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권, 영조 3년 1727년 6월

싸라리리 2025. 8. 2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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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병술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문학(文學) 이정박(李挺樸)이 상소하여 사사로운 의리로서 편안하기 어려움을 아뢰고, 또 궁료(宮僚)283)  를 가려 뽑아서 서연(書筵)을 소대(召對)의 예에 구애받지 말고 자주자주 불러 보라고 청하였으며, 또 몸소 가르치고 눈으로 보여 감동시키는 방책을 논하였다. 또 아뢰기를,
"세자빈의 가례(嘉禮)가 이미 정해졌으니 《소학(小學)》을 내려 주소서. 이것은 역대 왕실의 가법(家法)입니다. 그리고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중비필(重妃匹)’이란 한 조항은 제가(齊家)하는 요체를 깊이 얻었으니,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미리 번역하게 하며 《소학》과 더불어 일체로 전수(傳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문에서 아뢴 말들은 진실로 왕세자에게는 훈계가 되는 유익한 말이며, 나를 애써 경계하는 뜻이 은연중 그 안에 있으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중비필(重妃匹)’이란 한 조항은 춘방(春坊)의 관원으로 하여금 찬선(贊善)에게 가서 의논하여 번역해 올리게 하라."
하고, 이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대개 이정박의 아버지가 당시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의 관원이 되었던 까닭에 이정박이 의리상 벼슬을 갈아 줄 것을 빌었던 것인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下敎)하기를,
"이정박(李挺樸)의 상소문을 베껴서 동궁(東宮)으로 들여 보내라."
하였다.

 

이재(李縡)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양신(李亮臣)을 교리(校理)로, 정언섭(鄭彦爕)을 사서(司書)로, 정형복(鄭亨復)을 겸설서(兼說書)로, 정홍제(鄭弘濟)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조정순(趙正純)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계문(啓聞)하기를,
"예빈시(禮賓寺)의 직장(直長) 김도성(金道成)은 현인(賢人)을 죽이고 정론(正論)을 해치는 논의에 몸을 던져 일을 맡아 보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벼슬에 있으면서 추잡하고 비루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제릉(齊陵) 참봉(參奉) 신익주(申翊周)는 향리에서 버림받아 사람의 축에도 들지 않는데도 성균관(成均館)의 천거를 도모하여 얻어 분수에 넘치게 참봉의 직을 받았으니, 아울러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문하기를,
"예빈시의 비축물을 근자에 한 관원이 물품을 나누어 준 명목을 창정(創定)해 기록하여 절반 이상을 소모했으니, 호조(戶曹)에서 엄중히 조사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소대(召對)하고 명기(明紀)를 강론하였다.

 

6월 3일 무자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5일 경인

유복명(柳復明)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재(李縡)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삼았다.

 

이조 판서 심택현(沈宅賢)을 발탁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충주(忠州) 사는 유학(幼學) 정만근(鄭萬根) 등이 상소하여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의 사원(祠院)에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임경업의 외로운 충성과 크나큰 절의는 선조(先朝)께서 포상했던 바이고, 온 나라가 함께 칭송하던 바이다. 근자에 이르러 사액(賜額)의 폐단을 내가 실로 병통으로 여기지만 이 사원 문제에 이르러서는 다른 사원과 다르니, 이를 해조(該曹)에서 즉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임경업은 충주 사람으로서 남한 산성에서 하성(下城)을 당한 뒤에 중(僧) 독보(獨步)를 불러 주문(奏文)을 싸서 중국으로 들여보내 숭정 황제(崇禎皇帝)284)  가 조서(詔書)를 내리고 포가(褒嘉)하였다. 가도(椵島)·금주(錦州)의 일에 이르러서는 충절이 더욱 드러났다. 일찍이 바다를 건너 명(明)나라 조정에 들어가 부총제(副摠制)의 직을 배수(拜受)하여 마침내 사막(沙漠)을 쓸어서 깨끗이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었는데, 명나라 국운이 이미 끝났고 조선으로 송환되어서는 역적 김자점(金自點)에게 얽혀 들어 옥(獄)에서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겼다. 곧 그가 살던 지역에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그의 유상(遺像)을 봉안하니, 유상은 바로 명조(明朝)에서 내린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정만근 등이 상소하여 사액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윤허하였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36면
【분류】정론(政論) / 왕실(王室) / 사상(思想) / 교육(敎育) / 역사(歷史) / 인물(人物)


[註 284] 숭정 황제(崇禎皇帝) : 명(明)나라 의종(毅宗).
사신은 말한다. "임경업은 충주 사람으로서 남한 산성에서 하성(下城)을 당한 뒤에 중(僧) 독보(獨步)를 불러 주문(奏文)을 싸서 중국으로 들여보내 숭정 황제(崇禎皇帝)284)  가 조서(詔書)를 내리고 포가(褒嘉)하였다. 가도(椵島)·금주(錦州)의 일에 이르러서는 충절이 더욱 드러났다. 일찍이 바다를 건너 명(明)나라 조정에 들어가 부총제(副摠制)의 직을 배수(拜受)하여 마침내 사막(沙漠)을 쓸어서 깨끗이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었는데, 명나라 국운이 이미 끝났고 조선으로 송환되어서는 역적 김자점(金自點)에게 얽혀 들어 옥(獄)에서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겼다. 곧 그가 살던 지역에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그의 유상(遺像)을 봉안하니, 유상은 바로 명조(明朝)에서 내린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정만근 등이 상소하여 사액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윤허하였던 것이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근자에 듣건대, 경연관(經筵官)이 글의 의미를 아뢰는 바가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과 비교하여 낫다고 하니 오래도록 경연(經筵)에 두고 그대로 주연(胄筵)285)  에 출입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청컨대 별도의 유시를 내려 간곡히 부르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경연관이 비록 많지만 나는 단지 한원진(韓元震)·채지홍(蔡之洪) 두 사람만 보았다. 모두 불러 들이지 못한 것은 나의 성의가 얕은 연고이다."
하고, 드디어 승정원에 명하여 오기를 재촉하는 별도의 유시를 내리도록 하였다. 홍치중이 또 아뢰기를,
"근자에 보건대, 대사헌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하기를, ‘들어오면 체직을 허락한다.’고 하교(下敎)하셨으니, 이것이 비록 대신에게 시행하신 것이나 역시 대신을 우대하는 도리가 아니며, 유자(儒者)로서 대신을 대우하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거리가 있습니다. 병이 있어 오지 않으면 체직을 허락하였다가 다시 배수(拜授)하시는 것이 예우(禮遇)하는 뜻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림(山林)에 물러난 사람을 만약 체직시키면 더욱 불러들일 도리가 없는 까닭에 곧바로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경의 말이 진실로 그러할 듯하다."
하였다.

 

서종섭(徐宗爕) 등 여러 사람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서종섭과 서종급(徐宗伋)·박사성(朴師聖)·황재(黃梓)·서명구(徐命九)·김응복(金應福)·김유경(金有慶)·한이조(韓頤朝) 등이 법에도 없는 피혐(避嫌)을 끌어대어 합계(合啓)에 참여하지 않았었는데, 대계(臺啓)로 말미암아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서용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시민(市民)286)  의 난전(亂廛)을 금지하러 나가지 말고 전적으로 한성부[京兆]에 맡기라고 분부하니, 판윤(判尹) 이병상(李秉常)의 말을 따른 것이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익주(申翊周)의 일은 계문한 대로 하게 하고 금표(禁標)를 개정하는 일을 한성부의 관원이 위반자를 적발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사간원 【정언(正言) 송수형(宋秀衡)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계(臺啓)로 다투어 말썽이 된 것은 비록 조정의 명령이 있더라도 전례에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홍석보(洪錫輔)는 대각(臺閣)에서 환수(還收)하는 논의가 있지 않은데도 역적 유봉휘(柳鳳輝)의 아들 유필원(柳弼垣)을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 지내게 허락하였으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가 소하(疏下) 오적(五賊)의 죄를 힘써 아뢰고 처분을 빨리 내려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적의 무리가 태연하게 즐기며 전혀 두려워함이 없다고 하니, 각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다시 천극(栫棘)287)  을 엄중히 더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이유(李瑜)가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늘 신축년288)  의 일을 생각하고 말하려 하다가 목이 메어 웁니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귀양가고 신(臣) 등과 이병상(李秉常)·신사철(申思哲) 같은 이들은 잠깐 교외(郊外)에 머물러 있었는데, 역적 김일경(金一鏡) 무리들의 재앙을 일으키려는 마음은 날로 불같이 성하여 생각하면 위태롭고 두려웠습니다. 삼성(三聖)의 혈맥이라고는 단지 선대왕(先大王)289)  과 전하가 있을 뿐이어서 신 등은 말하기를, ‘우리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어찌 멀리 갈 수 있겠는가?’하였는데, 어찌 만 번 죽더라도 돌아올 것을 생각했겠습니까? 다시금 하전(廈氈)290)  의 위에서 전하를 모시면서 한갖 좋은 벼슬만 얻어 나라 일을 한푼어치도 이루어 낸 것이 없고, 역적을 토벌하는 한가지 일도 서로 버티기가 이와 같으니 다른 것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 신사철·이병상·심택현(沈宅賢) 등이 잇달아 아뢰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상소문이 어디에 있느냐?"
하니,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실려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을 시원스럽게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는데 한 부분의 애연(藹然)한 정성을 비로소 이유에게서 보겠다. 어찌 나의 뜻을 다 드러내 보인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비록 단지 용서한다고 말하였지만 그들이 끝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역적 김일경의 상소가 나오고 박상검(朴尙儉)의 변고가 또 궁중에서 나왔으니, 만약 그 당시에 전하께서 마침내 자리에서 물러나 보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무릇 신하된 자는 각각 죽을 각오가 있어서 비록 늙은 어버이가 있더라도 역시 돌아볼 수 없으며, 비록 집의 종이 나갔다 하더라도 몰래 업고 도망하였지, 어찌 그저 보고만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멀어질수록 점차 잊혀져 지금의 심정이 신축년의 심정과 같지 않아서 목숨을 걸고 힘써 간행하지 못하여 흉적(凶賊)으로 하여금 누워서 편안하게 쉬게 하였으니, 부끄러워 죽고 싶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간곡하게 아뢰었기 때문에 오늘의 하교(下敎)는 지난날과 달랐다."
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김일경과 더불어 끝까지 서로 마음이 맞았던 자는 박필몽(朴弼夢)입니다. 17명의 계사(啓辭)는 박필몽에게서 나왔는데, 모두 무옥(誣獄)에 들어가 죽었습니다. 그 당시 말하기를, ‘만약 원훈(元勳)을 꼽는다면 박필몽이 해당될 것이고, 이진유(李眞儒)에 있어서는 김일경과 차이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6월 6일 신묘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병년 별시(丙年別試)291)  를 정시(庭試)292)  로서 대신 거행토록 하고, 무과(武科)의 초시 급제자의 정원을 1, 2소(所)에 각각 1백 명씩 뽑도록 하였다.

 

문학(文學) 이정박(李挺樸)과 사서(司書) 정언섭(鄭彦爕)이 연명하여 소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밤 숙직실에서 갑자기 떠들썩하는 소리가 대궐 안에서부터 흘러나옴을 듣고 자세히 들어보니 마치 창기(娼妓)의 노래소리와 같았으며, 간간히 퉁소와 피리소리에 장구로 장단을 맞추었으므로 신들은 놀랍고 의아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용루(龍樓)293)  에서 잠자리에 드신 후 궁인(宮人)들이 몰래 자기들끼리 희롱한 것인데, 저길고 짧은 노래는 궁인배들이 혹시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퉁소부는 사람이 누구이며 피리부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들이 바깥에서 들어온 자들이라면 금중(禁中)의 삼엄하지 못함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물며 그 소리가 나오는 곳이 동궁(東宮)의 청강(聽講)하는 집과 서로 멀지 않은 것 같으니, 우리 저하(邸下)께서 만약 우연히 이 소리를 듣게 되어 혹시라도 열락(悅樂)에 빠지는 마음이 생긴다면 이는 세자(世子)의 덕(德)에 누가 됨이 큽니다. 삼가 바라건대 금중을 엄중히 신칙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소는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깊은 밤에 아득히 먼 소리를 나는 과연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연유를 물음에 이는 과연 방자(房者)들이 몰래 저희들끼리 노래하고 피리를 불었다 하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 통탄스럽다. 그들 중 앞장서 부른 자는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무거운 벌을 적용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곳이 동궁과는 거리가 자못 머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고, 이어 호피(虎皮) 1령(令)을 춘방(春坊)에 하사하여 칭찬하고 장령하는 뜻을 나타내 보였다.

 

부교리(副校理) 윤섭(尹涉)·조명택(趙明澤), 수찬(修撰) 조명익(趙明翼), 부수찬(副修撰) 이도원(李度遠) 등이 춘방(春坊)에서 올린 소로 말미암아 차자(箚子)를 올려 경계의 뜻을 아뢰었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인자하신 사랑이 너무 지나치시고 사사로운 은총이 간혹 치우치시어 일이 부녀자나 환관에 관련되면 문득 다 사정을 보아 주고 말이 궁액(宮掖)에 관계되면 감싸고 덮어 주려는 것을 드러나게 보이시어, 마침내 이 무리로 하여금 은혜로 돌보아 주는 것에 의지하여 점차 방자하기에 이르러 궁중 안에서 함부로 장난질하며 놀아나게 되어 소리가 궁관(宮官)의 숙직실에까지 들렸으니, 전하께서 몸을 신칙하심이 미진하시고 아랫사람을 거느리심이 엄격하시지 못한 소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하였다.

 

6월 9일 갑오

유척기(兪拓基)를 대사간(大司諫)으로, 홍봉조(洪鳳祚)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또 갖가지 말로써 오적(五賊)이 마땅히 주살되어야 한다고 연달아 아뢰었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교리(校理) 이양신(李亮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망령되게 어리석은 말을 진달하여 정성이 성상(聖上)의 마음을 열리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너는 옛 급암(汲黯)을 본받지만 나는 한 무제(漢武帝)가 아니다.’294)  라고 하교(下敎)하시기에 이르러서 명성(名聲)을 낚으려는 것이라 의심받았고 무엄하다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아! 전하께서는 이미 여러 역적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도리어 또 힘써 여러 사람의 마음을 거역하시기 연달아 3년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섭섭한 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세 신하에게 낙점(落點)을 아끼시는 것이 간쟁을 하고 난 뒤에 있었으니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 하고 있으며, 권익관(權益寬)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지친으로서 무릇 역모에서 나쁜 짓을 서로 도왔으니 비록 드러난 것으로 말하더라도 외부로 흘러나온 말은 반드시 사대부(士大夫)들을 도륙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의 그 뜻하는 바가 어찌 단순히 착한 사람들을 해치려는 것뿐이겠습니까? 신이 앞서 올린 소(疏)가 역적 김일경의 종제(從弟)에게 청죄(請罪)할 것을 이른 것이 아닌데도 전하께서는 도리어 법에 없는 연좌(緣坐)라고 하교하시고, 권중경(權重經)은 이름이 민언량(閔彦良)의 공초(供招)에서 나와 형신(刑訊)을 받기에 이르러서는 감히 선왕조(先王朝)에서 죄폐(罪廢)된 종적(踪跡)으로서 30년 동안 몸을 깨끗이 하였다고 자부하면서 마치 혼탁한 세상에 처하여 홀로 명절(名節)을 보존한 체하니, 그의 방자한 생각과 기만하고 모독하는 죄는 무거운 벌을 주어야 합당한데 정배(定配)하는 가벼운 벌도 오히려 또 미루기만 하시므로, 신은 더욱 개탄합니다. 조명신(趙命臣)은 은혜를 구하는 청을 올려 연석(筵席)에서 자주 번거롭게 하였고, 또 그의 재주와 명망은 보장(保障)의 직임에는 합당하지 아니한 까닭에 신이 과연 이러저러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자신을 반성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변명하려 하니, 나는 깨닫지 못하겠다. 조정에서 인물을 등용하는 것이 어찌 그대 뜻의 협착함과 같겠는가?"
하였다.

 

6월 10일 을미

정형익(鄭亨益)은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조정만(趙正萬)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았다.

 

집의(執義)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한 해가 지나도록 굳이 사양하는 데도 한결같이 재촉한 것은 또한 내가 벼슬에 얽매이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본래의 직은 이제 우선 체직을 허락하니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체득하여 어서 마음을 바꾸어 올라오라."
하였다. 박필주는 대관(臺官)으로서 자처하지 않고 앞뒤의 사직소에서 번번이 전(前) 영평 현령(永平縣令)이라고 직함을 썼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체직시켜 줄 것을 허락하여 임금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의천(李倚天)이 장계(狀啓)로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고기잡이 배가 표류히여 저 나라295)  로 들어가는 것이 근래 매우 빈번하니, 청컨대 사공은 효시(梟示)하고 배를 부리는 곁꾼[船格]은 때려서 귀양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령 뱃사람들이 저들의 우대를 이롭게 여겨 고의로 바람을 타고 표류하였다면 정상(情狀)이 진실로 가증스럽지만, 그러나 바람을 만나 갑자기 표류하였다면 어찌 사람의 힘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 지금 만약 사형에 해당되는 죄[一罪]로 논한다면 표류된 무리들이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다른 나라에 붙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나라의 형편이 은밀히 누설되는 그 폐단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고기잡이 배는 먼 바다로 나가지 못하도록 이미 금령이 내려져 있으니 사공은 때려 귀양보내고 그 나머지는 단지 세 차례 때리는 형을 내리시어 이것을 규칙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동지사(冬至使)에게 직함을 겸하는 규칙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장차 청나라에 사은(謝恩)할 일이 있었는데, 청나라에서는 예물을 가져와 바치지 말라고 하였다. 예물을 보내지 않았다면 별사(別使)도 파견할 필요가 없지만 그러나 저들의 자문(咨文)에 절사(節使)의 내왕편에 부치라는 말이 없었던 까닭에 대신에게 순문(詢問)한 것이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문서를 가져와 조사해 보니, 계사년296)  에 저 나라에서 보낸 자문(咨文)이 있고 갑오년297)  에 절사 겸 사은사(節使兼謝恩使)로 진평군(晋平君)이 정사(正使)로 들어갔으나 단순한 절사의 경우에는 일찍이 인편에 부친 예가 없었는데, 이미 갑오년에 그렇게 시행한 예가 있으므로 그 예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지만 앞으로 사은사는 장차 그만둘 때가 없을 것이니,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성(大司成) 정형익(鄭亨益)은 아뢰기를,
"사은사(謝恩使)의 폐해는 오로지 보내는 방물(方物)이 절사(節使)보다 많은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미 방물이 없으니 별다른 폐해는 없을 것이며, 일품(一品) 관원의 사행에 비록 노자[盤纏]가 조금 더 들기는 하지만 그 폐해는 사소합니다. 단순한 절사의 편에 부친다면 혹시라도 거친 시비가 일어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이름은 절사로 하여 사은을 겸하게 하고 수행 인원은 절사의 예에 따라 들여보내는 것이 아마 옳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옹정(雍正)298)  의 뜻은 비록 또 사은사를 보내는 것으로써 폐단이 있을까 염려할 것이겠으나 절사의 편에 부친다는 것은 결국 우려할 만한 데 관계되니, 사신은 사은사에 해당하는 관원을 차출하고 수행원은 절사의 예에 따라 보내며 그 밖에 사항은 모두 사은사의 예에 따라서 오늘 이후부터 만약 보낼 방물이 있으면 사은 겸동지사라고 일컫고, 만약 보낼 방물이 없으면 동지 겸 사은사라고 일컫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가 또 소하(疏下) 오적(五賊)의 죄를 몹시 말하며 빨리 윤허하여 따를 것을 청하고,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우의정(右議政) 이의현(李宜顯)이 잇달아 아뢰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나 역시 필경에는 공론을 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오적을 일시에 처단하는 것은 나의 마음이 주저하여 결단할 수 없는 바가 있는 까닭에 잠시 윤허하여 따르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종일토록 청대하여 서로 번갈아 힘써 다투느냐? 내가 만일 오늘 윤종(允從)한다면 바깥에서는 필연코 내가 이기지 못하여 윤종하였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정형익(鄭亨益)이 아뢰기를,
"성상(聖上)께서 뜻을 정하신 것은 진실로 합당함을 얻으신 것이니 좀더 자세히 생각하시고 특별히 전지(傳旨)를 내리시어 형벌을 엄격하고 바르게 베푸신다면, 비록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하여도 환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특별히 전지를 내려 달라는 말은 사실 나의 마음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 역적을 죽이고 살리는 것을 마땅히 초솔(草率)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윤섭(尹涉)이 아뢰기를,
"대사성이 아뢴 바가 그것이 합당함을 얻으신 것인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꼭 대계(臺啓)대로 윤허하셔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시일을 허비하셨습니까?"
하고, 장령(掌令) 강일규(姜一珪)가 아뢰기를,
"삼사(三司)에서 하는 일은 다른 데에서 하는 것과는 스스로 다르니, 꼭 대계(臺啓)대로 윤종(允從)하시면 신하의 말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시는 도량이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손으로 서안(書案)을 치면서 말하기를,
"만약 임금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임금이 장차 특별한 전지를 내려 그 죄를 밝게 다스린다면 대각(臺閣)의 신하로서 오늘 반드시 윤종하기를 요청한 것은 매우 미안함이 될 것이다. 오로지 처분을 명백하게 하고 옳고 그름을 확실히 정함이 마땅할 것이니, 무엇 때문에 단지 하나의 ‘윤(允)’자를 내리어 허둥지둥 처분해야겠는가?"
하였다.

 

밤에 별이 북극성(北極星) 위로 흘러 갔다.

 

6월 11일 병신

삼사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6월 12일 정유

밤에 별이 하늘 가운데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갔는데, 그 크기는 말[斗]만 하고 그 빛은 땅을 밝혔으며 길이는 6, 7척이나 되었고 소리는 큰 우레와 같았으니 천고성(天鼓星)일 것이다. 어떤 이는 전쟁이 있을 징조라고 하였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전옥(典獄)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특별히 놓아 보내니, 대개 더위로 결옥(決獄)이 많이 지체되었던 까닭이었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안상휘(安相徽)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계사를 올려 아뢰기를,
"함흥 판관(咸興判官) 임적(任適)은 사노비(寺奴婢)를 얻어 본부에 소속을 옮겨 놓자고 청하였는데 그들을 찾아 모아들일 때 한 지방이 시끄러웠고, 보은 현감(報恩縣監) 김득대(金得大)는 소나무의 도벌을 금지한다고 빙자하여 백성의 널빤대기를 어거지로 빼앗았으니 모두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황해도(黃海道) 서흥현(瑞興縣)에서는 요란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동이[盆]만한 큰 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잠시 후에 곧 없어졌다.

 

6월 13일 무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호인(洪好人)을 승지(承旨)로, 이근(李根)을 집의(執義)로, 조명익(趙明翼)을 교리(校理)로, 박필주(朴弼周)을 진선(進善)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이수신(李守身)을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 삼았다.

 

홍성보(洪聖輔)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홍호인(洪好人)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으니 모두 새로 탁용(擢用)한 것이다.

 

천둥하고 정릉(貞陵) 홍살문에 벼락이 쳐 위안제를 지냈다.

 

소대(召對)하였다.

 

재자관(䝴咨官) 이추(李樞)를 특별히 파견하여 바다에 표류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청나라로 들여보내며, 그와 더불어 빚진 은과 국경을 침범한 것에 대한 두 건의 자문(咨文)을 함께 부쳐 보냈다. 이에 앞서 청나라 사람 수백 명이 강도(江島)에 와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두 국경을 침범한 자들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급히 봉황성(鳳凰城)의 장수에게 통보하고 관병(官兵)을 보내어 쫓아가 체포하게 하면서 의주부에서 배를 출발시켜 접응(接應)하게 하였더니, 국경을 침범한 자들이 관병에게 반격을 가하였으므로 우리 나라 뱃사람이 상처를 입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5명이나 되었다. 조정에서야 바야흐로 자문(咨文)을 보내어 변방의 금령(禁令)을 엄중하게 해 달라고 청하려 하였는데 저들의 장계(狀啓)가 먼저 왔고, 그 뒤 봉황성 장수가 길을 막고 빚진 은을 갚으라는 자문을 보냈는데 조정에서는 조사하고 징수하기가 어려워 장차 사실에 의거하여 회답하는 자문을 보내기로 하였으나, 두 건의 자문을 미처 발송하기도 전에 절강(浙江)의 상인이 표류하여 제주도에 이르렀으므로, 장차 청나라로 돌아가도록 출발시킴에 있어서 이추가 청나라의 사정을 익힌 아는 까닭에 특별히 보낸 것이다.

 

서울 남부(南部)에 사는 여자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

 

6월 14일 기해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도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황해도(黃海道) 배천군(白川郡)에서 두 여인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6월 15일 경자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조정만(趙正萬)이 사직하는 소를 올렸는데, 대개 음관(蔭官)으로서 관찰사가 된 까닭이었다. 비답하기를,
"10여 군데의 주군(州郡)을 거친 나머지에 한 도(道)를 안찰(按察)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느냐?"
하였다.

 

소대(召對)하고, 명기(明紀)를 진강(進講)하였다.

 

6월 17일 임인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재(李縡)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지난날 성상께서 한 번 보고 싶다는 하교에 감격하여 가까스로 한 번 숙배(肅拜)의 명을 받았으나, 종전에 힘써 사양하고 지금 함부로 나갈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며 나오라고 독촉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적(任適)과 김득대(金得大)에 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임금이 특지(特旨)로 김제 군수(金堤郡守) 김인경(金麟慶)을 파직하였다. 당시에 김인경이 궁방(宮房)에 관한 일로 내수사(內需司)에 관문(關文)299)  을 띄웠는데, 임금이 말씀하기를,
"이 관문을 보면 빈(嬪)의 작호로써 둔전(屯田)의 이름을 삼았으니, 제가 만의 하나라도 청궁(靑宮)300)  을 중히 여기는 뜻이 있다면 방자하기가 이와 같겠는가?"
하고, 마침내 파직을 명한 것이다.
사신은 말한다. "후궁(後宮)에서 장차 김제의 둔전(屯田)을 절수(折受)하려 하였는데, 김인경이 논보(論報)301)  하여 허락하지 않았던 까닭에 엄한 하교가 이와 같았으나, 여러 신하가 그 잘못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38면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 / 농업(農業) / 역사(歷史)


[註 299] 관문(關文) : 상급 관청과 하급 관청 사이에 왕래하던 공문서.[註 300] 청궁(靑宮) : 동궁의 별칭.[註 301] 논보(論報) : 아랫 관청에서 윗 관청에 대하여 자기의 의견을 일부러 보고하는 것.
사신은 말한다. "후궁(後宮)에서 장차 김제의 둔전(屯田)을 절수(折受)하려 하였는데, 김인경이 논보(論報)301)  하여 허락하지 않았던 까닭에 엄한 하교가 이와 같았으나, 여러 신하가 그 잘못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6월 18일 계묘

이교악(李喬岳)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응복(金應福)을 사간(司諫)으로, 유겸명(柳謙明)을 수찬(修撰)으로, 이성조(李聖肇)를 승지(承旨)로, 유척기(兪拓基)를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9일 갑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정광제(鄭匡濟)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계문(啓聞)하여 정주 목사(定州牧使) 박창제(朴昌悌)의 몹시 패악한 행적을 말하면서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기를 청하고, 고창 현감(高敞縣監) 조중명(趙仲明)은 유약하며 어리석고 미련하니 파직하기를 청한다고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0일 을사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1일 병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6월 22일 정미

김여(金礪)를 승지(承旨)로, 이광운(李光運)을 장령(掌令)으로, 정언섭(情彦爕)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납시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도빈(趙道彬)을 불러보니, 조도빈이 휴가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지금 비로소 조정에 돌아온 까닭이다. 조도빈이 아뢰기를,
"소하(疏下)의 오적(五賊)에 대하여 지난번 장차 처분을 내리겠다는 하교가 있어서 발돋음하고 여러 날을 기다려도 아직 성상의 명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 이길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오적을 내가 아까와하는 것이 아니라, 허둥지둥 윤허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반드시 죄상(罪狀)을 두루 살피고 명백하게 열거해야 하는데 지독한 더위가 유별나게 심하여 고찰해 내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서늘한 바람이 차츰 일어나기를 기다리고자 하였다. 조만간 어찌 처분이 없겠느냐?"
하였다. 승지 임주국(林柱國)이 아뢰기를,
"오적의 죄상은 대계(臺啓)에 모두 실려 있고, 또 그들의 상소문 원본을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대계에서 논죄 열거한 것은 오히려 소략하고 상소문의 원본 외에 그 죄상 역시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 유봉휘(柳鳳輝)를 원흉으로 삼지만 신임 사화(辛壬士禍) 때 가장 먼저 재앙을 만든 자가 오적이 아니고 누구냐? 죄상을 두루 살펴보고 별도의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6월 23일 무신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다. 박창제(朴昌悌)·조중명(趙仲明)에 관한 일은 계문(啓聞)한 대로 따랐다.

 

6월 24일 기유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에도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안상휘(安相徽)가 상소하여 소하(疏下)의 오적에게 빨리 처분(處分)을 내리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왜 그렇게 바쁘게 날뛰고 급하게 서두르는가?"
하였다.

 

6월 25일 경술

삼사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에서도 전일의 거듭 합계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광운(李光運)·지평(持平) 정언섭(鄭彦爕)이다.】 에서도 전일의 계사를 거듭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문하여 아뢰기를,
"병조 좌랑(兵曹佐郞) 권해(權賅)는 춘추관(春秋官)의 관직을 겸한 사람으로서 경연(經筵)에서 나온 말을 누설한 죄가 있으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의금부에서〉 잡아들여 조처하도록 명하였다.

 

6월 26일 신해

서관(西關)과 북관(北關), 경기(京畿) 지방에 황충(蝗虫)의 피해가 있었다.

 

6월 28일 계축

소대(召對)를 행하여 명기(明紀)를 강론하였다.

 

이조(吏曹)에 명하여 경연관(經筵官)은 해유(解由)302)  에 구애받지 말라고 하였다. 당시 경연관으로서 체직되어 외직에 임명되었으나 해유에 구애된 사람이 있어서, 검토관(檢討官) 이도원(李度遠)이 구애받지 말게 하기를 청한 까닭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6월 29일 갑인

박사성(朴師聖)·황재(黃梓)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정광제(鄭匡濟)를 장령(掌令)으로, 권업(權𢢜)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병상(李秉常)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변사(備邊司)의 당상(堂上)을 소견(召見)하고,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김천택(金天澤)을 곧바로 6품으로 승진시킬 것을 명하고, 전(前) 봉사(奉事) 이서오(李叙五)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뽑아 쓰게 하게 하니, 이서오는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손자이고, 김천택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다.

 

북관(北關) 병사에게 명하여 조총을 다시 익히게 하였으니,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조상경(趙尙絅)의 청을 따른 것이다. 앞서 숙종(肅宗)을축년303)  에 북민(北民)이 경계를 침범하여 넘어 들어온 변고가 있었으므로 조정에서 변민(邊民)의 사냥을 엄격히 금지하고 조총은 모두 거두어들여 관청 창고에 보관하여 두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민간에 조총이 없어 오랑캐를 방비함이 소홀하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여기더니 이때에 이르러 조상경이 장청(狀請)한 까닭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우의정(右議政) 이의현(李宜顯)이 아뢰기를,
"신의 대제학(大提學) 겸임을 계속 무릅쓰고 할 수 없는데도 성상께서는 ‘실록 편찬을 마치지 못했으니 체직을 허락할 수 없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지금 편찬은 이미 끝나서 인쇄의 감독에 불과할 뿐이고, 또 과거 보일 시기가 임박하니 신은 과거를 주관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헛된 직책을 맡는 것은 참으로 난처합니다.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도 역시 과거 보일 시기가 되어 차자(箚子)로 아뢰어 체직되었으니, 이는 옛부터 내려오는 관례입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을 허락하였다.

 

삼사에서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니 윤허하지 않았고, 양사에서도 전일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소하(疏下)의 오적(五賊)에 대한 계사를 올리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는데, 말하기를,
"아! 예로부터 붕당(朋黨)이 사람과 국가에 끼친 화가 어느 때인들 없었으리요마는, 어찌 지난날의 사건과 같은 것이 있었겠는가? 당초에 붕당이 원한(怨恨)을 품고 해독(害毒)을 풂으로서 조정에 가득한 수많은 신하를 악역(惡逆) 역적으로 몰아 넣었으니, 아!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처음에 앞장서서 부르짖은 것은 바로 신축년304)   겨울 진신(搢紳)의 상소인데, 그 뒤에 호응하여 곧장 그 일을 팔아 이용한 것은 바로 역적 목호룡(睦虎龍)이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없었다면 역적 목호룡이 어떻게 흉악한 마음을 싹틔겠으며, 역적 목호룡이 없었다면 역적 김일경이 어떻게 그 사건을 빙자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이른바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소하(疏下)의 오적들이 역적 김일경의 지극히 흉악하고 몹시 패역한 상소문에 달가운 마음으로 따라가 참여하였으니, 그 가운데 어떤 자는 생각도 같고 뜻도 비슷한 자도 있을 것이요, 어떤 자는 성격이 어그러져서 선택이 부정(不情)한 자도 있었을 것이며, 어떤 자는 형편에 따라 세력 있는 데로 붙쫓은 자도 있을 것이지만, 그 근본을 캐 보면 동일하다. 왜냐하면 역적 김일경은 바로 공자(孔子)의 이른바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벼슬은 얻은 다음에는 잃을까 걱정하는[患得患失] 사람이니 크게는 아비와 임금을 시해할 자인데도 오적이 그를 따랐다. 양사(兩司)에서 다투어 간쟁하여 마지않는 것이 더러는 중정(中正)에 벗어난 점이 없지 않으나, 이 계문(啓聞)에 이르러서는 내가 당초부터 지금까지 한 마디도 지나치다고 말한 적이 없었던 것은 바로 앞의 하교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사람의 ‘그 원흉은 죽이되 위협을 받아 따른 자는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는 뜻을 염두에 두어 역적 김일경을 이미 사형에 처한 까닭에 진작부터 윤허함을 아꼈을 뿐이다. 지난날 승지(承旨)가 충분(忠憤)과 감개로 울음과 눈물을 함께 터뜨렸으니 내가 어찌 피나는 정성에 느낀 뜻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뜻을 비로소 내보이고도 오히려 이제까지 미루고 보류해 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살피고 삼가한 것인데,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먼저 이진유(李眞儒)와 박필몽(朴弼夢)을 사형에 처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그렇지 않다. 이미 오적이라 하였으면 그들 가운데서 구별하는 것이 정정당당한 노릇인지 알 수 없었던 까닭에 마음 속으로 소상(消祥)하게 하였던 것이다. 대저 위협을 받아 따른 자는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말하더라도 위협을 받아 따르는 중에 그 마음의 악함이 어찌 원흉보다 더함이 없겠느냐? 그러나 양사(兩司)에서 간쟁하는 것을 일체 윤허하지 않은 것은 엄중히 죄를 징계하고 다스리는 뜻이 아닌데, 더구나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은 비록 이진유와 박필몽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명의(李明誼)도 역시 같다고 여긴다. 억지로 구별하는 것이 어찌 구차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냐? 역적 김일경을 사형에 처한 것은 특별히 올린 상소문 때문이 아니요 바로 반교문(頒敎文) 때문이니, 소두(疏頭)를 사형에 처하지 않았다면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당연하다. 그들 가운데는 역시 한 등급 낮은 죄인이 있고, 또 역적 김일경은 이미 두 가지 죄로써 사형되었으니 적용하는 법률이 같을 수 없다. 상소문 중 김일경 아래에 있는 한 사람을 소두(疏頭)의 예(例)에 의하여 의금부로 하여금 한 등급 낮은 형벌을 적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이유(李瑜)가 전교를 받아 쓰기를 마치고 아뢰기를,
"이 사람은 소두(疏頭)가 아니고 바로 소하(疏下)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역적 김일경의 아래라고 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의현(李宜顯)이 아뢰기를,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신은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은 아뢰기를,
"신 역시 정확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하(疏下)의 다음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의현이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구별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구차함을 면할 수 없는데, 성상께서는 이미 그들의 죄를 구분하는 것이 구차하다는 것을 아시면서 처분은 도리어 이와 같으니 이 전교(傳敎)는 결코 세상에 발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경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하였는데, 이의현이 아뢰기를,
"오적을 어찌 구별할 수 있습니까?"
하고, 이유가 아뢰기를,
"김일경 아래에 이름을 쓴 한 역적을 단지 한 등급 낮은 형벌을 시행하는 것은 법을 바르게 쓰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명의와 박필몽은 한결같이 사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신사철(申思喆)·김흥경(金興慶)도 역시 잇달아 아뢰었다. 홍치중이 아뢰기를,
"신은 한등급 낮은 형벌을 주어야 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것을 듣자니 이는 이진유 같은데 만약 이진유를 김일경 다음이라 하여 한 등급 낮은 형벌로 다스린다면 박필몽은 혼자 빠지니 이진유로서는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의현이 아뢰기를,
"좌의정은 이진유를 억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죄가 같아 달아나고 면할 수가 없음을 논할 것입니다."
하고, 이병상(李秉常)은 아뢰기를,
"처분이 공명 정대한 후라야 민심을 누르고 감복시킬 수 있습니다. 오적 가운데 단지 그 하나만을 논한다면 참으로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소두(疏頭)는 진작부터 역적 김일경이 있지만 만약 소하인(疏下人)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적이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가령 그 가운데서 더욱 심한 자를 구별하여 살펴 판단하는 것은 혹시 할 수 있겠으나, 단지 그 이름이 두 번째에 들어 있다고 하여 혼자에게만 한 등급 낮은 형벌을 시행한다면 어찌 구차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안색이 변하여 말하기를,
"군주(君主)를 사람 죽이는 데로 유도하느냐? 맹자(孟子)는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맹자》도 읽어 보지 않았느냐? 지금 이 구차스런 판부(判付)를 어떻게 반포하겠느냐?"
하고, 마침내 거두어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여러 신하가 번갈아 나아가 판부를 거두어 들이는 것은 잘못이라고 힘써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누누이 전달하였는데, 또 임금이 말을 한번 꺼냈다가 반한(反汗)305)  하면 식언(食言)에 가깝다."
하고, 드디어 잘못된 부분을 고쳐 되돌려 보내게 하였다. 이에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송수형(宋秀衡)이다.】 에서 소하 오적에 대한 계사를 거듭 아뢰어, 그 내용을 고쳤는데, 말하기를,
"신은 삼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에 있는 다음 한 사람을 한 등급 낮은 법으로 다스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는 실로 역적을 엄중히 처벌하시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단지 오적을 생각하니 역적 김일경과 심사가 같은데도 지금 이 네 역적을 유독 남겨 놓은 것은 법의 취지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역적 한 사람을 한 등급 낮은 법으로 다스리는 것 역시 상도(常道)에 어그러지는 것이니, 청컨대 소두 다음에 있는 한 사람을 한 등급 낮은 법으로 다스리는 명을 거두어 주시고 네 역적과 아울러 모두 사형에 처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참의(參議) 서종섭(徐宗爕)은 지난날 연중(筵中)에서 법에도 없는 피혐(避嫌)을 억지로 끌어대어서, 여러 신하가 비난하고 배척하며 대각(臺閣)에서 논계 하였으면 서종섭은 오로지 허물을 들어 두려워하고 승복해야 마땅할 것인데, 그의 자신을 변명한 상소문은 말을 가려 하지 않은 것이 많고 입을 마구 놀려 가볍게 내뱉았으니 경고하고 책망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유필원(柳弼垣)의 사건을 정계(停啓)하니, 이는 유봉휘(柳鳳輝)를 이미 장사지내고 배소(配所)로 돌아왔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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