 마음이 이 일의 시비(是非)에서도 역시 이 두 글자를 먼저 마음에 두기를 면치 못한 까닭으로 늦추고 기꺼이 처분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러한 병근(病根)은 매우 성상의 마음에 해가 될까 싶습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이 일에서 피차의 생각을 쓸어버리시고 더는 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을 미리 마음속에 두지 마시고, 단지 그 사람과 그 일만을 보시고서 만일 ‘송시열과 권상하가 비록 어질지만 역시 색목(色目) 가운데 들어 있으니, 그를 부호(扶護)하는 자는 어찌 당을 옹호하는 것을 면하겠는가?’라고 하신다면 할말이 있습니다. 당(黨)에는 선(善)한 것과 불선한 것이 있으므로 선조(宣祖)께서 계미년144)   여러 간흉들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논박할 때 하교하시기를, ‘나는 주자(朱子)의 설에 의거하여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라고 하셨으니, 성고(聖考)께서 단안(斷案)을 만드시어 ‘백세토록 흔들리지 말라.’고 하심은 바로 선조(宣祖)의 당일(當日)의 마음이었습니다."
하고는, 인하여 송시열을 서원에 배향(配享)하고 권상하의 관작을 회복하며 최탁 및 회계(回啓)한 묘당(廟堂)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하였으며, 이덕보(李德普)를 정거(停擧)한 것은 사습(士習)을 바로잡는 바이다."
하였다.
수찬(修撰) 강박(姜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심이 너무 지나쳐서 혹은 안정(安靜)되고 침착한 뜻이 적으며, 온인(溫仁)함이 넉넉하여 오히려 굳세고 확고함이 모자라는 기상이여서, 문식(文飾)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문식이 더욱 번거롭게 되고, 실제에 힘쓰고자 하지만 실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유응환(柳應煥)·방만규(方萬規)는 역적 이의연(李義淵)에게 발을 붙여 조신(朝臣)들을 고첨(顧瞻)하면서 교묘하게 아유 구용(阿諛苟容)하기를 도모하고 함께 징토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창귀(倀鬼)145)  가 되어 아첨하기를 구하고 몸을 솟구쳐 공(功)을 구하면서 사람의 본성을 잃은 것이 이에 이르러 여지없게 되었으나, 그의 이러저러한 용의(用意)는 모두 정국(政局)상 득실(得失)의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 그 문장(門墻) 밖에 가소롭고 미운 것은 나학천(羅學川)·김시빈(金始鑌)·신택(申) 등입니다. 정호(鄭澔)에게 기록할 만한 공이 있고, 민진원(閔鎭遠)에게 석방할 만한 의리가 있는 것이 참으로 그들의 말과 같다면, 수년 사이에 어찌 죽은 체 엎드려 있으면서 말이 없다가 이제야 비로소 서로 잇따라 뛰어나와 말하기를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까? 그 심술과 정태(情態)를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영남(嶺南)에는 예로부터 이러한 일이 없었던 것이 참으로 김시빈의 말과 같으나, 맹세(盟誓)하던 입이 미처 다물지도 않아서 사람의 발자취를 밟아 같은 형태로 돌아갔으니, 산남(山南) 수백 년 동안의 직성(直聲)과 정기(正氣)가 이 무리들에 의해 덮이고 잠식되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엿보고 헤아리며 남의 뜻이나 맞추는 것을 신은 전하께서 다스리는 근본에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심과 세도(世道)가 이처럼 함몰되었는데, 나라에서 나라를 위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동자(董子)146)  가 말하기를,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조정을 바로잡는다.’라고 하였으니, 원하건대, 유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 끝의 절실한 경계를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나학천 등의 일을 논한 것이 또한 좋으나, 또한 그 둘은 모르겠다."
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세최(李世最)가 상소하여 허석(許錫)의 소어(疏語)를 변명하였는데, 말하기를,
"흉악한 윤휴(尹鑴)를 당초 ‘백이(伯夷)라고 포장(褒奬)한 자가 있었으나 소급해 허물한 일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번 김일경이 복법(伏法)된 뒤에 전일의 한 마디 말을 가지고 뒤따라 죄안(罪案)을 만들려고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할말이 없을까 걱정 말라.’는 것입니다."
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강현(姜鋧) 등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방만규(方萬規) 소의 흉패(凶悖)한 말은 위로 감히 말하지 못할 곳까지 이르렀으니, 신 등은 뼈가 떨리고 마음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의 그 뜻은 오로지 조정 신하들을 무함하는 데 두었는데, 계책을 낼 것이 없자, 이에 감히 위로 성자(聖慈)를 무함하는 데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 ‘은연(隱然)’이란 두 글자를 김일경의 말에 의탁하여 지엄한 자리에 비의(比擬)하고, 인하여 또 이어서 ‘김성(金姓)을 가진 궁인(宮人)에 대한 계사(啓辭)가 과연 나왔다.’는 말로써 온 조정에 여러 신하들을 헤아릴 수 없는 구덩이로 모조리 밀어 넣으려 했으니, 그 덫과 함정을 배포(排布)하여 몰래 엿보고 가만히 노리는 형상은 아! 또한 교묘하고 참혹합니다. 신들이 가장 절통(切痛)하게 여기는 것은 신들 때문에 침해하여 무함한 말이 위로 자성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오직 우리 자성께서는 그 존귀함이 하늘과 같으니 얼마나 지경(至敬)·지엄(至嚴)하여야 하는데, 공공연히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런 무리의 입술에 올랐으니 그 날조해 꾸며댄 것이 모두 망극한 말이고, 끌어다 비의(比擬)한 의논이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일입니다.
한 적비(賊婢)를 조사해 내자는 청(請)은 실로 온나라가 모두 분노하여 만부득이한 일이었는데, 혹은 ‘의심되고 암담(黯黮)한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하기도 하고, 혹은 ‘끝내 밝히기 어려운 지경으로 돌리었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주고받으며 폈다 접었다 하면서 수단에 따라 무함(誣陷)하고 형벌을 받게도 하여 마음껏 단련(鍛鍊)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성(慈聖)을 위해 변무(卞誣)한다고 말하니, 바로 진짜 하나의 자성을 무함하는 역신(逆臣)인 것입니다. 그 무리들의 마음에 처음에는 김일경이 성상을 무함하는 한 가지 일로도 조정의 신하를 모조리 함정에 빠뜨릴 밑천이 되기에 만족하다고 여겼다가 전하의 명찰하심이 이미 한 사람의 잘못으로 조정 절반의 신하에게 마구 미치게 해서 안 된다는 것을 통촉하시어 다시 만연(蔓延)시키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니, 생판 새 계책을 내어 백 가지로 억측(臆測)하여 감히 우리 전하의 지극한 효심(孝心)이 자성(慈聖)을 자중(藉衆)147)  함만 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한 말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무슨 사람의 도리이며, 이것이 무슨 세상의 변고입니까?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방만규를 엄히 국문하여 나라의 법을 쾌히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방만규의 소어(疏語)가 비록 매우 놀랍고 통분하나 그 인용한 사람도 또한 따져 다스리지 않았으니, 그 언사(言辭)를 감히 휘(諱)하지 않은 자를 먼저 다스리면 경중이 어떻게 되겠는가? 더구나 이러한 말은 한 번도 차마 들을 수가 없는데 또 성안(成案)하여 조사하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전(前) 군수(郡守) 김경연(金慶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는 어찌 일찍이 종사(宗社)와 만민의 주인이 되어 자신이 무함하는 더러움을 받고도 느리게 더러운 데에서 오히려 벗어나지 못함이 전하께서 오늘날 만난 것과 같음을 보셨습니까?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생각해 보소서. 이미 건저(建儲)하는 것을 그르다 하였고, 대리(代理)하는 것을 죄로 삼았으니, 그 건저하고 대리하는 처지에 무함과 핍박이 어떠했겠습니까? 전일의 비망기(備忘記) 십행(十行)이 간측(懇惻)하였는데, 사람 쓰는 한 조항으로 전지(銓地)에 있는 자를 죄책(罪責)함이 더욱 매우 엄격하고 분명하셨으나, 조정 신하들은 오직 자기 당을 세우고 다른 당을 배척하는 것으로 일삼습니다.
시험삼아 후원(喉院)에서 통의(通擬)한 일로 말하더라도 전조에 자리잡고 있는 자들에게는 성명(成命)이 있지 않아 이조(李肇)와 이세최(李世最)·심공(沈珙)이 비밀스런 곳에서 의논해 확정지워 간사한 계획을 내어 정원(政院)에 압력을 넣어 반드시 서울에 있는 무고(無故)한 사람을 차출해야 한다는 뜻을 아뢰게 하며, 서울에 있어 마땅히 의망(擬望)해야 할 사람도 무단히 빼어버리고 겨우 한두 사람으로 책임을 메워 의망하였으며, 심공으로 하여금 숨어 있으면서 참여하지 않게 하여 거짓으로 서로 통의(通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진소(陳疏)하여 교묘하게 공격해 제거할 계책을 합니다. 이미 의망하였다가 갑자기 빼어버리는 것은 오직 마음대로 하려고 하였으며, 삼사(三司)의 의망은 한결같이 버티고서 막았으니, 대개 그의 당여가 아닌 자가 한번 언지(言地)에 들어가면 그들의 죄역(罪逆)을 천청(天聽)에 상달(上達)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조원명(趙遠命)·조익명(趙翼命)은 바로 역괴(逆魁)의 지친으로, 조익명은 한림(翰林)의 천거에 저지를 당하자 세상의 버림을 받았는데, 청도 화관(淸塗華貫)148)  을 모두 외람되게 훔쳤으며, 소(疏) 가운데서 감히 ‘문생 천자(門生天子)’의 말을 꺼내 이거원(李巨源)을 구해(救解)하고, 역적 김일경의 죄를 영호(營護)하였습니다. 조원명은 근밀(近密)한 곳에 가까이 있으면서 역적 김일경을 힘껏 구원하였고, 초잡아 내놓은 계사(啓辭)가 요석(僚席)의 만류하는 바로 저지되었다가 이제 곧 급급히 전망(銓望)에 통의(通擬)된 것은 역적 김일경을 몰래 영호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청컨대 일체 모두 배척하여 내치소서."
하고, 인하여 청하기를,
"신임(申銋)의 방송(放送)은 후사(喉司)에 특명하여 전지를 받들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김일경이 몰래 쌓아 온 부도(不道)의 형상은 이미 통찰해 알고 있는데, 전형(銓衡)을 침척(侵斥)하는 것은 아주 공평함에 부족하다."
하였다.

 

 

 

1월 12일 신해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좌의정 유봉휘(柳鳳輝),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에게 특별히 선유(宣諭)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방만규(方萬規)·한세기(韓世基)의 소(疏) 때문에 상소하여 변명하였는데, 말하기를,
"예로부터 역적이 승복(承服)하면 원래 당원(黨援)을 묻느라 오랫동안 살려 두는 규정이 없는데, 김성절(金盛節)이 취복(就服)149)  한 지 6, 7일 동안 죽이지 않고 형신(刑訊)을 가하기까지 한 것은 오로지 적비(賊婢)의 이름을 조사하여 묻기 위한 것이며, 말을 다한 후에야 비로서 정형(正刑)했던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방만규는 조정 신하들을 날조하여 모함(謀陷)하기에 급하여 오로지 권세에 의지해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려고 하여 감히 전혀 헤아릴 수 없는 말로 함부로 위의 지경(至敬)·지존(至尊)한 자리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조정에서 비록 신에게 죄를 주고 신을 죽이더라도 방만규 같은 자의 유는 그 정상을 분명하게 밝혀 통렬한 처분을 가한 연후에야 인심이 바야흐로 진정되고, 국체(國體)가 비로소 존엄해질 것입니다. 신의 일편 단심(一片丹心)은 끝내 성상을 위해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신이 만약 자신을 위할 꾀로 이런 말을 한다면 전하께서 비록 형벽(刑辟)을 더하지 않더라도 천지 귀신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능지(陵誌)를 고쳐 짓자는 일은 신이 감히 억측해 대답할 것은 아니나, 숙종 때 여러 능의 지문(誌文)을 고치자는 청이 있었는데, 숙종께서 지문을 묻는 것은 사체가 중하다고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셨는데, 상소하여 청한 사람은 원래 논죄(論罪)한 일이 없었고 마침내는 지문을 고쳐 짓는 일을 사관(史官)에게 분부하라고 전교하시어, 신이 감히 이를 끌어대어 헌의(獻議)했던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경자년150)   3월에 성후(聖候)를 받들기 위하여 서울에 들어와 성 밖에서 4일을 머물었는데,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한 것은 바로 입궐(入闕)한 후 50여 일 만이었습니다. 국상(國喪)을 만나서는 외반(外班)에서 곡림(哭臨)하여 성복(成服)까지 이르렀는데, 곡림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번 국상 때는 중신(重臣)·재신(宰臣)으로 군함(軍銜)을 띠고 물러가 있는 자는 모두 외반에 나아가거나 혹은 야외(野外)에서 바라보고 곡하였는데, 신이 어찌 감히 동이(同異)를 비교하여 따져서 말한 자의 근거가 없는 것을 밝히겠습니까?"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세도(世道)가 함닉(陷溺)되어 정경이 아름답지 못하다. 무함이 감히 언급하지 못할 자리에까지 미쳤으니, 일이 매우 놀랍고 통탄스럽기 때문에 특별히 삭판(削版)을 시행하였다. 경의 소가 참으로 나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즉시 아주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도록 할 것이며, 지문(誌文)의 일은 고치기를 청한 사람이 비록 아주 무엄하나, 경의 복계(覆啓)는 선조(先朝)의 고사(故事)를 원용(援用)하였으니, 조금도 불안해 할 단서가 없다. 분곡(奔哭)을 하지 않았다는 일은 내가 비록 밝지 못하지만 어찌 그런 말을 믿겠는가?"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조경명(趙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방만규의 소는 모골(毛骨)이 송연함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렀으니, 전하의 나라가 망하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성상의 비답에 ‘도리어 무함한 것이다.’라고 한 전교는 일월(日月)처럼 모두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에서 ‘자성을 무함하였다[誣慈聖]’ 한 세 글자로써 하나의 변서(變書)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자성을 위해 토복(討復)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방만규를 국문하여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그 말과 비슷한 자가 있다면 위로는 정청(庭請)한 자에서부터 아래로 군교(軍校)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땅히 아울러 주벌(誅罰)하여 자성을 무함한 죄를 징토해야 하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방만규가 없는 사실로 자성을 무함한 죄는 비록 만번 죽이더라도 갚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그 조정 신하를 징토하느냐 방만규를 징토하느냐 하는 사이에 자성을 위해 변무(卞誣)하고 토복(討復)하는 대의(大義)가 이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원하건대 속히 처분을 내리시어 자성을 무함한 적으로 하여금 하루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 살지 못하도록 하소서. 윤서교(尹恕敎)의 소에 있는 조숙원(趙淑媛)에 대한 말이 신은 왜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비록 방만규가 지척(指斥)한 것으로 보더라도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한 것이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청망(淸望)이 막혔으니 대개 그 까닭이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역옥(逆獄)을 변환(變換)시키고 조정 신하를 경알(傾軋)151)  한 자는 마땅히 역적을 옹호한 형률을 시행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왕언(王言)이 한번 전파되면 사시(四時)처럼 믿게 되었는데, 방만규와 우덕삼(禹德三)의 소는 모두 변환시키는 근저(根柢)이고 경알하는 음계(陰計)인데도 아직껏 역적을 옹호한 율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전하께서는 처음만 있고 끝이 없는 덕이 있게 되어 이미 근심과 탄식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도 후사(喉司)에서 전교(前敎)를 쓸데없는 것으로 버리어 품지(稟旨)하기를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받아들였으니, 또한 매우 놀랍습니다. 해당 승지를 곧 체직(遞職)하여 파면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안세갑(安世甲)의 소(疏)에 신의 이름을 언급하였는데, 임인년152)   3월 28일, 김일경이 양전(兩殿)을 모해(謀害)한다는 말이 백망(白望)의 입에서 나왔고, 그 이튿날 대신이 입시하여 김일경을 억지로 나오게 한 일이 있었는데, 신도 함께 들어갔지만 한 가지도 진백(陳白)한 말이 없었습니다. 4월 2일에 백망이 또 대신과 재신(宰臣)이 동궁(東宮)을 모해하려 한다는 말을 했는데, 신은 대신이 국청에 앉아 명을 기다리다가 정파(停罷)하였으므로 빨리 처분을 내려 국문하는 일을 완결하라는 뜻을 계품했을 뿐, 원래 억지로 나오게 하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황유목(黃有牧)이 출사(出使)하는 것을 염피(厭避)하여 정소(呈訴)해 스스로 체임되고 공격해 버렸다는 말도 또한 뜬소문입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자 삼사(三司)를 이미 파직하였다는 것으로써 도로 내려 주기를 명했다.


 

 

 

승지 김상옥(金相玉)이 청대(請對)하자, 이조 참의 윤봉조(尹鳳朝)가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김상옥이 아뢰기를,
"적소(謫所)에 있는 사람 가운데 노친(老親)이 있는 사람을 써 들이라는 전교가 계셨는데, 이 밖에도 또 여러 해 동안 적소에 있는 자가 많으니, 마땅히 동일시하는 은혜를 고루 받아야 합니다."
하고, 윤봉조 역시 같은 말을 하니, 별단(別單)을 써 들이라 명하였다. 김상옥이 말하기를,
"삼사(三司)와 경재(卿宰)를 배치(排置)하여 의망할 방도가 없으니, 사유(赦宥)를 입은 여러 사람을 서용(舒用)한 연후에야 정관(政官)이 바야흐로 추이(推移)하여 의망할 수 있습니다."
하고, 윤봉조는 말하기를,
"민진원(閔鎭遠)을 서용하여 그로 하여금 한번 제반(祭班)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당초 특별히 방송한 뜻에 합당하며, 이 밖의 여러 사람 역시 점차 서용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사유를 입은 사람을 별단에 써 들이라고 명하였다.
민진원(閔鎭遠)·김재로(金在魯)·김취로(金取魯)·김희로(金希魯)·김조택(金祖澤)·황선(黃璿)·정형익(鄭亨益)·조정만(趙正萬)·이의천(李倚天)·조상경(趙尙絅)·이의현(李宜顯)·어유룡(魚有龍)·이중협(李重協)·박치원(朴致遠)·김유경(金有慶)·정호(鄭澔)·신사철(申思喆)·김고(金槹)·박태준(朴泰俊)·조영복(趙榮福)·신임(申銋)·장붕익(張鵬翼)·윤정주(尹廷舟)·강욱(姜頊)·오중한(吳重漢)은 서용하고, 이의종(李義宗)·이교악(李喬岳)·박사익(朴師益)·이명희(李命熙)·강계부(姜啓溥)·권경(權炅)·윤봉의(尹鳳儀)·윤득인(尹得仁)·이현록(李顯祿)·이징귀(李徵龜)는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송상기(宋相琦)·임방(任埅)·이희조(李喜朝)의 관직을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황일하(黃一夏)·이성조(李聖肇)·홍중우(洪重禹)·유봉징(柳鳳徵)·윤혜교(尹惠敎)를 승지로, 이기익(李箕翊)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민진원(閔鎭遠)을 예조 판서 지경연(禮曹判書知經筵)으로, 이재(李縡)를 부제학 동경연(副提學同經筵)으로, 이의현(李宜顯)을 지춘추(知春秋)로, 신임(申銋)·김흥경(金興慶)을 동춘추(同春秋)로, 김유경(金有慶)을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윤홍(尹泓)을 한성 서윤(漢城庶尹)으로, 송문상(宋文相)·윤섭(尹涉)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이봉익(李鳳翼)을 사간(司諫)으로, 박사성(朴師聖)·김상석(金相奭)을 정언(正言)으로, 유복명(柳復明)·이의천(李倚天)을 지평(持平)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수찬(修撰)으로, 김담(金墰)·이휘진(李彙晉)을 장령(掌令)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좌윤(左尹)으로, 김고(金槹)를 집의(執義)로, 정택하(鄭宅河)를 헌납(獻納)으로, 서종섭(徐宗燮)을 부교리(副校理)로, 서명우(徐命遇)를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삼고, 또 안중필(安重弼)·박성로(朴聖輅)를 승지(承旨)로 삼았는데, 모두 이조 참의 윤봉조의 정사였으며, 병조 판서 심수현(沈壽賢)이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어겨서 체차(遞差)하고 이유민(李裕民)을 대신하였다.

 

대사간 유명홍(兪命弘)이 청대하여 입시할 때 소회(所懷)를 아뢰기를,
"역적 김일경의 신축년153)   소는 양궁(兩宮)을 무함하여 핍박한 것이 매우 흉악하였는데, 구핵(究覈)하기 전에 미리 먼저 법을 다스려 거괴(巨魁)는 비록 죽었지만 여얼(餘孽)이 아직 남아 있으니, 지금 즉시 엄히 조사하기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소하(疏下)에 있는 6인을 아울러 잡아다 엄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악(元惡)이 이미 죽었는데, 따라 참여한 자를 어찌 나국(拿鞫)하기까지 하겠는가?"
하였다. 또 소회를 아뢰기를,
"윤서교(尹恕敎)의 상소에 김성(金姓) 궁인(宮人)을 논하였는데, ‘공봉(供奉)한 지 이미 오래여서 사랑하는 바를 역시 사랑한다.’는 등의 말은 가리키는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고 말이 음흉하니, 청컨대 잡아다 엄히 국문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자(文字)를 인용한 것이 매우 해괴하고 패만하기 때문에 지난번 삭출(削黜)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문자 사이의 일은 나국(拿鞫)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또 소회를 아뢰기를,
"사문(斯文)의 시비는 숙종(肅宗)께서 처분하심이 해와 별처럼 밝은데, 지난번 비국(備局)의 회계(回啓)에 감히 ‘선왕(先王)의 본의가 아니었다.’라고 함부로 무함하여 헐뜯었으니, 청컨대 회계한 여러 사람을 우선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회계한 사람을 써 들이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소회를 아뢰기를,
"이삼(李森)은 역적 김일경의 심복(心腹)이 되었다고 나라 사람들 모두가 지목하는 바입니다. 지난번 이봉익(李鳳翼)의 소에서 그 실상을 대개 거론하였는데, 감히 ‘체통에 구애되어 한 번 가서 보았다.’라고 말하였으며, 역적 김일경을 내쳐 유배할 때 그가 친신(親信)한 유성(劉姓)을 가진 장교(將校)로 하여금 몰래 노자를 주며 안부를 물었으니, 그가 임금을 잊고 적에게 붙은 죄는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삼은 쉽게 얻을 수 없는 무변(武弁)이니 비록 역적 김일경과 서로 알고 지냈다 하더라도 한 조정에 있는 뜻은 다르지 않는데, 한때의 일로 위리 안치하는 법을 쓰기까지 하는 것은 지나칠 듯하다."
하였다.
유명홍이 6적(六賊)을 국문하는 일을 윤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광무제(光武帝) 때에 반측(反側)한 무리들을 안심시킨 일이 있었으니, 지금 너무 심하게 해서는 안되고, 성훈(聖訓) 가운데도 ‘너무 심하게 미워하면 어지럽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바야흐로 넓혀 나가기를 힘쓰는 때에 너무 지나치게 해서는 마땅치 않고, 삭출(削黜)하는 것은 너무 가벼우니, 아울러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유명홍(兪命弘)이 윤서교(尹恕敎)의 일을 윤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음이 있었거나 없었거나간에 관계가 중대하니 한 번 묻는 것을 그만둘 수 없으나, 방만규의 소비(疏批)에 ‘귀로는 들을 수 있지만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전교가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캐묻는 즈음에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반드시 많을 것인데, 두 사람을 이제 만약 모두 따져 묻는다면 어찌 알 수 있는 일이 없으랴만, 해서는 불가하다."
하였다. 유명홍이 이삼(李森)의 일을 윤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붙잡아 올 때 문안했다면 용서할 수 없지만, 섬에 유배할 때 문안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일을 위로 올려 모조리 죄를 준다면 조정 사이에 온전한 사람이 많지 않게 될 것이니, 이 어찌 허물을 탕척하는 도리이겠는가?"
하였는데, 8일 후에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비변사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3대신에게 물었더니, 모두 그때 회계(回啓)를 주장한 사람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오래 된 사람을 반드시 추론(追論)할 것이 없는데, 써 들이게 한 것은 다만 알려고 했을 뿐이다. 그냥두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김일경을 정법(正法)한 뒤에 삼사(三司)를 일체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으니, 가율(加律)하기를 청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1월 13일 임자

심수현(沈壽賢)을 병조 판서로 삼으니, 이유민(李裕民)이 외직에 있으면서 체직했기 때문이었다.
소유(疏儒)로 피적(被謫)된 사람 홍우저(洪禹著)·나정일(羅廷一)·박번(朴蕃)·곽진위(郭鎭緯)·정만원(鄭萬源)·신구(申球)·윤현(尹俔)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유명홍(兪命弘)·정석삼(鄭錫三)을 승지로, 민진원(閔鎭遠)을 사복 제조(司僕提調)로, 윤석래(尹錫來)를 판결사(判決事)로, 이기진(李箕鎭)을 교리(校理)로 삼았는데, 윤봉조의 정사였다.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였는데, 말하기를,
"방만규(方萬規)는 진신(搢紳)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하기에 급하여 감히 부도한 말로 위로 감히 비의(比擬)하지 못할 자리를 핍박하여 곧바로 역비(逆婢)를 징토하기를 청한 사람을 거론하여 자성(慈聖)을 무함했다는 죄과로 돌렸는데, 한 사람만을 무고해도 오히려 거기에 해당한 율이 있는데, 더구나 백료(百僚)를 무고하였으며, 더구나 지존(至尊)·지경(至敬)한 자리까지 무함한 것이겠습니까? 이 일은 크게 강상(綱常)에 관계되니, 신은 방만규의 죄를 바로잡지 않으면 장차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안세갑(安世甲)의 소에 패륜(敗倫)된 말로 그때 경재(卿宰)와 삼사(三司)가 입대(入對)할 때 신은 나아가지 않았는데, 대신이 재차 보내온 말에 이르기를, ‘죄인의 지친(至親)으로 스스로 형적(形跡)이 있으니 분의(分義)상 감히 진대(進對)하여 인피(引避)하는 것에 득이 되는 것만 같지 아니함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입대하여 한 말에 단지 말하기를, ‘신은 죄인의 지친이어서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고, 다른 계사(啓辭)에 이르러서도 또한 입을 열어 다른 계사나 다른 사람처럼 논열하지 못했었습니다. 윤허를 입은 후 신은 먼저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않았으며, 신의 종형(從兄)154)  에 대한 계사 역시 그 날은 윤허되지 않았습니다. 그후 진하(進賀)하는 반열과 교문(敎文)을 지을 때, 회맹(會盟)하는 제사, 정시(庭試)에 고관(考官)으로 의망되었을 때 모두 참여하여 간섭하지 않았음은 온 조정이 다 알고 있습니다. 김일경이 운운(云云)한 말은 본래 신과 이광좌(李光佐)를 침해하여 욕한 말이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방만규의 일은 이미 영의정(領議政)의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안세갑의 소어(疏語)에 의리가 없는 것은 내가 이미 환히 알고 있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하였다. 검토관(檢討官) 홍현보(洪鉉輔)가 말하기를,
"제(齊)나라의 배택(裵澤)이 이르기를, ‘폐하(陛下)께서는 세밀(細密)한 데 손상되시니 제왕(帝王)의 법도가 자못 넓혀지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인군(人君)은 마땅히 관대하기를 힘쓰고 가혹하고 세밀한 것으로 경계를 삼아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齊)나라의 임금이 ‘새로 만기(萬機)155)  에 임하여 두루 자세하지 못할까 염려된다.’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성실하지 못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이조 참의 윤봉조(尹鳳朝)가 입시하였는데, 승지 김상옥(金相玉)이 진달하기를,
"능(陵)의 행차가 하루 남았는데, 병조 판서 심수현(沈壽賢)이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니, 윤봉조가 말하기를,
"대사마(大司馬)156)  는 중대한 임무인데, 어제 체직(遞職)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배(移拜)하였다가 오늘 또 그 사람을 체직시키고 다시 제배했으니, 전도(顚倒)된 듯싶고, 또한 성신(誠信)으로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까닭 없이 체직하고, 또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 차대(差代)하지도 않았으며, 또 잉임(仍任)시키지도 않아서 성실하지 못한 듯하기 때문에 다시 제배(除拜)한 것이니 성실하지 않은 것은 나의 본의(本意)가 아니다."
하였다.
사간(司諫) 이봉익(李鳳翼),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좌의정 유봉휘(柳鳳輝)의 큰 죄는 아직도 목욕하고 징토(懲討)를 청하는 데서 도망하고 있으니,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이에 조종의 아름다운 규범에 따라 깊이 국가의 대계(大計)를 생각하시고 위로 자지(慈旨)를 받들어 전하께 저부(儲副)의 중임(重任)을 부탁하셨는데, 저 유봉휘는 드러내놓고 불만하여 위태롭게 흔들 계책을 두어 종사(宗社)의 막대한 경사를 ‘국체(國體)가 너무 가볍고 망급(忙急) 초솔(草率)하다.’ 하였고, 금중(禁中)에서 정책(定策)하여 주고받은 것이 광명(光明)한데도 말하기를, ‘사령(使令)이 독촉하였다.’라고까지 하였으며, 저위(儲位)를 이미 세워 팔역(八域)이 경애하여 추대하는데도 혼자만이 경황(驚遑)하고 우혹(憂惑)하였고, 또 ‘인심이 의혹하여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했다.’는 등의 말을 공공연히 함부로 나쁘게 말하였으니, 그가 어떻게 감히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진 후에 문득 다른 뜻을 품고 천청(天聽)을 공동(恐動)시키고 나라의 근본을 모위(謀危)하기를 이처럼 무엄하게 합니까? 지금까지 하늘과 땅 사이에 누워 숨쉬면서 모두가 바라보는 자리를 더럽히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천지같이 포용하는 아량으로 비록 개의치 않는다고 하교하셨으나, 그가 만약 약간의 사람다운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천일(天日) 아래에서 머리와 얼굴을 들겠습니까? 청컨대 우선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문외(門外)로 출송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 영종(宋英宗) 역시 죄를 주지 않았으며, 내가 만약 노여움을 품어 청종(聽從)하지 않는 것이라면 본디 잘못이지만, 이는 그렇지 않으니,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봉익(李鳳翼)이 말하기를,
"죽어도 이 적(賊)과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송나라 일의 성교(聖敎)는 채양(蔡襄)157)  의 일을 가리키신 듯하나, 이것과는 다름이 있고, 또 진소(陳疏)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고, 김상옥(金相玉)은 말하기를,
"맹세코 이 적과 함께 살 수가 없다는 것은 유봉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일이 자신에게 관계된다 하여 용서하심이 있으나, 전하의 자리는 바로 조종(祖宗)의 자리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 영종(宋英宗)이 봉배(封拜)한 후에도 총급(怱急)하다고 말한 자가 있었었다."
하매, 유복명이 말하기를,
"이는 명호(名號)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행조(大行朝)에서 있었다면 혹은 되겠지만, 지금은 비록 하루에 열 번 아뢰어도 반드시 따르지 않겠다."
하매, 이봉익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그 무리들을 용서하시려면 차라리 신을 죽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억지로 권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는 음흉하게 속이는 것으로 화심(禍心)을 품고는 제멋대로 농락하고 함부로 마음 먹은 것을 행하였습니다. 역적 김일경이 교문(敎文)을 짓는 일이 나오자 간소(諫疏)가 한결같이 올라오고 여러 사람들의 말이 시끄러웠는데, 이에 도리어 역적 김일경을 숭장(崇奬)하여 팔좌(八座)158)  로 올리고 본병(本兵)159)  에 의망하여 애호하고 의지하기를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였습니다. 역적 김일경의 역절(逆節)이 드러나기에 미쳐서 성교(聖敎)가 측달(惻怛)160)  하셨는데도 자신이 삼사(三事)161)  에 있으면서 끝내 징토하기를 청하지 않았으며, 병신년162)   이후에는 스스로 심사(心事)를 폭로하지 못한다고 여겨 성고(聖考)께서 병환이 나신 날에도 반열에 나아갈 뜻이 없었으며 경자년163) 대상(大喪)164)   때도 또한 빈전(殯殿)에 나아가 곡하지 않다가 능침의 풀이 묵은 후에야 양양하게 〈염치를〉 무릅쓰고 나왔으니, 심사를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곳에서 뵙고 아뢰려고 이처럼 멋대로 하는 것입니까? 명릉(明陵)165)  의 지문(誌文)을 고치자는 청은 실로 망극한 변(變)인데도 수의(收議)함에 미봉(彌縫)하는 뜻이 있었고, 사문(斯文)의 시비는 유훈(遺訓)이 해와 별처럼 밝은데도 감히 ‘선왕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등의 말로 단번에 써서 결정지우며 함부로 무함하고 헐뜯었으니, 만약 약간이라도 선조(先朝)의 뜻을 생각함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까?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은 집안을 흉하게 만들면서 나라를 해칠 자는 아니다. 단지 역적 김일경에게 자급(資級)을 올려 준 일에 있어서는 오늘날 구실로 삼고 있으나, 다른 일로 본다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문(誌文)의 일은 선조(先朝)의 일에 의거해 한 것이니, 어찌 죄로 삼을 수 있겠는가? 빨리 정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은 부경(浮輕)하고 패악한 성품으로 옆에서 아첨하는 태도가 있어서 윤상(倫常)을 멸절(滅絶)시켰으므로 사람들 축에 끼지 못하였으며, 중병(重柄)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여러 간사한 사람을 농락(籠絡)하였습니다. 역적 김일경의 교문이 나왔을 때에 주문(主文)166)  이 된 자로 마땅히 자세히 따져 보아야 할 것인데도, ‘접혈(蹀血)’이란 두 글자를 예사로 보았으므로, 성상께서 그 역절(逆節)을 밝히시어 애통(哀痛)한 교서를 거듭 내렸으나 자신이 삼사(三事)에 있으면서 병을 칭탁하고 드러누워 역적을 징토하자는 말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엄정한 처분이 있기에 미쳐서는 스스로 빠져나올 계책을 하려고 하여 드디어 혐의가 있는 말을 하였고, 작년 김일경이 원접사로 나갈 때에는 서교(西郊)에서 전송하여 술잔을 나누면서 즐기고는 시구(詩句)에 뜻을 붙였는데, 혐의 있는 자가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정책 국로(定策國老)’·‘문생 천자(門生天子)’의 말은 아주 패악하여 윤리(倫理)가 없음이 어찌 이토록 극에 이르렀겠습니까? ‘문생·국로’란 바로 당(唐)나라 때 환관(宦官)의 무리들이 어두운 임금을 옹립(擁立)했던 일인데, 이것이 과연 어떤 때이기에 감히 오늘날에 비교하는 것입니까? 생각해낸 뜻이 해괴하고 패악하여 협박하며 무함하고 더럽히는 것이 끝이 없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교문(敎文)의 일은 비록 자신이 주문(主文)이 되어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으로 죄를 삼았으나, 자기가 간여하지 않은 일을 어떻게 죄주겠는가? 빨리 정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지난번 참독(慘毒)했던 칼날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만,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어찌 참혹한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봉익(李鳳翼)이 윤서교(尹恕敎)·이삼(李森)에 대한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사상(李師尙)은 역적 김일경의 혈당(血黨)으로 흉한 의논을 주장하고 마음 먹은 것을 자행(恣行)하여 선한 사람을 해쳤는데, 작년 소 가운데서는 감히 숙종 때의 여러 신하를 혼조(昏朝) 때의 흉당(凶黨)에 비유해 논하였으니, 마음씀이 아주 흉악하고 말 만든 것이 절패(絶悖)하였습니다. 심지어 ‘후일의 계책을 삼았다.’고 한 것은 그 마음을 더욱 헤아리기 어려우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안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숙종의 아드님이시고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아우님으로 조종(祖宗)의 부탁을 받았으니, 오늘날 전하를 섬기는 자가 누군들 그 사이에 이의(異議)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명언(李明彦)은 이에 감히 ‘원립(援立)’·‘옹립(擁立)’ 등의 말을 함부로 장주(章奏)에 썼으니, 대개 그 흉계가 군부(君父)를 협박하여 손을 놀리지 못하게 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청컨대 절도에 안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소한 말이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섬에 유배하는 것은 지나치니, 관직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하라."
하였다. 유복명이 또 아뢰기를,
"‘접혈(蹀血)’·‘회인(懷刃)’ 두 구절의 말은 실로 천만고(千萬古)에 차마 듣지 못할 흉악한 말이니, 남의 신하 된 자는 피땀을 흘리면서 징토하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이 해야 할 것인데, 그 날의 삼사(三司)는 예사 일과 같이 보아 묵묵히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그 화응(和應)하고 함께 붙은 형상은 통분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그때의 삼사(三司)를 모두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역적 김일경의 교문이 나온 후 역적 김일경을 추장(推奬)하여 쓴 전관(銓官)은 영호(營護)한 자에 비해 거의 더 죄가 큽니다. 선조(宣祖) 때 정여립(鄭汝立)에게 제직(除職)한 전관도 한결같이 아울러 논죄하였으니, 청컨대 그때의 전관도 일체로 적발하여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일경의 일이 일어나기 전에 당(黨)에 물든 사람들을 어찌 모조리 살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본병(本兵)의 장(長)은 지망(地望)이 자별(自別)한데, 이유민(李裕民)을 특별히 제수하였다가 체출(遞出)한 것은 뜻밖입니다. 본직은 비록 이미 개차를 윤허하셨으나, 자급(資級)을 그대로 올릴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자급을 올리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김창집(金昌集) 등의 일은 정계(停啓)하고, 이사상은 남해(南海)에 정배(定配)하였다.

 

1월 14일 계축

밤 4경(四更)에 달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홍호인(洪好人)·권변(權忭)·윤석래(尹錫來)를 승지로, 김재로(金在魯)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익순(權益淳)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삼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복령(李復齡) 등이 상소하여 방만규(方萬規)를 참(斬)하기를 청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궁비(宮婢)를 조사하기를 청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우리 동조 모의(東朝母儀)의 존귀함에 참여시키는 것입니까? 그리고 감히 비의(比擬)할 수 없는 곳에 비의한 것은 반드시 이와 같이 한 연후에야 선한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흉계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들의 전에 한 소가 만약 혹 적(賊) 방만규가 말한 것과 같다면, 비록 머리를 나란히 하여 죽음에 나아가도 마음에 달게 여기겠으며, 차마 이런 적과 같은 천하에서 함께 살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방만규의 일은 내가 이미 그 말이 매우 윤리가 없음을 알고 있는데, 장보(章甫)들의 청이 또 이러하다. 그러나 내가 윤허하지 않는 것은 차마 제기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1월 15일 갑인

신시(申時)에 햇무리가 지고 왼쪽에 이(珥)가 있었으며, 밤 3경에는 달이 자미 서원(紫微西垣)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을 내국 제조(內局提調)로, 신필현(申弼賢)을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정광제(鄭匡濟)·이태징(李台徵)을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으로 삼았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어영병(御營兵)이 마땅히 거가(車駕)를 따라가야 하는데, 대장 이삼(李森)은 성 밖에 있고 겸대장(兼大將) 김중기(金重器)는 유도 대장(留都大將)으로 본국(本局)의 군사를 거느려, 어영병은 영솔(領率)할 대장이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위병(禁衛兵)을 마땅히 모아야 하는데, 대장 심수현(沈壽賢)이 밖에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금군 별장(禁軍別將)을 불러 군사를 모으라는 일을 분부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호위 군관(扈衛軍官)은 마땅히 유도 대신(留都大臣)에게 소속시켜야 하나, 이미 유도 대신이 없으면 소속시킬 곳이 없으니, 결진(結陣)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금군진(禁軍陣)의 예에 의해 별장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수찬(修撰) 홍현보(洪鉉輔)가 차자(箚子)를 올려 능행(陵行)하는 기일을 늦추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유도(留都)하고 호필(扈蹕)167)  하는 사람이 없다면 사체를 휴손(虧損)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인산(因山)168)  이 이미 지나고 춘로(春露)가 이미 내렸으니, 원침(園寢)에 전배(展拜)하는 것은 인정상 그만둘 수 없다. 조의(朝儀)는 문식(文飾)이고, 전배(展拜)하는 것은 본질(本質)이니, 이것이 선유(先儒)가 이른바 화려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질박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였다.

 

가주서(假注書) 남위로(南渭老)가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에게 비답의 글을 전하고, 계(啓)를 올려 그의 말을 전하니 대략 이르기를,
"김일경이 빈사(儐使)가 되어 서쪽으로 나갈 때 신이 호조 판서로서 영접 도감 당상(迎接都監堂上)이 되어 여러 낭관을 거느리고 칙사(勅使)와 함께 사현(沙峴)으로 나갔습니다. 김일경은 예에 따라 먼저 홍제원(弘濟院)으로 나갔는데, 한 가지 일만은 사람들이 부회(傅會)하는 것 같습니다. 계묘년169)   겨울에 김시혁(金始㷜)이 사복 정(司僕正)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燕京)에 가게 됨으로써 신이 사복 제조(司僕提調)가 되었으며, 본시(本寺)는 으레 낭관을 위해 송별연(送別宴)을 베풀게 되어 부사(副使) 이명언(李明彦)도 함께 자리했습니다. 김일경을 두 사신이 와서 만나보게 되었는데, 이명언이 신에게 전별시를 구하면서 말하기를, ‘여러 벗들의 이별하는 시(詩)에 모두 형(荊) 자를 압운(押韻)하였다.’ 하고, 또 김일경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조 판서(趙判書)를 만나서 염파(廉頗)가 부형(負荊)했다170)  는 형자로 압운했으니, 두 사람은 함께 싸우지 말아야 좋습니다.’ 했는데, 이는 김일경을 비난하여 신에게 빨리 사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김시혁을 전송한 것을 김일경을 전송했다고 하여 의란(疑亂)할 계책을 삼은 것입니다."
하였다.

 

1월 16일 을묘

임금이 의릉(懿陵)171)  을 배알(拜謁)하여, 능(陵) 위를 봉심(奉審)하고 곡장(曲墻)172)   앞을 두루 돌아다니니, 여러 신하들이 수고로움을 간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이에 친향(親享)을 예(禮)대로 행하였다.

 

출궁(出宮)할 때 대가(大駕)가 이교(二橋) 근처에 이르자 길 남쪽에 있던 사람이 해괴한 소리를 질러 금오 나졸(金吾羅卒)이 붙잡아 와 이름을 물으니, 바로 이천해(李天海)였는데, 형조(刑曹)에 분부하여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비망기에 이르기를,
"방만규(方萬規)의 상소 가운데 지적한 뜻이 흉악하고 참혹하여 놀랍고 통분함을 이길 수 없어서 흉패한 말을 차마 다시 제기할 수 없어 특별히 투비(投畀)하는 법을 시행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말이 그 어버이를 침해하면 사람의 자식된 자는 이를 갈면서 통렬하게 변석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차마 못하는 것은 조그마한 절차이고 역적을 토죄하는 것은 큰 관계이니, 한번 친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 방만규를 즉시 잡아다 국청을 설치하라."
하였다.

 

심단(沈檀)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기익(李箕翊)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박성로(朴聖輅)를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정형익(鄭亨益)을 판결사(判決事)로 삼았다.

 

여러 승지가 입시할 때 임금이 말하기를,
"방만규의 소어(疏語)는 단안(斷案)하기에 족하다."
하니, 도승지(都承旨) 유명홍(兪命弘)이 말하기를,
"진신(搢紳)들의 소에 대한 비지(批旨)로 보면 성상의 뜻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는데, 대개 그 말이 비록 아주 패악하긴 하나 스스로 유래(由來)된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1월 17일 병진

오시(午時)에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는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햇무리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다. 빛깔은 모두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으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고상(故相) 권상하(權尙夏)의 관작과 송시열(宋時烈)의 도봉원(道峰院) 제향을 회복하고, 적소에 있는 사람 이병상(李秉常)·홍우전(洪禹傳)·황재(黃梓)·홍석보(洪錫輔)는 석방하여, 양이(量移)173)  하고, 김진상(金鎭商)은 감등(減等)하였다.

 

말을 하지 않은 삼사(三司)로 정제두(鄭齊斗)·서명우(徐命遇)·이경열(李景說)·신유익(愼惟益)·이제(李濟)·윤회(尹會)·조익명(趙翼命)·이진순(李眞淳)·심공(沈珙)·윤연(尹㝚)을 현고(現告)하고, 교문(敎文)을 지어 올릴 때에 말을 하지 않은 삼사로 이광도(李廣道)·정석오(鄭錫五)·김시엽(金始燁)·김동필(金東弼)·조익명(趙翼命)·조진희(趙鎭禧)·이현장(李顯章)·권익순(權益淳)·여선장(呂善長)·윤유(尹游)·이승원(李承源)·윤행교(尹行敎)를 현고하며, 지문(誌文)을 고쳐 짓자고 발론한 대간(大諫)으로 박장윤(朴長潤)을 현고하였는데, 갑자기 정석오는 도위(都尉)의 손자이고 또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다 하여 삭직(削職)을 중지할 것을 명하였다.

 

친국(親鞫)에 입시할 때 임금이 말하기를,
"천둥의 이변이 양기(陽氣)가 폐장(閉藏)되는 때에 나오고, 무지개의 이변이 또 천지 생물이 시작되는 때에 있으니,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는데 자성(自省)하는 도리를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겠는가?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도 역시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기를 생각하여 화평(和平)한 데로 돌려서 나라를 보존하기에 힘쓰도록 하라."
하고, 물러가기에 임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은 입시하였다가 곧바로 물러난 예가 없으니, 전계(傳啓)174)  하는 것이 옳다."
하니, 이봉익(李鳳翼) 등이 세 차례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는데, 조태억(趙泰億)의 계사 가운데서 ‘김일경의 빈행(儐行)’ 한 구절을 빼고 다만 말하기를,
"전석(餞席)에서 시(詩) 짓고 술 마신 것은 그 역시 숨기지 못했습니다. 또 이른바 혐의란 것은 문형(文衡)175)  을 다툰 데 불과한데도 선후의 합계(合啓)가 바야흐로 한창인 가운데 부주(附奏)176)  하여 스스로 변명하였으니, 방자하고 무엄합니다."
하는 등의 말을 첨가하였다. 이봉익이 4계(四啓)를 거듭 아뢰고, 유복명(柳復明)은 1계를 거듭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논계(論啓)를 받은 사람은 대계(臺啓)를 거두기 전에는 감히 지레 변명할 수 없는데, 더군다나 합계(合啓)한 것에 죄명이 아주 중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조태억은 국법을 두려워함이 없고 대각(臺閣)을 능멸하여 왕인(王人)177)  에게 지시하고 부탁하여 부주하면서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하고, 사관(史官)은 쟁집(爭執)하지 못하고 도리어 치계(馳啓)하여 마치 번갈아 분소(分疏)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나라의 기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까? 청컨대, 해당 사관을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고 전교하기를,
"옛사람이 옥중(獄中)에서 글을 올린 자도 있었으니, 변명할 일이 있으면 비록 사관이 서계(書啓)하더라도 어찌 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군사(軍士) 이천해(李天海)가 흉언(凶言)이 범필(犯蹕)178)  된 것으로써 복주(伏誅)되고 함께 국문하던 방만규(方萬規)를 죽였다. 형조 참의 박성로(朴聖輅)가 이천해의 공초를 받아가지고 구대(求對)하여 진달하기를,
"이천해가 말하기를, ‘처부(妻父) 하윤원(河潤遠)이 자신을 박대하여 처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려 하고 그의 처는 작당(作黨)하여 자신을 죽이려 하기 때문에 원한을 갚기 위한 계책으로 거가(車駕) 앞에서 상언(上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래 조항의 위를 무함한 부도한 말은 오늘의 신하 된 자가 들을 수 없는 바이기 때문에 차마 붓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천해의 처가 정장(呈狀)하여 말하기를, ‘이천해는 도깨비에게 홀려 혹 스스로 목을 찌르기도 하고 혹은 배를 찌르기도 했다.’ 하였기 때문에 직접 시험하여 보았더니, 과연 상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대저 실성(失性)한 사람인데 거둥하실 때 구경차 뛰어나온 것이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광인(狂人)이라 하더라도 이미 그런 말이 나왔으니,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그 때 자칭(自稱) 고자(告者)179)  라고 한 것을 승지는 듣지 못했는가?"
하니, 승지 김상옥이 말하기를,
"단지 ‘이번 환국(換局)이 어찌 옳은가?’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하니, 잡아다 국문할 것을 명하였다. 이천해는 나이 29세인데, 공초(供招)하기를,
"무예 별감(武藝別監) 하윤원(河潤遠)은 처부(妻父)인데, 저를 모살(謀殺)하려 했습니다. 하윤원이 궐내에 입번(入番)하여 다른 사람을 시켜 저를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살아나기를 바라서 진(陣)에 들어가 고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한 차례 형을 가했으나 불복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죄인의 흉악한 말은 문서 가운데 쓰지 말라."
하였다.
묻기를,
"흉악한 말을 너는 하윤원이란 자에게 들었다고 말하지만 반드시 이는 낭설이니, 어디서 들었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신윤정(申潤廷)에게 들었는데, 그들이 서로 말을 했기 때문에 옆에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승지 홍호인(洪好人)이 말하기를,
"죄인이 비록 미쳐 헛소리했다고 말하지만 말하는 것이 아주 흉악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미쳐 헛소리한 것이 아니다. ‘고자(告者)’란 두 글자 역시 음참(陰慘)하다. 그때 그가 처음에는 ‘국가가 무상(無狀)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환국(換局)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했으니, 단지 요탄(妖誕)한 것인데, 이제 그의 흉언을 모조리 들었다."
하였다. 이천해가 또 부도한 말을 하여 승지 유명홍(兪命弘)과 홍호인(洪好人)이 하윤원(河潤遠)과 신윤정(申潤廷)을 잡아오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천해의 말 가운데 ‘대궐 안을 왕래했다.’ 하였으니, 그 말이 더욱 아주 흉참함을 알 수 있다."
하고는, 인하여 전교하기를,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史官)은 쓰지 말아야 한다."
하니, 가주서(假注書) 홍서(洪曙)가 말하기를,
"그 말이 아주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초책(草冊)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환국(換局)의 설(說)을 9월 20일 하윤원에게 들었다고 하였는데, 환국에 대한 말을 경청(傾聽)하였다는 것이 어찌 말이 되는가? 아까는 하윤원에게 들었다고 했다가 지금은 길에서 들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동의금(同義禁) 이기익(李箕翊)이 말하기를,
"죄인은 광병(狂病)이 있는 자입니다."
하였다. 신윤정에게 물었는데, 신윤정의 나이는 49세였다. 공초하기를,
"무업(武業)을 익혀 바야흐로 호위 군관(扈衛軍官)이 되었습니다. 이천해는 동생의 집 협호(挾戶)에 사는데 9월 사이에는 함께 그 집에 있었습니다. 이천해가 평소 하윤원을 찾아가 보면 반드시 술을 대접했는데, 이천해는 갑자기 욕설을 퍼부으며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한다.’라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천해에게 묻기를,
"하윤원이 먼저 말했느냐, 신윤정이 먼저 말했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하윤원이 먼저 말했는데, 하윤원은 대궐 안을 왕래하였기 때문에 알고서 말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윤정이 그런 말을 하니 하윤원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이와 같은 말은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전후의 말이 같지 않음을 물으니, 공초하기를,
"처음에는 잊어버렸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잊어버렸다면 9월이란 말은 어찌 기억하고 있느냐?"
하니, 이천해가 또 부도한 말을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이런 말을 하였다면 하윤원을 죽일 수 있는데, 끝에 가서 또 말하기를 길에서 들었다고 한다. 하윤원 무리가 길에서 이런 말을 했는가?"
하니, 이천해가 말하기를,
"뜻하지 않은 가운데 나온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환국에 대한 말은 그 동생 만해(萬海)에게서 들었는데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환판(換板)되는 것이 좋다.’는 설과 ‘무상(無狀)하다.’는 말이 상반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천해가 말하기를,
"환국이 좋다는 설은 과연 잘못 진달한 것이며, 무상하다는 설은 곧 직고(直告)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무슨 마음으로 무상하다고 말했겠는가?"
하니, 이천해가 말하기를,
"이 말은 실로 신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 말은 신윤정의 말이 아니라, 이는 바로 신이 스스로 죽음을 당해서 한 말입니다."
했는데, 돌려서 또 말하기를,
"이 말은 신윤정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24번 압슬(壓膝)하였으나, 이천해는 불복(不服)하였고 또 아프다는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처럼 흉악하고 사나우니,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하였다. 신윤정을 형신(刑訊)하고 묻기를,
"너는 이천해가 광병(狂病)이 있다고 하는데, 친문(親問)할 때 보니, 네 말과 달랐다. 이는 반드시 이천해가 범필(犯蹕)하여 갇힌 후에 연루(連累)될까 겁을 내어 하윤원의 딸을 시켜 형조(刑曹)에 거짓 정장을 하게 하고 이를 끌어 속일 계책을 삼은 것이다."
하니, 신윤정이 공초하기를,
"이천해가 저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속여서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역모(逆謀)했다는 등의 말로 무고하는 것도 오히려 혹은 가하다고 하겠지만, 지금 이천해의 말은 아주 뜻밖이니,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하니, 신윤정이 공초하기를,
"이천해는 본디 실성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역시 부득이하여 정법(正法)했는데, 이제 또 이천해의 차마 못할 말이 있게 되었으니, 이런 말을 듣고 심담(心膽)이 떨어지려고 한다. 신윤정의 발명함이 매우 수상하나, 옛사람이 사수(死囚)를 다스리면서는 재계(齋戒)하고 일을 처결하는 규례가 있었으니, 우선은 형을 중지하라."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이 말하기를,
"하윤원의 공초가 수상한데, 이제 성교(聖敎)를 받드니 감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이 지나친 형을 하지 않으면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노여움을 당하면 이치로 살피라.’는 말이 있으니, 공평한 마음으로 천천히 따져보면 저절로 합당하게 처리할 도리가 있게 된다."
하였다. 이튿날 또 친국(親鞫)하여 이천해에게 형을 더하여 언근(言根)을 물으니, 공초하기를,
"신윤정에게 들었습니다."
하니, 묻기를,
"반드시 들은 곳이 있을 터인데 도리어 신윤정이라고 고하니, 매우 음흉하다. 신윤정을 죽이고자 한다면 모역을 했다고 해도 되는데, 그 말이 어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겠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신윤정과 하윤원이 술을 파는 사람 이상만(李相萬)과 함께 말했습니다."
하였다. 또 물으니, 공초하기를,
"허손(虛損)하여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귀신이 씌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헛것이 와서 시켰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 말을 누군들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천해가 또 신덕하(申德河)를 이끌어 들이니, 임금이 말하기를,
"널리 퍼진 말을 문랑(問郞)은 다 쓸 필요가 없다. 이끌어 대는 것이 모두 원한이 있는 자들이다."
하니, 홍호인이 말하기를,
"신윤정은 비록 이천해를 미쳤다고 하지만, 이천해는 미친 것이 아닙니다. 신윤정이 이천해의 처를 시켜 형조에 정장(呈狀)하게 한 것 역시 두루 막으려는 자취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천해와 신윤정을 면질(面質)시키니, 신윤정이 이천해를 향해 말하기를,
"네가 비록 세정(世廷)에게 미루지만 세정은 집에서 밥을 찾아먹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집에 있으면서 담화(談話)할 시간이 있으며, 20일 내가 방회(房會)로 집에 있지 않다가 돌아와서는 취하여 쓰러졌었는데, 어찌 일찍이 너와 담화를 하였겠는가?"
하니, 이천해(李天海)가 말하기를,
"20일 방회(房會)에 너는 어찌 네 아들을 대신 보내고 집에 있지 않았느냐? 그날 아침밥 먹기 전에 서로 모여 이 말을 하였다."
하니, 신윤정이 장찬명(張纘明)을 끌어대었다. 이천해가 말하기를,
"장찬명은 그날 식전(食前)에 과연 함께 있었다."
하여, 장찬명을 잡아와 20일 신윤정이 방회에 가서 참여했는지 여부를 물으니, 장찬명이 공초하기를,
"20일 방회에 신윤정이 바로 그때 소임(所任)이었으니 마땅히 와 모였을 듯하나, 확실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여, 여러 차례 물었으나, 공초한 바가 처음과 같았다. 또 말하기를,
"9월에는 신윤정이 연달아 와서 모인 듯합니다."
하니, 장찬명의 방송(放送)을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신윤정의 거조가 수상함이 이천해와 다름이 없는 듯하다."
하니, 심단(沈檀)이 말하기를,
"이는 그가 말한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신윤정에게 형을 가해 묻기를,
"거짓으로 형조(刑曹)에 정장(呈狀)한 것은 먼저 발명하려는 계책을 면치 못하는데, 감히 날짜를 마침 항상 정해져 있는 방회날로 하여 요행히 면할 계책을 삼았다. 너는 평소 감언(敢言)과 이런 흉패한 말이 저처럼 흉악하고 사나운 무리들에게 들린 것이 명약 관화(明若觀火)한데, 너는 어디에서 이 말을 들었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이는 이천해의 광언(狂言)·망설(妄說)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문랑(問郞) 서명구(徐命九)가 말하기를,
"이천해는 광인(狂人)이 아닙니다."
하니, 신윤정을 한 차례 형신(刑訊)했으나 불복(不服)하였다. 임금이 이천해를 바로 정법(正法)하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를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정법하기를 청하였다.
지평 유복명(柳復明)이 말하기를,
"결안(結案)을 받아 정법하지 않으면 왕장(王章)에 어긋남이 있으니 결코 처음 행할 수 없으며, 결안을 받은 후에 정법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즉시 결안을 받으라고 명하였다. 이천해의 근각(根脚)은 부(父)는 이수흥(李壽興)이고, 부의 부는 이정령(李廷齡)이며, 모(母)의 부는 신봉길(申鳳吉)인데, 동부(東部) 연일(連一) 연이계(連二契)에서 출생하여 자랐다. 함부로 범필(犯蹕)해서 감히 흉패하여 차마 듣지 못할 말을 해 대역 부도(大逆不道)를 한 것이 확실하게 지만(遲晩)되었으니 부대시(不待時)180)  하고 능지 처참(凌遲處斬)하여야 하는데, 임금이 신윤정에게 형을 가하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를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감사(減死)해도 무방합니다."
하니, 유복명이 말하기를,
"형을 가해 캐물어서 실정을 알아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형을 가하면 반드시 지레 죽을 것인데, 밝히기 어려운 일로 죽이기에 이른다면 어찌 되겠는가? 신윤정은 섬으로 유배하고, 하윤원은 이미 이천해의 공초에서 나왔으니, 멀리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흉당(凶黨)들이 강력히 건저(建儲)하는 것을 막는 계책을 했으나 이미 이루어지지 않자 김일경·목호룡이 무옥(誣獄)을 일으킬 것을 꾸며내어 반드시 감히 말을 하지 못할 자리에서 동요시키려고 하다가 계획이 또 이루어지지 않자 상(上)이 대위(大位)에 광림(光臨)하기에 미쳐 불량한 무리가 떼를 지어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고 거짓말로 선동하여 사방을 미혹시키다가 이천해의 흉언에 이르러 극에 달했으나, 사납고 완악(頑惡)하게 신문(訊問)에 불복하여 단서를 밝혀내지 못했다. 무신년181)  의 변에 미쳐 임환(任環)의 공초에 말하기를,
"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이 흉언(凶言)을 만들어 내어 내외가 서로 응했습니다."
하고, 후에는 이에 말하기를,
"그때 이천해에게 흉언을 하도록 사주(使嗾)한 자가 이번에도 도왔습니다."
하였고, 이유익은 말하기를,
"심유현이 흉언을 만들어내어 여항(閭巷)에 전파하였습니다."
하고, 한세홍(韓世弘)은 말하기를,
"심유현의 흉언이 만약 일찍 발각되었다면 마땅히 큰일이 일어났을 것인데,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으니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유익(李有翼)은 또 말하기를,
"심유현이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만들어내어 성덕(聖德)을 더럽혀 인심을 선동하여 역모의 일을 이루려 했습니다."
하였고, 이사로(李師魯)는 공초하기를,
"심유현은 자기가 척리(戚里)182)  여서 고관(高官)이 될 수 있는데, 만약 이런 때가 아니면 초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고, 이유익은 말하기를,
"이러한 말을 전파시키면 인심을 의혹시킬 수 있고, 많이 전파하고 나면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여길 것이니,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인심에 달려 있습니다. 적에게 붙은 무리들이 모두 흉언이 근거가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욕심에 이끌리어 이 역모를 함께 하였습니다."
하였고, 이익관(李翼觀)은 공초하기를,
"이유익이 처음 이 흉언을 하였는데, 이유익은 박필현(朴弼顯)에게 들었습니다. 이천해가 처음 생민동(生民洞)에 살다가 후에 수각교(水閣橋)로 이사하였는데, 신이 서울을 왕래하면서 이천해를 주인으로 삼았고, 신이 속두(粟斗) 주기를 요구하면 이천해가 왔기 때문에 신의 형제(兄弟)가 밤에 이천해와 함께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천해는 평소 당돌하였기 때문에 신이 과연 지시하여 시켰으며, 언근(言根)은 또 이일좌(李日佐)에게서 나왔는데, 이일좌는 이홍택(李弘澤)의 아들이며 이인좌(李麟佐)의 일가로 과천(果川)에 살면서 적당(賊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하였으니, 대개 이유익(李有翼)·박필현(朴弼顯)이 심유현을 꾀어 흉언을 만들어 내게 하고, 또 이익관(李翼觀) 형제, 민관효(閔觀孝)·한세홍·이일좌 등과 함께 원근에 전파한 것이다. 이익관이 또 이천해에게 변을 일으키도록 사주한 형상이 이때에 이르러 모조리 드러났고, 이유익의 무리가 반드시 심유현을 꾀어 흉언을 만들어 낸 것은 심유현이 왕실(王室)의 척련(戚聯)이기 때문에 그 말을 빙자(憑藉)하여 사람들의 청문을 현혹시키려 한 것이니, 아! 역시 흉악하였다. 그 흉언은 대개 무신년183)   역적의 격문(檄文)과 신치운(申致雲)의 흉언이 같다고 한다.
방만규(方萬規)에게 묻기를,
"적(賊) 김일경의 기(冀)·현(顯)이란 흉언은 이미 정법(正法)하였는데, 함부로 각주(脚註)를 달은 자가 말한 것의 흉패함은 인용한 자보다 더 심함이 있으니, 김일경은 마음에 간직한 자이고 너는 말로 낸 자이다.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로 끌어올렸는데, 상소문은 과연 스스로 지은 것인가?"
하니, 방만규가 공초하기를,
"적 김일경을 비록 정법하였으나 그 무리 6인도 마땅히 같은 율(律)을 써야 합니다. 기(冀)·현(顯)이란 흉패한 말을 전후의 소장(疏章)에서 분명하게 말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자세히 말한 것입니다. 김성 궁인의 일은 대행조(大行朝) 때 원래 없다는 전교가 계셨으나 시종 쟁집(爭執)했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유응환(柳應煥) 등의 소를 한데 모아 단장 취의(斷章取義)184)  한 것이 비록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했지만 실은 사주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소급수(小急手)란 말이 얼마나 흉패한데 네가 소 가운데서 감히 동조(東朝)도 그 사이에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가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인가?"
하니, 방만규가 공초하기를,
"교문(敎文) 가운데 말하기를, ‘내옥(內屋)의 척련(戚聯)이라’ 하였고, 또 ‘하나의 서찰(書札)로 다시 중신(重宸)에 꾀했다.’라고 했기 때문에 인용하여 말한 것입니다. ‘기·현’ 두 글자와 김성 궁인의 일 역시 그 때문에 쓴 것입니다."
하니, 형(刑)을 가하라고 명하여 말하기를,
"사주한 사람을 고하면 멈추고, 그렇지 않으면 형을 가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윤봉조(尹鳳朝)가 시켜서 한 것이며, 또 이름을 모르는 회동(灰洞)에 사는 사인(士人)의 하인 진필웅(秦必雄)이 그 사람과 윤 참의(尹參議)와 서로 친하다고 하면서 진필웅이 소초(疏草)를 가지고 왕래했고, 제가 몸소 회동 이성(李姓) 양반집을 왕래하여 소초를 가지고 이한동(李漢東) 집에 와서 이한동으로 하여금 준엄(峻嚴)한 말을 고치게 하였는데, 이한동이 말하기를, ‘준엄한 곳이 없다.’라고 했기 때문에 베껴 바친 것입니다."
하였다. 윤봉조에게 물으니, 공초하기를,
"방만규는 얼굴을 모르며, 진가(秦哥) 및 회동 사는 이성인 사람 역시 얼굴과 성명(姓名)을 모릅니다. 그가 과연 저와 서로 친하다면 어찌 친히 보고 소초(疏草)를 청하지 않았겠으며, 진가는 얼굴을 모르는데 그가 어떻게 저에게서 소초를 얻어 방만규에게 보였겠습니까?"
하니, 윤봉조와 방만규를 면질(面質)시키도록 명했다.
방만규가 윤봉조를 향해 말하기를,
"정유년185)   사이에 포폄(褒貶)할 때 공좌(公座)에서 보았다."
하니, 윤봉조가 말하기를,
"폄(貶)한 자리에서 본 것인데 어찌 이로써 안면이 있다고 말하는가? 네가 비록 나와 말을 나누었다 하더라도 나는 많은 관원 가운데서 어떻게 너를 알 수 있겠는가?"
하니, 방만규가 말하기를,
"진필웅을 너는 모르는가?"
하니, 윤봉조가 말하기를,
"모른다."
하니, 방만규가 말하기를,
"진필웅이 조극량(趙克亮)의 집을 왕래하면서 말하기를, ‘윤 참의가 향리(鄕里)에 있는데 만약 올라오면 상소를 할 수 있게 된다.’라고 하였는데, 너는 모르는가? 진필웅이 소초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너의 집에서 온다고 하였다."
하고, 얼마 후 또 말하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조극량이 너의 집에서 소초를 가지고 왔다."
하니, 윤봉조가 말하기를,
"조극량은 내가 안다. 정월 초에 조극량이 한 소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상소하려고 한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 소초는 결코 쓸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번 나온 너의 소는 단락(段落)마다 변역(變易)하여 별본(別本)이 되고 말았다."
하니, 방만규가 말하기를,
"내가 진필웅에게 말하기를, ‘소어(疏語)가 너무 준엄한 듯하니, 네가 다만 윤 참의 앞에 가서 다시 의논하라.’ 했더니, 진필웅이 돌아와 말하기를, ‘요즈음 소장(疏章)은 모두 이러한데 고칠 일이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하니, 윤봉조가 말하기를,
"진필웅이 소를 가지고 왕래했다는 말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그렇게 할 이치가 있겠는가? 네가 반드시 진필웅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는 방만규를 모른다고 했는데, 오늘은 서로 만난 일이 있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윤봉조가 공초하기를,
"방만규가 말하기를, ‘진필웅이 와서 소를 보였다.’고 했기 때문에 보지 않았다고 대답한 것인데, 지금은 ‘조극량이 와서 보였다.’고 하기 때문에 사실대로 대답한 것입니다. 면식(面識)이 있다는 일에 이르러서는 공회(公會)에서 한 번 본 것을 서로 안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진필웅에게 물으니, 공초하기를,
"본래 윤봉조와 방만규를 모릅니다."
하니, 진필웅과 면질(面質)시키자 방만규가 말이 꿀렸다. 방만규를 형신하니, 공초하기를,
"장(杖)을 견디지 못해 미루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방만규는 위를 무함하는 부도(不道)를 저질렀으니, 조사기(趙嗣基)에 비해 더욱 흉악하고 참혹하다."
하였다. 방만규를 두 차례 형신하여 결안(結案)하였는데, 말하기를,
"저의 소어(疏語)가 처음에는 위를 무함한 것임을 몰랐는데, 끝에 가서 위를 무함하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니, 위를 무함한 부도(不道)한 짓으로 지만(遲晩)하여 부대시참(不待時斬)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윤봉조는 비록 방만규의 초사(招辭)와 차이가 있지만 세록(世祿)의 신하로 청현직(淸顯職)에 있으니, 비록 사람이 와서 보이더라도 이런 소는 마땅히 엄한 말로 물리쳐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과 수작하여 역적의 초사에 인고(引告)되게 되었으니, 참으로 매우 통분하고 해괴하다. 극변으로 멀리 귀양 보내라. 진필웅은 면질할 때 이미 발명하였으니, 방송하라."
하니, 유복명(柳復明)이 말하기를,
"윤봉조를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진필웅과 면질할 때 이미 거짓이 밝혀졌고, 조극량이 가서 소본(疏本)을 보였지만 산개(刪改)를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가 간섭한 일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모두 그렇겠는가?"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방만규의 소는 그 출처(出處)를 주각(註脚)하여 김일경이 역적이 됨을 밝히려 하는 데 지나지 않았을 뿐이니, 흉도들이 지척(指斥)하는 데 뜻을 두는 것과는 그 마음이 달랐다. 임금이 그가 감히 척언(斥言)하는 것을 노여워하여 귀양 보내니, 이에 진신(搢紳)과 장보(章甫)들이 기화(奇貨)로 삼아 기회를 틈타고 자중(藉重)하여 협박하고 모함할 계책을 삼아 분분하게 상소하여 다투어 창도하고 번갈아 화응하게 되었다. 임금이 그 설에 미혹되었는데 마침 이천해(李天海)의 흉언이 있게 되자 드디어 모두 국문하여 죽였으니, 그의 죽음은 진실로 억울하다. 대개 임금이 신축년186)  ·임인년187)  의 의리(義理)에 본래 자혐(自嫌)하는 뜻이 있는데다, 또 흉한 무리의 협박을 받아 드디어 양쪽을 다스리고 양쪽을 풀어주어 탕평(蕩平)하는 정책을 삼았기 때문에, 김일경과 목호룡이 참형(斬刑)을 당하고 이의연(李義淵)이 장형(杖刑)을 맞다 죽었으며 이천해가 주벌(誅伐)되고 방만규는 대벽(大辟)188)  을 당했으니, 성덕(聖德)에 누됨이 많다. 대개 다만 방만규를 죽인 한 가지 일뿐만이 아니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1월 18일 정사

친국(親鞫)에 입시할 때 사간 이봉익(李鳳翼), 지평 유복명(柳復明)이 전의 삼합계(三合啓)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빨리 정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는, 인하여 전교하기를,
"대간(臺諫)이 된 자가 또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나라가 무사한 연후에야 세록(世祿)의 신하도 평안한 것이다. 이러한 때는 비록 공평(公平)에 귀착시키기를 힘쓰더라도 오히려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근래에는 효상(爻象)이 어떠하며 장차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는가? 이천해가 감히 환국(換局)의 말을 했는데, 내가 어찌 일찍이 환국을 하려고 했던가? 지난번 한쪽 사람의 장소(章疏)를 내가 엄히 배척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지난번의 역변(逆變)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쪽 사람이 어찌 모두 역적질을 하였기에 찬배(竄配)한 숫자의 많음이 근래에 없던 바인데, 남아 있는 자를 또 진소(陳疏)하여 죄를 주면 이는 내가 그 참혹함을 조장하는 것이다. 내가 소석(疏釋)해서 조용(調用)하여 화평한 데로 귀착시키려고 하나, 인심이 이미 의심하는 자가 있다. 지난번 유신(儒臣)의 소에서도 또한 말하기를, ‘인산(因山) 후에는 마땅히 환국(換局)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내 뜻을 모른 것이다. 지난번 주륙(誅戮)하고 찬배(竄配)한 것이 처음에는 역시 당(黨)에서 나왔는데, 오늘날의 합계(合啓)는 속담에 이른바 ‘품팔아 갚는다[傭報]’는 것이니, 보복하는 일을 나는 취하지 않는다. 왕낭(王郞)의 변에 광무제(光武帝)가 불안해 하는 자들을 스스로 안심하도록 했기 때문에 능히 중흥(中興)의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이봉익이 말하기를,
"단지 그 시비만 분명하게 하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시비라고 하는 것은 곧 한쪽 사람의 시비이지 참된 시비가 아니다."
하였다. 이봉익이 말하기를,
"이는 이른바 국시(國是)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고, 승지(承旨) 김상옥(金相玉)이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는 역신(逆臣)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대행왕(大行王)의 조정에 있었다면 다투어도 되지만, 금일에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매, 유복명(柳復明)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오히려 계교(計較)하는 사(私)를 면치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계교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내가 과연 그르지만, 내 마음에 조금도 걸리는 것이 없는데 어찌 윤허해 따르겠는가?"
하였다.
이봉익이 전의 사계(四啓)를 거듭 아뢰고, 유복명은 전의 이계(二啓)를 거듭 아뢰었는데, 사관(史官)에 대한 율명(律名)을 ‘나국(拿鞫)하여 정죄하소서.’로 고쳤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함께 오도록 한 사관은 모든 대신(大臣)의 동정(動靜)을 모두 치계(馳啓)하는 것이니, 소회가 있다면 어찌 치계하지 않겠는가?"
하니, 김상옥이 말하기를,
"비록 전교(傳敎)가 있더라도 대각(臺閣)에서 쟁집(爭執)하면 정원은 으레 전지를 받들지 않으니, 사관이 치계한 것은 사체가 합당치 못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심단(沈檀)에게 앞으로 나오라 명하여 전교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등에 태(笞)치는 것을 없앴고, 우리 나라 세종(世宗) 역시 등에 태치는 법을 없앴다. 근래에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져 흉역(凶逆)이 발자취를 잇고 있으므로 잇따라 대행왕을 무함하고 동조(東朝)를 무함한 죄인을 다스렸으나, 자기에게 관계된 일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이천해(李天海)의 흉한 말은 극도로 음험하고 참혹한데, 신문(訊問)에 복종하지 않음이 더욱 극도로 사납고 완악하기 때문에 압슬(壓膝)하는 법을 시행했으나, 압슬형은 율문(律文)에 없다고 한다. 비록 율문에 실려 있다 하더라도 심한 것은 제거해야 하는데, 더군다나 율문에 없는 것이겠는가? 형문(刑問)하는 법 역시 옛날 오형(五刑)189)  에 속한 것이 아니나, 이것은 《대명률(大明律)》에 실려 있지만, 압슬하는 법은 끝내 임금이 형을 삼가는 뜻이 아니다. 이천해가 흉악하고 사나와서 비록 능히 견뎠지만, 다른 사람이야 어찌 이를 견디겠으며, 보기에도 참혹했다. 이후에는 태배법(笞背法)을 없앤 예에 의해 영원히 압슬하는 법을 없애야 옳다."
하고는, 인하여 정식(定式)하여 시행하기를 명하였다. 또 명하기를,
"의원군(義原君) 혁(爀)은 그의 형(兄) 양원군(陽原君)의 예에 의하여 직첩을 돌려주어라."
하고, 인하여 명하기를,
"세초(歲抄)190)   가운데 만약 빼버린 사람이 있으면 선조(先朝) 때의 예에 의해 써 넣으라는 일을 분부(分付)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대간의 계사에 이른바 발거(拔去)는 옛날에 있지 않던 일이다."
하였다. 유명홍(兪命弘)이 진달하기를,
"세변(世變)이 무궁하여 옥사가 연달아 나오니, 관계된 사람은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는 김일경의 일이 있었고, 이번에는 윤봉조(尹鳳朝)의 일이 있게 되었으나, 나는 널리 퍼뜨리려고 하지 않는다."
하였다.

 

1월 19일 무오

판윤(判尹)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평생 색목(色目)과 편당(偏黨)의 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난번 일종의 시론(時論)에 미움을 받아 고금에 없는 횡역(橫逆)을 당했는데, 더군다나 지금은 물정(物情)이 평탄하지 못하고 시의(時議)에 용납되지 못함이 전일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이 비록 출입하고 두루 다니고자 해도 되지 않습니다."
하였고, 예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진 죄명(罪名)은 일이 선조(先朝)에 있어 비록 차마 소급하여 제기할 수는 없으나, 오직 성심(赤心)으로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스스로 신명(神明)에게 질정해도 된다고 이르는데 죄의 흔단이 마구 생기니, 가슴이 무너지고 뼈가 아픕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축년191)  에 유락(唯諾)192)  하다가 함께 죄를 입은 사람들이 아직껏 적소에 있는데, 의기 양양하게 조정에 있는 것을 신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소대(召對)할 때 사간(司諫) 이봉익(李鳳翼),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이 전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유봉휘(柳鳳輝)에 대한 계사에다 ‘다른 마음으로 요동시키고 노기를 뿜었다.’는 등의 말과 ‘선대왕(先大王)께서 국문(鞫問)하라는 계사를 특별히 윤허하셨으나 마침 경례(慶禮)가 앞에 있어 형을 시행하려고 하지 않아서 성명(成命)을 환수하였다.’는 등의 말을 첨가했다.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비록 일이 자신에게 관계되어 그릇되이 용서하려 하시지만 순제(舜帝)가 사흉(四凶)193)  을 죽인 데 대해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요제(堯帝)가 필부(匹夫)인 순제를 천거하여 선위(禪位)하니 사흉이 분노하고 원망하면서 불평하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순제가 죽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차적(次嫡)으로 저위(儲位)에 오르셨으니, 필부인 순제에게 선위(禪位)한 데 비교하면 어떠하며, 유봉휘가 드러내어 배척함이 사흉이 분노하고 원망하는 마음에서 불평한 것에 비해 또 어떻습니까? 순제는 또 자기의 일이라 하여 혐의하지 않고 전형(典刑)을 쾌히 바로 잡았으니, 이것이 어찌 순제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仁)이 모자라서 그랬겠습니까? 참으로 사흉의 죄를 천하가 함께 노했기 때문에 천하의 마음에 따라 죽인 것일 뿐, 순제가 어찌 일찍이 그 사이에 사(私)를 두었겠습니까? 이 어찌 전하께서 유봉휘를 처벌하는데 본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삼합계(三合啓)의 결사(結辭)에는 모두 ‘우선 먼저[姑先]’라는 두 글자를 첨가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전(書傳)》에 실린 정자의 말은 이 일과는 다름이 있다. 요(堯)·순(舜)이 아니면서 그런 일을 행하려고 하면 반드시 합당하지 못하다."
하니, 승지 이성조(李聖肇)가 말하기를,
"유봉휘의 소는 피차를 막론하고 온 세상이 모두 무상(無狀)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집(李㙫)은 그와 일생 동안 문경(刎頸)194)  하는 친구인데도 오히려 빈청(賓廳) 회의에 참여했었습니다. 대저 얼음과 숯은 결코 그릇을 같이 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예전처럼 김일경의 당을 진용하시려고 하시면 양사(兩司)를 물리치셔야 되고, 오늘 조정의 신하를 쓰려고 하시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봉익(李鳳翼)과 유복명(柳復明)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유복명이 또 아뢰기를,
"윤봉조(尹鳳朝)의 사학(詞學)·재망(才望)은 온 세상의 추앙을 받고, 성상께서 추장(推奬)하여 쓰셨기 때문에 방만규 같은 자가 자중(藉重)하여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면질(面質)할 때 이미 이끌어들인 것을 깨끗이 벗어났고, 진필웅(秦必雄)이 또 이미 거짓임을 밝혔으니, 이끌어 무함한 형상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윤봉조가 이미 ‘결코 쓸 수 없다.’라고 말했으며, ‘방만규가 올린 소는 문득 별본(別本)이었다.’라고 했습니다. 단지 다른 건(件)을 우연히 본 것 때문에 찬배(竄配)를 시행하기까지 하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극변에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청현직(淸顯職)에 있으니 자기가 상소를 해도 되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소에 참여시켜 의논하는가? 조극량(趙克亮)이 이미 적의 입에서 나왔는데, 윤봉조가 또 조극량을 만났으니, 소본(疏本)을 썼는지 안 썼는지는 모름지기 논하지 않더라도 멀리 귀양보내는 것도 또한 말감(末減)한 것이다."
하니, 이봉익과 검토관(檢討官) 홍현보(洪鉉輔) 역시 그 억울함을 진달하고, 또 문학(文學)이 아깝다는 말을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헌(王憲)이 매우 중하니, 그 사람을 아낀다는 것으로 용서할 수는 없다.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그 율(律)을 가볍게 논하는 것은 옳지만, 도로 정지하기를 청한 것은 참으로 뜻밖이다."
하였다. 대계(臺啓)를 마치고 《강목(綱目)》을 강하다가 훤(萱)으로 하여금 제왕(齊王)을 권하여 동생 원간(元侃)을 죽이라고 말하기를, ‘옛날 선제(先帝)께서 왕을 사랑하는 것을 보았으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차마 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는 데 이르러 홍현보가 그 충성심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사랑하지 않았으면 마땅히 이런 말이 없어야 하는가? 다만 대의(大義)의 당연함만 말해야지, 한 ‘애(愛)’ 자에 마음쓸 필요는 없다."
라고 하였다.

 

1월 20일 기미

유학(幼學) 성중은(成重殷)이 상소하여 여섯 가지 폐단을 논하여 말하기를,
"수령(守令)을 가려뽑고, 도망한 군졸을 쇄환(刷還)하고, 군제(軍制)를 변경시키고, 급재(給災)를 간결히 하고, 항상 전가(錢價)를 정하고, 이서(吏胥)의 숫자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말에 용잡하고 잗단 것이 많았다. 비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1일 경신

비망기(備忘記)에 대략 말하기를,
"내가 덕(德)이 없이 자리를 더럽힘으로 해서 황천(皇天)의 경고(警告)가 없는 달이 없다. 지난 겨울 천둥의 이변과 요즈음의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것은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으니, 어찌 두려움을 이기겠는가? 낭묘(廊廟)가 거의 비고 백 가지 일이 모조리 폐해져 임금은 위에서 수고롭고 백성들은 아래에서 곤핍한데도 아직껏 한 가지 일도 보람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 어찌 신료(臣僚)들이 받들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이 역시 내가 자수(自修)함이 없는 까닭이다. 서적(徐積)195)  이 말하기를, ‘부모(父母)가 〈군자(君子) 되기를〉바라고 향인(鄕人)이 그것을 영화롭게 여기는데 제군(諸君)은 어찌 군자(君子)가 되려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는데, 바로 오늘날을 두고 한 말이다.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의리와 목인(睦婣)196)  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당습(黨習)에 혹 어긋날까 염려를 하니, 이것이 어찌 충효(忠孝)이겠는가? 내가 마음 아파하는 것은 3백 년 동안 열성(列聖)께서 서로 지켜온 종사(宗社)를 떨쳐 일으키지 못한다면 후일 무슨 면목으로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에게 돌아가 배알하겠는가? 탕평(蕩平)하는 것은 공(公)이요, 당에 물드는 것은 사(私)인데, 여러 신하들은 공을 하고자 하는가, 사를 하고자 하는가?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폐부(肺腑)에서 나온 말이니, 만약 구언(求言)함을 칭탁해 경알(傾軋)하는 무리는 마땅히 먼 변방에 귀양 보내는 법을 쓸 것이다. 근밀(近密)에 있는 신하는 나를 대신해 교서를 초(草)해 정부(政府)에서 중외에 널리 반포(頒布)하라."
하였는데, 정원에서 재계(再啓)하여 곧바로 반포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축년197)  의 일은 최후(最後)의 비지(批旨)가 지성 측달(至誠惻怛)하여 돈어(豚魚)에게까지도 믿음을 주게 하였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비록 옛날 군자(君子)로 하여금 당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완연(頑然)히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니, 당일 여러 신하들이 고심(苦心)한 것은 거의 지금이나 후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말하는 자를 곧바로 당역(黨逆)의 죄과로 몰아넣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함께 죄를 입은 여러 신하들은 단서(丹書)가 그대로 있는데, 나오고 물러가며 영화롭고 욕되게 하는 것을 홀로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동의금(同義禁) 여필용(呂必容)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조극량(趙克亮)은 마땅히 국문했어야 하는데 국문하지 않아 윤봉조(尹鳳朝)가 감히 억울하다고 말하게 하고 대신(臺臣)이 공공연히 함부로 영구(營救)하게 하였으니, 이에 조극량을 끝내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조극량은 처음 적의 입에서 나왔는데, 판의금(判義禁) 신(臣) 심단(沈檀)과 신이 상의하여 나국(拿鞫)을 청했으나 성명께서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만연되는 것을 염려하셔서입니다. 먼 고장의 하찮은 천얼(賤孽)은 길들여 부리는 데 불과한데도 먼저 형을 받아 복주(伏誅)되고 참으로 사주한 적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누워 쉬고 있어서 나라 사람들의 말이 시끄럽게 일어나고 여러 사람의 분노가 더욱 간절하니, 원하건대, 다시 구문(究問)하여 엄히 처분하소서."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원악(元惡)을 정법(正法)하였으니, 비록 사주한 자가 있더라도 같은 율로 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처분이 이미 정해졌는데, 하필이면 다시 조사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교리(校理)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성상께서 출척(黜陟)하시는 법은 숙종의 뜻하신 일을 계술(繼述)하는 것이요, 경종의 효사(孝思)를 발명하는 것입니다. 바로 성교(聖敎)에서 이른바 ‘요순(堯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뿐이다.’라 하신 것은 성상의 뜻이 있는 바가 이미 이처럼 정대한즉, 영(令)을 내어 조치한 일은 마땅히 명백하고 통쾌하게 하여 사람들의 의논을 용납하지 않게 되니, 어찌 털끝만큼의 사사로운 뜻으로 그 사이를 아끼어 지체하게 하겠습니까? 아! 성고(聖考)께서 하늘을 이어 표준을 세우시고 심법(心法)을 전수하여 명의(名義)를 바로잡은 것은 실로 만세의 바꿀 수 없는 법칙이 되는데, 오직 저 한 종류의 보잘것없는 자들이 그 귀역(鬼蜮) 같은 마음을 이미 이룰 수 없게 되자, 이에 도리어 몰래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무릇 우리 성고(聖考)께서 승하하신 후에 유감을 드러낸 것이 있지 않은 곳이 없었고, 심지어는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어 우리 종팽(宗祊)198)  을 위태롭게 하도록 극에 이르렀습니다. 성상께서는 일월같이 밝으심으로 이를 모르는 바 아니나, 오직 포용(包容)하는 덕이 지나치게 참으시어 사령(辭令)하고 조치함이 혹 고식적이고 구차하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 계술(繼述)하고 발명하는 도리에 크게 부족함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노여움을 간직하지 않는다.’는 전교에 미혹됨이 없지 않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혈기(血氣)의 노여움이 있어서는 안 되고 의리(義理)의 노여움은 없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문황(文王)이 천하를 안정시킨 것이나 주자(朱子)가 태양(太陽)을 두고 증명했던 것처럼 하여야겠습니다. 어찌 일찍이 성인이라 해서 노여움이 없었겠습니까? 노해서는 안되는 데 노하는 것은 사(私)이며 마땅히 노해야 하는데도 노하지 않는 것도 사입니다. 이는 바로 성인의 마음은 대공 지정(大公至正)하여 노해야 하는 것이 저쪽에 있지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순(大舜)이 노여움을 간직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찌 일찍이 마땅히 노해야 할 것에 노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성상의 오늘날 거조가 이미 양조(兩朝)를 위하여 효제(孝悌)를 다하는 도리에서 나왔으니, 오직 마땅히 공정한 마음으로 혁연(赫然)하게 임하시어 난적(亂賊)으로 하여금 요행히 도망하지 못하게 하여 윤이(倫彛)가 다시 펴지게 된 연후에야 처분이 광명(光明)하고 뜻이 밝게 드러나 장차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게 되어 우리 숙종의 굉모(宏謨)·대훈(大訓)이 이에 유감없이 발휘되고 또한 경종께서 부탁하신 성대한 뜻도 저버리지 않게 될 터이니, 오직 성명께서는 힘쓰소서."
하니, 답하기를,
"근일의 일은 이미 전석(前席)에서 유시했으니, 진실로 고식(姑息)하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1월 22일 신유

민진원(閔鎭遠)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이 여필용(呂必容)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인피하면서 말하기를,
"여필용은 사람됨이 충동질을 좋아해 소급해 기회를 노려 경알(傾軋)할 계책을 냈습니다."
하니, 여필용이 또 상소하기를,
"유복명이 변환(變換)하여 엄호(掩護)하고 의란(疑亂)하게 말이 많으며, 또 기회를 노린다는 설(說)을 말한 것은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사간 이봉익(李鳳翼)이 유복명을 출사(出仕)하게 하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1월 23일 임술

심택현(沈宅賢)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박사익(朴師益)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정호(鄭澔)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교악(李喬岳)을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김동필(金東弼)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권업(權𢢜)을 우윤(右尹)으로, 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중협(李重協)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신임(申銋)을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로, 정호를 장원서 제조(掌苑署提調)로, 이의현(李宜顯)을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로, 이의록(李宜祿)을 김포 군수(金浦郡守)로, 신사적(申思迪)을 평강 현감(平康縣監)으로, 황유후(黃有垕)를 교하 현감(交河縣監)으로, 김상훈(金相勛)을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홍우제(洪禹濟)를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민진원의 정사였다.

 

이조 판서 민진원이 입시(入侍)하여 척신(戚臣)이란 것으로서 전임(銓任)을 강력히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안동 부사(安東府使) 박사수(朴師洙), 전 고령 현감(高靈縣監) 박창후(朴昌厚), 전 경산 현감(慶山縣監) 이정량(李廷亮), 옥천 군수(沃川郡守) 김정(金), 고산 현감(高山縣監) 이도현(李道顯)은 청렴하고 검소하여 잘 다스리어서 특이한 공적이 있으니, 표리(表裏)199)  의 하사를 명하고, 이미 체직(遞職)된 자는 승서(陞敍)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수령의 비석(碑石)을 세우고 생사당(生祠堂)200)  을 짓는 것은 숙종 때의 금령(禁令)이 지극히 엄한데, 조정의 명령이 행해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수령이 체직되기 전에 길가에 비석을 세우는 것을 수령이 보고도 금하지 않으니, 더욱 해괴합니다. 《대명률(大明律)》에 현임관(現任官)이 스스로 비석을 세우는 자는 죄를 주게 되어 있는데, 이는 스스로 세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동필(金東弼)은 송덕(頌德)하는 것을 보게 하는 비석을 새겨 금산 군수(金山郡守) 운동로(尹東魯)에게 제목(題目)을 쓰게 하였으니, 김동필은 추고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입비(立碑)하는 것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민진원이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권상하(權尙夏)에게 사제(賜祭)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민진원이 김여(金礪)의 사유(赦宥)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황귀하(黃龜河)를 석방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인하여 문외 출송한 사람의 별단(別單)을 써 들이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안중필(安重弼)의 석방을 명하였다. 민진원이 진달하기를,
"피적(被謫)되었다가 방송된 사람이 혹 이미 서용되었고 혹은 직첩(職牒)만 주기도 하여 전형하여 주의하는 것이 무시되는 경향이니, 아울러 서용하기를 명하소서."
하였고, 승지 유명홍(兪命弘)은 진달하기를,
"지평 조문명(趙文命)은 적 김일경의 신축년201)   소 이후에 현척(顯斥)하는 말을 분명하게 하여 김일경의 당에게 배척을 당함으로부터 시골에 내려가 살았는데, 김일경과 교유한 사람과도 또한 서로 끊었습니다. 상복(喪服)을 벗은 후 언직(言職)에 제수되었는데, 숙배(肅拜)하지 않았으니, 말을 하지 않은 삼사(三司)를 파직하는 가운데 마구 넣는 것은 선악(善惡)을 구별하는 뜻이 아주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소로 보건대, 서용해도 됨을 알았다."
하였다.

 

임금이 어사(御史) 홍성보(洪聖輔)와 조명교(曺命敎)를 인견하여 직접 타일러 보내고, 또 전교하기를,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것은 지금의 급히 힘쓸 일이니, 마땅히 자세히 살펴 아뢰라."
하였다.

 

1월 24일 계해

사간 이봉익(李鳳翼)이 전의 세 번 계달(啓達)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일경의 소하(疏下)에 든 6인을 나국(拿鞫)하라는 계달을 정지하였다.

 

주강(晝講)에 입시할 때 지경연사(知經筵事) 민진원이 말하기를,
"걸(桀)·주(紂)는 매우 무도한 자여서 《서경(書經)》에 ‘오직 왕(王)202)  이 음난하고 희롱하여 스스로 〈하늘에〉 거절을 당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3대(三代)203)  의 유풍(遺風)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신하가 감히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홍치중(洪致中)은 말하기를,
"당 태종(唐太宗)이 비록 간언(諫言)을 받아들였으나, 성심(誠心)이 없다고 하기 때문에 ‘전사옹(田舍翁)204)  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거짓으로 꾸며서 선(善)을 하는 것은 악(惡)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거짓으로 꾸며서 선을 한 자는 그 심술을 논하자면 악을 하는 것보다 심하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강독(講讀)하는 것이 비록 정밀하더라도 실천하지 못하면 부끄럽다.’라고 하였으니, 체념(體念)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체념하겠다."
하였다.

 

1월 25일 갑자

종신(宗臣)을 전강(殿講)하여 남원군(南原君) 설() 등 11인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박필몽(朴弼夢)은 무장(茂長)에, 이진유(李眞儒)는 나주(羅州)에, 이명의(李明誼)는 청도(淸道)에, 정해(鄭楷)는 영천(永川)에, 윤성시(尹聖時)는 밀양(密陽)에, 서종하(徐宗厦)는 안음(安陰)에 정배(定配)하였습니다."
하였다.

 

지평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여 여필용(呂必容)이 소척(疏斥)한 데 대해 변명하였는데, 말하기를,
"소가 이미 윤봉조(尹鳳朝)에게서 나오지 않았고, 또 윤봉조의 손으로 산개(刪改)하지 않은 것은 조극량(趙克亮)에게 묻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가 있습니다. 성상께서 윤봉조를 귀양 보낸 것은 단지 엄히 물리치지 못했다는 데 있기 때문에, 신이 곧바로 도로 정지하기를 청하고, 조극량에게 묻기를 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필용이 기화(奇貨)를 잡고서 변환(變換)하며 협박하였는데, 그는 역적 김일경의 친당(親黨)으로 권문(權門)에 아첨하고 남의 충동을 받아 그 공에 보답하려고 하여 곧 사람마다 의심하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조극량 하나로 인해 조정을 괴란(乖亂)시킬 기회로 삼으니, 나는 실로 병폐로 여긴다."
하였다.

 

1월 26일 을축

홍치중(洪致中)을 예조 판서(禮曹判書) 겸동경연(兼同經筵) 동성균(同成均)으로, 윤헌주(尹憲柱)를 판윤(判尹)으로, 심택현(沈宅賢)을 동성균(同成均)으로, 이의현(李宜顯)을 동경연(同經筵) 사역 제조(司譯提調)로, 김재로(金在魯)를 전생서 제조(典牲署提調)로, 김조택(金祖澤)을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박치원(朴致遠)을 종부 정(宗簿正)으로, 허석(許錫)을 사복 주부(司僕主簿)로, 이간(李柬)을 회덕 현감(懷德縣監)으로, 유수(柳綏)를 함종 부사(咸從府使)로 삼았다.

 

지평 이의천(李倚天), 정언 김상석(金相奭)이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고, 이의천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박장윤(朴長潤)의 죄를 죽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사년205)   당인(黨人)들은 명의(名義)에 죄를 지어 사람 축에 끼지 못하여 성고(聖考)께서 엄히 배척하고 준엄하게 막은 것이 형서(荊舒)206)  를 징계하고 험윤(玁狁)207)  으로 막듯이 했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이들 무리가 쌓여진 악감(惡憾)을 한번 풀어보려고 생각했다가 숙종께서 승하하신 지 오래 되어 능(陵)의 풀이 묵은 후에야 이에 감히 곧바로 지문(誌文) 고치는 것을 칭하기를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장석지(張釋之)208)  가 말하기를, ‘만일 누가 장릉(長陵)209)  의 한 줌 흙을 가져감이 있다면 어떻게 그 죄를 더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죄는 능의 흙을 범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법은 삼족(三族)을 멸하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없습니다. 이제 박장윤의 죄는 이미 옛사람의 정안(定案)이 있으니, 이른바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문외 출송한 죄인 박장윤을 빨리 방형(邦刑)으로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김상석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윤취상(尹就商)은 천성이 음흉하고 간특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흉악하고 간휼하였으며, 탐음(貪淫)하고 교종(驕縱)한 것은 다만 여사(餘事)일 뿐입니다. 평소에 역적 김일경과 심복을 맺어 나라에 화를 끼치고 남을 해치는 모의를 몰래 돕지 않음이 없었음은 실로 1천 사람이 지명한 바로 백망(白望)의 긴요한 초사에서 나와 그 정절(情節)이 치밀하였는데, 한 번도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국옥(鞫獄)에 붙잡혀 오기에 당해서는 포교(捕校)의 의례적인 독촉에 화를 내어 함부로 격분하여 꾸짖는 말을 내어 현저히 거역하는 형상이 있었으며, 석방(釋放)된 후에는 몰래 해청(該廳)에 부탁하여 포교(捕校) 두 사람을 제거했습니다. 그가 비록 흉악하더라도 진실로 조금이라도 신하 된 절조가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까? 이런 음흉하고 화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연곡(輦轂)210)   아래에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아주 변방에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유취기(兪就基) 등이 이복령(李復齡)의 소하(疏下)에 든 사람을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왕법(王法)을 단지 어수룩하고 미천한 사람에게만 시행하고 원악(元惡)은 법망에서 벗어났습니다. 방만규(方萬規)가 글을 하지 못하는 것은 삼척 동자(三尺童子)도 다 아는 바인데, 사주(使嗾)한 자를 신문(訊問)하자 과연 모든 사람이 윤봉조를 지목해 직초(直招)했습니다. 윤봉조도 사람이며 역시 자성(慈聖)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이러한 흉설이 마음에 싹터 입으로 나와서 자신을 악역(惡逆)의 죄과에 빠뜨려지기를 꺼려하지 않는 것입니까? 윤봉조가 ‘그 소를 쓸 수 없다.’고 한 것과 ‘별본(別本)이었다.’라고 스스로 변명한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윤봉조는 화심(禍心)을 간직한 지 오래 되어 전후로 말을 바꾼 수단이 행동에서 탄로났으니, 형신하여 정법(正法)하는 것을 의당 방만규보다 앞에 했어야 하는데, 단지 한 번 평문(平問)하고 그 율을 말감(末減)211)  하여 나라 사람들이 놀라고 분노하여 한 하늘 밑에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적 윤봉조에게 실형(失刑)함이 본디 커서 그 폐해가 마침내 저 무리들의 무엄한 마음을 열어 주었으며, 저 유복명(柳復明)이란 자는 적 윤봉조가 길들여 기르고 부린 자로서 감히 ‘깨끗이 벗어났다.’는 등의 말로 전석(前席)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함부로 말하였습니다. 만약 적 윤봉조와 함께 역적질할 마음이 아니었다면 임금의 원수를 잊고 흉역의 당이 되는 것이 어찌 이에 이르겠습니까? 만약 방만규를 죄준 죄로 윤봉조를 죄주고 윤봉조에게 죄준 죄로 유복명을 죄주지 않는다면, 신은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장차 발자취를 이어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모든 장주(章奏)에 소두(疏頭)인 자를 벌하는 것은 어찌 그 사람이 모두 글을 잘하고 소의 뜻이 오로지 그의 뜻에서 나왔다 해서이겠는가? 소두가 되었기 때문이다. 방만규가 비록 사주를 받아 함부로 상소하였다고는 하지만 어찌 왕법(王法)을 피할 수 있겠으며, 그 사주한 자를 물어 윤봉조를 귀양 보낸 것은 뒤를 엄히 징계한 것이다. 너희들의 처음 소에는 단지 방만규가 윤봉조로 인해 소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만 말했는데, 성무(聖誣)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하가 다시 제기할 바가 아니다. 수선(首善)212)  의 자리에 있으면서 당습(黨習)을 버리지 못하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자중(藉重)하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민진원(閔鎭遠)이 청하기를,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의 경차관(敬差官)이 재결(災結)213)  을 마음대로 주었으니, 다시는 환실(還實)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무신(武臣) 이여적(李汝迪)이 아뢰기를,
"남한(南漢)·강도(江都) 외의 각 영읍(營邑)에 모두 성 안에서 조련하는 규례가 없으니, 청컨대 정식(定式)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말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승평(昇平)한 지 오래여서 인심이 편안함에 익숙하여졌다. 제도(諸道)의 성 안에서 조련하는 규정을 시행하되, 민폐(民弊)를 끼치지 말라는 일을 신칙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왜관(倭館)의 고공(雇工)은 의식(衣食)이 후하기 때문에, 서울 사람들이 많이 몰래 들어가 조정의 소식을 많이 전파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자는 죄를 주고, 이후에는 몰래 들어가는 것을 엄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월 27일 병인

태학생(太學生) 유취기(兪就基) 등이 권당(捲堂)214)  하고 소회를 써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윤봉조의 머리가 아직 천지 사이에 있으니 자성(慈聖)에 대한 무함은 아직도 다 씻지 못하였으므로, 서로 이끌고 대궐에 가 부르짖는 것은 단지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이륜(彛倫)을 밝히려고 해서입니다. 어찌 당습(黨習)에 물들어 소란을 일으킬 뜻을 둔 것이겠습니까? ‘자중(藉重)하여 도리어 무함한다.’는 전교는 죽어도 들을 수 없으니, ‘도리어 무함한다[反誣]’는 두 글자를 변명하기 전에는 세상에 스스로 설 수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소의 말을 이미 잘 살피지 않았고 한 번의 책망을 인해 경솔하게 먼저 권당(捲堂)하니, 사습(士習)에 반드시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고는 동지관사(同知館事)에게 명하여 들어가기를 권하였다. 이튿날 성균관(成均館)에서 개유(開諭)하여 들어가기를 권하였으나 제생(諸生)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품계하니, 비답하기를,
"제생들이 비지(批旨) 가운데 있는 두 글자를 혐의의 단서로 삼는데, 그 소 가운데 말하기를, ‘성무(聖誣)를 씻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아! 비록 윤리가 없고 의리를 해치는 말이 있더라도 위를 무함하는 율(律)을 그가 스스로 당했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를 침범해 핍박함이 있었는가? 방만규를 왕법(王法)으로 바로잡은 것은 위를 무함했기 때문인데, 씻고 못 씻음을 어찌 감히 오늘날 다시 의논하겠는가? 소장(疏章)이 한번 올라오자 사방의 청문(聽聞)이 놀랐으니, 비지 가운데 두 글자를 어찌 과하다고 하는가? 그 말을 가리지 못함은 스스로 알지 못하고 비지를 혐의할 단서로 삼으니, 수선(首善)의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반성하는 공부를 생각하지 않는가? 사습(士習)이 이러하니, 다른 것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시 권유하여 도로 들어가도록 하라."
하였다. 그 이튿날 성균관에서 또 제생이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품계하니, 비답하기를,
"한결같이 권당(捲堂)하니 아주 미안한데, 제생이 이른바 불안해 하는 단서는 ‘반무(反誣)’란 두 글자이다. 소의 말을 이미 가리지 않았으니, 그 두 글자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유생(儒生)들이 비록 말을 가리지 않고 하였으나 어찌 이로 인하여 수많은 장보(章甫)를 위를 무함했다는 데로 돌리겠는가? 소의 비답 가운데 ‘깨닫지 못하겠다[不覺]’ 이하 여섯 글자는 특별히 삭거(削去)하여 현관(賢關)215)  을 대우하는 뜻을 보이라."
하니, 제생들이 마침내 다시 들어가 식당(食堂)을 설치하였다.

 

지평 이의천(李倚天), 정언 김상석(金相奭)이 합계(合啓)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는데, 박장윤(朴長潤)에 대한 계사 가운데서 ‘감정을 품고 갚기를 생각했다[蓄憾思逞]’는 등의 말을 삭제하고, ‘장릉(長陵)의 한 줌 흙’이란 한 조항을 ‘유궁(幽宮)을 놀라게 하여 실로 능침의 망극한 변이 되었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왕(先王)의 환후(患候)가 대개 일시의 증세가 아니었으니, 마땅히 화평(和平)한 약제로 점차 고르게 보하고 공벌(攻伐)하는 약제로써 망령되어 빠른 효과를 바라서는 안 되었습니다. 저 이공윤(李公胤)이란 자는 자세하고 신중히 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준열(峻烈)한 약제를 투여했습니다. 승기탕(承氣湯)·용회환(龍薈丸) 등의 약은 약성(藥性)이 매우 독해서 모든 질병에 감히 경솔하게 시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공윤은 이에 감히 지존의 병환에 시험하여 위기(胃氣)가 먼저 파괴되어 진원(眞元)216)  이 모르는 사이에 사그라지게 했는데도, 그때 조정 신하들은 오직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법에 의거 쟁집(爭執)하지 못하고 아직도 형장(刑章)을 피하고 있으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한 죄인 이공윤은 잡아다 엄히 국문(鞫問)하고 율에 의해 처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이공윤의 일은 처분한 지 이미 오래이니,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김상석(金相奭)이 또 아뢰기를,
"비국(備局)의 회계(回啓)한 여러 신하를 삭출(削黜)하는 일을 비국에서 주장하여 회계한 사람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오늘 비국의 여러 당상관이 모를 이치가 없는데, 서로 미루고 끝내 곧바로 진달하지 않은 형상은 더욱 매우 무상하여 결단코 그들이 덮어 감추는 대로 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그 때 회공(回公)217)  한 낭청(郞廳)은 반드시 자세히 알 터이니, 청컨대 사실대로 곧바로 지적하여 진달하기를 명하여 삭출(削黜)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어제 석강(夕講)에서 성상께서 한 글자를 잘못 읽은 것 때문에 조심하라는 논란이 있었다 하니, 이와 같은 전교에서 일에 따라 성찰(省察)하시는 단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방심(放心)함을 겨우 깨달으면 마음이 문득 이곳에 있게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방심을 거두어들이는 공부입니다. 전하께서는 천자(天姿)가 매우 뛰어나신 데다 만약 성학(聖學)에 뜻을 두신다면, 공효(攻効)가 반드시 빠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말한 것은 마침 이 자경(自警)하는 말이었다. 진달한 바는 마땅히 각별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서종섭(徐宗燮)이 청하기를,
"외방(外方)의 독서(讀書)하는 선비를 불러 강연(講筵)에 참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전하의 거조(擧措)가 중외(中外)의 바람에 어긋나지 않으면 선비들이 모두 조정에 서기를 원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인심을 복종시키지 못하여 선비들이 반드시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서종섭은 말하기를,
"선비를 이르게 하는 것은 전하의 성실하고 성실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송시열(宋時烈)이 매양 효종(孝宗)의 심학(心學) 공부를 문왕(文王) 이후 일인(一人)이라고 칭탄했다고 합니다. 그 때 선정신(先正臣) 김집(金集) 역시 부름을 받고 나왔는데, 효종께서 성심으로 학문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현인(賢人)을 많이 얻었습니다. 성상께서 만약 성심으로 좋아하신다면 효종처럼 이르게 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니, 요당(僚堂)218)  을 대우하고 마땅히 경학(經學)하는 선비를 의논해 뽑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얻는 것은 전조(銓曹)에 달려 있고, 이르게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
하였다. 서종섭이 진달하기를,
"과목(科目) 가운데 정호(鄭澔)와 이재(李縡)의 경학이 사림의 영수(領袖)가 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종신(宗臣)은 선조(先朝) 초년의 예에 의하여 무신(武臣)과 일체로 주강(晝講)에 윤회(輪回)로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8일 정묘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교문(敎文) 가운데 음흉하고 참혹한 말을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다시 제기할 수 있겠는가? 방만규(方萬規)가 함부로 주각(註脚)를 달았기 때문에 친국(親鞫)하여 정법(正法)하였고, 사주한 자를 물어 윤봉조(尹鳳朝)를 귀양 보낸 것이니, 도로 중지하자는 청은 이미 괴아(怪訝)하며, 이로 인해 소란을 일으켜 또 핵문(覈問)을 청하면서 오직 그 말이 준엄(峻嚴)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심지어 말하기를, ‘성무(聖誣)를 씻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비록 윤리가 없고 의리를 그르친 말이 있더라도 다만 그가 스스로 부도(不道)에 빠지는 것일 뿐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를 애핍(礙逼)함이 있는가? 상인(常人)이 말하면서도 말이 내정(內庭)을 핍박하는 것이면 감히 말을 하지 못함은 내외(內外)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을 더욱 어찌 감히 붓을 대어 글로 쓰겠는가?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내가 처음에 차마 제기하지 못하겠다고 한 뜻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동방의 예의가 거의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후에 다시 이 일을 인용하여 말이 동조(東朝)를 범한 자는 위를 무함하는 율로 바로잡을 것이니, 정원에서는 잘 알라."
하였다.

 

지평 이의천(李倚天)이 윤봉조에 대한 계사(啓辭)를 연달아 아뢴 일로 피혐(避嫌)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정언 김상석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판중추(判中樞) 심단(沈檀)은 기사년219)  의 흉얼(凶孽)로서 지은 죄가 아주 무거워 청의(淸議)에 막힌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의기 투합(意氣投合)하여 착한 사람을 해쳤으며, 더군다나 이름이 백망(白望)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그는 마땅히 움츠리고 엎드려 있으면서 죄를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양양하게 천일(天日) 아래에 고개를 들고 다녀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물정(物情)이 더욱 놀라고 있습니다. 청컨대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충주(忠州) 유학(幼學) 정언형(鄭彦衡)이 상소하여 도로 누암 서원(樓巖書院)  【이 서원에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한다.】 을 설립하여 사액(賜額)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선정(先正)을 대우하는 도리에 즉시 돌려주어 달지 않을 수 없으니, 본도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계사년220)   이후 중복해 세운 서원의 액호(額號)를 철거하게 했었는데, 이 서원은 임오년221)  에 사액한 것인데도 이진유(李眞儒)가 사사로이 도신(道臣)에게 위협을 하여 억지로 액호를 철거하게 하였다. 도신 권익관(權益寬)이 본주(本州)에 공문을 보내 액판(額板)을 예조(禮曹)로 수송하게 했는데, 예조에서는 조령(朝令) 이외라 하여 받지 않아 다시 본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논어(論語)》의 ‘관중(管仲)222)  은 죽지 않았다’는 장(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관중은 일광(一匡)223)  할 재능이 있었으니 죽지 않았어도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의(義)에 처하는 것을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지사(知事) 민진원이 정자(程子)의 ‘환공(桓公)은 형이나 당 태종(唐太宗)은 아우’라는 말을 인용하여 대답하기를,
"관중이 죽어야 할 의리가 없는 것이 왕위(王魏)224)  와는 달랐습니다. 숙종 때 윤휴(尹鑴)가 진강(進講)하면서 ‘왕위가 죽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하였는데,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그 말을 듣고는 깊이 세도(世道)를 위해 우려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석강(夕講)에 ‘공문자(孔文子)225)  가 가신(家臣)과 함께 조정(公朝)에 올랐다’는 장을 강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조 판서가 공문자의 일을 마음에 두면 국가 일에 어찌 크게 유익함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참찬관 이성조(李聖肇)가 아뢰기를
"석방을 입은 네 중신(重臣)에게 마땅히 하유하여 말을 주어 재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9일 무진

좌의정 유봉휘(柳鳳輝)가 면직(免職)하니, 임금이 특별히 별유(別諭)를 내렸는데, 말하기를,
"지난날 경의 마음은 단연코 다른 생각이 없었음을 내가 안 지 오래 되었으나, 낭묘(廊廟)가 한결같이 비고 북사(北使)가 곧 오게 되어 부득이 사직을 허락한다."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합계(合啓)를 바야흐로 펴고 있으므로 승전(承傳)을 받들지 못한다는 뜻으로 계달하니, 정조(政曹)에 특명하여 처치하게 하여 드디어 영중추(領中樞)에 분부하였다.

 

황흠(黃欽)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이의현(李宜顯)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박성로(朴聖輅)를 승지(承旨)로, 조명봉(趙鳴鳳)을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안중필(安重弼)을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이병태(李秉泰)를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삼았다.

 

사간 이봉익(李鳳翼)이 김일경의 소하(疏下)에 든 6적(六賊)을 경솔하게 정계(停啓)한 것으로써 피혐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이튿날 정언 김상석(金相奭)이 큰 의논을 지레 정지하여 공의(公議)가 준엄하게 배척한 것으로 이봉익의 체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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