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계사
삼사(三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고, 양사(兩司)에서 전에 합계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수령(守令)을 자주 바꾸는 것이 근일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 있습니다. 흉년이 든 재읍(災邑)에 있어서는 수령이 된 자가 각각 상사(上司)가 전곡(錢穀)을 얻어서 눈앞의 급한 것만 구제하고도 그 거두어들일 때에는 원망을 초래하는 사람이 없지 아니하여 반드시 온갖 계책으로 체직(遞職)을 꾀하고 있으며, 새로 도임한 사람은 단서(端緖)를 알지 못하여 혹은 간사한 아전의 손에 맡겨 두기도 하고 혹은 전관(前官)의 일이라 핑계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징봉(徵捧)하지 않아 허다한 전곡(錢穀)이 모두 간사한 아전에게서 녹아 없어 지거나 빈궁한 백성의 포흠(逋欠)이 되고 맙니다. 청컨대 금년에 재해 있는 고을의 수령은 겨울에서 봄까지를 한하여 곧장 체직을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하고, 논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재항(李載恒)은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행하고 오직 탐욕만을 일삼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게 하소서."
하니, 전계(前啓) 및 이재항(李載恒)의 일은 윤허하지 않고 재읍(災邑)의 수령(守令)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신방(申昉)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우의정(右議政) 홍치중(洪致中)을 부묘 도감 도제조(祔廟都監都提調)로 삼았다.
5월 3일 갑오
팔도 유생(八道儒生) 이수(李洙) 등이 상소하여 역적을 토벌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은 성현(聖賢)의 말을 외우고 있으면서 군부(君父)와 맞서 다투니, 이는 성현의 도(道)가 아니다."
하였다.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여 사면(辭免)을 빌면서 그가 강력하게 주장한 토역(討逆)의 의(義)가 펴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기필코 사면하려는 의리로 삼으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사직하는 바에 허락하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지(諭旨)를 전하고 인하여 함께 올 것을 명하였다.
이관명(李觀命)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삼았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이 처음 정승에 임명되었을 때의 대의(大義)를 굳게 잡고 나라의 역적을 토벌하여 성상을 무함(誣陷)한 것을 씻을 것을 청했으나, 성상의 마음 속에는 붕당(朋黨)을 타파하는 것으로 처음 정사에 나오셔서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아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두 당(黨)을 아울러 쓰고자 하였기 때문에 민진원과 이관명의 말이 비록 몹시 슬퍼 감동할 것이 있었으나 천청(天聽)248) 이 더욱 멀어지니 민진원이 먼저 사면하고 이관명이 잇따르게 되었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대신(大臣)은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불가능하면 멈춘다.’하였으니, 민진원·이관명은 이에 가깝다 하겠다.
5월 5일 병신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단오제(端午祭)를 친히 행하였다.
5월 6일 정유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또 논하기를,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봉익(李鳳翼)은 문부(文簿)를 대부분 아전에게 맡겨두어 고을 일에 두서(頭緖)를 알지 못하며, 청풍 부사(淸風府使) 박필문(朴弼文)은 탐욕스럽고 혹독하여 법도가 없으니, 아울러 파직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봉익의 일은 아뢴 대로 처리하고 박필문의 일은 잡아다가 심문하여 정죄(定罪)하게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관명(李觀命)이 궐내에 나아가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는 위로해 타일렀다. 이어 서울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도우라고 하였다. 물러가려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 이의천(李倚天)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이사영(李思永)의 처(妻)가 상언(上言)한 것을 시행하지 말라고 명(命)하고 인하여 이런 등속의 상언(上言)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교시(敎示)를 내렸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비록 국옥(鞫獄)에 관계되더라도 역시 신변(伸忭)할 일이 없지 않을 것인데, 만약 일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신변할 길이 막힐 것이니, ‘물봉(勿捧)’ 두 글자는 삭제토록 하라."
하였다. 이의천이 말하기를,
"이천기(李天紀)가 혹독한 형장(刑杖)을 맞은 나머지 분이 올라 이르기를, ‘나는 너희들이 반역하는 흉당이 되는 것을 보겠다.’고 한 것을 가지고 억지로 승복하였다고 했는데, 지금 이천기만이 홀로 복관(復官)되지 못하였으니, 억울함이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복했다는 것을 준신(準信)할 수 없으나 과연 승지의 말과 같이 이미 국안(鞫案)에 쓰여 있다면, 쓰여진 것을 어찌 모두 믿지 못한다고 하겠는가? 이런 일은 갑자기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정언(正言) 이도원(李度遠)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작년에 군문(軍門)의 전화(錢貨)를 취용(取用)한 것이 만 냥(兩)이나 되는 많은 액수에 이르고, 그 후 탁지(度支)249) ·기성(騎省)250) ·제용감(濟用監)·상의원(上衣院)에서 들어간 것도 그 수효가 또한 많을 정도가 아닌데도, 금년에 다시 기성의 보목(步木)251) 60동(同)252) 을 내입(內入)253)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내사(內司)에 사사로 저축하는 것을 선정(先正)도 또한 혁파(革罷)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를 혁파하지 아니하고 이제 또 외부(外府)의 재물을 절도없이 가져다 쓰게 되면 이는 내사(內司)와 외부(外府)가 모두 인주(人主)의 사장(私藏)이 되는 것이니, 유사(有司)의 경비는 또 장차 어느 곳에서 가져다 주겠습니까? 기성의 보목이 이미 북관(北關)254) 내노비(內奴婢)의 공목(貢木)을 대신 수송(輸送)한 것인즉, 또한 명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듣건대, 숙종조(肅宗朝)에서는 1년에 들여간 수효가 10동에도 차지 않았는데 지금은 6, 7배를 더 들여가니, 이 어찌 사치스런 용도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무릇 내간(內間)에서의 경비와 좌우(左右)에게 내려 주시는 것을 십분 절약하고 줄이셔서 백성들의 피해를 제거하게 하소서. 전하께서 신료(臣僚)를 등용하고 버리실 즈음에도 일을 논의하다가 뜻에 거슬리는 신하는 언제나 소원히 하여 배척하시고, 용모를 공손히 하며 언사를 겸손하게 하는 사람은 많은 발탁을 입었습니다. 윗사람의 향하는 바에 아랫사람이 따르는 법인데, 아첨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서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데에 이르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자신의 사심을 버리시고 바른 말을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도록 하소서. 대각(臺閣)이란 그 관직은 비록 낮더라도 그 책임은 심히 중한 것이어서 비록 군왕의 존엄함으로도 대우함에 있어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거늘, 지난번에 간장(諫長)255) 이 처음 사직을 고(告)하자 즉시 체직시킨 것은 특히 예사(禮使)하는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이는 반드시 전하께서 새로 발론된 계사(啓辭)에 격뇌(激惱)되어 현저하게 싫어하고 박대하는 뜻을 보이셨으니, 신(臣)은 그윽이 개탄하고, 지극히 애석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방백(方伯)의 임무란 직무가 크고 책임이 무거운 것인데, 호남(湖南)에 이르러서는 이와 같이 큰 흉년을 만나서 휴척(休戚)256) 에 관계되는 바가 다른 도(道)에 비해 더욱 심한데도, 감사(監司) 김조택(金祖澤)은 정사(政事)에 생소(生疎)함이 많아서 자못 원망과 비방을 초래하고 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그 직임을 교체하고 다시 정신(廷臣) 중에서 행정에 숙달된 자를 명하여 남쪽 백성의 화급함을 구제하게 해야 할 듯합니다. 암행 어사(暗行御史)를 파견함은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탐욕스런 관리를 제거하기 위한 것인데, 뽑아 보낸 사람이 혹 수령의 사무에 두루 아는 자가 아니면 역시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일전에 한 희조(韓熙朝)가 호서(湖西) 지방을 염탐할 때 명(命)을 받들고 나간 지 오래지 않아 비방하는 말이 비등(沸騰)257) 하였으니, 이 뒤로는 마땅히 일찍이 수령(守令)을 지냈고 시무(時務)에 숙달된 자를 뽑아서 보내게 하소서."
하니, 비답에 대략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노대(露臺)258) 와 송(宋)나라 인종(仁宗)의 소양(燒羊)259) 의 일을 아름답게 여겼다. 지금 경비가 궁핍한 때를 당하여 비록 응당 들여 올 물품도 일체 절약하고 감손하는데, 하물며 과외(科外)의 군문(軍門)의 만 냥이나 되는 돈이야 말해 무엇하랴? 혹시 네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겠느냐? 옛날 제왕(帝王)들의 바른 말을 포용한 그 아량을 어찌 흠모하지 않겠는가마는 이때 무리들의 괴격(乖激)한 의논을 억제하지 못하면서 어찌 알지 못한다고만 하는가? 내가 실로 개연(慨然)해 한다. 그러나 절약하여 쓰는 것과 바른 말을 포용하라는 경계는 대의(大意)가 모두 옳으니 마땅히 이에 뜻을 더하겠다. 간장(諫長)의 일은 초도(初度)이거나 삼도(三度)이거나 인주(人主)의 처분에 있는데 그른데도 그르다 하지 아니하고 옳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한다면 상(賞)과 벌(罰)을 어디에 쓰겠는가?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일은 새로 부임하여 좀 생소하긴 하나 무슨 병폐가 있겠느냐? 암행 어사를 뽑아 보내는 일은 그대의 말이 좋다."
하였다.
5월 7일 무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8일 기해
우변 포도 대장(右邊捕盜大將) 장붕익(張鵬翼)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함우신(咸遇臣)이라고 이름한 자가 포청(捕廳)의 기포(譏捕)에 걸려 들어왔는데, 언문(諺文) 서간 2장의 내용이 흉패(凶悖)하였습니다."
하고, 소매속에서 내어 올리니, 임금이 다 보고 말하기를,
"허망함이 심하다."
하고, 인하여 묻기를,
"함우신이 말한 바가 어떠한가?"
하였다. 장붕익이 말하기를,
"함우신의 말에 이르기를, ‘제가 병리(病理)를 조금 해득하였으므로 나인(內人)들의 병을 치료하느라 항상 왕래했었다.’ 배창석(裵昌碩)의 누이는 바로 상궁 나인(尙宮內人)인데 저에게 말하기를, 「그 약을 사서 대전(大殿) 및 중궁전(中宮殿)에 쓰려고 하는데, 그 약이 매우 독(毒)하다.」고 하였다.’ 하였으니,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거조(擧措)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무리가 나에게 무슨 약(藥)을 쓸 일이 있겠는가? 지난번에 목호룡(睦虎龍)의 일로 말하더라도 만약 설국(設鞫)하여 단련(鍛鍊)한 거조가 없었다면 마침내 무고로 돌아갔을 뿐이다. 신축년260) ·임인년261) 사이의 일을 내가 지금까지 몹시 미워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허망한 일을 어찌 국문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함우신을 곧장 옥중(獄中)에서 끌어 내다가 거리에서 효시(梟示)하라고 명하고 주서(注書)를 시켜서 그 글을 기둥 밖에서 불사르게 하였다. 그리고 명하여 교서(敎書)를 써서 승지(承旨)로 하여금 선유(宣諭)하게 하니, 승지 이의천(李倚天)이 ‘결안(結案)262) 을 받들지 않는 것은 법례(法例)에 위배됨이 있다.’고 간략하게 진달하였다. 임금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오기(吳起)263) 가 말하기를, ‘배[舟] 가운데 사람들이 모두 적국(敵國)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만약 덕이 박하면 궁중(宮中)의 사람들이 모두 적국(敵國)이 될 것이니, 어찌 홀로 함우신만을 추궁해 심문하겠는가?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거리로 달려 나아가 큰길 가운데서 효수(梟首)하게 하라."
하고, 승지를 재촉하여 달려가서 감형(監刑)264) 하게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차자(箚子)를 올려 문초(問招)도 기다리지 아니하고 곧바로 먼저 형벌을 시행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가 된다고 말하니, 비답(批答)에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호적(虎賊)265) 이 거짓으로 고하여 사람을 모함했던 것은 그 말이 아직도 몹시 놀라운데, 지금 또 맹랑한 사람을 끝까지 다스린 것이 다른 나라에 알려진다면 나를 어떤 임금이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5월 9일 경자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차자(箚子)를 올려 대략 이르기를,
"사형(死刑)을 결단한 것은 나라의 큰 정사인 지금 곧 바람과 번개가 몰아치듯이 급급하게 거행하여 재상(宰相)도 미처 듣지 못하고 대각(臺閣)에서도 미처 논(論)하지 못하였으므로 중외(中外)에서 듣는 이가 그 죄명도 알지 못하고 그 전말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이 무슨 거조이며 이 무슨 옥사(獄事)의 체통입니까?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말라 하였으니, 지금 논할 것이 없으나, 만약 모든 일을 이와 같이 하게 된다면 뒷날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개 성상의 의중에 하려고 하시는 바는 기필코 행하고야 마시니, 오직 두려운 것은 신하들이 혹시 어떤 한마디 말[一言]이라도 있을 경우 황급하게 처리하고 시비(是非)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비록 몸소 걸(桀)·주(紂) 같은 일을 행한다 해도 누가 구제하여 바로잡겠습니까? 금오(金吾)의 당상(堂上)이 창졸간에 황겁하게 한마디 말도 법에 의거하여 진품(陳稟)함이 없었으니, 추고(推考)하여 경계하고 문책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批答)에 대략 이르기를,
"아! 지금 나의 이 거조는 한때 희로(喜怒)의 소치가 아니며 금오의 당상은 거행한 데 불과할 따름이니, 어찌 굳이 추고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대간(臺諫)에서 혹은 계사(啓辭)로, 혹은 소장(疏章)으로 모두 함우신(咸遇臣)을 곧장 정형(正刑)한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남이 있다고 말했으며, 대간에서는 감형(監刑)한 것이 체통을 손상시켰다 하여 승지의 파직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5월 11일 임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전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고, 양사(兩司)에서 전의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신노(申魯)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청(請)하기를,
"함우신(咸遇臣)의 처자(妻子)와 배창석(裵昌碩) 등을 왕부(王府)266) 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히 조사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도원(李度遠)·한계진(韓啓震)이다.】 에서 전계를 아뢰고, 또 청하기를,
"함우신을 효수(梟首)할 때 참형(斬刑)하는 현장을 감시했던 승지(承旨)는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며 함께 당직(當直)했던 승선(承宣)도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전교(傳敎)하기를,
"삼사(三司)가 군부(君父)의 지나친 거조(擧措)를 보고 즉시 청대하여 쟁론(爭論)하였다면 어찌 후세에 남길 말이 없겠는가? 그런데 이미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늘도 또한 전계(前啓)에 앞서 발론(發論)하지 아니하고는 어찌 홀로 승지만을 깊이 허물한단 말인가? 이는 내가 평일에 간쟁(諫爭)을 인도하지 못한 과실이다. 진실로 개연(慨然)하게 여기는 바이며 정승의 차자(箚子)외에 다른 소장(疏章)은 없었으니 더욱 개탄스럽다."
하였다.
이집(李潗)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황선(黃璿)·정택하(鄭宅河)를 승지(承旨)로, 김용경(金龍慶)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5월 13일 갑진
김고(金槹)·신무일(愼無逸)을 승지(承旨)로, 이광운(李光運)·이덕부(李德孚)를 지평(持平)으로, 권적(權𥛚)을 헌납(獻納)으로, 김상옥(金相玉)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유(李瑜)를 교리(校理)로, 박사성(朴師聖)을 수찬(修撰)으로, 김용경(金龍慶)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흥경(金興慶)을 병조 판서(兵曹判書) 겸내국 제조(兼內局提調)로 삼았다.
전교(傳敎)하기를
"법(法)이란 국가의 중대한 것이므로 한번이라도 혹은 중정(中正)을 벗어나게 되면 그 폐단이 가볍지 않다. 그저께 함우신(咸遇臣)을 특명으로 사형(死刑)에 처한 것은 실로 일시적인 희로(喜怒)의 소치가 아니다. 오늘날 말속(末俗)의 인심이 교위(巧僞)한 때를 당하여 지난번에는 역호(逆虎)267) 가 있었고 지금은 적우(賊遇)268) 의 사람을 무함(誣陷)함이 있었으니, 악역(惡逆)에게는 스스로 합당한 율(律)이 있다. 이같은 무리들을 만일 효시(梟示)하여 대중에게 경계하지 아니한다면 장차 어찌 간얼(奸孼)의 싹을 잘라서 악역(惡逆)을 엄하게 징계하겠는가? 그러므로 특별히 교서(敎書)를 게시하고 인하여 효시(梟示)를 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주(人主)의 한 가지 일이 후세의 법도가 되어 만약 망령되게 살인(殺人)을 행한다면 그 끼칠 해독(害毒)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의 현군(賢君)은 사람을 형벌하거나 사람을 죽임에 있어 모두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나의 처분이 비록 깊이 미워하는 뜻에 연유한 것이나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어김이 있는지라 고요히 이를 생각하니 스스로 그 과중(過中)함을 알겠다. 이미 뉘우치고 고치지 아니하는 것은 옛사람의 경계한 바인데, 항차 임금이 나라를 다스림이야 말해 무엇하랴? 아! 중외(中外)의 백성은 모름지기 상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사형(死刑)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라 반드시 모름지기 명백하게 정식(定式)한 연후에야 장래의 좋은 계모(計謀)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이 뒤로는 대소(大小)의 범죄를 물론하고 반드시 전지(傳旨)를 받들어서 이를 유사(有司)에게 내려 그 옥사(獄事)의 체통을 갖춘 뒤에 비로소 처단하게 하고, 승지가 직접 참형(斬刑)에 입회(立會)하는 것과 형단(刑單)이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경유하지 아니한 것에 이르러서는 일체 다시 예사(例事)로 삼지 말 것을 법령(法令)으로 명시하여 전지(傳旨)를 받들어 시행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유척기(兪拓基)가 하직을 고하자, 임금이 불러 보고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유척기가 말하기를,
"영남(嶺南)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추로(鄒魯)269) 의 지방이 되어 문무(文武) 조사(朝士)가 한번 파산(罷散)되면 곧 향리(鄕里)로 돌아갔었지 본래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구사(求仕)하는 법이 없으므로, 본도(本道)에는 문무(文武)의 전직을 가진 자가 심히 많아서 문신(文臣)으로 말하더라도 그 수효가 거의 백 명에 이릅니다. 그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간신히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혹은 겨우 한 고을을 얻고는 그만둔 자도 있고 혹은 겨우 육품(六品)에 나갔다가 그만 둔자도 있어 먼 지방의 인사(人士)가 거의 다 구석을 향하여 억울한 탄식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전에는 도신(道臣)이 혹은 상소도 청하고 혹은 경연(經筵)에서 아뢰어서 취해 쓰기도 하였는데, 근자에 성상께서 또한 주(註)를 달아서 망단자(望單子)를 들이도록 하셨으므로 영외(嶺外)에서 청문(聽聞)하고 감격하여 용동(聳動)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전관(銓官)의 문견(聞見)에 한계가 있어서 아직도 별다르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으니, 다시 양전(兩銓)270) 에 분부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고 그대로 따랐다.
홍치중(洪致中)을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조도빈(趙道彬)을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삼았다. 임금이 홍치중을 불러서 복상(卜相)을 명하였으므로 이에 조도빈이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상(右相)에 임명되었다.
사신은 말한다. "조도빈은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의 형의 아들이다. 용모가 풍부하고 아름다웠으나 언론(言論)에 분명한 결단이 없었다. 숙종(肅宗)의 세대(世代)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는데 임인년271) 에 조태채가 참혹한 화(禍)에 걸리자 조도빈은 유배되었다. 을사년272) 에 국면(局面)이 바뀌게 되자 조도빈도 역시 세파(世波)에 따라 지위(地位)를 보존할 뿐이었고 별로 화를 당한 집안의 통박(痛迫)한 뜻이 없었다. 그러나 청렴 간결하고 근신함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허여(許與)하더니, 이에 이르러 정승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바야흐로 역적(逆賊)을 토벌하자는 의논을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에게서 염증(厭症)이 나도록 들어서 모두 이들을 박하게 대하여 서로 이어서 정승을 사면하게 되었던 것이니, 조도빈에게는 아마 취할 바가 있었다고 이르겠다."
【태백산사고본】 8책 9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92면
【분류】인사(人事)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271]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272]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사신은 말한다. "조도빈은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의 형의 아들이다. 용모가 풍부하고 아름다웠으나 언론(言論)에 분명한 결단이 없었다. 숙종(肅宗)의 세대(世代)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는데 임인년271) 에 조태채가 참혹한 화(禍)에 걸리자 조도빈은 유배되었다. 을사년272) 에 국면(局面)이 바뀌게 되자 조도빈도 역시 세파(世波)에 따라 지위(地位)를 보존할 뿐이었고 별로 화를 당한 집안의 통박(痛迫)한 뜻이 없었다. 그러나 청렴 간결하고 근신함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허여(許與)하더니, 이에 이르러 정승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바야흐로 역적(逆賊)을 토벌하자는 의논을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에게서 염증(厭症)이 나도록 들어서 모두 이들을 박하게 대하여 서로 이어서 정승을 사면하게 되었던 것이니, 조도빈에게는 아마 취할 바가 있었다고 이르겠다."
5월 14일 을사
서종섭(徐宗燮)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5월 15일 병오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황재(黃梓)를 교리(校理)로, 심택현(沈宅賢)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삼았다.
5월 16일 정미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지평(持平) 이광운(李光運)이 상소(上疏)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리신 비망(備忘)은 그 사지(辭旨)가 은근하고 간절하여 이미 지나간 과실을 깊이 뉘우치고 바야흐로 내일의 계책에 힘쓰려고 하시어 뉘우치고 한스러웠던 마음이 구름같이 사라지고 안개같이 개여 전혀 한점의 티끌도 없으니, 이를 간책(簡冊)에 쓴다면 어찌 빛나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그른 것을 아는 것도 본시 좋으나 애당초 그른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며, 허물을 고치는 것이 귀한 것이 되나 당초에 과실이 없음만 같지 못합니다. 지금은 혹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근근히 한 정사(政事)의 과실을 고치고 나서 다시 과실이 있거나, 겨우 한 가지 일의 실수를 뉘우쳤는데 다시 뉘우침이 있어서 한갓 과실을 뉘우쳤다는 이름만 있고 과실을 뉘우친 실상이 없다면 그 장차 어느 때에 깨끗하게 과실이 없는 영역(領域)에 이르겠습니까?"
하니, 우악한 비답으로 답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소대에서는 《강목(綱目)》을 강(講)하고 야대(夜對)에서는 《심경(心經)》을 강함이 마땅하겠다. 《심경》은 다른 글과 달라서 반드시 밤기운이 청명(淸明)할 때에 강(講)하고 싶다."
하였다.
5월 17일 무신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청인(淸人)이 ‘황지(皇旨)가 있다고 칭탁하고 심양(瀋陽)에서 1만 인, 봉성(鳳城)에서 3천 인을 정발하여 삼(蔘)을 캐기 위해 강변(江邊)에 주둔하여 모여 있다.’고 합니다. 이는 비록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 나라가 수어(守禦)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태연히 있을 수 없으니, 연강(沿江)의 파수(把守)와 봉수(熢燧)의 후망(候望)273) 은 엄하게 신칙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홍치중이 또 말하기를,
"듣건대 황지라 핑계하고 ‘한 사람에 인삼(人蔘) 1냥(兩)씩을 납입하라.’고 한다니, 그들이 비록 호인(胡人)이긴 하나 이미 중국(中國)의 주인이 되었는데, 재물을 탐함이 이와 같고서야 어찌 능히 오래가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송진명(宋眞明)이 두 대신(大臣)의 육시(戮屍)의 논계(論啓)에 수참(隨參)하였다 하여 삭직(削職)과 출척(黜斥)의 벌을 받았습니다. 바야흐로 어미의 복(服)을 입고 있는 중이어서 대상(大祥)이 명일(明日)에 있는데도 입참(入參)을 못하게 되었다 하니, 효도로서 다스리는 정치하에서 마땅히 불쌍히 생각할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命)하기를
"다만 관직만을 삭제하고 문외 출송에서는 방면(放免)하라."
하였다. 홍치중이 또 말하기를,
"윤순(尹淳)도 역시 육시(戮屍)의 계사에 수참(隨參)하였다 하여 바야흐로 삭직(削職)하여 문외(門外)로 출척하였는데, 윤순은 신축년274) 부터 김일경(金一鏡)과 척(隻)을 짓고 삼사(三司)의 관직을 행공(行公)하지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뒤섞여 들어간 듯하나 마땅히 구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조익명(趙翼命)도 합계(合啓)를 앞장서서 발의(發議)했다 하여 방금 멀리 귀양가 있는데, 그 논계(論啓)를 들으니 바로 양사(兩司)의 합계(合啓)였고 당초 삼사(三司)의 합계가 아니었는데도 조익명이 옥당(玉堂)으로서 뒤섞여 들어간 것이니, 승정원으로 하여금 다시 일기(日記)를 상고하게 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은 자는 옳다 하고 그른 자는 그르다고 한 뒤에야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윤순은 원전지(原傳旨) 가운데 표지를 부치고 조익명의 일은 승정원으로 하여금 일기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8일 기유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권변(權忭)이 졸(卒)하였다. 권변은 숙종(肅宗)기사년275) 에 과거(科擧)에 올랐는데, 이때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바야흐로 서궁(西宮)276) 에 물러나 있었다. 권변이 급제를 하고 고향에 돌아가자 그의 처부(妻父) 소두산(蘇斗山)이 문을 닫고 보지 않으면서 그의 과시에 응한 잘못을 책하니 권변이 부끄러워하고 사죄하여 이르기를, ‘이제부터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으면 권변의 허물을 속죄(贖罪)할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드디어 스스로 중지하기를 결의하였다. 숙종조(肅宗朝)로부터 당저(當宁)에 이르도록 그 지조(志操)를 지키는 것을 가상히 여겨 여러 차례 품계(品階)를 더하여 남달리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끝내 왕명에 응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76세였다. 임금이 슬퍼하여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상장(喪葬)을 돕게 하였으며 특별히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김취로(金取魯)를 도승지(都承旨)로, 나학천(羅學川)을 승지(承旨)로, 정형익(鄭亨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덕부(李德孚)·한이조(韓頤朝)를 정언(正言)으로, 이근(李根)을 지평(持平)으로, 민응수(閔應洙)를 헌납(獻納)으로, 권적(權𥛚)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고, 이유(李瑜)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여 제수하였다.
5월 19일 경술
사헌부(司憲府) 【지평 이광운(李光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행검(李行儉)을 탄핵하며 인하여 개차(改差)하기를 청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20일 신해
소대를 행하였다.
5월 21일 임자
홍호인(洪好人)을 승지(承旨)로, 황귀하(黃龜河)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단장(李端章)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5월 22일 계축
장령(掌令) 허석(許錫)이 아뢰기를,
"옛부터 궁녀(宮女)가 외부 사람과 서로 내통하며 국가에 화(禍)를 초래한 일이 헤아릴 수 없는데, 이제 궁녀가 요망한 역적과 내통한 사실이 처음에는 배창석(裵昌碩)의 소지(所志)에 나타났고 다시 함우신(咸遇臣)의 초사(招辭)에서 발각되었으니, 그 요악(妖惡)한 정상은 비록 상세하지는 못하나 안팎으로 관계를 맺고 통한 흔적이 이같이 낭자한데도 만약 간사한 그 상황을 끝까지 조사하여 분명하게 전형(典刑)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중외의 인정(人情)이 반드시 의혹(疑惑)을 갖게 될 것이니, 청컨대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온 바 궁인(宮人)을 유사(有司)에게 내주어서 엄하게 조사하여 죄를 바로잡아서 궁금(宮禁)을 막게 하고 뒷날의 폐단을 막도록 하소서."
하고, 또 전라 병사(全羅兵使) 신명인(申命仁)을 탄핵하기를,
"귀가 먹고 눈이 어두워 전혀 일을 살피지 못해 임명된 후로 물정(物情)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니 청컨대 파직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5월 23일 갑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24일 을묘
소대를 행하여 《강목(綱目)》을 강(講)하다가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묻기를,
"진(晉)나라가 사신(使臣)을 고려(高麗)에 보냈다는 대문(大文) 아래에 있는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이름을 마땅히 휘(諱)277) 하여야 되지 않겠는가?"
하자, 시독관(侍讀官) 윤심형(尹心衡)이 말하기를,
"비록 삼대(三代)의 성군(聖君)이라도 모두 휘하지 않았는데, 고려 태조의 이름이라고 휘하여야 할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고려 태조는 전대(前代)의 제왕(帝王)과는 다른 바가 있다. 아조(我朝)의 4왕(王)이 모두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였으니, 고려 태조의 이름을 지금의 신하들은 비록 휘할 필요가 없다고 할지라도 군왕의 입장으로서는 마땅히 휘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김용경(金龍慶)이 말하기를,
"다만 고려 태조만 휘한다는 것입니까? 고려의 모든 왕(王)도 다 휘한다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만 태조(太祖)만을 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5월 25일 병진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익명(趙翼命)의 일을 승정원에서 상고하여 아뢴 것을 보니, 그 합계(合啓)가 양사(兩司)인지 삼사(三司)인지의 실상(實狀)을 구별하여 거론(擧論)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청대(請對)하였을 때의 설화(說話)만을 가지고 따로 조익명의 죄로 삼는다면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합계를 맨먼저 발의한 것으로써 처단한다면 그 죄명(罪名)이 끝내 근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생각건대 신(臣)의 한 마디 말이 입에서 나오자 의혹과 비방이 먼저 집중해 오니 매우 물정(物情)을 공평하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나오도록 권면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자, 시독관(侍讀官) 윤심형(尹心衡)이 말하기를,
"증 영의정(贈領議政) 송갑조(宋甲祚)는 곧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아버지로 일찍이 광해조(光海朝) 때 진사(進士)가 되었습니다. 당시 인목 대비(仁穆大妃)께서 서궁(西宮)에 계셨는데 동방(同榜) 중에서 한 사람도 가서 배알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송갑조는 화염(禍熖)을 돌아보지 않고 곧 가서 배알하였으니, 그 절의(節義)의 뛰어남이 지금도 사람들의 이목을 솟구치게 합니다. 숙묘조(肅廟朝)에 대신(臺臣)이 소(疏)를 올려 증시(贈諡)를 청하자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하여 처리하게 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아직 미처 회계(回啓)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만약 특명(特命)으로 중시하신다면 일세(一世)를 권려(勸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 품처(稟處)하라는 명은 대개 공의(公議)에 부치려고 함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속히 회계(回啓)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6일 정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팔도 유생(八道儒生) 이인하(李仁夏) 등이 토역소(討逆疏)를 올리면서 사의(私意)를 이길 것을 말하니, 비답(批答)에 대략 이르기를,
"내가 한가하고 편안히 지내지 못하는 것은 세속 풍습이 괴려(乖戾)하고 과격하여져서 선비의 습성이 올바른 데로 추향(趨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私)’란 한 글자에 있어서 마음속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사(私)가 되겠는가? 마음속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 것이 사(私)가 되겠는가? 너희들의 소(疏)에서 말한 것은 나의 뜻과 상반(相反)된다."
하였다.
5월 27일 무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근(李根)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오부(五部)278) 의 방민(坊民)들이 봉소(封疏)를 칭탁하고 날마다 궐하(闕下)에 머물러 대기하고 있어서 신(臣)이 해괴(駭怪)함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그 소(疏)를 찾아보니, 이는 전포(廛舖)를 설치하는 데 관한 일이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기강(紀綱)이 엄격하지 않고 나라의 형세가 존엄하지 못한 소치이니, 청컨대 수창(首倡)하여 봉소한 사람의 유사(攸司)로 하여금 죄를 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윤심형(尹心衡)이 말하기를,
"깊은 산협(山峽)에 사는 백성들이 화전(火田)을 가지고 생업을 삼는데 경자년279) 에 개량(改量)할 때 산협의 백성들이 그 세금의 과중함을 괴로워하여 모두 원전(元田)280) 에 입속(入屬)시키기를 자원한 탓으로 높은 산꼭대기까지도 모두 양안(量案)에 편입되어 진실로 불쌍하고 측은합니다. 지금 만약 산 중턱 이상은 도로 화전에 귀속시키게 하고 열읍(列邑)에 분부하여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지 않게 한다면 산협에 사는 백성들도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境界)로부터 비롯한다고 하였다. 선조(先朝)에서 양전(量田)한 것도 백성을 위한 뜻에서 나왔으나 개량(改量)한 후에 혹은 이와 같은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근래 인심이 교묘하고 간사하여 처음에는 그 가볍고 헐함을 취하여 스스로 원해서 들어갔다가 지금 와서 도리어 싫어하고 괴로워 한다니, 그 간사하고 거짓됨을 가히 볼 수 있다. 지금 이를 환속(還屬)시켜 세금을 가볍게 해주자는 청이 뜻은 비록 좋으나 백성의 풍속이 또한 순박하지 않으니, 가볍게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5월 28일 기미
지평(持平) 이광운(李光運)이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순천(順天)의 여수면(麗水面)에 다시 한 현(縣)을 설치한 것은 곧 간사한 백성들이 백방으로 속인 소치이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다시 상의 확정하여 종전대로 합속(合屬)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수진궁(壽進宮) 차인(差人) 이동필(李東苾)이 정주(定州)의 민전(民田) 5백 섬지기를 은닉(隱匿)하여 10년 동안 몰래 세(稅)를 받아 모두 제 개인의 주머니로 돌렸습니다. 그 정상과 곡절을 논하건대 결코 너그럽게 용서할 수 없으니,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율(律)에 의하여 엄단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안주 목사(安州牧使) 송택상(宋宅相)이 맹산(孟山)의 읍기(邑妓)에게 빠져서 가고 올 때에 번번이 교자(轎子)를 타게 하여 도로(道路)에서 보는 사람들이 놀랍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으며, 대소(大小)의 정령(政令)도 한결같이 그 말을 따라 하고 그외에 교생(校生)이나 원생(院生)들에게 뇌물을 받고 강(講)을 면제해 주며, 보용미(補用米)를 돈과 바꾸어서 사사로이 사용한 것이 모두 불법에 관계되니,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律)을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경흥 부사(慶興府使) 정항녕(鄭恒寧)은 실상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사인(私人)이었으며, 또 그 아들을 조종하여 만경(萬經)의 흉소(凶疏)를 주장하게 하여 여정(輿情)의 놀라움과 분노가 오래도록 지식되지 않고 있으니, 파직(罷職)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에 대략 이르기를,
"여수현의 일은 앞으로 두고 보려고 하며, 송택상의 일은 굳이 풍문(風聞)을 준신(準信)하는가? 정항녕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허석(許錫)을 물리쳐 그 관직을 삭탈하였다. 허석이 상소하기를,
"함우신(咸遇臣)의 정절(情節)은 옥(獄)의 체통으로 보아 국문(鞫問)함이 당연한데도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입대(入對)를 구해 쟁난(爭難)하지 아니하고 짤막한 차자(箚子)로 형식만 갖추고는 무단히 입대를 청하여 송진명(宋眞明)·윤순(尹淳)·조익명(趙翼命)의 용서를 청했으니, 저 세 사람으로 하여금 과연 용서할 만한 단서라도 있었다면 함우신의 일에 비교하여 경하고 중함이 어떠합니까? 그 군덕(君德)을 바르게 하는 데 있어서는 사단(事端)을 옹호해 넘기고 초초(草草)하게 차자로 진달하며, 그 역당(逆黨)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는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누누이 면달(面達)하였으니, 가볍고 무거움을 거꾸로 함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허석을 불러 그 소(疏)을 읽게 하고 이르기를,
"너의 소장의 뜻은 오로지 감정을 선동하는 데 있다."
하였다. 허석이 대답하기를,
"좌상(左相)이 대배(大拜)된 후로 제일 먼저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 등의 무죄를 진달하여 많은 사람의 심정을 놀라게 하고 당혹하게 하여 합계(合啓)의 논의까지 있었습니다. 다만 대신(大臣)의 심사(心事)는 되도록 너그럽고 공평함에 힘쓰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논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신(臣)이 만약 감정을 선동할 뜻이 있었다면 어찌 이 일을 제론(提論)하지 아니하고 다만, 이진명(李眞明) 등의 사소한 일만을 거론하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체직(遞職)을 명하고 이어서 삭직 출송(削職黜送)의 율(律)을 시행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복역(覆逆)하였으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29일 경신
장령(掌令) 정광제(鄭匡濟)가 상소하여 허석(許錫)의 삭출(削黜)의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이 끝나자 경연관(經筵官) 및 참찬관(參贊官)이 일제히 허석(許錫)을 신구(伸救)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조영복(趙榮福)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5월 30일 신유
대제학(大提學) 이병상(李秉常)이 사면(辭免)되었다. 당초 대사헌(大司憲) 정형익(鄭亨益)이 소를 올려 이병상을 논했는데, 그 소장이 임금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그 말이 먼저 전파되어 이병상이 이를 듣고 이에 인혐(引嫌)하여 47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으므로, 임금이 부득이 사면을 허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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