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권, 영조 1년 1725년 3월

싸라리리 2025. 8. 19.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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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기해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백기(白氣)가 이변(珥邊)에서 나왔는데 얼마 있다가 없어졌으며,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는데 안은 붉고 밖은 푸른 빛이었다.

 

임금이 친히 삭제(朔祭)를 경소전(敬昭殿)에서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정호(鄭澔)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머물 수 없는 의리가 세 가지 있습니다. 임금이 무함당한 것을 아직도 씻지 못한 바가 있고, 의리를 아직도 밝히지 못한 바가 있는데, 신이 전하(殿下)를 보좌하여 시초(始初)의 교화를 도우려 한다면, 견철(牽掣)되고 막히어 착수(着手)할 곳이 없을 것이며, 만약 총명(寵命)에 헛되이 얽매여 구차스럽게 지위나 채우려고 할 뿐이라면 신의 평일 뜻이 아니니, 이것이 첫째입니다. 전하를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하는 적(賊)이 아직도 원임(原任)으로 있으며,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몰래 보호하는 사람이 함께 요지(要地)에 있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이 없지마는 또한 우리 숙고(肅考)319)  의 유신(遺臣)인데, 어찌 차마 이 무리들과 같은 반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여 후세(後世)의 비난을 끼치겠습니까? 이것이 둘째입니다. 신은 본래 지난번 4대신(四大臣)320)  과 죄가 같은데도 혼자 형장(刑章)321)  을 면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부끄러워할 만합니다. 4대신은 아직도 원통함을 품은 귀신이 되어 있는데, 신 혼자서만 은영(恩榮)322)  을 입고 의기 양양(意氣揚揚)하게 낭묘(廊廟)323)   사이에 모람되게 웅거하여 있으므로, 죽은 자가 안다면 틀림없이 신의 낯에다 침을 뱉을 것이니, 이것이 셋째입니다. 대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소결(疏決)324)  을 거행하라는 전교는 신이 성상의 뜻을 우러러 알겠습니다. 대저 오늘날에 신자(臣子) 된 자는 진실로 임금을 무함하는 것을 분변하고 국가의 역적을 성토하는 것으로 제일의 의리로 삼아야 할 것이고, 신하의 원통함을 씻어 드러나게 하고 소결(疏決)하여 석방하는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먼저 언급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신의 지난번 차자(箚子)의 본의(本意)였습니다. 그러나 전하(殿下)의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원통하게 죽은 여러 신하들에게 먼저 미쳤으니, 이것 역시 인정(仁政)의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신축년325)   이후로 종사(宗社)를 위하여 죽은 자가 몇 사람이며, 전하를 위하여 죽은 자가 몇 사람이겠으며, 죽임을 당한 나머지 생존한 자가 몇 사람이겠습니까? 더러는 귀양가기도 하고 더러는 쫓겨나기도 하여 여러 해를 지나도 침체되고 억눌렸으니, 이것이 성명(聖明)께서 슬프게 여기고 생각이 미쳐 기필코 차례대로 소결(疏決)하여 석방시켜 일물(一物)326)  로 하여금 그 안정된 처소를 얻지 못함이 없도록 하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임금이 이와 같이 하는데 저 죽은 자인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신이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눈물이 마구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의 사화(士禍)는 전고(前古)에 없었던 바이니, 누군들 원통하게 여길 만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그것은 대체로 정책(定策)327)  하여 대리(代理)하는 일에 연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왕(先王)328)  이 이미 후사가 없었으니, 건저(建儲)329)   하는 주청을 어떻게 일찍이 하지 않을 수 있었겠으며, 선왕께서 이미 질환(疾患)이 있는데 대리(代理)하는 일이 어떻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흉당(凶黨)으로 전하에게 배반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바로 건저하는 것을 폐립(廢立)330)  의 죄과(罪過)로 돌리고, 대리(代理)하는 것을 찬역(簒逆)331)  의 죄목(罪目)으로 몰아넣었으니, 이는 다만 여러 신하들을 무함하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전하를 무함한 것이었습니다. 전하의 무함이 벌써 씻어졌다면, 여러 신하들의 무함은 신원(伸冤)되기를 기약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신원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일의 서두가 이미 이와 같으니, 기타 백천(百千) 가지의 단서(端緖)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332)  가 유인(誘引)한 데서 나온 것임을 전하께서 이미 환하게 아시는 바이니, 단지 이는 무옥(誣獄)333)  일 뿐입니다. 이미 그것이 무옥이었음을 아셨다면, 연신(筵臣)이 이른바 자복(自服)을 받지 못하면 정형(正刑)334)  하지 못한다는 말은 그 사이에서 구별(區別)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것은 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국옥(鞫獄)335)  이 있은 이래로 임인년336)   옥사처럼 음험하고 흉악함은 없었습니다. 3년을 단련(鍛鍊)하여 오직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하였으며, 외간(外間)의 많은 말들이 죄인의 입에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써 놓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그 다른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른바 자복을 받은 것도 저 무리들이 허물을 감추려고 꾸민 바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겠으며, 또 전일(前日) 성상의 전교에서 이른바 죽을 곳에서 도망할 길을 찾느라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 중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무릇 이러한 내용들은 신의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성명(聖明)께서 이미 환하게 아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들의 원통함을 아셨으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하루라도 구지(九地)337)  의 아래에서 원통함을 품게 할 수는 없으며, 기필코 여러 신하들의 원통함을 풀어주려고 한다면 당연히 4대신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4대신의 참화(慘禍)는 오로지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하는 일에서 나왔었는데, 새로운 의도를 부연해 내어 별도의 죄안(罪案)을 구성(構成)한 것은 궁성(宮城)의 호위(扈衛)에 대한 일과 양자(養子)에 대한 일과 위자(痿字)에 대한 일에 불과합니다. 대체로 궁성의 호위에 대하여 말한 부분에 저 무리들이 증거로 삼는 것은 이삼(李森)을 〈외직(外職)으로〉 내보내어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삼은 것과 유취장(柳就章)을 중군(重軍)으로 임명한 것에 불과한데, 이삼이 스스로 구(求)한 정상은 온 조정이 함께 아는 바이며, 유취장을 중군으로 삼은 일에 이르러서는 임명한 지가 오래 되지 않는데도 곧바로 또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맨 먼저 의망(擬望)되었으니, 과연 저 무리들의 말과 같다면 어떻게 다시 곧바로 외직에다 임명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그밖에 모여서 의논하였다고 하던 날에 습조(習操)338)  로 기약에 뒤졌다는 말은 날짜가 어긋나니 실패로 돌아가서 여지가 없으며, 손바닥에다 ‘양(養)’ 자를 썼다는 데 이르러 그것을 추대(推戴)하는 데로 돌렸으니, 그것이 과연 털끝만큼이라도 근사(近似)한 것입니까? 비록 그 당시 최석항(崔錫恒)의 차자(箚子)를 가지고 본다 하더라도 거기에 이르기를, ‘추대한 사람이 세 번이나 그 말을 변경시켰다.’고 하였는데, 추대하는 역옥(逆獄)을 세 번이나 변경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단지 이 한 가지 조목만으로도 그 허망(虛妄)됨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痿)’ 자에 이르러서는 더욱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위(痿)’ 자가 어찌 별반의 깊은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족(手足)이 마비(痲痺)되는 것도 위비(痿痺)라고 말하는데, 이 한 글자로 어떻게 선왕(先王)을 깎아서 무함한다고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반드시 제혁(帝奕)339)  에게 비교하는 것은 저 무리들이 도리어 주상을 무함하는 죄를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건명(李健命)의 화(禍)가 다른 세 신하와 비교하여 가장 혹독하다는 것도 연유가 있으니, 대체로 그가 전대(專對)340)  하기를 자청(自請)하였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혹시라도 아십니까? 그 세 신하를 무함한 까닭이 여기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남김없이 탄로되었으니 그 밖의 다른 것은 또 무엇을 논하겠습니까? 그리고 조태채(趙泰采)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없는 사실을 꾸며서 만든 죄가 단지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린 한 가지 일뿐이며, 대리(代理)하는 것이 본래 찬역(簒逆)이 아님은 전하께서 이미 환하게 아시는 바인데, 조태채가 사형당한 것은 도대체 무슨 죄입니까? 4대신은 숙종(肅宗)의 구신(舊臣)으로 우리 선왕(先王)을 협력 보좌하여 깨끗하고 한결같은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만한데, 단지 우리 임금의 아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다가 마침내 형륙(刑戮)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국인(國人)이 함께 슬퍼해야만 할 뿐이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하늘에 계신 숙종(肅宗)의 영혼도 틀림없이 몹시 슬프게 여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숙종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 자기의 일로 혐의스럽게 여겨 저지당하는 바가 있지 않았다면 4대신이 어찌 지금까지 원통함이 있는데도 풀지 못했겠습니까? 원하건대, 빨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먼저 4대신의 지극한 원통함을 씻어 주시고 그들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킨 연후에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조성복(趙聖復)·이홍술(李弘述)·윤각(尹慤) 등도 일체(一體)로 신원설치(伸冤雪恥)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내 금오(金吾)341)  에 명하여 그때의 옥안(獄案)을 가지고 대신과 금오 당상(金吾堂上), 삼사(三司)의 관원에게 두루 보이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일이 상고하여 열람하게 하고 날짜를 정하여 일제히 빈청(賓廳)에 모여 진계(陳啓)하고 논열(論列)해서 이미 죽은 자는 신원(伸冤)시켜 주게 하고 귀양 중에 있는 자는 석방하도록 하며, 또 이러한 뜻을 팔방(八方)에 널리 알려 중앙과 지방으로 하여금 흉당(凶黨)이 속이고 엄폐시켜 흐리게 하고 어지럽힌 상황을 환히 알도록 하신다면 실로 큰 명(命)을 맞이하여 이어가는 데 한 가지 큰 중대한 관건(關鍵)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 요즈음의 일에 대하여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스스로 혐의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처분(處分)이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선조(先朝)의 남긴 뜻을 우러러 본받는 것이고 한편으로 대행조(大行朝)의 융성한 덕(德)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 지난날 4대신이 원통함을 당한 것은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앞장선 자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이고 호응한 자는 역적 목호룡(睦虎龍)이며,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여 그 일을 이루게 한 자는 바로 무복(誣服)한 여러 역적들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역안(逆案)342)  이 견고(堅固)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합계(合啓)하고 청대(請對)하게 해서 마침내 그 뜻을 이루게 하였으니, 만약 대행조(大行朝)의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아니었으면 그 사건의 단서가 어찌 여기서만 그칠 뿐이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일은 중대(重大)하므로 한 번의 비답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 대신(大臣)과 2품(品)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의 관원이 빈청(賓廳)에 모여 국안(鞫案)343)  을 상세히 열람한 뒤에 즉시 면대하여 품처(稟處)344)  하도록 하라. 그리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사건은 만약 합계(合啓)하는 것을 윤허한다면 지난번에 진소(陳疏)345)  한 것은 형식으로 돌려야 하겠는가? 오늘날의 마음은 바로 지난날 뜻하였던 것이다. 마음은 오히려 태연(泰然)한데 억지로 옳은 것을 따르도록 힘쓰라는 것은 성실함이 아니다. 애당초 글을 올려 진달하고서 마지막에 또 추가로 제안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이것이 어찌 말한 사람의 뜻을 억지로 거스르는 것이겠는가? 아! 지난날의 일을 경(卿)은 모름지기 생각하라. 더러는 쫓아내기도 하고 더러는 유배(流配)보내기도 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시켰는데, 만약 대행조(大行朝)의 덕의(德意)가 아니었으면 어찌 여기에 이르고 말았겠는가?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이미 처형되어 원악(元惡)346)  이 이미 제거되었으며, 소하(疏下)347)  의 사람들도 이미 모두 쫓겨나고 따르던 사람들도 또 죄를 다스렸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가 나라를 세워 오래도록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은 인애와 후덕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 이미 아주 정하여졌으니, 어찌 곧 참형을 시행하고 귀양을 보낸 뒤라야 비로소 안정이 되겠는가? 경(卿)이 오늘날 거취(去就)를 결정하겠다는 말은 경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2일 경자

목시룡(睦時龍)을 본부(本府)에서 추국(追鞫)하였다. 목시룡은 목호룡(睦虎龍)의 형(兄)이다.

 

장붕익(張鵬翼)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고(故)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이만성(李晩成) 등 여러 신하들도 모두 관작을 회복시켰다. 이보다 먼저 임금이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국안(鞫案)을 상세히 열람하고서 입시(入侍)하도록 하였었다. 이날 우의정(右議政) 정호(鄭澔)가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원(閔鎭遠),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 병조 판서(兵曹判書) 홍치중(洪致中),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윤헌주(尹憲柱), 호조 판서(戶曹判書) 신사철(申思喆),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기익(李箕翊), 좌윤(左尹) 권업(權𢢜), 예조 참판(禮曹參判) 허윤(許玧), 호조 참판(戶曹參判) 황일하(黃一夏)  【빈청(賓廳)에 모였다가 병(病) 때문에 입시(入侍)하지 못했다.】 , 사직(司直) 유명홍(兪命弘)·이유민(李裕民)·우윤(右尹) 심정보(沈廷輔)  【입시(入侍)하던 처음에 병 때문에 즉시 물러갔다.】 ,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봉상(李鳳祥), 훈련 도정(訓鍊都正) 김수(金洙), 행 호군(行護軍) 최진한(崔鎭漢)·김흡(金潝)·윤우진(尹遇進)·이여옥(李汝玉)·신명인(申命仁), 대사간(大司諫) 이교악(李喬岳), 집의(執義) 김여(金礪),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김담(金墰), 지평(持平) 이성룡(李聖龍), 사간 어유룡(魚有龍), 헌납(獻納) 정택하(鄭宅河), 응교(應敎) 신방(申昉), 수찬(修撰) 홍현보(洪鉉輔), 승지(承旨) 박성로(朴聖輅), 가주서(假注書) 최명상(崔命相), 기주관(記注官) 최도문(崔道文)·이태징(李台徵)을 인솔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때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으로 국옥(鞫獄)에 관계한 사람이 별도로 긴요한 말이 없는가?"
하자,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그 당시 단련(鍛鍊)하여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 남을 속이려던 것은 오로지 행약(行藥) 한 건에 달려 있었는데, 김창집(金昌集)의 경우는 그의 손자 김성행(金省行)이 서덕수(徐德修)와 수작(酬酌)한 바의 말이 있다고들 하였지만 김창집은 원래 거론(擧論)한 일이 없었으며, 이이명(李頤命)은 사명(使命)을 받들었을 때에 독약(毒藥)을 사다가 이것으로 흉악한 일을 행하여 심지어 누런 물을 토(吐)해 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였는데, 누런 물을 토해 낸 것은 경자년348)   12월에 있었으며, 이이명의 사신 일행이 되돌아온 것은 신축년349)   정월(正月)에 있었으니, 이것은 이미 서로 어긋납니다. 그리고 또 이르기를, ‘정유년350)  에 금평위(錦平尉)351)  가 연경(燕京)에 가는 행차에 장씨(張氏) 성(姓)의 역관(譯官)에게 부탁하여 약(藥)을 사서 오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행차에는 원래 장씨 성의 역관이 없었으니, 장가(張哥)가 홍가(洪哥)로 변(變)하여 자복(自服)을 하지 않고 장하(杖下)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궐 안에서는 김씨(金氏) 성의 궁인(宮人)을 인해서 약(藥)을 사용하여 흉악한 짓을 행하였다고 하였는데, 김씨 성의 궁인은 대행조(大行朝)에서부터 원래 없었다는 것으로 전교하셨으니, 이것은 모두가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서덕수(徐德修)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신축년 6월에 약을 장세상(張世相)의 처소에 들여보내고 인해서 동궁(東宮) 주방(廚房)의 나인이 이소훈(李昭訓)을 독살(毒殺)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축년 6월에는 전하(殿下)께서 바야흐로 사제(私第)에 계셨으니, 어찌 동궁 주방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등의 이야기가 바로 내가 앞서 말한 사리에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였다.
정호(鄭澔) 및 여러 신하들이 모두 김창집(金昌集) 등과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 이하 여러 신하들의 원통함을 극력 말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김창집이 후명(後命)352)  을 신의 귀양지인 성주(星州)에서 받았기 때문에 신이 가서 그를 보니, 김창집이 말하기를, ‘내가 선조(先朝)의 한없는 은혜를 받았으나 한 가지 일도 은혜를 갚기 위하여 힘을 다한 것이 없으니 죽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무슨 섭섭함과 한탄이 있겠는가마는, 다만 염려스럽기는 동궁이 아마도 보전하기 어려울 듯하니 이 때문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면서, 민진원이 이내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순(大舜)353)   임금이 시골 가운데 살았어도 3년 만에 읍(邑)이 이룩되고 5년 만에 도회(都會)가 이룩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성인(聖人)이 스스로 수양한 성과가 아니겠는가? 내가 만약 스스로 수양하는 공부(工夫)가 있었다면 애당초 건저(建儲)한 뒤에 어찌 인심(人心)이 의심하고 미혹됨을 초래(招來)하였겠는가? 이것은 모두 내가 스스로 수양하는 공부가 전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물건을 던져 쥐를 때려 잡고 싶지만 곁에 있는 그릇을 깰까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지난번에 이른바 폐립(廢立)과 찬역(簒逆)한다는 것이 미루어 말한다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스스로 그들이 위로 감히 말할 수 없는 처지에 핍박하였음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릇을 깨뜨릴까 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저위(儲位)354)  가 이미 정하여진 뒤에도 사건의 단서가 겹겹이 발생하여 궁위(宮闈)355)   사이에서도 역시 변괴(變怪)가 발생한 것은 모두 스스로 수양을 잘하지 못한 데 연유한 까닭인 것이다. 동궁(東宮)이 문침(問寢)356)  하고 시선(視饍)357)  하는 외에 비록 조정에 대하여 간예(干預)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곁에서 모시며 제시 진달하는 일은 옛날의 역사에도 있었다. 나의 경우는 단지 사건이 자기에게 관계된다는 이유로써 감히 못한 바가 있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아무리 그때의 일의 형세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실상 대행조(大行朝)의 건저(建儲)한 의도를 저버린 것이다."
하고서, 인하여 한참 동안 눈물을 줄줄 흘리므로 좌우(左右)의 여러 신하들이 몹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이의현(李宜顯)·신사철(申思喆)·이교악(李喬岳)은 눈물이 옷깃을 적셨는데, 얼마 있다가 옥음(玉音)을 조금 높이면서 말하기를,
"지난번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형법(刑法)으로 복주(伏誅)된 뒤에 처분(處分)을 하려고 하다가 참고서 발설하지 않았었는데, 다시 생각하여 보니 그 당시에는 비록 일의 형세에 저지되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만약 그 원통한 상황을 알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혐의스러움을 생각하여 예전대로 무기력하게 버려둔다면 대행조(大行朝)의 융성한 덕(德)을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명백하게 처분한 연후라야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다. 대저 조정의 형상이 갈래가 진 것이 선조(先朝)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었다. 처음에 사문(斯文)의 일로 선왕(先王)의 처분이 지극히 엄격하여 문자(文字)에 나타내어 간책(簡冊)에 전해져 있으며, 또 대행조(大行朝)에서는 소비(疏批)358)  가 지극히 그 엄격하고 분명하였기 때문에 한편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서 기회를 틈타 발설하여 여러 신하들을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죄과(罪科)로 모두 몰아넣었으니, 진실로 그들이 그렇게 한 까닭을 구명(究明)한다면 과연 어느 곳에서 말미암은 것인가? 그 당시 사람들은 의혹(疑惑)이 겹겹으로 발생하였는데, 만약 그들의 마음이 있는 곳을 논한다면 틀림없이 한편의 사람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한 연후에 그들로 하여금 손을 쓸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내조(內朝)와 외조(外朝)가 멀리 떨어져 있고 종친(宗親)과 외척(外戚)의 접견이 없으며, 조신(朝臣)들이 왕자(王子)를 섬김은 더욱 각별하기 때문에 내가 대신(大臣)이 어느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 판중추부사(李判中樞府事)359)  는 약원(藥院)360)  에 있은 지가 몇 년이었으므로 입시(入侍)할 때에 자주 그를 보았는데, 결단코 반역할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리고 내가 대궐에서 직숙(直宿)할 때에 글씨 쓸 일이 있어 불러와서 글씨를 쓰게 했는데, 약원(藥院)에서 와서 이 판중추부사(李判中樞府事)가 그로 하여금 ‘우국망가(憂國忘家)’ 네 글자를 쓰게 하여 벽(壁) 위에 걸도록 하였다고 전하므로, 내가 듣고서 마음속으로 매우 감탄하면서 일찍이 마음속에 쌓인 것은 밖으로 드러난다고 여겼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연명(聯名)으로 올린 차자(箚子)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고집하여 죄안(罪案)으로 만들었지만 뒤에는 거짓으로 자복한 어지러운 초사(招辭)를 가지고 기화(奇貨)로 삼았으니, 만약 그 사람으로 하여금 참으로 반역을 도모한 일이 있었다면 천년 뒤에도 진실로 역적이란 이름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만일 그가 그렇지 않다면 비록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역적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홀로 역적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자, 정호(鄭澔)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저승에 있는 원통한 영혼들도 틀림없이 감격하여 울먹일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합계(合啓)를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연달아 윤허하지 않으셨고, 빈청(賓廳)에서 2품(品) 이상의 관원이 청대(請對)하였어도 역시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대행왕(大行王)께서 허락을 아끼신 융성한 의도를 마침내 볼 수 있다. 김일경(金一鏡)의 신축년361)   상소가 목호룡(睦虎龍)이 고변(告變)한 글과 구절구절 서로 부합이 되니, 그들이 화답하고 호응한 상황은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목호룡의 고변하는 글이 어느 때에 나왔는가?"
하니,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책봉(冊封) 선래(先來)362)  가 나온 뒤에 고변하는 글이 곧바로 나왔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그 당시에 고변하는 글을 얻어 보고서 터럭과 뼈가 모두 오싹하여져서 밤중에 어쩔줄을 몰라 궁료(宮僚)를 인접(引接)하였었다. 추안(推案)363)  에 비록 흉악한 말은 빼어버렸다고 하더라도 만약 깊이 생각한다면 어떠한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지금 내가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스스로 혐의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 원통함을 펴게 하고 씻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소중하게 여기는 뜻이 아니며, 대행조(大行朝)의 허락을 아끼신 뜻을 본받지 않는 것이다. 원통함을 지니고 있는 자가 지금 만약 누명을 씻는다면 어찌 대행조(大行朝)의 덕의(德意)에 빛이 나며 또한 선조(先朝)에서 4대신을 은혜로 대우한 융성한 덕의 뜻을 우러러 계승하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국안(鞫案)을 상고하며 열람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벌써 그가 역적이 아님을 알 것이니, 무엇 때문에 묻기를 일삼겠는가마는, 일의 체모가 중대하기 때문에 널리 묻는 것이다. 무함을 당한 4대신은 특별히 관작을 회복시키고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이홍술(李弘述)도 일체(一體)로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는 진실로 아무런 생각 없이 경솔하였는데, 조성복을 일죄(一罪)364)  로 논한 뒤라야 그들이 하고 싶은 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마침내 극형(極刑)을 초래하게 되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조성복(趙聖復)의 죽음이 지극히 원통하다고 진달하였으며, 민진원(閔鎭遠)과 홍치중(洪致中)은 말하기를,
"설령 아무런 생각 없이 경솔했다 하더라도 아무런 생각 없이 경솔한 것이 어찌 죽어야 할 죄에 해당하겠습니까?"
하고, 신사철(申思喆)은 말하기를,
"단지 4대신의 〈원통함만〉 펴게 하고 조성복의 〈원통함을〉 펴게 하지 않는다면 4대신의 원통을 펴게 한 것도 역시 원통함을 펴게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며, 김여(金礪)는 말하기를,
"설령 곧바로 대리(代理)하도록 청한 것도 역시 죽을 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 무리의 의도가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조성복(趙聖復)을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그의 원통함을 알고서도 관작(官爵)의 회복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역시 스스로 혐의스럽게 여기는 결과를 면하지 못할 것이며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이른바 아무런 생각 없이 경솔한 것이 죽일 죄가 아니라는 것은 옳다. 일체로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정호(鄭澔)가 유락(唯諾)365)  한 여러 사람도 일체로 석방하도록 청하니,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저 무리들도 역시 유락(唯諾)하는 것을 죄로 성립시킬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형률(刑律)이 관작을 삭탈하여 내쫓는 데 그쳤던 것입니다. 저 무리들이 매우 미워한 것은 이정소(李廷熽)에게 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다른 죄로 없는 사실을 꾸며서 귀양 보내도록 청했다가 곧바로 그것이 이야기거리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깨닫고는 즉시 정지시켰으며, 다시 다른 죄를 꾸며 만들려고 하였다가 끝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최후에 또 유락(唯諾)한 것으로 죄를 성립시켜 그를 귀양 보내었습니다. 이정소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함께 귀양가게 되었으니 그들 마음에 있는 바를 어찌 알기가 어렵겠습니까? 지금에 이르러 전하(殿下)께서도 또한 이 정소를 혐의스럽게 여겨 아직도 은택 내리기를 아끼시면서 매번 매우 어렵게 여기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찌 미안(未安)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도 역시 유락(唯諾)하는 가운데 들어 있었으니, 이 사람들이 석방되지 않는다면 어찌 감히 편안한 마음으로 직임(職任)에 있겠습니까?"
하고, 정호(鄭澔)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본래 혐의스럽게 여김이 없습니다. 무엇을 회피(回避)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형적(形跡)을 가지고 혐의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유락(唯諾)한 여러 신하들도 일체로 석방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조태채(趙泰采)의 아들이 당초에는 연좌(緣坐)되지 않았었는데, 나라를 원망하였다는 죄를 꾸며내어 그의 딸을 귀양 보내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더욱 세상의 변고이며, 그의 비복(婢僕)을 가두고 여러 차례 형신(刑訊)하느라 아직도 감옥에 있습니다. 조태채가 이미 누명을 씻었다면 그의 아들도 석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태채(趙泰采)의 딸에 대한 일은 지난번에 그의 종이 징[錚]을 쳐서 사정을 하소연한 것을 보았는데 매우 잔인(殘忍)하였다. 비복(婢僕)들은 포도청(捕盜廳)으로 이송(移送)시킨 것은 틀림없이 자복을 받아 죽인 뒤에야 그만두려고 해서였다. 그러나 끝까지 조사하지 않고 미리 앞질러서 귀양 보내었으니 법을 위반한 것이 심하다. 조정빈(趙鼎彬)의 3형제(兄弟) 및 그의 누이를 모두 석방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봉상(李鳳祥)이 조씨(趙氏)의 비복(婢僕)도 석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진달하자, 석방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정호(鄭澔)가 윤각(尹慤)과 이홍술(李弘述)도 다름이 없다고 진달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윤각(尹慤)과 유성추(柳星樞)는 그 당시 국옥(鞫獄)에서도 역시 차율(次律)366)  로 감단(勘斷)367)  하였는데, 윤각은 대신(臺臣)의 계달로 마침내 사형(死刑)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의 원통함을 알 수가 있다. 윤각은 관작을 회복시키고 유성추는 석방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이건명(李健命)이 이미 원통함을 풀게 하였으니 같은 시기에 사명(使命)을 받들었던 사람인 윤양래(尹陽來)·유척기(兪拓基)도 석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진달하자, 그대로 따랐다. 이의현(李宜顯)이 귀양을 갔다가 석방을 받은 자는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敍用)하도록 하고, 연좌(緣坐)되었다가 석방된 사람도 직첩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진달하자, 바로 〈원통함을〉 씻어 주도록 명하였다.
신방(申昉)이 김창집(金昌集) 등 4대신은 시장(諡狀)368)  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시호(諡號)를 내려 주도록 청하자, 그대로 허락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듣건대, 〈4대신을 처형하여〉 묻기를 얕게 하였다고들 하는데, 개장(改葬)할 때에는 불쌍히 여겨 돌보아줌이 마땅합니다."
하니, 장례(葬禮)에 필요한 물품을 제급(題給)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정경(正卿) 이상의 관원을 앞으로 나아오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오늘의 처분(處分)은 벌써 하려고 하였었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지연되었던 것은 그 사건이 내 몸에 관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하지 않는다면 대행조(大行朝)의 융성한 덕(德)을 드러낼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늘 이러한 처분을 하였다. 훌륭한 순제(舜帝)가 사흉(四凶)369)  을 처벌하니 천하가 복종하였었다. 오늘날의 원악(元惡)은 김일경(金一鏡)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정승의 차자(箚子)에 비답(批答)하면서 앞장선 자는 김일경이고 호응한 자는 목호룡(睦虎龍)이라고 유시한 것은 대체로 그들이 약속 등을 맺어 화답하고 호응한 형상이 불을 보듯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옥사(獄事)를 다스리던 자가 어찌 모두 여러 사람들의 원통함을 몰랐을까마는, 다만 권세를 탐하고 재화(災禍)를 즐겁게 여기는 마음에서 상호간에 점차로 물들여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한편의 사람을 만약 모두 일망 타진(一網打盡)시키면 넉넉히 장구(長久)한 계책이 될 것이라고 여겨, 어처구니없는 많은 죄목들을 지어내어 온통 반 세상을 악역(惡逆)의 죄과(罪科)로 몰아넣어 큰 옥사를 거짓으로 꾸며 펼치게 되어, 베어 죽이는 일들이 어지러워지면서 숙종(肅宗)께서 의지하던 대신(大臣)과 책임을 맡겨 부리든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함께 죽임을 당하였으며, 그밖에 살해당하거나 장형(杖刑)을 맞아 죽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천지 사이에 지극한 원한이 서리고 맺힌 것이 이와 같은데, 화기(和氣)를 손상시킴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제 와서 지난일을 생각하니 그 참혹하고 가련함이 의당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오늘 누명을 씻어 주는 일이 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이것으로 인하여 또 주륙(誅戮)을 가한다면 이것은 원통함을 푸는 것이 아니라 바로 원수를 갚는 것이다. 지난번 주강(晝講)에서 마침 글의 뜻으로 인하여 바른 도리로 원망을 갚는다는 뜻을 언급하여 논한 것도 역시 우연히 발설한 것은 아니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 여섯 사람에게 대하여 국문(鞫問)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나, 원악(元惡)을 이미 주벌(誅罰)한 뒤에 그 나머지는 내버려두고 국문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위협에 의하여 따른 것은 다스리지 않는다는 도리에 해롭지 않으며, 또한 반측자(反側子)370)  로 하여금 스스로 안심(安心)하게 하려는 의도이기 때문에 요즈음 대간(臺諫)의 계달을 윤허하여 따르지 않은 것이 많았으며, 이사상(李師尙)·윤취상(尹就商) 등의 아룀에서 즉시 윤허한 것은 역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대각(臺閣)에 있는 자가 나의 의도가 있는 바를 알지 못하고 간쟁(諫爭)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데, 허락을 아끼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단지 전대(前代) 사람이 그르친 일의 자취를 거울삼을 만하기 때문에서이다. 경(卿)들은 또한 이 뜻을 본받아 공평(公平)함을 넓히도록 힘쓰라.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있기 때문에 나의 뜻을 상세히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정호(鄭澔)가 말하기를,
"천의(天意)가 있는 곳에 대하여 신은 실로 감탄(感歎)하였습니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간사하고 올바른 것을 분변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한 연후에 죄가 있는 자에게는 죄를 준다면 인심(人心)이 저절로 복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말이 옳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충신(忠臣)을 드러내고 악인(惡人)을 징계하는 도리는 나라가 있은 이래로 치우치게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이의현(李宜顯) 등의 말도 대략 이와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들의 말이 모두 옳으니 내가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지만, 경들도 나의 뜻을 본받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소결(疏決)을 처음으로 기한을 물리는 것은 대신(大臣)과 의금부(義禁府)의 당상관(堂上官)이 국안(鞫案)을 상고하고 열람한 뒤에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니, 자복하지 않고 죽은 자는 당장 우선 누명을 씻게 하고, 사리에 닿지 않은 말을 한 부류는 무고율(誣告律)로 논단(論斷)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하니,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자복하지 않고 죽은 자는 우선 누명을 씻겨 주고, 연좌(緣坐)되어 가산(家産)을 적몰(籍沒)당한 경우는 모두 석방하거나 되돌려 주어야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한 내용을 거듭 아뢰고, 김여(金礪) 등이 지난번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박장윤(朴長潤)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아무리 매우 도리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인하여 극률(極律)로 시행한다면 지나치다. 그러나 지난날의 감률(勘律)371)  은 죄에 비교하여 가벼우니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도록 하라. 그리고 권익관(權益寬)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휘진(李彙晉)이 아뢰기를,
"연석(筵席)에서의 순문(詢問)372)  은 일의 체모가 지극히 중대하니, 여러 신하들이 주대(奏對)373)  함에 있어 비록 상세하거나 간략함이 틀리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 원한을 풀어 주고 치욕을 씻어 주는 것이 타당한가 않은가 하는 것과 같은 일은 다만 당연히 분명하게 말하고 뚜렷하게 의논하기에 겨를이 없이 해야 할 것인데, 금군 별장(禁軍別將) 김흡(金潝)은 대충 4대신의 일은 여러 신하들이 이미 진달하였다고 말을 하면서, 끝내 분변하고 구별하는 말이 없고, 아뢰는 말도 이미 매우 모호(模糊)하게 하며, 정태(情態)도 또한 아주 미워할 만합니다. 청컨대, 파직(罷職)시켜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아뢴 데 의거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교악(李喬岳)이 지난번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서교(尹恕敎)의 일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먼 곳에 귀양 보내라."
하고, 이거원(李巨源) 등의 일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청대(請對)한 옥당(玉堂)의 관원은 먼 곳에 귀양 보내고, 그 나머지는 전례에 의거하여 관작을 삭탈해서 쫓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옥당(玉堂)의 관원은 이거원(李巨源)·이진수(李眞洙)이었다.】 정택하(鄭宅河)가 아뢰기를,
"순문(詢問)하는 것은 일의 체모가 가볍지 않은데 부총관(副摠管) 최진한(崔鎭漢)은 단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처분(處分)하는 것으로 우러러 대답하였으며,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봉상(李鳳祥)은 이야기하던 사이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에 대하여 성자(姓字)를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최진한(崔鎭漢)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이봉상(李鳳祥)의 일은 이야기하는 사이에 것은 논할 필요가 없으며, 이것은 이봉상의 말이 아니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4대신이 이미 원한을 풀어 주고 치욕을 씻어주었으니, 당초에 죽인 사람이 어찌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 4대신에 대하여 합계(合啓)를 맨 먼저 발의한 사람 및 청대(請對)한 여러 사람은 모두 관작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내쫓도록 하라."
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이 관작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내쫓는 것은 너무 가볍다고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이 의당 그것을 논할 것이다."
하였다.
이교악(李喬岳)이 아뢰기를,
"4대신이 가혹하게 간당(奸黨)의 터무니없는 무함을 받아 모두 악역(惡逆)의 극률(極律)을 당하였는데, 성상(聖上)께서 원통한 상황을 통절(痛切)히 살피시고 남김없이 원한을 풀어 주고 치욕을 씻겨 주셨으니, 저 터무니없이 무함하고 해롭게 한 무리들을 관작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내쫓는 정도로 그치는 것은 결단코 불가합니다. 청컨대 합계(合啓)하기를 맨 먼저 발의한 사람 및 전후(前後)하여 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대(請對)는 합계(合啓)와 다르니 합계하기를 맨 먼저 발의한 사람은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하고, 그 밖에 다른 사람은 앞서의 하교(下敎)에 의거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이 말하기를,
"극률(極律)에 처하도록 아뢴 것은 참혹하고 악독함이 당초 합계(合啓)한 것과 비교하여 몇 갑절이나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죄안(罪案)을 만든 뒤라 하더라도 가율(加律)374)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죄안(罪案)을 만들기 전에 있었습니다."
하였으며, 양사(兩司)의 여러 대신(臺臣)들이 또 마음에 품은 것으로 유봉휘(柳鳳輝)와 이삼(李森)의 죄를 강력하게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맨 먼저 발의한 사람을 죄주도록 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저절로 죄를 다스리지 않아도 다스려지게 되어 있다. 일일이 죄를 더하여 동쪽으로 귀양 보내고 서쪽으로 쫓아낸다면 광경이 어떠하겠는가?"
하면서, 끝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정호(鄭澔)가 말하기를,
"장수(將帥)의 직임(職任)은 마땅히 오래 비워둘 수가 없습니다. 이삼(李森)에 대한 계달이 거듭 나왔으니, 마땅히 개차(改差)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명회(李明會)에게 명하여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제사(祭祀)를 승습(承襲)하여 받들도록 하고,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명회(李明會)의 아비 이세정(李世楨)은 도정(都正)을 세습(世襲)하여 대원군(大院君)의 제사를 받들었었는데, 이홍술(李弘述)의 화(禍)로 여러 아들이 모두 먼 곳에 귀양갔으므로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다. 시골에 있는 사람은 고생스럽게 찾아서 제사 받들 사람으로 구차스럽게 채웠으나 지금은 내버려 둘 수가 없으므로, 이명회에게 제사 받드는 일을 승습(承襲)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니 귀양가 있는 여러 친족(親族)을 모두 석방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고, 또 당시 제사를 받들고 있던 사람인 이홍모(李弘模)에게 그전의 자급(資級)에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붙여 주도록 명하였다.

 

3월 3일 신축

우의정(右議政) 정호(鄭澔)를 명하여 불러서 복상(卜相)375)  하게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신임(申銋)·이의현(李宜顯)을 복상하였는데, 민진원을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삼고, 김흥경(金興慶)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기진(李箕鎭)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이봉상(李鳳祥)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장붕익(張鵬翼)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신광하(申光夏)를 총융사(摠戎使)로, 김유경(金有慶)을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김여(金礪)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고, 홍치중(洪致中)을 특별히 발탁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정2품 가운데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의 의망(擬望)을 더하도록 하므로, 대신이 이의현(李宜顯)과 신임(申銋)으로 명령에 응(應)하였는데, 임금이 임용하지 않고 홍치중(洪致中)을 발탁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晋)·김담(金墰)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윤봉조(尹鳳朝)가 평일(平日)에 마음가짐이 결단코 임금을 속일 자가 아니라는 등의 말을 보태어 아뢰고, 또 아뢰기를,
"목호룡(睦虎龍)의 상변(上變)376)  이 유인(誘引)한 데서 나온 것임을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환하게 아셨으니, 이것이 목시룡(睦時龍)을 잡아다 추국하도록 하신 명(命)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그 근본을 거슬러서 찾아보면 역시 목호룡보다 먼저 고변(告變)한 자가 있습니다. 신축년377)   12월 15일에 이희지(李喜之)·심상길(沈尙吉)·홍의인(洪義人)을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발의한 계사(啓辭)와, 19일에 김시태(金時泰)·유취장(柳就章)·양익표(梁益標)를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발의한 계사와 25일에 16인(人)을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발의한 계사이니, 무릇 이렇게 세 차례의 계사에서 죄를 삼게 된 것은 모두가 이 목호룡 변서(變書)의 근본이며, 마침내 무옥(誣獄)에 들어간 것도 세 차례의 계사 중에서 논하였던 사람에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것을 아뢴 대신(臺臣)은 바로 목호룡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가 무고(誣告)한 실정과 절차를 엄밀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 당시 발의하여 아뢴 대신(臺臣)을 승정원(承政院)의 관원으로 하여금 출두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목시룡과 함께 일체(一體)로 엄중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는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마는, 흉당(凶黨)이 기필코 국문(鞫問)하려고 하였으니 그들이 마음에 둔 것을 이미 숨길 수가 없는데 여러 번 귀양에서 돌아오게 하는 명령이 내려진 뒤에도 또다시 잡아다 국문하도록 강력히 청하였으니, 전후(前後)의 형신(刑訊)한 것은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대저 이미 조성복을 죽이려고 하였다면 그들이 죄로 삼는 바는 상소 가운데의 말에 벗어나지 않은데, 어찌 다시 신문할 단서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가혹한 형신(刑訊)으로 꼬투리를 찾아내겠다고 한 것은 대체로 조성복의 말 한 마디를 찾아내어 저 무리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사실로 만들려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조성복으로 하여금 가혹한 형신을 참지 못하고 말을 함부로 마구 한 바가 있었다면 그 뒤의 일을 차마 말하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뼈마디가 섬뜩해짐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전후(前後)에 조성복을 국문하도록 주청(奏請)한 여러 신하들을 모두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내도록 해서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다.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세 차례 고사(告辭)378)  했으나 되돌려 주신 것은 일반적인 격식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처음으로 신이 자핵(自劾)379)   하였습니다. 이는 단지 말이 채용되지 않아서인지 오늘날 말이 채용되지 않는 것도 또한 예전과 같습니다. 원컨대 신의 직임(職任)을 파면하여 동료(同僚)로 하여금 경성(警醒)하게 하소서. 그리고 윤지술(尹志述)과 임창(任敞)은 이 무슨 죄입니까? 윤지술은 글을 읽은 사람입니다. 친(親)한 이를 위해서 숨기는 일을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선왕(先王)의 지문(誌文)은 단지 선왕의 융성한 덕(德)을 기술(記述)할 뿐인데, 그가 신사년380)  의 일을 숨길 수 없다고 한 것은 의리로 보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윤지술의 본 뜻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하였으며, 그 말이 비록 과격(過激)하기는 하였지만 그 뜻은 가만히 사람이 꼭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히고 분수와 의리를 정하는 일에 스스로 따르려 하였다가 마침내는 이것 때문에 맨 먼저 참혹한 화(禍)를 당하였습니다. 국조(國朝)가 3백 년을 내려오면서 어찌 일찍이 태학생(太學生)이 바른 말을 한 것으로서 죄를 입어 정형(正刑)에 이른 자가 있습니까? 우리 성고(聖考)381)  께서 일찍이 우리 나라는 선비의 기개(氣槪)로 명맥(命脈)을 심는다고 여기시고 장보(章甫)382)  의 상소는 반드시 후하게 용서하고 죄주지 않았으며, 진동(陳東)383)   등의 사우(祠宇)를 태학(太學)384)   곁에다 세우게 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감동하도록 하였습니다. 윤지술과 같은 자는 남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바를 말하였으며 심지어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성고(聖考)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하(殿下)께서 만약 성고의 마음으로 윤지술의 말을 구명(究明)하신다면 윤지술은 죄가 없게 됨을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임창(任敞)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기사년385)   정변(政變)에 뜻을 수립함이 있어 흉당(凶黨)에게 원수처럼 보이는 바가 되었었는데, 신사년386)  에 또 한 차례의 소(疏)를 올려 성모(聖母)387)  를 위하여 토죄(討罪) 복수(復讎)하는 형벌을 엄격히 밝히도록 하였으며, 겸해서 동궁(東宮)을 위하여 하례(賀禮)를 정지하는 뜻을 진달하면서 그가 기필코 종묘(宗廟)에 고하고 국중(國中)에 반포(頒布)하여 보이도록 주청한 것은 한창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중지시키고 후세(後世)의 의혹(疑惑)을 근절시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성고(聖考)께서 비록 말이 미치광스럽게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고 하여 약간의 경미한 견책(譴責)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곧 한 해를 넘기지 않고 특별히 석방하여 되돌아 오게 명하고 강개(慷慨)하다는 것으로 장려하였으니, 두 차례 성상의 하교가 해와 별처럼 밝았습니다. 그런데 저 군흉(群凶)의 무리들은 명분과 의리의 죄인으로써 반드시 자기 마음대로 죄를 찾아내려고 하였지만 되지 못하자 당초의 근거 없이 떠도는 말들을 거둬 모아 우리 선왕(先王)을 속여 임창의 죄를 성립시켰던 것입니다. 임창의 상소는 동일(同一)할 뿐이었으니, 앞에 바친 것과 뒤에 바친 것이 만약 한 자(字)라도 보태거나 줄인 것이 있었다면 그날 승지가 앞에 바친 문자(文字)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으로서 또한 어찌 감히 어구(語句) 배치한 것을 계품(啓稟)하기를 이와 같이 명백히 할 수 있겠습니까? 상소문의 원본 및 승정원에서 아뢴 내용이 틀림없이 일기(日記)에 기재되었을 터이니 한번 예람(睿覽)388)  을 거치시면 그의 원통한 상황을 환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흉당(凶黨)이 반드시 죽이고서야 그만두겠다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두 사람의 선비를 살해한 후에야 신사년의 옥사(獄事)를 뒤집을 수 있으며, 성고(聖考)의 처분(處分)을 의혹(疑惑)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었으니, 그 관계는 다만 두 사람의 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임창이 기필코 종묘에 고하고 국중(國中)에 반포하여 보이려고 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일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만약 그의 말을 채용하였더라면 오늘날 세상의 도의가 틀림없이 이와 같이 침침(沈沈)하여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비로서 직언(直言)하다가 죄를 얻은 자가 옛날부터 어떻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결안(結案)389)  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정형(正刑)한 경우는 윤지술이나 임창처럼 가장 혹독하게 당한 것은 없었습니다. 원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성고(聖考)께서 선비를 대우하신 융성한 뜻을 준수하시고 두 선비가 화(禍)를 당한 것이 지극히 원통함을 살피시어 일체(一體)로 모여 의논하게 하여 빨리 원한을 풀어 주고 치욕을 씻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옛날부터 대신(臺臣)이 아뢴 것을 한 달 이상 지나도록 간쟁하거나 고집하였어도 이것으로 인하여 거취(去就)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전에 없었던 일이며, 이는 내가 이른바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다. 나의 뜻은 그렇지 않은데 대신(臺臣)을 위로하려고 억지로 따른다면 이것은 진실한 것인가 진실되지 않은 것인가? 윤지술(尹志述)에 대하여 비록 그가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알기는 하지만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 그리고 임창(任敞)의 일은 승정원(承政院)의 관원으로 하여금 그 전말(顚末)을 상고하게 하여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무신(武臣) 신명인(申命仁)이 안흥(安興)은 수로(水路)의 요충(要衝)이 되니 수영(水營)을 옮겨서 설치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아뢰니, 묘당(廟堂)에 명(命)하여 확정 처리하게 하였다.

 

3월 4일 임인

양사(兩司)에서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 헌납(獻納) 정택하(鄭宅河)이다.】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이르기를,
"그 내용은 유봉휘(柳鳳輝)의 계사(啓辭)에 ‘인신의 예가 없다[無人臣禮]’는 4자를 첨가한 것은 여러 신하들을 날조하여 무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위로 전하를 무함하는 바이며 나라의 근본을 동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뒤로는 신충(宸衷)390)  으로 결단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전하를 무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위로 자성(慈聖)391)  을 무함하는 것입니다.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남의 신하가 되어 바로 저군(儲君)392)  을 탄핵한 자가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또한 저군이 신하에게 탄핵을 당하고서 그 몸과 지위를 잘 보전한 자가 있었다는 등의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마지막에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에 의거하여 엄정히 국문하여 법을 바로잡도록 청하고,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에게도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도록 추가하여 청하자, 비답(批答)하기를,
"지금 가율(加律)하자는 것은 실로 뜻밖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휘진(李彙晉) 등이 지난번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6적(六賊)393)  이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죄가 같은데도 단지 역적 김일경만 주살(誅殺)하고 6적은 아직 용서하고 있습니다. 대저 6적의 죄는 여러 신하들을 터무니없이 죄를 꾸며서 해쳤을 뿐만이 아니라 바로 전하(殿下)를 무함하고 동조(東朝)394)  를 무함한 것입니다. 만약 건저(建儲)·대리(代理) 두 가지 일이 정말로 폐립(廢立)과 찬역(簒逆)에 가깝다면 4대신의 죽음은 과연 원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4대신의 죽음이 과연 원통하며 이 상소를 하는 자도 역적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구분하여 논하려고 하는데, 무릇 소장(疏章)으로써 죄를 얻었을 경우 소두(疏頭)인 사람만 죄주는 것은 대체로 경미한 과실을 저질렀을 때 시행할 수가 있지만 반역을 범한 사람에게는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 상소가 장차 나오려고 할 때에 비록 흉당(凶黨)으로 심중(心中)이 동일한 자라 하더라도 역시 물러나 움추리며 참석하지 않은 자가 있었고, 또한 이미 참석은 하였지만 이름을 오려낸 자도 있었는데 유독 6적만이 팔을 걷어 올리고 담당(擔當)하였던 것은 대체로 역적 박상검(朴尙儉)과 화답하고 호응하기로 약속하여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를 또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따라서 참석한 것으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 6적을 빨리 잡아다 추국(推鞫)하고 엄중히 신문(訊問)하여 왕법(王法)을 통쾌하게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나, 비답(批答)에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정택하(鄭宅河)가 지난번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당초 합계(合啓)하기를 맨 먼저 발의한 사람은 먼 곳에 귀양 보내고 전후(前後)에 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은 관직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내쫓으라는 명령을 신은 죄는 중한데 형률(刑律)은 가볍다고 가만히 여깁니다. 대저 4대신이 가혹하게 간당(奸黨)들의 터무니없이 꾸민 무함을 받아 모두 악역(惡逆)의 극률(極律)을 당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성상(聖上)께서 원통한 상황을 환하게 살피시고 남김없이 누명을 씻도록 하셨으니, 저 죄가 없는 사람을 모함하여 죽인 무리들만은 결단코 먼 곳에 귀양 보내거나 관직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내쫓는 것으로 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합계(合啓)하기를 맨 먼저 발의한 사람 및 전후(前後)에 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은 극변(極邊)에다 멀리 귀양 보내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4대신이 연명(聯名)한 차자(箚子)는 실제로 선왕(先王)의 우애(友愛)하는 인덕(仁德)을 본받아 선왕을 위해서 노고(勞苦)를 나누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저 무리들의 이른바 대역(大逆)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흉악한 말과 도리에 어긋나는 이야기로 성궁(聖躬)395)  을 위태롭게 핍박한 것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으니, 그 당시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396)  하여 아뢴 내용에 이르기를, ‘연명(聯名)한 차자(箚子)는 바로 삼수(三手)397)   중의 하나이다.’고 하였으니, 아! 마음이 아픕니다. 저 무리들이 이른바 삼수(三手)라는 것이 연명한 차자에 무슨 간섭(干涉)이 있기에 기필코 합쳐서 하나로 만들려는 것은 분명히 허다(許多)한 기관(機關)398)  이 있는데도 그들이 지목하여 핍박한 것은 차마 말하지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반역(反逆)한 실정이 이미 드러나 징계하고 토죄(討罪)하기를 바야흐로 엄중히 하는 때를 당하여 명백히 조사하고 법을 바로잡아 성명(聖明)의 무함을 씻고 신명(神明)과 사람들의 분노(憤怒)를 풀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 당시 합계(合啓)하기를 맨 먼저 발의한 삼사(三司)의 신하와 목시룡(睦時龍)을 똑같이 국문(鞫問)하고 연계(連啓)한 여러 신하들을 모두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교악(李喬岳)이 상소(上疏)하면서 그의 스승 송시열(宋時烈)이 효종(孝宗)에게 고(告)한 ‘마음을 바르게 하여 학문에 힘쓰고 원량(元良)399)  을 보필하며 인도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대신(臺臣)이 고집하는 바가 없지 않다는 하교(下敎)를 직접 받았는데, 이미 그들이 고집하고 있음을 아신다면 무엇 때문에 그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화답하고 호응하여 죄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관계되는 자들로 하여금 아직도 천지 사이에서 편하게 누워서 쉬도록 하십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윤지술(尹志述)의 죽음은 참으로 비참하고 원통합니다. 그래서 선비들의 기개(氣槪)가 꺾이고 사람들의 마음은 불쌍하게 여기고 있으니, 마땅히 다시 의심을 갖지 마시고 빨리 어여삐 여기는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세량(韓世良)의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는데, 밤중에 왕위가 옮겨졌다.’는 말은 그 흉악하고 참혹함이 극도에 이르러 죄상(罪狀)이 역적 김일경과 다름이 없으니, 마땅히 추탈(追奪)하는 법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적 김일경이 교문(敎文)을 지을 적에 접혈(蹀血)의 ‘접(蹀)’ 자를 처음에는 첩(喋)으로 쓴 것을 기성랑(騎省郞)400) 이태원(李太元)이 그것을 보고서 고쳤었는데, 접(蹀)은 첩(喋)의 잘못인 것을 이미 분변하여 살폈었다면 문자(文字)의 내력(來歷)을 어찌 모른다고 말하겠습니까? 그가 흉악한 말에 참여한 형상은 너무나도 절통(切痛)하니, 당연히 투비(投畀)401)  하여 그 무리들을 징계하게 하소서."
하니, 비지(批旨)로 옳게 여겨 받아들이고, 또 말하기를,
"윤지술(尹志述)의 일은 이미 사헌부 소속의 신하에게 비답으로 유시(諭示)하였으며, 한세량(韓世良)은 말이 비록 놀랍고 도리에 어긋나지마는 그 몸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 다시 의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태원(李太元)은 갑자기 중전(重典)402)  을 시행할 수 없다. 그러나 ‘임용한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라는 말은 너무나 방자한 데 관계되니, 사판(仕版)403)  에서 삭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양(洪陽)의 유학(幼學) 김두린(金斗麟) 등이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고을에 노은 서원(魯恩書院)이 있어 육신(六臣)404)  을 제향(祭享)하며, 성삼문(成三問)의 옛날 집도 그대로 있고, 성삼문의 아비 성승(成勝) 및 성삼문 처(妻)의 무덤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삼문 집안의 대대로 전해오던 장토(庄土)405)   12결(結)이 연산(連山)에 있었는데, 충훈부(忠勳府)에서 몰수하였던 것을 선조(先朝)에서 내어주도록 명하고 세금을 면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昨年)부터 이미 면제하도록 한 세금을 내도록 독촉하니, 바라건대, 징수하지 말게 명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3월 5일 계묘

사헌부(司憲府)에서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이다.】  지난번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권익관(權益寬)·이진수(李眞洙)·이거원(李巨源)은 죄명(罪名)이 매우 중대하니, 바로 옛날 사람이 이른바 먼 곳의 악지(惡地)는 이러한 무리들을 위하여 설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해부(該府)에서 그들의 원(願)을 곡진히 따라 모두 선지(善地)에다 정배(定配)하였으니, 이미 매우 놀랄 만한데 후원(喉院)에서도 사리에 의거하여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승지(承旨) 및 의금부 당상관(義禁府堂上官)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고, 권익관(權益寬) 등은 유배지를 개정(改定)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이에 권익관(權益寬)은 경원(慶源)으로, 이진수(李眞洙)는 선천(宣川)으로, 이거원(李巨源)은 영해(寧海)로 유배시켰다.

 

김재로(金在魯)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3월 6일 갑진

진시(辰時)406)  에서 미시(未時)407)  까지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재차 상소(上疏)하여 사직하자 비답을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인용한 바 한(漢)나라의 고사(故事)는 내가 경(卿)에게는 이미 한(漢)나라 문제(文帝)와의 처지가 다르다. 만약 척리(戚里)로 말한다면 경의 종형(從兄)이 이미 정승에 임명되었으니, 지금 내가 경을 정승에 임명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공의(公議)를 따르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국사(國事)를 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척리(戚里)인 것으로 피혐(避嫌)한다면 이는 계교(計較)하는 것이니, 그것이 사사로운 뜻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서종급(徐宗伋)을 섬으로 귀양 보낸 것은 소(疏)를 올려 조성복(趙聖復)을 구원하였기 때문이며, 홍용조(洪龍祚)를 변지에 귀양 보낸 것은 외영(外影)408)  을 가지고 꾸민 것이었습니다. 조성복이 이미 원통함을 풀어주었으면 서종급이 죄가 없다는 것은 알 수가 있으며, 외영(外影)의 이름이 오로지 터무니없는 데서 나왔다면 홍용조에 대해서 다시 고안(考案)을 가져다 결정할 것이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홍석보(洪錫輔)는 단지 일찍이 선인문(宣仁門)409)  에 몰래 들어간 사람을 배척하고 명백히 조사할 것을 극력 주청하였기 때문에 가장 흉당(凶黨)에게 꺼려하고 미워하는 대상이 되었다가 맨 먼저 찬축(竄逐)410)  이 가해졌고 잇따라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 죄안(罪案)을 만들고 기필코 마음대로 처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이나 먼 바닷가에서 귀양살이 하며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게 된 것을 성명(聖明)께서 환하게 아시고 이미 양이(量移)411)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듣건대 그의 노모(老母)의 나이 벌써 80세라고 하니 이는 그 정리(情理)가 더욱 특이함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 세 사람을 마땅히 먼저 소결(疏結)해서 석방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진사(進士) 강주우(姜柱宇) 등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윤지술(尹志述)이 죽고나서부터 선비라고 불리우는 자는 분주(奔走)하면서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심지어 갓을 부수거나 찢어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야위어져 죽으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아! 윤지술이 죽은 것은 과연 무슨 죄입니까? 대체로 어버이를 위하여 휘(諱)하는 뜻으로 논한다면 성고(聖考)의 융성한 덕(德)을 기술(記述)하는 문자(文字)에다 인용할 수도 없으며, 고의로 신사년412)  의 일을 널리 세상에 퍼뜨려서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마음을 상(傷)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이 비록 과격(過激)하기는 하더라도 그 마음은 천지(天地)에 질정(質正)할 수 있습니다. 저 군흉(群凶)들은 본래 명분과 의리의 죄인이므로 무릇 명분과 의리를 도와서 세우려고 하는 사람을 보기를 개인(個人)의 원수같이 여겨 죽이지 않으면 통쾌하게 여기지 않았었습니다. 조최수(趙最壽)·이진검(李眞儉)은 맨 먼저 흉악한 말을 올렸었고, 김행진(金行進)·홍흡(洪潝)은 그것을 계승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하늘에 치닿는 큰 화(禍)를 만들게 되어 윤지술이 마침내 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 뭇사람의 이러니 저러니 하는 말은 단단한 쇠도 녹일 수가 있으며, 근거 없는 일도 말하는 사람이 많으면 자연히 못 믿게 되는 것이니, 어찌 12월 12일의 일이 있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대저 태학생(太學生)이 국가의 대사(大事)를 논하다가 말을 한 것 때문에 죄를 얻어 정형(定刑)에 이른 자는 3백 년을 내려 오면서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이 뒤로부터 사람이 꼭 지켜야 할 인륜 도덕이 무너지고 없어져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무릇 우리 성모(聖母)의 신자(臣子)가 된 모든 사람들이 윤지술의 뒤를 따르려고 바라지만 따를 수 없습니다. 대체로 윤지술이란 사람은 성고(聖考)와 성모(聖母)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던 자입니다. 그러니 윤지술을 없는 죄를 씌워 죽인 자는 성모를 배반하고 성고에게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저 윤지술은 7척(尺)이 넘는 몸을 버려 천고(千古)토록 없어지지 않을 윤리(倫理)와 기강(紀綱)을 세웠으니, 오늘날의 원통함을 씻거나 씻지 않는 것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조가(朝家)에서 선비의 기개(氣槪)를 배양(培養)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당연히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원통함을 품은 귀신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윤지술의 원통함을 씻어주지 않는다면 태학(太學)에는 마침내 선비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원통함을 씻고 드러나게 하는 전례를 시행하도록 하고 인하여 전후(前後)에 윤지술을 없는 죄를 씌워 죽이게 한 자들을 주륙(誅戮)하여 윤지술에게 사죄(謝罪)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 등이 거듭 현관(賢關)413)  에 들어가 한 구역에 있는 새로운 사우(祠宇)를 쳐다보며 여러 부로(父老)들에게 물으니, 모두가 말하기를, ‘이는 윤 장의(尹掌議)414)  가 판비(辦備)한 4현(四賢)의 사우이다.’고 하였습니다. 윤지술은 약관(弱冠) 때부터 많은 선비를 거느리고 대소(大疏)를 진달하여 성고(聖考)의 채납(採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자년415) 대상(大喪)416)  에 또 복제(服制)에 관한 일을 논하였으며, 또 〈송(宋)나라 태학생(太學生)〉 진동(陳東) 등의 사우(祠宇) 건립에 대한 일을 논하여 성고의 성명(成命)을 성취하도록 하였으니, 윤지술과 같은 사람은 성고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사우가 겨우 창건(創建)이 되었는데 윤지술은 자신을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사현(四賢)의 뒤를 계승하였으니, 하늘이 일부러 윤지술을 태어나게 해서 그 사현에다 다섯을 만들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윤지술이 죽을 적에 그이 나이 26세였습니다. 한낱 보잘것없는 서생(書生)으로 〈의리를 위하여〉 만 번의 죽음은 있어도 〈불의를 위하여〉 한 번의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없다는 말을 잘 분변하여 천지(天地)에 뻗치고 고금(古今)에 통할 의리를 밝혔으니, 그의 수립한 바가 사현(四賢)에 비교하여 어찌 갑작스럽게 한 등급을 낮추겠습니까? 이 때문에 사현의 사우(祠宇)를 쳐다보는 많은 선비들이 이는 윤지술이 스스로 그의 사우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앙과 지방의 많은 선비들이 장차 윤지술을 사현의 사우에다 배식(配食)417)  하려고 합니다. 바라건대, 빨리 분명한 전지(傳旨)를 내려 유사(有司)로 하여금 종사(從事)할 수 있게 하시고, 특별히 한 번의 제사(祭祀)를 내려 원통한 영혼(靈魂)을 위로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절의(節義)를 수립하게 하고 충성을 나타나도록 하는 것은 옛날부터 아름다운 일인데, 지금까지 한 번의 허락을 아끼는 것은 의도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친히 정사(政事)를 보살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 참의(參議) 박사익(朴師益), 정랑(正郞) 홍현보(洪鉉輔), 병조 판서(兵曹判書) 홍치중(洪致中)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중서(董仲舒)418)  가 말하기를, ‘올바른 일을 보고 올바른 말을 듣고 올바른 도리를 행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춘방(春坊)419)  ·계방(桂坊)420)  의 관원은 가려뽑지 않을 수 없다."
하니,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세마(洗馬)421)  를 유학(幼學) 가운데서 문벌(門閥)과 재망(才望)422)  이 있는 자로 차출(差出)한 경우는 전에도 간혹 이런 사례가 있었습니다."
하고, 이의현(李宜顯)은 말하기를,
"신노(申魯)는 이름난 집안의 자제(子弟)로서 가장 명성이 있기 때문에 한림(翰林)423)  을 뽑는 전례에 의거하여 분관(分館)424)  하는 규례를 기다리지 않고 통의(通擬)425)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3대신(三大臣)에 연좌(緣坐)된 자들은 일체(一體)로 석방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이 모두 서용(敍用)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또 귀양갔다가 석방된 사람을 함께 서용하도록 청하자,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조도빈(趙道彬)·조관빈(趙觀彬)·조정빈(趙鼎彬)·신무일(愼無逸)·이정소(李廷熽)·윤양래(尹陽來)·유척기(兪拓基)·유성추(兪星樞)·이명회(李明會)·이명익(李明翼)·이홍매(李弘邁)·이홍선(李弘選)·이세유(李世裕)·이세복(李世福)·이관명(李觀命)·오중주(吳重周)를 의망(擬望)하니, 모두 서용하였다. 이재(李縡)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교악(李喬岳)·윤양래(尹陽來)·정형익(鄭亨益)을 승지(承旨)로, 김간(金幹)을 찬선(贊善)으로, 조도빈(趙道彬)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성조(李聖肇)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민제장(閔濟章)을 통제사(統制使)로, 조수(趙脩)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이재항(李載恒)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최도장(崔道章)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심수현(沈壽賢)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삼았다.

 

장령(掌令) 김담(金墰)이 지난번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7일 을사

전교하기를,
"아! 4대신(大臣)이 국가와 일체가 된 정성으로 두 조정을 섬기다가 마지막에는 멋대로 미워하는 자들의 해침을 당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서도 마음이 몹시 아프다. 오늘날 처분(處分)이 이미 정하여져 4대신이 당했던 참혹한 무함(誣陷)도 이미 모두 씻겨졌으니 어찌 선조(先朝)의 유의(遺意)를 준수하는 것뿐이겠는가? 또한 대행조(大行朝)의 너그럽고 인애(仁愛)하는 성덕(盛德)의 마음도 틀림없이 저승에서 기뻐할 것이다. 이는 다만 오늘에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고 또한 장차 다른 날 저승에 가서 양조(兩朝)에 아뢸 말이 있게 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도리어 감회로 인하여 마음 상함이 간절하다. 이미 관작(官爵)을 회복하였으니 절혜(節惠)426)  하는 은전(恩典)을 지체할 수 없다. 태상(太常)427)  으로 하여금 연중(筵中)에서의 하교에 의거하여 곧바로 빨리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전 찬선(贊善) 이희조(李喜朝)는 양조(兩朝)에서 예우(禮遇)한 유현(儒賢)으로 귀양간 곳에서 일생을 마쳤는데, 이제와서 생각하니 슬픔을 깨닫지 못하겠다. 증관(贈官)·추시(追諡)하는 은전을 역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직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은 총명(聰明)과 예지(睿智)가 백왕(百王)에 뛰어나며 큰 계책과 아름다운 정치는 진실로 성자(聖子) 신손(神孫)의 법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임인년428)   이후로 군흉(群凶)이 국권(國權)을 잡고 우리 선왕(先王)의 성총(聖聰)을 속여서 가리며, 우리 성고(聖考)의 전장(典章)429)  을 무너뜨려 대소(大小)의 법령(法令)이 고쳐진 바가 많습니다. 오늘날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꺼번에 예전대로 회복하여 성효(聖孝)430)  를 빛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빨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구별하여 즉시 시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사년431)  의 일과 같은 경우는 바로 선조(先朝)의 큰 처분(處分)에 관계되는 것이니 신자(臣子) 된 자가 어찌 감히 의논할 바이겠습니까마는, 몇 해 전에 시골의 유생(儒生) 오두석(吳斗錫)이 한 장의 소(疏)를 올려 무옥(誣獄)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며, 곧 말하기를,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강충(江充)과 소문(蘇文) 등이 여 태자(戾太子)432)  를 폐(廢)하려고 도모하여 몰래 오랑캐의 무당을 시켜 목인(木人)을 만들게 하였으니, 신사년의 옥사(獄事)가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그가 옛날 일을 끌어다 지금의 일을 증거대면서 가리키는 뜻이 음험하고 간특하여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조(先朝)를 무함하고 핍박한 인륜(人倫)도 없고 의리도 없는 사람은 마땅히 그와 더불어 서울에 같이 살 수가 없으니, 빨리 섬으로 귀양 보내는 형률(刑律)을 시행해야 하며 결단코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때 흉당(凶黨)이 4대신을 터무니없이 모함함이 이르지 않은 바가 없었는데, 고응엽(高應曅)이란 자가 맨 먼저 흉소(凶疏)를 내면서 이르기를, ‘정유년433)  에 독대(獨對)한 뒤로부터 이미 지난번의 일이 있을 줄 알았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송(宋)나라〉 장준(張浚)이 묘부(苗傅)와 유정언(劉正彦)의 난(亂)을 숙청(肅淸)하여 그 임금을 강단(剛斷)434)  으로 힘쓰게 하였으니, 신은 전하(殿下)께서 오늘날의 일에 돌보셔야 한다고 여깁니다.’고 하였으니, 말을 발설함이 흉악하고 참혹하며 끌어댄 비유도 매우 도리에 어긋나니, 또한 마땅히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잠(李潛)의 죄악(罪惡)은 숙종(肅宗)께서 친히 국문(鞫問)하던 날에 모두 드러났는데도 심단(沈檀)과 조태구(趙泰耉) 등은 감히 절의(節義)를 세웠다는 등의 말로 방자하게 건의 주청하여 포창하여 증직(贈職)을 행하도록 하는 데 이르렀으니, 아! 가슴이 아픕니다. 마땅히 그에게 추증한 관직을 삭탈하여 공의(公議)를 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적 목호룡(睦虎龍)은 이미 정해진 형벌에 복종하여 죽었으니 그의 이름을 훈적(勳籍)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여 임인년의 원통한 무함을 밝히게 하소서. 그 이르는 단서 철권(丹書鐵券)435)  도 빨리 유사(有司)로 하여금 즉시 허물어 버리도록 하소서. 그리고 또 그의 공훈을 삭제하고 그의 과거(科擧)는 파방(罷榜)하며 회맹(會盟) 때 시행한 상전(賞典)은 모두 도로 거두어다 태묘(太廟)에 경건히 고하고 팔역(八域)에다 반포하여 보이소서. 그리고 한세량(韓世良)의 신축년436)  의 상소는 유봉휘(柳鳳輝)의 뒤를 이어 제기한 것으로 천위(天位)를 몰래 옮겼다는 말은 바로 하나의 급서(急書)이니, 실제로 김일경·목호룡 두 역적과 동일한 세력의 범위인데 갑자기 유하(牖下)437)  에서 죽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분개하고 원통하게 여기니, 추탈(追奪)하는 의논은 너무 가볍고 헐한 데 관계됩니다. 노적(孥籍)하는 형벌을 빨리 시행하여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하소서."
하고, 끝부분에 유숭(兪崇)과 이정주(李挺周)를 용서하여 주도록 청하자, 비답(批答)하기를,
"그대의 상소에서 논한 것은 대의(大義)는 훌륭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할 수 없는 것은 시골 유생의 일은 말이 비록 미치광스럽고 도리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이 일을 다시 제기(提起)할 수 없으며, 이잠(李潛)에 대하여 추탈(追奪)하도록 청한 경우는 작년에 교문(敎文)의 일로 인하여 듣고 마음에 늘 놀랍게 여겼었다. 빨리 그의 관직을 회수하고 훈적(勳籍)에 삭제하며 자급(資級)을 거두는 일을 소결(疏決)할 때에 헤아려서 처리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그리고 유숭(兪崇) 등은 석방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관명(李觀命)을 장원서 제조(掌苑署提調)로, 김재로(金在魯)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유명홍(兪命弘)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유척기(兪拓基)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조문명(趙文命)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조현명(趙顯命)을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송필항(宋必恒)을 집의(執義)로, 조덕린(趙德隣)을 수찬(修撰)으로, 윤양래(尹陽來)를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홍우전(洪禹傳)을 판결사(判決事)로, 나학천(羅學川)을 사성(司成)으로, 김진상(金鎭商)을 겸 교서관 교리(兼校書館校理)로, 김조택(金祖澤)을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이구(李絿)를 선공감 주부(繕工監主簿)로, 이익지(李翊之)를 명릉 참봉(明陵參奉)으로, 김복택(金福澤)을 영휘전 참봉(永徽殿參奉)으로, 이홍선(李弘選)을 서부 참봉(西部參奉)으로, 서명균(徐命均)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삼았다.

 

진사(進士) 강주우(姜柱宇) 등이 상소(上疏)하여 지난번의 주청을 거듭 아뢰면서 말하기를,
"윤지술(尹志述)이 조용하고 편안하게 안색(顔色)도 변하지 않고 명릉(明陵)을 바라보며 절하고 하직한 뒤 의복과 자리를 정돈하고서 형장(刑場)으로 나아갔으니, 당일의 일은 선왕(先王)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니고 실제로 군흉(群凶)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초 윤지술이 유배되었을 때에 여러 유생(儒生)들의 권당(捲堂)438)  한 것으로 인하여 곧장 도로 거두도록 하였으니, 여기에서 선대왕(先大王)의 본의(本意)를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윤지술을 중벽(重辟)439)  으로 처치하지 않으려고 하였었는데 다만 군흉(群凶)들 때문에 그르치는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殿下)께서 군흉들을 죄주시고 윤지술의 원통함을 씻게 하여 선대왕의 본의가 이와 같지 않았음을 밝히셨으니, 이제야 비로소 〈선왕의 뜻을〉 계승하는 도리를 잘 하였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런데 또 하필이면 구습(舊習)에 따라 가리고 숨긴 후에야 바야흐로 〈선대왕의 뜻을〉 준수(遵守)하는 의리라고 말하겠습니까? 아! 군흉들이 선왕을 속이고 가려서 선왕에게 누(累)를 끼친 것이 어찌 이 한 가지 일뿐이겠습니까? 성고(聖考)의 정안(定案)을 변경시켜 어지럽히고, 성고의 유신(遺臣)을 주륙(誅戮)하였으며, 전하를 무함하는 흉적(凶賊)들을 높이 기용하였고 전하를 무함하는 문자(文字)를 반포하여 보였으니, 무릇 이러한 등의 일은 모두 군흉이 한 짓입니다. 이 때문에 전하께서는 군흉들의 죄를 엄중하게 토주(討誅)하여 선왕의 융성한 덕(德)을 빛내지 않을 수 없으며, 이렇게 한 후에야 전하의 효제(孝悌)하는 도리가 부족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윤지술의 일은 유독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 의리는 매우 분명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전하께서 신 등의 주청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가만히 생각하건대 아마도 성학(聖學)440)  이 아직도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그대들이 수선지지(首善之地)441)  에 있으면서 절의(節義)를 포창할 것을 강력히 청하니 내가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그런데 내가 허락을 아끼는 것은 또한 집념(執念)한 바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관대하고 공평한 것을 힘쓰라는 전교는 바로 신이 평소부터 스스로 힘을 쓴 바이기는 합니다만 다만 전하께서 관대하고 공평하다는 두 글자에 대하여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관(寬)하며 유(裕)하며 온(溫)하며 유(柔)함이 충분히 용납할 수 있으며, 발(發)이며 강(强)이며 강(剛)이며 의(毅)가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하였는데, 관(寬)은 인(仁)에 속하고 강(剛)은 의(義)에 속하니 두 가지가 서로 자용(資用)하여 덕(德)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강(剛)과 의(毅)가 아니면 이른바 관(寬)과 유(裕)라는 것은 부인(婦人)의 인(仁)이며, 관(寬)과 유(裕)가 아니면 이른바 강(剛)과 의(毅)라는 것은 의리의 의(義)가 아닙니다. 때문에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하게 한다.’고 하였으며,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강(剛)하고 의(毅)한 것이 인(仁)에 가깝다.’고 하였고, 주자(朱子)가 어떤 사람이 정치를 물은 데 답하기를, ‘엄격한 것으로 근본을 삼고 너그러움으로 구제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평한 것에 이르러서는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물건을 저울질하여 베풀기를 공평하게 한다.’고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을 묻지 아니하고 이것을 공평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아주 공평하지 않은 까닭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오늘날의 시급한 업무는 반드시 먼저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분변하기를 엄격히 해야 하며, 감죄(勘罪)하는 데 이르러서는 마땅히 《역경(易經)》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것이 추류(醜類)가 아니면 잔포(殘暴)한 허물이 없다.’고 한 교훈을 체득한 연후라야 바야흐로 관대하고 공평의 도리에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지난번에 여러 사람들이 건저(建儲)를 폐립(廢立)이라고 하고 대리(代理)를 찬역(簒逆)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왕법(王法)에 도망하기 어렵습니다만, 역시 미혹(迷惑)되었거나 협박에 의해 따른 부류들도 많이 있으니 어찌 모두 중벽(重辟)에 둘 수 있겠습니까? 단지 의당 각 사람의 죄를 먼저 밝힌 연후에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참작하고 헤아려 차등(差等)을 두고 논단(論斷)하여 천토(天討)442)  를 행하되 언제나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마음과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그 가운데서 행해지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만히 엿보건대 전하께서는 이 무리들에게 언제나 덮어두고 돌보며 소중히 여기는 생각을 두시고, 또 덕(德)으로써 원수를 갚고 혐의(嫌疑)를 피하여 멀리하는 뜻이 그 사이에 서로 엇갈리게 섞여 비록 지극히 중대한 죄일지라도 아주 가벼운 형률도 아껴 주시니, 종사(宗社)의 대죄(大罪)와 국가의 대체(大體)를 미처 돌보지 않음이 있어서입니다. 이것으로 너그럽고 공평하다고 하신다면, 가만히 생각하건대, 아마도 위에서 진달한 성현(聖賢)의 교훈에 어긋남이 있을 듯합니다. 신의 말을 옳다고 여기시면 즉시 채납(採納)을 내려 주시고, 옳지 않다고 여기시면 이는 신의 그릇되고 망령된 것으로 전하(殿下)의 보상(輔相)에 대비(對備)할 수가 없으니, 감히 사리에 어둡고 막힌 견해를 진달하여 취하거나 버리는 명(命)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나의 말로 인하여 권면하고 경계함이 매우 절실하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른바 너그럽다는 것은 어찌 부드럽고 연약하게만 하라는 것이겠는가? 요즈음에 와서 당고(黨錮)443)  가 날로 심하여 간과(干戈)444)  가 서로 계속되니, 이는 강의(剛毅)하다는 강(剛)이 아니고 바로 시세(時世)의 강(剛)인 것이다. 바로 부족함을 보충해야 할 시기를 당하여 장차 너그러움을 힘써야 되겠는가? 맹렬(猛烈)한 것을 힘써야 되겠는가? 순제(舜帝)가 4흉(四凶)에 대하여 한 사람은 죽이고 세 사람은 귀양 보냈었는데 4흉을 모두 베어 죽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이미 원악(元惡)을 베어 죽이고 수종(隨從)한 자들을 귀양 보내었으며, 원통함을 품고 있는 자는 이미 씻게 하였으니, 처분(處分)이 아주 정하여진 것이다. 지난날 마음에 만족하게 당(黨)을 비호하며 조정의 신하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한 자들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는 것은 진실로 불가함이 없겠지만 만약 국문(鞫問)하도록 청한 것을 윤허하여 동쪽에서 끌어들이고 서쪽에서 원호한다면 어떻게 지나치게 됨을 면하겠는가? 이미 윤허한 뒤에 혹시라도 갑자기 되돌리게 된다면 국법(國法)이 크게 틀려질 터이니, 애당초 신중(愼重)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귀양 보내는 것도 역시 아끼는 것은 의도하는 바가 있어서이니, 경(卿)은 모름지기 생각하도록 하라. 남쪽 북쪽으로 귀양 보낸다면 좋지 않은 몰골이 어떠하겠는가? 저들에 대해서 비록 말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부모(父母)와 처자를 어찌 탓하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관(寬)하며 유(柔)함으로 가르치고〉 무도(無道)한 이를 보복하지 아니함은 〈남방(南方)의 강(强)이니〉 군자(君子)가 거(居)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비록 자로(子路)445)  를 억제시키는 말이라 하더라도 이치에 가까운 것이다. 내가 비록 덕(德)은 적을지라도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밤중에 일어나 방황(彷徨)한 일은 본받고 싶지 않다. 상하(上下)가 스스로 수양하여 다만 천리(天理)446)  의 강(剛)을 지키고 잃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의 다행함이 아니겠는가? 경(卿)이 말한 강자(剛字)의 의미를 체득하여 스스로 실행하는 명(銘)을 삼고 인하여 말을 되돌려 모든 벼슬아치들을 힘쓰도록 하니 모름지기 이 뜻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3월 8일 병오

진사(進士) 심희운(沈熙運) 등이 세 번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흉당(凶黨)에게 무함을 받은 사람으로는 전하(殿下)보다 더 심한 분이 없는데, 전하의 무함도 오히려 씻을 수 없다면 한 사람의 유생(儒生)이야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선비가 없으면 국가가 장차 어떻게 국가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윤지술(尹志述)의 죽음이 설혹 선왕(先王)의 본의(本意)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선유(先儒)의 ‘변통(變通)할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은 바로 계술(繼述)447)  하는 것이 된다.’는 말로 관찰한다면 후왕(後王)의 계술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본디부터 마땅히 구차스럽게 준수(遵守)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 일이 오로지 군흉(群凶)들이 없는 사실을 꾸며 만든 데서 연유한 것이겠습니까? 윤지술의 원통함을 풀게 하는 것은 다만 윤지술을 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선왕을 위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殿下)께서는 선왕의 아우로서 선왕의 지위에 나아가셨으니, 앞으로 선왕을 허물이 있는 곳에다 두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선왕을 허물이 없는 곳에다 두려고 하십니까? 반드시 선왕을 허물이 없는 곳에다 두려고 하신다면 윤지술의 원통함을 풀게 하여 선왕께서 기필코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밝히는 것만 함이 없습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출숙(出肅)448)  하고 진수당(進修堂)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대단(大段)히 살육(殺戮)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전하(殿下)의 뜻도 또한 이와 같이 매우 어지신데 감히 공경하게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 흉악한 무리들의 죄상(罪狀)은 하늘까지 치닿는데도 전하께서는 오래도록 처분(處分)하지 않으시니, 다섯 가지 형벌로 다섯 가지의 죄에 적용하는 뜻이 너무도 아니므로 인심(人心)이 더욱 과격해지고 국가의 기강(紀綱)이 점차로 문란해집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계달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지마는, 다만 깊이 참작하지 않으면 혹시라도 지나칠 듯하기 때문에 곧바로 윤허할 수 없었는데, 법을 집행하는 의논에서는 진실로 응당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숙종(肅宗)신사년449)  에 궁위(宮闈)의 변고450)  를 만났으나 처치(處置)함이 중도(中道)를 얻었고 의리가 크게 밝혀졌으니 진실로 융성한 덕의 큰 업적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그리고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왕위에 오르신 뒤에 인정(人情)으로 말한다면 사친(私親)451)  을 높이고 싶었음이 어찌 다함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예(禮)로써 막음이 지극히 엄격하였으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출모(出母)452)  는 맞아서 돌아오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살았을 때 맞이하여서 봉양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데 더구나 죽었을 경우 높이 받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당일의 일은 다만 출모(出母)의 일에 그친 뿐만이 아닙니다. 장자(章子)의 일453)  로서 본다면 그것이 압존(壓尊)454)  되는 의리에 엄격한 것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장자로 하여금 의리에 어긋난다고 여긴다면 이는 인륜(人倫)에 죄를 얻은 사람이니 맹자(孟子)가 당연히 그와 절교하였을 터인데 어찌 기꺼이 그와 교유(交遊)하겠습니까? 위에서 비록 사사로운 인정으로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진실로 극력 간쟁(諫爭)하는 것이 당연한데, 더구나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대체(大體)에 분명하게 하셔서 일찍이 제기(提起)하지도 않았었는데, 군흉(群凶)들이 아첨하여 총애를 굳히려고 하여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앞장서고 이명언(李明彦)이 잇따라 극력 주청하여 군부(君父)를 예의에 어긋난 예(禮)를 이루도록 인도하였으니, 3년 안에는 비록 갑자기 의논하여 이정(釐正)455)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앞날에는 응당 다시 의논해야만 할 부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중대하므로 의논할 수 없다.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일을 가지고 관찰하면 성고(聖考)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난번에 추숭(追崇)456)  한 것도 지나치는 데 이르지 않았으니, 오늘날에 이르러 비록 예(禮)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결단코 제기(提起)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3대신(大臣)의 적몰(籍沒)한 가산(家産)을 되돌려주고 김제겸(金濟謙)의 관직을 회복시키도록 청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윤지술(尹志述)이 원통하게 죽은 것은 실로 옛날에 없었던 일입니다. 한 마디의 말로 인륜(人倫)을 부지(扶持)하려다가 지독한 화(禍)를 참혹하게 당하였으니,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처분(處分)이 지정(至情)의 관계가 있어서 비록 더러 중도(中道)를 지나쳤을지라도, 지금은 포장(褒奬)하고 어여삐 여기는 은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 된 뒤에는 의논할 수가 있겠으나, 지금은 너무 성급하다. 비록 박태보(朴泰輔)의 정충(貞忠)457)  으로도 오히려 즉시 포장(褒奬)하고 추숭(追崇)함을 얻지 못하였다. 윤지술(尹志述)의 절의(節義)가 비록 칭찬할 만하더라도 대행조(大行朝)에서 이미 가엾이 여기는 은전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추숭하고 포장하는 것은 혹 너무 이른 듯하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또 임창(任敞)을 포장하고 가엾이 여기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정원(承政院)에서 상고해 내어 품지(稟旨)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조성복(趙聖復)은 이미 관직이 회복되었는데, 그의 형(兄) 조성집(趙聖集)의 사형(死刑)에 대해서는 나라 사람들이 더욱 애처롭게 여깁니다. 율문(律文)에 형이 동생을 죽인 경우 본래 사죄(死罪)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효종(孝宗) 때 형이 포(炮)로 그의 동생을 살해한 자가 있었는데, 성교(聖敎)에, ‘포를 가지고 그 동생을 참형하였을 때 그의 심술(心術)을 상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하시고, 마침내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인해서 이 뒤로 정리(情理)가 매우 마음 아프게 여겨지는 것은 품지(稟旨)하여 처단(處斷)하도록 명하셨으며, 이 뒤로 형이 동생을 살해한 경우 그대로 사형하는 율(律)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성집의 마음은 진실로 그의 동생이 장차 극형(極刑)에 처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데서 나온 것이니, 그 일이 애처롭게 여길 만한데도 포로 그 동생을 살해한 자와 같은 형률(刑律)을 적용하는 것은 원통합니다. 청컨대, 원통함을 풀게 하고 가엾게 여기는 은전을 내려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김보택(金普澤)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도록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또 진달하기를,
"지난번에 호분위(虎賁衞)의 속목(贖木)458)  을 혁파(革罷)한 뒤에 진상(進上)은 줄어들지 않고 값은 내놓을 곳이 없어, 삼남(三南)의 경우는 선혜청(宣惠廳)에서 바꾸어다 봉진(封進)하며 경기(京畿)와 강원(江原) 두 도(道)의 경우는 본도(本道)에서 봉진하는데, 값을 장만할 수 없기 때문에 경기의 경우는 값을 각 고을에다 징수합니다. 강원도도 또한 경기의 예대로 나누어 징수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불쌍하니 백성들의 재력(財力)을 조금이라도 펴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면제시켰다가 도로 바치게 하는 것은 애당초 덜어주는 뜻이 아니다. 경기(京畿)·강원(江原) 두 도의 진상(進上)을 우선 정지하도록 하며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다시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의 책봉(冊封)하는 의식이 앞으로 다가왔는데 잠성 부부인(岑城府夫人)이 죄인의 집안으로 자처(自處)하면서 아직도 향리(鄕里)에 있다고 하는데, 부부인(府夫人)은 왕세자에게 외조모(外祖母)입니다. 특별히 분부(分付)하여 경사스러운 의식에 참석하도록 하는 것이 인정과 예의에 진실로 적합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민진원(憫鎭遠)이 말하기를,
"황하신(黃夏臣)의 죽음은 더욱 매우 참혹합니다. 그 당시 위조된 조지(朝紙)459)  가 원근(遠近)에 전파되어 호중(湖中)의 인사(人士)들은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황하신이 이 때문에 항양(桁楊)460)   아래에서 죽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황하신은 충성과 효도로 칭찬을 받았다고 하니, 결단코 거짓된 비답(批答)을 만들어 낼 사람이 아닙니다. 벼슬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 사건의 전말(顚末)을 알지 못하니, 소결(疏決)할 때의 문안(文案)을 가지고 들어와서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4대신(大臣)의 원통함은 이미 풀렸지만 성고(聖考)의 무함은 씻기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중앙과 지방의 흉도(凶徒)들이 윗사람의 뜻에 맞추어 상소하여 신사년461)  의 옥안(獄案)을 번복하도록 청하고, 바로 단정하기를 무옥(誣獄)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그 당시 파낸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실제 상황이 아니라고들 말합니다. 그때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 친히 죄인을 국문하여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많이 파내시고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명백히 하교(下敎)하셨는데도 군흉(群凶)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그들이 숙종(肅宗)을 우러러 무함한 것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듣건대 상소한 자가 더러는 조사(朝士)도 있고 더러는 유생(儒生)도 있었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모두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컨대 승정원(承政院)의 관원(官員)으로 하여금 상고해 내어 죄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행조(大行朝)에서도 비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죄를 논하는 자가 있었을 터이니 승정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모든 상소문을 상고해 내도록 하고 내용이 숙종(肅宗)에게 핍박되는 것은 품지(稟旨)하여 처치(處置)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또 숙종조(肅宗朝)의 크고 작은 처분(處分)을 신축년462)   이후에 변경시킨 것은 승정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상고해 내도록 하여 낱낱이 그전대로 회복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그마한 일들을 어찌 반드시 모두 예전대로 회복시켜야 하겠는가? 임진년463)  의 과거(科擧)에서 합격하였다가 낙제시킨 자들을 회복시키도록 청한 것은 더욱 근거가 없다. 숙종의 처분이 얼마나 엄격하게 결단하셨는데 한꺼번에 복과(復科)464)  하겠는가? 이진급(李眞伋)이 공무를 집행하지 않고 자처(自處)한 것은 옳았으니, 복과를 진청(陳請)한 본말(本末)을 승정원(承政院)의 관원으로 하여금 상고해 내도록 하여 품지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한배하(韓配夏)에게 가자(加資)하게 한 것도 역시 흉당(凶黨)이 속이고 가리며 법을 마음대로 적용한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청컨대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을 죄주려고 논한다면 지난번의 사람 중에 어찌 남는 자가 있겠는가? 내버려 두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옛날에는 3년에 9년을 대비(對備)할 저축이 있었는데 지금 국가의 경상 비용이 아주 텅비어 옮겨다 보태어 쓰니, 빌어먹는 아이가 애를 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소비하여 없어진 것이 이와 같으니 나라가 어찌 모양을 이루겠습니까? 재물을 늘리는 데에 방법이 있으니, 절약해서 쓰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애써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여 성과를 이루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연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3월 9일 정미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김담(金墰).】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최도장(崔道章)은 본래 흉당(凶黨)의 심복(心腹)으로 음모(陰謀)와 비계(秘計)를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철원(鐵原)의 지방관이 되어 도봉 서원(道峯書院)을 지나다 알현(謁見)하고서 감히 선정(先正)465)  을 모욕(侮辱)할 마음을 품고 심원록(尋院錄)466)  에다 선정의 성씨(姓氏)를 제거하고 단지 이름 자만 쓰고는 거기에다 ‘절하지 않았다[不拜]’는 두 글자를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라 수사(全羅水使)가 되어서는 3백 민(緡)의 재물을 내고, 또 벌채(伐採)가 금지된 소나무 1천여 그루를 베도록 하여 윤선도(尹善道)의 서원(書院) 건립을 도와 이루게 하여 흉당(凶黨)에게 아첨하였으므로 남중(南中)467)  의 사류(士類)들이 지금까지 분개하여 원망하며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외람되게 큰 지역의 곤임(閫任)에 임명되었으므로 물정(物情)이 아주 놀랍게 여깁니다. 청컨대 파직(罷職)시키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며칠 전에 대계(臺啓)를 승지(承旨) 신필현(申弼賢)이 받아 간 뒤에 유배 단자(流配單子)를 받들고 들어갔을 적에 함께 참석하였다는 것으로 인혐(引嫌)하고 끝내 받들어들이지 않았다가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대청(臺廳)468)  에서 바로 승전(承傳)469)  을 청하고서야 들여보내었습니다. 대계(臺啓)를 지체시켜 둔 것은 이미 놀랄 만한데, 대신(臺臣)이 전하는 말로는 머물러 둘 수 없다는 뜻을 약간 보였는데도 거만스러움을 무릅쓰고 공무를 집행하였으니, 본래 끌어댈 만한 혐의가 없었던 듯하다고 합니다. 이와 같다면 대계(臺啓)를 받들지 않았음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모두 윤허하지 않고 신필현(申弼賢)의 일은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3월 10일 무신

김고(金槹)를 승지(承旨)로, 권적(權𥛚)과 이유(李瑜)를 지평(持平)으로, 이병태(李秉泰)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校理) 이기진(李箕鎭)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전하(殿下)께서 무옥(誣獄)의 원통함을 깊이 염려하시어 씻어주고 용서하는 은전을 빨리 시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본말(本末)과 완급(緩急)의 차례에 만족스럽지 못함이 있습니다. 신이 이른바 대본(大本)이란 것은 반드시 먼저 경묘(景廟)470)  의 융성한 덕이 애당초 군흉(群凶)이 흐리게 하고 어지럽힌 일에 참여함이 없음을 발명(發明)해서 성고(聖考)471)  를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는 전하의 효제(孝悌)하는 도리에 있어서 제1의 의리가 되는데, 뭇 신하들이 피땀을 흘리며 눈물을 삼키는 것은 단지 성궁(聖躬)에 망극(罔極)한 무함이 아직도 암담(黯黮)한 가운데 있음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대저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 가운데 흉악하고 참혹하다는 말은 반드시 덮어두고 신문하지 않으면서 일이 양궁(兩宮)에 관계되었다고 대충 일컬으면서 이 일을 있는 듯 없는 듯하는 의심스런 사이로 돌려 버려, 그 말은 몰래 서로 전파(傳播)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미혹되게 하였으며, 그 일은 명백하지 못하게 하여 후세 사람들의 눈을 현혹되도록 하였으니, 이는 그 의도가 과연 양궁(兩宮)의 처지를 위해서 나온 것입니까? 지금 국문(鞫問)하는 일을 시작하여 단서가 점차로 드러나는데도 가만히 엿보건대 전하께서는 언제나 일이 거기에 관계되었다는 것으로 번번이 혐의를 두시고 한결같이 법을 굽히면서 〈그들을〉 비호하여 다만 혹시라도 다칠까 두려워하시니, 이와 같이 하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면 군흉(群凶)들을 토주(討誅)할 기약이 없게 되며, 성상의 무함은 분변될 희망이 없어지게 될 것이니, 조정 고관(高官)의 원통함을 씻는 것은 오히려 제2건(第二件)의 일입니다.
대체로 저 여러 신하들이 화(禍)를 입은 것은 실제로 성궁(聖躬)이 무함을 받은 데서 말미암았으니, 성상의 무함이 씻겨지지 않는 것이 여러 신하들이 원통함을 품게 되는 까닭입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한갓 여러 신하들의 원통함을 씻어주는 것만으로 구경(究竟)472)  의 법으로 인정하시고 다시 역적을 토주(討誅)하고 법을 바로잡는 데 뜻을 두지 않으시면, 앞서 이른바 망극(罔極)하고 암담(黯黮)하다는 것은 진실로 그대로 있게 될 것입니다. 비록 화(禍)를 입은 여러 신하들에 대하여 은혜로운 윤음(綸音)473)  을 선포하고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를 크게 갖추어 울적함을 깨끗이 씻고 여러 사람의 쳐다보는 것을 용솟음치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실제로는 순수한 충성이 아직도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지극한 원통함이 아직도 풀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본말(本末)과 완급(緩急)이 거꾸로 된 데 가깝지 않으며, 또한 장차 어떻게 천하 후세에 변명할 말을 남기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지금의 처분(處分)이 한편으로는 성고(聖考)의 뜻을 우러러 본받고, 한편으로는 대행조(大行朝)의 융성한 덕을 본받아 밝히는 것이니, 어찌 많은 말을 허비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유양(揄揚)474)  하는 것이겠는가? 한 마디 말로 밝힐 만한 것이 있으니, 그 일을 단련(鍛鍊)한 자들이 아래에 있는데도 일마다 너그럽게 용서하고 그 주청에 대한 허락을 아낀 것은 대행조(大行朝)의 덕스러운 뜻이었는데, 지금 여러 신하들의 원통함을 풀도록 하는 것이 어찌 오늘날의 일이겠는가? 바로 대행조의 남은 은택이다. 원악(元惡)이 이미 제거되고 원통함이 이미 풀렸으니 그 밖의 일은 생각 밖에 내버려 두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 마음은 태연하니 〈무함을〉 씻거나 씻지 않는 것은 더욱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찬선(贊善) 김간(金幹)과 전 현령(縣令) 박필주(朴弼周)가 상소(上疏)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모두 후한 비답을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김간에게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독(講讀)하기를 마치자, 참찬관(參贊官) 윤석래(尹錫來)가 귀양갔다가 석방을 받은 사람 가운데 정호(鄭澔)의 차자(箚子)와 이휘진(李彙晉)의 상소에서 진달한 다섯 사람을 일체(一體)로 서용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시독관(侍讀官) 신방(申昉)이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 고(故) 찬선(贊善) 이희조(李喜朝)에게 시장(諡狀) 짓기를 기다리지 않고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11일 기유

태안(泰安)의 유학(幼學) 김진(金稹)이 상소하여 양군(良軍)에게 죽은 사람 몫의 면포를 징수하는 폐단을 논하였는데, 첫째는 호적(戶籍)에 이름을 빠뜨리는 것이고, 둘째는 남자를 여자로 꾸미는 것이고, 셋째는 중의 무리에 몸을 던져 들어가는 것이고, 넷째는 이사하여 피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아전에게 뇌물을 주고 탈락되기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간 부분에서는 삼남(三南)의 취재(臭載)475)  하는 폐단을 말하고 연변(沿邊)에서 지토선(地土船)476)  을 만들게 하고 3도(道)에 각각 수운관(水運官)을 배치하여 조운(漕運)해서 수납하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경기(京畿)의 전세(田稅)가 과중하고, 수령이 세금과 잡역(雜役)을 강제로 징수하는 폐단을 말하고 엄격한 금지를 가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후하게 비답을 내리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며 처리하게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무신(武臣) 최진한(崔鎭漢)이 청석동구(靑石洞口) 밖 금천군(金川郡)에다 독진(獨鎭)을 설립하도록 청하니, 묘당(廟堂)에 품지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종신(宗臣) 영원군(靈原君) 헌(櫶)이 종신으로 가난하여 의탁할 데 없는 자에게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정밀하게 뽑아서 춘궁기(春窮期)에 급박함을 구휼(救恤)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12일 경술

원주(原州)의 유학(幼學) 이신방(李藎芳)이 상소(上疏)하여 양역(良役)477)  의 폐단을 말하기를,
"옛날에는 무학 군관(武學軍官)이나 기패관(旗牌官)은 삼청(三廳)478)  의 중인(中人)·서얼(庶孽)이 하고, 평민(平民)은 신역(身役)에 들게 하고 속오군(束伍軍)479)  을 겸행하도록 하였는데, 요즈음 부유한 백성들이 함부로 들어옴으로 인하여 삼청의 중인과 서얼은 나가서 한가히 놀기를 도모하여 첩역(疊役)과 족징(族徵)480)  의 폐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고, 또 사옹원(司饔院)에서 굽는 그릇을 당상관과 낭관이 지나치게 많이 나누어 가지게 되고, 사복시(司僕寺)의 초가미(草價米)481)  도 제조(提調)가 사사로이 차지하며, 병조(兵曹)의 보병 번포(步兵番布)를 관원의 월봉(月俸)으로 소비하는 것이 많고,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의 은화(銀貨)·쌀(米)·콩도 사사로이 빌려 주는 것이 많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각궁(各宮)의 세금을 면제할 것과 각 관사(官司)의 둔전(屯田)을 혁파하도록 청하고, 또 돈의 폐단을 말하고 녹여 그릇 따위를 만들 것을 청하였으며, 또 수령을 자주 체임하는 폐단을 말하였고, 또 세력이 있는 집안에서 입안(立案)482)  을 빼내도록 꾀하는 폐단을 말하니, 임금이 후하게 비답을 내리고, 인하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장령(掌令) 김담(金墰)이 상소(上疏)하여 이치를 밝히고 마음을 바로잡도록 청하고 또 징계하고 토죄(討罪)하기를 엄중히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르기를,
"뭇 신하들의 억울함은 거의 모두 펴게 하고 다스렸지만 성궁(聖躬)의 무함은 오히려 암담(黯黮)하게 그대로 있습니다. 전하께서 군흉(群凶)의 죄를 밝혀서 바로잡아 중앙이나 지방으로 하여금 건저(建儲)하고 대리(代理)하는 것이 광명 정대(光明正大)하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지 못하신다면 때가 지나고 일이 바뀐 뒤에 군흉의 무리가 곧 말하기를, ‘우리가 만약 죄가 있었다면 당일의 처분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한다면, 신들이 그들에게 도로 깨물림을 당하게 되는 것은 근심할 것이 못되지만 전하께서 그 차마 듣지 못할 악명(惡名)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천만세(千萬世) 뒤에 어떤 사람이 이 흉악한 소(疏)를 보고서 말하기를, ‘만일 이 소(疏)로 하여금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함이 없었다면 그 당시 이 무리들이 어찌 현륙(顯戮)483)  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할 것이니, 그것이 전하에게 씻기 어려운 누가 되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역적 김일경(金一鏡)은 바로 흉당(凶黨)의 한 사령(使令)일 뿐이었으니, 유봉휘(柳鳳輝)의 상소가 이미 역적 김일경보다 먼저 착수하였습니다. 한 사람을 귀양 보내면 열 사람이 슬퍼한다는 전교는 대성인(大聖人)의 인자하고 가엾게 여기는 지극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유독 지난번에 죄 없는 여러 신하들이 칼날에 뒹굴어서 온 몸이 분해(分解)되고 부모와 처자가 도로에서 울부짖던 모습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도 역시 자연의 이치입니다. 전하께서 옳은 일 가운데도 그른 것이 있고 그른 일 가운데도 옳은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신은 실로 그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의 흉당(凶黨)을 어떤 사람이 완화(緩和)와 준엄의 다름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른바 완화란 것은 겉은 완화하면서도 속은 준엄한 경우이고, 준엄이란 것은 안팎이 모두 준엄한 경우입니다. 요컨대 그 속마음은 같지만 그 상태(狀態)를 논한다면 완화한 것이 준엄한 것보다 더 심합니다. 진실로 준엄한 것을 죄줄 만하다고 아셨으면 어찌 분명하게 뒤로 물러나 서서 그 죄를 토주(討誅)하도록 청하지 않았으며, 진실로 준엄한 경우를 죄줄 만하다는 것을 몰랐다면 무엇 때문에 양쪽에서 머뭇거리며 조금씩 자취를 남겼겠습니까? 이는 흉악한 음모가 이루어지면 그 이익을 함께 하려는 것이며, 흉악한 음모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를 면하려고 하는 데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전하께서는 완화한 것과 준엄한 것을 논하지 않으시고 모두 용서하여 죽이지 않는다면 또 다시 난만(爛漫)484)  하게 같은 결과가 될 것입니다. 어찌 그릇된 가운데도 옳은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비록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어떻게 전하를 형벌로 죽이는 방향으로 인도하겠습니까? 참으로 흉적(凶賊)이 토주(討誅)되지 않으면 성상의 무함이 씻겨지지 않습니다."
하고, 끝부분에 황하신(黃夏臣)·이경(李坰)·이지규(李志逵)에 대해서는 가엾게 여겨 소결하여 석방함이 적당하다고 말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요즈음의 일은 오늘 연석(筵席)에서 분명히 유시하였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은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무릇 사람을 논하는 즈음에 단지 그 사건의 옳고 그른 것만 밝혀야만 하는데, 정말 소(疏)의 내용과 같다면 동자(董子)485)  가 이른바 그 의(誼)를 바로잡고 그 도(道)를 밝힌다는 것이 오늘날에 부족함이 있지 않겠는가?
아! 지난날의 살벌했던 상황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오늘날 죄를 토주(討誅)하는 것은 단지 의리만 나타낼 뿐이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그 가운데 섞여 있다면 사의(私意)가 공무를 해치는 경우가 어찌 적겠는가? 그대들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본받아 일마다 공정하기를 힘쓰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황하신 등의 일을 소결(疏決)할 때에 응당 하교하겠다."
하였다. 이보다 먼저 황하신(黃夏臣)은 비답을 위조한 옥사(獄事)로 죽었고, 이경(李坰)은 연좌되어 귀양갔으며, 이지규(李志逵)는 글을 지어 윤지술(尹志述)의 제사를 지냈다는 데 연좌되어 먼 곳에 귀양갔었다.

 

이날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의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 삼강(三講)에 나아갔다. 조강 때 영사(領事)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수차(袖箚)486)  에 대한 비답을 받지 못하고 대면(對面)하여 유시하겠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이기진(李箕鎭)의 소(疏)에서도 또 말하였는데, 모름지기 선왕(先王)께서 뜻밖에 병이 있어 뭇 간신들에게 속이고 가림을 당한 실상(實狀)을 분명히 말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환히 알도록 한 뒤라야 선왕의 융성한 덕이 비로소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윤헌주(尹憲柱)는 말하기를,
"선대왕(先大王)의 영명(英明)하고 인성(仁聖)한 자질로 마침 성상의 환후(患候)가 오래 낫지 않아서 위중함으로 인연하여 군사(群邪)들이 감히 속이고 가리는 계획을 멋대로 하였습니다. 질병(疾病)이 닥치는 것은 성인(聖人)도 면하기 어려운 바이니 이것이 어찌 숨겨야 할 일이겠습니까?"
하였고,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은 말하기를,
"당일의 일은 전하(殿下)께서 환히 아시는 바이니, 삼가 원하건대, 중앙과 지방에 분명히 하교하여 선대왕(先大王)이 불행하게 병이 있어 간흉(奸凶)이 흐리게 하고 어지럽힌 것이며 본래 선대왕의 본의(本意)가 아니었음을 알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宣祖)께서 명종(明宗) 때의 일을 후일에 고치게 되자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내가 왕손(王孫)으로 잠저(潛邸)에 물러나 있는 것만도 만족한데 어찌 이 지위에 있으면서 이렇게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맡게 될 줄을 생각하였겠는가?’라고 하셨는데, 나의 오늘날 처한 바가 선조(宣祖)의 일과 같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신중(愼重)한 성상의 뜻도 좋습니다만, 의리를 궁구하는 데는 반드시 천리(天理)의 극처(極處)를 생각하여 효제(孝悌)의 근본을 삼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한편의 조정 신하를 모두 어처구니없는 죄과(罪科)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그 근본을 논하면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다. 이의연(李義淵)은 내가 애당초 죽일 뜻이 없었는데 두 차례의 형신(刑訊)으로 죽고 말았다. 일찍이 그의 죄목(罪目)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은 선왕(先王)의 본의(本意)가 아니라는 것으로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의연(李義淵)이 홀로 무슨 죄가 있는가? 생각하면, 슬프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이미 그의 원통함을 아셨다면 명백하게 처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앞으로 마땅히 헤아려서 처분하겠다. 임인년487)  의 옥사(獄事)에 대하여 어제 추안(推案)을 보니 이른바 복초(服招)를 받았다는 것은 다만 쓰기를, ‘문목(問目) 안의 사연은 일일이 지만(遲晩)488)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으로써 결안(結案)하였으니, 어떻게 이와 같이 승복(承服)한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인하여 유봉휘(柳鳳輝)의 죄를 토주(討誅)하도록 청하였다.
지사(知事)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인조조(仁祖朝)에 저위(儲位)489)  를 어진이로 선택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경여(李敬輿)가 연석(筵席)에서 극력 간하고 물러나 여러 신하(臣下)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조정에서 간쟁(諫爭)한 것은 신하가 지킬 절조(節操)로는 당연한 일이다. 내일 다른 의논이 있으면 악역(惡逆)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으로 관찰하면 유봉휘(柳鳳輝)의 상소가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경(卿) 등의 말을 옳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이 이미 정해졌으니 지금에 와서 다시 논단(論斷)할 수가 없다."
하였다. 이휘진(李彙晉)과 헌납(獻納) 정택하(鄭宅河)가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대리(代理)에 대한 비망기(備忘記)가 처음 내렸을 적에 이광좌(李光佐)가 군함(軍銜)490)  으로 대신(大臣) 앞에 갑자기 뛰어나와 말하기를, ‘이 일을 만약 도로 거두어 들이지 않는다면 나라는 틀림없이 망할 것이다.’고 하면서 소리를 크게 지르므로, 조태채(趙泰采)가 성난 소리로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 뒤에, ‘좌우(左右)가 가한가 세제(世弟)가 가한가.’하는 전교가 또 내리니, 이광좌가 또 소리를 크게 지르며 말하기를, ‘이 전교는 진짜 하교가 아니다. 오늘의 대신(大臣)이 만약 이 하교를 받든다면 이는 신하의 절조가 없는 것이다.’고 하면서, 대단한 기세로 외치며 흉악하고 사납게 굴자 여러 신하들이 말 한 마디 못하고 잠자코 있었는데, 유독 이건명(李健命)이 꾸짖기를, ‘조정(朝廷)은 그대의 조정이 아닌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조태채(趙泰采)는 사형을 면하지 못하였고 이건명은 가장 참혹한 화(禍)를 당하였는데 모두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었으니 이광좌의 정상(情狀)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이휘진(李彙晉)은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이광좌(李光佐)를 해를 꿰뚫을 만한 충성이라고 권장하셨는데, 아마도 잘못한 말임을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원컨대 성상의 지시(指示)를 듣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흐리고 어지럽게 도륙(屠戮)하는 즈음에 금단(禁斷)할 수 없었으니 참으로 그 죄가 있기는 하되 다만 당습(黨習)491)  으로 엄폐하는 것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비록 지난번의 소장(疏章)으로 관찰한다 하더라도 알 말한 일이 많이 있으니, 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의 사형을 감(減)하도록 청한 것은 또한 어찌 공정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조태채(趙泰采)를 죽이기를 청하려 입대(入對)하였을 적에 조태억(趙泰億)도 함께 들어갔으니, 이는 인륜(人倫)이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를 당해서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옳았었다."
하였다. 이휘진(李彙晉)이 전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봉조(尹鳳朝)의 일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의 원통함을 진달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윤봉조(尹鳳朝)를 지주(指嗾)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처신(處身)을 삼가하지 않은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먼 곳에 귀양 보내는 것은 중도(中道)에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직(官職)을 삭탈하고 석방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박장윤(朴長潤)의 일에 이르러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그때 박장윤(朴長潤)의 아룀으로 인하여 고쳐 묻게 하였으니 진실로 정형(正刑)492)  에 해당되겠지만, 그의 아룀이 이미 시행되지 않았으니, 그 본정(本情)을 캐어보면 별다른 준론(峻論)으로 시배(時輩)들에게 아첨하여 좋은 벼슬을 도박해 보려고 한 것에 불과할 뿐이니 정형(正刑)은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형을 감(減)해서 먼 섬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공윤(李公胤)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그 본정(本情)을 캐어보면 술업(術業)이 정밀하지 못한 소치에 불과하며, 또 말이 미치광스럽고 도리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곧 역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도인승기탕(桃仁承氣湯) 수첩(數貼)을 올려서 드시게 한 것은 바로 이공윤(李公胤)이 명한 약(藥)이지만, 용회환(龍薈丸)은 이공윤이 명한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고, 남태징(南泰徵) 등의 일에 이르러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이삼(李森)과 남태징(南泰徵)은 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바이지만 박찬신(朴纘新)과 이여적(李汝迪)의 경우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하였으며, 윤헌주(尹憲柱)는 말하기를,
"이만성(李晩成)은 이삼(李森)이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화(禍)를 당했는데도 그가 스스로 청구하는 글을 그 당시 끝까지 한 번도 진달하지 않았으니, 더욱 보잘것없습니다."
하였다.
백망(白望)·정우관(鄭宇寬)이 끌어댄 여러 사람의 일에 이르러 이휘진(李彙晉)이 말하기를,
"백망(白望)의 초사(招辭)에 크게 요긴한 것은 단지 선래(先來)가 들어온 뒤에 당연히 고변(告變)하는 말을 했다는 데 있는데 그때 백망은 육현(陸玄)의 사건으로 남간(南間)493)  에 단단히 갇힌 지가 이미 한 달이 넘었었습니다. 그러니 갇히기 전에 만약 수작(酬酌)이 없었다면 어디로 말미암아 선래(先來)의 뒷일을 알아 이렇게 갑작스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그것이 마구 지껄인 초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망(白望)이 아는 것은 단지 외면(外面)의 일이고, 그 이면(裏面)의 일은 정우관(鄭宇寬)의 초사에 상세히 갖추어 있으며, 그 징험이 되는 곳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의 옥사(獄事)에 모두 드러났으니, 여러 역적들이 안팎으로 화답하고 호응한 것이 환하여 엄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우관(鄭宇寬)의 초사는 정말 박상검(朴尙儉)의 옥사에 부합(符合)이 되지만 김몽상(金夢祥)의 일은 그때 사실이 지난날 인접(引接)할 적에 궁료(宮僚)494)  가 보여 준 소초(疏草)에 있었으며, 그의 공사(供辭) 가운데서도 여기에 의거하여 말을 하였지만 옥사를 다스리는 신하가 이것으로 인하여 박상검의 기밀 단서가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억지로 윗사람을 무함했다는 것으로써 형벌하도록 청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도리가 있겠는가? 김몽상은 죄 없음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최도성(崔道成)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한세량(韓世良)의 소(疏)에 하늘에는 두 해가 없는데, 천위(天位)가 몰래 옮겨졌다는 등의 말은 감히 말하지 못할 처지에 무함하고 핍박하여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두 역적과 근주(根株)가 서로 연결되고 맥락(脈絡)이 서로 관계되었으니 청컨대 노적(孥籍)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승복(承服)한 정형(正刑) 외에는 노적(孥籍)함이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관작을 추탈(追奪)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택하(鄭宅河)가 전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신치운(申致雲)의 일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신치운(申致雲)이 권상하(權尙夏)를 나라를 배반하고 임금을 원수로 여긴다고 무함하였습니다. 일반 사람을 무함하여도 오히려 반좌(反坐)495)  되는데, 더구나 세 조정에서 예우(禮遇)하는 유현(儒賢)이겠습니까? 죄가 잡아다 국문(鞫問)하는 데 적합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위를 이은 초기에 먼 곳에 귀양 보낸 사람이 20여 명에 이르며, 이미 선정(先正)을 무함하였다는 것으로 신경제(申慶濟)를 먼 곳에 귀양 보내었으니, 신치운(申致雲)은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사대문 밖으로 쫓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備局)의 여러 당상관의 일에 이르러 민진원이 말하기를,
"비국(備局)의 초기(草記)496)  는 대신(大臣)이 만들므로 당상관은 참여하여 듣지 못합니다. 그 당시 예조(禮曹)의 회계(回啓) 가운데 선왕(先王)의 본의(本意)가 아니라는 말이 있었으니, 예조의 당상관은 당연히 논죄(論罪)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조(禮曹)의 회계(回啓)를 승정원(承政院)의 관원으로 하여금 상고해 내게 하여 품지(稟旨)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 때 민진원(閔鎭遠)이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에게는 시장(諡狀) 짓기를 기다리지 않고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을해년497)  에 대신(大臣)이 여러 궁가(宮家)498)  의 절수(折受)499)  한 것을 무진년500) 정탈(定奪)501)  에 의거하여 모두 혁파(革罷)하도록 하는 일을 경연(經筵)에서 진달하여 규정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세월이 오래 된 뒤에 가끔 절수하는 곳이 있으므로 경자년502)  에 대신 이건명(李健命)이 여러 궁가와 각 아문(衙門)의 절수하는 것을 영원히 금단(禁斷)하도록 하는 일을 또 경연에서 진달하여 정탈하였습니다. 근래 대신이 절수한 곳을 비국(備局)에서 서경(署經)503)  하도록 하는 일을 정탈하였는데, 선조(先朝)에서 정했던 규정대로 모두 혁파(革罷)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상고해 내어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민진원이 선혜청(宣惠廳)에서 빚진 사람이 부담해야 할 것을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강제로 징수한 것은 선혜청의 저축이 조금 여유가 있기를 기다려 되돌려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곧바로 되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숙종조(肅宗朝)에 고(故) 상신(相臣) 이유(李濡)가 징채청(徵債廳)을 관서(關西)에다 설치하도록 청하여 빚을 진 사람과 절족(切族)504)  이 바쳐야 할 전곡(錢穀)에 대해서 영문(營門)에서는 별장(別將)을 정하여 수시(隨時)로 전판(轉販)505)  하게 하되, 곡식인 경우는 환곡(還穀)을 주고 〈10분의 1을〉 이자로 받아 점차로 전부 갚게 하는 터전이 되도록 하였었습니다. 신이 관서(關西)에 있으면서 이 법을 준행하여 성과가 있었습니다. 청컨대, 해서(海西)로 하여금 모두 이 법을 시행하게 하여 관계되지 않은 사람에게 강제로 바치도록 한 물품은 역시 되돌려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조이중(趙爾重)·백시구(白時耉)·이상집(李尙)을 탐장(貪贓)506)  했다고 일컬어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법 밖의 처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일을 법례(法例)를 상고하지 아니하고 다만 마음에 쾌하도록 하려 했던 것이 지난날의 풍습(風習)이다. 세 사람에 대한 적몰은 모두 되돌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경주(慶州)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507)  이 있는데, 유세항(柳世恒)이 부윤(府尹)이 되었을 적에 지경 안과 이웃 고을의 수백 인이 무리를 지어 난동을 부리니, 유세항이 기회를 타서 사우(祠宇)를 헐어 철거하고 화상(畫像)을 찢어 불에 던지려고 하자, 사자(士子)의 무리들이 애걸(哀乞)하여 면할 수 있었는데, 유세항이 그 사자들을 가두고 매질하여 그 중 한 사람이 매를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맨 먼저 앞장서서 난동을 부린 사람은 청컨대, 조사해 내어 형배(刑配)508)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또 전교하기를,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였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유세항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공주(公州)의 공암 서원(孔巖書院)은 주자(朱子)를 주향(主享)으로 여러 유현(儒賢)들을 배식(配食)509)  하였습니다. 임인년510)   뒤로 서원의 유생들이 송시열(宋時烈)의 위판(位版)511)  을 교의(交椅) 아래에 내려 두었습니다. 사액 서원(賜額書院)은 제수(祭需)를 관청에서 지급하는데 마음대로 위패를 내치고 제사를 폐(廢)하였으니, 맨 먼저 앞장선 사람은 엄중하게 형벌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거 응시를 정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먼 시골의 식견(識見)이 없는 무리는 현관(賢關)512)  의 유생(儒生)과는 차이가 있으니, 과거 응시를 정지시키는 것으로는 징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자(儒子)의 갓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었으면 어떻게 먼 시골의 유생이란 이유로써 유생으로 대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본도(本道)에서 징계하여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3월 13일 신해

묘시(卯時)513)  에서 유시(酉時)514)  까지 사방(四方)이 어두워서 티끌이 내리는 듯하였으며, 미시(未時)515)  와 신시(申時)516)  에는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전 현감(縣監) 서행원(徐行遠)이 상소(上疏)하여 호조 판서(戶曹判書)와 병조 판서(兵曹判書)는 구임(久任)517)  하도록 청하고, 또 양역(良役)의 폐단을 말하였으며, 남한 산성(南漢山城)과 북한 산성(北韓山城)을 제외한 산성의 성가퀴를 지키는 군관(軍官) 및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에서 새로 정한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군사는 모두 혁파(革罷)하도록 청하고, 또 암행 어사가 여러 고을을 두루 검찰함에 있어 폐단이 있다고 말하고 한 고을을 집어내어 발송(發送)하도록 청하니,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논어(論語)》의 천명을 두려워하는 장을 강독(講讀)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필서(匹庶)518)  는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중에서 두렵게 여길 사람이 많지만 인군(人君)은 그렇지 않아 상천(上天)519)   외에는 두렵게 여길 곳이 없으니, 언제나 천명(天命)을 두렵게 여겨 감히 혹시라도 방자함이 없도록 해야 하며, 또 성인(聖人)의 말을 두렵게 여겨 오직 혹시라도 어길까 두려워한다면 마음이 저절로 방종하지 않아 성덕(聖德)이 저절로 성취(成就)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또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강독(講讀)을 마치자, 지사(知事) 이의현(李宜顯)이 아뢰기를,
"유응환(柳應煥)이 나라 일에 관한 상소로 관직이 삭탈되었는데, 이제 듣건대, 그가 죽었다고 하니, 가엾습니다. 마땅히 직첩(職牒)을 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응환(柳應煥)의 일에 대하여 주장한 생각은 소결(疏決)하여 석방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들으니 매우 가엾다. 그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4일 임자

서명구(徐命九)를 사서(司書)로, 이관명(李觀命)을 지돈녕부사 겸 지경연(知敦寧府事兼知經筵)으로, 유숭(兪崇)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조정빈(趙鼎彬)을 선공감 주부(繕工監主簿)로 삼았다.

 

3월 15일 계축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정호(鄭澔)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상(僚相)520)  의 수차(袖箚)는 관계됨이 지극히 큰데도, 즉시 명백하게 하교(下敎)하지 않으시어 흉당(凶黨)으로 하여금 기회를 타고 날뛰며 다시 화심(禍心)을 일으키게 한다면 세상 도의에 대한 걱정이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합계(合啓)에서 논한 바를 전하(殿下)께서 이미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아시면서 아직도 허락을 아끼시니, 이 역적을 토주(討誅)하지 않으면 임금의 무함을 씻지 못하며, 임금의 무함이 씻겨지지 않으면 지난번에 여러 신하들의 먼저 누명을 씻었다고 하는 것도 마침 죽은 사람들의 분노와 원망을 증가시키기에 충분하며, 신들도 또한 임금을 뒤로 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조복(朝服)을 입고 조정에 서서 한갓 녹식(祿食)만 허비하게 하겠습니까?"
하고, 또 잠성 부부인(岑城府夫人)과 풍창 부부인(豊昌府夫人)이 올라올 때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말을 지급하여 호송(護送)하도록 청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잠성 부부인(岑城府夫人)이 참혹한 화(禍)를 당한 이후로 멀리 가서 시골에 있으면서 죄인의 집안으로 자처(自處)하고 여러 번 그의 아들 서명백(徐命伯)을 석방하여 줄 것을 원하였습니다. 특별히 위로하는 유시를 내려 그의 뜻을 편안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책봉(冊封)하는 의식에 참석하여 곤성(坤聖)521)  의 그리워하는 심정을 위로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차자(箚子)로 진달한 것은 적합한데, 내가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신중(愼重)히 하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생각하기를 오래 하였으니 나의 뜻을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적당하며, 계문자(季文字)가 세 번 생각하던 경우522)  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리고 풍창 부부인(豊昌府夫人)이 아직도 향촌(鄕村)에 있다는 것은 실로 나의 잘못이니 특별히 말을 지급하도록 명하고, 그러나 차자 가운데 특별히 석방하도록 청한 것은 내가 어찌 혐의를 피하여 말하지 않았겠는가? 아! 삼수(三手)를 단련(鍛鍊)하는 가운데 그 하나는 무슨 일인가? 비록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기는 하더라도 문목(問目) 밖에 속이는 말을 바쳐 그 옥안(獄案)을 만들게 한 자는 흡사 김성절(金盛節)과 같은데, 또 그 한 사람은 누구인가? 말이 비록 거칠고 난잡하나 몹시 한탄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겠다. 이미 부도(不道)523)  를 범하여 4대신(四大臣)을 무함하였으니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대행조(大行朝)에서 특별히 관대한 은전을 베풀어 비록 반좌(反坐)하는 율(律)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지금 4대신의 원통함을 씻어 주는 때에 무함한 일을 분간하지 않는다면 국가에서의 처분이 거꾸로 됨을 면하지 못하며, 구원(九原)524)  의 여러 신하들이 그것을 안다면 어찌 슬퍼하며 원통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 사람의 허물로 그 어버이를 버리지 않는 것은 바로 성인(聖人)의 도리인데, 더구나 부부인(府夫人)의 의리로 어찌 그 사이에서 불안(不安)하게 여김이 있어야겠는가? 지금 만약 부부인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법을 굽혀 석방한다면 이는 성실(誠實)함이 아니니, 경(卿)도 또한 이를 생각하되 중하게 여길 바도 생각하여야 하며 일은 대의(大義)를 귀하게 여겨야 하니, 부부인을 어찌 이 일로 오래도록 시골 구석에 살도록 할 수 있겠는가? 말을 지급하는 일은 일체로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밤 삼경(三更)에 달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3월 16일 갑인

양사(兩司)에서 지난번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고,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김담(金墰)이다.】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면서 심단(沈檀) 등에 대하여 아뢴 내용 가운데 김몽상(金夢祥)에 관해서는, 비록 성상의 하교로 인하여 그가 역적 박상검(朴尙儉)과 죄가 같지 않다는 점은 대략 알았지마는, 이미 용서하여 내보냈으니 옥사(獄事)를 문초하는 체제에 추문하지 않을 수 없으며, 더구나 역적 박상검의 극도로 흉악한 정상은 김몽상이 반드시 아는 바가 있었을 터이니, 그를 오래도록 의심하는 대상에 두는 것보다는 허위와 실상을 조사하고 분변하는 것만 못하다는 등의 말을 첨가하고, 마지막에는 심단(沈檀)·이세중(李世重)·윤취상(尹就商)·서두창(徐斗昌)·최홍(崔泓)·함희춘(咸熙春)·김구준(金九準)·박재원(朴梓元)·김몽상을 일체로 국문하도록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임인년525)  의 무옥(誣獄)은 갖가지로 허물을 감추려고 꾸몄으니, 이른바 승복(承服)했다는 것도 더러는 이와 같이 공사(供辭)를 바치면 살려줄 뜻이 있다는 것으로 유혹하고서는 공사를 받은 뒤에는 그대로 결안(結案)을 만든 것도 있었으며, 더러는 승복한 초사(招辭)를 먼저 써두고 그 상단(上端)을 말아 죄인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하고는 죄인으로 하여금 강제로 착명(着名)526)  하게 하여 결안을 만든 것도 있었으며, 더러는 거의 죽게 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수장(手掌)을 찍게 하여 결안을 억지로 만든 것도 있었으며, 더러는 승복을 의계(議啓)하고는 물고(物故) 계문을 뒤따라 올린 것도 있었으며, 더러는 다른 죄인을 잡아오는 사이에 형신(刑訊)을 정지하도록 아뢰었다가 곧 승복한 것으로 결안한 문서가 나온 것도 있었으며, 더러는 이미 10여 차례 형신을 받고 난 후 전혀 지각(知覺)이 없었는데도 그 이른바 승복했다는 초사에는 낱낱이 자세하게 적혔으니, 결단코 거의 죽게 된 사람의 말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대체로 이 몇 가지 사항은 매우 수상한 데 관계되며 중앙과 지방에서의 의혹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며 무고한 정상에 대해서는 지금 한창 조사하며 추문하고 있으니, 이러한 등류의 가르쳐 유혹한 것과 허물을 숨기려고 꾸민 자취는 명백하게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그 의심스러운 곳은 적발하여 그 날짜를 상고하여 그날의 집사(執事)·서리(書吏)·나졸(羅卒)을 모두 엄중히 문초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윤봉조(尹鳳朝)에 대하여 먼 곳에 귀양 보내는 처분을 도로 거두는 일은 정계(停啓)하게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전 현감(縣監) 김석강(金錫剛)이 상소(上疏)하여 일찍이 도신(道臣)을 지낸 이로 하여금 각기 잘 다스린 사람을 추천하도록 청하고, 또 만과(萬科)527)  를 설행(設行)하여 방납포(防納布)를 없애서 죽은 사람에게 징수하는 것을 대신하도록 청하니, 우악하게 비답(批答)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3월 17일 을묘

청(淸)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치조(致弔)하고 시호(諡號) 【각공(恪恭)이다.】 를 내렸으며, 인해서 책봉(冊封)을 행하였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가서 맞이하고, 이튿날 반교(頒敎)하고 반사(頒赦)하였다.
3월 18일 병진

한덕전(韓德全)을 정언(正言)으로, 김상옥(金相玉)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삼았다.


 

국청(鞫廳)의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대계(臺啓)로 인하여 임인년528)   무옥(誣獄) 때 서리(書吏)와 나장(羅將)으로 의심스러운 자를 적발하여 엄중히 문초해서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서리 이만준(李晩俊)·윤정은(尹正殷)·장익한(張翊漢)·김익빈(金益彬)·김택귀(金澤龜)·윤필은(尹弼殷)과 집장 나장(執杖羅將) 정기만(鄭起萬)·박시웅(朴時雄)·이기한(李起漢)·이유복(李有福)·오필주(吳弼周)·박차돌(朴次突)·김정구(金鼎九)·김선(金善) 등은 먼저 잡아다 가두었는데, 서리 하종한(河宗漢)·최태제(崔泰齊)는 의금부(義禁府)의 도사(都事)를 보내어 잡아오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서례(胥隷)529)  를 추문(推問)하는 것은 그 무옥(誣獄)의 곡절을 알려고 하는 데 불과할 뿐이니, 단지 몇 사람만 가두어도 전말(顚末)을 알 수가 있는데, 어찌 감옥이 차기를 기다린 뒤에야 알겠는가? 추조(秋曹)530)  의 일반 죄수도 이미 차마 지나치게 못하는데, 더구나 국수(鞫囚)531)  이겠는가? 비록 오늘 가두었다가 내일 방면할지라도 반드시 여러 사람이 듣고서 놀랄 것인데, 국가의 죄수를 가엾이 여기는 도리에 있어서는 더욱 마땅히 이렇게 해서는 안 되니, 긴요한 몇 사람만 가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보내게 하고, 지방에 있는 자는 또한 잡아오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또 이만준(李晩俊)·장익한(張翊漢)·정기만(鄭起萬)·박시웅(朴時雄)·오필주(吳弼周)는 그대로 가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도록 아뢰니, 알았다고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숙빈(淑嬪)532)  의 신도비(神道碑) 귀대석(龜臺石)을 끌어다 운반하는데, 처음에는 1만 명을 분배(分排)하였다가 또 보태어 정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농사철이 닥친데다 또 칙사(勅使)의 행차를 만나게 되매 백성들의 원망이 틀림없이 심할 것이며, 또 백성들의 농사를 손상시키고 해칠 염려가 있으니, 우선 역사를 정지하게 하여 추수(秋收)가 끝나고 땅이 얼기를 기다려 운반하여 들이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의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고 또 선빈(先嬪)의 평소 조심하고 삼간 뜻에 어긋남이 있지만, 역시 중지할 수 없다. 듣건대 돌이 벌써 묘소(墓所)의 15리쯤 되는 곳에 도착했다고 하니, 돌이 있는 곳에서 먼저 갈고 다듬어 그 짐바리를 가볍게 해서 끌어다 운반할 때에 백성들의 농사를 손상시키지 말라는 뜻을 거듭 감영(監營)에 경계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역관(譯官) 홍순택(洪舜澤)은 김성절(金盛節)의 거짓 초사(招辭)에서 나왔는데, 처음에는 장성(張姓)의 역관으로 고(告)했다가 애당초 장성이 없었음을 알고난 뒤에는 홍순택으로 고쳐서 고하고, 포도청(捕盜廳)에서 그의 종을 국문하여 거짓 자복을 받아 홍순택을 장살(杖殺)하였습니다. 종으로서 주인을 증거대는 것은 법전(法典)에서 금하는 바인데, 남의 지시와 꾀임을 받고 주인을 증거대어 역적으로 만들었으니, 더욱 법에 의거하여 처단(處斷)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때 불의후(不義侯)의 일533)  과 같다. 형조(刑曹)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여 법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9일 정사

전교하기를,
"창경궁(昌慶宮) 동쪽에 하나의 조그마한 서재(書齋)가 있는데 바로 효종(孝宗)의 주연(胄筵)534)  인 곳으로, 지금 춘궁(春宮)이 개강(開講)하는 곳으로 삼아 그 서재 이름을 새기기를 ‘장경(莊敬)’이라고 하였는데, 정자(程子)가 애송(愛誦)하던 바 표기(表記)535)   가운데 말이다. 춘방(春坊)의 관원으로 하여금 서문(序文)을 지어 올려 우리 주자(胄子)536)  의 학문을 인도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관소(館所)537)  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접견(接見)하였다. 상칙사(上勅使)가 오는 도중에 병이 심했으므로 의관(醫官) 진필웅(秦必雄)을 보내어 치료(治療)하게 하였다. 임금이 몸소 상칙사의 방(房)에 나아가 문병(問病)하려고 하자, 상칙사가 굳이 사양하면서 감히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므로 중지하였다. 임금이 칙사를 접대하는 즈음에 정성과 예의를 다하니, 칙사가 아주 감격하여 즐거워하였다.

 

오중주(吳重周)를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3월 20일 무오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삼사(三司)에서 【대사헌(大司憲) 김흥경(金興慶), 부제학(副提學) 김재로(金在魯), 집의(執義) 송필항(宋必恒), 부응교(副應敎) 신방(申昉),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김담(金墰) 지평(持平) 권적(權𥛚), 헌납(獻納) 정택하(鄭宅河), 교리(校理) 이기진(李箕鎭), 부교리(副校理) 홍현보(洪鉉輔)·서종섭(徐宗燮), 정언(正言) 이병태(李秉泰)이다.】 유봉휘(柳鳳輝)를 엄중히 국문하는 일과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을 먼 섬에다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는 일을 합계(合啓)하였는데, 어구(語句)의 배치가 지난번 양사(兩司)의 합계와 같았으며, 유봉휘에 대한 계달에는 ‘인신(人臣)의 예의가 없다[無人臣禮]’는 네 글자와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상사(喪事)를 틈타 교제(矯制)538)  하였다.’는 말과 ‘서로 안팎이 되었다.’는 등의 말을 첨가하였다. 이광좌(李光佐)에 대한 계달에는 ‘선왕(先王)의 편치 못한 체후(體候)가 이미 한때의 근심할 바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보호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마땅히 점차 자양분(滋養分)으로 보호하여 주는 도리를 생각해야 할 것인데도, 오로지 망령되고 용렬한 의원(醫員)에게 맡겨 연달아 준급(峻急)한 약제(藥劑)를 투여(投與)하여 참된 원기를 몰래 없어지도록 하여 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고 위중하게 하였으며, 더구나 병세가 위독한 즈음을 당해서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고서 마침내 시약청(侍藥廳)을 미리 설치하지 아니하여 중앙과 지방의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막연하게 환후의 증세가 어떠한 것을 모르게 하였으며,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아주 한없는 슬픔을 품도록 하였으니, 그가 병환에 시중들기를 다잡아 하지 않은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등의 말을 첨가하였다. 김흥경이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정택하 등이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자, 정택하 등이 4대신(四大臣)에 대한 합계(合啓)를 맨 먼저 발의한 대관(臺官) 및 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을 먼 곳에 귀양 보내자는 아룀을 정지하였다.


 

사간(司諫) 어유룡(魚有龍)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지극한 어짊과 융성한 덕으로 왕위에 오른 처음에 기구(耆舊)539)  들이 곁에서 보필하였는데, 불행하게도 간흉(奸凶)들이 국가의 권력을 잡고 갖은 계교로 속이고 가리며, 보상(輔相)540)  은 왕실(王室)의 주석(柱石)인데도 베어 죽이기를 남김없이 하였고, 유현(儒賢)은 국가의 원기(元氣)인데도 해롭게 하기를 더욱 혹독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는 것은 인주(人主)의 달효(達孝)541)  인데도 아첨으로 인도하고 협박하여 선왕의 법을 어지러이 무너뜨려 마침내 아름다운 덕을 엄폐하여 드러나지 않도록 하며, 지극한 은택을 막아 행해지지 않도록 하여 〈소인의〉 소견이 아래서 행해지자 융성한 덕은 위에서 누(累)가 되니, 이것이 온 나라 신민(臣民)의 울음을 삼키며 마음을 썩히고 한없이 슬퍼하며 한스럽게 여기는 까닭입니다. 이것으로 논단(論斷)한다면 간흉(奸凶)의 무리들의 하늘에 사무치는 부도(不道)한 죄는 천벌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는 징계하고 토주(討誅)하는 것을 죄와 벌에 대한 보복(報復)으로 의심하고 비방과 원망을 염려하여 소인(小仁)에 구애되어 대법(大法)을 소홀히 하십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창집(金昌集)이 화(禍)를 입은 뒤 그의 자손(子孫)을 거두어다 죽이고 그의 명망이 있던 아비와 현명했던 아우를 욕보였습니다. 그래서 김수항(金壽恒)의 높은 덕과 우아한 인망, 그리고 김창협(金昌協)의 깊은 학문과 깨끗한 지조에도 심준(沈埈)이 허물을 숨기려고 꾸며서 명예를 더럽혔으며, 더욱 흉독(凶毒)을 멋대로 하여 마침내 석실(石室)542)  에서의 제향을 철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홍계적(洪啓迪)의 깨끗한 결단과 바른 기개는 군간(群奸)에게 미움을 쌓았으며, 마침 승정원의 도승지로 있으면서 함부로 탄핵하려고 몰래 들어온 자를 극력히 막았으므로 흉도(凶徒)들이 이를 갈며 반드시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 조진희(趙鎭禧)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아 근거 없는 국초(鞫招)를 핑계되어 곧바로 잡아다 국문하도록 청하고, 마침내 때려 죽이는 데 이르게 하였으니, 심준과 조진희는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조진희(趙鎭禧) 등의 일은 마땅히 헤아려서 조처하겠다."
하였다.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上疏)하여 신치운(申致雲)이 추정(醜正)543)  한 죄를 엄중히 징계하도록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왕세자(王世子)의 책봉례(冊封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길복(吉服) 차림으로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니, 여러 신하들이 조복(朝服) 차림으로 시위(侍衛)하였다. 흑립(黑笠)에다 청천익(靑天翼) 차림의 왕세자(王世子)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인해서 반교(頒敎)하였는데,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내가 생각하건대, 조종(祖宗)께서 복과 상서를 넉넉히 주시는 도리는 대체로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나라를 오래도록 편안케 하고 길이 다스리는 업(業)은 또한 진실로 조상이 물려준 계책에 의뢰하였다. 큰 기업을 공경히 계승하는 까닭은 앞으로 신기(神器)544)                  를 길이 의탁하게 함이니, 지금 전책(典冊)하는 행사를 당하여 윤발(綸綍)545)                  을 선포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과매(寡昧)546)                  한 자질을 생각하니, 마침 어려운 때를 만나, 계승함이 오히려 나누어지고 흩어지며 시세(時勢)가 점점 위태로움을 민망히 여겼으며, 밝고 아름다운 명을 받게 되니 조종의 업적을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훌륭한 후사(後嗣)를 돌아보니 아름다운 칭찬이 일찍 알려졌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정성은 진실로 천성에서 나왔으며, 총명한 자질(資質)은 스승에게 배우기를 기다림이 없었다. 엄연(儼然)함이 성인(成人)과 같으니 도덕의 모범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보겠고, 좋은 점괘 징거하니 부응(符應)이 드러나도다. 마땅히 군주를 선택하는 상서를 밝혀 주창(主鬯)547)                  의 중대함을 맡김이 적합하도다. 해처럼 밝아서 원량(元良)의 지위를 바로잡으니 성대한 전장(典章)이 새로웠으며, 미리 세워 영원한 법규를 보존하니 옛일을 모방할 만하도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곧 합해지니 이미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이 모두 따랐으며, 큰 계책이 잘 어울러지니 실로 사직과 종묘의 모든 경사이며, 복록(福祿)을 하늘이 거듭 명하니 부탁함에 내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랴? 후세를 인도하고 전대를 빛나게 하니 모두 진색(震索)548)                  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은혜를 미루어 만물에 미치게 하는데 어찌 혜택을 펴서 전하기를 아끼겠는가? 아! 크게 나타내고 계승하여 빛난 기업을 능히 공고히 할 것을 기약하고, 거듭 빛내고 거듭 윤택하게 하여 아름다운 칭송이 함께 일어남을 즐거워한다. 믿고 순종하는 성실함을 얻어 함께 국운(國運)의 오래도록 전해짐을 누릴 것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의현(李宜顯)이 지어 올렸다.】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으로 도로 나아가니,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구례(舊例)에 신묘년549)                  과 정미년550)                  의 책례(冊禮)에는 단지 대전(大殿)에만 사전(謝箋)과 표리(表裏)551)                  를 올리는 예(禮)를 행하였으니, 대비전(大妃殿)과 중궁전(中宮殿)에 사전과 표리를 올리는 예는 대내(大內)에서 행하였으니, 의당 정미년의 사례에 의거해야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미년의 경우는 대전(大殿)에서 친림(親臨)하여 하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왕세자가 외정(外庭)에 나아가서 사전(謝箋)을 올렸지만, 이번에는 권정례(權停例)552)                  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적당하며, 단지 정당(正堂)에서 거행하고 하례를 받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심택현(沈宅賢)이 왕세자(王世子)가 책례(冊禮)한 뒤에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영휘전(永徽殿)에 전알(展謁)553)                  하고 경소전(敬昭殿) 제향(祭享) 때에 행례(行禮)의 거행 여부(與否)를 아뢰니, 임금이 세자(世子)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써 관례(冠禮)를 기다린 뒤에 거행하고 동가(動駕)554)                   때 영접하고 전송하는 절차도 관례를 기다린 뒤에 거행하는 일을 규정으로 정하여 시행하도록 명했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88면
【분류】왕실-종친(宗親)


[註 544]          신기(神器) : 제왕(帝王)의 지위.[註 545]          윤발(綸綍) : 임금의 말씀.[註 546]          과매(寡昧) : 덕이 적고 사리에 어둡다는 뜻으로, 임금 자신의 겸사.[註 547]          주창(主鬯) : 울창주(鬱鬯酒)를 맡았다는 뜻으로, 울창주는 종묘(宗廟)에서 제사지낼 때에 태자(太子) 또는 세자(世子)가 올리므로, 태자 또는 세자를 이르는 말로도 쓰임.[註 548]          진색(震索) : 진(震)은 《주역(周易)》의 괘(卦) 이름으로, 장남(長男)을 뜻하는데, 곤괘(坤卦)의 한 효(爻)가 변하여 진괘(震卦)가 되었음을 이르는 말.[註 549]          신묘년 : 1651 효종 2년.[註 550]          정미년 : 1667 현종 8년.[註 551]          표리(表裏) : 옷의 겉감과 안찝.[註 552]          권정례(權停例) : 조하(朝賀) 때에 임금의 임어(臨御)는 그만두고 권도(權道)로써 의식만 행하거나, 혹은 절차를 다 밟지 않고 거행하는 의식.[註 553]          전알(展謁) : 종묘·문묘·능침 등에 참배함.[註 554]          동가(動駕) : 임금이 어가를 타고 대궐문을 나가는 일.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으로 도로 나아가니,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구례(舊例)에 신묘년549)                  과 정미년550)                  의 책례(冊禮)에는 단지 대전(大殿)에만 사전(謝箋)과 표리(表裏)551)                  를 올리는 예(禮)를 행하였으니, 대비전(大妃殿)과 중궁전(中宮殿)에 사전과 표리를 올리는 예는 대내(大內)에서 행하였으니, 의당 정미년의 사례에 의거해야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미년의 경우는 대전(大殿)에서 친림(親臨)하여 하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왕세자가 외정(外庭)에 나아가서 사전(謝箋)을 올렸지만, 이번에는 권정례(權停例)552)                  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적당하며, 단지 정당(正堂)에서 거행하고 하례를 받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심택현(沈宅賢)이 왕세자(王世子)가 책례(冊禮)한 뒤에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영휘전(永徽殿)에 전알(展謁)553)                  하고 경소전(敬昭殿) 제향(祭享) 때에 행례(行禮)의 거행 여부(與否)를 아뢰니, 임금이 세자(世子)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써 관례(冠禮)를 기다린 뒤에 거행하고 동가(動駕)554)                   때 영접하고 전송하는 절차도 관례를 기다린 뒤에 거행하는 일을 규정으로 정하여 시행하도록 명했다.

 

전교하기를,
"세자(世子)가 하례를 받을 때에 2품(品) 이상의 관원은 으레 답례로 재배(再拜)가 있어야 하며 3품 이하의 관원은 올라가서 자리에 나아간 뒤에 행례(行禮)하는 것이 바로 옛날의 규정인데, 이번에 하례를 받는 경우는 3품 이하의 관원이 행례할 때에 자리 위에 일어섰으니, 이것은 실로 그전에 없었던 바로 체모(體貌)를 손상시킴이 크다. 일어나도록 지도한 필선(弼善)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해당 협시(挾侍)555)   내관(內官)도 또한 전례를 근거로 간(諫)하며 주장하지 못했던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일체(一體)로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반교(頒敎)·반사(頒赦)의 책인(冊印)을 만들거나 쓴 사람 및 책례 도감(冊禮都監)의 당상관과 낭관(郞官)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내렸다.

 

승지(承旨) 김고(金槹)가 입시(入侍)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대사간(大司諫) 이교악(李喬岳)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합계(合啓)를 맨 먼저 발의한 사람은 먼 곳에 귀양 보내고 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은 삭출(削黜)556)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간(臺諫)이 죄는 중한데 형률이 가볍다는 이유로써 논계(論啓)하였기 때문에 전지(傳旨)를 받들지 못했습니다. 대계(臺啓)가 이미 정지되었으니, 먼 곳에 귀양 보내라는 것과 삭출하라는 전지는 마땅히 봉입(捧入)해야 하는데도, 지난번에 청대(請對)를 맨 먼저 발의한 데 대한 전교가 있었으니, 청대에는 원래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은 말하기를,
"전후(前後)에 청대(請對)한 사람은 수범과 종범을 논하지 말고 모두 삭출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심택현(沈宅賢)은 말하기를,
"그 중에 곧바로 참형(斬刑)하도록 청한 자는 단지 삭출하는 것만으로는 불가합니다."
하고, 민진원(閔鎭遠)이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청하니, 상고해 내어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도록 명하고, 또 전교하기를,
"청대(請對) 등의 일은 김일경(金一鏡)이 전적으로 주장하였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각기 견해가 있으니, 만약 그 마음이 김일경(金一鏡)과 부합되지 않는다면 어찌 모두 명령을 들었겠습니까? 신축년557)  에 유봉휘(柳鳳輝)를 토주(討誅)하도록 청할 때에 박태항(朴泰恒)과 이정신(李正臣)은 끝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대(請對)를 무릇 세 차례나 하였으니, 최초에 청대한 여러 신하들은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논하지 말고 모두 관직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내쫓도록 하라."
하였다. 이튿날 승지(承旨) 정형익(鄭亨益)이 전후(前後)에 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도 똑같이 죄주는 것이 적당하다고 굳이 청하고 또 상소(上疏)하여 거듭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합계(合啓)를 맨 먼저 발의한 대간(臺諫)으로 먼 곳에 귀양 보내는 데 해당되어 현재 보고된 자는 양성규(梁聖揆)·이제(李濟)·윤연(尹㝚)이며, 최초로 청대한 삼사(三司)의 관원으로 삭출(削黜)하는 데 해당되어 현재 보고된 자는 이경열(李景說)·이진순(李眞淳)·구명규(具命奎)·이광보(李匡輔)·여선장(呂善長)·유필원(柳弼垣)·김시혁(金始㷜)·이현장(李顯章)·권익순(權益淳)이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89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註 556] 삭출(削黜) : 벼슬을 떼고 내쫓음.[註 55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3월 21일 기미

이기진(李箕鎭)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연접 도감(延接都監) 당상관 신사철(申思喆)이 입시(入侍)하여 말하기를,
"부칙사(副勅使) 아극돈(阿克敦)이 정유년558)                  에 공청(空靑)559)                  을 가지고 왔었는데 정례(定例)로 주는 외에 은(銀) 4천 냥(兩)을 주었으며, 무술년560)                  ·임인년561)                  에 또 나왔을 적에 정유년의 전례를 인용(引用)하여 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번 전례를 인용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전례를 이룬 뒤에 이제 와서 갑자기 변경시켰다가 만약 저들의 노여워함을 만나 혹시라도 나라를 욕되게 한 뒤에 주게 된다면, 애당초 주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신사철(申思喆)이 또 말하기를,
"칙사(勅使)가 돌아갈 때에 교외(郊外)에 동가(動駕)하는 것은 구례(舊例)와 같이 병을 핑계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선조(先朝)에서는 언제나 친히 전송하였는데, 병을 핑계하는 것은 성실성에 부족함이 있다는 이유로써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월 22일 경신

승정원(承政院)에서 유중무(柳重茂)를 석방하여 보내는 명령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를 봉입(捧入)한 승지(承旨)와 그것을 말하지 않은 삼사(三司)의 관원을 석방하여 보내라는 명령을 중지하도록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단지 승지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였다. 당초 백망(白望)이 고변(告變)한 초사(招辭)에 유중무(柳重茂)가 옥관(獄官)으로서 문사 낭청(問事郞廳)을 금절(禁絶)시켜 그들에게 기록하지 못하게 하여 그 사건을 숨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간(臺諫)의 상소로 인하여 잡아다 국문했는데 곧 경솔하게 어긋나는 단서가 없다는 것으로 특별히 용서하므로, 승지 정형익(鄭亨益)이 입시(入侍)하여 간쟁(諫爭)하고 물러나 여러 동료들과 진계(陳啓)하였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사(勅使)를 전송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지난번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고, 양사(兩司)에서 지난번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이병태(李秉泰)이다.】  또 아뢰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교문(敎文)에 관한 일로 김동필(金東弼)에게 탄핵당하였을 적에 이세최(李世最)의 상소에서는 다만 엄폐하고 비호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높이고 권장하면서 하늘을 돕고 해를 받든다는 내용으로 그의 공을 견주었고, 또 의거(義擧)에 앞장서서 대항하며 변론했다는 것으로 그의 절개를 인정하여 자기 마음대로 역적에 아부(阿附)하여 돌아보며 꺼려하는 바가 없었으니, 범죄한 정도가 이거원(李巨源) 등과 비교하여 백 배나 됩니다. 청컨대 먼 곳에 귀양 보내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비변사(備邊司) 당상관(堂上官) 윤헌주(尹憲柱)는 물정(物情)에 맞지 않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유중무가 문사 낭청에게 부탁하여 백망(白望)의 공초를 기록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옥체(獄體)가 지극히 엄격함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역적의 정상이 혹시라도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신문하는 아래에서도 늙어서 정신이 없다는 것을 핑계대고 근거 없는 말로 가리고 숨겼으니, 청컨대, 특별히 석방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세최(李世最)는 삭출(削黜)하도록 하였으며, 윤헌주(尹憲柱)는 ‘순진하고 근신하는 것을 내가 이미 아는데 어찌 지나치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3월 24일 임술

관원을 관왕묘(關王廟)562)   및 선무사(宣武祠)563)  에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임금이 칙사(勅使)를 전송하는 노상(路上)에서 관왕묘를 바라보고 전교하기를,
"내가 지난해에 동교(東郊)의 무안왕묘(武安王廟)564)  를 두루 보았는데 이제 또 남묘(南廟)565)  가 길에서 마주 보이니,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여 내가 충의(忠義)를 흠모(欽慕)하는 뜻을 표하도록 하라. 그리고 선무사(宣武祠)에도 별도로 치제(致祭)하여 내가 성조(聖祖)의 존주 대의(尊周大義)566)  를 우러러 본받음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5일 계해

유숭(兪崇)을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이정소(李廷熽)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지난해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이 지극히 엄격하고 또 분명하였으며, 대행조(大行朝)의 선대 업적을 계승하는 뜻이 사륜(絲綸)567)   사이에 애연(藹然)568)  한데, 원한을 마음대로 갚으려는 무리들이 방자한 뜻으로 일망 타진(一網打盡)하여 대신(大臣)과 정신(廷臣)에게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 악역(惡逆)의 죄과(罪科)에 몰아넣었다. 당고(黨錮)가 사람을 해치는 것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이와 같은 무리의 악독한 수단은 없었다. 만약 대행조(大行朝)의 지극한 인애(仁愛)와 융성한 덕이 아니었으면 조정 신하로서 생명을 보전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앞에서 인도하며 전봉(前鋒)이 되고, 역적 목호룡(睦虎龍)이 뒤에서 호응하며 성원(聲援)하였으니, 그 사이 11인 사건을 발의하여 아뢴 것은 바로 김일경과 목호룡을 도와 협공한 사람이며, 요사한 박상검(朴尙儉)에 이르러서는 바로 김일경과 목호룡을 보좌하고 수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위로 조종조(祖宗朝)의 묵묵히 도우심을 힘입고 또 대행조(大行朝)의 지극한 우애와 사랑을 받아 겨우 요악(妖惡)을 제거하기는 하였지만, 일종(一種)의 사납고 악독한 무리들이 크게 의심과 겁을 내어 몰래 역적 목호룡을 시켜 갑자기 상변(上變)하게 한 뒤에 옥사(獄事)를 단련(鍛鍊)하여 주륙(誅戮)하기를 멋대로 행하였으니, 세간(世間) 천하에 어찌 한 해 이상 끌고 간 국옥(鞫獄)이 있었겠는가?
아! 참혹하도다. 대행조(大行朝)의 흠휼(欽恤)하는 관대한 성택(盛澤)이 아니었으면 그들이 장차 쾌한 마음으로 모두 죽이려던 것이 어찌 두 해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이미 진신(搢紳)569)  의 상소라고 말하였다면 어찌 다만 7인의 상소 가운데 논한 바가 역적 목호룡의 말과 어찌 그렇게도 서로 부합되었겠는가? 그런데 이 상소를 지목하여 이르기를, ‘세제(世弟)570)  를 위해서였다.’고 한 것은 바로 요사한 박상검(朴尙儉)이 종중(從中)571)  하는 말이었다. 때문에 이것이 내가 그들의 간악(奸惡)한 죄를 대행조(大行朝)에 청하였던 까닭이다. 이것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안팎이 서로 부합한 것은 분명하기가 불을 보는 듯하다. 아! 4대신(四大臣)이 나라를 위하는 충성 때문에 참혹하게 무함을 당하였다가 이제 대행조의 덕의(德意)가 드러나 대신들의 원왕(冤枉)572)  을 씻게 되었으니, 그들을 무함했던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는 것이 불가하지는 않지만 내가 심하게 다스리지 않는 것은 또한 의도(意道)가 있다. 그러나 그 시비(是非)를 밝히는 것은 바로 인주(人主)가 맡아서 다스려야 할 바이니, 더욱 중앙이나 지방으로 하여금 지난날 간흉(奸凶)들이 나라를 그르친 일을 환하게 알도록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조금이라도 대행조의 융성한 덕에 누(累)를 끼칠 수는 없다. 그러나 거짓으로 자복하여 간흉들의 계교를 이루게 한 사람에게 대해서는 결단코 용서할 수 없으며, 살기를 도모하여 남을 모함한 자에 대해서는 징계하고 두렵게 하여 경계할 것이다. 아! 그대 승정원의 신하들은 나의 이러한 뜻을 받들어 관각(館閣)의 신하로 하여금 글을 지어 반포하여 모두 중앙과 지방으로 하여금 환하게 처분(處分)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듣건대 강원도(江原道)의 황장산(黃腸山)에 적간(摘奸)하러 장생전(長生殿)에서 보낸 감관(監官)이 무뢰인(無賴人)을 많이 거느리고 시골의 마을에 멋대로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재물을 겁탈(劫奪)하므로, 본읍(本邑)에서 잡아 가두고 감영(監營)에 보고하면 본전(本殿)573)  에서는 또 다른 감관을 보내어 그 전처럼 폐단을 일으켜 봉산(封山)574)   근처의 백성들이 난리를 만난 것과 같다고 하기 때문에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조사하여 신문하니, 두 번씩이나 감관을 보낸 것은 실제의 상황이었습니다. 봉산은 사체가 중대하니 만약 적간(摘奸)할 일이 있으면 입계(入啓)하고 낭관(郞官)을 보내거나 혹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도록 해야 하는데, 계품(啓稟)도 하지 않고 이전에 없던 규정을 새로 만들어 내어 민간(民間)에 폐단을 일으키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해당 제조(提調)를 모두 파직(罷職)하고 폐단을 일으킨 감관이나 따라간 사람들을 함께 본도에서 엄중하게 형신(刑訊)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고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도록 하며, 빼앗은 백성의 재물인 전포(錢布)·주면(紬綿) 기타 잡물(雜物)은 일일이 징수(徵收)하여 본주인(本主人)에게 돌려주는 뜻으로 분부하는 일을 윤허(允許)하여 내리소서."
하였다.

 

 

 

교리(校理) 김진상(金鎭商)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적에 사친(私親)575)  을 천장(遷葬)할 때에 망곡(望哭)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었는데, 신축년576)  에 대신(臺臣) 이제(李濟)가 신의 죄를 추론(追論)하였습니다. 대체로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아비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쫓겨난 어미를 위하여 상복(喪服)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대개 어미가 쫓겨나면 아비와의 관계가 끊겼으며, 아들은 아비의 뒤를 계승해야 하므로, 상복을 입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왕조(王朝)의 예절은 필서(匹庶)에 비교하여 더욱 엄격하며, 신사년577)  의 사건은 또한 어미믈 내쫓는 데 비교할 뿐만이 아니니, 그 당시 시마복(緦麻服)을 입게 한 제도로 이미 《예경(禮經)》의 정의(正義)를 잃은 것이며, 임오년578) 초기(初朞)579)   때에 이르러 성고(聖考)께서 곡(哭)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여 망곡(望哭)하는 예(禮)를 행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초기 때에도 오히려 곡을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개장(改葬)할 때이겠습니까? 가령 말하기를, ‘예법으로 막는 것이 아무리 엄격할지라도 사사로운 은혜는 끊을 수 없다.’고 한다면 대내(大內)에서 곡을 하여 지정(至情)을 펴는 것은 혹시 가하겠지만, 만약 궁관(宮官)과 대조(大朝)의 신료(臣僚)를 거느리고 의식을 베풀며 망곡하여 예절을 차리는 것은 결코 그것이 불가한 줄 압니다. 신이 글로 논한 것은 다만 은미할 때 방지하려는 뜻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바로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으로 예절에 지나친 예절을 하지 말도록 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이는 바로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시당초 이미 저지당하였고 뒤에 또 근거가 없는 말로 명예를 손상시켰으며, 마침내 의리를 없애고 아첨을 바치는 무리가 다투어 일어나서 여럿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휘호(徽號)를 짓자고 청하기까지 하는 것은 한몸의 사사로운 욕심을 성취시키면서 우리 임금을 예절에 어긋나는 데로 빠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지나간 일을 어찌 반드시 깊이 혐의스럽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흥경(金興慶)이 상소(上疏)하여 소결(疏決)을 물려서 의금부의 이졸(吏卒)을 추핵(推覈)하기를 기다린 뒤에 거행하도록 청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본부(本府)의 전계(前啓) 중에서 전후(前後)에 발계(發啓)580)  한 대신(臺臣)을 목시룡(睦時龍)과 일체로 엄중히 국문하는 일에 대하여 의견에 차이가 있었던 것은 그 당시 대계(臺啓)가 아무리 극도로 음흉(陰凶)할지라도 대신(臺臣)을 국문하는 것은 국가의 체모에 미안(未安)하므로 주견(主見)을 굽혀가며 따라서 참석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소결(疏決)은 실로 원통함을 씻는 것이니, 그 가운데 의심스러운 것은 우선 예졸(隷卒)을 추문하기를 기다리되, 이것 때문에 물려서 거행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신(臺臣)에 관한 일은 바로 나의 뜻과 부합이 된다."
하였다.


 

 

 

헌납(獻納) 정택하(鄭宅河)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언제나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나는 남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써, 지난날의 참혹하고 악독함을 본받지 말라는 뜻으로 신하들을 힘쓰게 하고 경계하셨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오늘날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혹시라도 남이 나를 저버리는 데서 말미암아 지난날의 원수를 갚으려 한다고 여기시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음과 뜻이 성실하지 못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유정(留正)을 책망하기를, ‘붕당(朋黨)의 화(禍)는 진신(搢紳)에게 그쳐야 하는데 옛날에 붕당을 미워하여 제거하려 하는 자가 가끔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이르렀으니, 대체로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을 살피지 아니하고 다만 붕당을 제거하는 것만 힘쓰게 되면 그 전해지는 피해가 장차 충신(忠臣)과 사신(邪臣)을 분변하지 못하는 데 이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 오늘날 전하의 이목(耳目) 구실을 하는 직임에 있기가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간사한 자를 포용하고 죄를 용서하여 주는 것만으로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정치를 하려고 하시니, 주부자(朱夫子)가 이른바 ‘세상의 인주(人主)가 중도(中道)를 인정하기를 모호하고 구차스럽게 하며 선(善)과 악(惡)을 구분하지 않고 지극히 너그럽고 지극히 넓은 아량을 힘써 베풀려고 하여 마침내 시비(是非)가 거꾸로 되고 현명하고 현명하지 않음이 번갈아 어지럽힌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향기가 나는 풀과 악취가 나는 풀은 이랑을 같이하지 못하며, 얼음과 숯은 그릇을 같이하지 못하니, 그 정상(情狀)이 이미 다른데 억지로 함께 하려고 하면 음양이 서로 다투게 되고 시비가 각기 대립되어 진실로 양편이 서로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해결될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피차를 구분하지 않고 어물어물 용납하는 것으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도리로 삼는다면 그들의 시끄럽게 다투는 것을 증가시키기에 알맞으며, 끓는 물을 드날리면서 끓는 것을 멈추게 하고 기름을 부으면서 불을 끄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이것이 송(宋)나라 원우(元祐)581)   때의 조정(調停)과 건중(建中)582)   때의 지평(持平)583)  이 모두 후세의 비웃음을 받는 까닭입니다. 지금 역적을 토주(討誅)하자는 의논은 그 근본을 캐보면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이 수범(首犯)이 되었습니다. 혐의를 무릅쓰고 나타냈다는 말과 언문(諺文)의 전교를 도로 바쳤다는 일은 크게 나라 사람들이 함께 주벌(誅罰)해야 할 바이며, 또 유봉휘(柳鳳輝)의 상소가 나온 뒤에 공의(公議)를 안중(眼中)에 두지 않고서 앞장서서 변명하며 구원하였고, 또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 뒤에도 바로 말이 동궁(東宮)에 관계된다고 하여 옥안(獄案)에 쓰지 말도록 하는 뜻으로 함께 연석(筵席)에 올라 구차스럽게 임시 변통으로 꾸며 억지로 춘궁(春宮)을 위안한다고 말하였으며, 백망(白望)의 공초가 나온 뒤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되는 뜻이 없이 추구하여 조사하는 방법은 생각지도 않고 감히 본부(本府)에 옮겨서 국문하도록 청하였으며, 억지로 고발당한 의금부(義禁府)의 당상관을 내보내어 백망을 곤장으로 쳐서 죽인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아! 원통합니다. 춘궁을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한 역적을 도로 돕고 춘궁을 위하여 상변(上變)한 자를 기필코 죽이려 하되 다시 캐어 조사하지 않고 춘궁을 위안한다고 하니, 그것이 과연 말이 조리에 맞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귀를 막고 종(鍾)을 훔치는 것이니 그 죄가 더욱 크며, 유봉휘는 김일경과 목호룡의 근본이 되니 모두 죄를 추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능주(綾州) 등 다섯 고을의 전세(田稅)를 포구(浦口)로 내보내면서 나주(羅州) 영산강(榮山江) 4, 50리 되는 지역을 내버려 두고 멀리 3, 4일 길의 법성포(法聖浦)로 수송하게 하니, 백성들의 폐단을 민망히 여길 만합니다. 원하건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함창 현감(咸昌縣監) 권수(權授)는 어리석고 망령되며 여색(女色)을 탐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며, 영덕 현령(盈德縣令) 홍정보(洪鼎輔)는 형장(刑杖)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법 밖에 형벌이 지나쳐 부녀(婦女)에게까지 이르니, 모두 파직(罷職)시키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요즈음의 일에 내가 윤허를 아끼는 것은 또한 주견(主見)이 있기 때문이니, 어찌 대각(臺閣)을 가볍게 여기거나 조정의 신하를 의심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지난날의 안옥(按獄)이 비록 참혹하다 하더라도 이제 와서 추탈(追奪)하는 것은 내가 지나치다고 여긴다. 수령(守令)에 대한 일과 상소 끝부분의 일은 모두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가서 임인년584)  의 무옥(誣獄)을 소결(疏決)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치중(洪致中), 동의금부사(同義禁府事) 이기익(李箕翊)·김유경(金有慶)·박사익(朴師益),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봉상(李鳳祥), 형조 참의(刑曹參議) 안중필(安重弼), 승지(承旨) 이교악(李喬岳), 집의(執義) 송필항(宋必恒), 응교(應敎) 신방(申昉),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김담(金墰), 지평(持平) 권적(權𥛚),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서종섭(徐宗燮),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입시(入侍)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목호룡의 상변(上變)은 없는 사실을 꾸며서 만들지 않음이 없습니다. 정인중(鄭麟重)의 무리가 스스로 문인(文人)이라 일컬었으며, 목호룡도 또한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기 때문에 서로 교유하였는데, 목호룡은 실로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심복(心腹)이었습니다. 그래서 기필코 없는 사실을 꾸며 남을 모함하여 이이명(李頤命)과 그와 서로 친한 사람에게 미치도록 하였습니다. 정인중이 형가(荊軻)585)  에 대하여 읊은 시(詩) 같은 것은 바로 정인중이 젊었을 적에 지은 것으로 한때 전파되었었는데, 목호룡이 잡아당겨 형가와 섭정(聶政)586)   같은 사람을 구한다는 증거를 만들었으며, 이희지(李喜之)의 낙조시(落照詩)는 사물을 읊은 작품에 지나지 않는데도 목호룡이 부도(不道)의 말이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호룡의 처음 공초 안에 이희지가 목호룡에게 둔갑(遁甲)하는 술수를 물은 것은 바로 목호룡을 처음 본 날이었으며, 계묘년587)  의 목호룡 초사에도 역시 이희지를 봉안역(奉安驛)에서 처음 보았는데 입에서 떨어지는 한 마디의 말도 국가에 화(禍)가 되는 말이 아님이 없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정인중 등이 목호룡에게 형가(荊軻)와 섭정(聶政)의 유(類)를 묻고, 김용택(金龍澤) 등이 백망(白望)을 대하여 세상에 유비(劉備)588)   같은 이가 없다는 말을 발설하여 각기 손바닥에다 글자를 쓰고, 이천기(李天紀)가 목호룡을 대하여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에 대한 말을 발설했다고 하였는데, 모두 초면(初面)에 서로 만나 보는 날의 묻고 대답한 내용입니다. 이희지 등이 이미 미치거나 본심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설사 불궤(不軌)의 마음이 있었을지라도 바로 둔갑하는 술수와 나라에 화가 되는 말로 자객(刺客)을 찾아다니며 구하고, 유비(劉備)를 추대(推戴)하는 것과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 등의 말을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발설한다는 것은 절대로 그럴 이치가 없습니다. 임인년 옥사(獄事)의 근원은 오로지 여기에 있었으니, 이밖의 지엽(枝葉)격인 천언만어(千言萬語)가 모두 허망(虛妄)한 데로 돌아간 형상은 곧 이것에서도 아주 환하게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삼수(三手)’는 하나는 칼이고 하나는 약(藥)이며 하나는 국상(國喪)을 틈타 왕명을 고치는 것입니다. 칼에 대해서는 의금부에서 죄인의 죄상을 조사한 서류함 속에 비치하여 두었기 때문에 좌정(坐定)하여 국문할 때에 내보였는데 바로 자루가 부러진 쇠로 된 하나의 무딘 일반 칼이었으며, 요즈음 세상의 행객(行客)이 말 안장에 걸고 다니는 보통칼이었으므로 참여하여 앉아 있던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며 웃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이것을 비수(匕首)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비슷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목호룡이 처음에는 두 척(尺)의 칼이라고 하였다가 그것을 찾아내어 보고서는 또 본래 한 척(尺)의 칼이라고 말하여 그의 말이 수시(隨時)로 변경되었으니, 더욱 웃을 만한 일입니다. 일반 사람들도 이러한 등의 물건을 서로 빌리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인데, 이 일로 역적을 모의하였다고 한다면 세간(世間)에서 칼을 빌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 다른 절박(節拍)589)  은 없었고 단지 한 자루의 칼을 찾아낸 것으로 장물(贓物)을 잡았다고 하면서 곧바로 김용택을 형벌하도록 청하는 단서로 삼았으니, 고금(古今) 천하(天下)에 어찌 이와 같이 사리에 맞지 않는 역적 모의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대급수(大急手)의 허망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약(藥)에 대해서는 이헌(李瀗)의 초사에 이르기를, ‘이이명(李頤命)이 독약(毒藥)을 사가지고 와서 두 갈래로 나누어 주었는데, 한 파(派)는 서덕수(徐德修)에게, 한 파(派)는 이기지(李器之)·이천기(李天紀)의 무리였다.’고 하였으며, 서덕수의 초사에 이르기를, ‘은(銀) 3백 냥(兩)을 장세상(張世相)의 처소에 보냈는데, 장세상이 2백 냥으로 백망(白望)이 매수한 역관(譯官) 장씨 성(姓)을 가진 사람에게 샀다.’고 하였습니다. 서덕수가 이미 장씨 성의 역관에게서 샀다고 말하였다면 이는 정유년590)  에 사왔다고 하는 약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헌의 초사에서 이른바 이이명이 가지고 와서 두 갈래로 나누어 준 가운데 한 파(派)의 서덕수에게 주었다는 것은 허망한 데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김성절(金盛節)의 초사 안에, ‘정유년 사행(使行) 때 이기지 부자(父子)가 역관 장판사(張判事)란 자를 시켜 〈약을〉 사가지고 왔다.’고 하였는데, 그 사행에는 원래 장씨 성의 역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장 역관이 사가지고 온 약을 김 상궁(金尙宮)과 함께 모의하여 일차로 시험삼아 사용하였더니 곧바로 누런 물을 토해내었다고 하였는데, 만약 누런 물을 토해낸 것이 장 역관의 약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장씨 성을 가진 그런 사람은 원래 없었으며, 만약 이이명이 사가지고 온 약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누런 물을 토해 낸 것은 경자년591)   겨울에 있었고, 이이명의 사행은 신축년592)   봄에 되돌아 왔습니다. 김성절의 초사에 또 이르기를, ‘누런 물을 토해낸 뒤에 이기지의 무리가 약이 맹렬하게 독하지 않다고 여겨 다시 마땅히 은(銀)을 모아 다른 약을 사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이기지가 그의 아비를 따라 북경(北京)으로 갔다면 이것 또한 허망한 데로 돌아갔으며, 장씨 성의 역관은 이미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추문하니, 김성절이 또 홍순택(洪舜澤)을 지목하여 약을 사온 역관이라고 하였습니다. 홍순택이 정말로 약을 사온 사람이었으면 처음에는 어떻게 장씨 성의 사람으로 현저하게 고발하였다가 뒤에 변경시켜 홍씨라고 하였겠습니까? 포도청(捕盜廳)에서 또 홍순택의 종 업봉(業奉)을 찾아내어 잘 달래 가르쳐서 자복을 받았는데 종으로서 주인을 증거대는 것은 원래 법전(法典)에서 금지하는 바이니, 이것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데 다른 것이야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홍순택은 끝내 자복하지 아니하고 죽었으며, 그의 숙부(叔父) 홍성주(洪聖疇)까지 엄중한 형신(刑訊)으로 조사하고 추문하였으나 끝내 자복을 받지 못하였으니, 홍순택이 약을 사가지고 왔다는 말도 허망한 데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약을 목호룡은 작기가 소합원(蘇合元) 같다고 하였으며, 정우관(鄭宇寬)은 크기가 콩알만하다고 하였고, 업봉(業奉)은 크기가 계란만 하나 조금 작다고 하였으며, 목호룡은 빛깔이 푸르다고 하였고, 이영(二英)은 누른 빛깔이라고 하였으며 업봉은 누렇고 검은 빛깔이라고 하였으니, 똑같은 약인데 그 모양과 빛깔이 어찌 이와 같이 각기 다르겠습니까? 약에 관한 일이 이제야 거짓말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약을 사용한 한 조항은 이정식(李正植)의 초사 안에 ‘11월 무렵에 장세상이 말하기를, 「이소훈(李昭訓)이 독약(毒藥)을 마시고 바야흐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한다.」고 했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소훈은 11월에 죽었습니다. 서덕수의 초사에는 ‘6월 무렵에 은 3백 냥을 장세상의 처소에 보내어 그로 하여금 독약을 구하도록 하여 동궁(東宮)의 주방 나인(廚房內人) 이씨(李氏)를 시켜 음식에 타서 사용하게 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이소훈이 6월에 죽었습니다. 6월과 11월은 이와 같이 서로 반대가 되며 더구나 신축년 6월에는 전하께서 바야흐로 잠저(潛邸)에 계셨는데, 어떻게 동궁(東宮)의 주방이 있었겠습니까? 허망한 것의 첫째입니다. 그리고 서덕수의 초사에는 ‘장세상을 시켜 은 2백 냥으로 독약을 구하도록 도모하였는데, 이 약은 장세상에게 구하도록 도모한 것이며 밖에서 보낸 것은 아닙니다.’ 하고, 정우관의 초사에는 ‘서덕수·김창도(金昌道)·이정식이 궤(樻) 가운데서 한 개의 봉(封)한 물건을 꺼내어 그로 하여금 장세상에게 전해 주도록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약은 봉하였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틈을 기다려 장세상에게 전해 주었다고 하였으니, 이 약은 밖에서 보낸 것입니다. 두 사람의 초사가 이와 같이 서로 틀리니, 허망한 것의 둘째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약을 사용한 김 상궁(金尙宮)이 소훈(昭訓)의 이 궁인(李宮人)을 살해하였으나 끝내 그런 사람이 없었으니 허망한 것의 셋째입니다. 이른바 소급수(小急手)의 허망함은 알 수가 있으며, 이른바 평지수(平地手)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국상(國喪)을 틈타 왕명을 위조(僞造)하여 폐출(廢黜)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써 고발하였으나 이 일을 주장한 사람은 지열(池烈)이었는데 자신이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뒤에는 백열(白烈)이가 되었고 백열이 자복하지 않고 죽으니, 그 뒤에 또 갑자기 궁성(宮城)의 호위(扈衛)하는 일을 꾸며내어 은연중 이것으로 폐출하는 일을 증거대려고 하면서 당시의 군흉(群凶)들이 청정(聽政)하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찬역(簒逆)하는 죄과(罪科)로 몰아넣었으니, 그 뜻이 여러 신하들을 터무니없이 모함하는 데 두었을 뿐만 아닙니다. 궁성을 호위하는 것으로 역적 모의를 하였다는 것은, 생각건대 어찌 다분히 변명을 해야겠습니까마는, 김창도 등의 초사에 ‘애당초 소론(少論)을 쫓아내어 들어올 수 없게 하고 또 소장(疏章)을 거절하고 막아버리려는 계획이었다.’고 하니, 본래는 역적 모의에 관계된 것이 아닌데 그 당시 국청(鞫廳)에서 기필코 역적 모의로 몰아넣으려 하니, 죄인들도 의향(意向)을 받들어 대부분 반역했다는 것으로 자복하여 이것으로 여러 대신들을 터무니없이 무함하려고 하였으니, 그 무리에게는 죽을 곳에서 도망갈 길을 찾는 계책이 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플 만합니다. 그 사이의 절차(節次)는 이삼(李森)이 〈외직(外職)으로〉 나가 충청도 병사가 되었으며, 유취장(柳就章)은 중군(中軍)이 된 한 조항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삼이 충청 병사가 된 것은 실로 자신이 구한 데서 나온 것이니 이것은 온 조정에서 다 함께 아는 바인데, 이것이 역적 모의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정말로 유취장을 중군으로 끌어다 함께 모의하려는 바탕으로 삼으려 하였다면 당연히 유취장과 미리 계획을 도모하고 정녕코 서로 약속한 뒤에야 이삼을 내보낼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이삼이 이미 나가고 유취장이 청촉(請囑)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유취장을 차임(差任)하였으며, 또 어찌 곧바로 유취장을 평안 병사의 수망(首望)으로 주의(注擬)하였겠습니까? 얽어서 배치한 계책이 정말 이와 같았겠습니까? 유취장의 초사 안에 12월 초5일에 여러 대신(大臣)들이 이건명(李健命)의 집에 모여 호위하는 일을 모의하였다고 하였는데, 12월 초5일은 바로 이건명이 출강(出疆)593)  한 뒤였으니, 이것은 그 당시 국청에서도 허망함을 알고 다시 유취장에게 물으니 유취장이 즉시 그것은 속인 것이었음을 자복하였습니다. 이 한 가지 단서를 들면 다른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궁성 호위에 대한 한 가지 일이 이와 같이 거짓말로 돌아갔으니, 이른바 평지수(平地手)라는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옥사(獄事)에서 가장 긴요한 것은 삼수(三手)에 벗어나지 않는데, 그 가운데 칼에 대한 일과 왕명을 위조(僞造)하는 일은 애당초부터 이미 귀착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저 무리들도 많은 지절(枝節)594)  들을 발생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유독 약에 대한 일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3년 동안 기필코 단련(鍛鍊)시키려고 하여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한 뒤에도 오히려 김씨 성(姓) 궁인(宮人)의 일을 버리지 않았으며, 전하께서 실제로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명백하게 하교(下敎)한 연후에야 비로소 정계(停啓)하였으니, 이 한 가지 사항도 마침내는 허망한 데로 돌아갔으며, 그사이 허다한 절막(節拍)이 허망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은(銀)을 모으는 한 가지 일은 저 무리들이 한 가지 큰 중요한 문제로 삼았기에 우선 신이 상세하게 아는 것으로 말하겠습니다. 우홍채(禹洪采)가 승복(承服)한 초사 가운데 황해도 병사가 성(城) 쌓을 물력(物力)을 얻으려고 청한 보장(報狀)595)  을 김성행(金省行)의 말로 그의 할아버지596)  에게 제급(題給)을 받았는데, 서목(書目)에는 조송(趙松)이 어느 곳에서 성첩(成貼)597)  하였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더욱 매우 맹랑(孟浪)합니다. 그 당시 신이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대죄(待罪)598)  하였기에 이 일을 상세히 압니다. 최초로 물력을 얻으려고 청하였을 적에 대신(大臣)이 지급할 물력이 없다는 것으로 걱정하였는데, 신이 생각하기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을 때에 황해 병영(黃海兵營)의 물력을 빌려다 썼으니 그 댓가로 서남(西南)에서 쌀 수천 석(石)을 환산하여 거두고 이 쌀로써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대신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신의 말대로 제급(題給)을 허락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물력이 이미 다 떨어졌다는 것으로 급히 보고하자 대신이 다시 신에게 물었는데, 신이 지금은 달리 지급할 재물이 없으니, 방제(防題) 외에는 다른 계책이 없다고 하자 대신이 신의 말대로 방제목(防題木) 20동(同), 쌀 수백 석(石)을 비록 지급하려고는 하였으나 실제로 나올 곳이 없었는데, 대신이 어떻게 제급을 허락하였겠습니까? 더구나 서목(書目)을 제송(題送)599)  할 때에는 반드시 당상관의 결재를 받아 여러 당상관에게 두루 보인 뒤에 돌려보내는 것은 비국(備局)의 규례(規例)입니다. 신이 어찌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 사건만으로 관찰하건대, 그 허망됨이 이와 같으니 다른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초사에 모두 은(銀)을 모아 국면(局面)을 바꾸려고 도모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으니, 대체로 국면을 바꾸려고 도모하는 것은 그 죄가 진실로 사형에 해당되지만, 이미 반역을 도모한 것이 아니면 자신이 직접 도모한 외에 그 실정을 알고 고발하지 않은 경우는 당연히 사형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각 사람들이 이렇게 자복을 하면 혹시라도 살아날 방도가 있을 것으로 바라고 이에 여러 당상관의 의향을 받들어 더러는 사리에 맞지 않게 거짓으로 공초하였다가 승복(承服)한 뒤에 이르러서는 그 승복한 조건이 어떠한가는 묻지 않고 일제히 모두 반역을 도모한 데 함께 참여한 것으로 결안(結案)하여 조율(照律)하였으니, 이와 같은 옥사(獄事)의 체제는 전고(前古)에 없었던 바입니다.
그리고 신 등이 전후의 옥안(獄案)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니, 고발한 사람의 말이 비록 대단하게 어긋나고 착오된 것이 있어도 하나도 목호룡에게는 힐책하여 묻지 않고 다만 고발당한 자에게만 핍박하며 묻는 것으로 일을 삼아, 오늘에 한 문목(問目)을 첨가하고 내일에 한 문목을 첨가하여 좌우에서 번갈아 신문한 것이 그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며, 또 듣건대 형옥(刑獄)의 참혹하고 악독함은 차마 보지 못할 부분이 있었으며, 또 주장(朱杖)으로 좌우와 전후를 찌르고 때려 형신을 받아 죽은 사람의 갈비뼈가 모두 부러졌고 창자가 겉으로 나오기도 하였으니,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참혹하고 악독함이 이미 이와 같았다면 이 옥사에 말려든 자는 비록 입이 백개가 있더라도 그 누군들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3년 동안 옥사를 다스리는 데에서 살아나온 자가 거의 없고 죽은 자가 40인이나 많은 데 이르렀으니, 고금(古今) 천하(天下)에 어찌 이와 같은 옥사가 있겠습니까? 선왕(先王)께서 이와 같은 것을 알고서 더러는 한재(旱災)로써 여러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명하기도 하고, 더러는 노론(老論)을 모조리 처치하려는 계책이라고 하여 엄중히 배척하셨으니, 양 대신(兩大臣)이 화(禍)를 당하였을 적에 또한 도로 거두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따라서 선왕(先王)의 본심(本心)은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불쌍히 여겼음을 볼 수 있는데, 군흉(群凶)들이 극력 다투며 맞붙어 싸우느라 마침내 살생(殺生)하기를 꺼리는 성덕(聖德)을 막아서 시행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슬픔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치중(洪致中) 등이 모두 민진원(閔鎭遠)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비망기(備忘記)에 이미 대개(大槪)를 말하였는데,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한 뒤에 궁료(宮僚)를 인견(引見)한 일이 있었다. 그 뒤에 흉악한 말이 차마 듣지 못할 부분이 많았었다. 비록 필부(匹夫)라도 차마 더럽히고 욕되는 것을 그 몸에 더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내가 선조(先朝)에서 물려준 체통을 받고서 어떻게 차마 이런 더러운 이름을 당해야 하는가? 당론(黨論)이란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마는, 만고(萬古) 천하에 어찌 임인년600)  의 사건과 같은 것이 있었겠는가? 만일 대행조(大行朝)의 지극한 인애와 융성한 덕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어떻게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목호룡의 변서(變書) 가운데 동궁(東宮)의 씻기 어려운 무함을 씻는다고 말하였는데, 실제로는 그가 씻기 어려운 이름으로써 나에게 더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스스로 단념하고 일찍이 상서(上書)한 적이 있었다. 역적 목호룡이 이미 나에게 음흉한 말로써 더하였으니,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신하가 그 죄를 다스리도록 청해야 옳은데, 다만 이 일단(一段)을 빼버리도록 청하였으니, 빼버린다고 하는 것은 겉으로는 좋은 말이 되지마는, 실제로는 나를 암담(黯黮)한 가운데다 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 계책이 더욱 교묘하므로, 만일 끝까지 추문하려고 하면 옥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단지 빼버리도록 청하였다고 하니, 그가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사책(史冊)의 내용일지라도 만일 이러한 말이 있다면 내가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인데, 나 자신이 도리어 이렇게 망측(罔測)한 무함을 당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김일경(金一鏡)의 신축년 상소도 목호룡의 변서(變書)와 마찬가지이다. 진신(搢紳)의 상소라고 하는 것은 조정에 가득한 신하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단지 7인만으로 그쳤는데도 진신(搢紳)의 상소라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들 가운데서도 어찌 그 흉악하고 참혹한 것을 아는 자가 없겠는가마는, 김일경의 위세(威勢)를 두려워하여 한 사람도 말하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김일경의 상소를 동궁을 위하는 상소라고 말한 자는 바로 요사스런 박상검(朴尙儉)이 교묘하게 못된 계책으로 농락하는 말이었으니, 이것이 내가 그의 죄를 대행조(大行朝)에 청하게 된 까닭이었다. 만일 대행왕(大行王)의 우애(友愛)가 아니었으면 어찌 오늘날에 있을 수 있었겠는가? 박상검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변서(變書)가 나와 한편의 조정 신하들을 모두 도륙(屠戮)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였으니, 참혹하도다. 삼수(三手) 가운데 이른바 칼에 대해서는 어찌 이것을 반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추안(推案)을 열람하면서 칼을 주었다는 조목을 보고 이미 의심을 하였었는데, 이제 대신(大臣)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 사람이 서로 칼로 선물하는 자가 많은데, 이것은 김용택(金龍澤)이 우연히 백망(白望)에게 칼을 준 것에 불과한데 목호룡이 이 일로 인해서 모아다 만든 것이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칼에 대한 말은 이미 터무니 없는 데로 돌아갔다. 그리고 약(藥)으로 말한다면 사실과 틀리는 것이 매우 심하다. 이소훈(李昭訓)이 죽은 것은 원래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었으니 허망함이 극도에 달하였다. 지열(池烈)에 이르러서는 선조(先朝)의 늙은 상궁(尙宮)이다. 그가 늙은 궁인(宮人)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이 있기에 반역을 하였겠는가? 마침 목호룡의 아는 바가 되어 그것으로 인하여 증거를 삼았는데, 그가 어찌 감히 국상(國喪)을 틈타 왕명을 위조(僞造)하겠는가? 또 그 당시 이미 죽어 뼈만 남은 뒤에 아무리 반역을 하려고 하더라도 할 수 있겠는가? 궁성(宮城) 호위(扈衛)에 대한 말은 물의(物議)로 관찰하건대 이미 그것이 거짓인 줄 알았는데, 지금 또 들으니 더욱 그 허망됨을 알겠다. 거짓으로 고(告)하는 자가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 망령되게 온전히 살기를 바라서 오로지 죄를 여러 신하들에게 돌리면서 스스로 벗어날 계책을 삼는 데 이르렀다면, 그 실정과 태도가 매우 가슴 아프다. 거짓으로 자복한 자는 거론(擧論)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거짓으로 자복한 가운데서도 그 정상(情狀)을 캐어보면 각자가 동일하지 않으니,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박사익(朴師益)은 말하기를,
"거짓으로 고한 자는 죽을 곳에서 도망갈 곳을 찾아 다른 사람을 무함하고 해치게 하였으며, 거짓으로 자복한 자는 말이 비록 얕고 깊음의 같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체(大體)는 모진 고초를 견디지 못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문목(問目)의 사연(辭緣)을 지만(遲晩)한 것으로 승복(承服)하였다고 하면서 결안(結案)한 것은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김용택(金龍澤)의 결안(結案)입니다. 그에 연좌되어 적몰(籍沒)된 경우는 모두 마땅히 도로 거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정인중(鄭麟重)·심상길(沈尙吉)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정인중(鄭麟重)은 손바닥에 ‘나라 국[國]’ 자를 썼는데, 이것이 어찌 반역이 되겠는가? 심상길(沈尙吉)은 김용택(金龍澤)과 잘못 교유(交遊)한 것으로 공초를 바쳤으니, 역시 무고(誣告)한 것이 아니다. 모두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유경(金有慶)이 말하기를,
"조흡(趙洽)·김성절(金盛節)·이정식(李正植)·김창도(金昌道)는 당연히 무고(誣告)로 논단(論斷)해야 합니다."
하였다.
김민택(金民澤)·이천기(李天紀)에 이르러서는 석방하도록 명하고, 백망(白望)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더욱 논할 만한 것이 없으니, 석방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장세상(張世相)에 이르러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장세상은 죽은 뒤에 승복(承服)했다는 말에 사람들의 말이 자자(藉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졸(羅卒)을 추문(推問)한 뒤에 처분(處分)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하였다. 지열(池烈)·이영(二英)에 이르러 모두 석방하도록 하고, 이정식(李正植)·김창도(金昌道)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호위(扈衛)에 대한 일은 제가 스스로 부도(不道)한 말을 했으면 무고한 가운데 두는 것이 마땅하지만, 형률로 주벌하는 것은 그 자신에 그치고 연좌(緣坐)된 자는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덕수(徐德修)에 이르러 임금이 초사(招辭)를 거짓으로 하여 무고(誣告)를 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단지 그에 연좌된 자들만 석방하게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정우관(鄭宇寬)은 옥중(獄中)에서 고변(告變)했는데, 고발당한 사람에게 초사를 받은 뒤에 대질(對質)을 시키지 않고 석방하여 보내고 정우관은 잇따라 형신(刑訊)하여 거짓 자복을 받았으니 무고로 논할 수 없습니다. 김일관(金一寬)은 다만 말하기를, ‘창문의 틈으로 이기지(李器之)가 김성행(金省行)을 책망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은 사람이 반역을 도모한 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고로써 결단할 수 없으니, 정우관(鄭宇寬)과 일체로 석방하게 하고 연좌되어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심진(沈搢)이 승복한 것은 그가 공초한 바가 아닌데 죽은 뒤에 형률을 집행하였으며, 이헌(李瀗)은 김성절(金盛節)로 인하여 교통(交通)한 일을 들은 것에 불과하니 무고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정우관(鄭宇寬)과 똑같이 논죄하고 유취장(柳就章)은 무고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김극복(金克復)의 죽음은 가장 원통합니다. 그의 초사에 다만 이우황(李宇恒)이 임금의 환후(患候)를 걱정하고 대신(大臣)의 말을 염려한 것으로 묻는 데 따라 대답한 것을 난언(亂言)이라고 하면서 형(刑)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우항의 초사에는 ‘김창도(金昌道)는 말하기를, ‘이기지(李器之)가 조송(趙松)을 시켜 장세상(張世相)에게 은(銀)을 주었다.’고 하였다.’ 하고, 목호룡(睦虎龍)은 말하기를, ‘이 지사(李知事)601)  가 은(銀)을 모아 장세상에게 주었다.’고 하니, 말이 이미 서로 어긋나며, 국청(鞫廳)에서 이우항은 병(病)이 위중한 죄인이라고 하여 잡아오는 무렵에 형(刑)의 집행을 정지하도록 계청(啓請)하였었는데, 겨우 하루가 지나 죄인을 미처 잡아오지도 않고 갑자기 지만(遲晩)으로 초사를 받았다고 일컫고 이내 물고(物故)한 계문(啓聞)을 들여보냈으니, 이른바 지만(遲晩)은 분명히 장차 죽이려 할 때에 억지로 받아낸 것입니다."
하니, 김극복(金克復)에게는 적몰(籍沒)한 가산(家産)을 돌려주도록 하고, 이우항(李宇恒)은 나졸(羅卒)을 끝까지 추문하기를 기다린 후에 복관(復官)시키도록 명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이명좌(李明佐)·우홍채(禹洪采)·양익표(梁益標)·김창언(金昌彦)은 모두 거짓으로 자복하였으니, 무고(誣告)한 사례에 있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모두 석방하고 연좌(緣坐)된 사람의 적몰(籍沒)한 가산(家産)은 되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민진원이 김민택(金民澤)·백시구(白時耉)·이상집(李尙)·김시태(金時泰)와 그 나머지 직명(職名)이 있는 자로 조송(趙松)을 제외하고 모두 복관(復官)시키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홍순택(洪舜澤)의 죽음은 나라 사람들이 더욱 가련하게 여깁니다. 단지 사행(使行)으로 함께 갔다는 것 때문에 곤장을 맞아 죽는 데 이르렀으니, 불쌍히 여기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윤각(尹慤)이 은(銀)을 내었다는 말은 조흡(趙洽)의 무고(誣告)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각(尹慤)과 유성추(柳星樞)는 그 당시 옥사를 다스린 대신의 말로 보더라도 그 원통함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이수민(李壽民)은 선조(先朝)에서 오래 섬긴 장수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귀양가서 죽었으니 복관(復官)시키는 것이 마땅하며, 조흡(趙洽)을 무고(誣告)로 논단(論斷)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임인년602)  의 옥사(獄事)는 이미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 남을 재해(災害)에 빠뜨린 것을 알았으니 훈적(勳籍)에서 삭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목호룡(睦虎龍)을 단록(單錄)한 것이라 하더라도 녹훈(錄勳)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대로 보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옥안(獄案)이 번복되었으니, 훈적에서 삭제하는 것은 다음 차례의 일이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회맹제(會盟祭) 때 자급(資級)을 올려 준 사람도 도로 거두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른바 토역과(討逆科)603)  는 삭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명분과 실상이 있으니 이미 그 훈적에서 삭제하였으면 그 실상이 없는 것인데, 그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고, 홍치중(洪致中)은 말하기를,
"이미 훈적에서 삭제한 뒤의 토역과는 바로 〈가죽이 다 해진 데〉 털이 어디에 붙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 역시 틀림없이 전혀 옥사(獄事)의 곡절을 모르는 자가 있을 터이니, 모두 삭제하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이휘진(李彙晉)이 공자(孔子)의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파방(罷榜)604)  하도록 극력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명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은 훌륭하니, 과거를 삭제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민진원 등과 대신(臺臣)이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의 단련(鍛鍊)한 죄를 명백히 바로잡기를 청하니, 임금이 삭출(削黜)하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만약 반좌(反坐)의 형률을 적용한다면 먼 곳에 귀양 보내는 것도 가볍지만, 그 가운데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간 사람을 어찌 심하게 책망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휘진(李彙晉)이 말하기를,
"무옥(誣獄)을 단련(鍛鍊)하고 성상을 무함한 사람을 엄폐하여 두는 것은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고, 신방(申昉)은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괴수가 아니고 앉아서 지시하고 사주한 자가 진짜 괴수입니다."
하고, 권적(權𥛚)은 말하기를,
"비록 말감(末減)605)  한다 하더라도 변방에 귀양 보내는 것에 해당합니다."
하고, 송필항(宋必恒)은 말하기를,
"4대신(四大臣)을 없는 죄를 씌워서 죽였을 뿐만 아니라 역적 목호룡의 변서(變書) 가운데 감히 말하지 못할 지위에 무함이 미친 것은 끝내 역적 목호룡에게 끝까지 캐어 추문하지 아니하고 단지 무함하며 핍박한 말만 빼버리도록 청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암담(黯黮)한 죄과(罪科)에 두려는 것입니다.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고, 한덕전(韓德全)은 말하기를,
"기사년606)  의 옥사(獄事)는 임인년607)  의 옥사에 비교하면 조금 차별이 나겠지만, 숙종(肅宗)께서 바로 역적 민암(閔黯)을 가두고 옥사를 다스린 사람을 차례로 논죄(論罪)하였는데 더구나 이 옥사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작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내쫓게 한 것이 가볍고 헐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3년 동안 옥사를 다스린 신하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귀양 보내는 것이 비록 악(惡)을 징계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상(氣象)이 어찌 매우 슬프지 않겠는가? 그 중에 더욱 몹시 마음 아픈 것은 정국(庭鞫)608)  에서 본부(本府)609)  로 옮겨서 설치한 것은 대체로 마음대로 단련(鍛鍊)하려는 것이었으니, 그 뜻이 더욱 흉악하고 참혹하다. 정국(庭鞫)할 때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은 모두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본부(本府)로 옮긴 뒤의 여러 신하들은 임인년 겨울을 기한하여 모두 관직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쫓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옥사를 다스린 신하를 이미 변방으로 귀양 보냈으니 위관(委官)610)  은 비록 벌써 죽었다 하더라도 추탈(追奪)611)  을 시행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관(委官)을 어찌 죄가 없다고 말하겠는가마는, 죽은 사람에게 추탈(追奪)하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김담(金墰)은 말하기를,
"선인문(宣仁門)612)  으로 몰래 들어갈 때에 이미 흉악한 마음이 있었는데 추탈(追奪)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신방(申昉)은 말하기를,
"옛날부터 사화(士禍)를 만든 자로 김안로(金安老) 같은 이는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사형(死刑)을 내렸고, 남곤(南袞)·심정(沈貞)은 모두 추탈(追奪)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무리들의 죄는 다만 사화(士禍)를 일으켰을 뿐만이 아니잖습니까?"
하고, 민진원(閔鎭遠)은 말하기를,
"조금전의 하교(下敎) 가운데 목호룡(睦虎龍)이 전하에게 누명(累名)을 씌웠는데도 토주(討誅)를 청하지 아니하고 ‘추문하지 말라’는 두 글자로 암담(黯黮)한 죄과(罪科)에 두려고 했다는 것은, 이것은 인신(人臣)의 어떠한 죄악인데 그래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 있어 자신의 일이 되기 때문에 죄를 다스리고 싶지 않았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의 처분(處分)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난번에 간흉(奸凶)이 터무니 없는 사실을 꾸미고 단련(鍛鍊)하여 대신(大臣)을 주살(誅殺)하였기 때문에 시비(是非)를 밝히려는 것이지, 유봉휘(柳鳳輝)의 상소에 대하여 노여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유중무(柳重茂)의 죄상(罪狀)은 결코 석방하여 내보낼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중무는 다른 죄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임인년에 옥사를 다스린 것으로 귀양 보내는 가운데 들어 있다."
하였다. 이교악(李喬岳)은 말하기를,
"임인년의 정국(庭鞫)을 본부(本府)로 옮겨 설치하였을 때에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을 이미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명하셨는데, 국문(鞫問)에 참여한 승지(承旨)와 대관(臺官)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옥사를 다스릴 때에 위관(委官)과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이 주장하였는데, 승지(承旨)와 대관(臺官)은 곁에서 구경만 하였는가?"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문랑(問郞)613)  은 완의(完議)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승지(承旨)와 대관(臺官)은 완의(完議)에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체(一體)로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치중(洪致中)이 소결(疏決)하는 차례를 낭독하기를,
"박희진(朴熙晉)·박장윤(朴長潤)·이제(李濟)·양성규(梁聖揆)·윤연(尹㝚)·이광도(李廣道)·이경열(李景說)·김시엽(金始燁)·조익명(趙翼命)·조진희(趙鎭禧)·이현장(李顯章)·권익순(權益淳)·여선장(呂善長)·윤유(尹游)·이승원(李承源)·이사상(李師尙)·신윤정(申潤廷)·하윤원(河潤遠)·박필몽(朴弼夢)·이진유(李眞儒)·이명의(李明誼)·정해(鄭楷)·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윤취상(尹就商)·이중술(李重述)·신경제(申慶濟)·이공윤(李公胤)·이거원(李巨源)·이진순(李眞淳)·권익관(權益寬)은 모두 그대로 두고, 김수천(金壽天)·학손(鶴孫)·박후응(朴厚應)·황보겸(皇甫謙)·이지규(李志逵)·황상정(黃尙鼎)·이명룡(李命龍)·서윤흥(徐允興)·홍성주(洪聖疇)·문덕린(文德麟)·홍언도(洪彦度)·김시정(金時鼎)·이경(李坰)·오명준(吳命峻)·이봉명(李鳳鳴)은 모두 석방한다."
하였는데, 이지규(李志逵)의 일에 이르러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이지규는 젊어서 올바른 행위로 칭찬을 받았으며, 80년 동안 굶주림을 참아가며 글을 읽은 어진 선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시기를 당하여 이와 같은 일을 힘써 하였으니, 기절(氣節)을 높게 여길 만하다."
하고, 이에 서용(敍用)하여 관질(官秩)을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형조(刑曹)의 죄인 가운데 박지혁(朴趾赫)은 석방하게 하고, 허벽(許壁)과 최탁(崔鐸)은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이의연(李義淵)의 아들 이기금(李岐金)의 일에 이르러 민진원이 원통함을 씻어 주도록 청하고, 권적(權𥛚)도 잇따라 청하니, 이기금을 석방하고 적몰한 가산을 되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민진원이 불쌍히 여기는 은전을 가하도록 청하니, 안중필(安重弼)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죄없는 사람을 죽인 것이 선왕(先王)의 본의(本意)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데, 어찌 유독 이의연(李義淵)뿐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疏)의 내용이 끝까지 온화한 마음이 부족하였다."
하자, 김담(金墰)은 말하기를,
"초야(草野)에 있는 〈인사(人士)의〉 말은 거만합니다. 설령 말이 온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것을 어찌 죄로 삼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의 사람들은 모두 대행조(大行朝)를 핍박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벌을 시행하게 되었었으나, 어찌 갑자기 죽는 데 이르게 될 줄을 헤아렸겠는가? 생각하니 불쌍하게 여길 만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가엾이 여기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6일 갑자

조관빈(趙觀彬)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복연(李復淵)을 무승지(武承旨)614)  로, 김재로(金在魯)·이병상(李秉常)을 좌빈객(左賓客)·우빈객(右賓客)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독(講讀)을 마치자, 영사(領事)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이소훈(李昭訓)의 상사(喪事)는 조금도 의심하거나 염려할 것이 없음을 주상께서 이미 하교(下敎)하셨는데, 흉당(凶黨)이 단련(鍛鍊)하여 옥사(獄事)를 이룬 것은 오로지 이 한 부분에 달려 있었으니 관계되는 바가 중대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원래 의심과 염려가 없었음을 분명하게 언급한 뒤에야 인심(人心)의 의혹(疑惑)을 풀 수 있으며, 왕세자(王世子)가 장성(長成)한 뒤에도 그 마음을 위안(慰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당시의 일은 더욱 근거가 없으며 독약(毒藥)으로 〈왕을 시해하는 음모를〉 행하는 것은 삼수(三手) 중의 한 가지 일인데, 저들이 서덕수(徐德修)의 문목(問目) 밖인 난초(亂招)615)  에서 나온 것을 인하여 누런 물을 토(吐)해냈다는 계제(階梯)로 삼았으니, 이제와서 생각하면 마음과 뼈가 함께 오싹해진다. 근래의 하교를 조목별로 열거해서 써내어 중앙과 지방에 분명히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번옥(反獄)하여 공훈을 삭탈한 뒤에 당연히 종묘(宗廟)에 고(告)하고 반교(頒敎)하는 예(禮)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이 복주(伏誅)된 뒤에 역시 반교(頒敎)하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제 이미 번옥(反獄)이 되었으니, 역옥(逆獄)이 단련(鍛鍊)한 데서 나왔음이 명백하게 판단(判斷)되었다. 그러니 종묘에 고(告)하고 반사(頒赦)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호서(湖西)의 유생(儒生) 오두석(吳斗錫) 등의 흉악한 상소에서는 모두 신사년616)   번옥(反獄)에 대하여 주장하면서 그 가운데 죄인의 아들로 우리 전하(殿下)를 지목하는 말은 이미 이것이 매우 도리에 어긋나며, 인용한 바 강충(江充)의 일617)  은 더욱 아주 극도로 도리에 어긋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흉악한 소(疏)를 올린 사람이 몇 사람인가?"
하였다. 승지(承旨) 김고(金槹)가 말하기를,
"오두석(吳斗碩)·이덕표(李德標)·권서봉(權瑞鳳)·이덕배(李德培)·강봉의(姜鳳儀)의 경우는 유생의 상소이고, 이삼령(李三齡)·최선(崔鍌)·정전(鄭𦒜)·이가운(李嘉運)의 경우는 조관(朝官)의 상소입니다."
하니, 임금이 오두석(吳斗碩)과 이삼령(李三齡) 등의 상소를 읽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흉악하고 참혹하다. 저 무리들의 흉악한 상소가 어찌 모두 자기 마음에서 나왔겠는가? 국문(鞫問)할 필요가 없다. 이덕배(李德培)·오두석(吳斗碩)·이삼령(李三齡)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이덕표(李德標)·권서봉(權瑞鳳)·최선(崔鍌)·정전(鄭𦒜)·이가운(李嘉運)은 먼 곳에 귀양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임진년618)   과거를 회복하도록 한 일은 한배하(韓配夏)가 혼자 상소하여 청한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한배하가 감히 숙종(肅宗)의 엄정(嚴正)한 처분(處分)을 변경시키도록 청하는 것입니까? 그 과거를 도로 삭제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헌장(李獻章)·이헌영(李獻英)의 일은 처음에 아래서부터 진청(陳請)한 것이 아니고, 이는 숙종조(肅宗朝)의 특별한 전교였다.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을 한배하(韓配夏)가 감히 숙종조에서 이미 삭제한 과거를 10년 뒤에 회복시키도록 청하였으니, 방자하고 무엄(無嚴)하다고 말할 만하다. 대행조(大行朝)의 처분은 위에서부터의 특별 전교가 아니고 단지 한배하가 진달한 것에 대하여 억지로 따른 것이었다. 이헌장·이헌영·오수원(吳遂元)·이진급(李眞伋)을 과거에서 삭제한 것은 숙종조의 처분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윤지술(尹志述)의 일은 전하(殿下)께서 이미 그의 충절(忠節)을 포창(褒彰)하게 하시면서 오히려 원통함을 씻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시니, 성상의 하교가 비록 사건이 선조(先朝)에 있었던 것으로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미룬다 하더라도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일이 진실로 고쳐야 할 것은 어떻게 3년을 기다리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그 당시의 특별 전교는 지정(至情)에 가려 대의(大義)를 살피지 못해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니, 지금에 와서 뒤따라 고치는 것은 성상의 덕에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대사헌(大司憲) 김흥경(金興慶) 등이 모두 말하기를,
"태학생(太學生)이 한 차례 마음에 품은 바를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극률(極律)을 당한 데 대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듣는 자가 친척(親戚)처럼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사현사(四賢祠)에 배향하도록 영(令)을 내려 국가에서 절의(節義)를 권장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소서."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사자(士子)의 무리가 윤지술(尹志述)의 원통함이 씻기기 전에는 유자(儒者)의 의복을 입고 과거 시험장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지술(尹志述)이 마음에 품은 바를 진달하는 내용에 말을 가려서 발설하는 점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투비(投畀)를 시행하였다가 곧바로 석방시켜 보내도록 하였으며, 또 여러 유생(儒生)이 권당(捲堂)할 적에 도로 들어가도록 권하여 유시하였으니, 여기에서 대행조(大行朝)의 애당초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는 것은 대체로 본래 특별 전교에서 나온 것이고 아래서부터 진청(陳請)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어찌 3년을 기다리겠는가?’ 하는 것과 ‘변통(變通)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용하였는데, 변통하는 것도 또한 선조(先朝)의 뜻을 계승한다는 옛날의 가르침이니, 원통함을 씻도록 허락한다. 윤지술을 한결같이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상소하여 청한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호우(湖右)는 곧바로 사대부(士大夫)가 살던 곳인데 지난번 흉당(凶黨)이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을 만들려고 허위 비답(批答)을 창작해 내어 전파시켜 화(禍)를 전가(轉嫁)시키는 계제(階梯)를 만들었는데, 황하신(黃夏臣)이 한번 보았다는 것 때문에 잡아다 국문하여 곤장을 쳐서 죽게 하였으니, 마땅히 복관(復官)시키고 증직(贈職)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황하신(黃夏臣)이 주원(厨院)619)  의 낭관(郞官)이 되었으므로, 그의 순박하고 근신함을 벌써 알았었다. 특별히 복관(復官)시키고 증직(贈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이잠(李潛)과 권규(權珪)에게 증직(贈職)한 것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고, 또 삼대신(三大臣)에 대하여 파가 저택(破家瀦澤)620)  한 것을 곧 해당 부서(部署)에 명하여 메우도록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경신년621)   역옥(逆獄)에 선신(先臣)622)  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어 역당(逆黨)을 나누어 귀양 보낼 적에 요속(僚屬) 관원의 의논이 귀양지를 흑산도(黑山島)에 정하려 하므로, 선신(先臣)이 말하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이 길은 형극(荊棘)623)  의 50년이다.」고 하였으니, 흑산도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닌데 어떻게 길을 열 수 있겠는가?’ 하면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갑술년624)  에 숙종(肅宗)께서 특명으로 유명현(柳命賢)을 흑산도에 귀양 보내도록 하였으며, 신축년625)  과 임인년626)   사이에 이르러 주상게서 귀양 보내는 곳을 흑산도에다 정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지사(知事) 신사철(申思喆)은 말하기를,
"간흉(奸凶)의 무리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조태채(趙泰采)의 딸을 이 섬에다 귀양 보냈으니, 이 뒤로는 특별 전교가 아니면 귀양 보내지 말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특별한 전교 외에는 귀양 보내는 곳을 흑산도(黑山島)에다 정하지 않도록 하는 일을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김고(金槹)가 아뢰기를,
"조태구(趙泰耉)가 북문(北門)으로 몰래 들어왔을 적에 홍계적(洪啓迪)이 힘을 써서 저항하여 막았기 때문에 흉도(凶徒)들이 이를 갈았었는데, 조진희(趙鎭禧)가 근거 없이 국문한 초사를 핑계대고 곧바로 잡아다 국문하도록 청하여 마침내 때려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심준(沈埈)이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 부자(父子)를 석실(石室)과 원향(院享)627)  에서 내치도록 청한 것도 또한 아주 도리에 어긋나니, 대계(臺啓)를 윤허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관직을 삭출(削黜)하라고 명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이건명(李健命) 등이 〈세제(世弟)〉 책봉(冊封)의 주청(奏請)을 인준(認準)받은 뒤의 상전(賞典)을 도로 거두도록 한 것을 되돌려 주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늘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경종(景宗)을 자애(慈愛)하신 일을 삼가 보았는데, 자신이 낳으신 아들과 차별이 없었습니다. 지금 왕세자(王世子)가 어리시니 중궁전(中宮殿)의 자애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는 줄 생각합니다만, 가만히 원하건대, 밤낮으로 돌보시고 보호하며 지극한 뜻으로 융화하며 흡족하게 하여 가까이는 인현 왕후를 모범으로 삼고, 멀리는 한(漢)나라의 명덕 왕후(明德王后)628)  와 송(宋)나라의 장숙 황후(章肅皇后)629)  를 모범으로 삼는다면 더욱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한없는 복(福)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훌륭하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주강(晝講)의 소대(召對) 때에 세자(世子)로 하여금 곁에서 모시게 하여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준수(俊秀)한 모습을 바라보도록 하시고, 세자로 하여금 자주 강론(講論)하는 취지를 듣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강(晝講)은 법연(法筵)630)  이므로 어린 나이에 참석하여 모시는 것은 적당하지 않으니, 소대(召對) 때에 곁에 있으면서 강론(講論)을 듣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임창(任敞)의 일은 단지 신사년631)  에 종묘(宗廟)에 고(告)하도록 청한 한 가지 사건인데 숙종(肅宗)게서 괴이하고 망령되다는 것으로 전교하시고, 또 강개(慷慨)한 선비라는 전교도 있었는데, 지금은 흉역(凶逆)이라고 말하면서 마침내 참혹한 형벌을 당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원통합니다. 마땅히 원래의 상소를 가져다 열람한 뒤에 처분(處分)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빈객(賓客)632)  과의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는데, 모습이 의젓하고 행동이 침착하였으므로 보는 사람이 흠모하며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3월 27일 을축

동지 회환 사신(冬至回還使臣)인 여원군(礪原君) 주(柱)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주가 역관(譯官) 신호침(申好沈)이 《고황제어제전집(高皇帝御製全集)》 2갑(匣)을 얻어 왔다고 말하니, 들여오도록 명하였다.

 

이정신(李正臣)·조익명(趙翼命)·서명우(徐命遇)·김계환(金啓煥)을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강현(姜鋧)·이조(李肇)·김연(金演)·이태좌(李台佐)·박태항(朴泰恒)·유중무(柳重茂)·김중기(金重器)·이삼(李森)·김시환(金始煥)·윤우진(尹遇晉)·이세최(李世最)·남취명(南就明)·조원명(趙遠命)·박희진(朴熙晉)·이정제(李廷濟)·김중희(金重熙)·이명언(李明彦)·양정호(梁廷虎)·윤대영(尹大英)·권익순(權益淳)·이현장(李顯章)·이보욱(李普昱)·이광보(李匡輔)·이진순(李眞淳)·구명규(具命奎)·여선장(呂善長)·황이장(黃爾章)·윤행교(尹行敎)·김동필(金東弼)·유명응(兪命凝)·윤회(尹會)·신유익(愼惟益)·한재원(韓在垣)·박징빈(朴徵賓)·정수기(鄭壽期)·유수(柳綏)·김홍석(金弘錫)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토록 하였는데, 임인년633)  에 청대(請對)하였거나 옥사(獄事)를 다스렸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이 삭출(削黜)하는 대상으로 당장 고발된 가운데 들어 있었는데, 임금이 대신(大臣)은 사체(事體)가 스스로 구별이 되니 비록 이것이 정승에 임명되기 전의 일이라 하더라도 국가에 체모에 큰 차이가 있고 전해지는 폐단이 염려될 만하다고 하여 특명(特命)으로 빼어 버리게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독(講讀)이 끝나자, 헌납(獻納) 정택하(鄭宅河)가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명언(李明彦)의 일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서종섭(徐宗燮)이 말하기를,
"이명언(李明彦)이 옥당(玉堂)의 장관(長官)이 되어 맨 먼저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추숭(追崇)하는 의논을 발설하였으므로 사류(士流)들이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더구나 ‘도와서 세운다[援立].’는 등의 말은 어찌 인신(人臣)이 감히 입으로 발설할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와서 세운다.’느니 ‘옹호하여 세운다[擁立].’느니 하는 등의 말은 진실로 지나치기는 하지만 어찌 말을 가지고 죄를 주며 당동벌이(黨同伐異)634)  하는 의논에서 말이 핍박됨을 깨닫지 못한 것인데, 어찌 반드시 반역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겠는가? 섬에다 귀양 보내는 것은 지나치니 권익관(權益寬)의 예(例)에 의거하여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신치운(申致雲)의 일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극력 청하자, 그대로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붕당(朋黨)이 있은 이래로 겹겹이 생기는 의논이 점차로 격렬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졌으니 이와 같이 하였으면 만족한 것이다. 그리고 또 대신(大臣)이 논계(論啓)하여 파직(罷職)시키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곧 안치(安置)635)  할 의논을 발설하니 이와 같이 겹겹이 발생하는 의논은 내가 실제로 취하지 않는다. 대간(臺諫)이 간쟁(諫爭)하더라도 따르고 따르지 않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유독 신치운(申致雲)의 일뿐이겠는가? 군부(君父)가 윤허하지 않는데도 기필코 간쟁하려는 것도 실상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대간(臺諫)이 한 사람의 탐관오리(貪官汚吏)를 탄핵한 일을 듣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서글프다."
하자, 정택하(鄭宅河)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승냥이와 이리가 길에 있는데〉 여우나 너구리 같은 것을 어떻게 묻겠는가636)   하는 뜻입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이의현(李宜顯)이 성지(聖旨)를 대신 찬술(撰述)하는 일을 극력 사양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무신(武臣) 정찬술(鄭纘述)이 진달(陳達)하기를,
"국가에서 강화도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진양(晉陽)637)  으로 삼으면서도 병기(兵器)는 모두 도성(都城)에다 두었으니, 만약 도성을 지킬 만하다고 여긴다면 마땅히 성첩(城堞)을 높이 쌓고 참호(塹壕)를 깊이 파서 뜻하지 않는 일에 대비하여야 합니다."
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3월 28일 병인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독(講讀)하다가 소세양(蘇世讓)의 일에 이르러 검토관(檢討官) 이중협(李重協)이 말하기를,
"소세양(蘇世讓)의 말은 참으로 넌지시 간(諫)한 것이니 인주(人主)는 당연히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넌지시 간하는 것은 은미하게 간하는 것이니 이것도 또한 인신(人臣)이 임금을 바로잡는 도리인데, 인군(人君)의 도리로 말한다면 바로 간해서는 깨닫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넌지시 간하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인신이 은미하게 간함이 있게 되면 어찌 인군이 부끄럽게 여겨야 할 곳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중협(李重協)이 대답하기를,
"훌륭합니다. 임금의 말씀이여! 국가의 매우 다행입니다."
하였다.

 

조언신(趙彦臣)을 승지(承旨)로, 김간(金幹)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임주국(林柱國)을 지평(持平)으로, 김재로(金在魯)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홍현보(洪鉉輔)를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타나지 않은 원통함을 모두 씻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되었는데, 국적(國賊)이 아직도 대신(大臣)의 반열에 있지만 성상의 뜻은 끝내 움직여 옮겨질 희망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해이해진 체제에서 굳은 의지를 가진 이가 없습니다. 겸해서 또 성상의 자질이 인자(仁慈)함은 너무 지나친데다 강직하고 과감함은 부족하시면서 기필코 아랫사람의 마음을 곡진히 생각하려다가 더러 대체(臺體)를 손상시키는 데 이르기도 하며, 여러 신하들도 또한 모두 가까이서 친밀하여 은혜를 믿고 점점 게을러지는 마음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事務)에 익숙한 권성(權𢜫) 같은 이와 학식(學識)이 정밀하고 명확한 김진상(金鎭商) 같은 이는 아직도 조정에 나올 뜻이 없으니, 그것은 대체로 국가의 일을 다시 바라볼 것이 없다고 여기고 단지 일신[身命]만 스스로 보전하려고 할 뿐입니다. 또 듣건대, 좌의정[左相]도 장차 떠나려 한다고 하는데, 좌의정이 비록 늙고 병이 들었다고는 하더라도 합문(閤門)에 누워 진언(進言)하며 나라의 일을 바로잡고 보필하는 것이 어찌 천균(千勻)의 힘뿐이겠습니까마는, 백구(白駒)638)  를 매어 두기가 어려우므로, 장차 조정에서는 단지 국록(國祿)이나 바라고 지위나 보전하려는 한 사람의 천신(賤臣)이 있음을 볼 뿐이니, 신도 또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찌 차마 혼자 머물겠습니까?
바라건대 뭇 신하들을 신칙하고 면려하여 전하(殿下)께서도 의당 스스로 계책을 도모하여 바른 말을 받아들이기를 물이 흐르듯이 하고, 죄를 토주(討誅)하기를 반드시 엄중하게 하여 이미 지나간 후회스러움은 깊이 진사(陳謝)하고 지난날의 풍습은 통렬하게 고쳐 너그럽게 하되 위엄있게 하여 방탕한 데 이르지 않게 하며, 엄격하게 하되 너그럽게 하여 각박한 데 이르지 않도록 하여 조정의 윗사람으로 하여금 풍채(風采)가 즉시 변하게 하고, 정령(政令)을 내는 사이에서는 보고 듣는 사람이 모두 용솟음치게 하여 조정에 있으면서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신하에게는 지성(至誠)으로 머물도록 힘쓰고, 초야(草野)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禮)를 다하여 불러 맞이하여 임금과 신하가 한 마음으로 하늘이 맡긴 직무를 함께 다스려 우리 조종(祖宗)의 3백 년 기업(基業)을 떨어뜨리지 말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내가 요즈음의 일에 너무 너그럽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의 칼날로 서로 싸운 것에 대행조(大行朝)의 지극한 인애와 융성한 덕이 아니었으면 그 전해지는 해독(害毒)이 어떠하였겠는가? 나는 위로 양조(兩朝)639)  의 덕스러운 뜻을 준수하려 하는데 경(卿)들은 어찌 지난날의 독수(毒手)를 경계하지 않는가? 만약 그 한 짓을 논한다면 귀양 보내는 것도 또한 가벼운 벌이라고 말하겠지만 귀양 보내는 것도 이미 20명에 지났으니, 길가의 사람들이 반드시 서로 고하기를, ‘저 무리들이 착한 사람들을 해치니 참혹하고 각박하다. 오늘 귀양을 가게 된 것은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고 한다면 그만이겠으나, 만일 말하기를, ‘지난날의 귀양간 것은 예전에 없었던 바인데 거마(車馬)가 겨우 돌아오자 또 그 길에 계속 〈귀양을 가니〉 비록 저 무리들이 정인(正人)을 해롭게 한 원인이긴 하나 조정의 처분이 앞날을 거울로 삼을 의도(意圖)가 없다.’고 한다면 화기(和氣)를 감상(感傷)시킨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만약 이 일에 구애되어 즉시 처분하지 못한다면 이는 진실로 사사로운 뜻인 것이다. 내가 어찌 차마 이렇게 하겠는가? 오늘의 처분은 나의 뜻이 아니고 선조(先朝)의 뜻을 본받은 것이니,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은 고집하거나 고집하지 않는 데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신하들이 이 일로 인하여 멀리 떠나려고 하니 나의 정성이 얕은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자신에게 돌려 반성하며 세상을 서글프게 여겨 탄식을 할 뿐이다. 아! 내가 비록 덕이 적지마는 받은 것은 양조(兩朝)에서 물려주신 어려운 일이니, 여러 신하들이 비록 오늘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히 양조(兩朝)의 은혜만은 생각하지 않겠는가? 좌의정은 힘을 다하여 머물도록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 권면하고 경계하는 말이 절실하고 지극하니 잊지 않고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卿)은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돕도록 하라."
하고, 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좌의정(左議政) 정호(鄭澔)를 힘써 머물도록 하였다.

 

3월 29일 정묘

비변사(備邊司)에서 우참찬(右參贊) 신임(申銋)이 제주(濟州)에서 육지(陸地)로 올라온 뒤에 병세(病勢)가 위독하므로 의정부(議政府)에서 약물(約物)을 가진 의인(醫人)을 보낼 때 바닷가 고을에서 쇄마(刷馬)640)  를 찾아서 지급하는 일을 아뢰니, 내의(內醫)를 보내어 약물을 가지고 환자를 간호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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