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무오
이태징(李台徵)을 장령(掌令)으로, 윤헌주(尹憲柱)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병상(李秉常)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김용경(金龍慶)을 교리(校理)로 삼고, 김치후(金致垕)를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는데, 등과(登科)하기 전에 자궁(資窮)461) 됐기 때문이다.
사간원에서 【정언 한덕후(韓德厚)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박태항(朴泰恒)은 이사상(李師常)의 흉악한 역모(逆謀)가 점차 드러나기에 당하여, 논죄(論罪)해야 하는 말이 그 당(黨) 속에서 나왔었는데도, 이에 감히 명분(名分)과 의리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 멋대로 신구(伸救)하는 짓을 하되 ‘충정(忠貞)한 조행 소당(疏讜)한 지조’라는 등의 말로 뜻을 다해 칭찬하고 추어 주었습니다. 대저 이사상을 충정으로 여기고 소당으로 여겼음은, 그의 흉두(凶肚)와 역장(逆膓)을 논하건대 이도 또한 하나의 이사상입니다. 이사상은 복주(伏誅)되었는데도 이 역적은 법망(法網)을 벗어났으니, 방헌(邦憲)으로 헤아려 보건대, 단정코 이럴 수가 없는 이치이니, 청컨대 문출(門黜) 죄인 박태항을 아주 변방에 멀리 귀양 보내기 바랍니다. 태안 군수(泰安郡守) 박준(朴㻐)은 군아(郡衙)에 간직하고 있는 것을 유실하게 되자 온 마을을 두루 수색하였고, 다시 교궁(校宮)에 감추어 둔 것으로 의심하여 성전(聖殿)의 위판(位版) 밑까지 수색하는 짓을 하므로, 원근(遠近)에서 전해 듣고서 놀래며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청컨대 박준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 바랍니다. 순천 군수(順川郡守) 이필(李佖)은 읍(邑)을 옮기는 일을 빙자하여 억지로 민간에서 돈을 거두었다가 그 뒤에 이예(吏隷)들이 그 고장을 편케 여기며 옮기기를 중난하게 여기자, 몰래 전화(錢貨)로 군아(郡衙) 안의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었는데, 그제는 다시 거듭 뇌물 주는 것을 이득으로 여기고 있으매 정지하여 옮기지 않았고, 당초에 백성에게서 거둔 것에 있어서도 또한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대로 자목(字牧)462) 의 소임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이필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박준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윤대관(輪對官)과 하직하는 수령(守令)을 불러 보고, 폐막(弊瘼)을 묻고서 마땅히 감해 줄 것은 감하도록 하였다.
12월 2일 기미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앞서의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사간원에서 【정언 한덕후(韓德厚)이다.】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기조(騎曹)463) 의 도안청(都案廳) 서리(書吏)와 고직(庫直)들이 관장(官長)을 속이고서 군포(軍布) 수천 동(同)을 도둑질하여 먹었기에 본조(本曹)의 판서(判書)가 아울러 잡아 가두었었는데, 마침 경범 죄수들을 놓아주도록 하는 명이 있게 되자, 그때에 명을 받은 승선(承宣)이 죄의 경중을 묻지 않고서 한결같이 모두를 혼동하여 놓아 주므로 따라서 도망하여 숨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일이 놀랍고 해괴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를 우선 되도록 무겁게 추고(推考)하고, 따라서 좌우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기일을 정해 놓고 잡아내도록 하여 그 중에 수악(首惡)을 효시(梟示)하여 간사하게 좀먹는 풍습을 징계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승지를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효시는 곧 일률(一律)464) 이므로 경솔하게 앞질러 거행할 수 없다."
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여 다시 사직하기를 신청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옛말에 ‘정성이 이르는 바에는 금석(金石)도 또한 뚫리게 된다.’고 하였다. 지금 내가 경(卿)에게 돈면(敦勉)해 온 것이 지성껏 하였다면, 경이 사양하기를 어찌 이처럼 하게 되겠는가? 세상의 도리는 날로 저하(低下)되고 습관된 세속은 고칠 수 없어, 신기(新奇)한 것으로 이기기 힘쓰며 각박한 짓을 일삼아 하는 것을 직책을 감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언제나 너그럽고 요약하게 하여 공평(公評)하도록 하려는 것을 부드럽고 나약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아! 지금 나의 의지가 모질고 교만한데 경이 만일 받들어 순종하게 된다면 이는 진실로 아첨하는 것이거니와, 지금 나의 의지가 너그럽고 공평한 것이고 경의 뜻도 똑같이 그러하다면, ‘그의 아름다움을 받들어 순종하라.’고 한 말이 어찌 성인(聖人)이 농담한 것이겠는가? 경의 마음이 본래 너그럽고 공평하지 못하면서 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이는 지성이 아닌 것이고, 경의 마음이 너그럽고 공평하면서도 이 당시의 의논에 따라 과격한 논의를 하는 것이라면 이도 또한 지성이 아닌 것이다. 풍습과 세속에 물이 들지 않고 평소의 뜻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경을 취하게 된 소이(所以)인 것이다. 말과 뜻이 궁하여 나의 마음속에 있는 바를 털어놓는 것이니, 경은 마땅히 나의 이런 뜻을 체념(體念)하여 이날로 함께 들어 오라."
하였다.
동부승지 김조택(金祖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 편이 충신(忠臣)이라면 저 편은 역신(逆臣)인 것이고 저 편이 충신이라면 이 편은 역신인 것이어서, 음양(陰陽)과 흑백(黑白)을 구분하기 쉬움과 같을 뿐만이 아닌 것인데, 오늘날에는 충신인 사람도 자신이 충신인 줄을 알지 못하고 역신인 사람도 자신이 역신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있어, 충신 한 편과 역신 한 편이 마침내 귀결(歸結)이 없게 되므로 온 조정의 신하들이 거개 모두 반충신(半忠臣)과 반역신(半逆臣)의 중간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고도 하늘을 이고 땅을 디디고서 군부(君父)를 섬기게 될 수 있겠습니까? 저번날의 원로(元老)의 상소에 운운(云云)한 것 때문에 조정에 있던 두 대신(大臣)이 구태어 스스로 인혐(引嫌)하고 들어갔으나 이리저리 거닐며 관망(觀望)만 하기를 마치 국외(局外)의 사람처럼 하고 있고, 더러는 계사(啓辭)와 더러는 차자(箚子)를 올리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편어 척자(片於隻字)도 혹 ‘토복(討復)’ 두 글자에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붙들어 주고 억제하는 것이 너무 치우치게 하시어 ‘수규(首揆)의 상소에 말을 듣기를 잘못한 것이라.’는 말들로 구태어 두 대신을 위로해 주는 계획을 하시니, 이는 이미 원로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도 없고 따라서 두 대신의 불안(不安)만 더하게 한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만일 두 대신으로 하여금 즉시 일어나 나와서 일을 보아 전일에 펴지 못하던 의리를 펴게 한다면, 원로의 한 장의 상소가 두 대신을 성취(成就)시키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삼가 전하께서 더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적정한 바가 있기 때문이니, 두 정승을 권면하여 나오게 하는 것이 나에게 달려 있다. 과연 이렇게 하여 이때의 의논에 합치하게 된 다음에는 지성이라 하겠는가? 너는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므로 마땅히 먼저 공평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하였다.
경상 병사(慶尙兵使) 이사주(李思周)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며 권면하고 신칙(申飭)하였다.
12월 3일 경신
신무일(愼無逸)을 승지(承旨)로, 서종급(徐宗伋)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정사(呈辭)하여 체직되기를 원하니, 임금이 별유(別諭)를 내려 돈면(敦勉)하고,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차자를 올려 면직하기를 구하니,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려 돈면하였다.
12월 4일 신유
예조에서 아뢰기를,
"올 병오년465) 의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의 중시(重試)는 똑같이 거행하고, 별시(別試)의 문과(文科) 초시(初試)의 액수(額數) 3백 명은 그전대로 모두 서울로 모아, 양소(兩所)로 나누어 각각 1백 50명씩을 뽑되, 초장(初場)에는 논(論)과 부(賦)로 하고 종장(終場)에는 책문(策問) 1편씩으로 하며, 강경(講經)은 사서(四書)에 있어서는 추생(抽栍)하게 하고 삼경(三經)에 있어서는 한 가지 글을 자원(自願)에 의해서 하되, 조(粗) 이상을 시취(試取)할 것을 지위(知委)하여 거행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고, 또 아뢰기를,
"증광시(增廣試)에는 으레 원점(圓點)과 강경(講經)이 있는데 요사이에는 소모(消耗)하는 비용이 매우 많기 때문에 오래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또한 근래의 예대로 원점과 강경을 제외하고 관소(館所)도 설치하지 말고, 단지 양소(兩所)만 설치하여 관소에서 시취(試取)하던 수를 양소에 나누어 붙히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12월 5일 임술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요즘에 승선(承宣)의 상소가 나옴으로써 조절(操切)466) 이 더욱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은 대부분 억륵(抑勒)467) 에서 나온 것이기에 신(臣)이 진실로 교묘한 변명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마는, 물정(物情)의 소재(所在)를 가만히 앉아서 알 수 있습니다."
하니, 비답에 대략 말하기를,
"승선의 상소는 말이 해괴한 것이기에 진실로 가소로워 책망할 것이 없다. 이러한 야비하고 자질구레한 말을 경(卿)의 공평한 마음으로 어찌 입에 걸고 염두에 둘 것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6일 계해
무인(武人) 윤필은(尹弼殷)이 상소하여 군정(軍政)의 폐해를 논하고, 이어 군기도(軍器圖)를 진달하였는데, 답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世子)가 입학(入學)을 한 다음에 관례(冠禮)를 거행해야 하겠는가?"
하니,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경종(景宗)께서는 8세에 입학하여 관례하고 9세에는 가례(嘉禮)를 하였고, 숙종께서는 9세에 입학하고 10세에 관례하고 11세에 가례를 하셨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입학은 3월 초순 이후로, 관례는 9월 초순 전으로 날을 가려 입계(入啓)하라."
하였다.
대제학에게 반궁(泮宮)에서 선비들을 시험보이도록 명하여, 유내(柳徠)에게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하였다.
12월 7일 갑자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대사헌 김간(金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께서 슬기롭고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진강(進講)하는 《효경(孝經)》을 이미 끝냈으므로 장차 또 계속하여 《소학(小學)》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글에 실려 있는 일들은 임금께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스승을 존대하고 벗과 친애(親愛)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 없어, 주자(朱子)의 이른바 사람을 만드는 양자(樣子)인 것입니다. 신이 젊었을 적에 일찍이 이 글을 읽으면서 경전(經傳) 및 자사(子史)와 우리 동방(東邦) 제유(諸儒)들의 해설(解說) 중에 이글의 해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널리 찾아내어 하나하나 채집하여 기록하고 자음(字音)과 자의(字義)에 있어서도 또한 자세하게 해 놓아 몽학(蒙學)들이 알기 쉽도록 하고, 사이사이에는 또한 그윽이 신(臣)의 뜻을 붙여 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는 신(臣) 자신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자료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입니다마는, 이제 듣건대 서연(書筵)에서 장차 이 글을 진강하게 된다고 하니, 야인(野人)이 헌근(獻芹)468) 하는 정성이 스스로 가슴속에 간절하기에, 감히 참월(僭越)함을 잊고서 상소에 딸리어 올립니다. 춘궁(春宮)에게 주시어 강독(講讀)할 적에 자료로 삼게 하신다면 혹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소학차기(小學箚記)》는 경(卿)의 권권(惓惓)한 마음을 알겠으니, 마땅히 원량(元良)에게 보이어 강학(講學)하는 공부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
하였다.
12월 10일 정묘
소대(召對)를 거행하여 《송문감(宋文鑑)》을 진강하였다.
지평 신노(申魯)가 상소하여, 공인(貢人)들이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게 된 것은 환시(宦侍)와 액례(掖隷)들이 정채(情債)를 조종(操縱)하는 소치 때문임을 논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지첨(紙籤)469) 을 사하(斜下)하고 각사(各司)에 저장해 놓은 물건을 가져다가 쓰심은 좋은 도리가 아니니, 청컨대 모든 것을 승정원에 관유(關由)하소서."
하고, 또 양역(良役)의 고질이 된 폐해를 말하여 지패법(紙牌法)을 시행하여 장정(壯丁)의 수를 바로잡기 청하고, 또 청하기를,
"주전(鑄錢)하고 평적(平糴)하여 농민을 회복시키며 각 고을의 이노(吏奴)들을 모두 대오(隊伍)를 만들고 융복(戎服)을 갖추게 하여 봄과 가을에 무재(武才)를 시험보여 위급할 때에 쓰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정채(情債)는 진실로 통탄스러움과 해괴함이 심한 일이니 따로 신칙(申飭)을 가하겠다. 금내(禁內)에서 쓰는 물건은 반드시 계하(啓下)를 한다면 어찌 허위(虛僞)가 난잡하게 될 것이 있겠느냐마는, 의논해서 해야 할 것에 있어서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1일 무진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정사(呈辭)하여 체직하기를 구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를 내리어 유시하였다.
12월 12일 기사
밤에 유성(流星)이 진성(辰星) 위쪽에서 나와 건방(乾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형상이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4, 5자 가량이며 빛깔이 희었다.
경성회(慶聖會)·이정소(李廷熽)를 승지(承旨)로, 서종급(徐宗伋)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강일규(姜一珪)를 장령(掌令)으로, 이도원(李度遠)을 정언(正言)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지경연사(知經筵事)로, 김유경(金有慶)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삼았다.
12월 13일 경오
주강(晝講)을 거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정언 한덕후(韓德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해 이후로는 대궐 안의 수리하는 역사가 끊임없이 연속되었습니다. 태묘(太廟)의 수리와 사묘(私廟)의 영건(營建)에 있어서 이는 모두 그만둘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마는, 재력이 이미 너무도 궁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또한 새로 숙의(淑儀)의 별궁(別宮)을 영건하고 있는데, 봉작(封爵)한 다음에는 이도 또한 차례로 응당 거행해야 할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공사가 매우 커서 그 비용이 적지 않으니, 지금은 아직 천천히 하여 조금 힘이 넉넉해지기 기다리는 것이 진실로 방해로울 것이 없겠습니다. 만일에 혹 중지할 수 없다면 되도록 검약하게 하고 웅장하거나 화려하게 하지 말도록 하여 일분(一分)이라도 비용을 덜게 하도록 한다면 진실로 성상의 덕에 광채가 나게 될 것입니다.
숙의의 봉작은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니기는 합니다마는, 섬호(纖鎬)470) 의 복제(服制)가 막 끝난 오늘날은 곧 전하께서 맨 처음으로 정사를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신민(臣民)들의 기대가 바야흐로 새롭고 사방 사람들의 소망이 매우 간절하여, 방락(訪落)471) 하는 국정(國政)을 듣게 되기 바라고 있었는데, 일찍이 하나의 어진 선비를 기용(起用)하지도 않고 하나의 새로운 정책을 내놓지도 않고서, 은덕을 내리어 봉작하는 특전(特典)을 먼저 빈어(嬪御)에게 거행하시는 것은 너무도 어진 덕을 밝히는 데에서 먼 데나 가까운 데 사람이 듣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여 승묵(繩墨)472) 을 벗어나지 않게 몸단속을 하시므로, 성색(聲色)과 유연(遊宴)에 대한 경계에 있어 군하(羣下)들이 어찌 감히 망령되이 의심할 것 있겠습니까마는, 주자(朱子)의 말이 ‘중원(中原)에 침입한 오랑캐는 쫓아내기 쉽지만 자기 몸 하나의 사욕(私慾)은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옛적부터 영웅 호걸(英雄豪傑)인 임금들이 이 난관(難關)을 초탈하는 이가 적은 것은, 대개 어두운 방 안에 있어서의 조심(操心)하기는 지극히 어렵고 요란하게 화려한 장소에서는 사람이 방탕해지기 쉽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나는 그런 일이 없다.’ 하시지 마시고 더욱 힘써 경계를 더하시기 바랍니다. 전하께서 매양 ‘성실을 힘쓰고 문구(文具)는 없애야 한다’는 것으로 거듭 제신(諸臣)들을 경계하셨는데, 경계하시는 것이 진실로 옳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臣)이 보기에는 일마다 모두 형식만 갖추고 전연 성실한 도리는 없었습니다. 우선 그 중에 한두 가지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사이 두세 차례 진계(陳戒)한 상소를 특별히 금중(禁中)에 머물러 두도록 명하셨는데, 대저 금중에 머물러 두게 함은, 대개 장차 좌우에 놓아 두고서 항시 보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과연 성심(誠心)으로 좋게 여기셨다면 아침 저녁으로 살펴 보셨습니까? 진실로 이와 같이 하신다면 무슨 까닭으로 채용(採用)하는 실효를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만일에 혹시라도 겉으로만 아름답게 여기어 칭찬하는 뜻을 보이고 실지로 그 말을 써주는 것이 아니라면, 머물러 둔 상소는 궁중(宮中)의 한 장의 휴지가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인데, 이렇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이 그윽이 듣건대 창의궁(彰義宮)에서 절수(折受)한 것이 가장 많아 거의 각 고을에 널려있는데도 감히 누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한두 사람이 폐해를 진달한 것도 전하께서 그만 치우치게 비호(庇護)하시므로, 이 때문에 항간(巷間)의 여염(閭閻)에서 그윽이 논하는 사람이 많이 있게 되니, 이는 어찌 성명의 덕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옛적에 당나라 태종(太宗)이 일찍이 진부(秦府)의 옛 신료(臣僚)들에게 말하기를, ‘짐(朕)이 그 전에 하나의 부주(府主)가 되었었지만 이제는 천하의 임금이 되었기에 사정을 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온 나라의 군주(君主)이시기에 한 치의 땅이나 하나의 백성도 어느 것이 전하의 소유가 아닐 수 없는데, 이에 유독 구궁(舊宮)에만 사정을 두십니까? 그 절수로 더욱 심하게 백성을 괴롭게 한 것은 모두 도로 내주도록 하고, 다시는 더 점유(占有)하지 말도록 하여 먼 외방(外方)의 곤궁한 민생들이 아름다운 혜택을 입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이 임금을 친애(親愛)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에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
하고, 이어 원소(原疏)를 금중(禁中)에 머물러 두도록 명하였다.
12월 14일 신미
사헌부에서 【장령 강일규(姜一珪)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원로(元老) 대신의 상소는 진실로 세상의 도의(道義)를 근심하고 동료들을 경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장령 이태징(李台徵)이 상소하여 스스로 붙들어 주고 도와준다고 핑계하면서 말을 간사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 중에도 ‘적실하게 듣거나 보거나 하지 못하여 더러는 한두 가지의 사실과 틀리는 것이 있다.’는 말들은 은연중 원로(元老)의 말을 사실과 틀리는 것으로 돌리며, 성상의 비답 내용에 ‘오문(誤聞)한 것이라.’는 분부를 승순(承順)하는 짓을 한 것입니다. 경계하고 문책하는 방도로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장령 이태징을 파직하소서. 전 울산 부사(蔚山府使) 안서우(安瑞羽)는 작년에 전정(田政)을 마감하게 될 때에 재해(災害) 입은 3천여 결(結)을 도모하여 얻서 사사로이 스스로 구처(區處)하여 80여 결로 했습니다. 만일 이를 통렬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탐오(貪汚)한 관원들이 더욱 꺼리는 바가 없을 것이니, 안서우를 우선 잡아 가두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사실대로 사핵(査覈)해서 계문(啓聞)하도록 하여 율(律)대로 죄를 과하기 바랍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12월 15일 임신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홍석보(洪錫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임징하(任徵夏)를 석방할 차례에 넣은 것 때문에 성상께서 지극히 준엄하게 분부하시고, 심지어는 추고(推考)하라는 명을 내리시게 되었습니다. 신이 진실로 어리석고 어두었기에 당초부터 특히 투비(投畀)한 죄인에 있어서는 감히 함부로 의논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놓아주거나 놓아주지 않는 책임을 도신(道臣)에게 부여했고 보면, 다만 마땅히 한결같이 공론에 따라서 등급을 구분하여 계문(啓聞)한 다음에는 다행히 죄가 없게 될까 여겼습니다. 이에 도내(道內)에서 귀양 살고 있는 죄인들을 사전(赦典)에 따라 논열(論列)할 때에 과연 임징하를 놓아줄 차례에 넣었던 것인데, 이상하게 준엄한 분부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반복해서 차례차례 반성해 보건대 스스로 저지른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시급히 파면해 주시어 동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후에 지극히 준엄하게 분부를 했었는데 어찌 준례에만 따라 놓아주는 차례에 넣을 수 있겠는가? 공론에 따라서 했다는 말에 있어서는 구차함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12월 16일 계유
임주국(林柱國)을 승지(承旨)로, 황재(黃榟)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민응수(閔應洙)를 사간(司諫)으로, 서종급(徐宗伋)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영의정 정호(鄭澔)가 상소하기를,
"신축년473) 과 임인년474) 이후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군흉(羣凶)들이 정권(政權)을 도둑질하여 삼광(三光)475) 을 가리우고서 국본(國本)을 위해(危害)하려 도모하고 진신(搢紳)들을 어육(魚肉)이 되게 하였으니, 만일에 하늘이 우리 동방(東方)을 돌보지 않았었다면 오늘의 이 날을 기필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대개 위로는 종사(宗社)에 관한 원수와 아래로는 부형(父兄)에 관한 원한이 있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도, 앞을 보다 뒤를 돌아보다 하고, 왼쪽을 막다 오른쪽을 막다 하며 오직 녹(祿)을 유지하고 몸을 보존하기만 일삼느라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품고 있으려는 뜻이 없으며, 일찍이 하나의 사람이나 반 쪽의 사람도 눈을 밝히고 담기(膽氣)를 펼치어 토복(討復)의 의리를 신장(伸長)하는 것을 듣지 못하게 되었기에, 풍속이 퇴패(頹敗)하고 인륜이 무너지며 조정의 의논이 시들해지고 국가의 형세가 위태해짐을 순치(馴致)하게 되었는데도, 온 조정이 머뭇거리고만 있고 상하가 서로 그대로 따르기만 하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의 근심은 이미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는데, 성명(聖明)께서는 또한 ‘일 벌리기 좋아한다.[喜事]’는 두 글자로 온 세상을 금단하여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하고 계시니, 바로 이 이후부터 어버이를 버리고 임금을 제쳐놓는 의논이 마구 조정안에서 일어나게 되고, 아랫사람을 막아버리고 윗사람을 가리어버리는 간사한 짓이 멋대로 전폐(殿陛) 사이에서 행해지게 된다면, 누가 마땅히 다시 전하를 위하여 분명하게 말을 하겠습니까? 이는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요사이에 그윽이 삼가 듣건대 두 정승이 신(臣)의 상소한 말 때문에 동시에 인혐(引嫌)하고 들어가면서 사직하는 단자(單子)가 서 잇달게 되므로 성청(聖聽)이 바야흐로 바쁘시다고 하니, 조정에 일이 없다고 할 수 없고 요단(鬧端)이 생기지 않는다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비록 당초에 일 벌리기 좋아하고 요단을 야기(惹起)할 마음이 없었지만, 일 벌리기 좋아하고 요단을 야기하는 죄를 신이 진실로 차지하게 되었으니, 국법(國法)대로 조율(照律)할 적에 어찌 너그럽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장차 신이 띠고 있을 본직(本職)과 겸임하고 있을 모든 소임을 일체 모두 삭탈(削奪)하고 이어 신이 망령된 말을 한 죄를 다스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번의 상소에 논한 말이 오히려 앞서의 소견을 고집하고 있으니, 진실로 경(卿)을 위하여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영상(領相)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성심으로 예대(禮待)하는 도리가 아니라는 것으로 도로 거둘 것을 계청(啓請)하니, 비답하기를,
"수규(首揆)의 상소에 말은 대저 전일의 것과 같았는데, 어찌 개탄스럽게 여기는 분부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옛날부터 이러한 상소의 비답 때문에 복역(覆逆)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 서로 경계(儆戒)하느라 한 말에 놀라고 의혹함은 무슨 일인가?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모든 승지들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쌀과 베를 관장하는 아문(衙門)의 임사(任事)하는 관원들을 어찌 유능과 무능을 말할 것이 없겠는가? 이 뒤로는 전최(殿最)476) 때에 각별히 품제(品題)를 하라는 뜻으로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좌승지 이현록(李顯祿)과 동부승지 이정소(李廷熽)가, 영상(領相)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예대(禮待)에 모자람이 있다는 것으로 다시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선(承宣)의 말을 내가 진실로 알지 못하겠다. 비록 임금이 하는 말이라도 잘못되면 간하는 법인데 더구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찌 다같이 서로 경계하는 말을 하지 못하겠는가? 영상의 이번 상소는 전에 비하여 한층 더했다. 비록 좌상(左相)을 오로지 지적한 것은 아니었지만 ‘왼쪽을 막다 오른 쪽을 가리운다.’란 말들은 그 뜻이 심각하고 긴박한 것이었기에, 비답의 내용에 있어서도 말듯이 심각하고 긴박한 말을 하려다가, 평소에 예대(禮待)해 왔었기 때문에 ‘말에 너그러움과 화평함이 모자란다.’고 고쳤었다. 저번의 김상석(金相奭)과 이태징(李台徵)의 상소도 무슨 대단한 과실이 있는 것이라고 마침내 파직하기를 청하게 되었으니, 그 폐단이 어찌 작은 것이겠는가?"
하였다. 이현록이 말하기를,
"토복(討復)하는 대의(大義)는 특히 영상[首揆] 한 사람의 마음 만이 아니라 좌상이나 우상도 또한 이를 불안스러운 단서로 여기고 있으니, 만일 전하께서 삼사(三司)의 계사(啓辭)에 대하여 일찍이 윤허하시는 분부를 내리신다면, 두 대신이 어찌 바로 출사(出仕)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웃고 답하지 아니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도목정(都目政)은 국가의 큰 일이므로 마땅히 친림(親臨)하겠으니, 이대로 분부하라."
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진강(進講)이 끝나고, 시독관(侍讀官) 김용경(金龍慶)이 영상(領相)의 상소에 대한 전후의 비답 내용에 미안스러운 대문을 한결같이 모두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 영상의 상소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연속 격렬한 것이 마치 나이 젊은 무리들과 같은 것이어서, 진실로 평소에 원로(元老)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영상의 뜻에 항시 낭묘(廊廟) 안이 고요하게 일이 없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에 이르러 한 바탕의 요단(鬧端)을 야기하게 된 것이다. 김상석(金相奭)과 이태징(李台徵)은 대단한 과실도 없었는데 마침내 파직에 처하기에 이르렀었다. 영상에게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군정에 있는 신하들이 끝까지 감히 말을 하지 않겠는가? 이는 대개 원로가 평소에 강직(剛直)함이 너무 지나친 병폐인데, 제신(諸臣)들이 아뢰어 반드시 모두를 아름다운 것으로 돌리려고 하니, 이 뒤로는 비록 나의 뜻에 미안스러운 것이 있다 하더라도 장차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고, 선온(宣醞)하도록 명하여 닭이 세 차례 울게 되어서야 파하였다.
12월 17일 갑술
임금이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에게 잇따라 별유(別諭)를 내리어 한번 면유(面諭)하는 말을 듣기를 권면하매, 홍치중은 삼가 마땅히 아픔을 참고 나아가겠다고 아뢰었다.
대사간 유숭(兪崇)이 상소하기를,
"영상[首揆]에게 비답(批答)하신 뜻은 옛 성왕(聖王)들이 대신(大臣)을 존경(尊敬)하고 착한 말을 한 사람에게 절을 했던 성덕(盛德)에 어그러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영상의 상소에 대한 비답은 개탄스럽게 여기는 뜻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국가에서 대각(臺閣)을 두었음은 위로 공경(公卿)에서 아래로 모든 신료(臣僚)까지를 규찰(糾察)하여 바로잡도록 한 것인데, 지금 대신의 상소는 지나치게 된 것이라 서로 권면하는 말을 한 것이 도리어 과당하게 되었으니, 내가 세상의 도의를 개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곳이다."
하였다.
12월 18일 을해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명을 받고 빈청(賓廳)으로 나오니, 임금이 인견(引見)하면서 전교하기를,
"붕당(朋黨)의 폐단이 선왕조(先王朝) 때부터 있었으나 신축년477) 과 임인년478) 이래로는 엎치락뒤치락 차츰 더하게 되어 한 고비가 한 고비보다도 깊어지게 되었으니, 요순(堯舜)과 같은 재주와 덕이 있지 않으면 어떻게 만회(挽回)하겠는가? 나의 생각에 옳은 것은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은 그르게 여겨야 하는데 옳은 것 중에도 또한 그른 것이 있고 그른 것 중에도 또한 옳은 것이 있다고 여긴다. 만일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한 것으로 마음을 먹으면, 오래 쌓여 온 폐단이 비록 하루아침에 모두 제거하게 되지는 못하더라도 세월을 끌어 가노라면 혹 조금이나마 효과가 없지 않을 것이나, 나의 부덕한 몸으로 어찌 탕평(蕩平)하게 될 수 있겠는가? 요사이에 조정이 만일 당색(黨色)을 같이 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현명하여도 임용(任用)하지 않고, 만일 동류(同流)로 있게 되면 비록 어질지 않더라도 버리지 않는다. 오늘날 토복(討復)하는 의리를 대저 누가 그르다고 하겠는가마는, 그 중에 지엽(枝葉)마저 반드시 모두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 과중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조금도 사의(私意)가 없는 것을 온 조정이 알고 있는 일이고, 또한 나의 뜻에 아부하여 순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경(卿)을 취한 것은 진실로 경의 공평하고 대범함을 귀중하게 여긴 것인데, 경응 정승으로 제배(除拜)한 뒤부터는 임금으로 있고 신하로 있게 되었기에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뻐했었다. 수규(首揆)의 상소는 천만뜻밖에 나온 것이었다. 그는 강직(剛直)한 성미가 있기 때문에 또한 지나치게 강경한 병통이 없지 않는 것이다. 만일에 경이 이 때문에 자획(自劃)479) 한다면 진실로 바라던 바가 아니니, 나와서 일을 보기를 천만 번 바란다."
하였으나, 홍치중이 일단 체직(遞職)하지 않을 수 없는 뜻을 들어 상세하게 진달하였다. 임금이 탑전(榻前)으로 다가오도록 명하여 한참 동안 손을 잡고 끊임없이 돈면(敦勉)하므로, 홍치중이 말하기를,
"은총(恩寵)과 예대(禮待)가 이러하고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감히 다시 심정과 사세를 들어 말하겠습니까? 마땅히 삼가 명명(明命)하신대로 받들겠습니다."
하고, 이어 물러나왔다.
12월 19일 병자
사헌부에서 【지평 신노(申魯)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가 의금부의 복계(覆啓)에 판하(判下)하신 것을 보건대 멀리 귀양보낸 죄인 황이장(黃爾章)을 특별히 놓아주도록 한 명이 있으셨기에, 그윽이 아혹(訝惑)이 이르름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임인년480) 5월에 가뭄을 민망스럽게 여김이 있을 때에 황이장이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는 몸으로서 이에 감히 ‘오래도록 옥사(獄事)를 폐하고 형륙(刑戮)을 집행하지 않으므로 이런 천재(天災)가 있게 된 것이라.’는 말들을 방자하게 진달(進達)하여, 천청(天聽)을 공동(恐動)하고 무고(無辜)한 사람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계획을 했었습니다. 그의 심술(心術)을 구명(究明)해 보면 말할 수 없이 절통한데, 갑자기 전석(全釋)하게 되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있으니, 청컨대 황이장을 특별히 놓아주도록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12월 20일 정축
밤 3경(三更)에 달이 태미(太微) 서원(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첫 번째의 계복(啓覆)481) 을 거행하였는데, 박문랑(朴文娘)의 옥사에 이르러 임금이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에게 묻기를,
"경(卿)은 일찍이 안핵 어사(按覈御史)를 지냈으므로 반드시 박문랑의 일에 시말(始末)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홍치중이 주대(奏對)하기를,
"박문랑의 아비 박수하(朴壽河)가 박경여(朴慶餘)와 산송(山訟)을 할 적에 쟁변(爭辨)하는 말이 감사(監司)에게 침범함으로 인하여 형벌을 받다가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박문랑이 그의 아비의 죽음이 박경여와의 산송 때문이었음을 통분하게 여기고서 자기 자신이 박경여의 묘산(墓山)에 가서 무덤을 파헤쳐 관(棺)을 드러나게 해 놓고 따라서 숯으로 불을 피웠었습니다. 박경여의 집 사람들이 변(變)을 듣고서 바삐 달려가 바야흐로 이장(移葬)하려고 도모하다가, 박수하의 집 사람들이 다시 와서 변을 일으키게 될까 두려워하여 장정(壯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사방을 둘러쌌었는데, 그 안에 있던 양반(兩班)이 바야흐로 널을 내놓게 될 적에 박문랑에게 전하기를, ‘박경여가 바로 지금 박문랑의 어미 무덤을 파헤쳐, 숯으로 불을 지른 원한을 보복하려고 한다.’라고 했었습니다. 박문랑이 듣고서 통분하게 여기며 온 마을의 사람들과 노복(奴僕)들을 모조리 불러내어 산밑에 매복(埋伏)해 놓으며 하는 짓을 보아 대응하도록 해 놓고, 박문랑이 양손에 칼을 끼고 곧장 말을 달려 산으로 올라가 충돌(衝突)하려고 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가로막아 충돌하지 못하게 되므로 떠들썩하며 엉클어지는 판에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의 강렬(剛烈)한 성미가 그 애통 절박한 심정을 참지 못하여 자문(自刎)하여 죽은 것입니다. 이미 죽고 나자 박문랑이 데리고 있던 비자(婢子)가 사람을 죽였다고 크게 외쳐대매, 그제는 산 밑에 잠복(潛伏)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돌진(突進)해 나와 기세를 타 공격하여 쫓으므로 박경여의 집 사람들이 바람에 쓸리듯이 무너지고 흩어졌는데, 박취휘(朴就徽)는 늙은 사람이라 도망하지 못하고, 그의 오촌(五寸) 조카 박명빈(朴明彬)은 또한 차마 버리고 가지 못했었습니다. 박문랑의 집 제인(諸人)들이 두 사람을 결박(結縛)해 놓고 차다 밟다 하다가 끌고 내려왔었는데, 박취휘는 죽고 박명빈은 잡아 가두었었습니다. 그때에 박문랑의 아우와 박취휘의 아들이 다같이 서울로 올라와 북을 치며 서로들 원통함을 호소했었기 때문에, 드디어 재차 안핵사(按覈使)를 보내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대저 박문랑은 하나의 시골 부녀이지만 마음 속에 지극한 애통이 있자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겹겹의 포위를 뚫으려고 했으니 그 얼마나 용맹스러운 일입니까? 밀어젖혀 치고 밟고 하여 위험과 모욕이 몸에 절박함에 당하여는 칼을 뽑아 자결(自決)하여 죽어버리기를 집에 돌아가듯이 하였으니, 그 과단스러운 성미와 강렬(剛烈)한 기백이 옛적의 열장부(烈丈夫)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딴 사람에게 자살(刺殺)당하여 칼날 밑에 뒹굴게 되는 것과 어찌 동등하게 논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박문랑이 칼을 끼고 말을 달리어 1천 사람들 속에 돌진하는 늠연(凛然)한 모습을 마치 그 실상을 보는 것과 같다. 비록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싣는다 하더라도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느냐? 이를 숭상하고 권장하지 않는다면 그의 원통한 혼을 위로해 줄 수 없을 것이니, 특별히 박문랑에게 정려(旌閭)하라."
하였다.
이중환(李重煥)을 사형을 감등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였다.
특별히 조문보(趙文普)의 칼을 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조문보가 홍성룡(洪聖龍)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남간(南間)에 갇히어 있었는데, 임금이 묻기를,
"조문보는 누구의 집 자손인가?"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奉祀孫)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특별히 칼[枷]을 풀어 주도록 하여, 내가 현자(賢者)를 존경(尊敬)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정지하라고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그만두도록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임징하(任徵夏)를 멀리 귀양보낸 것을 도로 거두는 일에 있어서는,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임징하를 멀리 귀양 보내지 않는다면 뒷날에 무슨 면목으로 대행 대왕(大行大王)께 돌아가서 뵈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간원에서 【정언 한덕후(韓德厚)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중환(李重煥)이 적신(賊臣) 목호룡(睦虎龍)과 함께 일을 한 정상이 목시룡(睦時龍)의 공초(供招)에 낭자(狼藉)하였을 뿐만이 아니어서, 그의 죄상을 논한다면 결단코 용서할 수 없으니, 청컨대 이중환의 사형을 감동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2월 21일 무인
임금이 윤대관(輪對官)들을 불러 보고 각 직장(職掌)에 있어서의 폐막(弊瘼)을 물어보았다.
12월 22일 기묘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세 차례째의 계복(啓覆)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서울 안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마는, 옥남(玉男)이 사람을 죽인 일은 중신(重臣)의 가문에서 생긴 것으로서 이러한 일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었다. 평소에 잘 검칙(檢飭)하지 못한 것임을 미루어서 알 수 있으니, 계칙(戒飭)하는 도리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장계(狀啓)한 것에 따라 나리포(羅里舖)의 곡식 3천 석(石)을 이송하여 진제(賑濟)하는 밑천으로 보충해 주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빨리 그만두도록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정지하도록 비답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이중환(李重煥)의 사형을 감등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고,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12월 24일 신사
서종급(徐宗伋)을 교리(校理)로, 황재(黃榟)를 헌납(獻納)으로, 정익하(鄭益河)를 검열(檢閱)로 삼았다.
야대(夜對)를 거행하였다.
12월 25일 임오
이근(李根)을 사간(司諫)으로, 송택상(宋宅相)을 장령(掌令)으로, 송수형(宋秀衡)을 정언(正言)으로, 이응(李膺)을 지평(持平)으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김상석(金相奭)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12월 26일 계미
김유경(金有慶)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장령 강일규(姜一珪)가 상소하여 네 가지 일을 말하였다. 첫째 토역(討逆)에 있어 엄정(嚴正)하지 못한 것, 둘째 이중환(李重煥)을 앞질러 감단(勘斷)한 것, 셋째 강계 부사(江界府使) 허정(許鼎)은 변방 소임에 합당하지 못함을 논한 것, 넷째 홍주 목사(洪州牧使) 신겸제(申兼濟)의 탐오(貪汚)와 불법(不法)을 논한 것이었는데, 모든 것을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경연관(經筵官) 한원진(韓元震)이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를 토죄(討罪)하지 않으면 인륜(人倫)이 없어지게 되고, 사사(邪辭)와 음사(淫辭)를 물리치지 않으면 성인들의 도가 쇠퇴한다고 여깁니다. 신이 처음으로 나아온 날에 바로 이 두 가지를 들어 감히 탑전(榻前)에서 진달했던 것은, 대개 성상께서도 이를 가지고 전성(前聖)들의 공적(功績)을 이어 가시려고 하셨고, 신도 또한 스스로 《춘추(春秋)》의 법에 부합된다고 여겼습니다마는, 신이 정성이 모자라고 말이 졸렬(拙劣)하므로 천청(天聽)을 감동하여 돌리시게 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지켜 오던 바를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며 관작(官爵)을 탐하고 사모하여 지체하고 있다가 백대(百代)토록 비난을 받게 하겠습니까? 또 신은 요사이 전하께서 대신을 대우하시는 바에 있어서 더욱 개탄스럽게 여겨지는 바가 있습니다. 대신의 상소는 진실로 임금을 친애(親愛)하고 국가 일을 근심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의 말이 오직 당시 사람들의 병통에 절실하게 적중지켰을 뿐만 아니라, 진실로 깊이 곤직(袞職)482) 의 실수를 보완(補完)하게 하는 바의 것이었습니다. 그의 단단(斷斷)한 충심(忠心)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전하께서 조금도 조용하게 생각해 보시지 않고 졸급하게 견책(譴責)을 가하셨으니, 이 어찌 온 나라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하니,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12월 27일 갑신
내년에는 따로 서북도(西北道)에서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를 보이도록 명하였다.
부제학 이기진(李箕鎭)이 차자를 올려, 처치(處置)를 한 유신(儒臣)을 파직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시행한 벌은 또한 말감(末勘)한 것이라 여기고 있는데, 전환(轉圜)하기를 청하니, 진실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각(臺閣)이 시창(時昌)의 계달(啓達)은 정지(停止)하면서 이삼(李森)의 계달은 정지하지 않음을 들어 준엄한 분부를 내리므로, 대신(臺臣)이 이 때문에 피혐(避嫌)하게 되자 유신이 처치하여 출사(出仕)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노하여 유신을 파직하므로, 승정원에서 복역(覆逆)하자 모든 승지들을 추고(推考)하도록 명했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이기진이 차차로 논한 것이다.
12월 28일 을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친히 도목 대정(都目大政)을 거행하였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심택현(沈宅賢),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김흥경(金興慶)이었다.
12월 29일 병술
희정당에서 친정(親政)을 거행하여, 유숭(兪崇)을 도승지(都承旨)로, 홍용조(洪龍祚)와 김치후(金致垕)를 승지(承旨)로, 권업(權𢢜)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황재(黃榟)를 교리(校理)로, 권적(權𥛚)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한이조(韓頤朝)를 헌납(獻納)으로, 신처수(申處洙)를 장령(掌令)으로, 박사성(朴師聖)을 교리로 삼았다. 정사(政事)가 끝나자 선온(宣醞)하도록 명하고, 시 1구(句)를 어제(御製)하여 입시(入侍)한 제신(諸臣)들에게 화답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북도(北道)의 삼수(三水)·갑산(甲山) 등 11고을의 올해 전조(田租)를 차등이 있게 면제해 주었다.
충청도 제천현(堤川縣)에 지진하였다.
12월 30일 정해
경상도 풍기(豐基)와 충청도 청풍(淸風)에 지진하였다.
올해에 서울 오부(五部)의 원호(元戶)는 3만 2천 7백 47호이고, 인구는 18만 8천 5백 97명이다. 【남자 인구는 8만 9천 3백 61명이고 여자 인구는 9만 9천 2백 36명이다.】 팔도(八道)의 원호는 1백 58만 1천 8백 51호이고, 인구는 6백 80만 6천 8백 3명이다. 【남자 인구는 3백 28만 2천 8백 58명이고 여자 인구는 3백 52만 3천 9백 45명이다.】
【태백산사고본】 9책 10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15면
【분류】호구-호구(戶口)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11권, 영조 3년 1727년 2월 (1) | 2025.08.24 |
|---|---|
| 영조실록11권, 영조 3년 1727년 1월 (2) | 2025.08.24 |
| 영조실록10권, 영조 2년 1726년 11월 (1) | 2025.08.20 |
| 영조실록10권, 영조 2년 1726년 10월 (2) | 2025.08.20 |
| 영조실록10권, 영조 2년 1726년 9월 (4) | 2025.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