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권, 영조 3년 1727년 5월

싸라리리 2025. 8. 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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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병진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중용(中庸)》을 강론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주(註)도 빠짐없이 강의해야 하느냐?"
하니, 지경연사(知經筵事) 심택현(沈宅賢)이 말하기를,
"《중용》·《대학(大學)》은 다른 책과 달라서 주(註)도 빠짐없이 강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관례입니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명익(趙明翼)이, 사람과 사물이 오상(五常)245)  을 동일하게 부여받은 이치를 아뢰고, 이어 근세의 학자들이 주장한 차이점을 잇달아 수백 마디 말로 아뢰니, 임금이 옳다고 칭찬하였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5월 2일 정사

복상(卜相)을 명하여 이의현(李宜顯)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안중필(安重弼)·이단장(李端章)을 승지(承旨)로, 정형익(鄭亨益)을 대사성(大司成)으로, 황재(黃梓)를 헌납(獻納)으로, 이덕부(李德孚)를 수찬(修撰)으로, 신노(申魯)를 겸사서(兼司書)로, 채응복(蔡膺福)을 장령(掌令)으로, 조정순(趙正純)을 지평(持平)으로, 윤헌주(尹憲柱)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함경도(咸鏡道) 함흥(咸興) 등 7읍(邑)에 지진이 일어나 가옥과 성첩이 많이 부셔지고 내려앉았다.

 

5월 5일 경신

빈대(賓對)246)  를 거행하였다. 이때 묘당(廟堂)에 행공 대신(行公大臣)이 없어 빈대를 거행하지 않은 지 2년이나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거행하게 되었다.

 

전라도의 〈기근이〉 매우 심한 고을의 대동미(大同米) 및 군보미(軍保米)의 수봉(收捧)을 정지하고 그 보다 덜한 고을은 3분의 1로 줄일 것을 명하니, 관찰사 이현록(李顯祿)의 청원을 따른 것이다. 당시 호남에 큰 기근이 들어 사람이 서로 잡아 먹는 변괴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홍주 목사(洪州牧使)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여 그 고을의 기근 상태를 아뢰며 안흥창(安興倉)의 쌀을 나누어 주기를 청하고, 또 군정(軍政)의 폐단을 논하니, 임금이 묘당에서 품지(稟旨)하여 처리토록 하였다.

 

직전동(稷田洞) 궁가(宮家)의 절수(折受)를 중지하도록 명하니, 통제사(統制使) 이복연(李復淵)의 청을 따른 것이다. 일찍이 대신(臺臣)이 발계(發啓)하여 그만두기를 청하였더니, 임금이 궁차(宮差)를 소환하며 타량(打量)하지 말도록 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중지시킨 것이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국가의 비용이 점점 결핍되고 백성의 재력이 점차 궁핍해지는 것은 순전히 돈이 날로 귀해져 극도에 이른 까닭입니다. 신이 일찍이 돈을 더 주조하기를 청하였으나 성상의 뜻으로 미루어졌는데, 이미 돈을 더 주조하지 않았으니 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방편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저자에서의 매매에는 돈을 사용하기로 하되, 나라에서 쓰는 경비는 돈을 사용하지 말 것을 청합니다. 대동법(大同法)에 따른 군포(軍布) 및 노비의 공목(貢木)247)                  은 모두 순목(純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돈을 더 주조하는 폐해는 돈이 귀할 때보다 반드시 배나 더할 것이니, 돈이 없는 후라야 인심이 선량해지고 교묘하게 남을 속이는 것도 사라질 것이다."
하였다. 이어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한지의 여부를 여러 신하에게 순문(詢問)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돈을 사용하지 않으려면 공사간에 아울러 금지해야 마땅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편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단지 순목만 받아들이게 해 달라는 청만 윤허하였다.

 

〈청(淸)나라〉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국경 지대의 금령을 더욱 엄중히 해 줄 것을 청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청(淸)나라 사람으로서 국경을 침범하여 인삼을 캐는 자들이 있었는데, 봉황성(鳳凰城)에서 관병(官兵)을 풀어 수색 체포하면 국경을 침범한 자들이 도리어 관병에게 반격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역시 많은 관병을 따라 갔다가 죽음을 당한 까닭에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남구만(南九萬)은 모두 대제학(大提學)으로서 상신이 되었는데, 하비(下批)하실 때 그대로 대제학을 겸임한다고 썼습니다. 며칠 전 우의정 이의현(李宜顯)의 하비 단자(單子)를 기입할 때 신들이 구례(舊例)에 밝지 못하여 대제학을 겸임한다고 기입하지 않은 것은 착오임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비를 고치라고 명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도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김우철(金遇喆)이다.】 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좌승지(左承旨) 안중필(安重弼)을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대개 안중필이 광주 유수(廣州留守)에 제수되자 정언섭(鄭彦爕)이 소를 올려 그의 쇠퇴하고 우소(迃踈)함으로는 중책(重責)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논하니, 안중필이 소장(疏章)을 올려 도리어 꾸짖었던 까닭이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서용하지 말라는 청은 지나치다."
하였다.

 

5월 6일 신유

서종섭(徐宗爕)을 승지(承旨)로, 김흥경(金興慶)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이유민(李裕民)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강(講)이 끝나자 시독관(侍讀官) 신노(申魯)가 서종급(徐宗伋)의 출보(出補)에 대한 여태까지의 잘못을 말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유신(儒臣)이 처음 경연(經筵)에 들어와 혹시라도 나의 사람 쓰고 처벌하는 것이 중도(中道)를 지나칠까 염려하여 이와 같이 아뢰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내가 마땅히 유념해 두었다가 앞으로 마땅한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도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의현(李宜顯)이 상소하여 면직시켜 주기를 원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옛 상신(相臣)의 아들로서 순후(純厚)한 마음과 질박(質樸)한 뜻이 세속의 티를 벗어나 내가 진작부터 가상하게 여긴다. 지금 상신이 된 것도 역시 늦었다고 할 것인데, 경은 어찌 지나친 사양을 하는가? 즉시 기동하여 정사를 살피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의현은 반드시 재상의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렴 검소하고 순박 후덕하여 동년배 가운데에서 뛰어났으므로, 당시의 여망이 그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33면
【분류】인사(人事) / 인물(人物)
사신은 말한다. "이의현은 반드시 재상의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렴 검소하고 순박 후덕하여 동년배 가운데에서 뛰어났으므로, 당시의 여망이 그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5월 8일 계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여 겸직(兼職)을 풀어줄 것을 원하면서 말하기를,
"겸직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면 이는 전하께서 들어가게 하고 그 문을 닫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실록(實錄) 찬수(纂修)의 일은 우의정 이의현이 대제학(大提學)으로서 처음부터 실질적으로 주관하던 것인데, 지금 지위가 삼공(三公)에 올랐으니 신의 총재(摠裁)의 직임을 갈아 우의정에게 옮겨 주시어 그 일을 마치게 하심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두 가지를 그대로 따랐으나, 유독 내의원(內醫院) 제조(提調)의 사임을 허락하지 않고 승지를 보내어 함께 돌아오게 하였다.

 

5월 11일 병인

유명홍(兪命弘)을 우참찬(右參贊)으로, 강일규(姜一珪)를 장령(掌令)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지평(持平)으로, 김수석(金壽錫)을 정언(正言)으로, 김여(金礪)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봉교(奉敎) 민형수(閔亨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왕세자의 가례(嘉禮)를 위하여 간택(揀擇)을 할 때 인경(仁敬)249)  ·인현(仁顯)250)   왕후의 본가는 단자(單子)를 받아들이는 데에 구애받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삼가 생각건대 병자년251) 경종(景宗)의 가례 때 고(故) 판서(判書) 김진규(金鎭圭)가 예조에 단자를 올린 사실을 두고 속종(肅宗)께서 하교하기를, ‘이것은 민씨가(閔氏家)의 경우와 다름이 없으니, 단자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시어 이로 말미암아 규정이 되었습니다. 지금 신의 집은 병자년 당시의 김씨가(金氏家)와 사실상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잇달아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252)  의 집도 역시 단자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단의(端懿)253)  의 본가로부터 단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역시 예관(禮官)이 대신들에게 물어 의논하도록 명하니,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근래에 경연 석상에서 신이, ‘반드시 구애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대개 예(禮)란 혐의스럽다고 하여 피하는 것이 온당치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경 왕후와 인현 왕후의 본가에 대해 이미 받아들이지 말라고 윤허하셨다면 단의 왕후의 친속도 거의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가 단자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정언(正言) 정언섭(鄭彦爕)이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그대의 소를 보았는데,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송인명(宋寅明)의 사람 됨됨이를 내가 알고 있는지 오래인데, 지금 이를 논하는 것은 사리를 잘 살피지 않은 것이 아닌가? 유필원(柳弼垣)의 일과 두 역적에 관한 것은 이미 경연 석상에서 유시(諭示)하였다."
하고, 상소문 원본을 금중(禁中)에 두고 내려 보내지 않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도성(都城)에 들어와 숙명(肅命)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위로하며 타일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신이 겸대(兼帶)하고 있는 내의원(內醫院) 제조(提調)를 반드시 벗어 면하려 하였는데, ‘어찌 차마 간절히 사양하느냐?’라고 하교하시기에 이르렀으니, 들어가 진맥(診脈)하고 약을 짓는 따위의 일이 생각건대 무엇이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직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일에 따라 경계함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음식과 생활 습관에서 조금이라도 스스로 건강을 해치거나 병이 들 염려를 없게 하여야 바야흐로 보호의 책임을 다 한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옛날 이른바 태보(太保)란 임금의 신체를 보전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이라도 또한 진위(眞僞)를 묻지 말고 빠짐없이 그때그때 모두 들어가 아뢰어 전하께서 고칠 것이 있으면 고치시고 없으면 더욱 힘쓰시게 하여 척연(惕然)히 경계하고 두려워하시며 병을 삼가하는 방법을 다하게 하는 것이 이 신의 크게 원하는 바입니다. 신의 언사가 온순하지 못하여 만약 혹시라도 임금의 마음을 크게 괴롭히어 편치 못하고 거북한 하교가 계셨다면, 신이 비록 죄에 대한 벌을 받아도 진실로 우휼(憂恤)할 거리가 못되지만 그것이 성덕(聖德)에 누가 되었음을 또 어찌 하겠으며, 이미 직책을 다하지 못했는데 어찌 감히 무릅쓰고 자리를 지키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누누이 위로하며 타일렀다.

 

5월 12일 정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올리고, 이어 그 흉악한 역적의 죄를 낱낱이 들어 빨리 윤허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도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소하(疏下)의 오적(五賊)에게 정범(正犯)과 종범(從犯)의 구별이 없다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그들을 모두 죽여야 마땅합니다. 만약 구별이 있다고 한다면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이 가장 흉악 교활한데 이 두 역적을 주살하면 뭇사람의 분노가 조금 씻어질 것이겠으나, 이미 다 주살하지 않았고, 또 구별도 하지 않았으니 국법을 시행하는 것이 사리에 어긋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목숨만을 용서했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과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은 진실로 이 사람 저 사람의 구별이 없는데, 김일경은 특별히 벼슬이 높았던 까닭으로 소두(疏頭)가 되었을 뿐입니다. 김일경은 죽이고 이진유·박필몽은 죽이지 않았으니, 뒤죽박죽이 된 것이 아닙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그 목숨만을 용서했었다고 말했으면 그 죄를 알 것이다. 지난번 대간(臺諫)의 소에 대한 비답에서 ‘오적(五賊)’ 운운하였으니, 내가 평상시 적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이미 ‘적(賊)’자를 쓴 것을 보면 나의 뜻을 알 것이다. 비록 극형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주살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목호룡(睦虎龍)이 고변하는 글이 나왔을 때 내가 서연(書筵)254)  을 열지 않았더니, 조태구(趙泰耉)가 서연을 열 것을 청하였으므로 불러 보았는데, 그 당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너무 심한 것을 경종(景宗)의 인후하신 성덕(聖德)으로 막고 시행하지 않았던 까닭에 저절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더니, 조태구는 마음을 움직이는 뜻이 없지 않았으나 이명의(李明誼)는 말씨가 뻣뻣한 것이 드러나게 불평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그의 심사가 흉악하고 참혹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죄가 어찌 이진유·박필몽 보다 못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오늘 마땅히 머리를 동지(彤墀)255)  에 부서지게 하여 준청(準請)에 기약할 뿐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3일 무진

홍호인(洪好人)·홍용조(洪龍祚)를 승지(承旨)로, 이병상(李秉常)을 판윤(判尹)으로, 이위(李瑋)를 문학(文學)으로, 박사성(朴師聖)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설서(說書)로, 윤급(尹汲)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고, 잇달아 말하기를,
"여러 역적의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빨리 윤허하시어 따르시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신처수(申處洙)·정언(正言) 정언섭(鄭彦爕)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적을 다스리는 중대한 논의에서 법에 없는 친척간의 피혐(避嫌)을 어거지로 끌어댄 사람은 유독 서종섭(徐宗爕) 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 청관(淸官)과 미직(美職)은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라 여기고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은 내버려 두어 서로 잊어버리니, 처음부터 끝까지 피혐(避嫌)을 끌어대어 어거지로 피한 사람은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앞서의 조치에 한 사람을 징계하여 백 사람을 면려하려는 방도가 없지 않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조정순(趙正純)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입시(入侍)한 승지(承旨) 서종섭은 삼사(三司)에서 합사(合辭)하여 진청(陳請)할 때를 당하여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으므로 유신(儒臣)이 비난하고 배척하였는데, 법에 없는 피혐을 어거지로 끌어대었습니다. 아! 죄가 극악한 역모에 관련되면 진실로 대의멸친(大義滅親)256)  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단문(袒免)의 친척257)  에 대하여 감히 피혐할 수 있습니까?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개 서종섭은 서종하(徐宗厦)와 8촌간인데, 여러 신하들이 죄를 공박할 때에 ‘차마 관여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 까닭에 대간(臺諫)의 아뢴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아뢰기를,
"전(前) 참봉(參奉) 송수일(宋秀一)은 흉악한 무리에게 빌붙어 분에 넘치게도 재랑(齋郞)에 배수되었다가 대계(臺啓)로 인하여 파직되었습니다. 계묘년258)   가짜 비답(批答)이 전파될 때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모두 그것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요로(要路)에 급히 전해 발계(發啓)하도록 몰래 부탁하여 착한 사람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는 것으로써 공을 바라고 출세하는 계책을 삼았으니, 황하신(黃夏臣)이 차꼬를 차고 억울하게 죽은 것은 순전히 송수일의 터무니 없는 속임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청컨대 송수일을 먼 변방으로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정상주(鄭翔周)는 팔십 상노인으로서 곤외(閫外)를 제어(制御)할 수 없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둔전(屯田)의 절수(折受)에 관한 일과 내시(內侍)를 잡아들여 조처하는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겸설서(兼說書) 윤급(尹汲)이 사직하는 소를 올리고, 잇달아 스스로 한계를 지어 처신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니, 답하기를,
"지난날의 일이 비록 잘 처리한 것은 아니나 그 일은 사소한 것이요, 세상에 나와 임금을 섬기는 것은 그 의리가 크니, 그대는 다시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대개 윤급이 등과(登科)할 때 봉미(封彌)가 규격에 어긋남이 있어 방목(榜目)에서 뽑아 버리게 되었는데, 왕명으로 과방(科榜)이 회복되었다. 그 뒤 묘당(廟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간하면서 그를 과방에서 뽑아내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4일 기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송수일(宋秀一)의 일은 정배(定配)하는 것이 지나치므로 단지 사판(仕版)만 삭제시켰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5월 15일 경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감기 증세가 있어 단지 전일의 계사만 거듭 아뢰었는데, 윤허하지 않으므로 한마디도 아뢰지 못하고 물러났다.

 

5월 16일 신미

조명택(趙明澤)을 문학(文學)으로, 김용경(金龍慶)을 헌납 겸문학(獻納兼文學)으로, 이유(李瑜)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계사로 율봉 찰방(栗峰察訪) 박치문(朴致文)의 시장(試場)에서의 추잡하고 패역한 행위를 논핵하여 사판을 삭제할 것을 청하고, 도사(都事) 김광운(金光運)은 시장을 주관하는 사람이 규검(糾檢)하지 못한 실수로써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右議政) 이의현(李宜顯)이 또 상소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원하니, 답하기를,
"삼소(三疏)에 대한 비답에서 나의 뜻을 모두 유시(諭示)하였다. 경은 오늘의 나라 일을 한번 살펴 보라. 어찌 재상이 사양할 때인가?"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속히 나와 정사를 논하라고 타일렀다.

 

5월 17일 임신

경성회(慶聖會)·임주국(林柱國)을 승지(承旨)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校理)로, 조명택(趙明澤)을 부교리(副校理)로, 민응수(閔應洙)를 교리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정소(李廷熽)는 의주 부윤(義州府尹) 재임시 진휼할 곡식을 별도로 준비한 것으로써 승자(陞資)259)  의 명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름 있는 관원에게 진휼을 잘하였다 하여 가자(加資)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의 영예가 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자칫 상을 남발한 것으로 귀결되기에 족하니, 청컨대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평안도(平安道)의 평양(平壤)·은산(殷山)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하였고, 7일이 지나도록 녹지 않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심택현(沈宅賢)이 아뢰기를,
"음관(蔭官)으로서 정6품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삼조(三曹)260)  ·한성부(漢城府)·의금부(義禁府) 및 사평(司評)261)  ·감찰(監察)을 거쳐야 비로소 고을 수령에 제수하는 것은 대개 그 사람이 송옥(訟獄)에 밝고 익숙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까닭에 감찰과 의금부 도사(都事)는 6개월을 임기로 하고, 형조와 장례원은 12개월을 임기로 하여 만기를 채우지 못한 자는 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계청하는 것 외에는 관례에 따라 수령의 의망(擬望)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근래에는 의금부 도사가 되면 그 직책이 고역(苦役)인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회피하여 출사하지 않아 곧바로 체직(遞職)되는데도, 그것이 이력(履歷)에 쓰여져 수령으로 제배(除拜)되는 데에 장애가 되는 바가 없으니, 이러한 폐단은 엄격하게 막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삼조와 한성부·장례원 및 의금부 도사·감찰로 숙배(肅拜)하지 아니하고 돌아서 바로 벼슬이 갈린 자는 수령으로 내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이를 규칙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근래에 사대부(士大夫)들이 오로지 자기 편한 것만으로 일을 삼습니다. 가마를 타는 폐단을 선조(先朝) 때부터 엄금하였는데, 지방관은 물론이요, 양반·중인·서인·늙은이·젊은이가 함부로 타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조정에서 파견하는 대소 관원은 더욱 심합니다. 대간(臺諫) 및 대간의 직책을 겸임한 사람은 곧 법을 집행하는 관원임에도 거리낌없이 자신이 법을 범하니, 청컨대 관찰사에게 신칙하여 위반하는 대로 즉시 계문(啓聞)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8일 계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9일 갑술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정언(正言) 신처수(申處洙)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봉상(李鳳祥)은 명망과 지위가 점점 높아지자 꾀와 솜씨가 더욱 교활하여져서 군문의 돈과 베를 물쓰듯 합니다. 막료(幕僚)인 변하징(邊夏徵)·이진휘(李震輝)·변시철(邊是澈)·홍약수(洪若水) 등 네 사람은 그의 심복이 되어 세력을 믿고 폐단을 만듭니다. 또 돈 1백 냥과 베 20필을 몰래 홍약수에게 맡겨 역적 유봉휘(柳鳳輝)가 죽었을 때 부의로 보냈는데, 몸은 장수의 임무를 띠고 역적의 집과 내왕하였으니 그의 마음씨를 논하면 한량없이 분합니다. 우선 먼저 파직시키고, 홍약수는 엄중히 문초하여 사실을 밝혀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육조(六曹)의 우두머리는 지위와 명망이 남과 다른데도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유민(李裕民)은 자급(資級)이 오른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갑자기 그 관직을 제수받았으므로, 여론이 수긍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가 부여 현감(扶餘縣監) 채지홍(蔡之洪)을 불러 보았다. 채지홍은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인데, 경학(經學)에 밝아 경연관(經筵官)에 뽑히게 되었으나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다가 외직(外職)에 제수되어서야 비로소 와 숙배(肅拜)하였다. 임금이 채지홍에게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어려서 학문하는 것은 장성하여 뜻를 펴고자 함이다.’라고 하였으니, 산림(山林)의 처사(處士) 역시 세상을 저버릴 수 없다. 내가 경연관을 불러서 오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실로 성의가 얕은 데 연유한 것이지만, 지금 〈부모를〉 봉양하기에 유리하여 부임한다고 하니 지방이 비록 좋으나 서울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장차 아버지를 서울에 모셔두고 경연(經筵)을 출입하는 것이 바로 나의 소망이다."
하니, 채지홍은 학문이 천박하다고 사양하면서 잇달아 아뢰기를,
"과거에 한원진(韓元震)이 경연을 출입하여 보익(補益)함이 매우 많더니 지금은 이미 내려가 버렸습니다. 지난 신임 사화(辛壬士禍) 때 신의 스승이 무고를 당하였는데 우리 성상께서 특별히 복관(復官)·증시(贈諡)를 명하셨으니, 누가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참소하는 사람이 여태껏 집안에 있는 까닭에 한원진 같이 임금의 덕을 보필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서울의 집이 불안하여 끝내 내려가기에 이르렀으니, 하물며 신과 같은 자가 어찌 감히 서울에 머물어 감당할 수 없는 소임을 맡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누누이 위로하며 타이르고 달랬다. 채지홍이 아뢰기를,
"신이 선사(先師)에게 듣건대, 임금으로서 학문의 요체와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길은 ‘성의 정심(誠意正心)’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면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것을 반드시 모름지기 좋은 색(色)을 좋아 하는 것처럼 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처럼 한다면, 성학(聖學)은 밝고 환하게 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더라도 자연히 밝고 환해질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것이 간략하면서도 곡진하니, 각별히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호(鄭澔)가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원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0일 을해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다. 부여 현감 채지홍(蔡之洪)의 입시를 명하고 임금이 채지홍에게 이르기를,
"전부터 경연관(經筵官)이 먼저 글의 뜻을 아뢰는 규칙이 있으니 아무쪼록 먼저 진달하라."
하니, 채지홍이 아뢰기를,
"‘군자(君子)는 성정(性情)의 바름을 회복하여 그 뜻을 화평하게 만든다.[君子反情以和其志]’라고 한 것에 대한 공씨(孔氏)262)  와 진씨(眞氏)263)  의 설이 각기 다르지만, 두 설이 모두 훌륭합니다. 《심경석의(心經釋疑)》는 바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신의 스승 권상하(權尙夏)가 함께 수정하여 올린 책인데, 선배(先輩)의 말이 역시 진씨의 설을 매우 적절하다고 하였습니다. 주자(朱子)가 이른바 ‘간사한 소리와 음란한 빛을 눈과 귀에 머무러 두지 않는다.[奸聲亂色 不留聰明]’는 것은 바로 공자(孔子)의 사물(四勿)의 가르침264)  에 안자(顔子)가 이에 종사(從事)하겠다고 한 것과 같으니,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가는 효과가 있겠으나 개인적인 사사로움을 극복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릇 정사를 베푸는 사이에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어 천리(天理)를 따르지 않는다면 인(仁)을 크게 해치는 것이니, 이른바 사(私)라는 것은 사사로운 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그렇게 하여야 할 것을 당하여서도 간혹 사사로운 생각으로 의심이 생긴다면 이것 역시 사(私)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귀에 거슬리는 말은 임금에게 미움을 받으니, 그것이 스스로 획책한 것이라면 그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잡아 죽이는 것은 겨우 지난 뒤로는 사람들이 모두 뒷날의 계획을 위하여 짐짓 큰소리는 치면서 속으로는 재화와 멀리 하고 싶어하므로 과감히 간쟁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그의 충직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니, 비록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만약 최절(摧折)을 더한다면 언로(言路)를 크게 해칠 것입니다. 신이 초야에 있어도 역시 들은 바가 있으니, 재화와 복록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이 군자가 됨을 알며 아첨하고 기쁘게 하여 포상을 받는 사람은 그것이 비부(鄙夫)가 됨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그 말이 더욱 절실하다. 간절한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고, 잇달아 동궁(東宮)의 서연(書筵)에 입시하라는 명을 내렸다.

 

5월 21일 병자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수찬(修撰) 조명익(趙明翼)이 소를 올려, 학문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과 춘방(春坊)의 관원을 가려 뽑는 방도를 논하고, 또 채지홍(蔡之洪)을 머무르게 하여 경연에 자주 참석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답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의현(李宜顯)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상신(相臣)은 대제학을 겸임하지 못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유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이덕형(李德馨)은 선조(宣祖)께서 특명으로 겸임케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여 배수하지 않았고, 신흠(申欽)·김유(金鎏)·홍서봉(洪瑞鳳)·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은 모두 대제학으로 상신에 배수되었으나 역시 곧바로 사양하여 체직되었으며, 김수항(金壽恒)은 그 당시 해조(該曹)에서 문임(文任)265)  의 수를 줄였는데, 논의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신의 겸임은 마땅히 그가 스스로 사양하는 것을 기다려서 드디어 겸임한 직을 반환하도록 계품(啓稟)하여야 한다.’고 하여 김수항 역시 차자로 사양하며 직을 면해 줄 것을 아뢰었습니다. 유독 개국 초에는 대신이 간혹 대제학을 겸임한 적이 있으나 이는 관제가 정비되기 이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는 음관(蔭官)이 더러 과시(課試)를 주재하기도 하였고, 무신(武臣)이 간혹 대간(臺諫)이 되기도 하였으나 이것을 어찌 준용할 수 있겠습니까? 빨리 신의 문임직을 갈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영복(趙榮福)이 개성부의 쇠잔하고 피폐한 상황을 말하면서, 전(前) 유수(留守) 이집(李㙫)이 호조(戶曹)의 인삼세를 갈라서 얻은 예에 의하여 세로 바치는 인삼 십여 근을 나누어 주기를 청하였다. 또 대흥산성(大興山城)의 군사 장비가 허술한 폐해를 논하면서 공명첩(空名帖)266)   얻을 것을 청하고, 또 공조(工曹)에 진상하는 초립(草笠)의 값을 호조(戶曹)에서 마련하여 나누어 주도록 해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5월 22일 정축

부여 현감(扶餘縣監) 채지홍(蔡之洪)이 소를 올려 소대(召對)에 진참(進參)하라는 명을 사양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대답하였다.

 

지평(持平) 안상휘(安相徽)가 상소하여, 위로는 육경(六卿)으로부터 아래로는 모든 관원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의 임기를 정하여 자주 옮기지 말도록 하기를 청하고, 또 고적(考績)267)  의 방도를 엄격히 할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양지 현감(陽智縣監) 이용신(李龍臣)은 아약(兒弱)을 초록(抄錄)해 책을 만들어 그들이 장성하기를 기다렸다가 군액(軍額)에 충정(充定)한 까닭에 군영에는 수효가 모자람이 없고 고을은 백골(白骨)에 포(布)를 징수하는 폐단이 없었으니, 이 방법을 전국에 널리 펴서 법으로 채택하소서."
하고, 또 분관(分館)을 오래도록 거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잇달아 한유(韓游)가 분관하지 아니한 죄를 논하여 먼 변방에 정배하는 형률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5월 23일 무인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세자빈(世子嬪)을 간택(揀擇)한 단자(單子)를 이제 입계(入啓)하려 하는데, 등록(謄錄)을 가져와 살펴보았더니, 신유년268)   가례(嘉禮) 때에 관작을 삭탈한 사람 및 파직한 사람은 단자를 수봉(收捧)하였으나 먼 변방에 귀양간 사람의 자손에 대한 단자는 수봉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문외 출송(門外黜送)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규칙을 논의한 예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외 출송은 당연히 관직을 삭탈하는 중에 있으니, 옛 관례에 따라 수봉하여 들이라."
하였다.

 

5월 24일 기묘

신사철(申思喆)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5월 25일 경진

부수찬(副修撰) 이양신(李亮臣)이 상소(上疏)하여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일찍이 효묘(孝廟)에게 고하여 정심(正心)·수신(修身)·치국(治國)·안민(安民)의 방책을 상세하게 논하였는데, 그 항목은 모두 열 셋으로서 오늘날 거두어 쓰기에 매우 합당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을 궁가(宮家)에 이속(利屬)시킨 것은 실로 성덕(聖德)에 누가 됨으로 간장(諫長)269)  의 직위에 있으면서 거두어들이라는 청을 들이지 않을 수 없는데, 비답과 경연에서의 하교에 이미 거북해 하는 뜻을 나타내시고, 자주 천점(天點)을 아끼시어 드러나게 미워하고 냉대하는 기색이 있습니다. 한덕후(韓德厚)의 상소는 시폐(時弊)를 정확히 꿰뚫는 것이어서 이미 가상(嘉尙)히 여기고 장려한다는 비답을 내리시고도 잇달아 금중(禁中)에 놓아 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대간의 벼슬과 한가한 관서는 번번이 모두 낙점(落點)을 아끼시고 즉시 먼 지방의 고을로 보내시니, 벼슬에서 내쫓는 것과 같습니다. 성진령(成震齡)은 처음에 승지(承旨)로 발탁되었다가 끝내는 작은 고을로 내쫓기고 말았으니, 겉으로는 총애와 격려를 받는 것 같으면서 내막은 실제로 소박과 버림을 받은 것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말로써 미움을 받는 것은 훌륭한 임금의 치세(治世)에 있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멀리 유배한 죄인 권익관(權益寬)의 죄를 논하여 전형(典刑)을 밝게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또 논하기를,
"권중경(權重經)은 기사년270)  에 겨우 살아 남은 집안의 자손으로서 명의(名義)271)  에 죄를 짓고도 감히 ‘삼십 년 동안 그 몸을 스스로 깨끗이 하였다.’는 따위의 말을 함부로 편지에다 썼으니, 먼 변방으로 쫓아버리는 형벌을 내리심이 당연합니다."
하고, 또 광주 부윤(廣州府尹) 조명신(趙明臣)을 논하여,
"인망이 본래부터 가벼우니 그 직위를 그만두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렸다.
사신은 말한다. "이양신(李亮臣)은 유현(儒賢)의 아들로서 일찍부터 가정 교육을 받아 벼슬길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아 곧장 홍문관에 뽑혔으니, 그가 임금 섬김에 있어서 사실을 은폐하지 않음이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하지만 이 역시 근래에 보지 못한 것이어서 선비들이 자못 눈을 닦고 자세히 보았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35면
【분류】정론(政論)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농업(農業) / 군사(軍事) / 인사(人事) / 사법(司法)


[註 269] 간장(諫長) : 대사간(大司諫).[註 270]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271] 명의(名義) : 명분과 의리.
사신은 말한다. "이양신(李亮臣)은 유현(儒賢)의 아들로서 일찍부터 가정 교육을 받아 벼슬길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아 곧장 홍문관에 뽑혔으니, 그가 임금 섬김에 있어서 사실을 은폐하지 않음이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하지만 이 역시 근래에 보지 못한 것이어서 선비들이 자못 눈을 닦고 자세히 보았다."

 

부여 현감(扶餘縣監) 채지홍(蔡之洪)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위로하며 타일러 보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변사의 당상을 불러보고 춘천(春川) 등 다섯 고을의 사옹원(司饔院) 시장(柴場)을 없애라고 명하니, 강원도 관찰사 유복명(柳復明)의 청을 따른 것이다.

 

도성(都城)의 금표(禁標)를 개정할 것을 명하니 도민(都民)들의 상언(上言)을 따른 것이다. 당초 서울의 금표는 십 리를 한정으로 하여 동·서·남 세 도(道)는 모두 하천(河川)으로 경계를 삼고 북쪽은 산등성이를 경계로 삼아 저서령(猪噬嶺)에서부터 연서(延曙)의 돌곶이고개[石串峴]에 이르기까지 두 내가 합류하는 곳으로 경계를 정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도성의 백성들이 옹암(瓮巖)의 서쪽 모래내[沙川]로 경계를 삼아 달라는 청을 하였으니, 대개 그곳에 잇대어 장사지내기[繼葬] 위함이었다. 임금이 묘당에 품처토록 하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것의 불가함을 아뢰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 인구가 많이 불어나 서울 근교에는 한 조각의 노는 빈 땅이 없다. 지금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나라의 은택이 백골(白骨)에게도 당연히 미치는 것이니, 모래내를 경계로 삼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관서(關西)의 네 방영(防營) 【강계(江界)·선천(宣川)·창성(昌城)·삼화(三和)이다.】 에 별무사(別武士)의 정원을 늘리라고 명하였으니, 평안도 병마 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김수(金洙)의 청을 따른 것이다. 과거 관서 별무사는 북관(北關)의 친기위(親騎衛)272)  의 예에 의하여 설치한 것인데, 의주(義州)에 3백 명을 두고, 네 방영에 각각 1백 50명씩 두었더니 이즈음에 와서 소속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므로,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다.

 

한유(韓游)를 먼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지난날 안식(安栻)과 한유는 분관(分館)으로 회자(回刺)273)  하지 않았던 까닭에 멀리 정배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뒤이어 대신의 말로 말미암아 멀리 정배하라는 명령이 중지되었으나 한유는 고지식하게 앞만 보고 끝내 회자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다.

 

황귀하(黃龜河)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다시 제수하였다. 처음에 황귀하는 의금부 당상으로서 유봉휘(柳鳳輝)의 아들 유필원(柳弼垣)을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도록 허락하여 달라고 계청했던 까닭에 대계(臺啓)를 당해 파직되었다가, 이때에 와서 임명하는 명이 있었던 것이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도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6일 신사

지평(持平) 조정순(趙正純)이 상소하여 임금의 덕과 백성의 폐해를 논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 다섯 조목은 매우 절실하다. 호포(戶布)와 결포(結布) 문제는 묘당에서 바야흐로 좋은 방도를 궁리하고 있으니, 원소(原疏)를 금중(禁中)에 두라."
하였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유숭(兪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며칠 전 연달아 명주와 비단을 내전(內殿)으로 들이라는 명이 있었으니, 신이 알기로는 내전에서 하사하는 것은 반드시 과거의 예를 따라야 할 것인데, 한소후(韓昭侯)가 떨어진 바지를 보관해 둔 고사(故事)274)  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백성이 궁핍하고 재물이 고갈된 날을 당해서는 더욱 절약하셔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내전으로 들이는 물건은 세자가 입학한 뒤에 양대비(兩大妃)께서 상으로 줄 물건으로서 과거의 예가 확실히 형편에 밝지 못한 것이다. 한소후의 고사까지 끌어 댄 것은 더욱 그것이 접근하게 부합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유숭(兪崇)은 호조에 벼슬 자리를 두고 있으면서 바르게 간하는 소를 올려 아뢰었으니 그 자리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임금은 마음을 비우고 받아 들이는 미덕을 보이지 않으니, 조야(朝野)에서 근심하고 한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35면
【분류】정론(政論) / 재정(財政) / 역사(歷史)


[註 274] 한소후(韓昭侯)가 떨어진 바지를 보관해 둔 고사(故事) : 춘추 시대(春秋時代) 한소후(韓昭侯)가 떨어진 바지[袴]를 간직해 두라고 하면서 좌우(左右)에 있는 자에게 주지 않자, 시자(侍者)가 말하기를, ‘임금이 어질지 않다.’고 하니, 소후가 말하기를, ‘밝은 임금은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것조차 조심하는데 지금 이 바지를 얼굴 표정에 비하겠는가? 나는 반드시 뒷날 공이 있는 자를 기다리겠다.’ 한 고사.
사신은 말한다. "유숭(兪崇)은 호조에 벼슬 자리를 두고 있으면서 바르게 간하는 소를 올려 아뢰었으니 그 자리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임금은 마음을 비우고 받아 들이는 미덕을 보이지 않으니, 조야(朝野)에서 근심하고 한탄하였다."

 

검열(檢閱) 윤득화(尹得和)가 사직하는 소를 올렸다. 대개 윤득화는 정형복(鄭亨復)·심성희(沈聖希)·권혁(權爀)과 더불어 예문관(藝文館) 검열의 천망(薦望)에 함께 들었는데, 권혁은 김취로(金取魯)의 ‘여러 사람이 많이 모여 앉았다.’는 말로 인하여 누차 쓸데없이 승강이질하면서 결정짓지 못하다가 강(講)에 임해서는 조(粗)275)  를 받고도 또 불통(不通)으로 자처하였으며 윤득화가 함께 천망을 받은 사람으로서 관례를 들어 체직시켜 줄 것을 원하니, 임금이 엄격한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9일 갑신

송수형(宋秀衡)을 정언(正言)으로, 이정박(李挺樸)을 문학(文學)으로, 박규문(朴奎文)을 필선(弼善)으로, 윤급(尹汲)을 설서(說書)로, 이도원(李度遠)을 부수찬(副修撰)으로, 황선(黃璿)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조정순(趙正純)·안상휘(安相徽)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금표(禁標)의 개정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데 무식한 시정배(市井輩)가 외람되게 호소하여 서울 도성의 지척에도 반드시 많은 무덤이 겹겹이 싸일 것이니, 국도(國都)의 금표를 개정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고 상언(上言)한 주동자를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죄를 주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부사직(副司直) 김간(金榦)이 상소하여 《중용차기(中庸箚記)》를 바쳤는데, 그 소에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바야흐로 《중용(中庸)》을 강론한다고 하시니, 이 책은 성문(聖門)276)  에서 전수(傳受)한 요지(要旨)입니다. 신이 일찍이 고금의 여러 학자의 설을 모아 각장(各章)의 아래에 수록하고 간혹 한두 가지 보잘것 없는 견해를 덧붙여 놓았는데, 한 통을 베껴써서 감히 살펴 보시는 데 더럽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명기(明紀)를 강론(講論)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용(孔鏞)의 일277)  은 우후(虞詡)278)  보다 낫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도적을 교화하여 양민(良民)을 만드는 것은 진실로 수령(守令)에게 달렸는데, 지금 토포사(討捕使)가 된 자들은 도둑을 다스릴 때에 도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온 자는 한번 옥문에 들어가면 살아서 나가는 사람이 없으니, 그러한 것이 허실(虛實)을 판별하고 형살(刑殺)을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의의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근래에 도적이 나타나는 걱정으로 인하여 간혹 무신(武臣)을 수령으로 뽑아 보내는데, 만약 지혜와 국량(局量)이 있다면 사실상 문무(文武)에 관계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 어찌 본래부터 착하지 않은 자가 있으리요? 단지 신역(身役)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춥고 배고픈 환난을 참지 못하여 서로 모여 도적이 되어 잠시 구차하게 살기를 구하는 것이니, 그 정상이 애처롭다. 지금 삼남(三南)에 기근이 매우 처참하니 수령된 자는 진실로 공용(孔鏞)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먹는다면, 하소연할 데 없는 곤궁한 백성들이 변하여 도적이 되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교화(敎化)로 그들을 이끌지 아니하고 오직 형벌로 죽이는 것을 위주로 한다면, 장차 공용(孔鏞)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써 특별히 더 신칙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임주국(林柱國)이 아뢰기를,
"근래에는 인심이 교사(巧詐)하여 역시 교화만을 전적으로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교사한가? 남의 위에 있는 사람이 교화를 베푼다면 모두 양민이 될 것이다. 지금의 백골 징포(白骨徵布)와 인족 침징(隣族侵徵)은 참으로 고질적인 폐단이니 수령이 가령 이러한 일에 마음을 쏟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에 힘을 쓸 것인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폐단으로 크게 두려워 할 것은 붕당(朋黨)이며, 전화(錢貨)며, 양역(良役)이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신노(申魯)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자주 재물을 궁중으로 들이신 일이 있었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천하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부모에게 검소하게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부모를 기쁘게 하는 길이 비록 그 지극한 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러나 양지(養志)의 효도가 큰 것입니다. 경자년279)   대상(大喪) 때 동조(東朝)280)  께서 언문 교서를 내리시어 여러 가지 기구(機具)를 없애거나 덜게 하셨으니, 전하께서 이 뜻을 우러러 체득하시면 뜻을 받드는 효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지난 을미년281) 영고(寧考)282)  께서 이어(利御)하실 때에 하교 하시기를, ‘수리(修理)하는 데 폐단이 있다. 비록 창문이라도 그 떨어진 곳만 오려내고 구멍을 따라 떼워 바를 것이며 전체를 뜯어내고 바르지 말라.’고 하셨으니, 검약(儉約)을 숭상하는 덕은 곧 전하의 가법(家法)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5월 30일 을유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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