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을축
임금이 경소전(敬昭殿) 【경종(景宗)의 혼전(魂殿).】 에 삭제(朔祭)를 친히 거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고향에 돌아갈 것을 고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주상의 무함된 것이 신설(伸雪)되지 못하고 나라의 역적이 토죄(討罪)되지 못하였으므로, 신(臣)이 등대(登對)하던 날에 먼저 이것으로써 제일의 급무(急務)로 삼았는데, 전하께서는 신의 말을 그르게 여기지 않으시고 말이 엄격하고 의리가 바르다고 분부까지 하시기에, 신은 명확하신 뜻을 공경하여 마음에 간직하고 돌아와 동조(同朝)에 자랑하면서 왕법(王法)이 행하여지기를 날을 받아놓고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만, 시일(時日)을 끌수록 천청(天聽)1312) 은 더욱 막연하고 도리에 어두운 말들은 그치지 않으니, 다만 임금에게 자주 간(諫)하면 욕을 당한다는 허물만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장소(章疏)를 올리고 빨리 돌아가서 물러나 시골에 묻혀 있을 계획만을 합니다. 맹자(孟子)의 이른바 ‘왕(王)께서는 고치기를 바란다.’는 것이 곧 신의 큰 소원(所願)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종전의 변통성이 없는 편견(偏見)을 씻어 버리시고 마음을 차분히 하여 성현(聖賢)의 글을 공부하셔서 본원(本源)이 청명(淸明)하고 의리(義理)가 밝게 나타나게 하신다면, 하늘을 받들어 토죄(討罪)를 행하시는 것은 저절로 그만둘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변변치 못한 생각으로 기원하는 것도 다만 이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려 승지(承旨)를 보내 같이 오게 하였다.
10월 2일 병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조관빈(趙觀彬)이 춘천(春川)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또 말하기를,
"선대왕(先大王)의 크고 융성한 공렬(功烈)을 모사(慕寫)할 여지(餘地)가 있으니, 비록 신이 문재(文才)도 없고 식견(識見)도 없지마는, 또한 어찌 감히 머뭇거리면서 찬술(纂述)하는 역사에서 물러나 회피하겠습니까? 그리고 운명이 이미 불행하고 행적이 또 기구(崎嶇)하여 한번 물러간 뒤로는 다시 움직일 길이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전(日前)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유시(諭示)하였는데도 경(卿)이 이와 같이 스스로 단념(斷念)하니, 자못 지나치다."
하였다.
10월 3일 정묘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독(講讀)이 끝나자,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강원도(江原道)에 표류(漂流)된 왜인(倭人)을 지금 막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감사(監司)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해도(海道)로 해서 보내게 되면 우리 나라의 해변(海邊) 방어(防禦)나 길의 이정(里程)과 험하고 평탄한 것을 왜인이 반드시 알기 때문에 충주(忠州)로 해서 미리 길을 정하여 동래(東萊)로 보내려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뜻은 비록 주밀(周密)하고 신중(愼重)하지마는, 왜인이 이미 해도(海道)를 모를 이치가 없고 또 반드시 배[船]와 서로 떨어져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므로, 묘당(廟堂)의 여러 의논이 서로 다투어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침구(侵寇)하려고 하면 어찌 해도(海道)를 모를 이치가 있겠는가? 또 사람과 배를 각각 보내면 폐단이 있으니, 삼척(三陟)으로 해서 곧바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평안도(平安道) 유생(儒生) 김초직(金楚直) 등이 상소하여 제적(諸賊)을 토죄(討罪)하자고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박필정(朴弼正)을 장령(掌令)으로, 조문명(趙文命)을 교리(校理)로, 권적(權𥛚)을 수찬(修撰)으로, 정광제(鄭匡濟)를 정언(正言)으로, 이현록(李顯祿)을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10월 4일 무진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독(講讀)이 끝나자, 지사(知事) 김흥경(金興慶)이 아뢰어 말하기를,
"전민(田民)1313) 의 형옥(刑獄)은 각각 관장(管掌)하는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경조(京兆)1314) 에서는 전택(田宅)을 관장하고, 장례원(掌隷院)에서는 노비(奴婢)를 관장하며, 형조(刑曹)에서는 형옥(刑獄)과 법률(法律)을 관장하고 있는데, 근래에는 한 가지 소송(訴訟)을 여러 관사(官司)에 몰려와서 호소하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전민의 소송은 각각 관장하는 곳에 귀속(歸屬)시키고 다시 다른 관사로 옮기지 못하도록 영원히 법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생(儒生) 윤상량(尹尙亮)이란 자가 있어 응지(應旨)해 상소하여 일을 말한다고 핑계를 대고, 또 임금을 뵙고 그가 할 말을 다 진달(陳達)하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불러서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윤상량이 말하기를,
"한번 분당(分黨)된 뒤로부터 악역(惡逆)의 명목(名目)이 있는데, 전하께서 매사(每事)에 신의(信義)를 세워 행하셔서 악역(惡逆)의 큰 악인(惡人)도 사유(赦宥)하기 이전의 일과 같이 처리하여 일체 모두 탕기(蕩棄)하되, 엄격히 약속을 정하여 만약 별도의 당론(黨論)을 하는 자가 있으면 종신(終身)토록 금고(禁錮)1315) 시킨다면 저절로 당습(黨習)의 폐단은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참찬관(參贊官) 신방(申昉)이 말하기를,
"악역(惡逆)을 탕기(蕩棄)시키자는 말은 협잡(挾雜)으로 상대(相對)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뜻이 있었으니, 이러한 곳에는 원컨대 더 자세히 살피셔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고 원소(原疏)를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었다.
사신은 말한다. "윤상량(尹尙亮)은 곧 고(故) 판서(判書) 윤강(尹絳)의 서증손(庶曾孫)이다. 응지(應旨)하여 진소(陳疏)한다고 핑계대고는 역신(逆臣)을 사유(赦宥)하자는 말까지 하였으니, 그의 무엄(無嚴)함이 극도에 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56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歷史)
[註 1315] 금고(禁錮) : 죄를 지은 사람이나 그 자손이 벼슬길에 나오는 것을 금지함.
사신은 말한다. "윤상량(尹尙亮)은 곧 고(故) 판서(判書) 윤강(尹絳)의 서증손(庶曾孫)이다. 응지(應旨)하여 진소(陳疏)한다고 핑계대고는 역신(逆臣)을 사유(赦宥)하자는 말까지 하였으니, 그의 무엄(無嚴)함이 극도에 달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어 말하기를,
"목시룡(睦時龍)이 호적(虎賊)1316) 을 권유하여 상변(上變)한 것이 이미 그의 공초(供招)에서 나왔으니, 그 죄상(罪狀)을 구명(究明)한다면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벼울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미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를 윤허했다가 곧바로 성명(成命)을 정지시키시니, 난적(亂賊)을 어떻게 징계하여 두렵게 하겠습니까? 청컨대 목시룡을 형추(刑推)하여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형률(刑律)에 의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어 말하기를,
"무과(武科) 일소(一所)에서 출방(出榜)할 때에 몰기(沒技)1317) 한 거자(擧子)가 무단히 방목(榜目)에서 빠지고 또 누락(漏落)되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도 많이 있습니다. 청컨대 시관(試官)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해당 우두머리 차비관(差備官)을 수금(囚禁)하여 과죄(科罪)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그저께 밤에 무과(武科) 일소(一所)에서 낙방(落榜)한 응시자(應試者)가 억울함을 칭탁하고 궐문(闕門) 밖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일이 몹시 놀랍고 해괴합니다. 청컨대 그 관사(官司)로 하여금 수창(首唱)한 자를 적발(摘發)하여 조사해 심문해서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신축년1318) ·임인년1319) 에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1320) 하여 아뢸 때 먼저 발론(發論)한 사람과 잇따라 아뢰기로 한 사람을 찬출(竄黜)하라는 전지(傳旨)를 처음 받고, 이에 전(前) 장령(掌令) 윤대영(尹大英)·김중희(金重熙), 전 사간(司諫) 양정호(梁廷虎), 전 수찬(修撰) 이진순(李眞淳), 전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 등을 모두 먼 곳에 귀양보냈으며, 【윤대영(尹大英)은 성안(成安)으로, 김중희(金重熙)는 구례(求禮)로, 양정호(梁廷虎)는 남원(南原)으로, 이진순(李眞淳)은 숙천(肅川)으로, 구명규(具命圭)는 정주(定州)로 보냈다.】 전 수찬 윤유(尹游)·이승원(李承源), 전 장령 이광도(李廣道)·이경열(李景說), 전 지평 김상규(金尙奎)·성덕윤(成德潤)·정석오(鄭錫五), 전 정언 유언통(兪彦通)·조진희(趙鎭禧) 등은 모두 관직(官職)을 삭탈(削奪)하여 성외(城外)로 출송(黜送)시켰다. 이에 앞서 이미 이런 명령이 있었으나, 사간원(司諫院)에서 먼저 발론(發論)한 자를 엄하게 구문(究問)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그 나머지는 먼 곳에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전지(傳旨)를 받들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계(停啓)1321) 하였으므로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10월 5일 기사
별이 오제좌(五帝座)로 흘러갔다.
전주(全州)·순창(淳昌) 등 읍(邑)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영사(領事)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심법(心法)을 서로 전하여 정밀(精密)하고 전일(專一)하게 학문을 좋아하는 분은 인종 대왕(仁宗大王)만한 이가 없었으니, 동궁(東宮)으로 있으면서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질문(質問)하여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장소(章疏)에서 군덕(君德)에 거울삼아 경계가 될 만한 것은 벽상(壁上)에 붙여 놓고 조석(朝夕)으로 경계 삼아 살펴보았으니, 이것이 인종(仁宗)께서 학문을 좋아하신 실덕(實德)입니다.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심경(心經)》을 매우 좋아하셔서 일찍이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으므로, 국상(國喪)이 난 뒤에 현종(顯宗)께서는 1건(件)의 책을 재궁(梓宮)1322) 에 넣었으니, 선왕(先王)을 본받으려고 한다면, 조종(祖宗)을 본받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강독(講讀)이 끝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정언(正言) 한이조(韓頤朝)가 상소하여 별도의 추천으로 사람 쓸 것을 청하였는데, 신(臣)의 생각에는 이제 따로 별도의 추천을 할 필요는 없으며, 다만 어사(御史)나 감사(監司)가 별도로 추천하였거나 전후(前後) 연중(筵中)에서 진달(陳達)한 사람을 뽑아내어 등용(登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한원진(韓元震)은 본래 학행(學行)으로 칭찬을 받고 또 사물(事物)을 처리하는 국량(局量)이 있기 때문에 조문명(趙文命)이 일찍이 어사(御史)로서 특별히 천거하여 그 뒤에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마침내 명령에 응하지 않았으며, 안수상(安壽相)은 고(故) 참의(參議) 안방준(安邦俊)의 후손으로서 또한 학문(學問)이나 사물을 처리하는 국량이 있는데도 지금 재랑(齋郞)이 되어 장차 버리고 돌아가려고 한다 하니, 이런 사람을 선발하여 임용(任用)하되 자목(字牧)1323) 의 직임(職任)에 시험한다면 반드시 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천거되어 쓰이는 사람이 반드시 이름과 사실이 서로 부합되지 않았는데, 이제 경(卿)의 말을 들으니, 이 두 사람은 실제로 쓰기에 적합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6품(品)에 승진시킨 뒤에 곧 수령의 직임에 보충하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下敎)하기를,
"무릇 액정서(掖庭署)의 하례(下隷)로 야금(夜禁)을 범한 자를 먼저 계문(啓聞)하고 뒤에 죄를 다스리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곧 노마(路馬)1324) 를 공경하는 뜻이다. 지금 액정서의 하례가 이미 야금을 범하고 또 포졸(捕卒)을 구타하였으니, 일이 몹시 놀랄 만한데도 입계(入啓)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곤장(棍杖)을 치고 또 족장(足杖)을 시행하였으니, 대장(大將)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부장(部將)은 병조(兵曹)로 하여금 곤장을 쳐서 도태(淘汰)시키라."
하였다.
사은사 겸주청정사(謝恩使兼奏請正使) 여성군(礪城君) 집(楫)·부사(副使) 권업(權𢢜)·서장관(書狀官) 조문명(趙文命)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신(臣)이 북경(北京)에 들어가 만수산(萬壽山)을 바라보았는데, 그 산은 통주(通州)의 강(江)을 파서 그 흙을 가져다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숭정(崇禎)1325) 갑신년1326) 에 도성(都城)이 함락(陷落)되던 날에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산 위의 매산각(煤山閣)에서 참혹하게 목숨을 버렸는데, 그날 황제가 공주(公主)와 여러 비(妃)·빈(嬪)에게 칼을 가지고 손수 찌르게 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내 집에 살게 되었는가?’ 하며, 이내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망친 임금이 아니다.’라 하면서 말이 몹시 분개하고 한탄스러웠다 합니다. 대개 만력(萬曆)1327) 때로부터 조정(朝廷)에서 대동(大東)·소동(小東) 등의 색목(塞目)이 있어 질투와 모함(謀陷)으로 서로가 진퇴(進退)하다가 숭정(崇禎) 때에 이르러 더욱더 고질이 되어 무기[戈戟]를 서로 사용하여 편하게 쉴 기약이 없었으며, 나라의 계획이나 백성의 걱정은 내버려두고 서로 잊었는데,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유적(流賊)이 황성(皇城)에 바싹 가까이 오게 되자 황제가 급히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전쟁과 수비(守備)의 계책을 물으니, 한 각신(閣臣)이 ‘지금의 묘책(妙策)은 과도(科道)1328) 를 고선(考選)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으니, 대개 그때 당론(黨論)을 주장하는 자가 과도(科道)가 아니면 힘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일(數日)이 못되어 황성이 함락되었으니, 당론이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사실 오늘의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서로 경계(警戒)할 일이다."
하였다.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신이 출강(出疆)1329) 하기 전에 잇따라 삼가 비지(批旨)를 보았는데, 당론(黨論)의 폐단을 잊지 못하시고 분개하여 바로잡아 개혁시킬 뜻을 두셨으니, 원컨대 더욱더 힘쓰시고 더욱더 경계하여 살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정언(正言) 정광제(鄭匡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은 성의(誠意)와 진심(眞心)이 보통보다 훨씬 뛰어 나므로 한 번 정승이 된 뒤로는 성명(聖明)께서 의지하고 믿는 바와 여러 신하들의 기대하며 희망하는 바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일찍이 얼마 안되어 갑자기 도성(都城)을 떠나게 되니, 이것이 비록 말한 것이 채용되지 않으므로 오래 머물러도 소용이 없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이렇게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백성의 일이 몹시 어려운 때를 당하여 이런 현보(賢輔)를 잃게 되니, 어찌 작은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성의를 미루어 예(禮)를 다하셔서 대신(大臣)을 소환(召還)하시고 흉금(胸襟)을 비우고 마음을 바꾸어서 쾌히 여러 사람의 심정에 부응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우상(右相)이 빨리 돌아가려는 것은 나의 성의가 얕은 연유이니, 어찌 성의를 다하여 돈면(敦勉)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오늘 국정(國政)에서 떠나는 것은 일시적으로 발끈 화를 내는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 종국(宗國)을 돌보는 정상이야 또한 어찌 감히 잠시라도 잊어버리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난신(亂臣)·적자(賊子)는 사람마다 주벌(誅伐)할 수가 있는데, 명색이 재상(宰相)이 된 자가 먼저 목욕(沐浴)을 하고 토역(討逆)을 청하는 일로써1330) 급무(急務)로 삼아 간쟁(諫爭)한 지 반년(半年)이 되었는데도 청을 얻지 못하였으니, 장차 천청(天廳)을 돌리기 어려운 것에 핑계를 대고 영광된 은총을 탐하여 입을 다물고 참으면서 세월이나 끌고 변동(變動)할 줄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장차 자신이 물러나서 마음을 결백하게 가지면서 명의(名義)의 죄인(罪人)이 되는 것을 면해야 하겠습니까? 싫어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함이 있기 때문에 옛사람은 그 마음의 불안(不安)한 데 대해서는 비록 죽더라도 하지 않았으니,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나름대로는 일찍이 군자(君子)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어찌 차마 물러갈 것을 결심한 뒤에 엄명(嚴命)에 핍박되어 부끄러움을 지니고 아픔을 품으며 몰염치하게 다시 나와서 씻기 어려운 죄명을 첨가시키겠습니까?
전하께서 매양 조용히 개진(開陳)하라는 일로써 분부를 하셨는데, 신이 들어가서는 전석(前席)에서 진달(陳達)하고 나와서는 장소(章疏)로 아뢴 것이 무릇 몇 번이었습니까? 수없이 간절히 간(諫)한 말이 한갓 한바탕 공담(空談)이 되고 말았으니, 비록 해를 지내면서 힘써 간쟁하더라도 과연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또 선제(先帝)를 추모(追慕)하여 보답(報答)하란 뜻으로써 신에게 면려(勉勵)하여 요구하시니, 아! 신은 선조(先祖)의 구물(舊物)로서 화변(禍變)을 겪으면서 성명(性命)을 보전(保全)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면 그 조그마한 힘을 바쳐서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할 것이 《실록(實錄)》 한 가지 일이 아니고는 다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영원히 태평한 세상을 이별하여 이미 찬수(撰修)의 역사(役事)에 참여하여 들을 수 없으니, 자신을 어루만지며 스스로 슬퍼하여 갑자기 사는 것을 잊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영상(領相)이 고향에 있는데 경(卿)도 또한 서울을 떠나니, 백성의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 할 바를 알 수가 없다. 한편으로 나라의 일을 함께 구제하고 한편으로 조용히 개진(開陳)하면 무엇이 불가(不可)할 것이 있기에 망연(茫然)히 돌아가기를 결심한 것이 산림(山林)의 처사(處士)처럼 할 수가 있겠는가? 아! 조(趙)나라의 예양(豫讓)은 전국(戰國) 시대의 선비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는 국사(國士)로 대우하는 데에 감동되어 신명(身命)을 바쳐 절의(節義)를 다하였다. 하물며 경이 대대로 녹봉(祿俸)을 받는 신하임에랴?"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0월 6일 경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7일 신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를 인견(引見)하여 같이 청대(請對)하게 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매양 저들이 선류(善類)를 죽인 것을 반역이라 할 수 없다고 분부하셨는데, 숙종조(肅宗朝)에 오시수(吳始壽)의 일로써 말한다면 오시수의 ‘신하는 강하고 임금은 약하다.’는 말은 선류(善類)를 죽인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감히 현종(顯宗)을 지척(指斥)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숙종께서 또한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것으로써 분부하여 처분이 지극히 엄중하고 결단코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유봉휘(柳鳳輝)는 죄가 오시수보다 지나친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下問)하였다. 영돈녕(領敦寧) 어유귀(魚有龜)가 말하기를,
"오늘의 청하는 바는 다만 나라를 위하여 역신(逆臣)을 토죄(討罪)하자는 것이 아니고, 종사를 위하여 강상(綱常)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대왕께서 전하에게 부탁하신 까닭은 바로 영고(寧考)1331) 의 유의(遺意)에 따라 왕위(王位)를 주고받는 것을 광명(光明)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봉휘의 상소가 위험하게 핍박한 것이 이르지 않은 바가 없고, 변고(變故)가 겹쳐 발생하자 이에 감히 선대왕과 전하의 형제 사이를 이간(離間)하려고 하였으니, 신은 가만히 슬프게 여깁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심택현(沈宅賢)이 말하기를,
"옛날부터 악역(惡逆)들은 모두 군상(君上)을 범하였으니, 만약 자기를 범한 것이라고 해서 죽이지 않는다면 어찌 죽일 만한 역신(逆臣)이 있겠습니까?"
하고, 좌윤(佐尹) 홍석보(洪錫輔)가 말하기를,
"신은 곧 통곡하면서 한 번 아뢰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매양 조종(祖宗)을 본받는 것으로써 분부를 하시면서도 어찌하여 숙종(肅宗)은 본받지 않습니까?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 등의 죄상(罪狀)은 오시수(吳始壽)와 다를 것이 없는데, 전하께서 숙종이 처분하신 것을 본받지 않고 법을 굽혀 용서하여 보호를 가하시니, 이것이 신이 통곡하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하고,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유민(李裕民)이 말하기를,
"오늘 여러 신하들이 아뢰어 청한 것은 모두 종사(宗社)를 위하여 역신(逆臣)을 토죄(討罪)하자는 것이니, 다만 원하건대 왕법(王法)을 빨리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구(國舅)가 진달(陳達)한 바는 대신(大臣)이나 여러 신하들과 그 의도가 동일하다. 유봉휘의 상소는 저위(儲位)가 이미 정하여진 뒤에 나왔으니 진실로 잘못된 것이라 하겠으나, 나의 뜻은 이제 신축년1332) 에 진소(陳疏)할 때와 다를 것이 없다. 일이 선조(先朝)에 있었는데도 선조에서 윤허를 아끼셨으니, 나는 마땅히 우러러 본받을 뿐이다. 설령 유봉휘의 죄가 오시수보다 갑절이 될지라도 그 시기를 논한다면 어찌 다름이 없겠는가? 마음에 환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따르는 것은 성실(誠實)한 도리가 아니니, 결코 윤허(允許)하여 따를 수가 없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그 죄에 범한 것을 논한다면 선왕(先王)을 위협하여 핍박한 것이 전하에게 죄를 얻은 것보다 어찌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순제(舜帝)가 사흉(四凶)1333) 을 주벌(誅伐)한 것은 실제로 지극히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일이 자기에게 관계된 것이라고 해서 법으로 처치하지 않는다면 어찌 도리어 사심(私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어유귀(魚有龜)는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천리(天理)의 공정한 것으로써 간쟁(諫爭)하는데 전하께서는 용서하여 보호하시는 사심으로 보이시니, 신은 적이 의혹을 갖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대왕(先大王)께서 불행하게도 훈열(熏熱)이 위로 오르는 증후(症候)가 있어 번뇌(煩惱)가 특별히 심하여지자 더욱 응답(應答)하기를 싫어하셨는데, 흉당(凶黨)이 성후(聖候)가 이와 같은 것을 헤아려 보고는 모든 일에 다 협박(脅迫)을 하면서 처리했으므로 살육(殺戮)했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성덕(聖德)에 누를 끼친 것이 많으며, 유봉휘(柳鳳輝)의 죄에 대해서는 양궁(兩宮)을 이간(離間)하여 성궁(聖躬)을 위태롭게 핍박하였으니, 그가 대행조(大行朝)를 속인 것은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 외의 대간(臺諫)의 아룀에 대하여 깊이 살펴 받아들이시고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때 일률(一律)1334) 을 적용하지 않았으니, 나도 또한 마땅히 일률을 적용할 수가 없는데도 국구(國舅)가 처음에 연석(筵席)에 들어와서 대행조(大行朝)의 성덕(聖德)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어유귀(魚有龜)가 말하기를,
"그때 처음으로 잡아다 국문(鞫問)하라고 하신 것은 대개 법으로 처치하려고 한 것이나 그 뒤에 천극(栫棘)1335) 하지 않은 것은 요사(妖邪)한 환관(宦官)과 반역한 난신(亂臣)을 그대로 죄주지 않고 마침내는 등양(騰揚)1336) 하기까지 하였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처분하실 것은 오직 선왕(先王)의 성덕(聖德)을 우러러 본받고 여러 신하들의 말을 윤허(允許)하여 따르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고,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잡아다 국문할 것을 특별히 윤허한 것은 공법(公法)입니다. 그리고 선대왕(先大王)께서 혹시 신 등의 말을 들어 주셨다면, 반드시 신 등의 청을 따랐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그때의 빈청(賓廳)에서 아뢴 것을 어찌하여 정지시켰는가?"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그때엔 대신에게 영을 내린 것이요 정지시키려고 한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신사철(申思喆)은 말하기를,
"그때엔 인심(人心)이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鎭定)시키려고 해서 정지시킨 것입니다."
하고, 어유귀(魚有龜)는 말하기를,
"그때는 비록 이와 같았지마는, 오늘의 처분은 다만 공정한 것으로써 처단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삼사(三司)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 헌납(獻納) 이병태(李秉泰), 정언(正言) 임주국(林柱國)·정광제(鄭匡濟), 교리(校理) 윤심형(尹心衡), 수찬(修撰) 서종급(徐宗伋)이다.】 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봉휘(柳鳳輝)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대신(大臣)과 국구(國舅)와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상세히 진달(陳達)했는데도 그에게 죄를 가하지 않으면 여러 신하들의 심정을 위로할 수 없으므로, 유봉휘에게 천극(栫棘)의 형을 가하게 한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형률을 가할 것을 힘껏 청했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정해(金正海)의 사건에 대하여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노륙(孥戮)1337) 의 계달(啓達)이 만약 처음에 나왔다면 내가 어찌 따르지 않았겠는가? 그때에는 잡아다가 김정해로 하여금 김일경(金一鏡)을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게 할 것을 청하고는 곧바로 노륙(孥戮)하기를 청하여 미봉(彌縫)할 계획을 하려고 하였으니, 내가 실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니, 홍석보(洪錫輔)가 말하기를,
"당초에는 김정해(金正海)가 일찍이 지난번에 여러 사람이 그 아비로 하여금 하도록 하여 그 아비만을 죽게 한 것을 원망하여 신문(訊問)할 때에 일의 내용을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잡아다 국문(鞫問)하자는 계달(啓達)을 꺼내고 뒤따라 노륙(孥戮)하자는 계달을 꺼낸 것입니다."
하였다.
유수(柳綬)의 사건에 대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유수(柳綏)의 계사(啓辭)가운데 아래 조항의 일은 대간(臺諫)의 풍문(風聞)을 반드시 믿을 수 없으나, 이미 악역(惡逆)을 비호(庇護)한 것으로 여긴다면 윗조항의 일은 아뢴 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동래(東萊)로 귀양 보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서교(尹恕敎)의 일에 대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계달(啓達)은 속히 수쇄(收殺)하여 찬배(竄配)의 벌(罰)을 시행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 어찌 그로 하여금 버젓이 집안에 있게 하겠는가?"
하니, 임주국(林柱國)이 말하기를,
"엄중히 국문(鞫問)하여 실정을 캐내고 빨리 방형(邦刑)으로 바로잡는 것이 옳겠습니다. 어찌 찬배하는 것으로 그 죄를 징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정형익(鄭亨益)은 말하기를,
"남을 악역(惡逆)에 빠뜨렸으면 스스로 해당되는 형률이 있을 것이니, 형률을 상고하여 처단(處斷)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신문(訊問)하여 그 죄를 밝게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형률(刑律)을 상고할 일이 없는데도 잡아오기를 청하는 까닭으로 하문(下問)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이미 도배(島配)의 형률을 시행하였는데, 어찌 다시 신문(訊問)할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조진희(趙鎭禧)의 일에 대해서는 아뢴 대로 따른다 하였다. 【온성(穩城)으로 귀양 보냈다.】 이병태(李秉泰)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액정서(掖庭署) 하례(下隷)의 일로 부장(部將)을 곤장(棍杖) 쳐서 태거(汰去)한 것은 처분(處分)이 과중(過重)하여 성덕(聖德)을 더럽히고 국체(國體)를 손상시켰으니, 반드시 빨리 생각해 보시고 뒤쫓아 고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간신(諫臣)의 말이 이와 같으니, 태거(汰去)시키지 말라."
하였다.
심택현(沈宅賢)이 말하기를,
"서원(書院)을 첩설(疊設)하는 것은 조정의 금령(禁令)이 지극히 엄중하나, 황간(黃澗)의 냉천 서원(冷泉書院)은 곧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문인(門人)과 더불어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하던 곳입니다. 사실은 청주(淸州)의 화양 서원(華陽書院)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일례(一例)로 방색(防塞)하는 것은 부당(不當)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서원이 폐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엄중히 금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이미 바로 선정(先正)이 거처하던 곳이므로 영상(領相)이 대신(大臣)에게 편지로 알려왔다고 하니, 화양 서원의 규례의 의거하여 액호(額號)를 내린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서명구(徐命九)를 사간(司諫)으로, 이완(李浣)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10월 8일 임신
열성조(列聖祖)의 어필(御筆) 간본(刊本)이 이루어졌으므로, 구관 당상(句管堂上)인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 등에게 차등이 있게 상(賞)을 내렸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안치(安置)된 죄인 유봉휘(柳鳳輝)에게 가극(加棘)하란 명령이 있었는데, 삼사(三司)에서 바야흐로 정형(正刑)1338) 을 청하고 있으니 전지(傳旨)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당초의 안치(安置)도 또한 합계(合啓)가 한창 일어나던 날에 있었으니, 지금 이 전지는 마땅히 한결같이 받아들여야 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안치(安置)와는 차이가 있으니, 마땅히 수쇄(收殺)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10월 9일 계유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거행하였다.
홍석보(洪錫輔)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현록(李顯祿)을 사간(司諫)으로, 권변(權忭)을 좌윤(佐尹)으로, 신처수(申處洙)를 사서(司書)로 삼았다.
10월 10일 갑술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상소(上疏)하여 징토(懲討)의 의리를 남김없이 말하니, 임금이 특별히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날 5적(五賊)을 외딴섬에 천극(栫棘)시키고 유봉휘(柳鳳輝)는 안치(安置)시킬 때에 승정원(承政院)에서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 다시는 간쟁하며 주장하는 일이 없었는데, 유봉휘에게 가극(加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자 또 전일에 하는 일과 같이 수다한 말로 계품(啓稟)하려고 하여 금석(金石) 같은 옛 법전은 무너져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었으니,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는 곳에서 일마다 이와 같았습니다. 지난번 이삼(李森)의 가쇄(枷鎖)1339) 를 풀고 감옥으로 옳길 때에 비록 규례를 지켜 논쟁(論爭)하려 하였으나 전하께서 그것을 기꺼이 경청(傾聽)하셨습니까? 신이 생각하기에 그때에 대간(臺諫)이 말한 것은 구애하지 않고 강제로 봉지(捧旨)하게 하였던 것은 전하께서 스스로 창제(創制)한 것이 아니고 실상은 여러 신하들이 인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흥경(金興慶)은 특별한 다른 사고(事故)도 없이 재차 엄소(嚴召)를 어겼으니, 일을 만나 규피(規避)하는 습관에는 마땅히 경책(警責)을 가하여야 하며, 대제학(大提學) 이의현(李宜顯)은 당장 과장(科場)을 설시하기에 임하여 일을 이유로 하여 도성(都城)을 나갔으니, 사람들이 모두 고의(故意)로 피해 나간 것으로 말을 합니다. 신은 적이 개탄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저께 모두 하교(下敎)로 인하여 한 것이라 하고, 이번 품계(稟啓)도 이에 연유하였으니, 어찌 후사(喉司)1340) 의 책임이겠는가? 형조 판서의 일은 추고(推考)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병태(李秉泰)가 액례(掖隷)의 일로 우러러 아뢸 때에 신이 곡절을 몰라 감히 가부(可否)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설서(說書) 한현모(韓顯謨)의 말을 듣건대 지난번에 주상께서 하교하신 뒤로부터 액례(掖隷)가 떼를 지어 부장(部將)을 난타(亂打)했는데 그가 마침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국가에서 이미 처치(處置)하였다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난타하였겠습니까? 액례의 무리가 교만하게 함부로 날뛰는 폐단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몰랐던 일이다. 마땅히 각별히 신칙(申飭)하겠다."
하였다.
10월 12일 병자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녹수(錄囚)1341) 의 일은 예전에도 또한 행한 적이 있었는데, 신(臣)이 또한 어찌 전연 모르겠습니까? 한(漢)나라 명제(明帝)의 일로 말한다면 친히 옥에 갇힌 죄수를 기록하여 경미한 범죄는 석방하면서도 옥사(獄事)는 일찍이 미리 파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옳고 그른 것을 되풀이해 밝히고 경(輕)하고 중(重)한 것을 공평하게 조정(調停)하여 평반(平反)1342) 한 데로 귀착(歸着)되기를 힘쓸 뿐입니다. 또한 생각하건대, 우리 숙종(肅宗)께서도 진실로 일찍이 몸소 의금부(義禁府)에 나가셔서 옥사를 의논하여 사죄(死罪)를 늦추게 하되 그 중한 죄수에게는 혹시라도 가볍게 석방하는 일이 없었으니, 진실로 자애심이 많아 살생(殺生)하기를 꺼리는 덕이 비록 지극하나 죄인을 토주(討誅)하는 법은 또한 엄중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오늘과 같이 곧 성상(聖上)의 결단에 따라 성급히 국문(鞫問)하는 일을 정지시켜서 대신과 대간(臺諫)이 번갈아 간쟁(諫爭)했는데도 이를 듣지도 않고서 이런 바쁜 거조(擧措)를 하였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70세에 치사(致仕)하는 것은 《예기(禮記)》의 분명한 교훈입니다. 지금 신은 70세의 한계를 지난 것이 이미 8년입니다. 비록 사고(事故)가 많은 이유로 과오를 초래하였지마는 조정에 돌아온 뒤에 그대로 시일을 지체하여 지금까지 소청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차마 죽어가는 늙은 신하로 하여금 일부(一夫)의 수효를 채우게 하여 돌보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전라도 유생(儒生) 이만시(李萬蒔) 등이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 등 여러 적(賊)을 토죄(討罪)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권업(權𢢜)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취로(金取魯)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이병태(李秉泰)를 교리(校理)로, 서종섭(徐宗燮)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10월 13일 정축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삼사(三司)에 분부하신 성상(聖上)의 하교는 친절하실 뿐만이 아니었으니, 대각(臺閣)에 있는 자는 마땅히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勇氣)를 내어 한결같이 토죄 복수(討罪復讐)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야 할 것인데, 근래에 시소(試所)에 분담하여 감독하는 일로써 큰 의논[大論]이 오랫동안 정지되었습니다. 그 출방(出榜)하고 예궐(詣闕)하던 날에 미쳐서는 마땅히 곧 전계(傳啓)하여 조금이나마 목욕(沐浴)하고 토역하는 의리를 신장해야 할 것인데도 신은 참척(慘慽)을 만나 먼저 돌아오고 양사(兩司)의 관원은 날이 저물었다는 것으로 핑계대고서 잠자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팔장을 끼고 돌아갔으니, 이래서야 의리가 어느때에 펼쳐지겠습니까? 신은 어제 예궐(詣闕)한 대신(臺臣)에게 모두 규책(規責)을 가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저께 대사헌(大司憲)의 상소는 서로 경계하는 뜻에 불과하였고 여러 승지는 상소하여 변명하는 것이 부족하자 한 번 어기고 두 번 어기기까지 하면서 오히려 명을 받지 않았으니, 이렇게 옥후(玉候)가 미령(未寧)한 날을 당하여 분수와 의리의 엄중함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까?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흥경(金興慶)의 직사(職事)를 각근(恪勤)히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이 마음가짐을 공정히 하는 것은 세상에서 다 아는 바인데도, 혹은 외지에 있고 혹은 소명(召命)을 어겨 일이 마침 그렇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논하여 책망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으나, 일을 만나면 번번이 회피하고 일에 부딪치면 해가 된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신은 적이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대망(臺望)1343) 과 검의(檢擬)1344) 는 얼마나 중대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정관(政官)이 이미 의망하였다가 곧바로 깨달았으니, 실로 경솔한 실수입니다. 장령(掌令) 이완(李完)이 청도(淸塗)1345) 에 저지를 당한 것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이런 낭패(狼狽)를 당해 행공(行公)할 기약이 없으니, 이에 토역(討逆)이 한창 펼쳐지는 날을 당하여 헛되이 잡아둘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우선 그 직임을 갈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이에 앞서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유경(金有慶)이 이완을 대망(臺望)에 의망(擬望)하였다가 곧바로 상소하여 오래 저지되었던 사람을 갑자기 의망했다는 이유로써 그 죄를 자책(自責)했기 때문에 박필정(朴弼正)의 상소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정형익(鄭亨益)을 도승지(都承旨)로, 유척기(兪拓基)를 승지(承旨)로, 황귀하(黃龜河)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의천(李倚天)을 보덕(輔德)으로 삼고, 조문명(趙文命)을 특별히 발탁하여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15일 기묘
동부승지(同副承旨) 조문명(趙文命)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신(臣)이 일생(一生)을 지켜온 바는 오직 ‘파붕당(破朋黨)’ 이란 세 글자를 부신(符信)일 뿐입니다. 종전(從前)에 곤란과 재액(災厄)을 싫증이 나도록 받아왔습니다만, 그래도 변할 줄을 몰랐는데, 더구나 지금 국가의 흥망(興亡)의 기미가 오로지 여기에 달렸으니, 이것을 버린다면 신은 은총(恩寵)을 우러러 보답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익히 생각하여 보아도 곧 막아낼 수 없을 듯합니다. 가령 백척간두(百尺竿頭)1346) 에서 진보(進步)하려고 한다면 이는 흙을 가지고서 맹진(孟津)1347) 을 막는 것에 불과하므로 마침내는 또 이전과 같이 낭패만 당할 뿐이니, 이것이 신이 감히 용이(容易)하게 진신(進身)할 계획을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지켜온 의지(意志)를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다. 다만 자기의 의견만 지킬뿐이니, 어찌 이와 같이 지나친 사양만 하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조문명(趙文命)이 ‘파붕당(破朋黨)’ 세 글자를 부신(符信)으로 삼은 것은 외면(外面)에서 보아 지나친다면 어찌 좋은 제목(題目)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의 피차(彼此)가 다투는 것은 바로 충(忠)이냐 역(逆)이냐 하는 것으로, 비단 전일(前日)에 군자(君子)·소인(小人)이 서로 변론하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닌 즉, 어찌 그 시비(是非)를 암담(黯黮)한 곳에 두고서 끝까지 다스려 그 근본을 끊지 않고는 다만 두리 뭉실하게만 꾸려갈 수가 있겠는가? 훈유(薰蕕)1348) ·빙탄(氷炭)1349) 도 오히려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는데, 더구나 충신 의사(忠臣義士)가 기꺼이 저 일종(一種)의 흉역(凶逆)의 무리와 더불어 같이 한 조정에 있으면서 토죄 복수(討罪復讐)할 의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만약 붕당(朋黨)을 타파(打破)하려고 한다면 충신(忠臣)·역적(逆賊)이 나눠진 까닭을 명백히 조사하여 시비(是非)로 하여금 해와 별처럼 소명(昭明)하게 하여야 될 것이니, 그 나머지 갈라져 나간 당(黨)은 타파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타파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문명(趙文命)은 이렇게 하지 않고 두 사이에 끼어 갑자기 음지(陰地)에 숨었다가 갑자기 양지(陽地)에 나타나면서 군주(君主)에게 듣기 좋도록만 하고 있다. 대체로 붕당은 옛날부터 군주들이 매우 미워하는 바이다. 이 때문에 조문명의 말은 쉽게 사총(四聰)1350) 의 밝은 것을 현혹시켜서 장차 후일의 무궁한 화근을 만들게 할 것이니, 개탄을 견딜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58면
【분류】인사(人事) / 정론(政論) / 역사(歷史)
[註 1346] 백척간두(百尺竿頭) : 아주 위험한 형편을 이름.[註 1347] 맹진(孟津) :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맹현(孟縣) 남쪽에 있던 나루 이름.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칠 때 제후(諸侯)와 회맹(會盟)한 곳.[註 1348] 훈유(薰蕕) : 향기를 풍기는 풀과 악취를 내는 풀.[註 1349] 빙탄(氷炭) : 얼음과 숯불.[註 1350] 사총(四聰) : 임금이 막힘이 없이 사방의 것을 들음.
사신은 말한다. "조문명(趙文命)이 ‘파붕당(破朋黨)’ 세 글자를 부신(符信)으로 삼은 것은 외면(外面)에서 보아 지나친다면 어찌 좋은 제목(題目)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의 피차(彼此)가 다투는 것은 바로 충(忠)이냐 역(逆)이냐 하는 것으로, 비단 전일(前日)에 군자(君子)·소인(小人)이 서로 변론하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닌 즉, 어찌 그 시비(是非)를 암담(黯黮)한 곳에 두고서 끝까지 다스려 그 근본을 끊지 않고는 다만 두리 뭉실하게만 꾸려갈 수가 있겠는가? 훈유(薰蕕)1348) ·빙탄(氷炭)1349) 도 오히려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는데, 더구나 충신 의사(忠臣義士)가 기꺼이 저 일종(一種)의 흉역(凶逆)의 무리와 더불어 같이 한 조정에 있으면서 토죄 복수(討罪復讐)할 의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만약 붕당(朋黨)을 타파(打破)하려고 한다면 충신(忠臣)·역적(逆賊)이 나눠진 까닭을 명백히 조사하여 시비(是非)로 하여금 해와 별처럼 소명(昭明)하게 하여야 될 것이니, 그 나머지 갈라져 나간 당(黨)은 타파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타파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문명(趙文命)은 이렇게 하지 않고 두 사이에 끼어 갑자기 음지(陰地)에 숨었다가 갑자기 양지(陽地)에 나타나면서 군주(君主)에게 듣기 좋도록만 하고 있다. 대체로 붕당은 옛날부터 군주들이 매우 미워하는 바이다. 이 때문에 조문명의 말은 쉽게 사총(四聰)1350) 의 밝은 것을 현혹시켜서 장차 후일의 무궁한 화근을 만들게 할 것이니, 개탄을 견딜 수 있겠는가?"
권업(權𢢜)을 도승지(都承旨)로, 권변(權忭)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박규문(朴奎文)을 지평(持平)으로, 박사성(朴師聖)을 정언(正言)으로, 김취로(金取魯)를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김상석(金相奭)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교악(李喬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10월 16일 경진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임주국(林柱國)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어 말하기를,
"이번 괴원 분관(槐院分館)1351) 때에 다분히 유주(遺珠)1352) 의 개탄이 있었습니다. 박치문(朴致文)과 한봉조(韓鳳朝)의 문벌(門閥)과 재화(才華)1353) 는 진실로 동료(同僚)에게 추허(推許)를 받았는데도 무단히 누락(漏落)되었으므로 공의(公義)가 애석하게 여겼고, 또 신직(新直)이 회자(回刺)1354) 할 때에 한 사람의 회자를 공공연히 퇴각(退却)시켰다 하니, 이는 사실 전에 없었던 거조(擧措)입니다. 소문이 닿는 곳에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청컨대 박치문·한봉조는 괴원(槐院)의 규례에 의하여 일체 등용하고, 해당(該當) 회자를 퇴각시킨 관원은 파직(罷職)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이현록(李顯祿)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 오늘 난적(亂賊)을 반드시 토죄(討罪)하여야 한다는 이유는 비록 필부 필부(匹夫匹婦)일지라도 모두 능히 이를 알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또 공의(公義)를 강력히 거절(拒絶)하시고 번번이 말감(末減)1355) 을 따르시니. 이와 같이 처분(處分)하신다면 호생(好生)의 덕에는 해로움이 되지 않고 고식(姑息)적인 정사에는 무방(無妨)한 것이라 여기시지마는, 조종조(祖宗朝) 3백년 전수(傳授)의 업적이 급속(急速)하게 날로 위망(危亡)의 지경에 떨어지는 것을 전연 모르고 있습니다. 빨리 엄중한 토벌(討伐)을 거행하여 장차 떨어지려는 강상(綱常)을 다시 세우게 하소서. 그리고 연상(燕商)1356) 이 몰래 사화(私貨)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정(事情)을 누설시켰으나, 의주(義洲)에서는 그 수세(收稅)를 이득(利得)으로 삼아 고질적인 폐해를 금지시키지 않은 형상이 이미 청북(淸北)1357) 암행 어사(暗行御史)의 계달(啓達)에 상세히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신이 듣건대 이번에 재자관(齎咨官)과 역관(譯官)이 사사로이 상인(常人)을 데리고 가면서 은화(銀貨)가 매우 낭자(狼藉)하였다고 하니, 이것도 또한 의주(義州)에서 수색하여 검거하는 것이 엄격치 못한 소치입니다. 재자관(齎咨官)과 수역관(首譯官)을 마땅히 엄중히 조사하여 추문(推問)해 다스리고 단련 군관(團戀軍官)과 상고(商賈)1358) ·팔포(八包)1359) 등의 틀린 규례에 대해서는 엄하게 과조(科條)를 정하여 일체 막도록 하소서.
그리고 장수현(長水縣)의 석교창(石橋倉)은 곧 공세(貢稅)를 수봉(收捧)하여 배[船]로 운반할 때 포구(浦口)로 나가는 곳인데, 기로소(耆老所)의 차인(差人)이 경솔하게 제방을 쌓는 역사(役事)를 일으켜 7읍(邑)의 민정(民丁)을 조발(調發)하고 또 현창(縣倉)의 진휼청(賑恤廳) 쌀을 내어 주며 장차 창고 앞의 큰 포구(浦口)를 끊어 막으려고 하니, 지금 만약 포구를 막으면 현창(縣倉)은 장차 철폐 되어 다시는 설치할 곳이 없게 될 것이고 포구의 백성은 생업(生業)을 잃게 되어 온통 떠돌아 다니는 근심이 있게 될 것이니, 경사(京司)를 빙자(憑藉)하여 하민(下民)에게 침범 학대(虐待)한 죄를 이루 다 주책(誅責)하겠습니까? 신은 그 일을 맡은 자 두서너 사람을 마땅히 유사(攸司)로 하여금 중한 데로 따라 과죄(科罪)하고 아울러 그 역사를 파(罷)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요즘의 일이 내가 어찌 한갓 선입견(先入見)만을 지킨 것이겠는가? 재자관(齎咨官)의 일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추고하여 다스리고 상소 끝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사직(司直) 이재(李縡)가 상소하여 《실록(實錄)》 찬수(纂修)의 명을 힘껏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7일 신사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신(臣)이 어제 조문명(趙文命)의 상소를 보니, ‘파붕당(破朋黨)’ 이란 세 글자가 있는데, 그 말은 좋은 듯하지마는 다만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단지 붕당을 타파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먹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듣건대, 조문명은 글을 읽은 사람이라 하는데 말한 것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신은 가만히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전하께서 매양 여태까지 봉인(鋒刃)1360) 의 비참함을 하교(下敎)하셨는데, 대개 지난번 사람들은 붕당의 까닭으로 처음에는 현신(賢臣)을 살육(殺戮)하고 종말에는 주상의 몸까지 간범(干犯)하였으니, 이와 같은데도 단지 붕당을 타파하는 것으로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조문명의 상소를 보고서 웃었으니, 한때의 사람들도 또한 반드시 오활(迂闊)1361) 하다고 여길 것이다. 무릇 당론(黨論)이 불치(不治)의 병이 되었는데, 옳은 가운데도 잘못이 있고 잘못된 가운데도 옳음이 있으니 그 장점은 취하고 그 단점은 버려야 할 것이다. 어떻게 모두 착한 사람만 얻을 수 있겠는가? 여태까지 봉인(鋒刃)의 비참한 일을 대신(大臣)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인정(人情)으로 말한다면 어찌 분개(憤慨)한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만약 억제(抑制)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나친 일이 없겠는가? 주벌(誅伐)하여도 지나치지 않고 귀양을 보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니, 대각(臺閣)의 언론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진정시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태조(太祖)께서 왕씨(王氏)를 죄다 죽이는 것을 지나치게 여겼으니, 오늘의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은 조종조(祖宗朝)의 인후(仁厚)한 기풍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소신(小臣)도 또한 어찌 감히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이려고만 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유봉휘(柳鳳輝)와 5적(五賊)을 주살(誅殺)하려고 할 뿐이니, 이것이 어찌 당론(黨論)이겠습니까? 이것은 큰 의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도 전하께서는 곧 신 등을 당을 위하는 신하로 의심하시니, 장차 무슨 안면(顔面)으로 전하를 섬기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매양 ‘파붕당(破朋黨)’ 이란 세 글자를 좋아하시니, 소인(小人)이 만약 그로 인하여 이간하게 된다면 지난 날의 화(禍)가 어찌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심한다면 무슨 일이 이루어지겠는가? 탕평(蕩平)1362) 이 어찌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조문명(趙文命)의 상소를 오활하게 여긴다."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한 것도 마침내 시비(是非)가 뒤섞어진 일이 없지는 않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주심(誅心)1363) 하는 법으로써 말한다면 이광좌(李光佐)나 조태억(趙泰億)도 어찌 주책(誅責)할 만한 죄가 없겠습니까? 다만 형률(刑律)을 가하는데 이르러서는 소신(小臣)도 또한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이광좌(李光佐)를 알지 못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비록 수많은 소인(小人)들보다 뛰어나지는 못하지마는, 끝내 나라를 배반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였다.
홍현보(洪鉉輔)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교악(李喬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기진(李箕鎭)·박성로(朴聖輅)·이봉익(李鳳翼)을 승지(承旨)로, 이현록(李顯祿)을 부응교(副應敎)로, 정택하(鄭宅夏)를 사간(司諫)으로, 이언상(李彦祥)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8일 임오
강화부(江華府)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증광시(增廣試)의 전시(殿試)를 행하여 정언섭(鄭彦燮) 등 32명을 뽑았다.
10월 19일 계미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여 실록 총재관(實錄摠裁官)의 직임(職任)을 사양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으로 돈면(敦勉)하였다.
전라도 유생(儒生) 이만시(李萬蒔) 등이 다시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 등 여러 적(賊)의 죄를 토죄(討罪)하자고 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가만히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적(賊)과 더불어 한 하늘밑에서 같이 사는 것을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천리 밖에서 두려운 태도로 성의를 다하여 봉장(封章)하는 것은 징토(懲討)의 의리를 펴서 신인(神人)의 분노를 통쾌하게 할 것을 바라고 있었는데, 성상의 비답을 받자오니 곧 이러한 과격(過激)한 의논으로써 국사(國事)의 판탕(板蕩)1364) 됨을 돕는다느니 조정의 의논은 스스로 조정에서 하고 있다는 것으로 분부를 하셨습니다. 아! 신 등이 비록 몹시 어리석고 혼미(昏迷)하나 이미 배양(培養)의 성화(聖化)를 입었으므로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흉역(凶逆)이 누어서 쉬고 강상(綱常)은 썩어 없어져서 사람은 장차 금수(禽獸)가 되고 나라는 장차 전복(顚覆)되려는 날을 당하여 직위(職位)에 벗어난 것을 핑계삼아 잠자코 물러나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은 결정적인 일입니다. 전하께서 흉적을 용서하고 비호하시어 삼척(三尺)1365) 이 시행되지 못하므로 모든 관료(官僚)가 물러날 것만을 생각하여 국가(國家)가 장차 망하게 될 것이니, 판탕(板蕩)되도록 돕는 것이 전하에게 있다고 하겠습니까? 신 등에게 있다고 하겠습니까?
아! 조정의 의논은 궐정(闕庭)에서 호소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는데도 전하께서 윤허를 아끼시니, 이른바 조정의 의논이 무엇을 믿을 만한 것이 있기에 초야(草野)의 신민(臣民)이 또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공론(公論)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초야(草野)에 있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며, 상하(上下)에서 모두가 없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조정의 공론을 억제하고 초야의 공론까지 물리치시니, 누가 기꺼이 전하를 위하여 오래도록 괴롭게 간쟁할 것을 일삼겠습니까? 그리고 저 대신들이 어찌 영원히 떠나가지 않겠으며 대간의 의논이 어찌 해태(懈怠)해지지 않겠으며, 유식(有識)한 선비가 어찌 천정(天井)을 쳐다보고서 길이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근래에 붕당(朋黨)의 근심을 사륜(絲綸)의 내용에 여러 번 나타내셨는데 군주(君主)가 붕당을 미워하는 마음이야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오늘날 조정에서 우선 서로 공격하는 붕당이 없다면 전하께서는 곧 여러 신하의 징계와 토죄(討罪)를 붕당에서 나온 것이라 이르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그렇다면 신 등의 의혹은 매우 큽니다. 전하께서 건극(建極)1366) 의 지위에 계시니 다만 마땅히 그 사람이 충신(忠臣)인가 역적(逆賊)인가를 자세히 살필뿐이오 ‘붕당(朋黨)’ 이란 두 글자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오늘의 일로써 붕당이라고 하신다면 비록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뒤를 이어 일어나더라도 잠자코 무관심하게 본 다음에야 바야흐로 붕당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공자(孔子)가 목욕(沐浴)하고 토역(討逆)하기를 청한 것도 또한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되겠습니까?
아! 옛날에 무왕(武王)이 두 포로[俘]를 잡아 묻기를, ‘나라에 요변(妖變)이 있었느냐’하니, 한 포로가 말하기를, ‘대낮에 별이 나타나고 하늘에서 피가 내린 이러한 요변입니다.’고 하니, 한 포로는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요변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임금이 신하를 의심하고 신하가 임금을 의심하여 임금과 신하가 교접(交接)하지 않는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아! 나라가 생긴 이래로 오늘날 같은 국사(國事)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상하(上下)의 정지(情志)가 줄곧 의심하고 막힌다면 교접(交接)하지 않는 근심은 갈수록 더욱 심하여질 것이니,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런 막대한 근심이 있으리라 생각하였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과단성 있는 정치를 행하셔서 빨리 3흉(三凶)·5적(五賊)과 이삼(李森)의 죄를 전형(典刑)으로 밝게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근일의 일은 임금이 신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붕당(朋黨)’ 이란 두 글자를 내가 어찌 좋아서 말하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종묘(宗廟)를 수리하여 고칠 때에 종묘 안의 묵고 비어 있는 곳에서 흙을 가져와 역사(役事)에 편리하도록 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함춘원(涵春苑)에서 흙을 갖다 쓰라고 명하였다.
돈 주조(鑄造)하는 것을 파하고 진휼청(賑恤廳)에서 사놓은 동(銅)으로 군기(軍器)를 주조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진휼청에서 진휼하는 자금을 장만하기가 어려운 이유로써 돈을 주조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그것을 어렵게 여겼다. 여러 신하들이 굳이 청함으로 인하여 호조(戶曹)에서 장차 낭청(郞廳)을 파견(派遣)하여 동쪽 산골의 땔나무가 흔한 곳에서 주조하게 하니, 임금이 돈을 주조하는 것은 폐단이 많고 이익이 적다는 이유로써 특별이 하교(下敎)하여 그 주조할 것을 그만두도록 하고, 진휼청에서 사놓은 동철(銅鐵)은 모두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병기(兵器)를 주조하게 하였다.
10월 20일 갑신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유생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신하가 임금을 의심한다.’는 것으로 분부를 하셨는데, 신하가 임금을 의심하는 것은 이것이 어떤 죄명(罪名)이기에 이런 죄목(罪目)을 군부(君父)에게 얻고서도 그가 감히 편안히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조문명(趙文命)의 상소를 오활(迂闊)하다고 한 것은 그의 말을 오활하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그가 이때에 올린 것을 오활하다고 여긴 것이다. 오늘의 조정 신하들이 위의 사람이 신하를 붕당(朋黨)으로 의심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의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날 창과 칼로 날뛴 일들은 비참(悲慘)하다면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그를 주살(誅殺)한다 해도 이루 다 주살할 수 없고 귀양을 보낸다 해도 이루다 귀양을 보낼 수 없으니, 위에 있는 사람이 진정(鎭定)시키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대각(臺閣)의 의논(議論)은 지나치다고 여긴 것이 아닌데도 윤허를 아낀 것은 또한 사정(邪正)·시비(是非)를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조정의 신하들이 다 오래 있을 뜻이 없이 물러가려고만 하는 것은 어찌 윗사람을 의심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심한다면 어찌 국사(國事)를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민진원이 말하기를,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탕평(蕩平)을 행하는 것은 비록 좋기는 하나, 다만 붕당을 타파하는 것만 말하고 시비(是非)를 밝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효과가 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그 시비를 밝힌다면 거의 점차 탕평의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홍석보(洪錫輔)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조명신(趙命臣)을 장령(掌令)으로, 황재(黃梓)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전(前) 목사(牧使) 이집(李潗)에게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더하니, 과전(科前)에 자궁(資窮)했기 때문이다.
조덕린(趙德隣)을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削除)하였다. 조덕린은 전(前) 사간(司諫)으로 안동(安東)에 있으면서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즉위(即位)하신 처음에 많은 어려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혼란한 옥사(獄事)는 불어나 여러 사람이 연좌되어 체포되었는데, 전하께서 지극히 공정하고 명백하며 관대하고 인후하여 비록 여러 사람들의 말에 핍박되어 간혹 억지로 따르시는 것이 있기는 했으나, 효제(孝悌)의 도리는 신명(神明)에 통하고 호생(好生)의 덕은 민심(民心)에 흡족했으니, 이런 일을 옛날 선철왕(先哲王)에게서 찾아 보더라도 진실로 비교될 이가 적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시험하여 살펴보건대, 오늘날의 시비(是非)는 번갈아 어지러워져서 선조(先朝) 때에 망명(亡命)했던 자가 도리어 임용(任用)되고, 선왕(先王)을 위하여 숨김이 없이 말한 자는 오히려 벼슬에서 떨어져 쫓겨남을 당하였으며, 혹은 지나치게 총애(寵愛)하다가 도리어 업신여김을 받으며, 혹은 존엄(尊嚴)한 자세를 낮추어 경솔한 것만 보여서 나라는 폐허[丘墟]가 되어 웅덩이로 채워지고, 번신(藩臣)의 발탁은 등급(等級)이 무너져서 하민(下民)이 보고 본받는 것은 능멸하고 참람함이 순서가 없는 것으로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커져서 드디어 짐짓 일상적인 습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개 제왕(帝王)은 천지(天地)의 무사(無私)한 것을 본받고 일월(日月)의 대명(大明)한 것을 넓혀서 조림(照臨)하여 나간다면 치우쳐서 모두 혜택을 입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고 부족하여 불만(不滿)스러운 마음이 없게 될 것이니, 위로는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되어야 진실로 백성의 부모(父母)인 원후(元后)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사심(私心)이나 편념(偏念)을 가지거나 혹은 정의(情意)에 끌리는 바가 있어서 구차하게 행하게 된다면, 그 마음에서 일어나 그 정사를 해치게 되어, 편당(偏黨)되고 반측(反側)1367) 하게 되면 한가지 일도 그 정당함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심(私心)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순제(舜帝)와 우왕(禹王)은 천하(天下)를 보유(保有)하고도 자기는 그 지위를 즐기지 않았으니, 위대한 업적을 형언(形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어둡고 용렬한 군주에 이르러서는 능히 그 사심(私心)을 극복하지 못하여 그 아첨하는 신하가 친절을 바쳐 공명(功名)을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드디어 사인(私人)으로 삼아서 사은(私恩)을 베풀게 됩니다. 혹은 도리어 그 능멸하고 협박하는 것을 당하고도 제어하기 어려워져서 마침내는 어지러워 멸망하기에 이르게 되었으니,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숙종(肅宗)의 친자(親子)이고 선왕(先王)의 개제(介弟)1368) 로서 황옥(黃屋)1369) 에 마음을 두지 않고 구위(求位)하는 데도 뜻이 없었습니다. 선왕의 첫 해에는 곧 대호(大號)를 정하고 적임자(適任者)에게 부탁하며 돌보아서 사랑하기를 더욱 융성하게 하였는데, 그 창졸간에 승하(昇遐)하시던 날을 당하게 되자 우는 얼굴을 가리우고 등극(登極)하여 드디어 독자적으로 정사를 청단(聽斷)하면서 동작과 행위가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운 노고(勞苦)는 상(賞)을 주지 않고 사사로운 분노(忿怒)에는 개의(介意)하지 않아서 지극한 인애(仁愛)로 미루어 나가고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시었으니, 천하(天下)를 보유(保有)하고도 자신은 그 지위를 즐기지 않았으므로 결점을 지적하여 비난할 수가 없는 지경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당고(黨錮)의 습관이 날로 더욱 심하여 서로가 적대시하는 원수가 되어 무기[弋戟]로 서로 대립하게 되니, 전하의 정치가 이미 은혜를 널리 베풀어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근심하게 되었는 데도, 전하의 마음은 오히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데에 편하게 여기시니, 황천(皇天)도 감싸 주지 못하는 곳이 있고 일월(日月)도 비추어 주지 못하는 골짜기가 있게 되었으므로, 그것이 천지(天地)의 유감이 되는 것이 이보다 큼이 없습니다.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방상수(龐相壽)를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왕(王)이 된 것은 일부(一府)를 위하여 임금이 된 것이고, 지금에 천자(天子)가 된 것은 사해(四海)를 위해서 임금이 된 것이니, 치우치게 일부(一府)에만 은택(恩澤)을 줄 수 없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태종을 공평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오히려 사정(私情)을 면치 못하였다고 여깁니다. 그마음이 진실로 공평했다면 일부(一府)나 천하(天下)에 어찌 차별을 두겠습니까? 대개 당인(黨人)이 당을 세워 서로 공격(攻擊)하여 온 지가 그 시일이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번갈아 드나들며 교대하여 모이고 펼쳐대며 군주의 신임은 독차지했는 데도 권세는 나누어지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이에 군주의 권한을 도둑질하여 그 당을 불러 모으고 군주의 작위(爵位)를 팔아서 그 은혜를 팔았으니, 저 이익을 탐하여 행검(行檢)이 없는 무리들은 맞아들이는 은총과 벼슬길에 이익을 노려보고 있다가 갓의 먼지를 털고 달려 나오니, 이익에 부쫓고 권세에 아부하는 이 많은 무리들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다달이 왕성하여져서 국가를 배반하고 사당(私黨)을 위해 죽는다는 의논이 결성되고 직책을 지키며 공무(公務)를 집행하는 의리는 폐지되었습니다.
군주(君主)는 자기의 덕을 높여 밝히고 인극(人極)1370) 을 세워서 조금도 협잡(挾雜)하는 일이 없이 하여 자기가 총명(聰明)한 체하지 않고서 공평하게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쌍방의 의견을 아울러 보는 마음을 넓히며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표정을 짓지 말고서 정대(正大)하고 탕평(蕩平)한 방도를 확대해 나간다면, 저 붕당을 만든 사람은 스스로 그 권세가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감히 이익을 팔아서 당을 세우는 계략을 품지 못할 것이요, 남에게 아부(阿附)하는 자도 또한 그 권세가 저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감히 이익에 쏠려서 권세에 붙좇는 마음을 발생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필이면 시비(是非)가 얽힌 곳에서 부지런히 왕래하고 언색(言色)의 사이에서 괴이쩍어 놀라면서 그 형세를 조성(助成)시켜 마침내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그만 그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밤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아! 당고(黨錮)의 폐해는 내가 실로 이를 근심하였기 때문에 사륜(絲綸)의 내용에 여러 번 언급하였다. 그러나 어찌 옳고 그른 것을 분별없이 뒤섞고 검은 것과 흰것을 서로 섞어 놓을 생각이겠는가? 지금 조덕린(趙德隣)의 상소를 살펴보건대, 수미(首尾)에 진계(陳戒)한 정성이 몹시 간절하고 지극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답(批答)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다시 상세히 보건대, 그가 한 말이 지극히 교밀(巧密)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내 뜻에 순종하거든 반드시 정도(正道)에 어긋난 점을 찾아보라.’고 한 것이다. 아! 신축년1371) 의 일은 그날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 사의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며, 지금 내가 처분한 것도 또한 다른 뜻을 둔 것이겠는가? 조정의 신하에 있어서는 나라를 위한 것이고, 나에게 있어서는 선왕(先王)의 뜻을 본받은 것이다.
그런데 ‘황옥(黃屋)에 마음을 두지 않고 구위(求位)하는 데도 뜻이 없었다.’는 등 말은 이미 몹시 차례가 없는 말이며, ‘창졸간에 왕이 승하(昇遐)하던 날에 미처 우는 얼굴을 가리우고 등극(登極)하였다.’는 말이나, ‘군주의 신임은 독차지했는데도 권세는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등의 말은 또한 해괴하고 패리(悖理)한 말이다. 그리고 지난날에 국문(鞫問)한 일은 특별한 하교로 인하여 설시한 것으로 한편으로는 역호(逆虎)1372) 의 사건이고 한편으로는 요검(妖儉)1373) 의 사건이니, 그 근본을 구명(究明)한다면 역신(逆臣)들이다. 비록 그러하나 나는 지난날의 참혹한 해독(害毒)을 징계(懲戒)하여 한(漢)나라 명제(明帝)의 방황(彷徨)하던 일을1374) 본받아 가뭄으로 인하여 녹수(錄囚)한 것이니, 대개 옥사(獄事)의 함부로 결정한 것이 많음을 염려한 것에 연유한 것인데, 지금 조덕린(趙德隣)은 곧 감히 말하기를, ‘혼란한 옥사(獄事)’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에 신자(臣子)가 마음 먹을 바이겠는가?
조덕린이 함부로 군주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떤 일로 인하여 제뜻대로 하면서 동인(東人)도 아니고 서인(西人)도 아닌 척하며 의란(疑亂)스러운 계획을 행하여 보려고 하였으니, 진실로 통탄하고 해괴한 일이다. 아! 선조(先朝)의 처분은 지극히 밝고 지극히 훌륭하여 밝기가 해나 별과 같아서 천지(天地)가 끝나도록 의혹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상황에 따라 기회를 타서 현혹시키려고 하는데, 자기와 의사가 다른 자가 스스로 변론하는 것이 당습(黨習)에 오염(汚染)되었으니, 내가 본래 심각하게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으나, 이것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 뜻이 매우 교묘하니 만약 몹시 징계하지 않으면 앞으로 진신(搢紳)을 경알(傾軋)1375) 시키고 조정(朝廷)을 괴란(壞亂)시키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됨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투비(投畀)1376) 의 형벌(刑罰)을 시행하여야 할 것이지마는, 이미 진언(進言)한다고 하기 때문에 십분(十分) 말감(末減)하여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형률로써 시행한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조덕린(趙德隣)은 곧 기사년1377) 의 여얼(餘孼)인데도 명의(名義)에는 죄(罪)를 얻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앞뒤로 논사(論思)·언책(言責)의 직임에 처한 것이 여러 번일 뿐만이 아니었다. 이때에 아첨하는 사람은 물리쳐 내치고 착한 사람들이 몰려 나왔으나, 크게 시비(是非)를 가려야 될 곳에 이르러서는 삼사(三司)에서 오랫동안 간쟁하여도 마침내 한결같이 윤허를 아꼈으므로 대악인(大惡人)과 대간인(大奸人)이 누워서 쉬며 버젓이 있게 하고, 또 붕당을 타파하여 탕평(蕩平)해야 한다는 뜻을 누차 비지(批旨)에 나타내었으니, 조덕린(趙德隣)이 임금의 뜻을 엿보고서 이에 기회를 노려 감정을 풀면서 임금의 총명을 현란(眩亂)시키고 군자(君子)를 해치려고 하였는데, 그 말의 아주 패리(悖理)하고 음흉(陰凶)함이 ‘천하(天下)를 보유(保有)하고도 즐기지 않았다.’ 느니 ‘구위(求位)하는데 뜻이 없었다.’ 느니 하는 등의 말에까지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또 ‘혼미하고 용렬한 임금은 사인(私人)에게 사은(私恩)을 베풀다가 도리어 능멸과 협박을 받는다.’는 등 말로 은연중 이를 성상(聖上)에게 비교하면서 마치 지존(至尊)의 자리를 구할 수 있는 자리인데도 성상께서 구하는 데에 뜻이 없었는데 대신(大臣)에게 핍박을 당한 것처럼 하였으니, 아!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가 마음에 먹고서 입에서 낼 수가 있는 것이겠는가? 신축년1378) 에 대신(大臣)이 자전(慈殿)의 전교(傳敎)를 받들어 우리 전하를 명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은 것은 일편 단충(一片丹忠)이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이에 친절을 바쳐 공(功)을 요구한 것에 비하였으니, 말의 흉참(凶慘)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다행하게도 귀역(鬼蜮)1379) 의 정상(情狀)이 성감(聖鑑)에서 도피할 수 없이 되어 십행(十行)의 사륜(絲綸)1380) 이 명백하고 통쾌하여 역당(逆黨)으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하여 감히 다시 현혹(眩惑)시킬 계략을 싹트지 못하게 하였다. 주극(誅極)의 형률에 처치(處置)해야만 거의 그 죄를 징계할 수가 있을 것인데도 벌(罰)이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시키는 것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것이 한탄스러운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59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정론(政論) / 역사(歷史)
[註 1367] 반측(反側) : 두 가지 마음을 품고 바른 길을 좇지 아니함.[註 1368] 개제(介弟) : 남의 아우의 존칭.[註 1369] 황옥(黃屋) : 임금의 존칭.[註 1370] 인극(人極) : 중정 인의(中正仁義)의 도(道).[註 1371]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372] 역호(逆虎) : 목호룡(睦虎龍)을 지칭함.[註 1373] 요검(妖儉) : 박상검(朴尙儉)을 지칭함.[註 1374] 한(漢)나라명제(明帝)의 방황(彷徨)하던 일을 :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친히 낙양옥(洛陽獄)에 행차해서 죄수들의 기록을 들춰서 10여 명을 석방시키니, 이때 날씨가 가물었는데 크게 비가 내렸음. 이틈에 마황후(馬皇后)가 또 초옥(楚獄)이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명제에게 말하니, 명제가 측은히 느끼고 밤중에 일어나 홀로 방황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죄수들의 형벌이 많이 감해졌다는 고사(故事).[註 1375] 경알(傾軋) : 질투심으로 간책(奸策)을 희롱하여 남을 모함함.[註 1376] 투비(投畀) : 왕명으로 죄인을 정배(定配)함.[註 1377]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1378]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379] 귀역(鬼蜮) : 귀신과 물여우 곧 음흉한 사람.[註 1380] 사륜(絲綸) : 조칙(詔勅)의 글.
사신은 말한다. "조덕린(趙德隣)은 곧 기사년1377) 의 여얼(餘孼)인데도 명의(名義)에는 죄(罪)를 얻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앞뒤로 논사(論思)·언책(言責)의 직임에 처한 것이 여러 번일 뿐만이 아니었다. 이때에 아첨하는 사람은 물리쳐 내치고 착한 사람들이 몰려 나왔으나, 크게 시비(是非)를 가려야 될 곳에 이르러서는 삼사(三司)에서 오랫동안 간쟁하여도 마침내 한결같이 윤허를 아꼈으므로 대악인(大惡人)과 대간인(大奸人)이 누워서 쉬며 버젓이 있게 하고, 또 붕당을 타파하여 탕평(蕩平)해야 한다는 뜻을 누차 비지(批旨)에 나타내었으니, 조덕린(趙德隣)이 임금의 뜻을 엿보고서 이에 기회를 노려 감정을 풀면서 임금의 총명을 현란(眩亂)시키고 군자(君子)를 해치려고 하였는데, 그 말의 아주 패리(悖理)하고 음흉(陰凶)함이 ‘천하(天下)를 보유(保有)하고도 즐기지 않았다.’ 느니 ‘구위(求位)하는데 뜻이 없었다.’ 느니 하는 등의 말에까지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또 ‘혼미하고 용렬한 임금은 사인(私人)에게 사은(私恩)을 베풀다가 도리어 능멸과 협박을 받는다.’는 등 말로 은연중 이를 성상(聖上)에게 비교하면서 마치 지존(至尊)의 자리를 구할 수 있는 자리인데도 성상께서 구하는 데에 뜻이 없었는데 대신(大臣)에게 핍박을 당한 것처럼 하였으니, 아!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가 마음에 먹고서 입에서 낼 수가 있는 것이겠는가? 신축년1378) 에 대신(大臣)이 자전(慈殿)의 전교(傳敎)를 받들어 우리 전하를 명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은 것은 일편 단충(一片丹忠)이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이에 친절을 바쳐 공(功)을 요구한 것에 비하였으니, 말의 흉참(凶慘)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다행하게도 귀역(鬼蜮)1379) 의 정상(情狀)이 성감(聖鑑)에서 도피할 수 없이 되어 십행(十行)의 사륜(絲綸)1380) 이 명백하고 통쾌하여 역당(逆黨)으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하여 감히 다시 현혹(眩惑)시킬 계략을 싹트지 못하게 하였다. 주극(誅極)의 형률에 처치(處置)해야만 거의 그 죄를 징계할 수가 있을 것인데도 벌(罰)이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시키는 것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것이 한탄스러운 일이다."
전라도 유생(儒生) 김진태(金震泰) 등이 등소하여 고(故) 참찬(參贊) 신임(申銋)의 충절(忠節)과 명덕(名德)을 아뢰고 사당을 세워 액호(額號)를 내려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절의(節義)를 포상(褒賞)하였으니, 두세 칸의 원우(院宇)가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평안도 진사(進士) 김초직(金楚直) 등이 다시 상소하여 빨리 유봉휘(柳鳳輝)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10월 21일 을유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박규문(朴奎文)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덕린(趙德隣)의 상소가 겉으로는 진계(陳戒)를 핑계대면서 마음쓰는 것이 교밀(巧密)합니다. 그가 말한 ‘지나치게 총애(寵愛)하다가 도리어 업신여김을 받고 존엄한 자세를 낮추어 경솔한 것만 보였다.’는 등의 말은 그에게는 오히려 이 하찮은 일이나 사소한 일로 여겨질 뿐입니다. ‘황옥(黃屋)에 마음을 두지 않고 구위(求位)하는 데에 뜻이 없었다.’는 것이나, ‘창졸간에 선왕이 승하(昇遐)하던 날 우는 얼굴을 가리우고 등극(登極)하였다.’는 한 단락(段落)의 말에 이르러서는 아주 음흉(陰凶)한 짓이므로 신자(臣子)로는 감히 입에서 꺼낼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역적 목호룡(睦虎龍)이나 요망한 박상검(朴常儉)의 옥사(獄事)와 같은 것은 어떠한 흉역(凶逆)입니까? 그런데도, 곧 감히 말하기를, ‘난옥(亂獄)이 불어나 여러 사람들이 연좌되어 체포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형벌이 함부로 무고(無辜)한 자에게 미친 것처럼 여긴 것이니, 그가 만약 일분이라도 군부(君父)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상의 마음을 억탁(臆度)하여 은밀히 딴 일을 빌어 속마음을 떠보려고 한 형상은 천감(天鑑)1381) 에서 도피(逃避)할 수 없는데 형률이 삭판(削版)에 그쳤으니, 그 죄의 만분의 일도 징계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조덕린을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종성(鐘城)으로 귀양보냈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임주국(林柱國)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목시룡(睦時龍)이 호적(虎賊)1382) 에게 상변(上變)하도록 권유(勸諭)한 것이 이미 호적의 공초(供招)에서 상세히 나타났는데, 더구나 지금 그의 자백한 초사(招辭) 가운데서도 그가 지휘(指揮)한 실정이 명백(明白)할 뿐만이 아니니, 왕장(王章)으로 헤아려 보더라도 결단코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대간의 아뢰는 것이 달이 지나도록 서로 옥신각신 다투었던 것을 성상(聖上)께서 하교하시어 특별히 처단을 허락하신 것은, 대개 징계와 토죄(討罪)를 엄중히 행하여 왕법(王法)을 펴려고 한 까닭이었는데, 아예 며칠이 되지 않아서 도로 성명(成命)을 정지하시니, 어떻게 전하께서 처분하심의 전도(顚倒)된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까? 청컨대 목시룡에 대하여 형신(刑訊)하고 추국(推鞫)하여 배소(配所)로 보내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시고 그대로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형률(刑律)에 의거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강화부(江華府)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기호(畿湖)의 유생(儒生) 이양대(李養大) 등이 상소하여 정응린(鄭應麟) 부자(父子)를 포장(褒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응린은 임진년1383) 의 난리를 당하여 전(前) 현감(縣監)으로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倭賊)을 토벌(討伐)하다가 전패(戰敗)하여 죽었는데, 그 아들 정적(鄭迪)이 김유(金瑬)·심대부(沈大孚) 등과 더불어 의기(義氣)를 분발(奮發)하여 원수를 갚은 사실이 체부(體府)1384) 의 격문(檄文)에 있다고 하였다.
10월 22일 병술
신무일(愼無逸)을 승지(承旨)로, 채응복(蔡膺福)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10월 23일 정해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북평사(北評事)는 반드시 이랑(吏郞)을 뽑아 보냈는데, 지금 다만 이병태(李秉泰)·이유(李瑜) 두 사람만 있으나 모두 어머니의 병이 있다고 하니, 삼사(三司)의 의망(擬望)해야 할 듯하나, 일이 변통에 관계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례(舊例)에 있는 것인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가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릉(長陵)1385) 능 위에 불이 났다. 임금이 정전(正殿)을 피하여 감선(減膳)하고 조정(朝廷)과 시장(市場)의 일을 정지하게 하였는데, 변복(變服)과 철악(撤樂)의 절차가 없었던 것은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이다. 잇달아 좌의정 민진원에게 명하여 능(陵)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능관(陵官) 두 사람은 모두 과거(科擧)에 응시하고 다만 가관 능졸(假官陵卒)만 있었기 때문에 이런 변고가 발생한 것이니, 일이 몹시 해괴하고 한탄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능관(陵官)의 죄는 어떤 율(律)에 해당되는가?"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심택현(沈宅賢)이 말하기를,
"전일(前日)에 순릉(順陵)1386) 에 불이 났을 때는 능관만 추고(推考)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능관을 잡아다 추고(推考)한 것은 마침내 족히 능졸(陵卒)의 의도하는 바만 이루어 줄 만한 까닭에 잡아오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반드시 묘맥(苗脈)이 있는 일이니, 능졸을 나문(拿問)하고 능관(陵官)도 또한 나치(拿致)하여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또 아뢰기를,
"이번에는 내일 정과(庭科)도 또한 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먼 지방에서 온 거자(擧子)가 여러 날 유체(留滯)하고 있는 것이 민망스러우니,
정과(庭科)는 날짜를 택할 것 없이 28일로 설행(設行)하라."
하였다.
명년(明年) 정월에 해서(海西)와 관서(關西) 지방에 포제(酺祭)1387) 를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정유년1388) 에는 해서·관서 지방에 충재(蟲災)가 온 산야(山野)에 가득차 곡식 이삭을 절단시키는 일이 있었으므로 이로부터 해마다 그치지 않았다. 좌의정 민진원이 근신(近臣)을 보내어 포제를 설비(設備)하여 재앙을 빌어 없앨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24일 무자
달이 태미(太微) 동원(東垣) 좌집법성(左執法星)을 범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장릉(長陵)에 화재(火災)가 난 일로써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사람이 낸 불은 ‘화(火)’라 하고, 하늘에서 나게 한 불은 ‘재(災)’라고 하였으니, 이번의 이 불이 만약 사람에게서 나왔다면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인심(人心)의 흉패(凶悖)함이 이와 같이 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하늘에서 나게 하였다면 전하께서 하늘에 대한 정성으로 보더라도 하늘이 지중(至重)·지엄(至嚴)한 곳에다 경계(警戒)를 보임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겠습니까? 전하께서 조심하시고 반성(反省)하시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어진이를 진용(進用)시키고 불초(不肖)한 사람을 물리치는 것이 곧 재앙을 멈추게 하는 급무(急務)입니다. 바라건대, 신과 같이 용렬하고 비루한 자를 물리치시고 어진 덕망이 있는 자를 정승으로 고쳐 뽑으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기익(李箕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능(陵) 안에서 불이 난 것은 이는 사실 전에도 드물게 있던 변고입니다. 비록 위안제(慰安祭)를 행할지라도 미처 사초(沙草)를 고치기 전에는 앞질러 먼저 과거를 설시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 듯합니다. 증광시(增廣試)의 방방(放榜)도 수일(數日)로 다가와 있습니다. 전에 있었던 정묘년1389) 감시(監試)의 방방(放榜) 때에도 만수전(萬壽殿)의 화재[回祿]로 조금 물려서 거행하였으니, 이는 대개 화재를 만나면 경계하고 조심하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이 능침(陵寢)에 화변(火變)은 정묘년에 비하면 조금 중하니, 우선 대신(大臣)이 봉심(奉審)하고 복명(復命)하기를 기다려서 하문(下問)하여 처리하시면 아마 혹시 적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25일 기축
장령(掌令) 조명신(趙命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과거(科擧)를 설시하여 인재(人材)를 뽑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므로 반드시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길일(吉日)을 골라 선택한 것은 옛날의 규례에 그렇게 했는데 지금 경솔하게 청대(請對)할 때에 다시 정하였으니, 마침내 미안한 데 관계됩니다. 마땅히 보류시켰다가 능침[珠丘]이 개봉(改封)되기를 기다린 뒤에 천천히 의논하여 길일(吉日)을 골라서 과시(科試)의 선발(選拔)을 소중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시사(試士)하는 즈음에 시문(詩文)에 능한 사람을 뽑지 말고 반드시 경륜(經綸)의 계획이나 치안(治安)의 방책을 물어서 치무(治務)를 연습시켜 이치에 통달하게 하면서 수식[粉飾]하는 습관을 개혁시키시고, 명경(明經)의 과시(科試)에서도 또한 입으로 음송(音誦)에 통한 사람을 뽑지 말고 반드시 그 깊은 뜻을 탐구한 사람을 뽑아서 겸하여 대책(對策)을 기술(記述)케 하면서 참으로 알고 실지로 유익한 바가 있게 한다면, 바야흐로 취사(取士)의 실익(實益)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과(武科)에 이르러서도 기능(技能)이 높은 사람을 뽑게 되면 함부로 구하는 자가 끊어지게 되어 재산(財産)을 파탄시키는 근심이 없게 될 것이고, 정원(定員)을 자세히 살피면 선법(選法)이 정밀(精密)하여져서 헛되이 늙어가며 억울하다는 탄식이 없어질 것이며, 강규(講規)를 폐지하지 않으면 뽑는 것이 쓸 만하여 무무(貿貿)1390) 한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10월 26일 경인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예조 판서 심택현(沈宅賢)·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정형익(鄭亨益)이 장릉(長陵)을 봉심(奉審)하고 도형(圖形)을 가져다 올리며, 인하여 아뢰기를,
"불이 3경(三更)에 일어났으니, 어찌 저절로 일어날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臣)이 능관(陵官)에게 들으니, ‘작년(昨年)에 능침의 나무 백여 주(柱)를 도벌(盜伐)한 사람이 있어 적발되어 정배되었는데, 지금 정배된 자가 돌아왔으므로 반드시 능관(陵官)에게 원한을 갚으려고 할 것이니, 비록 명백히 알 수는 없지만 의심할 만한 자는 이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가만히 보고 있다가 체포하도록 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이기익(李箕翊)이 과거(科擧)와 창방(唱榜)을 물려서 행할 것을 상소하여 청한 것은 그 말이 옳습니다. 그런데 조정이나 시장(市場)의 일을 정지한 지 3일이 지났으면 각사(各司)에서 다 공사(公事)를 거행하여 평일과 다름이 없어야 하고 또 명(明)나라 조정에서는 비록 나라에 대고(大故)가 있더라도 과거의 기한은 물리지를 않았으니, 지금 과거를 물려서 행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下問)하고 하교하기를,
"예(禮)는 과(過)하거나 불급(不及)한 것이 다 옳지 못하다. 만수전(萬壽殿)에 불이 났을 때에는 3일 안에 있었기 때문에 물려서 행하였지만 지금은 이미 정전(正殿)으로 돌아와서 거처하고 있는데, 유독 과거를 설시(設施)하지 못하겠는가? 국휼(國恤) 3년 안에 과거를 설시하는 것도 또한 어찌 과거를 중시(重視)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명사(明使)》에도 과거는 이미 물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제 정시(庭試)를 물려서 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처음에 정한 28일로 설행(設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제주(濟州)의 증광 초시(增廣初試)에서 입격(入格)한 사람 이반근(李盤根) 등 3인(人)을 이번 정시(庭試)나 전시(殿試)에 응시시킬 것을 명하였다. 대개 제주는 외딴 바다에 있는 지방으로서 전부터 초시에 입격한 사람이면 비록 본과 회시(本科會試)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와서 호소하는데 따라 다른 과시(科試)에는 응시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홍치중(洪致中)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명택(趙明澤)을 설서(說書)로, 이병상(李秉常)을 원접사(遠接使)로, 서종급(徐宗伋)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조도빈(趙道彬)을 관반(館伴)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영접 도감 제조(迎接都監提調)로 삼았다.
10월 27일 신묘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필선(弼善) 성진령(成震齡)과 사서(司書) 신처수(申處洙) 등이 상소하였는데, 가의(賈誼)의 말을 인용하여 동궁(東宮)을 일찍 교유(敎諭)할 것을 청하였다. 또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궁인(宮人)이나 내관(內官)은 나이 4, 50이상의 후중(厚重)하고 소심(小心)한 사람을 뽑고, 또 신료(臣僚)들 자제(子弟)에서 10세(歲) 이상, 12세 이하의 단정하고 근실(謹實)하며 영리한 자를 뽑아서 항상 좌우(左右)에서 모시게 하되,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녁에는 돌아가게 하며 13세가 되면 문득 파거(罷去)시킬 것을 청하였다. 또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사물잠(四勿箴)1391) 이나 제자직(弟子職)의 여러 편(篇)을 뽑아서 운어(韻語)로 만들어 궁인·내관 및 선발한 자제들을 가르쳐서 아침 저녁으로 외우게 한다면 또한 옛날에 장님으로 하여금 시(詩)를 외우게 하는 뜻에 부합될 것이라고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8일 임진
정시(庭試)를 거행하여 왔으나 비가 와서 과장(科場)을 설시할 수 없었으므로, 드디어 물려서 행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천둥의 이변(異變)으로 인하여 자신을 책망하는 전교(傳敎)를 내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 인천(仁天)이 경고(警告)하는 것은 그 연유(緣由)를 추구(推究)하여 보면 진실로 나의 부덕(否德) 때문이다. 아! 여러 도(道)에 기근(飢饉)이 거듭 들어 백성은 거꾸로 매단 형편이며, 조정의 형편은 어지럽게 분열되고 나라 일은 위태로워지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바로 나의 허물이다. 그 쉽게 알 만한 것으로 말한다면 조정 형편이 어긋나고 과격한 것은 내가 능히 잘 인도하지 못한 소치에 연유한 것이고, 백성이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은 내가 능히 구제하여 살게 하지 못한 까닭에 연유한 것이며, 성의(誠意)가 믿어지지 않는 것은 내가 능히 성의를 미루어 미치게 못한 소치에 연유한 것이고, 나라의 일이 진작(振作)되지 못한 것은 내가 능히 정신을 분발하여 실행하지 못한 까닭에 연유한 것이니, 총괄하여 말한다면 이는 내가 내 자신을 닦는데 미진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내 스스로 마음에 구해야 하는데, 어느 겨를에 남을 언급(言及)하겠으며 또 어떻게 서로 힘쓰게 하지 않겠는가? 아! 조정에 있으면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것으로 힘을 쓰고 외관(外官)에 있으면 백성을 구휼하면서 각근(恪勤)히 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고 통렬하게 구습(舊習)을 제거하여 나간다면 또한 어찌 인천(仁天)의 경고에 보답하여 3백 년의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표목(表木)이 바르면 그림자도 바르게 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이 반드시 쓰러진다.’ 하였으니, 그 근본을 구명(究明)한다면 나의 이 한 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마땅히 자신에 구하여 힘차게 반성(反省)해야 할 것이니, 또한 어찌 언로(言路)를 넓혀서 스스로 반성하는 단서로 삼지 않겠는가? 마땅히 의정부로부터 널리 직언(直言)을 구해야 할 것이니, 말이 비록 중도(中道)에 지나치더라도 내가 탓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대들 여러 신하들은 나의 이 뜻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천둥의 이변(異變)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재이(災異)의 발생은 본래 헛되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이렇게 인천(仁天)이 경고(警告)를 보이는 것도 또한 어찌 기인된 것이 없는데도 오는 것이겠습니까? 왕강(王綱)1392) 이 진작(振作)되지 않고 형정(刑政)이 규칙이 없어져서 인심(人心)은 평온하지 못하고 국세(國勢)는 위태로와지는데 선류(善類)가 비록 진용(進用)되었으나 참벌(斬伐)하는 나머지에 기절(氣節)이 상실(喪失)되었으며, 간당(奸黨)이 비록 물러갔지마는 뜻을 잃은 무리들이 머뭇거리면서 옆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은상(恩賞)이 지저분해지니 명기(名器)1393) 는 날로 가벼워지고 정렴(征斂)1394) 이 많아짐으로 민원(民怨)은 날로 번져만 가니, 중외(中外)를 빙 돌아보건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그것을 변경시키는 기틀은 진실로 전하에게 있습니다. 아! 대신(大臣)이란 나라의 주석(柱石)인데도 전하께서 그를 대우하시는 것이 그 구경(九經)1395) 의 경신(敬信)하는 뜻에 어긋나지 않으셨습니까? 사론(士論)은 나라의 원기(元氣)인데도 전하께서 그를 양성하는 것이 과연 선왕(先王)의 작흥(作興)하는 방도에 부합되게 하셨습니까? 원컨대 사의(私意)를 극복해 버리시고 원대한 계획을 크게 넓이시되, 실덕(實德)으로 행한 뒤에야 천심(天心)이 기뻐하는데 이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교악(李喬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장릉(長陵)의 불이 난 것은 실로 전고(前古)에 없었던 변(變)입니다. 그리고 문과(文科)나 무과(武科)에 대하여 좋은 날을 가리지 않고 행하기로 정한 것은 처음에 예절(禮節)을 참고하고 사세(事勢)를 침작한 데서 나온 것인데, 불행하게 큰 비가 밤새도록 새벽까지 왔으며, 고관(考官)은 이미 시소(試所)로 나갔고 응시(應試)할 사람은 모두 장옥(場屋)에 모였는데 갑자기 파하여 돌려보내니, 낭패된 광경이 이 또한 옛날에 없었던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후일(後日)로 조금 물리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이미 조금 물리게 한다면 능(陵)위에 사초(莎草)를 개수(改修)하는 기일(期日)과 시일이 떨어지기가 5, 6일 사이에 불과하니, 이 일을 지나고서 설행(設行)하는 것이 아마도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어저께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은 성분(省墳)한다는 상소가 승정원[喉院]에서 저지를 당하자 이로써 성을 내어 승지(承旨)를 원망하면서, 심지어 무신(武臣)은 유독 부모(父母)가 없는가 하는 말로써 궐내(闕內)에 많은 사람이 앉은 가운데서 발언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정상은 아무리 간박(懇迫)한 데서 나왔다고 해도 그 날카로운 말씨의 성미와 버릇은 추솔(麤率)한 결과가 됨을 면할 수가 없었으며, 부총관(副摠管) 정찬술(鄭纘述)은 어제 시관(詩官)으로 패초(牌招)하였으나 앉아서 어기고 오만함을 범하였으니, 마땅히 모두 경책(警責)을 시행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김영행(金令行)을 거두어 서용(敍用)하시는 것은 대개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는다는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이에 앞서 신(臣)이 동래부(東萊府)로 은견(恩譴)되었을 때에 김영행은 또 기장(機張)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그가 밤낮으로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그때 사람에게 동정받기를 구걸하여 끝에 가서 석방을 입은 정상을 신이 이미 상세히 아뢰었으니, 결단코 가볍게 은서(恩敍)를 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부화(浮華)한 것이 실용(實用)이 없다.’는 것은 옛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헌신(憲臣)이 치안(治安)할 방책을 물어보고 수식(修飾)을 혁파(革罷)하란 말을 장주(章奏)하는 내용에 꺼내었으니, 아마도 과시(科試)에 임하여 제론(提論)할 일은 아닐 듯합니다. 조덕린(趙德隣)의 소어(疏語)는 아주 패려(悖戾)함이 비할 수 없습니다. 신하로서는 마음에 먹은 것을 입에서 꺼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가 ‘친절을 바쳐 공명(功名)을 요구한다.’느니, ‘도리어 협박(脅迫)을 받았다.’ 느니 하는 등의 말은 더욱 몹시 흉악[凶獰]한 것이 고변서(告變書)와 같은 점이 있으므로, 그의 이른바 ‘황옥(黃屋)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느니, ‘눈물을 흘리면서 등극(登極)을 하였다.’ 느니 하는 말과 한 꿰미로 꿰어 온 것인데, 더욱더 음흉하고 참혹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聖上)께서는 될 수 있는 한 관용(寬容)하시어 귀양보내는데 그치게 했으므로 여정(輿情)이 함께 분노(憤怒)하여 오래되면 될수록 더욱 절박하게 여기고 있으니, 나치(拿致)하여 구문(究問)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칭찬하고 권장하였으나, 김영행과 조덕린의 일은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직언(直言)을 구하는 전지(傳旨)가 친절하고 간측(懇惻)하시니, 누군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유현(儒賢) 김간(金幹)과 같은 이는 지난번에 잠깐 정초(旌招)1396) 를 받고서는 얼마 안가서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만약 성궁(聖躬)의 궐실(闕失)과 조정(朝廷)의 이해(利害)로써 듣고 본 바에 따라 봉장(封章)하여 모두 진달(陳達)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하유(下諭)하신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상소 내용에 학문(學問)한 선비를 초선(抄選)하여 그로 하여금 직무(職務)를 맡겨 서연(書筵)에 출입(出入)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지금 만약 듣고 보는 것을 넓혀서 학문한 선비를 초선(抄選)하여 혹은 한직(閑職)을 맡기고 혹은 군직(軍職)을 맡겨서 서연(書筵)에 출입하게 한다면 보도(輔導)하는 효과가 반드시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참으로 좋으니 초선(抄選)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계방(桂坊)1397) 의 관원(官員) 이세환(李世瑍)·윤봉오(尹鳳五) 두 사람에게 번차(番次)에 구애(拘碍)하지 말고 입직(入直)할 것을 명하여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대개 이세환과 윤봉오는 경술(經術)과 학식(學識)이 있었으며 지난번에 계방의 참하(參下)1398) 로 임기(任期)가 차서 승륙(陞六)1399) 에 해당되었는데, 임금이 보도(輔導)를 급하게 여겨 특히 승진시키지 말 것을 명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10월 29일 계사
숙위(宿衛)하는 군사(軍士)에게 유의(襦衣)를 주도록 명하였으니,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명(明)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문집(文集)이나 어필(御筆)을 사가지고 온 역관(譯官) 등에게 모두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강원도 도사(都事) 신사직(申思稷)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망령되어 일을 처리하는 것이 비루(鄙陋)하고 패악(悖惡)하였으며, 일찍이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이 되어서는 이미 자질구레하다는 비난이 많았고, 본직(本職)에 임명되어서는 더욱 방자하여 해괴한 행동을 하였으나, 흉년[凶歲]에 검전(檢田)하는 임무를 결코 맡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천둥의 이변(異變)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정승의 직임(職任)을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여 정승의 직임을 사양하고 끝으로 재해를 만나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진달(陳達)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말을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정언(正言) 임주국(林柱國)이 천둥의 이변(異變)으로 인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재앙은 헛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초래(招來)한 바가 있습니다. 신(臣)이 이미 기묘(奇妙)한 계책으로 구원할 수 없으니, 다른 말을 광범위하게 인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상의 하교(下敎) 가운데 수조(數條)의 말씀을 추연(推演)하여 어리석은 정성을 조금 바치는 것입니다. 성교(聖敎)에 말씀하시기를, ‘조정의 형편이 어긋나고 과격하여진 것은 내가 잘 인도하지 못한 데 연유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신은 아마도 전하의 마음에 혹 대공 지정(大公至正)함이 부족함이 있어서 이런 재구(災咎)를 초래(招來)한 것이 있는가 싶습니다.
대저 마음은 온갖 교화(敎化)의 근원입니다. 혹은 편계(偏係)의 실수가 있게 되면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되고, 혹은 탐욕(貪慾)의 싹이 트게 되면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되며, 혹은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심(私心)이 있게 되면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되고, 혹은 계교(計較)하는 생각이 있게 되면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됩니다. 대체 삼사(三司)의 의논은 곧 온 나라의 공의(公議)인데도 상하(上下)가 서로 버티게 되어 마침내 한 번의 윤허(允許)를 아끼시니, 이는 전하께서 편계(偏係)의 병통을 버리지 못한 것이고, 여러 신료(臣僚)들의 말이 성상의 마음에 거슬림이 있으면 번번이 고훈(古訓)을 인용하여 구변(口辨)으로 막아내는 듯함이 있으시니, 이는 전하께서 이기기를 좋아하시는 병통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액정서(掖庭署) 하례(下隷)의 무리는 얼마나 미천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법을 굽혀 비호하시는 말씀이 사륜(絲綸)의 사이에 자주 나오고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신은 아마도 평상시 깊숙한 가운데서 기욕(嗜欲)의 사심(私心)을 능히 스스로 제거(除去)하지 못함이 있는 듯합니다. 또 전하께서 즉위(即位)하신 뒤로부터 무릇 크고 작은 일을 하시는 사이에 주밀하고 자상한 데에 지나치고 적당히 처리하는 데 노력하시면서 끌어대어 덮어나갈 계획만 하시니, 이는 전하께서 계교(計較)하는 사심(私心)이 또한 제거되지 못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성상의 하교에 또 이르기를, ‘백성이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은 내가 능히 구제하여 살게 하지 못한데 연유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 오늘날 백성이 곤궁하고 초췌(焦瘁)함을 그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해마다 거듭된 기근(飢饉)의 나머지에 삼남(三南) 지방이 더욱 혹심(酷甚)하여 절후는 추수(秋收)철에 이르렀는데도, 떠도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여 그들은 장차 다 죽게 되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옛날 우리 숙종(肅宗)께서는 을해년1400) ·병자년1401) 의 큰 흉년 든 해를 당하여 특별히 내탕고(內帑庫)의 저장을 꺼내어 여러 고을의 진휼(賑恤)하는 자본에 도와 주셨고 친히 후원(後苑)의 상수리 열매를 몸소 주워서 도성(都城) 안의 굶주린 백성에게 주셨으니, 덕의(德意)가 융후(隆厚)하여 목숨을 온전히 살린 것이 실제로 많았습니다. 그리고 임진년1402) 에는 내탕고(內帑庫)의 은(銀) 수천여 냥(兩)을 꺼내어 구렁에 빠져 죽게 될 위급함을 구제하였고, 경자년1403) 에 〈숙종께서〉 승하(昇遐)한 뒤로는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수봉(數封)의 은자(銀子)를 빈청(賓廳)에 내어 주면서 이르기를, ‘선왕(先王)께서 앞으로 백성을 진휼한 자본을 대비하기 위하여 궁중(宮中)에 봉치(封置)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 선왕께서 백성을 무휼(撫恤)하시는 지극한 뜻은 비록 편찮은 병중에 있으면서도 이와 같이 간절하셨기 때문에 백성이 사랑하여 떠받들기를 부모(父母)와 같이 여겼으며, 오늘에 와서도 말이 선왕에게 미치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신은 내수사(內需司)에 저축되어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원컨대 전하께서는 창고를 열어 저축을 모두 꺼내어 유사(有司)에게 내어 주어서 백성을 진휼하는 자본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이 진실로 매우 절실(切實)하니, 유념(留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부응교(副應敎) 이현록(李顯祿), 교리(校理) 이병태(李秉泰)·김용경(金龍慶), 수찬(修撰) 권적(權𥛚) 등이 천둥의 재변으로 인하여 진계(陳戒)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내수사(內需司)의 설치는 사실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一體)가 되는 뜻에 불만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전부터 전해 오는 제도를 비록 혁파(革罷)하기는 어려울지라도 궁장(宮庄)의 등속(等屬)은 마땅히 일체 억제하여야 할 것입니다. 종신(宗臣)에게 자급(資級)을 올려 주는 것과 같은 일에도 이미 매우 분수에 지나침이 많았고, 성균관 유생(儒生)에게 급제(級第)를 내리는 일도 또한 제한(制限)이 없었으며, 요즘 주청사(奏請使)나 여러 역관(譯官)의 사물(賜物)을 받는 것도 예전에 비하여 증가됨이 있으며, 그저께 어의(御醫) 3명에게 논상(論賞)하는 일도 자못 명목이 없는데 가까우니, 이것은 신 등이 너무 외설(猥褻)된 것임을 걱정하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10월 30일 갑오
별이 오거성(五車星) 아래로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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