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권, 영조 1년 1725년 11월

싸라리리 2025. 8. 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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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을미

문과(文科)의 정시(庭試)를 거행하여 이만영(李萬榮) 등 19인을 뽑았다.

 

11월 2일 병신

조영세(趙榮世)를 집의(執義)로, 김응복(金應福)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파주 목사(坡州牧使) 정내주(鄭來周)·교하 현감(巧河縣監) 황유후(黃有垕)가 재황(災荒)이 든 이유로써 상소하여 청하기를,
"두 고을에서 낼 경리청(經理廳)·금위영(禁衛營)의 쌀을 금년(今年)만 한정하여 본읍(本邑)에 받아 두어서 진휼(賑恤)하고 구제하는 밑천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군량미(軍糧米)는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허락하여 줄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쌓기 전에는 군량미를 의당 각 고을에 받아 두어야 하는데, 더구나 또 백성이 곤궁한 때이겠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 신사철(申思喆)도 그 불가함을 강력히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말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먹을 것을 버릴지언정 어찌 백성을 버리겠느냐?’고 하였으니, 특별히 받아 유치(留置)할 것을 윤허한다."
하였다.

 

밀양 부사(密陽府使) 조언신(趙彦臣)이 상소하여 6조(六條)를 진달하니, ‘1. 진전(陳田)에 징세(徵稅)하는 억울함 2. 박토(薄土)에는 등급을 낮추어야 마땅한 것 3. 양역(良役)이 괴로움을 남보다 더 받는 근심 4. 화전(火田)에 감세(減稅)하는 방법 5. 본도(本道)에 저치미(儲置米)를 진휼의 자본으로 대여(貸與)하기를 허락하는 것 6. 수영(水營)의 두 봉산(封山)을 혁파(革罷)하여 폐해를 제거하는 것’ 이었는데,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시(庭試)의 문과(文科)에 2등 한 사람 윤급(尹汲)을 빼내 버렸다. 대개 비봉(秘封)한 가운데 나이와 거주지(居住地)를 쓰지 않아서 격식(格式)을 어김이 있었기 때문에 시소(試所)에서 빼어 버릴 것을 계청(啓請)한 것이다.

 

통영(統營)에서 구관(勾管)하는 곡미(穀米) 1만 석(石)과 벼[租] 5만 석을 진휼청(賑恤廳)에 갈라주어서 기민(飢民)을 구제하여 살리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진휼청의 창고에 저축한 것이 탕진(蕩盡)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갈라서 이송(移送)하라는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11월 3일 정유

동지 정사(冬至正使) 김흥경(金興慶)·부사(副使) 유복명(柳復明)·서장관(書狀官) 최명상(崔命相)이 북경(北京)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임금이 불러 보고 위유(慰諭)하여 보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고, 신사직(申思稷)의 일은 아뢴 대로 따랐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병태(李秉泰)가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무릇 화란(禍亂)의 싹은 소홀하게 여기는 데서 생기기 때문에 주자(朱泚)의 난(亂)1404)  이 뜻밖에 일어나 덕종(德宗)이 파천(播遷)까지 하게 되었고, 명(明)나라 이자성(李自成)의 난(亂)1405)  이 나게 된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지금 시기가 명(明)나라 말기(末期)와 같은데, 다만 말단적인 것만 구하고 근본적인 것은 구하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하면 1분의 반인들 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남중(南中)에 가 보니 농사가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이 모두 이리저리 흩어져서 옛날에 백 가구(家口)였던 것이 지금은 10가구만 있었습니다. 또 듣건대 김제(金堤)에 고씨(高氏) 성(姓)을 가진 사인(士人)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남편과 아내가 장차 나누어져 흩어지기로 하였는데,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이런 참혹한 흉년을 만나 이제 앞으로 다니면서 빌어먹어야 하니, 인생이 이 지경에 이르면 무엇을 돌볼 것이 있겠습니까? 집에 키우던 개가 있으니, 청컨대 당신과 같이 잡아서 먹을까 합니다.’ 하니, 남편이 말하기를, ‘나는 차마 손으로 잡을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아내가 말하기를, ‘제가 부엌 안에서 〈개의〉 목을 매어 놓을 테니까 당신은 밖에서 그것을 당기세요.’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그가 말한 대로 하고 들어가 보니, 개가 아니고 바로 그의 아내였다 합니다. 무릇 죽는 것은 인정(人情)의 어렵게 여기는 바인데 아주 감내하기 어려운 일이 없었다면 어찌 남편을 속여가며서 자결(自決)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한참동안 측연(惻然)하게 여기다가 관찰사(觀察使)에게 별유(別諭)를 내려서 그들을 구휼(救恤)하여 편안히 살도록 하는데 힘쓰라고 하였다.

 

정형익(鄭亨益)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김용경(金龍慶)을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11월 4일 무술

경상(慶尙)·전라(全羅)·충청(忠淸) 3도(道)의 재해를 입은 고을에 금년의 환자곡[還上穀] 4분의 1은 정봉(停捧)하라고 명하였으니, 3도(道) 감사(監司)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다.

 

강원도 유생(儒生) 원태규(元泰揆) 등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부사직(副司直) 권화경(權和經)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주(州)·현(縣)의 교생(校生)·원생(院生)·군관(軍官)의 액수(額數) 외의 인원과 8도의 승도(僧徒)를 조사해 내어 각각 신포(身布)를 거두고, 관사(官司)의 정액(定額) 외의 선척(船隻)에는 그 크고 작은 것에 따라 차등을 두고 포(布)를 받아서 그것으로 죽은 사람에게 징포(徵布)하는 폐단을 견감(蠲減)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1월 5일 기해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 당상관(堂上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서교(尹恕敎)를 나국(拿鞫)하여 엄문(嚴問)하라는 계달(啓達)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윤서교의 사건은 원래 국문(鞫問)할 단서가 없다. 그런데 대계(臺啓)로 인하여 아직도 찬배(竄配)하지 않았으니, 옳겠는가? 만약 도배(島配)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다면 절도(絶島)에 천극(栫棘)시키라."
하였다.  【대계(臺啓)로 인하여 전지(傳旨)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63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집의(執義) 조영세(趙榮世)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의 효제(孝悌)의 덕은 상하(上下)에 화합하여 이미 쇠퇴하여 가는 풍속을 크게 변화시켰고, 대척(大慽)을 당한 뒤로부터 울고 슬퍼하시기를 한결같이 경자년1406)   삭망(朔望)의 제전(祭奠)과 같이 하시면서 대행(代行)시키지 않으셨으며, 인산(因山)1407)   뒤에 재차(再次) 성배(省拜)를 행하셨으므로, 신은 진실로 흠송(欽頌)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다만 이 해가 다가려는 데도 아직 명릉(明陵)을 전성(展省)하시는 일이 없으시니, 신은 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예제(禮制)에 구애(拘碍)되어 능히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시고, 유사(有司)는 상견(常見)에 국한(局限)되어 감히 우러러 청하지 못합니다. 대체 3년상 안에 선릉(先陵)을 배알하는 규례가 없는 것을 신이 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예(禮)란 다만 천리(天理)나 인정(人情)에 합당하게 할 뿐입니다. 오늘의 일은 경자년1408)  에 숭릉(崇陵)을 배알하지 못하게 된 것과 갑인년1409) 영릉(寧陵)을 배알하지 못하게 된 것과는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그 복색(服色)에 대해서도 혹은 길복(吉服)을 따라야 하느니 혹은 천담색(淺淡塞)이어야 한다느니 하는데, 신은 예학(禮學)에 어두워 감히 억측(臆測)으로 단정(斷定)할 수가 없으니, 다만 성명(聖明)께서 예(禮)를 아는 자에게 널리 물어보시고 처리하는데 있을 뿐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예제(禮制)로 인하여 행할 수는 없다 하나 서쪽으로 명릉(明陵)을 바라보면 추모(追慕)하는 감회를 스스로 억제하기가 어렵다. 이제 그대의 상소를 보건대, 더욱 나의 슬픔을 절감하게 한다. 그것을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물어보고 품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상(喪)을 당한 3년 내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즉위(即位)하여 묘현(廟見)하는 것도 선유(先儒)들은 오히려 또 총재(冢宰)가 대신 고(告)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원릉(園陵)에도 또한 전성(展省)의 예(禮)를 폐지하는 것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막중(莫重)한 변례(變禮)를 처음으로 시작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情)은 비록 한정이 없지마는 예(禮)에 절차가 있는 법이다."
하고, 드디어 그 의논을 따랐다.

 

11월 6일 경자

열성 어필(列聖御筆)의 간본(刊本)이 완성(完成)되었다.

 

김취로(金取魯)를 도승지(都承旨)로, 이교악(李喬岳)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황일하(黃一夏)를 좌참찬(左參贊)으로, 홍우전(洪禹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병상(李秉常)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서종섭(徐宗燮)을 교리(校理)로, 윤심형(尹心衡)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성룡(李聖龍)을 집의(執義)로, 이근(李根)을 지평(持平)으로, 한현모(韓顯謨)를 검열(檢閱)로 삼고, 조영세(趙榮世)를 발탁(拔擢)하여 승지로 삼았다.

 

11월 7일 신축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한계진(韓啓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의 스승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신치운(申致雲)의 모함(謀陷)을 참혹하게 입어서 심지어 난역(亂逆)으로까지 지목되었습니다. 아! 저 신치운은 곧 하나의 무고(誣告)한 사람이므로 스스로 해당 적용되는 형률(刑律)이 있을 것인데도 벌(罰)이 삭출(削黜)에 그쳤습니다. 남을 난역(亂逆)으로 무함한 것이 얼마나 흉패(凶悖)한 짓이며 난역으로 무함을 당한 사람은 얼마나 억울함이 심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남을 무함한 자가 그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이 무함을 당한 자는 그 억울함을 펼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내려주는 것으로써 무함된 것을 신원시키는 단서로 삼는다 하더라도 신치운의 죄를 신문하지 않는다면 신의 스승의 무함은 그대로 반암 반명(半暗半明)한 죄과(罪科)에 남아 있을 것이니, 스승의 무함이 이미 시원스럽게 신원되지 않았는데 신이 무슨 얼굴로 대간(臺諫)의 자리에 들어가 세상 일을 논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려 주었다.

 

영의정 정호(鄭澔)가 화재(火災)와 천둥의 재변으로써 차자(箚字)를 올려 정승의 직무에서 해임되기를 원하니, 비답하기를,
"화기(火氣)의 재앙과 겨울 천둥의 재변은 진실로 부덕(否德)한 나에게 연유한 것이니, 경(卿)은 인구(引咎)하지 말고 기회를 기다려 길에 오르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서명구(徐命九)를 사간(司諫)으로, 심택현(沈宅賢)을 동의금(同義禁)으로, 권적(權𥛚)을 겸사서(兼司書)로, 이도원(李度遠)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11월 8일 임인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번 정시(庭試)에 입격(入格)한 사람 윤급(尹汲)의 비봉(秘封) 가운데 나이와 주거지(住居地)를 쓰지 않아 마침내 빼어 버릴 것을 계청(啓請)하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전례(前例)를 원용(援用)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신은 억울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신이 예조(禮曹)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일찍이 신유년1410)  에 있었던 주항도(朱恒道)는 식년 회시(式年會試) 때의 비봉(秘封)에 성(姓)과 본관(本貫)과 나이를 쓰지 않았으므로 빼버렸다가 전시(殿試)를 지난 뒤에 유신(儒臣)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후일에 복과(復科)를 명하였습니다. 지금 윤급(尹汲)은 이미 과제(科第)에서 2등을 차지하였고 어수(御手)로 친히 개탁(開拆)을 거치기까지 하였으니, 그것은 주항도에 비하면 조금 중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유년1411)   알성시(謁聖試)에서 이인소(李寅熽)가 비봉(秘封)에 직함(職銜)을 쓰지 않았으므로 시소(試所)에서 빼어 버릴 것을 청하였으나 특별히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으니, 지금 이 윤급의 낙서(落書)는 이인소의 잘못 쓴 것과는 차이가 없을 듯합니다. 또 심준(沈埈)의 제자(題字)가 빠진 것이나 최수경(崔守慶)이 소인(小印)을 찍지 않은 것이 외면(外面)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또한 뒷날 폐단에 관계되는 바가 있겠지마는, 해가 오래 된 뒤에는 그래도 복과(復科)를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날 시소(試所)에서 고례(古例)의 근거를 몰라서가 아니라 갑작스런 순간에 능히 글을 꾸며 계품(啓稟)할 수가 없으므로 이렇게 앞질러 먼저 빼어 버리도록 한 것이니 애석함을 견디겠습니까? 바라건대, 빨리 성명(聖明)께서는 숙종(肅宗)의 성대한 뜻을 우러러 본받으시고 한 사람의 지극히 원통함을 굽어 살피시어 다시 대신에게 물어보시고 처리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근년에는 8도(八道)에 거듭 흉년(凶年)이 들자 양민(良民)이 도둑이 되어 심지어는 일산을 펼쳐들고 불러대며 재물로써 사람을 죽여 쓰러뜨리는 자가 있으니, 여주(驪州)·양근(陽根) 등 고을이 더욱 그 해(害)를 입고 있습니다. 마땅히 별도로 위풍과 무력이 있는 원[倅]을 뽑아서 날렵하게 체포하는 임무를 맡겨 주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수령(守令)은 3년의 자리를 변경하여 6년의 자리로 하였으므로 지금은 3년의 자리가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습니다. 다스리는 이치를 환히 알고 재능과 기량(器量)이 넉넉하고 민첩한 자는 대체로 대부분 연한(年限)에 구애되거나 산관(散官)1412)  에 헛되이 늙고 있으니, 마땅히 옛날 제도를 따라 3년의 자리를 6년의 자리로 만든 자는 그전대로 뽑아 메우면 점차 옛날로 회복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요즘 장물(贓物)을 다스리는 법이 엄하지 못하므로, 비록 죄과에 범한 사람이 있더라도 권세 있는 연줄을 타서 청탁을 꾀하여 마침내 말끔히 벗어나게 되니, 신의 생각에는 지금부터 앞으로는 일이 탐장(貪贓)에 관계되는데도 함부로 전결(田結)을 이용하는 자는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신칙하여 영구히 기용(起用)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조신(朝紳)1413)   가운데서 청렴하고 결백하여 존경할 만한 사람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널리 묻고 정밀하게 뽑아서 현저하고 포상(褒賞)을 가해야 하겠습니다. 고(故) 참판(參判) 신(臣) 이단석(李端錫)은 청백(淸白)하고 청렴하며 근신(謹愼)한 것이 그와 비교될 이가 드뭅니다. 의당 특별히 포상과 증직(贈職)을 더하여 주시고 그 봉사(奉祀)하는 손자를 수록(收錄)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무신(武臣)이 변지(邊地)의 원[倅]으로 가는 것을 싫어서 기피(忌避)하는 것이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삼수(三水)의 한 고을은 여름부터 겨울까지 교체(交遞)됨이 매우 많았고 한 사람도 부임해 가려는 자가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어버이의 나이가 이미 많았거나 독자(獨子)로 형제(兄弟)가 없는 자 외에 체임(遞任)을 도모하고 부임하지 않는 자는 일체 법전(法典)에 의거(依據)하여 정배(定配)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날 분관(分館)할 때에 홍득후(洪得厚)가 승문원(承文院)에서 누락(漏落)을 당하였는데, 마땅히 승문원의 규례로써 조용(調用)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임인년1414)   위훈(僞勳)으로 진하(陳賀)할 때에 유독 미말 음관(微末蔭官)으로 스스로 지조를 지키고 참여하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심지어는 삭탈(削奪)의 형률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높여서 권장(勸奬)을 가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급(尹汲)이 이미 높은 과제(科第)에 뽑혔다가 개탁(開拆)하기에 이르러 빼어 버림을 당하였으니, 내가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이제 그대의 상소를 보건대, 이인소(李寅熽)와 지금 윤급의 일이 다를 것이 없다고 하니, 이인소의 규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복과(復科)시키고, 무신(武臣)의 원을 뽑아보내는 일과 장리(贓吏)를 징계(懲戒)하고 청렴·결백한 사람을 포상(褒賞)하는 일은 별도로 전조(銓曹)에 신칙할 것이며, 이단석(李端錫)의 손자는 녹용(錄用)하도록 하고, 삼수(三水)에 대한 일로 이후에 싫어하고 기피(忌避)하는 자는 청하는 바에 따라 시행(施行)할 것이며, 홍득후(洪得厚)의 일이나 상소 말미에 높여서 서용(敍用)하자는 일은 모두 따라서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윤서교(尹恕敎)는 경상도(慶尙道) 남해현(南海縣) 외딴 섬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고, 이삼(李森)은 경상도 곤양군(昆陽郡)의 아주 먼 변지(邊地)에 안치(安置)하며, 목천임(睦天任)은 평안도(平安道) 벽동군(碧潼郡)의 아주 먼 변지로 정배(定配)하고, 심정옥(沈廷玉)은 경상도 거제부(巨濟府)에서 감사(減死)하여 외딴섬으로 정배하며, 심정신(沈廷紳)은 경상도 단성현(丹城縣)으로 정배할 것을 명하였다.

 

11월 9일 계묘

교리(校理) 이병태(李秉泰)와 수찬(修撰) 권적(權𥛚)이 차자(箚子)를 올려 윤급(尹汲)의 복과(復科)를 정지하고 과시(科試)를 엄격히 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예조 참판(禮曹參判) 이기익(李箕翊)·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정형익(鄭亨益)이 장릉(長陵)의 사초(沙草)를 수개(修改)한 뒤에 복명(復命)하면서, 민진원이 능(陵) 위에 변고를 일으킨 사람을 국문(鞫同)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또 아뢰기를,
"이인소(李寅熽)는 직함(職銜)을 틀리게 쓴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곧 복과(復科)를 명하였으나, 윤급(尹汲)에게 복과하는 것은 부당(不當)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우윤(右尹) 권변(權忭)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또 관각(館閣)의 겸대(兼帶)한 직임의 사면(辭免)을 원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경(卿)이 선조(先朝) 때부터 이미 벼슬하지 않고 지켜온 것은 의리인데, 한결같이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예절(禮節)로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어찌 경의 뜻을 신장(伸長)시키지 않겠는가? 사면하려는 관각(館閣)의 직임(職任)은 체임(遞任)을 허락한다."
하였다.

 

경상도 유생(儒生) 이도장(李道章) 등이 다시 상소하여 3흉(三凶)·5적(五賊)의 죄를 논하고 엄중히 징토(懲討)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임주국(林柱國)이 상소하여 재물을 절용(節用)하는 방도를 말하면서 전폐(錢幣)를 대궐 안으로 들여와서 성덕(聖德)을 더럽히지 말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은진(恩津)·강경포(江景浦) 장세(場稅)를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한 것을 청컨대 본읍(本邑)으로 돌려주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당진(唐津) 민전(民田)으로 궁차(宮差)와 서로 소송하던 것을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속히 판결(判決)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훈국(訓局)의 양향 둔전(糧餉屯田)이 이천(伊川)에 있는 것을 청컨대 다른 고을로 옮겨서 산골에 사는 백성을 소생(蘇生)케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인천 부사(仁川府使) 정혁선(鄭赫先)은 성품이 본래 잔혹(殘酷)·각박(刻薄)하고 행동이 탐오(貪汚)·비루(鄙陋)하여 청주(淸州) 한 고을에는 지금까지 그 해독(害毒)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부(本府)에 임명된 후에는 잔인(殘忍)하고 포학함이 더욱 심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남들이 긴 시일에 조적(糶糴)해야 하는 것을 한꺼번에 다 받아들였으니, 백성을 괴롭힌 형상을 이를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홍주 영장(洪州營將) 유만성(柳萬成)은 사람됨이 음휼(陰譎)하고 본래 행동이 비패(鄙悖)하여 오로지 징채(徵債)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면서 뇌물받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남의 사촉(私囑)1415)  을 받아서 비밀 관문(關文)1416)  을 많이 발송하여 민간(民間)에 소란을 일으켰으니, 이 두 사람은 의당 그 직임을 파면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날 경솔하게 적삼(賊森)1417)  에 대한 계달(啓達)을 정지(停止)시킨 것은 이삼에게 물어볼 만한 단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상하(上下)가 서로 버티는 것은 한갓 일의 체면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신(臣)이 헌신(憲臣)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계달을 정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의금부(義禁府)의 배소 단자(配所單子)를 보게 되자 곧 전일(前日)에 이미 정하여 놓은 배소(配所)임으로 신이 해괴하게 여겨 개탄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무릇 함부로 나오게 된 적(賊)의 공초는 다시 물어볼 만한 것이 없는데 특별히 환배(還配)1418)  의 율을 적용하였으니, 지금 이삼의 죄악(罪惡)은 과연 어떠한 것이며, 의금부에서 특별히 환배(還配)를 적용한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의금부 당상관(堂上官)에게 특별히 경책(警責)을 가하여 배소(配所)를 다시 정하게 하도록 해야할 듯합니다."
하고, 또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이 윤급(尹汲)의 과시(科試)를 회복시킬 것을 청한 잘못을 논하면서 복과(復科)의 명을 거두고 과거의 체제를 엄격히 하기를 원하니, 비답하기를,
"맨먼저 진달한 일은 옛부터 의례적으로 들여오는 것으로 마땅히 더욱더 유의(留意)할 것이고, 당진(唐津)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속히 처결(處決)할 것이며, 이천(伊川)의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고, 정혁선(鄭赫先)의 일은 그대의 상소에 논한 것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유만성(柳萬成)의 일은 풍문(風聞)을 반드시 다 믿을 수가 없으니 다시 더 상세히 살필 것이며, 이삼(李森)의 일은 지금에 명하여 고칠 것이 유배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데 또 배소(配所)를 고치게 하는 것은 또한 각박한 것이 아닌가? 윤급(尹汲)의 일은 이미 의금부 당상관(堂上官)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11월 10일 갑진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치중(洪致中)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안중필(安重弼)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1월 11일 을사

황감제(黃柑製)1419)  를 설행(設行)하여 유학(幼學) 이성해(李聖海)를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것을 명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장릉(長陵)에 불을 놓은 죄인(罪人) 석산(錫山)·삼덕(三德)·문필한(文必漢)·이준(二俊)·이건이(李建伊)·유충건(劉忠建)·최세정(崔世丁)·윤치선(尹致先)·이오익(李五益)·문필명(文必明)·서부선(徐富先)을 국문(鞫問)하였다.

 

11월 12일 병오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판의금(判義禁)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신(臣)이 전번에 무과 회시(武科會試)를 관장(管掌)하여 위격(違格)한 일로써 세 사람을 빼어 버리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외조(外祖)의 거주지(居住地)를 잘못 쓴 것이고, 한 사람은 ‘신(臣)’ 이란 글자를 빠뜨린 것이며, 한 사람은 그 조부(祖父)의 직함(職銜)을 잘못 쓴 것이었는데, 윤급(尹汲)이 복과(復科)된 뒤에 신에게 와서 호소하기를, ‘이미 윤급을 복과시켰으면 문과(文科)와 무과(武科)가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대저 과장(科場)의 일은 반드시 똑같은 법을 쓴 뒤에야 폐단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라도 틀리게 되면 뒤에 생기는 폐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윤급의 일로써 살펴 본다면 국가(國家)에서는 적당한 사람을 얻었다고 하겠으나 그에 따른 폐단이 이미 이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를 다르게 할 수가 없으나, 다만 끊임없이 복과(復科)할 수도 없으니, 그들로 하여금 뒷 과시(科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이 뒤로는 대소 과장(大小科場)에 만약 위격(違格)하는 일이 있으면 알성시(謁聖試)나 춘당 대시(春塘臺試)의 특은(特恩) 외에는 일체 엄격히 막도록 하라."
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죄인(罪人) 석산(錫山)·서부선(徐富先)·문필명(文必明)·이준(二俊)은 모두 자복(自服)하였으므로, 결안(結案)1420)  하여 정법(正法)1421)   했으니, 모두 장릉(長陵)에 불을 놓고 변고를 일으킨 죄인이다. 이보다 앞서 석산(錫山) 등이 금송(禁松)을 도벌(盜伐)하다가 능졸(陵卒)에게 붙잡혀 세 사람이 수금(囚禁)을 당하였으나 곧 석방되었는데, 석산은 유독 풍천(豊川)에 정배(定配)되었으므로 배소(配所)로부터 도망하여 와서 능졸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세 사람을 협박하여 불을 놓아 변고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에 와서 복주(伏誅)되고 문필한(文必漢)·삼덕(三德)은 정배(定配)되었으며, 나머지 사람은 모두 석방되었다.

 

신이장(愼爾章)을 섬에 귀양 보냈으니, 석산(錫山)은 신이장의 종[奴]이다. 석산이 도벌할 때에 신이장이 사나운 종을 돌보아 비호하면서 능관(陵官)에게 성을 내며 외쳤으니, 이런 까닭으로 임금이 특별히 잡아다 국문(鞫問)하고 형신(刑訊)하여 섬에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 뒤로는 능(陵) 안에서 작벌(斫伐)을 범한 자는 경산(京山)1422)  의 예(例)에 의거하여 가장(家長)을 정배(定配)하는 일로 법을 정하도록 한다."
하였다.

 

전(前) 찰방(察訪) 홍우재(洪禹載)가 상소하여 떠돌며 구걸하는 사람을 안집(安集)시키고 기황(飢荒)을 진구(賑救)하는 대책을 진달(陳達)하고, 또 말하기를,
"수령(守令)을 잘 뽑아서 죽은 사람에게 징포(徵布)하는 원망을 제거시키고, 문무(文武)의 과시(科試)를 드물게 시행하여 침체(沈滯)된 폐단을 제거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음직(蔭職)의 자리에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을 참용(參用)시키며, 《병학지남(兵學指南)》은 영진(營陳)에서 호령(號令)하는 조목(條目)에 지나지 않으니, 청컨대 기정(奇正)1423)  ·합변(合變)1424)  의 방법으로써 삼청(三廳)1425)  의 연소(年少)한 무인(武人)에게 교훈(敎訓)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경도(京都)에 군사가 적어서 위급할 때는 믿을 것이 없으니, 공경(公卿)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1호(戶)에 1정(丁)을 내어 군문(軍門)에 맡겨서 매년 봄·가을로 한 번씩 조련시켜 좌작(坐作)하는 법을 시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陳達)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할 것이나, 도인(都人)을 군문(軍門)에 맡기는 일은 전에 없던 일을 시작해서 양민(良民)의 폐해를 끼치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여 정승의 직임을 사직하고 인하여 총재(摠裁)의 해임(解任)을 원하니, 비답하기를,
"정승의 직임은 결코 면부(勉副)하기가 어렵다. 총재(摠裁)의 직임은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도리가 비록 중요하긴 하나 실록(實錄)을 찬수(撰修)하는 일이 하루가 급하니 우선 면부(勉副)한다."
하였다.

 

지평(持平) 한계진(韓啓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금의 당인(黨人)이 유학(儒學)의 시비(是非)에서 단서를 일으키고 군부(君父)의 처분(處分)에서 원한을 쌓아 기회를 따라 흉폭(凶暴)함을 풀고 일에 따라 악독함을 더하니, 형적(形迹)을 잡고 마음을 추구하여 보면 아주 미세(微細)한 것에도 대역(大逆) 아닌 것이 없고 지시를 받은 환첩(宦妾)과 위세(威勢)를 받드는 적노(賊奴)는 겨우 그 자신만 주살(誅殺)을 당하는가 하면 원흉(元凶)은 그물에서 빠져나가고 거괴(巨魁)는 형벌에서 도망을 치게 되어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날로 무부(無父)·무군(無君)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아조(我朝) 3백 년 동안에 불충(不忠)·불효(不孝)한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스승을 배반한 변고는 윤증(尹拯)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윤증의 아비 윤선거(尹宣擧)는 역적 윤휴(尹鑴)에게 아부(阿附)하면서도 겉으로는 서로 절교(絶交)하였다 하였고 강화도(江華島)에서 실절(失節)하였으면서도 거짓으로 허물을 뉘우쳤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윤증이 기유년1426)  의 글을 내어서 그가 윤휴와 끊지 않은 흔적을 나타내었고 사국(史局)에 글을 보내어 그가 허물을 뉘우치지 않은 형상을 밝혔으니, 윤선거는 예전대로 악인(惡人)에 아부하여 절개(節槪)를 잃은 사람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그를 의심하고 배척한 것은 바로 유학(儒學)과 세도(世道)를 위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윤증이 그 아비를 허물이 없는 곳에 두려고 하다가 도리어 악(惡)을 드러내는 결과를 면치 못하였으니, 이미 자식이 된 도리를 잃었는 데도 끝에 가서는 곧 만고(萬古) 흉역(凶逆)의 죄목을 모아서 40년 동안 아버지처럼 섬겨오던 곳에 씌우고는 스스로 그 자신을 탕왕(湯王)·무왕(武王)의 일에 견주었으니, 그가 패륜(悖倫)·난상(亂常)한 것이 이미 여지(餘地)없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절반이나 되는 나라 사람들이 그 당에 들어가자 한 번 전환시켜 갑술년1427)  에 이르러서는 역적을 비호하는 사람이 되었고, 두 번 전환시켜 병신년1428)  에 이르러서는 군부(君父)를 원망하고 해독(害毒)하는 무리가 되었으며, 세 번 전환시켜 신축년1429)  ·임인년1430)  에 이르러서는 성궁(聖躬)을 무함하고 핍박하며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모의하는 적(賊)이 되었으니, 대개 그 근본(根本)과 연원(淵源)은 절로 내력(來歷)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군주를 업신여긴 적(賊)은 모두가 지난날 스승을 배반한 무리들이니, 또한 그 이치와 형편이 스스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세히 진언(進言)한 것을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그러나 한 편(篇)의 뜻이 시사(時事)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였다.

 

임피(臨陂) 창고의 쌀 5천 석(石)을 제주(濟州)에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목사(牧使) 한범석(韓範錫)의 장청(狀請)에 따른 것이다.

 

선혜청(宣惠廳)에 명하여 영남(嶺南) 전선(戰船)의 별향미(別餉米) 1만 석(石)을 가져와 쓰게 하였다. 이때 선혜청의 경비가 부족하였으므로 선혜청 당상(堂上) 홍치중(洪致中)이 주청(奏請)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11월 13일 정미

직강(直講) 한주(韓澍)가 상소하였는데, 그 조목(條目)이 여섯이 있었으니, ‘1. 성학(聖學)에 힘쓰는 것 2. 하늘을 감응시켜 재해(災害)를 멈추게 하는 것 3. 조정(朝廷)을 바로잡는 것 4. 임금과 신하가 서로 믿게 하는 것 5.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 6. 용도(用度)를 절약하여 백성을 구휼(救恤)하는 것’ 이었다. 또 말하기를,
"과천(果川) 땅에는 조태구(趙泰耉)의 서원(書院)을 짓고, 홍주(洪州) 땅에는 이세귀(李世龜)의 서원을 짓는데, 인근(隣近)의 수령(守令)들이 위세(威勢)에 겁을 내어 군정(軍丁)을 허급(許給)하고 역사를 감독할 때에는 회초리로 치는 형벌이 낭자(狼藉)하여 원성(冤聲)이 하늘에 사무치며, 양정(良丁)을 모집(募集)하여 원생(院生)으로 만드니, 기세(氣勢)가 미치는 곳에 사람들이 영(令)을 어기지 못합니다. 조태구는 자신이 악역(惡逆)에 범하여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었고, 이세귀는 배우지 않아 무식해서 늘 음관(蔭官)에서 선발되었으니, 보고 듣는 이로서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유사(攸司)에게 명하셔서 그 서원을 훼철(毁撤)하고 그 원례(院隷)는 각기 본고을[本官]에 주어서 양역(良役)에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깊이 가상하게 여기니, 유념(留念)하지 않겠는가? 두 서원의 일은 창건(創建)한 뜻을 알 수가 없으므로 해조(該曹)에 물어보고 마땅히 처리하겠다."
하였는데, 그 뒤에 드디어 그 서원을 훼철하였다.

 

이유(李瑜)를 헌납(獻納)으로, 민응수(閔應洙)를 정언(正言)으로, 이재(李縡)를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조관빈(趙觀彬)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삼았다.

 

11월 14일 무신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암행 어사(暗行御史) 박사성(朴師聖)·윤심형(尹心衡)을 나누어 보내서 여러 도(道)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을 실록 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 삼았다.

 

11월 15일 기유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칙사(勅使)를 맞이하고, 궁궐에 돌아와서 전정(殿庭)에서 예(禮)를 행하였으며, 인정전(仁政殿)에서 칙사를 접견(接見)하였다. 이날 왕세자(王世子)가 책봉(冊封)을 받고 전정에서 예(禮)를 행하였는데, 대체로 어린 나이에 있으므로 칙사에게 교영(郊迎)하는 예(禮)는 덜어버렸으며, 예를 행할 때에도 또한 후사배(後四拜)의 절차를 덜어 버릴 것을 허락하였는데, 임금이 ‘우리 나라는 예의(禮義)의 나라로 중국(中國)에 알려졌는데, 나는 절을 하는데도 세자(世子)가 절을 하지 않는다면 매우 옳지 못하다.’ 하므로, 드디어 전후(前後)의 사배(四拜)를 행하였다.

 

성진령(成震齡)·정광제(鄭匡濟)를 장령(掌令)으로, 윤섭(尹涉)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1월 16일 경술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동하여 칙사(勅使)를 접견(接見)하고 인하여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신사철(申思喆)이 아뢰기를,
"칙사(勅使)가 세자(世子)를 보고는 떠들썩하게 칭찬하면서 역관[譯舌]에게 말하기를, ‘세자가 비록 중국에 있을지라도 비교될 만한 사람이 없으니, 만약 돌아가서 황제(皇帝)에게 말을 하면 반드시 내려주는 물품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칙서를 받은 뒤에 사면(赦免)을 반포하였으니,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한다. 중리(重離)1431)  가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위호(位號)을 일찍이 저사(儲嗣)에게 정하고, 현책(顯冊)에 은총을 소진(疏陳)하니 사신(使臣)이 영광스럽게 하황(遐荒)1432)  에 왕림(枉臨)하였다. 같이 기뻐함을 나타내어 부고(敷告)를 펴는 것이니, 생각건대 다만 방기(邦基)를 보수(保守)하는 도리는 진실로 주기(主器)1433)  를 부탁하는 이의 현명함에 힘입는다. 하늘이 우리 국가를 돌보고 도우셔서 이미 그 조윤(祚胤)1434)  을 영구히 내려 주었으니, 묘궁(眇躬)이 그 명(命)을 새로 시행하여 원량(元良)1435)  을 빨리 세워야 마땅하다. 다만 효(孝)와 경(敬)은 바로 나서부터 아는 것이고, 생각건대 총명(聰明)함은 대체로 자득(自得)에 연유하였다. 덕성(德性)이 날로 향상(向上)되니 학문(學問)은 제시(提撕)1436)  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고, 인성(仁聲)은 일찍이 드러나니 명망(名望)이 이미 빛나는 윤기(潤氣)에 맞추어졌다. 국본(國本)을 잠시라도 비워둘 수가 없으니 원대한 경영의 계획을 넓혀나가는 것이며, 봉전(封典)을 감히 스스로 독차지할 수가 없으니 이에 중국에 들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곡진히 생각하는 성대한 뜻이 얼마나 다행한가? 빨리 허락하는 융성한 은혜로 특별히 내리셨다. 거듭 주는 의장(儀章)을 따르니 광영(光榮)이 널리 덮었으며, 중국의 칙사가 높고 낮은 곳을 지나 왕림하였으니 도와서 감싸줌이 더욱 부지런하였다. 금채(錦綵)의 호종(扈從)이 빛나니 상자에 있던 진품(珍品)을 반사(頒賜)한 것이고, 왕음(王音)을 발표하니 아름다운 명이 함(函)을 여는 데서 솟아난다. 총령(寵靈)이 미치는 곳엔 중외(中外)가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상서와 복이 함께 모이니 이미 진질(疹疾)의 쾌안(夬安)한 기쁨을 맞이하였고, 전례(典禮)가 높았으니 다시 종묘(宗廟)가 더욱 견고하여짐을 보겠다. 그런 까닭으로 하자(瑕疵)와 더러운 때를 말끔이 씻어주어 크나큰 나라에서 함께 살게 하는 것이다. 본월(本月) 16일 새벽 이전에 잡범 사죄(雜犯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죄를 없앤다. 아! 큰 계획은 영원히 전하여 영장(靈長)의 복을 함께 누릴 것이며 화락한 덕택은 널리 미쳐서 바로 태평한 시기에 속할 것이다. 때문에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마땅히 죄다 알 것이라 생각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의현(李宜顯)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65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註 1431] 중리(重離) : 해 둘을 겹친것을 상징함.[註 1432] 하황(遐荒) : 먼 지방.[註 1433] 주기(主器) : 왕세자를 이르는 말.[註 1434] 조윤(祚胤) : 자손(子孫).[註 1435] 원량(元良) : 왕세자.[註 1436] 제시(提撕) : 가르쳐 인도함.

 

예조 참의(禮曹參議) 조문명(趙文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삼가 듣건대 지난날 연중(筵中)에서 신의 사소(辭疏) 가운데 ‘파붕당(破朋黨)’ 이란 세 글자를 가지고 비난하여 헐뜯으면서 의도가 있다는 데로 돌린 바가 있다고 하였는데, 신이 무슨 뜻이 있었겠습니까? 붕당을 타파한 뒤에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한다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만약 그 붕당을 타파하는 절목(節目)을 말하지 않았다면 상소는 바로 사직소로써 다만 신의 거취(去就)에 따라 말한 까닭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곧 타파하여야 할 계책을 말하지 않은 이유로써 배척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 이는 신의 말이 아니고 실은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말입니다. 박세채가 갑술년1437)  의 융성한 시대를 당하여서도 오히려 붕당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을 제일의 급무(急務)로 삼았었는데, 더구나 세도(世道)는 더욱 저하(低下)되어가고 당화(黨禍)는 더욱 맹렬(猛烈)하여지니 진실로 진심(眞心)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이런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선정(先正)이 능히 이전에 행하지 못했는데도 신이 또 이제와서 망령되게 말을 하였으니, 그 계획을 세운 것이 너무 오활(迂濶)한 것입니다. 빨리 신의 직명(職名)을 갈아 주시면 아주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지난날 상소를 남들은 모두 의도가 있다고 하나 나는 의도가 없다고 하였다. 그대의 지키는 것은 내가 전에도 옳다고 여겼다."
하였다.

 

11월 18일 임자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 제사를 지냈으니, 동지(冬至)였기 때문이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칙사(勅使)가 나올 때에 만약 절일(節日)을 만난다면 으레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습니다. 오늘 동지(冬至)는 마침 칙사가 서울에 들어온 뒤에 있게 되었습니다. 순치(順治)1438) 무술년1439)  에 정조 칙사(正朝勅使)가 관사(館舍)에 있을 때에 도감(都監)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주상(主上)께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전정(殿庭)에서 망궐례를 행하였고, 칙사는 다만 도감(都監)의 관원만 거느리고 관소(館所)에서 행례(行禮)하는 일이 사리(事理)에 맞았는데도 곧바로 승정원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전정(殿庭)에서 권정례(權停禮)1440)  로써 행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이 규례에 의거하여 행해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차자(箚子)를 올려 총재(摠裁)의 직임(職任)을 해면(解免)해 주기를 원하고 인하여 천토(天討)를 빨리 행할 것과 우상(右相)을 돈소(敦召)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조문명(趙文命)의 상소에서 신(臣)이 일전(日前)에 연석(筵席)에서 주달(奏達)한 것을 나오기 어렵다는 단서로 삼았습니다. 대개 신이 연석(筵席)의 아룀에서 ‘군주(君主)는 반드시 먼저 현사(賢邪)를 분변하고 시비(是非)를 밝히면 붕당(朋黨)은 타파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타파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먼저 붕당을 타파하는 것에 의도가 있다면 ‘당(黨)’이란 한 글자가 마음속에 가로질러 붙어서 상하(上下)가 의심하고 시기하며 정지(情志)가 서로 막혀서 이미 붕당을 타파할 수 없게 되고 붕당은 더욱 고질이 될 것이니, 이러한 뜻으로써 성덕(聖德)을 진계(陳戒)하였을 뿐입니다. 어찌 일찍이 조문명에게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11월 19일 계축

달이 헌원(軒轅) 좌각성(左角星)으로 들어갔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한계진(韓啓震)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이삼(李森) 등에게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하자는 계달(啓達)을 꺼내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정지(停止)된 것을 다시 계달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민응수(閔應洙)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또 이삼(李森) 등에게 국청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하자는 계달을 꺼내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치중(洪致中)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도빈(趙道彬)을 판의금(判義禁)으로, 홍중우(洪重禹)·이집(李潗)을 승지(承旨)로, 서종섭(徐宗燮)을 필선(弼善)으로 삼고, 권업(權𢢜)을 발탁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켜서 곧 반송사(伴送使)에 차임(差任)시켰다.

 

경창미(京倉米) 4천 석(石)을 운반하여 제주도(濟州島)를 진휼(賑恤)하라고 명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명홍(柳命弘)이 인천 부사(仁川府使) 정혁선(鄭赫先)을 계달(啓達)하여 파직(罷職)시켰다. 정혁선은 관직(官職)에 있으면서 엄격하고 혹독하여 관리(官吏)가 모두 도망치므로 정혁선도 이로 인하여 관직을 버렸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 계사(啓辭)를 보고 하교(下敎)하기를,
"나라의 기강(紀綱)이 헤이하여져서 간리(奸吏)가 함부로 날뛴다. 지난날 대간의 상소에서 반드시 이에 연유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나, 교활한 아전 때문에 관장(官長)을 탄핵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대각(臺閣)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정혁선은 파직시키지 말고 간리로서 맨먼저 창도(倡導)한 자를 엄중히 형벌하여 정배(定配)할 것을 명하였다.

 

11월 20일 갑인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고, 달이 태미(太微) 서원(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성로(朴聖輅)를 승지로 삼았다.

 

대사헌(大司憲) 이교악(李喬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가만히 보건대, 전하의 말씀에 나오는 것이 혹은 자중(自重)하심이 모자라고 비지(批旨)의 내용에는 또한 과중(過中)한 점이 있습니다. 그저께 지평(持平) 한계진(韓啓震)이 진계(陳戒)한 말은 마땅히 채택하여 받아들이셔야 할 것인데 심지어는 미안한 하교까지 내리시고, 또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계(狀啓)에 대한 비답에는 더욱 감히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체 인천(仁川)의 관속(官屬)이 죄다 도망하여 흩어진 것을 성상(聖上)께서 특별히 형신(刑訊)하여 정배(定配)할 것을 명하시니 대체로 사나운 아전을 징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다만 전일의 정언(正言) 임주국(林柱國)이 들은 대로 논핵(論劾)한 것은 대간의 체모로써 헤아린다면 적당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대간을 꺾는 데 조금도 어려워하시는 마음을 두지 않으시니, 아! 한 명의 수령이 탄핵을 받아 파직(罷職)되는 것이 무슨 관계(關係)가 있기에 성교(聖敎)의 엄중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은 적이 이것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사(批辭)로 인하여 면계(勉戒)한 것은 말한 것이 매우 마땅함을 얻었으니,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하였다.

 

11월 21일 을묘

임금이 친히 칙사(勅使)를 모화관(慕華館)에 보내면서 다례(茶禮)를 베풀고 파하였다.

 

장령(掌令) 정광제(鄭匡濟)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삼남(三南) 지방의 재결(災結)이 대부분 수령(守令)의 사사주머니로 돌아가니, 청컨대 관찰사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과죄(科罪)하고 재결(災結)을 추고(推考)하여 캐어내서 황정(荒政)을 돕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위훈(僞勳)에 녹권(錄券)할 때에 여러 사람들이 공천(公賤)을 모집(慕集)하여 값을 받고 속신(贖身)1441)   시켰다가, 훈신(勳臣)에서 삭제된 뒤에는 공천을 다시 도로 사역(使役)시키면서도 본가(本價)는 마침내 찾아내어 주지 않으니, 청컨대 찾아내어 주도록 신칙(申飭)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재결(災結)은 관찰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알리되, 장률(贓律)로써 시행하고 소말(疏末)의 일은 받은 사람에게 주도록 엄중히 신칙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여 정승의 직임을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궁음(窮陰)1442)  의 아래 한 줄기의 양기(陽氣)가 다시 살아나서 만물(萬物)을 생장(生長)시키는 마음이 이로부터 비로소 싹이 트게 되니, 《주역(周易)》에 이른바 ‘천지(天地)의 마음을 다시 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천지(天地)의 정기(正氣)를 받아서 나게 되니 그 선단(善端)이 발현(發見)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진실로 능히 넓혀 채워나가면 인(仁)을 이루 다 쓸 수가 없이 될 것입니다. 만약 본심(本心)의 전체(全體)에서 나오지 않거나 혹은 계교(計較)·영탁(營度)의 사심(私心)을 면치 못한다면 천리(天理)의 공심(公心)이 못됩니다. 인(仁)은 사덕(四德)1443)  의 첫째가 되지마는, 공평하지 못하면 행할 수가 없으니, 지금 전하께서 사소(私少)한 은혜(恩惠)로써 인(仁)이 되는 줄로 아시고 기구(崎嶇)하게 마음을 써서 지치(至治)를 도야(陶冶)시키려고 하신다면, 전하의 마음은 이미 그 대공 지정(大公至正)의 도리를 잃은 것이며, 수많은 사람의 똑같이 말하는 여론(輿論)을 어기고 삼사(三司)에서 간절히 간(諫)하는 공의(公議)를 거절하시니, 신은 적이 의혹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돈면(敦勉)하였다.

 

강화부(江華府)에서 천둥이 일어났다.

 

11월 22일 병진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3일 정사

그대로 초복(初覆)1444)  을 행하였으니, 문안(文案)이 호번(浩繁)한 이유로써 어제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양산(梁山)에 사는 사람을 죽인 죄인(罪人) 박태순(朴泰純)의 사건에 대해 임금이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조사해 밝힐 것을 명하였다. 대개 박태순이 아비의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 하니, 향전(鄕戰)1445)  에서 그의 지친(至親)으로 좌수(座首)가 된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상세히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성진령(成震齡)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역신(逆臣) 김일경(金一鏡)의 아들을 노륙(孥戮)시키고 재산을 적몰(籍沒)하는 일에 이르러 영돈녕(領敦寧) 어유귀(魚有龜)가 말하기를,
"역신 김일경은 전하에게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을 마음을 품고 이미 대역 부도(大逆不道)한 짓을 하고, 선왕조(先王朝)에 있어 말로써 공동 협박(恐動脅迫)하는 일과 모롱(侮弄)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것은 선왕(先王)의 역신(逆臣)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선왕의 말씀을 빌려서 숙종(肅宗)을 저훼(詆毁)하는 계획을 하니, 이것이 어찌 인신(人臣)으로서 할 짓이겠습니까? 세 조정에 역신(逆臣)이 되었는데도 그 아들을 주륙(誅戮)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下問)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역신(逆臣) 김일경의 죄악(罪惡)은 참으로 크니, 마땅히 노륙(孥戮)하라는 청을 따라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계달(啓達)에 따랐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민응수(閔應洙)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어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아들을 노륙(孥戮)하자는 청은 실제 응당 행해야 할 형벌인데도, 동은군(東恩君) 부(榑)는 오늘 입시(入侍)하여 대소 옥안(大小獄案)에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유독 이 일로서 신문(訊問)하는 아래에서 종신(宗臣)을 핑계대어 대답하지 않고 물러갔으니, 청컨대 파직(罷職)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파직(罷職)은 지나치니,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감시회시(監試會試)에 함부로 들어오는 유생(儒生)은 변방의 먼 곳에 충군(充軍)하고 사전(赦前)을 가리지 말 것을 명하였다. 이때에 함부로 들어온 유생이 형조(刑曹)에 수금(囚禁)되어 자복(自服)을 받은 일이 있는데, 초시(初試)에 함부로 들어온 자는 형률(刑律)에 수군(水軍)에 충정(充定)한다는 글이 있으나 회시(會試)에 함부로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정(定)한 형률이 없으므로, 형조 판서(刑曹判書) 홍치중(洪致中)이 품주(稟奏)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

 

11월 24일 무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서종급(徐宗伋)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성첩(城堞)이 비록 견고(堅固)하더라도 만약 병란(兵亂)이 있게 되면 형세가 반드시 흙이 무너지듯 할 것이니, 인화(人和)가 실제로 오늘의 급무(急務)입니다."
하고, 지경연(知經筵) 홍치중(洪致中)은 말하기를,
"우리 조정에서 육진(六鎭)1446)  을 설치(設置)하였는데, 영고탑(寧古塔)에는 어염(魚鹽)의 이익이 없으므로, 육진이 아니었다면 충족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육진(六鎭)은 반드시 지키기 어려운 근심이 있지마는,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영상(領相)은 오로지 국사(國事)를 관장(管掌)하고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은 각각 서북 체찰사(西北體察使)를 겸임(兼任)하고 있는데, 지략(知略)이 있는 자를 잘 뽑아서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으로 차송(差送)하는 것이 오늘의 제일에 힘써야 될 일입니다. 지리(地利)가 비록 인화(人和)만은 못하다고 하지마는 또한 어찌 마음을 쓰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으니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왕대비(王大妃)에게 드릴 삭선(朔膳)1447)   값의 쌀 중에서 병오년1448)  ·정미년1449)   양년조(兩年條) 1천여 석(石)을 도감(都監)에 내어 주어 종묘(宗廟)를 수개(修改)하는 역사에 보태도록 하고, 도감에서 가져다 쓸 해조(該曹)의 물건은 진자(賑資)할 때에 쓸 것을 명하였는데, 임금이 자교(慈敎)를 받들어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지평(持平) 한계진(韓啓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의 여러 적(賊)이 종사(宗社)를 모위(謀危)하고 충현(忠賢)을 참벌(斬伐)한 것은 저궁(儲宮)을 세워 대리(代理)한다는 일을 역적(逆賊)으로 여기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피차(彼此)의 충신(忠臣)·역적(逆賊)의 구분은 또한 이 한 조항에 있습니다. 옛날 우리 인종 대왕(仁宗大王)께서 사복(嗣服)1450)   하시던 처음에 병환이 있어 오래도록 정사 보살피는 것을 비워두어야 했기 때문에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이 마땅히 일찍이 대군(大君)을 세워 세제(世弟)로 책봉해야 한다고 했는데, 선정신 이황(李滉)이 그 말을 이언적(李彦迪)의 행장(行狀)에 특별히 썼던 것입니다. 더구나 선대왕(先大王)께서는 병환이 이미 오래된데다가 사속(嗣屬)의 희망이 끊긴 것은 국인(國人)이 다 아는 바였으니, 저궁(儲宮)을 세울 계책을 어찌 그만두겠습니까? 송(宋)나라 효종(孝宗)은 태자(太子)에게 명하여 국사(國事)에 참여하여 결단하게 하자 주자(朱子)가 봉사(封事)를 올려 말하기를, ‘성려(聖慮)의 깊은 것을 볼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선대왕께서는 병환으로 버티기가 어려워 심지어 ‘측근의 신하로서 해야 옳을 것인가, 세제(世弟)로 해야 옳을 것인가?’라고까지 하셨으니, 대리(代理)의 시키는 일을 어찌 그만두겠습니까?
그런데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역신(逆臣)이 된다고 한 이유는 어찌 변서(變書)나 흉소(凶疏)와 교문(敎文)을 대신 찬술(撰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5적(五賊)은 도리어 공(功)으로 삼아 고관(高官)·미작(美爵)으로 그 권세를 펼치고 단서 철권(丹書鐵券)으로 그 공훈(功勳)을 기록하였으며, 김일경과 목호룡이 뜻을 얻은 뒤에는 전하께서 두 차례나 합문(閤門)에 나가려고 하시다가 무한한 모욕을 받으시고 한 떼의 착한 무리는 머리를 나란히 하여 죽음에 나가게 되었으니, 모두가 전하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충민공(忠愍公) 신(臣) 이건명(李健命)에 이르러서는 유독 사신(使臣) 일을 준청(準請)받은 것 때문에 화를 입은 것이 더욱 혹독하여 형(刑)을 받던 날에 구경한 사람이 친척처럼 슬퍼했고, 이내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검은 안개가 땅을 덮는 이변(異變)이 있었으며, 마침내 두 아들까지 목숨을 같이하여 함께 길옆에 묻혀있어 잇달은 세 무덤을 보고 길가는 사람이 우는 얼굴을 가렸으며, 조성복(趙聖復)의 죽음에 이르러 더욱 저 무리의 정상(情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비(妖婢)가 경폐(徑斃)1451)  하게 되자 인심(人心)이 함께 분개하였는데, 그 멸구(滅口)를 다행으로 여겨 안문(按問)하지 않았습니다.
조성집(趙聖集)은 그 아우가 극형(極刑)을 받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로 하여금 자진(自盡)1452)  하게 하였으니, 그 정상이 슬프기만 합니다. 이미 그 아우를 죽이고 또 그 형을 죽였으니, 그 마음을 추구(推究)하여 본다면 전하에게 반역(叛逆)하는 자는 그들이 사랑하는 바요 전하에게 충성하는 자는 그들이 미워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미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내려 주며 단서(丹書)1453)  에 이름을 깨끗이 지워버렸은 즉, 저 몸소 살육(殺戮)을 행한 사람이 편안히 앉아서 배부르게 먹고 있다면, 황천(黃泉)의 원기(冤氣)는 더욱 뭉쳐질 것이요 신(神)과 사람의 울분(鬱憤)은 더욱 격렬하여질 것이니, 삼가 원하건대 과단성(果斷性) 있는 정치를 행하여 왕법(王法)을 시원스럽게 바로잡으소서.
아! 오늘날 난적(亂賊)의 방자한 행동은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윤선거가 포로(捕虜)가 되어 구차하게 모면하였으니 실절(失節)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적신(賊臣) 윤휴(尹鑴)와 서로 좋아하였으니 악인(惡人)에게 아부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쳤다 하고, 윤휴에게 절교(絶交)하지도 않았으면서 스스로 윤휴에게 절교하였다고 하였으니, 심술(心術)의 바르지 못한 것을 더욱 도피(逃避)할 수가 없습니다. 사직소(辭職疏)에 인용한 강화도(江華島) 사건에 이르러서도 무엇이 효종(孝宗)에게 관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곧 말하기를, ‘오늘은 말할 수 있지만 다른 날은 감히 입밖에 낼 수 없다.’고 하면서 은연중 더러운 자신을 효종의 처신(處身)한 의리에 겨누면서 억지로 남의 입을 다물게 하면서도 스스로 효종을 속이고 핍박하는 결과가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한 것은 묘문(墓文)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나 묘문(墓文)이 자기 마음에 만족하지 않은 것은 스승을 배반할 단서가 되지 못하니, 끝에 가서는 곧 만고 흉역(萬古凶逆)의 죄목(罪目)을 모아 아버지처럼 섬겨야 하는 데에다 능멸(凌蔑)하였는데도 도리어 그 형세가 자립(自立)할 수 없었던 까닭에 오히려 문인(門人)과 함장(函丈)1454)  의 칭호는 폐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조지겸(趙持謙)·한태동(韓泰東)이 소란을 일으키고 조정의 의논이 서로 나누어지게 되자, 평일에 선정(先正)에게 죄를 얻은 자와 무릇 시기를 틈타 이익을 노리는 무리들이 고슴도치 털같이 일어나고 고기 비늘처럼 모여서 윤증을 추대하여 괴수(魁首)로 삼았으니, 한 번 옮겨지고 두 번 옮겨지면 사단(事端)이 잇따라 일어나고, 한쪽이 나아가고 한쪽이 물러가면 원수와 원망이 더욱 깊어지다가 조태구(趙泰耉)의 무리들이 저궁(儲宮)을 세우는 일에 이의(異議)를 하고 대리(代理)하는 것을 강력히 저지하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게 되었으니, 그 근본을 구명(究明)한다면 어찌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의 한 짓이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숙종(肅宗)께서 그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한 것은 천감(天鑑)이 매우 밝았던 것이고 성려(聖慮)가 심원(深遠)하였던 것인데, 저들의 흉악한 무리는 숙종의 유교(遺敎)를 안중(眼中)에 두지 않고서 숙종께서 처분(處分)하신 것을 마음대로 고쳐가며 그들에게 관작을 회복시키고도 조금도 의문을 가짐이 없었으니, 성상(聖上)께서 계술(繼述)하시는 도리에 있어 어찌 마땅히 구습(舊習)에 따라 행하면서 고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윤선거 부자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명하여 유학(儒學)을 부식(扶植)하고 세도(世道)를 보위(保衛)하게 하소서.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 것인데,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은 곧 명의(名義)의 죄인(罪人)이요 유학의 난적(亂賊)입니다. 남구만은 갑술년1455) 경화(更化)1456)  할 때를 당하여 곧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복위(復位)시키는 것으로 기뻐하고 〈장 희빈(張禧嬪)을〉강위(降位)시키는 것을 슬퍼하는 오늘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어찌 기사년1457)   여러 신하들의 마음과 다르겠습니까?’라는 등의 말로써 함부로 진달(陳達)하였는데, 당일 성고(聖考)의 처분이 공명 정대(公明正大)하여 팔방(八方)의 신민(臣民)들이 고무(鼓舞)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그는 유독 슬프게 여겼으며, 기사년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국모(國母)가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남구만은 스스로 그 마음에 다를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남구만은 문득 혼자 국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윤지완에 이르러서는 본래 무의(無義)·무식(無識)한 사람으로서 정유년1458)  의 한 통의 상소에 마음이 다 드러났으니, 조정 신하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하고 남의 집안과 나라에 재앙을 끼칠 뜻이 소명(昭明)하여 가리울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성고(聖考)께서 백수 대신(白首大臣)으로서 조정을 괴란(壞亂)시킨다고 하교하셨으니, 그 깊이 미워하고 몹시 거절하신 뜻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석정은 국량(局量)이 작은 사람으로서 이에 감히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할 계획을 하여 《유편(類編)》이란 한 권의 책을 찬성(撰成)하고는 자사(子思)의 장구(章句)를 변란(變亂)시키고 주자(朱子)의 훈고(訓詁)를 개역(改易)시켜 놓았으니, 그가 경전(經傳)을 훼손(毁損)시키고 성인(聖人)을 무욕(誣辱)한 죄가 과연 어떠합니까? 또 삼가 생각건대, 옛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과 한둘의 동덕(同德)한 신하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가지고 토적 복수(討賊復讐)의 계책을 강구(講究)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천심(天心)이 돕지 않아 대업(大業)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최석정이 곧 감히 쓸데없는 말은 시행될 수 없다며 배척하고 고상한 논리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며 헐뜯었으니, 아! 어떻게 그 말의 패리(悖理)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저 세 사람은 살아서 이미 성고(聖考)에게 죄를 얻었는데, 죽어서 도리어 묘정(廟庭)에 배식(配食)되었으니, 도리(道理)로써 헤아려 보건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속히 개정(改正)하는 법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달(陳達)한 일은 끌어대어 비유한 것이 명백하니 시비(是非)를 결정하는데 통쾌하다고 할 수가 있겠으나, 윤선거(尹宣擧)의 일이나 두 신하를 배향(配享)하는 일은 이미 전일의 비지(批旨)에 유시(諭示)하였는데, 그대가 또 한 명의 신하를 논하였으니,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11월 25일 기미

삼사(三司) 【대사헌(大司憲) 이교악(李喬岳), 부응교(副應敎) 이현록(李顯祿), 장령(掌令) 정광제(鄭匡濟)·성진령(成震齡), 지평(持平) 한계진(韓啓震), 정언(正言) 민응수(閔應洙), 교리(校理) 이병태(李秉泰), 수찬(修撰) 권적(權𥛚)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이내 상세하게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이 일체 모두 아주 먼 변지(邊地)로 귀양 보내는 일과 정석삼(鄭錫三)을 특별히 석방하라고 명한 것을 정지하도록 청한 일은 정계(停啓)되었다.

 

이경열(李景說)과 신유익(愼惟益)을 귀양 보냈다. 대개 이경열 등은 대관(臺官)으로써 임인년1459) 사직단(社稷壇)에서 기우(祈雨)할 때에 어가(御駕) 앞에서 청대(請對)하였던 사람이다. 이보다 앞서 양사(兩司)에서 앞장서 창도(倡導)한 사람과 수참(隨參)한 사람을 일체 모두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낼 것을 발론(發論)하여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앞장서 창도한 자는 먼 곳에 귀양 보내고 수참한 자는 삭출(削黜)할 것을 명하였으나 양사(兩司)에서 간(諫)하기 때문에 찬출(竄黜)하는 형률은 모두 시행되지 못하고 여태까지 정계(停啓)되었던 것이며, 앞장서 창도한 자는 혹은 죄로써 사형(死刑)되고 혹은 다른 죄로써 귀양갔기 때문에 다만 이경열 등 두 사람을 귀양 보내고, 수참한 여러 사람은 또한 모두 먼저 다른 죄로 귀양갔으므로, 드디어 삭출(削黜)의 벌은 시행되지 않았다.

 

이기진(李箕鎭)·신방(申昉)을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으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의 아들을 연좌(緣坐)시켜 종[奴]으로 삼아, 죄인(罪人) 김정해(金正海)는 바야흐로 남해현(南海縣)에 있고 김영해(金寧海)는 바야흐로 강진현(康津縣)에 있으니, 청컨대 도사(都事)를 보내어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김영해가 비록 나이가 많다고 하나 한 번 대계(臺啓)를 허락하여 그 형제(兄弟)를 죽이는 것은 당초에 참작하여 처리한 뜻이 아니니,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로 보내어 종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6일 경신

석강(夕講)을 행하고 《맹자(孟子)》를 강독(講讀)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이병태(李秉泰)가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아버지가 부르면 대답하지 않고 곧 나가며, 임금이 부르면 거마(車馬)를 기다리지 않고 나가는 것이 신하와 아들이 평소 실행하는 경(敬)입니다. 우인(虞人)1460)  이 정(旌)으로 부르면 나가지 않는 것이나, 맹자(孟子)가 본디 조정에 나가려다가 왕명(王命)을 듣고는 실행(實行)하지 않은 것은 의리에 부합됨을 위한 것입니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서종급(徐宗伋)은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聖) 송시열(宋時烈)이 효종(孝宗) 때에 장령(掌令)으로서 부름을 받고 대궐(大闕)에 들어갔는데, 효종께서 마침 일이 있어 다음 아침에 입시(入侍)하게 하니, 송시열이 곧 대궐에서 내려와 진소(陳疏)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당시의 사람은 모두 ‘지나치다.’고 하였으나 유독 고(故) 상신(相臣) 김상헌(金尙憲)은 ‘옛날의 도리(道理)를 얻었다.’고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분주하게 받들어 순종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마시고,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는 것을 쉽게 여기는 선비를 취용(取用)하소서."
하니, 임금이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내수사(內需司)·어의궁(於義宮)·창의궁(彰義宮)의 쌀 6백 석(石)을 삼남(三南)에 나누어 주어 진자(賑資)에 보충(補充)할 것을 명하였다.

 

옥당(玉堂) 동벽(東壁)1461)  에 특진관(特進官)을 초계(抄啓)할 것을 명하였다. 옛날 규례에는 옥당 장관(玉堂長官)이 초계하였는데, 이때 장관은 없고 강연(講筵)은 잇따라 열어야 함에도 특진관은 인원이 모자랐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정광제(鄭匡濟)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자산 부사(慈山府使) 양헌익(楊憲益)은 나이가 이미 쇠모(衰耗)하여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기고 오로지 탐욕만을 일삼아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한정이 없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금오도(金鰲島)에 백성이 들어가 경작하도록 명하였으니,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의 계청(啓請)에 따른 것이다.

 

11월 27일 신유

임금이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임금이 문안(文案)을 상세히 열람(閱覽)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반드시 사형(死刑)하여야 할 가운데서도 살려낼 것을 구하는 방도를 두루 물어보아서 마침내 세 사형수(死刑囚)의 죄를 감하였다. 또 수령(守令)이 함부로 형벌을 하여 해독(害毒)을 끼치는 것을 지금부터는 반드시 토포사(討捕使)에게 보고한 뒤에 족장(足杖)1462)  을 적용할 것이며, 만약 보고하지 않고 함부로 이런 형벌을 사용하는 자는 감사(監司)로 하여금 먼저 파직(罷職)하고 뒤에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더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한계진(韓啓震)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감사 정배(減死定配)된 죄인(罪人) 최시대(崔始大)가 인형(印刑)을 위조(僞造)한 실상은 사증(詞證)이 이미 갖추어져 실정이 모두 드러났으니, 왕법(王法)으로 헤아려 보면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감사(減死)의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감사 정배(減死定配)된 죄인(罪人) 철주(哲周)가 인명(人命)을 치사(致死)하게 한 것과 지선(之先)이 인명(人命)을 찔러 죽인 것은 모두 이미 명백하게 환히 드러났으니, 결단코 술이 취하여 저지른 과실로 돌려서 용서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청컨대 두 죄인에게 감사 정배의 명을 도로 중지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유숭(兪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함흥 판관(咸興判官) 임적(任適)과 정평 부사(定平府使) 전운상(田雲祥)은 잘다스렸으니 체직(遞職)시켜 돌려보내기가 아깝고, 영흥 부사(永興府使) 임욱(任勗)은 큰 고을에 막 부임하여 유능한지 않은지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또한 마부(馬夫)나 말을 영송(迎送)하는 폐단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고, 또 삼수(三水)에 새로 온 부사(府使) 이침(李梫)의 전에 부임했을 때에 탐욕(貪慾)스러운 죄상을 논핵하면 그 직임을 갈아 주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세 고을의 수령(守令)은 그대로 유임시키고, 말단(末端)의 일에 대해서는 전일(前日)의 일로 이와 같이 맞아서 공격하니, 그것이 마땅한지를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강화부(江華府)에 천둥이 일어나고 번개가 쳤다.

 

11월 28일 임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前日)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민응수(閔應洙)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심준(沈埈)의 일은 아뢴 대로 따랐고, 【철산(鐵山)으로 귀양보냈다.】 동은군(東恩君) 부(榑)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대사간(大司諫) 홍우전(洪禹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금 이 군흉(群凶)의 정상(情狀)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건저(建儲)한 것을 찬탈(簒奪)한 것으로 몰아부쳤으니 역적(逆賊)이 아니겠습니까? 대리(代理)한 것을 추대(推戴)한 것으로 무함했으니, 그것이 역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이재(李縡)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의리(義理)가 상세히 갖추어진 것으로 인정하셨고, 또 한계진(韓啓震)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는 명백하고 통쾌한 것으로 권장하셨으니, 이것으로 살펴본다면 전하께서는 군흉(群凶)을 역적이 아니라고 여기지 않으시고, 또한 정신(廷臣)의 주청(奏請)을 옳은 것이 아니라고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삼사(三司)의 주청(奏請)을 윤허하셔서 난역(亂逆)으로 하여금 다 복주(伏誅)되게 하여 윤의(倫義)가 다시 밝아지게 하소서. 요즘 삼사(三司)의 가운데서 대간의 지위를 스스로 단념(斷念)한 것에 대해 신은 적이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 있습니다. 무릇 상피(相避)하는 규정은 스스로 한계가 있으니, 만약 그 죄가 악역(惡逆)에 관계된 자이면 비록 응당 인피(引避)할 수 있더라도 멸친(滅親)1463)  의 의리로 단속시켜 마땅히 그 인혐(引嫌)을 허락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족파(族波)가 소원(疏遠)하고 죄가 극률(極律)에 있는데도 참계(參啓)하려고 하지 않고 법을 굽혀 대직(臺職)을 사피(辭避)하니 일이 몹시 한심합니다. 마땅히 조사 해내어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정석삼(鄭錫三)을 특별히 석방하라는 명령이 문득 생각 밖에 나왔으므로 반한(反汗)1464)  의 청이 이미 여러 달을 지났는데도 한 번 허락하심을 여전히 아끼시니, 여러 신하들의 심정이 더욱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곧 듣건대 어제는 또 정계(停啓)되었다고 하니 사의(私意)는 점점 기세가 커지고 토죄(討罪)는 점점 느슨하게 되니, 정계(停啓)한 대관(臺官)은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신은 일찍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의 평생 심사(平生心事)를 의심하여 왔는데, 지난번에 두세 가지 일을 본 뒤로는 비로소 그가 역적에게 아첨하여 사술(詐術)을 행한 한 비부(鄙夫)로 허명(虛名)을 도둑질하여 얻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번 선왕조(先王朝)에서 사친(私親)을 숭봉(崇奉)하는 헌의(獻議)에 있어 상하(上下)의 뜻을 어기지 않으려고 힘을 써서 어의(語意)가 간교(奸巧)하고 정태(情態)가 서로 비호(庇護)했으니, 이것이 어찌 영화를 사양하고 세상을 버리는 자의 마땅히 할 짓이겠습니까? 견식이 있는 사람은 진실로 이미 침을 뱉고 꾸짖었습니다. 그런데도 작년 한 장의 상소에 스스로 그가 인피하여 물러가는 본말(本末)을 진달(陳達)하면서 이에 감히 스스로 명(明)나라 설선(薛瑄)1465)  이 조길상(曹吉祥)과 석형(石亨)이 용사(用事)한 일로1466)   인하여 기미를 보고 물러간 것에 비겼으니, 아! 또한 통탄스럽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최규서가 인피(引避)하여 물러갈 때는 바로 숙종(肅宗)의 전성(全盛)한 무렵으로 화리(化理)1467)  가 청명(淸明)하고 반항(班行)1468)  이 숙목(肅穆)하였는데, 최규서는 어떤 사람을 조길상이라 여기고 어떤 사람을 석형이라 여기고서 이러한 기미를 보고 조정을 떠난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조정의 신하를 조길상과 석형의 난역(亂逆)한 무리에다 몰아부치면서 슬그머니 자신을 설선(薛瑄)의 명철(明哲)한 데에 부비(附比)하였으니, 그가 또한 간교하고도 비참한 일입니다. 그리고 30년 동안 이미 물러나 있던 몸으로 지난 겨울에 갑자기 군함(軍銜)의 직책으로서 바야흐로 상직(相職)을 겸무하고 있던 날의 일을 들어와 사죄한 것은 무엇에 의거한 출처(出處)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뒤에 유봉휘(柳鳳輝)와 김일경(金一鏡)의 죄를 성토(聲討)하는 상소가 나오게 되자 머물기를 즐겨하지 않고 인산(因山)을 지나서는 바쁘게 먼저 하루밤 사이에 돌아갔으므로, 유봉휘와 김일경의 영달(榮達)과 실패(失敗)로써 그의 거취(去就)로 삼았으니, 거조(擧措)가 황란(慌亂)했습니다. 그 상소에 이른바 ‘장차 대행조(大行朝)를 어느 곳에 두려고 하느냐?’는 등의 말은 더욱 몹시 흉악하고 비참했으니, 그가 선류(善類)를 해치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할 계획을 하는 자에게 동정(同情)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땅히 엄중하게 배척과 거절을 가하여 충사(忠邪)를 분변하고 호오(好惡)를 밝히는 뜻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합계(合啓)한 일은 이미 연석(筵席)에서 유시(諭示)하였다. 이미 지친(至親)이 아닌데도 종시(終始) 회피(回避)를 하니 비록 지나친 데 관계가 되나, 파직(罷職)의 벌(罰)은 또한 지나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석삼(鄭錫三)의 일은 정계(停啓)한 것이 늦었다. 내가 봉조하(奉朝賀)를 대우하는 것은 그의 처신하는 의리를 아름답게 여겨서인데, 이처럼 더 한층 격렬한 의논은 내가 실로 괴롭게 여긴다."
하였다.

 

반촌(泮村)1469)  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진(晉)나라 태학생(太學生) 동양(董養), 당(唐)나라 태학생 하번(何蕃), 송(宋)나라 태학생 진동(陳東)·구양철(欧陽澈)과 본조(本朝)의 태학생 윤지술(尹志述)을 제향(祭享)하였다. 처음에 숙종(肅宗)이 하번(何蕃) 등을 제사지내 주라고 명하였고, 윤지술(尹志述)은 성균관(成均館)의 장의(掌議)로서 그 일을 주관하였으나, 일이 미처 이루어지기도 전에 숙종이 승하(昇遐)하니, 윤지술이 의견서(意見書)를 임금에게 올려, ‘숙종의 묘지(墓誌)와 행장(行狀)에는 마땅히 신사년1470)  의 일을 써야 한다.’고 말하다가 드디어 여러 간사한 사람에게서 죄를 씌워 죽인 바가 되었다. 이때에 와서 성균관 유생이 상소하여 선조(先朝)의 하교(下敎)에 따라 사당을 세우고 아울러 윤지술을 배식(配食)시킬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황귀하(黃龜河)를 우윤(右尹)으로, 정택하(鄭宅河)를 사간(司諫)으로, 신노(申魯)를 설서(說書)로, 이유(李瑜)를 양산(梁山)의 안옥 어사(按獄御史)로 삼았다.

 

11월 29일 계해

강원(江原)·경기(京畿)·황해(黃海)·충청(忠淸) 네 도(道)의 유생(儒生) 이집(李楫) 등이 상소하여 문간공(文簡公) 이희조(李喜朝)의 서원(書院)을 양주(楊州)의 영지동(靈芝洞)에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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