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정묘
여러 대신(大臣)들이 도당록(都堂錄)에 권점(圈點)을 치기 위해 빈청(賓廳)에 모였었으나, 권점을 완결짓지 못한 채 헤어졌다. 이에 앞서 조태채(趙泰采)가 이만성(李晩成) 등 여러 사람에게 배척당하여 붕당(朋黨)이 나뉠 조짐이 있었는데, 이만성은 화전(花田)에 살았고 조태채는 낙동(駱洞)에 살았으므로 화당(花黨)·낙당(駱黨)이라는 호칭이 있게 되었다. 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성무(聖廡)868) 에 종사(從祀)하게 하자는 의논으로 인하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문도(門徒)들이 박세채까지 아울러 거론하려 하였으나 사론(士論)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박세채를 추존(推尊)하는 사람들은 모두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 점차 분리되기 시작했는데, 이를 지목하여 파론(坡論)이라고 했으니, 박세채가 파산(坡山)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마침내 낙당(駱黨)과 결합하였는데, 조태채와 그의 아들 조관빈(趙觀彬), 김유(金楺)와 그의 아들 김취로(金取魯), 박사익(朴師益)과 그의 아우 박사성(朴師聖), 신방(申昉)·조언신(趙彦臣)·임징하(任徵夏) 등이 일당(一黨)이 되었고, 화당(花黨)은 노론(老論)의 청류(淸類)들이 모두 여기에 들었다. 김유는 바로 박세채(朴世采)의 문인(門人)이며, 박사익은 박세채의 족 증손(族曾孫)이고 신방은 외손(外孫)이다. 신임 사화(辛壬士禍)869) 때에 다같이 화(禍)를 입었기 때문에 거의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금상(今上)870) 이 등극한 처음 조정이 제반 정무를 시작하고 사류(士類)들은 모두 귀양지에서 미처 돌아오지 않았을 적에 임징하(任徵夏)는 상복(喪服)을 벗기도 전에 아산(牙山)에서 올라와 도하(都下)에 거주하였고, 이의천(李倚天)은 제일 먼저 대관(臺官)으로 부르는 명을 받고 부임하였다. 당시 토죄(討罪)하는 논계가 이의천에 의하여 발론된 것이 많았는데, 그 계문(啓文)의 작성은 거의 임징하가 주장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은 실권을 잡고 있는 대신(大臣)으로서 매양 이 두 사람의 사한(詞翰)과 풍절(風節)을 칭찬하면서 권장하여 기용하였는가 하면 조관빈(趙觀彬)은 지극한 원한이 맺혀 있었기 때문에 더욱 흉당들에 대해 이를 갈고서 임징하·이의천이 토죄(討罪)에 공이 있다는 것으로 역시 극력 추천하고 나섰다. 이때 이의현(李宜顯)이 동전(東銓)871) 을 관장하고 있으면서 이를 자못 억제하였으므로 여기에 불평을 품은 자들이 민진원에게 이의현을 모함하게 되었고, 따라서 양가(兩家)가 의심을 일으켜 마침내 분당(分黨)하고 말았다. 민진원을 종주로 하는 사람들은 과거 낙당(駱黨)에 들어 있던 자들이었고 조정(朝廷)의 명류(名類)들은 거의 모두 이의현의 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만 사세를 관망하면서 머뭇거리는 사람이 간혹 이의현의 당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민진원의 당에서 토역(討逆)에 완만(緩慢)하다는 이유로써 비난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회좌(會坐)하여 도당록(都堂錄)에 권점(圈點)을 치게 되었는데, 민진원·이관명이 조관빈과 서로 의논하여 본디 기록된 8인 외에 유복명(柳復明) 등 10인을 더 뽑아서 18명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학사(學士) 임징하·이의천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다. 이의현과 이병상(李秉常)이 이를 불가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영선(瀛選)872) 은 마땅히 정밀하게 뽑도록 힘써야 하는데 어찌 많이 취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서로간에 재삼 논란하였으나, 끝내 의견이 귀일되지 못하였다. 이에 조관빈이 갑자기 일어나서 바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드디어 파좌(罷坐)하기에 이르렀다.
이기진(李箕鎭)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과 윤심형(尹心衡)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박징빈(朴徵賓)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빌붙어 외람되이 대직(臺職)에 올라서는 역적 김일경이 하려고 하는 것이면 팔을 걷어 붙이고 담당하여 나서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장령(掌令)이 되어서는 마침내 정청(庭請)873) 할 것을 발론하여 당시 경재(卿宰)들을 파직시킬 것을 의논하였는데, 대관(臺官)이 오로지 제인(諸人)들을 원찬(遠竄)시킬 것을 내용으로 합계(合啓)하여 일망 타진(一網打盡)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 합계에 성상(聖上)이 천위(天位)874) 를 불안스럽게 여긴다는 등의 말은 더욱 망측하여 실로 최석항(崔錫恒)이 전선(傳禪)이라고 하고 한세량(韓世良)이 음이(陰移)라고 한 말들과 서로 표리(表裏)의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청컨대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당시 청대(請對)를 수창(首倡)한 사람은 원찬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삭출(削黜)하라."
하였다. 최석항이 무리가 청대하여 성명(成命)을 환수하게 하였었는데, 박징빈이 뒤이어 이런 합계(合啓)를 올렸기 때문에 내려진 조처이다.
원찬(遠竄)된 죄인 강현(姜鋧)을 석방시켰다. 강현이 배소(配所)에 도착하였다는 계문(啓文)이 올라오자 임금이 강현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기사(耆社)에 들었다는 것을 이유로 특별히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이를 간쟁(諫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강현(姜鋧)은 그의 아들 강세윤(姜世胤)의 과거(科擧)에 관한 일이 탄로난 뒤로 선류(善類)들을 원망하는 독심을 품고 흉당(凶黨)에 아첨하며 빌붙었다. 신축년875) 의 변(變)이 발생한 처음에 드디어 금오(金吾)876) 의 장관이 되었는데, 그때 여러 소인(小人)들과 협모(協謀)하여 환첩(宦妾)들의 옥사(獄事)를 극력 미봉(彌縫)하였다. 겨우 배소(配所)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명이 있었으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의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20면
【분류】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87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876] 금오(金吾) : 의금부.
사신은 말한다. "강현(姜鋧)은 그의 아들 강세윤(姜世胤)의 과거(科擧)에 관한 일이 탄로난 뒤로 선류(善類)들을 원망하는 독심을 품고 흉당(凶黨)에 아첨하며 빌붙었다. 신축년875) 의 변(變)이 발생한 처음에 드디어 금오(金吾)876) 의 장관이 되었는데, 그때 여러 소인(小人)들과 협모(協謀)하여 환첩(宦妾)들의 옥사(獄事)를 극력 미봉(彌縫)하였다. 겨우 배소(配所)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명이 있었으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의심하였다."
은진(恩津)과 강경포(江景浦)는 상선(商船)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므로, 본디부터 이굴(利窟)이라고 일컬어 왔다. 본현(本縣)에서도 여기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관(官)의 비용을 충족시켰는데, 숙종(肅宗)기사년877) 에 어의궁(於義宮)에 획급(劃給)하였으나 궁차(宮差)878) 들이 백성을 침학하는 폐단이 있어 어사(御史)의 논계(論啓)에 따라 곧바로 혁파(革罷)하였다. 이때에 와서 어의궁(於義宮)에 도로 예속시키고 본현(本縣)과 함께 거둬들인 세금을 반분(半分)하도록 하는 판부(判付)가 있자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장계(狀啓)를 올려 도로 중지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는 판부대로 시행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궁차들의 횡포한 것을 금억(禁抑)하라고 청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묘당(廟堂)의 회계(回啓)를 살펴보건대, 비록 어공(御供)에 보충하여 쓰는 것을 소중히 여긴 조처였으나,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백성이 바치는 정당한 세금만 썼으니, 어찌 산택(山澤)의 이익에 대한 세금을 사적으로 거둘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임금을 허물이 없는 지경으로 인도하는 도리가 아니다."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20면
【분류】재정(財政) / 역사(歷史)
[註 877]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878] 궁차(宮差) : 궁가(宮家)에서 보낸 원역(員役).
사신은 말한다. "묘당(廟堂)의 회계(回啓)를 살펴보건대, 비록 어공(御供)에 보충하여 쓰는 것을 소중히 여긴 조처였으나,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백성이 바치는 정당한 세금만 썼으니, 어찌 산택(山澤)의 이익에 대한 세금을 사적으로 거둘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임금을 허물이 없는 지경으로 인도하는 도리가 아니다."
패선(敗船)된 곡물(穀物) 가운데 미수된 것을 탕감시키라고 명하니,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명홍(柳命弘)이 장계(狀啓)를 올려 청한 데에 따른 조처이다.
6월 2일 무진
저성(氐星) 아래에 유성(流星)이 있었다.
정택하(鄭宅河)를 사간(司諫)으로, 정광제(鄭匡濟)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궁관(宮官)을 원찬(遠竄)시키는 일에 대해서 답하기를,
"지난번 춘방(春坊)에 대한 일은 내가 지나쳤다고 생각하고 있다. 모든 일은 중한것을 다스리고 가벼운 것은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일을 가지고 도배(島配)를 청하기도 하고 원찬(遠竄)을 청하기도 하여 이것을 끌어대고 저것을 끌어대면서 한 통의 계사(啓辭)에서 양쪽을 논핵하니, 이런 따위의 습관은 내가 실로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축년879) 에 역적 환시(宦侍)와 요사스런 비녀(婢女)의 변고가 있었습니다. 이때에 흉도(凶徒)들이 혹시라도 자신들의 정적(情迹)이 다 드러날까 염려하여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명령이 내렸어도 고의적으로 이를 지체시켰으며, 두 명의 역비(逆婢) 가운데 하나는 제 집에서 먼저 죽게 하고 하나는 잡아다가 추국하기 시작한 처음에 지레 죽게 만들었습니다. 두 명의 환시(宦侍)를 신문(訊問)할 적에는 그들이 화응(和應)한 실정과 절차를 사실대로 말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입을 쳐서 말을 못하게 만들었고 경골(脛骨)을 강타하여 기어이 빨리 죽게 만들었으므로, 온 나라의 여론이 왁자하게 일어나 박상검(朴尙儉)을 시켜 박상검을 다스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강현(姜鋧)은 그때의 금부의 으뜸 당상관(堂上官)으로 역적인 환시를 법을 굽혀 비호하고 은밀히 덮어두려고 한 정상이 실로 최석항(崔錫恒)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최석항은 이미 죽었으나 강현 등은 아직도 살아 있으니 진실로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낸 다음 통쾌히 왕법(王法)에 의거 처단해야 하는데, 성도(聖度)880) 가 너무 너그러워 단지 유찬(流竄)시키는 형벌(刑罰)만 시행했으므로 국인(國人)들의 울분이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강현이 일찍이 기사(耆社)에 참여되었다는 것으로 뜻밖의 분부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왕법(王法)으로 헤아려 본다면 결단코 이렇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강현은 특별히 석방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강현을 특별히 석방하게 한 것은 강현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옛날을 추념(追念)하여 보건대, 그대도 선조(先朝) 때에 출신(出身)한 사람인데 대체 무슨 심정으로 이러한 환수하라는 논계를 올리는가?"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역적 환시(宦侍)의 일이 발각되었을 적에 심단(沈檀)과 조태구(趙泰耉)가 바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을 아뢰어 증언(證言)할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다. 금오(金吾)에서 박상검을 잡아들여 협박으로 공초(供招)를 받아내어 결안(結案)하려 하자 박상검이 땅을 치며 큰 소리로 외치기를, ‘단지 대감(大監)들이 무사하기 위해 한 명의 내관(內官)은 죽여도 괜찮다는 말인가? 하였으니, 내외(內外)가 교결하여 흉모(凶謀)에 화응(和應)하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뒤에 대신(大臣) 김우항(金宇抗)의 차자(箚子)에 의거하여 부득이 국청(鞫廳)을 설치하기는 하였지만, 역모의 정상을 약간 사실대로 말하게 되자 갑자기 자복(自服)을 받았다고 하면서 곧바로 처형하여 버렸다. 아! 그 결안을 살펴보면 구차스럽게 미봉한 자취가 환히 드러나 가리울 수가 없으니, 통분스럽기 그지없다."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20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87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880] 성도(聖度) : 임금의 도량.
사신은 논한다. "역적 환시(宦侍)의 일이 발각되었을 적에 심단(沈檀)과 조태구(趙泰耉)가 바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을 아뢰어 증언(證言)할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다. 금오(金吾)에서 박상검을 잡아들여 협박으로 공초(供招)를 받아내어 결안(結案)하려 하자 박상검이 땅을 치며 큰 소리로 외치기를, ‘단지 대감(大監)들이 무사하기 위해 한 명의 내관(內官)은 죽여도 괜찮다는 말인가? 하였으니, 내외(內外)가 교결하여 흉모(凶謀)에 화응(和應)하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뒤에 대신(大臣) 김우항(金宇抗)의 차자(箚子)에 의거하여 부득이 국청(鞫廳)을 설치하기는 하였지만, 역모의 정상을 약간 사실대로 말하게 되자 갑자기 자복(自服)을 받았다고 하면서 곧바로 처형하여 버렸다. 아! 그 결안을 살펴보면 구차스럽게 미봉한 자취가 환히 드러나 가리울 수가 없으니, 통분스럽기 그지없다."
전교(傳敎)하기를,
"엊그제 특별히 방면하여 김동필(金東弼)을 문외(門外)로 출송(黜送)시킨 데 대해서는 나의 뜻을 이미 유시(諭示)하였는데, 오늘날 대신(臺臣)이 그 의도를 어찌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사헌부(司憲府)의 논계에 신축년881) 춘방(春坊)의 상번(上番)은 김동필이고 하번(下番)은 권익관(權益寬)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논계는 그 뜻이 이미 원찬된 권익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군부인(郡夫人)의 상여가 발인(發靷)할 기일이 아직도 멀었으며 집에는 건장한 남자가 없고 친척 또한 드무니 내가 위안(慰安)하고 있는 것은 다만 김동필이 있다는 것뿐이었는데, 이제 이 논계를 보니 서울에 있기가 불안하다. 아! 어떻게 영령(英靈)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만일 헌신(憲臣)들이 계속 집요하게 쟁론한다면, 진실로 발인하는 달에 직접 가서 조문(弔問)하고 살펴보는 것과 같지 못할 것이다. 승정원(承政院)은 이런 내용을 알고 있으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3일 기사
장생전(長生殿)에서 새로 만든 재궁(梓宮)에 옻칠을 1백 번하여 예비해 둘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전례에 따른 것이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금 사류(士類)들이 무리지어 나아오고 인재(人材)가 죽 늘어섰으니, 영선(瀛選)을 18명으로 정하는 것을 많다고 할 수 없습니다. 권점(圈點)을 주관하고 있는 양대신(兩大臣)이 이미 취사(取捨)한 바 있고 신의 하찮은 의견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어제 도당록(都堂錄)을 내기 위한 좌석(坐席)에서 미처 합석(合席)하기도 전에 의견이 엇갈리는 논의가 없지 않았는데, 반복하여 서로 논란하였으나 끝내 귀결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책임을 느끼고 물러나와 손피(遜避)하고야 말게 된 이유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의견이 같지 않으면 조용히 다시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지평(持平) 임주국(林柱國)이 신축년882) 춘방(春坊)에 관한 계사(啓辭)의 비답과 승정원(承政院)에 내린 비망기(備忘記)에 미안스러운 분부가 많다는 것을 이유로 진계(陳啓)하고서 인피(引避)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성교(聖敎)에 이른바 한 사람의 일에 대해 도배(島配)를 청하기도 하고 원찬(遠竄)을 청하기도 하여 한장의 계사(啓辭)에 양쪽을 논핵한다고 하신 것은 권익관(權益寬)의 일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권익관의 찬배(竄配)는 이미 춘방(春坊) 때의 일 때문이 아니고, 끝부분에서 도배(島配)할 것을 청한 것은 군부(君父)의 명을 무시하고 중로에서 지체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만일 지금 논핵한 것으로써 이쪽을 끌어대고 저쪽을 끌어댔다고 한다면 권익관의 죄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은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중한 것은 다스리고 가벼운 것은 놓아준다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전하께서 이에 실언(失言)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김동필(金東弼)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그의 범죄가 매우 중하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특별히 군부인(郡夫人)의 상장(喪葬)에 보살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도리어 용서하는 전지(傳旨)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분부는 사적인 것이고 우신(愚臣)의 논쟁은 공적인 것입니다. 아! 환첩(宦妾)들이 흉모를 꾸며 성궁(聖躬)을 위태롭게 하려 하였으니, 당시 궁관(宮官)들이 안에서 저해하고 동요시킨 것은 그 죄가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몸소 가서 조문(弔問)하고 보살피겠다는 분부에 이르러서는 김동필을 법을 굽혀 비호하고 대의(臺議)를 협박하여 억제하려는 뜻이 현저히 있습니다. 신은 대성인(大聖人)의 처분이 결단코 이래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고, 지평(持平) 윤혼(尹焜)과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도 인피(引避)하니,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현도(縣道)에서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조정의 논의가 분열되어 일종의 사심을 품고 술책을 부리려는 무리들이 망령되어 임금의 뜻을 헤아리고 뒷날의 복을 구하려는 생각에서 대신(大臣)을 동요시켜 중론(衆論)을 저격(狙擊)한다고 하니, 그 정상과 작태가 밉상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도리어 이를 용서하고 부억(扶抑)이 한쪽에 너무 치우쳐서 조금이라고 정론(正論)을 지킬 수 있는 대신(臺臣)은 번번이 견책과 파직을 당하므로 그 말류의 폐단은 마침내 임금의 무함을 씻어버리지 못하고 나라의 역적을 토죄(討罪)하지 못하여 삼강(三綱)이 민멸되고 구법(九法)883) 이 무너지는 지경에 이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나의 성의가 변변하지 못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돌이킬 수 없구나. 윤양래(尹陽來)의 일은 경(卿)의 말이 옳다."
하였다.
6월 4일 경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심단(沈檀)에 관한 전계(前啓) 가운데 국인들이 지척(指斥)한다고 한 밑에다가 내용을 고쳐 첨가 하기를,
"그중에 가장 드러난 것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그가 왕래하면서 주도 면밀하게 흉모를 꾸민 정절(情節)이 이미 백망(白望)과 정우관(鄭宇寬)의 공초에서 드러났는데 자신이 의금부(義禁府)의 당상관이면서 조금도 꺼리는 빛이 없었으며, 오서종(吳瑞鍾)에게 형장(刑杖)을 가하여 신문할 적에는 제 스스로 여러 당상관들에게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죄인이 말한 것을 난초(亂招)로 돌려버렸고, 끝내는 오서종을 장살(杖殺)하여 증언(證言)할 사람을 죽여 없앰으로써 스스로 벗어날 계책을 꾸미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입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심정옥(沈廷玉)의 공초를 보건대, 또 백망 등이 고발한 것과 그 내용이 전후 일치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으니, 심단이 여러 역적들의 와주(窩主)884) 가 된 것은 너무도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목숨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여정(輿情)이 다같이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방(申昉)을 승지(承旨)로, 권성(權𢜫)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6월 5일 신미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정광제(鄭匡濟)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석규(鄭錫圭)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이창수(李昌壽)에 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상도(慶尙道)에 큰물이 져서 물에 잠기거나 사태에 덮쳐 무너진 가옥(家屋)이 모두 5백여 호(戶)나 되었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짐승도 또한 많으니 구휼(救恤)하는 은전(恩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정제(李廷濟)가 장계(狀啓)를 올려 논하기를,
"선천(宣川) 좌현(左峴)에 있는 동림(東林)은 관방(關防)의 험요지(險要地)입니다. 청강(淸江)의 만호(萬戶)를 동림성(東林城)으로 옮겨 농한기(農閑期)를 틈타 폐성(廢城)을 수축하게 하소서."
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묘당에서 회계(回啓)하기를,
"새 감사(監司)가 도임한 뒤에 상세히 살펴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봉상(李鳳祥)이 대계(臺啓)로 인하여 상소(上疏)하여 스스로 변명(辯明)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이삼(李森)에게 첩(妾)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바입니다. 설령 참으로 첩이 있어서 신에게 부탁하려고 했더라도 신이 어떻게 그것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쌀1곡(斛)과 돈5백 냥을 뇌물로 주고 역적 조태구(趙泰耉)와 결탁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사재(私財)로 주었다고 한다면 보시다시피 빈한(貧寒)이 이러한데 그 많은 재화(財貨)를 어떻게 판출해 낼 수 있겠으며, 신이 공화(公貨)로 주었다고 한다면 총융사(摠戎使)의 직임을 맡았던 것이 그가 죽은 다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1백 관(貫)의 돈을 대주어 흉적 조태억(趙泰億)의 약수(藥需)에 쓰게 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조태억이 이미 훈국(訓局)의 제거(提擧)를 겸무하고 있었으므로 스스로 쓸 약이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별도로 준비하여 지급해 주겠습니까? 많은 재화로 권익관(權益寬)의 가산(家産)을 도와 주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이삼(李森)이 총융사로 있을 적에 1백 관의 돈을 권익관에게 대여(貸與)하여 주었는데, 신이 대임(代任)하게 되자 독촉하여 이를 도로 받아내었습니다. 그리고 70전(錢)을 귀양길에 오른 그에게 노자로 주었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또한 너무도 맹랑한 이야기입니다. 어찌 대신(臺臣)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대간의 말이 정도에 지나치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병조 참판(兵曹參判) 권변(權忭)이 상소하여 새로 내린 자급(資級)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승진 발탁시킨 것은 공의(公議)에 의한 것이다. 지난번 대신(大臣)의 말을 듣고 경(卿)의 강직함과 스스로 지조를 지킨 데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였다. 권변은 기사년885) 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그가 전시(殿試)에 응시할 적에 곤전(坤殿)에서 손위(遜位)하였으므로, 이로부터 벼슬하지 않을 것을 마음으로 맹세하여 전후의 제배(除拜)에 일체 응하지 않은 것이 거의 40년에 이르렀으므로 그의 처의(處義)가 굳고 깨끗함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으니, 비지(批旨)에 강직하고 스스로 지조를 지켰다고 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에 한 말이었다.
6월 6일 임신
달이 태미원(太微垣) 위의 상성(相星)을 범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정광제(鄭匡濟)이다.】 에서 아뢰었던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삭출(削黜)된 죄인 황이장(黃爾章)은 본래 흉역(凶逆)의 잔당으로 김일경(金一鏡)과 박상검(朴尙儉)의 사주를 받아 사우(死友)886) 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백망(白望)의 고변서(告變書)에서 제일 먼저 역적 김일경을 현고(現告)하자 그렇게 흉악스러운 김일경으로서도 감히 태연하게 옥사(獄事)를 안찰(按察)할 수가 없어 대략 사피하였었는데, 황이장은 이에 탑전(榻前)에서 ‘김일경이 특별히 구핵(鉤覈)했기 때문에 독심을 품은 것이 뼈에 사무쳐 감히 축출한 계책을 낸 것입니다.’라는 등등의 말을 멋대로 진달하여 마침내 역적 김일경으로 하여금 마구 다그쳐 무옥(誣獄)을 만들어 진신(搢紳)들을 도륙하고야 말게 하였습니다 또 백 망의 고변을 난초(亂招)로 돌려 감히 기록하지 말 것을 청함으로써 흉역(凶逆)을 법을 굽혀 비호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사상(李師尙)이 고(故) 판서(判書) 신임(申銋)을 귀양보내자고 청할 적에는 곁에서 말을 함께하여 윤허하라고 진달함으로써 마침내 흰 머리로 충성을 바친 신하를 절해 고도에 수금(囚禁)되게 하였으니, 그의 참독(慘毒)스러움은 실로 역적 김일경·박상검과 동일한 심장(心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 극심했던 한재(旱災)에 대해서도 이를 옥사(獄事)를 완만히 하고 소홀하게 한데서 온 소치라고 궤변을 늘어 놓아 진달함으로써 천청(天聽)887) 을 현혹시켰으니, 그의 마음의 소재는 참으로 망측하기 그지없습니다.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있었던 임인년888) 국옥(鞫獄) 때 서덕수(曙德修)를 체포할 적에 도사(都事)와 부장(部將)이 많은 나졸(邏卒)들을 거느리고 바로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의 집으로 달려갔는데, 서덕수가 마침 집에 없자 그가 숨었는가 의심하여 부부인(府夫人)의 내방(內房)에 갑자기 들어가서 다락 위를 샅샅이 수색하면서 온갖 공갈을 다하였습니다. 서덕수가 이미 옥초(獄招)에서 거론되었으니,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집에 가서 수색하는 것은 본디 전례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내실(內室)에까지 함부로 들어가서 문짝을 부수는가 하면 심지어 상협(箱篋)까지도 수색하여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 세의(歲儀)로 문답(問答)했던 서찰 두 통을 기화(奇貨)로 여겨 국청(鞫廳)에 바쳤습니다. 그러나 당시 옥사를 다스리고 있던 흉도(凶徒)들도 또한 여기에 의거하며 흉계를 부릴 수 있는 단서가 없었기 때문에 드디어 본가(本家)의 사람을 불러 그 서찰을 봉하여 되돌려 주었으니, 국인(國人)들의 통한과 울분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그때의 도사(都事)와 부장(部將)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때의 도사(都事)는 지정한 곳으로 귀양보내는 형벌(刑罰)을 시행하라. 따라간 부장(部將)이야 어찌 함께 죄를 다스리겠는가?"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광 군수(靈光郡守) 이희제(李喜濟)는 재결(災結)에 대한 면세(免稅)와 진자전(賑資錢)이 하나도 백성에게 미치지 않았는데 모두가 간 곳이 없었으며 옥송(獄訟)의 재결(裁決)을 일체 아전의 말에 따라서 하고 있으니, 먼저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그리고 세선(稅船) 색리(色吏)도 체포하여 가두고 엄중히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조(禮曹)에서 왕세자(王世子)의 환후가 나아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좋은 날을 가려서 종묘(宗廟)에 고하고 교서(敎書)를 반포하되 진하(陳賀)는 국휼(國恤)중이기 때문에 권정례(權停例)로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신세웅(申世雄)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지난번 흉도(凶徒)들의 악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은밀히 환수(宦竪)들과 내통하여 임금의 동정(動靜)을 살펴서 후사(喉司)889) 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갔으니, 이것은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밤에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가서 아뢴 여모(餘謀)를 답습한 것입니다. 저위(儲位)를 세우는 것을 지척(指斥)하여 역적을 모의한다고 하면서 선류(善類)들을 일망타진하고서 훈권(勳券)을 과장(誇張)한 것은 윤원형(尹元衡)과 임백령(林百齡)이 무옥(誣獄)을 일으켜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녹공(錄功)했던 유술(遺述)을 답습한 것입니다. 은밀히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사주하여 상변(上變)하는 글을 날조하게 하고 안팎에서 화응(和應)하여 마구 다그쳐 옥사(獄事)를 만들어 낸 것은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이 사수(死囚)를 사주하여 무옥(誣獄)을 일으켰던 구투(舊套)를 답습한 것입니다. 화심(禍心)을 품고 이극(貳極)890) 을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한 데 이르러서는 이것이 남곤·심정과 이이첨의 무리도 하지 않았던 것인데 멋대로 흉독을 부리면서 조금도 돌아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근본은 다스리지 않은 채 말단만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박상검(朴尙儉)·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은 이미 형벌에 따라 죽임을 받았으나 간흉의 수괴(首魁)는 아직도 천주(天誅)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7명의 역적이 연명(聯名)한 상소에서 인용한 바 기(冀)·현(顯)·망(莽)·조(操)891) 는 바로 양기(梁冀)·염현(閻顯)·왕망(王莽)·조조(曹操)를 가리킨 것입니다. 7명의 역적이 기·현·망·조를 기필코 인용한 그 의도가 이미 흉특(凶慝)하기 그지없는데, 윤서교(尹恕敎)의 상소에서 인용한 것은 더욱 지척(指斥)한 것이 명백합니다. 전하(殿下)께서 여기에 만일 엄중히 핵실하여 법에 의거해 다루지 않고 흐지부지한 가운데 내버려둔다면 일시(一時)의 의혹이 더욱 심해질 것이고 만세(萬世)의 시비(是非)를 정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이사상(李師尙)이 서한을 보내어 역적 김일경에게 권고한 데에 이르러서는 내용이 참독스러웠습니다. 따라서 교문(敎文)의 정절(情節)을 알고 있는 음흉한 자와 함께 왕토(王討)를 가함에 있어 달리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어찌하여 깊이 생각해서 통쾌하게 결단을 내리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상소를 들이자 분부하기를,
"세태를 개탄하여 올린 봉장(封章)이 어찌 불가하겠는가? 그러나 역적 김일경의 교문(敎文) 내용에 있는 말들은 지금도 추념(追念)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오니, 그러한 말은 귀로 들을 수는 있어도 입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의 흉악한 무리들이 한 이런 따위의 흉패(兇悖)스런 말들을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 어떻게 감히 임금에게 견주어 논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한번이라도 알 만하거늘 더구나 두 번씩이나 말하는가? 신세웅(申世雄)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
하였다.
경기(京畿) 유생(儒生) 이대수(李大壽) 등이 상소하여 문간공(文簡公) 이희조(李喜朝)를 그의 아버지 부제학(副提學) 이단상(李端相)을 모신 학산 서원(鶴山書院)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는데,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6월 7일 계유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근래 김동필(金東弼)과 강현(姜鋧)의 일에 대해 분부하는 사이에 화평(和平)스러움이 전혀 부족합니다. 발인(發靷)하는 달 직접 임어하겠다는 분부에 이르러서는 몹시 고민하는 뜻이 현저히 드러났으니, 이는 성명(聖明)께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도로 들여오라 명령하여 앞서의 분부 가운데서 발인하는 달에 직접 가서 조문하고 일을 보살피겠다는 말을 깎아버리게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재(李縡)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조관빈(趙觀彬)을 체직(遞職)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도당록(都堂錄)을 내게 되었는데, 이재는 시골에 있으면서 올라오지 않았고 조관빈도 권점(圈點)의 모임에서 파좌(罷坐)했기 때문이었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김제겸(金濟謙)은 살아 있을 적에 벼슬을 하였기 때문에 관작(官爵)을 추증(追贈)하였습니다만, 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의 아들은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였기 때문에 추증하는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였으니, 똑같이 관작을 추증(追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또 청하기를,
"선현(先賢) 정여창(鄭汝昌)·정구(鄭逑)의 후손들과 고(故) 대제학(大提學) 조석윤(趙錫胤), 고(故) 참판(參判) 유계(兪棨)의 후손들을 녹용(錄用)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승지(承旨) 홍석보(洪錫輔)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특별히 동궁(東宮)에 대해 진념(軫念)하시어 강학(講學)하면서 모신 바 있는 이세환(李世瑍)과 윤봉오(尹鳳五)를 6품으로 승진시키시고 이어 위사(衛司)에 부임(付任)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윤봉오는 비록 연소(年少)하지만 문학(文學)으로 칭송을 받고 있으며, 이세환은 본디 경학(經學)을 하는 선비로서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적에 사부(師傅)로 있었습니다. 금년 봄 동궁(東宮)의 책봉례(冊封禮)가 있을 적에 또 앞서의 직책을 제수하였으니, 이는 실로 희귀한 일입니다. 의당 별도로 조용(調用)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종전에 사문(斯文)에 대한 일 때문에 귀양간 유생(儒生)들의 그 비분 강개한 절조(節操)가 참으로 숭상할 만한데, 유학(幼學)은 진달하여 윤허를 받지 못하면 의망(擬望)하여 입사(入仕)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등용할 수는 없으니, 가려서 의망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8일 갑술
약방(藥房)에 세 제조(提調)와 입시(入侍)하였던 궁관(宮官) 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의관(醫官)들에게는 말[馬]을 내리기도 하고 가자(加資)하기도 하였다. 이때에 왕세자(王世子)의 병환이 수두(水痘) 같았는데, 이에 이르러 병이 나아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 노고를 상준 것이다.
6월 9일 을해
달이 항성(亢星)의 네 번째 별을 범하였다.
약원(藥院)의 숙직(宿直)을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왕세자의 환후가 나아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더위가 극심하였기 때문이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차자(箚子)를 올려 상전(賞典)을 사양하니, 으레 내리는 비답을 내렸다.
부제학(副提學) 윤봉조(尹鳳朝)가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지난날의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화기(禍機)가 급박하고 흉설(凶說)이 난무하여 하찮은 이 몸의 분쇄(粉碎)가 종이 한 장 사이였습니다. 다만 일월(日月)이 높은 데서 내리비추고 부모이신 성상께서 매우 가까이 계시어서 한마디 말로 즉시 결정하시어 안폐(犴狴)892) 를 통촉하시었고 엄한 말로 감싸주자 괴역(鬼蜮)들이 스스로 움츠러들었으니, 신이 오늘날까지 목숨을 보존한 것은 추호(秋毫)도 모두가 성덕(聖德)에 의한 것입니다. 다만 통한(痛恨)스러운 것은 제급(製給)하고 사주한 자는 세간에 모두 전파되었고 방만규가 끌어들인 것 또한 도리어 우연인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를 한 번 열람한 신에게 마침내 끝없는 오욕을 한몸에 뒤집어 씌운 것입니다. 인생 만사(萬事)에 온갖 일이 없을 수 없지마는 어찌 신 같은 일을 당한 경우가 있겠습니까? 제급하여 지사한 사람은 바로 이정박(李挺樸)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지난번 중신(重臣)들의 말에 의하여 그대를 석방한 것인데, 이제 상소 내용을 살펴보니 더욱 분명히 알겠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상(李秉常)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최진한(崔鎭漢)을 경상 병사(慶尙兵使)로, 이언상(李彦祥)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삼았다.
임금이 동중추(同中樞) 길혜적(吉惠迪)을 불러 접견하였다. 길혜적은 고려(高麗)의 충신(忠臣) 길재(吉再)의 후손인데, 나이가 1백 3세였다. 지난번 경기 어사(京畿御史) 이정응(李挺膺)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관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인견(引見)하였다. 그런데 길혜적은 노병(老病)으로 걸을 수가 없었으므로 환관(宦官)을 시켜 부축하여 들어오게 한 다음 정헌 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제수하고 사은(謝恩)은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또 초모(貂帽)를 하사하여 총애하였다.
6월 10일 병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군주의 이목(耳目)입니다. 설령 과격한 말이 있었더라도 주상께서는 너그러이 용납하실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강현(姜鋧)·김동필(金東弼)에 대한 논계(論啓)는 실로 온 나라의 공론(公論)인데 성상(聖上)께서는 윤허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엄중한 비답을 내리셨으니,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가 조종조(祖宗朝)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것이 옳다. 강현의 일은 대각을 꺾으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환수(還收)하라는 논계도 또한 잘못이라 할 수 없다. 김동필의 일은 지난번 좌상(左相)이 진달한 바로 인하여 다시 고쳐서 내리라고 전교하였는데, 과연 몹시 걱정스런 면이 없지 않았다."
하였다. 이관명이 이어 널리 포용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도리에 대해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면계(勉戒)한 말은 마땅히 유념하도록 하겠다. 이의천(李倚天)은 인품이 질박(質朴)하고 정직하여 힘써 간쟁(諫諍)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내가 매우 칭찬하고 있다."
하고, 또 분부하기를,
"대신이 이미 언단(言端)을 열었으니, 나도 마땅히 말해야 되겠다. 여태까지는 군간(群奸)들이 말한 것을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합계(合啓)하였고 합계해도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청대(請對)하였다. 그리하여 입대(入對)하게 되면 반드시 허락을 받고서야 물러가는 등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겠는가? 내가 늘 이 점에 대해 증오하고 있었다. 근일 정신(廷臣)들이 지난번 사람들에 대해 통분한 나머지 기필코 심각하게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에 스스로 과거의 사람들이 하던 전철(前轍)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쉽사리 윤허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이관명이 말하기를,
"과거의 군간(群奸)들은 다만 당론(黨論)이라는 것을 가지고 무옥(誣獄)을 양성(釀成)하였지마는 근래의 대계(臺啓)는 그 목적이 토복(討復)에 있으니, 이는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볼 때 그만 둘 수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다시 전철(前轍)을 답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충성스런 혼백(魂魄)이 이미 신설(伸雪)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일에는 본말(本末)이 있으니, 성궁(聖躬)의 무함을 변명(辯明)하는 것은 근본이고 여러 신하들의 원통함을 신설(伸雪)하는 것은 말단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선류(善類)들을 살해(殺害)한 죄를 다스림으로써 사대신(四大臣)이 역적이 아니고 충신이라는 것을 밝혔으니, 나라를 위하여 변무(辯誣)하는 것은 저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다. 경(卿)은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다. 이관명이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를 따르신다면 삼척(三尺)893) 을 시행할 수가 있어 인심이 기뻐하여 복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봉휘(柳鳳輝) 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토복(討復)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관명이 말하기를,
"어찌 유독 유봉휘뿐이겠습니까?"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홍석보(洪錫輔),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가 이관명이 한말과 같이 잇달아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이기익(李箕翊)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직단(社稷壇)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 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의 일에 대하여 아뢰기를,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때를 이용해서 이런 논계(論啓)를 발하였으니 더욱 교묘하고도 참독스럽습니다. 비록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구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수창자(首倡者)는 관차(官次)를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그 가운에 절로 장(長)이 있기 마련이니, 속히 수금(收禁)하여 즉시 정배(定配)하는 것이 마땅한 처사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박징빈(朴徵賓)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기익(李箕翊)이 또 말하기를,
"삼사(三司)에서 인원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오랫동안 합계(合啓)를 정지하고 있는데, 사간원의 논계도 윤허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많은 탓으로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이 울분을 품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서교(尹恕敎)의 일은 어떤 말을 가지고 신문하는 것인가? 이미 도배(島配)하라고 명하였으니, 대계(臺啓)대로 잡아들여 정배(定配)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기익이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김동필(金東弼)의 일에 대해 직접 가서 조문(弔問)하겠다는 분부를 내리기도 하고 빨리 정계(停啓)하라는 분부를 내리기도 하여 마치 대각(臺閣)을 협박하는 듯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각에서 어찌 성교(聖敎) 때문에 정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말 때문에 정계한다면 그런 대각을 장차 어디에다 쓰겠는가?"
하였다. 이기익이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의 상소에 역심(逆心)이 환히 드러났는데도 ‘성명(成命)이 이미 내렸으니 다시 논의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더욱 흉패스럽기 그지없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만일 성명이 이미 내리지 않았다면 그래도 다시 의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명호(名號)가 이미 정하여진 뒤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전후의 하교(下敎)에서 다 말하였다."
하였다.
고(故) 판서(判書) 임방(任埅)의 장수(葬需)를 추가로 지급하였다. 임방은 인품이 청아(淸雅)하여 시율(詩律)을 좋아했는데 지위가 팔좌(八座)894) 에 이르렀는데도 가계(家計)는 쓸쓸하였다. 나이 80에 귀양가 있다가 졸(卒)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우상(右相) 이관명(李觀命)의 건의에 따라 이 명령이 있었다.
선현(先賢)·공신(功臣)·청백리(淸白吏)·전망인(戰亡人)·원사인(冤死人)의 자손은 지손(支孫)이나 적손(嫡孫)을 막론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이 적장손(嫡長孫)만 녹용함으로써 경쟁을 방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아뢰기를,
"적장손이 반드시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지손 가운데에서도 훌륭한 사람은 발탁하는 것이 마땅한 조처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관명의 말을 따랐다.
황귀하(黃龜河)를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무안왕(武安王)895) 의 소상(塑像)과 복색(服色)을 고치도록 명하였다.
6월 11일 정축
태학생(太學生) 정유(鄭楺) 등이 상소하여 역적을 토죄하였는데, 임금이 노하여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가 승선(承宣)896) 이 신구(伸救)함에 따라 그 명을 도로 중지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에 말하기를,
"아! 전하(殿下)께서 무함을 받은 것은 천고에 씻기 어려운 악명(惡名)이라고 할수 있는데, 오늘날에 이르도록 끝내 환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 등은 비록 미천한 위포(韋布)897) 의 신분이지만 또한 다같은 전하의 신자(臣子)이니, 어떻게 직분 밖의 일이라는 것으로 혐의스럽게 여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과거 신축년898) 에 저위(儲位)를 책립할 적에 일종의 흉역(凶逆)스런 무리들이 의혹과 분노를 크게 일으켰는데, 그때 유봉휘(柳鳳輝)가 이를 주창하고 군간(群奸)들이 이를 계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위(儲位)의 건립을 논하면 반드시 ‘이는 폐립(廢立)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대리(代理)로 정사를 다스릴 것을 논하면 반드시 ‘이는 찬탈(簒奪)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의도가 ‘임금의 춘추(春秋)가 한창때이고 침선(寢膳)에 아무 탈이 없는데도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군(儲君)을 끼고 폐립하고 찬탈하려는 것이다.’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이 뜻을 얻어 권세를 잡은 뒤에는 서로 창언(倡言)하기를, ‘임금이 권신(權臣)들을 꺼려 오랫동안 잠잠히 계시다가 하루아침에 천둥 같고 태풍 같은 큰 처분(處分)이 있었던 것이요, 실로 당초에 병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임금의 병을 숨기는 방법이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주상의 병환이 위중(危重)할 때에는 이광좌(李光佐)가 약원(藥院)에 있었으면서도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았고 저녁 문안도 거행하지 않은 채 다만 밖의 사람들이 혹시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될까만을 걱정하였습니다. 승하(昇遐)하신 뒤에도 조태억(趙泰億)이 교문(敎文)을 지어 바치면서 이에, ‘야반(夜半)에 갑자기 안석[几]에 기대어 계시면서 내린 명령을 받들었다.’고 함으로써 마치 선왕(先王)께서 옥체가 늘 강녕하였는데 한밤중 창황한 사이에 갑자기 승하하신 것처럼 하여 중외(中外)의 이목(耳目)을 더욱 의혹케 하였습니다. 지난날 이천해(李天海)의 변고도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 어찌 차마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초 조태구(趙泰耉)가 북문(北門)으로 들어갈 적에 반드시 지름길을 인도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분명한 사실이며, 근일 여러 역적들의 공초(供招)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박상검(朴尙儉)의 일이 낭패되고 나자 목호룡(睦虎龍)이 고변서(告變署)를 갑자기 올렸고 큰 옥사(獄事)를 날조하여 일으키자 삼수(三手)로 안건(案件)을 삼는 등 구핵(鉤覈)하는 것이 전하의 일에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 최석항(崔錫恒)은 교활한 성품을 가진 자로서 생살(生殺)의 권한을 한 손에 쥐고 겉으로는 전하를 위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상은 전하로 하여금 암담(黯黮)한 지경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게 하려 하였던 것이니, 저 두 조정(朝廷)을 섬겨 온 주석(柱石)같은 신하와 백년토록 오래 된 세가(世家)를 남김없이 일망타진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천명인 것입니다. 아! 저들이 뚫고 들어올 때의 은밀한 종적(蹤跡)과 이미 들어온 뒤의 농간을 부린 정절(情節)에 대해 외인(外人)의 이목은 그래도 혹 숨길수가 있겠지만 전하께서는 총명(聰明)한 자질로 궁위(宮闈) 안에 거처하시면서 눈으로 직접 보시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저들의 걱정하는 마음으로써 어찌 하루인들 전하를 잊고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명분(名分)이 확실히 구별되므로 손을 쓰기가 어려웠고 성자(聖慈)899) 께서 위에 계시므로 계책을 부리기가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 이광좌(李光佐)는 속으로 흉특(凶慝)한 계책을 품고도 겉으로는 관완(寬緩)한 의논을 핑계하였으며 그 정절은 은밀히 부도(不道)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그 종적은 조금 애이(崖異)900) 를 보임으로써 괴역(鬼蜮)처럼 농락(籠絡)하여 현혹시켰습니다. 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를 방면시키자고 청한 것도 그의 농간에서 나온 수단인 것입니다. 아! 이광좌는 바로 고(故) 상신(相臣)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의 중표 형제(中表兄弟)901) 인데도 스스로 대의 멸친(大義滅親)902) 에 핑계하고서 이이명의 처자(妻子)를 노예로 삼을 것을 극력 청하였습니다. 그의 잔인한 마음이 이와 같은데 어찌 유독 윤각과 유성추에게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더구나 윤각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결국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어찌 관완(寬緩)하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그가 능란하게 헤아리고 속마음이 은밀하였기 때문에 김일경(金一鏡)의 계책이 실행될 경우에는 스스로 그 복록은 함께 누리게 될 것이고 만일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샘에 밀어넣고 돌까지 떨어뜨려서 자신과 서로 의견이 틀리는 자취를 실증하려 한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외면(外面)의 관완한 모습으로써 빠져나갈 수 있는 한 가닥 길을 은밀히 만들어 뒷날 죽음을 면하게 되기를 바란 것이니, 교활한 토끼가 도망갈 구멍을 세 군데다가 만들어 두고 있는 것과 너무도 같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스스로 끝내 박상검의 사인(私人)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자 드디어는 병환을 숨기는 한 가지 일에 마음을 기울여 성취시킴으로써 천하 후세로 하여금 승하(昇遐)할 때의 상황을 명백하게 알지 못하게 하여 자신이 수년간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부렸던 죄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전하(殿下)에 대한 망측한 무함도 자연 그 가운데 들어 있게 되었으니, 그의 계책은 과연 끝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참형(斬刑)에 처하여 몸뚱이를 만 동강을 낸다고 해도 진실로 그 죄를 면할 수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다만 그 정상을 개닫지 못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상당히 관완(寬緩)한 의논을 지닌 것으로 인정하고 계시니, 진실로 생각이 세밀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간혹 선왕(先王)의 병환에 언급된 말이 있으면 전하께서는 매양 차마 거론할 수 없다고 분부하신 탓으로 나라 사람들에게 모두 이를 숨기고 감히 말하지 못하도록 하여 장차는 이광좌의 흉계(凶計)에 적중(適中)될 것이니, 또한 너무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그가 말을 할 때에는 교묘하게 임금의 마음에 맞게 하고 전상(殿上)으로 올라가면 조심스럽게 꿇어 엎드려 있는 것을 보면 조금은 군신(君臣)의 명분(名分)을 아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금오(金吾)의 장관(長官)으로 있을 적에 목호룡을 원훈(元勳)에 책봉하였고 자신이 정석(鼎席)903) 으로 있을 적에 김일경(金一鏡)을 팔좌(八座)로 발탁하였으니, 진실로 전하께 대해 조금이나마 돌아보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감히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늘날의 신하들이 할 일은 군부(君父)의 무함을 변명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무함을 변명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고, 다만 여러 역적들의 패란(悖亂)스럽고 음특(陰慝)한 죄상을 낱낱이 헤아려 시조(市朝)904) 에서 처형하여 시체를 조리돌림으로써 나라 안의 사람들에게 종래에 들었던 의혹을 통쾌히 풀게 하고 백세 뒤에도 전하의 마음이 광명 정대하였다는 것을 환하게 알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신자(臣子)의 분수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삼사(三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한번 이의연(李義淵)이 죽음을 당한 뒤로 다시는 감히 ‘성질(聖疾)’905) 이라는 두 글자를 장주(章奏)에 거론하여 원흉(元凶)을 토죄(討罪)하지 못하게 되었음은 물론, 또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킨다는 비난도 면할 수 없어 우두머리는 버려두고 말단인 자들만 거론하다 보니 이미 그들이 역적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천청(天聽)을 깨우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가 전하께서 인도하여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아! 조태구와 최석항을 왕법(王法)으로 다스리지 못한 것도 먼저 음주(陰誅)된 자는 진실로 한스럽기 그지없는데, 이광좌의 죄는 조태구·최석항이 죄보다 만배나 되며, 유봉휘와 조태억에 이르러서는 실로 여러 역적들이 흉모(凶謀)를 시작하게 했으니, 어떻게 이들을 하루인들 천지 사이에 살려 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소장을 들이자 임금이 여러 승지(承旨)들에게 입대(入對)하라고 명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신방(申昉)에게 그 소장을 읽게 하고 소두(疏頭)인 정유(鄭楺)를 불러 중계(中階)로 나오게 하였다. 임금이 탑상(榻床)을 앞마루로 옮기고 하교하기를,
"그대가 현관(賢關)906) 에 있으면서 목욕(沐浴)하고 토역(討逆)하기를 청하는 의리로써 소장을 올려 진달한 것은 옳다. 그러나 근래 합계(合啓)하였던 내용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말을 만들 수 있었는데 조태억이 지은 교문(敎文) 가운데의 말이 이천해(李天海)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에 이천해의 일에다가 결부시킨단 말인가? 그리고 이천해는 이미 법에 의거 처형되었는데, 그대가 어찌하여 감히 그의 성(姓)을 썼는가?"
하였다. 정유가 아뢰기를,
"선대왕(先大王)께서 병환이 있은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이광좌의 무리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이를 숨겨 임금의 병환이 위독(危篤)할 때 시약청(侍藥廳)도 설치하지 않았고 조석(朝夕)의 문안도 거행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 조태억이 찬진(撰進)한 교문(敎文)에 또 갑자기 한 구절의 말을 써 넣어 마치 선왕께서 처음부터 병환이 없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승하하시게 된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이천해의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조태억의 단안(斷案)을 만들려 하였다면 다른 말도 많은데, 그대가 어떻게 감히 이천해의 일을 인용(引用)하는가?"
하였다. 정유가 말하기를,
"조태억은 곧 이천해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천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감히 인용했는가?"
하였다. 정유가 말하기를,
"신이 상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흉역(凶逆)으로서 부도(不道)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전하께서 처참하셨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성(姓)을 삭제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정유가 말하기를,
"이광좌나 조태억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은 성(姓)을 쓰지 않아도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지만, 이천해는 이 경우와는 달라서 다만 이름만 써 가지고는 알지 못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에 성(姓)을 썼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들된 도리에 있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어찌하여 매양 꺼내어 말하는가?"
하였다. 정유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매양 차마 꺼내어 말할 수 없다는 것으로 분부하시니, 이 뒤로는 비록 악역(惡逆)의 부도(不道)한 말이 있어도 상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천해는 일개 미련하고 무식한 사람인데 어떻게 조태억이 지은 교문(敎文)에 있는 말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유가 말하기를,
"교문이 한번 나오자 중외(中外)에 전파되어 인심을 의혹시켰기 때문에 이천해가 감히 이런 부도(不道)한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몹시 노(怒)하여 말하기를,
"의혹이라는 말이 어찌 범연(泛然)히 할 수 있는 말이겠는가? 우리 동국(東國)의 윤기(倫紀)가 여기에 이르러 멸절(滅絶)되고 말았다. 승지(承旨)는 어찌하여 감히 이런 소장을 봉입(捧入)했는가?"
하였다. 정유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비록 윤기(倫紀)가 신 때문에 멸절되었다고 말씀하셨지마는, 신의 이 소장은 윤기를 부지(扶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감히 방만규(方萬規)를 편들겠다는 것인가?"
하였다. 정유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방만규를 죽인 것에 대해 신은 실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방만규가 다른 사람의 부도(不道)한 짓을 고발하였는데도 도리어 부도라는 죄명으로 죽인 것에 대해 신은 삼가 의혹을 가집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일신에 관계된 일이라면 역적 목호룡의 말이라도 말할 수가 있겠으나, 이천해의 말에까지 어떻게 감히 제기(提起)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유가 말하기를,
"합사(合辭)에서 논한 것은 지엽적인 것입니다만, 신은 근본을 논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승지(承旨)들은 나아와서 서안(書案) 앞에 나란히 서 있으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전에 신세웅(申世雄)을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킨 것도 그가 왕망(王莽)과 조조(曹操)에 대한 말을 꺼내어 감히 견주지 못할 자리에다 견주었기 때문이었다. 방만규가 인용한 말은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유응환(柳應煥)의 소장에서 강목(綱目)에 있다고 한 것으로도 충분히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방만규를 친국(親鞫)할 적에 ‘군흉(群凶)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에 주각(註脚)을 단단 말인가?’라는 내용으로 결안(結案)을 받았었다. 종래의 군흉들이 비록 그지없이 음험하고 참독스러웠지만 어떻게 교문(敎文)에 있는 말을 가지고 이천해의 일에 연루시킬 수 있겠는가? 마땅히 방만규의 전례에 의거하여 즉시 친국(親鞫)을 실시할 것이로되 당시 동조(東朝)907) 께서 방만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 슬퍼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국문하지 않고 다만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한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홍석보(洪錫輔)가 말하기를,
"소장을 올린 유생(儒生)이 어찌 사사로이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교문(敎文)의 내용은 갑자기 살펴보면 매우 해괴하기 때문에 외간(外間)에도 전파된 말들이 많습니다."
하고, 좌승지(左承旨) 이교악(李喬岳)은 말하기를,
"주대(奏對)한 것으로서 살펴보면 조금도 동요되어 굴하는 것이 없으니, 그가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홍석보가 말하기를,
"정유는 바로 고(故) 상신(相臣)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손자입니다. 아주 가까운 천위(天威)908) 앞에서 조금도 동요되어 굴하는 바가 없으니, 그 사기(士氣)는 숭상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큰 소리로 이르기를,
"승지도 이런 말을 하는가? 이는 장차 나를 불효(不孝)의 죄에 몰아 넣으려는 짓이다."
하고, 이어 서진(書鎭)909) 을 들어 책상을 치고 소장을 땅에 집어던졌다. 홍석보가 말하기를,
"소장을 어찌 땅에다 던질 수 있습니까? 서진도 중간이 부러졌습니다."
하고, 이교악은 말하기를,
"소장을 올린 유생의 말이 혹시 중도에 지나치더라도 마땅히 자상하게 타일러 나무라야 되는 것인데, 이제 큰 목소리에 노기를 띠시니, 이는 즉위하신 이후 처음 보는 일입니다."
하고, 이어 소장을 받들어 올리니, 임금이 비로소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가를,
"내가 다른 일에 있어서 어찌 목소리를 크게 하거나 노기를 띠겠는가? 그러나, 이천해의 말을 사관(史官)에게 기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보면 나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자리에서 생각하면 꿈결에서도 또한 놀라는 실정인데, 이제 무단히 그 말을 제기하니, 아들된 마음에 어찌 평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홍석보가 말하기를,
"말이 전하의 마음에 거슬리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성인(聖人)의 큰 도량에 있어 의당 널리 포용할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절도(絶島)에 정배하는 것은 끝내 지나친 조처입니다. 옛날 인조조(仁祖朝) 때 강빈(姜嬪)의 옥사(獄事)910) 가 있은 뒤로 만약 강석기(姜碩期)의 일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써 논죄하겠다는 분부를 내렸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뒤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감히 복관(復官)시킬 것을 청하자, 인조(仁祖)께서 매우 놀랍고 괴이하게 여겼습니다만, 그래도 깊이 탓하지 않았습니다. 인조의 이 거조(擧措)는 실로 성덕(盛德)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신방(申昉)은 말하기를,
"모든 일은 반드시 화평한 마음과 온화한 기운으로 처리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한 뒷에야 정도에 지나치는 거조를 면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교악은 말하기를,
"명(明)나라 때에도 소장을 땅에 던진 일이 있었으나, 전하께서 다시 이런 지나친 거조를 하시리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 조사기(趙嗣基)는 말이 왕대비(王大妃)를 핍박하였기 때문에 결안(結案)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법에 의거, 처벌하였었다. 지금도 조사기의 전례에 의거하여 논단(論斷)하려 하였으나 현관(賢關)에서 올린 소장이기 때문에 우선 용서한다."
하였다. 신방이 말하기를,
"전하의 분부에 소장을 올린 유생을 이천해를 편든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실로 그렇지 않습니다. 소장을 올린 유생은 이천해의 말에 대해 절통함을 느꼈기 때문에 이런 소장을 올린 것입니다."
하고, 정유는 말하기를,
"신에게 칼을 들고 이천해를 찌르라고 해도 할 수가 있는데, 어찌 그를 편들어 나설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교악은 말하기를,
"사론(士論)은 신기(新奇)한 것을 만들어 기필코 성청(聖聽)을 움직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 말이 이러했던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치원(朴致遠)은 말하기를,
"신 등이 상소를 올린 유생을 위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성덕(聖德)에 누를 끼칠까 염려해서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의 말이 진실로 옳다. 현관(賢關)의 말은 조사(朝士)들과 달리 신기(新奇)하게 만들려고 힘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소장을 올린 유생을 살펴보건대, 아주 가까운 엄위(嚴威)911) 의 아래에서도 조금도 동요하거나 굴하는 기색이 없으니 3백년 동안 사기(士氣)를 배양시켜 온 효험임을 알 수가 있다. 성종조(成宗朝) 때 대내(大內)에서 반궁(泮宮)912) 에 신사(神祀)를 거행하자 반궁의 유생들이 이를 쫓아내었는데, 성종(成宗)께서 들으시고는 기뻐하며 이르기를, ‘선비의 기개(氣槪)가 이와 같으니, 내가 다시 무엇을 걱정할 게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윤지술(尹志述)의 일에 대해 칭찬한 바가 있었던 것은 이런 뜻에서였다. 지금 이소장을 올린 유생은 비록 이 일과는 다르지만, 내가 그들의 굴하지 않는 것을 칭찬하여 특별히 절도(絶島)에 정배하라는 명을 환수하노니, 이 소장은 도로 주어서 내어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정유가 즉시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이교악이 말하기를,
"성균관에서 올린 소장은 다른 경우와는 다릅니다. 비록 나무라는 말일지라도 비답(批答)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홍석보 등도 그렇게 하라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승지(左承旨)가 소장을 탑전에 놓고 누누이 진달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모름지기 이런 뜻을 알고서 이 뒤로도 이렇게 하라."
하고, 이어 비답을 내렸다.
사신은 말한다. "신축년913) 에 군흉(群凶)들이 윤지술(尹志述)을 장살(戕殺)할 적에 금오(金吾)914) 의 당상관(堂上官)이 윤지술을 협박하여 결안(結案)을 받아내려 하였으나, 윤지술의 행동거지가 태연하여 조금도 꺾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하여 혹독한 형장(刑杖)을 받게 되었는데, 단지 곤장(棍杖)이 부러지는 소리만 들릴 뿐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에 따르면 수령(守令)들이 죄수의 판결을 지체시킨 것이 매우 많았는데, 비록 평일에는 윤지술과 의견을 달리하던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는 경탄(驚歎)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행형(行刑)에 임하여서도 신기(神氣)가 조용하여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옛날의 절사(節士)에 견주어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정유(鄭楺)의 일이 또 윤지술이 화를 당하여 선비의 기개(氣槪)가 꺾어진 뒤에 있었는데도 또한 항론(抗論)하면서 진노하는 천위(天威) 아래서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그 강직한 기개가 늠연하여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었다. 그 뒤로 진사(進士) 유조(柳組)가 서장(書狀)을 올려 참마검(斬馬劒)915) 으로 이광좌(李光佐)의 목을 베기를 청하자, 임금이 몹시 노하여 불러들였다. 그때 유조가 비분 강개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는 감탄과 칭찬을 받았으니, 이것이 어찌 열성조(列聖朝)에서 사기(士氣)를 배양시켜 온 힘이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23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歷史)
[註 896] 승선(承宣) : 승지(承旨).[註 897] 위포(韋布) : 위대(韋帶)와 포의(布衣). 곧 빈천한 사람의 의복.[註 898]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899] 성자(聖慈) : 왕대비.[註 900] 애이(崖異) : 모가 나서 남과 틀림.[註 901] 중표 형제(中表兄弟) : 내외종(內外從) 형제.[註 902] 대의 멸친(大義滅親) :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골육(骨肉)의 사정(私情)도 끊음.[註 903] 정석(鼎席) : 정승(政丞).[註 904] 시조(市朝) :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註 905] ‘성질(聖疾)’ : 임금의 질병.[註 906] 현관(賢關) : 성균관(成均館).[註 907] 동조(東朝) : 왕대비.[註 908] 천위(天威) : 임금의 위엄.[註 909] 서진(書鎭) : 책장이나 가벼운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물건. 쇠나 돌 따위로 여러가지 모양을 만듦. 문진(文鎭).[註 910] 강빈(姜嬪)의 옥사(獄事) :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의 사사(賜死) 사건. 인조 23년(1645)에 세자와 세자빈이 청(淸)나라에서 돌아와 조소용(趙昭容)과 반목이 생겨 싸우던 중, 세자가 죽자 이것을 기화로 조소용이 세자를 강빈이 죽였다고 무고하고 왕실(王室)을 저주한다고 고함으로써 다음해에 강빈을 사사(賜死)하였음.[註 911] 엄위(嚴威) : 임금의 위엄.[註 912] 반궁(泮宮) : 성균관.[註 913]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914] 금오(金吾) : 의금부(義禁府).[註 915] 참마검(斬馬劒) : 말을 벨 만큼 날카로운 칼.
사신은 말한다. "신축년913) 에 군흉(群凶)들이 윤지술(尹志述)을 장살(戕殺)할 적에 금오(金吾)914) 의 당상관(堂上官)이 윤지술을 협박하여 결안(結案)을 받아내려 하였으나, 윤지술의 행동거지가 태연하여 조금도 꺾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하여 혹독한 형장(刑杖)을 받게 되었는데, 단지 곤장(棍杖)이 부러지는 소리만 들릴 뿐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에 따르면 수령(守令)들이 죄수의 판결을 지체시킨 것이 매우 많았는데, 비록 평일에는 윤지술과 의견을 달리하던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는 경탄(驚歎)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행형(行刑)에 임하여서도 신기(神氣)가 조용하여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옛날의 절사(節士)에 견주어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정유(鄭楺)의 일이 또 윤지술이 화를 당하여 선비의 기개(氣槪)가 꺾어진 뒤에 있었는데도 또한 항론(抗論)하면서 진노하는 천위(天威) 아래서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그 강직한 기개가 늠연하여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었다. 그 뒤로 진사(進士) 유조(柳組)가 서장(書狀)을 올려 참마검(斬馬劒)915) 으로 이광좌(李光佐)의 목을 베기를 청하자, 임금이 몹시 노하여 불러들였다. 그때 유조가 비분 강개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는 감탄과 칭찬을 받았으니, 이것이 어찌 열성조(列聖朝)에서 사기(士氣)를 배양시켜 온 힘이 아니겠는가?"
대제학(大提學) 이병상(李秉常)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우대하는 비답(批答)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황귀하(黃龜河)를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김유경(金有慶)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황일하(黃一夏)와 조관빈(趙觀彬)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보덕(輔德) 유복명(柳復明)을 발탁하여 승지(承旨)로 삼았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홍현보(洪鉉輔)와 서종섭(徐宗燮)이 아뢰기를,
"유생(儒生)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 가운데 오륜(五倫)을 모른다느니, 사습(士習)이 괴이하고 패리(悖理)하다느니 하는 분부는 현관(賢關)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속히 환수하소서."
하고, 승지(承旨) 신방(申昉)도 또한 말을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반유(泮儒)916) 의 상소에 대한 비답 내용에 과도한 분부를 환수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근밀(近密)한 직책에 있으면서 품은 마음이 있으면 숨김없이 아뢰니, 내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6월 12일 무인
태학생(太學生) 정유(鄭楺) 등의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批答)의 내용을 고치기를,
"목욕(沐浴)하고 토역(討逆)하기를 청하는 의리는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합계(合啓) 이외의 말을 점출(拈出)하여 감히 차마 제기하지 못할 말을 인용하였다. 지난날의 처분이 더없이 엄명(嚴明)하였는데, 그대들이 어찌 듣지 못했을 이치가 있겠는가? 현관(賢關)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성인(聖人)의 훈계를 배우고 성인의 도(道)를 행하면서도 오히려 이러하니, 진실로 이상하다."
하였다. 처음 비답에서 있었던 ‘오륜(五倫)의 소중함을 모르고 감히 역적 이천해(李天海)의 말을 인용하였으니 사습(士習)이 괴이하고 패리(悖理)하다’고 한 등등의 말을 이날의 분부에서는,
"오늘 새벽 소대(召對)를 끝마치고 돌아가 자리에 누워 조용히 생각하여 보니, 승선(承宣)과 유신(儒臣)의 말은 임금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엊그제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는 관유(館儒)를 책망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훗날을 엄중히 경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태학(太學)에 있는 여러 유생들은 공자(孔子)의 학문을 배우고 있는데 오륜(五倫)을 가지고 책망한 것은 과연 선비에 대한 예우(禮遇)가 아니었다. 금년은 바로 내가 처음 즉위한 해이니 교육을 진흥시켜 도의를 부지(扶持)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한때의 경솔한 말을 가지고 갑자기 실정에 벗어난 지목(指目)을 가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비지(批旨)를 고쳐 내리니, 사유(師儒)의 장(長)으로 하여금 여러 유생들에게 두루 유시하게 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아! 신임 사화(辛壬士禍) 때 군흉(群凶)들이 영고(寧考)917) 에게 원한을 품고 전하(殿下)에게 흉독을 부렸는데, 무함하고 핍박함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기필코 선왕(先王)의 우애(友愛)를 손상시키고 삼종(三宗)918) 의 혈맥(血脈)을 단절시키려 하여 안팎으로 배치(排置)하고 수미(首尾)가 서로 호응하였습니다. 지난번에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 두 역적이 믿고 의지할 데가 없고 성원(聲援)하는 데가 없었다면 그들이 아무리 흉악하고 교활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감히 앞장서서 흉독을 부릴 계책을 세우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직접 변고(變故)를 겪으셨으므로 사건의 시종을 환히 알고 계실 터인데도 김일경과 목호룡이 복주(伏誅)된 것으로 거괴(巨魁)가 이미 섬멸되었다고 여겨 그 나머지 죄악이 동등한 자들까지 모두 협박에 의해 따랐다는 죄과(罪科)에 돌리고 법에 의거, 철저히 규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조정의 기상이 쇠약해지고 국가의 형세가 진작(振作)되지 못한 것이 여기에 연유되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는 나이는 비록 많지마는 정신과 식견은 아직도 왕성하니, 그를 의정부(議政府)에 나오게 하여 치도(治道)를 논하게 함으로써 품은 뜻을 정사에 반영하게 한다면 틀림없이 대천(大川)이나 교악(喬岳)같은 큰 효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봄 강물에 일엽 편주로 호연(浩然)히 멀리 떠나가 산야(山野)에 은거(隱居)하면서 조정으로 나아올 기약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더욱 간곡한 정성을 다하여 기필코 멀리 물러가 있으려는 마음을 되돌리도록 하소서, 찬선(贊善) 김간(金幹)은 일생 동안 실천하여 온 공부가 정숙(精熟)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재(李縡)는 학문을 통하여 도(道)를 깨달아 사학(詞學)이 우수한데, 혹 시골로 돌아가 살기를 결심하고 혹은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기를 빨리하여 은혜로운 전지(傳旨)가 내렸으나 한번도 달려오지 않고 있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지성으로 간곡히 부른다면 어찌 감격하여 마음을 바꿀 이치가 없겠습니까?"
하고, 또 논핵하기를,
"양구 현감(楊口縣監) 양우전(梁禹甸)은 불효(不孝)하고 부자(不慈)하여 정실(正室)의 아내를 소박해 버렸으며 관직(官職)에 있으면서 욕심이 많고 비루하였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소서. 영월 부사(寧越府使) 김시경(金始慶)은 아내의 상(喪)을 당하여 백성의 돈을 함부로 징수하였으며 금년 봄 구황(救荒)의 정사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유산(流散)되어 산골 마을들이 거의 텅 비어버렸으며, 평해 군수(平海郡守) 유동무(柳東茂)는 행정(行政)을 아전들의 손에 맡기고 뇌물이 기녀(妓女)의 입을 통하여 들어오므로 바닷가 마을의 백성들이 혹독한 침탈을 당하고 있으니, 이들을 모두 파직(罷職)시키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영상(領相)과 두 신하의 일에 대해서는 그대의 말이 절실하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세 고을 수령의 일도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임주국(林柱國)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서덕수(徐德修)를 체포할 때 있었던 부장(部將)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국가에서 반유(泮儒)를 대우하는 것이 대신(大臣)과 동등하니, 모든 큰일에 대해서 그들로 하여금 논렬(論列)하게 하고 비록 재계(齋戒)하는 날을 당하더라도 그들의 소장을 봉입(捧入)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현관(賢關)을 중히 여기고 사기(士氣)를 배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엊그제 소장을 올린 유생(儒生)이 입시(入侍)하였을 적에 전하의 위노(威怒)가 너무 지나쳐 목소리와 얼굴빛이 모두 엄격하여 오륜(五倫)을 모른다느니, 사습(士習)이 괴이하고 패리(悖理)하다느니 등의 분부가 있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참으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논한 것은 강상(綱常)을 부지(扶持)시키자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오륜을 손상시켰다는 지목을 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경계한 말에 대해서는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관유(館儒)919) 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이미 고쳐서 내렸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13일 기묘
태학생(太學生) 정유(鄭楺) 등이 엄중한 비답을 받고서는 권당(捲堂)920) 하고 물러갔다. 대사성(大司成) 정형익(鄭亨益)이 반궁(泮宮)에 나아가 들어가라고 권하려 할 즈음에 마침 고쳐서 내린 비지(批旨)를 받들었으므로 드디어 여러 유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고친 비답을 선시(宣示)하였다. 정유 등이 소회(所懷)를 써서 바쳤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전하께서 역적 이천해(李天海)의 변고에 대해 놀란 마음이 뼈에 사무쳐 차마 다시 그 일을 제기하지 않으셨는데, 신 등의 말을 듣고서는 성념(聖念)에 크게 거슬려 이런 엄중한 분부가 있으셨는데, 신 등의 말을 듣고서는 성념(聖念)에 크게 거슬려 이런 엄중한 분부가 있으셨습니다만, 이것은 실로 전하께서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왜냐하면 역적 이천해가 흉언(凶言)을 할 적에 배종(陪從)하였던 백관(百官)과 연(輦)을 호위하였던 군졸들이 그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그를 국문할 적에 이르러서는 그 국문에 참여한 많은 관원과 서리(胥吏)·나졸(羅卒)들도 그 정상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사적으로 서로 묻고 듣고 하여 자연히 전파되는 것은 사세(事勢)의 면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전하께서만 차마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마는 그 많은 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다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한번 통렬하게 변명(辯明)하여 군흉(群凶)의 죄를 통쾌하게 바로잡아 중외(中外)의 사람들에게 환히 알게 하실 수 있다면, 오늘날 신하된 사람으로서 그 누군들 감히 다시 그런 말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중외(中外)에서 듣는 사람들이 날로 더욱 의혹을 품게 되고 전하께서 받은 무함이 날로 더욱 엄매(唵昧)해져 가기 때문에, 신 등은 이를 절통하게 여겨 비록 전하께서 반드시 듣기 싫어 하실 줄 알면서도 감히 극언(極言)으로 죄다 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사건의 골자(骨子)를 명백히 변파(辨破)함으로써 전하의 의혹을 풀고 군부(君父)의 무함을 신설(伸雪)하고 난적(亂賊)의 죄를 바로잡으려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오륜(五倫)을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오륜의 소중함을 모른 처사라고 하시니, 이것이 어찌 천만 뜻밖의 말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구구한 정실(情實)을 이미 다 아뢸 수가 없는데 더구나 이번에 다시 고쳐서 내린 비답에서도 책유(責諭)가 오히려 더 엄중하였으니, 신 등이 어떻게 감히 너그러이 용납하는 성덕(聖德)을 믿고 빨리 횡서(黌序)921) 로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또 회책(誨責)하는 분부를 내려 태학(太學)으로 들어올 것을 권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끝내 재사(齋舍)로 들어오지 않고 다시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를 진달하였는데, 임금이 개석(開釋)922) 한다고 분부를 내린 후에야 들어왔다.
동궁(東宮)의 환후(患候)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이를 종묘(宗廟)에 고하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왕(王)은 이르노라, 세자(世子)가 병을 앓게 되어 바야흐로 걱정하는 마음이 깊었었는데, 하늘이 복을 내려 쾌차하는 기쁨을 보게 되었다. 이는 진실로 일국(一國)의 경사이니, 어찌 열 줄 교서를 반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과인(寡人)이 다행히 훌륭한 후사(後嗣)를 얻어서 명호(名號)를 이미 정하였으니 크게 계체(繼體)의 존엄함에 부응하였고, 인효(仁孝)가 일찍부터 드러나니 진실로 애타게 기다리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백신(百神)이 다같이 호위하여 철에 따라 몸을 조섭(調攝)함에 잘못이 없었으나 육기(六氣)923) 는 틈을 타고 발동하기가 쉬운 것이어서 조심하고 경계함이 항상 간절하였는데, 마침 돌림병이 널리 퍼지게 되어 이것이 저위(儲闈)924) 에까지 점점 번져가게 되었다. 건강이 조금 나빠지게 되었으나 처음에는 기거(起居)에 해로움이 없었는데, 창진(瘡疹)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스스로 놀랍고 위태로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다행히 기거(起居)가 더욱 평온하여 짐을 보니, 점차 기약한 날짜의 효험이 있는 듯하다. 낟알 모양의 반점(斑點)이 통상적인 숫자보다 조금 드물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소양(少瘍)925) 인가 의심하였으나, 여러 가지 증정(證情)이 본래의 증세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대두(大痘)926) 로 단정하게 되었다.
대개 이 병은 제일 위중한 병으로 이름이 났는데, 지난날 일찍이 과인도 경험한 바 있다. 이는 치료하기가 실로 어려워서 궁벽한 여염(閭閻)에서도 가시를 치고 사람을 금하는데, 하물며 거양(居養)을 남보다 특별해야 할 지극히 귀하고 어린 몸이겠는가? 마침 절서(節序)가 삼경(三庚)927) 에 속해 있어 그 걱정스러움이 말할수 없었는데 칠발(七發)928) 을 기다릴 것도 없이 갑자기 병의 증세가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신기(神氣)가 점점 청녕(淸寧)하여지게 되고 기거가 날로 평온하게 되었다. 이미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이 회복된 것을 보니 그 기쁨이 점을 쳐서 미리 안 것보다 갑절이나 더하다. 열성조(列聖祖)의 강감(降監)을 받아 병이 잘못되지 않았고 여러 신민(臣民)의 옹축(顒祝)에 힘입어 큰 경사가 이르게 되었다. 아름다운 상서(祥瑞)가 바야흐로 새로우니 큰 기업(基業)이 더욱 공고하여질 것을 기대할 수 있고, 나쁜 병이 빨리 제거되니 거듭 백체(百體)929) 가 다 조화(調和)됨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묘궁(廟宮)에 희생(犧牲)과 예주(醴酒)를 바쳐 제사지내고 이어 전국에 윤음(綸音)을 반포하게 된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까지 이르니 이미 천지(天地)의 인자(仁慈)함을 본받을 것이고 가벼운 죄범(罪犯)을 탕척시키는 것은 단비 같은 은택을 널리 베푸는 것이다. 잡범(雜犯)중 사죄(死罪)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주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씩 올려주며 자궁(資窮)930) 된 자는 대가(代加)931) 하라, 아! 한(漢)나라의 궁전(宮殿)에 송축(頌祝)을 올리니 다시 중륜(重輪)932) 의 기쁨이 비등하게 되었고, 기자(箕子)의 구주(九疇)933) 를 널리 펴니 길이 오복(五福)934) 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만물(萬物)과 함께 즐기겠기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노니, 이런 의도를 마땅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의현(李宜顯)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25면
【분류】사법(司法) / 인사(人事) / 왕실(王室)
[註 923] 육기(六氣) : 음양(陰陽)의 여섯 가지 기운. 곧 한(寒)·서(署)·조(燥)·습(濕)·풍(風)·우(雨).[註 924] 저위(儲闈) : 세자를 가리킴.[註 925] 소양(少瘍) : 부스럼을 말함.[註 926] 대두(大痘) : 홍역(紅疫).[註 927] 삼경(三庚) : 삼복(三伏)의 더위.[註 928] 칠발(七發) : 홍역(紅疫)을 앓을 때 붉은 반점이 일곱번 생겼었다는 말로 증세가 나아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임.[註 929] 백체(百體) : 신체의 모든 부분.[註 930] 자궁(資窮) : 품계(品階)가 다 되어 다시 더 이상 올라갈 자급(資級)이 없이 되는 것. 곧 당하관(堂下官)의 최고위(最高位)에 있는 것을 이름.[註 931] 대가(代加) : 자궁(資窮) 등의 이유 때문에 자급(資級)이 오를 당자를 갈음하여 아들·사위·아우·조카 등에게 자급을 올려 주는 것.[註 932] 중륜(重輪) : 겹으로 된 수레바퀴란말. 안정된 것을 말함.[註 933] 구주(九疇) :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 곧 오행(五行)·오사(五事)·팔정(八政)·오기(五紀)·황극(皇極)·삼덕(三德)·계의(稽疑)·서징(庶徵)·오복(五福).[註 934] 오복(五福) : 다섯 가지 복(福). 곧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삼가 근일의 처분(處分)을 보건대, 혹은 간사한 정상이 반쯤 드러났는데 지레 짐작하여 조처하기도 하고, 혹은 긴급한 공초(供招)에 연루된 사람을 잡아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옥체(獄體)가 너무 너그러워져서 법망을 빠져 나가는 사람이 많게 되었으니, 비록 대신(大臣)들이 굳이 청하고 대각(臺閣)에서 극력 논쟁하여도 천청(天聽)을 감동시켜 돌이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흉역(凶逆)도 오히려 이렇게 법을 굽혀 용서한다면 난적(亂賊)이 어떻게 징계되겠으며 옥사(獄事)를 다스림에 있어 법대로 시행하지 못한다면 왕법(王法)이 어떻게 진숙(振肅)935)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소장에서 진달한 내용은 사의(辭意)가 엄정(嚴正)하나, 내가 짐작하여 조처한 것도 나름대로 주견(主見)이 있다."
하였다.
이성룡(李聖龍)을 집의(執義)로, 장붕익(張鵬翼)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조영세(趙榮世)를 보덕(輔德)으로, 조덕린(趙德隣)을 교리(校理)로, 나학천(羅學天)을 필선(弼善)으로, 방진기(方震夔)를 연천 현감(漣川縣監)으로, 이엽(李燁)을 양구 현감(楊口縣監)으로 삼았다. 방진기와 이엽은 의관(毉官)인데, 동궁(東宮)의 두환(痘患)을 치료한 공으로 이번 정사(政事)936) 에서 모두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의 관직을 제수하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최석항(崔錫恒)은 바로 신의 오촌숙(五寸叔)입니다. 그의 가산을 적몰하고 처자를 노비로 삼기를 청한 것에 참섭하여 차마 못할 바가 있어서 거듭 소명(召命)을 어겼사온데, 대신(大臣)들이 과연 일을 피한다는 죄목을 만들어 초기(草記)로 파직시킬 것을 청하기를 마치 해사(該司)에서 낭관(郞官)을 제거(除去)하듯이 하였으니, 사람이 못난데 따라 관직까지 무시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사간(大司諫) 윤양래(尹陽來)가 시끄러움을 야기시킨 것으로 인하여 대신이 차자(箚子)를 올려 진달하기를, ‘저 일종의 사세를 관망하는 무리가 틈을 타고 나와서 저해(沮害)하여 감히 당당(堂堂)한 대론(大論)과 서로 대항(對抗)했기 때문에 상의하여 파직시킬 것을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아! 대신들이 신을 다그치기를 어찌 그리도 심하게 한단 말입니까? 신은 사세를 관망한 것이 무슨 일이며 저해한 것이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는데도 생판으로 근거없는 말을 하여 신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에 대해서는 성명(聖明)께서도 통촉하고 계시겠기에 신은 많은 변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지금 이 상소의 내용은 자못 재택(裁擇)937) 할 수 없다. 진실로 합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삼사(三司) 【대사헌(大司憲) 김취로(金取魯), 대사간(大司諫) 이기익(李箕翊), 장령(掌令) 정광제(鄭匡濟), 지평(持平) 임주국(林柱國)·윤혼(尹焜), 헌납(獻納) 이의천(李倚天),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서종섭(徐宗燮),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윤심형(尹心衡)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군흉(群凶)들이 전하를 핍박하여 위태롭게 하였는데, 제일 먼저 손을 댄 사람은 역적 유봉휘(柳鳳輝)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성고(聖考)938) 의 유의(遺意)를 본받고 자전(慈殿)의 명교(明敎)를 받들어 손수 전하의 작호(爵號)를 쓰시고 대신(大臣)과 경재(卿宰)들에게 직접 부탁함으로써 억만년 끝없는 국기(國基)를 안정시켰으니, 이는 광명 정대하고 종용(從容) 진밀(縝密)한 조처였습니다. 그런데 유봉휘가 성급하게 소장을 올려 감히 황급하여 경황이 없는 가운데 사령(使令)을 독촉하였다는 등의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으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선왕(先王)939) 께서 바야흐로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을 얻을 것을 기뻐하고 있는데도 유봉휘는 유독 근심스럽게 여긴다고 했고, 신민(臣民)들은 모두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기뻐 송축(頌祝)하는데도 유봉휘는 유독 인심이 의혹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오래도록 결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이른바 ‘신하의 예절이 없다.[無人臣禮]’고 한 네 글자는 한(漢)나라 때의 어사(御史)인 엄연년(嚴延年)이 곽광(霍光)에 대하여 폐립(廢立)을 마음대로 한다고 탄핵했던 말인 것입니다.940) 이 말은 역적 김일경이 국상(國喪)을 이용하여 거짓 교서(敎書)를 만들었다고 한 말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는 말로 여러 신하들을 무함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곧 위로 전하에게까지 미쳐 국본(國本)을 동요시키려는 계책이었습니다.
그가 이른바 ‘지금부터는 신충(宸衷)941) 에서 결단하셔야 한다.’고 한 말은 종전에는 신충에서 결단하지 않았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 말은 역적 김일경이 ‘한장의 서찰로 도모하여 얻으려 했다.’고 한 말과 서로 조응(照應)이 되는 말이니, 이것이 어찌 전하만을 무함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를 깊이 생각하시어 이미 신충(宸衷)에서 결단을 내리시고 나서 그 일이 지극히 중대하였기 때문에 자성(慈聖)께 앙품(仰稟)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성고(聖考)의 유의(遺意)로써 명령했을 뿐인데, 이제 유봉휘가 기필코 이런 따위의 말로써 협박하고 공동(恐動)하려는 것은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신하가 되어가지고 정당한 저군(儲君)을 탄핵한 경우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놀라움이 뼛골에 사무치고 가슴이 떨려옴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당시 선왕(先王)께서 그가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통촉하시고 특별히 국문(鞫問)하라는 계청(啓請)을 허락하였으니, 유봉휘는 다만 전하의 죄인일 뿐 아니라 실은 선왕(先王)의 죄인이요 종사(宗社)의 죄인인 것입니다. 더구나 백망(白望)이 상변(上變)할 때의 공초(供招)에 세 가지 이야기가 있었으니, 그 가운데 하나는 곧 목호룡(睦虎龍)이 먼저 와서 변서(變書)를 올릴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는 계책을 꾸며낸 자를 지적한 것이었는데 유봉휘의 이름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습니다. 이 한 가지 조항만 가지고도 충분히 유봉휘에 대한 단안(斷案)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일이 자신에게 관계된 것이라 하여 한결같이 포용하시면서 여러 달 동안 토죄(討罪)할 것을 청하여도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으시다가 다만 삭출(削黜)하라는 명만 내리셨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자신이 흉역(凶逆)의 죄를 범하고서도 처벌이 삭출(削黜)에 그칠 리가 있겠습니까? 그의 역적 절차를 논한다면 스스로 해당되는 형률(刑律)이 있을 것이니, 유봉휘를 속히 방형(邦刑)에 의거 처단하소서.
이광좌(李光佐)는 본래 흉역(凶逆)의 괴수로 위복(威福)의 권한을 마음대로 휘둘러 조정(朝廷)을 탁란(濁亂)시켰으며 선류(善類)를 도륙(屠戮)하였으니, 그의 천지(天地)사이에 가득찬 죄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나, 우선 그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것만을 들어 말하여 보더라도 토죄(討罪)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숙종(肅宗)을 배반하고 우리 전하(殿下)를 모위(謀危)한 것입니다. 아! 절통합니다. 성고(聖考)께서 생존해 계실 때 이광좌가 아경(亞卿)942) 의 반열에까지 이르렀었는데, 그가 감히 병신년943) 의 처분(處分)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오만 불손한 마음으로 도망하여 신하되기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가 숙종께서 승하(昇遐)하신 뒤에 군얼(群孽)들이 꽉 들어차는 때에 이르러 그제야 의기 양양(意氣揚揚)하여 뻔뻔스레 나왔으니, 숙종의 정책을 변경하고 숙종의 신하를 주륙(誅戮)할 적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는 데가 없었습니다. 사문(斯文)에 대한 시비(是非)는 곧 성고(聖考)께서 어제(御製)로 편차(編次)하여 문자(文子)944) 에게 주어 천만세토록 삭제(削除)할 수 없는 공안(公案)이 되게 한 것인데, 이를 하루아침에 고쳐버리면서 조금도 기탄함이 없었으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명릉(明陵)의 지문(誌文)을 고치자고 청한 경우는 이것이 실로 유궁(幽宮)945) 의 망극한 변고인데도 죄줄 것을 청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태연히 수의(收議)하여 모호하게 미봉(彌縫)하고서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성고(聖考)께서 무엇을 그에게 저버린 것이 있기에 그가 차마 이런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그가 우리 숙종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신축년946) 대리(代理)하여 정사를 다스리라는 명령이 내렸을 적에 이광좌가 은밀히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 대신(大臣)들을 공동(恐動)하였는데, 사기(辭氣)가 성을 불끈 내고 기세가 흉악하고 사나웠습니다. 한 가지 주장은 ‘만일 이 명령을 도로 정지하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하였고, 또 한가지 주장은 ‘만일 이 명령을 봉승(奉承)하면 오늘날의 대신들은 신하가 지킬 절개가 있다고 할 수 없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병환중에 내린 분부를 어떻게 감히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아! 숙종께서 미령(未寧)하실 때에 또한 선왕(先王)에게 명하여 국사(國事)를 대리(代理)하도록 하였었는데, 지금 대리(代理)하는 것을 가리켜 나라를 망치게 될 일이라 하고 명령을 봉승(奉承)하는 것을 가리켜 신하의 절개를 어기는 것이라 하며 선왕(先王)의 성교(聖敎)를 참된 분부가 아니라고 하니, 이는 우리 전하를 조묘(祧廟)를 받들어 왕통(王統)을 계승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여기고 선왕(先王)의 분부를 애매 모호한 지경으로 돌려버리려는 처사입니다.
따라서 그의 흉역스런 심장(心腸)이 이미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다가 선왕의 우애(友愛)가 매우 가깝고 저위(儲位)를 동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유봉휘·김일경의 무리와 마음을 합쳐 공모(共謀)하여 목호룡에게 유리한 기회를 엿보아 변서(變書)를 올리도록 하는 계책을 꾸며 내었으니, 그 변서 내용 중 목적을 쏟은 곳은 확실히 소재(所在)가 있습니다. 그들이 남몰래 서로 배포(排布)하여 몸소 흉역(凶逆)을 범한 정상(情狀)은 백망의 공초(供招)를 살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억지로 죄에 빠뜨려 옥사(獄事)를 만든 것은 이에 점차 연급(延及)시키기 위한 계책이었던 것입니다. 아! 위태롭기 그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요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이것이 곧 우리 전하를 모위(謀危)한 것이니, 그 음흉한 정절(情節)은 바로 조태구(趙泰耉)·유봉휘의 무리와 조금도 차등이 없으며, 김일경과 목호룡의 무리는 다만 그의 조아(爪牙)947) 일 뿐입니다.
그리고 선왕(先王)께서 미령(未寧)하실 때를 당하여 그가 약제(藥劑)를 논의하는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시종 병환을 비밀에 붙여 숨긴 채 오랫동안 숙직(宿直)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점(大漸)948) 때에 이르러서도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는 거조가 없었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헤아릴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왕법(王法)은 지극히 엄중하므로 결단코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전하께서는 법을 굽혀 포용(包容)하시어 다만 파직(罷職)시키라는 명령만 내렸을 뿐입니다. 대저 이 역적의 죄악이 이러한데도 통쾌하게 전장(典章)을 시행하지 않으신다면 난적(亂賊)이 어떻게 징계되겠으며, 왕법(王法)이 어떻게 진숙(振肅)되겠습니까?
이광좌를 먼저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소서. 조태억(趙泰億)은 부박하고 패려스러운 성품과 탐욕스럽고 교활한 자질로 권병(權柄)을 마음대로 휘둘러 군간(群奸)들을 손안에 넣고 주물렀으니, 그의 절도 없는 교만하고 사치함과 의리와 인륜을 무시한 죄는 진실로 온 나라 사람이 다같이 분개하고 있는 바입니다. 따라서 그가 역심(逆心)과 화심(禍心)을 품는 것은 실로 역적 김일경과 절절(節節)이 상응(相應)되고 있습니다.
김일경이 교문(敎文)을 지을 적에 그가 문형(文衡)949) 으로 있었으니 참여하지 않았을 리가 절대로 없습니다. 더구나 문형이 사고(事故)가 있으면 제학(提學)이 대신 짓게 되는데, 그 경우 대신 지은 문자(文字)를 문형에게 질의(質議)하는 것은 이것이 관각(館閣)950) 의 구례(舊例)입니다. 그런데 피를 마시는 잔을 돌렸다는 등등의 말을 심상(尋常)하게 보아넘긴 채 산삭(刪削)하여 고치게 하지 않고 팔방(八方)에 반시(頒示)되게 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가 지은 사람과 어찌 털끝만큼인들 다른 점이 있겠습니까?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시고 나서 역적 김일경의 역절(逆節)을 통촉하시고 거듭 애통(哀痛)해 하시는 분부를 내렸으나, 그와 역적 김일경은 신로 순치(脣齒)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김일경이 위태로우면 그도 장차 위태롭게 되기 때문에 문을 닫고 입을 다문채 끝내 역적을 성토하는 데 대해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전후에 김일경은 옹호하던 무리가 차례로 파직을 당하는 등 처분이 점점 엄중하여지게 되어서는 드디어 혐의가 있다는 말을 발설함으로써 스스로 빠져 나갈 계책을 도모하였습니다. 그와 역적 김일경은 다같이 역심(逆心)을 품고 있었는데, 비록 중간에 문형(文衡)의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다투어 잠시 서로 의심하고 시기한 적이 있기는 하였지만, 당여(黨與)가 서로 갈라지게 되면 흉역(凶逆)을 성취시킬 수 없게 될까 염려하여 곧바로 마음을 풀고 술을 마시면서 전처럼 서로 어울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다같이 본 사실이기 때문에 숨길 수가 없는 것인데, 비록 혐의[嫌]라는 한 글자를 찬출(撰出)하여 함께 흉역을 공모(共謀)한 자취를 덮어버리려고 하지만 그 누가 속겠습니까?
아! 절통합니다. 신축년951) 겨울에 대리(代理)의 명령이 내린 뒤 번번이 감히 청대(請對)하여 앞으로 장차 어떠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등의 말을 멋대로 진달하였으니, 이는 이광좌의 ‘이 명령을 정지시키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과 실로 표리(表裏)가 되는 말입니다. ‘정책(定策)하는 국로(國老)이고 문생(門生) 같은 천자(天子)952) 라는 말은 곧 당나라 때 환시(宦侍)들이 혼암(昏暗)한 군주를 옹립(擁立)하면서 한 말인데, 그것을 감히 오늘 날의 일에다 견주었으니, 다만 이 여덟 자(字)의 흉언(凶言)이 어찌 그의 단안(斷案)이 아니겠습니까?
골육(骨肉)의 사랑은 지극히 흉패(凶悖)스런 사람일지라도 지니고 있는 것인데, 군흉(群凶)들이 자기의 종형(從兄)인 고(故) 상신(相臣) 조태채(趙泰采)를 장살(戕殺)한 때를 당하여는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함께 임금 앞에 들어가서 대의 멸친(大義滅親)이란 이유로 자처(自處)하여 그 당여들로 하여금 핑계댈 데가 있게 만들었으니, 결국 처형에 대한 허락을 요청한 것은 실로 그가 한 짓입니다. 그가 역적을 편당든 정절(情節)은 길가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으니, 왕법(王法)으로 헤아려 보건대 결단코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억지로 공의(公議)를 거역하고 법을 굽혀 용서하시어 다만 파직시키라는 명령만 내렸기 때문에 인심은 갈수록 더욱 울분을 품게 되고 왕법은 시행될 때가 없게 되었습니다. 조태억을 우선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시키소서.
지난날 군흉(群凶)들이 품었던 화심(禍心)과 역절(逆節)이 이미 모두 환하게 드러났는데, 그 근본(根本)을 구명(究明)하여 본다면 실로 적신(賊臣) 조태구(趙泰耉)가 선창(先倡)한 것입니다. 선왕(先王)께서 이미 사속(嗣續)이 없고 또 병환이 있어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은 오직 전하에게 달렸으니, 전하 일신(一身)의 안위(安危)는 곧 종사(宗社)의 존망(存亡)에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태구가 홀로 그 사이에서 이의(異議)를 제기하여 기필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도모하려 하였고, 무단히 ‘혐의[嫌]’란 한 글자를 점출(拈出)하여 전하에 대한 화근(禍根)을 만들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생각하여 보소서. 예로부터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으로서 남에게 지목받은 것이 이와 같고서도 능히 일신(一身)을 보전한 경우가 있었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심장과 간담이 다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하의 위호(位號)를 일찍 정하게 되니, 이에 조태구의 계책이 더욱 급박하여졌습니다. 그리하여 은밀히 역적 유봉휘를 사주하여 먼저 동요시키는 말을 꺼내게 하고는 뒤이어 한 통의 차자(箚子)를 올려 동요시키는 계책을 더욱 방자히 하였습니다. 대리(代理)의 명령이 내림에 이르러서는 대계(臺啓)를 무시하고 선인문(宣仁門)으로 불쑥 들어가서 승정원(承政院)을 거치지 않은 채 스스로 신폐(宸陛)에 주달하였으니, 그가 환시(宦寺)들과 결탁하여 화기(禍機)를 양성(釀成)한 정상을 이미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로부터 이후로 박상검(朴尙儉)·석열(石烈)이 대내(大內)에서 독기(毒氣)를 부렸고, 김일경·목호룡이 외정(外廷)에서 흉악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조태구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역적 목호룡의 변서(變書)가 나왔을 적에 거기에 동궁(東宮)을 무함하고 핍박하는 말이 있자 조태구가 급급히 서둘러 청대(請對)하여 드디어 양옥(梁獄)은 구핵(究覈)하지 않아야 된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증거로 대면서 옥안(獄案)에 기록하지 말 것을 청하였습니다.
양옥에 대한 일은 양왕(梁王)953) 이 실제로 불궤(不軌)954) 를 도모하였는데도 전숙(田叔) 등이 그 문서(文書)를 소각시켜서 골육(骨肉)에게 은혜를 온전히 하려고 한 계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가 양옥(梁獄)의 일을 인용하여 근거로 삼는 것은 겉으로는 전하를 부호(扶護)하는 체하였지만 실상은 전하를 망측한 지경으로 밀어넣으려 한 것이니, 그의 마음의 소재는 백망(白望)의 세 가지 이야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백망이 이른바 ‘먼저 와서 준청(準請)한 뒤에……’라고 한 것은 바로 역적 목호룡의 고변(告變)에 대한 일을 지적한 것인데, 그가 열거한 사람 가운데 조태구가 실제로 괴수(魁首)였으니, 이 몇가지 사항만으로도 넉넉히 조태구의 결안(結案)이 될 수가 있습니다.
위로는 진신(搢紳)에서부터 아래로는 여대(輿儓)955) 에 이르기까지 이 역적이 방안에서 편안히 죽은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조정의 입법(立法)이 인후(仁厚)하여 참시(斬屍)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돈(王敦)의 기참(跽斬)956) 을 이제 와서 실행 할 수는 없지만 간략한 전형(典刑)을 실시하여 신(神)과 사람의 분노를 풀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전의 연석(筵席)에서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그의 흉역(凶逆)스런 정상을 통촉하고 계셨습니다만, 필경의 처분(處分)은 다만 관작을 추탈(追奪)할 것만을 분부하시어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저지른 이 역적에게 해당된 형률(刑律)을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삼가 왕법(王法)이 이로부터 무너져서 난적(亂賊)이 징계되어 두려워함이 없을 것은 물론, 장차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따라서 결단코 관작을 추탈하는 데만 그쳐서는 안될 것이니, 역적의 괴수인 조태구를 급히 왕부(王府)957) 로 하여금 역적 민암(閔黯)의 전례에 따라 처자를 종으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는 형벌을 시행하게 하소서.
최석항(崔錫恒)은 본디 간사하고 교활한 성품으로 아첨하는 태도를 잘하였습니다. 그의 영리하고 번지르르한 말은 세상을 넉넉히 속일수가 있고 변화무쌍한 행동은 넉넉히 형적(形跡)을 숨길 수가 있습니다. 신축년958) 이후 임금의 총명을 속이고 흉적(凶賊)들을 끌어들여 기용함으로써 사류(士類)를 도륙하였고 명의(名義)를 무너뜨렸으니, 그의 범죄를 논하면 이루 다셀 수가 없습니다. 우선 가장 큰 것 만을 가지고 말하여 보겠습니다. 대리(代理)의 명령이 승정원(承政院)에 내리자마자 최석항은 이미 후사(喉司)959) 에 도착하였는데, 미처 계품(啓稟)하기도 전에 표신(標信)이 먼저 내려왔으니, 그가 환시(宦寺)들과 체결하여 안팎에서 화응(和應)한 형적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죄이고, 그가 입대(入對)함에 이르러서는 대리(代理)하는 것을 전선(傳禪)에 견주었으니, 한세량(韓世良)이 은밀히 천위(天位)를 옮기려 한다고 한 말과 역적 김일경이 노론(老論)의 사대신(四大臣)을 양기(梁冀)·염현(閻顯)·왕망(王莽)·조조(曹操)로 지목한 말은 실로 최석항의 이 한 마디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죄이며, 역적 목호룡의 변서(變書)가 나온 뒤에 전하께서 그의 무욕(誣辱)을 혹독하게 받아 저위(儲位)를 사양하고 나가려고까지 하였으니,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놀란 마음이 뼈에 사무쳐 역적 목호룡을 엄중히 형문(刑問)하여 그 무함을 통쾌히 변명(辯明)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말이 동궁(東宮)을 핍박한다는 것을 이유로 기록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니, 그의 말은 전하를 돌보는 것같이 했지만 그의 뜻은 실제로는 전하를 암담(黯黮)한 지경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죄이고, 역적 목호룡이 전하를 무함한 말이 사직(社稷)에 무슨 공로가 될 것이 있기에 기필코 녹훈(錄勳)하여 그 일을 확대시키려 하였으며, 군흉(群凶)들이 사류(士類)를 해치는 옥사(獄事)가 이웃 나라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기필코 옥초(獄招)에 없는 말을 만들어 넣어가면서 중국(中國)에 주문(奏聞)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최석항이 주장한 것으로 조금도 전하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돌보려는 뜻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 죄이며, 임인년960) 의 무옥(誣獄)은 전고에 없던 것으로 시종 옥사를 다스리면서 오래도록 전담해 온 사람으로는 최석항 같은 자가 없었습니다. 처음 옮겨서 국문(鞫問)하기를 청한 데에도 이미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옥사를 다그치면서 잔폭(殘暴)한 짓을 멋대로 행하여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 강제로 결안(結案)을 만들기도 하고 이미 매장(埋葬)된 사람에게 형륙(刑戮)을 가하기도 하는 등 족치기도 하고 늦추어 주기도 하여 일의 시작과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죄인들을 꾀이고 핍박하여 멋대로 허위의 사실을 날조하였으므로 살아서 잡혀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오게 되어 한 사람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위로는 선왕(先王)에게 누(累)를 끼쳤고, 중간으로는 전하를 화근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으며, 아래로는 일세(一世)에 해독을 미치게 하여 3백 년 동안 이어온 종사(宗社)가 거의 멸망할 뻔하였습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죄입니다.
더구나 백망(白望)이 상변(上變)할 때의 공초(供招)에서 이른바 세 가지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실제로 최석항에게 해당하는 것이니, 이 한가지 조항만으로도 넉넉히 최석항의 결안(結案)이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그가 편안히 방안에서 죽은 것은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러한 여러 역적들을 차례로 성토하는 때를 당하여 전형(典刑)을 명백히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난번의 처분이 관작을 추탈(追奪)하는 것에 그쳤기 때문에 뭇사람의 심정은 갈수록 더욱 억울해 하고 있고 난적(亂賊)은 징계되어 두려워할 길이 없으니,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속히 처자를 노예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는 형벌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미 근일에 있었던 합사(合辭)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유시하였다. 제2건과 제3건의 일에 이르러서는 내가 더욱 지나치다고 여기고 있으니,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4일 경진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근래 윤혼(尹焜)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군부(君父)를 경시(輕視)한다는 분부가 계셨는데, 이는 이미 실언(失言)인 것입니다. 그런데 윤혼은 엄중한 분부를 받으면서도 끝내 좌절하고 동요되지 않았으므로 그의 정직한 기개(氣槪)는 칭찬해야 할 만한데, 성상(聖上)께서는 의심하여 승부를 다투는 것으로 여기시니, 이런 등류의 하교(下敎)는 참으로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삼가 이로부터 강직한 선비가 조정에 서기를 원치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깊이 헤아려 생각하시어 언로(言路)를 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이번 동궁(東宮)께서 두환(痘患)이 나아 회복된 데 대한 경과(慶科)와 책봉(冊封)에 대한 경과(慶科)를 합쳐서 일과(一科)로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죄인 목천임(睦天任)은 진사(進士)라고 일컬으면서 어두운 밤에 박상검(朴尙儉)의 집에 출입한 일이 심정옥(沈廷玉)의 공초(供招)에서 나왔으나, 심정옥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고 다만 박상검의 말을 전했을 뿐이니, 그 정절(情節)이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가형(加刑)하면 반드시 심문하기 전에 죽게 될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형신(刑訊)을 정지하였다가 앞으로 있을 죄인들의 공초 내용을 살펴본 다음에 가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봉상(李鳳祥)을 지의금(知義禁)으로 삼고, 이교악(李喬岳)을 발탁하여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유봉휘(柳鳳輝) 등 오적(五賊)을 토죄(討罪)할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15일 신사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친히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며 전일의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6일 임오
삼사(三司)에서 합문(閤問)에 나아와 청대(請對)하였다가 도승지(都承旨) 홍석보(洪錫輔)가 〈사간원〉의 하리(下吏)를 불러 말하여 보낸 것 때문에 드디어 물러나 대청(臺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인피(引避)하여 아뢰기를,
"신 등이 연일 합문(閤門)을 지키면서 누차 쟁론(爭論)하였습니다만, 다만 정성이 얕은 탓으로 천청(天廳)을 돌이키지 못하였으므로 연석(筵席)에 들어가 기어이 준청(準請)하기 위하여 드디어 입대(入對)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승지(都承旨) 홍석보가 사간원의 하리를 불러서 대관(臺官)들에게 전하는 말을 일러서 보내기를, ‘합사(合辭)의 내용에 미진한 점이 많다. 또 한세량(韓世良)의 처자를 노예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지 않는다고 아울러 논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누차 번거롭게 왕복하면서 자못 긴박하게 비난하였는가 하면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인 가운데서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면서 마구 꾸짖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신 등의 관직을 갈아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辭職)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 등이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솔하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진계(陳啓)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아! 인신(人臣)은 역심(逆心)을 품어서는 안되는 것이므로 역심을 품으면 반드시 주참(誅斬)하는 것입니다. 유봉휘(柳鳳輝)는 상소하여 흉역을 부리면서 성궁(聖躬)을 핍박하였고 이광좌(李光佐)는 화심(禍心)을 품고 무옥(誣獄)을 주장하였으며 조태억(趙泰億)은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품고 흉패스런 일을 인용하여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언비어를 선동하여 사람들의 입을 막고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변(變)을 양성(釀成)하였으며 죄인을 마구 다그쳐 허위의 사실을 날조해서 억지로 무고(誣告)의 옥안(獄案)을 만들기까지 한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의 정절(情節)은 모두 더없이 참독(參毒)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왕법(王法)이 아직껏 지체되고 있으므로 군정(群情)이 갈수록 더욱 울분하고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삼사(三司)의 계청(啓請)을 윤허하여 천토(天討)를 엄중히 시행하시고 국법(國法)을 바로잡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전후의 연석(筵席)에서 이미 다 하교(下敎)하였다. 근일의 복합(伏閤)은 내가지나치다고 여기고 있다. 경(卿) 등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본받아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 조영복(趙榮福)을 불러 접견한 다음 유시(諭示)하여 보내었다. 조영복이 말하기를,
"도내(道內)의 문관(文官)가운데 오래도록 침체(沈滯)된 사람이 1백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신이 마땅히 각 고을의 전함관(前銜官)을 방문(訪問)하여 파산(罷散)된 기간의 구근(久近)을 이름 아래 기록하여 별단자(別單子)를 만들어서 계문(啓聞)하겠으니, 전조(銓曹)로 하여금 그들이 진 죄의 유무를 가려내어 궐원(闕員)이 나는 대로 조용(調用)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박사익(朴師益)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의 갑곶(甲串) 사이에 있는 옥포(玉浦) 망해(望海)의 두 돈대(墩臺) 앞에 있는 외성(外城)이 바닷물에 침식되어 곧 무너져 내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돌로 축조(築造)하려 하니, 선혜청(宣惠廳)에서 받아들인 양남(兩南) 산군(山郡)의 대동 마포(大同麻布)와 삼군문(三軍門)961) 의 돈 1만여 냥으로 무판(貿販)하여 남는 이윤으로 성역(城役)의 자금에 보태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진잠(鎭岑)·회인(懷仁)·음성(陰城)·문의(文義)·석성(石城) 등 다섯 고을을 그대로 두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충청 감사(忠淸監司)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이 다섯 고을에 군액(軍額)은 많고 백성은 적어서 온 경내(境內)가 거의 텅 비어 버린 폐단이 있으니, 고을을 개혁하소서."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감사(監司) 홍호인(洪好人)이 아뢰기를,
"이미 설치된 고을을 마땅히 갑자기 폐지할 수는 없으니, 그 고을의 군액(軍額)을 다른 고을로 이정(移定)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묘당(廟堂)에서 아뢰기를,
"각 고을의 양정(良丁)이 면제되기를 도모함에 따라 매양 수효가 부족한 걱정이 있어 왔습니다. 이제 이를 일체 수괄(搜括)한다면 반드시 소란이 일어날 것이니, 구호(舊號)는 그대로 두고 【교원생(校院生)·초관(哨官)·기패관(旗牌官)·영군관(營軍官)·관군관(官軍官), 곡식을 바치고 첩문(帖文)을 받은 사람, 한유(閒遊)한 중인(中人), 무음(無蔭)인 서얼(庶孽)이다.】 군액에 충당하지 않는 반면 1인당 1필(疋)씩 받아들여 2인이 봉납(捧納)한 것으로 군정(軍丁) 1명의 댓가에 충당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서 계문(啓聞)하게 하였다.
김진옥(金鎭玉)을 승지(承旨)로, 이교악(李喬岳)을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6월 17일 계미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 등이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솔하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역적 토죄할 것을 세번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찬선(贊善) 김간(金榦)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인(仁)이 발현되지 않고 마음 속에 있을 적에는 혼연(渾然)한 하나의 이치에서 잡됨이 없는 순수한 선(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물(事物)에 감응(感應)되어 밖으로 발현되는 데 이르러서는, 올바로 발출되면 측은하고 자애로운 마음이 되고 부정하게 발출되면 구차하고 고식적인 마음이 되는 것이니, 이는 곧 주염계(周濂溪)962) 의 이른바 선(善)과 악(惡)의 기미(幾微)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기점을 정밀히 살펴서 명백하게 분변하지 못한다면 미상불 구차스럽고 고식적인 것을 측은하고 자애로움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강경히 조처해야 될 데에 강경하게 조처하지 못하게 되어 일마다 쇠약해져서 그 폐해가 마침내 현사(賢邪)를 분변하지 못하고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어질고 사악함을 분변하지 못하면 현자(賢者)를 반드시 다 등용할 수 없고 사자(邪者)를 반드시 다 내칠 수 없게 되며, 상벌을 분명히 하지 못하면 억울한 자가 반드시 신원(伸冤)될 수 없고 죄진 자가 간혹 요행히 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대하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관학(館學)963) 의 유생(儒生) 조흥림(趙興林) 등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이광좌(李光佐)가 먹은 마음은 진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만, 또한 알기가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외(中外)로 하여금 선왕(先王)에게 병환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면 저위(儲位)를 건의하여 세운 대신(大臣)들을 장차 토죄(討罪)할 수 없게 될 것은 물론이고, 느닷없이 불쑥 들어간 흉계(凶計)를 또한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숙종(肅宗)의 유의(遺意)를 하찮게 여기고 양조(兩朝)의 구신(舊臣)을 도륙한 것은 모두가 저들에게 있어 용서할 수 없는 죄이며, 심지어 전하(殿下)를 무함하고 핍박하여 온갖 방법으로 공동(恐動)시킨 경우는 더욱 천지 귀신도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주야로 연구하여 선왕의 병환을 숨긴다는 한 가닥 탈출의 길을 찾아내고서는 스스로 이렇게 하면 충분히 한 세상의 눈을 속이고 뒷사람의 판단을 현란시킬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아! 지금의 논자(論者)들이 모두 역적 유봉휘(柳鳳輝)를 괴수로, 이광좌와 조태억(趙泰億)을 그 다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의 역적들 가운데 이광좌가 실제로 괴수가 되고 유봉휘는 선봉(先鋒)이고 조태억은 성원(聲援)했을 뿐이라고 여깁니다. 전하의 명성(名聖)으로써 어찌 이러한 정절(情節)을 간파(看破)할 수가 없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장보(章甫)964) 들의 말은 층격(層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지금 이 합계(合啓)에서 괴수인 자를 다음이라고 하고 다음인 자를 괴수라 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실로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6월 18일 갑신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 등이 여러 재신(宰臣)들은 인솔하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역적을 토죄할 것을 세 번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복합(伏閤)하던 삼사(三司)에서 승지(承旨)에게 지척받은 것으로 인하여 다시 대청(臺廳)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지금 이 역적을 토죄하자고 청한 것은 대의(大義)가 지극히 중대하니 의당 패초(牌招)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했다. 삼사(三司)에서 모두 패초(牌招)를 받들었는데, 유독 집의(執義) 이성룡(李聖龍)만이 병을 핑계하고서 패초를 어겼기 때문에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대의를 지킴에 있어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이유로써 마침내 패초를 어긴 것에 대해 상소하여 진달하였다. 이리하여 집의(執義) 이하의 관원은 모두 파직(罷職)되었다.
신무일(愼無逸)을 집의(執義)로, 채응복(蔡膺福)을 헌납(獻納)으로, 조명신(趙命臣)을 장령(掌令)으로, 이덕부(李德孚)·한덕후(韓德厚)를 지평(持平)으로, 최도문(崔道文)·최명상(崔命相)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6월 19일 을유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 등이 2품 이상의 관원(官員)을 인솔하고 청대(請對)하였는데,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 등이 온 나라 공공(公共)의 의논으로써 빈청(賓廳)에 모여 진계(陳啓)하였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 등의 말이 그르다면 마땅히 사람을 무함한 형률(刑律)로 처단하시고 신 등의 말이 옳다면 마땅히 즉시 윤허하셔야 합니다. 신이 먼저 유봉휘(柳鳳輝)의 일을 진달(陳達)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매양 ‘신(信)’ 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만, 설령 당초 그와 죽이지 않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대의(大義)에 관계된 것이면 또한 마땅히 작은 신의(信義)는 돌아볼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원래 ‘신(信)’ 이라는 글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겠습니까? 유봉휘가 상소했을 때에 전하(殿下)께서 모골(毛骨)이 모두 섬뜩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바로 저절로 흘러나온 말인 것입니다. 그 뒤 용서해 줄것을 청한 것은 남이 자신 때문에 죽는 것을 염려한 데서 나온 조처(措處)인데, 이는 안배(安排)965) 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작년에 정승에 임명하였으니, 이것은 덕(德)으로 원수를 갚은 것이므로 모두 천리(天理)의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처음 잘못되었던 일을 지키기 위해 신(信)이라고 한다면, 이는 허물을 고침에 있어 인색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비추어 보건대 신(信)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 호조 판서(戶曹判書) 신사철(申思喆), 우윤(右尹) 이교악(李喬岳)이 잇달아 민진원(閔鎭遠)이 한 말과 같은 내용을 진달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흉역(凶逆)들을 관대히 다스리기 때문에 조정의 의론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혹 당초에 출사(出仕)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혹 대의(大義)를 신장(伸張)하기 위해 억지로 출사한 사람도 있으며, 혹 여러 사람과 같이 나아왔다가 여러 사람과 같이 물러가면서 의지(意志)가 확고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혹 화복(禍福)의 기미를 돌아보면서 담당하고 나서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으니, 확고한 의지로 역적을 토죄하려 하다가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는 당초 출사하지 않았던 것보다 못하게 됩니다. 신 등이 윤허를 받지 못하고 물러간다면 만세의 공론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윤허받기 전에는 결단코 물러갈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봉휘의 일에 대해서 좌규(左揆)966) 가 그때 내가 올린 소장을 안배(安排)를 계교(計較)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때 처음 올린 소장은 황공하고 불안한 끝에 나온 것인데, 만일 이소장의 내용 때문에 그를 대벽(大辟)967) 에 몰아넣는다면 나의 본의(本意)와는 어긋난다. 그래서 소장을 올리고 나서는 곧바로 사람을 보내어 도로 찾아오게 하였으나 승정원(承政院)에서 이미 봉입(捧入)하여 버렸으므로 못하였다. 그뒤 빈청(賓廳)의 계사(啓辭)에서 내가 모골(毛骨)이 섬뜩했다고 한 말을 가지고 한 가지 죄를 첨가하려 하였으니, 내 마음이 어찌하였겠는가? 다시 뒤에 올린 소장에게 크게 어그러짐이 없을 것을 청하였는데, 좌규는 이를 안배(安排)에서 나온 조처라고 하였다. 대개 나의 의도는 공의(公議)를 조정에 맡기고 나는 내 일신의 일만을 하려 한 것이다. 종래 소인(小人)들의 한 짓은 모두가 의구(疑懼)스러워한 가운데서 나온 것으로, 나에게 영명(令名)이 있었더라면 저들이 어찌 의구심을 품었겠는가? 이는 나의 덕이 없는 소치이니, 스스로 반성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유봉휘가 근본(根本)이라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이광좌는 비록 뭇 소인들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바로 간흉(奸凶)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 지문(誌文)을 고친 일은 그가 청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의 죄로 인정할 수가 있겠는가? 조태억(趙泰億)이 정책 국로(政策國老)·문생 천자(門生天子)란 말을 한 것은 진실로 괴이하기는 하다. 그러나 한 때의 망령된 말을 가지고 죄를 준다면 이 뒤로는 모두 장차 망발(妄發)한 것으로써 죄를 삼게 될 것이다. 최석항(崔錫恒)에 이르러서는 내가 그의 죄를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미 추탈(追奪)을 시행했으니 다시 처자를 노예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는 형벌을 시행할 필요는 없다. 대신(大臣)들이 일찍이 한세량(韓世良)에게 처자를 노예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는 형벌을 추가(追加)하였을 적에 이를 불가한 일이라고 했었는데, 이제 이 합계(合計)에 참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매양 남곤(南袞)·심정(沈貞)의 관작을 추탈한 것을 증거로 제시하였었는데, 조태구(趙泰耉)·최석항의 죄는 선류(善類)들을 도륙한 것에 그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추탈만 하고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역적(逆賊)이 승복하여 처형된 뒤에 처자를 노예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는 것은 순차적으로 응당 시행해야 하는 형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뒤에 추가로 이 형률을 시행하는 것은 법외(法外)의 일에 관계되기 때문에 신(臣)이 이 때문에 얼른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기만 했던 것입니다. 일찍이 역적 윤휴(尹鑴)의 전례에 따라 그 아들들을 나누어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이것도 또한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빈청(賓廳)의 계사(啓辭)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조정의 대론(大論)으로 여러 사람의 의론이 준엄(峻嚴)한데, 신 한 사람의 소견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시끄러움을 야기시킨다는 것은 사체(事體)에 있어 불가한 것이기 때문에 과연 함께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윤허를 받는다면 처음에 먹었던 생각을 진달하려 했었습니다."
하고, 승지(承旨) 유복명(柳復明)은 말하기를,
"유봉휘의 상소에서 이른바 경황(驚惶)하여 의혹하였다느니 급박하여 초솔(草率)하였다느니 인심이 의심하고 있다느니 한 등등의 말은 모두가 전하를 위태롭게 하기 위한 부도(不道)한 말이었으니, 신하로서 여기에 관계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결코 용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반유(泮儒)들은 이광좌의 흉역(凶逆)이 유봉휘보다 더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하니, 이의현이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추천하여 등용한 사람은 실로 이광좌입니다. 김일경은 이미 복주(伏誅)되었는데, 이광좌가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민진원과 이관명이 누누이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한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 것인데, 승지(承旨)에게 지척(指斥)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물러가 버렸습니다. 승지가 이미 인구(引咎)했는데도 명을 받들지 않고 누차 소패(召牌)를 어김으로써 대론(大論)을 오래도록 정지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경책(警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이미 전례에 의거 파직시켰다. 양사(兩司)의 장관(長官)도 파직시키라."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이 홍석보(洪錫輔)도 아울러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물러나온 뒤에 계사(啓辭)를 진달하여 다시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한덕후(韓德厚)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서덕수(徐德修)를 체포할 때의 도사(道事)를 도배(島配)시키는 일은 정계(停啓)시켰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를 옥당(玉堂)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정지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을 발탁하여 판의금(判義禁)으로 삼고, 정형익(鄭亨益)을 대사헌(大使憲)으로, 신방(申昉)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교악(李喬岳)을 도승지(都承旨)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6월 20일 병술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면서 아뢰기를,
"오적(五賊)의 죄는 전후 연석(筵席)에서의 아룀과 계사(啓辭)에서 이미 모두 열거하였습니다. 지난번 군흉(群凶)들이 저위(儲位)를 세우는 것을 폐립(廢立)이라고 여기고 대리(代理)하는 것을 찬탈(簒奪)이라고 여기면서 이들이 수창(首倡)하여 우리 국가를 괴란(壞亂)시켰고 우리 전하를 핍박하여 위태롭게 하였으니, 이 한 가지 조항만 가지고서도 만번 죽여도 죄가 오히려 가벼울 것인데, 더구나 유봉휘(柳鳳輝)는 그의 상소에서 스스로 단안(斷案)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더욱 어떻게 조금이라도 용서할 수가 있기에 흉완(凶頑)한 목숨을 아직껏 집안에서 보존하고 있으니, 여러 사람의 심정의 억울하고 분통함이 다시 어떻하겠습니까? 신하로서 난적(亂賊)을 토죄(討罪)하는 것은 고금의 통의(通義)인 것이니, 전하께서 비록 법을 굽혀 은혜를 베풀려 하여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복합(伏閤)과 빈계(賓啓)968) 는 내가 지나치다고 여기고 있다. 더구나 직사(職事)를 폐지하고서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는 것이겠는가? 이미 결정된 뜻은 결단코 고치기 어렵다."
하였다. 두 번 아뢰고 세 번 또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빨리 정청(庭請)을 윤허할 것을 진계(陳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양사(兩司) 【집의(執義) 신무일(愼無逸), 지평(持平) 한덕후(韓德厚),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 정언(正言) 최도문(崔道文)·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복합(伏閤)하여 다시 유봉휘(柳鳳輝) 등 오적(五賊)에 대하여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신무일(愼無逸), 지평(持平) 한덕후(韓德厚)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군부(君父)를 무욕(誣辱)하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한 패악과 흉특(凶慝)이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같은 자는 없었습니다. 천참 만륙(千斬萬戮)하여도 그 죄를 징계할 수가 없는데도 다만 그 자신만 주참(誅斬)하였을 뿐 처자(妻子)를 처형하는 죄벌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방헌(邦憲)으로 헤아려 보건대 이보다 더한 실형(失刑)이 없습니다. 역적 김일경의 처자를 처형하는 형벌을 빨리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제학(大提學) 이병상(李秉常)을 파직(罷職)시켰다. 이병상은 누차 특명으로 불렀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금오(金吾)969) 에서 임금의 명이 내리기를 기다리기에 이르렀었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의 과오를 논핵하니, 임금이 특명으로 파직시켰다. 이병상은 젊어서부터 문망(文望)이 있었는데, 옥서(玉署)970) 의 청선(淸選)에도 스스로 단념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문형(文衡)971) 의 직임도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바야흐로 염치를 무릅쓰고 명환(名宦)을 구하는 판인데도 이병상은 홀로 물러나 피하였으므로 시론(時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조언신(趙彦臣)을 승지(承旨), 이의현(李宜顯)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이유민(李裕民)을 동의금(同義禁)으로, 황일하(黃一夏)를 우참찬(右參贊)으로, 이기진(李箕鎭)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6월 21일 정해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굳게 정하여졌으니, 결단코 윤허하기 어렵다."
하였다.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사(三司) 【집의(執義) 신무일(愼無逸), 장령(掌令) 조명신(趙命臣), 지평(持平) 한덕후(韓德厚),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 부교리(副校理) 이기진(李箕鎭), 정언(正言) 최도문(崔道文)·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복합(伏閤)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매양 나도 주견(主見)이 있다는 것으로 분부하시고 계시는데, 옛날 한 무제(漢武帝)도 처음에는 소평(昭平)972) 을 속죄(贖罪)할 것을 허락 하였었으나, 형률(刑律)을 범한 데 이르러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참형(斬刑)에 처하였습니다. 한 무제는 중간 정도의 군주이었는데도 구구한 작은 신의 때문에 법을 굽혀 흔들리게 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난 자질로써 이에 종사(宗社)의 죄인에 대해 필부(匹夫)의 신의를 지키려 하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미 정청(庭請)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진계(陳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신무일(愼無逸), 장령(掌令) 조명신(趙命臣), 지평(持平) 한덕후(韓德厚)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축년973) 춘방(春坊)974) 의 관원들을 도배(島配)시키는 일은 정계(停啓)시켰다.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 정언(正言) 최도문(崔道文)·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정해(金正海)를 잡아다가 사핵(査覈)하는 일은 정계(停啓)시켰다.
신방(申昉)을 승지(承旨)로, 김취로(金取魯)를 우윤(右尹)으로, 김흥경(金興慶)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안중필(安重弼)을 부사(副使)로, 최명상(崔命相)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홍석보(洪錫輔)를 대사성(大司成)으로, 황귀하(黃龜河)를 대사간(大司諫)으로, 홍현보(洪鉉輔)를 교리(校理)로, 서종섭(徐宗燮)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평안도(平安道)에 바람과 가뭄의 재해(災害)가 들었는데, 영원군(寧遠郡)에서는 갈충(蝎蟲)이 곡식을 갉아먹었다.
대제학(大提學)의 권점(圈點)이 있었는데, 모두 구망(舊望)이었다. 이의현(李宜顯)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를 다시 태복시(太僕寺)에 예속시키고 목관(牧官)을 설치하였다. 나도로의 목장(牧場)은 폐지된 지 오래 되었다가 기해년975) 에 특별히 제주도(濟州島)의 종마(種馬) 1백80여 필을 사들여 섬에 방목(放牧)하여 왔는데, 이때에 이르러 태복시의 계청(啓請)으로 인하여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6월 22일 무자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다행히 황천(皇天)과 조종(祖宗)들께서 묵묵한 가운데 도와주심을 힘입어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의 핍박하고 위협한 자들에 대해 전하께서는 그 일이 자신에게 관계된 것이라 하여 기필코 버려두고 신문하지 않으려 하십니다. 심지어 ‘내가 부덕한 소치로 이런 소장(疎章)이 있게 되었다.’고 하시는데, 이것이 비록 전하께서 스스로 겸손하시어 남을 탓하지 않으시려는 뜻에서 나왔지마는, 전하로 하여금 이런 분부가 있게 만든 것은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들을 역적으로 다스리려 하지 않는 것은 아마 종묘(宗廟)를 공손히 받드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윤허하지 않는 것은 또한 뜻이 있어서이다."
하였다. 다시 아뢰었는데, 조태억(趙泰億)의 일에 대하여 논핵한 것에 말하기를,
"아!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은 마음을 주벌하는 것보다 엄격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책 국로(政策國老)’ 니 문생 ‘천자(門生天子)’ 이니 한 말은 그 뜻을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바 두헌(竇憲)976) 이 계책을 정하였다고 한 것은 더욱 음흉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 우연히 나온 말이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미 유시(諭示)하였으니, 무엇을 말하겠는가?"
하였다. 세 번째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오적(五賊)의 죄는 유독 전하를 무함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바로 선왕(先王)을 무함한 것이고 자성(慈聖)을 무함한 것이며 성고(聖考)를 무함한 것입니다. 우리 성고의 성덕(盛德)은 영원토록 잊을 수가 없는 것인데, 저들이 감히 성고의 금석(金石)같은 유법(遺法)과 일성(日星)같은 처분(處分)을 일체 번복하여 고치고 멋대로 어겼으니, 이는 성고를 무함한 것입니다. 우리 자성께서는 직접 성고의 유교(遺敎)를 받들어 저위(儲位)를 세우는 대책(大策)을 도와 성취시켰는데, 흉역의 무리가 감히 멋대로 헐뜯고 갖가지로 위핍(危逼)을 가하였으니, 이는 자성(慈聖)을 무함한 것입니다. 선왕(先王)께서는 타고난 우애(友愛)가 더없이 지극하시었는데, 저들이 미령(未寧)하심을 이용하여 감히 기망(欺罔)하는 간계(奸計)를 부렸습니다. 역적 목호룡(睦虎龍)이 변서(變書)를 올린 경우는 감히 말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분을 핍박하여 천총(天聰)을 속인 것인데, 억지로 다그쳐 대옥(大獄)을 만들고는 흉적을 원훈(元勳)에 녹공(錄功)케 하여 우리 선왕과 함께 삽혈 동맹(歃血同盟)의 거조를 하게 만들었으니, 아!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선왕(先王)을 무함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일이 자신에게 관계되었다는 것으로 혐의하시어 용서하려 하시지만 삼성(三聖)977) 께서 무함받은 것을 유독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렇게 조목조목 따지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이제 윤허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또 이런 말을 듣게 되니 마음이 베어내는 듯하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삼사(三司) 【집의(執義) 신무일(愼無逸), 장령(掌令) 조명신(趙命臣), 지평(持平) 한덕후(韓德厚),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 부교리(副校理) 이기진(李箕鎭), 정언(正言) 최도문(崔道文)·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복합(伏閤)하면서 아뢰기를,
"지난번 흉당(凶黨)들의 화(禍)는 종사(宗社)가 추망(墜亡)되는 지경에 이를 뻔하였는데, 그 화단(禍端)을 수창(首倡)한 사람은 조태구(趙泰耉)과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이었습니다. 이제 국정(國政)을 개혁(改革)시킨 뒤에 그들이 일을 지시하여 부렸던 자들 가운데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의 무리에 대해서는 이미 주벌(誅伐)을 시행하였으나 유독 거괴(巨魁)에 대해서는 전혀 토죄(討罪)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전도(顚倒)되어 순서를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진계(陳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성복(趙聖復)의 추국(推鞫)을 청할 적에 따라서 참여한 사람들을 삭출(削黜)시키는 일과 제일 먼저 반론한 대관(臺官)을 삭거(削去)시키는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강현(姜鋧)의 일은 정계(停啓)시켰다.
필선(弼善) 조덕린(趙德隣)이 상소하여 성학(聖學)에 힘쓰고 춘궁(春宮)을 보도(輔導)하는 도리에 대해 논하니, 임금이 우대하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6월 23일 기축
삼사(三司)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 집의(執義) 신무일(愼無逸), 장령(掌令) 조명신(趙命臣), 지평(持平) 한덕후(韓德厚),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서종섭(徐宗燮), 별교리(別校理) 이기진(李箕鎭), 정언(正言) 최도문(崔道文)·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정형익(鄭亨益)이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를 나아가 읽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정청(庭請)과 복합(伏閤) 때의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신무일(愼無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매양 신의를 가지고 분부하십니다만, 일이 진실로 의리에 부합한다면 신의는 결코 절로 그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때 우연히 분부하신 것을 고집하여 신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정형익(鄭亨益)은 말하기를,
"옛날 당태종(唐太宗)이 대리경(大理卿)978) 대주(戴胄)에게 이르기를, ‘경(卿)이 법을 지키기 위해 짐(朕)으로 하여금 실신(失信)하게 하려는 것인가?’ 하니, 대주가 말하기를, ‘법이란 천하에 큰 신의를 반포하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큰 신의를 드러내어 밝히려 하신다면 당연히 조종(祖宗)의 삼척법(三尺法)을 지켜야 할 것인데, 어찌 한때의 작은 신의를 지키려 하십니까?"
하고, 한덕후(韓德厚)는 오적(五賊)의 죄악을 낱낱이 논하고 최석항(崔錫恒)의 일에 이르러 말하기를,
"임인년979) 5월 14일 국청(鞫廳)에서 인대(引對)하였을 때의 설화(說話)는 매우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4일의 설화가 어떠하였는가?"
하였다. 한덕후가 말하기를,
"그의 말에 곽현(霍顯)의 음모980) 를 어찌 외인(外人)이 알 수가 있겠습니까? 내간(內間)의 일은 진실로 안타깝습니다. 하였는데, 이제 이를 가져다가 조사하여 본다면 의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서종섭(徐宗燮)은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의 일에 대해 비록 지난해의 한 장 상소로써 신표(信標)를 삼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일국의 임금으로 임하고 계시기 때문에 잠저(潛邸) 때와는 다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봉휘를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가하지만 잠저로 있을 때와 지금이 다르다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 만일 그에게 왕법(王法)을 시행할 만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당시에는 다스릴 수가 없는데도 이제 와서는 다스려야 할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명신(趙命臣)은 말하기를,
"성교(聖敎)에서 비록 ‘지금이 잠저 때와 다름이 없다.’고 하셨지마는, 당태종(唐太宗)이 ‘옛날에는 일부(一府)의 주인이었지만 지금은 천하의 군주이다.’고 한 말로써 살펴본다면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태종이 이러니 저러니 했다고 한 말은 좋은 말이다."
하였다. 홍현보(洪鉉輔)·이기진(李箕鎭)·채응복(蔡膺福)·최도문(崔道文)이 번갈아 나아가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최도문은 말하기를,
"유봉휘가 상소한 뒤 사변(事變)이 잇달아 발생하여 국본(國本)이 하마터면 위태롭게 될 뻔하였으니 역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전하께서 이미 역적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신 등은 모두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몰아넣은 죄에 빠졌습니다. 무슨 면목으로 다시 전하를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최도문이 진달할 적에 성기(聲氣)가 강개(慷慨)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언(正言)의 언사가 격절(激切)하니, 칭찬할 만하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뢰었던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취상(尹就商)의 아들 윤지(尹志)를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는 일에 대하여는 임금이 그에게 형제(兄弟)가 있는지의 여부를 하문하였다. 이는 윤취상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를 매장하기를 기다려 처분(處分)하기 위한 것이었다. 홍현보(洪鉉輔)가 이미 매장했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였다. 이진검(李眞儉)의 일에 대해서는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는데, 윤서교(尹恕敎)를 잡아다가 국문하는 일에 대하여는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분부하기를,
"이미 도배(島配)를 명하였는데도 아직도 정계(停啓)하지 않고서 그들이 집에서 편안히 생활하게 하고 있으니, 그것이 옳은 줄을 알지 못하겠다."
하니, 최도문(崔道文)이 말하기를,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또한 사랑한다는 등의 말은 가리키는 뜻을 헤아릴 수 없으니, 한번 국문(鞫問)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신치운(申致雲)의 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최명상(崔命相)이 말하기를,
"나라를 원수로 삼을 수 있고 임금을 배반할 수 있다는 등의 말로 선정(先正)을 헤아릴 수 없는 죄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황욱(黃昱)·김범갑(金范甲)의 무리는 이미 모두 찬축(竄逐)하였는데 유독 신치윤만 죄를 주지 않는다면 선정(先正)이 받은 무함을 신설(伸雪)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최도문은 말하기를,
"신치운은 사기(辭氣)가 아첨을 잘하는 사람인데 전하께서 그의 사람된 품을 기뻐한 나머지 이 계청(啓請)을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신은 삼가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고, 이기진(李箕鎭)과 서종섭(徐宗燮)도 쟁론(爭論)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사상(李師尙)의 일에 대하여는 임금이 애책문(哀冊文)이하의 말을 다시 읽게 하고는 분부하기를,
"왕망(王莽) 동탁(蕫卓)이 어떠한 사람들인데 그들을 거론하여 양조(兩朝)를 무함한단 말인가? 이사상의 이 말은 매우 괴이하여 가리키는 뜻이 비록 교모하고 참혹하지마는, 이런 말을 계사(啓辭)에 올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의 일에 대해서도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정청(庭請)하여 세 번 아뢴 것과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뢴 것을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김취로(金取魯)를 지의금(知義禁)으로, 홍석보(洪錫輔)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6월 24일 경인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과 승정원(承政院)과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 등이 다시 유봉휘(柳鳳輝)의 죄역(罪逆)에 대해 말을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봉휘가 요역(妖逆) 박상검(朴尙儉)과 맥락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박상검·김일경·유봉휘가 성궁(聖躬)을 모의하여 위태롭게 한 것은 같습니다."
하고, 한덕후(韓德厚)는 말하기를,
"유봉휘가 상소한 뒤에 여러 역적들의 상소가 계속 나왔습니다. 조태구(趙泰耉)가 자성(慈聖)께서 애통해 하는 교지(敎旨)를 되돌려 보냈으니, 이것은 맥락이 서로 관계된 곳이 아닙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성(慈聖)의 교지 가운데 일부는 신자(臣子)로서 봉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이 나 자신에게 관련된 것이므로 내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때 자성의 교지를 되돌려 보내야 했겠는가, 아니면 봉행했어야 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자성이 교지가 이미 내렸으면 당연히 군하(群下)에게 이를 알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이기진(李箕鎭)은 말하기를,
"처음 유봉휘를 국문(鞫問)했다면 맥락이 마땅히 모두 드러났을 것인데도 유봉휘를 이미 국문하지 않았고, 또 박상검과 목호룡(睦虎龍)을 모두 바로 죽임으로써 핵실(覈實)할 길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여당(餘黨)들을 또 추문(推問)하려 하였으나 전하께서 또한 윤허하지 않으셨으므로 바로 정형(正刑)에 처할 것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올린 한 장의 상소가 넉넉히 단안(斷案)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고, 홍현보(洪鉉輔)는 말하기를,
"옛말에 그 형체를 알 수 없으면 그 그림자를 살피기 바란다고 한 말이 있습니다. 유봉휘의 상소도 전하를 모의하여 위태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요역(妖逆) 박상검의 일도 전하를 모의하여 위태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여기에서 그들의 맥락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림자를 살피기 바란다는 말은 좋은 말이다."
하였다 홍현보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매양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열람하시는데 옛부터 저위(儲位)를 건립한 후에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고, 민진원이 말하기를,
"조태구가 유봉휘를 신구(伸救)하기 위하여 올린 소장에서 우상(右相)981) 의 조부(祖父) 이경여(李慶輿)의 일을 인용하여 말하였는데, 이것은 명호(名號)가 정해지기 전에 한 말이니, 어떻게 끌어다가 비유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그때의 일기(日記)를 보았는데 다만 이경여 뿐만이 아니라 여러 신하들도 많이 말들을 했었다. 그리하여 다만 서울과 지방의 인심이 뒤흔들리고 있다는 말 때문에 귀양가는 죄를 받았다. 그러나 처분(處分)이 이미 내린 뒤에는 이경여도 말한 것이 없었다."
하였다. 이관명이 말하기를,
"그때에는 원손(元孫)과 대군(大君)이 있었기 때문에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신축년982) 에는 단지 전하뿐이었는데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봉휘는 상소(上疏)한 일로써 역적이라고 하였는데, 두 번째 사항 이하는 무슨 일을 가지고 역적이라고 하는 것인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저위(儲位)를 건립하여 대리(代理)시키는 일로써 폐립(廢立)이요 찬탈(簒奪)이라고 하면서 죄인을 다그쳐 무옥(誣獄)을 만들어 전하를 핍박하였습니다. 군흉(群凶)들이 모두 그렇게 했지만 모두 주참(誅斬)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조태구·최석항(崔錫恒)·이광좌(李光佐)이 세 사람을 괴수(魁首)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광좌는 수상(首相)이 되어 임인년983) 의 옥사(獄事)를 주장(主張)하면서 김일경(金一鏡)을 발탁하여 등용시켰으니, 이것이 역적이 아닙니까? 그러나 유봉휘에게 견주어보면 한 등급이 낮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봉휘가 김일경·박상검과 비록 맥락이 서로 연결되었다고 하지만 요역(妖逆) 박상검의 일을 그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대개 요역 박상검의 일은 환국(換局)에 그칠 정도가 아니었다. 박상검이 수개월 동안만 더 목숨이 연장되었다면 반드시 다른 거조(擧措)가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요역 박상검에게 속임을 당했을 뿐이니 모두 역적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외간(外間)에서 말하기를, ‘유봉휘는 동조(東朝)984) 의 가까운 친척(親戚)이기 때문에 전하께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미루면서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漢)나라 때에는 박소(薄昭)도 오히려 사사(賜死)되었는데985) , 전하께서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얼굴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정성이 얕은 탓으로 의심이 동조(東朝)께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습니다. 이미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진달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이런 말을 듣고 의심하면서도 진달하지 않는다면, 이는 잘못인 것이다. 다만 이런 말을 만든 것은 매우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 장령(掌令) 조명신(趙命臣), 지평(持平) 한덕후(韓德厚)이다.】 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사간(大司諫) 황귀하(黃龜河)는 대론(大論)이 바야흐로 일어나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는 때를 당하여 여러 번 소명(召命)을 어겼으므로 그 형적이 오만한데에 관계되니 파직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엊그제 승지(承旨)가 여러 대관(臺官)들을 꾸짖었으니, 여러 대관들이 인혐(引嫌)하는 것은 그 형세가 진실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상소를 진달하여 비답(批答)을 받은 뒤에는 다음날 패소(牌召)를 받들기로 약속하였었는데, 전 집의(執義) 이성룡(李聖龍)이 갑자기 이의(異議)를 제기하여 여러 대관들이 대궐로 나아갔다가 다시 물러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날의 낭패된 일은 오로지 이성룡 때문이었으니,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날 한림(翰林) 신노(申魯)가 역사에 있었던 일을 인용하여 조태구(趙泰耉)의 죄를 논하면서 그를 강충(江充)986) 에 견주고 대계(臺啓)를 윤허할 것을 청하였는데, 승지(承旨) 조언신(趙彦臣)이 신노가 직분에 벗어나 일을 아뢰었다는 이유로써 추문(推問)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일(史佚)도 동옆(桐葉)을 오려서 준 희롱에 대해 간하였는데987) , 사관(史官)이 역사의 일을 인용하여 진언(進言)하는 것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추문하지 말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민진원이 유봉휘를 동조(東朝)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덕린(李德隣)의 아내는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언니이니, 유봉휘는 이덕린에게 이성(異姓)의 종숙(從叔)이 된다. 외간(外間)에서 비록 망령되어 억측하여 이러니저러니하는 이야기가 있을지라도 이것이 어찌 위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할수 있는 것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30면
【분류】역사(歷史) / 사법(司法) / 변란(變亂)
[註 986] 강충(江充) :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사람. 강충이 무제의 장자(長子)인 여태자(戾太子:유거(劉據))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무제가 병들자 결국 여태자는 장락궁(長樂宮)의 위졸을 동원하여 강충을 죽이고 이어 자살했는데, 뒤에 무제가 여태자의 억울함을 깨닫고 강충의 삼족(三族)을 멸(滅)하였음.[註 987] 사일(史佚)도 동옆(桐葉)을 오려서 준 희롱에 대해 간하였는데 : 사일(史佚)은 주(周)나라 사관(史官) 윤씨(尹氏)임. 성왕(成王)이 동엽(桐葉)을 오려서 규(圭)를 만들어 그 아우인 숙우(叔虞)에게 주면서 이것으로써 너를 봉(封)하겠다고 하니 사일(史佚)이 택일(擇日)하여 봉하기를 청하므로 성왕(成王)이 "내가 희롱한 말이라"고 하니, 사일은 "천자는 희롱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한 고사(故事)가 있음.
사신은 말한다. "민진원이 유봉휘를 동조(東朝)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덕린(李德隣)의 아내는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언니이니, 유봉휘는 이덕린에게 이성(異姓)의 종숙(從叔)이 된다. 외간(外間)에서 비록 망령되어 억측하여 이러니저러니하는 이야기가 있을지라도 이것이 어찌 위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할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병상(李秉常)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기익(李箕翊)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김용경(金龍慶)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6월 25일 신묘
정청(庭請)하여 세 번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김취로(金取魯)를 도승지(都承旨)로, 이병태(李秉泰)를 문학(文學)으로, 이교악(李喬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의천(李倚天)을 사간(司諫)으로, 최도문(崔道文)을 장령(掌令)으로, 이덕부(李德孚)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지사(知事) 심수현(沈壽賢)이 현도(縣道)를 거쳐 상소(上疏)했는데, 제일 먼저 정유(鄭楺)의 상소에서 논한 임금의 병환을 숨겼다고 한 한 가지 조항을 지척(指斥)하면서 가슴이 떨리고 뼈에 사무친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찬축(竄逐)이 길에 서로 잇달게 되어 기상(氣像)이 저상(沮喪)된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평일 임용(任用)한 3대신(大臣)까지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지게 되었고 처자(妻子)까지 처형하자는 계청(啓請)이 이미 죽은 두 신하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성대한 덕화와 지극히 인자한 정사가 실시되는 세상에 어찌 차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이광좌(李光佐)의 평일 언행(言行)은 옛사람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고 그의 일편 단심(一片丹心)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습니다."
하고, 끝으로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기필코 남을 죄에 얽어 넣으려는 자들이 문득 감히 말할수 없는 처지에 계신 분의 권위를 빙자하여 시기를 타서 독심(毒心)을 부리려는 계책을 꾸몄으니, 진실로 성상(聖上)께서 조금이라도 억제하지 않는다면 신은 사람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심수현이 멋대로 소장을 올려 흉적(凶賊)들을 신구(伸救)하고 조정 신하들의 죄를 날조하여 감히 천토(天討)가 방금 일어난 때에 힘을 다해 다투었으니 매우 놀랍고도 밉살스럽다는 내용이 계품(啓稟)을 봉입(捧入)하자, 비답(批答)하기를,
"전(前) 영부사(領府事)의 일은 그 말이 지나치지 않다. 한쪽에서는 정청(庭請)을 하고 한쪽에서는 영호(營護)하고 있는데 중신(重臣)도 이러하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권위를 빙자하여 독심을 부리려 한다는 말은 목적한 뜻이 위험(危險)하므로 진실로 이상하다. 찬축(竄逐)이 서로 잇따랐다고 한 의견은 경(卿)의 말이 옳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난번에 말하지 않고 유독 오늘날에 와서 말하는가?"
하였다.
양사(兩司) 【대사간(大司諫) 정형익(鄭亨益), 집의(執義) 신무일(愼無逸), 장령(掌令) 조명신(趙命臣),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 정언(正言) 최도문(崔道文)·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아뢴 말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모두 인피(引避)하였고, 옥당(玉堂)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서종섭(徐宗燮), 부교리(副校理) 이기진(李箕鎭)이다.】 에서도 상소를 진달하고 곧바로 나갔다. 비답(批答)하기를,
"정청(庭請)하고 복합(伏閤)하는 것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윤허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이렇게 인혐(引嫌)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그대들은 사퇴(辭退)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일에 계청(啓請)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진검(李眞儉)을 강진현(康津縣)으로, 윤지(尹志)를 대정현(大靜縣)으로 절도 안치(絶島安置)시켰다.
지평(持平) 한덕후(韓德厚)가 상소하고서 잇따라 대론(大論)에 참여하였으나 임금을 깨우치지 못하였으니 떠나야 할 의리가 있다고 논하고, 또 말하기를,
"오흉(五凶)이 모의하여 전하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된 것은 똑같은데, 유독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에게만 분수(分數)를 조금 줄여서 의율(擬律)988) 이 너무 가볍습니다. 한세량(韓世良)이 올린 소장의 내용이 흉참(胸慘)스러운 것은 실로 역적 유봉휘(柳鳳輝)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 육적(六賊)이 범한 악역(惡逆)은 의당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같은 법으로 다스려야 하는데도 삼사(三司)의 합계(合啓)에는 생략하고서 거론(擧論)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마음속으로 그것이 공의(公議)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신달(伸達)하지 못하였으니, 직책을 저버린 것이 큽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의 이 징토(懲討)는 실로 여러 사람의 말이 한결같은 공론인데, 몇몇 재신(宰臣)들은 말미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가서 머뭇거리며 사태를 관망(觀望)하고 있어 규피(規避)하는 의도가 현저히 드러났으니, 사대부(士大夫)의 풍절(風節)이 결단코 이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좌참찬(左參贊) 조도빈(趙道彬)은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가 화(禍)를 당할 적에 흉도들의 참혹한 계청이 한창 치성하여 후명(後命)989) 이 곧 내리게 되어 있었는데도 자기의 아들을 태연히 과거(科擧)에 응시하게 하였습니다. 아! 당시 사류(士類)들 가운데 진실로 강개(慷慨)한 뜻을 품은 사람들은 모두 의리를 내세워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과장(科場)을 좋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더구나 친조카의 마음으로 어찌 차마 그런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당 책벌(責罰)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덕(輔德) 조영세(趙榮世)는 그전 숙종조(肅宗朝) 때에 누차 제수(除授)하는 명령을 어기면서 스스로 폐기된 사람처럼 하였다가, 흉당(凶黨)들이 뜻을 이루게 되어 군수(郡守)를 제수하여서는 용감하게 달려가지 않은 적이 없었고 두루 흉적들을 찾아다니면서 의기 양양하였습니다. 지난 겨울에 올린 한 장의 상소는 스스로 속죄(贖罪)하려는 계책을 보인 것에 불과하므로 정대(正大)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악한 일을 징계하고 착한 일을 면려시키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몇몇 재신(宰臣)은 김흥경(金興慶)·심택현(沈宅賢)·이유민(李裕民)을 지적한 것이라 한다.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심각(深刻)하다고 책망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김용경(金龍慶)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심수현(沈壽賢)의 상소는 그 간사한 실정과 사특한 작태를 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군부(君父)가 무함받은 것은 변모(弁髦)990) 처럼 가볍게 보면서 적도(賊徒)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는 데 있어서는 사력(死力)을 다하여 공의(公議)와 힘껏 다투고 상시 지계(嘗試之計)991) 로 농간을 부리고 있으니, 심수현을 절도(絶島)에 안치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6일 임진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확고하게 결정되었으므로 비록 하루에 열 번씩 계사(啓辭)를 올린다고 해도 결단코 윤허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억지로 청하지 말기 바란다."
하였다. 세 번이나 아뢰었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학 유생(四學儒生) 윤만동(尹萬東) 등이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 등 오적(五賊)의 죄를 성토할 것을 청하고 또 심수현(沈壽賢)이 역적을 비호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근일 정청(庭請)한 일에 대해서는 이미 전후의 비지(批旨)에서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조성복(趙聖復)의 국문(鞫問)을 청한 계사(啓辭)를 제일 먼저 발론한 여러 신하들을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하도록 현고(現告)한 데 대한 전지(傳旨)에 최초에 발계(發啓)한 사람만 전지(傳旨)를 받들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계(臺啓)에서 이미 여러 차례 환배(還配)992) 시키라는 명령이 내린 뒤에 또다시 나국(拿鞫)할 것을 극력 청한 자들을 죄줄 것을 청하였는데, 주상께서 윤허는 하셨습니다만, 다만 최초에 발계한 사람만 거론하여 봉입(捧入)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계의 본의(本意)에 어긋나는 조처입니다. 그리고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여러번 환배(還配)시킬 것을 명하였는데도 그 당시의 대간(臺諫)들이 기필코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으니, 그 죄를 논한다면 전후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억지로 구별하려 하는 것은 실로 반박(斑駁)이 되는 것이니, 대계에 의거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일의 하교(下敎)에 따라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6월 27일 계사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과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 등 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면서 아뢰기를,
"아! 지난날의 화변(禍變)을 말하려 하니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흉도(凶徒)들에게 핍박당하여 저위(儲位)에 편안히 있을 수 없던 때를 당하여 전하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모두 몇 사람이며 종사(宗社)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또한 몇 사람이었습니까? 3년 동안 옥사를 다그쳐 온갖 계책으로 위핍(危逼)을 가하였으니, 전하께서 시험 삼아 눈물을 흘리면서 저위를 사퇴하던 성심(聖心)으로 눈물을 삼키며 토죄(討罪)할 것을 청하는 군정(群情)을 헤아리신다면 토죄하지 않고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신축년993) 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에 ‘이제 상소의 내용을 살펴보건대 성실하여 다른 뜻이 없으니 바로 나의 뜻과 합치된다.’고 분부하시면서 살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가상하게 여겼고 유의(留意)하겠다는 것으로 허락하였었다. 따라서 어찌 그때에만 감격의 눈물이 흘렀겠는가? 지금와서 생각해 보아도 오히려 창연(愴然)한 마음이다. 대행조(大行朝)에서 이미 살려주도록 하라는 뜻으로 진달했었는데, 이제와서 이를 번복하여 고친다면 뒷날 지하(地下)에 가서 배알할 적에 무슨 말로 주달할 수 있겠는가? 전(前) 영부사(領府事)의 일에 이르러서는 국인(國人)들이 모두 역적이라고 하고 있지만 나는 결단코 역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이날 승지(承旨) 홍용조(洪龍祚)가 아뢰기를,
"정청(庭請)에 대한 비답에서 뒷날 지하(地下)에 가서 배알한다느니 국인이 모두 역적이라 한다느니 하는 등등의 분부가 있었는데, 이것은 후세에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으니, 고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청(庭請)하여 다시 아뢰었는데, 대략에 말하기를,
"아! 전하께서는 선대왕(先大王)께서 살리기 좋아하신 덕을 추모하여 흉적(凶賊)들을 죽이지 않고 용서하시려 합니다. 백곤(伯鯀)994) 이 명령을 어기고 상인 해물(傷人害物)할 적에 요제(堯帝)는 형벌을 시행하지 않았지만 순제(舜帝)는 빨리 그 죄를 처형하였습니다. 역적 김자점(金自點)은 인조(仁祖)께서 총애하여 우대한 대신(大臣)이었는데도 효종(孝宗)께서 법에 의거 그 죄를 처형하였습니다. 더구나 유봉휘(柳鳳輝)의 국문을 청한 데 대해서는 선왕(先王)께서 당초에 이미 윤허하였으니, 이는 선왕께서도 이미 그의 반역에 대한 정상을 환하게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였다. 또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행조(大行朝)의 비지(批旨)를 인용하여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보이셨는데 신 등도 또한 이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타고나신 우애(友愛)하는 마음에서 전하의 마음을 불안하게 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전하께서 올린 소장의 내용에 따라 엄격하게도 하고 너그럽게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모골(毛骨)이 모두 섬뜩하다는 말이 있자 유봉휘를 역적으로 다스리고 국문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전하께서 대려(大戾)995) 를 주는 지경에 이르지 말게 하라는 청이 있게 되자 유봉휘의 죄를 용서하여 변방으로 내치는 형벌을 시행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때 우연히 내린 분부로써 바꿀 수 없는 훈계를 준행(遵行)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다시 무슨 유시(諭示)를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서종섭(徐宗燮), 부교리(副校理) 이기진(李箕鎭) 등이 청대(請對)하여 다시 토복(討復)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충청도(忠淸道)에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이 있었다.
6월 28일 갑오
태학 유생(太學儒生) 등이 심수현(沈壽賢)이 반궁(泮宮)의 상소에 대해 비난을 가한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인혐(引嫌)하고 권당(捲堂)하였다. 그리고 소회(所懷)를 적어서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심수현의 상소가 불쑥 올라갔는데도 성상(聖上)의 처분(處分)이 또한 엄절(嚴截)하지 못하여 국적(國賊)을 토죄할 수 없고 성무(聖誣)를 신설(伸雪)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신 등의 상소는 실로 근원을 밝히자는 데서 나온 의논인데, 그가 감히 갑자기 소장을 올려 이광좌(李光佐)를 비호하고 태학을 침척(侵斥)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도리어 그의 말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비답(批答)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심수현의 말은 받아들이고 신 등의 말은 내치시는 것입니다. 신 등이 어찌 감히 태연하게 식당(食堂)에 출입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분부하기를,
"만약 변론해야 될 일이 있으면 상소로 진달하면 되는 것인데, 어찌 권당을 하고서 반당(泮堂)을 나갈 수가 있는가? 권유(勸諭)하여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면서 세 번이나 아뢰었지만, 따르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29일 을미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 있었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면서 세 번이나 아뢰었지만,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부평(富平)의 민가(民家)에서 암탉이 변하여 수탉이 되었다.
6월 30일 병신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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