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권, 영조 1년 1725년 5월

싸라리리 2025. 8. 19.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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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무술

임금이 경소전(敬昭殿)744)  에서 몸소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서명구(徐命九)를 필선(弼善)으로, 이덕부(李德孚)를 설서(說書)로, 박사성(朴師聖)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5월 2일 기해

충주(忠州)의 유학(幼學) 권명(權洺) 등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운곡 서원(雲谷書院)은 곧 주부자(朱夫子)를 제향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신축년745)   이후에는 귀역(鬼蜮)의 무리가 자신들의 소굴로 만들고 흉악한 짓을 멋대로 행하여 오랫동안 인심을 잃어오던 끝에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위판(位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위판을 다시 만들어 봉안(奉安)할 것을 당연히 조정에 앙품(仰稟)했어야 하는데도, 그 당시 도신(道臣)이었던 윤혜교(尹惠敎)가 이를 조정에 계문(啓聞)하지 않고서 고을의 원으로 하여금 다시 만들어 봉안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본조(本朝)의 유현(儒賢)에게 사액(賜額)한 서원(書院)이라 할지라도 이를 중수(重修)할 적에는 조정에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향(香)과 축(祝)을 하사하는 법인데, 더구나 주자(朱子)의 위판을 다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한 예(禮)인데 조정에서 모른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그 당시의 도신(道臣)과 일을 주관했던 원유(院儒)를 철저히 사핵(査覈)하여 논죄(論罪)하고, 위판을 봉안하는 일도 예관을 시켜 다시 의논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도신(道臣)과 수령의 소위가 진실로 매우 놀랍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사문(査問)하여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윤양래(尹陽來)가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의 죄는 죽이고도 남습니다. 감히 망급(忙急)하다느니, 의혹스럽다느니 하는 등등의 말로 인심을 혼란시키고 국본(國本)을 동요시킨 사람이 유봉휘이고, ‘혐(嫌)’ 자를 지어내어 화(禍)의 기미를 조성하고 검열(儉烈)746)  의 옥사(獄事)를 뻔뻔스럽게 다스리지 않은 채 양옥(梁獄)747)  의 설(說)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음으로써 전하(殿下)를 위의(危疑)스런 처지로 몰아넣어 거의 보존할 수 없게 만든 사람이 조태구입니다. 신은 이 두 명의 역적에 대한 논계(論啓)를 빨리 윤허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번의 무옥(誣獄)에서 이른바 궁인(宮人)들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국초(鞫招)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행 대왕(大行大王)748)  께서 당초에 원래 이런 일이 없었다는 전교를 내렸는데도 3년 동안 계속 조사하기를 청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감히 부형(父兄)의 원수라느니 외의(外議)가 미안하게 여긴다느니 하는 등등의 말로 붕당(朋黨)을 불러 모아 청대(請對)하여 짐짓 딴 일을 빌어 상대의 속마음을 떠보며 독촉하면서 마치 참으로 그런 사람이 있는데도 왜곡되게 비호하고 있는 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지금 대계(臺啓)에서 논계(論啓)하고 진소(陳疏)한 수발자(首發者)와 소두(疏頭)·소하(疏下)749)   및 청대(請對)한 사람들을 찬출(竄黜)시키자고 청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저 논계하여 진소하고 청대한 사람들은 진실로 용서할 수가 없지만, 외방(外方)에 있는 소하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위세(威勢)로 유혹하고 이익으로 꾀었으니, 그 누군들 여러 사람들을 따라서 서명(署名)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신의 생각으로는 소하의 여러 사람들은 일체 내버려 두고 죄를 묻지 않아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합계(合啓)에 대해 윤허를 미루는 것은 또한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상소의 말단에 대한 일은 경(卿)의 말이 옳다."
하였다.

 

장령(掌令)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벼슬에 제수되어 앉은 자리에 온기가 돌기도 전에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였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성의(誠意)를 다하여 더욱 간절히 불러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의 자손(子孫)들이 임인년750)  의 참화(慘禍)를 제일 혹독하게 받아 온 가문이 모두 귀양갔기 때문에 은사(恩賜)하신 옛집까지도 보유할 수가 없었는데, 지난 겨울 특명(特命)으로 속환(贖還)하게 하였으니, 우리 전하께서 선후(先后)를 생각하고 구훈(舊勳)을 잊지 않는 성의(盛意)를 더욱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 해조(該曹)의 방계(防啓)751)  는 실로 상정(常情)에서 한 것이 아니었으니, 신은 전의 하교(下敎)대로 특별히 추환(推還)케 하시기 바랍니다.
고(故) 영부사(領府事) 이이명(李頤命)을 붙잡아 올 적에 선전관(宣傳官) 이창수(李昌壽)가 은밀히 흉당(凶黨)의 사주를 받아 곤욕을 가하고 구박을 줌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수행(隨行)하는 사람을 결박하여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였고, 호송 군졸들이 도중에서 활을 겨누기도 하고 칼날을 들이대기도 하는 등 그 흉패(凶悖)스런 거조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으며, 강교(江郊)에서 명령을 받던 날에는 그의 처지에서 마땅히 궐하(闕下)에 복명(復命)을 해야 하는 것인데도 일부러 즉시 가지 않고 영부사의 문전에 가서 고함을 지르면서 법외의 짓을 멋대로 하기를 마치 사적인 원수를 갚는 것처럼 하였으며, 그때의 부관(部官)도 또한 흉당의 사인(私人)으로서 곧 검시(檢屍)할적에 숨어서 피하고 오지 않아 반나절이 지나도록 시체를 강 언덕에 그대로 방치하게 하였으니, 그들도 사람인데 어떻게 차마 이미 죽은 사람에게 마음내키는 대로 행패를 부리고 이를 계기로 승진하고 이름을 얻으려는 계책을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그때의 부관과 선전관(宣傳官)에게 모두 귀양 보내는 형률(刑律)을 시행해야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수상(首相)에 대한 일은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구(國舅)의 제택(第宅)에 대한 일은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이창수(李昌壽)에 대한 일은 참으로 매우 놀랍고 패리(悖理)하니 사판(仕版)752)  에서 삭제하고 부관은 더욱 아주 참독(慘毒)스러우니 먼 곳으로 귀양 보내라."
하였다.

 

충주(忠州)의 유학(幼學) 이광춘(李光春) 등이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누암 서원(樓巖書院)은 바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배향(配享)되어 있습니다. 선정신 권상하(權尙夏)도 이곳에서 선생을 모시고 머물면서 도(道)를 강론하였었으니, 사문(斯文)753)  에 대한 공로는 전후가 같은 것이어서 진실로 함께 배향하기에 합당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5월 3일 경자

회양부(淮陽府)에 불이 나서 관사(官舍) 4백여 칸이 소실되고 민가(民家) 1백여 호(戶)가 탔으며 세 사람이 사망하였는데, 본도(本道)에 명하여 휼전(恤典)을 시행하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승지(承旨) 이정주(李挺周)가 주달(奏達)하기를,
"도성(都城)의 가까운 곳에다 중들이 불사(佛舍)를 많이 지어 놓았기 때문에 여염(閭閻)의 양녀(良女)들이 요망한 말에 미혹되어 머리를 깎는 폐단이 많이 있습니다. 마땅히 엄금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도(儒道)가 크게 행하여지고 있으니, 비록 이단(異端)이 있을지라도 어찌 감히 유도(儒道)를 해칠 수가 있겠는가? 다만 여승(女僧)들이 도성 안에 왕래하는 것만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5일 임인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 제사를 지냈는데, 오늘이 단양절(端陽節)이기 때문이었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출사(出仕)하니,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서 인견(引見)하고 유시하기를,
"종전에 있었던 살육(殺戮)의 참혹한 정상은 차마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의 이 대배(大拜)754)  는 진실로 선조(先朝)의 유의(遺意)를 본받은 것이다."
하였다. 이관명(李觀命)이 배사(拜謝)하고 나서 이어 토복(討復)에 대한 대의(大義)를 진달한 것이 누누이 수천언(數千言)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사의(辭義)가 엄정(嚴正)하니, 마땅히 유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윤헌주(尹憲柱)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5월 6일 계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논어(論語)》의 강독을 마치고 나서 지사(知事) 홍치중(洪致中)이 주달하기를,
"방만규(方萬規)의 상소가 윤봉조(尹鳳朝)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문안(文案)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그가 관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는데 어떻게 버려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봉조에 대하여 처음에는 매우 의심했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윤봉조는 이조 참의(吏曹參議)로서 문명(文名)이 있었기 때문에 윤봉조를 핑계대면 혹 그에게 부회(傅會)하여 의논을 야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한 짓이다. 그러니 그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하고, 이어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국가의 저축(貯蓄)이 탕갈(蕩竭)되어 전에는 진휼청(賑恤廳)에 수십만 석(石)을 보유하고 있던 것이 지금은 겨우 수만 석에 불과하니, 혹시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닥친다면 장차 어떻게 진제(賑濟)할 수 있겠습니까? 근래 쌀값이 떨어졌다고 하니, 만약 공명첩(空名帖)755)   수천 장을 내면 수천 석의 곡식을 사들일 수가 있겠습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서종섭(徐宗燮)은 말하기를,
"이것은 벼슬을 파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며, 더구나 백성들이 사기를 원치 않고 한정(閑丁)도 또한 많이 잃게 될 것이니, 다만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손해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관직(官職)과 작위(爵位)가 명칭은 비록 같지만 일은 다르다. 이것으로 사들인 곡식을 경비(經費)로 쓰는 것은 진실로 안될 것이지만 진휼(賑恤)하는 자본으로 쓰는 것은 경비로 쓰는 것과는 다르니, 1천 장만 제급(題給)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장령(掌令) 채응복(蔡膺福)이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신이 지난 겨울에 흉당(凶黨)들이 사나운 기세로 군부(君父)를 협박하고 전지(傳旨)를 따른 사람을 박살(撲殺)하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걱정하고 강개해 하는 정성을 조금 바쳤던 것인데, 승정원(承政院)에서 무함 고발한다고 함에 따라 역적을 비호한다는 분부가 있게 되었고 대평(臺評)이 잇따라 발론(發論)되었으니, 심지어 김동필(金東弼)과 김시빈(金始鑌)의 상소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로 몰아넣었습니다. 지금은 목숨을 바쳐 바른 말을 했던 선비들이 그 원통함을 이미 풀게 되었고 흉독스런 김시빈과 김동필도 모두 파출(罷黜)되었으니, 신이 진달한 말이 시행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례에 의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경종(景宗)의 연주(練主)756)  를 만들 곳을 경덕궁(慶德宮)의 자정전(資政殿)으로 정하니, 이는 예조(禮曹)에서 구례(舊例)에 따라 청한 것이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이의천(李倚天)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지빈(趙趾彬)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라고 아뢴 것에 대해서는 임금이 찬배(竄配)하라고 명하였다. 【대계(臺啓)로 인하여 전지(傳旨)를 받들지 못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성절(金盛節)의 공초(供招)에 ‘김일경(金一鏡)이 동궁(東宮)을 모해(謀害)하려 했기 때문에 그들이 과연 제거하려 했었다.’고 하니, 금부 당상(禁府堂上)이 큰소리로 꾸짖어 중지시키면서 등서(謄書)하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원근 지방에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엊그제 연신(筵臣)이 자신이 수금(囚禁)되어 있을 적에 들은 내용을 진달한 바가 있었는데, 과연 위의 전설(傳說)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모든 죄인들의 공초(供招)는 한 글자, 한 마디 말이라도 삭제해서는 안되는데, 더구나 동궁을 모해하려 했다는 말은 얼마나 큰 악역(惡逆)인데 도리어 숨겨주고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김성절의 초사(招辭)를 조사하여 찾아내게 해서 동궁을 모해하려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과연 기재되어 있지 않으면 그 당시의 문랑(問郞)·별형방(別刑房)·도사(都事)를 국청으로 하여금 모두 잡아다가 엄하게 핵문(覈問)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전일에 아뢴 내용 가운데 박사제(朴師悌)·이일제(李日躋)·이기성(李基聖)의 일은 정계(停啓)757)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이다.】  전일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상검(朴尙儉)의 옥사(獄事) 때에 신문(訊問)을 맡았던 여러 당상관(堂上官)들을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 보내라고 아뢴 것에 대해서는 임금이 원찬(遠竄)하라고 명하였다. 【대계(臺啓)로 인하여 전지(傳旨)를 받들지 못하였다.】  또 아뢰기를,
"역적 김일경이 밤을 틈타 요망스런 환관(宦官)의 집에 왕래한 것은 이것이 사환(使喚)들이 하는 일이므로, 따로 은밀한 곳에서 지휘(指揮)한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김일경을 정국(庭鞫)할 적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말했다.’고 한 등등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가 이른바 어떤 사람이라고 한 것은 반드시 지휘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가 처형(處刑)될 적에 자기 아들 김정해(金正海)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수자(竪子)758)  의 무리와 일을 한 것이 지금까지 한스럽다.’고 한말은 저자 사람들이라면 듣고 보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가 이른바 수자(竪子)라고 한 자와 앞서 말한 어떤 사람이라고 한 자가 틀림없이 지휘한 사람일 것임이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대개 김정해(金正海)는 본디부터 요망스럽고 교활하다는 이름이 있었는데, 김일경과 육적(六賊)이 교결(交結)하여 음모를 꾸밀 적에 그가 실제로 그들 사이를 왕래하면서 사환(使喚)노릇을 하였으므로 자기 아비와 동모(同謀)한 사람을 모를 리가 절대로 없을 것이니, 청컨대 김정해를 잡아다가 엄중히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일은 지금까지도 원통한데 어찌 털끝만큼인들 돌보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김정해를 잡아다가 국문하는 것은 실로 아들을 데려다가 아비의 죄를 입증시키게 되는 혐의가 있다. 더구나 김일경이 시켰다고 하는 것은 뒷날의 구실(口實)이 되기에만 족할 뿐이니, 이 아룀은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전일에 아뢴 내용 가운데 유중무(柳重茂)의 일은 정계(停啓)하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의 권점(圈點)759)  이 있었는데, 이의현(李宜顯)·이재(李縡)는 4점을, 조관빈(趙觀彬)·김재로(金在魯)·이병상(李秉常)·윤봉조(尹鳳朝)는 3점을 받았다.

 

서종섭(徐宗燮)을 헌납(獻納)으로, 이중협(李重協)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이재(李縡)를 대제학(大提學)으로, 황귀하(黃龜河)를 동의금(同義禁)으로, 박사익(朴師益)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구봉창(具鳳昌)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대사헌(大司憲)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한번 성고(聖考)께서 사문(斯文)의 시비(是非)를 확정하고서부터 권세를 잃은 무리들이 뼛골에 스미는 독심(毒心)을 품고 있다가 기회를 포착하여 흉독(凶毒)을 부려서는 구신(舊臣)들을 무고(誣告)로 살해하였는데, 심지어 세자(世子)를 책봉하는 것을 마음대로 폐립(廢立)하는 것이라고 하고 대리(代理)하는 것을 찬탈(簒奪)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들의 의도는 전하(殿下)를 모해하여 숙종(肅宗)의 혈사(血嗣)를 단절시키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조태구(趙泰耉)는 혐의스러운 말로 앞에서 창도하였고 유봉휘(柳鳳輝)는 의혹스러운 말로 뒤에서 호응하였으며, 역적 김일경(金一鏡)은 밖에서 상변(上變)하였고 요망한 박상검(朴尙儉)은 안에서 화단(禍端)을 조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일이 터짐에 따라 그들의 경영(經營)하고 배포(排布)한 정상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참했는데도 유독 조태구와 유봉휘에 대해서는 명령을 내리지 않으시니, 형정(刑政)이 사의(事宜)에 어긋났고 처분(處分)이 정당성을 읽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민(臣民)들이 전하에게 기대했던 것이겠습니까? 신축년760)                  진신(搢紳)의 상소에서 역모한 절차가 이미 드러났는데도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형벌이 소하(疏下)의 사람에게 미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김성(金姓) 궁인(宮人)이 김성절(金盛節)의 공초(供招)에서 처음 발단되자 한 해를 경과한 대계(臺啓)에서 계속 궁인에 대한 조처가 있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윤서교(尹恕敎)의 상소가 갑자기 나오자 공봉(供奉)한 지가 이미 오래라느니 임금이 사랑하는 사람을 또한 사랑했다느니 하는 등등의 말을 거론하면서 드러내어 지척(指斥)하는 데가 있었습니다. 그 의도와 내용이 참으로 불측하기 그지없는데도 철저히 심문하지 않은 채 갑자기 참작하여 조처하라고 명하셨으니, 진실로 중외(中外)의 의혹을 풀 길이 없습니다.
조태구와 유봉휘는 결단코 용서할 수 없고 육적(六賊)은 참형에 처해야 되며 윤서교(尹恕敎)는 신문해야 된다는 것을 전하께서도 모르지 않지만, 과단성 있게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진실로 자신의 마음대로 했다는 혐의와 함부로 죽였다는 경계가 먼저 성심(聖心)에 고착되어 있어 의리(義理)의 공심(公心)이 주장이 되지 못한 탓인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양사(兩司)에서 아뢴 것이 거의 수십 가지가 넘는데 찬배(竄配)와 안치(安置)를 아직도 윤허하지 않고 계십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주살(誅殺)할 사람은 주살하고 찬배할 사람은 찬배시키소서.
신이 임인년761)                   시골에 가 있을 적에 과거의 소장(疏章)을 살펴보았더니, 권익관(權益寬)의 상소에서 거괴(巨魁)를 사흉(四凶)에 대비(對比)하여 말을 하였습니다. 저들은 늘 사대신(四大臣)을 역괴(逆魁)라고 일컬어 왔는데, 갑자기 사대신 이외에 하나의 거괴를 말하였습니다. 그 상소의 문세(文勢)로 살펴보건대, 음흉한 지의(指意)가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승정원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신의 정신이 쇠미하여지고 세월이 좀 오래 된 일이라서 비록 누구의 상소인지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만, 발란 반정(撥亂反正)이라는 것으로 선왕(先王)을 찬양(贊揚)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국조(國朝)에서는 다만 중종(中宗)과 인조(仁祖)만을 반정(反正)했다고 일컬어오고 있는데, 저들이 숙종(肅宗)을 어떤 세대에다 견주었기에 그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이사상(李師尙)과 얼신(孼臣)의 말에 견주어 보아도 거의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 이 또한 승정원으로 하여금 그 상소를 조사해 내게 하여 속히 해당되는 형률(刑律)을 시행하게 하소서. 윤봉조(尹鳳朝)는 문학과 재주가 사류(士類)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데, 자신이 저지른 죄가 아닌 데에 연루되어 전야(田野)에 폐척(廢斥)된 까닭에 신은 마음속으로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 대의(大義)는 좋다. 그러나 내가 윤허하지 않는 것도 뜻이 있다. 권익관(權益寬)의 일과 상소 내용의 어구(語句)에 대한 일은, 과거에 있었던 이런 등등의 말을 어떻게 일일이 엄하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윤봉조는 이미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하였다.

 

5월 7일 갑진

상산군 부인(商山郡夫人) 김씨(金氏)가 졸(卒)하였다. 김씨는 바로 임금의 아우인 연령군(延齡君)의 부인(夫人)이다. 임금이 애도(哀悼)하는 교서(敎書)를 내리고 특별히 동원비기(東園秘器)762)  를 하사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이기진(李箕鎭)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5월 8일 을사

이의천(李倚天)을 집의(執義)로, 이휘진(李彙晋)과 이자(李滋)를 장령(掌令)으로, 서종섭(徐宗燮)을 교리(校理)로, 서명구(徐命九)를 헌납(獻納)으로, 조덕린(趙德隣)을 필선(弼善)으로, 김수(金洙)를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에게 정헌 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가자(加資)하였으니, 죽책(竹冊)763)  을 지어 올린 공로 때문이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방금 조정(朝廷)이 초창(草創)중이어서 인재가 적다는 것을 말하고, 이어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취로(金取魯)를 자리가 비는 대로 내직(內職)으로 옮겨 줄 것을 청하였는데,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비답(批答)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유경(金有慶)이 파면(罷免)되었다. 김유경은 최석항(崔錫恒)과 친척(親戚)의 교분(交分)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일부러 합계(合啓)를 피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과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추국(推鞫)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초기(草記)로 파면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5월 9일 병오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전하(殿下)께서 교서(敎書)의 내용에 두 글자를 첨입(添入)하도록 허락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써 감히 못하고 차마 못한다고 하면서 끝내는 환수(還收)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석삼(鄭錫三)의 말을 옳게 여긴 처사인 것입니다. 정석삼의 말이 옳다면 신(臣)이 감히 말해서는 안될 이야기를 감히 말했고 차마 제기(提起)할 수 없는 일을 차마 제기한 것이 되니, 성상(聖上)의 효우(孝友)하는 덕(德)을 손상시킨 것이 죄가 큽니다. 전하께서 정석삼에 대해서는 그 말은 채용하면서도 그 몸은 버렸으며 신에 대해서는 그 말은 처벌하면서도 그 몸은 총애하고 계시니,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형상(刑賞)을 가지고 시비(是非)를 밝히는 도리가 어찌 이처럼 사리에 어긋날 수 있겠습니까?
선왕께서 불행히 병환이 있어서 군흉(群凶)에게 기폐(欺蔽)당했으므로 당시의 처분(處分)이 선왕의 본의(本意)가 아닌 것이 많았다고 하는 것은 과연 성덕(聖德)과 지인(至仁)에 손상이 되는 것으로, 신자(臣子)로서는 차마 듣고 차마 제기할 수 없는 것인데, 저들이 불행을 다행으로 여겨 병환이 있는 것을 숨긴 채 기필코 한번의 사화(士禍)에 대한 책임을 모두 선왕(先王)에게 돌리면서 자신은 무고(誣告)하고 장살(戕殺)한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니, 유독 차마 듣고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전하의 총명하심과 슬기로우심으로써 어찌 이쪽은 옳고 저쪽은 그르다는 것에 현혹되어서 명명(明命)을 내렸다가 또 갑자기 취소하기를 자주 되풀이하여 마지 않다가는 결국은 미혹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모두가 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군부(君父)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 데서 온 소치(所致)이므로 이것도 또한 신의 죄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글자를 환수한 것이 내가 어찌 경(卿)의 마음을 몰라서이겠는가마는, 그래도 차마 하지 못하는 뜻이 있어서이다. 이 때문에 인책(引責)하는 것은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신축년764)  의 사변(事變)이 있은 이후 뭇 소인(小人)들이 선왕(先王)께서 병환이 있었다는 것을 숨겨 이를 방금(邦禁)765)  으로 삼았다. 임금이 즉위함에 이르러 이광좌(李光佐)의 무리가 말하기를, ‘선왕께서 비록 병환이 있기는 하였지만 사군(嗣君)의 도리에 있어서는 숨겨진 사실을 들추어내어서는 안된다.’ 하여 매양 임금 앞에서 이것을 큰 의리(義理)로 삼았으므로, 임금이 선입설(先入設)에 동요됨이 없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호(鄭澔)와 민진원(閔鎭遠) 등의 장주(章奏)가 비록 간절하기 그지없었지만, 임금이 끝내 차마 할 수 없는 바가 있다고 하면서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끝내 선왕께서 병환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신년766)   흉적(凶賊)의 변(變)을 초래(招來)하도록 했으니, 이광좌(李光佐)가 어떻게 그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13면
【분류】정론(政論) / 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76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765] 방금(邦禁) : 나라에서 금하는 일.[註 766]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사신은 말한다. "신축년764)  의 사변(事變)이 있은 이후 뭇 소인(小人)들이 선왕(先王)께서 병환이 있었다는 것을 숨겨 이를 방금(邦禁)765)  으로 삼았다. 임금이 즉위함에 이르러 이광좌(李光佐)의 무리가 말하기를, ‘선왕께서 비록 병환이 있기는 하였지만 사군(嗣君)의 도리에 있어서는 숨겨진 사실을 들추어내어서는 안된다.’ 하여 매양 임금 앞에서 이것을 큰 의리(義理)로 삼았으므로, 임금이 선입설(先入設)에 동요됨이 없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호(鄭澔)와 민진원(閔鎭遠) 등의 장주(章奏)가 비록 간절하기 그지없었지만, 임금이 끝내 차마 할 수 없는 바가 있다고 하면서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끝내 선왕께서 병환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신년766)   흉적(凶賊)의 변(變)을 초래(招來)하도록 했으니, 이광좌(李光佐)가 어떻게 그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고(故) 영부사(領府事) 이이명(李頤命)의 처 김씨(金氏)가 상언(上言)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신의 손자 이봉상(李鳳祥)은 생명을 위해 도피하느라 미처 자수(自首)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남편의 아우인 신 이익명(李益命)의 보고에 의하면 성상께서 죄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조(該曹)로 하여금 녹용(錄用)하게까지 하셨다 하니, 이제는 이봉상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천지(天地)같은 인자하심과 하해(河海)같은 큰 것으로도 이 일에 비유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어떻게 감히 은수(恩數)가 특이하다는 것 때문에 참수(斬首)하는 형벌을 청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한마디 진달하고 죽겠습니다.
망부(亡夫)는 단지 아들 하나 이기지(李器之)를 두었습니다. 이기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장님이어서 폐인이 되었고 유독 이봉상이 후사(後嗣)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화란(禍亂)이 일어날 때에는 나이 겨우 16세였는데, 이기지(李器之)를 고장(藁葬)한 뒤 왕부(王府)767)  에서 가산을 몰수하고 처자는 노예를 만들도록 했다는 소식이 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신이 어떻게 일신(一身)에 닥칠 엄주(嚴誅)를 두려워하여 두 세대에 걸쳐 하나 남은 핏줄을 보존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부(子婦)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이미 이곳을 떠났으니 이로 인하여 목숨을 도모할 수 있다면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조씨(趙氏)의 거짓 고아(孤兒)768)  가 된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였는데, 마침 가동(家僮) 가운데 나이와 용모가 이봉상과 비슷한 아이가 있었으므로 신이 대신 죽어줄 수 있겠느냐는 뜻으로 말하였더니, 그 가동이 비분 강개한 마음으로 사양하지 않고 강에 몸을 던져 죽어서 이봉상을 도망하여 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가동의 시체를 염(斂)하고 관(棺)에 넣어 관부(官府)의 부검(剖檢)을 거친 다음 무덤을 쓰고 신주(神主)를 만들었습니다. 이봉상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한번 떠나간 뒤에 소식이 없었는데, 금년 2월에야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찾아서 자수(自首)하게 하려 하였었습니다.
삼가 듣건대 이봉상이 이미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고 하니, 진실로 성상께서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고 망한 것을 다시 보존시켜 주시는 은혜가 백왕(百王)들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천지 사이에 전복(顚覆)된 집안의 아들을 보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일의 정상을 다아뢰고 석고 사주(席藁俟誅)769)  합니다."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이제 김씨(金氏)의 상언(上言)을 보니, 나도 모르게 비통(悲痛)한 마음이 든다. 가동(家僮)이 주인을 위해 목숨을 대신 바친 일은 실로 전고(前古)에도 드문 일이다. 이에 중관(中官)을 보내어 대명(待命)하지 말라는 일로 전유(傳諭)하고 주인을 위하여 대신 목숨을 바친 가동에 대해서도 전례를 상고하여 포상(褒賞)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봉상을 진수당(進修堂)에서 인견(引見)하고 유시(諭示)하기를,
"영부사(領府事)의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난번 봉인(鋒刃)의 화(禍)가 있고 나서 혈족(血族)이 없으리라고 여겼는데, 지난번 그대 종조(從祖)의 상소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대가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실로 근래에 드문 일로, 그 전말(顚末)을 알고 싶어서 일부러 인견(引見)한 것이다."
하니, 이봉상이 당초 화란이 있었던 가운데 달아나 자취를 감추었던 정상을 모두 진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자년770)  에 그대의 조부(祖父)를 만나보았었는데 6년 뒤에 또 그대를 만나보니, 마치 그대의 조부를 만난 것 같다."
하고, 누누이 위유(慰諭)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봉상(李鳳祥)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도망쳤을 적에 흉당(凶黨)들이 그를 거짓으로 죽었다고 하는가 의심하여 이삼(李森)의 기포(譏捕)가 영남(嶺南)·호남(湖南)에 거의 두루 깔렸었으나 끝내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으니, 어찌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가동(家僮)이 주인을 위하여 대신 죽은 것은 실로 만고에 걸쳐 높이 뛰어난 절개이니, 어찌 말세(末世)의 일개 동노(僮奴)가 쉽사리 처리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때 이봉상의 가노(家努)가운데 나이와 용모가 대략 비슷한 자가 있었는데 마침 그 집에서 죽었으므로, 이내 이봉상이 익사(溺死)했다고 하고 드디어 상례(喪禮)를 치르고 성빈(成殯)했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13면
【분류】사법(司法) / 인사(人事) / 신분-천인(賤人) / 역사(歷史)


[註 767] 왕부(王府) : 의금부(義禁府).[註 768] 조씨(趙氏)의 거짓 고아(孤兒) : 춘추 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 대부(大夫) 도안고(屠岸賈)가 조삭(趙朔)과 그 일족(一族)을 모두 죽였는데, 조삭의 처(妻)에게 유복자(遺腹子)가 있었다. 그 아이가 태어나니 조삭의 문객(門客) 공손저구(公孫杵臼)가 그 친구 정영(程嬰)과 서로 의논하고는 다른 아이를 조씨(趙氏)의 고아(孤兒)라 속여서 공손저구는 그 어린 아이와 같이 죽음을 당하고, 정영(程嬰)은 조씨의 참 고아(孤兒)를 빼돌려 조씨의 후사(後嗣)를 보존시킨 고사(故事)가 있음.[註 769] 석고 사주(席藁俟誅) : 거적을 갈고 엎드려 죽이기를 기다림.[註 770]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사신은 말한다. "이봉상(李鳳祥)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도망쳤을 적에 흉당(凶黨)들이 그를 거짓으로 죽었다고 하는가 의심하여 이삼(李森)의 기포(譏捕)가 영남(嶺南)·호남(湖南)에 거의 두루 깔렸었으나 끝내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으니, 어찌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가동(家僮)이 주인을 위하여 대신 죽은 것은 실로 만고에 걸쳐 높이 뛰어난 절개이니, 어찌 말세(末世)의 일개 동노(僮奴)가 쉽사리 처리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때 이봉상의 가노(家努)가운데 나이와 용모가 대략 비슷한 자가 있었는데 마침 그 집에서 죽었으므로, 이내 이봉상이 익사(溺死)했다고 하고 드디어 상례(喪禮)를 치르고 성빈(成殯)했다’고 하였다."

 

5월 10일 정미

김취로(金取魯)를 대사헌(大司憲)으로, 김흥경(金興慶)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재로(金在魯)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이교악(李喬岳)과 이봉익(李鳳翼)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5월 11일 무신

승지(承旨) 박치원(朴致遠)이 주달하기를,
"김제겸(金濟謙)은 이미 증직(贈職)했는데, 이면지(李勉之)·이술지(李述之)형제는 대신(大臣)의 아들로서 모두 억울하게 죽었으며, 김시태(金時泰)가 억울하게 죽은 것은 백시구(白時耉)·이상집(李尙)과 같습니다. 이들만이 유독 증직(贈職)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자꾸 잇달아서 증직하기는 곤란할 듯하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별단자(別單子)에 써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임인년771)  의 위훈(僞勳)인 원종 녹권(原從錄券)과 회맹록(會盟錄)및 목호룡(睦虎龍)이 받은 교서(敎書)와 화상축(畫像軸)을 불살랐다. 그리고 위훈의 적장자(嫡長子)집에 있는 것도 서울과 지방에 명령을 내려 모두 불사르게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주달하기를,
"지난번 동지 부사(冬至副使) 이하원(李夏源)이 청나라에서 방금 《명사(明史)》를 수찬(修撰)하고 있다면서 ‘우리 나라의 종계(宗系)에 대한 무고(誣告)를 명나라에서 이미 정리하여 바로잡았습니다만,772)   이제 《명사》를 수찬하고 있는 시기에 혹시 전처럼 무고당할 우려가 없지 않으니, 책이 아직 완성되기 전에 미리 변무(辯誣)에 관한 요청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어 품처(稟處)하도록 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옛날 명 신종(明神宗) 때 우리 나라에서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가까스로 소설(昭雪)시킬 수가 있었고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반시(頒示)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명사(明史)》를 수찬한다고 하니 전처럼 무고당할 우려가 없지 않은데, 《명사》의 수찬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열람하기를 청하게 되면 질책을 당할 우려가 없지 않을 것이며, 또 《회전(會典)》 가운데에 이미 바루어졌으니 지금 수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 《회전》을 전거로 인용할 것 같습니다. 설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신종조(神宗朝)에 우리 나라에서 여러 번 번거롭게 호소(呼訴)한 일을 새 역사책에 반드시 기재하게 될 것이니, 이 조항을 기재하게 되면 종계(宗系)에 대한 변무(辨誣)는 저절로 그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 책이 완성되기를 기다린 다음 과연 무고당한 내용이 있으면 다시 요청하여 변무(辨誣)해도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이 막중한 데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품처(稟處)하게 했던 것인데, 이미 《회전(會典)》에 기재되어 있으니, 이제 역사를 수찬하더라도 어찌 다른 염려가 있겠는가? 경솔하게 앞질러 열람하기를 청하는 것은 불가할 듯하다. 이 뒤로 사행(使行)이 있을 적에는 역사의 완성에 대한 여부를 상세히 탐문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비국(備局)에 명하여 여러 도(道) 각 고을의 신포(身布)와 구적(舊糴)의 수납되지 않은 것이 제일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1년치를 모두 탕감시키도록 행회(行會)773)  하게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태구(趙泰耉)를 노적(孥籍)하자는 계(啓)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이르기를,
"신축년774)   무렵에 저 사람이 뜻밖의 말을 하였었는데, 설령 그때 정신(廷臣)들이 물리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나와 보았겠는가? 조태구가 상소를 올리기에 급급하여 마치 참소하는 것같이 한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에 대해 내가 어찌 마음에 두고 잊지 않겠는가? 역적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한 뒤에 시종 옥사(獄事)를 조사하여 다스린 사람은 조태구였다.
그런데 김몽상(金夢祥)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위를 범한 부도(不道)스러움이 역적 박상검(朴尙儉)보다도 더하다.’고 하면서 기필코 죽이려고 하였다. 역적 목호룡의 변서(變書)는 그의 공초(供招)에 견줄 정도가 아닌데도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듯이 혹독하게 다그쳐 옥사(獄事)를 만들었으니, 나는 그때에 그가 이미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나는 선류(善類)들이 도륙(屠戮)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으며, 사소(辭疏)가 올라올 때에는 내가 또 나의 일 때문에 옥사가 꾸며지는 것을 차마 편안히 보고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을 그에게 언급했었다. 그가 사람의 심장(心腸)을 가지고 있었다면 마땅히 그 옥사를 그렇게 다그치지 않았어야 하는데도 결국 기필코 없는 사실을 꾸며 만들고야 말았다. 그가 신축년775)  에 몰래 북문(北門)으로 들어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이는 그 자신에게 있어 큰 죄가 된다고 할 수는 없으니,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라."
하였다. 【대계(臺啓)로 인하여 전지(傳旨)를 봉행하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14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


[註 77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77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윤양래(尹陽來), 사간(司諫) 홍용조(洪龍祚),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윤심형(尹心衡)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육적(六賊)을 처형하라는 아룀에 대하여는 가극(加棘)776)  하라고 명하였다.  【대계(臺啓)로 인하여 전지를 봉행하지 못하였다.】 이삼(李森)을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라는 아룀에 대하여는 원찬(遠竄)시키라고 명하였다. 【대계로 인하여 전지를 봉행하지 못하였다.】 이명언(李明彦)의 일과 박상검(朴尙儉)의 옥사가 있을 때의 여러 당상관(堂上官)들에 대한 일은 모두 정계(停啓)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이의천(李倚天),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이자(李滋)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남태징(南泰徵)과 이여적(李汝迪)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고 이보욱(李普昱)의 일에 대해서는 이기성(李基聖)과 함께 똑같이 원찬시키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사상(李師尙)은 입신(立身)한 처음에 이미 명의(名義)의 죄인이 되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선조(先朝)에서 버림받은 것과 자기 아들이 적과(賊科)에서 삭제당한 것을 이유로 감히 나라를 원망하고 임금을 원수로 여기는 마음을 품고 폐일(吠日)777)  ·석천(射天)778)  의 계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담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지난해의 상소에서는 혼조(昏朝)779)   때의 일을 거론하여 감히 영고(寧考)의 성세(聖世)에 견주었는가 하면 백망(白望)이 동궁(東宮)을 모해하는 역적을 고발했을 적에는 앞장서서 입대(入對)하여 그 사실을 핵문(覈問)하고자 청한 노신(老臣)을 저격(狙擊)하여 동궁(東宮)을 보호할 길을 단절시켰습니다. 지난번 대신(大臣)들의 연차(聯箚)는 정유년780)  의 구례(舊例)를 따르자고 청한 것에 불과한데도 찬탈(簒奪)하려 한다고 하면서 기필코 참혹한 형벌과 극률(極律)을 가하라고 하였으며, 또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서신을 보내어 먼저 대신을 제거하게 하였습니다. 이미 대신을 제거하게 하였다면 그 뒤에 하려고 하는 짓은 환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김일경은 이미 복주(伏誅)되었는데, 이 역적만이 유독 법망(法網)을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사상에게 빨리 방형(邦刑)을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봉상(李鳳祥)은 지난날 흉당(凶黨)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적에 이미 불러다 빌붙었다는 꾸지람이 있었는데, 지금 조정이 청명한 때에 이르러서도 음흉하고 교사스런 짓을 한 자취가 많습니다. 군부(軍府)의 재화(財貨)를 마구 남용하여 죄를 받고 귀양가 있는 흉도(凶徒)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었으며, 군부의 중요한 일이 무엇을 위한 일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감(都監)이 장차 폐국(廢局)되는 지경을 면치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봉상(李鳳祥)을 파직(罷職)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포도 대장(捕盜大將) 김수(金洙)는 자신이 수신(帥臣)이면서도 귀양간 내시(內侍)를 불러서 사람을 물리치고 비밀 이야기를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더구나 그 의도가 실지로 역적 이삼(李森)의 뜻을 받들려는 데 있었으니, 김수를 파직(罷職)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황해 병사(黃海兵使) 조수(趙脩)가 곤수(閫帥)의 직임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본직(本職)에 제수되자 군수 물자를 함부로 소비하면서 귀양중에 있는 흉도(凶徒)들에게 두루 방문하였으며, 그 외의 탐학(貪虐)스런 정상에 대해서는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조수를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구후익(具後翼)은 탐학(貪虐)하는 것으로써 일을 삼아 재물을 실은 짐바리가 길에 끊어지지 않고 있으며, 전원(田園)을 많이 점유(占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막비(幕裨)들이 이를 이용하여 간사한 짓을 하고 아객(衙客)이 멋대로 곤장을 치기 때문에 영중(營中)의 군졸들이 지탱하여 견뎌낼 수가 없으니, 구후익을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최필번(崔必蕃)은 과외(科外)의 초피(貂皮)와 인삼(人蔘)을 강제로 받아들여 서울로 실어 보냈는데, 간 곳이 명백하지 않으므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필번을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임주국(林柱國)이 상소(上疏)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조태억(趙泰億)이 이른바 당초 교문(敎文)에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실로 더할 수 없는 기망(欺罔)인 것입니다. 대저 교문은 사체(事體)가 엄중하므로, 비록 일찍이 주문(主文)781)  을 지냈던 사람이라도 반드시 돌려가며 보아 문장의 자구(字句)를 고치는 것은 규례(規例)가 곧 그러한 것이었는데, 그는 당시 대제학의 자리에 있던 사람으로 몰랐을 리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교문 가운데 몇몇 구어(句語)는 그것이 얼마나 흉패(凶悖)스러운 것입니까? 그에게 조금이라도 전하(殿下)를 섬기려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혐의가 있다고 핑계하면서 심상하게 여긴 채 묵묵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또 종형(從兄)의 일 때문에 서로 교제하지 않았다고 한 말은 더욱 아주 무망(誣罔)한 것입니다. 임인년782)   8월 13일의 청대(請對)는 이것이 어찌 인정(人情)에 있어 차마 할 수가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리하여 공의(公議)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입에서 발론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임인년 이후 술자리를 마련하고 친밀하게 한 곳에 모여 앉아 시구(詩句)를 수창(酬唱)하였는데, 혐의가 있는 사람이 진실로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역적 유봉휘(柳鳳輝)의 죄에 이르러서는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인데, 전하께서 발탁하여 보상(輔相)의 직임을 맡기고 심지어 어린 임금의 보좌를 부탁받은 한(漢)나라 신하783)  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정사를 시작하는 처음에 있어 누(累)가 된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의례적인 비답(批答)을 내렸다.

 

경기 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이정응(李挺膺)이 복명(復命)하니, 분부하기를, "파주 목사(坡州牧使) 정내주(鄭來周)와 음죽 현감(陰竹縣監) 강일규(姜一珪)는 모두 치적(治績)이 칭찬할 만하니, 재직하고 있는 사람은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잉임(仍任)시키고 이미 체차(遞差)된 사람은 특별히 3품 수령(守令)에 임명하라. 양근 군수(楊根郡守) 심세준(沈世俊)과 남양(南陽)의 전(前) 부사(府使) 윤식(尹植)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잡아다가 핵문(覈問)하여 죄를 정하고 그들의 천주(薦主)784)  도 파직시키라."
하였는데, 이정응(李挺膺)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이 명(命)이 있었다.

 

지평(持平) 윤혼(尹焜)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臣)의 스승인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가 을미년785)  에 올린 상소는 사도(斯道)를 천명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친 그런 내용이었는데, 저 윤증(尹拯)의 무리들이 원한을 깊이 품고 막된 소리로 욕설을 한 것이 한이 없었습니다. 신치운(申致雲)이 무고(誣告)한데 이르러서는 그것이 아주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났으므로 곧 하나의 고변서(告變書)였습니다만, 다행히도 성명(聖明)께서 맨 처음에 누명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신의 스승을 추존(追尊)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치운을 극진히 용호(容護)하여 귀양보내기를 청한 아룀을 여러 달이 되도록 윤허하지 않고 계시니, 전하께서 신의 스승을 추숭(追崇)하여 주신 보답이 끝내 성실하지 않은 것이 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신치운에 대한 일은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
하였다.

 

5월 12일 기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정원(政院)에서 박상검(朴尙儉)의 옥사(獄事) 때의 금부 당상(禁府堂上)이었던 강현(姜鋧)·이조(李肇)·이태좌(李台佐)를 원찬(遠竄)하라는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까지 모두 귀양보내는 것은 성인(聖人)이 상사(喪事)를 애도한다는 뜻에 어긋나니, 이태좌는 정배(定配)하지 말고 삭직(削職)만 시키라."
하였는데, 승지(承旨) 이교악(李喬岳) 등이 취소할 것을 극력 간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이재항(李載恒)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5월 13일 경술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이의천(李倚天),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이자(李滋)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봉상(李鳳祥)의 일에 대해서는 다만 체차(遞差)시키도록 하고, 이보욱(李普昱)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윤양래(尹陽來), 사간(司諫) 홍용조(洪龍祚), 정언(正言) 윤심형(尹心衡)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이삼(李森)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축년786)   청정(聽政)하라는 명이 내린 뒤 불령(不逞)한 무리들의 흉패(凶悖)스러운 말이 권규(權珪)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선왕(先王)께서 환후(患候)를 조섭하고 있는 가운데 특별히 대리(代理)하라고 명한 것은 실로 숙종조(肅宗朝)에서 이미 행한 전례를 따른 것인데, 무슨 위망(危亡)의 화(禍)가 금방 들이닥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권규의 상소에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어찌하여 우리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 하며 조종(祖宗)의 영령이 어찌하여 우리의 종팽(宗祊)787)  을 돌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하고 공갈 위협하면서 조금도 돌아보고 꺼림이 없었습니다.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비록 이것이 본의(本意)라고 하시지만 전하의 본의가 아닌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하였으니, 아! 통분스럽습니다. 선왕(先王)의 간절한 뜻이 담긴 열 줄 교서(敎書)를 그는 누가 시키고 누가 만들었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이것은 유봉휘(柳鳳輝)가 ‘이제부터는 신충(宸衷)788)  에서 결단하소서.’라고 한 말과 그 맥락을 같이한 것입니다. 만일 권규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마땅히 형장(刑章)에 의하여 복주(伏誅)되었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집안에서 천명을 누리고 죽었으며, 게다가 흉당(凶黨)들이 포장(褒奬)하여 추증(追贈)까지 하였으므로 여정(輿情)이 울분을 품고 있으니, 권규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전결(田結)을 사사로이 쓴 수령(守令)에 대해 연한(年限)을 정하는 금고법(禁錮法)을 처음으로 제정하였으니,  【10결(結) 이상은 5년, 1백 결(結) 이상은 10년이다.】  이는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의 말을 따른 것이다.

 

영유현(永柔縣)의 무후묘(武侯廟)789)  에 서원(書院)을 면세(免稅)하여 주는 준례에 의거하여 둔전(屯田) 3결(結)을 획급(劃給)하라고 명하였다. 무후묘는 곧 선조조(宣祖朝)에서 명하여 건립한 것인데, 숙종(肅宗)이 또 악무목(岳武穆)790)  을 추배(追配)하고 이어 전민(田民)을 급여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그 내용을 아뢰었으므로, 임금이 마침내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증 영의정(贈領議政) 신임(申銋)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였다. 신임은 임인년791)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를 당하여 90세의 나이 많은 노인으로서 상소하여 동궁(東宮)의 보호를 원하다가 드디어 귀양을 가서 절해(絶海)에 갇혔다. 정국(政局)이 바뀐 처음에 제일 먼저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큰 바다를 건너자마자 갑자기 부음(訃音)이 들려 왔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연민의 정을 느껴 상공(上公)의 직위를 추증(追贈)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사시(賜諡)하자고 주청(奏請)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에 합계(合啓)한 것을 다시 아뢰었다. 유봉휘(柳鳳輝)의 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당초의 의율(擬律)에 따라 삭출(削黜)하라고 하였다. 이광좌(李光佐)의 일에 대해서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날 처분(處分)이 아주 확정된 후에는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파직하라."
하고, 조태억(趙泰億)의 일에 대해서 임금이 이르기를,
"조 판부사(趙判府事)792)  가 화를 당한 뒤 지친(至親)을 장살(狀殺)한 사람과 함께 벼슬하였으니, 의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똑같이 파직하라."
하고, 최석항(崔錫恒)의 일에 대해서 임금이 이르기를,
"국옥(鞫獄)에서 죄인을 마구 다그친 것은 모두 그의 한 일이었다. 조태구(趙泰耉)와 똑같이 추탈(追奪)하라.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윤심형(尹心衡)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권규(權珪)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前)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시환(金始煥)은 본래 줄곧 흉당(凶黨)인으로서 외람되이 번임(藩任)793)  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로지 백성을 침학하여 자신을 살찌우는 것을 일삼고 있습니다. 각 고을에서 해마다 중국의 칙사(勅使)가 나올 때 접대하는 수목(數目)가운데 억지로 실용(實用)과 남용(濫用)의 숫자를 나누게 한 다음, 강제로 환징(還徵)하여 자기 집으로 짐바리를 실어보냈습니다. 고(故) 참판(參判) 이덕영(李德英)이 본도(本道)의 감사(監司)로 있을 적에 구채(舊債)를 탕감시키고 10분의 일의 이자만 받아들였으므로 백성들이 그 혜택에 힘입었는데, 김시환(金始煥)이 이미 탕감한 구채를 다시 징수하면서 마구 편태(鞭笞)를 가하였으므로 읍리(邑里)가 거의 텅 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로 징수한 돈은 몰래 영상(營商)에게 주어 소금을 사서 판매(販賣)하게 하여 그 수익금을 본가(本家)로 실어갔기 때문에, 원성(怨聲)이 길에 가득하고 그의 살점을 먹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김시환을 잡아다가 가두고 엄중히 조사하여 특별히 중률(重律)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날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에서 속히 대계(臺啓)를 윤허하라는 것으로써 같은 목소리로 앙청(仰請)하였으나, 임금이 굳이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조언신(趙彦臣)을 승지(承旨)로, 장붕익(張鵬翼)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고, 부제학(副提學) 이병상(李秉常)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사간(司諫) 홍용조(洪龍祚)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황일하(黃一夏)와 전(前) 참판(參判) 허윤(許沇)을 자헌 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승급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나이가 80이 넘으면 으레 자급(資級)을 올려 주어야 하는데도 해조(該曹)에서 전례에 따라 하비(下批)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청한 것이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교문(敎文) 가운데 ‘위예(違豫)’라는 두 글자를 처음에는 첨입(添入)하게 하였다가 끝내는 삭제하게 하였으므로, 신은 의혹스러운 탄식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대저 질병(疾病)이 닥치는 것은 성인(聖人)도 면할 수 없는 것이요, 병중(病中)에는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일을 살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공자(孔子)도 병중에 자로(子路)가 문인(門人)을 가신(家臣)으로 삼은 것을 알지 못했으니,794)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대성(大聖)의 덕(德)에 누(累)를 끼친 일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병을 앓고 있을 때 주공(周公)이 선왕(先王)에게 고하는 글에서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곧 ‘원손(元孫) 아무가 모진 병에 시달리고 있다.‘795)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예(違豫)’라는 두 글자를 어찌 숨겨야 될 의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신 등이 기필코 ‘위예(違豫)’라는 두 글자를 쓰려고 하는 것은, 바로 성덕(盛德)과 지인(至仁)을 지니신 선왕(先王)께서 불행히도 병을 앓고 계셨는데, 이 흉도들이 대내(大內)에서 이를 숨기고서 저들이 하고 싶은 짓을 마음대로 하였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흉당(凶黨)들이 기필코 ‘위예’라는 두 글자를 삭제하려고 하는 것은 저들이 기회를 이용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부린 자취를 엄폐함과 동시에 당시의 허다한 처분(處分)을 모두 선왕에게로 돌리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더구나 완염(琬琰)796)  에 새긴 대훈(大訓)은 곧 영고(寧考)797)  의 수찰(手札)이고 선왕께서 직접 받으신 것인데,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의 흉언(凶言)은 바로 동조(東朝)798)  를 극도로 무함한 것이고 전하(殿下)에게 악명(惡名)을 씌운 것입니다. 선왕의 지인과 성덕으로써 진실로 위예하실 때가 아니라면 어찌 놀랍고 통분하여 엄중히 토죄(討罪)하지 않고서 도리어 기폐(欺蔽)하는 말에 속았겠습니까?
이제 반드시 말하기를, ‘선왕의 성덕은 백왕(百王)에 뛰어났으므로 영왕(寧王)799)  의 지사(志事)를 잘 이어받아 감히 동요하지 않았고 효우(孝友)가 극진하여 사람들이 감히 이간시킬 수 없었는데, 불행히 옥체가 위예(違豫)하자 군흉(群凶)들이 그 기회를 포착하였고 환첩(宦妾)들이 멋대로 날뛰었다. 따라서 전장(典章)을 변란시키고 화변(禍變)을 양성(釀成)시킨 것은 모두 선왕께서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다.’라고 한 뒤에야 선왕이 지니신 본연의 성덕이 빛나고 깨끗하여 하자(瑕疵)가 없게 될 것입니다. 만일 ‘선왕께서 옥체가 위예하시지 않았는데도 군흉들에게 기폐(欺蔽)를 당하여 숙종(肅宗)의 유훈(遺訓)을 본의(本意)가 아니었다고 하면서 변경(變更)하고 동조(東朝)와 전하(殿下)를 무고하고 핍박한 악언(惡言)을 놀랍고 통분스럽게 여길 것이 없다고 하면서 방치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선왕의 지극히 성스럽고 지극히 인자하신 본연의 성덕까지도 아울러 엄폐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왕의 병환을 숨기려 하는 것이 도리어 선왕의 누(累)를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병환을 숨겨서 성덕에 누를 끼치려 하십니까? 아니면 병환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성덕을 밝히려 하십니까? 그리고 정석삼(鄭錫三)의 무리가 ‘위예(違豫)’라는 두 글자를 첨입(添入)시키는 것을 강상죄(綱常罪)에 저촉된다고 지목하였는데도 도리어 그들의 말을 따라서 즉시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오늘날의 정신(廷臣)을 모두 강상죄에 밀어넣는 것이 됩니다. 이미 강상죄에 저촉된다는 것을 아셨으면서도 즉시 엄히 배척하지 않고 잠정적으로 함용(函容)하는 것은 대성인(大聖人)이 지성으로 아랫사람을 접대하는 도리로 보아서 마땅히 이렇게 해서는 안될 듯합니다.
근일의 토복(討復)한 일을 가지고 말씀드려 본다면, 조태구(趙泰耉)가 앞에서 창도하고 유봉휘(柳鳳輝)가 뒤에서 호응하였으며, 그 나머지 양흉(兩凶)도 모두 삼사(三事)800)  의 반열에 있으면서 흉모(凶謀)와 비계(秘計)는 전후 같은 방식으로 모두가 저위(儲位)를 동요시키고 국가를 위란(危亂)시키려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단지 일이 자신에게 관계된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기필코 처음에서 끝까지 법을 굽혀 용서하여 대계(臺啓)에서 논한 것을 일체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억지로 따르신 것도 제대로 율법에 의한 죄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물론,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도 유찬(流竄)시키는 데 그치기도 하고 삭출(削黜)하는 데 그치기도 하였습니다. 국옥(鞫獄)의 사체(事體)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혹 조사를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완전히 석방하라고 하기도 하고 혹 이미 자복(自服)을 받은 일도 지레 참작하여 조처하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당초 무엇 때문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구문(究問)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입니까, 사정(私情)에서 나온 것입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첨입(添入)에 대한 한 조항에 관해서 내가 어찌 상신(相臣)들의 뜻을 알지 못하겠는가? 성명(成命)을 환수시킨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합계(合啓)에 관한 일과 대계(臺啓)에 관한 일은 이미 연석(筵席)에서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지평(持平) 임주국(林柱國)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깊이 진념(軫念)하시고 성고(聖考)801)  의 유의(遺意)를 우러러 본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위로 자성(慈聖)802)  에게 품하여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시어 3백 년의 어렵고도 중대한 왕업(王業)을 우리 전하에게 넘겨주셨으니, 이는 진실로 조종(祖宗)의 아름다운 법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종의 음흉한 무리들이 은밀히 불쾌한 마음을 품고 기필코 우리 전하를 핍박하며 모해하기 위하여 씻기 어려운 악명으로 더렵혔고 암담(黯黮)한 지경으로 밀어넣었는데, 전하께서는 엄격히 분별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환히 설원(雪冤)하려고도 하지 않으신 채 교문(敎文)에 기미(幾微)만 조금 보였을 뿐 처분(處分)이 끝내 구차스러운 데로 귀결되었고, 신료(臣僚)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닌데도 징토(懲討)를 끝내 엄정하게 하지 못한 채 그럭저럭 세월만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특별히 명지(明旨)를 내려 먼저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 두 역적을 국문하여 그들이 무함하고 모해한 정상을 규명하면서 이들과 호응하여 터무니없는 말을 마구 한 무리들도 똑같이 정죄(正罪)하여 팔도(八道)의 사람들로 하여금 선왕과 전하의 수수(授受)803)  가 정당하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였다면 이 어찌 광명정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만, 이에 도리어 망설이면서 결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태억(趙泰億)·이명언(李明彦)의 무리가 상황을 엿보아 헤아리고서 도리어 협박하고 공갈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각로(閣老)의 문에서 천자(天子)가 난다느니 하는 말이 연석(筵席)에서 발론되기도 하고 원립(援立)이니 옹립(擁立)이니 하는 말이 장독(章牘)에 드날려서 방자스럽게 눈앞에서 속이며 조금도 돌보아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신은 사죄(死罪)를 무릅쓰고 아뢰건대,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스스로 취(取)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 여러 신하들이 참혹한 도륙(屠戮)을 당한 것은 동궁(東宮)으로 책봉하기 위한 대계(大計) 때문이었고 군흉(群凶)들이 멋대로 참독(慘毒)을 부린 것은 모해하기 위한 여의(餘意)에서였던 것입니다.
무옥(誣獄)의 전말에 대해 그 귀취(歸趣)를 상고하여 본다면 모든 조짐(兆朕)이 성궁(聖躬)에 있었던 것인데, 지금 설원(雪冤)된 것은 다만 군하(群下) 가운데 억울하게 죽은 자들 뿐이요 유독 전하의 무함은 그대로 있습니다. 오늘날의 거조는 국승(國乘)에 기재되고 야사(野史)에 기록될 것인데, 시대가 흐르고 일이 지나간 뒤 후세에서 이를 보는 사람들이 만일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의심을 가지게 된다면, 그런 때를 당해서 오늘날의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피를 뿌리며 변명하려 한들 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영민(英敏)한 예기(銳氣)는 너무 드러나면서도 강의(剛毅)804)  에는 부족한 점이 있고 너그럽고 인자하심은 흡족하지만 엄려(嚴厲)에는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정밀하게 생각하시고 널리 아시니 성학(聖學)이 고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치를 아는 데에는 명백하지 못한 점이 있으시고,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사방을 모두 살피시니 성의(聖意)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처심(處心)에는 아직도 순수하지 못한 점이 있으십니다. 그리하여 성무(聖誣)805)  의 변명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일이 자신에게 관계된 것이라 하여 싫어하시고, 국적(國賊)을 징토하자고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원악(元惡)을 주멸(誅滅)했으면 된다고 하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소제(漢昭帝)가 무엇 때문에 상관걸(上官桀)806)  을 목 베겠으며 《춘추(春秋)》에서 무엇 때문에 당여(黨與)들을 다스렸겠습니까? 설령 일이 자신에게 관계된 것이고 원악을 주멸했으면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충분한 도리(道理)로 삼으신다고 하지만, 신은 전하께서 자신에게 관계된 것이라는 것이 무슨 일이며 전하께서 원악을 주멸하였다는 것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의 일신(一身)은 신(神)과 백성이 의탁하는 바이므로 ‘자기(自己)’라는 두 글자는 애당초 논할 것이 못되며, 김일경과 목호룡 두 역적은 흉역(凶逆)의 사주를 받아 움직였으니 원악이라고 지칭할 자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디에 의거하여 이런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 임금의 동정을 살피고 임금의 시청(視聽)을 현혹시키는 것이 본디 소인(小人)들의 능란한 기량인 것인데, 그들의 아첨하는 태도를 본받아 의란(疑亂)시키려는 계책을 완성시킨 것은 지난번 정석삼(鄭錫三)의 무리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아! 천하의 의리(義理)는 무궁한 것이고 인심의 견해(見解)는 각기 다른 것입니다. 이 무리들이 공평한 마음으로 논설(論說)을 벌여 지당한 데로 귀결시키려 힘썼다면 누군들 그것을 불가(不可)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강상죄(綱常罪)로 말을 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속이란 말입니까? 여기에서 그들 본래의 태도가 드러난 것을 충분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무슨 책망할 것이 있겠습니까만, 유독 애석하게도 전하께서 집덕(執德)이 확고하지 않은 탓으로 처분(處分)이 전도(顚倒)되어 하루에 성교(聖敎)를 세 번이나 바꾸었습니다. 전하께서 증거로 취택(取擇)하신 것은 한 고조(漢高祖)의 소각(銷刻)807)  에 불과하였는데다가 또 오늘날의 대신(大臣)을 하마터면 일을 낭패시킬 뻔한 일개 변사(辯士)에다 견주었으니, 성명(聖明)께서 내린 이 분부는 이미 잘못을 면할 수 없는 것이거니와, 대신들의 경솔한 청대(請對)에 끝내 한마디도 변명하는 말이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하께서 전교(傳敎)를 내리는 가운데 번복이 너무 심하여 인유(引喩)한 말은 거개 견강 부회(牽强附會)한 것이 많았고 장유(奬諭)하는 말도 자못 근엄한 체통이 부족하였습니다. 우선 그 가운데 제일 두드러진 것을 취하여 말해보겠습니다. 곽광(霍光)은 한(漢)나라의 충신(忠臣)인데도 전하(殿下)를 모해하려 한 역적에 견주기까지 하였고, 위징(魏徵)은 당(唐)나라의 양신(良臣)인데도 갑자기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역적에 견주었으니, 전하께서 곽광과 위징 이 두 사람을 알고 계시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비박(卑薄)하십니까? 왕언(王言)은 한번 전파되면 다만 사방에 전송(傳誦)될 뿐만이 아니라 사필(史筆)이 역사에 기록하여 영원토록 만대(萬代)의 감시(監示)가 되는 것이니, 성덕(聖德)의 누(累)가 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부자(夫子)808)  가 이른바 ‘한마디 말이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것을 불행히도 오늘날에 와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시사(時事)를 개탄하여 진언(進言)한 것은 내가 매우 이를 칭찬하는 바이나, 대계(臺啓)를 윤허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으니, 그대로 모쪼록 침착한 마음으로 천천히 궁구해 보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목호룡의 변서(變書)는 그 정신의 쏟은 것이 오로지 저군(儲君)을 무해(誣害)하는데 있었다. 백망(白望)이 옥중(獄中)에서 상변(上變)하여 고발하기를, ‘묵호룡의 흉악한 무함은 곧 조태구(趙泰耉)와 김일경(金一鏡)의 무리들이 동궁을 모해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는데, 조태구와 김일경의 무리는 잠시 대명(待命)했다가 곧바로 안옥(案獄)하게 하였다. 최석항(崔錫恒)은 또 일이 동궁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옥안(獄案)에 기록하지 말 것을 청하였고, 이것을 조보(朝報)809)  에 내어 팔방(八方)에 전파시킴으로써 마치 참으로 무함할 만한 단서가 있는 듯이 하여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의란(疑亂)시켰다. 이리하여 그 당여들이 서로 흉언을 유포하여 일세(一世)를 광혹(誑惑)시켰는데, 비록 노론(老論)으로 명칭하는 사람들도 그저 범연히 무옥(誣獄)이라고 일컬을 뿐이고 실제로 이면(裏面)의 일은 몰랐다가 목호룡의 형인 목시룡(睦時龍)이 국문을 받을 때의 공초(供招)에서 ‘목호룡이 남의 사주를 받아 상변(上變)했는데 사행(使行)의 성부(成否)를 관망(觀望)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사행이 일을 마쳤다는 말을 듣고 난 다음날 고발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진실로 그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이것이 얼마나 큰 위역(危逆)인데 즉시 고발하지 않고 사행(使行)의 성부를 기다리며 관망하는 바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삼수(三手)810)  의 지목은 전혀 거짓된 날조로서 단지 저궁(儲宮)을 모해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왔다는 것이 명백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더구나 저궁을 책립할 전후에 환첩(宦妾)들이 온갖 방법으로 무해(誣害)한 정상은 또 손형좌(孫荊佐)의 공초(供招)에 상세히 나와있다. 을사년811)   초에 국정을 담당한 여러 신하들이 만약 목호룡이 상변(上變)한 것이 오로지 저궁을 무해하기 위한 것임을 명백히 말하면서 당시 국문에 참여하여 다그쳤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철저히 다스려 무안(誣案)을 일거에 번복하고 그들의 위훈(僞勳)과 위과(僞科)를 삭제시킬 수 있었다면 우리 임금의 망극(罔極)한 무함을 통쾌히 씻을 수 있었을 것이며, 대신(大臣)이하 관원의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벼슬과 시호(諡號)도 회복시키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저절로 회복되었을 것이다. 당시 사류(士類)들 가운데 이런 논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지 않았는데도 일대(一隊)의 제공(諸公)들은 모두 사대신(四大臣)812)  의 신설(伸雪)만을 급선무로 삼았다. 이는 여러 신하의 억울함을 신설하면 임금의 무함에 대한 변명(辯明)은 저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임금이 무함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는 강상(綱常)의 큰 변고인 것이다. 천하의 만사(萬事)가운데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에 있기에 도리어 대신들을 신설시키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았으니, 경중(輕重)이 전도(顚倒)된 처사이다. 생각건대, 어떻게 임금의 청문(聽聞)을 감동시키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열복(悅服)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겨우 신설되자마자 다시 파기되어 의리(義理)가 폐쇄되고 역변(逆變)이 일어나기에 이른 까닭이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15면
【분류】정론(政論)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801] 성고(聖考) : 숙종(肅宗).[註 802] 자성(慈聖) : 왕대비.[註 803] 수수(授受) : 왕위를 주고받음.[註 804] 강의(剛毅) : 강직하고 굳셈.[註 805] 성무(聖誣) : 임금이 당한 무함.[註 806] 상관걸(上官桀) : 한소제(漢昭帝)의 왕후(王后)인 상관 황후(上官皇后)의 조부로, 무제(武帝) 때에 벼슬이 좌장군(左將軍)이었음. 당시 상장군(上將軍)인 곽광(霍光:즉 상관 황후의 외조부였음)과 어린 소제(昭帝)를 보필하라는 유조(遺詔)를 받았었는데, 그 뒤 곽광과 틈이 생겨 그를 죽이고 소제를 폐할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종족(宗族)이 다 멸망당했음.[註 807] 한 고조(漢高祖)의 소각(銷刻) : 한 고조가 초 패왕(楚霸王)과 천하를 다툴 적에 변사(辯士) 역이기(酈食其)가 고조에게 육국(六國)의 후손을 다시 세워 왕 노릇하게 할 것을 권하여 인장(印章)을 새기게 하였었음. 그러나 고조의 모신(謀臣)인 장양(長良)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드디어 인장을 다시 녹였는데, 이를 가리킨 말임.[註 808] 부자(夫子) : 공자(孔子).[註 809] 조보(朝報) :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사항을 매일 아침 기록하여 반포하는 관보(官報).[註 810] 삼수(三手) : 삼종(三種)의 수법(手法)이란 말. 즉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평지수(平地手)를 이름. 대급수(大急手)는 용사(勇士)를 시켜 칼을 품고 궁중(宮中)에 들어가서 왕을 시해(弑害)하는 것이요, 소급수(小急手)는 중국에서 사온 환약(丸藥)을 궁녀(宮女)에게 주어 음식물에 타서 왕을 독시(毒弑)하는 것이요, 평지수(平地手)는 선왕(先王:숙종)의 전교(傳敎)를 위조하여 왕을 폐출(廢黜)시키는 것임.[註 811]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812] 사대신(四大臣) :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사신은 말한다. "목호룡의 변서(變書)는 그 정신의 쏟은 것이 오로지 저군(儲君)을 무해(誣害)하는데 있었다. 백망(白望)이 옥중(獄中)에서 상변(上變)하여 고발하기를, ‘묵호룡의 흉악한 무함은 곧 조태구(趙泰耉)와 김일경(金一鏡)의 무리들이 동궁을 모해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는데, 조태구와 김일경의 무리는 잠시 대명(待命)했다가 곧바로 안옥(案獄)하게 하였다. 최석항(崔錫恒)은 또 일이 동궁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옥안(獄案)에 기록하지 말 것을 청하였고, 이것을 조보(朝報)809)  에 내어 팔방(八方)에 전파시킴으로써 마치 참으로 무함할 만한 단서가 있는 듯이 하여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의란(疑亂)시켰다. 이리하여 그 당여들이 서로 흉언을 유포하여 일세(一世)를 광혹(誑惑)시켰는데, 비록 노론(老論)으로 명칭하는 사람들도 그저 범연히 무옥(誣獄)이라고 일컬을 뿐이고 실제로 이면(裏面)의 일은 몰랐다가 목호룡의 형인 목시룡(睦時龍)이 국문을 받을 때의 공초(供招)에서 ‘목호룡이 남의 사주를 받아 상변(上變)했는데 사행(使行)의 성부(成否)를 관망(觀望)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사행이 일을 마쳤다는 말을 듣고 난 다음날 고발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진실로 그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이것이 얼마나 큰 위역(危逆)인데 즉시 고발하지 않고 사행(使行)의 성부를 기다리며 관망하는 바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삼수(三手)810)  의 지목은 전혀 거짓된 날조로서 단지 저궁(儲宮)을 모해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왔다는 것이 명백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더구나 저궁을 책립할 전후에 환첩(宦妾)들이 온갖 방법으로 무해(誣害)한 정상은 또 손형좌(孫荊佐)의 공초(供招)에 상세히 나와있다. 을사년811)   초에 국정을 담당한 여러 신하들이 만약 목호룡이 상변(上變)한 것이 오로지 저궁을 무해하기 위한 것임을 명백히 말하면서 당시 국문에 참여하여 다그쳤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철저히 다스려 무안(誣案)을 일거에 번복하고 그들의 위훈(僞勳)과 위과(僞科)를 삭제시킬 수 있었다면 우리 임금의 망극(罔極)한 무함을 통쾌히 씻을 수 있었을 것이며, 대신(大臣)이하 관원의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벼슬과 시호(諡號)도 회복시키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저절로 회복되었을 것이다. 당시 사류(士類)들 가운데 이런 논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지 않았는데도 일대(一隊)의 제공(諸公)들은 모두 사대신(四大臣)812)  의 신설(伸雪)만을 급선무로 삼았다. 이는 여러 신하의 억울함을 신설하면 임금의 무함에 대한 변명(辯明)은 저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임금이 무함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는 강상(綱常)의 큰 변고인 것이다. 천하의 만사(萬事)가운데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에 있기에 도리어 대신들을 신설시키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았으니, 경중(輕重)이 전도(顚倒)된 처사이다. 생각건대, 어떻게 임금의 청문(聽聞)을 감동시키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열복(悅服)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겨우 신설되자마자 다시 파기되어 의리(義理)가 폐쇄되고 역변(逆變)이 일어나기에 이른 까닭이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것이다."

 

5월 14일 신해

윤헌주(尹憲柱)를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삼았다.

 

5월 15일 임자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승지 홍용조(洪龍祚)가 아뢰기를,
"근래 장오법(贓汚法)이 엄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신이 북도(北道)에 귀양가 있을 적에 전(前) 병사(兵使) 이수량(李遂良)의 탐오스런 정상을 상세히 알았는데, 그 당시의 북평사(北評事) 조익명(趙翼命)이 상소로 진달하면서 청죄(請罪)하였으니, 곧 호마(胡馬)를 사들인 일 및 변장(邊將)들이 전최(殿最)813)  에 대한 일과 사인(私人)에게 봉진(封進)한 일 등이 그것입니다. 또 호백구(狐白裘)814)  를 각 읍진(邑鎭)에 요구한 일 때문에 수의(繡衣)815)  의 서계(書啓)에 의해 보고되었는데도 미처 사핵(査覈)하기도 전에 사면령(赦免令)으로 인하여 방면(放免)되었습니다. 그리고 북관(北關)의 친기위(親騎衞) 시사(試射) 때의 상격(賞格)을 이수량이 절반 이상을 지급하지 않고서 남은 수량을 가져다 썼으며, 또 이수량이 6월에 나포(拿捕)되었는데 추수한 후에 받아들여야 할 모곡(耗穀)의 수량을 미리 중기(重記)816)  에 기록하여 놓았으니, 이 또한 더없이 큰 불법인 것입니다. 마땅히 엄중히 핵실하여 죄를 매겨서 북인(北人)들의 원통함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5월 16일 계축

대사간(大司諫) 윤양래(尹陽來)가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대사헌(大司憲) 김유경(金有慶)이 잇달아 패초(牌招)를 어긴 것은 비록 일을 피하는 것 같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하급 관리를 대하듯이 초기(草記)817)  로 파직시키기를 청한 것은 조정의 사체(事體)에 있어 애석한 처사였습니다. 색목(色目)을 논의하는 것이 세상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 있으니, 오늘날의 급선무는 다만 전철(前轍)을 아주 되돌려 탕평(蕩平)으로 귀착시키도록 힘써야 되는데, 엊그제 이장(二將)·삼변(三弁)818)  에 대한 계청(啓請)은 끝내 이러한 고질에서 탈피되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이봉상(李鳳祥)의 경우는 결단코 음험 간교한 사람이 아니고 구후익(具後翼)은 본디 일을 까다롭지 않게 처리한다는 칭송이 있었는데도 일필(一筆)의 단구(斷句)로 배척하였으니, 어찌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수의(繡衣)의 서계(書啓)에서 폄론(貶論)된 자를 반드시 모두 폐기할 수가 없고 칭찬된 자를 반드시 모두 임용할 수는 없으나, 간교하게 장오(贓汚)를 마구 범한 사람이 혹 사면으로 인하여 석방되기도 하고 혹은 잠시 유배되었다가 사유(赦宥)받기도 하였으니, 어떻게 징계하고 권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당 양전(兩銓)819)  으로 하여금 10여 년 이래 제도(諸道) 수의(繡衣)의 서계(書啓) 가운데 탐학(貪虐)으로 지목된 자는 일체 금고(禁錮)시켜 사면령이 있을 때에도 논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김유경(金有慶)의 일에 대해서는 경(卿)의 말이 옳다. 이미 특별히 거두어 서용하게 하였다. 부계(府啓)820)  에 이르러서는 나도 늘 세태(世態)가 시속(時俗)을 탈피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고 있었다. 소장(疏章)의 끝에 진달한 것도 또한 매우 사의(事宜)에 맞는 말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처음에 윤양래(尹陽來)가 이광좌(李光佐)와 함께 연경(燕京)의 사행(使行)에 동행했었으므로, 정의(情意)가 매우 도타왔었다. 그래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어서는 합계(合啓)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사론(士論)에 버림받을까 두려워 시급히 한 장의 상소를 올려 간략하게 토복(討復)에 대한 의리를 진달하였으나, 단지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만을 거론하였을 뿐 이광좌(李光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말을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무단히 이장(二將)·삼변(三弁)의 일을 가지고 과연 대사(大事)를 저해하려 하였으니, 그의 용심(用心)이 교묘(巧妙)하다고 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16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행정(行政) / 역사(歷史)


[註 817] 초기(草記) : 상주문(上奏文)의 하나. 각 관서에서 정무상(政務上) 그리 중요하지 아니한 사항에 관하여 사실만을 간단히 적어 상주하는 문서.[註 818] 삼변(三弁) : 세 사람의 무관.[註 819] 양전(兩銓) : 이조(吏曹)와 병조(兵曹).[註 820] 부계(府啓) : 사헌부의 아룀.
사신은 말한다. "처음에 윤양래(尹陽來)가 이광좌(李光佐)와 함께 연경(燕京)의 사행(使行)에 동행했었으므로, 정의(情意)가 매우 도타왔었다. 그래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어서는 합계(合啓)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사론(士論)에 버림받을까 두려워 시급히 한 장의 상소를 올려 간략하게 토복(討復)에 대한 의리를 진달하였으나, 단지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만을 거론하였을 뿐 이광좌(李光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말을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무단히 이장(二將)·삼변(三弁)의 일을 가지고 과연 대사(大事)를 저해하려 하였으니, 그의 용심(用心)이 교묘(巧妙)하다고 할 만하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과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재상(宰相)이 허물이 있으면 대간(臺諫)이 논핵하고 대간이 허물이 있으면 재상이 규탄하는 법인데, 대간이 대신(大臣)을 논핵하는 것이 유찬(流竄)과 주극(誅殛)을 청하기까지 한다면 대신이 대간을 규탄하는 것은 유독 파직시킬 것을 아뢰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 등이 전일에 초기(草記)로 파직시킬 것을 청한 것은 그 사체(事體)가 차자에 견주어 볼 때 더욱 중한 것인데, 그가 이른바 ‘사체에 있어 애석하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교(聖敎)에 매양 종래 군간(群奸)들의 참독(慘毒)한 것은 이것이 당초 당론(黨論)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서 ‘탕평(蕩平)’ 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여러 번 부지런히 교유(敎諭)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이 교유가 명교(名敎)에 큰 손상이 있게 할까 염려스럽습니다. 흉도(凶徒)와 선류(善類)는 서로가 반대(反對)되므로 처음에는 당론(黨論)에서 출발된 것이지만 말류(末流)에 이르러서는 종묘 사직을 위란(危亂)시키려 모의하여 악역죄(惡逆罪)를 범하게 되는 것이니, 당연히 악역을 다스리는 법으로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당론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까? 탕평(蕩平)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가짐이 지극히 공정하여 한결같이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현사(賢邪)를 뒤섞어 두는 것을 탕평의 도(道)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윤양래(尹陽來)는 마음속으로 사태를 관망하는 뜻을 품고 위란(危亂)시킬 계책을 부려 보기 위해 갑자기 색목(色目)을 논의하면서 탕평을 힘써야 된다는 등등의 말을 가지고 깊이 전하(殿下)의 마음을 맞추었으니, 그 계책이 일을 피하는 데에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저 사헌부(司獻夫) 여러 관원들의 아룀이 사간원(司諫院)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있는 힘을 다하여 변명 하면서 기필코 대각(臺閣)에 시끄러움을 야기시키려 한단 말입니까? 이미 거괴(巨魁)를 제거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 여러 대관(臺官)들과 함께 일하려 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의도입니까? 생각건대, 그가 흰머리에 곤궁한 처지여서 지기(志氣)가 꺾여 좌우를 돌아보며 두려워하던 끝에 규피(規避)할 생각에서 한 소치(所致)인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돌볼 가치도 없습니다만, 혹시 의리가 더욱 어두워지고 윤상(倫常)이 날로 무너지게 될까 염려스러우니, 다만 전하께서는 겸손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에 동요됨이 없이 조금 견책(譴責)을 가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도헌(都憲)821)  의 파직을 청한 것은 삼사(三事)822)  의 사체에 매우 합당한 것인데, 어찌 인구(引咎)할 필요가 있겠는가? 차자의 끝에 진달한 말은 좋다."
하였다.

 

집의(執義) 이의천(李倚天)과 장령(掌令) 이자(李滋)가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 등이 지난번 토역(討逆)을 위해 청대(請對)한 이유를 윤양래(尹陽來)에게 통의(通議)하였더니 다방면으로 핑계를 대다가 절박하게 된 뒤에야 들어왔습니다. 또 복합(伏閤)823)  하겠다는 내용으로 간통(簡通)을 보냈더니, 그 간통이 이틀간을 왕복토록 끝내 근실(謹悉)이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상소하여 이장(二將)·삼변(三弁)에 대한 아룀을 색목(色目)에 대한 논의로 귀착시켜 은연중 화심(禍心)을 품은 무옥(誣獄)에다 견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흉적 이삼(李森)에게 은밀히 결탁하여 역적 조태구(趙泰耉)에게 뇌물질을 한 이봉상(李鳳祥)과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인척 관계를 맺어 재물을 탐하고 몰래 뇌물을 일삼은 구후익(具後翼) 등을 끄집어내어 많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신구(伸救)하였는가 하면, 감히 복합(伏閤)하기 위하여 간통(簡通)을 발송하는 때에 기필코 신 등을 격축(擊逐)함으로써 대론(大論)을 저해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상정(常情)에 벗어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윤양래는 이광좌(李光佐)의 친우(親友)로서 이광좌를 위하는 일이면 죽더라도 사피(辭避)하는 바가 없습니다. 지난날 전대(專對)한 대신(大臣)이 극형(極刑)을 받았을 적에 윤양래만이 유독 그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지로 이광좌의 힘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지난번에 올린 한 통의 상소에서 유독 조태구와 유봉휘(柳鳳輝) 두 역적만을 끄집어내어 논핵한 것은 은연중 구별(區別)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일부러 이렇게 동요시킬 계책을 세워 바야흐로 일어나던 공의(公議)를 저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사은(私恩)에 빠져 임금의 원수를 잊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처사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일시적으로 받은 충격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허물을 무자비하게 비난하는 것은 아름다운 기상(氣像)이 아니다."
하였다. 지평(持平) 임주국(林柱國)·윤혼(尹焜)과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도 이것 때문에 인피(引避)하니, 모두 사퇴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서종섭(徐宗燮)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고(故) 판서(判書) 김창협(金昌協)은 기사년824)  의 환국(換局) 이후로 의리를 지켜 자기의 뜻을 실천하여 임천(林泉)에 물러가 살았습니다. 그는 학문이 정밀하고 식견이 명석하였으므로 선조(先朝)에서 예우(禮遇)를 받았고 사림(士林)이 높여 우러렀습니다. 그리고 겸손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죽은 뒤에도 시호(諡號)를 청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만, 포장(褒奬)하는 은전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 이희조(李喜朝)의 전례에 의거하여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기진(李箕鎭)은 말하기를,
"전(前) 부제학(副提學) 권변(權忭)의 염퇴(恬退)825)  한 행적은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심(苦心)과 청절(淸節)을 지녔다는 것으로 일찍이 숙종조(肅宗朝)에서 포은(褒恩)을 받았었는데도 아직껏 승품(陞品)시키는 조처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이가 80에 이르렀고 또 선조(先朝)의 포은(褒恩)도 있었으니,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윤봉조(尹鳳朝)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송필항(宋必恒)을 사간(司諫)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원백규(元百揆)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삼았다.

 

여선군(驪善君) 이학(李壆)과 흥해 부수(興海副守) 이환(李爟)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종부시(宗簿寺)에서 고강(考講)할 적에 잇달아 다섯 번 으뜸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가자하는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5월 17일 갑인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논어(論語)》를 강하다가 불쌍하게 여길 것이요 기뻐하지 말라826)  고 한 문구(文句)에 이르러 분부하기를,
"오늘 마침 추조(秋曹)827)  의 복주(覆奏)를 보니, 여러 도(道)에서 강도(强盜)의 수효가 많았다.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면 누군들 바라지 않겠는가마는, 혹 관장(官長)에게 시달리기도 하고 혹 신역(身役)에 지치기도 하여 이러한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애처로운 것이다. 또 수도(囚徒)를 살펴보았더니 시수(時囚)의 수효가 또한 많았다. 그 가운데 범죄(犯罪)가 매우 무거운 자와 오랫동안 판결이 내리지 않아서 억울함을 신원하지 못한 자는 경중(輕重)에 따라 속히 처리함으로써 판결이 내리지 않은 죄수가 없게 하라. 이어 이 전교를 팔도(八道)와 양도(兩道)828)  에 반시(頒示)하게 하라."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심택현(沈澤賢)을 지의금(知義禁)으로, 김진상(金鎭商)을 수찬(修撰)으로, 박필현(朴弼賢)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과 윤심형(尹心衡)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사간(大司諫) 윤양래(尹陽來)는 대론(大論)이 바야흐로 일어나려고 할 적에 갑자기 미세한 단서로 인하여 한 장의 상소문을 올려서 여러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서로 잇달아 인피(引避)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커다란 분뇨(紛鬧)를 야기시킴으로써 징토(懲討)하는 형벌을 점차 지체시키게 하였으니, 그의 자취를 가지고 논한다면 대사(大事)를 저해(沮害)시킨 결과를 끝내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화심(禍心)을 품은 무옥(誣獄)이라는 따위의 말은 조어(措語)가 상심(詳審)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차자(箚子)를 올려 인구(引咎)하고 또 아뢰기를,
"신하들의 정태(情態) 가운데 제일 밉살스러운 것으로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여 자신의 사욕(私欲)을 이루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윤양래(尹陽來)는 간관(諫官)이라는 직명(職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히 사욕을 이루기 위해 성심(聖心)을 헤아려 거기에 합치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저 오변(五弁)829)  이 탄핵을 받은 것이 당론(黨論)에 관계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도 갑자기 당론(黨論)을 탕평(蕩平)시킨다는 말을 거론한 것을 전하께서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한 나머지 헌신(憲臣)을 의심하게 되어 전하의 총애를 가로챔으로써 장차 거론되려 하는 대론(大論)을 저해(沮害)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도리어 권장하고 허여(許與)하시니, 신은 삼가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엊그제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나의 뜻을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하고 또 말하기를,
"일종의 정세를 관망하는 무리들이 감히 대론(大論)을 맞서 온갖 방법으로 저해(沮害)하고 있기 때문에, 신 등은 걱정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어 서로 의논하여 파직시킬 것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제 윤양래(尹陽來)가 겉으로는 일을 논한다 핑계하고서 속으로는 사욕을 부리기 위해 은연중 지난번 흉당(凶黨)들이 종사(宗社)를 모위(謀危)하려 한 것을 오늘날 토복(討復)하는 의리와 싸잡아서 모두 당론으로 귀결시키려 한 것입니다. 전하의 총명함으로 어찌 그 정상을 간파[覰破]하지 못하였겠습니까마는, 그에 앞서 탕평(蕩平)시켜야 되겠다는 마음이 성념(聖念)에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보고는 곧바로 믿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의자(議者)들이 모두들 대론(大論)을 저해한 것으로 그의 죄안(罪案)을 삼고 있습니다만, 신은 성총(聖聰)을 의란(疑亂)시킨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엊그제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이미 나의 뜻을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수찬(修撰) 조덕린(趙德隣)이 상소하여 성학(聖學)을 힘쓸 것과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는 방법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인다는 우대(優待)의 비답을 내렸다.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의 유생(儒生) 채명보(蔡命寶)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본고을에 있는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이 지난 임인년830)  에 흉당(凶黨)들에 의해 철거(撤去)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기사년831)  의 잔당(殘黨)인 권세항(權世恒)이 이 고을의 부윤(府尹)으로 왔고 그의 도당인 홍상빈(洪尙賓)이 이웃 고을의 수재(守宰)로 와 있으면서 은밀히 도내(道內)의 귀역(鬼蜮)832)  과 같은 무리를 사주하였는데, 권집(權潗)·최봉(崔鳳) 등 1백여 인이 그들의 지휘(指揮)를 받아 기필코 원우(院宇)를 파괴하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본주(本州)의 장보(章甫)833)  들이 사문(斯文)의 참액(慘阨)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일신의 화복(禍福)은 돌아보지 않고 의리로써 막고 정성으로써 수호하니, 권세항이 드디어 이졸(吏卒)을 풀어 신 등 50여 인을 체포하여 칼을 씌우고 족쇄를 채워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연호 군정(煙戶軍丁)과 승도(僧徒) 1천여 명을 풀어 묘우(廟宇)에 갑자기 뛰어들어 와서 단번에 철거하여 버렸으므로 선정(先正)의 영령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 그만 폐허가 되었으니, 그 해괴하고 패악스러운 거조와 그지없이 참담한 광경은 차마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영족(影簇)834)  까지도 온갖 방법으로 욕을 보이고는 또 갈가리 찢어 불에 태우려고 하였습니다.
한시유(韓是愈)·한흥유(韓興愈) 등이 관부(官府)에 정문(呈文)하여 목숨을 걸고 힘껏 다투니, 권세항이 그들의 정의를 수호하는 것에 분노한 나머지 자신의 위세(威勢)를 믿고 곧바로 혹독한 형장(刑杖)을 쳐서 더할 수 없이 참독(慘毒)스럽게 하였으며, 잡아 가두고 협박하여 온갖 방법을 다 썼으므로, 이런 지독한 형장 아래 끝내 목숨을 보존할 수가 없어 한시유는 드디어 죽고 말았습니다. 유궁(儒宮)835)  의 횡액과 사류(士類)의 참화가 고금에 어찌 이런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권세항에게는 이미 추탈(追奪)하는 죄벌이 가해졌는데 홍상빈만이 홀로 죄벌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을 수창(首倡)한 유생(儒生)은 엄형을 가한 다음 먼 곳으로 유배(流配)하라는 분부가 더없이 엄절(嚴截)하였는데도 감사(監司) 권이진(權以鎭)은 선정(先正)의 외손(外孫)으로서 수개월을 미루면서 징치(懲治)하는 거조가 없었습니다. 홍상빈과 권세항은 똑같이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결정하고 수창했던 여러 유생(儒生)들도 전일의 분부에 따라 엄형을 가한 뒷 유배시키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홍상빈의 한 짓은 진실로 더없이 놀라울 만하니 특별히 삭출(削黜)하는 형벌을 시행하고, 수창한 유생은 조사하여 찾아내어 형벌을 가한 다음 유배하라."
하였다.

 

조관(朝官) 가운데 월등(越等)836)                  에 들어 있는 자들을 탕척(蕩滌)시켜 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탄핵(彈劾)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게 된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이 월등에 구애된 사람들이었다. 대개 월등된 사람은 먼저 경직(京職)을 임명했다가 그 월한(月限)이 찬 다음에야 바야흐로 수령(守令)의 망(望)에 주의(注擬)될 수 있게 되니, 이 때문에 의차(擬差)할 적에 여기에 구애되어 군색하기 그지없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이 구례(舊例)로 인하여 진달(陳達)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대제학(大提學) 이재(李縡)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으레 내리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정국(廷鞫)을 시행하니, 죄인 윤취상(尹就商)을 나포하였기 때문이었다.

 

5월 18일 을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명홍(兪命弘)과 예조 참의(禮曹參議) 안중필(安重弼)을 불러서 접견하고 하문하기를,
"의릉(懿陵)837)  의 해자(垓子)838)  의 경계를 정한 보수(步數)가 얼마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경계를 정하는 것은 처음에는 5백 보(步)를 항식(恒式)으로 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해자를 판 곳이 단지 3백 보뿐인데, 만약 2백 보를 더 정하여 5백 보의 한계를 채우려 한다면 백성의 전지(田地)가 그 가운데로 많이 들어가게 되어 일이 매우 난처하겠고, 또 주봉(主峰)의 뒷받침 산맥을 파서 파손(破損)시키는 것도 또한 미안스러운 일입니다. 장원서(掌苑署)의 율원(栗園) 아래쪽까지를 경계로 정한다면 합당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해자의 경계를 정할 적에 백성의 전지를 많이 범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의견은 실로 선조(先朝)에서 백성을 구휼한 성덕(盛德)을 우러러 본받은 데에서 나온 것이다. 율원은 이것이 공전(公田)이니, 사전(私田)의 경우와는 다르다. 이것으로 경계를 정하라."
하였다.

 

정국(庭鞫)을 행하였다.

 

임금이 정국(庭鞫)하는 대신(大臣)과 금오(金五)839)  의 여러 당상관(堂上官)들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죄인 심정옥(沈廷玉)이 아직도 통쾌히 자복(自服)하지 않으면서 윤취상(尹就商)을 끌어들였는데, 윤취상은 시종 발명(發明)하고 있으니, 매우 흉악(凶惡)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정옥의 공초(供招)에 대해 무슨 말로써 아비를 증거대게 하는 혐의가 있다고 하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그의 아비가 살아 있을 적에 모의한 일에 대해서 저 자신은 전혀 모르고 그의 아우인 심정신(沈廷紳)이 모두 알고 있다고 하였는데, 심정신을 국문하려 하면 아비를 증거대게 하는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정옥에게는 윤취상을 만난 일에 대해 다시 신문(訊問)하라. 심정신에게는 아비를 증거대게 하는 혐의가 있으니, 신문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윤취상에게 세 번 공초(供招)를 받은 뒤에 마땅히 바로 형신(刑訊)을 가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취상은 나이가 70이 넘었다. 옛날 국문할 적에 나이 70이 된 자는 어떻게 조처하였는가?"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의금부(義禁府)의 죄인은 나이 70이면 형벌을 면제하는 것이 고례(古例)입니다. 국청(鞫廳)의 죄인은 원래 70세라고 해도 형벌을 면제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심정옥의 공초에 말하기를, ‘윤취상이 흉계를 모의했다는 것은 박상검(朴尙儉)에게서 들었다.’고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물어볼 곳이 없게 되었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형신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동의금(同義禁) 장붕익(張鵬翼)은 말하기를,
"민간(民間)에 떠도는 소문으로 말하면 윤취상이 흉계를 모의한 사실이 여러 곳에 전파되어 숨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연로(年老)한 것에 구애되어 돌보아 주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윤취상이 무녀(巫女)를 통하여 궁인(宮人)들과 서로 결탁하여 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파되었습니다. 신축년840)   7월 무렵에 대계(臺啓)에서 형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특별히 형벌을 면제하고 방송(放送)하게 하였으므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소신(小臣)이 도로 가두어 둘 것을 진달하였습니다만, 또 석방하라는 하교를 내렸으므로, 그 뒤에는 황공하여 감히 다시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심정옥의 공초를 가지고 살펴보건대, 윤취상이 훈장(訓將)841)  으로 있을 때 원휘(元徽)가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있었으니, 그들이 주도 면밀하게 모의한 정상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율문(律文)을 상고하여 보면 환시(宦侍)들과 교통(交通)한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논한다면 바로 율문에 의거하여 죄를 주어도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취상의 공초가 당초에는 조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이 판부(判付)한 바 있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조사기(趙嗣基)는 나이 70이 넘었는데도 장하(杖下)에서 죽었고, 오시수(吳始壽)와 윤휴(尹鑴)는 모두 공초도 받지 않고 바로 사사(賜死)하였으니, 연로(年老)하다는 것 때문에 옥체(獄體)에 구애가 있을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형신(刑訊)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어 분부하기를,
"심정옥이 처음에는 원일서(元一瑞)와 목천임(睦天任)을 끌어들였었는데, 이제는 심단(沈檀)·이삼(李森)·김일경(金一鏡)을 말하는 것이 무슨 까닭인가? 지난번 요망한 박상검과 문유도(文有道)의 초사(招辭)에 많은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었었는데, 심단·이삼에 이르러서는 동모(同謀)했다는 말이 없었고, 주도 면밀하게 은밀히 모의한 것은 단지 환국(換局)에 대한 일뿐이었다고 하였으니, 여기에 의심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심단과 이삼은 모두 지목(指目)되었던 자들인데, 이제 심정옥의 공초에서는 또 김일경과 박상검이 집에서 만나 보았다는 말이 있으니, 그들이 모여서 흉계를 모의한 정상이 명백하여 의심이 없습니다. 심단·이삼을 윤취상과 똑같이 잡아다가 국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취상은 이미 정우관(鄭宇寬)의 공초에서 나왔고 또 심정옥의 공초에서도 나왔다. 심단은 단지 심정옥의 공초에서만 나왔는데 김일경의 집에서 만나보았다고 하니, 심단의 죄는 윤취상과는 차별이 있을 듯하다."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심단도 또한 정우관의 공초에서 나왔었습니다."
하고, 홍치중(洪致中)은 말하기를,
"심단과 이삼이 이미 요망한 환관(宦官)들과 교통하였다면, 악역(惡逆)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고, 이관명은 말하기를,
"심단과 이삼은 잡아다가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단과 이삼을 국문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심단은 늙어서 정신이 흐리고 쇠잔한 사람이므로 수창(首倡)한 사람은 아닌 듯하고, 다만 김일경의 사주를 받고서 그렇게 한 것뿐이다. 당초에 왕래하였던 말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최석항(崔錫恒)이 먼저 정승이 되고 심단이 계속해서 정승이 된다는 말은 모두 김일경과 박상검의 무리들이 선동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심단은 이미 기사(耆社)842)  에 들어 있으니, 형신을 가하기는 곤란하다. 잡아온 뒤에도 참작하여 처리하기가 어려우니, 우선은 국문하고 싶지 않다."
하였다. 민진원과 이관명이 말하기를,
"이삼은 국문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이어 분부하기를,
"윤취상에 관한 일은 절통(絶痛)한 것이기 때문에 정국(庭鞫)을 설행하라고 명하였던 것인데, 이삼을 잡아오는 동안은 정국을 우선 정지하도록 하고 내일부터는 본부(本府)로 옮겨 설행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이 아뢰기를,
"심단(沈檀)이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과 서로 통한 정상은 모든 사람이 다같이 눈으로 본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번 국문하고 그만두어서는 안되는 것인데도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니, 가만히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심단의 죄가 저토록 현저하고 또 심정옥(沈廷玉)의 공초에서도 나왔으니, 돌보아 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심단을 빨리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잡아다가 규핵(糾劾)하여 죄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윤양래(尹陽來)의 일은 아뢴 대로 따르게 하였다.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가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은 전(前) 집의(執義) 이의천(李倚天)이 좌죄(坐罪)되어 파직당한 데 대해 개탄스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의천처럼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氣風)은 마땅히 숭장(崇奬)하고 부식(扶植)시키기에 겨를이 없어야 될 것인데, 한번 소명(召命)을 어겼다고 갑자기 준례에 따라 파직하라고 하명하였으니, 어찌 대성인(大聖人)이 간언(諫言)을 포용하는 성덕(盛德)에 부족함이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직신(直臣)을 너그러이 용납하시어 언로(言路)를 활짝 열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의천에 대한 일은 그대의 말이 옳다. 특별히 서용하겠다."
하였다.

 

지평(持平) 임주국(林柱國)이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윤양래(尹陽來)가 주창하여 사설(邪設)을 만들어 상소하여 전하의 속마음을 떠본 결과, 전하께서 증오하는 것이 붕당(朋黨)에 있고 전하께서 힘쓰시는 것이 탕평(蕩平)을 주로 하고 있으며, 화심(禍心)을 품은 무옥(誣獄)은 곧 전하께서 깊이 징창(懲創)하는 것이고 탐관 오리(貪官汚吏)도 전하께서 엄중히 다스리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색목(色目)에서 나온 의논이라는 것으로 전하께서 증오하는 대상에 적중시켰고 탕평을 힘써야 한다는 말로 전하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으며, 화심을 품은 무옥이라는 말로 전하의 귀를 경동(驚動)시켰고 탐관 오리에 대한 일로 전하의 뜻에 영합(迎合)하였습니다. 아! 사심(私心)을 이루기 위하여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거기에 영합하는 것은 바로 부시(婦寺)들이나 하는 짓인데, 어찌 청명한 조정의 대각(臺閣)에 이렇게 아첨하는 부정(不正)한 습관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간신(諫臣)들이 특별이 죄줄 것을 계청(啓請)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일방적인 선입견에 매달려 파직(罷職)시키는 경미한 처벌마저도 윤허하지 않고 계십니다. 양 대신(兩大臣)이 차자(箚子)를 올려 견책(譴責)할 것을 청한 것은 사의(辭義)가 엄정(嚴正)하였으므로 소인(小人)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따르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망설여 미루는 뜻을 현저히 드러내어 보이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하나의 아첨하는 신하는 아끼시면서 나라와 일체(一體)가 되는 대신은 그리도 야박하게 대우하십니까? 전(前) 집의(執義) 이의천(李倚天)은 다만 임금의 무함을 변명하고 국적(國賊)을 징토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을 뿐이고, ‘화복(禍福)’이라는 두 글자는 결단코 치지도외(置之度外)하였으니, 그의 지절(志節)을 돌아보면 또한 숭상할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가지 일이 주상의 마음에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꺾어누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척퇴(斥退)시키는 것조차 어렵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 윤양래가 대각(臺閣)을 격축(擊逐)하려는 계책이 이루어졌으니, 그가 정승들을 동요시키려는 계책이 얼마나 성취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진달한 내용을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이의천(李倚天)에 대한 일은 이미 유신(儒臣)에게 내린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5월 19일 병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홍용조(洪龍祚)가 말하기를,
"윤양래(尹陽來)의 주장은 진실로 잘못된 것이고 양 대신(兩大臣)의 차자 내용은 실로 세상을 근심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윤양래를 퇴척시키지 않으시니, 이는 아마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5월 20일 정사

임금이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조택(金祖澤)을 불러 보고 나서 유시(諭示)하여 보냈다.

 

분부하기를,
"엊그제 대신들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세습(世習)을 개탄하던 끝에 미처 장유(奬諭)하지 못하였었는데, 승지(承旨) 홍용조(洪龍祚)가 숨김없이 사실대로 진달하여 군심(君心)의 잘못된 점을 바루었으므로,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여 내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받아들임과 동시에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는 뜻을 보인다."
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신방(申昉)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신방의 아버지 신성하(申聖夏)는 일찍이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녹훈(錄勳)할 때 회맹(會盟)843)  에 참여한 사실이 있다는 것으로 간장(諫長)844)  인 정형익(鄭亨益)이 논했었는데, 신방이 이 때문에 마음이 꺾여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파직을 명하였다.

 

이기익(李箕翊)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서명구(徐命九)를 집의(執義)로, 이의천(李倚天)을 헌납(獻納)으로, 신노(申魯)를 겸설서(兼說書)로, 김흥경(金興慶)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이재(李縡)를 동경연(同經筵)으로, 권변(權忭)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황일하(黃一夏)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영복(趙榮福)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윤양래(尹陽來)가 주장한 탕평(蕩平)에 대한 상소는 그 폐단을 커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방지하는 방도를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은 말하기를,
"홍범(洪範)845)  의 도리는 황극(皇極)846)  을 확립하는데 있는 것인데, 훈유(薰蕕)847)  와 빙탄(氷炭)은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윤양래(尹陽來)는 복합(伏閤)하겠다는 의논에 대해 끝내 근실(謹悉)이라고 쓰지 않았고 당론(黨論)이라는 말로 대론(大論)을 저해(沮害)시켰으니, 그 계교가 교묘하고 참혹했습니다. 그런데도 신 등의 상소는 임금의 마음을 바루지 못하였고, 윤양래의 말은 도리어 임금의 뜻에 영합되었으니,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홍용조(洪龍祚)가 진달한 바인데 그에 대해 특별히 옳게 여겨 받아들인다는 뜻을 보였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영남(嶺南)은 인재의 부고(府庫)이니, 문관(文官)·남행(南行)848)  ·무관(武官)·유생(儒生)을 막론하고 의당 특별히 수용(收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주의(注擬)849)  할 적에 일체 서북(西北)의 전례에 의거하여 영남(嶺南)이라고 주(注)를 달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이 말하기를,
"성조(聖朝)에서 인재를 버리고 빠뜨리지 않는 도리에 있어서는 영남뿐만이 아니라 타도(他道)에도 어찌 쓸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단지 영남 사람만 기용하는 것은 치우치고 좁은 처사를 면할 수 없으니, 타도(他道)에서도 똑같이 특별히 천거하게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유학(幼學)을 감역(監役)에만 의망(擬望)850)  하게 하는 것은 사로(仕路)가 너무 좁은 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현(先賢)·청백리(淸白吏)·전망인(戰亡人) 등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는 법규가 있으면 그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시환(金始煥)의 일에 대해서는 대신(臺臣)과 대신(大臣)이 모두 ‘장률(贓律)은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임금이 비로소 잡아다가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이관명(李觀命)을 실록 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 삼았다. 총재관(摠裁官) 정호(鄭澔)가 노병(老病)이 들었다는 것으로 여러 번 사양하면서 배사(拜謝)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시키라고 명한 것이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광주(廣州)의 유학(幼學) 우덕삼(禹德三)이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흥양(興陽)은 바로 고(故)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이 귀양살던 곳입니다. 그가 사직(社稷)을 보위(保衛)하고 국가를 부지(扶持)시킨 정성을 생각하면 어찌 원우(院宇)를 건립하여 충절을 포장(褒奬)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이곳에다 사당(祠堂)을 세워 충혼(忠魂)을 위로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그의 두 아들도 함께 운명을 같이하였으니, 또한 매우 원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의당 위로하는 추증(追贈)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 그 후예(後裔)들을 녹용(錄用)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5월 21일 무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임주국(林柱國)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조수(趙脩)의 일과 구후익(具後翼)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심단(沈檀)에 대한 논계(論啓)는 그 내용을 고치기를,
"심단은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하여 심복(心腹)이 되어 주도 면밀하게 왕래하면서 일을 꾸민 정상이 이미 심정옥(沈廷玉)의 공초(供招)에서 드러났으며, 그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까지 증언하였습니다. 따라서 국청(鞫廳)에서 잡아다 추국하기를 청하는 것은 실로 옥체(獄體)의 당연한 데서 나왔는데도 성상(聖上)께서는 특별히 심단의 이름이 선조(先朝)의 기사(耆社)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이유로 윤허를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단이 기사에 든 것은 원래 숙종(肅宗) 때의 일이 아니니, 그가 늙었다는 것으로 용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원찬(遠竄)한 죄인 심단을 잡아다가 엄중히 구문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해 박상검·석열(石烈)의 일에 대해서는 어찌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해(謀害)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바야흐로 급박하였는데, 문안하고 시선(視膳)할 길이 막혔으므로 전하(殿下)께서는 창황한 나머지 한밤중에 신료(臣僚)들을 인접(引接)하시고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핍박당하는 정상을 상세히 설명한 다음, 이어 저위(儲位)를 사양하겠다는 뜻을 유시(諭示)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궁료(宮僚)들은 조금도 놀라거나 근심하는 기색(氣色)이 없었고, 도리어 차단하여 막을 계책만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삼전(三殿)에 진알(進謁)할 길이 막혀 호소할 데가 없게 되었을 적에는 이에 ‘대내(大內)에서 개진(開陳)하겠다.’고 하였고, 화기(禍機)가 박두하여 외정(外庭)에 유시하려고 할 적에는 이에 ‘외인(外人)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심한 경우는 ‘양전(兩殿)께서 편안치 못하시니 깊은 밤에 번거롭게 해서는 안된다. 내일을 기다려 조정(朝廷)으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겠다.’고 하면서 전하로 하여금 안으로는 손을 쓸 수 없게 만들었고 밖으로는 그 내막을 밝힐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중간에서 궁지에 몰려서 그들의 위욕(危辱)을 받게 하여 흉얼(凶孽)들로 하여금 그들의 계책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그들 마음의 소재가 매우 음흉하였습니다. 그 당시 인접하였던 춘방(春坊)851)  들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날 흉당(凶黨)들이 군부(君父)를 협박하여 그 뜻을 실행할 수 없게 만들었을 적에 민진원(閔鎭遠)을 전후에 특별히 방면하라는 명을 여러 번 내렸었으나, 이를 되돌리고 끝내 봉행(奉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특별히 방환(放還)시키라고 명하였는데도 윤회(尹會)가 감히 다시 협박하던 계책을 답습하여 멋대로 저해하고 막는 의논을 제기하면서, 심지어는 선후(先后)께서도 반드시 몹시 증오할 것이라는 등등의 말을 글로 써서 힘을 다하여 군부(君父)의 분부를 저알하고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을 속였습니다. 이처럼 무엄한 짓을 한 윤회를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고, 서명균(徐命均)·송인명(宋寅明)을 원찬시키는 일과 김성(金姓) 궁인(宮人)에 대한 일과 당시 논계(論啓)하고 진소(陳疏)한 사람들을 원찬시키는 일과 그 당시 청대(請對)한 삼사(三司)·승지(承旨)를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라는 일에 대해서는 정계(停啓)하였다.

 

보덕(輔德) 유복명(柳復明) 등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본원(本院)의 일기(日記)는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한 것입니다. 임인년852)   3월28일 밤에 궁료(宮僚)를 인접(引接)한 일이 있었고, 다음날 또 빈객(賓客)과 궁료(宮僚)들을 인접할 일이 있었는데, 이 양일(兩日)에 있었던 분부와 여러 신하들의 진달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 그때의 일은 어찌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밤중에 사대(賜對)하는 하교(下敎)는 애통스러운 마음에 하신 말씀이 수없이 많았을 것이니, 궁관(宮官)이 된 사람은 마땅히 낱낱이 상세히 기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환하게 알게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끝내 기록하지 않았으니, 그들 마음의 소재를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들추어 내어 죄에 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궁료들의 한 짓은 진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그러나 방금 큰 사건을 다스리고 있는데 어찌 그런 것까지 낱낱이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다음날 다시 상소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하번 사서(下番司書) 유필원(柳弼垣)을 현고(現告)하였는데, 그뒤 대계(臺啓)로 인하여 원찬(遠竄)시켰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서릉 도정(西陵都正) 욱(煜)과 서성수(西城守) 작(焯)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욱과 작이 상소를 진달하면서 현종(顯宗)과 숙종(肅宗)의 어필(御筆)을 봉진(封進)하였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는 것이다.


 

5월 22일 기미

임금이 강화 유수(江華留守) 박사익(朴師益)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박사익이 아뢰기를,
"신은 이제 막 예조 당상(禮曹堂上)으로서 북도(北道)의 여러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고 돌아왔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회양(淮陽)의 화재(火災)현장을 살펴보았는데 타고 남은 관곡(官穀)이 4, 5백 석뿐이었습니다. 그나마도 그을린 나머지여서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는데, 관(官)에서 강제로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만 백성들은 받기를 원치 않고 있었으니, 의당 화재를 만난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서 무휼(撫恤)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아뢰기를,
"철령(鐵嶺)에는 단지 한 가닥의 길이 있을 뿐인데, 이것이 실로 남북의 요충지(要衝地)입니다. 이제 방어(防禦)하는 임소(任所)를 안변(安邊)과 회양(淮陽) 두 고을 사이에 설치하고 회양읍을 철령의 요해처(要害處)로 옮기는 것이 매우 편의(便宜)하겠습니다."
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5월 23일 경신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5월 24일 신유

추국을 행하였다.
박성로(朴聖輅)를 승지(承旨)로, 이기진(李箕鎭)을 부교리(副校理)로, 정형익(鄭亨益)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임금이 약원(藥院)의 제조(提調)를 불러 보았다. 이때 왕세자(王世子)가 부스럼을 앓고 있었는데, 여러 의관(醫官)들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아서 어떤 사람은 이것이 수두(水痘)에 가깝다고도 했다. 의관(醫官)들에게 숙직(宿直)하라고 명하였다.
5월 25일 임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최필번(崔必蕃)을 파직시키는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이의천(李倚天)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사상(李師尙)에 대한 논계(論啓)에 이르러서는 그 내용을 고치기를,
"이 사상은 본디 음흉하고 사특한 사람으로 은밀히 흉적 임부(林溥)를 사주하여 무옥(誣獄)을 날조하였었는데, 그 일의 실정이 점차 드러나 간사한 정상이 발각되게 되자, 임연(林演)을 짐독(鴆毒)으로 살해하여 근본을 엄폐해 버렸습니다. 일찍이 영얼(嶺臬)853)                  로 있을 적에 주원(厨院)854)                  에 이직(移直)하는 날을 당하여 멋대로 연회를 베풀고 풍악을 벌였으므로, 대간(臺諫)에서 준엄한 소장(疏章)을 올렸고 성고(聖考)께서 대단히 증오한 나머지 오랫동안 금고(禁錮)시키고 녹용(錄用)하지 않았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의 적과(賊科)를 삭제하라는 명이 내림에 이르러서는 원독(怨毒)이 뻣골에 사무쳐 군흉(群凶)들을 협찬하며 유인(誘引)하는 주동이 되어 폐일(吠日)·석천(射天)의 계책이면 앞장서서 담당하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백망(白望)의 상변(上變)은 실로 양전(兩殿)을 모해하려는 역적을 고발한 것인데, 마침내 그를 박살(撲殺)시킴으로써 증언(證言)할 사람을 죽여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노신(老臣)의 일차 상소는 오로지 목을 길게 빼고 죽을 각오에서 나온 진정한 말이 었는데도 급급히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여 절해 고도에 유배시켜 기필코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사대신(四大臣)의 연차(聯箚)는 정유년855)                  의 고례(故例)에 따르기를 청한 것에 불과한데, 이를 찬탈(簒奪)이라고까지 몰아붙여 기필코 극률(極律)을 가하려고 하였으니, 그가 정신을 쏟은 것은 대신(大臣)을 먼저 제거한다[先除]는 두 글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서한으로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격동시켜 화기(禍機)를 도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애책문(哀冊文)에 멋대로 왕망(王莽)856)                  과 동탁(董卓)857)                  의 일을 인용하여 양조(兩朝)를 무함하고 욕보일 계책을 세웠으며, 더구나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 내용을 이사상(李師尙)이 모두 참여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김일경은 이미 복주(伏誅)되었는데 그만은 아직도 유배(流配)된 채로 있으므로 여정(輿情)이 울분을 품고 있으니, 이 사상에게 속히 국법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양 대신(兩大臣)을 사사(賜死)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라고 하면서 심지어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을 한꺼번에 사사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분부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흉당들은 선왕(先王)의 간곡한 뜻을 본받지 않고 다만 흉독을 부릴 마음만 품었으므로, 사직단(社稷壇)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날에 급급히 어가(御駕)앞에서 청대(請對)하여 군부(君父)를 협박함으로써 마침내 그 비망기를 철회하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선조(先朝) 때부터 나라와 일체(一體)가 된 신하로 하여금 원통함을 품은 채 죽게 했으니, 당시에 청대(請對)하였던 대신(臺臣)들을 모두 극변(極邊)으로 원찬(遠竄)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의저(李宜著)는 부임한 처음에 주공(厨供)을 성대하게 진설하게 하고 나서 며칠 뒤에는 반수(盤數)를 줄이게 하고는 그 찬품(饌品)을 계산하여 전화(錢貨)로 값을 정하였는데, 1개월에 거두어 들인 것이 거의 수백 냥을 넘었습니다. 기타 백성을 침탈하여 자신을 살찌운 일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며, 그의 경내(境內)에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의 사우(祠宇)가 있는데 이의저가 군졸을 보내어 그 사우를 헐고 재목은 관가로 실어다가 마구(馬廐)를 지었습니다. 그가 탐욕을 부리고 정인(正人)을 해친 일에 대해 엄한 징벌이 없을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5월 26일 계해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현기증(眩氣症)이 있으시니, 야간(夜間)에 출납(出納)하는 문서(文書)에 대해서는 의당 정한(定限)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의서(醫書)에도 말하기를, ‘삼경(三更)에 잠을 자지 않으면 피가 심장(心臟)을 수호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밤에 3고(三鼓)가 올린 뒤에는 문서를 출납하지 말도록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또 말하기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김재로(金在魯)는 어미의 병환 때문에 출사(出仕)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도당록(都堂錄)858)  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재로가 아니라도 적합한 사람이 없는가?"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해당되는 품계(品階)에 들어 있는 사람은 다만 이병상(李秉常)·조관빈(趙觀彬)뿐이어서 당상관(堂上官)을 승진 의망[陞擬]한 후에야 삼망(三望)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김재로의 체직을 윤허하고, 이어서 자급(資級)에 구애하지 말고 비망(備望)하여 주의(注擬)하라고 하였다.


 

 

 

윤봉구(尹鳳九)를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조관빈(趙觀彬)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신노(申魯)를 대교(待敎)로 삼았다. 윤봉구(尹鳳九)는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의 문인(門人)이다.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學問)에 힘썼으므로 평소부터 사림(士林)의 명망이 있었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 직책을 임명하였다.
사헌부 【지평(持平) 임주국(林柱國)·윤혼(尹煜).】 에서 전일에 아뢴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진검(李眞儉)은 이진유(李眞儒)의 아우로서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혈당(血黨)입니다. 지난해에 고(故) 상신(相臣) 이이명(李頤命)이 주청사(奏請使)가 되었을 적에 정축년859)  의 구례(舊例)를 끌어당겨 별도의 은화(銀貨)를 준비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게 하여 주기를 청하였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진검이 이에 6만 냥의 은화를 장차 어디에다 쓰겠느냐는 등의 말을 열거한 상소를 올려 은연중 마치 따로 무엇을 하려는 것이 있는 것처럼 돌렸습니다. 그리고 북사(北使)860)  가 왔을 적에는 조태구(趙泰耉)가 또 한 통의 차자(箚子)를 올려 혐의를 무릅썼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사적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중약(仲約)은 참으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고 하였으니, 중약은 곧 이진검의 자(字)이고 선견(先見)이란 말은 바로 그 은화를 ‘장차 어디에다 쓰겠느냐?’고 한 말을 가리킨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진검이 앞서 올린 상소에서 지적한 뜻이 음흉하였다는 것이 저절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일로써 살펴본다면 목호룡(睦虎龍)의 흉모(凶謀)는 실로 이진검이 제일 먼저 양성(釀成)한 것입니다. 이진검을 우선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극변에 원찬된 죄인 권익관(權益寬)은 3월 초9일 귀양길에 올랐는데, 함흥(咸興)에 이르러 오래 머무르며 지금까지 지체하고 있으면서 적소(謫所)로 갈 의향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감히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다리에 병이 났다는 것을 핑계로 방백(方伯)을 사주하여 거짓말을 꾸며 치계(馳啓)하게 하였습니다. 지난번 숙종(肅宗) 때에 이봉징(李鳳徵)은 귀양길에 머무른 죄 때문에 특별히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라고 명하였었는데, 더구나 이 권익관의 죄는 이봉징에 비하면 배나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도신(道臣)이 죄인을 법을 굽혀 비호(庇護)하면서 조정(朝廷)을 속이고 영하(營下)에 머무르게 한 정상은 말할 수 없이 놀랍고도 통분스러운 일입니다. 권익관은 절도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고 전(前) 감사(監司) 이의만(李宜晩)은 관작(官爵)을 삭탈한 다음 문외(門外)로 출송(黜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권익관의 일은 서장(書狀)으로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까닭 없이 지체한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가율(加律)을 청하는 것은 각박한 처사임을 면할 수 없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연안 부사(延安府使) 정석규(鄭錫圭)는 흉얼(凶孽)들의 당여로서 오로지 탐욕만 부리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 재결(災結)861)  로 면세(免稅)된 것을 거두어 모두 사복(私服)을 채웠고, 부중(府中)에서 수납할 지가미(紙價米) 3백 석과 시작미(柴作米) 3백여 석을 정석규가 별도로 열 말들이 부대를 만들어서 나진포(羅津浦)에서 직접 받아 서울의 자기 집으로 실어 보냈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 서명구(徐命九)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다. 서명구는 중궁(中宮)의 당종(堂從)으로서 스스로 외척(外戚)이 대각(臺閣)에 임명된 이유 때문에 번번이 다 사면 하였다.
5월 27일 갑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여 도당록(都堂錄)을 외람되이 감당할 수 없다는 내용을 진달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번의 도당록에 관해서는 이미 문형(文衡)을 역임한 대신(大臣)이 있으니, 전과는 경우가 다르다. 조속히 명령을 받으라."
하였다.


 

 

 

5월 28일 을축

어떤 별이 우기성(右旗星) 아래로 지나갔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조사하여 보니 기사년862)  ·계미년863)  ·무자년864)  에 도당록을 낼 때에는 대제학(大提學)이 모두 차임되지 않아서 제학(提學)만 참여하였었습니다. 병술년865)  에는 대제학 김창협(金昌協)이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제학이 또 혼자서 권점(圈點)을 완결하였고, 병신년866)  에는 이조(吏曹)에서 조사하여 품의한 계사(啓辭)로 인해 숙종(肅宗)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대제학이 아무런 연고가 없이 서울에 있을 경우에는 도당록을 낼 적에 제학 혼자서 참여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을 이제부터 정식(定式)하라.’ 하였습니다. 이제 숙종의 성교(聖敎)로 살펴보건대, 대제학이 아무런 연고가 없이 서울에 있을 경우에는 도당록을 낼 적에 제학이 진실로 혼자서 감당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지금은 대제학이 외방에 있으니 제학이 도당록을 완결짓는 것이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도당록을 조속히 완결지으라."
하였다.


 

 

 

윤양래(尹陽來)를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삼았다.

 

경기(京畿)·충청(忠淸) 양도(兩道)의 유생(儒生) 김수명(金壽溟) 등이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이사상(李師尙)·이명언(李明彦)·권익관(權益寬)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인 육적(六賊)을 처참할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목욕(沐浴)하고 토역(討逆)하기를 청하는 의리867)  에 대해서는 비록 칭찬하지마는, 내가 윤허하지 않는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전(前) 현감(縣監) 김간(金榦)이 고산현(高山縣)에서 오는 도중에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이어 사관(史官)과 함께 오라는 명령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간곡히 불렀다.


 

 

 

5월 29일 병인

회양(淮陽)과 고성(高城)에 서리가 내렸다.
전라도(全羅道)에 큰물이 져서 인물(人物)이 물에 빠져 죽고 가옥(家屋)이 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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