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권, 영조 3년 1727년 7월

싸라리리 2025. 8. 2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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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을묘

이중협(李重協)·김응복(金應福)을 승지(承旨)로, 황귀하(黃龜河)를 판윤(判尹)으로, 신노(申魯)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유숭(兪崇)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삼았다.

 

영부사(領府事) 정호(鄭澔)가 상소(上疏)하여 면직(免職)을 구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대사헌(大司憲) 이교악(李喬岳), 집의(執義) 이근(李根), 장령(掌令) 이광운(李光運), 지평(持平) 안상휘(安相徽)·정언섭(鄭彦燮), 헌납(獻納) 김용경(金龍慶), 정언(正言) 송수형(宋秀衡)·정홍제(鄭弘濟), 교리(校理) 신노(申魯)·조명익(趙明翼), 부교리(副校理) 윤섭(尹涉)·조명택(趙明澤), 수찬(修撰) 홍봉조(洪鳳祚)·유겸명(柳謙明), 부수찬(副修撰) 이도원(李度遠) 등 15인을 파출(罷黜)하고 그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였다. 이날 삼사(三司)306)  에서 청대(請對)307)  하여 전에 합계(合啓)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또 소하(疏下)308)   네 적(賊)에게 빨리 나라의 형벌로 바로잡기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섯 적을 어찌하여 네 적이라 하는가? 그 가운데의 하나는 어제 처분한 대로 버려둘 것인가?"
하였다. 이광운(李光運)이 말하기를,
"3년 동안 쟁집(爭執)하여 왔는데 비로소 어제 처분이 있었습니다. 인심은 조금 강박하다 할지라도, 차율(次律)로 결단하면 마침내 형벌을 잘못 쓴 것이 될 것이므로, 양사(兩司)309)  에서 도로 거두기를 청한 계(啓)가 하단(下段)에 있습니다. 네 적으로 말하면 죄명이 여전하여 뭇사람의 뜻이 더욱 격렬해지므로, 이때문에 삼사에서 합계(合啓)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사에서 합계한 것은 지나치거니와, 또 다섯 적을 나누어 두 가지로 하여 삼사로서는 네 적을 아뢰었는데, 양사로서는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계(啓)를 이미 냈기 때문에 그대로 다섯 적을 아울러 논하였다는 것은 이는 소상하지 못한 소치이다."
하였다. 윤섭(尹涉)이 말하기를,
"이미 소상히 하였더라도, 네 적(賊)은 처분이 오히려 늦어져서 뭇사람의 뜻이 더욱 분개하므로 삼사에서 합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나누어 두 가지로 한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적을 논계(論啓)하였다가 윤허(允許)하지 않으면, 한 적은 어제의 비지(批旨)대로 결단한 뒤에 잇달아 네 적을 논할 것인가? 모든 일은 사실대로 하는 것이 귀중한데, 이것은 그렇지 않고 속여서 농락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니, 요순(堯舜)의 도(道)가 아니면 감히 임금 앞에서 아뢰지 않는다는 뜻이 어디에 있다 하겠는가?"
하였다. 유겸명(柳謙明)이 말하기를,
"차율(次律)로 결단하는 것은 형법에 크게 어그러지므로 양사(兩司)에서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니, 삼사에서 네 적을 논계하여도 성상께서 끝내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한 적은 어제의 비지(批旨)대로 결단하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고, 이도원(李度遠)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어찌 억측(臆測)으로써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적에 관한 계달을 양사에서 하지 않고 삼사에서 하기까지 한 것이 중도에 지나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 이진유(李眞儒)는 차율로 시행할 것인가?"
하고, 이어서 발끈 성을 내어 안상(案床)을 치며 말하기를,
"삼사의 여러 신하들을 모두 갈아 차출하라."
하고, 또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310)  하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 경성회(慶聖會)가 울며 처분이 중도에 지나친 것을 간하고 이어서 도로 거두기를 청하고, 겸춘추(兼春秋)인 예조 좌랑(禮曹佐郞) 우세준(禹世準)이 울어서 목이 쉬니, 임금이 말하기를,
"겸춘추(兼春秋)가 목이 쉬도록 우는 것은 임금을 위한 것인가, 당론(黨論)을 위한 것인가?"
하였다. 우세준이 말하기를,
"소신(小臣)이 성상의 지나친 거조(擧措)를 눈으로 보고 망극(罔極)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승지(承旨)가 울며 아뢴 것은 매우 무엄하니, 파직(罷職)하라. 겸춘추(兼春秋)가 목이 쉬어 흐느껴 운 것은 매우 놀라움에 관계되니, 사판(仕版)311)  에서 삭제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때 뭇 흉악한 무리가 죽을 처지에서 살 길을 찾는 마음으로 밤낮으로 꾀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의 환국(換局)에 비할 것이겠는가? 종사(宗社)의 그지없는 염려가 오늘부터 비롯하였다. 경성회는 나이가 이미 70이고 우세준은 시골 출신인 낮은 관원인데 능히 울며 간하였으므로, 시론(時論)이 충직하다고 칭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40면
【분류】사법(司法) / 인사(人事) / 변란(變亂) / 역사(歷史)


[註 306] 삼사(三司) : 사헌부·사간원·홍문관.[註 307] 청대(請對) : 신하가 임금을 면대(面對)하여 국사(國事)를 아뢸 것을 청하던 것.[註 308] 소하(疏下) :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올리는 소(疏)를 주도하고 맨 앞에 서명한 소두(疏頭) 뒤에 이어 서명한 사람들.[註 309] 양사(兩司) : 사헌부·사간원.[註 310] 문외 출송(門外黜送) : 형벌의 하나. 죄지은 사람의 관작(官爵)을 빼앗고 도성(都城) 밖으로 추방하는 일. 비교적 가벼운 벌임.[註 311] 사판(仕版) : 벼슬아치의 명단.
사신은 말한다. "이때 뭇 흉악한 무리가 죽을 처지에서 살 길을 찾는 마음으로 밤낮으로 꾀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의 환국(換局)에 비할 것이겠는가? 종사(宗社)의 그지없는 염려가 오늘부터 비롯하였다. 경성회는 나이가 이미 70이고 우세준은 시골 출신인 낮은 관원인데 능히 울며 간하였으므로, 시론(時論)이 충직하다고 칭찬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유복명(柳復明)·우부승지(右副承旨) 임주국(林柱國)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자신이 후원(喉院)312)  에 있으면서 오늘 삼사(三司)의 청대(請對)는 매우 간사한데도 태연히 입계(入啓)하였으니, 매우 무엄하다. 사진(仕進)한 승지를 모두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7월 1일 을묘

위장(衛將) 이익(李榏)을 가승지(假承旨)로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어제 처분에 대하여 감히 불만한 마음을 품는 것은 매우 무엄하니, 어제 입시(入侍)한 신하들을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이에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우의정(右議政) 이의현(李宜顯)·예조 판서(禮曹判書) 신사철(申思喆)·좌참찬(左參贊) 김흥경(金興慶)·판윤(判尹) 이병상(李秉常)·승지(承旨) 이유(李瑜)와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파직되었는데, 홍치중은 특별히 파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근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자신이 무변(武弁)313)  이면서 당습(黨習)에 달갑게 여기고 있으니, 내가 일찍이 놀랍게 여겼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을 우선 파직하라."
하였다.

 

특별히 정석삼(鄭錫三)·송인명(宋寅明)을 제수(除授)하여 승지(承旨)로 삼았다.

 

김동필(金東弼)을 도승지(都承旨)로, 오명항(吳明恒)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심수현(沈壽賢)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이진망(李眞望)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지평(持平)으로, 정석오(鄭錫五)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는데, 모두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특별히 이광좌(李光佐)를 서용(敍用)하여 영의정(領議政)으로 삼고, 이태좌(李台佐)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특별히 영부사(領府事) 정호(鄭澔)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영부사 정호는 흰 머리에 얼마 남지 않은 나이로 당습(黨習)을 일삼아 왔다. 근년에 올린 하나의 차자(箚子)는 이미 지극히 놀라웠으며, 나라의 일을 마치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의 여윈 것을 보듯이 하고 당비(黨比)에 달갑게 여겼으니, 그 상벌(賞罰)을 밝히는 도리에 있어서는 놓아둘 수가 없다. 파직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수원 부사(水原府使) 홍우전(洪禹傳)은 맨 먼저 삼신(三臣)의 출향(黜享)을 논하였으니, 마음 쓴 것이 놀랍다. 파직만 하고 말 수는 없으니,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조문명(趙文命)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심공(沈珙)·이정걸(李廷傑)을 승지(承旨)로, 강박(姜樸)을 부교리(副校理)로, 윤광익(尹光益)을 수찬(修撰)으로, 이정응(李挺膺)을 장령(掌令)으로, 조최수(趙最壽)를 헌납(獻納)으로, 오광운(吳光運)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모두 특별히 제수(除授)하였다.

 

특별히 조태억(趙泰億)을 문외 출송(門外黜送)에서 방면(放免)하여 직첩(職牒)을 도로 주어 서용(敍用)하고, 특별히 이봉상(李鳳祥)을 제수(除授)하여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이제 세도(世道)가 갈라지고 국사(國事)가 위태로워지니, 참으로 위망(危亡)의 조짐이 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위급한 것을 구제할 방도를 논한다면, 오직 ‘붕당을 타파한다[破朋黨]’는 세 글자가 있을 뿐입니다. 예전부터 내려오면서 붕당이 성행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일은 없었습니다. 갑진년314)   겨울에 전하께서 여러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붕당을 타파하는 뜻을 심각하게 보이시고 전후에 처분하신 것이 지극히 공정하였으므로, 신(臣)은 전하께서 그때의 초지(初志)를 굳게 지키고 사람들의 말에 움직이는 바가 되지 않으셨다면 거의 변동 없이 유지될 희망이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마침내 한편의 말을 치우치게 듣고 한편의 사람만을 임용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무리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으로 힘써 억제함을 더하시더라도 궐문 밖의 일을 전하께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죄다 아시겠습니까? 이 때문에 당동 벌이(黨同伐異)315)  를 방자하게 행하고 오로지 보복을 일삼아도 감히 문책하지 못합니다. 만약 오늘날 처분이 없으면 나라의 일이 참으로 어떠한 지경으로 돌아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본디 ‘죽어야 한다[殺]’는 한 글자는 맹세코 입에서 낼 수 없으니, 성상께서도 유념하셔야 하겠습니다. 전국(戰國) 때의 제후(諸侯)는 다 왕을 참칭(僭稱)하였으므로 왕법(王法)으로 논하면 그 죄가 죽음을 면할 수 없으나, 맹자(孟子)는 ‘성왕(聖王)이 다시 나더라도 지금의 제후를 죄다 죽일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의 당론(黨論)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급히 힘쓸 일로는 붕당을 타파시키는 일보다 앞세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어찌 오늘날과 같은 당론이 있었겠는가? 한 번 《가례원류(家禮源流)》가 나오고부터 엎치락뒤치락 거듭 더하여 이 지경이 되었다. 내가 을사년316)  에 조정하려다가 자연히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내가 강단(剛斷)이 모자라는 탓이겠으나, 그들은 임금을 도리어 붕당만도 못하게 보고 농락하려는 생각을 하여, 네 사람에 대한 계청을 만약 윤허하지 않으면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하여 거행하려 하니, 임금을 위하여 역적을 성토하는 것이 과연 이러한 것인가? 대저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의 치우친 논의는 매우 어그러진다. 승선(承宣)317)  은 모름지기 내 뜻을 알아서 마음을 다하여 거행하여야 한다."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무변(武弁)으로서 귀양간 사람을 모두 놓아 보내라."
하였다.

 

특별히 조최수(趙最壽)를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숭(兪崇)을 파출(罷黜)하고 그 관작(官爵)을 삭탈하였다. 유숭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어제와 오늘의 처분은 어찌된 거조(擧措)입니까? 하루아침 사이에 성상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니, 충역(忠逆)이 바뀌어 놓이고 현사(賢邪)가 분간되지 않습니다. 승선(承宣)이 충성스런 마음에서 분개하여 울며 아뢰어 뜻을 나타낸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고(寧考)318)  의 《실록(實錄)》의 편수(編修)는 앞으로 누구에게 맡길 것입니까? 전하의 국사(國事)가 장차 날로 글러질 것입니다. 신(臣)이 비록 조금이나마 직분을 다하려 하더라도 동정호(洞庭湖)의 가을 잎이 어느 곳에 떨어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소(疏)를 바치고 지레 국문(國門)을 나가니, 이제 영결(永訣)하는 때를 당하여 감히 한 말씀을 올리니, 오직 전하께서 조종(祖宗)의 부탁을 깊이 생각하고 자기의 호오(好惡)를 용납하지 말아서 우리 3백 년의 종사(宗社)를 보전하시는 것이 노신(老臣)이 국도(國都)를 떠나며 구구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유숭의 소는 오로지 붕당을 감싸는 데에 뜻이 있는데, 동정호의 가을 잎이 어느 곳에 떨어질는지 모르겠다는 따위 말은 더욱이 놀랍다.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특별히 조태억(趙泰億)을 제배(除拜)하여 좌의정(左議政)으로 삼고, 홍치중(洪致中)을 낮추어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으며, 윤순(尹淳)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서명균(徐命均)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이집(李㙫)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오명신(吳命新)을 교리(校理)로, 이광덕(李匡德)을 부교리(副校理)로, 윤용(尹容)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유정(柳綎)을 사간(司諫)으로, 송진명(宋眞明)을 헌납(獻納)으로, 유엄(柳儼)을 정언(正言)으로, 심전(沈㙉)을 장령(掌令)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사서(司書)로, 이익한(李翊漢)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서명연(徐命淵)을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김상성(金尙星)을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삼았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조문명(趙文命)이 정사(政事)를 주관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조문명(趙文命)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국가의 안위(安危)의 기틀은 오로지 인재를 공평하게 등용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이제 물러간 한편 사람들 가운데에도 어찌 재주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없어서 쓰지 못하였겠습니까? 오로지 한편 사람만을 쓴다면, 비록 공평한 마음이 있더라도 그 형세가 그럴 수 없는 것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선(承宣)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죄로 파직된 사람을 아무리 서용하려고 하여도 반드시 앞으로 말썽이 생겨 진정할 수 없을 것이니, 우선 세월이 조금 지나서 조정의 자리가 대강 모양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 뒤에 그 죄의 경중과 그 사람이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를 헤아려 편의에 따라 등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나도 어찌 모두 죄로 파직하고 싶겠는가마는, 이제 우선 이렇게 하였으니, 앞으로 어찌 헤아려 분간할 방도가 없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경화(更化)319)  하는 이때를 당하였으니, 몸가짐이 깨끗하고 삼가는 자를 의당 등용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깨끗하고 삼가는 자가 누구인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병태(李秉泰)는 사는 곳이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고 윤용(尹容)은 청백하고 곧은 길을 지키므로 일세(一世)가 보고 느낄 만합니다."
하고, 조문명은 말하기를,
"두 사람의 청백함을 신도 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특별히 거두어 쓰라."
하였다.

 

7월 3일 정사

하교(下敎)하기를,
"소하(疏下) 다섯 사람 외는 전후에 귀양간 사람을 모두 놓아 보내라."
하니, 승지(承旨)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임징하(任徵夏)처럼 죄의 범한 것이 매우 무거운 자는 결코 놓아 보낼 수 없습니다. 또 잡범(雜犯)인 사죄(死罪)와 역적의 연좌(緣坐)된 자는 더욱 마땅히 이 가운데에 두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징하와 소하 다섯 사람 외는 을사년320)   이후에 진신(搢紳)과 유생(儒生)으로서 귀양이나 벌받은 사람을 모두 놓아 보내고 죄를 씻어 주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박장윤(朴長潤)은 널리 죄를 씻어 주는 은전을 베풀려 하므로 놓아 주었으나,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되니 어찌 변통할 수 있겠는가? 박장윤은 그대로 유배하여 두고 그 나머지는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하라."
하였다.

 

이정필(李廷弼)을 필선(弼善)으로, 황정(黃晸)을 문학(文學)으로, 어유봉(魚有鳳)을 집의(執義)로, 김시환(金始煥)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유만중(柳萬重)을 장령(掌令)으로, 송성명(宋成明)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강현(姜鋧)을 판의금(判義禁)으로, 권이진(權以鎭)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삼았다.

 

사복시 정(司僕寺正) 이응(李膺)이 상소하여, 어제와 오늘의 처분이 전도(顚倒)된 것을 논하고, 또 논하기를,
"찬수(纂修)하던 신하들은 다 배척받아 파면되고 숙종[肅廟]의 《실록(實錄)》은 장차 다른 사람에게 맡겨질 것이니, 신(臣)은 통곡하며 눈물이 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응(李膺)은 직분에서 벗어나는 혐의를 생각하지 않고 감히 붕당을 감싸는 마음을 일으켰으니, 우선 파직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심전(沈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일전의 처분은 무엇을 위하여 낸 것입니까? 시비가 바뀌어 놓이고 현사(賢邪)가 가려지지 않아서, 의지하는 대신(大臣)을 황급히 내치고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을 어지럽게 물리치시어 잠시 사이에 조정이 모두 비었으니, 전하께서는 탕평(蕩平)을 말씀하시나, 앞으로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의 여당(餘黨)이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 섞여 진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심전이 상소한 뜻은 오로지 봉당을 감싸는 데에 있다. 우선 갈아 차출하라."
하였다.

 

특지(特旨)로 유봉휘(柳鳳輝)의 관작(官爵)을 추복(追復)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 송인명(宋寅明)에게 이르기를,
"조태구(趙泰耉)의 혐자(嫌字)에 관한 말을 내가 비록 개의하지는 않으나 망발임을 면할 수 없고, 최석항(崔錫恒)은 국량(局量)이 있다는 것은 내가 아나 처사(處事)에는 또한 그르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죽은 뒤에 추삭(追削)한 것은 일률(一律)이므로 일전에 처분한 뒤에 곧 복관(復官)해야 할 것이나 천천히 한 것은 나에게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태구·최석항은 모두 직첩(職牒)을 도로 주라."
하였다. 이때 송인명과 심공(沈珙)이 조태구·최석항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을 굉장하게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는 옥사(獄事)에 외람된 것이 많았으므로, 내가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대행왕(大行王)의 인덕(仁德)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여 문득 조지(朝紙)321)  를 물리치고 보지 않는데, 이제 승선(承宣)으로 인하여 알게 되었다."
하였다.

 

임징하(任徵夏)를 대정현(大靜縣)에 안치(安置)322)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정응(李挺膺)이다.】 에서 아뢰기를,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지극히 영명(英明)하셨으나, 일종의 윤리를 없애고 의리에 어그러지게 하는 무리가 문득 하늘을 헐뜯고 해를 욕하는 마음을 품었는데, 적신(賊臣) 임징하에 이르러 극심하였습니다. 그 한 번 어지럽혔다가 어지러움을 다스렸다는 따위 말은 넌지시 혼란한 세상으로 돌린 것인데 당초의 감률(戡律)은 말감(末減)임을 면할 수 없으니, 멀리 귀양보낸 죄인 임징하는 우선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면 버젓이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접때 대신(大臣)이 소매에 차자(箚子)를 넣어 온 것은 일이 명백하지 않으므로 팔역(八域)에서 해괴하게 여기고 의혹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승정원(承政院)에 내어 주어 뭇사람의 의심을 푸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소하(疏下) 다섯 사람의 죄는 신(臣)이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마는, 이진유(李眞儒)는 비록 김일경(金一鏡)의 소(疏)에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그 뒤에 김일경과 서로 틀려진 정상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3년 동안 천극(栫棘)323)  하여 벌이 이미 행해졌는데, 일전에 있었던 차율(次律)로 결단하라는 명은 아직 거두지 않으셨으니, 청컨대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승지(承旨)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일경(一鏡)은 반역으로 죽었는데, 대신(臺臣)이 어찌 성(姓)을 갖추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의 말이 지극히 공정하다 하겠다. 역적 일경을 어찌 김일경이라 할 수 있겠으며, 진유(眞儒)는 바야흐로 천극되어 있는데 또한 어찌 성을 붙여 부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정응이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사직하지 말고 퇴대(退待)하지도 말라고 명하였다. 이날 이정응이 신계(新啓)만을 전하고 전계(前啓)를 죄다 멈추었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전계 가운데에 있는 김영해(金寧海)·배창석(裵昌碩)·시창(時昌)·목시룡(睦時龍) 등의 일은 죄의 범한 것이 매우 무거우므로 문득 정지할 수 없는데, 헌신(憲臣)이 모두 정지하였으니,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정응이 인피하니, 임금이 특별히 체직(遞職)시켰다. 이때 사헌부의 전계 가운데에는 한세량(韓世良)을 노적(孥籍)324)  하고 이삼(李森) 등을 국문(鞫問)하며 심단(沈檀)·이중환(李重煥)을 나국(拿鞫)·엄문(嚴問)하기를 청하는 계(啓)가 있었던 것을 이정응이 모두 정지하였는데, 송인명은 김영해·목시룡·시창을 정계한 잘못만을 논하였다. 대계(臺啓)는 체례(體例)가 중대한데 마음대로 구별하였으니, 그 외람되고 방자한 것이 이러하였다.

 

7월 4일 무오

홍정필(洪廷弼)을 보덕(輔德)으로, 홍상인(洪尙寅)을 장령(掌令)으로, 송진명(宋眞明)을 부교리(副校理)로, 권업(權𢢜)을 판윤(判尹)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하교(下敎)하기를,
"종전에 사람들이 반드시 정호(鄭澔)를 태산(泰山)·북두(北斗)처럼 여긴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정호가 평소에 논의하는 것이 흔퍅(狠愎)하였기 때문이다. 정호는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그뒤에 조현명(趙顯命)의 말에 따라 ‘흔퍅’ 두 자를 ‘각박함을 힘쓴다[務刻]’는 것으로 고치라고 명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재(李縡)를 체직(遞職)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모든 신민은 모두 내 가르침을 들으라. 붕당(朋黨)의 폐해가 《가례원류(家禮源流)》가 나온 뒤부터 점점 더하여 각각 원수를 이루어서 죽이려는 것으로 한계를 삼아왔다. 아! 마음 아프다. 지난 신축년325)  ·임인년326)  의 일은 그 가운데 반역할 마음을 품은 자가 있기는 하나 다만 그 사람을 죽여야 할 뿐이지, 어찌하여 반드시 한편 사람을 다 죽인 뒤에야 왕법(王法)을 펼 수 있겠는가?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경중을 가리지 않아서 한편 사람들이 점점 불평하게 하는 것은 이 또한 당습(黨習)이다. 한편 사람이 ‘선조(先朝)의 처분이 보책(寶冊)에 새겨 있는데 후왕(後王)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쓰고 버릴 수 있겠는가?’ 하나, 이것은 아주 그렇지가 않다. 우리 성고(聖考)께서 신장(宸章)에 성의(聖意)를 보이신 것은 당습을 진정시키려는 성대한 뜻이니, 신하의 도리로서는 탕평(蕩平)할 마음을 품고 공도(公道)를 힘써야 도리가 당연한데, 만약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속에 싹트고 무엄한 뜻이 가슴속에 개재되 있다면 다스려야 하겠는가, 다스리지 않아야 하겠는가? 아! 선왕에 대하여 공경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후왕에게 어찌 충성한다 할 수 있겠으며, 선왕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는 마음이 있다면 후왕에게 어찌 충성하지 않는다 할 수 있겠는가? 아! 나라의 계책(計策)을 세우는 것은 곧 나라의 공(公)을 위한 것이요 한 사람의 사(私)를 위한 것이 아닌데, 당사자가 어찌 감히 스스로 충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사(前史)를 두루 보건대, 신하인 자가 정책(定策)한 것을 스스로 공(功)으로 여기면 권세가 아래로 옮겨지지 않은 일이 드물었다. 영상(領相)이 나라가 반드시 망하리라고 한 말과 좌상(左相)이 ‘문생(門生)’327)  이니 ‘국로(國老)’328)  이니 하는 말은 바로 붕당(朋黨)을 타파하는 마음에 저촉(抵觸)된다 하여 도리어 반역이라 이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신사년과 임인년의 일은 또한 지나치다고 하겠다. 어찌 이런 기회를 인하여 한편의 사람을 죄다 죽이려고만 하는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일은 말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소하(疏下)의 사람은 평일에 당(黨)을 위하여 죽을 마음으로 흉소(凶疏)에 따라 참여하였으니, 이들 다섯 사람은 그 호오(好惡)를 밝히고 붕당을 타파하는 방도에 있어 엄격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아!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본디 남에게 미움받은 일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어찌 나를 미워하겠는가? 이것은 당습이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으니, 모위(謀危)한다느니 침핍(侵逼)한다느니 하는 것은 임금을 붕당의 우두머리로 여기는 것이거니와,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정호(鄭澔)·이관명(李觀命)은 나라의 일을 마치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의 여윈 것을 보듯이 하고 당습을 마치 큰 절의(節義)를 지키듯이 하며, 민진원(閔鎭遠)은 자신이 폐부(肺腑)의 신하인데도 당습을 일삼았다. 대신(大臣)은 나라의 주석(柱石)인데 모두 이러하니, 내가 앞으로 누구와 나라의 일을 하겠는가? 오직 우상(右相)이 마음을 공평하게 갖고 당습을 타파시키려 하나, 뭇사람의 노여워하고 시샘하여 편할 날이 늘 드물다.
아! 유 판부사(柳判府事)329)  가 근년에 상소한 것이 경솔하기는 경솔하나, 말을 참조해 보지 않은 탓에 지나지 않으니, 무슨 나에게 불만의 뜻이 있었겠는가? 이러한데도 역적의 괴수라 한다. 영상의 충성은 해를 꿰뚫을 만하다는 것은 실로 지나치게 칭찬한 말이 아니다. 갑진년330)   대상(大喪) 때에 영상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세도(世道)를 진정시킬 수 있었겠는가? 설령 허물이 있더라도 절로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합계(合啓) 가운데에 약원(藥院)을 옮겨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좌상의 문생·국로에 관한 일과 같이 들어와 청대(請對)한 일은 이미 비망기(備忘記)에 일렀거니와, 더욱이 우스운 것은 술을 나누는 사이에 유감을 풀었다는 일이다.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거니와, 최상(崔相)331)  은 내가 잘 알지 못하나 아홉 번 영상에 제배(除拜)되었으므로 대우한 것을 알 만하고, 남 봉조하(南奉朝賀)332)  가 신축년·임인년에 살아 있었더라도 어찌 외람된 일이 많은 한탄이 있었겠는가? 윤 영부사(尹領府事)333)  의 지조(持操)가 뛰어난 것은 안 지 오래 되었다.
아! 당습의 폐단이 어찌하여 이미 뼈가 된 세 신하에게까지 미치는가? 무변(武弁)·음관(蔭官)이 색목(色目)에 어찌 관계되며 이서(吏胥)까지도 붕당에 어찌 관계되기에 조정(朝廷)의 진퇴가 이들에게까지 미치는가? 이미 신칙(申飭)하였어도 전만 못하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이번 처분은 다름이 아니라, 접때 신하들이 사수(私讐)를 앞세우고 국사(國事)를 뒤로 미루어도 양사(兩司)에서 아뢰는 것은 잔뜩 움켜쥐며 청대(請對)하는 일은 외람되게 잗다라서 마침내 임금을 농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이 때문에 크게 경장(更張)한 것이다. 나는 다만 마땅히 인재를 취하여 쓸 것이니, 당습에 관계된 자를 내 앞에 천거하면 내치고 귀양보내어 국도(國都)에 함께 있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문(斯文)의 일로 말하면 본디 조정에 올릴 일이 아니니, 만일 다시 어지럽히면 반드시 엄하게 배척할 것이다. 아! 임금의 마음은 이러한데 신하가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내 신하가 아니다."
하였다.

 

사재 봉사(司宰奉事) 박지혁(朴趾赫)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박지혁은 일찍이 갑진년334)  겨울에 유생(儒生)으로서 항소(抗疏)하여 신축년335)  ·임인년336)  의 흉당(凶黨)의 죄를 논하였다가 귀양갔다. 이때에 이르러 병을 핑계하여 사진(仕進)하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한 버릇은 내가 일찍이 놀랍게 여겼다. 특별히 그 벼슬을 파면하라."
하고, 이어서 요즈음 음관(蔭官)중에서 병을 핑계한 자와 휴가를 받은 자는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접때 비지(批旨)를 위조한 일은 매우 놀랍다. 비록 한편 사람을 음해(陰害)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본디 그 사람이 있을 것인데 이성룡(李聖龍)이 거의 죄를 꾸며 만든 것이 드러났으니, 이러한 점을 내가 일찍이 더욱 놀랍게 여겼다. 김요경(金堯鏡)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아우이므로 전혀 죄를 면하더라도 도하(都下)에 둘 수 없으니, 도로 배소(配所)에 보내라. 그 밖에 뜻밖에 죄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곧 놓아 보내라. 이성룡이 시세(時勢)를 따라 힘을 다하여 큰 옥사(獄事)를 만들 뻔한 것은 매우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정석오(鄭錫五)이다.】 에서 전계(前啓) 【목시룡(睦時龍)을 법대로 처단하고 이중환(李重煥)을 국문(鞫問)하고 함우신(咸遇臣)의 처자와 배창석(裵昌碩)·시창(時昌)을 국문하는 일이다.】 를 거듭 아뢰고 소하(疏下) 다섯 적(賊)의 일과 신치운(申致雲)의 일과 이삼(李森)의 일은 정계(停啓)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이중환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내가 오늘에야 비로소 공의(公議)를 보았다."
하였다. 대개 헌부(憲府)에서는 전계를 모두 멈추고 간원에서는 오히려 한두 가지 전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판부사(判府事) 조도빈(趙道彬)이 상소하여 제신(諸臣)과 벌을 같이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7월 5일 기미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과 판부사(判府事) 이관명(李觀命)과 우의정(右議政) 이의현(李宜顯)과 전 판서(判書) 이병상(李秉常)·김흥경(金興慶)·신사철(申思喆)·심택현(沈宅賢)·황귀하(黃龜河)·권성(權𢜫)과 전 참판(參判) 홍석보(洪錫輔)·김취로(金取魯)·정익하(鄭益河)·이교악(李喬岳)과 전 삼사(三司) 박치원(朴致遠)·신방(申昉)·조언신(趙彦臣)·유복명(柳復明)·조명신(趙命臣)·한덕전(韓德全)·채응복(蔡膺福)·최도문(崔道文)·홍현보(洪鉉輔)·서종섭(徐宗燮)·박사성(朴師聖)·이기진(李箕鎭)·이성룡(李聖龍)·정택하(鄭宅河)·이현록(李顯祿)·성진령(成震齡)·이근(李根)·한계진(韓啓震)·황재(黃梓)·권적(權𥛚)·어유룡(魚有龍)·홍봉조(洪鳳祚)·신처수(申處洙)·국명택(國明澤)·정언섭(鄭彦燮)·유겸명(柳謙明)·김수석(金壽錫)·김용경(金龍慶)·송수형(宋秀衡)·박사익(朴師益)·김상석(金相奭)·조명익(趙明翼)·신노(申魯)·이양신(李亮臣)·이덕부(李德孚)·이도원(李度遠)·신무일(愼無逸)·이자(李滋)·김우철(金遇哲)·박규문(朴奎文)·강일규(姜一珪)·이휘진(李彙晉)·이정박(李廷樸)·이단장(李端章)·이광운(李光運)·조정순(趙正純)·안상휘(安相徽)·윤헌주(尹憲柱)·조관빈(趙觀彬)·김재로(金在魯)·유척기(兪拓基)·이기익(李箕翊)·이봉익(李鳳翼)·안중필(安重弼)·이정주(李挺周)·김고(金槹)·이유민(李裕民)·임주국(林柱國)·정광제(鄭匡濟)·윤심형(尹心衡)·서종급(徐宗伋)·이제항(李齊恒)·이의종(李義宗)·남세진(南世珍)·윤혼(尹焜)·김순신(金舜臣)·진익한(陳翼漢)·윤광천(尹光天)·정재춘(鄭再春)·박필정(朴弼正)·송사윤(宋思胤)·이한동(李漢東)·정태주(鄭泰周)·한주(韓澍)·장우귀(張宇龜)·이필(李珌)·정창선(鄭敞選)·홍수귀(洪受龜)·김태화(金兌和)·김정봉(金廷鳳)·이규휘(李奎徽)·박세표(朴世杓)·조중명(趙仲明)·문재중(文在中)·박양검(朴良儉)·진두병(陳斗柄)·김언보(金彦輔)·이수영(李秀英) 등 1백 1인을 파면하였는데, 다 전후에 청대(請對)하고 정청(庭請)한 사람이다.

 

안치(安置)한 죄인 이현장(李顯章)·윤서교(尹恕敎)·권익순(權益淳)·여선장(呂善長)·이삼령(李三齡)·윤지(尹志)와 원찬(遠竄)한 죄인 권부(權扶)·이선행(李善行)·권익관(權益寬)·심단(沈檀)·김수귀(金壽龜)·이태화(李泰和)·이하영(李夏英)·김시엽(金始燁)·조익명(趙翼命)·이세진(李世璡)·유중무(柳重茂)·이명언(李明彦)·이보욱(李普昱)·윤회(尹會)·유필원(柳弼垣)·박징빈(朴徵賓)·이진검(李眞儉)·이제(李濟)·이광보(李匡輔)·유수(柳綬)·조진희(趙鎭禧)·조덕린(趙德隣)·심준(沈埈)·이형수(李衡秀)·박필기(朴弼夔)·이대원(李大源)·한유(韓游)·목천임(睦天任)·신경제(申慶濟)·유술(柳述)·이기성(李基聖)과 정배(定配)한 죄인 최선(崔鍌)·정전(鄭𦒜)·이세최(李世最)·이중술(李重述)·이거원(李巨源)·이진수(李眞洙)·양성규(梁聖揆)·윤연(尹㝚)·조이정(趙彝鼎)·조지빈(趙趾彬)·윤대영(尹大英)·김중희(金重熙)·양정호(梁廷虎)·이진순(李眞淳)·구명규(具命奎)·신유익(愼維益)·이경열(李景說)·정계장(鄭啓章)·윤빈(尹彬)·김대(金岱)·남태징(南泰徵)·박찬신(朴纘新)·이여적(李汝迪)·이삼(李森)·김세정(金世鼎) 등 62인을 석방하였다.

 

이유(李瑜)·홍우전(洪禹傳)·이태징(李台徵)·김여(金礪)·허석(許錫)·유명홍(兪命弘)·정홍제(鄭弘濟)·성대열(成大烈)의 벼슬을 파면하였는데, 또한 전일의 삼사(三司)이다.

 

김유(金濰)를 집의(執義)로, 조상경(趙尙絅)을 헌납(獻納)으로, 윤유(尹游)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정석오(鄭錫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일제(李日躋)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유엄(柳儼)이다.】 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윤봉조(尹鳳朝)는 이미 방만규(方萬規)의 공초(供招)에 긴요하게 나왔는데, 성상께서 특별히 너그러운 법을 써서 약하게 귀양보내는 벌을 주셨으니, 그때의 대간(臺諫)이 아뢰었으나 마침내 거두어 돌아오게 하였으므로 여정(輿情)이 울분합니다. 윤봉조를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남을 무함하기에 바빠서 스스로 흉악한 말을 앞장서 말한 것으로는 근년의 정유(鄭楺)와 같은 자가 없는데, 전하께서 간사하게 속이는 것을 환히 살피고 연교(筵敎)가 매우 엄하셨으나, 입시(入侍)한 승지(承旨)가 근거 없는 말로 농간을 부리고 온갖 꾀로 구제하였으니, 진실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청컨대 그날 입시한 승지는 모두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정유의 소어(疏語)가 비록 매우 이를 데 없기는 하나, 그가 이미 반유(泮儒)337)  이고 보면 승선(承宣)이 아뢴 것은 관계로서 옳은 듯하다. 이 때문에 뒤미처 죄준다면 장차 말을 막는 폐단을 열게 될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7월 6일 경신

특지(特旨)로 이삼(李森)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은 한두 대신(大臣)과 논의가 같지 않은 적이 없는데, 이제 전하께서 당습(黨習)으로 두 신하를 죄주시고 신에게만 물들지 않았다고 장려하여 굳이 구별하셨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스스로 엄폐하겠습니까? 청컨대 그 벌을 같이 받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시비(是非)·충녕(忠佞)은 본디 한때의 애증(愛憎)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근일의 성지(聖旨)는 다 평소의 하교와 일체 서로 어그러지니, 신은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경(卿)의 이 상소는 실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경도 이러하니, 세도(世道)가 심각하구나."
하고, 이어서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김동필(金東弼)이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여, 맨 먼저 민진원(閔鎭遠)이 소매에 차자(箚子)를 넣고 가서 정원(政院)에 내어 보인 뒤에 도로 들어간 잘못을 아뢰고 이어서 대각(臺閣)에 내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정원에 보였으니, 대각에서 절로 알 것이다."
하였다. 김동필이 말하기를,
"지금 하루도 대신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영상(領相)·좌상(左相)은 비상한 무함을 받았습니다. 삼사(三司)에서 정계(停啓)한 뒤에야 대신이 비로소 명에 따를 수 있을 것인데, 삼사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결말나지 않으니, 삼사를 출사(出仕)하도록 재촉하여 빨리 합계(合啓)를 멈추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신을 불러 오게 할 때에는 지신(知申)338)  을 보내거나 종백(宗伯)339)  을 보낸 전례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사신은 말한다. "김동필은 한낱 승지인데 아뢰는 것이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림이 없어 거의 협박하는 것과 같았으나, 임금이 모두 승낙하였으니, 총애가 너무 치우쳤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42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338] 지신(知申) : 도승지(都承旨).[註 339] 종백(宗伯) : 예조 판서(禮曹判書).
사신은 말한다. "김동필은 한낱 승지인데 아뢰는 것이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림이 없어 거의 협박하는 것과 같았으나, 임금이 모두 승낙하였으니, 총애가 너무 치우쳤다."

 

7월 7일 신유

심단(沈檀)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박태항(朴泰恒)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여필용(呂必容)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이정제(李廷濟)를 우윤(右尹)으로, 강박(姜樸)을 수찬(修撰)으로, 이보욱(李普昱)을 교리(校理)로, 정우량(鄭羽良)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호조 참의(戶曹參議) 이병태(李秉泰)를 내치어 그 관작(官爵)을 삭탈하였는데, 상소하여 탕평(蕩平)을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 소에 대략 말하기를,
"전일에 삼사(三司)가 역적이라 한 자에게 전하께서 특별히 예우(禮遇)를 더하셨으니, 그렇다면 삼사는 남을 무함한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신은 삼사에 오래 있으면서 죄를 성토하는 의논에 참여하여 같이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뭇사람과 함께 으레 감죄(勘罪)될 것도 요행히 면하게 되었으니, 천하에 어찌 이처럼 잘못된 일이 있겠습니까? 어찌 전하께서 오늘날 등용하신 신하가 바야흐로 일종의 새로운 제목을 가지고 세상 사람의 반을 손에 쥐고 놀음으로써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억제해 당겨서 여러 가지로 참여하여 합해진 자취를 만들었는데도 전하께서는 또한 그 술책을 아주 믿으므로 신처럼 비교하여 따질 수 없는 자를 취하여 물리치신 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뽑으시겠습니까? 죄를 같이 지고 벌을 달리 받는 것은 천한 사람도 부끄러워하는 것이니, 청컨대 빨리 신의 죄를 감정(勘定)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으나, 승지(承旨) 송인명(宋寅明)과 이조 참의(吏曹參議) 조문명(趙文命)이 그 소 가운데에서 탕평을 가리켜 일종의 새로운 제목이라 하였고 손에 쥐고 놀았느니 억제하여 당겼다느니 하는 따위 말이 있었으므로, 다 상소하여 인혐(引嫌)하니, 임금이 드디어 엄한 분부를 내려 삭출(削黜)로 벌주었다.

 

지평(持平)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공두(工兜)340)  가 조정에 차서 체동(螮蝀)이 해를 가렸으나, 다행히 천심(天心)이 절로 깨달아 뭇 음흉한 자를 시원히 쓸어 내셨으니, 진실로 마땅히 분명한 분부를 내어 역란(逆亂)의 죄를 바로잡는 것으로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뭇 흉악한 자가 물러갔더라도 의리가 밝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임징하(任徵夏)를 섬에다 천극(栫棘)하게 한 것은 처분이 엄정합니다마는, 역적 임징하는 좀도둑일 뿐입니다. 흉역(凶逆)의 무리가 혹 질환(疾患)을 팔방에 반포(頒布)하기를 청하기도 하고 일란(一亂)으로 선조(先朝)를 가리켜 배척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대개 그 사당(私黨)의 부형(父兄)이 선조에서 반역으로 죽었으므로 반드시 선왕께서 질환이 있었다 하고 한 번 어지러웠다 하고서야 반역으로 죽은 자의 친족의 마음이 크게 시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당의 부형에게는 반드시 그 역적의 죄명을 씻어 주려 하고 우리 임금의 부형에게는 반드시 근거 없이 욕하려 하니, 전하를 임금으로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러하겠습니까? 죄를 성토하는 법을 쾌히 바루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네 소는 속투(俗套)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런 편계(偏係)를 빨리 없애야 한다. 그 ‘뭇 흉악한 자’라 한 것은 이번에 특별히 이른 뜻을 몸받은 것이 아니다. 이런 제목을 세상 사람의 반에게 모두 붙인다면 어느 때에 안정(安靜)하겠는가?"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근일 비망기(備忘記)에 이미 상세히 일렀거니와, 죄줄 만한 자를 죄줄 뿐이다. 어찌하여 반드시 세상 사람의 반에게 악명을 붙이고서야 비로소 마음에 시원하겠는가? 정원(政院)은 각별히 경계하여 이런 버릇을 통렬히 금하라."
하였다.

 

7월 8일 임술

조덕린(趙德隣)을 집의(執義)로, 윤대영(尹大英)을 장령(掌令)으로, 김시형(金始炯)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수찬(修撰) 강박(姜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오광운(吳光運)의 소(疏)를 전하께서 속투(俗套)라고 지목하고 편계(偏係)라고 배척하셨고, 이어서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에는 또 마치 말에 대한 금령(禁令)을 두는 듯이 말씀하셨으니, 호오(好惡)를 밝히고 시비를 정하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근년에 선왕의 병환을 반포하기를 청하였을 때에 전하께서 차마 할 수 없는 바가 있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차마 하실 수 없는 것을 해낼 수 있는 자는 그 죄가 어떠하겠습니까? 역적 임징하(任徵夏)의 소가 나왔을 때에 전하께서 쟁송(爭訟)하는 자가 있고 배척하는 자가 있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신하로서 선왕을 배척하는 자는 그 죄가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너는 경악(經幄)341)  에 있으니 탕평(蕩平)하려는 뜻을 몸받아야 한다. 과격하게 말라."
하였다.

 

전 병조 좌랑(兵曹佐郞) 이흡(李潝)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성상께서 붕당(朋黨)의 폐해를 깊이 근심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죄다 물리치고 다른 사람으로 바꾸셨으나, 신(臣)은 이번에 물리치신 것이 과연 소인의 간사한 무리이고 등용하신 것이 과연 군자의 참된 무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하의 성명(聖明)으로 결코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마는, 만약 한때의 꺼리고 괴로운 것 때문에 일종의 겉으로는 유순한 체하고 속으로 음흉한 무리를 등용하여 부리기에 편한 것을 꾀한다면 나라를 일으키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소하(疏下) 다섯 적(賊)에 대한 논계(論啓)에 비로소 앞으로 처분을 내리겠다고 이르시고 식언(食言)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셨으므로 성의(聖意)가 정녕하신 것을 나라 사람이 전송(傳誦)하였는데, 한적을 결단한 명도 오히려 도로 거두셨으니, 신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마는, 당초의 결단이 애써 굽어 따르는 데에서 나왔을 뿐이고 전후의 성교(聖敎)도 참된 뜻에서 나오지 않은 것입니까? 숙종(肅宗)병신년342)  의 처분은 백세(百世) 뒤에도 의혹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인데, 전하께서 이 일을 들어 논하여 마치 성고(聖考)의 마음이 당습(黨習)을 진정시키려 하신 것인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당습을 진정시키는 것이 비록 이 성고의 평소의 마음이기는 하나 그 당습을 진정시키는 방도는 바로 시비(是非)·호오(好惡)를 바르게 하시는 데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곧 현사(賢邪)를 가리지 않고 일진 일퇴(一進一退)시켜서 이것을 탕평(蕩平)의 방도로 삼으려고 하시니, 홍범(洪範)343)  의 탕평에 비하면 서로 어그러지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또 당시의 정책(定策)은 오로지 선대왕(先大王)의 지성(至聖)에 말미암았고 뭇 신하는 받들어 따랐을 뿐이며, 근일의 신하들은 더욱이 공이 있고 없는 것을 논할 것이 없으니, 이제 전혀 그럴 듯하지도 않은 죄목을 나라를 위하여 역적을 성토한 사람에게 더하는 것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문생(門生)이니 국로(國老)이니 하는 따위 말로 먼저 현혹할 꾀를 부렸으므로 성명(聖明)께서도 통촉하시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이런 뜻밖의 분부가 있었을 뿐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감히 붕당을 감쌀 마음을 일으켜 장황하게 상소하였으니, 참으로 놀랍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시환(金始煥)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로는 성저(聖儲)344)  를 보도(輔導)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으니, 전조(銓曹)345)  를 신칙(申飭)하여 각별히 궁료(宮僚)를 가리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 처분은 거의 황급한 데에 가깝고 기상(氣象)은 온화한 것이 부족합니다. 지위가 삼사(三司)에 있는 자는 체모가 절로 다르므로 죄가 있으면 귀양보내는 것은 본디 안될 것이 없으나, 낮은 관원과 아울러 현파(現罷)하는 가운데에 섞어 거론한 것은 그 사체(事體)에서 보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조정을 망치는 것은 반드시 붕당이고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군역(軍役)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고심하시는 것은 당습(黨習)을 타파하는 데에 있으니, 참으로 이 마음을 미루어 군역을 변통하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지평(持平)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의 오늘날의 거조(擧措)는 어찌하여 발단이 된 것입니까? 지금 물리쳐 내치신 자는 다 전하께서 전일에 충현(忠賢)으로 여겨서 등용하는데 빠르지 못할까 두려워했던 자이고, 지금 등용하신 자는 다 전하께서 전일에 간사하게 여겨서 물리치는데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던 자입니다. 사람의 충현·간사는 본디 정해진 성질이 있는데, 전하께서 밝게 굽어 보살피시는 것이 도리어 아침저녁으로 변화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여기에 대하여 처음부터 공정하게 살피지 않으신 적이 없으나 다만 한때의 희노(喜怒)로 종사하셨을 뿐입니다. 앞으로 전하의 조정(朝廷)이 피차의 당인(黨人)들의 한 번씩의 부귀(富貴)하게 하는 전사(傳舍)346)  가 되어 번갈아 등용하고 물리칠 즈음에 인심(人心)·세도(世道)가 날로 더욱 함몰되어 마침내 반드시 난망(亂亡)에 이르고 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아마도 우선 눈앞에 맡겨 부리는 자는 그대로 두어 안정(安靜)하고 무사하게 하는 것만함이 없을 듯한데, 어찌하여 다시 이런 어지러운 일을 합니까?
또 대저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데에는 성례(誠禮)가 귀중함이 됩니다. 가만히 보건대, 전하께서 갑진년347)   이후로 두 번 출척(黜陟)함이 있었으나 한결같이 모두 이에 반대되었습니다. 총우(寵遇)가 겉으로 크나 함정이 속으로 설치되고, 칭찬이 아침에 부지런하나 주벌(誅罰)이 저녁에 엄준하여, 곡절이 기구하고 거조가 전도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상(氣象)은 이미 성세(聖世)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닌데 불성(不誠)하고 불례(不禮)한 것이 또한 이러하였으니, 세상에 깊이 알고 멀리 보는 사람과 염치를 알고 자중하는 선비가 있다면 누구인들 소원하여 친밀하지 않은 사이로서 경솔하게 의심할 것인지 믿을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곳에서 일하여 보려 하고 불러 모으고 꾸짖어 흩이는 아래에서 감심(甘心)하여 분주하다가 마침내 거꾸러져 낭패하는 수치를 자취(自取)하려 하겠습니까? 비록 애써 가서 따르는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사람들이 굳은 뜻이 없어서 돌아보는 마음을 품으므로 반복되는 근심이 앞에서 견제하고 보전할 생각이 속에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망할 징조인데 전하께 유도한 까닭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번 처분이 어찌 그 사이에 사사로운 호오(好惡)가 있으랴마는, 네가 오히려 모르니 내가 개탄하기는 하나, 대의(大意)는 절실하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승지(承旨)  【정석삼(鄭錫三)·송인명(宋寅明)·조최수(趙最壽)이다.】 들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삼사(三司)에 한 사람도 행공(行公)하는 자가 없어서 합계(合啓)를 아직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외방에 있는 대신이 들어오지 못하고 생각하는 바를 서계(書啓)에 아뢸 수도 없다 하니, 삼사는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삼사로서 외방에 있는 자를 두루 세니, 임금이 드디어 갈도록 허락하고 정관(政官)을 명초(命招)하여 그 갈음할 자를 차출하게 하였다. 이때 삼사의 여러 사람은 다 그 당여(黨與)이었으나 합계를 곧 멈추지 못하고 여러 날 동안 머뭇거렸는데, 송인명 등이 곧바로 변통하기를 청하였으니, 무엄하다 하겠다.

 

임금이 승지(承旨)들에게 말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의 소(疏)는 내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하니,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성상의 이번 처분은 뭇 신하가 다 갑작스레 한 것을 의심하나, 신은 이것은 곧 갑진년348)   겨울에 하교하신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찌 갑작스레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다 아랫사람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지 못한 탓에 있습니다. 앞으로 외방에 있는 신하들이 다 일제히 모이면 그 가운데에 어그러지고 과격한 생각이 없지도 않을 것인데, 전하께서 일에 따라 가르치고 책망하여 옳으면 옳다 하고 그르면 그르다 하시지 않고 하는 대로 맡겨 두신다면 뒷날에도 이번 같은 처분이 없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모든 일에 반드시 완전한 도리를 책망하지 않고 7, 8분을 바로잡더라도 자중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탕평(蕩平)하시려는 아름다운 뜻이 한갓 겉치레로 돌아가 마침내 실효가 없게 한다면, 어찌 신들의 죄가 아니겠으며, 또한 어찌 이병태(李秉泰)에게 웃음받지 않겠습니까? 대신(大臣)·중신(重臣)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각별히 경계하고 격려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매우 좋으니, 각별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송인명은 겉으로는 소탈한 듯하나 속으로는 책략이 교묘하였다. 문묵(文墨)의 작은 기예(技藝)를 끼고서 예리한 구변을 가졌으므로, 탕평의 명목을 빌어 충역(忠逆) 사이에 걸터앉아 꾀하고 돌아보며 다만 위에서 좋아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연석(筵席)에서 아뢴 몇 가지 말로 보더라도 그 편녕(便佞)한 태도는 열 손으로도 가리기 어려운데 유독 성상만이 그 술책 가운데에 떨어져 깨닫지 못한다. 세도(世道)를 그르치는 자는 아닌게 아니라 이 사람일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43면
【분류】정론(政論) / 역사(歷史)


[註 348]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사신은 말한다. "송인명은 겉으로는 소탈한 듯하나 속으로는 책략이 교묘하였다. 문묵(文墨)의 작은 기예(技藝)를 끼고서 예리한 구변을 가졌으므로, 탕평의 명목을 빌어 충역(忠逆) 사이에 걸터앉아 꾀하고 돌아보며 다만 위에서 좋아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연석(筵席)에서 아뢴 몇 가지 말로 보더라도 그 편녕(便佞)한 태도는 열 손으로도 가리기 어려운데 유독 성상만이 그 술책 가운데에 떨어져 깨닫지 못한다. 세도(世道)를 그르치는 자는 아닌게 아니라 이 사람일 것이다."

 

권부(權扶)·이선행(李善行)을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 송인명(宋寅明)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때 권부와 이선행은 귀양살이에서 풀린 지 겨우 며칠이 지났는데, 송인명이 아뢰기를,
"임징하(任徵夏)의 소(疏)가 나온 뒤에 권부가 맨 먼저 한 소를 내었으니, 그가 충심에서 분개한 것은 적성(赤誠)이라 하겠습니다. 이선행은 이어서 상소하였다가 귀양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은 다 서용되었으나, 이 두 사람만이 빠졌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의 이러한 명이 있은 것이다.

 

이병태(李秉泰)를 삭출(削黜)하라는 명을 거두고 다만 그 벼슬을 파면하였다. 승지(承旨) 송인명(宋寅明)의 말을 따른 것이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어제 이병태의 소에 신들을 헐뜯어 배척하였습니다. 그 소가 비록 잘한 것은 없으나 삭출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종의 새로운 제목이라는 것이 어찌 해괴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승선(承宣)의 말은 공정하다 하겠다. 이러한 논의는 내가 듣고자 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파직(罷職)으로 개부표(改付標)349)  하라고 명하였다.

 

7월 9일 계해

야대(夜對)350)  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은총을 믿고 죄를 지은 권신(權臣)은 그 처자가 격고(擊鼓)351)  하여 억울한 일을 하소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진실로 사방에 보고 듣는 것을 밝게 하지 않으면 지척인 당폐(堂陛)352)  도 만리와 같아서 아랫사람의 뜻이 위로 통달되지 못하여 마침내 위복(威福)이 아래로 옮겨지고 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진(秦)나라 이세(二世)353)  는 관동(關東)의 적(賊)을 몰랐고, 당(唐)나라 명황(明皇)354)  은 남조(南詔)355)  에서의 실패를 듣지 못한 것은 다 총명이 가려진 데에서 말미암았습니다. 을사년356)   여름에 성상께서 가뭄을 민망히 여기시는 정성으로 친히 거둥하여 비를 빌고 친히 임하여 죄수를 심사하되 몸소 볕을 쬐고 양산을 물리라고 명하셨으니, 백성을 위하시는 정성을 누가 공경히 우러르지 않았겠습니까마는, 그때 전라 감사 김조택(金祖澤)은 성덕(聖德)을 몸받지 않고 오로지 당론(黨論)으로 많은 선비를 가두고 다스렸습니다. 고략(拷掠)이 낭자하여 경상(景象)이 비참하였으니 누가 통탄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그때 조정의 신하들은 오로지 총명을 가리는 것을 일삼았으니, 어떻게 임금 앞에 통달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시독관(侍讀官)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신도 그때에 눈으로 본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습(黨習)이 그치지 않으니 어찌 그 폐단이 없겠는가? 이번 비망기(備忘記)는 승선(承宣)이 본 바이니, 내 뜻을 몸받아 다시는 전일의 버릇이 없게 하라. 김조택의 일은 이미 들었으므로 버려둘 수 없으니, 파직(罷職)하고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7월 10일 갑자

태학생(太學生) 한덕옥(韓德玉)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 간사한 무리가 성궁(聖躬)을 근거 없이 더럽히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려고 꾀한 죄는 전하께서 이미 죄다 통촉하셨으므로 전하께서도 아닌게 아니라 역적이라 하셨으나,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면서 실은 '나를 분명하지 못한 지경에 두었다.'는 교서로 말씀하신다면 신하들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앞으로 처분을 내리겠다고 이르시고 또 식언(食言)하지 않겠다는 분부로 더욱 밝히시고 마지막에는 친히 옥음(玉音)을 내어 역적들의 죄를 열거하고 왕법(王法)의 주벌(誅罰)을 거행하려 하시다가, 대저 어찌하여 한 번 희노(喜怒)하는 사이에 이들의 쌓이고 찬 죄악을 문득 다 풀어 없애고 차율(次律)로 결단하라는 명도 도로 거두셨습니까? 전하께서 ‘내 뜻은 본디 이들을 역적으로 여기지 않았으므로 가차(假借)하여 수작한 까닭은 농락하여 늦추려는 뜻에서 나왔을 뿐이다.’ 하신다면, 전하의 불성실은 여기에 이르러 극진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키시는 것은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탕평(蕩平)으로 인도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아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도둑을 아들로 여겨 충역(忠逆)·선악(善惡)에 한계가 없다면, 마침 난망(亂亡)의 계제(階梯)가 될 만할 것입니다.
사문(斯文)의 일로 말하면, 우리 숙종(肅宗)께서 사정(邪正)을 환히 알아서 시비를 크게 정하시고 ‘굳게 지켜 변하지 말라[堅持勿撓]’는 네 글자로 자손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셨으니, 백세(百世) 뒤에도 의혹되지 않을 만하고, 친히 선정(先正)의 서원(書院)의 편액(扁額)을 써서 사설(邪說)을 그치게 하고 선비의 추향을 하나로 하는 뜻에 간절하셨으니, 이것은 본디 성상께서 이른바 당습(黨習)을 진정시키는 것인데, 또한 어찌하여 일찍이 의리를 구명하여 대안(大案)을 굳게 결단하지 않고 오늘날 전하께서 분부하신 것처럼 한때의 당습을 진정시키는 것으로만 삼습니까? 접때 흉당(凶黨)이 감히 선왕의 본의가 아니라는 말을 방자하게 아뢰는 글에 썼어도 전하께서 엄하게 징벌하지 않으시고, 신치운(申致雲)처럼 선정을 참혹하게 무함한 자를 귀양보내는 가벼운 벌도 끝내 윤허를 아끼셨으므로, 사림(士林)이 근심하고 한탄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비망기(備忘記) 가운데에 당시의 성훈(聖訓)에 언급하여 마치 후왕(後王)이 그 사이에서 취사(取捨)하여도 무방한 듯이 말씀하셨으니, 아! 전하께서 어찌하여 차마 이런 말을 하십니까? 전하께서 바야흐로 다른 사람을 등용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힘쓰시므로 이런 혼돈된 말씀을 하여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 흉당의 처지를 위해서는 지극하겠으나, 의리를 바꿀 수 없고 시비를 어지럽힐 수 없다는 것만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들이 성의(聖意)를 엿보고 헤아려 다시 선정을 해칠 계책을 부리면 반드시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이니, 성고(聖考)의 금석(金石) 같은 유훈(遺訓)이 혹 이로부터 변하게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마음 아파 무너져서 죽고 싶을 뿐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자신이 수선(首善)357)  의 자리에 있는데도 붕당의 버릇을 벗어나지 못하여 놀라운 말이 많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아! 공평하게 하고 붕당을 맺지 않는 것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인데 너희들이 성훈(聖訓)을 몸받지 않고 오히려 당습을 숭상하니, 더욱이 모르겠다."
하였다.

 

이광좌(李光佐)를 실록 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7월 11일 을축

금성(金星)이 좌각성(左角星)을 범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훈명(勳名)을 이미 삭제하였으니 과명(科名)만을 그대로 둘 수 없으므로 마지못하여 파하도록 명하였다. 아!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일을 말하면 마음 아프니 어찌 훈명을 다시 거론하랴마는, 과거(科擧)에 관한 일에 대하여는 유신(儒臣)이 아뢴 바를 들었다. 전례가 그러하다면 그 막히고 답답한 것을 터 주는 도리로서는 복과(復科)해야 마땅할 듯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살펴서 여쭈게 하라."
하였다. 이때 교리(校理) 송진명(宋眞明)이 계묘년358)   역적을 토죄(討罪)한 뒤에 설행(設行)한 정시(庭試)를 파방(罷榜)한 것이 억울하다는 것을 극진히 아뢰어 말하기를,
"무과(武科)에 급제한 반천인(半千人)이 갈 곳을 잃고 어쩔 줄 몰라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하늘에 사무칩니다. 을사년359)  과 경신년360)  에도 삭훈(削勳)하였으나 삭과(削科)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철보(李喆輔)의 사초(史草)는 비록 편수하여 들이라는 명이 있었으나, 과명이 이미 삭제되었으므로 유생(儒生)으로서 비사(祕史)를 편수할 수 없으니,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승지(承旨) 송인명(宋寅明)이 이어서 아뢰기를,
"이 과(科)는 회복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마는, 복과(復科)하는 일은 한 유신(儒臣)과 한 승선(承宣)의 말을 중시하여 경솔히 윤허하실 수 없으니, 하문하고 신충(宸衷)에서 결단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매우 옳게 여겼다. 그러므로 이 명이 있었다.

 

병조 참지(兵曹參知) 조명봉(趙鳴鳳)이 상소하여 근일의 처분이 황급하고 원로 대신의 파출(罷黜)이 잘못이라는 것을 말하니, 하교하기를,
"삭출(削黜)한 정호(鄭澔)를 감히 원로라 부르니, 조금이라도 엄외(嚴畏)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찌 감히 이러하겠는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특별히 조문명(趙文命)을 제수(除授)하여 실록 도청 당상(實錄都廳堂上)으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계묘년361)  의 과방(科榜)을 회복해야 할 것인지, 전례를 살펴서 여쭈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등록(謄錄)》을 상고하였더니, 숙종(肅宗)기사년362)  에 대사간(大司諫) 이현기(李玄紀)가 계(啓)를 내어 보사훈(保社勳)과 토역과(討逆科)를 파하기를 청하였으나, 숙종께서 그 훈은 삭제하고 그 과는 삭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복과(復科)하되 그 과명(科名)을 별시(別試)로 고치라고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그때에 녹훈(錄勳)된 자는 누구인가? 이 때문에 감히 훈명(勳名)을 제기하는 자는 역적 목호룡(睦虎龍)과 같은 죄로 논단(論斷)할 것이다."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강현(姜鋧)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근년 이중환(李重煥)을 소석(疏釋)363)  할 때에 신이 수석(首席)으로서 이미 참섭하였으니, 이제 다시 국문(鞫問)하는 때에 이르러 결코 무릅쓰고 담당할 수 없습니다. 박치원(朴致遠)의 옥사(獄事)로 말하면 이제 엄히 핵사(覈査)해야 하겠으나, 신은 왕년에 그의 무함 때문에 화(禍)가 헤아릴 수 없게 되었었으니, 신이 감히 혐의를 무릅쓰고 안치(按治)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김상옥(金相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종래 신하들이 성의(聖意)를 받들어 따라서 지극한 교화를 우러러 돕지 못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출척(黜斥)된 것은 본디 감심(甘心)할 바이나, 비망기(備忘記) 가운데에 있는 불만하느니 농락하느니 지위를 얻으려고 걱정하고 잃을세라 걱정한다느니 하는 말씀은 실로 신하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니, 전후의 미안한 분부는 특별히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영복(趙榮福)이 상소하기를,
"신(臣)도 신축년364)   이후 당적(黨籍)에 든 사람이므로, 이름이 세 가지 죄안(罪案)에서 빠졌다 하여 태연히 구차하게 무릅써 있을 수 없으니, 견벌(譴罰)하여 물리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반드시 같이 돌아가려 하는 버릇을 내가 참으로 병통으로 여긴다."
하였다.

 

한성 판윤(漢城判尹) 권업(權𢢜)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충역(忠逆)의 구별이 잠시 사이에 빨리 변하고 진노하여 박대하시는 분부가 평소와 아주 다르며 진퇴(進退)할 때에 거조(擧措)가 전도되고 여탈(與奪)할 즈음에 곡절이 기구하니, 이 방도로 세상을 다스리면 마침내 난망(亂亡)하고야 말 것입니다. 아! 종사(宗社)를 힘껏 도운 충신을 도리어 천공(天功)을 탐낸 것으로 의심하고, 후세에 명백히 보이신 성훈(聖訓)을 마침내 당습(黨習)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으로 핑계삼으셨습니다. 선왕에게 불경한 일이 있었으면 후왕에게 어찌 충성할 수 있겠느냐는 분부로 말하면 더욱이 아주 놀랍습니다. 접때 비록 조정의 신하가 변변치 못하기는 하였으나 모두 선조(先朝)의 신하인데 누가 조금이라도 불경한 마음을 가졌겠습니까마는, 그 사람이 있다면 어찌하여 전형(典刑)을 명백히 보이지 않고 도리어 흐릿하게 분부하여 한편 사람을 죄다 망측한 죄로 모는 것입니까? 이것은 거의 사악한 자의 효시(嚆矢)가 되어 마침내 파란을 도와 일으키게 되지 않겠습니까? 평소에 예우(禮遇)하던 원로(元老)를 거의 좀처럼 다그쳐 차고 위협하여 꾸짖으셨습니다. 민진원(閔鎭遠)이 주장한 것은 국가를 위하여 의리를 밝히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이것을 붕당을 감싸고 나라를 저버린 큰 죄안(罪案)으로 삼았습니다.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동기는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어찌 선조에서 원구(元舅)로 대우하여 끝내 보전하신 의리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엄하게 비답하여 꾸짖었다.

 

장령(掌令) 홍사인(洪尙寅)이 사직하는 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은 일찍이 신축년365)  에 권규(權珪)의 소에 따라 참여하였는데, 을사년366)   이후에 소두(疏頭)가 근거 없는 욕을 참혹하게 받아 바야흐로 죄적(罪籍)에 있으니, 신은 무릅쓰고 사진(仕進)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권규의 직첩(職牒)을 도로 주라고 명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승지(承旨)를 삭출(削黜)하는 일은 지나치니, 모두 파직(罷職)하고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7월 12일 병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제주 시재 어사(濟州試才御史) 김상석(金相奭)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시재 서계(試才書啓)에서 ‘두 가지 기예(技藝)가 있는 사람은 사목(事目)에 따라 급제를 줄 것’을 청하였는데, 구례(舊例)에는 주기도 하고 주지 않기도 하였으므로 임금이 엄하게 분부하고 그 벼슬을 파면하였다.

 

검열(檢閱) 윤득화(尹得和)가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였는데, 그 벼슬을 삭탈(削奪)하라고 명하였다. 그 소에 대략 말하기를,
"신은 사필(史筆)을 잡는 직임에 있어 발길이 자주 연석(筵席)에 들어왔으므로, 전석(前席)에서 듣자온 것을 우러러 묻겠습니다. 전하께서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를 논계(論啓)한 것에 대하여는 ‘삼사(三司)의 간쟁(諫爭)이 지나치지 않다.’고 하시고, 다섯 적(賊)의 일은 각각 죄상을 논할 데에 신하들이 미처 알지 못한 죄를 따로 더 붙여 흉역(凶逆)으로 결단하고 혹 ‘목을 베는 것만을 용서한다.’고도 하시고 혹 ‘사책(史冊)에 쓰게 하면 반드시 다섯 적을 주벌(誅罰)하였다 할 것이다.’고도 하셨으므로, 신이 그때 옥음(玉音)을 우러러 듣고 스스로 감탄하여 ‘성명(聖明)이 곧 윤허하시지는 않았으나 충역(忠逆)의 구별과 의리의 요긴한 데를 너무도 명백히 타개(打開)하셨으니 이 뒤로는 난적(亂賊)이 두려운 줄 알고 백성의 윤리가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는데, 뜻밖에 잠시 사이에 처분이 갑자기 바뀌어 차율(次律)로 감죄(勘罪)하는 것도 거두시고 조태구·유봉휘 두 역적을 차례로 복관(復官)하고 다섯 적이라는 명칭을 바꾸어 다섯 사람이라 하셨으니, 전하께서 전석에서 하신 말씀이 성실한 것입니까, 성실하지 않은 것입니까? 아침저녁으로 고치되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셨으니, 천하 후세에서 전하를 어떠한 임금으로 여기겠습니까? 또 신이 초나흗날의 비망기(備忘記)를 보니, 병신년367)  의 처분을 끌어내어 마치 성고(聖考)의 뜻이 다만 한때 당습(黨習)을 진정 시키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처럼 말씀하셨으니,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우리 숙종(肅宗)께서 시비를 크게 정하여 글에 나타내어 길이 백세 뒤에도 고치지 않을 법을 만드셨으니, 전하께서 계술(繼述)하는 효성으로서는 오직 간절히 따르셔야 할 뿐인데, 이제 용사(用捨)할 즈음에 성심(聖心)에 혐의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드디어 까닭 없이 뽑아 내어 문득 ‘대불연(大不然)’이라는 세 글자를 붙여서 마치 오늘날의 처분이 성고(聖考)의 유의(遺意)에 해롭지 않은 듯이 하셨으니, 아! 전하의 말씀이 어찌하여 여기에 미쳤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여 엄히 꾸짖고 이어서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윤득화는 옛 명상(名相) 윤두수(尹斗壽)의 후손이다. 병신년 초에 뜻을 같이하는 선비를 거느리고 상소하여 사문(斯文)의 일을 논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 사필을 잡는 반열에 있어서 상교(上敎)가 병신년의 처분에 언급한 것을 보고 사문의 시비가 또 다시 전도될세라 염려하여 직분을 벗어나 일을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적절하므로, 사람들이 다 칭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45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역사(歷史) / 인사(人事)


[註 367] 병신년 : 1716 숙종 42년.
사신은 말한다. "윤득화는 옛 명상(名相) 윤두수(尹斗壽)의 후손이다. 병신년 초에 뜻을 같이하는 선비를 거느리고 상소하여 사문(斯文)의 일을 논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 사필을 잡는 반열에 있어서 상교(上敎)가 병신년의 처분에 언급한 것을 보고 사문의 시비가 또 다시 전도될세라 염려하여 직분을 벗어나 일을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적절하므로, 사람들이 다 칭찬하였다."

 

우의정(右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소장(疏章)을 두고 시골로 돌아가니, 임금이 엄한 비답으로 꾸짖었다.

 

동지관사(同知館事) 이집(李㙫)에게 명하여 태학 유생(太學儒生)에게 들어가도록 권하게 하였다. 이때 한덕옥(韓德玉) 등이 엄한 비답을 받고 나서 권당(捲堂)368)  하여 떠났는데, 임금이 이집에게 명하여 들어가도록 권하게 하였으나, 유생들이 명을 따르지 않고 생각하는 바 수백 마디 말을 써서 바쳤다. 그 글에 대략 말하기를,
"천하에서 성토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은 난역(亂逆)이고 국가에서 밝히지 않아서는 안될 것은 시비(是非)인데, 전하께서는 난역의 죄악을 쾌히 바로잡지 못할 뿐더러 또 다시 원악 대대(元惡大憝)369)  을 모두 풀어 주시고, 사문(斯文)의 시비를 밝히지 못할 뿐더러 또한 숙종(肅宗)의 유훈(遺訓)을 모두 변경하시니, 조야(朝野)의 신민이 모두 놀라고 의혹합니다. 대저 난적의 주토(誅討)는 반드시 사사(士師)370)  라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도(吾道)의 굴신(屈伸)은 실로 사림(士林)에 관계되므로, 신들이 전하를 위하여 한 말씀 올리지 않으면 이는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고 숙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충역(忠逆)을 혼돈하고 시비를 모호하게 하는 것을 붕당을 타파하는 방도로 여기시나, 신들은 선악을 분별하고 직왕(直枉)을 취사(取捨)하는 것을 붕당을 타파하는 방도로 여깁니다. 신들이 주장하는 것과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서로 어그러지니, 이와 같이 되면 마땅히 신들의 말을 굳게 물리쳐 받아들이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엄히 분부하고 앞장선 재임(齋任)371)  을 3년 동안 정거(停擧)372)  하라고 명하고 다시 들어가도록 권하게 하였다. 이에 한덕옥 등이 또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치기를,
"신들이 전후에 아뢴 것은 다만 난역의 죄를 성토하여 군신(君臣)의 큰 의리를 엄하게 하고 성고(聖考)의 가르침을 밝혀서 사도(斯道)가 퇴폐하려는 것을 부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하늘의 상경(商經)이고 땅의 의리인데, 이제 성상께서 의리가 마땅한 것인지를 묻지 않고 오직 꺾는 것을 일삼으시니, 이것은 대개 신들이 주장하는 것에는 지적하여 배척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우선 당비(黨比)라는 등의 말로 혼돈하여 말하여 막으시는 것이겠습니다. 재임이 이미 벌받았으니, 전하께서 억지로 협박하고 뜻대로 얽매려 하시더라도 신들은 죽음이 있을 뿐이고 결코 무릅써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엄한 분부를 내려 소두(疏頭) 한덕옥을 재임과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정거하고 다시 들어가도록 권하게 하였다. 이에 유생들이 성묘(聖廟)의 신문(神門)에서 절하고 하직하고서 떠났다. 이때 서재(西齋)의 장의(掌議) 홍계희(洪啓禧)는 처음부터 상소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이 홍계희에게 명하여 유생을 거느리고 들어가게 하였으나, 홍계희도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치니, 임금이 또 엄한 분부를 내리고 홍계희를 3년 동안 정거하고, 이어서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다른 재임을 차출하여 다시 들어가도록 권하게 하였다. 대사성 송성명(宋成明)이 아뢰기를,
"근래 선비의 버릇이 더욱 어그러져 무릇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는 재중(齋中)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므로 전후의 재임은 다 전 장의 김치일(金致一)에게 삭제되었습니다. 이제 삭제된 자를 차출하더라도 반드시 행공(行公)하지 않을 것이니, ‘삭(削)’이라 쓴 글자를 지우고서 들어가도록 권하는 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지우라고 명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홍상인(洪尙寅)이다.】 에서 아뢰기를,
"안치(安置)한 죄인 임징하(任徵夏)는 한 소(疏)를 바쳐 선왕(先王)을 근거 없이 욕하였는데, 그 이른바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워졌다느니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반정(反正)하였다느니 하는 따위 말은 결코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마음에 싹틔우고 입에 낼 것이 아닙니다. 이제 대계(臺啓)에 따라 찬극(竄棘)하라는 명이 있기는 하였으나 왕법(王法)을 다 펴지 못하였으므로 여정(輿情)이 오래 울분하니, 청컨대 임징하에게 빨리 국법을 바로잡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일종의 흉역(凶逆)의 말은 방만규(方萬規)의 소(疏)에 이르러 극진하였는데, 그 소가 윤봉조(尹鳳朝)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그가 이미 공초(供招)하였는데도 윤봉조가 처음에는 굳이 숨기다가 마지막에야 반쯤 실토하였습니다. 성상께서 특별히 옥사(獄事)가 번질까 염려하여 마지막에 편배(編配)373)  하는 율(律)로 결단 하셨으나, 붕당을 감싸는 무리가 혹 도로 거두기를 청하기도 하고 거두어 쓰기를 청하기도 하여 요사한 물건을 다시 청현(淸顯)의 반열(班列)에 두게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대계에 따라 우선 찬배(竄配)하였으나 정상이 구명되지 않았으므로 여정(輿情)이 더욱 울분하니, 청컨대 윤봉조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히 물어서 국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징하의 일은 이미 원계(院啓)374)  에 대하여 하유(下諭)하였고, 윤봉조의 일은 방만규가 살아 있다면 이 계도 할 수 있겠느나 이제는 원고(元告)가 없는 송사인데 어찌 한 가지 일로 두 사람을 죽이겠는가? 근년의 처분이 상세하고 심밀(審密)하였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다시 한층 더하여 그 일을 만연시켜야 하겠는가? 바야흐로 경장(更張)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다시 이러한 계를 내지 말고 지극히 공정한 도리로 돌아가도록 힘써야 한다."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유엄(柳儼)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아! 임징하의 죄를 이루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른바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워졌다느니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반정하였다느니 하는 따위 말은 더욱이 감히 말할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대역 무도한 죄는 전하께서 이미 찬배하는 벌을 주셨고 대신(臺臣)이 또 도극(島棘)하는 벌을 청하였으나, 죄가 윤상(倫常)에 관계되면 절로 해당하는 벌이 있으니, 청컨대 안치된 죄인 임징하에게 빨리 국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징하가 지난해에 올린 소는 비록 지극히 짝이 없는 것이기는 하나 이미 천극(栫棘)의 벌을 주었고, 이러한 무리는 한낱 좀도둑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일률(一律)을 주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삼사(三司)의 합계(合啓)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을 절도(絶島)에 안치하고 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유봉휘(柳鳳輝)를 노적(孥籍)하는 것이다.】 와 양사(兩司)의 합계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을 출향(黜享)하는 것이다.】 를 모두 정계(停啓)하였다. 이날 장령(掌令) 홍상인(洪尙寅)이 전계(前啓) 가운데에서 목시룡(睦時龍)·김영해(金寧海)·배창석(裵昌碩) 등의 일은 논해야 할 것인데 논하지 않았다 하여 인피(引避)하니, 갈도록 윤허하였다.

 

7월 13일 정묘

지평(持平) 조현명(趙顯命)이 대청(臺廳)에 나아가 인피(引避)하였는데, 그 글에 대략 말하기를,
"두어 해 사이에 조정이 두 번 뒤집혀 성신(誠信)은 위아래에서 미쁘지 않고 처분은 혹 갑작스러우며, 출척(黜陟)할 때에는 전혀 예(禮)로 진퇴(進退)하는 뜻이 없어서 처음에는 마치 묶어 오는 것같이 하다가 나중에는 마치 끌어 가는 듯하여 한 세상의 사대부를 노예와 다름없이 여기니, 이것이 또한 유식한 자가 모두 민망히 여기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조현명은 조문명(趙文命)의 아우인데,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조현명 형제와 송인명(宋寅明) 등이 궁료(宮僚)로서 매우 깊이 인정받았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45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논한다. "조현명은 조문명(趙文命)의 아우인데,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조현명 형제와 송인명(宋寅明) 등이 궁료(宮僚)로서 매우 깊이 인정받았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이태좌(李台佐)·심수현(沈壽賢)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이집(李㙫)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이인복(李仁復)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서명빈(徐命彬)을 지평(持平)으로, 이종성(李宗城)을 겸설서(兼說書)로, 이집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김시혁(金始㷜)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이윤신(李潤身)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정사를 주관하였다.

 

예조(禮曹)의 초기(草記)375)  에 따라 기우제(祈雨祭)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소대(召對)376)  를 행하였다.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에게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시골에서 올라와 임금에게 아뢰기를,
"조태구는 신축년377)  ·임인년378)   사이에 늘 왕실을 생각하여 눈물을 흘렸으니, 그가 나라를 근심한 충성을 상상할 만합니다. 선인문(宣仁門)379)  의 일로 말하면 그때 조태구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 가운데에 장차 망하려는 나라를 안정시키라는 등의 분부가 있었는데, 이때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충성스럽다 할 수 있겠습니까? 홍계적(洪啓迪) 등이 그 비답을 전하지 않았고 대궐에 나아가 청대(請對)하였으나 또 굳게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정원(政院)에서 그의 청대를 굳게 막았다면 대내(大內)에서 어떻게 인견(引見)하겠다는 명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며, 조태구의 심사가 명백한데 어찌 부정한 길로 청대하였다고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합계(合啓) 가운데에 있는 북문(北門) 등의 말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혐자(嫌字)에 이르러서는 본디 나를 핍박했다는 말이 아니고 어구를 만드는 사이에 잘 살피지 못한 탓에 지나지 않는다. 그 뒤의 차자는 긴요하지 않은 듯하나 내가 어찌 이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을 갖겠는가? 다만 조태구가 신축년·임인년 참벌(斬伐)하는 즈음을 당하여 과격한 논의에 끌려서 너그럽고 평정하도록 힘쓰지 못하였으니, 만약 완전하기를 바라는 도리로 말하면 어찌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자성(慈聖)의 언문 분부로 말하면 그때 송상기(宋相琦)의 소(疏)에 이것을 죄로 삼았는데 무함하는 무리가 문득 기화(奇貨)로 삼아 고집하여 마지 않았다. 이제 경(卿)의 말을 들으니 더욱 잘 알겠다."
하고, 이어서 사제하라고 명하고, 또 하교하기를,
"유 판부사(柳判府事)380)  의 당초의 한 소는 말을 만들 즈음에 경솔한 것은 있었으나 그 본심을 추구하여 본다면 어찌 사사로이 나를 미워하였겠는가? 구천(九泉) 아래에 내 뜻을 명백히 보이지 않을 수 없으니, 조 영상(趙領相)381)  에게 사제할 때에 마찬가지로 사제하라."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유엄(柳儼)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의천(李倚天)의 전후의 이를 데 없는 말은 본디 죄다 거론할 수 없으나, 그 ‘선왕께 병이 있는 것을 군흉(群凶)이 또한 이롭게 여겨 요망한 환관(宦官)과 짜고서 화망(禍網)을 벌였으니 좋은 계책은 「병을 숨겼다[諱疾]」는 두 글자로 그들의 두뇌를 여지없이 때려 부수는 것이라’ 한 것은 더욱이 감히 말할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말이 선조(先朝)를 범하고 일이 윤상(倫常)에 관계되니, 청컨대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와 같이 위협에 눌려 따른 무리를 다 멀리 귀양보낸다면 남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또 생각하는 바로 임징하(任徵夏)를 죽이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힘껏 아뢰고 시독관(侍讀官) 송진명(宋眞明)·정석오(鄭錫五)도 이어서 번갈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잊어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유신(儒臣)은 아는가?"
하였다. 송진명이 말하기를,
"한나라 하후 승(夏侯勝)이 선제(先帝)를 비방하였기 때문에 죄를 받았는데,382)   이것은 사실(私室)에서 폄론(貶論)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임징하가 방자하게 글에 쓴 것과 같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하후 승과 서로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임징하의 소(疏)는 직언(直言)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은 오로지 어그러지고 과격한 논의를 숭상하는 데에 있었는데, 접때 한편 사람들이 이러한 논의를 하나의 의리로 삼았으니, 한편 사람들의 죄를 죄다 한낱 임징하에게 돌린다면 또한 너그럽고 평온한 도리가 아닐 것이다. 도배(島配)는 무거운 벌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죽여야만 되겠는가?"
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실언을 면하지 못하셨습니다. 세도(世道)가 혼란하고 투박하여 비록 색목(色目)383)  의 구별이 있기는 하나, 성상께서 한 가지로 보시는 도리로서는 한편 사람이라고 부르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옳다. 이제부터는 ‘한편 사람[一邊人]’이라는 세 글자를 마땅히 입에서 끊고 말하지 않겠으니, 아랫사람으로서도 내 이 뜻을 몸받아야 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접때 대계(臺啓)에 따라 정유(鄭楺)를 영구(營救)한 승지(承旨)로 이미 파직(罷職)하였으니, 임징하를 찬배(竄配)할 때에 도로 거두기를 앞장서서 청한 대신(臺臣)을 그대로 둘 수 없다.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유엄이 또 부계(府啓) 가운데에 있는 윤봉조(尹鳳朝)를 나국(拿鞫)하는 일을 윤허하기를 힘껏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가지 일을 두 번 국문(鞫問)하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을사년384)   사람들을 죄다 배척한 것은 대개 청의(請議)가 준엄하고 격렬한 것을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조문명(趙文命)·송인명(宋寅明) 등이 성의(聖意)가 어디 있는지를 깊이 알고 드디어 탕평(蕩平)이라는 논의를 올렸고 유엄과 송진명도 그 무리일 뿐인데, 그 지론(持論)은 김일경(金一鏡)의 무리와 조금 달라서 저희 가운데에서 의논이 갈라져 드디어 세 층을 만들었다. 그들도 탕평을 핑계하여 세 층으로 논의하는 것을 알았으나, 그에게 임금이 돌보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또한 감히 나타내어 배척하지 못하였다. 여러 해 동안 나라의 일을 맡은 것은 실로 겉으로 너그럽고 평온한 논의를 보였기 때문이며, 물러간 신하들이 죽음을 면한 것도 이 때문이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45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382] 한나라 하후 승(夏侯勝)이 선제(先帝)를 비방하였기 때문에 죄를 받았는데, :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즉위하여 무제(武帝)의 덕을 기리려고 무제의 묘악(廟樂)을 만들도록 명하자, 군신(群臣) 가운데 유독 하후 승(夏侯勝)만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무제가 비록 사이(四夷)를 물리치고 국경(國境)을 개척한 공이 있으나 선비를 많이 죽였고, 사치스러워 백성을 괴롭히는 등 백성에게 덕이 없으니, 묘악을 만드는 것은 마땅히 못합니다.’ 하였음.[註 383] 색목(色目) : 조선조 때 사색 당파의 이름.[註 384]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을사년384)   사람들을 죄다 배척한 것은 대개 청의(請議)가 준엄하고 격렬한 것을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조문명(趙文命)·송인명(宋寅明) 등이 성의(聖意)가 어디 있는지를 깊이 알고 드디어 탕평(蕩平)이라는 논의를 올렸고 유엄과 송진명도 그 무리일 뿐인데, 그 지론(持論)은 김일경(金一鏡)의 무리와 조금 달라서 저희 가운데에서 의논이 갈라져 드디어 세 층을 만들었다. 그들도 탕평을 핑계하여 세 층으로 논의하는 것을 알았으나, 그에게 임금이 돌보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또한 감히 나타내어 배척하지 못하였다. 여러 해 동안 나라의 일을 맡은 것은 실로 겉으로 너그럽고 평온한 논의를 보였기 때문이며, 물러간 신하들이 죽음을 면한 것도 이 때문이다."

 

7월 14일 무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5일 기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직(司直) 김간(金幹)이 상소하기를,
"신(臣)이 근년에 올린 글에 토역(討逆)과 출향(黜享)을 대략 논하였으니, 청컨대 제신(諸臣)과 죄벌(罪罰)을 같이 받겠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조정(朝廷)의 처분은 본디 산림(山林)의 선비에게 관계되지 않는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에게 별유(別諭)하고 함께 오게 하였다.

 

유명응(兪命凝)을 승지(承旨)로, 홍정상(洪廷相)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문묘(文廟)에는 보름날에 분향(焚香)하는 규례가 있는데, 유생(儒生)이 재사(齎舍)를 비우고 떠났으므로 분향할 자가 없다는 것을 임금이 듣고 성균관(成均館)의 관원이 대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16일 경오

우의정(右議政) 홍치중(洪致中)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김동필(金東弼)을 부사(副使)로, 강필경(姜必慶)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심수현(沈壽賢)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정사효(鄭思孝)를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정사효는 이광좌(李光佐)가 천거하였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정사효가 반역을 꾀하여 국문(鞫問)받게 되어서야 이광좌가 비로소 잘못 천거한 일 때문에 인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46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논한다. "정사효는 이광좌(李光佐)가 천거하였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정사효가 반역을 꾀하여 국문(鞫問)받게 되어서야 이광좌가 비로소 잘못 천거한 일 때문에 인책하였다."

 

헌납(獻納) 조상경(趙尙絅)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붕당을 타파하시려면 인심을 복종시킬 방도를 생각하셔야 할 것인데, 인심을 복종시키는 방도는 윤리를 붙들어 세우고 명의(名義)를 바로잡는 것보다 앞세울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그 죄가 윤기(倫紀)에 관계되고 말이 부도(不道)에 관계되는 자를 잡아내어 빨리 처분을 내려 그 죄를 명백히 바로잡으소서. 그러면 뭇사람의 마음이 크게 복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한편 사람들이 혹 선비라는 이름을 빌거나 사직하는 상소를 핑계하되 그 말하는 것은 번번이 충역(忠逆)을 거꾸로 놓으려는 뜻으로 동류(同類)와 같이 조정에 나오는 여러 신하들에게 억지로 무함을 더하였습니다. 아! ‘역(逆)’이라는 한 글자가 어떤 죄악인데 터무니 없이 곧바로 죄가 없는 사람에게 붙입니까? 말을 찾다가 찾지 못하면 그들이 스스로 범한 것을 되씹어서 욕하고 무함할 계책으로 삼으니, 이 뒤에 도리어 욕하는 상소가 있으면 그 남을 반역으로 무함한 죄를 바로잡아야만 조정이 편안하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붕당을 감싸 상소한 무리에게 처분이 만일 혹 지나치면, 이는 임금이 격동시켜 일을 만드는 것이 된다."
하였다.

 

사간(司諫) 유정(柳綎)이 그 형 유수(柳綏)를 위하여 상소하여 변명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사신은 논한다. 유수 형제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편들어 신축년385)  ·임인년386)   사이에 모두 청현직(淸顯職)에 통하였는데, 유수는 일찍이 영남 어사(嶺南御史)이었을 때에 수령(守令)과 병영(兵營)·수영(水營)에 대하여 행장(行裝)을 요구하여 갓을 보내 온 것이 많아서 수십 개나 되고 다른 물건도 이와 같았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이제까지도 침뱉고 욕하였다. 을사년387)   초에 대신(臺臣) 이제항(李齊恒)이 탄핵하였기 때문에 멀리 귀양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 아우를 시켜 도리어 욕하되 이제항이 분관(分館)388)  할 때에 부탁을 꾀한 일을 흠으로 들추니, 사람들이 다 놀라워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46면
【분류】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38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386]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387]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388] 분관(分館) : 조선조 때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과 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의 관(館)에 배치시켜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實務)를 익히게 하던 일.
사신은 논한다. 유수 형제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편들어 신축년385)  ·임인년386)   사이에 모두 청현직(淸顯職)에 통하였는데, 유수는 일찍이 영남 어사(嶺南御史)이었을 때에 수령(守令)과 병영(兵營)·수영(水營)에 대하여 행장(行裝)을 요구하여 갓을 보내 온 것이 많아서 수십 개나 되고 다른 물건도 이와 같았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이제까지도 침뱉고 욕하였다. 을사년387)   초에 대신(臺臣) 이제항(李齊恒)이 탄핵하였기 때문에 멀리 귀양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 아우를 시켜 도리어 욕하되 이제항이 분관(分館)388)  할 때에 부탁을 꾀한 일을 흠으로 들추니, 사람들이 다 놀라워하였다.

 

정언(正言) 김시형(金始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고심하시는 것은 오로지 조정의 논의를 탕평(蕩平)하는 데에 있고 뭇 신하가 서로 힘쓰는 것은 당습(黨習)을 씻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마는, 혹 섞어 합하기에 급하여 죄의 범한 경중을 돌아보지 않고 배척하는 논의를 혐의하여 한결같이 시비가 혼란한 대로 버려두면, 이것도 사의(私意)가 섞이는 것입니다. 이의천(李倚天)같은 무리는 한낱 응견(鷹犬)에 지나지 않을 뿐이므로 오히려 매우 책망할 것도 못되나, 이재(李縡)로 말하면 스스로 글을 읽었다고 이름하고 조금 두각을 낸 자인데 접때 상소한 말이 이를 데 없습니다. 하나의 적당한 언론을 만들어 내어 빌붙는 무리로 하여금 본받아 지어내는 밑거리로 삼게 하였으므로 이제 경화(更化)하는 처음에 공론에 배척받아야 할 것인데, 일전에 추조(秋曹)389)  에 의망(擬望)한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데에서 나왔으니, 혹 전형(銓衡)을 맡은 신하가 미처 깨달아 살피지 못한 데에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臣)은 이재 같은 자는 먼저 벌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재의 일은 지나침을 면하지 못한다."
하였다.

 

한배하(韓配夏)·한세량(韓世良)의 관작(官爵)을 추복(追復)하였다. 승지(承旨) 김동필(金東弼)의 청을 따른 것이다. 이에 앞서 승지 이정걸(李廷傑)이 아뢰기를,
"고(故) 판서(判書) 한배하(韓配夏)는 임인년390)  에 죽었고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화상을 그린 것은 계묘년391)  에 있었으니, 화사(畫師) 진재해(秦再奚)를 구박하여 역적 목호룡의 화상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사실에 어그러집니다. 이 때문에 추탈(追奪)하였는데 아직 복관(復官)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배하의 일은 상세히 알지는 못하나 복과(復科)에 관한 일로 보면 당습(黨習)을 면하지 못한다. 경솔히 풀어 주면 사람들이 오늘의 처분은 한때의 호오(好惡)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것이니,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동필이 이어서 힘껏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수원(吳遂元)의 복과(復科)를 건의한 자가 한배하가 아닌가? 선조(先朝)의 처분을 공론을 기다리지 않고 어찌 지레 아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초에 벌받은 것은 이미 다른 일 때문이었으니, 추율(追律)을 그대로 둘 수 없다. 복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김동필이 또 아뢰기를,
"한세량(韓世良)은 일찍이 추탈(追奪)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때 대계(臺啓)에 노적(孥籍)으로 감률(勘律)되었으므로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정계(停啓)하였으면 본원(本院)에서는 본디 봉입하여 추탈해야 할 것인데 해방(該房)에서 깨달아 살피지 못하여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니, 일이 매우 미안합니다. 이제 봉입해야 할 것이나, 한세량의 일은 권규(權珪)와 동일한 조리인데 권규는 이미 직첩(職牒)을 주었으니, 관례에 따라 봉입할 수 없습니다. 감히 이에 여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세량의 소(疏) 가운데에 있는 하늘에는 두 해가 없다는 따위 말은 참으로 해괴하다. 어찌 감히 이러한 말을 소 가운데에서 언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권규에게 이미 직첩을 주었으니, 달라서는 안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윤허하였다. 해방은 송인명(宋寅明)이다. 한세량을 추탈하는 전지를 곧 봉입하지 않은 것은 무엄하다 하겠는데, 김동필은 다만 미안하다고 하였고 임금도 꾸짖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감함(勘緘)392)                  하는 규례를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        김동필(金東弼)이 아뢰기를,
"조종(祖宗) 때에는 대간(臺諫)이 추고(推考)받으면 벼슬을 갈았는데, 중간에 자주 갈린다 하여 고쳐서 추고받으면서 행공(行公)하는 규례를 만들었으나, 추고하고 조율(照律)하려면 반드시 헌부에서 개좌(開坐)393)                  하기를 기다려야 하므로 근래 감함이 지체됩니다. 헌부의 완의석(完議席)394)                  에는 ‘공충 정직(公忠正直)’이라 씌어 있고, 대궐에 나아가 논계(論啓)할 때는 청심환(淸心丸)을 타서 마시는데 지금까지 고사(故事)로 전합니다. 헌부에서 개좌하면 모든 관사(官司)가 두려워하니, 이제부터 엄히 신칙하여 자주 개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각별히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7월 17일 신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제주시(濟州試)에 입격(入格)한 사람 이귀제(李龜濟)를 빼라고 명하였다. 이귀제는 고(故) 승지(承旨) 이익태(李益泰)의 아들인데, 이익태가 제주 목사(濟州牧使)이었을 때에 이귀제를 낳았다. 이귀제가 태어난 고장이기 때문에 과시(科試)에 나아가 입격(入格)하였는데, 부교리(副校理) 송진명(宋眞明)이 상소하여 논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원적(原籍)을 살피게 하였더니 과연 원적이 중첩되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심경(心經)》을 강독(講讀)하였다.

 

지평(持平) 조현명(趙顯命)이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그 조목은 열 둘이 있으니, 기질(氣質)을 변하고, 곤내(梱內)를 화협(和協)하고, 동궁(東宮)을 교양(敎養)하고, 궁금(宮禁)을 숙청(肅淸)하고, 근습(近習)395) 을 엄하게 다루고, 완호(玩好)를 멀리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직언(直言)을 받아들이고, 법전(法典)을 삼가 지키고, 관작(官爵)을 아끼고,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신하를 예우하여 부리는 것입니다. 이 열두 조목은 다 오늘날의 요긴한 일인데, 기질을 변화하는 데에 또한 그 큰 근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조목들 앞에 두었으나 가장 뒤에 그 말을 베풀었습니다.

곤내(梱內)를 화협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대개 부부라는 것은 함께 몸을 같이하고 덕을 짝하는 것이므로, 필부(匹夫)가 제집을 바로잡으려 하여도 반드시 이것을 삼가서 좋아하여 합하기를 힘쓰고 어그러져 헤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데, 더구나 제왕(帝王)의 정치는 장차 국가를 다스려 천하에 통달하려는 것이니 부부 사이에서 시작하여 처음을 삼가는 방도가 더욱이 어떠하여야 하겠습니까? 또 후궁·궁녀를 두는 것은 임금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나 상하·귀천 사이는 명분이 엄연하여 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총애에 가리워 미혹하여 빠지기 쉬우므로, 안으로 밤에 모시는 경계를 범하고 아래로 물러나 앉는 규례가 없다면 집안이 쓸쓸해지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까닭이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궁을 교양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신이 듣건대,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라 합니다. 조종(祖宗)께서 창업하여 이어 주는 중대함과 자손이 영구히 전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 걸려 있고, 치란(治亂)과 흥망의 기틀도 또 가르치고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착하고 착하지 않은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부(選部)396) 를 신칙(申飭)하여 반드시 위망(威望)이 무거워 두려워 할 만하고 충신(忠信)하고 박식(博識)한 자를 가려서 빈객(賓客)과 궁관(宮官)에 차임(差任)하고 또 구임(久任)397) 의 법(法)을 정하여 타관(他官)으로서 겸직한 자는 비록 본직(本職)은 파면되더라도 특별히 따로 서용(敍用)하여 그대로 벼슬을 띠게 하여 맡겨서 성취하도록 요구하소서. 궁금을 숙청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안의 말은 밖에 나가지 않게 하고 밖의 말은 안에 들어가지 않게 한다.’ 하였으니, 대개 궁금 사이에서는 모름지기 막는 한계를 준엄하게 해야 할 것인데, 불행히도 근래 일종의 불령(不逞)한 무리가 이따금 유음(幽陰)한 길에 비밀히 붙어 뇌물이 유행하고 말이 전달되므로, 비록 임금이 위에서 잠자코 헤아려 홀로 결단하더라도 시끄럽게 떠도는 말은 이미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 숙종(肅宗) 때에 경계를 아뢴 것입니다. 아! 통탄합니다. 예전부터 궁인(宮人)들이 혹 족속이라 핑계하여 여염(閭閻)의 어린아이를 금중(禁中)에 재우고 혹 대식(對食)398) 을 핑계하여 요사한 여중이나 천한 과부와 안팎에서 교통합니다. 이것은 다 요사한 자에게서 인연하고 간사한 자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출입의 방지를 준엄하게 하여 그 왕래하는 길을 끊으소서. 그러고서야 부정한 길을 막을 수 있고 뒷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근습(近習)을 엄하게 다룬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접때 심부(沁府)399) 에 봉명(奉命)한 승전(承傳)의 일로 말하면, 전하께서 특별히 승전을 파면하신 것은 곧 수신(守臣)을 파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수신은 막 본병(本兵)400) 의 장관(長官)으로 발탁되었는데, 일국의 대사마(大司馬)401) 가 환시(宦侍)와 서로 다투었다 하여 전하께서 마음대로 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시니, 이 뒤로 이들이 날로 더욱 방자해졌습니다. 내시(內侍)는 봉명하였을 때 외에는 가벽(呵辟)402) 하지 못하는 것이 수교(受敎)에 실려 있는데, 조상의 무덤을 돌보러 휴가를 받아서 갈 때에 승상(繩牀)403) 으로 앞에서 인도하고 외쳐 뽐내며 성안의 큰 길에 이르러서는 가벽이 낭자하였고, 또 두어 사람이 가마를 메고 창의문(彰義門) 밖에서 돌아다니며 구경한 일이 있고, 또 액례(掖隷)들이 용산강(龍山江) 위에서 풍악을 벌이고 잔치를 베풀되 승전(承傳)을 받들었다고 핑계하여 방자하게 벽제(辟除)404) 를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다 전에 없던 변괴입니다. 또 각궁(各宮)에서 절수(折受)405) 하고 측량하는 일은 매우 어지럽습니다. 지난해 증산통(甑山筒)의 일로 말하면 내사(內司)406) 가 맡은 일인데, 스스로 성교(聖敎)를 친히 받았다 하면서 혹 ‘주상(主上)께서 밤낮으로 희망을 거신다.’고도 하고 혹은 ‘주상의 뜻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고도 하여 못하는 짓이 없이 공동(恐動)하고 위협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들을 조사해 다스려 뒷 폐단을 징계하소서.

완호(玩好)를 멀리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완호가 사람의 심술을 해치고 사치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 많습니다. 신이 듣건대, 전하께서는 궐내(闕內)에서 여러번 토목(土木)의 일을 일으키시어 잗단 일들이 거의 끊일 때가 없고 그림을 매우 좋아하시어 때로는 친히 필묵을 잡으시기도 한다 합니다. 대저 그림은 조금 점잖은 기예에 가까우나 또한 지기(志氣)를 잃게 할 만한데, 더구나 이 보다 큰 것이겠습니까? 대저 마음은 두 가지로 쓸 수 없으로 이것을 중하게 여기면 저것을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종사(宗社)의 큰 책임을 맡고 요순(堯舜)의 전해 온 도통(道統)을 맡고서 마음을 조금이라도 나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소열 황제(昭烈皇帝) 제갈양(諸葛亮)의 짧은 경계의 말을 듣고 평생 동안 기르던 결모(結髦)를 자른 까닭입니다. 재용을 절약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지금 탁지(度支)407) 의 저축이 남김없이 없어졌는데 전하의 용도는 절제가 없어서 유사(有司)로서 조금 난처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꾸중이 문득 가해지므로, 무릇 명이 내리면 혹은 빌어서 응하기도 합니다. 아! 자전(慈殿)께 진연(進宴)을 청하였을 때에 다만 나라의 저축이 없다 하여 굳이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전하의 그지없는 생각을 조금도 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무릇 은사(恩賜)하고 예급(例給)하실 때에는 번번이 ‘진연도 거행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여기에 미칠 겨를이 있겠느냐?’고 생각하고 절약을 힘써서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재물을 아끼고 경비를 아까워하시는 생각에 우러러 따르신다면, 어찌 성효(聖孝)에 크게 빛이 있지 않겠습니까? 직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진언(進言)한 자가 여러번 포상(褒賞)을 받았으니, 아뢰고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은 성대하다 하겠으나, 다 잗달아서 매우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치우치게 사랑하고 몸에 가까운 곳에 대해서는 간혹 말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따르려 하지 않으시고, 따르지 않을 뿐더러 혹 문구(文句) 사이의 단점을 집어 내어 꾸짖기도 하고 혹은 경전(經傳) 중의 의리를 끌어 내어 꾸미기도 하셨습니다. 비록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에 대한 계청(啓請)으로 말하더라도 이것은 일국의 공론인데 한 달이 넘도록 쟁론(爭論)하여도 마침내 윤허하시지 않았습니다. 맨 먼저 의논을 낸 대신(臺臣)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낙점(落點)을 아끼고 최후에 영얼(嶺臬)408) 을 제수한 것도 배척하여 멀리한 혐의가 있는 듯하니, 앞으로 어떻게 뭇 신하의 의혹을 풀겠습니까?

법전을 삼가 지킨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전하께서 조종(祖宗)의 법에 대하여 가볍게 하고 무겁게 하며 좌지우지하여 뜻대로 하신 것이 많습니다. 작은 인애(仁愛)에 얽매이면 혹 죽어야 할 것도 부당하게 용서하고, 매우 미워하는 것에 지나치면 혹 가벼운 죄가 있어도 엄중히 추구하며, 봉명(奉命)한 승선(承宣)을 능욕한 자는 조금도 징치(懲治)하지 않고 위조한 비망기(備忘記)를 전파한 자는 가볍게 귀양보내며, 제배(除拜)는 혹 자격(資格)에 맞추지 않고 사여(賜與)는 혹 상법(常法)에 넘치는 것이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구제(舊制)를 지키기를 힘쓰고 한때의 사사로운 소견으로 전에 없던 법을 경솔히 새로 만들지 마소서. 관작(官爵)을 아낀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전하께서 갑진년409) 이후로 특별히 제수하거나 갑자기 뛰어오른 자가 모두 몇 사람입니까? 낭계(郞階)410) 가 겨우 끝나자 경(卿)411) 의 반열에 이른 자가 있고, 출신(出身)412) 한 지 한 해가 못되어 방백(方伯)을 맡은 자가 있는가 하면, 은대(銀臺)413) 는 추요(樞要)의 지위인데 미천한 집의 아들이 채워 있고, 대각(臺閣)은 언론의 지위인데 구차하게 출세를 꾀하는 무리가 나아가니, 금옥(金玉)이 흙처럼 천하게 되고 명기(名器)가 더러워서 버릴 물건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전의 과실을 깊이 징계삼고 삼가기를 힘써서 중비(中批)414) 로 특별히 제수하는 일을 일체 행하지 마시고 묘당(廟堂)의 천거를 반드시 살피고 삼가게 하소서.

붕당을 타파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오늘날 붕당의 폐단은 대개 신축년415) ·임인년416) 이래로 수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저 토죄(討罪)를 지나치게 하여 외람된 것이 많은 것을 면하지 못하고 분노하고 미워하는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낀 것은 신축년·임인년 사람의 죄입니다. 보복(報復)하기에 바빠서 오로지 남을 죄에 빠뜨리기만을 생각하여 관계가 매우 중대한 자와 함께 같은 예로 지워 없앤 것은 을사년417) 사람의 죄입니다. 전하께서 양편의 잘잘못에 대하여 이미 타파하실 수 있었으면 출척(黜陟)하고 용사(用捨)하는 데에 있어서도 공평한 마음으로 공평한 정사를 행하셔야 할 것인데, 또 순전히 이들을 등용하고 저들을 물리치는 상투(常套)를 쓰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축년·임인년 사람들이 목소리를 같이하여 명대로 따르고 을사년 삼사(三司)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은 실로 당인(黨人)들이 일망타진하여 석권(席捲)한 수법이었는데, 오늘날 전후의 정청(庭請)과 청대(請對)를 죄안(罪案)으로 삼는 것은 또한 어떻게 저들과 다르겠습니까? 이와 같은 거조(擧措)는 붕당을 타파시킬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붕당을 격동하여 만들 수 있습니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접때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왕을 핍박하여 욕하고 나라 사람의 반을 무함한 자는 죽이고 귀양보내어도 본디 안될 것이 없겠으나, 그 밖의 무고한 자는 똑같이 사랑하여 구별을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귀양가 있는 사람들은 당초에 본디 억울하게 당한 자가 많고, 그 가운데에서 앞장서서 숭봉(崇奉)을 의논하여 청의(淸議)의 비난을 받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아 선류(善類)를 배척한 자는 3년의 귀양살이로도 그 죄를 징계할 만하니, 이러한 청명(淸明)한 초기를 당하여 또한 대략 청탁(淸濁)의 구별을 보여서 공론을 신장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기사년418) 사람들도 분별하여 등용하여 널리 죄를 씻어 주는 덕을 보이셔야 하겠습니다.

신하들을 예우하여 부린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전하의 오늘날의 거조는 본디 호오(好惡)를 명백하게 보이시려는 데에서 나왔으나, 거조가 점진하지 않고 처분이 전도되어 한나절 안에 거의 다 물리치고 잠시 사이에 어지러이 제배(除拜)하여 마치 화기(禍機)가 한 번 숨쉬는 사이에 닥친 듯합니다. 저 참으로 불충(不忠)하여 임금을 잊고 붕당을 늘리었다면 죄받아야 마땅하겠으나, 전하께서 예우하여 부리는 도리로서는 결코 이렇게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구나 대신(大臣)은 체모가 존엄한데 즉시 고하여 파직하는 것은 이미 전에 없던 일이고 ‘흔퍅(狠愎)’이라는 두 글자는 더욱이 성인(聖人)의 중화(中和)의 덕을 손상시킴이 있습니다. 대개 그 나이는 매우 늙었고 그 지위는 영상(領相)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이러한 제목을 붙이고서야 시원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깊이 뉘우치고 고치소서.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다 오늘날 급히 힘써야 할 일입니다마는, 그 온갖 폐단의 큰 근본이 되는 것은 전하의 기질(氣質)의 병통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나 표리(表裏)가 혹 서로 어울리지 않고 언행(言行)이 혹 서로 고려되지 않습니다. 연석(筵席)에서 신하와 마주하는 엄숙하고 화목한 자리에서는 위의(威儀)에 어그러지는 것이 없으시나 홀로 한가한 가운데에서는 수시로 듣는 것을 빠뜨리시고, 요순(堯舜) 주공(周公)·공자(孔子)의 가르침은 자주 인용하시나 한(漢)·당(唐)의 중흥한 임금의 일은 혹 도리어 언급하지 않으시며, ‘경(經)에 이르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하는 분부는 여러 번 사륜(絲綸)419) 의 사이에 부지런히 쓰시나 한갓 겉치레로 돌아가고, ‘유념(留念)한다’, ‘체념(體念)한다’는 비답(批答)은 번번이 경계를 아뢴 글에 대하여 내리시나 진실이 없는 것을 면하지 못하십니다. 이 때문에 위단(威斷)의 맹렬한 것이 천둥처럼 두렵고 바람처럼 빠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래에서 따르지 않고, 포고(布告)하는 말씀이 정녕하고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전하께서 성실하지 않으신 병통입니다. 전하께서는 사정(私情)이 공심(公心)보다 많고 천리(天理)가 인욕(人慾)보다 적어서 욕심이 싹트는 것을 결단코 누르지 못하고 인정이 있는 데에는 굽혀서 수행하기를 힘쓰시며, 말이 궁위(宮闈)에 관계되면 반드시 막으려 하고 일이 근습(近習)에 관계되면 문득 주장을 하시며, 좋아하시는 자에게는 선웃음을 치고 사랑하며 구차하게 기쁘게 하려고 힘쓰시고 미워하시는 자에게는 일마다 의심을 일으키고 짐짓 허물을 찾으시니, 사의(私意)는 그래서 넘쳐 흐르고 공도(公道)는 그래서 아주 없어집니다. 이것은 다 전하께서 사정이 많은 병통입니다. 인정과 물욕에 깊어서 용서가 혹 지나치고, 작은 법문(法文)과 잗단 일에 상세하여 대체를 혹 잃으며, 스스로 마음을 열어 정성을 보인다고 생각하시나 왕언(王言)은 혹 신중한 것이 부족하고, 스스로 영예(英銳)하여 과단(果斷)한다고 하시나 거조는 혹 경솔한 데에 가깝습니다. 무릇 이러한 것들은 낱낱이 열거하기 어려우나 대개 다 전하의 기질의 병통입니다. 이른바 잘 다스려 변화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바로 요순의 정일(精一)한 심학(心學)이 있을 뿐이고, 그 본받는 방법은 《중용(中庸)》 《대학(大學)》의 글에 실려 있는 것이 지극히 상세하고도 명백합니다. 비록 성인이 다시 나더라도 그 말은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오직 전하께서 힘써 배우고 참으로 체험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칭찬하고, 중관(中官)의 승상(繩牀)으로 앞에서 인도한 일은 엄하게 신칙(申飭)하고, 가마를 메고 다니며 구경하고 용산에서 잔치를 벌인 중관과 액례는 모두 죄주어 다스리게 하고, 청탁의 구별을 대략 보이는 일은 물서(勿敍)로 부표(付標)하고, 정호(鄭澔)의 일은 ‘「흔퍅」이라는 두 글자는 지나치다 하겠거니와 네 말이 공평하다.’ 하고 뒤미처 고치도록 윤허하였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 소 가운데에서 거행할 만한 것을 분부한 뒤에 도로 들여와 궁중에 두라. 경연(經筵)을 멈춘 여가에 보겠다."

하였다.

 

7월 18일 임신

승지(承旨)들 【유명응(兪命凝)과 송인명(宋寅明)이다.】 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조현명(趙顯命)의 소(疏)에 대한 비답(批答) 가운데에 대략 구별을 보이는 일은 가벼이 풀어 줄 수 없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상소의 뜻과 서로 어그러지는 듯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소의 뜻은 소하(疏下)인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아닙니다. 이명언(李明彦)이 일찍이 임인년420)  에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추숭(追崇)을 논한 것을 청의(淸議)가 비난하였으니, 조현명이 이른바 청의에 비난받았다는 것은 이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사주를 받아 선류(善類)를 배척하였다는 것은 박징빈(朴徵賓)이 윤순(尹淳)을 탄핵한 것이 그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명언·박징빈의 죄명을 물었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다 원찬(遠竄)인데, 이번에 석방받았고 또 서용(敍用)받았습니다. 박징빈은 본디 말할 것도 못되나, 이명언은 충성하고 청렴하고 근신합니다. 근년의 한 상소는 비록 청의에 비난받았더라도 이것은 큰 죄가 아니고 이미 석방하였으니 그대로 유배하여 둘 것 없습니다. 직임을 맡기면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할 것입니다."
하고, 유명응도 이어서 아뢰니, 임금이 그 소에 대한 비답을 고치라고 명하였다. 다만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고, 이어서 하문하기를,
"정석삼(鄭錫三)이 그때에 또한 탄핵받았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정석삼은 이명의(李明誼)에게 탄핵받았는데 이명의는 바야흐로 천극(栫棘)되어 있습니다. 고(故)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는 김홍석(金弘錫)에게 역적을 감쌌다고 탄핵받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영상(領相)이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일에 너그러웠기 때문인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조정의 기상이 참혹하여 내가 조지(朝紙)를 보지 않았으므로 영상이 탄핵받은 것을 몰랐다. 김홍석도 서용할 수 없으니, 마찬가지로 파직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접때 귀양간 사람을 석방할 때에 신(臣)이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하였습니다. 이헌장(李獻章)도 놓아 보내야 할 것인데, 특별히 찬배하라고 분부하셨으므로 감히 놓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뒤미처 공론을 들으니, 신이 곧바로 전의 죄대로 둔 것은 소홀하였음을 면하지 못한다 합니다. 이헌장은 이미 연좌(連坐)가 아니니, 크게 은혜를 내리는 이때를 당하여 법외(法外)로 그대로 유배하여 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가벼이 석방할 수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조현명의 소를 거론하여 그 바르고 절실한 것을 크게 일컬으니, 임금도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그 소 가운데에 있는 근습(近習)을 엄히 다루어야 한다는 말은 더욱이 절실합니다. 선조(宣祖) 때에 보모(保姆)421)  가 옥교자(屋轎子)422)  를 타고 대궐 안으로 들어왔더니 선조께서 그 가마를 쳐부수라고 명하셨는데, 이제까지도 아름다운 일로 전합니다. 효종(孝宗)께서 신하들을 인접(引接)하실 때에는 액례(掖隷)들이 다 낯에 사람 같은 기색이 없었습니다. 조종 때에 근습을 단속하여 막은 것이 이러하였으니, 이것은 전하의 가법(家法)입니다."
하니, 임금이 칭찬하였다.

 

7월 19일 계유

정제두(鄭齊斗)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조덕린(趙德隣)을 부응교(副應敎)로, 신치현(申致顯)을 부교리(副校理)로, 박태항(朴泰恒)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이보욱(李普昱)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합사(合辭)한 계(啓)와 청대(請對)·정청(庭請)한 사연 및 허다한 상소에서 무함받은 것은 지극히 허무하고 지극히 참혹합니다. 한 마디가 거짓말이 되면 한 마디 말을 다시 만들어 내고 한 가지 일이 파탄(破綻)되고 나면 한 가지 일을 다시 만들어 내니, 신이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벼슬은 대신인데, 당당한 국가에서 흐릿하게 버려두고 엄히 구명하여 통렬하게 분별하지 않았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빨리 신을 사패(司敗)423)  에 내려 죄상을 명백히 살피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그날로 길을 떠나 오라고 명하였다.

 

사간(司諫) 유정(柳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임징하(任徵夏)는 감히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글에 실어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는데, 이는 바로 김춘택(金春澤)의 매제[妹婿]이고 역적 임창(任敞)의 지친(至親)입니다. 부도(不道)한 마음은 그 무리가 서로 전하는 의발(衣鉢)이니, 하루도 용서하여 둘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대저 선왕을 핍박하여 욕하여 스스로 형벌을 재촉한 윤지술(尹志述)이 무슨 일컬을 만한 절의(節義)가 있어서 유현(儒賢)의 사당에 배향(配享)까지 합니까? 나라 사람이 분개하는 것이 오래 갈수록 격렬해지니, 그 배향에서 내치고 그 위판(位版)을 불사르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어비(御批)를 위조한 것이 어떠한 중죄이며 사람을 모아서 옥사(獄事)를 일으킨 것이 얼마나 음흉한 도둑입니까? 홍성룡(洪聖龍)을 찾아내어 무고한 사람에게 화를 전가한 계책은 성교(聖敎)에 이미 통촉하였다 하셨으나 지레 감죄(勘罪)하여 처단하고 구명하지 않으셨으므로 옥사의 체례(體例)가 크게 무너졌으니, 홍성룡을 다시 국문(鞫問)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윤봉조(尹鳳朝)의 음흉하고 공교한 정상은 전하께서 이미 다 통촉하셨으나, 꾐을 받은 자는 방만규(方萬規)이고 시킨 자는 윤봉조이니, 방만규는 윤봉조의 한낱 사령(使令)입니다. 방만규는 죽었으나 조극량(趙克亮)은 아직 살아 있으니, 소가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를 당장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대계(臺啓)를 쾌히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임징하(任徵夏)의 일과 윤봉조(尹鳳朝)의 일은 전일의 비답에 이미 일렀다. 윤지술의 일은 당초에 배향(配享)하라고 명한 것이 어찌 한때 청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이겠는가? 내 생각도 그러하다. 이제 네 상소를 보고 다시 생각하니, 대신(大臣)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처분해야 하겠다. 홍성룡의 일은 결코 오늘의 윤팽수(尹彭叟)·갑술(甲戌)을 다시 만들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유정의 상소에 비답을 내릴 때에 처음에는 윤지술을 정몽주(鄭夢周) 및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에 견주었는데, 송인명(宋寅明)의 말에 따라 뒤미처 비지(批旨)를 이렇게 고쳤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48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유정의 상소에 비답을 내릴 때에 처음에는 윤지술을 정몽주(鄭夢周) 및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에 견주었는데, 송인명(宋寅明)의 말에 따라 뒤미처 비지(批旨)를 이렇게 고쳤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독(講讀)이 끝나고서, 참찬관(參贊官) 송인명(宋寅明)이 나아가 말하기를,
"삼가 유정(柳綎)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성명(聖明)께서 미처 의리(義理)의 정미(精微)함을 죄다 살피시지 않은 듯하므로, 비지(批旨)를 감히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하여 보아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윤지술(尹志述)을 정몽주(鄭夢周)와 육신(六臣)에 견주신 것은 매우 가깝지도 않습니다. 무릇 임금이 꺼리는 것을 신하가 범하여 죄받아서 죽었다면 비록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죽었다 하여도 될 것입니다. 만일 임금이 혹 사친(私親)을 숭봉(崇奉)하거나 조종(祖宗)에게 지나치게 예(禮)에 어그러지는 예를 더하면 신하로서는 때때로 꺼리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하여 간쟁(諫爭)합니다. 한선제(漢宣帝)가 무제(武帝)를 높여 세실(世室)로 하려 할 때에는 하후 승(夏侯勝)이 그 무력(武力)을 남용(濫用)하였다는 것으로 배척하였고, 아조(我朝)의 일로 말하면 심대부(沈大浮)·유계(兪棨) 등이 추숭(追崇)하는 일을 힘껏 간쟁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사친(私親)을 추존(追尊)할 때에는 권달수(權達手)가 힘껏 간쟁하다가 화를 입었는데, 이것은 곧은 절의입니다. 경종(景宗)께서 만약 사친을 너무 지나치게 숭봉하셨다면 신하가 죽을 힘을 다하여 간쟁하였어야 하겠으나, 윤지술은 까닭 없이 지문(誌文)의 일 때문에 임금이 숨기는 것을 들추어내어 전혀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일이 놀라운 것은 말하고 말하지 않는 사이에 절조를 잃었을 뿐이 아닙니다. 이는 의리의 정미한 것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그때에 조중우(趙重遇)가 이미 막 장사(杖死)하였으니, 윤지술의 마음에서 그때에 명예를 얻고 뒤에 화가 없다고 생각되어 들추어내어 숨기는 것을 범하였다면 그 심술이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들추어냈다고 한다면 옳커니와 사실을 속이고 도리어 어그러졌다고 한다면 옳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윤지술은 사죄(死罪)까지는 되지 않으므로 처형하는 것은 그르나 진동(陣東)424)  ·구양철(歐陽澈)425)  에 배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비지(批旨)에 인용하여 견주신 것은 더욱이 가깝지도 않으니, 고쳐 내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承旨)는 ‘윤지술이 조중우(趙重遇)의 일을 보고서 이 말을 하였다.’ 하는데, 이것은 너무 심각하게 본 것인 듯하다.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인데, 만일 조중우(趙重遇)의 일을 보고서 이렇게 하였다면, 어찌 중장(重杖)을 견디어가면서 끝내 승복(承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질풍(疾風)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고 세상이 어지러워져야 충성한 신하를 아는데, 윤지술이 죽음을 보고도 태연하였으니 지조가 있는 듯하다. 내 이 말은 백세 뒤에도 변하지 않을 것인데, 승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윤지술이 형(刑)을 받을 때에 신이 이태좌(李台佐)를 가 보고 권하기를 ‘국가에서는 죽이려 하더라도 신하로서는 마땅히 쟁집(爭執)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신의 소견도 이러하였거니와, 그의 죽음이 억울하기는 하나, 어찌 이 때문에 배향(配享)할 수 있겠습니까? 조용히 죽는 것은 비록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마땅히 그 일의 시비를 보아야 할 것이니, 어찌 이 때문에 죄다 어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으며, 설사 어질게 여길 만하더라도 어찌 배향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지경연(知經筵) 이집(李㙫)과 검토관(檢討官) 윤광익(尹光益)이 이어서 아뢰어 상소에 대한 비답을 고쳐 내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참형(斬刑)에 처하여도 유사(有司)가 간쟁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경종의 허물이 아니라 신하가 변변치 못한 것이다. 진동·구양철의 배향은 진실로 백세 뒤의 공론이 어떻게 말할라는지 참으로 모르겠다."
하고, 이어서 비답을 고쳐 내렸다. 검토관 강박(姜樸)이 아뢰기를,
"윤지술·임징하(任徵夏)는 선조(先朝)의 죄인 가운데에서 본디 지엽(枝葉)이기는 하나 그 죄가 또한 윤상(倫常)을 범하였으니, 그 죄를 바루고서야 윤상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지술이 윤상을 범하였다고 하는 것은 유신(儒臣)의 큰 망발이다."
하였다. 강박이 말하기를,
"윤지술은 흠을 들추어내어 선왕을 배척하여 말하였으니, 그 임금을 업신여기고 위를 범한 죄가 윤상을 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소리높여 말하기를,
"무슨 마음으로 윤지술이 윤상을 범하였다고 하는가?"
하였다. 강박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사람이 미천하기는 하나 벼슬은 삼사(三司)에 있는데, 이처럼 꺾으시는 것은 관용(寬容)하는 덕에 흠이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소리높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탕평(蕩平)으로 다스리는데 감히 당습(黨習)의 말을 하는 자는 삼사(三司)뿐이 아니라 삼사(三事)426)  라도 꾸짖을 수 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윤지술의 일은 임징하의 일과 같지 않으니, 유신이 아뢴 것은 너무 지나침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니, 강박이 드디어 물러가서 상소하고 경출(徑出)하였다.

 

7월 20일 갑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여 스스로 죄진 사람이라 하였다. 그 소에 대략 말하기를,
"신은 세상의 큰 죄인이므로 흉역(凶逆)이라 이름하고 징토(懲討)한다고 말합니다.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도 모자라서 청대(請對)하여 복합(伏閤)427)  하기까지 하고, 복합도 모자라서 공경(公卿)이 회의하기까지 하고, 회의도 모자라서 뭇 관원을 협박하여 두 달 동안 정청(庭請)428)  하고 유생들을 풍자하여 날마다 글을 올리게 하고, 이의천(李倚天)·한덕후(韓德厚) 같은 자는 안률(按律)하시라는 청까지 냈으니, 신도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신이 받은 모든 무함을 죄다 통찰하시어 청대(請對)에 같이 참여한 일에 대하여 두 번의 비망기(備忘記)에 특별히 거론하셨으므로 신은 다시 변명할 수 없습니다마는, 오직 이 한 가지만은 마음에 근심스럽습니다. 대개 그때 모든 사람의 의논이 신이 들어가지 않으면 반드시 더 격렬해질 것이고 들어가면 화를 늦출 수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날 들어간 것은 실로 지극한 사정에 몰렸기 때문인데, 마침내 나중의 화에는 무익하고 도리어 스스로 윤상(倫常)을 손상한 죄에 빠졌습니다. 이제 비록 여러 번 용서하셨으나 사람들의 말은 저러하니,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본심은 이러하였다고 말하여 스스로 해명할 계획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사진(仕進)할 수 없는 큰 관건(關鍵)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그날로 길을 떠나 오라고 명하였다.


 

 

 

7월 21일 을해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겸설서(兼說書)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대개 분관(分館)하기 전의 영전이 너무 갑작스럽기 때문인데, 임금이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윤유(尹游)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접때의 일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원망하는 무리가 산릉(山陵)을 헐뜯어 욕하였는데, 더욱이 통탄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선왕의 원구(元舅)429)   줄에 있는 이에 대하여 차마 무슨 마음을 가지고 ‘비밀히 차자(箚子)를 올렸다.’고 앞장서 말하고, 머리가 흰 나이로 원보(元輔)의 직임에 있는 이에 대하여 ‘태묘(太廟)에 고하고 팔방에 반포(頒布)하기를 청하였다.’고 화답하여 못하는 짓이 없이 분수를 범하고 도리를 어깁니까? 그런데도 대신(臺臣)인 자는 까닭 없이 패초(牌招)를 어기어 합계(合啓)의 논의가 아직도 없으니, 신은 가만히 슬프게 여깁니다. 또 신이 삼가 듣건대, 일전에 대소(臺疏)에 따라 이명언(李明彦)을 성요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이명언은 본디 높은 명망이 있고 충직하고 성실하고 곧고 굳으며 내직(內職)·외직(外職)을 두루 지내되 공평하고 청렴한 것을 스스로 지켰으므로, 장독(瘴毒)이 있는 바닷가에서 3년 동안 귀양산 끝에 도하(都下)의 백성이 그가 오기를 날마다 바라고, 서용하라는 명을 거두신 것도 또한 대신(臺臣)의 본심이 아니므로 여정(輿情)이 모두 개탄합니다."
하고, 또 호남(湖南)에 흉년든 정상을 말하고 도신(道臣)과 읍쉬(邑倅)로 하여금 안심시켜 구제하게 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국가의 경비는 새것으로 옛것을 잇대지 못하니, 위로 승여(乘輿)·공봉(供奉)부터 아래로 온갖 비용까지 일체 적당히 줄이고 앞으로 대례(大禮) 때에는 비록 전례에 따라 행해야 할 것이라도 적당히 생략할 것을 허락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소 가운데에 아뢴 말이 매우 절실하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각이 합사(合辭)하지 않는다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만약 정호(鄭澔)와 전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을 가리킨 것이라면, 이미 처분한 뒤이니 다시 더 격동시켜서는 안된다. 이명언의 일은 그가 오기를 날마다 바란다고 한 말이 지나치게 칭찬한 것이 아닌가? 안심시켜 구제하게 한다는 등의 말은 방백(方伯)에게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유엄(柳儼)·김시형(金始炯), 부교리(副校理) 송진명(宋眞明), 수찬(修撰) 정석오(鄭錫五)·윤광익(尹光益) 등이 윤유(尹游)의 상소로 인하여 다들 합계(合啓)할 것을 논의해야 할 것인데 논의하지 않았다 하여 상소하여 인혐(引嫌)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批答)하였다.


 

 

 

7월 22일 병자

이정신(李正臣)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인복(李仁復)을 승지(承旨)로, 조한위(趙漢緯)·이춘제(李春躋)를 지평(持平)으로, 김시환(金始煥)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광덕(李匡德)을 교리(校理)로, 윤순(尹淳)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강필경(姜必慶)을 보덕(輔德)으로, 조적명(趙迪命)을 사서(司書)로, 유건기(兪健基)를 설서(說書)로 삼았다. 이한규(李漢珪)를 발탁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높였는데, 다섯 아들이 등과(登科)하였기 때문에 한 자급(資級)을 더한 것이다.
7월 23일 정축

태백성(太百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정신(李正臣)을 병 때문에 면직하고 이정제(李廷濟)를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특별히 수서(手書)를 내려 도승지 이정제를 좌의정(左議政) 이광좌(李光佐)에게 보내어 별유(別諭)하고 함께 오게 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재숙(齋宿)430)  하였다. 장차 기우제(祈雨祭)를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가물어서 관원을 보내어 비를 빌게 한 것이 세 번인데 끝내 비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드디어 친히 빈다는 명이 있었고, 특별히 신칙하는 분부를 내려 집사(執事)들은 각별히 재계하고 목욕하고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갖게 하고 묘정(廟庭)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은 다 재계하고 목욕하고 술을 금하고 담배를 금하게 하였다. 이날 임금은 연여(輦輿)를 타지 않고, 양산(陽傘)을 물리고 백관에게는 특별히 말을 타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막차(幕次)에서 밤을 지내고 재실(齋室)에 들어가지 않았다.

 

7월 24일 무인

임금이 태묘에 들어가 기우제를 행하였다. 초헌(初獻)이 끝나고서 임금이 판위(板位)에 서서 예(禮)가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승지(承旨) 송인명(宋寅明)이 잠시 앉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례(廟禮)는 엄숙하고 공경해야 하는데 어찌 감히 앉겠는가?"
하였다. 잠시 소차(小次)에서 쉬며 다음(茶飮)을 들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늘의 감응이 막연한데 어느 겨를에 생각이 기갈(飢渴)에 미치겠는가?"
하였다.

 

7월 25일 기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하교(下敎)하기를,
"몸소 비궁(閟宮)431)  에서 제사하였으나 작은 정성이 사무치지 못하였으니, 사단(社壇)에서 다시 빌겠다."
하고, 이어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의절(儀節)을 줄이고 남교(南郊)의 예(例)에 따라 거행하게 하였다. 이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등록(謄錄)》에서 상고하니, 남교에서 비를 비는 것은 중사(中祀)에 속하므로 소여(小輿)를 타고 시신(侍臣)의 절차는 모두 줄이고 그밖의 줄일 만한 의장(儀仗)은 병조(兵曹)로 하여금 여쭈고 시행하게 하는 것이 고례(古例)입니다마는, 종묘(宗廟)·사직(社稷)은 대사(大祀)이니 일찍이 절차를 줄인 예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친히 비는데 어찌 의장을 갖출 수 있겠는가? 또 이번 하교는 지금 새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선조(先朝)에서도 사단에 거둥하실 때에 이미 거행한 예가 있다."
하였다. 예조에서 또 아뢰기를,
"하교가 이러하시니 의주 절목(儀註節目) 가운데에서 시신(侍臣)의 절차와 전후의 고취(鼓吹)를 모두 줄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에 병조에서도 의장과 수가(隨駕)하는 인원의 수를 줄였다. 【의장 가운데에서 대기(大旗) 세 쌍과 소기(小旗) 두 쌍과 금등자(金鐙子)·은등자(銀鐙子) 각 한 쌍과 은월(銀鉞)·은부(銀鈇) 각 한 쌍과 공련(空輦)을 줄이고, 수가하는 인원 가운데에서 충장위 장(忠壯衛將)·충익위 장(忠翊衛將) 이하 군병과 추패장(椎牌將) 및 유청군사(有廳軍士) 등을 줄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49면
【분류】왕실(王室) / 사상(思想) / 과학(科學)


[註 431] 비궁(閟宮) : 종묘(宗廟).

 

부수찬(副修撰) 윤용(尹容)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파출(罷黜)되었던 것은 육시(戮屍)를 청하는 합계(合啓)에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추형(追刑)을 청하는 것은 비록 인후(仁厚)한 논의가 아니기는 하나 신이 합계에 참여한 것은 대개 또한 토역(討逆)하여 복수한다는 의리에서 나왔는데, 이제 와서 신이 일찍이 역적이라 하던 자가 변하여 충신이 되어 오히려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祀)하고 시호(諡號)를 내려 포장(褒奬)하는 반열에 있어 마치 충현(忠賢)이 억울하게 죽은 것처럼 여겨지니, 신 같은 자는 충현을 상해한 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무릅쓰고 사진(仕進)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批答)을 내렸다.
수찬(修撰) 강박(姜樸)이 상소하여, 윤지술(尹志述)이 윤상(倫常)을 범한 죄를 다시 논하여 전일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이 망발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밝히니, 임금이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여필용(呂必容)·유정(柳綎)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영복(趙榮福)이 상소하여, 근일의 처분이 상례에 어그러졌음을 말하고, 또 탕평(蕩平)은 위령(威令)으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정호(鄭澔)가 청렴하고 충성하고 강직하고 지조가 있다는 것을 전하께서도 일찍이 굽어살피고 일전의 사직하는 상소에 대한 비답에는 나라를 몸받는 정성으로 받아들이고 목마르듯이 기다리는 뜻을 보이셨는데, 온화한 하유(下諭)가 아침에 베풀어졌다가 엄한 분부가 저녁에 내려져 죄를 열거하여 죄를 성토하시는 것이 천한 자를 욕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아! 정호가 죄를 얻은 까닭이 이날에 있었던 것이 아닌데, 아침의 은비(恩批)는 무슨 까닭으로 내리셨습니까? 전하께서 평소에 성신(誠信)하라고 뭇신하에게 신칙(申飭)하여 권면(權勉)하신 것이 겉치레로 돌아갈 듯합니다. 전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은 충언(忠言)이 부지런하고 간절하여 미움받는 것을 피하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싫어하고 박대하는 기색을 뚜렷이 보이셨고, 이제 또 붕당(朋黨)을 감싼 것을 그 죄안(罪案)으로 삼았으니, 저 시기하고 미워하는 무리가 바야흐로 팔을 걷어붙이고 기회를 타서 반드시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3백 년의 종사(宗社)가 앞으로 위망(危亡)의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신이 삼가 저보(邸報)432)  를 보니,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조태구(趙泰耉)의 일을 아뢴 데에 ‘홍계적(洪啓迪) 등이 끝내 비답을 전하지 않아서 대궐에 나아가 청대(請對)하였더니 또 굳게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도 그때 승선(承宣)433)  이었습니다. 신은 신축년434)   10월 16일 초혼(初昏)에 들어가 숙사(肅謝)하고 이어서 사진(仕進)하였으므로 그 이른바 비답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느 때에 있었던 일인지 모르겠으나, 이튿날 신과 동료들이 원중(院中)에 같이 앉아 있는데 원리(院吏)가 문득 와서 고하기를, ‘우상(右相)이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와 바야흐로 누국(漏局)435)  에 앉아서 청대한다.’ 하기에, 신과 동료들이 다 ‘합계(合啓)가 바야흐로 벌어졌고 비답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는데 이때에 청대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하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왕복하였습니다. 대개 국가에서 대각(臺閣)을 중하게 여기므로 대각이 쟁론(爭論)하면 상교(上敎)도 감히 받들지 않는 것이 본디 고례(古例)입니다. 그때 양사(兩司)에서 바야흐로 삭출(削黜)로 논계(論啓)하니 논핵(論劾)받는 사람이 일방으로 청대하는 것은 거조(擧措)가 이상하므로 본원(本院)에서 사리에 의거하여 물리친 것은 법례(法例)가 그러하여 마땅한 것인데, 접때 대신(臺臣)이 죄를 성토하는 것이 낭자하였으므로 신들이 이 때문에 죄받아 파출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중신(重臣)이 또 다시 제기(提起)하여 천하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니, 벌을 받아 인심을 시원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충역(忠逆)을 분변하지 않고 시비를 분간하지 않으면서 탕평(蕩平)만을 주장한다면, 이는 거의 자막(字幕)의 집중(執中)436)  과 같을 것입니다. 그 지키는 것이 굳을수록 그 중도는 더욱 어그러져서 장차 윤상(倫常)이 아주 없어지고 의리가 어두워져 절로 난망(亂亡)의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소의 말이 도리에 어그러진다. 본직(本職)을 갈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6일 경진

임금이 사단(社壇)에 가서 재숙(齋宿)하였다. 장차 비를 빌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임금이 연(輦)을 물리치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성상께서 보련(步輦)을 타시면 백관(百官)은 걸어서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도 그러하다면 걸어서 따르라."
하였다. 이미 신문(神門)을 들어가서 임금이 연에서 내려 말하기를,
"백관이 걸어서 따르는데 내가 어찌 홀로 걷지 않겠는가?"
하매,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연에서 내리는 데에는 스스로 절문(節文)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어찌 절문에 얽매이겠는가?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으니, 여기부터 걸어가겠다."
하였다.

 

김상규(金尙奎)를 승지(承旨)로, 조상경(趙尙絅)을 사간(司諫)으로, 강필경(姜必慶)을 집의(執義)로, 김호(金浩)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예조(禮曹)에 명하여 제주시(濟州試)에 입격(入格)한 사람 변시중(邊是重)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비가 내렸다. 신하들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러한 영응(靈應)을 얻어 단비가 크게 내렸습니다. 장전(帳殿)에서 밤을 새우시면 반드시 손상되실 염려가 있으니, 청컨대 재사(齋舍)에 드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말하기를,
"비를 얻은 뒤에는 반드시 친히 비실 것이 없습니다. 관원을 보내어 대행하게 하는 것도 전례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무자년437)  에 이미 단소(壇所)에 가셨는데 비를 얻었으므로 대신(大臣)이 기우제(祈雨祭)를 설행(設行)하지 말고 보사제(報謝祭)438)  를 설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셨다. 이제 희생(犧牲)과 폐백(幣帛)이 이미 진설되고 정시(正時)가 다가왔으니, 어찌 거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27일 신사

임금이 단(壇)에 나아가 제사지냈다. 태묘(太廟)에서 보사제를 행하라고 명하였는데, 대개 사흘 동안 제사지내고 비를 얻으면 보사하는 것이 전례이기 때문이다. 회란(回鑾)439)  할 때에 혜정교(惠政橋)에서 어가(御駕)를 멈추고서 판의금(判義禁) 심수현(沈壽賢)을 불러 가벼운 죄수를 소석(疏釋)하게 하였는데, 이날 석방된 자는 모두 17인이다. 이어서 승지(承旨) 송인명(宋寅明)을 보내어 전옥(典獄)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고, 또 각 아문(衙門)에서 구류(拘留)한 죄인과 포도청(捕盜廳)의 가벼운 죄수를 모두 놓아 보내라고 명하고,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의 가벼운 죄수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전옥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옥중에 세미(稅米)에 물을 탄 죄인이 있었는데, 5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수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다 무거운 죄수이며 율문(律文)에 따르면 도배(島配)해야 하나, 이미 사핵(査覈)하기 어렵고 또 줄곧 지체하여 가두어 둘 수도 없으므로, 신이 마음대로 석방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잘 처치하였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무릇 대사(大赦)가 있으면 잡범(雜犯)인 사죄(死罪)까지도 다 사유(赦宥)를 받는데, 당론(黨論)에 관계된 자만은 비록 가벼운 죄라도 거론하지 않으므로, 신이 일찍이 개탄스럽게 여겼습니다. 이제 앞으로 경사로 사유하는 은전이 있을 때에는 원컨대 성명(聖明)께서 폐습을 따르지 말고 마찬가지로 은혜를 베풀어 탕평(蕩平)의 실효가 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칭찬하고 말하기를,
"내가 헤아리겠다."
하였다.
7월 28일 임오

조익명(趙翼命)을 보덕(輔德)으로, 서명균(徐命均)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중관(李重觀)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7월 29일 계미

묘사(廟社)에서 비를 빌었을 때의 제관(祭官)과 제집사(諸執事)에게 차등을 두어 상전(賞典)을 내렸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목시룡(睦時龍)을 형추(刑推)하고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곧 왕부(王府)440)  로 하여금 법대로 처단하게 하기를 계청(啓請)하고, 또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아들 김영해(金寧海)를 사형을 감면하여 종[奴]으로 삼으라는 명을 거두고 빨리 유사(有司)로 하여금 율(律)대로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기를 계청하고, 또 배창석(裵昌碩)과 시창(時昌), 함우신(咸遇臣)의 처자를 모두 국청(鞫廳)을 설시하여 엄히 추문(推問) 하기를 계청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 세 가지 계청도 다 전에 아뢰던 것인데, 접때 이정응(李挺膺)에 의하여 멈추어졌다가 이제야 비로소 다시 발계(發啓)되었으나, 한세량(韓世良)을 노적(孥籍)하고 이삼(李森)·심단(沈檀) 등을 국문(鞫問)하기를 계청한 것도 이정응이 멈춘 것인데 끝내 다시 발계하는 자가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50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歷史)


[註 440] 왕부(王府) : 의금부(義禁府).
사신은 말한다. "이 세 가지 계청도 다 전에 아뢰던 것인데, 접때 이정응(李挺膺)에 의하여 멈추어졌다가 이제야 비로소 다시 발계(發啓)되었으나, 한세량(韓世良)을 노적(孥籍)하고 이삼(李森)·심단(沈檀) 등을 국문(鞫問)하기를 계청한 것도 이정응이 멈춘 것인데 끝내 다시 발계하는 자가 없었다."


 

 

 

장령(掌令) 김호(金浩)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바야흐로 출척(黜陟)은 분명하나 역순(逆順)은 정해지지 않아서 명분을 범한 무리가 아직도 편히 쉬는 자가 많습니다. 저 간장(諫長)441)  은 맨 먼저 정론(正論)을 내었으므로 퇴폐한 풍습을 진작시킬 만하나, 이제 대사헌(大司憲)의 제수(除授)는 그 아우에게 돌아갔으므로 저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장차 승강이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전조(銓曹)에서 미처 잘 살피지 못한 탓이나, 신은 실로 염려됩니다. 조현명(趙顯命)의 소(疏)에 신축년442)  에 말을 같이하여 명대로 따르고 을사년443)   이후에 정청(庭請)하고 청대(請對)한 것을 오늘날에 와서 같은 것으로 견준 것은 실로 맞지 않습니다. 대개 신축년에 말을 같이하여 명대로 따른 것은 마음에 반역을 품은 것이고, 을사년 이후에 정청하고 청대한 것은 충량(忠良)을 해치는 것이니, 관계가 이미 구별되는데 혼동하여 말하였습니다. 이명언(李明彦)이 충신(忠信)하고 굳센 것은 신이 많이 보지는 못하였으나, 간장이 말한 도민(都民)이 그가 오기를 날마다 바란다는 것은 곧 실제의 말입니다. 바야흐로 탕평(蕩平)하는 때를 당하여 먼저 발탁하여 써야 할 것입니다. 근년이 명언의 소에 우리 임금이 낳은 곳에 대하여 박하시게 할 수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 허물을 보고 그가 얼마나 어진지를 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헌신(憲臣)은 혹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또 청탁(淸濁)의 구분을 대략 보이기를 청한 것으로 말하면, 이미 ‘3년 동안 귀양살이하였으니, 그 죄를 징계하였을 만하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귀양갔다가 석방된 사람을 가리킬 것이고, 저 김홍석(金弘錫)은 처음부터 귀양간 일이 없는데 이제 그 가운데에 섞어 넣은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서용(敍用)을 도로 거두라는 명은 곧 거두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제 내가 처분한 것은 경장(更張)에 뜻이 있는 것이니, 저들을 누르고 이들을 돕는다는 것은 이미 잘 모르는 말이고, 대헌의 제수가 염려된다는 따위 말에 이르러서는 과격하고 어그러지는 뜻이 뚜렷이 있다. 조현명이 상소하여 논한 것은 참으로 적당하고 승선(承宣)이 아뢴 것도 하문(下問) 때문이었으니, 이제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은 마땅한 것인지 모르겠다. 편히 쉬는 자가 아직도 많다는 따위 말에는 넌지시 끝없는 분란을 일으킬 뜻이 있으나, 내 뜻이 굳게 정해졌으므로 접때의 수단을 오늘날에 다시 부려서는 안된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김호는 신축년444)  ·임인년445)   사이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응견(鷹犬)이었다. 육시(戮屍)를 합계(合啓)한 사람으로 오래 척출(斥黜)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대간(臺諫)의 지위에 다시 들어왔는데, 이명언·김홍석 등을 위하여 조현명이 탕평을 논한 것을 넌지시 배척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어그러지고 과격한 것을 미워하여 배척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50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441] 간장(諫長) : 대사간(大司諫).[註 442]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443]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44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445] 임인년 : 1722 경종 2년.
사신은 말한다. "김호는 신축년444)  ·임인년445)   사이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응견(鷹犬)이었다. 육시(戮屍)를 합계(合啓)한 사람으로 오래 척출(斥黜)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대간(臺諫)의 지위에 다시 들어왔는데, 이명언·김홍석 등을 위하여 조현명이 탕평을 논한 것을 넌지시 배척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어그러지고 과격한 것을 미워하여 배척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조도빈(趙道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을사년446)   개기(改紀)한 처음에 꼭 죽을 뻔한 처지에서 돌아와 경광(耿光)을 뵈었을 때에 전하께서 먼저 신축년447)  ·임인년448)  에 화를 일으킨 참상을 말씀하시고 이어서 제신(諸臣)을 언급하셨는데, 나라를 위하여 죽은 충신을 비록 말하고 싶었으나 다시 더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문득 이런 비상한 거조(擧措)가 있어 분부하시는 글 사이에 열거하신 것이 바로 당비(黨比)를 제목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미 정해진 충역(忠逆)에 관계되겠습니까마는, 의리의 근원까지 아울러 일체 뒤집으셨습니다. 이미 기초(起草)한 성교(聖敎)는 문득 빈말이 되고 이미 죽은 원악(元惡)은 다시 높은 벼슬을 무릅써 차지하였습니다. 더구나 정책(定策)한 제신(諸臣)은 성지(聖旨)를 받들었으니, 공이 있고 공이 없는 것은 본디 논할 것이 없는데 도리어 이것을 제신의 죄안(罪案)으로 삼았으니, 어찌 억울하고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불만한다느니 불충하다느니 하는 말씀은 더욱이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것인데, 곧바로 결단하셨습니다. 오광운(吳光運)의 소(疏)가 나오기에 이르렀는데 그 이른바 사당(私黨)의 부형(父兄)이라는 말은 가리키는 뜻을 더욱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신이 이 때문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곧바로 죽고 싶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卿)이 반드시 거취를 같이하려는 뜻을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하거니와, 이번에 상소한 말도 내 뜻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사직하지 말고 길을 떠나 오라."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장령(掌令) 김호(金浩)의 상소에 대사헌(大司憲)의 제수(除授)에 언급하여 미처 잘 살피지 못한 것이라 하였으나, 양사(兩司)를 통하여 상피(相避)449)  하는 법은 형제에 미치지 않으니, 진실로 논할 만한 일이 있으면 어찌 법외(法外)의 작은 혐의 때문에 인피(引避)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겸설서(兼說書) 이종성(李宗城)이 반드시 면직되고야 말려 하니, 신은 잘 모를 것이 있습니다. 옛날 병술년450)  에 전조(銓曹)에서 신을 설서(說書)에 통의(通擬)하였는데, 그때 괴원(槐院)451)  에서는 회권(會圈)452)  하였으나 정부(政府)에서는 미처 좌차(坐次)를 분간하지 못하고 전조에서도 또한 나누어 익히게 하지 못했으므로 전 사정(司正)으로 의망(擬望)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마침 전랑(銓郞) 박필명(朴弼明)을 만나서 물었더니 ‘김만근(金萬謹)·이방언(李邦彦)도 다 신방(新榜)으로 분관(分館)하기 전에 통의하였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이 친히 들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헌신(憲臣)이 상소한 말은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거니와, 분관하기 전에 통청(通淸)453)  하는 것도 전례가 많이 있었으니, 경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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