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경신
상원(祥原)에 황충(蝗蟲)이 일었다.
임금이 약방(藥房)의 계사(啓辭)에 답하기를,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상제(祥祭)의 달이 어느새 되었는데, 이번의 삭제(朔祭)를 몸소 거행하지 못했기에 추모(追慕)하는 애통과 제사 지내지 못한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새로워진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윤심형(尹心衡)을 헌납(獻納)으로, 이근(李根)과 한덕후(韓德厚)를 장령(掌令)으로, 권업(權𢢜)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현록(李顯祿)이 상소하여 토역(討逆)에 관한 의리를 논하니, 비답하기를,
"다시 어찌 많은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8월 2일 신유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8월 3일 임술
전교하기를,
"옛날부터 간관(諫官)을 설치하여 임금의 이목(耳目) 구실을 만들고 일에 따라 곧장 진달하게 한 것을 대범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마는, 인주(人主)란 또한 사방의 표준이 되는 것이기에,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여 혹은 아름답게 여겨 권장하기도 하고 혹은 재단(裁斷)하여 억제하기도 하는 것이 곧 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도리인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교만[驕]’이란 글자 하나는 마음속에 일찍이 경계해 온 것이다. 비록 평소에 사람들을 대하게 될 적에도 오히려 혹시 교만하게 될까 염려해 왔는데, 더구나 조정 신하들을 대해서이겠는가? 나의 병통을 어찌 내가 알지 못하겠는가? 평소에 기질(氣質)이 매양 순하고 부드러운 점이 많았었기에, 지난날의 선왕조(先王朝)의 일로 말하더라도 더러 신칙하시는 분부는 계셨으나 지나치도록 스스로 인혐(引嫌)하였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었고, 달리 진소(陳疏)하는 일도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혹은 한 가지 일이라도 있으면 그만 끌어잡고서 늘어지게 되고 혹은 신칙하는 일이 있으면 업신여긴다고 한다. ‘위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것이 비록 부자(夫子)가 경계한 바이기는 하지만, 군신(君臣) 사이의 분의(分義)는 또한 천지 사이에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나의 병통으로 인해 받게 된 것에 지나지 않기는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비록 신료(臣僚)들의 과오를 보게 되더라도 거의 함묵(緘默)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곧은 것을 들어 굽은 것을 바로잡는 의의가 과연 어디에 있게 되겠는가? 그 사기(事機)가 비록 미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로 인한 폐해는 염려스럽기만 하다. 아! 제신(諸臣)들은 인주(人主)가 신칙(申飭)한 것으로 자성(自省)하기를 힘쓰고, 위가 된 사람은 군하(群下)의 과오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긴다면 어찌 아름답게 되지 않겠는가? 아! 이번에 내가 이렇게 분부하는 것은 신하 부리기를 예의에 맞게 해야 하는 도리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또한 기강(紀綱)을 보존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근밀(近密)한 신하들로부터 먼저 모름지기 알도록하라."
하였다.
청주(淸州)·공산(公山)·직산(稷山)·단양(丹陽) 등지에 큰물이 지고, 당진(唐津)에는 해일(海溢)이 일어났다.
8월 4일 계해
삼사(三司)에서 전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도록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의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진순(李眞淳) 형제의 일에 있어서는 시급히 정지하도록 비답하고, 사간원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8월 5일 갑자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조명신(趙命臣)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삼사(三司)에서 앞서의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정지하라고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의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정지하도록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차자를 올렸다. 대략 말하기를,
"여름 사이에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했을 적에 감히 주공(周公)이 노공(魯公)을 경계한 말에 ‘너는 나라를 가진 것으로써 사람들에게 교만하지 말고 근신하라.’고 한 것을 외며 이를 가지고 망령되이 규계(規戒)하는 정성을 본받게 한 것은 진실로 지나친 계획으로 생각한 데 나온 것이었는데, 하교(下敎)하시기를, ‘교만이란 글자 하나는 나에게는 진실로 없다.’고 하셨기에, 신이 다시 나머지 뜻을 부연하여 진달하고 싶었지만 황송하여 머뭇거리고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하고 물러갔었습니다. 어제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살펴보건대 교만이란 글자 하나를 가지고 반복해서 제시하여 설명하시며 뒷날의 폐해를 염려하기까지 하셨고, 또 ‘나의 병통은 매양 순하고 부드러운 점이 많다.’는 것으로 분부하셨기에, 신이 마음에 깜짝 놀라 몸둘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나신 총명으로 군하(群下)들을 내려다 보실 적에 하나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게 되셨으면 경멸하게 보시는 마음이 생김을 면하지 못하게 되셨을 것이고, 이미 경멸하게 보지 않을 수 없으셨으면 교만에 마음이 없어도 자연히 교만으로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시험삼아 전후의 사륜(絲綸)344) 에 제신(諸臣)들을 꾸짖은 것으로 보더라도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긴 것에 가까운 것이지 순하고 부드러운 것은 깨닫을 수 없습니다.
신이 전하께서 평소에 경계를 가지고 계시는 뜻을 알지 못하고서 이에 감히 전하의 없는 과오를 지적하여 말을 했으니, 한(漢)나라의 법으로 논한다면 불경죄(不敬罪)를 저질렀기에 지금 감히 석고 대죄(席藁待罪)하며 신의 죄를 감단(勘斷)하여 군공(群工)들을 격려하시기를 원합니다. 신이 듣건대 옛날 사람이 한 마디 말을 하고 죽기를 바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신이 바야흐로 죄를 감단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구구(區區)한 정성은 말을 다 하기가 소원입니다. 전하께서 궁리(窮理)와 격물(格物)하는 공부가 이르지 못한 데가 있어 무릇 의리를 강론하거나 명령을 내리는 즈음에 오직 한때의 의견만 가지고 굳게 정해버리거나 강경하게 결단해 버리시고, 대소의 신료(臣僚)들이 비록 더러 말을 해도 받아들이게 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혀를 움츠려 버리고 감히 과실을 지적하여 진달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도 다행한 일은 전하께서 제신(諸臣)들을 인접(引接)하시면 메아리치듯 수작(酬酌)하시어 비록 청납(聽納)하는 실속은 없어도 또한 거스르는 기색은 없으시니, 아래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 능히 정성을 쌓으며 완순(婉順)하게 말씀드려야 거의 감동하여 돌리시게 할 수 있을 것인데, 이제 곧 순하고 부드럽다는 것으로 자책(自責)하시어, 귀에 거슬리는 말을 감히 다시는 진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시니, 신은 그윽이 성조(聖朝)를 위해 근심하고 한탄스럽게 여깁니다. 또 삼가 성상께서 분부하신 것을 보건대, 신하 부리기를 예로써 하는 것과 기강(紀綱)을 보존하는 것을 양건(兩件)의 일로 삼으셨습니다. 대저 기강을 세우는 것은 거조(擧措)가 합당함을 얻고 상벌(賞罰)이 사리에 합당하여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기뻐하여 복종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지, 위엄스런 형벌이나 엄중한 명령으로 세우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의 말에 ‘임금은 신하 부리기를 예의에 맞게 하고 신하는 임금 섬기기를 충성으로 해야 한다.’고 했는데, 선유(先儒)가 해석하기를, ‘임금이 예의에 맞게 신하를 부리면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君使臣以體則臣事君以忠]’라고 했으니, 아래의 한 ‘즉(則)’자를 붙여 놓은 것은 지극히 깊은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예의에 맞게 신하를 부리어 상하가 서로 믿게 되고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덕화(德化)가 날로 새로워지게 된다면 기강이 저절로 세워지게 되는 법입니다. 신하를 예의에 맞게 부리는 것과 기강을 세우는 것은 본시 하나의 이치 속에서 나오게 되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서로 방해되는 바가 있다고 근심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엊그제의 비망기(備忘記錄)에 대강 현재의 풍습을 경계했었지만 그 본뜻이 전일에 경(卿)이 진달한 말에 있는 것이 아닌데, 지금 경이 인혐(引嫌)하고 있으니 어찌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사저(私邸)에 있을 때에 일찍이 말하기를, ‘교만은 빈천(貧賤)한 사람들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곧 부귀(富貴)한 사람들이 하게 되는 것이다. 부귀한 사람은 비록 마음이 교만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교만한 것으로 알게 되기 쉬운 법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깊이 경계해야 할 곳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대할 즈음에 오직 사람들이 나를 보고 교만하다고 여기게 될까 생각했었다. 대업(大業)을 이어받은 다음에는 일찍이 말하기를, ‘옛적에 계통을 이어받은 제왕(帝王)들은 거기에서 출생하고 거기에서 자랐기에 이목(耳目)으로 듣고 보고 하는 것이 모두다 부귀한 것이라, 비록 대통(大統)을 이어받게 되어도 진실로 달라질 것이 없었지만, 외번(外藩)에서 들어와 이어받게 된 사람에 있어서는 부귀한 자리에 있게 되는지라 연안(宴安)한 마음이 생기게 되어 폐해(弊害)를 부림이 더욱 심해지게 된 것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일찍이 맹렬하게 성찰(省察)을 가해 왔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듯이 생겨나는 것이 어찌 없었다고 할 수 있으며, 제신(諸臣)들이 경계하는 말을 또한 어찌 불가하다고 하였겠는가? 또, 군신(君臣)의 사이는 체모를 중히 여기고 성의는 허술하여져서 어수(魚水)처럼 기쁘게 지내기가 옛적과 같지 않음을, 또한 일찍이 혼자서 한탄스럽게 여겨왔기에 상례의 격식(格式)은 파탈해버리고 속에 쌓여 있는 바를 다 말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평소 내 마음이었다. 다만 문(文)과 질(質)과 충(忠)도 또한 말폐(末獘)가 없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은 국가의 기강(紀綱)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한갖 편당하는 풍습으로 소중히 여길 줄만 알고 국가의 일이 전복(顚覆)될 것은 생각하지 않아, 날마다 하는 일이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아! 국가의 일에 당하여 그처럼 분발(奮發)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한편으로 굽은 것을 바로잡고 한편으로는 신칙(申飭)을 하였어도 스스로 각성(覺惺)할 줄을 알지 못하고서 군부(君父)가 하는 말을 도리어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돌리고 있으니, 이는 무슨 사체이고 이는 무슨 도리이겠는가? 그전에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신 뒤에 군신들에게 경계하시기를, ‘대북(大北)345) 사람 중에 임용(任用)할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 편당하는 풍습에 극심한 자는 마땅히 그의 머리를 베겠다.’고 하셨고, 또 훈신(勳臣)들을 돌아보시며 이르시기를, ‘비록 경(卿)들이라 하더라도 범한 죄가 있게 되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아!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전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겠는가?
군부(君父)가 하는 말에 동념(動念)하지 않고서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긴다.[輕侮]’는 두 글자로 주차(周遮)하는 방패를 삼고 있으니, 이래서 통탄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더구나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한 말은 부자(夫子)의 말씀인데, 편당하는 사심(私心)이 앞서고 공정한 마음은 어두워져, 그 사람이 밉지 않으면 비록 그른 일을 했어도 영구(營救)하여 용서하고 그 사람이 만일 미우면 비록 그른 일이 아니라도 배척하여 논계(論啓)하니, 만일에 혹 신칙(申飭)이라도 하면 ‘겸제(箝制)346) ’ 니 ‘경모(輕侮)’ 니 등의 말을 군부(君父)에게 가하게 된다. 지난 선왕조(先王朝)에는 엄정(嚴正)하게 분부를 내리시다 준엄하게 처분을 하신 것이 오늘날과 같지 않았는데도 비호하거나 용서하여 준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었다. 이것이 어찌 나의 병통으로 인하여 받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엊그제 내린 분부는 바른 이에서 연유한 것인데, 지금 경(卿)의 차자 내용에는 내가 분부한 말을 언로(言路)를 막는 발단(發端)으로 여겼으니, 진실로 나의 본의가 아닌 것이다. 이는 대개 이때의 사세를 개탄하여 한 말인데, 경이 어찌 지나치게 인혐(引嫌)할 것 있겠는가? 경은 마음을 안정하여 사직하지 말고 또한 대죄(待罪)하지도 말라."
하였다.
경상도에 큰 물이 졌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어, 서울 산의 송금(松禁)을 엄하게 신칙(申飭)하고, 감역관(監役官) 세 사람을 파직하도록 하였다.
8월 6일 을축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도록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그만두도록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원에서 【 헌납 윤심형(尹心衡)이다.】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 임인년347) 에 북쪽의 차사(差使)가 그들의 상사(喪事)를 고하러 왔을 적에 그때의 공조(工曹)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이 황제(皇帝)의 성복(成服) 때에 쓸 것이라고 핑계하며 백의(白衣)·백모(白帽)·마대(麻帶)조로 공조안에 있는 돈과 베를 많이 내다가 각자가 나누어 쓴 것이 분명하게 문부에 실려 있어 엄폐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아! 일종(一種)의 간흉한 무리들이 하는 일마다 하는 말마다 반드시 사류(士類)들과 배치(背馳)하려고 했기 때문에 기절(氣節)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고 대의(大義)를 공담(空談)으로 여기는 자들이 본시 그 유래가 있기는 했지만, 해괴하고 추잡하며 의리를 무시하는 짓을 또한 어찌 이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 때에 백관(百官)들은 본시 백의와 마질(麻絰)로 성복을 한일이 없었으니, 이로 본다면 그들의 뜻이 특히 성복하기 위해서 한 짓이 아니라 이런 놀랍고 우습기만 한 제목(題目)을 빌려 거기에 핑계하여 탐욕을 부리는 계책을 이루게 된 것이니, 이들은 바로 없어져버리지 않은 인간의 마음이 일분(一分)도 없는 자들입니다. 청컨대 그때의 당상관과 낭청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성복을 하는 일이 없었는데도 그런 일이 있었고 보면, 윤리도 없고 의리도 없음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를 청한 것은 또한 가볍다고 하겠지만, 그때 순치(順治)348) 때의 예를 사용하여 4품까지는 포모(布帽)에 마대(麻帶)를 하고 5품 이하는 천담복(淺淡服)에 각대(角帶)를 했다가 3일이 지나 치웠었으니, 백모(白帽) 등의 말은 근거가 없이 나온 것이 아니다. 아! 약한 나라는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을 굽히지 않을 수가 없어, 상방(尙房)에서 옷을 가져오고 대정(大庭)에서 성복(成服)을 했었다. 비록 준례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감개(感慨)를 견딜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곡절을 알지도 못하고서 수부(水部)349) 의 당상과 낭청을 탄핵하여 논계했으니, 그 살피지 못한 것이 이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다.
임금이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이구(李絿)와 신사원(申思遠)의 효행을 정표(旌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에게 증직(贈職)하도록 하였다. 이구는 이만성(李晩成)의 아들이고 신사원은 신임(申銋)의 아들이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김익량(金翼亮)의 일은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 양가(兩家)의 말을 들어보건대, 김익량은 김종서(金宗瑞)의 자손임이 분명했습니다. 송시열의 5대 조부가 김종서의 질녀서(姪女壻)로 그때 3세의 아이를 숨겨주어 김종서의 뒤가 보존되게 했었는데, 곧 김익량의 선조(先祖)이었습니다. 송시열의 가문에서 당초에 기휘(忌諱)하면서 감히 분명하게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드디어 김종서는 후손이 없다는 말이 있게 되어, 접때의 대관(臺官)의 상소에 곧장 ‘김종서는 후손이 없는데 김익량이 사칭(詐稱)한 것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어찌 세속에 떠다니는 말 때문에 두 선정의 가문에 전해 오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을 들어보니, 비로소 석연(釋然)해진다."
하였다.
8월 7일 병인
헌납 윤심형(尹心衡)이 피혐(避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수조(水曹)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창고에 저축해 놓은 것을 많이 내다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이외에 두루 이례(吏隷)들에게까지 해놓고는, 곧장 강희 황제(康熙皇帝)에 대한 성복(成服) 조관이라고 문부(文簿)에 대서(大書)하는 짓을 하여, 전후에 있지 않던 새 규정을 만들어 이런 시기를 타 이득을 노리는 꾀를 부렸으니, 논계(論啓)한 본의는 성복하는 준례가 있고 없는 것에 있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의리를 무시하고 이득을 탐하는 짓 한 것을 통탄했던 것인데, 성상께서 회책(誨責)하는 비답이 곧 이에 이르렀으니, 신이 어찌 감히 대관(臺官)의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이번의 일은 처음부터 이미 사실과 틀린 것이었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그만두지 않고서 이득을 탐낸 것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다. 한때의 성복(成服) 거리를 가지고서 어찌 이득을 탐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상방(尙房)에서 옷을 가져오라.’고 한 분부는 대강 기휘(忌諱)해야 하는 뜻을 보여 준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할지라도 안 다음에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복(心腹)을 털어 놓는 말이고 세상의 도의를 개탄하는 말이다. 기휘해야 할 일인데도 고려하지 않으니, 한갓 말만 허비한 것이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진실로 세상의 도의를 위해 긴 한숨이 나온다.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라."
하였다.
8월 9일 무진
밤 4경(四更)에 간방(艮方)에 불빛같은 기운이 있었다.
전교하기를,
"지금 이병태(李秉泰)의 상소를 보건대, 나의 병통을 지적하고, 옛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권면하고 경계한 것이 진실로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게 하였으니, 소환(召還)한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특별히 호피(虎皮) 1령(領)을 내리어 내가 아름답게 여긴 뜻을 보여 주라. 아! 이번에 호피를 내리게 된 것은 한갓 그의 말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의 마음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하였다. 【이병태(李秉泰)의 원소(原疏)는 비답을 내리고도 도로 금중(禁中)에 두었기 때문에 일기(日記)에 싣지 못했다.】
【태백산사고본】 9책 10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00면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홍성보(洪聖輔)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8월 10일 기사
진시(辰時)에서 사시(巳時)까지 햇무리했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어 시험(試驗)을 관장하는 사람들이 사정을 쓰느라 공정을 잃어버리는 폐단을 엄중하게 신칙하도록 하였는데, 감시(監試)와 초시(初試) 날이 하루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남(嶺南)에 또 큰물이 져 집이 많이 떠내려가고 사람이 또한 빠져 죽었다.
8월 11일 경오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8월 12일 신미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가 전 부수(副率) 한원진(韓元震)을 불러 보았는데, 한원진이 첫머리에 역대의 왕자(王者)·패자(霸者)와 공사(公私)의 구별을 진달하고 다음으로 복수(復讎)하여 치욕(恥辱)을 씻어야 하는 의리를 진달하니, 임금이 여러 모로 위유(慰諭)하고 이어 뒷날의 소대(召對)에도 함께 들어오도록 하였다.
경성회(慶聖會)·이현록(李顯祿)을 승지(承旨)로, 김상옥(金相玉)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민응수(閔應洙)를 사간(司諫)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약방 제조(藥房提調)로 삼았다.
8월 13일 임신
예조에서 농사에 해로운 냉우(冷雨)가 내린 것을 들어 4대문에 영제(禜祭)350) 를 지낼 것을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8월 14일 계유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어제부터 소찬(素饌)을 드신다고 했습니다. 바로 지금은 성상의 체후(體候)가 회복되지 못하셨는대 10여 일을 소찬을 드신다면 손상을 가져오게 되기 쉬울 것이니, 20일 이후부터 행소(行素)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3년 동안의 행소는 비록 하지 못하더라도 10여 일 동안의 행소를 어찌 할 수 없겠는가? 비록 경(卿)의 말이 이러하기는 하지만 18일부터는 소찬을 드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8월 15일 갑술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 친림하여 망제(望祭)를 거행하였다.
8월 16일 을해
소대(召對)를 거행했는데, 경연관(經筵官) 한원진(韓元震)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소대는 법강(法講)과 다르니, 경연관(經筵官)이 먼저 문의(文義)를 진달하면 좋겠다."
하니, 한원진이 주대(奏對)하기를,
"우리 나라 조정은 나라를 세움과 정치를 해 감이 대저 송(宋)나라 조정과 서로 유사(類似)하여, 이상으로 말한다면 열성(列聖)들께서 수신(修身)을 엄격(嚴格)하게 하고 가법(家法)을 방정(方正)하게 하였으며 유현(儒賢)을 존숭하고 사도(斯道)를 중히 여기고 선비들의 기개(氣槪)를 배양해 온 것이 송나라 조정과 같고, 치도(治道)로 말한다면 문교(文敎)를 너무 앞세우고 무략(武略)은 다듬지 않아, 인재(人才)가 호번(浩繁)하게 많기만 하면서 일을 해 낼 사람은 적고 진신(搢紳)은 편당이 갈린 지가 이제 1백 년이 넘어 폐해가 심각해진 것이 또한 송나라의 원우(元祐)351) ·희녕(熙寧)352) ·원풍(元豊)353) 시절의 당파와 같아, 여러 조정을 지나오면서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이 밖에 정령(政令)의 사이에 있어서도 규모(規模)나 기상(氣象)이 힘이 없고 고식(姑息)적인 것도 또한 모두 서로 같습니다. 전하께서 송나라 역사를 보시다가 반드시 우리 나라에 돌이켜 보셔서 잘한 곳의 같은 점은 굳게 지키어 힘써 행하시되 그 어지러웠던 것에 있어서는 동조(同調)하지 않는다면, 역사를 보며 감계(監戒)하는 도리에 있어 거의 실효(實効)를 얻게 되실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연관은 오래 산림(山林)에 있었기에 반드시 강마(講磨)한 바가 있을 것이다. 내가 부덕(不德)한 몸으로 크게 기업(基業)을 받았기에 민생들의 곤궁을 펴 주고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 주게 될 바를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 길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진달해 주는 것이 옳겠다."
하니, 한원진이 말하기를,
"민생들의 고통이 진실로 절박하고 시급합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조정에 있고 조정이 올바르지 못함은 또한 붕당(朋黨)이 빌미가 되고 있으니, 오늘날의 계책은 오직 먼저 붕당을 해소(解消)하여 조정을 바로잡는 데 있고 다음으로 민생들의 고통을 돌보아 주어 국본(國本)을 굳건해지게 하고, 다음으로 군사 행정을 잘 닦아 불우(不虞)에 대비해야 함에 있습니다. 이른바 붕당의 해소는 다만 현명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잘 변별(辨別)하여 현명한 사람은 진출시키고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어, 군자는 여망(輿望)을 얻게 하고 소인은 마음을 고치게 할 뿐인 것입니다. 후세의 임금들은 붕당을 해소하려고 하면서도 방법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오직 조정(調停)하는 데 평등을 유지하려고만 하여 현명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다 같이 쓰기를 주장하여 왔으니, 이것이 당(唐)나라 덕종(德宗)과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화란을 불러 들이게 되었던 연유입니다. 민간의 고통을 돌보아 주고 군사 행정을 닦는 것에 있어서는 갖가지로 조치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기에 신이 감히 번거롭게 주달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전하께서 정심(正心)하여 표준을 세우고 현명한 사람을 임용(任用)하고 유능한 사람을 시키신다면, 슬기로운 자는 일을 잘 도모하고 용맹한 자는 일을 잘 결단하며 어진 자는 일을 잘 이루어 가게 되어 국가의 일이 하기 어려운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좋은 말이다. 잠깐 동안 진달한 것이지만 지극히 요약한 것이니,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임을 알겠다."
하고, 임금이 또 호포(戶布)·결포(結布)·구전(口錢)·유포(遊布)의 이해와 편리 여부를 물으매, 한원진이 네 가지 법 중에 호포(戶布)가 가장 시행할 만하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칭찬하여 좋게 여겼다. 한원진이 물러나가자, 시독관 김용경(金龍慶)이 말하기를,
"산야(山野)에 있던 사람은 물러가기는 쉽게 여기고 나오기는 어렵게 여기는 법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심으로 머물러 있게 하여 자주 경연에 입시(入侍)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8월 18일 정축
예조에서 아뢰기를,
"영제(榮祭)를 금방 지내고 났는데도 큰 비가 잇달아 내려 곡식이 손상되니, 진실로 염려스럽습니다. 4대문의 영제를 다시 설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헌관(獻官)을 별도로 가리어 정성스럽게 비가 개이기를 빌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9일 무인
예조에서 부묘(祔廟)354) 한 다음에 왕세자(王世子)가 10월 15일 알묘(謁廟)했으면 하는 뜻으로 아뢰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장령 한덕후(韓德厚)가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작년부터 오늘까지 전하의 대신과 대각(臺閣)이 더러는 염박(厭薄)과 능모(凌侮)함을 만나 물러가고 더러는 가질(呵叱)과 최절(摧折)을 입고 가버린 사람이 있기도 했습니다. 오직 이렇게 되는 근본은 대개 성상께서 지자(智者)로 자처하시는 병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신이 바로잡아 고치는 말은 이는 진실로 병증(病症)에 대한 좋은 약인데, 돌아보건대 어찌 말을 허비하여 분효(分曉)하기를 일삼겠습니까? 이번에 이미 오래된 뒤에 갑자기 그 단서를 꺼내어 중언 부언(重言復言)으로 반드시 변명을 하려고 하시니, 어찌 전하께서 사람들에게 넓지 못함을 보이시겠습니까?"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저번의 비망기(備忘記)에 대신이 진달한 말을 이른 것이 아님을 차자의 비답에도 또한 일렀었는데도, 그대의 상소 내용에 오히려 대신에게 돌리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감시(監試)의 일소(一所)의 출방(出榜) 때에 예궐(詣闕)한 시관(試官)은 조명봉(趙鳴鳳)·서종급(徐宗伋)·김응복(金應福)이었다.
전교하기를,
"봉보 부인(奉保夫人)355) 에 대한 치제(致祭)가 내일에 있는데, 밤이 이미 깊었는데도 아직까지 제문(祭文)을 지어 들이지 않았다. 제술관(製述官) 한덕전(韓德全)을 우선 엄중하게 추문(推問)하여 오늘밤 안으로 지어 올리게 하라."
하였다.
정형익(鄭亨益)을 대사성(大司成)으로, 홍현보(洪鉉輔)을 승지(承旨)로, 서종급(徐宗伋)을 헌납(獻納)으로, 김상석(金相奭)을 수찬(修撰)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유겸명(柳謙明)을 정언(正言)으로, 민형수(閔亨洙)를 설서(說書), 조명택(趙明澤)을 겸 설서로 삼았다.
8월 20일 기묘
감시(監試)의 방(榜) 안에서 장태소(張泰紹)를 빼도록 명하였다. 장태소는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의 아들이다. 임금이 일찍이 이르기를,
"그 아비가 무장(武將)인데 그 아들이 어찌하여 무예(武藝)를 부끄럽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권무(勸武)를 명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감시의 방에 발해(發解)356) 하니, 빼도록 명한 것이다.
전교(傳敎)하기를,
"봉보 부인(奉保夫人)에 대한 제문(祭文)을 단지 두어 구절만으로 책임만 면하려 지어 올렸다. 그가 비록 경솔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의릉(懿陵)357) 의 송백(松栢)을 멀리서 바라보더라도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의 방자하고 무엄(無嚴)한 버릇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한덕전(韓德全)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감시(監試) 이소(二所)의 출방(出榜) 때에 예궐(詣闕)한 시관(試官)은 홍현보(洪鉉輔)·민응수(閔應洙)·신노(申魯)이었다.
분부하기를,
"음복연(飮福宴)을 설행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인데, 이번의 절목(節目) 내용에 마련해서 입계(入啓)하였기에 이 한 대문에 부표(付標)해 놓았으니, 이 뒤로는 빼버릴 것을 분부한다."
하였다.
대사간 김상옥(金相玉)이 상소하여, 한덕전(韓德全)을 견책 파직하도록 한 명을 시급히 정지하기를 청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그 사람이 비록 미미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임금의 몸을 봉보(奉保)하던 사람이다. 그가 지어야 할 제문(祭文)에 있어서 대신 지었었다는 말은 이미 전례가 있었던 것이기에 다시 신칙(申飭)했더니, 싫어하고 버티다가 책임만 막으려고 지어 올렸으니, 이는 그 사람을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라 곧 임금의 명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 특별히 파직하도록 명하였음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곧 사체를 중히 여겨서 인데, 재상(宰相)의 반열에 있는 몸으로 하나의 지제교(知製敎)를 위하여 분소(分疏)358) 하는 짓을 함은 진실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8월 21일 경진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고 시독관(侍讀官) 황재(黃梓)가 말하기를,
"감시(監試) 일소(一所)의 종장(終場)에서 장원한 이정개(李挺揩)를 재랑(齋郞)으로 제배하도록 분부가 계셨는데, 과장(科場) 안에서 이미 ‘회조 청명(會朝淸明)’으로 글제를 하였고 보면 존주(尊周)의 의리를 들어 이어가게 되는 것은 과장(科場)에서 상례로 하게 되는 말인데, 어찌 이로 인해 외람한 상전(賞典)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이가 젊은 유생(儒生)이 일찍이 존주의 의리를 알아차렸는데 어찌 내가 아름답게 여기는 도리를 표할 수 없겠는가?"
하고, 그 이튿날 이정개를 의릉 참봉(懿陵參奉)으로 삼았다.
8월 23일 임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려, 첫머리에는 장미비가 비상하여 농사 형편이 갑자기 변해버렸음을 말하고, 이어 빨리 책면(策免)하는 고사(故事)를 따라 일찌감치 척퇴(斥退)해 주기를 청하였으며, 다음으로 말하기를,
"응제(應製)한 문자(文字)에 설혹 성상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대저 어찌 딴 까닭이 있었겠습니까? ‘의릉 송백(懿陵松柏)’이란 분부는 진실로 천만 뜻밖에 내리시게 된 것이니, 원컨대 세 번 생각하심을 더하셔서 시급히 도로 거두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이번에 재해가 생긴 것은 진실로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한덕전(韓德全)을 특별히 파직하도록 명한 것은 한때의 격노(激怒) 때문만이 아니나, 경(卿)들의 소청이 이러하니 비망기(備忘記)를 도로 거두겠다."
하였다.
심택현(沈澤賢)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한원진(韓元震)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로, 이간(李榦)을 익위(翊衛)로, 이병태(李秉泰)를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8월 25일 갑신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 나아가 대상제(大祥祭)를 거행하였다. 2경(二更) 1점(一點)에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재실(齋室)로 나아갔는데, 찬례(贊禮)가 전도(前導)하였다. 판위(板位)에 나아가 임금이 서 있으니, 인의(引儀)가 창곡(唱哭)하매 임금이 곡을 마치고 물러나 재실로 들어와 담복(禫服)으로 갈아 입고 도로 판위에 나아갔다. 임금이 부복(俯服)하여 곡하다가 곡을 멈추고 사배(四拜)를 마치자 찬례가 전도하여 관세(盥洗)하고 준소(尊所)로 나아가니 승지(承旨)가 술을 따랐고, 찬례가 전도하여 영좌(靈座)앞으로 나아가니 향로(香爐)와 향합을 받들매 임금이 분향하고 관창(灌鬯)359) 한 다음에 초헌례(初獻禮)를 거행하였다. 대축(大祝)이 독축(讀祝)을 끝내자 임금이 동계(東階)로 해서 내려와 판위(板位)로 돌아왔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과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를 끝내자 임금이 부복하여 곡하고 4배하고 나매 찬례가 제례가 끝났음을 아뢰었다.
8월 26일 을유
약방(藥房)의 계사(啓辭)에 답하기를,
"세월이 빨리 가 재기(再期)를 어느새 지내고 나니, 애통이 새로워지는 듯하며 더욱 망극(罔極)한 마음이 되살아나게 된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경소전(敬昭殿)에 입번(入番)한 종실(宗室)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 함평군(咸平君) 이홍(李泓), 양평군(陽平君) 이장(李檣), 여선군(驪善君) 이학(李壆), 낙춘 도정(樂春都正) 이배(李培)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에게는 숙마(熟馬) 1필(匹)을 내리고, 장계 도정(長溪都正) 병(棅)에게는 반숙마(半熟馬) 1필을 내리라. 참봉(參奉) 이계(李綮)·심석현(沈碩賢)은 모두 직장(直長)을 제수하고, 충의(忠義) 이익겸(李益謙)·이필(李弼)·남월(南礇)·윤지상(尹志尙)에게 모두 동반(東班)의 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의릉(懿陵)의 수릉관(守陵官)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은 가자(加資)하고 안장 갖춘 내구마(內廐馬) 1필과 외거 노비(外居奴婢) 6명과 밭 50결(結)을 내리고, 시릉관(侍陵官) 김몽상(金夢祥)은 가자하고 안장 갖춘 내구마 1필과 외거 노비 4명과 밭 30결을 내리고, 참봉 권세륭(權世隆)·이익정(李益炡)은 아울러 6품으로 천전(遷轉)하여 각각 아마(兒馬) 1필씩을 내리고, 진지 충의(進止忠義) 조종유(趙宗裕)는 승진시켜 동반(東班)의 직을 제수하고, 주시관(奏時官) 이하 및 도설리(都薛里)360) 이하와 반감(飯監)이하는 각각 차등이 있게 논상(論賞)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의 사록(司錄)이 좌의정의 뜻으로 아뢰기를,
"영제(禜祭)를 이미 두 번이나 거행했는데도 오늘의 우세(雨勢)는 아침까지 쏟아지니, 앞으로의 민생의 일이 진실로 그지없이 되었습니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기청제(祈晴祭)를 설행하는 일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되, 제문은 제학(提學)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신을 보내어 기청제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8월 27일 병술
밤 2경(二更)에 유성(流星)이 허량성(虛梁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발 같고, 꼬리의 길이가 4, 5자 가량이었으며, 빛깔이 붉어 광채가 땅에 비치었다.
사헌부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를 개정하는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정언 유겸명(柳謙明)이 상소하여 경계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권면과 경계가 진실로 더없이 간절하고 지극하므로, 깊이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전라 감사 이유(李瑜)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는데, 이유가 말하기를,
"지금 요리(料理)의 폐단은 내외(內外)가 똑 같습니다. 신이 내려간 다음에 각 아문(衙門)과 여러 궁가(宮家)의 차인(差人)을 막론하고 만일에 요리하는 것으로 민간에 폐단을 부린다면 각별히 엄중하게 다스리되, 장문(狀聞)하여 논죄(論罪)하게 할 생각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이 진달한 것은 좋은 말이니, 만일에 모리(牟利)하느라 폐단을 부리는 자가 있으면 우선 죄를 다스리고 다음에 장문해도 좋다."
하였다. 우부승지 경성회(慶聖會)가 말하기를,
"4대신의 서원(書院)의 공역(工役)이 이미 끝났는데도 사액(賜額)하는 한 가지 일을 해조(該曹)가 감히 준례대로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원우(院宇)가 이미 이루어졌으면 사액(賜額)하는 것은 곧 다음 차례의 일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이세진(李世璡)이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삼사(三司)가 쟁집(爭執)하던 일은 성상께서 처분이 이미 작성되었으니 마침내 그만두어야 할 것인데, 널리 성세(聲勢)를 확장시켜 해가 넘도록 시끄럽게 떠들고 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오로지 당론(黨論)을 타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사(兩司)가 쟁집하고 있는 오직 저 3신(三臣)에 있어서는 모두가 선왕조(先王朝)의 숙덕(宿德)361) 인 원로(元老)로서 그 제우(際遇)362) 의 융숭(隆崇)함과 권주(眷注)363) 의 깊음이 보통 사람에 뛰어났었기에, 한결같이 공론에 따라 곧 번잡한 예절을 거행하게 된 것인데, 세월이 오래된 뒤인 이제 와서 이것 저것을 들추어내어 뒤좇아 논하여, 지극히 공경해야 할 자리에서 기필코 변란(辨亂)하려고 합니다. 복관(復官)한 4정승의 사우(祠宇)를 세움에 있어서는, 태묘(太廟)에 쓰기로 한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그 재목(材木)을 옮겨다 쓰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니, 사체를 헤아려 보건대 이미 극도로 무엄(無嚴)한 짓입니다. 거듭 말해서 어느 곳에 넓은 터가 없어서 반드시 6신(六臣)과 3신의 곁에다 창립(刱立)하되, 윤지술(尹志述)을 반드시 4현(四賢)의 사우(祠宇)로 올려 하나의 일로 만든 것은 또한 무슨 짓이겠습니까?
저에 있어서는 너무도 심각하게 배척하고 이에 있어서는 너무도 외람하게 높이었으니, 만일에 식견 있는 사람이 곁에서 보게 된다면 누군들 당론으로 시킨 바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직위가 모두 우러러보는 데 있는 사람은 대중의 소망이 달려 있는 바인데, 소매 속에 차자(箚子)를 한 번 올리자 대중의 심정이 의혹(疑惑)하며 가만히 생각하기를 우리 정승이 반드시 아름다운 법도와 좋은 계책을 우리 임금께 들어가 고함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다만 원차(原箚)가 궁중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하여 대중들의 의혹이 풀리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본부(本府)의 임징하(任徵夏)의 계사(啓辭)에 있어서는 항간(巷間)의 어린 아이들도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의 머리를 고가(藁街)364) 에 달게 되지 않고서는 하늘에 계신 선왕(先王)의 영혼을 위로할 수 없다.’고 했었는데, 오늘날의 조정 신하들이 입은 은덕에 대한 의리도 생각하지 않고 준엄한 성상의 분부도 꺼리지 않고서, 가까운 땅에 가볍게 귀양 보낸 것도 또한 반한(反汗)365) 하기를 청했으니, 진실로 편당하는 논에 가리워지지 않고서는 또한 이와 같이 깜깜하게 막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만히 오늘날의 상태를 보건대 팔을 걷어붙이며 마음을 곤두세우는 자가 오로지 편당하는 의논을 하는 한 편에 있어, 민생들에 대한 근심과 국가의 계책에 있어서는 도외시하는 데 두어 유독 병침(丙枕)366) 이 편치 못하시게 하고 있으니, 전하의 국가가 장차 어느 지경에 있게 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일 어리석은 신(臣)으로 하여금 전하를 위해 오늘날의 일을 계획한다면 ‘파붕당(破朋黨)’ 세 글자 이외에는 다시 말을 할 일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편의 뜻이 망령되이 임금의 뜻을 헤아리고서 조정 신하들과 알륵(軋轢)하는 짓을 한 것이다. 이런 안정(安靖)되지 못한 짓을 하는 작태(作態)는 내가 보고 싶지 않다."
하고, 이어 우선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시독관 윤심형(尹心衡)이 말하기를,
"듣건대 이세진(李世璡)이 상소하여 합계(合啓)한 일을 정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토복(討復)에 관한 중대한 논계(論啓)는 온 나라가 다 같은 바인데, 대각(臺閣)에 있는 몸으로서 도리어 괴란(乖亂)하는 일을 함이 있으니,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망령되어 성상의 뜻을 헤아리고서 상시(嘗試)367) 하는 꾀를 부리려고 하였음을 진실로 더없이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조덕린(趙德隣)이 상소하여 상시(嘗試)하는 짓을 했기 때문에 즉시 투비(投畀)368) 하는 법을 시행한 것인데. 지금 이세진이 망령되이 임금의 뜻을 헤아리고서 조정 신하들과 알륵(軋轢)하는 짓을 하여, 조덕린과 앞뒤에서 한통속이 된 것이다."
하였다.
이세진을 삼수부(三水府)에 귀양 보냈다. 전교하기를,
"요사이에 내가 조정 신하들을 신칙(申飭)했던 것은 되도록 공평(公平)으로 돌아가게 하려 한 뜻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어찌 옳음과 그름을 혼동되게 할 이치가 있겠는가? 이세진이 망령되이 나의 뜻을 헤아리고서 ‘파붕당(破朋黨)’이란 세 글자로 상소 한 장의 아름다운 제목으로 삼아, 그의 정신이 오로지 국시(國是)를 무너뜨려 어지럽히고 진신(搢紳)들을 알륵(軋轢)하게 하려는 데에 두었으니, 교묘하고도 처참(悽慘)한 짓이라 하겠다. 그가 만일 조금이라도 무섭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뒷날을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 엄하게 통렬한 징계를 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주 변방에 멀리 귀양 보내라."
하였다.
정언 홍성보(洪聖輔)가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의 죄를 논하기를,
"진실로 역적을 다스리는 법이 있다면 베어야 할 죄가 어느 것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오적(五賊)에 관한 상소에 첨부한 연명(連名)은 비록 고하(高下)의 다름이 있기는 하지만 전편(全篇)에 나타난 뜻에 있어서는 피차의 다름이 없는 것인데, 전하께서 억지로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으로 나누어 지금까지 용서하고 있음은 진실로 대중의 심정 밖으로 벗어나게 된 일입니다. 이 무리들의 죄가 섬으로 귀양보내는 것에 그치어 오히려 지금까지 버젓이 살아 있으며 유독 죄는 같은데도 베임을 면하고 있으니, 김일경(金一鏡)의 원통함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유봉휘의 일은 전후에 이미 말을 했다. 소하(疏下) 오적(五賊)의 일은 괴수 김일경을 이미 사사하였다. 소하의 오적들이 비록 마음이 한통속이기는 했지만 다음의 율(律)에 처한 것이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8월 28일 정해
막 어두워질 적에 유성(流星)이 천루성(天壘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병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7, 8자 가량이며, 빛깔이 붉어 광채가 땅에 비치었다.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영휘전(永徽殿)369) 을 봉심(奉審)하였다.
윤헌주(尹憲柱)를 판윤(判尹)으로, 황재(黃梓)를 헌납(獻納)으로, 신노(申魯)를 지평(持平)으로, 심태현(沈泰賢)을 대교(待敎)로 삼았다.
8월 29일 무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차자를 올려 궐례(闕禮)한 죄를 주기로 청하고, 겸하여 이세진(李世璡)의 모함에 대하여 폭로(暴露)하니,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려 소석(昭釋)하게 위유(慰諭)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경연관(經筵官) 한원진(韓元震)이 아뢰기를,
"옛사람들이 경(敬)자의 뜻을 말하는 데에서 정자(程子)는 ‘의관을 정제(整劑)하고 용모를 엄숙(嚴肅)하게 하여 마음을 한군데 집중하고 다른 데로 감이 없게 하는 것이다.’라 하고, 사씨(謝氏)370) "는 ‘늘 경계하여 개닫는 법이다.’라 하고, 윤씨(尹氏)371) 는 ‘그 마음을 수렴(收斂)하여 하나의 사물(私物)을 용납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고 하고, 주자(朱子)는 ‘외(畏)자와 가깝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몇 가지의 말을 가지고 살펴보면 경자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마는, 신(臣)이 또한 청컨대 세속에서 항시 쓰는 말로 해석하겠습니다. 이른바 ‘경(敬)’은 다만 이 ‘놓아 지나칠 수 없다[不放過]’는 세 글자의 뜻입니다. 마음은 한몸의 주재(主宰)요 만 가지 일의 근본이 되고 ‘경’은 마음 하나의 주재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 사이의 일에 있어 설명이 이에 이르게 되어지면 지극히 요긴하고 지극히 간약하다 할 수 있는 법이니, 삼가 바라건대 깊이 유의하소서. 심(心)이니 성(性)이니 하는 명목(名目)은 학문을 하는 공부가 대략 이와 같은 것이니, 이에 있어서 생각을 다하여 보는 바가 있게 되면 《맹자》 한 책 속에 무릇 심성(心性)과 그 공부하는 절목(節目)을 말해 놓은 것이 모두 신(臣)의 이 말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어서, 그 글을 바야흐로 읽기 쉽게 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말이 자세하고 극진하게 되었다. 그 중에도 세속말로 ‘경자’를 해석해 놓은 것이 더욱 좋으니,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니, 한원진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신이 선사(先師)에게서 듣게 된 것이고, 신의 식견으로 언급한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장령 한덕후(韓德厚)가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이번에 이세진(李世璡)이 토복(討復)에 관한 의리를 당동 벌이(黨同伐異)372) 하는 것으로 돌리고 간흉(奸凶)의 괴수를 숙덕(宿德)으로 칭찬하였으며 종묘(宗廟)의 역사를 끝냈다고 고하였으면 나머지 목재(木材)와 석재(石材)에 있어서는 지부(地部)373) 의 버린 자료가 되고 마는 것인데, 이에 감히 막중한 태묘(太廟)를 빙자하여 무엄(無嚴)한 짓이라는 죄목(罪目)을 씌웠고, 그 4대신을 말하면서는 ‘4정승을 복관(復官)했다.’고 하여, 그가 은연중에 오히려 죄인(罪人)으로 대우하였고, 대신의 수차(袖箚)는 진실로 혈성(血誠)에 나온 것인데도 죄안(罪案)으로 만들면서 말이 또 음흉하고 험악했습니다. 이를 미루어 구명(究明)해 보면, 그의 상소의 건목(件目)이 비록 많기는 해도 대저 모두가 이런 유입니다."
하니, 우악(優渥)하게 비답하였다.
8월 30일 기축
갑산(甲山)·삼수(三水) 두 고을에 7월 중순(中旬)에 서리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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