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갑자
임금이 몸소 경소전(敬昭殿)의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김영해(金寧海)를 절도(絶島)로 보내어 종[奴]으로 삼으라는 명을 도로 중지하고 그 전의 판부(判付)에 의거하여 빨리 노륙(孥戮)의 형률을 거행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재차 아뢰었으나, 또 따르지 않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정미년1471) 영녕전(永寧殿)을 옮겨 봉안(奉安)할 때에 주상(主上)으로부터 종묘(宗廟)에 나아가서 망묘(望廟)나 망전(望殿)의 예(禮)를 행하시고 인하여 신연(神輦)을 지영(祇迎)하는 절차를 행함이 있었으나, 지금은 국상(國喪)이 끝나지 않았으니, 주상께서는 변복(變服)하고 입묘(入廟)하는 예절이 없어도 되겠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이번의 수개(修改)하는 때를 당하여 지영(祗迎)이나 지송(祗送)을 어찌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신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의논하기를,
"주상께서 바야흐로 우복(憂服) 중에 계시니, 예절로서는 종묘(宗廟)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또 사위(嗣位)하신 뒤에 아직 알묘(謁廟)의 예절을 행하지 않았는데, 이제 만약 이안(移安)하는 한 절차로 인하여 갑자기 망묘(望廟)나 망전(望殿)의 예절을 행하신다면 더욱 미안할 것 같습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이안(移安)하는 날에 파자(把子)의 앞 다리[橋]에 막차(幕次)를 설치하고 신연(神輦)이 지나갈 때에 흑포(黑袍)를 입고 지송(祗送)의 절차를 행하시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예절(禮節)은 정리(情理)에서 나오는 것인데, 종묘(宗廟)의 각실(各室)을 장차 이안(移安)하면서 동가(動駕)하고서도 전배(展拜)하지 않는다면 정리(情理)에 있어 어떠하겠는가? 이로써 다시 문의(問議)하고, 또한 밖에 있는 대신(大臣)에게도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의논하기를,
"대체 무고(無故)한 때에 의리상 하는 예절을 행한다면 진실로 상정(常情)에 의심하는 바가 되겠으나, 만약 유사(有事)한 날로 인하여 전성(展省)의 의식을 거행한다면 정례(情禮)로 헤아려보아 무엇이 크게 어긋나는 것이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상중(喪中) 3년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다만 옛사람은 상중에 있을 때, 출입(出入)·거처(居處)·언어(言語)·음식(飮食)이 평상시와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종묘(宗廟)의 예절은 비록 폐지(廢止)되어도 유명(幽明)의 사이에 양쪽이 다 유감이 없는 것이다. 지금 사람은 상중에 있을 때, 출입·거처·음식과 평상시의 하던 것을 모두 폐지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이 한 가지 일만은 폐하고 있으니, 아마도 또한 미안한 점이 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졸곡(卒哭) 전에는 부득이 예절에 준(準)하여 또한 폐지하더라도 졸곡 후에는 《좌전(左傳)》의 두주(杜註)에 최묵(衰墨)을 사용하여 가묘(家廟)에 상사(常祀)한다는 말을 조금 모방하여도 되겠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살펴본다면 3년 안에 가묘(家廟)의 제사도 오히려 폐지하지 않는데 더구나 한때의 일로 인하여 전알(展謁)하지 못하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은 말하기를,
"묵최(墨衰)로 종군(從軍)한 자는 옛날에 있었지만, 묵최로 입묘(入廟)하는 예절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병진년1472) 에 인선 왕후(仁宣王后)1473) 의 상(喪)이 끝나고 부묘(祔廟)할 때에 숙종 대왕께서 바야흐로 우복(憂服) 중에 계시면서 입묘(入廟)하여 행례(行禮)하였으니, 이는 숙종께서 이미 인선 왕후의 상(喪)을 주관하였으므로, 상(喪)이 끝나서 부묘(祔廟)하는 예절을 몸소 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므로 오늘의 일과는 아주 다르니, 이 일을 끌어다 준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알묘(謁廟)를 행하기 전에 일로 인하여 입묘(入廟)하는 것은 아마도 예제(禮制)에 어긋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주자(朱子)가 의논한 것도 또한 방조(傍照)1474) 할 만하다. 또 종묘(宗廟)를 더 짓는 것은 실로 3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안(移安)하는 즈음에 전배(展拜)하지 않는다면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또 더구나 병진년에 부묘(祔廟)한 일은 비록 오늘의 일과는 다르다고 하나, 나는 다를 것이 없다고 여긴다. 처음에 묘전(廟殿)에 배알(拜謁)한 뒤에 그대로 지영(祗迎)하고 어가(御駕)를 수행(隨行)하여 경덕궁(慶德宮)에 이르러 봉안(奉安)한 뒤에 또한 전알(展謁)하고, 환안(還安)하였을 때에도 또한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정리는 비록 한정이 없으나 예절은 절차가 있는 것이다. 대신(大臣)이 진달한 것은 정리와 예절을 절충한 것으로 아주 그 타당함을 얻었는데 임금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배제하고 반드시 전알의 예절을 행하였으니, 효(孝)와 경(敬)에 지나쳐 중제(中制)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후왕(後王)의 법이 될 수 없다.
12월 2일 을축
사직(司直) 홍만조(洪萬朝)가 졸(卒)하였다. 홍만조는 비록 착한 무리와는 배치(背馳)가 되었으나 8도(道)를 역임(歷任)하면서 다른 하자[疵類]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간혹 이 때문에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12월 3일 병인
대신(大臣)과 2품(品) 이상의 관원이 청대(請對)하여 여러 적(賊)을 마땅히 주살(誅殺)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진달(陳達)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하(疏下) 5적(五賊)의 계달(啓達)에 이르러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상소에 참여된 사람을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구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자애심이 많아 살생(殺生)하기를 꺼리는 덕(德)으로써 한꺼번에 다 주살하려고 하지 않으신다면 마땅히 구별하여 주살하셔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상소에 같이 참여하였다면 그들의 마음이 어찌 다르겠는가?"
하였다. 부응교(副應敎) 이현록(李顯祿)이 말하기를,
"명화적(明火賊)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능히 혼자서는 할 수 없으므로 또한 반드시 당(黨)을 결합(結合)하여 도둑질을 하는데, 더구나 역적질이 어찌 혼자서 처리할 일이겠습니까? 저 기한(飢寒)이 몸에 절박함을 견디지 못하여 도적질을 한 자도 오히려 용서해 주지 않고 다 죽이고야 마는데, 어찌 한꺼번에 5명을 주살하는 일을 어렵게 여기면서 왕법(王法)을 굽히시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유(比喩)한 말이 좋은데, 내가 어찌 이를 따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정택하(鄭宅河)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적(逆賊)에게 연좌(緣坐)되는 것은 곧 변경할 수 없는 법입니다.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은 이미 대역(大逆)으로서 노적(孥籍)의 법을 거행하였는데, 유독 김영해(金寧海)에게만 특별히 용서를 베푸시니 법례(法例)로써 헤아려 보건대 결단코 이런 이치는 없습니다. 연한(年限)이 이미 찼으나 왕법(王法)이 지엄(至嚴)하니, 청컨대 김영해에게 사형(死刑)을 감하여 종[奴]으로 삼으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빨리 유사(有司)로 하여금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통하게 죽은 대신(大臣) 조태채(趙泰采)에게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통하게 죽은 4대신에게 신원(伸冤)하여 관직(官職)을 회복시킬 때에 천장(遷葬)할 때에는 장례(葬禮)에 수용(需用)되는 것을 주라는 명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태채가 천장(遷葬)되었기에 마땅히 다만 장례의 수용되는 것만을 주었는데,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원통하게 죽은 대신에 당초에는 이미 예장을 못하였으나, 천장할 때라도 예장을 허급(許給)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으로써 주달(奏達)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봉사(奉事) 서명훈(徐命勳)이 임인년1475) 위훈(僞勳)의 하례(賀禮)에 참여하지 않고, 무신(武臣) 최명주(崔命柱)와 김상두(金相斗)가 김성(金姓) 궁인(宮人)에게 조사할 것을 청한 상소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출륙(出六)되지 않은 자는 출륙시키고 이미 출륙된 자는 승진시켜 서용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대신(大臣)의 연주(筵奏)를 따른 것이다.
중신(重臣)을 보내어 강화도(江華島)에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를 설시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4일 정묘
무지개가 나타났다.
좌의정(左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첫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은 내리지 않고 특별히 전교(傳敎)를 내려 힘쓰라는 말이 지극하였다.
이성룡(李聖龍)을 승지(承旨)로, 서종섭(徐宗燮)을 집의(執義)로, 이단장(李端章)을 필선(弼善)으로, 한덕전(韓德全)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12월 5일 무진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여 사면(辭免)을 원하였으나,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민진원이 2품(品)의 관원과 삼사(三司)를 거느리고 여러 번 토적(討賊)의 의리를 청하면서 심지어 거취(去就)로써 간(諫)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정승의 직책을 사직하게 되었다.
12월 6일 기사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병조 정랑(兵曹正郞) 한이조(韓頤朝)를 보내어 충청좌도(忠淸左道)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임금이 몸소 문신(文臣)에게 전경강(專經講)1476) 을 행하였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또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辭職)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밤에 삼가 비답을 받들고 촛불을 밝히고서 삼가 읽어 보니, 글자마다 눈물이 났습니다. 신이 숙종(肅宗)께 복종하여 섬겨온 지가 자못 30년이나 되었습니다. 삼가 숙종께서 정치하신 것을 보면 먼저 힘쓰신 것은 명의(名義)를 지키고 시비(是非)를 밝히신 것입니다. 지금 신이 대신(大臣)의 반열에 외람되게 있으면서 능히 숙종께서 하시던 일로 전하를 인도하지 못하고 추잡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 스스로 처신할 줄을 모르니, 성고(聖考)와 성후(聖后)의 하늘에 계신 혼령께서 반드시 장차 큰 죄벌(罪罰)을 내리실 것입니다. 신은 아마도 선왕(先王)에게 보답하고 전하에게 충성하는 도리는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장령(掌令) 성진령(成震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오늘의 내 마음은 전일(前日)과 같다.’고 분부를 하셨습니다. 아! 전하께서 춘저(春邸)1477) 에 계실 때에 처음 상소하신 것은 곧 진심(眞心)에서 나온 것으로 사노(私怒)라고 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신(賊臣) 유봉휘(柳鳳輝)의 계략이 오로지 전하를 모위(謀危)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전하께서 도리어 이 마음이 혹시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일까 염려를 하면서 그것이 마땅히 성을 낼 만한데도 성낼 줄을 모르시는 것이니, 비록 일이 자신에 관계되었다 하더라도 또한 사의(私意)가 아닙니다. 때문에 오로지 백반(白般)으로 이런 마음의 걱정을 없애어 천천히 거닐면서 견디고 참아서 종시(終始) 법을 굽혀 용서하여 차라리 온 나라의 공공(公共)의 의논을 어길지라도 나라의 함홍 광대(含弘廣大)한 명분만 이루려고 하신다면 이는 곧 이른바 사의(私意)일 것이니, 그 세상에 전하는 폐해가 어찌 한명의 유봉휘(柳鳳輝)가 다행히 천주(天誅)를 도망치는 일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전하께서 탕평(蕩平)의 도리를 하시려고 하면서 도리어 탕평과 비슷한 것을 참 탕평으로 삼는 것이니, 이러한 의사(意思)가 밝게 사물을 접할 곳에 가로 놓여 있기 때문에 비록 여러 적(賊)의 죄가 중하고 악이 극심한 것을 알면서도 종시(終始) 고집하여 여러 사람이 청하는 것을 굳게 거절하시면서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요즘의 일은 비록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다.
장령(掌令) 정광제(鄭匡濟)가 상소하여 첫머리에 난역(亂逆)을 토벌(討伐)하여 대신(大臣)을 힘써 나오게 하는 것을 말하고, 말미(末尾)에 악폐(惡弊)의 정치를 진달(陳達)하기를,
"1. 여러 아문(衙門)에 소용(所用)되는 잡물(雜物)은 방납(防納)1478) 을 금하여 소모되는 것을 근절시키되, 정가(定價)에 의하여 시장과 가게에서 갖다 쓰게 하여 백성의 힘을 펴게 하소서.
2. 유포(游布)와 호포(戶布), 결전(結錢)과 구전(口錢)의 법을 처음으로 행하여 백성의 마음을 떠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마땅히 수령(守令)을 뽑아서 여러 고을 하리(下吏)의 보인(保人), 원사(院舍)의 모속(募屬), 토호(土豪)의 누호(漏戶), 부민(富民)으로 모면(謀免)된 자와 감영(監營)·병영(兵營)·방진(防鎭)에 함부로 종속시킨 군관(軍官)이 포(布)를 거두어 함부로 쓰는 무리를 찾아내 모아서 도망하였거나 늙었거나 죽은 사람의 결원(缺員)에 보충시켜서 백골(白骨)·인족(隣族)에게 받아내는 근심을 제거하되, 수령이 받들어 거행하지 않는 자는 금고(禁錮)의 율(律)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달(陳達)한 일은 이미 다른 대간(臺諫)의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첨부하여 진달한 일은 그대의 말이 옳으니 이에 의거하여 신칙할 것이며, 양역(良役)에 충정(充定)하는 일은 이미 조정에서 의논하는 자가 있었다."
하였다.
필선(弼善) 이단장(李端章)이 상소하여 스스로 전일(前日)에 유봉휘(柳鳳輝)를 논핵(論劾)한 일을 진달(陳達)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은 다만 하나의 지엽(枝葉)일 뿐입니다. 오직 이때에 유봉휘는 한 시대의 정권(政權)을 잡고 영수(領袖)를 점거하고 있으면서 은연중 골자(骨子)를 만들었으니, 대개 지난해 한 장의 상소는 지의(旨意)가 음흉하고 교활하여 순서가 없는 부도(不道)한 형상이 간적(奸賊)과 표리(表裏)가 되고 흉언(凶言)의 근저(根抵)가 되어서 인심(人心)이 빠져들고 의리(義理)가 어두워졌는데도, 마치 사업(事業)에서 〈자기의 공을〉 수립(樹立)한 것처럼 여기고 더욱 서로 추허(推許)하니, 세상 사람들이 거지반 붙좇아 따랐습니다. 이에 거만스럽게 스스로 위대한 체하면서 한시대를 몰아쳐 위협하고 여러 사람의 입을 막자 기세(氣勢)가 대단히 성하여 방자하게 거리낌이 없었으며 임금을 업신여기고 의리를 능멸하여 장차 나라가 나라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신이 격분(激奮)하여 자신도 돌보지 않고 경솔하게 손을 대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매(愚昧)한 말이 시행되기도 전에 해괴한 사단(事端)이 먼저 도발(挑發)되어 여러 사람의 지껄어대는 소리가 몰려들고 많은 사람의 공격이 무더기로 모여들었는데, 상소나 계달(啓達)을 받아들인 데 대하여 패려(悖戾)함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신이 한 손으로 큰 물을 막는다는 것은 또한 어리석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단장(李端章)은 소론(少論)인데, 일찍이 상소하여 유봉휘를 토죄(討罪)하다가 그 당(黨)의 배제(排除)를 당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이런 소(疏)를 올리니, 임금이 다만 의례적인 비답만 내렸다.
해서 어사(海西御史) 한덕전(韓德全)이 돌아와 사옹원(司饔院)에서 연해(沿海)의 어부(漁夫)에게 해마다 은(銀) 3냥(兩)씩을 받아들이는 폐단을 아뢰니, 임금이 본원(本院)과 묘당(廟堂)에서 서로 의논하여 변통(變通)할 것을 명하였다.
해주(海州)의 전(前) 판관(判官) 이경열(李景說), 문화(文化)의 전 현령(縣令) 박수한(朴壽漢), 풍천(豊川)의 전 부사(府使) 김후(金垕), 토산(兎山)의 전 현감(縣監) 조정기(趙廷基), 해주의 전 판관 최집(崔), 금천(金川)의 전 군수(郡守) 오수현(吳遂顯), 옹진(瓮津)의 전 부사 김중려(金重呂) 등을 잡아 가두라고 명하였으니, 장오(贓汚)·불법(不法)한 일로 암행 어사(暗行御史)가 계달(啓達)한 가운데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12월 7일 경오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두 번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권업(權𢢜)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신사철(申思喆)을 좌빈객(左賓客)으로, 홍호인(洪好人)을 승지(承旨)로, 신노(申魯)를 정언(正言)으로, 이도원(李度遠)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합천군(陜川郡)에 불이 나서 이웃으로 번져 1백 80호(戶)가 타고 3명이 타서 죽었으므로 감사(監司)가 장계(狀啓)로 알려 왔는데, 휼전(恤典)을 시행(施行)할 것을 명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여산군(礪山君) 방(枋)이 졸(卒)하였는데, 임금이 그가 능(陵)을 지킨 노고(勞苦)로써 죽음을 측은히 여기는 것이 모두 극진하였다.
12월 9일 임신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세 번의 사직소(辭職疏)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소대(召對)를 행하고 《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였다. 겸춘추(兼春秋) 안연석(安鍊石)이 민간(民間)의 질고(疾苦)로 자리에 나가 앙진(仰陳)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안연석이 각 고을에서 한정(閑丁)을 숨겨주고서 신포(身布)를 사용(私用)하는 폐단을 대략 말하니, 임금이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마수(馬燧)1479) 의 일로서 말한다면, ‘한 마디 말에 성(城) 위의 군사들이 모두 감동했다.’고 하였으니, 내가 만약 정성으로 미루어 나간다면 수령(守令)이 된 자가 어찌 감히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이는 마땅히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다.
12월 10일 계유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경인년1480) ·을묘년1481) 두해에는 곧 국휼(國恤)1482) 의 3년 안인데도, 사직단(社稷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몸소 행하실 때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풍악을 쓰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마땅히 이러한 규례를 의거하여 풍악을 써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1일 갑술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네 차례나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독(講讀)이 끝나자, 시독관(侍讀官)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요즘 좌상(左相)의 사면(辭免)을 고하는 것은 대개 말한 것이 채용되지 않기 때문에 가려는 것이니, 전하께서 비록 정성을 다하여 힘써 기용(起用)하신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의 말을 채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시독관(侍讀官) 이현록(李顯祿)은 말하기를,
"역신(逆臣)을 토죄(討罪)하지 않으면 의리(義理)가 어두워져 막히고 강상(綱常)이 무너져 끊기게 되니, 그가 말한 것을 채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천극(栫棘)으로 처치한 것은 바로 다음 가는 형률(刑律)인데, 유봉휘(柳鳳輝)를 죽이지 않는 것으로 그의 거취(去就)를 결정하는 것은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현록(李顯祿)이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는 여러 적(賊)의 괴수(魁首)입니다. 유봉휘가 아니었다면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이 없었을 것이고, 적신 김일경이 없었다면 간사한 박상검(朴尙儉)이 없었을 것입니다. 유봉휘의 상소에 폐단을 늘어놓은 것이 한정이 없었는데 한 가지도 폐단을 구제(救濟)하는 말은 없었으며, 과시(科試)의 책문(策文)으로써 말하더라도 폐단을 늘어놓은 뒤에는 반드시 폐단을 구제한다는 말이 있어야 할 것인데도 다시 의논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이하(以下)에 폐단을 구제한다는 말이 없었으니, 신(臣)이 생각하기에 그가 폐단을 구제한다는 속셈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번의 사체(事體)는 신축년1483) 과는 아주 다르니, 반드시 그 죄를 토죄(討罪)한 뒤에야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유척기(兪拓基)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단장(李端章)을 헌납(獻納)으로, 홍봉조(洪鳳祚)를 정언(正言)으로, 이병태(李秉泰)·박사성(朴師聖)을 교리(校理)로, 이병태를 겸문학(兼文學)으로 삼았다.
12월 12일 을해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정광제(鄭匡濟)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양산 군수(梁山郡守) 이두삼(李斗三)은 백성을 해롭게 하면서 자기를 살찌게 하고, 창고의 곡식을 덜어내어 사사로이 스스로 판매(販賣)했으며, 읍비(邑婢)를 몰래 간음(奸淫)하여 그의 말만 치우치게 들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12월 13일 병자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다섯 차례나 사직소(辭職疏)를 올렸으나,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할 것을 명하였다.
이의천(李倚天)을 집의(執義)로, 임주국(林柱國)을 필선(弼善)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유(李瑜)를 수찬(修撰)으로, 박필현(朴弼賢)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승지(批旨)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罪囚)를 석방(釋放)하게 했으니,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파하기에 임하여 중관(中官)1484) 을 시켜 홍귤(紅橘) 1반(盤)을 들고 나오게 하여 내려주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승정원(承政院)이나 홍문관(弘文館)을 달리 대우하여 자주 선온(宣醞)1485) 이나 어찬(御饌)을 하사(下賜)한 일이 있었다. 지금은 여느 때와 달리 마침 진헌(進獻)한 물품이 있기 때문에 하사하는 것이니, 가져가도록 가라."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귤을 소매에 넣고서 물러갔다.
북관(北關)1486) 에 사는 사람 호두필(胡斗弼)을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호두필은 문정공(文定公)인 호안국(胡安國)1487) 의 19대(代) 손(孫)이라 자칭(自稱)하고 그 선대는 중국(中國)에서 북청(北靑)으로 떠돌아 들어왔다고 하면서 상언(上言)하여 청하기를, ‘화양동(華陽洞)의 만동사(萬東祠)를 수호(守護)하여 중국(中國)을 잊지 못하는 성의(誠意)를 표현하겠다.’고 하였다. 교리(校理) 황재(黃梓)가 아뢰기를,
"춘추(春秋)의 의리는 곧 효종(孝宗)과 숙종(肅宗)께서 마음 먹었던 일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평생을 지켜오던 것이 오로지 이 의리에 있었으므로, 일찍이 한 칸의 모옥(茅屋)에 주(周)나라 소왕(昭王)을 제사지내는 의리로써1488) 명(明)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사당(祠堂)을 세워 향사(享祀)하려 했으나 마음먹었던 것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그 문인(門人)인 권상하(權尙夏)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권상하가 처음으로 초가(草舍)를 세워 사당으로 삼고, 만동(萬東)으로 이름을 한 것은 나름대로 선조(宣祖) 때의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성교(聖敎)를 따온 것입니다. 뒤에 권상하가 죽자 사옥(祠屋)은 황량하여져서 풀이 우거져 덮었으니 호두필의 상언(上言)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두필이 어찌 능히 지키겠습니까? 마땅히 조정에서 진념(軫念)하여 처리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처분(處分)이 있어야겠다."
하였다. 황재(黃梓)가 말하기를,
"화양동(華陽洞)에 의종(毅宗)의 어필(御筆)로 ‘비례 부동(非禮不動)’ 이란 네 글자를 돌에 새긴 것이 있는데, 천년 뒤에도 감회를 일으킬 수 있으며 선정(先正)의 존주(尊周)1489) 한 성의도 또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돌에 새긴 인본(印本)을 들이라고 명하고, 마침내 호두필의 일로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전회일(田會一)의 일로 ‘중국 상서(尙書)의 손(孫)인데 어찌 위장(衛將)을 삼지 않겠느냐.’는 분부가 있었으니, 이 분부는 대개 황조(皇朝)1490) 를 위한 것이다. 지금 이 호두필은 본래 황조 사람의 자손(子孫)으로 우리 나라에서 떠돌다가 그 족속(族屬)이 서북(西北) 지방에 흩어져 있다고 하니, 사는 고을로 하여금 돌보게 하되 문무(文武)간에 한 가지 기능(技能)을 지닌 자는 전조(銓曹)로 하여금 등용(登用)하게 하고, 호두필은 상당직(相當職)에 부료(付料)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4일 정축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이미 물러난 몸으로 다시 나갈 수 없다 하면서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免職)을 원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같이 오게 하였다.
12월 15일 무인
임금이 몸소 경소전(敬昭殿)에 망제(望祭)를 행하고 충렬사(忠烈祠)·삼충사(三忠祠)·충무공사(忠武公祠)에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의종(毅宗)의 어필(御筆)를 가져와서 보고 드디어 하교(下敎)하기를,
"어제 승정원(承政院)에서 숭정 황제(崇禎皇帝)1491) 의 어필(御筆)에 대하여, 화양동(華陽洞) 환장암(煥章菴)의 모본(模本)을 올린 것을 보고 감개(感慨)하여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명나라가 재조(再造)하여 준 은혜는 실로 우리 동방(東邦)에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추모(追慕)할 일인데, 해가 오래 되고 인심(人心)은 익숙하여져서 존주(尊周)하는 한 가지의 일을 거의 서로가 잊게 되었으니, 만약 우리의 성조(聖祖)1492) 나 성고(聖考)1493) 께서 대의(大義)를 후세(後世)에 펴지 않으셨다면 우리 동방의 사람이 어찌 존주(尊周)의 의리를 알았겠는가? 그 양조(兩朝)의 뜻을 본받는 데 있어 마땅히 격려(激勵)하고 권장(勸奬)하는 일이 있어야 하니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충렬사(忠烈祠)에 관원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강화도(江華島)의 구원일(具元一)·강흥업(姜興業)·황선신(黃善身) 3신(三臣)이 순절(殉節)한 것에는 감탄하여 칭찬함을 견딜 수 없으니 똑같이 사제(賜祭)할 것이며, 충무공사(忠武公祠)에도 또한 본도(本道)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화양 서원(華陽書院)에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미 의종(毅宗)의 어필(御筆)을 가져와서 보고는 선정(先正) 송시열(宋時烈)의 존주(尊周)하는 성의에 한없는 감명을 받아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12월 16일 기묘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홍우전(洪禹傳)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이유(李瑜)를 겸교서(兼校書)·교리(校理)로, 이병태(李秉泰)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단장(李端章)을 사간(司諫)으로, 채응복(蔡膺福)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신노(申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묘정(廟庭)에 철식(腏食)1494) 시키는 것은 얼마나 중대(重大)한 일입니까? 그런데 지난날 여러 흉악한 무리가 조정의 정사를 탁란(濁亂)시킬 적에 곧 명의(名義)에 죄를 얻은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 세 신하를 숙종(肅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된 반열에 참람하게 올렸으므로 지난번에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서로 잇따라 진달(陳達)하여 논박하였는데도 승락하시는 말씀을 오히려 멈추고 계시니 신은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만, 전하께서 진정으로 이 세 신하가 배향(配享)되는 것을 십분(十分) 온당하다고 여기셔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세 신하가 명의(名義)에 죄를 얻은 것을 성고(聖考)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바가 되었던 것을 성명(聖明)께서도 또한 이미 통촉(洞燭)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변경(變更) 시키기를 어렵게 여기신다면 옛날 숙종(肅宗) 초년(初年)에 여러 간사한 무리들이 일찍이 조경(趙絅)을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배식(配食)시켰는데, 경신년1495) 경화(更化)할 때에 숙종께서 곧 폄출(貶黜)을 시행하시면서 일찍이 추출(追黜)하는 일을 어렵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어찌 한 때의 잘못된 은전(恩典) 때문에 구차스럽게 구습(舊習)을 따르면서 개혁(改革)시킬 방도를 생각지 않으십니까? 아! 신하로서 임금을 모시는 것은 그 의리가 깊은 것이니, 묘정(廟庭) 조두(俎豆)1496) 의 사이에서 철식(腏食)할 뿐만 아니라 비록 천만 세대(千萬世代)라도 오히려 옥란간(玉欄干)의 꽃을 구경하는 곳에 영원히 모셔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시는 영고(寧考)의 영혼(靈魂)이나 오르내리는 성모(聖母)의 신령(神靈)이 과연 저승에서 편안하게 계시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명지(明旨)를 내리셔서 빨리 개정(改正)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다른 상소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필선(弼善) 임주국(林柱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정혁선(鄭赫先)은 여러 번 주군(州郡)을 맡아 오로지 탐학(貪虐)만을 일삼았고, 인천(仁川)에 제수되자 온 경내(境內)가 난리(亂離)를 만난 것처럼 사자(士子)는 이사를 하고 소민(小民)은 도망하여 피하는 일이 길에 서로 잇대었으므로 신이 과연 논핵(論劾)하였던 것인데, 관리(官吏)가 도망쳐 간 일은 마침 신(臣)이 진소(陳疏)한 뒤에 있었습니다. 지금 성명(聖明)께선 곧 신이 그 간리(奸吏)의 언론(言論)을 듣고서 잘 다스리는 관장(官長)을 논핵하는 것처럼 여기시는데, 신이 비록 어리석고 고루하지만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 판부(判付)한 것은 대각(臺閣)의 의사를 경시(輕視)한 것이 아니고 곧 기강(紀綱)을 중시(重視)한 것이다."
하였다.
황해도(黃海道) 장연현(長淵縣)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12월 17일 경진
달이 화성(火星)을 범하고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근(李根)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안동 부사(安東府使) 정우주(鄭宇柱)는 노쇠(老衰)하고 혼유(昏謬)하여 아전이 많은 농간(弄奸)을 부리므로 부고(府庫)에 저축이 소모되었으며, 또 금송(禁松)을 몰래 베어 판자를 만들어 재[嶺]를 넘어 가져갔으니, 청컨대 그를 파직(罷職)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오늘날이 어떠한 때입니까? 나라의 무함을 씻지 못하여 흉적(凶賊)은 잠시 쉬고 있으며, 시비(是非)가 엄격하지 못하여 인심(人心)이 편안하지 못합니다. 기강(紀綱)이 날로 무너져가고 나라의 형편은 날로 낮아져서 하늘은 위에서 노여워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흩어져 가는데, 저축은 탕진(蕩盡)되어 중외(中外)가 텅 비었으므로, 백성이 죽는 것을 즉시 보고서도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릴 형편이니, 아! 그 또한 위험하고 위태롭습니다. 이러한 때에 전하께서는 새로 그 천명(天命)을 받으시고는 신을 선조(先朝)의 의관(衣冠)을 갖춘 구신(舊臣)이요, 폐부(肺腑)의 지친(至親)으로 여기시어 발탁하여 삼공(三公)의 자리에 두시고 추보(追報)의 뜻으로 권면(勸勉)하시니, 아! 신이 어떻게 감히 떠나가겠습니까? 다만 이 재주와 지혜가 노둔하고 모자라며 학식과 견문이 어둡고 고루하여 믿어 주신 뜻에 부응할 수 없으며, 하찮은 성의는 감동되지 못하여 대의(大義)를 펼 수가 없습니다. 무릇 건백(建白)하는 데에 있어서는 비록 면대(面對)하여서는 장유(奬諭)를 내리시나 채용(採用)되는 실상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없으니, 이와 같은데 신이 어떻게 감히 떠나가지 않겠습니까?
신은 성품이 본래 거칠고 어리석어서 진실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스스로 숨길 수가 없으니, 전후(前後)에 아뢴 바를 이루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구언(求言)을 하시려면 먼저 유현(儒賢)에게 구하시고 청언(聽言)을 하시려면 반드시 먼저 마음을 비우시며, 경술(經術)의 선비를 뽑아서 고문(顧問)에 대비(對備)하게 하고, 성현(聖賢)의 글을 강론(講論)하되 반드시 연구(硏究)하게 하며, 재물을 쓰는 데는 반드시 절약과 검소함을 힘쓰시고 궁액(宮掖)에겐 치우치게 비호하는 것을 보이지 마시며, 모든 일에는 반드시 대체(大體)를 돌아보시고 화락(和樂)이니 소인(小人)이니 하는 등의 말에 구애됨이 없으셔야 실제로 덕에 향상(向上)되는 급무(急務)가 될 것이요 정치를 하는 요도(要道)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일도 시행되는 것을 볼 수가 없으니, 전하의 생각에는 대개 신으로 하여금 주상의 의지(意志)를 받아서 몰아쳐 부리는데 대비하시려고 할 뿐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신의 정승의 직책을 갈아 주시고 중추부(中樞府) 산관(散官)의 직질(職秩)로서 제향(祭享)·조하(朝賀)의 반열에나 출입하게 하신다면 그 변변치 못한 정성을 힘써 다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은 매양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이 서울을 버리고 떠난 것을 끌어대어 사양을 하는데, 은(殷)나라의 삼현(三賢)1497) 을 공자(孔子)는 ‘삼인(三仁)’이라고 하였으니, 만약 모두가 서울을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써 옳다고 여긴다면 성문(聖門)에서 어찌 삼인(三仁)이라고 일컬었겠는가? 다시는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빨리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8일 신사
찬선(贊善) 김간(金幹)이 상소하여 5조목(條目)을 진달하고, 또 선현 고사(先賢古事)의 책자(冊子)를 올렸는데,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원소(原疏)는 대궐안에 머물러 두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도필(刀筆)1498) 과 궤안(几案)1499) 에 종사했던 남은 목숨으로 부끄러움을 지니고 고통을 참으면서 몰염치하게 한 번 나온 것은 다만 토적 복수(討賊復讐)의 대의(大義)를 위할 뿐입니다. 신이 만약 이 대의(大義)를 무용지물로 여기고 영화와 총애를 탐하여 일신(一身)의 이익을 차지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침을 뱉고 꾸짖을 것이니, 자차 어떻게 천지(天地)의 사이에 스스로 설 수가 있겠습니까? 물리쳐 사면(辭免)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12월 19일 임오
달이 태미(太微) 서원(西垣) 안으로 들어갔고,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12월 20일 계미
임금이 몸소 경소전(敬昭殿)에 제사를 지냈으니, 납일(臘日)의 제향(祭享)이기 때문이다.
12월 21일 갑신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우주(鄭宇柱)의 일은 아뢴 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12월 22일 을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홍봉조(洪鳳祚)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흉당(凶黨)이 조정(朝政)을 맡아서는 제멋대로 농간을 부리면서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임인년1500) 2월 초5일 차대(次對)할 때에, 그 당시 대신(大臣) 이중협(李重協) 등을 그전의 하교(下敎)에 의해 거행(擧行)할 것을 청하였으나, 성상(聖上)께서 결정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계(臺啓)에서 곧바로 국문(鞫問)하라 하는 사이에 우선 중지하라 하였다고 조지(朝紙)1501) 에 써낸 것을 사관(史官)은 연중(筵中)에서 기록한 것에 결정한 것이 없다는 것으로써 거조(擧條)1502) 에 써냈으므로, 승지(承旨)가 품계(稟啓)하여 사관을 청죄(請罪)하였는데, 추국하지 마라고 하교를 하시고 번거롭게 써내지 말라는 것으로 비답을 하셨으니, 이제야 비로소 상교(上敎)의 결정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계(臺啓)를 윤허하고 않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도 천위(天威)1503) 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곧 감히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승지는 또 뒤따라 바른대로 쓴 사관을 청죄하여 위로 성지(聖旨)를 속이고 아래로 온 세상의 이목(耳目)을 가리면서 형옥(刑獄)의 생살(生殺)을 다만 제마음대로 하려고 했으니, 이는 실로 그들의 능사(能事)입니다. 관계가 사소하지 않으니, 일이 이미 지나갔다고 해서 내버려두고서 논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그날의 입시(入侍)한 대관(臺官)과 해당 승지를 모두 나문(拿問)하여 사실을 캐어내 처리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비록 혹시 무엄한 짓을 분명하게 듣지 못한 것으로 돌리긴 하였으나, 큰 것을 가지고 작은 것을 빠뜨리는 뜻에는 해로울 것이 없다."
하였다.
전(前) 현감(縣監) 하필도(河必圖)가 응지(應旨)하여 상소하고 민폐(民弊)를 진달(陳達)하였는데,
"1. 백골 징포(白骨徵布)1504) 의 억울한 일입니다. 마땅히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그 물고(物故)한 것에 따라 검시(檢屍)한 입안(立案)을 직접 죽은 사람의 친척에게 주게 되면 그 폐단은 없어질 것입니다.
2. 도망하거나 죽은 군사(軍士)입니다. 도망하거나 죽은 것의 대치(代置)는 청컨대 각 영문(營門)이나 각 고을로 하여금 잡색군(雜色軍)과 교생(校生)·원생(院生)을 조사해내어 보충시키게 하소서.
3. 각읍(各邑)의 관리배(官吏輩)가 환곡(還穀)과 전포(錢布)를 받기를 도모하여 가을에 받아들일 때에 소민(小民)에게 나누어 기록하여 일족(一族)에게 나누어 징수(徵收)하는 일입니다. 청컨대 각도(各道)에 엄하게 신칙하여 환곡은 관속(官屬)에게 많이 주지 말고 전포(錢布)는 관속에서 대여(貸與)하지 못하게 하소서.
4. 서울의 각 관사(官司)에서 선부(船夫)와 염한(鹽漢)1505) 을 장부에 기록하고 불법으로 빼앗아내는 일입니다. 청컨대 본고을로 하여금 조사해 바로잡고 대신 전하게 하소서.
5. 오래된 문서(文書)를 가지고 노비(奴婢)를 추쇄(推刷)하는 입입니다.
6.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일로 송사(訟事)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모두 마땅히 엄금(嚴禁)하소서.
7. 어상(漁商)으로 생업(生業)을 삼는 자에게 사수(斜水)1506) 에서 양쪽으로 세금을 매기는 일입니다. 청컨대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엄중히 신칙하여 겹쳐서 징수하지 못하게 하소서.
8. 청컨대 서울과 지방의 정채(情債)1507) 의 폐단을 엄격히 신칙하소서.
9. 청컨대 삼남(三南)에 토포사(討捕使)와 수령(守令)을 뽑아 보내어 도적(盜賊)을 기찰(譏察)하여 체포하소서.
10. 청컨대 서북도(西北道)에 의거하여 친기위(親騎衛)를 양남(兩南)에 각각 설치(設置)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서종급(徐宗伋)을 부교리(副校理)로, 조명택(趙明澤)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12월 23일 병술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숙빈(淑嬪)의 사당(祠堂)이 이루어졌다. 숙빈은 곧 임금의 사친(私親)이다. 즉위(即位)하던 처음에 땅을 골라 사당을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사당이 이루어졌으니, 경복궁(景福宮)의 북쪽에 있다. 20년 후에 묘호(廟號)를 고쳐 정하여 ‘육상궁(毓祥宮)’이라고 하였다.
12월 25일 무자
장령(掌令) 성진령(成震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정사를 처리하는 사이에 마땅히 결단하셔야 할 것을 결단하시지 못하는 것은 세밀한 데 실수한 것이요, 말씀하시는 즈음에 혹은 깊기도 하고 혹은 얕기도 한 것은 말씀이 많은 데서 손상이 된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다만 토적(討賊)의 한 조항에 의거하여 밝히겠습니다. 무릇 난적(亂賊)을 반드시 주살(誅殺)해야 하는 것은 곧 천지(天地)의 법도요 의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처음엔 일이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으로 혐의를 하시다가 종말에는 혹은 하찮은 신용을 잃은 것으로서 생각을 하시고 나갈까 물러갈까 머뭇거리며 결단짓지 못하시고 역신(逆臣)인지 역신이 아니지 〈분간없는〉 사이에 내버려 두시니, 이것이 이른바 마땅히 결단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세밀한 데 실수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후(前後)의 비지(批旨)에서 탕평(蕩平)이 아니면 반드시 공평(公平)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전하께서 또한 어찌 난적(亂賊)을 용서하는 것으로써 탕평이나 공평이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이런 말이 성현(聖賢)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선 빌려서 남의 듣는 데에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5적(五賊)과 같은 경우 만약 반역(反逆)의 실정(實情)을 알기 어렵다고 여기신다면 마땅히 곧 국문(鞫問)을 하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강압(强壓)에 따른 것으로 불문(不問)의 죄과에 두려워하시고, 그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의 구분이 없음을 깨달았으면 마땅히 곧 정형(正刑)을 하여야 할 것인데 또 다시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양을 부리는 무리로 핑계를 대시니, 이것이 이른바 혹은 깊었다 얕았다 하는 것이 말씀이 많은 데에서 손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신료(臣僚)에게 옳으니 그르니 할 즈음에 마음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혹은 한마디의 작은 관심을 지적하여 도리어 그 큰 뜻을 매몰시키고, 마음에 순종하는 자가 있으면 실리(實理)가 있는지는 캐어 보지도 않고 지나치게 포장(褒奬)을 더하십니다.
전번에 사묘(私廟)가 너무 사치하다고 재신(宰臣)이 말을 했고 외재(外財)가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간신(諫臣)이 논하였으나, 신은 진실로 이미 이룬 일은 말할 것이 없음을 알았으니, 전하께서도 수신(修身)을 하셨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해에 역환(逆宦)·요비(妖婢)의 변고가 불행하게도 갑자기 나오게 되었는데, 그 조짐이 처음에는 한 맥락(脈絡)의 뇌물 사이에서 일어났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징계(懲戒)하여 엄중히 막아야 할 것인데, 각사(各司)에서 공진(公進)하는 즈음에 환관(宦官)·하례(下隷)의 무리들이 반드시 중간(中間)에서 조종(操縱)을 하여 물품(物品)의 높았다 낮았다 하는 것이 오로지 뇌물의 많고 작은 데 관계되므로 궐정(闕庭)에서 방자하게 행동하여 여염(閭閻)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사단(事端)이 없지 않았으니, 전하의 가정(家庭)이 다스려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부고(府庫)의 재물(財物)은 서리(胥吏) 무리의 손에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교활한 아전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되므로 호조(戶曹) 각청(各廳)과 영·진·주·부(營鎭州府)가 텅 비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의 남아 있는 것도 또한 대부분 거짓 문서 뿐입니다. 양역(良役)의 고통은 이웃 사람과 일족(一族)에게 미치게 되어 일부(一夫)의 징포(徵布)로 한 촌락(村落)이 죄다 폐허(廢墟)가 되고 수가(數家)의 부역으로 온 고을이 모두 텅비게 되었습니다. 전결(田結)에 대해서도 기해년1508) 에 다시 측량한 뒤로 삼남(三南)의 전지(田地)의 높고 낮은 등급이 도리어 옛날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산허리의 전지는 모두가 척박(瘠薄)하므로, 올해에 우연히 경작(耕作)하였다가도 명년(明年)이면 반드시 묵게 되는데, 국가의 징수와 부역은 그침이 없기 때문에 해마다 양전(良田)을 팔아서 진전(陳田)의 전세(田稅)를 주어야 하니, 전하의 나라가 다스려졌다고 하겠습니까? 다스려지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춘저(春邸)1509) 에 계실 때에 마침 계방 관속(桂坊官屬)이 신과 서로 친한 자가 있었는데, 가만히 서연(書筵)에서 말씀하신 한두 마디를 들으니, 전하께서 자처(自處)하시는 바는 제2(第二)의 의리를 편안하게 여기시지 않는다고 하셨다는데, 전하께서 즉위(即位)하신 이후로 구습(舊習)에 따라 미봉책(彌縫策)만 쓰시니, 그것이 제2의 의리에도 오히려 두서너 등급은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신은 가만히 전하의 일신(一身)에 이렇게 전후(前後)의 다름이 있다는 것을 괴이하게 여깁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봄 무렵에 경학(經學)한 사람을 얻기를 생각하시기에 대신(大臣)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초계(抄啓)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거의 반년(半年)이 되도록 거행되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들은 바로는 이간(李柬)과 같은 이는 전에 수령(守令)으로 사폐(辭陛)1510) 할 때에 전하께서 불러 보시고 하문(下問)도 하심을 받았다고 하는데, 윤봉구(尹鳳九)는 곧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의 사부(師傅)이고, 한원진(韓元震)은 전하께서 동궁(東宮)으로 계실 때의 부수(副率)이며, 이이근(李頤根)은 곧 그 스승이 천거한 바인데도 전조(銓曹)의 관원이 아직도 수용(收用)하지 않았으니, 또한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일에 능히 먼저 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조신(朝紳)들 중에서 참판 이재(李縡)는 일찍이 영광스러운 길을 사양하고, 성리(性理)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호군(護軍) 윤봉조(尹鳳朝)는 재학(才學)과 경술(經術)이 그에 비교될 이가 드뭅니다. 이재는 여러 번 힘써 돈소(敦召)하였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올 생각이 없었으며, 윤봉조는 형편상 아직 조정에 나오지 못하였으니, 또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각별히 전부(銓部)에 신칙하여 빨리 학문(學問)한 선비를 초계(抄啓)하도록 하고, 또 지성(至誠)으로 이재를 힘써 기용(起用)할 것이며, 윤봉조의 지체(遲滯)한 죄를 꾸짖어 도성(都城)에 들어오도록 하여 경연(經筵)에 두게 된다면 보익(補益)됨이 크고 많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삼가 우리 조정의 묘제(廟制)를 보건대, 태조(太祖)와 사친(四親)1511) 의 신주(神主)가 모두 태묘(太廟)에 있어야 하는데,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와 여러 사당의 조주(祧主)가 모두 영녕전(永寧殿)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무릇 태묘(太廟)는 정묘(正廟)이고 영녕전(永寧殿)은 별묘(別廟)입니다. 태조가 비록 공덕(功德)이 있으나 곧 손자이고 목조(穆祖)는 비록 공덕이 없으나 곧 조선(祖先)입니다. 지금 공덕을 조손(祖孫) 간에서 따진다면 손자는 정전(正殿)에 있고 조선(祖先)은 별전(別殿)에 있으니, 곧 실례(失禮)의 큰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효종조(孝宗朝)에서 부묘(祔廟)의 예절로 인하여 이 일로써 상소 진달하면서 주부자(朱夫子)의 조의(祧議)의 설(說)로 증거를 대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예제(禮制)가 아주 갖추어졌지마는, 열성(列聖)의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하였던 것을 숙종조(肅宗朝)에 이르러 수거(修擧)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이 종묘(宗廟)의 큰 일은 아직도 흠결(欠缺)된 바가 있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제 선대왕(先大王) 천부(遷祔)의 예(禮)가 장차 명년(明年)에 있어서 바야흐로 묘우(廟宇)를 넓히려고 하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진실로 이런 때로 인하여 주자(朱子)와 선정(先正)이 의논한 것을 썼으면 합니다. 다시 대신(大臣)과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강구(講究)하여 목조(穆祖)는 태묘(太廟)의 제1실(室)에 옮겨 봉안(奉安)하여 시조(始祖)로 삼아서 태조(太祖)·태종(太宗) 이하(以下)의 여러 세실(世室)1512) 과 사친(四親)의 신주를 순서대로 배열(排列)하고, 또 태묘(太廟)에다 동서(同西)의 협실(夾室)을 만들어서 익조(翼祖)이하의 조주(祧主)를 봉안(奉安)하게 되면 명분이 바르게 되고 이치가 맞게 되어 성효(聖孝)를 더 넓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선정(先正)1513) 은 효종(孝宗)에게 있어 은(殷)나라 성탕(成湯)의 이윤(伊尹)이나 한(漢)나라 소열제(照烈帝)의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다를 것이 없는데 유독 청묘(淸廟)1514) 의 제사에 배향(配享)되지 못하고, 남구만(南九萬) 등 명의(名義)에 죄를 얻고 숙종(肅宗)에게 배치(背馳)된 세 사람을 곧 묘무(廟廡)에 배식(配食)시켰으니, 어찌 통탄(痛歎)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널리 물어보셔서 선정(先正)을 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추배(追配)시키고 빨리 대신(臺臣)의 말을 따라 세 사람은 숙종(肅宗)의 묘정(廟庭)에서 내치어 버리신다면, 또한 종묘(宗廟)를 엄중히 여기는 중대한 두서(頭緖)가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상소 가운데 난역(亂逆)을 용서하여 탕평(蕩平)을 삼는다는 말은 나의 본의(本意)가 아니고, 옛사람이 말한 것을 빌어서 지금 사람이 듣기에 기쁘게 하는 것은 비록 첫 임명을 받은 관원이라도 차마 이런 짓은 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군림(君臨)한 자이겠는가? 그대는 비록 쉽게 말하지마는 나는 사실 개탄스럽게 여긴다. 이간(李柬)·윤봉구(尹鳳九)·한원진(韓元震)·이이근(李頤根)은 또한 해조(該曹)로 하여금 각별히 등용(登用)하게 하였고, 이재(李縡)는 내가 또한 그 재주를 아끼고 있는데, 그가 스스로 단념(斷念)하는 것을 나는 지나치다고 여긴다. 그러나 마땅히 기여코 억지로라도 기용(起用)할 것이며, 윤봉조(尹鳳朝)는 승정원(承政院)의 재촉하는 계달(啓達)로 인하여 이미 승락하였다. 태묘(太廟)나 세실(世室)에 이르러서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지난번에 비록 선정(先正)의 논계(論啓)가 있었으나 성조(聖祖)께서 변통(變通)시키지 않으신 것은 곧 그 일을 중대하게 여기신 것이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사서(司書) 임징하(任徵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전일의 상소에 통박(痛迫)한 심정(心情)을 다 진달(陳達)하였으나, 성상(聖上)께서 또한 일기(日記)를 가져다 보신 뒤에 마땅히 처분(處分)한다는 것으로써 비답을 하셨습니다. 이미 또 일기(日記)를 가져 들어갔으므로 빠짐이 없이 자세히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손하게 기다려 온 지가 매우 오래 되었으나 마침내 결정함이 없으시니, 이는 신의 상소가 너무 결절(激切)함이 모자라서 족히 천정(天聽)을 감동(感動)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 당시에 사화(士禍)로 죽은 자가 누군들 원통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신의 종숙(從叔) 임창(任敞)과 같이 가장 원통하고 슬픈 사람은 없습니다. 그 상소를 전후(前後)로 올린 것이 만약 조금이라도 증감(增減)이 있었다면 전일(前日)에 퇴각(退却)시킨 승지(承旨)로서 어찌 감히 재차(再次) 정소(呈疏)하던 날에 글을 꾸며 계품(啓稟)하기를 저와 같이 명백하게 하였겠습니까? 이는 상세히 구명(究明)함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그것이 절대로 이런 이치가 없을 것임을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흉당(凶黨)은 명의(名義)를 지키는 사람을 원수같이 보고서 반드시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여 곧 허황되게도 전에 상소는 꾸며낸 것이라고 이러니저러니 말을 하다가 그래도 그 능히 말이 조리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또 신의 조부의 상소한 말을 인용하여 의사(疑似)하고 방불(彷彿)한 안건(案件)을 만들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대체 숙부(叔父)로서 조카의 증인을 세우는 것은 사람의 윤리상 차마 못할 바이고 윤리를 손상시키고 의리에 어긋나는 것은 방헌(邦憲)의 반드시 토죄(討罪)되는 바인데, 더구나 신의 조부의 상소에 말한 것이 처음부터 밀쳐대거나 핍박한 단서가 없는 것이겠습니까? 이 일이 신원(伸冤)되어 밝혀지지 않기 전에는 장차 천지(天地)의 사이에 스스로 설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명지(明旨)를 내리시고 통쾌하게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일기(日記)를 가져다 보니, 그대 조부의 상소한 말은 과연 그대의 상소와 같았는데, 더구나 이것으로써 증거를 삼았으니 패리(悖理)하고도 비참한 일이다. 그때 발계(發啓)한 대간(臺諫)에게는 특별히 투비(投卑) 형벌을 시행하여 참혹하게 해독(害毒)을 끼친 것을 엄격히 징계하는 뜻을 보이겠다."
하였다.
정계장(鄭啓章)을 태천군(泰川郡)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으니, 곧 임창(任敞)을 논계(論啓)했던 대관(臺官)이기 때문이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도 암행 어사(忠淸道暗行御史) 한이조(韓頤朝)가 청주(淸州)에 이르러 그 창고를 봉하였는데, 감사(監司) 홍용조(洪龍祚)가 드디어 해당 목사(牧使) 이성좌(李聖佐)를 파직(罷職)시킬 것을 아뢰고는 이내 이성좌의 선치(善治)의 상황을 논하면서 어사가 창고를 봉함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파직시켰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의심하였다.
12월 26일 기축
군기시(郡器寺)에서 아뢰기를,
"병기(兵器)는 포(砲)와 총(銃)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군중(軍中)의 행용(行用)되는 총은 그 힘이 미치는 바가 백보(百步)를 지나지 못합니다. 숙종조(肅宗朝)에서 박영준(朴英俊)이란 자가 천보총(千步銃)을 만들어 올린 적이 있다고 하는 까닭으로 박영준의 아들 박지번(朴枝蕃)을 시켜서 시험삼아 총 두 자루를 만들게 하였는데, 행용하는 총에 비하여 조금 길고 조금 무거우나 그 힘은 거의 9백여 보(步)에 이르게 되니, 이는 실로 옛날에도 없었던 기계(器械)입니다. 서북(西北)의 두 도(道)는 이것이 관문(關門) 방어(防禦)의 중요한 곳이니, 청컨대 삼남(三南)에 분송(分送)하는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무고(武庫)에서 만들어서 나누어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근(李根)이다.】 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충주 토포사(忠州討捕使) 이진화(李震華)는 연기(年紀)가 쇠모(衰耗)한 데에다 혼미(昏迷)하여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기찰(譏察) 체포(逮捕)하는 즈음에 분간없이 양민(良民)에게 침범(侵犯)하고, 신문(訊問)할 때에는 하리(下吏)가 뇌물을 받았으므로 강도(强盜)들이 서로 불러 무리를 모아 백성이 편히 살 수가 없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창릉(昌陵)1515) 직장(直長) 김옥(金沃)은 비루(鄙陋)하고 자질구레한 일이 한두 가지 뿐만이 아닌데, 수졸(守卒)에게 침범하여 포학한 짓을 하는 것이 끝이 없었으니, 청컨대 도태(淘汰)시켜 버리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고향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원하였으나,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7일 경인
도목정(都目政)1516) 을 행하여 이병상(李秉常)을 판윤(判尹)으로, 홍석보(洪錫輔)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재(李縡)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기익(李箕翊)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업(權𢢜)을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유경(金有慶)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정형익(鄭亨益)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병태(李秉泰)를 헌납(獻納)으로 삼았고, 박필주(朴弼周)·이간(李柬)·윤봉구(尹鳳九)·한원진(韓元震)·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은 경연관(經筵官)으로 초계(抄啓)하였으며, 권성(權𢜫)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으니,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과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도빈(趙道彬)의 정사(政事)였다.
장령(掌令) 성진령(成震齡)이 상소하여 전일에 말한 것을 거듭 말하니,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으로 답하였다.
12월 28일 신묘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났다.
그대로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여 정형익(鄭亨益)을 동의금(同義禁)으로, 황일하(黃一夏)를 좌참찬(左參贊)으로, 권변(權忭)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이교악(李喬岳)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서명구(徐命九)를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전교(傳敎)하기를,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곧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내가 봄에 처분(處分)한 뒤로 여태까지 명백한 하교(下敎)가 없었기 때문에 조정(朝廷)의 형편이 이로 인하여 위축되어서 나라 사람들이 거의 옳고 그른 것을 아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 어제 찬선(贊善)의 상소를 보고서 더욱 나의 잘못을 깨달았으니, 먼저 지난번의 일을 말하고 다음으로 나의 병통(病痛)을 말하고 다시 현재의 일을 말하겠다. 아!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이 밝기가 해와 별같아서 간책(簡策)에 전하여지는데도 붕당(朋黨)의 습성이 더욱 심화되어 신축년1517) ·임인년1518) 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한편의 조정 신하들을 악역(惡逆)으로 몰아넣어 창과 칼로 참혹하게 해독을 끼친 것은, 대개 그 잘못을 가리고 그일을 사실로 만든 까닭이니, 만약 대행조(大行朝)의 지극한 인(仁)과 성대한 덕(德)이 아니였다면 그 전해 퍼지는 해독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내가 〈즉위한〉 원년(元年)에 선조(先朝)의 유의(遺意)를 받들고 대행왕(大行王)의 지극한 덕을 본받아 처분(處分)한 바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 지난날의 일은 비록 주륙(誅戮)하기도 하고 찬배(竄配)하기도 하였으나 그를 어떻게 용서하겠는가! 그리고 창과 칼로 날뛰던 나머지에 그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를 엄맹(嚴猛)하게 하겠는가, 관용(寬容)하게 하겠는가?
유봉휘(柳鳳輝)의 일에 이르러서는 내가 어찌 지나치게 말하겠는가? 선왕(先王)의 처분이 찬배(竄配)에 그쳤다면 이것도 또한 내가 준수(遵守)할 생각이다. 그저께 연중(筵中)에서 일률(一律)을 용서하여 주자는 전교(傳敎)에서도 또한 공의(公議)를 중시(重視)하는 뜻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니, 어찌 옳고 그른 것을 분변하지 않고 얼버무릴 생각이 있는 것이겠는가? 이 한 가지 일로써 세 상신(相臣)이 자리를 떠나고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조덕린(趙德隣)이 함부로 헤아려 보는 행동까지 있었으니, 이는 나의 성심(誠心)이 능히 신하들을 믿도록 동감시키지 못한 소치이다.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을 정법(正法)하고 이사상(李師尙)을 감률(減律)하였으며 소하(疏下)의 무리들도 또한 다 천극(栫棘)시켰는데, 혹은 찬배(竄配)시키고 혹은 출송(黜送)시킨 것이 또한 몇 사람이나 되는가? 때문에 혹은 한 번 아뢰어도 곧 허락하기도 하고 혹은 두세 번 아뢰어도 따르지 않기도 했으니, 이는 내가 좋아하고 싫어함을 밝힌 뜻이다. 아! 나의 병통(病痛)을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이의연(李義淵)의 상소가 지난 때를 개탄(慨歎)하여 발론(發論)한 것이라면, 어찌 무함(誣陷)이 대행왕(大行王)에게 미치며 그때의 여러 신하들의 의논으로 인하여 끝내 반드시 죽이고야 만다는 것인가? 이는 마음 먹은 것이 굳지 못한 과실이다. 아! 내가 이미 스스로 알면서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이에서 오히려 스스로 마음에 힘쓰고 격려(激勵)하는 것이다.
아! 군주(君主)는 밤낮으로 조정 형편의 어긋나고 과격한 것을 걱정하고 있는데, 정주(政注)1519) 하는 즈음에 과격(過激)한 사람을 숭장(崇奬)하고 있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조정이 어느 때에 안정(安靜)될 것이며 이와 같이 하고서 어느 때에 탕평(蕩平)해질 것인가? 이것도 또한 세상을 가다듬게 하는 한 가지 일이다. 아! 가까이 있는 신하들은 나의 마음 먹은 것을 가지고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여 지금 나의 처분(處分)이 얼버무리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탕평(蕩平)의 전교(傳敎)가 역신(逆臣)을 지칭하고 옳다고 한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환히 알도록 하여 의심하는 자로 하여금 의심을 없애게 하고 개과 천선(改過遷善)하려고 하는 자는 스스로 개과 천선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무릇 천재(全災)와 지변(地變)이 비록 혹시 여러 나라의 다름이 있으나 해와 달은 한가지이다. 지금 절사(節使)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초5일 오시(五時)에 음홍(陰虹)이 해를 꿰뚫은 이변이 있었다.’고 하니, 백홍(白虹)이 해를 꿰뚫은 것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그날 청대(靑臺)의 보고(報告)를 보지 못하였으니, 관상감(觀象監)을 설치(設置)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그때의 금루관(禁漏官)과 본관상감에 입직(入直)한 관원을 모두 잡아다 추고(推考)하라."
하였다가, 조금 후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사간(司諫) 이단장(李端章)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빨리 징계(懲戒)와 토죄(討罪)를 행하시고 가장 믿고 중요한 신하에게 예(禮)를 다하셔서 국시(國是)1520) 를 엄중히 하여 시국의 어려운 점을 함께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5도(五道)의 유생(儒生) 박세형(朴世炯) 등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기묘년1521) 의 명현(名賢)인 승지(承旨) 박훈(朴薰)과 사간(司諫) 박광우(朴光佑)에게 증직(贈職)하고 시호의 은전(恩典)을 내리소서."
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2월 29일 임진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고 《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였는데, 강독이 끝나자 시독관(侍讀官) 서종급(徐宗伋)이 말하기를,
"근래에 대계(臺啓)가 쌓인 것이 십수(十數)에 이르나, 하나도 개납(開納)됨을 얻지 못하였으니 여러 신하들이 억울해합니다. 신(臣)이 여러 번 전석(前席)에 들어가 직접 성교(聖敎)를 받들었으나, 일찍이 합사(合辭)의 계달(啓達)을 편당(偏黨)에다 귀결시키지는 않으셨는데, 어제 하교(下敎)하신 사지(辭旨)가 전과는 조금 다르니, 적이 이로부터 토역(討逆)하시는 의리가 엄격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언(進言)하는 자가 반드시 시사(時事)로써 억지로 말을 만드는 것이 규계(規戒)나 올리는 것처럼 하는 것이 있으나 그 귀착점(歸着點)을 요약(要約)한다면 대체로 당론(黨論)에 돌아가게 되니, 내가 거의 취택(取擇)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시강관(侍講官)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하교하신 가운데 또 정주(政注)하는 즈음에 과격(過激)한 사람을 숭장(崇奬)하였다는 것으로써 불가하다고 하셨는데, 비록 모르겠습니다만, 과격한 자가 어느 사람이고 숭장한 것이 어떤 일입니까? 지금 삼사(三司)의 주청(奏請)은 실로 온 나라의 공론(公論)입니다. 그런데 줄곧 윤허를 아끼시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해이하여집니다. 간혹 말하고 의논하는 것이 조금 엄준(嚴峻)함이 있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도와서 세워 주시는 데 겨를이 없이 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꺾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하교한 것은 실은 나의 진심(眞心)을 알려서 여러 신하들을 힘쓰게 한 것이다. 내가 어찌 일찍이 토역(討逆)하자는 것을 전연 당론(黨論)에다 돌렸겠는가?"
하였다.
12월 30일 계사
평안도(平安道)에 천둥이 일어났다.
전교(傳敎)하기를,
"아! 지난번에 양원군(陽原君)과 의원군(義原君)의 직첩(職牒)을 돌려주라고 한것은 대개 성고(聖考)의 돈목(敦睦)하신 성대한 뜻을 본받은 까닭이다. 아! 천도(天道)도 10년이 되면 고쳐지는데, 더구나 이미 죽은 자에게 복관(復官)시켰으면 살아 있는 자에게 어찌 다르게 할 수 있겠는가? 고(故) 완계 부정(完溪副正) 찬(燦)에게 직첩을 돌려주고, 전(前) 완천정(完川正) 엽(燁)을 서용(敍用)하되 홍(烘)·엽(燁)·형(炯)에게도 똑같이 직무(職務)를 맡기도록 하라."
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작환(繳還)하면서 아뢰기를,
"당초(當初)에 환(煥)·혁(爀) 등에게 직첩(職牒)을 주라는 명령이 비록 이미 죽은 뒤에 나왔으나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의 분울(憤鬱)한 것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의 성상(聖上)의 하교(下敎)는 더욱이 천만 뜻밖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정(楨)·남(柟)은 어떠한 악역(惡逆)입니까? 그 응당 좌죄(坐罪)될 친속(親屬)은 살고 죽은 것을 논할 것이 없이 왕법(王法)으로써 헤아려 보면 조금도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 전에 숙종조(肅宗朝)에서도 두 번이나 환(煥)·혁(爀) 등에게 탕척(蕩滌)1522) 의 명을 내리셨으나 번번이 대간(臺諫)의 계달(啓達)로 인하여 곧바로 반한(反汗)되었고, 또 경종조(景宗朝)에서도 여러 번 직첩(職牒)을 돌려주라는 명을 내리셨으나 또한 곧 도로 거두시고 인하여 또 세초(歲抄)1523) 를 가리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그 제방(隄防)을 엄격히 한 성의(聖意)를 여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처분(處分)은 돈목(敦睦)하고 무휼(撫恤)하는데 지나쳐 엎치락뒤치락 거두어 서용(敍用)하는 것을 마치 무고(無故)한 종친(宗親)에게 규례(規例)를 따라 직첩을 주듯이 했으니,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으신다면 흉역(凶逆)을 다스리는 법은 날로 문란(紊亂)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구족(九族)을 사랑한다.’는 것을 요전(堯典)1524) 에 말하지 않았던가? 성고(聖考)께서 양차(兩次)나 탕척(蕩滌)의 명을 내리시고 대행조(大行朝)에서 직첩(職牒)을 주라고 전교(傳敎)하신 것도 문득 또한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을 만한 것이다. 아! 성조(聖祖)께서 인평 대군(麟坪大君)에게 우애(友愛)하심은 천고(千古)에 뛰어나셨는데, 대군(大君)의 손자에게 줄곧 침체(沈滯)시켜 서용(敍用)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시는 성조(聖祖)의 마음이 어떠하시겠는가? 말이 이에 미치니, 마음이 실로 슬프기만 하다."
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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