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을미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윤봉조(尹鳳朝)를 실록 도청 당상관(實錄都廳堂上官)으로 삼았다.
실록청(實錄廳)에서 아뢰기를,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이 지연(遲延)되는 일로써 윤번(輪番)으로 숙직하며 찬수(纂修)하란 명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당상관은 전에도 숙직한 예(例)가 없으니, 지금와서 처음으로 열기는 어렵습니다. 당상관이 만약 무고(無故)한 때에 이따금씩 나와서 자고 야중(夜中)에 수사(修史)하게 되면 낭청(郞廳)도 또한 와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월 2일 병신
한산군(韓山郡)의 급제(及第) 이인식(李仁植)이 상소하여 3당편(三堂鞭)과 4당편(四堂鞭)의 규제(規制)를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포상(褒賞)하여 권장(勸奬)하고 그 규제를 훈련 도감(訓鍊都監)에 내렸다.
지평(持平) 임주국(林柱國)이 상소하여 충청 감사(忠淸監司) 홍호인(洪好人)은 추잡하고 비루하며 우매하고 용렬하여 관찰사가 될 수 없다고 논핵하고 파직(罷職)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경기 수사(京畿水使) 이익한(李翊漢)이 응지(應旨)하여 상소하며 양역(良役)이 치우치게 괴로운 것과 옥송(獄訟)이 적체(積滯)된 근심과 이서(吏胥)가 군포(軍布)를 도둑질하는 폐단을 진달(陳達)하고 말미(末尾)에 붕비(朋比)의 습관을 진달하면서 중도(中道)를 세우는 정치를 행할 것을 청하니,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연일(延日)의 유생(儒生) 이달장(李達章)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오천 서원(烏川書院) 가운데에 문정공(文貞公) 정사도(鄭思道)를 그 조부(祖父)인 영양공(榮陽公) 정습명(鄭襲明)의 예(例)에 의거하여 똑같이 배향(配享)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9월 3일 정유
진휼청(賑恤廳)에서 아뢰기를,
"삼남(三南)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도 본청(本廳)에 저축(儲畜)이 고갈[罄竭]되어 형세가 장차 백성이 죽어가는 것을 곧 보고만 있을 형편이니, 청컨대 먼저 통영(統營)의 포목(布木) 3백 동(同)과 해서(海西)의 돈 2만 냥(兩)을 갖다가 접제(接濟)하여 진구(賑救)하는 밑천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여 《맹자(孟子)》를 강독(講讀)하였는데,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지난날 정청(庭請)이 파한 뒤로 신(臣) 등이 어찌 나와서 공사(供仕)할 뜻이 있겠습니까? 나라의 연제(練祭) 때에 외방(外方)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올라올 것이므로 청컨대 널리 묻고 다시 의논하소서. 주상께서도 또한 이것을 마땅하다고 분부하셨으니, 원컨대 지금 마음을 비우시고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고서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미 하교(下敎)하였는데, 지금 만약 널리 묻지 않는다면 성실(誠實)한 도리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판윤(判尹) 권성(權惺)·호조 판서(戶曹判書) 신사철(申思喆)·예조 판서(禮曹判書) 심택현(沈宅賢)·우참찬(右參贊) 이병상(李秉常)·우윤(右尹) 이봉상(李鳳祥)·참판(參判) 황귀하(黃龜河) 등이 모두 대답하기를,
"지금 이 역적을 토벌(討伐)하자는 청은 하늘의 상경(常經)이요 땅의 법칙(法則)입니다. 원컨대 빨리 천토(天討)1262) 를 거행하셔서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강목(綱目)》을 강독하다가 당(唐)나라 숙종(肅宗)이 이임보(李林甫)1263) 의 시신(尸身)을 참(斬)하려고 하였는데, 이필(李泌)1264) 이 간(諫)하여 저지시킨 일에 이르러 두려워서 깨들은 바가 있게 되었다. 만약 숙종이 이필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았더라면 당(唐)나라의 중흥(中興)은 기필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천자(天子)가 필부(匹夫)를 원수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정의 신하들은 어찌 옛사람의 일을 본받지 않는가? 지난날 대행조(大行朝)에 있어 이미 원찬(遠竄)의 처분이 있었는데, 이제 만약 혹시 일호(一毫)라도 너무 지나치게 되며 대행조의 지극하신 인(仁)과 성대하신 덕(德)을 우러러 본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니 승지 신방이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의 일을 이임보에 비교 한다면 접근 시키지 못할듯 합니다. 그것은 이임보(李林甫)가 생존(生存)하였다면 이필(李泌)이 어찌 반드시 간(諫)하여 저지시키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씨(胡氏)1265) 의 논평(論評)을 본다면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소신(小臣)은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하여 능히 천청(天聽)을 감회(感回)시킬수 없으니, 물러가는 수밖에 다시 다른 도리가 없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의 죄가 만약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이르렀다면 내가 어찌 속히 처리하지 않고 미루기만 하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백성이 다 죽어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유봉휘를 죽이는 것으로만 일을 삼으니, 내가 만약 일호(一毫)라도 대행조(大行朝)의 처분(處分)에 지나치게 한다면 무슨 면목(面目)으로 선왕(先王)을 지하(地下)에서 뵙겠는가?"
하며, 이때에 천안(天顔)에는 슬픈 기색을 지니고 옥음(玉音)은 목멘 소리를 하며 말하는 것이 또 매우 엄하고 끊는 듯함으로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장붕익(張鵬翼)을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홍호인(洪好人)을 체직(遞職)시켰으니, 홍호인이 새로 대관(臺官)이 말하는 것을 당한 까닭이었다.
양주(楊州)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몸뚱이 하나에 머리가 둘이 있었다.
9월 4일 무술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정형익(鄭亨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명신(趙命臣)을 장령(掌令)으로, 한이조(韓頤朝)와 신처수(申處洙)를 정언(正言)으로, 이유(李瑜)를 교리(校理)로, 김유경(金有慶)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신방(申昉)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이성룡(李聖龍)을 집의(執義)로, 조관빈(趙觀彬)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채응복(蔡膺福)을 헌납(獻納)으로, 김취로(金取魯)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정택하(鄭宅河)를 사간(司諫)으로, 박성로(朴聖輅)를 승지(承旨)로 삼고, 홍우전(洪禹傳)을 발탁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삼았으며, 나학천(羅學川)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9월 5일 기해
달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가서 대신(大臣)과 비변사(備邊司)의 당상관(堂上官)을 불러 보았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지난번에 신(臣) 등이 명령과 분부를 이어받들지 못하는 것으로써 목이 메이는 말씀까지 하시고, 신 등도 또한 종일 힘써 청하였으나 유음(兪音)을 듣지 못하고 억울(抑鬱)하게 물러났으니, 상하(上下)의 정의(情意)가 이와 같이 막혀 진데다가 큰 가뭄이 이처럼 극심하니, 신 등을 물리친 뒤에야 전하께서 하시고 싶은 정치를 하실수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이 간쟁(諫爭)하는 바는 사실 천지(天地)를 버티고 만고(萬古)에 뻗어가는 변경할 수 없는 의리(義理)인데 한결같이 굳이 거절하시니, 신은 진실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혹시 나의 소견(所見)이 미치지 못해서 군하(群下)의 청을 따르지 않는다고 여기는가?"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신 등이 유봉휘(柳鳳輝)와 어찌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서 이와 같이 진달(陳達)하겠습니까? 영남(嶺南)의 인사(人事)가 색목(色目)1266) 은 비록 다르나 같은 소리로 토죄(討罪)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온나라 사람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호씨(胡氏)의 논평한 것으로써 분부를 하셨는데, 신이 물러와서 상고하여 보니 이 일과는 다릅니다. 이임보(李林甫)의 죄는 비록 베어 만 토막을 내더라도 무엇이 지나치겠습니까? 당(唐)나라 숙종(肅宗)이 다만 자기의 조그마한 미움만을 생각하고 죽은 뒤에 관(棺)을 쪼개고 시체(尸體)를 태우려고 하였으니, 이는 천자(天子)로서 필부(匹夫)에게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봉휘는 종사(宗社)의 죄인이므로 종사를 위하여 토적(討賊)할 뿐이니, 이것이 어찌 필부의 원수가 되는 일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민진원에게 이르기를,
"경(卿)이 비록 토적(討賊)하는 것으로써 급한 일로 삼고 있으나, 또한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소신(小臣)을 효유(曉諭)하시어 자신을 돌아보라는 방도로써 격려하여 주시니, 신을 생각하시는 뜻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소신은 본래 척신(戚臣)1267) 으로서 마땅히 국사(國事)에 관여할 수는 없지마는 이미 그 직위에 있게 되었으니, 그 직책(職責)을 생각하지 않고서 그 자신만 돌아볼 수가 있겠습니까? 대신이 자신을 돌아본다면 조정에 있는 신하가 누군들 자신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신은 다만 대의(大義)를 부식(扶植)하는 것만 알 뿐이요 그밖에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으니,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관명(李觀命)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신 자신을 물리쳐 내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유봉휘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해서 따르지 않는 것인가? 대신은 아직도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유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
"문간공(文簡公) 이희조(李喜朝)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라고 명을 하셨는데, 그 집이 매우 가난하여 예절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별도로 부조(賻助)한 은혜도 또한 고루 받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몹시 흠결(欠缺)된 일이며, 고(故) 판서(判書) 송상기(宋相琦)와 임방(任埅)은 적소(謫所)에서 죽은 이유로써 이미 은전(恩典)을 받았으니, 그 유현(儒賢)을 대우(待遇)하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별도로 구휼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구휼하는 은전을 거행하게 하였다.
삼남(三南)과 강원도(江原道)에 전곡(田穀)이 참혹한 흉년이 들었으므로 전세(田稅)에서 결(結)마다 1두(斗)를 감(減)하고, 양주(楊州)는 서울에 가까이 있으면서 여러 능침(陵寢)을 받들게 되어 민역(民役)이 치우치게 고달프므로 대동미(大同米)를 결(結)마다 3두를 감하여 주라고 명하고, 기역(畿驛)도 잔폐(殘廢)하였으므로 받아들이지 못한 환자곡[還上穀]을 감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찬선(贊善) 김간(金幹)이 상소하여 치사(致仕)할 것을 원하였으나,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9월 6일 경자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판윤(判尹) 권성(權𢜫)이 상소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 소에 대략 말하기를,
"왕자(王者)는 하늘을 받들어 사정(私情)이 없어야 하므로 구차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주극(誅殛)·찬출(竄黜)하는 것을 한결같이 하늘에 따라야 할 것인데, 성상(聖上)의 처분이 천리(天理)의 공도(公道)에 합당치 않고, 여러 신하들의 아뢰는 바가 부화 뇌동(附和雷同)하는 결과를 면치 못하니, 천청(天聽)이 더욱 막연하여 징계와 토죄(討罪)하는 일이 행하여지지 않습니다. 비록 신에게 질병을 억지로 참고 나와서 벼슬하게 하더라도 국사(國事)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신이 이에 되풀이 하면서 생각하여 보건대 많이 쓰도록 힘써 간쟁(諫爭)하며 상하(上下)가 서로 버티기 보다는 차라리 몸을 받들고 돌아가서 명의(名義)의 죄인(罪人)이 되는 것을 면하겠습니다."
하고, 상소 끝에 휴퇴 치사(休退致仕)의 청을 진달(陳達)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 연교(筵敎)는 나의 의도(意圖)가 목적이 있었는데, 경(卿)이 이 일로써 그 거취(去就)를 결정하는 것은 또한 지나치지 않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권성(權𢜫)이 향서(鄕墅)에 오래 물러나 있다가 이미 조정에 나와서 임금의 마음이 흉당(凶黨)을 심각하게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드디어 돌아갈 것을 결정하였다. 이로부터 비록 관직에 제수하여 부름이 있었으나 다시 명을 받지 않았으며, 조정의 신하가 토적(討賊)하는 계달(啓達)로 달이 지나도록 힘써 간쟁(諫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하여 따르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견(先見)을 탄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51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권성(權𢜫)이 향서(鄕墅)에 오래 물러나 있다가 이미 조정에 나와서 임금의 마음이 흉당(凶黨)을 심각하게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드디어 돌아갈 것을 결정하였다. 이로부터 비록 관직에 제수하여 부름이 있었으나 다시 명을 받지 않았으며, 조정의 신하가 토적(討賊)하는 계달(啓達)로 달이 지나도록 힘써 간쟁(諫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하여 따르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견(先見)을 탄복하였다."
9월 7일 신축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윤식(尹植)을 조사한 일에서 탈공(脫空)1268) 하는 것은 분간(分揀)하여야 될 듯하며, 심세준(沈世浚)에게는 마땅히 재결(災結)을 마음대로 적용한 형률(刑律)을 시행하여야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근래에 장법(贓法)이 엄격하지 못하므로 윤식(尹植)이 옥석(玉石)을 부취(浮取)1269) 하는 데서 이미 장물(贓物)이 있었으니, 모두 종신(終身)토록 금고(禁錮)하게 하라."
하였다. 그 뒤에 동의금(同義禁) 이의현(李宜顯)이 아뢰기를,
"조사한 상황으로 살펴본다면 윤식은 죄줄 만한 단서가 없는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판부(判付)한 것을 도로 들이라고 명하였다.
9월 8일 임인
조덕린(趙德隣)을 사간(司諫)으로, 이병태(李秉泰)를 헌납(獻納)으로, 권적(權𥛚)을 정언(正言)으로, 윤혼(尹焜)을 지평(持平)으로, 서평군(西平君) 요(橈)를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김유경(金有慶)을 부사(副使)로, 조명신(趙命臣)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어유귀(魚有龜)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삼았다.
9월 9일 계묘
집의(執義) 이성룡(李聖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날 연석(筵席)에서 대신(大臣)의 토죄(討罪)하자는 청으로 인하여 혹은 그것이 백성에 대한 근심과 나라를 위하는 계책에 방해됨이 있을까 염려하시며 천안(天顔)에 슬픔과 근심을 띠우시고 옥음(玉音)이 진정으로 측은하셨으니, 이에서 우리 성상(聖上)께서 백성을 근심하시는 지극한 뜻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군주(君主)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인(仁)과 의(義)를 한쪽만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罪)를 주토(誅討)하면서 백성을 근심하는 것은 본래 서로가 방해되지 않습니다. 옛날의 백성을 근심하는 것이 요순(堯舜)보다 지나친 이가 없으나, 일찍이 백성에 대한 근심에 서둘러서 사흉(四凶)1270) 의 죄를 바로잡는 데에 겨를이 없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옛날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공자(孔子)보다 지나친 이가 없으나 또한 나라를 위하는 계책에 서둘러서 소정 묘(少正卯)1271) 를 주륙(誅戮)하는데에 겨를이 없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 성상의 하교에 신은 가만히 괴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정신(精神)을 모아 진실한 마음으로 실행하여 나간다면 한편으로는 죄를 주토하고 한편으로는 백성을 구호(救護)하여도 족히 많은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과연 빨리 슬기로운 판단을 넓혀 조속히 처분을 내리시는 일이 있다면, 또한 어찌 지금까지 미루면서 백성을 구제하는 방도를 설시(設施)하는 데에 방해가 있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지신사(知申事)1272) 의 직임(職任)은 지위나 명망이 자별하므로 번번이 모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임명되는데, 간혹 또한 중신(重臣)으로서 이를 겸무(兼務)하는 자가 있기도 했으니, 대개 그 직임(職任)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입니다. 심지어는 비의(緋衣)로서 겸무(兼務)되는 자도 혹은 있으나 아주 드뭅니다. 지금 전하께서 당품(當品)1273) 에게 천점(天點)1274) 을 자주 가하여 주시니, 관질(官秩)에 순서가 없어지는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 헌신(憲臣)이 번신(藩臣)1275) 을 논핵할 때에 그다지 진상(眞狀)을 포착하지도 않고서 곧바로 비루하고 용렬하다는 명목으로써 한번의 운필(運筆)을 경솔하게 더하는 것은 절대로 청명(淸明)한 조정의 돈후(敦厚)한 기풍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즉시 변통(變通)한 것은 본래 본도(本道)를 진념(軫念)한 데서 나온 것인데, 오늘 탄핵을 받았다고 다음날 대체(代遞)해 내보내는 것은 또한 방악(方岳)1276) 을 중요시하는 방도에 부족함이 있는 듯합니다. 신은 가만히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 연교(筵敎)가 어찌 병행(並行)하려고 하였던 뜻이 아니였던가? 지신사(知申事)는 그 사람이 감내할 만하면 예전대로 행하는 것도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전(前) 충청 감사(忠淸監司)의 일에 대해서는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서 구일제(九日製)를 설시(設施)하였는데, 수석(首席)을 차지한 진사(進士) 임수적(任守迪)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장흥 출신(長興出身) 김성대(金成大)가 상소하기를,
"회양 철령(淮陽鐵嶺)의 남쪽과 안변 철령의 북쪽에 각각 쇠뇌[弩] 1천여 기(機)를 설치하고, 또 수백명(數百名)의 노군(弩軍)을 두어서 회양(淮陽)·안변(安邊)양부로 하여금 방어사(防禦使)를 겸임(兼任)하게 하고, 또 춘천(春川)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서 여러 곳의 험애(險阨)를 총찰(摠察)하여 뜻밖의 변고에 대비(對備)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경기(京畿)의 유생(儒生) 이세장(李世章) 등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문정공(文正公) 송시렬(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중협(李重協)이 장계(狀啓)한 것을 살펴보건대, ‘별차왜(別差倭) 귤광찬(橘匡贊)이 서계(書契)를 싸가지고 와서 반드시 연향(宴享) 할 때에 바치려고 하면서 임관(任官)에겐 바치려 하지 않으니, 서계(書啓)의 별폭(別幅)을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인가 않아야 할 것인지와 접대(接待)하는 한 조항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지휘(指揮)하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별차왜(別差倭)가 규정 외에 나오는 것은 특히 놀랄 만한 일입니다. 여러 번 꾸짖어 타일렀으나 해가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글을 올리려고 하면서도 대체로 잠상(潛商)을 금단(禁斷)하는 것에 핑계대고 있으니, 일이 변금(邊禁)에 관계된 것이므로 또한 한결같이 물리쳐 쫓을 수만은 없습니다. 때문에 받아서 보내게 하였는데, 별차왜(別差倭)가 반드시 부사(府使)에게 직접 바치려 하므로 또 이와 같이 다투고 힐책(詰責)하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그 말에 의하여 부사(府使)가 직접 왜관(倭館)에 가서 다례(茶禮)를 베풀고 서계(書契)를 받게 된다면 다음날 규정 외에 사신을 보내어 떳떳한 것으로 볼 것이요, 만약 한갓 꾸짖어 타이르는 것만을 일삼는다면 교활한 왜인(倭人)이 듣고 따를 이치가 절대로 없을 것이니, 오래도록 끌고만 있는 것은 더욱 폐단(弊端)만 증가시킬 뿐입니다. 마땅히 부사(府使)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고 연례(年例)로 제관(諸館)에 사신을 보낼 때에 별차왜가 가지고 온 서계(書啓)는 받아서 해조(該曹)로 보내게 하여 해조에서 답서(答書)할 때에 ‘이 뒤로는 약조(約條)외에 별도로 사신을 보내지 말고 반드시 왕래하는 인편을 기다리자’는 뜻으로써 글을 만들어 꾸짖어 타일러야 하겠습니다. 서계의 별폭은 벌써 이미 받아 올렸으니, 회례사(回禮使)에게 식량과 반찬을 또한 마땅히 헤아려서 주어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9월 10일 갑진
경기(京畿)·강원(江原)·충청도(忠淸道)의 유생(儒生) 백시청(白時請) 등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이삼(李森)·이사상(李師尙)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 여러 적(賊)의 죄를 토벌(討伐)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라도(全羅道) 유생(儒生) 이만영(李萬榮)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임진년1277) 의 변란(變亂)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순절(殉節)한 선비가 호남(湖南)에서 많이 나왔으나, 그 중에서 가장 드러난 자는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慶會) 이분들입니다. 성고(聖考)께서 임어(臨御)하시던 날에 김천일·고경명 두 신하는 증시(贈諡)의 은전(恩典)을 받았으나 유독 최경회만 같이 받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은전의 시호를 특별히 내리소서. 또 최경회가 절의(節義)로 죽은 뒤에 그 형(兄)인 최경장(崔慶長)이 남은 병사(兵士)를 소집(召集)하여 다시 영남(嶺南)으로 갔는데, 추노(醜奴)가 최경회의 형이라는 것을 알고서 황급히 물러나 피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관작을 추증(追贈)하여 권장하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그대의 상소를 보건대, 두 신하의 충절(忠節)이 늠연(澟然)히 살아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영복(趙榮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내수사(內需司)의 첩정(牒呈)에 고래[鯨魚]의 눈과 수염을 조금 보냈다는 일로 인하여 감세관(監稅官)을 형배(刑配)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고래의 눈은 다만 하찮은 물품이고 원래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아닌데, 해궁(該宮)에서 감히 기한을 정하여 징납(徵納)하라는 뜻으로써 천청(天聽)을 번거롭게까지 하였으니, 더욱 몹시 외람되고 잗단 일인데도 전하께서 퇴척(退斥)하지 않으시고 곧 이런 분부를 내리시니, 신은 진실로 전하의 뜻이 고래의 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마는, 가만히 하방(遐方)의 소민(小民)이 반드시 전하께서 한낱 고래의 눈 때문에 이런 처분이 있다고 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감색(監色)의 무리들이 계하 공사(啓下公事)1278) 를 준행(遵行)하지 않기 때문에 선조(先朝)에서 판부(判付)한 것을 인용하여 징치(懲治)하게 한 것이고 고래 눈에 대한 일은 판부에서 거론하지 않았으니, 징납(徵納)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이에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어찌 하찮은 물품을 아까워해서 이런 일을 하였겠는가? 고래의 눈을 본도(本道)에서 쪼개어 버리게 하여, 나의 뜻을 명백히 보이라."
하였다. 그때에 연일포(延日浦)에 백성이 세 마리의 고래[鯨魚]를 잡았는데 감세관(監稅官)이 궁차(宮差)에게 이익을 나누어 주지 않았으므로, 궁차가 돌아와서 내수사(內需司)에 호소하여 엄중한 분부가 있기까지 되었으니, 이런 까닭으로 조영복(趙榮福)의 상소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야대(夜對)를 행하고 《심경(心經)》을 강독(講讀)하였다.
9월 11일 을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서명구(徐命九)를 보덕(輔德)으로, 황재(黃梓)를 수찬(修撰)으로, 이유(李瑜)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신방(申昉)을 체직(遞職)시키고 홍용조(洪龍祚)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신방이 친병(親病)으로 부임(赴任)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9월 12일 병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주청사(奏請使)가 돌아온다는 보고가 있으니, 경사스럽고 다행함이 큽니다. 기청(祈請)하는 일이 많이 있으므로 방물(方物)도 또한 많이 감제(減濟)하였으니, 앞으로 사은(謝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일에 김상명(金常明)이 매양 힘을 다하여 주선(周旋)하였는데, 김상명의 선묘(先墓)가 우리 나라 지역에 있습니다. 때문에 듣건대, 비석(碑石)을 세우려고 하는데 청나라[他國]에서는 광록 대부(光祿大夫)를 추증(追贈)하였고 또 우리 나라에서는 절충 장군(折衝將軍)의 자급(資級)을 얻었으므로 반드시 나란히 쓰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가 어떤 연유로 우리 나라의 관자(官資)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나라에서 마땅히 그를 위하여 비석을 세우고 또한 마땅히 그가 원하는 바에 의하여 써야 하는데, 대청 광록 대부 조선국 절충 장군(大淸光祿大夫朝鮮國折衝將軍)으로 쓰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몹시 우스운 일이긴 하나, 마땅히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도빈(趙道彬)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홍치중(洪致中)을 좌참찬(左參贊)으로, 박사성(朴師聖)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상석(金相奭)을 수찬(修撰)으로, 이집(李㙫)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9월 15일 기유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9월 16일 경술
월식(月食)하고 화성(火星)이 여귀성(輿鬼星) 서북(西北)을 범(犯)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독(講讀)이 끝나자, 대신(大臣)과 2품(二品) 이상의 관원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춘추 시대(春秋時代)로 말하면 반역(反逆)을 토벌(討伐)하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했을 것이요, 주(周)나라 왕실(王室)로 말하면 강상(綱常)이 도치(倒置)됨으로써 나라가 따라서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신(臣) 등은 유봉휘(柳鳳輝)를 토죄(討罪)하지 않으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으로 여기는데도 전하께서는 도리어 유봉휘를 토죄하면 사직(社稷)이 위태롭다고 여기시므로, 군신(君臣) 사이가 서로 막혀졌으니, 무슨 일이 성사되겠습니까? 일로 보아 마땅히 다시 정청(庭請)하여야 하겠지마는, 외국(外國) 사신이 올때가 멀지 않아서 폐좌(廢坐)1279) 가 될까 근심이 되기 때문에 자주 청대(請對)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은 말하기를,
"진실로 좌의정의 의논과 같습니다. 주(周)나라 말기(末期)에 제후(諸侯)가 왕명(王命)을 마음대로 내렸으므로 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되었던 것은 윤상(倫常)이 밝지 못하였던 까닭입니다. 이제 능히 토적(討賊)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後世)의 책망을 면하겠습니까?"
하고, 좌참찬(左參贊) 홍치중(洪致中)은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달이 지나도록 토적(討賊)을 청한 것이 어찌 사의(私意)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 불평스런 사기(辭氣)가 있으시니, 이것이 어찌 여러 신하들의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하고, 공조 참판(工曹參判) 홍우전(洪禹傳)은 말하기를,
"유봉휘의 죄상(罪狀)은 전하께서 곧 여러 신하들이 능히 알지 못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아직 윤허하여 따르지 않으시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경신년1280) 오시수(吳始壽)의 일로써 말한다면 명성 왕후(明聖王后)께서 자애심이 많아 살생(殺生)하기를 꺼리는 덕으로써 반드시 그를 살리려고 하였으나 숙종(肅宗)께서 마침내 방헌(邦憲)을 시행하였으니, 어찌 오늘에 마땅히 우러러 본받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참찬(左參贊)이 내가 불평스런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찌 경(卿) 등의 말을 옳지 못하다고 여긴 것이겠는가? 다만 내가 고집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장령(掌令) 이제항(李齊恒)이 상소하여 먼저 징토(懲討)의 뜻을 진달(陳達)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날 연중(筵中)에서 ‘경(卿)은 어떻게 자신을 돌아보지 않느냐?’는 분부가 있었는데, 이것은 이른바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릇 큰 사화(士禍)를 치른 뒤로부터 선류(善類)들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기절(氣節)이 사라져 꺾이게 됩니다. 성상께서 비록 임금의 뜻을 거슬러가면서 과감하게 간(諫)하는 절개로써 인도하시고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죽는 의리로써 권하여도 오히려 그들이 후환(後患)을 돌아보아 혀를 물고 머뭇거릴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자신을 돌아보라는 등의 말씀으로 사교(辭敎)에까지 나타내시며 언로(言路)를 막는 방도로 삼으시는 것입니까? 보고 듣는 이마다 실망(失望)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해주 판관(海州判官) 최집(崔)은 천성이 본래 간사하고 음흉한데다가 구변(口辯)을 더하여 권흉(權凶)의 가문(家門)에 이[虱]처럼 붙어서 임인년1281) 에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그 조카 최흥조(崔興祚)를 유혹(誘惑)하여 황당한 말을 조작(造作)하고 재앙이 일어날 기틀을 양성(釀成)하였으니, 그 심술(心術)의 요악(妖惡)스러움은 이중환(李重煥)·목천임(睦天任)의 무리와 더불어 한 꿰미[一串]로 꿴 듯하였습니다. 흉당(凶黨)은 이로써 공(功)을 삼아 해서(海西) 웅부(雄府)의 목사(牧使)로 후하게 보답하니, 불법(不法)으로 탐욕을 부리며 포학하므로 온 경내(境內)가 시끄러웠습니다. 청컨대 삭직(削職)하여 나문(拿問)하소서. 그리고 철원 부사(鐵原府使) 이중신(李重新)과 여산 부사(礪山府使) 이우신(李遇新)은 곧 유취장(柳就章)의 처남(妻娚)이고 유선기(柳選基)의 외숙(外叔)입니다. 그가 벼슬에 있으면서 법(法)을 능멸한 형상은 우선 내버려두고 말하지 않더라도, 유취장 부자(父子)가 화(禍)를 입던 날을 당하여서는 사수(私讎)처럼 보면서 시신(屍身)을 한데 드러낸 즈음에도 관직(官職)을 구하였으니, 이와 같이 윤리(倫理)를 멸시하며 의리에 어긋난 사람을 의관(衣冠)1282) 의 반열에 둘 수가 없습니다. 모두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시켜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참벌(斬伐)된 나머지에 기절(氣節)이 사라지고 꺾이게 되었습니다. 주상께서 비록 거리낌없이 말하는 기풍으로써 부추기더라도 오히려 그 자신을 돌아볼까 근심이 되는데, 더구나 어찌 자신을 돌아보지 않느냐는 분부를 연석(筵席)에서 나오기까지 하여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담력(膽力)을 잃고 입을 다물게 하십니까? 옛 성인(聖人)의 이른바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게 된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구후익(具後翼)이 재차 패초(牌招)하여서야 비로소 나왔으니, 그가 무병(無病)한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무신(武臣)이 패초를 어긴 것은 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김상석(金相奭)이 전후에 패초를 어긴 것을 사람들이 모두 규피(規避)로 처치(處置)해야 한다고 하니, 모두 마땅히 특별히 파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비국(備局)의 여러 당상관이 신칙한 교지(敎旨)로 인하여 거개가 관아(官衙)에 나왔는데도 양국(兩局)1283) 의 대장(大將)은 모두 나와 참여하지 않았으니, 성상의 분부를 안중(眼中)에 두지 않고서 업신여기고 거만하여 스스로 편하게 하려는 습관은 마땅히 엄하게 경책(警責)을 가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9월 17일 신해
반제(泮製)를 설시하여 박수근(朴守謹)·박민채(朴敏采)·우세준(禹世準) 세 명을 뽑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박민채는 고(故) 충신(忠臣) 박팽년(朴彭年)의 아우인 박인년(朴引年)의 후손(後孫)이다. 박인년은 지평(持平)으로 참화(慘禍)에 죽었으므로 참봉(參奉)의 직책으로 서용(叙用)할 것을 명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이교악(李喬岳)이 직접 유생(儒生)을 과시(課試)하였으므로 특별히 호랑이 가죽[皐比]을 내려 그를 총애하였다.
김상원(金相元)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박사성(朴師聖)을 검상(檢詳)으로, 이광원(李光遠)을 지평(持平)으로, 이정주(李挺周)·신방(申昉)·김고(金槹)를 승지(承旨)로 삼고, 특별히 유복명(柳復明)을 도승지(都承旨)로 임명하였다.
9월 18일 임자
임금이 유생(儒生)에게 전강(殿講)을 시행(施行)하여 수석(首席)을 차지한 유학(幼學) 유문룡(柳文龍)·윤봉교(尹鳳郊)·노이형(盧以亨) 등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9월 19일 계축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사헌부 【장령(掌令) 이제항(李齊恒)이다.】 에서 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문출(門黜)된 죄인(罪人) 이광보(李匡輔)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심복(心腹)이고 적(賊) 이진유(李眞儒)의 조아(爪牙)1284) 로서 선류(善類)를 해치고 사환(使喚)이 되는 일에 만족하였으며, 남읍(南邑)으로 체직(遞職)되어 돌아간 뒤에도 돌보아 준 것을 잊지 않고 경차관(敬差官)에 차임(差任)되기를 구하여 호중(湖中)1285) 에 행도(行到)하자 문득 천붕지통(天崩之痛)1286) 을 당했는데도 곧 도사(都事) 박사제(朴師悌)와 더불어 술을 시키고 기생을 다투어 음행(淫行)을 벌리면서 묵고 있었으니, 곧 이 한 조항은 흉악하고 어긋남이 비길 데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날 대신(臺臣)이 박사제를 논핵할 때에 그는 유독 빠져 있었으며, 죄로 문출(門黜)된 뒤에도 거만하게 집에 있었으니, 삭출(削黜)하는 것으로만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아주 먼 변경(邊境)으로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9월 20일 갑인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이제항(李齊恒)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또 아뢰어 말하기를,
"문출(門黜)된 죄인 유수(柳綬)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지친(至親)으로서 서로 호응(呼應)한 형상이 대간(臺諫)의 장소(章疏)에서 대략 논의되었고, 지난날 김동필(金東弼)이 역적 김일경의 교문(敎文)을 상소하여 배척한 일은 그 정상(情狀)이 탄로날 것을 걱정하여 김일경·권익관(權益寬) 등의 사주(使嗾)를 몰래 받아 김동필을 논핵 배척하고 심지어는 파직(罷職)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적 김일경이 연음(宴飮)하던 날에 그의 압객(狎客)1287) 이 되어 역적 김일경에게 헌수(獻壽)하였으니, 역적 김일경이 복주(伏誅)된 뒤라고 해서 어찌 당여(黨與)의 주벌(誅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아주 먼 변방으로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前) 참봉(參奉) 김요경(金堯鏡)은 곧 역적 김일경의 친아우입니다. 역적 김일경의 도천(滔天)1288) 의 죄악(罪惡)은 사실 김요경이 조성(助成)한 데 연유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임인년1289) 에 사화(士禍)가 일어날 때 재임(齋任)으로 핑계대고 태학(太學)1290) 에 돌입(突入)하여 재생(齋生)을 몰아내 쫓고 흉악하고 패려(悖戾)한 말로 8도(八道)에 통문(通文)하여 무릇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는 일체 역당(逆黨)으로 지목하고 유안(儒案)에서 먹으로 지우고 교적(校籍)에서 칼로 오려내며, 심지어 열읍(列邑)에 대단한 기세로 외치면서 그 집을 헐어버리고 그 고향에서 내쫓기까지 했으니, 옛날부터 사림(士林)에 재화(災禍)를 양성(釀成)한 자가 어찌 김요경같이 참독(慘毒)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모두 계청(啓請)에 따랐다. 【이광보(李光輔)는 양덕(陽德)으로 귀양보내고, 김요경(金堯鏡)은 대정(大靜)으로 귀양보냈다.】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53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註 1287] 압객(狎客) : 주인과 터놓고 지내는 손님.[註 1288] 도천(滔天) : 세력이 엄청나게 크게 퍼짐.[註 1289]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1290] 태학(太學) :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충청도(忠淸道) 유생(儒生) 이덕함(李德涵) 등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고(故) 충신(忠臣) 홍익한(洪翼漢)의 평택 사원(平澤祠院)에 전결(田結)을 획급(劃給)하시고 겸하여 비(碑)를 세우는 역사를 도와주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칭찬하고 권장하여 그 청을 따랐다.
서울과 지방의 유생(儒生) 이현조(李顯祚) 등이 상소하여 찬선(贊善) 김간(金幹)을 불러올 것을 청하니,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주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도빈(趙道彬)이 여러 도(道)에 참혹한 흉년이 들었다 하여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보내어 백성을 초유(招諭) 안집(安集)시키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옮겨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9월 21일 을묘
천둥이 일어나고 번개가 쳤으며, 화성(火星)이 적시성(積尸星)을 범하였다.
경상도(慶尙道)의 유생(儒生) 이도장(李道章) 등이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 등 여러 적(賊)을 토죄(討罪)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황해도(黃海道) 평산(平山)의 진사(進士) 이동현(李東鉉)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안으로 육조(六曹)·삼사(三司)와 밖으로 도신(道臣)·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각각 두 사람을 추천해서 임용(任用)하되 한결같이 과목 출신(科目出身)의 제도와 같이하고, 문관(文官)·남행(南行)1291) ·무관(武官)을 논할 것 없이 그 청백 염근(淸白廉謹)한 자를 뽑아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으로 차송(差送)하여 사치한 것을 금지시키고 군액을 정밀하게 하되 선파(璿派)1292) 의 후에는 군정(軍丁)에 침범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라고 하였다.
9월 22일 병진
대신(大臣)과 2품(品) 이상의 관원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어젯밤의 천둥은 또한 매우 심상치 않고 또 성변(星變)이 있으니, 그 징후(徵候)는 인물(人物)이 많이 죽을 조짐이라고 합니다. 신(臣) 등은 직책이 정승에 있으면서 상하(上下)의 정지(情志)가 성실(誠實)되지 않아서 천변(天變)을 초래(招來)하였으니, 삼가 원하건대, 척퇴(斥退)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경(卿) 등이 허물이겠는가? 매양 옛날에 보필하는 정승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을 보고는 일찍이 분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민진원이 다시 토적(討賊)의 의리를 아뢰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역신(逆臣)의 죄를 모르시는 것이 아닌데, 인후(仁厚)하심이 지나쳐서 곧 용서하여 주시려고 하니,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장차 끊이지 않고 일어날 것입니다."
하고, 우참찬(右參贊) 이병상(李秉常)은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가 만약 죽일 만한 죄가 없다면 신 등을 척퇴(斥退)시키시고, 만약 과연 죽일 만한 죄가 있다면 마땅히 신 등의 말에 윤허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반신 반의(半信半疑)하고 반생 반사(半生半死)하는 사이에 두고 계시니, 어찌 느슨하게 하면서 말 많게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현명(賢明)하지는 못하나, 어찌 오늘 정신(廷臣)의 말한 것을 반신 반의하는 사이에 두고 듣지 않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신 뒤로 상전(賞典)이 너무 지나칩니다. 요즘 급제를 내려 주신 것이 전후에 합쳐 6명이나 되므로, 외부의 의논이 너무 많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해진 바지를 보관해 두었다.1293) 는 말이 있는데, 내가 어찌 시상(施賞)을 신중하게 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내가 격려하여 권장하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선조(先朝)에서는 5명이나 직부(直赴)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수효가 그래도 5명에서 감축시켰을 뿐이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고 《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였다.
9월 24일 무오
달이 헌원성(軒轅星)의 제3성(第三星)을 범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상도(慶尙道) 장기(長鬐)의 유생(儒生) 오시좌(吳時佐) 등이 상소하여 본읍(本邑)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 사원(祠院)에 액호(額號)를 내리는 은전(恩典)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는데,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전(前) 만호(萬戶) 이태배(李泰培)가 상소하여 열 가지 일을 진달(陳達)하였으니, ‘1. 기강(紀綱)이 해이하여 없어진 것, 2. 기계(器械)가 쓸모 없이 된 것, 3. 향미(餉米)1294) 를 나누어 주는 것, 4. 진졸(鎭卒)이 요역(徭役)을 부담하는 것, 5. 시초(柴草)를 독촉하여 받는 것, 6. 왜인(倭人)이 곡식을 무역하는 것, 7. 송금(松禁)이 엄격하지 못한 것, 8. 색목(色目)을 바꾸어 정하는 것, 9. 전선(戰船)을 제도(制度)로 하는 것, 10. 좌수영(左水營)을 옮겨 설치하는 것’이었는데,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9월 25일 기미
별이 천름성(天廩星)의 아래로 지나갔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관(備局堂上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이재(李縡)가 경학(經學)의 공부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난번에 그 사람됨을 보니 과연 들은 바와 같다. 외부에 두는 것은 지극히 아까운 일이니, 이재·윤봉조(尹鳳朝)는 똑같이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리게 하라."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이 말하기를,
"누차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리는 것은 사체(事體)에 손상됨이 있습니다. 연석(筵席)의 분부가 이와 같았으니, 여러 신하들은 스스로 들어서 알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헌장(憲長)의 말이 진실로 그러하다면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릴 필요는 없다."
하였다.
좌의정 민진원이 아뢰기를,
"칙사(勅使)의 행차가 오래지 않아 마땅히 올 것인데, 왕세자(王世子)가 바야흐로 충년(沖年)에 있고 또 관례(冠禮)를 행하지 못하였으니, 교외(郊外)로 나가 맞이하는 것이나 전정(殿庭)에서 칙사를 맞이하는 절차를 규례(規例)에 따라 행하지 못할듯 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심택현(沈宅賢)은 말하기를,
"을미년1295) 에 현종(顯宗)께서 동궁(東宮)으로 계실 때에 교외(郊外)로 나가서 맞이하는 한가지 절차는 규례에 의해 마련하여 빈신(儐臣)으로 하여금 주선(周旋)하게 하고는 거행하지 않았으며, 경종(景宗)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에도 또 빈신으로 하여금 주선하게 하여 교외로 나가서 맞이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인정전(仁政殿) 문 밖에서 단지 칙사를 맞이하는 절차만 행하였습니다. 지금 동궁께서는 새로 두환(痘患)을 치루고 또 감기 기운이 있으니, 교외로 나가서 맞이하는 것은 결단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목시룡(睦時龍)의 일은 아뢴 대로 따랐다. 정형익(鄭亨益)이 인하여 아뢰기를,
"소하(疏下) 5적(五賊)에 대한 계달(啓達)은 지난날 거의 윤허하시어 따르심을 입었는데도 아직까지 한 번의 승인하는 허락을 아끼시니,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빨리 방형(邦刑)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1296) 겨울에 상소한 것이 지극히 음흉(陰凶)하다고 해서 오늘날 계사(啓辭)를 어찌 잘못이라 하겠는가?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동모(同謀)한 것은 비록 환하게 알 수 있으나, 국옥(鞫獄)의 사체(事體)로 말하면 원사(爰辭)1297) 를 받은 뒤에 그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정한 것인데, 음흉하고 교활한 역적 김일경의 말을 들은 것으로써 어찌 죄다 죽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비록 인명(人命)을 많이 죽이는 것으로써 불안(不安)하게 여기시나, 주자(朱子)의 상형설(祥刑設)1298) 로써 살펴 본다면 ‘죽어야 할 자를 죽이지 않는 것은 살려야 할 자를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으니, 주자의 말한 것은 도리(道理)가 정당(正當)하므로 추측 번복(翻覆)시킬 수가 없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죽어야 할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의 일은 그가 마음먹은 것이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는 데서 나와 기기(忌器)1299) 의 혐의를 몰랐던 것인데, 오늘 극형(極刑)에 처하는 것은 불가함이 없겠는가? 춘방일기(春坊日記)를 내가 세 번이나 반복하여 보았으나 분당(分黨)의 일이 없는 것 같은데, 그가 하였다면 마땅히 곧바로 역률(逆律)로 돌릴 뿐이다."
하였다.
정언(正言) 한이조(韓頤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백성을 보호하는 계책은 오로지 수령(守令)을 선택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하기 전에는 선택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전관(銓官)이 된 자는 마음가짐이 비록 공정하더라도 다만 그 사람의 말이나 모양만 볼 뿐이니, 어찌 그 재주의 우열(優劣)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신(臣)이 가만히 보건대, 어사(御史)나 감사(監司)가 수령을 포폄(褒貶)하는 것이 비록 반드시 낱낱이 합당하지는 못하지마는, 여러 번 포상(褒賞)되거나 여러 번 폄론(貶論)된 사람은 반드시 이름과 실상(實狀)이 서로 부합되기 마련입니다. 해조(該曹)에서 비의(備擬)할 즈음에 여러 번 포상된 사람은 택차(澤差)1300) 하면서 여러 번 폄론된 사람은 영구히 검거(檢擧)됨이 없습니다. 만약 혹시 여러 번 폄론하는 데에 들어갔을지라도 실지로 치적(治績)이 있어서 남들이 원통하다고 일컫는 자는 반드시 대신(大臣)이나 중신(重臣)의 진백(陳白)을 기다린 뒤에 천거하여 의망(擬望)한다면 그것이 출척(黜陟)하는 방도에 있어서 또한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뽑는 것은 규모(規模)가 매우 좁아서 다만 과목(科目)으로써 먼저를 삼고, 음직(蔭職)에 이르러서도 또한 반드시 조그마한 성과가 있는 사람을 뽑게 되므로 온 나라 인재(人才)를 과장(科場)의 가운데로 모두 몰아넣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옛날 성왕(聖王)이 인재를 진작(振作)·흥기(興起)시키는 방도이겠습니까? 과목(科目)으로 사람을 뽑은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비록 갑자기 변경시키기는 어려우나 초야(草野)에 유일(遺逸)된 사람을 찾아 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선업(先業)을 이어받으신 처음에 인재를 널리 뽑아서 먼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을 용동(聳動)시키는 일이 없다면 또한 처음 정사하는데 사람을 진작시키는 방도가 아닙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대신(大臣)과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별천례(別薦例)에 의거하여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여 수용(收用)하는 근본으로 삼게 하소서.
전(前) 지평(持平) 윤혼(尹焜)은 경술(經術)과 행의(行誼)가 세상에서 추앙받던 바가 되었습니다. 위포(韋布)1301) 로 있을 때부터 이미 숙종(肅宗)이 온천(溫泉)에 거둥하실 때에 별천(別薦)에 올랐는데, 불행하게도 여저(旅邸)에서 객사(客死)하였습니다. 여태까지 규례에 의해 치부(致賻)한 일이 없으니, 만약 호조(戶曹)로 하여금 구조(救助)하되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내게 하신다면 또한 한 가지 성덕(聖德)의 일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는 일은 그대의 말이 옳으니, 따라서 시행하게 하고 별천(別薦)의 일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이에 의해 거행하며, 윤혼(尹焜)의 일은 진실로 불쌍하게 측은한 일이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돌보아 도와주고 시체를 고향에 옮겨 장사지내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상소하여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토적(討賊)의 의리를 논하여 말하기를,
"신(臣)이 봄 무렵에 소명(召命)에 나아가 한두 차례 등대(登對)할 때에 성상(聖上)의 하교가 일찍이 간흉(奸凶)이 앞장서는 참독(慘毒)한 일에서 몹시 한탄하신 적이 없지 않으시면서도 매양 일이 성궁(躬聖)에 관계된 곳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스스로 혐의스러운 뜻을 두시니, 이는 전하께서 흉당(凶黨)의 죄악(罪惡)과 정의(廷議)의 공공(共公)함을 모르시지는 않으면서도 다만 이 스스로 혐의하시는 한 가지 생각이 그 병근(病根)이 되는 것이며, ‘호생(好生)’ 이란 두 글자로 꾸며서 갈수록 더 융통성이 없어져 견고하여 해결할 수가 없으니, 신은 청컨대 그것을 분변하겠습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피혐(避嫌)하는 일은 현자(賢者)도 또한 하지 않는데 성인(聖人)은 스스로 지극히 공정한데 어찌 피혐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무릇 필사(匹士)의 현자(賢者)도 오히려 피혐을 부당하게 여기는데, 더구나 천승(千乘)의 지위에 있으면서 한 나라의 군주(君主)가 된 분이겠습니까? 한 번 피혐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의(私意)가 일어나 지극히 공정한 마음을 넓힐 수가 없으므로 장차 가시는 곳마다 막히고 구애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가 순(舜)임금이 사흉(四凶)을 주벌(誅伐)한 것을 논하여 말하기를, ‘사흉은 모두가 세가(世家) 대족(大族)인데, 순이 하루 아침에 시골[畎畝]에서 천거되어 자기의 위에 있게 되니 그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고 죄악(罪惡)이 환히 드러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주벌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순이 사흉에 대한 것은 바로 일이 자기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순이 어찌 일찍이 피혐(避嫌)할 바가 있어서 주극(誅極)의 법을 거행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 흉당(凶黨)이 성궁(聖躬)을 위태롭게 하고 선류(善類)를 해치고 죽일 것을 꾀한 죄가 환하게 나타난 것은 다만 사흉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은 데에 비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곡사(曲士)의 피혐하는 의논만을 따르시고 대순(大舜)의 지극히 공정한 도리는 잊으시니, 이는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감히 알 수가 없는 바입니다. 이삼(李森)의 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신이 본말(本末)을 알 수가 없으나, 다만 이미 국문한 죄수의 공초에서 나온 것을 끌어댄 증거가 자못 간절하고 단서가 장차 드러나게 되면, 이는 마땅히 몹시 심문(審問)과 규핵(糾覈)을 가하여 그 실정을 알아내는 데 힘써야 할 것인데, 갑자기 친림(親臨)하시어 앞질러 국청(鞫廳)을 파하시니, 이것은 무슨 거조(擧措)인지 모르겠습니다. 문왕(文王)은 ‘서옥(庶獄)1302) 과 서신(書愼)1303) 을 겸하여 보시는 일이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 옥리(獄吏)의 일을 행하시면서 혐의로 여기지 않으시니, 신은 가만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경(卿)이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몹시 기뻐하여 위로가 되었는데, 병으로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니 서운함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조용히 잘 조섭하면 약을 쓰지 않고도 병이 저절로 낫는 효과를 볼 수가 있으니, 어찌 휴직(休職) 치사(致仕)를 말하겠는가? 지난날 궐정(闕庭)에서 호소하던 일은 경(卿)이 등대(登對)할 때에 이미 유시(諭示)하였으니, 경도 또한 기억하여 알 것이다. 그리고 녹수(錄囚)의 일은 오늘에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9월 26일 경신
달이 태미성(太微星) 서원(西垣)으로 들어갔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주국(林柱國)을 정언(正言)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교리(副校理)로, 박사성(朴師聖)을 교리(校理)로, 유성추(柳星樞)를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이숙(李潚)을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도(忠淸道) 신창(新昌)의 유생(儒生) 이유백(李有白) 등이 상소하여 군포(軍布)·절수(折受)의 폐단을 진달(陳達)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9월 27일 신유
임금이 충청 감사(忠淸監司) 홍용조(洪龍祚)를 인견(引見)하였다. 홍용조가 말하기를,
"삼남(三南) 지방에서 참혹한 흉년을 만났으니, 구활(救活)하는 것이 더욱 급합니다. 주자(朱子)가 ‘사사로 진휼(賑恤)하는 사람을 포상(褒賞)하는 것으로써 선무(先務)를 삼아야 한다.’ 하였으므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도 또한 이것으로써 효종께 진달하였습니다. 지금 사사로 진휼하라는 영을 내려 그 인품(人品)을 보아서 참봉(參奉) 등의 관직(官職)이나 군문 장교(軍門將校)와 같은 데에 조용(調用)하게 되면 힘을 얻을 수 있겠지만, 국가(國家)에서 만약 신용을 잃게 되면 누가 즐기어 사재(私財)를 내어서 진구(賑救)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가(漢家)1304) 에서 관작(官爵)을 파는 것을 마음에 일찍이 개탄스럽게 여겨 왔는데, 또 듣건대, 수재(守宰)가 억지로 곡식을 바치게 하고 관작을 판다고 하니, 어찌 아주 불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홍용조(洪龍祚)가 말하기를,
"그 가운데 어찌 스스로 원하여 진휼을 돕는 자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반드시 잘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삼척(三陟) 사람 신희(申熙)가 상언(上言)하기를,
"삼척(三陟)·평창(平昌) 등지에서 지석(誌石)이 있다고 알려 왔으니, 이는 국가(國家) 선대(先代)의 능침(陵寢)인 듯 싶습니다. 청컨대 예관(禮官)을 보내어 봉심(奉審)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언유(鄭彦儒)가 간심(看審)한 후에 치계(馳啓)하기를,
"신(臣)이 평창 겸임(平昌兼任) 정선 군수(旌善郡守) 이덕소(李德邵)와 더불어 국릉(國陵)이 지석(誌石)을 지효길(池孝吉)에게 추구(推究)하고 힐문(詰問)하였는데, 지효길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읍인(邑人) 철백(哲白)과 이웃 사람 이용진(李龍進)과 더불어 군(郡) 서쪽 백자전(栢子田) 뒷 동리에서 뗄나무를 베다가 섬돌[階砌]쌓은 것이 완연(宛然)하게 푸른 돌이 나무 뿌리 밑에 노출(露出)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돌을 보니, 길이가 한 자[尺]쯤에 넓이가 3, 4촌(寸)이고, 두께가 1촌쯤 되는데, 네 모서리가 다 떨어져나가 부스러졌으며, 앞면에 네 글자가 있는데 제일 밑에 있는 글자는 이미 반은 떨어져 나간 글자로 크기가 거의 손바닥만 하였습니다. 철백(哲白) 등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옛부터 국릉(國陵)이 있다고 전하여 왔는데, 지금 이 돌에 새긴 것도 또한 심상(尋常)한 것은 아니다.」고 하면서 인하여 가지고 왔으나, 무식하여 글을 모르기 때문에 마침내 돌 위의 글자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이듬해에 본군(本郡)의 토반(土班)인 김득우(金得禹)·김득하(金得夏)가 그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능동(陵洞)에 묘지(墓地)를 정하려고 하여 그 전년(前年)에 얻은 석각(石刻)을 찾고 있으므로, 위협(威脅)에 겁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내어주었는데, 지금 김득우는 비록 죽었으나 김득하는 아직 살아 있으니, 김득하에게 물어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철백(哲白)과 이용진에게 함께 캐물어 보니, 지효길이 말한 것과 낱낱이 서로 부합되었습니다. 때문에 곧 지효길·철백 등이 공초한 것을 가지고 김득하에게 물어보았는데, 김득하가 말하기를, ‘능동(陵洞)에는 애초에 아비를 장사지낸 일이 없으니, 모두 이것은 지효길이 속여서 한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득우의 3세(世)의 연속(連屬)된 무덤이 능동 좌우(左右)에 빙 둘러 있으므로 다만 석각(石刻)이 하나라도 나올까 두려워하여 반드시 흔적을 없애려고 하였기 때문에 애당초 찾아간 것이니, 다만 그 아비만 입장(入葬)할 계획을 했을 뿐이 아닙니다. 그 정상(情狀)이 십분(十分) 음흉하고 간교(奸巧)하기 때문에 엄한 형벌로 캐물었으나 마침내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삼척(三陟)의 국릉(國陵) 지석(誌石)에 대해서는 원래 지적(指的)한 곳이 없으며, 신희(申熙)가 상언(上言)한 가운데 파내 보았다는 등의 말은 그가 이미 경솔하게 자복(自服)한 것으로 단지 허술[虛踈]한 말에 빙거(憑據)하여 단정(斷定)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니,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삼척(三陟)의 국릉(國陵)에 대한 말은 전하여 온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여러 번 찾아 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 신희 등도 또한 이미 명백하게 본 것이 없으며, 평창(平昌) 능동(能洞)의 지석(誌石)에 관한 말은 신희 등이 상언한 데서 시발(始發)이 되었고, 이른바 지석(誌石)을 찾아낸 일은 지효길(池孝吉)·이용진(李龍進)의 말한 것이 모두 명백하고, 또 이른바 김득우(金得禹)·김득하(金得夏) 등이 지효길을 유혹하고 협박하여 석각(石刻)을 빼앗아 갔다는 말은 김득우 등이 그 곳에 어버이를 장사지내고는 동리 이름을 고치어 불렀다는 일로써 참고하여 보면 지효길의 말은 속인 것이 아닌 듯합니다. 김득하와 응당 물어보아야 할 여러 사람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영옥(營獄)1305) 에 잡아다가 조사하여 아뢰게 하고 본조(本曹)의 낭청(郞廳)은 마땅히 올라오게 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을 우선 그대로 머물게 하여 그들을 참고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9월 28일 임술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겨울의 천둥은 근심이 내년(來年)에 있다는 것으로써 숙종(肅宗) 때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몸소 기곡제(祈穀祭)를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는 정성으로 기도(祈禱)를 하였기 때문에 효험이 있었으나, 나는 정성이 얕으니 어찌 감히 하늘에 감동되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민진원에게 이르기를,
"정석삼(鄭錫三)은 말한 것이 몹시 괴망(怪妄)하여 내가 옳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석삼이 일찍이 이광보(李匡輔)를 탄핵하다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을 당하기까지 하였는데, 창과 칼로 참독(慘毒)하게 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만약 개과 천선(改過遷善)할 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비록 착한 길로 향하려고 하더라도 그것이 되겠는가? 특별히 놓아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정석삼(鄭錫三)의 일은 신(臣)이 혐의되는 바가 있으므로 옳으니 그르니 하기는 어려우나, 그 소(疏)에 마음 쓴 것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귀양가 있은 지가 이미 반년(半年)이 되었으니, 참작하여 놓아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의천(李倚天)에게 요즘 자못 낙점(落點)을 아끼시는 것은 아마도 정직한 사람을 포용하시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윤혼(尹焜)에게 치부(致賻)1306) 하시는 은전(恩典)은 처음에 거론(擧論)되지 않았는데도, 한이조(韓頤朝)의 상소를 보시게 되자 특별히 휼전(恤典)을 베푸시니, 누군들 감탄(感歎)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계속하여 일을 말하는 것이 중도에 지나친 사람에게도 낙점(落點)을 아끼지 않으신다면 성덕(聖德)에 빛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옥당(玉堂)에서 이의천(李倚天)을 체차(遞差)하자고 청하였으나 내가 특별히 출사(出仕)하라고 한 것은 대개 정직함을 숭상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이의천이 두차례 상소한 것이 끝내 독후(篤厚)한 기풍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선 억제하게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낙점을 아끼는 것이겠는가? 윤혼(尹焜)에 대해서는 원래 낙점을 아낀 일이 없을 뿐이다."
하였다.
판윤(判尹) 이집(李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 겨울에 이의연(李義淵)의 상소가 나온 뒤로 신(臣)이 신축년1307) 에 청대(請對)했을 때에 선인문(宣仁門)1308) 으로 따라 들어간 일로써 상장(上章)하여 스스로 논열(論列)하였는데, 지금의 여론이 이 일을 죄상(罪狀)으로 삼는 까닭은 뜻이 심상(尋常)치 않으므로 추삭(追削)하자는 의논이 문득 한 가지의 죄안(罪案)으로 삼았으니, 같이 들어간 사람으로서 도리상 요행히 면하기가 어려우므로, 처벌을 기다리는 처지에서 감히 비교하여 변론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은총(恩寵)으로 발탁된 시점에서 만약 다시 슬그머니 스스로 잘못을 숨긴다면 이는 참으로 부끄러워하는 것도 없고 꺼리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승진시켜 발탁하는 것은 나의 뜻이 우연히 한 것이 아니니,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지나치게 끌어댈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9월 29일 계해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임주국(林柱國)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제 연중(筵中)에서 원찬 죄인(遠竄罪人) 정석삼(鄭錫三)을 석방하여 보내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신(臣)은 혼자서 의아(疑訝)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저 정석삼의 지난날 상소는 만들어낸 말이나 생각해 낸 것이 지극히 교묘하고 참혹하여서 혹은 상도(常道)에 어긋난다느니, 혹은 흔들어 빼앗는다느니 하다가 끝에 가서는 곧 만세(萬世)에 강상(綱常)이 된다는 등의 말로써 그 짐짓 딴 일을 빌어 성상(聖上)의 속마음을 떠보고 여러 신하를 기울이어 빠뜨릴 계획을 행하려고 하였으니, 그 간교한 심정과 사특한 태도는 진실로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그때에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청대(請對)하여 토죄(討罪)한 것은 대개 시비(是非)를 밝히고 제방(隄防)을 엄중히 하자는 방도에서 나온 것이고, 성상께서 곧 투비(投卑)1309) 를 허락하신 것은 또한 선왕(先王)의 성대한 덕을 나타내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날 죄인을 신문(訊問)하여 처분한 것은 그에게 있어 그래도 형벌을 아주 경하게 한 것이라고 할 만한데 얼마되지 않아서 이러한 전석(全釋)1310) 이 있게되니, 성상의 처분이 전도(顚倒)된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체모가 어긋나 손상되고 여러 사람이 심정이 놀라며 의혹하니, 그것이 참소를 미워하고 악인(惡人)을 제거하는 도리에 있어 결단코 가볍게 석방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정석삼을 놓아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난날 정석삼이 상소하여 말한 가운데서 조정의 신하를 의심하게 한 것은 비록 지극히 놀랍고 패리(悖理)한 것이지만, 지난날 탄핵을 만난 자로써 살펴본다면 참혹하고 악독한 종류에 만족하게 여기지 않은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 특별히 정석삼을 석방하는 것도 또한 군소(群少)들에겐 몹시 한탄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하였다.
9월 30일 갑자
별이 삼성(參星)의 아래로 지나갔다.
목시룡(睦時龍)을 배소(配所)로 도로 보냈다. 이에 앞서 목시룡을 침작하여 처리하였는데도 대간(臺諫)에서 형률(刑律)에 의거하여 처단하기를 계청(啓請)하여 달이 지나도록 강력히 간쟁(諫爭)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그 청을 윤허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대역 공모(大逆共謀)와 대역 지정(大逆知情)으로써 품계(稟啓)하니, 임금이 의금부에 다시 무고 공모율(誣告共謀律)로 상고하여 아뢸 것을 명하였다. 의금부에서 이미 상고하여 아뢰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금 세 가지 형률을 보건대, 모두가 일률(一律)이니, 당초 참작했던 뜻이 아니다. 그가 비록 흉악하다고는 하나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이 없었다면 어떻게 능히 하도록 권하였겠는가? 다시 엄형(嚴刑)을 가하여 배소(配所)로 도로 보내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목시룡(睦時龍)과 목호룡(睦虎龍)이 마음을 같이하여 비밀히 계획하고 함께 대역(大逆)을 꾀하다가 호적(虎賊)1311) 은 역률로써 복주(伏誅)되었으니, 호적에게 상변(上變)하라고 권고한 자도 곧 모역(謀逆)에 함께 참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미 목호룡에게 상변(上變)을 권유하였다고 자백하였으니, 같이 역모한 실정이 여지 없이 다 드러난 것인데 지금 법을 굽혀 용서하여 곧 무고(誣告)한 자와 비교하여 동일하게 생각하십니까? 비록 무고한 것으로써 논죄한다 하더라도 모역(謀逆)한 무고를 어찌 살펴 주는 형률(刑律)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목시룡을 배소(配所)로 보내라는 명을 빨리 중지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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