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권, 영조 3년 1727년 1월

싸라리리 2025. 8. 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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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무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조하(朝賀)를 받고 분부하기를,
"국가는 백성에게 의존(依存)하고 백성은 국가에 의존하는 것인데 그 근본은 농사(農事)인 것이다. 근년(近年) 이래로는 해마다 큰 흉년인데다가 인족(隣族)에 대한 침징(侵徵)과 백골(白骨)에 대한 징포(徵布)까지 가해지고 있으니, 아! 생령(生靈)들이 장차 어떻게 지탱하여 보존해 가겠는가? 삼양(三陽)이 돌아와 화창해져 만물이 모두 즐겁게 되었는데, 어찌 유독 우리 동방(東方)의 생령들은 홀로 즐거움이 없어서 되겠는가? 아! 제도(諸道)의 방백(方伯)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해야 한다마는, 비록 권농(勸農)을 하더라도 만일에 혹시 백성들을 요란하게 한다면 민생들이 어떻게 마음을 안정하여 일을 하게 되겠느냐? 농량(農糧)이 모자라게 된 자에게는 종자를 구득(求得)해 주고, 부역(賦役)이 고통스러워 농사하기에 게을러진 자에게는 경작(耕作)에 권면하도록 지도하고, 무릇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는 행정(行政)을 면제해 주어 우리 민생들이 편리하게 농사일을 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헌납(獻納) 한이조(韓頤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박필정(朴弼正)의 일에 있어서는 당초에 허석(許錫)이 상소 가운데 이른바 ‘알양(訐揚)이라.’ 한 것이 이미 가리키는 바가 있은 것이었는데, 그 뒤에 허석이 많은 사람의 좌중(座中)에서 박필정의 이름을 지적하며 드러나게 배척하기까지 했었으니, 비록 덮어서 은휘(隱諱)하려고 한들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臣)이 대신의 좌석에서 상소의 초본(草本)을 보게 될 적에 이름 높은 관원이 그 자리에 있으며 참여하여 듣게 되었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어사(御史)가 봉고(封庫)한 뒤에 도신(道臣)이 말을 만들어 장계(狀啓)한 것에 있어서는 과연 이것이 그전에 없는 짓을 한 것인데도 사람들의 소견이 같지 않으니, 신(臣)이 어찌 반드시 복명(復命)하는 날에 시끄럽게 따라서 변명하겠습니까? 간신(諫臣)이 신의 변명하지 않는 것을 그르게 여겼습니다마는, 도신이 말을 만들어 장문(狀聞)한 것은 유독 사체에 맞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희노(喜怒)와 사령(辭令)을 하시는 사이에 중도(中道)를 지나치는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시험삼아 지난번에 유신(儒臣)을 특별히 파직하도록 한 명으로 말하더라도, 신(臣)은 걱정되고 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대각(臺閣)이 쟁집(爭執)한 바는 당초에 한두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어서 그 혹은 정지하고 혹은 정지하지 않은 것을 오로지 공정(公正)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간신(諫臣)들의 그날 주대(奏對)한 말이 설혹 착오된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탑전(榻前)의 갑작스러운 자리인지라 정론(停論)한 사람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었는데, 이번에 그만 거짓 알지 못하는 체한 것으로 책하고 곧장 면전(面前)에서 속이는 짓을 한 것으로 돌리시니, 진실로 이미 실정을 벗어난 것입니다. 하물며 처치(處置)하는 규례(規例)는 단지 그 피혐(避嫌)한 말에 의거하여 하는 것이고, 대관(臺官)의 계사(啓辭)에 논한 말도 또한 거듭 나온 의논이었고 보면, 유신(儒臣)이 전례에 따라 출사(出仕)하기를 청한 것은 단정코 다른 뜻은 없는데, 사정을 두어 하늘을 속이는 짓을 한 것으로 그의 죄목(罪目)을 삼았음은 또한 중도에 지나침의 심하심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경(卿)의 차자를 보고서 비로서 말씨가 중도에 지나쳤음을 깨닫게 되었고 경의 권권(眷眷)한 마음을 알겠다. 그날의 비망기(備忘記)을 특별히 고쳐서 계하(啓下)하겠다."
하였다.

 

1월 2일 기축

영의정 정호(鄭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고집 불통의 성미는 늙어도 오히려 변화되지 않았으며 어긋나고 망령된 견해는 자신(自信)이 또 견고합니다. 돌아보건대, 어찌 차마 한 번 준엄한 분부를 받들었다고 갑자기 지키던 바를 변경하여 위에서 기뻐하고 아래에서 용납되기를 구하겠습니까? 당면한 지금의 도리는 단지 신(臣)의 죄를 분명하게 조사하여 크게 국시(國是)001)  를 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복잡하고 요란한 발단이 생겨나지 않게 되고 화평(和平)해지는 복을 가져오게 될 것인데, 한결같이 용서해 주어 양편이 모두 안정되게 하려고만 하신다면, 가만히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구경(九經)002)  의 군신(群臣)을 체찰(體察)하는 의리에 있어 혹은 살피지 못하시는 데가 있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때의 하교(下敎)가 딴 심각한 뜻이 없으니, 마땅히 빨리 길에 올라야 한다."
하였다.

 

1월 3일 경인

조명신(趙命臣)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에서 재숙(齋宿)하니, 기곡(祈穀)003)  하기 위함이었다.

 

1월 4일 신묘

임금이 기곡제(祈穀祭)를 행하였다. 밤 4경(四更)에 장차 제단(祭壇)으로 나아가려 하며 분부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비는 일이므로 내가 장차 걸어서 가겠다."
하니, 도승지 유숭(兪崇)이 교자(轎子) 탈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날 밤 크게 추웠는데 어가(御駕)를 따르는 군병(軍兵)들에게 유의(襦衣)를 내리도록 명하고, 회란(回鑾)004)  할 때에는 길 위에 연(輦)을 멈추어 삼군(三軍)을 위문하였다.

 

1월 5일 임진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005)  을 받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관명(李觀明)이 용도(用度)를 절약할 것과 검소를 숭상해야 함은 진계(進戒)하고, 또 이전(二典)과 삼모(三謨)006)  로써 성학(聖學)을 힘쓰게 하며, 이어서 언로(言路)를 신장(伸張)할 것과 공론을 붙잡아 세우는 것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要諦)로 삼도록 하고, 끝으로 《춘추(春秋)》의 토복(討復)하는 의리를 들어 누누이 진달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했다. 부제학(副提學) 이기진(李箕鎭)이 성실을 힘쓰고 허위를 제거해야 함을 들어 진계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답하였다. 제신(諸臣)들이 대략 당시의 폐해를 진달하고 나자, 오위 장(五衛將) 성규헌(成揆憲)이 성학(聖學)을 힘쓸 것과 군정(軍政)을 정돈할 것을 들어 상주(上奏)하고, 이어서 《춘추》의 대의(大義)를 진달하니, 임금이 묻기를,
"이는 어떤 사람이냐?"
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입니다."
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며 칭찬하였다. 우통례(右通禮) 오명희(吳明羲)가 군정과 전정(田政)에 관한 폐단을 진달하고, 이어 아뢰기를,
"해가 짧은 때라 구두(口頭)로는 진달하기 어려우므로, 청컨대 문자(文字)로써 앙주(仰奏)하겠습니다."
하였다. 승지가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추고하지 말라고 명하며 물러가 상소를 진달하도록 윤허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엇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정령 송택상(宋宅相)이 아뢰기를,
"양사(兩司)의 합계한 사람 중에 윤지완(尹趾完)은 신(臣)과 오촌(五寸) 친속(親屬)이 됩니다. 사의(私義)로 헤아려 보건대, 참여하여 관섭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청컨대 체직하소서."
하고, 정언 송수형(宋秀衡)이 아뢰기를,
"송택상이 억지로 법례(法例) 이외의 혐의를 끌어대어 급급하게 앞질러 물러나려고 하니, 경계와 문책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어 분부하기를,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의 일에 있어서는 앞서 이미 분부를 내렸거니와, 이광좌(李光佐) 등 세 사람의 일에 있어서는 내가 대관(臺官)의 말을 지나치게 여긴다."
하고, 또 분부하기를,
"정언(正言)이 경연(經筵)에 새로 들어와 누누이 진달한 것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송수형(宋秀衡)은 처음으로 대관(臺官)의 자리에 들어가 연계(連啓)한 일 이외에도 토역(討逆)해야 하는 의리를 들어 누누이 자세하게 진달하였는데, 사기(辭記)가 강개(慷慨)하고 명백하여 천청(天聽)을 감동시키기에 족함이 있었으니, 임금이 비록 그의 말을 써 주지는 않았으나 그가 대관의 체모를 얻었음을 아름답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15면
【분류】역사(歷史) / 변란(變亂) / 왕실(王室) / 정론(政論) / 외교(外交) / 군사(軍事) / 농업(農業) / 사법(司法) / 인사(人事)


[註 005] 조참(朝參) : 매달 초5일, 11일, 21일, 25일 이렇게 네 차례에 모든 문무(文武) 관원이 검은 옷을 입고 근정전(勤政殿)이나 인정전(仁政殿)에서 임금에게 문안드리고 나서 정사(政事)에 대해 아뢰는 것.[註 006] 이전(二典)과 삼모(三謨) : 이전은 《서경(書經)》 우서(虞書)의 요전(堯典)·순전(舜典)의 2편, 삼모는 《서경》 우서의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익직(益稷)의 3편을 가리킴.
사신은 말한다. "송수형(宋秀衡)은 처음으로 대관(臺官)의 자리에 들어가 연계(連啓)한 일 이외에도 토역(討逆)해야 하는 의리를 들어 누누이 자세하게 진달하였는데, 사기(辭記)가 강개(慷慨)하고 명백하여 천청(天聽)을 감동시키기에 족함이 있었으니, 임금이 비록 그의 말을 써 주지는 않았으나 그가 대관의 체모를 얻었음을 아름답게 여겼다."

 

임금이 태묘(太廟)의 전알(展謁)과 사묘(私廟)의 전배(展拜)하는 절목(節目)을 가져다 보고, 호가(扈駕)와 노부(鹵簿)007)  의 의식(儀式)을 차등이 있게 참작하여 정례(定例)를 만들었다.

 

이근(李根)을 사간(司諫)으로, 채응복(蔡膺福)을 헌납(獻納)으로, 정광제(鄭匡濟)를 필선(弼善)으로, 심태현(沈泰賢)을 겸설서(兼說書)로, 이재(李縡)를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흡(李潝)을 대교(待敎)로 삼았다.

 

명천포(明川浦) 백성들이 바닷물에 침몰하여 죽고 연군(鉛軍)들이 광산(鑛山)에서 압사(壓死)했는데, 도신(道臣)에게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펴도록 명하였다.

 

분부하기를,
"동작(動作)008)  이 멀지 않으니, 원릉(園陵)에 행행(行幸)할 때에 도로와 교량(橋梁)을 수리하지 말도록 하여 민폐(民弊)를 덜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차자를 올려 동조(東朝)009)  에게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이때 징토(懲討)가 엄정하지 못하고 의리가 밝아지지 못하므로 우려하는 기색이 눈에 그득하여 장차 변난(變難)이 일어나게 되어 있었는데, 홍치중은 대신으로 연락(宴樂)을 청함이 있으니, 마땅히 공론에 배척을 받게 될 것이다.

 

장령 신처수(申處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헌신(憲臣)이 이제항(李齊恒)을 논척(論斥)한 상소에 ‘사의(私意)를 협잡(挾雜)하고 있음은 정계(停啓)010)  한 대관(臺官)보다도 심함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신(臣)이 정계할 때에 사의가 있었다고 이른 것입니다. 신이 심단(沈檀)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전연 관계가 없음을 온 조정이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신이 어찌 조금이라도 사사로이 두둔하려는 뜻을 가지고 고의로 정계(停啓)하여 한없는 구설수를 가져오게 하였겠습니까?"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1월 6일 계사

야대(夜對)011)  를 행하였다. 《송감(宋鑑)》을 진강(進講)했는데, 부제학 이기진(李箕鎭)이 아뢰기를,
"학문이란 딴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해 가고[成己], 만물을 완성해 간다[成物]’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말을 하여 대대로 천하(天下)에 법이 되고, 행동하여 대대로 천하에 모범이 되는 것이라.’ 하였으니, 제왕(帝王)의 언행이 신민(臣民)들에게 법이 되어지지 못하면 학문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시독관(侍讀官) 박사성(朴師聖)이 아뢰기를,
"김용경(金龍慶)이 전일에 만나게 된 바는 어찌 그것이 그의 본정(本情)이겠습니까?"
하고, 이기진(李箕鎭)이 아뢰기를,
"당초에 시창(時昌)의 일을 정계(停啓)하게 될 때에 많은 대관(臺官)이 일제히 모였었기 때문에 일이 지나간 다음에는 전연 망각(忘却)하게 된 것입니다. 민응수(閔應洙)와 신노(申魯)가 탑전(榻前)의 자리에서 주대(奏對)한 말도 어둡고 잘못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또한 어찌 그 속에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한덕후(韓德厚)와 이근(李根)은 곧 정계했던 사람들인데, 한덕후는 인피(引避)하면서도 또한 깨닫지 못하였었고, 이근은 또한 상소하여 처치(處置)한 김용경을 구원하다가 사헌부(司憲府)의 일기(日記)를 보고서 비로소 그제야 깨달았었습니다. 여러 대관의 처사가 마디마디 착오된 것이었지만, 그들의 본정(本情)은 고의로 속이거나 은휘(隱諱)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을 여기에 볼 수 있습니다. 비망기(備忘記) 내용에 ‘거짓 알지 못한 것처럼 한 것이라.’고 하신 분부를 비록 이미 고쳐서 계하(啓下)하기는 했습니다마는, 만일에 분명하게 개석(開釋)하셨음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제신(諸臣)들이 어찌 감히 조정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날에 함우신(咸遇臣)을 정법(正法)할 적에 문서(文書)를 불태워버린 것은 내가 우연한 뜻으로 한 것이 아니다. 옛적부터 지금까지에 어찌 신축년012)  과 임인년013)  의 일처럼 참혹하고 독살스러운 것이 있었겠느냐? 내가 그때에 차마 조보(朝報)014)  를 볼 수가 없었고, 일찍이 춘당대(春塘臺)에 입시(入侍)하였다가 마침 대간(臺諫)이 논계(論啓)하는 것을 보고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 없기에 조금 물러나와 피했었는데, 대개 적신(賊臣) 목호룡(睦虎龍)을 빙자하여 모함하는 옥사(獄事)를 일으켜 부당한 형벌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지금 함우신(咸遇臣)으로 인하여 또 옥사를 일으키게 된다면 반드시 층층으로 생기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비록 나의 뜻이 이러하기는 하지만, 집법(執法)을 논계(論啓)함에 있어서 어찌 갑작스럽게 시창(時昌)의 일을 정계(停啓)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기진이 아뢰기를,
"대저 대관의 논계는 반드시 한 시대의 공론을 보아서 하게 됩니다. 지금 거리에서 하는 말이나 항간(巷間)에서 하는 말들이 ‘적신(賊臣) 이삼(李森)을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시창에 있어서는 물의(物議)가 이러한 데 이르지 않았으므로 저번에 정계하게 된 것은 대개 이런 때문입니다."
하였다.

 

1월 7일 갑오

정언 송수형(宋秀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허석(許錫)의 상소 내용에 ‘이름 있는 관원을 알양(訐揚)했다.’는 말은 이미 적실하게 성명을 지적해 놓지 않은 것인데, 박필정(朴弼正)과 한이조(韓頤朝)가 서로 미루고 있으므로 둘 다 의사(疑似)하기만 하고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으니, 진신(搢紳)들의 수치입니다. 진실로 박필정이 조금이라도 스스로 불만족스러운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한이조의 사실(私室)에서 동정을 받으려고까지 하였겠습니까? 청컨대 박필정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한이조는 사실에서 한 말을 임금께 고하는 글에 나타내는 짓을 했습니다. 또한 한이조는 안렴(按廉)을 잘하지 못했기에 탄장(彈章)을 받게 되었고, 경연(經筵)에서 분부가 계신 다음에는 덮어놓고 부임(赴任)했다가 간신(諫臣)이 거론하여 탄핵하자 스스로 분소(分疏)015)   하기를 마치 도리어 꾸짖듯이 했었으니, 청컨대 한이조를 파직하소서. 장령 송택상(宋宅相)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미련하여 청관(淸官)016)  의 길에 막힘을 당하였고, 어제의 조참(朝參) 때에는 구태여 법외(法外)의 혐의를 끌어대며 하는 말이 허겁지겁했었으니, 마땅히 척파(斥罷)하고 다시는 대관(臺官)에 의망(擬望)017)  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1월 8일 을미

임금이 종묘(宗廟)를 전알(展謁)하였다.

 

1월 9일 병신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김우철(金遇喆)을 장령(掌令)으로, 한덕후(韓德厚)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소대(召對)018)  를 행하였다. 《송감(宋鑑)》을 진강(進講)했는데, 부제학 이기진(李箕鎭)이 아뢰기를,
"지금의 중원(中原)은 바로 오랑캐의 원(元)나라와 같은 것이니, 효종(孝宗)께서 복수 설치(復讎雪恥)하려고 하신 뜻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명(明)나라의 창업(創業)은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게 하였었고, 숭정 황제(崇禎皇帝)019)  는 또 나라를 망하게 한 임금이 아니었는데도 마침내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이 나오게 하는 처지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기진이 아뢰기를,
"명태조(明太祖)가 건국(建國)한 처음에 매양 명예와 절개를 장려하는 것으로써 힘썼기 때문에 명나라 말엽(末葉)에 절의(節義)에 죽는 신하가 매우 많았었고, 비록 나라가 망한 뒤에 있어서도 충절(忠節)을 지키는 선비들이 모두 명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진인(眞人)이 나오지 않아 아직도 흥복(興復)하게 될 기약이 없으니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중원의 인심은 비록 어떠한지 알 수가 없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열성조(列聖朝) 이래로 분노를 참고 원통함을 품은 생각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않았었기에 식견이 있는 신민(臣民)들은 모두 비풍(匪風)·하천(下泉)020)  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만일에 인심을 수습하고 사기(士氣)를 진작(振作)해 간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이는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덕원(德源) 원산포(元山浦)의 선세(船稅)를 상의원(尙衣院)에 소속하도록 명하였다. 본원(本院)에서 아뢴 데에 따른 것이다.

 

1월 11일 무술

집의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학문에 진취하고 간하는 말을 용납하는 도리를 논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윤대(輪對)021)  를 행하였다.

 

1월 12일 기해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숙종조(肅宗朝)에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하여, 이인엽(李寅燁)과 신(臣)의 망형(亡兄) 민진후(閔鎭厚)가 유집일(兪集一)과 함께 그 일을 관장했었는데, 신축년022)   이후에 양역청(良役廳)으로 고쳤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온 평안도(平安道)에 원래 작정한 1필(疋)씩의 신역(身役)은, 이는 자못 균평(均平)한 것이라 여기니, 음직(蔭職)이 없는 서얼(庶孽)과 교원(校院)023)  의 정액(定額) 이외의 유생(儒生)에게는 모두 1필씩을 받아 군액(軍額)에 충당하는 것이 편의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정청은 재감(裁減)할 생각을 한 것이고 양역청은 신역을 1필씩으로 균등하게 하려 한 것이었으나, 마침내 실효(實效)가 없었으니 민심이 반드시 실망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청(廳)의 명칭을 둘 것이 없고, 묘당(廟堂)의 제신(諸臣)들로 하여금 1필씩의 신역을 강구하여 작정하게 하겠다."
하였다.

 

1월 13일 경자

좌통례(左通禮) 오명희(吳命羲)가 상소하여, 전정(田政)·군정(軍政)·전폐(錢幣) 세 가지 일을 말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며 칭찬하였다.

 

1월 14일 신축

민응수(閔應洙)를 사간(司諫)으로, 박규문(朴奎文)을 장령(掌令)으로, 서종급(徐宗伋)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신처수(申處洙)를 필선(弼善)으로, 조명익(趙明翼)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1월 15일 임인

임금이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종신(宗臣) 63인을 불러보고 선온(宣醞)024)  하며 사후(射帿)025)  하게 하였으니, 대개 새해의 문후(問候)에 사대(賜對)한 것이다. 회원군(檜原君) 윤(倫)은 나이가 92세이므로 임금이 특별한 예로 대우하니, 윤이 노래 1곡을 올리자, 임금이 시(詩)를 내리기를,
"빨리 가는 광음 얼마나 바뀌었는지,
선묘의 왕손 오직 경만이 있네.
노쇠한 90 나이에도 근력 좋으니,
수성이 반드시 공의 뜰에 비추었으리."
하였다. 윤이 매우 취하자, 그의 아들 함평군(咸平君) 이홍(李泓)으로 하여금 부축하고 먼저 나가도록 하였다. 이어 제종(諸宗)들에게 선온하기를 가족에 대한 예처럼 했는데, 영원군(靈原君) 이헌(李櫶)이 잘 마시자 임금이 큰 잔으로 내리었다. 낭제 도정(琅瑅道正) 이담(李燂) 등이 과녁을 쏘아 맞추자 모두를 가자(加資)하도록 명하고, 이어 2품 이상에게는 표피(豹皮)를 내리며 당상(堂上) 이상에게는 녹비(鹿皮)를 내렸는데, 회원군 이윤에게는 특별히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내렸다. 술이 거나해지자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이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로 하여금 거문고를 타게 하자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시 1수를 써서 내렸는데, 시에 이르기를,
"상원(上元)026)   명절의 종사들 모임에
아름다운 기상 넘치고 날씨도 좋네.
공들은 통술에 취함을 사양하지 말라,
궁중에서 빚은 한잔술이지만 다 정성이 담긴거네."
하였다. 이어서 화답하여 글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1월 16일 계묘

달이 헌원성(軒轅星) 오른쪽 각성(角星)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황명통기(皇明通記)》를 진강(進講)했는데, 검토관(檢討官) 서종급(徐宗伋)이 아뢰기를,
"고황제(高皇帝)027)  가 매양 ‘절용(節用)·애인(愛人)·사민이시(使民以時)’ 등의 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법으로 삼았었으니, 이 세 가지의 일은 인군(人君)이 마땅히 유의(留意)해야 할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고황제가 강무재(康茂才)로 영전사(營田使)를 삼아 제방(堤坊)을 수축(修築)하게 하였으니, 전쟁으로 어지러운 즈음에도 이처럼 농사에 진념(軫念)했는데, 하물며 태평한 때에 있어서이겠는가? 제언(堤堰)과 관개(灌漑)의 일은 도신(道臣)에게 별유(別諭)한 내용에 있었는데, 수령(守令)이 된 자들이 집착하여 생각하지 않아 또한 형식이 되어버렸기에 내가 진실로 개탄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다시 신칙(申飭)해야 한다."
하였다.

 

권적(權𥛚)을 승지(承旨)로, 홍현보(洪鉉輔)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조명익(趙明翼)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월 17일 갑진

한덕후(韓德厚)를 동래부(東萊府)에 보내 왜인(倭人)들을 접위(接慰)하게 하였다.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차자를 올려 능(陵)에의 행행(幸行)을 물리고 또 횃불을 세우지 말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단지 횃불만 세우지 말도록 명하였다.

 

1월 18일 을사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차자를 올려 면직하기를 바라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서천(舒川)의 파선(破船)한 사람들을 해조(該曹)에서 복계(覆啓)한 대로 놓아 보내고 침몰한 쌀은 원적(原籍)의 고을에서 받아 내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뱃사람들은 놓아주고서 또 곡식을 받아냄은 신의(信義)를 잃어버림에 가까운 일이다."
하고, 따르지 아니하였다.

 

1월 20일 정미

김상석(金相奭)을 제주 시재 어사(濟州試才御史)로, 황선(黃璿)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신방(申昉)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중협(李重協)을 승지(承旨)로, 이의현(李宜顯)을 빈객(賓客)으로 삼았다.

 

승지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논하였는데, 그 융정(戎政)을 논한데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어떤 이가 상소하여 연노법(連弩法)028)  에 관해 진달한 것을 들으니 그 방법이 매우 좋아 적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것인데, 아직까지도 채택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영이 내리지 않으므로 신(臣)이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마땅히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해서 조치하여 불의의 일에 대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하였다.

 

지평 이응(李膺)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축년029)  과 임인년030)  의 제적(諸賊)들이 화를 일으킬 마음이 생기기는 숙종(肅宗)병신년031)  의 처분에서 시작되지 않았겠습니까? 아! 병신년의 남기신 분부에서 크게 옳음과 그름을 정하였으니, 무릇 우리 숙종의 신자(臣子)가 된 사람들로서는 마땅히 준수(遵守)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인데, 저 흉역(凶逆)들은 윤증(尹拯)을 위해 가세(加勢)하여 감히 달갑게 여기지 않는 마음을 품어 부산하게 신변(伸辨)할 즈음에 더러는 귀양가는 사람이 있게 되고 더러는 폐기(廢棄)하게 되는 사람이 있게 되자 엎치락뒤치락 층층으로 격화(激化)되어, 우리 숙종께 원망을 가지며 반드시 보복(報復)하고야 말려고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경자년032)  의 대상(大喪) 뒤에 미쳐서는 낮이나 밤이나 경영하는 것이 오로지 성상(聖上)의 몸을 모해(謀害)하기에 두어 설시하고 배치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없이 했었습니다. 그때에 당해서는 전하께서 위태함이 한 가닥의 털에 매달린 것 같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아마도 우리 선왕(先王)의 우애가 지극한 성덕(聖德)이 아니었었다면 전하께서 거의 오늘이 있게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전하의 유모(孺慕)033)  하시는 효성으로 마땅히 마음에 놀랍게 여기고 생각에 두려워하며 통쾌하게 왕법(王法)으로 바로잡으셔야 할 것인데, 접때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이 해가 넘도록 극력 논쟁하였는데도 오직 윤허하지 않으시는 것만이 아니라 도리어 싫어하고 괴롭게 여기시는 뜻을 보이고 계시니, 신(臣)은 이에서 진실로 억울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혹시 선왕께서 토죄(討罪)하지 않은 바라 하여 토죄하기를 미안스럽게 여기십니까? 선왕께서는 과연 이미 토죄하기로 한 것인데도 특히 아랫사람들이 받들어 거행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선왕께서 어느 날엔가 하교(下敎)하시기를, ‘국청(鞫廳)의 제신(諸臣)들과 삼사(三司)의 제신들을 일체 모두 파직하라.’고 하셨었고, 또한 제신들이 입대(入對)했을 적에는 천위(天威)가 몹시 성을 내시어 특별히 엄한 분부를 내리시기를,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을 잡아다가 국문(鞫問)하여 엄단(嚴斷)하라.’고 하셨으니, 그 사령(辭令)의 사이에 나타낸 것을 이처럼 하셨다면, 비록 군흉(群凶)들이 중간에서 주차(周遮)034)  하여 마침내 도로 정지하게 되기는 했지만, 선왕께서 어찌 일찍이 토죄하지 않으려고 했겠습니까?
선왕조(先王朝)에 뜻이 있으시면서도 실현하지 못한 일을 전하께서 계술(繼述)하지 않으실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또 신이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임징하(任徵夏)의 상소로 경종(景宗)을 핍박하는 말을 하였다고 하여 죄주었으며, 하물며 조태억(趙泰億)이 지은 교문(敎文)에는 ‘극히 불운(不運)함[極否]을 돌리어 태평(泰平)을 만든다.’는 말이 있었으니, 신이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극비(極否)’라는 두 글자는 어느 세상을 가리켜 말한 것이겠습니까? 그의 마음이 있는 데를 길 가는 사람들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임징하는 귀양갔는데도 조태억은 마침내 아무 일이 없게 되었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죄어 벌의 시행이 또한 너무나 어그러지게 되었다고 여깁니다. 아! 원흉(元凶)과 거얼(巨孽)들이 더러는 자기의 집 봉창 안에서 편안히 죽어가게 되고 버젓이 천지 사이에 편안히 쉬고 있는데, 단지 하나의 역신(逆臣) 김일경(金一鏡)만 주벌하고서 이미 그들을 섬멸(殲滅)했다고 하게 된다면, 역신 김일경이 반드시 지하(地下)에서 원통하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삼가 요사이의 조지(朝紙)를 보건대, 하나의 처치(處置)로 인하여 옥당(玉堂)이 특별히 파직되고 승선(承宣)이 추고(推考)받게 되어, 조정 안의 기상이 아름답지 못하게 되었으니, 신은 그윽이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원로(元老) 대신의 상소한 말에 있어서도 혹 거슬리기만 하면 갑자기 비난과 배척을 가하여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으시니, 하물며 신과 같이 새로 벼슬하여 사귐이 얕은 몸의 초초(草草)한 몇 마디 말이야 어찌 감히 천청(天聽)을 감동하여 돌리게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곁들여 진달한 말에 대하여는 일찍이 이미 다 말을 했었다. 아! 경종께서 한때 내리신 분부를 다시 오늘날에 제기(提起)하니, 이는 또한 신기(新奇)한 것을 힘써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하였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여 《황명통기(皇明通紀)》를 진강(進講)했는데, 임금이 검토관(檢討官) 서종급(徐宗伋)에게 이르기를,
"명나라 열성(列聖)의 어휘(御諱)를 진강할 때에 기피(忌避)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서종급이 아뢰기를,
"마땅히 기피해야 합니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조명신(趙命臣)은 아뢰기를,
"명나라가 우리 나라에 대해서는 한 없는 은덕이 있었는데, 열성의 휘자(諱字)를 어찌 기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 신이 입계(入啓)하는 문서 내용에 한 종신(宗臣)이 명나라 태종(太宗)의 휘자로 이름을 지은 것이 있음을 보았는데, 신의 생각에는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뒤로는 명나라의 어휘에 있어서는 진강할 때에 기피하여 읽는 것이 합당하고, 태종의 휘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은 곧 연은령(蓮恩令)이므로 종친부(宗親府)에 분부하여 이름을 고치도록 하겠다."
하였다.

 

분부하기를,
"명나라 태조(太祖)는 작소(鵲巢)에서 난익(卵翼)035)  하는 노고에 감동하여 제신(諸臣)들에게 귀양(歸養)을 허락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 부모를 멀리 떠나 종사(從仕)하는 자에게 특별히 1년에 한 차례의 귀근(歸覲)을 허락하였음은 또한 효도하는 도리를 추진(推進)한 것이다. 그런데 그 정사(呈辭)036)  의 내용에 다만 ‘오래 부모를 떠나 있었으므로 귀성(歸省)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을 한다면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마는, 반드시 ‘부모의 병이 위중하여 전인(專人)037)  이 도착하였으므로 생전(生前)에 서로 만나 보겠다.’고 말을 하는 것이 이미 규례(規例)가 되었으니, 지극히 미안스러운 일이다. 만일 부모가 참으로 병이 있어서라면 그만이겠지만, 병이 없는 부모를 병이 있다고 핑계하며 정사(呈辭)하여 말미를 받으려 하는 것은 특히 임금에게 아뢰는 문자(文字)의 성실하지 못한 것만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자식된 사람의 도리이겠는가? 이 뒤부터는 정사할 적에 어버이의 병을 들어 핑계하지 말고 정직하게 귀근(歸覲)할 것을 청해야 한다."
하고, 이어 유신(儒臣)에게 정사 내용에 말을 하는 규정을 고치도록 명하였다.

 

1월 23일 경술

대사간 황선(黃璿)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수어청(守禦廳)에서 관장하고 있는 재령(載寧) 등지의 옛 통답(筒畓)을 앞서 궁가(宮家)의 수본(手本)038)  에 따라 절수(折受)039)  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대저 궁가에 갈라 주는 것이 비록 전례가 있기는 합니다마는, 군문(軍門)에서 수만(數萬)의 재화(財貨)를 소비해 가며 매수(買收)하여 경영해 온 것에 있어서는 본래부터 한만(閑漫)한 토지를 절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물며 변(變)이 있을 때 수용(需用)할 것을 대비하는 것이어서 중요함이 자별한데, 이속(移屬)하도록 허락함은 진실로 뒷날의 폐해와 관계가 있게 되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시어 더욱 성덕(聖德)에 빛이 나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대각(臺閣)과 춘방(春坊)040)  은 영광(榮光)스러운 선임(選任)과 관계되므로 더욱 마땅히 가려서 제수(除授)해야 하는데, 채응복(蔡膺福)의 지체와 인망은 본시 가볍고 이근(李根)의 문학(文學)은 칭찬할 것이 없는데도 제수하기도 하고 의망(擬望)하기도 하므로 물정(物情)이 맞지 않게 여기니, 마땅히 전조(銓曹)를 신칙하여 신중하게 가리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엄하게 비답하고 따르지 않았다.

 

1월 24일 신해

공조 참판 조관빈(趙觀彬)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하니, 답하기를,
"경(卿)이 조목조목 진달한 것을 보며 옛적의 일을 추념(追念)해 보니 감회와 사모가 더욱 간절해지고, 또한 임금을 친애(親愛)하여 권면하고 경계한 성의를 보게 되었다."
하고, 원소(原疏)를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었다.

 

1월 25일 임자

이근(李根)을 사간(司諫)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수찬(修撰) 서종급(徐宗伋)을 내치어 홍원 현감(洪原縣監)으로 삼았다. 당초에 대신(臺臣) 이정박(李挺樸)이 시창(時昌)의 논계(論啓)를 정지할 때에 같이 참여한 것 때문에 인피(引避)할 적에, 서종급이 옥당(玉堂)으로서 처치(處置)에 당하여 낙과(落科)로 처치하고 논계를 정지한 한 가지 조항에 있어서는 ‘아직 미처 논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말을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처치에 있어 한 말이 공정한 것이냐 공정하지 않은 것이냐? 서종급을 우선 체직하여 홍원 현감으로 제수하라."
하고, 또 분부하기를,
"군부(君父)에 관한 일을 아직 미처 논하지 못했다면 다른 일을 오히려 어찌 말하겠느냐? 김용경(金龍慶)의 다음에 또 서종급이 있음은 역시 세상의 도의(道義)가 달라져버린 일이다. 이 다음에 만일 서종급을 영구(營救)하여 비호(庇護)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불경죄(不敬罪)로 논하겠다."
하였다. 승지 김치후(金致垕)와 이중협(李重協)이 청대(請對)하여 도로 중지하기를 원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1월 28일 을묘

도승지 유숭(兪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경연(經筵)의 신하들을 잇달아 파척(罷斥)하는 것도 이미 청명(淸明)한 조정(朝廷)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거니와, ‘영구(營救)하여 비호하는 자에게 불경죄(不敬罪)로 논하겠다.’고 하신 분부에 있어서는 더욱 중외(中外)에 전파되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교리 황재(黃梓)도 또한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스스로 지나친 거조(擧措)를 하시고 또 언로(言路)를 막으려고 하시니, 이는 진실로 이전에는 있지 않던 일입니다."
하였는데, 상소를 입계(入啓)하자 도로 주도록 명하고, 특별히 받아들인 승지를 추고(推考)하도록 하였다.

 

춘추관(春秋館)에 명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상고해 찾아내게 하니, 판중추부사 이관명(李觀命)의 말에 따른 것이다. 당초에 이관명이 인조(仁祖)가 탄강(誕降)한 옛터의 비문(碑文)을 고쳐 지으니, 그 비문에 선조(宣祖)가 계사년041)  에 해주(海州)에서 주필(駐蹕)042)  할 때의 일을 기록했었는데 월일(月日)이 틀리게 되었었다. 이에 이르러 이관명(李觀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실록을 고찰해 보기를 청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되었는데, 그 뒤에 드디어 뒤쫓아 고쳤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승지 이정소(李廷熽)·조명신(趙命臣)·김치후(金致垕)·이중협(李重協)이다.】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시창(時昌)의 일은 조정에 있는 제신(諸臣)들이 모두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대관(臺官)의 논계(論啓)가 이미 나왔다가 곧 정지하게 되었던 것인데, 삼가 어제의 비망기(備忘記)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 일이 군부(君父)에게 관계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일이 군부에게 관계되었으면 곧 악역(惡逆)인데, 지금 대각(臺閣)에 행공(行公)043)  하는 사람이 없어 국문(鞫問)하기를 청할 수 있으므로 신들이 서로 데리고 와서 앙청(仰請)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시급히 분명하게 분부를 내리시어, 시창 등을 국문하여 통쾌하게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 함우신(咸遇臣)에 대한 처분이 비록 전도(顚倒)된 듯하기는 했지만, 그의 글을 불살라버리고 그 사람을 베게 된 것은 나의 뜻이 있는 데가 있은 것이고, 형벌하여 죽이기를 즐겁게 여겨 그런 것이 아니니, 그의 일이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은 것임을 대략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삼(李森)에 대한 논계(論啓)에 있어서는 아미 정지했다가 다시 나오게 되고, 시창의 일에 있어서는 잠깐 발론(發論)했다가 곧 정지했음은 진실로 이미 그르게 된 것이다. 김용경(金龍慶)이 처치(處置)할 적에 이삼에 대한 논계를 중히 여겼는데, 이는 비록 잘 살피지 않은 잘못이 있기는 해도 혹 용서할 수 있는 단서가 있는 것이지만, 서종급(徐宗伋)은 내린 분부를 자세하게 들었으면서도 그만 ‘딴 마음이 없는 것[無心]’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서 김용경을 구해(救解)하는 짓을 하였고, 또한 감히 ‘아직 미처 논하지 못했다.’는 말을 했었으니, 이래도 딴 마음이 없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승선(承宣)들이 오늘 청대(請對)하였음은 도리에 당연한 것이지만, 이미 정지한 논계를 다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여러 승지들이 또 아뢰기를,
"저번날의 판부(判付)044)   내용에 ‘서종급을 영구(營救)하여 비호(庇護)하는 자가 있으면 불경죄(不敬罪)로 논하겠다.’고 하신 분부가 계셨는데, 대저 불경죄는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입니다. 서종급을 배척하여 보임(輔任)한 것은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전하께서 분부하시는 말씀을 이렇게 하심은 합당하지 못하니 ‘불경(不敬)’이란 두 글자를 중지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사간(大司諫) 황선(黃璿)이 상소하여, 서종급(徐宗伋)을 배척하여 보임하도록 한 명령과 비망기(備忘記) 내용에 ‘과중(過中)’이란 분부를 중지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전교(傳敎)에 말했다."
하였다.

 

분부하기를,
"‘불경(不敬)’이란 두 글자에 있어서는 나도 또한 과중하게 된 것임을 알고 있다."
하고, 도로 들이라 명하여 판부(判付)를 고쳐서 계하(啓下)하였다.

 

1월 30일 정사

이기진(李箕鎭)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수석(金壽錫)을 지평(持平)으로, 민익수(閔翼洙)를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삼았다.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함우신(咸遇臣)의 일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시말(始末)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제 삼가 ‘군부(君父)에 관한 일이라.’는 하교를 보고 놀라움과 퉁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 괴수는 비록 이미 법대로 복주(伏誅)했지만 이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그 여당(餘黨)을 엄중하게 국문(鞫問)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민진원이 또 아뢰기를,
"서종급(徐宗伋)이 처치(處置)할 때에 한 말은 신(臣)도 또한 그르게 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그를 외방(外方)에 보임(輔任)한 것은 특히 소소한 일인데, 전하께서 큰 일처럼 여기시어 대단하게 기력(氣力)을 허비하고 계시니 성상의 덕에 해가 있게 될까 싶습니다. 또 선왕조(先王朝)에는 만일 외방에 보임하게 될 적에는 으레 역마(驛馬)를 내주었었는데, 서종급에 있어서는 밤중에 창황(蒼黃)하게 유문(留門)045)  하게 하여 내보냈고 또 말도 내주지 않았으니, 이는 전례와는 다르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북도(北道)에는 으레 말을 내주었지만 남도(南道)에 있어서도 또한 이런 준례가 있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신의 선신(先臣)과 고(故) 판서(判書) 오두인(吳斗寅)이 남도에 외보(外輔)될 때에 모두 말을 내주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찍이 선왕조에 박필몽(朴弼夢)이 외보될 때에도 또한 말을 주었었는데,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여 분부를 내리지 못하게 되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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