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3권, 영조 3년 1727년 9월

싸라리리 2025. 8. 2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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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갑인

송인명(宋寅明)을 실록청(實錄廳)의 도청 당상(都廳堂上)에 차임(差任)하였다. 이에 앞서 《숙묘실록(肅廟實錄)》의 역사(役事)가 거의 다 끝나 갔었는데, 국면(局面)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사역(史役)이 도로 정지되었다가 이광좌(李光佐)가 올라옴에 이르러 장차 개수(改修)하기 위하여 이에 송인명을 해청(該廳)의 당상(堂上)에 환차(換差)한 것이다.

 

이정제(李廷濟)를 도승지(都承旨)로, 김호(金浩)를 장령(掌令)으로, 김동필(金東弼)을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삼았다.

 

왕부(王府)541)  에 명하여 실록청(實錄廳)의 등록랑(謄錄郞) 이수해(李壽海)·이석신(李碩臣)을 나추(拿推)하게 하니, 이는 총재관(摠裁官) 이광좌(李光佐)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에 앞서 실록랑(實錄郞) 남유상(南有常)·신만(申晩)이 이광좌가 총재(摠裁)가 되면서부터 병을 핑계하고 출사(出仕)하지 않다가 금부(禁府)의 추문(推問)을 받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수해 등도 병을 핑계하고 사진(仕進)하지 않자, 이광좌가 초기(草記)542)  로 죄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윤대(輪對)543)  를 행하였다.

 

9월 2일 을묘

집의(執義) 이보욱(李普昱)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의 지난해 한 계사(啓辭)는 대개 이만성(李晩成)을 곧바로 앞질러 작처(酌處)할 것을 논한 것이었는데, 그가 옥사(獄死)한 것이 신에게 무엇이 관계되어 이에 ‘구살(搆殺)’이란 두 글자로써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어 신의 아비인 전(前) 목사(牧使) 신(臣) 이의저(李宜著)가 서로 바꿔가며 뒤잇는 무함을 참혹하게 받기에 이르렀으며, 마침내는 도신(道臣)의 근거없이 날조된 무함을 받고 뇌폐(牢狴)544)  에 수감된 지가 어언 3년이 경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원수진 집안에서 신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것은 실로 신이 삼사(三司)545)  의 자리에 오래 있으면서 일을 만나면 격렬하게 쟁론한 것에 연유된 것입니다. 앞서는 안세갑(安世甲)의 계문(啓聞)이 있었고 뒤에는 이의천(李倚天)의 논계(論啓)가 있어 찬배(竄配)당하기에 이르렀으며, 감옥에 수감되는 화(禍)가 노부(老父)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비를 위해 진달하여 변론하는 것이 정리(情理)에 있어서 진실로 당연한 것이긴 하나, 억지로 지난날의 흔단을 인용하여 ‘상대가 날조 무함했다’는 단서를 만든 것은 나는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였다.

 

보덕(輔德) 조익명(趙翼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당초 좌죄(坐罪)된 것은 육시(戮屍)546)  하자는 계사(啓辭)를 제일 먼저 발론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계사를 처음에 발론하던 날 마침 관직(館職)에 있었기 때문에 입시(入侍)하여 대계(臺啓)가 있은 끝에 소회(所懷)를 대략 진달했던 것에 불과했을 뿐이었으니, 이것을 어떻게 삼사(三司)의 계사(啓辭)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지난번 사람들이 아울러 제거하기에 급급하여 이에 신을 제일 먼저 발론했다는 형률(刑律)로써 다스려 분별없이 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전라도(全羅道)의 을사년547)  ·병오년548)  의 묵은 대동(大同)549)  과 신포(身布)를 견감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호남(湖南)의 어사(御史) 이광덕(李匡德)이 과천(果川)에서 언문(諺文)으로 방문(榜文)을 써서 내걸고 유민(流民)들을 효유(曉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유민들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서 없겠습니까만, 돌아간들 무엇을 먹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 물려서 받기로 한 요역가(徭役價)를 이제 징수하려 한다고 하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어 서로 마주보면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그 정상(情狀)을 아뢰었기 때문에 임금의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동조(東朝)550)  가 호남(湖南)의 기민(飢民)들을 진념(軫念)하여 특별히 선혜청(宣惠廳)에서 납입한 삭선가미(朔膳價米) 2백 석(石)을 하사하여 진구(賑救)에 보태게 하였다. 이에 앞서 태묘(太廟)에 개수(改修)하는 역사(役事)가 있었는데, 동조가 경비(經費)를 진념하여 삭선가미를 하사하였었고, 이때에 이르러 또 이 명령이 있었다.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 아래를 지나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은 번갯불 같았고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점사(占辭)에 ‘하고(河鼓)가 땅을 진동시켰으니 마땅히 병란(兵亂)이 있을 것이다.’ 했는데, 얼마 안 되어 과연 무신(戊申)의 변란(變亂)551)  이 있었다.

 

실록랑(實錄郞) 남유상(南有常)·신만(申晩)을 원지(遠地)로 찬배(竄配)하였다. 신만과 남유상은 이광좌(李光佐)가 총재관(摠裁官)이 된 뒤부터 의리를 지켜 대항하면서 굴하지 않았는데, 나추(拿推)당할 때에 이르러 공초(供招)하기를,
"지금 총재관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은 숙종조[肅廟朝]에 죄를 졌고 선조(先朝)552)  에 누(累)를 끼쳤으니, 곧 종사(宗社)의 죄인입니다. 따라서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의 체례(體例)로 보아 억지로 얼굴을 들고 수행(隨行)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 공초가 들어가니, 임금이 처음에는 사판(仕版)553)  에서 삭제시킬 것을 명하였었다. 오명항(吳命恒)과 이익한(李翊漢)이 교대로 대신(大臣)554)  의 마음이 편안하기 어렵다는 내용으로 진달하였다. 승지(承旨) 이정제(李廷濟)가 계속해서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수인(囚人)의 공사(供辭) 때문에 도성(都城)을 나가려고 하니, 국가의 기강이 점점 해이해져 조정이 엄숙하지 못합니다."
하고, 이익한은 말하기를,
"그들의 의도(意圖)는 기필코 국사를 저지하여 낭패시킨 뒤에야 그만두려는 것입니다. 이뒤에는 반드시 잇달아 일어나는 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광좌가 또 소장을 올려 진달하면서 물러가게 해줄 것을 고하였다. 이리하여 임금이 마침내 남유상 등을 찬배(竄配)하라는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조지빈(趙趾彬)을 이조 좌랑 겸문학(吏曹佐郞兼文學)으로, 이제(李濟)를 승지(承旨)로, 윤동수(尹東洙)를 집의(執義)로, 이하원(李夏源)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임광(任珖)을 교리(校理)로, 황이장(黃爾章)을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삼았다.

 

겸문학(兼文學) 조지빈(趙趾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 이의천(李倚天)이 윤지(尹志)를 논핵하는 계사(啓辭)에서 공공연히 신의 이름을 써 넣고 말하기를, ‘윤지와 조지빈이 사우(死友)를 맺어 성궁(聖躬)을 위태롭게 할 것을 모의하고 조정의 신하들을 장살(戕殺)하는 일에 은밀히 참섭(參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뒤 신(臣)을 논핵하는 계사에서 또 다섯 건의 일을 가지고 일일이 열거하며 죄를 성토(聲討)하여 망측(罔測)한 죄과(罪科)에 몰아넣었습니다.
아! 신이 어릴 적에 윤지와 같은 마을에 살아서 서로 알았고 조정에 같이 있게 되어서는 교분(交分)이 진실로 변할 수가 없는 사이였는데 이제 사우(死友)라고 말을 하니, 그 의도는 구살(驅殺)하고야 말겠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의천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신하로서 더할 수 없는 죄이니, 진실로 국문(鞫問)할 것을 계청하여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루어야 되는 것인데,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할 것만 청할 수 있겠습니까? 횡성(橫城)의 예적(隷籍)555)  에 들어 있는 여자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가 바로 우홍채(禹洪采)의 딸입니다. 신이 임인년556)   겨울에 부임했을 적에 그의 나이가 겨우 아홉 살이었고, 더구나 5개월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한번도 점고(點考)하지 않았는데, 그의 용모를 연모하여 협박하려 했다는 말이 과연 이치에 가까운 말이겠습니까? 회정(懷貞)이 목을 매려 했던 것은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의 숙부(叔父)가 무엇 때문에 신을 지칭하여 원망하면서 당시 재상(宰相)의 집에다 대간(臺諫)이 무함했다고 송변(訟辨)한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그대가 무함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환하게 알고 있다."
하였다.

 

동지 부사(冬至副使) 황이장(黃爾章)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나이 70이 넘으면 사개(使介)557)  에 차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조가(朝家)의 정식(定式)으로 되어 있는 것이니, 체차(遞差)시켜 주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9월 6일 기미

밤에 달이 남두(南斗)의 첫 번째 별자리로 들어갔다.

 

특지(特旨)를 내려 다시 조태억(趙泰億)을 좌의정(左議政)으로 삼았다.

 

김시환(金始煥)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심공(沈珙)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최집(崔)을 장령(掌令)으로, 강필경(姜必慶)을 집의(執義)로, 권부(權扶)를 지평(持平)으로, 정운주(鄭雲柱)를 헌납(獻納)으로, 여광헌(呂光憲)을 정언(正言)으로, 윤동수(尹東洙)를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이조 판서 오명항(吳命恒)이 기사년558)  의 여얼(餘孼)들을 많이 끌어들이기를 한결같이 신축년559)  ·임인년560)   무렵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하던 짓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마음과 힘을 합쳐 을사년561)  의 제인(諸人)들을 빈척(擯斥)하기 위한 계책인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59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558]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55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560]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561]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사신은 말한다. "이조 판서 오명항(吳命恒)이 기사년558)  의 여얼(餘孼)들을 많이 끌어들이기를 한결같이 신축년559)  ·임인년560)   무렵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하던 짓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마음과 힘을 합쳐 을사년561)  의 제인(諸人)들을 빈척(擯斥)하기 위한 계책인 것이다."

 

9월 7일 경신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여 정승의 직에서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고 서추(西樞)562)  의 산질(散秩)로써 대례(大禮)에 입참(入參)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고례(古例)를 널리 상고하여 보니, 원임(原任)이 대신하여 거행한 일이 없었다. 당당(堂堂)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원량(元良)563)  에게 삼가례(三加禮)564)  를 거행함에 있어 어찌 이렇게 구차스럽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즉시 좌기(坐起)하여 시사(視事)할 것을 명하였다. 대개 관례(冠禮)를 거행할 때에는 으레 시임 의정(時任議政)이 빈(賓)이 되기 때문에 비지(批旨)가 이러한 것이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조정이 초창중(草刱中)이어서 아경(亞卿)565)  이 매우 적으므로 동지 부사(冬至副使)를 해당되는 품계 가운데에서는 의망(擬望)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승진 발탁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홍천 현감(洪川縣監) 한현모(韓顯謨)와 삼가 현령(三嘉縣令) 김형(金炯)을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킬 것을 명하였으니, 이는 오명항(吳命恒)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때 한현모 등이 사조(辭朝)566)  하면서 대신들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명항이 그 정상을 아뢰고 처벌을 청했다. 그래서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야대(夜對)567)  를 행하였다.

 

9월 8일 신유

무과 중시(武科重試)의 초시(初試)를 행하였는데, 황이장(黃爾章)과 남태징(南泰徵)에게 관장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황이장(黃爾章)이 과거 임인년568)  에 한쪽 사람을 도륙(屠戮)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소장(疏章)으로 준엄하게 다스릴 것을 청하면서 ‘아무아무를 죽인 뒤에야 하늘이 비를 내릴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회자수(劊子手)569)  라고 지칭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59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568]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569] 회자수(劊子手) : 군문(軍門)에서 사형의 집행을 맡아 보는 사람.
사신은 말한다. "황이장(黃爾章)이 과거 임인년568)  에 한쪽 사람을 도륙(屠戮)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소장(疏章)으로 준엄하게 다스릴 것을 청하면서 ‘아무아무를 죽인 뒤에야 하늘이 비를 내릴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회자수(劊子手)569)  라고 지칭하였다."

 

9월 9일 임술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삼대(三代)570)   때의 전옥(殿屋)에 대한 제도는 동계(東階)와 서계(西階)가 당렴(堂廉)571)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민당(時敏堂) 계단(階段)의 경우는 당(堂) 아래에 이미 두 개의 층계(層階)가 있고 층계 아래에 널찍한 대(臺)가 있으며 대 아래에 또 여러 계단의 준계(峻階)572)  가 있습니다. 이번 이 관례(冠禮)는 층계를 내려가서 행례(行禮)하는 절차가 있는데 모두 준계 밑에서 하게 되어 있으니, 예법(禮法)의 본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단지 교서(敎書)를 맞이하는 한 가지 절차만 준계 아래에서 행하고 기타의 예절은 모두 대(臺) 위에 있는 두 개의 층계 밑으로 옮겨 설행(設行)하게 한다면 예법에도 합치되고 또 오르내리는 수고로움도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내용이 바로 나의 뜻에 합치된다."
하였다. 이어 의주(儀註)의 개부표(改付標)573)  를 명하였다.

 

이날 왕세자(王世子)의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도승지(都承旨) 이정제(李廷濟)·좌승지(左承旨) 정석삼(鄭錫三)·우승지(右承旨) 조최수(趙最壽)·좌부승지(左副承旨) 조석명(趙錫命)·우부승지(右副承旨) 송진명(宋眞明)·동부승지(同副承旨) 이제(李濟)가 동서(東西)로 나뉘어 시립(侍立)하고 사관(史官)은 그뒤에 있었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사배례(四拜禮)를 행하니, 전교관(傳敎官)이 【우승지 조최수이다.】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전교(傳敎)를 아뢰고 물러나 동문(東門)으로 나갔다. 찬의(贊儀)가 꿇어앉으라고 외치니, 빈(賓) 이하의 관원이 꿇어앉았다. 전교관이 전교를 선포하기를, ‘이제 원자(元子)에게 관례를 올리니 경(卿) 등은 일을 진행하라.’ 하였다. 선포를 마치고 나니, 빈(賓) 이하의 관원이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전교관이 교서함(敎書函)을 받들어 빈(賓)에게 주니, 빈이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받아서 채여(綵輿)에 봉치(奉置)하였다. 그 다음 세장(細仗)·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니, 빈(賓)이하의 관원이 뒤따라 나갔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이 모두 사배례를 행하니, 통례(通禮)가 예절이 끝났다고 외쳤다.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왕세자에게 길일(吉日)을 가려 원복(元服)574)  을 하는 것은 옛법에 따른 것이므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을 명하여 궁(宮)에 나아가 예절(禮節)을 행하게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옛날의 성왕(聖王)이 관례(冠禮)를 중히 여긴 것은 관(冠)을 쓴 다음에야 복색(服色)이 갖추어지고 복색이 갖추어진 다음에야 품위가 바르게 되기 때문인데, 세 번 가관(加冠)하여 복색을 더욱 존엄하게 하는 것은 성인(成人)이 됨을 더하는 뜻인 것이다. 이미 관을 쓰고 나서 자(字)를 지어 주는 것은 성인의 도(道)인 것인데,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성인(成人)의 예(禮)를 책임지우는 것이다. 중서(衆庶)들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데, 더구나 임금의 후사(後嗣)에 있는 이겠는가? 제주(祭主)가 되어 조종(祖宗)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이니, 그 예절이 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세자(世子)는 타고난 성품이 넓고도 원대하고 기우(氣宇)가 장중(莊重)하여 어린 나이에 이미 덕기(德器)가 이루어졌으므로 이에 저위(儲位)에 책립하여 일찍부터 백성들의 기대를 모으게 하였다. 성묘(聖廟)575)  에 알현(謁見)하고 학문을 배울 때부터 모든 행동이 예칙(禮則)에 맞았으며 발언(發言)과 처사(處事)가 항상 보통 사람의 뜻 밖에서 나왔다. 나의 좌우(左右)에 승봉(承鋒)할 적에는 인효(仁孝)가 더욱 드러났고 아침저녁으로 강송(講誦)하여 온화하고 문아(文雅)함이 날로 향상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기쁨이 끝이 없었고 기대와 희망이 더욱 지극해졌다. 이에 가례(嘉禮)576)  를 거행하여 원복(元服)을 하고 다시 피변(皮弁)을 더하고 세 번째로 작변(爵弁)을 더하였으며, 예주(醴酒)로 제사지내게 하고 자(字)를 지어 주어 너에게 성인(成人)의 도리를 책임지움이 지금부터 시작되었으니, 너는 더욱 주야로 삼가는 마음을 지녀 나의 훈계를 어기지 말지어다.
대저 성인(成人)의 도리는 효제(孝悌)와 충순(忠順)인 것인데, 예문(禮文)에 이른바 ‘사행(四行)577)  ’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너는 항상 나를 사랑하고 나를 공경하여 너의 마음을 다할 것을 생각하여 이 마음을 확충(擴充)하면 효(孝)와 충(忠)을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너는 항상 너의 동기(同氣)를 사랑하여 이 마음을 확충하면 제(悌)를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너는 항상 노인과 어른을 공경하여 이 마음을 확충하면 순(順)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것이다. 요순(堯舜)의 도(道)는 자신을 완성시키고 남도 완성시켜 주는 것으로 오직 이것뿐인 것이다. 그러나 학문이 아니면 어떻게 이 도(道)를 밝혀서 의심없이 실행할 수 있겠는가? 오직 정수(精粹)하고 전일(專一)한 것만이 곧 우리 집안에서 전수(傳授)하여 온 심법(心法)인 것이니, 《대학》의 격물(格物)·치지(致知)는 바로 정수(精粹)하게 하는 일이고 성의(誠意)·정심(正心)은 바로 전일하게 하는 일로서 그 근기(根基)는 오로지 《소학(小學)》의 주경(主敬)에 있고 또 《소학》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으니, 너는 힘쓸지어다. 사욕(私慾)을 따르면 법도를 무너뜨리게 되고 오락(娛樂)을 즐기면 본심(本心)을 잃게 되니, 분수에 넘치는 사치가 모두 여기에서 연유되는 것이다. 너는 마음가짐을 굳건히 하고 행동을 단정히 하며 위의(威儀)를 조심하는 것을 일상 생활에서 잊지 말아 날로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한다면 성인(聖人)의 극진한 공을 이로 인하여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니, 너는 항상 경계할지어다. 올바른 선비와 바른말은 비록 〈자신의 마음에〉 화합하기 어려울 듯하지만, 이를 가까이 하면 반드시 자신에게 이롭고 국가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며, 간사한 사람과 아첨하는 말은 마음을 기쁘게 할 듯하지만 이를 가까이 하면 반드시 자신을 해치고 국가에도 재앙이 있을 것이니, 너는 깊이 유념할지어다. 아! 보불(黼黻)과 면류관(冕旒冠)이 화려한 것이 아니고 장차 그것에 부합되는 실제의 책임을 떠맡게 될 것이니, 진실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면 곧 어린 아이와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너는 늘 두려운 마음을 지니고 삼가서 혹시라도 태만함이 없게 하며, 어린 마음을 버리고 덕을 완성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성인(成人)의 도리를 닦으라. 그렇게 하면 하늘이 내리는 경사(慶事)를 받들어 영원토록 끝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59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574] 원복(元服) : 남자가 스무 살에 어른의 의관(衣冠)을 입는 의식.[註 575] 성묘(聖廟) : 대성전(大成殿).[註 576] 가례(嘉禮) : 관례(冠禮).[註 577] 사행(四行) : 효(孝)·제(悌)·충(忠)·신(信).

 

관례(冠禮)의 의주(儀註)는 이러하다.
전설사(典設司)에서 왕세자의 관차(冠次)를 시민당(時敏堂)에 설치한다. 인의(引儀)가 빈(賓)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다.】 을 인도하고 층계 사이로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서고, 찬관(贊冠)은 빈(賓)의 서남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서면 주인(主人)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이다.】 은 자신의 위차에 나아가 선다. 빈(賓)이 안상(案床)으로 나아가 교서(敎書)를 집어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면 필선(弼善)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교서를 받을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서게 한 다음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게 한다. 빈(賓)이 교서가 있다고 일컬으면 왕세자가 꿇어앉는다. 빈이 교서를 선포하는데, 선포가 끝난 다음에는 왕세자가 사배례를 행한다. 빈객(賓客)이 빈(賓)의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교서를 받아가지고 물러나와 왕세자에게 주면, 왕세자는 꿇어앉아 이를 받아서 필선(弼善)에게 건네준다. 왕세자가 동서(東序)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아청색(鴉靑色) 직령(直領)을 입고 조대(絛帶)를 띠고 나오면 빈(賓)이 왕세자의 자리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서서 축복(祝福)하는 말을 한다. 【좋은 달 좋은 날에 비로소 원복(元服)을 하니, 그대의 어릴 적의 뜻을 버리고 덕(德)을 순성(順成)하는 데 삼가면 반드시 오래도록 수(壽)하는 상서로움이 있을 것이고 큰 복을 많이 받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꿇어앉아 관(冠)을 올리고 나서는 다시 일어나 위차(位次)로 돌아가 동쪽을 향하여 선다. 주인(主人)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서(東序)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나오면 빈(賓)이 왕세자의 연석(筵席)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서서 축복하는 말을 한다. 【좋은 날 좋은 때에 다시 그대에게 피변(皮弁)을 쓰게 하니, 그대의 위의(威儀)를 조심하고 그대의 덕을 밝히라. 그렇게 하면 만년(萬年)토록 장수[壽]를 할 것이고 영원히 큰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꿇어앉아 관(冠)을 올리고 일어나서 다시 위차로 돌아와 동쪽을 향하여 선다. 주인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서(東序)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강사포(絳紗袍)를 입고 나오면 빈(賓)이 왕세자를 연석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항하여 서서 축복하는 말을 한다. 【좋은 해 좋은 달에 그대에게 세 번째로 작변(爵弁)을 쓰게 하니, 그대의 덕을 성취(成就)시키라. 그렇게 하면 만년토록 장수를 누릴 것이고 하늘의 경복(慶福)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꿇어앉아 관(冠)을 올리고 일어나서 다시 위차로 돌아와 동쪽을 향하여 선다. 주인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서(東序)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또 왕세자의 예석(醴席)을 당(堂) 위의 서남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왕세자가 면복(冕服)을 입고 나와서 남쪽을 향하여 앉으면 사옹원 부제조(司饔院副提調)  【장계 도정(長溪都正) 이병(李棅)이다.】 가 예준탁(醴樽卓)으로 나아가 예주(醴酒)를 잔에 따르면 빈(賓)이 나아가 예주를 받아 왕세자의 연석 앞으로 가서 북쪽을 향하여 서서 축복하는 말을 한다. 【맛이 아름다운 예주(醴酒)를 꽃다운 제수(祭需)로 올리고 절하며 제사지내어 아름다운 상서(祥瑞)가 이르게 하라. 하늘의 아름다운 복을 받아 장수(長壽)하여 잊지 말라.】  그리고 꿇어앉아 예주를 올리면 왕세자가 규(圭)를 꽂고 예주를 받아 제사지내고 나서 예주를 맛본다. 빈(賓)은 물러가 다시 위차로 돌아가고 왕세자는 연석에서 내려와 서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하면 빈(賓)도 재배로 답한다. 필선(弼善)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서계(西階)로부터 내려와 층계의 동쪽에 서서 남쪽을 향하면, 빈(賓)이 조금 앞으로 나아가 자(字)를 올리면서 말한다. 【예의(禮儀)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좋은 달 좋은 날에 자(字)를 밝게 고하는 것은 군자(君子)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이는 복을 받기에 마땅하니, 이 자(字)를 받아서 영원히 잘 보존하라. 전교(傳敎)를 받들어 자(字)를 아무라고 짓는다.】  왕세자가 재배(再拜)하고 말하기를, ‘모(某)가 비록 민첩하지 못하지마는 감히 삼가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나서 또 재배한다. 인의(引儀)가 빈(賓)·찬례(贊禮)및 주인(主人)을 인도하여 문으로 나간다.

 

예조(禮曹)에게 아뢰기를,
"세자빈(世子嬪)을 친영(親迎)578)  한 다음날에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에 조현례(朝見禮)를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과 왕대비전(王大妃殿)에 조현례를 행하는 조목에 대해서는 예문(禮文)에는 전거(典據)할 곳이 없습니다. 신해년579)  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니, 먼저 대전과 중궁전에 대추·밤·포[腶脩]를 차린 폐백상을 올리는 예절(禮節)을 행하고 이어 대왕 대비전과 왕대비전에는 단지 전후 사배례(四拜禮)만을 행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행해도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조문명(造文命)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이세근(李世瑾)을 좌윤(左尹)으로 삼았는데, 모두 새로 발탁된 사람들이다. 이날 권첨(權詹)을 좌윤(左尹)에 수망(首望)으로 주의(注擬)580)  했고, 정사효(鄭思孝)를 말망(末望)에 주의했었는데, 조태억(趙泰億)의 천거(薦擧)를 받은 것이었다.

 

조원명(趙遠命)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여선장(呂善長)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김동필(金東弼)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지빈(趙趾彬)을 겸 교서 교리(兼校書校理)로, 윤순(尹淳)을 예문관 제학(藝文官提學)으로, 남일명(南一明)을 부응교(副應敎)로, 윤광익(尹光益)을 수찬(修撰)으로, 강박(姜樸)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감사(監司)와 유수(留守)는 수령(守令)과는 다르기 때문에 비록 죄를 지어 파직(罷職)되어 있더라도 하례(賀禮)하는 전문(箋文)은 으레 봉진(封進)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번 왕세자의 관례(冠禮)에 대하여 진하(陳賀)할 때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기진(李箕鎭)은 전문을 봉진하지 않았으니,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진실로 기뻐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삭출(削黜)하라고 명하였다.

 

정언(正言)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여 아홉 가지 조목을 진달하였는데, 아첨하는 사람은 멀리하고 충직(忠直)한 사람을 가까이 해야 함에 대하여 논하기를,
"주자(朱子)는 무신년581)  의 봉사(封事)582)  에서 장순(張巡)·허원(許遠)·안고경(顔杲卿)의 일583)  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지난번 역적 임징하(任徵夏)가 선조(先朝)에게 무욕(誣辱)을 가할 적에 집집마다 목숨을 아끼는 마음을 품었고 사람마다 구설(口舌)로 인한 주벌을 두려워하였으며, 초초(草草)한 진신(搢紳)584)  들의 상소가 오히려 또 뒤늦게 발론되었으나 전하(殿下)께서는 어떠한 상황이었는지를 알지 못하시어, 제일 먼저 정당한 말을 주창하다가 무거운 견책을 받았으니, 이들이 장순·허원·안고경의 세상에 있었더라면 장순·허원·안고경이 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3년 동안 찬축(竄逐)당하였다가 온갖 고난을 겪고 돌아왔는데도 권장하여 기용할 뜻이 전혀 없으니, 신은 가만히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혹시 변란(變亂)이 지친(至親) 가운데에서 발생했을 적에 자신이 반졸(叛卒)이 되기도 했고, 이름이 신하의 반열에 들어 있으면서 군부(君父)에게 무욕(誣辱)을 가하기도 했으니, 천보(天寶)585)  의 변란(變亂)586)   때 적정(賊庭)에 머리 조아리고 항복한 자들이 바로 이런 등의 사람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의리(義理)를 밝혀 이륜(彝倫)을 바르게 해야 함에 대하여 논하기를,
"국안(鞫案)을 한번 뒤집은 것은 지난번 사람들이 사당(私黨)을 위하여 신리(伸理)시키려는 계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실정을 자백하고 복주(伏誅)된 경우에는 이를 무복(誣服)이라고 핑계되고, 장(杖)을 참다가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은 경우에는 원통하게 죽었다고 일컫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국시(國是)를 환하게 게시(揭示)하여 단안(斷案)을 정해야 합니다."
하고, 선임(選任)을 정밀하게 하여 체통(體統)을 밝혀야 함에 대하여 논하기를,
"영남(嶺南)은 예전부터 인재(人才)의 부고(府庫)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빠뜨렸거나 침체되어 있는 사람을 수방(搜訪)하게 하여 문·무·음·유사(文武蔭儒士)를 막론하고 매양 도목 정사(都目政事)587)   때마다 각각 1인씩 천거하게 해서 만일 한 사람을 천거한 것이 세 군데일 경우에는 바로 전조(銓曹)로 하여금 수용(收用)하게 하소서. 아! 사람을 임용하는 방법은 오직 그의 기량(器量)에 맞추어 사용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옛날 인조조[仁廟朝] 때 정온(鄭蘊)이 순천부(順天府)를 맡았었는데 인조께서 하교하시기를, ‘정온이 문학(文學)에는 능하지만 이재(吏才)588)  에는 모자란다. 그를 부제학(副提學)으로 불러들이라.’ 했습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사람을 임용하는 법이 이러했으니, 원컨대 전조(銓曹)에 신칙하소서."
하고,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켜 풍속(風俗)을 면려시켜야 함에 대하여 논하기를,
"근일 무신(武臣)들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임금의 소명(召命)이 문전에 이르렀는데도 뻔뻔스레 나오지 않고 누워 있었으니, 그때 세 번 소명을 어긴 자는 변방(邊方)으로 찬축하는 형벌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大臣)은 백인(百人)의 위에 있는 사람인데 낭속(郞屬)으로서 죄를 지고 수감되어 있는 자에게 말이 나오는대로 구욕(詬辱)을 가하는 것이 마치 장사꾼들이 서로 꾸짖는 정도일 뿐만이 아니었으며, 외읍(外邑)의 수령이 묘당(廟堂)589)  과 대각(臺閣)590)  을 뵈옵지 않은 채 곧바로 사폐(辭陛)591)  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넉넉히 세변(世變)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9월 10일 계해

왕세자(王世子)가 선정전(宣政殿)에서 조알(朝謁)하였다. 【임금은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곤룡포(袞龍袍)를 입었고, 세자는 면복(冕服)을 입었으며, 백관(百官)은 흑단령(黑團領)을 입었고, 춘방(春坊)의 관원(官員)은 모두 조복(朝服)을 입었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0면
【분류】왕실-의식(儀式)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하례(賀禮)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종사(宗社)가 만년(萬年)토록 공고해지는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세자(世子)를 미리 세우는 경사가 있어야 하고, 원량(元良)에게 삼가례(三加禮)를 거행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함께 하는 뜻인 것이다. 이에 팔역(八域)이 모두 환희하는 때를 당하여 어찌 열 줄의 윤음(綸音)을 내려 널리 고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과인(寡人)이 외람되이 큰 서업(緖業)을 계승한 것을 생각하건대, 뒤를 이을 저위(儲闈)592)  를 일찍 정하게 된 것이 그지없이 다행스럽다. 세자의 총명(聰明)하고 효우(孝友)스런 자질은 진실로 백성들의 기대가 모아져 있고, 계속 밝혀 연마한 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은 스승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을 전수(傳授)함에 있어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명각(命閣)593)  의 뜻을 본받았고, 교상(膠庠)594)  에 입학하여서는 토론이 환교(圜橋)595)  의 관람자들을 용동시켰다. 유지(幼志)를 어린 나이에 버림에 있어서는 관례(冠禮)를 올리는 아름다운 일보다 먼저 할 것이 없는데, 의식(儀式)을 위해 연석(筵席)으로 오르고 조계(阼階)로 내려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성인(聖人)의 경전(經典)에서 증거댈 수가 있다. 세대(世代)와 존위(尊位)를 밝히는 것은 곧 인도(人道)의 시작인 것인데 좋은 날을 가림은 추성(秋成)의 계절에 예속되어 있고, 복색(服色)을 갖춤은 하수(夏收)596)  의 제도를 상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이달 초9일에 당헌(堂軒)에 나가서 왕명을 선시(宣示)하였고 궁(宮)에 나아가 예절(禮節)을 거행하였다. 자(字)를 지어 주는 것은 이름을 존경하기 위한 것이고 축복해 주는 것은 복을 누리기를 바라서인 것이다. 성인(成人)의 아름다운 행실을 책임지우니 위의(威儀)가 매우 환하고, 열조(列朝)의 이장(彝章)을 준행하니 절문(節文)이 모두 갖추어졌다. 엄숙한 위모(委貌)597)  의 제도가 이에 정제되었으니, 아! 목을 길게 빼고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이 배로 깊어졌다. 양이(兩离)598)  가 상서롭게 빛나니 비창(匕鬯)599)  이 더욱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고, 삼조(三朝)600)  의 기뻐하는 안색은 면류관(冕旒冠)을 단정히 하고 천천히 추주(趨走)할 때 보겠다. 신명(神明)이 내려 준 상복(祥福)을 빛나게 하였으니 장수(長壽)하여 잊지 않기를 기약하고, 후손을 위해 남겨준 모유(謨猷)가 영구히 이어져오니 덕업(德業)이 더욱 드러나기를 기다린다. 이미 밝은 조정(朝廷)에서 하례를 받았으니 다시 온 나라에 경사로움이 반포한다. 뇌우(雷雨) 같은 은택이 널리 흡족하게 내렸으니 모든 구하(垢瑕)601)  를 씻어 주어야 하고,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이 함께 흘러넘치니 온갖 품물(品物)이 다시 크게 소생한다. 아! 큰 법으로 보익(輔翼)하여 준 것을 추념(追念)컨대, 오래도록 평안할 것을 도모하게 되고, 홍운(洪運)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시기를 즈음하여 함께 경시(更始)할 것을 생각하노라."
하였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이집(李㙫)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0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註 592] 저위(儲闈) : 왕세자(王世子).[註 593] 명각(命閣) : 왕명(王命)을 내리는 전각(殿閣). 곧 임금을 지칭(持稱)한 말임.[註 594] 교상(膠庠) : 학궁(學宮).[註 595] 환교(圜橋) : 후한(後漢) 때 명제(明帝)가 즉위하여 직접 태학(太學)에 나아가 경서(經書)를 가지고 논란을 벌였는데, 태학의 교문(橋門)에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고 함.[註 596] 하수(夏收) : 하(夏)나라 때의 수관(收冠)을 말함. 수관이란 머리를 거두어 넣는다는 뜻.[註 597] 위모(委貌) : 주(周)나라 시대의 관(冠)이름.[註 598] 양이(兩离) : 일·월(日月).[註 599] 비창(匕鬯) : 세자(世子)의 지위.[註 600] 삼조(三朝) : 세자(世子)가 하루에 임금에게 세 번 조현(朝見)한다는 말.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편에 문왕(文王)이 세자(世子)로 있을 적에 왕계(王季)에게 하루 세 번 조현(朝見)했다고 함.[註 601] 구하(垢瑕) : 죄수를 가리킴.

 

이인징(李麟徵)을 판윤(判尹)으로, 조석명(趙錫命)을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조지빈(趙趾彬)을 겸필선(兼弼善)으로, 남일명(南一明)을 사간(司諫)으로, 홍정상(洪廷像)을 수찬(修撰)으로, 조진희(趙鎭禧)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최도장(崔道章)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진옥(金鎭玉)을 파직(罷職)시켰는데,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의 청을 따른 것이다. 이때 조태억이 을사년602)   이후로 원주(原州) 감영(監營) 근처에 살았는데, 김진옥이 예우(禮遇)를 하지 않았었다. 조태억이 다시 복상(卜相)되어 서울로 올라갈 적에 단지 한 번 가서 만났을 뿐이고 배행(陪行)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草記)를 올려 파직시키기를 청한 것이다.

 

9월 11일 갑자

왕세자(王世子)의 관례(冠禮)를 올릴 때의 빈(賓) 이하 여러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는데, 빈(賓)인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 주인(主人)인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 교서 제술관(敎書製述官)인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와 【안장을 갖춘 말[鞍具馬]을 내렸다.】 찬(贊)인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집(李㙫)과 【숙마(熟馬)를 내렸다.】  찬관(贊冠)인 보덕(輔德) 조익명(趙翼明), 찬인(贊引)인 필선(弼善) 이정필(李廷弼), 빈객(賓客)인 심수현(沈壽賢)·이태좌(李台佐)·김동필(金東弼), 교서 서사관(敎書書寫官)인 참판(參判) 윤순(尹淳)과 【아마(兒馬)를 내렸다.】  전교관(傳敎官)인 우승지(右承旨) 조최수(趙最壽), 작례관(爵醴官)인 사옹원 부제조(司饔院副提調) 장계 도정(長溪都正) 이병(李棅)과 【가자(加資) 하였다.】  여러 집사(執事), 차비관(差備官)과 【혹은 아마(兒馬)를 내리기도 하고, 혹은 현궁(弦弓)을 내리기도 하였다.】  원역(員役)들이었다. 【쌀과 베를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60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뢴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곤궁한 것을 도와주는 것은 이것이 특은(特恩)인 것인데, 3등(等)으로 나누어 지급하는 것은 이미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월름(月廩)과 아울러 내렸으니 해조(該曹)에서 조관(照管)603)  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다시 참고하여 증거로 삼아 이 뒤로는 항식(恒式)으로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9월 12일 을축

채성윤(蔡成胤)을 승지(承旨)로, 조명교(曺命敎)를 정언(正言)으로, 조지빈(趙趾彬)을 부응교(副應敎)로, 성덕윤(成德潤)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유(尹游)를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송성명(宋成明)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이사성(李思晟)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조문명(趙文命)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어제 김상성(金尙星)의 소장에서 권부(權扶)가 제일 먼저 정당한 말을 제창했다가 그 자신 무거운 견책을 받은 일을 대단히 진달하고 장순(張巡)·허원(許遠)·안고경(顔杲卿)에게 견주기까지 하면서 ‘최후에 견복(甄復)604)  에 자못 권장하여 임용하는 뜻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신은 진실로 이 말을 받아들여 자신의 죄로 인정하고 굴복하여 사죄(謝罪)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만, 어떻게 감히 최초에 대망(臺望)에 즉시 통과되었고 그 뒤 기성(騎省)605)  에 특별히 조용(調用)된 사람을 간신(諫臣)들이 큰소리 치는 장순·허원·안고경과 같은 무리라고 일컬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의 소장에서 논한 내용이 수미(首尾)가 분명하지 않아 사람을 현혹시켜 머리를 감추는 말이므로 신은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른바 ‘목숨을 아끼고 구설(口舌)의 주벌을 두려워하였다’는 등의 말은 과연 어떤 사람들을 지적한 것입니까? ‘총총히 서둘러 올린 진신(搢紳)들의 상소가 그런 뒤에야 발론되었다’고 한 것은 곧 신이 지난해 임징하(任徵夏)를 토주(討誅)하기를 청한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궁벽한 시골에 거처하다 보니 신이 과연 늦게 올라왔습니다. 따라서 서로 거느리고 진달한 것이 남보다 뒤늦었으니 총총히 서둘렀다는 책망은 이것이 모두 신의 죄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김상성의 상소 내용은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경(卿)은 무엇 때문에 인혐(引嫌)하는가?"
하였다.

 

봉교(奉敎) 윤상백(尹尙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과명(科名)을 도로 회복시킨 것은 특교(特敎)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잇달아 예원(藝院)606)  에 제수하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다만 신(臣)이 사진(仕進)할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한림(翰林) 정익하(鄭益河)가 소장으로 배척한 일이고 또 하나는 대신(臺臣) 박사성(朴師聖)이 논핵한 일입니다. 정익하의 상달되지 않은 소장에 이르기를, ‘과명(科名)의 부정(不正)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은 곧 신을 가리킨 것입니다. 만일 신이 지난날 과명(科名)에서 토역(討逆)이라고 명명한 것을 부정(不正)으로 인정한다면 이는 공척(攻斥)에 급급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말이 무엄(無嚴)한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처사인 것이며, 만약 근일 과명을 바꾼 것을 가지고 부정으로 인정한다면 이는 조정의 처분(處分)에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과명으로 해서 비난을 받았으니 진실로 사진(仕進)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박사성의 소장에서 신의 사천(史薦)607)  에 대한 일을 논하면서 ‘추천하는 일을 함부로 담당하여 널리 5인을 취한 것은 전혀 어렵게 여기고 근신하는 뜻이 없는 처사이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신이 홀로 사국(史局)에 있게 되었으니 완천(完薦)의 책임이 신 한 사람에게 있다는 뜻입니다만, 이른바 함부로 담당했다고 하는 것은 어디다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의 천거한 사람들은 바로 조적명(趙迪命)·박문수(朴文秀)·이철보(李喆輔)·신치근(申致謹)·서명빈(徐命彬) 5인인데, 이들은 명주 거벌(名胄巨閥)로 재망(才望)으로 추앙(推仰)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5인의 완천은 분명한 전례가 있는데, 대신(臺臣)이 신을 탓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의도(意圖)입니까?"
하니, 임금이 전례(前例)에 따른 비답(批答)을 내렸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수인(囚人) 이수해(李壽海)의 공사(供辭)에서 신을 구욕(詬辱)한 것이 신만(申晩)·남유상(南有常)과 다름이 없었다는 것을 금부 당상(禁府堂上)이 목견(目見)하고 나서도 날이 저물었다는 것을 이유로 환급(還給)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누차 금부 당상에게 통보하여 봉입(捧入)하도록 재촉하였습니다만, 공고(公故)가 있다고 하면서 아직껏 개좌(開坐)하지 않고 있었다가 이제 사명(赦命)이 내린 때를 당하여 석방했다고 하니, 구차스럽게 미봉(彌縫)한 것 같습니다. 신이 비록 무력하고 용렬하지마는 어떻게 태연히 덮어둔 채 무사(無事)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직차(職次)에 눌러 앉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총재(摠裁)의 직임에서 체직시켜 고향으로 빨리 돌아가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금부 당상에게 하문(下問)하니, 심수현(沈壽賢)이 대답하기를,
"이수해(李壽海)·이석신(李碩臣)은 마땅히 동시에 공초(供招)를 받아야 하는데 이석신이 고향에서 올라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수해의 공사(供辭)가 먼저 전파되어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들은 신만(申晩)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공사(供辭)를 아직 올리지 않았으니, 논죄(論罪)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총재(總裁)의 행공(行公)에 방애가 되어 있고 또 그들이 오래도록 사진(仕進)하지 않고 있으니, 이수해와 이석신은 모두 삭직(削職)시키라."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심공(沈珙)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기호(畿湖) 지방에 흉년이 들었으니, 침작하여 헤아려 급재(給災)608)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이이명(李頤命)과 그 아들 이기지(李器之)를 임천(林川)의 큰 마을 가운데에다 장사지낼 적에 민가(民家) 수십 호(戶)를 일시에 철거(撤去)하였는데, 다만 금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일도(一道)의 사람을 동원하여 부역(赴役)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자 이봉상(李鳳祥)은 선조(先朝) 때 망명(亡命)했던 사람으로 편안히 생활하면서 날마다 침학(侵虐)을 부리고 있으므로 마을의 백성들이 모두 흩어질 마음을 품고 있으니, 엄한 처분(處分)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급재(給災)하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소장의 끝에 거론한 일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겠다."
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반인(泮人)609)  들의 생업(生業)이 어려우니, 군문(軍門)의 전화(錢貨)를 대여(貸與)해 줄 것을 허락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신축년610)  ·을사년611)   이후 시위(試圍)612)  의 고관(考官)을 순전히 한쪽 사람만 쓰고 있는데, 인정이란 절제(節制)를 잃기는 쉬워도 제재(制裁)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이제부터는 고관의 망단자(望單子)613)  에 반드시 반대편 사람을 참입(參入)시키게 하소서. 만약 까닭없이 사진(仕進)하지 않을 경우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은 고신(告身)614)  을 수탈(收奪)하고 벼슬이 낮은 사람은 의금부(義禁府)에서 추문(推問)하여 결장(決杖)하게 함으로써 규피(規避)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고, 또 일전에 이기진(李箕鎭)을 삭출(削黜)하라고 한 전교(傳敎)가 중도에 지나쳤다는 것을 말하기를,
"그는 재상(宰相)의 반열에 있고 일찍이 은우(恩遇)를 받았던 사람인데, 그의 기쁨이 어찌 남에게 뒤지겠습니까? 이런 등류의 사령(辭令)은 보고 듣는 데에 방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위의 건사(件事)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시관(試官)에 대한 일은 그 공평함을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기니 해조(該曹)에 신칙(申飭)하겠다. 이기진(李箕鎭)의 일은 이제 그대의 소장(疏章)을 보고서야 비로소 지나쳤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변사 당상관(備邊司堂上官)을 불러 보았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이미 돈소(敦召)하여 예절(禮節)을 갖추어 맞아들이게 했으므로 도성(都城)의 백성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고 기다렸었는데, 오랫동안 서추(西樞)615)  에 있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들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원임(原任)의 소장에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하지 않겠다[誓墓]는 말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말세(末世)에 탄핵을 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늘상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맹세한다면 조정에 종사(從仕)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호판(戶判)은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이태좌(李台佐)가 대답하기를,
"오명준(吳命峻)이 소장을 올려 배척한 뒤에 과연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상이 권우(眷遇)가 이러하니 어찌 그 마음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변치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심수현(沈壽賢)은 말하기를,
"아비가 비록 아들에게 벼슬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만약 임금의 명령이 있으면 감히 벼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대신(大臣)이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이를 스스로 단념한다면, 신은 그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의(私義)는 끊어버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李光佐)가 사진(仕進)하지 않으면서 이미 조상(祖上)의 구묘(丘墓)에서 벼슬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죽은 사람은 비록 앎이 없지만 배반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처음에는 이 말을 가지고 사면(辭免)할 계책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임금의 자리 앞에 나와서는 곧 추회(追悔)하는 뜻을 보였으니, 심수현(沈壽賢)의 말은 더욱 사리(事理)에 어긋나는 것이다. 세상에 어찌 부모를 저버리고서 자기 임금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윤유(尹游)는 이명언(李明彦)을 일컬으면서 ‘도민(都民)들이 날마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까지 말하였고, 조태억(趙泰億)은 이광좌를 또 ‘도민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너무도 사리에 맞지 않으니, 무엄(無嚴)하다고 할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1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615] 서추(西樞) : 중추부(中樞府).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李光佐)가 사진(仕進)하지 않으면서 이미 조상(祖上)의 구묘(丘墓)에서 벼슬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죽은 사람은 비록 앎이 없지만 배반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처음에는 이 말을 가지고 사면(辭免)할 계책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임금의 자리 앞에 나와서는 곧 추회(追悔)하는 뜻을 보였으니, 심수현(沈壽賢)의 말은 더욱 사리(事理)에 어긋나는 것이다. 세상에 어찌 부모를 저버리고서 자기 임금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윤유(尹游)는 이명언(李明彦)을 일컬으면서 ‘도민(都民)들이 날마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까지 말하였고, 조태억(趙泰億)은 이광좌를 또 ‘도민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너무도 사리에 맞지 않으니, 무엄(無嚴)하다고 할 수 있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 홍석보(洪錫輔)가 장계(狀啓)를 올려 본영(本營) 군병들의 번상(番上)을 정지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연사(年事)가 흉년이 들었으니 허락해 주어야 합니다."
하고,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은 아뢰기를,
"병영(兵營)은 적로(賊路)의 처음 들어오는 길이므로 군대를 정비하는 정무(政務)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번상(番上)을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영에는 번상을 정지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이삼이 또 아뢰기를,
"순회 점검(點檢)할 적에 각 고을에서 돌려가면서 기계(器械)616)  를 빌어다 쓰고 군병을 대신 점고(點考)받았다가 순회 점검한 후에는 전적으로 방임한 채 포기하여 버립니다. 서관(西關)은 다른 도(道)와 다르니, 병사(兵使)가 추졸(騶卒)을 간편하게 하여 수시로 적간(摘奸)한다면, 각 고을에서 어느날 당도할지 모르게 되어 반드시 모두 각별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일시에 두루 순회 점열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신이 일찍이 장계(狀啓)를 올려 청한 적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변(武弁)이 모두 훈장(訓將)의 말과 같이 한다면 좋겠다. 제도(諸道)에 신칙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날 이삼(李森)과 김중기(金重器)가 수원(水原)의 군병들이 정예롭다는 것을 대단히 말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데면데면하게 듣고 있었다. 그 뒤 이사성(李思晟)이 과연 평안도(平安道)의 병제(兵制)를 고쳐 은밀히 불궤(不軌)617)  를 도모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복주(伏誅)되었다. 김중기가 무신년618)   변란이 발생한 처음에 남태징(南泰徵)을 극력 추천하여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으려 했으나, 조문명(趙文命)의 무리가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에 송진명(宋眞明)을 부사로 삼았는데, 김중기가 소장(疏章)을 올려가면서까지 극력 쟁론(爭論)하였지만 끝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오래지 않아 김중기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왔는데, 그제서야 그날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이 뜻이 있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1면
【분류】농업(農業) / 군사(軍事) / 역사(歷史)


[註 616] 기계(器械) : 무기(武器).[註 617] 불궤(不軌) : 반역(反逆).[註 618]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사신은 말한다. "이날 이삼(李森)과 김중기(金重器)가 수원(水原)의 군병들이 정예롭다는 것을 대단히 말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데면데면하게 듣고 있었다. 그 뒤 이사성(李思晟)이 과연 평안도(平安道)의 병제(兵制)를 고쳐 은밀히 불궤(不軌)617)  를 도모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복주(伏誅)되었다. 김중기가 무신년618)   변란이 발생한 처음에 남태징(南泰徵)을 극력 추천하여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으려 했으나, 조문명(趙文命)의 무리가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에 송진명(宋眞明)을 부사로 삼았는데, 김중기가 소장(疏章)을 올려가면서까지 극력 쟁론(爭論)하였지만 끝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오래지 않아 김중기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왔는데, 그제서야 그날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이 뜻이 있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령(守令)들이 여결(餘結)619)  을 사사로이 쓰는 데 대한 형률(刑律)을 다시 엄하게 하였으니, 이는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때 호남(湖南)의 어사(御史) 이광덕(李匡德)이 장계를 올려 여결을 사사로이 쓰는 데 대한 폐단을 논하였는데,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여결(餘結)로 마감이 된 것에 있어서 자신에게는 검약(儉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수령들은 그것을 모두 대동재(大同災)로 주어 보조하고 있는데, 이것이 비록 백성들에게는 편리할지라도 또한 범금(犯禁)에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청렴하지 못한 수령들은 여결(餘結)에도 원결(元結)과 동일하게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를 거두어 결국은 자신이 사사로이 써버립니다. 또 간혹 이를 가격으로 계산하여 돈[錢]으로 봉납하기도 하는데 흉년에는 1결(結)의 값이 7, 8냥에 이르고 있으니, 세상에 어찌 전결(田結)을 팔아먹는 수령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의당 별도로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삼남(三南)에 반포하고 그런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중죄(重罪)로 추구(推究)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결의 세금을 사사로이 쓰는 데 대한 형률(刑律)이 어떠한가?"
하였다.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10복(卜) 이상이면 금고(禁錮)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결을 팔아먹는 것은 은결(隱結)620)  하는 것보다 더 나쁘니, 다과(多寡)를 논하지 말고 장률(贓律)로써 적용하라."
하였다.

 

호남(湖南)의 전세(田稅)의 반을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호남 어사(湖南御史) 이광덕(李匡德)이 장계(狀啓)를 올려 한전(旱田)에 급재(給災)하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한전은 1년에 두 번 경작하기 때문에 원래 급재하는 법규가 없습니다."
하니, 이에 임금이 그 전세의 반을 감면하라고 명한 것이다.

 

다시 제도(諸道)에서 전·목(錢木)621)  을 반반씩으로 섞어 봉납(捧納)하게 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전화(錢貨)에 폐단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혁파(革罷)하려 하였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어렵게 여겼기 때문에 서울과 지방의 관부(官府)에 명하여 돈[錢]으로 봉납할 것을 허락하지 말게 하고 단지 민간(民間)에서 사사로이 쓰는 것만을 허락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시혁(金始㷜)이 백성들의 청원에 따라 장계(狀啓)를 올려 반은 돈으로 섞어서 봉납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도 잇달아 ‘사사로이 쓰는 것만 허락하고 공적으로 쓰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 것은 장애되는 점이 많다’고 진달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이날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만약 전폐(錢幣)를 혁파한다면 의당 저폐(楮幣)를 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저폐의 편부(便否)에 대해 하문하였다.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신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듣건대, 그 제도는 장지(壯紙) 한 장이면 여섯 조각을 낼 수 있고, 그 모양은 병조(兵曹)의 초료판(草料板)622)  과 같아서 백관(百官)들의 늠료(廩料)를 나누어 줄 적에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래 쓰면 해져서 떨어지고 찢어지기 때문에 떨어지는 대로 다시 만들어야 하므로 결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고, 이태좌(李台佐)는 말하기를,
"이른바 조량목(助粮木)이라는 것은 바로 시장에서 쓰는 상목(常木)623)  인데, 신이 어릴 적에 본 바로는 길이나 너비가 너무 짧아서 세간에서 이른바 함산포(咸山布)라는 것과 같아서 오래 쓰면 거칠고 검게 되니, 이것은 사가(私家)에서 아침저녁으로 시장에서 쓰는 것에 불과할 뿐이고 다른 데에 쓸 수가 없습니다. 병진년624)  에 처음 소전(小錢)을 주조했는데 소전 네 푼이 대전(大錢) 한 푼의 값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폐(楮幣)와 조량목(助粮木)은 내가 아직 보지 못했는데, 일단 돈을 사용한 뒤로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날로 점차 괴려(乖戾)되어가고 있으니, 이는 우물(尤物)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을 혁파한다면 다른 화폐(貨幣)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묘당(廟堂)에서 헤아려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으로 강원도(江原道)에다 포·목(布木)을 반반씩 섞어서 봉납할 것을 허락했는데, 이는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의 말을 따른 것이다. 관동(關東)에는 마포(麻布)는 생산되지만 목면(木綿)은 매우 귀하므로 일찍이 도신(道臣)의 요청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태억이 원주(原州)에서 와서 산골 백성들의 청원을 대단히 진달했던 까닭에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경상 도사(慶尙都事) 윤광천(尹光天)을 원지(遠地)에 찬배(竄配)시켰다. 윤광천은 함부로 형벌을 써서 사람을 죽였는데, 수금(囚禁)되었다가 감죄(勘罪)하지 않은 채 사령(赦令)으로 인하여 방면되었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선조(先朝) 때에는 서장관(書狀官) 정제선(鄭濟先)이 함부로 곤장을 쳐서 사람을 죽였다가 마침내 먼 곳에 귀양가게 되었고 회양 부사(淮陽府使) 유신일(兪信一)은 북도(北道)의 유생(儒生)을 곤장을 쳐서 죽였다가 마침내 옥중(獄中)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윤광천은 비록 그것이 우연히 죽게 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완전히 놓아줄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9월 12일 을축

승지(承旨) 송진명(宋眞明)이, 유시모(柳時模)가 3년 동안 파출(罷黜)된 것에 대한 억울함을 아뢰고 이어 거두어 서용(敍用)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유시모가 일찍이 역적(逆賊)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을 개찬(改撰)할 것을 청하는 발의(發議)를 했는데, 그 내용이 배척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엄호(掩護)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임금이 엄한 분부로 파출시켰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송진명이 그의 억울함을 대단히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일이 세상에 나온 뒤에 사람들이 모두 특이한 이론을 제기하지 않은 채 묵묵히 지내왔다. 그런데 김시빈(金始鑌)의 소장(疏章)이 나오고 나서 유심(有心)이니 무심(無心)이니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매우 구별이 분명치 않은 내용이니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조태억(趙泰億)이 잇달아 아뢰었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특별히 강박(姜樸)을 파직(罷職)시켰다. 하교(下敎)하기를,
"강박은 지난번 윤지술(尹志述)의 일을 진달하면서 망발(妄發)한 말이 있었고, 그 뒤 소장(疏章)을 올려 국구(國舅)를 논핵하면서 이삼석(李三錫)의 일도 따져 언급했는데, 이는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이제 와서 녹훈(錄勳)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였는데, 이는 바로 김일경(金一鏡)이 했던 추악하고 패려스러운 말이다.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파직시켰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최집(崔)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징하(任徵夏)를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할 적에 복역(覆逆)625)  했던 승지(承旨), 청대(請對)했던 옥당(玉堂), 제일 먼저 발론했던 대신(臺臣)을 원찬(遠竄)시키라는 일이었는데, 모두 삭출(削黜)만 시행하였다. 또 아뢰기를,
"망명 죄인(亡命罪人) 이봉상(李鳳祥)은 바로 정법(正法)626)  의 명령이 내리던 날 멋대로 도망하여 숨었으니, 이는 참으로 전고(前古)에 없던 변고인 것입니다. 이뒤로 난신 적자(亂臣賊子)들이 반드시 형벌에 임하여 도명(逃命)할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선조(先朝)의 망명 죄인 이봉상을 형률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계(臺啓)를 윤허하는 여부(與否)는 ‘선조(先朝)’라는 두 글자의 유무(硫無)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익명(李益命)은 이봉상이 가장(家長)으로서 이봉상이 도명(逃命)할 적에 같이 모의하여 숨겨 주었고, 그가 소장(疏章)을 진달하여 자수(自首)할 적에는 감히 혼조(昏朝)627)   때의 일을 인용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패려스러웠으니, 이익명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런 등류의 계사(啓辭)는 국시(國是)가 정해지고 난 다음 계속 발론할 일이니, 지금으로서는 경솔하게 앞질러 한 듯하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김씨(金氏) 성(姓)을 가진 궁인(宮人)이 독약(毒藥)을 쓰기로 했다고 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이것이 국초(鞫招)에서 나왔고 옥사(獄事)를 다스린 신하가 법에 의거하여 잡아오기를 청했으니, 이는 본디 당연한 의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방만규(方萬規)가 올린 소장에서 과감하게 감히 말할 수 없는 처지에 견주었으므로 신이 그때 감히 징토(懲討)해야 한다는 의리를 진달했고, 주상께서도 전형(典刑)을 명백히 바로잡았습니다. 그 뒤 정형익(鄭亨益)이 감히 한 장의 소장을 올려 온 세상의 사람들을 악역(惡逆)의 죄과(罪科)에 없는 죄를 꾸며 모함했었는데, 그의 말이 그르다면 이는 사람을 악역의 죄과에 빠뜨린 것이므로 절로 해당되는 형률(刑律)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삼사(三司)에서는 죄를 청하는 논계(論啓)가 없었으니, 주상께서 반드시 광명 정대한 처분(處分)을 내린 뒤에야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형익의 일은 방만규가 복법(伏法)된 뒤에 그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정형익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조태억(趙泰億)이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이미 살인(殺人)을 즐겨 하지 않으시는 덕(德)이 있으시니 신하로서는 당연히 이를 봉승(奉承)해야 하는데, 정호(鄭澔)는 아주 노쇠한 사람으로 지위가 삼사(三事)628)  에 이르렀으면서도 오로지 당론(黨論)만을 일삼아 고묘(告廟)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의 거취(去就)를 결단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민진원(閔鎭遠)은 자신이 원구(元舅)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매양 ‘살인(殺人)’이라는 두 글자로 군상(君上)에게 권하였는데, 고묘론(告廟論)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반드시 그 죄를 명백히 바로잡은 뒤에야 국인(國人)의 분노를 풀어줄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합계(合啓)에 대해 아직껏 이렇게 윤허하지 않는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호는 다만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일 뿐만 아니라 또 나이가 늙었으니, 억지로 죄줄 필요가 없다. 민진원은 성후(聖后)629)  의 동기(同氣)로서 단지 혼자만 남아 있을 뿐이고, 또 내가 성모(聖母)께서 자애롭게 길러주신 은혜를 추념(追念)하건대, 어찌 차마 민진원을 죄줄 수 있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릴 수는 없다.’ 한 말이 있으니, 나는 결단코 차마 죄를 줄 수가 없다. 송인명(宋寅明)의 소장(疏章)에서 ‘우선 먼저[姑先]’라는 두 글자는 함축성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좌상(左相)이 입대(入對)하였으니 당연히 하교(下敎)해야 하겠으니, 좌상에 대해서는 구애되는 혐의가 있다. 뒷날 연석(筵席)에서 영부사(領府事)와 좌상(左相)이 함께 입시(入侍)하고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모였을 때 마땅히 하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9월 13일 병인

윤순(尹淳)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삼았으니, 조태억(趙泰億)이 추천한 것이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여광헌(呂光憲)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해에 독약(毒藥)을 쓰려고 했던 궁비(宮婢)에 대해 조사하기를 청한 일은 실로 신하로서 토죄 복수(討罪復讎)하자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정형익(鄭亨益)은 이의연(李義淵)의 마음을 전수하여 받고 방만규(方萬規)의 여론(餘論)을 주어 엮어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감히 드러내어 지적하고 핍박하는 등의 말을 장주(章奏)에 썼습니다. 아! 이런 일을 차마 한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남을 무함하기에 급급하여 감히 말할 수 없는 처지에 견주기까지 했으니, 용의(用意)가 음험하고도 참혹합니다. 지난번 천감(天鑑)630)  이 매우 밝지 않았더라면 온 조정이 반 이상 되는 사람들이 모두 종족(宗族)이 멸절(滅絶)되는 형벌에 빠졌을 것이니, 삭출(削黜)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전일에 아뢴 계사(啓辭) 가운데에서 최초로 발론한 대신(臺臣)을 파직시키자고 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조덕린(趙德隣)을 교리(校理)로, 이광덕(李匡德)을 수찬(修撰)으로, 조경(趙儆)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삼았다.

 

 

 

9월 14일 정묘

사방(四方)이 캄캄한 것이 마치 먼지가 내리는 것 같았고, 햇빛이 검붉었다.
수찬(修撰) 이광보(李匡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지난해에 당한 일은 심상(尋常)한 일에 견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복심(腹心)이니 조아(爪牙)이니 하는 등의 말은 실로 이것이 지난번에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던 수법인데, 담당(擔當)했다느니 장해(狀害)했다느니 하는 등의 지목(指目)은 그 당시 토죄 복수(討罪復讎)하자는 의논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이야 변해(辨解)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남읍(南邑)에서 탐욕을 부렸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애매한 데 관계되는 것이고 검전(檢田)의 직임에 차임되기를 도모하였다는 이야기는 이야말로 한번의 웃음거리도 못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물러 지체하면서 음란(淫亂)한 짓을 했다는 것은 아! 너무도 통분스럽습니다. 선침(仙寢)께서 빈소(殯所)에 계신 때를 당하여 어떻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도사(都事) 박사제(朴師悌)와는 원래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술에 취하여 기생(妓生)을 다투었던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부응교(副應敎) 조지빈(趙趾彬)이 상소하기를,
"영남(嶺南) 사람은 문과(文科)에 급제한 이가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경서(經書)를 연구하고 행실(行實)을 근신하는 선비가 또한 얼마인지 모를 정도인데도 다만 표방(標榜)에 인연하여 전연 폐기되고 있으니, 각별히 수용(收用)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전조(銓曹)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정언(正言) 조명교(曺命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역자(逆者)에게 서원(書院)에서 제향(祭享)하게 하고 시호(諡號)를 내려 주어 포장(褒奬)한 은전(恩典)을 내린 데 대해 논하였는데, 신이 수참(隨參)한 사람을 추륙(追戮)해야 한다고 한 계사(啓辭) 때문에 도리어 삭출(削黜)당하는 견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충(忠)·역(逆)이 분변되기 전에는 신의 죄목(罪目)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비(逆婢)를 징토할 것을 청한 것은 그 일이 윤기(倫紀)에 관계가 되는데 정형익(鄭亨益)의 소장(疏章)은 신 한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었으니 도리어 떠들썩하게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또 신이 연전(年前)에 외람되게 안렴(按廉)631)  의 명을 받고 의주(義州)에 이르러 교활한 상인(商人) 한 사람을 치죄(治罪)하여 3차의 형신(刑訊)을 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 김응복(金應福)이 소장을 올려 이현장(李顯章)을 논할 적에 그 여파(餘波)가 신의 몸에도 미쳐서 ‘수의(繡衣)632)  가 같이 일하는 사람을 장살(杖殺)하면서 미봉(彌縫)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고 했고, 잇달아 이정소(李廷熽)의 사장(査狀)에서도 ‘일찍이 이 일 때문에 어사(御史)에게 장살(杖殺)을 당했지만 실상을 빙문(憑問)할 길이 없다.’고 말하면서, 마치 신이 법을 굽혀 이현장을 위하여 살인(殺人)해서 증언(證言)할 사람을 죽여 없앤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심(私心)을 부리기 위해 공도(公道)를 저버린 죄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지난 일인데 혐의할 것이 뭐 있는가?"
하였다.

 

9월 15일 무진

양사(兩司)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최집(崔)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새로 제수(除授)된 강진 현감(康津縣監) 유상익(柳祥翼)은 혼미하고 용렬하니, 파직(罷職)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문학(文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앞서 올린 소장(疏章)에서 논한 이명언(李明彦)의 일에 대해서는 당초에 깊은 뜻이 없었습니다. 대저 이명언의 재지(才智)가 쓸 만하다는 것을 신이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옥서(玉署)633)  에 있을 적에 추숭(追崇)하자는 소장을 한 번 올린 뒤로 끝내 청의(請議)에 애석히 여김을 받게 되었으니, 그에 대해 개략적인 내용을 제기하여 논한 것이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나라 사람의 반수가 일제히 분노하고 말하는 사람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장헌(掌憲)634)  의 소장(疏章)에 이르러서는 더욱 장황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내용에, ‘소생(所生)에게 야박하게 했다’느니, ‘사체(事體)라’느니, ‘도리(道理)라’느니 한 등의 말은 은영중 다시 곡경(曲逕)을 통하여 의리(義理)임을 게시(揭示)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북관(北關)의 무사(武士)들 가운데 직부(直赴)635)  하게 한 사람은 정시(庭試)636)  에 응시하도록 허락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북도(北道)의 무사들 가운데 직부(直赴)를 허락받은 사람들이 정시에 응시하기 위해 올라왔는데 정시는 전시(殿試)637)  와는 달라서 특교(特敎)가 없으면 응시를 허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소장을 올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을 위로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허락한 것이다.

 

9월 17일 경오

밤에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조상경(趙尙絅)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소장(疏章)을 올려 시사(時事)를 논한 때문이었다. 그의 소장에 대략 말하기를,
"신이 떠나가야 하는 것은 그 단서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명(聖明)께서 신을 잡아두고 체면(遞免)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방백(方伯)의 직임은 여러 고을을 총찰(總察)하는 것인데, 지금 신은 4개월이나 병으로 몸져누워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고을의 품보(稟報)를 전혀 수응(酬應)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신이 떠나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작년에 신이 외람되이 사간원(司諫院)에 몸담고 있었는데, 그때 삼사(三司)와 날짜를 약속하여 청대(請對)해서 난역(亂逆)을 징토(懲討)하려 했었습니다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만일 신이 아무 연고 없이 서울에 있었다면 목욕 재계하고 징토를 청하는 것이638)   어찌 남에게 뒤졌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토역(討逆)했던 제신(諸臣)들이 일제히 모두 파직 삭탈되었는데, 신 혼자만이 죄벌(罪罰)을 면하고 태연히 직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떠나야 하는 두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본도(本道)의 흉년은 근래에 없었던 극심한 것이므로 반드시 백성들의 일을 묘당(廟堂)에 품의(稟議)한 뒤에야 구활(救活)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근일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여당들이 뜻을 얻어 종횡으로 날뛰고 있는 바 그들의 전두(前頭)의 형세를 살펴보면 반드시 참혹(慘酷)한 수단을 부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과 같이 무력하고 용렬한 사람은 일찍이 그들에게 날조된 무함을 받았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보존했었으니, 또 어떤 죄명(罪名)을 씌워 이 한몸을 감금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러니 어떻게 백성을 구제할 계책을 상세하게 조처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떠나야 하는 세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이렇게 떠나야 할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도 머뭇거리면서 주저앉아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치인 것입니다. 신이 바야흐로 물러가기를 청하는 마당에 한마디 올려 보겠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탕평(蕩平)’이라는 두 글자로써 지치(至治)를 이룰 제목(題目)으로 삼고 계신데, 성의(聖意)의 소재를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탕평이라는 말 속에는 본디 허다한 의리(義理)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화(士禍)를 빚어내는 와주(囮主)와 기사년639)   흉당(凶黨)의 잔얼(殘蘖)들이 진흙과 물이 혼합한 것처럼 한데 뭉쳐 한편이 되어 있으므로 흉언(凶言)과 패설(悖說)이 날마다 주광(黈纊)640)   아래에 진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심(聖心)을 엿보아 헤아려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을 뒤바꿔 놓으려는 의도가 현저히 드러나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용납하여 보호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형세가 그치지 않는다면 백마역(白馬曆)에서 청류(請流)들을 황하(黃河)에 던져넣은 화(禍)가641)   성세(聖世)에 다시 일어날 뿐만이 아니라 실로 국사(國事)가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난번에 이른바 탕평(蕩平)의 다스림이라는 것을 신은 끝내 볼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정호(鄭澔)와 민진원(閔鎭遠)은 정직한 도리로 임금을 섬겼고 일편 단심으로 나라를 위했는데, 그들이 건백(建白)한 것은 난역(亂逆)을 주토(誅討)하여 선왕(先王)의 성대한 덕을 드러내려고 한 것게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붕비(朋比)’라는 두 글자는 전혀 얼토당토 않은 말인데, 전하(殿下)께서는 갑자기 정외(情外)의 분부를 내리시어 조금도 가차없이 꾸짖고 박축(迫逐)하였습니다. 아! 주자(朱子)가 이른바 ‘대신(大臣)을 종처럼 꾸짖고 서료(庶僚)들을 돼지처럼 여기고 있다.’고 한 말이 불행하게도 근사하게 되었습니다. 민진원은 성모(聖母)642)  의 동기(同氣)로서 나라가 보존되면 함께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한다는 것이 그가 평소 스스로 마음속에 맹세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사람이 어찌 붕비(朋比)를 달갑게 여기는 사람이겠습니까? 정호는 나이 이미 70이 넘었습니다. 젊어서부터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쉽게 했는데 다만 그의 언의(言議)가 방정(方正)했기 때문에 남에게 미움을 받은 것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일찍이 임인년643)  에는 찬축(竄逐)을 당하여 남쪽 끝과 북쪽 끝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모진 고생을 하였는데, 도로(道路)에서 쓰러져 죽는 것을 면한 것만도 진실로 한 가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에 와 나이는 더욱 많아지고 병은 더욱 깊어져 숨이 장차 끊어지려고 헐떡거리면서 아침저녁으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경에 있는데도 기필코 장독(瘴毒)이 있는 바닷가로 귀양보내려고 합니다. 성명(聖明)의 지극한 인애(仁愛)로써 어떻게 차마 시인(時人)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기 위해 거의 죽게 된 구신(舊臣)을 끝내 보전(保全)할 수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주석(柱石)인 신하들이 모두 이들에 의해 이멸(夷滅)되었으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하교(下敎)하기를,
"국가의 기강이 엄하지 못한 탓으로 의리가 또한 분명하지 못하여 단지 자신의 당여(黨與)만 알 뿐 군부(君父)가 있는 줄은 모르고 있다. 그리하여 대관(大官)이나 소관(小官)을 막론하고 당(黨)을 비호하는 것을 달갑게 여겨 멋대로 조정을 무함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분스럽고 놀라운 일이다. 이제 함경 감사(咸鏡監司) 조상경(趙尙絅)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군부(君父)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겠는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서용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공조 참의(工曹參議) 권익관(權益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갑진년644)   겨울부터 신이 문득 많은 화살받이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어 있는데, 화살받이들은 박지혁(朴趾赫)·이의천(李倚天)·허석(許錫)·안세갑(安世甲)·이동복(李東馥)·김수명(金壽溟)의 부류가 바로 그들입니다. 신이 무함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김유경(金有慶)·이양신(李亮臣)의 무함이 더없이 음험하고 참혹했습니다. 김유경의 소장에 이르기를, ‘권익관의 소장에서 거괴(巨魁)를 사흉(四凶)에 대비(對比)하여 말을 했었습니다. 저들은 매양 사대신(四大臣)645)  을 역괴(逆魁)라고 했었는데, 갑자기 사대신 이외에 하나의 거괴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으니, 지적한 의도가 매우 음험합니다.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그의 소장을 고출(考出)하게 하여 그 죄를 바루게 하소서.’ 했는데, 이양신이 다시 김유경의 소장의 내용을 들고 나와 곧바로 전형(典刑)을 분명하게 바룰 것을 청했습니다. 아! 신이 임인년646)  에 소장을 올려 역옥(逆獄)에 대해 논할 적에 제일 먼저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이 두 역적을 거론하여 그들이 역괴(逆魁)임을 밝혔습니다. 대체로 사흉(四凶)은 여러 역적들의 우두머리이고 이 두 역적은 더욱 사흉 가운데서도 괴수(魁首)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조송(趙松)이 은(銀)을 훔쳤다는 이야기에 대해 논하면서 말하기를, ‘역괴(逆魁)가 흉독을 부리니 역적들이 이를 진퇴(進退)시킬 수가 없었고 사흉(四凶)이 합심하여 모의하니 온갖 간사한 자들이 그림자처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그 역괴라고 한 것은 이이명과 김창집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역적들이라고 한 것은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한번 안복(案覆)을 거치자 그 사실이 금방 드러나 버렸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을 사패(司敗)647)  에 내리시어 김유경·이양신과 소장의 내용에 대해 대질(對質)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지난번에 사람을 무함하고 죄를 날조한 것이 대개가 모두 그러했으니, 그대가 지나치게 혐의할 것이 뭐 있겠는가? 사퇴(辭退)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正言) 조명교(曺命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 저들이 이른바 선왕(先王)648)  께서 질양(疾恙)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어떤 질양입니까? 한때에 열화(熱火)가 오르내린 경우는 진실로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축년649) 조성복(趙聖復)의 소장이 나온 뒤를 당하여 선왕의 비지(批旨)에 ‘이와 같을 뿐이다’라고 한 데 불과했었고, 진신(搢紳)들의 소장의 내용도 ‘이와 같을 뿐이다’라고 한 데 불과했으며, 저들이 이른바 정청(庭請)650)  할 때의 계사(啓辭)에도 ‘이와 같을 뿐이다’라고 한 데 불과했습니다. 그뒤 3, 4년 동안 특별히 다른 증세(症勢)가 가중된 적이 없었고 또한 질환(疾患)을 가지고 말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질환이 있다는 말이 갑자기 민진원(閔鎭遠)의 수차(袖箚)에서 튀어나왔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성찰(省察)하지 못했다’느니, ‘영회(領會)651)  하지 못했다’느니 하였으므로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진실로 이미 그 지의(指意)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데 고묘(告廟)의 의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세상에서 선왕(先王)을 헐뜯는 자들은 질환이 있었다고 말을 했고 선왕을 변호하는 자들은 질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선왕께서 질환이 있었다느니 없었다느니 하는 것이 마침내는 하나의 큰 안건(案件)이 되어버렸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질환이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은 그 심장(心腸)이 진실로 말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요 질환이 없었다고 말하는 자들도 그 또한 잘못입니다. 신이 외람스럽게 변변찮은 자질로 이두(螭頭)652)  에서 가까이 모신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선왕(先王)께서 제신(諸臣)들의 소장에 대해 직접 옥음(玉音)을 내셨고 승선(承宣)을 시켜 비답(批答)을 쓰게 한 것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양사(兩司)의 계사(啓辭)에 대해 윤허하지 않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비록 신기(神氣)가 불평할 때를 당했을지라도 번거롭게 하지 말라느니 윤허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것을 분명히 하여 한번도 착오된 말이 없었습니다. 간간이 열화(熱火)가 오르면 연신(筵臣)들을 꾸짖어 물리치기도 했지만 얼마 안 있어 다시 불렀고 이내 위로하는 뜻을 보이면서 개유하기를 ‘한때 열화가 올라와서 이런 지나친 거조가 있었다.’ 하였습니다. 한때의 열화는 비유하건대, 해와 달에 잠깐 일식과 월식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큰 총명(聰明)에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전대의 역사(歷史)를 두루 상고하여 보건대, 군주 가운데 질환(疾患)이 있었던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질환 때문에 군주의 직무를 버린 사람은 당 순종(唐順宗)과 송 광종(宋光宗) 두 군주뿐이었습니다. 순종(順宗)은 궁중(宮中)에 깊이 거처하고 있었으므로 정사(正事)가 유렴(帷簾)에서 나왔습니다. 광종(光宗)은 아버지가 아파도 문안(問安)을 못했고 아버지가 붕어(崩御)했는데도 복상(服喪)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 태자(太子)에게 감국(監國)하게 했다가 전위(傳位)한 일이 있었습니다. 송 영종(宋英宗)의 경우는 경의(驚疑)로 인하여 질환(疾患)을 얻었는데 관구(棺柩) 앞에서 지팡이를 던지고 약물(藥物)을 집어던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만, 한기(韓琦)653)  가 얼싸안고 염내(簾內)로 들어가면서 좌우(左右)에게 신칙하여 이런 곡절을 누설시키지 못하게 하는 등 보호한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가령 군주의 질환이 당 순종·송 광종과 같은데, 신하된 자가 두황상(杜黃裳)654)  ·조여우(趙如愚)655)  와 같은 일을 하게 된다면, 이는 또한 천지 사이에 더없이 큰 불행인 것입니다. 그리고 선왕(先王)의 질환은 열화가 오르내린 것에 불과한데 저들은 한기(韓琦)가 한 일을 행할 것은 생각하지 않았고 또 두황상(杜黃裳)과 조여우(趙如愚)와 같은 마음도 없었으니, 그들이 화심(禍心)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는 역적(逆賊)이 아니라고 하지만 여러 사람의 눈총과 천고(千古)의 비평에서 끝내 ‘역(逆)’이라는 한 글자를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선왕(先王)께서 전하(殿下)의 성명(聖明)을 명찰(明察)함으로써 위로 자성(慈聖)의 교지(敎旨)를 받들어 막중한 종사(宗社)를 부탁하였으니, 주고받은 것이 광명(光明)하였고 거조가 정대(正大)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차(袖箚)의 무함하여 헐뜯는 이야기 속에서도 감히 성모(聖謨)가 깊고도 원대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 이미 깊고도 원대한 성모가 있었다면 그의 수차(袖箚)에서 ‘성찰(省察)하지 않았고 영회(領會)하지 않았다.’고 한 말이 과연 조리에 맞는 말이 되겠습니까? 만일 성찰하지 않고 영회하지 않은 것이 수차(袖箚)의 내용과 같다면 도리어 이런 광명 정대한 거조를 과연 누구에게 돌려야 하겠습니까? 종래에 있었던 이의연(李義淵)의 소장에서는 기필코 그 공을 군하(群下)에게 돌리려 했는데 지금 생각하건대,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아! 선왕(先王)께서 신축년 이전에도 사람들에게 형벌과 포상을 내렸었고 신축년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형벌과 포상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신축년 이전에는 저들이 조정에서 요로(要路)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하(群下)가 기폐(期蔽)했다고 말하지 않고, 신축년 이후에는 저들이 죄를 얻었기 때문에 기필코 선왕(先王)의 본의(本意)가 아니었다고 하니, 어찌 선왕의 질환이 선후(先後)에 경중(輕重)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 말의 수미(首尾)가 그리도 어긋나고 좌우(左右)가 그리도 모순(矛盾)이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명지(明旨)를 내리셔서 제일 먼저 선왕(先王)의 무함을 변해(辨解)하여 주신다면, 비록 불령(不逞)한 자들 가운데 더욱 극심한 자 1인만 주벌(誅罰)하더라도 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비록 10명의 임징하(任徵夏)를 주벌하더라도 어떻게 신(神)과 사람의 분노를 풀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당(唐)·송(宋) 때의 일을 인용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처분(處分)이 있을 것이다. 어찌 장황한 말로 인유(引喩)할 필요까지 있겠는가?"
하였다.

 

정시(庭試)를 행하여 강백(姜栢) 등 5인을 뽑았다.

 

9월 18일 신미

석강(夕講)을 행하여 《중용(中庸)》을 강(講)하였다.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 송인명(宋寅明)이 《숙종실록(肅宗實錄)》을 개수(改修)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를 불러서 하문하니, 이광좌도 개수할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편차(編次)에 따라 보궐(補闕)할 것만을 허락하였다. 이때 《실록(實錄)》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는데, 국면(局面)이 갑자기 바뀌어 역사(歷史)를 찬수(撰修)하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논척(論斥)을 받아 물러나고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들이 모두 시인(時人)으로 차임되었다. 송인명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실록(實錄)》은 백세(百世)의 공의(公議)가 있는 것이므로 양쪽의 시비(是非)가 편벽되어 있는 부분은 마땅히 산삭(刪削)해야 됩니다. 숙종(肅宗)의 처분(處分)은 춘하 추동(春夏秋冬)이 각기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아서 출척(黜陟)과 진퇴(進退)가 모두 사의(事宜)에 맞게 되어 있는데도 한쪽에 좋게 되어 있는 것은 기재하고 좋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은 뽑아버렸기 때문에 의논이 분분(紛紛)하여 귀결되지 않고 있으니, 조가(朝家)에서 처분(處分)이 있은 후에야 봉행(奉行)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총재관(摠裁官)이 인혐(引嫌)하면서 출사(出仕)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안타깝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이러하니, 마땅히 헤아려 조처하겠다. 개수(改修)하고 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총재관이 들어온 뒤에 결정하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 총재관 이광좌와 당상(堂上)·낭청(郞廳)들을 명소(命召)하였다. 이광좌가 인혐한 것으로 인하여 드디어 총재관의 직임을 체면(遞免)시키자, 그제야 이광좌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이광좌에게 이르기를,
"조금 전에 송인명의 말을 듣고서 이미 그 대체적인 사실은 알았다. 근래 당의(黨議)가 횡류(橫流)하고 있어 《실록(實錄)》도 또한 모두 사의(私意)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전부터 신칙(申飭)했던 것이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이 본 내용도 과연 송인명이 진달한 것과 같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본 것이 어느 해의 책이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병신년656)  ·정유년657)  과 신사년658)  의 기록이었습니다. 상소(上疏)를 지엽적인 말만 기재하였으며, 사람의 생졸(生卒)도 간혹 누락된 경우가 있었고 혹은 꾸며서 지은 것도 있으니, 지금의 도리로서는 개수(改修)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전부 개수해야 되겠는가, 아니면 따로 기록하려고 하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외간의 의논들은 모두들 말하기를 ‘아주 귀중한 《실록(實錄)》을 이런 식으로 남겨 전하게 할 수는 없으니 고쳐야 할 부분은 개수하는 것은 마땅하다.’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대략 산삭(刪削)하는 것보다는 전부 다 개수하는 것이 좋겠다.’고도 합니다. 이밖에도 편말(編末)에 부록(附錄)하는 법규(法規)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우선 의논들을 다 들어본 뒤에 다시 여쭙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생각하기를, 당당(堂堂)한 《실록(實錄)》이니만큼 전부 개수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현종(顯宗)의 《실록》은 이미 완성되어 비장(秘藏)했기 때문에 부득이 다시 별록(別錄)을 수찬(修撰)하였습니다만, 지금의 경우는 《실록》을 아직 완전히 끝내지 않은 상태이니 개수해야 됩니다. 국가에 혹시 병혁(兵革)659)  의 화(禍)가 발생할 수도 있고 이들 무리가 다시 들어오는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반드시 개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여 보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전부 개수하려고 하면 시일(時日)이 오래 걸리게 되는데, 세변(世變)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의견으론 이미 완성된 책자는 개수하지 말고 누락된 것만을 별록(別錄)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있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황정(黃晸)은 말하기를,
"국가의 중대한 처분(處分)과 중대한 관계가 있는 부분은 모두 호오(好惡)에 의해 기재(記載)했으니, 개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의향은 비록 이러하지마는, 만약 다 개수(改修)한다면 어찌 나라의 체모에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광좌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궐루(闕漏)된 데 따라 편말(編末)에다 별록(別錄)하는 것이 일이 양쪽 모두가 온편하겠습니다."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누락된 부분을 따로 첨록(添錄)하여 편말에 붙인다면 뒷날 다시 개수할 걱정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본 병신년조(丙申年條)가 그러하다면 그 밖의 다른 것은 알 수가 있겠다. 그 당시의 당상(堂上)은 한결같이 모두 삭출(削黜)하라. 이미 완성(完成)된 책은 단연코 개수(改修)할 수 없으니, 각각 편말(編末)에 별록(別錄)을 붙이게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담당 당상(堂上)을 삭출(削黜)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비사(祕史)는 원래 국가에서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니, 이제 사사(史事) 때문에 죄를 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삭출하라는 명령을 정지하였다.

 

검열(檢閱) 정익하(鄭益河)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숙종실록(肅宗實錄)》을 한두 행신(倖臣)660)  의 말로 인하여 장차 개수(改修)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신은 처음에 놀라고 의혹스러웠습니다만, 뒤에 그 상세한 내용을 듣건대, 개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궐(補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개수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성상(聖上)께서 비사(祕史)를 중히 여기는 뜻인데, 보궐이라고 이름하는 것도 또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아! 비사의 내용은 참으로 외인(外人)이 알 바가 아닌데, 지난번의 기사(記事)한 것이 과연 일호(一毫)도 소루함이 없이 했는지는 신도 또한 감히 딱 잘라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다만 지금 보궐하자고 진백(陳白)한 사람들은 모두가 평일의 구적(仇敵)이 되는 사람들이니, 기사(記事)한 것이 빠짐없이 한 것인데도 진백한 자들이 성실하지 않은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그 가운데서 의심스로운 것을 질의하여 보겠습니다. 46년간의 《실록(實錄)》의 권질(卷秩)이 모두 74편(編)인데, 그들이 기필코 병신년·정유년·신사년의 것만을 먼저 가져다가 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이 신이 의심하는 것 가운데 첫 번째 것입니다. 허다한 권질(卷秩)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 천만 가지의 일뿐만이 아닌데, 지금 궐략(闕略)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과 국가의 전례(典禮)에 관한 것이 아니고 단지 제신(諸臣)들의 소차(疏箚)와 은졸(隱卒)661)  의 특은(特恩)에만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이 신이 의심하는 것 가운데 두 번째 것입니다. 8개 년에 걸쳐 겨우 완성한 서책(書冊)을 감히 전부 개수(改修)하자고 청하면서 혹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비평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말하기를, ‘오늘날 개수한 뒤에 만일 다시 개수하기를 청하는 자가 있게 된다면 어찌 나라의 체모에 큰 손상이 되지 않겠는가?’ 했는데, 개수하기는 똑같은데도 나라의 체모에 손상되는 것이 유독 전후(前後)에 차별이 있다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이 신이 의심하는 것 가운데 세 번째 것입니다. 처음에는 전부 개수하기를 청했다가 성의(聖意)가 망설이시고 자중(自中)에서도 의견을 달리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고서는 이에 보궐(補闕)이 정오(正誤)의 뜻을 겸하는 것으로 우물쭈물 말을 했는데, 보(補)와 정(正), 궐(闕)과 오(誤)는 그 뜻이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필코 두 가지의 뜻을 날합(揑合)하여 공교하게 하나의 명칭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의심하는 것 가운데 네 번째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큰 일이겠느냐는 등의 말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마치 떠벌릴 의도가 없는 것 같았으나 아침에 청대(請對)하였다가 저녁에 또 같이 들어가서 비사(祕史)의 내용을 전하고 말하여 신청(宸聽)662)  을 공동(恐動)시키면서도 조금도 돌아보며 꺼리는 것이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이 신이 의심하는 것 가운데 다섯 번째 것입니다. 사역(史役)은 사역이고 조저(朝著)663)  는 조저인데 조저의 번복(翻覆)되는 것이 사역(史役)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우려가 없을 수 없다는 말을 한단 말입니까? 사사(史事)를 빙자하여 성의(聖意)를 염탐하고 시험해 본 정상이 현저히 드러났으니 이것이 신이 의심하는 것 가운데 여섯 번째 것입니다. 남의 불공정(不公正)에 대해서는 진실로 말하기 쉬운 것이지만, 자신이 무사(無私)하게 한다는 것을 또한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한 것은, 바로 공손홍(公孫弘)이 ‘어떻게 신이 거짓을 하는지 알겠습니까?’라고 한 말과664)   같은 맥락입니다. 자신의 사심(私心)과 무사(無私)에 대해 기필할 수가 없다면 남의 공정(公正)과 불공정(不公正)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의심하는 것 가운데 일곱 번째 것입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사가(史家)의 필법(筆法)은 매우 엄중하고도 비밀스럽게 해야 하는 것인데, 그들이 감히 아무일 아무일이라고 임금 앞에서 지적하여 진달할 수가 있습니까? 거조(擧條)665)  에 나온 것도 이처럼 낭자한 지경인데 연석(筵席)에서의 설화(說話)는 이를 미루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비사(祕史)의 내용을 누설한 형률을 엄중히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가항(街巷)의 담론(談論)에까지 그 내용이 언급될 것이고, 따라서 사가의 엄중히 하고 비밀스럽게 하는 필법이 이로부터 없어질 것이니, 유자광(柳子光) 같은 무리가 앞으로 계속하여 뒤따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 소장(疏章)이 이미 승정원에 도착되었는데, 정익하(鄭益河)가 어떤 일로 인하여 죄에 걸려 파직되었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봉입(捧入)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3면
【분류】정론(政論) / 역사(歷史)


[註 660] 행신(倖臣) :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註 661] 은졸(隱卒) : 사망한 신하를 가엾이 여김.[註 662] 신청(宸聽) : 임금의 들음.[註 663] 조저(朝著) : 조정(朝廷).[註 664] 공손홍(公孫弘)이 ‘어떻게 신이 거짓을 하는지 알겠습니까?’라고 한 말과 : 공손홍(公孫弘)은 한 무제(漢武帝) 때 승상(丞相). 공손홍이 거친 베 이불을 덮고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당시의 직신(直臣)인 급암(汲黯)이 "공손홍은 지위가 삼공(三公)으로서 녹봉(祿俸)이 매우 많은데 베 이불을 덮는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하자, 임금이 공손홍에게 이런 사실에 대해 하문하니, 공손홍이 사죄하기를, "삼공이 베 이불을 덮는다는 것은 이름을 요구하기 위한 거짓인데 급암 같은 충신이 아니면 어떻게 그것이 거짓인 줄 알겠습니까?" 하여, 묘하게 곤경을 벗어난 일이 있음.[註 665] 거조(擧條) : 임금께 아뢰는 조항.
사신은 말한다. "이 소장(疏章)이 이미 승정원에 도착되었는데, 정익하(鄭益河)가 어떤 일로 인하여 죄에 걸려 파직되었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봉입(捧入)하지 않았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지난번 차대(次對)666)   때 성상께서 국시(國是)에 의거하여 처분(處分)을 내리려 했으나 좌상(左相)에게 혐애(嫌礙)가 있다는 것으로 분부하였다고 했습니다. 좌상이 혐애하는 사람은 조금도 옥사(獄事)에 간섭된 것이 없으나, 처분을 내릴 즈음에 실로 피해야 할 혐의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때 하교(下敎)하시겠습니까? 날짜를 정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으고 이내 좌상(左相)으로 하여금 함께 입참(入參)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신의 경우는 비록 옥사(獄事)를 다스린 혐의가 있지마는 성상께서 당시의 사실(事實)에 대해 하문이 있다면, 감히 어떻게 우러러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左相)이 가부(可否)하는데 혐의가 있다고 했기 때문에 시임(時任) 가운데 혐의 없는 이가 한 사람 있기를 기다린 뒤에야 처분(處分)을 내릴 수 있겠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좌상에게는 혐애(嫌礙)가 없습니다 다른 정승이 비록 출사(出仕)한다고 해도 좌상이 참여하여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사성(大司成)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역적(逆賊) 목호룡(睦虎龍)을 정법(正法)시킨 뒤에 어찌 차마 역적 목호룡이 고발한 옥사(獄事)에 대해 제설(提說)할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관계되는 점이 아주 중대한 경우에는 또한 차마 제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사성(大司成)의 마음을 내가 안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그에 대한 설명을 한번 듣고 싶다."
하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희지(李喜之)는 곧 이사명(李師命)의 아들인데, 이사명이 죄에 걸려 죽었으니 이희지는 죄인(罪人)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된 품이 요사(妖邪)스러워 대대로 그 사악(邪惡)함을 이루어 무뢰한들과 교결하여 재화(財貨)를 마구 쓰고 있었는데, 그 정적(情迹)이 비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역적 목호룡의 고변서(告變書)가 나오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지적하여 고발된 자는 모두 이희지의 압객(狎客)과 지친(至親)들이었으니, 그가 환첩(宦妾)·잡류(雜流) 들과 체결하여 계획을 세운 정상이 낭자하여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천기(李天紀)·김용택(金龍澤)·정인중(鄭麟重)의 무리는 가형(加刑)을 기다리지 않고 태반이 승복(承服)했습니다. 이희지의 영정행(永貞行)667)  과 이기지(李器之)의 국구(國舅) 등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당초에 이것이 문목(問目)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어떤 일 때문에 절로 드러나기도 했고 혹은 제가 스스로 먼저 말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추대(推戴)라느니 보검(寶劒)이라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 일이 상정(常情)에 어긋난다는 것으로 역적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흡(趙洽)이 고변(告變)한 뒤에 이르러 이미 승관(承款)668)  한 자는 이제 논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옥사(獄事)는 시일이 오래 간 뒤에는 널리 퍼지기가 쉬운 것인데, 임인년669)  의 옥사도 또한 어떻게 과람(過濫)한 것이 없었다고 기필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교(聖敎)에 이른바 호사 난설(胡辭亂說)670)  이란 것도 또한 그럴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이만성(李晩成)의 경우에는 죄가 명백하지 않으므로 대신(大臣)이 누차 참작하여 조처하려 했으나 대의(臺議)에 막혀서 마침내 옥중(獄中)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홍계적(洪啓迪)은 평일 당론(黨論)을 주장하였으니, 정상(情狀)이 통분스럽습니다. 그러나 역적으로 몰려 죽은 것은 또한 매우 원통한 일입니다. 오늘 입시(入侍)한 대신은 홍계적을 안치(按治)할 때를 당하여 여러 날 동안 인입(引入)671)  했다가 대언(臺言)을 받기까지 했으니, 홍계적의 죄상(罪狀)이 매우 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고, 이광좌는 말하기를,
"홍계적(洪啓迪)은 조송(趙松)의 은화(銀貨)에 대한 건으로 국옥(國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경종(景宗)께서 즉위하신 원년(元年)에 집무(執務)를 못하시겠다는 전교(傳敎)가 있자,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애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소장(疏章)을 번갈아 올렸는데도 홍계적이 앞장을 서서 담당하고서는 사나운 기세로 배척했기 때문에 그때 조정에 가득했던 신료들과 여대(輿儓)에 이르기까지 매우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경종께서 특별히 우상(右相) 조태구(趙泰耉)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는데, 사지(辭旨)가 더없이 간절했습니다. 그런데도 홍계적이 멋대로 이를 방색(防塞)하고서 누차 봉환(封還)시켰으므로 국인(國人)들이 이 때문에 더욱 그의 살점을 먹고 그의 가죽을 벗겨 깔고 자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대계(臺啓)로 인하여 국문(鞫問)을 당할 적에 신이 어찌 일호(一毫)인들 단련(鍛鍊)하려는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죄가 용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구해(救解)하는 의논을 제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대헌(大憲)의 직임을 역임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위관(委官)이 차자(箚子)를 올려 정형(停刑)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네 차례나 가형(加刑)하여 필경에는 죽고 말았으니, 송인명이 진달한 내용이 완비된 의논은 아닙니다."
하였다. 송인명은 말하기를,
"홍계적의 다른 죄에 대해서는 신이 모르겠습니다만, 역옥(逆獄)으로써 말한다면 홍계적의 죄가 반드시 죽음에 해당되는지를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윤각(尹慤)이 이미 국청(鞫廳)에서 누차 참작하여 조처할 것을 청했었으니, 그에게 죽일 만한 죄가 없었음을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김운택(金雲澤)이 처해 있는 상황은 참으로 반드시 죽을 곳입니다만, 또한 역옥(逆獄)에 관련된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대저 국가에서 옥사(獄事)를 다스릴 적에는 단지 일체 법률(法律)에 의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김용택·이천기 등은 이미 승복했으니 법에 의거해 죄를 바룰 수밖에 다시 다른 방도가 없겠고, 조흡의 고변(告變)이 있은 뒤에도 승복하지 않은 부류는 그 정상(情狀)이 의심스러우나 그들이 이미 승복하지 않았으니 지금에 와서 역률(逆律)로써 시행할 수는 없으며, 이만성·홍계적의 무리는 이미 복관(復官)시켰으므로 버려두어도 무방하겠으나, 이에 의거해 3등(等)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흉언 역설(凶言逆說)은 실로 천고에 없었던 변고(變故)이므로 신은 일찍이 당시의 처치(處置)하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었다고 여겼었습니다. 그 흉악한 말로 임금을 무함한 부도(不道)한 정상에 대해서는 목호룡을 국문하여 그의 죄를 바루는 것이 진실로 첫째의 도리(道理)가 되겠으나, 국문할 즈음에 사세로서는 다시 그 흉언(凶言)을 제론(提論)해야 하니, 이것이 차마 못할 바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옥사(獄事)를 해산(解散)하고 목호룡을 박살(搏殺)하는 것뿐입니다만, 그의 고발 가운데 김용택·이천기 등의 무리가 이미 평문(平問)672)  할 적에 역절(逆節)에 대해 반쯤 사실을 말했으니, 이것이 옥사를 해산할 수 없는 이유였던 것인데, 이미 안치(按治)하려 했다면 목호룡을 또 갑자기 죽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흉언 역설(凶言逆說)이 문안(文案)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은 이미 명쾌한 일이 아니고 또 고식적(姑息的)인 듯하므로 실로 하책(下策)인 것이니, 이것이 종전의 사람들이 빙자하여 구함(構陷)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상(聖上)께서도 애매 모호하다고 분부하셨는데, 이것은 진실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인조조(仁祖朝)에 유효립(柳孝立)를 다스리던 대신(大臣)들은 말하기를, ‘이런 등류의 흉언(凶言)을 어떻게 차마 번거롭게 문안(文案)에 기재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즉시 불태워버리게 했으며,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는 말하기를, ‘이미 흉언(凶言)이 있었으며 마땅히 다시 성상을 무함한 죄를 엄중히 국문하여 국인(國人)들로 하여금 환히 알게 했어야 하는데 경솔하게 불태운 것은 실수(失手)임을 면할 수 없다.’고 했는데, 당시 상하(上下)가 모두 피차(彼此)로써 사체(事體)에 맞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임인년의 옥사(獄辭)를 문안(文案)에 기재하지 않은 것도 역시 인조조에 대신(大臣)들이 문안을 불태운 것과 그 의의가 같은 것입니다. 신 등의 동아리 가운데도 갑론 을박(甲論乙駁)의 의논이 분잡하고 소란스러워서 의견을 귀일(歸一)시킬 수가 없었던 가운데 갑자기 갑진년673)  이 닥친 것입니다. 이제 대의(大義)에 의거해 재제(裁制)하지 못했다는 죄로써 죄준다면 신 등은 만번 죽을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고, 이광좌는 말하기를,
"신은 7월부터 국문(鞫問)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11월에는 또 옥사(獄事)를 완만히 하고 있다는 것으로 논박을 받아 체직되었습니다. 역적 목호룡이 부도(不道)한 말에 대해서는 마땅히 제때에 죄를 바로잡아야 했습니다만, 그 일의 지난(至難)함이 참으로 송인명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때의 대신(大臣) 최석항(崔錫恒)은 본래 엉성하고 경솔하여 완벽하게 잘 구처(區處)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그의 결점입니다. 어찌 전하(殿下)를 애매 모호한 가운데 두기 위해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의 본심(本心)을 추구해 보면 금석(金石)을 꿸 수 있을 정도로 투철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사저(私邸)에 있을 적에는 남·서(南西)674)  도 몰랐었는데, 더구나 노·소(老少)675)  이겠는가? 지난해 객사(客使)가 나왔을 적에 갑자기 괴이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조상(趙相)676)  이 차자(箚子)를 올려 진달한 어의(語意)에 아름답지 못한 점이 있었으나 나는 그것을 몰랐었다. 그 뒤 또 한 통의 차자에는 형제(兄弟)이니 화평(和平)이니 하는 등류의 말이 있었는데, 내가 또 보고 웃었다. 정유년677)  에는 윤 영부사(尹領府事)678)  가 있었고, 신축년679)  에는 유 판부사(柳判府事)680)  가 있어 성실하게 해 왔으므로 다시 논의할 것이 없었는데, 내가 개연(慨然)스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최상(崔相)681)  에 대해서이다. 역적 목호룡의 부도(不道)한 말에 대해 끝내 처치(處置)하지 않았는데, 만약 남 봉조하(南奉朝賀)682)  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추패(麤悖)스러움은 경(卿) 등도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이진수(李眞洙)는 계방(桂坊)683)  에 있었으므로 내가 그의 인품을 알고 있는데, 어찌 여적 김일경을 신구(伸救)하는 말이 도리어 이진수에게서 나올 줄이야 추측했겠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김일경을 증질(增秩)시키고 또 호판(戶判)·병판(兵判)에 의망(擬望)한 것은 그때의 사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그런 뒤에야 지탱해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늘 한없이 송죄(訟罪)684)  하고 있습니다."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종무(鍾巫)685)  에 대한 소장(疏章)을 신이 처음 보고서는 놀란 마음에 분통이 골수에 사무쳐 즉시 소장을 진달하여 토죄(討罪)할 것을 청했습니다만, 되풀이하여 헤아려 보고 참고 견디면서 발설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 등이 고심(苦心)하면서 혈성(血誠)을 다한 것입니다만, 미처 드러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신(大臣)들도 당일에 호판(戶判)·병판(兵判)의 의망에 대해서는 역시 신의 마음과 같았던 것입니다."
하고,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신은 보잘것없는 소관(小官)이므로 조정의 대처분(大處分)에 대해 감히 참여하여 논할 처지가 아닙니다만, 이제 전하(殿下)께서 마음을 열어 성심(誠心)을 보이시니, 신이 소회(所懷)를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앞서 올린 소장(疏章)에서 열 두 조항을 논했는데, 그 가운데 붕당(朋黨)을 없애야 된다는 조항에서 신임인(辛壬人)과 을사인(乙巳人)686)  의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이 양쪽에 다 있다는 것을 설파(說破)했습니다. 대저 임인년의 역옥(逆獄)은 지나친 것이 많았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률(勘律)한 것이 이미 과중했고 주사(誅死)한 것에도 억울한 경우가 많았으니, 을사인들이 통렬히 질시(姪視)하면서 원통하다고 일컫는 것이 잘못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과중한 것을 과중하다고 했을 뿐만이 아니라 과중하지 않은 것까지도 아울러 과중하다고 하였으며, 원통한 것을 원통하다고 했을 뿐만이 아니라 원통하지 않은 것까지도 아울러 원통하다고 하면서 시비(是非)를 막론하고 일체를 번복(飜覆)시켰는데, 이는 을사인들의 죄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대처분을 내리려 하시니, 각기 피차(彼此) 가운데에서 옳은 것은 신리(伸理)시키고 그른 것은 고치신다면 인심이 감복(感服)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좋다. 국안(鞫案)에서 이른바 궁인(宮人)이란 사람이 시정(市井)의 무뢰배들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했는데, 이는 곧 성(姓)이 지(池)가인 궁인으로 결단코 뇌물을 줄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경자년687)   전에 그가 이미 죽었으니 더욱 증거할 만한 단서가 없다. 서덕수(徐德修)의 공초(供招)에 역비(逆婢)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른바 환시(宦侍)란 것은 나의 사저(私邸)에 있었던 차지 환시(次知宦侍)이다. 평상시에 몸가짐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매우 소원하게 대하였었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 같은 사람은 식견과 사려가 암매(暗昧)한데, 옥사(獄事)가 오래 되고 또 만연 되었으니, 어찌 착오된 것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김일경을 당초에 정죄(正罪)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동후(鄭東後)의 소장(疏章)이 나오기에 이르러서야 신의 죄지은 두려움이 더욱 절실했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말은 신의 ‘지나친 것이 많다’는 말로 인하여 발론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 김일경이 폭위(暴威)를 떨치고 있었으므로 전하께서는 이필(李泌)688)  의 일을 인용(引用)하면서 조태구(趙泰耉)에게 몸을 부탁하기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스스로 위태롭게 여긴 것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때를 당하여 대신(大臣)이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얻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의리를 강경하게 고집하면서 절절(節節)이 간쟁(諫爭)하다가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떠나가 버렸다는 국사(國事)가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하고, 이광좌는 말하기를,
"신은 국문(鞫問)에 참여한 이후 유취장(柳就章)·양익표(梁益標)·우홍채(禹紅采)·이헌(李瀗)·김시태(金時泰)·김성절(金盛節)·조송(趙松) 등의 역적이 역모(逆謀)한 정절(情節)이 낭자한 것을 목견(目見)하고는 조금도 용서해 준 것이 없었습니다."
하고, 황정(黃晸)은 말하기를,
"임인년의 국옥(鞫獄)에서는 전일의 죄가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뒤의 죄가 더욱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죄수(罪囚)에 대해 참작하여 조처하는 일이 있게 되면 대신(臺臣)이 번번이 환수(還收)하기를 청했습니다. 역적 김일경에 대한 의논에 한두 가지 참착할 것이 없지는 않았으니, 과연 사소한 과람(過濫)의 폐단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네 번 차자(箚子)를 올린 일은 신축년의 여러 신하들이 단지 그들이 불충(不忠)한 마음을 먹은 것을 통렬히 증오한 일로 인하여 그들의 자취에 빙자(憑藉)할 것이 있다는 것을 미리 깨달아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국문(鞫問)하여 실정을 알아낼 것을 기다리지 않은 채 경솔하게 이미 사사(賜死)된 뒤에 노적(孥籍)689)  하는 형벌을 가했는가 하면 이참(莅斬)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더욱 법 밖의 참혹한 형벌이었습니다. 국가에서 형률(刑律)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마음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형적(形跡)에 따라서 해야 되는 것인데, 노적(孥籍)한 것은 진실로 과한 조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朝廷)의 시비(是非)와 사대부(士大夫)의 언의(言議)는 마음이 본디 형적보다 중시되고 있으니, 어떻게 불충(不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벼슬과 시호(諡號)를 내리고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祀)하게 하여 충신(忠臣)으로 대우하는 것은 의리(義理)에 아주 해롭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이들의 심사(心事)를 묵묵히 살펴보신다면,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의 무리의 처지가 과연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과연 성후(聖候)690)  를 성심(誠心)으로 우려했다면 으레 약(藥)을 의논하고 보호하는 절차에 대해 마음을 다했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한번도 보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이 혹은 사람을 사주하여 딴 일을 빌어 속마음을 떠보기도 하고 혹은 정청(庭請)을 하여 책임을 메우기도 했으며, 연차(聯箚)가 올라오자마자 또다시 사람을 따라 들어가서 반한(反汗)691)  할 것을 청하는 등 이면(裏面)과 표면에 농간을 부리는 데에 온갖 심술(心術)을 다 허비했으니, 그들의 마음이 충성[忠]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반역[逆]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노적(孥籍)하는 법을 추후에 실시할 수는 없습니다만, 관작(官爵)과 원향(院享)은 결단코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경종(景宗)께서 병으로 미령(靡寧)하셨을 적에 누군들 걱정하지 않았겠습니까? 따라서 저위(儲位)를 세우는 일이 하루가 급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고 구가(謳歌)하는 사람들이 귀의(歸依)하는 것은 저절로 전하께 있었던 것인데 저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공로로 삼기 위해 온 나라 사람을 이심(異心)을 품고 있다는 죄과(罪科)에 몰아넣었으니, 이것이 유봉휘(柳鳳輝)의 소장(疏章)이 나오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의 처치(處置)가 과람(過濫)했던 데 대해 실로 후회스러움이 많았다."
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축년 정청(庭請)할 적에의 계사(啓辭)를 신에게 찬출(撰出)하게 했는데, 거기에 몇 해가 지나는 한이 있어도 요청에 대한 허락을 얻고서야 그만두겠다는 내용으로 말을 만든 것을 이건명(李健命)이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신이 극력 버티어 그대로 두게 하니 그는 크게 원한의 분노를 더하였으므로, 신은 이때에 그들이 역심(逆心)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경종께서 집무(執務)하지 못하시겠다는 명령이 내린 뒤에 좌참찬(左參贊) 최석항(崔錫恒)이 궐문(闕門)을 두드리며 청대(請對)하여 환수(還收)할 것을 극력 청했습니다. 인신(人臣)의 마음을 지녔다면 마땅히 술잔을 들고 서로 축하해야 할 것인데도 이에 도리어 관통(關通)한 승지(承旨)를 죄줄 것을 청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는 길가는 사람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인징(李麟徵)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성덕윤(成德潤)을 교리(校理)로, 정석오(鄭錫五)를 사서(司書)로, 송진명(宋眞明)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박내정(朴乃貞)을 승지(承旨)로, 김동필(金東弼)을 판윤(判尹)으로, 이보욱(李普昱)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최집(崔)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라 도사(全羅都事) 이봉명(李鳳鳴)은 본디 향곡(鄕曲)의 비천한 사람으로 권세가를 인연하여 발신(拔身)한 자인데, 외람되게 본직(本職)에 제수되었습니다. 금년 봄 과시(科試)를 관장하였을 적에 공법(公法)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제멋대로 속셈을 행하여 사정(私情)을 따른 정상이 낭자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들끓고 있습니다. 과시의 관장이 이러하였으니 그밖의 다른 것은 미루어 알 수가 있겠습니다. 흉년이 든 해에 검전(檢田)하는 책임을 이런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됩니다. 이봉명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이봉명(李鳳鳴)은 일찍이 갑진년692)  에 훈도(訓導)로서 소장(疏章)을 올려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베라고 청했다가 시배(時輩)들에게 큰 미움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장(科場)이 문란하고 혼잡했다는 것을 핑계하여 탄핵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5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692]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사신은 말한다. "이봉명(李鳳鳴)은 일찍이 갑진년692)  에 훈도(訓導)로서 소장(疏章)을 올려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베라고 청했다가 시배(時輩)들에게 큰 미움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장(科場)이 문란하고 혼잡했다는 것을 핑계하여 탄핵한 것이다."

 

9월 19일 임신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前) 감사(監司) 조상경(趙尙絅)의 소장은 전편(全篇)의 정신이 오로지 조정을 괴란(壞亂)시키고 국시(國是)를 저패(沮敗)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 충신[忠]·역적[逆]의 분변이 지금까지 지연(遲延)되어 있고 합사(合辭)의 논계(論啓)를 아직도 윤허하지 않고 있으므로 이들 무리가 임금의 뜻을 함부로 헤아리고 감히 현혹시킬 계책을 안출해 내어 무엄한 말을 많이 하고 있으니, 악인(惡人)을 징계하고 선인(善人)을 권려(權勵)하는 도리에 있어 파직(罷職)만 시키고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속히 귀양보내는 형벌을 시행하소서. 인하여 삼가 생각하건대, 충·역(忠逆)의 변별(辨別)을 지체시켜서는 안 되니, 특별히 대신(大臣)·제재(諸宰)와 삼사(三司)의 신하들을 불러서 국안(鞫案)을 참고하여 속히 처분(處分)을 내리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조상경에서 귀양보내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은 과한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에게 명하여 약조(約條) 이외에 나온 차왜(差倭)는 금년을 기한으로 접대하도록 하고, 그 뒤로는 나오더라도 접대하지 말도록 하였으니, 이는 비국(備局)의 아룀을 따른 것이다.

 

 

 

9월 20일 계유

임금이 인정전(仁正殿)에 나가서 왕세자(王世子)의 납채례(納采禮)를 보았다. 정사(正使)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 부사(副使) 판윤(判尹) 윤동필(尹東弼)이 전교(傳敎)를 받들고 별궁(別宮)으로 가서 행례(行禮)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정석삼(鄭錫三)이 전교를 받들고 별궁으로 가서 납채례(納采禮) 외에 선온례(宣醞禮)를 행하였다.
납채(納采)의 의주(儀註)는 이러하다.
하루 전일에 액정서(掖庭署)에서 어좌(御座)를 전(殿) 북쪽에다 설치하고 사자(使者)의 자리는 길 동쪽에 설치하는데 서쪽을 향하여 북쪽을 위로 한다. 사자(使者)가 들어와서 자리로 나아가면 전교관(傳敎官)이 꿇어앉아 전교(傳敎)를 아뢰고 내려와서 사자 앞으로 나아가 전교가 있다고 일컫는다. 그러면 사자가 꿇어앉고 전교관이 전교를 선시(宣示)하기를, ‘참판(參判)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맞이하여 왕세자(王世子)의 빈(嬪)으로 삼음에 있어 경(卿) 등에게 명하여 납채례(納采禮)를 행하게 하노라.’ 하는데, 선시가 끝나면 사자(使者)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나간다. 사자가 별궁(別宮)으로 나아가 대문(大門) 밖에서 북쪽을 위로 하여 서면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전교(傳敎)를 받들어 저궁(儲宮)의 배필을 결정하니 진실로 영덕(令德)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에 옛법에 따라 아무로 하여금 납채례를 행하게 하였다.’ 한다. 행례(行禮)를 마치고 나면 복명(復命)한다.


 

왕대비전(王大妃殿)에서 선혜청(宣惠廳)에서 봉납(捧納)한 쌀 2백 석을 내려 호남(湖南)의 진구(賑救)에 보태 쓰라고 명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에 합계(合啓)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최집(崔)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내노비(內奴婢)693)                   신공(身貢)에 대한 대가(代價)를 병조(兵曹)와 호조(戶曹)에서 반을 나누어 이송(移送)하게 하는 전례가 있는데, 처음에는 10동(同)에 불과했었습니다만, 임진년694)                  에 이르러서는 이미 20동(同)이 되었기 때문에 병판(兵判)        박연(朴遾)이 진달하여 이송하게 하지 말 것을 청하니 10동을 감하고 본수(本數)만 두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선조(先朝)에서 경비(經費)를 진념(軫念)한 성의(盛意)에서 나온 조처였습니다. 그런데 내노비의 수효가 해마다 불어나서 지금은 병조(兵曹)에서 이송한 것이 1백 30동(同)이나 되기에 이르렀고 탁지(度支)695)                  도 그러한 관계로 경용(經用)이 날로 모자라고 있습니다. 듣건대, 노비의 신공(身貢)을 본도(本道)에서 1인당 12두(斗)씩을 거두어 들이고 있는데 각고을의 조적(糶糴)696)                  에 회부(會付)할 즈음에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당초에 상환(相換)하게 한 것은 이것이 변방(邊方)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변방의 방비에 여유가 있으면 경사(京師)로 실어 들여오는 것은 옛날에도 이런 전례가 있었습니다. 본도(本道)에서 징수하는 포목(布木)은 12두(斗)의 쌀을 포목 1필(疋)씩으로 쳐서, 덕원(德源) 이북은 선로(船路)에 장애되는 곳이 없고 안변(安邊) 이남은 불과 5일 노정(路程)이니 이를 본사(本司)로 수납(輸納)하게 한다면, 내수사(內需司)에는 체징(替徵)하는 폐단이 없게 되고 경비(經費)에는 이송(移送)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내노비(內奴婢)의 신공(身貢)을 본도(本道)에서 포목으로 징수하여 맞바로 본사(本司)에 수납하게 해서 병조와 호조에서 이송하는 준례를 영원히 폐기하여 경비를 돌보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수찬(副修撰) 조진희(趙鎭禧)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 여러 간인(奸人)들이 신을 원수처럼 미워한 것은 곧 홍계적(洪啓迪)을 국문(鞫問)할 것을 청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개 선대왕(先大王)께서 홍계적을 처벌하는 분부에 이르기를, ‘은밀히 불측(不測)한 마음을 품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떠한 죄명(罪名)입니까? 그리고 조송(趙松)이 은(銀)을 훔쳤으니 죽여야 된다고 했다는 말이 또 조송의 공초(供招)에서 나왔고 국안(鞫案)에 기재되었으니, 신이 국문하기를 청한 것은 실로 이 두 가지 단서에 의거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이른바 ‘근거없는 공초(供招)를 핑계하여 구살(構殺)하려 한다’는 말은 신의 많은 변명을 기다릴 것도 없이 저절로 해명이 된 것입니다. 저들이 혹은 박살(撲殺)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이빨을 부러뜨리고 갈빗대를 분질렀다고 일컬은 말은 비록 천청(天聽)을 경동(驚動)시켜 보복(報復)할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었으나, 왕옥(王獄)에서 형벌을 적용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것인데 어떻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9월 21일 갑술

임금이 인정전(仁正殿)에 친림(親臨)하여 왕세자의 납징례(納徵禮)를 보았다. 【정사(正使)·부사(副使)·우승지(右承旨)가 별궁(別宮)에 가서 행례(行禮)했는데, 앞서와 같았다.】  의주(議註)는 납채의(納采儀)와 같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최집(崔)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조상경(趙尙絅)의 소장(疏章)은 오로지 처분(處分)을 현혹시키고 정신(廷臣)을 무함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백마역(白馬驛)에서 청류(淸流)들을 황하수에 던졌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얼마나 혼란한 시대에 있었던 일인데, 이에 감히 인용(引用)하여 성조(聖朝)에 비유하였으니, 말의 무엄함이 어쩌면 이토록 극도에 이릅니까? 더구나 정호(鄭澔)와 민진원(閔鎭遠)은 그 죄가 윤상(倫常)에 관계되어 징토(懲討)가 바야흐로 엄한데도 마음을 다해 추장(推奬)하고 기꺼이 영구(營救)하기 위해 나서고 있습니다. 그가 이른바 ‘진흙을 물에 섞은 것처럼 만들어 한편이 되었다’는 등의 말은 더욱 절패(絶悖)스러운 말입니다. 전 함경 감사 조상경은 관작(官爵)을 삭탈한 다음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가서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을 불러 보았다. 대화가 사사(史事)에 언급되자, 윤순이 말하기를,
"보궐(補闕)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결루(缺漏)된 것을 첨가하는 것뿐입니다. 혹 잘못된 것이 있어서 고쳐야 될 부분이 있게 되면, 신 등 몇몇 사람으로서는 임의(任意)로 고치기가 곤란한 듯하니, 마땅히 총재관(摠裁官)이 있어야 강정(講定)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보궐(補闕)과 정오(正誤)에 대한 뜻 때문에 상의(相議)했었는데, 단지 첨가하는 글자의 숫자가 조금 긴 것은 보궐(補闕)이라는 두 글자로 이름하더라도 정오(正誤)란 뜻이 저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게 된다."
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통감강목(通鑑綱目)》의 경우는 후세의 선비들이 증정(證定)했기 때문에 혹은 정오(正誤)로 이름하기도 하고 혹은 발명(發明)으로 이름하기도 했으나, 이번 이 《실록(實錄)》인즉 이와는 다릅니다. 지난번에 이 일을 주관했던 사람들이 어찌 사필(史筆)에다 사심(私心)을 부리려 했겠습니까마는, 다만 당의(黨議)가 이미 나뉘어지고 문견(聞見)이 같지 않았던 탓으로 시비(是非)와 여탈(予奪)이 올바르게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별도로 수찬(修撰)하여 첨부함에 있어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것을 둘 다 보존하여 두려고 하는데, 다만 이것을 보궐(補闕)하는 아래에다 혼록(混錄)하는 것은 미안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교정(校正)하는 일은 마땅히 총재관(摠裁官)이 차출되기를 기다려야 하겠다. 정명(定名)하는 일은 먼저 원임(原任)·시임(時任)에게 문의하되 혹은 청대(請對)도 하고 혹은 초기(草記)도 올리게 하여 품지(稟旨)토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정제(李廷濟)가 아뢰기를,
"평안 병영(平安兵營)의 군제(軍制)가 극도로 괴란(乖亂)되었으니 수포(收布)를 감하여 보인(保人)697)  에게 지급하게 함으로써 전마(戰馬)와 기계(器械)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거조(擧條)를 내어 본도(本道)의 수신(帥臣)에게 신칙(申飭)할 것을 명하였다.

 

9월 22일 을해

소대(召對)698)  를 행하고 《명기(明記)》를 강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제(李濟)가 아뢰기를,
"회령(會寧)에서 개시(開市)699)  할 적에 북도(北道)의 백성들이 소로써 말을 바꾸었는데, 그 수효가 매우 많았습니다. 근래에는 기강(紀綱)이 해이하여져서 북도의 물화(物貨)에 대한 금법(禁法)이 없어졌으므로, 백성에게 혹 말이 있으면 병사(兵使)·수령(守令)·변장(變將)과 상고(商賈)700)  들이 이를 수괄(搜括)하여 사들여 가지고 대낮에 영(嶺)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호마(胡馬)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북도의 말 가운데 조금이라도 좋은 것은 또한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이런 때문에 기병(騎兵)인 전사(戰士)들이 말을 갈아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일체 엄금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각별히 엄금하게 하라. 고산 찰방(高山察訪)이 잘 금하지 못할 경우에는 드러나는 대로 중죄(重罪)로 추구(追究)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4일 정축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왕세자(王世子)의 고기례(告期禮)를 보았다. 【정사(正使)·부사(副使)·우승지(右承旨)가 별궁(別宮)에 가서 행례(行禮)했는데, 전과 같이 하였다.】  의주(儀註)는 납채의(納采儀)와 같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빈(王世子嬪)은 가례(嘉禮)를 올린 다음날 마땅히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에 조현(朝見)해야 하고 그 다음날은 마땅히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과 왕대비전(王大妃殿)에 조현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례(前例)를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례를 상고하니 신해년701)  과 신유년702)  의 가례(嘉禮) 때에는 조현례(朝見禮)를 모두 이틀로 나누어서 거행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례에 따라 행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광좌(李光佐)를 총재관(摠裁官)으로 삼았다.


 

 

 

조상경(趙尙絅)을 사간(司諫)으로, 권부(權孚)를 장령(掌令)으로, 여선장(呂善長)을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가 친영(親迎)할 적에 대문(大門) 밖에서 연(輦)에서 내리도록 예문(禮文)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별궁(別宮)의 외대문(外大門)과 내대문(內大門) 사이는 거리가 조금 멀기 때문에 종전에 행례(行禮)할 때는 모두 내대문 밖에서 연에서 내렸습니다. 비록 예문에 없는 것이지만 실로 편의(便宜)한 것에 따라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도 이 전례에 의거하여 내대문 밖에서 연에서 내리도록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홍치중(洪致中)이 또 상소하여 해직(解職)시켜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전례에 따라 판중추(判中樞)에 임명하였다.

 

9월 25일 무인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윤득징(尹得徵)·김약로(金若魯)·이성해(李聖海)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 사국(史局)의 제신(諸臣)들이 연석(筵席)에서 청한 것으로 인하여 《실록(實錄)》을 보궐(補闕)하라는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거조란 말입니까? 일찍이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다 하면서 당화(黨禍)의 여독(餘毒)이 선조(先朝)703)  의 《실록》에까지 미치게 된단 말입니까? 우리 《숙종실록》은 이미 편마(編藦)가 끝나서 50년 동안의 훌륭한 공과 아름다운 업적이 70여 편(編) 가운데 환히 포열(布列)되어 있으니, 그 장부(臧否)·여탈(與奪)의 조심한 것과 상략(詳略)·취사(取捨)의 살핌에 있어 각기 권도(權度)가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제 이에 편사(偏私)한 마음으로써 감히 이를 변란(變亂)시킬 계책을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대로 무함하는가 하면 쓸데없는 말로 강청(强請)하면서 사체(事體)의 엄중함은 돌보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만 통쾌하게 하려고 힘쓰고 있으니, 어찌 통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사책(史冊)에 필삭(筆削)을 가하는 것은 그 법이 진실로 엄중한데다가 당대(當代)의 《실록(實錄)》은 기휘(忌諱)하는 말이 많은 법이므로, 문자(文字)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비록 심상한 자구(字句)라도 감히 용이하게 증산(增刪)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망령되게 사어(史語)를 전하면서 시비(是非)를 평론하는 자에 대해서는 나라의 상형(常刑)이 있는 것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사적인 호오(好惡) 때문에 멋대로 추의(追議)하여 일에 따라 첨보(添補)하고 편차에 따라 증부(增附)하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인용한 선조(先朝)의 구례(舊例)라는 것은 더욱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찬수(纂修)를 맡은 사람이 임무를 받은 지 여러 해가 되도록 세월을 보내기만 일삼은 채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과 후세에 전할 전례(典禮)를 거개 재록(載錄)하지 않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연월(年月)과 인명(人名)까지 착오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 가지 일 가운데도 전말(顚末)이 빠지거나 끊긴 것이 자주 있었습니다. 특별히 찬술할 것을 품지(稟旨)한 것은 진실로 이에서 나온 조처였던 것이요 좌우(左右)나 피차(彼此)의 말 때문에 감히 논의를 제기한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피차(彼此)를 분별하여 상략(詳略)을 헤아렸고 은졸(隱卒)의 기록을 점출(拈出)해 내어 척언(斥言)한 것이 공평하지 못했으며, 아무 해의 기록을 지적하여 진달하였고 아무 양상의 일을 제기하여 말했는데, 이는 다만 사당(私黨)을 위하여 완사(完史)의 개찬을 청한 것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경신년704)  의 전례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방자하고 무엄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더구나 그들이 상략(詳略)이 같지 않다고 하는 말은 또한 절대로 허망한 것이 있습니다.
신 등이 듣건대, 전후에 찬수(纂修)를 관장했던 사람들이 장주(章奏)의 문자에 대해 언사(言辭)의 선악(善惡)과 사실(事實)의 시비(是非)를 막론하고 모두 아울러 기재하여 후세(後世)의 평론을 기다린다고 했고 사초(史草)가 모두 보관되어 있어 검핵(檢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람(睿覽)을 거치지 않는 서책이기 때문에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마음대로 날조하여 찬술하려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놀랄 만한 일입니다. 신 등이 지난달 사진(仕進)했을 때 모두 계산해 보니, 사초(史草) 가운데 아직 인출(印出)되지 못한 것은 단지 3백여 판(板)뿐이었는데, 하루에 인출되는 것이 으레 21판(板)이니, 이는 불과 열흘이나 보름 동안이면 충분히 완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한 달이 되도록 아직껏 미루고 있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이미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도청(都廳)의 낭관(郞官)이 몰래 인판(印板)을 집어내어 은밀히 보관하여 두었다는 말이 이수해(李壽海)의 공초(供招)에서 발론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금당(禁堂)705)  으로 있는 자가 물리치고 까닭없이 봉입(捧入)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다만 그 말이 혹시라도 성총(聖聰)에 알려질까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랬는데 어제 또 교수(校讎)706)  하는 당상관(堂上官) 한 사람이 갑자기 청대(請對)를 요구하였고 총재(摠裁) 이하의 관원이 뒤따라 함께 나와 앞뒤에서 서로 화답하고 호응하면서 거조가 매우 바쁜 것으로 보아 그 속셈은 사심(私心)을 이루려는 데 있으나 겉으로는 보궐(補闕)이라 핑계하면서 기필코 완성된 역사를 괴란(壞亂)시킨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통분하여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하시고 그 전대로 속히 완간(完刊)하도록 명하시어 사사(史事)를 엄중하게 하소서."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엄중한 전교를 내려 모두 섬에다 정배(定配)시킬 것을 명하였다.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조영복(趙榮福)을 파출(罷黜)시키고 그 관작(官爵)을 삭탈하였다. 조영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금의 이른바 대신(大臣)이란 사람은 곧 지난날 토죄(討罪)하자고 합계(合啓)한 자들입니다. 신이 마침 정청(庭請)과 청대(請對)의 반열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신의 의견도 토죄할 것을 청한 여러 신하들과 본래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그런 사실을 스스로 숨긴 채 같은 조정에서 주선(周旋)하면서 기무(機務)를 강론할 수 있겠으며 저 정승도 또한 어찌 편의에 따라 구획(區劃)하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지부(地部)707)  에서 이미 있었던 일을 가지고 말해 보더라도 초립가(草笠價)를 돈으로 먼저 내릴 것과 개시(開市)에서 삼상세(蔘商稅)를 받아 경비에 보태게 할 것을 신이 이미 여름에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는데도, 이제 해조(該曹)에서 일체 방색(防塞)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이러하니 큰일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근래 국가(國家)의 기강이 엄하지 못하므로, 비록 연소(年少)한 무리라도 분의(分義)를 돌아보지 않고 감히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마음을 품고 있는데 지위가 재상(宰相)의 반열에 있는 자는 더욱 심한 편이다. 이제 조영복(趙榮福)의 소장을 살펴 보건대, 전편(全篇)의 지의(旨意)가 처분(處分)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묘당(廟堂)이 누구의 묘당인데 감히 취의(就議)하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는 조정(朝廷)을 무시하는 마음을 품은 것이다. 만일 조금이나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권익관(權益寬)을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을 불러 보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호남(湖南)의 흉년에 대해 진달하고, 이어 각 영문(營門)에서 요판(料販)하여 이익을 취하는 데 대한 폐단을 논하고서 엄금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영남(嶺南)의 흉년도 호남(湖南)과 다름이 없으니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흩어져 떠도는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게 하고, 이어 내년 봄의 진구(賑救)를 감독하게 하소서. 그리고 다시 측량한 전지(田地)도 상세히 살피게 하소서."
하고, 이어 박문수(朴文秀)를 어사(御史)로 천거하니, 임금이 박문수는 나이가 젊어서 일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어렵게 여겼다. 조태억과 김동필(金東弼)이 모두 박문수가 두루 통달하고 사무에 연달(鍊達)한 것을 아뢰니, 임금이 드디어 박문수를 어사(御史)로 삼았다. 조태억이 또 아뢰기를,
"박문수가 나학천(羅學川)의 소장(疏章)으로 인하여 매양 종사(從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 살피러 가는 일을 책임지운다면 그가 감히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각별히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일찍이 갑진년708)  에 나학천(羅學川)이 소장을 올려 신축년709)   이후의 과장(科場)이 공평하지 못했다는 것을 논했기 때문에 박문수(朴文秀)가 처음에 이를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여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갑자가 출사(出仕)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조태억(趙泰億)의 말이 이러했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7면
【분류】행정(行政) / 상업(商業) / 농업(農業) / 구휼(救恤) / 역사(歷史)


[註 708]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註 70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사신은 말한다. "일찍이 갑진년708)  에 나학천(羅學川)이 소장을 올려 신축년709)   이후의 과장(科場)이 공평하지 못했다는 것을 논했기 때문에 박문수(朴文秀)가 처음에 이를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여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갑자가 출사(出仕)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조태억(趙泰億)의 말이 이러했던 것이다."

 

임금이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오명항(吳命恒)에게 출사(出仕)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의 청을 따른 것이다. 오명항의 형 오명준(吳命峻)이 일찍이 갑진년710)  에 소장을 올려 이광좌(李光佐)가 당여(黨與)를 심어 권병(權柄)을 휘두른 죄를 탄핵했을 적에 조태억이 이광좌를 위해 오명준을 배척하면서 말하기를, ‘형이 아우만 못하다.’고까지 하여, 드디어 귀양가기에 이르렀다. 오명항이 이를 이유로 인혐(引嫌)하여 조태억이 좌기(坐起)하면 오명항은 좌기하지 않았다. 조태억이 이 때문에 연석(筵席)에서 주달하여 그와 감정(感情)을 풀게 해 줄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추판(秋判)711)  이 비어 있는데 정경(正卿)에 사람이 모자라니, 의당 가선 대부(嘉善大夫)에서 발탁 승진시켜야 됩니다."
하고, 이내 서명균(徐命均)·이명언(李明彦)·권이진(權以鎭)을 쓸 만한 사람이라고 천거(薦擧)하였다. 판윤(判尹) 김동필(金東弼)이 잇달아 진달하기를,
"이명언은 일찍이 추조(秋曹)712)  와 경조(京兆)713)  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성적(聲績)이 있었습니다. 연전(年前)에 소장을 올려 추숭(追崇)할 것을 논한 것은714)   그의 직분이 아니었습니다만, 3년 동안 귀양 가 있었으니, 벌이 이미 시행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계속 그대로 병치(屛置)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이명언의 일에 대해 원래 심각하게 할 의도가 없었는데, 근래 소장(疏章)을 살펴보건대, 간혹 ‘도민(都民)이 그가 오기를 날로 바라고 있다.’는 말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지나친 말이다. 앞으로 사령(赦令)을 내릴 적에 의당 처분(處分)이 있어야겠으나, 직첩(職牒)을 우선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조태억이 이어 아뢰기를,
"선왕조(先王朝)에는 형판(刑判)을 특별히 발탁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비(中批)715)  는 진실로 상례(常例)가 아닌 것이다. 이미 묘당(廟堂)이 있으니 특별히 제수할 필요가 없다. 묘당에서 의망(擬望)해서 들이라."
하였다.
나이 50세에 등과(登科)한 사람은 분관(分館)716)  을 기다리지 말고 출륙(出六)717)  시키도록 한 명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급제(及第) 고승헌(高升獻)이 연로(年老)하여 관직에 임명되지 못한 채 죽었는데, 임금이 이를 딱하게 여겨 드디어 나이 50이 된 자는 분관(分館)을 기다리지 말고 출륙시킬 것을 허락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이것은 조종조(祖宗朝)의 구제(舊制)가 아니니 출방(出榜)718)  할 때마다 재촉해서 분관(分館)시키게 하면 됩니다. 어찌 분관의 지체로 인하여 구제를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와서 도로 중지하는 것은 소각(銷刻)719)  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김동필(金東弼)과 서명균(徐命均)이 모두 아뢰기를,
"분관시킨 후에야 이조(吏曹)에서 그 사람의 문지(門地)720)  를 알아서 임용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구별(區別)이 없다면 점차 혼란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래에는 오랫동안 분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명(命)이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의 주달을 듣건대, 이후로는 분관시키기 전에는 출륙(出六)을 허락하지 말도록 해야 하겠다."
하였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등과(登科)한 자는 분관(分館)되기 전에는 청직(淸職)을 허통(許通)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이종성(李宗城)이 분관되기 전에 설서(說書)에 제배(除拜)되었기 때문에 소장을 올려 진달하고 인혐(引嫌)하면서 행공(行公)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분관되기 전에 한림(翰林)721)  이 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예문관의 분관인 것입니다. 이미 천주(薦主)가 있고 또 대신(大臣)과 의정부(議政府)·관각(館閣)의 당상관(堂上官)이 모두 모여 강론해서 비로소 이 직(職)에 임명한 것이니, 이것도 또한 분관인 것입니다. 그러나 설서는 이와 달라서 승문원의 권점(圈點)722)  을 이조로 이송(移送)한 후에야 의망(擬望)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이판(吏判) 오명항(吳命恒)이 이방언(李邦彦)의 일을 전례로 인용했습니다만, 이방언이 설서가 된 것은 분관된 뒤에 있었던 것으로 미처 간택(揀擇)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을사년723)   이후에는 분관을 기다리지 않고 창방(唱榜)한 지 3일 만에 바로 설서에 임명했었으니, 이런 등류의 잘못된 습관은 그대로 따라 시행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남쪽의 우후(虞候)를 갑산(甲山)에 유방(留防)시키는 법을 혁파(革罷)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승지(承旨) 이제(李濟)가 아뢰기를,
"우후(虞候)를 유방(留防)시키는 것은 혁파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연전(年前)에 병사(兵使) 정덕징(鄭德徵)이 장계(狀啓)를 올려 청한 것으로 인하여 또다시 설치하였습니다만, 그 폐단이 작지 않았으니, 혁파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삼(李森)이 또 폐해만 있을 뿐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아뢰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조명교(曺命敎)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일에 아뢴 계사(啓辭) 가운데 임징하(任徵夏)에 대한 일은 그 조어(措語)를 고치기를,
"선왕(先王)을 무함하고 비방한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임금을 후매(詬罵)한 것과 분의(分義)를 범한 것이 임징하와 같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의 소장(疏章)에 이른바 일치 일란(呢治一亂)이니 발란 반정(撥亂反正)이니 한 등의 말은 더없이 흉악하고 참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피혐(避嫌)한 계사(啓辭)에는 심지어 ‘비망기(備忘記)가 박상검(朴尙儉)의 손에서 나온 것은 중외(中外)에서 다같이 아는 일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박상검이 죽은 뒤에 어찌 또 박상검 같은 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아!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차마 이런 등의 절패(絶悖)스런 말로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에다 척언(斥言)하였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없었던 변괴입니다. 그 죄악을 논한다면 비록 오형(五刑)724)  을 갖추고 그 시체를 베어 만 조각을 내어도 오히려 분을 풀기에 부족합니다. 청컨대, 안치(安置)시킨 죄인 임징하를 속히 방형(邦刑)에 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전일에 아뢴 계사(啓辭) 가운데 이의천(李倚天)의 일에 대해 그 조어(措語)를 고치기를,
"임창(任敞)과 임징하(任徵夏)의 죄를 합쳐서 다 함께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이의천입니다. 대저 임창과 임징하의 소장(疏章) 내용이 얼마나 흉패(凶悖)스러웠습니까? 그런데도 이의천은 감히 침이 마르도록 칭도(稱道)하면서 임창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당시에 만일 그의 말을 써주었다면 세도(世道)가 반드시 이와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했고, 임징하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청조(淸朝)725)  의 간쟁(諫爭)하는 기풍(氣風)을 깊이 체득하였으므로 신은 바야흐로 용약(踴躍)하면서 기뻐하고 있다.’ 하였으니, 아! 통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의 죄범을 논하자면 임창·임징하와 다를 것이 없으니, 삭출(削黜)만 시키고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이의천을 감사(減死)하고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감사(減死)’라는 두 글자의 율명(律名)을 비로소 가하라는 것인가? 무릇 죄를 논할 때에는 혹은 국청(鞫廳)을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정형(正刑)726)  에 처하기도 하는데, 끝에 가서 감단(勘斷)할 적에 감사(減死)하는 것이 의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의천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오로지 당론(黨論)만을 일삼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담당(擔當)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의천을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라."
하였다. 【대계(臺啓)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일에 아뢴 계사(啓辭) 가운데 정형익(鄭亨益)을 절도(絶島)에 안치시키라는 일에 대해 임금이 말하기를,
"삭출(削黜)시키는 것이 조금 경하기는 하지만 안치(安置)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라."
하였다. 【대계(臺啓)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아뢰기를,
"경상좌도 병사(慶尙左道兵使) 김석보(金錫保)는 종래에 무변(武弁)들이 당론(黨論)을 숭장(崇奬)하던 때를 당하여 감히 스스로 힘을 다하려는 계책을 세우고 이에 공좌(公座)에서 대신(大臣)들을 두루 열거하면서 성(姓)과 호(號)를 쓰지 않고 이름을 불렀는데, 이 일로 인하여 상(賞)을 받았고 외람되이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때 신이 마침 어사(御史)로서 그 경내(境內)를 지나다가 그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그가 부임한 지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버려두고 논핵하지 않았었는데, 그뒤 한정이 없는 탐욕을 부렸습니다. 그후 다른 곳의 곤수(閫帥)727)  로 옮겨갈 때에 이르러서는 창고에 저축된 것을 모두 긁어내어 그의 아들 김상벽(金尙璧)이 있는 장연(長淵)의 임소(任所)에서 선척(船隻)을 가져다가 가득 싣고 돌아갔습니다. 김석보를 사판(仕版)728)  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무간(文武間)에 중재(重宰)729)  를 사판에서 삭제한 일이 있는가? 사판에서 삭제시키는 것은 해당 율법(律法)이 아니다. 나문(拿問)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통제사(統制使) 이복연(李復淵)은 염리(廉吏)의 아들로서 아비의 도리를 모두 위반(違反)하여 이욕(利慾)을 탐하고 행실이 볼 모양이 없습니다. 한번 동현(東縣)에 제수되자 백성을 침탈하여 자신을 살찌우다가 대간(臺諫)의 참혹한 탄핵을 받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의연(李義淵)의 종형(從兄)이고 장붕익(張鵬翼)의 표숙(表叔)730)  이기 때문에 차례를 건너뛰어 승진해서 외람되이 은대(銀臺)731)  에 임명되었습니다. 본직(本職)에 임명되자 탐욕을 부린 것이 더욱 극심하여 사람들이 모두들 타매(唾罵)하면서 거두(巨蠹)732)  라고 지목하고 있으니, 관작(官爵)을 삭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석보(金錫保)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무변(武弁)이 대신(大臣)에게 욕을 했다는 말은 직접 듣지 않고서는 모두 믿기가 어렵다. 정주(定州)에 있을 때는 간신(諫臣)이 그때 수의(繡衣)였는데도 서계(書啓)하지 않았었으니, 이제 와서 추론(追論)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복연(李復淵)의 일에 대해서는 청백리(淸白吏)의 아들로서 그렇게 했다면 단지 지금의 탐람(貪婪)으로써 논핵할 것이지 기필코 동현(東縣)에 있을 때의 일을 거슬러 취해다가 통영(統營)의 불법(不法)을 논죄(論罪)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렇게 사람을 논핵하는 것은 결단코 성실한 도리가 아니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6일 기묘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윤득징(尹得徵) 등의 소장(疏章)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대하는 비답(批答)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성(大司成)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윤득징(尹得徵) 등의 소장을 보건대, 황공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득징의 무리를 죄주어 찬배(竄配)한 것에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의 구별을 두지는 않았으나 본죄(本罪)에 견주어 보면 감쇄(減殺)한 것이 과분(過分)했으니, 신은 또 송구스럽고 부끄럽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3인이 한 통의 소장을 올렸으니, 그들의 마음이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 무슨 수범·종범의 구별이 있겠는가?"
하였다.


 

 

 

사서(司書) 정석오(鄭錫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윤득징(尹得徵) 등이 그 소장에서, ‘몰래 인판(印板)을 집어내어 몰래 자신이 보관해 두었다.’고 하는 말에 대해 실로 어처구니없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신이 사국(史局)에 사진(仕進)하여 《등록(謄錄)》을 가져다 보니, 낭청(郞廳)이 인판을 썼는데 연차(年次)를 뛰어넘어 최후의 1, 2년 것을 먼저 인각(印刻)하였습니다. 신은 진실로 그 사이에 반드시 기관(機關)733)  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한장 한장 교정(校正)할 때에 이르러 그 가운데 인판(印板) 하나가 과연 보기에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1, 2년 것을 먼저 인각한 주안점이 오로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총재(摠裁)인 대신(大臣)에게 취정(就正)734)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신이 과연 상의(商議)하여 따로 보관하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만, 미처 의정(議定)하기도 전에 신이 먼저 감하(減下)735)  되었습니다. 그뒤 당상(堂上)·낭청(郞廳)이 연조(年條)의 차서(次序)가 해당되는 것으로 인하여 즉시 입간(入刊)했습니다. 그간의 사상(事狀)이 대략 이러했는데, 윤득징 등이 지금 와서 죄를 날조하면서 마치 신이 사심(私心)을 품고 몰래 빼어내다가 보관한 듯이 하고 있으니,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 어쩌면 이토록 극도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판본(板本)을 보관한 데 대한 한 가지 절목에 관해서는 이제 그대의 소장을 보니 윤득징이 진달한 바가 더더욱 놀랍기 그지없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진명(宋眞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삼가 윤득징(尹得徵) 등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거기에서 말하기를, ‘지난번 도청(都廳)의 낭관(郞官)이 몰래 인판(印板) 하나를 집어내어 몰래 자신이 보관해 두었다는 이야기가 이수해(李壽海)의 공초(供招)에서 나왔는데도, 금당(禁堂)736)  인 사람이 이미 까닭없이 물리치고 봉입(捧入)하지 않으면서 그 말이 혹시라도 성총(聖聰)에 알려질까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아! 이는 바로 신이 외람되이 도청(都廳)으로 있을 때에 있었던 일인데, 그 어의(語意)가 마치 신이 오로지 사의(私意)에 의거 몰래 은밀한 곳에 숨겨둔 것처럼 하였음은 물론이고 또 금당(禁堂)과 화응(和應)하여 공초를 물리친 것처럼 했습니다. 아! 연조(年條)가 착출(錯出)되어 차례가 없었던 것은 주자(鑄字)를 분배(分排)하기가 어려운 데에 연유된 것이었습니다. 최후의 1, 2년 것을 전력을 기울여 먼저 인각(印刻)한 것에 대해서는 신도 진실로 그것이 기관(機關)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습니다. 그러나 필경에는 같이 입간(入刊)되었으니, 그 선후(先後)를 계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개의 인판은 단례(斷例)가 어긋났고 문자(文字)도 통창(通暢)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장(該掌)에게 신칙하여 우선은 그대로 놓아두게 하였는데, 이는 그들도 응당 알고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수해의 공초는 이에 이 각판(刻板)을 인출(印出)한 뒤에 있었으니, 생각건대, 무엇을 기휘(忌諱)하여 물리치면서 봉입하지 않으려 했겠습니까? 이들이 멋대로 날뛰면서 조가(朝家)에서 예우(禮遇)하는 원로(元老)를 능멸하고 성주(聖主)의 엄명(嚴明)한 처분(處分)을 현혹시키려 하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신은 무산 부사(茂山府使) 이경지(李慶祉)의 체개(遞改)의 일에 대해 삼가 개연(慨然)스러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무변(武弁)들이 변지(邊地)를 꺼려하여 피하는 것은 실로 고질적인 폐단인데도 묘당(廟堂)에서 위곡(委曲)에게 진품(陳稟)한 것은 심히 사체(事體)를 손상시킨 처사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미 정석오(鄭錫五)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이경지(李慶祉)의 일은 그대의 말이 좋다."
하였다. 이때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이경지는 연소(年少)하고 이름 있는 무변(武弁)이니 억지로 병든 사람을 북변(北邊)으로 멀리 보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체개(遞改)를 윤허 받았기 때문에 송진명의 말이 이러하였다.

 

병조 참지(兵曹參知) 유정(柳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정우량(鄭羽良)이 신의 형을 논핵(論劾)할 적에 안세갑(安世甲)·이제항(李齊恒)이 근거없는 말을 날조하여 무함하던 여설(餘說)을 주워모았는데, 전편(全篇)의 정신은 오로지 ‘혐원(嫌怨)’ 두 글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형의 전후 소계(疏啓) 가운데에는 다만 혐원(嫌怨)에 대한 문자(文字)는 반 개도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혐원을 품은 의사(意思)가 일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스스로 ‘혐원’이라는 두 글자를 창출해 내어가지고 아우로써 증거를 대어 그 형을 추욕(醜辱)하고 있으니, 신이 어떻게 차마 혀를 더럽힐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이제항을 괴원(槐院)737)  에 허통(許通)시키지 않았던 탓으로 신의 형이 무함을 받아 먼곳에 귀양을 갔었습니다. 이제 신의 소장 가운데서 이제항의 일을 가지고 ‘혐원’이란 두 글자를 지어내게 되었고, 또 정우량이 신의 형을 무욕(誣辱)한 일을 당했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신 형제의 전후 소장(疏章)을 가져다 상고하여 속히 처분(處分)을 내리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중도(中道)에 지나친 의논에 대해 깊이 혐의할 필요가 없으니, 사퇴(辭退)하지 말라."
하였다.

 

9월 27일 경진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왕세자(王世子)의 책빈례(冊嬪禮)를 보았다. 【정사(正使)·부사(副使)·승지(承旨)가 교명(敎命)을 받들고 별궁(別宮)에 가서 앞서처럼 행례(行禮)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책빈(冊嬪)하는 의주(儀註)는 이러하다.
하루 전날 액정서(掖庭署)에서 어좌(御座)를 전(殿) 북쪽에다 설치하는데, 교명안(敎命案)과 책인안(冊印案)을 각각 하나씩 어좌(御座)의 남쪽에 설치한다. 그리고 명복안(命服案)은 전정(殿庭)의 길 동쪽에다 북쪽에 가깝게 설치하고 사자(使者)의 위차(位次)는 전정의 길 동쪽에다 북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교명함(敎命函)·책함(冊函)·인수(印綬)와 명복함(命服函)을 받들어 각각 안상(案上)에 올려놓는다. 사자(使者)가 들어와 위차(位次)로 나아가면 전교관(傳敎官)이 꿇어앉아 전교(傳敎)를 아뢰고 나간다. 그러면 집사자(執事者)들이 교명안·책안·인안을 마주들고 따른다. 전교관은 사자(使者)의 동북쪽으로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서고, 집사자(執事者)는 안상(案床)을 들고 전교관의 남쪽에 선다. 사자가 꿇어앉으면 전교관이 선교(宣敎)하기를, ‘모씨(某氏)를 책봉하여 왕세자의 빈(嬪)으로 삼으니, 경(卿) 등에게 명하여 행례(行禮)하게 하노라.’ 한다. 선교를 마치고 나면 사자(使者) 이하의 관원이 사배(四拜)한다. 집사자가 교명안(敎命案)을 전교관 앞에 가져다 놓으면 전교관이 교명함(敎命函)을 가져다가 정사(正使)에게 준다. 정사는 꿇어앉아 이를 받는데, 책함(冊函)·인수(印綬)를 받을 적에도 모두 교명함을 받는 법과 같이 한다. 이것이 끝나면 사자(使者)가 교명함·책함·인수와 명복함을 각기 채여(綵輿)에 봉치(奉置)하고 사자 이하의 관원이 수행(隨行)한다.

 

빈(嬪)의 의주(儀註)는 이러하다.
책봉(冊封)하기 하루 전에 주인(主人)이 사자(使者)의 위차(位次)를 궁문(宮門) 밖에다 설치하는데, 서쪽을 향하여 북쪽을 위로 한다. 그리고 빈(嬪)의 수책위(受冊位)는 내당(內堂)의 뜰 가운데에다 북쪽을 향하게 하여 설치한다. 사자가 이르면 빈은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는데 정사(正使)가 일컫기를, ‘모관(某官) 모(某)는 전교(傳敎)를 받들어 왕세자빈(王世子嬪)에게 비물(備物)과 전책(典冊)을 준다.’ 한다. 선교(宣敎)가 끝나면, 정사가 교명함(敎命函)·책함(冊函)·인수(印綬)를 상전(尙傳)738)  에게 준다. 상전은 꿇어앉아 이를 안상(案床)에 봉치(奉置)한다. 빈(嬪)이 명복(命服)을 갖추고 수식(首飾)을 쓴 다음 수책위(受冊位)로 나아오면 장서(掌書)739)  가 꿇어앉아 교명함·책함·인수를 가지고 빈의 앞으로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서면 빈이 사배(四拜)한다. 장서(掌書)가 전교(傳敎)가 있다고 말하면 빈이 꿇어앉는다. 수칙(守則)740)  이 장서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전교를 받아가지고 빈(嬪)의 앞으로 나아와 꿇어앉아서 빈에게 준다. 빈은 이것을 받아가지고 수규(守閨)741)  에게 준다. 책함(冊函)·인수(印綬)를 받는 것도 위의 의주(儀註)와 같게 한다. 빈(嬪)이 사배(四拜)를 마치고 나면 사자(使者)가 복명(復命)한다.

 

9월 28일 신사

서명균(徐命均)을 발탁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9월 28일 신사

이정석(李廷錫)을 지평(持平)으로, 권호(權頀)를 장령(掌令)으로, 이중관(李重觀)을 집의(執義)로, 서명균(徐命均)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오명신(吳命新)을 사인(舍人)으로, 민창기(閔昌基)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前日)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9월 29일 임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의 초계례(醮戒禮)를 보았다. 왕세자가 전정(殿庭)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서계(西階)로부터 올라와 들어오니, 상례(相禮) 윤대영(尹大英)이 전도(前導)하고 보덕(輔德) 조익명(趙翼命)과 필선(弼善) 이정필(李廷弼)이 좌우에서 보좌(輔佐)하였다. 왕세자가 좌석(座席)의 서쪽으로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서니, 사옹원 부제조(司饔院副提調) 평원 도정(平原都正) 이표(李標)가 술잔을 가져다가 술을 따라 가지고 나아와 왕세자 앞으로 나아갔다. 왕세자(王世子)가 몸을 굽혀 사배(四拜)한 뒤에 좌석에 올라가 꿇어앉아 규(圭)를 꽂았다. 표(標)가 술잔을 왕세자에게 드리니, 왕세자가 잔을 받았다.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 송징태(宋徵泰)가 찬탁(饌卓)을 좌석 앞에 바치니, 왕세자가 제주(祭酒)742)  하고 일어나 좌석에서 내려와 서남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술을 입에 댄 다음 그 술잔을 표(標)에게 주었다. 이어 사배하니, 송징태가 찬탁을 철거하였다. 윤대영(尹大英)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어좌(御座)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으니, 임금이 명하기를, ‘가서 너의 배필(配匹)을 맞이하여 나의 종사(宗事)를 계승하되 엄하게 잘 거느리라.’ 하니, 왕세자가 아뢰기를, ‘신(臣) 아무는 삼가 교지(敎旨)를 받들겠습니다.’ 하고, 이어 사배하였다. 그리고 나서 윤대영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서계(西階)로부터 내려와 나갔다.

 

이날 왕세자가 별궁(別宮)에 나아가 친영례(親迎禮)를 행하였다. 친영(親迎)하기 하루 전날에 전설사(典設司)에서 별궁 대문 밖에다 왕세자의 위차(位次)를 설치하는데, 왕세자가 명을 받고 나서 연(輦)을 타고 별궁으로 나아가니, 찬자(贊者)가 전안(奠鴈)743)  하는 위차를 당중(堂中)에 북향(北向)하도록 설치하였다. 왕세자가 문 동쪽에 서니, 빈자(儐者)가 나아와서 아뢰기를, ‘감히 행사(行事)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필선(弼善)은 꿇어앉아 왕세자에게 아뢰기를, ‘이것은 초혼(初婚)이니 교지(敎旨)를 받들고 명을 받으소서.’ 하였다. 주인(主人)이 문 밖에 나아가 맞이하는데 동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하니, 왕세자가 재배로 답하였다. 주인이 읍양(揖讓)하면서 먼저 문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가니, 장축자(掌畜者)가 기러기를 필선(弼善)에게 주고 필선은 꿇어앉아 왕세자에게 받들어 주었다. 왕세자가 기러기를 들고 문으로 들어가는데 오른쪽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고 왕세자는 동계(東階)로 올라갔다. 부모(傅姆)744)  가 빈(嬪)을 인도하여 방(房)에서 나와 모(姆)의 동북쪽에 서서 남향(南向)하니, 왕세자는 위차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어앉아 전안(奠鴈)하였다. 엎드렸다 일어나 재배(再拜)를 마치고 나서 내려와 나가니,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이 내문(內門) 밖에서 연(輦)을 탔다. 왕세자가 대문 밖으로 나아가 연을 타고 환궁(還宮)한 뒤에 통명전(通明殿)에서 동뢰례(同牢禮)를 행하였다. 이날 내시(內侍)가 빈(嬪)의 위차를 동궁(東宮)의 중문(中門) 안에 서남쪽을 향하게 하여 설치하는데 저녁이 되려 할 적에 수규(守閨)가 동뢰례를 할 욕석(褥席)을 실내(室內)에 진설하였다. 왕세자의 욕석은 동쪽에 있어 서쪽을 향하게 하고, 빈의 욕석은 서쪽에 있어 동쪽을 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좌석의 남쪽에다 각각 배석(拜席)을 설치하였다. 땅거미질 무렵 장식(掌食)745)  이 실내(室內)에 주탁(酒卓)을 설치하고 그 위에 두 개의 잔근(盞巹)을 가져다 놓았다. 왕세자가 연(輦)에서 내려 들어가 합문(閤門) 밖 동쪽에서 기다리니, 빈(嬪)은 연에서 내려 위차로 들어가 수식(首飾)을 매만짐을 끝내자, 수규(守閨)가 빈을 인도하여 합문(閤門) 밖 서쪽으로 나아갔다. 왕세자가 빈(嬪)에게 읍하고 합문으로 들어가니, 수규(守閨)가 빈을 인도하여 따라서 들어갔다. 왕세자가 빈에게 읍하고 실내(室內)로 들어가 좌석으로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서니, 빈도 좌석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섰다. 빈이 재배(再拜)하니, 왕세자도 재배하여 답하였다. 빈에게 읍하고 좌석으로 나아가니, 장찬(掌饌)746)  이 찬탁(饌卓)을 들고 들어와서 왕세자와 빈의 좌석 앞에다 설치하고서, 장찬(掌饌) 2인이 잔(盞)을 가져다가 술을 따랐다. 한 사람은 꿇어앉아 왕세자에게 진헌하고 한 사람은 꿇어앉아 빈하게 진헌하였다. 왕세자와 빈이 함께 잔을 받아 제주(祭酒)하고 마시기를 끝내니, 2인이 그 잔을 다시 받아 찬탁에다 가져다 놓았다. 장찬(掌饌)이 함께 탕(湯)을 내어와 먹은 다음 끝내었다. 재윤(再酳)과 삼윤(三酳)도 모두 처음 하던 의주(儀註)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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