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권, 영조 1년 1725년 2월

싸라리리 2025. 8. 1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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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기사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고, 《강목(綱目)》 진기(陳紀)를 강하였다. 시독관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진 태조(陳太祖)가 비단을 불태워 검소함을 숭상한 것은 아름다운 듯한데, 호씨(胡氏)가 도근(桃根)을 죄주지 않은 것으로 본래 노한 마음이 없다고 여겨 소인(小人)을 영합하는 무리들이 이미 그 마음을 헤아려 알았다고 했으니, 이런 곳에 마땅히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하였다.

 

2월 2일 경오

정호(鄭澔)를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특배(特拜)하고, 어유룡(魚有龍)을 사간(司諫)으로, 이봉상(李鳳祥)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신임(申銋)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에게 별유(別諭)를 내려 명소(命召)를 받게 하고, 해래 사관(偕來史官)을 소환하였다.

 

대사간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깊이 지난번 참혹한 일을 징계하는 데에서 ‘내가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힘쓰시니, 그 편사(偏私)를 버리고 탕평(蕩平)을 이루려는 것은 지성으로 측달(惻怛)하는 가운데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나, 신은 이에 대해 지나친 염려가 있습니다. 전하(殿下)의 이런 마음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참으로 혹 사람의 선악과 일의 경중을 분간하지 않고 오직 고식적(姑息的)으로 아울러 용서하기를 힘쓰시면, 그 흐르는 폐해는 충사(忠邪)가 뒤섞이고 형정(刑政)이 해이하여져서 장차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않는데 이를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주역(周易)》 태괘(泰卦) 구이효(九二爻)의 가르침을 음미하여 비록 포황(包荒)226)  의 도량을 귀히 여기더라도 빙하(憑河)227)  하는 용기를 잃지 마시면 은위(恩威)가 아울러 행해지고 중정(衆情)이 모두 복종하여 스스로 붕당이 없어지는 아름다움이 이를 것입니다.
언로(言路)를 열어 치국(治國)의 요점을 삼아야 하는데, 크고 작은 대계(臺啓)를 한결같이 윤허하지 않으시니, 대각(臺閣)의 풍도가 이로 인해 막히고 단지 고지(故紙)에 등전(謄傳)하는 것을 일삼으니, 맹자(孟子)가 이른바 ‘스스로 잘난 체하여 남의 말을 거절한다.’는 데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또 전하께서 매양 성실(誠實)에 힘쓰고 문구(文具)228)  를 없애는 것을 스스로 힘쓰셨으나 시험삼아 행사한 것으로 보건대, 합계(合啓)가 이미 나온 후 대신인 자가 조정에 나올 형세가 만무한데도 해래 사관(偕來史官)을 아직껏 소환(召還)하지 않고 명소(命召)를 가져다 바치자 문득 다시 주기를 명하셨으니, 이것이 문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능(陵)에 행행하던 날 본병(本兵)의 장은 특별히 그 정세를 진념하시어 체직하셨는데, 얼마 후 새로 대신한 자가 밖에 있다는 것으로 다시 전 사람을 제수하고 인하여 독촉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성실한 도리이겠습니까? 원하건대, 반성하시어 면려를 가하소서.
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에 든 여섯 사람은 몸은 다르나 마음이 같아서 아주 흉악하다고 나라 사람들이 지목하는데, 대신(臺臣)이 엄히 국문하기를 곧바로 청한 것이 비록 갑작스럽다고 할 수 있으나 전하께서 단지 멀리 귀양 보내라고 명하는 것도 또한 너무 느슨한 잘못이 있었으니,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는 것을 아마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회계(回啓)한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써 들이라는 일은 명을 내린 지 열흘이 가까운데도 한결같이 미루고 핑계하면서 즐겨 자수(自首)하지 않다가 끝에 가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라고 계달하여 방자하게 속인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으니, 빨리 다시 조사하라 명하시어 대계(臺啓)에 의하여 죄를 정한 연후에야 임금의 명이 행하여질 수 있고 나라 기강이 떨칠 수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끝내 적발하기 어렵다면 그날 행공(行公)한 당상을 한결같이 모두 현고(現告)해야 마땅합니다. 최탁(崔鐸)의 정거(停擧)하는 명은 죄율(罪律)이 합당하지 못합니다.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여러 해 동안 병환이 계셨으나, 정사(政事)를 힘쓰시어 게을리하지 않으신 것이 심지어는 단시일에 밝혀졌습니다. 예단(睿斷)하심이 천성(天性)에 타고나시어 사문(斯文)에 대한 일은 본말(本末)을 환히 아시고 시비를 크게 정하셨는데, 그가 감히 ‘침고(沈痼)’·‘침윤(浸潤)’ 등의 말로 공공연히 함부로 비난하고 헐뜯으면서 반드시 높고 밝으신 성덕(聖德)을 더럽히고 그 원망하는 마음을 풀려고 했으니, 먼 번방에 귀양을 보내 무패(誣悖)한 죄를 바로잡으소서.
방만규(方萬規)의 옥사(獄事)에 조극량(趙克亮)은 실로 긴요하게 관계되는데, 특별히 묻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 비록 만연시키지 않으시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끌려 들어간 자는 변석(辨釋)할 수가 없어 곁에서 엿본 자들이 시끄럽게 잇따라 일어나고 있으니, 조극량을 잡아다 조사해 옥체(獄體)를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장윤(朴長潤)이 능지(陵誌)를 고치자고 청한 것은 스스로 무엄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과에 빠지는 것을 모른 것인데, 이는 한(漢)나라 신하가 논한 바와는 일이 서로 같지 않습니다. 결단코 사람을 사형(死刑)하는 것은 가장 신중히 살펴서 해야 하는데, 원정(原情)으로 논하는 것은 실로 과중(過重)한 데 속하니, 원하건대 참작하여 정죄해서 형법(刑法)이 공평하게 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내가 어찌 고식(姑息)적으로 그런 것이랴? 옳은 가운데 그름이 있고 그른 가운데 옳음이 있는 것이다. 만약 한 가지 일의 그름으로 인해 모조리 그르다고 돌리고 한가지 일의 옳음으로 모조리 옳은 데로 돌린다면 성인의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대각은 내 뜻을 본받아 공평에 힘써야 하며, 내가 만약 윤허를 아낀다면 이는 나의 허물이다. 함께 오라고 한 사관(史官)의 일은 경의 말이 옳으며, 병조 판서의 일은 이미 제수한 후 다시 체직하는 것을 내가 성실하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소하(疏下)의 여섯 사람은 가율(加律)할 필요가 없으며, 최탁의 일은 과연 율이 가볍고, 박장윤의 일은 공심(公心)을 볼 수 있으니 모두 멀리 귀양을 보내고, 조극량의 일은 옥사(獄事)가 끝났는데 어찌 다시 묻기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수찬(修撰) 홍현보(洪鉉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탕평(蕩平)229)  은 바로 성왕(聖王)이 건극(建極)230)  하는 도리입니다. 반드시 먼저 충(忠)과 사(邪)를 변별(卞別)한 연후에야 공경하고 화협(和協)하는 아름다움을 바랄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먼저 충(忠)·역(逆)과 현(賢)·사(邪)를 분변하시어 선악의 구분을 온 세상에 크게 밝히게 하셨는데도 아래 있는 자가 오히려 당습(黨習)을 하게 되면 죄주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지금은 시비가 서로 혼동되고 처분이 혹은 흔들리고 있는데 갑자기 탕평의 정사를 행하려고 하시면, 장차 한격(扞格)231)  의 결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서경(書經)》의 정자(程子) 주(註)는 실로 유봉휘(柳鳳輝)를 위한 공안(公案)인데도 전하께서는 도리어 ‘내가 어떻게 순제(舜帝)의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전교하셨습니다. 노여움을 품지 않은 것과 4흉(四凶)을 주벌하는 일은 모두 순제의 일이지만, 나라의 적을 용서하여 보호하면서도 반드시 ‘순제의 노여움을 품지 않은 것이다.’라 일컫고 대계(臺啓)를 윤허하지 않으면서는 반드시 ‘내가 어떻게 순제의 일을 행하겠는가?’라고 하시니, 신은 의아하고 미혹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노해서는 안 될 일에 노하는 것은 순임금이 노여움을 품지 않은 것을 본받으시고, 그 행적에 따라 죽이는 것은 순임금이 4흉을 주벌한 것을 본받으소서.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은 바로 성조(聖祖)의 난신(亂臣)이며 사문(斯文)의 참적(讒賊)인데, 복관(復官)·복향(復享)의 일을 아직껏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신치운(申致雲)은 흉역의 여종(餘種)으로 세상에 그 악을 행하고 어진 사람을 해치고 바른 사람에게 독을 뿜어서 3조(三朝)의 빈사(賓師)인 대로(大老)232)  를, 거활(巨猾)’이라고까지 말했으며, 감히 ‘기사년233)  의 흉당(凶黨)이라는 오히려 가할 수 없는 패언(悖言)을 했으며, 산림(山林)에서 덕을 기른 유종(儒宗)을 ‘임금의 원수는 갚아야 한다.’라고까지 말하여 감히 화(禍)를 전가시키는 일을 일으켰으니, 사문(斯文)에 대한 흉계에는 진실로 마땅히 빨리 죄를 가해 사도(斯道)를 부지(扶持)해야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엄히 토역(討逆)하는 뜻을 엄격히 하고 계지(繼志)하는 효도를 돈독히 하셔서 빨리 양사(兩司)의 쟁론(爭論)을 윤허하시고 또 선조(先朝)의 처분을 따르시어, 인하여 신치운의 무리가 선정(先正)을 무함해 욕한 죄를 바로잡으소서. 또 따르기만 한 여러 신하들이 이미 많이 먼저 석방되었으니, 적소에 있는 몇 명의 신하들에게 어찌 향우(向隅)234)  하는 탄식이 없겠습니까? 원하건대, 아울러 소석(疏釋)을 내리소서."
하고, 끝에 진계(陳戒)하는 말을 거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소(疏) 끝의 진계한 것은 매우 가상하니, 유의하지 않겠는가? 영부사(領府事)의 일은, 대행조(大行朝)에서라면 비록 이런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날 다시 제기할 일은 아니다. 내가 비록 성조(聖朝)의 덕의(德意)를 우러러 본받지 못하더라도 그대들은 어찌 효종조(孝宗朝)의 여러 신하를 본받지 않겠는가? 윤선거의 일은 사문(斯文)의 시비로 관작(官爵)을 주고 빼앗는 일에 관계시킬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조정에 있는 사람이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한 후에야 관작을 받는다는 것인가? 이것이 선조(先朝)에서 훼판(毁板)하자는 청을 윤허하지 않는 까닭이니, 나는 선조의 관인(寬仁)한 성덕(盛德)을 본받을 뿐이다. 관직을 회복시키지 않았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주었다가 다시 빼앗는 것을 나는 할 수 없으니, 이런 논의를 일찍이 취하지 않았다."
하였다.

 

지평 이의천(李倚天)이 김재로(金在魯)가 박장윤(朴長潤)을 소로 논한 일로써 피혐(避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박장윤의 죄는 능침(陵寢)에 관계되어 환(環)을 훔친 죄에 비하여 분명히 중한데, 어찌 간신(諫臣)이 수범(手犯)과 다르다는 말을 내어 곧바로 ‘그 일과 같지 않다.’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혹시라도 우리 선대왕께서 즉시 깨닫지 못하셨더라면 거의 불행하게 참으로 그런 일이 있게 되었을 것인데, ‘신중히 살펴야 한다’의 두 글자는 신 역시 이에 힘써야 하지만, 박장윤에게는 단지 그 고기를 먹고자 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니, 스스로 이런 마음이 어디를 말미암아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예비(例批)를 내렸다. 이튿날 장령(掌令) 김담(金墰)이 이의천의 출사(出仕)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논어(論語)》의 ‘진성자(陳成子)235)  가 간공(簡公)236)  을 시해한다.’ 장(章)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감지(闞止)237)  가 진항(陳恒)과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백성들이 진항을 편들지 않고서 감지의 당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허여하고 허여하지 않음이 각기 반반씩이었으면 찬탈(簒奪)하는 계책을 감히 이룰 수 있었을 터인데, 끝내 금하지 못한 것은 비유컨대 훈유(薰蕕)가 함께 냄새를 내고 빙탄(氷炭)을 한 그릇에 담은 것으로 끝에 가서 흐르는 폐단이 음(陰)이 양(陽)을 이기고 사(邪)가 정(正)을 이기는 데 이르러 나라가 따라서 망했으니, 인주(人主) 된 자가 현사(賢邪)를 구별하는 것을 제일의 의(義)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지사(知事) 민진원(閔鎭遠)이 청하기를,
"귀양을 갔다가 추후로 석방된 사람을 서용(敍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이병상(李秉常)·황재(黃榟)·김여(金礪)·홍우전(洪禹傳)이었다. 또 청하기를,
"전(前) 헌납(獻納) 송택상(宋宅相)을 조문명(趙文命)의 예에 의해 서용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진달하기를,
"김진상(金鎭商)은 늙은 어미가 있고 형제가 없어 불쌍하니, 마땅히 이유(李瑜)·이명룡(李命龍)과 함께 사유(赦宥)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르고 이명룡만 육지로 나가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왕자(王子)와 옹주(翁主)에게는 으레 전택(田宅)을 내려 주어야 하나, 새로 주면 폐단이 있게 된다. 잠저(潛邸) 때의 창의궁(彰義宮)을 그 창의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신위를〉 봉안(奉安)하는 사우(祠宇)로 하여 봉사(奉祀)하는 자가 인하여 그 궁에 들어가게 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한데, 대신들이 사체(事體)가 미안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별도의 사우를 지어 봉안한 후 이를 마땅히 왕자의 궁을 삼아야 한다. 창의궁은 그 호칭을 버리고, 전민(田民)을 왕자나 옹주에게 내려 주는 것은 새로 설치하는 폐단을 줄이고, 본궁(本宮)은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수직하게 하라는 뜻을 승정원(承政院)에서 내수사(內需司)에 분부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양주(楊州)의 유학(幼學) 이지항(李志沆)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과 고(故) 판서(判書) 김창협(金昌協)의 석실 서원(石室書院) 배향(配享)을 회복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도봉 서원(道峯書院)을 이미 복향(復享)하였으니, 석실 서원을 어찌 다름이 있게 하겠는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일체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김창협은 김수항의 아들로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임인년238)   화(禍)에 이르러 김씨가 모두 도륙(屠戮)을 당하자 심준(沈埈)·윤회(尹會)의 무리가 무함해 헐뜯어 출향(黜享)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복향된 것이다.

 

2월 3일 신미

장령(掌令) 김담(金墰), 정언(正言) 김상석(金相奭)이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비답하기를,
"옛날 사람은 한 마디 말로 능히 사람을 감동시켰는데, 나는 평일에 성심(誠心)이 여러 신하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해 한 번 비답하고 두 번 비답한 것이 격언(格言)이 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차탄(嗟嘆)할 뿐이다. 영부사(領府事)의 일은 지난해 4소(四疏)에 비록 그러한 문자가 있었지만 그후의 소장과 요즘의 연주(筵奏)에는 역시 후회하는 뜻을 말하였는데, 다시 합계로 제기하는 것은 참으로 알지 못하겠다. 지금 만약 이런 말을 중시하면 지난해 5소(五疏)는 문구(文具)로 돌리고 말겠는가? 영상(領相)의 일에 대해 그 조어(措語)를 고쳐 ‘김일경 당의 괴수이다.’라고 하였으니, 사람을 참혹하게 논함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는 것인가? 좌상(左相)의 일과 아울러 빨리 정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김담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권익관(權益寬)은 역적 김일경의 종제(從弟)로 천성이 사납고 독하며 마음씀이 간사해 사람을 해치고 나라에 화를 끼치는 일을 은밀히 돕고 몰래 돕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전후의 소계(疏啓)에 가리키는 뜻이 흉악하고 참혹하였으니, 그 이른바 ‘종(種)을 바꾸는 일이 없게 하라.’는 설은 반드시 착한 사람들을 죽이어 사람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후에 그만두려 한 것입니다. 지난 겨울에 하나의 상소는 기사년239)  의 일을 추후에 제기함이 매우 절통(絶痛)하였으며, 보내 온 글에 말한 뜻이 ‘문생(門生)·국로(國老)’니 ‘옹립(擁立)·원립(援立)’이니 하는 등의 말은 일관(一貫)되게 그가 성궁(聖躬)을 협박하고 역적 김일경을 몰래 옹호한 형상이 더욱 환하게 드러났으니, 청컨대 아주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고, 구계(舊啓) 가운데 유봉휘의 죄목을 첨가했다.
김상석은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신치운(申致雲)은 역적 신면(申冕)의 손자이고 집안을 어지럽힌 아들로서 사람축에 끼지 못하였으며 청의(淸議)에 원망을 쌓아오다가 간사한 무리들이 권병(權柄)을 잡던 날을 당하여 여러 흉적에게 아첨해 빌붙고 외람되이 청현직(淸顯職)으로 기울면서 유감을 드러내고 힘을 쓸 계책을 하려고 하면서 감히 정인(正人)을 해치고 현인(賢人)을 무함하는 수단을 써서 이에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의 관작을 추탈(追奪)하라는 계달(啓達)을 내었는데, 심지어 ‘거활(巨猾)에 의지하였다.’는 말까지 해 무함하여 욕한 말이 사문(師門)에까지 이르렀고, 끝에 가서는 다시 ‘나라에 원수가 된다[謂國嫁讎]’느니, ‘임금에게 반역이 된다[謂君可叛]’느니 하는 등의 말로 갖은 더러운 욕을 하며 더럽혔으니 그 말하는 바가 문득 급서(急書)와 같았습니다. ‘나라에 원수’니, ‘임금에게 반역’이니 하는 것은 어떠한 악역(惡逆)인데 비록 평범한 사람에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이런 말을 갑자기 가할 수 없는데, 더구나 세 조정에서 예우(禮遇)하고 한 세대가 종주(宗主)로 우러러보는 유현(儒賢)을 갑작스레 무함해 욕하기를 의심과 거리낌이 없게 하는 것입니까?
아! 그의 증조(曾祖) 적(賊) 신면(申冕)은 김자점(金自點)에게 빌붙어 몰래 그들과 내통하여 여러 현인을 섬멸하고 나라에 해를 끼친 형상이 효종(孝宗) 때의 친국(親鞫) 문안(文案)에 환히 실려 있는데, 그가 어찌 감히 진신(搢紳)의 반열에 머리를 들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이미 오래 되어 이목(耳目)이 조금 멀어진 후에 와서 제멋대로 도로 씹는 계책을 하였으니, 청컨대 빨리 먼 곳으로 귀양 보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신치운의 그때 아뢴 말이 비록 괴려(乖戾)하다고 하겠으나 그는 선조(宣祖)의 현도위(賢都尉) 자손인데, ‘역당(逆黨)의 자손이며 집안을 어지럽힌 아들이라.’는 말로 지목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2월 4일 임신

장령(掌令) 김담(金墰), 정언(正言) 김상석(金相奭)이 합계에 대한 비지(批旨)로 피혐하였다. 김상석이 아뢴 가운데 말하기를,
"신치운(申致雲)의 아비 신유(申輶)는 그의 종질(宗侄) 신치원(申致遠)과 더불어 적통(嫡統)을 빼앗고 재산을 다투느라 형조(刑曹)에 치대(置對)한 일까지 있어 문득 원수와 같이 여겼으니 ‘집안을 어지럽혔다’는 두 글자가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현도위(賢都尉)의 친아들이라 하더라도 악역의 죄를 범하면 효종께서 일찍이 용서하지 않으셨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이에 도위의 후손이라 하여 곡진하게 비호하는 은혜를 보이려 하십니까?"
하니, 의례적인 비답으로 ‘내 뜻이 굳게 정해졌긴 하나 성의가 부족함을 스스로 부끄러워한다.’는 전교가 있었다. 이튿날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이 김담과 김상석을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우윤(右尹) 권업(權𢢜)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정유년240)   영번(嶺藩)에서 대죄(待罪)하면서 감시(監試)를 설과(設科)할 때 선조(先朝)의 대리(代理)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유생(儒生)의 무리가 반드시 과거를 폐지시키려고 진소(陳疏)하여 마침내는 소란을 일으켜 과장(科場)을 파하기에 이르러, 시소(試所)에서 소란을 피운 유생 약간 명을 붙잡아 가두고 치보(馳報)하였기 때문에, 신이 낱낱이 들어 장계로 아뢰고 처분을 앙청했었습니다. 그때 수찬(修撰) 홍만우(洪萬遇)의 소에 오로지 난장(亂場)한 이유는 빼고 진소(陳疏)한 일을 자중(藉重)하여, 신을 모함함이 매우 위태롭고 두렵게 하였습니다. 작년에는 신필회(申弼誨)가 남은 의논을 주워모아 ‘수창(首昌)을 적발하여 옥(獄)을 가득 차게 가두었다.’고까지 하면서 시소(試所)에서 유생을 가둔 것이 처음에는 신에게 관계된 연유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가소로와 변명하기에도 부족하였습니다."
하였다.

 

춘천 부사(春川府使) 최종주(崔宗周), 양양 부사(襄陽府使) 박내정(朴乃貞)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면칙(勉飭)하여 보냈다.

 

2월 5일 계유

이성룡(李聖龍)을 지평(持平)으로, 홍우전(洪禹傳)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김여(金礪)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의현(李宜顯)을 겸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으로, 조문명(趙文命)을 겸동학 교수(兼東學敎授)로, 심정보(沈廷輔)를 우윤(右尹)으로 삼았는데, 심정보는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외손(外孫)이어서 임금이 의망(擬望)에 넣기를 특별히 명한 것이다.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이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쥐를 잡고자 해도 그릇을 깰까 꺼려하고, 벌(罰)은 꼴[蒭]을 차내는 데 이른다.’라고 한 것은 그 이름을 미워하여 그 은미했을 때 방지하려는 것입니다. 지난해 궁인(宮人)의 일이 처음으로 국옥(鞫獄)에서 나오자, 도사(都事)가 나장(羅將)을 거느리고 지레 동조(東朝) 차비문(差備門) 밖에 이르러 곧바로 뒤따라 잡고자 한 것이 독촉하고 핍박하는 것과 같음이 있어서, 동조에서 놀란 나머지 궁인(宮人)의 요기(料記)까지 내어 보이며 그런 사람이 본래 없었음을 밝혔으니, 당시의 모습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설령 죄인이 곧바로 동조의 궁인이라고 지적해 현고(現告)했더라도 안옥(按獄)하는 여러 신하들은 오직 청대(請對)하여 면품(面稟)하고 공손히 넘겨 주기를 기다리더라도 다시 미룰 수는 없는 일인데, 곧바로 도사와 나졸로 하여금 차비문 밖에서 소란을 떨게 한 것이 여염집에서 추포(追捕)하는 것처럼 했습니다. 남의 신하 된 사람이 어찌 감히 이처럼 무례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죄가 도태(淘汰)시켜 버리는 데 그쳐 책임을 메워 미봉할 계책을 삼았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감출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당 도사를 잡아다 엄히 국문하고, 안옥(按獄)한 여러 신하들을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였으니,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괴산 군수(槐山郡守) 이정량(李廷亮) 등 여섯 고을 수령(守令)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또 인견(引見)하고 면대하여 신칙하였다. 이 정량이 아뢰기를,
"영읍(嶺邑)에 있을 때 보니 감병영(監兵營)의 별회곡(別會穀)으로 여러 고을에 있는 것이 수만 석인데, 해마다 그 전체의 축나는 것을 취해 회록(會錄)하여 강제로 다 분할시키니, 백성들이 환납(還納)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원회 곡물(元會穀物)이 절반은 창고에 남아 있더라도 스스로 명령하여 별회곡과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또 대동(大同)의 재감(災減) 때 태가(駄價) 및 잡비(雜費)는 비록 재감하지만 대동의 원래 숫자는 재감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수납할 때를 당하여 태가와 잡비가 부족함으로 인해 다시 거두는 것을 면치 못하니, 합하여 변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2월 6일 갑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할 때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윤휴경(尹休耕)의 귀양가 있는 것을 석방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진달하기를,
"육진(六鎭)의 수령(守令)을 전부터 감사(監司)가 병이 중한 것으로써 파출(罷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싫어하여 회피함을 방지하려는 것입니다. 북백(北伯)의 장계(狀啓)에 병으로 경흥 부사(慶興府使) 하섭(河涉)을 파출했다고 하였으니, 청컨대 감사 이의만(李宜晩)을 추고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인하여 하섭을 그대로 잉임(仍任)하도록 명하였다.

 

2월 7일 을해

하교하기를,
"사헌부의 계사 가운데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소란을 피운 것은 매우 놀라운 일로 중관(中官)의 요기(料記)를 찾아 준 것 역시 매우 무엄하니, 일체 나문(拿問)할 것을 명한다."
하였다.

 

2월 8일 병자

김고(金槹)를 승지(承旨)로, 김여(金礪)를 집의(執義)로, 민진원(閔鎭遠)을 판의금(判義禁)으로, 김흥경(金興慶)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병상(李秉常)을 참판(參判)으로, 신사철(申思喆)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인징(李麟徵)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영복(趙榮福)을 참의(參議)로, 권성(權𢜫)을 사직 제조(社稷提調)로 삼았는데, 이조 참판 심택현(沈宅賢)의 정사(政事)였다.

 

장령 이휘진(李彙晉)·김담(金墰), 지평 이의천(李倚天), 정언 김상석(金相奭)이 합계를 거듭 아뢰고, 유봉휘(柳鳳輝)에 대해 아뢰기를,
"군흉(群凶)이 전하를 위협하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손을 쓴 자는 유봉휘였습니다. ‘신하의 예가 없다[無人臣禮]’란 네 글자는 한(漢)나라 어사(御史) 엄연년(嚴延年)241)  이 곽광(霍光)이 마음대로 폐립(廢立)한 것을 논핵한 것으로부터 나온 말이며, 그리고 그 이른바 ‘지금으로부터 이 뒤로는 반드시 임금의 마음으로 결단하라.’고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전에는 임금이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난적(亂賊)이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남의 신하 된 자로서 이미 정해진 저위(儲位)를 논핵하여 바로잡는 자가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으며, 지난번 우리 선왕(先王)의 이간할 수 없는 우애(友愛)가 아니었다면 전하께서 어떻게 오늘날 보존함이 있었겠습니까? 유신의 소비(疏批) 가운데 ‘효종(孝宗) 때 여러 신하들’이라고 전교하셨는데, 성상의 뜻이 만약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일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나라에 원손(元孫)이 있었지만 금일에는 삼종(三宗)의 혈속으로는 단지 전하 한 분뿐이니 어찌 비교해 논하겠으며, 더구나 이경여의 의논은 저위를 세우는 일을 논의하던 처음에 있었고, 유봉휘의 소는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진 후에 나왔습니다. 군신의 분의(分義)는 단지 명위(明位)가 정하여지고 정하여지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는 등의 말을 첨가했다.
이광좌(李光佐)에 대한 계사에는,
"본래 김일경 당의 괴수(魁首)로 착한 사람을 도륙(屠戮)하고 윤상(倫常)을 무너뜨려 거의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역적 김일경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하는 등의 말을 첨가했다. 이휘진 등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무릇 죄인의 초사(招辭)는 비록 한 마디 말이라도 삭제할 수 없는 것은 옥체(獄體)를 중히 하고 간사하고 속이는 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백망(白望)이 옥중(獄中)에서 상변(上變)한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안옥(按獄)하는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쓰지 않으려고 하다가 문랑(問郞)과 도사(都事)가 다투어 힐문하는 단서가 있게 된 뒤에야 부득이 썼으며, 마침내는 난초(亂招)라 일컬으면서 시행하지 못할 과목(科目)에 두었고, 끝내는 때려 죽여 멸구(滅口)하고 육시(戮屍)·노적(孥籍)하여 그들 마음을 상쾌하게 하였으니, 인정이 의혹되고 국언(國言)이 시끄러워서 그 동안의 사정을 구핵(究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 때 문랑과 도사를 우선 잡아다 핵문(覈問)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고, 다만 신계(新啓)만 윤허한다."
하였다. 전계 가운데서 해당 금부 도사와 안옥(按獄)한 여러 신하들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그 때 문랑(問郞)은 강세윤(姜世胤)·유수(柳綏)·윤유(尹游)·정내주(鄭來周)이고, 도사(都事)는 신성집(申成集)·이심(李淰)·황유목(黃有牧)·홍응몽(洪應夢)이다. 김상석(金相奭)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이삼(李森)에 대한 계사에는,
"심지어 그의 아우가 역적 김일경의 친교(親校)가 되고, 역적 김일경의 아우는 그의 밀비(密裨)가 되어 서로 심복으로 의탁하여 몰래 모의를 통했으니, 그 몸은 비록 둘이지만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하는 등의 말을 첨가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원계(院啓) 가운데 비국(備局)에서 회계(回啓)한 사람의 일은 비국 낭청에게 물은 뒤에 품처할 것을 명한다."
하였다.

 

행 대사성(行大司成) 이진망(李眞望)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 겨울 이래로 하나의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감히 틈을 타 뚫고 나올 계책을 해 먼 곳 가난한 사람의 아들을 사주하고 한미한 집안의 말단 벼슬아치 무리를 꾀어 문자(文字)를 지어주고 이름을 빌려 일찍이 시험해 보는 자가 날로 공거(公車)242)  에 쌓였는데, 김일경으로써 함정을 삼아 조정에 가득한 신하들을 헤아릴 수 없는 죄과로 마구 몰아넣지 않음이 없습니다.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는 것도 이미 마음이 아팠는데, 경알하고 모함함이 더욱 급하여 합계(合啓)에 이르러 극심해졌습니다. 전후의 비지(批旨)에 여러 대신의 심사를 남김없이 통찰하시어 혹은 다른 염려가 없을 것을 보장한 듯하나, 저들의 앞으로의 형세를 보건대 그 계책을 이루려면 필경 호랑이가 성 안에 들어왔다고 세 사람이 말하면 믿게 되고, 어머니가 북을 던지고 의심하게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니, 이는 옛사람도 슬퍼한 바이고 신 역시 두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아! 사람을 참소하는 말이 어느 것인들 망극하지 않겠습니까만, 수규(首揆)243)  를 괴수라고 한 것이 더욱 절통합니다. 영의정은 평생에 실로 청류(淸流)의 영수(領袖)이며 국가의 주석(柱石)으로 종사(宗社)를 위하고 성상을 위하는 마음에 더운 피가 가슴에 가득차 있음을 천지 귀신 역시 혹 감림(鑑臨)하실 것입니다. 김일경과는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처럼 갈래가 다름을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데, 지금 참소하는 자들은 도리어 ‘몰래 화심(禍心)을 도왔다.’는 등의 말을 가해 없는 사실을 엮어 불려내니, 지의(指意)가 참혹하고 혹독합니다. 아! 나라에 어진 재상이 있는 것이 저들에게 무슨 원수가 되기에 이렇게 심하게 합니까? 아! 참소하는 말이 함부로 행해져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의 무함받음이 오늘과 같은데, 구차스레 영총(榮寵)을 탐내는 사람을 자취를 분간하지 않고 부앙(俯仰)한다면 비단 그 마음이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서 마땅히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설령 신이 염치를 무릅쓰고 반박(盤礴)244)  하고 있으나 지금의 화색(禍色)을 보면 신과 같은 자는 우선 언급할 겨를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필경에는 또한 반드시 밀망(密網)245)  에서 모면하지 못할 것이니, 신이 또 어찌 감히 망령되게 한 걸음 나아가 스스로 위기를 촉발시키겠습니까?"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이진망(李眞望)의 소는 처분(處分)이 크게 정해진 데 유감을 품고, 김일경의 무리가 쫓김을 당한 데 분노하였으니, 만약 엄하게 방지하여 길들게 하지 않으면 조정이 편치 못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에 말한 것이 비록 화평함이 모자라나 시비를 가리는 것은 곧 임금의 처분이다. 계품(啓稟)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공경하라."
하고, 이진망의 소에 대해 비답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 요즈음의 일에서 밀망(密網)이라고 한다면 지난날의 대간의 말은 또한 마땅히 어떻다고 말하겠는가? 경 같은 문학(文學)으로도 또한 자기의 곡식 싹이 크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결과를 면치 못하니, 경이 또 이러한데 다른 사람이야 그나마 무엇이라 말을 하겠는가? 가만히 경을 위해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전라도 유생(儒生) 김택현(金宅賢) 등 1천여 인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황욱(黃昱)·김범갑(金范甲)·김수귀(金壽龜)·김홍석(金弘錫)이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무함하여 헐뜯은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고, 도 말하기를,
"신경제(申慶濟)는 바로 기사년246)  의 흉얼(凶孽)로 임인년247)  의 흉소(凶疏)를 문득 하나의 급서(急書)로 하였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송시열은 불만스런 뜻으로 앞에서 창도(倡導)하여 화기(禍機)를 빚어내다가 신축년248)  에 이르러 탄로된 것이다.’라고 한 것은 선정을 악역 부도(惡逆不道)의 죄로 몰아넣었습니다. 청컨대 신치운(申致雲)과 함께 중한 형률을 더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송시열의 정읍(井邑) 고암 서원(考巖書院) 및 다른 서원의 철훼(撤毁)한 편액(扁額)을 일체로 다시 내려 주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선정신 권상하(權尙夏)를 여산(礪山) 죽림사(竹林祠)에 배향(配享)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원액(院額)은 일체로 다시 달도록 하고, 선정을 무함한 사람과 이러한 일을 마음에 달게 여긴 무리는 일이 이미 지났으니, 어찌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이재(李縡)가 상소하여 그의 중부(仲父) 고(故) 판서(判書) 이만성(李晩成)의 억울함을 아뢰었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해 화를 당한 것은 단지 이삼(李森)이 호곤(湖閫)249)  이 된 일단(一段)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으로, 한번 구금되어 끝내 살아서 원호(圓戶)250)  를 나오지 못하였고, 역적 김일경과 이사상(李師尙)이 옥관(獄官)이 되어 여러달 동안 단련(鍛鍊)하여서 되지 않았었습니다. 신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부사(父師)의 은의(恩義)를 오직 중부에게 의뢰하였는데 지금껏 구천(九泉)의 원통함을 씻지 못한 채 총광(寵光)이 먼저 제 몸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해독을 푸는 수단에 만약 선대왕의 지극히 밝은 성덕(聖德)이 아니었더라면 반드시 사류(士類)를 모조리 섬멸한 후 그만두었을 것인데, 경은 하필 이미 지난일을 따라 제기하는가?"
하였다.

 

청시 승습 정사(請諡承襲正使)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서장관(書狀官) 김상규(金尙奎)가 돌아왔는데, 부사(副使) 이진유(李眞儒)는 먼저 죄로 귀양갔다. 직과 김상규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이진유의 자질(子侄)은 제직(除職)하고 모두 전답과 노비를 내리며, 역관(譯官)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라고 명하였으니, 옛날의 전례(典例)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비국랑(備局郞)을 불러 물었더니, 말하기를, ‘그때 회계(回啓)는 초기(草記)로 하였으며, 대신(大臣)의 주장을 여러 당상에게 돌려 보인 후 입계하였다.’ 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하나하나 지목해 현고(現告)하게 하니, 영의정 조태구(趙泰耉), 우의정 최석항(崔錫恒), 유사 당상(有司堂上)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광좌(李光佐), 예조 판서 이태좌(李台佐), 우참찬 유봉휘(柳鳳輝)라고 써 들여 현고했습니다. 그때 집필랑(執筆郞) 전운상(田雲祥)이 바야흐로 정평부(定平府) 임소(任所)에 있으니, 전운상에게 물으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그때 초기(草記)를 들이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거기에 사용한 문자(文字)는 바로 사마광(司馬光)의 말을 이끌어 비유한 것으로 비록 온당치 못하였으나, 현고(現告)된 여러 비국 당상은 선조(先朝)를 무핍(誣逼)한 사람들이 아니다. 비국 당상 가운데 만약 대신(大臣)이 있다면 사체가 전도되기 때문에 비국 낭청에게 물으라는 명이 있었던 것인데, 과연 생각하던 바대로이니, 그냥 두라."
하였다.

 

2월 10일 무인

장령 이휘진(李彙晉)·김담(金墰), 지평 이의천(李倚天), 정언 김상석(金相奭)이 이진망(李眞望)의 소 때문에 피혐하였는데, 말하기를,
"이진망(李眞望)의 본래의 뜻은 적 김일경을 위하여 신변(伸卞)하려고 하면서도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흉역(凶逆)의 거괴(巨魁)요 종사(宗社)의 죄인을 청류(淸流)의 영수(領袖)요 국가의 주석(柱石)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축년251)   이후로 늦추었다 조였다 하고 닫았다 열었다 하는 것을 모두 적 김일경이 하였는데, 이광좌(李光佐)의 무리는 그 효과(効果)를 받았고 이진망은 이광좌의 발탁된 바가 되었으니, 이광좌를 영구(營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이광좌가 적 김일경에게 보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광좌는 적 김일경에게 있어 차마 성토하지는 못했으나 역시 감히 영구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이진망은 이광좌에게 있어 힘껏 영구할 뿐만 아니라, 이것으로써 스스로 벼슬하지 않을 계획을 하는 것이 마치 절개를 세우려는 자같이 하여, 김일경의 당과 함께 하기를 달갑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이휘진 등이 전의 합계(合啓)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형조 판서 이의현(李宜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사상(李師尙)·박필몽(朴弼夢) 등이 선신(先臣)을 배척한 일은 처음에 반드시 신을 죽일 계획을 하려고 함으로 인하여 위로 그 친속(親屬)에게 미친 것인데, 이른바 ‘가만히 불리(不利)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바로 흉악한 임부(林溥)의 말을 전하여 답습한 것입니다. 이 사상이 임부를 사주한 상소문과 편지가 모두 있어 숙종께서 특명하여 그 직임을 삭탈(削奪)하였는데, 이에 감히 〈숙종께서〉 승하하신 지 이미 오랜 뒤에 임부를 칭송하는 말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습니다. ‘경영(經營)·고감(敲撼)’ 등의 말은 모두 이로 말미암아 연출(演出)된 것이며, 역적 김일경이 교문(敎文)을 지으면서 또 임부와 이잠(李潛)을 극구 숭장(崇奬)한 것을 들어 그때의 국안(鞫案)과 부합시켜 흉악한 뜻이 한 투식에서 나온 것과 같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의 무함한 말을 어찌 뒤따라 혐의하겠는가?"
하였다.

 

수찬 홍현보(洪鉉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락 말하기를,
"‘너희들은 인조조(仁祖朝)의 여러 신하들을 본받지 않는가?’라고 전교하신 것은 대개 신의 외조(外祖) 고(故) 영상(領相) 이경여(李敬輿)의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인조 을유년252)   저위(儲位)를 세울 때 ‘세자(世子)가 죽고 아들이 어리니, 나는 장(長)을 가려 세우고자 한다.’라고 하신 전교가 있을 때에 효종(孝宗)께서 차적(次嫡)으로 대군(大君)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경여는 원임(原任)으로 경(經)을 지키자는 의논을 진달하였는데, 아직 명위(名位)가 정해지기 전에 경(經)을 인용하여 논설(論說)한 것은 의리가 당연하지만, 명위가 이미 정해진 뒤에 감히 흉악한 꾀를 드러내는 것은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신축년253)   초에 유봉휘(柳鳳輝)를 성토할 때 조태구(趙泰耉)가 감히 이 일을 거론하여 현란하게 구해할 바탕을 삼았으나, 그때에도 이미 그것이 속여 인용한 것임을 변석한 자가 있었습니다. 성상께서 전말을 자세히 모르시고 이런 전교가 계신 것이었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내 뜻은 굳게 정하여져서 마음에 끼인 것이 없는데, 이미 정해지고 정해지지 않은 것을 논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2월 11일 기묘

헌부(憲府)에서 【장령(掌令) 김담(金墰)과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진망은 당을 옹호하는 데 급하여 감히 합계나 중론(重論)을 참소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터무니없는 말을 엮어 단련해 내어, 반드시 공의(公議)와 다투어 임금의 주벌(誅伐)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이것도 이미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데, 그가 이른바 ‘세도(世道)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라고 한 것은 더욱 놀랍습니다. 아! 역적 김일경을 숭장할 때에는 세도가 어떠하였기에 이에 역적 김일경을 징토(懲討)하는 날에 도리어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입니까? 그는 역적 김일경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분노하고 미워하는 의도도 없이 심지어 ‘함정’ 등의 말을 하여 근거 없는 말로 현혹시켜 스스로 그 난만(爛漫)한 데로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고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정하고 있으니, 마땅히 먼저 다스려야 할 죄과에 두어야 합니다.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 등이, 화릉군(花陵君) 이조(李洮)의 효행을 상소하여 포상(褒賞)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서경(書經)》에 ‘구족(九族)을 친하게 한다.’고 하더니, 경(卿)의 상소에서 친족(親族)에게 화목하는 성의를 볼 수 있다.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우러러 본받은 것은 선조(先朝)의 성대한 뜻이니, 경들도 더욱더 면려(勉勵)하여 마땅히 친해야 할 사람을 친하는 뜻을 굳게 하라."
하고, 조(洮)는 영래군(瀛萊君)과 청천군(淸川君)의 예에 의해 특별히 정2품 직을 제수하라고 명하고, 인하여 이밖에 종신(宗臣) 가운데 효행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선조(先朝) 때의 결정에 의거하여 해시(該寺)로 하여금 사실에 따라 물어보고 아뢰라고 명하였다.

 

2월 12일 경진

박필철(朴弼哲) 등 15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대왕 대비전의 환후가 평복(平復)된 경과(慶科)이다.

 

장붕익(張鵬翼)을 군기시 제조(軍器寺提調)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3일 신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할 때 제조 민진원(閔鎭遠)이 진달하기를,
"지난번 대신이 올라온 뒤로 소결(疏決)하라고 명하신 일이 있습니다. 죄인으로 정형(正刑)254)  하지 않은 자는 연좌(緣坐)하여 적몰(籍沒)하는 법이 없는데, 숙종께서 특명으로 조성(趙䃏)을 노적(孥籍)하였고, 임인년255)  에는 승관(承款)하지 않은 죄인에게 아울러 노적을 시행했으나 연좌된 사람은 으레 소결에서 거론하지 않았는데, 이들은 법 이외에 연좌된 것이긴 하나 또한 써서 들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 봉인(鋒刃)이 참혹하고 혹독했음은 나 역시 알고 있긴 하나, 어제 비국(備局)의 일로 그때의 일기(日記)를 가져다 보았더니, 그때 여러 신하들이 대신을 김자점(金自點)에게 비교하였다. 김자점의 옥사에서는 여러 신하들이 곧바로 정법(正法)256)  하려고 하였으나 효종(孝宗)께서 반드시 형신(刑訊)하여 취복(取服)하기를 기다린 뒤에 정법하게 하였으니, 후폐(後弊)를 염려하신 뜻이 지극하셨다. 지난번의 일로 만약 후일 임금이 마음을 상쾌하게 법을 행하는 단서를 열어 놓는다면 폐단이 적지 않다. 지금 이후로는 정형(正刑)하지 않았는데 죽은 자는 소급해 전형(典刑)으로 바로잡지 말 것을 영원한 정식(定式)으로 삼아 시행하고, 법외(法外)로 연좌되어 귀양가게 된 무리는 소결(疏決)할 때 일체 써 들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민진원이 척신(戚臣)으로 전직(銓職)에서 해임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교리(校理) 서종섭(徐宗燮)이 상소하여 회계(回啓)한 비국(備局)의 여러 당상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여러 비국 당상이 선조(先朝)를 무함하고 핍박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나, 선조(先朝)의 금석(金石) 같은 훈계를 ‘본의가 아니다.’라고 말하여 고친 것은 무함하고 핍박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낭묘(廊廟)의 반열에 있는 자가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고 속이어 가리면서 고식적으로 죄를 덮으려고 계획하는 것은 더욱 매우 무엄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계(臺啓)의 비답에 매양 ‘내 뜻은 굳게 정해졌다.’라고 전교하시는데, 진실로 이치의 마땅한가 않은가는 묻지 않고 한결같이 굳게 정한 것으로 주장을 하신다면 마침내 반드시 적(賊)을 아들로 잘못 아는 경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이 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건중(建中) 소성(紹聖)의 화(禍)257)  가 곧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국 낭청에게 물은 것은 그 전말을 알려고 해서였다. 이처럼 붕비(朋比)258)  가 날로 심해져서 세도(世道)가 함몰되는 때를 당하여 이러한 일들을 소급해 허물한다면 조정 신하 가운데 완전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합계(合啓)한 일을 한 나라의 공공(公共)의 논의라 한다면, 맹자(孟子)가 말한 ‘나라 사람이 모두 죽여야 한다.’라는 것인데, 네 말이 또한 지나치지 않겠는가? 대각(臺閣)에서 말한 것이 공정한데도 내가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내가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당론(黨論)이 있으면서부터 피차의 언사에서 격탁 양청(激濁揚淸)259)  하는 말을 듣지 못하겠고 한갓 서로 공격하는 것만을 일삼았으니, 이것이 어찌 공정(公正)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러한 한쪽의 말을 나는 취하지 않는다."
하니, 여러 대간(臺諫)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전교로써 피혐하자,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이의현(李宜顯)을 이조 판서로 삼고, 또 조영복(趙榮福)·신필현(申弼賢)·김상옥(金相玉)을 승지(承旨)로, 권성(權𢜫)을 형조 판서로, 홍호인(洪好仁)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았는데, 이의현의 정사였다.

 

전교하기를,
"조정에서 종척(宗戚)을 대우함에 있어 비록 당하관(堂下官)260)                  이라 할지라도 초모(貂帽)와 홍대(紅帶)를 하게 하였으니, 이숙(李埱)은 바로 의원군(義原君)의 아들이며 대군(大君)의 증손이다. 비록 부직(付職)261)                  은 하지 않았으나 대진(代盡)262)                  한 사람이 아니면 계품하지 않고 마음대로 형신(刑訊)하는 것은 후폐(後弊)에 관계가 되니, 해당 형조 당상을 파직하라."
하였다.

 

장령 이휘진(李彙晉)·김담(金墰), 지평 이의천(李倚天), 헌납 정택하(鄭宅河), 정언 김상석(金相奭)이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고, 이휘진 등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훈련 도정(訓鍊都正) 남태징(南泰徵)은 음험하고 사나우며 해치고 교활하게 굴어 여러 악을 구비하였는데, 역환(逆宦)과 체결(締結)하여 음모(陰謀)를 주장하여 오랫동안 역적 김일경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맨먼저 흉당이 숭장(崇奬)하여 등용됨을 입어 일찍이 해를 넘기지 않아 영장(營將)에서부터 기용되어 통수(統帥)가 되고 오래지 않아서 들어와 훈부(勳府)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되었습니다. 그가 남이 모르는 가운데 공을 세운 것이 역적 목호룡(睦虎龍)과 서로 표리(表裏)가 된 형상은 가리우지 못함이 있습니다.
전(前) 병사(兵使) 박찬신(朴纘新)은 역적 김일경의 조아(爪牙)263)  로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군복(軍服)을 갈아입고 어두운 밤에 이삼(李森)과 남태징의 집을 드나들면서 언뜻 보였다가 갑자기 없어지곤 하여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고 음흉한 정적(情跡)은 길가는 사람도 모두 의심하였습니다. 부총관(副摠管) 이여적(李汝迪)은 종처럼 역적 김일경을 섬겼고 이삼과 윤취상(尹就商)에게 빌붙어서 공격의 참독한 일을 몰래 돕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이 세 사람과 역적 김일경·목호룡 두 역적은 본래 나쁜 짓이 같은데, 두 역적이 복법(伏法)된 뒤로 더욱 의구심을 품어 머리를 마주대고 모의하여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결코 연곡(輦轂)264)   아래에 두어 나라에 근심을 끼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 보내소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박필현(朴弼顯)은 바로 박태춘(朴泰春)의 아들입니다. 박태춘은 흉악한 임부(林溥)의 와주(窩主)265)  가 되어 국청(鞫廳)의 형신(刑訊)을 받기까지 했는데 요행히 왕장(王章)에서 도피하여 사람 무리에 끼지 못했습니다. 박필현은 흉당에 빌붙어 외람되이 사적(仕籍)에 통하여 본직(本職)을 탐하기에 이르러 동료들이 같은 대오(隊伍)에 참여하기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역적 김일경을 붙잡아 올 때 엄명(嚴命)이 있지 않다고 하여 오직 지체하는 대로 맡겨두었으며, 경기(京畿) 가까이 오기에 미쳐서는 역적 김일경의 사당(私黨)으로 와서 보는 자를 하나도 금단하지 않아 현저히 치밀하게 화응하는 형적이 있었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버리소서."
하였다.
정택하 등이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회계(回啓)한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그냥두자고 전교하셨습니다. 회계에서 사마광(司馬光)의 말을 인용한 것이 비록 자중(藉重)의 계책이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것이 무함하고 핍박하는 것에 신종(神宗)이 왕(王)·여(呂)266)  의 무리에게 옹폐(壅蔽)되어 나라를 그르친 간신들이 옛날의 법을 변란(變亂)시켜 해독이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게 되어서야 말년에 후회하고 깨달아 여러 번 혁파하고 고칠 뜻을 보인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것이 과연 털끝만큼이라도 선조(先朝)에서 분명하게 바로잡는 일과 방불하겠습니까? 오직 우리 숙종께서 사문(斯文)의 시비를 정하시고 후세의 이모(貽謨)267)  를 만들어 사(邪)를 물리치고 도(道)를 보위(保衛)한 것이 백세를 기다리더라도 미혹됨이 없을 것입니다. 그 무리들이 사당(私黨)에 급한 나머지 부당한 말을 무함해 인용하여 함부로 현란(眩亂)시킬 계책을 하였으니, ‘선왕(先王)의 본의가 아니다.’라는 한 단락에 이르러 더욱 지극히 아주 패악스럽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인용한 비유가 부당하다고 전교하셨으면 또한 이미 그 간사한 형상을 통촉하신 것인데, 현고(現告)한 대신에 대한 성명(成命)을 도로 정지하소서. 죄범(罪犯)의 경중은 관직의 높고 낮음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니, 그가 사당(私黨)에 붙어 선조(先朝)를 무함한 죄는 일이 대신에게 관계된다는 것으로 법을 굽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회계(回啓)한 비국의 여러 당상은 전의 대계(臺啓)에 의해 빨리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전 현감(縣監) 서행원(徐行遠)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죽은 스승 이상(李翔)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종유(從游)하면서 한번 허적(許積)의 간사함을 배척하다가 윤휴(尹鑴)의 무거운 독해(毒害)를 입었습니다. 윤증(尹拯)이 배사(背師)한 변이 동문(同門)에서 나왔으므로 글을 보내 절교(絶交)하다가 이로써 크게 윤증의 당에게 미움을 받아 끝내는 옥중에서 병들어 죽게 했습니다. 숙종께서 특별히 복관(復官)을 명하셨는데, 신축년268)  에 추탈(追奪)하는 화가 구천(九泉)에 미쳤으니, 청컨대 복관을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정언 박사성(朴師聖)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한 장의 소와 한 마디 말에 일의 시비를 묻지 않고 일절 벌이(伐異)269)  로 의심하시니, 마땅히 맹렬히 반성하시어 고쳐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난번 조지빈(趙趾彬)·조현명(趙顯命)·신치운(申致雲)이 추천을 받게 됐을 때 그 천거를 주장한 사람이, 신이 외임(外任)이라고 핑계하면서 와 묻지 않았는데, 온세상이 천시(賤視)하여 버린 신치운과 추하고 패악한 조지빈은 본디 말할 것이 못되며, 조현명에 이르러서는 조금 스스로 좋게 지내려고 하지만 역시 같은 투식에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니, 신은 가만히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비가 만약 분명하다면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붕당으로 의심함이 있겠는가? 그러나 새로 간직(諫職)에 들어와 맨 먼저 면계(勉戒)하는 것으로 진달하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2월 14일 임오

심택현(沈宅賢)을 발탁하여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예조 판서 홍치중(洪致中)이 청대(請對)할 때 진달하기를,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를 천장(遷葬)할 때 마땅히 예장(禮葬)을 명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이판(吏判)이 이미 진달한 바 있으므로, 예장을 규례에 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또 고(故)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의 천장에도 마땅히 진휼(軫恤)하여야 한다고 진달하자, 군정(軍丁)과 장수(葬需)를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백망(白望)의 옥사(獄事) 때 문랑(問郞)인 강세윤(姜世胤)·유수(柳綏)·윤유(尹游)·정내주(鄭來周)를 잡아다 신문하였다. 도사(都事) 황유목(黃有牧)·홍응몽(洪應夢) 등이 그때 당상관 유중무(柳重茂)를 잡아 올 것을 청하였는데 유수는 백망을 추고하기 전에 체직되었고, 윤유와 강세윤은 이치에 의거하여 쟁집(爭執)한 것이 체통을 얻었으며, 정내주도 또한 물을 만한 것이 없고 황유목·홍응몽은 수참(隨參)하여 듣고 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아울러 방송(放送)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고, 인하여 역적 목호룡(睦虎龍)이 끌어댄 유경유(柳慶裕)·심수관(沈受觀)·장우상(張宇相)·목천임(睦天任)·이중환(李重煥)을 일체로 나문하라고 명하였다.

 

2월 15일 계미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지평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문랑(問郞)과 금부 도사(禁府都事)의 초사(招辭)에 백망이 상변(上變)한 가운데 있는 허다한 사설을 갖춰 말하였는데, 그후 수년 이래 착착 서로 부합됨이 명백한 근거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주청(奏請)하는 일이 이루어지면 마땅히 상변한다.’고 하였는데 선래(先來)가 온 이튿날 역적 목호룡의 변서(變書)가 과연 올려졌으며, 백망의 초사 가운데 있는 김일경(金一鏡)·심단(沈檀)·원휘(元徽) 세 적(賊)이 또 정우관(鄭宇寬)의 초사 가운데서 나온 것이 백망의 초사에 비해 더욱 명백합니다. 정우관의 초사 가운데 흉환(凶宦)을 많이 끌어댔는데,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바로 박상검(朴尙儉)의 옥사 때 법망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백망의 공초 가운데 끌어댄 느슨하게 논한 말이나, 그후 조정 사이의 모습으로 보면 과연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어 네 가지 증거가 이미 갖추어져 일관되어 왔으니, 백망은 비록 죽었더라도 살아 있는 것과 같은데, 어찌 면질(面質)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그 정위(情僞)를 알겠습니까? 어제 각자에게 공초를 받은 후 마땅히 피고인(被告人)을 한결같이 아울러 나문하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단지 유중무(柳重茂)만 나문하기를 청한 것입니까? 판부(判付)를 보건대 신충(宸衷)으로부터 결정하시는 것이 약간 명을 잡아 가두라는 명이 계시면서 원악(元惡)과 대대(大憝)270)  는 아직도 거론하지 않고 있으니, 신은 가만히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역적 김일경의 무리가 전하를 모위(謀危)한 것은 그 계책을 베푼 것이 흉환(凶宦)과 체결(締結)하여 궁중(宮中)에서 편리함을 엿보았다가 밖에서 상변(上變)하기를 기다려 화응(和應)해 손을 쓸 뿐이었으나, 하늘이 종팽(宗祊)을 도와서 박상검의 일이 먼저 발각되어 그 무리들의 두뇌(頭腦)가 이미 파괴가 되고 목호룡이 비록 상변했으나 선왕의 우애(友愛)가 틈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때에 시행됨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신은 백망과 정우관의 두 공초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 귀착(歸着)되는 곳은 모두 박상검의 옥사에서 발원(發源)된 것으로 세 가지가 합쳐 하나가 된 것이니, 일체로 모두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른바 박상검의 옥사는 그때 역시 모호하게 끝내고 다시는 끝까지 조사하지 않았으니, 여당(餘黨)으로 금중(禁中)에 잠복해 있는 자가 반드시 다만 정우관이 고한 약간인뿐이 아닐 것입니다. 이는 밖의 신하가 알 수 있는 바 아니니, 또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분명하게 감촉(鑑燭)하심을 내리시어 하나하나 조사해 내어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여 즉시 일체로 국청을 설치하여 엄한 형벌로 구문(究問)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두 역적이 일관되게 내려온 형상을 어찌 정우관의 초사를 기다린 뒤에야 알겠는가? 처음 흉소(凶疏)를 바쳐 목호룡을 유인하다가 끝에 가서는 급서(急書)로 서로 화응했으니, 김일경의 초소(初疏)는 바로 역적 목호룡의 마음이며, 목호룡의 상변(上變)은 바로 역적 김일경의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경을 친국(親鞫)할 때 일체로 목호룡을 잡아다 조사한 것이다. 이번 각인(各人)을 나문(拿問)하라는 명은 뜻한 바가 있는데, 너의 국청을 설치하자는 청은 어찌 빨리 서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부귀(富貴)를 낚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그 시세(時勢)에 따라 흉설(凶說)을 변환(變幻)하였는데, 지금 또한 이로 인해 또 하나의 국청을 설치하면 참으로 어진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만약 그릇됨이 살상(殺傷)이 있게 된다면, 이와 같이 되고는 나라가 장차 편안하겠는가? 앞의 일을 거울삼아 뒷일을 경계하는 것은 바로 성인의 말씀이다. 다시 각자의 초사를 보아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처분하겠다. 남은 당(黨)이 잠복해 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네가 생각하는 것이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 한번 두번 쓸데없이 궁위(宮闈)에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단서만 생기게 하는 것이다. 설령 그렇다면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만 어찌 광무제(光武帝)의 도량을 본받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처음 비답(批答) 가운데 있는 ‘사림의 화[士林之禍]’ 네 글자는 그 후 승지 박성로(朴聖輅)가 고쳐 내리기를 청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이튿날 이의천(李倚天)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지난번 흉악한 무리들이 국옥(鞫獄)으로 인하여 사림에 화를 끼친 것을 깊이 아셨기 때문에 앞의 일을 거울삼아 후일을 경계하라는 뜻을 분명하게 보이셨으니, 이는 우선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미워하신 것입니다. 판부(判付)한 가운데 다섯 사람을 나문(拿問)하라는 명은 바로 백망(白望)이 상변한 것을 흉당들이 덮어두었기 때문입니다. 김일경(金一鏡)·원휘(元徽)·심단(沈檀)의 세 적은 백망의 초사를 기다리지 않고도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인데, 김일경은 이미 법으로 복주되었고, 원휘는 또 스스로 죽었으나 오직 역적 심단만 살아 있습니다. 심단은 바로 다섯 적의 괴수인데, 다섯 적은 가두면서 심단만이 그대로 있으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원악(元惡)·대대(大憝)는 오히려 거론하지 않고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남은 당(黨)이 잠복(潛伏)해 있다고 염려하는 것은 김몽상(金夢祥)이 처음 국옥에 들어올 때 흉당이 반드시 엄폐하여 덮어두려고 하였으니, 또한 감히 박상검과 서로 부합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박상검 외에 김몽상이 있고, 김몽상 외에 또 네 환관(宦官)이 있다는 것이 정우관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또 어찌 여섯 환관 외에 허다하게 있는 여당(餘黨)이 아직도 금중(禁中)에 있을는지 알겠습니까? 전하의 이목(耳目)의 임무를 맡았으면 군부(君父)를 위하여 난적(亂賊)을 토주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험한 책망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니, 의례적인 비답(批答)을 내렸다. 퇴대(退待)하니, 처치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2월 16일 갑신

금부 당상(禁府堂上) 민진원(閔鎭遠)·이유민(李裕民)·이기익(李箕翊)이 청대할 때, 민진원이 말하기를,
"특별히 다섯 사람을 잡아다 신문하라고 명하신 것은 모두 이 백망의 공초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 본부(本府)에서 전례에 따라 안문(按問)하는 것은 일이 매우 부당하니, 국청을 설치하여 엄히 신문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초사를 기다려서 알겠는가? 김일경의 소(疏)는 바로 목호룡의 변서(變書)이다. 맥락(脈絡)이 서로 통하여 옥사를 국문하는 체통이 중대한데, 그때 위관(委官)들은 어찌 난초(亂招)라고 하여 쓰지 않았으며 그 공초한 것도 또한 어찌 난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김일경은 잠시 서명(胥命)하였다가 다시 즉시 안옥(按獄)하여 마음을 상쾌히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지난번에 한 바는 단지 세도(世道)가 함몰된 것을 인연한 것이긴 하나, 예로부터 어찌 3년이나 옥사를 국문하는 것이 있었는가? 반드시 한쪽 사람을 다 죽인 후에야 그만두려고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대행조(大行朝)의 지극하신 인(仁)이 아니었더라면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남아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 만약 다시 국옥을 설치한다면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지 못하는 데 장차 어떻게 결말을 내겠는가? 그때 정우관(鄭宇寬)·서덕수(徐德修)·김창도(金昌道)의 초사는 참혹하여 차마 입을 더럽힐 수 없었기 때문에, 그후 조지(朝紙)에는 처음부터 눈에 보이게 하지 않았었다."
하니,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화(禍)를 당한 집안을 누군들 뼈에 새겨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습니까만, 그러나 이는 그래도 사가(私家)의 일이라고 하겠으나 심지어 성궁(聖躬)에까지도 무핍(誣逼)을 면치 못했으니, 어찌 한갓 덮어 감추기만 일삼아 그 역적의 정상을 조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참혹한 무함을 받았으니, 어찌 격분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한갓 마음을 상쾌하기만 일삼아 만연하게 되면 옥석(玉石)을 구분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을까 두렵고, 곧바로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것은 끝내 너무 서두르는 것이 된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만약 자기의 사사로운 뜻으로 개인적인 원수를 갚는 데 통쾌하기를 힘쓰면 진실로 성덕(聖德)에 큰 누가 됩니다. 그러나 전하의 한 몸에는 종사(宗社)가 의탁하는 바이니, 전하를 모해하는 자는 바로 종사를 모위(謀危)하는 것으로, 이는 바로 종사의 죄인입니다. 어찌 전하의 사사로운 원수이겠습니까? 지금 만약 한 사람의 사(私)라는 것으로 혐의를 삼는다면, 대성인(大聖人)께서 마음을 쓰는 도리가 좁은 데 가까울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기의 공부(工夫)가 미진한데 또한 어찌 신중히 처리하지 않겠는가?"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곧음으로 원한을 갚는다[以直報怨]’라고 하였는데, 곧음으로 원한을 갚는다고 한 것은 ‘원(怨)’이란 한 글자를 가슴속에 잊어버려서 저 원수인 사람에게 공이 있으면 갚고 죄가 있으면 징토하여, 한결같이 천리(天理)를 따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일이 원한을 갚는 데 관계된다는 것으로써 혐의를 삼아서 토죄(討罪)하지 않는다면 형정(刑政)과 기강(紀綱)이 반드시 문란하게 되어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승지 김상옥(金相玉)은 말하기를,
"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해서 하면 문득 이는 사의(私意)가 됩니다."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이중환(李重煥)은 백망의 초사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목호룡(睦虎龍)과 서로 관계하여 통한 흔적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마땅히 이로써 문목(問目) 가운데 넣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일인가?"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목호룡이 이중환을 원훈(元勳)이 된다고 추대하였으나 이중환은 해당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호룡과 이중환이 심지어 나문(拿問)하는 사이에서도 서로 다투었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청하기를,
"이중환 등 5인은 남쪽 칸으로 옮겨 가두어 외인(外人)과의 서로 통하는 것을 엄격히 막으소서."
하니, 김시발(金時發)의 예에 의해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시수(時囚)271)  로 원정(原情)을 품처하지 못한 사람을 특방(特放)하는 것은 옥체(獄體)에 미안하고 죄인으로 하여금 집에 있으면서 조율(照律)272)  하는 것도 부당하니, 청컨대 다시 가두고 조율하소서."
하니, 조율할 때에 도로 가두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시발은 관문(關文)273)  을 뜯어 본 것으로 4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20여 차례 형을 받았습니다. 율이 사형에 이르지 않는데 중간에 참형(斬刑)으로 조율한 것은 조종(操縱)하여 살리고 죽이는 형상을 볼 수 있으니, 마땅히 작처(酌處)하여 원배(遠配)를 명해야 합니다."
하고, 김상옥은 아뢰기를,
"전(前)에 형조 참의(刑曹參議) 안중필(安重弼)은 이숙(李埱)을 형추(刑推)한 일로 특파(特罷)하였는데, 들으니 숙종조에서는 격쟁(擊錚)274)  한 사람은 형조에서 계품하지 않고 곧바로 형추(刑推)하는 일로 정식(定式)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안중필은 서용하고, 이후로는 이와 같은 종반(宗班)에는 먼저 품한 후 형추하는 일로 정식을 삼아야 옳겠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강목(綱目)》 수기(隋紀)를 강하다가 ‘유광(劉曠)275)  을 발탁하여 자사(刺史)를 삼았다.’는 데에 이르러 참찬관 신필현(申弼賢)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장법(贓法)은 엄격하지 못하여 한번 조사를 지나고 나면 반드시 무죄(無罪)한 것을 얻게 되니, 자주 어사(御史)를 보내 반드시 팽아(烹阿)의 법276)  을 행한 연후에 징계될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 신방(申昉)은 말하기를,
"어사를 자주 보내면 폐단이 없지 않고, 수령(守令)의 출척(黜陟)은 오직 방백(方伯)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방백은 가리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신방이 말하기를,
"수 문제(隋文帝)가 기상(禨祥)277)  의 조그마한 상서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왕소(王劭)278)  가 힘써 《영감지(靈感誌)》를 꾸며서 뜻을 아첨하며 기쁘게 하는 데 두었습니다. 임금에게 기호(嗜好)함이 있으면 소인들이 기회를 틈타 고혹(蠱惑)시켜서 난망(亂亡)에 이르게 하였으니, 임금은 기호를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 문제는 기상을 좋아하였고, 한 광무제(漢光武帝)는 적복부(赤伏符)279)  를 좋아하였는데, 기상과 부참(符讖)은 대소의 차이는 있으나 학술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니, 윤방이 말하기를,
"수 문제(隋文帝)가 인수궁(仁壽宮)이 장려(壯麗)하다 하여 양소(楊素)280)  에게 화를 내어 천하에 원한을 맺었고, 학술(學術)이 없는 까닭으로 아래 있는 자들이 그 천심(淺深)을 엿보게 되었으니, 봉덕이(封德彝)281)  에게서 ‘반드시 은조(恩詔)의 말이 있으리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수 문제가 사만세(史萬歲)282)  를 쳐죽인 것을 후회해도 미칠 수가 없었으니, 칠정(七情) 가운데서 성내는 것만은 제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진실로 학술이 없으면 절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노여움이 일어날 때 일을 처리해서는 마땅치 않다.’고 하였으니, 필부(匹夫)도 그러하거늘 더구나 임금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모두 좋게 여겼다.

 

2월 18일 병술

대사간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소하(疏下)의 여섯 흉인(凶人)은 죄악이 큽니다. 회계(回啓)한 비국 당상이 처음에는 성고(聖考)를 무함하였고, 나중에는 군명(君命)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전소(前疏)의 비답에 유독 굽어살피는 답을 아끼시어 합계(合啓)가 이미 나왔는데도 녹사(錄事)가 소명(召命)을 싸서 가지고 사관(史官)이 먼 고장을 왔다갔다 하느라 수고롭고 소란한 폐단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실로 전하께서 간하는 것을 물리치는 자성(自聖)의 조짐이 되는 것입니다. 대저 형정(刑政)과 출척(黜陟)은 한결같이 천리(天理)를 따를 뿐인데, 공심을 갖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도리어 사(私)가 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공심을 넓히고 편벽됨을 제거하시면 뜻이 심히 성대해질 것인데, 오직 이 ‘공(公)’이란 한 글자를 마음에 두시나 먼저 안배(安排)하여 교량(較量)하시고 거기다 명분을 따르고 혐의를 멀리하는 뜻을 가하시어 또 그 사이에서 어긋남을 면치 못하시며,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즈음에 매양 두루 용납하여 덮어주는 것을 벌려 놓는 것으로 일삼으십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한 뜻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나 역시 주장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병상(李秉常)을 도승지(都承旨)로, 김재로(金在魯)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황귀하(黃龜河)를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김고(金槹)를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김간(金榦)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민진원(閔鎭遠)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교악(李喬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충청도 진사(進士) 안후석(安后奭) 등이 상소하여 진달하기를,
"고(故) 참찬(參贊) 송규렴(宋奎溓)은 학문이나 염퇴(恬退)하는 아름다움으로 회덕(懷德)에 세운 사당이 이진유(李眞儒)의 무함을 받아 훼철되었으니, 청컨대 다시 설치하는 것을 허락하고, 인하여 선조(先朝)에서 이미 하사한 액호(額號)를 반사(頒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서원(書院) 세우기를 허락하여 사액하였습니다."
하니, 선조의 처분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의 합계 및 전계를 거듭 아뢰었는데, 이광좌(李光佐)의 계사 가운데 ‘김일경을 숭장(崇奬)하여 마치 공을 갚는 듯이 함이 있었다.’는 등의 말을 첨가하였고, 권익관(權益寬)의 계사 가운데는, ‘종(種)을 바꾸지 말라는 설로 반드시 선류(善類)를 제거해 없애 살아 있는 사람을 없앤 후 그만두려고 하였다.’는 등의 말을 첨가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왕녀(王女)를 봉하여 화순 옹주(和順翁主)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시독관 신방(申昉)이 아뢰기를,
"유도(儒道)를 높이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우리 조가(朝家)의 법입니다. 전(前) 승지(承旨) 김간(金榦), 전 지평 박필주(朴弼周)는 숙종 때로부터 징소(徵召)되었고, 이 밖에 경학(經學)을 하는 선비도 또한 많이 있으니, 마땅히 찾아 방문(訪問)해 그들로 하여금 경연(經筵)에 출입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숭장했던 선비는 별도로 하유(下諭)하고, 기타 유일(遺逸)로 경학(經學)이 있는 자는 직임을 제수하여 초치(招致)하라는 뜻을 전조(銓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신방(申昉)이 말하기를,
"임금은 사물을 만나고 처리하는 즈음에 하나의 ‘의(疑)’ 자를 가슴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의’ 자가 병의 근원이 되면 호오(好惡)가 마땅함을 잃고 희로(喜怒)가 반대로 될 걱정이 있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대계(臺啓)에 대해 매양 당론으로 의심하시어 꺾기에 힘을 쓰시니, 신은 개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를 ‘의’ 자가 붙어 있다고 여기는 자가 어찌 내 뜻을 아는 자이겠는가? 지난번 화색(禍色)이 참혹한데도 아직도 남아 있는 자는 진실로 이는 경종(景宗)의 지극한 덕과 깊은 인이였긴 하나, 또한 어찌 그 당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는가?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러서 저쪽에서 역적이라 하고 이쪽에서 역적이라고 하는데, 내가 어찌 도울 수 있겠는가? 신하들은 나를 그 당론을 의심한다고 하는데 신하들이 내 뜻을 모르는 것이며, 이렇게[云云] 의심하는 것은 이는 나의 성의와 신의가 미덥게 하지 못한 소치이니, 다만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한탄할 뿐이다. 내가 어찌 꺾으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2월 19일 정해

밤 5경(五更)에 달이 방성(房星) 제이(第二)를 범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을 병조 판서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 신방이 자기를 위하느냐 남을 위하느냐에 대한 학문을 논하여 말하기를,
"임금이라면 어찌 남에게 알려지기를 원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임금이라 하더라도 어찌 남에게 알려지기를 요구하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이름 얻기를 좋아하는 임금은 모두 알려지기를 요구하였으니, 한 무제(漢武帝)가 말하기를, ‘나는 이렇게 하려고 한다.’고 한 것에 그 행실로 고찰해 보면 미치지 못함이 멀다. 말하기는 쉽고 행하기는 어려움이 예로부터 이러하니, 참으로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이중환(李重煥) 등을 이미 국청(鞫廳)을 설치하지 않았으면 문안(文案)을 봉입(封入)하는 것이 미안하니 육현(陸玄)의 옥안을 밀봉한 일을 지금에 와서 본받을 필요가 없다며 다른 예에 의해 봉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사조(辭朝)하는 수령을 인견하였는데, 회덕 현감(懷德縣監) 이간(李柬)이 나와 엎드렸다. 임금이 그가 초선(抄選)됐다는 말을 듣고 전교하기를,
"산림(山林)에서 독서(讀書)하였으니, 반드시 학문하는 요점을 알 것인데, 내가 듣고자 한다."
하니, 이간이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학문하는 본말(本末)은 지(知)와 행(行)이라고 합니다. 지행(知行) 가운데 각기 큰 이치가 있고, 한 물건 한 일의 이치는 모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나 심신(心身)에 일용(日用)하는 윤상(倫常)·기강(紀綱) 상에는 반드시 먼저 곧바로 결단하여 이해해야 하니, 이것이 치지(致知)의 큰 이치입니다. 행(行)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선(善)과 하나의 행실을 진실로 마땅히 극진하게 해야 하나, 수기(修己)상에 나아가 말하면 천인(天人)·이욕(理欲)의 나눔에서 곧바로 판단하여 구별해 내어야 하며, 치인(治人)상으로 나아가 말하자면 선을 선하게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겨 진실되게 힘을 쓰면 이것이 역행(力行)의 큰 이치입니다. 학문을 하면서 그 큰 이치를 먼저 하지 않으면 학문하는 요점이 아닐까 싶으니, 맹자(孟子)가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을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을 어찌 많이 해야 되겠는가? 의리(義理)의 대체는 한 마디면 다 된다. 듣건대 노모(老母)가 있다 하니, 지금은 우선 내보내나, 강학(講學)하는 사람을 얻기가 매우 쉽지 않다. 조만간 올라와 강론하여 내가 미치지 못한 점을 보완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다. 사헌부에서 【장령 이휘진(李彙晉)·김담(金墰), 지평 이의천(李倚天)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백망(白望)의 상변(上變) 초사(招辭)가 이미 근거가 있어 안험(按驗)할 수 있으니, 유사의 청을 기다릴 것이 없이 특별히 나문(拿問)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그 음흉한 정절(情節)은 이미 천감(天鑑) 아래에서 도망할 수 없습니다. 피고(被告)된 여러 사람도 마땅히 다를 것이 없는데, 잡아다 조사하는 가운데 아직도 두 적(賊)이 빠졌으니, 이는 실로 옥체(獄體)에서 크게 어긋납니다. 또 그의 고한 바가 정우관(鄭宇寬)의 초사와 서로 같은 것이 많이 나왔는데, 그 말은 동일한 고변(告變)이며 그 일은 동일한 역모(逆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미 시행하고 저 사람은 유독 그렇지 않아 실로 옥체에 어긋남이 있으며, 더구나 그 근본을 따져보면 대개 이미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때 탄로난 것입니다. 그 때에 다시 끝까지 하지 않고 모호(糢糊)하게 마쳐서 김몽상(金夢祥)같이 크게 서로 부합된 자도 오히려 편배(編配)하는 박벌(薄罰)로서 책임을 막아 미봉하였으니, 중외(中外)의 의혹이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백망(白望)의 초사가 나오자 밖에 있으면서 주장한 사람이 입증되었고, 정우관(鄭宇寬)의 공초에 안에서 화응한 자취가 더욱 드러나 음모하는 비계(秘計)를 감출 수가 없었는데도 억지로 붙잡아다가 문득 곧바로 석방하기를 청하였고, 잠시 서명(胥命)283)  이 갑자기 다시 안옥(按獄)하였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지금 단서가 이미 드러나게 된 뒤로 끝까지 조사하여 왕법(王法)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백망의 초사에 끌어들인 자의 일전 판부(判付) 가운데 누락된 심단(沈檀)·원일세(元日世)·이세중(李世重) 및 정우관(鄭宇寬)이 끌어들인 각인(各人)과 박상검의 옥사 때 관련된 여러 환관을 의금부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일체로 국문하소서."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 헌납 정택하(鄭宅河)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다. 이삼(李森)의 계사 가운데, ‘국휼(國恤)이 난 처음에 인심이 위의(危疑)하고 있으니 숙위(宿衛)하는 임무가 얼마나 엄중한데 역적 김일경이 두 번씩이나 진중(陣中)에 돌입할 때에 영기(令旗)를 내보내 들어오기를 허락하고 도리어 법을 지킨 장관(將官)을 죄주었다.’ 하는 등의 말을 첨가하였고, 또 그 날 복역(覆逆)한 승지를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아뢰어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고 또 전교하기를,
"추안(推案)이 아직 있는데 김몽상(金夢祥)이 서로 부합하였다는 말은 본사(本事)를 몰라서 그런 것인가? 대행조의 처분이 이미 정해졌으니, 간여하지 않은 사람을 오늘날 다시 제기할 일이 아니다. 승지를 원찬하라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2월 20일 무자

민진원(閔鎭遠)을 예조 판서로, 황일하(黃一夏)를 호조 참판으로, 홍우전(洪禹傳)을 예조 참의로, 김취로(金取魯)를 형조 참의로, 이만직(李萬稷)을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삼았다.

 

지평 이의천(李倚天)이 박장윤(朴長潤)의 아우 박형윤(朴亨潤)이 격쟁(擊錚)하여 원정(原情)한 것으로써 피혐(避嫌)하고, 또 말하기를,
"‘김몽상의 일은 본사(本事)를 모른다.’라고 한 비답은 의아(疑訝)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임인년284)   정월 국청(鞫廳)의 의계(議啓)에서 말하기를, ‘김몽상의 무함이 양궁(兩宮)에 미치게 하였으니 요악(妖惡)한 죄는 박상검보다 더합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김몽상과 박상검을 면질(面質)할 때 문답한 말이 대개 서로 부합됩니다.’ 하고, 인하여 전의 판부(判付)에 의하여 형추해 실정을 알아내자고 청하였습니다. 그 때 안옥(按獄)한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미봉해 끝내려고 했는데, 오직 단서가 혹 김몽상에게서 탄로날까 두려웠지만 그래도 감히 형추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김몽상과 박상검은 매우 다름이 없음을 이에 의해 알 수 있는데, 신의 계사 가운데 ‘서로 부합된다.’고 한 것이 어찌 본사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까? 또 성교(聖敎) 가운데 ‘간여하지 않은 사람[不天之地]’이란 네 글자는 누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김몽상 등 다섯 환관(宦官)은 이미 정우관의 초사에서 나왔고, 이 밖에 박찬문(朴贊文)과 같은 자는 본래 박상검과 문유도(文有道)와 같은 죄인데도 그 때 특별히 방송하라는 명이 있어 다시는 끝까지 조사하지 않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는데, 기타에 또 반드시 없을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이미 정우관이 끌어들인 각인을 아뢰었으므로, 반드시 또 박상검의 옥사에 관련된 여러 환관을 모두 열거하였던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무릇 이런 흉악한 환관들은 단서가 이미 박상검의 옥사에서 나오고 정절(情節)이 정우관의 초사에서 더욱 드러나 김일경·심단(沈檀)·원휘(元徽)·윤취상(尹就商) 4적과 더불어 체결(締結)하여 화응(和應)하면서 전하를 모위(謀危)하지 않음이 없는 자인데,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간여하지 않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이 무리들에게 곤욕을 당하신 지가 지금 그 몇 년입니까? 오직 그 변이 궁금(宮禁)에서 생기고 일이 또 음비(陰秘)하여 외부의 사람이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갓 의혹만 하고 조사해낼 길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백망(白望)의 초사 한 조항으로 인하여 비로소 전후의 맥락(脈絡)이 서로 이어진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휘진(李彙晉)과 김담(金墰)도 피혐하니, 함께 예비(例批)를 내리어 출사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고,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 【 헌납 정택하(鄭宅河)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백망의 초사 가운데 ‘거사(擧事)한다.’는 등의 말은 바로 하나의 고변이니, 신하 된 자는 마땅히 놀라는 마음에 뼈를 아프게 하는 바이므로 그 허실(虛實)을 끝까지 조사하여야 하는데, 유중무(柳重茂)는 자신이 옥관(獄官)이 되었으면서도 오직 단서가 혹 드러날까 염려하여 오로지 가려 덮기만 일삼았으며, 심지어는 집필(執筆)하는 문랑(問郞)으로 하여금 써서 기록하지 못하게까지 했으니, 그 마음을 둔 바가 헤아릴 수가 없었고, 지금에 이르러 숙문(淑問)285)  하자 ‘혼미(昏迷)하여 자세히 듣지 못하였다.’고 핑계대었습니다. 그가 마음대로 역적을 옹호하고 시종 가리고 속이는 형상이 아주 절통한데, 삭출(削黜)하라고 판부함은 처분이 가볍고 갑작스러워 듣는 이가 의심하고 의혹스럽게 여깁니다. 청컨대 유중무는 그대로 가두어 두고 다시 엄한 국문을 더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역적 김일경의 교문(敎文)에 대한 일이 처음 나올 때 전하의 신하 된 자가 누군들 놀라는 마음에 통분하여 피를 흘러 징토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거원(李巨源)·이진수(李眞洙) 등은 감히 영호(營護)할 계책을 하며 깊은 밤에 청대(請對)하여 이에 ‘접혈(蹀血)’ 등의 말을 부회(傅會)하고 주각(註脚)하여 반드시 가려 덮으려고 하였으며, 심지어 역적 김일경을 징토하자는 말을 없는 죄를 무함한다고까지 하면서 유자광(柳子光)에게 비유했습니다. 유시모(柳時模)는 교문을 다시 짓자는 청을 가탁하여 ‘출처를 생각하지 않았다.’라 하였고, 김시빈(金始鑌)은 ‘마음에 있었다느니 없었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마음대로 의혹시켰으니, 만약 역적을 옹호한 죄로 논한다면 복역(覆逆)한 승지보다 더함이 있는데, 승지에게는 이미 윤허하시고 이 네 사람은 단지 삭출(削黜)만 명하시어 처분이 같지 않으므로, 공의(公議)가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삭출한 죄인 이거원·이진수·유시모·김시빈을 모두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유중무의 일은 아뢴 대로 하고, 이거원 등의 일은 모두 삭출하는 율(律)을 시행하라."
하였다.

 

나주(羅州) 유학(幼學) 최규(崔珪)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민서(李敏敍)의 서원(書院)은 연전에 훼철된 것이니, 조정의 명에 인하여 다시 세울 때에는 원액(院額)을 하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서원 세우는 것은 허락하였으나, 사액(賜額)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선조 때 처분에 의해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민진원(閔鎭遠)이 진달하기를,
"연산(連山) 땅에 옛날에는 성삼문(成三問)의 사전(私田)이 있었는데 훈부(勳府)에 적입(籍入)되었고, 그후 훈부에서 노은동 서원(魯隱洞書院)에다 내어주고 인하여 면세(免稅)하였습니다. 이진유(李眞儒)가 진달해 면세(免稅)를 혁파한 후 근래에는 다시 세를 낸다고 하니, 선조(先朝)의 정식(定式)에 의해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전지는 3결(結)에 한해 면세하되 반드시 본원(本院)에서 스스로 마련한 위전(位田)만 면세를 허락하고 민결(民結) 가운데 든 것은 면세를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무신(武臣) 최진한(崔鎭漢)이 진달하기를,
"궁성(宮城) 안에 입직(入直)하는 군병(軍兵), 수직(守直)하는 사환(使喚) 이외에는 군병을 단속하고, 훈국(訓局)의 2백 명을 금호문(金虎門)과 홍화문(弘化門) 두 문에 나누어 수직하며, 금위(禁衛) 1백 명을 건양문(建陽門)에 입직하고, 금려(禁旅) 1백 명은 인정전(仁政殿) 대정(大庭) 아래에 입직하게 해야 합니다. 훈군(訓軍)은 안에서 입직함이 중하니, 매달 세 차례씩 해영(該營)에서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며, 금위군 및 금려는 해영에서 습진할 때 표신(標信)을 제거하고 내어 써 매달 세 차례 신지(信地)인 금위를 공허하게 만들며, 향군(鄕軍)은 생소(生疎)하니 습진에 내어 쓰는 것도 한 방도일 듯합니다. 그러나 금려에 이르러서는 군법(軍法)에 익숙함이 훈졸(訓卒)에게 뒤지지 않으며 대정(大庭)에 직숙하는 것이 훈졸(訓卒)의 직소(直所)에 비할 것이 아닌데도 매번 내어 써 숙위(宿衛)를 중히 여기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신(將臣) 신여철(申汝哲)이 죽을 때 소신(小臣)이 가서 보았더니, 신여철이 말하기를, ‘입직하는 금군은 내어 쓰는 것이 부당할 듯하여 내가 계달(啓達)하여 변통하려고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으니, 젊은 무변(武弁)은 이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효종(孝宗) 때 비로소 금군(禁軍)을 설치하였으니, 뜻이 있는 바가 있는 것이다. 금위군(禁衛軍)을 내어 쓰지 않을 수 없으나, 금군은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라는 뜻을 병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니, 병조에서 청하기를,
"최진한의 말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논어》의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다[以德報怨]’ 장(章)을 강하였다. 시독관 신방(申昉)이 말하기를,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은 잘못이며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 역시 사의(私意)이니, 곧은 자는 의리(義理)의 경중을 헤아려 마땅하게 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이의현(李宜顯)은 말하기를,
"범순인(范純仁)286)  이 채확(蔡確)287)  의 죄를 논하면서 채확이 자기와 다른 당이기 때문에 그 죄를 가볍게 하고자 했으나, 주자(朱子)는 그르게 여겼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피혐(避嫌)하는 것은 마침내 사의(私意)가 되니, ‘직(直)’이란 한 글자가 매우 간결하고도 지당합니다."
하였다.

 

2월 21일 기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병조 좌랑(兵曹佐郞)        김조택(金祖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당화(黨禍)가 있음으로부터 오면서 무고하게 화를 입은 자가 옛부터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만, 신의 집안처럼 혹독한 예는 없었습니다. 두 형이 서로 잇따라 독장(毒杖)에 죽었고, 종질(宗姪)은 마침내 먼 바닷가에서 여귀(旅鬼)가 되었으며, 천양(泉壤)288)                  에서도 무함을 당하고 어린아이도 나뉘어 귀양갔었는데, 지난번 우리 선대왕의 지극히 인자한 성덕이 아니었더라면 신이 어찌 남은 목숨을 보존하여 금일에 와서 전하의 앞에서 스스로 말씀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신의 집안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아 3백 년 국운(國運)의 낮아지고 높아짐에 신의 집안의 펴지고 굽혀짐이 달려 있었습니다. 경신년289)                  에 퍼졌다가 기사년290)                  에 굽혀졌으며 갑술년291)                  에 이르러 또 펴졌으니, 이러한 까닭은 성명께서 이미 통촉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이 어찌 감히 밝게 말하겠습니까? 신의 집안은 폐부(肺腑)의 친(親)으로 가장 인현 성모(仁顯聖母)의 일시(一視)하는 덕을 받았으니, 마음에 새긴 감격에 갚기를 도모함이 다른 사람들보다 백배나 더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흉인들이 성묘께 무례하게 구는 자를 반드시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하여 사수(私讎)와 다름이 없이 하였으니, 저 흉인들이 신의 집안을 원수처럼 보면서 반드시 마음대로 하려고 한 지가 오래입니다.
신의 형 김춘택(金春澤)은 하나의 포의(布衣)로 문을 닫고 글이나 읽었으니, 일절의 세상일이 어떻게 그에게 관계가 되었겠습니까? 기사년292)                   흉당들이 갑술년293)                   광복(光復)하는 때를 당하여 분노를 드러낼 바가 없게 되자, 이에 감히 김춘택에게 노여움을 옮겨 터무니없는 죄를 얽어 반드시 박살하고자 했으나, 우리 숙종께서 위에 계셨는데 저들이 어찌 그 계책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이후로부터 일종의 후일 터전을 위한 자들이 몰래 적 민암(閔黯)의 여당(餘黨)과 함께 합해 성세(聲勢)를 이루어 신의 형이 그들 말에 오르내렸는데, 감옥이 아니면 먼 바닷가로 귀양을 보내 신의 형은 마침내 궁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리는 자들은 오히려 잊지 못하고 후한 무함(誣陷)이 죽은 뼈에까지 뒤따라서 미치게 되었으며, 여독(餘毒)을 한덩이의 흙에다가 마음대로 풀려고 하였으니, 아! 심함이 어찌 이런 극도에 이르는 것입니까? 저들이 진술한 신경제(申慶濟)·권익관(權益寬)·이진유(李眞儒) 등의 소계(疏啓)는 모두 적 민암의 마음이 아닌 것이 없었고, 임보(林溥)와 이잠(李潛)이 전수(傳授)하는 그 뜻이 어찌 유독 신의 집안에만 화(禍)를 넘길 뿐이었겠습니까? 대개 이 무리들은 성모(聖母)께 두 마음을 두었고 성고(聖考)께 죄를 얻은 것은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선왕께서는 다만 세 성모(聖母)가 계신 줄만 알고 그 밖에 다른 것이 있음을 모르자, 이 무리들이 소인(小人)의 마음으로 망령되이 스스로 시기하는 생각으로 반드시 사친(私親)을 숭봉(崇奉)하게 하여 성모를 핍박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문에 부득이 먼저 성모를 위해 명의(名義)를 부호하는 사람에게 손을 썼으니, 지난번 하늘에 닿는 화가 어찌 이에 근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바야흐로 신사년294)                  의 일을 의혹의 과목(科目)으로 돌려 성고의 처분을 어둡게 하면서 그들의 숙감(宿憾)을 풀려고 했으니, 신의 집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신의 형 김춘택이 죽은 후 망극한 무함을 받게 된 까닭입니다.
신(臣)의 중형(仲兄) 김보택(金普澤)에 이르러서는 지난 계미년295)                  에 맨 먼저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尙運)·최석정(崔錫鼎) 등이 역적을 옹호한 죄를 논했으며, 정유년296)                  에 이르러 병이 심해 죽으면서도 또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의 일을 논해 마침내 성고(聖考)의 채납(採納)을 받았으니, 저 무리들의 원한이 뼈에 사무쳐 반드시 한 번 갚으려고 함은 그 형세가 본래 그러하였으니, 또 무엇을 괴이하게 여기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아울러 김보택(金普澤)·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의 억울하게 죽은 본말을 호소하기를,
"원하건대, 유사에게 명하여 전후의 소계(疏啓) 및 시종의 옥안(獄案)을 상고하여 신의 네 형의 원통함을 신설(伸雪)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의 일은, 만약 대행조(大行朝)의 지극히 어진 성덕이 아니었더라면 성후(聖后)의 오복(五服)297)                  의 친속으로 칼날을 면한 자가 몇 명이나 되었겠는가? 특방(特放)하라는 명은 성의(聖意)를 본받은 것이니, 상신(相臣)이 올라온 후 물어 의논하여 헤아려서 처리하려고 한다."
하였다.

 

사직(司直) 오명항(吳命恒)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의 형의 하나의 소(疏)를 죄로 삼아 전후 해 더러운 욕을 함부로 가해, 심지어는 형제를 상호 거론해 그 장단(長短)을 논하여 윤의(倫義)를 상하게 함이 있었으니, 실로 풍교(風敎)에 관계됩니다. 전소(前疏)에서 변명하여 폭로한 것은 대개 통박(痛迫)함이 간절한 데에서 나온 것이요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는데, 신의 말이 뜻을 진달하기에 부족함을 인연하여 갑자기 성교(聖敎)가 있기에 이르러 신을 사마우(司馬牛)의 근심298)  하고 두려워하는 것에 비하셨으니, 신은 가슴을 치며 숨이 막혀 감히 이 세상에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을 위로하는 말에 불과하다. 어찌 깊은 뜻이 있겠는가? 경에게 하나의 불안한 단서가 된 것은 또한 말의 박절(迫切)한 뜻이 없지 않아서이나, 어찌 한 마디 말로 경의 형에 대한 단안(斷案)을 삼겠는가? 특별히 그날의 비지(批旨)를 고치겠다."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고,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며, 사간원에서 【사간 어유룡(魚有龍)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백망(白望)이 고한 바가 어떠한 흉역(凶逆)인데 여러 해 동안 덮어두었으며, 이제야 비로소 발각되었으면 끌어들인 여러 사람은 마땅히 국옥을 설치하여 엄중히 조사해야 하는데도, 성상께서 윤허하지 않아 여러 적들로 하여금 안팎으로 서로 내통하게 하여 간사한 폐단이 백 가지로 생기게 했습니다. 심단(深檀)·이세중(李世重)은 모두 백망의 초사에 끌어댄 바인데, 잡아다 조사하는 가운데 유독 두 적만 누락되었습니다. 정우관(鄭宇寬)이 끌어들인 각인 및 박상검(朴尙儉)의 옥사(獄事) 때 간련된 여러 환관(宦官)이 혹은 밖에 있으면서 음모(陰謀)를 주장(主張)하였고, 혹은 안에 있으면서 밀계(密計)로 화응(和應)하였으니, 지금 단서가 이미 드러난 뒤에는 잡아다 국문(鞫問)하여 법으로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백망(白望)이 고하여 이미 잡아다 수금(囚禁)된 자를 빨리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하도록 명하시되 누락(漏落)된 두 적(賊)과 정우관(鄭宇寬)이 끌어댄 박상검의 옥사 때 간련된 여러 환관을 일체로 국문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2월 22일 경인

목시룡(睦時龍)을 잡아온 뒤에 마땅히 국청을 설치해야 한다며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붙잡아 오라고 명하였는데, 목시룡이 목호룡(睦虎龍)의 일로 연좌(緣坐)되어 고성현(固城縣)에 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취로(金取魯)를 승지로 삼았다.

 

2월 23일 신묘

한식(寒食)이었다.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친제(親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강목(綱目)》을 강하였는데, 진효의(陳孝意)299)  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진(陳)나라의 충신(忠臣)에 마침 효의가 있었는데, 수주(隋主)가 만약 잘 이끌었다면 어찌 효의 한 사람에 그쳤겠는가? 봉덕이(封德彝)가 수(隋)나라에서는 간사하였으나 당(唐)나라에서는 충성했으니, 어찌 임금이 인도하기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2월 25일 계사

명하여 왕자(王子) 경의군(敬義君)을 세워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이 때 왕자가 이미 7세였는데, 재능이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여 중외(中外)에서 마음을 두었으므로 우윤(右尹) 심정보(沈廷輔)가 상소하여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튿날 예조 판서 민진원이 입대(入對)하기를 구하여 책봉하기를 강력히 청하여 말하기를,
"지금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니, 제일 먼저 힘써야 할 것은 일찍이 국본(國本)을 정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일찍이 교유(敎喩)한 말에 진실로 나라를 위하여 깊이 염려한 것을 알 것이다. 나라의 중요한 일은 마땅히 대신(大臣)이 오기를 기다려서 해야 한다."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일찍이 경자년300)  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건저(建儲)301)  하는 것을 급하게 여겼으나 신만이 유독 신중해야 한다고 여겨 말하기를, ‘이 일이 혹 차질(蹉跌)이 있게 되면 비단 여러 신하들에게 화(禍)가 있을 뿐 아니라 종사(宗社)가 위망(危亡)하는 것이 반드시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있게 되니, 경솔히 발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대서(臺書)가 나오게 되어서는 신이 말하기를, ‘이미 말이 나온 후에는 화복(禍福)을 따지지 말고 죽을 힘을 다해 청해 오늘을 넘기지 말게 한 연후에야 나라가 보전된다.’라고 하여 대신들이 드디어 서로 이끌어 입대(入對)해 밤새껏 힘써 청해서 즉시 명호(名號)를 청했습니다. 종사가 오늘날까지 보전된 것은 그날 밤 힘이었으나 신의 신중하자는 말 때문에 지연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신의 죽을 죄입니다. 이 논의가 한번 나온 후인데 어찌 하루인들 조금이나마 늦추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시원스레 따르지 않았다. 이날 밤 4경에 갑자기 명하기를,
"2품(品) 이상 육조(六曹)의 장관과 양사(兩司)·옥당(玉堂)은 입시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를 세우는 일을 대신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자고 한 것은 그 일을 소중히 여겨서였는데, 다시 생각하니 관계된 바가 중대하고 일의 체통이 자별하다. 지난번 조정 신하들이 강력히 청한 것은 전적으로 종사를 위한 계책에서 나왔는데, 그후 잇따라 생긴 논의가 점점 괴격(乖激)하기에 이르렀다. 오늘에 이르러 생각하니, 차라리 말을 안하려고 한다. 근일의 세도(世道)로 보건대, 이미 말이 나온 후에 만약 다시 지연시키게 되면 혹 사단이 겹쳐 생길 염려가 없지 않다. 응당 행하여야 할 일은 조금도 늦추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이미 두 분 자성(慈聖)께 앙품(仰稟)했다."
하니, 예조 판서 민진원(閔鎭遠), 이조 판서 이의현(李宜顯), 병조 판서 홍치중(洪致中), 이조 참판 김재로(金在魯), 대사헌 신사철(申思喆), 대사간 이교악(李喬岳) 등이 소리를 같이 하여 찬양(贊揚)하니, 임금이 그 주달(奏達)을 옳게 여겼다. 승지 김상옥(金相玉)에게 명하여 쓰게 하기를,
"경의군(敬義君)을 세자(世子)로 삼는다."
하였다. 민진원·김재로·이교악 등이 인하여 성의(聖意)의 피혐함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으로 진계(陳啓)하기를,
"사사로운 뜻을 둔 것으로 참으로 사(私)이고, 남이 사(私)로 의심할까 두려워하는 것 역시 사입니다. ‘사(私)’란 한 글자를 마음속에서 잊어버린 연후에야 일마다 합당하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전 사람이 하지 않은 말이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지평 이의천(李倚天)이 심단(沈檀)의 아들 심득행(沈得行)이 격고(擊鼓)하여 원정(原情)한 것 때문에 피혐하고, 또 말하기를,
"아! 전하께서는 전하를 모위(謀危)한 자가 오직 역적 김일경 하나뿐이라고 여기십니까? 지난번 조정에 반거(盤據)하고 있던 자들은 모두 같은 자들입니다. 이 무리들이 반드시 전하를 없애려고 한 것은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그 말미암은 까닭을 알고 계십니까? 대개 성고(聖考)께서 잡으신 바는 춘추(春秋)의 의리이고, 이 무리들은 실로 춘추의 반적(反賊)이며, 성고(聖考)께서 부호(扶護)한 것은 윤기(倫紀)인데, 이 무리들은 실로 윤기의 죄인입니다. 이 무리들이 이미 이 때문에 성고 때에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되자 이에 망령되게 스스로 헤아려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는데, 정유년302)  의 미안하다는 전교로 즉시 후회하시자 떼를 지어 서로 바꾸어 일어나 나오기를 그침 없이 하여, 우리 성고에게 의심과 분노를 이르지 않은 바가 없이 하였습니다. 대리(代理)하라는 명이 내리기에 미쳐서는 이에 기뻐서 서로 축하하기를 오직 그 일이 크게 펼쳐지지 못할까 염려했으니, 전하께서 시험삼아 당시의 모습이 왜 한결같이 신축년303)   대리(代理)할 때와 상반(相反)되었는가를 상상해 보셨습니까? 아! 선왕(先王)은 바로 성고(聖考)의 아들이며 전하는 선왕의 아우입니다. 신하 된 자들은 마땅히 성고를 섬기던 것으로 선왕을 섬겨야 하고, 선왕을 섬기던 것으로 전하를 섬길 뿐인데, 이제 이 무리들이 반드시 둘로 나누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부자(父子) 사이도 오히려 둘로 나누려고 했으니, 또 형제(兄弟) 사이에야 무엇을 꺼리겠습니까? 옛사람들은 선제(先帝)의 지우(知遇)해 주심을 추념(追念)해 폐하(陛下)에게 갚고자 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은 선고(先考)에 대한 원한을 추념해 전하께 드러내려고 하니, 아!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전하께서 만약 이에 대해 그 원인를 따져 보시면 이 무리들이 성고의 죄인이 되어서 징토(懲討)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오직 하늘이 전하께 큰 임무를 내려 주시니, 흉적(凶賊)을 나오게 하여 전하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음이 없는 것은 지난번 김일경과 목호룡의 무리가 이것입니다. 4년 동안 전하께서는 두려워하여 고생하고 군색하게 쭈그러들어서 험하게 막히는 일을 고루 맛보셨고, 또한 마음의 고달픔과 균형 있는 생각은 그 능(能)하지 못한 바를 보태주기에 족하게 되었으니, 하늘이 우리 전하를 옥성(玉成)304)  시킨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거의 위태롭게 된 종사(宗社)를 안정시켜야 하고, 거의 무너진 기강(紀綱)을 바로잡아야 하며 여러 흉인의 오염(汚染)을 고쳐 일대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해야 하니, 전하의 책임 또한 크다고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토죄(討罪)하는 한 가지 일에 의심을 가지고 결단하지 않음을 혹자는 일이 자신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억지로 그릇되게 용서하는 것인가 여기고, 또 혹 함부로 죽인다는 이름을 듣기 싫어하여 우선 포황(包荒)305)  하는 것인가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이 두 가지에 반드시 하나를 차지할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모두 사의(私意)를 면치 못합니다. 종사에 죄를 지은 자는 일이 자기에게 관계된다 하여 혐의를 두어서는 안 되며, 사람들마다 죽이고자 하는 자를 함부로 죽인다는 이름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천리(天理)에 순응하여 한결같이 공의(公議)에 붙여 각기 그 죄로써 죄를 주게 되면 내 마음을 그 사이에 용납하는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근일의 대계(臺啓)는 큰 의리(義理)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전하께서는 옳게 여기지도 않고 또 그르게 여기지도 않으면서 ‘번거롭게 하지 말라.’가 아니면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하시어, 상하가 서로 버티어 완결할 기일이 없습니다. 당후관(堂后官)306)  은 하루 종일 쓰고 전하께서는 촛불을 밝히고 기다리면서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또 그렇게 하여, 이른바 백성들에 대한 걱정과 나라의 계책에도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으니, 비록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정사가 있더라도 장차 어디다 시행하겠으며, 저 수화(水火) 가운데 있는 것 같은 자들은 언제나 양춘(陽春)을 만나겠습니까? 먼저 한 장의 애통(哀痛)하는 교서(敎書)를 내리어 지난번 흉당들이 선왕을 가리어 속이고 전하를 위협 핍박한 형상을 분명하게 말하시고, 대신 및 경재(卿宰)·삼사(三司)에 명하니 빈청(賓廳)에 모여 《정원일기(政院日記)》 및 금부(禁府)의 옥안(獄案)을 상고하고 열람해서 그 심적(心迹)을 따지고 그 경중을 따져서 누구누구는 어떠어떠한 일로 마땅히 죽여야 하며, 누구누구는 어떠어떠한 일로 마땅히 찬축(竄逐)해야 한다고 하며, 혹은 내치고 혹은 파직에 이르기까지도 조목으로 나열해 상주(上奏)하게 해서 성상으로부터 다시 상량(商量)하시어 시행하소서. 지금 전하께서 가장 높은 권세를 죄다 잡으시고 옛 신하들을 불러모은다면 분문(奔問)하는 뜻을 마땅히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나, 평일에 능히 의리를 알아서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자가 또한 혹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해져서 바쁘게 급난(急難)에 달려 오듯이 함이 없을 것이니, 신은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를 쉽게 여기는 의리를 과연 이럴 때 행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으로 군부(君父)를 뵙는 날에는 오직 마땅히 임금의 무함을 씻고 나라의 역적을 징토하는 것을 첫째 의리로 삼았는데, 그 건백(建白)한 바는 석방을 청하는 것이 아니면 서용(敍用)을 청하는 것이니, 이 어찌 경중과 선후가 도치되는 것입니까? 저 화(禍)를 입은 집안의 자제들은 지극한 통분이 마음에 있어 잠시라도 기다릴 수 없는 것이 역시 인정(人情)과 천리(天理)에 당연한 것인데, 만약 그 부형(父兄)이 국가를 위해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뜻을 추념(追念)한다면 임금의 무함을 씻고 나라의 역적을 징토하기 전에는 어찌 사가(私家)의 일을 신폭(伸暴)하는 것을 급무로 삼겠습니까? 전하께서 이재(李縡)와 김조택(金祖澤)의 소에 특별히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시어 그 억울한 형상을 분명히 말씀하셔 인심을 감복시키고 귀신을 울리기에 족했습니다. 전하의 도리는 본디 그러해야 하지만 두 신하의 도리에 있어서는 그렇게 해서는 부당할 듯하니, 이것이 신이 두 신하를 위하여 깊이 애석해 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근일 대각의 말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역시 집착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6일 갑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부터 책례(冊禮) 진하(陳賀)할 때는 비록 국휼(國恤) 3년 안이라도 성상의 복색(服色)이나 백관의 복을 길복(吉服)으로 마련했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신임(申銋)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심택현(沈宅賢)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김재로(金在魯)를 부제학(副提學)으로, 권적(權𥛚)을 정언(正言)으로, 민진원(閔鎭遠)·홍치중(洪致中)·김재로(金在魯)·이병상(李秉常)을 빈객(賓客)으로, 조언신(趙彦臣)을 보덕(輔德)으로, 신방(申昉)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유복명(柳復明)을 필선(弼善)으로, 이유(李瑜)를 문학(文學)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설서(說書)로, 이이근(李頤根)을 자의(諮議)로, 이병태(李秉泰)를 사서(司書)로, 이재(李縡)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민익수(閔翼洙)·조명익(趙明翼)을 세마(洗馬)로, 이세환(李世煥)·윤봉오(尹鳳五)를 시직(侍直)으로, 채지홍(蔡之洪)·심육(沈錥)을 부수(副率)로, 박사한(朴師漢)·유학기(兪學基)를 위솔(衛率)로, 홍우해(洪禹諧)·김성운(金聖運)을 익찬(翊贊)으로, 이병정(李秉鼎)·송문상(宋文相)을 사어(司禦)로, 김시좌(金時佐)·박필문(朴弼文)을 익위(翊衛)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민진원(閔鎭遠)이 책자(冊子)를 올리면서 아뢰기를,
"진달하려고 하였던 것이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고 혐사(嫌私)를 멀리하는 등의 일이기 때문에 감히 옛사람의 수차(袖箚)하는 규례를 본받습니다."
하였다.

 

2월 27일 을미

소원(昭媛) 이씨(李氏)를 정빈(靖嬪)에 추증(追贈)했는데, 왕세자(王世子)를 탄생했기 때문이다.

 

조문명(趙文命)을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기(京畿)·황해도(黃海道) 유학(幼學) 조덕기(趙德器)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을 개정하고, 윤증(尹拯)의 관작을 삭탈하여, 최탁(崔鐸)·김범갑(金范甲)·신치운(申致雲) 등이 선정(先正)을 해친 죄를 통렬히 징치(懲治)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처분이 크게 정해졌으니, 다시는 그를 선정으로 대우하지 않으면 될 뿐이다. 사람이 모두 유종(儒宗)에 이른 연후에 비로소 관작을 제수하는 것인가? 조정의 벼슬은 사문(斯文)에 관계되지 않는다. 선정을 추하게 욕한 말을 어찌 다시 제기하겠는가?"
하였다.

 

2월 28일 병신

호조 판서(戶曹判書)는 종2품 가운데서 가망(加望)307)  하라고 명하였다. 이재(李縡)·신사철(申思喆)을 가망하니, 신사철을 호조 판서로, 김용경(金龍慶)을 문학(文學)으로, 황귀하(黃龜河)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집의(執義) 김여(金礪),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김담(金墰), 지평(持平) 이성룡(李聖龍)이다.】  또 아뢰기를,
"밤이 깊어진 후 2품 이상을 패초(牌招)한 것은 막중 막대한 일임을 알 수 있으니, 비록 실제로 병이 있는 정세라도 마땅히 급히 달려와 일제히 도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혹은 아무렇지 않게 집에 있으면서 까닭 없이 위패(違牌)한 자가 있습니다. 참으로 일분이라도 인신(人臣)의 예(禮)가 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장임(將任)은 다른 직임과는 다름이 있는데, 만약 지난번 특소(特召)가 급한 데서 나왔다면 장차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청컨대 당일 패초(牌招)를 어긴 인원은 아주 늙고 실제의 병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아울러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파직으로 현고(現告)된 사람은 김중기(金重器)와 여필용(呂必容)이다.

 

신광하(申光夏)·이봉상(李鳳祥)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 때문에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갔다. 우의정 정호(鄭澔)가 입시하니, 처음 등대(登對)한 것이다. 참찬관 조영복(趙榮福)이 청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봉사손(奉祀孫) 송문상(宋文相)을 이황(李滉)·김장생(金長生)의 봉사손의 예에 의해 강직(講直)을 제수하였다가 수령(守令)에 제수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또 김진상(金鎭商)·이유(李瑜)를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2월 29일 정유

남편을 시해(弑害)한 죄인 만향(萬香)이 복주(伏誅)되었다.
사헌부에서 【장령 이휘진(李彙晉)과 지평 이성룡(李聖龍)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해 신경제(申慶濟)의 소에서는 ‘난역(亂逆)’이란 두 글자를 공공연히 선정신 송시열에게 가하여 ‘장심(將心)을 온축(蘊蓄)하고 화기(禍機)를 빚어왔는데 죽은 후 남김없이 탄로되었다.’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아! 신사년308)  의 처분이 이미 성고(聖考)의 예단(睿斷)에서 나왔으니, 이는 신하로서 감히 소급해 제기할 수가 없는데, 신경제는 선정을 해치는 데 급하여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를 은연중 핍박하였습니다. 이것이 선대왕께서 특별히 엄지(嚴旨)를 내려 그 소를 돌려준 까닭입니다. 심술이 음참(陰慘)하고 말뜻이 흉독(凶毒)하니, 청컨대 아주 변지에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민진원(閔鎭遠)이 수차(袖箚)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가만히 보건대, 전하께서 호령을 내고 시행하는 즈음에 먼저 힘써야 할 바는 하나는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는 것이요, 둘째는 탕평(蕩平)을 넓히는 것입니다. 이른바 효제라는 것은 본(本)과 말(末)이 있으니, 본이란 공자(孔子)가 말한 ‘계지 술사(繼志述事)를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인명 예지(仁明睿智)하시고 강의 과단(剛毅果斷)하시었으며, 임어(臨御)하신 지가 이미 오래이고 춘추(春秋)가 더욱 높으시어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을 단련하여 통달하시고 밝게 익히지 않음이 없으시고, 사람들의 정위(情僞)와 일의 시비에 촛불을 비추고 점쳐 보시듯 하셨습니다. 그 대강(大綱)을 들어 말하자면, 신사년309)  의 토역(討逆)과 병신년310)  에 사문(斯文)을 바로잡은 이 두 가지는 모두 천지의 상경(常經)과 인륜(人倫)의 대강(大綱)에 관계되는 것으로, 그것을 처리함이 또 모두 조용하고 자세하며 신중하여 심사 숙고(深思熟考)하면서 희로(喜怒)를 나타내지 않고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한결같이 조치하는 것이 바른 데로 돌아갔으니, 백세토록 전해도 폐단이 없고 성인(聖人)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아!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신이 옛날 6년 동안 춘방(春坊)311)  에서 가장 오랜 기간 시강(侍講)하였는데, 삼가 보건대, 인자(仁慈)하고 총명하시며 순수(純粹)하고 온화(溫和)하신데다가 학문이 숙성하며, 행실이 순수하고 독실하셨습니다. 신사년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승하하시자 곡읍(哭泣)하는 소리에 듣는 자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 능히 숙종의 업적(業績)을 잇고 숙종의 공열(功烈)을 빛내는 것이 후일(後日)을 기필할 수가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중년 이후에 병환이 나셔서 침선(寢膳)·기거(起居)의 절도는 대단히 정상을 잃지는 않았으나, 사무를 수응(酬應)하는 즈음에 혹은 자세히 살피지 못하시면 신하들이 아뢰어 말하고 혹 이해하지 못하시면 외정(外庭)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오직 지성으로 보필하고 일에 따라 광구(匡救)하기를 생각하며 조만간 회복되는 경사가 있기만을 기다렸었습니다. 선왕께서 스스로 병환의 증세가 버티기 어렵고 만기(萬機)를 수작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헤아리시어 전하에게 저부(儲副)312)  의 중임을 부탁하셨습니다. 인하여 서무(庶務)를 대리(代理)하라 명하시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고 애통하면서 차마 받들지 못한 지가 대개 또한 며칠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세제(世弟)에게 두는 것이 가하겠는가, 좌우(左右)에 두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는 전교에 미쳐서는 지의(旨意)가 더욱 간절하고 성려(聖慮)가 더욱 심원(深遠)하셨는데, 일종의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의심과 겁을 내어 자기에게 불리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조태구(趙泰耉)는 찬축(竄逐)을 청하는 대계(臺啓)가 있지도 않아서 그 도당을 이끌고 함부로 궐문에 들어가 정원(政院)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대(賜對)를 입었는데, 문득 모두가 ‘종사(宗社)가 장차 망하게 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으니, 신은 좌우에서 용사(用事)하면 종사가 편안하게 되고 전하께서 대리하면 종사가 망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오히려 생각하기를, ‘저 무리들이 망령되이 의심을 내어 국가의 대체(大體)를 생각하지 않으니, 실로 미혹됨이 심하다.’고 여겼습니다. 역환(逆宦) 박상검(朴尙儉)의 일이 탄로되기에 미쳐서는 그가 이로 인하여 혹은 당일 여러 신하들의 심사와 저들 무리의 죄가 됨을 알아내어 그 화심(禍心)을 조금 식힐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에 도리어 지레 대옥(大獄)을 끝내 사실을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목호룡(睦虎龍)과 김일경(金一鏡)이 잇따라 나와 참벌(斬伐)을 멋대로 행하고 무패(誣悖)함이 자심했는데, 흉도들이 체결하고 교란(交亂)함이 이때에 이르러 낭자하여 가리우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병신년의 크게 처분(處分)하신 것을 숙종의 본의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쉽게 고쳤으며, 신사년 역옥(逆獄)은 비록 번복하지는 못했으나 추가해서 숭봉(崇奉)하는 것은 한결같이 숙종의 유지(遺志)와 예경(禮經)의 대방(大防)313)  에 반대되었습니다. 무릇 숙종의 평일 정령(政令)은 크고 작음을 묻지 않고 거의 다 변역(變易)시키면서 문득 말하기를, ‘상지(上旨)에 품(稟)하여 상지에서 취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숙종의 전후 처분이 옳고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만이지만, 의리가 명백하고 정녕하게 부탁함이 이러한데, 대행조(大行朝)에 이르러 일절 변개(變改)시킨 것이 이 어찌 선왕의 본의이겠습니까? 더군다나 평소 영예(英睿)하신 성자(聖姿)이셨으니, 이러한 거조(擧措)를 미루어 생각해 보면 털끝만큼도 근사한 것이 있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이 말한 ‘품처(稟處)했다.’느니, ‘윤허하셨다.’느니 하는 것은 대개 이 편찮은 가운데 여러 흉인들이 주달하는 즈음에 본사(本事)의 시비를 더러 살피지 못하시고 범연하게 응답하시어 그런 것입니다. 대저 질병이 오는 것은 성현도 면하지 못하는 바이니, 돌아보건대, 성덕(聖德)에 무슨 손상됨이 있기에 한 떼의 여러 간사한 자들이 그릇되어 선왕께 질병이 있음을 속이어 몰래 스스로 그 까불고 희롱하며 무엄한 자취에서 벗어나면서 그 위에다 누(累)를 더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아! 두 성인의 본심을 상세히 아는 분은 마땅히 전하만한 분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숙종 병신년의 처분이 과연 본의가 아니며 선왕께서 변개(變改)하신 바가 있는 것이 과연 한결같이 예재(睿裁)에서 나온 것이지, 간흉(奸凶)이 현혹시킨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이 근일 두 선정(先正)을 복향(復享)하고 복작(復爵)하는 등의 일로서 보건대, 결코 전하의 뜻이 일찍이 이에 의혹되지 않으실 줄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흉한 무리들이 숙종에게는 곧바로 그 크게 처분하신 것을 ‘여러해 동안 침고(沈痼)된 병환에 연유한 것이라.’고 배척하여 마음대로 무훼하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았으며, 선왕에게는 질환을 비밀에 붙여 숨기고 금방(禁防)을 설치해 말이 혹 이에 미치면 문득 역적이라 지목했으며 전하께 상서(上書)하는 자를 박살하도록까지 인도했으니, 이는 그 무슨 까닭입니까? 전하께서는 예학(睿學)이 고명하시니 의리의 곡절(曲折)에 대해서 반드시 통촉하여 의심이 없으시며, 또 궁위(宮闈) 사이의 크고 작은 일은 또 전하께서 익히 아는 바인데도 그 오늘날 여러 신하들의 충사(忠邪)와 시비(是非)에 있어 어찌 구분하지 못하심이 있겠습니까? 특히 그 일이 양조(兩朝)에 관계되고, 숙종의 처분을 따르신다면 혹 선왕(先王)께 방해됨이 있을까 염려하실 것이요, 선왕의 자취를 답습하신다면 또 그 숙종께 방해됨이 있을까 염려하실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의심을 지녀 결단하지 않으시니, 좌우가 난처하게 됩니다.
대저 이렇게 하면 숙종의 무함은 아무 때나 분변될 것이요 선왕의 본심은 아무 때나 밝혀질 것입니다. 반드시 분명히 ‘선왕께서는 인효(仁孝)·총예(聰睿)한 자품으로 불행히 뜻밖의 질환이 계시고 소인들이 막고 가리는 바가 되어 수년 사이에 숙종의 구정(舊政)을 변역(變易)시킴이 한결같이 여러 간신들이 현란(眩亂)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한 연후에야 비로소 중외의 의혹을 풀고 후세의 의심을 풀게 되며, 선왕 본연(本然)의 아름다운 덕이 곧 해와 별처럼 밝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왕은 진실로 일찍이 숙종의 뜻과 숙종의 일을 계술(繼述)하지 않음이 없게 되고, 전하도 또한 일찍이 선왕의 뜻과 숙종의 일을 계술(繼述)하지 않음이 없게 되어, 세 성인이 수수(授受)하는 즈음에 융성한 덕과 큰 업적이 광명(光明)하여지고 통달(洞達)하여져서 기꺼이 합치고 사이가 없게 될 것이니, 이 어찌 효제(孝悌)의 큰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선왕께 질환이 있었음을 감추지 않은 연후에야 선왕의 무함을 변명할 수 있고, 선왕의 무함을 이미 변명하고 나면 숙종의 무함은 변명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모름지기 두 성인의 본심이 있던 바를 미루어 밝히시고 중간에서 엄폐한 곡절을 중외(中外)에 효유하시어 두 성인의 심사가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이 사람들마다 볼 수 있게 하시고, 역사(歷史)에다 쓰게 하면, 거의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없고 효제(孝悌)의 도리를 능히 다할 것입니다. 탕평(蕩平)을 넓혀야 한다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임금은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즈음에 하나의 털끝 같은 사(私)라도 제거하고 오직 그 사람의 어질고 사악함과, 일의 옳고 그름을 보는 것을 이를 뿐입니다. 마음을 두는 것이 지극히 공평하면 어질고 간사함이 구별되고 ‘당(黨)’이란 한 글자를 마음에서 잊어버린 연후에야 바야흐로 탕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제(舜帝)가 고요(皐陶)를 들어 쓰자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가고,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들어 쓰자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갔습니다. 만약 어진이를 나오게 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는 즈음에 그 편중(偏重)하는가 의심하여 반드시 훈유(薰蕕)와 빙탄(氷炭)을 한 그릇 안에 섞어 담는다면, 반드시 아울러 용납하여 서로 도울 이치가 없고 기성(箕聖)314)  의 탕평(蕩平)이라는 가르침에 크게 어긋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송(宋)나라건중정국(建中靖國)315)   때에 마침내 정강(靖康)의 화를 부르게 된 까닭입니다. 이른바 ‘사(私)’ 자라는 것은 다만 사사로이 친한 사람만 치우치게 쓴 연후에 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가 없음을 남에게 보이려고 하고 공평하다는 칭찬을 받고자 해서 하려는 마음을 두는 데서 나온 것도 또한 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지금 어진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구별하기는 아주 쉽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선왕(先王)에게 질환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전하의 영명(英明)을 꺼려하면서 기반을 굳히고 규합하여 그 욕심을 이루고자 한 자는 모두 흉악한 무리들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런 줄을 깨달으셨으나 물리치는 즈음에 오히려 혹시 편중(偏重)에 돌아갈까 염려하시어 문득 돌보아 주고 애호하는 뜻을 보이십니다. 주자(朱子)가 이른바 ‘만약 그 시비 곡직(是非曲直)을 묻지 않고 똑같게 대우하면 옳고 선한 자는 항상 펴지 못하고, 악한 자는 도리어 요행히 면하는데, 이것을 공평하다고 하면 이는 바로 크게 공평하지 못하다고 여긴다.’라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같으며, 역시 《서경(書經)》의 ‘의심하지 말라.’는 가르침에도 어긋남이 있습니다. 징토(懲討)가 이미 행해지고 시비가 크게 정해진 후에 이 도를 가지고 변함 없이 세월을 두고 연마하여 그 가운데서 조금 수립(樹立)한 자를 취해 재능에 따라 백집사(百執事)에 조용(調用)하면, 세월이 오래 된 후에는 대중의 마음이 스스로 정해지고 시비(是非)가 크게 밝혀져 자연히 얼굴을 바꾸어 선(善)을 따르는 보람이 있을 것이며,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은 오직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뿐이니, 신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른바 탕평하는 도리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정령(政令)을 하시는 사이 매양 혐의를 피해 멀리하려고 하시는 것은 소절(小節)에 구애되어 대체(大體)를 손상시키심이 혹은 많이 있으니, 신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이런 뜻을 제거하지 않으시면 장차 막히지 않는 곳이 없을까 염려되며, 맹자(孟子)의 이른바 ‘마음에서 나와 정사에 해가 되며 정사에서 나와 일에 해가 되는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피혐(避嫌)하는 일을 현자(賢者)는 또한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성인(聖人)이겠습니까? 대저 임금의 한 몸에는 종사(宗社)의 부탁과 억조(億兆)의 백성이 관계된 바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사람은 반드시 어진이를 구하여 일념(一念)으로 오직 종사를 편하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인데, 어찌 감히 스스로 그 몸에 있어 그릇되게 작은 혐의를 피하시는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근년 이래로 험악하고 어려움을 이미 갖춰 겪으셨습니다. 잠저(潛邸)에 계시면서 이미 횡역(橫逆)의 말을 들었고 저위(儲位)에 오르셔서는 유봉휘(柳鳳輝)의 저지(沮止)와 한세량(韓世良)의 흉한 말을 만났고, 이어서 박상검(朴尙儉)의 모해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무함이 있었으며, 그 다른 위태롭고 불안했던 단서가 한둘에 그치지 않았으니, 이 무리들은 모두 종사(宗社)의 죄인이요 전하의 사사로운 원수가 아닙니다. 즉위(卽位)하시던 처음에 비록 그날로 다 취하여 그들의 죄를 바로잡는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종사를 위해서 적을 징토(懲討)하신 것이요 자기(自己)를 위해서 복수(復讎)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전하께서 사람들이 혹은 자기를 위해 복수(復讎)를 한다고 의심할까 염려하여 용서하고 참아 온 지 반 년에 망념(妄念)을 가지고 진각(眞覺)이라고 여겨서 오직 징토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닙니다. 새로 정사를 하는 처음에 유봉휘를 보상(輔相)의 자리에 발탁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덕(德)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으로 공성(孔聖)께서 취하지 않은 바입니다. 전하께서 처음 유봉휘의 상소를 보시고 선왕(先王)에게 글을 올리는데 ‘모골이 함께 송연하여 진다[毛骨俱竦]’는 네 글자까지 두셨는데, 전하로 하여금 모골이 함께 송연하게 한 자가 종사의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종사의 죄인인데도 정사 처음에 정승으로 세운 것은 어찌 천리(天理)·인정(人情)에 크게 어긋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그후 연중(筵中)에서 관중(管仲)과 환공(桓公)에 비의(比擬)하는 말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관중이 환공의 혁대 고리를 쏜 것은 그 자규(子糾)와 쟁립(爭立)한 때문이었으니, 이는 환공의 죄인이요 제(齊)나라 종사에 죄를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환공이 그때에 각기 그들이 주장하던 것을 용서하여 원망하던 것을 용서하고 썼던 것인데, 지금 전하께서는 선왕의 저사(儲嗣)가 되시어 원래 환공과 자규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봉휘는 감히 차거(遮莒)316)  할 계책을 했으니, 이것이 다만 전하만의 죄인이겠습니까, 아니면 종사의 죄인이겠습니까? 이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천리(天理)에 돌이켜 구하여 보면, 전하의 거조가 합당함을 잃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전하께서 저위(儲位)에 오르신 것은 선왕께서 자성(慈聖)께 품지(稟旨)하시어 정책(定策)한 것이요, 그 때 여러 신하들은 그 사이에서 협찬(協贊)한 데 불과할 뿐이니, 논할 만한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흉도들이 전하께서 구신(舊臣)을 등용할까 두려워하여 ‘원립(援立)’·‘옹립(擁立)’·‘정책 국로(定策國老)’ 등의 말을 서로 이어 진달하여 반드시 전하를 혐의가 있어 마땅히 피해야 할 과목으로 돌리려고 하여, 전하께서 이런 말에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적(竄謫)된 여러 사람들은 죄 없이 원통함을 안고 있어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데도 오랫동안 내릴 은택을 아끼시니, 이는 모두가 전하께서 혐의를 멀리하는 잘못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모든 정령(政令)을 한결같이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따라 오직 종사(宗社)를 생각하시고 털끝만큼도 자기의 사를 마음에 두지 마소서. 그렇게 하시면 규모(規模)가 굉대(宏大)해지고 형상(刑賞)이 이치에 맞아서 억만세(億萬世)의 무궁한 아름다움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그 임금에게 고하기를, ‘폐하(陛下)의 마음은 전일에 일찍이 위(位)를 구할 계획이 없으셨으니, 나의 일찍이 위를 구할 마음이 없었던 마음을 확충(擴充)시켜서 마음이 충동되어도 본성(本性)을 굳게 참아 깊이 스스로 억손(抑損)하며 스스로 대처하는 것을 항상 전일에 일찍이 위에 있지 않았을 때처럼 하신다면, 화가 굴려 복이 되고 위험이 바뀌어 편안함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참으로 지당한 의논입니다. 전하께서 전일에 일찍이 위(位)를 구할 마음을 두지 않으셨는데, 흉도들은 전하께 위를 구할 마음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 이 말을 듣고는 마치 조의(朝衣)를 입고 도탄(塗炭)에 앉은 것과 같이 하여 반드시 혐의를 멀리 피하고 이 누(累)를 씻으려고 하시나, 한갓 사람들에게 넓지 못한 점만 보이고 밝은 덕에는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단지 주자의 말에 의하여 차분하신 마음으로 힘써 행하시고 부지런히 하시면서 게으르게 하지 않으신다면, 천하 후세에 자연히 전하의 심사를 환히 알게 될 것이니, 오직 전하께서는 힘쓰소서."
하였다.
이때에 군흉(群凶)이 모두 내쳐져 조정(朝廷)의 기상이 일신(一新)되었는데, 민진원(閔鎭遠)이 적소(謫所)에서 겨우 돌아왔으므로, ‘신축년317)  ·임인년318)   흉도들의 화심(禍心)은 비단 사류(士類)를 해쳐 죽이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흉언(凶言)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깊어지고 화기(禍機)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번져지니, 만약 의리(義理)를 통렬히 분변하여 흉언을 쪼개 깨뜨리지 않으면 화란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여겨, 드디어 수차(袖箚)를 진달하면서 근본을 거슬러 죄다 논한 것이 이와 같았다.

 

 

 

우의정 정호(鄭澔)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하나의 마음이 이미 바르게 되면 만사(萬事)가 스스로 거행되는 것이 대강(大綱)을 들면 세목(細目)은 저절로 펴지는 것과 같음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리우는 것이 있어 문득 하는 일마다 주선해 미봉(彌縫)하면 일에 반드시 차례가 없어 한갓 스스로 어지러워질 뿐입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인(仁)을 좋아하는 폐단이 너무 지나쳐 대대(大憝)·원악(元惡)이 법망(法網)을 빠져 나가는 한탄이 있고, 피혐(避嫌)하는 뜻이 너무 뛰어나 호령을 내어 시행함에 굉대(宏大)한 체제(體制)가 없어서 선왕의 성덕(聖德)이 현창(顯彰)되지 않고 종사의 죄인이 편안하게 있으니, 이런 병통을 제거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민진원의 수차(袖箚)는 참으로 이른바 병증(病症)에 대한 신방(神方)입니다. 지금 말하는 자들이 모두 성상의 무함을 변석하고 국적(國賊)을 징토하는 것을 첫째 의리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상의 마음을 전에 논한 자들에게는 석연(釋然)치 못한 점이 있게 되었으니, 성상의 무함은 끝내 변명할 수 없고 국적은 끝내 징토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대계(臺啓)에 대해 한 가지 예(例)로 어기고 거절하시니, 성상의 뜻이 과연 대간의 말을 옳지 않다고 여겨서 따르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말은 비록 반드시 틀리지 않으나 저 무리들을 오히려 돌보는 바가 있으셔서 그러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결코 전하께서 반드시 대간의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시는 것이 아님을 아는데, 그런데도 오히려 또 겉으로 문구(文具)가 되게 하시니, 성학(聖學)의 ‘성(誠)’ 자 공부가 혹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감히 ‘성(誠)’ 자 하나를 전하께 바칩니다. 대개 대계(臺啓) 한 가지 일뿐만 아니라, 민진원의 수차(袖箚)에서 논한 몇 가지 일은 어찌 성실해야 할 저 도리에 부족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님이 없는 것입니까? 원하건대 통렬하게 스스로 성찰(省察)하여,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시어 확연히 크게 공평하시어 물아(物我)에 사이를 두지 마소서. 헌신(憲臣)이 그 직책을 다할 수 없어 곧 단자를 올려 체직하려 한다고 합니다. 헌신이 근래의 대각(臺閣) 가운데는 제법 감언(敢言)한다는 명성이 있어 그의 자처함이 제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다만 사람들이 성조(聖朝)를 어떻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이래부터 언지(言地)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굳은 뜻이 없고 한결같이 퇴보(退步)하여 조정의 기상(氣像)이 아름답지 못하여 언로(言路)의 막힘이 장차 오늘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전하께서는 어찌 일찍이 언로가 막히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를 보셨습니까? 전하의 신하 된 자면 누군들 은연중 근심하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함에 깊이 감탄하였다. 다만 근일의 일은 나에게도 집착한 바가 있으니, 후일 등대(登對)할 때 면유(面諭)하겠다. 헌신에 대한 일은 참으로 나의 허물이니, 자성(自省)하는 외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2월 30일 무술

밤 3경에 유성(流星)이 천강성(天江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만 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 남짓 되며 색은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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