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권, 영조 2년 1726년 7월

싸라리리 2025. 8. 20.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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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신묘

임금이 경소전(敬昭殿)293)  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거행하였다.

 

호서(湖西) 지방에 지진(地震) 하였다.

 

7월 2일 임진

혜순 자경 대왕 대비전(惠順慈敬大王大妃殿)의 존호(尊號)를 헌열(憲烈)이라 올리고, 왕대비전(王大妃殿)의 존호를 경순(敬純)이라 올렸으며,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휘호(徽號)를 공효 정목(恭孝定穆)이라 올렸다.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묘정(廟庭)에 민진후(閔鎭厚)와 이유(李濡)를 배향(配享)하기로 의논하여 정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재(李縡)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였다. 이때에 대신과 구경(九卿)294)   및 제학(提學)이 빈청(賓廳)에 모여 각전(各殿)의 존호(尊號)와 배향(配享)할 제신(諸臣)을 의논하여 정하는데, 이재가 시골에서 도성(都城)으로 들어와 금오(金吾)295)  에서 명령을 기다리므로 세 번이나 패초(牌招)했으나 마침내 응하지 않자, 임금이 이르기를,
"3백 년을 지켜 온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이재로부터 소홀해지게 되었다."
하고,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헌납 임주국(林柱國)이 상소하기를,
"민진원(閔鎭遠)과 이관명(李觀命)을 차례로 벼슬을 해면시키는 것은 대신(大臣)을 존경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세웅(申世雄)을 해가 지나도록 서용(敍用)하지 않으심은 성주(聖主)의 사람 임용(任用)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성진령(成震齡)은 논란을 받을 만한 심술(心術)은 없는 사람인데도 전하께서 배척하시는 것은 무슨 일 때문이십니까? 임징하(任徵夏)는 말 한 마디 했다가 거슬림을 받아 황량(荒涼)한 변방에서 결(玦)을 받고 울고 있습니다. 조현명(趙顯命)의 상소는 뜻이 음흉하고 간교한데 ‘딴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분부하셨고, 허석(許錫)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기에 반드시 진달했던 것인데 마치 노예(奴隷)를 꾸짖듯이 하셨습니다. 이이근(李頤根)의 상소는 스승이 모함받은 것을 변명한 것인데 즉각 도로 주도록 내버려 두셨고, 윤봉조(尹鳳朝)에게는 한결같이 낙점(落點)을 아끼어 현저하게 미워하고 박대하는 뜻을 두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묘정(廟庭)에서 출향(黜享)하는 논란에 있어서는 대신들에게 물어 보고서 시급히 대간(臺諫)이 논계한 대로 윤허하시면서, 승선(承宣)이 감형(監刑)하는 일에 있어서는 어찌 이렇게 처분하실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장신(將臣)의 소청을 굽혀 따르셔서 1백여 리 밖의 경숙(經宿)하게 되는 곳에서도 패부(佩符)하도록 윤허하셨으니, 조종조(祖宗朝)의 더없이 엄격했던 군법(軍法)을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무너뜨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우악(優渥)하게 비답(批答)하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집(李潗)이 사폐(辭陛)296)  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하고 싶은 말을 물으매, 이집이 수의(繡衣)297)  의 별단(別單) 내용에 있는 풍속(風俗)·문교(文敎)·전정(田政)·양역(良役) 등의 일을 들어 폐단을 부연(敷演)하여 진달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의(稟議)하도록 하였다.

 

7월 3일 계사

임금이 좌의정 홍치중(洪致中)과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을 불러 보았다. 이때에 사은사(謝恩使)의 선래(先來)298)  가 이미 돌아왔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이 ‘이적(夷狄)에게서는 선언(善言)이나 악언(惡言)을 듣게 되더라도 기쁘게 여기거나 성내거나 할 것이 없다.’고 했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1백년 동안의 국가에 대한 무함을 이제는 이미 소설(昭雪)299)  하게 되었다. 그 책자(冊子)를 비록 미처 가져오지는 못했지마는, 피인(彼人)들이 일단 승락한 뒤에는 반드시 딴 뜻이 없을 것이다. 이 기쁨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묻기를,
"동지사(冬至使)와 사은사를, 피인들이 겸임(兼任)하여 오라는 것으로 말을 하더라는 것인데, 경(卿)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홍치중과 조도빈은 모두 겸임하여 차송(差送)하라는 것으로 진달하고, 이어 대신(大臣)을 보내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신처수(申處洙)를 파직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을 사은사(謝恩使) 겸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김상옥(金相玉)을 부사(副使)로, 김응복(金應福)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7월 4일 갑오

삼사(三司)에서 전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시급히 그만두도록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의 합계를 거듭 아뢰니, 시급히 그만두도록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앞서의 계달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사간원에서 【사간 민응수(閔應洙)이다.】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금부 도사(禁府都事) 박필준(朴弼俊)과 전의 현감(全義縣監) 송성원(宋性源)은 다같이 명문가의 후예인데도 시기에 따라 아첨을 바쳐 의리를 무시한 체 염치가 없으니, 아울러 파직하기를 바랍니다.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한덕사(韓德師)는 앞서 목릉(穆陵)300)  의 재랑(齋郞)을 맡았을 때에 감히 공가 문서(公家文書)에 해괴하고 패려(悖戾)한 말을 썼었으니, 사판(仕版)301)  에서 삭제하기 바랍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대개 임주국(林柱國)의 상소 내용에 ‘장신(將臣)이 패부(佩符)하고서 1백 리 밖에서 경숙(經宿)했다.’는 말은 곧 조도빈이 병조 판서일 때의 일을 지적한 것인데,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려 출사(出仕)하도록 권면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경종 대왕(景宗大王) 묘정(廟庭)의 배향(配享)을 영의정 이유(李濡)와 행 좌참찬(行左參贊) 민진후(閔鎭厚)로 하여 이미 계하(啓下)받았습니다.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고찰해 보건대, 봉상시(奉常寺)에서 위판(位板)을 만들어 그의 집으로 보내게 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되, 교서(敎書)를 선유(宣諭)하고나서는 위판을 써서 그 임시에 혼전(魂殿)으로 가지고 갔다가, 경종 대왕의 신연(神輦)이 종묘로 나아갈 때에 신연 뒤에 따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서의 제술(製述)과 위판 제작 및 제관(祭官)·제물 등의 일을 부묘 도감(祔廟都監)과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7월 5일 을미

삼사(三司)와 양사(兩司)에서 앞서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다. 이때에 추향(秋享)의 친제(親祭)가 앞으로 3일이 남았는데, 전교(傳敎)하기를,
"2일 동안의 치재(致齋)는 특히 옛날의 규례만이 아니라 올봄에 또한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오늘 대계(臺啓)를 받아들인 것은 살피지 못함을 면하지 못할 일이다."
하고, 이어 제사가 지나간 다음에 전계(傳啓)하도록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청대(請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민진원(閔鎭遠)이 성후(聖候)가 편치 못함을 들어 추향(秋享)을 대행(代行)할 것을 강력히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상제(祥祭) 전의 대제(大祭)는 이번뿐인데 어찌하여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경기(京畿) 근방에는 장맛비가 매우 지나치게 내리고 호남(湖南)은 한재가 몹시 혹독하여 큰 흉년이 들 것이 이미 결판이 났습니다. 지금 공물(貢物)에 대한 값을 주지 못하고 있고 백관(百官)들에게 녹봉도 주지 못하고 있는데 올해의 연사가 또한 이러하니, 성상께서 비록 1되[升]의 쌀이나 1자[尺]의 베라 하더라도 마땅히 낭비를 경계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민생(民生)의 일을 생각하노라면 밤중에도 잠이 오지 않는다. 호남에는 해마다 한재가 드는데, 옛사람의 말이 ‘한 사람의 지어미가 원통해 하매 5월인데도 서리가 내렸다.’고 했었으니, 혹은 도내(道內)에 억울해 하는 기운이 쌓여서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호남의 방백(方伯)이 되었을 적에 특별히 탐문해 보았는데도 원통함이 쌓여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의 어염(魚塩)의 생리(生利)는 호남이 제일인데, 요사이 할박(割剝)302)  하는 길이 여러 가지어서,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 및 해읍(該邑)이 모두 침학(侵虐)하고 있고 서울의 아문(衙門) 및 여러 궁가(宮家)의 차인(差人)들이 또한 징수하면서 독촉하는 수가 많기 때문에 포구(浦口) 민생들이 한 해가 다 가도록 애를 써가며 고생을 하여도 호구(糊口)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해마다 천재를 불러들이게 된 것은 반드시 연해(沿海)의 민생들이 생업(生業)을 잃고서 원통을 호소하여 천지의 화기(和氣)를 감상(感傷)시킨 때문이 아닐 수 없으니, 이번에 마땅히 일을 잘 아는 어사(御史)를 가려서 보내어 한 번 정돈하여 바로잡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각 영문(營門)과 서울의 아문 및 여러 궁가를 엄중하게 신칙하여 다시는 침해하여 징수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효종(孝宗)의 어필(御筆)을 찾아 들이게 하는 뜻으로 앙달(仰達)하였고, 이번에 이미 본가(本家)에서 구득(求得)하였기 때문에 감히 진달합니다."
하고, 이어 서찰(書札) 하나를 올리고, 임금이 보고 난 다음에 또 하나의 서찰을 올리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어느 해의 어필(御筆)인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모두 다 승하(昇遐)하시던 기해년303)  에 내리신 것입니다."
하고, 민진원이 또 한 폭(幅)을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는 곧 갑술년304)  에 송기태(宋基泰)가 상소하며 어찰(御札)을 올렸을 때에 숙종(肅宗)께서 비답(批答)하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제 4폭은 무슨 일의 것인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는 곧 명성 왕후(明聖王后)305)  의 언찰(諺札)입니다. 경신년306)  에 선정(先正)이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을 때에 명성 왕후께서 특별히 어찰을 내리시어 김석연(金錫衍)으로 하여금 전선(傳宣)307)  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희조(李喜朝)가 올렸던 독대(獨對) 때의 설화(說話)를 보았는데 어찌 성조(聖祖)의 뜻을 알지 못하겠는가? 성조께서 하신 말씀이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은 돌아볼 것 없다.’고 하셨으니, 이에 있어서 더욱 성조의 뜻이 순수한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조께서 또 하신 말씀이 ‘10년 뒤에는 내 나이가 50이 되는데 그때 하게 되지 못한다면 마땅히 경(卿)에게 물러가도록 윤허하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분부를 내리신 때가 곧 승하하신 해이었다."
하고, 이어 한참동안 오열(嗚咽)했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숙종께서 황단(皇壇)308)  에 친제(親祭)하시고서 칠언 율시(七言律詩)를 지으셨는데, 그 끝에 구절에 이르기를, ‘그윽이 소원은 영릉(寧陵)309)  의 성지를 따르는 것[竊願寧陵聖志遵]’이라고 하셨기에, 신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이 일곱 글자는 뜻이 다 좋습니다.’ 했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민생들이 곤궁하고 지치어 장차 보존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전하께서 큰 뜻을 분발하시기를 반드시 위(衛)나라 문공(文公)의 대포(大布)310)  와 월(越)나라 구천(句踐)의 상담(嘗膽)311)  과 같이 하신 다음에야 바야흐로 일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범연하게 토벌하여 복수하는 의리만 말하고 만다면 대저 어찌 실제의 효과가 있게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外敵)을 물리치는 것은 곡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비록 진부(陳腐)한 말과 같기는 하지만 곧바로 실속이 있는 공부인 것이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의 그 날의 치욕(耻辱)을 해가 오래되자 점점 잊고 있다. 어리석은 하민(下民)들은 본시 책망할 수 없는 것이지만, 비록 사대부(士大夫)라 하더라도 또한 모두 거의 잊고 있으니,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선정(先正)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만동사(萬東祠)의 창건(創建)까지 비난하며 배척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대계(臺啓)에 논박한 바 한덕사(韓德師)는 건원릉지(健元陵誌)에다 ‘황청(皇淸) 성조(聖祖)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조책(造冊)했다.’고 썼습니다. 사대부들의 풍습이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판(仕版)에서 삭제만 한 것이 오히려 가볍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일전에 서명백(徐命伯)이 초사(初仕) 중에는 제일 앞에 의망(擬望)312)  되었다가 은혜스러운 낙점(落點)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상의 덕에 있어서는 진실로 광채가 있는 일이지만, 다만 부부인(府夫人)이 빈궁(貧窮)함을 면하지 못하게 되어 마침내는 미안스럽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재주가 없다면 몇 말[斗]의 녹이라도 받게 되도록 한관(閑官)의 자리에 두게 하고, 과연 임용(任用)할 만하다면 고을의 원으로 나가게 하더라도 또한 불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두광국(竇廣國)313)  을 임용하지 않은 것을 내가 일찍이 그르게 여겼었다. 만일 피혐(避嫌)하느라 낙점을 아끼었다면 이는 도리어 사의(私意)인 것이다. 나의 뜻이 있는 데를 경(卿)이 어찌 알겠는가? 서명백 형제 두 사람 중에 만일 그 아우를 의망했었다면 내가 반드시 지난(持難)314)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7월 6일 병신

약방(藥房)에서 임금의 체후(體候)가 어제보다 더치었음을 들어, 지극한 심정을 억지로라도 억제하여 추향(秋享)을 섭행(攝行)하게 하기를 극력 청하니, 비답하기를,
"3년의 상기(喪期)가 장차 다 가게 되어 재기(再期)315)  가 어느새 박두했는데, 이때에 섭행하게 하는 일을 어찌 차마 윤허하겠는가마는, 증세가 버티기 어려울 듯하고 경(卿)들의 간청이 또한 다시 이러하니, 할수없이 억지로 따르겠다."
하였다.

 

7월 7일 정유

정언 유겸명(柳謙明)이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맹랑하여 기운만 믿고 교만 방자하고, 술주정으로 정신이 헷갈리어 깨어 있는 때가 언제나 적으므로 기율(紀律)이 문란하여져서 호령(號令)이 행해지지 않는 것도 이미 더없이 한심한 일이거니와, 지난번에 신(臣)을 만났을 때의 일은 이미 날을 정하여 대궐을 범하려는 역적이 아니었고 보면 무슨 다급한 일이 있다고 대신과 본병(本兵)의 신료(臣僚)에게도 통의(通義)하지 않고서 창황(蒼黃)하게 청대(請對)하기를 마치 놀라운 사기(事機)가 한 번 호흡(呼吸)할 사이에 박두해 있는 것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비록 무식하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이처럼 전도(顚倒)되고 망령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아서 그의 죄를 징계해야 마땅합니다. 전 지평 이광운(李光運)은 처치(處置)를 합당하지 못하게 한 것 때문에 견책(譴責)하여 파직당하게 되자, 그만 함께 일을 한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고자 하여 갖가지로 애걸(哀乞)하여 그에게 대신 당할 것을 요구하면서 수서(手書)한 것을 가지고서 증거를 삼았고, 대관(臺官)을 꾀다 으르다 하여 구차하게 인피(引避)하는 짓을 하되, 승지(承旨)를 단속하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극력 주장하였으며, 한이 없는 수단으로 농간을 부려 평조의 심술을 남김없이 드러냈습니다. 이처럼 벼슬을 얻고서는 잃을까 근심하는 사람과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정주(李挺周)는 곡진하게 이광운의 처지를 위하여 서로들 꾀를 내어 권유(勸誘)하는 짓을 하였고, 전 장령(掌令) 이제항(李齊恒)은 구태어 인피하게 하여 받아들이겠다고 언약하고서, 그의 인피하는 계사(啓辭)가 원(院)에 이르자 반드시 받아들이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항이 탄핵받음에 당해서는 그만 도리어 상소를 진달하여 자신을 변명하여 이제항을 구차하다고 했습니다. 만일 구차한 짓으로 알았다면 무엇하러 강력히 권유하는 짓을 했으며, 이미 권유한 것이 성사하게 되어서는 어찌하여 그만 자신의 종적(蹤跡)을 숨기고 도리어 이제항을 모함할 수 있겠습니까? 이광운은 이미 앞서의 일로 파직되엇으니, 이정주(李挺周)도 또한 마땅히 견파(譴罷)하여 경책(警責)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순릉 봉사(順陵奉事) 김익량(金翼亮)은 고 명상(名相) 김종서(金宗瑞)의 후손이기에 일찍이 숙종조(肅宗朝)에 특별히 침랑(寢郞)을 제수했던 것인데, 그 뒤에 흉당(凶黨)들이 ‘김익량은 김종서의 후손이 아니다.’고 했었기 때문에 대관(臺官)의 장주(章奏)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대신이 신변(申辨)함에 따라 복직(復職)하도록 명하시게 되었습니다마는, 그가 거짓 소속한 것인지 아닌지를 유사(有司)로 하여금 분명하게 사핵(査覈)하도록 해야 합니다. 전 대제학 이재(李縡)는 구구(區區)하게 지켜온 바를 일이 다급한 것 때문에 갑자기 변경할 수는 없었던 것이니, 삼가 삭출(削黜)하도록 하신 명을 시급히 거두시기 바랍니다. 사은 정사(謝恩正使) 민진원(閔鎭遠)은 비록 시임(時任)은 아니지만 경연(經筵)에 드나들며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사국(史局)일에 마음을 다하여 한청(汗靑)316)  이 기약이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상개(上价)317)  로 임명한 것을 고쳐야 합니다.
신축년318)  에 전하께서 정위(正位)319)  하셨을 적에 춘궁(春宮)320)  의 공물인(貢物人)들이 때를 타 상언(上言)하기를, ‘3백 년 이래 세제궁(世弟宮)이 없었다가 이제야 비로소 있게 되었으니 세제궁의 공물인 12명을 더 두기 바랍니다.’라고 했었던 것을 전하께서 등극하신 뒤에 바로 재감(裁減)하도록 하셨던 것인데, 작년에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고서 신축년의 사례를 들어 다시 더 두게 되었습니다. 대저 세자궁(世子宮)과 세제궁은 비록 그 명칭이 다르기는 하지만 똑같은 춘궁인데, 공인(貢人)들이 핑계하며 상언하므로 마침내 더 두게 된 것은 더욱 극도로 의의(意義)가 없는 일입니다. 그 공물인들이 1명마다 대가로 받는 쌀이 1백 10석(石)씩이 되어 합하여 헤아리면 그 수량이 1만에 가깝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각전(各廛)에서 진배(進排)하는 것을 한결같이 《대전(大典)》에 있는 원액(元額)대로 하고, 원액 이외에 더 둔 52명은 즉시 개혁하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성균관(成均館)의 초기(草記)321)  에 ‘각 고을에서 통용하고 있는 폐백(幣帛)은 거칠거나 가는 것이 일정하지 못하고 자[尺]수도 똑같지 않으므로, 본관(本館)의 주관(主管) 아래 저자의 상민(商民)들로 하여금 폐백으로 쓸 저포(紵布)를 무역(貿易)해서 마치도록 하여 각 고을에 반포하여 보내고서, 각 고을에서는 폐백 마련에 들어가는 지출을 대동미(大同米)322)  에서 회감(會減)해 내어, 본고을에서 뱃삯을 내고서 저자의 상민에게 운반해 주도록 하되, 그 속에서 남게 되는 이익을 가져다가 본관의 비용에 보충한다.’고 했습니다. 폐백을 마련하느라 회감해 내는 쌀이 그만 원상납(元上納)의 대동미처럼 되어버리고, 뱃삯도 또한 장차 민간에서 나오게 되고, 운반하여 바치는 동안에도 끼치는 폐단이 적지 않은데, 해가 오래된 뒤에는 또한 반드시 차츰 생기는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서울 안의 모리배(牟利輩)들이 수십년 전부터 이 일을 경영해 오다가 이제야 비로소 확정하게 되었는데 각 고을에 폐해가 되고 소민(小民)들에게 해를 끼치게 됨이 이러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향사(享祀)에 쓰는 폐백을 각 고을에서 그전처럼 스스로 마련하게 하고 공물(貢物)로 설정(設定)하지 마는 것이 가할 듯합니다. 김우태(金遇兌)라는 사람이 공경(公卿)들의 문에 드나들고 서울과 외방(外方)속에 오가면서 관력(官力)을 빙자하여 곤궁한 백성을 박할(剝割)하므로 중외(中外)의 민정이 질시하고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마땅히 유배(流配)하여 그의 죄를 징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훈련 대장에 관한 일은 논한 말이 과중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광운(李光運)과 이제항(李齊恒) 등의 일은 사대부(士大夫)로서 염치와 지조에서 어찌 이와 같은 것을 용서하겠느냐? 그 말세(末世)를 격려하는 도리에 있어 이미 파직했다고 해서 그만둘 수 없으니, 모두를 삭직(削職)하도록 하겠다. 승지도 또한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않아야 한다. 김익량(金翼亮)의 일에 있어서는 그대의 말이 옳으니 그대로 시행하겠다. 이재의 일은 이미 경연(經筵)에서 일렀었고, 사은 정사는 이미 변통하도록 명했다. 진배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이는 하나의 궁(宮)에만 더 진배하게 한 것이 아니다. 태학(太學)의 폐백의 일은 그대의 말이 합당하게 되었으니, 묘당(廟堂)으로 히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김우태는 연한(年限)을 두지 말고 멀리 유배하여 징일 여백(懲一勵百)하는 뜻을 보여야 한다."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니, 임금이 도제조 민진원(閔鎭遠)에게 이르기를,
"경(卿)의 나이가 이미 늙었고 위에는 부부인(府夫人)이 있는데, 어찌 경을 먼 데에 가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민진원이 두세 번이나 가겠다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제조(提調) 김흥경(金興慶)이 아뢰기를,
"종친부(宗親府)의 서리(書吏)와 사령(使令)을 각각 6명씩을 다시 더 낸 것은 비용을 아끼는 도리 때문에 진달한 것이 아니니, 청컨대 전지(傳旨)를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종친부의 신료(臣僚)들은 으레 초모(貂帽)와 홍대(紅帶)를 착용하여 겉은 우대하는 것 같지만 실지는 아무 것도 없다. 다른 일에 있어서는 비록 더러 모두 감할 수 있을지라도 이는 감할 수 없다."
하였다. 제조 황귀하(黃龜河)가 잇따라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하는 말이 이러하니, 서리와 사령을 절반으로 재감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가, 약방에서 물러간 다음에 다시 재감하도록 한 분부를 도로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홍호인(洪好人)과 나학천(羅學川)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7월 8일 무술

밤 5경(五更)에 유성(流星)이 천창성(天倉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바리때와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척(尺) 가량이며, 빛깔이 붉어 광채가 땅에 비치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죄인 목천임(睦天任)이 어버이의 상사를 만난 것을 들어 귀장(歸葬)하도록 허락하는 뜻으로 장문(狀聞)하였는데, 의금부에서 방계(防啓)하므로, 전교(傳敎)하기를,
"왕자(王者)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다른 것이 없고 효도로써 하는 것이다. 법전(法典)에 실려 있는 귀장하게 하는 법을 이토록 방색함은 이심한 짓임을 면하지 못할 일이다. 귀장하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7월 11일 신축

사간원에서 【정언 유겸명(柳謙明)이다.】  앞서의 계달한 일을 거듭 아뢰고, 또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기를 청했는데, 하는 말이 상소에 말과 같았다. 또 말하기를,
"의금부 죄인 홍성룡(洪聖龍)이 이미 끌어대는 말이 있었는데도 불문에 붙이고 한결같이 엄한 형벌을 하여 장차 박살(撲殺)한 과죄에 돌리게 되었습니다. 다만 크게 뒷날의 폐단에 관계가 있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당초에 기포(譏捕)하도록 한 뜻을 그르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홍성룡을 하루에 두 차례씩 형벌하도록 한 명을 정지하고, 끌어댄 제인(諸人)들을 모두 본부(本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핵실(覈實)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7월 12일 임인

사간원에서 앞서의 계달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임금이 의금부의 죄인 홍성룡(洪聖龍)을 우선 엄하게 심문하되, 한 차례 한 다음 다시 심문하여 아뢰도록 명하니, 승정원에서 복역(覆逆)323)  하기를,
"대간(臺諫)이 바야흐로 심문을 정지하고 참핵(參覈)하기를 청했으니, 대계(臺啓)를 거두어버리기 이전에는 해부(該府)에서 거행할 수 없음은 대개 대각(臺閣)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일 대계가 있지 않는데 앞질러 먼저 형벌하여 심문한다면, 진실로 뒷날의 폐단과 관계가 있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에 대략 이르기를,
"금오(金吾)에서 탈품(頉稟)324)  하고 사간원에서 논계(論啓)하고 승정원에서는 복역(覆逆)하고 있음은 한통속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바탕의 웃음거리에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홍성룡은 결코 몇 차례 가하는 심문 때문에 갑자기 죽게 되지 않을 것인데 어찌 이다지도 시끄럽게 하는 것인가? 무릇 일은 위에서 행하는 것을 아래서 본받게 되는 것이고, 나는 없는 죄를 꾸며내려고 하지 않는데도 여러 신하들의 하려고 하는 짓이 곧 이와 반대되고 있으니, 지금과 옛날이 같지 않아서 그러는 것인가? 내가 세상의 도의를 개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하였다.

 

정언 유겸명(柳謙明)이 아뢰기를,
"위조 비답(批答)을 만들어 낸 일은 홍성룡(洪聖龍)이 혼자서 주선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흉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있어 몰래 홍성룡을 사주(使嗾)하여 사류(士流)들 사이에 전파(傳播)하도록 하여 화를 전가(轉嫁)하고 사람을 장해(狀害)하려는 흉계를 부린 것임을 밝히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홍성룡이 공초한 말에 이미 끌어댄 것이 있었으므로 허실(虛實)을 막론하고 한 번 잡아 오게 하는 것이 옥사(獄事)의 체모에 당연한 일인데, 끌어댄 사람에 있어서는 놓아 두고 심문하지 않고서, 도리어 승복(承服)한 말만 가지고 그가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으로 미리 의심하여 한결같이 엄한 형벌을 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갑자기 죽어버리게 된다면 이것이 어찌 옥사를 다스리는 도리라고 하겠습니까? 신이 애석하게 여기는 바는 옥사의 체모이고, 조금도 지나치게 의심하는 뜻이 있어서가 아닌데, 전하께서 ‘말마다 의심하고 일마다 그렇게 여긴다.’는 등의 말씀으로 갖춰 지극하게 회책(誨責)하시게 되니, 신은 진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신을 체직하여 배척(排斥)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판부(判付)325)  는 구차한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없는 죄를 꾸며내는 것을 타파시키려고 한 것이다. 아! 끊임없이 이렇게 한다면 왕자(王者)가 비록 지극히 공정하게 세상을 다스리려고 해도 장차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돌아보건대 이 세상의 도의(道義)는 진실로 한심하기만 하다.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있으며 물론(物論)을 기다리라."
하였다.

 

예조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앞으로의 탄일(誕日)을 시작으로 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세자궁(世子宮)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준례에 의하여 옛날대로 회복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시 내년 가을까지 기다렸다 품하도록 명하였다.

 

이병태(李秉泰)를 사간(司諫)으로, 송사윤(宋思胤)과 이태징(李台徵)을 장령(掌令)으로, 이정박(李挺樸)과 이세진(李世璡)을 지평(持平)으로, 김상석(金相奭)을 정언(正言)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북평사(北評事)로, 홍석보(洪錫輔)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황귀하(黃龜河)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유명홍(兪命弘)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7월 13일 계묘

지평 이정박(李挺樸)이 상소하기를,
"유사(有司)가 참핵사(參覈使)326)  들을 잡아오도록 청하였음은 본시 옥사(獄事)의 체모에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없는 죄를 꾸며내는 것과 근사한 것이겠습니까? 전후에 비답하신 분부를 모두 도로 거두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비답에 대략 이르기를,
"그대의 상소에 논한 말이 이러하니, 어찌 도로 거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어 구절의 말은 제신(諸臣)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납언(納言)하려는 뜻을 보여준 것이다. 비답한 내용에 ‘나직(羅織)327)  ’이란 두 글자는 추후에 마땅히 고치도록 하겠다."
하고, 그 뒤에 ‘나직’을 ‘장대(張大)’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7월 16일 병오

정언 유겸명(柳謙明)이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아래서는 ‘박살(撲殺)’로 위를 의심하고 위에서는 ‘나직(羅織)’으로 아래를 의심하여,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 정지(情志)가 서로 믿지 못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는 유독 신들의 죄만이 아니라 또한 전하께서도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셔야 할 곳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끊임없이 권면하고 경계해 주니, 임금을 친애(親愛)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음에 아름답게 여기고 있는데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장령 이태징(李台徵)이 상소하여 첫머리에는 토역(討逆)하기를 청하고, 다음에는 말하기를,
"전일에 간신(諫臣)이 재물을 절약하라는 말은 바로 오늘날의 약석(藥石)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더구나 저 군문(軍門)에서 쓰는 전포(錢布)는 민생들의 고혈(膏血)아닌 것이 없으므로 비록 심상하게 쓰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만 둘 수 있기만 하다면 절감(節減)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때 두어 신하들의 말이 비록 더러 사실과 틀리는 것이 있기는 했어도 또한 성상께서 용도(用度)를 절약하여 재물을 넉넉하게 하시려고 한뜻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처음에는 많은 말을 해서야 상소를 입계(入啓)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맞바로 향암(鄕闇)이라고 책망을 하여, 현저하게 듣기 싫어하는 뜻이 있으셨고 마침내 허심 탄회(虛心坦懷)하게 받아들이는 아량이 없으셨으니, 어찌 물 흘러가듯 간하는 말을 들어주어야 하는 융성함에 흠이 있게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저번날 이재(李縡)에게 삭출(削黜)을 가하셨으니, 신하를 예의에 맞게 부려야 하는 도리에 있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합계(合啓)한 일들에 있어서는 전후에 다 말을 했는데 대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재의 일에 있어서는, ‘신하를 예의에 맞게 부린다.’는 것이 비록 부자(夫子)328)  의 말씀이기는 하다마는, 또한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는가? 두 대간(臺諫)의 소론(疏論)은 더러는 잘못 듣게 된 것이고 더러는 사체에 어두운 것이었고 보면, 회유(誨諭)하는 말을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약방(藥房)의 입진(入診)이 끝나자,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이진순(李眞淳)·이진수(李眞洙) 형제가 바야흐로 귀양살이 중에 있습니다. 그의 어미가 따라가지 못했는데 병세가 위중하여 조석 사이의 변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이가 늙은 부인은 그 아들의 죄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아들을 생각하는 한 가지 생각만을 하고 있으니, 그의 심정이 진실로 민망하고 가엾습니다. 그의 형제 중에 죄가 가벼운 자를 살펴보아 한 사람을 놓아 주어 귀성(歸省)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사세의 형편에 합당합니다."
하고, 도제조(都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이진순 형제가 어느 죄로 귀양갔는지는 비록 기억할 수 없습니다마는, 경솔하게 놓아 주기를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선왕조(先王朝)에 정제선(鄭濟先)이 귀양살이할 때에 말미를 주어 어미를 귀성(歸省)하도록 명했었으니, 이번에도 또한 와서 근친(覲親)하고 돌아가게 하는 것이 효도로 다스려 가는 국정(國政)에 합당하게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진순의 죄는 곧 4대신을 합계(合啓)한 죄이고 이진수의 죄는 곧 김일경(金一鏡)을 신구(伸救)한 죄인데,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반드시 차이가 없을 것이니, 형제에게 모두 말미를 주어 그 어미를 살펴보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황귀하(黃龜河)가 아뢰기를,
"올봄에 반궁(泮宮)의 유생(儒生)이 상소하여, 성묘(聖廟)의 축문(祝文)에 청나라[彼國]의 연호를 쓰지 말도록 청했는데, 비답에 ‘대신들이 등대(登對)하기를 기다려 처결하겠다.’고 분부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었다.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반궁의 유생의 소청이 이러하니, 성묘(聖廟)의 축문에 그렇게 쓰지 않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고,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효종조(孝宗朝)에서도 이렇게 청한 일이 있었는데 효종께서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대개 번거롭고 누설되어 사단이 생기게 될까 염려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이러한 염려는 없을 듯하니, 특별히 윤허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성조(聖祖)께서 존주(尊周)329)  하는 성의에 어찌 그런 문자(文字)를 고치기 꺼려하셨겠는가마는, 끝내 윤허하지 않으신 것은 성조의 뜻의 소재를 또한 알 수 있는 일이니, 서서히 뒷날을 기다렸다 처결하겠다."
하였다.

 

이재(李縡)의 문출(門黜)330)  을 해제하였다.

 

장령 송사윤(宋思胤)이 상소하여 이진순(李眞淳) 형제가 병이 난 어머니를 귀성(歸省)하도록 명한 것을 도로 정지하기를 청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왕자(王者)가 세상을 다스릴 적에는 효도를 우선으로 삼는 법이니, 이번에 말미를 주는 것은 놓아 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혈구(絜矩)331)  는 학문(學問)의 요법인 것인데, 그대는 어찌 사람에게 슬퍼하는 마음이 없이 곧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7월 19일 기유

사헌부에서 【지평 이정박(李挺樸)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엇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자(程子)332)  와 주자(朱子)333)   이후에는 도학(道學)이 크게 밝아져 지(知)와 행(行)을 병진(幷進)해야 하는 공부를 마치 수레바퀴나 새의 날개처럼 어느 하나를 폐할 수 없게 되었는데, 육구연(陸九淵)334)  의 돈오설(頓悟說)과 왕수인(王守仁)335)  의 양지론(良知論)은 오도(吾道)336)  와 배치(背馳)되는 것으로서 깊이 세상의 폐해가 되어, 전하여지는 해독과 남아 있는 열기가 지금까지 멎지 않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옛날에는 폐해가 천근(淺近)해서 알아차라기 쉬웠지만 오늘날에는 해독이 깊어서 분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는 정주(程朱)337)  의 학문을 완전히 배반하고 육왕(陸王)338)  의 학설을 대강 답습(踏襲)하여, 이에 감히 말하기를, ‘육왕과 정주는 비록 다같이 대도(大道)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지만, 육왕의 학문은 숭례문(崇禮門)과 같고 정주의 학문은 돈의문(敦義門)과 같다.’고 했으니, 이는 대개 육왕을 정도(正道)로 삼고 정주를 방기(旁歧)로 여긴 것입니다. 그는 배우지 않고 무식하여 전연 두뇌(頭腦)에 어두움이 이처럼 심하기에 이미 일찍이 선생(先生) 장자(長者)들에게 배척받던 사람인데, 특히 대가(大家)에 드나들며 조금 스스로 수식(修飾)했기 때문에 차차로 추천(推遷)하여 외람하게도 재상(宰相)의 반열에 올라가 심지어는 사유(師儒)의 자리를 더럽히게 되었으니, 일의 해괴하고 우습게 됨이 이보다 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진실로 도학(道學)으로 나아가는 길에 참여시켜 논할 수 없는 것이며, 이와 같이 정도(正道)에 어둡고 이교(異敎)를 숭상하는 유들을 만일 엄격하게 제방(隄防)을 가하지 않는다면, 그 전하는 폐해가 어찌 혹세 무민(惑世誣民)을 순치(馴致)하게 되지 않기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세상의 도의(道義)에 있어 소소한 근심거리가 아니니, 청컨대 좨주 정제두를 시급히 개정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무릇 일에 있어서 선(善)한 것을 본받는다면 비록 더러 미진하게 되더라도 다 같이 선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선하지 못한 것을 본받게 된다면 그 일이 혹은 아름답게 되어도 똑같이 선하지 못한 데에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 고도(高蹈)339)  하는 선비가 산림(山林)에다 이름을 감추고 암혈(巖穴)에서 사는 몸이어서 이미 입조(立朝)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는데도, 지난번에 귀양보내기를 청하는 논계(論啓)가 암혈에서 살고 있는 사람까지 언급하게 되었기에 내가 일찍이 세상의 도의를 통탄스럽게 여기며 분개했었다. 이번의 개정하자는 의논이 비록 귀양보내기를 논계한 것과 다르기는 하지만, 모욕하고 훼방하는 뜻에 있어서는 똑같은 것이다. 정주(程朱)와 육왕(陸王)의 흑백(黑白) 구분을 세상 사람들이 알기 어렵지 않은 것은 바로 네가 말한 바와 같기는 하다마는, 이미 선왕조(先王朝)로부터 유신(儒臣)에 두었는데도 어찌 한 사람도 말을 하는 자가 없었겠는가? 조가(朝家)에서 사람을 쓸 적에는 현명 여부에 따라서 하지 어찌 세상의 구애(拘礙)를 받겠는가? 지난번에 유신(儒臣)을 초치(招致)했을 적에 좨주의 직명(職名)을 전대로 띠고 있었는데도 마침내 별유(別諭) 내용에 거론(擧論)하지 않아 이미 염박(厭薄)하는 뜻을 알고 있은 것이니, 개정하기를 청하는 것은 오히려 늦었다 하겠다. 심하도다! 세상의 도의여. 그렇다면 과연 동강(桐江)의 지조340)  로 경세 제민(經世濟民)할 학문이 있더라도 장차 펴 볼 때가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7월 21일 신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신이 경시관(京試官)의 일에 따라 감히 아뢰겠습니다. 요사이 과거(科擧)를 보인 뒤에 문득 떠들썩한 말이 있는데, 서울 안이 이러하니 향시(鄕試)에 있어서도 알만합니다. 신이 영남(嶺南)에 폄적(貶謫)되었을 때에 듣건대 향곡(鄕曲)의 유생(儒生)들이 모두 사관에게 청탁하지 않고서는 참방(參榜)할 수 없다고 여기며 과거 기일이 박두하자 분주하게 청탁을 하고, 방(榜)이 나옴에 당해서는, 과연 아무개는 청탁하여 얻게 되었다 하였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낙방(落榜)한 사람들의 떠들썩한 말은 진실로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만일 시험을 관장하는 관원들이 한결같이 마음으로 공정함을 가진다면 비록 근거없는 비방을 써먹으려고 하더라도 될 수 있을 것이겠는가? 이번에는 엄중하게 신칙해야 한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장령 이태징(李台徵)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진순(李眞淳) 형제에게 돌아와 근친(覲親)하도록 허락한 명을 정지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들된 사람의 근친을 저지하는 것은 진실로 인정이 아닌 일이니, 시급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7월 22일 임자

승정원에 명하여, 선왕조(先王朝)에 귀양간 사람 중에 근친을 하도록 허락해 준 것이 몇 사람이 되는지 금오(金吾)에 물어보아 아뢰게 하니, 승정원에서 신명규(申命圭)와 조대수(趙大壽)를 들어 아뢰었다. 또 그때 양사(兩司)가 정지하기를 청했는지를 고찰하여 아뢰도록 명하니, 승정원에서 양사가 정지하기를 청한 일이 없었음을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그렇다면 옛사람들이 지금 사람들만 못해서이겠는가?"
하였다.

 

조명신(趙命臣)을 장령(掌令)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수찬 겸교서 교리 겸사서 남학 교수(副修撰兼校書校理兼司書南學敎授)로, 권업(權𢢜)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정형익(鄭亨益)을 사은 겸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 이병태(李秉泰)를 중학 교수(中學敎授)로 삼고, 중비(中批)341)  로 김흥경(金興慶)을 발탁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7월 23일 계축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여, 임금이 침을 맞은 다음에 뜸질 3장(壯)을 받았다.

 

7월 24일 갑인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와 부사(副使) 김유경(金有慶), 서장관(書狀官) 조명신(趙命臣)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왔는데, 임금이 불러 보며 방무(邦誣)를 통쾌하게 씻은 것을 들어 매우 근간하게 위유(慰諭)하고 차등이 있게 상을 내렸다.

 

한이조(韓頤朝)를 장령(掌令)으로, 김응복(金應福)을 헌납(獻納)으로, 이현록(李顯祿)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적(權𥛚)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한덕전(韓德全)을 장령(掌令)으로 삼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를 현록 대부(顯祿大夫)로, 김유경(金有慶)을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조명신(趙命臣)을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하였으니, 준청(準請)한 노고(勞苦) 때문이었다.

 

7월 26일 병진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 민진원(閔鎭遠)이 삭제(朔祭)를 섭행(攝行)하게 하기를 극력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평소의 삭망(朔望)에도 혹 참사(參祀)하지 못했다가 새벽녘에 찬배(贊拜) 소리를 듣노라면 문득 비애스럽고 허전하여 견딜 수 없었다. 하물며 이제는 상제(祥祭) 바로 앞이어서 남아 있는 날이 많지 않은데 어찌 섭행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기운이 이러하고 경(卿)들의 소청이 또한 계속되니 부득이 그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7월 28일 무오

충청도 유생(儒生) 정사상(鄭思相)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정언 유겸명(柳謙明)이 상소하여 첫 머리에 토역(討逆)에 대한 의리를 진달하고, 그 다음에 논하기를,
"송화(松禾)의 관리들을, 특별히 명하여 형장(刑杖)을 가해 추문(推問)하여 율(律)을 감단(勘斷)하도록 하시는 거조(擧措)가 계셨다는데,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일은 성상의 덕에 누가 될 듯 싶습니다. 대저 각 궁(宮)의 종들이 여리(閭里)에서 위세를 부리고 다닌 지가 또한 이미 오래이기에, 여리의 상한(常漢)들이 만일 마직(馬直)342)                  이란 이름만 들먹이면 어린 아이들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어 그들의 위세가 두려움이 이와 같습니다. 시골 관리들이 어느 일로 인하여 도성(都城)에 들어오면 동서(東西)를 분간 못하고 걸어다니는 데도 겁을 내는데, 어찌 작당(作黨)하여 뛰쳐 나가 궁차(宮差)를 묶어 놓고 구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내수사(內需司)에서 이런 미미한 일을 가지고 거짓 꾸며서 위에 진달하였음은 너무도 한없이 해괴하고 통탄스러운 일이니, 전하께서 다만 마땅히 그렇게 소란 피우는 폐단만 신칙하시고 물시(勿施)하셔야 합니다. 어찌 대리(大里)에 판하(判下)를 내려 형벌을 가하여 율(律)을 감단(勘斷)하게 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즉시 관리를 놓아 주게 하고 궁노(宮奴)들을 준엄하게 징계하도록 하여,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는 덕을 보여 주시고 장래의 폐단을 막으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묘당(廟堂)에서 상역배(商譯輩)들을 위하여 새로 상채청(償債廳)을 만든다고 했는데,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일은 사체에 해롭게 될 듯합니다. 상역배들은 방안의 벽(壁)을 문채 나게 수를 놓고 술과 고기를 마음대로 먹고 살면서도 포흠(逋欠)진 공채(公債)는 하나도 상환(償還)하지 않고 교묘하게 청탁을 하여 오직 미루기만 일삼는데, 묘당에서는 받아낼 방책이 없는 것 때문에 상채청을 두고서 부채자(負債者)들로 하여금 각각 10분의 1씩을 내도록 하여 본청(本廳)에 받아 놓고, 그것을 돌려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내어 상환해 갈 수 있도록 계획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찮은 상역배들의 채무(債務) 상환 여부가 조정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당당(堂堂)히 해야 할 위대한 조정이 이에 도리어 이 무리들을 위해 사사로운 계획을 하여 대신 상고(商賈)하는 일을 하겠습니까? 의거할 데가 없는 것은 탕척(蕩滌)해 주고, 부요(富饒)한 자에게서는 독촉해서 받아 내야 하고, 소위 상채청이란 것은 특별히 혁파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고, 또 분원(分院)을 옮기어 설치하여 양근(楊根) 민생들이 번목(燔木) 때문에 원통함을 호소하는 폐단을 제거하기를 청하고, 또 선인(船人)들을 효시(梟示)하는 율(律)을 거듭 엄중하게 하여 조운(漕運)하는 쌀에다 물을 타는 간계(奸計)를 근절시키기를 청하고, 또 청하기를,
"향교·서원의 생도(生徒) 및 각 읍관(邑官)·군관(軍官)과 각 영문(營門)의 아병(牙兵)은 그 액수(額數)를 정하여 한도를 넘지 못하게 하고, 소위 원당(願堂)343)                   및 관청의 장인(匠人)들을 한결같은 예로 혁파하여 군액(軍額)을 보충하고, 백골(白骨)이 된 사람에게서 베[布]를 받아 내는 폐단을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렸다.

 

7월 29일 기미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여 진맥(診脈)을 끝내고, 도제조 민진원(閔鎭遠)이 청하기를,
"자주 대신들을 접견하여 무릇 강학(講學)·구현(求賢)·치국(治國)·안민(安民)의 도리에 있어 반드시 부지런히 강구하여 국가의 일을 해나가기로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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