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기미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친히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걸가(乞暇)하여 쉬다가 돌아와, 연로(沿路)의 민간 폐해를 들어 차자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려 시행하도록 윤허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홍용조(洪龍祚)와 음성 현감(陰城縣監) 정유일(鄭惟一)을 파직하니, 병을 핑계하고 영중추부사의 행차를 배웅하지 않았으므로 차자(箚子) 끝에 논했기 때문이다.
10월 3일 신유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친히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거행하였다.
10월 4일 임술
부묘 도감(祔廟都監)에서 아뢰기를,
"임인년394) 에 숙종 대왕(肅宗大王)을 부묘(祔廟)할 때에 신연(神輦)을 종묘의 남문(南門)밖 악차(幄次)에 봉안(奉安)한 다음, 도제조(都提調) 이하가 봉심(奉審)하였고,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겉 함[櫃]을 벗기고서 다만 안 함에 봉표(封標)를 고쳐 배치(排置)했었으니, 이번에도 또한 이대로 하여야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그만두라고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고,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성진령(成震齡)을 사간(司諫)으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송감(宋鑑)》을 진강(進講)했는데, 경연관 한원진(韓元震)이 아뢰기를,
"한탁주(韓侂胄)395) 가 경당(京鏜)396) 의 꾀에 따라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고 조여우(趙如愚)를 모함하여 한 시대의 선인(善人)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려고 도모했었습니다. 대개 소인들이 군자를 모함하여 죽일 적에 만일 사람마다에게 각각 죄명(罪名)을 씌우다가 도리어 사세가 시행될 수 없게 되면, 반드시 하나의 제목으로 혼합(混合)해서 씌워 일망 타진하는 꾀를 부리게 되는데, 혼동(混同)하는 죄목은 ‘역적[逆]’이란 글자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동경 당화(東京黨禍)397) 도 또한 불궤(不軌)398) 라고 지목하여 선류(善類)들을 모조리 제거했던 것이니, 경당의 꾀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역적[逆]’이란 하나의 글자는 진실로 소인들이 군자를 모함하여 죽이는 권한으로 삼은 것은 천고(千古)의 똑같은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고, 임금이 승지 김조택(金祖澤)에게 묻기를,
"호남(湖南)의 일을 진달해야 할 것이 있겠는가?"
하매, 김조택이 두어 건의 폐막(弊瘼)을 대략 진달하니, 임금이 모두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김조택이 막 호남의 방백(方伯)으로 있다가 체직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10월 5일 계해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10월 6일 갑자
영의정 정호(鄭澔)가 상소하여 치사(致仕)399) 하기를 원하였는데,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0월 7일 을축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 나아가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3경(三更) 2점(二點)에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재전(齋殿)으로 나아가자 찬례(贊禮)가 전도(前導)하여 판위(板位)에 나아가 임금이 멈추어 서니, 집례(執禮)가 ‘부복(俯伏)·곡(哭)을 노창(臚唱)하매, 임금이 부복하여 곡하고 제신(諸臣)들도 모두 조곡(助哭)하다가 지곡(止哭)하고 사배(四拜)를 마치었다. 찬례(贊禮)가 전도하여 임시 변통으로 재전(齋殿)으로 나아갔다. 찬례가 옷을 바꾸어 입을 것을 계청(啓請)하자, 제신들도 또한 모두 흑단령(黑團領)을 입었다. 4경 1점에 찬례가 전도하여 판위(板位)로 나아가 임금이 부복(俯伏)하여 곡하다가 지곡하고 사배를 하고나매, 찬례가 전도하여 관세(盥洗)를 끝내고 영좌(靈座) 앞으로 나아가 분향(焚香)하고 관창(灌鬯)하고 전폐(奠幣)했다. 찬례가 전도하여 준소(尊所)로 나아가 서쪽으로 향하고 서서 짐주(斟酒)하고 찬례가 전도하여 영좌 앞으로 나아가 초헌례(初獻禮)를 행하고 내려와 복위(復位)했는데, 집례(執禮)가 소차(小次)로 나아가기를 청해도,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과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를 끝내자, 임금이 부복하고서 곡하고 제신(諸臣)들도 조곡하다가 곡을 끝내고 사배(四拜)하니, 찬례가 제례가 끝났음을 아뢰었다.
10월 8일 병인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공경(公卿) 사서(士庶)의 길복(吉服)과 모두 청색(靑色)을 숭상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황해 병사(黃海兵使) 원백규(元百揆)가 사폐(辭陛)하매,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융정(戎政)에 힘쓰도록 하고, 전교하기를,
"일찍이 선왕조(先王朝)에서 윤대(輪對) 때 무신(武臣)들은 반드시 융복(戎服) 위에 관포(冠袍)를 입었었는데, 요사이는 그렇지 않아 관포 안에 모두 창의(敞衣)를 입으니 신칙(申飭)해야 한다."
하였다. 도승지 정형익(鄭亨益)이 아뢰기를,
"무신(武臣)들이 흑천익(黑天翼)을 입고 수화자(水鞾子)를 신는 것은 방사(放射)하기에 편리하고 행보에도 편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효종(孝宗)께서 일찍이 이것을 신칙하셨는데도 이제 모두 입기를 싫어하니 자못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병조로 하여금 신칙하도록 하겠다. 국가가 생긴 이래로는 각각 숭상하는 복색(服色)이 있었다. 우리 나라는 동쪽에 있는 나라이니 마땅히 청색을 숭상해야 할 것인데 사람들이 모두 흰 옷을 입으니, 어찌 아름다운 징조이겠는가? 하물며 선왕조의 영갑(令甲)400) 이 있으니 공경(公卿)에서 사서(士庶)까지 길복은 일체로 청색을 숭상하라."
하였다.
정언 성대열(成大烈)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이진(權以鎭)은 곧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외손인데, 선정을 존숭하고 사모하는 선류(善類)들을 원수처럼 여기고 선정을 장해(狀害)하는 흉도(凶徒)들에게 편당하고 아부하여, 선류들이 조정에 있게 되면 몸을 사리어 떠났다가 흉도들이 국정(國政)을 잡게 되면 득지(得志)하여 나서고 있어 의리를 거스리고 인륜을 무시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시급히 변방으로 내치는 법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평 군수(嘉平郡守) 조창수(趙昌壽), 남포 현감(藍浦縣監) 김석좌(金碩佐), 적성 현감(積城縣監) 김석순(金錫順)은 더러는 백성을 침학(侵虐)하는 짓을 하고 더러는 가렴 주구(苛斂誅求)하는 짓을 하였으며 더러는 법을 어기는 짓을 했으니, 모두를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기를 청합니다. 평해 군수(平海郡守) 정연(鄭淵)은 비천(卑賤)한 사람으로 섬기는 짓을 잘하고, 양덕 현감(陽德縣監) 변정화(卞廷華)는 시정(市井)의 거간꾼이니,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이진(權以鎭)에 관한 일은 사람 논박을 과중하게 한 것이기에 내가 진실로 취하지 않는다. 정연과 변정화는 파직하라. 세 고을 수령에 대한 풍문(風聞)의 말을 어찌 반드시 모두 믿겠는가? 우리 나라는 사람 쓰기를 지극히 좁게 하여 단지 문벌(門閥)로만 취하므로, 비천한 사람들은 당초에 이미 스스로 금을 그어 놓아 용기를 가질 수 없게 되므로 내가 항시 개탄해 왔으며, 사람을 논할 적에 먼저 현달(顯達)과 비천을 거론하는 것을 진실로 병폐로 여겼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의 책봉례(冊封禮)를 치룬 다음에 진하(陳賀)하는 한 가지의 절차는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고찰해 보건대, ‘백관(百官)이 궁문(宮門) 밖에 나아가 먼저 내전(內殿)께 진하를 한 뒤에 다음으로 대전(大殿)께 진하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존숭(尊崇)과 책봉례 뒤에 백관의 진하는 반드시 먼저 당전(當殿)께 해야 하겠습니다. 저번날의 초기(草記)에 비답하신 분부대로 백관의 진하를 먼저 대정(大庭)에서 거행하게 된다면 먼저 당전께 진하해야 하는 예법에 어그러지게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그렇다면 옛 준례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9일 정묘
권업(權𢢜)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10월 10일 무진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수해(水害)와 천둥의 이변을 들어 면직해 주기를 바라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漢)나라 때에 하던 책면(策免)을 나는 하지 않겠다."
하였다. 조도빈이 유봉휘(柳鳳輝) 및 소하(疏下) 오적(五賊)에 관하여 아뢴 것을 가지고 시급히 윤허해 주기를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후에 이미 다 말했는데, 지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조도빈이 말하기를,
"한이조(韓頤朝)는 수의(繡衣)401) 로서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가 논계(論啓)하기를 성상의 뜻에 들게 하지는 못했었습니다마는, ‘책궁(責躬)하신다.’는 분부를 내리기까지 하셨음은 성상께서 사신(使臣)을 예대(禮待)하셔야 하는 도리에 있어 화평(和平)이 모자라게 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사(御史)의 논계는 마땅히 다스렸는지 않았는지에 관하여 논해야 하는 법인데, 이성좌(李聖佐)를 세력을 믿은 것이라고 책하였으니, 단지 전파되는 말을 지나치게 곧이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공심(公心)에 해로운 짓을 했었다. 내가 이미 내 자신을 반성했으니, 그도 또한 마땅히 자신(自新)해 가야 할 것이고, 이 때문에 자처(自處)해야 할 것은 없다."
하였다. 조도빈이 또 함경도(咸鏡道) 덕원(德源)·원산포(元山浦)의 선세(船稅)를 상의원(尙衣院)에 떼어 주어 어공(御供)에 보충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미루어 오다가 끝내는 윤허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대신은 국가를 보상(輔相)해 가는 것인데, 천재와 이변이 거듭 생기는 때를 당하여 상의원에 떼어 주는 일을 누누하게 진달하는 짓을 하여, 한갓 이속(吏屬)들의 소원만 들어주고 민생들의 폐해는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런 정승을 장차 어디에다 쓸 것인가?"
【태백산사고본】 9책 10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05면
【분류】왕실(王室) / 과학(科學)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행정(行政)
[註 401] 수의(繡衣) : 암행 어사(暗行御史).
사신은 말한다. "대신은 국가를 보상(輔相)해 가는 것인데, 천재와 이변이 거듭 생기는 때를 당하여 상의원에 떼어 주는 일을 누누하게 진달하는 짓을 하여, 한갓 이속(吏屬)들의 소원만 들어주고 민생들의 폐해는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런 정승을 장차 어디에다 쓸 것인가?"
10월 12일 경오
오시(午時)에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 나아가 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친히 거행하고서 신연(神輦)을 모시고 태묘(太廟)로 나아갔다. 전교하기를,
"비궁(閟宮)402) 은 엄숙하고 조용해야 하는 자리로서 대궐안과 같은 곳이 아니기에, 대신(臺臣)이 전도(前導)하는 소리가 종묘 뜰에 울리게 됨은 경근(敬謹)한 도리가 아니니, 이 뒤로는 대문 안에서는 전도하는 소리를 금단하고, 승정원이 거행하는 소리도 일체로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의주(儀注) 내용에 ‘재전(齋殿)으로 들어간다.’라는 한 조관이 있는데, 선왕조(先王朝)의 병진년403) 에 체후(體候)가 편치 못하신 참이라 임시 변통하여 재전으로 나아가셨다. 이로 본다면 부득이하여 한 일임을 지금 헤아려볼 수 있다. 나는 우선 병도 없는데다가, 또한 신주(神主)를 신악(神幄)에다 임시 변통으로 모셔 놓았는데, 부묘(祔廟)하기 전에 내가 어찌 재전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망묘례(望廟禮) 다음에 마땅히 그대로 막차(幕次)에 머물러 있겠다."
하매, 약방(藥房)의 3제조(提調)가 청대(請對)하여, ‘이런 추운 철을 당하여 노천(露天)에 계시며 밤을 새우시면 반드시 손상(損傷)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아뢰고, 강력히 재전으로 들어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신연이 아직 신악에 머물러 있는데 내가 어찌 차마 재실(齋室)로 가서 편히 잘 수 있겠는가?"
하였다. 도제조 민진원(閔鎭遠)이 누누이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만일 망묘례(望廟禮)가 저물어지게 된다면 그 다음의 절차도 매우 많은데다가 또한 품결(稟決)해서 해 가야 할 일들이 있어 사세가 매우 군속(窘速)해집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부터 이후에는 비록 효도를 하려고 하더라도 하게 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밤을 새우기로 뜻을 결단했다."
하였다. 대신이 망묘례(望廟禮)가 또한 저물어지겠음을 진달하니, 부득이 억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친제(親祭)하는 의절(儀節)은 매우 번다하여 각실(各室)의 준소(尊所)에 나아갔을 적에 더욱 시간을 지체하게 됩니다. 그 전부터 친제하게 될 적에는 제1실(第一室)의 전작(奠爵)을 기다리다가 제2실(第二室) 이하는 차례차례로 미리 술을 따라 놓고 기다리게 되는데, 예절에 있어 조금도 방해로운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체로는 마땅히 직접 각실의 준소에 나아가서 술을 따라 전작해야 하나, 이렇게 하면 제례(祭禮)가 매우 지체되므로 이미 선조(先朝) 때부터 변통해서 하게 된 것이다. 진달한 말대로 하되, 미리 따를 때에 1잔은 따라서 머물러 놓았다가 준소에 나아간 다음에 1잔은 따라서 전작(奠爵)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10월 13일 신미
임금이 새벽에 부묘(祔廟)한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3경(三更) 1점(一點)에 임금이 재전(齋殿)에서 나와 묘정(廟庭)으로 들어가 판위(板位)로 나아갔다. 임금이 서 있고 신연(神輦)이 묘문(廟門)으로 들어왔다. 임금이 국궁(鞠躬)하고 공경히 맞이하여 판위에 부안(祔安)한 다음에 독교관(讀敎官)이 배향(配享)하는 신하에 대한 도교서(都敎書)를 읽기 끝내자, 12실(室)에의 작헌례를 예식대로 거행했는데, 하늘이 이미 밝았다. 미시(未時)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의식대로 진하(陳賀)를 받고 이어 대신들에게 전상(殿上)으로 올라오도록 명하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 우의정 조도빈(趙道彬),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진복(進伏)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부묘(祔廟)를 막 끝내고서 전(殿)에 임하여 진하를 받고나니, 처창(悽愴)하게 여겨지는 감회(感懷)가 더욱 마음 속에 간절해진다. 내가 부덕(不德)한 몸으로 무거운 선조(先朝)의 부탁을 받았기에 떨리도록 두려워하는 마음이 낮이나 밤이나 풀리지가 않는다. 하물며 지금 삼년(三年)의 상제(喪制)가 이미 끝났으니 바로 내가 맨처음으로 국정(國政)을 하게 되었다. 군신(君臣)의 사이에 서로가 공경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기에 이제 세 가지 조목의 경계를 가지고서 1장의 글을 만들었으니, 경(卿)들이 의정부로 가지고 가서 팔도(八道)에 반포하라."
하고, 인하여 봉서(封書)를 탑전(榻前)에 내리매, 좌의정 홍치중이 꿇어앉아서 받아 개탁(開拆)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내가 부덕한 몸으로 무거운 선왕(先王)들의 부탁을 받았기에 낮이나 밤이나 떨리며 마치 깊은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 같았었다. 예법에 따라 부태묘(祔太廟)를 하고 전(殿)에 임하여 진하(陳賀)를 받노라니 옛일에 대한 감회(感懷)와 새로운 일에 대한 애통으로 추모(追慕)가 더욱 간절해졌다. 아! 양암(諒闇)404) 의 상제(喪制)가 이미 끝났으니 바로 내가 맨 처음으로 국정을 해 가야 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자신이 힘쓰기에 겨를이 없을 때인데, 또한 어찌 서로가 권면하고 경계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한 가지 조목의 경계를 여러 대부(大夫)에게 유시(諭示)한다.
1. 붕당(朋黨)을 경계하는 것이니, 아! 편당하는 풍습이 앞서므로 공정한 도의(道義)가 어두워졌다. 앞 수레가 넘어졌는데도 뒷 수레가 경계하지 않고 있으니,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아! 대소의 신료(臣僚)들은 나의 맨처음의 국정에 당하여 통절(痛切)하게 물아(物我)에 대한 사심을 제거하고 공심(公心)을 다하기로 힘쓴다면 어찌 우리 나라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1. 사치를 경계하는 것이니, 아! 우리 나라는 태평한 지 세월이 오래이기에 사치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옛적에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말이 ‘금(金)과 주옥(珠玉)은 주릴 때에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추울 적에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었으니, 이는 바로 적당한 말이다. ‘면백(綿帛)도 오히려 따뜻한데 어찌 꼭 금수(錦繡)인가?’라는 섭이중(聶夷中)405) 의 농가를 불쌍히 여긴 시[傷田家詩]는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1백 가구(家口)의 살림살이를 허비하여 한 몸뚱이의 욕심을 받드는 것이 이처럼 해야 하겠는가? 당면한 지금 위로 공경(公卿)에서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종길(從吉)406) 할 때에 더욱 마땅히 힘써야 한다.
1.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니, 아! 술은 맛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곧 실로 미치게 하는 약이다. 옛적의 대우(大禹)도 깊이 염려했던 일과 우리 열성(列聖)들께서도 경계를 남겨 놓은 것이 지난날에 소소(昭昭)407) 하였으며, 우리 성고(聖考)께서 술을 경계한 윤음(綸音)도 지극하고 극진하게 되어 있건만 오히려 그전의 풍습을 고치지 못하므로 내가 일찍이 마음속으로 개탄스럽게 여겼다. 아! 사람의 천성(天性)은 진실로 본래부터 착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더러 기질(氣質)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또한 변화시켜서 착해지게 하려고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맑은 기질을 혼탁하게 만들고 아름다운 기질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술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부터는 마땅히 더 자신들을 가다듬어 깊이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 이 세 가지 조목 이외에도 어찌 말을 해야 할 것이 없겠는가마는, 편당하는 풍습이 없어진다면 공정한 도의가 나타나게 되어지고 사치하는 풍습이 제거된다면 쓸데없는 허비가 자연히 덜어지게 되며 마구 마시는 폐해를 경계한다면 본성(本性)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국가의 일을 잘해 가게 될 수 있고 민생이 이를 힘입어 안정되어질 수 있으며 직무(職務)를 잘 닦아서 거행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오늘날의 급무(急務)인데, 요체(要諦)는 마음 하나에 달려 있고, 그렇게 해 가게 되는 근본은 또한 과인(寡人)의 몸에 달려 있다. 아! 내가 심학(心學) 공부에 있어서 또한 능히 하지 못했기에 이번의 이런 말은 말로만 가르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내가 일찍이 깊이 싫어해 온 것이기 때문에 여러 백관들을 칙려(飭勵)하는 것이다. 또 ‘심(心)’자 하나에 더 힘쓰는 것으로 따라서 자성(自省)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니, 아! 그대들 대소의 신료(臣僚)는 나의 이런 분부를 체득(體得)하여 힘쓰고 또 힘쓰라. 이제는 그 그림자를 관찰하면서 표상(表象)을 보습(補拾)해 가게 된다면, 내가 비록 부덕한 몸이기는 하지만 어찌 맹렬하게 반성하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잘 알아차리어 나의 말에 어그러지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조정의 편당하는 논란은 백년 동안이나 고질이 된 것이기에 하루 아침이나 하루 저녁에 제거할 수 없는 폐단이긴 하나, 성상께서 반드시 성심(誠心)으로 제거하려고 하신다면 군하(羣下)들이야 또한 어찌 그대로 받들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이는 한때의 위령(威令)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무릇 처분해 가시는 일을 한결같이 천리(天理)대로 하시어 계착(係着)하는 바가 없게 된다면, 군하들은 자연히 감응(感應)하게 되어 비록 한 편에 계착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소멸하여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분명하게 살피고 공정하게 분변한 다음에야 붕당(朋黨)의 폐해를 거의 바로잡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치하는 풍습에 있어서는 서민의 처첩(妻妾)들도 모두 비단 옷을 입는 버릇을 보통으로 여기고 있으니, 먼저 궁중(宮中)에서부터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따른다면 아래 있는 사람들이야 누가 보고서 감동하여 그에 감화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폐단을 제거하시려고 단지 신칙(申飭)하기만 일삼는다면 비록 하루에 열 번을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더라도 반드시 제거하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신료(臣僚)들 중에 학식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아침이나 저녁으로 강확(講確)하여 기필코 폐단을 개혁할 수 있는 계책을 찾아내어 되도록 나은 계책을 취택하여 쓰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형식이 될 뿐일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윤심형(尹心衡)을 부교리(副校理) 겸보덕(兼輔德)으로 삼았다.
10월 14일 임신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전교(傳敎)하시기를,
"부묘(祔廟)하는 예를 치루었으니 마땅히 즉시 문묘(文廟)를 전알(展謁)해야 할 것인데, 올해 안에는 사세가 주선하기 어렵게 되었다. 선비들을 뽑아야 하는 일도 또한 지장이 많게 되었으니, 선왕(先王)들의 고사(故事)대로 내년 2월에 거행하기로 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입진이 끝나자 도제조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종묘(宗廟)를 수리할 때에 망건장(網巾帳)과 외면장(外面帳)을, 성상께서 분부하신대로 새것으로 옛것을 바꾸고 그전의 것은 불살라버리는 것이 준례입니다마는, 이번의 것은 곧 올봄에 마련한 것으로서 비록 습기(濕氣) 때문에 그 빛깔이 조금 변하기는 했어도 본질은 새것과 같습니다. 만일 이번에 조종(祖宗)들께서는 신의(身衣)도 세탁하게 하셨던 검덕(儉德)을 체념(諦念)하여, 세탁해서 다시 염색하여 두었다가 뒷날에 수리할 때에 쓰더라도 미안스러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좋은 뜻이기는 하다마는, 대우(大禹)는 의복은 험하게 했어도 불면(黻冕)은 더없이 아름답게 했었다. 제사 때에 입는 것이라 오히려 또한 아름답게 한 것이니, 하물며 신좌(神座)에 배설(排設)하는 장막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미 치웠다면 도로 사용하는 것은 사체에 미안할 일이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듣건대 각실(各室)의 장막을 새로 마련하느라 호조(戶曹)에서 내는 공가(貢價)가 은(銀)으로 2천여 냥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조종(祖宗)들께서 검소를 숭상하시던 덕을 체념(體念)하여, 빨아서 물들였다가 다시 사용하더라도, 신의 생각에는 마침내 그것이 불가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도승지 정형익(鄭亨益)이 말하기를,
"신이 충주(忠州)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의정 정호(鄭澔)를 지나오다 만나 보았었는데, 강가의 바람이 마구 닿는 쓸쓸한 초가집에 대문에는 응접하는 사람 하나가 없고 단지 어린 손자 하나가 응접했었습니다. 조가(朝家)에서 우악(優渥)하게 예우(禮遇)해야 하는 도리에 있어 은덕(恩德)을 내려 돌보아 주는 방도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전에도 또한 그런 예가 있었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이 금천(衿川)에서 살고 있었는데 너무도 심하게 청빈(淸貧)하므로 인조(仁祖)께서 관에서 초당(草堂)을 지어 주도록 명하여 지금도 오히려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벼슬이 대신에 이르렀었는데도 그처럼 청빈하다니 듣기에 매우 감동되고 한탄스럽다. 이원익의 고사대로 약간의 집을 만들어주고, 본읍(本邑)의 사노비(寺奴婢)를 각각 한 사람씩 갈라 주게 하라."
하였다.
10월 15일 계유
장령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하여 거듭 토역(討逆)하기를 청하고, 또한 물에 잠기어 재해를 입은 곳은 수전(水田)·한전(旱田)을 막론하고 모두 급재(給災)408) 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상건(上件)의 일에 있어서는 전후에 이미 말을 했고, 급재하는 일에 있어서는 묘당(廟堂)에서 구별하여 처결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하직하는 수령(守令) 및 차사원(差使員)과 도로 내려가는 수령 및 변장(邊將)을 불러 보고 봉공(奉公)과 직책을 다하는 도리를 유시(諭示)하였다.
10월 16일 갑술
왕대비전(王大妃殿)이 저승전(儲承殿)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현록(李顯祿)을 승지(承旨)로, 임주국(林柱國)을 헌납(獻納)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김상옥(金相玉)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고, 특별히 이병태(李秉泰)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고, 이복연(李復淵)을 통제사(統制使)로, 정수송(鄭壽松)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10월 17일 을해
부제학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 우선은 ‘붕당(朋黨)’ 두 글자에 대하여는 한쪽에 놓아 두시고 먼저 의리의 지극한 곳에 나아가 그 당연히 해야 할 바를 밝히어,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모두 민이(民彝)409) 와 물칙(物則)410) 의 소재(所在)를 환히 알게 되도록 한다면, 지난날에 올바르지 못했던 사람들은 오직 오늘날에 있어서도 사특한 짓을 하게 될까 두려워하게 되고, 그전에 충성스럽지 못했던 사람들은 오직 다음에도 반역하는 짓을 하게 될까 두려워하게 되어, 탕평(蕩平)되기 바라지 않아도 자연히 탕평해지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치하는 폐단에 있어서는 반드시 법도에 되돌아가게 하시려면, 궁중(宮中)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우악(優渥)하게 비답하였다.
10월 18일 병자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411) 을 거행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상참은 조종조(祖宗朝)에서 행하던 아름다운 일인데, 삼년상(三年喪)이 막 끝나자 바로 거행하도록 명하시니, 성상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구하시는 것을 이에 있어서 알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굳게 작정하기를 간단이 없게 하여, 시작만 있고 결말이 없게 되지 않도록 하신다면 나라를 다스려 가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양암(諒闇) 중에 있는 몸이라 성대(盛大)한 일을 거행하지 못하다가 삼년(三年)의 상제(喪制)가 이미 끝났기에 이제는 거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신이 권면하고 경계하는 말은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영남(嶺南)의 방백(方伯)과 호남(湖南)의 경차관(敬差官)이 모두들 급재(給災)를 청했습니다마는, 올해의 농사가 비록 재해를 입은 데가 있기는 해도 크게 흉년이 들지는 않았으니, 마땅히 일체로 방색(防塞)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절수(折受)하는 한가지 일은 요사이의 더없이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영변부(寧邊府)의 검산(檢山)·백령(白嶺) 두 곳에 있는 산화전(山火田)은 당초에 종부시(宗簿寺)에 소속했다가 뒤에는 숙빈(淑嬪)의 방(房)에 소속했었는데, 선왕조(先王朝)에서 민폐를 진념(軫念)하시어 혁파했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종친부(宗親府)에 소속하게 되어 본읍(本邑)의 민생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해가 되고 있으니 마땅히 혁파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사태로 말하자면, 의리(義理)가 펴이게 될 수 있는 날이 없고, 처분(處分)이 행해지게 될 수 있는 때가 없는데 한갓 구구(區區)하게 말단의 일만을 하고 있습니다. 근본이 어지럽고서 말단이 다스려지는 것을 신(臣)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이라.’는 말은 합계(合啓)한 일을 가리키는 것인가? 대소의 신료(臣僚)들이 ‘당비(黨比)’ 두 글자를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는다면 무릇 일을 거의 해가게 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국가의 행복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조도빈이 말하기를,
"먼 시골의 사자(士子)들 중에 이미 과거를 하지 못했기에 또한 한 말[斗]의 녹도 받게 되지는 못했지만, 백집사(百執事)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데 초야(草野) 속에서 헛되이 늙어버리게 되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도목정(都目政) 때마다 널리 시골 사람을 의망(擬望)하기가 비록 쉬운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초사(初仕) 한 자리의 의망을 시골 사람의 과(窠)412) 로 작성하여, 주(註)를 달아 입계(入啓)하도록 하고, 이 이외에도 손을 쓸 수 있는 데가 있게 되면 또한 참조(參照)해서 의망하여, 조가(朝家)에서 검용(檢用)하는 뜻을 보여준다면 거의 사람들이 흥기(興起)하게 될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하고, 홍치중이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한 차례의 도목정(都目政) 때에 의망하게 되는 사람이 3명에 지나지 않고 낙점(落點) 받는 사람이 1명에 벗어나지 않기는 해도 전연 검용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도 하지만, 만일 영구히 정식(定式)을 삼기로 한다면 규모(規模)가 넓지 못하니, 사체에 있어서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일정한 규례(規例)로 하기는 어렵지만 양전(兩銓)에 신칙(申飭)하여 마음을 써서 수용(收用)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홍치중이 아뢰기를,
"부묘(祔廟)한 뒤에 바로 문묘(文廟)를 전알(展謁)하는 일은 본래부터 열성(列聖)들께서 이미 시행해 오던 규례입니다. 일찍이 선왕조(先王朝)에서 옥후(玉候)가 편치 못하시므로 부득이 물리어 거행했었습니다마는, 그대로를 예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추위가 심하고 해가 짧아 유생(儒生)들을 과시(課試)하기에 방해로운 것 때문에 물리어 거행하게 된다면 사체의 경중(輕重)에 있어서 도치(倒置)를 면하지 못하게 되니, 전알하시는 예절을 마땅히 올해 안에 거행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입시(入侍)한 제신(諸臣)에게 물어보고서, 문묘(文廟) 전알(展謁)을 동짓달 그믐 안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정지하도록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그만두도록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고,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이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거행하였다.
김용경(金龍慶)을 헌납(獻納)으로, 황선(黃璿)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10월 20일 무인
임금이 새벽에 명릉(明陵)에 행행(幸行)하여 전알례(展謁禮)를 거행하고, 회가(回駕)하여 양철평(梁鐵坪)에 이르러 분부하기를,
"여기에서 성조(聖祖)의 기적비각(記績碑閣)과의 거리가 서로 바라 볼 수 있는데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한 번 가서 친히 봉심(奉審)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군병(軍兵)과 백관(百官)은 모두 길가에 머물러 있고, 단지 승지·사관(史官)·내관(內官) 각각 두어 사람씩만 거가(車駕)를 따르고, 등롱수(燈籠手)와 협연군(挾輦軍)이 호위하고 가면 된다."
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부제조 정형익(鄭亨益) 등이 일제히 같은 말로 아뢰기를,
"시간이 이미 저물었고 길이 또한 혐악하여 가실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들의 말이 이러하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에는 마땅히 친히 봉심하겠다."
하고, 2경(二更)에야 비로소 환궁(還宮)하였다.
영남(嶺南)의 대구(大邱) 등 세 고을에 사나운 범이 횡행하여 사람 15명을 물어 죽이고, 영산(靈山) 등 세 고을은 인가가 1백 44호나 떠내려 갔으므로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고양(高陽) 유생(儒生) 이계영(李啓英) 등이 상소하여, 고양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위로해 기쁘게 해 주는 방도로 삼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그전에는 없던 규례(規例)를 새로 시작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평안도(平安道) 유생 최엽(崔熀)이 상소하여, 송사를 청리(聽理)할 때에 뇌물을 받은 수령(守令)을 각별하게 죄를 과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별다르게 신칙(申飭)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강원도 유생 이승수(李昇粹)가 상소하여, 영동(嶺東)의 아홉 군(郡) 사이에 특별히 수영(水營)을 설치하여 방어해 가는 계책을 하도록 하고, 또한 울릉도(鬱陵島)에는 변장(邊將) 1원(員)을 두고서 민간을 모집하여 경작(耕作)하게 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전에 곤수(閫帥)가 없던 데에 새로 두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10월 22일 경진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임금이, 두 동조(東朝)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세 번째의 습의(習儀)하는 날에 차장(遮帳)과 포진(鋪陳)을 그전의 것을 사용하게 한 것을 들어, 호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천하의 것을 다해서라도 어버이에게는 검소하게 하지 않는 법이다. 태모(太母)413) 께 존호를 올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어찌 잘못된 소견을 지키려고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전라도 유생(儒生) 이유(李)가 상소하여, 편저(編著)한 책을 올렸다. 《군범책(君範策)》이란 것으로서 무릇 43편(篇)의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네가 진언(進言)한 성의를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10월 23일 신사
권적(權𥛚)을 부응교(副應敎)로, 박사성(朴師聖)을 교리(校理)로, 박필정(朴弼正)을 장령(掌令)으로, 심택현(沈宅賢)을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관명(李觀命)이 그의 아우인 고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을 이장(移葬)하기 위하여 청가(請暇)하고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했는데, 이관명이 치지(致知)하고 격물(格物)하여 옳음과 그름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학문의 요체(要諦)가 됨을 진달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받아들이며 선온(宣醞)414) 하여 보냈다.
10월 24일 임오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홍석보(洪錫輔)가 사폐하니, 임금이 인견했는데, 홍석보가 관서(關西)의 군제(軍制)가 허술함과 군향(軍餉)이 고갈되어 가는 폐해를 대략 진달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지평 조명택(趙明澤)이 상소하여, 첫머리에 충신과 역적의 구분을 논하고, 다음으로 사치를 경계하고 술을 경계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할 것을 들어 권면하니,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10월 27일 을유
임금이 대왕 대비(大王大妃)에게 존호(尊號)를 올리었다. 임금이 인화문(仁和門)으로 해서 나와 인정전(仁政殿)의 서쪽 막차(幕次)에 이르렀고 조금 있다가 인정전 앞의 판위(版位)로 나아가 사배(四拜)를 마치고 꿇어앉으니, 집사(執事)가 옥책(玉冊)을 받들고 오매 우승지 조영복(趙榮福), 동부승지 김조택(金祖澤)이 두 손으로 받들어 임금에게 진헌(進獻)하자 임금이 받아서 바치었다. 정사(正使) 홍치중(洪致中)이 꿇고 앉아서 받아 도로 인정전에 놓았다. 집사가 금보(金寶)를 받들고 오매 받아서 바치기를 앞의 의식(儀式)대로 끝내고, 임금이 사배(四拜)하고서 계하(階下)로 내려가 섰다가, 정사가 옥책과 금보를 받들고 나가매 임금이 국궁(鞠躬)하고 지영(祇迎)하였다. 대내(大內)로 돌아와 신시(申時)가 되자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들의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유숭(兪崇)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10월 28일 병술
임금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존호를 올렸다. 임금이 인정전 계상(階上)의 판위(版位)에 나아가, 전후에 사배(四拜)하는 것과 옥책 및 금보를 받들어 올리는 모든 절차를 한결같이 어제의 의식대로 하고, 미시(未時)에 인정전으로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윤심형(尹心衡)을 응교(應敎)로, 김용경(金龍慶)을 교리(校理)로, 강일규(姜一珪)·이태징(李台徵)을 장령(掌令)으로, 이정박(李挺樸)을 지평(持平)으로, 홍성보(洪聖輔)를 정언(正言)으로, 한이조(韓頤朝)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10월 29일 정해
중궁전(中宮殿)의 책봉례(冊封禮)를 거행하였다.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들의 하례를 받은 다음에 전교(傳敎)하기를,
"부묘(祔廟)하는 예절을 이미 이루었고 유양(揄揚)415) 하는 의식도 또한 지냈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국조(國朝)의 지극히 중요한 예식이요 더없이 큰 경사이다. 광탕(曠蕩)416) 의 사전(赦典)과 일시 동인(一視同仁)하는 국정(國政)을 바로 이때에 해야 하는데, 다만 사면(赦免)하는 것은 소인(小人)들에게 요행한 일이 되기 때문에, 한(漢)나라 신하 오한(吳漢)이 죽을 때에 임하여 광무제(光武帝)에게 한 말이 ‘신무사(愼無赦)’란 세 글자뿐이었고, 문중자(文中子)417) 는 말하기를, ‘사(赦)가 없는 나라는 형벌이 반드시 공평한 법이니, 어찌 사를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국가에 경사가 있어야 반드시 사를 하여, 사를 반드시 외람하게 하지 않았었다.
이러므로 경사를 만나면 문득 사를 하는 것이 이미 규례(規例)를 이루게 되어진 것인데, 어제와 그저께에 잇달아 사문(赦文)을 내리게 되었고, 오늘도 진하(陳賀)가 있었으므로 또한 마땅히 반사(頒赦)를 해야 하니, 그렇고보면 3일 동안에 사지(赦旨)를 세 차례나 내리게 된다. 3년 동안에 두 차례 사하는 것도 옛사람이 오히려 경계했는데, 하물며 3일 동안이겠는가? 양일(兩日)의 사유(赦宥)를 하는 것은 동조(東朝)를 모시고서 백성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는 마음을 내가 어찌 어렵게 여기겠는가마는, 오늘의 일에 있어서는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나의 소견과 차이가 없다면 마땅히 줄여야 한다. 또한 이미 양일을 지냈으니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인데, 다만 비망기(備忘記)만 내리어 보기에 사치스럽고 아름답게 한다면 이는 어찌 형식만 차리고 마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사체에 있어서 미안스러운 일이다. 해조(該曹)의 절목(節目)에 의하여 단지 중외(中外)에 반교(頒敎)만 하게 하라. 아! 내가 어찌 애석하게 여겨 이런 말을 하는 것이겠는가?
뜻이 진실로 성실하게 해야 함에 있어서이다. 아! 사(赦)로 인하여 용서를 받음은 국법(國法)대로 준행하여 죄가 없게 됨만 못한 것이니, 아! 너희 대소의 신료(臣僚)들은 과인(寡人)의 뜻을 체념(體念)하여 하라. 나는 비록 부덕하기는 하더라도, 국가의 삼척(三尺)418) 은 곧 조종조(祖宗朝)에서 정해 놓은 것이고, 온 강토(疆土)의 민생들은 또한 조종조의 신자(臣子)인 것이니, 열성(列聖)들께서 흠휼(欽恤)419) 하시던 덕을 추앙하고 열성들께서 제정해 높은 법을 공경한다면 어찌 과매(寡昧)한 내가 인도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만일에 하루 아침에라도 다같이 착해져서 함께 춘대(春臺)420) 에서 다스리게 한다면, 내가 비록 부재(不才)하기는 하지만 더욱 수성(修省)421) 을 가하여 너희들을 만에 하나라도 진작(振作)시키고 흥기(興起)시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범법(犯法)하기를 밥 먹듯이 하다가 경사를 만나 사를 받게 된 사람들과 어찌 천지와 같은 차이가 있을 뿐이겠는가? 아! 오늘날 너희들이 만일 이 분부를 체념(體念)해 본다면 진실로 정녕(丁寧) 순순(諄諄)한 뜻일 것이다마는, 만일 한 장의 종이에 한담(閑談)한 것으로 만들게 된다면 어찌 대정(大庭)에서 한 때에 분부를 내린 것과 다르게 되겠는가? 아! 너희 군신(群臣)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준수하여 힘을 쓰고 또 힘을 쓰라."
하였다.
도승지 정형익(鄭亨益)이 아뢰었는데, 대략 말하기를,
"그 사체를 중히 여겨야 하는 도리에 있어 어제의 사례와 다르게 할 수는 없으니, 마땅히 일체로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내가 어찌 한 차례의 사(赦)를 아끼는 것이겠는가? 내가 압존(壓尊)422) 이 되면서도 높이고 낮추고 하는 것을 보인 것은, 특사(特赦)를 소중히 여기고 경사를 함께 누리려는 뜻이다."
하였다.
성진령(成震齡)을 승지(承旨)로, 유겸명(柳謙明)을 정언(正言)으로, 김상석(金相奭)을 검상(檢詳)으로, 임주국(林柱國)을 사간(司諫)으로 삼고, 호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을 보국(輔國)으로 승진시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만 부여하였다.
10월 30일 무자
왕세자(王世子)가 태묘(太廟)를 알현(謁見)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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