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권, 영조 3년 1727년 4월

싸라리리 2025. 8. 2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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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정해

홍성보(洪聖輔)를 수찬(修撰)으로, 김진옥(金鎭玉)을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삼았다. 김진옥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다. 음사(蔭仕)로 여러 차례 군부(郡符)를 맡다가 이에 이르러 발탁되어 감사를 제배하게 된 것인데, 음관(蔭官)이 감사가 되기는 근세(近世)에는 없던 일이다.

 

주강을 행하였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이수겸(李守謙)을 발탁하여 6품의 직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이수겸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후손이다. 영남(嶺南) 사람인데 두역(痘疫)204)  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의 제배(除拜) 때마다 곧장 두역을 들어 사피(辭避)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기에, 서사(筮仕)205)  한 지가 16년이 되었는데도 6품에 올라가지 못했었다. 이에 이르러 이조 판서 심택현(沈宅賢)이 아뢰기를,
"효종조(孝宗朝)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이황의 후손 이성철(李誠哲)을 6품으로 올려 수령(守令)을 제배하여 관공(官供)으로 그의 선조를 제사하게 하기 청했었고, 또 숙종조(肅宗朝)에는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이 아뢰는 말에 따라 특별히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의 봉사손(奉祀孫) 김만준(金萬峻)을 바로 6품의 직을 재배하도록 명했었습니다. 만일 이번에 양조(兩朝)의 고사에 의하여 이수겸을 특별히 6품으로 승진시킨다면 유신(儒臣)을 존숭하는 성상의 덕에 빛이 있게 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내년 봄에 합경(合慶) 별시(別試)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세자(世子)가 관례(冠禮)와 입학(入學)을 거행하고 또 장차 가례(嘉禮)를 거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홍치중(洪致中)을 제배하여 좌의정(左議政)으로 삼았다.

 

윤대관(輪對官)들을 불러 보았다.

 

효녀(孝女) 두거비(斗巨非)를 정려(旌閭)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유척기(兪拓基)가 흥해군(興海郡)의 효녀 두거비의 행적을 계문(啓聞)하여 정표(旌表)를 내리기를 구하므로, 분부하기를,
"5세의 어린아이가 이런 효성이 있음은 진실로 양지(良知)206)  에서 나온 것이다. 특별히 정려하여 온 도(道)가 흥기되게 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강원도에 서리가 내리고, 또 큰 눈이 내렸다.

 

4월 3일 기축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해에 외람하게 절위(竊位)하고 있다가 마침내 실패했었습니다. 한 번 실패도 이미 심한 일인데 어찌 재차 잘못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신이 직을 떠난 것이 겨우 한 달입니다. 일신(一身)의 흠과 허물을 어느 겨를에 다 씻게 되고, 온 나라의 물정(物情)이 어느 겨를에 모두 평정해지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잠시 체직(遞職)하였다가 곧바로 제수(除授)하는 것은 신(臣)으로 신(臣)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니, 국가의 사체가 전도(顚倒)되는 것으로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은 일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며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고, 사헌부에서 【장령 강일규(姜一珪)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어도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창후(朴昌厚)는 이미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았는데도 갑자기 승진하여 큰 고을에 의망(擬望)했으니, 청컨대 이조 당상(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앞서 논계(論啓)한 속의 유봉조(柳鳳朝)의 일도 아뢴 대로 하였다.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4월 4일 경인

홍용조(洪龍祚)를 승지(承旨)로, 이집(李潗)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응복(金應福)을 헌납(獻納)으로, 이병상(李秉常)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어유룡(魚有龍)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삼았다.

 

4월 6일 임진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또 상소하여 사면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고 곧 일어서 나와 일을 보도록 명하였다.

 

4월 7일 계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장차 하약(夏禴)을 거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교(傳敎)하기를,
"‘체제(禘祭)를 이미 관(灌)한 뒤부터는 내가 더 보고 싶지 않다.’207)  고 하게 된 것은, 대개 노(魯)나라 군신(君臣)들의 정성과 공경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제집사(諸執事)들을 각각 재계(齋戒)와 목욕(沐浴)으로 정결하게 하여 용의(容儀)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4월 8일 갑오

임금이 태묘에서 향사(享祀)하였다.

 

황해 감사 이집(李潗)이 임소(任所)에서 졸(卒)하였다. 이집은 고(故) 참판(參判) 이택(李澤)의 아우이다. 처음에 음사(蔭仕)로 고을의 목사(牧使)에 이르렀다가 늦게야 비로소 등제(登第)하였고, 발탁하여 황해도 관찰사를 제수했었는데,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므로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4월 9일 을미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다시 경연관(經筵官) 이이근(李頤根)을 징소(徵召)하였으나 오지 않고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월 11일 정유

장령 이응(李膺)이 상소하여 6가지 조목을 진달하였다.
"1. 실행(實行)하는 공부를 힘써 성학(聖學)을 밝혀 갈 것.
2. 사부(師傅)를 가리어 저이(儲貳)208)  를 보도(輔導)하게 할 것.
3. 기강(紀綱)을 밝히어 조정을 바로잡을 것.
4. 정학(正學)을 존숭하여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일정해지게 할 것.
5. 청렴한 관원을 포장(褒奬)하여 탐오(貪汚)한 풍습을 가다듬게 할 것.
6. 충절(忠節)을 포양(褒揚)하여 퇴패한 풍속을 수습할 것."
이었는데, ‘기강을 밝힌다.’는 것에 말하기를,
"분관(分館)의 적체(積滯)가 3년에 이르는 것은 또한 하나의 세변(世變)입니다. 남위로(南渭老)가 까닭도 없이 요단(鬧端)을 야기(惹起)하고 공공연히 물러나 헐뜯으며, 승부를 겨루는 것으로 계획을 하였고, 한유(韓游)·안식(安栻)의 무리는 억지로 하치않은 혐오로 인하여 기필코 이기려고만 힘쓰고 있습니다. 신은 생각에, 남위로는 마땅히 멀리 귀양 보내야 하고, 한유와 안식은 마땅히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여 정죄(定罪)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고, ‘정학(正學)을 존숭한다.’는 것에 말하기를,
"송시열(宋時烈)을 성묘(聖廟)에 종향(從享)하기를 청한 일을 윤허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청렴한 관원을 포장한다.’는 것에 말하기를,
"고(故) 감사(監司) 강유후(姜裕後)는 청백리(淸白吏)로 뽑혔고, 그의 아들 고 도정(都正) 강석범(姜錫範)은 염근리(廉謹吏)로 뽑혔으며, 고 군수(郡守) 신성중(辛聖重)과 고 통제사(統制使) 민섬(閔暹)은 또한 모두 갑술년209)  의 청백리 선발에 들었었는데도, 모두 시기하여 미워하는 자들에게 저지되었으니, 일체로 포장하고 그들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기 바랍니다."
하고, ‘충절을 포양한다.’는 것에 말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사절(死節)한 신하 지여해(池汝海)는 마땅히 현절사(顯節祠)에 배향(配享)하고 강도(江都)에서 사절한 신하 심척(沈惕)은 마땅히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하고서 증직(贈職)을 더하고 시호를 내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여 가납(嘉納)하였다.

 

유복명(柳復明)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박사익(朴師益)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김용경(金龍慶)을 부교리(副校理)로, 안중필(安重弼)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오명준(吳命峻)의 문출(門黜)한 벌을 해제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오명준이 이미 죽었는데, 오명준의 아우 오명항(吳命恒)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자신을 폐기(廢棄)하는 뜻을 말하여 그의 형에게 언급했었는데, 비답하기를,
"이미 졸(卒)한 뒤에야 어찌 특별히 용서하는 은전(恩典)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문신 전강(文臣殿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제신(諸臣)들에게 이르기를,
"두 동조(東朝)께 진연(進宴)하는 일을 여러 차례 번독(煩瀆)스럽게 우러러 청해 보았지만, 자전(慈殿)의 생각에서 사양하시려고만 하여 내년 봄으로 물리어 행하라고 분부하시게 되었다. 대개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고 민생들의 생명이 가까운 날에 끊어지게 되어 잔치를 할 수 없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하니, 제신들이 일제히 아뢰기를,
"내년 봄은 너무 멀어 그렇게 물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승지 홍용조(洪龍祚)는 말하기를,
"동조께서 내리신 분부는 백성을 위하여 비용을 아끼시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진실로 천고(千古)의 훌륭한 덕입니다. 훈도는 양지(養志)210)  보다 더 큰 것이 없는 법이니, 내년 봄으로 물리어 거행하면 성상의 덕도 더 빛이 나게 될 것이니, 술잔을 올리는 예에 비하면 더 나을 듯합니다."
하고, 이어 거조(擧條)를 써 내어 중외(中外)로 하여금 모두 동조의 훌륭한 덕을 알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4월 12일 무술

이기진(李箕鎭)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박사성(朴師聖)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정언섭(鄭彦爕)을 정언(正言)으로, 신처수(申處洙)를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온천(溫泉)에서 고향 집으로 돌아와 상소하여 사직하고 오지 않으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고, 또한 의관(醫官)을 보내어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온양 군수(溫陽郡守) 이만춘(李萬春)은 탐오(貪汚)하고 잔학(殘虐)한 짓을 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여 명기(明紀)를 진강(進講)하였다. 검토관 홍성보(洪聖輔)가 섭이중(聶夷中)211)  의 시(詩)를 들어 권면하기를,
"임금은 모름지기 가색(稼穡)212)  의 어려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옛적에 임금이 친히 삼퇴(三推)213)  를 하게 된 것도 농사가 중요함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선왕조(先王朝)에는 또한 빈풍 칠월시(豳風七月詩)214)  를 그림으로 그렸었는데, 금중(禁中)에 아직도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가색의 어려운 점에 관한 시도 있고 연두(年頭)에 기곡(祈穀)하는 제사도 있었으며, 또한 일찍이 따로 윤음(綸音)을 내리셨는데 매양 ‘옥식(玉食)215)  을 해도 달지 않다.’고 분부하셨으니, 선왕(先王)께서 민생의 일을 진념(軫念)하시기를 이처럼 지극하게 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왕조(先王朝)에 과연 농상도(農桑圖)를 그린 일이 있었는데, 춘방(春坊)에서 들여온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밑에다 발문(跋文)을 붙였다가,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진언(進言)하는 말이 있으며 고쳐서 들여오매, 추모(追慕)하는 마음이 배나 더했었으니, 마땅히 춘궁(春宮)에 주어야 하겠다."
하였다. 홍성보(洪聖輔)가 말하기를,
"민간의 병폐와 고통을 모름지기 나이 어릴 때부터 일찌감치 알게 해야 하는 법인데, 세자(世子)께서 바야흐로 충년(沖年)의 시기에 있으면서 혹시라도 단청(丹靑)의 채색(彩色)만 완호(玩好)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전하께서 그림으로 그려 주게한 본뜻이 아니게 되니, 반드시 그림에 임하여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좋은 말이니, 마땅히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4월 13일 기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평 정홍제(鄭弘濟)가 상소하기를,
"금화(金化)에서 도둑떼가 아전을 죽이고 감옥을 부순 변은 옛날에는 있지 않던 일입니다. 수령(守令)인 사람이 소임을 감당하지 못한 책임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직 죄주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 또한 따라서 갑자기 경직(京職)을 부여했습니다. 청컨대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 이최언(李最彦)을 파직하소서."
하고, 또 병조 좌랑 임익빈(林益彬)을 도태(淘汰)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가 이윽고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임익빈을 도태하지 말도록 하였다. 임익빈은 관서(關西) 사람이다. 병조의 낭관(郞官)으로서 떠드는 것을 금하는 직무를 담당했었는데, 각 관사(官司)의 서리(胥吏)와 하례(下隷)들이 어전(御前)에서 떠들었기 때문에 임익빈이 가죽 채찍을 휘둘러 금단했었다. 정홍제가 그의 거조(擧措)를 놀랍게 여겨 상소를 진달하여 도태하기를 청했던 것인데, 임금이 그의 순박하고 진실함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에 비답하는 분부를 고쳐서 내리게 된 것이다.

 

4월 14일 경자

달이 심성(心星)을 침범했다.

 

영의정 정호(鄭澔)가 면직되었다. 정호는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손이고,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정직한 도리대로만 하므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여 여러 차례 배척을 받았는데, 청고(淸高)한 명성이 더욱 높아져 사림(士林)들이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처럼 추앙(推仰)하며 ‘장암 선생(丈巖先生)’이라고 불렀었다. 신축년216)  에 흉당(凶黨)들의 모함을 받게 되어 바다 섬으로 귀양 갔다가 을사년217)  에 수상(首相)에 임명되었지만 시사(時事)를 해갈 수가 없음을 알고서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 굳게 들어앉고 나오지 않았었다. 임금이 강박(强迫)해서는 안됨을 알고서 드디어 부응(副應)해 주도록 윤허한 것이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을 낮추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삼고, 정호(鄭澔)를 영중추부사로 삼았다.

 

4월 15일 신축

이기진(李箕鎭)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안중필(安重弼)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신방(申昉)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황재(黃梓)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박규문(朴奎文)을 장령(掌令)으로, 신택(申)을 승지(承旨)로, 이병상(李秉常)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구후익(具後翼)을 남병사(南兵使)로, 김석보(金錫保)를 경상 병사(慶尙兵使)로, 구성익(具聖益)을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삼았다.

 

전 황해 병사(黃海兵使) 원백규(元百揆)를 그대로 유임하도록 명하였다. 당초에 무신(武臣)의 착화(着靴) 격식을 정했었다. 이어 앞서 부사(副使) 정형익(鄭亨益)이 아뢰는 말에 따라, 원백규가 수화(水靴)를 신지 않은 일로 함문(緘問)하게 하는 명이 있었고, 이어 대관(臺官)의 논계(論啓)에 따라 그를 파직했었다. 이에 이르러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무신이 수화를 신음은 곧 옛날부터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천익(天翼)을 입으면 마땅히 수화를 신어야 하고, 장복(章服)을 입으면 마땅히 항화(項靴)를 신어야 하니, 이를 일정한 격식으로 정해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원백규를 잉임하도록 명하고, 이어 일정한 격식으로 하도록 하여 양국(兩局)의 대장 이하는 천익을 입으면 항화를 신지 못하게 하였다.

 

4월 16일 임인

사관(史館)에 추천된 사람 윤득화(尹得和)·정형복(鄭亨服)·심성희(沈聖希)·권혁(權爀)을 의금부에 내렸다. 이때 봉교(奉敎) 이흡(李潝), 대교(待敎) 민형수(閔亨洙), 검열 정익하(鄭益河) 등이 윤득화 등 4인을 완의(完議)하여 추천했는데, 대사성(大司成) 김취로(金取魯)가 국외(局外)의 사람으로서 기필코 저해(沮害)하려고 하여, ‘유주(遺珠)’218)  라는 말들을 사청(史廳)의 많은 사람이 앉은 가운데서 했었다. 윤득화와 김취로는 내외종(內外從) 간이었는데 그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말을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와했고, 권혁 등은 마침내 강(講)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평양부(平壤府)에 화재(火災)로 민가(民家) 2백 35호가 연소되었는데,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임술년219)  의 예대로 【1호(戶)에 쌀 1석(石)을 주었다.】  구제하는 은전(恩典)을 베풀도록 했다.

 

지평 이광운(李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날 장령 이응(李膺)이 상소하여 지여해(池汝海)를 논한 일은 진실로 해괴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대저 지여해가 난리에 임하여 죽음을 바쳤음은 진실로 숭상할 만한 것이거니와, 이미 작설(綽楔)220)  로 빛내주었고 또 그의 자손은 녹용(錄用)했으니, 이는 또한 민휼(愍恤)하는 은전(恩典)을 유감없이 한 것인데, 이응이 자기 망모(亡母)의 외조(外祖)라 하여 감히 증직(贈職)하기를 청한 것은 이미 극도로 무엄(無嚴)한 짓인데다가, 3신(三臣)의 사당에 같이 배향(配享)해야 한다는 말에 있어서는 더욱 어긋나는 것이니, 청컨대 이응을 파직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김수(金洙)와 전라 병사 이행검(李行儉)은 몰염치하게 부임했기에, 비당(備堂)이 상소하여 주춤거리며 차지하고 있음을 불가하게 여기고 있으니, 마땅히 즉각 체개(遞改)하여 자리가 비게 되는 폐해가 없게 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응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라."
하고, 김수 등의 일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서학(西學)의 훈도(訓導)        박상진(朴祥震) 등의 상소로 인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대개 박상진 등이, 그의 스승 박사근(朴思謹)이 후진들을 잘 교도(敎導)하였기에 등제(登第)한 사람이 4, 5인이나 되도록 많음을 말하며, 준례를 고찰해 보아 포상(褒賞)하기를 청했기 때문이다.

 

헌납        김응복(金應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연경(燕京)에 갔다가 오는 길에 대강 들은 바가 있습니다. 심양(瀋陽)과 책문(柵門)에 그전에는 개시(開市)하는 일이 없었는데 십수 년 이래로는 법금(法禁)이 해이해져 매양 사행(使行) 때가 되면 상고(商賈)들이 몰래 은(銀)을 가지고 들어가 서로 매매(賣買)해 놓았다가 단련사(團練使)의 돌아오는 인마(人馬)를 이용하여 복물(卜物)221)                  을 운반하고 있는데, 그 폐단이 처음에는 미미하다가 점점 번다해지며 마침내는 팔포(八包)의 규정222)                  을 시행하기 시작하여 포흠(逋欠)을 지게 되자, 결국에는 이번에 이자(移咨)223)                  하여 징수를 독촉하는 폐해가 있게 되었습니다.
대개 단련사의 세폐(歲幣)를 운반하는 말이 거의 수백이 넘습니다. 당초에는 조가(朝家)에서 잠상(潛商)하는 짓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변장(邊將)을 가려서 보내어 단련사를 삼아 검찰(檢察)하여 거느리고 건너오게 했었습니다. 법을 세운 본뜻이 이러했었는데, 지금은 단련사를 의주(義州)의 비장(裨將)으로 대신하여 도리어 상고들의 영수(領袖)가 되어 있고, 수백의 돌아오는 말로도 오히려 다 싣지 못하므로 맞이할 복마(卜馬)224)                  를 책문 밖에까지 더 보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연경의 화물(貨物)이 폭주(輻輳)하여 한이 없게 되었습니다. 당면한 지금 서울이나 외방(外方)의 사람들이 한 섬[甔石]의 저축이 없이 살면서도 나설 적에는 비단으로 꾸미는 짓을 하여 사치함이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상고(商賈)들이 잡다하게 강을 건너 다니고 있어 우리 나라의 사정을 하찮은 것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이에 한 가지 일만 있으면 저들이 금방 알게 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따로 단련사(團練使)를 가리어 영솔(領率)하는 사람과 말을 반드시 공수(空手)로 돌아오게 하도록 하고, 이른바 맞이하는 복마도 또한 수를 헤아려서 들여보낸다면 잠상의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이번에 금법을 범하며 부채(負債)한 사람들은 사핵(査覈)해 내어 효시(梟示)하기를 청하고, 또 사행(使行)의 원역(員役)은 10인이 넘지 않게 각별히 가려서 보내기를 청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겠다는 것으로 비답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간원에서 【정언 정언섭(鄭彦爕)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충청 감사 김여(金礪)에 관한 일은 정계(停啓)되었다.

 

참찬관 신택(申)이 관서(關西)의 별무사(別武士) 정액(定額)이 균등하지 않은 잘못을 논하여, 창성(昌城)·강계(江界)의 2방영(防營)에도 의주(義州)의 단독 진(鎭)의 액수(額數)대로 3백 명씩으로 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척원(戚畹)인 신하이기에 묘당(廟堂)이 나라를 경륜(經綸)해가는 계책을 마땅히 참여하여 듣지 않아야 하는데도, 전하께서 발탁하여 삼사(三事)의 자리에 두셨습니다. 이미 사양해도 윤허받지 못하여 대신(大臣)으로 자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에, 망령되이 선왕(先王)의 덕을 드러내고 성상의 효성을 빛내며 인륜(人倫)을 밝히고 옳음과 그름을 바로잡는 것으로 이몸의 소임을 삼았었는데, 성력(誠力)이 위를 감동시키지 못하여 사세가 생각과 어그러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곧 극력 사양하여 직임을 내놓고는 조금 사사 분의(分義)에 안정을 가지려고 했었는데, 전하께서 오히려 차마 버리지 않으시고 곧 국가 일에 마음을 다하라는 뜻으로 순순(諄諄)하게 면유(面諭)하시기에, 신이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며 무룻 생각하고 있는 바를 문득 감히 남김없이 주달하여 곧장 우리 임금을 그날로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이 되시게 하려고 하느라, 번독(煩瀆)의 혐의가 되는 줄을 알지 못하고 외람됨의 두려움도 따지지 않고서, 더러는 일에 앞서 권면하고 경계하다 더러는 글에 따라 부연하여 진달하고 더러는 일에 나아가 논열(論列)하다 더러는 과오를 기롱하며 쟁집(爭執)하였습니다. 오직 친애(親愛)하는 마음이 돈독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 격렬해졌고 근심하는 마음이 깊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 번다하게 되었습니다마는, 이미 그득한 신임을 받지 못했고 또 스스로 깨우치게 할 의리에 어두었기에, 오직 일단 충군(忠君)하고 애국(愛國)하는 마음으로 진실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여, 전후에 진달한 것이 한갓 참람하고 외람된 죄를 쌓게 될 뿐이었습니다. 이에 공자(孔子)가 말한 ‘〈임금을 섬기는 데〉 자주 말을 하다가는 욕을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 교훈에 있어서 척연(惕然)해지고, 자하(子夏)225)  가 말한 ‘신임 받지 못하면서 간하는 짓을 한다.’고 한 경계에 있어서 구연(懼然)해져 혀를 씹으며 후회하고 있어 감히 다시는 일을 말하지 않았으니, 신과 같은 사람은 바로 하나의 녹만 먹고 있는 천장부(賤丈夫)입니다. 신이 매양 한번 간절한 심정을 털어 놓고 몸을 빼내 전리(田里)로 돌아가 만년(晩年)의 정절을 스스로 보존해 가고 싶어했었는데, 이번에 마침 말미를 받아 길을 떠나 교외(郊外)에서 병으로 체류(滯留)하고 있게 되었기에 비로소 감히 평소에 진달하기를 원하고 있던 바를 다 진달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시급히 면직을 윤허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오도록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대제학 이의현(李宜顯)에게 명하여 호당(湖堂)226)  을 뽑도록 하매, 이의현이 말하기를,
"호당은 지극히 잘 선발(選拔)해야 합니다. 그전의 준례를 들어보면 반드시 이조·예조의 당상(堂上)과 모여서 의논해야 하고, 또한 따라서 사원(詞垣)227)  의 공론을 채택한 다음에야 비로소 선발하게 되었었으니, 잠깐 동안에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바로 즉각 의논해서 정하도록 명했다가, 이윽고 일을 그만 정지하였다.

 

4월 18일 갑진

김취로(金取魯)와 조명신(趙命臣)을 승지(承旨)로, 송사윤(宋思胤)을 장령(掌令)으로, 윤헌주(尹憲柱)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중협(李重協)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김용경(金龍慶)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정언 정언섭(鄭彦爕)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군수(郡守) 박필우(朴弼禹), 문출 죄인(門黜罪人) 박필기(朴弼夔), 전 도사 박필현(朴弼顯), 유학(幼學) 박필룡(朴弼龍) 등은 곧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처조카인데, 충헌공이 자기의 아들과 같이 여겼고 박필우 등도 아버지처럼 섬겼었습니다. 신축년228)  의 화변(禍變) 때에 당해서는 겉으로 비참하게 여기는 기색을 보이고 나타나게 억울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며, 더러는 적소(謫所)까지 보러 가기도 하고 더러는 성산(星山)까지 호친(護櫬)229)  하기도 했지만, 필경에는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에게 따라 붙어 그의 가문을 음해(陰害)하여 충헌공의 이름을 배척하여 불러대며 흉역(凶逆)이라고 일렀고, 궁벽한 길에 찾아 보려가는 사람을 기찰(譏察)하여 모두를 화망(禍網)에 몰아넣었으니, 영중추부사 정호(鄭澔)가 제문(祭文) 때문에 멀리 바다의 섬까지 귀양갔던 것도 또한 이 무리들이 구성(構成)해 낸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박필우와 박필현은 맹제(盟祭)와 하반(賀班)에 달가운 마음으로 용맹스럽게 달려 갔었고, 박필기는 육시(戮屍)에 관한 논계(論啓)에 연명(聯名)했었으니, 차마 이런 짓을 했고 보면 무슨 짓인들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의 화패(禍敗)할 때를 틈타 충헌공의 비복(婢僕)들을 도매(盜賣)했었으니, 사람으로서 형상할 수 없는 짓을 어찌 이에 이르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들의 고모(姑母)를 충헌공의 묘에 합장(合葬)할 적에 박필우 형제는 하나도 와서 곡(哭)하는 사람이 없었고, 상여(喪輿)가 박필기의 사는 데를 지나가게 되어 문전(門前)에서 지척의 거리이었는데도 마침내 나와 보지 않았습니다. 인륜을 손상하고 의리를 어기는 짓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청컨대 박필기·박필우·박필현·박필룡은 모두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형제 네 사람을 남김없이 모두 귀양 보냄은 왕정(王政)의 할 바가 아니니, 음사(蔭仕)한 두 사람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이름이 유적(儒籍)에 있는 사람은 그대로 두라."
하였다.

 

4월 19일 을사

경성회(慶聖會)·이유(李瑜)를 승지(承旨)로 삼고, 이정소(李廷熽)를 발탁하여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삼은 것은 의주(義州)에 있을 때에 진제(賑濟)를 잘한 공로에 의한 것이다.

 

4월 20일 병오

혜민서(惠民署)에 명하여 영남(嶺南)에 약품을 보내어 여역(癘疫)을 구료(救療)하도록 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의 말에 따른 것이다.

 

회양부(淮陽府)에 화재로 민가 50여 호가 연소되었는데, 신포(身布)를 면제해 주고 전세(田稅)의 대동미(大同米)를 3분의 2로 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안식(安栻)·한유(韓游) 등을 귀양보내는 일을 정지하도록 명하고, 이어 시급히 분관(分館)을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안식과 한유가 여러 차례 신칙(申飭)하는 분부를 어기어 마침내 분관을 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당초에는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가, 대신이 진달하는 말에 따라 곧 도로 거두도록 명하게 된 것이다.

 

삼사(三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고,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경원부(慶源府)에 안치(安置)한 죄인 유봉휘(柳鳳輝)가 물고(物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유봉휘는 원악 대대(元惡大憝)230)  인데도 마침내 집안에서 죽게 하였으니, 국가의 실형(失刑)이 크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32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歷史)


[註 230] 원악 대대(元惡大憝) : 아주 못된 짓을 하는 큰 악인.
사신은 말한다. "유봉휘는 원악 대대(元惡大憝)230)  인데도 마침내 집안에서 죽게 하였으니, 국가의 실형(失刑)이 크다."

 

4월 21일 정미

도당록(都堂錄)231)  을 완성하여, 신노(申魯)·윤섭(尹涉)·이양신(李亮臣) 등 13인을 뽑았다. 이양신은 고(故) 대사헌 이희조(李喜朝)의 아들이다. 이희조는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에게 수업하여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와 함께 사림(士林)들의 종사(宗師)가 되어 지촌 선생(芝村先生)이라고 불리웠다. 신축년232)  과 임인년233)  의 화 때에 관새(關塞)로 귀양갔다 죽었는데, 이에 이르러 이양신이 석갈(釋褐)234)  하고 조정에 들어가므로 사림들의 인망(人望)이 성대했는데, 미처 통청(通淸)235)  하지도 않고서 바로 영선(瀛選)236)  에 들게 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을 수습하여 임용(任用)하게 하고, 이어 분부하기를,
"만일 후손이 없으면 비록 방손(傍孫)이나 외손이라도 일체로 탐문(探問)하여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이때 승지 경성회(慶聖會)가 아뢰기를,
"박팽년은 후손 박경여(朴慶餘)가 있고 성삼문은 단지 외손 박중귀(朴重龜)만 있으므로 숙종(肅宗)께서 임용하여 수령(守令)을 삼았었는데, 이 두 사람이 벼슬에 있을 적에는 육신(六臣)들의 제사를 일체로 차렸었으나, 지금은 이 두 사람이 모두 죽고 그 가문이 매우 빈한하므로 제사를 받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런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여 명기(明紀)를 진강(進講)하였다.

 

4월 23일 기유

사간원에서 【정언 정언섭(鄭彦爕)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적신(賊臣) 유봉휘(柳鳳輝)의 아들에게 귀장(歸葬)237)  을 윤허하신 명에 있어서 그윽이 놀랍고 분개한 마음이 지극해짐을 견딜 수 없습니다. 현륙(顯戮)238)  이 행하여지지 않았는데 귀주(鬼誅)239)  가 먼저 더하여져 마침내 대역 원흉(大逆元凶)으로 하여금 마침 유하(牖下)240)  에서 죽게 하였으니, 아! 몹시 통탄스럽습니다. 당면한 지금 조정 신하들이 바야흐로 역신(逆臣)에 대한 율(律)을 계청(啓請)하고 있으므로 천토(天討)를 거행하게 되었다면, 유필원(柳弼垣)은 죄가 마땅히 유사(攸司)에서 결단코 규례에 따라 말미를 줄 수 없으니, 청컨대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장령 박규문(朴奎文)이 또한 상소하여 말미나 귀장(歸葬)을 윤허해서는 안됨을 극력 말하고, 이어 금당(禁堂)의 초기(草記)와 승정원이 받아들인 잘못을 논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섭(尹涉)을 부교리(副校理)로, 신노(申魯)·민응수(閔應洙)를 교리(校理)로, 조명익(趙明翼)을 수찬(修撰)으로, 이양신(李亮臣)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신처수(申處洙)를 사간(司諫)으로, 김우철(金遇喆)을 장령(掌令)으로, 이정박(李廷樸)을 지평(持平)으로, 이광운(李光運)을 필선(弼善)으로, 한이조(韓頤朝)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이유민(李裕民)을 발탁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삼았다. 이에 앞서 임금이 이유민을 발탁하여 병조 판서를 삼았다가 대관(臺官)의 말에 따라 도로 거두었었는데, 이에 이르러 이유민이 시종신(侍從臣)의 아비로 추은(推恩)241)  하여 가의 대부(嘉義大夫)를 삼게 되자, 임금이 품계를 고쳐 자헌 대부로 올리도록 명한 것이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여 명기(明紀)를 진강하였다.

 

4월 24일 경술

삼사(三司)에서 【사간 신처수(申處洙), 장령 김우철(金遇喆)·박규문(朴奎文), 정언 조명택(趙明澤)·정언섭(鄭彦爕), 교리 윤섭(尹涉), 수찬 홍성보(洪聖輔), 부수찬 박사성(朴師聖)이다.】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적신(賊臣) 유봉휘(柳鳳輝)의 반역한 상황은 이미 전후에 토죄(討罪)하기를 청한 계사(啓辭)에 진달했습니다마는, 그 중에도 가장 현저한 것을 들어 말씀드린다면, 건저(建儲)할 처음에 맨먼저 흉악한 상소를 하여 국본(國本)을 요동시키려는 계책을 부렸고, 사나운 독심(毒心)을 품고서 몰래 제신(諸臣)들을 장살(戕殺)하는 음모를 부렸었습니다. 대저 그 당시에 작정한 계책이, 선왕(先王)께서는 숙종(肅宗)께서 남기신 뜻을 체념(體念)하고 자성(慈聖)께서 수교(手敎)하신 분부를 받들어 가는 것이었는데, 신충(宸衷)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배척했었고, 여러 신하들에 있어서는 선왕께서 내린 명명(明命)을 받들어 종사(宗社)의 큰 계책을 협찬(協贊)해 가는 것이었는데, 신하된 사람의 예의가 없는 것으로 돌리면서, 한편으로는 ‘소청을 준허(準許)받고야 말겠으니 다시 의논할 것이 없다.’고 하고, 한편으로는 ‘인심이 의혹(疑惑)하게 됨은 국본(國本)이 너무도 가벼워서다.’라고 하며, 공동(恐動)하고 현란(眩亂)하여 처참하고 혹독한 화를 빚어내게 되었고, 필경에 5적신(賊臣)들의 흉악한 음모와 역신(逆臣)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도 모두 이에서 근본하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스스로 지은 주문(奏文)은 멋대로 모함하여 쓴 것으로서 위로는 군부(君父)를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충현(忠賢)들을 해치면서 흉악한 말을 떠벌여 이웃 나라에 전파하였음은 더욱 지극히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살았을 적에 미처 정법(正法)하지 못한 것은 이미 실형(失刑)한 것이거니와, 죽은 뒤에라도 노적(孥籍)을 시행하는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청컨대 시급히 수노(收孥)하고 적몰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때 유봉휘가 느닷없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대관(臺官)이 시급히 국법(國法)대로 정형(正刑)하기 바란 계청(啓請)을 고쳐 이런 논계(論啓)를 한 것이다.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사헌부에서 【장령 김우철과 박규문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상(喪)을 들은 사람에게 귀장(歸葬)하도록 윤허하는 것이 비록 그전부터의 준례라고는 하지만, 유필원(柳弼垣)에 있어서는 흉악한 역신(逆臣)의 아들로서 응당 노적(孥籍)으로 과죄에 두어야 하니, 귀장 여부를 본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에 도리어 급급하게 초기(草記)를 만들어 마치 가벼운 죄인에게 준례에 따라 말미를 주는 것처럼 하였고, 후원(喉院)242)  의 신하들은 멍청하게 받아들이는 짓을 했으니, 청컨대 금오(金吾)의 당상(堂上)은 파직하고 해방(該房)에 승지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준엄하게 비답하고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헌납 김응복(金應福)이 상소하여 유필원에게 귀장을 윤허한 명을 도로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4월 25일 신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삼사(三司)의 제신(諸臣)들이 청대(請對)하여 합계(合啓)한 일은 따르지 않을 수 없음을 극력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유봉휘의 죄는 해당되는 율(律)을 논하면 마땅히 왕돈(王敦)에게 쓴 율(律)243)  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왕조(先王朝)에는 이미 그런 율이 없었고, 지난 시대에 쓰던 법을 어찌 지금 잘못을 답습(踏襲)할 수 있겠는가? 삼사에서 논한 말이 더러 가하기는 하나, 최석항(崔錫恒)을 이미 노적(孥籍)으로 거두기 청했기에 유봉휘에 있어서도 반드시 이런 논계가 있게 된 것인데, 당초에 이미 따르지 않았기에 이제 와서 윤허할 수 없다."
하였다. 제신(諸臣)들이 말하기를,
"노적(孥籍)으로 거두기를 청한 것도 또한 말감(末勘)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만일 다시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유봉휘의 하늘에 닿는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앞서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어도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날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나와 우러러 청하며 누누이 수백 마디의 말을 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월 26일 임자

김고(金槹)·이봉익(李鳳翼)을 승지(承旨)로, 강일규(姜一珪)를 문학(文學)으로, 윤득화(尹得和)를 검열(檢閱)로 삼았다. 이때에 김취로(金取魯)의 상소에 스스로 말하기를, ‘본시 사청(史廳)의 수작(酬酌)이 없었다.’고 했기 때문에, 한림(翰林)에 추천된 네 사람 중에 윤득화와 심성희(沈聖希)는 강론(講論)에 응했지만 권혁(權爀)은 병을 핑계하고 나가지 않고 정형복(鄭亨復)은 ‘김취로의 말이 허위인지 사실인지를 논할 것없이 경솔하게 나갈 수 없다.’고 하며 마침내 응명(膺命)하지 않았다.

 

4월 29일 을묘

지평 이정박(李廷樸)이 상소하여 호서(湖西)의 여섯 가지 일을 논하였다. 첫머리에 아산(牙山) 공진창(貢津倉)의 조운(漕運)이 허술하므로 마땅히 본고을 원으로 하여금 검찰(檢察)하게 해야 함을 논하고, 다음으로 서천 군수(舒川郡守) 김상두(金相斗)가 중대한 옥사(獄事)를 엄폐하여 숨긴 죄를 논하였으며, 다음으로 부여 현감(扶餘縣監) 박종양(朴宗陽)은 병으로 민생(民生)들의 일을 포기하고 있는 죄를 논하고, 다음으로 이산 현감(尼山縣監) 박필로(朴弼老)의 탐오하고 잔학한 죄를 논하였으며, 다음으로 청양 현감(靑陽縣監) 홍우장(洪宇章)의 혼매(昏昧)하고 패리(悖理)한 죄를 논하고, 다음으로 전 장령 이자(李滋)가 방해하여 버림받은 원통함을 논하였다. 또 관서(關西)의 여덟 가지 폐해를 논하기를,
"1. 중령(中領)에 관(關)을 설치하는 일입니다. 대개 중령의 산맥 한 가닥이 북로(北路)에서부터 일어나 정주(定州)와 가산(嘉山)의 사이까지 뻗히어 있어 진실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요새(要塞)입니다. 강계(江界) 길로 나가면 적유령(狄踰嶺)이 있고 위원(渭原)의 이산(理山) 길로 나가면 우현령(牛峴嶺)이 있으며, 벽동(碧潼)과 창성(昌城)의 길로 나가면 완항령(緩項嶺)이 있고, 삭주(朔州)의 길로 나가면 천마령(天磨嶺)이 있으며, 의주(義州) 길로 나가면 효성령(曉星嶺)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기필코 지켜야 할 땅이니, 마땅히 이 중령에다 관을 설치해야 합니다.
2. 북로(北路)를 방수(防守)하는 일입니다. 성천(成川)과 양덕(陽德)의 군사는 마땅히 고원(高原)의 경계를 지키고, 맹산(孟山)과 덕천(德川)의 군사는 마땅히 영흥(永興)의 경계를 지키며, 영원(寧遠)의 군사는 마땅히 함흥(咸興)의 경계를 지키도록 하여, 평소부터 미리 작정해 놓으신 위급할 때에 임하여 두려워하게 될 염려를 면할 것입니다."
3. 해방(海防)을 거듭 단속하는 일입니다. 연해(沿海) 고을들의 선정(船政)이 허술하니, 마땅히 각 고을의 전선(戰船) 배치를 삼남(三南)의 바닷가 고을들이 하듯이 하게 해야 합니다.
4.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의 제번(除番)244)  하는 군관(軍官)에 관한 일이니, 마땅히 액수(額數)를 정하여 고질(痼疾)이 된 폐단을 제거해야 합니다.
5. 관서(關西)의 고을들의 수령(守令)은 중간중간 문신(文臣)으로 차임(差任)하여 보내는 일입니다.
6. 강계의 인삼(人蔘) 채취하는 일이니, 조가(朝家)에 진공(進貢)하는 것 이외에 본읍(本邑)이 과외로 거두는 폐단을 한결같이 준엄하게 금단하기를 청합니다.
7. 황주(黃州)의 동선령(洞仙嶺) 밑 극성(棘城)에 방어(防禦)를 설치하는 일입니다.
8. 상원군(祥原郡)의 화전(火田)을 종부시(宗簿寺)가 절수(折受)하는 일이니, 해시(該寺)에 절수하게 하신 명을 파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어 이정박이 사본(寫本)을 만든 영액해방도(嶺阨海防圖)를 입계(入啓)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이정박의 상소 내용에 자신이 모사해 왔다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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