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권, 영조 2년 1726년 4월

싸라리리 2025. 8. 20.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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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계해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의 삭제(朔祭)를 몸소 행하였다.

 

4월 2일 갑자

양사(兩司)  【장령(掌令) 이제항(李齊恒)·지평(持平) 신처수(申處洙)·헌납(獻納) 권적(權𥛚)·정언(正言) 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묘정(廟庭)의 배식(配食)은 일의 체통이 엄하고 중한 것인데, 불행하게도 근자에 뭇 흉도(凶徒)들이 나라의 정령(政令)을 쥐고 감히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 등 세 사람을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묘정(廟庭)에 배식(配食)하였으니, 아! 통탄할 일입니다. 저 세 사람의 평생을 공정하게 고찰하여 그 본말(本末)을 논한다면 마음에 달갑게 역도(逆徒)와 동당(同黨) 혹은 국적(國賊)을 두호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고 기회를 이용하여 소(疏)를 올려서 혹은 사류(士流)를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는 것을 장책(長策)으로 삼았으며, 심지어는 흉론(凶論)을 조술(祖述)하여 명의(名義)를 원수같이 보았는가 하면 경서(經書)의 근본 뜻을 어지럽게 변조하여 성현의 훈의(訓義)를 위배하였은즉, 그 인륜의 상도(常道)를 무너뜨리고 거역하여 세상을 혼란케 하고 사람을 그르치게 한 죄를 또한 이루 주벌(誅伐)할 수 없는데, 오직 그 기염(氣熖)이 치성하고 혈맥(血脈)이 관통(貫通)되어 그 무리가 한층 더 서로 보호하면서 멋대로 자기들의 의도한 바를 행사해서 신축년230)  의 화(禍)를 빚어내어 거의 종사(宗社)를 복망(覆亡)하게 하였으니, 아! 이 어찌 하루 아침 하루 저녁의 연고이겠습니까? 이것이 모두 저 3인이 남긴 해독(害毒)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찌 하루인들 이를 종향(從享)하는 반열에 두어 후세의 사람으로 하여금 동심(同心)·동덕(同德)했던 것으로 의심받아 우리 성고(聖考)에게 누(累)가 되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묘모(廟貌)를 새롭게 하고 신여(神轝)를 도로 봉안(奉安)할 때를 당하여 결코 그대로 잘못을 답습하여 배식(配食)하는 반열에 둘 수는 없으니, 청컨대, 속히 묘정(廟庭)의 종향에서 철거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3일 을축

태묘(太廟)의 개수(改修)를 마치고 경덕궁(慶德宮)으로부터 11실(室)의 신여(神轝)를 받들어 도로 봉안(奉安)하기를 의절(儀節)과 같이 하였다. 임금이 어가(御駕)로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갔다가 공경히 따라 태묘(太廟)에 나아가 배알(拜謁)하고 봉심을 마치매, 도제조(都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나아가 말하기를,
"영녕전(永寧殿)231)   배알은 예(禮)에 미안함이 있으니, 정지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홍치중(洪致中)도 말하기를,
"영녕전은 전내(殿內)에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니 원임 대신(原任大臣)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옮겨 봉안할 때에 이미 봉심을 했는데 유독 환안(還安)할 때만 행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마음에 내킨 대로 즉시 행동이 비록 불가하다고는 하나 예(禮)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영녕전에 배알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인하여 공경히 배알하기를 태묘(太廟)의 예절과 같이 하였다.

 

4월 4일 병인

전주(全州)에 우박이 내렸다.

 

태묘 개수 도감(太廟改修都監) 도제조(都提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내렸다.

 

집의(執義) 서종섭(徐宗燮)이 상소(上疏)하여 사직하고 묘정 배향(廟庭配享)에 대하여 대략 논하기를,
"해조(該曹)에서 초기(草記)하여 품정(稟定)한 것은 사실 나라의 체통을 중시하고 대각(臺閣)의 규례(規例)도 유지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殿下)께서 이미 도로 내주라고 명하시고 또 받아들인 승지(承旨)를 추고(推考)하라 하시니, 신(臣)은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예조에서, 양사(兩司)에서 바야흐로 삼신(三臣)을 묘정(廟庭) 배향(配享)에서 축출할 것을 청하고 있어 전례에 따라 환향(還享)하기가 곤란하다고 초기(草記)하여 품의하니, 임금이 도로 내주라고 명하고 승지를 추고(推考)하였기 때문에 서종섭이 말한 것이다. 소(疏)를 들이자 임금은 비답을 내리지 않고 계자(啓字)232)  를 찍었으므로 정원(政院)에서 이를 도로 올리면서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말하자, 서종섭의 소장(疏章)을 다시 들이라고 명(命)하고 비답을 내려 체직(遞職)을 허락하였다.

 

4월 5일 정묘

응교(應敎) 이현록(李顯祿)·교리(校理) 김용경(金龍慶)·부교리(副校理) 윤심형(尹心衡)·수찬(修撰) 박사성(朴師聖)·부수찬(副修撰) 김상석(金相奭)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배향(配享)한 삼신(三臣)을 거론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한 번 당론(黨論)이 있은 뒤로부터 그 올렸다 내렸다 하는 바가 순수하고 공정했음을 듣지 못했고 심각한 논의가 종묘(宗廟)에 배향된 신하에게까지 미치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내가 조화(調和)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시강관(侍講官) 김용경(金龍慶)이 육진(六鎭)의 폐단을 고쳐 바로잡기를 청하였는데, 이르기를,
"시장(市場)을 열 때 우리 나라의 곡물이나 소 등은 한도 외에 사사로이 판매하지 못하게 할 것, 경원(慶源) 시장의 호인(胡人)은 그 인마(人馬)의 수효를 정하고 머물러 있는 기한을 정하여 오랫동안 지체함이 없게 할 것, 육진(六鎭)의 수령(守令)은 곤수(閫帥)233)  로 승진시키는 계제(階梯)로 삼아 호인(胡人)들을 탄합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혹은 품하여 처리하게 하고 혹은 시행하게 하였다. 당시 김용경이 북평사(北評事)로 있다가 환조(還朝)하였기 때문이다.

 

정택하(鄭宅河)를 집의(執義)로, 이단장(李端章)을 사간(司諫)으로, 김상석(金相奭)을 부교리(副校理)로, 권적(權𥛚)을 교리(校理)로, 민응수(閔應洙)를 헌납(獻納)으로, 이현록(李顯祿)을 승지(承旨)로, 이재(李縡)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이의현(李宜顯)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유척기(兪拓基)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유복명(柳復明)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4월 6일 무진

소대(召對)를 행하고 《강목(綱目)》을 강(講)하였다.

 

4월 7일 기사

경성회(慶聖會)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4월 8일 경오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여름 향사(享祀)를 몸소 행하였다.

 

4월 9일 신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신(臣)이 종묘(宗廟)를 개수(改修)하고 남은 재목을 4대신(四大臣)의 서원(書院) 역사에 허급(許給)하실 것을 진달하여 윤허를 받은 것은, 대개 신의 뜻은 4대신이 종사(宗社)를 위하여 죽었고 묘역(廟役)의 남은 재목을 허급하는 것은 사리에 합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전날에 허급한 외에도 또 약간의 남은 재목이 있다 하니, 모두 지급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4대신의 서원을 바야흐로 육신 서원(六臣書院) 근처에 영건(營健)하고 있는데, 어느 선비가 그 소유 전지(田地)의 성문(成文)을 보내오면서 이르기를, ‘이 서원을 영건하는 데 내가 어찌 값을 받겠느냐?’고 했으니, 인심(人心)의 동일함을 이어서 또한 볼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4월 11일 계유

헌납(獻納)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평일에 제도나 정치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평범한 군주(君主)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시고 언제나 삼대(三代)의 정치를 스스로 기약하셨는데도 곧 선(善)을 따르는 미덕(美德)이 부족하시고 도리어 스스로 성인(聖人)으로 자처하시는 병통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혹은 부딪치게 되면 대체로 종같이 꾸짖고 돼지같이 보시는 습성을 면치 못하시니 전하께서 대각(臺閣)을 대우하심이 이미 이와 같으시면 지금 대각에 있는 자가 장차 머리를 숙여 눈치만 살피며 한결같이 임금의 처분만 따라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말과 논의를 힘껏 다하여 토죄해 회복할 대의(大義)를 진달하여야 하겠습니까? 전일 관학(館學) 유생에 대한 비답에는 ‘무의(無義)’ 두 글자를 비록 대신(臺臣)의 소장(疏章)으로 인하여 특별히 고쳐서 내리셨으나, 그 후에는 관학과 팔도(八道)의 소장에 번번이 두어 글자로 비답을 내리시다가 마침내는 곧장 도로 내주도록까지 하시어 대각에 대해서는 다만 작록(爵祿)으로써 구사(驅使)하려 하고 많은 선비에 대해서는 다만 과목(科目)으로 용동(聳動)하게 하려고 하시니, 전하(殿下)께서 새상을 격려하는 도구(道具)로 삼는 것에 본말(本末)이 또한 전도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언로(言路)를 넓히고 사기(士氣)를 부식(扶植)함을 내가 어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겠는가? 다만 시사(時事)가 예전과 같지 않아 언의(言議)가 더욱더 과격해 가는데, 위에 있는 사람이 그 장차 부식해야 하겠는가? 조금 제재(制裁)하여야 하겠는가? 이기기를 힘쓰는 풍조와 스스로를 믿는 병폐가 실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4월 12일 갑술

예조 정랑(禮曹正郞) 고만첨(高萬瞻)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화양동(華陽洞) 환장암(煥章菴) 곁에 별도로 한 작은 집을 짓고 두 황제(皇帝)의 유묵(遺墨)를 아울러 봉안(奉安)하였는데, 유생(儒生)으로 하여금 그 개폐(開閉)와 포쇄(曝曬)234)  를 주관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후에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진달한 바로 인하여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적당한 양(量)의 쌀을 지급하여 모든 유생들로 하여금 환장암 곁에 나아가 한 간의 집을 세워 어필(御筆)을 받들게 하였다.

 

임금이 차사원(差使員)·수령(守令)으로 도로 내려가는 자를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영남(嶺南)에 흉년이 들어서 진휼(賑恤)을 시행하였는데, 임금이 진휼 행정의 시행 조치와 유산(流散)하고 사망한 자의 다소(多少)를 물은 바, 비안 현감(比安縣監) 정석징(鄭錫徵)의 말이 모호(糢糊)하여 대답을 자세하게 못하자 임금이 그의 직무(職務)에 마음을 다하지 못함을 책망하고 특별히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4월 13일 을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기익(李箕翊)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허석(許錫)·정광제(鄭匡濟)를 장령(掌令)으로, 신노(申魯)를 지평(持平)으로, 이도원(李度遠)을 정언(正言)으로, 이정주(李挺周)·신무일(愼無逸)·이의천(李倚天)을 승지(承旨)로, 심태현(沈泰賢)을 검열(檢閱)로, 이병상(李秉常)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삼았다.

 

4월 15일 정축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망제(望祭)를 몸소 행하였다.

 

4월 16일 무인

삼사(三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고, 양사(兩司)에서 전에 합계한 것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정언(正言) 이도원(李度遠)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만약 천리(天理)에 따르시고 인정(人情)에 순응하시어 군흉(群凶)의 죄를 고찰해 다스리고 주범과 종범의 분별을 자세히 살펴서 좋고 나쁜 것을 엄격히 보이고 옳고 그른 것을 밝게 바로잡는다면, 여러 사람의 소망을 채울 수 있고 사특한 말들이 지식될 수 있을 것이며, 조치가 합당함을 얻어서 인심이 크게 안정될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새로운 길을 열고 기회를 엿보는 바람을 끊게 하여 국론이 분열되지 아니하고 추향(趨向)하는 바가 합일(合一)한다면 자연히 날로 변천하고 달로 감화되어 마침내는 난만(爛熳)히 같은 데 돌아가는 영역(領域)에 이르러서 지난날 근심하던 당비(黨比)의 풍조(風潮)가 장차 전하의 성기(聲氣)를 수고롭히지 않더라도 자연히 해소되고 융화될 것이니, 이것이 참으로 한낱 탕평(蕩平)의 경지가 될 것입니다."
하니, 후한 비답으로 답하였다.

 

사간(司諫) 이단장(李端章)이 사물(事物)에 나아가 이치를 추구(推求)하고 성심(誠心)으로 사람을 대하여 성학(聖學)에 힘쓰라는 것으로써 상소하고, 또 말하기를,
"영광(靈光) 사람 이범(李範)의 서자(庶子) 이유기(李有機)는 감히 적통(嫡統)을 빼앗으려는 계획을 내어 그 적모(嫡母)가 낳은 자녀(子女)를 가리켜서 그 부모의 소생이 아니라 하고 스스로 원척(原隻)235)  이 되어 아비와 서로 소송을 제기하여 그 아비로 하여금 세 차례의 혹형(酷刑)을 당하게 하고 천리(千里)의 먼 곳으로 유배가게 하였으며, 그의 적모(嫡母)를 협박하여 마침내 자진(自盡)하게 하였으니, 일이 윤상(倫常)에 관계되고 죄(罪)는 삼성(三省)236)  에 관련됩니다. 이유기를 마땅히 의금부(義禁府)로 옮겨서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얻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원백규(元伯揆)는 탐욕하고 불법(不法)하오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함이 마땅하며, 임천 군수(林川郡守) 정창진(鄭昌震)은 비루하고 잗달으며 탐욕하여 재물을 긁어 모았으니 마땅히 파직하여 쫓아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유기(李有機)의 일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하고, 이내 해조(該曹)에 명하여 그 경개(梗槪)를 추려 진달하도록 하였고, 원백규·정창진의 일은 따르지 않았다.

 

4월 17일 기묘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4월 18일 경진

삼사(三司)가 전의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 비답하였고, 양사(兩司)에서 전에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한 것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북병사(北兵使) 이사성(李思晟)이 장계(狀啓)를 올려 청하기를,
"북경(北京)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매년(每年) 개시(開市)하기를 의주(義州)나 중강진(中江鎭)의 예와 같이 두 나라의 접경한 지대에서 별도로 한 공한지(空閑地)를 정하여 각각 스스로 교역하게 하되, 공궤(供饋)237)  는 건물(乾物)로 지급하고 예단(禮段)은 정식(定式)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묘당(廟堂)에서 복계(覆啓)하였으나 자문을 보내는 것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4월 20일 임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4월 21일 계미

밤 2경(二更)에 건방(乾方)에 불빛같은 기운이 있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울산부(蔚山府)의 정빈방(靖嬪房)에서 어전(漁箭)238)  을 절수(折受)239)  한 곳은 지난번에 경상 감사(慶尙監司)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여 혁파하기를 청했는데, 주상으로부터 병영(兵營)과 더불어 반으로 나누어서 세(稅)를 거두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숙종조(肅宗朝) 때 고(故) 상신(相臣) 민진장(閔鎭長)이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있을 당시 탑전(榻前)에 진달하여 모든 궁가(宮家)에서 어장(漁場)을 절수하는 것을 영원히 혁파하게 하였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정한 법식은 본시 준수하는 것이 마땅한데, 더욱이 반으로 나누어 세금을 거둔다는 것은 끝내 구차할 뿐 아니라 두 곳에서 세금을 거두게 되면 민폐(民弊)가 더욱 심할 것이니, 민정(民情)을 굽어살피시와 특히 혁파를 명하신다면 성덕(聖德)에 빛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우참찬(右參贊) 심택현(沈宅賢)도 또한 세금을 나누어 거둘 때에 반드시 다투는 사단이 있을 것이라고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관서(關西)에 절수(折受)한 것도 한낱 수령(守令)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그 혁파를 허락하였다. 더구나 이 일은 대신(大臣)들이 말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본도(本道)에 환속(還屬)토록 하라."
하였다. 이때 이사영(李思永)의 처(妻)가 그 아들 이천기(李天紀)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임금이 대신(大臣)과 모든 신하에게 물으니,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물으시는 처지에 어찌 감히 마음에 품은 바를 다하지 않겠습니까? 이천기가 치우치게 참혹한 화를 입은 것이 비록 심히 불쌍하오나, 다만 이 무리가 과연 역적 목호룡(睦虎龍)과 결탁하였고 환시(宦侍)와 서로 내통한 일이 있었다면 까닭없이 원통하게 죽은 사람과 아울러 복관(復官)을 허락할 수 없을 것이니, 다시 문안(文案)을 상고하여 과연 이런 일이 없었다면 마땅히 탕척(蕩滌)을 논의해야 할 것이나, 혹시라도 의심난 사단이 있다면 마땅히 처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황귀하(黃龜河)는 말하기를,
"작년에 민진원(閔鎭遠)이 이천기의 복관을 진달한즉 성상께서 미루시면서 거론하지 말라 하셨는데, 신(臣)의 생각에 비록 그 역명(逆名)은 벗겨주었으나 복관(復官)을 허락하지 아니하신 것은 성의(聖意)에 구별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하셨으리라고 봅니다. 지금 만약 복관을 허락한다면 심상길(沈尙吉)의 아우도 그 형을 위해 상언(上言)하여 원통함을 호소할 것이니, 이 무리도 또한 차례로 시행을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당초에 구별해 놓으신 성의(聖意)에 어긋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헌납(獻納) 민응수(閔應洙)와 교리(校理) 권적(權𥛚)도 모두 황귀하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240)  ·임인년241)  에 화를 입는 사람이 만약 대행조(大行朝)에 털끝만큼이라도 모반(謀反)할 마음이 있었다면 내가 마땅히 엄히 토벌하는 데 겨를이 없었을 것이어늘 어찌 용서할 이치가 있겠는가? 아까 대신의 한 말이 좋기는 하다. 흉악함이 역적 목호룡과 같은 사람을 뿌리쳐 물리치지 못하고 이와 더불어 교유(交遊)하여 마침내 형화(刑禍)에 빠지고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그 복관(復官)을 허락한다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오늘 여러 신하들의 뜻이 모두 같으니, 가히 한 맥락의 공의(公議)를 속일 수 없음을 보겠다. 이사영 처(妻)의 상언(上言)은 시행하지 말고 돌려주는 것이 옳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심택현(沈宅賢)이 말하기를,
"동궁(東宮)이 여덟 살에 입학(入學)하는 것은 본시 옛날의 규례(規例)입니다. 왕세자(王世子)께서 바로 입학할 해를 당하여 바야흐로 국휼(國恤)242)  의 3년 안에 있음으로 전례에 따라 취품(取稟)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옛날의 사례에는 어떻게 하였는가를 물었다. 심택현이 말하기를,
"숙종께서는 9세(歲)에 입학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묘(宗廟)를 배알(拜謁)하는 일은 부묘(祔廟)243)  를 기다려 10월 안에 하고 입학(入學)은 우선 명춘(明春)을 기다려서 하게 하라."
하였다. 헌납(獻納) 민응수(閔應洙)가 나아가 전계(前啓)를 읽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고, 손형좌(孫荊佐)의 아룀에 이르서는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으며, 오명항(吳命恒)·이인징(李麟徵)·이만선(李萬選) 등의 아룀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말하기를,
"그 소(疏)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 사람을 죄주는 것이 부당하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임징하(任徵夏)가 상소하여 인피한 것을 만약에 감히 말할 수 없는 처지에서 기망(欺罔)해 핍박했다고 이른다면 나라의 처분이 어찌 이에 그치겠습니까? 대개 그 당시의 모든 신하의 죄를 공척(攻斥)하려고 한 것이므로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공척하려면 어찌 할 말이 없어서 꼭 이와 같은 말을 했겠습니까? 찬배(竄配)를 특별히 명하신 것은 이를 막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신(臣)은 언제나 성상의 처분을 좋게 여깁니다. 대저 사람이란 각기 소견이 있는 것이므로 오명항이 소회(所懷)를 소장으로 진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지금 올라오지도 않은 소(疏)를 가지고 어찌 혼동하여 죄를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신(臣)은 대계(臺啓)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징하를 죄주지 아니하면 어떻게 저지하고 억제하겠는가?"
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의 계달(啓達)에 대하여 말하기를,
"조현명의 소(疏)는 마음에 품었던 것을 반드시 진달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교밀(巧密)하다는 이유로 배척하니, 만약 이것을 가지고 죄를 준다면 이 뒤로는 마음에 품었던 것을 진달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권변(權忭)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재(李縡)를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4월 22일 갑신

지평 신노(申魯)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그저께 금리(禁吏)를 보내어 두세 명의 창녀(娼女)를 잡아다가 구류(拘留)해 두었는데, 어제 10여 명의 불량한 놈들이 창의궁(彰義宮)의 노예라 하면서 구류해 둔곳에 돌입(突入)하여 금리(禁吏)와 쇄장(鎖匠)을 구타(毆打)하여 상처가 낭자하였습니다. 본부(本府)에서 마땅히 즉시 가두고 엄히 다스려야 되겠는데, 궁내(宮內)로 도망해 숨고 나오지 아니하니, 청컨대, 그들을 적발하여 본부로 넘겨주어 법에 따라 죄를 주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이 극히 해괴하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추궁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창의궁(彰義宮)은 곧 임금의 잠저(潛邸)이다.

 

팔도 유생(八道儒生) 이승수(李昇粹) 등이 잇따라 상소(上疏)하여 역적(逆賊)을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23일 을유

삼사(三司)에서 전날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고, 양사(兩司)에서 전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도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서 전옥(典獄)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남원 유학(南原幼學) 김협(金筴) 등이 상소하여 사절신(死節臣) 이상길(李尙吉)을 영천 서원(寧川書院)에 추향(追享)할 것을 청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라고 비답하였다.

 

4월 24일 병술

열성(列聖)의 어제(御製)를 첨부하여 간행하는 역사(役事)를 마치자 제조(提調) 및 발문 제술관(跋文製述官)·서사관(書寫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경연관(經筵官) 김간(金榦)이 《맹자차기(孟子箚記)》를 올렸는데, 그 상소에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요사이 《맹자(孟子)》를 강독(講讀)하신다고 하니, 이 글을 읽은 자는 반드시 먼저 그 편(篇)의 주의(主意)가 어디에 있는가를 안 연후에야 비로소 차례로 풀어서 수용(受用)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주의(主意)라는 것은 ‘인욕(人慾)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한다.[遏人慾存天理]’는 여섯 글자 뿐입니다. 《중용(中庸)》으로써 말한다면 ‘인욕을 막음’은 신독(愼獨)하는 일이요, 천리를 보전함은 계구(戒懼)하는 일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이 여섯 글자를 가지고 공부(工夫)에 힘써서 한갓 그 말만을 외울 것이 아니라 또 능히 몸으로 체득하여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사이에 추급(推及)해 시행한다면, 무릇 날로 쓰는 거조(擧措)가 반드시 모두 공평한 천리(天理) 속에서 흘러나와 자연히 사사로운 인욕(人慾)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臣)이 전일 이 글을 읽을 때 감히 고금(古今)의 경사(經史)가 이 글에 발명된 것을 수집하여 하나하나 각 조목(條目)의 아래에 수록(收錄)하였으며, 간혹 천박한 식견으로 논변(論辯)한 바가 있으면 ‘안(按)’이란 한 글자로 분별하고 이름하여 《맹자차기(孟子箚記)》라 했습니다. 야인(野人)의 헌근(獻芹)244)  한 그 정성을 견디지 못하여 사리를 헤아리지 않고 무릅쓰고 글을 올립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아름답게 여겨 권장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지(諭旨)를 전하였다.

 

4월 25일 정해

팔도 유생(八道儒生) 조선(趙璿) 등이 연속 소를 올려 역적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소장(疏章)을 올린 것은 조사(朝士)나 유생(儒生)을 막론하고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고, 양사(兩司)에서 전에 합계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4월 26일 무자

임금이 경연관(經筵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직(內職)을 가볍게 여기고 외직(外職)을 중하게 여기는 것은 한(漢)나라의 미법(美法)인데, 우리 나라는 이와 같지를 않다."
하였다. 시강관(侍講官)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시종(侍從)하는 사람들을 간혹 목민관(牧民官)으로 삼는다면 어찌 도움되는 바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평상시에도 오히려 외방(外方)을 중히 여기는 법을 행하여 왔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이 민생(民生)이 곤핍한 때이겠는가? 삼사(三司)에 출입한 사람이 만약 외방(外方)의 일을 잘 알고서 묘당(廟堂)에 들어와 있다면 어찌 그 효력이 없겠는가? 지금부터는 일반적인 격례(格例)에 구애하지 말고 융통하여 외읍(外邑)에 비의(備擬)하고 그를 다시 내직(內職)에 비의할 때는 외읍에 제수된 연월(年月)을 이름 아래에 주(註)로 달아서 그 오램과 가까웠던 일을 알게 함이 옳다."
하였다.

 

4월 28일 경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밀찰(密札)을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에게 내리셨는데, 이를 현묘(顯廟)에 주시어 친히 서연(書筵)에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선정(先正)이 미처 앙대(仰對)하기 전에 효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기사년245)  에 화(禍)를 입을 때에 유소(遺疏)와 어찰(御札)을 그 아들에게 주어서 뒷날 올리게 하였습니다. 갑술년246)  에 이르러 선정의 아들이 비로소 어찰과 유소를 올렸는데, 숙묘(肅廟)께서 비답하신 뜻이 간곡하고 상통(傷痛)하여 누가 감읍(感泣)하지 않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그 어찰(御札)이 지금 대내(大內)에 있을 것이니 신(臣)의 생각으로는 이를 환장암(煥章菴)에 받들어 간직하는 것이 존주(尊周)247)  의 의(義)에 빛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 이제 경(卿)의 말을 들으니, 어찌 그 추감(追感)을 견디겠는가? 밀찰(密札)은 아직 내가 보지 못했으나 이는 독대(獨對)하여 설화(說話)한 종류일 것이다. 환장암은 산중의 한 작은 암자에 불과하여 중이나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마도 누설할 염려가 있으니, 절대로 성조(聖祖)의 신중하고 엄밀했던 본뜻이 아닌 듯하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선정의 유소(遺疏)에 성조(聖祖)께서 뜻을 두시고 행하지 못한 일들을 조목조목 진달한 것이어서 정령(政令)의 사이에 또한 볼 만한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문집(文集)을 가져와서 쪽지를 붙여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한계진(韓啓震)이 상소하여 열 가지 일을 진달하기를,
"큰 뜻을 세워 규모(規模)를 정하는 것, 성학(聖學)에 힘써서 덕업(德業)에 나아가는 것, 의리(義理)를 밝혀서 붕당(朋黨)을 타파하는 것, 백관(百官)을 장려하여 모든 실적을 빛내게 하는 것, 고시(考試)를 정밀히 하여 인재(人才)를 수용(收用)하는 것, 번얼(藩臬)의 직임을 소중히 하여 관방(關防)을 공고히 하는 것, 수령(守令)을 선택하여 생민(生民)을 편안하게 하는 것, 부역(賦役)의 법을 고르게 하여 쌓인 폐단을 제거하는 것, 산택(山澤)의 금령을 늦추어서 업(業)을 유통하게 하는 것, 사치의 근원을 막아서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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