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갑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憲府)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적신(賊臣) 임징하(任徵夏)의 죄를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신(人臣)으로서 누가 마음 아프고 피눈물을 흘리며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자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저 일종의 당적(黨賊)은 마음껏 감싸고 가장 낮은 벌로 줄여서 귀양보낸 것도 오히려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후원(喉院)454) 에서 복역(覆逆)455) 하고 옥당(玉堂)이 청대(請對)하고 이어서 또 대신(臺臣)이 발계(發啓)하여 가장 줄인 가벼운 벌도 폐기하고 시행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엄히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청컨대 그때 복역한 승지(承旨)와 청대한 옥당 및 맨 먼저 발의한 대신을 모두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징하로 세상 사람의 반을 몰아넣는 함정을 만드는가? 아! 조종(祖宗) 때에 군·현(郡縣)을 둔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고 귀양보내기 위한 것이 아닌데, 이제는 문득 피차가 교체하는 곳이 되었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한 번 흉당(凶黨)이 나라의 일을 담당한 뒤로는 남인(南人)과 소북(小北)을 끌어들여 등용하여 힘을 합하여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공격할 생각을 하였으므로, 강필경(姜必慶)이 시배(時輩)에게 아부하여 반드시 일망 타진하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51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454] 후원(喉院) : 승정원(承政院).[註 455] 복역(覆逆) : 임금이 내린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여길 경우, 승정원(承政院)에서 임금의 뜻을 거슬려서 다시 아뢰는 것을 말함.
사신은 말한다. "한 번 흉당(凶黨)이 나라의 일을 담당한 뒤로는 남인(南人)과 소북(小北)을 끌어들여 등용하여 힘을 합하여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공격할 생각을 하였으므로, 강필경(姜必慶)이 시배(時輩)에게 아부하여 반드시 일망 타진하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기를,
"사진(使進)할 수 없는 정세가 세 가지 있습니다. 성의가 천박하여 임금에게 의심 받았으니 이것이 첫째이고, 남들과 일을 같이하였는데 신만이 죄를 면하였으니 이것이 둘째이고, 이름이 현고(現告)에 들어 이미 파면되었다가 곧 그대로 벼슬에 있게 된 것이 마치 해사(該司)의 서관(庶官) 같으므로 국가에서 보상(輔相)456) 을 대우하는 예(禮)가 신으로 말미암아서 무너졌으니 이것이 셋째입니다."
하고, 또 종전에 칙사(勅使)가 회피한 예(例)를 끌어대어 전대(傳對)457) 의 직임을 갈아 주기를 구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소 가운데에 세 가지 할 수 없는 뜻을 아뢰었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卿)에 대하여 반드시 치우치게 보전하려고 번번이 차대(次對)458) 할 때에 경을 먼저 물러가게 한 것은 경이 말하지 않아서 도리에 어그러지고 과격한 논의에 매우 저촉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반드시 내 지극한 뜻을 몸받아 즉일로 길을 떠나 와야 한다. 사신[使价]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곧 고쳐 의망(擬望)하게 하겠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소 가운데에 현고라 한 것은 7월 처분 때에 홍치중이 좌상(左相)으로서 현고에 들어 죄파(罪罷)를 같이 당하였는 대신(大臣)에게는 본디 현고하는 규례가 없으므로 상소의 말이 이러하였다. 비지(批旨) 가운데에 경을 먼저 물러가게 하였다는 것은 을사년459) 이후로 홍치중이 육경(六卿)으로서 차대(次對)에 참여하였는데, 입시(入侍)한 신하들이 반드시 징토(懲討)할 것을 말하므로 임금이 번번이 홍치중을 먼저 물러가게 하였던 것이다.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를 신하들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 이 비답을 보게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51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456] 보상(輔相) : 정승.[註 457] 전대(傳對) : 외국에 사신으로 나간 사람이 본국과 상의 없이 임의로 물음에 대답하거나 또는 임시로 일을 처리하던 것.[註 458] 차대(次對) : 매월 여섯 차례 정부 당상(政府堂上)·대간(臺諫)·옥당(玉堂)들이 입시(入侍)하여 중요한 정무(政務)를 상주(上奏)하는 일. 빈대(賓對).[註 459]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사신은 말한다. "소 가운데에 현고라 한 것은 7월 처분 때에 홍치중이 좌상(左相)으로서 현고에 들어 죄파(罪罷)를 같이 당하였는 대신(大臣)에게는 본디 현고하는 규례가 없으므로 상소의 말이 이러하였다. 비지(批旨) 가운데에 경을 먼저 물러가게 하였다는 것은 을사년459) 이후로 홍치중이 육경(六卿)으로서 차대(次對)에 참여하였는데, 입시(入侍)한 신하들이 반드시 징토(懲討)할 것을 말하므로 임금이 번번이 홍치중을 먼저 물러가게 하였던 것이다.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를 신하들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 이 비답을 보게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다."
임금이 또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에게 별유(別諭)를 내렸다. 이때 이광좌는 공주(公州)에 있었는데, 임금이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어 수서(手書)로 돈유(敦諭)하였으나, 이광좌가 그래도 인책하고 오지 않고서 또 왕가(枉駕)를 대신하는 분부를 감히 들을 수 없다 하여 현옥(縣獄)에서 명을 기다렸다. 그러므로 이 명이 있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조정만(趙正萬)이 여러번 사직하는 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대개 정청(庭請)에 같이 참여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는데 전지(傳旨) 가운데에는 음관(蔭官)으로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정원(政院)에서 재촉하기를 청하였는데, 교리(校理) 이광덕(李匡德)이 말하기를,
"인조(仁祖) 때에 정세규(鄭世規)가 음관으로서 비로소 방백(方伯)을 맡았고, 그뒤에 홍득우(洪得禹)·정시선(鄭是先)이 있었으나 매우 드물었는데, 지금까지 한때에 음관인 방백이 많아서 세 사람이나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신이 본디 모르나 조정만은 가는 곳마다 잘 다스리지 못하였는데 외람되게 이 직임을 받았으니, 굳이 부임시켜서는 안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패초(牌招)하여 부임을 재촉하라고 명하였다. 조정만이 끝내 사진(仕進)하지 않으므로, 병조 판서(兵曹判書) 심수현(沈壽賢)이 번신(藩臣)이 여러번 소패(召牌)를 어기는 것은 크게 체통에 관계된다 하여 엄히 벌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갈도록 윤허하였다.
8월 2일 을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광덕(李匡德)을 호남 별견 어사(湖南別遣御史)로 삼았다. 이때 호남에 큰 기근이 들었으므로,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어사를 보내어 안정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드디어 이광덕을 보냈다. 이태좌가 안집(安集)으로 이름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일찍이 안집이라는 이름이 없었으니, 별견 어사라 칭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가례(嘉禮) 때에 쓸 체발(髢髮)을 전례에 따라 함경도에 분정(分定)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 수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전례는 50속(束)이었는데, 20속으로 줄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51면
【분류】왕실(王室) / 재정(財政)
여선장(呂善長)을 다시 청현직(淸顯職)에 의망(擬望)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의 청을 따른 것이다. 여선장은 일찍이 대신(臺臣) 박치원(朴致遠)의 아룀에 따라 귀양갔다. 이때에 이르러 오명항이 아뢰기를,
"여선장은 이제 막 특별히 서용하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장차 다시 전랑(銓郞)에 의망하려 합니다마는, 근년에 당한 일이 애매하므로 여쭈어서 정하려 합니다."
하고, 교리(校理) 이광덕(李匡德)이 말하기를,
"여선장과 이명의(李明誼)는 권익순(權益淳)이 올린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연명(聯名)하였는데 그 글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받았습니다."
하고, 오명항이 말하기를,
"그때 이명의는 집에 있으면서 들어가지 않았고 여선장은 실록청(實錄廳)에서 늦게야 비로소 들어갔고 권익순이 입직(入直)하여 있다가 차자를 올렸는데, 《정원일기(政院日記)》에서 지웠다는 말은 실로 애매합니다."
하고, 이광덕이 말하기를,
"여선장이 들어가서 차자의 초안을 보고 그 글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곧 수정하여 드디어 개본(改本)해서 입계(入啓)하였다면, 각사(各司)에는 다 초본(初本)을 베껴서 전하고 《일기》 가운데에서는 지웠다는 것은 참으로 애매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의 《일기》를 상고하여 보니, 지운 곳이 있었다."
하였다. 이광덕이 말하기를,
"지운 곳은 과연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기(日記)》에서 지운 것은 그 일이 애매하거니와, 이판(吏判)과 유신(儒臣)이 아뢰는 것이 이러하니, 그 사람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전랑과 옥서(玉署)460) 에 의망하도록 하라."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권익순이 여선장과 함께 차자를 고쳐 쓰는 데에 같이 참여하였다면 서로 다를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마찬가지로 거두어 쓰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 정석삼(鄭錫三)가 이 아뢰기를,
"좌상(左相)이 같이 들어가 청대(請對)한 일로써 사진(仕進)할 수 없는 까닭으로 삼습니다마는, 그때 여러 사람이 의논하기를, ‘좌상이 만일 들어가면 거의 구별할 방도가 있을 것이다.’ 하고, 또 조태채(趙泰采)의 지친(至親)으로 인하여 같이 들어가도록 권하였기 때문에 힘써 같이 들어간 것입니다."
하고, 호조 참판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그 지친(至親)이 말하기를, ‘만약 따라 들어가지 않으면 대론(臺論)이 반드시 더 격렬하여질 것이다’고 하기 때문에 좌상이 마지못하여 같이 들어갔는데, 이제 좌상이 이 때문에 스스로 인책하여 남을 대할 면목이 없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윤허하고 윤허하지 않는 것은 좌상이 입대(入對)하고 안 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은데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곧 그 지친도 같이 들어갔다는 것을 말삼았으니, 매우 거칠고 도리에 어그러진다. 좌상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이 분부를 거조(擧條)에 내고 전유 승지(傳諭承旨)를 시켜 좌상에게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을 대사간으로, 송진명(宋眞明)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익녕군(益寧君) 이제(李梯)를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여선장(呂善長)을 겸 교서 교리(兼校書校理)로, 임광(任珖)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8월 3일 병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조석명(趙錫命)·윤유(尹游)를 승지(承旨)로, 이광덕(李匡德)을 겸사서(兼司書)로, 조지빈(趙趾彬)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송진명(宋眞明)을 겸 교서 교리(兼校書校理)로 삼았다.
양사(兩司)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장령(掌令) 김호(金浩)·지평(持平) 이춘제(李春躋)·사간(司諫) 조상경(趙尙慶)·정언(正言)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분노하고 원망하여 근거 없이 선왕의 흠을 들추어내어 반드시 위로는 태묘(太廟)에 고하고 아래로는 팔방에 유시하려 하기를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처럼 한 것은 실로 사적(史籍)에 실린 일이 없었던 변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은 대개 그 사당(私黨)이 지은 죄가 낭자하여 끝내 벗어날 방법이 없으므로 서로 더불어 꾀하기를 ‘선왕의 처분을 죄다 거론하여 모두 병환 때문에 살피지 못한 탓으로 돌리면 우리들의 죄를 벗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조정을 어지럽힐 수 있으나 사방을 어지럽힐 수는 없으니, 또 서로 더불어 꾀하기를 ‘그 일을 가지고 태묘에 고(告)하고 반유(頒諭)하는 일을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러면 사체(事體)를 크게 벌이고 이목(耳目)을 진동하여 거의 듣는 자가 믿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을 것입니다. 아! 그 말이 참으로 거짓이라면 이는 선왕의 덕을 더럽힌 것이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는 선왕의 허물을 드러낸 것입니다. 선왕의 덕을 더럽혔다면 본디 부도(不道)한 것이요, 선왕의 허물을 드러내었더라도 또한 부도한 것이니, 문외 출송(門外黜送)한 죄인 정호는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고, 전 판부사(判府事) 민진원은 우선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정호의 사람됨을 내가 이미 안다. 그러므로 너희 말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처분하였는데, 이번에 아뢴 것은 지나침을 면할 수 없다. 전 판부사 민진원이 소매 속에서 차자(箚子)를 올린 것은 매우 경솔하나, 이것은 평소의 마음이 후중(厚重)하지 못한 탓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아! 인현 성모(仁顯聖母)의 동기로서 남아 있는 자는 민진원 한 사람뿐이니, 팔의(八議)461) 로 논하여도 용서해야 마땅하다. 이른바 ‘우선[姑先]’이라는 두 글자는 깊은 뜻이 있다. 아! 성모께서 계시다면 너희들이 결코 이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임금으로 위에 있으면서 입으로는 탕평(蕩平)을 외되 조정하지 못하므로 이런 논의가 있으니, 이러하고도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특별히 우승지(右承旨) 이인복(李仁復)을 갈았다. 이인복이 상소하여 조정의 신하가 징토(懲討)를 늦추는 것을 배척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리고 그 벼슬을 갈았다.
사신은 말한다. "이인복은 때를 타서 부화(附和)하였으므로, 특별히 갈았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52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이인복은 때를 타서 부화(附和)하였으므로, 특별히 갈았다."
8월 4일 정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8월 5일 무자
신치운(申致雲)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강박(姜樸)을 부교리(副校理)로, 송진명(宋眞明)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윤상백(尹尙白)을 봉교(奉敎)로 삼았다. 윤상백은 계묘년462) 과거에 파방(罷榜)되었다가 복과(復科)된 자이다.
권첨(權詹)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았다. 권첨과 정사효(鄭思孝)는 다 이광좌(李光佐)가 천거하였다. 이때 이광좌는 미처 출사(出仕)하지 못하였으므로 그가 천거한 것을 사람들이 알 수 없었는데, 뒤에 역적이 처형될 때에 이광좌가 비로소 장전(帳殿)에서 스스로 하소하였으므로 드디어 상세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어유귀(魚有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일전의 합계(合啓)는 아주 위태롭고 두렵습니다. 전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으로 말하면 그 죄를 구성한 까닭이 수차(袖箚)463) 에 있으니, 이것을 죄안(罪案)으로 삼는다면 신이 실로 수범(首犯)입니다. 아! 을사년464) 봄에 민진원이 환조(還朝)하여 초토(草土) 가운데로 신을 찾아왔는데 말이 대상(大喪)에 미쳐서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주고받은 것은 사실(私室)에서 한 이야기입니다마는, 민진원이 일찍이 이미 외람되게 신청(宸聽)에 아뢰었으니,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있겠습니까? 신이 민진원에게 말하기를, ‘문득 승하하셨으니 하늘에 사무치는 아픔이 여느 사람보다 훨씬 더한데 따로 매우 한스러운 것이 있다. 임어(臨御)하신 다섯 해 동안에 성후(聖候)가 평상으로 회복되시지 못하였는데,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가 때를 타서 까불어대고 충량(忠良)을 죽여 천고의 누명이 성궁(聖躬)에 돌아가게 하여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거룩한 덕을 더렵혔으니, 만약 혹 이 무함을 씻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였고, 민진원도 목이 메어 말하기를, ‘오늘날 신하로서 마음이 썩고 뼈가 아픈 것은 오직 여기에 있다.’ 하였는데, 그뒤에 연석(筵席)에서 아뢰고 차자로 아뢴 것은 대개 신이 눈물을 흘리며 전한 말에서 딴 것입니다. 또 신이 을사년 겨울에 토역(討逆)하여 복수하는 일 때문에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감히 환후 중에 뭇 흉악한 자가 협박한 정상을 누누이 아뢰었고 정승의 차자 가운데에 있는 속이고 엄폐하였다는 등의 말도 오히려 가벼운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과 민진원은 선왕께서 의리로는 부자(父子)이고 정리로는 외척이니, 대저 어찌 조금이라도 흠을 드러내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지극한 정성과 몹시 급박한 마음으로 함부로 농간하여 속이고 협박한 죄를 밝혀서 광명(光明)하고 인후(仁厚)한 덕이 천 년 뒤에도 밝게 나타나게 하려 한 것이니, 신이 들어가 고한 것과 민진원이 차자를 올린 것은 마찬가지로 구구한 성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호(鄭澔)의 일로 말하더라도 신과 민진원의 뜻과 어찌 다르겠습니까마는, 그가 고유(告諭)하기를 청한 까닭은 반드시 뭇 흉악한 자의 죄가 천지와 후세에서 도피할 데가 없게 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니, 또한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아! 선왕의 대덕(大德)으로도 불행히 천화(天和)의 허물이 있는 것은 온 나라 안의 신민이 함께 근심하고 민망하게 여기는 바인데, 도리어 꺼리지 않고 직언하는 것을 부도(不道)하다고 생각하고 반드시 숨기려 하는 것은 그 뜻이 과연 선왕을 공경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대개 숨기면 허다한 거조(擧措)가 모두 임금에게 돌아가서 인자하고 거룩한 덕이 가리워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숨기지 않으면 전에 없던 참혹한 일이 모두 뭇신하에게 돌아가서 속이고 협박한 죄가 남김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그 숨기려 한 마음을 살펴보면, 신은 그 선왕의 덕을 더럽히고 선왕의 허물을 드러낸 것은 저기에 있고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지난해에 입시(入侍)하여 아뢴 일을 내가 이미 기억하고 있어 경(卿)들의 결코 다른 뜻이 없는 마음도 이미 통촉하였는데, 뜻밖에 억지로 씌우는 죄목이 경에게 무슨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내 뜻을 몸받아 과격한 것을 진정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다시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에게 별유(別諭)을 내리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집(李㙫)을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다.
승지(承旨) 윤유(尹游)가 아뢰기를,
"사신(史臣)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잇달아 겸춘추(兼春秋)를 시켜 대행하게 하는데, 호조(戶曹)·형조(刑曹)·공조(工曹) 3조(三曹)의 낭관(郞官)은 다 음관(蔭官)이므로 다른 데로 옮길 수 없으니, 이뒤로는 3조의 낭관을 문관(文官)으로 차출하여 겸춘추 벼슬을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벼슬자리가 나는 대로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8월 6일 기축
정시 무과(庭試武科)의 초시(初試)를 설행(設行)하였다.
양사(兩司)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장령(掌令) 김호(金浩)·지평(持平) 이춘제(李春躋)·사간(司諫) 조상경(趙尙慶)·정언(正言)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인피(引避)하여 아뢰기를,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상소는 오로지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을 신구(伸救)할 생각에서 나왔는데, 자신이 가로맡아 같이 죄받기를 청하여 반드시 대론(大論)을 막고야 말려는 것입니다. 아! 국구(國舅)가 조정의 시비에 참섭하는 것은 본디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거니와, 이처럼 막는 말이 도리어 선왕의 폐부(肺腑)인 친족에게서 나올 줄 몰랐습니다. 과연 신축년465) ·임인년466) 의 신하들에게 까불어대며 농간하고 속여서 엄폐한 죄가 참으로 있다면, 오늘날의 국구가 바로 그때의 국구인데 그때에는 어찌하여 명백히 말하여 매우 배척하지 않고 이제 문득 선왕의 흠을 근거 없이 들추어낸 사람을 돕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봉상(李鳳祥)·이재항(李載恒)·윤오상(尹五商) 등 여섯 사람의 벼슬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무신(武臣)의 시관(試官)을 세 번 패초(牌招)하여도 사진(仕進)하지 않은 것은 전에 없던 일이기 때문이다.
김성발(金聲發)을 장령(掌令)으로, 박필기(朴弼琦)를 지평(持平)으로, 홍상빈(洪尙賓)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8월 7일 경인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는 사연을 아뢰기를,
"을사년467) 가을에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아룀에 따라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은(銀)과 검(劒)의 일을 다시 사핵(査覈)하게 하였는데 이제 3년이 되어도 아직 복주(覆奏)하지 않았으니, 복주하기 전에는 신이 죄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이의천(李倚天)의 소(疏) 가운데에 있는 스스로 감추고 스스로 드러냈다는 말을 생각하면 이제까지도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합니다. 국청(鞫廳)에서 포청 종사관(捕廳從事官)을 불러다가 봉서(封書)를 내어 주었으면 포장(捕將)이 봉행(奉行)하는 것은 본디 으레 행할 규례이고, 많은 사람이 공초(供招)한 말도 오히려 포청의 사안(査案)에 실려 있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 무함당한 것을 내가 이미 환히 아는데, 경(卿)은 어찌하여 지나치게 혐의하는가? 포청에서 사핵하는 일은 시행하지 말게 하라."
하고, 드디어 명하여 편전(便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이삼이 말하기를,
"포청의 사안(査案)이 아직 입계(入啓)되지 않아서 신의 죄상이 어떠한 것인지 모르니, 실로 신이 무릅써 있을 수 없는 까닭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이제 어떻게 가져다 볼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누누이 위유(慰諭)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신축년468) ·임인년469) 의 화는 모두 이삼과 윤취상(尹就商)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을사년 이후에 대계(臺啓)에 따라 모두 나국(拿鞫)하였는데, 윤취상은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고 이삼은 미처 다 신문하지 못하였다. 마침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녹수(錄囚)470) 할 때에 특별히 놓아주어 영남에 유배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돌보는 것이 여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52면
【분류】사법(司法)
[註 467]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468]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469]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470] 녹수(錄囚) : 죄수의 정상을 심사함.
사신은 말한다. "신축년468) ·임인년469) 의 화는 모두 이삼과 윤취상(尹就商)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을사년 이후에 대계(臺啓)에 따라 모두 나국(拿鞫)하였는데, 윤취상은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고 이삼은 미처 다 신문하지 못하였다. 마침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녹수(錄囚)470) 할 때에 특별히 놓아주어 영남에 유배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돌보는 것이 여전하였다."
도정(都政)471) 을 행하였다. 남취명(南就明)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유준(柳濬)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영돈녕(領敦寧) 어유귀(魚有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양사(兩司)에서 인피(引避)한 사연을 보건대, 가로맡았느니 막았느니 하는 따위 말로 매우 비난하여 배척하였습니다. 지금의 대간(臺諫)들이 스스로 대론(大論)이라 생각한다면 신의 소(疏)에 대하여 조목조목이 분석하여도 괜찮겠으나, 곳곳이 터져서 말이 되지 않으므로 다만 허튼소리와 함부로 말하는 것으로 우물쭈물하는 것은 말이 막히고 조리가 꺾여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신이 양신(兩臣)이 고유(告諭)를 청한 본의를 밝히는 까닭은 바로 선조(先朝)에서 속여 만든 허물을 씻기 위한 것이니, 속인 한 조항은 바로 그들이 스스로 변명할 곳인데 말로써 형용할 수 없어서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또 전일에 말하지 않은 것으로 신을 압제하는 자료로 삼으려고 합니다마는, 그때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이 늘어서서 천총(天聰)을 가리므로 호소할 길이 없고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없어서 하늘에 사무치는 화를 구제하지 못하고 아픔을 머금고 피눈물을 흘렸으니, 반드시 속이고 저버린 죄를 밝혀서 뒤미처 선왕에게 보답하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대신(臺臣)이 인피한 사연은 지나침을 면할 수 없다. 자신이 폐부(肺腑)의 처지에 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겨루어 가려야 하겠는가?"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새로 나온 대론(大論)은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대하니, 이것이 신이 전일 반거(盤據)하여 있을 때에 죽음을 무릅쓰고 극진히 말하다가 도리어 물리고도 스스로 후회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제 와서 경신(更新)하는 처음에 한 번 징토(懲討)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처지인데, 더구나 감률(勘律)이 귀양보내는 것이었을 뿐이니, 신은 아직 그것이 과중한지를 알 수 없습니다. 비록 성상의 지극히 인자하고 크게 믿게 하시는 것으로도 또한 꺾지 못할까 염려하시거든, 신이 어찌 감히 쉽사리 진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국구(國舅)의 소(疏)에는 신이 가만히 이상히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신축년472) ·임인년473) 의 일이 참으로 그 말과 같았다면 그때에 국구처럼 말하기 좋아하는 자가 눈을 부릅뜨고 용맹을 떨쳐 그 속이고 가린 정상을 드러내야만 옳을 것인데, 아깝게도 그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제 내가 경장(更張)하는 때에 네가 오히려 이러하니, 지난해 소 가운데에 임금이 있고 신하가 없다고 한 말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하였다.
8월 8일 신묘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수익(李壽益)을 정언(正言)으로, 이태원(李太元)을 장령(掌令)으로, 이집(李㙫)을 좌빈객(左賓客)으로, 여선장(呂善長)을 교리(校理)로, 윤용(尹容)을 부교리(副校理)로, 남일명(南一明)을 수찬(修撰)으로, 홍정상(洪廷相)을 헌납(獻納)으로, 윤동원(尹東源)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접때의 합계(合啓) 외에도 정유(鄭揉)·이응(李膺) 같은 자가 들추어내어 함해(陷害)한 것은 반드시 신을 죽이고야 말려는 것입니다. 수조(水曹)474) 에서 삭판(削板)을 계청(啓請)한 것으로 말하면 그 헐뜯은 것은 본디 가릴 것도 못되나, 일찍이 대신이란 이름에 있으면서 삭판의 율(律)에 견주어진 것은 3백 년 이래로 신에게서 처음 보입니다. 예빈시(禮賓寺)의 일로 말하면 명목은 해랑(該郞)을 나문(拿問)하기를 청한다고 하였으나 실은 신을 핍박하여 욕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즉일로 길을 떠나 오라고 명하였다.
8월 9일 임진
세자빈(世子嬪)의 초간택(初揀澤)을 행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참의(參議) 조문명(趙文命)·통덕랑(通德郞)·생원(生員) 유숙기(兪肅基)의 딸은 모두 혼인을 금하라."
하였다.
8월 10일 계사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이미 붕당(朋黨)을 펴고 나라의 일을 마음대로 하였다는 죄목을 얻었으니, 을사년475) 의 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종신토록 다시 정승 벼슬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마음에 맹세하여, 이 마음으로 임금에게 고하고 이 마음으로 천일(天日)을 대하고 이 마음으로 가묘(家廟)에 들어가고 이 마음으로 무덤에 올랐습니다. 을사년 이후에 당한 것으로 말하면 더욱이 변괴입니다. 최보(崔補)·정동후(鄭東後)·이태징(李台徵)·홍득일(洪得一)·한세기(韓世基) 및 방만규(方萬規)의 소(疏)에 대하여는 신이 이미 아뢰어 드러냈고 성상께서도 통촉하여 용서하셨으나, 오직 신축년476) 겨울 정청(庭請)할 때의 일에 대하여는 아직 드러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대개 그때 쟁집(爭執)한 신하들도 천지 사이에 있는데 어찌 성상께서 대리(代理)하시는 데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비난하는 것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선왕께서 정무(政務)를 놓으시는 데에 대하여 의리가 감히 받들 수 없었을 뿐입니다. 즉위(即位)하신 원년에는 약원(藥院)477) 에서 하루도 직숙(直宿)하며 의약(議藥)한 적이 없었는데 문득 병 때문에 정무를 놓으시겠다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신이 그때의 정승을 면대하여 책망하기를, ‘이제 만약 굳이 다투어 천의(天意)를 돌리지 못하면 만대(萬代) 뒤에 신하로서의 절의(節義)가 있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합계에 인용한 것이 이것입니다.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말은 본디 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 어느 사람이 처음 만들어 전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까닭 없는 일입니다. 국문(鞫問)에 관한 일로 말하면 임인년478) 3월 그믐날에 비로소 시작되었으나 신은 7월부터 비로소 국문에 참여하고 11월에 이르러 갈렸습니다. 유취장(柳就章)의 결안(結案) 때 날짜를 전하여 쓴 것이 하루 어긋나는 것을 유취장이 말하여 즉시 고쳤는데 옥사(獄辭)에 증감(增減)한 것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을 속인 것입니다. 심진(沈搢)이 승복(承服)할 때에 임하여 정신이 어둡고 말이 헛갈리므로 신이 위관(委官)에게 청하여 형신(刑訊)을 멈추고 인하여 가두어 두었다가 며칠 밤을 지나서 다시 추문(推問)하였더니 도로 깨어나서 명백히 공초하였는데, 곧 심진이 죽음에 임박하여 어지러이 공초하였다 하여 금오리(金吾吏)를 국문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차례 엄하게 형장(刑杖)을 맞고 곧 죽었으니 죄 없는 자가 참으로 가엾은데, 그 속이고 어지럽히는 것이 이토록 심합니다. 가만히 듣건대, 신이 안치(按治)하여 승복한 역적은 모두 역안(逆案)에서 벗어났다 하니, 그렇다면 잘못 안치한 죄는 죽어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곧 이 한 가지에서도 이미 사진(仕進)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돈면(敦勉)하고 누누이 허물을 용서하고 곧 길을 떠나 오게 하였다.
함경 도사(咸鏡都事) 민원(閔瑗)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적(載籍) 이래로 역적 김일경(金一鏡)같은 흉역(凶逆)이 있지 않았으니, 이 역적에 대하여 용납하고 감싸려는 마음을 품은 자는 결코 전하의 신하가 아닙니다. 저 이정응(李挺膺)이라는 자가 감히 불쑥 나와서 김영해(金寧海)에 대한 논계(論啓)를 곧바로 멈추었으니, 이것은 그 마음에 역적 김일경이 있는 것만을 알고 임금이 있는 줄을 모르는 것인데, 전하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것이 너무 지나치셨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이 징계되고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서 오광운(吳光運)·윤유(尹游)·강박(姜樸)의 무리가 잇달아 상소하여 가리키는 뜻이 흉참(凶慘)하였고 김호(金浩)가 다시 상소하기에 이르러서 극진하였습니다. 흉역이라는 따위 말을 방자하게 상소하는 글에 나타냈으니, 아! 통탄합니다. 대저 4대신(四大臣)479) 이 사직을 위하여 죽은 충성은 해와 별처럼 빛나므로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맨 먼저 성대한 은전(恩典)을 베풀어 시호(諡號)를 내리고 사우(祠宇)를 세우셨으니, 이제 전하 앞에 진언(進言)하는 자가 감히 ‘역(逆)’자나 ‘흉(凶)’자를 붙이는 것은 유봉휘(柳鳳輝)·김일경이 뜻을 얻었을 때를 당하여 위세에 몰려 어지러이 한 군데로 돌아간 것과 본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제 충역(忠逆)이 이미 가려진 뒤에 있어서도 감히 이러한 흉역이라는 말을 마음에 싹틔어서 입에서 나왔으니, 이는 그 마음이 과연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일전에 오광운에게 답하신 비지(批旨)와 정원(政院)에 내리신 분부는 ‘흉’자를 금하고 물리치기 위한 것이므로 또한 성의(聖意)가 굳게 정해진 것을 또한 알 수 있는데, 위에서는 바야흐로 막아도 아래에서는 그대로 일컬어 임금의 명이 있지도 않은 양 반드시 이기려고 다투려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명언(李明彦)을 추장(推奬)한 것도 또한 매우 음흉합니다. 저 이명언은 유봉휘·김일경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에 서둘러 감싸고 오직 그가 오는 것이 혹 늦을세라 염려하여 도민(都民)이 그가 오기를 날마다 바란다는 말로 성총(聖聰)을 속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이명언처럼 음해하고 이명언처럼 완악한 자가 김일경과 함께 왕법(枉法)에 처형되지 않은 것도 그로서는 다행이거니와, 도민이 그가 올세라 염려하여 소매 속에 자갈을 넣고 기다린다고 한다면 되겠으나, 어찌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 하여 곧 이런 말을 상소하는 글에 썼단 말입니까? 이것은 속이는 것일 뿐이 아니라 업신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양사(兩司)의 합계(合啓)는 두 대신의 죄안(罪案)을 구성하려는 방법이 치밀하고 참혹하며 다시 방자하게 살육하려는 뜻이 말 사이에 등등합니다. 아! 선조(先朝)의 기구(耆舊)인 신하가 이미 참벌(斬伐)의 화를 겪어 남은 자가 얼마 안되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차마 다시 김일경·목호룡(睦虎龍)의 잔당이 이토록 극진히 마음대로 씹게 하십니까?"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 소본(疏本)을 보니, 온 편(篇)의 정신이 모두 처분을 현란하게 하려는 의도에 있다. 이러한 마음껏 자효(自効)480) 하는 소는 차마 바로 볼 수 없고 또한 다스리고 싶지도 않으니, 이 소를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창녕(昌寧)의 유학(幼學) 배진삼(裵晉三)이 상소하여, 이정청(釐正廳)에서 구습(舊習)을 따라 세월을 끌며 실혜(實惠)를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이어서 여러 가지 폐단을 바로잡는 방책을 아뢰었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묘당(廟堂)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8월 11일 갑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오명신(吳命新)이 말하기를,
"민원(閔瑗)을 엄하게 매우 배척하지 않으면 이 뒤로 이러한 무리가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이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어떻게 사지(四肢)를 펴고 나라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원의 심술이 바르지 않아서 자효(自効)할 생각에서 나온 것을 죄주면 그 자효하려는 생각에 적중할 것이므로, 다스리지 않을 뜻을 보였다. 이미 내가 다스리고 싶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제 어찌 죄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오명신이 누누이 아뢰어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오명신이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당론(黨論)은 선조(宣祖) 때부터 폐조(廢朝)481) 까지 그 화가 매우 심하였고 대북(大北)482) 이 국사를 마음대로 하여 종사(宗社)가 망하려 하였습니다. 인조(仁祖)께서 등극하실 때에 반정 공신(反正功臣)은 다 서인(西人)이었으나 인조께서 오로지 서인에게 맡기지 않고 당론을 매우 배척하여 초정(初政)에 이원익(李元翼)을 영상(領相)으로 삼고 정경세(鄭經世)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으시고 전랑(銓郞)이 통색(通塞)을 주장하는 것이 편론(偏論)의 근저가 되므로 낭천(郞薦)을 폐지하라고 명하기까지 하셨습니다. 나만갑(羅萬甲)·박정(朴炡)·유백증(兪伯曾)은 다 일대(一代)의 귀중한 신하이었으나 당론 때문에 귀양보냈는데, 고(故) 상신(相臣) 장유(張維)가 이판(吏判)으로서 나만갑 등을 구호하다가 또한 출보(黜補)되었으므로, 그때 당론이 감히 방자하게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효종(孝宗)·현종(顯宗) 때에는 의정(議政)·전조(銓曹)를 다 참용(參用)시켰는데, 현종 말년에 예론(禮論) 때문에 당론이 다시 치열해져서 오늘날에 이르러 극진하였습니다. 위에서 인조께서 당론을 타파하신 성의를 우러러 몸받으시면 어찌 그 보람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동경연(同經筵)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성고(聖考)의 관례(冠禮) 때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이 겸찬선(兼贊善)이고 고(故) 참판(參判) 신(臣) 이유태(李惟泰)가 찬선(贊善)이었는데, 모두 진참(進參)하였습니다. 이제 왕세자의 관례가 멀지 않은데 찬선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겸찬선은 차출해야 할 듯합니다마는, 찬선 김간(金榦)은 나이가 80이 넘었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제두(鄭齊斗)가 겸찬선이 되어야 하겠으나 또한 나이가 80에 가깝습니다. 그가 반드시 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으니, 조정에서 별유(別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겸찬선은 이미 선조에서 행한 전례가 있으니, 차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태좌가 또 말하기를,
"진선(進善)·자의(諮議)에 합당한 사람이 있으면 또한 차출하여 인원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찬가지로 차출하라."
하였다.
홍상용(洪尙容)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승지(承旨) 윤유(尹游)가 민원(閔瑗)의 소 때문에 상소하여 인혐(引嫌)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제두(鄭齊斗)가 사직하는 소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해 대론(大論)이 개정(改正)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홀로 은비(恩庇)를 받았습니다. 전에 탄핵한 것이 시행되지 않았을 뿐이 아니라 이에 도리어 총애하여 간택하는 반열에 놓으셨으니, 어찌 허물받은 천한 자로서 조정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卿)이 무함받은 것은 환히 안다마는, 개탄스러운 것은 무함이 산림(山林)에 미친 것이다. 선조(先朝)에서 동궁(東宮)의 관례(冠禮) 때에 이미 찬선(贊善)이 진참(進參)하는 예(禮)가 있었거니와, 전례가 없더라도 불러와야 할 것인데, 더구나 전례가 있는 것이겠는가? 경은 문득 뜻을 바꾸어 올라와서 내 희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임광필(林光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민원(閔瑗)의 소(疏)는 처분을 현란하게 하되 그 음흉하고 교묘함이 극진하여 반드시 한 세상 사람을 죄다 참소(讒訴)하여 해친 과죄로 몰아넣으려고 하면서 충직하다고 자처하니, 청컨대 엄히 견책하여 배척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하였다.
수찬(修撰) 신치운(申致雲)이 상소하여, 근년에 무함받은 억울함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신(臣)이 외람되게 관록(館錄)483) 에 들어간 것은 대개 승륙(陞六)484) 뒤에 있었고 또 일찍이 삼사(三司)로 자처하였으나, 이제 이미 올랐던 자급(資級)이 도로 낮추어짐을 면하지 못하여 5년 뒤에 다시 전적(典籍)에 붙여졌으면 삼사의 이력은 절로 빠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찌 5년 뒤에야 비로소 6품이 된 사람이 도리어 5년 전의 이미 먼지가 된 관록에 의거하여 벼슬받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벼슬을 삭제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미 용서하였는데 줄곧 인혐(引嫌)하여 다시 6품이 된 일을 가지고 버티는 구실로 삼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사간(司諫) 조상경(趙尙絅)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가 두 번 상소한 데에 대하여 아주 놀랍고 두려워함이 있습니다. 대론(大論)이 바야흐로 펼치어지고 있는 이때를 당하여 처지가 혐의스럽다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한 번 상소하고 두 번 상소하여 공론과 다투어 이기려 하고 차라리 선조(先朝)를 저버릴지언정 반드시 사당(私黨)을 감싸려 하니, 신은 매우 염려됩니다. 또 민원(閔瑗)의 상소는 그 떠드는 것이 모두 시험해 보려는 계책이어서 합사(合辭)를 배척하는 말이 그지없습니다. 국구(國舅)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도 이미 용서하셨는데 민원이 이어서 일어나 방자한 생각대로 허구 날조(虛搆揑造)하였으니, 신은 통탄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접때 국구가 상소한 것은 비록 온당하지 못하기는 하나 아뢰어 밝히려는 데에 뜻이 있었으니, 이제 네가 차라리 선조를 저버릴지언정 반드시 사당을 감싸려 한다고 한 말은 매우 미안하다."
하였다.
판윤(判尹) 권업(權𢢜)이 상소하여 고향에 돌아갈 뜻을 고하고 소 끝에 면계(勉戒)하는 말을 대략 언급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卿)이 반드시 거취를 같이하려는 것은 이미 지나치거니와, 소 끝에 면계할 것은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설서(說書) 한사선(韓師善)이 상소하여, 그 아버지 한배하(韓配夏)가 진재해(秦再奚)를 구박하여 목호룡(睦虎龍)의 화상을 만들었다는 억울한 일을 하소하고, 또 한배하가 일찍이 민진후(閔鎭厚)의 교만하고 방자한 죄를 논하였으므로 민진원(閔鎭遠)의 말이 보복하려는 데에서 나왔다고 말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보복이라는 말은 미안하다.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가 자신을 삼가고 나라에 몸바친 것은 내가 안 지 오래거니와, 교만하고 방자하다는 죄목은 더욱이 놀랍다."
하였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장계(狀啓)하여 안성 군수(安城郡守) 서종집(徐宗集)을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나추(拿推)하게 하였다. 서종집은 서종섭(徐宗燮)의 형이다. 이때 문신(文臣)·남행(南行)485) ·무신(武臣)을 물론하고 벼슬을 버리고 사진(仕進)하지 않는 자가 많았는데, 임금이 그들이 거취를 같이하려는 것을 노여워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8월 15일 무술
호남 어사(湖南御史) 이광덕(李匡德)을 인견(引見)하여 친히 봉서(封書)를 주어서 보냈다.
승지(承旨) 정석삼(鄭錫三)이 아뢰기를,
"접때 정청(庭請)의 현고(現告) 가운데에서 무신(武臣)과 음관(蔭官)을 성상께서 구별하셨으니, 은혜를 생각하고 의리를 두려워하여 마음을 다하여 직무에 이바지해야 할 것인데, 장성 부사(長城府使) 김언희(金彦熙)와 그 밖의 두세 사람이 글을 올려 갈리기를 꾀하였고 이조(吏曹)에서 이것을 허용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모두 이것을 표준삼아 반드시 거취를 같이하려 하여 직무를 폐기하기까지 하여 백성이 그 폐해를 받으니, 각별한 처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마땅히 처분하겠으나, 음관(蔭官)은 이미 과목(科目)에 들어서 발신(發身)한 것이 아니니 의리를 대하는 것이 현관(顯官)과 다른데, 이제 만약 이 때문에 벌주면 앞으로 도리어 저희 가운데에서 추장(推奬)될 것이니, 오늘날 벌주는 것은 곧 상주는 것과 같다. 인정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므로 일률(一律)486) 은 마땅히 꺼리어 할 것인데, 혹 괴이한 자는 비록 일률에 들어가더라도 음식을 먹듯이 보통 형벌처럼 여기니, 이것은 줄곧 뜻대로 버려둘 수 없다. 일전에 서종집(徐宗集)도 나추(拿推)된 것은 뭇사람이 다 아는 것이다. 실병(實病)과 정세가 안정할 수 없는 자 이외에 국가에서 신칙(申飭)하여도 끝내 직무에 이바지하지 않는 자는 정배(定配)하는 것이 그 도리에 마땅하다."
하였다.
김동필(金東弼)·송성명(宋成明)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8월 16일 기해
임금이 숭릉(崇陵)487) 을 배알(拜謁)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으며, 예가 끝나고서 오릉(五陵)을 봉심(奉審)하였다. 승지(承旨)들이 나아가 말하기를,
"날씨가 아직 더운데 성체(聖體)가 노동(勞動)하셨으니, 오릉을 어찌 죄다 봉심하실 수 있겠습니까? 선조(先朝)에서도 또한 대신(大臣)을 보내어 봉심한 전례가 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회란(回鑾)할 때에 주정소(晝停所)488) 에 나아가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차원(差員)·수령(守令)을 불러서 보고 민폐(民弊)를 물어 아뢴 바에 따라 묘당(廟堂)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날 임금이 능소(能所)에 갔을 때에 겨우 막차(幕次)에 들자 포장(布帳)에서 불이 났으므로, 조정에서 문안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장전(帳殿)은 불이 날 곳이 아닌데 친림하여 앉아서 재계(齋戒)할 때에 이런 비상한 변이 있었으므로, 구치(雊稚)에 비하면 그 경고한 것이 더욱이 현저한데, 수가(隨駕)한 신하 가운데에 한 사람도 경계를 아뢰는 자가 없었으니, 예전에 이른바 일에 따라 경계를 아뢴다는 뜻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을사년489) 에 신하들을 한꺼번에 배척하여 내보낸 것은 대개 날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올리고 한 가지도 뜻대로 따르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뜻을 얻게 된 무리가 말마다 일마다 반드시 순히 받들어 영합하여 오래 보전하는 방도로 삼았으니, 이번에 뜰에서 문안하기만 하고 끝내 경계를 아뢰는 말이 없었던 것은 그 형세가 본디 그러할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54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487] 숭릉(崇陵) : 현종과 그 비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능.[註 488] 주정소(晝停所) : 임금이 거둥하는 도중에 잠깐 머물러 낮 수라를 들던 곳.[註 489]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사신은 말한다. "장전(帳殿)은 불이 날 곳이 아닌데 친림하여 앉아서 재계(齋戒)할 때에 이런 비상한 변이 있었으므로, 구치(雊稚)에 비하면 그 경고한 것이 더욱이 현저한데, 수가(隨駕)한 신하 가운데에 한 사람도 경계를 아뢰는 자가 없었으니, 예전에 이른바 일에 따라 경계를 아뢴다는 뜻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을사년489) 에 신하들을 한꺼번에 배척하여 내보낸 것은 대개 날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올리고 한 가지도 뜻대로 따르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뜻을 얻게 된 무리가 말마다 일마다 반드시 순히 받들어 영합하여 오래 보전하는 방도로 삼았으니, 이번에 뜰에서 문안하기만 하고 끝내 경계를 아뢰는 말이 없었던 것은 그 형세가 본디 그러할 것이었다."
8월 17일 경자
임금이 다시 별유(別諭)를 내리고 같이 올 승지(承旨) 조최수(趙最壽)에게 명하여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에게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대개 조태억이 여러번 불러도 오지 않은 것은 현옥(縣獄)에서 명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이 졸(卒)하였다. 혼은 종신(宗臣) 가운데에서 어질다는 이름이 있는 이이므로, 임금이 놀라와 하고 슬퍼하였다.
8월 19일 임인
세자빈(世子嬪)의 재간택(再揀擇)을 행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초간택(初揀擇) 때에 혼인을 금한 여자 세 사람을 삼간택(三揀擇)에 들어와 참여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0일 계묘
왕세자(王世子)의 관례(冠禮) 때의 교서(敎書)에는 하루 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를 누르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전례를 상고하여 여쭌 것을 따른 것이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가 관례(冠禮)를 치른 이튿날에 대전(大殿)·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왕대비전(王大妃殿)·중궁전(中宮殿)에 조알(朝謁)하였는데, 《등록(謄錄)》에서 상고하여 보면 경술년490) ·을해년491) 에는 대전에 조알할 때에 전하께서는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시고 승지(承旨)·사관(史官)은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왕세자는 면복(冕服)을 갖추고 궁관(宮官)은 조복(朝服)을 입고 예(禮)를 거행하고 예가 끝나고서 이어서 각전(各殿)에 가서 조알하였으나, 접때 대내(大內)에서 조알할 때에는 을사년492) 의 전례에 따라야 한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대전의 조알도 또한 장차 대내에서 거행할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전에서 전례대로 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冠禮) 때에 아청직령(鴉靑直領)·도대(絛帶)를 처음 나올 때의 차림으로 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세자 관례 절목(世子冠禮節目)에 대하여 통례(通禮)와 예모관(禮貌官)이 생소함을 면하지 못하고, 당상(堂上)이 예를 행할 때에는 예모관이 다 들어가 참여하지 못하고 다만 빈(賓)과 주인(主人)·찬관(贊冠)만이 오로지 행례(行禮)를 맡는데, 만일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드시 착오될 걱정이 있을 것이므로 전부터 시강원(侍講院)의 관원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가려 정하여 의주(儀註)를 가지고 들어가 참여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또한 전례에 따라 가려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우량(鄭羽良)을 정언(正言)으로,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을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삼았다.
장령(掌令) 홍상용(洪尙容)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오직 저 삼수(三手)493) 의 적(賊)은 참으로 사적(史籍)에 없던 흉역(凶逆)인데, 어찌 역적 목호룡(睦虎龍) 하나가 처형되었기 때문에 문득 죄를 깨끗이 벗겨 줄 수 있겠습니까? 죄를 씻어 주는 것도 모자라서 칭찬하고, 칭찬하는 것도 모자라서 관작(官爵)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내리고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니, 천하(天下)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유사(攸司)에 명하여 한결같이 국안(鞫案)에 따라 모두 시행(施行)해야 할 율(律)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소(疏) 가운데에 아뢴 것은 대신(大臣)이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려 처분(處分)하겠다."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강박(姜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전에 상소한 데에서 대개 선왕의 병환을 반포(頒布)한 것이 죄가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국구(國舅)가 선왕께서 병환이 있어서 협박당하신 것을 뒤미처 드러낸 것을 가지고 스스로 충성이라 하였습니다. 아! 병환이 있어서 살피지 못하시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전담해야 할 것인데, 어찌 협박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미 협박이라 하였으면 이는 위권(威權)이 아래에 있다는 것이고 병환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환도 오히려 차마 이제 와서 뒤미처 제기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차마 협박을 말합니까? 국구가 반드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대개 접때의 처분을 충량(忠良)을 죽인 것으로 돌리려는 것입니다. 과연 충량을 죽인 것이라면 그때에 말해야 할 것이 마땅히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녹훈(錄勳)을 사양한 일은 자기에게 관계되는 일이므로 더욱이 생각하는 바를 곧바로 아뢰어 그 협박하고 살해한 죄를 밝혀야 할 것인데, 그때 상소한 말은 범연한 말에 지나지 않았고, 원훈(元勳)은 한 마디 말도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한 번 상소하고 두 번 상소하여 배척하여 말하기를 마지않으니, 백세(百世) 뒤에도 속일 수 없는 것을 왜 그럽니까? 민원(閔瑗)의 상소로 말하면 더욱이 아주 도리에 어그러집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국구의 상소는 다른 뜻이 없으니, 장황하게 벌여 말하는 것이 마땅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심단(沈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두렵고 억울한 것은 정우관(鄭宇寬)·심정옥(沈廷玉) 두 사람의 공초(供招)에 있는데, 신은 정우관에게 일찍이 원한을 맺은 일이 있습니다. 대개 신축년494) 신이 기사 당상(耆社堂上)이 되었을 때에 정우관이 꾀하여 기사의 관문(關文)을 얻어내어 평안 병사(平安兵使)에게서 4천 금(金)을 빌었다는 것을 듣고 신이 서영(西營)495) 에 관문을 보내어 독촉하여 받아들이게 하였는데, 정우관이 이 때문에 원망하여 가는 곳마다 헐뜯고 욕하였습니다. 오직 저 일종의 시배(時輩)의 의논이 남을 무함하기에 바빠서 정우관의 거짓 공초를 주워 모아 심정옥의 문목(問目)을 만들어 갖가지로 다그치니, 저 심정옥이 시배의 뜻을 따랐습니다. 여러 차례 형신(刑訊)한 뒤에 마침내 전의 공초에 없던 말을 새로 만들어, 신축년 7월에 신을 김일경(金一鏡)의 집에서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김일경과 평소에 모르고 지나다가 신이 신축년 섣달에 패초(牌招)를 받고 대궐에 나아가서 비로소 정석(政席)에서 얼굴을 보았으니, 공석(公席)에서 여러 사람이 본 것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백망(白望)이 공초한 한 건과 같다면 한 번 웃을 것도 못됩니다. 바야흐로 육현(陸玄)의 옥사(獄事)를 당하였을 때에 신이 마침 금오(金吾)496) 의 수석(首席)이었는데 그가 육현의 무리가 차례로 잡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으므로 사람들과 수작할 때에 신의 관직과 성명을 말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신에게 무슨 허물을 끼칠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접때 대계(臺啓)에 ‘긴출(緊出)’이라는 두 글자가 나오기 시작하였으니, 어찌 그렇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심합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전일의 일은 내가 이미 통촉하였는데 경(卿)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하였다.
황주 목사(黃州牧使) 원명귀(元明龜)·평산 부사(平山府使) 송상유(宋相維)·간성 군수(杆城郡守) 김양겸(金養謙)·공산 판관(公山判官) 유두기(兪斗基)가 모두 병을 핑계하여 벼슬을 버렸다. 대개 정청(庭請)에 같이 참여한 사람들인데, 도신(道臣)이 모두 장청(狀請)하여 파직(罷職)하였다. 창평 현령(昌平縣令) 유광기(兪廣基)·임실 현감(任實縣監) 조상강(趙尙綱)·동복 현감(同福縣監) 유업기(兪業基)도 병을 핑계하여 부임하지 않았는데, 다 파직하였다. 이때 조정의 형상이 바뀌었으므로, 음관(蔭官)으로서 조금 자중하려는 자도 다 이와 같이 사진(仕進)하지 않았다.
사어(司禦) 한원진(韓元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징토(懲討)하는 의리를 신도 여러 번 아뢰었으니, 죄가 같은 것을 홀로 면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아! 전하의 이 거조(擧措)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접때 조정의 신하가 어질고 간사한 것과 죄가 있고 없는 것은 스스로 평소에 알 수 있었고 하루 사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전하께서 평소에 과연 그 사람이 다 간사하고 죄가 있다는 것을 아셨다면, 어찌하여 그 간사한 것을 지적하여 배척하고 그 죄를 낱낱이 들어서 꾸짖지 않으시고, 도리어 3년 동안 의지하여 나라의 일을 같이하며 일찍이 그 사람들을 간사하게 여기지 않고 그들이 지키는 대의(大義)를 죄로 여기지 않으셨습니까? 문득 잠시 사이에 그 사람들을 갑자기 배척하여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무리라 하고 갑자기 그 일을 가리켜 무리를 맺어 보복하는 사사로운 일이라 하며, 아침에 한 당(堂) 안에서 찬성하지 않았다 하여 저녁에 궁문(宮門) 밖으로 물리치고 꾸짖어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시니, 신은 참으로 전하의 이 거조가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혹 한 마디 말이 거슬리는 것으로 천노(天怒)가 갑자기 일어나서 다시는 그 사람의 현사(賢邪)와 그 죄의 유무를 논하지 않고 오직 마음에 통쾌하게 이기려고 힘쓰는 것만을 주장하십니까? 아니면 혹은 천심(天心)에 참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여 그 죄를 깊이 기억하되 우선 너그러이 용서하다가 때를 기다려서 나타내는 것입니까? 전에 연유한 것이라면 전하께서 함양(涵養)하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기쁨과 노여움을 나타내는 것이 그 정당함을 얻지 못한 것이요, 뒤에 연유한 것이라면 전하께서 극복(克復)하는 공부에 지극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아랫사람을 어거하는 도리가 전혀 성실하지 못하신 것이니, 이 병통이 제거되지 않으면 종사(宗社)와 백성이 길이 의뢰할 데가 없어져서 이번의 한 가지 거조가 잘못되는 데에 그칠 뿐이 아닐 것입니다.
또 전일의 정신(廷臣)은 그 재지(才智)를 논하면 신도 그 능한 것을 알지 못하나, 그 유(類)로 말하면 본디 군자(君子)입니다. 그들이 군친(君親)의 의리와 역순(逆順)의 분별에 대하여 강구한 것이 명백하고 전하여 받은 것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선 4, 50년 동안의 가까운 일로 말하더라도 매양 나라에 사고가 있을 때를 당하여 그 충성을 바치고 절의를 다하여 죽건 살건 변하지 않고 종사를 붙들고 강상을 세우는 것은 이 한편 사람들에게 힘입었을 뿐이니, 전하께서 시험삼아 귀와 눈으로 보고 기억하시는 것으로 상고하여 보시더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염구(冉求)497) ·중유(仲由)498) 를 논하여 이미 구신(具臣)499) 이라 하고 나서 또 아버지와 임금을 시해(弑害)하는 것은 따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정하였으니, 대개 스스로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도 배척하여 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세도(世道)가 쇠퇴하여 난적(亂賊)이 횡행하는 때를 당하여 더욱이 이에 충의(忠義)를 대대로 지켜 정기(正氣)가 있는 곳에 대하여 힘껏 보호하여 국맥(國脈)을 오래가도록 해야 할 것인데, 이제 곧 하루아침에 배척하여 끊어서 도리어 기사년500) 의 유얼(遺孼)과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잔당으로 하여금 팔을 걷어붙이고는 함부로 입을 열어 그 죄를 논하려 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또 삼가 7월 5일의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정녕하고 간절한데 그 대의(大意)를 요약하면 다만 ‘파붕당(破朋黨)’ 세 글자에 있었습니다. 붕당을 타파하는 것은 참으로 국가에서 먼저 힘쓸 일인데, 신이 보면 전하께서 붕당을 타파하는 방도가 신이 들은 것과 다릅니다. 대저 붕당을 타파하는 한 일은 옛사람이 행한 것이 있는데 대순(大舜)이 사흉(四凶)501) 을 주벌(誅罰)하고 원개(元凱)502) 를 천거한 것이 그것이고, 옛사람이 말한 것이 있는데 공자(孔子)가 곧은 것을 들어서 굽은 것에 놓으면 굽은 것을 곧게 할 수 있다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밖에는 다른 방법이 결코 없는데, 이제 전하께서는 어진 자와 간사한 자가 서로 용납하고 굽은 자와 곧은 자가 함께 있게 하여 억지로 탕평(蕩平)하게 하려 하시니, 전사(前史)를 두루 보아도 어찌 이렇게 하고서 붕당을 타파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붕당은 사정(邪正)이 구별이 전세(前世)에 비하여 더욱 명백합니다. 그 근원에서 갈라진 곳으로 말하면 대개 사문(斯文)의 변에서 말미암았는데, 병신년503) 의 처분이 시비를 크게 정하여 임금의 가르침에 분명히 나타나 있으므로 백세(百世) 뒤에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류(末流)에서 격렬해진 것으로 말하면, 저들이 갑술년504) 이후에 역적을 감싸는 무리가 되고 신축년505) ·임인년506) 이후에 김일경·목호룡의 무리가 되었는데, 이것은 대의(大義)를 지켜서 토죄(討罪)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시비를 의심할 만하고 사정을 구별하지 못할 것이겠습니까? 맹자(孟子)가 말한 것은 처음에 조금 빗나가면 나중에는 천리(千里)가 어그러지는 것이어서 화살을 만드는 사람과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마음쓰는 것이 같지 않다 한 것이니, 전하께서 아울러 용납하게 하시려는 것은 본디 이미 옳지 않거니와, 더구나 다시 김일경과 목호룡의 당으로서 일찍이 참혹한 도륙을 방자히 하던 자로 하여금 그 권세를 잡게 하여 아름다운 탕평을 이루도록 요구하시니, 어찌 그르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비록 성상의 영위(英威)를 두려워하여 아직은 감히 뜻대로 흉악을 부리지 못하더라도 칼날을 감추었다가 조만간에 기회를 타서 마침내 반드시 다시 크게 방자하게 굴면 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될 것이니, 아!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이미 숙종(肅宗)의 처분을 병환 중에 뭇 소인이 속인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선왕의 본의가 아니라 하고, 또 경종(景宗) 때에 세자를 세우고 대리(代理)하게 하신 것을 뭇 신하가 협박한 데에서 말미암았다 하여 곧 시킨 것과 같다는 따위 말로 임금을 가리켜 배척하고, 또 김일경·목호룡과 앞뒤가 되어 일을 같이하였는데도, 그 죄를 성토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임금을 근거 없이 헐뜯고 흉역(凶逆)을 편들어 도운 것은 백세(百世)의 의논이 반드시 돌아가는 데가 있을 것인데, 이들을 시켜 국론(國論)을 조정하고 세상을 탕평하게 하려 하여도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또 가만히 저들을 보건대, 위과(僞科)의 회복을 급히 청하고 오적(五賊)에 대한 논계(論啓)를 급히 멈추고 목시룡(睦時龍)·김영해(金寧海)에 대한 논계를 혹 멈추기도 하고 빼기도 하며 곧 다시 인피(引避)하기를 한 번 하고 다시 하여 성상의 뜻을 탐색하여 보는 것은 그 뜻이 오로지 김일경·목호룡을 신리(伸理)하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대개 역적 목호룡이 신리되지 않으면 일을 같이한 무리도 끝내 스스로 당역(黨逆)의 죄에서 벗어나서 전하의 조정에 다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혹 김일경·목호룡을 뒤미처 신리하고 한편 사람들에게 다시 죄를 준다면 저 흉악한 마음은 비록 위로하여 기쁘게 할 수 있겠으나, 천지의 기강이 떨어지고 종사(宗社)가 백세에 헐뜯기는 것은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전하의 조정에 감히 사대신(四大臣)을 토죄(討罪)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자가 있다 합니다. 대개 그 사대신의 죄를 구성하여 토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세자를 세우고 대리하게 한 두 가지 일을 도운데에 있는데, 만일 이것을 반역이라 한다면 선왕께서 종사를 위하여 대책(大策)을 정하신 것과 전하께서 명명(明命)을 받아서 세자 자리에 오르신 것과 자성(慈聖)께서 성고(聖考)의 유의(遺意)를 따르고 경종의 지극한 덕을 도우신 것이 다 오늘날과 후세에서 할 말이 있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 임금 자리를 주고받는 것은 천하의 큰일인데, 진실로 조금이라도 명백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백세에 드리워 보일 수 없을 것이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우리 인종(仁宗) 원년에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이 세제(世弟)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선정신 이황(李滉)이 이 일을 간책(簡冊)에 썼고, 숙종 정유년507) 에도 대신이 세우기를 청함에 따라 곧 대리하는 일을 결정하였는데 그때 이 때문에 토죄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신축년에 분부를 따른 사람은 바로 정유년에 청한 신하이니, 같은 사람이 같은 일을 한 것인데, 정유년에 있던 일은 죄로 여기지 않고 신축년에 있던 일만 반드시 반역으로 여기는 것은 신이 이것이 무슨 의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게 한 것은 전하의 허물입니다. 네 충신의 억울함을 이미 씻어 주었으면 죄를 꾸며서 죽인 사람은 본디 받아야 할 벌이 있을 것이고, 김일경·목호룡이 이미 처형되었으면 악한 짓을 같이 한 무리는 마땅히 먼저 죽이는 법에 따라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시비를 시원히 바루고 전형(典刑)을 명백히 보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돌리고 백세에 드리우지 못하시고, 처음에는 일체 고식(姑息)하다가 마지막에는 거조(擧措)가 거꾸로 되어 드디어 어그러지고 어지러운 말이 임금 앞에 번갈아 나오게 하셨으니, 신은 가만히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번 처분은 한때 과격한 번뇌(煩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제 네가 상소하여 논한 것은 내 뜻을 살피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조태상(趙台祥)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들은 어머니에 대하여 끝내 끊을 수 없는 은혜가 있고, 신하는 임금에 대하여 불경(不敬)할 수 없는 의리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선강(宣姜)은 송환공(宋桓公)이 내친 아내인데도 선유(先儒)가 오히려 양공(襄公)이 예(禮)를 다한 것을 받아들였고, 문강(文姜)은 노환공(魯桓公)의 죄인인데도 부자(夫子)가 오히려 장공(莊公)을 위하여 그 악한 것을 숨겼습니다. 대개 그 임금이 사친(私親)의 은혜를 끊지 않으면 신하가 된 자도 감히 솔직하게 쓰지 못하는 것은 임금을 공경하기 때문입니다. 아! 저 윤지술(尹志述)이 생각하는 바를 상소하여 선왕 앞에서 사친을 핍박하여 욕한 것은 그 은혜를 업신여기고 분수를 범한 죄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윤지술도 선왕의 신하인데, 감히 전형(典刑)을 밝게 바로잡아야 궁위(宮闈)가 엄숙해지고 뭇사람의 분노가 풀어진다는 따위 말을 조금도 꺼림 없이 상소에 쓰고, 끝에는 전하께서 감히 다시 사친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접때 대신을 기다려서 처분하겠다는 분부가 있었으나, 이제는 사현(四賢)의 제삿날이 이미 가까와졌으니, 빨리 윤지술의 종향(從享)을 철폐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처분하겠다는 뜻을 이미 하교하였으니, 이번 제사는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임광(任絖)이 상소하여,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이 임금을 잊고 역적을 편든 죄를 논하여 합사(合辭)한 청을 빨리 윤허하기를 청하고, 또 임징하(任徵夏)의 패역(悖逆)한 죄를 논하여 대계(臺啓)를 쾌히 따르기를 청하고, 또 양역(良役)508) 의 폐단을 논하여 군액(軍額)을 줄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리고 의논하여 처치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명기(明紀)》를 강독(講讀)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오명신(吳命新)이 변지(邊地)의 봉수(烽燧)509) 가 허술하다는 것을 아뢰고, 병조(兵曹)를 시켜 절목(節目)을 만들고 연대(煙臺)510) 의 물건을 나열하여 적어 조목마다 주(註)를 달아 쓸 곳을 명백히 보여 팔로(八路)에 반포하고 또 언문(彦文)으로 번역하여 써서 모든 연대의 벽에 붙여서 강습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1일 갑진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정재(李挺材) 등이 상소하여 윤지술(尹志述)의 출향(黜享)을 다시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어제 비답에 이미 일렀는데 어찌하여 번거롭히는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과천(果川)에 이르러 머무르고 들어오지 않고 또 상소하기를,
"국구(國舅)이 상소는 놀랍고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신축년511) ·임인년512) 사람들이 과연 속이고 협박한 사실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는 주벌(誅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만일 그가 그렇지 않다면 또한 분명히 밝히는 분부를 한 번 내리셔야 하겠습니다. 신도 또한 신축년·임인년에 벼슬한 사람이니, 청컨대 신의 죄를 감정(勘定)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누누이 용서하고 이어서 함께 올 예판(禮判)에게 명하여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8월 22일 을사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과천(果川)의 현옥(縣獄)에서 명을 기다리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어 다시 돈유(敦諭)하게 하고 이어서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강현(姜鋧)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설서(說書)로, 정제두(鄭齊斗)를 겸찬선(兼贊善)으로, 윤동수(尹東洙)를 겸진선(兼進善)으로, 심육(沈錥)을 자의(諮議)로, 성덕윤(成德潤)을 수원 시재 어사(水原試才御史)로, 유수(柳綏)·양정호(梁廷虎)를 승지(承旨)로, 송진명(宋眞明)을 사간(司諫)으로, 권이진(權以鎭)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8월 23일 병오
도승지(都承旨) 김동필(金東弼)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고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에게 전유(傳諭)하였더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정승 벼슬은 종신토록 다시는 맡을 수 없는 뜻을 이미 임금에게 고하고 선묘(先墓)에 맹세하였으니, 정승 직함이 갈리기 전에는 죽어도 명을 받을 수 없다.’ 합니다."
하였다. 이어서 성안으로 들어와 대궐 밖에서 명을 기다리니, 임금이 드디어 허락하고 영중추(領中樞)에 붙였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홍상용(洪尙容)·지평(持平) 이춘제(李春躋)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어 무신(武臣)인 시관(試官)이 부름을 두 번 세 번 어긴 죄를 논하고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영돈녕(領敦寧) 어유귀(魚有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한 마디 말이 입에서 나가면 모든 공박이 이 몸에 모입니다. 조상경(趙尙絅)의 상소는 본디 위태롭고 두렵거니와, 강박(姜樸)이 헐뜯고 배척한 것도 다시는 여지가 없습니다. 아! 일찍이 신축년513) ·임인년514) 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무리가 비로소 요비(妖婢)·역수(逆豎)와 은밀한 곳에서 교통하여 성궁(聖躬)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였으나, 천심(天心)이 잠잠히 도와서 난적(亂賊)의 우두머리가 처형되더니, 또 다시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꾸며내어 무옥(誣獄)을 구성하여 충량(忠良)을 살해하고 우익(羽翼)을 제거하여 4년 동안에 재앙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신이 임인년에 올린 소(疏) 가운데에 위권(威權)을 마음대로 행하고 협박하여 분부를 받았다는 따위 말로 역적 김일경의 죄악을 열거하고 또 ‘위록(僞錄)’이라는 두 글자로 명백히 말하여 배척하였으니 그 충현(忠賢)을 살해하고 마음대로 위록을 만든 정상이 절로 그 가운데에 있는데, 저들이 이른바 한 마디도 여기에 언급한 것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훈(勳)’이라는 한 글자로 말하면 바로 역적 김일경이 근거 없이 신을 욕한 것인데, 이제 강박의 소에 문득 끼워 넣었습니다. 아! 역적 김일경이 정삼석(鄭三錫)을 사주하여 부탁하고 사공(私供)을 만들어 주어 속이고 협박한 것도 이미 매우 통탄스러운데 은밀히 도왔다는 따위 말로 속여서 궁위(宮闈)515) 에 언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역적 김일경은 비록 처형되었으나 정삼석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 의당 유사(有司)에 넘겨 엄히 구핵(究覈)하여 남을 무함한 죄를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강박이 상소한 말은 매우 괴이하다."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한사필(韓師泌)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숙종의 처분 가운데에서 무엇이 신사년516) 의 것보다 중대하겠으며, 숙종의 《실록(實錄)》 가운데에서 무엇이 능지(陵誌)보다 중대하겠습니까마는, 그때의 상신(相臣)이 지문을 지은 것은 깎아 없애어 둥글둥글하게 하고 사실을 기록한 말은 없어져서 징계될 것이 없는데, 윤지술(尹志述)이 진심을 드러내어 극진히 말한데에 한 가닥 끊어지지 않은 명의(名義)를 붙들 만한 것이 있으니, 저 일종의 간흉(奸凶)이 뼈에 사무친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윤정(尹綎)·강박(姜樸)·문강(文姜)은 송(宋)나라와 노(魯)나라의 국모(國母)이므로 감히 사친(私親)에 견주어 의논할 것이 아닌데 인용하여 비유하였으니, 이미 몹시 윤리에 어그러집니다. 선조(先朝)의 일을 기록하는 데에는 소중한 뜻이 있으니 이른바 악한 일을 숨긴다는 의리는 더욱이 논할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 윤정에게 내리신 비답은 두루 간곡하여 이미 3년 동안 정해졌던 의리와 일체 서로 어그러집니다. 또 더구나 이번 제사는 사현(四賢)과 함께 거행하지 말게 하셨으니, 그 처분이 과연 출향(黜享)하고 위판(位版)을 불사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 윤지술은 의리에 용감하여 죽는 것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으니, 저 사현과 마찬가지로 제사지내는 것은 참으로 성조(聖朝)에서 그만둘 수 없는 전례(典禮)인데, 이제 만약 바꾼다면 백세 뒤에 가서 오늘의 거조(擧措)를 어떻다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새로 내리신 비지(批旨)를 빨리 거두고 이미 정해진 의리를 굳게 지켜서 성대한 전례를 떨어뜨리지 않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번 처분은 사전(祀典)을 중하게 여긴 것이니, 장황히 상소한 것은 참으로 괴이하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광주(廣州)에 이르러 상소하여 정승의 벼슬을 해면하여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정석삼(鄭錫三)을 보내어 돈유(敦諭)하게 하고 이어서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삼간택(三揀擇)의 기일이 멀지 않으니, 별궁(別宮)의 처소를 품정(稟定)하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의궁(於義宮)으로 정하라."
하였다. 이태좌가 또 말하기를,
"삼간택 이튿날에 호조(戶曹)에서 으레 빈(嬪)의 본가에 쌀과 베를 보내는 것이 신묘년517) 의 《등록(謄錄)》에 실려 있으나, 일찍이 신해년518) 에 줄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이제는 어느 전례를 따라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신해년의 전례 【중미(中米) 1백 석(石)과 조미(糙米) 1백 석 중에서 각각 30석을 줄이고, 면포(綿布) 3백 필(疋) 중에서 각각 1백 필을 줄였다.】 를 따르라고 명하였다.
조현명(趙顯命)·정석오(鄭錫五)를 춘방(春坊)519) 에 차출하여 제수(除授)하고 이어서 구임(久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태좌(李台佐)가 춘방은 극선(極選)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어서 조현명은 문학(文學)과 재행(才行)이 있다고 천거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8월 24일 정미
송진명(宋眞明)을 발탁하여 승지(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를 소견(召見)하였다. 이광좌가 스스로 당한 일이 망측함을 아뢰니, 임금이 누누이 위유(慰諭)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이 스스로 그만두려고 하는 것은 실로 갑진년520) 겨울에 당한 일 때문입니다. 대개 평생 고구(故舊)인 사람에게 위권(威權)이라는 죄목을 씌웠으니, 신이 무슨 낯으로 선부(先父)에게 돌아가 보겠습니까? 이때부터 스스로 정승 벼슬에서 떠나기로 천일(天日)에 맹세하고 선령(先靈)에게 맹세하였는데, 이제 전하께서 이토록 의지하시니, 신이 성의(聖意)가 이러하신 줄 알았으면 어찌 스스로 맹세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의 사직하는 상소에 선묘(先墓)에 맹세하고 하늘에 맹세하였다는 따위 말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드디어 그 벼슬을 갈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광좌가 아뢸 때에 넌지시 후회하는 뜻을 보였다. 곧 다시 복상(卜相)521) 하게 된 것은 실로 이 때문이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56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520]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註 521] 복상(卜相) : 새로 정승될 사람을 가려 뽑음.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의 사직하는 상소에 선묘(先墓)에 맹세하고 하늘에 맹세하였다는 따위 말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드디어 그 벼슬을 갈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광좌가 아뢸 때에 넌지시 후회하는 뜻을 보였다. 곧 다시 복상(卜相)521) 하게 된 것은 실로 이 때문이다."
이날 이광좌(李光佐)가 또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의 분의(分義)는 인륜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므로, 만일 명백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듯하니, 마땅히 기강을 세우고 충역(忠逆)을 명백히 가려야 하겠습니다. 만약 아울러 포용하여 모두 쓰려고만 한다면 이것은 결코 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접때 대신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처분하겠다고 분부한 것을 경(卿)은 반드시 들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정신이 피로하여 우선 조용해지기를 기다린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지당합니다. 이 일은 중신(重臣)과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일제히 모여서 상의하여 천 년 뒤에도 고치지 않을 법을 만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문(斯文)의 일을 경에게 한 번 묻고 싶다."
하매, 이광좌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비록 지극한 분부를 내려 그 시비를 정하시더라도, 두 집 사람들은 믿고 따를 리가 만무합니다. 한가하실 때에 두 집의 문집(文集)을 상세히 보시면 시비가 어디에 있는지 살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역적이 아닌데 역적이라 하였으면, 옥사(獄事)를 안찰(按察)한 자는 죄받는 것이 당연할 것이니, 이 일이 처분되기 전에는 신은 조복(朝服)을 입고 대궐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또 국구(國舅)의 상소가 오로지 신을 가리킨 것은 아닐지라도 핍박한 것이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처분하려는 것이 있으니, 마땅히 한 번 상세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8월 25일 무신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궐하(闕下)에 이르러 또 상소하여 정승의 벼슬을 갈아 주기를 구하니, 임금이 드디어 허락하여 판부사(判府事) 벼슬을 주고, 이어서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조태억이 스스로 전후에 당한 일이 억울함을 아뢰니, 임금이 누누이 용서하고 말하기를,
"합계(合啓) 가운데에 있는 술을 나누며 유감을 풀었다는 것은 설사 이런 일이 있었더라도 또한 괴이할 것도 없다. 같이 들어가 청대(請對)하였다는 일은 그때 연중(筵中)에 지친(至親)도 들어갔다는 말이 있는데 거칠고 패악한 말은 헤아릴 수도 없다."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교문(敎文)의 일은 더욱이 맹랑합니다. 임주국(林柱國)의 상소에 신이 익숙히 상의하였다 하였으나, 신은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문형(文衡)522) 의 일 때문에 그 시새움을 받았습니다. 대개 강현(姜鋧)이 역적 김일경을 문형의 수천(首薦)으로 하고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와 신도 같이 그 천거를 받았는데, 강현이 정수기(鄭壽期)에게 탄핵받게 되어서는 역적 김일경이 강현에게 글을 보내어 신과 이광좌가 정수기를 시켰다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신을 배척하였습니다. 더구나 그 교문은 깊은 밤에 지어 바쳤으므로 성문(城門)이 이미 닫혔는데 신이 어찌 그 글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술을 나누며 유감을 풀었다는 것은 김일경을 전별한 것이 아니라 곧 김시혁(金始㷜)이 사복 정(司僕正)으로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燕京)에 가므로 신이 제조(提調)로서 고례(古例)에 따라 모화관(慕華館)에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 때에 김일경이 빈사(儐使)로서 왔고 부사(副使) 이명언(李明彦)도 왔는데, 이명언이 신에게 말하기를, ‘어제 벗들이 형자운(荊字韻)으로 시를 지어 나를 전송하였으니, 그대도 이 운으로 시를 지어라.’ 하고, 또 김일경에게 말하기를, ‘군은 오늘 조 판서(趙判書)를 만났으니 염파 부형(廉頗負荊)523) 의 뜻으로, 이 운을 써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유감을 풀었다 하니, 어찌 해괴하지 않겠습니까? 같이 들어가 청대한 것으로 말하면, 그때 신이 들어가지 않으면 혹 과격하게 부딪쳐 화를 재촉할 염려가 있으므로 마지못하여 들어가 참여하였습니다. 신이 당한 것이 모두 허구(虛搆)한 무함이나 이 한 가지는 신에게 이런 일이 있었으니, 마음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자취는 참으로 변명하기 어려운데 어찌 남을 허물하겠습니까마는, 그때 역적 김일경이 그 지친도 들어갔다 하여 도리어 신을 배척할 계책을 삼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조덕린(趙德隣)을 사간(司諫)으로, 강현(姜鋧)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신치운(申致雲)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8월 26일 기유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冠禮) 때에는 으레 시임 대신(時任大臣)을 빈(賓)으로 삼고 종친(宗親)을 주인(主人)으로 삼되, 원임(原任)을 빈으로 삼는 예(例)는 본디 없고 《오례의(五禮儀)》에도 의정(議政)을 빈으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등록(謄錄)》을 상고하여 보면, 을해년524) 에는 영상(領相) 남구만(南九萬)이 빈이 되었고, 신해년525) 에는 좌상(左相) 허적(許積)이 빈이 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박장원(朴長遠)이 찬(贊)으로 실차(實差)526) 되고 예차(預差)527) 는 예참(禮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의정을 빈으로 삼는 전례가 있더라도 어찌 임시 방편의 방도가 없겠는가? 조 판부사(趙判府事)를 빈으로 삼으라."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 영부사(李領府事)를 예차로 삼아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오명항이 또 아뢰기를,
"가례(嘉禮) 때의 정사(正使)는 으레 대신(大臣)과 종반(宗班)에서 가려서 주의(注擬)하여 들이고 부사(副使)는 으레 정경(正卿)으로 차출하는데 이제 정경 중에는 합당한 자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서 종2품(宗二品) 중에서 변통하여 가려서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관례 때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이 집관 차비(執冠差備)가 되어야 하나 이 벼슬이 혁파(革罷)된 지 오래 되었는데, 이제 차출해야 합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제두(鄭齊斗)의 벼슬을 갈라고 명하고, 이어서 별유(別諭)를 내려 돈소(敦召)하였다. 이때 왕세자의 관례가 가까와졌으므로 임금이 정제두가 와서 참여하기를 바랐으나, 본직(本職)으로 부르면 산림(山林)의 사람으로 명을 따르기 어려울 듯도 하므로 이 명이 있었다.
서명균(徐命均)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오명신(吳命新)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이중관(李重觀)을 상의 정(尙衣正)으로 삼았다. 이튿날 이중관을 갈고 이보욱(李普昱)으로 갈음하였다.
8월 27일 경술
대신(大臣) 및 정부(政府)·관각(館閣)의 당상(堂上)과 육조(六曹)의 참판(參判) 이상을 명초(命招)하여 왕세자의 덕을 표하는 자(字)를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다. 삼망(三望)528) 을 주의(注擬)하여 들였는데, 부망(副望)인 ‘성경(聖敬)’으로 낙점(落點)하였다.
좌참찬(左參贊) 강현(姜鋧)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실은 제학(提學)의 직임에서 본디 갈려야 할 규례가 있습니다. 대개 숙종(肅宗) 초년에 대신이 문형(文衡)을 지낸 사람은 다시 양관(兩館)529) 의 제학을 겸하지 못하게 할 것을 아뢰어 그대로 정식(定式)으로 삼았으므로 그뒤에 사퇴하여 갈린 자가 거의 대여섯 사람이 넘습니다. 이미 법이 되었으니, 무릅써 명에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批答)하였다. 강현이 또 상소하여 전례를 인용하며 굳이 사직하니, 드디어 갈도록 허락하였다.
임금이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하교(下敎)에 따라 당전(當殿)에 이듬해에 바칠 삼남(三南) 삭선(朔膳)을 반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동조(東朝)530) 에서 병오년531) ·정미년532) 두 해의 삼남의 삭선을 반으로 줄이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예조(禮曹)에서 내년 정월부터 규례대로 봉진(封進)할 것을 계청(啓靑)하니, 임금이 자교(慈敎)에 따라 내년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다시 여쭈라고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정우량(鄭羽良)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명의(名義)를 간범(干犯)한 사람은 대각(臺閣)이 된 자가 마땅히 서둘러 토죄(討罪)해야 할 것인데, 접때 대간(臺諫)들은 곧 경화(更化)하는 처음에 맨 먼저 발탁하는 명을 받고도 간단한 몇 가지 일로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고 우두머리 죄인에 대하여는 끝내 합사(合辭)하여 논계(論啓)하지 않으니, 대간의 체례(體例)에 크게 어그러집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罷職)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승지(承旨) 유수(柳綏)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세력이 한창일 때에 당하여 남보다 뒤질세라 염려하듯이 아부하고 친근하다가, 그 죄를 성토하게 된 뒤에는 부당하게 두렵게 할 마음을 일으켜 억지로 혐의와 원망을 끌어대어 변명하였는데, 혐의하는 것이 무슨 일이고 원망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며, 김동필(金東弼)을 파직하기를 계청(啓請)한 것 또한 과연 혐의와 원망이 있어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사대부(士大夫)의 염치를 본디 이 사람에게 바랄 수는 없으나, 진실로 그 마음을 추구하여 보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종래에 신방(申昉)의 아비는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이므로 하치않은 관사(官司)에도 이름을 한 번도 걸지 못하였는데, 그 아들은 스스로 자신을 어질게 여기고 참으로 아비의 잘못을 간쟁(諫爭)하는 아들인 듯이 하며 화요(華要)한 지위에 태연히 출입하니, 이것은 비록 그 집안의 아비와 아들의 일이기는 하나 그 풍속을 손상하는 것은 큽니다. 청컨대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치운(申致雲)이 종래 모욕받은 것을 을사년533) 의 무함하고 날조하는 수단에서 나온 것이므로 신치운의 병통이라 할 수 없으나, 그러나 신치운의 도리에 있어서는 전의 수치에 상심하여 영달의 길에 머뭇거리며 세월이 조금 오래되어 욕된 것이 사라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인데, 바삐 서둘러 직성(直省)이 되었으니, 어찌 그리 빠릅니까? 용태(容態)·재예(才藝)는 비록 몹시 가엾으나, 몸가짐이나 일을 처리하는 데는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유수·신방의 일은 매우 심한 일이므로 내가 받아들이지 않거니와, 신치운의 일은 지나침을 면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조문명(趙文命)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기를,
"신의 전형(銓衡)하여 주의(注擬)한 것은 문득 예투(例套)를 따르므로, 위임하신 성의(盛意)를 저버리고 도리어 진창길 속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하고, 또 사국(史局)의 당상(堂上)을 헛되이 대직(帶職)할 수 없다고 말하니, 비답하기를,
"실록 당상(實錄堂上)은 이제 우선 갈도록 윤허한다. 본직(本職)은 반드시 지나치게 사양할 것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조문명이 전조(銓曹)에 들어간 처음에 청대(請對)하여 한편 사람을 죄다 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섞어 쓰기를 청하였으나, 승지 송인명(宋寅明)은 이제 만약 섞어 쓰면 반드시 말썽을 일으킬 것이므로 문득 써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는데, 조문명이 물러가 또 상소하기를, ‘신의 정주(正注)를 신이 스스로 보면 문득 한 당(黨) 사람이니, 신이 정사에 임할 때마다 절로 자탄하게 됨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전직(銓職)을 굳이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57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조문명이 전조(銓曹)에 들어간 처음에 청대(請對)하여 한편 사람을 죄다 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섞어 쓰기를 청하였으나, 승지 송인명(宋寅明)은 이제 만약 섞어 쓰면 반드시 말썽을 일으킬 것이므로 문득 써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는데, 조문명이 물러가 또 상소하기를, ‘신의 정주(正注)를 신이 스스로 보면 문득 한 당(黨) 사람이니, 신이 정사에 임할 때마다 절로 자탄하게 됨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전직(銓職)을 굳이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수찬(修撰) 남일명(南一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합사(合辭)하여 청한 지 오래 되었으나 드디어 윤허하지 않아서 의리가 어두어지게 하시므로, 흉언(凶言)·패설(悖說)이 서로 잇달아 벌떼처럼 일어납니다. 민원(閔瑗)의 무리는 본디 책망할 것도 못되나, 한원진(韓元震)은 자신이 경연(經筵)의 벼슬을 띠고 있으면서 위태하고 어그러지는 말을 만들어 충역(忠逆)의 구분을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벌주어 내쳐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한원진의 일은 이러한 논의를 내가 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였다.
8월 28일 신해
삼간택(三揀擇)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조 참의(吏曹參議)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정하라."
하고, 이어서 해조(該曹)에 명하여 가례(嘉禮)의 길일(吉日)을 가리게 하여 9월 29일로 날짜를 정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의 가례(嘉禮) 때에는 육례(六禮)534) 에 대한 내외 습의(內外習儀)를 마땅히 각각 여섯 번 행해야 하는데, 날짜가 촉박하므로 실로 날을 배정하여 거행할 방도가 없습니다. 외습의(外習儀)는 각각 한 번 행하고 내습의(內習儀)는 각각 두 번 행하면 합당할 듯하나, 상례(常例)와 다르므로 감히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5일에 납채(納采)·납징(納徵)·고기(告期)를 습의(習儀)하고, 6일에 책빈(冊嬪)·초계(醮戒)·친영(親迎)을 습의하고, 11일에 빈수책(嬪受冊)·친영을 첫 번째 내습의하고, 12일에 빈수책·친영을 두 번째 내습의하고, 14일에 동뢰연(同牢宴)·조현례(朝見禮)를 첫 번째 내습의하고, 19일에 동뢰연·조현례를 두 번째 내습의하는 것으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5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註 534] 육례(六禮) : 혼인(婚姻)의 여섯 가지의 예(禮).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청기(請期)·친영(親迎)의 총칭.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등록(謄錄)》을 취하여 상고해 보면, 가례(嘉禮) 때 빈수책(嬪受冊)·친영(親迎)의 내습의(內習儀)는 모두 별궁(別宮)에서 행하고, 동뢰연(同牢宴)·조현례(朝見禮)의 내습의는 모두 대내(大內)에서 행하되 한 번만은 별궁에서 행하였습니다. 이 제도 이대로 거행합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가 친영(親迎)하는 예(禮)는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에서 행해야 하겠습니다마는, 동뢰연(同牢宴)은 어느 전(殿)에서 행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통명전(通明殿)에서 행해야 한다."
하였다.
송성명(宋成明)을 실록 당상(實錄堂上)으로 삼았다.
수찬(修撰) 윤광익(尹光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함께 낸 계(啓)와 합사(合辭)한 청을 끝내 윤허하여 따르지 않으시니, 뭇사람의 심정에 답답해 합니다. 더구나 옥사(獄事)의 전말은 국안(鞫安)에 분명하게 있으므로 한 번 국안을 상고하면 당장에 결단할 수 있을 것이니, 빨리 해부(該府)를 시켜 국안을 가지고 대신(大臣)·제신(諸臣)과 낱낱이 검핵(檢覈)하게 하여 분명하게 처분을 내려서 충역(忠逆)이 오래 섞이지 말게 하소서."
하고, 또 어제 대신(臺臣)이 신치운(申致雲)을 파직할 것을 논한 잘못을 말하였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批答)을 내렸다.
해남 현감(海南縣監) 이수익(李壽益)이 상소하여,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한 정상을 말하기를,
"90일 동안의 큰 가뭄은 근래에 없던 것이므로 한 그릇의 물 값이 5전(錢)이고 사람과 말도 또한 많이 목말라 죽었습니다."
하고, 이어서 공세(貢稅)를 멈추고 전재(田災)535) 를 주고 군액(軍額)을 줄이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집(李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중시(重試)536) 에 나아가지 않은 자는 율(律)이 고신(告身)537) 을 빼앗는 것에 해당합니다마는, 올해의 흉황(凶荒)이 이러함을 생각하여 정축년538) ·정유년539) 의 전례에 따라 각도(各道)의 수령(守令)으로서 나아가기를 바라는 자는 나아가게 하되 나아가지 않는 자는 논죄(論罪)할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호서(湖西)의 우전(郵傳)은 장차 참(站)이 없어지는 피폐에 이를 것이니, 환모(還耗)540) 를 획급(劃給)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묘당(廟堂)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8월 29일 임자
장령(掌令) 임광필(林光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간원(諫院)의 신계(新啓)는 온당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유수(柳綏)가 재지(才智)가 있고 민첩하며 신치운(申致雲)이 문학과 명망이 있는 것은 실로 조종에 같이 있는 자가 모두 추대하는 바입니다. 설사 작은 잘못이나 가벼운 허물이 있더라도 서로 권면하고 경계해야 할 것인데, 이제 문득 지난 일을 뒤미처 제기하여 일필(一筆)로 논단(論斷)하니, 신은 참으로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정언(正言) 정우량(鄭羽良)이 인피(引避)하여 아뢰기를,
"유수(柳綏)가 야비하고 도리에 어그러진 것은 김일경(金一鏡)이 실패한 뒤에 더욱 나타났으므로 청의(請議)가 침뱉고 욕합니다. 신방(申昉)의 일은 참으로 윤리의 변괴입니다. 신치운(申致雲)은 신도 겉으로는 그 재질을 아끼고 속으로는 바르고 깊은 것을 아끼므로 연전에 한 명관(名官)이 탄핵하는 상소를 소매에 담고 있을 때에 신이 굳이 힘써 말렸으나, 오늘날의 행사를 보면 한갓 겉모양일 뿐인데, 이제 헌신(憲臣)·유신(儒臣)이 다 신의 말에 대하여 박절한 것을 혐의하고 충후(忠厚)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니, 신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유수와 같은 자는 본디 한 사람이 아니고 홍성보(洪聖輔)·경성회(慶聖會)·윤광천(尹光天)·송택상(宋宅相)의 무리도 행실이 개·돼지와 같아서 다시는 인리(人理)가 없는데, 예의(禮義)·염치(廉恥)로 엄하게 단속하지 않으면 나라가 장차 무엇에 힘입겠습니까?"
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8월 30일 계축
이보욱(李普昱)을 집의(執義)로, 이선행(李善行)을 지평(持平)으로, 윤용(尹容)을 헌납(獻納)으로, 송성명(宋成命)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송인명(宋寅明)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세자의 가례(嘉禮) 때 판부사(判府事) 조태억(趙泰億)을 정사(正使)로,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을 예차(預差)로, 행 도승지(行都承旨) 김동필(金東弼)을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발탁하여 부사(副使)로 삼고, 밀천군(密川君) 이담(李墰)을 예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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