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권, 영조 2년 1726년 6월

싸라리리 2025. 8. 20.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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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술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2일 계해

밤 3경(三更)에 동·남·서쪽에 불빛과 같은 기운이 있었다.

 

박필정(朴弼正)을 장령(掌令)으로, 신처수(申處洙)를 지평(持平)으로, 윤심형(尹心衡)을 헌납(獻納)으로, 홍봉조(洪鳳祚)를 정언(正言)으로, 이의현(李宜顯)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박사성(朴師聖)을 수찬(修撰)으로, 이세근(李世瑾)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광운(李光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또 허석(許錫)의 삭출(削黜)의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 말의 부정(不正)함을 알지 못함은 공(公)이 아니며, 이미 알고도 오히려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면 이는 사(私)인 것이다. 허석의 습성을 털어버리고 공정한 언론을 힘쓰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6월 4일 을축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여 허석(許錫)이 삭출(削黜)을 당한 것으로써 자기의 죄를 인책하는 사단으로 삼으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경(卿)이 아뢴 것은 결단코 다른 것이 없었으며 바로 공평한 뜻이었는데, 무슨 의심할 만한 사단이 있기에 나이 젊은 경솔한 무리들이 감히 기롱하고 배척할 마음을 먹었는가? 세도(世道)가 이와 같으니 진실로 한심하게 여길 만하다. 사대(賜對)했을 때 하교(下敎)한 말은 나 스스로도 그 지나침을 아는데 경(卿)의 말이 또 이와 같으니, 깊이 감탄한다. 면려를 더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삼대(三代) 때에 어찌 경서(經書)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성인(聖人)이 되고 현인(賢人)이 된 것은 다만 이 마음을 굳게 잡은 데 연유했을 뿐이니, 치심(治心)을 근본으로 삼고 강서(講書)를 종말로 삼은 것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내가 학문에 본래 공소(空疏)하여 매양 조종(祖宗)의 부탁이 중대함을 생각하건대, 오직 짊어진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나 스스로 기대하는 바는 자못 낮지가 않다. 대개 필부(匹夫)의 서민들도 스스로 기대하는 바가 비하(卑下)하지 않은데 하물며 나라의 군왕이겠는가? 학문이란 다른 공부가 없고 다만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 비록 일각(一刻)인들 어찌 감히 헛되게 지내겠는가? 삼대(三代)이후로는 사의(私意)가 가리어 지치(至治)를 보지 못했으니, 나는 실로 이를 개연(慨然)해 한다. 그러나 내가 반드시 사(私)가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하겠는가?"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홍성룡(洪聖龍)·남궁재(南宮載)·황하필(黃夏弼)을 구문(究問)하게 하였다. 경종조(景宗朝) 때 황하신(黃夏臣)이 위조된 비답[僞批]을 얻어 보았다는 이유로 국청에 나아가 원통하게 죽었는데, 이에 이르러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이 황하신의 관작을 회복할 것을 진달하여 그때 임금의 비답을 위조한 자를 기찰(譏察)해 체포하니, 홍성룡 등 3인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임금이 설국(設鞫)을 명하려고 하자 승지(承旨) 홍호인(洪好人)이 아뢰기를,
"일찍이 숙종조(肅宗朝)에서도 역시 비답을 위조한 죄인이 있었는데 설국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관계됨이 심히 중하기 때문에 황하신의 예에 의하여 설국하려 했으나 지금 승지로 인하여 선조(先朝)의 일을 듣고 보니, 만약 알지 못하고 갑자기 국문을 명했더라면 거의 지난번 사람들의 한 바와 같을 뻔했다."
하였다.

 

6월 5일 병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보부(保傅)는 전(傳)에 일찍이 유교(諭敎)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사부(師傅)를 두고 빈료(賓僚)를 설치하였으니, 이는 어린 임금을 보도(輔導)하는 뜻이다. 어린 나이에 보도하는 것은 평상의 사부보다 마땅히 갑절 힘써야 할 것이니 비록 자주 서연(書筵)에 들지는 못하더라도 빈객(賓客)281)  은 궐(闕)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좌우빈객(左右賓客)이 모두 행공(行公)하였는데도 아직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지 못하여 서연(書筵) 때에 다만 궁관(宮官)으로 입시(入侍)하는 자가 많으니, 일이 심히 미안하다. 상견례를 속히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6일 정묘

약방(藥房)의 입진(入診)이 끝나자 도제조(都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판부사(判府事) 이관명(李觀命)은 평소에 문망(文望)이 있고 그 집이 대대로 사학(史學)으로 알려져 칭송이 있으니, 만약 사학을 강론할 때에 함께 들게 하면 반드시 보익(輔益)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 이미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하는 정식(定式)이 있었으니, 경(卿)도 또한 판부사(判府事)와 더불어 윤번(輪番)으로 입시토록 하라."
하였다.

 

황귀하(黃龜河)를 도승지(都承旨)로, 홍석보(洪錫輔)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김간(金榦)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민응수(閔應洙)를 사간(司諫)으로, 유겸명(柳謙明)을 정언(正言)으로, 임주국(林柱國)을 헌납(獻納)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6월 7일 무진

밤 4, 5경(更)에 곤방(坤方)에 불빛 같은 기운[氣]이 있었다.

 

6월 9일 경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자 하교하기를,
"《실록(實錄)》의 찬수(纂修)는 얼마나 되었는가? 옛 사기(史記)는 그 기재(記載)한 것이 심히 간략하여 우리 나라처럼 문(文)에 지나침이 있지 않다. 소장(疏章)으로 말을 해도 그 번거로운 문식(文飾)을 산삭(刪削)하지 않을 수 없으나, 갑(甲)과 을(乙)이 논박한 것 같은 것은 모두 기재한 연후에야 뒷 사람으로 하여금 그 처분을 알게 할 것이다."
하였다. 동지사(同知事) 윤봉조(尹鳳朝)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편당(偏黨)이 있으니 그 시비(是非)를 모두 두어야 후세로 하여금 정하게 할 수 있는데, 어찌 갑(甲)은 두고 을(乙)은 제거하여 그 사의(私意)를 용납하게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유(先儒)의 논의를 보더라도 부호(扶護)하고 억제하는 즈음에 공정함을 잃은 것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경계하고 격려하는 하교가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강관(講官)에게 묻기를,
"옛날에는 참하(參下)282)  의 옥당(玉堂)283)  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황재(黃梓)가 말하기를,
"참하(參下)의 홍록(弘錄)284)  을 남상(南床)285)  이라 이름은 곧 지극히 정선(精選)함이었는데, 근래에는 인재(人才)가 전인(前人)에 미치지 못하여 오래도록 폐지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변방에서 세운 공을 좋아하매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 나왔고, 재리(財利)를 좋아하매 상홍양(桑弘羊)이 진출하였으니, 인재(人才)가 흥(興)하는 것은 인주(人主)가 인도하는 데 연유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금 나는 인재(人才)의 묘연(杳然)함에 개연(慨然)함이 있어서 작흥(作興)하게 하고자 하니, 이후로는 참하의 흥록을 내라."
하였다.

 

정언(正言) 홍봉조(洪鳳祚)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배창석(裵昌碩)과 궁인(宮人)의 계략(計略)은 오히려 다스릴 수가 있으나, 허석(許錫)을 인대(引對)하여 소(疏)를 읽게 한 것은 군신(君臣)이 서로 체통을 잃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함우신(咸遇臣)의 일은 이미 비망기(備忘記)을 내렸고, 허석의 처분은 세도(世道)를 위한 데 불과하다."
하였다.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 상소하기를,
"대신(臺臣)을 연석(筵席)에 불러서 그로 하여금 소(疏)를 읽게 한 것은 이미 대각(臺閣)을 대접하는 도리를 잃었으며, 허석(許錫)이 항쟁(抗爭)하지 아니하고 머리를 숙이고 읽은 것도 대각의 체통을 상실하는 결과가 되었는데, 입시(入侍)한 승지(承旨)가 한 마디도 바로잡아 구제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대신의 문출(門黜)을 특별히 방면하며 또 직책을 망각한 승지를 책망(責望)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고, 양사(兩司)에서 전에 합계한 것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유겸명(柳謙明)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허석(許錫)의 상소 속에 이른바 명관(名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나 장령        박필정(朴弼正)은 번거로운 말로 스스로 변명하여 ‘친척(親戚)’이란 두 글자를 집어냈고, 필선(弼善)        한이조(韓頤朝)는 앞장서서 대신 담당하였으니 청조(淸朝)의 현귀(顯貴)한 사람에게 이런 해괴한 행동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박필정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한이조는 직임을 교체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그 차자에 이르기를,
"일을 논(論)한 대관(臺官)은 오히려 죄적(罪籍)에 있는데 망언(妄言)한 대신은 번번이 은지(恩旨)를 받았으니, 어찌 언로(言路)에 방해됨이 있는 데만 그치겠습니까? 이는 바로 신(臣)의 죄를 더하여 몸이 나아가는 길을 막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에 대략 이르기를,
"허석(許錫)의 일은 실로 세도(世道)를 위함이니 경(卿)에게 무슨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설령 이것을 불안한 사단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나와서 논도(論道)한 뒤에 조용히 개진(開陳)한다면 내 어찌 경(卿)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것을 생각치 않겠는가?"

 

6월 10일 신미

임금이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에게 수서(手書)를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부터 군신(君臣)은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다. 이미 임용(任用)했다면 비방하는 말로 공격하지 못하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일을 성취할 것이니, 지금 만약 잡다한 말 때문에 털끝만큼이라도 마음에 동요가 생겨서 예대(禮待)함이 감소될 것 같으면 당초 어찌 경(卿)을 발탁했겠는가? 경의 평소에 공평한 마음으로 나의 근간(懃懇)한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지나치게 혐의한다면 잡다한 말을 진정케 하는 뜻이 아니다. 백성의 일을 생각하고 오늘의 세도(世道)를 돌아보건대 밤중에 잠이 오지 아니하고 음식을 대하여도 맛이 없는지라 이에 수서(手書)로 다시 마음속의 간절함을 털어놓는 바이며, 경(卿)이 들어 오기를 기다려서 마땅히 면유(面諭)함이 있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승지(承旨)를 보내어 함께 오라 하였다.

 

6월 11일 임신

달이 심성(心星)과 화성(火星)을 범하였다.

 

이제항(李齊恒)을 장령(掌令)으로, 홍현보(洪鉉輔)를 대사성(大司成)으로, 김용경(金龍慶)을 교리(校理)로, 홍석보(洪錫輔)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신방(申昉)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고 각각 그 소회(所懷)를 물었다.

 

좌의정 홍치중이 차자(箚子)를 올려 즉시 같이 오라는 승지(承旨)를 소환하는 명을 내리기를 비니, 비답에 대략 이르기를,
"경(卿)이 만일 들어온다면 승지(承旨)도 당연히 들어 올 것이다. 경의 차자가 이와 같으니, 먼저 승지를 들어오게 하여 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것이니, 경도 나의 지극한 뜻을 체념하여 모름지기 곧 조정으로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2일 계유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강을 마치고, 삼사(三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다. 지평(持平) 신처수(申處洙)가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유봉휘(柳鳳輝)의 죄상(罪狀)을 모르시는 바 아닌데 도리어 일률(一律)의 형(刑)이 부당하다 하시니, 이는 전하께서 성실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유봉휘가 무죄(無罪)하다고 했겠는가? 일률(一律)에 대해서는 과중하다는 것이다."
하였다. 정언(正言) 유겸명(柳謙明)이 이르기를,
"유봉휘의 소(疏)가 만약 무심(無心)한 데서 나왔다면 혹은 경솔한 것으로 돌릴 수 있겠으나, 그 소(疏)를 전하께서도 역시 보셨지만 어찌 조금인들 용서할 길이 있겠습니까? 역적 김일경은 곧바로 지난번의 한 하류(下流)였는데 유봉휘의 무리가 부추겨 주어서 이에 이르렀으니, 역적 김일경을 이미 극률(極律)로 처치하였다면 유봉휘를 어찌 복주(伏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신처수(申處洙).】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는데 허석(許錫)의 삭직 출외(削職黜外)를 도로 정지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대개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바야흐로 들어왔으므로 이로써 좌상(左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공조 참의(工曹參議) 남세진(南世珍)을 탄핵하기를,
"차인(差人)을 영남(嶺南)에 정해 보내어 수백 장(丈)의 선첩(船帖)을 발급(發給)하고는 선세(船稅)를 과다하게 징수하여 작폐(作弊)한 사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취로(金取魯)의 사직소가 있는데 그의 조부 김징(金澄)이 본도(本道)의 감사(監司)가 되어 참혹한 논박을 당하였으므로, 그 자손(子孫)된 자가 이 직임(職任)에 부임하려 하지 아니하여 이러한 공사(控辭)가 있으니 체직을 허락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유(李瑜)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정택하(鄭宅河)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사간(司諫)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함우신(咸遇臣)의 옥사(獄事)에 삼사(三司)가 즉시 청국(請鞫)하지 아니함을 잘못이라고 하신다면 전하께서 대계(臺啓)를 따르지 않으신 것도 또한 잘못입니다. 어찌하여 삼사는 불가불 급급히 청국하여야 하고 전하께서는 반드시 따르지 아니하여야만 바야흐로 사리에 합당하겠습니까? 토죄 복수(討罪復讐)하는 대의(大義)로 말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일찍이 군흉(群凶)들이 죄가 없다고 하지 않으시고 또한 대간(臺諫)의 논의가 옳지 않다고도 않으시다가, 마침내는 이르시기를 나에게도 지키는 바가 있다 하시면서 억지로 의리(義理)를 만들어 도리어 윤허를 아끼는 것을 옳게 여기시니, 천하(天下)에 어찌 이러한 시비(是非)가 있겠습니까? 무릇 다투는 바가 있으면 언제나 편당(偏黨)에 관계됨을 의심하여 언의(言意) 밖의 일을 내리 헤아리시고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감동되지 않음이 있으면, 별개의 의의(意義)를 생각해 내어 본사(本事) 밖의 일까지도 두루 막으시며 말마다 감히 나를 어기지 말라 하시고 일마다 반드시 독단(獨斷)하려 하셨습니다. 아랫사람을 접할 때에는 문식(文飾)한 변론이 너무 많음을 면치 못하였고, 일을 만들 즈음에는 처음에서 끝까지 대체로 마음대로 결단함이 많아서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들이 농락(籠絡)하며 닫았다 열었다 하는 가운데에 엎어져 넘어지고 어리둥절하게 현혹되어 스스로 서로의 과실을 구제할 겨를이 없으니, 간절히 바라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은미(隱微)한 하나의 마음에 돌이켜서 규모(規模)를 펴 열기를 높은 하늘 넓은 바다와 같이하고, 의리(義理)를 강구하기를 저울을 가지고 물건을 달듯이 하시어 무릇 말을 듣고 일을 행할 즈음에 한결같이 정성과 믿음으로 임하시고, 시비(是非)의 진실을 논의할 때에는 반드시 의리로써 이를 제재하여 진실되고 망령됨이 없는 영역에 이르도록 힘쓰소서."
하니, 비답에 대략 이르기를,
"농락하며 닫았다 열었다 하는 것은 스스로 명예를 좋아하는 자도 반드시 부끄러워할 것이다. 내가 비록 덕(德)은 적으나 어찌 한(漢)이나 당(唐)나라의 명예를 좋아하는 임금이 하는 바를 본받겠는가? 대관(臺官)으로 있으면서 숨김없이 용감하게 진언(進言)하는 것은 좋으나 나의 뜻을 이행하지 못함이 심하다. 어찌 몸에 돌이켜 살피지 않겠는가?"
하였다.

 

6월 13일 갑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광운(李光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삭녕 군수(朔寧郡守) 최수적(崔守迪)이 한 가지 미세한 일로 인하여 고을 사람 권수(權銖)를 곧바로 도적을 다스리는 율(律)로 시행하다가 10일 안에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일의 놀랍고 참혹함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청컨대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또 경상 도사(慶尙都事) 신척(申滌)은 일찍이 본막(本幕)286)  을 보좌하다가 마침 시장(試場)을 당하여 한결같이 사의(私意)에 맡겨서 여러 사람의 비방을 크게 초래한 바 있는데, 지금 재차 제수(除授)함에 미쳐 또한 가을 과장(科場)을 만나 일도(一道)의 많은 선비가 더욱 분노와 질시를 품을 것이니, 청컨대 개차(改差)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15일 병자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지평(持平) 신처수(申處洙)가 심단(沈檀)을 잡아다 국문하라는 논계(論啓)를 바로 정지한 탓으로 물의(物議)가 있다 하면서 인피(引避)하여 물러나 기다리고 있는 것을 사헌부(司憲府)의 처치에서 신처수의 체직(遞職)을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천하(天下)의 모든 일에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한 것이 모두가 중도(中道)가 아니다. 심단의 일은 친히 본사(本事)를 기록한 뒤에는 오래도록 다툴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정지하지 아니한 것도 이미 지나친 일인데, 물의(物議)가 있는 것은 더욱 온당하지 않다. 만약 이와 같지 않았다면 위에서 어찌 지나치게 의심한다 하겠는가? 낙과(落科)에 처치하였으니 자신의 의사를 버리고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6월 16일 정축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효유(曉諭)하기를,
"형조(刑曹)의 죄수 장부 가운데 죄수로 있은 지 40년에 가까운 자가 있으니,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제 《송감(宋鑑)》을 강(講)하는데 ‘태조(太祖)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옥(獄)을 청소하고 죄수를 돌보도록 했다.’하였으니, 이 또한 인후(仁厚)한 도리이다. 전번에 강원 감사(江原監司)의 진달로 인하여 옥중(獄中)을 정결하게 하여 염기(染氣)를 이룸이 없게 하라고 전교하였는데, 요사이 염기가 이와 같으니 경계한 것이 한갓 형식적인 것으로 돌아가고 말았음을 알 수 있다."
하고, 이어 옥중의 죄수 중에 의심할 만한 자는 반드시 신중한 심찰(審察)을 가하여 여러 해 동안 적체(積滯)된 죄수가 없도록 낭관(郞官)에게 분속(分屬)시켜 자세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민응수(閔應洙)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臣)은 어제 헌부(憲府)의 처치에 있어 적이 이해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심단(沈檀)의 정계(停啓)에 대한 논의를 양대(兩臺)에서 이미 참여해 들었다 하여 인피(引避)했던 것인즉, 공의(公議)의 비난을 당한 뒤에는 그 불안한 바가 마땅히 다를 것이 없을 것인데, 처음에는 그 논의에 참여해 들었다는 것으로 인혐(引嫌)하였고 나중에는 중론(重論)을 바로 정지하였다는 이유로써 요대(僚臺)를 스스로 낙과(落科)에 처치하였으니, 언의(言議)가 모순(矛盾)되고 처의(處義)가 구차합니다. 청컨대 장령(掌令) 정광제(鄭匡濟)와 지평(持平) 이광운(李光運)을 체차(遞差)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장령(掌令) 이제항(李齊恒)이 상소하여 논(論)하기를,
"심단(沈檀)의 정계(停啓)는 진실로 물정(物情) 밖에서 나온 것으로 적이 헌신(憲臣)을 위하여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어제 처치한 데 대한 비답은 더욱 놀랍고 미혹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에 대략 이르기를,
"심단의 일을 오히려 지금까지 연계(連啓)함은 이미 지루한 일이었는데 오늘 정론(停論)한들 무슨 개연(慨然)해 할 일이 있겠는가? 처치(處置)에 대한 답사(答辭)는 다만 가르쳐 타이른 것일뿐 놀라고 미혹했다는 말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6월 17일 무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이 문의(文議)로 인하여 진계(陳戒)하기를,
"송유(宋儒)가 말하기를, ‘안으로 밝히기를 힘쓰는 자는 자기의 과실을 볼 것이고 밖으로 밝히기를 힘쓰는 자는 남의 과실을 보는 것이니, 자기의 과실을 보는 자는 천하(天下)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보다 나은 것을 볼 것이고 남의 과실을 보는 자는 천하의 사람이 모두 자기와 같이 못함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신(臣)은 감히 이 두가지 말을 성덕(聖德)에 절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이 가만히 엿보건대 전하의 총명과 예지(睿智), 정사(政事)와 문변(文辯)은 전대(前代)에서도 견줄 사람이 드물어서 뭇 신하에서는 한 사람도 방불하게 미칠 자가 없으니, 전하께서 뭇 신하를 굽어 보시는데도 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경시(輕視)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말씀하시는 사이에 대략 박절한 언론이 많아서 예(禮)로 대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대개 성인(聖人)이 덕(德)이 더욱 높을수록 마음을 더욱 낮추어서 오직 현사(賢士)를 잃고 선언(善言)를 듣지 못할까 두려워함은 이러한 까닭입니다. 어찌 억지로 혐의를 피하는 태도를 짓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공부(工夫)가 아직 미진(未盡)하여 말씨의 조화롭지 못함을 초래하곤 하는데, 이는 실로 나의 병통이다.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겠는가? 대신(大臣)의 말을 잘 지키겠다."
하였다.

 

성진령(成震齡)을 장령(掌令)으로, 윤섭(尹涉)·홍성보(洪聖輔)를 지평(持平)으로, 이정주(李挺周)·박성로(朴聖輅)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18일 기묘

임금이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자 판부사(判府事)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임징하(任徵夏)의 귀양은 무슨 죄였습니까? 영상(領相)의 소(疏) 가운데는 ‘무슨 큰 죄냐?’라고 말했는데 전하께서 망언(妄言)으로 돌렸으니, 어찌 망언을 가지고 대신(臺臣)을 죄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주(漢主)가 하후승(夏侯勝)287)  을 죄주지 아니하였는데 임징하(任徵夏)의 일은 그 죄가 하후승에게 비교하여 더 중하며, 그 말에 감히 이르기를, ‘한번 다스려지면 한 번 어지럽게 마련이라.’하고 종말에 가서는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에 비교했으니, 어찌 망언이 아니겠는가? 여염(閭閻) 사람으로 말하더라도 일이 부형(父兄)에게 관섭된다면 그 자제(子弟)된 자가 어찌 즐겁게 듣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특별히 귀양을 보내게 된 까닭인 것이다."
하였다. 이관명이 말하기를,
"상세히 본의(本意)를 추구하여보면 죄줄 만한 사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내 이관명에게 타이르기를,
"선조(先朝) 때부터 차대(次對)할 때에는 원임(原任)도 함께 들어가는 규정이 있었으니, 이 뒤로 차대에는 경(卿)도 모름지기 윤회(輪廻)하여 입시(入侍)토록 하라."
하니, 이관명이 말하기를,
"감히 명(命)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려 우의정(右議政) 조도빈(趙道彬)을 힘써 나오게 하고, 또 특별히 유지를 내려서 대사헌(大司憲) 김간(金榦)을 돈독히 불렀다.

 

6월 19일 경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유겸명(柳謙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탄핵(彈劾)하기를,
"장흥 부사(長興府使) 채숙(蔡橚)이 날마다 술에 빠지는 것을 일삼고 관무(官務)를 완전히 폐하는가 하면, 패악(悖惡)한 동생과 조카가 간특한 아전과 부동(符同)하여 오로지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며, 진도 군수(珍島郡守) 홍우귀(洪禹龜)는 흉년의 곡물(穀物)을 모두 자기의 주머니로 돌려 굶주려 죽은 시체가 즐비하다 하니, 청컨대 아울러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풍문(風聞)은 반드시 준신(準信)할 것이 못되니, 다시 상세한 심찰(審察)을 더하라."
하였다. 그 후에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채숙(蔡橚)과 홍우귀(洪禹龜)의 치적이 모두 볼만한 것이 있으니 당연히 한번 잡아다 가두고 허실(虛實)을 다시 조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진달하니, 임금이 마땅히 헤아려서 하겠다는 것으로 전교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강관(講官)에게 효유(曉諭)하기를,
"성인(聖人)의 문하(門下)에서 친히 배운 사람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서 자연히 정밀하고 절실하겠지만, 후세에서는 성현(聖賢)의 사적(事蹟)이 다만 경적(經籍)에 실려 있을 뿐이다. 경전(經傳)의 해설과 주해(注解)는 본디 당연히 강하여 밝혀야 하니, 몸으로 실천하는 방도는 비록 나에게 있다 하더라도 감동시켜 분별하게 하는 것을 돌아보건대 유신(儒臣)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충청도(忠淸道)의 전의(全義)·정산(定山)·공산(公山)·청산(靑山)에 황충(蝗蟲)이 번지고, 함경도(咸鏡道)의 경성(鏡城)에는 우박이 내렸다.

 

6월 23일 갑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윤섭(尹涉)이 상소(上疏)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前) 지평(持平) 신처수(申處洙)가 중대한 논의를 바로 정지한 것은 실상 상정(常情)밖에 나온 것인지라, 장령(掌令) 이제항(李齊恒)이 소(疏)를 올려 그 과실을 배척하여 그 논계(論啓)를 다시 발의하는 데 무슨 꺼려할 것이 있기에 간신히 뜻만 보이고는 말을 여러 가지로 완곡하게 돌리면서 교묘하게 피하였으니, 신(臣)의 생각으로는 논의를 정지한 대관(臺官)과 장령(掌令) 이제항은 모두 파직(罷職)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항의 일은 이미 그 계사(啓辭)에 윤허하였고 신처수는 이미 그 직임을 바꾸었는데, 또 어찌 파직하겠는가?"
하였다.

 

지평(持平) 최명상(崔命相)이 상소(上疏)하여 세 신하를 출향(黜享)하자는 논의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24일 을유

이재(李縡)를 대제학(大提學)으로 삼으니, 전전(前前) 대제학(大提學) 이의현(李宜顯)의 천거이었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최명상(崔命相)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심단(沈檀)이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의 무리와 더불어 심복(心腹)의 관계를 맺고 음흉(陰凶)한 계획을 치밀하게 한 정상이 백망(白望)·정우관(鄭宇寬)의 초사(招辭)에서 드러났고 재차 심정옥(沈廷玉)의 초사에서 나온지라, 국청(鞫廳)에서 국문(鞫問)을 청한 것은 왕법(王法)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처지에서 나온 것인데, 성상(聖上)께서 특히 심단의 이름이 선조(先朝)의 기사(耆社)288)  에 들어 있다는 것으로 너그럽게 용서해 주려고 하시면서 윤허를 내리지 아니하시니, 어찌 전하의 생각하지 아니하심이 이와 같이 심하십니까?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죄가 혹시 반역(反逆)을 범하게 되면 비록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이라도 법으로 보아 용서하여 보호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심단이 영수각(靈壽閣)289)  의 기당(耆堂)290)  에 처음에는 들어가지도 아니하였고 추후하여 참여해 들어간 것도 또한 역적 김일경이 뜻을 이루게 된 때에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기사(耆社)에 들었다 하여 혹시라도 용서하는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청컨대 멀리 귀양보낸 죄인 심단을 국청에 잡아다가 엄하게 문초하게 하소서."
하고, 또 전(前) 지평(持平) 신처수(申處洙)는 유독 자기의 소견만으로 심단에 대한 논계를 졸지에 정지한 것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하였으나, 다시는 억지로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려 대제학(大提學) 이재(李縡)를 빨리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도목 대정(都目大政)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병상(李秉常)과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흥경(金興慶)의 정사(政事)였다.

 

황선(黃璿)을 승지(承旨)로, 이간(李柬)을 충청 도사(忠淸都事)로 삼았다. 이간은 새로 자의(諮議)를 거쳐 이에 이르러 이 직임에 제수되었다.

 

6월 25일 병술

삼사(三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것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고, 양사(兩司)에서 전의 합계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간(金榦)이 상소하여 사관(史官)과 같이 오라는 명을 거두어 줄것을 빌고 인하여 《맹자차기(孟子箚記)》의 이루편(離婁篇) 이하 4책(冊)을 바쳤다. 대개 전일에 바친 것은 곧 등문공편(滕文公篇) 이상의 3책(冊)이었다. 우악한 비답을 내리기를,
"바친 책자(冊子)는 항상 오른쪽 자리에 놓아두고 본전(本傳)과 서로 참고하겠다."

 

평안도(平安道) 강계부(江界府)에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다.

 

6월 26일 정해

예조(禮曹)에서 회계(回啓)하여 송갑조(宋甲祚)에게 증시(贈諡)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6월 27일 무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에 앞서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와 송조 육현(宋朝六賢)291)  의 이름자를 강연(講筵)에서 마땅히 휘(諱)를 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옥당관(玉堂官)에 명하여 전례를 상고해서 품하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유신(儒臣)이 강독(講讀)할 때에 군상(君上)은 마땅히 휘해야 하나 신료(臣僚)는 군상(君上) 앞에서 휘함이 부당함을 아뢰니, 임금이 명하기를,
"군신(君臣)이 모두 휘(諱)하고 주공(周公)의 이름도 또한 일체(一體)로 휘하며, 문왕(文王)의 이름도 마땅히 휘(諱)할 것인지 그에 대한 여부도 옛일에 해박(該博)한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다시 품정(稟定)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9일 경인

대제학(大提學) 이재(李縡)가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이번의 권점(圈點)은 오로지 성전(盛典)을 위함이니 일의 체통이 엄중(嚴重)함을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 이 직임으로 신(臣)을 부르신다면 우인(虞人)292)  의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우악한 비답으로 재촉하여 올라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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