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병신
이제(李濟)를 갑산부(甲山府)에, 박필몽(朴弼夢)을 경흥부(慶興府)에 귀양보내니, 조성복(趙聖復)을 국문(鞫問)하자고 청하여 아뢸 때에 앞장서서 발언(發言)한 자이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과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996) 하며 유봉휘(柳鳳輝) 등 5적(五賊)의 죄를 토죄(討罪)하여 세 번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도승지(都承旨) 김취로(金取魯), 좌승지(左承旨) 박치원(朴致遠), 우승지(右承旨) 신방(申昉), 좌부승지(左副承旨) 조언신(趙彦臣),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용조(洪龍祚), 동부승지(同副承旨) 유복명(柳復明)이다.】 5적(五賊)을 토죄(討罪)할 것을 진술(陳述)하여 청해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 대사간(大司諫) 이교악(李喬岳), 사간(司諫) 이의천(李倚天), 지평(持平) 김용경(金龍慶),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서종섭(徐宗燮), 부교리(副校理) 이기진(李箕鎭), 정언(正言) 최명상(崔命相)이다.】 복합(伏閤)997) 하여 5적을 토죄하기를 아뢰었으나, 또한 따르지 않았다.
사학 유생(四學儒生) 이동복(李東馥) 등이 상소하여 5흉(五凶)과 제적(諸賊)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비록 그들의 폐일(吠日)998) ·석천(射天)999) 의 계획이 마침내 시행되지는 못했으나 흉악하고 패리(悖理)한 말들이 널리 퍼졌으니, 지난번에 이른바 온 나라 절반의 무리가 이제야 모두 김일경(金一鏡)의 내통자요 유봉휘(柳鳳輝)의 심복(心腹)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지난해 김일경과 목호룡(睦虎龍)이 복주(伏誅)된 뒤에도 그 무리들이 오히려 팔을 걷어 올리고 큰소리 치며, 혹은 김일경을 추대(推戴)하여 제일인(第一人)으로 삼는다고 여항(閭巷)에 전파하였으니, 실로 신자(臣子)로서 차마 듣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요즘 또 보건대 전하(殿下)께서 흉적(凶賊)의 무리에게 참고서 주벌(誅伐)하지 않으신다면 저들은 반드시 그들의 고집하는 바가 바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비록 군주(君主)의 위엄을 믿고 있으면서도 또한 능히 죽이지 못한다고 할 것이니, 진실로 이와 같이 되면 전하께서 그 당시 본래 왕위(王位)를 구하지 않았다는 마음을 스스로 온 나라에 나타낼 수가 없을 것이니, 저들 마음에 불만을 품은 자가 설령 이를 구실로 삼아 틈을 엿보고 선동한다면 전하께서 또한 장차 어떻게 계획을 세우시겠습니까? 심지어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이명의(李明誼)와 같은 3적(三賊)은 본래 흉악하고 교활한 것이 김일경보다 지나침이 있으므로 이름은 비록 소하(疏下)1000) 에 있으나 사실은 주모(主謀)를 하였으니, 이런데도 주벌하지 않는다면 저 역적 김일경이 어찌 원통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사상(李師尙)이 감히 왕망(王莽)1001) ·동탁(董卓)1002) 을 끌어대고 이명언(李明彦)이 옹립(擁立)하도록 지시하며 권익관(權益寬)이 나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말과 한세량(韓世良)이 몰래 옮겨야 한다는 말은 또한 5흉(五凶)과 다를 것이 없으니, 오늘의 신하가 된 자가 역신을 토죄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으나, 어찌 그 사이에 구별을 두어야겠습니까? 요사이 합문(閤門)은 논하지 않았으니,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재결(裁決)하는 도리에 있어서 아마도 이와 같이 해서는 부당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요즘 일은 이미 정청(庭請)할 때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서종섭(徐宗燮), 부교리(副校理) 이기진(李箕鎭)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 훌륭한 숙종(肅宗)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행(善行)은 어느것이든 후왕(後王)이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닌 것이 없어서, 경신년1003) 에 화란을 감정(勘定)한 것과 신사년1004) 에 역신(逆臣)을 토죄(討罪)한 것과 병신년1005) 의 부정 척사(扶正斥邪)한 것과 같은 경우는 그 처분(處分)의 엄정(嚴正)함과 의리(義理)의 광명(光明)함은 더욱 위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역란(逆亂)하는 종자(種子)가 이에 감히 우리 숙종을 원수처럼 보고 우리 경종(景宗)의 효도하는 생각도 체념(體念)하지 않고서, 선조(先朝)에 관계되는 일이면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 없이 낱낱이 변역(變易)시키고 마디마디 배치(背馳)하여, 무릇 성고(聖考)1006) 께서 높여서 예우(禮遇)하는 것이면 반드시 치욕(恥辱)을 가하고 성고께서 물리쳐 단절하는 것이면 반드시 부추켜 권장하였습니다. 살육(殺戮)된 자는 모두 성고께서 선발하여 남기신 바이고 포숭(褒崇)된 자는 모두 성고께서 토죄(討罪)한 바이니, 이는 진실로 전하(殿下)께서 마땅히 깊이 미워하고 몹시 싫어하셔야 할 것인데, 다만 하찮은 신의(信義)와 조그만 인덕(仁德)에 구애되어 마침내 명의(名義)로 하여금 점차 무너지게 한다면 능히 계술(繼述)1007) 하는 도리에 유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령(掌令) 최도문(崔道文)이 상소(上疏)하여 토복(討復)의 의리를 아뢰고, 또 심수현(沈壽賢)의 소어(疏語)를 헤아릴 수가 없다고 논하며 섬[島]에 안치(安置)하자고 아뢴 것을 윤허(允許)할 것을 청하였다. 또 상주 목사(尙州牧使) 권부(權孚)가 첨정(簽丁)1008) 하고 돈을 징수(徵收)하여 탐도(貪饕)하는 형상과,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징휴(李徵休)가 흉당(凶黨)에게 아첨하여 아부하고 자부(子婦)를 박축(迫逐)한 죄와, 선공감역(繕工監役) 심여경(沈餘慶)은 박세당(朴世堂)의 문도(門徒)라 일컬으면서 졸곡(卒哭) 후에 상식(上食)하는 일을 철폐(撤廢)한 일들을 논핵하며 모두 사판(仕版)1009) 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였다. 또 판윤(判尹) 권성(權𢜫)의 재주와 식견은 사무에 통달 숙련하였고, 수찬(修撰) 김진상(金鎭商)의 경학(經學)은 정밀하고 투철함을 논하면서 조신(朝臣)의 수위(首位)에 초치(招致)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단지 권부(權孚)의 일만 윤허하고 나머지는 모두 따르지 않았다.
7월 2일 정유
정청(庭請)하며 세 번 아뢰고,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세 번 아뢰고,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王世子)가 바야흐로 유충(幼冲)한 나이에 있으므로 경소전(敬昭殿)1010) 의 3년 내의 제향(祭享)에 진참(進參)의 예절을 마련(磨鍊)하지 않았습니다. 책봉(冊封)하던 날에 이미 포포(布袍)로 경소전 전알(殿謁)의 예를 행하였으니, 연제(練祭) 때엔 또한 마땅히 변복(變服)의 절차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 제적(諸賊)을 한결같이 모두 천극(栫棘)1011) 할 것을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고 《강목(綱目)》을 강(講)하게 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홍현보(洪鉉輔)가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호씨(胡氏)1012) 가 당시에 제신(諸臣)들이 능히 무후(武后)1013) 의 죄를 밝혀 바로잡지 못한 것을 오히려 그르게 여겼는데, 하물며 신하로서 난역(亂逆)의 죄가 있는데도 만약 주토(誅討)의 법에서 도망치게 한다면, 어찌 다만 무후(武后)를 토죄(討罪)하지 못한 사람에게 비교하겠습니까?"
하고, 이내 승지(承旨) 박치원(朴致遠)과 더불어 토복(討復)의 의리를 힘써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묻기를,
"역적 김일경의 소하(疏下) 6명은 이미 천극(栫棘)하였는가?"
하니, 박치원이 말하기를,
"비록 천극의 명이 있었으나 대간(臺諫)이 바야흐로 정형(正刑)을 논계(論啓)하기 때문에 전지(傳旨)를 받들지 못하였고, 이명의(李明誼)는 다른 죄로써 벌써 이미 천극하였기 때문에 박필몽(朴弼夢)을 극변(極邊)에 이배(移配)하는 것도 또한 다른 죄로 전지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은 이미 정법(正法)되었는데, 그 소하(疏下)의 6적(六賊)이 어찌 지금까지 누워서 편안히 쉬고 있겠는가? 비록 천극(栫棘)된 뒤라도 또한 일률(一律)1014) 로 청할 수 있으나, 또 그가 범한 바가 다른 사람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다른 죄로써 이배(移配)시킬 수 없으니, 천극으로써 전지(傳旨)를 받들라."
하였다.
7월 3일 무술
금오(金吾)1015) 에 명하여 죄인(罪人) 이사상(李師尙)을 사사(賜死)하였다. 이날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 승정원(承政院)과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군흉(群凶)의 죄를 당론(黨論)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질실로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지난번 기사년1016) 에 민종도(閔宗道) 등이 장희재(張希載)와 체결(締結)한 것은 지난 날 사람들이 박상검(朴尙儉)과 몰래 내통한 것과 같습니다. 갑술년1017) 경화(更化)된 뒤로 조정의 의논이 장희재를 국문(鞫問)하여 그 몰래 내통한 정절(情節)을 조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은 동궁(東宮)에게 해로움이 있다고 생각하여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는데, 청의(請議)1018) 는 남구만을 공박하여 배척하였고 남구만을 편드는 자는 도리어 청의(請議)를 나무라면서 동궁에게 불충(不忠)하다고 하며 점점 서로 격화되었으니, 임부(林溥)가 몰래 나오게 된 것이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신축년1019) 에 세자를 세운 뒤로 저 무리들은 대신(大臣)을 전하의 신하라고 지목하면서 선왕의 신하가 아니라고 인정하고는 마침내 이로써 없는 죄를 씌워 만든 것은 무슨 일입니까? 유봉휘(柳鳳輝)의 상소에서 반역(反逆)의 마음이 모두 드러났으니, 어찌 털끝만치라도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전말(顚末)을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신사철(申思喆)·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병상(李秉常)이하 여러 신하들이 서로 잇따라 진달(陳達)하여 청하고, 대사성(大司成) 홍석보(洪錫輔)가 말하기를,
"숙종(肅宗) 때의 오시수(吳始壽)가 죄에 저촉(抵觸)되었을 때에 처음에 자성(慈聖)의 하교(下敎)로서 특별히 감사(減死)를 명하였으나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기에 미쳐 다시 처단(處斷)을 내리고 또 암적(黯賊)1020) 도 또한 노적 죄인(孥籍罪人)1021) 이 되었는데, 지금 역적 유봉휘(柳鳳輝)는 오시수(吳始壽)보다 지나침이 있고 역적 조태구(趙泰耉)는 암적(黯賊)보다 심함이 있으니, 영고(寧考)1022) 께서 이미 행하신 형벌을 전하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유봉휘는 다만 당론(黨論)에 가리어진 고질로 인연하여 의리(義理)가 어두워지고 막혀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조태구의 ‘혐(嫌)’ 자 하나는 내가 비록 덕이 부족하더라도 어찌 혐의를 무릅쓰고 나가 볼 것이며, 조태구가 곧 이런 괴이한 차자(箚子)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사저(私邸)에 있을 때와 세자(世子)로 정하여진 뒤와는 다름이 있으니, 이로써 적암(賊黯)의 규례를 쓸 수는 없다. 승지(承旨)가 비록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병환(病患)을 외간(外間)에서 어찌 모르는 자가 있겠느냐?’고 하였지마는, 지난 날 사람들이 청정(聽政)의 거조(擧措)가 종사(宗社)를 위하여 어쩔수 없는 계획에서 나온 것은 알지 못하고 다만 ‘의(疑)’ 자 하나만 두게 된 것이다. 신축년1023) ·임인년1024) 이후에는 환하게 밝혀진 것이지마는 이미 출발하여 달아나는 것과 같음이 있었으니, 만약 중지시키려고 한다면 남을 악역(惡逆)의 죄과에 빠뜨리는 데 귀착될까 두려워하여 비록 그 잘목을 아는 자라도 또한 능히 파탈(擺脫)할 수가 없었으니, 이것이 내가 이른바 수많은 소인(小人)들에게 초탈(超脫)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또 간쟁(諫爭)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김정해(金正海)1025) 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노륙(孥戮)1026) 할 것을 청하고 재차 나치(拿致)하여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다가 다시 노륙할 것을 청하니, 무릇 그 청을 세 번 변경한 것이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한 사람의 대간(臺諫)이 그 말을 세 번 변경한 것은 진실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마는, 이것은 한 사람의 대간(臺諫)이 한 짓은 아닙니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윤서교(尹恕敎)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묻기를,
"사형(死刑)을 적용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그가 상소한 말이 지극히 흉참(凶慘)하지마는 사형은 지나친 듯합니다."
하였다. 이사상(李師尙)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곧바로 방형(邦刑)을 청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의 혈당(血黨)으로는 이사상(李師尙)보다 지나친 자가 없으니, 만약 곧바로 허락하기가 어려우시면 국문(鞫問)하는 것도 불가(不可)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교악(李喬岳)이 말하기를,
"이사상이 계달(啓達)한 것을 마땅히 재차 읽어 보고 나서 처분(處分)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대신(大臣)을 제거(除去)하자는 말은 뜻이 비록 지극히 음참(陰慘)하나, 이로써 곧바로 사형을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 아들이 과방(科榜)에서 삭제된 것은 선조(先朝)의 특별한 분부였으나 복과(復科)된 뒤에 의기 양양(意氣楊楊)하게 출사(出仕)하니 복과되지 않았을 때에 그 마음을 알 수가 있으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가져다 보면 글을 만든 것이 역적 김일경과 다름이 없다. 역적 김일경이 정법(正法)된 뒤에 애책문(哀冊文)을 짓게 하였다면 어떻게 감히 이와 같은 말을 쓸 것이며, 그 뒤에 또 부표(付標)를 하여 들였으니, 그 뜻의 흉참함을 알 수가 있겠다. 대간(臺諫)이 만약 이로써 죄를 삼는다면 내가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사상(李師尙)은 차율(次律)을 써서 사사(賜死)하였고, 그 아들은 매우 먼 변방(邊方)으로 정배(定配)하였다. 이날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역신(逆臣)을 토죄(討罪)하는 뜻으로 힘써 청하기를 멈추지 않고, 대신(大臣)은 심지어 거취(去就)를 결정하는 것을 말하였는데, 임금이 위로하며 유시(諭示)하기를,
"옛사람이 비록 말하기를, ‘말이 채용(採用)되지 않으면 벼슬을 버리고 떠나간다.’고 하였으나, 또한 나라와 휴척(休戚)1027) 을 같이 할 의리에 있어서 좌규(左揆)1028) 의 처신하는 의리는 우규(右揆)1029) 와는 더욱 다르니, 오늘의 이런 말이 좌규에게서 먼저 나오리라는 것은 바라던 바가 아니다."
하니,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신(臣) 등이 고집하는 바는 곧 이보다 큰 것이 없는 의리입니다. 이 의리가 만약 펴지지 않는다면 어찌 삼공(三公)의 반열에 편안하게 있겠습니까? 다시 수삼 일을 보아서 인퇴(引退)할 계획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하였다. 이날 대신(大臣)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7월 4일 기해
기우제(祈雨祭)를 거행(擧行)하였다.
장령(掌令) 조명신(趙命臣)이 상소(上疏)하여 성학(聖學)에 힘써서 다스리는 근본을 세우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분명히 하여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것을 청하고, 또 논핵하기를,
"하동 부사(河東府使) 신경필(申慶弼)은 술에 취하여 나체(裸體)로 쫓아다니며 정무(政務)를 향임(鄕任)1030) 에게 위임(委任)하였으니 마땅히 파직(罷職)시켜야 하고, 온양 군수(溫陽郡守) 권흥준(權興駿)은 노상(路上)에서 국휼(國恤)의 관문(關門)을 만났는데도 친우(親友)를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종일토록 술을 많이 마시고, 곧 거애(擧哀)1031) 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을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두 수령(守令)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施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봉휘(柳鳳輝)를 귀양보내고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은 관직(官職)을 삭탈(削奪)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할 것을 명하였다. 이날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는데, 답하기를,
"윤허(允許)를 아끼는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때에 대행조(大行朝)의 처분(處分)이 또한 멀리 귀양보내는 데 이르렀다면 지금에 와서 관직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하는 것으로써 공의(公議)를 거절하는 것은 과연 성실(誠實)한 도리가 아니다. 유봉휘는 지난해 처분에 의하여 멀리 귀양보내고 전(前) 영부사(領府事) 및 조태억의 일에 이르러서는 죽은 자는 추탈(追奪)하고 살아 있는 자는 다만 그 관직만 파한다면, 어찌 다만 경중(輕重)이 현격하게 다를 뿐이겠는가? 또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처분을 엄격히 하는 뜻이 아니니, 모두 관직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하는 형률(刑律)을 시행하라. 아! 오늘의 처분은 한편으로는 성조(聖祖)의 뜻을 체득(體得)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대행왕(大行王)의 뜻을 준수(遵守)하는 것이니, 경(卿) 등은 나의 신하들의 의견을 어기지 않는 뜻을 본받아 그 궐정(闕庭)에서 호소하는 것을 그만두고 국사(國事)를 강마(講磨)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계사(啓辭)1032) 하니, 답하기를,
"이미 정유(庭諭)의 비답에서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정동후(鄭東後)와 이봉익(李鳳翼)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왜국(倭國)에서 동궁(東宮)을 세운 일 때문에 와서 고하였다.
여러 도(道)에 모두 가뭄이 들고, 평안도에서 황충(蝗蟲)이 발생하였다.
대신(大臣)·여러 재신(宰臣)과 승정원(承政院)·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유봉휘(柳鳳輝)를 죄준 것은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을 본받은 것으로 하교(下敎)를 하셨으나, 선조에서는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시행하였는데, 지금은 다만 멀리 귀양 보내라고만 명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지(批旨) 가운데 비록 ‘극변(極邊)’ 이란 두 글자는 없으나 선조(先朝)의 처분에 의하여 하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극변(極邊)’ 이란 것이 스스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였다. 승지(承旨) 유복명(柳復明)이 말하기를,
"만약 선조(先朝)의 처분에 따른다면 나치(拿致)하여 국문(鞫問)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이 말하기를,
"바야흐로 유봉휘에게 사형을 논하는데, 대신(大臣)이 멀리 귀양 보내는 일로써 다투어 논하는 것은 긴절(緊切)함이 매우 모자라는 것이니, 신(臣)은 빨리 방형(邦刑)으로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각(臺閣)의 말로서는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조금 전에 찬출(竄黜)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것이 어찌 정청(庭請)을 대우하는 것이겠는가? 만약 미리 이런 명령이 있으면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다시 간(諫)하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 비로소 찬출하게 한 것이니, 이 뒤로는 경(卿) 등이 삼사(三司)에 이를 맡기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병상(李秉常)이 말하기를,
"신하가 반드시 간(諫)하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에 이제 비로소 찬출(竄黜)의 하교(下敎)를 하신 것은 이는 성신(誠信)으로써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유봉휘(柳鳳輝)는 역적인데 역적을 어찌 삼사(三司)에 맡기고 만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여러 신하들이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뜻으로 번갈아 아뢴 것입니다."
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유봉휘 부자(父子)는 대대로 그 악(惡)을 이루어서 명의(名義)에 죄를 얻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들어가 저위(儲位)1033) 를 이어받기에 미쳐 유봉휘가 전하의 영민(英敏)하고 총명한 덕을 시기하여 흉소(凶疏)를 올렸으니, 곧 하나의 고변서(告變書)입니다. 처음에는 정책(定策)의 경사(慶事)에 한 마디 말도 칭송하여 하례한 일이 없다가 끝에 가서야 곧 인신(人臣)의 예가 없다는 것으로써 말을 하고, 정책(定策)하는 일로써 폐립(廢立)의 죄과(罪科)로 돌리면서 경적(鏡賊)1034) 과 더불어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같이하여 전하를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므로 종사(宗社)가 거의 망하게 되었으니, 이런 역적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이광좌(李光佐)가 윤선거(尹宣擧)를 위하여 진소(陳疏)한 데 이르러서는 숙종(肅宗)께서 엄격히 배척(排斥)하셨으니, 그 뒤로부터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서 심지어 종신토록 스스로 폐인(廢人)이란 것으로써 상소 가운데에 맹세를 하며 숙종께서 여러 해 편찮던 날에 한 번도 후반(候班)1035) 에 나와서 참여하지 않고 훙서(薨逝)하였을 때에도 또한 분곡(奔哭)하지 않다가 그 뒤에 무단히 불쑥 나온 것이 박상검(朴尙儉)이 용사(用事)할 때에 있었으니, 그 음흉(陰凶)한 곡절(曲節)은 환하여 가리울 수가 없습니다. 무릇 정청(庭請)할 때에 미쳐서는 다만 동요(動撓)하는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성난 눈으로 소리쳐 외치며 거조(擧措)가 흉악하고 패리(悖理)하여, 심지어는 ‘만대(萬代)에 첨앙(瞻仰)하는 것이 한 번 거사(擧事)하는 데에 있다.’는 등의 말로써 방자하게 궁정(宮庭)의 반열(班列)에서 크게 꾸짖었으니, 이 말이 당(唐)나라 중종(中宗) 20년에 있었으므로, 한 번 펼쳐 열람해 보면 그 끌어다 비유한 것이 흉악하고 참혹한 것임을 밝힐 수 있습니다. 대옥(大獄)에서 없는 죄를 교묘하게 꾸며 만들어 나라의 근본을 동요(動搖)시켰으니, 이광좌(李光佐)를 목 베지 않는다면 종사의 근심은 말할 수 없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유봉휘(柳鳳輝)와 이광좌는 온 나라 사람이 모두 그가 역모(逆謀)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듣건대, 중외(中外)의 물정(物情)이 오늘의 처분(處分)으로써 의혹(疑惑)하는 바가 있지 않을 수 없으니, 흉적(胸賊)의 무리로 하여금 죄가 없다고 한다면 그만이겠습니다만, 어찌 역모를 했는데 목 베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로써 인심(人心)이 혼란하여 안정되지 않는다면 흉당(凶黨)이 서로 뜬소문을 선동시켜 심지어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까지 있게 될 것이니, 이는 처분이 엄격하지 못한 소치라고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진달(陳達)한 바가 옳다. 군주의 처분은 여대(輿儓)1036) 의 비천(卑賤)한 사람도 진실로 모두 우러러본다. 여러 날 궁정(宮庭)에서 호소한다고 하여 죄가 멀리 귀양 보내는 데 그친다면 인심(人心)이 반드시 의혹(疑惑)할 것이니, 아주 먼 변방으로 안치(安置)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이사상(李師尙)과 역적 김일경은 한패이면서 두 사람인 것입니다. 또 일품직(一品職)이 아니면 사사(賜死)의 규례(規例)가 없으므로 차율(次律)을 써서 교형(絞刑)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윤허(允許)하였다.
7월 5일 경자
정청(庭請)한 계사(啓辭)에 대략 말하기를,
"신(臣) 등이 박절한 아픔이 있으므로 한 마디 말을 하고 죽기를 원합니다. 아! 신 등의 불충(不忠)하고 무상(無狀)함은 8년을 시탕(侍湯)하면서도 용염(龍髥)을 더위잡고 올라가는1037) 데에 따르지 못하여 누의(螻蟻)1038) 의 정성을 바치지 못하고, 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우리 선왕(先王)을 바르게 보필(輔弼)해서 뒤따라 보답하는 의리를 다하지 못하였으며, 영고(寧考)1039) 의 뜻하던 일을 여지없이 훼손시켜 선왕(先王)의 성대한 덕을 가리고 숨기어 빛내지 못하였습니다. 또 전하(殿下)로 하여금 두 번이나 사위(辭位)의 변고를 만나게 하여 종사(宗社)로 하여금 거의 위망(危亡)의 화변(禍變)에 떨어지게 하였다가 지금 경화(更化)1040) 된 뒤에까지도 오히려 지성(至誠)으로 감회(感回)시켜 나라의 역적을 복주(伏誅)시켜서 군주의 무함을 풀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모두가 신 등의 죄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먼저 신 등의 죄를 다스리어 선왕(先王)의 영혼에게 고하소서. 전하께서 혹시 이륜(彛倫)의 지극히 중한 것을 깊이 생각하시고 의리(義理)의 있는 바를 자세히 살피시어 황연(況然)히 깨달아서 빨리 왕법(王法)을 거행하신다면 실로 종사(宗社)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종일토록 궁궐을 지키면서 백성을 생각 밖에 보고 양조(兩朝)에서 두터운 은혜로 구휼(救恤)하던 백성을 능히 구제하여 살게 하지 못한다면 뒷날에 무슨 면목(面目)을 가지고 선왕(先王)에게 돌아가 뵙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매 차라리 죽고 싶다. 어제 처분(處分)한 뒤로 또한 연석(筵席)에서 유시(諭示)하였는데도 경(卿) 등은 또 계달(啓達)을 거두지 아니하니, 성심(誠心)을 믿어 주지 않음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어제 이 일로써 가인(家人)과 부자(父子)에 비교해서 말하였다. 어찌 그 아비가 대단히 걱정하여 거의 병이 날 지경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돌아보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지금 내가 나랏일을 생각하여 잠자고 밥먹는 것을 잊고 있으니, 빨리 이런 계달을 정지해서 위로는 밤낮으로 근심하는 것을 풀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과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이 비답 가운데 차마 들을 수 없다는 하교 때문에 차자(箚子)를 진달(陳達)하여 견책(譴責)을 청하고 궐문(闕門) 밖으로 물러 나갔는데, 그 차자에 대략 말하기를,
"백성의 생활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위급함을 신(臣) 등이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에 서둘러 힘쓰지 않고서 반드시 눈을 밝혀 용기를 내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삼키면서 토적(討賊)하는 것을 제일의 임무로 삼는 것은 대개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장차 강상(綱常)을 부지(扶持)하고 국맥(國脈)을 진작(振作)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삼성(三聖)1041) 이 한없는 무고(誣告)를 받은 것을 우러러 생각하고, 두 차례 사위(辭位)의 변고를 돌이켜 생가하시면서 전하께서 주무시는 것을 잊고 수라 드시는 것을 잊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지 저것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 등의 인혐(引嫌)은 실로 뜻밖의 일이다. 더구나 또 ‘삼성(三聖)이 한없는 무고를 받았다.’고 한 말은 실제로 경솔하게 말한 일은 아니나, 오늘날 나의 뜻은 다만 백성을 위하는 데 있으니, 차자 가운데 저것이니 이것이니 하는 말은 더욱 나의 뜻을 알아주지 못하는 일이다."
하였다.
홍현보(洪鉉輔)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7월 6일 신축
좌의정 민진원(閔鎭遠)과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이 비답(批答)을 받은 뒤에 다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는데, 그 계달(啓達)에 대략 말하기를,
"신(臣) 등은 삼성(三聖)이 한없는 무고를 당한 것이 사실 경솔한 말이 아니라고 하교하신 것은 진실로 수없이 의혹되는 바가 있습니다. 아! 신축년1042) 에 동궁(東宮)을 세운 것은 실로 이 삼성(三聖)이 전하여 받은 것이므로 종사(宗社)를 위하여 이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휘적(輝賊)1043) 은 곧 말하기를, ‘인심(人心)이 의심하고 미혹되어 오래도록 안정되지 못한다.’고 하고, 심지어는 임금의 마음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의심하기까지 하면서, 이것은 영고(寧考)1044) 의 유지(遺旨)로써 믿을 수 없다고 하고 자성(慈聖)의 애통(哀痛)한 분부를 받들어 행할 수 없다고 하며 선왕(先王)이 자전(慈殿)의 교지(敎旨)를 대신(大臣)에게 들어 손수 주신 것도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체통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제적(諸賊)의 이른바 폐립(廢立)이니 찬탈(簒奪)이니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충현(忠賢)을 죽이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전하께서는 앉아서 한없는 무함을 받은 것이니, ‘폐(廢)’란 한 글자가 또 어찌 선왕(先王)을 속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숙종(肅宗)의 처분(處分)을 변경하면서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리는 일이 없이 본의(本意)가 아니라고 하면서 선왕의 병환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기만(欺瞞)을 자행(恣行)하여 임금의 뜻을 받은 것이라 이르고, 성명(聖明)을 암담(黯黮)한 가운데 두고서 단련(鍛鍊)한 옥사(獄事)에 흉모(凶謀)를 자행하였으니, 신 등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등류의 일에 사성(四聖)1045) 께서 무함을 받았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卿) 등은 내가 끝에 가서 반드시 따를 것이라 하여 곧 이런 거조가 있는 것인가? 해가 비록 바뀌고 달이 또 지났으나 이미 정한 뜻은 변경하기가 어려우니, 빨리 이런 계달(啓達)을 정지하고 상하(上下)의 곤란함을 안정(安靜)시켜라."
하였다. 재차의 계달(啓達)에는 대략 아뢰기를,
"지금 신 등은 전하를 섬기기를 아버지같이 여기는데 전하께서는 신 등을 보시기를 아들처럼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적신(賊臣)을 자식으로 인정하여 곡진하게 용서하고 보호하시면서 신 등을 불충(不忠)·불효(不孝)하는 것으로 인도하시니, 이에 신 등이 전하에게 섭섭함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 등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로서 말을 하였는데, 어찌 세간(世間)에 아비가 몹시 슬퍼하는 말이 있는데도 그 아들이 감동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더구나 온세상이 왕의 신하가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곱사등이나 강도(强盜)의 무리일지라도 그 근본을 추구(推究)하여 본다면 모두가 신자(臣子)이다. 지금 아들로 여긴다느니 아들로 여기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은 어찌 과격한 것이 아니며, 또한 횡거(橫渠)1046) 에게도 불만족한 것이 아니겠는가? 연교(筵敎)에서 슬픔을 느꼈는데도 경 등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다 내가 덕이 부족하고 무력한 소치이다. 임금의 자리에 앉아 백관을 다스린다는 것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대신(大臣)이 이 비지(批旨)로 인해 드디어 궐정(闕庭)의 호소를 그만두었다.
도당록(都堂錄)1047) 이 이루어졌을 때에 대제학(大提學) 이의현(李宜顯)이 면직을 공소(控訴)하고 잇따라 소패(召牌)를 어기다가 이때를 이르러 출사(出仕)하여 회권(會圈)으로 이유(李瑜)·이현록(李顯祿)·이병태(李秉泰)·권척(權䄔)·박사성(朴師聖)·김상석(金相奭)·김용경(金龍慶)·황재(黃梓)·서종급(徐宗伋)·윤심형(尹心衡) 등 10명을 뽑았는데, 다만 본관록(本館錄)1048) 을 사용하여 첨가(添加)하거나 감소(減少)시킨 바가 없었던 것은 대개 이의현의 뜻이었다.
사신은 말한다. "세상에서 바야흐로 문벌(門閥)로써 사람을 뽑으므로 경학(經學)이나 사망(士望)이 윤혼(尹焜)과 성진령(成震齡) 같은 자는 그 선발(選拔)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논하는 자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34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1047] 도당록(都堂錄) :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임명하기 위한 2차 선거(選擧) 기록. 의정(議政)·찬성(贊成)·참찬(參贊)·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이 모여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명단에서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은 뒤, 그 권점의 수를 헤아려 임금에게 올리면 득점의 순위대로 교리·수찬에 임명함. 이때 피선(被選)될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을 찍는 것을 회권(會圈)이라 함.[註 1048] 본관록(本館錄) : 홍문관의 교리·수찬을 임명하기 위한 1차 선거(選擧)기록.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弘文館員)이 뽑힐 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홍문록이라고 함. 홍문록. 관록(館錄).
사신은 말한다. "세상에서 바야흐로 문벌(門閥)로써 사람을 뽑으므로 경학(經學)이나 사망(士望)이 윤혼(尹焜)과 성진령(成震齡) 같은 자는 그 선발(選拔)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논하는 자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좌참찬(左參贊) 조도빈(趙道彬)이 대간(臺諫)의 배척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대변(對辯)하기를,
"지난번에 어리석은 아이가 경솔한 뜻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을 때 곧 신(臣)은 깎는 듯한 마음으로 산골짜기에 있었던 날입니다. 그 때에 화색(禍色)1049) 이 공중(空中)에 가득차서 불 붙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화(禍)를 늦추는 일이라면 의리(義理)를 따르지 않는다.’고 여기면서 신을 귀양 보내자는 계달(啓達)이 또한 이미 한창이었는데도 오히려 또 함부로 응시(應試)하였으니, 그 정상은 비록 슬프나 그 일은 의의(意義)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하였다.
7월 7일 임인
이집(李集)을 우윤(右尹)으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응교(副應敎)로, 이병태(李秉泰)·윤심형(尹心衡)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상석(金相奭)·이근(李根)을 지평(持平)으로, 박규문(朴奎文)을 정언(正言)으로, 김용경(金龍慶)을 수찬(修撰)으로, 이현록(李顯祿)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병태(李秉泰)를 겸교서 교리(兼校書校理)로, 이유(李瑜)를 부교리(副校理)로, 서종급(徐宗伋)을 문학(文學)으로, 조명택(趙明澤)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이날 지제교(知製敎)를 뽑은 것이 무릇 10명이었다.
태학 유생(太學儒生) 한사직(韓師直)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저 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3적(三賊)이 유독 천주(天誅)에서 도망친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춘추(春秋)》에는 진가(晉家)의 적(賊)을 토죄(討罪)하는 데에 조돈(趙盾)은 써 넣고 조천(趙穿)은 써 넣지 않았으며1050) 《통감강목(通鑑綱目)》에는 조씨(曹氏)의 적을 토죄하는 데에 사마소(司馬昭)는 써 넣고 가충(賈充)은 써 넣지 않았으니,1051) 그렇다면 저 현재 제적(諸賊)은 남몰래 침범하는 솜씨로 가만히 창도(倡道)한 자이므로 진실로 마땅히 먼저 상형(上刑)1052) 에 복주(伏誅)되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용서하시고 다만 귀양 보내거나 잠깐 파직하는 것으로써 책임을 다하고 미봉(彌縫)할 계획을 하시니, 이는 그 화근을 만드는 것이 장차 강상(綱常)을 없어지게 하여 난적(亂賊)으로 하여금 발을 붙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7월 8일 계묘
임금이 친히 경소전(敬昭殿)1053) 에 추향(秋享)을 거행(擧行)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지난날 정청(庭請)의 비답(批答)에 말의 취지가 엄격하여 맺고 끊은 듯하므로 차자(箚子)를 올려 죄에 대한 견책(譴責)을 받기를 원하였으나,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이 처음으로 사직소를 올렸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소대(召對)를 행하고 《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제도를 정하였을 때에는 내시성(內侍省)에서 황의 늠식(黃衣廩食)1054) 은 문을 지키고 명(命)을 전할 뿐이며, 중종(中宗) 때엔 비록 1천여 인에 이르렀으나 붉은 비단1055) 입은 자가 오히려 적었으며, 명황(明皇)1056) 때 이르러서는 고역사(高力士)1057) 를 총애하여 쓰게 되었는데, 그 뒤로 환관(宦官)의 화(禍)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저 고역사가 처음에는 홍공(弘恭)1058) ·석현(石顯)1059) 과 조절(曹節)1060) ·왕보(王甫)1061) 와 같이 사특하고 간사하게 악한 짓을 한 자가 아닙니다. 한 번 쓰게 된 뒤로 차츰 나라의 정사를 관여하게 되어 그 미치는 해독이 점차로 하늘까지 치솟게 되었으니, 삼가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말기(末期)의 일로써 말한다면 환관(宦官)이 화(禍)가 된 것이 적지 않았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요즘 역신(逆臣)을 토죄(討罪)한 것이 오래도록 처리되지 못하여 국사(國史)에 해를 끼치고 있는데, 천청(天聽)은 더욱 멀어지게 되고 여러 사람의 심정은 더욱 격렬하여지게 됩니다. 지금의 역신(逆臣)을 다스리는 것이 비록 능히 여러 사람의 마음을 꼭 위로하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만약 혹 먼저 큰 것에 나아가 빨리 왕법(王法)을 거행하신다면, 여러 사람의 울분을 조금은 풀 수가 있고 나라의 일도 거의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이 대신(大臣)이 달이 지나도록 강렬히 간쟁(諫爭)하는 것은 자기 한 사람의 견해만이 아니고 사실 공의(公議)의 절박한 바를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늘 정청(庭請)하는 것을 대신의 독자적인 주장으로만 의심하시고 미안하다는 하교를 여러 차례 내리시니, 대신이 이미 모두 인입(引入)하였는데 오늘의 묘당(廟堂)이 어느 곳에 의지하는 것입니까? 실로 《중용(中庸)》의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뜻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지금 이 정청(庭請)이 비록 공의(公議)라 막기 어렵다고 하지마는 나는 조제(調齊)하는 방도가 대신에게 있다고 여긴다."
하였다.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그 죄가 크고 중한 자에게 그 죄상을 밝히고 토죄(討罪)한다면 그 나머지는 비록 다 주벌(誅罰)하지 않더라도 인심(人心)을 거의 조금은 위로할 수가 있는데도 전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참고 견디십니다. 신이 듣건대,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심하다.’고 하였으니, 오늘날 처분이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인심을 진정시키고 백성의 입을 막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前) 영부사(領府事)와 조태억(趙泰億)을 반드시 중죄(中罪)를 주려고 하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다.
7월 9일 갑진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군주를 섬기는 데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말을 하는 데에 패리(悖理)한 것이 많아서 군부(群父)로 하여금 임금의 자리에 계신 것을 즐겁게 해 드리지 못하고 스스로 그 무력함을 한탄하게 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강포(强暴)한 신하일지라도 그 죄가 어찌 이에 더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선조(宣祖) 때에 상신(相臣) 심통원(沈通源)을 귀양보내자고 청한 일로써 많은 신료(臣僚)들이 궐정(闕庭)에서 호소하기를 달이 넘어서야 멈추었고, 또 을사년의 위훈(僞勳)1062) 을 삭제(削除)할 것을 청하는 일로써 많은 신하들이 궐정(闕庭)에서 호소할 때에 혹은 정지하기도 하고 혹은 아뢰기도 하면서 지연되기를 7개월까지 이르렀으나, 선조께서는 일찍이 궐정에서 호소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미안하다는 하교가 있지 않았습니다. 신에게 평일에 몸가짐이나 일을 처리하는 것을 그때의 대신(大臣)에게 부끄러움이 없이 하게 하였다면, 어찌 우리 임금에게 믿음을 얻지 못한 것이 이렇게 극심한 데 이르겠습니까? 신은 역적 유봉휘(柳鳳輝)와 더불어 한하늘을 함께 이고 사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데, 지금 이 적(賊)이 누워서 쉬며 편안히 있고 신도 또한 보상(輔相)의 직위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비록 이로써 형벌에 복종하여 죄를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차마 모몰염치(冒沒廉耻)하게 그대로 있으면서 《춘추(春秋)》의 죄인이 되기를 달갑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날 비지(批旨)에 이르기를, ‘곱사등이[癃疾]나 강도(强盜)도 그 근본은 모두 신자(臣子)라.’고 하시면서 장횡거(張橫渠)로써 증거를 삼으셨는데, 서명(西銘)1063) 에 말한 ‘천하의 피륭(疲癃)1064) ·잔질(殘疾)1065) ·경독(惸獨)1066) ·환과(鰥寡)1067) 가 모두 우리 형제(兄弟)의 무고(無告)1068) 한 자라.’고 하였고, 그 사이에 원래 ‘강도(强盜)’ 란 두 글자는 없고 그 아래에 또 이르기를, ‘인(仁)을 해치는 것은 적(賊)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천지(天地)〉 양간(兩間)에 사는 자가 비록 다 건(乾)을 아버지로, 곤(坤)을 어머니로 여기긴 하나, 제가 이미 적(賊)이 되었다면 아버지 된 도리에 있어 아들이라고 일컬을 수 없기 때문에 피륭(疲癃)과 적(賊)을 구별해서 말하였고, 일찍이 혼동하여 일컫고 합쳐서 계산하지 않았으니, 옛사람이 적을 인정하여 아들로 삼는 자를 경계한 것이 이것입니다. 대체로 옛날 교훈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의 뜻에 부합시키는 것은 이는 바로 학문을 하는 데에 큰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신 등의 말하는 것은 거절하여 막으려고 하시면서 부회(傅會)1069) 하는 결과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어찌 강학(講學)·치심(治心)하는 공부에 큰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또한 신이 오랜 날을 두고 시강(侍講)하였으나 능히 개도(開導)하여 힘쓰고 경계하지 못한 죄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지난날 비지(批旨)에 말이 유창하지 못하고 정성이 성실하지 못하여 우의정은 곧 단자(單子)를 찾고 경(卿)은 또 차자(箚子)를 진달(陳達)하니, 스스로 성의가 얕은 것을 부끄러워 한다. 융질(癃疾)과 강도(强盜)란 말은 대략(大略)에 불과한 것이며, 더구나 우왕(禹王)이 죄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 일에1070) 성인(聖人)의 마음은 애연(藹然)1071) 하여 그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요즘 부회(傅會)한다고 이른 것은 능히 경 등에게 믿음을 얻지 못한 것이니, 가만히 스스로 부끄러워할 따름이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10일 을사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두 번이나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강목(綱目)》의 당기(唐紀)를 강독(講讀)하였는데, 강(講)을 마치자, 검토관(檢討官) 윤심형(尹心衡)이 먼저 정성을 전하고 예절을 다하여 두 대신(大臣)을 억지로라도 나오게 할 방도를 아뢰고, 시독관(侍讀官) 이유(李瑜)와 참찬관(參贊官) 유복명(柳復明)은 잇따라 진청(陳請)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유복명이 또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을 편찬(編纂)하는 것이 겨우 수년(數年)치만 하고 그쳤으니, 일이 매우 미안합니다. 당상관(堂上官)이나 낭관(郞官)중에 각각 두세 사람을 뽑아서 본직(本職)으로써 구애(拘碍)시키지 말고 전일(專一)한 마음으로 편찬하게 한다면 반드시 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재(李縡)와 김진상(金鎭商)은 이미 고도(高蹈)1072) 의 선비가 아닌데, 군신(君臣)의 사이에 어찌 한번도 상면(相面)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더구나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에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는가? 별도로 유시를 내려 재촉하여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유복명이 또 말하기를,
"각사(各司)에 이례(吏隷)의 액수(額數)가 번거로울 정도로 많으므로, 도성(都城)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지금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형조(刑曹)로써 말하건대, 서리(書吏)가 1백 40여 인의 많은 수효에 이르러 송옥(訟獄)을 조종(操縱)하고 추착(推捉)1073) 을 빙자(憑藉)하여 다만 고혈(膏血)를 짜내는 것을 능사(能士)로 삼으니, 서울 안의 곤궁한 백성이 어떻게 명령을 감내하겠습니까? 한결같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정한 수효에 의한 뒤에야 거의 그 폐단을 구제(救濟)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곧 도태(淘汰)시켜서 감할 것을 명하였다.
7월 11일 병오
삼사(三司)에서 전일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 【지평(持平) 이근(李根)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사상(李師尙)을 빨리 방형(邦刑)으로 바로잡아야 할 일이 정계(停啓)된 것은 교형(絞刑)에 처한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아뢰기를,
"선산 부사(善山府使) 조정례(趙正禮)는 성품이 본래 술을 좋아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순서가 없고, 도로(道路)나 교량(橋梁)을 수리하거나 고치는 역사(役事)로 인하여 궐전(闕錢)을 강제로 징수한 것이 거의 누천(累千)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을 죄다 자기의 주머니로 돌렸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게 하소서. 순천 부사(順天府使) 황찬(黃燦)은 본래 향품(鄕品)으로서 외람하게 사로(仕路)를 통하여 여러 번 현읍(縣邑)을 맡았는데, 방자한 생각으로 탐욕(貪欲)을 부렸으니, 청컨대 파직하게 하소서.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희담(李喜聃)은 행동하는 것이 비굴하고 더러워서 때에 따라 아첨하고 아부하였으며, 일찍이 호읍(湖邑)에 있으면서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고 본읍(本邑)에 부임하여서도 교활한 수단이 옛날과 같았으나, 다만 일을 잘 한다는 것으로써 아직 아직 쭈구리고 앉아 있게 되었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황찬의 일은 아뢴 대로 하고, 조정례 등의 일은 풍문(風聞)을 반드시 다 믿을수 없다."
하였다.
부응교(副應敎) 이기진(李箕鎭)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이기진이 삼사(三司)의 계달(啓達)에 연명(聯名)되어 있으면서 일로 인하여 패초(牌招)1074) 를 어겼는데, 임금이 패초를 어기어 응당 파직시켜야 할 사람으로 이름이 계사(啓辭)에 있으니 명분이나 사체(事體)가 모두 무엄(無嚴)한 데 관계된다고 분부하면서 드디어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또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이제 와서 이미 성상(聖上)의 뜻이 굳게 정하여 진 것을 알고 이미 말로써 논쟁(論爭)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또 더러워 떠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그 지키는 바를 잃고 벼슬을 잃을까 근심하는 비부(鄙夫)가 되기를 달갑게 여기는 것이니, 혹시 전하께서는 미약한 소원이나마 허부(許副)1075) 하신다면 때로는 향관(享官)1076) 에 차임(差任)되어 교산(喬山)의 송백(松栢)을 우러러볼 것이요, 들어가서는 대정(大庭)의 문안을 폐하지 않을 것이며, 급한 일이 있으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데 사생(死生)을 걸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에게 돈면(敦勉)하신 것은 대개 대의(大義)를 놓아두고 우선 부서(簿書)나 기회(欺會)의 말단에 종사(從事)하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니, 또한 신이 전하의 뜻을 받들지 못할 바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정신(廷臣)이 비록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받았다 해도 감히 호소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대개 그가 지켜야 할 바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인 것이요, 진실로 티끌만한 사의(私意)라도 그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신충(宸衷)1077) 의 지나치신 고뇌(苦惱)로 엄지(嚴旨)가 거듭 내려오고 비사(批辭) 가운데에 두세 구(句)의 말씀이 신하로서 감히 들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전하께서는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회복하는 뜻을 깊이 생각하고 미안(未安)하다는 비답(批答)을 빨리 고치셔서 듣는 이로 하여금 의혹을 풀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위아래에서 믿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직 이 한둘의 대신(大臣) 뿐인데,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성이나 정성을 능히 나타내 보이지 않고 일시(一時)에 인입(引入)하였으니, 광경이 근심스럽고 기막힙니다. 또한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위노(威怒)를 조금 푸시고 성신(誠信)을 더욱 미루어서 힘써 우악(優渥)한 예를 더하여 기어이 어떻게서라도 나오게 하여 국문(鞫問)하는 옥사(獄事)를 속히 마치고 조정(朝廷)의 의결(議決)을 지체됨이 없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백성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매여 있는데, 요즘엔 척박한 지방은 기피하고 중요한 고을로 승진되기를 도모하는 자가 있으며, 좋은 벼슬을 가지고서 피폐(疲弊)한 고을에 차임(差任)되면 그대로 있으면서 편리한 대로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다만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신은 생각하기를 모두 본직(本職)을 도로 임명하여 속히 부임(赴任)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동부승지(同副承旨) 정동후(鄭東後)는 추천하여 제수(除授)한 뒤에도 물정(物情)이 믿지 않고, 김진옥(金鎭玉)은 문벌(門閥)이나 재주를 세상에서 모두 추대하여 인정하고 있으니, 육조(六曹)의 참판(參判)·참의(參議)나 웅대한 번진(藩鎭)1078) 에는 혹시 임명할 수 있으나 은대(銀臺)1079) 에 통의(通擬)함에 있어서는 공의(公議)에 어긋남이 있으니, 신은 이제부터는 모두 검의(檢擬)1080)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대신(大臣)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수령(守令)의 일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인데, 어떻게 그 좋고 나쁜 것을 택하겠는가? 정동후(鄭東後)나 김진옥(金鎭玉)을 승지(承旨)에 추천한 것은 진실로 지나친 일이 아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명희(李命熙)는 부임(赴任)하기도 전에 상주(常州)로 옮겨 임명하였고,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범지(李範之)는 진산(珍山)에 임명되었는데도 본조(本曹)에서 곧 그대로 유임(留任)하기를 청하였으니, 상주는 바로 웅읍(雄邑)이고 진산은 바로 박현(薄縣)이므로 자못 물의(物議)가 있었기 때문에 정형익(鄭亨益)의 상소가 이에 언급(言及)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35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1077] 신충(宸衷) : 임금의 생각.[註 1078] 번진(藩鎭) : 큰 도(道).[註 1079] 은대(銀臺) : 승정원을 달리 이르는 말.[註 1080] 검의(檢擬) : 인재를 골라 뽑아서 관직의 후보자로 추천하는 것을 말함.
사신은 말한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명희(李命熙)는 부임(赴任)하기도 전에 상주(常州)로 옮겨 임명하였고,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범지(李範之)는 진산(珍山)에 임명되었는데도 본조(本曹)에서 곧 그대로 유임(留任)하기를 청하였으니, 상주는 바로 웅읍(雄邑)이고 진산은 바로 박현(薄縣)이므로 자못 물의(物議)가 있었기 때문에 정형익(鄭亨益)의 상소가 이에 언급(言及)한 것이다."
사간(司諫)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는 일은 실로 이것은 온 나라의 큰 논의(論議)이므로, 무릇 반드시 주살(誅殺)에 관계되는 적(賊)은 해당 형률(刑律)에 빨리 적용하여 일체로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감등(減等)과 제적(諸賊)의 누락(漏落)을 당한 것은 엄격하게 악(惡)을 징계하고 죄(罪)를 토벌하는 의리에 크게 불만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성상(聖上)께서 흉역(凶逆)을 처단하는 것이 하찮은 물건이나 사소한 일처럼 여기시기 때문에 의당 방형(邦刑)으로 바로잡을 자를 겨우 찬축(竄逐)하는데 이르렀고, 우선 도극(島棘)에 적용되는 자를 다만 삭출(削黜)하는 것으로 감죄(勘罪)하셨으며, 또 비지(批旨)이 내용에는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하교가 여러 차례 내려왔습니다. 이로써 군하(群下)를 위협 제지하면서 공의(公議)를 거절 방색(防塞)하는 자료로 삼으시니, 대신(大臣)이 이로 인하여 불안하게 여기고 마침내 인피(引避)하여 들어가기에 이른 것입니다. 아! 대신의 괴로운 심정과 진심(眞心)에서 나오는 정성은 다만 토죄하여 복수(復讐)하는데 있을 뿐이니, 그들의 마음에 이 적(賊)을 주살(誅殺)하지 못한다면 윤리(倫理)와 강상(綱常)이 끊겨 없어지고 대의(大義)가 쇠하여 어두워져서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궐정(闕庭)에 지켜서서 괴롭게 호소하며, 혹은 개도(開導)하여 허락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릇 두 대신이 나라와 일체(一體)가 되는 순수한 정성으로 그가 백성에 대한 근심이나 나라에 대한 계획이 어찌 일찍이 잊고 소홀히 하여 그렇게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에 대하여 조금도 조용히 추구(推究)하지 않으시고, 심지어는 내가 죽고 싶다느니 남면(南面)1081) 하고 있는 것도 또한 부끄럽다는 등의 하교를 내리시고, 우의정이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리면 으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시고, 좌의정이 차자(箚子)로 아뢰면 다만 돈유(敦諭)의 명령을 내리시어 싫어하고 박대하는 기색(氣色)을 현저하게 보이시니, 이것이 어찌 《중용(中庸)》의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도리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궐정(闕庭)에서 호소할 때에 비답은 나의 뜻을 보인 것에 지나지 않고, 대신이 세 차례나 휴가를 청한 것에 윤허하지 않는다는 답을 내린 것은 바로 이것이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이니, 이것도 또한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이다."
하였다.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하여 삼사(三司)의 청한 것을 빨리 윤허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훈련 판관(訓鍊判官) 김중일(金重一)은 일찍이 남행(南行)1082) 의 선전관(宣傳官)으로서 내원(內苑)의 시사(試射)에서 농간(弄奸)과 기만(欺瞞)을 부리다가 찬배(竄配)를 당하기까지 했는데, 지난번에 흉당(凶黨)이 반드시 성고(聖考)의 처분(處分)을 배반하여 버리려고 하여 무인(武人)을 극선(極選)하는 일에도 〈김중일을〉 통의(通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제 새롭게 교화(敎化)된 청명(淸明)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사적(仕籍)에서 삭제(削除)하여서 선조(先朝)에서 엄중히 징계(懲戒)하신 의도를 준수(遵守)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해미 현감(海美縣監) 박민신(朴敏信)은 불법(不法)을 방자하게 행하여 조세(租稅)를 거둔 것이 한정이 없었으며, 대흥 군수(大興郡守) 김경호(金慶豪)는 행동하는 것이 사납고 패리(悖理)하여 술에 취하면 백성을 학대(虐待)하였으며, 고창 현감(高敞縣監) 유전(柳淀)은 본래 미천한 서얼(庶孽)로 권세 있는 흉당(凶黨)에게 아첨하여 붙어서 외람되게 자목(字牧)1083) 에 임명되어 오로지 백성의 재물을 걸태질하는 것을 일삼는 형상이니, 모두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요즘에 일은 전후(前後)에 다 유시(諭示)하였다. 김중일(金重一)의 일은 선조(先朝)의 처분이 이미 엄중하고 또 분명하니, 그가 마땅히 움츠리고 엎드려 있어야 할 것인데도 신축년1084) 이후로 버젓이 과거(科擧)에 나오고 의기 양양(意氣楊楊)하게 출근하고 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는 검의(檢擬)하지 말고 세 읍재(邑宰)의 일은 모두 소청(所請)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최명상(崔命相)이 상소하여 먼저 유봉휘(柳鳳輝) 등을 주벌(誅伐)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아뢰고, 다음으로 정비(庭批)의 미안하다는 것을 가지고 진계(進戒)하며, 또 말하기를,
"양역(良役)1085) 한 가지 일은 백성에 고질적인 폐단이 됩니다. 지난번에 이광좌(李光佐)가 권세를 잡았을 때에 허세를 부리고 자랑하는 일로 청사(廳舍)에 이름만 정해 두고 당랑(堂郞)1086) 을 차출(差出)하면서 수년(數年) 동안 시행한 조처(措處)는 번쇄(煩瑣)하여 우습기만 합니다. 지금 만약 여러 도(道)에 행회(行會)1087) 하여 그 수재(守宰)로 하여금 각각 폐해를 구원하는 술책을 아뢰게 하고, 다시 묘당(廟堂)에 품고(稟告)하여서 그 시행할 만한 것만 채택하여서 시행한다면, 그것이 백성을 구원하는 데에 실질적인 효과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희주(李熙疇)는 오로지 탐욕(貪慾)을 일삼고 읍비(邑婢)를 미혹(迷惑)시켜 뇌물받는 문로(門路)를 활짝 열었으며, 고령 현감(高靈縣監) 이선행(李善行)은 백성을 징발(徵發)하여 보(洑)를 쌓으면서 채찍으로 치기를 낭자하게 하고 남의 분묘(墳墓)를 파내며 불법으로 벼슬살이를 하였고, 단양 군수(丹陽郡守) 이명직(李命稷)은 평소에 흉당(凶黨)의 졸개로서 잔혹하고 포악하여 가혹하고 각박하여 선가(船價)를 강제로 징수하면서 이득을 속여가며 백성을 학대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그 관직을 파면하소서. 용담 현령(龍潭縣令) 신태동(辛泰東)은 충헌공(忠獻公) 신(臣) 김창집(金昌集)과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의 불식(拂拭)1088) 의 은혜를 받은 것이 친척(親戚)과 다름이 없었는데도 신축년1089) ·임인년1090) 이후로 흉당(凶黨)에게 뵙기를 청하고 온갖 계책으로 아첨함을 구하여 본읍(本邑)을 맡게 되자, 백성의 고택(膏澤)을 거두어서 연시(延諡)1091) 의 의례적인 폐백으로 쓴다고 핑계대고 심지어는 세단(細緞)과 전화(錢貨)로써 적신(賊臣) 윤성시(尹聖時)에게 뇌물을 많이 바쳤으니, 비루(鄙陋)하고 패리(悖理)하며 탐욕(貪慾)스러운 것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은진 현감(恩津縣監) 이의규(李宜揆)는 관직에 있으면서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환곡(還穀)의 미수(未收)를 벌전(罰錢)으로 강제로 받아내어 진휼(袗恤)하는 밑천으로 요리(料理)한다면서 또한 모두 실어 보냈으며,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잡아 올 때에 후한 음식으로 정성껏 접대하기를 지친(至親)보다 갑절로 여김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건강한 말을 사서 김정해(金正海)에게 주었으니, 만약에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 두 고을의 수령(守令)은 모두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버리게 하소서. 충주 영장(忠州營將) 목중형(睦重衡)은 도둑을 다스리는 한 가지 일조차 잊은 채 놓아두어서 도적의 환란이 크게 번지게 했으며, 관리(官吏)가 도당(徒黨)을 맺어 시장의 물화(物貨)를 덮쳐 빼앗는데도 또한 잡아다 다스리지 않아서 장사꾼이 다닐 수 없게까지 하였으니, 마땅히 파직(罷職)시키고 서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북우후(北虞候) 최제백(崔齊白)은 역적 김일경이 심복(心腹)이 되어 수성 찰방(輸城察訪)을 도모하여 얻었는데, 군기(軍器)를 별도로 비치한다는 것으로써 핑계를 대고 역적 김일경에게 세포(細布)를 실어 보내면서 수어청(守禦廳)의 기치(旗幟)를 받아 내겠다고 큰소리 쳤으나 마침내 받아온 일이 없었으므로 이졸(吏卒)이 아직도 원망하며 욕을 하고 있으니, 또한 마땅히 체직하여 파면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좌참찬(左參贊) 조도빈(趙道彬)이 평생(平生)에 근신(謹愼)한 것은 온 세상이 아는 바인데, 지금 그 아들의 일로써 논핵이 그 아비에게까지 미치니, 가만히 헌신(憲臣)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보덕(輔德) 조영세(趙榮世)가 숙종조(肅宗朝)에 스스로 단념한 일은 대간(臺諫)의 말과 이미 사실이 틀리는데 우현(郵縣)에다 한때 강제로 부임시키면서 어찌 반드시 중한 죄로 처벌하십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하여 진달한 것이 군주를 사랑하는 데서 나왔으니, 깊이 이를 칭찬한다. 양역(良役)의 일은 지난번에 청사(廳舍)를 설치하고 당상관(堂上官)을 차출(差出)했다는 것은 명칭과 사실이 같지 않았는데, 지금 그대가 상소하여 진달한 것이 매우 좋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두 고을의 수령(守令)과 목중형(睦重衡)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되, 이명직(李命稷)의 일은 그대가 상세히 살필 것이며 신태동(辛泰東)의 일은 비록 매우 모양이 없으나, 사가(私家)의 일로써 공당(公堂)에서 추론(推論)할 수 없는 것이며, 이의규(李宜揆)와 최제백(崔齊白)의 일은, 이런 등류는 말끔히 세척(洗滌)시켜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어찌 깊이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중신(重臣)과 조영세(趙榮世)의 일은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교악(李喬岳)이 정비(庭批)의 미안함으로 대신(大臣)이 인입(引入)하였다 하여 진계(進戒)하기를,
"원컨대 성상(聖上)께서는 뉘우쳐 깨닫는 마음을 밝게 보이시고 성교(聖敎)를 도로 취소하시며 성례(誠禮)를 더욱 돈독히 하여 대신을 억지로라도 나오게 하여 국사(國事)를 이루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조도빈(趙道彬)의 만난 바는 충후(忠厚)한 기풍(氣風)에 부족함이 있고, 두세 재신(宰臣)은 원래 지회(遲回)1092) 하면서 관망(觀望)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금년의 농사는 가뭄과 큰물이 서로 겹쳐서 삼남(三南)1093) 은 이미 큰 흉년으로 판결이 났으니, 신은 마땅히 삼남의 방백(方佰)에게 특별히 유시(諭示)하여 미리 진휼(賑恤)·구호(救護)의 대책을 강구하여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윗 조항의 일과 재신(宰臣)의 일은 이미 유시하였고, 말단(末段)의 일은 가을 수확이 멀지 않았으니 우선 앞일을 살펴보고서 유시를 내리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권변(權忭)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인하여 청하기를,
"성학(聖學)을 부지런히 하여 의리를 밝히고 성지(聖志)를 굳건히 하여 덕업(德業)을 빛나게 하시며, 사부(師傅)를 선택하여 세자(世子)를 보좌하고 궁료(宮僚)를 선정(選定)하여 충익(忠益)을 의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으로 가납(嘉納)하였다.
장령(掌令) 최도문(崔道文)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원악(元惡)인데도 단지 말률(末律)을 적용하면서 국적(國賊)을 토죄(討罪)하라고 청한 대신(大臣)은 도리어 엄중한 하교를 받게 되었으니, 충신과 역적이 명분을 바꾸어서 형정(刑政)이 차서(次序)를 잃은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장흥부(長興府)에 새로 설치하는 수문포(水門浦)는 도청(都廳)에서 다만 감영(監營)의 사용(私用)으로만 삼고 본부(本府)의 폐단을 끼치는 것은 돌아보지 않았으니, 청컨대 혁파하도록 명하시어 쌓인 폐해를 제거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남포(藍浦)의 성주산(聖住山)에서 비석(碑石)을 벌취(伐取)하는 폐단은 마땅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하게 금지하여서 백성의 폐해를 제거하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어찌 대신을 가볍게 대우하여 그렇겠는가? 소말(疏末)의 두 가지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2일 정미
삼사(三司)에서 전일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박규문(朴奎文)이다.】 전일에 계달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사릉(思陵)1094) 의 직장(直長) 유규(柳奎)는 처지나 문벌(門閥)이 낮고 미천(微賤)한데, 권간(權奸)에게 아첨하여 빌붙어서 흉소(凶疏)를 올려 방자한 생각으로 정인(正人)을 해치고 공적(功績)을 바치고는 관작을 낚았으니, 벼슬의 반열에 놓아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버리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세 번이나 사직소(辭職疏)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홍치중(洪致中)이 액정서(掖庭署)의 하례(下隷)로 야금(夜禁)을 범(犯)하여 구속(拘束)된 자를 징계하여 다스릴 것을 아뢰어 청하니, 임금이 품고(稟告)하지 않고 먼저 구속하였다는 것으로써 크게 비난과 책망을 가하고 훈영(訓營)에 명하여 패장(牌將)을 곤장(棍杖)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홍치중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야금(夜禁)의 설치는 구법(舊法)이므로 액정서(掖庭署)의 소속이라고 금하지 말라는 영이 없었고 패장(牌將)이 붙잡은 것은 진실로 그 직책일 뿐입니다. 그런데 야금을 무시한 액정서의 하례는 마침내 무사하게 되었고 법을 받든 패장은 엄중한 곤장을 면치 못하였으니, 실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一體)라는 뜻에 결점이 있습니다. 비록 근래의 일로서 말하더라도 여러 군문(軍門)에서 야금을 범한 액정서의 하례에서 법을 지키는 것은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는데 유독 오늘에 있어 처분이 치우치게 엄중하시니, 뒷날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임금이 타는 말에 경례를 하는 것은 공경을 넓히는 바이다. 그들이 비록 미천(微賤)할지라도 이미 액정서(掖庭署)의 하례(下隷)인데, 경솔하게 먼저 구류(拘留)시킨 것은 자못 매우 놀랄 일이다. 이는 법을 굽히는 것이 아니라 곧 사체(事體)를 중시(重視)하는 뜻이다."
하였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본감(本監)은 일식(日蝕)·월식(月蝕)하는 것이나 하늘의 기상(氣象)을 점치는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는 곳인데도, 방서(方書)가 비치(備置)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계묘년1095) 에 연경(燕京)에서 책을 구입(購入)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교식역지(交食曆指 )》 【7책(冊)이다.】 《융사류점(戎事類占)》 【10책(冊)이다.】 것은 지극히 긴요한 것이 되니, 청컨대 제때에 발간하여 반포(頒布)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안중필(安重弼)·김고(金槹)를 승지(承旨)로, 이병태(李秉泰)를 교리(校理)로, 조덕린(趙德隣)을 필선(弼善)으로, 박사성(朴師聖)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현록(李顯祿)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7월 13일 무신
의금부(義禁府)에서 사령(赦令)으로 인하여 시수 죄인(時囚罪人) 김시환(金始煥) 등 30여 인을 석방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윤식(尹植)과 심세준(沈世浚)은 모두 방질(放秩)1096) 에 있었으나 지난번에 수의(繡衣)1097) 의 별단(別單)으로 인하여 특별히 나문(拿問)하라고 명한 것은 뜻이 의도한 데가 있다. 아! 장물(贓物)을 탐한 것이 이와 같은데도 사면(辭免)으로 인하여 사유(赦宥)를 받게 되면 소인(小人)의 다행이라 할 수 있으니, 특별히 그대로 가두게 한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장법(贓法)을 엄중히 하려고 하여 이런 처분이 있게 되었다. 다만 김시환(金始煥) 무리는 비록 장오(贓汚)에 관계되었으나 임의로 그를 방송(放送)하면서 오직 윤식·심세준 두 사람을 반드시 추궁해 다스리려고 한 것은 대개 의금부 여러 당상관이 죄인의 죄를 낮추었다 높였다 하는 바가 있는가 의심스럽다."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36면
【분류】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1096] 방질(放秩) : 방면(放免)할 죄수의 명단(名單).[註 1097] 수의(繡衣) : 암행 어사(暗行御史).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장법(贓法)을 엄중히 하려고 하여 이런 처분이 있게 되었다. 다만 김시환(金始煥) 무리는 비록 장오(贓汚)에 관계되었으나 임의로 그를 방송(放送)하면서 오직 윤식·심세준 두 사람을 반드시 추궁해 다스리려고 한 것은 대개 의금부 여러 당상관이 죄인의 죄를 낮추었다 높였다 하는 바가 있는가 의심스럽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에게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세 차례나 올린 차자(箚子)의 비답에 나의 뜻을 다 털어놓았다. 아! 경(卿)이 보다시피 지금 국사(國事)가 영의정은 밖에 나가 있고 우의정은 정단(呈單)하는 일만 찾고 있는 형편이다. 경도 또한 인혐(引嫌)하여 백사(百事)가 모두 폐지되어 있으니, 백성의 일을 생각하면 밤중에도 잠이 오지 않는다. 경은 즉각 나와서 정사를 보도록 하라."
하니, 민진원이 정세(情勢)로 보아 감히 외람되게 나아갈 수 없다는 것으로써 진달(陳達)하는 글을 붙여 아뢰고, 또 차자를 올려 유봉휘(柳鳳輝)의 일을 남김없이 논하기를,
"비지(批旨)가 더욱 융성하여 특별한 유지(諭旨)로 와서 전달하였으나, 어떻게 그 말을 쓰지 않으면서 한갓 자리만 채우는 대신(大臣)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시인(詩人)의 이른바 ‘나를 잡아 두기를 거만스럽게 하고 또한 나의 공력(功力)을 묻지도 않는다.’는 것과 불행히도 비슷합니다. 아! 전하께서 유봉휘(柳鳳輝)의 상소를 처음에 당론(黨論)의 배제(排除)와 알력(軋轢)에서 나온 것이라 한 것은 죄를 용서하여 그 정상(情狀)을 얻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지난번에 진소(陳疏)하여 용서하여 줄 것을 청한데 대하여 선왕(先王)이 깊이 권장하여 받아 들였는데, 지금 만약 법으로 조치하게 되면 아마도 신의를 잃고 선왕(先王)의 유지(遺旨)에 어긋남이 있다고 하셨으니, 그 측은하게 여기고 차마 못하시는 마음도 또한 온화하신 심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뜻을 미루어 나가면 비록 요(堯)·순(舜)의 성덕(聖德)일지라도 어떻게 이보다 낫겠습니까?
그리고 신 등이 비록 매우 노둔하고 거칠지라도 또한 어찌 받들어 순종할 뜻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다만 이 일은 관계(關係)가 지극히 크고 의리(義理)가 지극히 엄중하니, 하찮은 신의(信義)와 사소한 인덕(仁德)으로써 경솔한 뜻으로 처리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무릇 유봉휘는 그 아비가 명의(名義)에 죄를 얻은 뒤로부터 사류(士類)를 원수처럼 보고 반드시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신축년1098) 의 세자를 세우던 날에 이르게 되자 이런 나라의 대사(大事)가 있는 때를 틈타 여러 신하들을 악역(惡逆)의 죄과(罪科)에 빠뜨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여러 신하들의 죄상(罪狀)으로 한 것은 바빠서 독촉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이것으로는 장살(狀殺)1099) 의 죄안(罪案)을 만들 수가 없으므로 곧 본래의 일을 깊이 배척하여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셨다는 등의 말로써 세자를 세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고, 세자를 세우는 것은 인심(人心)이 의혹(疑惑)된다는 등의 말로써 현란(眩亂)시키면서 위동(危動)시키고, 처분이 이미 정하여져서 다시 의논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다는 등의 말로써 마치 처분이 정하여지지 않았다면 별도의 의논을 허용해 주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뒤로는 임금의 마음으로부터 결단하라는 등의 말로써 곧 아래로부터 마음대로 농간하는 바에 연유하였다 하여 ‘인신의 예가 없다[無人臣禮]’는 네 글자로써 폐립(廢立)의 죄로 단정하였으니, 그 뒤에 경적(鏡賊)1100) 의 무리가 폐립(廢立)이니 찬탈(簒奪)이니 하는 등의 흉언(凶言)을 한 것도 그 원인이 대개 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 가령 그 마음이 오직 당동 벌이(黨同伐異)한 데서 나왔다면 그는 이미 ‘사슴을 쫓는 자는 태산(泰山)의 험악(險惡)함도 안중(眼中)에 없다. ’는 격입니다. 그 원소(原疏)의 수미(首尾)에 털끝만치도 목을 길게 빼고서 고대(苦待)하는 소망이나 아끼면서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말이 없고 정신(精神)이나 의의(義意)가 아주 흉악하여 측량할 수가 없으니, 오직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생각하여 보소서.
세자(世子)를 세우는 일에 불만하면서 전하에게 아끼어 주는 바가 없고 심지어 폐립(廢立)하는 것으로써 의심하기까지 하였다면, 그를 장차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격(排擊)하고 알력(軋轢)만 부릴 뿐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때에 빈청(賓廳)의 계달(啓達)에서 인용(引用)한 전하의 상소 가운데 ‘모골(毛骨)이 모두 소스라쳐진다.’는 한 단락(段落)의 말은 전하께서 지극히 어진 마음으로써 남이 나로 말미암아 죽는 것을 염려하여 다시 용서해 주기를 청하는 소를 올린 것인데, 선왕(先王)이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서 허락하였으니, 전하께서 청하신 까닭과 선왕께서 허락하신 까닭은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되는 데에 해로움이 없을 것이며, 더구나 그때에 유봉휘(柳鳳輝)의 역상(逆狀)이 다만 이 소어(疏語)가 흉악하고 패리(悖理)한 것뿐이었다면 설령 죽이지 않는 것으로써 대우하더라도 그나마 혹은 불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일경(金一鏡)의 소가 나오고 목호룡(睦虎龍)의 글이 올라가기에 미쳐 모두 유봉휘의 말을 본받아 서술(敍述)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없는 죄를 씌워서 죽이고 전하를 무함하여 핍박하였으니, 그 지의(旨義)의 대체(大體)는 모두 유봉휘의 상소 내용의 이러이러하다고 한 바에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는 김일경과 목호룡의 말과 행동이 아니라 바로 유봉휘의 전일의 말을 처음 시행한 것이며, 이는 김일경과 목호룡의 계획이 시행된 것이 아니라 바로 유봉휘의 처음 계책이 시행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로써 살펴본다면, 유봉휘가 역적이 되느냐 역적이 되지 않느냐와 죽는 것이 마땅하냐 죽는 것이 부당하냐는 것은 많은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환하게 쉽사리 알 수가 있습니다.
아! 유봉휘는 앞에서 창도(唱導)하였는데도 아직 임금이 토죄(討罪)를 늦추고 있으며, 김일경과 목호룡은 이를 호응(呼應)한 것인데도 먼저 현륙(顯戮)1101) 을 당하였으니, 국가(國家)의 형장(刑章)이 어떻게 이와 같이 어긋나는 것입니까? 만약 처음에 당론(黨論)에서 나왔다 하여 용서하여 준다면 김일경의 반역만 유독 당론에서 근원을 구명하지 않겠습니까? 반역의 형상이 이미 밝게 드러났다면 전하께서 비록 그를 죽음에서 용서해 주려고 하여도 결단코 될 수가 없으며, 선왕(先王)께서도 또한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법을 굽혀 보전시켜 준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시어 의리(義理)를 환히 꿰뚫으셨으니, 진실로 능히 마음을 비워 자세히 생각하신다면 일호(一毫)의 사의(私意)로서 흉중(胸中)에 서로 엇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사(公私)·경중(輕重)의 분수에 이리저리 비교하여 헤아려 보고서 말하기를, ‘유봉휘 상소의 본래의 뜻으로써 논한다면 당론(黨論)이 역심(逆心)보다 중하나, 그 죄에 범한 것으로써 논한다면 악역(惡逆)은 당론(黨論)으로써 다스릴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형벌을 받은 사람에게 비록 용서해 주려고 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토죄(討罪)하려고 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겠습니까? 처음에 이미 용서해 주기를 청한 상소가 있었는데, 이제 그 정법(正法)을 허락하면 진실로 차마 못할 바가 있는 것 같다 하여 한 몸을 위하여 은혜를 보이려 하시는 것이 공정한 것이겠습니까? 종사(宗社)를 위하여 토적(討賊)하려고 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겠습니까? 선왕(先王)의 한때의 비지(批旨)가 중함이 되는 것입니까? 조종(祖宗)의 삼척(三尺)의 법이 중함이 되는 것입니까? 여러 신하들은 진실로 모두 당(黨)으로 지목된 사람이므로 그가 말한 것을 혹은 ‘화해하여 용서할 수 없다.’ 하였고, 대소 관료(大小官僚)와 중외 신민(中外臣民)들은 이 적(賊)을 토죄하기를 청하는 것으로써 오늘 제일의 의리로 삼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은 반드시 모두 당론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 하니,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여러 신하들이 연석(筵席)에서 주청(奏請)하고 아뢰는 말이 혹은 너무 지나친 데에 속하긴 하나 충의(忠義)가 격렬(激烈)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다지 그르게 여길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상께서 주장하시는 바가 본래 차마 못하시는 마음에 연유한 것이라고 하나, 사람들이 ‘도리어 인(仁)을 해치고 도리어 의(義)를 해친다.’고 하는 것에 혹은 비슷한 점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우선 먼저 결정하신 뜻을 버리시고 그 과격하게 괴로운 마음을 잊으셔서 이를 늘 생각하시되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서 이와 같이 하여 마침내 내 마음으로 삼으신다면, 요(堯)·순(舜)의 덕(德)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의 청이 호생(好生)의 인덕(人德)에 해로움이 있다면 신도 또한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바라는 바는 다만 전하의 마음이 하루아침에 깨달으신다면 엄중히 징계하고 통렬히 다스리는 것은 반드시 여러 신하들이 굳이 청함을 기다리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마침내 그가 반역이 되는 줄을 깨닫지 못하시고 신 등의 말한 것에 핍박되어 뜻을 굽히고 억지고 따른다면, 신의 말이 비록 혹시 행하여지더라도 그것이 성덕(聖德)에 손상이 있음이 장차 어떻겠습니까? 신이 깊이 바라는 바는 전하께서 공사(公私)의 구분에 있어서 상세히 살피셔서 그 대의(大義)가 있는 바를 환히 보신 다음에 분명하게 토죄(討罪)하게 되는 것이 《맹자(孟子)》에 이른바 ‘죽일 만한 것을 본 다음에 그를 죽인다.’는 뜻에 힘써 부합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또 전하께서 마땅히 유의(留意)하실 바입니다. 성상의 하교에 매양 이 토적(討賊)하는 한 가지 일로 인하여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획을 지연시키는 것으로써 미안하게 여기시니, 오늘날 백성이나 나라의 계획이 망극(罔極)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신으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계획과 기이한 계책을 가지고 새로운 교화[新化]를 도와서 이익되게 한다면 비록 한편에선 토적(討賊)한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한편에선 정사를 하는 곳이 없겠습니까?
또한 신이 일찍이 가생(賈生)1102) 의 말을 듣건대, ‘지금 예의(禮義)를 버리고 염치(廉耻)를 버리는 것이 날로 심하여지는데도 대신(大臣)은 다만 부서(簿書)1103) 를 기일(期日) 안에 보고하는 일로써 큰 사고가 된다 하고, 풍속이 유실(流失)하고 세상이 괴패(壞敗)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대로 편안하게 여기고 괴이하게 여길 줄을 모르며, 속리(俗吏)가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고 폐하(陛下)께서도 또한 스스로 근심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신도 또한 망령되게 생각하기를 전하께서 오늘날의 근심하실 것은 스스로 마땅히 먼저 할 바가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더구나 신이 상지(上旨)를 임시 변통으로 따라서 비록 부서(簿書)를 기일 안에 보고하는 일에 성급하게 하려고 하더라도, 이미 대신(大臣)의 반열에 참여하여 국적(國賊)이 토벌되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면 신은 수악(首惡)의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니, 장차 무슨 안면(顔面)으로 버젓이 정사(政事)하는 당사(堂舍)에서 다시 그 낭리(郞吏)를 대하겠습니까? 신의 이 말은 토적(討賊)하자는 것만이 아니라, 실로 성덕(聖德)을 근심하고 종사(宗社)를 근심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유봉휘의 일은 마침내 회청(回聽)하지 않았다.
김최증(金最曾)의 죄를 특별히 사유(赦宥)하라고 명하였다. 김최증은 바로 김용택(金龍澤)의 아들이다. 임인년1104) 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나이가 차지 않았으므로 그 어미를 따라 사천(泗川)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흉당(凶黨)이 반드시 죽이려고 하므로 그 어미가 숨기고서 역질(疫疾)로 죽었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최증이 의금부(義禁府)에 자수(自首)하니, 임금이 이봉상(李鳳祥)의 일과 다를 것이 없는데 죄는 같으면서 벌은 다를 수 없다고 분부하여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함경도(咸鏡道) 영흥(永興)의 유생(儒生) 정홍제(鄭弘濟)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본부(本府)의 흑석리(黑石里)는 곧 환조(桓祖)의 옛 저택(邸宅)으로 태조(太祖)가 탄생(誕生)하신 곳인데, 가시넝쿨이 무성하여 묻혔으나 아직 봉축(封築)하는 식전(式典)이 없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담을 둘러 쌓고 정민(貞珉)1105) 으로 표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열성(列聖)께서 주필(駐蹕)1106) 하던 곳에도 또한 다 표시하여 기록하는데, 태조께서 탄생하신 곳이 아직도 무성한 잡초의 땅으로 되어 있다니, 그 추모(追慕)하는 도리에 있어 조금도 지연시킬 수가 없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석을 세우고 누각(樓閣)을 세웠다.】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37면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註 1105] 정민(貞珉) : 비석(碑石).[註 1106] 주필(駐蹕) : 임금이 나들이하는 도중에 거가(車駕)를 잠시 멈추고 머무르거나 묵는 일.
충청도(忠淸道) 문의(文義)의 유생(儒生) 오동일(吳東一)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청컨대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를 본현(本縣)의 노봉 서원(魯峰書院)에 추향(追享)하소서. 노봉 서원은 곧 송인수(宋麟壽)·정염(鄭𥖝)·송시열(宋時烈)이 배향된 곳입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정언(正言) 최명상(崔命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에 군흉(群凶)들이 권세를 잡던 날에 무릇 여러 수령(守令)들을 차출(差出)하여 보내는 것이 모두 그 당여(黨與)였는데, 이제 경화(更化)된 뒤로부터 각기 불안(不安)한 마음을 품고서 먼저 권속(眷屬)을 보내고는 관아(官衙)의 일을 제폐(除廢)하고 놀고 있으므로 이로써 백성이 그 곤란을 받고 있으니, 이제부터 이후로는 체직(遞職)이나 파직(罷職)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지 않으면 그 관아의 권속을 보내지 못하게 하여 피폐한 백성의 소란(騷亂)하는 근심을 덜게 하고 관사(官事)의 폐지되는 폐해를 제거(除去)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도(道)로 하여금 신칙(申飭)하게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14일 기유
이정주(李挺周) 홍용조(洪龍祚)를 승지로 권적(權𥛚)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네 차례나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니, 답하기를,
"경(卿)의 아우가 몸소 나라에 충성한 뜻을 생각하여 다시는 정단(呈單)하는 일만 찾지 말고 곧바로 나와서 정사를 보라."
하였다.
7월 15일 경술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고, 승지를 보내어 좌의정 민진원(閔鎭遠)과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에게 유지(諭旨)를 내려서 내정(內庭)의 곡반(哭班)에 입참(入參)하게 하였는데, 민진원 등이 정세(情勢)가 편치 않다는 것으로 서계(書啓)를 붙여서 아뢰고 마침내 명(命)을 받들지 않았으며, 또 차자(箚子)를 올려 토역(討逆)의 뜻을 아뢰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7월 16일 신해
선원록 교정청(璿源錄校正廳)에 당상관(堂上官)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와 우윤(右尹) 홍석보(洪錫輔) 등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전하(殿下)의 헌호(軒號)인 ‘양성(養性)’ 이란 두 글자를 마땅히 선원록(璿源錄)에 기재(記載)하여야 하는데, 삼가 듣건대 이는 바로 숙종(肅宗)께서 주신 바이고 또 숙종 어제시(肅宗御製詩)에 있다고 하니, 청컨대 어제시를 현주(顯註)하는 가운데 첨입(添入)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보첩(譜牒)이란 마땅히 간략(簡略)하여야 하니, 헌호(軒號)의 밑에는 다만 그 사실(事實)만을 기록하고 시(詩)는 마땅히 열성 어제(列聖御製)에다 기재해야겠다."
하였는데, 그 시(詩)에 이르기를,
"두 난간에 새로 액호(額號)를 주시니,
명명(命名)한 뜻이 어찌 무의미한 것이랴?
존심(存心)·양성(養性)의 뜻 알려고 하면,
진심편(盡心篇)1107) 을 깊이 완미(玩味)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최도문(崔道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액정서(掖庭署)이 하례(下隷)가 나졸(邏卒)에게 잡힌 것은 비록 그간의 사실(事實)이 어떠한지를 알 수 없으나, 이미 표지(標識)가 믿을 만한 것이 없었다면 나졸이 법에 의거하여 잡은 것은 다만 대장의 명령만 듣는다는 뜻에 체득(體得)함이 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법을 지키는 패장(牌將)에겐 중한 곤장(棍杖)을 시행하시면서 금령을 범한 액정의 하례는 곧 석방하도록 하시니, 그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고 방금(邦禁)에 손상이 있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직책(職責)이 후원(喉院)1108) 이나 경악(經幄)1109) 에 있는 자가 이미 명령을 미처 돌려보내지도 못하고 또 곧 구원하여 바로잡지도 못한 것을 신은 가만히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윤식(尹植)·심세준(沈世浚)을 그대로 가두라는 하교는 엄격히 막는 성상의 뜻을 알 수가 있는데, 다만 그 가운데 김시환(金始煥)·권신(權賮)과 같은 무리는 대간(臺諫)의 소장(疏章)에서 논핵한 바 탐오(貢汚)함이 낭자(狼藉)한데 미처 조사하여 다스리기 전에 뒤섞여져 석방을 받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히 똑같이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 조사가 마치기를 기다리게 하여야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액례(掖隷)의 일에 대해서는 처분이 어찌 사의(私意)에 끌렸다고 하겠으며, 경악(經幄)과 후원(喉院)에서 즉시 차자(箚子)로 아뢰지 못한 것은 무엇이 손상된 바가 있겠는가? 김시환 등의 일은 사장(査狀)이 이미 이르렀으니 지금은 죄줄 만한 단서가 없다."
하였다. 이에 후원(喉院)과 옥당(玉堂)에서 인혐(引嫌)하여 사면(辭免)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필선(弼善) 나학천(羅學川)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작년에 진소(陳疏)한 그 가운데 두어 가지 관곡(款曲)한 말은 크게 군간(群奸)들의 미워하고 성내는 바가 된 것입니다. 김시빈(金始鑌)의 상소에 이르기를, ‘말한 것이 혹은 아주 정직하나 의중에 협잡(挾雜)이 많다.’ 하였고, 강박(姜樸)의 상소엔 이르기를, ‘심술 정태(心術情態)를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김시빈과 강박은 신과 더불어 서로가 좋아하는 사이였습니다. 그가 신에게 이처럼 너무 야박하게 못할 것인데, 김시빈은 조태억(趙泰億)의 가신(家臣)으로서 그가 선도(善導)하여 이끌어 준 은혜를 후히 받았고, 강박은 이진유(李眞儒)의 가까운 집안으로서 그 교화(敎化)시켜 준 힘을 치우치게 받았기 때문에 신을 팔아서 각각 그 공덕(功德)을 잡는 바탕으로 삼았으니, 소인(小人)의 정상(情狀)은 본래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주상을 속이고 부도(不道)했다는 법을 명백히 시행한 것은 한결같이 법전(法典)에 의거하여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신(臺臣)이 간쟁(諫爭)하는 여러 사람의 죄는 비록 천심(淺深)의 간혹 다름이 있을지라도 전하께서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심을 허용하여 낮추거나 높이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침해(侵害)하고 공박(攻駁)하는 말을 어떻게 다 입에 담겠는가? 역적 김일경을 정법(正法)한 뒤에 수노(收孥)의 형벌을 추가(追加)하였다. 윗사람을 속이고 부도(不道)했는데도 단지 그 자신만을 주벌(誅伐)하였으니, 어떻게 역적 김일경에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병조 판서(兵曹判書) 홍치중(洪致中)이 전일의 상소에 대한 비답으로 인하여 또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곤장(棍杖)을 맞은 두 장교(將校)는 장차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액례(掖隸)의 교만한 횡포는 장차 날로 늘어나 막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기강(紀綱)이 점차 해이해져서 금액(禁掖)에 출입(出入)하는 사람을 도리어 낭리(郞吏)가 거느리는 하례(下隸)만도 못하게 여기니, 마음에 항상 개탄하고 있다. 지난번에 비지(批旨) 가운데서 ‘공경함을 넓히라.’는 말은 액례(掖隸)를 위한 것이 아니고 곧 사체(事體)를 중시(重視)하자는 것이었다. 대간(臺諫)의 상소를 보게 되자 내가 스스로 부추기거나 억제한 것이 너무 치우쳤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미 그 허물을 알고서 어떻게 그 고치기를 주저하겠는가? 액례(掖隸)도 또한 유사(攸司)로 하여금 추고(推考)하여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사간(司諫)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금 이 5적(五賊)은 실로 천고(千古)에 서적(書籍)이 있은 이후로 없었던 흉역(凶逆)입니다. 접때는 대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대정(大庭)을 지키셨을 때에 위로 경재(卿宰)로부터 미관(微官)에 이르기까지 피를 뿜으면서 분발(奮發)하고 앞뒤를 다투면서 분주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유독 병조 판서 홍치중(洪致中) 만이 전후(前後)의 정반(庭班)에 한 번도 나와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로서 역신(逆臣)을 토죄(討罪)하는 데에 어리석고 지혜로운 자가 같이하는 바라면 그 참여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병고(病故)에 연유한 것으로 알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유독 괴이하게도 그는 먼저도 아니고 뒤에도 아니게 정청(庭請)의 의논이 나올 무렵에 병이 발작되었다가 호소하는 반열(班列)이 이미 거두어졌던 날에 곧 나았으니, 이 어찌 질병(疾病)의 오는 것이 마침 이때를 맞추어 발생하는 것입니까? 더구나 그의 아들 홍진유(洪晉猷)는 현재 관직(官職)을 가지고 있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지 않았으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홍진유도 역시 버티기 어려운 병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비의 병을 간호하느라 이에 미칠 겨를이 없는 것입니까? 신은 가만히 중신(重臣)을 위하여 분개하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올 여름에 대단한 가뭄으로 큰 흉년이 이미 판정되었습니다. 매년 기근(飢饉)이든 나머지 남아 있는 피폐한 백성들이 모두 장차 가난하여 의자할 곳이 없게 되었는데, 만약 또 그 여러 해 동안 포흠(逋欠)진 것을 독책(督責)한다면 이것이 어찌 인인(仁人)·군자(君子)의 할 일이겠습니까? 유사(有司)가 빈민(貧民)을 구휼(救恤)하는 방도(方途)에 있어서 비록 일체 견감(蠲減)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보다 앞서 진휼(賑恤)할 때에 여러 고을에서 이전(移轉)할 미조(米租) 중에 가장 오래된 것 1년 조(條)를 탕감(蕩減)하여 준다면 크게 백성의 혜택이 될 것입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묘당(廟堂)에 하문(下問)하여 획일적으로 즉시 시행하게 하고, 빈민(貧民)이 공채(公債)나 사채(私債)를 지고 자신이 죽은 자에 대해서는 청컨대 그 자손(子孫)에게 침범하여 징수(徵收)하는 것을 금하게 하소서. 지난번 법사(法司)에서 출금(出禁)1110) 할 때에 금리(禁吏)가 도시(都市)에서 소란을 피우면서 함부로 속전(贖錢)을 징수하는 것을 금지시키지 않았으므로 백성이 지탱하여 견딜 수가 없었으니, 마땅히 여러 관사에 특별히 단속하여 한결같이 법조(法條)에 의거하여 과죄(科罪)하고 다시는 속전을 징수하지 말게 하며, 금리의 무리가 함부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별도로 엄중하게 추구(追究)하여 도민(都民)의 폐단을 제거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 신유익(愼惟益)의 패란(悖亂)한 거조(擧措)와 장회(贓賄)의 정치에 온 섬[島]의 인민(人民)이 물이나 불 속에 있는 것과 같았으니, 이미 교체(交遞)하였다고 해서 그대로 놓아 둘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잡아다 조사하여 과죄(科罪)하여야 하고,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필우(朴弼禹)는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으로서 씻기 어려운 누(累)가 있는데도 요급(料給)을 파는 것으로 힘을 써서 정령(政令)이 어긋나게 되니, 마땅히 그 직임(職任)을 파면시켜야 하며, 창성 부사(昌城府使) 홍하석(洪夏錫)은 만상(灣商)1111) 과 체결(締結)하여 지칙(支勅)1112) 으로 내어 준다고 하면서 쌓아 놓았던 전화(錢貨)·은금(銀錦)을 모두 사탁(私槖)으로 돌리고는 칙사(勅使)의 수용(需用)이라고 핑계를 대고는 또다시 더 거두었으니, 파직하는 것으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시키는 형률(刑律)을 시행하여야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질병(疾病)은 사람이 면하기 어려운 바이며 아비의 병을 구호(救護)하는 것은 이치에 당연한 일이다. 이전(移轉)하는 쌀을 적당히 감하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고, 채무(債務)를 보상하는 일은 별도로 경사(京司)나 외방(外方)에 신칙(申飭)할 것이며, 민간(民間)에서 함부로 소란을 피우는 자는 중률(重律)로써 다스려 백성의 피해를 제거시키고, 신유익(愼惟益)을 나문(拿問)하는 것과 두 수령(守令)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서종일(徐宗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서덕수(徐德修)는 곧 신(臣)의 망형(亡兄)인 신(臣) 증 부원군(贈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장손(長孫)입니다. 장차 제사를 이어받은 자인데도 그가 이미 죄명(罪名)이 씻겨지지 않았으니, 예법(禮法)으로써 헤아려 본다면 후사(後嗣)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망형(亡兄)의 후사(後嗣)로 계승할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통박(慟迫)한 사사로운 정상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그 가운데 이른바 결안(結案)1113) 에 대해서 본다면 독약(毒藥)을 썼다는 한 가지 항목은 더욱 이것이 매우 위태하고 두려운 일인데, 이는 날짜와 달이 서로 틀리고 사증(詞證)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또 삼가 듣건대, 연중(筵中)에서 그 허망(虛妄)함을 통촉(洞燭)하셨다는 분부가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망형(亡兄)집의 남이 모르는 억울한 원한(怨恨)은 거의 풀어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침내 명백하게 반포하여 보여 준 일이 없으므로, 신은 의아스럽고 답답함을 견딜수가 없습니다. ‘무고(誣告)’ 란 명목(名目)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변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무고(誣告)와 무복(誣服)은 정절(情節)이 아주 다르고 죄명(罪名)이 각각 다릅니다. ‘무고(誣告)’ 란 것은 곧 무고(無辜)한 것을 무함(誣陷)하여 공상(功賞)을 희망하는 자이고, ‘무복(誣服)’이란 것은 곧 고문[拷掠]을 견디지 못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자복(自服)하는 것입니다. 지난 역사를 두루 살펴보건대, 선량(善良)한 사람으로 고문하는 밑에서 억지로 굴복한 자가 어찌 한정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은 시비(是非)·선악(善惡)을 분별함도 없이 곧바로 무고(誣告)로 단정하게 되니, 신이 마음속으로 민망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의 처분은 의도(意圖)가 있었던 일이다. 지난번에 무옥(誣獄)으로 단련(鍛鍊)받을 시기를 당하여 그 가운데 빠져서 무복(誣服)한 것도 또한 몹시 슬픈 일이다. 그 자신이 세가(世家)에서 나서 일찍이 경전(經傳)을 배웠을 것인데, 어찌 그런 사이에서 동요되어 굴복하였겠는가? 이는 사람마다 책망할 수 없는 것이며, 문목(問目)의 밖에는 위로 대신(大臣)으로부터 아래로 정신(廷臣)에 이르기까지 악역(惡逆)에 빠뜨리게 하였으니, 그 뒤에 삼사(三司)의 계달(啓達)에서 무슨 말을 끌어대어 다투겠는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마음과 뼈가 모두 아프다. 또 서덕수(徐德修)의 일로써 그대 선조(先祖)의 충근(忠謹)한 기풍을 떨어뜨리게 하였으니, 이것을 내가 마음속에 몹시 슬퍼하는 바이다. 대저 혈기(血氣)가 정하여지지 않은 자가 고문(拷問)을 견디지 못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한 것은 무복(誣服)에 지나지 않는데, 특별히 무고(誣告)의 형률(刑律)로써 적용하도록 명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날의 일을 통탄스럽게 여긴 것이고 한편으로는 죽게 된 때를 당하여 무복(誣服)했던 것을 징계하는 뜻이다. 지금 그대의 상소를 살펴보니, 나도 또한 슬픔 느낌이 든다. 아뢴 대로 시행하여서 그대 형의 영혼을 위로하지 않겠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무복(誣服)으로써 논하게 하라."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중화 부사(中和府使) 여위량(呂渭良), 순안 현령(順安縣令) 박필기(朴弼夔), 양덕 현감(陽德縣監) 김대(金岱), 전(前) 현감(縣監) 권수봉(權壽鳳), 맹산 현감(孟山縣監) 김열(金冽)을 잡아다 사실을 조사하도록 했으니, 평안도 어사(平安道御史) 홍성보(洪聖輔)가 그들이 장물(贓物)을 탐하고 불법(不法)한 짓을 한 것을 아뢰어 논핵했기 때문이었다.
7월 17일 임자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이때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상호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요즘에 정청(庭請)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혹은 과격한 괴로움이 많아서 거듭 미안하다는 하교를 내리셨다 하는데, 신이 감히 알 수는 없지마는, 전하께서 진실로 정신(廷臣)의 의논으로써 과당(過當)한 행동으로 여기시고 찬출(竄黜)하는 경(輕)한 벌(罰)로 여러 적(賊)의 죄를 징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 여러 적의 흉역(凶逆)은 실로 이것이 고금(古今)의 듣기 드문 바입니다. 전하께서 오래도록 윤허(允許)를 아끼시면서 도리어 이이(訑訑)1114) 한 언어(語言)와 안색(顔色)으로써 의리를 지켜 역적을 토벌하는 대신(大臣)에게 베푸시니, 의리(義理)는 날로 어두워지고 이륜(彛倫)은 날로 무너지므로 죽게 된 노신(老臣)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지경에 도달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빨리 정신(庭臣)의 청을 윤허하신다면 종사(宗社)의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서 그를 올라오라고 독촉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시(諭示)를 전하였다.
중신(重臣)과 근신(近臣)을 보내어 풍운뇌우(風雲雷雨)·산천(山川)·우사단(雩祀壇)·용산강(龍山江)·저자도(楮子島)에 기우제(祈雨祭)를 설행(設行)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날《논어(論語)》의 강독(講讀)을 마치고 잇따라 《맹자(孟子)》를 강독하였는데, 강독이 끝나자 특진관(特進官) 이의현(李宜顯)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전(前)부응교(副應敎) 이기진(李箕鎭)을 특파(特罷)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이기진은 그날 삼사(三司)의 합계(合啓)에 연명(聯名)하고는 곧바로 이의천(李倚天)의 상소로 인하여 패초(牌招)를 어기는 데 이르게 된 것이니, 이는 무난히 패초를 어긴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집에 있으면서 연명(聯名)하는 것도 또한 전례(前例)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규례(規例)가 어느때부터 시작되었는가?"
하자, 지경연(知經筵)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경복궁(景福宮)에 이른바 성상소(城上所)1115) 가 있습니다. 한 명의 대관(臺官)이 성상소에 앉아서 전계(傳啓)하면 밖에 있는 여러 대관은 다만 연명(聯名)만 할 뿐이니, 지금의 성상소라는 것은 대개 이 규례를 따른 것이며 밖에 있으면서 연명하는 것도 이것이 옛날의 규례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의 규례가 이와 같다면 하루아침에 변경시킬 수 없으니, 예전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또 차자(箚子)를 올려서 사면(辭免)을 원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大司諫) 이교악(李喬岳)이 상소하여 정청(庭請)에 대한 비지(批旨) 가운데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下敎)를 고칠 것을 청하고, 인하여 두 대신(大臣)에게 나라의 일을 함께 이루어 나가도록 하자는 뜻으로써 돈유(敦諭)할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경(卿)의 말한 것이 모두 좋으니, 내가 마땅히 더 마음에 두겠다."
하였다.
기호(畿湖) 유생(儒生) 정수걸(鄭壽杰)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의 서원(書院)을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실현(任實縣)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눈이 셋이고 뿔이 넷이었다.
7월 19일 갑인
임금이 오래 가무는 것을 근심하여 하교하기를,
"아!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써 하늘을 삼는데, 백성이 먹을 것이 없으면 장차 어떻게 백성의 구실을 하며 나라가 백성이 없으면 장차 어떻게 나라의 구실을 하겠는가? 아! 8도(八道) 백성의 곤궁하고 초췌(憔瘁)함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한데다 해마다 거듭 흉년이 들고 역질(疫疾)마저 겹쳤으며, 탐관오리(貪官汚吏)는 백성의 재물을 걸태질하는 것을 일삼아서 군포(軍布)와 신역(身役)을 죽은 사람에게도 함부로 징수(徵收)하고 있으니, 슬프도다. 백성[生靈]이 앞으로 어떻게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다 붕당(朋黨)을 만들어 아부(阿附)하는 풍습이 요즘보다 심할 때가 없어서 나라의 일은 생각 밖에 두고 한 가지도 시행하거나 조처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진실로 나의 허물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매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자지 못하겠고 밥상을 대하여도 밥맛을 모르겠다. 밤낮으로 기원(祈願)하는 바는 다만 금년의 농사가 조금이나마 풍년이 드는데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큰 가뭄이 혹심하여 삼남(三南)1116) 의 농사는 이미 큰 흉년으로 판정이 되었다. 아! 백성들이 나의 덕이 부족한 탓으로 인하여 이런 참혹한 재해(災害)를 받았으니, 내가 흰 쌀밥을 먹더라도 어찌 편안하겠는가? 만약 한번 세찬 비가 쏟아지지 않는다면 죽음이 장차 다가올 것이니, 내 몸이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직접 기도(祈禱)하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좋은 날을 택하지 말고 이달 21일에 내가 마땅히 사직단(社稷壇)에서 직접 기도하겠다. 아! 가까이 있는 신하들은 나를 대신하여 교지(敎旨)를 기초(起草)하되, 마땅히 의정부(議政府)로부터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바로잡게 하라. 말한 것이 비록 중도에 지나친다 하더라도 내가 마땅히 가납(嘉納)하겠다."
하니, 승정원에서 청하기를,
"대찬(代撰)하지 말고 상교(上敎)로써 반포(頒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이 여덟 번이나 사직소를 올렸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사직단(社稷壇)에 친히 기우(祈雨)할 때에 보상(輔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소(敦召)하였으나, 이관명은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
임금이 특별한 유지(諭旨)로써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을 돈소(敦召)하였으나, 민진원은 다시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辭免)을 원하였다.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는데, 심지어는 몸소 임하여 직접 유시한다는 하교까지 있었으니, 민진원이 황공(惶恐)하여 명을 받들었다.
병조 판서 홍치중(洪致中)이, 사간(司諫)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하여 배척한 것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辯明)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위로하며 해명(解明)시켰다.
7월 19일 갑인
이병상(李秉常)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홍현보(洪鉉輔)를 부응교(副應敎)로, 서종섭(徐宗燮)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7월 20일 을묘
임금이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을 인견(引見)하고 친히 그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가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이 큰 기업(基業)을 받들게 되었으니, 믿는 사람은 다만 보상(輔相)뿐인데, 오늘의 국사(國事)를 장차 어느 지경에 둘려고 경(卿)이 이처럼 돌아보지 않고서 가려고 하는가?"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토적(討賊)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토적(討賊)한 뒤에야 인륜(人倫)이 밝아질 것이며, 인륜이 밝아진 다음에야 나라가 제대로 될 것입니다. 보상(輔相)의 임무는 그 책임이 매우 중하므로, 이미 능히 토적(討賊)을 못하였으니, 하루라도 함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정승의 직임을 교체(交遞)하여 서추(西樞)1117) 에 있게 하신다면 그나마 기거(起居)하는 반열에 참여하여 간혹 마음에 품은 바를 진달하는 것이 원하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이 말한 것을 그르게 여기고 저 흉배(凶輩)의 죄가 없다고 여기신다면 빨리 신의 직책을 파면시키고 언의(言議)하는데 평온(平穩)한 사람을 다시 정승을 가려 임명할 것이요, 만약 신이 말한 것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마땅히 속히 처분(處分)을 내려야 할 것이니, 지금 신 등이 고집하는 큰 의리(義理)로써 쓸 수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로 하여금 그대로 정승(政丞)의 직무에 있게 하는 것은 결단코 옳지 않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선조(先朝)와 전하를 저버리고서 떠나 버리겠습니까? 성현(聖賢)의 말로써 살펴본다면 ‘신하가 군주를 섬기다가 말한 것이 행하여지지 않으면 물러간다.’고 하였으니, 어찌 한때의 은권(恩眷)으로써 분주하게 명령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선조(宣祖) 때 대신(大臣) 이준경(李浚慶)은 을사년1118) 의 위훈(僞勳)을 삭제할 것을 청하는 일로써 정청(庭請)하고 혹은 3, 4일이 되어서야 멈추고 혹은 5, 6일이 되어서야 멈추므로, 어느 사람이 물어 본 자가 있었는데, 답하기를, ‘이는 바로 한 나라의 공의(公議)를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이요 독촉(督促)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그때에 잠깐 아뢰었다가 곧 바로 정지하면서 능히 지성으로 감회(感回)시키지 못했다는 것으로써 슬퍼하며 근심하고 탄식하였으나, 오늘의 이 일은 전하께서 매양 삼사(三司)에게 맡기라고 하셨는데, 다른 죄인(罪人)이라면 그래도 되겠지마는 유봉휘(柳鳳輝)에 이르러서는 다른 역적과는 다른데, 어찌 삼사(三司)에게 맡기고서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뜻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내가 허락을 아낀 것은 이미 비지(批旨)나 연교(筵敎)에서 다 말하였고, 모든 신료(臣僚)가 뜰에 가득히 서고 대신(大臣)이 강력히 간쟁(諫爭)한 까닭으로써 헤아려서 처리한 바가 있으니, 이것은 끝내 윤허(允許)를 아낀 것과는 다름이 있다. 그리고 삼사(三司)에게 맡긴 것에 이르러서는 미루어 핑계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옳고 그른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말이 그르면 물리치시고 옳으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말한 것을 쓰지도 않고 또 체직(遞職)하지도 않으면서 공무(公務)를 집행하게 하니, 신이 고집하는 의리가 이미 행하여지지도 않는데, 어떻게 함부로 정승의 직책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고 그른 것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은 내가 알 수 없는 바이다. 지난번 우의정의 말에서 이미 말한 내용이 엄중하고 의리가 바르다고 하였으면 옳고 그른 것은 이미 밝혀진 것인데, 하필이면 유봉휘를 정법(正法)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옳고 그른 것이 크게 밝아진다는 것인가?"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유봉휘를 안치(安置)하라는 전지(傳旨)를 먼저 받아들이자고 청하였는데, 성상(聖上)께서 정청(庭請)이 한창 일어난 이유로써 지금은 아직 내버려 두라고 분부하셨지마는 지금은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경흥부(慶興府)에 안치(安置)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경소전(敬昭殿)의 연제(練祭)의 기일(期日)이 이미 박두하였으니, 외방(外方)에 있는 2품(品) 이상의 관원을 특별히 유시(諭示)하여 올라오게 하여 널리 묻고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의논한다는 말은 좋다."
하였다.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免職)을 원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돈소(敦召)하였다.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에 거동하였으니, 장차 기우(祈雨)하려는 것이었다. 어가(御駕)가 떠날 때에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우상(右相)이 지영(祇迎)할 때에는 반드시 제고(提告)하라."
하였다. 순청교(巡廳橋)에 이르렀는데, 이관명(李觀命)이 길 왼쪽에서 지영(祇迎)하니, 승지(承旨)가 고(告)하였다. 임금이 연(輦)을 멈추고 승지를 보내어 이관명을 부르니, 이관명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어가(御駕) 앞에 나아가 뵈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오늘의 국사(國事)를 어떻다고 여기는가? 삼공(三公)에 있는 사람은 결단코 인피(引避)하여 물러갈 수만은 없는 일이다. 더구나 경이 정승에 임명된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성급히 정단(呈單)하는 길만을 찾을 수 있겠는가? 내가 믿는 것은 다만 보상(輔相)뿐이니, 반드시 면유(面諭)한 일을 본받아 꼭 어가(御駕)를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신이 고집하는 바의 의리는 곧 온 나라의 공공(公共)의 의논입니다.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도리는 다만 영화로운 작록(爵祿)만을 위할 뿐만은 아닙니다. 말이 시행되지 못하면 물러가는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신이 관련된 까닭으로 오래도록 연(輦)을 멈추게 했으니, 신은 진실로 황공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배종(陪從)한다는 것을 안 다음에야 내가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좌상(左相)을 인견(引見)하였을 때에 이미 연교(筵敎)가 있었으니, 입시(入侍)한 승지(承旨)에게 시험삼아 물어보라."
하였는데, 이에 승지 홍용조(洪龍祚)가 그 연교(筵敎)를 그대로 전하였으니, 대개 외방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올라온 뒤에 다시 의논하는 일이었다. 이관명이 말하기를,
"오늘의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신은 삼가 마땅히 배종(陪從)하겠습니다."
하니, 대가(大駕)가 이내 거둥하게 되었다.
7월 21일 병진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에서 기우제(祈雨祭)를 거행하였다.
이날 임금이 사직단으로부터 회가(回駕)하다가 의금부(義禁府) 앞길에 이르러 의금부에 몸소 가서 옥수(獄囚)을 소석(疏釋)하라는 명을 내리니, 도승지(都承旨) 김취로(金取魯) 등이 나와서 말하기를,
"형살(刑殺)하는 곳에는 마땅히 친히 가실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이에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연(輦)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의금부(義禁府)의 국수(鞫囚) 외에는 다른 죄수는 없습니다. 법가(法駕)1119) 가 환어(還御)하신 뒤에 천천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도 될 것인데, 어찌 반드시 친히 보려고 하십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고, 마침내 의금부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의금부 당상관(義禁府堂上官)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이내 국옥(鞫獄)의 여러 죄수를 참작하여 결정하였는데, 이삼(李森)은 극변(極邊)에 안치(安置)하고, 심정옥(沈廷玉)은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하였으며, 심정신(沈廷紳)은 정배(定配)하고, 목천임(睦天任)은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하였으며, 유경유(柳慶裕)는 도로 배소(配所)로 보내고, 심수관(沈受觀)과 언례(彦禮)는 놓아 보냈다. 대신과 삼사(三司)에서 강력히 간쟁(諫爭)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심정옥은 심익창(沈益昌)의 장자(長子)인데, 심익창이 박상검(朴尙儉)·김일경(金一鏡)과 서로 내통한 일이 죄인 정우관(鄭宇寬)·손형좌(孫荊佐)의 공초(供招)에서 나왔으므로, 심익창은 이미 죽어서 추구(推究)하여 조사할 수가 없는 까닭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국문(鞫問)을 명한 것이다. 심정신은 심정옥의 아우이고 언례(彦禮)는 박상검의 물긷는 여종[婢]이다. 이삼(李森)·목천임(睦天任)·윤추상(尹就尙)은 김일경과 박상검을 체결(締結)하여 정국(政局)을 바꿀 것을 몰래 도모했는데, 이것이 모두 심정옥의 공초에서 나왔다. 이중환(李重煥)은 이잠(李潛)의 족손(族孫)인데, 목호룡(睦虎龍)이 그 원훈(元勳)을 양보하였기 때문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잡아다 국문한 것이다. 원일서(元日瑞)는 원휘(元徽)의 아들이다. 원휘가 이삼·목천임·윤취상(尹就商)·유경유(柳慶裕)·심수관(沈受觀) 등과 더불어 은화(銀貨)를 모아 박상검에게 뇌물로 바친 형상이 정우관(鄭佑寬)·손형좌(孫荊佐)의 공초에서 나왔으나, 원휘(元徽)는 이미 죽었으므로 원일서(元日瑞)를 문초하지 않으면 추구하여 조사할 수 없기 때문에 잡아다 국문하였다. 유경유와 심수관도 또한 김일경과 목호룡에게 서로 내통하였으므로 잡아다 국문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심정옥을 문초하니, 심정옥이 공초하기를,
"원휘(元徽)는 신(臣)의 이성(異姓) 재종친(再從親)이고, 김일경(金一鏡)은 신 전모(前母)의 지친(至親)이며, 박상검(朴尙儉)은 신의 집에서 수학(受學)하였고 또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신축년1120) 7월 그믐 무렵에 밤이 깊은 뒤에 박상검의 집에서 불빛이 있었고 또 문을 여는 소리가 있었으므로, 다음날 박상검의 집에 물 긷는 여종[婢] 언례(彦禮)에게 물어보니, 언례가 말하기를, ‘아계동(丫溪洞)의 김 참의(金參議), 원주(原州)의 원서방(元書房)과 진사(進士) 윤선달(尹先達)이 밤이 깊은데 문득 모였다.’고 하였고, 그 뒤에 박상검에게 물어 보았더니, ‘원휘(元徽)도 자주 와서 모인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김 참의는 곧 김일경이고 원 서방은 원일서(元日瑞)이며, 진사는 곧 목천임(睦天任)이고, 윤선달은 곧 윤취상(尹就商)입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신축년 9월에 신이 고향에 내려갔다가 동짓달 그믐 무렵에야 비로소 돌아왔으니, 그 사이의 일은 신의 넷째 아우인 심정신(沈廷紳)이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하므로, 이에 심정신과 언례를 국문(鞫問)하였으나 모두 변명하고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다시 심정옥을 추국(推鞫)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박상검에게 등불을 밝히고 모였던 일을 물으니, 박상검이 말하기를, ‘원휘·윤취상·목천임·원일서가 환국(煥局)1121) 을 모의(謀議)하였는데, 환국된 뒤에는 윤취상은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고, 원휘는 평안도 병사(平安道兵使)가 되며, 목천임은 그가 승륙(陞六)1122) 되는 것과 그 조부(祖父)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는 일을 도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김일경의 집에 간 것이 6, 7차례나 되는데, 박상검과 같이 간 것은 3차례이고, 김일경이 박상검의 집에 와서 모인 것은 여러 차례뿐만이 아니었으나, 신이 김일경과 함께 박상검의 집에 와서 모인 것은 여러 차례뿐만이 아니었으나, 신이 김일경과 함께 박상검을 만난 것은 한 차례였고, 김일경이 신의 집으로 찾아 온 것도 또한 한 차례였습니다. 신축년 9월에 신이 박상검과 함께 김일경의 집에 같이 갔을 때에 그곳에 있던 철릭(帖裏)1123) 을 입은 한 무인(武人)이 나갔으므로, 신이 물어 보고 나서 이삼(李森)인 것을 알았습니다. 김일경이 곧 박상검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이름난 무인인데, 나와 더불어 같이 일을 하면 앞날에는 크게 쓰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신이 원휘의 집에 갔었는데, 이삼이 이미 자리에 있었습니다. 원휘가 신을 가리키면서 이삼에게 말하기를, ‘저 사람은 곧 나와 〈이성(異姓)으로〉 재종(再從) 간이 되는 심정옥이다.’고 하였고, 다시 이삼을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곧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삼(李森)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삼이 신에게 전일 아동(丫洞)에 같이 간 소환(小宦)을 묻기에, 신이 말하기를, ‘박상검이었다.’고 하니, 이삼은 그가 일찍이 알지 못하고 그때에 수작(酬酢)한 것을 한(恨)스러워하였으며, 또 신축년 10월에 밤이 깊은 뒤에 김일경이 박상검의 집에 와서 신을 맞이하여 이르기를, ‘조금 전에 이삼이 이곳에 와서 그대와 서로 만나 보려고 하다가 그대가 늦게 오는 까닭으로 혹시 이웃집에 발각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곧바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였는데, 대개 승지(承旨) 정필동(鄭必東)의 집이 앞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월에 다시 박상검과 같이 김일경의 집에 갔었는데, 심단(沈檀)이 이미 먼저 자리에 와서 있었습니다. 김일경이 박상검에게 이르기를, ‘심단은 어찌 정승(政丞)에 합당하지 않는가?’ 하니, 박상검이 말하기를, ‘최석항(崔錫恒)과 심단이 모두 합당하긴 하나 최석항이 마땅히 먼저 정승이 되어야 하니, 심단은 우선 먼저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김일경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잘 주선(周旋)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신축년 12월 초2일 밤에 박상검의 집에 갔었는데, 인정(人定)1124) 이 된 뒤에 누구인가 문에 다가와서 목소리를 낮추어 박상검을 부르니, 박상검이 신은 남겨둔 채 나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기에 신이 몰래 가서 엿보았더니, 박상검이 손[客]과 같이 대문(大門)왼쪽 난간 위에 있었는데, 손이 박상검에게 이르기를, ‘그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만약 대장의 직임(職任)을 얻는다면 마땅히 힘을 다하여 그대의 집 산업(産業)을 힘써 도울 것이다.’라고 하니, 박상검이 웃으면서 손에게 이르기를, ‘비록 구차(久次)1125) 로써 논하더라도 저절로 마땅히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조급하게 서두는가?’ 하니, 손도 또한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급히 공격하여 기회를 잃지 말라[急擊勿失]〉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고 하였습니다. 신은 드디어 들어와 앉았다가 박상검에게 묻기를, ‘손은 누구냐?’고 하니, 박상검이 말하기를, ‘곧 전일에 말한 윤선달(尹先達)이다.’고 하기에 신은 그가 윤취상(尹就商)인 것을 알았으며 이내 수작(酬酌)을 했는데, 윤취상이 갈 때에 ‘누설하지 말라.’고 경계하였고, 박상검도 신의 손을 잡고는 서로가 경계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목천임(睦天任)·이삼(李森)·윤취상(尹就商)을 모두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대개 이삼은 전일에 대계(臺啓)로써 원찬(遠竄)되었고 윤취상도 또한 일찍이 정우관(鄭宇寬)의 공초에 나왔으므로 잠깐 국문(鞫問)하고 곧바로 귀양보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잡아와서 마침내 정국(庭鞫)하게 되었다. 윤취상은 4차례의 형신(刑訊)을 받았으나, 끝내 자복(自服)하지 않고 곧 넘어져 죽었다. 이삼을 추국(推鞫)하였으나 이삼이 자복하지 않았으로 심정옥(沈廷玉)과 면질(面質)시켰다. 심정옥이 이삼을 향하여 말하기를,
"신축년 9월에 내가 박상검과 같이 김일경의 집에 갔을 때에 나는 먼저 들어가고 박상검은 다음에 들어왔는데, 마루에 올라가려 할 때에 네가 나왔으므로 김일경에게 물어 보고는 너인 줄을 알았다. 그날 내가 마침 말을 빌려서 타고 갔기 때문에 박상검은 머물고 있었으나 나는 돌아왔다. 지나는 길에 원휘의 집에 들렸는데, 그때 너는 이미 앉아 있었다."
하니, 이삼이 심정옥을 향하여 말하기를,
"너의 처음 공초(供招)에선 이미 말하기를, ‘처음에는 나를 김일경의 집에서 보았다고 하다가 뒤에 가서는 나를 원휘의 집에서 보았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곧 말하기를, ‘김일경의 집에서 돌아올 때에 원휘의 집에서 보았다.’고 하니, 어떻게 그 말이 서로 어긋나는가?"
하며 서로가 증거를 대어 변론(辯論)하였으나, 끝내 승부(勝負)가 없었다. 목천임을 국문하였으나, 목천임이 자복하지 않았다. 그때에 목천임이 그의 털로 만든 갖옷을 나장(羅將)인 유복상(兪卜尙)에게 뇌물로 주어서 심정옥으로 하여금 변사(變辭)하게 하고 심정신(沈廷紳)도 또한 심정옥에게 편지를 전하여 변사(變辭)하게 하니, 심정옥이 과연 변사하였는데, 편지로 내통한 일이 발각이 되자 나장(羅將) 유복상(兪卜尙)·김삼봉(金三奉)·김부귀(金富貴)를 모두 형률에 의하여 처벌하였다.
그리고 원일서(元日瑞)를 추국하여 은화(銀貨)를 모아 환첩(宦妾)을 체결(締結)하여 박상검의 집에 모여서 환국(換局)을 모의(謀議)한 일에 대하여 물었으나 원일서는 자복하지 않았고, 유경유(柳慶裕)를 추국하여 은화를 모아 환첩을 체결한 상황을 물었으나 유경유도 또한 자복하지 않았으며, 이중환(李重煥)을 추국하여 목호룡(睦虎龍)이 공훈(功勳)을 양보하는 일로써 이잠(李潛)을 추켜 세워서 자랑한 뜻을 가지고 물었으나 이중환도 또한 자복하지 않았다. 심수관(沈受觀)은 이름 글자가 틀렸다는 이유로써 우선 수금(囚禁)을 명하였는데, 이로부터 추국(推鞫)을 연달아 행하여 목천임은 형신(刑訊)을 받은 것이 2차례나 되었고 심정옥과 언례(彦禮)는 형신이 4차례나 되었으며, 이중환은 형신이 6차례나 되었고, 원일서는 형신이 5차례나 되었으며, 유경유·이삼·심정신은 다만 엄격히 묻기만 하고 형벌(刑罰)은 가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호두각(虎頭閣)에 나아가 이삼에게 심정옥이 공초한 가운데 김일경·박상검과 체결(締結)했다는 정상(情狀)을 가지고 물으니, 이삼이 공초하기를,
"심정옥(沈廷玉)의 처음에 공초한 것이 면질(面質)할 때와 서로 어긋납니다. 신이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제수된 것은 바로 신축년 10월에 있었는데, 그의 이른바 ‘9월에 신을 원휘의 집에서 만나서 곧 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충청 병사라」고 하였다.’는 것은 신이 제배(除拜)되기 전에 원휘가 어찌 미리 충청 병사로 지칭하였겠습니까? 박상검의 집에서 서로 만난 일이 국면(局面)을 바꿀 것을 도모하였다면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며, 제가 또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면 어찌 신이 있을 때에 저를 부르지 않고 반드시 신이 돌아가기를 기다려 불렀겠습니까?"
하니, 다시 묻기를,
"국휼(國恤)이 났던 처음에 역적 김일경이 진중(陣中)에 돌입(突入)할 때 네가 영기(令旗)1126) 를 가지고 3차례나 들어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삼이 공초하기를,
"군중(軍中)에 영기가 없으면 진(陣)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규례(規例)입니다. 역적 김일경이 위세(威勢)로써 돌입(突入)하려고 하기 때문에 신이 그로 하여금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는데, 영(令)이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장교(將校)가 위세에 겁을 내어 먼저 이미 진문(陣門)을 열어 주어 들어오게 했기 때문에 신이 곧 그 장교를 곤장(棍杖)을 쳐서 태거(汰去)하였습니다. 그 뒤에 김일경이 또 진문(陣門)으로 돌입하려고 하니, 장교 안종국(安宗國)이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다가 끝내는 능히 거절하지 못하였으므로 신이 안종국을 태거(汰去)시키지 않은 것은 처음에 능히 거절하였기 때문이요, 안종국을 곤장으로 다스린 것은 끝내 능히 거절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대간(臺諫)에서 말하기를, ‘곧 신이 안종국을 곤장친 것은 처음에 역적 김일경을 거절한 죄라.’고 하였으니, 이는 사실과 어긋납니다."
하였다. 심정옥에게 물어보니, 심정옥이 공초하기를,
"김일경과 박상검이 모인 일은 손형좌(孫荊佐)가 이를 알고 있는데, 신의 집에서는 서로가 모인 일이 없습니다."
하고, 박상검의 집과 담을 뚫고 서로 통행한 일에 대하여 물으니, 공초하기를,
"이는 박상검의 집이 적몰(籍沒)된 뒤에 그 집에 들어간 자의 소행입니다."
하였다. 언례에게 묻기를,
"김일경이 박상검의 집에서 모였는가, 심정옥의 집에서 모였는가?"
하니, 언례가 공초하기를,
"심정옥의 집은 동쪽과 서쪽에 두 군데 문이 있는데, 항상 동문(東門)으로 들어와서 모퉁이 방에서 모였습니다. 그런데 밤에 모일 때에는 비록 아무 아무가 모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박상검이 오면 반드시 심정옥의 있고 없는가를 물었으며, 심정옥이 오면 반드시 박상검이 돌아갔는가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박상검의 집에서 모였는가 안 모였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해 모퉁이 방이 있는가 없는가를 심정옥에게 물으니, 공초하기를,
"모퉁이 방이 있었습니다마는, 어찌 역적 김일경과 서로 모인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심정신(沈廷紳)에게 묻기를,
"요사한 박상검이 환관(宦官)이 된 뒤에 너의 집에 왕래(往來)하였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박상검이 환관(宦官)이 된 뒤에 왕래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신의 집에 두 군데에 문이 있어서 지름길이 되기 때문에 박상검이 때때로 왕래하였는데, 유독 박상검만이 아니고 다른 환관도 또한 더러 왕래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중환(李重煥)에게 묻기를,
"네가 만약 범(犯)한 바가 없다면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무슨 까닭으로 원공(元功)이라 지칭(指稱)하는가? 역적 목호룡의 상소와 목시룡(睦時龍)의 공초(供招)가 아직 있는데 네가 어찌 감히 발명할 수가 있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정유년1127) 에 신이 설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더라도 임인년1128) 에 이르러서는 원래 상관되지 않는 일입니다. 신이 대계(臺啓)를 만나게 되자 호적(虎賊)1129) 이 갑자기 상소하여 신을 마치 대공(大功)이 있는 것 같이 하였으니 매우 웃을 만한 일이며, 이것은 그가 역마(驛馬)를 도둑질하여 숨긴 자취를 숨기려고 맹랑한 말을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변(告變)을 격동시켜 권유하였다는 말은 진실로 매우 애매(曖昧)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역마(驛馬)의 사건은 어느 해에 있었으며, 이중환(李重限)이 옥에 갇힌 것은 또 어느 해에 있었는가?"
하니, 좌의정 민진원이 말하기를,
"역마의 사건은 정유년에 있었고, 이중환이 옥에 갇힌 것은 계묘년1130) 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이중환에게〉 묻기를,
"네가 비록 호적(虎賊)에게 상변(上變)하라고 권유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마는, 이미 이잠(李潛)을 칭찬하고 또 사마소(司馬昭)에 비하는 설(說)이 있었다면 곧 권유하여 성사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만약 계묘년에 역마(驛馬)의 사건으로써 미봉(彌縫)하려고 해서 너의 이름을 거론하였다면 그래도 되겠지마는, 임인년에는 역마의 사건이 없었는데도 호적(虎賊)이 ‘네가 상변(上變)을 격동시켜 권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이는 호적(虎賊)이 구함(構陷)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혹은 유혹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하니,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계묘년의 추안(推案)을 취입(取入)하여 이중환의 공사(供辭)를 읽으라고 명하고는 ‘말한 것이 비록 맞지는 않았으나 죽은 것은 또한 슬피 여길 만하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로써 이중환에게 물으라."
하니, 이중환이 공초하기를,
"‘맞지 않았다.’ 란 것은 추천하여 칭찬한 말이 아니고, ‘슬피 여길 만하다.’ 란 것은 한집안의 사정(私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묻기를,
"맞지 않았다느니 슬피여길 만하다느니 하는 등의 말은 네가 비록 추천하여 칭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마는, 계묘년에 이르러 이에 말한 ‘단심(丹心)에서 우러나는 충성과 진심(眞心)에서 나오는 정성으로 무릇 상도(常道)를 굳게 잡은 천성(天性)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그 절의(節義)를 칭도(稱道)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은 이는 부도(不道)한 말이니, 넉넉히 단안(斷案)이 될 수가 있다."
하니, 이중환이 공초하기를,
"조정(朝廷)에서 이미 증직(贈職)하였기 때문에 신은 한집안의 사정(私情)으로써 칭도(稱道)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이잠(李潛)의 일에 수시(隨時)로 칭찬하였다면 목호룡(睦虎龍)을 상변(上變)하도록 격동(激動)시킨 것도 또한 의심이 없는 것이다."
하니, 이중환이 공초하기를,
"지금 와서 생각하면 과오(過誤)가 된 듯합니다."
하였다. 목천임(睦天任)에게 묻기를,
"심정옥(沈廷玉)의 공초(供招)로써 살펴본다면, 네가 요사한 박상검과 서로 내통한 것은 다시 의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네가 종전에 만약 간범(干犯)한 바가 없다면 어찌하여 옥졸(獄卒)을 유도하고 심정옥을 공동(恐動)하여 그 말을 변경시키기까지 했겠는가?"
하니, 목천임이 공초하기를,
"역적 박상검의 집에 서로 내통하였다는 것은 매우 애매(曖昧)합니다. 심정옥(沈廷玉)·심정신(沈廷紳) 형제(兄弟) 사이에 왕복(往復)한 편지를 신도 또한 여러번 보았으니, 이로써 죄를 삼는다면 비록 죽을지라도 또한 탓할 바가 없으나, 심정옥을 유도하여 그로 하여금 변사(變辭)하게 하였다는 일은 이는 바로 옥졸(獄卒)이 공(功)을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이 어찌 유도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원일서(元日瑞)에게 물으니, 원일서가 공초하기를,
"정우관(鄭宇寬)의 공초에 이르기를, ‘11월에 박상검을 보니, 박상검이 말하기를, 「오늘 원병사(元兵使)가 마땅히 심정옥의 집에서 모였을 것이다.」고 하였다.’ 하였는데, 신의 아비는 10월에 이미 김해 부사(金海府使)가 되어서 부임하고 원래 서울에 있지 않았는데, 어찌 11월에 와서 모일 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바로 아무까닭도 없이 없는 사실을 꾸며서 무함한 것입니다. 그리고 심정옥의 공초에서 ‘신이 밤을 틈타 역적 박상검의 집에 왕래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은 이때에 상인(喪人)이었으니, 어떻게 최복(衰服)을 입은 몸으로 환관의 집에 왕래하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벌써 신축년 겨울의 일을 잊었는가?"
하고, 명하여 그때의 문안(文案)을 읽게 하여 그로 하여금 듣게 하고 윤취상(尹就商)이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고 원휘(元徽)가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된다는 대목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 겨울의 일은 곧 이 조항(條項)이다."
하였다. 원일서가 공초하기를,
"신이 심정옥과 더불어 비록 한번 만나본 교분(交分)은 있으나 족적(足跡)이 그문에 가지 않은 지는 이미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신은 바로 상인(喪人)이었으며, 신의 아비는 병이 있었으니, 어찌 능히 왕래하면서 모의(謀議)를 하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다시 묻기를,
"너의 아비가 병이 있어서 능히 출입(出入)을 못했다면 어떻게 평안 병영(平安兵營)에 부임하였는가?"
하니, 원일서가 공초하기를,
"신의 아비가 신축년 12월에 평안 병사에 임명되어 병(病) 때문에 사직소를 올렸으나 마침내 체직(遞職)되지 못하였고, 곧 임인년 1월에 조령(朝令)에 핍박되어 어쩔 수 없이 부임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휘(元徽)가 어느 때 죽었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원휘가 죽은 것은 3월에 선래 군관(先來軍官)이 들어오던 이튿날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수관(沈受觀)이 말하기를,
하니,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심수관은 곧 심중량(沈仲良)의 아들입니다. 당초에 그 이름 글자가 틀렸으므로 그가 여러 죄수(罪囚)들의 공초에서 긴요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려 나문(拿問)하려고 하였던 것이며, 전일에 전하(殿下)께서 우선 내버려 두라는 분부를 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던 것이고 여러 죄수들은 이미 모두 하옥(下獄)시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하교(下敎)하기를,
"당초에 이중환을 나치(拿致)하여 왔을 때 국청(鞫廳)을 설치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목시룡(睦時龍)에 이르러서는 관계가 매우 중대하여 다른 죄인과는 다름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청을 설치한 것이다. 오늘의 일은 대개 가뭄을 근심하여 죄수(罪囚)의 정상(情狀)을 살펴 밝히려 한 것이다. 만약 혹시라도 지나치게 미치는 근심이 있다면 어찌 불쌍하게 여길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조정이 3백 년 동안 나라를 향유(享有)한 것은 조종조(祖宗朝)에서 인덕(仁德)을 쌓은 소치가 아님이 없다. 요(堯)·순(舜)을 본받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삼(李森)은 전연 석방시킬 수 없으니 아주 먼 변경(邊境)에다 안치(安置)1131) 하고, 심정옥(沈廷玉)은 그 아비를 차마 끌어대지 못하여 박상검의 일을 그가 곧 스스로 담당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불쌍히 여길 만한 일이므로 감사 도배(減死島配)할 것이며, 심정신(沈廷紳)은 그 정절(情節)은 비록 밉지마는 이미 그 형을 죄주었으므로 마땅히 참작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이니 방송(放送)하게 하고, 목천임(睦天任)은 벼슬을 구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니 아주 먼 변경(邊境)으로 정배(定配)하며, 유경유(柳慶裕)는 도로 배소(配所)로 보내고, 심수관과 언례(彦禮)는 모두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경솔하게 먼저 참작하여 처리하는 실수를 강력히 말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심정신이 옥중(獄中)에서 통서(通書)하여 심정옥으로 하여금 변사(變辭)하게 한 죄는 큽니다. 이와 같은 유(類)를 전연 석방한다면 아마 뒷날의 폐단을 방지하기 어려움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정배(定配)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이삼(李森)·목천임(睦天任)·심정옥(沈廷玉)·심정신(沈廷紳)은 모두 가(枷)1132) 를 풀어 주되, 이삼은 서간(西間)1133) 으로 이송(移送)시키고, 이중환(李重煥)과 원일서(元日瑞)는 다시 엄형(嚴刑)으로 실정(實情)을 알아내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삼은 본래 간사하고 교활한 무부(武夫)로서 경종(景宗) 초년(初年)에 김일경(金一境)·윤취상(尹就商)·남태징(南泰徵)·박찬신(朴纘新) 무리와 더불어 휘적(輝賊)1134) 에게 아첨하고 아부하여 환첩(宦妾)과 체결(締結)해서 국면(局面)을 바꿀 것을 도모하고 동궁(東宮)을 무함하고 핍박하니, 국인(國人)들이 지목(指目)한 것이 이미 오래 되었다. 경종이 승하한 때에 미쳐 이삼이 바야흐로 장임(將任)을 겸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가 군대를 가지고 난(亂)을 일으킬까 의심하였다. 그때에 전(前) 사간(司諫) 이봉익(李鳳翼)이 한통의 소(疏)를 진달하여 미리 간교한 싹을 꺾었으며, 경화(更化)된 후에도 이봉익이 또 간관(諫官)으로서 발계(發啓)하여 비로소 귀양 보내는 명을 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다시 심정옥의 공초에서 긴급히 나왔으니, 만약 엄하게 구문(究問)하여 조사를 한다면 간사하고 음흉한 정상을 거의 캐어 낼 수 있을 것인데, 잡아 가둔 뒤에 대신(大臣)이 인피(引避)하여 들어감으로 인하여 국좌(鞫坐)가 지연(遲延)되었다. 마침 가뭄을 근심하여 죄수의 정상(情狀)을 살펴 밝히는 날을 만나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참작해서 처리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심정옥·목천임의 무리가 모두 이삼을 힘입어 면죄를 얻게 되었으니, 아! 탄주어(呑舟魚)1135) 의 법도 또한 낮추었다 높였다 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견식이 있는 사람은 가만히 한탄하였다."
7월 21일 병진
윤시택(尹時澤)을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윤시택이 상인(喪人)으로 변복(變服)하여 입장(入場)한 죄목으로 형조(刑曹)로부터 형신(刑訊)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억울함을 아뢰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형조(刑曹)와 전옥서(典獄署)의 여러 죄수(罪囚)들의 정상(情狀)을 기록해 올리게 하였다. 환궁(還宮)할 때에 종가(鍾街)에 어가(御駕)를 멈추고 여러 죄수들을 불러서 가뭄을 근심하여 죄수의 정상(情狀)을 살펴서 밝힌다는 뜻으로 방송(放送)할 것을 하교하니, 여러 죄수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좌우 포도청(左右捕盜廳)에 명하여 한결같이 죄수의 정상(情狀)을 살펴서 밝히게 하고, 각사(各司)에 구류(拘留)된 사람들을 모두 방송(放送)하게 되었다.
하교(下敎)하기를,
"장죄(贓罪)를 범한 형률(刑律)은 가볍게 할 수 없으니, 윤식(尹植)·심세준(沈世浚)·권신(權賮)·이헌일(李獻一)은 모두 그대로 가두어 두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집의(執義) 신무일(愼無逸), 장령(掌令) 조명신(趙命臣)·최도문(崔道文), 지평(持平) 이근(李根)이다.】 아뢰기를,
"지금 이 처분(處分)은 가뭄을 근심하신 뜻에서 나왔으니,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른바 ‘녹수(錄囚)’1136) 란 대개 가벼운 죄수의 마땅히 용서할 만한 처지에 있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어찌 일이 국옥(鞫獄)에 관계되는데도 가볍게 석방을 시행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 가운데 이삼(李森)은 죄를 범한 것이 더욱 무거운데, 이제 성급히 석방하는 것은 왕법(王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실로 뒷날에 무궁한 폐단을 열어 주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이삼·목천임·심정옥·심정신 등의 참작하여 처리하란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2일 정사
경기(京畿) 수원(水原)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임금이 가뭄을 근심하여 장차 종묘(宗廟)에 기도하려 하였으나, 예관(禮官)이 국휼(國恤) 3년 안에는 전배(展拜)하는 예절이 없다는 것으로써 아뢰므로 드디어 그 명(命)을 정지시키고, 다시 북교(北郊)에 친히 기도하는 일로써 예관에게 물으니 예관이 옛날 규례가 없다는 것으로써 아뢰므로 장차 남교(南郊)에 기도하려고 하였다. 이날 임금이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보았는데, 악독(嶽瀆)1137) 에 친히 제사지낸다는 글이 있고, 《대명집례(大明集禮)》에는 또 천지(天地)·남교(南郊)·북교(北郊)에 나누어 제사지낸다는 예절이 있으며, 전농단(典農壇)에 친히 제사지내는 것은 숙종(肅宗)갑신년1138) 에 시작되었다 하였으므로, 임금이 다시 남교(南郊)에는 중신(重臣)을 보내고 북교(北郊)에는 친히 거행할 것으로 하교하면서 거둥할 때에 도로(道路)를 수치(修治)하지 말도록 명하였으니, 대개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정식(李正植)·김창도(金昌道)·김성절(金盛節)·유취장(柳就章) 등의 무고율(誣告律)을 명하여 고치기를,
"무복(誣服)에 대해서는 적몰(籍沒)된 가산(家産)을 도로 주라."
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서종일(徐宗一)의 진소(陳疏)로 인하여 서덕수(徐德修)에게 무고(誣告)의 율(律)을 적용하지 않고 무복(誣服)으로써 논했으니, 조흡(趙洽) 외에 여러 사람도 서덕수의 예(例)에 의하여 일체로 무복으로써 논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서덕수·김성절의 무복(誣服)으로 인하여 허다(許多)한 죄없는 사람이 참혹하게 도륙(屠戮)을 당하였으니, 내가 그 무복한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나 특명으로 무고(誣告)의 율을 적용한 것은 마음에 몹시 미워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덕수에게 이미 무복으로써 논하였으니, 여러 사람에게도 마땅히 다르게 할수는 없다. 조흡(趙洽)한 사람 외에는 모두 서덕수와 같이 일체로 시행하라."
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이공윤(李公胤)이 죄를 당하였을 때에 대간(臺諫)에서 아뢴 조어(措語)에 ‘대행조(大行朝)께서 편찮으실 때에 약성(藥性)이 준극(峻劇)한 약제(藥劑)를 많이 썼으므로 마침내 망극(罔極)한 슬픔을 초래(招來)했다.’ 하니, 그 죄목(罪目)을 보면 매우 놀랍고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신(臣)이 약원(藥院)에 들어가서 일기(日記)를 상고하여 보니, 이공윤이 시킨 바의 약으로 전후(前後)에 진어(進御)한 것은 단지 도인승기탕(桃仁承氣湯) 두서너 첩(貼)뿐인데, 이것은 매우 준극한 약제는 아니며, 병세가 위독했을 때에 쓴 계지탕(桂枝湯)은 이것은 온열(溫熱)에 속하는 약제이니, 준극한 약제를 많이 썼다는 말은 거짓으로 돌아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다만 병세가 위독하실때에 소명(召命)이 있었는데 즉시 대령(待令)하지 못한 것은 매우 버릇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년(周年)을 도배(島配)하였으니, 족히 그 죄를 징계하였을 것이므로 참작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효종조(孝宗朝) 때에 신가귀(申可貴)도 또한 복주(伏誅)를 면치 못하였으니, 이공윤도 마땅히 일율(一律)1139) 에 두어야 하나 대신(大臣)의 아뢴 바가 뜻이 또한 있으므로 마땅히 처음에 판하(判下)한데 의하여 아주 먼 변경(邊境)으로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좌의정 민진원이 말하기를,
"금년의 흉년은 삼남(三南) 지방이 더욱 심하니, 진구(賑救)하는 대책(對策)을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곡식을 옮겨 수송하려고 하나 8도(八道)에 저축된 곡식이 없고 다만 북도(北道)의 육진(六鎭)에 내수사(內需司)의 노비 공미(奴婢貢米)가 해마다 유치(留置)되어 있으니, 이 곡식을 옮겨 수송하면 가히 영남(嶺南)은 진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경차관(敬差官)을 뽑아 보내는 것은 매양 폐해를 끼치는 일이 있으니, 금년에는 경차관을 보내지 말고 관찰사(觀察使)에게 신칙하여 그로 하여금 마감(磨勘)하게 하고, 삼남(三南) 지방은 추후(追後)에 별도로 암행 어사(暗行御史)를 보내어 염탐(廉探)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平) 김상석(金相奭)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삼(李森) 등 여러 죄수들은 죄가 흉역(凶逆)을 범했는데 감처(勘處)하였으니, 마땅히 대각(臺閣)에서 도로 거두라는 청을 따라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하교(下敎)하기를,
"삼남(三南)지방에 해마다 흉년이 거듭 들었는데 금년에 또 큰 흉년이 들었으니, 어찌 특별히 돌봐서 구휼하는 방도를 베풀지 않겠는가?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에 올리는 방물(方物)과 두 동조(東朝)1140) 의 탄일(誕日)에 올리는 방물외의 각전(各殿)의 탄일의 물선(物膳)은 봉진(封進)하지 말고 그 가미(價米)를 진휼(賑恤)하는 물자에 유치(留置)하여 보충(補充)하도록 하라."
하였다.
충청·전라 두 도(道)의 유생(儒生) 신석규(辛錫奎)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선현(先賢)을 무함(誣陷)하고 선정(先正)을 해치는 것이 지난번에 김수귀(金壽龜)·김범갑(金范甲)·정하복(鄭夏復)·최탁(崔鐸)·황욱(黃昱) 등과 같은 적이 없었으나, 신치운(申致雲)·김홍석(金弘錫)·김태원(金泰源)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아! 신치운과 같은 흉도(凶徒)에게 죄를 가하지 않는다면 선정께서 무함을 받은 것이 아직도 소명(昭明)하게 밝혀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태원은 곧 선정신(先正臣) 김집(金集)의 서손(庶孫)입니다. 윤증(尹拯)의 일당(一黨)에게 투속(投屬)하여 선정신(先正臣)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김집을 위하여 무함당한 일을 변명한다고 핑계대면서 상소의 뜻은 오로지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을 구무(構誣)하는데 있었으며, 김홍석(金弘錫)의 소(疏)에 이르러서는 김태원(金泰源)과 더불어 동일한 화심(禍心)으로 송시열을 무함(誣陷)하고 성문준(成文濬)을 위하여 결함을 씻어 주려고 한 것은 더욱 지극히 절통(絶痛)한 일입니다. 김수귀(金壽龜) 무리에게 이미 투비(投卑)1141) 의 형벌을 시행하였으니, 신치운(申致雲) 무리만이 어찌 혼자 도망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3인(人)의 죄를 다스려서 선정신(先正臣)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의 무함을 씻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7월 23일 무오
임금이 북교(北郊)에 거둥하였으니 장차 기우제(祈雨祭)를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어가(御駕)가 경복궁(景福宮) 담장 서쪽에 이르러 전구(前驅)의 착오로 다른 길로 경유하게 되자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을 잡아들이라고 명하고, 칙교(飭敎)를 내려 곧 백의 종군(白衣從軍)하도록 하였다. 대개 임금이 거둥하는 길을 병조(兵曹)에서 임시(臨時)로 아뢰어 변경한 것을 훈영(訓營)에서 미처 알지 못하여 이런 착오를 초래(招來)한 것이다. 이에 임금이 드디어 앞의 상군(廂軍)1142) 을 뒤에 상군으로 삼고, 뒤에 상군을 앞의 상군으로 삼아서 다시 군대의 태세를 정비하라 명하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행차를 떠났다.
예조(禮曹)에서 아뢰어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 계령조(戒令條)에는 ‘국휼(國恤)이 난 졸곡(卒哭)뒤에 대사(大祀)에는 음악(音樂)을 사용하되 중사(中祀) 이하는 3년내엔 모두 음악을 정지한다고’고 하였습니다. 북교(北郊)의 행사는 중사(中祀)에 속하니, 청컨대 예문(禮文)에 따라서 친히 제사지낼 때에는 음악을 사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24일 기미
임금이 익선관(翼善冠)·흑원령포(黑圓領袍)·옥대(玉帶)·흑화(黑靴) 차림으로 북교단(北郊壇)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를 지내는 즈음에 비가 죽죽 내렸으므로 어포(御袍)가 다 젖게 되었다. 승지(承旨) 김취로(金取魯) 등이 나아가서 말하기를,
"오방(五方)에 예(禮)를 행하려면 자못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니, 청컨대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비오기를 빌면서 어찌 편안한 것만 취하겠는가?"
하고, 판위(版位)에 한데 그대로 서서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정성을 들여서 예절이 끝날 때까지 있었다.
7월 25일 경신
충청도(忠淸道) 유생(儒生) 박치룡(朴致龍)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과 역적 김일경(金一鏡) 소하(疏下)의 5적을 목베고 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에게 노적(孥籍)의 형벌을 시행하여서 신(神)과 사람의 분노를 풀게 하소서."
하였고, 경상도(慶尙道) 유생(儒生) 이도장(李道章) 등도 또한 상소하여 청하기를,
"역적이 괴수(魁首)와 난적(亂賊)의 무리를 목 베어서 온 나라의 사람으로 하여금 환하게 흉당(凶黨)이 이성(二聖)1143) 을 무함하고 성궁(聖躬)을 위태롭게 한 죄를 알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비답을 내리기를,
"이미 전후(前後)의 비답(批答)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경기(京畿)의 진사(進士) 이집(李楫)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선정신(先正臣) 김정국(金正國)의 시호(諡號)를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예조(禮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심택현(沈宅賢)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교악(李喬岳)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봉익(李鳳翼)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홍우전(洪禹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용경(金龍慶)을 교리(校理)로, 이봉상(李鳳祥)을 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액정서(掖庭署) 하례(下隷)의 야금(夜禁)에 대한 일로써 나졸(邏卒)에게 곤장(棍杖)을 치게 한 거조(擧措)가 있었는데, 곧바로 액정서 하례를 유사(有司)에게 맡겨 죄를 다스리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진실로 성덕(聖德)에 빛이 있는 일입니다. 효종조(孝宗朝) 때 금리(禁吏)가 공주(公主)의 집에 들어가서 궁속(宮屬)의 범금(犯禁)한 자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효종께서 진노(震怒)하셨다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후부인(侯夫人)은 그 능히 굽히지 않는 것을 근심한다.’1144) 는 말을 인용(引用)한 것을 듣고서는 효종께서는 가납(嘉納)하셨고, 또 전일에 이조(吏曹)에서 거행(擧行)하지 않았다는 일로써 전교(傳敎)하여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이조의 이속(吏屬)을 곤장(棍杖)을 치게 하여 거의 죽게 되었는데, 신정신 송준길(宋浚吉)이 조정에 돌아와 진계(陳戒)하니, 효종께서 기뻐하여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경(卿)이 잠깐 밖에 나간 까닭이다.’라고 하시며, 약물(藥物)을 내려 주어 그 병을 구료(救療)하라고 명하셨으니, 허물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덕은 진실로 후세의 법칙이 될 만합니다. 지금 효종조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곤장(棍杖)을 맞은 나교(邏校)에게 약물을 내려 주어서 성의(聖意)를 보이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옹원(司饔院)에 직장(直長) 2명과 봉사(奉事) 4명을 증원(憎員)해 두고 주부(主簿) 3명은 감원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신축년1145) 에 관제(官制)를 변통(變通)할 때에 참하(參下) 5과(窠)를 다 주부(主簿)로 만들어서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좌천(左遷)시키니 일이 대부분 소홀하기 때문에 좌의정 민진원(閔鎭遠)과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이 아뢴 바로 인하여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한성부(漢城府)의 주부(主簿) 1과(窠)를 감하여 참군(參軍)으로 삼도록 명하였으니, 한결같이 형조(刑曹) 구임(久任)의 전례에 의거한 것으로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의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7월 27일 임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謹)을 마치자, 참찬관(參贊官) 유복명(柳復明)이 말하기를,
"암행 어사(暗行御史)가 염찰(廉察)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니, 수령(守令)을 지내지 않은 자는 외방(外方)의 물정(物情)을 알지 못하여 혹은 당연히 포상(褒賞)될 것인데도 폄출(貶黜)되고, 당연히 폄출될 것인데도 포상되는 자가 없지 않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암행 어사를 반드시 일찍이 수령을 지내고 물정에 아주 익숙한 자로 뽑아서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기고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일찍이 수령을 지내어 사무로 감당할 만한 자로 초계(抄啓)하게 하였다.
북교(北郊)에 친제(親祭)할 때의 제관(祭官)인 아헌관(亞獻官)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과 종헌관(終獻官)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에게 모두 안장 갖춘 말[鞍具馬] 1필(匹)을 내려 주고, 그 나머지 여러 집사(執事)들은 차등이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이병상(李秉常)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정형익(鄭亨益)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7월 28일 계해
삼사(三司)에서 전일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장붕익(張鵬翼)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았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여 이기진(李箕鎭)을 응교(應敎)로, 이병태(李秉泰)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권적(權𥛚)을 수찬(修撰)으로, 황귀하(黃龜河)를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심택현(沈宅賢)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황일하(黃一夏)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병상(李秉常)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재(李縡)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이중익(李重翊)을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삼았으니, 이조 판서 이의현(李宜顯)과 병조 판서 홍치중(洪致中)의 정사(政事)이었다.
증(贈) 영의정(領議政) 신임(申銋)에게 충경(忠景)이란 시호(諡號)를, 고(故) 판서(判書) 남용익(南龍翼)에게 문헌(文獻)이란 시호를, 고 판서 김창협(金昌協)에게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7월 29일 갑자
삼사(三司)에서 전일에 합계(合啓)한 것은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규(柳奎)의 일은 아뢴 대로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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