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기축
임금이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심경(心經)》의 진강(進講)을 끝내고, 이어 글제를 내도록 명하여 입시(入侍)한 제신(諸臣)들로 하여금 사운 율시(四韻律詩) 4수(首)씩을 지어 올리라 하고, 또 대제학 이의현(李宜顯)에게도 지어 올리라 명하였는데, 이의현이 본래부터 율시의 격식을 알지 못하여 명을 받들지 못하게 됨을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반드시 강요할 것이야 있겠는가?"
하였다. 제신들이 지어서 올리자, 이의현에게 과차(科次)하여 올리도록 하여, 수석을 차지한 교리(校理) 윤심형(尹心衡)에게 초피(貂皮) 이엄(耳掩)423) 으로 상을 주고, 이어 선온(宣醞)하고 파하였다.
이근(李根)을 장령(掌令)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지평(持平)으로, 성대열(成大烈)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1월 2일 경인
호서(湖西)에 지진하였다.
임금이 대조전(大造殿)에 환어(還御)하였으니, 곧 창덕궁이다. 병조에서 홍화문(弘化門)은 그전처럼 도로 닫아버리고 돈화문(敦化門)의 표신(標信)에 따라 여닫되, 건양문(建陽門)에는 입직(入直)하는 군사를 차출하고, 동룡문(銅龍門)도 파수(把守)를 해야 하는 뜻으로 아뢰니, 윤허하였다.
11월 3일 신묘
이재(李縡)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병태(李秉泰)를 승지(承旨)로, 김상석(金相奭)을 수찬(修撰)으로, 홍성보(洪聖輔)를 사서(司書)로 삼았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일전에 동궁(東宮)께서 묘현(廟見)할 때에 신(臣)이 모시고 갔었는데, 걸음걸이와 주선(周旋)함이 지극히 찬찬하였습니다. 영녕전(永寧殿)이 멀지 않은 데에 있었지만 대조(大朝)께 품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전배(展拜)를 허락하지 않다가 강청(强請)한 다음에야 비로소 허락했습니다. 어린 나이인데도 조행이 이러하였으니, 큰 성인(聖人)의 자품이 아니고선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동궁이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듣고서, 내 생각에 사체에 맞게 되었다고 여겼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호서(湖西)는 재해(災害)를 입었으므로 도신(道臣)이 시급히 부임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인데, 감사(監司) 김여(金礪)는 어버이를 떠나 홀로 가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감사의 권솔(眷率)에 있어서는 이미 숙종조(肅宗朝)의 성명(成命)이 있었으니 이제부터 준행하게 하면 공사(公私)가 양쪽 다 편리하게 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홍치중이, 호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저번날 준엄한 분부를 받들고는 도성(都城)문을 나가 대죄(待罪)하고 있는 뜻을 진달하니, 패초(牌招)하여 소임을 살피게 하도록 명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세자궁(世子宮)의 포진(鋪陳)424) 을 점퇴(點退)425) 해 버린 다음에 모두를 궁내(宮內)에서 마련했다고 했습니다. 만일에 조심스럽게 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해랑(該郞)을 신칙(申飭)함은 좋거니와, 궁내에서 마련한 일에 있어서 여염(閭閻) 사람들이 역정(逆情) 부리는 것에 가까왔으나, 아마도 대성인(大聖人)의 처사에는 어그러지게 됨이 있은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해당관의 뜻이 그전의 준례대로 하려는 것이기에, 드디어 그대로 두도록 명했던 것이고 역정을 낸 것이 아니었다. 이는 반드시 해리(該吏)와 계사(計士)가 잘못 전한 소치이니 해리와 계사를 유사(攸司)로 하여금 추고(推考)하여 죄를 다스리게 해야 한다."
하였다. 승지 이현록(李顯祿)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그전의 준례를 지키려고 한 낭관(郞官)을 용서하신 것은 이는 성덕(聖德)이 지극하신 일입니다. 다만 해리와 계사를 추고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신 분부에 있어서는, 그 일이 본시 지극히 미미한 것인데, 이를 글에다 나타내어 미천한 무리들을 빙문(憑問)하게 된다면, 아마도 사체에 있어서도 해롭게 되고 당초에 관대하게 용서하신 성의(聖意)도 아닌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 칭찬하며 즉시 도로 거두도록 명하였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11월 4일 임진
홍문록(弘文錄)에 권점(圈點)을 받아, 민응수(閔應洙)로 준점(準點)으로 삼고 서명구(徐命九)·유겸명(柳謙明)·홍성보(洪聖輔)·조명택(趙明澤)·이도원(李度遠)·이덕부(李德孚)·신노(申魯)·홍봉조(洪鳳祚)·윤섭(尹涉)을 차점(次點)으로 삼았다.
임금이 동지 정사(冬至正使)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 부사(副使) 정형익(鄭亨益), 서장관(書狀官) 김응복(金應福) 등에게 선온(宣醞)을 내려 주고 전송하였다.
11월 5일 계사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특진관(特進官) 대사성(大司成) 김취로(金取魯)가 성균관 유생(儒生)에 대한 권점(圈點)을 혁파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11월 6일 갑오
임금이 숙빈(淑嬪)의 사우(祠宇)에 행행(幸行)하여 전배례(展拜禮)를 거행하고, 회란(回鑾)426) 하다가 창의궁(彰義宮) 동구(洞口)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내가 장차 그전의 잠저(潛邸)에 들리겠다."
하니, 여러 승지(承旨)들이 모두 예법의 뜻에도 어그러지게 되고 또 날이 저물게 되어 들릴 수 없는 뜻으로 진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풍패(豐沛)427) 와 광무제(光武帝)의 남양(南陽)이 바로 오늘날의 일과 서로 부합(符合)되는 것으로서, 옛적에도 이미 그렇게 한 이가 있었는데 잠시 들리는 것이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니,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 민진원(閔鎭遠)과 응교(應敎) 윤심형(尹心衡) 등이 모두 거조(擧措)가 잘못되는 것으로 진달했지만, 임금이 듣지 않고 드디어 창의궁에 들어갔다가, 2경(二更)에야 비로소 환궁(還宮)하였다.
11월 7일 을미
진교하기를,
"사묘(私廟)를 전배(展拜)할 때에 입참(入參)했던 종신(宗臣)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은 지금의 품계(品階)가 현록 대부(顯祿大夫)이니, 그의 아들 중에 대가(代加)해 주고,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도 품계가 이미 현록 대부(顯祿大夫)이고 그 아들은 또한 대진(代盡)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의 아들에게 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홍현보(洪鉉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어제 본궁(本宮)에 들리실 적에 거가(車駕)를 돌리려는 즈음에 영을 내렸으므로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게 되어, 보기에 이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더구나 춘궁 저하(春宮邸下)께서는 나이가 어려 약하므로 혈기(血氣)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이번에 갑자기 저문 밤에 거가를 따르다가 차가운 기운이 몰아치면 쉽사리 감기가 들게 될 것입니다. 민망하고 염려스러움이 또한 마땅히 어떠했겠습니까? 전하께서 매양 이런 일에 있어서 의향(意向)이 계시는 바에 군하(群下)들이 하는 말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기필코 행하고야 마시므로, 어리석은 신이 죽을 죄를 지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성상께서 마음에 더욱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으시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누가 감히 금지하느냐고 여기시게 된다면, 이보다도 큰 일이 있게 되지 않을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또 왕세자(王世子)께서 바로 몽양(蒙養)428) 때에 당하였는데, 대조(大朝)께서 이렇게 하시는 일을 보고서 으레 행하는 법처럼 여기어, 무릇 하는 일에 있어서 오직 자신의 뜻대로 마구 하기를 주장하게 된다면 소소한 우려가 아닙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의(大意)가 좋은 말이기는 하다마는, 그 임시(臨時)에 분부를 내리게 되는 것은 옛적에도 또한 있었던 것인데, 어찌 의문(儀文)의 말단에 구애하여 구구(區區)한 짓을 하겠는가? 나는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11월 8일 병신
김유경(金有慶)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사묘(私廟)에 전배(展拜)하실 때에 ‘입참(入參)한 종신(宗臣)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에 있어서는 그의 아들 중에 대가(代加)하고,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에 있어서는 그의 아들에게 직을 제수하라.’고 하신 명이 계셨으니, 유사(有司)인 신하로서는 마땅히 그대로 받들어 거행해야 할 뿐입니다마는, 다만 이번의 사묘 전배 의주(私廟展拜儀注)는 이미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당을 전알(展謁)할 때의 전례에 의거한 것이기에, 바로 이번의 상전(賞典)은 또한 이 전례를 준용(遵用)하시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다만 그때 입참했던 종신들은 모두가 대원군의 후손이었으니, 이번의 종신에 대한 상전에 있어서 또한 그 전례를 사용함은 자못 의의(意義)가 없게 됩니다. 더구나 전성군의 제자(諸子)들은 모두 높은 품계(品階)에 있으므로, 이번의 대가로 인하여 또 높은 품계로 올림은 진실로 관작과 상전을 신중히 아끼는 도리가 아니게 되고, 자질(子姪)에게 직을 제수하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중도를 벗어나게 되기에, 신(臣)은 성명께서 마땅히 요량하며 처리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무릇 상전의 과람(過濫)함은 나도 옳게 여기지 않는다마는, 이번에 있어서는 사복(嗣服)429) 한 뒤에 처음으로 전배해서이고, 이 다음에 있어서는 내 생각에도 또한 번번이 그런 준례를 사용할 수 없다고 여긴다. 대원군의 사당에 입시(入侍)했던 종신에 있어서도 자손이어서가 아니라 성의(聖意)에 생각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또 전배할 때에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은 들어가지 않았고 다만 중관(中官)과 종신(宗臣)만 입시하였음은 예법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다. 지난 계묘년430) 에도 또한 이러한 사례가 있었는데, 유독 오늘날에 있어서는 말을 하고 있으니,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아! 내가 모든 일에 있어서 사친(私親)을 따르려는 소심(小心)한 뜻을 되도록 제약함을 힘써 따르고 있는데,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말을 그만 오늘날에는 듣게 되므로, 추모(追慕)하고 있는 중에 마음이 또한 편치 못하니 분부 내린 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병상(李秉常)이 이 상소에 논한 말은 비록 조정의 대체(大體)인 것은 아니더라도 진실로 상전(賞典)을 신중히 하고 명기(名器)431) 를 아끼는 뜻에서 나온 것인지라 전형(銓衡)의 사체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도, 받아들임을 입지 못하고 도리어 준엄한 비답을 받들게 되었으나, 대신과 삼사(三司)가 마침내 구제하여 바로잡지 못했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는 일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9책 10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08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429] 사복(嗣服) : 선인(先人)의 사업을 이음.[註 430] 계묘년 : 1723 경종 3년.[註 431] 명기(名器) : 작위(爵位)와 거복(車服).
사신은 말한다. "이병상(李秉常)이 이 상소에 논한 말은 비록 조정의 대체(大體)인 것은 아니더라도 진실로 상전(賞典)을 신중히 하고 명기(名器)431) 를 아끼는 뜻에서 나온 것인지라 전형(銓衡)의 사체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도, 받아들임을 입지 못하고 도리어 준엄한 비답을 받들게 되었으나, 대신과 삼사(三司)가 마침내 구제하여 바로잡지 못했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는 일이겠는가?"
11월 10일 무술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불러 보고, 차대(次對)를 거행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어제 옛날 잠저(潛邸)에 들리실 적에 거조(擧措)가 전도되어 사세가 매우 미안스럽게 되었습니다. 군상(君上)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은 바로 뒷날의 사례가 되니, 무릇 동작(動作)할 때에 있어서 되도록 조용하게 한 다음에야 화란(和鑾)432) 이 조용히 울린다는 뜻에 맞는 것입니다. 홍현보(洪鉉輔)의 상소는 진실로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친애(親愛)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또한 미안스러운 분부를 내리셨으니, 성상의 덕에 흠이될까 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도빈(趙道彬)도 또한 그 일을 들어 잇달아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명릉(明陵)을 전알(展謁)하였고 이번에는 사묘(私廟)를 전배(展拜)했으니 비감이 어떠했겠는가? 창의궁(彰義宮)은 곧 선조(先朝)에서 내리신 것으로서 신한(宸翰)433) 을 봉안(奉安)하고 또 나의 사친(私親)께서 지난날에 사시던 곳이다. 여기를 떠난 지 6년이 지난 뒤에 처음으로 이 동구(洞口)를 지나게 되었으니, 인정으로 헤아려 볼 적에 어찌 잠시 들리고 싶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미리 분부할 줄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의문(儀文)의 말단인 것은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기에 그 임시해서 분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홍현보의 상소는 대의(大義)는 비록 좋은 것이었으나 쟁집(爭執)하는 바는 말단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뜻을 대략만 보이었던 것이다."
하였다. 홍치중과 조도빈이 다시 이병상의 상소에 말은 집책할 바가 없지는 않았으나, 비답에 뜻은 크게 본정(本情)을 벗어났다는 뜻으로 진달하니, 임금의 분부가 자못 준엄해지므로 감히 다시 말하지 않았다. 홍치중이 각도(各道)의 농사 형편의 실상을 들어 품달(稟達)하니, 임금이 재해를 입은 고을에 있어서는 묵은 적미(糴米)와 신포(身布)를 차등이 있게 감하여 받도록 명하였다.
예조 판서 심택현(沈宅賢)이 전주(全州) 유생(儒生)이 상소하여 청한 경기전(慶基殿)434) 에 기적비(紀績碑) 세우는 일을 앙달(仰達)하니, 물시(勿施)하도록 명하였다. 우부승지 김조택(金祖澤)이 말하기를,
"서원(書院)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서원 설립을 금지하게 된 뒤에는 영당(影堂)이란 것을 곳곳에서 새로 세우고 있어 폐해가 똑 같으니, 청컨대 일체로 금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11월 12일 경자
신노(申魯)를 지평(持平)으로, 황재(黃梓)를 헌납(獻納)으로, 김용경(金龍慶)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날 거행한 상참(常參)은 전하의 제일 처음의 국정(國政)이었습니다.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며 듣는 일이 있기를 바랐었는데, 대관(大官)들은 일을 피하여 급급하게 앞질러 물러가버리고, 여러 대관(臺官)은 책임만 막느라 초초(草草)하게 논열(論列)하고 대오(隊伍)를 좇아서 따라 행동하며 거조(擧措)가 되지 않았기에, 중외(中外)가 전해 듣고서 비웃었고 대소(大小)의 사람들이 신심(身心)이 풀려버렸으니, 참으로 주부자(朱夫子)의 이른바 ‘이와 같은 기상(氣像)으로 어떻게 저당(抵當)435) 하겠는가?’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어떻게 해보려고 하시지만 누구와 더불어 이루어 갈 수 있겠습니까? 임금은 계시지만 신하는 없는 것이기에 신(臣)이 적이 통탄스럽게 생각합니다."
하고, 끝으로 곧 집을 지어 주고 노비(奴婢)를 주도록 한 명을 사양하는 말을 하니, 비답하기를,
"사람의 성품(性品)은 각자가 같지 않아 강(剛)한 사람은 모두 강하고 사나운 사람은 모두 사나운 것인데, 강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너그러우면서도 사나워야 한다는 말이 어찌하여 나오게 된 것인가? 나이 젊고 일 벌리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더러 요단(鬧端)을 야기(惹起)하는 것을 마음에 항시 그르게 여겨 왔는데, 경(卿)의 평소의 아량으로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진실로 바라던 바가 아니다."
하였다.
11월 13일 신축
밤 5경(五更)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11월 14일 임인
사시(巳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했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무리의 윗쪽에 관(冠)이 있었으며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푸른 빛이었으며, 무지개와 같은 백기(白氣)가 양이에서 나와서 비스듬히 북쪽을 가리키고 있다가 한참만에야 없어졌다.
승정원에서 진계(陳啓)하기를,
"청컨대 영의정 정호(鄭澔)의 상소에 대한 미안스러운 비답(批答)을 거두시고 따라서 아름답게 받아들이시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요사이 나이 젊고 일 벌리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매양 신기(新奇)한 짓을 승사(勝事)로 여기기 때문에 내가 진실로 병폐로 여겨 왔다. 또 이번의 상참(常參)은 곧 나의 제일 처음의 국정(國政)이었기에, 지난날의 심각(深刻)한 짓들은 제거하고 오늘날에는 공정(公正)한 도리를 넓혀 가는 것이 곧 내가 바라던 바이었는데, 그날 신기한 짓을 힘쓰는 대관(臺官)들이 갑작스럽게 각박한 논의를 내놓기에 내 마음속으로 적이 그르게 여겼다. 또 무릇 차대(次對)에는 대신이 아뢸 말을 다 아뢰고 자리로 나아가 앉은 뒤에 다음으로 중신(重臣)이 들어오고 맨 나중에 대관이 아뢰게 되어, 그전부터의 준례가 곧 그렇게 되어 있다. 더구나 상참은 조참(朝參)436) 과 같은 것으로서 먼저 일을 아뢴 사람이 먼저 나가게 되는 것은 그전의 준례가 또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2품(品)들이 청대(請對)한 것이 아니고 보면, 대신이 먼저 뜰에 자리로 나아갔음은 사체에 당연한 일이다. 만일에 그날 곁에 앉아서 고대(苦待)하다가 삼사(三司)와 더불어 소리를 함께 내게 되었다면 심한 짓이겠는가? 아니겠는가? 비록 나이가 젊은 무리들이 그런 일을 야기(惹起)시켜 시끄럽게 만들게 되었더라도, 백관(百官)의 우두머리에 있는 몸으로서는 되도록 조정(調停)해 가야 할 것인데, 비난하여 비웃는 말과 심각하게 배척하는 소리가 기구(耆舊)인 대신의 상소에 나왔으니,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겠는가? 아니겠는가? 아! 나는 성미가 본시 심각하지 않아 적중을 벗어난 논의는 더욱 취하지 않는 터인데, 이미 그의 실수를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 자랑하는 짓을 하는 것이 성실(誠實)한 것이겠는가? 서로간에 경계(儆戒)하는 것이 성실한 것이겠는가? 지금 이렇게 복역(覆逆)을 하는 것은 진실로 나의 생각 밖이다."
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심경(心經)》 진강(進講)이 끝나고, 시독관(侍讀官) 김용경(金龍慶)이 영의정의 상소에 대한 비답과 오늘의 승정원의 계사(啓辭)에 대한 비답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음속에 그의 그름을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 자랑하는 말을 함은 곧 자신을 속이는 짓이다. 어찌 천승(千乘) 나라의 임금으로서 대신을 대우하는 데 표리(表裏)가 다르게 할 수 있겠는가? 선왕조(先王朝)에는 더러 대신이 불가한 데가 있을 적에는, 비답에 ‘벌떡 일어나 길에 오르라.’는 하교(下敎) 등은 없으셨지만, 나는 비답의 끝 때문에 이미 이런 말들을 했으니, 이에서 그의 그른 바는 그르게 여기지만 예대(禮待)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박하게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용경이 말하기를,
"대신의 상소에 어찌 사사로운 뜻이 있겠습니까? 보통때에 대처분(大處分)이 있어야 함을 제일의 의리로 삼아, 만일 조정에 대처분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게 되고 사람이 사람답지 않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의 뜻이 이미 이러했다면 그의 말이 어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말한 대처분이란 것은 활짝 열려 크게 공정해지는 것을 가리키어 말한 것이고, 각박(刻薄)한 말을 대처분으로 여긴 것이 아니다."
하며, 언성과 안색이 엄해졌다. 참찬관(參贊官) 김유경(金有慶)이 말하기를,
"말이 이 일에 미치게 되면 전하께서 그만 언성과 안색이 화평하지 못하십니다. 다행히 자세하게 생각해 보시고서 요량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承旨)의 말이 대의(大意)는 좋다. 일 벌리기 좋아한다는 말은 수규(首揆)437) 를 가리켜 한 말이 아니다. 나이 젊은 사람들이 대체로 일 벌리기를 좋아하는 풍습이 많았기 때문에, 비답 내용에 대략 그런 폐단을 말했던 것이다."
하였다.
11월 16일 갑진
안중필(安重弼)·홍호인(洪好人)·조명신(趙命臣)을 승지(承旨)로, 김수(金洙)를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이씨(李氏)를 봉하여 숙의(淑儀)로 삼았다. 이병태(李秉泰)가 일찍이 조용하게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듣건대 안빈(安嬪) 이씨(李氏)는 옹주(翁主)를 낳은 지 7년 만에야 비로소 안빈으로 봉했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전하께서 새로 후궁(後宮)을 봉하셨으니, 이는 이루어진 일이어서 비록 말을 할 수가 없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빈어(嬪御)를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주강(晝講)을 거행하였다.
우부승지 김조택(金祖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이미 고달파하고 괴로워 하시는 기색이 있으십니다. 신이 감히 망령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삼아 요사이의 일로 말하면 재작일(再昨日)의 정사(政事)에는 6, 7명을 의망(擬望)한 것에 지나지 않았었는데도 아침에 정사를 시작하여 저물어서야 비로소 파하고 나왔습니다. 그 이외의 여러 기무(機務)의 수응(酬應)에 있어서도 또한 여러날을 지체하게 되는 수가 없지 않으시니, 감히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전하께서 한가로이 깊숙하게 계시는 동안에 천리(天理)가 앞서지 못하는 바가 있고 인욕(人慾)을 모두 제거하지 못하시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번날의 영의정 정호(鄭澔)의 상소에 대한 비답은 의의(意義)가 없는 인유(引諭)를 하여 현저하게 미안스러운 뜻이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 쉽게 말씀하시기를 이처럼 심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장령 이태징(李台徵)이 상소하여, 영의정 정호(鄭澔)의 상소에 대한 비답과 일전에 입시(入侍)했던 종신(宗臣)들의 자급(資級)을 올리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17일 을사
정택하(鄭宅夏)를 승지(承旨)로, 한덕후(韓德厚)를 정언(正言)으로, 서종급(徐宗伋)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정언 유겸명(柳謙明)이 상소하여, 시급히 영의정 정호에 대한 비답 내용에 미안스러운 분부를 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상례대로 비답을 하고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수상(首相)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대관(大官)은 일을 피하려고 급급하게 앞질러 물러갔다.’고 말을 했기에, 신은 진실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날의 사상(事狀)은 바로 성명(聖明)께서 굽어 통촉(洞燭)하고 계시는 바이고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들이 목도(目覩)한 바인데, 신이 어찌 많은 말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말세(末世)의 풍속이라 비방하기 좋아하고 떠도는 말은 와전되기 쉬운 법이니, 먼 데에 있는 대신이 갑자기 듣고서 놀라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물러가야 하는 의리는 오늘을 기다릴 것 없이 결정되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상소에 말이 준엄하여 진실로 이 시기를 바로잡을 수 있는 약석(藥石)이기에, 신(臣)이 장차 부끄럽게 여기며 복종하기에 겨를이 없게 되었는데 무슨 말을 가지고 자신을 해명하는 짓을 하겠습니까? 성명(聖明)한 조정의 원로 대신을 우대(優對)하는 도리에 있어 바로 그의 말을 아름답게 받아들여 한 시대의 규모(規模)를 새롭게 해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비답하신 내용에 자못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시는 뜻이 모자라게 되었기에, 신이 적이 성명(聖明)을 위하여 근심스럽고 한탄스럽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의 마음을 이미 통촉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처럼 인책하는 것인가? 수규(首揆)의 상소에 말은 그날의 일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한 소치에 지나지 않은 것인데 경에 있어서 어찌 불안스럽게 여겨야 할 단서가 있겠는가?"
하였다.
11월 18일 병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관명(李觀命)도 함께 입시(入侍)하여 진강(進講)이 끝나고, 이관명이 영상(領相)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미안스럽게 된 뜻을 들어 상세하게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영상의 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아직까지 영상의 체직을 윤허하지 않고 있는 것은 대개 그가 곧은 지조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비답 내용에 ‘일 벌리기를 좋아하여 소란을 일으킨다.’고 한 말은 바로 대신을 배척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요즘에 수규(首揆)가 올린 차자에 ‘일을 피했다.’는 말에 있어서는 혹은 전해 듣기를 잘못하기 쉬운 것이기는 합니다마는, 가사 신(臣)이 만일에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장차 신이 식언(食言)하지 않은 나머지에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원로(元老)가 권권(眷眷)하게 근심하고 개탄하는 말을 한 것을, 전하께서 예대(禮待)하는 훌륭한 뜻이 계시면서도 도리어 우악(優渥)하게 장후(奬詡)하는 온화한 분부를 아끼고 계시니, 이는 소소한 근심스러운 일이 아니기에 신이 적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영상의 상소에 말은 잘못 들은 말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는데, 경(卿)의 너그러운 아량으로 어찌하여 이처럼 인책을 하는 것인가?"
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일차의 사소(辭疏)를 올리니, 임금이 친히 특별하게 유시(諭示)를 내린 것이 말뜻이 근간하고 진지하며, 승지를 보내어 그와 함께 들어오도록 하였다.
사간원에서 【정언 유겸명(柳謙明)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원로(元老) 대신의 상소는 말이 엄격하고 의리가 정당하여 당면한 지금의 병폐에 적중한 것이므로, 지금 삼사(三司)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진실로 마땅히 부끄럽게 여겨 복종하며 사죄(謝罪)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수찬 김상석(金相奭)은 인책(引責)하는 상소를 진달할 적에 감히 비상하게 지척(指斥)하며 말의 뜻이 심각하고 긴박(緊迫)한 말을 하여, 마치 원로 대신이 참으로 심각하고 긴박한 의사가 있어 배척해서는 안될 사람을 억지로 배척한 듯이 했습니다. 한갓 자신을 해명하기만 일삼고 말을 신중하게 가려서 하지 않았었으니, 청컨대 수찬 김상석을 파직하소서."
하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전라 병사(全羅兵使) 신명인(申命仁)은 물의(物議)가 비등(沸騰)하는데도 임시 방편으로 마구 부임하였고, 삭녕 군수(朔寧郡守) 최수적(崔守迪)은 사핵(査覈)받는 일을 수습해 놓고서 급급하게 소임에 돌아와, 다시 이민(吏民)을 대해서는 태연히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전 장령 이자(李滋)는 남이 하는 대로 웃거나 화내거나 하여 거칠고 야비함이 더없이 심합니다. 신명인과 최수적은 모두 파직하고, 이자에 있어서 전조(銓曹)로 하여금 다시는 대관(臺官)에 의망(擬望)하지 말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전 군수(郡守) 홍중권(洪重權)의 아들 홍이보(洪頤輔)는 그의 숙모(叔母)의 상(喪)을 만나 염습(斂襲)하여 입관(入棺)도 하기 전에 슬픔을 잊어버리고 부시(赴試)했습니다. 기년복(期年服)을 정해 놓은 예문이 있고, 율(律)에는 진시(陳試)438) 하는 조문이 있는데도 홍이보는 유모(猶母)439) 를 길거리의 사람처럼 여기고 예율(禮律)을 쓸데없는 것처럼 버리었습니다. 사람이 미미하다 하여 내버려둘 수가 없으니, 홍이보를 시급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율을 고찰해 보아 죄를 과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전 현령(縣令) 이형수(李衡秀)는 그의 아우 이덕수(李德秀)와 함께 위훈(僞勳)에 들어가게 되었을 적에, 도감(都監)에서 이덕수를 호적(虎賊)440) 에 대한 회맹축(會盟軸)에 참여하게 하자, 서사관(書寫官)이 외람하게도 증직(贈職)하는 은전(恩典)으로 넣어 그의 아비를 영화롭게 하도록 농간하매, 외방(外方)의 관노비(官奴婢) 중에 부요(富饒)한 자를 모집해 놓고 억지로 대가(代價)를 높이 정하여 속량(贖良)하도록 핍박했습니다. 삭훈(削勳)된 뒤에 이르러 면천(免賤)했던 사람도 또한 모두 도로 천인(賤人)이 되었었는데, 속량할 때에 징수했던 대가를 상환(償還)할 대비는 생각을 하지 않고서, 위협하고 공갈하여 몰아내며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였고, 불량한 무리들을 모아들여 정상(情狀)이 헤아릴 수 없었으니, 청컨대 이형수를 먼 지방에 정배(定配)하고, 유사(攸司)로 하여금 속전(贖錢)을 사핵(査覈)해 내어 하나하나 받아 주도록 하여, 소민(小民)들이 원통함을 외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고 최수적·이자·이형수·홍이보의 일을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11월 19일 정미
홍성보(洪聖輔)를 지평(持平)으로, 정광제(鄭匡濟)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차자를 올려 면직하기를 원하니, 비답의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인하여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도록 하였다.
충청도 진사(進士) 송선함(宋善涵) 등이 상소하여, 고(故) 부제학(副提學) 권변(權忭)의 서원(書院)을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식년(式年)441) 문과(文科)를 보여 이휘항(李彙恒) 등 33인을 뽑았다.
11월 20일 무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일차의 사직서(辭職書)를 올리니, 임금이 특별히 유시하고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도록 하였다.
사충(四忠)의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고, 따라서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11월 21일 기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삼가 어제 정목(政目)을 보건대, 후궁(後宮)을 봉작(封爵)하는 일이 있었고, 또한 듣건대 임신(姙娠)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뒤로는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백대토록 경사가 있게 되었으니 반가움과 다행함을 어찌 이루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근심스러운 단서는 반가움보다도 큰 바가 있습니다. 성상께서 본래부터 산증(疝症)이 있으신데다가 복중(腹中)에는 또한 적기(積氣)가 있어 때없이 발작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가 심복(心腹)의 무거운 증세이니, 신중하게 조섭(調攝)하는 도리를 마땅히 보통 사람들 보다도 백배나 하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색(色)에 있어서의 경계를 소홀히 하신다면 손상을 가져옴이 마땅히 어떻게 되겠습니까? 외간(外間)에 전해지는 흑자의 말은, 이 이외에도 또한 총애를 받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에 그러하시다면 더욱 민망하고 답답한 일입니다. 가만히 바라건대 깊이 질병을 조심해야 한다는 경계를 진념(軫念)하시어,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통렬하게 공부를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한참 있다 이르기를,
"군신(君臣) 사이는 부자간과 같은 것이어서 경(卿)이 이미 숨김없이 말을 했는데 내가 또한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옛말에도 ‘후궁이 3천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없앨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내가 경계하는 바도 매양 이에 있다. 그날 분부를 내리게 될 때에 한 참을 머뭇거린 다음에야 말을 했었으니, 이에서도 또한 내가 신중하게 하는 뜻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요사이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하여져 내간(內間)의 일을 항간(巷間)에서 거개 터무니없이 전파하는 것이 많기에 한 번 분부를 내리려고 하면서도 과단을 짓지 못하였다. 나의 뜻이 이미 이와 같으므로 이 이외의 일에 있어서는 또한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더 힘쓰지 않는다면 또한 방심하게 될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경계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옛사람의 말이 ‘극기(克己)는 먼저 성질이 치우치어 극복(克服)해 가기 어려운 데에서부터 극복해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이러한 데에 있어서 항시 경계와 근신을 더해 가더라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사욕(私慾)이 마구 발동하게 되는 것이기에, 만일 십분(十分) 강단 있게 제어하여 발동하는 데에 따라 즉시 끊어버리지 못한다면 마침내는 극복해 가기 어렵게 되는 법이니, 다시 더 맹렬하게 살피고 통렬하게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더 유의하겠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을해년442) 무렵에 신이 사관(史官)으로서 입시(入侍)할 적에 그 때의 대신이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에 관한 폐단을 갖춰 진달하고, 이어 ‘이 뒤로는 영구히 절수하는 규정을 혁파하고 호조에서 은화(銀貨)를 일정한 격식대로 갈라 보내어 전답(田畓)을 매수(買受)하는 자본으로 삼도록 할 것’을 청하여 즉시 윤허를 받았는데, 그 뒤에 삼가 듣건대, 여러 궁가(宮家)들이 이미 호조의 은화를 받고도, 그 절수한 것을 그전대로 폐하지 않아서 민간의 폐해가 예전대로라고 했으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이번에 새로 후궁(後宮)을 봉작(封爵)하셨으니 앞으로 분만(分娩)하신 다음에는 왕자(王子)나 옹주(翁主) 사이에도 또한 마땅히 궁가가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오래 시골에 있을 적에 매양 외방(外方) 백성을 만날 적이면 국가에 종사(螽斯)443) 의 경사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어찌 국가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경사가 되는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오히려 이러했으니, 대개 평소에 소민(小民)들이 절수에 있어 시달림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어찌 민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뒤로는 한결같이 선왕조(先王朝)에 정해진 격식을 준행하여 영구히 절수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가사(家舍)에 있어서도 신이 듣건대 선조조(宣祖朝)에는 왕자나 부마(駙馬)들의 궁가(宮家)가 모두 여염(閭閻)의 사대부(士大夫)의 집 모양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궁가들이 지금도 많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만일에 따로 중사(中使)를 내보내어 그 모양대로 지어 주도록 한다면, 사치스럽고 크게 할 염려도 없게 되고 또한 복(福)을 기르는 방도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좋은 말이다. 새 궁가는 으레 지부(地部)444) 에서 사 주는데 이번에는 본궁(本宮)으로 하여금 사도록 했더니 그 값이 천 냥(兩)이 되지 않았다. 이로써 본다면 약간 큰 것임을 알 수 있고 또 호조에서 으레 1백 석(石)의 쌀을 보내게 되는데 이번에는 보내지 말도록 했다. 내가 다른 일에 있어서는 비록 잘하지 못하지마는 절약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저위(儲位)에 오르게 될 때부터 먼저 유의해 왔다. 전례대로 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대로 할 뿐이거니와 과외(科外)의 일에 있어서는 어찌 해야 되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비록 전례가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만일 민폐와 관계가 있거나 혹은 경비(經費)에 방해가 있는 것이라면 정지하는 것이 또한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좋은 말이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윤대관(輪對官)들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각각 직장(職掌)과 폐막(弊瘼)을 물어보고, 이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11월 22일 경술
밤 5경(五更)에 달이 태미(太微) 서원(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이기익(李箕翊)을 승지(承旨)로, 김용경(金龍慶)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박사성(朴師聖)을 수찬(修撰)으로, 신노(申魯)를 사서(司書)로 삼았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사직서를 올리고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차자를 올려 면직되기를 바라니, 임금이 모두에게 특별한 유시(諭示)를 내려 해래 승지(偕來承旨)에게 전유(傳諭)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정언 유겸명(柳謙明)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요사이 사람들의 도리가 어두워지고 풍속이 무너지면서 인륜(人倫)에 관한 변이 허다히 사대부(士大夫)들의 집에서 생기게 되어, 자식으로서 아비의 죄를 증거대고 아우로서 형과 송사하는 짓을 하는데, 재물을 다투는 화가 일어나고 적통(嫡統)을 빼앗는 흉계를 부린 것이 이범(李範)의 옥사(獄事)와 같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신이 추조(秋曹)445) 의 문안(文案)을 가져다가 고찰해 보건대, 이범의 의심스러운 단서가 다만 50 이후에 연달아 자녀(子女)를 낳은 한 가지 단서에 있는데, 50 이후에 연달아 자녀를 낳는 것은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이를 가지고 단안(斷案)으로 결말할 수는 없습니다. 적자(賊子) 이유기(李有機)와 흉악한 이급(李笈)의 공초는 말마다 무망(誣罔)한 것이고 마디마다 파탄(破綻)이 생기는 것이어서, 재물을 다투는 음모(陰謀)와 적통을 빼앗는 흉계가 가리울 수 없이 훤하여 마치 오장이 보이듯 하고, 각 사람들의 공초가 비록 전후에 변동이 많기는 했지만 이리저리 구핵(究覈)하여 실정이 자연히 드러나게 되었고 보면, 이범이 혹독하게 형벌 받다가 멀리 귀양가고 이범의 아내가 원한을 머금고서 운명하게 되고 이두덕(李斗德)이 천륜(天倫)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어찌 천지 사이에 지극히 원통하고 몹시 애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시급히 이범의 옥사를 도로 본도(本道)에 돌리도록 하신 명을 정지하고, 이어 추조(秋曹)로 하여금 기일을 정해 놓고 안찰하여 다스리도록 하여, 일찍이 확정되지 못한 천륜을 결정짓고 이유기와 이급 등의 불효(不孝)하고 우애하지 못한 죄를 엄중하게 다스리어 풍속과 교화(敎化)를 바로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끝 부분의 일을 도신(道臣)에게 분부한 것은 나의 뜻의 소재(所在)가 있는 것이다. 그 분명하게 결단하게만 된다면 어찌 서울과 시골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다시 번거롭게 하지도 말고 지체되게 하지도 말라."
하였다.
지평 홍성보(洪聖輔)가 상소하여 권태(倦怠)로 인한 실수를 조목별로 진달하니,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11월 23일 신해
밤 오경(五更)에 달이 태미(太微) 서원(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날씨가 추우므로,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서(典獄署)에 달려 가서 경범(輕犯) 죄수 44인을 놓아 주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사어(司禦) 한원진(韓元震)에게 특별한 유시(諭示)를 내려 그날로 길을 떠나도록 윤허하였다. 대개 한원진의 아우 한계진(韓啓震)이 이때에 홍천 현감(洪川縣監)이 되었는데, 한원진이 어머니를 데리러 가게 되었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11월 24일 임자
이현록(李顯祿)을 승지(承旨)로, 신노(申魯)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과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잇달아 사직 단자(單子)를 올리고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리니, 임금이 특별한 유시를 내려 위안(慰安)하였다.
임금이 성균관(成均館)에 행행(幸行)하여 문묘(文廟)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명륜당에 나아가 시사(試士)하였다. 임금이 어제(御製)한 글제를 봉함하여 내리며 분부하기를,
"요사이 사자(士子)들이 오로지 사화(詞華)만 숭상하고 실속을 힘쓰지 않으므로 내가 실로 병폐로 여긴다. 내가 사복(嗣服)한 이후에 지금 처음으로 선성(先聖)께 작헌례를 올리고 벽옹(辟雍)446) 에 친림(親臨)하여 선비를 뽑아 진작(振作)하고 흥기(興起)시키는 방도를 하는 것은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니, 고시(考試)할 적에 문화(文華)를 취하지 말고 실속이 있는 뜻을 취하라. 또 사자(士子)들이 글을 지을 적에도 실속을 힘쓰고 문장을 힘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고, 김치후(金致垕) 등 7인을 뽑아 급제를 내렸다.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도록 비답하고,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으며,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역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김치후(金致垕)에게 전적(典籍)의 직을 부여하고, 김윤구(金潤九)에게 빙고 별제(氷庫別提)를 부여하였는데,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에 장원을 한 사람들이다.
장령 정광제(鄭匡濟)가 상소하기를,
"황해 수사(黃海水使) 이중익(李重翊)은 부극(掊克)447) 을 일삼아 군민(軍民)에게 폐해를 끼쳤으니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통천 군수(通川郡守) 김석문(金錫文)은 행정을 패륜(悖倫)한 아들에게 맡기고 있으므로 원망과 비망이 갈수록 터지고 있으니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평안 도사(平安都事) 김정봉(金廷鳳)은 본래 인망(人望)이 가벼웠고 기랑(騎郞)을 지내지 않았으니 마땅히 체직해야 합니다. 창성(昌城)의 전 부사(府使) 이철징(李鐵徵)은 도사(都事)가 검전(檢田)하러 갔을 적에 당하여, 재상(災傷)을 차착(差錯)한 것을 염려하여 감히 협제(脅制)하려는 꾀를 내되, 심지어 관아(官衙)의 하례(下隷)를 시켜 도사의 침롱(寢籠)을 뒤지게 하였고, 또한 두 사람을 시켜 밤중에 칼을 지니고 몰래 침방(寢房)에 들어가 음해(陰害)하려는 흔적이 있는 듯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의 마음 자취를 논하자면 이희열(李希烈)이 사명 맡은 사신을 집류(執留)하고 이사도(李師道)가 임금이 보낸 사람을 멋대로 장해(戕害)한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일이 비상한 관계가 있는 것이어서 반드시 죄를 사명(査明)해 내야 할 것이니, 창성의 전 부사 이철징을 잡아다가 국문(鞫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중익·김정봉의 일에 있어서는 논한 말이 과당(過當)함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이철징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김석문의 일은 한때 들은 말을 어찌 모두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간 임주국(林柱國)이 상소하여, 원로(元老)를 엄박(嚴薄)함은 미안스러운 일임을 진계(陳戒)하고, 또 말하기를,
"호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조정에 안정됨을 얻지 못한 것은 오로지 그때의 사약(司鑰)들이 농간 부린 것 때문인데, 중신(重臣)에 있어서는 죄도 없이 물러 나가 있고 사약들은 죄가 있으면서도 태평하게 있으니, 이는 무슨 도리이고 이는 무슨 거조(擧措)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사약들의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또 삼가 회양 부사(淮陽府使) 이휘진(李彙晉)의 상소를 보건대, 궁차(宮差)들이 민간의 전토를 양탈(攘奪)하는 죄가 엄폐할 수 없이 낭자(狼藉)했습니다. 전하께서 마땅히 준엄하게 그들의 죄를 바로잡아 하나를 징계하여 백 가지를 격려하는 계기가 되도록 하셔야 할 것인데, 심상한 것처럼 보시어 처분을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신(臣)은 바라건대, 특별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율(律)을 고찰해 보아 죄를 감단(勘斷)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범(李範)의 옥사(獄事)에 있어서는 시급히 대계(臺啓)를 윤허하시고, 이어 추조(秋曹)로 하여금 기일을 정해 놓고 구핵(究覈)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 한이조(韓頤朝)는 지난해에 호서(湖西)를 안렴(按廉)하였을 적에, 도신(道臣)이 올린 장계(狀啓)가 한이조에 대한 하나의 탄핵하는 글이었는데도, 그뒤 복명(復命)할 적에 마침내 자신의 일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또 박필정(朴弼正)과 서로 힐란(詰難)할 적에 그의 한없는 후욕(詬辱)을 받고도 몰염치하게 나와서 숙배(肅拜)하고 급급하게 부임했었으니, 또한 바라건대 특별히 파직하여 경책(警責)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원 부사(南原府使) 민진강(閔鎭綱)은 무릇 정령(政令)에 관한 일을 방자한 제자(諸子)들에게 일임하고 있어 해괴하고 놀라운 일들이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교하 현감(交河縣監) 이시정(李蓍定)은 성미가 술만 탐하여 해괴한 일들이 더욱 심하니, 이 두 사람은 또한 파직하여 여타의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수규(首揆)에 관한 일은 전후에 이미 말을 했다. 호조 판서의 일에 있어서는 지금 이 상소에 이렇게 논하였음은 반드시 그 곡절을 알지 못하여 이런 것이다. 이범의 일은 이미 사간원의 계사(啓辭)에 대한 비답에 유시하였다. 한이조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회양에서의 일은 이미 정지하도록 명했으니 어찌 다시 논할 것이 있겠는가? 두 고을 원들의 일은 어찌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11월 26일 갑인
심택현(沈宅賢)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고, 특별히 황귀하(黃龜河)를 제배하여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고, 박사성(朴師聖)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조상경(趙尙絅)과 충청 감사 김여(金礪)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선화(宣化)448) 에 관한 책임을 권면하였다.
또 특별 유시(諭示)를 내리며 함께 온 승지로 하여금 좌상과 우상에게 전유(傳諭)하도록 하였다.
11월 27일 을묘
주강(晝講)을 거행하였다.
통제사 이복연(李復淵)이 사폐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며 융정(戎政)을 닦아 군졸들을 안무(按撫)하는 뜻으로 권면하였다.
석강(夕講)을 거행하였다.
11월 28일 병진
예조에서 연초의 상신(上辛)449) 에 준례대로 대신을 보내어 기곡(祈穀)할 것을 청하니, 분부하기를,
"올해의 상신에 사직단(社稷壇)에서 친히 빌었었지만 작은 정성이 감동되지 않아 농사가 풍년들지 못했으니, 어찌 다만 자신의 정성이 모자랐음만 부끄러웠겠는가?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말하지 않고 싶다. 나의 정성이 모자랐기 때문에 비록 감히 효과를 바라지는 못하겠지만, 민생들을 위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감동시키지 못했다고 하여 정성을 해이하게 할 수 있겠는가? 명년 봄 상신에도 또한 마땅히 몸소 거행하겠다."
하였다.
사어(司禦) 한원진(韓元震)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도신(道臣)에게 선포(宣布)한 지난달 13일 의정부에서 받든 전지(傳旨)를 가만히 보건대, 10줄의 천찰(天札)에 하신 말씀이 간절하고 측은하여, 위로는 넘겨 받은 무거운 책임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첫 번째 국정(國政)의 기틀을 살펴보시며 개연(慨然)히 분발하고 진작(振作)하시려는 뜻이 담긴 것이었으니, 이는 자못 하늘이 성상의 마음을 열어 주며 빛이 나는 중흥(中興)을 열어 가게 한 것입니다. 하물며 그 세 가지 조목으로 게시(揭示)한 교훈은 오늘날의 병폐에 적중한 것이어서, 어두운 돈어(豚魚)라 하더라도 오히려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만물의 가장 영장(靈長)인 사람들이 어찌 감동할 줄 알지 못하겠습니까? 아! 오늘날의 편당하는 풍습의 폐해는 진실로 나라를 망치게 될 화근(禍根)이기에 경계하셨음은 진실로 옳은 일이나, 제거하게 되는 것은 오직 전하께서 처분하시기를 합당하게 하시기에 달렸을 뿐이고 본래부터 언어(言語)만 가지고 교유(敎誘)하여 제거하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臣)이 감히 전하께서 말씀하신 ‘편당하는 풍습을 없애고 공정한 도의(道義)를 힘쓰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어 하신 말씀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장차 사(邪)와 정(正) 역(逆)과 순(順)을 탕평(蕩平)하여 보합(保合)해 가고 간격(間隔)이 생길 수 없게 하시려는 것이라면, ‘방향이 유로써 모이게 되고[方以類聚] 만물은 무리로써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物以羣分]’는 말은 거룩한 《역경(易經)》에 나와 있는 말이고, 훈유(薰蕕)와 빙탄(氷炭)은 같은 그릇에 둘 수 없음은 사물의 이치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직하면서 순종하는 자는 비록 만 번 주륙(誅戮)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다시 사특하면서 반역하는 자와 구차하게 합할 수 있으며, 사특하고 반역하는 자가 이미 징계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는데 또한 어찌 정직하고 순종하는 자와 합하려고 하게 되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일로서 사세가 마침내는 반드시 사특한 것이 정직한 것을 깎아내고 반역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을 멸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한 편 속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서로가 화동(和同)하고 갈라지지 못하도록 하려고 한다면, 한 번 편당의 명목(名目)이 나누어지게 되면서부터 사·정과 순·역을 논할 것없이 각자가 안으로는 고단(孤單)함을 근심하고 밖으로는 승폐(乘弊)450) 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자기와 같은 사람끼리는 오로지 서로 좋게 지내기만 힘쓰고 다시는 규계(規戒)해 가는 기풍이나 격탁 양청(激濁揚淸)451) 하는 거조가 있지 않게 되니, 이는 진실로 당면한 오늘날의 고질(痼疾)이 되어 있는 일인데, 또한 무엇하려 주환(走丸)452) 하는 것을 뒤따라 격동(激動)시키는 일을 할 것입니까? 한 가지로는 반드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요 한 가지로는 그러한 가르침을 기다릴 것이 없는 법인데, 전하께서 내리신 분부는 과연 어디에 뜻을 두고 하신 말씀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반역을 주벌하고 순종하는 것을 붙잡아 주면 온 천하가 모두 반역을 등지고 순종하는 것을 지향하게 되고, 사특한 것을 내치고 정직한 것을 존숭하면 온 천하가 모두 사특한 것을 버리고 정직한 것을 따르게 되는 법입니다. 이는 대순(大舜)이 이미 실행한 일이고 공자(孔子)가 항시 말하던 도리이기에 다시 의심할 것이 없는 일인데 전하께서 이렇게 하지는 않으시고 도리어 언어(言語)와 구설(口舌)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환란을 평온해지게 하려고 하시어, 왼쪽을 따르다 오른쪽을 무마하다 하고 아침에 명을 내렸다 저녁에는 호령하였다 하여, 유익함은 없이 한갓 수고롭게 됨을 알지 못하시니 어찌 잘못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사람들을 치우침이 없게 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자신의 치우치고 있는 점을 제거해야 하고, 사람들을 사(私)가 없게 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자신이 사정을 쓰고 있는 점을 제거해야 하는 법입니다. 진실로 자신에게 있어서 조금도 치우침과 사가 없지 못한다면 또 어떻게 남에게 치우침과 사심이 없기를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마음에 치우침과 사심이 있고 없는지는 신(臣)이 진실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듣건대 지난번에 금중(禁中)의 하례(下隷)들로 밤중에도 항간(巷間)의 여염(閭閻)에 드나드는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비록 죄를 받았다고 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어찌 그 뒤에 그런 버릇을 딱 고치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궁성(宮省)에 진공(進供)하는 물품에 있어서도 또한 중간에 서서 헐뜯게 되거나 추어주게 되거나 하는 수가 파다(頗多)하다고 했습니다. 만일 이 무리들로 하여금 이에 있어서 근신하게 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이 반드시 무슨 말을 내놓다 무슨 말을 들여 놓다 하며 권세를 빙자하여 뇌물을 받는 짓을 하게 될 것인데, 이런 조짐을 커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선왕조(先王朝)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었는데 유독 오늘날에 듣게 되었으니, 어찌 전하께서 이 무리들을 제어(制御)해 가는 바에 있어 사의(私意)도 가차(假借)해 줌을 면하지 못함이 있어 그러는 것입니까? 이로써 본다면, 어리석은 신(臣)이 죽을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마는, 또한 감히 우리 임금의 성덕(聖德)에 조금도 치우침과 사정의 끌리심이 없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자신에 치우침과 사정의 끌림이 없지 않다면, 비록 날마다 사람들을 깨우치며 치우침과 사정이 없게 하려고 하시더라도 될 수 없을 듯합니다.
아! 오늘날의 사치한 풍습은 진실로 세상의 도의(道義)에 있어 큰 폐해가 된 것이기에 경계하는 것이 진실로 옳기는 합니다마는, 사치하거나 검소하게 되는 풍습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에 백성은 위에서 좋아하는 것을 따르게 되고, 명령은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백성을 변화시켜 검소함을 따르게 하시려면 다만 마땅히 몸소 검약을 실행하시기를, 대우(大禹)가 변변치 못한 음식에 거친 의복을 입은 것과 위(衛)나라 문공(文公)이 대포(大布)453) 와 대백(大帛)454) 을 입은 일과 같이하여 궁성(宮省) 속에서부터 먼저 소박하게 하고, 재물을 쓸 적에도 오로지 절감하기를 힘쓰게 된다면 백성에게 교화(敎化)에 따르기를 구하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스스로 변화되게 될 것이니, 또 어찌 번거롭게 말씀을 하고 명령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요사이의 습의(習儀) 때에 유장(帷帳)을 일체 새로 하지 못한 것 때문에 갑자기 준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심지어 추고(推考)하게 되고 장형(杖刑)의 조율(照律)이 중신(重臣)에게 가해지게 되었다니, 신은 적이 상심되고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오래된 유장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쓰고 새로 마련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검덕(儉德)을 밝히고 재용(財用)을 절약하게 되는 것이므로 진실로 마땅히 아름답게 여기고 권장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대관(大官)에게 책벌(責罰)을 가하였으니, 책벌을 받은 소관(小官)들이 어찌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될 수 있겠습니까?
한 가지 일이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 다른 일에 있어서도 어찌 이번의 위령(威令)을 보고서 몰리게 되는 바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결같이 변경하여 사치스럽게 될 것은 사세가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신이 또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맹자》에 ‘천하의 것을 다해서라도 어버이에게는 검약하게 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분부하셨다고 합니다. 신은 생각에 맹자의 이 말은 대개 법제(法制)에 있어서 할 수 있는 것과 재정(財政)에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한 것으로서,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또한 하게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오늘날의 유장을 반드시 새로 하는 것에 있어 과연 법제에 그만둘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국고(國庫)의 저축이 고갈되어 있으니 과연 이는 재정에 있어서 넉넉하지 못함이 없게 되어 있는 것이겠습니까? 성현(聖賢)이 입언(立言)한 뜻은 본래 그런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 문득 인용하여 사치를 숭상하고 재물을 허비하는 구실(口實)로 삼으셨으니, 맹자가 한 말에 ‘글이 없는 것만 못하다[不如無書].’고 한 것이 자못 이와 같은 일을 이른 것입니다. 신이 또한 생각해 보건대 제왕(帝王)의 효도는 다만 덕을 높히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재정을 절약하고 백성을 돌보아 민생들이 넉넉하고 편안해지며 종사(宗社)가 공고(鞏固)해지게 하여, 어버이의 마음에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게 하는 데 있을 뿐이고, 본래 복어(服御)와 공봉(供奉)을 풍성하게 마련함에 있지 않는 법입니다. 더구나 이번의 유장 등의 물건은 또한 얼마나 말단에 말단의 것이고 겉치레 중에도 겉치레인 것입니까?
신은 듣건대, 윤화정(尹和靖)455) 의 어머니가 윤화정에게 말하기를, ‘나는 네가 선(善)으로서 봉양해 줄 것으로만 알고 있으며 녹(祿)으로 봉양해 주리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는 항간(巷間) 여염(閭閻)의 필부(匹夫)의 어머니로도 오히려 이처럼 사리를 잘 알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성모(聖母)께서는 덕이 지극하게 깊고도 아름다우신데 어찌 사치하는 것이 덕을 손상하게 됨을 깊이 미워하지 않으시고, 또한 오늘날의 국가 사세가 한이 없게 되고 재정과 곡식이 하나도 없어, 안으로는 부고(府庫)가 텅 비고 밖으로는 굶주려 죽는 사람이 길에 널리게 된 것을 생각하신다면 또한 어찌 깊이 근심하고 한없이 상심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양지(養志)하는 효성으로 진실로 마땅히 그 아름다움을 받들어 순종하고 그 덕을 찬성(贊成)하여 마침내 백세토록 기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한갓 말절(末節)에 있어서 다하기만 힘쓰시고 그 대체(大體)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다만 이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솔하(率下)들을 사치스럽게 하려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계시니, 비록 온 나라 사람들이 검소함을 따르게 하려고 하신들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술 마시기를 숭상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에 있어서는, 천성(天性)을 상실(喪失)하고 의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도 이에 있고, 곡식을 허비하고 재물을 소모하게 되는 것도 이에 있다면 경계하신 것이 진실로 옳은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주(醴酒)의 사용은 성인들도 폐하지 않은 바이었으니, 술의 해가 되기는 단지 그 기욕(嗜欲)을 절제(節制)하지 않음에 있는 것입니다. 기욕의 해가 되는 것은 술 한 가지 것에만 그치지 않는데, 보고서 본받게 되는 바는 또한 오로지 윗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마음을 해치게 되는 욕심을 다 셀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중에도 큰 것을 말한다면 치빙(馳騁)과 유관(遊觀), 성색(聲色)과 화리(貨利)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임금의 마음이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쏠리게 되면, 그 폐해가 반드시 군자들은 물러가고 소인들이 진출(進出)하게 되고 삼강(三綱)456) 이 없어지고 구법(九法)457) 이 무너지게 되어 가정이 반드시 결단이 나고 나라가 반드시 망하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대개 임금이 하고 싶어함이 있으면 소인들은 이루어지게 하고 군자들은 거역해버리므로 자연히 소인을 친근히 하고 군자를 멀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유관(遊觀)하기 좋아하자 조부(造父)458) 가 천한 기예(技藝)를 가지고서 모시게 되고,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재화(財貨)를 좋아하자 배연령(裵延齡)이 공봉(供奉)을 잘하여 쓰이게 되고,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여색(女色)을 좋아하자 왕덕용(王德用)이 몰래 특수한 여색을 바치며 은총(恩寵)을 바랐던 것입니다. 조보가 진출(進出)하게 되면서는 제공 모보(祭公謀父)의 말을 써 주지 않다가 거의 서방(徐方)459) 이 어극(御極)하게 될 뻔하였고, 배연령이 진출하게 되면서는 육지(陸贄)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재차 황여(皇輿)가 파천(播遷)하게 되었고, 송나라 인종은 다행히도 눈물을 씻으며 왕덕용이 바친 여색을 내보냈기 때문에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의 무리가 조정에 있게 되며 경력(慶曆)460) 무렵의 다스림을 이루어 후세에 칭찬받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천자(天姿)가 고매(高邁)하시어 시초부터 청명(淸明)하셨고, 3년의 복제(服制)를 막 넘기셨기에 치빙(馳騁)·유관(遊觀)과 성색(聲色)·화리(貨利)의 기욕에 있어, 신(臣)이 진실로 그런 것이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기욕은 치사(侈肆)해지기 기다릴 것도 없이 한번이라도 마음에 싹트게 되기만 하면 이미 너무도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그 한번 마음에 싹트게 되어 극복(克服)하여 제거할 줄을 모르게 되면 몰래 퍼져 가고 가만히 자라게 되어 마침내는 반드시 일에 나타나게 되고 국정(國政)을 해치게 되는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천자(天姿)가 고매한 것을 스스로 믿지도 마시고 현저한 허물이나 뉘우침이 없는 것을 스스로 기뻐하지도 마시고서 더욱 경계와 공구(恐懼)하는 마음을 더해 가고 잡아 지키는 힘을 게을리 하지 말아서, 항상 스스로 마음에 점검해 보아 혹시 조금이라도 사욕(私慾)이 싹트게 될 적에는 반드시 깊이 경계하고 통렬(痛烈)하게 끊어버리며 항시 청명(淸明)한 기운이 몸에 있게 하시면서 지기(志氣)가 신명(神明)처럼 되게 하신다면, 소인(小人)들은 멀리하려고 하지 않아도 멀어지게 되고, 군자들은 친근히 하려고 하지 않아도 친근해지게 되어, 백공(百工)들이 진실로 바로잡아지며 갖가지 업적(業績)이 모두 빛이 나게 될 것입니다. 저 윗사람이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 백성도 어느 누가 불언(不言)의 교화(敎化)에 감화되지 않겠습니까? 진신(搢紳)들의 사이와 항간(巷間) 여염(閭閻) 속의 술잔을 들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또한 장차 태평한 성세(聖世)를 본받게 될 것인데, 또한 무엇하려 반드시 미워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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