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권, 영조 2년 1726년 9월

싸라리리 2025. 8. 20. 13:39
반응형

9월 1일 경인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거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우로(雨露)의 감모(感慕)를 가진 지 이미 5년을 지났다. 부묘례(祔廟禮)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마땅히 즉시 명릉(明陵)374)  을 전알(展謁)하겠으니, 좋은 날을 내달 15일, 20일 무렵으로 가리도록 하라. 3년이 막 끝나고나니 추모(追慕)하는 생각이 더욱 새로워지므로 새 능에의 전알도 또한 마땅히 오는 봄에 행하겠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이에 의해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맥(診脈)이 끝나자 도제조(都提調) 민진원(閔鎭遠)이 이세진(李世璡)이 상소한 것을 들어 척퇴(斥退)해 주기를 바라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수차(袖箚)에 말뜻은 성실하여 딴 뜻이 없었는데도 이세진이 모함하기에 급급하여서 또한 알지도 못하고서 말을 한 것이 있었다. 이러한 알륵(軋轢)하는 짓을 어찌 인혐(引嫌)할 것 있겠는가? 모름지기 마음을 안정해야 한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경연관 한원진(韓元震)이 함께 입시(入侍)했다. 참찬관 조명신(趙命臣)이 말하기를,
"오늘은 하교(下敎)가 없으셨는데도 옥당(玉堂)에서 경연관에게 전통(轉通)하여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이 뒤에도 이에 의해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하교를 기다릴 것이 없다."
하였다.

 

9월 2일 신묘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 윤심형(尹心衡)이 말하기를,
"광장(匡章)375)  이 효도하는 도리를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학력(學力)이 부족했기 때문에 효도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부자간에 서로 맞지 않게 되었던 것이니, 이래서 성현들이 학문함을 귀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하고, 경연관 한원진(韓元震)이 말하기를,
"책선(責善)376)  과 규간(規諫)377)  은 같지 않은 것입니다. 책선은 잘못이 있기를 기다리지 않고 선(善)으로써 권하는 것이니, 이는 부자간에는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잘못이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아들된 사람이 간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나, 만일 책선에 관한 말로 인해 부모에게 과오가 있어도 또한 간할 줄을 알지 못한다면 잘못인 것입니다. 또 과오는 공과(公過)와 사과(私過)가 있으니 이른바 공과란 무심코 악을 하여 우연히 잘못하는 것이고, 이른바 사과란 마음을 두고서 악을 하여 우연히 잘못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현들이 공과에 있어서는 비록 큰 것이더라도 또한 용서해 주는 뜻이 있지만, 사과에 있어서는 반드시 깊이 미워하여 조금도 방심하고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광장(匡章)의 과오는 대개 공과이기 때문에 맹자가 그와 끊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고, 삼사(三司)에서 앞서의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그만두도록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의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비답하기를,
"다시 또 무슨 말을 할 것이 있겠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고, 사간원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김조택(金祖澤)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이진(權以鎭)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김여(金礪)를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삼았다.

 

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들을 인견(引見)하여 신칙(申飭)하고 권면하여 보냈다.

 

9월 3일 임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한원진(韓元震)이 상소를 진달하여 주급(周急)해 준 것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있는 격언(格言)을 체념(體念)하며 거행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변변치 못하나마 주급한 것을 어찌 그리 지나치게 사양을 하는가?"
하고, 이어 원소(原疏)를 금중(禁中)에 머물러 두도록 명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앞서의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정지하도록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의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그만두도록 비답하였고, 사헌부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으며, 사간원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사(三司)가 합문(閤門)에 나온 지 이미 오래이었는데도 주서(注書)들이 서로 미루어 등대(登對)가 지체되게 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와 주서를 되도록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9월 4일 계사

충주(忠州)에 있는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태실(胎室)에,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김택현(金宅賢),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정형익(鄭亨益)에게 명하여 석물(石物)을 더 봉(封)하도록 하였다.

 

김취로(金取魯)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동당(東堂)의 문과(文科)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에서 출방(出榜)하려고 예궐(詣闕)하였다.

 

9월 5일 갑오

달이 심화성(心火星)을 침범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세상의 도의(道義)가 어그러지고 어지러워진데다가 이세진(李世璡)의 일이 또 생겼습니다. 비록 다행히도 처분을 명쾌하게 하시기는 했습니다마는, 그 유래한 바를 따져 본다면 대개 전하께서 원임 대신(原任大臣)에 있어서 정승 체직(遞職)을 너무 용이하게 하시어, 괴이한 귀신같은 무리가 망령되이 헤아리는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임금이 순천(順天)과 여수(麗水)의 분계(分界)가 편리한지 않은지를 하문(下問)하자, 홍치중이 말하기를,
"여수는 분읍(分邑)한 뒤에 폐해가 적지 않습니다. 이미 설치했다가 도로 혁파하는 것이 비록 두서가 없는 것같기는 하지만, 사세가 진실로 혁파해야 한다면 없애는 것에 구애받을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다시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묻자, 모두들 말하기를,
"개혁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번에 문부(文簿)가 호번(浩煩)하기 때문에 미처 조관(照管)하지 못하고서 분속(分屬)하도록 윤허했던 것인데, 여수 부사(麗水府使)에 대한 유서(諭書)를 지어 입계(入啓)함에 당해서야 비로소 뉘우치게 되었다. 마땅히 결단해야 하는데도 결단하지 못한 것은 우유 부단(優柔不斷)에 가까운 것이니, 여수를 도로 순천에 소속해야 한다."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고(故) 좌상(左相) 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은 기묘년378)  의 명현(名賢)이었는데, 참혹한 처형(處刑)의 화를 입었기 때문에 사림(士林)들이 비통하게 여겼습니다. 듣건대 그의 자손들이 이번에 비로소 광주(廣州) 땅에서 묘산(墓山)을 찾아냈다고 하니, 마땅히 본도(本道)의 방백(方伯)으로 하여금 묘를 만들 물건을 주도록 하고,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후하게 돌보아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하게 여겼다. 삼사(三司)에서 앞서의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정지하도록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의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그만두도록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고, 사간원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정관(貞觀)379)   시절의 정치는 날마다 민생들의 근심거리와 국가의 계책을 강구(講求)하기에 벗어나지 않았었는데, 오늘날의 빈대(賓對)380)  에서는 양사(兩司)에서 종일토록 논쟁하는 바가 다만 이 지나치게 억제하거나 지나치게 붙잡아 주거나 하는 논의이고, 한 사람도 탐관 오리(貪官汚吏)를 논급(論及)하는 일이 없어 국가의 계책과 민생들의 근심거리는 서로가 잊어버리는 지경에 두고 있으니, 만일 이런 일을 청사(靑史)에 써 놓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나를 어떤 임금이라고 하게 되겠는가?"
하고, 이어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장령 이근(李根)이 아뢰기를,
"신이 전번에 여수(麗水)의 분현(分縣)에 관한 일로 상소를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었는데, 오늘의 경연(經筵)에서는 분현을 그르게 여기므로 필경에는 처분을 내리시어 드디어 도로 소속(所屬)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당초에 잘 살피지 않은 잘못이 현저해졌으니, 청컨대 신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도 말고 또한 퇴대(退待)하지도 말라."
하였다.

 

9월 6일 을미

밤 3경(三更)과 4경(四更)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이의현(李宜顯)을 대제학(大提學)으로, 박사성(朴師聖)을 헌납(獻納)으로, 권적(權𥛚)을 응교(應敎)로, 홍석보(洪錫輔)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민형수(閔亨洙)를 검열(檢閱)로 삼았다.

 

사간 민응수(閔應洙), 장령 한덕후(韓德厚)와 이근(李根), 지평 신노(申魯)와 이정박(李挺樸), 정언 유겸명(柳謙明) 등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다시 토복(討復)에 관한 의리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엊그제 내린 분부는 세상의 도의(道義)가 개탄스럽기 때문이었는데, 너희들은 염박(厭薄)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이 몸이 비록 부덕(不德)하기는 하지만 임금과 신하가 하나의 대청에서 온화하게 도를 강론하게 된다면 어찌 낮에서 밤까지 계속하더라도 아낄 것이 있겠는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기는 것은 위에 있는 사람이 밝혀야 하는 바인데, 한 번 바로잡음이 있게 되면 문득 위협하여 제재한다고 하니, 이는 내가 총명하지 못하여 말을 과당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략 말하겠다. 합계(合啓) 내용에 있어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의 일 이외의 논인(論人)한 것과 율인(律人)한 것이 모두 적당하게 된 것이겠는가? 소하(疏下) 오적(五賊) 중의 한세량(韓世良)·목시룡(睦時龍) 등의 일을 내가 윤허하기를 아낀 것은 비록 휼형(恤刑)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나, 대신(臺臣)이 쟁집(爭執)한 말을 어찌 과당한 것이라 하겠는가? 이미 정계(停啓)한 이삼(李森)에 관한 일과 이미 그만둔 심단(沈檀)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논계 정지를 배척하는 사람이 다시 쟁집하는 논계를 하고 있으니, 이미 심하다고 하겠는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안옥(按獄)한 제신(諸臣)을 멀리 귀양보내야 한다는 논계와 입시(入侍)했던 제신들을 귀양보내기를 계청한 것이나, 심수현(沈壽賢)을 섬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한 것과 조현명(趙顯命)을 멀리 귀양 보내기를 계청한 것이나, 수부(水部)381)  의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를 논계한 것과 임징하(任徵夏)를 도로 귀양 보내기를 계청한 것에 있어서는, 더러는 심각한 짓을 면하지 못한 것이고 더러는 비호와 억제를 면하지 못한 것이었다. 윗사람이 된 자가 매양 일에 있어 구차하게 동조해야 하는 것이라면 말할 것 없거니와 이미 알았다면 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 신하는 배향(配享)하는 논계에 있어서도 당초에 논계하게 될 때부터 내가 단정코 과당한 것으로 알았었다. 그저께 하교(下敎)하면서 거의 그대들이 감동하게 되기를 바랐었는데, 일전의 청대(請對) 때에 마치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들 같았었으니, 어떻게 회책(誨責)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아! 아래 있는 민생들은 절박하게 되어 있고 직에 있는 탐관 오리(貪官汚吏)는 침학(侵虐)하는 짓을 하고 있는데도, 양사(兩司)의 신하들이 아득하고 어두워서 한 가지 일도 논함이 없이 함묵(緘默)하고 있고 등대(登對)하여 하는 말은 심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차근차근 옛적의 역사를 볼 적에 다스렸던 세상이 이러했었던가? 그대들이 이기기 좋아하기를 특기(特奇)하게 여기지 말고, 그전의 풍습을 씻어버리고서 마음을 공정하게 하기를 힘쓴다면 어찌 특히 나의 마음만 기쁘게 되겠는가? 진실로 국가의 행복이 될 것이다. 그대들은 사직하려고 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9월 7일 병신

김유경(金有慶)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재(李縡)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설서(說書)로, 서종급(徐宗伋)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사간 민응수(閔應洙), 장령 한덕후(韓德厚)와 이근(李根), 지평 신노(申魯)와 이정박(李挺樸), 정언 유겸명(柳謙明) 등이 피혐(避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대각(臺閣)의 계사(啓辭)는 진실로 공론에 의거하여 나온 것으로서, 정지하거나 정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마땅히 한결같이 공론에 붙여야 하고, 본시 군상(君上)이 지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한결같이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정지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임금이 위에서 독단(獨斷)하여도 넉넉할 것입니다. 또한 무엇하러 대각을 둘 것이 있겠습니까? 민생들의 곤궁과 탐관 오리들의 침학(侵虐)에 있어서는 신들이 또한 열거(列擧)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당면한 지금 대의(大義)가 신장(伸張)되지 못하고 윤기(倫紀)가 장차 어두어지게 되어, 겨를없이 시급하게 되었으니, 혈성(血誠)을 다해 진청(陳請)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첫째의 일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겨를에 앞에 당한 시랑(豺狼)을 놓아 두고 호리(狐狸)를 반문(反問)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에 체직하기를 청하니, 사직하지 말도록 비답하였다.

 

9월 8일 정유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호서(湖西)에 큰물이 졌다.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아들 아명(兒名)에게 도서(圖書)를 주었다. 당초에 대마 도주가 그의 아들 미일아명(彌一兒名)의 도서를 그전의 규례대로 허급(許給)하기를 청하므로,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조정에 계문(啓聞)하매,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도왜(島倭)의 정원(情願)을 당초부터 허락하지 않았다면 말할 것 없지만 한 번 허락한 뒤이라 또한 다시 막는 것은 합당치가 않으니, 주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황재(黃梓)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9월 9일 무술

오시(午時)에 천둥하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큰 콩알만씩 하였다.

 

교리 황재가 상소하여 토복(討復)에 관한 의리를 거듭 진달하니, 준례의 비답을 내렸다.

 

9월 10일 기해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는데, 새벽에서 아침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김용경(金龍慶)을 헌납(獻納)으로, 한현모(韓顯謨)를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의 책례의(冊禮儀)를 고찰해 보건대, ‘왕비(王妃)께서 책봉(冊封)을 받은 다음에는 백관(百官)이 궁문(宮門)밖에서 상례처럼 진하(陳賀)한다.’고 했습니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과 왕대비전(王大妃殿)께 존호(尊號)를 올릴 때와 중궁전(中宮殿)께서 책봉례를 받을 때에 통명전(通明殿)에 어좌(御坐)하시게 되는데 통명전과 명정전은 상거가 가깝습니다. 각각 그 날에 백관들의 진하를 먼저 명정전에서 하고 대전(大殿)께의 진하는 다음으로 인정전(仁政殿)에서 거행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존숭(尊崇)과 책봉례(冊封禮)를 다같이 하나의 전에서 거행하는 것은 미안스러운 생각이 든다. 전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없기에 임인년382)  의 예에 의하여 통명전으로 정했었는데, 추후에 병진년383)  의 예를 듣건대 존숭은 통명전에서 거행하고 책봉례는 희정당(熙政堂)에서 거행했었다. 이번의 책봉례는 마땅히 양화당(養和堂)에서 거행해야 하는데, 존숭의 진하를 마땅히 먼저 거행하되 책봉례 진하도 일체로 편리할 대로 하는 것이 합당하게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먼저 대정(大庭)에서 거행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불러 보았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수해와 한해로 흉년인데다가 어제는 천둥하는 이변이 생긴 것을 들어 척퇴(斥退)하고 다시 어진 덕이 있는 사람으로 복상(卜相)하도록 명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모두 내가 부덕(否德)하기 때문이다. 천재(天災)를 들어 책면(策免)하는 것은 본래부터 아름다운 일이 아닌 것인데, 경(卿)이 어찌하여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만일 지금 이로 인하여 상하가 서로 힘쓰며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해 나간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대각(臺閣)이 쟁집(爭執)하는 일은 이미 대의(大義)에 의거한 것인데,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어 수습될 기약이 없습니다. 그들이 논열(論列)한 말이 어찌 과격하게 된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 더러는 한때 성상의 뜻에 맞지 않는 것으로 좌절(挫折)해버리거나 염박(厭薄)하기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하시니, 이렇게 하고도 수습되고 결말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진작(振作)하고 격려(激勵)하는 방도는 오로지 옳음과 그름이 밝혀지느냐 밝혀지지 않느냐와 성상께서 뜻이 굳게 정해지느냐 굳게 정해지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에 대각(臺閣)의 논계(論啓)에서 서로 버티고 있는 것은 어찌 나의 뜻이 정해지지 못하여 그러는 것이겠느냐? 조금이라도 계칙(戒飭)하는 말을 하면 그만 좌절하는 것으로 여기고, 약간이라도 수습하려는 뜻을 보이면 반드시 염박(厭薄)한다고 여겨, 의리가 어둡게 막혀지지 호오(好惡)가 너무도 치우치게 되어 있다. 임금과 신하가 하나의 대청 안에서 조용히 서로 접했을 적에 어찌 국가의 계책을 논하거나 민생의 병패를 말할 수가 없겠는가마는, 한갓 긴요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서 평상시에 서로 버티기를 마치 문구(文具)384)  처럼 하고 있어, 진실로 무어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순례(循例)’ 두 글자대로 비답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신이 매양 젊은 사람들을 만날 적마다 으레 말하기를, ‘큰 시비(是非)에 관한 것은 논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 나머지 세세한 일에 있어서는 서로 의논해서 수습하는 것이 불가할 것 없는 것이라.’고 하면, 그들의 대답도 모두 그렇지 않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왕조(先王朝)에는 몇 번이고 경화(更化)했어도 대각의 논계가 많지 않았고 양사(兩司)의 합계(合啓)는 더욱 드물었는데, 갑술년385)   이후에 쟁집(爭執)한 것도 또한 2, 3건에 지나지 않았었다. 임인년386)  의 참벌(斬伐)은 누구도 통한(痛恨)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일이었는데, 어찌 그 무리들의 참혹한 녹기는 통탄스럽게 여기면서 또한 이런 과격한 논의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만일 청나라[彼國]에 일이 있게 된다면 우리 나라도 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일이 없을 때에 미리 방어하는 계책을 강구해 놓지 않았다가 하루아침에 풍진(風塵)의 경계가 있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변에 대응해 갈 것입니까? 서북(西北)의 변방 소임은 다른 지방의 소임과 달라 반드시 적임자를 얻어 맡긴 다음에야 변방의 근심거리를 풀어 갈 수 있습니다. 양계(兩界)의 감사(監司)는 물의(物議)를 채탐(採探)하여 겨우 막 가려서 의망(擬望)했거니와, 북병사(北兵使)는 또한 이미 기한이 찾으므로 마땅히 차례로 대신할 사람을 내야 할 것인데, 바로 지금 인재(人才)가 묘연(杳然)하게도 가합한 사람이 없으니, 이 일이 더욱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말은 편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잊지 않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인재를 발탁(拔擢)하는 방도는 미천한 사람 속에서도 기용할 수 있는 법이니, 진실로 인재를 가리려고 한다면 어찌 인재가 없는 것을 근심하겠는가? 양계의 병사(兵使)는 자격(資格)에 구애하지 말고 또한 가려서 의망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매양 곤수(閫帥)387)  를 의망하기에 당하면 문득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걱정을 합니다. 평상시에도 이러한데 난시(亂時)에 임해서는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수령(守令)과 곤임(閫任)을 지낸 사람 중에 명망(名望)과 치적(治績)이 있는 조빈(趙儐)·조경(趙儆)·김흡(金潝)·최도장(崔道章)과 같은 사람들은 참으로 범한 죄가 있었다면 비록 무재(武才)를 지닌 것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경솔하게 조용(調用)하기를 의논할 수 없겠습니다마는, 만일에 자신이 죄를 범한 것은 없으면서도 한갓 색목(色目)과 형적(形跡) 때문에 폐하여 버리게 된다면, 무사(武士)들의 실망이 응당 어떠하게 되겠습니까? 이 뒤로는 시의(時議)는 파탈(擺脫)해 버리고 재주에 따라 조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편당하는 의논이 비록 고질(痼疾)이 되기는 했지만 음무(蔭武)들이 어찌 감히 형적(形跡)이 있는 짓을 했겠는가? 요사이 사람을 논하는 즈음에 매양 흉당(凶黨)에게 붙은 것으로 죄목을 삼고 있으니, 이는 조정에서 편당하는 풍습을 조장하는 것이다."
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봉상(李鳳祥)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보장(保障)으로 믿고 있는 곳은 심도(沁都)388)  와 남한 산성·북한 산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 군데에 있어서 미리 한 곳을 정하여 의귀(依歸)할 곳으로 삼으시고 양향(糧餉)과 기계(器械)를 많이 쌓아 놓아야 뒷사람들이 믿는 데가 있어 두렵지 않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홍치중이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평소에 생각하시기를 만일에 비상한 변이 있게 된다면 어디로 돌아가려고 하셨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도성(都城)이란 종사(宗社)·궁궐(宮闕)·부고(府庫)·사민(士民)이 모두 있는 데 인데, 나라 임금이 이를 놓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만일 조가(朝家)에서 버리고 지키지 않을 뜻을 보인다면 또한 모두 부모와 처자가 있는 도성 백성들이 어찌 먼저 한심하게 여기며 스스로 심신(心身)이 풀려버리게 되지 않겠는가? 백성들이 모두 국가에서 종사(宗社)를 지키고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놀라거나 의심하여 동요하게 될 근심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위급에 임하여 당황하게 되겠는가? 미리 한 곳을 정해 놓는 것은 마침내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도성을 지키려고 하면 성밑의 여염(閭閻)집들을 헐지 않을 수 없고 성 밖의 일대(一帶)에 참호(塹壕)를 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왕조(先王朝)에도 도성 지키는 일을 의논할 때에 단지 넓고 커서 어렵게 여겼을 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평상시에 집을 헐고 참호를 파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조(擧措)가 중대하기는 지금에 와서도 또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도성을 지키는 계책은 아마도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을까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강토를 방비하고 있어 도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고, 굳게 도성을 지키며 외부의 원조를 기다리는 것이 중등의 계책이고, 황급하게 파천(播遷)하여 바람만 보고도 놀라며 무너져버리는 것은 가장 하등의 계책이다."
하였다.

 

9월 11일 경자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맹자(孟子)》 만장편(萬章篇)을 진강(進講)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만약 증자(曾子)로 하여금 대순(大舜)의 처지에 놓였다면 대순처럼 처신하지 못했을까?"
하였다. 경연관(經筵官) 한원진(韓元震)이 말하기를,
"증석(曾晳)389)  의 성미가 매우 엄하고 조급하여 아들에게 시키는 일을 또한 과당하게 하는 데가 많이 있었는데도, 증자가 그를 섬기기를 한결같이 모두 그대로 승순(承順)하고 원망하거나 불공(不恭)할 마음이 없었으니, 비록 대순의 처지에 놓이게 되더라도 처신해 가기를 또한 반드시 대순처럼 했을 것입니다. 다만 증자는 힘을 써서 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지만 대순은 자연히 그렇게 되어 면강(勉强)하는 것이 없었으니, 대순은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게 되고 생각하지 않아도 알게 되었고, 증자는 생각해 본 다음에야 알게 되고 힘쓴 다음에야 적중하게 된 것입니다. 대순과 증자가 일을 처리함에 있어 반드시 같게 되지 않을 수가 없지만, 처리해 가는 데에 있어 편안하게 행하는 것과 이롭게 행하는 것의 차이가 있으니, 이는 성인과 현인이 구분되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겠다 하였다.

 

9월 12일 신축

유명홍(兪命弘)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단장(李端章)을 사간(司諫)으로, 채응복(蔡應福)과 이자(李滋)를 장령(掌令)으로, 성대열(成大烈)을 정언(正言)으로, 조정만(趙正萬)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9월 15일 갑진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삭망(朔望) 제사를 친히 거행하였다.

 

9월 17일 병오

홍성보(洪聖輔)와 정홍제(鄭弘濟)를 지평(持平)으로, 김용경(金龍慶)을 수찬(修撰)으로, 한원진(韓元震)을 사어(司禦)로 삼았다.

 

예조에서 낭청(郞廳)을 보내어 고려 임금들의 제릉(諸陵)에 가서 적간(摘奸)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병조에서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할 때에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을 임인년390)   예에 의거하여 순수한 길복(吉服)을 입게 하기를 아뢰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경연관 한원진(韓元震)이 상소하여, 복수(復讎)하여 설치(雪恥)해야 하는 의리를 진달하니,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리고 원소(原疏)를 금중(禁中)에 머물러 두었다.

 

9월 19일 무신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9월 20일 기유

정언 성대열(成大烈)이 상소하여 토역(討逆)에 관한 의리를 말하니, 비답하기를,
"삼사(三司)가 공론대로 다하기를 힘쓰려면 마땅히 붙잡아 주고 권장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헐뜯고 책망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9월 21일 경술

소대(召對)를 거행하여 《송감(宋鑑)》을 진강(進講)하였다. 경연관 한원진(韓元震)이 말하기를,
"사호(史浩)391)  가 정승이 되어 조정(趙鼎)과 이강(李綱)의 죄가 없는 것과 악비(岳飛)의 오래된 원통함을 말하여, 그들이 관작(官爵)을 복구하고 그들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했습니다. 조정과 이강은 진회(秦檜)의 쫓아낸 바가 되고 악비는 진회의 죽인 바가 되었는데, 사호가 추후에야 그들의 원통함을 신리(伸理)해 주었으니 마치 진회와는 서로 반대되는 듯합니다마는, 그의 소위를 추적(追跡)해 보면 진회의 심술(心術)을 물려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소인들은 본시 모두가 똑같은 심장(心腸)이면서도 때에 따라 머리와 얼굴을 바꾸어 그들의 간계를 부리는 법입니다. 사호의 때에 당하여 진회의 간사한 실상을 이미 남김없이 드러났기에, 사호가 진회를 뒤쫓아 높이며 곧장 그가 하던 대로 이어간다면 그 당시에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겉으로는 군자들을 붙잡아 보호하여 진회와는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했지만 속으로는 진실로 진회의 소위를 답습(踏襲)하며 군자들을 저해하고 배척하는 짓을 한 것이니, 이는 송(宋)나라 효종(孝宗)이 사호에게 속임당하게 된 바입니다. 대저 소인의 당파 속의 사람들은 자기의 당파 사람이 실패하게 되면 대중을 따라 같이 배척하여 자신의 행적을 덮어버리는 짓을 하지만, 본래부터 똑같은 심장(心腸)이기 때문에 비밀로 군자들을 헐듣고 몰래 자기 편당을 비호하다가, 어느날 세상에 뜻을 얻게 되면 드디어 그의 당파까지 아울러 일으켜 군자들을 모조리 쫓아내기까지 하니, 특히 그의 행적이 지난날의 소인과는 반대되는 듯하기 때문에 군자들이 또한 나타나게 말을 하여 공격하지 못하다가 마침내는 그의 화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인은 더욱 두려운 것이니, 인주(人主)들이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할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말은 사호의 심술을 잘 파헤친 것이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앞서의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정지하도록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의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그만두도록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앞서의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고,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9월 22일 신해

권적(權𥛚)을 사간(司諫)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수찬(修撰)으로, 이병태(李秉泰)를 부응교(副應敎)로, 황재(黃梓)를 부교리(副校理)로, 박사성(朴師聖)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9월 23일 임자

소대를 거행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이병태(李秉泰)가 여색(女色)을 경계하고 용도(用度)를 절약하며 유현(儒賢)을 높이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현명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분변하고 상과 벌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권권(眷眷)392)  하게 경계를 진달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9월 24일 계축

사간원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9월 25일 갑인

유시(酉時)에 해에 검은 기운이 있었고, 호서(湖西)의 예산(禮山) 지역에 이달 초8일에 천둥하였으므로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진강(進講)이 끝나고, 검토관 김용경(金龍慶)이 특별히 권변(權忭)의 시호(諡號) 내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지경연 심택현(沈宅賢)이 말하기를,
"충주(忠州)에 있는 태실(胎室)을 가봉(加封)할 때에 석물(石物)을 끌고 지나가는 길 곁의 밭 곡식이 많이 손상되었으니, 더러는 값을 주기도 하고 더러는 역사를 감해 주기도 하여 백성의 심정을 위로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태실이 있는 봉우리에 당초에 정한 금표(禁標)가 몇 보(步)나 되었는가?"
하니, 심택현이 말하기를,
"당초에 정한 것이 2백 보이었는데 이번에 다시 1백 보를 더하여 도합이 3백 보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대행조(大行朝)의 태실(胎室)은 사체가 중대하므로 가봉(加封)한 금표를 그대로 해야 하거니와, 이 뒤 청주(淸州)에 있는 태실을 【당저(當宁:현재의 임금. 곧 영조를 가리킴)의 태실이다.】  가봉할 적에는 물리어 정하지 말 것을 해조(該曹)가 알도록 하라."
하매, 심택현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비록 백성을 돌보시려는 뜻으로 이런 분부를 내리시게 되었지만, 금표를 넓게 잡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 초부(樵夫)와 목동(牧童)들이 가까이 달려들게 되는 염려가 없겠습니까? 사체가 있기에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내가 선왕(先王)들의 업적을 떨어뜨리게 되지 않는다면, 비록 금표를 넓게 정하지 않더라도 어찌 초부와 목동들이 가까이 달려들게 될 염려가 있겠는가?"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정지하라고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그만두라고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고, 사간원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9월 26일 을묘

매상(昧爽)393)  때부터 묘시(卯時)까지 안개가 자욱하고, 진시(辰時)에는 해 복판[日中]에 검은 기(氣)가 있었으며, 밤에는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경기(京畿) 유생(儒生) 신명희(申命羲)가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9월 27일 병진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소두(小豆)와 같았다.

 

승정원에서 천둥의 이변(異變)을 들어 진계(陳啓)하니, 비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을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영휘전(永徽殿)에서 전알례(展斡禮)를 거행하였다.

 

9월 28일 정사

묘시(卯時)에 임금이 영휘전에서 예식대로 옥책(玉冊)과 금보(今寶)를 친히 올리고, 잠시 욕주(浴主)를 기다리었다. 정시(正時)에 임금이 전(殿)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해서 들어가 남쪽으로 향하여 서고, 대축(大祝)이 신주(神主)를 받들어다 탁자 위에 안치(安置)하고 장차 욕주(浴主)하게 되매, 임금이 창문을 열고 발[簾]을 걷도록 명했다. 욕주가 끝나자, 임금이 봉심(奉審)하고서 물러 서고, 제주관(題主官)이 상(床) 앞에 서서 제주(題主)를 끝내고 준례대로 사자관(寫字官)으로 하여금 광칠(光柒)하게 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윤허했다. 광칠이 끝나자 다시 봉심하고 오시(午時)에 친히 환안제(還安祭)를 거행하였으며, 제사가 끝나자 환궁(還宮)하였다.

 

9월 29일 무오

호서(湖西)의 은진(恩津)·강경(江景)의 들판 가운데에 돌연히 큰 곰이 나타나 마구 사람들을 물었다고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