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권, 영조 1년 1725년 8월

싸라리리 2025. 8. 19.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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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정묘

소대(召對)를 행하고 《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였다.

 

8월 3일 무진

별이 왕량성(王良星) 밑으로 흘러갔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박규문(朴奎文)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어 말하기를,
"국청(鞫廳)의 죄인(罪人) 이삼(李森) 등과 여러 죄수에게 안치(安置)·찬배(竄配)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이것이 비록 가뭄을 근심하는 성의(聖意)에서 나왔지마는, 다만 생각건대 이삼 등의 죄명(罪名)은 지극히 중합니다. 진실로 마땅히 엄하게 끝까지 조사를 하여야 할 것인데,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참작하여 처리하셨으니, 옥사(獄事)의 체모로써 헤아려 본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삼은 흉당(凶黨)에 빌붙어서 종적(蹤跡)이 음흉하고 우악한 것을 온 나라의 사람이 지적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제 또 심정옥(沈廷玉)의 공초에서 긴급히 나와서 그가 박상검(朴尙儉)과 부동(符同)하여 왕래(往來)하면서 모의(謀議)한 상황은 명백하여 가리울 수 없으니, 더욱 경솔히 의논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석방하는 법은 대개 가벼운 죄수가 재판의 판결이 지체되어 원통함을 안고 억울함이 쌓여진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 자신이 극죄(極罪)를 범하고 이름이 국청의 공초에서 나온 일이 있는데도, 경솔히 사유(赦宥)를 베풀어서 재해(災害)를 물리치는 방도를 삼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하면 왕법(王法)이 신장(伸張)될 수 없게 될 것이고, 큰 간특(奸慝)함을 징계하여 멈출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이삼(李森) 등에게 안치(安置)·찬배(竄配)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시고 다시 국문(鞫問)을 가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맹자(孟子)》를 강독(講讀)하다가 참찬관(參贊官) 유복명(柳復明)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도성(都成)의 백성이 곤궁하고 초췌(憔悴)함이 많고, 이미 전옥(典獄)이 있는데도 여러 법사(法司)나 오군문(五軍門)과 각 해사(該司)에 또한 모두 이른바, ‘구류간(拘留間)’이란 것을 두어서 구속(拘束)된 자가 늘 가득차 있으니, 백성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구속을 당한 자도 수도(囚徒)의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록 혹은 석방이 된다 하여도 또한 수도(囚徒)의 가운데는 들어가지 못하니, 이제부터는 삼법사(三法司)1146)  ·오군문(五軍門)과 각 해사(該司)에 가둘 만한 것은 전옥(典獄)에 가두고 각사(各司)에서 구류(拘留)시키는 규례는 일체 혁파(革罷)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미 내수사(內需司)의 감옥도 혁파하였는데, 더구나 여러 법사(法司)이겠는가? 만약 가둘 만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전옥(典獄)이 있는데 별도로 사옥(私獄)을 만드는 것은 사체(事體)가 옳지 못하니, 이 뒤로는 삼법사(三法司)나 여러 군문에 구류간(拘留間)은 별도로 신칙하여 혁파하여 버리게 하라."
하였다. 유복명(柳復明)이 또 말하기를,
"형옥(刑獄)은 인명(人命)이 매인 바입니다. 그런데 의금부(義禁府)의 전옥(典獄)은 그 지대가 낮고 우묵하여 온통 모두 기울어져 무너질 형편이고, 만약 장마철의 비를 만나면 도랑 물이 넘쳐 들어오므로, 죄인이 혹은 지붕에 올라가 물을 피하는 때도 있고 또는 더러운 흙덩이가 밀려 쌓이고 더러운 기운이 후끈거려 전염병이 자주 발생하고 있으니, 진실로 슬퍼하고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청컨대 수즙(修葺)할 것을 신칙하여 각별히 소통하고 세척(洗滌)하는 일을 정식(定式)으로 시행(施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사간(大司諫)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중신(重臣)이 스스로 변명한 말은 가리우려고 하여도 더욱 드러났습니다. 아! 이진유(李眞儒)는 원악(元惡)인데도 손을 잡고 이별하는 정이 찬적(竄謫)하던 날에 나타났고, 유봉휘(柳鳳輝)는 흉괴(胸魁)인데도 영호(營護)1147)                  한다는 지적이 간쟁(諫爭)하는 신하에게서 발생하였으니, 어찌 그 마음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지금 또 빈청(賓廳)의 의논이 일어날 즈음에 병이 발생되었다가 궐정(闕庭)에서 호소하는 것이 겨우 중지된 뒤에야 갑자기 나았으며, 중신의 아들은 숙직(宿直)을 하다가 열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귀성(歸省)하였으니, 병(病)이 심중(深重)하지 않다는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이 어떻게 법을 굽혀 용서를 했다고 해서 의심하지 않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사총(四聰)1148)                  의 밝음을 맡으셨는데 혼자서 많은 정무(政務)를 처리하는 뜻을 가지고 계시며, 한 몸의 사심(私心)을 따르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채택하는 마음이 없어서 신하를 업신여김이 아이들의 장난처럼 보아서 성신(誠信)으로써 서로 바라지 않고, 작록(爵祿)으로써 재갈과 고삐로 삼아서 굴레를 씌우고 예의(禮義)로써 임용(任用)하지 않고 시키는데 위노(威怒)로써 채찍을 쳐서 달음박질을 시키고, 대간(臺諫)이 말을 하면 비상(非常)한 분부를 내리셔서 반드시 그 논의(論議)를 멈추게 하고, 궐정(闕庭)에서 호소하면 미안하다는 비답을 내려셔서 반드시 그 의논을 거두게 하시니, 이제 전하께서 하려고 하시는 바는 그 무사(無事)한 바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나라와 동체(同體)가 된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정지(情志)를 불안(不安)하게 하여 두려워하고 국축(局縮)되어서 인피하여 들어가게 하는데도, 전하께서는 끝내 지성(至誠)으로 회오(悔悟)하는 뜻은 없고 도리어 급박하게 재촉하며 위협으로 나오게 할 계획을 하십니다. 좌의정에게는 집으로 찾아 가신다는 비답으로써 핍박하시고 우의정에게는 연(輦)을 멈추고 분부하시는 것으로써 핍박을 하여 그 자신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고, 반드시 그가 지키는 신념(信念)을 버리고 억지고 엄명(嚴命)을 따르게 하시는 것은 이미 《중용(中庸)》구경(九經)1149)                  의 뜻에 어긋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필경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배제하고 왕옥(王獄)에 임해서 친히 유사(有司)의 일을 행하신 것은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펴서 다스린 것이 아니라, 이에 곧바로 국청의 죄수를 감죄(勘罪)하여 대간(臺諫)이 말하는 것을 쓸어 물리치고 본부(本府)로 강제로 옮겼으며, 대신(大臣)과 경재(卿宰)의 말이 모두 감회(感回)시키지 못하게 되자 승정원(承政院)·삼사(三司)의 산하에게 두루 꾸지람과 책망을 가하셔서 처분(處分)하는 즈음에 전도(顚倒)된 일을 혐연(嫌然)하게 여기지 않고 말씀하시는 사이에 전연 재량(裁量)하지 않으시니, 성인(聖人)이 하늘을 대하는 정성과 왕자(王者)가 조심하여 결정하는 방도가 과연 이와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번에 검·은(劒銀)으로써 무옥(誣獄)의 증거로 꾸며댄 것은 전적으로 흉악한 이삼(李森)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흉악한 이삼이 검·은을 국청(鞫廳)으로 이송(移送)한 것은 임인년1150)                   4월 초7일에 있었고, 국청에서 검·은의 사건을 문목(問目)에 첨입(添入)시킨 것은 임인년 4월 초10일에 있었습니다. 설령 백망(白望)이 덕사(德寺)에 묻어 둔 일이 있었더라도 그가 이미 직고(直告)하여 지시(指示)하지 않았다면, 포도 대장(捕盜大將)이 비록 기찰(譏察)을 잘한다 하더라도 무슨 연유로 그가 묻어 놓은 곳을 알아서 곧 달려가 가져오는 것이 마치 자기 집의 물건을 가져오듯 하였습니까? 더구나 또 칼 모양의 길고 짧은 것이나 글자 표시가 목호룡(睦虎龍)이 형용(形容)한 것과 아주 서로 같지 않고, 은화(銀貨)를 받아 감춘 근각(根脚)도 또한 여러 죄수들의 공초한 바가 아닌데 미리 먼저 찾아냈으니, 그가 스스로 감추었다가 스스로 발각시킨 자취가 불을 보듯 환합니다.
약사(藥事)에 이르러서는 사온 양으로 스스로 원사(爰辭)1151)                  를 만들어서 속여가며 다짐을 받은 형상이 이미 엽봉(葉奉)의 공초에서 나타났고, 그들이 삼수(三手)1152)                  를 조작하여 무옥(誣獄)을 구성(構成)한 것이 오로지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흉당(凶黨)이 원훈(元勳)으로 추의(推擬)한 것도 대개 이러한 때문입니다. 그리고 총융영(摠戎營)·어영청(御營廳) 두 영내(營內)에 은전(銀錢)이 간 곳이 없는 것이 많게는 수만여 냥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모두 환첩(宦妾)을 체결(締結)하여 음흉한 행동을 도모하는 자금으로 새어나가 없어진 것이니, 무릇 이런 정상은 모두 문초(問招)할 만한 것인데, 어찌 구핵(究覈)하지 않고 미리 먼저 감안하여 처리하십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흉악한 이삼(李森) 이하 여러 죄수를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령을 특별히 중지하시고 다시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전에 의하여 구핵하되, 신(臣)이 아뢴 검·은(劒銀) 등 4조항의 일도 또한 문목(問目)에 첨입(添入)하여 간교한 실상을 캐어 내게 하여 형정(刑政)을 어긋남이 없게 하소서.
아! 필부(匹婦)가 원한을 품으면 3년의 가뭄을 이루고, 서녀(庶女)가 하늘에 호소하면 5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은 원기(怨氣)가 범하는 바에 천지의 이변(異變)이 서로 응하게 마련입니다. 지난번 참혹하고 혹독한 칼날에 종사(宗社)를 위하여 죽은 자가 무릇 몇 사람이기에 누군들 원통하게 여기지 않으며 누군들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죽은자에게는 원한의 기운이 맺혀 있고, 살아 있는 자에게는 원통하고 혹독한 마음을 품고 있어서 4년 사이에 억울함이 신원(伸冤)되지 않아 재해(災害)의 변괴가 해마다 있지 않았을 때가 없었습니다. 경화(更化)된 뒤에 먼저 억울함을 신원시키는 법을 행하기에 미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두 적(賊)이 함께 전형(典刑)에 복주(伏誅)됨으로써 선류(善類)를 모아 나오게 하고 흉당(凶黨)를 몰아 내치어 장차 큰 처분(處分)이 있을 듯하므로,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통완(痛惋)함을 거의 통쾌하게 씻고 죽은 자나 살아 있는 자의 원한(怨恨)도 그나마 조금은 위로할 것이라 여겼는데, 일찍이 두서너 달이 못되어 성상(聖上)의 마음이 게을러져서 악역(惡逆)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고 공의(公議)를 저지(沮止)시켰으니, 지난번에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통완함을 거의 통쾌하게 씻겨지기를 바라던 것이 도리어 그 분완(憤惋)함을 증가(增加)시켜 자못 경화(更化)되기 이전과 같습니다.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의 원한이 그나마 조금은 위로될 것이라 여겼던 것이 다만 그 원통함을 부르짖는 것을 더하여 화(禍)에 걸려들던 초기와 다름이 없으니, 이것이 화기(和氣)를 손상시켜 상서(祥瑞)가 변하여 재앙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시고 이에 도리어 흉역(凶逆)을 용서하여 옹호하시면서 재화(災禍)를 변경시켜 상서를 만들려고 하신다면 또한 어긋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의당 그 풍우(風雨)가 순조롭지 못하고 재이(災異)가 사라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 4대신(四大臣)이 나라를 위하는 충성으로 무함(誣陷)을 당한 원통함은 전하께서도 또한 일찍이 통찰(痛察)하시어 애처롭게 여기시고 측은하게 여기신 교지(敎旨)가 왕언(王言)에서 여러 번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그 화를 전가(轉嫁)시키면서 독살(毒殺)한 무리에게 그 법을 차마 시행하지 못하고 반드시 전체를 살펴 주시려고 하시니, 전하께서 애처롭게 여기시고 측은하게 여기시는 바가 과연 성심에서 나왔다면 처분(處分)하신 바가 진실로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이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에게 동일(同一)한 심장(心腸)인 줄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이광좌가 이에 감히 전하의 대리(代理)하시는 것으로써 나라를 보유(保有)하는데 반드시 망할 근심이 된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찬탈(簒奪) 등의 말과 한 꿰미에 꿰어온 것인데도 그 이름이 또 백망(白望)의 3종(三種)의 공초에서 나왔으니, 그가 흉역(凶逆)을 한 형상은 김일경·목호룡과 본래 다를 것이 없었으며, 조태억은 허다한 죄상(罪狀)이 주살(誅殺)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청대(請對)할 때에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인가?’ 하는 등의 말은 이광좌(李光佐)·유봉휘(柳鳳輝)·한세량(韓世良)·김일경이 ‘나라가 망하자면 세운 임금을 폐하느니, 은밀히 찬탈(簒奪)로 옮겨지느니’ 하는 말과 하나로 연결된 맥락(脈絡)이 되는 것이며, ‘저 문생(門生)1153)                  이니 국로(國老)니’ 하는 말은 더욱 몹시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그리고 ‘금정(禁庭)1154)                  ’ 이니 ‘종무(鍾巫)1155)                  ’ 니 하는 것에 비하면 한 갑절이나 음흉하니, 신은 이광좌·조태억 두 적(賊)은 모두 형률(刑律)에 의하여 처단(處斷)하고 그 밖의 다른 여러 역적도 또한 마땅히 속히 군정(群情)에 따라 왕법(王法)으로 바르게 한 뒤에야만 인심(人心)을 복종(服從)시키고 천견(天譴)에 보답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은휼(隱恤)1156)                  하는 법이 대개 죽은 자의 원한을 위로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귀하고 천한 것으로서 차별을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난날 석방한 것은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마는, 형편이 외롭고 자취가 은미(隱微)한 사람과 같은 이에게는 오히려 대부분 궐루(闕漏)되었습니다. 혹은 의당 채용(採用)이 되어야 할 것인데도 채용되지 못한 자가 있으며 혹은 의당 신설(伸雪)되어야 할 것인데도 신설되지 못한 자가 있고, 혹은 의당 휼전(恤典)을 베풀어 주어야 할 것인데도 휼전을 받지 못한 자가 있으니, 이것이 또한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한 가지 단서입니다. 그것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다시 상의를 더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이 진실로 임금을 사랑하는데 연유하였으므로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왕가(枉駕)1157)                  하여 재거(載車)1158)                  하라 한 의도는 실로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마음에 연유한 것인데, 지금 그대의 ‘급박하게 재촉하며 위협으로 나오게 하여 도로 활동을 못하게 한다.’는 등의 말은 말을 하면서 사리(事理)를 살피지 못한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의금부(義禁府)에서 녹수(錄囚)한 것이 어찌 사의(私意)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지금 그대가 공심(公心)으로 생각하여 본다면 소어(疏語)의 분격(忿激)한 것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상소 말단에 녹용(錄用)·신설(神雪)·시휼(施恤) 등의 말은 그대의 말이 옳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곧 속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8월 4일 기사

박성로(朴聖輅)와 김상원(金相元)을 승지(承旨)로, 김진상(金鎭商)을 필선(弼善)으로, 임징하(任徵夏)를 사서(司書)로, 한현모(韓顯謨)를 설서(說書)로, 황재(黃梓)를 수찬(修撰)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박규문(朴奎文)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어 말하기를,
"증광시(增廣試)와 식년시(式年試)의 감시(監試)는 정시(庭試)와 알성시(謁聖試)의 한나절에 기예(技藝)를 고찰(考察)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인정(人定)을 한정하여 시권(試券)을 거두게 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가 글을 지어 자기 손으로 쓰게 해서 그 문필(文筆)이 함께 우수한 사람을 뽑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런 규례(規例)가 점점 무너져서 과거의 응시자가 〈시권을〉 속히 바치는 것을 위주로 하고, 고관(考官)도 속히 바치는 것으로써 인재를 뽑기 때문에, 서울에서 유력(有力)한 자는 모두 글씨를 잘 쓰는 자에게 의뢰하여 빌린 솜씨로 써서 일찍이 바치는데, 시골 유생(儒生)은 남의 글씨를 빌릴 수가 없으므로 거칠고 엉성하게 글을 지어 써서 그 재능(才能)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서울의 유생은 많이 참방(參榜)이 되는 반면 시골의 유생은 대부분 억울함이 많으니, 이번 과거에는 사수(寫手)1159)  를 엄중히 금지하여 일찍이 바치는 것을 뽑지 못하게 하고, 또 시험지(試驗紙)는 두꺼운 것을 금하는 것이 이미 조령(朝令)이 있으니, 이번에는 마땅히 공정(公正)하면서 풍도(風度)나 능력(能力)이 있는 자를 뽑아 타인관(打印官)을 삼아서 사정에 따라 찍어 주는 일이 없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과장(科場)에서 사정을 쓴 형률(刑律)을 적용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독(講讀)이 끝나자, 검토관(檢討官) 이병태(李秉泰)가 아뢰기를,
"숙빈(淑嬪)의 사우(祠宇)를 이제 곧 영선(營繕)하고 있는데, 본제(本第)도 이미 작지 않은데 역사(役事)를 바야흐로 시작해야 하니, 이렇게 해마다 기근(飢饉)이 들어 백성이 빈곤(貧困)한 때를 당하여 만약 지나치게 사치하고 방대하게 한다면 아래로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고 위로는 성상(聖上)의 덕에 누(累)가 될 것입니다. 더욱 절약하여 비용을 줄이도록 힘쓸 것을 의당 감독(監督)하는 사람에게 신칙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애초에 광대(廣大)하게 지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집이 해가 오래 되어 자연히 보수(補修)할 곳이 많아진 것이며, 그리고 이미 광대하게 짓지 말도록 신칙한 일이 있다."
하였다.

 

8월 5일 경오

박치원(朴致遠)을 승지(承旨)로, 신무일(愼無逸)을 사간(司諫)으로, 이유(李瑜)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최도문(崔道文)이 응지(應旨)하여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역적 유봉휘(柳鳳輝)의 죄악(罪惡)은 의당 저자에서 사형(死刑)시켜 버려야 할 것인데도, 궐정(闕庭)에서 호소하며 애써 간쟁하였던 것을 마침내 어기시고 흉악한 이삼(李森)의 지은 범죄(犯罪)는 용서하여 석방할 수가 없는데도 환수하시라는 대론(臺論)을 굳이 거절하시니, 이와 같이 하시면 대신(大臣)은 쓸데없는 직위(職位)가 되고, 대각(臺閣)은 쓸데없는 관원(官員)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군도(君道)는 너무 지나치고 신도(臣道)는 비색(否塞)하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여자(女子)가 근장군(近仗軍)1160)  에게 잡히게 된 일이 있었는데, 이미 부신(符信)으로 증험할 만한 것이 없으면 이를 구속(拘束)하고 수금(囚禁)하는 것은 법에 있어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해조(該曹)의 하리(下吏)가 도리어 죄과를 가하여 다스려서 패장(牌將)이 훈영(訓營)에서 곤장(棍杖)을 맞게 되고, 액정서(掖庭署)에 예속(隸屬)은 영문(營門)에 둘러서서 공갈(恐喝)하는 말을 방자하게 했다고 하니, 소문이 미치는 바에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런 무리가 세력을 믿고 함부로 날뛴다면 그 조짐은 근심할 만합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실피셔서 엄중히 막으소서. 그리고 가만히 듣건대 지난번에 대내(大內)에서 여러 번 표지(標紙)를 내려 호부(戶部)와 군문(軍門)에서 전포(錢布)를 받아들이게 했으므로, 유신(儒臣)이 진계(陳戒)하였으나 도리어 미안한 분부로 위로하시니, 외간(外間)의 전설(傳說)에 혹 전하께서 급하지 않은 용도를 준비하시는 것으로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상(聖上)의 덕에 누(累)가 됨이 마땅히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반성(反省)하셔서 속히 고치소서. 그리고 지난번 성상의 덕화가 다시 시작하는 시점에서 무함(誣陷)을 입은 두 선정(先正)이 이에 조두(俎豆)의 제향(祭享)을 회복하여 특별히 절혜(節惠)1161)  의 은전(恩典)을 베풀면서도 신치운(申致雲)과 같이 선정(先正)을 욕하고 선현(先賢)을 해친 자에게 오히려 병예(屛裔)1162)  의 형벌을 아끼시니, 이미 벽사 위도(辟邪衛道)하는 도리에 미흡함이 있습니다. 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에서도 불평(不平)의 뜻을 현저하게 보이시어 사설(邪說)은 더욱 번져가게 하고 대의(大義)는 더욱 어두워지게 하였으니, 다만 전하께서는 통쾌한 처분을 내리셔서 사문(斯文)1163)  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그리고 백성이란 임금이 하늘처럼 여기는 바로 나라가 의지하는 바입니다. 우리 숙종(肅宗)께서는 즉위하시던 처음에 신해년1164)   이상의 쌓여진 포흠(逋欠)을 특명으로 견감(蠲減)하고 탕척(蕩滌)하여 주셨으니, 흉년을 만나 궁핍한 사람을 진휼(賑恤)하는 성덕(盛德)이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계승하실 바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원하건대 묘당(廟堂)에 굽어 물으셔서 1년의 포조(逋租)를 양감(量減)하여 백성을 구급(救急)하는 실제의 혜택을 보이시고 이 밖에 영문(營門)의 환곡(還穀)이나 도민(都民)에게 징수할 채무(債務) 등의 일도 또한 마땅히 반행(頒行)하는데 있어 일분의 민폐(民弊)라도 덜어줄 것을 강구(講究)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호부(戶部)의 수입되는 바가 그전에 비하면 크게 줄어졌는데도 그 비용은 공가(貢價)를 미리 받는 것보다 더함이 있으므로 실제는 쌓여진 고질이 되었으니, 경비의 쓰임이 모두 없어지는 것도 이에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고가(雇價)의 비용은 병부(兵部)로부터 나오는데 간사(奸詐)한 짓이 날로 번져서 소모됨이 더욱 심하나, 그 직무를 맡은 관사(官司)에는 본래 중기(重記)1165)  가 없으므로 늘였다 줄였다 하고 늦추었다 당겼다 하는 것을 한결같이 하리(下吏)의 무문 농법(舞文弄法)하는 수법에다 맡겼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공물(貢物)이 수용(需用)에 절실하지 않은 것은 특별히 재량(裁量)하여 감해 주고 미리 받아들이는 공가(貢價)도 또한 용도에 따라 지급하며 고가(雇價)를 분표(分俵)하는 즈음에 이른바 추후 성책(成冊)한 것은 이름을 상고하여 사실을 조사해서 간사하고 외람된 근원을 맑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올해의 대단한 가뭄은 근래에 없던 바이니, 위로 어공(御供)의 복용(服用)으로부터 아래로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임시 방편으로 감면(減免)하게 하며 각 군문(軍門)과 아문(衙門)에 약간 남아도는 재력(財力)으로 진휼(賑恤)하는 밑천에 보충이 될 만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임시로 빌려 주게 하고, 호부(戶部) 공가(貢價) 외에 선혜청(宣惠廳)에 지급할 쌀도 진실로 급하지 않은 것은 임시로 정지하여 유치(留置)하게 한다면 더욱 황정(荒政)1166)  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송(宋)나라 효종(孝宗)이 말하기를, ‘진휼(賑恤)의 정책(政策)엔 사실을 캐내어 일찍 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다만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장령(掌令) 조명신(趙命臣)이 응지(應旨)하여 상소하였는데, 먼저 성학(聖學)을 힘쓰고 수령(守令)을 선택하며 체옥(滯獄)을 동정해 주는 것을 말하고, 끝으로 또 조운(漕運)하여 온 쌀을 환매(換買)하는 폐단을 논하기를,
"청컨대,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신칙(申飭)하여 비록 흉년을 만나더라도 환매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고 정식으로 시행(施行)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으로 채택(採擇)하여 시행(施行)하게 하였다.

 

봉교(奉敎) 신노(申魯)가 응지(應旨)하여 상소하였는데,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이삼(李森) 등의 죄상(罪狀)의 용서하기 어려운 점을 죄다 진달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진(晉)나라 대부(大夫) 조삭(趙朔)이 도안가(屠岸賈)에게 멸족(滅族)을 당하니, 진나라 경공(景公)이 원수를 갚기 위하여 도안가의 친족(親族)을 모두 주살(誅殺)하였습니다. 지난번에 흉당(凶黨)에게 도륙(屠戮)된 것은 조씨(趙氏)의 친족에게만 그치지 않았는데, 전하께서 흉당을 처단하신 것이 진나라 경공(景公)이 도안가를 주살(誅殺)한 것만 못하시니, 이것은 몹시 개탄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도안가의 죄는 세가(世家)를 도멸(屠滅)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지마는, 지금 흉당의 죄는 다만 세가를 다 죽였을 뿐 아니라, 사실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한 역적(逆賊)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작은 과실로 여겨 다만 가벼운 형벌만을 시행하시니, 전하의 형정(刑政)이 어떻게 옛날 법과 서로 반대가 되는 것입니까? 빨리 명지(明旨)를 내리셔서 한결같이 방헌(邦憲)을 따르신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기뻐하게 되고 하늘의 재앙도 그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직책이 한림원(翰林苑)에 있으면서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하는 것을 내가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내가 처분(處分)한 바는 의도(意圖)가 또한 있는 데가 있으니, 다만 먼 뒷날의 공의(公議)만 기다리겠다."
하였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이병상(李秉常)의 직(職)을 체차(遞差)시키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병상이 질질 끌고 명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듣건대 관각(館閣)의 규례(規例)는 이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면 다시 제학(提學)이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옛날의 규례입니다. 숙종조(肅宗朝) 때에 고(故) 판서(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제학이 되었을 때에도 이로써 규례를 끌어대어 체직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선공감(繕工監)의 주부(主簿) 2원(員)은 근래에 신설(新設)한 것으로 아침에 임명하였다가 저녁에 천직(遷職)시키니, 아전이 이로 인하여 간사한 짓을 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10개월을 기한하여 천직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기록하여 법을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0개월은 너무 지나치니 8개월로 정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병조(兵曹)에 군색(軍色)이나 낭관(郞官)이 자주 옮겨감으로 폐단이 있으니, 병조 판서로 하여금 자의(自意)로 관원을 추천 임명하도록 하여 비록 혹 대직(臺職)에 옮겨 임명되었더라도 또한 그대로 유임(留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 직임에 있은 뒤에야 그 성과(成果)를 요구할 수가 있으니, 이 뒤로는 반드시 가려 뽑았으면 비록 대간(臺諫)에 의망(擬望)되었더라도 오래도록 유임하는 것으로 주(註)를 달 것이며, 다만 병조(兵曹) 뿐만 아니라 비록 다른 관사(官司)일지라도 오래도록 유임시키는 것으로 일체 주를 달도록 하라."
하였다.

 

전조(銓曹)1167)  에 명하여 고(故) 상신(相臣)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의 후손(後孫)을 채용(採用)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숙종조(肅宗朝) 때에 단종(端宗)이 복위(復位)된 뒤로 김종서의 후손 김익량(金翼亮)과 황보인의 후손 황보겸(皇甫㻩)을 특명(特命)으로 관직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임인년1168)  에 흉당(凶黨)이 김익량은 내노(內奴)1169)  를 은루(隱漏)1170)  하였다 하여 없는 죄를 꾸며 만들어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였으며, 황보겸은 탈종(奪宗)1171)  의 죄가 있고 또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문객(門客)이란 이유로써 절도(絶島)에 귀양 보냈었는데, 이때에 와서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다시 채용할 것을 주청(奏請)하였으므로 임금이 마침내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이기진(李箕鎭)을 발탁하여 승지(承旨)로 삼고, 신무일(愼無逸)을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김수(金洙)를 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으로 삼았다.

 

8월 6일 신미

지평(持平) 이근(李根)이 응지(應旨)하여 상소하였는데, 먼저 ‘어진사람을 임용하려거든 의심하지 말고, 간사한 사람을 제거하려거든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이미 제적(諸賊)의 죄역(罪逆)이 도망하기 어려운 것을 아시면서도 반드시 용서해 주려고 하시는 것은 이름 내기를 좋아하시는 것이며, 정유(庭籲)1172)  하는 일을 미워하고 냉대(冷待)하면서도 삼사(三司)에 맡기는 것도 또한 이름 내기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순천부(順天府) 여수(麗水)의 백성은 부역(賦役)을 거듭 부담하는 원망이 있으니, 대개 여수현(麗水縣)은 일찍이 수영(水營)의 설치로 인하여 처음에는 혁파(革罷)되었다가 그 뒤에 수영이 옮겨 설치되므로 다시 읍(邑)을 설치하지 못하고 그대로 순천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순천에서는 이를 ‘속읍(屬邑)’ 이라 하고 수영에서는 이를 ‘구진(舊鎭)’ 이라 하여 많은 폐단이 함께 발생함으로 백성이 살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곧 속히 품처(稟處)하여 여수의 백성이 부역을 거듭 부담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폐단을 제거하여야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흥양(興陽)에서는 종[奴]이 주인(主人)을 죽인 변고가 있었는데, 본고을의 원은 배반한 종의 뇌물을 몰래 받아 먹고 순영(巡營)에 속여서 보고하여 고한(辜限)1173)  이 이미 지난 것으로 핑계를 대어 강상(綱常)을 해친 자로 하여금 마침내 삼척(三尺)의 법에서 도망하게 하였으니, 이른바 ‘고한(辜限)’ 이 어찌 종이 주인을 죽인 변고에 적용되겠습니까? 그때에 감사(監司)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수령(守令)을 잡아다 신문(訊問)하여 죄를 정하며, 빨리 본도(本道)로 하여금 특별히 강직(剛直)하고 명민(明敏)한 관원을 정하여 명백하게 조사해 죄를 바로잡아서 윤상(倫常)을 바르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아간(亞諫)1174)  이 병조 판서 홍치중(洪致中)을 논척(論斥)할 때에 이진유(李眞儒)의 손을 잡고 이별했다느니, 역적 유봉휘(柳鳳輝)를 관용(寬容) 비호(庇護)하였다고 말한 것은 이미 전하여진 말에서 나온 것으로써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또 홍치중이 수립(樹立)한 바도 또한 말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근년에 조중우(趙重遇)가 흉소(凶疏)를 올렸을 때에 홍치중은 도승지(都承旨)로서 먼저 계사(啓辭)에 참여했고, 올봄에 부소(赴召)1175)  한 뒤로 연석(筵席)에서 주대(奏對)하는 것이나 국문(鞫問)하는 옥사(獄事)에서 죄상을 의논함에 있어 일찍이 일호(一毫)도 악역(惡逆)을 변명 비호(庇護)한 뜻이 있지 않았는데, 아간이 작은 결점을 샅샅이 찾아내어 그 중요한 부문을 숨기려고 한 것은 신(臣)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대간(臺諫)에 들어가던 처음에 먼저 탐리(貪吏) 두세 사람을 논핵하였으나, 성명(聖明)께서 마침내 한결같이 윤허를 아끼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백성을 해치면서 자신을 살찌게 한 형상은 남쪽에서 온 사람으로 입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가 말을 하고 있으니, 신이 어찌 사사로운 미움이 있어서 그렇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곧 모두 체임(遞任)하여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요즈음의 일을 ‘이름 내기를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위와 아래의 심정과 뜻이 성실(誠實)하지 못한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흥양(興陽)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리고 수읍(數邑) 수령(守令)의 일에 내가 윤허를 아낀 것은 사실 자세히 살피는 데에 연유한 것이며, 그 가운데 이희담(李喜聃)은 일찍이 계방(桂坊)1176)  을 지냈으므로 내가 그의 사람됨을 대략은 아는데 그를 대단히 교활한 사람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의논하여 처리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여수(麗水)를 다시 현(縣)으로 삼고, 청컨대 수사(水使)로 하여금 겸무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8월 7일 임신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이현국(李顯國) 등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유봉휘(柳鳳輝) 등 5흉(五凶)의 죄를 빨리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후(前後)에 이미 유시(諭示)하였는데, 어찌 다시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훈공(勳功)을 삭제한 것을 종묘(宗廟)에 고하고 교지(敎旨)를 반포하는 것은 우선 국옥(鞫獄)이 수쇄(收殺)1177)  되기를 기다려 거행하란 명령이 일찍이 있었는데, 국옥은 지금 이미 철폐(撤廢)되었으니, 마땅히 날짜를 가려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계(臺啓)가 수쇄되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대계(臺啓)가 수쇄되기를 기다릴 일이 아니니, 날짜를 가려서 거행하라."
하였다.

 

유복명(柳復明)·김상원(金相元)·신무일(愼無逸)을 승지(承旨)로, 정택하(鄭宅河)를 사간(司諫)으로, 이병태(李秉泰)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8일 계유

별이 우림성(羽林星) 밑으로 흘러갔다.

 

사헌부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기(京畿)·충청(忠淸) 두 도(道)의 유생(儒生) 윤내성(尹來成) 등이 상소하여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의 사우(祠宇)를 과천(果川)의 반계(盤溪)에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4대신(四大臣)이 성심(誠心)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데 대하여 느닷없이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신축년1178)  ·임인년1179)  의 일은 옛날에도 보기 드문 바이다. 지금 신설(伸雪)하는 날에 이르러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바야흐로 그 영혼을 위로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양조(兩朝)의 덕의(德意)를 본받는 일이다. 사우(祠宇)를 세우는 일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8월 9일 갑술

전(前) 첨사(僉使) 이우송(李友松)이 응지(應旨)해 상소하여 열읍(列邑)에서 죽은 사람에 대한 세금을 인족(隣族)에게 불법으로 징수하는 폐단을 논하고, 각도(各道)·각영(各營)·각읍(各邑)의 액수(額數)외의 군관(軍官)과 양남(兩南)1180)   관아(官衙)의 장인(匠人)이나 서도(西道)1181)  의 번(番)에서 제외된 군관의 무리를 원군(元軍)이 도망하거나 죽은 사람의 대역(代役)에서 면제(免除)시켜 줄 것을 청하며, 또 삼남(三南)1182)  의 흉년의 재해(災害)를 논하여 요역(徭役)을 감해 주고 당년(當年)의 공채(公債)도 또한 침범하여 독촉하지 못하게 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겨울에 구언(求言)할 때에 그대가 이미 응지(應旨)하였고 이제 또 진언(進言)하였으니, 그대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각읍(各邑)에 도망하거나 죽은 사람에 대한 역(役)을 대신 정하는 일은 다시 여러 도에 신칙하고, 삼남(三南)의 요역을 견감(蠲減)시키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내 하교하기를,
"전(前) 첨사(僉使) 이우송(李友松)이 응지(應旨)의 소(疏)를 잇따라 올린 것은 자못 의견(意見)이 있는 일이니, 그를 전조(銓曹)로 하여금 수용(收用)하게 하라."
하였다.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외방(外方)의 군관(軍官) 등이 잡색 명목(雜色名目)을 하루아침에 면직(免職)하게 되면 또한 소란을 일으키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별도로 뽑아내게 하되 군액(軍額)은 정하지 말고 다만 한 필(匹)의 배[布]를 받아들이는 뜻으로 양호(兩湖)1183)  에 알릴 것이며, 요역을 견감하는 일은 본도(本道)에서 등급을 나누어 계문(啓聞)하기를 기다린 뒤에 마땅히 품정(稟定)하겠습니다. 그리고 채무(債務) 징수(徵收)를 정지하는 일은 이미 삼남(三南) 도신(道臣)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허락하였으니, 지금은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주청(奏請)하기를,
"병사(兵使)나 수사(水使)의 군관(軍官)의 남잡(濫雜)한 폐단은 숙종조(肅宗朝)의 금령(禁令)에 의하여 다시 거듭 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10일 을해

한성 좌윤(漢城左尹) 홍석보(洪錫輔)가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의 식년 호적(式年戶籍)은 사체(事體)가 존귀하고 소중하므로 마땅히 한성부(漢城府)의 창고(倉庫)에 섞어서 둘 수는 없습니다. 일찍이 신묘년1184)  에도 인조(仁祖)가 잠저(潛邸)에 계실 때의 장적(帳籍)을 얻어서 영흥부(永興府)에 봉안(奉安)한 태조(太祖) 호적(戶籍)의 예(例)에 의거하여 노비(奴婢)가 기록된 것은 오려내고 뒷면을 배접(褙接)하여 두루마리를 만들어서 궤(樻)에 담아서 본궁(本宮)에 모시어 봉안(奉安)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마땅히 이런 예에 의거하여 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봉안하라고 명하였다.

 

박필주(朴弼周)·박필정(朴弼正)을 장령(掌令)으로, 임징하(任徵夏)를 정언(正言)으로, 권적(權𥛚)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근(李根)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정례(趙正禮)·이희담(李喜聃) 등을 파직(罷職)하는 일은 모두 정계(停啓)1185)  시켰다.

 

8월 11일 병자

위훈(僞勳)을 삭거(削去)하는 일로써 종묘(宗廟)에 고하고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아! 지난해의 일을 오히려 차마 말하겠는가? 간흉(奸凶)이 늘어서서 도모하는 계략이 몹시 간교하다. 큰 옥사(獄事)를 구성(構成)하여 사류(士類)를 제거하였으니, 진실로 그 마음이 극도에 이른 것을 찾아본다면 대개 이 지경에 그칠 뿐만이 아니다. 이에 전후(前後)의 사단(事端)을 가지고 본말(本末)을 환히 살펴서 여러 사람들에게 선포하여 유시(諭示)하는 것이니, 그것을 분명하게 듣고 시끄럽게 하지 말기를 바란다. 아! 생각해 보건대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인자하고 명민하여 강직하고 정대하여 천명(天命)을 스스로 헤아리시며, 그가 유학(儒學)의 일과 윤의(倫義)의 소중함에 대해서 더욱 조심하여 마음을 쓰셨다.
마침 신사년1186)  ·병신년1187)  의 두 차례 처분(處分)은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엄중(嚴重)하여 천지간(天地間)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은 일인데도 다만 저 흉당(凶黨)의 마음은 이와는 서로 배반되는 진실로 이미 본바탕이 있었으니, 어찌 두려워하고 의심하며 놀라는 마음이 없겠는가? 쌓인 감정과 원한을 한번 풀어 보려고 생각하였으나 기회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선왕(先王)께서 초년(初年)에 세자(世子)의 지위가 비어 있어서 인심(人心)이 의지할 데가 없고 왕위(王位)를 부탁할 곳이 없으므로 종사(宗社)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이에 과덕(寡德)한 이 몸을 책립(策立)하셨는데, 간사한 무리들이 이런 때를 이용하여 음흉한 계획으로 혐의를 무릅썼다는 말을 늘어 놓고 그 장본(張本)이 의혹(疑惑)스럽다는 말을 하면서 잇달아 또 밤중에 합문(閤門)을 두드리고 북문(北門)으로 잠입(潛入)했다는 일로써 위험스럽게 충동시켰으니, 그 의도가 지극히 흉악하고 그 계획이 지극히 치밀했던 것이다. 심지어 ‘하늘엔 해가 둘이 없다.’는 말과 ‘천위(天位)1188)  를 몰래 옮긴다.’는 말은 더욱 지극히 참혹하게 해독(害毒)을 끼치는 것이다.
마침내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6적(六賊)을 거느리고서 흉소(凶疏)를 선창(先倡)하여 올려 밖에서 척후병(斥候兵)이 되었고, 요사한 박상검(朴尙儉)은 김일경을 돕는 일당으로 은밀한 기회를 몰래 주선하여 안에서 해적(害賊)이 되어 표리(表裏)로 선동하여 화(禍)가 경각(頃刻)에 박두하였으니, 다행히 선대왕(先大王)의 우애(友愛)가 돈독하고 지극함을 힘입어서 그들의 뜻대로 되지 못하여 박상검은 곧바로 형륙(刑戮)을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뒤로는 흉역(凶逆)의 무리들은 크게 의심과 겁을 내어 계획하는 것이 날로 심각하여져서 드디어 곧 호적(虎賊)1189)  을 부추겨 빨리 변서(變書)을 올리게 하였는데, 변서 가운데 나에게 미친 무함(誣陷)은 말이 몹시 음흉하고 사특했으므로 의도(意圖)의 목적한 것은 길가는 사람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상변(上變)은 당기거나 늦추지도 않고 반드시 중국에 갔던 사신[使价]이 돌아오던 이튿날에 있었으니, 그들의 속셈[肝腑]이 이에서 더욱 드러났던 것이다. 옥사(獄事)가 막 일어나자 정국(庭鞫)의 명령이 있었으니, 그 간사한 정상이 쉽게 밝혀질까 염려하여 조급하게 면대(面對)를 구하여 본부(本府)로 국청(鞫廳)을 옮겨서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을 마음대로 다루어 다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또 심문하지도 말고 기록하지도 말 것을 청하여 나를 암담(黯黮)한 가운데 두고서 인하여 다시 삼수(三手)의 말을 창출(創出)하였다.
이른바 ‘삼수(三手)’ 란 것은 한 가지는 검(劒)이고, 한 가지는 약(藥)이며, 한 가지는 국상(國喪)을 이용하여 교지(矯旨)1190)  하는 것인데, 검은 부러지고 무딘 일반 칼에 지나지 않는데 이를 비수(匕首)라고 한 것은 아주 비슷하지도 않는 것이며, 약은 그가 말한 산 사람의 성자(姓字)가 어긋나고 사용한 자의 시일[日月]이 어긋났으며, 교지(矯旨)했다는 것에 이르러서는 이삼(李森)을 내보내어 충병(忠兵)1191)  을 삼은 것으로 큰 중요점을 만들었는데, 대신 임명된 자가 또 출외(出外)1192)  에 의망(擬望)되었으니 그 말이 스스로 파탄(破綻)에 돌아간 것이다. 또 궁성(宮城)을 호위(扈衛)한다는 말을 지어내어 하나의 요긴한 점으로 만들었으나 그가 말한 같이 의논한 대신은 실제로 이미 국경에 나간 지가 한 달이 되었으니, 거짓 사실을 만들어 없는 것을 날조한 형상이 이에서 더욱 스스로 드러나 나타났는데도 저들이 지적하여 역적으로 삼은 것은 번번이 삼수(三手)를 핑계대었으니, 다만 이 세 가지 일은 거개가 다 귀착시킬 곳이 없고 그들이 승복(承服)하였다고 일컬은 것은 또 대부분 죽은 뒤에 강압(强押)한 것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부정(不正)한 옥사(獄事)가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마는, 어찌 이와 같이 허망한 옥사(獄事)가 있었겠는가?
아! 4대신(四大臣)은 선조(先朝)의 옛날 덕망 있는 신하로 일신(一身)의 죽고 사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충성을 다할 것을 힘써서 위태한 때를 당하여 계책을 정하였으니, 정성스러운 마음의 빛나는 것이 바로 절개를 지키어 의리에 죽는 자와 비교하여 논할 만하고, 억울하게 참혹한 죄에 걸렸으나 뜻을 지켜 변심(變心)하지 않는 자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정량(貞亮)1193)  ·충순(忠純)1194)  한 신하인데, 온갖 음형(淫刑)을 더하여 차례로 죽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역신(逆臣)을 토벌하는 것으로 핑계대면서 심지어 호적(虎賊)을 훈적(勳籍)에 기록하기를 천승(千乘)의 지존(至尊)에게 강제로 요청하고, 이에 천례(賤隷)와 더불어 맹반(盟盤)의 피를 같이 마시면서 군부(君父)를 업신여기어 조롱하고 상궁(上穹)1195)  을 속이면서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려함이 없었으며, 역적 김일경이 찬술(撰述)한 문자(文字) 가운데 ‘종무 접혈(鍾巫蝶血)’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흉악하고 참혹하였으며 패악하고 불순(不順)한 것이 윤리를 끊었으니, 한없는 흉악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대개 그 계획적으로 일을 꾸며낸 것은 실로 망측(罔測)한 죄안(罪案)을 날조(揑造)하여 보호하는 여러 신하들을 죄다 죽여, 그로 인하여 위로 침범할 단계를 조작하여 그 애초에 몰래 계획하였던 것을 통쾌하게 시행하는데 있었으며, 곧 문생(門生)이니 국로(國老)니 하는 비유와 같은 것은 그 지적한 뜻이 패만(悖慢)하여 더욱 신하로서 감히 말할 바가 아니었다. 아! 대순(大舜)1196)  은 견묘(畎畝)1197)   가운데 살았으나 고을을 이루고 도읍(都邑)을 이루는 효과가 있었으니, 성실(誠實)의 상응(相應)함이 어긋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은 결과가 있는가 싶다.
돌아보건대, 나는 평일(平日)에 본래 자수(自修)하는 공부가 없어서 덕망은 믿음을 보지 못하고 정성은 능히 감동시키지 못하여 그들이 사나운 마음을 고치지 않고 독살 스러운 말을 더욱 번득이게 하여 마침내 충현(忠賢)이 나란히 운명(殞命)하게 되고 국맥(國脈)이 모두 절단(絶斷)하게 되어 싹자른 듯이 경복(傾覆)될 형세(形勢)에 놓여 있었고, 내 몸도 또한 아침저녁으로 위태롭고 두려운 지경에 있었으니, 지난날 우리 조종(祖宗)께서 위에서 묵묵히 돕고 선대왕(先大王)께서 지극하신 인심(仁心)과 성대하신 덕으로 안전하게 도와주시는 일이 있지 않았다면, 내게 어찌 오늘날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근본을 캐어 논한다면 다만 이 일종(一種)의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는 모두 숙종(肅宗)께서 사문(斯文)을 크게 바로잡은 뒤로 버림받고 배척당한 사람으로서 온갖 계책으로 감히 말하지 못할 지위에 침범하고 핍박해서 사직(社稷)을 전복시키고 위태롭게 하여 그들의 묵은 원한을 푸는 것이니, 그들이 밤낮으로 경영하는 바는 다만 이것뿐이므로, 크나큰 죄악(罪惡)은 실로 전사(前史)에서 보지 못한 바이다. 아! 다만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인자(仁慈)하여 남을 사랑하고 살생(殺生)을 좋아하지 않는 뜻이 조칙(詔勅)의 내용에 온화스럽게 나타났으니, 두 대신이 극화(極禍)를 당했을 때에는 이미 도로 거두라는 왕음(王音)을 내리시고, 중간에 재난과 허물로써 소방(疏放)할 것을 자주 명하였으니, 성상의 뜻이 있는 것을 곧 이에서 볼 수 있다.
지난번의 화변(禍變)이 비록 있지 않은 바가 없으나, 어찌 이로써 우리 성덕(聖德)에 누(累)를 끼치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선왕(先王)의 끼친 뜻을 추모(追慕)하여 이미 고(故) 상신(相臣)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의 원통함을 신설(伸雪)하여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켜서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내릴 것을 명하였다.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김제겸(金濟謙)·조성복(趙聖復)·이홍술(李弘述)·윤각(尹慤)·백시구(白時耉)·이상집(李尙)·김시태(金時泰) 등에겐 그 직첩(職牒)을 돌려주되, 관등(官等)을 뛰어 올려 관작(官爵)과 직질(職秩)을 추증(追贈)하였다. 그리고 역적(逆賊)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에겐 모두 법에 의거하여 사형(死刑)하였고, 이사상(李師尙)은 우선 말감(末減)1198)  의 형률(刑律)에 따라 참작해서 교형(絞刑)에 처하되 부사 공신(扶社功臣)을 혁파(革罷)하여 그 녹권(錄券)을 회수(回收)할 것이며, 그 나머지 흉적(凶賊)들은 혹은 찬배(竄配)하거나 축출(逐黜)하고, 혹은 수금(囚禁)하거나 국문(鞫問)하였으니, 주토(誅討)의 형(刑)을 비록 우선 오늘엔 지체하고 있으나 역·순(逆順)의 분변은 그나마 신(神)과 사람에게 위로될 것이다.
바야흐로 탕척(蕩滌)하여 밝힘을 당한 나머지에 포고(布告)한 수문(修文)이 없겠는가? 아! 그대 중외(中外)의 신서(臣庶)들은 모두 나의 뜻을 알아서 사인(邪人)을 물리치고 정인(正人)을 도와서 영원히 그대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방가(邦家)를 보호하여 다스려야 한다. 아! 원통함을 씻어 주고 죄를 토벌(討伐)하는 것은 곧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따르는 것이고, 나라를 세우고 가훈(家訓)을 계승하는 것은 영원히 소인(小人)의 화(禍)를 끊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마땅히 자세히 알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의현(李宜顯)이 지어 올렸다.】  임금이 이 글의 수미(首尾)에 조리(條理)가 밝고 말이 자못 상세히 갖추어졌다 하여 특별히 길든 말[熟馬]을 하사하였다.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 상소하여 토역(討逆)·진대(賑貸)의 대책을 논하고, 또 말하기를,
"내수사(內需司)의 재화(財貨)를 관장(管掌)하는 것을 환관 잡류(宦官雜流)로써 처리하게 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습니다. 의당 사대부(士大夫)에서 선발하여 그 관원(官員)으로 삼는 것을 한결같이 각 관사(官司)와 같이 한다면 거조(擧措)가 빛나게 밝고 법제(法制)가 두루 갖추어져서 그것이 성덕(聖德)에 도움되는 것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외방(外方)에서 서로 소송(訴訟)하는 전답(田畓)이 대부분 내수사(內需司)에 들어간다.’고 하고 낙송(落訟)1199)  된 자는 짐짓 내수사에 납속(納屬)하게 하는 것은 아주 몹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내수사는 그 받아들이는 것을 이롭게 여겨 헤아려 수세(收稅)하게 되니, 더욱 조가(朝家)에서 신칙한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원컨대 곧 조사해 내어 돌려주게 하소서."
하고, 또 액정서(掖庭署) 하례(下隷)의 무리가 야금(夜禁)을 범하면서 함부로 다니는 상황을 말하면서 엄칙(嚴飭)을 가할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요즘의 일은 나의 뜻을 이미 유시(諭示)하였으니, 다시 무슨 많은 말을 하겠는가? 민사(民事)를 위하여 계책을 진달한 것은 진실로 매우 마땅한 일이니,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신칙(申飭)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거행(擧行)하도록 하겠다. 내수사의 설행한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논할 수 없다. 또 내수사에서 원래 전답(田畓)의 세(稅)를 함부로 받아들인 일이 없으니, 그대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8월 12일 정축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종묘(宗廟)에 고하고 교서(敎書)를 반포하는 일은 곧 전하(殿下)께서 하나의 처음으로 행하시는 대정(大政)인데, 혹은 병(病)을 핑계대고 참여하지 않은자가 있으니, 이는 반드시 그 마음이 기뻐하지 않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화외(化外)1200)  의 백성과 같음이 있으므로 징계(懲戒)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여하지 않은 자는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해 내어 당상관(堂上官)은 파직(罷職)시키고 당하관(堂下官)은 태거(汰去)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화외(化外)의 백성으로써 비교한다면 교화(敎化)가 어찌 군주(君主)의 한때의 위노(威奴)로써 행해질 수 있겠는가? 이는 형정(刑政)으로 굴복시킬 바가 아니니,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우리 교화(敎化)를 따르지 않는 자는 어찌 다스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파직(罷職)이나 태거(汰去)의 처벌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사이에 비록 간혹 마음에 기뻐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나의 정교(政敎)가 능히 감화(感化)시키지 못한 소치이니, 이는 스스로 반성(反省)해야 할 처지(處地)이다. 내버려 두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로써 연석(筵席)에서 말을 하여 거행하는 조목에 내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성상(聖上)의 뜻이 이와 같다는 것을 다 알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15일 경진

서종급(徐宗伋)을 수찬(修撰)으로, 황재(黃梓)를 지평(持平)으로, 이성룡(李聖龍)을 필선(弼善)으로, 최명상(崔命相)을 사서(司書)로, 이기익(李箕翊)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삼았다.

 

충청도(忠淸道) 홍주(洪州)에 암캐가 새끼를 낳았는데, 일년을 지난 뒤에 변하여 수캐가 되었다.

 

대사헌(大司憲) 조관빈(趙觀彬)이 춘천(春川)에 있으면서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고, 인하여 근래의 일을 말하기를,
"청컨대 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과 역적 김일경(金一鏡) 소하(疏下)의 여러 적(賊)들이 모반(謀反)을 꾀한 죄를 빨리 바로잡으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삼적(森賊)1201)  의 죄는 이미 악역(惡逆)에 관계되었으므로, 경솔하게 먼저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또한 원컨대 여러 죄수들과 함께 다시 엄하게 국문하도록 명하여 기어이 실정을 캐내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최규서(崔奎瑞)는 20년간 휴퇴(休退)1202)  한 사람으로서 처음에 허예(虛譽)가 없지 않았는데, 신축년1203)   변란(變亂)이 일어남을 당하여 하늘에 치솟는 기세를 가만히 도와주었고, 경적(鏡賊)1204)  이 주토(誅討)의 죄에 처하게 되자 감히 편드는 말을 하였으니, 그 평생에 심술(心術)이 죽기전에 다 드러났습니다. 마땅히 엄중한 견책(譴責)을 가하여 그 죄상을 명백히 징계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태묘(太廟)에 배식(配食)시키는 일은 전례(典禮)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숙종조(肅宗朝) 때에 덕(德)을 같이 한 신하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감히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이 명의(名義)에 위배(違背)되어 성고(聖考)1205)  에게 죄를 얻은 자로서 함부로 승배(陞配)시키니, 이것도 또한 지난번에 군간(群奸)들이 한결같이 처분(處分)을 반대했던 흉심(凶心)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하늘에 계시는 성고(聖考)의 혼령도 반드시 척강(陟降)1206)  의 즈음에서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상(聖上)께서 선왕(先王)을 준수(遵守)하시는 도리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疏)를 진달(陳達)한 일은 지난번에 연교(筵敎)에게 경(卿)도 또한 들어서 안것인데 무엇 때문에 많은 말을 하고 있는가? 소하(疏下)의 5인과 이삼(李森)의 일에 대한 나의 의도(意圖)는 목적한 것이 있으니 억지로 거슬려서 될 일이 아니다. 봉조하(奉朝賀)1207)  의 일에 이르러서는 사직(辭職)하고 고향에 돌아가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으므로 선조(先朝)에서도 억지로 나오게 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 염절(恬節)을 힘쓰도록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경(卿)의 논하는 바가 휴퇴(休退)·치사(致仕)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은 너무 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세 신하를 배향(配享)시킨 일은 적당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아! 지난해에 분개하여 성내는 일이 과격하게 됨으로써 공정(公正)하게 경계하는 바를 생각하지 못하고서 말이 이미 죽은 사람에게 미치게 되니, 어찌 그 자제(子弟)들의 마음을 잘 살피지 못하는가? 경은 모름지기 옛사람의 패위(佩韋)1208)  한 일을 본받고 경의 아버지의 관용(寬容)하는 도량을 본받아 지나치게 사직(辭職)하지 말고 속히 공무를 집행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조관빈(趙觀彬)은 죄화(罪禍)를 입은 집의 자손(子孫)으로서 벼슬에 이바지한 것은 대개 징토(懲討)의 대의(大義)를 위한 것인데, 한번 도당록(都堂錄)에서 파좌(罷坐)된 뒤로부터 물의(物議)에 비난을 당하게 되니 종적(踪跡)이 진실로 이미 위태로워졌으며, 궐정(闕庭)에서의 호소에 대한 윤허를 아끼는 것을 보게 되자 드디어 춘천(春川)으로 들어가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을 계획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때마침 대간(臺諫)의 직책을 받게 되자 사직소로 인하여 최규서(崔奎瑞)와 세 신하를 배향(配享)에서 내치는 일을 논하였다. 대개 종묘[太廟]에 배식(配食)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 것이다. 더구나 숙종 대왕께서 즉위하신 40여 년에는 명신 석보(名臣碩輔)가 이때에 번성하였는데, 여태까지 올려 배향한 것은 마침 한편의 사람의 정권을 마음대로 처단하던 때를 당하여 곧 명의(名義)에 죄를 얻은 사람으로써 그가 좋아하는 바에 아부를 하여 구차스럽게 수효를 채웠으니, 그가 사정(私情)에 따라 공의(公議)를 무시(無視)한 죄를 이루 다 책망하겠는가? 지금 경화(更化)된 뒤로부터 성상(聖上)께서 마땅히 올리고 내칠 자를 변별(辨別)하는 데에 이보다 먼저 할 것이 없었는데도, 처음에는 조관빈의 말한 것을 배척하다가 마침내는 양사(兩司)의 계사(啓辭)를 윤허하지 않았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자는 근심하며 한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45면
【분류】인사(人事)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1201] 삼적(森賊) : 이삼을 지칭함.[註 1202] 휴퇴(休退) :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와 쉼.[註 1203]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204] 경적(鏡賊) : 김일경을 지칭함.[註 1205] 성고(聖考) : 숙종을 지칭함.[註 1206] 척강(陟降) : 오르락내리락함.[註 1207] 봉조하(奉朝賀) : 최규서(崔奎瑞)를 지칭함.[註 1208] 패위(佩韋) : 전국 시대(戰國時代) 위(魏)나라 서문표(西門豹)가 자기의 성급한 마음을 고치기 위하여 항상 무두질한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반성했다는 고사(故事).
사신은 말한다. "조관빈(趙觀彬)은 죄화(罪禍)를 입은 집의 자손(子孫)으로서 벼슬에 이바지한 것은 대개 징토(懲討)의 대의(大義)를 위한 것인데, 한번 도당록(都堂錄)에서 파좌(罷坐)된 뒤로부터 물의(物議)에 비난을 당하게 되니 종적(踪跡)이 진실로 이미 위태로워졌으며, 궐정(闕庭)에서의 호소에 대한 윤허를 아끼는 것을 보게 되자 드디어 춘천(春川)으로 들어가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을 계획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때마침 대간(臺諫)의 직책을 받게 되자 사직소로 인하여 최규서(崔奎瑞)와 세 신하를 배향(配享)에서 내치는 일을 논하였다. 대개 종묘[太廟]에 배식(配食)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 것이다. 더구나 숙종 대왕께서 즉위하신 40여 년에는 명신 석보(名臣碩輔)가 이때에 번성하였는데, 여태까지 올려 배향한 것은 마침 한편의 사람의 정권을 마음대로 처단하던 때를 당하여 곧 명의(名義)에 죄를 얻은 사람으로써 그가 좋아하는 바에 아부를 하여 구차스럽게 수효를 채웠으니, 그가 사정(私情)에 따라 공의(公議)를 무시(無視)한 죄를 이루 다 책망하겠는가? 지금 경화(更化)된 뒤로부터 성상(聖上)께서 마땅히 올리고 내칠 자를 변별(辨別)하는 데에 이보다 먼저 할 것이 없었는데도, 처음에는 조관빈의 말한 것을 배척하다가 마침내는 양사(兩司)의 계사(啓辭)를 윤허하지 않았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자는 근심하며 한탄하였다."

 

8월 16일 신사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변사(備邊司)의 당상관(堂上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나아가 아뢰기를,
"군주의 마음 쓰는 것은 인(仁)으로써 주관을 삼고 의리로써 재제(裁制)를 한 뒤에야 선(善)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만약 한갓 자애(慈愛)로써 인(仁)을 삼는다면 이는 부인(婦人)의 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제 조관빈(趙觀彬)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을 살펴보건대, 군주가 된 이는 마땅히 그 사람의 충(忠)과 사(邪)를 먼저 분변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그 사람의 충(忠)과 사(邪)를 분변하시지 않고 그 자제(子弟)가 된 사람의 마음에 애척(哀慽)하는 바가 있는 것만으로써 생각을 하신다면 혹은 불도(佛道)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인(仁)을 하는데 지나쳐서 능히 밝게 분별하시지 못한 소치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 등은 모두 이미 죽은 사람이다. 무릇 남을 논평하는 도리에서는 공평하게 용서해 주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인데 세 상신(相臣)을 일필(一筆)로 구단(句斷)하는 것을 여지없이 하였으니, 지난날 상소에 대한 비답은 실제로 경계하라는 뜻이었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윤지완(尹趾完)은 곧 신의 처숙부(妻叔父)입니다. 신(臣)은 미심쩍어 감히 말하지 못하였지마는, 조신(朝紳) 사이에 이런 의논이 있는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대저 군신(君臣)사이는 물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서로 믿고 의지하는 교계(交契)가 밝고 융화(融和)하여 신하의 재능을 알아 잘 대우하는 일이 성대하여 종시(終始) 변함이 없게 된 뒤에야 묘정(廟庭)에서 배식(配食)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시(古詩)에 이른바 ‘일체(一體)가 된 군신(君臣)이 제사(祭祀)를 같이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지난날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조경(趙絅)을 배식(配食)시켰는데, 그 뒤에 조정의 의논에서 말하기를, ‘현종께서는 조경의 면목(面目)을 모르니 배향(配享)시킬 수 없다.’ 하시며 한 달이 지나도록 주견(主見)을 다투어 출향(黜享)시켰으니, 배향되었던 사람이 만약 적합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어찌 배향에서 내치는 것을 미룰 수 있겠습니까?
남구만은 사람됨이 젊어서는 명망(名望)이 있었으나 만년(晩年)에는 곧 명의(名義)에 어긋났기 때문에 을유년1209)  에 신이 승지(承旨)가 되었을 때에 숙종(肅宗)께서 말씀하시기를, ‘남구만은 명의(名義)에 죄를 얻었으니 특별히 그 직(職)을 파면시켜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최석정(崔錫鼎)은 신사년1210)  에 신이 특별히 겸춘추관(兼春秋館)으로 입시(入侍)했을 때에 최석정(崔錫鼎)이 연일 직접 세 차례나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숙종께서 대면(對面)하여 엄중히 물리치시고 이내 중도 부처(中道付處)할 것을 명하였으며, 그 뒤에 명의(名義)에 죄를 얻은 이유로써 마침내 임용(任用)하지 않았으니, 그를 평일에 미워하고 냉대(冷待)하신 것을 대체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로 묘정(廟庭)에 올려 배향(配享)하니, 물정(物情)의 불평(不平)이 진실로 이미 오래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구만(南九萬)은 봉조하(奉朝賀)로서 그대로 벼슬을 하였고 윤지완(尹趾完)은 선조(先朝)에서도 또한 다시 수용(收用)하였으니, 이제 와서 추론(追論)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일찍이 숙종조 때에 서원(書院)이 난잡(亂雜)하여진 폐단으로써 계미년1211)   이전에 조정(朝廷)에 품(稟)하여 창건(創建)된 것 외에 그 뒤에 새로 세운 서원은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해년1212)  에 신의 형 민진후(閔鎭厚)가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을 때에 각도(各道)에 조사하여 아뢴 것을 진달(陳達)하니, 숙종께서는 친히 스스로 헤아려 억제하여 혹은 훼철(毁徹)하게 하고 혹은 보존시켰는데, 그때에 훼철하라고 명한 서원도 지금까지 훼철하지 않고 신축년1213)   이후로 더 세운 것도 많다고 하니, 청컨대 낱낱이 조사하여 훼철하지 않은 것은 죄를 주고 새로 세운 서원은 또한 생각해 보고 판단하셔서 혹은 훼철해야 할 것인가 혹은 그대로 둘 것인가를 한결같이 숙종의 처분하신 것에 의거하소서. 숙종 말년에 또 비록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한 대현(大賢)일지라도 첩설(疊設)1214)  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분부가 있었으니, 지금도 또한 한결같이 이러한 분부에 의거하여 시행하신다면 새로 세우느라 분운(紛紜)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곧 이제 새로 세워야 할 것으로 말한다면 문순공(文純公) 신(臣) 권상하(權尙夏)는 곧 유학(儒學)의 적통(嫡統)을 전한 유현(儒賢)이므로 그가 살던 곳에 세우지 않을 수 없고, 그 밖에 새로 세우는 것은 모두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의 서원(書院)을 명하여 세우게 하였다. 처음에 유생(儒生) 윤내성(尹來成) 등이 상소하여 서원을 세울 것을 청하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민진원이 아뢰기를,
"4대신(四大臣)을 합향(合享)하는 것은 비록 숭보(崇報)의 도리에는 합당하나 사당을 세우는 것은 폐단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고(故) 상신(相臣) 김창집(金昌集)은 거제도(巨濟島)에서 체포(逮捕)되었다가 성주(星州)에서 사사(賜死)를 받았으며 거제도나 성주에는 모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서원과 영당(影堂)이 있으니 김창집은 여기에 배향(配享)시키고, 이이명은 남해(南海)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당이 있으니 사적(事蹟)은 비록 다르지마는 나라를 위하여 죽은 것은 같으니 여기에 합향(合享)시키고, 조태채(趙泰采)는 진도(珍島)에 일찍이 귀양갔었던 여러 현인(賢人)의 서원이 있으니 또한 여기에 합향(合享)시키며, 이건명(李健命)은 흥양(興陽)에서 죽었고 흥양엔 전망(戰亡)한 무장(武將) 두 사람의 사당이 있어 ‘쌍충사(雙忠祠)’라고 하는데 이 사람도 또한 나라를 위하여 죽은 것은 같으니 여기에다 합향(合享)시키고, 다시 액호(額號)를 내리게 되면 이미 조두(俎豆)의 제향(祭享)이 있게 되므로 또한 분잡(紛雜)하고 떠들썩한 폐단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원의 설립(設立)은 사실 근래에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으나 4대신(四大臣)의 일에 이르러서는 규례(規例)에 따라 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대신에게 의논하게 한 것이다. 대신의 뜻이 신중히 하는 도리에서 나왔으나, 다만 거제도(巨濟島)·진도(珍島)·남해(南海)·흥양(興陽) 등처(等處)에 나아가 배향(配享)시키게 되면 충신(忠臣)을 포양(褒揚)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고, 선정(先正)에게 합향(合享)하게 되면 그것이 사체(事體)에 있어서도 또한 미안할 듯하다. 그리고 충무공(忠武公)은 진중(陣中)에 임하여 순절(殉節)하였고, 쌍충사(雙忠祠)에 두 글자로 사액(賜額)한 것은 의도(意圖)한 바가 있어서였다. 비록 나라를 위하여 죽은 것은 같지마는 사적(事蹟)은 각각 다르니, 지금 만약 다른 사람을 배향시킨 이유로써 그 사당의 칭호(稱號)를 고친다면 또한 사액(賜額)한 본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4대신을 모두 한 사당에 배향하는 것이 사리(事理)에 있어서 합당할 듯하다."
하고,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니,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호조 판서(戶曹判書) 신사철(申思喆)·어영 대장(御營大將) 이봉상(李鳳祥)·승지(承旨) 이기진(李箕鎭)·대사간(大司諫) 홍우전(洪禹傳)·교리(校理) 박사성(朴師聖) 등은 모두 말하기를,
"대신이 아뢴 말은 대개 폐단을 덜기 위한 뜻이지마는, 다른 사당에 합향(合享)하는 것은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국가에서 충신을 포양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별도로 4대신을 위하여 사당을 세워서 똑같이 향사(享祀)하는 것이 사체(事體)에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4대신은 모두 한때의 대신으로 나라를 위하여 같이 죽었으니, 별도로 사우(祠宇)를 세워서 똑같이 모두 향사(享祀)하게 하라. 비록 후세(後世) 사람에게 이를 보게 하더라도 반드시 4대신의 충성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니, 다른 사당에 합향(合享)하지 말고 별도로 사당을 세워서 함께 향사(享祀)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만약 별도로 4대신을 위하여 사당을 세운다면 유소(儒疏)에 의하여 과천(果川)땅에 설립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과천(果川)에 사당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4대신이 모두 그전에 과천 땅에서 왕래하였기 때문에 선비들의 의논이 모두 이곳에 사당을 세우려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곳은 사육신(死六臣)의 서원과도 멀지 않다."
하며, 마침내 허가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대사간(大司諫) 홍우전(洪禹傳)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어 청하기를,
"특별히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호남(湖南)에 보내어 도신(道臣)과 함께 편의(便宜)함을 강구(講究)하여 구활(救活)하는데 마음을 다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별도로 보내는 일은 폐단이 있다 하여 암행 어사(暗行御史)에게 각별히 유지(諭旨)를 내려 그로 하여금 진휼(賑恤)하는 일을 겸하여 관장(管掌)하게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이 아뢰기를,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재(李縡)는 학식(學識)이 뛰어났으니 조정에서는 하루라도 이런 사람을 없게 하여서는 안될 것 인데도, 시종(始終) 시간만 끌고 올라오지 않습니다. 이제 나라의 연제(練祭)가 임박(臨迫)함으로 인하여 외반(外班)에 참여하기 위하여 어제 막 도성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성상(聖上)께서 각별히 힘써 만류하여 연석(筵席)에 출입하게 된다면, 그가 성학(聖學)을 도우고 이익됨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조 참판이 올라오는 것은 진실로 특이(特異)한 일이다. 내가 비록 성심(誠心)이 적지마는 어떻게 도로 돌아가게 하겠는가?"
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재(李縡)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옛날 주자(朱子)가 임금의 명에 나가려 하며 그 스승에게 방금 당연히 말할 것을 물으니, 스승의 말이 ‘삼강(三綱)이 바르지 않으면 의리(義理)가 밝아지지 않는다.’고 하므로, 주자가 마침내 이 말로써 군주에게 고하는 제일의 의리로 삼았습니다. 이제 군주의 무함을 씻고 나라의 역적을 토벌(討伐)하는 것으로 온 나라가 큰 의논으로 삼고 있는 것을 전하께서는 싫도록 보시고 싫도록 들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천리(天理)와 민이(民彛)의 큰 것에 관계되므로 신은 청컨대 먼저 중요한 부분에 나아가 논하겠습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온화하고 우아하며 화평하고 순수하셨으며, 관대하고 후덕하며 인자하고 선량하여 효우(孝友)의 덕망이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라의 운수가 어려워져서 3, 4년 사이에 세상의 재앙이 이처럼 혹독하여지자 저 여러 간흉(奸凶)들은 기회를 타 함부로 날뛰면서 우리의 선량(善良)한 사람을 해치고 우리의 전장(典章)1215)  을 변경(變更)하여 무릇 하는 일에 있어서는 걸핏하면 품지(稟旨)라고 핑계대면서 물러나와 외부에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성상(聖上)의 재결(裁決)이 대단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진심으로 우리 선왕(先王)을 사랑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그들의 마음속에 쌓아온 것이 명의(名義)에 시달리게 되므로 반드시 품은 화심(禍心)을 한번 통쾌히 풀어보려고 했던 날이 오래된 것입니다. 드디어 곧 한 몸의 사납고 독살스러운 사심을 품고 종사(宗社)의 대책(大策)에 승부를 다투게 되어 뜬 소문을 선동(煽動)하여 인심(人心)을 현혹시켜서, 마침내는 세자(世子) 세우는 것을 지칭하여 폐립(廢立)한다 하고 대리 청정(代理聽政)한 것으로써 찬탈(簒奪)한다 하였으니, 그들이 장차 저군(儲君)을 어떤 곳에 두려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전하의 무함당한 것은 이미 망극(罔極)한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처리하신 바는 다른 도리(道理)가 없습니다. 대개 숙고(肅考)1216)  의 유교(遺敎)로 부탁하신 것은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며, 선왕(先王)께서 선지(先志)1217)  를 본받고 자지(慈旨)에 품하여 빨리 대책(大策)을 결정한 것도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며, 전하(殿下)께서 합문(閤門)에 나가시어 저위(儲位)를 사양하신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으셨으니, 그 어렵고 절박하며 위험하고 두려움이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감히 천승(千乘)의 나라를 가볍게 여기면서 필부(匹夫)의 절의(節義)를 펴지 못하신 것도 또한 종사(宗社)를 위한 것입니다. 저들의 무함 패리(悖理)한 말에 전하께서 무엇을 괴로워하십니까? 전하의 일신(一身)은 곧 종사(宗社)의 주재(主宰)이므로 전하께서도 또한 사사로이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 세자를 세우도록 한 여러 신하들도 전하에게 사정을 둔 것이 아니고 실로 종사(宗社)를 위하는 대계(大計)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저군(儲君)을 위태롭게 할 것을 꾀하였으니, 실제는 종사(宗社)에 죄를 얻게 된 것입니다.
토죄(討罪)하는데 형벌(刑罰)하고 시상(施賞)하는 것을 한결같이 하늘의 법칙에 따른다면 전하께서 무엇을 관여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저의(儲位)에 계실 때에 험악하고 어려운 점을 이미 갖추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위로 종사(宗社)를 위하고 아래로 백성을 위해 감히 스스로 그 자신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무릇 환란을 막고 변고에 대처하는 방법에서 진실로 낱낱이 상경(常經)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대위(大位)가 이미 정하여진 뒤로는 마땅히 한결같이 공리(公理)를 따라 먼저 선왕의 본심(本心)을 밝히고 간흉(奸凶)의 죄악(罪惡)을 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이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이에 열어 주느냐 닫느냐 펼쳐 놓느냐 거두느냐 하는 가운데서 마음과 힘을 헛되어 쓰시는 것은 위험하게 위협하는 말에 선입견을 면치 못하신 것이니, 예우(禮遇)의 융성함이 가슬(加膝)하는 것보다 더 심하나 명령의 실수는 사마(駟馬)의 빠른 것도 혹은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천지(天地) 가운데 스스로 일단(一段)의 성직(誠直)한 도리(道理)가 있으니, 전하께서 마음에 돌이켜 보아서 그 능히 스스로 만족하고 괴로움이 없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인심(人心)의 빠져든 것은 이미 십분(十分)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 여러 소인의 무리들은 유독 우리 조종(祖宗)의 신자(臣子)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부귀(富貴)를 탐하여 자기 속셈을 자행(恣行)하는 일로써 다만 쌓여진 울분을 보복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욕심을 만족하지 못할까 염려할 뿐입니다. 더구나 큰 죄악을 범한 사람 외에는 천심(淺深)·완급(緩急)의 다름이 없지 않으나, 색목(色目)의 가운데서 빼낼 힘이 없으니,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시비(是非)를 분석(分析)하여 전형(典刑)을 소상히 보여서 나쁜 짓을 하면 부끄러워하고 착한 짓을 하면 사모하는 줄을 알게 한다면 저들도 장차 옛일을 뉘우치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여 탕평(蕩平)의 영역(領域)에 함께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번번이 시비에 있어 근원에서 밝히지 못하고 이를 쓸어 매몰시켜서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이 구분되지 못하고, 이름과 실상이 서로 어긋나게 되면 전하께서 그 악한 자를 교화시키려고 하였던 것이 다만 악을 조장(助長)시키는 바가 될 것이고, 당화(黨禍)를 풀려고 하였던 바가 다만 당화를 더하는 바가 될 것입니다.
작년에 전하께서 대단한 기세(氣勢)로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을 주살(誅殺)할 때에 그전에 사직(社稷)에 공훈(功勳)이 있다고 하는 자가 마침내 변하여 역적이 되었으며 혹은 그전대로 토죄(討罪)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그 죄에 복주(伏誅)되었으니, 비록 이광좌(李光佐)로 하여금 조태억(趙泰億)을 다스리게 하고 조태억으로 하여금 이광좌를 다스리게 하더라도 또한 장차 분주히 돌아다니며 일하기도 부족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다만 전하의 위엄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습니까? 저 여러 간사한 무리들은 스스로 죄진 것이 지극히 중하여 하늘 아래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설령 전하께서 한결같이 용서하여 총애(寵愛)하여 쓴다하더라도 혹은 아마 하루라도 깨닫게 되면 스스로 편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들의 죄악을 알고도 법을 굽혀 비호(庇護)를 하셨는데, 지금 와서 무엇이 두려워서 방자하지 않겠습니까? 아! 의리(義理)가 어두워져서 막힌 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전하께서 또 한개의 ‘사(私)’ 자로써 몸소 행하여 거느리시니, 상하(上下)·대소(大小)가 사의(私意)의 소굴에 빠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대부(士大夫)가 한번 참벌(斬伐)을 겪은 뒤로 기절(氣節)이 소마(消磨)되었으니, 비록 신근(辛勤)하게 붙들어 가지려 하나 오히려 그 능히 진작(振作)시키지 못할까 근심되는데, 전하께서는 한갓 작록(爵祿)으로써 얽어서 묶으려고 달음박질하고 계시니, 국조(國朝)에서 예교(禮敎)와 명절(名節)을 숭상하는 기풍을 다시 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까?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것은 공정한 것인데도 성상의 뜻이 향하는 바를 감히 어기거나 거스리는 일이 없으며 비록 대간의 의논에 거듭 나온 것이라도 억지로 정지하게 하여 점차 임금의 도리는 날로 높아지고 신하의 도리는 날로 낮아지게 하니, 주자(朱子)의 이른바 ‘현인(賢人)·군자(君子)가 날로 더욱 소침(消沈) 위축(委縮)될수록 녹봉(祿俸)이나 받고 작위(爵位)나 보존하려는 선비가 날로 더욱 서로 모여든다.’는 것에 거의 가까와질 것입니다. 더구나 대간(臺諫)은 군주(君主)의 이목(耳目)인데도 전하께서 이미 이들과 서로 다투셨고, 사림(士林)은 국가의 원기(元氣)인데도 전하께서 또 기를 꺾어 욕보였습니다. 스스로 그 이목을 폐지하고 스스로 그 원기를 해치고서도 나라가 위태롭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선왕(先王)의 사업을 이어받은 처음에 사친(私親)을 높여 받들자는 한두 가지 일로 아첨하며 인도하는 자가 있었는데, 전하께서 대의(大義)를 끌어대어 물리쳤으므로 원근(遠近)에서 전송(傳謫)1218)  하였는데, 다시 얼마 안 가서 사옥(祠屋)을 새로 짓고 종친(宗親)의 집을 강제로 사느라 거천(鉅千)의 재물을 소비하게 되었으니, 지난날 의리를 끌어대며 물리쳤던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하겠습니까? 동궁(東宮)의 질환(疾患)이 평복(平復)된 것이 어찌 종사(宗社)의 큰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의인(醫人)을 고을에 임명하여 서둘러서 행한 것이 하루 동안의 정사(政事)1219)  가 많게는 세 사람까지 이르렀으니, 심하게도 사의(私意)는 쉽사리 일어나고 이겨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순교(巡校)나 액례(掖隷)는 동일한 신서(臣庶)인데, 노해서 마땅히 죄줄 만한 자를 알지 못하는 것이 법을 집행한 자입니까, 법을 범한 자입니까? 예속(隸屬)은 아주 미세(微細)한 존재인데도 전하께서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서 아래로 낭리(朗吏)와 더불어 그 경중(輕重)을 다투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자중(自重)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내수사(內需司)를 두고 또 사궁(私宮)을 두었으니, 이미 왕자(王者)는 사재(私財)가 없어야 하는 의리에 어긋난 것인데도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유사(有司)가 상공(常貢)하는 외에 받아드리는 것이 대부분이 명목이 없는 것이었으니, 그것을 주자(朱子)의 이른바 ‘감히 일호(一毫)라도 잠저(潛邸)의 옛것에 더하여서는 안 된다.’고 한 것에 비하면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또 전하께서는 말씀을 하실 때에 과묵(寡默)하지 못하시어 간중(簡重)한 체모를 아주 잃으시고 또 혹은 구변(口辯)으로 남에게 대항하는 습관이 있으시니, 그 말의 결점으로 그 마음의 실수를 알게 된다는 것을 어찌 스스로 숨기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낮에 경(卿)이 왔다는 것을 듣고 저녁에 경의 상소를 보니,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함으로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기며 또한 들었던 앞에 말이 틀리지 않다고 하겠다. 의리를 명백히 분변한 곳에 이르러서는 말한 것이 매우 상세하고 착실하므로 내 나름대로 감탄(感歎)하였다. 원소(元疏)는 궁중에 머물러 두고 좌우(座右)에 명언(銘言)으로 삼겠으니, 경은 속히 공무를 집행하고 연석(筵席)에 출입하면서 내가 미처 행하지 못하는 것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찬선(贊善) 김간(金幹)이 소명(召命)으로 인하여 광주(廣州)에까지 와서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돈소(敦召)하였다.

 

정언(正言) 박규문(朴奎文)이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득실(得失)과 풍속(風俗)의 사치한 폐단을 상세히 진달(陳達)하였는데, 무릇 수천여 언(言)이었다.
"1. 전하께서 이삼(李森)을 석방한 것은 진실로 가뭄을 근심하신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나, 흉역(凶逆)을 용서함에 있어 도리어 가벼운 형벌을 사용하였으니, 마땅히 하늘에서 신령스러운 감응이 없을 것입니다.
2. 춘궁(春宮)의 덕기(德器)가 숙성(夙成)하니, 의당 단정(端正)한 선비를 뽑아 좌우(左右)에서 보호하고 도우게 하고 혹은 환관(宦官) 내시(內侍)의 무리를 가까이 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3. 궁금(宮禁)을 엄숙히 하고 제방(隄防)하기를 엄격히 하여 외정(外庭)에 서로 내통하는 폐단을 막는 것입니다.
4. 통역관(通譯官)이 길을 떠날 때에 은화(銀貨)를 수검(授檢)하고 돌아오는 날엔 사가지고 오는 비단을 죄다 찾아내어 화재(貨財)를 허비하지 않게 하고 사치한 풍습을 조금이라도 개혁시키는 것입니다.
5. 수령(守令)을 신중히 뽑아서 진휼(賑恤)하는데 뜻을 다하도록 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효과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6. 병조(兵曹)의 군색(軍色) 두 낭관(郞官)은 마땅히 1년을 한정하여 오래 위임시켜서 전포(錢布) 출납(出納)의 수효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7. 기읍(畿邑)의 황폐(荒廢)한 전지(田地)도 또한 삼남(三南)의 규례에 의하여 재해지(災害地)로 잡아 면세(免稅)하는 것입니다.
8. 각 영문(營門)과 여러 도(道)의 감영(監營)·병영(兵營)에 신칙(申飭)하여 군기(軍器)를 점검해 대단히 날카롭도록 하여 방어(防禦)하는 방법으로 삼는 것입니다.
9. 정원(定員) 이외의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의 생도(生徒)와 모입(冒入)1220)  한 관원과 군관(軍官)은 한결같이 모두 군보(軍保)에 충정(充定)시켜서 백골(白骨)에게 징포(徵布)하는 폐단을 없게 해야 합니다.
10. 영종도(永宗島)의 언답(堰畓)은 당초의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기경(起耕)하던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11. 사류(士類)를 높이고 권장하여 원기(元氣)를 도와 세우는 것입니다.
12. 예법(禮法)을 바로잡아서 상피(相避)하는 법으로 하여금 처당(妻黨)이나 종남매(從娚妹)의 사이에 혼동되게 시행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먼저 요즘에 일을 진달(陳達)한 것은 의도(意圖)한 것이 목적이 있으며, 병조(兵曹)의 낭관을 구임(久任)시키자는 일은 그대의 말이 옳으니, 의논하여 처리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고, 신칙(申飭)할 만한 일은 비변사(備邊司)로 하여금 거행(擧行)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판교(判校) 이만(李滿)이 응지(應旨)하여 상소하기를,
"청컨대 동래(東萊)에 성첩(城堞)을 쌓아서 금성 탕지(錦城湯池)의 형세를 공고(鞏固)히 하고 겸하여 문무 별과(文武別科)를 남쪽 연해(沿海)의 읍(邑)에서 설치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으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8월 19일 갑신

삼사(三司)에서 전일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복휴(李復休)는 권세 있는 간흉(奸凶)을 잘 섬겨서 외람되게 명곤(名閫)1221)  에 임명되었는데, 한 가지 하찮은 일로 인하여 충주 목사(忠州牧使)에게 공문(公文)을 보내고는 성을 내며 꾸짖었는데 말한 것이 대부분 헛소리로 도리에 어긋났으니, 급히 군관(軍官)을 보내어 철삭(鐵索)을 주어서 영문(營門)으로 잡아들이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거조(擧措)의 광패(猛悖)함이 이보다 심할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에 의관(醫官)을 읍(邑)에 제수하라는 명이 한번 내려지자 반드시 당일(當日)로 봉행(奉行)하는 것을 미처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같이 하고 또 반드시 두 사람을 한때에 모두 의망(擬望)하였으니, 물정(物情)이 의심하고 놀라워하는 것은 진실로 그 경우입니다. 요신(僚臣)이 비록 서로 후대(厚對)하는 까닭으로 아첨하고 간사하다는 명목(名目)은 현저하게 가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 부정한 뜻으로 떠받든 형상이 자연히 모사(模寫)하는 즈음에 드러났으니, 이와 같고서도 오히려 버젓이 그대로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좌이(佐貳)1222)  의 상소한 내용은 나를 힘써 경계한 데에 지나지 않는데, 경(卿)이 인혐(引嫌)하는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야대(夜對)를 행하고 《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였는데, 강독이 끝나자,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最錫鼎)은 어느 해에 급제에 올랐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신해년1223)  에 급제에 올랐고 출신(出身)된 뒤로 이름자가 현종(顯宗)의 소휘(小諱)에 범하기 때문에 ‘만(萬)’ 자를 고치어 ‘정(鼎)’ 자로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감시 방목(監視榜目)에 입격(入格)한 이성(李姓)인 사람의 이름이 ‘용(龍)’ 자와 ‘상(祥)’자인데 숙종(肅宗)의 소휘(小諱)를 범하였으니, 회시(會試) 때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부표(付標)하여 들이게 하였다."
하였다.

 

8월 20일 을유

신방(申昉)을 승지(承旨)로, 서명구(徐命九)를 집의(執義)로, 한이조(韓頤朝)를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상도 유생(儒生) 이도장(李道章) 등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유봉휘(柳鳳輝) 등 여러 적(賊)의 죄를 빨리 바로잡아 신(神)과 사람의 분노(憤怒)를 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다시는 거듭 격렬한 의논을 하지 말고 물러가 공문(孔門)1224)  의 학업(學業)을 닦아라."
하였다.

 

송도(松都)의 유생(儒生) 이백남(李百男)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옛 기지(基地)에 목청전(穆淸殿)을 중건(重建)하여 태조(太祖)의 어용(御容)을 봉안(奉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어진(御眞)은 또 추가로 모사(摸寫)할 수가 없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21일 병술

찬선(贊善) 김간(金幹)이 도성 밖에 올라왔는데,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소(敦召)하였다.

 

8월 22일 정해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명년(明年)에 나라의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는 마땅히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는 예(禮)를 행하여야 하는데, 태묘가 협착(狹窄)하여 다시 봉안(奉安)할 곳이 없으니, 마땅히 다시 3간(間)을 더 지어야 하는데 기둥과 대들보의 재목을 더욱 마련 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양남(兩南)의 섬 중외(中外)에 재궁(梓宮)으로 쓸 황장목(黃腸木)을 가져와 써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정미년1225)  에 영녕전(永寧殿)을 고쳐 세운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여 보건대, 경덕궁(慶德宮)의 비어 있는 대궐에 옮기어 봉안(奉安)하였고 자정전(資政殿)·읍화당(挹和堂)·영경당(靈慶堂) 3전(殿)에 분배(分排)하여 이안(移安)하였으니, 지금도 마땅히 이 규례(規例)에 의거하여 거행하여야 하나 영녕전에는 초하루 보름에 대제(大祭)가 없고 종묘(宗廟)에는 대제·삭제(朔祭)와 천신(薦新)의 절차가 있으니, 지금 만약 3전에 나누어 봉안하고 담을 헐어 연결해서 통하게 하면 제사지낼 때에 무방(無妨)하겠지만, 만약 서로 통하지 않는다면 형편상 앞으로 각기 헌관(獻官)을 내고 각각 제향(祭享)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경당(靈慶堂)이 이제 위선당(爲善堂)으로 되었는데 이미 좌우에 행랑채가 있고 또 담도 있으니, 만약 서로 통하려고 한다면 그 형세가 장차 구차스럽고 간략하게 될 것이다."
하니,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신(臣)이 호조 판서(戶曹判書)와 예조 당상관(禮曹堂上官)과 더불어 같이 가서 살펴 본 뒤에 마땅히 다시 품(稟)하여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민진원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가서 살펴 보니, 자정전(資政殿)에는 3실(室)을 봉안(奉安)할 수가 있겠으며, 읍화당(挹和堂)과 위선당(爲善堂)의 두 당에는 각각 4실(室)을 봉안할 수가 있겠으나, 다만 3전각(殿閣)이 능히 연하여 있지 못하므로 초하루 보름으로 제사를 거행할 때에 3전(殿)에는 형편상 장차 각각 헌관(獻官)을 내야만 하니, 이것이 구차스럽고 간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융복전(隆福殿)·집경전(集慶殿)·회상전(會祥殿) 등 여러 전에도 옮겨 봉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곳은 모두 침전(寢殿)이므로 아마도 옮겨 봉안(奉安)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하고는, 드디어 자정전(資政殿)·읍화당(挹和堂)·위선당(爲善堂)으로 옮겨 봉안(奉安)하는 곳을 삼고 헌관(獻官)도 또한 각각 차임(差任)하도록 하였다.

 

좌의정 민진원이 아뢰기를,
"정미년1226)  에 옮겨 봉안(奉安)할 때에 처음에는 위패(位牌)마다 하나의 신연(神輦)으로써 봉안하기로 정하였다가, 다시 1실(室)마다 하나의 신연으로써 봉안하기로 정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사복시(司僕寺)의 신연은 단지 6좌(座)만 있는데 종묘(宗廟)는 11실(室)이니, 신연의 수효가 이미 이와 같이 부족(不足)함으로 외부의 의논에서 혹은 말하기를, ‘하나의 신연(神輦)에다 2실(室)을 합하여 봉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혹은 말하기를, ‘두 차례로 나누어서 옮겨 봉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나 반드시 신연을 더 만들어서 각각 1실을 봉안하게 해야만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차례로 봉안하는 것이 비록 미안한 듯하나 2실(室)을 함께 봉안하는 것은 더욱 미안하게 되고, 또 종묘(宗廟)를 옮겨 봉안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니, 그것을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수의(收議)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의 의논으로 인하여 1실(室)을 한 신연(神輦)에 함께 봉안하되 두 차례로 나누어 옮겨 봉안하게 하였다.

 

8월 23일 무자

찬선(贊善) 김간(金幹)에게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렸다. 김간이 서계(書啓)로 인하여 군함(軍銜)을 가지고 입대(入對)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면부(勉副)하면서 다시 돈소(敦召)하였다.

 

8월 24일 기축

부사직(副司直)        김간이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朝廷)에 나가니,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서 인견(引見)하면서 두 내시(內侍)로 하여금 끼고 부축하여 앞으로 나아오게 하였다. 김간이 앞으로 나와서 삼가 받들어 위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오늘 등대(登對)하는 데에서 반드시 직명(職名)을 사양할 것인데 군함(軍銜)을 띠고 있으니, 이는 나의 성의가 천박(淺薄)한 소치이다. 지금 이미 등대(登對)했으며 또 찬선(贊善)이란 명칭은 명칭 또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머물러 있으면서 원량(元良)1227)                  을 보필(輔弼)하는 것이 바라는 바이다."
하니, 김간이 말하기를,
"신(臣)의 나이가 이미 80세인데 어찌 80세의 늙은 사람이 조정에 출근한다고 해서 나라에 도움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렇게 온 것은 다만 천안(天顔)1228)                  이나 한번 뵙고 구학(丘壑)1229)                  에 물러나 죽으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와 같이 박덕(薄德)한 사람이 조종(祖宗)의 어렵고 큰 업적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희망하는 것은 산림(山林)의 선비를 불러들여 좌우에서 도와 인도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구나 세자(世子)를 새로 책봉(冊封)하였으니, 보필하여 인도하는 것이 바로 급한 일이다. 오늘에 힘써 만류하는 것은 문구(文具)1230)                  로 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다. 찬선(贊善)이 이와 같이 이름이 드러난 화려한 관직이라면 또한 혹은 사양할 만도 하나, 옛날에도 또한 이름난 관작(官爵)을 띠고 출사(出仕)한 자가 있었다. 지금 이에 면부(勉副)하는 것은 사실 이 선조(先朝)에서 온천(溫泉)에 거둥할 때에 선정신(先正臣)을 면대(面對)하고 내렸던 고사(故事)를 본받은 것이다. 그러나 당(唐)나라        숙종(肅宗)도 또한 이필(李泌)에게 말하기를, ‘이미 자포(紫袍)를 입었는데 직명(職名)이 없을 수 없다.’ 하였으니, 내가 또한 이미 경(卿)으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하였는데 어찌 군함(軍銜)을 헛되이 가지게 할 수 있겠는가? 찬선(贊善)의 관직을 도로 제수(除授)하니, 반드시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라."
하니, 김간(金幹)이 말하기를,
"옛날 예법에도 ‘70세가 되면 치사(致仕)1231)                  한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신(臣)은 이미 치사(致仕)의 나이보다 10년을 지난 것이겠습니까? 신은 구구(區區)한 소회가 있어 수행(數行)의 문자(文字)로써 우러러 아뢰려고 합니다."
하고, 인하여 소매 속에서 차자(箚子)를 꺼내 올렸다. 그 조목(條目)이 일곱 가지가 있었는데, 이르기를,
"1. 성학(聖學)을 강론(講論)하여 밝히는 일입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입대(入對)하여 차자(箚子)로 아뢰기를, ‘《대학(大學)》의 방도(方道)는 사물(事物)의 이치를 연구하는 지식을 넓히는데 있다.’고 하였으니, 대저 주자(朱子) 같은 대현(大賢)으로서도 군부(君父)를 들어가 뵙던 날에 반드시 이로써 말한 것은 어찌 먼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힌 뒤에야 모든 일이 바야흐로 이루어지게 된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다만 성명(聖明)께서는 유의(留意)하소서."
2. 동궁(東宮)을 보필(輔弼)하여 인도하는 일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께서는 어린 나이에 세자의 지위를 정하셨으니, 가르치고 깨우치는 방도를 일찍이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좌우(左右)의 사람을 선택(選擇)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우리 중종조(中宗朝) 때에는 특별히 보양관(輔養官)을 설치(設置)하여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가 그 선임(選任)에 참여하였고, 인조조(仁祖朝) 때엔 익선(翊善)을 처음으로 두어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그 선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가르침의 맞음과 선택(選擇)의 신중함이 이와 같았으니, 다만 성명께서는 마음에 두소서.
3. 대의(大義)를 명백히 게시(揭示)하는 일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마음에 지극히 분통(憤痛)함을 품으시고 뜻이 와신 상담(臥薪嘗膽)1232)                  하는데 간절하여 문정공(文正公) 신(臣)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모책(謀策)을 신중 주밀(周密)하게 하셨으며,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능히 선대의 뜻을 본받아 문순공(文純公) 신(臣) 박세채(朴世采)와 더불어 장차 큰일을 해 보려고 하는 바가 있었으니, 대보단(大報壇) 한가지 일이 넉넉히 성고(聖考)의 마음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두 선왕(先王)의 통서(統緖)를 크게 이어받았으니, 두 선왕의 뜻을 마땅히 본받으신다면 참으로 이른바 짐(朕)에게 평성(平城)의 근심을 끼쳤다.1233)                  는 것입니다. 다만 성명께서는 마음에 두소서.
4. 이륜(彝倫)을 펴서 바로잡는 것입니다. 신은 오늘의 이륜이 바른지 바르지 않은지를 모르겠습니다. 군흉(群凶)이 위를 범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은 고금(古今)에 없었던 큰 변고인데도, 전하께서 이미 그 죄를 알면서 오히려 또 용서하고 비호(庇護)하여 주시니, 세도(世道)는 날로 무너져 가고 인심(人心)은 더욱 어두워져서 나라의 방침이 밝지 못하므로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그나마 이륜이 펴져서 바로잡힐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성명께서는 마음에 두소서.
5. 선왕(先王)의 뜻을 계술(繼述)하는 것입니다.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는 것이 얼마만큼 막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곧 감히 명의(名義)에 죄를 얻은 사람을 철식(腏食)1234)                  의 반열에 섞어서 올려놓았으니, 난잡(亂雜)하고 외설(猥屑)됨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전하께서 바야흐로 또 심상하게 보시고 바로잡지 않으시니, 여기에서 계술(繼述)하시는 데에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심을 보겠습니다. 사문(斯文)1235)                  의 일에 이르러서는 병신년1236)                  의 처분(處分)이 지극히 엄정(嚴正)하고 명확(明確)하였는데, 지난번에 여러 간흉(奸凶)들이 조정에 있으면서 차마 선왕(先王)의 본의(本意)가 아니라는 말로써 천청(天聽)1237)                  을 현혹시켜서 한결같이 성법(成法)에 반대하였으니, 통탄스러움을 견디겠습니까? 지금에 와서 서원(書院) 배향(配享)이 겨우 회복됨으로써 무함(誣陷) 날조(揑造)하던 것이 조금은 신원(伸冤)되었으나, 선조(先朝)에 죄를 입은 사람의 작질(爵秩)은 그대로 있고 절혜(節惠)1238)                  가 옛날 그대로 변함이 없으니, 전하께서 숙고(肅考)1239)                  의 처분을 한결같이 따르는 일을 생각하지 못한 까닭으로 이에 도리어 양편을 모두 보전할 계획을 하시게 되니, 이것이 또 계술하는 데에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성명(聖明)께서는 마음에 두소서.
6. 인재(人材)를 배양(培養)하는 것입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인재를〉 권장(權奬)하여 성취(成就)시킨 덕(德)은 실로 후세에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뒤로는 진작(振作)하여 성취시킨 방도가 선조(先朝)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혹은 이들을 죄를 주어 처벌을 하기도 하고 혹은 이들을 굴종(屈從)시켜 욕을 보이기도 하니, 3백 년 동안 배양(培養)하던 기풍이 꺾여져 여지가 없이 됨으로써 인재(人材)가 묘연(渺然)하게 된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습니다. 배양하는 방도는 더욱 마땅히 급히 할 바이므로 다만 성명께서는 마음에 두소서.
7. 아랫사람을 접할 때에 성심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총명(聰明)이 너무 지나쳐서 스스로 모든 방면에 뛰어난 체하는 병통이 있고 영특한 기질(氣質)이 너무 드러나 독단적으로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으시니, 사령(辭令)은 문구(文具)를 면할 수 없으며 행사(行事)는 대부분 사의(私意)에 관계됩니다. 대신(大臣)에게 예우하는 성의가 혹은 처음만 못하시고 대각(臺閣)을 관대하게 용서하시는 도리가 때로는 혹 조금 나태하여져서 심지어는 이득이 있는 녹봉(祿俸)으로 몰아 시키시고 위엄스런 명령으로 말을 못하게 억제하시니, 전하께서 사람을 쓰는 성심이 혹은 미진(未盡)한 바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는 성의(誠意)를 가지시고 공부를 하소서. 한낱 성의가 있는 곳에 모든 일이 크게 감응되는 것입니다. 시종(始終)을 한결같이 하시면 장차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막힘이 없어지고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一體)가 되는 효과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다만 성명께서는 마음에 두소서."
하니, 임금이 그 차자를 받고는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격언(格言)이 되는 것이다. 마땅히 조용히 살펴보겠다."
하고, 인하여 궁중에 머물러 두었다. 김간(金幹)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임금이 그의 손을 잡고는 정성스럽게 힘써 만류하니, 김간이 감히 굳이 사양하지는 못하고 우선 병세(病勢)를 보아서 그 가고 머물 것을 정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심오(深奧)한 학문을 일시(一時)에 개진(開陳)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긴요한 공부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가장 긴요한 것으로써 개진하라."
하였다. 김간(金幹)이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말씀으로써 살펴본다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고 절실한 것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각별히 잘 지켜 잠시도 잊지 않겠다. 지금 나라의 형편이 위태로와짐으로써 백성의 생활이 곤궁하고 초췌(樵悴)하여지니, 내가 부족한 덕으로 어떻게 할바를 모르겠다. 경(卿)이 배운 바는 이미 고명(高明)한 경지에 나아갔으니, 모든 일은 다 학문(學問)하는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의 일을 조처할 수가 있으며 백성의 생활을 구제(救濟)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간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인심(人心)이 아래에서 화합(和合)한 뒤에야 천의(天意)가 위에서 화합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서로 더불어 화합하게 되고 천심(天心)이 감응(感應)하게 되면 백성은 소복(蘇復)될 것이고 국사(國事)는 조처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잘 한다고 칭찬하였다. 김간이 장차 물러가려 하니, 임금이 또 두 내시(內侍)를 시켜서 부축하여 보냈다.
사신은 말한다. "김간(金幹)은 젊어서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에게서 수학(受學)하여 자못 예학(禮學)에 힘써 공부하였으며, 평온하고 조용하게 스스로 지조를 지키므로 선조(先朝)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다 명(命)에 응하지 않았는데, 이제 80의 나이에 미쳐서야 이에 산림(山林)의 늙은 구신(舊臣)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등대(登對)하니, 임금의 은총(恩寵)과 예우(禮遇)는 보통보다 뛰어났으며 사림(士林)에서도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48면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역사(歷史)


[註 1227]          원량(元良) : 왕세자(王世子).[註 1228]          천안(天顔) : 임금의 얼굴.[註 1229]          구학(丘壑) : 언덕과 골짜기. 시골.[註 1230]          문구(文具) : 형식적인 것.[註 1231]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註 1232]          와신 상담(臥薪嘗膽) : 섶에 눕고 쓸개를 맞본다는 뜻으로 원수(怨讎)를 갚고자 고생을 참고 견디는 일. 춘추 시대(春秋時代)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쳐서 부왕(父王)의 원수를 갚고자 매양 섶 속에 앉아서 신고(辛苦)를 하였으며, 또 월왕 구천은 오(吳)나라를 쳐서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고자 쓸개를 핥으며 보복을 잊지 않았다는 고사(故事).[註 1233]          짐(朕)에게 평성(平城)의 근심을 끼쳤다. : 평성(平城)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현(大同縣) 동쪽에 있는 지명(地名).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흉노(匈奴)에게 포위되어 큰 고통을 받다가 진평(陳平)의 비계(秘計)로 겨우 빠져 나온곳인데, 무제(武帝)가 흉노를 치면서 고조(高祖)의 욕본 일을 회상(回想)하면서 한 말임. 여기서는 인조(仁祖)가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청군(淸軍)에게 포위당한 수치(羞恥)를 회상(回想)하는 일.[註 1234]          철식(腏食) : 여러 신(神)이 제향(祭享)을 받는 곳.[註 1235]          사문(斯文) : 유학(儒學).[註 1236]          병신년 : 1716 숙종 42년.[註 1237]          천청(天聽) : 임금의 들음.[註 1238]          절혜(節惠) : 시호(諡號).[註 1239]          숙고(肅考) : 숙종.
사신은 말한다. "김간(金幹)은 젊어서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에게서 수학(受學)하여 자못 예학(禮學)에 힘써 공부하였으며, 평온하고 조용하게 스스로 지조를 지키므로 선조(先朝)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다 명(命)에 응하지 않았는데, 이제 80의 나이에 미쳐서야 이에 산림(山林)의 늙은 구신(舊臣)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등대(登對)하니, 임금의 은총(恩寵)과 예우(禮遇)는 보통보다 뛰어났으며 사림(士林)에서도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상소하여 궐례(闕禮)의 죄를 받기를 청하였으니, 상소의 내용은 대체로 나라의 연제(練祭)에 맞추어 오다가 이천(利川)에 일러 병(病)이 발생됨으로써 장차 군정(郡庭)의 곡반(哭班)에 들어가 참여하고는 그대로 시골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비답하기를,
"어제 듣건대 경(卿)이 장차 올라온다기에 연제(練祭)를 지난 뒤에 불러 보려고 하였는데, 지금 경의 상소를 살펴보니 허전함이 극도에 달한다. 깊이 생각하고 있으니, 병이 조금 났기를 기다려 올라와서 나의 매우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라."
하고, 이내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고는 어의(御醫)로 하여금 간병(看病)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연제(練祭)가 지난 뒤에는 곡(哭)이 없다는 글이 있으므로 등록(謄錄)1240)  을 가져와 상고해 보니,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대상(大祥)후 담제(禫祭) 전에는 그대로 삭전(朔奠)·망전(望奠)의 곡(哭)을 행하였으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법을 정해야 하고, 또 인선 왕후(仁宣王后)1241)  의 국휼(國恤) 때에는 연제(練祭)가 지난 뒤에 곡림(哭臨)하는 한 조항을 가지고 대신에게 의논하였으나 기축년1242)  ·기해년1243)  에 이미 《오례의》에 연제가 지난 뒤에 곡(哭)이 없는 예문(禮文)을 쓰지 않았고, 대상(大祥)이 지난 뒤 담제(禫祭) 전에 삭전(朔奠)과 망전(望奠)에 곡(哭)하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또 대신에게 의논하여 거행하였으니, 연제가 지난 뒤 대상 전에 곡이 있는 것은 다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이 다른 사람의 물음에 답한 것이나 기축년·기해년에 이미 행한 예(例)를 인용하더라도 연제가 지난 뒤에 조석(朝夕) 상식(上食)에 또한 그대로 곡하는 예(禮)가 있었던 일이 정하여졌던 법입니다. 지금 이 연제가 지난 뒤에 혼전(魂殿)에서 제사를 거행할 때에 그대로 곡례(哭禮)를 행하고 산릉(山陵)에도 또한 마땅히 일체(一體)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예조(禮曹)에게 아뢰기를,
"국휼(國恤)의 초상(初喪)에 백관(百官)의 최복(衰服)은 병조(兵曹)와 호조(戶曹)로 하여금 지어주게 하고, 연제(練祭) 때의 연복(練服)에 있어서 신축년1244)  에는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로 인하여 능히 스스로 준비하는 자는 스스로 준비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부판(負版)을 버린 최복을 하였으니, 이제 또한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禮曹)에서 변제(變除)할 절목(節目)을 올리면서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는 수질(首絰)을 버리시고 최복(衰服)과 【부판(負版)과 벽령(辟領)을 버린 최복이다.】  상(裳)을 【모두 대공(大功)에 누이지 않은 일곱 새 베[布]를 쓴다.】  갈아 입되, 요질(腰絰)은 다듬어진 칡[葛]을 사용하며, 【세 겹으로 4고(四股)를 내며 끈[纓]은 누인 베를 사용한다.】  연관(練冠)과 【여덟새 베를 사용하는데 누인 베로 무(武)와 관의 끈을 한다.】  건(巾)을 쓰시고 【누인 베를 사용한다.】 연중의(練中衣)1245)  에 연포대(練布帶)를 띠며, 죽장(竹杖)을 집고 【그대로 사용한다.】  마혜(麻鞋)를 신되, 시사복(視事服)은 백포(白袍)에다 백포(白布)로 싼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상립(喪笠)도 같이 한다.】  백포로 싼 오서대(烏犀帶)를 띠며 백피화(白皮靴)를 신습니다. 그리고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는 제사 때에만 소복(素服)을 하시고 제사지낸 뒤에는 길복(吉服)을 입습니다. 왕대비전(王大妃殿)과 중궁전(中宮殿)께서는 누이지 않은 최복과 치마를 갈아 입는데, 【대공(大功)에 일곱 새 베를 사용한다.】  연포(練布)로 머리를 덮는 두수(頭𢄼)에다 띠를 띠고 백피화를 신으며, 평상시에는 그전대로 소복(素服)을 합니다. 왕세자(王世子)는 의주(儀註)에 ‘전교(傳敎)로 인하여 마련(磨鍊)되지 않았고 그날 그때에 포포(布袍)를 입고 베로 싼 공정책(空頂幘)에 베로 싼 오서대(烏序帶)를 띠고 내별당(內別堂)으로 나아가 망곡(服哭)하는 자리에서 곡하고 4배(四拜)한다.’고 하였으니, 제사를 거행할 때에 백포(白袍)를 갈아 입고 백포(白布)로 싼 공정책(空頂幘)에다 백포로 싼 오서대(烏序帶)를 띠며 백피화를 신고 망곡을 하며 4배례(四拜禮)를 행하는 것입니다.
내명부(內命婦)·외명부(外命婦)와 빈(嬪) 이하의 상복(喪服)은 중궁전(中宮殿)의 상복과 같고, 대왕 대비전의 상궁(尙宮)이하는 주상의 상복을 따르며, 대전(大殿)·왕대비전·중궁전·왕세자궁(王世子宮)의 상궁(尙宮) 이하는 백포 배자(白布背子)를 입고 머리를 덮는 두수(頭𢄼)에다 띠를 띠고 백피화를 신으며, 종친(宗親)·문무백관(文武白官)은 수질(首絰)을 버리고 누이지 않은 복(服)과 【부판(負版)과 벽령(辟領)을 버린 최복이다.】  상(裳)을 【모두 대공(大功)에 일곱 새 베를 사용한다.】  갈아입되 칡으로 요질(腰絰)을 하며, 【새겹으로 4고(股)를 내며 칡이 없으면 숙마(熟麻)를 사용하고 끈은 누인 베를 사용한다.】  연관(練冠)과 【여덟 새 베를 사용하는데 누인 베로 무(武)와 끈을 한다.】  건(巾)을 쓰고 【누인 베를 사용한다.】  연중의(練中衣)에 연포대(練布帶)를 띠며 죽장(竹杖)을 집고 【그대로 사용한다.】  마혜(麻鞋)를 신으며, 공복(公服)1246)  은 백포(白布)로 된 단령의(團領衣)에 백포로 싼 사모(紗帽)를 쓰고 【상립(喪笠)도 또한 같다.】  백포로 싼 각대(角帶)에 백피화를 신습니다.
각도(各道)의 대소 사신(大小使臣)과 외관(外官)·전함관(前銜官), 동성(同姓)·이성(異姓)의 시마(緦麻) 이상 친척과 【시임(時任)·전임(前任)이나 관직이 없는 사람을 논하지 않는다.】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내시(內侍)·사알(司謁)·사약(司鑰)·서방색(書房色)·반감(飯監)이나 경소전(敬昭殿)과 산릉(山陵)의 내시(內侍) 이하의 복색(服色)은 모두 백관(百官)의 복색과 같이 하고, 동성(同姓)·이성(異姓)의 시마(緦麻) 이상의 여자(女子)의 상복은 중궁전의 상복과 같이 합니다.
별감(別監)과 각 차비인(差備人)은 백의(白衣)의 백두건(白頭巾)을 쓰고 백대(白帶)를띠며, 직사(職事)에 있는 전함관(前銜官)의 각 품관(品官)과 성중관(成衆官)은 【내금위(內禁衛)·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충순위(忠順衛)·별시위(別侍衛)·족친위(族親衛)의 등류이다.】  백포로 된 단령의(團領衣)에 백포로 싼 사모를 쓰고 【상립(喪笠)도 또한 같다.】  백포로 싼 각대(角帶)를 띕니다. 녹사(錄事)와 서리(書吏)는 백의(白衣)에 백평정 두건(白平頂頭巾)을 쓰며 【상립 또한 같다.】  백대(白帶)를 띕니다. 생원(生員)·진사(進士)나 유학(幼學)·생도(生徒)는 그대로 백립(白笠)에다 백의를 입고 백대를 띱니다. 【학교(學校)에 들어가서는 백두건을 쓰고 전내(殿內)에 출입할 때에는 흑두건(黑頭巾)을 쓴다.】  사직서(社稷署)·종묘서(宗廟署)와 여러 능전(陵殿)의 관원은 모두 평상복을 입되,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단령(黑團領)을 입으며 밖에 나갈 때는 백관(百官)의 상복과 같이 하고 【혜릉(惠陵)·영휘전(永徽殿) 관원으로 입직(入直)할 때에는 복색(服色)을 백관의 공복(公服)과 같이 한다.】  갑병(甲兵)·정병(正兵)은 백의(白衣)에 백립(白笠)을 쓰고 연포대(練布帶)를 띠며, 서인(庶人)과 승도(僧徒)는 그대로 백의에 백립을 쓰고 백대(白帶)를 띠고, 조례(皁隷)나 나장(羅將)은 백의에 백두건(白頭巾)을 쓰고 백대(白帶)를 띠는 것입니다."
하였다.


 

8월 25일 경인

임금이 연제(練祭)를 경소전(敬昭殿)에서 친히 행하였다. 시사복(視事服) 차림으로 재실(齋室)로 들어갔다가 최복(衰服)차림으로 전내(殿內)로 들어가서 곡(哭)하고 4배(四拜)하였으며, 도로 재실로 들어가 최복을 벗고 연복(練服)을 입고는 다시 전내로 들어가 곡하고 4배하였다. 초헌례(初獻禮)를 행할 때엔 판위(版位) 앞에 내려섰고 3헌례(三獻禮)가 끝나자 임금께서 곡하며 4배하였고, 재실로 나아가서 연복을 벗고는 시사복 차림으로 내전(內殿)으로 돌아왔다.

 

8월 26일 신묘

제주관(題主官) 윤봉조(尹鳳朝), 수릉관(守陵官) 낙창군(洛昌君) 탱(樘)·시릉관(侍陵官) 김몽상(金夢祥)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고, 그 나머지는 상(賞)을 주는데 차등이 있었다.

 

 

 

8월 27일 임진

임금이 의릉(懿陵)1247)  을 전알(展謁)하고 봉심(奉審)한 뒤에 재실(齋室)로 나아가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명홍(兪命弘)·광주 부윤(廣州府尹) 어유룡(魚有龍)·양주 목사(楊州牧使) 홍중주(洪重疇) 등을 불러서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을 물었는데, 홍중주가 청하기를,
"예전에 받지 못한 군포(軍布)를 탕감(蕩減)하여 주시고 북한 산성(北漢山城)으로 이송(移送)할 환상미(還上米)는 우선 본부(本府)에 받아 유치(留置)하였다가 명년 봄을 기다려서 곤궁한 백성에게 대여(貸與)하거나 진휼(賑恤)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어유룡(魚有龍)은 청하기를,
"관무재(觀武才)를 설행(設行)하여 장사(將士)를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휼(國恤) 3년 안에 관무재(觀武才)를 설행(設行)하는 것이 과연 어떠한가?"
하였다. 승지(承旨) 유복명(柳復明)이 말하기를,
"이것은 재예(才藝)를 시험하여 뽑는 것이니, 구애(拘碍)될 단서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남한 산성(南漢山城)과 강화도(江華島)에 명하여 명년 봄을 기다려서 시재(詩才)하도록 하였다.
이날 임금이 환궁[回鑾]하다가 노상(路上)에 연(輦)을 멈추고 양주(楊州)에 나이 많은 사람을 불러서 본읍(本邑)의 폐막(弊瘼)을 물었다.


 

《선원보략(璿源譜略)》이 완성(完成)되었다. 처음에 계묘년1248)  에 《선원보략》이 틀린 것이 많다 하여 특별히 바로잡으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와서 완성되었으므로 교정 당상관(校正堂上官)·낭관(郞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賞)을 주었다.

 

판윤(板尹) 권성(權𢜫)이 상소하여 치사(致仕)할 것을 원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8월 28일 계사

이병태(李秉泰)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서종섭(徐宗燮)·황재(黃梓)를 부교리(副校理)로, 유복명(柳復明)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임주국(林柱國)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재(李縡)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가서 《맹자(孟子)》를 강독(講讀)하였는데, 이재가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입시(入侍)하여 문의(文義)를 해석하여 아뢰기를,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무서워 벌벌 떠는 소[牛]를 보고 차마 그것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으니,1249)   이는 인심(仁心)이 본래 스스로 번져나갔던 것이고, 백성에 대하여 능히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이런 마음이 이미 어두워져서 가리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맹자(孟子)가 인술(仁術)을 개진(開陳)한 뒤에야 〈선왕(宣王)이〉말하기를, ‘내 마음에 척연(戚然)한 생각이 든다.’고 하였으니, 이는 본심(本心)이 다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마음이 왕정(王政)에 부합된다는 까닭을 까마득히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맹자가 ‘저울로 달고 척도(尺度)로 재 보아야 한다는 말로써, 청컨대 왕은 헤아려 보소서.’ 하였는데, 이연(犂然)1250)  히 깨닫는 단서가 있는 듯하였으나 웃으면서 말하지 않았으니, 그가 큰 욕망(慾望)을 내었던 것이 스스로 그 부족함을 알고 부끄러워서 말하려 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또 사심(私心)입니다. 〈선왕이〉 ‘내가 사리(事理)에 어두우니, 청컨대 밝게 나를 가르쳐 주시오.’라고 말하게 된 것은, 양심(良心)이 다시 나타나긴 하였으나 마침내 확충(擴充)시켜서 왕정(王政)을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편(一篇)가운데에서 선왕(宣王)의 마음이 어둡고 밝은 가운데에 드러나는 것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무릇 군주가 누군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능히 체험(體驗)하지 못하는 것이 근심스럽습니다. 이러한 장(章)은 반드시 선왕(宣王)에게만 고한 말로만 여겨 보지 말고 항상 맹자에게 직접 듣는 것처럼 하며, 또 살펴서 알고 넓혀서 충실(充實)하는 일로써 힘쓴다면 족히 백성을 보존하고 또한 《맹자》를 잘 읽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잘 한다고 칭찬하였다. 이재가 말하기를,
"신(臣)이 시골에 오래 있으면서 민정(民情)을 익히 보아왔습니다. 민정은 풍년(豐年)을 만나면 선량(善良)하여지고 흉년(凶年)을 만나면 악독(惡毒)하여지니, 맹자의 말이 진실로 그렇습니다. 지금 전하의 백성이 배가 부르다고 하겠습니까? 괴롭다고 하겠습니까? 죽어간다고 하겠습니까?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가엾이 여기시고 측은하게 여기시는 뜻은 매양 사륜(絲綸)1251)  의 내용에 가득히 표현되는데, 그것을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한낱 소[牛]에 차마 못한다는 마음에 비한다면 현격하게 다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능히 한가지 선정(善政)도 행하지 못하시어 백성이 그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왕(宣王)은 이런 인심이 있는데도 능히 넓혀 충실(充實)하지 못함이 있었던 것은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이 진실로 토지(土地)를 열어 넓히고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를 조회 받는데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감히 전하의 하고 싶은 것이 어떤 일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하고 싶은 것이 어찌 반드시 선왕(宣王)의 갑병(甲兵)을 일으켜 사신(士臣)을 위태롭게 하는 것과 같겠는가? 무릇 한낱 자신(自身)의 사의(私意)가 있는 것이 모두 하고 싶은 욕망이다. 나는 본래 공부가 모자라는데 어떻게 감히 넓혀서 충실(充實)히 하는 도리를 바라겠는가? 평상시에 행하는 일이 모두 사의(私意)를 면치 못하였는데 이제 이 말을 듣고서 힘차게 반성(反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강독(講讀)이 끝나자 임금이 이재(李縡)를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말하기를,
"경자년1252)   겨울 인산(因山) 때에 명릉(明陵)에서 경(卿)을 보았는데, 세월이 얼마나 되었기에 귀밑의 털이 벌써 허옇게 되었구나. 경(卿)의 숙부(叔父)를 지금 와서 생각하면 마음에 몹시 슬퍼지기만 한다."
하니, 이재가 말하기를,
"신이 화(禍)의 흔단(釁端)으로 떠돌던 나머지에 경광(耿光)1253)  을 뵙게 되어 지나간 옛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감동의 눈물이 마구 쏟아짐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숙부가 지하(地下)에서 원통함을 품고 있다가 지난번에 천일(天日)이 환히 비침을 힘입어 단서(丹書)1254)  에서 한번 씻게 되어 슬프고 영광됨이 모두 이르게 되니, 황공하고 감격해서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문학(文學)이 고명(高明)한 것을 내가 이미 알면서도 일찍기 초치(招致)하지 못한 것은 나의 성심이 얕은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경은 이미 출세(出世)하여 인군을 섬기게 되었으니, 산림(山林)에 은거(隱居)한 선비와는 다른데 어찌 돌아다 보지 않고 멀리 떠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반드시 경을 머물러 두려고 하니 경은 경연(經筵)에 출입(出入)하면서 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돕도록 하라."
하니, 이재가 말하기를,
"신은 쌓인 흔단(釁端)이 많았으므로 다만 한평생 동안 물리쳐 버림받아야 할 것이며, 또 신의 어미가 50이 되었을 때 신이 외람되게 평생 봉양한다는 것으로써 청하였더니, 숙종(肅宗)께서 불쌍하고 애처러워하시는 하교까지 내리셨습니다. 지금은 신의 어미가 나이 이미 70이 되었으니, 신이 조정에 있더라도 또한 마땅히 물러가서 봉양하기를 원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이미 물러나 있던 자가 다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아무리 성의가 얕으나 지금 어찌 경을 내버려두겠는가?"
하니, 이재가 말하기를,
"신이 지난날 한 통의 상소에 말한 것이 사리(事理)에 어두워 우매한 데에 관계되었으나 도리어 칭찬과 권장을 받았고 심지어 좌우명(座右銘)으로까지 비유하셨으니, 어리석은 마음을 갑절이나 감동시켰습니다. 청컨대 다 말하지 못한 소회(所懷)를 거듭 아뢰겠습니다."
하고, 이에 청하기를,
"하늘을 공경하고 혼자 있을 때에 삼가 중화(中和)의 극진한 공부를 이루게 하시며,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정신(精神)을 보호하고 아끼시며, 거상(居喪)에 예(禮)를 다하여 옥루(屋漏)1255)  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고, 정직한 선비를 잘 골라 뽑아서 조기(早期)에 동궁(東宮)을 가르치는 의리(義理)를 재량(裁量)하여 중대한 의논을 결정하시며, 빨리 애통(哀痛)하는 교서(敎書)를 내려 8도(八道)에 환산(渙散)된 민심(民心)을 결속(結束)시키며, 안으로는 궁중(宮中)에 복어(服御)·기용(器用)을 힘닿는 대로 스스로 줄이고 밖으로는 여러 관사(官司)에 쓸데없는 비용을 십분 절감(節減)하시며, 탐장(貪贓)을 단속(團束)시키고 사치한 것을 혁파시키되 또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속히 백성을 구제(救濟)하는 실제의 행정(行政)을 강구하시고, 창의궁(彰義宮)의 절수(折受)를 혁파(革罷)하여 사심(私心)이 없는 덕의(德意)를 보이시며, 근신(近臣)들을 몹시 멀리하여 궁금(宮禁)을 엄숙히 하고 사정(私情)이 통하는 지름길을 막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바가 모두 좋으니,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하니, 이재(李縡)가 말하기를,
"군주의 규모(規模)가 협소(狹小)해지면 큰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너무 세밀하게 살피는 일로써 밝음을 삼지 마시고 조그마한 은혜를 베푸는 일로써 인(仁)을 삼지 마시고, 총명(聰明)을 넓게 열고 심흉(心胸)을 넓혀서 광대(廣大)하게 되는 것으로써 마음을 가지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돌보아 주는 것이 이에 이르니, 마땅히 각별히 체념(體念)하겠다."
하니, 이재가 또 말하기를,
"성의(誠意)를 힘써 쌓고 암혈지사(巖穴地士)1256)  를 초치(招致)하여 군덕(君德)을 돕게 하고 성균관 장(成均館長)을 잘 뽑아서 사기(士氣)를 배양(培養)하며 교관(敎官)을 선택하여 미리 양정(養正)하는 도(道)를 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陳達)한 바를 내가 마땅히 체념(體念)하겠으나, 다마 옛사람이 하는 말에 ‘남을 책망하는 것은 밝다.’고 하더니, 경(卿)은 반드시 물러나 가려고 하면서 오히려 반드시 암혈지사(巖穴之士)를 초치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이재가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과목(科目)에서는 항상 뽑혔으나 본디부터 재능(才能)은 모자라니, 어찌 감히 암혈지사(巖穴之士)에다 비교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이 아직도 공사(工事)를 끝내지 못하였으니, 경이 사국(史局)의 임무(任務)를 겸무(兼務)한다면 어찌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수사(修史)하는데 전념(專念)한다면 다만 군함(軍銜)으로써 경을 대우하더라도 또한 논란(論難)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재가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은 한청(汗靑)1257)  하기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십수년(十數年)을 물러나 있던 사람이 지금 만약 스스로 실록의 중임(重任)에 핑계대고 그대로 가지 않는다면 그 거취(去就)하는데 있어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실록》은 곧 중대한 일이니, 반드시 그 적임자(適任者)를 신중히 뽑아서 편찬[編摩]하는 역사를 맡겨야만 그제야 후세(後世)에 증거되어 믿게 될 것입니다. 만약 거취(去就)에 의리가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담당하게 한다면 어찌 그것이 《실록》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지나치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홍현보(洪鉉輔)·시독관(侍讀官) 권적(權𥛚)·검토관(檢討官) 김용경(金龍慶) 등이 모두 더욱 성례(誠禮)를 더하여 기어코 힘써 만류(挽留)하기를 청하고, 임금도 또한 상세하게 위로하고 개유(開諭)하여 반드시 머물러 두려고 하였으나, 이재가 끝내 굳이 사양하고 이튿날 드디어 돌아갔다.
사신은 말한다. "이재는 문학(文學)이 뛰어난데다가 고표(高標)와 명망(名望)은 한 세상을 쏠리게 하였다. 숙종(肅宗) 말년(末年)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나 사환(仕宦)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고 구원(丘園)으로 물러나 살았다. 신축년1258)  ·임인년1259)  의 사화(士禍)에서 군흉(群凶)이 국정(國政)을 천단(擅斷)하여 진신(搢紳)을 무찔러 죽이기까지 하였으나, 이재만은 초연(超然)하게 세속에 물들지 않은 까닭으로 비록 흉당(凶黨)이 반드시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자일지라도 또한 감히 해칠 수 없었으니, 사람들이 이에서 그의 선견(先見)을 탄복하였다. 개기(改紀)하던 처음에 이르러 관직에 임명하는 소명(召命)이 여러 번 내리게 되었으나 끝내 명에 응하지 않고 경학(經學)에 잠심(潛心)하여 조예(造詣)가 더욱 높았으니, 조야(朝野)에서 그가 조정에 나와서 도(道)를 행할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라의 연제(練祭)에 참여하기 위하여 비로소 조정에 나왔으나 시사(時事)가 정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힘껏 사양하고 돌아가니, 사류(士類)가 모두 감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50면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재정(財政) / 역사(歷史) / 인물(人物)


[註 1249] "제(齊)나라선왕(宣王)이 무서워 벌벌 떠는 소[牛]를 보고 차마 그것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 《맹자(孟子)》 양혜왕편(粱惠王篇)에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종(鍾)에 피를 바르기 위해 소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고 소 대신 양을 쓰도록 한 고사(故事).[註 1250] 이연(犂然) : 두려워서 떨고 있는 모양.[註 1251] 사륜(絲綸) : 임금의 명령.[註 1252]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1253] 경광(耿光) : 성덕(盛德)의 형용.[註 1254] 단서(丹書) : 죄를 주서(朱書)한 형서(刑書).[註 1255] 옥루(屋漏) : 방(房)의 서북쪽 구석으로 집 안에서 가장 깊숙하여 어두운 곳 전(轉)하여 남이 보지 않는 곳을 말함.[註 1256] 암혈지사(巖穴地士) : 속계(俗界)를 떠나서 산중에서 사는 은사(隱士).[註 1257] 한청(汗靑) : 사서(史書) 또는 기록. 한간(汗簡).[註 1258]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259] 임인년 : 1722 경종 2년.
사신은 말한다. "이재는 문학(文學)이 뛰어난데다가 고표(高標)와 명망(名望)은 한 세상을 쏠리게 하였다. 숙종(肅宗) 말년(末年)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나 사환(仕宦)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고 구원(丘園)으로 물러나 살았다. 신축년1258)  ·임인년1259)  의 사화(士禍)에서 군흉(群凶)이 국정(國政)을 천단(擅斷)하여 진신(搢紳)을 무찔러 죽이기까지 하였으나, 이재만은 초연(超然)하게 세속에 물들지 않은 까닭으로 비록 흉당(凶黨)이 반드시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자일지라도 또한 감히 해칠 수 없었으니, 사람들이 이에서 그의 선견(先見)을 탄복하였다. 개기(改紀)하던 처음에 이르러 관직에 임명하는 소명(召命)이 여러 번 내리게 되었으나 끝내 명에 응하지 않고 경학(經學)에 잠심(潛心)하여 조예(造詣)가 더욱 높았으니, 조야(朝野)에서 그가 조정에 나와서 도(道)를 행할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라의 연제(練祭)에 참여하기 위하여 비로소 조정에 나왔으나 시사(時事)가 정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힘껏 사양하고 돌아가니, 사류(士類)가 모두 감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8월 29일 갑오

찬선(贊善) 김간(金幹)이 진소(陳疏)하여 돌아갈 것을 고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소(敦召)하였다.


 

정언(正言) 임징하(任徵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대상(大喪)이 난 뒤로부터 흉당(凶黨)이 틈을 노리고 일어나서 유중무(柳重茂)가 시험하여 보고 김행진(金行進)·홍흡(洪潝)이 번갈아 나오므로, 신의 아비 임형(任泂)이 마침 대간(臺諫)의 지위에 있으면서 일에 따라 논하고 배척하여 그들의 아각(牙角)1260)  을 꺾자 이에 이진검(李眞儉)의 상소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일의 곡절(曲折)은 모두 신의 아비가 대변(對辯)한 상소에 있으니, 청컨대 울면서 그것을 외우겠습니다. 소(疏)에 말하기를 신의 종형(從兄)인 임창(任敞)이 유배(流配)를 당했을 때에 신의 아비가 마침 사직소(辭職疏)의 끝에 약간 불안(不安)스러운 의사(意思)를 언급(言及)하였는데, ‘가질(家姪) 임창이 괴이하고 망령된 상소로써 죄를 얻어 편배(編配)1261)  하게 되었으니, 신은 곧 마원(馬援)의 죄인(罪人)이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마원이 형의 아들을 경계하여 ‘시사(時事)를 말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의 아비가 ‘스스로 능히 자질(子姪)을 단속하지 못해서 이런 망언(妄言)의 실수를 있게 하였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진검은 곧 말하기를,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서 소장(疏章)을 진달(陳達)하여 사실(事實)을 자백(自白)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의 원소(原疏)가 일기(日記)에 기재되어 있으니, 지금이라도 상고하여 증험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화를 두려워 하는 것이며 어떤 말이 사실을 자백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친간(至親間)의 스스로 편치 못하였다는 소(疏)로써 끌어대어 위협하는 도구로 삼았으나, 이는 선왕(先王)께서도 이미 밝게 통촉하시고 개석(開釋)한 것입니다. 이진검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일시(一時)나마 신의 아비를 쫓아내는 자료로 삼고 전법(傳法)하는 자는 이로써 임창(任敞)을 죽이기 위한 죄안(罪案)으로 삼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신의 아비의 원소(原疏)를 가져다 보시고 쾌히 밝은 해석을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기(日記)를 가져다 본 뒤에 마땅히 처분(處分)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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