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권, 영조 2년 1726년 3월

싸라리리 2025. 8. 20.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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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을미

흰 구름 한 줄기가 기운처럼 동쪽에서 일어나 곧장 하늘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길이가 10여 장(丈), 너비가 1자 남짓 되더니, 한참 만에 사라졌다.

 

삼사(三司)에서 전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속히 정지하라고 비답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도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필정(朴弼正)·이제항(李齊恒)을 장령(掌令)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대제학(大提學) 이의현(李宜顯)에게 명하여 반궁(泮宮)에서 시사(試士)하게 하고, 진사(進士) 유운(柳運)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평양(平壤) 사람 전하성(田夏成)의 집에서 암소가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는데, 암컷이 한 마리, 수컷이 두 마리였다.

 

3월 5일 정유

큰 눈이 내렸다. 임금이 몸소 경소전(敬昭殿)에서 한식(寒食)의 은전(殷奠)을 예식(禮式)대로 거행하였다. 이때에 상후(上候)가 매우 미령(未寧)하여 약방(藥房)의 제신(諸臣)이 힘써 섭행(攝行)하기를 청하였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3월 6일 무술

정언(正言)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의 소가 이선행(李善行)의 무리와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그 놀랍고 간악(奸惡)한 것은 도리어 심함이 있습니다. 또 신이 그윽이 성의(聖意)를 살피건대, 또한 깊이 그 말에 들어간 듯하온데, 성인(聖人)이 이구(利口)204)  를 미워함을 반드시 자주빛을 미워하고 가라지를 미워하는 것에 비유한 것은 그 생각이 깊으니, 신은 진실로 근심과 한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그 소(疏)에 대하여 대략 변명하겠습니다. 아! 오늘날 조정(朝廷)의 신하는 다 같은 선왕(先王)의 신자(臣子)이니, 구구한 애대(愛戴)의 성의에 누가 감히 조현명에 뒤지는 자가 있단 말입니까? 이제 그 말함이 마치 다른 사람은 일찍이 선왕(先王)을 충애(忠愛)하지 아니하고 저만 홀로 지성(至誠)으로 통박(痛迫)하여 무함하는 말을 파헤쳐 깨뜨림을 스스로 맡은 것처럼 하니, 또한 가소롭지 않습니까? 아! 우리 임금을 사랑하여 받듦이 다 같이 윤리(倫理)를 지키는 천성(天性)에서 나오는데도, 조현명은 말하기를, ‘찬양하고 박대함이 그 이해(利害)에 기인한다.’고 하였으니, 윤상(倫常)이 없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전혀 일을 살피지 못한다.’ 느니, ‘너무 심한 데에 이르지 않았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명색(名色)을 설정하여 스스로 품평(品評)한 것이니, 이것이 과연 신자(臣子)의 감히 마음에 싹틔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물며 그 ‘흑백(黑白)의 빛을 혼동하고 천지(天地)가 자리를 바꾼다.’는 등의 말은 누구를 가리켜 흑으로 하고, 누구를 가리켜 백으로 하며, 무엇을 하늘로 삼고, 무엇을 땅으로 삼았는지 진실로 쉽게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그 소에 말하기를, ‘성헌(成憲)을 뒤엎고 어진 선비를 죽였다면 이것이 아름다운 일인가? 이것이 올바른 행실인가? 요·순과 문왕·무왕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 선왕은 성헌을 뒤엎은 일이 없는데도 멋대로 흔들어 뒤엎은 것이 군소(群小)이고, 선왕은 어진 선비를 죽일 뜻이 없는데도 속여 총명을 가려서 죽인 자는 군간(群奸)입니다. 선왕은 요·순의 덕이 있었는데도 능히 도와서 이루지 못한 것은 군소의 죄이고, 선왕은 문왕·무왕의 인애(仁愛)가 있었는데도, 능히 받들어 펴지 못한 것은 군간의 죄입니다. 이제 조현명이 어찌 이것으로써 군소를 죄주지 않고, 감히 아름다운 일이 아니고 바른 행실이 아님을 가지고 곧장 선왕에게로 돌린단 말입니까?
또 그 우리 대행왕(大行王)의 성덕(盛德)을 칭송(稱頌)함에 있어서 천하를 위하여 사람을 얻음을 가지고 찬양하여 기리는 일단(一段)으로 하였는데, 아! 조현명의 뜻이 과연 능히 신기(神器)205)  를 끌어 전하(殿下)에게 전수(傳授)함이 선왕의 지인 성덕(至仁盛德)이 됨을 알았다면 당일의 건저(建儲)의 계책을 돕다가 일망타진(一網打盡)의 화(禍)를 입은 자가 어찌 조현명이 가엾이 여기 애석(哀惜)하게 생각하는 바가 되지 않으며, 저 당일 건저의 거조(擧措)를 배척하여 전하로 하여금 그 무함과 핍박을 받아서 거의 그 자리에 편안하지 못하게 한 자가 또 어찌 조현명의 뼈아프게 미워하는 바 되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것이 이상스럽다고 할 만합니다. 그 소에 말하기를, ‘대저 본연의 덕이란 곧 이른바 하늘이 명(命)한 성품(性品)과 하늘이 내려준 선(善)이니, 하우(下愚)도 모두 이것을 타고나서 걸(桀)·주(紂)·유(幽)·여(厲)도 또한 일찍이 이것이 없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 말의 무엄(無嚴)함이 이에 이른단 말입니까? 아! 우리 선왕께서는 덕성(德性)이 밝고 슬기로우며, 인효(仁孝)가 일찍 드러나서 우리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효도로 섬기어 질환(疾患)의 때에 근심을 다하고 흉변(凶變)의 즈음에 슬픔을 다한 것은 곧 나라 안의 대소(大小) 사람이 함께 칭탄(稱歎)하고 감읍(感泣)하는 바입니다.
이연(離筵)206)  의 강독(講讀)에 이르러서는 의심나는 뜻의 논란(論難)을 일으킴이 높아 보통 견해를 벗어나고, 전대(前代)를 상론(尙論)하여서는 문득 요·순으로써 스스로 기약하였으므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대소 신료(臣僚)들이 서로 더불어 전하여 외니,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조현명의 원용(援用)한 바 걸·주·유·여도 또한 이 같은 덕(德)이 있었습니까? 선왕의 본연의 덕이 이와 같은데도, 여러 간흉(奸凶)의 무리가 감히 속여 총명을 가려서 성고(聖考)의 성헌(成憲)을 뒤엎고 사직(社稷)의 어진 신하 죽이기를 오직 마음대로 하려고 하였습니다. 오늘에 미쳐 군의(群議)가 선왕(先王)의 본연의 덕을 밝혀서 흉당(凶黨)의 속여 총명을 가린 죄을 바로 잡고자 하니, 또 감히 막중함을 빙자하여 말하기를, ‘너희의 이른 바 본연의 덕은 걸·주·유 여도 일찍이 이것이 없지 않았다.’고 하고, 그들의 속여 총명을 가려서 탁란(濁亂)한 행적(行跡)에 이르러서는 일체 선왕에게로 돌리며, 조현명 같은 자도 또한 말하기를, ‘이는 선왕의 정형(政刑)의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감히 끌어대어 의논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은 흉당의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는 계책을 위하여서는 득(得)이 되나 그 성덕을 더럽히는 데에야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그 무함하여 핍박한 것이 과연 누구이며, 허다한 좋은 점을 말살(抹殺)하여 함부로 끌어댄 것이 또한 누구입니까? 이는 참으로 만고(萬古)의 지원(至冤)으로서, 신민(臣民)이 지극히 통한(痛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가 소에 말하기를, ‘가령 남의 아비가 능히 항상 건강하지 못하여 병이 있었는데, 그 이미 죽은 뒤에 이르러 사람들이 혹시 그 병들고 그릇된 정상(情狀)을 차례로 들어서 헐뜯어 말하고 따라서 이를 풀이하여 말하기를, 「질병이니 본성(本性)을 손상할 것은 없다.」고 한다면, 즐겁겠는가 슬프겠는가? 하물며 호협하고 굳센 노복(奴僕)이 좌우에서 번갈아 왼다면 더욱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말이 비록 설만(褻慢)한 데에 가까우나 그가 이미 가정하여 비유로 삼았으니, 신은 청컨대, 그 말에 따라 묻겠습니다. 대저 질병이 몸에 닥침은 성인(聖人)도 면하지 못하는 바이니 기휘(忌諱)할 것이 아니며, 설령 기휘할 만한 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어진 부형(父兄)이 있어 불행하게 그 질병으로 인하여 집안 일에 혹시 그 본정(本情)을 어김이 있다면, 그 서로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향당(鄕黨)과 주려(州閭)에 밝게 말하기를, ‘이는 질병에 말미암은 것이지, 본정은 일찍이 이런 것이 없다.’고 할 것이요, 그 아들된 자도 또한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어찌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는가? 이는 질병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고 할 것입니다. 그 질병을 밝게 말하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그 질병을 기휘하여서 그 일로써 그 사람이 스스로 한 것에 돌리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함이 되겠습니까? 그 아비의 질병을 밝게 말하여서 향당과 주려의 의혹을 푸는 것이 효도가 되겠습니까? 차라리 본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마 ‘병(病)’이라는 한 글자를 끌어대어 이를 변명하지 않는 것이 효도가 되겠습니까? 하물며 그 집 일의 본정을 어긴 것이 모두 그 집의 호협하고 굳센 노복이 그 아비의 질병을 틈타 이를 한 데서 나왔는데, 당초에 그 아비에 관여(關與)된 바가 없다면, 그 아들된 자가 또 장차 그 아비의 질병을 기휘코자 하여 도리어 호노(豪奴)·건복(健僕)이 한 바로써 은연중에 그 아비가 스스로 한 것처럼 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조현명으로 하여금 이것을 담당하게 한다면, 장차 어느 것을 가려 이에 처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소(疏)에 말하기를, ‘이제부터 이후로 신축년과 임인년의 일을 논함에 있어 다만, 「아무 신하는 무슨 죄가 있으니 죽여야 합니다. 아무 신하는 무슨 죄가 있으니 귀양보내야 합니다」고 말할 것이요, 일언 반사라도 비방이 선왕에게 미쳐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그들의 죽여야 하고 귀양보내야 한다는 것은 그 죄범(罪犯)을 논한다면 바로 때를 틈타 탁란(濁亂)하고 속여서 천총(天聰)을 가린 것입니다. 이제 선왕을 위하여 그 탁란하고 속여 천총을 가린 죄를 주토(誅討)하고자 하면, 그는 곧 말하기를, ‘이는 곧 선왕을 지적하여 배척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걸핏하면 반드시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에 중점(重點)을 빙자(憑藉)하여 스스로 그 죄를 가리고 선왕에게 허물을 돌리고자 합니다. 조현명이 비록 비방이 선왕에게 미침을 지통(至痛)으로 여겨 심지어는 비록 그 무리를 들어 모두 죽이더라도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다고 말하였는데, 그 실지를 헤아린다면 차라리 선왕의 덕을 손상할지언정 오직 군하(群下)의 죄가 혹시 탄로날까 두려워한 것이었습니다. 조현명으로 하여금 스스로 마음에 숨겼다면, 이는 과연 선왕을 위하는 것입니까, 군소(群小)를 위한 것입니까? 그러나 오히려 감히 전하의 앞에서 드러내어 쟁변(爭辨)하지 못하는 것은 전하의 그 진실(眞實)을 모두 파악하심을 알아서 그 정상을 밝히심을 두려워하여 근거없는 말을 둘러대어 농간을 부리고, 백반(百般)으로 현혹하여 겉으로는 간악(奸惡)한 무리와 조금 다른 것 같으나, 실지는 사류(士類)를 깊이 무함하니 그 폐간(肺肝)을 가리기 어려움엔 어떠합니까? 더구나 그 인용한 바 송(宋)나라의 일에는 더욱 놀랍고도 분한 것이 있습니다.
아! 명숙 태후(明肅太后)는 참으로 실덕(失德)이 있었으니, 당시에 금하여 말하지 못하게 함은 그 실덕을 듣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선왕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인애는 일찍이 조그마한 허물도 없었는데, 그 총명을 가려서 탁란한 것은 군흉(群凶)의 죄입니다. 선왕께서 어찌 일찍이 실덕(失德)함이 송나라 태후와 같음이 있었습니까? 비유한다면 높은 하늘이 위에 덮여 있는데 바람과 천둥이 밑에서 멋대로 행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한 때의 요사스런 동작(動作)을 가지고 조금인들 고명(高明)한 본체(本體)를 손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허다한 경영을 소비하고 무한한 기관(機關)을 감추어서 말마다 막중(莫重)함을 빙자하고 일마다 협지(脅持)하여 그 사이에 한 마디 말도 용납되지 못하게 하여서 한갓 온 세상 사람을 속박할 뿐만 아니라, 실로 천청(天聽)을 공동(恐動)하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은 진실로 간교하고도 치밀하였습니다. 전하의 해와 달 같으신 밝음을 가지고도 도리어 매우 달콤한 말에 현혹되시어 그 끌어낸 비유의 그릇되고 망령됨을 살피지 못하시고, 그 말을 쓰고자 하시니 어찌 개연(慨然)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무릇 소장(疏章)은 유심히 보면 그 말이 또한 유심하고, 무심히 보면 그 말이 또한 무심하다. 전에는 내가 무심히 보았는데, 이제 네가 유심히 보니 내가 실로 이것을 병통으로 여긴다."
하였다.

 

3월 7일 기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 이이근(李頤根)이 그 죽은 스승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를 위해 상소(上疏)하여 변무(辨誣)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3월 9일 신축

권적(權𥛚)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삼사(三司)에서 전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속히 정지하라고 비답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0일 임인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론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서종급(徐宗伋)이, 광주(光州)의 백성이 자사(刺史)를 쫓은 일로써 문의(文義)를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의종(懿宗)207)   때 혼암(昏暗)한 임금이 당조(當朝)하여, 군소(群小)가 횡행하고 탐관 오리(貪官汚吏)는 오직 가렴 주구(苛斂誅求)에 힘썼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데 근본이 먼저 무너짐이 이와 같았으니,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사람의 상정(常情)인데, 무리로 모여 도둑질함은 사세(事勢)가 절박(切迫)하여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니, 정상이 실로 딱하다. 현재 삼남(三南)은 재황(災荒)이 매우 참혹한데도 탐학(貪虐)의 풍습이 크게 떨치어 수령(守令)된 자가 백성으로 하여금 살아갈 길이 없게 만드니, 광주 백성의 작란(作亂)이 바로 오늘의 근심이 되는 것이다. 지난번에 어느 고을의 석채(釋菜)208)   때에 제물(祭物)을 훔쳐 먹은 사람이 있어서 제사를 거행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굶주림이 몸에 절박함으로 인하여 염치를 돌아보지 못한 때문이다. 이것을 만약 용서한다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됨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법에 의하여 조처하였지만 측은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수령이 진정(鎭定)하여 통솔하는 방도에 만약 마음을 다한다면 어찌 이같은 폐단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대신(大臣)이 이선행(李善行)을 좋은 곳을 가려 보낼 것을 말하므로,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따랐다. 무릇 찬배(竄配)의 죄인은 이미 죽음을 감하여 살리려는 뜻인데, 근래에 의금부(義禁府)에서 배소(配所)를 정할 때에 한결같이 그 좋아하고 미워함에 맡기니, 지극히 한심하다. 하물며 극변(極邊)의 찬배는 스스로 마땅히 보낼 곳이 있으니, 어찌 나쁜 곳을 가려서 보내랴? 이제부터 이후로 특별한 전교(傳敎) 이외에는 만약 나쁜 곳을 가려 보낸다면 의금부의 당상(堂上)은 마땅히 반좌(反坐)의 율(律)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함이 옳다."
하였다. 시독관 서종급이 말하기를,
"반좌(反坐)의 하교는 법례(法例)를 헤아리고 사리(事理)로 참작하건대, 단정코 지나친 줄로 압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좌의 율도 오히려 가볍다. 위에 있는 사람이 살리고자 하는데 밑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이려고 한다면, 장차 나로 하여금 당(唐)나라 희종(僖宗)이 되게 하려는 것인가? 극히 무엄(無嚴)하다. 한(漢)·당(唐)의 임금이 어찌하여 미약(微弱)하였는가? 이는 권병(權柄)을 아랫사람들에게 빼앗긴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비록 능히 삼대(三代)로 면려(勉勵)하여 경계하지 못할망정 어찌 나로 하여금 난망(亂亡)의 임금을 본받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비답하기를,
"속히 정지하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1일 계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3월 12일 갑진

달이 태미(太微)의 서원(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3일 을사

주강을 행하였다.

 

3월 14일 병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의현(李宜顯)·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심택현(沈宅賢)·동의금부사(同義禁府事) 윤봉조(尹鳳朝) 등을 파직(罷職)하였다. 이의현 등이, 죄인의 배소를 호오(好惡)에 일임(一任)함을 가지고 상교(上敎)가 극엄(極嚴)하여 심지어는 반좌의 하교가 있었는데, 연명(聯名)하여 소장(疏章)을 올려 인죄(引罪)하니, 임금이 모두 파직한 것이다.

 

3월 15일 정미

월식(月食)이 있었다.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의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황주(黃州)·재령(載寧)·서흥(瑞興)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기운이 있어 동북쪽에서 일어나 길이가 10여 장(丈)이 되며 빛이 무지개 같았는데, 얼마 아니되어 사라졌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의중(李毅中) 등이 상소하여 이광좌(李光佐)·유봉휘(柳鳳輝)·조태억(趙泰億)을 토죄(討罪)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16일 무신

지평(持平) 이광운(李光運)이 상소하였다. 그 요강(要綱)이 여덟 가지가 있었으니, 징토(懲討)를 엄히 하여 의리(義理)를 밝히는 것, 호오(好惡)를 공변되게 하여서 시비(是非)를 정하는 것, 사령(辭令)을 신중히 하여서 국체(國體)를 높이는 것, 실덕(實德)을 닦아서 천견(天譴)에 답하는 것,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나라의 경제를 넉넉하게 하는 것, 황정(荒政)을 강구(講究)하여서 실혜(實惠)를 펴는 것, 도고(逃故)를 덜어서 백성의 고통을 구휼(救恤)하는 것, 성학(聖學)을 힘써서 마음과 몸을 바르게 하는 것이었다. 비답하기를,
"진계(陳啓)한 것이 임금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었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지평(持平) 신처수(申處洙)가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신치운(申致雲)이 선정(先正)을 무함하여 훼방함과 이선행(李善行)의 기회를 타서 시험함을 성명(聖明)께서 이미 그 죄상을 통촉하였으니, 감률(勘律)의 조금 중한 것과 정배(定配)의 조금 먼 것은 처음부터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설사 대신(臺臣)과 금당(禁堂)209)  이 과연 너무 심한 거조를 하였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조용히 상량(商量)하고 짐작(斟酌)하여 가벼운 데에 따르심은 혹 가하거니와, 그렇지 않고 곧장 제신(諸臣)에게 오직 하고자 하는 대로 좋아하고 미워함에 한결같이 따랐다는 죄목을 더하셨으니, 신은 감히 전하의 이 하교는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경계하고 신칙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전하께서 조금 후에 마음을 돌리시어 곧 개석(開釋)을 내리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또한 그 연교(筵敎)가 마땅함을 잃었음을 아시는 것입니다. 오직 그 허물을 뉘우치심을 바로 보여 실언(失言)의 허물을 밝게 말씀하시더라도 어찌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인들 손상되겠습니까? 이제 그렇지 아니하여 미봉(彌縫)하고 감추며 이리저리 둘러대시다가 끝에 가서는 허물을 한 유신(儒臣)에게 돌리셨으니, 신은 옛날에 이른바 ‘해와 달이 다시 밝아졌다’는 것은 그 맑고 깨끗함이 결코 이와 같지 않을 듯합니다. 왕자(王者)의 법을 만드는 교시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그렇습니다. 옛날에 법을 제정(制定)함은 우순(虞舜)보다 더 나음이 없는데도 사흉(四凶)을 벌(罰)하였고, 또한 주공(周公)보다 더 나음이 없는데도 관(管)·채(蔡)를 죽였으니, 어찌 그 인애(仁愛)가 부족하고 법을 제정함이 너무 가혹한 것이겠습니까?
이제 흉역(凶逆)이 편안히 쉬고 대대(大憝)210)  가 스스로 방자한데도 전하께서는 조종(祖宗)의 법도를 어기고 삼척(三尺)의 준엄한 전법(典法)을 굽히사 이를 비호하여 온전히 용서하시니, 신은 왕자의 법도(法度)가 이로부터 모두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또 생각건대, 인군(人君)이 한갓 법을 만들 줄 알아서 의언(議讞)의 신하로 하여금 한결같이 임금의 뜻에 따라 그 사이에서 위복(違覆)211)  케 하여 조금이라도 어김이 있으면 문득 실당(失當)의 율(律)로써 더하시니, 신은 법을 집행하는 벼슬아치가 손 댈곳이 없고 정위(廷尉)212)  의 관원은 이로부터 혁파될까 두렵습니다. 전하의 이 하교는 또한 이치를 살핌이 정밀하지 못한 병폐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3월 17일 기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명하여 명(明)나라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어필(御筆)을 새겨 예관(禮官)을 보내어 청주(淸州)의 환장암(煥章庵)에 간직하게 하고, 이어 본도(本道)에 명하여 전결(田結)과 민호(民戶)를 떼어 주어서 수호(守護)하게 하였다. 처음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의종의 어필의 진본(眞本)이 지금 만동사(萬東祠)213)  에 있으니, 받들어 가져와서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인본(印本)하여서 혹시 진본과 어긋난 곳이 있거든 수개(修改)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다만 표준으로 삼아 본떠 새길 뿐이겠는가? 나 또한 어찌 진본을 받들 뜻이 없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오랫동안 봉안(奉安)한 뒤에 무단(無端)히 이봉(移奉)함은 미안(未安)한 데에 관계될 듯하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만동사 곁에 한 승사(僧舍)가 있는데, 선정(先正)214)  이 얻은 바 숭정(崇禎)215)  의 어필(御筆)인 비례 물동(非禮勿動) 네 큰 글자를 바위에다 본떠 새긴 뒤에 승사에 간직하였으며, 그 뒤에 또 숭정의 어필 타본(他本)을 얻어 함께 봉안하고, 이어 그 승사를 이름하여 ‘환장암(煥章庵)’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환하게 빛나는 글씨가 있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어필을 옮겨 받듦은 거조(擧措)가 가볍지 않으니, 이번의 인본 및 발문(跋文)을 만동사로 내려보내어 함께 간직하도록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또한 이와 같다. 마땅히 1건(件)을 내리어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인본 및 발문을 환장암에 봉안케 함이 옳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미 인본 및 발문을 간직한다면 만동사의 사체(事體)가 전과 더욱 달라질 것입니다. 숙종 임금께서 만동사의 일로써 하순(下詢)하셨을 때 신의 형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대답하기를, ‘나라에서 관여(關與)하여 알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관여하여 안다면 사체가 중대하니, 마땅히 1간(間)의 모옥(茅屋)에서 주 소왕(周昭王)을 제사지내는 의리(義理)로써 백성에게 붙여 주심이 가합니다.’고 하였으니, 당시에 성교(聖敎)가 또한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근년에 수령(守令)들이 전혀 돌아보지 아니하여 만동사의 수호(守護)가 매우 어려우니, 제물(祭物)과 제관(祭官)은 비록 조가(朝家)에서 간섭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결(田結)과 민호(民戶)를 떼어 주어서 수호하도록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약간의 전결을 환장암에 떼어 주어서 수호하도록 함이 좋겠다."
하였다.

 

3월 18일 경술

이병태(李秉泰)를 부응교(副應敎)로, 윤심형(尹心衡)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유(李瑜)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3월 19일 신해

밤 2경(更)에, 유성(流星)이 저성(氐星) 밑의 하늘 가에서 나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2, 3자가 되었다. 3경에 달이 심성(心星)과 화성(火星)을 범하였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홍치중(洪致中)에게 별유(別諭)하였다.

 

3월 20일 임자

이현록(李顯祿)을 응교(應敎)로, 이병태(李秉泰)를 집의(執義)로, 이의현(李宜顯)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이의현에게 다시 수어사(守禦使)의 직책을 주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지평(持平) 신처수(申處洙)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대저 임징하(任徵夏)가 과연 무슨 죄입니까? 권부(權扶)의 무리가 고집(固執)하여 죄안(罪案)으로 삼는 것은 그 말이 비록 많으나 요는 ‘난(亂)’이란 한 글자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 이른바 ‘난’이란 또한 그때의 군신(群臣)이 무상(無狀)하여 오로지 속이고 가리움을 일삼아서 성치(聖治)에 누(累)가 되게 함을 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찍이 털끝만치인들 선조(先朝)의 지극한 인애(仁愛)와 아름다운 덕을 해침이 있단 말입니까. 옛날에 하후승(夏侯勝)216)  이 곧장 한선제(漢宣帝) 앞에서 무제(武帝)를 배척하여 말하기를, ‘선제(先帝)가 사치스럽고 도(道)가 없어 백성의 재력(財力)을 다하여서 백성에게 덕택이 없었습니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 말됨이 일란(一亂)이라는 말에 그칠 뿐만이 아닌데도, 계류(繫留)217)  한 지 두 겨울이 지나매, 사씨(史氏)는 오히려 중흥(中興)의 흠정(欠政)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승하(昇遐)하신 초두에 고(故) 판서(判書) 신 정경세(鄭經世)가 응지(應旨)해 상소하여서 선조(先朝) 말년의 일을 극언(極言)하여 이르기를, ‘십수 년 이래로 요행의 문이 크게 열려 궁위(宮闈)가 저자를 이루어 각각 뇌물을 받아들여 작상(爵賞)과 형벌이 공도(公道)에 말미암지 않더니, 마침내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인의(仁義)를 버리고 이(利)를 품어 서로 접(接)하기에 이르러서 조저(朝著)의 탁란(濁亂)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정경세가 선조(先祖)를 비방함을 가지고 장차 극형(極刑)에 빠지게 되었는데, 고(故) 문충공(文忠公) 신 이항복(李恒福)이 대신(大臣)으로서 여러 번 아뢰어 신구(伸救)하여 벌이 삭직(削職)에 그쳤습니다. 대저 정경세의 말이 곧게 진달하고 통렬히 지척(指斥)하여 회피(回避)하는 바가 없었으며 임징하에 비하여 또 지나친데도, 당세(當世)에 죄를 성토(聲討)하는 의논이 없었고, 대신은 사체(事體)를 얻었다는 칭예(稱譽)가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모두 군신의 의(義)를 알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임징하가 말을 재량(裁量)하여 가리지 아니하고 뜻은 간곡(懇曲)함이 결여(缺如)되어서 능히 성상(聖上)의 추구(追疚)218)  의 지극한 정리(情理)에 저촉됨이 없지 않으니, 광망(狂妄)으로써 책하시고 그 벼슬을 특체(特遞)하심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군하(群下)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마땅히 언로(言路)의 방애(妨碍)가 있음을 염려하고 성덕(聖德)의 함용(含容)219)  을 권면(勸勉)하여 급급하게 구제하고 바로잡기를 이항복의 정경세에게 대함과 같이 함이 옳습니다. 오직 저 권부의 무리는 문자(文字)를 적결(摘抉)함으로써 기화(奇貨)로 삼아 번갈아 나아가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를 원용(援用)하여 반드시 한판에 승리를 거두고자 했으니, 그 마음의 소재(所在)를 밝게 알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예감(睿鑑)이 높이 비쳐 이매(魑魅)도 벗어나지 못하여 투비(投畀)220)  의 형전(刑典)을 차례로 거행하였으니, 무릇 듣는 자들이 흠앙(欽仰)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기회를 타서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에게 극심한 괴로움을 당하매 당초에 일을 말한 신하에게로 노여움을 옮겨 모두 정배(定配)의 벌로써 시행하시니 선악(善惡)이 같은 죄과(罪科)로 돌아가고 시비(是非)가 혼동(混同)되었으며, 후사(喉司)에서 복역(覆逆)하고 대간(臺諫)이 논계(論啓)하였으나 한결같이 물리쳐 마침내 지나친 거조(擧措)를 이루어서 더욱 흉당(凶黨)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성상(聖上)께서 평일에 위미(危微)의 경지(境地)221)  에 힘쓰심이 과연 무슨 일이기에 수응(酬應)의 즈음에 나타남이 이와 같이 전도(顚倒)되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임징하의 일은 경(卿)의 소(疏)에 인용한 바가 옳으나, 다만 때의 일이 예와 이제가 다른 때문이다."
하였다.

 

팔도(八道)의 유생(儒生) 이수(李洙) 등이 소를 올려 토역(討逆)의 의리(義理)를 진달(陳達)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유시(諭示)하였는데 무엇을 말하겠는가?"
하였다.

 

3월 21일 계축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3월 22일 갑인

주강을 행하였다.

 

3월 23일 을묘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경상도 암행 어사(慶尙道暗行御史) 윤심형(尹心衡)이 복명(復命)하여 상주 목사(尙州牧使) 안상원(安相元)과 울산 부사(蔚山府使) 안서우(安瑞羽)를 폄척(貶斥)하였다.

 

3월 24일 병진

우의정(右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은명(恩命)을 숙사(肅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홍치중이 맨 먼저 영상(領相)과 좌상(左相)을 권면(勸勉)하여 나오게 하기를 청하고, 이어 흉년에 당하여 급하지 않은 비용은 일체 견감(蠲減)하기를 청하였으며, 인하여 말하기를,
"신이 구구한 회포가 있으나 전에는 하문(下問)이 없었기 때문에 외람되게 감히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이제 청컨대, 마음속에 쌓인 것을 모두 말하겠습니다.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는 대의(大義)를 지키는 것이오나 그 안의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의 노적(孥籍)의 논계는 법(法) 밖에 속(屬)합니다. 무릇 법을 쓰는 도리(道理)에 있어서 아직 죽기 전에는 그 죄를 밝혀 바로잡음이 진실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전법(典法)이나, 이미 죽은 뒤에 노적을 추시(追施)함은 종시 법의 뜻이 아니니, 어찌 법 밖의 법을 세워서 뒷날의 무궁한 폐단을 연단 말입니까? 일찍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과 이 일을 의논하였는데, 민진원의 뜻은 혹 그 자식을 나누어 귀양보냄은 오히려 가하나 노적(孥籍)은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광좌(李光佐)는 성상께서 또한 이미 일을 맡겨 부리셨으니, 어찌 그 사람됨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사람이 반드시 일마다 모두 잘하지는 못하는 법이니, 국면(局面)에 당하여 일을 그르침은 면키 어려운 바입니다만 나라에 대한 부도(不道)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은 그 반드시 이 마음이 없음을 압니다. 전번의 정청(庭請)할 때에 소신(小臣)이 때마침 병으로 참례치 못하였는데, 소회(所懷)를 진달하고자 하였을 때는 정청을 먼저 파(罷)하였기 때문에 신이 또한 말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이광좌의 인품(人品)과 심사(心事)를 살펴본다면 계사(啓辭) 안에 여열(臚列)한 죄목이 종시 서로 가깝지 않으며, 조태억(趙泰億) 또한 일찍이 삼사(三事)222)  를 거친 사람이온데, 근래에 세도(世道)가 불행하여 무릇 변고(變故)가 있으면 삼사의 열(列)에 있는 자가 능히 화(禍)를 면함이 드무니, 어찌 크게 국맥(國脈)을 손상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유봉휘(柳鳳輝)의 소(疏)에 이르러서는 명호(名號)가 이미 정하여진 뒤에 나왔고 그 문자(文字)와 사어(辭語)로 보아서 진실로 구해(救解)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당론(黨論)에 괴벽(怪僻)한 사람으로서 한쪽의 사람을 지나치게 의심하여 죄를 구하기에 급하여서 말함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작년의 연중(筵中)에서 과연 성심(聖心)의 집지(執持)하는 바가 진실로 성덕(聖德)의 일이 되겠으나 대각(臺閣)의 의논을 또한 줄곧 억지로 어길 수 없음을 가지고 진달하였습니다. 신의 뜻이 이와 같으므로, 지난날 청대(請對)에 따라 참례함을 얻지 못함은 전후의 언의(言議)가 모순(矛盾)의 혐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물정(物情)에 있어서 신이 만약 진달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아시겠습니까? 위로 대신(大臣)·경재(卿宰)에서부터 아래로 유생(儒生)에 이르기까지 사생(死生)·화복(禍福)을 한쪽에 밀어 두고 모두 반드시 다툴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신(廷臣)이 겨우 임인년223)  의 살육을 거쳤으니, 누가 징창(懲創)의 마음이 없으며 또 어찌 성상의 호생(好生)하는 덕을 우러러 몸받고자 하지 않겠습니까만, 이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굳어서 깨뜨릴 수 없습니다. 성명(聖明)께서는 혹시 그 보복(報復)의 계책에서 나옴을 의심하시는 것 같으나 다만 물의(物議)를 듣건대, 이 계청(啓請)을 만약 허락하신다면 그 나머지는 수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보복을 마음으로 한다면 일부러 여러 사람을 버리고 다만 한 사람을 죽여서 마음에 쾌하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그 계청에 따르지 않으시고 왕왕 사지(辭旨)의 사이에 미안(未安)의 뜻을 지나치게 보이시니, 이것으로써 삼사(三司)의 신하가 다만 억울할 뿐만 아니라, 기맥(氣脈)이 풀리지 않는 자가 없어 모두 굳은 뜻이 없으니, 이와 같고도 나라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 대강(大綱)을 알지 못하랴. 경(卿)의 뜻은 지난번 입시(入侍) 때에 비록 한 마디 말을 들었어도 알 수 있었는데, 오늘 그 속에 쌓인 바를 다 털어놓으니, 나의 평일에 헤아리던 바와 다름없다. 합계(合啓) 중에 있는 사람을 내가 어찌 허물이 없다고 하랴? 만약 능히 군소(群小)의 버릇을 벗어나지 못함을 가지고 책함은 가하나 곧장 이를 역괴(逆魁)로 모는 것은 평일의 뜻과 다름이 있다. 조태구·최석항의 일은 원임 대신(原任大臣)도 또한 지나치다고 하였는데, 나 또한 대의(臺議)의 긴요(緊要)한 바가 이에 있지 않음을 안다. 유봉휘의 일은 공의(公議)의 굽힐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삼사(三司)에 붙이게 하였다. 나의 마음속이 만약 유봉휘의 죄가 반드시 일률(一律)에 해당함을 안다면 삼척(三尺)의 법을 내가 어찌 억지로 굽힐 수 있으랴? 이미 그 반드시 죽임에 해당함을 적실(的實)히 알지 못하면서 군하의 청(請)에 핍박받아 마지못해 따른다면 또한 성실(誠實)한 뜻이 아니다. 내가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여 지금까지 인순(因循)한 것은 아니니, 실로 너그러움을 가지고 사나움을 건지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 나랏 일이 그칠 바를 모르는 데, 생각이 백성의 곤췌(困瘁)와 시사(時事)의 간우(艱虞)에 미치면 한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으니, 실로 겉치레의 말이 아니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쪽을 따르는 것이 삼대(三代)의 아름다운 법도이니, 군신(群臣)이 어찌 죽이기를 좋아하고 많이 귀양보냄을 가지고 전하에게 바라겠습니까? 관계가 가볍지 않은 곳은 다투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삼사(三司)의 직분(職分)입니다."
하고, 인하여 제도(諸道)의 장문(狀聞)을 복주(覆奏)하고 물러나왔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3월 25일 정사

김고(金槹)·이집(李潗)을 승지(承旨)로, 최명상(崔命相)을 정언(正言)으로, 권적(權𥛚)을 헌납(獻納)으로, 이유(李瑜)를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 상소하여 맨 먼저 토역(討逆)을 말하고, 다음에 즉시 임징하(任徵夏)의 찬배(竄配)의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며, 다음에 의금부(義禁府)의 세 당상관(堂上官)의 견파(譴罷)224)  가 예우(禮遇)에 흠(欠)이 있음을 말하고, 다음에 외방(外方)의 진휼(賑恤)하여 구제(救濟)할 때에 통정 대부(通政大夫)·절충 장군(折衝將軍) 등의 첩문(帖文)을 팔도록 허락한 규정을 혁파(革罷)하기를 청하였으며, 다음에 열읍(列邑)을 엄히 신칙하여 군정(軍丁)의 여러 해 동안 도고(逃故)한 자를 명확하게 핵실(覈實)하여 즉시 그 대신을 편입(編入)하기를 청하고, 다음에 열읍의 전세(田稅)의 운반은 반드시 실지의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로 하여금 배에 타게 하기를 청하였다. 인하여 논하기를,
"진천 현감(鎭川縣監) 김득대(金得大)는 굶주린 백성의 죽음을 방관(傍觀)하여 종시 진구(賑救)할 생각이 없었고, 목천 현감(木川縣監) 오성유(吳聖兪)는 간악한 아전이 정사(政事)를 맡아보아서 곤궁한 백성들이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며, 온양 군수(溫陽郡守) 이광식(李光湜)은 친구를 두둔하여 촌가(村家)를 헐어서 입장(入葬)하도록 허락하였으니, 모두 파직(罷職)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하였다.

 

3월 26일 무오

밤 5경(更)에 유성(流星)이 남두성(南斗星) 위에서 나와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으니,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자 남짓 되었으며 빛이 붉었다.

 

평안도(平安道)의 일곱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유척기(兪拓基)를 승지(承旨)로, 홍봉조(洪鳳祚)를 지평(持平)으로, 서종섭(徐宗燮)을 집의(執義)로, 한계진(韓啓震)을 정언(正言)으로, 김흥경(金興慶)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황귀하(黃龜河)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이봉상(李鳳祥)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경상도(慶尙道) 유학(幼學) 권태두(權泰斗)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론(講論)을 마치고 시독관(侍讀官) 윤심형(尹心衡)에게 묻기를,
"유신(儒臣)이 방금 영남(嶺南)에서 돌아왔으니, 민사(民事)를 진달함이 가하다."
하니, 윤심형이 말하기를,
"영남의 흉년은 전고(前古)에 없던 바로서, 초봄의 날이 찬 때에는 길 위에서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바라보이고 5리(里), 10리 사이에 길 가운데서 얼어 죽은 시체가 거의 서넛에 이르렀는데, 이제는 열읍(列邑)에서 진휼(賑恤)을 설행(設行)하고 날씨가 또 따뜻하여서 길 위에 굶어 죽은 시체는 많지 않습니다. 당초에 도신(道臣)이 ‘우심(尤甚)’, ‘지차(之次)’, ‘초실(稍實)’의 세 등급으로 구별하고 ‘우심’ 속에서 전혀 수획(收獲)이 없는 곳을 추려 내어 ‘우심지우심(尤甚之尤甚)’에 두었는데, 묘당(廟堂)에서 혹시 재읍(災邑)의 지나치게 많음을 염려하여 ‘지차’를 ‘초실’로 올리고 ‘우심’을 ‘지차’로 올렸으며 다만 ‘우심지우심’의 아홉 고을만을 ‘우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번의 대동미(大同米)를 절반(折半)하라는 명령이 다만 아홉 고을에만 미치고 그 밖에는 다시 거론(擧論)하지 않았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 국용(國用)이 궁핍(窮乏)한 때를 당하여 한 도(道)를 비록 모두 정봉(停捧)하기는 어렵지만 처음에 도신의 장문(狀聞) 안의 ‘우심’에 들어간 곳은 또한 절반을 정봉케 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쪽 땅의 민정(民情)이 눈 안에 있는 듯하니, 처참함을 어찌 말하겠는가?"
하고, 이어 묘당으로 하여금 초기(草記)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윤심형이 또 목화(木花)의 재해를 입은 흑심한 정상(情狀)을 진달하고 이어 대동미의 작목(作木)하는 수량(數量)를 감(減)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였다. 이는 대개 윤심형이 영남 어사(嶺南御史)로서 복명(復命)한 내용이었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3월 27일 기미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효종 묘정(孝宗廟庭)에 추배(追配)하고 숙종 묘종(肅宗廟庭)에 배향한 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윤지완(尹趾完)은 모두 출향(黜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선현(先賢) 및 공신(功臣)·청백리(淸白吏)와 원통하게 죽거나 전사(戰死)한 사람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는 규례는 실로 충의(忠義)를 포장(褒奬)하고 염결(廉潔)을 권면(勸勉)하는 뜻에서 나왔는데, 먼 후예(後裔)와 지손(支孫)이 계속 녹용(錄用)되어 거의 정하여진 수가 없으니, 신의 뜻은 정한(定限)을 명백하게 하여 다만 그 적장손(嫡長孫)을 취하여 씀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요(堯)·순(舜)의 아들도 오히려 불초(不肖)했거늘 유현(儒賢)의 자손이 어찌 반드시 사람마다 모두 어질겠는가? 근래에 공신 및 전사(戰死)한 사람들의 자손을 또한 모두 그 형세(形勢)의 유무(有無)를 보아서 쓰니, 내가 매우 개연(慨然)스럽게 여긴다. 이 뒤로는 다만 적장손을 쓰되 먼저 그 사람됨을 볼 뜻으로 전조(銓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유척기가 또 말하기를,
"정사훈(靖社勳)225)  은 여섯 임금을 거쳐 이미 백 년을 지냈는데도 적장손이 이제에 이르기까지 녹(祿)을 받음은 진실로 의의가 없으니, 마땅히 즉시 혁파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유척기가 또 청하기를,
"해마다 대정(大政)전에 미리 조신(朝臣)의 2품(品)이상, 혹은 삼사(三司)이상으로 하여금 각각 경술(經術)·사학(詞學)·간국(幹局)이 있어 입사(入仕)를 감당할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되, 생원(生員)·진사(進士)는 30세 이상, 유학(幼學)은 40세 이상이라야 비로소 천거를 허락하고,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정사(政事)에 임하여 가려 쓰게 하되, 일후(日後)에 혹시 법을 어기거나 장죄(贓罪)를 범할 경우 그 천주(薦主)를 아울러 죄준다면, 옛날의 효렴(孝廉)을 천거하는 유의(遺意)를 얻음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규식(規式)을 정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또 경외(京外)의 관절(關節)226)  의 폐단을 진달하여 말하기를,
"옛날 인조(仁祖) 임금 때에 있어, 또한 이 법금(法禁)을 엄히 하여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고(故) 판서(判書) 김좌명(金佐明)이 수찬(修撰)이 되었을 때에 우연히 일로 인하여 경기(京畿) 고을에 서간(書簡)을 보냈는데, 그 고을 수령이 그 서간을 감영(監營)에 봉(封)하여 올리고 감영에서는 다시 조정에 계문(啓聞)하매, 김좌명이 이로써 죄를 받아 멀리 귀양갔으니, 조종조(祖宗朝)의 법제(法制)와 기강(紀綱)이 그 엄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엄금(嚴禁)하게 하였다.

 

3월 28일 경신

행 대사간(行大司諫) 홍우전(洪禹傳)이 상소하기를,
"전하(殿下)께서 극치(克治)227)  의 공부가 아직도 순숙(純熟)치 않고 기질(氣質)의 병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영기(英氣)를 매우 발로(發露)하사 군하(群下)를 경시하는 뜻이 있고, 성지(聖智)를 홀로 운행(運行)하여 선(善)한 것을 즐거이 취하는 도량이 없으며, 희노(喜怒)의 나타남이 혹시 경솔한 것이 많고 사기(辭氣)의 사이에 또한 침중(沈重)함이 부족하여 때와 곳에 따라 걸핏하면 해(害)가 됩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신은 거조(擧條)228)   외에 연석(筵席)의 설화(說話)는 인혐(引嫌)하지 말라는 하교에 있어 저으기 의아하게 생각하고 미혹(迷惑)하는 바가 있습니다. 일당(一堂)에서 도유(都兪)229)  한 말은 본디 깊이 기휘(忌諱)할 일이 아니니, 말을 반드시 가려 꺼내어 모두 이치(理致)에 맞기를 힘써서 전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할 따름입니다. 어찌 반드시 그 유포(流布)될 것을 미리 염려하여 먼저 엄방(嚴防)을 세워 조정에 있는 신하로 하여금 비록 인혐(引嫌)할 만한 것이 있어도 들어서 앎을 얻지 못하게 하고 비록 혹시 들어서 알아도 또한 감히 스스로 논열(論列)하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려 가장(嘉奬)하였다.

 

3월 29일 신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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