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권, 영조 3년 1727년 윤3월

싸라리리 2025. 8. 2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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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3월 1일 무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면직되었다. 홍치중이 이미 출사(出仕)하였다가 또한 극력 사직하므로, 임금이 면부(勉副)하였다.

 

사간원에서 【정언 신처수(申處洙)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경상 도사(慶尙都事) 윤광천(尹光天)이 외람된 형장으로 혹독하게 형벌을 한 죄는, 청컨대 먼저 사국(史局)의 낭청(郞廳)의 소임을 도태하고 따라서 잡아 가두고 조사하여 감죄(勘罪)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홍중범(洪重範)·홍중복(洪重福)·홍중주(洪重疇)는 그의 아비의 연시(延諡)186)  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홍중주는 바야흐로 양주(楊州)를 맡고 이어 능침(陵寢)이 있는 중요한 곳이기에 감히 함부로 떠날 수 없으므로 사세사 혹 그렇게 되겠지만, 홍중범과 홍중복이 진참(進參)하지 않은 것은 풍교(風敎)에 관계가 있는 것이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평안 감사 홍석보(洪錫輔)가 그의 조부 홍만용(洪萬容)의 연시례(延諡禮)를 거행하였는데, 홍만용의 세 아들이 모두 서울에 있으면서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대관(臺官)의 말이 이와 같게 된 것이다.
사신은 말한다. "홍중범은 세력가(勢力家)인데도 신처수(申處洙)가 감히 회피하지 않고 말을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대단하게 여겼다. 혹자의 말은 ‘홍중주가 홍석보로 하여금 기일을 물리도록 했는데도 홍석보가 듣지 않았다.’고 했고, 사람들이 더러는 이 때문에 그의 숙부(叔父)는 용서하고 그의 조카에게는 욕을 하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27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풍속(風俗) / 역사(歷史)


[註 186] 연시(延諡) : 시호(諡號)를 받들고 나온 선시관(宣諡官)을, 그 본가(本家)에서 시호받는 이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나와 의식(儀式)을 행하고 맞아들이는 일.
사신은 말한다. "홍중범은 세력가(勢力家)인데도 신처수(申處洙)가 감히 회피하지 않고 말을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대단하게 여겼다. 혹자의 말은 ‘홍중주가 홍석보로 하여금 기일을 물리도록 했는데도 홍석보가 듣지 않았다.’고 했고, 사람들이 더러는 이 때문에 그의 숙부(叔父)는 용서하고 그의 조카에게는 욕을 하게 되었다."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걸가(乞暇)하여 휴양(休養)하러 갔다.
사신은 말한다. "민진원은 고(故) 명상(名相) 민정중(閔鼎重)의 조카이고 부원군(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아들이다. 신축년187)  과 임인년188)  의 참벌(斬伐)을 당한 뒤에 신성하게 사림(士林)들의 영수(領袖)가 된 사람은 유독 정호(鄭澔)와 민진원 뿐이었는데, 을사년189)  의 첫머리에 서로 이어 정승으로 들어왔다가, 정호는 늙어 병이 들었기 때문에 바로 고향에 돌아가버리고 오직 민진원만 조정에 있었다. 국가의 적신(賊臣)에 대한 토죄(討罪)와 임금에 대한 모함을 밝히는 것을 제1의 의리로 삼았는데, 화를 입은 가문들에서는 오히려 통쾌하게 하지 못한다고 책망하게 되고, 평온(平穩)을 논하는 사람들은 매양 너무 성급하게 한다는 것으로 염려하게 되었고, 공명(功名)에 급급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준엄하게 논하면서도 속으로는 실지로 우물쭈물하는 짓을 하고 있고, 이해(利害)에 밝은 사람들은 계교(計較)하기만 좋아하고 아주 성실(誠實)한 맛이 없었다. 삼사(三司)의 논계(論啓)가 해가 넘도록 쟁집(爭執)하고 있어도 천청(天聽)은 더욱 아득하기만 하고, 대신의 말을 한결같이 듣기 싫어하여 임금의 마음에 깨달음이 없었다. 이에 민진원이 깊이 불안한 생각이 들어 정승에 제수된 지 오래 되지 않아 굳게 사양하여 면직하게 되고, 또한 이어 걸가(乞暇)하여 떠나버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27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 인물(人物)


[註 18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88]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189]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사신은 말한다. "민진원은 고(故) 명상(名相) 민정중(閔鼎重)의 조카이고 부원군(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아들이다. 신축년187)  과 임인년188)  의 참벌(斬伐)을 당한 뒤에 신성하게 사림(士林)들의 영수(領袖)가 된 사람은 유독 정호(鄭澔)와 민진원 뿐이었는데, 을사년189)  의 첫머리에 서로 이어 정승으로 들어왔다가, 정호는 늙어 병이 들었기 때문에 바로 고향에 돌아가버리고 오직 민진원만 조정에 있었다. 국가의 적신(賊臣)에 대한 토죄(討罪)와 임금에 대한 모함을 밝히는 것을 제1의 의리로 삼았는데, 화를 입은 가문들에서는 오히려 통쾌하게 하지 못한다고 책망하게 되고, 평온(平穩)을 논하는 사람들은 매양 너무 성급하게 한다는 것으로 염려하게 되었고, 공명(功名)에 급급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준엄하게 논하면서도 속으로는 실지로 우물쭈물하는 짓을 하고 있고, 이해(利害)에 밝은 사람들은 계교(計較)하기만 좋아하고 아주 성실(誠實)한 맛이 없었다. 삼사(三司)의 논계(論啓)가 해가 넘도록 쟁집(爭執)하고 있어도 천청(天聽)은 더욱 아득하기만 하고, 대신의 말을 한결같이 듣기 싫어하여 임금의 마음에 깨달음이 없었다. 이에 민진원이 깊이 불안한 생각이 들어 정승에 제수된 지 오래 되지 않아 굳게 사양하여 면직하게 되고, 또한 이어 걸가(乞暇)하여 떠나버린 것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명하여 봉황성장(鳳凰城將)의 글을 답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난도채(攔道債)의 은(銀) 때문에 조정 의논이 한결같지 못하여 오래도록 회자(回咨)하지 못했었는데, 이어 이르러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먼저 의주 부윤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스스로 회답하여 그들의 동정을 보게 하기를 청하고, 좌상(左相) 홍치중(洪致中)도 또한 그렇게 여겼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비변사(備邊司)에 명하여 전후에 거행할 조목을 써내어 양서(兩西)와 송도(松都)를 효유(曉諭)하게 하였다. 이때에 금법을 범하며 빚을 진 사람들은 모두가 양서와 송도의 상고(商賈)하는 사람이었다. 조정 신하들이 더러는 사핵(査覈)해서 징수하여 상환(償還)하기를 청하고, 더러는 사핵해서 징수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효시(梟示)하게 하고 징수해서 상환하지 말게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었다. 임금이 영중추부사 민진원에게 이르기를,
"비록 전대의 역사를 본다 하더라도 대국(大國)이 어찌 일찍이 소국(小國)에서 빚을 받아냈었는가? 혹시 소국은 대국을 섬겨야 함을 들어 핑계할지라도, 피국(彼國)의 구차한 짓을 만일 우리가 승순(承順)하게 된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도 구차하게 될 것이다. 만일 사책(史冊)에 써 놓기를, ‘대국이 자문을 보내어 빚을 독촉하매 소국이 7만의 은화(銀貨)를 징수하여 보내 주었다.’고 하게 된다면, 후세에 오늘날의 군신(君臣)을 어떻다고 하게 되겠는가? 경(卿)과 좌상(左相)의 말도 오히려 임시 변통의 방법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나라는 힘이 약하므로 경들의 생각은 또한 진실로 당연한 것이기는 하나,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유신(儒臣)의 상소에는 곧장 효시하기를 청했었지만, 수백의 상고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가리어 죄를 줄 것인가? 전후의 사신(使臣) 및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잘 살피지 않은 죄는 지금 도리어 불문에 부치고, 단지 무식한 상한(常漢)들만 죄 주려고 함은, 나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만일 일시에 기포(譏捕)하여 무거운 율(律)로 다스리게 된다면 한갓 요란하게만 되고 말 것이니, 이 무리들을 안집(安集)해 놓고 특별히 그 죄를 용서해 주며 잘 효유(曉諭)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승지 홍용조(洪龍祚)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덕음(德音)을 발포(發布)하여 특별히 윤허하여 사형을 용서해 주며 자수(自首)하도록 한다면, 그들이 또한 어찌 감격하여 사실대로 자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드디어 유시(諭示)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윤3월 2일 기미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지만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3월 3일 경신

임금이 동지사(冬至使) 세 신하를 불러 보며 변무(辨誣)에 관한 일을 물으니, 부사(副使) 정형익(鄭亨益)이 주대(奏對)하기를,
"등본(謄本)이 처음 것보다는 조금 나아졌습니다마는 그래도 거리끼는 박절한 말이 없지 않았으니, 신들이 봉사(奉祀)를 잘 하지 못한 죄가 큽니다."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해 주었다. 대개 《명사(明史)》에 우리 나라 인조(仁祖)의 일을 기록하되 구무(構誣)한 말이 많았었는데, 청나라가 바야흐로 《명사》를 편수(編修)하게 되었기 때문에 전후의 사행(使行)이 매양 개정하기를 청했었지만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번의 사행에 청나라의 집정(執政) 상명(常明)이란 사람이 우리 나라를 위해 주선하여 자구(字句)를 조금 고치고 따라서 등본을 보여주므로 사신을 받아서 가지고 돌아왔는데, 아직도 다 고쳐지지 않았었다. 임금이 묻기를,
"황하(黃河)가 맑아졌다는 말은 참으로 그러하던가?"
하니, 정형익이 말하기를,
"지난해 12월에 과연 황하가 맑아졌었는데, 조신(朝臣)들이 칭하(稱賀)하려고 했지만 청주(淸主)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정형익이 또 말하기를,
"요사이 광은(礦銀)이 너무도 한없이 저들의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데, 이른바 광은은 곧 우리 나라에서 채굴(採掘)한 은입니다. 우리의 쓸 데가 있는 은화(銀貨)를 저들의 유익함이 없는 물건을 무역(貿易)하느라 모두를 소비하여 사치(奢侈)만 열어주고 있으니, 이는 매우 답답한 일입니다. 또한 요사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교묘하고 간사해져 광은에다 연철(鉛鐵)을 많이 섞었다가 피인(彼人)들에게 타매(唾罵)를 당하고 있으니, 청컨대 이제부터는 저들에게 들여 보내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변통해야 할 일이므로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정사(正使)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이 말하기를,
"광은(礦銀)에다 납을 섞는 폐단에 있어서는 의논하는 사람들이, 자표(字標)를 정하여 주조(鑄造)해 내기를 한결같이 상평통보(常平通寶)의 규식(規式)처럼 하게 한다면, 간사한 짓을 방지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뒤에도 그전처럼 피국(彼國)을 속이는 자는 마땅히 일률(一律)을 적용(適用)하겠으니, 이대로 엄중하게 신칙(申飭)하라. 광은에다 자표를 주조해 내는 하나의 조항도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충청도 해미현(海美顯)에서 소가 머리는 하나에 몸둥이는 둘에다, 눈은 둘 귀는 셋 코는 하나 다리는 여덟의 송아지 한 마리를 낳았다.

 

윤3월 4일 신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중협(李重協)·한이조(韓頤朝)를 승지(承旨)로, 한현모(韓顯謨)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윤3월 5일 임술

사방이 어두어 먼지가 내리는 것 같았다.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상소하여 면직하기를 구하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경연관 이간(李柬)이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피(辭避)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피하지 말고 올라와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副應)하라."
하였다.

 

제주(濟州) 어사(御史) 김상석(金相奭)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유시(諭示)하기를,
"이번에 네가 가게 된 것은 단지 시재(試才)하기만 위한 것이 아니라, 궁벽한 바다의 외딴 섬은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어서이다. 요사이 탐오(貪汚)한 풍습이 크게 퍼져 비록 내지(內地)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바다 가운데 섬의 수령(守令)들이겠는가? 연도(沿道) 수령들의 현명 여부와 민간의 병폐를 하나 하나 채탐(採探)해야 한다."
하고, 이어 대제학 이의현(李宜顯)에게 과거 글제를 내도록 명하여, 임금이 친히 김상석에게 주었다.

 

주강(晝講)을 거행하였다.

 

부호군(副護軍) 구성임(具聖任)이 인조(仁祖)가 어사(御賜)했던 망룡전포(蟒龍戰袍)를 바치었다. 구성임은 곧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의 후손이고, 구굉은 곧 인조(仁祖)의 내구(內舅)190)  이다. 정축년191)  에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내려온 뒤에, 인조가 포위당한 속에서 입던 전포(戰袍)를 구굉에게 내리면서 이르기를,
"만일에 오랑캐들이 중국을 침범하게 된다면 내가 경(卿)과 마땅히 근왕(勤王)하러 가야 할 것이니, 경이 이를 입고 먼저 몰고 가야 한다."
하였었다. 구굉의 자손들이 대대로 전해 오는 가보(家寶)로 삼고 있다가, 이에 이르러 구성임이, 군상(君上)이 입던 것을 사사 집에 오래 둘 수 없다고 여겨 드디어 바치게 된 것이다.

 

장령 최도문(崔道文)이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은 임금을 친애(親愛)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에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 그러나 이미 전례가 있은 것이고 이제야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하고, 이어 분부하기를,
"원소(原疏)를 금중(禁中)에 머물러 두라."
하였다.

 

윤3월 7일 갑자

정홍제(鄭弘濟)를 지평(持平)으로, 민응수(閔應洙)를 보덕(輔德)으로, 강일규(姜一珪)를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윤3월 8일 을축

충청·전라·경상 3도에 보리가 없게 되었다.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장차 온천(溫泉)에 가려고 예궐(詣闕)하여 사폐(辭陛)를 아뢰니, 임금이 아주 가버릴까 염려하여 편전(便殿)에서 불러 보며 선온(宣醞)하고, 친히 수서(手書)를 주며 빨리 돌아오도록 하였다.

 

공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을 파직하였다. 이때 증광시(增廣試)의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의 회시(會試)를 설행(設行)하게 됨에 상시관(上試官) 이의현(李宜顯)·이병상·윤헌주(尹憲柱)가 다섯 차례나 패초(牌招)하여도 나오지 않으므로, 승정원에서 밤을 새우며 계청(啓請)하게 되었었다. 대개 이의현과 이병상은 사정이 있다고 하였고, 윤헌주는 그의 아들이 초시(初試)에 참여했기 때문에 마침내 명을 받들지 않은 것인데, 정언 신처수(申處洙)가 상소하기를,
"여러 시관(試官)이 다섯 차례의 패초를 어기고 있어 막중한 과거 시험 보이는 일을 작정한 날에 거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지극히 한심(寒心)한 일입니다. 공조 판서는 이미 말할 만한 사정도 질병도 없으면서, 단지 법외(法外)의 친혐(親嫌)을 피하여 죽기에 이르도록 나오지 않는 것은 더욱 극히 의거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그를 파직하여 여러 신료(臣僚)들을 경계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고, 이어 전교하기를,
"침맞고 뜸뜨느라 말미를 받은 공조 판서와 그의 아들이 응당 과거를 보게 되는 형조 판서를 일체로 의망(擬望)에 갖추어 이렇게 되도록 했으니, 해조(該曹)의 당상(堂上)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고, 그 이튿날 이의현이 또 여러 차례 어기고 나오지 않다가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나오도록 권면하니, 이의현이 드디어 명을 받들고 과장(科場)을 설시하였으나 경향(京鄕)의 유생(儒生) 무사(武士)들이 장옥(場屋)에서 대기한 지가 이미 2일이나 되었었다.

 

윤3월 9일 병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윤3월 10일 정묘

판중추부사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회양(淮陽)·금성(金城)은 본래부터 도둑이 많은 데이어서 일찍이 무기를 들고서 관문(官門)에 돌입(突入)하는 변이 있기도 했었는데, 지금 듣건대, 김화(金化)에서는 극심한 도둑이 아전을 죽이고 감옥을 부수었다고 하니, 고을 원을 무신(武臣)으로 차임(差任)하여 보내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경연관(經筵官) 채지홍(蔡之洪)을 징소(徵召)하였으나 오지 않았다.

 

세미(稅米)에 물을 섞는 짓을 거듭 엄중하게 금단하도록 하였다. 세미에 물을 섞는 죄는 곧 일률(一律)에 해당되는 것인데, 법이 오래 되자 해이해져 범하는 자가 매우 많았었다. 이에 이르러 남양(南陽)과 이천(利川)의 선인(船人)들이 물을 섞은 일이 발각되어 장차 일률을 적용하게 되었는데, 임금이 삼령 오신(三令五申)192)  의 뜻을 들어, 그 선인들은 사형을 감하여 섬에 귀양 보내고, 선혜청 낭관(宣惠廳郞官) 박필진(朴弼震)은 잘 살피지 못했으므로 도배(徒配)하는 율에 처하고, 만일에 다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율대로 효수(梟首)한다는 뜻으로 행하는 조항에 써내어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하도록 하였다.

 

윤3월 11일 무진

강화 유수(江華留守) 박사익(朴師益)을 특별히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제수하고, 이어 추천을 들이도록 명하여 정형익(鄭亨益)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대개 시임 대신(時任大臣)에 단지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있었는데, 인피(引避)하고 들어가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命)이 있게 된 것이다.

 

종신(宗臣)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 등이 상소하여, 동조(東朝)193)  에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술잔 올리는 예를 나의 성의가 부족한 것 때문에 윤허를 받지 못했기에 장차 다시 진달하려고 한다."
하였다.

 

정택하(鄭澤河)를 승지(承旨)로, 김우철(金遇喆)을 장령(掌令)으로, 홍봉조(洪鳳祚)를 정언(正言)으로, 송택상(宋宅相)을 필선(弼善)으로, 신노(申魯)를 문학(文學)으로, 홍성보(洪聖輔)를 수찬(修撰)으로, 유최기(兪最基)를 설서(說書)로, 신사철(申思喆)을 지경연사(知經筵事)로, 황귀하(黃龜河)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김흥경(金興慶)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흡(李潝)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송택상은 일찍이 거가(車駕)앞에서 상언(上言)한 것 때문에 사람축에 끼지 못했었는데, 이에 이르러 외람되게도 춘방(春坊)의 직에 있게 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며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28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송택상은 일찍이 거가(車駕)앞에서 상언(上言)한 것 때문에 사람축에 끼지 못했었는데, 이에 이르러 외람되게도 춘방(春坊)의 직에 있게 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며 비웃었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이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서북(西北)의 무신(武臣) 중에 도시(都試)에 입격(入格)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직부(直赴)를 부여하는 것으로, 병사(兵使)가 장문(狀聞)하여 이미 해조(該曹)에 계하(啓下)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전시(殿試)를 보기 위하여 기일에 맞추어 올라왔는데, 병조 판서가 인혐(引嫌)하고 들어가 아직도 복주(覆奏)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진퇴(進退)가 낭패(狼狽)스럽게 되었습니다. 이는 준례대로 직부하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기에 비록 차관(次官)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더라도 사례에 크게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으며, 다른 도의 무사들도 마땅히 직부를 부여하게 된 사람에게는 또한 이에 의해 거행하도록 했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명기(明紀)》를 진강(進講)하였다.

 

윤3월 12일 기사

김상원(金相元)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흥경(金興慶)을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김상옥(金相玉)·이유(李瑜)를 승지(承旨)로, 홍성보(洪聖輔)를 부교리(副校理)로, 조명택(趙明澤)을 문학(文學)으로, 정광제(鄭匡濟)를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특별히 《벽온신방(辟瘟新方)》 1책을 계하(啓下)하며 오부(五部)로 하여금 등서(謄書)하여 도성(都城) 백성에게 두루 나누어 주도록 하고, 이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인출(印出)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장령 김우철(金遇喆)이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지난날 여러 시관(試官)들이 8차례나 패초(牌招)를 어기어 경과(慶科)를 물리어 거행하게 되었음은 듣기에 놀랍고도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이의현(李宜顯)에 있어서는 대신이 이미 사국(史局)의 일을 들어 시관(試官)에 의망(擬望)하지 말도록 요청했었으므로 그가 고집을 부린 것은 의거한 바가 있게 될 수도 있지만, 윤헌주(尹憲柱)에 있어서는 곧 상피(相避) 등의 말을 버젓이 장주(章奏)에 올리는 짓을 했으니, 무슨 사체가 이러하겠습니까? 그의 아들이 정거(停擧)에 좌죄된 것은 비록 사사 심정이 답답하기는 했겠지만, 여러 차례의 패초를 번번이 어겨 국가의 사체가 무너져버리게 되었는데도 전하께서 도리어 예관(禮官)이 추천한 것만 그르게 여기시며 추고(推考)하라는 분부를 내리어 처분이 합당하게 되지 못하였으니, 신은 생각에 이 이후부터는 고관(考官)들이 상피(相避)를 들어 패초를 어기는 짓을 하여 장차는 고칠 수 없는 규정이 되어버릴까 싶습니다. 청컨대 윤헌주를 파직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형조 판서가 패초를 어긴 것은 전 공조 판서가 어긴 것과는 다른데 똑같이 벌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윤3월 14일 신미

다시 경연관(經筵官) 한원진(韓元震)을 징소(徵召)하였으나 오지 않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또 상소하여 면직하기를 구하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고 함께 오도록 하였다.

 

남원(南原) 유학(幼學) 이흡(李熻)이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하니, 비답하기를,
"시사(時事)를 논한 말은 알 수 없는 데가 있으니, 시골 유생(儒生)이라 잘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앞서 이흡이 《군범집책(君範輯策)》 한 권을 지어 상소에 곁들여 거가(車駕) 앞에서 진달했었는데, 비답을 받들지 못한 지가 7개월이나 되었었다. 이에 이르러 또 상소하여 김조택(金祖澤)의 일을 논하고, 또 판중추부사 정호(鄭澔)의 충청(忠淸)·강개(剛介)한 것과 대사헌 김간(金榦)의 독실한 조행(操行)을 말하여, 지극한 성의로 돈소(敦召)하기를 청하고,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의 6적신(六賊臣)을 베기를 청했기 때문에, 비답한 요지가 이와 같은 것이다.

 

윤3월 15일 임신

홍호인(洪好人)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왕자 사부(王子師傅) 이이근(李頤根)을 징소(徵召)하니, 이이근이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신치운(申致雲)이 유현(儒賢)을 모함한 죄를 해당되는 율(律)대로 하지 못했기에, 신(臣)의 스승이 받은 모함을 아직도 모두 씻지 못했으므로, 신이 감히 나아가서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을 내리고, 이어 곧 속히 올라오도록 명하였으나 이이근이 마침내 일어서지 아니하였다.

 

홍주(洪洲) 유학(幼學) 이일장(李日章)이 상소하여 전화(錢貨)의 다섯 가지 폐해를 논하였다.
"1. 농민(農民)이 실업(失業)하게 된 것.
2. 도둑이 퍼지게 된 것.
3. 수령(守令)들이 탐오(貪汚)해진 것.
4. 인심이 혼탁해진 것.
5. 풍속이 퇴패(頹敗)하게 된 것."
으로, 상세하게 수천 수백 마디의 말을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상소에 진달한 전화의 폐해는 진실로 매우 절실한 것이기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윤3월 16일 계유

서리가 내렸다.

 

사헌부에서 【장령 김우철(金遇喆)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또 아뢰기를,
"세미(稅米)에 물을 탄 선인(船人)을 율(律)대로 처단하고, 부동(符同)한 이서(吏胥)와 하례(下隷)들을 한결같이 모두 엄중하게 감죄(勘罪)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세선(稅船)에서 쌀에 물을 타는 것을 거듭 엄중하게 금하여 거조(擧條)를 반시(頒示)하기까지 했었는데, 양근(楊根)의 선인(船人)이 또 다시 범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사헌부의 신하가 논계(論啓)하게 된 것이다. 임금이 처음에는 윤허하였다가 다시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귀양 보내도록 명했으니, 대개 그들의 발선(發船)이 거조(擧條)를 반포하기 이전에 있은 때문이다.

 

지평 송수형(宋秀衡)이 상소하여, 호조(戶曹)의 수원(水原)의 언전(堰田)을 궁가(宮家)의 차인(差人)이 멋대로 점유(占有)한 폐해를 말하고, 또 연해(沿海) 고을들의 군향(軍餉)이 허술한 폐단을 말하여, 절반은 창고에 머물러 두는 법을 엄중하게 하기를 청하고, 또 추쇄관(推刷官)의 폐단을 논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여 《명기(明紀)》를 진강(進講)하였다.

 

윤3월 17일 갑술

달이 기성(箕星)을 침범했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3월 18일 을해

민응수(閔應洙)를 사간(司諫)으로, 박필정(朴弼正)을 헌납(獻納)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면직되었다. 조도빈은 인혐(引嫌)하고 들어가 출사(出仕)하지 않은 지 이미 반년이 지났다. 이에 이르러 아침에 입시(入侍)하면 저녁 때에 면부(勉副)한다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명을 받들고 도성(都城)으로 들어왔었다. 임금이 불러 보며 위유(慰諭)하매, 조도빈이 따라서 아뢰기를,
"김조택(金祖澤)의 처지는 신(臣)과 일반입니다. 그가 한 말이 어찌 신을 해롭게 할 뜻이 있은 것이겠습니까? 《당사(唐史)》에도 있는 일입니다마는, 논박 받은 대신이 들어온 다음에는 언자(言者)들이 일찍이 그의 죄벌(罪罰)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김조택의 파직은 비록 가벼운 벌이라고는 하지만 마땅히 도로 거두셔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3월 19일 병자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고, 사간원에서 【정언 신처수(申處洙)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변(武弁)194)  들은 천익(天翼)과 수화(水靴)를 착용해야 하는 것을 이미 조정에서 명령한 일이 있었는데, 황해 병사(黃海兵使) 원백규(元百揆)는 친히 성상의 분부를 받들 적에 관하(管下)들을 신칙(申飭)하기로 우러러 주대(奏對)까지 해 놓고서 부임하고 나서는 전연 단속하지 않았고, 그 자신이 또한 금법을 범하는 짓을 하여 마침내 면전(面前)에서 속이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청컨대 원백규를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중비(中批)로 발탁하여 제수함은 본시 아름다운 일이 아닌 것이고, 육경(六卿)의 순서는 양전(兩銓)이 우두머리가 되므로 반드시 묘당(廟堂)의 공천(公薦)이 있어야 곧 의망(擬望)할 수 있는 것인데, 병조 판서를 박사익(朴師益)에게 특별히 제수하도록 하는 명이 격외(格外)로 나왔었습니다. 하물며 품계(品階)를 올리어 은총(恩寵)으로 발탁하는 것은 진실로 들어보기 드문 일이기에 물정(物情)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으니, 청컨대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준엄하게 비답을 내리어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에서 【장령 김우철(金遇喆)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어 기장 현감(機張縣監) 유봉조(柳鳳朝)가 벼슬살이에서 탐오(貪汚)한 형상을 말하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지평 정홍제(鄭弘濟)가 상소하여, 입지(立志)하여 사심(私心)을 제거하고,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며, 상(賞)을 신중하게 하여 용도(用度)를 절제하고, 언로(言路)를 열어놓기를 청하였다. 또 금오(金吾)에 죄수가 적체되어 있는 폐해를 논하고, 또 호남(湖南)에 흉년이 든 것을 논하여 호조의 삼수미(三手米)와 통영미(統營米)를 갈라주기 청하고, 또 영종도(永宗島)의 관방(關防)이 중요함을 논하여, 비국(備局)에서 목장(牧場)의 개간세(開墾稅)를 빼앗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고, 또 서종급(徐宗伋)을 출보(出補)하였음은 과당한 일임을 논하여 소환(召還)하는 명을 내리기 청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조목조목 진달한 말은 매우 간절하고 지극한 것이므로, 품처(稟處)해야 할 것에 있어서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윤3월 20일 정축

증광 전시(增廣殿試)를 보여 민원(閔瑗) 등 43인을 뽑았다.

 

윤3월 21일 무인

이광운(李光運)을 지평(持平)으로, 이덕부(李德孚)를 문학(文學)으로, 송수형(宋秀衡)을 사서(司書)로, 박사성(朴師聖)을 수찬(修撰) 겸 사서로, 황재(黃梓)를 겸 문학으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정언 조명택(趙明澤)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김여(金礪)는 일찍이 수원(水原)에 원이 되었을 적에 사사정에 끌리어, 춘분(春分) 이후에 몰래 소교(小轎)로 가권(家眷)을 데려갔었습니다. 그가 사정에 따라 이처럼 범과(犯科)하는 짓을 했으니, 이번에 도신(道臣)이 되어서는 또한 어찌 법대로 몸을 가지며 관하(管下)들을 표솔(表率)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김여를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3월 22일 기묘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이사성(李思晟)에 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특별히 한성 판관(漢城判官) 심유현(沈維賢)을 추문(推問)하게 하였다. 심유현은 단의 왕후(端懿王后)195)  의 아우인데 성미가 본래 교만하고 망령되어 괴이하고 패리(悖理)한 일이 많았다. 이에 이르러 공사(公事)를 가지고 승정원에 가서 착함(着銜)196)  할 즈음에 승정원의 서리(胥吏)가 수필(水筆)을 내준 것에 화를 내어, 그의 아내를 잡아다가 난타(亂打)하여 장차 죽게 되었었다. 그가 척완(戚畹)197)  으로서 세력을 믿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 이와 같으므로, 사람들이 불길(不吉)한 것으로 지목하였다.

 

윤3월 23일 경진

사헌부에서 【지평 정홍제(鄭弘濟)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연 부사(長淵府使) 김상벽(金相璧)은 무과(武科)의 시관(試官)으로서 과장(科場)을 설시한 지 두어 날 만에 제멋대로 앞질러 돌아가버려 막중한 과장을 여러 날 정지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고,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헌납 박필정(朴弼正)이 상소하여, 자신이 이삼(李森)에 대한 논계(論啓)를 앞질러 정지한 잘못을 진달하고, 또 괴원 분관(槐院分館)198)  의 신칙(申飭)한 분부를 마음에 두지 않아 지금까지 지체하고 있는 죄를 논하여 준엄하게 감죄(勘罪)를 내리기를 청하고, 또 감찰(監察) 이우명(李遇命)을 도태(淘汰)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강화(江華)에 서책(書冊)을 포쇄(曝曬)199)  하러 나간 중사(中使)를 잡아다가 추문(推問)하기를 청하였다. 대개 이우명은 향장관(鄕將官)이 오래 벼슬하다 출륙(出六)200)  한 것으로 가장하였다가 서경(署徑)을 받지 못한 사람이고, 중사는 강화에서 소란을 피운 사람이었는데, 따르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명기(明紀)를 진강(進講)하였다. 검토관        황재(黃梓)가 말하기를,
"호남(湖南)은 큰 흉년이 들었으니, 진휼(賑恤)하여 구제하는 계책을 일찌감치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비당(備堂)201)                  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라.’는 분부를 했는데도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다. 엊그제는 선왕조(先王朝)의 사례에 의거하여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소대(召對)와 차대(次對)202)                  에 입시하도록 했는데, 원임과 시임(時任)은 별로 다름이 없는 것이므로, 비당에 분부하여 원임에게 가서 의논하여 품정(稟定)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때 묘당(廟堂)이 온통 비어 있어 공사가 적체되어 있기 때문에 비당이 공사를 가지고 들어와 품처(稟處)하도록 한 것인데, 비당이 머뭇거리고 있으므로 원임에게 가서 의논하게 한 명이 있게 된 것으로, 국가 일이 이처럼 구차하고 소홀해지게 된 것이다.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궁녀(宮女)를 뽑아 들일 때에 액정(掖庭)의 하례(下隷)들이 소란 피우는 폐단(弊端)을 엄중하게 금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왕세자(王世子)의 가례(嘉禮)가 멀지 않았는데, 액정의 하례(下隷)들이 ‘조만간에 양가(良家)의 딸들을 뽑아 궁중(宮中)으로 들여오게 될 것이라.’고 말을 했었기 때문에, 항간(巷間)의 여염(閭閻)에서 크게 겁을 내어 더러는 뇌물을 바치고 모면하려고 하는 폐단이 없지 않았었다. 승지(承旨) 이중협(李重協)이 이런 상황을 아뢰므로, 임금이 이런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경연관(經筵官) 이간(李柬)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초상과 장사에 쓸 것을 넉넉하게 제급(題給)하도록 하였다. 이간은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경학(經學)에 깊어 한원진(韓元震)과 명성이 비등하여 경연관으로 뽑혔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졸하므로, 임금이 듣고서 놀라 애도하여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연신(筵臣)이 증직(贈職)하는 은전(恩典)을 내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산림(山林)에 있는 사람에게 비록 경연관으로 초계(抄啓)하게 하기는 했지만, 작록(爵祿)으로 묶어 놓으려고 하지 않음은 대개 그의 소원이 아닌 것을 억지로 시키면 도리어 예대(禮待)하는 도리에 어그러지게 된다고 여겨서였다. 만일 지금 신몰(身歿)한 뒤에 증직한다면 생존과 사망에 따라 예대를 다르게 하는 것이 되니 증직할 것 없다."
하고, 이어 제술관(製述官)에게 명하여 제문(祭文) 내용에 오늘 내린 분부로 말을 만들어 제진(製進)하도록 하였다.

 

윤3월 24일 신사

이근(李根)을 사간(司諫)으로, 강일규(姜一珪)를 장령(掌令)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우윤(右尹)으로, 박사성(朴師聖)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정언 조명택(趙明澤)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관(臺官)의 계사(啓辭)는 사체가 중한데, 어제 본원(本院)에서 계사를 이미 전달한 뒤에 주서(注書)는 누락해버리고 쓰지 않았고 승지는 또한 잘 살피지 않았으니, 청컨대 승지는 엄중하게 추고(推考)하고 주서는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사익(朴師益)에 대한 일은 정계(停啓)되었다.

 

윤3월 25일 임오

사헌부에서 【지평 정홍제(鄭弘濟)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징하(任徵夏)를 멀리 귀양 보낸 것을 도로 거두기를 청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경연관 윤봉구(尹鳳九)를 징소(徵召)하였으나 오지 않고 사직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그대는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되도록 빨리 올라오라."
하였다.

 

윤3월 26일 계미

주강을 행하여 《맹자》를 진강(進講)하였다.

 

청나라 사람이 대정현(大靜縣)에 표류해 왔는데 역관(譯官)을 보내 실정을 물어보고 육로(陸路)로 해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홍성보(洪聖輔)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장령 김우철(金遇喆)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강도(江都)에 포쇄(曝曬)하러 나간 중관(中官)이 성첩(城堞) 순시(巡視)를 빙자하여 억지로 군물(軍物)을 배치하도록 하고, 곤장으로 장교(將校)를 구타하기까지 하였음은 그전에는 있지 않던 일로서, 수신(帥臣)이 장문(狀聞)하고 간신(諫臣)이 죄 주기를 청하였음은 모두 다 사체에 맞게 된 것인데 단지 파직만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은 일이어서 조짐을 그대로 키울 수 없으니, 청컨대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예조의 당상(堂上)을 일체 모두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3년 상제(喪制)가 끝나면 동조(東朝)에 진연(進宴)을 해야 함은, 갑진년203)  에 이미 거행한 전례가 있는 것인데도 예조에서 계청(啓請)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3월 27일 갑신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고,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전 현감(縣監) 윤복(尹澓)이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고서 그대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겼다."
하고, 원소(原疏)는 금중(禁中)에 머물러 두었다.

 

윤3월 28일 을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조 참의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신이 외람하게 진달한 얕은 소견을 개납(開納)해 주시면서 묘당(廟堂)의 제신(諸臣)과 방백(方伯)·유수(留守)에게 각기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薦擧)하도록 명하시고, 천주(薦主)를 죄주는 법을 거듭 엄하게 하셨음은 매우 훌륭한 뜻이 담긴 것인데. 지금 이미 3월이 되었는데도 천망 단자(薦望單子)가 겨우 6건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어찌 하나도 가합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신은 생각에 전임(前任) 비당(備堂)과 도백(道伯)·수신(守臣) 중에 현재도 직명(職名)을 띠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다 각기 추천하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무관(武官) 수령(守令)에 있어서는 적임자를 가리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들의 현명 여부를 알기는 무장(武將)들만 한 것이 없으니, 양국(兩局)의 대장(大將) 및 총융사(總戎使)와 각 군문(軍門)의 아장(亞將) 및 제도(諸道)의 곤수(閫帥)에게 각기 1인씩 추천하도록 하여 인선(遴選)할 길을 넓히게 하되, 천주들로 하여금 각각 그 사람의 유능한 바를 가지고 따로 제목(題目)을 만들어 그의 이름 밑에 주기(注記)하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추천하지 않은 사람은 되도록 무겁게 추고(推考)하라. 무신들의 천거는 양국의 대장과 총융사는 각기 세 사람씩 천거하고, 제도의 곤수들은 각기 두 사람씩을 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과 참의 이정소(李廷熽)가 청대(請對)하였는데, 진연(進宴)하는 일 때문이었다.

 

임금이 신사철에게 이르기를,
"세자빈(世子嬪)의 간택(揀擇)은 올겨울에 거행하고 가례(嘉禮)는 내년 봄에 치르려고 하였는데,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가져다가 보건대 열성(列聖)들의 가례 때의 연세를 모두 고찰할 수 있었다. 선왕(先王)께서는 11세, 경종(景宗)께서는 9세에 가례를 거행했었으니, 반드시 11세와 9세에 거행하였음은 대개 뜻이 있는 것이다."
하니, 승지 홍호인(洪好人)이 말하기를,
"기수(奇數)와 우수(耦數) 때문에 그렇게 한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렇다고 하고, 이어 내년 봄에 하려던 가례를 올해로 당기어 정하도록 명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판윤(判尹) 김흥경(金興慶)이 병을 들어 체직(遞職)하기를 구하였다. 승지 이중협(李重協)이 말하기를,
"김흥경이 비록 1품의 중신(重臣)이기는 하지만 탑전(榻前)에서 사직을 하였음은 지극히 외람되고 번거로운 짓입니다."
하고, 이어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왕조(先王朝)에서 이미 신칙(申飭)했었지만, 중신에 있어서는 더러 탑전에서 사직하는 규례(規例)가 있었다."
하고, 이어 추고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윤3월 29일 병술

이응(李膺)을 장령(掌令)으로, 박사성(朴師聖)을 헌납(獻納)으로, 김응복(金應福)을 보덕(輔德)으로, 채지홍(蔡之洪)을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현상벽(玄尙璧)을 장릉 참봉(長陵參奉)으로 삼았다. 채지홍과 현상벽은 모두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치중(洪致中)과 예조 참판 이교악(李喬岳)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서, 다시 동조(東朝)에 진연(進宴)하기를 거듭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금내(禁內)에서 다시 극력 간청하겠다."
하였다. 당초에 홍치중이 차자를 올려 청했었고, 종신(宗臣)들이 또한 상소를 진달했는데도 자성(慈聖)이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의 분부가 이와 같게 된 것이다.

 

판중추부사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영릉(英陵)의 석물(石物)을 봉심(奉審)해 보니 상처가 크지 않아 전체를 모두 고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전에 숭릉(崇陵)의 마석(馬石)이 상처가 났었는데, 전부를 고치지 않고 조금 그 형상을 작게 하여 그대로 옛 석물을 사용했었습니다. 또 장인(匠人)들의 말을 들어보건대, ‘그전의 석물을 쪼아내고서 다른 돌로 보완하고, 은정(隱釘)을 박고서 유회(油灰)로 메워버리면 반드시 해가 오래되어도 움직이어 빠져나가게 될 염려가 없다.’고 했으니, 이에 의해 수개(修改)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숭릉에서 그렇게 한 예가 있었으니, 장인의 말대로 그 상처만 고치는 것이 가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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